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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노벨상 프로젝트(스카이데일리)/ [71] 언론 탄압‧혼외자‧불법 도청… 노벨상 ‘DJ의 민낯’ - [79] 마지막 회, 지금이라도 北에 핵 선물한 반역자 처단해야

상림은내고향 2025. 2. 6. 17:19

김대중의 노벨상 프로젝트 스카이데일리 김기삼 변호사 2025

△ 미 프린스턴 대학 졸업

△ 1970년대 중반 이후 현재까지 시카고 트리뷴지(Chicago Tribune)·프랑스 파리의 IHT(International Herald Tribune)지를 비롯해 50년간 한반도 문제 전문 최고령 현역 기자

정리= 박혜수 편집위원

 

2025.01.20

[71] 언론 탄압‧혼외자‧불법 도청… 노벨상 ‘DJ의 민낯’

평화상 국민 반응 시큰둥하자 “언론 비협조 탓”… 무차별 세무조사 채찍
바람 피워 낳은 딸 탓에 “노벨상 산통 깨질라”… 김홍일이 돈으로 입 막아

노벨상 수상 시큰둥한 언론에 분개한 DJ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그토록 염원하던 노벨상 수상의 영광을 거머쥐고 돌아온 김대중(DJ)은 의외로 여론의 반응이 신통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DJ의 실망은 금세 분노로 변했다. 그는 국민의 이러한 반응이 언론들의 비협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1 DJ는 곧장 마키아벨리에게서 배운 자신의 정치적 맨얼굴을 백일하에 드러냈다. 노벨상을 수상하기 위해 여론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지도자로서의 이미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김대중의 언론기관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 전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대상은 대한국민 최대의 중도 보수 일간지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였다. 국세청은 조선과 동아를 포함한 여러 언론에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벌였다. 동시에 공정거래위원회는 매체들 간의 불공정 행위를 조사했다. 이후 검찰의 이들 언론기업에 대한 수사가 뒤를 이었다.

언론에 대한 DJ의 보복 전쟁

DJ가 이 같은 지시를 한 이유는 신문들이 그동안 노벨상 수상을 위한 자신의 햇볕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유지해 왔기 때문이었다. 이들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는 그 범위와 강도 면에서 전례가 없는 수준이었다. 대한민국이 생겨난 이래 초유의 세무조사였다.

 

물론 이전 정권에서도 기업 길들이기 차원의 세무조사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전 정권들은 칼을 드는 척하다가 멈추곤 했었다. 이처럼 강도 높은 조사가 계속되던 2001 7월 동아일보 사주의 부인이 자신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같은 해 8월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창업자의 2세 사장들이 구속 수감됐다.

 

함께 조사를 받던 중앙일보 사주이자 보광그룹의 회장 홍석현은 이미 1년 전에 구속된 후 집행유예와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로 인해 중앙일보의 김대중 정부에 대한 비판 강도는 크게 수그러든 상태였다. 구속된 신문사 사주들에게는 약 5000억 원의 세금과 벌금이 추징됐다.

 

이들에 대한 수사와 처벌이 정치적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대법원 선고에서도 드러났다. 대법원은 하급심에서 선고된 형량을 크게 낮추고 이들을 석방했다. 이른바 동 길들이기는 이미 충분히 그 뜻을 이뤘다는 정권의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DJ 집권 마지막 해 반격에 나선 언론

DJ와 언론사의 전쟁은 정권이 끝나갈 무렵 역풍이 되어 돌아왔다. 집권 마지막 해에는 언론들의 집요한 폭로로 연이은 게이트 사건이 터져 나왔다. 걷잡을 수 없는 게이트 폭풍에 DJ 정권은 파탄이 났다.

 

DJ가 청와대를 떠나고 1년 이상 지난 2004 419 SBS TV는 탐사 프로그램을 통해 DJ에게 혼외 자식이 있다는 의혹을 보도했다. 방송은 DJ 1970년대 초 당시 유명 한정식 집의 종업원과 바람을 피워 숨겨둔 딸이 있다는 소문을 파헤쳤다.

SBS가 들춘 DJ의 혼외 자식 논란

방송은 세월이 흘러 30대가 된 이 김대중의 딸을 추적 보도하면서, 자신의 딸을 DJ의 호적에 올려줄 것을 요구하던 이 여성의 엄마는 그 와중에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보도했다. 공교롭게도 이 여성이 사망한 때는 DJ와 김정일이 정상회담을 하기로 한 날을 불과 열흘 앞둔 시점이었다. 딸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파트 욕조에서 숨진 채 발견됐고, 그녀의 장례식은 DJ 최측근 신부에 의해 철저히 비밀리에 조용히 치러졌다.

 

또한 방송이 폭로한 바에 의하면, 이 여성이 자살하기 전 DJ의 장남 김홍일은 아버지에게 혼외 자식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노벨상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이들 모녀에게 조용히 지낼 것을 요구하며 금전적인 대가를 지불했었다.

 

▲ 방상훈(왼쪽) 조선일보 사장·김병관(가운데)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조희준 전 국민일보 회장 등 언론사 사주 3명이 2001년 8월17일 서울지검에서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조세포탈 및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혐의로 구속됐다. 연합뉴스

여느 때와 달리 침묵을 지킨 DJ

퇴임 후 방송을 통해 제기된 이러한 의혹에 대해 DJ는 보도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법적 조치 등을 취하기보다 그저 침묵을 지켰다. 자신의 외도로 태어난 딸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 DJ가 이처럼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은 그동안 그의 행동을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이전까지 DJ는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벌어지면 법적 소송을 최대한 활용했다. 상대에 대한 관용이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의 경호원 출신인 함윤식이 1987 동교동 24라는 책을 출간했을 때 DJ는 소송을 통해 허위사실 유포의 책임을 물었다. 1997년 대선 전 김대중 X파일을 출간한 손충무 역시 소송을 당해 감옥에서 2년을 살았다. DJ의 사상 의혹을 밝혔던 한국논단 이도형 대표는 DJ가 제기한 소송에서 패하는 바람에 벌금을 내기 위해 살던 집까지 팔아야 했다. DJ의 오랜 지지자였던 손창식은 DJ의 출생의 비밀을 캐다가 소송을 당하고 시달리던 중 거리에서 객사하기도 했다.

국정원 도청 사건으로 다시 불거진 DJ의 숨겨진 딸 문제

DJ의 숨겨진 딸 문제는 그 이듬해인 2005년에 국정원 도청 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한번 불거져 나왔다. 당시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에 대한 속행 공판에서 검찰은 증인으로 나온 김은성 전 국정원 2차장에게 “2000년 국정원이 당시 김 대통령의 측근 인사들을 불법 감청하면서 어떤 내용이 보고됐느냐고 물었다.

 

이에 김은성은 당시 김 대통령의 최측근인 모녀에 대해 감청했고 그 이상도 감청했다 “2000 6월 모친의 언니와 유명 신부 간의 쇼킹한 통화를 도청했다고 대답했다. 2000 6월이라면 DJ의 숨겨진 딸의 엄마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시점이다.

 

그는 모녀에 대한 도청은 1년간 이뤄졌고, 내용은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에게 생첩보로 보고했다고 증언했다. 생첩보는 보고서 형태로 정리하지 않은 도청 원문이다. 김은성은 당시 국정원 감청부서인 8(과학보안국) 국장에게서 대단히 중요한 통화가 감청됐다는 보고를 받고 이를 임동원 원장에게 직접 보고했다 당시 임 원장은 그 인물(모녀)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김은성은 또한 당시 임 원장은 과학적 기관에 의해 확인된 내용이 아니니까 철저히 보안을 지키라고 지시했다고 진술했다. 김은성은 통치권자와 관련된 내용이라 당시 이를 매우 중요하게 취급했다고 덧붙였다.

국정원의 불법 도청 DJ가 과연 민주적인 정치인인가

국정원 도청 사건은 DJ를 과연 민주적인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던져 주었다. 2005 7월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자 DJ의 후임자인 노무현은 검찰에게 불법 도청 및 감청에 대한 전면적인 수사를 지시했다. 김승규 국정원장에게도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하도록 지시했다. 국정원의 광범위한 도청 실태가 밝혀지게 된 과정을 잠시 돌이켜보면 다음과 같다.

 

2005년 초, MBC의 이상호 기자가 재미 교포인 박인회 씨로부터 국정원이 도청한 내용을 녹음한 CD 자료를 입수했다. 이른바 ‘X파일이었다.  CD의 주요 녹음 내용은 1997년 대선 과정에서 삼성의 이학수 부회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이 여야의 대통령 후보에게 어떻게 선거자금을 제공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내용이었다. 이 도청은 국정원의 전신인 안기부의 비밀 도청 전담 미림팀에 의해 삼성이 소유하고 있는 신라호텔의 일식집에서 행해진 것이었다.

 

[72] DJ 차 버린 김정일… 핵 개발에 전력투구

2003년까지 영변서 플루토늄 생산 재개… 방북 임동원 예방도 퇴짜
무기‧마약 밀매로 자금 조달… 위조달러 유통 창구로 마카오 이용

깨져 버린 홍석현의 꿈

 

홍석현은 2005 1월 노무현정부의 주미대사로 임명됐지만 정작 본인은 코피 아난 총장에 이어 UN 사무총장직을 노리고 있었다. 매부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등에 업고 있던 그는 세계신문협회장을 지내는 등 장래의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차근차근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정원 도청사건이 터지면서 홍석현은 불과 5개월 만에 주미대사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정부는 홍석현 대신 반기문 전 외교부 장관을UN 사무총장으로 밀어 2006 10월 그를 UN 사무총장으로 당선시켰다.

 

국정원 불법 도청사건은 전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1997년 대선 당시 김대중(DJ)은 자신은 불법 도청과 감청의 최대 피해자라며 자신이 집권하면 대한민국에서 불법 도감청을 완전히 뿌리 뽑겠다고 공약했다. 하지만 정작 DJ 정부의 국정원에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이 믿기 힘들어 했다.

김기삼의 국정원 불법 도청사건 폭로

국정원의 도청을 최초로 폭로한 것은 미국에서 망명을 신청하고 있던 김기삼전 국정원 직원이었다. 그가 조선일보 이진동 기자에게 제보한 내용이 2005 721자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또한 김기삼은 2005 7월 말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 집중에 출연해 자신이 알고 있는 국정원의 불법 도감청 사실에 관해 상세히 밝혔다. 월간중앙 기사에 의하면 이날 방송이 나가고 난 후 노무현은 전면적인 수사를 지시했다고 한다.

 

이후 최고 권력기관인 국정원에 6개월간의 검찰 수사가 집중되었다. 수사 결과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은 DJ 정부에서 거대한 규모의 불법 도감청이 이루어진 사실을 확인하고 발표했다.

불법 도감청 최고 책임자는 임동원 전 국정원장

국정원은 ‘R2’라는 전자장비를 사용해 1800여 명에 달하는 유력 인사들을 상시 도청하며 감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CASS’라는 전자장비를 통해 당시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던 휴대폰 통화도 도청하고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결국 여러 명의 전현직 국정원 간부들이 처벌을 받았는데, 이 사건에서 가장 책임이 큰 임동원 전 국정원장은 재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노무현정부에 의해 사면받았다.

 

노벨상 수상 공작을 통해 만들어진 남북한 사이 우호적 분위기가 무의미한 것이라는 사실은 또 다른 문제들에서도 드러났다. 2002년 중반 국정원장에서 통일부 장관 자리로 돌아간 임동원은 북한을 방문했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해 10월 북한 외교부 부부장 강석주가 미국 측 특사 제임스 켈리를 만났을 때 북한이 핵탄두 제조를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제네바 협정 체제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은 8년 전 북한이 제네바 협정을 받아들이면서 합의했던 내용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었다.

 

▲ 2005년 9월 미국 정부는 북한이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를 통해 위조달러 지폐를 유통시키고 마약 등 불법 국제거래 대금을 세탁하는 등 자금 조달과 융통을 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전경. 연합뉴스

파키스탄 핵 과학자가 북한에 고농축 우라늄 기술 전수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HEU) 프로그램은 압둘 카디르 칸과 북한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는 파키스탄 핵무기 기술 개발의 아버지라 불리는 인물이다. 2003 11월 미국 등은 파키스탄 정부에 칸 박사가 리비아이란북한 등에 핵기술을 제공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파키스탄 정부로서도 조사에 착수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결국 칸 박사 일행이 1989년 이후 북한·리비아·이란 3개국에 우라늄 농축 기술과 원심분리기 도면·부품 등을 제공한 것을 밝혀 냈다. 칸 박사도 2004 2월 지난 15년간 북한리비아이란 등에 핵기술을 제공한 사실을 시인했다.

 

이런 사실이 밝혀지기 이전인 1998 6월 일본의 마이니치 신문은 파키스탄의 핵무기 기술이 북한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의혹을 보도했다. 이 신문은 1998 67일 파키스탄 내 북한 핵기술 자문관의 집에 복면을 한 괴한이 침입해 북한 자문관의 아내를 살해했다고 전했다.

 

북한 핵기술자 아내 관 속의 원자력 기체 원심분리기 샘플과 설계도

 

파키스탄 정보기관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한 기사에서 마이니치 신문은 살해된 여자가 북한이 파키스탄과 협력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서방 외교관에게 누설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고 밝혔다. 또한 살해된 아내의 남편은 파키스탄 내에서 실종된 상태라고 전했다.

 

이 신문 기사에서는 또 하나의 마치 007 영화와도 같은 사실이 드러났다. 괴한에 살해된 북한 여성의 시신은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평양까지 특별기로 수송됐는데, 그녀의 관 속에는 원자력 기체 원심분리기의 샘플과 설계도가 함께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김정일, 방북한 임동원 만나 주지도 않아

2003년까지 북한은 영변의 5메가와트급 원자로에서 플루토늄 생산을 재개했다. 2003 2 DJ 퇴임 직전 방북한 임동원은 2000 6월 정상회담에서의 합의 내용, 특히 김정일의 서울 답방이 성사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그를 만나 주지도 않았다.

 

김정일이 평양까지 찾아온 김대중의 특사 임동원을 만나 주지도 않은 것은 곧 제네바 협정뿐 아니라 햇볕정책이 실패했다는 것을 한 번 더 확인시켜 주는 일이었다. 북한이 한국 정부에 원한 것은 단지 자신들이 개발한 핵탄두 실험에 필요한 수억 달러 내지 수십억 달러의 현금이었다.

북한, 무기류마약가짜 담배 밀매 등으로 핵무기 개발 자금 마련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북한은 김정일의 개인금고인 일명 39호실을 통해 AK37 등 무기류에서부터 양질의 메타암페타민(필로폰)과 헤로인 등 마약류, ‘슈퍼노트라 부르는 미화 100달러 위조지폐는 물론 가짜 말보로 담배까지 밀매했다. 이들 대부분의 거래는 마카오 소재 은행을 통해 이루어졌다.

 

2005 9월 미국 재무부가 마카오의 소형 은행 방코델타아시아(BDA)에서 이루어진 이와 같은 불법행위들을 파악하고 이 은행에 대한 제재에 들어가면서 북한은 평양에 스위스제 정밀 프레스까지 들여다 놓고 수백만 달러 이상에 상당하는 규모의 슈퍼노트를 찍어 내고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드러났다.

마카오의 BDA 북한의 위조지폐 유통 창구

BDA는 당시 마카오 현지에서도 6위에 해당하는 소형 은행이었다. 2005 9월 미국 정부는 북한이 이곳을 통해 위조달러 지폐를 유통시키고 마약 등 불법 국제거래 대금을 세탁하는 등 자금 조달과 융통을 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고 발표하고 북한 계좌 2500만 달러를 동결시켰다.

 

1970년대부터 북한의 은행 및 무역회사들과 거래를 해 온 BDA는 북한의 외환 결제를 위한 유일한 창구로 북한은 이 은행을 통해 김정일의 주요 통치자금을 마련해 왔으며 자금 세탁금괴 밀수마약 대금 세탁, 심지어 미사일 판매대금 수금에도 활용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노벨평화상 수상 위한 공작 벌이며 인권 유린 외면한 DJ

자신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위한 공작을 벌이는 동안 DJ는 단 한 차례도 극심한 인권유린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에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 1994 7월 김일성 사망 후 적어도 200만 명 이상의 북한 주민이 굶주림고문 및 처형, 그리고 의약품 부족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참상이 본격화되기 전에 사망한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은 아들이자 후계자인 김정일보다 운이 좋았는지도 모른다.

 

[73] DJ 식량‧비료까지 北에 펑펑… 김정일 정권‘생명수’

주민 한 해 200만 명 굶어 죽어도… 금수산 궁전 치장에 돈 쏟아부어
홍수‧가뭄까지 겹쳐 1990년대 北경제 최악… 지원 없었다면 붕괴

금수산 궁전 전체를 김일성의 무덤으로

 

북한의 기아 사망자 수와 관련해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총비서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기아로 인한 사망자 수가 걱정되어 통계 책임자에게 그 숫자를 물어본 적이 있다. 북한에서는 1995 50만 명이 굶어 죽었는데 그중 5만 명이 당원이었으며, 1996 100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외부의 지원이 없다면 1997년의 사망자 수는 20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됐다.”

북한 주민들의 상황에 대해 황장엽은 흥미로운 비교를 내놨다.

크렘린궁에서 일했던 레닌의 묘지는 크렘린궁 옆 작은 건물에 있는 반면, 김일성이 일했던 주석궁은 전체가 그대로 김일성의 묘지로 바뀌었다. 궁전 전체를 묘지로 바꾸는 역사적인 사건은 김정일에 의해 수많은 주민이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상황에서 강행됐다. 기록에 따르면 내부 장식 등 엄청난 규모의 공사에 소요된 비용이 무려 89000만 달러에 달했다. 이러한 독재자의 범죄행위는 지구상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굶주림에 시달리는 주민 외면하고 호화 치장한 무덤

굳이 비교하자면 고대 이집트의 왕 파라오의 무덤인 피라미드 건설에 주민을 동원하고, 파라오의 부인들과 가족을 죽은 파라오와 함께 생매장했다는 기록에 견줄 만해 보인다. 김일성 생전에 지어져 김정일 집권 후 더욱 화려하게 치장된 금수산 기념관은 일본과 미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승리를 상징하기 위해 붉은 대리석으로 호화스럽게 꾸며졌다. 식량이 없어 죽어 가는 주민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그처럼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독재자의 묘지를 만든 것이었다.

 

이에 대해 황장엽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김일성의 묘지를 꾸미는 데 들어간 돈이면 옥수수 600t을 살 수 있다. 당시 북한에서는 1년에 200t의 옥수수가 부족한 실정이었으니 그 돈이면 북한 주민들의 식량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붕괴 직전의 김씨 정권 살려 준 DJ의 대북 송금

이처럼 완전히 자금이 고갈된 상태이던 북한 체제의 금고에 김대중(DJ)은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부어 줌으로써 거의 소멸 직전이던 김씨 일가 독재의 불씨를 되살리고 그것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준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김정일의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의 회고록에 의하면 1994 7월 이후 김정일은 오랫동안 방 안에만 틀어박혀 생활하면서 권총을 머리맡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고용희가 권총을 앞에 놓고 있는 김정일을 보고 놀라서 당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라고 소리친 적도 있었다는 것이다.

 

DJ가 김정일에게 막대한 뇌물을 보내 준 것은 주로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마련되던 통치자금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의 정치의 오랜 폐습이다. 그렇게 조성되는 통치자금의 규모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비정상적인 경로로 돈이 흘러 들어간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 선거 기간 소모되는 비용의 규모는 적게 잡아도 이미 조 단위를 넘어선 것으로 추산됐다.

 

▲ 1997년 7월10일 80여 일간의 서울생활을 마친 황장엽(왼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와 김덕홍 전 조선여광무역연합총회사 사장이 안기부청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연합뉴스

 

역대 대통령들의 통치자금 한국 정치의 오랜 폐습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재임 중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 재벌들로부터 엄청난 이득을 취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대 이후 518 광주사태 등을 거치며 집권한 전두환은 이후 재판 과정에서 1조 원 이상의 불법 자금을 받은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또한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 역시 적어도 수천억 원의 부정한 돈을 챙긴 것으로 드러나 내란죄와 함께 뇌물죄 등까지 적용해 처벌을 받았다.

 

이들 군 출신 대통령 이후 집권한 민간인 출신의 대통령들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노태우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의 당선을 위해 당시 민자당에 3000억 원 이상의 자금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노태우의 이러한 고백에 대해 김영삼은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한국논단 이도형 대표는 자신의 저서에서 박태준 전 민자당 최고위원이 대선 출마 의사를 밝히고 얼마 후 사퇴하기까지 짧은 기간 동안 재벌들이 엄청나게 돈을 싸 들고 와서 놀랐다는 사실을 전하기도 했다.

 

이도형의 김대중 의혹이라는 책은 이러한 정황을 자세하게 전해 준다. 그 책은 책 속에 ‘P’라는 이니셜로 소개된 박태준이 한국의 재벌들로부터 6700억 원을 거둔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박태준은 노태우로부터 대선 후보 지명을 거절당한 후 이 돈을 전부 노태우에게 돌려주었는데, 그중 2700억 원만 김영삼의 대통령 선거에 쓰이고 4000억 원은 노태우가 착복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부패한 정치자금 수수엔 여야 불문 모두가 진심

부패한 정치자금은 여당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1995년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기 전 DJ 1990년 노태우로부터 약 20억 원의 돈을 받은 사실을 기자회견을 자청해서 고백했다.

 

당시 이 돈을 DJ에게 전달한 노태우의 정무 보좌관 김중권은 이후 DJ 정부에서 청와대 비서실장에 임명됐다. DJ가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으로 자진해서 자금 수수 사실을 밝혔지만 이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정계에서는DJ가 노태우로부터 실제로 받은 돈은 20억 원이 아니라 그 열 배는 넘을 것으로 보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1000억 원을 훨씬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DJ의 불법 정치자금에 대한 수사가 1997년 대선 직전 진행되었지만 당시 대통령이던 김영삼은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이를 중단시켰다.

DJ, 김정일 비위 맞추기 현금은 물론 식량비료 등도 지원

DJ는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김정일이 자신을 평양에 초대해 준 대가로 5억 달러, 또는 김기삼의 주장에 따르면 15억 달러를 지불했다. 하지만 DJ는 김정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현금만 지원한 게 아니었다. 그는 현금 이외에도 여러가지 다른 방법을 동원했다. 우선 그는 정부 차원 외에 여러 인도적 지원 및 무역 경로를 통해 해마다 수십만t의 식량과 비료를 북한 정권에 제공했다.

 

그런데 우리는 김대중 및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햇볕정책을 통해 북한에 얼마의 자금이 전달됐는지 정확한 금액을 알지 못하고 있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최경환 의원은 햇볕정책으로 총 90억 달러 상당의 현금과 물자가 북한에 제공된 것으로 추산했다. 매년 북한에 보낸 수십만t의 식량과 비료뿐 아니라 현대그룹에 의한 금강산 관광 투자개성공단 개설 비용 등을 모두 합하면 최종 금액은 훨씬 커질 것으로 예상됐다.

김정일에게 생명수가 된 DJ의 대북 지원

이러한 지원으로 인해 북한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정확히 규명한 연구를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당시 북한의 경제 규모를 통해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1999 8월 한국은행은 1998년 북한의 국내총소득(GNI) 126000만 달러로 평가했다. 북한엔 1990년부터 8년 동안 구소련연방 붕괴에 따른 마이너스 성장이 이어지고 있었다.

 

구소련 붕괴 후 그동안 제공되던 석유와 식량 공급이 끊긴 것에 더해 계속된 홍수가뭄 등 자연재해는 극심한 식량난을 불러와 북한 전역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의 경제는 연료 및 에너지 부족 비율이 15%를 넘는 절망적인 상태였다.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한국에서 북한으로 전달된 엄청난 현금과 물자는 구소련 체제의 붕괴로 인한 북한의 어려움을 상쇄시켜 주는 생명수와도 같은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하다.

 

[74] 북핵 위협 ‘나 몰라라’… DJ “대북 송금 후회 없다”

“가난한 동생 찾아갈 때 빈손으로 안 가는 것”… 퇴직하고도 황당 변명
수많은 의문 남기고 2008년 타계… 평화의 이름 내세워 자기 욕심만 채워

북한 불법 지원 혐의 DJ 죽음과 함께 묻혀

 

이처럼 북한 정권의 생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김대중(DJ)의 엄청난 호의는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나아가 전 세계에 대한 핵무기의 악몽을 만들어 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북한에 제공된 대부분의 자금은 핵무기 및 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에 전용되고, 또한 정권의 유지를 위해 쓰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자금은 스위스 은행의 비밀계좌를 통해 김정일 일가 및 그의 총애를 받는 권력 엘리트들의 호화 생활을 위한 비용으로 지출된 것으로도 보인다.

 

이제까지 북한에 불법으로 지원한 자금 규모와 그것의 전용 의혹 등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조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9 5월부터 8월까지 3개월이 채 안 되는 동안, 노무현이 가족들의 부패 혐의를 조사하는 와중에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고 이어서 DJ가 노환으로 병사하면서 이 문제는 그대로 역사에 묻혀 버렸다.

DJ가 준 515얼 달러, 북한 핵개발에 기여

그렇다면 이런 가정을 해 볼 수 있겠다. 2000 6월 정상회담의 대가로 5억 달러 또는 15억 달러가 북한에 전달되지 않았다면 북한이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었을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DJ 정권에서 북한에 그처럼 퍼주기를 하지 않았다면 북한이 현재와 같은 수준의 핵무기 및 미사일 개발 능력을 보유할 수 있었을까. 이 점에서 우리는 DJ가 북한의 핵무기 및 미사일 개발 능력 강화에 분명한 기여를 했다고 확신할 수 있다.

 

2006 10월과 2009 5, 그리고 2013 2월 북한의 핵실험이 비록 대단한 규모는 아니었다고 해도 북한은 지속적으로 관련 기술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DJ의 도움으로 북한은 자신들의 단계적인 목표 달성 시기를 앞당겼다는 사실이다.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미 부시 행정부

김정일이 한국 정부의 햇볕정책에 따른 과실을 즐기고 있는 동안 미국의 조지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이란이라크와 함께 핵무기 개발로 전 세계를 위협하는 악의 축으로 지목하고 나섰다. 부시 행정부가 상정하고 있던 최악의 시나리오는 중동 테러리스트들에 의한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이었다. 따라서 그 가능성을 높이는 북한에 대한 한국 정부의 현금 제공에 미국 정부는 반대하고 있었다. 부시는 2001 3월 기자들 앞에서 DJ ‘This man(이 친구)’이라고 지칭했다. 이러한 외교 참사가 있고 나서 한국과 미국의 외교관계는 급속히 냉각됐다.

2001 DJ부시 간 한미정상회담은 재앙

반기문 UN 사무총장은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의 대북정책에 대해 언급하며 미국과 엇박자를 낸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한국 고위 외교관으로서 겪은 고충을 털어놨다. 2001년 외무부 차관 시절 백악관에서 열린 김대중-조지 부시 간 한미정상회담을 반 총장은 한마디로 재앙이라고 요약했다.

 

반 총장은 회고록에서 이제 막 정권을 잡은 부시 행정부는 클린턴 정부의 대북정책을 송두리째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있을 때였는데 DJ가 성급하게 부시 행정부에 클린턴 정부의 대북정책을 지속하라고 압박하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지적했다. 당시 정상회담이 대실패로 끝나자 DJ는 외무부의 대표적인 미국통인 반 차관에게 엄청 화를 냈고 반기문은 차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망 소식이 전해진 2011년 12월19일 서울 용산 아이파크몰 가전매장에서 시민들이 TV 뉴스를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DJ의 햇볕정책 이어받아 미 정부와 대립한 노무현정부

2003년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후에도 한미 관계는 회복되지 못했다. 부시 행정부 인사들은 노무현과 그 측근들을 탈레반’, 그리고 한국인들을 달아난 신부라고 표현했다. 이들이 처음 제대로 충돌한 것은 2005 1117일 경주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였다.

 

당시 부시는 다음 날 부산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협력기구(APEC)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한국과 미국의 정상은 북한의 불법 자금줄인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대한 제재 해제를 놓고 대립했다. 당시 버시 바우 주한 미국대사는 역대 최악의 한미정상회담이었다고 이 회담을 평가했다. 이 같은 한미 간의 불협화음은 2007 9월 시드니에서 열린 APEC 총회에서도 이어졌다.

 

부시와 노무현의 기자회견에 배석했던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당시 상황을 노무현의 종잡을 수 없는 성격(erratic nature)을 보여준 사건이라며그는 당시 상황이 얼마나 이상했는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고 자서전에서 혹평했다.

퇴임 후 햇볕정책을 변명하기에 급급했던 DJ

후임자인 노무현이 김대중의 햇볕정책 끝자락을 잡고 쫓아가던 당시 DJ는 자신의 정책에 대해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2004년 중반 파이낸셜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DJ는 남북정상회담의 대가로 북한에 현금을 제공한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자 형이 가난한 동생을 찾아갈 때 빈손으로 가지 않는다. 우리는 1억 달러 정도를 주고 싶었지만 그것이 가능한 합법적인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북한이 현대그룹 측과 협의해 사업 개발 대가로 1억 달러를 산업은행 비밀 대출을 통해 지원했다. 내가 그것을 승인했으며 그것에 대해 후회는 없다. 결국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북관계를 향상시켰으며 군사적 위협을 감소시키는 성과를 얻었다.”

 

DJ는 북한의 핵 위협에 대해 아예 모르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일부러 무시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경향신문이 창간 58주년을 맞아 DJ와 인터뷰했을 때도 그는 비슷한 논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북한도 남북정상회담에서 모든 것에 대해 평화적 해결을 원한다고 했다. 실제 북한은 지금 전쟁할 능력도, 전쟁할 의사도 없다. 북한에게 핵은 수단이고, 목적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다. 미국 핵 앞에서 북한의 핵은 장난감도 아니다.”

DJ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는 북한의 비확산조약 탈퇴 원인 주장

그로부터 2년 후인 2006 10월 북한의 첫 핵실험이 있은 지 5일 후 DJ CBS와의 대담에서 여전히 부시 정부가 햇볕정책을 비판한 데 대해 자신을 합리화하기에 바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북한의 핵실험은 미국으로부터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미국과 대화를 하기 위한 수단이며, 위협을 받고 있는 북한에 대한 제재는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DJ는 국제원자력기구 등 국제사회의 북한에 대한 압력은 북한의 비확산조약 탈퇴라는 부작용만을 초래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2년 후인 2008 DJ는 부시 행정부가 북한 핵 문제 있어 평화적인 협상을 하지 않고 56년이라는 시간만 허비했다고 비난했다.

DJ와 김정일 사망으로 역사 속에 묻혀 버린 의문점들

이렇게 악화된 한미 관계는 2008 2월 이명박정부가 출범할 때까지 회복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 해 김대중이 세상을 떠나고, 2011 12월 김정일까지 사망하면서 수많은 의문점들은 풀리지 않은 채 그대로 역사의 무대 아래 묻혀 갔다.

 

DJ는 어떻게 화해와 평화의 이름으로 자신의 영광에 대한 욕망을 실현할 수 있었을까. 그는 자신의 노벨상 수상이 그 권위를 넘어 대다수 사람에게 작은 혜택이라도 주리라고 여겼을까. DJ는 해외 체류 기간 그에게 아부하던 교수유명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그는 정말 노벨상 수상이 자신을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인물로 만들어 줄 거라고 생각한 걸까. 북한의 미래 세대는 엄청난 돈을 주고 개최한 정상회담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75] 머리에 핵 얹은 한국… DJ가 남긴 유산

노벨상으로도 가리지 못한 DJ의 위선… 지지자들 ‘환상’ 깨뜨려
햇볕정책 시들어 사라지고 남은 건 김정은의 핵무기 발사 버튼

수백만 지지자의 환상을 깨뜨린 DJ의 위선 행각

김대중(DJ) 자신에게 노벨평화상 수상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진정한 영웅으로 인식시키고자 한 꿈의 완성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노벨상은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대한민국을 보다 크고 부강한 나라로 만든 쾌거라고 하겠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그가 정치적 라이벌과 자신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을 탄압하기 위해 국정원의 불법 도청을 승인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또한 DJ가 자신이 한 약속들을 헌신짝 버리듯 팽개친 일들, 지역감정을 부추긴 사실, 정적에 대해 협박을 일삼은 과오들을 잘 알고 있다. 결과적으로 DJ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자유가 들꽃처럼 피어나며, 통일의 희망이 무지개처럼 영롱한 국가가 될 것으로 믿던 수백만 명 지지자들의 환상을 확실하게 깨뜨렸다.

 

그렇다면 이제 궁극적인 질문이 하나 남았다. 햇볕정책은 과연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햇볕을 비춰 주었으며 그 역사의 빛줄기 속에서 DJ는 앞으로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사라진 햇볕, 남은 것은 김정은의 핵무기 발사 버튼

DJ는 정권 말기 김정일에게 정상회담에서의 약속대로 한국을 한번 방문해 달라고 애걸했지만 거절당하면서 햇볕정책은 본격적으로 생명을 잃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임기가 끝난 후 10여 년이 지나면서 그의 햇볕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은 검증되지 않은 미숙한 지도자 김정은의 손에 쥐어진 핵무기 발사 버튼뿐이다.

 

2011 1228, 평양 하늘은 진한 회색빛으로 물든 가운데 드문드문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이날 북한 조선중앙TV는 김정일의 장례식 실황을 전 세계에 중계했다. 1970년대에 생산된 구형 링컨 콘티넨탈 모델을 개조한 운구차는 지붕 위에 인공기로 감싼 김정일의 관을 싣고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강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도에 서서 오열하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이 화면에 비쳤다.

새 지도자 김정은의 등장을 알린 김정일의 장례식

군인들의 긴 대열이 음울한 침묵 속에 행진하는 가운데 김정은이 운구차에 한 손을 얹고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이 TV 화면을 가득 메웠다. 김정은은 북한 권부의 최고위층들과 함께 장례 행렬의 맨 앞에 서서 걸어가며 새로운 북한 지도자의 등장을 알렸다.

 

드라마의 주인공 김정은은 마치 세상 사람들에게 할아버지 김일성의 기억을 되살려 주려는 것처럼 인민복 차림을 하고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의 젊은 시절 헤어스타일까지 흉내 내려 애쓴 흔적이 보였다. 김정은을 뒤에서 따라가는 장성택은 3대째 이어지는 정권의 세습 과정에 혹시라도 실수가 생기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듯했다.

 

이날 장례식 실황은 CNNBBC한국의 방송망 등을 통해 전 세계에 방영되었다. 그것은 마치 할리우드에서 만든 누아르 영화의 한 장면같이 음산하고 초현실적인 모습이었다. 김정일의 영구차가 지나가는 평양 거리 모습을 시청하고 있는 외부 세계인들의 머릿속엔 강제 수용소에서 굶주림과 공개처형의 공포에 떠는 주민들의 모습이 떠올랐을 것이다. 생전에 세계 각국에서 유인해 온 미녀들과 어울려 헤네시 코냑을 마시며 희희낙락하던 폭군의 모습이 오버랩 됐을지도 모른다.

 

▲ 2010년 10월10일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시신이 서울의 한 병원으로 옮겨지고 있다. 황장엽은 김정일의 가정교사 역할을 했던 북한 주체사상의 설계자로 1997년 남한에 귀순했다. 연합뉴스

장례식 다음 날은 새 최고 지도자의 대관식

할리우드의 마피아 갱 영화대부의 장례식과 흡사한 행사를 마친 다음 날, 김정은은 김일성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 북한 최고 권력자들과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 자리에서 86세로 당시 북한 권력의 우두머리였던 김영남은 김정은을 북한의 최고 지도자로 선포했는데, 이는 새로운 지도자라는 언급 없이 이루어지는 대관식이나 취임식과도 같은 이벤트라고 할 수 있었다.

 

이들 장면을 바탕으로 분석가들은 북한 권부 내에서 진행 중인 권력투쟁 과정에서 과연 누가 승리하고 있는지 파악하느라 분주해졌다. 당시 상황으로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집권 기간부터 항상 최고 권력 서열의 상단에 위치하고 있던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의 남편인 장성택이 유력해 보였다. 장례식 운구행렬에서나 김일성 광장 발코니에서 그의 위치를 보더라도 그렇게 보는 것이 당연했다.

섭정 세력으로 등장한 장성택

장성택은 4성 장군에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면서 북한 노동당 총비서 자리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김정은의 막강한 후견인의 위치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김정일 장례식 후 김정은을 둘러싸고 장성택 등 섭정 세력이 권력을 잡았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는가 하면 장성택의 오른팔이었던 최룡해가 급부상하며 권력의 라이벌로 등장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최룡해는 군경력이 없음에도 2012년 부참모장에서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영전했고 곧이어 장성택이 부위원장이던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장성택의 위치가 아무리 높아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유일한 장군님이었으며, 2010 1010일 북한 노동당 창건 기념일 행사에 김정은이 장성택김경희 부부와 나란히 모습을 나타내면서 권력의 중심추가 김정은으로 이동했음을 짐작하게 했다.

김정은 등극하는 날 목숨 잃은 황장엽

그날 국정원이 관리하는 서울의 안가 욕조에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총비서가 숨진 채 발견되었다. 일각에서는 황씨가 김정은이 등극하는 축제에 희생제물로 사용된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일기도 했다.

 

북한 지도자에 대한 주민들의 광신적 태도는 이미 오래전부터 스테레오타입이 되어 이제는 이야깃거리조차 되지 못할 정도이다. 2011 1219일 조선 중앙TV 뉴스에서 한복을 입은 여자 아나운서가 김정일의 사망 소식을 알리며 흐느끼던 모습에서 여전히 그런 분위기가 변치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날 낮 12시 방송은 중대 발표를 통해 김정일의 사망 소식을 알렸고 이 소식에 통곡하며 울부짓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이 방송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아시아 대륙 귀퉁이에 자리 잡은 이 작은 나라에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과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 그리고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백두혈통의 세습 권력 우상화는 일상적인 일이 된 지 오래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김씨 일가 우상화

김정일의 생일인 216, 한겨울인데도 백두산 정일봉에 날씨가 풀리면서 소백수 골짜기에 버들꽃이 피어났다는 식의 우상화 신화가 만들어졌다. 백두산 밀영 김정일 고향집에 갑자기 햇무리가 나타나 경치가 이채로워졌다는 거짓 신화가 등장하기도 했다. 백두산 정일봉을 칭송하는 노래와 시다큐멘터리는 너무 많아서 그 수를 셀 수가 없을 정도다.

 

신격화된 김정일의 사망을 둘러싸고는 백두산 하늘이 붉게 물들고, 천지의 두꺼운 얼음이 깨졌다는 전설이 끊임없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거짓 신화와 전설은 김정일을 진정 하늘이 내린 인물로 묘사했다.

 

김정일의 신격화는 그의 아버지 김일성 때부터 시작됐다. 김일성은 소련군과 함께 북한을 장악한 1945년부터 1994년 사망하기까지 무려 반세기 동안 북한을 통치하며 그 후계자인 아들 김정일 역시 그것을 그대로 답습해 국방위원장이라는 최고 권좌에서 이른바 선군정치 주체사상을 표방하며 세습 독재 권력을 굳건하게 지켜 왔다.

 

[76] 한·미 ‘김정일 사망’ 깜깜… 北발표 때까지 몰라

사망 이틀 지나 공식 발표… 장례 절차 준비 위한 시간 벌기 때문인 듯
17년 전 김일성 때와 빼박은 듯한 장례식… 철저히 각본 따라 거행

김정은 권력 세습의 장애물들

 

김일성으로부터 김정일로 이어진 권력 세습의 경우와 달리 김정일 사후 김정은으로의 권력 세습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김정은 위로 두 명의 형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은 2001년 도미니카 공화국의 위조여권으로 일본에 입국하려다 적발되었다. 그는 아내와 네 살 난 아들, 그리고 경호원인지 애인인지 유모인지 모를 젊은 여인과 함께 일본에 밀입국을 시도했다. 그는 불법 입국한 이유를 묻는 일본 경찰의 질문에 디즈니랜드에 가기 위해서였다고 밝혀 세상 사람들을 황당하게 했다. 김정남의 이러한 해프닝은 가뜩이나 그에 대해 실망을 느끼고 있던 아버지 김정일을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김정일은 이전에 서방으로 탈출해 서울로 망명하고 난 후 평양의 은밀한 궁정 사생활을 폭로했던 처조카 이한영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1982년 한국으로 망명한 이한영은 망명 후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이란 책을 펴낸 후 1997 2월 김정일이 파견한 공작원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한영은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의 아들이었다. 성혜림은 김정은의 생모 고영희에게 본처 자리를 빼앗기고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리다 2002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모스크바에서 성혜림을 돌보던 언니 성혜랑은1990년대 후반 딸 이남옥과 함께 프랑스로 망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의 차남 정철과 3남 정은은 같은 어머니 고용희에게서 태어났다.

고용희는 이른바 기쁨조 출신으로 김정일의 눈에 들어 본처 성혜림의 자리를 빼앗고 안방을 차지한 인물이다. 고용희 입장에서는 김정일의 차남이자 자신의 장남인 정철을 권력의 후계자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었겠지만 그는 독재국가의 최고 권력자가 되기에 적합한 성격이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철은 싱가포르에서 열린 에릭 클랩튼 콘서트장에서 그 모습이 노출되며 후계 구도에서 벗어났고 결국 3남인 김정은에게 절대 권력이 주어졌다.

일본 밀입국 등으로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김정남

고용희는 2004년 파리에서 암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김정남이 유럽마카오 등지에서 숨어 살기를 원했다. 김정남은 일찌감치 자신이 김정일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요지 고미가 쓴 책 나의 아버지 김정일과 나에서 김정남은 북한이 폐쇄적 공산주의를 버리고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반 북한 주민이 그러한 생각을 말했더라면 목이 열 개라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김정남은 책의 저자 고미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북한의 권력 세습 가능성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뜻밖이리만큼 솔직하게 밝혔다. 그는 내 아버지는 젊은 지도자로 권력을 이어받았을 때부터 측근에서 따르던 권력 엘리트들에게 3대 세습까지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은 정상적인 상황에서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또한 김정남은 북한이 매우 불안정한 상태이고 북한 군부의 힘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점도 지적했다. 2011년 고미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김정남은 권력 세습이 실패할 경우 군부가 권력을 장악할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했다.

 

▲ 2011년 12월20일 북한 조선중앙TV가 금수산기념궁전에 안치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시신을 공개했다. 연합뉴스

김정일 사망 이틀 후에야 정보 확인한 한미 양국

2008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생사의 경계를 오간 후 부분적으로 겨우 회복을 해 나가면서 사망하기까지 3년 동안 김정일은 3남을 속성 과정으로 후계자로 키우기 시작했다. 당뇨와 심장병 등 여러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김정일은 김정은과 함께 일주일에 수차례씩 공장농장, 특히 군부대 등에 대한 이른바 현장 지도를 계속했다. 김정일은 장남인 김정남에게 권력을 넘겨줄 것을 포기한 후 곧바로 김정은을 후계자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선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2011 1219일 김정일의 사망 발표에 따르면, 그는 이틀 전인 1217일 공장 또는 농장으로 현장 지도를 가던 중 전용 열차 안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 측에선 김정일이 줴기밥(주먹밥)을 먹고 쪽잠을 자면서 과로했기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 선전했지만 이는 당연히 사실이 아닐 것이다. 위성 관측 자료의 분석으로는 북한 방송에서 밝힌 시점에 해당 열차의 이동은 확인되지 않았다.

 

사실은 김정일이 이동 중인 열차 안이 아니라 자신의 여러 비밀 저택 중 한 곳에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주민들에게 그들의 지도자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선전하기 위해 사망 장소를 그렇게 밝힌 것이라는 분석이다.

접근하기 어려운 북한 내부 정보

김정일의 사망 발표 후 서울과 워싱턴에서는 왜 한국과 미국의 정보기관 모두 김정일의 사망 사실을 이틀이나 지나 북한 측의 공식 발표를 듣고서야 알게 되었는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다. 정보활동 실패가 아니냐는 비판이었다. 정보당국에서는 북한 주민들과 중국북한 접경 지역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휴대폰 통화 내용 감청을 통해 북한 내부의 사정을 파악해 왔다. 그럼에도 김정일의 사망 사실을 공식 발표 때까지 몰랐던 것은 그만큼 북한의 내부 통제가 높은 수준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었다.

 

해외 정보기관들에도 김정일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놀라운 사건임이 분명했다. 이들 역시 평양 내부의 사정과 권력 엘리트들에 대한 정보에는 접근이 어려웠다. 정보라는 측면에서 북한은 언제나 블랙박스와 같다. 김정일은 사망일 바로 하루 전인 1216일 김정은과 장성택을 대동하고 새로 문을 연 백화점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모습의 사진이 공개됐는데 이것이 김정일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철저히 기획되고 연출된 지도자의 장례식

북한은 김정일 사망 사실을 왜 이틀이 지나 발표했을까. 다른 여러 의문들과 마찬가지로 이 문제 역시 아직 답을 알 수 없다. 사망 발표가 지연된 가장 가능성 있는 이유로는 김정일 시신 공개 등 장례 절차 준비를 위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일 거라는 추측이 있다.

 

김정일 사망 후 열흘이 지나 군부 원로당 지도부각료 및 고위 관리들이 김정일 시신이 들어 있는 유리관 앞에 조의를 표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김정일의 시신은 러시아로 보내져 그곳의 과학자들에 의해 아버지 김일성의 경우처럼 방부 처리를 한 후 대동강변 금수산 기념관에 안치됐다.

 

한국 방송을 통해 김정일의 장례식을 지켜본 도널드 커크 기자는 장례 행렬을 따라 도로를 가득 메우고 오열하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이 김일성 장례식 때 보다 정도가 더한 것으로 보였다고 한다. 커크는 1994 7월 김일성 장례식 당시에도 서울에서 방송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는데, 17 5개월이 지난 시점에 그 아들의 장례식에서 주민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슬퍼하는 분위기는 이전의 기억을 되살리기에 충분했다. 누구였는지 몰라도 김정일 장례식의 총감독은 세부적인 부분까지 김일성 장례식 때와 같은 각본에 따라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두 장례식 사이에는 주목할 만한 차이가 있었다. 1994 7월의 경우, 청명한 날씨에 장례 행렬이 지나는 도로변 가로수가 모두 짙푸른 색을 띠고 있었다. 또한 길가에서 지도자의 마지막 길을 보며 오열하는 북한 주민들은 대부분 반팔 셔츠 차림이었다. 이들은 마치 헐리우드 영화의 엑스트라들처럼 조선중앙TV 감독의 큐 사인에 따라 움직이듯 일제히 통곡하며 슬픔을 표현하려 애쓰고 있었다.

 

[77] 정권 잡은 김정은 ‘리영호 1호 숙청’… 선군정치 강화

김일성 100회 생일 맞아 대규모 軍열병식 열고 새 지도자로 등장
2010년 천안함 폭침‧2011년 연평도 포격… 대남 도발 의지 과시

김일성과 김정일 장례식의 차이

 

김일성과 김정일의 장례식에서 나타난 가장 뚜렷한 차이는 후계자의 모습이었다. 김일성의 장례식에서는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김정일이 운구차에 관이 실려 출발할 때 등을 제외하고는 중계 화면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북한 주민들 입장에서는 과연 김정일이 정말 권력을 이어받은 게 맞는지, 그가 진정한 후계자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장례식 전 과정에서 김정일의 개입이나 존재감은 없었다.

 

김정일이 김일성 사후 후계자로 공식 확인되기까지는 3년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됐다. 당시 이에 대해 효자는 아버지의 3년상을 치른다는 것을 보이려는 것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던 김정일은 3년이 지나고 권력의 중심에 다시 등장해 역사상 최악의 기근을 겪고 있는 북한의 통치자 역할을 맡았다.

 

그렇다면 왜, 어떻게 김정일의 3남이며 20대 후반에 불과한 김정은이 갑작스럽게 북한 전체를 통치하는 지도자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일까. 가장 그럴듯한 이유는 정권의 안보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일은 자신이 김일성 사후 권력을 세습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974년부터 최고 지도자로서의 수업을 받았다. 그동안 김정일 주변에는 그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거나 권력을 빼앗으려고 할 만한 군부 원로들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김정일은 김일성이 사망하기 10년 전부터 자신의 아버지가 명목상의 지도자로 남아 있는 동안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로 군림해 왔다.

김정일 때와는 다른 김정은의 권력 계승

하지만 30세도 채 되지 않은 김정은은 스위스 유학을 중단하고 갑자기 북한의 최고 권력 서열로 뛰어올랐다. 그가 김일성대학 및 김일성군사대학에서 컴퓨터물리군사과학 등을 공부했다고는 하지만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설령 김정은이 엄격한 고등교육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김정일의 비밀 저택이나 개인 사무실 등에 개인교수를 불러 배우는 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어쨌든 김정은과 함께 공부했다거나 그를 개인적으로 가르쳤다는 사람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게다가 김정은은 실제로 어떠한 특정한 일을 했던 경력도 없었다. 김정일이 갑작스럽게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3 4개월 동안 북한 정권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 이어지기 전까지 김정은의 행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993년부터 2008년까지 김정일을 수차례 치료했던 프랑스 신경외과 의사 프랑스와 자비에 루 박사는 당시 병실에 들어갔을 때 환자가 김 위원장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았다. 그는 생명이 위독한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이후 김정일은 극적으로 의식을 되찾았고 루 박사는 열흘간 평양에 머물다가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는 김정일의 미래가 걱정되곤 했는데 당시 막내아들 김정은이 자주 아버지를 찾아와 병상을 지키곤 했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 북한은 2012년 4월15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김일성 주석 100회 생일 경축 대규모 열병식을 열었다.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김정은의 권력 세습을 위한 김정일의 배려

김정일이 최우선시한 것은 자신이 선대 김일성으로부터 권력을 세습해 최고 지도자가 됐듯이 김정은도 그렇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북한 매스컴에서 내보내는 김정일과 김정은이 함께 공장농장군부대를 시찰하는 모습은 일상적인 것이 됐다.

 

그렇다면 장성택의 위치는 무엇이었을까. 김정일 사망 후 한 달 만에 장례식 운구 행렬에서 김정은장성택과 함께 운구차를 호위했던 네 명의 장군은 모두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 주민들은 김정은과 장성택, 또는 다른 누군가를 북한의 실제 지도자라고 여기고 있었을지 분명치 않다.

 

당시 누가 실권을 잡고 있었든 간에 김정은은 그만한 힘과 지식을 갖고 있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학 생활 덕분에 영어독일어, 어쩌면 프랑스어까지 구사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김정은이 처음 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당시에 비해 살만 더 찐 모습 등을 고려해 볼 때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 말이다.

 

김정은의 주변 인물들은 하나같이 아부만 할 줄 아는 무능력자들로 보인다. 김정은의 집권 초기엔 장기간 이어진 경제위기와 기근 및 질병으로 악화된 민심을 휘어잡을 권력구조 확보가 시급할 수밖에 없었다. 김정은으로서는 혼란한 내부 상황을 정리하는 방안으로 핵과 미사일 실험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확보하는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는 화해라는 수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충성심이 불확실한 권력 엘리트들을 힘으로 굴복시키는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

수포로 돌아간 미국과 북한 간 윤년 합의

2012 413일 북한이 대포동2호 미사일을 발사함으로써 햇볕정책을 통해 북한에 자금을 지원한 결과가 실패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 버렸다. 불과 6주 전인 2012 229일 미국 측 협상 대표 글렌 데이비스는 북한 대표 김계관과 북한이 핵과 미사일 실험을 중단할 것을 선언하면 미국이 식량을 지원한다는 내용의 이른바 윤년 합의에 서명했다. 하지만 북한이 발사한 미사일이 서해에 떨어지면서 북한은 다시 한번 불량 국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정보기관들의 분석 결과 미사일 실험이 실패했다는 평가에도 북한은 김일성100회 생일(태양절)을 맞은 그해 415일 대규모 군 열병식을 통해 김정은 시대의 개막을 대내외에 알렸다. 이날 행사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은 열병식을 축하하는 연설을 20분가량 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이후 북한의 새 지도자로 등장한 김정은 제1위원장이 공개 행사에서 연설하는 모습이 공개된 것은 처음이었다. 김정은은 연설에서 나는 성스러운 선군 혁명의 길에서 언제나 동지들과 생사 운명을 함께하는 전우가 될 것이며 김정일 동지의 유훈을 받들어 조국과 혁명 앞에 지닌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집권 세력의 물밑 권력투쟁과 선군정치

이 시기 북한에서는 이미 집권 세력 내부의 권력투쟁이 물밑에서 진행 중이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당시 북한의 군 최고책임자 리영호가 전격 숙청되었다는 소문이 확산하고 있었다. 리영호는 김정일의 장례식 운구차를 호위하던 이들 중 김정은 바로 뒤에 있던 사람이다. 그렇게 막강하던 리영호가 실각한 것은 장례식 후 7개월 만에 조선중앙통신에서 노동당 내 모든 직위에서 물러난다고 짤막히 보도함으로써 확실해졌다. 보도에서는 리영호의 실각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았지만 장성택과 그의 아내 김경희가 선군 경제 강화를 목적으로 군부 개혁을 위해 리영호를 몰아낸 것으로 추정됐다.

 

같은 시기 김정은은 선군정치를 강조하고 나섰다. 북한 권력은 대를 이어 군사력 투자에 집중한 결과 110120, 어쩌면 130만 명에 이르는 군사력을 보유함으로써 중국인도미국에 이은 군사 대국으로 이미 러시아의 군사력 규모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김정은이 지도자로 등극하기 전인 2010년 천안함 폭침 및 2011년 연평도 포격 등으로 북한은 이미 그의 배짱을 시험하고 도발 의지를 과시했다. 나아가 김정은은 핵무기 실험에 성공함으로써 가장 큰 목표를 이루려는 야망을 드러냈다. 2012 120일 북한의 선전용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는 과거 핵실험을 통해 북한의 적대 국가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는 김정은의 발언을 전했다.

 

[78] DJ ‘기만의 삶’… 생전 마지막 인터뷰도 거짓말

2009년 8월 BBC 기자 만나 “北에 돈 준 일 없다” 뻔뻔한 부인
한국 해 위험은 아랑곳하지 않고 노벨상 수상 탐욕에만 골몰

김정은 로켓 발사 성공으로 권력 강화

 

김정일 사망 후 거의 1년이 지난 2012 1212일 김정은을 크게 고무시키는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날 김정은은 북한의 서해우주센터에서 실시된 은하 로켓 발사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위성탑재 로켓이 발사되자 미국 콜로라도의 북미우주항공방위사령부는 즉각 로켓의 움직임을 추적해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미국의 미사일 경고 시스템 추적 결과 미 동부 시간 오후 749분 발사했다. 표면적으로 미사일이 우주 궤도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이 로켓 발사 성공은 김정은의 권력 강화로 이어질 것이 분명했다. 김정은은 이와 관련해 우리 과학자와 기술자 그리고 우수한 관계자들에 의한 발사 성공에 대해 지대한 만족을 표한다. 조국의 과학기술경제 발전을 위해 앞으로도 위성 발사를 계속할 것이다고 밝혔다.

 

김정은은 2013 212 3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미국일본중국 모두 5.1킬로톤(kt) 규모의 지하 폭발 사실을 감지한 반면 이후 두 달이 지날 때까지 방사능 가스 배출은 확인하지 못했다. 정보 위성이 북한의 미사일 발사 위협에 대한 감시를 진행하는 동안 북한은 노동신문 사설을 통해 우리의 핵 무력은 날로 흉폭해지고 있는 미 제국주의자들의 핵 위협으로부터 조국을 지키는 정의의 칼이 될 것이며 우리의 주권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핵 무력을 질적양적으로 빠르게 강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는 동안 북한은 핵탄두를 장거리 미사일에 탑재 가능한 정도로 소형화시키는 4차 핵실험 준비를 계속한 것이 확실시된다.

 

북한 핵 문제는 항상 중요한 문제로 자리 잡아 왔다. 김정일 사망 11일 후 장례식이 치러진 1228일 노동신문 사설은 김정일 총사령관의 혁명적 유산이라는 제목으로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3대 유산에 대해 설명했다.

 

그 첫째는 핵 프로그램과 위성으로 1998년과 2009년 두 번에 걸쳐 위성을 우주 궤도에 진입시킨 사례를 예로 들었다. 다음 유산으로는 새로운 세기를 위한 산업혁명으로 북한의 정보기술(IT) 발전을 들었으며, 마지막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조국의 정신력을 들었는데 이에 대해 노동신문 사설은 핵 무력의 존엄과 동반할 수 있는 위성의 개발과 발사를 통한 민족적 자존심이라고 주장했다.

북한 핵 문제 부상은 노무현정부 때

북한이 자신들의 핵무기 능력을 세상에 처음으로 드러낸 것은 노무현정부 때이다. 당시 노무현정부는 김대중(DJ)의 햇볕정책을 이름만 평화번영정책으로 바꿔 계속 승계하고 있었다.

 

2006 109, 6자회담이 아무런 진전 없이 지지부진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북한은 저 멀리 함경도 오지 지하 깊숙한 곳에서 핵폭발 실험을 강행했다. 하지만 폭발 규모가 1~2kt에 불과하여 이 실험은 실패한 것으로 평가됐다. 이로써 김대중의 햇볕정책은 조종을 울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2009 525일 실시된 두 번째 핵실험은 첫 번째보다 약 4배나 큰 규모로 폭발했다. 이번에는 농축 우라늄이 아니라 플루토늄 핵폭탄이었다.

이명박정부, ‘햇볕정책 포기를 선언

북한이 두 차례 핵실험을 감행하던 약 2년 반 동안 한반도 주변에서는 많은 일이 벌어졌다. 2008 225일 노무현정부에 이어 이명박정부가 들어섰다. 이명박 정부는 명시적으로 햇볕정책의 포기를 선언했다. 북한에 대한 대량의 식량과 비료 제공도 끊었다. 또한 2008 8월 금강산에서 북한 경비병의 총격에 남한의 중년 여성 관광객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자 금강산 관광 역시 중단시켰다. 정부 당국에선 북한이 이 비극적인 사건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할 때까지 금강산 여행 허가를 내주지 않기로 했다. 북한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였다.

 

앞서 2007 104일 김정일이 노무현 대통령을 평양으로 초청해 두 번째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노무현은 판문점에서 자신의 두 발로 직접 남북 분계선을 넘는 퍼포먼스를 보였다. 하지만 두 번째 남북정상회담도 만남 자체의 의미만 있었을 뿐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 남북 정상의 만남에 얼마나 많은 댓가가 지불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하지만 김정일이 노무현을 공짜로 초청해 줬을 리는 만무할 것이다.

지지부진흐지부지 ‘6자회담

북한의 핵 프로그램 중단을 위한 목적으로 노무현정부 출범 후 시작된 6자회담은 이미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당초 6자회담은 미국중국일본러시아, 그리고 남북한이 참여해 시작됐지만 그동안 이렇다 할 의미도 없는 합의를 도출하느라 시간만 끌었다. 2007 11, 미국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사실상 6자회담의 전망은 어두워졌다. 오바마정부는 전략적 인내라고 이름 붙인 한반도 정책을 내놓았다. 이름은 거창하고 듣기에는 좋았지만, 실상을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을 뿐이다. 6자회담은 끝내 지지부진하다가 흐지부지하게 되고 말았다.

 

한반도 주변 상황이 변하는 동안에도 북한의 김정일은 여전히 벼랑 끝 전술을 버리지 않고 핵보유국으로 남아 있기를 고집했다. 또한 북한은 미 서부 지역뿐 아니라 대륙을 횡단해 수도 워싱턴까지 쑥대밭을 만들 수 있다며 핵미사일 개발 위협을 계속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적으로 여기는 국가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김정일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지고 뇌출혈로 쓰러져 몇 달 동안이나 잠적하는 일이 벌어졌다.

북한에 현금 지원 사실 끝까지 부인한 DJ

다시 이야기를 서울로 돌려 보자. 2009 8, 영국 BBC 방송과 가진 생애 마지막 인터뷰에서 DJ 2000년 남북정상회담 개최 의혹에 대해 이전보다 강한 어조로 의혹을 부인했다.

 

한국 정부는 북한에 현금을 준 일이 결코 없다. 돈이 전달된 것은 민간기업에서 사업 목적으로 투자와 위험을 피하려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정부는 식량과 비료만을 지원했다. 식량과 비료로 핵무기를 만들 수 있나?”

 

그는 또한 정상회담의 성과가 없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부인했다.

 

남과 북으로 분단돼 적대시하던 오랜 적이 만나 다시 손을 맞잡고 북한 주민들의 생명을 위해 도운 것 자체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요설과 허위, 기만으로 점철된 DJ의 인생

DJ는 한평생 요설과 사기, 허위와 기만으로 점철된 비루한 삶을 살다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도 거짓말만 남겨 놓고 떠난 것이다.

 

노벨평화상은 DJ를 세계적인 위대한 지도자의 반열에 올려놓는 영광의 징표가 됐을는지 모른다. 그가 어떤 연유로 노벨상의 영광을 꿈꾸게 됐는지, 그 열망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그는 자신의 열망인 노벨상 수상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국민과 국가, 그리고 동북아시아 지역과 전 세계를 핵 위험에 빠뜨린 것이다. DJ가 불법적으로 북한에 제공한 자금은 결국 한국일본동북아 전체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미국까지 핵 공포에 사로잡히게 만들 수 있는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는 데 쓰였기 때문이다.

 

[79] 지금이라도 北에 핵 선물한 반역자 처단해야

DJ가 실제로 김정일에게 바친 돈은 15억 달러 아닌 30억 달러
박지원 국정원장 청문회 때 ‘5억+25억 달러’ 합의문 공개돼

세계 9번째 핵보유국이 된 북한

 

북한 국영 언론이 선언한 것처럼 자체 핵 프로그램 개발로 북한은 세계 9번째 핵보유국이 됐다. 방송은 그것이 김정일의 위대한 유산이라고 선전한다. 김대중(DJ)이 평양에 찾아가 정상회담을 갖고 그 덕분에 노벨상까지 수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북한이 핵보유국이 된 것은 한국 정부가 불법으로 갖다 바친 수십억 달러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DJ는 자신이 한반도 평화통일의 시금석을 마련한 것으로 믿었을지 모르지만 그는 한반도 비핵화의 꿈을 송두리째 말아먹은 것이다.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조국의 안위와 이익을 팔아먹은 것이다.

 

DJ는 노벨평화상이 아니라 노벨물리학상을 탔어야 했다. 그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에너지 입자인 햇볕을 이용하여 핵무기를 만드는 리버스 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역공학)’의 방법을 고안해 냈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논란의 요소를 품은 노벨상

노벨상은 본질적으로 논란의 요소를 갖고 있다. 의학이나 수학 등 과학 분야의 상에서는 새로운 개념을 처음으로 정립한 사람의 업적을 인정하는 것으로 비교적 잘 정의되고 판별된다. 이에 비해 문학상은 국가적민족적 시각과 언어적 차이에 따라, 심지어는 같은 언어로 쓰인 작품들 중에서도 어느 작품이 더 우수한지 결정하는 것에 논란의 소지가 많다.

 

그러나 아무리 경쟁이 심하고 수상자 결정에서 주관적 요소가 개입됐다고 하더라도 노벨상 중에서 평화상만큼 논란이 많은 부문은 없다. 또한 논란이 된 평화상 결정 과정에서 누구보다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동시에 외부의 영향을 받은 인물을 꼽자면 노르웨이의 군나르 스톨셋 주교만 한 사람이 없다.

 

그는 198590, 19942003년의 오랜 기간 노벨상 위원으로 재임했으며, 특히 DJ의 노벨상 수상 결정에도 직접 참여했다. 그의 정치적 편향성은 여러 결정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DJ와 스톨셋 주교의 편향적 사고

DJ는 퇴임 후 자신의 햇볕정책을 좌절시킨 미국의 조지 부시 정부를 비난하면서도, 김정일의 독재체제는 단 한 번도 비난한 적이 없다. 이와 비슷하게 스톨셋은 한미동맹이 북한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을 하면서도, 북한의 강제 수용소, 한국전쟁 이후 강제 납북자들의 송환 문제 등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의 좌시하지 않겠다는 경고에도 필자들은 노벨평화상 선정 과정에서 로비의 영향과 관련된 내용들을 정리했으며, 이는 단지 스톨셋 주교만이 아니라 노벨상위원회 전체에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 하태경 당시 미래통합당 의원이 2020년 7월27일 국회 정보위원회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남북합의서에 서명된 박 후보자의 서명과 봉하마을 방명록과 4·19민주묘지 방명록에 남긴 서명을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는 DJ의 노벨상 공작 스토리가 그 과정에서 로비에 굴복하고 추종했던 이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스톨셋 주교 같은 인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미 누구보다 오랜 기간 노벨상위원회에서 일했음에도 2011년 몸이 아픈 위원을 대신하여 또다시 위원회에 들어옴으로써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한영우, 박근혜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 언급

이와 함께 우리는 스웨덴 교포인 의사 한영우 박사에게도 깊은 유감을 표하고 싶다. 한 박사는 2011년 한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여성 정치인이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가 언급한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자 2012년 대선에서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노벨상과 상관없이 우리에게는 박근혜 대통령이 DJ의 족적을 따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어느 정도 희망적이었다. 적어도 그는 노벨상 수상을 위해 국정원외교부 등을 포함한 정부의 자원을 이용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박근혜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주변 국가들에서는 지도자가 모두 교체되는 변화를 겪었다. 우선 북한에서는 2011 12월 김정일 사망 후 곧이어 그의 3남 김정은이 북한의 최고지도자 자리에 올랐다. 중국에서는 2013 3월 후진타오에 이어 시진핑이 국가주석이 되며 중국을 이끌게 됐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2006년부터 2007년까지 총리를 지낸 아베 신조가 다시 일본의 우파 정부 총리로 선출되었다. 이 모든 변화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각국의 새 지도부는 모두 제2차 세계대전 및 한국전쟁을 거친 상황에서 보수적 시각의 정책 기조를 견지하고 있었다. 이들이 무엇을 하든 DJ 시대 햇볕정책의 유산과 경쟁을 하는 결과가 될 것이 분명했다. DJ는 노벨상 수상을 위해 북한에 현금을 쏟아 부었고, 이는 북한 독재체제의 생명을 연장시켰을 뿐 아니라 핵과 미사일이라는 무기가 되어 돌아왔다. DJ의 호의는 한반도동북아, 나아가 전 세계를 핵 공포에 몰아넣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 역시 이에 대한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DJ가 실제로 김정일에게 건넨 것은 30억 달러

마지막으로 이 연재 글에 실린 정보 중 오류가 있어 바로잡고자 한다.

 

필자는 DJ가 김정일에게 미화 ‘15억 달러라는 뇌물을 주고 남북정상회담이라는 드라마를 매수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또한 이 금액이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뇌물 액수일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것은 허위정보였다. DJ가 실제 김정일에게 주기로 약속한 돈이 미화 30억 달러인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놀랍게도 필자가 당초 주장했던 것보다 정확하게 두 배나 큰 액수다.

 

국정원 재직 시, 2000 1월 김보현 전략국장이 자주 해외 출장을 떠나는 것을 보았다. 동료 직원들로부터 그가 해외에 나가 북쪽과 남북정상회담을 논의하고 있다고 들었다. 북측이 “30억 달러를 요구하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저들이 그런 액수를 요구하는 근거는 김정일이 남측이 러시아와 수교할 때 준 것과 같은 금액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김정일의 요구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했고 우리 정부가 북측의 요구를 다 들어줬을 리 없다고 추론했다. 그 후 윤씨로부터 ‘15억 달러라는 수치를 듣고 절반으로 깎아서 거래한 줄로만 알았다.

 

필자는 2008년경 여러 기자에게 남북정상회담 과정에서 남북 간에 ‘30억 달러라는 뒷거래 얘기가 있었다는 것을 밝힌 적이 있으며 VOA를 비롯한 일부 언론들은 이를 기사화하기도 했다.

 

그런데 2020 7, 박지원 국정원장 인사청문회에서 야당 원내 대표가 박씨가 서명한 합의문 두 장을 내밀었다. 그 문서에는 5억 달러와 25억 달러, 합계 30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약속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제야 DJ가 애초 김정일이 제시한 30억 달러라는 금액을 그대로 전면 수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박지원은 그 자리에서 문서가 허위이고 서명이 가짜라면서, 자신이 관계기관에 고발하여 수사하도록 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이제까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문서를 공개한 측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그 두 페이지의 문서가 작금의 핵 위기의 뿌리가 어디인지를 설명해주고 있다고 믿는다. 반역의 증거가 명백히 드러났는데도 모른 척 방관한다면 대한민국은 존재할 이유도 가치도 없는 나라다.

 

김정은의 핵 위협은 실체가 있는 것이다. 못 본 척 외면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지금이라도 북한에 핵을 선물해 준 반역자들을 처단하는 일을 미루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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