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방산 신화를 만든 사람들]2 조선일보 2024
11.06
[11] K9 개발 주역 안병철 사장
발사 사고로 삽시간에 번진 불길… K9, 가슴에 동료 묻고 만들었다

▲지난 4일 서울 중구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본사에서 만난 안병철 전략부문 사장이 K9 자주포 모형을 두고 무기 개발 과정과 많은 나라에 수출을 성사시킨 비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지금 수출 시장에서는 무기의 성능은 기본이고, 판매한 무기를 앞으로 수십 년간 관리·수리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 장련성 기자
1997년 12월 충남 안흥시험장. 국방과학연구소(ADD) 강신천 선임연구원과 조기호 기술원, 삼성테크윈(현재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정동수 대리와 막내였던 안병철 대리(현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사장) 등 4명은 한창 K9 자주포(自走砲) 연속 발사 시험을 하고 있었다.
연속 사격 중 갑자기 포탄 발사가 뚝 멈췄다. 이상하게 생각한 것도 잠시, 탄이 들어가는 약실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삽시간에 뻘건 불길이 4~5평에 불과한 실내에 번졌다. 입구 쪽에 있던 안 사장을 비롯한 개발자들은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가 바닥에서 몸을 구르며 곳곳에 붙은 불을 껐다. 크고 작은 화상을 입었지만 생명엔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맨 안쪽 사수석에 있었던 30대 정동수 대리는 결국 극심한 화상으로 치료를 받다가 한 달 뒤 숨졌다.
K9 자주포는 당시 우리보다 5000문 이상 화포가 많았던 북한과의 격차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개발하는 신무기였다. 이 사고로 개발이 크게 지연될 것이란 우려가 확산했다. 하지만 이들은 약 4개월 만에 개발 현장에 복귀했다. ‘우리가 하지 않으면 전체 개발이 멈춘다’는 사명감이었다.
안 사장은 “동고동락했던 친한 형이 돌아가셔서 자주포를 타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지만 리더였던 강신천 박사님이 ‘헌신적으로 일했던 정동수 대리를 생각해서라도 우리가 이 일을 마쳐야 하지 않겠냐’고 다독여주셔서, 서로 손을 꼭 잡고 다시 해보자고 다짐을 했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만든 K9 자주포는 해외 9국에 지금까지 약 105억달러(약 14조4800억원)어치가 수출됐다. 단일 무기로 우리 방위산업이 해외에서 올린 가장 큰 성과다.

▲그래픽=양인성
자주포는 차량 등 다른 기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이동(自走)’해 사격할 수 있는 포(砲)를 뜻한다. 흔히 탱크(Tank)로 부르는 전차가 직접 적(敵) 진지까지 돌파해 공격하는 것과 달리 수십km 떨어진 곳에서 ‘움직이는 대포’ 역할을 한다. 하지만 1990년대 초 기준 우리 군의 화포는 병사들이 끌고 이동을 시켜야 했던 견인 방식이 많았다. 숫자도 적고 적의 공격을 빠르게 피하기도 어려웠다. 미국 기술을 이전받아 만든 자주포가 있었지만 사정거리가 25km 남짓으로 짧았다. 그래서 우리 군은 고(故) 김동수 ADD 본부장(당시 자주포 체계팀장) 지휘 아래 우리 고유 자주포 개발에 착수했다.
하지만 개발 과정도, 수출도 어느 것 하나 녹록지 않았다. 지난 4일 서울 중구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본사에서 만난 안병철(56) 전략부문 사장을 통해 그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는 삼성항공에서 한화에어로스페이스까지 약 34년간 방위산업에 종사했다. 엔지니어 출신으로 경영자까지 됐다. 입사 직후부터 K9 개발에 투입되는 등 24년을 K9 관련 업무를 맡았다.

▲K9 자주포.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인명 사고와 엔진 실패 넘어서
K9 자주포는 무게가 47톤(t)이고, 최고 시속 67km로 달린다. 1990년대 초 이런 성능을 내게 하는 동력 장치를 만드는 게 가장 큰 관건이었다고 한다. 국내에선 기술이 없어 개발팀은 초기에는 미국의 850마력짜리 엔진을 가져다 썼다. 하지만 몇 년간 시험 끝에 결국 실패했다. 9600km까지 달릴 수 있는 내구성을 갖춰야 하는데 번번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엔진이 망가지거나, 꺼지기 일쑤였다. 결국 독일의 1000마력짜리 MTU 엔진으로 바꿔서 원점에서 다시 개발을 시작했다. 안 사장은 “실패였어도 동력 장치에 대한 경험을 쌓았기에 독일 엔진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라며 “포기하지 않고 빠르게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 것이 잘한 결정이었다”고 했다.
개발 막바지 눈길에서의 기동이 원활한지 테스트해야 하는데, 1998년 겨울에 눈이 충분히 오지 않아 스키장에서 테스트한 것도 유명한 일화다. 1999년 3월 초 강원 홍천의 대명 비발디 스키장에 부탁해 손님이 없는 밤 11시부터 새벽 5시까지 야간 조명을 켜고 기동훈련을 했다고 한다.
K9은 2001년 튀르키예를 시작으로 폴란드(2014년), 핀란드·인도·노르웨이(2017년), 에스토니아(2018년), 호주(2021년), 이집트(2022년), 루마니아(2024년) 등 9국에 수출됐다. 어느 한순간도 녹록지 않았다고 한다.
2013년 인도 수출 때는 러시아와 일대일 승부를 벌였다. 당시 인도 라자스탄 사막에서 테스트가 실시됐는데, 인도군 장교 지시로 높은 언덕을 오르다 자주포의 궤도(차량 바퀴를 감고 있는 일종의 체인)가 빠져버리는 일이 생겼다. 24시간 내 정해진 거리를 주파해야 하는 시험이었다.

▲지난 4일 서울 중구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본사에서 만난 안병철 전략부문 사장이 K9 자주포 모형을 들고 무기 개발 과정과 많은 나라에 수출을 성사시킨 비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지금 수출 시장에서는 무기의 성능은 기본이고, 판매한 무기를 앞으로 수십 년간 관리·수리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장련성 기자
시간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안 사장 등 직원 5명은 2톤짜리 궤도를 바퀴에서 빼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도구 하나 없어 망치 하나로 5명이 돌아가면서 밤새 연결 부위를 해체해 궤도를 다시 장착시켰다. 안 사장은 “자주포 뒤편 안테나에 러시아는 자기 나라 국기 달고 테스트하는데, 우리는 인도 국기를 달아 조금이라도 더 마음을 사려고 노력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2001년 튀르키예에 자주포를 수출할 때는, 테스트 중 튀르키예 군인들의 사용 실수로 포탄 자동 공급 장치가 부서지는 일도 있었다. 튀르키예 군인들은 당시 “두 달은 시험 못 하겠다”고 했는데, 당시 안 사장은 사고 발생 후 30시간 만에 현지에 부품을 갖고 도착해 현지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안 사장은 “그들을 놀라게 할 정도의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같은 유럽의 제품을 사지, 바다 건너 나라의 무기를 사지 않는다”면서 “기술과 성능, 가성비는 기본이고, 판매한 무기를 앞으로 수십 년간 관리, 수리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게 핵심”이라고 했다.
◇무기도 고객 목소리 들어야
한화는 또 2022년 이후 매년 노르웨이와 핀란드 등 K9을 쓰는 나라들과 ‘K9 유저(user) 클럽’도 만들었다. K9을 써본 여러 나라의 군 관계자들이 매년 한자리에 모여 경험과 정비, 교육 노하우 등을 공유하는 것이다. 무기 역시 일반 제품과 마찬가지로 고객들의 생생한 의견을 경청하는 것이 필수라는 점에서 착안한 것이다. K9을 사용하는 각국의 군 관계자들도 미처 몰랐던 자주포 활용 방식을 배워가기도 하고, 한화는 이 자리를 빌려 실제 고객의 사용 후기를 접한다고 한다.
안 사장은 “우리가 비전을 갖고 무기를 계속 업그레이드하고 관리한다는 걸 고객들에게 알리는 효과도 생기고, 이들이 또 우리 무기의 경쟁력을 다른 나라에 자연스럽게 소개하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다연장로켓 천무나 장갑차 레드백 등 해외로 수출하는 우리 제품이 많아질수록 이런 유저 클럽을 계속 늘려갈 생각”이라고 했다. 안 사장은 “우리 무기에 문제가 있으면 한화가 욕먹고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가 욕먹는다는 점을 직원들에게 강조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김동관 한화 부회장이 직접 나서 “방위산업에서만큼은 우리가 국가대표”라며 많은 격려를 해줬다.
K9은 지난 9월에는 마침내 엔진 국산화에도 성공했다. 핵심 기술인 엔진까지 스스로 만들면서 국산화율을 86%로 높였다. 우리 고유 기술 자주포의 마지막 퍼즐을 완성한 셈이다. 우리 군과 한화는 K9의 무인화에도 도전한다. 현재 5명이 탑승하는데 성능 업그레이드로 포탄 발사 과정의 자동화율을 높여 탑승자를 3명으로 줄이고, 궁극적으로는 무인 운용을 하는 게 목표다.
안 사장은 K방산이 해외에서 올리는 성과는 누구 하나의 공이 아니라 우리 방위산업 생태계 전체가 성장한 결과라고 했다. 그는 “방위산업 수출은 결국 ‘국가 대 국가’의 거래이기 때문에, 기술을 개발하는 ADD와 기업뿐만 아니라 국방부, 방위사업청 등 정부와 우리 군 모두가 늘 한 팀처럼 움직이고 있다”고 했다.
☞K9 자주포
K9 자주포는 현대화된 중형 155㎜ 자주포 시장에서 시장점유율 1위(36%)다. 시속 67㎞로 이동할 수 있고, 약 40㎞ 떨어진 곳에서 적을 타격할 수 있다. 1998년 국방과학연구소와 국내 방산기업이 개발했다. 여름에 무덥고 겨울에 추운 한국의 혹독한 기후, 산악 지형부터 평원 등 다양한 운용 환경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
2001년 튀르키예 수출을 시작으로 올해 루마니아까지 총 9국에 수출됐다. 현재 탄약·장약을 자동으로 장전할 수 있는 개량형 K9A2 자주포로 미 육군의 차세대 자주포 도입 사업에서 독일·영국·미국·이스라엘 방산 기업과 경쟁하고 있다.
[12] 한화오션 'K잠수함 장인' 정한구 현장 최고 감독자
30년 전 기술자 150명 'U보트' 독일 조선소로… K잠수함 역사 시작됐다

▲잠수함은 프로펠러 주변에서 압력 차이 때문에 공기 방울(기포)이 생기고, 이 기포들이 터지면서 소음이 만들어진다. 프로펠러 구조를 알면 기포가 발생하는 형태, 더 나아가 소음까지 유추할 수 있어 철저히 대외비로 유지된다. 지난 11일 한화오션 서울 남대문사무소에서 만난 정한구 기원(생산직 최고 감독자 직급)이 본지 인터뷰 도중 이 회사가 건조한 잠수함 모형 앞에서 “모형이라도 프로펠러는 노출돼선 안 된다”고 했다. /김지호 기자
1991년 대우조선공업(현 한화오션)의 정한구 기능사원은 이름도 생소한 독일 북부 도시 킬(Kiel)에 도착했다. 이 도시는 ‘2차 세계대전’의 전설로 불리던 잠수함 ‘U보트’를 건조한 하데베(HDW) 조선소가 있는 곳이다. 동료들과 도착해, 독일어라고는 벼락치기로 배워 인사말 몇 마디 할 줄 알던 그는 잠수함 공정 기술 훈련에 투입됐다. 1980년대 북한의 잠수함 전력에 위기를 느낀 정부가 독일의 잠수함 기술을 바닥부터 배우자며 보낸 이들이었다. 이 시기에 하데베 조선소에서 정씨처럼 잠수함 기술을 배운 한국 기술자가 150명에 이르렀다. 정씨가 맡은 파트는 잠수함 핵심 장비 소나(sonar·음파탐지기)에서 이어지는 수백 가닥 케이블 설치 작업이었다.
지난 11일 한화오션 서울 남대문사무소에서 만난 정한구(59) 기원(技員·생산직 최고 감독자 직급)은 “시속 200km로 달리는 아우토반보다 킬조선소에서 처음 본 복잡한 잠수함 구조가 몇 배는 더 충격적이었다”고 했다. 창원기계공고 전기과 졸업 후 1983년 당시 선망받는 직장인 조선소에 취업했던 정 기원의 인생은 그 후 잠수함 케이블로 이어졌다. 잠수함에서 소나를 중심으로 뻗어나오는 케이블만 약 600가닥, 평균 길이는 20m에 달한다. 늘어놓으면 12km에 달해, 장보고급 잠수함(길이 56m)을 107번 왕복할 수 있다.
케이블을 오가는 정보는 수만 개에 달한다고 한다. 잠수함의 ‘실핏줄’인 셈이다. 수천 개의 표적을 동시에 탐지하고, 위험도가 높은 수십 개 표적에 대해선 위치, 방향, 속력 등 세부 정보까지 확보한다. 센서·무장·통신·항해 체계가 합쳐진 전투 체계에서 이 정보들을 빠르게 처리하고 적 위치를 파악해야 선제 타격에 나설 수 있다.
정 기원은 이후 독일에서 한국 첫 수입 잠수함으로 생산된 1번함 장보고함 건조에 참여했고, 국내로 돌아와 2번함 이천함 건조에도 참여했다. 이후 잠수함 총 9척 건조 작업에 참여했다. 국내 잠수함 총 21척 중 거의 절반에 그가 엎드린 채 손 한 뼘 겨우 닿아 설치한 케이블이 깔렸다. 잠수함 도전 약 30년 만에 세계 8번째로 3000t급 잠수함을 독자 설계·건조한 ‘K잠수함’처럼, K방산의 전례 없는 도약에는 수십, 수백 명의 ‘정 기능사원’의 땀이 있었다.
◇잠수함 100번 왕복하는 ‘실핏줄’ 케이블
독일 킬조선소에서 정 기원에게 주어진 시간은 6개월이었다. 정 기원은 “독일 기술자들은 도면과 서류만 보여줬지 정작 중요한 케이블을 설치하는 구체적인 노하우는 제대로 보여주지도 않았다”며 “하루 두 시간 정도 현장에서 그들이 일하는 방식을 어깨너머로 볼 수 있었는데, 이때 죽어라고 보면서 손끝 동작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던 시절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하나라도 더 물어보기 위한 고육책 중 하나가 ‘도시락 하나 더 만들기’였다. 독일인 동료에게 질문하려 해도 일과 중에 좀처럼 틈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독일인 동료를 위한 샌드위치를 준비해 가서 ‘같이 먹자’고 한 뒤 그 시간을 이용해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배운 것이다.
현장에서 배울 때 독일 기술자들이 쉽게 포기해버리는 것조차 한국인들은 끝까지 물고 늘어져 해결해 냈던 적도 많았다.
“어떤 케이블은 지름 3cm 안에 가느다란 케이블 120가닥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고장이 나면 독일인들은 그냥 버립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너무 아까운 거예요. 한국에 돌아가면 우리는 ‘저걸 버릴 수도 없을 것’이라며 불량이 난 가닥을 찾아내 고치고 케이블을 되살리기도 했죠.” 정 기원의 회상이다.
▲그래픽=양진경
◇세계 8번째 3000t 잠수함 설계·건조
독일, 프랑스 등 잠수함 선진국의 기술 역사는 1860년대 후반 시작됐다. 한국보다 100년 넘게 빨랐다. 한국은 1980년대가 돼서야 독일 잠수정을 모방해 국산 잠수정을 처음 개발했고, 1990년 초 독일 하데베조선소에서 1200t급 잠수함을 처음 수입했다.
그러나 이후 세계 잠수함 역사에서 전례 없는 도약을 했다. 라이선스 방식이지만 한국에서 건조한 국산 1호 잠수함 이천함은 1999년 환태평양 군사훈련(림팩)에서 1만2000t급 미국 퇴역 순양함을 중어뢰 한 발로 격침했다. 당시 한 미국 언론은 “원 샷! 원 히트! 원 싱크!(One Shot! One Hit! One Sink!)”라고 보도했다. 한 번 쏴서, 한 번에 맞추고, 한 번에 격침시켰다는 뜻이다. 이 문구는 현재 해군 잠수함사령부의 전투 구호가 됐다.
독일 조선소에 각각 업무를 나눠 파견됐던 150인은 국내로 돌아와 역(逆)설계 방식으로 국산 잠수함 기술에 도전했다. 설계도면으로 잠수함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잠수함을 분해하면서 새로운 설계도를 그려내는 방식이다. 정 기원은 “1990년 초반 독일에는 동남아, 남미 여러 국가에서 한국과 비슷하게 잠수함 기술을 배우러 왔는데 그중 잠수함 독자 설계·건조를 달성한 곳은 한국이 유일하다”고 했다. 해군과 한화오션은 세계 8번째로 3000t급 중형 잠수함(도산안창호급) 독자 설계·건조를 달성한 데 이어 2021년 전력화에 성공했고, 세계 디젤 추진 잠수함 중 처음으로 SLBM(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도 탑재했다.
내년 정년퇴직을 앞둔 정 기원은 잠수함 건조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도구, 현장 후배들을 위한 매뉴얼을 만들고 있다. “잠수함 특성상 엎드리고 누워 일하는 건 피할 수 없지만 후배들이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으로 일하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했다. 그가 2010~2011년 개발한 소나 케이블 선행 작업 도구는 잠수함 내부에서 하는 작업을 줄여 작업 기간을 최대 일주일 당길 수 있다. 4년 전 개발한 레일(rail) 장비는 주전원 공급 장치 옆 60cm 공간에서 혼자서도 60kg에 달하는 장비를 손쉽게 옮길 수 있다. 그가 개발한 도구와 기술이 이제는 현장에선 표준이 됐다고 한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작년 조선 업계 최대 행사 ‘조선해양의 날’에서 우수조선해양인상도 받았다. 정 기원은 “현재 한국 잠수함의 기술력은 배관, 전장, 기장, 선체, 시운전 등 다양한 분야 조직에 저보다 뛰어난 실력자가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2024.11.26.
[13] KAI 시험비행 조종사 이동규
엔진 끄고, 급강하하고... 2000번의 극한 시험 끝 K-전투기가 탄생했다
▲지난 20일 오후 경남 사천 KAI 본사 내 활주로에서 이동규 수석 조종사가 초음속 전투기 ‘KF-21′을 타고 엄지를 치켜세우고 있다. /KAI
지난해 1월 17일 오후 2시 58분 경남 사천 공항. 순수 국산 기술로 만든 첫 초음속 전투기 ‘KF-21(보라매)’ 시제기(試製機) 1호가 남해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17분쯤 후 시제기는 고도 약 4만피트(1만2200m)를 비행하며 음속(마하 1.0·시속 1224㎞)을 돌파했다. 6개월간 80여 회 비행으로 조금씩 속도를 높여 초음속에 근접하다가 결국 처음으로 초음속 비행에 성공한 것이다. K전투기가 음속을 넘어선 역사적 순간이었다. 초음속 전투기는 아음속(음속 이하)보다 세밀한 동체 설계가 필요하고, 첨단 장비도 갖춰야 하는 만큼 개발 자체가 어렵다.
이날 조종간을 잡은 이는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소속 23년 경력 시험비행 조종사 이동규(57) 수석. 2001년부터 경공격기 ‘KA-1(훈련기 KT-1의 개량형)’, 초음속 고등 훈련기 ‘T-50’, 다목적 전투기 ‘FA-50’ 등을 2000회 이상 시험비행하며 K전투기 역사를 함께한 베테랑이다. 이 수석은 “작은 실수 하나도 용납되지 않는 게 시험비행이란 생각으로 조종간을 잡아왔다”며 “수조 원을 투자한 KF-21의 완벽을 위해 시험비행 전 시뮬레이터(비행 모의 장치)에서 수없이 연습을 거듭했다”고 했다.
▲2023년 1월 17일 한국형 전투기 KF-21 '보라매'가 초음속 비행하고 있다. /방위사업청
시험비행 조종사는 ‘일반 조종사는 할 필요도 없고 하지도 않는 비행’을 한다. 예컨대, 속도를 거의 ‘0′에 가깝게 줄여 동체가 균형을 잃게 한 후 다시 속도를 올렸을 때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 본다. 엔진이 과열돼 꺼야 하는 상황을 가정하고 공중에서 엔진을 껐다 켜기도 하고, 항공기를 지상 3000m 상공에서 순간적으로 150~300m까지 하강시켜 ‘자동 상승 장치’가 작동하는지 확인하기도 한다. 실제 전투 상황에서 비행기를 몰 조종사의 안전을 위해 스스로의 안전을 담보로 비행하는 셈이다. 하나의 전투기가 만들어지기까지 이런 시험비행을 2000번 넘게 거듭하고, 이들의 시험 결과는 고스란히 개발 과정에 반영돼 완성도를 높인다. 국산 훈련기·전투기를 독자 개발한 ‘하늘의 K방산’ 신화 뒤에는 이들의 위험을 무릅쓴 비행이 있었던 것이다.
◇전투기 개발 뒤엔 2000번 시험비행
20일 오후 경남 사천 KAI 본사에서 만난 이 수석은 이날 오전에도 시험비행을 하고 오는 길이었다. 마치 난기류에 빠진 것처럼 비행기에 인위적으로 진동을 주고, 기체가 잘 흡수하는지 확인했다고 한다. KF-21은 이런 시험비행을 2026년까지 총 2000여 회 거듭하게 된다.
1990년부터 공군 전투조종사로 근무한 이 수석은 2000년 시험비행 조종사 임무에 지원했다. 그는 “진급에 좋은 자리도, 인기 있는 자리도 아니었지만 비행기 개발 과정에 참여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후 1년간 영국 시험비행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항공기에 탑재되는 각종 전자 장비와 비행시험 기법을 배우고 훈련기·전투기·수송기 등 20여 종의 비행기를 하나하나 몰았다. 그는 “한 기종을 배우고 비행하고 분석하는 과정이 쉴 틈 없이 반복돼 매일 밤을 새워야 할 정도였다”고 했다.
▲KAI 격납고에서 정비 중인 KF-21 시제기. /KAI
이후 귀국해 공군 제52시험평가전대에서 시험비행을 하다 KAI로 옮긴 게 2005년. 전역 당시 민항기로 진로를 바꿀까도 고민했지만 “국가 지원으로 시험비행 조종사가 된 만큼 군용기 개발 업무를 계속하는 게 맞다고 봤다”고 했다. 이 수석은 “시험비행 조종사는 아무도 안 타본 비행기를 가장 먼저 타야 하기 때문에 지금도 최신 기술·기종이 나올 때마다 공부한다”고 했다. 미국 록히드마틴, 영국 BAE 같은 글로벌 방산 업체가 방문할 때면 따로 최신 전자 장비에 대한 설명을 구하기도 한다.
23년간 비행기의 각종 ‘처음’을 책임져 온 만큼 아찔한 순간도 많았다. 지난 2005년 5월 남해 상공에서 T-50 저고도 초음속 비행 시험을 할 때의 일이다. 낮은 고도에서 초음속은 기술적으로 더 어려운데 엔진 추력을 최대치로 높이는 과정에서 갑자기 엔진이 뚝 하고 멈췄다. 겨우 엔진 재시동에 성공해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
이 수석은 “내가 테스트 중 실수를 할까 걱정될 뿐 사고가 날까 봐 두려웠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그는 “개발 엔지니어부터 현장 정비사까지 동료들과 그들이 해온 작업을 절대적으로 믿기 때문에 20년 넘게 시험비행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무장 투하 시험 중인 KF-21. /KAI
◇한 달간 사막서 비행하며 세일즈도
KAI 시험비행 조종사는 개발자이자 영업맨이기도 하다. 그는 “개발 과정에서 조종석 디스플레이에 어떤 정보를 크게 보이게 할 지부터, 조종간의 민감도를 얼마나 높일지 등 조종사 입장에서 의견을 전달한다”고 했다. 2006년엔 사막의 한 국가로 날아가 한 달간 T-50을 몰았다. 당시 T-50 수출을 위해 공을 들이던 중동 국가에서 “사막기후에도 운용이 가능한지 테스트해 보고 싶다”고 요청해 옆좌석에 현지 공군을 태우고 비행했다.
이 수석은 “최종적으로 수출은 실패했고 어찌 보면 무리한 요구였지만 당시엔 첫 수출을 해내야 한다는 의지가 그만큼 컸다”고 했다. 외국에서 우리 항공기를 둘러보러 온 공군 관계자를 태울 땐 눈치껏 ‘이런 기능을 원하는구나’ 파악하고 KAI 개발팀에 전달해 주기도 한다.
가장 잊지 못할 순간 중 하나는 2013년 9월 인도네시아행이었다. 2011년 수출 계약을 맺은 ‘T-50’ 16대를 넉 달에 걸쳐 직접 비행해 인도했다. 일명 ‘페리’라고 불리는 납품 방식으로 “성능이 이만큼 좋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분해 후 화물기로 운송하는 대신 이 방식을 택했다. 사천 비행장에서 대만(중간 기착지), 인도네시아로 이어지는 항공길을 날아 도착한 순간 T-50에 대한 자부심은 더 커졌다.
▲20일 경남 사천 KAI 본사 내 활주로에서 이동규 수석조종사가 KF-21 시제1호기 앞에 서 있다. / KAI
이 수석은 KAI에서 은퇴할 때까지 시험비행을 계속하는 게 목표다. 그는 “우리나라가 KT-1부터 KF-21까지 쉬지 않고 항공기를 개발해 온 덕에 감사하게도 계속해서 시험비행을 할 수 있었다”며 “앞으로도 항공 개발 사업 투자가 이어져 시험비행 노하우가 이어졌으면 한다”고 했다.
▲그래픽=김성규
☞시험비행 조종사
새로 개발하는 항공기를 시험·평가하는 전문 조종사. 개발 단계에선 시제기(試製機)를 몰며 성능을 시험하고, 개발 완료 후엔 양산 항공기의 첫 비행을 하며 기능을 점검한다. 일반 조종사들은 할 필요도 없고, 하지도 않는 비행을 한다. 일부러 통제 불능 상태, 극단의 상황을 만들어 군용기 등이 설계한 대로 복원되는지를 시험한다. 1980년대 말 공군에서 선발하기 시작했고, 한국항공우주산업(KAI)도 2001년부터 비행시험팀을 운영 중이다. 현재 공군에 20여명, KAI에 24명의 조종사가 있다. 비행 경력과 조종 실력은 물론 비행역학·항공전자 같은 이론도 잘 알아야 해 선발 후 1년가량의 교육을 거친다. 이들의 시험비행 결과는 고스란히 비행기 개발 과정에 반영돼 완성도를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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