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05/ 조선일보 외교담당 에디터
2025.01.05
<41회>카터의 NYT 친북 기고문에 발칵 뒤집힌 워싱턴 정가
리버먼 상원의원 "기절할 정도" "끔찍하다"고 비판
김성환 장관, "카터는 제3자, 그의 발언에 무게 안 둬 "
카터 1994년 '대동갓 뱃놀이' 이어 두 차례 더 방북
김정일, 중국 가거나 면담 피하며 안 만나줘
카터, 金사망하자 조전 보내며 방북 허가 요청하기도
미국의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가 지난 29일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역대 최장수 미국 대통령이었던 그는 퇴임 후에 국제 평화와 인권 문제에 헌신하며,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전 세계적인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의 별세 소식에 조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 등 미국 정치권의 주요 인사들은 깊은 애도를 표하며 추모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도 2일 주한미국대사관을 찾아 조문록에 “평생을 국제 평화와 번영에 헌신했던 카터 전 대통령을 기억하며, 그의 유산이 밝은 미래로 이어지길 기원한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YONHAP PHOTO-1023> 김일성 주석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서울=연합뉴스) 북한 외국문출판사(外國文出版社)가 운영하는 '조선의 출판물' 홈페이지는 지난 2021년 9월 발간한 화보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 드린 선물' 화보에서 1994년 6월 방북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부부한테서 받은 동장식 접시를 공개했다. 2023.1.30 [북한 선전매체 '조선의 출판물'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photo@yna.co.kr/2023-01-30 08:49:07/Media Only <저작권자 ⓒ 1980-2023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퇴임 후, 카터의 업적은 분명 높게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가장 성공한 전직 미국 대통령’이라는 평가 속에 전 세계의 원로로 활동해왔습니다. 1994년 김일성 북한 주석과의 ‘대동강 뱃놀이’로 이어진 그의 첫 번째 방북이 당시 한반도 긴장 완화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 전체에서 남북한에 대해 다른 잣대를 들이대고, 북한의 대변인 처럼 활동한 것은 유감입니다. 카터는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는 인권 문제를 제기하며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 대한민국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북한의 잔혹한 독재체제와 비확산 체제 위반, 북한 인권에는 침묵하며 대화만을 강조, 결과적으로 김일성 일가의 대남 정책에 활용됐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카터가 별세하자 미국 사회는 추모 분위기를 띄우지만, 그의 잘못된 대북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숨기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카터의 NYT 기고문에 경악한 워싱턴 정가
워싱턴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2010년 9월 16일이었습니다. 워싱턴 DC는 이날 카터 때문에 한바탕 큰 소동이 일었습니다. 워싱턴 DC의 정계, 관가(官街)와 싱크탱크의 한반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온종일 “카터 전 대통령의 뉴욕타임스 기고문 읽었느냐”는 말이 오고 갔습니다.
미사일이 열리면서 꽃을 든 손이 나오는 삽화와 함께 실린 카터의 기고가 날이 밝자마자 비판의 대상이 된 겁니다. 저는 그날 저녁까지 최소한 3차례의 한반도 관련 모임 안팎에서 카터의 기고에 대한 ‘탄식’이 나온 것을 목격했습니다.
2010년 8월 북한이 억류했던 미국인 아이잘론 말리 곰즈 석방을 명목으로 방북했던 카터는 ‘북한은 협상을 원한다’는 기고에서 일방적으로 북한의 입장을 전달했습니다. “북한이 미국·한국과 포괄적인 평화협상, 한반도 비핵화 협상 재개를 바란다는 분명하고 강력한 신호들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당시 납치했던 선박 송환과 이산가족 상봉 제의 등을 ‘긍정적인 메시지’로 규정하며 지체 없이 즉각 대화 재개에 나서야 한다고 했습니다. 북한이 6자회담을 먼저 깨고 나간 것이나,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에 대한 비판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의 기고문이 나온 직후, 이날 오전 상원 군사위원회에서 이에 대한 비판이 공개적으로 표출됐습니다. 한때 카터와 같은 당에 소속돼 있었던 조 리버먼 상원의원은 ‘기절할 정도(stunning)’, ‘끔찍한(awful)’이라는 단어를 써 가며 그를 비판했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이 우리에게 (북한으로부터) 여러 차례 샀던 똑같은 말을 사라고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가 천안함 사태를 언급하지 않았다”고도 지적했습니다.
미 국무부의 커트 캠벨 동아태 차관보(현재 부장관)도 “천안함 사건에 대한 언급이 그의 기고에서 빠진 것에 대해 놀랐다”는 말로 리버먼 의원의 입장에 동조했습니다. 이날 오후 한·미경제연구소(KEI)의 세미나에서 잭 프리처드 KEI 소장은 “카터 전 대통령의 기고문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로 비판적인 입장을 밝혔습니다.
◇김정일 못 만난 두번째 방북
2010년 8월 방북한 카터는 예상과는 달리 2박3일간 평양에 머물렀지만 끝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지 못하고 귀국했습니다. 1994년 김일성과의 ‘대동강 뱃놀이’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카터 주연의 ‘한반도 드라마’는 재연되지 않았습니다.

▲2010년 8월 27일 북한 순안공항에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86·왼쪽)이 7개월 동안 북한에 억류돼 있었던 미국인 아이잘론 말리 곰즈(31·오른쪽)와 포옹하고 있다. 25일 평양에 도착한 카터는 목표했던 곰즈의 석방을 이끌어냈지만, 26일 갑자기 방중(訪中) 길에 오른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는 데는 실패했다./연합뉴스
2010년 8월 25일 평양에 도착한 카터는 미국인 곰즈의 석방을 이끌어냈지만, 26일 김정일이 갑자기 중국으로 떠나는 바람에 그를 만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1994년 방북 당시 그의 아버지인 김일성을 만나 영변 핵시설 동결 및 남북 정상회담 개최 용의 발언을 이끌어냈지만 두 번째 방북에서는 김정일의 얼굴도 보지 못했습니다.
카터가 1994년 김일성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을 떠올리며 김정일 면담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 북한을 방문, 민망한 상황을 자초했다는 분석이 많았습니다. 김정일이 미국의 전직 대통령을 방문하게 한 후 중국으로 떠나버림으로써 당분간 미국과의 대결구도를 계속 가져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는 해석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당시 취재에 따르면, 오바마 정부 내에서는 카터가 김정일을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해 다소 안도하는 기류가 있었습니다. 카터가 미국인 곰즈를 데리고 평양을 출발한 후 이례적으로 그의 방북 과정을 공개함으로써 다시 한번 자신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강조한 것이 이에 대한 방증입니다.
국무부의 필립 크롤리 공보담당차관보는 성명을 발표 “(미국) 정부는 이번 방북을 제안하거나 주선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곰즈의 건강이 미국에서 즉각적인 치료를 받지 않으면 심각한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판단을 토대로 정부는 북한의 방북 제안을 수용하겠다는 카터 전 대통령의 결정에 동의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굳이 공개하지 않아도 될 내용을 밝힘으로써 카터가 방북 당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논의한 것을 바탕으로 대북정책에 관여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 의사를 표명한 것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카터가 억류된 미국인의 석방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는 것을 최종적으로 승인했지만, 크게 내키지는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정통한 워싱턴 DC의 외교소식통은 “오바마 대통령이 카터 전 대통령을 크게 예우하는 것도 아니고, 카터 역시 오바마에게 두드러지게 친근감을 보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카터가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곰즈 구출을 명목으로 ‘비공식 특사’가 된 것은 카터가 워낙 적극적으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카터와 오랫동안 친분이 있는 조지아대의 박한식 교수가 북한과 구체적인 일정을 협의했습니다.
◇다시 논란 부른 세 번째 방북
카터는 2011년 4월 세 번째 이자 마지막 방북에서도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카터를 단장으로 하는 전직 국가수반(首班) 모임인 ‘디 엘더스(The Elders)’ 회원들은 2011년 4월 26일 베이징을 떠나 평양에 도착, 백화원 영빈관에서 박의춘 외무상을 만났습니다. 디 엘더스 방북단에는 카터 외에 마르티 아티사리 전 핀란드 대통령, 그로 브룬트란드 전 노르웨이 총리, 메리 로빈슨 전 아일랜드 대통령이 포함됐습니다.
카터는 이때 “1994년 김일성 북한 주석이 자신을 매우 따뜻하고 친근하게 대했는데 이번에도 환영받았다”고 블로그에 썼습니다. 김일성과 ‘(대동강에서) 잊지 못할 6시간의 뱃놀이’를 했으며 그의 사망에 대해 슬퍼한 것도 소개했습니다.
북한의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 11월 연평도 포격 도발을 겪은 이명박 정부는 카터의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2011년 4월 26일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카터의 방북 후, 김정일의 메시지를 가져 올 가능성과 관련, “(남북 간 채널도 있는데) 북한이 굳이 제3자를 통해 우리와 얘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김 장관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북한은 이미 우리와 여러 대화채널이 열려 있으며 북한 매체를 통해 ‘우리 민족끼리’를 얘기하고 있지 않으냐”며 이 같이 말했습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손든 이)이 부인 로잘린 카터 여사와 함께 1994년 6월 한반도 핵 위기 때 북한을 방문한 뒤 판문점을 통해 한국으로 입국하고 있다./연합뉴스
김 장관이 카터를 ‘제3자’로 지칭한 것은 그가 어떤 메시지를 가져오든지크게 무게를 두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입니다. 김 장관은 카터의 방북 효과에 대해서도 “현재로서는 그다지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북한이 굳이 민간인을 통해 우리측에 메시지를 보낼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말로 평가절하했습니다. 또 “이번 방북은 순전히 개인적 방문일뿐, (미국) 정부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브리핑은 카터가 주도한 방북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기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미 양국 정부는 카터 전 대통령의 이번 방북이 순수한 의도에서 출발했을지는 몰라도 북한에 이용당할 가능성이 크다고 봤습니다.
김 장관이 우려했던 대로 카터는 평양에 이어서 서울에 와서 북한의 입장을 대변했습니다. 특히 그는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 실망스러운 발언을 했습니다. “북한에 인권 문제가 존재하지만 우리가 직접 통치하지 않는 입장에서 간섭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과 미국이 의도적으로 대북 식량 지원을 중단한 것은 명백한 인권침해다.” 카터는 전 세계 분쟁의 중재자로 나서며 ‘휴머니스트’로 살아왔지만, 북한 인권 증진을 위해 이후에도 의미 있는 발언을 한 적이 없습니다.
◇ 김정일 사망때 보낸 조전에서 “방북하고 싶다”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이 사망했습니다. 그러자 카터는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앞으로 조전(弔電)을 보냈습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카터는 조전에서 북한 주민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고, 영도자로서 새로운 책임을 지게 된 김정은 부위원장에게 성과가 있기를 기원했습니다.
북한 주민을 굶어 죽이고, 대한항공 폭파사건을 비롯한 테러를 자행해 온 독재자에게 조전을 보내는 것은 전직 미국 대통령이 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조전에서 “북한을 다시 방문하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습니다. 김정은은 그러나 카터의 방북 요청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카터는 다시 평양을 가고 싶어했으나, 그의 방북 기록은 2011년 4월에서 더 이상 연장되지 못했습니다.
P.S.
1. 2011년 4월 카터가 세 번째 방북했을 때 ‘북한자유주간’ 행사가 서울에서 개최되고 있었습니다. 행사 주최측은 카터가 방북한 다음날 서울 세종로에서 납북자 이름 부르기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의 이미일 이사장은 “꿈에도 잊지 못하는 가족들이 조국과 가족에게 돌아오길 바라며 정성 들여 이름을 부르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구순(九旬)의 그의 어머니 김복남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남편 이성환씨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지난 60년간 북한에 억류된 이들의 이름이 28일 새벽까지 불렸습니다.
장애인으로 태어나 몸이 약한 이 이사장은 철야 행사가 끝난 후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병상에서 전화가 연결된 이 이사장은 목이 쉬어 있었습니다. 카터가 김정일을 만나지 못한 채 서울을 방문한 것이 자연스레 화제에 올랐습니다. 그의 목소리엔 카터에 대한 노여움이 묻어났습니다.
“김정일 일가는 8만명이 넘는 납북자들의 생존 여부에 대해 알려주지도 않는 범죄 집단이에요. 미국의 대통령을 지낸 분이 그런 사람과 대화를 하겠다고 가서 지난해에 이어 또 속고 오다니….” 장애 때문에, 아버지의 납북으로 힘들게 살아온 이 이사장은 카터보다 김정일 체제의 본질을 더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카터는 평화와 인권 증진이라는 이상을 위해 헌신하며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지만, 북한 문제와 관련해서는 균형을 잃었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가 북한을 방문하면서도 이미일 이사장을 비롯한 납북자 가족, 탈북자, 북한인권단체 관계자들을 만나는 균형감을 가졌더라면 “북한 독재체제를 대변했다”는 비판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의 명복을 빕니다.⊙
<42회>"외교가 진영 논리의 강 건너도록 정치권은 깊은 성찰하라" 조태열 장관 잇따른 소신 발언
'지조론'의 조지훈 선생 아들...직접 준비한 연설문 화제
"미증유의 정치적 갈등으로 손발이 묶여 있다"고 비판
" 정치권이 각성하면서 분열,갈등의 정치 극복하라"
"운명이지만, 짐이 너무 무겁고 현실은 가혹하다"고 토로
연초 조태열 외교부 장관의 문장력을 겸비한 소신 발언이 외교부 안팎에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조 장관은 지난해 12·3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12·14 윤 대통령 탄핵 이후 불안정한 정국에서 자신이 직접 준비한 연설문과 기자회견 발언을 통해 극도로 불안정한 국제정세에도 불구, 당파 싸움을 일삼는 여야 정치권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각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난 7일 한국외교협회 신년회에서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연설하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신봉길 외교협회장, 조태열 외교부 장관, 김숙 전 주유엔대사, 이태식 전 주미대사./외교협회
◇ “혼돈의 시기, 힘들게 견디고 있다”
지난 7일 서울 프레스센터 18층에서 한국외교협회(회장 신봉길) 신년회가 열렸습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윤영관·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 이시영 전 외교부 차관, 박수길·권병현·이재춘·나종일 대사를 포함, 200여 명의 전현직 외교관들이 참석했습니다.
조태열 장관은 이날 신년사에서 지난해 12월 계엄 이후 현 정국에 대해서 솔직한 심경과 비장한 각오를 밝혔습니다. 조 장관은 먼저 “무엇보다도 지난 한달간 있었던 모든 불행한 사태에 대해 외교부 장관으로서, 그리고 국무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며 특히 여러 선배님들께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고 자책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이 혼돈의 시기에 제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습니다만 짐이 너무 무겁고 현실은 너무 가혹하다”고 했습니다. 조 장관은 이 말을 한 후 울컥한 듯, 약 10초 정도 고개를 숙였습니다. 살짝 눈물을 흘린 듯했습니다. 그는 “모든 혼돈을 하루빨리 정리하고 새 질서를 찾아가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하며 해야 할 책무를 다하는 것이 제게 주어진 마지막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했습니다.
◇ 여야 각성 요구하며 작심 발언
조 장관은 특히 국무위원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여야 정치권을 향해 비판적 발언을 하며 외교안보문제에서만큼은 비상하게 대응하자고 했습니다.
그는 “전례없는 지정학적 대(大) 격동기에 기민한 외교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상황 속에서 우리 외교는 미증유의 국내 정치적 갈등 상황으로 인해 손발이 묶여 있는 형국”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윤 대통령 탄핵 이후, 여야가 정국 주도권 장악을 위해 ‘내전’ 중인 상황을 지적한 겁니다.
그는 지금은 “위기를 절대로 낭비하지 말라(Never let a crisis go to waste)는 처칠의 명언을 기억해야 할 때” 라며 “외교 정책의 진폭을 줄이고 일관된 비전과 목표를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조 장관은 여야가 외교만큼은 초당적으로 임해줄 것을 요청하며 미국의 사례를 거론했습니다. “공화당 소속의 상원의원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의 루즈벨트-트루먼 대통령을 도와 2차 대전 수행을 지원하고, 냉전 초기 대소 전략에 대한 초당적 합의를 이끌어냈던 아서 반덴버그는 ‘정쟁은 국경에서 멈춰야 한다(Politics stops at the water’s edge)’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새해에는 대한민국 외교가 진영 논리의 강을 건너 거센 파도를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정치권이 깊은 성찰을 하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는 외교협회 연설 하루 전에는 정치권의 각성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6일 방한한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의 기자회견에서 “우리 정치권이 각성하면서 더 나은, 더 완벽한 민주주의를 향해 노력해야 하고 분열과 갈등의 정치를 극복하고 화합과 통합과 치유의 정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한 겁니다. “우리의 정치 문화를 바꾸기 위한 지지층의 각성도 필요하다”고도 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역대 외교부 장관 중 어느 누구도 정치권을 향해 이같이 직설적으로 당파 싸움을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국내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외교의) 손발이 묶였다’ ‘진영 논리의 강을 건너자’며 ‘정치권의 깊은 성찰과 각성’을 촉구한 이는 아마도 조 장관이 유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조 장관은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재취임을 앞둔 최근 국제 정세가 심상치 않다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조지훈 선생 아들...”아버지가 내 뒷덜미를 잡았다”
외교를 ‘말과 글로 하는 국가행위’로 정의하는 조 장관은 ‘지조론(志操論)’으로 유명한 조지훈 전 고려대 교수의 막내아들입니다. 지훈 선생은 “지조란 것은 순일 (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라고 했는데, 조 장관은 늘 아버지를 의식하면서 살아왔다고 합니다. 조 장관이 2020년 6월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게 어떨 때는 채찍질이나 세속적 의미로는 족쇄다, 족쇄. 조직사회라는 게 끈, 연줄, 압력, 청탁이 동원되는데 연줄 없는 사람이 어딨겠나. 내가 근무하던 외교부는 1년에 몇 번씩 인사가 있기에 그때마다 외부에서 그런 반칙 행위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내 뒷덜미를 잡았다. (하하하) 자식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잘못 처신해서 아버지 명성에 누가 돼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고위직에 올라 여러 언론과 만나면 늘 아버지 이야기가 나왔다. 그게 스트레스였다. 잘해야 본전, 못하면 누구 자식이 저 모양이야…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말이다.” 외교부 간부들은 조 장관이 혼돈의 정국에서 소신 발언을 하는 배경에 아버지의 기질이 엿보인다고 말합니다.
◇ “조지훈 선생 아들인 내게 환상 같은 기대”
조 장관은 젊은 시절부터 연설문, 보고서 잘 쓰기로 손꼽히는 외교관이었습니다. 그는 2021년 펴낸 ‘자존과 원칙의 힘’이라는 책에서 “지금까지 연설이든 기고문이든 대외에 공개되는 글을 직원들이 써 준대로 읽거나 발표해 본 적이 한번도 없다”고 했습니다. “메시지가 제대로 담겨 있지 않을 경우에는 밤을 꼬박 새우는 일이 있더라도 내 손으로 직접 다듬어 마무리하곤 했다”고 합니다.
1979년 제13회 외무고시에 합격한 그가 문필력을 인정받은 계기는 전두환 대통령의 1984년 국빈 방일 당시 연설문 초안을 쓰게 되면서부터 입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전대통령에 대해 “일본을 공식방문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원수가 하필이면 정통성 시비를 겪고 있는 전두환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지 내심 불만스러웠고 그것 또한 한일 양국의 불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어린 시절 아버지 조지훈 선생, 어머니 김난희 여사, 누나 혜경씨와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다./월간조선
그는 “아버지가 이름난 문인(청록파 시인 조지훈)이라고 해서 아들도 글을 잘 쓴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모두들 내게 일종의 환상 같은 기대를 갖고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당시 전 대통령 국빈 방일에서 중요한 것은 히로히토 천황 주최 만찬 답사였는데, 이를 위해 그는 서점에서 한일 관계 고대사와 근현대사를 다룬 책, 양국의 속담집을 몇 권 사서 호텔에서 책만 읽으며 몇 주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는 당시의 고통을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글을 쓸 때면 지금도 늘 겪는 고통이지만 백지를 앞에 두면 이걸 어떻게 채워 나갈지 막막해진다. 어두운 과거와 밝은 미래를 동시에 담아낼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니 그 막막함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되지 않는가.”
그는 고심 끝에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속담을 핵심 메시지로 한 초안을 마련했습니다. 권병현 아주국 심의관( 주중대사,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역임)이 이에 가필하여 청와대로 올렸습니다. 최종적으로 그가 제안한 이 속담을 키워드로 한 연설문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The ground hardens after a rainfall 로 번역됐는데, 전 대통령의 방일 당시 TIME지 기사 제목으로 인용됐습니다.
전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 후, 그는 대통령 해외 방문 계획 때마다 차출됐습니다. 그는 “글을 못쓴다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된 것은 돌아가신 아버님을 생각해서라도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으나 상사들의 높아진 기대 수준에 나를 꿰어 맞추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주한 미대사와 통화 회피로 비판받아
유려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여야 정치권에 대해 소신발언을 하는 조 장관이지만, 그의 처신에 대한 비판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는 윤 대통령이 12월 3일 긴급 소집된 국무회의에서 계엄 선포 계획을 밝히자 최상목 부총리와 함께 강하게 반대한 국무위원으로 알려졌습니다. 두 사람 모두 국제 사회의 안보 및 경제 동향을 잘 알고 있기에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를 막지 못했습니다.
조 장관이 국제사회가, 특히 동맹국인 미국이 헌법을 위반하는 계엄 발동을 납득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더 강하게 거론해 저지했어야 하지 않느냐는 비판이 나옵니다.
실제로 윤 대통령은 계엄 후 입장 발표에서 여러 국내적 상황을 거론하며 변명했으나 이 사태가 한미동맹과 대외 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습니다. 계엄령 발동 당시 이에 대해선 아무런 고려가 없었다는 방증으로 보이는데, 이와 관련 조 장관의 당시 역할에 대해 아쉬움이 남는다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가 계엄 직후 필립 골드버그 주한미대사의 통화 요청을 거절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많이 있습니다. 한 외교관은 “그런 상황에서는 신속하게 골드버그 대사와 통화해야 했다. 크게 의미있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전화 통화를 하는 것도 중요한 외교 행위다. 그랬다면 골드버그 대사가 국무부 본부로부터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주재국 외교부 장관과 통화도 못했다’는 질책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전직 외교관은 이렇게 말합니다. “조 장관이 자칫 미국에 잘못된 정보를 줄까 봐 통화를 피한 것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조 장관의 그런 행동이 한국의 유일한 동맹국을 무시하는 듯한 메시지를 사태 초기에 발신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에서 유감스럽다”고 했습니다.⊙
<43회>한국 장관 만나 웃었다가 경질...외무상 돼 비상시국에 방한
동해 '日 초계기 저공비행 사건' 당시 이와야 방위상
갈등 커진 상황에서 정경두 장관과 악수할 때 웃어
자민당 우파가 경질주장해 3개월만에 교체돼
"양국 복잡한 문제에도 연대할 사안은 연대해야"소신
‘일본 외무상 7년만에 현충원 참배, 14년만에 한일 외교부 장관 공동 기자회견.’ 지난 13일 방한한 이와야 다케시(岩屋毅) 일본 외무상 방한이 남긴 기록입니다. 그가 유례 없는 정치적 위기에 처한 한국을 방문하면서 여러 배려를 했음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지난 13일 오후 5시15분 외교부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가졌을 때 이와야 외무상은 어느 때보다 더 한일 협력을 강조했습니다. 조 장관이 먼저 모두(冒頭) 발언에서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한일 관계를 흔들림 없이 발전시켜 나가기로 했다. 한일 관계를 중시한다는 일본 정부의 일관된 입장을 재확인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와야 외무상은 “현재의 전략적 환경하에서 양국 관계 중요성은 변함이 없다”며 “복잡한 국제 과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일한미공조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국회의 12·14 윤 대통령 탄핵으로 한국 정치가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양국의 우호관계가 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한 겁니다.
이와야는 일본 우익 일부로부터 “무정부 상태의 한국에 왜 가느냐”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방한했는데, 조 장관은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며 감사인사를 했습니다.

▲2019년 6월 1일 아시아안보회의(일명 샹그릴라 대화) 참석을 위해 싱가포르를 방문한 정경두 국방부 장관(왼쪽)과 이와야 다케시 일본 방위상이 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이와야 방위상은 한일관계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의 국방장관을 만나고, 웃는 얼굴로 악수를 했다는 이유로 경질론에 휩싸인 뒤 3개월 뒤에 교체됐다./연합뉴스
◇초유의 한일 군사대치 당시 일본 방위상
한일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와야의 방한은 그가 수 년 전 방위상으로 일할 때를 떠 올리게 했습니다. 그는 2018년 12월 ‘일본 초계기의 저공비행 및 한국 해군의 사격용 레이더 조사(照射)’ 사건이 발생했을 때 아베 신조 내각의 방위상이었습니다. 이어서 그는 2019년 6월 열린 한일 국방장관 회담에서 웃는 얼굴로 악수를 했다는 이유로 경질론에 휩싸인 뒤 3개월 뒤에 교체됐습니다.
저는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처음으로 양국간 군사적 갈등이 고조되고, 이와야가 한일 회담에서 웃었다는 이유로 경질되는 과정을 도쿄에서 지켜봤습니다. 마치 한편의 희비극(喜悲劇)을보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이와야는 아베 신조 내각의 방위상이었지만 ‘비둘기파’로 분류됐습니다.
2018년 12월 20일은 한일이 군사적 측면에서 사상 처음으로 대치한 날로 기록돼 있습니다. 한국 해군의 3200t급 구축함인 광개토대왕함이 일본 이시카와(石川)현 노토(能登)반도 인근 해상에서 일본 자위대 초계기를 사격 관제용 레이더로 겨냥했다고 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사건이 발생한 겁니다.
당시 일본 방위상이었던 이와야가 12월 21일 기자회견을 열고 “20 일 오후 3시쯤 노토반도 인근 해상에서 한국 해군 구축함이 경계·감시 임무를 하던 일본 자위대 P1 초계기를 사격 관제용 레이더로 겨냥했다”고 발표한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이는 화기(火器·전투시 사용하는 무기를 의미)의 사용에 앞서 실시하는 것으로 당시 예측할 수 없는 사태를 초래할 수 있는 지극히 위험한 행위였다”고 주장했습니다. “본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한국 정부에 강하게 항의했으며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고도 했습니다.
방위성외에도 일본 외무성 관료들은 한국 측의 행동이 “있을 수 없는 행동”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일본 NHK 방송에 따르면 복수의 외무성 관리들은 “이번 사태는 우호국 사이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그간 한국군과의 사이에서 이런 문제가 일어난 적이 없었던 만큼 한국군의 의도를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 국방부는 “우리 군은 정상적인 작전 활동 중이었으며 작동 활동 간 레이더를 운용했으나 일본 해상초계기를 추적할 목적으로 운용한 사실은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해군 관계자는 “대화퇴 어장에서 조업을 하던 다른 선박이 ‘북한어선으로 추정되는 선박이 조난당한 것 같다’는 신고를 한 것으로 보인다”며 “우리 해군은 이 배를 찾기 위해 사격 관제용 레이더를 작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 초계기를 겨냥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했습니다. 요약하면, 북한 조난 어선을 찾기 위해 일반 레이더보다 정밀한 사격 관제용 레이더를 켰는데 이때 우리측을 마치 위협하듯 저공비행한 일본 초계기가 레이더망에 잡혔다는 것입니다. 이때문에 국방부는 일본 초계기가 저공비행으로 위협한 것이 더 문제라고 했습니다.
◇ “아베 총리가 방위상에 초계기 영상 공개 지시”
일본 방위성은 사건 발생 8일 만인 12월 28일 이 사건을 더욱 확대시켰습니다. 동해상 한·일 중간 수역에서 광개토대왕함과 일본 해상자위대 초계기인 P-1 사이의 발생 사건을 찍은 영상을 전격 공개했습니다다. 광개토대왕함이 일본 초계기를 향해 무력 사용을 가정한 사격 통제 레이더를 쐈다는 취지였습니다.
그런데, 방위성이 일본 초계기 영상을 공개한 것은 아베 총리의 지시였다는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더욱 커졌습니다. 일본의 주요 언론에 따르면 아베는 2018년 12월 27일 이와야를 총리 관저로 비공식 호출했습니다. 이어서 사건이 발생한 20일 일본 초계기가 공중에서 촬영한 영상을 공개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와야는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중시해 난색을 표명했지만 아베가 밀어붙였다고 합니다. 도쿄신문은 위안부 재단의 해산과 강제징용 판결 등으로 아베가 화가 많이 났다는 자민당 관계자의 발언을 전하며, 이런 상태에서 레이더 문제가 발생하자 불만이 폭발한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마이니치신문은 아베 내각이 이 영상을 공개하지 않을 경우 일본 내 여론이 악화될 수 있다는 점도 감안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했습니다. 국내 여론 대책의 일환이라는 것입니다.
한국군은 일본 정부가 이번 사태에 민감하게 나오는 이유가 광개토대왕함이 일본 영해 가까이에서 기동했기 때문으로 판단했습니다. 광개토대왕함은 당시 북한 선박 구조를 이유로 독도 남동쪽 대화퇴 어장 인근까지 수 백㎞를 항해했습니다. 당시 우리 정부 관계자들은 “조난당한 북측 선박이 정확히 어떤 종류인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군 함정도 당연히 현장에 갔어야 했다”고 했습니다.
◇ 한국과의 화해 주장한 이와야
이와야는 당시 방위상이었지만 이 사건에 대해 한일간의 화해를 주장했습니다. 그는 2019년 5월 한국과의 관계를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다는 발언을 해서 주목받았습니다. “한일 사이에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났지만, 한국의 국방장관과도 만나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그의 발언을 계기로 2019년 6월 1일 제18차 아시아안보회의(일명 샹그릴라 대화)를 계기로 한일 국방장관 회담이 열렸습니다. 이때 이와야는 한국의 정경두 장관과 웃는 얼굴로 악수를 했습니다. 이 사진은 다음날 한일 양국의 신문에 모두 크게 실렸습니다.
그러자 자민당의 우익 성향 의원들이 발끈했습니다. 6월 5일 열린 자민당 국방부회(국방위원회) 등 합동회의에선 동해상에서 한일 대치 사안에 대해 진전이 없는 상태에서 이와야가 한일 국방장관 회담을 하고, 웃는 얼굴로 악수한 것을 문제삼았습니다. 사실상 교체를 요구한 겁니다.
이에 대해 이와야는 언론 인터뷰에서 “문제를 해결하자고 만난 자리에서 엄한 표정을 지어야 하느냐. 비록 힘든 이야기를 해야 하는 자리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는 기분 좋게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반박했습니다.

▲방한한 이와야 다케시(맨 오른쪽) 일본 외무상이 13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참배하고 있다. /조인원 기자
◇ 문 대통령 8.15 연설도 긍정적 평가
2019년 8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일본이 대화·협력의 길로 나오면 기꺼이 손을 잡겠다”는 광복절 연설이 나왔을 때도 그는 각료중에서는 유일하게 유연한 대응을 주장했습니다.
당시 문 대통령 연설에 대해 일본내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습니다. 요미우리신문은 ‘관계 회복의 구체적인 대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제목의 사설에서 “문 대통령이 일·한 관계 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이 없으면 일본의 불신을 씻을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사설은 “문 대통령의 경축사 중에서 관계 악화의 원인이 일본에 있는 것 같은 언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고노 다로(河野太郞) 외무상은 “문재인 대통령은 국제법 위반 상황을 시정하는 리더십을 발휘하길 바란다”고 반박했습니다. 문 대통령의 대일(對日) 유화 메시지에도 징용 피해자 문제를 한국 정부가 국내적으로 먼저 처리해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재차 강조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야는 문 대통령의 경축사에 대해서 “이전의 발언과 비교하면 매우 온건하다”고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는 “북한의 미사일 문제를 비롯해 일·한과 일·미·한의 방위 협력이 중요한 시기에 접어들고 있다. 연대할 사안에 대해서는 확실히 연대하겠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한일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상황에서 양국간 화해를 주장해 온 그는 2019년 9월 초 경질이 확정됐습니다. 이와야는 9월 11일 교체되기 하루 전 퇴임사에서 다시 한번 한일 안보 협력 강화를 강조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후임자인 고노 다로가 한일 양국간 협력을 중시하는 쪽으로 노력해 달라는 뜻을 밝혔습니다.
◇7년간 낭인 생활하며 뒤늦게 입각...이시바 내각 외무상에 발탁
이와야는 옛부터 한국과 교류가 많은 큐슈 지열 출신으로 자민당의 주류 의원들과는 다른 경로를 걸어왔는데, 이같은 배경이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한일 협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오이타(大分)현 벳푸시에서 1957년에 태어났습니다. 의사이자 오이타현 의회 의원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20대 후반에 정계에 뛰어들었습니다.
1987년 오이타현의원에 이어 1990년 중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됐습니다. 이어서 자민당에 입당했으나, 정계 개편 과정에서 신당 사키가케로 이적하며 낙선과 7년간의 야인생활을 겪었습니다. 2000년 자민당 소속으로 중의원에 복귀한 그는 2006년 외무부대신을 지냈습니다. 이어서 2018년 10월 아베 신조 내각에서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가 이끄는 아소파 몫으로 방위대신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뒤늦게 처음 입각한 겁니다.
이와야는 지난해 9월 이시바 시게루 내각이 출범하면서 외무상으로 발탁됐습니다. 이시바는 한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를 중시하는데, 2018~2019년 한일 갈등 확산을 막으려고 애쓴 이와야를 눈여겨보다가 그에게 외무상의 중책을 맡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윤 대통령이 내란 혐의로 체포된 한국의 정치 상황은 앞으로 크게 요동칠 수 있는데, 이럴 때 이와야 같은 지한파 정치인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44회> 尹, 출근길 약식 회견 폐지하면서 민심과 멀어졌나
일본 총리는 관저 드나들 때 근접 취재 허용
수시로 기자들 취재 응하며 여론 파악하려 해
日언론, "총리 걸음 2초 느려졌다"고 보도하기도
尹, 기자들과 접촉 끊고 편향적 유튜브에 몰두
박근혜처럼 폐쇄적 생활하다가 시대착오적 계엄
2018년 6월 도쿄 특파원으로 부임했을 때 일본 정치에서 부러운 게 하나 있었습니다. 일본 총리가 관저(官邸)에 드나들 때 기자들이 로비에서 그에게 최대한 가까이 가서 취재를 하는 장면이 매일 TV에 나왔습니다. [일본 총리 관저는 한국 대통령의 청와대 관저, 한남동 관저와는 달리 사무공간을 의미합니다. 일본 총리 부부가 생활하는 곳은 공저(公邸)라고 합니다.]
일본 정부로부터 외신기자증을 받자마자 총리 관저에 가보니, 미국 백악관처럼 총리와 기자들이 같은 건물을 사용하는데 훨씬 더 개방적이었습니다. 총리는 이곳의 5층에서, 기자들은 1층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2022년 5월 10일 취임한 윤석열 대통령이 다음날인 1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 출근하며 첫 약식 회견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일본 관저에 등록된 언론사 기자들은 현관과 연결된 3층 로비까지는 자유롭게 올라가 갈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밖을 오가는 총리에게 질문하고 방문객을 주시합니다. 우리나라의 청와대와는 달리 기자들이 총리를 근접 취재하는 시스템이 정착돼 있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일본 총리는 언론이 매일 자신의 동정을 파악해 보도할 수 있도록 협조합니다. 총리가 외출할 때는 풀(pool) 기자 역할을 하는 통신사 차량이 반드시 경호 차량과 함께 다니는 것이 관례로 자리잡았습니다. 우리처럼 대통령이 보여주고 싶은 행사에만 풀 기자를 허용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에 따라 일본의 중앙 일간지에 매일 총리의 전날 일정이 분(分) 단위로 실리고 있습니다. 지난 23일 요미우리 신문에 실린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동정을 일부 살펴보겠습니다.
▽8시 40분 관저 도착▽8시 52분 임시 각의▽9시 40분 사카타 관방 부장관보, 나가하시 복구·부흥 지원 총괄관 면담▽10시 37분 이이다 경제산업차관, 무라세 자원에너지청 장관 면담▽11시 35분 노모토 토큐(東急)그룹 회장 면담▽ 12시 2분 아키바 내각 특별 고문, 작가 사토 유씨와 점심
언론은 이를 바탕으로 총리가 누구를 자주 만나는지, 어떤 성향을 보이는지를 분석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도쿄에서 근무할 때 아사히 신문이 2020년 11월 2000년 이후 일본 총리 9명을 대상으로 취임 후 1개월간의 ‘수상(首相) 동정’을 분석해 발표했습니다. 그 결과 2020년 9월 취임한 스가 요시히데 총리가 659회로 면담을 가장 많이 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기록으로만 보면 지난 20년간 총리 중 가장 부지런한 총리라는 평가가 가능합니다.

▲일본 요미우리 신문 2025년 1월 24일자 2면에 실린 이시바 총리의 23일 동정. 23일 오전 8시40분에 출근해서 오후 7시 45분에 퇴근할 때 까지의 일정이 분 단위로 파악돼 있다. 총리 동정은 매일 일본의 중앙 일간지에 게재된다. 이를 통해 일본 국민은 총리가 매일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다.
그 다음이 2000년 취임한 모리 요시로 총리로 521회를 기록했습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는 각각 489회, 438회로 3, 4위를 차지했습니다. 후쿠다 야스오 총리는 237회로 면담을 가장 적게 했습니다.
스가 총리의 동정 중 민간인이나 언론 관계자와의 면담은 112회로 전임자들보다 월등히 많았습니다. 취임 후 한 달간 스가의 1일 평균 활동 시간은 12시간 6분. 이른 아침에 관저에서의 산책으로 하루를 시작한 후 호텔 등에서 면회나 회의에 들어가는 ‘조활(朝活)’형이었습니다.
저녁에도 매일 회식이 있지만 음주를 하지 않아 모두 1시간 정도면 모임이 끝났습니다. 아사히신문은 스가가 관방장관 시절부터 스타일을 바꾸지 않고 각계 전문가들과 만나 의견 교환을 자주 하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스가가 한 달간 가장 빈번하게 만난 인물은 기타무라 시게루 국가안전보장국장(29회)으로 매일 한 차례꼴로 만났습니다. 그 다음은 국정원장 역할을 하는 다키자와 히로아키 내각정보관(26회)이었습니다. 아베 전 총리에 비해 외교·안보 경험이 부족한 그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두 사람을 자주 만난 것으로 보인다고 아사히신문은 분석했습니다.
◇청와대에 은둔했던 박근혜 대통령
제가 일본 총리의 개방적이고 언론 친화적인 관저 운영에 주목한 것은 2017년 3월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과 소통하지 않고, 청와대 생활에 안주하다가 탄핵당했다는 판단때문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임기 후반으로 가면서 청와대 깊숙이 자리잡은 관저(여기서는 대통령이 먹고 자는 생활공간을 의미합니다. 집무실까지는 도보로 10분 가까이 걸립니다.)에 틀어박혀 지내는 때가 많았습니다. 비서실장, 수석비서관도 잘 만나지 않았으니, 언론과 자주 접촉하며 민심 파악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9년 10월 31일 총리 관저에서 열린 약식 기자회견에서 발언 도중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일본 총리들은 출퇴근시 기자들의 근접취재를 허용하며 이같은 약식 회견을 수시로 갖는다./연합뉴스
박근혜 정부 청와대 비서실장 5명 중 가장 실세였다는 김기춘씨는 1주일에 한 번도 박근혜 대통령을 못 보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박 대통령이 집무실에 나오지 않고, 관저에 머무는 경우가 많아 행정관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서 보고서를 전달한 적이 있다는 사실도 나중에 밝혀졌습니다.
◇근접 취재 일본 언론, “아베 총리 걸음 2초 느려졌다” 보도
일본의 총리 관저 시스템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기자들이 관저 로비에서 상주하며 밀접 감시하니, 평일에는 단 하루라도 공저에 틀어박혀 쉴 수가 없습니다.
현행 일본의 총리 관저 취재 시스템에서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2020년 8월 아베 총리의 사임 원인이 된 건강 이상을 가장 먼저 눈치 챈 이들은 그를 매일 지켜보던 젊은 기자들이었습니다. 일본의 한 방송사는 관저 로비에서 아베의 걸음이 4월 평균 18.24초에서 8월 20.83초로 2초 이상 느려졌다고 보도했습니다. 매일 총리의 걸음걸이를 살피며 시간을 재고, 이를 통계화해 기사화한 데서 탄복했습니다.
다른 언론사는 그가 엘리베이터에 타기 위해 방향을 틀 때 벽에 왼손을 기대는 것이 건강 이상 징조라고 분석했습니다. 이렇게 ‘감시’받던 아베는 결국 2020년 8월 말 궤양성 대장염 재발을 밝히고 사임 발표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20년 9월 한국 정치가 일본 관저 시스템을 벤치마킹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칼럼을 써서 송고했습니다. 오피니언면을 담당하던 박종세 조선일보 여론독자부장(현 경영기획본부장)은 제 칼럼에 ‘어항 속 日 총리 관저 vs 구중심처 청와대’라는 제목을 붙여줬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 이전 공약 파기
도쿄 근무를 마치고 2021년 5월 1월 본사로 복귀했는데, 문재인 대통령도 전임자와 비슷한 불통 논란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문 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처럼 되지 않겠다며 청와대를 나와 ‘광화문 시대’를 여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약했는데, 이는 거짓말이 됐습니다.
문 대통령은 2017년 12분짜리 대통령 취임사에서 4분이 지날 때부터 청와대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권위적인 대통령 문화를 청산하겠다”며 “준비를 마치는 대로 지금의 청와대에서 나와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뿐이었습니다. 그의 청와대 집무실 이전 언급은 2012년 대통령 선거에 처음으로 나왔을 때부터 시작됐는데, 대통령이 되고 난 후 달라졌습니다.
문 대통령은 2019년 1월 22일 자신의 광화문 시대 공약을 파기했습니다. 공약을 무효화하는 이유로 리모델링 비용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청와대 관저와 헬기장, 의전 공간은 그대로 사용하며 광화문 정부중앙청사로 출퇴근하면 되는데 무슨 비용이 그렇게 많이 든다는 것인지....사실은 외부와 단절돼 편안한 청와대에서 나가고 싶지 않다는 것을 에둘러 말한 것에 불과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그도 역시 언론 접촉을 꺼리고 청와대에 칩거하는 시간이 많아 언론과 국민은 그가 매일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잘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문 대통령의 실패는 광화문 시대 공약을 파기한 2019년 1월 22일부터 본격화했다고 생각합니다.

▲오른쪽 건물이 일본에서 사무공간을 뜻하는 총리 관저로 옥상에 헬리콥터가 이착륙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2002년 완공됐다. 왼쪽은 이전에 총리 관저로 쓰였던 건물로 지금은 총리 부부가 생활하는 공저로 단장됐다./연합뉴스
이런 문제 의식하에 제 20대 대통령 선거가 시작될 때인 2021년 11월 ‘광화문으로 출퇴근하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는 칼럼을 썼습니다. 대통령이 청와대에 거주하되, 한 낮에 일하는 집무공간을 정부종합청사로 옮겨서 출퇴근길에 기자도 만나면서 소통을 해 보라는 취지였습니다. 말미엔 구체적으로 이렇게 제언했습니다.
“(대통령 집무공간을 광화문으로 옮기면) 정부청사와 경복궁 사이엔 일반인이 잘 모르는 지하도가 개설돼 있어 유사시 이동하는 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광활하기 이를 데 없는 청와대는 미국의 블레어 하우스처럼 국빈이 투숙할 수 있는 시설로 일부 개조하는 것도 방법이다.
내년(2022년) 3월 대통령 선거까지는 앞으로 4개월가량 남아 있다. 문재인 정권의 적폐(積弊) 청산을 위해서도 청와대 집무실 이전 문제가 여야 대통령 후보들 사이에 깊이 있게 논의되기를 바란다.”
◇대통령실, 일본식 약식기자회견 도입했다가 중단
1999년에 정치부 기자가 돼 여당, 야당을 번갈아가며 출입하고 TV 조선 정치부장을 지내면서 정치권 인사들을 자주 만나왔습니다. 20대 대통령 선거 중에도 여야의 중견 정치인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습니다. 이 때 일본 총리 관저 이야기를 하며 청와대 업무공간의 이전과 언론과의 소통을 강조했습니다.
청와대 이전을 매개로 한 국민과의 소통은 2007년 정동영 민주당 대선 후보, 2012년 유력한 대선 주자였던 안철수 의원 등이 제기해왔기에 이에 반대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일부 정치인들은 제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가며 메모하기도 했습니다.
그랬기에 2022년 3월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가 당선된 후, 청와대를 용산으로 옮기는 것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기자들과 출근길 약식 회견을 시작한 것에 대해서는 다행으로 생각했습니다.
윤 대통령이 취임 다음날부터 시작한 출근길 약식 회견은 많은 화제가 됐습니다. 대한민국의 최고 지도자가 출근하면서 기자들을 만나는 장면은 신선감을 줬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처음 시행되다보니,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실은 이 제도가 정착될 때까지 ‘거친 질문’을 하지 않는 ‘그레이스 피리어드(유예기간)’를 희망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실의 각 부서가 출근길 약식 회견에 대응하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다”는 얘기도 들렸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평소 알고 지내던 대통령실 관계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저의 도쿄 특파원 경력을 잘 알고 있는 그가 “일본의 관저 시스템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2019년에 제가 쓴 칼럼을 바탕으로 상세한 설명을 해줬습니다. 대통령이 특정 현안에 대해서 언쟁하기보다는, 기자들의 관심사에 귀 기울여가며 자신의 생각을 국민에게 잘 전달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해줬습니다. 아울러 “다소 문제가 있더라도 이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미국 방문 중 비속어 논란 등 특정 방송사와 갈등이 커지고 대통령실 내부에서 출근길 회견 무용론이 나오면서 시작한지 반 년만인 2022년 11월 중단되었습니다. 이후 출근길 회견은 복원되지 않은 채 언론과의 관계는 계속 악화됐습니다.
저는 윤 대통령의 시대착오적인 비상 계엄이 잉태되기 시작한 지점을 바로 이즈음으로 봅니다. 언론과의 소통을 귀찮아하고, 극단으로 쏠리는 유튜브에 빠져들면서 2020년대 중반의 한국 대통령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국민은 무엇을 바라는 지에 대한 감각을 잃어가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윤 대통령이 기자들의 레이더에서 벗어나면서 자신이 생활하는 한남동 관저에 머무는 시간이 늘고, 성실하게 출근하지 않았다는 관측도 계속 커져왔습니다.
윤 대통령이 출근길 약식 기자회견을 매일같이 진행하며 기자들의 질문에 귀 기울였더라면, 이렇게 어이없는 자폭 계엄을 할 생각은 못 했을 겁니다. 때로는 거칠고, 자신이 보기엔 억울한 질문도 있었겠지만, 이를 민심으로 받아들이고 고민했다면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수의를 입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45회>김정일 공개 비판했다가 좌파 진영 '변절자' 됐던 박선원
北, 미북대화 하려던 오바마 정권 초기 미사일 도발
브루킹스 와 있던 朴, '김정일 오판' 보고서 게재
"잘못된 대가를 치러야 한다"며 강하게 비판
"미국 가더니 변했다" 비난 받다가 천안함 폭침 부정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8년만의 재취임을 계기로 미북 정상회담이 다시 열릴지 여부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4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난달 20일 북한을 ‘핵 보유국(nuclear power)’으로 부르며 미·북 정상회담을 재개할 수 있다는 입장을 시사했습니다. “나는 그를 좋아했고 매우 잘 지냈다. 그도 나의 귀환을 반길 것”이라고 한 겁니다.
이에 대해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즉각 호응하는 대신 26일 전략순항미사일을 동해가 아닌 서해 쪽으로 시험 발사하고, 29일 핵 물질 생산기지 관련 사진들을 공개하는 식으로 ‘도발’하며 몸값을 높이고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박선원 의원이 2024년 7월 28일 새벽 국회 본회의에서 '방송법 일부개정법률안'에 관한 무제한토론을 하고 있다. 박 의원은 2009년 오바마 정권 초기에 북한이 '대포동 2호'를 발사하며 도발하자 브루킹스 연구소 초빙연구원 신분으로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일의 실명을 거론하며 비판했었다./연합뉴스
러시아를 돕기 위해 1만 여명의 군대를 파병, 북·러 혈맹 관계를 구축한 김정은이 당분간 상황을 관망하며 미국에 대한 협상력을 제고할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합니다. 김정은이 지난 29일 “(올해는) 핵 무력 노선을 관철해나가는 과정에서 중대 분수령이 되는 관건적인 해”라고 한 대목은 핵 보유국으로 인정받으며 미국과의 군축협상을 하겠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김정은은 트럼프 취임 후, 미사일을 동해가 아닌 서해로 발사하며 도발 강도를 조절하고 있는데, 몸값을 올리기 위해 너무 강하게 도발하면 2009년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 때처럼 ‘전략적 무시’ 당할 것을 계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친노 전략가 박선원, 브루킹스 연구원으로
이런 상황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 시대의 초기 미북관계와 민주당 박선원 의원에 얽힌 에피소드를 떠올리게 합니다.박 의원은 386운동권 중에서는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는 정치인입니다. 19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사건 당시 배후인물로 구속된 ‘반미 운동 1세대’ 출신입니다. 연세대 삼민투 위원장을 지낸 그는 영국의 워릭대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노무현 정부에서 통일외교안보전략 비서관을 지낸 그는 친노(親盧) 386세대의 외교·안보 전략가로 북핵 6자회담에도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박 전 비서관은 김정일의 비자금을 관리하고 돈세탁 혐의를 받았던 마카오 은행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대한 금융제재를 해제시키기 위해 미국 측과 여러 차례 부딪쳤습니다. 이 때문에 조지 W 부시 전 행정부 인사들로부터는 ‘기피인물’로 낙인찍히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력의 박 의원은 제가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하던 2008년 워싱턴 DC의 브루킹스 연구소에 초빙연구원으로 와 있었습니다. 그가 와 있던 브루킹스는 미국에서 손꼽히는 싱크탱크인데, 특히 오바마 행정부 출범 전후에 더욱 주목받았습니다.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안보 핵심이었던 수전 라이스 주유엔대표부 대사, 백악관의 제프리 베이더 아시아 담당 보좌관이 모두 이곳 출신이었습니다. 오바마 행정부의 동향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곳이기에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외교안보 전문가들로 북적거렸습니다. 당시 저는 이곳을 드나들며 박 의원을 만나 오바마 행정부 출범 후의 미북관계에 대해 얘기를 많이 나눴습니다. 저와 그는 성향은 달랐지만, 오바마 행정부가 북한과의 고위급 또는 최고위급 대화에 적극적이라는 데는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그 이유는 오바마 행정부가 보여준 전례없는 우호적인 대북 분위기 때문이었습니다.

▲2008년 10월 말 북한 외무성 리근 미국국장(왼쪽)은 북핵 검증 문제 논의를 위해 뉴욕을 방문, 성 김 북핵 특사와 회담을 가졌다. 리근 국장은 귀국하지 않고 11월 미국 대선 결과를 지켜본 후, 오바마 캠프의 프랭크 자누지 한반도 정책팀장과 함께 전미외교정책협의회(NCAFP) 주최 한반도 전문가 회의에 참석했다. 이는 오바마 당선 후, 첫 미북 회담으로 기록됐다./연합뉴스
◇ 오바마 캠프, “취임 100일내 대북 특사 보내자”
2008년 11월 4월 오바마가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3일만에 오바마의 외교안보팀과 북한 정부 대표단의 회동이 열릴 정도로 미북 대화는 기정사실화 되고 있었습니다.
2008년 11월 7일 북한 외무성 리근 미국국장은 북핵 검증 문제 논의를 위해 뉴욕을 방문 중이었는데, 오바마 진영의 프랭크 자누지 한반도 정책팀장과 함께 전미외교정책협의회(NCAFP) 주최 한반도 전문가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이날 회의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스테이플턴 로이 전 주중대사, 윈스턴 로드 전 동아태 차관보,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대사, 성 김 미 국무부 북핵특사 등이 참석했습니다. 약 4시간 동안 비공개로 진행된 이날 회의에서 사실상 미북 회담이 이뤄졌다는 점이 중요했습니다. 이때 리근 국장이 키신저의 방북을 요청한 사실이 나중에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바마의 정책 산실인 싱크탱크미국진보센터(CAP·Center for American Progress)가 정책 제안서에서 신속한 대북(對北) 특사의 평양 파견을 제안하고 나왔습니다. 이 제안서를 만든 이는 오바마 캠프에서 외교안보분야의 핵심적인 역할은 하던 이는 백악관 고문에 지명된 그레고리 크레이그였습니다.
저는 그레고리 크레이그를 2008년 8월 오바마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 지명되던 덴버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이 수장으로 있던 ‘국제 지도자 포럼(ILF)’이 열렸는데, 나중에 유엔주재 미국 대사로 활동하는 수전 라이스를 비롯, 이 자리에 나중에 오바마 대통령의 외교·안보 브레인들이 모두 참가했습니다. 회의가 끝난 후 크레이그와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 짧은 인터뷰를 했습니다. 크레이그가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하면 북한 문제에 대해서 개입 정책을 펼 것이라고 한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하버드대-예일대 법학박사 출신으로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시절 국무부 정책기획국장을 지낸 그는 제안서에서 오바마 당선자 취임 후, 100일 내에 대통령 특사를 파견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북한에 대통령 특사를 보내, 6자회담을 통해 북한 핵 문제의 교착상태를 해결하기 위한 부시 행정부의 노력과 직접적인 미북 양자회담이 여전히 궤도 위에 있다는 단일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미 버락 오바마 대통령 후보자의 정책 산실인 싱크탱크 미국진보센터(CAP·Center for American Progress)가 취임 100일내 대북 특사의 평양 파견을 제안했다. 조선일보는 이를 2008년 11월 21일자 1면 톱기사로 전했다.
그는 “새 정부는 (특사를 보내) 미북 관계의 더 큰 발전 및 향상이 새 정부의 의제 중 높은 위치에 있으며, 핵심적인 목표가 핵 문제에서 더 큰 진전을 이루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습니다. 이와 함께 “대통령 특사는 반드시 평양을 방문하기 전후에 사전 협의와 브리핑을 위해서 서울을 방문해야 한다”고 못박았습니다.
오바마 캠프의 핵심으로 일했던 크레이그의 제안이 의미가 있다고 판단, 당시 워싱턴 특파원으로 함께 일했던 최우석 선배와 함께 기사를 써 보냈습니다. 감창기 편집국장(현 조선일보 미디어연구소 이사장)은 이 기사를 1면 톱 기사로 게재했습니다. 대북 특사로 2000년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난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과, 클린턴 정부의 대북정책조정관을 지낸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이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미국의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 대표는 2009년 4월 초 “언제라도 북한을 방문할 준비가 돼 있다”며 대화 의사를 강조했습니다. 그는 방북하게 되면 비핵화뿐만 아니라 미북 관계 정상화를 위한 조건을 논의할 것이라고 밝히며 북한이 대화에 응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북한에 압박만 가하는 것이 최선책이 아니며 유인책을 결합해야 한다”며 미사일 회담 재개의사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 김정일, 몸 값 높이려 북한 미사일 도발
그런데 당시 북한이 상황을 오판, 판을 깨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북한이 4월 5일 대포동 2호로 불리는 장거리 로켓을 발사했습니다. 1단계 추진체는 일본 아키타(秋田)현 서쪽 280㎞ 동해상에 떨어졌으며, 2단계 추진체는 일본 동쪽 1270㎞ 지점에 떨어진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북한은 ‘은하 2호’ 위성을 궤도에 성공적으로 진입시켰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명백한 유엔 안보리 제재 위반이었습니다. 유엔 안보리는 2006년 10월 북한의 핵 실험을 계기로 제재 결의 1718호를 발동, ‘탄도미사일과 관련한 모든 프로그램’을 불법으로 규정한 바 있습니다. 대기권 밖으로 쏘아올리는 장거리 로켓 기술은 위성으로 부르더라도 원리가 동일합니다. 유엔과 미국은 2006년에 핵실험을 한 북한이 운반수단으로 이용가능한 장거리로켓 기술까지 확보하는 것을 용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북한의 대포동 2호 발사 사태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처음으로 직면하는 중요한 외교·안보 문제였습니다. 더욱이 오바마는 당시 유럽연합(EU) 정상들과의 회의를 위해 체코를 방문중이었는데, 프라하에서 현지시각 새벽 4시30분에 북한의 로켓 발사를 보고 받느라 잠을 깼습니다. 그는 1시간 만에 “도발적 행위”라는 내용의 대북(對北) 비판 성명을 발표하며 유엔 안보리의 소집을 요구했습니다.
오바마는 프라하에서 “자제를 촉구하는 분명한 (국제사회의) 요청을 거부하고 국가들과의 공동체에서 스스로를 더욱 고립시켰다”고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또 “지금이야말로 국제사회가 북한에 대해 강력한 대응을 내놓아야 할 시점”이라고 밝혔습니다. 워싱턴 특파원이었던 저는 이후 백악관 계자들로부터 당시 오바마가 얼마나 화가 많이 났는 지에 대해 들을 기회가 많이 있었습니다. 오바마는 대북 특사도 고려하고, 상황 변화에 따라 자신이 방북할 생각도 갖고 있었는데 북한때문에 체면을 구긴 데 대해 화가 많이 났습니다.
▲박선원 의원이 브루킹스 초빙연구원으로 일하던 2009년 4월 6일 이 연구소 홈페이지에 게재한 김정일 비판 보고서. ‘평양 또 실패하다, 북한의 세 번째 미사일 발사와 김정일의 오판(Pyongyang Fails Again: North Korea’s Third Missile Launch and Kim Jong-il’s Miscalculation)’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브루킹스 홈페이지
◇ 박선원, 북 도발 하루만에 김정일 비판
이때 미국이 북한과 적극적으로 대화하려던 기류를 잘 알고 있던 박 의원이 급히 나섰습니다. 북한이 ‘인공위성 발사 성공’으로 치하한 대포동 2호가 일본 열도 상공을 날아간 다음 날인 4월 6일 영문 보고서를 썼습니다.
브루킹스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여전히 게재돼 있는 그의 보고서 제목은 ‘평양 또 실패하다, 북한의 세 번째 미사일 발사와 김정일의 오판(Pyongyang Fails Again: North Korea’s Third Missile Launch and Kim Jong-il’s Miscalculation)’입니다. 북한의 도발에 매우 좌절한 듯 그는 이 보고서에서 김정일에 대한 분노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 주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2009년 4월 5일, 국제사회의 거듭된 경고와 설득 시도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불량 국가의 길을 선택하고 장거리 탄도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북한의 계산과 달리 이번 사건은 북한의 힘이나 자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전술과 전략 모두에서 북한이 완전히 실패한 것으로 인식해야 합니다.(중략)
미국의 새 행정부는 전임 행정부와 달리 이미 북한 지도자와 정상회담을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위해 북한에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위원장은 미국의 제스처를 냉담하게 거부했고, 이제 미국을 다시 우호적인 논의에 참여시키기 전에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외교적으로 김 위원장은 한국과 일본이 북한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과 강력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만 도움을 주었습니다. 북한의 행동과 다양한 압박 시도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비롯한 6자회담 참가국들은 북한에 더욱 유리한 조건으로 회담 재개를 끊임없이 요구해 왔기 때문에 북한은 강경한 입장이 항상 성공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연된 계승 계획의 정치적 복잡성과 김 위원장의 건강 악화, 외교적 어려움, 경제적 어려움, 식량 공급 문제 등 현재 북한의 문제를 고려할 때, 특히 6자회담 참가국들 간의 국제사회의 공동 행동은 북한에게 대결과 기회주의적 이득 확대를 동일시하는 어리석음을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이제 국제사회는 지난 60일 동안 북한의 나쁜 행동에 대해 질책해야 합니다.”
박 의원이 김정일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거명하면서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데서 그가 얼마나 크게 좌절했는 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1980년대 반미 학생운동 지도부 출신 정치인들 사이에서 북한 비판은 물론 김정일에 대해 부정적인 언급을 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에 속했습니다. 저는 박 의원의 용감한 김정일 비판이 의미가 있다고 판단, 이를 칼럼을 통해서 알렸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을 차용했는데,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박선원 의원이 김정일을 공개 비판한 보고서를 전했던 2009년 4월 16일자 조선일보 특파원 칼럼. '김정일 국방위원장 귀하'라는 제목으로 편지 형식을 차용했다.
“무엇보다 박선원 전 비서관이 당신(김정일)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면서 비판했다는 점에서 큰 실망감을 느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몸담은 386 인사들이 당신에 대한 공개 비판을 금기(禁忌)로 삼아온 관행을 깨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신의 이런 (도발적인) 행동이 오바마 행정부의 ‘반짝 관심’을 자극할지는 모르나 과거처럼 많은 양보를 얻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
◇좌파 진영내에서 박 의원 비판
박 의원이 김정일의 실명을 거론해가며 비판한 사실이 조선일보를 통해 알려진 후, 좌파 진영 내에 파장이 일었다고 합니다. 좌파 진영에서 장관을 했거나 ‘선생님’ 소리를 듣는 이들이 그를 ‘변절자’로 칭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가 ‘제국주의의 심장’인 워싱턴에 오래 머문 것을 거론하며 “사람이 변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만났습니다.
박 의원의 김정일 실명 비판 파문이 가시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1년 후인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이 난 이후로 기억합니다. 박 의원은 당시 방송 인터뷰 등을 통해 “버블제트로는 천안함이 두 동강 날 수가 없다”며 “스크루 상태 등을 감안하면 좌초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을 부인하는 쪽에 섰습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국정원 2차장을 역임한 박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의 12-3 자폭(自爆) 계엄 이후의 탄핵 및 내란죄 기소 정국에서 핵심 인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P.S.
1.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2009년 오바마가 적극적으로 미북대화를 고려하고 있을 때 김정일이 몸값을 적당히 높이고 도발을 자제했다면, 북한의 미래와 김정일의 운명은 달라졌을 지도 모릅니다.
미국과 북한은 2000년 클린턴 미 행정부 당시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이 상호 교차 방문하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기로 합의한 바 있습니다. 제 취재에 따르면, 클린턴 정부의 입장을 계승하는 오바마는 평양 방문도 고려할 정도로 미북관계 개선에 적극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김정일은 박선원 의원의 지적대로 “전임 행정부와 달리 이미 북한 지도자와 정상회담을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위해 북한에 손을 내민” 오바마를 냉담하게 거부했습니다. 이후 미북간에 의미있는 접촉이 일어나지 않은 가운데 김정일은 2011년 12월 17일 사망했습니다.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은 이런 역사를 잘 알고 있을텐데, 어떤 선택을 할 지 주목하고 있습니다.⊙
<46회>한국 부임 못할 뻔한 첫 여성 美대사 '심은경'
평화봉사단 출신 캐슬린 스티븐스 지명되자
대북 강경파 상원의원이 3개월간 인준 반대
"스티븐스는 끝났다" 비관적 전망 확산할 때
뇌종양 투병하던 케네디 의원 등이 구명나서
미 상원 여름 휴회 앞두고 극적으로 인준 통과=
트럼프 2기 미국 행정부의 주한 미 대사로 한국계 미셸 박 스틸(70·한국명 박은주) 전 연방 하원 의원이 거론되면서 제2의 여성 미국 대사가 부임할지 주목됩니다. 한국계 여성 하원 의원으로 캘리포니아주에서 재선을 한 그가 부임하면 캐슬린 스티븐스 전 대사에 이어 두 번째 여성 미국 대사가 되는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1970년대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과 인연을 맺은 스티븐스는 2008년 8월 조지 W 부시 행정부 말기에 부임,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한 후에도 2011년까지 3년간 재임했습니다. 그는 1953년 한미동맹이 맺어진 후 부임한 정무 위주의 권위적인 남성 대사들과는 달리 한국 사회에 뛰어 들어 일반인들을 자주 만나는 공공외교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스티븐스는 당시 미 상원 인준에 어려움을 겪고, 낙마 위기에 몰려 부임하지 못할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어렵게 미 상원 인준을 통과한 캐슬린 스티븐스(왼쪽) 주한 미 대사가 2008년 8월 8일 콘돌리자 라이스(오른쪽) 국무장관 앞에서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한국 이름이 ‘심은경’인 스티븐스 대사는 1975년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온 지 33년 만에 한국에 대사로 부임했다. 가운데는 스티븐스 대사의 아들 제임스./연합뉴스
◇ “평화봉사단 출신 여성 외교관이 대사된다”
2008년 1월 워싱턴 특파원 시절 일입니다. 스티븐 보즈워스 주한 미 대사 후임으로 1970년대 미국의 평화봉사단(Peace Corps) 단원으로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여성 외교관이 거론되고 있다는 사실이 포착됐습니다. 취재를 해 보니 국무부를 취재할 때 알게 된 캐슬린 스티븐스 전 국무부 동아태 담당 수석 부차관보였습니다. 그는 2007년까지 수석 부차관보로 일하다가 국무부의 동아태 담당 선임고문으로 활동하며 주한 미 대사 출신의 크리스토퍼 힐 동아태 차관보를 보좌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주한 미 대사로 지명된 데는 같은 평화봉사단 출신의 힐 차관보의 역할이 컸습니다. 두 사람은 1980년대에 주한미대사관에서 각각 정무팀장(스티븐스), 경제팀장(힐)으로 활동하며 깊은 신뢰를 쌓아왔습니다.
당시 주미 대사관과 한국 특파원들은 스티븐스 지명을 모두 환영했습니다. 스티븐스가 한국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데다 여성 대사의 부임이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스티븐스는 평화봉사단에서 파견돼 1975년부터 2년 동안 한국명 ‘심은경’으로 충남 예산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이어 1977년 주한 미 대사관에서 외교관 시험을 치른 후 1978년에 외교관이 됐습니다. 그는 1984년부터 주한 미 대사관 정무팀장으로 근무하면서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지켜봤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정·관계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습니다. 나중에 이명박 정부의 외교부 장관이 되는 김성환(외시 10회)씨를 비롯, 많은 한국 외교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었습니다. 스티븐스는 한국인과 결혼, 아들을 한 명 낳은 후 이혼했습니다.
그는 2005년 6월 수석 부차관보에 취임 후, 북핵 문제 및 6자회담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2006년 3월 북한 계좌가 동결된 마카오 은행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 리근 북한 외무성 미주국장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2007년 1월엔 서울을 방문, 외교부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방안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이같은 경력 때문에 미 상원이 ‘스티븐스 대사’에 대해 반대하지 않을 것을 보여 이르면 2008년 6월 부임할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 대사가 1970년대 평화봉사단원 시절 충남 예산중학교 학생들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다./연합뉴스
◇축제 분위기 같았던 인준 청문회
2008년 4월 9일 미 상원 외교위원회의 스티븐스 인준 청문회는 여러 면에서 이례적이었습니다. 주미대사관 관계자들과 함께 현장을 지켜보니, 마치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우선 민주당의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 의원이 스티븐스 지명자와 나란히 앉아 있는 게 특이했습니다. 당시 뇌종양으로 투병중인 케네디 상원 의원은 “캐슬린은 여성과 평화봉사단원으로는 처음으로 주한 미 대사에 지명됐으며 한국말을 하는 최초의 미국대사로 업무에 손색이 없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형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이 만든 평화봉사단을 오랫동안 지지해왔습니다.
청문회를 주관한 바바라 박서 상원 외교위 동아태 소위원장은 스티븐스가 한국인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제임스 군과 그의 상관이었던 제임스 릴리 전 주한 미 대사를 일일이 일으켜 소개했습니다.
알래스카 출신의 리자 머코스키 의원이 “알래스카에 한국 총영사관이 만들어지도록 해 달라”고 하자 박서 의원도 “내 지역구인 캘리포니아에도 60만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달라”고 말해 웃음이 터지기도 했습니다.
스티븐스는 모두 발언에서 “한국이 경제·정치적으로 놀랄만하게 성장하는 시기에 한국에 있었다”며 “한국의 미래와 한미 관계에 대해서 낙관적”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한국은 매일 같이 긴급뉴스(Breaking news)가 나오는 역동적인 나라”라며 자신이 청문회에 제출하는 서류를 만든 후에 발생한 미북협상, 한국의 여성 우주인 이소연씨 탄생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북한 인권에 대해선 “내겐 북한의 인권 상황을 제고해야 할 특별한 의무가 있다. 한국의 새 정부와 협력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 한국계 보좌관둔 브라운백 의원이 강하게 반대
그런데,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가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끝난 후 4월 말부터 좋지 않은 얘기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한반도 문제에 관심이 많은 공화당의 샘 브라운백 상원의원이 스티븐스의 임명을 강하게 반대한다는 겁니다. 스티븐스 인준을 낙관하고 있던 주미 대사관 관계자들도 긴장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설마, 그럴 리가 있나...” 반신반의 속에 미 국무부를 취재해 보니 사실이었습니다.

▲2008년 미 공화당의 샘 브라운백 상원의원이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대사' 인준안을 강하게 반대했다. 브라운백 의원은 당시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가 북한에 대해 지나치게 유화적이라며 대북 정책 수정을 요구하며 스티븐스 인준 반대에 나섰다. /연합뉴스
브라운백 의원은 백악관과 국무부가 대북(對北) 인권 문제를 강하게 제기할 것을 요구하며 스티븐스 인준 반대 입장을 밝혔습니다. 주한 미 대사의 직무와 북한 인권 문제를 연계시키는 그의 논리에 대해 국무부는 반발했지만 일부 동료 의원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동안 부시 행정부의 국무부가 탈북자, 북한 인권 문제를 개선시키지 못한 채 북핵 6자회담을 비롯한 북한과의 협상에서 유화(柔和)적 자세를 취했다는 비판이 컸습니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브라운백 의원이 스티븐스를 추천한 힐 차관보를 견제하기 위해 제동을 걸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힐 차관보는 워싱턴 DC에서 그의 이름과 김정일의 이름을 합쳐서 ‘김정힐’로 불릴 정도로 비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힐 차관보를 못마땅하게 여겨 온 브라운백 의원이 스티븐스 인준을 거부하는 방법으로 대북정책 수정을 요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곤란해진 스티븐스가 브라운백 의원을 찾아갔을 때 1시간 30분을 기다리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브라운백 의원과 그 주변을 취재하면서 그 배경에 한국계의 W 보좌관이 있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취재를 해 보니, W 보좌관은 변호사 출신으로 북한 체제를 민주화시켜야 한다는 신념을 굳게 갖고 있었습니다. W 보좌관이 브라운백 의원의 스티븐스 인준 반대 결정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습니다. 당시 워싱턴 DC의 유력 소식통을 통해 취재한 바에 따르면, W 보좌관은 “왜 일 잘하는 버시바우 대사를 바꾸려고 하는 지 알 수 없다. 힐 차관보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 힐 차관보는 북한 인권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데, 스티븐스 지명자를 보내더라도 단단히 교육시켜서 보내야 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미 상원, 대사 임명에 만장일치 전통
당시만 해도 미국의 상원 시스템은 관료의 대사 임명에서는 만장일치를 추구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브라운백 의원이 스티븐스의 인준에 강하게 제동을 걸어 상원 전체 회의를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5월이 지나면서 안 좋은 얘기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외교안보 전문가는 “캐슬린 스티븐스는 사실상 끝났다. 힐 차관보의 가장 큰 목표는 북핵 6자회담을 잘 이끌어가는 것이다. 지금 스티븐스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다. 그 문제로 상원의 화를 자초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조선일보 2008년 6월 7일자 특파원 칼럼 <美 외교관 '심은경'씨의 운명>. "주한 미대사 내정자 인준 지연이 미국 정치권과 행정부의 힘 겨루기 속에 방치되는 것은 한국이 중요하지 않다는 잘못된 인식을 줄 수도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미 공화당 소속으로 한반도 사안에 대해 밝은 인사도 “브라운백 상원 의원이 저렇게 나오면 스티븐스 인준은 어렵다. 국무부가 그의 요구를 들어주거나, 백악관이 브라운백 의원의 지역구 민원을 하나 들어주기 전에는 인준 통과가 어렵다”고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당시 저는 이 문제가 정치화되는 것이 한미 관계에 좋지 않다고 판단, 칼럼을 써서 보냈습니다.
“한국에 특명전권대사로 누구를 보내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미국 정부와 의회의 권한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주한 미 대사 내정자 인준 지연이 미국 정치권과 행정부의 힘겨루기 속에 방치되는 것은 한국이 중요하지 않다는 잘못된 인식을 줄 수도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주한 미 대사의 위상이 예전과 같지 않지만 한국에선 여전히 가장 중요한 외교 사절인 것은 틀림없다. 2002년 ‘효순·미선양 사건’이 발생했을 때 당시 주한 미 대사가 그 심각성을 좀 더 일찍 파악했더라면 한미 간의 갈등은 최소화됐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다음 달 조지 부시(Bush) 대통령이 방한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 문제는 가부(可否) 간에 어떤 식으로든 조속한 결정이 내려져야 할 것 같다.”
◇ 스티븐스의 기사회생
브라운백 의원이 스티븐스의 대사 임명에 강하게 제동을 걸어, 3개월 넘게 상원 전체 회의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을 때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뇌종양 투병 중인 에드워드 케네디 미 민주당 상원의원이 민주당 전당대회 첫날인 25일 저녁 콜로라도주 덴버시의 펩시센터에서 버락 오바마 후보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스티븐스가 낙마 위기에 처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고령(高齡)의 상원의원 두 명이 나섰습니다. 먼저 외교위원회 인준 청문회장에 스티븐스와 나란히 앉아서 그를 도와줬던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브라운백 의원 설득에 나섰습니다. 뇌종양으로 거동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스티븐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케네디 의원은 1년 뒤인 2009년 8월 사망했습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존 워너 상원의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는 김일성의 6·25 동족살해(同族殺害) 남침 당시 1951년부터 1년간 미 해병대 장교로 한국에서 싸운 경력이 있습니다. 한국전 참전 용사인 그는 상원 군사위원회에서 열린 북핵 청문회에서 “상원이 8월 휴회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동안 유보돼 온 스티븐스 주한 미 대사 지명자의 인준이 매듭지어지길 희망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아시아 지역을 방문할 때 스티븐스가 수행했던 그는 “캐슬린은 주한 미 대사라는 중책을 맡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는 공개 발언으로 브라운백 의원을 ‘압박’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스티븐스는 기사회생(起死回生)했습니다. 스티븐스 임명을 반대해 브라운백 의원은 2008년 7월 31일 반대 입장을 철회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하루 뒤인 8월 1일 상원은 전체회의를 통해 ‘스티븐스 주한 미 대사’를 확정했습니다. 브라운백 의원은 성명에서 “크리스토퍼 힐(Hill)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청문회에서 북한 인권 문제를 6자회담에서 다루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스티븐스 주한 미 대사 지명자에 대한 인준 반대를 철회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어렵게 미 상원 인준을 통과한 스티븐스는 2008년 8월 8일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앞에서 취임 선서를 한 후, 서울에 부임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47회> "나는 한국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한국을 사랑했던 주한 미 대사
자전거로 지방 돌며 '친근한 미 대사' 이미지 심어
농촌 촌부 만나고 관저에 대중가수 불러 공연도
재임중 北의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겪어
"미 대사가 해녀 체험까지 하느냐"는 비판 여론도
2008년 1월 주한 미 대사로 지명된 후 7개월간 미 상원에서 인준이 안 돼 낙마할 뻔했던 캐슬린 스티븐스는 같은 해 9월 23일 서울에 부임했습니다. 평화봉사단원으로 1975년 한국과 인연을 맺은 후 33년 만에 주한 미 대사로 부임할 때 인천공항은 특별한 환영 행사를 기획했습니다. 공항 입국장에 그가 예산중학교에서 한국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크게 걸어 놓았습니다. 입국하던 스티븐스는 이를 보고 크게 감동했습니다. 자신이 한국을 좋아하는 것보다 한국이 더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느꼈다고 나중에 말합니다.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미국대사가 2011년 8월 6일 강원도 자전거 투어에서 동강 주변을 달리고 있다./연합뉴스
1953년 한미 동맹이 맺어진 이래 첫 여성 대사, 첫 한국 근무 평화봉사단 출신의 스티븐스는 이전의 권위적인 남성 대사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그는 서울 광화문의 대사관과 정동 대사관저에서 벗어나 한국 사회로 뛰어드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한국에서의 미국 이미지 개선을 위해서는 공공 외교가 필요한 시점이 됐다고 판단한 겁니다.
스티븐스는 전임자들이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지방 소도시를 돌며 한국인들의 여론을 청취했습니다. 시골 장터를 찾아 촌부(村婦)의 손을 잡고 얘기했습니다.
자신의 관저에 한미 청소년 100명이 모인 가운데 당시 ‘사랑비’로 유명한 가수 김태우 콘서트를 갖기도 했습니다. 정동에 주한 미 대사관저가 자리 잡은 후 대중가수 콘서트가 열린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1980년대 반미(反美)의 진원지였던 광주광역시의 여고(女高)에서 강연한 것도 양국 관계를 가깝게 하려는 노력의 하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스티븐스를 한국에 대중적으로 알린 것은 자전거를 타고 대한민국 전국을 다니면서 공공외교를 한 겁니다.
◇6·25 60주년에 낙동강 전투 지역 라이딩
스티븐스는 자전거 마니아로 프로 사이클리스트에 맞먹는 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저도 몇 차례 그와 라이딩을 함께한 적이 있는데, 한번 속도를 내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그가 주한 미 대사 시절 그를 밀착 경호하던 여성 경찰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내달리는 스티븐스 대사를 경호하기 위해 자전거를 배웠습니다. 이 경찰관은 저에게 “스티븐스 대사가 속력을 내면 무시무시하다. 그를 따라가면서 경호하기 위해 죽을 뻔한 위기를 몇 차례 넘겼다”고 했습니다.
스티븐스는 처음엔 대사관 관계자들과 자전거를 타다가 차츰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계 인사들과 자전거를 타며 긴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크고 작은 자전거 모임을 갖던 스티븐스는 2010년 6·25 전쟁 60주년을 맞아 큰 구상을 했습니다. 한국의 대학생들과 함께 낙동강 전투 지역을 1주일 동안 자전거로 달리며 한미동맹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심은경 대사와 함께 달리는 자전거 길 600리’로 명명된 이 행사는 미 대사와 자전거 라이딩을 한다는 것 때문에 큰 인기를 모았습니다. 낙동강 전적지를 다니면서 함께 피 흘렸던 한미 양국의 군인들을 추모하고, 자유의 소중함을 깨쳤습니다.
스티븐스는 자신의 블로그에 “한국 학생들은 전쟁이 끝난 지 수십 년이 지난 후 태어난 세대로, 현재의 부유하고 현대적인 한국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할아버지·할머니 세대가 겪은 전쟁의 고통을 기리기 위해 이 라이딩에 참여했다”고 썼습니다.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미국대사(왼쪽)가 2010년 ‘심은경 대사와 함께 달리는 자전거길 600리’ 행사에서 손뼉을 치고 있다./주한미국대사관
◇ 한미 FTA 홍보 위해 서울~진도 자전거 종단
스티븐스는 2011년 당시 논란이 많았던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를 홍보하기 위해 다시 자전거와 관련된 행사를 기획했습니다. 서울에서 진도까지 1주일간 자전거를 타고 가며 한미 FTA와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알리자는 취지였습니다. 행사도 미국의 현충일(매년 5월의 마지막 월요일) 연휴와 한국의 현충일 사이로 잡았습니다.
워싱턴 특파원을 마치고 2011년 서울로 복귀한 저는 그의 한반도 종단 라이딩 첫날 구간에 참여했습니다. 주한 미국 대사관의 토머스 언더우드 지역 총괄 담당관, 애런 타버 공보관과 1970년대 평화봉사단원으로 그와 함께 한국에 파견됐던 빌 하워드씨, 주한 미군 장병 등 약 20여 명이 동행했습니다.
스티븐스의 한반도 종단 라이딩이 시작된 날은 2011년 5월 28일 토요일이었습니다. 주한 미 대사관저 앞에서 출발, 하루 종일 90㎞를 달리는 동안 스티븐스는 줄곧 선두를 유지했습니다. 약 3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경기도 의왕시의 삼천리자전거 사옥이었습니다. 스티븐스는 이곳에서 삼천리자전거 임직원들에게 한미 FTA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한국의 자전거 업체는 미국 부품들을 수입해 세계 최고의 자전거를 만들고 있습니다. 한미 FTA가 하루빨리 시행돼 8%의 관세가 철폐됨으로써 한국 자전거의 경쟁력이 더욱 커지기를 기대합니다.”

▲2011년 5월 28일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 대사가 한반도 종단 라이딩 첫날 경기도 의왕시의 삼천리자전거 사옥을 방문, 관계자들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주한 미 대사관
그는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華城)에 이르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사망한 역사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근처에서 부채춤 공연이 벌어지는 것을 보자 갑자기 진로를 바꿔 다가간 후 탄성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이 1950년 7월 북한군과 첫 전투를 벌인 곳에 세워진 경기도 오산시 세교동의 ‘유엔군 초전비(初戰碑)’에 헌화도 했습니다. (이 부근에서 체력이 바닥난 저와 주한 미 대사관 직원 두 명은 대열에서 낙오했습니다. 주한 미군 헌병이 낙오자들을 찾으러 와 미군 트럭을 타고 오산 미군 기지로 갔습니다.)
스티븐스 일행은 이후 원래 계획대로 군산의 GM 자동차 공장, 아산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묘소 등을 둘러보며 진도까지 내려가는 여정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 “한미관계는 자전거 처럼 어떤 경우에도 전진해야”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스티븐스는 2018년 미국의 자전거 전문 매체에 ‘한국에서의 자전거 외교’라는 제목의 글을 썼습니다. 그는 “서울을 벗어나면, 포장된 국도를 따라 로드 바이킹을 즐길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여전히 내가 1970년대에 경험했던 한국의 농촌 풍경을 엿볼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전거에서 내려 농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자동차에서 내리는 것보다 자전거에서 내리는 것이 더 친근하고 솔직한 대화를 이끌어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기고문은 “자전거 타러 한국에 가세요. 그리고 한국의 사람, 음식, 환대를 경험하세요”라고 끝을 맺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내 이름은 심은경입니다>에서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한·미 관계는) 자전거처럼 항상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가는 길에 때로는 오르막도 있고 장애물도 있습니다. 때로는 예상보다 빨리 움직일 때도 있습니다. 모든(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전진해야 합니다.”

▲2011년 KOICA가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미대사를 홍보 모델로 한 ‘당신은 가슴 뛰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광고./ 조선일보 2011년 5월 23일자
◇ “연예인처럼 자신의 인기에만 신경 쓴다” 비판도
스티븐스는 이 같은 공공 외교에 힘입어 외국 대사로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 정부 기관의 홍보 모델이 되는 진기록을 세웠습니다. 2011년 외교부 산하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해외 봉사단을 모집하면서 그를 홍보 모델로 기용한 겁니다. KOICA는 그의 평화봉사단 경력에 주목, ‘당신은 가슴 뛰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광고를 만들었습니다. 3년 임기를 마치고 곧 떠나는 스티븐스는 KOICA 홍보 모델을 한국인들이 이별 선물로 주는 훈장(勳章)으로 여기는 듯했습니다. 이는 2000년대 중반 “미국과의 동맹을 재고해야 한다” “한국과 이혼하라”는 목소리가 두 나라에서 공개적으로 나올 정도로 불안정했던 양국 관계가 안정됐음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스티븐스의 공공 외교가 호평(好評)만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재임한 시기는 2010년 북한의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으로 극도로 긴장된 상태였습니다. 미국은 이례적으로 서해에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를 진입시키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외교부 관계자들로부터는 스티븐스에 대한 불평을 여러 차례 듣기도 했습니다. 당시 한 고위급 외교관은 “스티븐스 대사가 한국에서 일반 시민들을 만나는데 주력하며 자신의 인기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
우리는 연예인이 아니라 언제든 백악관의 오바마 대통령과 통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비판했습니다.
한·미 관계의 내실을 다지기보다는 일반 한국인을 상대로 미국의 이미지를 다듬는 ‘공공 외교’에만 신경을 쓴다는 지적이 미 국무부에서도 나왔습니다. 제주에서 해녀(海女) 체험을 하고, 연극 공연 무대에 서고, 자전거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하는 데 많은 비중을 두는 것 같다는 지적이었습니다. 미국의 한 외교관은 “스티븐스의 후임인 성 김 대사에게는 ‘해녀 체험’ 같은 것은 하지 말라는 얘기도 나왔다”고 했습니다.
◇스티븐스 이임 인터뷰
2011년 스티븐스가 부임한 지 3년이 가까워오자 한국계 성 김 대북 특사가 주한 미 대사로 내정됐습니다. 그러자 스티븐스는 7월 13일 그의 집무실에서 저와 이임 인터뷰를 했습니다. 스티븐스는 1시간 넘는 인터뷰에서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한국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주로 이런 문답이 오고 갔습니다.
― 1975년 평화봉사단원으로 처음 한국 땅을 밟으면서 시작된 당신의 ‘한국 사랑’이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내가 대사로 부임한 후, 자주 쓰는 한국말이 ‘인연’이다. 영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말인데, 커넥션(connection)보다 깊은 뜻을 담고 있다. 나와 한국이 바로 그런 인연이 있다고 생각한다. 몸은 떠나더라도 양국 동맹을 더 튼튼히 하고 북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대사는 2013년 세종문화상 한국문화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후, 상금 중 일부를 대한사이클연맹에 기부했다. 스티븐스가 재임시절 자전거를 함께 타던 구자열 대한 사이클연맹 회장과 악수를 하며 활짝 웃고 있다./대한사이클연맹
―어려운 일도 많았을 텐데.
“서울에 온 날이 미국의 리먼 브러더스가 무너진 다음 날이다. 한국 신문을 보면서 경제 위기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걱정스러웠는데 잘 극복됐다. 늘 힘들고 도전적인 문제는 북한이었다.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 때는 상황이 매우 심각했다. 미국은 분명하고 강한 메시지를 북한에 보냈다. 대북 억지력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다.”
―후임자인 성 김 대사 내정자에게 어떤 말을 해 주고 싶나.
“미국 대사 업무는 자전거 타기와 비슷하다. 계속 페달을 밟아야 한다. 멈추면 쓰러지고 만다. 성 김은 훌륭한 주한 미국 대사가 될 것으로 의심치 않는다.”
인터뷰를 마칠 무렵 그의 소감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정말로 한국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한국은 나를 에너지가 넘치도록 만드는 나라입니다. 이임(離任)하더라도 한국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을 거예요.” 그때 스티븐스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습니다. 그 말에 진심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티븐스는 이후 그의 희망대로 워싱턴 DC의 한미경제연구소장에 이어 코리아소사이어티의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P.S.
스티븐스의 한국에서의 자전거 타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는 지난해 11월에도 외국 언론인들과 함께 자전거로 DMZ을 횡단하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한국에서 스티븐스와 함께 자전거를 타는 주요 인사로는 구자열 LS그룹 이사회의장, 가수 김창완씨, 김수남 전 검찰총장, 김동환 전 자전거 국가대표 선수, 이명숙 트라이애슬론(철인 3종) 선수, 전상우 전 주한 미 대사관 공보관 등이 있습니다.
스티븐스는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한 제32회 세종문화상 한국문화부문 수상자로 선정됐습니다. 그는 세종문화상 상금 3000만원 중 1000만원을 한국의 자전거 문화 확산을 위해 써달라며 대한사이클연맹에 기부했습니다.⊙
<48>"미국만 다녀오면 한미 동맹 깨버리고 싶다"
오바마, MB를 '베스트 프렌드'로 부르면서도
1979년 미국이 강요한 미사일 지침 개정 반대
북·중·러, 장거리 미사일 개발 가속화하는데
한국만 300km 로 묶여 정부 안팎서 불만 고조
고위 관계자 "미국이 동맹국 맞냐"며 작심 토로
2012년 초여름의 일입니다. 한국 정부의 고위 관계자가 워싱턴 DC를 방문하고 돌아왔기에 오바마 미 행정부의 기류를 파악하고자 그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몹시 화가 나 있었습니다. 굳은 표정으로 “미국만 다녀오면 한미 동맹 깨버리고 싶다. 비핵화, 원자력 문제에서 우리에게만 너무 심하게 군다”고 했습니다.
그는 “미사일, 원자력 협정 등 미국과의 협상에서 전혀 진전이 없다. 오바마 정부는 도대체 우리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며 “과연 ‘미국이 동맹국 맞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외교안보 분야를 취재하면서 정부 관계자로부터 미국에 대한 불만을 여러 차례 들었지만, 이렇게 강한 비판은 처음이었습니다.

▲2009년 11월 한국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태권도 시범을 따라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이 주창한 핵 안보 정상회의가 2012년 3월 서울에서 개최되도록 배려할 정도로 이 대통령과 관계가 좋았으나 미사일 협정 개정에 대해선 완강한 모습을 보였다. /연합뉴스
당시 이명박 정부는 김대중, 노무현 진보 정권 시절 해결하지 못한 한미동맹의 여러 현안을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상황이 갈수록 심각해지는데도 한·미 미사일 협정과 원자력 협정은 시대에 뒤처져 있다는 시각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불만이 정부 내에 팽배해 있었습니다. “한·미 동맹 깨 버리고 싶다”고 한 고위 관계자 뿐만 아니라 “미국과의 협상장에서 뛰쳐나오고 싶었다”는 이도 있었습니다.
◇ 표면적으로는 한미 관계 황금기
2012년은 표면적으로 볼 때 한미 관계가 황금기를 구가하던 시기였습니다. 미국은 2008년 11월 대한민국을 비자 면제 프로그램(Visa Waiver Program·VWP) 대상국으로 지정, 한국 국민이 비자 없이 최대 90일간 미국을 방문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한국과 미국에서 각각 2008년, 2009년 출범한 이명박, 오바마 정부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왔습니다.
2009년 6월 ‘한미 동맹 미래 비전’ 채택, 2010년 G20 서울 정상회의 개최, 2012년 3월 서울 핵안보정상회의를 거치면서 양국 관계는 더욱 돈독해지는 듯했습니다.
특히 오바마가 자신의 업적을 남기기 위해 개최한 핵 안보 정상회의를 워싱턴 DC에 이어 서울에서 개최되도록 배려한 것은 전 세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2012년 3월 26일부터 이틀간 서울에서 열린 제2차 핵 안보 정상회의는 참가국이 2010년 G20 서울 정상회의의 두 배로 한국에서 열린 정상회의 중 최대 규모의 정상회의로 기록됐습니다.
오바마는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의 뛰어난 교육열과 교육 시스템을 미국이 배워야 한다고 언급하는 등 한국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한국은 미사일 협정, 원자력 협정에서 주변국 상황을 반영한 미국의 배려를 기대했으나 미국의 반응은 예상보다 더 냉랭했습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2012년 12월 12일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장거리 로켓 은하3호를 발사했다고 보도했다./AP=연합뉴스
◇한국 1인당 GDP 1700달러 때 맺은 협정
2012년 당시 한국의 미사일 개발 문제는 외교·안보 분야에서 중요한 현안으로 부각되었습니다. 1979년 맺어진 후 33년간 유지돼 온 ‘한·미 미사일 지침’은 달라진 한국의 위상에 걸맞지 않다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미국이 한국의 미사일 개발을 제한한 것은 19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노재현 당시 한국 국방부 장관은 존 위컴 주한 미군 사령관에게 한 장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두 달 전 위컴 사령관이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습니다.
미국은 위컴 명의의 서한에서 “한국이 개발하는 미사일은 사거리 180㎞ 이내, 탄두 중량 500㎏ 이내로 제한해야 한다”고 우리 정부에 요구했습니다. 주한 미군 철수도 고려하고 있었던 지미 카터 미 행정부는 1978년 우리가 첫 국산 탄도미사일인 ‘백곰’ 시험 발사에 성공하자 한국의 탄도미사일 사거리를 제한하기로 했습니다.
결국 노 장관은 결국 미국의 요구대로 “한국이 개발하는 미사일은 결코 사거리 180㎞를 초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는 답장을 보냈습니다. 이것이 한국의 미사일 개발을 제한하는 ‘지침’의 시작입니다.
그때 1인당 GDP가 약 1700달러에 불과했던 한국 정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한국은 1970년대 초부터 ‘자주 국방’을 내걸고 자체 미사일 개발에 착수했지만 미국으로부터 핵심 부품과 기술을 제공받지 않으면 미사일 개발을 완수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더욱이 카터 미 대통령이 추진한 주한 미군의 감축 계획의 여파로 나라 전체가 ‘안보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한미 미사일 지침’은 2001년 1차 개정에 의해 사거리가 300㎞로 늘어났습니다. ‘트레이드 오프’ 방식이 적용돼 사거리가 500km가 될 수도 있지만, 이 경우 탄두 중량은 300kg으로 축소됩니다.
이는 한반도 주변 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중국·러시아는 이미 사거리 수천㎞의 장거리 미사일(ICBM)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북한도 사거리 1300㎞의 노동미사일을 실전 배치했고, 10년 넘게 대포동 장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달라진 한국 위상 고려 안 해
한국의 군사적, 경제적 위상도 크게 달라졌습니다. 한국은 2011년 국내총생산이 1237조원으로, 1979년에 비해 38배 성장했습니다. 수출도 같은 기간에 150억달러에서 5552억달러로 30배 이상 올랐습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보유한 나라로 발돋움했고, 미국·유럽연합(EU) 등과 대등한 위치에서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었습니다.
▲한미 미사일 지침관련, 한국과 미국의 입장을 비교한 조선일보 2012년 7월 16일자 그래픽. 오른쪽 사진은 1999년 미사일 지침 개정 협상 모습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33년 전의 ‘지침’을 2012년에도 그대로 적용하려는 것은 부당하다는 비판이 많았습니다. 한국이 선진국 수준의 미사일 개발 기술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일일이 미국의 허가를 받는 것은 한국의 국가적 위상에 걸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당시 민간 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동북아의 안보 상황이 불안정하게 진행될 경우, 주변 국가와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을 이룰 수 있을 정도의 사거리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많은 전문가는 유사시 우리가 남해안뿐만 아니라 제주도에서 북한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미사일을 발사하기 위해서는 사거리가 최소한 1000㎞ 이상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바마, 한국 좋아한다면서도 냉담
한미는 2011년 1월 미사일 지침 개정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으나 미국의 완강한 태도로 1년 넘게 진전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미국 일각에서는 탄두 중량을 그대로 둔채 사거리만 500km로 늘리는 방안을 제시한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한미 미사일 지침과 관련한 양국의 입장 차이가 뚜렷이 부각된 것은 2012년 3월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였습니다. 핵 안보 정상 회의를 계기로 서울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서 미사일 지침과 관련한 질문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이명박 대통령은 “한미 간에 실무적으로 검토되고 있고, 합당한 합의가 이뤄져 곧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미사일 지침 개정 협상에 대해 낙관적인 입장을 피력한 겁니다. 이 대통령은 내외신 기자회견에서도 “우리가 미사일 사거리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은 유사시 북한의 공격에 대해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바마는 이날 회견에서 이 대통령을 ‘베스트 프렌드(절친한 친구)’로 부르며 다른 사안에서 대해선 공감을 표시했지만, 미사일 문제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오바마는 “(미사일 지침은) 특정한 무기 체계나 미사일 사거리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 국민을 어떻게 보호하느냐, 동맹의 목적 달성을 확실히 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이 발언은 한국이 미사일 사거리를 늘리지 않는 선에서 다른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됐습니다. 이는 미사일 협상이 더욱 난항을 겪을 것임을 예고하는 발언이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49>"미국의 족쇄 풀자" 기획 기사에 美 "표현 너무 과하다" 항의
미국이 한국의 미사일 사거리 연장 요구 무시하자
본지, "미국의 족쇄 벗어나자" 5일간 1면에 기획 보도
美측 " '족쇄' 표현 과하다. 삭제할 수 없느냐"며 항의
한국내 비판 여론에 오바마 대통령이 입장 바꿔
사거리 연장 합의 후, 2021년 미사일 지침 완전 해제
2011년 시작된 한미 미사일 지침 개정 협상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2012년 중반이 됐습니다. 이때 조선일보 정치부에 미국이 우리나라의 탄도미사일 사거리를 2001년 개정한 300㎞에서 550㎞로 늘릴 수 있다는 입장을 시사한 것이 포착됐습니다. 사거리가 늘어날 때 탄두 중량을 줄이는 ‘트레이드 오프’도 적용하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는 겁니다.

▲2012년 한미 미사일 사거리 연장 협상이 타결된 직후인 10월 24일 김관진 국방장관과 리언 패네타 미 국방장관이 워싱턴 DC의 국방부 청사에서 제 44차 연례안보협의회(SCM)를 마친 후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미국이 1년 넘게 완강한 모습을 보이다가 입장을 바꾼 것은 긍정적이었지만, 우리나라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주변 국가인 중국·러시아·일본과 북한 모두 사실상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능력을 가진 상황에서 250㎞의 사거리 연장을 시혜처럼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공감대가 조선일보 편집국에 형성됐습니다. 당시 한국의 많은 전문가는 유사시 우리가 남해안뿐만 아니라 제주도에서 북한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미사일을 쏘기 위해선 사거리가 최소한 1000㎞ 이상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한미 양국이 19개월째 협상 중인 미사일 사거리·탄두 중량 협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결과는 이를 무효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회에서 밝힌 대로 1979년 맺어진 후, 33년간 유지돼 온 ‘한미 미사일 지침’은 달라진 한국의 위상에 걸맞지 않다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미사일 지침 무효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면 시효를 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도 나왔습니다.
◇ 조선일보 ‘경제 톱10 대한민국 안보 현안 족쇄 풀자’ 기획
이런 분위기 속에 조선일보는 한미 미사일 지침 문제를 정면으로 파고드는 대형 기획 보도를 시작했습니다. 2012년 7월 16일 월요일 자 1면 톱에 [경제 톱10 대한민국 안보 현안 족쇄 풀자]라는 제목의 기사가 게재됐습니다. 첫 회에 “한미 미사일 지침 효력 끝내야 한다”는 제목이 달렸습니다. 부제로는 ‘미사일 사거리 연장 협상하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고 했습니다.
1면 외에도 4~5면 전면이 할애됐는데, ‘동북아 안보 상황 급변하는데 사거리 250㎞ 놓고 줄다리기’, ‘극비 개발 미사일 제원까지 알려줘야... 명백한 주권 훼손’ 등의 기사가 강한 톤으로 실렸습니다. 이 기획 보도에서 1999년부터 2001년까지 국방부 군비통제관으로 한미 미사일 지침 개정 협상에 핵심 멤버로 참여했던 김국헌 예비역 육군 소장은 “(미국이 우리 탄도미사일 사거리를 계속 제한하려는 것은) 프로메테우스가 불 특허권을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이 기획을 지시하고, 총괄했던 양상훈 편집국장(현 조선일보 주필)은 ‘족쇄’가 들어가는 제목을 직접 제안해 1면부터 명기하도록 했습니다.
조선일보의 ‘미국의 족쇄 풀자’ 는 기획은 이날부터 5일 연속 1면, 4~5면에 걸쳐 나가는 대형 기획이었습니다. 당시 한미 간에 논의되던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후 5년이 지나면 미사일 지침을 아예 소멸시키자는 제언도 했습니다.
▲한미 미사일 지침이 한국의 주권을 제약하는 '족쇄'라고 비판하며 시작된 조선일보 기획기사. 2012년 7월 16일자 1면 톱 기사를 시작으로 5일간 1면과 4~5면에 걸쳐 미국의 대한 미사일 지침과 관련한 정책을 비판했다.
한미 미사일 지침 개정 협상에서 미국이 크게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있을 때 시작된 이 기획은 한국과 미국의 정부 안팎에서 큰 화제가 됐습니다. 특히 한미 동맹을 중시하는 조선일보가 ‘족쇄’라는 표현을 써가며 기획을 했다는 것에 주목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이에 대해 주한 미 대사관 관계자들은 불만을 나타냈습니다. 족쇄라는 어감이 지나치게 강하고 현실을 오도한다는 겁니다. 주한 미 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제게 “족쇄라는 말이 너무 과하다. 이런 표현을 꼭 써야 하느냐. 삭제할 수 없느냐”며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족쇄’ 기획에 대해 놀라기는 이명박 정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부 관계자들은 조선일보의 기획이 협상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면서도 표현이 너무 강해서 오히려 역효과를 낼지 모른다고 우려했습니다. 한미 미사일 지침이 국민의 눈높이에 맞게 개정되지 못할 경우의 후폭풍을 우려하기도 했습니다. 정치부 소속으로 기획에 참여한 전현석 기자(현 조선일보 자회사 ‘스튜디오 광화문’ 대표)가 쓴 ‘기자수첩’은 당시 정부 분위기를 잘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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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기자의 하루 일과는 정부 관계자들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들은 대뜸 지난 16일 자부터 본지에 연재되고 있는 ‘경제 톱10 대한민국 안보 현안 족쇄 풀자’ 기획 의도, 앞으로 다루게 될 주제에 대해 묻곤 한다. 그런 다음 “언제까지 이 시리즈를 계속할 거냐”는 질문을 빠뜨리지 않는다. 이른 아침 시간,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이들의 목소리에서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이유를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미 미사일 지침 속에 담겨 있는 우리 안보의 발목을 잡고 있는 크고 작은 족쇄들, 주권 침해 요소, 불평등성 등을 지적하는 본지의 연재물이 불편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한미 미사일 지침을 다뤄온 청와대와 국방부, 외교부 관계자들에게 이 문제는 국민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이었을지 모른다. (중략) 나흘 가까이 매일 아침 정부 관계자들의 전화를 받으면서 우리 정부가 급변하는 안보 정세를 헤쳐나갈 유연함과 전략적 사고 능력을 갖췄는지 새삼 의문을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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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중국도 한국 미사일 사거리 연장에 반대
한미 미사일 지침 개정 협상의 또 다른 변수는 일본과 중국이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일본의 민주당 정권과 관계가 좋지 못했습니다. 일본은 특히 2012년 8월 이명박 대통령 독도 방문 후, ‘반(反) 이명박’ 노선을 분명히 하고 있었습니다.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내각은 한국의 미사일 능력이 커지면 일본의 남서(南西) 지역이 사정권에 들어갈 수 있다며 지침 개정에 대한 반대 입장을 정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우리나라가 미사일 사거리를 300㎞에서 800㎞ 이상으로 대폭 늘릴 경우 일본 열도의 상당 부분이 한국 미사일의 사정권 내에 들어간다며 부정적 입장을 취한 겁니다. 일본은 이런 입장을 미국에 전달했는데, 저는 이를 취재해 2012년 9월 5일 자 1면에 보도했습니다.
▲2012년 개정된 한미 미사일 지침의 주요 내용을 다룬 조선일보 그래픽. 탄도 미사일 사거리 외에도 무인항공기의 탑재 중량도 2.5t으로 5배 증가했지만, 여전히 제약이 많았다. 한미미사일 지침은 결국 2021년 완전히 무효화됐다.
일본의 탄도미사일 기술 수준은 한반도 전역을 사정권으로 할 정도며 ICBM으로 전환할 수 있는 3단 고체 로켓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의 미사일 능력이 크게 강화될 경우 독자적인 대북 행동 등에 나설 수도 있다는 논리로 미국을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중국도 한국의 탄도미사일 능력 증강에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중국은 한국이 사거리를 1000㎞ 가까이 늘릴 경우, 베이징이 사정권에 들어간다는 점에서 거부감을 보였습니다. 중국 정부의 량광례(梁光烈) 국방부장을 비롯한 군부 지도부가 한국의 미사일 능력 증강을 중국에 대한 한미 동맹의 포위 전략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렸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한국이 미사일 사거리를 800㎞ 이상으로 늘릴 경우, 북한을 자극해 동북아에 긴장이 고조되는 사태를 초래할 것이라는 논리를 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DF-21C는 사거리가 2500㎞이며 DF-31A는 1만㎞ 이상을 날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중국의 반대는 논리적이지 못했습니다.
미국은 2011년 1월 개정 협상이 시작될 때부터 일본·중국의 우려와 반대를 내세워 사거리 300㎞·탄두 중량 500㎏의 현행 지침을 완전히 폐지하거나, 최소한 각각 1000㎞·1t 이상으로 늘려야 한다는 한국의 여론에 난색을 표명해 왔습니다.
◇오바마 한국 여론 보고받고 미 국방부 손 들어줘
조선일보의 ‘미국의 족쇄 풀자’는 기획 이후, 미사일 지침 개정 협상이 진척되기 시작했습니다. 2012년 9월 21개월째 협상 중이던 한미 양국은 우리나라의 미사일 사거리를 유사시 북한 전역을 사정권에 넣을 수 있는 800㎞가량으로 확대하고, 탄두 중량도 현행 500㎏보다 늘리는 데 의견 접근을 이룬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2012년 3월 방한했을 때만 해도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미사일 사거리 연장에 부정적인 발언을 했지만, 7월 본지 기획 보도 이후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당시 저의 취재에 따르면, 오바마는 7월 이후 “한국에서 사거리가 최소한 800㎞ 이상이 돼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한국이 바라는 대로 동의해 주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비확산’을 주장하는 국무부가 아니라 한국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하려 했던 국방부의 손을 들어준 겁니다.
이에 따라 한미 양국은 2012년 10월 5일 제2차 미사일 지침 개정에 합의했습니다. 한미 양국은 “2001년 지침 개정 이후 약 10년간의 변화한 안보 환경을 반영하고 현재와 미래의 군사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도록 군사 전략과 무기 개발 융통성을 대폭 확대하는 차원”에서 개정됐다고 설명했습니다.
탄도미사일의 경우, 사거리를 300km에서 최대 800km로 연장하고, 탑재 중량은 사거리 800km 기준으로 500kg 미만으로 유지하되, 사거리를 줄이는 만큼 탄두 중량을 늘릴 수 있는 트레이드오프 개념이 적용됐습니다. 무인항공기(UAV)의 경우, 탑재 중량을 2500kg까지 확대했습니다. 순항미사일은 기존과 동일하게 사거리 300km 범위 이하에서는 탑재 중량 제한이 없고, 500kg 이하일 경우 사거리 무제한의 원칙이 적용됐습니다.
◇2021년 미사일 족쇄 42년 만에 완전 해제
2012년 미사일 지침 개정으로 한국의 미사일 주권이 신장된 것은 분명하나, 여전히 제약이 많았습니다. 이후 한국과 미국에 “과연 미사일 지침이 필요하냐”는 분위기가 확산됐습니다. 2017년 11월 문재인 정부에서 3차 개정을 통해 탄도미사일 최대 사거리를 800㎞로 제한하되 탄두 중량 제한을 완전히 없앴습니다. 이에 따라 세계 최대 규모의 탄두 중량을 가진 미사일 ‘현무-4’가 개발됐습니다. 현무-4는 사거리 800㎞일 때 2t, 사거리 300㎞일 때 4~5t 이상의 탄두 장착이 가능, 유사시 북한의 평양 중심부의 축구장 200개 면적을 초토화할 수 있습니다.
2020년 7월에는 4차 개정을 통해 우주발사체에 대한 고체연료 사용 제한이 철폐됐습니다. 이로써 고체연료 로켓 개발로 독자 정찰위성 및 GPS 위성 등을 띄울 수 있게 됐습니다.
2021년 5월 21일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워싱턴 DC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한미 미사일 지침을 완전히 무효화하기로 합의했습니다. 42년 만에 한미 미사일 지침이 사라짐으로써 우리나라는 중국·러시아까지 사정권에 둔 중거리 탄도미사일 개발이 가능해졌습니다. ‘최대 사거리 800㎞ 제한’이 사라지면서 사거리 2000~3000㎞의 중거리 미사일은 물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미국이 그동안 한반도 주변의 안보 상황 변화를 도외시한 채 낡은 개념의 한미 미사일 지침을 고수해왔다는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미국은 6·25 때 대한민국을 구하고, 우리나라의 안보와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될 동맹국이지만, 지정학적 인식 차이로 한반도 안보에 대해 판단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논리에 그대로 순응할 경우, 자칫 우리의 안보 역량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럴 때 2012년 미사일 지침 개정 협상 때 있었던 일은 냉철한 상황 판단 하에 국내 여론을 제대로 결집시키면 미국을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동맹 개념을 폐기하는 ‘트럼프 광풍’ 속에서도 분명한 목표와 이를 뒷받침하는 여론의 성벽(城壁)이 있다면, 거센 바람을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50>박근혜, 탄핵 기각 확신하고 해외 순방 계획했었다
2017년 국정원, '헌재 5대3 으로 탄핵 기각' 예상 보고
청와대, 비밀리에 박 대통령 직무 복귀 준비 착수
트럼프와의 정상회담 등으로 실추된 이미지 회복 기대
외교 실무진은 부정적...헌재의 파면 결정으로 무산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파면 결정이 나기 얼마 전의 일입니다. 박 대통령은 직무 정지돼 청와대 내부의 관저에 머물렀고, 한광옥 비서실장과 수석 비서관들이 주요 현안이 있을 때마다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국정원 측에서 청와대에 헌법재판소가 박 대통령 탄핵소추에 대해 기각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비밀리에 보고해 왔습니다. ‘찬성 5대, 반대 3′으로 기각돼 박 대통령이 직무에 복귀할 것이라고 알려온 겁니다. 청와대의 전직 고위 관계자는 “국정원의 고위 인사 A씨가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며 ‘5대 3′으로 기각된다고 전해왔다”고 밝혔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5년 9월 28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제70차 유엔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AP 뉴시스
청와대 비서실도 다른 채널을 통해 박 대통령 탄핵소추가 기각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박 대통령 탄핵이 인용되려면 헌재 재판관 8명 중 6명 이상이 찬성해야 하는데, 3명 이상이 기각 의견을 내 탄핵은 무산된다고 확신했습니다. 이에 따라 박 대통령의 직무 복귀를 축하하기 위한 내부 행사를 미리 준비하기도 했습니다.(대형 케이크를 준비했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 트럼프와의 정상회담으로 분위기 반전 기대
청와대는 박 대통령 탄핵소추가 기각돼 직무에 복귀하는 즉시 분위기를 쇄신하고 실추된 박 대통령의 이미지를 회복하는 방안을 논의했습니다. 여러 방안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박 대통령의 조기 해외 순방을 통해서 분위기를 반전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는 겁니다.
2016년 12월 9일 박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면서 연말에 열릴 예정이던 한중일 정상회의를 비롯한 정상 외교가 무산됐습니다. 2017년 1월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등 중요한 외교 일정이 모두 보류됐습니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 1기 임기를 시작한 트럼프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트럼프 1기 때는 균형감을 가진 관료들에 둘러싸여 지금처럼 ‘트럼프 광풍’이 불지는 않았지만, 돌출적인 정책이 나올 가능성이 컸습니다. 자칫 한미 동맹이 훼손되고, 한미 통상에서도 피해를 입을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았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한미 정상회담이 이뤄져야 하는데, 탄핵 사태로 실기하고 있다는 비판이 비등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1월 21일 스위스 다보스의 한 호텔에서 열린 제44차 WEF(세계경제포럼)의 '한국의 밤'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연합뉴스
이같은 배경에서 청와대는 다른 무엇보다 한미 정상회담의 조속한 개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박 대통령이 취임 후 해외 정상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왔고, 해외 순방을 할 때마다 지지율이 오르곤 했던 경험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베테랑 외교관 차출, 외교비서관실 보강
청와대의 결정에 따라 김규현 국가안보실 2차장 겸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이 관련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김 차장은 박 대통령이 탄핵된 상황에서도 외교비서관실을 보강하고 있었습니다. 아시아 국가에서 근무 중이던 유능한 외교관을 청와대로 불러 들였는데, 그에게 박 대통령 순방 관련 업무를 맡겼습니다. 김 차장이 외교부 간부들에게 직접 연락을 하기도 했습니다.
청와대에 들어갔다가 ‘박 대통령 탄핵 소추 기각’ 정보를 접한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외교부로 돌아와 일부 간부들에게 청와대 분위기를 알렸습니다. 그는 이들에게 탄핵 소추가 기각될 것에도 대비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이 즈음 저는 외교부의 한 관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 외교관은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 탄핵이 안 될 것으로 판단한다는 데, 정말 그렇게 되느냐. 언론계는 어떻게 보고 있느냐”고 물어왔습니다.
◇ 실무진 “탄핵 상황에서 해외순방 준비는 무리”
청와대는 박 대통령이 복귀할 경우 트럼프 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조기에 하는 방안을 구상했습니다. 미국 방문 후, 다른 나라를 거쳐서 귀국하는 안도 거론됐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파면을 보도한 조선일보 2017년 3월 11일자 1면 기사
하지만 박 대통령이 탄핵 중인 상태에서 해외 순방 계획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청와대와 외교부의 실무진은 박 대통령 탄핵이 인용될 가능성이 큰 상태에서 해외 순방을 준비하는 것은 무리라고 보았습니다. 또, 탄핵 기각을 전제로 미국을 비롯한 상대국과 교섭하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들 국가는 주한 대사관을 통해서 매일같이 관련 상황을 수집, 분석하고 있었는데 박 대통령의 직무 복귀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가 인용될 것이라는 전망이 더 높았기 때문에 논의가 구체적으로 진전되지 않았습니다.
2017년 3월 10일 청와대의 희망과는 달리 헌법재판소 재판관 8명 전원 일치로 박 대통령 파면 결정이 내려지면서 해외 순방 계획은 없던 일이 됐습니다. 박 대통령 해외순방 계획은 비밀리에 진행됐기 때문에 공식 기록으로 남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사정에 밝은 전 청와대 관계자는 “청와대가 헌재의 탄핵소추 심리 관련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다. 박 대통령은 무죄이고, 조속히 직무에 복귀해야 한다는 집단 사고에 빠져 있다 보니 잘못 판단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렇다면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 소추된 지금 외교부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을까요? 외교부 대변인실은 8일 “현재 외교부가 검토하고 있는 정상 순방 계획은 없다”고 밝혔습니다. 외교부 관계자는 “헌재의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 결정을 주시하며 일상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대통령실로부터 해외 순방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은 적도 없다”고 했습니다.
참고로,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에 적극 반대했다고 밝힌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윤 대통령의 탄핵이 기각돼 직무에 복귀하면, 즉시 사표를 내겠다는 입장을 주변에 시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