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14/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조선일보 2024
2024.10.12
〈131〉중국의 비논리를 꼬집는 대만 라이 총통의 기발한 "조국론(祖國論)"
변방의 중국몽 <49회>

▲중화민국의 국부 쑨원(孫文, 1866-1925) 초상화 앞의 라이칭더 총통./rfa.org
지난 10월 1일 중국에 가서 연예 활동을 펼치고 있는 대만 연예인 17명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75주년을 맞아 중국의 SNS 위챗에 대륙의 국경일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올랐다. 그 중엔 “가장 큰 축복을 그대에게 드립니다. 나의 조국이여!”란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기사를 공유한 연예인도 세 명이나 됐고, “대만, 조국의 품에 다시 안겨야”란 문자를 올린 가수도 한 명 있었다.
대만 연예인의 노골적인 친중성 아부 발언이 대만 언론에서 큰 뉴스로 불거질 때면 라이칭더 총통은 “남의 지붕 아래서 압박을 받는 대만 예술인들이 가슴 아프다” 말하며 관용적 태도를 보여 왔다. 과거와 달리 지난 10월 5일 그는 양안(兩岸)의 이념 대결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지난 9월 1일에 취임 100일을 맞아 라이칭더(賴慶德, 1959~ ) 총통은 제정 러시아에 넘어간 청 제국의 영토를 그대로 인정하고 포기하는 중국공산당의 모순을 꼬집어 중·러 관계의 급소를 찌르는 외교적 지략을 발휘한 바 있다. (“슬픈 중국” 45회) 이번에도 그는 중국을 조국이라 부르는 대만 연예인의 논리적 모순을 슬쩍 들추는 기발한 유머 감각을 발휘했다.
“75세 중화인민공화국” v. “113세 중화민국”
지난 10월 5일 저녁 대만 타이베이 돔(Taipei dome) 실내경기장에서 개최된 “국경(國慶) 만회(晩會)”에 수만 명이 시민이 운집했다. 여기서 국경 만회란 중화민국의 건국을 기념하는 국경일(國慶日)을 닷새 앞두고 열린 축하연을 이른다. 8년 만에 다시 열리는 이 만회에서 수만 군중 앞에 등장한 라이칭더 총통은 중화민국의 독립국임을 만천하에 알리는 소신 발언을 이어갔다.
“우선 저는 전체 국민을 대표하여 중화민국 113세 생일을 경축합니다. (중략) 우리는 반드시 우리나라가 주권을 가진 독립 국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국가를 사랑해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나라를 사랑해야 합니다. (군중 박수) 동시에 선현·선열의 희생과 공헌의 정신을 학습하고, 단결하여 국가의 주권을 수호해야 합니다. 민주와 자유와 인권의 생활 방식을 수호해야만 비로소 이토록 긴 세월 희생과 공헌을 바친 분들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요? (군중 박수)”
이렇게 운을 뗀 후 라이칭더 총통은 작심한 듯 단호하게 군중을 향해 말했다.
“최근 우리의 이웃인 중화인민공화국이 막 75세의 생일을 지냈습니다. 며칠 있으면 중화민국은 113세 생일을 맞이합니다. 따라서 나이를 놓고 보면, 중화인민공화국은 절대로 중화민국 인민의 조국(祖國)이 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중화민국은 도리어 중화인민공화국의 75세 이상 되시는 인민의 조국이 될 수는 있습니다. 여러분, 맞나요, 틀리나요? (군중 환호) 중화민국이 대만과 그 부속 도서(펑후, 진먼, 마주)에 뿌리내린 지가 벌써 75년이나 되었으므로 우리는 다시 이러한 관계를 논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생일을 축하하려면 특별히 정확하게 축사를 써야 할 것입니다. 절대로 ‘조국’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맞나요, 틀리나요? (군중 환호)”

▲2024년 10월 10일은 “중화민국의 113세 생일”이라 말하는 대만의 라이칭더 총통./유튜브
중화인민공화국 이전에 중화민국이 이미 존재했는데, 중화민국의 국민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조국이라 부른다면 시간의 선후를 뒤집는 부조리일 뿐이라는 논리다. 중국을 조국이라 부르는 재중 대만 연예인을 직접 질타하기보다는 부드럽게 그들의 개념적 모순을 꼬집고 넘어가는 그의 재치가 관중의 뜨거운 호응을 불러냈다. 그의 지적대로 중화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보다 무려 38년이나 먼저 제국(帝國, 황제의 나라)을 무너뜨리는 민국(民國, 국민의 나라)혁명을 통해서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이다.
1949년 10월 1일 이래 중국인들은 매해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경일을 기념한다. 중국과 달리 대만에선 10월 10일을 국경일로 기념한다. 1911년 10월 10일 공화국의 이념을 내걸고 후베이성 우한에서 일어난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중화민국(中華民國) 건립의 기점(起點)이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 더불어 중화민국은 패망했다고 주장하지만, 역사적으로 중화민국의 정부가 존속함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대륙을 빼앗긴 국민당 정권은 타이베이로 수도를 옮겨서 중화민국의 국호를 그대로 이어서 대만을 통치했다. 2차대전의 승전국이었던 바로 그 중화민국은 유엔이 1971년 10월 25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할 때까지 유엔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으로 남아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이 곧 중화민국의 종말이라는 베이징의 주장은 힘의 논리일 뿐 역사적 사실에 어긋난다.
라이칭더의 연설을 잘 들어보면, 오늘날 대만이 중화민국인 이유는 단순히 1895년 이후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아온 대만을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국민당 정권이 접수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날 대만이 중화민국의 건국 이념을 계승하여 민주와 자유와 인권을 수호하는 국가이기 때문이라는 논리가 깔려 있다. 실제로 중화민국의 건국이념은 자유로운 개개인 모두가 함께 국가의 주권자가 되는 민주공화국의 정신이었으며, 그 정신은 대만의 헌정사를 통해서 실현되었다.
바로 그 점에서 라이칭더는 “중화민국 113세 생일”을 경축함으로써 바로 오늘날 대만이 1911년 공화 혁명으로 건립된 중화민국이라는 점을 새삼 강조한다. 대만이 당당하게 중화민국의 적통을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대만의 헌정사가 민주, 자유, 인권이라는 공화 혁명의 이념을 현실에서 구현했기 때문이다. 반면 중화인민공화국은 1919년 공화 혁명의 이념에 어긋나는 공산당 일당독재로 인민의 자유와 민주를 억압하는 인권 유린의 전체주의 국가로 남아 있다.
문제는 1911년 신해혁명은 양안(兩岸)에서 모두가 중시하는 중국 현대사의 출발점이라는 점이다. 만약 중국이 대만을 무력으로 정복한다면 1919년 세워져서 113년간 존속해 온 중화민국은 멸망하고 공화 혁명의 정신은 단절될 수밖에 없다. 대만은 중화민국의 국호를 내걺으로써 스스로 역사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래서 대만 총통부에 쑨원((孫文, 1866-1925)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2024년 10월 10일, 실내경기장 “타이베이 돔”에서 열린 국경 만회에 운집한 대만 국민들./유튜브.
라이칭더의 국민 통합 전략
10월 5일 연설에서 라이칭더 총통이 “대만과 그 부속 도서에 중화민국이 뿌리내린 지도 이미 75년”이나 되었음을 구태여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발언 속엔 중국과의 관계를 놓고 국민당과 민진당으로 분열된 대만 국민을 하나로 모으려는 통합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국민당 지지자 중에는 라이칭더 총통을 극단적 ‘대독(臺獨, 대만 독립) 운동가라 여겨 경계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그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중국에 맞서 대만 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발언을 숱하게 이어갔고, 그를 비판하는 국민당 지지자들은 “전쟁이냐, 평화냐?”의 구호로 맞섰다.
라이칭더 총통은 지난 5월 20일 총통 취임사에서도 대만의 독자적 역사성을 강조하는 강성 발언을 남겼다. 당시 그는 중화민국의 헌법을 근거로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서로 예속 관계가 아니다”라는 강력한 독립의 원칙을 천명한 후 취임사 맺음말에서 “도발적” 주장을 이어갔다. 그는 바로 그날 밤 타이난(臺南)시에서 국빈 연회가 열린다면서 “1624년 이래 대만이 세계화에 연결된 지 400년”이라고 말했다. 1624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타이난(臺南)을 점령하여 요새를 짓고 통치의 거점으로 삼았던 사건이 대만 세계화의 출발점이라는 적극적 평가이다. 라이칭더의 이 발언은 전 세계의 관심을 끌었지만, 중국 정부는 물론 대만의 국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이러한 라이칭더의 역사관은 대만 안팎에서 충분히 반중-대독 노선의 공식적 선언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민주, 자유, 인권 뿐만 아니라 수출주도의 개방적 시장경제를 구현하는 오늘날의 대만은 중화 문명의 영향이 아니라 서구 문명과의 접촉 덕분에 발전할 수 있었다는 탈식민주의적인(post-colonial) “대만인(臺灣人) 의식”을 고스란히 반영하기 때문이다. 민진당 지지자 중에는 그의 역사의식에 흔쾌히 동의하는 사람들이 다수지만, 지난 총통 선거에서 합쳐서 60% 가까이 득표한 국민당이나 민중당 지지자 중에서 그러한 라이칭더의 견해에 비판적이거나 유보적인 국민이 많다.
라이칭더의 역사의식은 1962년 대만 독립의 교부(敎父)라 칭송되는 역사학자이자 작가 쑤벙(Su Beng, 史明, 1918-2019)을 떠올리게 한다. 1952년 국민당의 핍박을 피해서 일본으로 망명한 쑤벙이 일본어로 저술하여 일본에서 1962년에 출판된 ‘대만인(臺灣人) 4백년사(四百年史)’는 대만 민족주의와 독립·건국의 의지를 밝힌 대독(臺獨) 좌파의 기념비적 저서이다. 피식민지 민중의 시각에서 대만인의 지난 4백 년 역사를 정리한 이 책은 계엄 시기 국민당 정권 통치 아래서 금서(禁書)로 분류됐으나 1960년대 말부터 중문판이 대만인 사이에서 널리 읽혔고, 1986년 영문판이 출판되어 세계적으로 알려진 대만 역사의 명저로 꼽힌다.
1540쪽에 달하는 이 책은 고대의 말레이-인도네시아계 원주민의 정착에서 명대(明代, 1368-1644) 한족의 이주에 이르는 장구한 역사는 4장에 걸쳐 46쪽으로 정리한 후, 나머지는 제5장 “세계사에 출현한 대만”부터는 지난 400여 년의 세월 동안 대만 민중이 거쳐 갔던 피식민의 역사에 할애한다. 네덜란드, 정씨(鄭氏) 왕조, 청조(淸朝), 일제를 거쳐 마지막 제11장과 제12장에서 국민당 정권 이후의 역사를 다루는데, 그는 국민당 정권을 “중국 장가(蔣家) 군벌 정권”이라 낮춰 부른다.
▲상징적인 대독(臺獨, 대만독립) 운동가이지 역사가 쑤벙(史明, 1918-2019)과 그의 대표작 ‘대민인 사백년사’
라이칭더의 역사의식은 쑤벙의 역사관과 공명한다. 물론 대만 국민 사이의 정치적 갈등과 분열상을 잘 알고 있는 라이칭더는 취임사에서 통합과 화합의 메시지를 빠트리진 않았다. 그는 대만은 서로 다른 시기에 이 섬으로 이주해서 살아가고 있는 여러 종족 모두의 땅이라면서 “어떤 이는 중화민국(the Republic of China, ROC), 어떤 이는 중화민국 대만(ROC Taiwan), 또 어떤 이는 대만(Taiwan)이라 부르지만, 무엇이라 부르든 우리는 빛날 것”이라 했다.
그 정도에서 대충 대만의 국명을 둘러싼 논쟁을 정리했던 라이칭더는 지난 10월 5일에는 분명하게 “중화민국”을 대만의 공식 국명으로 사용했다. 밖으로 중국을 향해선 대만 독립의 메시지를 다시금 분명하게 던지면서, 안으로 사분오열된 대만 국민을 향해선 공식적으로 “중화민국”의 국명을 확실하게 되살려 민진당과 국민당의 화해를 꾀하는 한 수였다.
중국공산당의 늦장 대응, 논리적 빈약함을 드러내
10월 7일 홍콩의 중문 언론 명보(明報)에는 라이칭더 이 연설에 관한 대만 출신 정치학자 린취안중(林泉忠, 현 도쿄 대학 동양문화연구소 연구원)의 분석 기사가 실렸다. 린취안중은 이 연설의 특징을 세 가지로 꼽았다. 첫째, 대만의 주류 민심을 규합하여 반대할 수 없도록 할 뿐더러, 심지어는 지지층을 넓힐 수도 있다는 점, 둘째, 국민당의 입장까지 포용하여 최소한 국민당이 정면으로 반대할 수 없게 한다는 점, 셋째, 베이징이 논리적으로 대응하기 곤란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대내적으로 지지층을 넓히고, 국민당의 반대를 억지하고, 나아가 베이징을 논리적 함정에 빠뜨리는 “일타삼피”의 묘수라는 해석이다.
▲2024년 10월 8일 중국 국무원 대만 사무 판공실 대변인 주펑롄(朱鳳蓮)이 라이칭더 총통의 연설에 논평하고 있다./국대판國台辦 위챗.
린취안중이 예견했듯 중국 국무원의 대만 사무 판공실(국대판)에서는 사흘이 지나서야 라이칭더의 연설에 대한 공식 대응을 내놓았다. 중국 측은 기껏 “1945년 10월 25일 중국 정부가 대만을 회복하여 주권을 행사했다”는 점, 그리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중앙 인민 정부가 중화민국을 대신하여 중국 유일의 합법정부라고 선언했다”는 점을 들어 대만의 “신양국론(新兩國論)”과 대독(臺獨) 움직임을 비난했다. 쉽게 말해 일본 패망 후 대만은 중화민국에 넘어갔는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바로 그 중화민국을 접수했다는 비역사적 주장일 뿐이다. 대만 언론들은 ‘챗GPT’에 물어보니 1초도 안 돼서 뚝딱 답안지를 내놓던데 중국공산당은 왜 사흘이나 걸리고도 그 정도밖에 못했다며 조롱했다.
역사적으로 엄격하게 말하면, 양안이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국공내전의 연장이라 볼 수밖에 없다. 국공내전의 결과 1949년까지 중국은 대륙의 전 영토를 점령했지만, 지금까지도 중국은 대만을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전혀 흡수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대만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라는 주장은 양안의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일방적인 “중국몽”일 뿐이다. 지난 9월 1일에 이어 10월 5일의 논전 역시도 라이칭더 총통의 한판승이었다.
라이칭더 총통은 탄탄한 역사 지식과 정연한 정치철학으로 중국공산당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여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는 외교적 지략을 과시하고 있다. 그 방법이 기발하고도 유쾌하여 세계 모든 나라가 중국 다루기의 정석으로 삼을 만하다. 특히 중국 앞에 서면 작아지기만 하는 대한민국 외교부의 실무진들이 되새겨야 할 대중 외교의 기본기가 아닐까. <계속>
〈132〉'중국'에 귀화했던 도산 안창호가 '일본' 국적자로 체포된 까닭은?
변방의 중국몽 <50회>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성립기념 사진 (1919. 10. 11).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왼쪽부터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독립기념관 제공
사춘기 시절 인간은 누구나 질풍노도의 성장통을 앓으며 인생의 깊은 의미를 깨달아간다. 국가 공동체의 진화 과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장구한 역사의 과정에서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실패와 패배를 거울삼아야만 비로소 공동체적 지혜와 범시민적 합리성을 발휘할 수가 있다.
제국주의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무기력하게 나라를 잃고 피식민(被植民)의 오욕을 겪었던 민족이라면 더더욱 치욕스러운 과거사를 비판적으로 반성해야만 한다. 결국 벗고 거울 앞에 서는 심정으로 역사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스페인의 철학자 산타야나가 말했듯, 역사를 망각한 자는 같은 역사를 반복할 수밖에 없으니······.
고통스럽다고 회피하거나 이미 벌어진 과거사를 “원천 무효”라며 자위(自慰)한다면 진화를 멈춘 채로 이념의 갈라파고스(Galapagos)에 갇혀 버리고 만다. 역사 서술의 기본은 과거사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거짓 없이 진술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정치적 의도에 휩싸여 과거를 왜곡하는 순간, 역사는 정치적 무기로 변질되고, 인간사의 진실은 묻혀버린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의 국적은 과연 무엇이었나?
일제 강점기 한반도의 ‘조선인(朝鮮人, 韓人, Koreans)’은 모두 ‘일본 국민’에 편입되어 ‘일본 국적’을 부여받았다. 당시 조선인의 국적이 일본이라는 사실은 그 당시 일제가 조선인에 발급한 여권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의 입국 사증을 봐도 대번에 알 수 있다. 물론 그렇게 일본 국적을 부여받았음에도 일본의 국적법은 ‘내지(內地)’의 일본인과 한반도의 조선인에게 똑같이 적용되진 않았다.
▲1937년 김성낙에게 발급된 미국의 이민 사증. 출생 국가는 조선(Chosen), 국적은 일본인(Japanese)라 기재돼 있다. http://www.yoshabunko.com/empires/Detritus_passports.html
1899년 제정된 일본 국적법 제20조는 “자기의 희망에 따라 외국 국적을 취득한 자는 일본 국적을 상실한다”고 규정했다. 이 법에 근거하여 해외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외국 국적을 취득함과 동시에 일본 국적에서 이탈할 수 있었다. 반면 조선인들에겐 이러한 일본의 국적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해외로 나간 조선인들이 외국 국적을 취득하여 그 나라로 귀화한다고 해도 일제는 조선인의 일본 국적 이탈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다(武井義和, “戦前上海における朝鮮人の国籍問題,” 中国研究月報60[1], 7-21, 2006-01).
일제는 조선인에 대한 일본 국적법 불이행의 근거로 “신민은 대대로 왕조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는 조선왕조의 관습법과 외국으로의 귀화를 금지한 대한제국 내부대신 훈령 제240조(1908년)를 들었다. 대한제국의 호적법에 준하여 조선인을 지배하겠다는 명분이었지만, 해외에 체류하며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인들을 정치적으로 통제하려는 의도가 읽힌다.
일제가 만주국(滿洲國) 세우기 이전 만주 길림(吉林) 동남부 간도(間島) 지방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국적과 관할권을 놓고서 중국과 일본이 맞섰다.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의 이중 국적 문제와 토지 소유권 논란이 발생하자 1915년 중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남만주 및 동부 내몽고에 관한, 이른바 남만동몽(南滿東蒙) 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은 만주에 체류하는 조선인을 일본 신민이라 주장하며 영사 재판권을 행사하려 하였고, 일본의 주장을 거부한 중국은 지방 관리를 통해서 만주의 조선인들을 지배하려 했다. 1920년대 말 만주 지역에 체류하던 200만 명의 조선인 중에서 대략 10%가 중국 국적을 취득했으나 일제는 그들의 일본 국적 이탈을 용납하지 않았다(이영훈, “일정기 조선인의 국적은 일본이었다”).
1933년 제네바에서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의 승인 여부를 둘러싼 국제연맹 총회가 열렸을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바로 그 현장을 찾아서 조선 독립의 당위를 설파하면서 ‘만주의 한인들(The Koreans in Manchuria)’이란 소책자를 배포했다. “만주 지역 조선인의 입지를 불리하게 한다”며 국제동맹에 만주 문제를 안건으로 상정할 수 없다는 일제의 괴이한 변명을 비판하면서 이승만은 만주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조선인들까지 무조건 일본 신민으로 속박하여 절대로 일본 국적에서 이탈할 수 없게 하는 일제의 만행을 규탄했다(Syngman Rhee, “Statement of the Koreans in Manchuria,” Geneva, February 18, 1933).
▲이승만이 편찬한 “만주의 한국인” 표지. 이 소책자에서 이승만 박사는 만주의 한국인들이 자유롭게 국적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월간조선
1923년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체포된 조선인의 국적 논란
만주뿐만 아니라 1920~30년대 중국의 국제도시 상하이(上海)에도 상당수 조선인이 체류하고 있었다. 상하이 일본 영사관의 조사에 따르면, 1921년 6월 말 현재 739명, 1922년 7월 말 현재 625명의 조선인이 상하이에서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중 중국으로의 귀화 신청자가 몇 퍼센트 정도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일본 측이 “요주의(要注意)” 대상으로 지목한 인물들도 적잖게 포함돼 있었다(武井義和, “戦前上海における朝鮮人の国籍問題,” 中国研究月報60[1], 7-21, 2006-01).
일례로 평안남도 중화 출신 독립운동가 한진교(韓鎭敎, 1887~1973)는 1914년 상하이로 가서 해송양행(海松洋行)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경영했던 인물이었다. 1919년 상하이에 한국임시정부가 들어선 후 그는 물밑에서 자금을 대고 여러 식객(食客)을 보살피며 독립운동을 도왔다.
1923년 2월 그는 일본 지폐를 위조한 죄로 프랑스 조계에서 체포되었고, 회심(會審) 아문(衙門)으로 넘겨졌다. 1860년대 창설된 회심 아문은 중국인 재판관과 외국인 재판관이 합동으로 심리하는 상하의 조계의 중외(中外) 혼합형 재판 제도였다. 명목상 합동 재판이었지만, 중국인 피고는 중국 현행법에 따라 중국 재판소가 심의했고, 외국인 피고는 외국 재판소가 담당하는 원칙이 있었다.
당시 한진교는 이미 중국 국적을 취득하고 귀화한 상태였으므로 중국 측은 그를 중국인으로 인식했다. 이와 달리 일본 총영사관은 한진교는 일본 국적자라는 점을 근거로 1923년 3월 중국 측에 공식적으로 그의 신병 양도를 요구했다. 중국 측은 그가 이미 중국의 적법 절차에 따라서 중국 국적을 취득하여 “귀화 허가 증서”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서 일본 측의 요구를 묵살했다.
한진교의 국적을 두고 중·일의 입장이 첨예하게 부딪히자 결국 프랑스 조계가 중재하고 나섰다. 그 결과 한진교는 1923년 12월 무렵에야 프랑스 조계로 송치되어 재판받게 되었다. 프랑스 조계 재판부는 범죄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며 그를 프랑스 조계 밖으로 추방하는 선에 머물렀다. 적어도 이 시점 상하이에서는 일본 측이 중국으로 귀화한 조선인을 일본 국적자임을 내세워 자의적으로 처리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상황은 그러나 머잖아 급변했다.
상하이의 프랑스 경찰, “안창호의 국적은 일본이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關東軍)은 남만주 선양(瀋陽)에서 이른바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이른바 ‘15년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이듬해 1월 28일엔 상하이 국제 공동 조계에서 일본 군과 중국 군이 격돌하는 제1차 상하이 사변일 발발했다. 양국의 병력이 팽팽히 맞서면서 전투가 지연되자 일본은 2개 사단의 증원군을 파병하여 저돌적인 공격에 나섰다. 결국 3월 1일이 되자 중국군은 상하이를 버리고 후방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虹口)공원에서 승전 경축의 열병식을 올리는 일본 영사와 해군 중장 등을 향해서 조선 청년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이 폭탄을 투하했다. 곧바로 4월 29일과 30일에 이틀간 일본 총영사관 경찰은 프랑스 조계 경찰의 협력 아래서 12명의 조선인 연루자를 체포했다.
▲1925년 10월 20일 일제가 작성한 감시 대상 인물 카드 속의 안창호./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그 12인 중에 도산(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가 속해 있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내무 총장직과 국무총리직을 역임한 안창호는 1923년 7월 중국 국적을 취득해 중국으로 귀화한 상태였다. 그런 안창호가 일본 총영사관의 경찰이 체포하자 그의 국적을 둘러싸고서 중·일 양국 사이에서 다시 논쟁이 불붙었다.
상하이 여러 시민 단체는 중국에 귀화한 안창호를 중국 당국이 아니라 일본 총영사관이 잡아간 사실에 격분하여 항의했는데, 그들의 분노는 일본을 돕는 프랑스 조계를 향해 있었다. 그렇게 중국인들은 귀화한 조선인 안창호를 중국인으로 대우하며 구출하려 했다. 안창호가 체포된 5월 중순까지 중국인들은 격렬한 반일 시위를 이어갔다. 중국의 법조인들은 일본에 체포당해 있는 안창호가 중국 국적자라는 점을 강조하며 국민당 정부를 압박했다.
특히 상하이 법조인들의 결사체인 율사공회(律師公會)는 안창호를 중국인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성명서까지 발표했다. 그들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이 동시에 원래의 국적을 상실하지 못해서 이중 국적의 문제가 발생한다면, 국제 공법의 원칙에 따라 그가 살고 있는 나라의 법률로 결단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중국 국적을 취득한 조선인들은 일본 국적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중국 영토에 이미 살고 있기에 마땅히 중국인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포용의 논리였다(武井義和, 같은 논문).
중국인들의 항의에도 아랑곳없이 일본 경찰에 체포당한 안창호는 같은 해 6월 2일 조선으로 압송돼 갔다. 일본 총영사관이 안창호의 신병을 확보할 때 프랑스 조계 경찰이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무엇보다 프랑스 조계 당국이 안창호를 일본 국적자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프랑스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 출신 안창호는 설령 중국에 귀화했더라도 중국인이 아니라 실은 일본 국적에서 이탈할 수 없는 일본인이었다. 여러 식민지를 거느리고 경영하던 제국 열강은 그렇게 힘의 논리에 공조하고 있었다.
“존재(存在, sein)”와 “당위(當爲, sollen)를 구분해야
1923년 7월 안창호는 중국 국적을 취득하여 중국으로 귀화했다. 그가 일제에 체포되었을 때 상하이의 중국인들은 중국인을 잡아가지 말라며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다. “민족개조”와 “실력양성”을 외치며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안창호는 왜 중국 국적을 취득해야만 했을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역임했음에도 당시의 현실에서 안창호는 국제법상 일본 국적자였다. 항일 독립투사가 일본 국적에 속박당해 있는 실로 비극적인 실존적 부조리였다.
일본 국적에서 이탈하기 위해서 안창호는 중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결정적 순간 그는 다시 일본 국적자의 신분으로 일제에 체포되고 말았다. 프랑스 조계 경찰은 그를 일제 식민지 조선 출신의 일본 국적자로 인식하고서 일본 측에 넘겼기 때문이었다. 그를 보호하려는 중국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중국에 귀화한 안창호는 중국인”이라고 부르짖었음에도 국제정치의 현실에서 안창호는 일본 국적을 벗어날 수 없었다. 조선인은 그 누구도 일본 국적에서 이탈할 수 없다는 일제의 법령이 국제법적 효력을 발휘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지금도 대한민국 국사학계와 정부는 이른바 “원천 무효설”에 입각해서 일제 강점기 조선인의 국적은 “한국”이라 강변하고 있다. 1965년 12월 18일 발효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 제2조에 따라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의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약은 무효이므로 당시 “일제 강점기 우리 국민의 국적은 한국”이어야만 한다는 주장이다.
▲1932년 7월 4일 안창호의 서대문 형무소 수형 카드./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일제의 강점과 식민 지배의 부당성을 고발하려는 의도이겠지만, 역사를 쓸 때는 언제나 특정 시공간을 배경으로 실제 발생한 사태를 객관적으로 기술해야 한다. 부당하다 비판하고 잘못이라 비난해 봐야 그 누구도 이미 지나간 과거사를 사후적으로 무화(無化)할 순 없다. 도덕성도, 합법성도 없는 반인류적 범죄에 대해서 “원천 무효”를 선언한다 해도 과거사를 뒤바꿀 순 없다.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독일 제3제국의 죄악상을 고발할 수 있을지언정 가스실에서 스러져간 6백만 희생자들의 목숨을 되살릴 수는 없듯이.
일제 강점기 안창호의 국적이 진정 한국이었다면 왜 프랑스 조계 경찰은 그의 신병을 일본인으로 파악해서 일제 경찰에 넘겼겠는가? 당시 일제는 범아시아 제국을 꿈꾸는 막강한 군사 대국이었던 반면, 국민·영토·주권도 확보하지 못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자국민을 지킬 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일제 강점기 조선인이 모두 ‘일본 국민’에 편입되어 국제법상 일본 국적자로 살아야 했음은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명백한 역사의 현실을 보면서도 중국으로 귀화한 안창호나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우승한 손기정의 그 당시 국적이 ‘한국’이었다고 주장한다면, 역사적 상식에 어긋난다. 일제의 조선 병합과 식민 지배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 점에서 국사학계나 정부의 “원천 무효설”은 역사적 사실의 진술이 아니라 사후적으로 내린 도덕적 평가이자 당위론에 불과하다.
요컨대 “1932년 안창호의 국적은 일본이었다”는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의 객관적 진술이다. 반면 일제 지배가 원천 무효이므로 “1932년 안창호의 국적은 한국이었어야만 했었다”는 주장은 법리적 당위(juridical oughtness)의 설파이다. 16세기 중반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가 지적했듯 ‘존재’와 ‘당위’를 구분하지 못하는 자는 몰락을 면할 수 없다. ‘1930년대 조선인의 국적이 일본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국무위원을 ‘친일파’로 몰고가는 2024년 대한민국의 국회의원들이 가슴 깊이 새겨야 할 명언일 듯하다. <계속>
〈133〉"주한미군 이상 없나?" 트럼프 2기 미국을 읽는 '내재적 접근법'
변방의 중국몽 <51회>
▲1950년 총상 입은 미 해병을 한국군 병사와 시민들이 기관총을 써서 임시로 만든 들것에 실어서 옮기고 있다./라이프(Life)지 종군기자 던컨(David Dougles Duncan) 촬영. life.com
트럼프의 귀환,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번 미국 대선에서 주류 언론의 예측을 뒤엎은 트럼프의 압승은 미국 사회 전역에서 격렬하게 전개된 이념 전쟁과 가치 투쟁의 결과였다. 이미 2~3년 전부터 미국의 보수층은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와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 운동에 경도된 미국 사회의 병증을 고발하고 교정하려는 적극적인 사회 운동을 일으켰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GA)”란 구호 아래 들불처럼 일어난 이 운동은 무너진 가족의 복원, 건전한 상식의 회복, 시민적 자치(自治, self-government)의 재건, 전통적 가치의 부활, 개인적 자유의 신장 등의 구호를 내걸고 미국 사회 전역으로 확장되었다. 미국 주류 언론의 편향된 보도 속에서 이 운동이 크게 주목받진 못했지만, 압도적 표차로 미국의 정권이 교체됐다는 사실은 이미 시대의 대세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트럼프 2.0 시대의 미국 사회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싶다면 편견과 선입관을 다 버리고 송의달 교수의 ‘신의 개입: 도널드 트럼프 깊이 읽기’(나남, 2024)을 정독하길 권한다. 트럼프 2기의 도래를 예견하고 미국 사회를 뒤흔드는 트럼피즘(Trumpism)을 심층 분석한 이 책은 미국 사회를 미국인의 시각에서 있는 그대로 파헤치는 ‘내재적 접근법’으로 트럼프가 앞으로 펼칠 국제외교의 전략, 트럼프를 부활시킨 미국 사회의 불안과 희망, 트럼프란 개성적 인물의 성향과 실체를 정밀하게 분석한다. 이 정도 로드맵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호는 절대로 트럼프 2.0의 거친 바다를 슬기롭게 헤쳐갈 수가 없다. 당장 임박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바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문제이다. 송의달 교수가 이 책의 제1부 4장에서 “주한미군 분담금 이슈 선제 대응하라” 주문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2024년 8월 말 트럼프 재선을 두 달여 앞두고 출판된 송의달 교수의 저서 ‘신의 개입: 도널드 트럼프 깊이 읽기’/월간조선.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트럼프 2.0 시대의 제1과제
미국 대통령 선거를 한 달 앞둔 지난 10월 초 한·미 양국은 12차 방위비 분담 특별 협정(SMA)에 합의했다. 짧게는 5~6개월, 길게 치면 11~18개월에 걸친 마라톤 회의 끝에 나온 성과였다. 2025년 한국 측 방위비 분담 총액 1조 4028억 원이었는데, 2026년부턴 그보다 8.3% 증액된 1조 5192억 원을 분담해야 한다. 한국 측 분담금이 늘어나지만, 연간 증가율은 현재 적용되는 국방비 증가율(4.3%) 대신 소비자물가지수 증가율(2%)을 적용하기로 했으며 5%의 상한선을 두었다. 달러 강세로 원화 절하가 지속되는 작금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한국 측으로선 최선의 협상이었을 수 있다.
문제는 트럼프의 귀환으로 바이든 행정부와 체결한 이번 협정이 좌초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는 미 의회의 비준을 거친 한미 FTA에 대해서도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며 관세 인상을 예고하고 있으며, 유세장에서 몇 번이나 한국이 방위비 분담액을 100억 달러로 올려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그는 임기 초부터 한국을 향해서 기존 협정을 무시한 채 분담금 증액을 강력하게 요구해 올 수 있다. 2019년 6월부터 2020년 10월까지 국방장관을 지낸 마크 에스퍼(Mark Esper)의 회고에 따르면, 2020년 한국과의 방위비 협상이 좌초되자 트럼프는 여러 차례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다. 당시 트럼프는 대미 무역 흑자를 내는 한국의 안보를 미국이 책임지는 현실을 성토하면서 주한미군 전면 철수를 거듭 주장했는데, 폼페이오(Mike Pompeo) 국무장관이 설득해서 그 민감한 의제를 일단 두 번째로 넘겼다. (송의달, ‘신의 개입,’ 제1부 4장).
한국인으로선 한미동맹의 가치보다 미국의 국익을 앞세우는 트럼프의 요구가 야박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입장 바꿔 미국인의 심정을 헤아려 보면 미국인 상당수가 한국에 대해 느끼는 불만과 의심을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최첨단의 기술력을 갖춘 한국은 과거의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 세계 10대 부국으로 성장해 있으며, 특히 미국과의 무역에서 2001년에서 2021년까지 2164억 달러의 흑자를 냈다는 점이다.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트럼프의 말마따나 충분히 부유한 대한민국을 미국이 왜 큰돈을 써가며 지켜줘야 하는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둘째, 주한미군 유지를 위해서 한국이 분담하는 방위비는 2023년 기준으로 한국 정부 총예산의 0.2%에 지나지 않는다. 그마저 대부분은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군속(軍屬)의 급여와 주택 비용이다. 미국 국방부 분석에 따르면, 주한미군 주둔 총비용 중에서 78%를 미국이, 22%를 한국이 담당하고 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주일미군 주둔 비용의 75%를 내고 있다. 평범한 미국인들은 미국에서 큰돈을 벌어가는 한국의 안보를 왜 미국이 지켜줘야 하는지 알 길이 없다.
셋째, 평범한 미국인들은 자국의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는 한국인들이 표출하는 반미감정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지난 20여 년을 돌아보면 대한민국이 반미주의의 온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2002년 6월 두 여중생이 주한미군의 공병 전차에 깔려 안타깝게 숨진 사건은 반미감정에 불을 질러서 그해 대선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04~2005년 여론조사를 보면, 한국인 다수는 북한의 김정일보다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이 한국 안보에 더 큰 위협이라고 대답했다. 2006년 개봉되어 1300만 관객을 동원하고 2007년 미국에서도 개봉됐던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은 미군 부대에서 한강으로 흘러 들어간 독극물이 괴물을 낳았다는 반미적 모티프를 품고 있다. 2008년 대한민국에선 미국산 쇠고기로 인간 광우병이 발생한 사례가 역사상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음에도 “미국소=미친소” 선동이 사회적 패닉을 조장했고, 서울 도심에서 100일 넘게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2010년 북한 천안함을 폭침했을 때는 난데없이 미군 오폭설이 떠돌았다. 문재인 정권은 환경영향 평가 등을 핑계로 사드 배치를 고의로 연기한다는 의구심을 샀다. 그 모든 굵직한 사건들이 실은 극미한 위험을 부풀리거나 사태의 인과관계를 교묘하게 왜곡하는 일부 세력의 거짓 선동에서 시작됐다는 점을 한국인만큼이나 미국인들도 잘 꿰뚫어 보고 있다.
넷째, 미국인들은 지금도 자국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쳐서 공산 전체주의 세력으로부터 대한민국을 구했음을 기억하고 있으며, 자라나는 세대에게 그 사실을 철저히 가르치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발생한 미군 사상자는 14만 명에 달한다. 그중 3만3000명의 미군은 이역만리 한국 땅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많은 희생자를 내고서 지킨 대한민국인데, 만약 한국인들이 미국에 반감을 품고 있다면 미국인들은 당연히 한미동맹의 해체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미국은 공산 전체주의의 침략을 받아서 절멸의 위기에 처한 신생국 대한민국을 14만의 사상자를 내면서 함께 싸워 지켜준 나라다. 한국인들이 섣부른 반미의식을 드러내거나 친중 노선을 추구한다면, 미국인들로선 인간적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국익을 놓고 치열하게 협상하기도 하고, 때론 격하게 언쟁할 수도 있겠지만, “다리에 불을 지르진 말라(don’t burn the bridges)”는 영어의 속담을 기억해야 한다. 개인 사이나 국제관계나 배은망덕(背恩忘德)을 저지르면 원수가 되고 만다.
요컨대 트럼프 2.0 시대 한국 정부가 한미 양국의 관계를 슬기롭게 풀어가기 위해선 무엇보다 미국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미국인의 마음을 세심하게 읽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공감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도발적 직설과 냉정한 압박으로 동맹 유지의 비용 정산을 청구하는 제2기 트럼프 정권의 도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송의달 교수는 미국 안보 지원에 무임 승차하던 시대가 이미 끝났다며, 한국 정부가 진정 국가 안보를 위해서 주한미군 주둔이 필수적이라 판단한다면 방위비 전액을 부담하는 안도 검토해야 한다고 말한다. 2024년 4월 유력 정당이 총선 공약으로 제시한 국민 1인당 25만 원의 민생 회복 지원금은 13조 원이었고, 2020년 정부가 뿌린 코로나 재난 지원금은 14조 원이었다. 13조 원이면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10년 치를 웃도는 금액이다. 1년 총예산을 따져보면, 대한민국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더 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경제력을 갖고 있다. 물론 치열한 협상으로 분담금을 낮추면 좋겠지만, 국가의 안보가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정가의 선심성 공약 뒤로 밀리는 불합리는 척결해야 한다. 트럼프의 귀환에 앞서 자발적으로 안보 비용을 증액하는 유럽연합(EU)의 발 빠른 대응을 배워야 한다.
“트럼프 2.0″에 대비 방위비 증폭하는 유럽연합
최근 보도에 따르면, 독일·이탈리아 등 유럽연합(EU) 주요국의 방위 산업체 주가가 급등했다. 트럼프 당선 이후 불과 일주일 만에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SpA의 주가는 18%, 독일의 라인메탈(Rheinmetall) AG와 헨솔트(Hensoldt) AG의 주가는 각각 22%와 18% 치솟았다. 미국에서 트럼프가 대통령직을 탈환하고 공화당이 의회 권력을 장악하면서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대한 미국의 군사 지원이 대폭 줄어들 전망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이 자체 방위비를 증강한다면 당연히 유럽의 방위 산업체는 당연히 호황을 맞게 된다. 실제로 유럽연합은 트럼프 방위비 압박에 대비하여 선제적으로 585조 원의 기금을 방산에 쓰기로 결정했다.
▲2024년 7월 9일 워싱턴 DC에서 나토 75주년 기념식 회원국 대표들의 기념촬영./AFP
2020년 6월 트럼프는 독일에 주둔하는 미군 병력의 25%, 약 1만 2000명을 철수시켜 6400명은 본국으로 송환하고 나머지 인원은 이탈리아와 벨기에에 재배치하도록 명령했다. 2020년 7월 29일 그 결정 직후 트럼프는 백악관의 기자단을 향해 말했다. “우리도 이제 더는 안 속는다(We don’t want to be the suckers anymore). 독일이 제 몫을 안 내니까 우리가 병력을 빼는 것이다. 매우 단순하다.” 트럼프는 사전 합의에 따르면 모든 나토 회원국이 2024년까지 국내총생산의 2%를 방위비 분담금으로 내놓아야 하는데 독일이 목표액을 충당하지 않았다며 그 결정을 정당화했다.
트럼프는 당시 병력 철수를 불현듯 일방적으로 통보했지만, 당시 국방부 비서관은 그러한 트럼프의 결정이 실은 서유럽의 미군 병력을 전략적으로 재배치하는 큰 계획에 따라 이뤄졌다고 해명했다. 독일에 주둔하던 전투기 부대를 이탈리아로 옮기고 일부 병력은 폴란드에 배치함으로써 러시아군에 대한 미국과 나토의 억지력을 확충할 수 있다는 설명이었는데, 당시 독일 측은 그러한 조치가 나토동맹, 특히 미·독 관계를 악화시킨다며 깊은 유감을 표했다. 당시 미국과 유럽연합 사이의 언쟁을 보면, 나토야말로 2차대전 이후 북미와 유럽의 평화와 번영을 이끈 가장 중요한 군사동맹이라는 공동의 역사 인식을 확인하게 된다.
트럼프는 오히려 나토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방위비 증액을 요구했고, 독일 측은 나토동맹을 일방적으로 함부로 흔드는 트럼프 정권에 불만을 표했을 뿐이었다. 어느 쪽도 나토동맹의 역사적 의의나 국제정치적 효력을 부정하지 않았다. 위에서 언급한 속담처럼 “다리에 불을 지르지는 않았다.” 적어도 나토동맹의 중요성은 쌍방 모두 인정하기에 유럽연합은 트럼프의 귀환이 확실시되자 방위비를 대폭 증액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지난 정권에서 유감없이 표출됐던 트럼프의 강골이 4년이나 지나 트럼프 2.0이 시작되기도 전에 유럽연합을 알아서 기게 한 셈이다. 물론 유럽연합이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트럼프란 독특한 인물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우·러 전쟁이 계속되는 이 시점에서 나토동맹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지난 1000년 동안의 유럽사를 돌아보면, 실제로 끝없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역사·사회학자 찰스 틸리(Charles Tilly, 1929-2008)가 논증했듯, 지난 1천 년 유럽사에서 다수의 민족국가가 출현하는 ‘나라 만들기(state-making)’ 과정은 쉴 새 없는 전쟁 만들기(war-making)의 과정이었다. 비근한 예를 들면, 100년 전쟁(1337-1453, 사상자 200~300만), 이탈리아전쟁(1494-1559, 50~100만), 30년 전쟁(1618-1648, 400~800만), 루이 14세가 일으킨 숱한 전쟁들(1667-1714, 200~400만), 나폴레옹 전쟁(1803-1815, 350~600만), 1차대전(1914-1918, 1500만~2000만), 2차대전(1939-1945, 전 지구 7000만~8500만, 유럽 4000만)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렇게 지난 1000년의 세월 동안 유럽의 수많은 전장에서 1억 명 이상이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되어야만 했다. 천년 넘게 대규모 전쟁에 끊임없이 휩싸였던 유럽인들은 1949년 나토동맹이 결성된 이후로는 75년의 세월 동안 대규모 전쟁을 피해 가며 전대미문의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나토의 결성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주체는 2차대전을 계기로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이라는 점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다.
▲2차대전 당시 독일 베른버그(Wernberg)에서 미군 11기갑사단의 22 전차대대와 55 기갑 보병대대 병사들이 연기가 오르는 거리로 달려가고 있다./위키피디아
미국은 마셜 플랜을 추진하여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의 부흥을 지원했고, 소련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서유럽과의 상호 방위조약을 체결했으며, 무엇보다 막대한 군사비를 써가면서 서유럽 주요국에 대규모 미군 병력을 주둔시켰다. 2차대전이 종결될 당시 서독에만 200만의 병력을 배치했었지만,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는 유럽 전역 주요국에는 대략 25만에서 30만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덕분에 2차대전 추축국이었던 독일, 이태리, 일본은 미국의 직접적 영향 아래서 ‘규칙 기반(rules based)’의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동참하여 세계적 주요 국가로 성장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트럼프의 귀환에 맞춘 유럽연합의 기민한 방위비 증액 결정은 지난 75년의 평화와 번영을 가능하게 한 나토동맹에 대한 긍정적 역사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대한민국 정부도 대중의 의식을 파고드는 시대착오적 종북·반미주의, 친중 사대주의, 반일 종족주의에 대항하여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의 역사적 의의와 성취를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설파할 필요가 있다. 다음 회에 살펴보겠지만, 20세기 중반기부터 미국이 세계 140개 국가에 병력을 배치한 글로벌 군사 대국으로 성장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선 반드시 한국전쟁(1950-1953)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계속>
▲1987년 백악관에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는 트럼프. 트럼프의 상표가 된 “MAGA” 구호는 1980년 선거에서 레이건이 내걸었던 구호였다. 레이건 시대에서 트럼프 시대로 이어지는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연속성이 보인다./위키피디아.
〈134〉"힘을 통한 평화" 트럼프가 계승하는 레이건의 세계 전략
변방의 중국몽 <52회>
▲2017년 트럼프는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facebook.com)에 레이건 대통령과 만나 악수하고 있는 자신의 사진을 올렸다. 레이건 시대에서 트럼프 시대로 이어지는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연속성이 보인다. https://www.facebook.com/DonaldTrump
트럼프 2.0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트럼프라는 개성적 인물이 세계 최강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진 미국의 최고 권력을 또 거머쥐었기에 전 세계가 다시 묻고 있다. 트럼프는 누구인가? 과연 어떤 사람인가? 좌충우돌하는 돈키호테인가? 좌고우면하는 햄릿인가? 큰 권력이 그에게 집중되기에 자연스럽게 드는 질문이겠지만, 트럼프 일개인의 심리 분석만으로는 급변하는 미국의 세계 전략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트럼프 2.0 시대에 슬기롭게 대응하기 위해선 트럼프란 인물에 빠지지 말고 트럼프 정권을 창출한 미국 보수세력의 정강·정책과 가치지향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나 70여 년 한미동맹의 엄호 아래서 번영과 발전을 이룩해 온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선정적 가십과 도발성 억측은 접어두고 트럼프 2.0 시대 미국의 비전과 전략을 탐구해야 하지 않을까?
트럼프를 알려면 트럼프 1기 정권의 정책을 살펴야
50만 명 이상의 유튜브 구독자를 가진 한국의 한 보수 논객은 미 대선이 치러지던 11월 5일 당일 해리스의 승리를 예측한 외신 보도를 소개하면서 “트럼프가 당선되면 한국과 대만과 우크라이나가 안보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트럼프의 승리는 세계 독재자들의 승리가 될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트럼프가 전통적 동맹을 방기한 채로 단기적 국익만을 위해서 세계 평화를 등한시하며 중국, 러시아, 이란, 북한과 적당히 타협할 것이라는 비현실적 극단론이지만, 미국 주류 언론의 편향적인 반트럼프 보도에 장기 노출된 사람에겐 이런 말이 귀에 솔깃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 트럼프의 세계 전략을 알고 싶다면 그의 관상이나 언행을 살피기 보단 트럼프 1기 정권의 군사·외교 정책을 되짚어봐야 한다.
트럼프 1기 정권의 국가안보보좌관 로버트 오브라이언(Robert O’brien)에 따르면, 군사·외교 면에서 트럼프는 일관되게 “힘을 통한 평화”를 추구했다. 그동안 국내외 언론들엔 트럼프가 돌발 행동으로 세계 평화를 위협할 수 있다는 전망이 쏟아졌지만, 트럼프 정권은 단 한 번도 새로운 전쟁을 벌이거나 기존 전쟁을 확전하지 않았다. 통념과는 달리 트럼프 정권은 카터 정권(1977~1981) 이래로는 전쟁을 벌이지 않은 최초의 정권이었다.
트럼프는 초지일관 ‘싸우지 않고서 이기는 전략’을 추구했고, 그 결과 마지막 16개월 동안 트럼프 1기 정권은 최소 네 가지의 중요한 외교적 성과를 냈다. 첫째, 2020년 9월에서 2021년 1월까지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은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모로코, 수단과 각각 국교를 정상화하는 아브라함 조약을 체결했다. 둘째, 미국의 중재로 세르비아와 코소보는 양국의 경제 관계를 정상화했다. 셋째, 미국의 압박으로 이집트와 주요 걸프 국가들은 카타르와의 분쟁을 종식하고 아랍에미리트에 대한 봉쇄령을 해제했다. 넷째, 탈레반과 적극적으로 협상하여 트럼프 정권은 마지막 1년간 미군 전사자 발생을 극소화했다. Robert O’brien, “The Return of Peace Through Strength,” Foreign Affairs, 2024. 6.18)
▲2020년 9월 15일 미국 백악관에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중재로 아브라함 조약이 체결되었다. 왼쪽부터 바레인의 외교무 장관 아브라티프 빈 라시드 알자야니(Abdullatif bin Rashid Al-Zayani), 이스라엘 수상 벤자민 네탄야후(Benjamin Netanyahu), 미대통령 트럼프, 아랍에미리트 외교부장관 압둘라 빈 자예드 알 나햔(Abdullah bin Zayed Al Nahyan). Wikipedia.com
“힘을 통한 평화”: 레이건의 군사·외교 노선을 계승한 트럼프
트럼프의 외교 노선은 지난 40여 년 미국 보수세력이 설파해 온 가장 중요한 군사·외교 적 원칙에 기반하고 있다. 그 원칙은 바로 “힘을 통한 평화(peace through strength)”이다. 로마제국 황제 하드리아누스(76-138)가 남겼다는 이 한마디 경구 속엔 동서고금에 적용되는 국가 방위의 기본 원칙이 담겨 있다. “힘을 통한 평화”란 “안 싸우고 적의 군대를 굴복시켜야 최선(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이라는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지략(智略)과 공명한다.
어떤 나라든 적국의 군사력에 압도당하면 평화를 유지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강국일지라도 전쟁을 막기 위해선 군사력을 계속 증강하고 빈틈없이 국토를 방위해야 한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군사기술이 발달할수록 이 원칙은 더 중시될 수밖에 없다. 현대 국가의 대규모 학살 전쟁은 승패에 상관없이 전쟁 당사자 모두를 패배의 수렁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250년 미국 헌정사에서도 여러 대통령이 바로 그 원칙을 금과옥조로 삼았다.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도 “평화를 원하면 늘 전쟁을 준비하라” 외쳤고,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는 “말은 부드럽게 하되 큰 몽둥이를 갖고 다니라” 했다. 1980년대 들어와서 레이건(Ronald Reagan, 1911-2004)은 바로 그 “힘을 통한 평화”의 원칙에 따라서 1980년 GDP 5.2%에 달했던 방위비를 대폭 늘려 8년 내내 GDP 6~7%를 지출하며 군비를 증강했다. 그 결과 레이건 정권은 총 한 방 쏘지 않고서도 “악의 제국” 소련을 스스로 무너지게 하는 세계사적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레이건을 미국 헌정사 최고 대통령이라 칭송하는 트럼프는 2020년 9월 유엔 총회 연설에서 “미국은 ‘평화 중재자(pacemaker)’의 숙명을 실천하겠지만, 그것은 힘을 통한 평화”라고 선언했다. 트럼프 정권이 명시적으로 레이건 시대의 군사·외교 노선을 계승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규정하고선 미국인들을 향해 “우리가 이기고 저들이 진다(we win, they lose)”라는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확신을 표명했다. 바로 그러한 레이건의 정신을 이어받은 트럼프는 중국과의 정면 대결을 시대의 소명으로 내세우고 있다.
”힘을 통한 평화”의 원칙은 트럼프 1기 정권에서 군사력 강화 전략으로 표출됐다. 실제로 트럼프 정권은 방위비 예산을 대폭 늘려서 군대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트럼프 정권이 군산복합체를 되살리고, 세 차례에 걸쳐 병사들의 연봉을 올려주고, 미합중국 우주군을 창설하는 적극적인 군사력 강화의 조치를 취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도 트럼프는 그 원칙을 견지하고 있는 듯하다. 지난 11월 8일 윤석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그는 한국의 여러 산업 중 조선업을 콕 집어 도움을 청했다. 레이건 정권에서 미국 해군은 592척의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2024년 현재 그 수는 300척 이하로 줄어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2017년 트럼프는 2032년까지 군함 수를 355척으로 늘리는 계획을 세웠지만, 권력을 놓쳐서 제대로 그 정책을 이행할 수 없었다
(O’brien, 위의 논문). 내년 1월 백악관에 복귀하면 그는 미국 해군력의 증강을 위해 한국 조선업에 도움을 요청하리라 짐작된다.
미국 보수주의의 부활: 레이건에서 트럼프로
2016년 대선 때부터 트럼프는 외쳤던 “위대한 미국 재건(MAGA, Make America Great Again)”이란 구호는 사실 레이건의 모토였다. 트럼프는 소위 “레이건 혁명”의 국가 개조 전략을 되살려서 바로 오늘 위기와 혼란에 직면한 미국 사회를 재건하겠다고 부르짖었다.
2023년 60번째 대선을 1년 앞두고서 공화당의 재집권을 위해 미국의 보수세력은 워싱턴 DC의 헤리티지 재단을 통해서 “프로젝트 2025: 집권 명령, 보수주의의 약속(Mandate for Leadership: The Conservative Promise)”을 출판했다. 920페이지를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행정조직, 군사전략, 사회복지, 경제정책, 독립적 규제 기구 등 다섯 방면에 걸쳐 보수세력의 집권 전략과 통치 방법을 상세하게 논의한 이 정책집은 “레이건 혁명”에 대한 회고에서 시작된다.
지미 카터(Jimmy Carter, 1924- )가 집권하던 1970년대 말 미국의 보수층은 미국 사회는 총체적 난국에 직면해서 몰락의 일로로 치닫고 있다는 위기의식에 휩싸였다. 1970년대 미국은 석유파동으로 유가가 급등하면서 불황인데도 물가가 치솟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의 늪에 빠져 있었고, 산업기반이 위축되면서 공장지대는 날로 줄어들고 있었다. 문화·학술 분야에선 수정주의가 득세하면서 미국인의 역사적 자긍심이 무너졌고, 반문화(counter-culture) 운동이 일면서 전통적 가치관이 위협받았다.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대표로 출마한 레이건이 내건 구호는 “Let’s Make America Great Again.” 2016년 트럼프는 이 구호를 차용해서 MAGA 운동을 펼쳤다. Wiki commons.
당시 미국 사회에 몰아쳤던 반전(反戰)시위와 “리버럴 혁명(liberal revolution)”의 광풍은 전통적 삶을 살아가던 미국인들의 역사적 자긍심, 애국심, 기독교적 가치관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특히 1975년 4월 30일 미국 전역 모든 가정에 중계됐던 베트남 “사이공 함락”의 충격적 장면은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몰락과 공산주의의 흥기를 알리는 신호탄처럼 보였다.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소련이 이끄는 공산주의 진영에 패배하여 붕괴할 지도 모른다는 이념적 공포가 미국 보수층에 널리 퍼져 있었다. 가족이 해체되고, 학교와 교회가 무너지고, 마을 공동체가 붕괴되면서 미국 사회 전역에선 범죄율이 치솟았다. 당시 카터 정부는 빈곤 퇴치와 사회 안전망 구축에 노력했으나 정부 부문만 커졌을 뿐 저소득층은 정부에 의존한 채로 더욱 극심한 빈곤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오늘날 미국 보수세력이 보기에 오늘날 미국 사회의 위기는 1970년대 말 미국의 상황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그들의 눈에는 최근 10여 년 미국 사회를 휩쓸고 있는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 운동과 워키즘(wokism) 따위도 1960년대 널리 퍼졌던 히피들의 반사회 운동이나 1970년대 유행했던 “래디컬 쉬크(radical chic)”의 재판에 불과하다. (여기서 “래티컬 쉬크”란 부유한 엘리트층이 자기 나름의 신념이나 논리도 없이 그저 패션 상품 구매하듯 과격한 좌파의 주장에 동조하는 경향을 이른다. 한국어로 뜻을 옮기면 강남좌파의 허위의식 정도가 아닐까.)
1970년대 말 그랬듯 오늘날 미국의 중산층 가정은 인플레이션으로 경제적 곤경에 처해 있고, 하층민은 빈곤의 함정에서 탈출하지 못하며, 마약성 진통제 펜타닐 남용으로 사망자가 날로 늘고 있고, 성전환 풍조와 포르노물이 만연하면서 청소년은 심각한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다. 무서운 속도로 일어서는 중국이 값싼 공산품으로 미국의 산업기반을 위협하면서 교묘하고도 저돌적인 방식으로 미국을 내부에서 허무는 정치전(政治戰, political warfare)을 전개하는 현실도 역시 과거 소련이 미국에 가했던 이념적·군사적·정치적 위협을 방불케 한다. (Mandate for Leadership: The Conservative Promise)
트럼프의 승리 비결: 마음을 읽고 진실을 말하라
1980년 미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발탁된 70세의 레이건은 반문화의 역습에 지쳐 근원적 변화를 원하는 보수적 유권자를 향해서 2차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끌고서 공산주의를 봉쇄하며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유지해 온 미국의 세계사적 공헌을 적극적으로 설파했다. 8년에 걸친 “레이건 혁명”의 시대가 막을 내리자 곧바로 동유럽의 공산정권들이 줄도산했고, 1991년 12월 말에는 소련이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영원히 계속될 듯했던 미·소 냉전에서 미국이 완벽하게 승리하는 순간이었다. 레이건 혁명을 거치면서 미국 보수세력은 다시금 국가적 자부심과 역사적 자긍심은 물론, 전통적 가치관과 기독교적 세계관을 되찾을 수 있었다. 대망의 1990년대 그들은 비로소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승리와 “역사의 종언”을 이야기했다.
▲1983년 방한하여 DMZ를 찾은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facebook.com/korean.dmz.vets
2010년대 들어오면서 미국인들은 1990년대 그들을 들뜨게 했던 메시아적 희망을 거의 망실해버렸다. 1980년대의 영광을 기억하는 미국의 보수세력은 2024년 대선에 앞서 재집권을 위한 사회 운동을 부지런히 전개했다. 그들은 다시금 1980년의 레이건처럼 보수적 가치를 되살릴 수 있는 영웅의 등장을 꿈꿨다. 그들이 펴낸 정책집에는 미국 재건의 비전이 선명한 언어로 제시돼 있다. 그들의 비전이란 무너진 가족을 되살리고, 건전한 상식을 회복하고, 시민적 자치(自治, self-government)를 재건하고, 전통적 가치를 복원하고, 개인적 자유를 신장한다는 강령으로 정립되었다. 트럼프는 그러한 미국 보수세력의 가치지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탁월한 쇼맨십을 발휘하여 2024년 대선에서 “1980년대 레이건”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미국은 이미 70~80년간 전 세계 140여 개 국가에 군사기지를 두고서 명실공히 세계의 경찰로서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유지하고 관리해 온 나라다. 비록 입 밖으로 공공연히 말하진 않아도 미국인 다수는 2차대전 이후 세계 평화 유지의 인류사적 사명을 수행한 그들 나라에 대한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작은 마을에서 교회에 다니며 성경 말씀을 듣고 자란 미국인들은 한평생 매일 밤 기도하고 입버릇처럼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은 종교적 신념도 내놓고 말하기 힘든 세상을 맞게 되었다. 부모가 자식에게 전통적 이성관과 성(性) 윤리조차 말할 수도, 전하기도 무서운 분위기는 어떤가? 이번 대선을 계기로 미국에서는 성전환의 자유와 워키즘을 설파하는 좌파 집단만큼이나 소도시의 보수세력이 정치화되었다.
트럼프는 그들의 지지 위에서 대권을 재탈환했다. 그는 문화적 불안감에 내몰린 미국인들의 억눌린 자부심과 상처받은 종교심과 불안한 가족관을 공개적으로 옹호하며 상식과 자유를 지키겠다고 공언했고, 반대편을 향해선 직설의 말화살을 거침없이 쏘아댔다. 그 결과 문화적 마르크시즘에 밀려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야만 했던 전통적 가치관을 가진 평범한 미국 시민들은 그를 향해 열광적 지지와 성원을 보냈다. 트럼프가 그들의 마음을 정확히 읽고 느끼는 바 진실을 솔직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을 위해 유세하는 트럼프. Politico.com
레이건에서 트럼프로 이어지는 미국 보수주의의 계보를 놓고 보면,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이 전 세계 경찰이자 평화 중재자로서의 미국의 국제적 지위와 역할을 축소하거나 포기하는 전략이 아님은 확실해 보인다. 트럼프의 군사외교 전략은 전통적 동맹국과의 유대를 더욱 강화하여 중국·러시아·북한·이란을 더 효율적으로 봉쇄하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트럼프 1기 정부 고위 관료들이 만트라처럼 읊조렸다는 “미국 먼저는 미국 홀로가 아니다(America First is not American Alone)”이라는 한마디가 그 점을 웅변한다.
군사적 측면에서 트럼피즘(Trumpism)은 외교적 고립주의(isolationism)로의 회귀가 아니라 오히려 1980년대 레이건 정권이 추구했던 군사적 자강(自强) 노선의 재천명이라 할 수 있다. 레이건이 자유의 깃발을 들고서 악의 제국 소련을 붕괴시켰듯이 트럼프는 자유의 바통을 이어받아서 자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유린하는 전체주의 중국과의 대결을 예고해 왔다. 레이건에서 트럼프로 이어지는 미국 보수주의의 흐름을 보지 않고선 트럼프 2.0 시대를 예측할 수 없다.
레이건 시대로의 회귀는 비단 트럼프 일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트럼프 2.0 시대를 창출한 미국 보수세력의 일반 여론이다. 트럼프 권력을 재창출한 미국 사회는 시방 1980년대 난파 직전의 미국을 근본적으로 치료하여 세계 최강의 국가로 다시 일으켜 세운 레이건과 같은 영웅을 희구하고 있다. 과연 트럼프가 레이건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느 나라 지도자든 효과적인 대미 정책을 세우기 위해선 트럼프를 다시 불러낸 평범한 미국 시민들의 마음을 읽으려 노력해야 할 듯하다. <계속>
〈135〉다시 불붙는 미·중 전쟁에서 대한민국의 최선책은?
변방의 중국몽<53회>

▲1950년 10월 압록강을 건너 참전하는 “중공군”의 모습. 사진/ 중국 신화(Xinhua).
미국과 중국의 대결 조짐이 심상찮다. 트럼프 2기 정권에선 1기 때보다 더 강력한 대중국 압박 정책을 강행할 분위기다. 1978년 12월 말 이래로 중국과 경제적 공생 관계를 맺어 온 미국은 이제 다시 본격적으로 중국과의 탈동조화(decoupling)를 논의하고 있다. 최근 트럼프가 발탁한 강경 인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중국을 미국의 숙적(宿敵, arch-enemy)으로 지목하는 상황이다. 다시 불붙는 미·중 전쟁은 과연 세계를 어디로 끌고 가는가?
서태평양 자유 진영의 최전선 대한민국과 중화민국(대만)이 미·중 전쟁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다. 긴박한 미·중 대결의 한가운데서 한국과 대만이 취할 수 있는 외교·안보적 최상책은 과연 무엇인가? “미국 우선(America First)”를 제창하는 트럼프 2기 정권은 과연 미국의 단기적 국익을 위해서 70여 년 유지해 온 전통적 동맹국들을 버리려 할까? 한국과 대만은 과연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지금껏 걸어온 자유와 번영과 평화의 고속도로를 더 안전하게 유지·관리할 수 있을까?
트럼프의 “예측 불가능성”
트럼프 2.0 시대의 개막을 앞두고 세계 여러 나라의 셈법이 복잡하게 엇갈리고 있다. 유럽연합은 서둘러 방위비 증액을 선언했고, 트럼프의 25% 관세 폭탄 예고에 캐나다와 멕시코의 정치인들은 미국에 아첨하거나 울분을 토하거나 보복을 맹세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24시간 안에 종식할 수 있다는 트럼프의 발언을 놓고도 선거용 허풍, 실용적 휴전전략, 최악의 시나리오 등등 세계 언론의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한국에서는 돌발적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에 대비해 자체 핵무장을 서두르자는 주장이 심심찮게 들린다.
여러 나라 중에서도 트럼프가 65% 관세 폭탄을 부과하겠다는 중국의 반응이 특히 흥미롭다. 트럼프 당선 직후 중국 외교부는 일단 “상호존중, 평화공존, 상생협력” 등의 외교적 상투어를 늘어놓았지만, 중국공산당 중앙당교(黨校)를 비롯한 중국 주요 기관의 전문가들은 애국심과 희망 사항을 뒤섞어 “중국 특색” 국제정세 분석을 토해내고 있다. 대부분 이번 트럼프의 재선으로 미국은 몰락 일로를 가고, 중화민족은 부흥의 기회를 잡는다는 무리한 해석이 많다. 미국의 정치적 분열이 심해지고 사회적 갈등이 격화되면서 미국식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말 것이란 미국 문명에 대한 묵시론적 예언부터 중국 경제에 큰 지분을 갖고 있는 일론 머스크가 트로이 목마로 돌변하여 중국 편을 들 것이란 장밋빛 비전까지 근거가 빈약한 억지스러운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대부분 자국 중심의 무리한 해석인데, 오히려 중국이 처한 절박한 상황을 방증한다.
중국 내 전문가들의 여러 분석 중에서도 특히 앞으로 미국의 글로벌 지도력이 무너지면서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해체될 것이란 전망이 눈길을 끈다. 특히 머잖아 트럼프가 틀림없이 대만을 포기하고,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을 절반 이상 철수시키고, 필리핀 영토 내의 미군 기지는 무력화할 것이란 주장은 비현실적이지만, 중국공산당의 속셈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섬뜩하게 느껴진다. 과연 중국의 소망대로 미국이 대만과 한국을 포기할까? 트럼프 정권의 핵심 인물들이 모두 중국을 미국의 가장 악랄한 적대국으로 규정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전 지구 반도체의 80% 이상을 생산·공급하는 대만과 한국은 미국이 이끄는 규칙 기반의 국제 질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이다. 미국은 공산 전체주의의 팽창 전략에 맞서 유엔군을 이끌고서 한국과 대만을 지킨 나라이다. 그런 미국이 전 세계 자유 진영의 현대사에서 최고의 성공 사례로 꼽히는 한국과 대만을 중국에 거저 넘길 수 있다는 중국 전문가의 발상은 공상에 가깝다. 문제는 트럼프 2.0 시대 미국에 대한 공포증이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세계는 이미 4년의 트럼프 정권을 경험했다. 그럼에도 그의 복귀가 그토록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세계 최강의 국가 미국의 정치권력을 완벽하게 장악한 트럼프란 인물이 갖는 “예측 불가능성(unpredictability)” 때문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트럼프란 인물은 이미 미국 외교의 상수(常數)가 되어버린 듯하다. 미국 대선의 흑색 선거전이나 주류 매체의 편향 보도 등도 큰 영향이 있겠지만, 더 본질적으로 트럼프의 예측 불가능성은 치밀하게 계산된 그의 작전이라 볼 수밖에 없다. 약소국의 리더가 예측 불허의 돌발행동을 한다면 주변국들에 짓밟히고 말지만, 세계 최강국의 리더라면 상황은 정반대가 된다. 예측을 불허하는 트럼프의 외교술은 일개인의 즉흥적 결정이 아니라 적대국의 세계 전략을 더욱 난해하게 만드는 미국의 치밀한 전술일 가능성이 크다.
글로벌 군사 대국 미국의 세계사적 역할
트럼프가 예측 불가능하다는 인상은 터프(tough)한 사업가의 거래 방식에서 나온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미국의 분석가들은 그러한 그의 거래 방식이 돌출적 행동이 아니라 그만의 독특한 업무적(transactional) 리더십이라 설명한다. 그 관점에서 보면, 트럼프는 동맹국과의 대화도 미국의 국익 증진을 위한 업무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1987년 9월 2일 트럼프가 사비를 써서 게재한 뉴욕타임스 전면 광고. ”강단만 있다면 못 고칠 미국 방위 정책의 오류는 없다“는 제목 아래 트럼프가 미국 국민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취하고 있다. https://x.com/MarlowNYC
트럼프는 지난 40년간 일관되게 같은 주장을 되풀이해 왔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1987년 9월 2일 트럼프는 사비 94,801달러를 들여서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보스턴글로브 세 신문에 전면 광고를 냈다. ”미국 국민“에 보내는 편지글 형식의 광고문에서 트럼프는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같은 부자 나라들을 미국이 국민 혈세로 지켜줘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1980년대부터 일본, 중동, 유럽의 부국들을 향해서 군사비 증액을 요구했다. 그렇다고 그가 미국이 이미 장악한 세계적 헤게모니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이 점을 간과한 분석가들은 흔히 트럼프가 외교적 고립주의를 취한다고 오인하지만, 지금껏 트럼프가 발탁한 주요 인사 중에서 군사·외교적 고립주의를 추구하는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미국 먼저는 미국 홀로가 아니다(America First is not America Alone)“라는 구호 아래 오히려 전통적 동맹국과의 유대가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맹국에 압박하고 미군 철수까지 쉽게 말하면서 어떻게 동맹을 중시하냐 되물을 수 있지만, 그들의 논리를 분석해 보면 의외로 간단하다.
1) 자유주의 국제 질서의 정당성: 2차대전 이후 등장한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는 미국과 동맹국 모두를 자유와 번영으로 이끌었다.
2) 미국의 세계사적 기여: 80년의 세월 동안 미국은 가장 많은 방위비를 써서 최강의 군대로 세계 평화에 가장 큰 공헌을 해왔다.
3) 동맹국의 군사적 책무: 미국의 글로벌 군사적 리더십 아래서 이제 부국이 된 동맹국들은 방위비를 늘려서 미국에 대한 군사 의존성을 줄여가야 한다.
4) 자유 진영의 군사적 강화 전략: 미국의 동맹국들이 모두 스스로 자국의 방위를 책임질 수 있을 때 자유주의 국제 질서는 더욱 강화될 수 있다.
2차대전 당시 추축국으로서 연합국에 항복한 독일, 일본은 물론, 2차대전의 결과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 한국과 대만 중 그 어떤 나라도 위의 네 가지 주장에 뾰쪽한 반론을 제기할 수가 없다. 그 모든 나라들이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국제 질서에 참여하여 가장 성공한 국가들이기 때문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해 보면, 트럼프의 요구가 전혀 부당하지 않음을 쉽게 논박할 수가 없다. 1989년 11월 트럼프가 직접 썼던 거친 표현을 그대로 쓰자면, 이들 나라들은 미국을 “뜯어먹으며(ripping off)” 번영을 누렸기 때문이다.

▲2017년 4월 백악관 행사. 당시 폭스 뉴스 해설자로서 트럼프 대통령과 인터뷰한 피트 헤그세스(Pete Hegseth)를 트럼프는 최근 국방장관으로 지명했다. 사진 Andrew Harnik(AP).
바로 그러한 논리 위에서 트럼프는 “미국 우선”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 세계를 향해서, 특히 유럽과 아시아의 동맹국들을 향해서, 지금껏 자유주의 국제 질서의 구축과 유지와 발전을 위해서 미국이 치러야만 했던 거액의 군사비와 인적 희생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거액의 청구서를 요구해 왔고, 앞으로 그 수위를 높일 전망이다. 내년 초부터 트럼프는 반드시 한국과 대만을 압박해서 방위비 증액을 요구할 것이다. 한국의 경우 주한미군 주둔비 부담을 늘리려 할 것이고, 대만의 경우엔 최첨단 무기 구매와 더불어 자체 병력의 훈련 강화를 요구할 전망이다. 트럼프의 언어를 빌자면, 한국과 대만은 이미 “현금 기계”로 돈을 찍어내듯 돈을 잘 벌고 있기 때문이다.
동맹국에 대한 트럼프의 단호한 요구는 미국인들에게 쾌감을 준다. 보통 미국인들은 일본, 독일, 한국, 대만 등 부유한 나라들을 왜 미국이 자신들이 낸 혈세를 써가며 지켜줘야 하는지 쉽게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수 여론과 상관없이 역대의 미국 정권은 공화당, 민주당 불문하고 세계 평화를 지키는 미국의 사명감을 방기한 사례가 거의 없다. 미국 정부가 전통적으로 내세우는 미국적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나 미국 특유의 자유주의적 이상주의(liberal idealism) 외에는 달리 외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설명하기 어렵다.
미국 학계 일각에서는 여전히 글로벌 군사 제국으로서의 미국이 군산복합체의 이윤 극대화를 위해서 고의로 군사적 위기를 고조시키며 동맹국을 이용하고 있다는 좌파적 주장을 횡행하지만, 그런 식의 논리는 1980년대 공산권이 붕괴하면서 구시대의 음모론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은 전 세계의 경찰국가로서 자유와 인권과 민주의 이상 아래 파시스트 전체주의, 공산 전체주의, 글로벌 테러 집단과 같은 “악한 세력”의 도발을 막강한 군사력으로 억지(抑止, deterrence)하고, 불가피할 땐 전쟁 수행(war-fighting)하는 책무를 감당해 왔다. 그 어떤 나라도 미국의 그런 역할을 대체할 수 없다. 과연 미국은 과연 왜, 어떤 과정을 통해서 오늘날의 글로벌 군사 대국이 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역사적 탐구가 없이는 미·중 전쟁에 대응하는 대한민국의 최상책을 찾을 방도가 없다.
미국은 대체 어떻게 글로벌 군사 대국이 되었나?
2차대전이 시작되던 1939년까지 미국의 군사력은 태평양과 대서양 사이에 놓인 거대한 섬과 같은 나라였다. 당시 미국의 육군 병력은 20만 미만으로 전 세계 18위의 전력에 불과했다. 이미 하와이를 병합하고 필리핀을 식민화한 미국은 태평양에 포진한 강력한 해군 병력을 갖고 있긴 했지만, 군사적으로 세계 패권을 노리는 제국과는 거리가 멀었다.
경제적으로도 대공황의 여파에서 온전히 탈출하지 못한 상태였다. 미국 의회는 전쟁 참여에 반대하는 대다수 국민 여론을 반영하여 1935년에서 1939년까지 미국이 외국의 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무기·군수품 수출과 금융 지원을 막는 여러 중립법(Neutrality Acts)을 통과시킨 상태였다. 그러한 미국이 부득불 군사 대국으로 급성장한 결정적 계기는 의심의 여지 없이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었다.
태평양 전쟁으로 2차대전에 들어간 미국은 불과 4년 만에 거의 1천2백만 명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무장 병력을 양성하게 되었다. 육군 병력이 820만 명, 해병 48만 4천 400명을 포함한 해군 병력은 3백40만 명에 달했다. 230만 명을 자랑하는 육군 항공단은 15만 9천 대의 비행기를 갖추고 있었다. 미 해군은 총 1,200대의 전함, 5만 대의 지원·상륙용 주정(舟艇, support and landing craft), 15만 9천 대의 비행기를 보유했다. 2차대전이 종결될 때까지 미국은 269만 기의 비행기와 3억 5천100만 톤의 폭탄을 제조했고, 항공모함 147대, 전함 952대와 상선 5,200기를 건조했으며, 탱크 8만 6,333대와 소총 1천250만 자루를 생산했다. 미국은 세계 유일의 핵폭탄, 레이더 등의 최첨단 군사기술도 보유하게 되었다. (Thomas G. Mahnken, “US Grand Strategy, 1939-1945,”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I, pp. 189-190)

▲1944년 프랑스 셰르부르에서 미군에 잡혀서 압송되는 독일의 전쟁 포로들. wikipedia.com
2차대전 과정에서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갖게 된 미국은 승전국으로서 200여 전부터 대영제국이 구축한 글로벌 군사 기지를 접수하게 되었다. 섬나라 영국이 글로벌 제국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아메리카, 카리브해,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 오세아니아, 유럽에까지 실로 전 세계에 미치는 수많은 군사 기지의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2차대전 과정에서 미국은 대영제국의 글로벌 군사 기지의 네트워크를 이양받을 수 있었다. 예컨대 방위 목적상 영국은 1940년 미국에 인도양과 카리브해의 여러 섬에 구축된 군사 기지를 양도했는데, 미국이 해외에 갖게 된 첫째 군사 기지였다. 반대급부로 미국은 영국에 낡은 구축함 50척과 무기 대여(lend-lease)의 지원을 받았다. (Kent E. Calder, Embattled Garrisons, Princeton Univ. Press, 2007, chapter 1)
무엇보다 미국과 영국은 개방성, 안전성, 투명성을 갖춘 규칙 주도의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건설해야 한다는 공동의 세계 전략을 갖고 있었기에 미국은 바레인, 싱가포르, 대서양의 어센션(Ascension)섬 등에 있던 영국 기지를 이양받을 수 있었다. 2차대전이 종결될 때 미국은 북극권 한계선에서 남극에 이르는 전 세계의 대략 100개 국가에 구축된 2천 개가 넘는 군사 기지에 3만여 개 군 시설에 대한 관리권을 갖게 되었다.
2차대전 과정에서 세계 최강의 군사 대국으로 급부상한 미국은 군사 충돌의 재발을 막고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확대하기 위해선 해외 군사 기지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1945년 1,200만에 달했던 해외 주둔 병력을 급속하게 감축하여 1950년까지 150만 정도로 줄였다. 일례로 1945년 5월 8일 유럽 전승 기념일 때 독일에 주둔했던 미군 병력은 200만 명이었는데, 불과 5년 지난 1950년이 되면 96.3%가 철수하고 오직 7만 5천 명이 남겨졌다. (같은 책, chapter 2).
2차대전 직후 급속한 해외 주둔 미군 병력이 급속히 감축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당시 미국의 군사·외교적 전략이 쉽게 파악된다. 미국은 전후 최소 비용만 치르고서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유지·관리할 계획이었다. 그러한 미국의 병력 감축 계획을 근본적으로 뒤바꾼 결정적 사건이 바로 북한 김일성의 6·25남침 전쟁이었다. 물론 김일성은 스탈린의 큰 계획에 따라 마오쩌둥의 참전 언약을 받고서 소련제 무기로 중무장한 북한의 인민군을 앞세워 건국 2주년을 50여 일 앞둔 자유민주주의 신생국 대한민국을 침공했다. <계속>

▲1950년 서울 수복 전투. 라이프(Life)지 종군기자 던킨(David Douglas Duncan) 촬영.
〈136〉한반도 게임: 미·중 전쟁과 코리안 딜레마 (1)
변방의 중국몽 <54회>

▲1950년 6월 27일 유엔안보리 총회에서 59개 회원국이 북한의 대남 침공에 대한 군사 작전을 표결하고 있다. United Nations Photos #64552
12월 7일 발의된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에는 “북한·중국·러시아를 적대시하고 일본 중심의 기이한 외교를 고집했다”는 점이 탄핵 사유의 하나로 명기돼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12월 10일 여러 미국 동아시아 전문가들은 한·미·일 3국 공조 강화는 절대로 탄핵 사유가 될 수 없다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상식적으로 대통령의 외교·안보 정책이 탄핵 사유가 될 수 없을뿐더러 한·미·일 공조는 환태평양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핵심축이기 때문이다. 거대 야당이 탄핵의 사유로 그처럼 부당한 논거를 포함했다는 사실은 국제정세를 보는 그들의 시각이 1980년대의 낡은 운동권적 세계관에 포박당해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늘날 세계는 제2차 미·중 전쟁을 목도하고 있다. 제1차 미·중 전쟁은 바로 1950년에서 1953년까지 한반도에서 일어난 6·25전쟁 혹은 한국전쟁이었다. 2차대전 이후 사상 최대 규모의 병력 감축을 추진하던 미국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다시 군비를 증강하여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세계 140여 국가에 주둔지를 확보한 세계 최강의 글로벌 군사 대국으로 성장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에서 대한민국의 중요성은 전 세계 그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다. 미국 동아시아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듯 한·미·일 공조는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과 전략적 중요성을 제고하는 가장 효과적인 외교 정책이다.
지난 4년간 3부에 걸쳐 연재해 온 “슬픈 중국”에서는 그 마지막 기획으로 이번 주부터 3회에 걸쳐서 “한반도 게임: 미·중 전쟁과 코리안 딜레마”라는 제목으로 한국을 끼고 도는 국제정세의 냉혹한 현실을 짚어보려 한다.
대한민국, 서태평양 자유 진영의 린치핀
린치핀(linchpin)은 수레의 두 바퀴를 바깥에서 굴대(axletree, 축)에 고정하는 쇠막대나 철사 등을 말한다. 아무리 강력한 철근 굴대를 가진 튼튼한 수레일지도 린치핀이 빠지면 바퀴가 굴대에서 빠져나가 해체되고 만다. 바퀴 중심 밖으로 나온 굴대에 린치핀을 잘 끼우면 바퀴와 굴대는 절대로 분리되지 않지만, 바퀴를 굴대에서 분리하려면 린치핀만 빼면 된다. 작고 단순한 부속이지만, 린치핀이 부서지면 수레는 굴러갈 수가 없다. 바로 그런 이유로 학술논문이나 언론매체에서도 흔히 핵심 인물이나 주요 사항을 가리켜 린치핀이라 부른다.
미국 국무부 수뇌부의 전략가들이 1948년 8월 15일에 세워진 신생국 대한민국을 린치핀으로 인식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50년 6·,25전쟁이었다. 전쟁 발발 직후 미국 트루먼(Harry Truman, 1884-1972) 대통령은 이 도발이 스탈린이 이끄는 세계 공산 진영의 군사적 팽창주의의 최초 신호탄임을 대번에 간파했다. 북한 김일성이 소련제 중화기로 무장한 인민군을 몰고서 38선을 넘어 남침했기 때문이었다. 기민하게 유엔안보리 총회를 열어 미국과 유엔 회원국의 신속한 참전을 결정한 트루먼 행정부는 실로 놀라운 지도력을 발휘했다.

▲수레의 바퀴와 굴대를 연계하는 린치핀, wikipedia.com
1945년 10월 24일 창설된 유엔은 트루먼의 강력한 드라이브에 이끌려서 “안보리 결정안 82”를 채택했다. 인류가 사상 최초로 유엔의 명의 아래 위기의 대한민국을 구출하기 위한 국제전을 수행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1950년 6월 27일 즉각 전 세계에 공포된 트루먼 선언문엔 다음 의미심장한 구절이 등장한다.
“의심의 여지 없이 한국에 대한 공격은 공산주의가 독립국들을 침략하기 위해서 (내적인 체제) 전복의 방법을 이미 넘어섰으며, 이제 앞으로는 무장 침략과 전쟁을 자행할 것이란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공산 세력은 국제 평화와 안전을 지키기 위해 유엔안보리가 내린 명령을 거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산 세력에 의한 포르모사(Formosa, 대만) 점령은 태평양 지역의 안보와 그 지역에서 합법적이며 필수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미군 병력에 직접적 위협이 될 것이다.”

▲1950년 10월 태평양 웨이크섬에서 만난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Douglas McArthur, 1880-1964) 사령관. wikipedia.com
전쟁 발발 사흘째인 6월 28일 일본에서 이륙한 미 공군 B-26 전투기가 최초로 인민군 보급로를 폭파했다. 바로 다음 날 B-26은 38선 넘어 평양 공항을 폭격했다. 북한의 기습 공격에 대항하여 미국은 최대한 신속하게 반격을 가했다. 1949년 6월 30일부로 주한미군은 이미 철수를 완료한 상태였다. 전쟁이 터졌을 땐 미 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500명 정도가 한국 땅에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어떻게 그토록 신속하게, 왜, 어떤 절박한 이유에서 유엔군을 이끌고서 대한민국을 구하는 전쟁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관해선 1950년 4월 6일에 작성된 미국 국무부 국가안보위원회 보고서 68(이하 NSC 68)이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 냉전 시기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구축·관리하는 미국의 세계 전략이 담긴 이 중대한 문서는 한국 현대사를 결정했다. 과연 이 문건 속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는가? 이 문건은 6·25전쟁 발발 이후 미국의 세계 전략에 과연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케넌의 “봉쇄 전략”과 “애치슨 라인”
1952년 미국 대선에서는 2차대전 당시 서유럽 전선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한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1890-1969) 장군이 공화당 후보로 나왔다. 그해 미국 대선에서 가장 첨예한 논점은 2년 넘게 지속된 한국전쟁이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지리멸렬하게 질질 끌고 있는 한국전쟁이 애당초 왜 일어나야만 했나를 날카롭게 추궁하면서 애치슨(Dean Acheson, 1893-1971) 국무장관이 1950년 1월 12일 워싱턴 D.C. 국가 프레스 클럽 연설문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비판했다.
미국의 대외 전략을 요약한 애치슨의 이 연설은 중국이 공산화된 지 3개월 지나고 6·25전쟁이 발발하기 5개월 전에 이뤄졌다. 애치슨은 서태평양 미국의 전략적 방어선(strategic defense line)을 논하면서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 등을 열거하면서, 놀랍게도 그 방어선 안에 남한과 대만은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사후 학자들은 일본에서 오키나와를 거쳐 필리핀으로 이어지는 미국의 서태평양 방어선을 ”애치슨 라인“이라 명명했다. 미국이 고의로 애치슨 라인을 제시함으로써 스탈린과 김일성의 침략전쟁을 유도하고 부추겼다는 반미주의적 수정론(revisionism)의 근거가 되었다.
미국에서 최초로 애치슨의 발언에 일반 대중이 주목하게 된 계기는 1952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주어졌다. 아이젠하워는 에치슨이 1950년 1월 12일 연설에서 남한과 대만을 미국이 전략적 방어 둘레(defense perimeter) 안에 구체적으로 포함하지 않는 결정적 실책을 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스탈린과 김일성의 침략 야욕을 부추겼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항해 애치슨은 그날 그 발언을 통해서 자신은 대한민국과 대만에 대한 포기 의사가 아니라 서태평양에 대한 미국의 방어 의지를 표명했다고 항변했다.

▲1949년에서 195년까지 미국 국무부 장관직을 수행한 딘 애치슨(Dean Acheson, 1893-1971)
실제로 그날 애치슨의 발언을 꼼꼼히 뜯어 보면, 그가 고의로 한국과 대만을 서태평양 미국 방어 둘레(defense perimeter)에서 제외했다고 볼 순 없음이 분명하다. 그는 한국, 대만뿐만 아니라 호주와 뉴질랜드도 언급하지 않았다. 같은 연설문에서 그는 2차대전 후 독립을 얻는 모두 5억 명에 달하는 아시아 여러 국가를 하나씩 거명하면서 ”남한 2천만 명(southern Korea with 20 million)“ 국민을 분명히 언급했다. 특히 그는 아시아 여러 독립국에 대한 공산 세력의 침투 가능성을 논하면서 동남아와는 달리 동북아에 대해선 미국이 직접적 책임을 지고 있음을 강조했다. 애치슨은 일본에 대한 미국의 직접적 책임을 논하면서 ”그 정도는 다소 약하지만 한국에 대해서도 미국은 직접적 책임을 갖는다(The same thing to a lesser degree is true in Korea. There we have direct responsibility)“고 분명히 밝혔다. (”Secretary of State Dean Acheson’s Speech, Crisis in Asis: An Examination of U.S. Policy,“ Jan. 12, 1950, Department of State Bulletin, XXII No. 551: 111-118).
요컨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식 출범한 상황에서 한국과 대만이 공산 세력의 군사적 침략에 노출돼 있음을 미국 정부가 모르지 않았다. 애치슨을 비롯한 미국 트루먼 정권의 핵심 인물들은 그 누구도 대한민국과 대만을 공산 세력에 넘겨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만 그들은 전 세계의 전략적 요충지에만 방어선을 친다는 당시 미국 정부의 기본적 봉쇄 전략을 채택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 봉쇄 전략은 2차대전 이후 냉전 시기의 미국 외교·안보 전략의 기본 노선을 설계한 조지 케넌(George Kennan, 1904-2005)의 머리에서 나왔다.
1946~1947년 소련이 본질적으로 팽창주의적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케넌은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선 미국이 ”필수적인 전략적 중요성(vital strategic importance)“을 갖는 지역에만 집중적으로 방어선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케넌의 전략적 분석은 애치슨의 1950년 1월 연설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애치슨은 바로 그 필수적인 전략적 요충지에 한국과 대만을 포함하지 않았다. 쉽게 말해 일본 본토, 오키나와, 필리핀 등지의 주둔 병력만으로 한국과 대만까지 방어할 수 있다는 다소 느슨한 군사전략이었다. 미국으로선 국가 재정상 2차대전 과정에서 무려 1,200만 명 이상으로 불어난 대규모 군 병력을 최소의 정예부대로 감축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그러한 국가적 필요에 따라서 케넌은 소련 팽창주의를 막는 가장 효과적 방법으로 군사력 억지력과 장기적 인내를 요구하는 ”봉쇄 전략(Containment Strategy)“을 제시했다. 이 노선은 김일성이 남침하기 이전까지 미국의 기본 노선이었다. 6·25전쟁 발발은 바로 그러한 미국의 기본적 외교·안보 정책을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NSC 68,“ 니체의 ”롤백 전략“
1950년 4월 7일 미국 국가안보위원회(NSC)는 66쪽의 극비 보고서 ”국가안보를 위한 미국의 목적과 정책(이하 NSC 68)“를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브리핑했다. 에치슨이 문제의 연설문을 낭송하고 석 달쯤 지나서 6·25남침을 고작 두 달 반 남겨둔 시점이었다.
미국 역사학자 메이(Earnest May) 교수가 지적한 대로 이 문서는 1950년부터 1991년 소련 멸망까지 미국의 군사·외교 노선과 세계 관리 정책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미 국무부 정책 계획 감독 폴 니체(Paul H. Nitze, 1907-2004)가 맡아서 작성한 이 보고서는 미국 국제전략의 근본적 수정을 요구한다.

▲미국 국가안전위원회가 1950년 4월 7일에 보고한 기밀문서 “NSC 68”(왼쪽)와 이 보고서를 주도적으로 작성한 폴 니체(Paul Nitze, 1907-2004). wikipedia.com
소련의 위협은 공화국(미국)뿐만이 아니라 문명 자체를 파괴할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경고를 담은 이 보고서는 당시 트루먼 행정부에서 가장 강경한 매파(hawks)의 논리를 담고 있었다. 소련 핵무장, 중국 공산화, 유럽과 일본의 경제적 위기가 중첩적으로 일어는 당시 상황에선 공산 세력의 팽창주의에 맞서는 미국의 적극적 대응이 필수적이며,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대규모 군사비 지출이 불가피하다는 논리였다. 냉철하면서도 비장한 어조로 니체는 소련 스탈린의 팽창주의 야욕이 단순히 러시아 및 그 위성 국가들에 머물지 않고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의 자유 진영 국가들에 대한 무력 침공과 공산화 전략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1950년 초반 긴장 어린 국제정세를 반영한 이 보고서는 2차대전 후 역대 최대 규모의 군비 감축을 추진해 온 미국 정부를 향해 이제는 대규모 군비 증강이 필요할 때임을 강조했다. 소련의 군사적 팽창주의를 막기 위해선 케넌처럼 가장 주요한 전략적 핵심 지역뿐만 아니라 전 지역에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미군 방어망을 쳐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니체는 소극적 봉쇄 정책이 아니라 공산 정권의 교체까지 시도하는 적극적 ”롤백(rollback, 역행)“ 전략을 제시했다. 2차대전 과정에서 독일, 이태리, 일본의 파시즘 체제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이양한 미국의 군사적·정치적 개입이 가장 대표적 ”롤백 전략“의 성공 사례였다. 이후 한국전쟁 과정에서 인천상륙작전으로 38선 이남을 수복한 후 전개된 유엔군의 이북 점령 작전도 바로 ”롤백 전략“의 일환이었다. 물론 중국의 참전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당시 유엔군은 국제법을 어기고 전쟁을 일으킨 북한 공산 정권을 무너뜨리고 자유 진영의 진지를 확대한다는 롤백 전략을 추진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50년 4월 7일 니체의 기밀문서 ”NSC 68“을 전해 받고서 그 중요성과 시급성을 즉각 인정한 트루먼 대통령은 닷새 후인 4월 12일 국가안보위에 이 정책의 추진에 필요한 예산액을 포함한 상세한 검토를 요구했다. 이 문서의 시의성을 직감한 트루먼의 혜안은 당시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불과 두 달 열흘 후 소련제 중화기로 무장한 북한 인민군이 김일성의 명령을 받아서 남침을 감행했다. 김일성의 남침 이틀 후인 6월 27일 트루먼 대통령이 그토록 기민하게 유엔안보리 회의를 소집하여 전격적으로 대규모 참전을 결정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분명 소련 팽창주의의 위험에 경종을 울린 니체의 ”NSC 68”도 끼어 있었다. 이 보고서에 적혀 있는 다음 문단은 스탈린의 군사 지원을 받은 김일성의 6·25남침 전쟁을 예언하고 있는 듯하다.
“소련의 기획은 소비에트 진영이 아닌 나라들에서 정부 조직과 사회 구조를 완전히 전복하고 강압적으로 파괴하여 크렘린에 복종하고 지배받는 제도와 구조로 뒤바꿀 것을 요구한다.” (NSC 68, 6쪽).
한국전쟁은 이 기밀문서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된 후 최초로 발생한 공산 세력의 침략전쟁이었다. 바로 그 점에서 “NSC 68”이 6·25전쟁 발발 두 달 전에 이미 미 국무부에서 작성되어 트루먼 행정부의 군사·외교 정책의 큰 방향을 변화시키고 있었음은 대한민국의 운명과 직결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계속>
〈137〉6.25가 세계사에 끼친 일곱 가지 영향
한반도 게임: 미중 전쟁과 코리안 딜레마 (2)
변방의 중국몽 <55회>

▲한국전쟁 당시 1951년 충주 부근에서 미 공군 대형 수송기 페어차일드(Fair Child) C-119가 보급품을 낙하하고 있다./위키피디아
6·25전쟁 발발 후 마오쩌둥이 참전을 결정한 여러 이유 중엔 흔히 간과되는 중대한 계략이 숨어 있었다. 마오쩌둥은 대군을 급파해 38선 이북을 되찾고서 그 파죽지세를 몰아 이남 주요 지역을 점령할 수 있다면 미국과 협상하여 그 지역을 대만과 맞바꿀 수도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마오쩌둥 입장에서 미국은 본래대로 남한을 되찾고 중국은 피 흘린 대가로 대만을 먹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전리품은 없을 듯했다.
6.25와 “대만 해방”의 꿈
마오쩌둥 자신도 그러한 계략의 실현 가능성을 그리 높게 보진 않았다. 중공군의 개입 이후 한국전쟁은 어차피 한반도의 상황을 6·25전쟁 발발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싸움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군사적으로 냉철하게 판단할 때 중공군이 이미 한반도에 진주해 있는 대규모 유엔 병력을 물리치고 38선 이남 주요 지역을 점령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전쟁 발발 이틀 만에 파병한 결정한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동시에 제7함대를 보내 대만 해역을 엄호했다. 트루먼은 김일성을 꼭두각시로 내세운 스탈린의 전쟁이 곧 마오쩌둥의 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음을 내다봤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미국이 쉽게 대만을 포기할 리도 만무했다. (송재윤,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 제9장 “마오의 도박, 미국과의 전쟁”)
산전수전의 게릴라 전사 마오쩌둥이 그 점을 모를 리 없었다. 참전 결정 때부터 마오쩌둥의 본래 목표는 북한 수복이었다. 중국 측 참전의 최대 명분은 “미제에 대항해 조선을 지원한다”는 항미원조(抗美援朝)였다. “항미”란 북한을 침략한 “야심랑(野心狼) 미제(美帝)”를 38선 이남으로 물리친다는 구호였고, “원조”란 만주로 쫓겨온 어린 동생 같은 김일성 정권을 되살려준다는 표어였다.
▲1950년 10월 19일경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중공군./공공부문, 윌슨센터 홈페이지
냉혹한 국제정세의 역관계를 모르지 않았음에도 마오쩌둥에겐 현실적 목표만큼이나 당원들과 인민을 설득할 원대한 이상이 필요했다. 국민당군을 물리치고 대륙을 통일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한 지 고작 1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국과의 전쟁에 나선 마오쩌둥은 실리 못지않게 여러 전쟁의 명분이 필요했고, 그중 하나가 바로 “대만 해방”이라는 큰 꿈이었다. 마오쩌둥으로선 만약 한반도에서 피 흘린 대가로 미국과 협상하여 꿈에라도 대만을 차지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통일 대업을 완성하는 최대 과업이 아닐 수 없었다. 마오쩌둥이 오매불망 염원했던 “대만 해방”은 1970년대 후반까지도 중국공산당의 일관된 양안(兩岸) 정책이었다.
▲1955년 중국에서 제작된 “대만 해방” 포스터. “견결히 대만을 해방하여 고난 중인 대만 인민을 구하자!”는 구호가 적혀 있다./chineseposters.net
제1·차 미·중 전쟁의 결과
한국전쟁의 세계사적 의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한국전쟁은 이후 국제적 세력 관계를 어떻게 뒤바꿨을까? 어떤 이는 대중 강연에서 한국전쟁의 의미를 애써 폄훼하면서 남·북한의 독재정권만 강화했다는 1차원적 주장을 늘어놓지만, 국제정세의 큰 흐름을 전혀 모르는 백면서생의 궤변일 뿐이다. 한국전쟁은 최소 일곱 가지 점에서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첫째, 한국전쟁은 2차대전 이후 ‘미국 주도의 규칙 기반 자유주의 국제질서(U.S. led rules-based liberal international order)’를 확립하는 가장 중요한 전쟁이었다. 냉전 시대 공산 세력의 팽창주의 의도를 간파한 미국은 전 세계 전역에 적극적인 방어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미국은 조지 케넌(George Kennan, 1904-2005)의 ‘봉쇄 전략(containment policy)’에 따라 일본, 독일 등 전략적 핵심 요충지에만 주둔지를 남겨두고서 그 외 지역에선 병력을 철수하는 대규모 해외 병력 감축 정책을 진행하고 있었다.
지난 회 이미 살펴봤듯 한국전쟁 발발을 두 달 반 앞두고 미 국무부 정책 계획 감독 폴 니체(Paul H. Nitze, 1907-200)는 소련이 팽창주의적 야욕을 실현하기 위해 세계 여러 지역에서 국지전을 벌일 수 있음을 내다보고서 미국이 군비를 강화하여 전 세계에 거미줄처럼 촘촘한 반공(反共)의 주둔지를 구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의 숨은 의도를 꿰뚫어 본 니체의 기밀문서에 따라 즉각적 유엔총회를 소집하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파병을 결정했다. 요컨대 한국전쟁은 미국의 세계 전략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였고, 미국의 세계 전략이 바뀐 결과 냉전 이후 세계사가 바뀌었다.
둘째, 치열했던 한국전쟁의 결과로 대한민국과 대만은 동시에 냉전기 자유 진영의 최전선으로서 미국이 주도하는 규칙 기반(rules-based)의 국제질서에 편입되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남로당 주도의 내란(內亂, insurgency)에 휘말려 베트남 모델의 공산화 과정을 갔을 개연성이 높다. 대만 역시 반공의 보루로서 존립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마오쩌둥이 한국전쟁에 투입한 그 대규모 병력을 오롯이 대만 침공에 투입해서 대규모 통일 전쟁을 감행했다면 대만의 중화민국이 존속하지 못했을 수 있다. 스탈린이 김일성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6·25남침을 저지른 결과 남한의 내란과 중국의 내전은 유엔군이 개입한 국제전으로 비화했고, 덕분에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표방하는 반공의 전초기지로 연명할 수 있었다.
셋째, 한국전쟁 덕분에 공산화를 막은 대한민국과 대만은 급속한 경제성장의 기적을 이루면서 건실한 중진국으로 발돋움했고, 1980년대 말 거의 동시에 민주화를 이루면서 선거를 통해서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명실공히 자유민주주의라는 헌정적 이상을 실현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대한민국과 대만은 현재 전 세계에 산업의 쌀이라는 반도체를 80% 이상 공급하는 세계 경제의 허브로 성장해 있다.
넷째, 한국전쟁 과정에서 미국과의 전쟁을 치른 중국은 전쟁 종결 후에도 무려 25년의 긴 세월을 세계 경제와 절연한 채 공산주의적 집산화(集産化, Communist collectivization)와 계급투쟁의 광열에 휩싸인 채 대기근과 문화혁명을 겪어야만 했다. 마오쩌둥은 미국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대내적으로 전체주의적 통제를 강화할 순 있었지만, 자유 진영을 통째로 적으로 돌린 결과 중국은 거대한 세계 시장을 잃고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궁핍을 벗어날 수 없었다. 흔히 마오쩌둥이 기근을 해결한 성군이라 미화하지만, 실상을 보면 그 시대 중국은 저성장과 저개발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렸을 뿐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중국에서 제작된 포스터. 대만과 조선에 대한 미국의 침략에 반대한다는 구호가 담겨 있다./chineseposters.net
다섯째, 한국전쟁의 계기로 소련도 역시 미국과의 첨예한 이데올로기적 갈등과 군사적 대립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소련은 미국, 영국과 함께 연합군으로 나치 독일과 전쟁을 치렀던 2차 대전의 승전국이었다. 공산권의 대원수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 전쟁을 무산시키고 전향적 개혁·개방 노선을 추구했다면 30년 후 경제적으로 파산 상태에 이르러 뒤늦게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추진하는 사태를 피할 수도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로 팽창주의 마각을 들켜버린 스탈린은 연합국의 승전국으로서 누릴 수 있었던 특권과 기회를 모두 상실해 버렸다. 자유 진영 전체를 적으로 돌린 결과 2차대전의 패전국 일본과 독일이 세계 2, 3위의 경제 대국으로 급성장할 때 소련은 빈곤과 부패의 악순환에 빠져 있어야만 했다.
여섯째, 한국전쟁은 “북한 문제(The NK problem)”라는 세계사적 골칫거리를 남겼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절멸 직전까지 내몰렸던 북한 김일성 정권은 마오쩌둥의 참전 덕분에 휴전선 이북을 점령할 수 있었다. 중국은 북한을 완충지로 남겨둬야 하는 이유를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논리로 설파하려 하지만, 현실을 보면 북한은 단순히 중국의 입술이 아니라 중국의 핵기지임을 알 수 있다. 북한의 핵무장은 정권 영속을 바라는 김씨 왕조의 의지와 김씨 왕조의 현상 유지를 원하는 중국의 의지가 공명한 결과물이다.
북한의 핵무장은 중국의 묵인과 방조 아래서만 이뤄질 수 있었다. 북한이 핵무장에 성공함으로써 중국은 한국, 일본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미국에 대한 군사·전략적 레버리지를 극적으로 강화할 수 있었다. 아니라면, 북핵은 그대로 두고서 남한에 미군의 탄도탄 고고도 요격인 체계 사드(THADD)가 배치될 때 경기를 보이는 중국의 이율배반은 설명되지 않는다. 결국 북한의 핵무기는 휴전 상태의 한반도에서 치밀하게 전개되는 제2차 미·중 전쟁에서 최전선에 배치된 중국의 전략 병기라 할 수 있다.
일곱째, 한국전쟁이 지금도 세계사에 드리운 가장 큰 그늘은 바로 오늘날 한국과 대만이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플래시포인트(flashpoint)가 되어버린 현실에서 새삼 확인된다. 국제정치학에서 플래시포인트란 대규모 세계대전 발발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일촉즉발의 화약고를 뜻한다. 세계 지도를 놓고 보면, 최소 다섯 지역의 플래시포인트를 꼽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국경, 아프리카 사헬(Sahel) 지역,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 외에 양안(兩岸, 대만 해협)과 남북한이 바로 그러한 위험지대이다. 그중에서도 양안과 남북한은 세계 경제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력 덕분에 더더욱 위중한 지역으로 여겨진다.
한반도와 대만 해협: 미·중 전쟁의 플래시포인트
한국전쟁이 휴전에 돌입한 후 71년이 지났음에도 한반도와 대만 해협은 여전히 미·중 전쟁의 플래시포인트로 남아 있다. 한국전쟁 당시와는 달리 한국과 대만은 세계 경제에서 절대로 없어선 안 될 중대한 산업기지로 변모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한국과 대만을 끼고 도는 미·중 갈등의 전운은 음산하다.
대만 해협으로 해마다 세계 무역 총액의 20%(2조 4,500억 달러)의 물동량이오간다. 대만 해협에서 군사 충돌이 발생하여 전 세계 20%의 물동량이 막히면, 전 세계 경제는 일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특히나 대만은 전 세계 최첨단 반도체의 90%를 생산한다. 대만 해협의 비상 상황은 세계 모든 국가의 데이터 센터나 최첨단 군사 시설은 물론, 인류 개개인의 스마트폰 사용에도 직접적 영향을 끼친다. (“Crossroads of Commerce: How the Taiwan Strait Propels the Global Economy”)
대만 해협에서 비상사태가 발생할 때 가장 큰 타격을 입을 나라는 다름 아닌 대한민국과 일본이다. 일본 무역의 25%, 한국 무역의 28% 이상이 그 비좁은 해협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석유, 가스, 석탄 등 필수 에너지 자원이 대만 해협을 거쳐서 한국과 일본에 운송된다.
▲2024년 5월 20일 라이칭더 대만 총통의 취임 직후 분열주의 분쇄를 구호로 내걸고 대만 해협에서 중국이 군사작전을 펼치고 있다./bbc.com
이미 만성이 되어버려 증시조차 요동치지 않지만, 북한은 틈만 나면 대륙간 탄도탄 미사일을 발사하고, 중국은 대만을 향해 노골적인 군사 위협을 가하는 오늘날의 현실은 언제든 일본과 한국을 경제적 파탄으로 몰고 갈 수 있다. 군사 충돌 등으로 한국, 일본, 대만의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면, 밀접하게 연동되는 세계 경제도 공황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오늘날 세계 경제가 한국과 대만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세계 체제의 현실은 위태롭고 부조리해 보인다. 대만 해협과 한반도는 자유 진영의 애로(隘路, choke point)이자 관문(關門)이다. 반자유와 반서방의 기치를 내걸고 이른바 “악의 공조”를 이룬 북·중·러·이란 등이 위기에 내몰리면 가장 먼저 노릴 자유 진영의 아킬레스건인 셈이다.
중국은 그 점을 모를 리 없다. 이미 2005년 후진타오 정권은 ‘반분열(反分裂) 국가법’을 제정하여 필요하면 언제든 대만을 향해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의사를 공식적으로 천명해 왔다. 시진핑 정권은 더욱 노골적으로 대만을 향한 군사 위협을 가해왔다. 특히 2022년 이후부턴 더욱 위협적인 군사 도발이 전개되고 있다. 군사적 위협 이외에도 베이징은 경제적 압박, 사이버 공격, 정치적 개입, 허위 정보 유포, 외교적 고립화 전략 등 무수한 비군사적 수단으로 대만을 공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만에 머물지 않고 중국은 대한민국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직·간접적 영향력도 증폭시키고 있다. 때론 북한을 앞세우고, 때론 북한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중국은 한국을 군사적으로 위협하고 경제적으로 압박하면서 어르고 길들이려 한다. 한국 정부나 민간기업은 중국의 사이버 공격에 노출돼 있다. 중국은 갈수록 대담하게 한국의 여론시장을 파고들어 정치적·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고 있다. 대만과 마찬가지로 한국 역시 중국의 비군사적 공격 앞에 속수무책 노출돼 있는 상태이다.
그럼에도 한국과 대만을 반도체 생산기지로 삼고 아슬아슬하게 돌아가고 있는 세계 경제의 현실은 더없이 불안하다. 한국과 일본은 오직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맺고 있기에 국제적 세력 균형을 유지해 올 수 있었다. 만약 2차대전 직후 미국이 미래의 세계 체제를 설계할 수 있었다면, 절대로 반도체 생산기지를 한국과 대만에 집중시키는 우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만 해도 한국과 대만이 오늘처럼 성장하리라곤 누구도예측할 수 없었다. 이른바 “애치슨 라인”이 말해주듯, 미국은 2차대전 이후 공산 진영의 팽창정책에 맞서서 서태평양 일대에 일본에서 필리핀으로 이어지는 느슨한 자유의 벨트를 마련했을 뿐이었다. 일본에서 오키나와를 거쳐 필리핀으로 이어졌던 자유의 방어선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휴전선과 대만 해협까지 나아갔다. 인해전술로 밀려든 중공군과의 치열한 전쟁을 치른 대가였다. 바로 그 점에서 한국전쟁이 세계사적 영향은 두 세대에 걸친 한국과 대만의 발전사에서 극적으로 확인된다. 여전히 가장 큰 문제는 북·중·러와 미·일 사이에서 중간자 외교를 펼치려는 대한민국 정치인들의 비현실적 국제인식과 미숙한 외교정책이다. <계속>
〈138〉중국의 정치 공세를 막는 대만의 투명한 선거관리
변방의 중국몽 <마지막 회>
한반도 게임: 미중 전쟁과 코리안 딜레마 (3)
▲2024년 1월 13일 대만 한 개표소의 개표 장면. 대만의 투명하고 효율적인 완전 수동식 선거관리는 중국의 허위 정보전에 노출된 자유 진영 모든 나라에 귀감이 되고 있다./AP
2차대전이 끝나고 5년 지나 6.25전쟁이 터진 그 순간부터 세계는 두 진영으로 갈라져서 40여 년간 냉전을 치러야만 했다. 6.25전쟁의 결과 동북아에선 대한민국과 중화민국(대만)이 공산화의 위험을 벗어나 부강하고 자유로운 민주주의 체제로 성장했다. 이와 달리 마오쩌둥 사상에 포박당한 중화인민공화국은 1978년 12월에야 개혁개방의 기치를 내걸고 교조적 공산주의 이념에서 벗어나서 급속한 경제성장의 일로로 나아갈 수 있었다.
2010년 중국은 일본을 제치고 세계 제2위 경제 규모를 달성할 수 있었으나 그때부터 자유주의 국제 질서와의 불화가 시작되었다. 2020년 중국발 팬데믹 이후로 미주, 유럽, 아시아 주요국들은 반중(反中)의 국제 공조, 억중(抑中)의 군사 동맹을 강화하고 있다. 세계는 지금 제2의 냉전을 목도하고 있다. 제1차 냉전이 미국과 소련의 대결이었다면, 제2차 냉전은 미국과 중국의 대결로 전개되는 양상이다. 1950~1953년 한반도에서 격돌했던 미국과 중국은 다시금 경제적 이해득실을 넘어 이념적 근본 차이를 둘러싼 군사·외교적 갈등상태에 놓여 있다.
중국에 맞서는 대만의 저력
지난 회 살펴보았듯, 제2차 냉전 시기 미·중 대결의 가장 핵심적 두 지역은 바로 한반도와 양안(兩岸)이다. 이미 핵무장에 성공한 북한은 한국, 일본, 나아가 미국을 조준하고 있다. 대외 무역 총액의 98.3%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북한은 현실적으로 중국의 핵 전초기지가 되어 있다. 중국은 대만과 한국에 고분고분한 친중 정부를 세우기 위해서 온라인과 오프라인, 합법 영역과 불법 공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저돌적이고도 다각적인 방식으로 광범위한 정치전(政治戰, political warfare)을 벌이고 있다.
정치전이란 병력을 동원하여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군사적 기동전(kinetic warfare)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직접 싸우지 않고서도 적국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전개하는 모든 형태의 소리 없는 전쟁을 의미한다. 가짜뉴스나 허위 정보로 대중의 현실 인식을 교란하는 인지전(cognitive warfare), 소셜 미디어나 언론 댓글로 여론시장을 파고드는 선전전, 전쟁 공포나 경제 불안을 조장하는 심리전, 문화예술계를 장악하여 군중 의식을 지배하는 문화전, 대중매체와 언론기관을 파고드는 미디어전, 국가 기관과 정부 관원을 파고드는 첩보전, 전산망과 인터넷을 교란하고 해킹하는 사이버전, 펜타닐 등의 오피오이드 마약 및 향정신성 의약품을 은밀하게 대량 유포하는 생물학전 등등 정치전의 전략·전술은 헤아릴 수없이 많다. 중국 군부의 정의에 따르면, 정치전이란 한계를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초한전(超限戰, unlimited warfare)이다.
한국에 대한 중국의 초한전은 이미 정계, 관계, 문화예술계, 학계, 재계를 겨냥해 때론 은밀하고(covert), 때론 공공연하게(overt)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물론 중국은 명백하게 외국이라 여겨지는 한국보다는 자국의 영토 일부라 주장하는 대만을 더 심하게 겁박하고 위협한다.
대만에 대한 중국의 정치적 간섭은 노골적인 군사적 협박, 경제적 압력, 외교적 공세에 그치지 않는다. 중국은 대만의 인터넷에 직접 개입하여 허위 정보(disinformation)를 퍼뜨리고, 간첩을 밀파하고, 뇌물을 살포하고, 정치인을 포섭하고, 문화·학술계를 파고들어 선전·선동전을 벌이고 있다. 대만을 파고드는 중국의 정치적 공세는 집요하고 정교한 방식으로 실시간 끊임없이 전개된다.
특히 대만에서 선거가 치러질 때면 중국의 정치적 공세는 더욱 극심해진다. 중국은 대만의 친중 후보를 지원·엄호하는 한편, 반중 후보를 향해선 노골적인 비판과 공격을 가하면서 대만 국민을 공포 속으로 몰아가고 있다. 놀랍게도 그러한 중국의 전방위적 공격 앞에서도 대만 국민은 단호하면서도 여유롭게 대만의 주권과 대만인의 정체성을 꿋꿋하게 견지해 왔다.
과연 대만의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첫째, 전 세계 경제에 최고급 반도체를 공급하는 디지털 제조업의 허브로서 대만이 갖는 국제경제적 위상이다. 둘째, 자유, 민주, 인권, 법치 등 범인류적 가치를 선양하며 자유주의 국제 질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대만인들의 이념적 보편성이다. 셋째, 중화민국의 헌법 정신에 따라서 가장 투명하고. 깨끗하고 공명정대하게 선거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있다는 대만인의 정치적 자부심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세 이유 중에서도 특히 대만 특유의 민주적 선거관리 시스템이야말로 정치적 분열과 이념적 충돌 속에서도 대만의 정치적 독립성을 견지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제도라 할 수 있다.
부정선거 논란을 불식하는 대만식 선거관리
현재 캐나다 토론토 부근에 살고 있는 한 대만인 노부부는 2024년 1월 대만 선거에서 투표하기 위해 타이베이행 비행기표를 샀다. 대만 선거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 중국 정부가 중국 체류 중인 친중 성향 대만인에게 대만행 항공료를 할인해 준다는 보도를 접하고서 노부부는 당장 비싼 왕복 항공권을 구매했다고 한다. 해외 체류하는 대만 국적자는 대략 200만을 헤아린다. 2024년 1월 대만 선거에서도 미국에 살고 있는 수천 명의 대만인들이 태평양 건너가서 참여했다.
대만 선거에선 사전 투표, 부재자 투표, 우편 투표, 재외 국민 투표 등의 절차가 전혀 없다. 대만에선 모든 유권자가 선거 당일 직접 투표소에 가야지만 소중한 한 표를 던질 수 있다. 대만 정부가 당일 현장 투표 외는 그 어떤 다른 방식의 투표도 허락하지 않는 이유는 자명하다. 선거 부정을 완벽하게 근절하고, 부정선거 논란 자체를 원천적으로 뿌리뽑기 위함이다.
▲2024년 1월 13일 대만 타이베이의 한 개표소./AFP
대만의 모든 투표장은 선거 당일 투표가 종료되면 순식간에 개표장으로 뒤바뀐다. 투표함은 그 자리에서 한 치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곧바로 그 상태 그대로 투표함이 개봉되기 때문이다. 개표 속도를 조금 앞당긴다는 명분으로 전자장비 따위를 사용해서 표를 먼저 분류하는 절차 따위는 아예 없다.
선거 관리원은 투표함에 직접 손을 넣어 한 장 한 장씩 유권자가 직접 기표한 투표용지를 손으로 집어 들고 참관인들이 눈으로 확인하고 촬영할 수 있도록 머리 위로 활짝 펼쳐 보이며 득표한 후보의 성명을 육성으로 크게 소리내어 외친다. 관리인이 그렇게 득표한 후보자의 이름자를 부르는 행위를 대만에선 “창표(唱票)”라 한다. 특정 후보의 이름자가 불리면, 그 뒤에서 관리원이 사인펜을 들고서 벽에 붙인 종이 위에 인쇄된 그 후보의 이름자 밑에 바를 정(正)자의 한 획씩을 긋는다. 전 세계 최첨단 반도체의 90%를 생산하는 하이테크 산업국 대만에서 먼 옛날 방법 그대로 개표 과정을 고수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어느 사회든 디지털 기술이 발달할수록 최첨단 전자장비에 대한 사회적 불신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이 발달할수록 온라인 여론 조작은 용이해진다. 지난 몇 년간 러시아와 중국이 미국, 캐나다, 호주 등의 선거에 다방면으로 개입해 영향 공작을 벌여왔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대만과 한국에 대한 중국의 사이버 공격은 갈수록 정교해지고 있으며, 대립하는 정치 세력들의 상호 불신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또 한국식 전자 개표기를 수입해 간 이라크, 볼리비아, 콩고, 키르기스스탄 등 여러 나라에서 공교롭게도 부정선거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선거에 사용되는 전자장비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부추긴다.
그렇기에 더더욱 대만은 100% 당일 현장 투표만 실시할뿐더러 투개표 전 과정을 완전 수작업으로 진행한다. 전자장비에 전혀 의존하지 않지만, 대만에선 개표 시간이 전혀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일례로 2024년 1월 13일 대만 정부 총통과 입법위원 선거에서는 대만의 유권자 중 72%(대략 1400만 명) 정도가 오전 8시부터 4시까지 투표장에 몰려가서 4200만 장의 투표지에 기표했다. 그리고 불과 5~6시간 지나서 밤 9~10시 정도가 되었을 땐 투표 결과가 대충 다 드러났다. 투표장이 즉시 개표장으로 바뀌어 전국에서 동시에 개표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본래 개표 과정은 각 투표장의 결과 수치를 하나씩 모두 더하기만 하면 끝나는 단순 작업이다. 전자장비의 도움 없이도 인류는 얼마든지 맨손으로 공명정대하고도 유리알처럼 투명한 선거를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치를 수가 있다.
대만에선 1935년 일제 치하에서 최초로 지방 선거가 치러졌다. 당시에는 참정권이 특정 금액 이상의 세금을 내는 일부 시민들에게만 주어졌다. 그때에는 후보자의 이름자를 직접 손으로 기입하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그때도 이미 개표할 때는 창표 관행이 행해졌다. 1950년부터 국민당 정부는 미국의 압력 아래서 도시와 향촌에서 보통 선거를 치르기 시작했다. 당시엔 문맹률이 높았기 때문에 이름을 직접 적는 방식 대신 인쇄된 이름자에 도장을 찍도록 했는데, 국민당은 관리원이 일일이 표를 펼쳐들고서 득표자의 이름을 부르는 창표의 절차를 공식 도입했다. 대만에서도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음을 널리 선전하기 위함이었다.
1970년대 국민당 정권 아래서 대만은 선거 부정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선거 관리원이 손가락에 일부러 잉크를 묻혀서 무효표를 만들거나 반대당 후보의 표를 국민당 후보 표로 둔갑시키는 사례도 있었다. 난데없이 전기가 나갈 때 국민당 표를 투표함에 쏟아붓는 사례도 있었다 한다. 급기야 1977년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대규모 민중 시위가 발생했다. 이른바 중리(中壢) 사건이다. 대만 민주화 운동의 기념비적 이벤트로 기억되는 1979년 가우슝(高雄) 사건도 국민당 독재에 저항하여 선거 제도의 복원을 요구하며 시작되었다. 실로 험난한 과정을 거쳐 가면서 대만은 오늘날의 투명하고 공정한 선거관리의 전통을 확립했다.
역사적으로 확정할 순 없지만, 아마도 창표의 절차는 과거 중화 제국 향리(鄕吏)들의 문서 행정에서 기원했을 듯하다. 전통 시대 중국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지방 정부에선 밑바닥 서리들이 2인 1조가 되어서 한 명은 문서 내용을 창(唱)하고, 다른 한 명은 눈으로 확인해서 준(準)하는 절차가 있었다. 그러한 문서 확인의 절차를 창준(唱準)이라 했다. 조선조에서도 창준의 절차를 거치기 때문에 호적(戶籍)대장을 비롯한 관공서의 문서가 공신력을 지닐 수 있었다. 조선조에서 문서 행정을 맡은 하급 서리들도 투명성과 공신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입으로 외치고,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받아적는 절차를 거쳤음을 알 수 있다.
▲1780년 이국량(李國樑) 준호구(准戶口). 위의 문서에서 필자가 표시한 붉은색 네모 안의 글자는 “唱 權昌祿, 準 權鳳耉”이다. 권창록이 문서의 내용을 소리내서 외치면, 권봉고가 눈으로 문서를 확인하여 인준했음을 보여준다. 조선 시대 하급 관청에서 문서를 확인하는 법적 절차였다./한국고문서 자료관.
한국과 대만의 민주주의, 과연 무엇이 다른가?
1980년대 후반 대한민국과 중화민국(대만)은 거의 동시에 민주화를 이뤘다. 이후 한국에선 네 차례, 대만에선 세 차례나 선거를 통해서 평화적으로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정치학자 헌팅턴은 공명선거를 통해서 두 차례 이상 정권이 교체하면 민주화가 정착됐다고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두 차례 권력 교체 시험(two turn-over test)” 이론이다. 한국과 대만은 그 기준을 오래전에 달성했다.
과거 권위주의 군사독재를 경험한 한국과 대만은 지난 20년 넘게 선거 민주주의 모범국으로 전 세계의 칭송을 받아 왔다. 겉만 보면 한국과 대만은 비슷한 수준의 경제 수준과 민주주의 발전 정도를 보이지만, 조금만 더 깊이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과연 한국이 대만과 비교될 수 있을 만큼 안정된 민주주의를 구가하고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지난 40여 년의 한국 헌정사를 돌아보면, 거의 모든 대통령이 임기 중 친인척 비리에 휘말리거나 퇴임 후 구속되었으며, 벌써 세 명이나 국회의 탄핵을 당했고, 한 명은 검찰 조사를 받은 후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 대만에서도 민진당 천수이볜(陳水扁, 1950- ) 총통이 퇴임 후 부패 혐의로 구속된 사례가 있고 국민당 마잉주(馬英九, 1950- ) 총통 또한 법적 시비에 말려들었지만, 한국만큼 큰 혼란상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늘날의 대만도 선거를 치를 때마다 전 국민이 두, 세 파로 갈라져서 격렬하게 대립하고 갈등한다. 2350만 명의 작은 인구를 가진 대만이지만 정치적 양극화는 어느 나라에 못잖다. 대만 국민의 정치적 분열과 갈등은 갈수록 커져만 가는 중국의 영향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특히 최근 10여 년간 대만 정치에 대한 중국의 간섭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대만 정치는 더욱 심각한 분열상을 보여 왔다.
첨예한 정치적 대립이 상존(常存)하는 만큼, 대만의 인터넷엔 가짜뉴스, 허위 정보, 음모론이 어지럽게 떠다닌다. 2024년 1월 선거 직후에도 대만의 SNS는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는 여러 주장이 난무했었다. 사람들이 가짜 표를 넣거나 선거 관리원이 결과를 조작했다는 등의 근거 없는 주장들이었는데, 대만의 중앙선거위원회가 즉각 나서서 기민하게 가짜뉴스와 허위 정보를 불식했으며, 다수 구독자를 가진 유튜버들도 대대적인 사실 확인을 통해서 거짓말과 음모를 물리칠 수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더 큰 불신과 의혹에 휩싸이는 한국의 중앙선관위와는 대조적이다.
▲2024년 1월 13일 대만 타이베이의 한 개표소에서 각 후보자의 득표수를 기입하는 선거관리원./Reuters
위기의 대한민국, 대만식 선거관리를 받아들여야
일제의 식민 지배와 군부독재를 겪고 나서 개발독재의 방식으로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고 1980년대 후반 민주화를 이뤄서 3번 이상 평화적 정권 교체를 경험한 실로 엇비슷한 대만과 한국이지만, 선거관리의 투명성과 공정성에선 대만이 압도적 우위를 보인다.
한국의 중앙선관위가 지난 10년간 실시한 291건의 채용에서 1200여 건의 부정을 자행했다는 감사원의 조사 결과가 한국 선거관리의 부패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2023년 10월 국정원과 한국인터넷진흥원과 중앙선관위가 공동으로 조사해서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대한민국 중앙선관위의 사이버 관리 점수는 100점 만점에 31.5점으로 F-보다 낮았다. 언론에 공표된 2023년 10월 10일 국정원과 한국인터넷진흥원의 발표를 보면 선관위 전산망에선 대략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드러났다.
1. 해킹으로 선관위의 내부 선거 시스템까지 침입 가능
2. 선관위 통합선거인명부 탈취 및 내용 변경 가능
3. 사전 투표 여부 조작 가능
4. 유령 유권자 등록 가능
5. 사전 투표용지 무단 인쇄 가능
6. 정당 대표·최고위원 선출의 ‘온라인 투표시스템’ 보안상 허점 발견
7. 투표권자 인증 절차 미흡
8. 다수 유권자 대리 투표 및 투표 결과 조작 가능
9. 사전투표소 내부 통신장비 침투 가능 (비인가 장비 연결 방식의 선거망 침투 가능)
10. 부재자 투표 ‘선상투표’의 경우, 특정 유권자의 기표 결과 유출 가능 (비밀투표 원칙 파괴)
11. 개표 결과 변경 가능
12. 개표 데이터베이스(DB) 부실 관리
13. 안전한 내부망에 설치·운영되지 않고 패스워드도 관리 부실
14. 특정 후보의 득표수 변경 가능
15. 투표지분류기 해킹 가능: A 후보 표를 B 후보 표로 분류해 결과 조작 가능
16. 북한 해킹조직 “킴수키”의 사이버 공격 정황 확인
중국과 북한의 정치전에 상시 노출돼 있는 대한민국에서 선관위의 전산망이 형편없는 낙제점을 받았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가장 공정하고 투명해야 마땅한 독립적 헌법기관 중앙선관위가 자녀 채용 비리를 예사로 저지르는 데 머물지 않고 사이버 안보를 엉망으로 관리하는 실태는 한국 민주주의가 총체적 위기에 봉착해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게다가 신성한 투표지를 소쿠리, 빵 상자에 넣어 나르는 몰상식한 관리 실태, 신권 지폐처럼 빳빳한 투표용지가 무더기로 발견되자 공식적으로 제작한 동영상에서 ‘원상 복원 기능이 있는 특수 재질’을 사용했다는 기상천외한 변명을 둘러댄 후 전문가의 비판이 쏟아지자 슬그머니 그 동영상을 내려버린 행태까지·····. 선관위는 국민적 공신력을 이미 오래전에 상실했다. 결국 대통령이 선관위의 부정선거 획책을 의심하며 비상계엄령까지 선포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음험한 딥스테이트(deep state)의 조작 행위인가? 부패한 헌법기관의 부실 행정인가? 전체주의 적대국의 은밀한 선거 개입인가?
▲2020년 4월 15일 총선 이후 개표소와 재검표 현장에서 신권 지폐 다발처럼 접힌 자국이 없는 빳빳한 투표지가 무더기로 발견되어(오른쪽 사진)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자 중앙선관위는 동영상을 제작해서 “원상 복원 기능이 있는 특수 재질을 사용했다”고 변명했다. 종이 전문가들이 세상에 그런 종이는 없다며 강하게 반박했고, 이후 중앙선관위는 홈페이지에서 이 동영상을 내렸다(왼쪽 상·하 사진)./2022년 당시 중앙선관위 홈페이지 캡처(왼쪽 사진), 조선일보 (2020년 5월 25일), “빳빳한 신권 다발처럼 묶인 사전 투표지, 정식 규격 아닌 투표지도····”(오른쪽 사진)
대만이 중국의 계속되는 도발과 집요한 공격에 굳건히 맞서 자유, 민주, 인권, 법치를 지킬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대만인들이 중국의 음험한 술수와 숨겨진 의도를 냉철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역사적 지식과 정치적 혜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와 중국인의 정신세계를 잘 알고 있는 대만의 정치 지도자들은 중국에 대한 환상이나 존경심을 품기보단, 대기근의 참상과 문화혁명의 광기로 점철된 중국 현대사의 비극을 냉철히 꿰뚫어 보고 중국의 모순과 착오를 비판한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어떠한가? 구한말까지 명나라를 숭배하던 위정척사파의 낡은 세계관에 갇혀서 지금도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의 나라”라 칭송하면서 “중국몽에 동참”할 기회를 엿보고 있지는 않는가?
바로 그러한 우려와 불안을 떨칠 수 없어 지난 4년 8개월 동안 나는 거의 매주 200자 원고지 30매가 넘는 긴 원고를 써서 인터넷 조선일보에 연재해 왔다. “문화혁명 이야기” 75회, “대륙의 자유인들” 75회, “변방의 중국인” 56회를 잇달아 연재하면서 대한민국에 널리 퍼진 “중국 판타지”를 어느 정도 해체할 수 있으리라 희망했었는데, 연재를 마칠 즈음 다시 한국의 정치 상황이 원점으로 돌아간 듯해 착잡하고 허탈하다. 바라건대 부디 대한민국이 중국식 문화혁명의 광기와 남미식 폭민 정치의 미망에 빠지지 않고서 정치적 발전과 문명적 성숙을 이뤄갈 수 있기를! <끝>
*지난 4년 8개월간 연재를 맡겨주신 조선일보사에 가슴 깊이 감사드립니다. 또한 매주 글을 읽어주시고, 댓글을 달아주시고, 메일로 독후감과 다양한 의견을 전해주신 모든 독자분께 큰절을 올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