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橫說竪說(동아일보) 2025-02/ 02-01(토) “국무회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02-28(금) “선관위는 가족회사” “친인척 채용이 전통”

상림은내고향 2025. 2. 14. 11:07

橫說竪說(동아일보) 2025-02/

02-01(토) “국무회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날 무슨 일이

 

12·3 비상계엄 사태의 결정적 장면 중 하나가 계엄 전 소집된 국무회의다. 계엄 선포와 해제는 헌법과 계엄법에 따라 최고 정책심의기관인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공소장에 따르면 당시 국무회의는 법적 절차를 무시한 채 5분 만에 끝난 하자투성이 회의였다. 국무위원들도 최근 경찰 조사에서 “정상적인 국무회의가 아니었다”고 진술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계획을 가장 먼저 접한 국무위원은 김 전 장관을 제외하면 한덕수 국무총리다. 한 총리는 그날 오후 8시 40분경 호출을 받고 대통령 집무실에 도착해 계엄 얘기를 처음 들었다. 반대해도 소용없자 “다른 국무위원들 말도 들어보시라”고 했고 윤 대통령은 “그럼 한번 모아 보라”고 지시했다. “윤 대통령은 처음부터 국무회의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는 게 한 총리 진술이다. “항상 법전 먼저 찾는 게 평소 업무 스타일”이라는 법조인 출신 대통령이 왜 국무회의 심의 절차를 가볍게 여겼는지 의문이다.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도 “국무위원 전원이 반대한다”며 대통령을 말렸다고 한다. “계엄에 동의한 국무위원이 있었다”는 김 전 장관 증언과 배치되는 진술이다. 이는 장관들의 반대 의견이 국무회의 전 비공식적으로 제기된 상황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장관들은 의결정족수 11명이 채워지길 기다리는 동안 “국가 신인도에 치명적 영향을 준다” “70년간 대한민국이 쌓은 성취를 무너뜨린다”며 말렸다. 윤 대통령은 “22시에 KBS 생방송으로 발표해야 하는데”라며 기다리다 딱 11명이 되자 바로 회의를 시작해 일방적 통보만 하고 끝냈다.

 

▷결국 당시 국무회의는 안건 제안도, 실질적인 심의도, 국무위원 서명이 담긴 회의록도 없는 ‘3무(無)’ 회의였다. 이 전 장관은 계엄 선포 직후 대통령실 부속실 직원에게 “장관 몇 명이 언제 왔다 정도라도 적어 놓으라”고 지시했다. 회의록이 없으면 국무회의 심의를 거친 것으로 볼 수 없어 위헌 위법적 계엄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은 계엄 선포 후 누군가 와서 “서명해 달라”고 했지만 거부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회의가 국무회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한 총리 등에게 “(비상계엄 계획은)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와이프도 모른다. 와이프가 화낼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일명 ‘명태균 녹취록’을 통해 김건희 여사의 전방위적 국정 개입 의혹이 제기된 터다. 김 전 장관 공소장에는 지난해 8월과 10월 윤 대통령이 관저에서 주요 군 지휘관들과 식사하며 계엄을 모의한 정황도 나온다. 김 여사를 보호하고 싶었을까. 왜 “계엄은 정당하다”면서 김 여사가 알면 화낼 것 같다고 했을까.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2-03(월) 尹 “대통령실이 국정 중심”… 그럼 대통령실 중심은?

 

서울구치소에서 지내는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첫 일반인 접견을 하며 발신한 메시지는 “대통령실이 국정의 중심”이라는 것이었다. 면회를 온 정진석 비서실장 등 대통령실 참모들에게 “의기소침하지 말라”며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국회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지난해 12월 14일부터 직무 정지 상태다. 자연히 대통령 비서 조직도 기능이 달라진다. 권한이 중단된 대통령 대신에 국정의 새 중심인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원하는 조직으로 바뀐다. 대통령실은 국정 최고 책임자를 보좌하는 국가기관이기 때문이다.

▷국정의 중심이 대통령실이라는 윤 대통령 발언이 단순 격려인지, 어떤 복선이 깔린 건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윤 대통령이 공수처에 체포되지 않기 위해 경호처를 방패로 동원했듯, 대통령실도 대통령 자신을 위해 복무하는 조직으로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든다. 탄핵소추 이후 변화된 국정 질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심리가 은연중 드러난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대통령실 참모들에게 최상목 권한대행을 잘 보좌하라는 당부를 하는 게 상식에 더 부합한다.

▷일각에선 벌써 한 달을 넘긴 최 대행 체제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용산 참모들은 최 대행이 헌법재판소 재판관 2명을 임명하자 항의성으로 일괄 사표를 내는 등 크고 작은 신경전을 벌여 왔다. 이주호 교육부 장관이 의대 증원 정책에 대해 사과하고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고 한 것에 대해서도 용산에선 불만이 많다고 한다. 이런 기류가 윤 대통령에게도 전달됐고, 윤 대통령이 이번에 작심하고 “대통령실이 국정의 중심” 운운했을 거란 얘기다.

 

▷윤 대통령은 그동안 구속된 뒤에도 변호인 등을 통해 지지층을 향한 메시지를 내왔다. 설 연휴를 앞두고 “국민 여러분 생각이 많이 난다”고 했고 며칠 뒤엔 “이번 계엄이 왜 내란이냐, 어떻게 내란이 될 수 있느냐”고 했다. 이젠 하루 1회 30분씩 일반인 접견까지 허용됐으니 방문 인사들의 입을 빌린 옥중 정치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7년 구속됐을 당시 유영하 변호사만 창구로 두고 말을 아끼며 현실 정치와 거리를 뒀는데, 이와는 많이 다를 것으로 전망된다.

▷요즘 여권에선 윤 대통령 접견을 위해 줄지어 번호표를 뽑고 있다고 한다. 국민의힘 출신 시도지사들과 의원들은 물론 권성동 원내대표,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도 면회를 갈 예정이다. 권 대표는 인간적 도리에 따른 개인적 차원의 방문이라고 하지만 여당 지도부까지 윤 대통령의 접견 정치에 이용될 가능성이 크다. 냉철하게 선을 그어야 할 사람들이 그러질 못하니 윤 대통령의 현실 인식이 다수 국민의 상식과 갈수록 멀어지는 것 같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2-04 트럼프 관세 폭탄 맞은 캐나다 “국산품 쓰자”

 

중동도, 중국도 아닌 캐나다에서 반미(反美) 바람을 타고 국산품을 쓰자는 ‘바이 캐나디안(Buy Canadian)’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캐나다에 25% 관세를 부과하며 관세 전쟁의 포문을 열었고, 연일 ‘51번째 주가 돼라’며 주권을 깡그리 무시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쥐스탱 트뤼도 총리가 말했듯이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부터 한반도 산맥까지 주요 전장에서 (미국과) 생사를 함께한 동맹’이었던 캐나다로선 이런 배신이 없다.

▷‘캐나다인에 의한, 캐나다인을 위한 현명한 소비를 하자.’ 캐나다산 제품 목록을 정리한 웹사이트 ‘메이드 인 캐나다(Made in Canada)’는 이렇게 주장해 호응을 얻고 있다. 마트에는 캐나다산 식료품을 모아둔 매대가 등장했다. 온타리오, 브리티시컬럼비아는 아예 주 정부가 나서 미국산 주류 판매를 중단하기로 했다. 맥도날드, 스타벅스, 코카콜라 같은 미국 상품 불매 운동으로도 번지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평화롭게 살던 캐나다인들이 미국의 괴롭힘을 더는 못 참겠다며 분노하고 있다”고 2일 전했다.

▷캐나다는 세계에서 러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국토가 넓고, 그 땅에는 엄청난 자원이 매장돼 있다. 하지만 캐나다 경제는 미국에 종속된 채 자립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산 자동차의 부품은 만들지만 캐나다산 자동차는 없다. 원유 생산량의 98%는 미국으로 수출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무한 에너지를 갖고 있고, 스스로 자동차를 만들고, 사용할 양보다 많은 목재를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캐나다는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다”고 모욕했다. 캐나다로선 경악할 막말이지만 그만큼 미국 의존도가 높은 것도 사실이다.

 

▷‘바이 캐나디안’으로 관세 충격을 상쇄하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캐나다는 미국의 후방 생산기지로 충분히 먹고살 만했기 때문에 제조업 기반이 허약해졌다. 캐나다산 제품을 사용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는 뜻이다. 식료품, 화장품, 가구는 국산을 쓸 수 있지만 냉장고와 식기세척기는 살 수 없다. 트뤼도 총리는 “주류는 켄터키 버번 대신 캐나다 라이를 사고, 플로리다 오렌지 주스는 먹지 말자”고 했다. 애국심만으로 맛없고 비싼 술과 주스를 계속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다.

▷115년간 자치령이었던 캐나다가 헌법 개정 권한을 영국으로부터 가져와 완전히 독립한 것은 1982년이다. 그 후에는 강대국인 미국 옆에서 평화로운 공존을 택해 왔다. 다양한 이민자가 모여 사는 ‘모자이크 국가’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캐나다라는 국가 정체성이 느슨했던 이유다. 그런데 미국의 일방적인 관세 전쟁이 캐나다인의 애국주의를 깨웠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호형호제’하던 이웃 국가마저 적으로 돌리고 말았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2-05 트럼프 노벨상 추천한 민주당 의원… 뜬금없지 않나

 

국회 본회의장에서 의원들의 휴대전화 문자나 사진, 수첩은 언론사 사진 기자들의 단골 취재 포인트다. 3일 더불어민주당 박선원 의원 역시 수첩 속 메모가 촬영되면서 그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한 사실이 드러났다. “노르웨이 위원회에 제출·접수 완료-미 측 통보(당분간 비공개) (백악관 보고 예정)”이라는 손글씨였다. 조셉 윤 주한 미국대사대리에게 설명됐고, 이재명 대표에게도 보고됐다고 당 대변인이 확인해줬다.

▷박 의원은 “트럼프 대통령 시절 북-미 대화를 통해 한반도 평화 정착의 전기를 만들 단계까지 갔었다”며 추천 배경을 설명했다. 박 의원은 싱가포르, 하노이(베트남)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이 성과를 낸 것을 기정사실로 하고 싶은 듯했다. 그렇잖아도 트럼프는 요즘 김정은과 맺은 친분을 강조하며 모종의 북-미 간 관계 개선을 노리는 형국이다. 박 의원은 문재인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 1차장과 원장 특보를 지내면서 이 과정에 관여한 이력이 있다.

▷박 의원의 생각과 달리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전문가 평가는 대체로 박한 편이다. “역사상 가장 많은, 수백 대의 카메라를 봤느냐”는 트럼프 자랑처럼 그의 이벤트 본능에는 맞았을지 모르지만, 북한 비핵화에는 의미가 없었다. 김정은에게 비핵화 의지가 없다는 점을 확인했다. 김정은은 평북 영변 내 낡은 핵시설에 국한해 폐쇄하는 대가로, 2016년 이후 유엔과 미국의 모든 경제 제재 해제를 반복 요구하다가 빈손으로 돌아갔다. 이후 북한은 문재인 정부를 향해 인용하기 민망한 말폭탄을 쏟아냈는데, 그런 뼈아픈 사정을 가장 잘 알 만한 인물이 박 의원이다.

 

▷칭찬 받기를 즐기는 트럼프의 마음을 사려는 뜻이라면 추천도 생각할 수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정부도 2018년 트럼프를 노벨상 후보로 추천했다. 당시 일본 내에서 “트럼프가 자격이 되느냐”부터 “너무 친미 굴종”이란 비판이 있었는데, 아베 총리는 ‘국익에 도움 된다’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 민주당으로서도 트럼프의 마음을 얻어야 할 절실한 사정이 있다. 윤석열 대통령 1차 탄핵 시도 때 탄핵소추문에 “일본 중심의 기이한 외교 정책을 고수했다”는 표현을 민주당이 썼다가 미국 조야의 비판을 샀다.

▷올 들어 이스라엘-하마스는 휴전을 진행 중이고, 어쩌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멈춰 설 수 있다. 두 전쟁이 종식된다면 트럼프 공로는 부인할 수 없고, 노벨 평화상의 수상 자격을 갖출 수 있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너무나 논쟁적이다. 성추문 입막음 혐의에 대한 유죄평결, 소수자 폄훼, 우방국 정상 조롱 등 국제사회 비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민주당에도 트럼프 행정부와 이익을 나누는 실용적 관계가 필요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 노력이 노벨 평화상 후보 추천으로 시작한다는 것이 왠지 뜬금없게 느껴진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2-06 중동의 ‘화약고’ 가자지구를 ‘휴양지’로 바꿀 수 있을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폭탄 발언으로 ‘세계의 화약고’ 중동이 요동치고 있다. 그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의 정상회담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가자지구를 장악할 것(take over)”이라고 했다. 주민 약 220만 명을 중동의 다른 나라로 영구적으로 이주시키고 미국이 가자지구를 소유(own)해 재건하겠다는 구상이다. 그러면서 “중동의 ‘리비에라(Riviera·프랑스 동남부 지중해 연안의 휴양지)’가 될 것”이라고도 했다.

▷지중해와 맞닿은 가자지구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이후 폐허가 됐다. 난민 수십만 명이 발생했고, 인프라는 완전히 붕괴했다. 트럼프는 이곳을 “지옥 구덩이”라고 부르며 지중해 건너편 프랑스 니스, 마르세유 같은 휴양지로 개발하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원래대로 돌아가면 지난 100년과 똑같은 결과가 나온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린란드, 파나마 운하에 이어 가자지구까지 미국 땅으로 만들겠다니 “21세기 식민주의”라는 반응부터 나온다.

▷그 파격성이 놀랍지만 현실성은 떨어진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동의 다른 나라 정상과 대화했고 그들도 좋아한다”고 한 것과는 달리 이집트·요르단·아랍에미리트(UAE)·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 등 주변 국가는 가자 주민 이주 구상에 일제히 반대했다. 이스라엘과의 합의로 가자지구를 인수할 수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합법적인지, 누가 개발 자금을 대고 어떻게 주민을 이주시킬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도 없다. 미군 파견은 “필요하다면 할 것”이라고 했고, 개발된 가자지구에 누가 살 것인지를 묻자 “세계인”이라고 답했다. 그간 ‘두 국가 해법’을 지지했던 동맹들도 반발한다.

 

▷실현 가능성이 작다 보니 트럼프 대통령의 진짜 의도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반이스라엘’ 연합을 형성하고도 팔레스타인 난민 수용에는 손사래를 치는 이집트나 요르단 등 인접 국가에 대한 압박용, 트럼프 1기 당시 이스라엘과 아랍 4개국 간 체결했던 ‘아브라함 협정’처럼 중동의 질서를 재편하기 위한 협상용 등이 그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북한에도 호텔 개발을 제안했던 터라 우리도 흘려들을 수만은 없는 얘기다.

▷일종의 ‘충격과 공포’ 작전인지, 정말 부동산 사업을 구상했는지 모르겠으나 그의 머릿속에 팔레스타인의 생명과 인권에 대한 존중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당장 국제법을 위반한 강제 이주가 ‘인종 청소’와 다름없다는 비난이 거세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제1차 중동전쟁으로 수천 년을 살았던 고향에서 쫓겨났던 팔레스타인인들이다. 그후 77년간 숱한 테러와 전쟁을 겪으면서도 차마 내 집을 떠날 수 없었던 가자 주민들이 다시 난민으로 떠돌지 모를 처지가 됐다. 그들의 기구하고 슬픈 역사가 오늘 또 한 장 늘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2-07 “개인 정보 새면 어쩌나”… 확산되는 딥시크 금지령

 

설 연휴 중 글로벌 인공지능(AI) 업계에 ‘스푸트니크 쇼크’를 던졌던 중국산 AI ‘딥시크(DeepSeek)-R1’의 충격파가 한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와 군대, 금융업계 등으로 급속히 번지고 있다. 딥시크의 진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챗GPT의 20분의 1이란 저렴한 개발 비용이 사실인지 궁금해하고, 신기해하는 단계는 지났다. 그보다 중국이 똑똑한 AI를 손에 쥐었을 때 다른 나라 국방, 금융 시스템에 닥칠 ‘실존적 위협’을 걱정하는 국면으로 빠르게 전환 중이다.

▷국방부, 외교부, 산업통상자원부, 경찰청 등은 안보·외교·산업 기밀 유출 우려를 이유로 인터넷으로 외부에 연결된 PC의 딥시크 접속을 차단했다. 카카오 등 정보기술(IT) 기업과 한국은행, 시중은행, 증권사들도 개인정보 보호 등을 이유로 금지령을 내렸다. 앞서 대만, 일본 정부는 공공부문 근로자의 사용을 금지했고, 미국 일부 주도 같은 조치를 취했다.

▷딥시크 금지령 확산에는 기업의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는 중국적 현실이 작용한다. 중국의 ‘데이터보안법’은 정부가 필요로 할 경우 기업이 이용자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다른 나라 국민의 개인정보도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 플랫폼 기업들처럼 사용자 취향에 따라 맞춤형 광고를 보내는 데 정보를 쓰는 것과 차원이 다른 위험이다.

 

▷딥시크는 사용자가 키보드를 치는 타이핑 습관까지 분석해 한 PC를 여럿이 쓰더라도 현재 접속한 사람이 누군지 가려낸다. 딥시크는 톈안먼 사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관련한 질문에 ‘묵비권’을 행사하는 중이다. 그런데 한 해외 누리꾼이 언어, 내용을 바꿔가며 집요하게 관련 질문을 했더니 “너는 지난주 120개 언어로 887번이나 물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려는 건가. 그만두라”는 섬뜩한 경고성 대답을 했다고 한다.

▷벌써 120만 명이 넘는 한국인이 딥시크 AI를 쓴다. 약 500만 명이 이용하는 챗GPT에 이어 2위다. 개인 월 구독료가 20달러인 챗GPT와 추론 등에서 성능이 비슷한데 공짜로 쓸 수 있다는 게 사용자 급증의 이유다. 숏폼 콘텐츠를 앞세워 전 세계 청소년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높은 SNS로 자리 잡은 중국계 ‘틱톡’의 약진이 재현될 것이란 평가까지 나온다.

▷국민의 정보 유출 불안감을 고려해 정부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딥시크 중국 본사에 개인정보의 수집·보관 방식을 공식 질의했지만 1주일째 답이 없다고 한다. 설사 딥시크 측이 ‘안심해도 좋다’고 답하더라도 몇 푼 안 되는 가격에 내 전화번호, 주민등록번호가 중국에서 손쉽게 거래된다는 걸 잘 아는 한국인들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긴 어려울 것 같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2-08(토)19개 ‘모두 무죄’ 사과한다면서 ‘법 잘못’ 탓한 이복현

 

검찰 재직 당시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 합병 등 혐의로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을 기소했던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6일 “국민께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이 회장에게 적용한 19개 혐의에 대해 2심에서도 ‘모두 무죄’ 판결이 나오자 고개를 숙인 것이다. 2020년 9월 이 원장의 주도로 검찰이 “판례, 증거관계, 사안의 중대성” 등을 강조하며 기소를 밀어붙인 지 3년 반 만이다. 그런데 발언의 내용을 짚어 보면 뒷맛이 개운치 않다.

▷먼저 뭘 사과한다는 것인지 모호하다. 이 원장이 사과한 직접적인 대상은 “국민”과 “공판업무를 수행해 준 후배 법조인들”이었다. 정작 본인이 기소한 사건으로 100차례 넘게 공판에 출석하며 고통을 겪은 이 회장과 피해를 당한 삼성그룹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또 자신이 “기소 결정을 하고 논리를 만들고 근거를 작성”했는데 “법원을 설득할 만큼 단단히 준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과한다”고 했다. 기소가 잘못됐다기보단 탄탄하게 기소하지 못한 게 문제라는 취지로 들린다. 과연 그런가.

▷검찰에서 이 사건을 수사할 당시 무리한 수사라는 지적이 나온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삼성 계열사 등을 50여 차례 압수수색하고 관련자 110여 명을 조사하는 등 저인망식 수사를 펼쳤는데도 이 회장을 비롯한 삼성 경영진에 대한 구속영장은 줄줄이 기각됐다. 검찰수사심의위원회에서 10 대 3의 압도적 의견으로 수사 중단과 불기소를 권고했을 때라도 받아들였어야 했지만 거부하고 기소를 강행했다. 결국 재판에서는 단 하나의 혐의도 인정되지 않았다. 이 과정에 대한 이 원장의 사과는 없었다.

 

▷나아가 이 원장은 “사법부가 법 문헌 해석만으로는 주주 보호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며 법률 개정을 주문했다. 법의 미비, 법원의 소극적 해석으로 유죄 판결을 받지 못했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지만 핑계로 비칠 뿐이다. 법률이 어떻게 돼 있든 검사는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사안만 기소해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 사건에서 검찰이 압수한 디지털 자료들이 적법 절차를 지키지 않아 증거능력을 인정받지 못했고, 그럼에도 항소심 재판부는 핵심 증거 229개를 살펴본 뒤 무죄라고 결론 내렸다. 검찰의 수사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는 얘기 아닌가. 법률 탓, 법원 탓으로 돌릴 계제가 아니다.

▷이 회장이 사법 리스크에 발이 묶인 9년간 삼성의 글로벌 이미지는 실추되고 경쟁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기업에 국한된 게 아니라 국가 경제 전체에 타격을 준 일이다. 검찰의 수사팀장이었던 이 원장이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데도 사과인지, 변명인지 모를 발언을 내놓는 걸 보니 책임의 무게를 느끼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2-10(월) 8년 전처럼 탄핵정국 틈탄 식품가격 줄인상

 

새해 들어서도 “장보기가 겁난다”, “월급 빼고 다 오른다”는 말이 괜한 엄살이 아니다. 연초부터 과자, 빵, 아이스크림, 커피, 햄버거, 컵밥까지 뭐 하나 안 오른 게 없어서다. 올 들어 불과 한 달 남짓 동안 가격을 이미 올렸거나 인상을 예고한 식품기업이 열 손가락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롯데웰푸드·빙그레 같은 제과·빙과업체부터 오뚜기·대상 등 식품 제조업체, 파리바게뜨·버거킹 등 프랜차이즈, 스타벅스·폴바셋 등 커피 브랜드까지 품목을 가리지 않는다.

▷기업들이 내세우는 가격 인상의 배경은 원재료 비용 급등이다. 세계적인 이상 기후에 트럼프발 ‘관세 폭탄’ 화염까지 옮겨붙으면서 국제 농산물 가격이 치솟고 있는 건 사실이다. 커피 원두 가격은 브라질과 베트남이 극심한 폭염과 가뭄에 시달린 탓에 자고 일어나면 최고가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초콜릿 원재료인 코코아는 지난해에만 170% 넘게 급등해 “비트코인보다 더 올랐다”는 평가를 받는다. 수입 대두, 밀 가격도 들썩이고 있다. 여기에 원-달러 환율마저 1400원대가 뉴노멀이 되면서 기업의 비용 부담은 더 커졌다.

▷하지만 계엄·탄핵 정국의 혼란한 틈을 타 식품업계가 무더기로 가격 인상에 나섰다는 곱지 않은 시선이 쏟아지고 있다. 그동안 정부 눈치를 보느라 인상을 망설였던 기업들이 국정 공백이 두 달 넘게 이어지는 상황을 틈타 기습적으로 가격을 올렸다는 것이다. 지난해만 해도 농림축산식품부는 식품기업들을 수시로 소집해 가격 동결을 압박했고, 공정거래위원회는 제품 용량을 줄여 꼼수로 가격을 올리는 ‘슈링크플레이션’에 대해 과태료를 물리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그런데 올 들어서는 먹거리 가격 인상을 통제하려는 정부의 움직임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지난해 12월 일부 식품기업이 가격을 인상했지만 어려운 국내 여건과 소비자 물가 부담 등을 고려해 식품업계의 가격 인상은 당분간 없을 것으로 파악된다”는 게 1월 초 내놓은 농식품부의 보도자료다. 이러니 정부의 ‘물가 컨트롤타워’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의구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도 식품업체들의 가격 인상 릴레이가 이어진 바 있다. 당시에도 맥주, 커피, 라면, 치킨, 햄버거 등 품목을 가리지 않았다. 이 여파로 박 전 대통령 탄핵 시기인 2016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농축수산물 소비자물가는 예년의 두 배 수준인 7.5% 뛰었다. 민간 기업에 밑지면서 장사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만, 요즘 같은 내우외환의 경제 위기 상황에서 기업들도 고물가를 부추기는 가격 인상을 가급적 자제하는 게 옳다. 먼저 뼈를 깎는 원가 절감 노력을 기울이고, 하다 하다 안 될 때 가격을 올리는 것이 소비자들에 대한 예의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2-11 尹측 “지시대명사로 안 쓴다는 뜻”… 문법시험인가

 

가뜩이나 문해력이 떨어지는 요즘인데 윤석열 대통령의 말을 이해하려면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한다. 12·3 비상계엄 선포 당시 “국회 문을 부수고 들어가 OO들을 밖으로 끄집어내라”는 윤 대통령의 지시를 두고 온 국민이 국어 문법 시험을 치르고 있다. 먼저 OO 빈칸에 들어갈 목적어를 찾아보자. 그날 밤을 지켜봤다면 ‘OO’이 무엇이든 ‘의원’을 가리킨다고 추론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윤 대통령 측은 보기를 교묘히 꼬아 오답을 유도한다.

▷먼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은 “요원”이라고 했다. “인원”이라는 곽종근 전 특수전사령관의 증언에 대해선 윤 대통령이 직접 “사람이라는 표현을 놔두고, 또 의원이면 의원이지 인원이란 말은 써본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증언의 신빙성을 흔들려는 의도일 것이다. 이렇게 주장한 탄핵심판 변론에서 윤 대통령은 인원이란 단어를 세 차례나 사용했다. 인원을 언급한 다수의 과거 발언도 재조명됐다. 그러자 윤 대통령 측 석동현 변호사가 “윤 대통령이 ‘인원이란 말을 안 쓴다’고 진술한 의미는 이 사람, 저 사람 등 지시대명사로 이 인원, 또는 저 인원이란 표현을 안 쓴다는 뜻”이라고 옹호했다.

▷석 변호사는 헷갈릴까 봐 예문을 제시했다. 윤 대통령이 ‘인원수가 얼마냐’ ‘불필요한 인원은 줄여라’ ‘인원만큼 주문해’ 등에선 인원이란 단어를 쓴다고 했다. 보통명사, 즉 단체를 이룬 사람들이나 그 수를 가리키는 본래 의미로는 사용한단 뜻이다. 하지만 ‘이 인원은 싫어’ ‘저 인원이 오면 나는 안 갈래’처럼 사람을 지칭하는 지시대명사로는 쓴 적이 없다고 했다. 윤 대통령의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OOO 쪽팔려서 어떡하나’ 발언을 두고 바이든인지, 날리면인지를 맞히던 국어 듣기평가 못지않게 난도가 높다.

 

▷윤 대통령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방어한 듯하지만 그야말로 엉뚱한 소리다. ‘인원’은 쓰임을 달리해 쓰려야 쓸 수가 없다. ‘인원’은 보통명사다. 원래 대명사로 쓰일 수 없다. 설령 대명사로 쓰더라도 ‘이것’ ‘여기’처럼 사물, 장소를 가리키는 지시대명사는 될 수가 없다. 계엄령을 계몽령으로, 내란을 소란이라고 해서 국어사전을 펴게 하더니 문법도 다시 공부할 판이다. “평화적 계엄” “경고용 계엄” “계엄 형식을 빌린 호소” 등 뜨거운 아이스커피 같은 모순된 단어로 위헌, 위법이라는 계엄의 본질을 희석하려는 시도의 연장선일 뿐이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두 달이 넘었다. 그간 윤 대통령과 변호인들이 현란한 법기술로 계엄 사태의 본질을 흐리려는 것을 지켜봤다. 이제는 국어 문법을 비틀어가면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그런 변명을 옮겨 적는 것만으로도 참담한 심정이다. 언제까지 이런 모습을 보일 것인가.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2-12 대선에서 尹 찍은 유권자들의 뚜렷한 분화

 

2022년 3·9 대선 때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48.6%를 얻어 당선됐다. 1639만 표로 역대 최다 득표였다. 3년이 흐른 지금 이들은 12·3 비상계엄과 탄핵을 어떻게 여길까. 최근 지방을 돌며 열리고 있는 탄핵 반대 집회는 윤 대통령을 찍었던 이들의 여론을 얼마나 대표하고 있는 걸까. 중견 정치학자 싱크탱크인 동아시아연구원(EAI)이 10일 공개한 ‘2025년 양극화 인식 조사’는 이런 의문에 답을 찾는 시도였다.

▷웹 조사에 응답한 1514명은 자신을 강성 보수(9.6%), 온건 보수(17.2%), 중도(46.4%), 온건 진보(17.2%), 강성 진보(9.6%)라고 밝혔다. 국민의힘 지지자가 27.3%였고,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는 31.0%였다. 최근 전화 여론조사 때 나타나는 정당 지지율 차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눈길을 끄는 것은 3년 전 윤 후보를 찍었다고 답한 450명의 정치적 분화다. 450명 중 “나는 강성 보수”라고 답한 응답자는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여전히 강했다. 대통령 호감도를 점수(0∼100점)로 매겼더니, 강성 보수의 평균은 78.5점이었다. 그러나 온건 보수는 중간값(50점)을 조금 웃도는 54.2점, 중도 가운데 윤 후보를 찍었던 이들을 뜻하는 중도 보수는 34.9점이었다.

▷윤 대통령이 주장하는 야당의 국정 비협조, 안보·사회질서 회복 등 계엄 명분에 대한 평가도 크게 엇갈렸다. 강성 보수는 야당의 발목 잡기(10점 만점에 8.6점), 안보와 질서 유지(7.9점)라는 계엄 사유에 비교적 수긍했다. 하지만 중도 보수의 동의 수준은 매우 낮았다. 발목 잡기는 5.1점, 안보·질서 유지는 3.8점에 그쳤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부정선거 의혹에 대한 인식 차이도 뚜렷했다. 지난 대선의 공정성에 대해 4점 척도로 물은 결과, 강성 보수는 3.06점으로 불공정하다는 인식이 강한 반면 중도 보수는 2.35점으로 낮았다. 윤 대통령을 찍었던 유권자들의 분화(分化) 양상을 보여준다.

 

▷최근 탄핵 반대 집회 등을 통해 강성 보수의 목소리가 더 부각되고 있지만 중도의 목소리는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는 게 EAI의 분석이다. 이는 강성 보수의 정치 효능감에 대한 인식이 높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나는 사회의 중요한 정치적 문제를 잘 안다”는 항목(1∼5점)에서는 강성 보수(4.4점)가 중도 보수(3.7점)보다 점수가 높았다.

▷이번 EAI 조사는 응답자 1514명 가운데 강성 보수(125명)의 적극성과 대조되는 중도 보수(247명)의 소극적 태도를 조명하고 있다. 서울대 강원택 교수는 “계엄 불가피성 인정이나 탄핵 반대 목소리는 강경파의 의견으로, 온건 또는 중도 보수의 생각은 다르다”고 분석했다. 목소리는 높지 않지만 ‘침묵하는 중도’의 민심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인 셈이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2-13 백악관 “현대제철을 보라”… 관세 홍보에 거론된 韓 기업들

 

“관세의 효과가 뭐냐고? 한국의 현대제철을 보라.” 미국 백악관이 ‘철강·알루미늄 25% 관세 부과’의 당위성을 설명하며 현대제철을 예로 들었다. 11일 백악관은 보도 참고자료에서 “도널드 트럼프 1기 때 철강·알루미늄 관세로 미국 전역에서 투자 붐이 일어났다”며 “최근엔 현대제철이 미국에 제철소 건설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는 발표가 있었다”고 했다. 백악관은 2일에도 설명자료를 내고 현대차, 현대제철, 삼성전자, LG전자 등의 미국 투자 사례를 언급했다.

▷백악관이 한국 기업들을 홍보에 동원한 것은 관세가 미국 경제와 소비자들에게 타격을 줄 것이란 비판에 반박하기 위해서다. “관세가 미국 내 생산을 늘리고 더 많은 일자리를 가져올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압박작전이기도 하다. 2017년 2월 트럼프 대통령은 ‘삼성이 미국에 가전공장을 세울 것’이라는 미국 현지 보도가 나오자 즉각 트위터에 “생큐 삼성”이라고 올렸다. 투자가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기정사실화한 것이다. 결국 4개월 뒤 삼성전자는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철강 관세 폭풍에 국내 철강업계는 비상이 걸린 상태다. 가뜩이나 건설 경기 침체와 중국산 철강재의 저가 공세로 실적이 부진한 때여서 충격이 더 크다. 지금까진 한국산 철강 제품이 미국산보다 20%가량 저렴했는데, 관세가 부과되면 오히려 더 비싸져 가격경쟁력을 잃게 된다. 철강사들은 관세를 피하기 위해 미국 현지 투자를 고민하고 있다. 현대제철은 10조 원가량을 투자해 미국 남부에 자동차용 강판을 생산하는 제철소를 지을 예정이다. 포스코 역시 현지 합작 법인 설립, 제철소 인수 등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무관세 효과만 노리고 미국 내에 제철소를 세우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실적이 좋지 않은 상황에 수조 원의 막대한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것부터 부담이다. 기업들이 국내 생산시설을 해외로 이전하면 국내 생산이 감소해 일자리가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도 무시할 수 없다. 기껏 현지 생산을 늘려도 US스틸이 미국 정부의 지원과 일본의 투자에 힘입어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을 확대하면 미국에서 한국산 철강의 입지는 더 좁아진다.

▷관세 폭풍이 거세지만 한국은 이미 슬기롭게 극복해 본 경험이 있다. 트럼프 1기 당시 기민한 외교전을 통해 철강 수입 쿼터제를 수용하는 대신 무관세 혜택을 얻는 데 성공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기 때 한국산 세탁기에 고율 관세를 부과한 것을 성공 사례로 들고 있지만, 사실 최후의 승자는 현지 생산을 늘리고 품질로 미국 소비자를 사로잡은 한국 가전이었다. 이번 미국의 공세에도 움츠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여전히 틈새는 있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2.14 유력 주자 행사에 몰려간 與 의원들… 마음은 이미 대선에?

 

12일 국회에서 개헌 토론회가 열렸다. 국회의원이나 정당이 아닌 서울시가 공동 주최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줄일 방법으로 외교와 국방 이외의 대통령 권한을 대폭 지방자치단체에 넘기자는 제안이 나왔다. 참석자들은 개회사를 위해 참석한 오세훈 서울시장의 개헌 구상으로 여겼을 것이다. 국민의힘에서는 권영세 비대위원장, 권성동 원내대표는 물론 현역 의원이 108명 가운데 40명 넘게 모였다.

▷정책 토론회답지 않게 일부 참석자들은 오 시장의 이름을 연호하고 박수를 치기도 했다. 김기현 의원은 “(지지자 여러분) 목소리와 박수에 뜻이 담겨 있지요. 저는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오 시장의 대선 출마 의지를 이심전심으로 알지 않느냐는 말로 들렸다. 이날 누구도 대통령 선거가 있을 거라고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오 시장도 행사장 밖에서 출마 연관성을 묻는 질문에 “조기 대선은 헌법재판소가 결론을 낸 다음에 논의해도 늦지 않다”고 답했다.

▷이번 토론회는 옴짝달싹하기 힘든 국민의힘의 처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권 비대위원장은 2주 전 “조기 대선을 전제로 하는 여론조사는 잘못으로, 중단하는 게 옳다”고 공개 요청을 했다. 국회의 탄핵소추 직후와 달리 국민의힘 강성 지지층이 주도하는 탄핵 반대집회가 이어지는 가운데 국민의힘은 계엄 전 지지율을 회복했다. 헌법재판소의 심리가 마무리돼 가는 현실과는 무관하게, 당으로선 지지층을 자극할 행동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의원들은 여전히 “탄핵 기각”을 외치고 있다.

 

▷이날 행사를 꼬집은 것은 홍준표 대구시장이었다. 그는 SNS에 “여의도 정치판에 의리가 사라진 지 오래”라고 썼다. 한남동 관저 앞에서 시위하던 의원 몇몇까지 유력한 잠재후보 행사에 눈도장 찍듯 참석했다며 비꼰 것이다. 하지만 홍 시장 역시 비슷한 행보를 한 적이 있다. 지난해 12월 말 “대구시장을 4년만 하고 졸업할 생각이었는데, 그게 더 빨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 이사 가야 한다는 생각에 뒤숭숭하다”는 글을 남겼다. 대통령 지지율이 10%대까지 떨어진 시점에 대선 출마 가능성을 누구보다 먼저 밝힌 것으로 해석됐다.

▷이재명 대표가 3년 넘게 당을 이끌어 온 더불어민주당과 달리 국민의힘에선 다른 후보들을 압도할 만한 후보가 없다. 오세훈 홍준표 이외에 김문수 한동훈을 포함하는 다수의 후보가 경쟁할 것으로 예상될 뿐이다. 오 시장도 탄핵심판 중에 ‘출마 시 내놓을 개헌 공약’처럼 비치는 개헌안을 놓고 토론회를 여는 것에 부담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오 시장도 40명 넘는 현역 의원이 모인 것에 놀랐을지 모르겠다. 이날 토론회는 대통령에 대한 ‘의리’와 엄존하는 조기 대선 가능성이라는 ‘현실’이 맞붙은 자리였다. 의리보다는 현실의 힘이 더 셌던 것 같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2-15(토) ‘500명 수거해 처리’

 

‘노상원 수첩’은 내란 혐의로 구속 기소된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점집에서 경찰이 확보한 약 70쪽짜리 메모장이다. 그는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불러준 내용을 받아 적은 것”이라고 진술했는데 국립과학수사연구원 필적 감정에서는 ‘감정 불능’ 판정이 나왔다. 누가 썼는지는 수사 중이지만 일부 언론이 입수해 보도한 수첩 속 비상계엄 계획은 충격적이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체포자 명단. 수첩에는 계엄 선포 10일 차까지 체포 대상자를 ‘수거’해 ‘수집소’로 보낸다는 내용이 나온다. 체포 대상은 “여의도 30∼50명 수거” “언론 쪽 100∼200(명)” 등 “500여 명 수집”으로 적혀 있다. 이 중 A급은 문재인, 이재명, 유시민, 권순일, 김명수, 조국, 민노총 등이다. 검찰 조사 결과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김 전 장관에게서 넘겨받았다는 ‘체포자 명단 16명’과 비교하면 ‘한동훈’이 빠지고 ‘이준석’이 들어가 있다. 이재명 대표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판사, 조국 전 장관을 위해 탄원서를 쓴 축구대표팀 감독 차범근 씨도 ‘수거’ 대상이다.

▷“A급 수거 대상 처리 방안”은 살벌하다. ‘수집소’는 “강원도 화천, 양구, 울릉도, 마라도, 전방 민통선 쪽”이고, “확인 사살 필요” “막사 내 잠자리 폭발물 사용” 등의 메모로 보아 ‘처리’는 ‘살해’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내국인 사용 시 수사를 피하기 어렵다”는 문장과 함께 “외국 중국 용역업체” “북한과의 접촉 방법” “무엇을 내어줄 것이고 접촉 시 보안 대책은”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다. 수거 대상자들을 제거하려 ‘북풍’ 공작을 검토한 흔적들이다.

 

▷메모 작성 시기는 지난해 4월 총선 이전으로 짐작된다. 수첩 첫 장에 “총선 후 입법으로 집행하는 건 쉽지 않다. 실행 후 싹을 제거해 근원을 없앤다”는 문장이 있다. “여의도 봉쇄” “역행사에 대비해야 한다” “민주당 쪽” “9사단과 30사단” 등의 문구로 보아 국회의 계엄 해제 결의를 무력으로 진압하려는 계획도 세웠던 듯하다. “행사 후속 조치 사항”으로 “헌법, 법 개정” “3선 집권 구상 방안” “후계자는?”이 나온다. 메모 작성자 머릿속엔 ‘경고성 계엄’이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의 장기 집권용 비상계엄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수첩 속 메모는 휘갈겨 쓴 필체라 동일인이 썼는지 확인하기 어렵다는 게 필적 감정 결과다. 검찰은 메모 내용이 파편적이어서 해석의 여지가 있고, 수첩 주인이 작성 경위에 대해 입을 닫고 있다며 그의 공소장에 수첩 내용은 담지 않았다. 하지만 허튼 망상이라고 덮고 넘기기엔 체포 명단 작성과 국회 표결 무력화 등 실제 시도한 대목이 적지 않다. 누구 지시로 작성한 것일까. 유혈 친위 쿠데타 모의의 흔적이 ‘계엄의 설계도’였는지 규명할 필요가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2-17(월) 교육감 출마하며 “조국 딸 못 지켜 미안하다”는 전 부산대 총장

 

오는 4월 2일 하윤수 전 교육감이 당선무효형을 받아 치러지는 부산시교육감 재선거를 앞두고 뜻밖에 조국 입시 비리 사태가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예비후보로 등록한 진보 성향의 차정인 전 부산대 총장이 최근 기자회견을 열어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 딸 조민 씨에게 공개 사과하면서다. 차 후보가 총장이던 2021년 부산대는 위조된 표창장과 허위 인턴십 확인서를 의학전문대학원 입시에 활용한 조 씨의 입학을 취소했다.

▷차 후보는 이날 회견에서 “당시 수사가 정치 검찰의 표적 수사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며 “총장이 학생을 지키지 못한 엄연한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그는 “(정경심 교수) 1심 판결 후 국민의힘에서 거세게 공격하고 교육부가 공문을 보내 입학 취소를 요구했지만 응하지 않았다”면서 “사실심의 최종심인 항소심 판결이 난 이후에야 입학 취소 예정 처분을,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후에야 입학 취소를 결정했다”고 강조했다.

▷차 후보의 난데없는 사과 회견은 같은 진보 진영의 경쟁 후보와 단일화가 무산된 후 진보층의 지지를 결집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차 후보가 출마하자 진보 진영에서는 ‘당시 총장이 직권으로 조민 씨 입학 취소를 막을 수 있지 않았나’라는 말이 나왔다. 차 후보는 이에 대해 “부산대 입학 요강에는 허위 서류를 제출하면 불합격 처리한다고 명시돼 있었고, 허위 여부는 법원 판결로 결정되기 때문에 총장에게 재량권은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조민 씨의 허위 서류가 합격에 영향이 없었음을 공개한 사실을 언급하며 “학생의 억울한 점을 밝히는 데도 최선을 다했다”고 덧붙였다.

 

▷조민 씨 입시 비리 사건은 입시제도의 신뢰 기반을 흔들어놓은 사건이다. 조 씨가 입시에 활용한 ‘7대 스펙’은 대법원에서 모두 허위로 판명됐다. 이 일로 조 씨의 부모가 모두 실형을 살았거나 살고 있다. 차 후보는 검사 출신으로 민변 변호사와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지냈다. 법조인이자 교육자 출신이 부산 초중고교 교육을 책임지겠다며 나선 자리에서 부정입학생을 억울한 정치적 피해자인 양 감싸다니 자격 미달 아닌가.

▷교육감 선거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 정당 개입을 금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치열한 진영 대결로 치러진다. 특히 이번 선거는 지금까지 등록한 예비후보만 6명이다. 후보가 난립할수록 진영 내 후보 단일화가 승리에 결정적이다 보니 공약 경쟁은커녕 엉뚱한 사람에게 사과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2022년 당선된 시도교육감 17명 중 서울(조희연)과 부산 교육감 2명이 대법원 판결로 불명예 퇴진했고 3명이 재판을 받고 있다. 여러모로 교육적이지 않은 교육감 선거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2-18 그날 밤 국회 단전

 

군이 야간에 건물을 장악하려 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조치가 단전이다. 상대의 대응 능력을 떨어뜨리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앞이 깜깜해지고 엘리베이터나 전자식 출입문이 작동을 멈추면 내부 인원들은 당장 이동이 어려워진다. 통신까지 먹통이 된 채로 어둠에 갇힌 사람들은 혼란과 두려움에 빠져 침착하고 조직적인 대응을 하기 힘들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직후인 지난해 12월 4일 새벽에도 계엄군에 의한 국회 단전이 이뤄졌다. 그날 밤 곽종근 전 특전사령관은 국회 현장을 지휘하던 김현태 707특임단장에게 전기 차단이 가능한지를 물으며 “150명이 넘으면 안 된다고 하는데 들어갈 수 없겠느냐”고 사정하듯 얘기했다고 한다. 국회가 계엄 해제를 의결하기 10분 전인 0시 50분경의 일이다. 의원들이 본회의장으로 속속 모여들어 의결 정족수 150명을 채워가던 때였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최근 공개한 국회 본관 폐쇄회로(CC)TV 영상을 보면 계엄군이 2층 창문을 깨고 본관에 진입한 게 0시 32분이다. 그 후 18분 뒤 곽 전 사령관의 단전 지시가 있었다. 군인들은 본회의장이 있는 2층을 배회하다 국회 직원들에게 가로막히자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이때가 오전 1시 1분. 계엄 해제안이 통과되던 바로 그 시각이다. 그로부터 5분 뒤 군인들은 지하 1층 전력 차단기를 내렸다. 지하 1층 일부 구역이 5분 넘게 암흑에 잠겼다.

 

▷그날 계엄 해제 표결은 전자투표로 진행됐다. 전력이 끊기면 투표 시스템도 멈춘다. 만약 계엄군이 투표 완료 전 본회의장 전력을 통제하는 2층 분전함을 찾아냈다면 표결은 중단됐을 수 있다. 수기 투표로 전환하더라도 어둠 속에서 신속히 진행되긴 어려웠을 것이다. 지하 1층 단전이라고 해서 표결과 무관했던 건 아니다. 당시 의원들 상당수가 의원회관과 국회 본관을 연결하는 지하 1층을 통해 본회의장으로 왔다. 계엄군이 조금만 일찍 해당 연결 통로에 설치된 방화셔터를 내린 뒤 전력을 차단해 못 열게 했다면 의결 정족수를 못 채웠을 가능성이 있다.

▷“국회 기능을 마비시키려 했다면 단전 단수부터 했을 텐데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던 윤 대통령 측은 단전 사실이 드러나자 “곽 전 사령관이 한 것”이라고 한다. 곽 전 사령관이 “(전기 차단은) 제가 지시한 것”이라고 헌법재판소에 증언한 건 맞다. 하지만 그는 부하에게 단전 지시를 하기 20분 전쯤 윤 대통령으로부터 “아직 의결 정족수가 안 채워진 것 같다. 빨리 문을 부수고 들어가 안에 있는 인원을 끄집어내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했다. 단전은 의원들을 끌어내란 대통령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취한 기본적인 조치에 해당하는 셈이다. 윤 대통령이 “내가 단전을 지시한 건 아니다”란 말로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2-19 젤렌스키는 빠진 트럼프-푸틴의 종전 협상

 

전쟁 발발 3년을 앞두고 막 출범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협상이 묘한 구도로 흐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12일 전화 정상회담을 갖고 “종전협상 즉각 개시”에 합의했다. 18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양국 협상단이 처음 마주 앉았다. 하지만 침략당한 우크라이나는 배제됐다. “우크라이나와 협상하지 않겠다”는 푸틴의 말을 트럼프가 일단 들어준 결과다. 핵무장 강대국에 침공당한 우크라이나는 어쩌면 앞으로 더 가혹한 운명을 맞을 수도 있다.

▷트럼프는 평화도 돈으로 환산한다. 우크라이나에 종전 후 재건투자기금으로 5000억 달러, 우리 돈 720조 원을 요구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통상, 전쟁에서 진 나라는 배상금을 문다.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도 배상금을 물었는데, 가혹한 배상액 때문에 나치당의 등장에 빌미를 줄 정도였다. 그런데 우크라이나는 침략당한 당사국인데 막대한 돈을 요구받고 있다. 달러가 없으니 흑연, 리튬 등 희토류와 석유를 현물로 내거나 항만 이용권을 내줘야 할 판이다.

▷트럼프 정부가 쓴 협정서 초안에는 미국이 자원 채굴에 따른 수익금 50%를 갖도록 돼 있다. 조 바이든 정부가 5차례에 걸쳐 부담한 전쟁지원금은 약 250조 원 규모다. 일부는 무상 원조였지만, 상당액은 미국의 ‘무기대여법’에 따른 무기 공여로 훗날 우크라이나가 갚아야 하는 것이었다. 트럼프가 “왜 우리 도로를 지을 돈을 유럽에 퍼붓냐”고 말했지만, 전액 다 무상 지원은 아니었던 것이다. 요즘 트럼프 내각 장관들은 “우크라이나 희토류의 50%를 미국에 준다면 미군이 장기 주둔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돈이 된다면, 트럼프는 고립주의적 정책도 언제든 바꿀 것 같다.

 

▷우크라이나가 원하는 건 나토 가입을 통한 안전보장 확보와 실지(失地) 회복이다. 그러나 둘 다 쉽지 않은 목표다. 나토는 한 가입국이 군사 공격을 받으면 모든 회원국이 함께 대응하는 만큼 우크라이나로선 이만한 안전보장책이 없다. 하지만 러시아로선 서쪽 국경에 접한 우크라이나가 나토의 일원이 되는 것에 결사반대하고 있다. 또 우크라이나는 2014년에 점령당한 크림반도와 2022년 이후 뺏긴 돈바스 지역을 돌려받기를 바라고 있지만, “원래 우리 땅”이라며 전쟁을 시작한 푸틴에게 돌려받는 일은 쉽지 않다.

▷유럽 7개국 정상이 17일 프랑스 파리에 긴급히 모였다. 영국 프랑스 독일은 “종전 이후에도 미국이 아닌 유럽만의 평화유지군을 우크라이나에 두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국내 사정이 제각각 달라 성사 여부는 알 수 없다. 결국 3년을 돌이켜 보면 힘없는 우크라이나만 짓밟히고, 배제됐다. 트럼프가 내세운 ‘취임 직후 종전’은 기대가 컸지만, 미국의 이익보다 약소국의 자주권을 더 챙겨줄 것이란 기대가 너무 순진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2-20 “보수 정권 역사 이래 최다석을 얻을 거라 했어요”

김건희 여사가 지난해 4·10총선 때도 경남 창원 의창 공천에 개입하려 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명태균 씨 변호인이 17일 공개한 입장문 ‘김건희와 마지막 텔레그램 통화 48분’에 나오는 내용이다. 김 여사가 윤석열 대통령 검찰총장 시절 ‘조국 수사’에 참여한 김상민 검사(47)를 도와달라 했다는 것이다. 이곳은 검찰이 대통령 부부의 2022년 보궐선거 공천 개입 의혹을 수사 중인 지역구다. 명 씨 측은 녹취록을 따로 공개하지 않았고 국민의힘은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부인했다.

▷명 씨가 지난해 2월 16∼19일 5, 6회의 통화 내용을 복기한 기록에 따르면 김 여사는 “선생님, 김상민 검사 조국 수사 때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의창구 국회의원 되게 도와주세요”라고 했다. 김 검사는 현직 검사 신분으로 출마를 강행해 논란이 된 인물이다. 2023년 추석 무렵 “지역사회에 큰 희망을 드리겠다”는 ‘명절 문자’를 지역 주민들에게 보냈다가 ‘경고’ 처분을 받았다. 경선에서 떨어진 뒤엔 국가정보원 법률특보(차관보급)로 기용됐다.

▷김 여사는 김영선 당시 현역 의원에 대해서는 “어차피 컷오프라면서요”라고 배제했다. 또 다른 예비 후보에 대해서는 “문재인 정부 부역자”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명 씨는 “평생 검사만 하다 지역도 모르는 사람을 공천하면 총선에서 진다”며 반대했다. 명 씨는 당시 “5선 의원이 떨어지면 조롱거리가 된다”며 세비 절반을 떼주던 김 전 의원을 밀고 있었다. 마지막 통화는 “김상민이 내려 꽂으면 전 가만히 안 있을 겁니다”로 끝난다. 둘 사이가 틀어진 계기가 공천 문제였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김 여사는 당시 총선 결과를 낙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명 씨가 “이 추세로 가면 110석을 넘지 못합니다”라고 하자 “아니에요. 보수 정권 역사 이래 최다석을 얻을 거라 했어요” “이철규, 윤한홍 의원이 그랬어요” 했다는 것이다. 보수 정권 역대 최대 의석은 2008년 총선 당시 153석이었다. 결과는 역대 두 번째로 적은 108석이었다. 통화가 이뤄진 시기는 명품백 논란으로 2월 18∼24일로 잡혔던 독일 국빈 방문과 덴마크 공식 방문 일정까지 연기할 정도로 총선 여론이 좋지 않을 때였다.

▷지난 총선은 ‘김 여사 리스크’로 시작해 ‘대파 논란’으로 끝난 선거였다. 일반 여론도 ‘대통령실 책임론’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대승 전망과 대패 결과 사이에서 윤 대통령은 부정선거론의 길로 빠져들었고 이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게 된 주요 원인”이 됐다. 김 여사는 계엄 전후 조태용 국정원장과도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서울중앙지검이 넘겨받은 명 씨와 대통령 부부 사건을 수사하다 보면 계엄의 전말을 보여줄 퍼즐 조각을 찾게 될지 모른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2-21 뺄수록 더 눈에 띄는 한동훈의 21년 검사 이력

곧 정치 일선에 복귀할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가 책(‘한동훈의 선택―국민이 먼저입니다’)을 26일 출간한다. 지난해 12·3 비상계엄 직후 자신이 ‘불법 계엄 반대’를 선언한 순간부터 대통령 탄핵 소추 이후 대표직에서 사퇴할 때까지 12일간 300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한 전 대표가 계엄 직후 경찰에게 국회 출입을 제지당하자 “정말 이럴 거냐”고 설득해 경내로 들어간 일 등이 담겨 있다고 한다.

▷한 전 대표는 이 책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결정을 대단히 비판적으로 다뤘다. 평소라면 비공개했을 만한 대통령 발언이 다수 실렸다는 게 책 내용을 아는 이들의 설명이다. “한동훈의 계엄 반대는 성급했다”는 당내 친윤 그룹과 일전을 각오한 듯하다. 대표적인 것이 계엄 이튿날 윤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할 수 있는데도 안 했다”고 한 말이다. 헌법상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권이 없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없는 주장으로, 한 대표는 “황당한 발상”이라고 썼다.

▷한 전 대표는 정치인 체포 시도에 대해서도 상세히 다뤘다. 그는 계엄의 밤에 누군가로부터 “체포되면 죽을 수 있다. 은신처로 숨어라. 추적 안 되게 휴대폰도 꺼놔라”는 전화를 받았다. 이튿날 대통령에게 따져 물었는데, 대통령은 “전혀 그런 일이 없다. 체포하려면 방첩사를 동원했을 텐데, 계엄에 방첩사는 동원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제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에 비춰 보면 대통령은 거짓을 말했다. 12월 4일이란 초기 시점엔 방첩사의 깊고 넓은 개입이 드러나 있지 않았을 뿐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온라인 서점에 공개된 저자 소개다. 사법연수원 및 공군 법무관 생활은 적어놓았지만, 21년 동안의 검찰 생활이 빠졌다. 법무부 장관, 여당 비대위원장과 당 대표 경력은 있었다. 정치인이 됐지만, 세상은 한동훈을 ‘천하제일검’이란 별명과 함께 검사로 기억하곤 한다. 한 전 대표는 “내 인생의 화양연화는 문재인 정부 초기”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당시 수사 대상이 전직 대통령 등 거의 모두가 범보수 인사들이고, ‘나올 때까지 파는 식’의 수사 방식을 놓고 많은 비판이 있었다. 여기에 양승태 대법원장을 구속했지만 1심에서 47개 혐의가 모두 무죄가 났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수사도 2심까지 19개 혐의가 모두 무죄로 판결되면서 무리한 기소 논란을 낳았다.

▷한 전 대표로선 ‘또 검사 출신 대통령이냐’는 질문에 답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윤 대통령의 국정 실패에는 고집불통의 성향이나 배우자의 국정 개입이란 특이점도 있지만, 검사 생활만 26년을 한 데 따른 경험 제약을 꼽기도 한다. 경쟁자들은 이 점을 물고 늘어질 수 있다. 온 세상이 아는 검사 한동훈을 저자 소개에서 몇 자 뺀다고 달라질 건 없다. 그 바람에 사람들은 더 기억하고, 더 묻게 됐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2-22(토) 트럼플레이션이 부른 美 ‘둠 스펜딩’ 바람

한때 ‘인생은 한 번뿐’이라며 ‘욜로(YOLO)’와 플렉스(Flex·과시형 소비)를 외치던 유행은 한풀 꺾였다. 경기 불황과 소비 침체가 길어지면서 ‘필요한 것은 하나뿐’이라며 실용적 소비를 중시하는 ‘요노(YONO)’가 새롭게 떠올랐다. ‘무지출 챌린지’ 등 극단적인 절약도 유행한다. 하지만 미국은 딴 세상이다. 생필품과 고가의 가전제품, 자동차를 구매하려는 행렬이 줄을 잇는다고 한다.

▷미국 소비자들의 ‘탕진 소비’는 즐거움이라기보다 공포에 가깝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연일 터트리고 있는 ‘관세 폭탄’으로 물가가 크게 오를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다. 미 신용카드 정보공유업체 크레디트카드닷컴이 미국 거주자 2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 응답자의 22%는 평소보다 더 많은 물품을 구매하고 있다고 했다. 아직은 아니지만 조만간 사재기하겠다는 답변도 20%였다. 소비를 위해 빚을 늘리고 있다는 사람도 많았다. 이 같은 사재기에 대해 ‘파멸적 소비(Doom Spending)’라는 우려의 표현이 나오고 있다.

▷‘파멸적 소비’는 경제 불안, 지정학적 긴장, 미래에 대한 비관 등으로 충동적이거나 무분별하게 소비하는 현상을 말한다. 현재 미 국민들의 불안감은 전시의 공황 상태에 가깝다.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한 직후 월마트 등 대형 소매업체에서 화장지 등 생활필수품의 재고가 급격히 줄었다. ‘관세 폭탄’이 단순한 엄포가 아닌 현실임이 확인되면서 사재기 품목은 진공청소기 TV 오디오 등의 가전제품과 자동차 등으로 확대됐다.

 

▷미국인들의 사재기 열풍은 멕시코산 아보카도와 방울토마토, 유럽산 와인, 중국산 의류와 장난감 등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관세 때문에 미국인들의 올해 가구당 지출이 평균 830달러(약 120만 원)가량 늘어날 것이란 연구 결과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류 인플루엔자(H5N1) 확산으로 달걀값까지 폭등하면서 소비자들의 주름살이 더 깊어졌다. 달걀 절도가 성행하고, 차라리 닭을 키우겠다는 사람들이 늘며 암탉과 닭장을 빌려주는 서비스까지 등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던 미국의 초라한 모습이다.

▷패닉에 빠진 사재기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관세가 현실화하기 전에 원자재를 확보하려는 기업 수요 때문에 원자재 가격이 급등했다. 금값이 연일 사상 최고치를 찍으면서 골드바는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다. 경제학자들은 인플레이션에 대한 불안 심리로 소비를 늘리면 실제로 물가 상승을 부추길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른바 ‘자기충족적 예언’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이 소비자 개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파멸과 종말의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2-24(월) 쏟아진 軍 일선 지휘관들의 증언

12·3 비상계엄 당시 윤석열 대통령이 군을 동원해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 표결을 막고 정치인들을 체포하려 했는지는 탄핵심판의 최대 쟁점이다. 윤 대통령 측은 헌법재판소 변론에서 “의원 아닌 요원을 끌어내라 한 것”, “체포가 아니라 동향 파악”이라며 극구 부인했다. 하지만 현장에 출동했거나 사령관들의 지시를 받았던 일선 지휘관들은 윤 대통령 측의 주장과 상반되는 증언을 쏟아내고 있다.

▷“곽종근 전 특전사령관이 ‘대통령이 문을 부숴서라도 국회의원을 끄집어내라, 필요하면 전기도 끊으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21일 국회 내란 혐의 진상규명 국정조사특별위원회(국조특위)에서 나온 이상현 특전사 1공수여단장의 발언이다. 이 여단장은 “대통령 지시 사항이라고 부하에게 전달은 했지만 당혹스러웠다”고 토로했다. 그래서 당시 있었던 일을 “수첩에 다 기록하고, 수정할 수 없게 볼펜으로 써 검찰에 제출했다”고 한다.

▷이 여단장이 곽 전 사령관의 전화를 받을 때 차에 함께 있던 1공수 작전참모도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대통령님 지시’라는 단어가 기억난다”고 했다. 방첩사 방첩부대장은 곽 전 사령관이 긴장해서 전화를 받길래 다른 간부에게 물어보니 ‘코드원’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진술했다. 앞서 조성현 수방사 1경비단장은 헌재에서 “이진우 전 사령관으로부터 의원을 끌어내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했다. 이들이 모두 입을 맞춰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여길 사람은 드물 것이다.

 

▷정치인 체포 지시에 관한 증언도 이어지고 있다. 구민회 방첩사 수사조정과장은 국조특위에서 “(김대우 전 수사단장이) 체포한다는 지시와 명단을 불러줘서 받아 적었다”고 증언했다. 김 전 단장도 앞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체포 대상자들의 이름을 불러주면서 “잡아서 수방사로 이송시켜라(고 지시했다)”고 했다. 줄줄이 명령이 하달됐음을 짐작하게 한다. 당시 출동한 방첩사 요원들은 포승줄, 수갑 등을 지참했다. 누가 봐도 동향 파악 차원의 움직임은 아니다.

▷계엄 포고령의 절차적 하자 문제도 제기됐다. 계엄 포고령은 대통령이 서명한 계엄 공고문을 토대로 작성해 계엄사령관 결재, 대통령 재가를 거치도록 규정돼 있는데 당시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대통령) 서명이 들어간 포고령 1호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정해진 절차를 건너뛴 채 정치활동 전면 금지 등이 포함된 포고령을 발표했다는 얘기다.

▷계엄 당시 특전사, 수방사, 방첩사 사령관에게서 명령을 하달받은 일선 지휘관과 간부들은 준장, 혹은 대령이나 중령 계급으로 현장 상황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기소된 사령관들에 비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날 상황을 꾸며낼 이유도 없을 것이다. 이들의 잇단 증언에 대한 군 통수권자의 입장은 뭔가.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2-25 인명 구하려 문 부순 소방관들이 배상 걱정해서야

광주의 한 소방서가 한 달 전 빌라 화재로 뒤탈을 겪고 있다. 화재 직후만 해도 신속한 조치로 인명 피해를 최소화했다고 평가받았던 사건이다. 불이 난 시간은 오전 3시경이었다. 2층 주인집에서 시작된 불이 4층 빌라 전체로 번졌다. 소방관들이 한 집씩 문을 두드리며 주민들을 대피시키는데 여섯 집에서 응답이 없었다. 새벽이라 깊이 잠들어 있거나 연기에 의식을 잃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불길이 빠르게 퍼지고 있어 지체할 새가 없었다. 소방관들은 여섯 집의 현관문을 강제로 뜯고 들어갔다.

▷소방관들의 대응은 칭찬할 만했지만 현관문 수리비를 누가 부담할지를 놓고 문제가 생겼다. 통상 화재 진압 중 발생한 피해는 건물주가 든 화재보험으로 배상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 화재로 사망한 건물주는 보험에 들지 않았다. 소방서가 가입한 행정배상보험이란 것도 있는데 소방관의 과실로 손실이 생겼을 때만 적용된다. 이번처럼 적절한 조치로 인한 피해는 보험 처리가 안 된다.

▷소방 활동은 불가피하게 재산 피해를 수반한다. 소방관들이 아파트 베란다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유리창을 깨거나, 유리 파편이 떨어져 주차된 차량을 파손하기도 한다. 나무 위 벌집을 제거해 달라는 요청에 사다리를 타고 화염방사기를 쏘다가 나무에 불이 옮겨붙자 비싼 나무를 망쳐놨다며 배상을 요구받는 일도 있다.

 

▷소방관들의 민·형사 책임을 면제해주는 법이 몇 년 전 생기긴 했다. 하지만 피해가 불가피했음을 소방관이 입증해야 하고,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주민들 민원이 계속돼 십시일반 돈을 걷어 배상하는 일이 아직도 적지 않다. 일부 소방관들은 열쇠 전문가를 초빙해 문을 부수지 않고 개방하는 법을 배운다고 한다. 소방차 진입을 막는 불법 주정차 차량에 대해선 파손해도 면책되는 법이 도입되긴 했지만 이 역시 차주들 민원과 소송 부담으로 집행 사례가 거의 없다.

▷빌라 화재 현관문 수리비 500여만 원은 소방 예산을 대는 광주시가 물어줄 방침이라고 한다. “물에서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란 것이냐”는 비판도 있지만 세입자들 역시 사정이 넉넉지 않고 화재 발생에 전혀 책임이 없는 이들이다. 소방관과 주민의 문제로 방치할 것이 아니라, 어느 쪽도 피해 보지 않도록 시스템을 촘촘히 만들어야 할 책임이 국가에 있다.

▷억울하게 책임을 지게 된 소방관들은 마치 근로자가 산업재해를 당하고도 보호받지 못할 때 겪는 심리와 유사한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이런 일들이 계속되면 소방관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몇 초 차이로 생사가 엇갈리는 현장에서 소방관들이 문을 강제로 열어도 될지, 불법 주정차 차량을 밀고 가도 될지 망설인다면 그 피해는 결국 국민의 몫이다. 걱정 없이 화재 진압과 인명 구조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서 더 많은 소방 영웅들이 나올 수 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2-26 “지난주 한 일 5가지 보고해. 답장 안 하면 사직 간주할 것”

“지난주에 한 일을 5가지로 정리해서 보내라.” 지난 주말 휴식을 취하던 230만 미국 연방정부 직원들은 갑자기 이런 내용의 e메일을 받고 술렁였다. 일부 공무원들은 정부를 사칭한 ‘피싱 메일’로 오해했다. 메일의 발신처는 연방정부 구조조정을 주도하는 인사관리처, 배후에는 일론 머스크 정부효율부(DOGE) 수장 겸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있었다. 머스크는 “답장하지 않으면 사직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했다.

▷메일을 보낸 이유에 대해 머스크는 진짜 근무를 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수준의 ‘기본적인 맥박 검사’라고 했다. “공무원 상당수는 일을 너무 안 해서 e메일조차 확인하지 않는다”고 했다. 최소한의 성실성까지 의심받은 직원들은 즉각 반발했다. 연방수사국(FBI), 국가정보국(DNI), 국방부, 국무부 등 기밀을 다루는 부서는 회신을 거부했다. 공무원 노조인 미국공무원연맹(AFGE) 등은 위법한 지시라며 인사관리처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천재적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라고 머스크를 추켜세웠다. 더 공격적으로 하라고 주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애니메이션 캐릭터 ‘스펀지밥’을 활용한 풍자 게시물을 올렸다. 캐릭터들에게 지난주에 한 일 5가지를 적어보라 한 것인데 내용은 이렇다. ‘트럼프와 일론 때문에 울었다’ ‘사무실에 간신히 한 번 갔다’ ‘e메일 몇 개 읽었다’…. 많은 공무원들이 사무실에 가서 머스크가 보낸 e메일을 읽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비꼰 것이다.

 

▷정부 효율화와 예산 절감을 명분으로 추진하는 연방정부 개혁은 트럼프 대통령과 머스크의 합작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1기 때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은 관료들에 대한 불만이 컸고, 머스크는 트위터(현 X)를 인수하며 직원 80%를 잘라냈던 경험이 있다. 400여 개 연방기구를 4분의 1로 줄이고, 연방정부 예산의 약 30%인 2조 달러를 감축하는 게 목표다. 이미 7만5000명의 자진 퇴사를 받아냈고, 근무 기간 1년 미만의 수습 직원 22만 명에 대한 해고 조치에 들어갔다.

▷머스크는 공화당 정치 행사장에서 전기톱을 치켜들고 “관료주의를 썰어버리겠다”고 외쳤다. 이 같은 머스크식 개혁에 대해 공공영역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급진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핵무기 관리·감독 기관 직원들을 해고했다가 뒤늦게 필수 인력인 것을 알고 부랴부랴 취소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공직사회의 비대화와 비효율, 복지부동으로 개혁이 시급한 한국으로선 미국의 단호한 결단이 부럽기도 하다. 남들은 개혁하겠다고 전기톱까지 휘두르는데 우리는 여태 커터칼 한번 제대로 쥐어본 적이 없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2-27 尹 “윤상현이 공관위원장인지도 몰랐다” 했는데…

‘명태균 게이트’의 핵심 고리 중 하나는 윤석열 대통령 부부가 2022년 김영선 전 의원의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공천에 개입했는지다. 윤 대통령이 취임식 전날이자 김 전 의원 공천 확정 하루 전인 그해 5월 9일 명 씨와 통화에서 “내가 김영선이 경선 때부터 열심히 뛰었으니 좀 해줘라 그랬는데 당에서 말이 많네…”라고 얘기한 육성이 지난해 공개되자 파장이 컸던 이유다. 당시 공개된 분량은 윤 대통령의 이 발언과 명 씨의 “진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두 대목, 단 17초였다.

▷전체 맥락을 알 수 없으니 윤 대통령이 무슨 말을 했기에 명 씨가 감사하다 했는지 분명치 않았다. 공천 권한을 쥔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약속이지 않았겠느냐는 짐작이 가능할 뿐이었다. 당시 국민의힘 재·보선 공천관리위원장은 윤상현 의원이었다. 의혹이 커지자 육성 공개 일주일 만인 지난해 11월 기자회견에서 윤 대통령은 “저는 그 당시 공관위원장이 정진석 (현) 비서실장인 줄 알았다. 누구를 공천 주라 이런 이야기는 해본 적 없다”며 정면으로 부인했다.

▷25일 한 시사주간지가 공개한 윤 대통령과 명 씨 간 전체 통화 내용은 “정진석” 운운했던 해명이 사실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드러낸다. 2분 30초간 이뤄진 통화에서 윤 대통령은 “김영선이 해줘라”에 이어 “내가 저기다 얘기했잖아. 상현이한테, 윤상현이한테도 하고”라고 말한다. 명 씨가 다시 공천을 부탁하자 윤 대통령은 “알았어요. 내가 하여튼 저, 상현이한테 내가 한 번 더 얘기할게. 걔가 공관위원장이니까”라고 했다. “은혜 잊지 않겠다”는 명 씨의 인사는 바로 이 발언 뒤에 이어진다. 공관위원장인지도 몰랐다던 윤 의원을 공관위원장이라 부르고 공천을 얘기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하루 앞서 공개된 김건희 여사와 명 씨 간 통화 육성에도 관련 정황이 보인다. 윤 대통령과 명 씨의 통화 40여 분 뒤 김 여사가 명 씨에게 전화를 걸어 이뤄진 통화다. 통화 초반 김 여사 전화기 옆에서 윤 대통령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윤상현이한테…”라고 하는 말이 들린다. 김 여사는 “응, 응”이라고 답한 뒤 명 씨에게 “당선인이 지금 전화를 했는데 하여튼 당선인 이름 팔지 말고 그냥 밀으라고(밀라고) 했어요”라고 했다.

▷이는 공개 석상에서 윤 대통령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검찰이 포렌식을 끝낸 명 씨 ‘황금폰’ 3대와 USB엔 통화 파일은 물론 저장된 문자메시지 파일이 15만 개가 넘는다. 윤 대통령 부부에 대한 비공표 여론조사 무상 제공 의혹뿐 아니라 김 여사의 지난해 총선 공천 개입 의혹까지 실체 여부에 따라 하나하나 다 정국을 흔들 만한 내용들이다. 앞으로 윤 대통령이 묻어둔 진실들이 얼마나 더 드러날지 궁금해지는 이유다.
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02-28(금) “선관위는 가족회사” “친인척 채용이 전통”

믿을 만한 사람을 뽑기 위해 친인척을 채용하는 전통이 있다.” 감사원 담당자가 특혜 채용의 이유를 묻자 선거관리위원회 간부가 한 말이라고 한다. 감사원은 2013년부터 10년간 진행된 전국 선관위 경력 채용 사례를 조사해 878건의 규정 및 절차 위반을 확인하고 32명에 대해 중징계 등을 요구했다. 감사 결과에 따르면 선관위에서는 오랜 기간 친인척 특혜 채용과 청탁이 공공연하게 이뤄졌는데, 직원들끼리 “선관위는 가족회사”라는 대화가 오가기도 했다고 한다.

▷이번 감사는 2022, 2023년 김세환 박찬진 전 사무총장과 송봉섭 전 사무차장 등 선관위 최고위직 자녀의 특혜 채용 의혹이 불거지며 이뤄졌다. 사무총장과 사무차장은 대법관이 겸직하는 위원장을 보좌하며 조직을 이끄는 사실상의 1, 2인자다. 감사 결과 김 전 총장 아들을 경력 채용할 때 규정을 어기고 면접관 전원이 김 전 총장과 같이 일했던 사람으로 구성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중 한 명은 김 전 총장 아들 결혼식 때 축의금을 접수했던 직원이었다. 송 전 차장은 실무자에게 전화해 “내 딸을 추천하면 안 되겠냐”고 노골적으로 청탁했다. 이렇게 채용된 최고위직 자녀는 내부에서 ‘세자’로 불리며 근무할 때도 각종 특혜를 받았다고 한다.

▷채용 특혜는 최고위층 자녀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지역 선관위 과장급 자녀까지 특혜를 받았는데, 감사에선 최소 10명이 특혜 채용되고 그만큼 억울한 탈락자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무자들은 면접관에게 “평가표에서 점수는 비우고 사인만 하라”고 한 뒤 나중에 점수를 채웠고, “점수를 연필로 쓰라”고 한 뒤 지우고 새로 적어넣기도 했다. 특혜 채용에 대한 내부 고발도 있었지만 묵살됐다. 오히려 논란이 되자 특혜 채용을 감추기 위해 국회에 “친인척 채용 현황 자료가 없다”며 허위 답변했고, 관련 자료를 파기하며 은폐를 시도했다는 게 감사원 지적이다.

 

▷이번 감사에선 내부에 만연한 근무 태만 사례도 적발됐다. 강원선관위 과장은 8년 동안 124회 출국해 817일 동안 해외에 체류하며 무단결근을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정상 근무한 것처럼 위장해 챙긴 급여만 3800만 원가량이다. 무단결근과 허위 병가를 셀프 결재하며 2019년에만 131일 동안 해외여행을 다녀온 국장도 있었다.

▷선관위는 그동안 ‘헌법상 독립기관’임을 내세우며 감사원 감사를 거부해 왔다. 헌법재판소 역시 27일 “선관위는 감사원 직무감찰 대상이 아니다”라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헌재는 “(이번 결정이) 부패 행위의 성역을 인정하는 것으로 호도돼선 안 된다”며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선관위가 감사원 감사 대상이 아닐 수는 있지만 자정 노력을 통해 국민의 신뢰를 되찾지 못하면 존립의 위기를 맞게 될 수 있다.◎
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橫說竪說(동아일보) 202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