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萬物相(조선일보) 2024-12/ 12.02(월) '등록 동거혼' - 12.31(화) 버드 스트라이크

상림은내고향 2024. 12. 17. 19:04

萬物相(조선일보) 2024-12/

12.02(월) '등록 동거혼'

▲일러스트=이철원

 

프랑수아 올랑드 전 프랑스 대통령은 정치적 동지였던 세골렌 루아얄과 결혼하지 않고 25년을 함께 살았다. 올랑드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엘리제궁에 함께 들어간 이는 새 연인 발레리 트리에르바일레르였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대통령 재임 중 배우 출신 쥘리 가예와 염문을 뿌렸다. 올랑드는 자녀 넷을 두었는데 모두 루아얄이 낳았다. 프랑스 신생아 열에 여섯은 이처럼 결혼하지 않은 부모에게서 태어난다.

 

▶사회 분위기를 통째로 바꾼 ‘68혁명’ 전엔 프랑스에서도 “자식은 결혼해서 낳아야 한다”는 통념이 강했다. 이런 제약이 임신과 출산을 막는 장애물이 되고 합계 출산율이 1.76명까지 떨어지자 1999년 팍스(PACS·시민연대계약)를 도입했다. 결혼하지 않아도 함께 살면 사실혼으로 인정해 세제 혜택과 가족 수당 등을 지급했다. 덕분에 프랑스 전역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커졌고 태어난 아이도 어른들의 손가락질이나 사회적 냉대를 받지 않고 자란다.

 

▶남의 나라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우리도 어느새 같은 길에 들어서고 있다. 한 여론조사에서 20대 청춘 남녀에게 “결혼하지 않고도 자녀를 낳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열에 넷이 “그렇다”고 답했다. 10년 전 같은 물음에는 30%가 긍정하는 대답을 했는데 그 사이 10%포인트 넘게 늘었다. 방송인 사유리씨가 정자를 기증받아 엄마가 되고, 10대 청소년 부모의 애환을 다룬 TV 예능 ‘고딩 엄빠’나 영화 ‘과속스캔들’이 호응을 얻는 것도 이런 인식 변화를 담고 있다.

 

▶아빠가 된 배우 정우성씨가 “아빠 노릇은 충실히 하겠다”면서도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밝혀 논쟁을 불렀다. “자식이 생겼으니 아기 엄마와 결혼하라”는 의견과 “자식 태어난 것과 부부가 되는 것은 별개 사안”이란 견해가 맞서고 있다. 그 와중에 저출산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나경원 의원이 프랑스의 팍스와 유사한 ‘등록 동거혼’ 입법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합계 출산율이 0.7명 아래로 떨어지며 국가 소멸까지 걱정하게 된 만큼 필요성에 공감하게 된다.

 

▶다양한 동거 형태를 인정하는 팍스와 “함께 아이를 키우지 않겠다”는 정우성씨 사례가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이번 일을 계기로 동거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출생도 인정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 것은 분명하다. 태어난 아기를 소중히 보호하고 키우는 것은 우리 사회가 마땅히 져야 할 의무이기도 하다. 다만 팍스 형태로 사는 프랑스 커플의 절반이 아이에게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결국 법적 부부가 되기로 결심한다는 사실도 함께 알았으면 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12.03 美대통령들의 뻔뻔한 사면

▲일러스트=이철원

 

2001년 1월 20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140명을 사면했다. 임기 종료를 약 2시간 앞두고 발표된 사면이었다. 그중엔 마약 밀매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던 이부 남동생 로저가 있었다. 하지만 더 큰 논란이 된 것은 부유한 기업인 마크 리치에 대한 사면이었다. 리치는 4800만달러의 탈세 혐의 등으로 기소된 1983년 스위스로 도피해,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과 함께 연방수사국(FBI)의 ‘10대 지명수배자’ 명단에 올라 있었다. 리치의 아내가 클린턴 도서관 건립 재단 등에 거액을 기부한 사실이 알려지자 “사법정의가 매수당했다”고 여론이 들끓었다.

 

▶미국 대통령의 사면권은 영국 국왕의 은사권(恩赦權)을 본떠 만든 것이다. ‘제왕적 특권’을 거부했던 미국 건국의 주역들도 은사권만큼은 국가를 통합하는 순기능이 있다고 생각해 헌법에 반영했다. 링컨 대통령은 1862년 백인과 무력 충돌한 인디언 303명이 교수형 판결을 받자, 판결문을 일일이 읽어보고 265명을 사면했다. 백인을 공격한 이들을 엄벌하라는 정치적 압박에도 링컨은 “선거를 위해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고 했다.

 

▶세월과 함께 사면의 취지도 변질됐다. 1974년 9월 8일,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전임자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대한 “절대적 사면”을 발표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 위기에 몰린 닉슨이 사임하고, 부통령이었던 포드가 대통령직을 승계한 지 한 달 만이었다. 포드는 국론 분열을 끝내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대통령이 되는 대가로 사면을 약속해준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퇴임 한 달 전인 1992년 12월 ‘이란-콘트라 스캔들’에 연루된 인물들을 전격 사면했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일어나 당시 부통령을 지낸 부시도 책임이 있는 스캔들이었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도 첫 임기 막바지인 2020년 12월, 측근 26명을 무더기 사면했다. 그중에는 트럼프에 거액 기부를 했으나 탈세와 위증 등으로 실형을 살았던 사돈 찰스 쿠슈너가 포함돼 있었다. 당시 트럼프는 사상 최초로 자기 자신을 사면하기 위한 법률 검토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트럼프는 찰스 쿠슈너를 주프랑스 미국대사로 지명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탈세와 불법 총기 소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차남 헌터를 사면했다. 자녀를 사면한 것은 바이든이 처음이다. 그동안 “사법 절차를 존중하겠다”며 헌터를 사면할 계획이 없다던 바이든인데, 대선이 끝나자 생각이 바뀐 모양이다.

김진명 논설위원

 

12.04 '골판지'의 진화

▲일러스트=이철원

 

‘파도 모양의 구조역학적 완충작용을 하는 골심지에 두꺼운 종이를 접합해 만든 포장재’. ‘골판지’에 대한 공업 표준 용어집의 설명이다. 골판지는 1856년 영국에서 모자의 부속품 용도로 발명됐다. 모자 안쪽에 감아 통풍을 하면서 땀도 흡수하는 용도였다. 18년 뒤 미국의 한 발명가가 유리병 보호용으로 골심지 한쪽 면에 종이를 붙인 포장재를 만들었다. 현대 골판지의 탄생이었다.

 

▶우리나라에선 1963년까지 골판지가 ‘단보루’로 불렸다. 일제강점기에 골판지를 한국에 들여온 일본인들이 두꺼운 종이를 뜻하는 cardboard를 ‘보루’라고 쓰면서, 여러 층이 있는 골판지를 ‘단(段)보루’ 종이라고 부른 영향이다. 한국 골판지 업체들이 1963년 협회를 만들면서 우리말 ‘골’을 사용해 ‘골판지’라는 새 용어를 만들었다. 중국에선 골판지를 기왓장 모양 비슷하다고 ‘와릉지판(瓦楞紙板)’이라고 부른다.

 

▶폐지를 재활용해 만드는 골판지는 ‘튼튼하고, 가볍고, 저렴해야 하는’ 포장재의 3대 필수 요소를 모두 갖췄다. 종이 주름이 트러스 구조와 비슷해 내구성이 좋고 충격을 잘 흡수한다. 중간의 빈 공간은 단열 기능을 발휘해 농수산물, 식품 운반에도 적합하다. 재료가 종이라 가볍고 값도 싸다. 워낙 경쟁력 있는 소재라 포장재를 넘어 용도가 계속 확장돼 왔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전사자용 관으로 사용한 이후 골판지 관이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2020년 도쿄 올림픽, 2024년 파리 올림픽에선 선수촌에 골판지 침대가 사용됐다. 세계적 가구업체 이케아에선 골판지로 만든 가구를 계속 선보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선 골판지 드론이 등장했다. 호주 업체가 매달 100대씩 우크라이나군에 납품하는 골판지 드론은 날개 폭 2m, 무게 2.4㎏으로, 자기 무게보다 더 무거운 3㎏의 폭탄을 달고 최대 120㎞까지 비행한다. 1기당 460만원 정도로 가격도 저렴하다. 종이여서 레이더에도 거의 잡히지 않는다. 호주 신문은 골판지 드론이 러시아 비행장을 급습해 전투기 5대를 파괴했다고 보도했다. 가성비 ‘끝판 왕’이다.

 

▶북한이 발 빠르게 나서 지난달 골판지 드론으로 보이는 자폭형 무인기로 BMW 승용차를 공격하는 영상을 공개했다. 그러자 우리 군도 골판지 드론 100여 대를 도입한다고 나섰다. 배달 산업의 번창 덕에 한국은 세계 9위 골판지 생산국이다. 그런 나라의 군이 골판지 드론 아이디어도 못 내고, 전쟁터에 등장한 뒤에도 손 놓고 있다가, 북한이 하니 뒤따라간다. 이런 일이 한둘이 아니어서 한숨이 나온다.

김홍수 논설위원

 

12.05 '여행 경보' 내려진 한국

▲일러스트=박상훈

 

1980년 5월 17일,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에 선포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제주도를 제외하고 선포한 ‘부분 계엄’을 확대한 것이다. 미국 국무부는 즉각 여행 경보를 발령했다. “대한민국에서 비상계엄이 선포된 점을 고려해 중대한 개인적 사유가 있지 않은 이상 미국 시민들이 한국으로 여행하지 않기를 권고한다.” 사실상 ‘여행 금지령’이었다.

 

▶미국이 공식적 ‘여행 경보’를 도입한 것은 1978년이다. 당초엔 항공사·여행사를 위한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1988년 12월 런던에서 뉴욕으로 가던 팬암 항공 103편이 폭탄 테러를 당해 270명이 사망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테러 발생 전 미국 정부가 “팬암 항공기가 폭파될 것”이란 구체적 익명 제보를 받았지만, 일반 여행객에게 공유되지 않았다는 문제가 제기됐기 때문이다. 여행 경보는 대중을 위한 것으로 재편됐고, 다른 국가로도 퍼졌다. 2010년대 들어 한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가 1단계(일상적 유의)부터 4단계(여행 금지)까지 등급을 나눈 여행 경보 시스템을 채택했다.

 

▶2020년 6월 1일 호주 정부가 미국에 대해 “여행하지 말라”는 경보를 발령했다.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에 의해 숨진 뒤 여러 미국 대도시에 폭동이 발생하고 통금령도 내려졌기 때문이다. 코로나 팬데믹 탓에 많은 국가가 서로 여행 제한 조치를 하고 있는 때여서 주목을 못 받았지만 미국으로선 큰 망신이었다.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뒤, 미국·캐나다·호주 등 많은 국가가 한국에 대한 여행 경보를 발령했다. 한국 여행 등급 자체는 대체로 안전하다는 취지의 1단계로 유지하면서도, 시위가 지속될 예정이니 군중이 모이는 곳을 피하라고 경고한 국가가 많다. ‘광화문’ ‘삼각지’ ‘여의도’ 등 지명도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1980년 한국 여행 금지령은 그해 6월 2일 주한 미국 대사관이 “현재 한국이 비교적 진정된 상태로 보인다”는 전문을 워싱턴에 보내고서야 취소됐다.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줄 알았던 계엄 선포가 다시 등장하고 외국에서 한국에 대해 여행 경보를 내리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은 최근 세계 여행객들 사이에 핫한 나라 중 하나였다. 그런 나라에서 2024년에 수십 년 전 일이 다시 벌어질 줄 안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러시아와 같은 문제 국가가 ‘한국 상황이 우려스럽다’고 한다니 참으로 당혹스럽다.

김진명 기자

 

12.06 공대 지망 수능 만점자

202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D-50일을 하루 앞둔 24일 경북 경산시 와촌면 팔공산 갓바위 선본사 연등 아래 '수능 만점'과 '의대 합격'을 기원하는 소원지가 붙어 있다. 2024.9.24 /뉴스1

 

▲일러스트=박상훈

1981~1992년엔 대입 학력고사를 치렀다. 12년간 치른 학력고사에서 340점 만점을 받은 수험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객관식이었지만 시험 과목이 15개 안팎이어서 만점 받기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1992년 마지막 학력고사에서 민세훈씨는 339점으로 아깝게 만점을 놓쳤다. 민씨는 서울대 법대에 수석 합격했고 현재 외국계 컨설팅업체에서 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93년부터는 수능을 보았다. 수능은 5지선다형이지만 6~7과목만 시험을 치른다. 1998년에 나온 첫 만점자는 서울대 물리학과에 간 오승은씨였다. 오씨는 수능 직후 인터뷰에서 당시 큰 인기를 끈 보이 그룹 H.O.T.에 대해 묻자 “H.O.T.가 뭐죠?”라고 답해 화제였다. 오씨는 과목별 정리 노트를 출간하며 상당한 인세를 받는 등 연예인 못지않은 관심을 끌었다. 오씨는 미국 MIT 대학원 물리학과를 거쳐 UC샌디에이고에서 생물물리학을 연구하는 교수로 재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오 교수가 큰 과학적 성과를 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를 바란다.

 

▶2018년 입시에선 김지명씨가 중학교 3년 내내 백혈병을 앓았는데도 병을 이겨내고 수능 만점을 받아 화제였다. 그는 서울 강북구의 평범한 가정 출신으로 학원에도 다니지 않았다고 했다. 같은 해 입시에선 김형태씨가 공군 취사병으로 복무 중 수능에 응시해 만점을 받은 것도 많은 화제를 낳았다.

 

▶하지만 수능 만점자가 수십 명 나오는 해도 있고 2000년대 이후 수능 만점자들이 대부분 의대에 진학하는 것이 패턴으로 굳어지면서 만점자에 대한 관심도 크게 줄어들었다. 가장 쉬웠다는 2000년 수능에선 만점자가 66명, 2013년 수능에서도 33명의 만점자가 나왔다. 전형 방법이 다양해지면서 수능 만점자도 입시에서 탈락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2014년엔 자연계 유일 만점을 받은 전모씨가 서울대 의대 입시에서 떨어졌다. 올봄엔 수능 만점자 출신인 명문대 의대생이 서울 강남역 인근 건물 옥상에서 여자 친구를 살해한 혐의가 드러나 충격을 주기도 했다.

 

▶지난달 14일 치러진 올해 수능에서 만점자가 11명 나왔다. 재학생 만점자는 4명인데, 이 중 한 명인 서울 광남고 서장협군은 의대에 가지 않고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진학을 희망한다고 한다. “의대 생각은 원래 없었다”고 했다. 서군과 같은 수재급 인재들이 이공계열에 많이 진학해야 한다. 가진 자원은 두뇌밖에 없는 나라에서 이공계 인재 없이 무엇으로 먹고사나. 수능 만점자가 의대 아닌 공대 지망이란 것이 화제가 되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다.

김민철 기자

 

12.07(토) 한국 '타임스스퀘어'

▲일러스트=김성규

 

미국 뉴욕 맨해튼의 7번가와 브로드웨이가 만나는 타임스스퀘어는 연간 5000만명이 찾는 관광 명소다. 세계적인 기업들이 내건 화려한 광고가 시선을 사로잡는 광고 명소이기도 하다. 25층짜리 원 타임스 스퀘어에는 코카콜라 같은 세계적 기업의 광고가 걸린다. 2002년 개봉된 영화 ‘스파이더맨’에는 타임스스퀘어를 누비는 스파이더맨 뒤로 삼성전자 광고판이 등장한다. 영화를 만든 소니픽처스가 경쟁사라는 이유로 이 광고판을 지웠다가 소송을 당해 복원했다. 그럴 만큼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된다는 의미다.

 

▶일본 오사카 시내를 흐르는 도톤보리강도 관광 명소이자 광고 명소다. 강 양쪽에 늘어선 광고판의 화려한 불빛을 보려고 하루 30만명 넘게 몰려든다. 식품회사 글리코가 1935년부터 내건 ‘글리코맨’ 광고판은 오사카를 넘어 일본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됐다. 영국 런던의 피카딜리 서커스,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도 광고 명소로 꼽힌다.

 

▶광화문광장이 속해 있는 서울 종로구가 광장 주변 빌딩 9곳과 함께 광장 일대를 타임스스퀘어와 같은 미디어·광고 명소로 꾸민다고 한다. 내년 말까지 코리아나호텔·동아일보·교보빌딩·동화면세점·KT 등 건물 9곳의 외벽에 대형 광고판이 들어선다. 광고판 9개를 하나의 거대한 미디어 캔버스로 활용하는 통합 시스템도 구축한다니 서울의 표정을 바꿀 볼거리가 탄생할 듯하다.

 

▶뉴욕 타임스스퀘어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포르노 극장이 수백 곳 들어선 우범지대였다. 1980년대 들어 뉴욕시와 디즈니 등 기업들이 손잡고 광장 주변을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팔 걷고 나섰다. 뮤지컬 ‘캣츠’와 ‘레미제라블’이 각각 1981년과 1986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됐다. 타임스스퀘어의 새해맞이 행사인 볼 드롭(Ball Drop)에는 유명 연예인이 초청된다. 싸이·방탄소년단·뉴진스 등 K팝 가수들도 이 무대에 섰다. 다양한 문화 인프라와 화려한 광고판이 도시의 품격을 높이는 시너지 효과를 냈다.

 

▶광화문광장의 변신을 위해 경복궁·덕수궁 같은 고궁과 세종문화회관의 문화 인프라도 함께 활용할 계획이라 한다. 성공하면 서울의 도심 풍경이 지금보다 더 화려하고 다양해질 것이다. 서울 소공동의 신세계 백화점 본점 외벽에 겨울이면 등장하는 미디어 파사드 쇼는 이미 명품 볼거리로 자리 잡았다. 백화점 맞은편 중앙우체국 앞 공터에 사람이 몰리며 주변 상가도 활기를 띠고 있다.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과 광화문광장에서 “해피 뉴이어!”를 외치는 모습을 그려본다.

김태훈 논설위원

 

12.09(월) 아사드 가문의 최후

▲일러스트=박상훈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에는 김일성 공원이 있다. 미국 주간지 타임은 ‘지구촌 악당 4인’을 선정한 적이 있다. 탈레반 우두머리, 소말리아 무장 단체 수장, 그리고 북한 김정은과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이었다. ‘중동의 학살자’로 불리는 바샤르는 자국민을 상대로 화학무기를 사용한 독재자다. 끝없는 내전은 지금까지 60여 만명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바샤르는 무슨 기념일만 되면 김정은과 축전을 주고받았다.

 

▶2018년 트럼프가 주도하는 미·영·불 세 나라가 시리아의 화학무기 시설에 미사일 공격을 했다. 시리아 독재자를 놔둘 수 없다는 국제 여론이 비등할 때였다. 미·북 정상회담을 불과 한 달쯤 앞둔 상황이었다. 김정은에게 강력한 경고 메시지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잇달았다. 미 워싱턴포스트는 “시리아 공습을 가장 유심히 지켜보는 곳은 북한일 것”이라고 했다. 시리아는 아랍연맹에서조차 퇴출됐지만 시진핑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한 적도 있다.

 

▶2011년부터 내전에 빠져 있던 시리아는 올 11월 파죽지세로 주요 도시를 점령하던 반군이 주말 동안 다마스쿠스를 장악했다고 한다. 아버지 하페즈 때부터 대를 이어 53년 동안 ‘철권 유혈 독재’를 호령하던 가문이 몰락하고 아들 바샤르 대통령마저 해외로 도피했다는 소식이다. 반군들은 “다마스쿠스가 해방됐다”고 선언했는데, 주요 공공기관도 손에 넣은 것 같다. 현재는 총리가 대권을 이어받아 복잡한 반군 세력들과 정권 이양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아사드는 사자라는 뜻이다. 아버지 하페즈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공군사관학교를 나온 뒤 거듭된 쿠데타에 성공하면서 2000년 심장마비로 죽을 때까지 30년 동안 종신 집권했다. ‘아랍의 비스마르크’로 불렸던 하페즈는 정치적으로는 철권통치, 종교적으로는 유화정책을 폈다. 그가 북한을 방문해서 김일성을 만난 적이 있는데, 무슨 영감을 받았는지 귀국한 뒤 자신의 대형 초상화를 내걸고 엄청난 동상을 여럿 세웠다.

 

▶이 집안은 장신으로 유명하다. 아들 바샤르도 190㎝가 넘는다. 안과 전문의가 되려 했던 그는 대중 연설이 불가능할 정도로 소심했다. 아버지와 카스트로, 김일성 등 대한 염증 때문에 정치에는 뜻이 없었다. 그러다 부친 사망 후 97% 득표율로 7년 임기 대통령에 오른다. 영어·불어에 능통하고 컴퓨터 통신에 관심 많은 그는 민주 개혁의 목소리를 수용하려 했다. ‘현대화의 기수’였다. 그러다 고문, 암살, 비밀경찰 감시로 돌아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김광일 기자

 

12.10 집안의 저승 문, 욕실

▲일러스트=김성규

 

 작년 겨울 일본에 온천 여행을 갔던 한국인 3명이 목숨을 잃었다. 직접사인은 심근경색 등으로 밝혀졌지만 이른바 ‘히트(heat) 쇼크’가 촉발 요인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히트 쇼크는 추운 곳에 있던 사람이 욕실처럼 따뜻한 곳에 들어가면 혈압이 뚝 떨어지며 현기증을 느끼거나 심하면 실신하는 현상이다. 이때 넘어지면서 욕조나 변기, 세면대에 부딪혀 골절이나 뇌진탕 같은 심각한 부상을 당한다. 심근경색이나 뇌졸중을 일으키기도 한다.

 

▶영화 ‘러브 레터’로 유명한 일본 배우 나카야마 미호가 지난 6일 집 안에서 사망했다. 조사 결과 사인이 욕조 내 익사로 밝혀졌다.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던 미호도 히트 쇼크로 변을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어떻게 집 안 욕조에서 익사할 수 있나 싶은데 이런 사고를 당하는 이가 적지 않다. 아일랜드 출신 인기 가수 돌로레스 오라이어든과 미국 시트콤 ‘프렌즈’에 출연했던 매슈 페리도 집 안 욕조에서 목숨을 잃었다.

 

▶거의 대부분 집에 욕실이 있는 우리나라도 욕실 사고가 증가하는 추세다. 국내에서 넘어져 다치는 사고의 절반에 가까운 46%가 가정 내 욕실에서 발생한다니 집에 저승 가는 문을 두고 사는 셈이다. 주변에서 욕실에서 넘어져 골절 사고를 당했다는 얘기를 듣지 못한 사람이 드물 것이다. 근력이 떨어진 고령층이 특히 위험하다. 초고령 국가 일본에선 연간 1만9000여 명이 집 안 욕실에서 목숨을 잃는다. 65세 이상에선 욕조 익사 사고가 교통사고 사망자보다 두 배나 많다. 미국의 75세 이상 노인이 90세까지 살 경우 적어도 5번은 욕실에서 죽을 고비를 맞는다고 한다. 변기에 앉아 뇌출혈을 당하는 사람도 많다.

 

▶어떻게 예방할까. 추운 데서 옷을 벗고 욕실에 들어가면 맥이 풀려 쓰러지기 십상이니 주의해야 한다. 뜨거운 물에 갑자기 들어가는 것도 피해야 한다. 욕조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혈관이 확장돼 혈압이 낮아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반신욕도 오래 하면 심장박동을 높이므로 피해야 한다. 술이나 약을 먹고 욕조에 들어가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목욕은 즐거움과 위험을 동시에 갖고 있다. 전문가들은 깨끗한 몸으로 장수하고 싶으면 욕실 안전에 아낌없이 투자하라고 한다. 바닥에 미끄럼 방지판을 까는 것은 기본이고 욕실 벽 전체, 손길 닿는 곳마다 손잡이를 설치해야 한다. 욕조에서 넘어지거나 움직임이 없으면 센서가 이를 감지해 자동으로 물을 배출, 익사를 막는 장치도 있다니 조심만 하면 오래도록 욕실을 사용할 수 있다.

김태훈 논설위원

 

12.11 독도 쥐

▲일러스트=박상훈

 

 섬나라인 뉴질랜드에는 원래 쥐가 없었다. 하지만 폴리네시아인에 이어 유럽인들이 섬에 들어올 때 갈색쥐·검은쥐도 유입되면서 큰 문제가 생겼다. 쥐가 잘 날지 못하는 토종 새들을 공격하고 낳은 알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 치웠기 때문이다. 뉴질랜드 정부는 쥐 등 유해 동물이 매년 키위새 등 2500만 마리의 토착종 새들을 죽이고 있다고 했다. 뉴질랜드는 2050년까지 자국에서 쥐들을 완전 박멸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미국 뉴욕시는 ‘쥐 왕국’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넘쳐나는 쥐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거리와 지하철에는 쥐들이 들끓어 이를 구경하는 관광 프로그램이 있을 정도다. 뉴욕 쥐는 길이 50㎝ 정도로 다른 쥐보다 훨씬 크고 공격성까지 있어서 혐오의 대상이다. 미국 뉴욕시는 쥐약을 살포했다가 다른 동물이 먹고 죽는 2차 피해가 속출하자 쥐에게 피임약을 먹여 개체 수 증가를 억제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쥐 소탕이 어려운 것은 놀라운 번식력 때문이다. 생후 5개월이면 임신 가능하고 임신 기간은 21일에 불과하다. 1년에 6~8회 새끼를 낳고 1회 6~10마리를 출산한다. 집쥐 암수 한 쌍은 1년에 새끼를 최대 460마리까지도 낳는다고 한다. 쥐 100마리 중 98마리를 잡아도 두 마리가 암수이면 원상 회복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한다. 더구나 잡식성이라 닥치는 대로 먹고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독도에 집쥐 수백 마리가 출몰해 환경부가 ‘소탕 작전’을 벌이고 있다. 집쥐가 독도 전역에 퍼지면서 철새인 바다제비·괭이갈매기 알을 먹어 치우는 등 생태계를 교란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서도에서 처음 발견됐는데 공사를 위한 건축 자재를 들여오는 과정에서 딸려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개체 수가 늘면서 동도까지 건너갔다. 생존력이 놀랍다. 동·서도 간 최단 거리는 약 151m이고 파도도 거친데 그 거리를 헤엄쳐 건너간 것이다.

 

▶독도 쥐 소탕 작전은 쉽지 않았다. 고양이 등 천적을 투입하는 방안은 다른 철새들까지 공격할 가능성 때문에 접었다. 쥐약과 쥐 피임약은 다른 천연기념물 동물이 먹고 피해를 입을 우려 때문에 포기했다. 그래서 채택한 방식이 쥐덫을 놓는 것이다. 1980년대 독도에 방사한 토끼가 수백 마리로 불어나 나무 등을 고사시키자 소탕 작전을 펼쳤다. 독도에 쇠무릎이라는 식물이 바다제비의 둥지 근처까지 퍼져 새들이 뾰족한 열매에 걸려 죽는 일이 빈발하자 제거 작전을 한 적도 있다. 두 작전 모두 성공했다. 독도 쥐도 박멸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바란다.

김민철 기자

 

12.12 감옥 안 세 살 아기

▲일러스트=박상훈

 

시리아를 철권통치해온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가 오랜 내전 끝에 축출되며 정치범 수용소에 갇혔던 이들이 풀려나고 있다. 그간 묻혀 있던 숱한 비극적인 사연도 세상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고문과 처형 수법이 너무 잔인하고 엽기적이어서 도저히 관련 사진을 볼 수가 없다고 한다. 지하 감옥이 너무 거대해 콘크리트를 부수며 수색을 하지만 전모를 알기 어려울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행방불명자들의 귀환 소식도 이어진다. 고문으로 신체가 훼손된 채 수십 년 갇혀 있던 이들이 가족과 만나 부둥켜안고 통곡한다. 지하 감옥에 40여 년 갇혔던 사람은 모든 기억이 사라졌고 말할 수 있는 게 자기 이름밖에 없었다.

 

▶끝내 가족을 못 만나는 이들도 많다. 리비아에서 영국으로 망명한 작가 히샴 마타르가 쓴 논픽션 ‘귀환’에는 카다피 통치 시기, 정치범 수용소에서 사라진 가족을 찾지 못해 애태우는 이들의 사연이 실려 있다. 정치범이었던 마타르의 아버지가 갇혀 있던 수용소에서 1996년 1000명 넘게 학살당했다. 마타르의 아버지는 사망자 명단에 없어 ‘실종’ 처리됐다. 마타르는 “지금도 아버지를 찾아 헤매고 있다”고 했다.

 

▶시리아 뉴스 중에서도 3세 아기가 수용소에서 발견된 것은 충격이었다. 엄마 품에 있어야 할 아기가 어른도 견디기 힘든 곳에서 발견되다 보니 “수감된 여성이 간수에게 성폭행당해 낳은 아이일 것”이라는 추측이 나온다. 이 추측을 들으면서 영화 ‘그을린 사랑’이 떠올랐다. 1970~80년대 레바논 내전 당시의 비극을 다룬 영화다. 한 여자가 내전 통에 어린 아들과 생이별하면서 수십년 뒤 만나도 알아볼 수 있도록 아들 발목에 문신을 새긴다. 훗날 여자는 정치범으로 투옥된 감옥에서 간수에게 성폭행당해 쌍둥이 남매를 낳는다. 나중에 석방된 여자가 남매와 함께 캐나다에서 살다가 그 간수를 우연히 목격한다. 그런데 그 간수의 발목에 자신이 새긴 문신이 있었다. 이 참혹한 현실에 여자는 절망한다.

 

▶‘그을린 사랑’에서 여자는 죽음이 다가오자 간수였던 아들 앞으로 편지 두 통을 남긴다. 한 편지엔 그에게 사랑한다고 했고 다른 한 통엔 용서한다고 썼다. 쌍둥이 남매에겐 ‘함께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녀는 비극으로 맺어진 자기 아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랐다. 간수 아들은 어머니 무덤 앞에서 참회한다. 알아사드 시대는 끝났지만 시리아의 비극이 끝난 것인지는 모른다. ‘그을린 사랑’과 ‘귀환’에 그려진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기원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12.13 '가깝고도 먼 이웃' 미국·캐나다

▲일러스트=박상훈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를 ‘주지사’라고 호칭했다. “주지사님(Governor)과 저녁 식사를 함께해 기뻤다. 곧 만나 관세 대화를 이어 나가자”고 한 것이다. 캐나다를 미국의 51번째 주(州)로 취급한 조롱이다. 트럼프가 캐나다 국경을 통해 범죄와 마약이 미국에 유입된다면서 25% 보복관세를 물리겠다고 하자, 트뤼도 총리가 급히 미국으로 날아가 트럼프를 만났는데, 트럼프를 만족시키지 못한 모양이다.

 

▶1만1366㎞, 세계 최장 국경선을 마주한 미국과 캐나다는 영국 식민지라는 뿌리는 같지만, 국가 형성 과정은 180도 달랐다. 미국은 토착민 인디언을 몰아내고, 영국과 전쟁을 치르며 독립했다. 반면 캐나다는 독립전쟁을 함께 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거부하고, 영국과 평화협정을 통해 독립했다. 땅도 인디언에게 돈을 주고 샀다. 미국 독립전쟁에서 영국 편에 섰던 왕당파가 대거 캐나다로 도주했다. 훗날 이들은 영국-캐나다 연합군을 결성해 미국 워싱턴을 침공, 대통령궁을 불태우는 ‘1812년 전쟁’을 일으켰다. 미국 건국 당시 캐나다는 가장 위협적인 적대국이었다.

 

▶영토 분쟁도 있었다. 알래스카 남동부 해안 지대를 놓고 다퉜다. 모피 무역 과정에서 개발된 태평양 연안 항구도시들이 대거 미국 땅으로 넘어가게 되자 캐나다가 국제재판을 걸었다. 그런데 캐나다가 같은 편으로 여겼던 영국인 재판관이 미국 손을 들어주며 배신했다. 신흥 강국 독일을 견제하려면 영국은 캐나다가 아닌 미국과 손잡아야 했다.

 

▶앙숙이던 두 나라는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동맹국으로 거듭났고, 생활·경제 공동체로 발전했다. 캐나다인들은 미국 방송을 국내 방송처럼 실시간 시청하며, 전화 국가번호(1)도 같아 일반전화로 미국에 전화를 걸 수 있다. 야구, 농구, 아이스하키 등 각종 스포츠 리그도 공유한다. 캐나다 중서부 오일 샌드에서 추출된 원유는 송유관을 타고 미국 텍사스까지 곧장 간다. 캐나다 수출품의 76%는 미국으로 향한다.

 

▶하지만 양국은 여전히 가깝고도 먼 이웃이다. 미국인은 캐나다인을 ‘51번째 주 시골뜨기’로 여기고, 캐나다인은 미국인을 ‘거만한 속물’로 본다. 캐나다에서 스타벅스가 고전하는 것은 캐나다인의 반미 정서도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트뤼도 총리는 “미국이 이웃이라는 건 코끼리와 한 방을 쓰는 것과 같다”고 했다. 살짝 움직여도 깔려 죽을 수 있다는 뜻이다. 트럼프의 1차 표적이 된 캐나다가 어떤 생존술을 발휘할지 두고 볼 일이다.

김홍수 논설위원

 

12.14(토) '반품 천국'

▲일러스트=김성규

 

1970년대 박봉의 한국 외교관들은 부부 동반 파티에 입고 갈 연미복, 드레스를 살 돈이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쓴 꼼수가 백화점에서 옷을 산 뒤, 파티 당일 하루 입고, 그다음 날 반품하는 것이었다. 필자에게 이 얘기를 들려준 주요국 대사 아내는 “가격 꼬리표를 감추느라 식은땀을 흘렸고, 옷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무지 애를 써야 했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유럽 특파원 시절, 식탁을 구입했다가 불량품이 배달돼 애를 먹었다. 상판 2개를 붙여 6인용 식탁이 되는 구조였는데, 두 상판 아귀가 맞지 않았다. 가구점에 반품을 요구했더니 한 달 반이나 지난 뒤 새 제품으로 교환해 줬는데 역시 아귀가 맞지 않았다. 반면 조립 가구 판매점, 이케아의 ‘반품 코너’에선 가성비 좋은 소품 가구를 얻을 수 있는 재미를 맛봤다. 약간의 흠결만 감수하면 가격도 싸고 직접 조립하는 수고도 덜 수 있어 좋았다.

 

▶택배 천국, 한국에선 반품 서비스도 세계 최고다.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산 물건이 마음에 안 들거나 하자가 있을 때, 집 앞에 내놓기만 하면 도로 가져간다. 반품을 전제로 색상·사이즈별로 옷, 신발을 구매한 뒤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반품하는 소비자도 많다. 신선 식품을 구입한 뒤 일부를 먹고 반품하거나, 여름철 선풍기를 산 뒤 실컷 쓰고, 반품 기한(30일) 하루 전 반품을 요구하는 ‘블랙 컨슈머’도 있다고 한다.

 

▶알리, 테무 등 중국 전자 상거래 업체들은 한국 시장을 공략할 때 ‘무료 반품’ 카드를 적극 활용했다. 반품을 요구하면, ‘제품 폐기 요청’과 함께 반품 없이 환불해 주고, 그 비용은 판매자에게 떠넘겼다. 참다 못한 중국 판매업자들이 본사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무기한 반품’을 자랑해 온 코스트코는 비용 부담이 커지자, TV, 세탁기, 로봇청소기 등 전자 제품의 경우 반품 허용 기간을 3개월로 제한했다.

 

▶유통업체들은 반품 물건을 상태에 따라 ‘미개봉/최상/상/중’ 4등급으로 분류한 뒤, 최대 90% 할인한 가격으로 재판매한다. 쿠팡, 11번가, 롯데홈쇼핑 등에선 반품 상품만 따로 파는 ‘반품 마켓’ 코너를 운영하고 있다. 기업들은 반품 비용을 줄이려 AI(인공지능)와 빅데이터 기술을 동원하고 있다. 옷, 신발을 가상으로 착용해 볼 수 있는 ‘가상 피팅’, 신체 크기를 정교하게 측정하는 앱까지 만들었다. 고객의 반품 요청이 들어오면 AI 상담원이 “가격을 50% 깎아줄 테니 그냥 사용하시라”면서 협상을 시도하기도 한다.

김홍수 논설위원

 

12.16(월) 가상화폐 vs 양자컴퓨터

▲일러스트=김성규

 

1941년 12월 7일 일본 정부가 주미 일본 대사관으로 보낸 암호 전문을 미군 무선정보국이 잡아챘다. 미군이 풀어낸 암호는 ‘미 국무장관에게 워싱턴 시각 오후 1시까지 일본 정부 답변을 전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를 수신한 일본 대사관이 복잡한 암호를 푸는 데 쩔쩔매는 바람에 오후 2시 30분에야 미 국무부에 도착했다. 그사이 진주만은 이미 일본군 공습으로 쑥대밭이 됐고 일본은 ‘선전포고 없는 기습’의 불명예를 안고 말았다.

 

▶로마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알파벳의 각 철자를 세 글자씩 뒤로 이동시키는 방식으로 암호를 만들어 썼다. 예를 들어 ‘cat’이라는 단어를 이 규칙(암호 키)에 따라 ‘fdw’로 바꾸는 식이다. 이처럼 암호화할 때와 해독할 때 같은 키를 사용하는 방식을 ‘대칭 암호화’라고 한다. 오늘날 온라인 상거래에선 주로 ‘비대칭 암호화’가 사용된다. 암호화에 쓰는 키(공개 키)와 해독에 쓰는 키(개인 키)가 달라 암호를 풀려면 두 가지를 모두 알아야 한다. 암호화하려는 정보를 특정 숫자로 바꾸고 소수(素數)들의 곱과 복잡한 연산을 활용해 엄청나게 큰 수로 바꾸면, 이를 해킹해도 암호를 풀어낼 규칙을 알아내기 어렵다.

 

▶이보다 훨씬 고도화한 기술이 타원 곡선 위의 특정 점과 연산을 이용해 공개 키와 개인 키를 생성하는 ‘타원 곡선 암호화’다. 비트코인이 사용하는 방식이다. 비트코인이 수많은 개인의 디지털 장부에 기록돼 위·변조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암호화 기술 덕이다. 그런데 지난주 새로운 양자 칩을 탑재한 구글의 양자컴퓨터가 기존 수퍼컴퓨터로 10셉틸리언(10의 24제곱)년 걸리던 문제를 단 5분 만에 풀었다는 발표가 나오자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 화폐 가격이 많게는 20% 가까이 폭락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양자컴퓨터의 정보 단위인 큐비트는 0과 1의 상태를 동시에 가질 수 있는 확률적 중첩 상태로, 여러 상태를 동시에 계산할 수 있다. 예컨대 두 큐비트는 00, 01, 10, 11의 상태를 중첩으로 표현할 수 있어 여러 정보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다. 동전에 비유하면, 던져진 동전이 공중에서 돌고 있는 동안 앞면과 뒷면 중 하나로 결정되지 않은 상태다. 양자컴퓨터는 소인수 분해 같은 문제에서 강력한 계산 능력을 갖고 있어 기존 암호 체계를 무력화할 게임 체인저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양자컴퓨터의 성능 고도화를 기대하는 이들은 가상 화폐의 암호 체계가 뚫리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본다. 반면 가상 화폐 업계는 양자컴퓨터에 뚫리지 않는 양자 내성(耐性) 암호화 기술이 개발되고 있어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뚫으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 양자컴퓨터와 가상 화폐의 ‘창과 방패’의 전쟁이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곽수근 논설위원·테크부 차장

 

12.17 돈 벌러 한국 오는 日 청년들

▲일러스트=이철원

 

아일랜드는 700년 이상 영국의 식민지였다. 아일랜드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영국으로 갔다. 아일랜드 대표 소설가, 조너선 스위프트, 오스카 와일드, 버나드 쇼는 영국에서 사회 경력을 쌓았다. 1840년대 아일랜드 대기근 때는 아일랜드인 수백만 명이 영국으로 갔다. 산업혁명으로 일손이 부족했던 영국은 아일랜드인을 부려먹으면서 ‘하얀 검둥이’(white negro)라고 멸시했다.

 

▶1949년 독립국이 된 아일랜드가 50년 만에 국민소득에서 영국을 제쳤다.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영국 넬슨 제독 기념탑을 치우고, 그 자리에 높이 120m짜리 기념탑(The Spire of Dublin)을 세웠다. 구글, 애플, 페이스북 등 글로벌 IT(정보기술) 기업의 유럽 본부가 몰려 있는 더블린은 유럽의 실리콘밸리로 불린다. 과거와 정반대로 영국 청년들이 일자리를 위해 아일랜드로 몰려가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식민지 조선 청년들의 구직 행렬이 일본으로 이어졌다. 강제징용을 포함해 350만명 이상이 일본 기업에서 일했다. 해방 후에도 일본행 취업 이주는 계속됐다. 일부 한국 여성이 3~4배에 달하는 임금 격차를 좇아 일본 유흥업소로 몰려갔다. 당시 일본에 입국하려는 젊은 한국 여성들은 일본 공항 입국장에서 유흥업소 불법 취업으로 의심받으며 많은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30년’을 보내면서 한일 경제력 격차가 좁혀졌다. 일본의 국민소득은 2012년 5만달러를 찍고 줄곧 내리막을 걸었다. 반면 한국은 1995년 1만달러, 2007년 2만달러, 2014년 3만달러를 넘고, 지난해엔 3만6194달러로 일본(3만5793달러)을 추월했다. 최저임금도 일본을 앞질렀다. 일본은 심각한 저임금 국가다. 이제는 일본 청년들이 돈 벌러 한국으로 오는 것이 자연스럽게 됐다. 한류 열풍은 한국 취업 매력도를 높이는 요소다. 요즘 음식점, 옷 가게 등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일본 청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어르신들이 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만하다.

 

▶회원국 간 취업 이주가 자유로운 유럽연합(EU)을 보면, 우수한 두뇌는 고소득 국가로 몰려 인재의 부익부 빈익빈이 강화된다. 중세 시절, 용병 수출로 연명하던 스위스는 세계 최고의 금융업, 기계공업, 제약 산업을 키운 덕에 유럽 최고 인재들의 1순위 취업 희망국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도 국가 매력도를 더 높여 외국인 인재가 취업해 살고 싶은 나라로 만들어가야 한다. 인구 감소 문제도 해결하고 국가 경쟁력도 더 키울 수 있을 것이다.

김홍수 논설위원

 

12.18 독재자의 은닉 재산

▲일러스트=박상훈

 

2003년 4월 초, 영국군이 이라크 남부 바스라에 있는 사담 후세인의 별궁(別宮)에 들이닥쳤다. 아라베스크 무늬로 장식된 대리석 궁전에서 이들을 맞이한 것은 ‘황금빛 화장실’이었다. 변기, 비데, 세면대의 밑단과 수도꼭지 등이 모두 금도금돼 있었다. 비슷한 시기, 바그다드의 대통령궁을 점령한 미군은 화장실에서 금을 입힌 청소용 솔을 찾아냈다. ‘황금 변기 솔’은 후세인의 사치와 약 400억달러의 해외 은닉 재산을 상징하는 물건이 됐다.

 

▶2010~2011년 ‘아랍의 봄’ 민주화 시위로 중동·북아프리카의 독재 정권이 줄줄이 무너지자, 스위스가 갑자기 바빠졌다. 튀니지의 제인 엘아비디네 벤 알리,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등이 몰락하자 스위스에 맡겨 놓은 이들의 재산을 본국에 반환하라는 요구가 빗발쳤기 때문이다. 이들 독재자 중에는 카다피의 해외 은닉 재산이 가장 많았는데, 현금·보석·부동산 등을 합쳐 1000억~2000억달러로 추정됐다.

 

▶카다피의 황금 사랑은 후세인을 능가했다. 자신이 ‘왕 중의 왕’이라며 황금관을 쓰고 황금 지팡이를 들었다. 황금 파리채를 쓰고, 다이아몬드가 박힌 황금 권총을 자랑했다. 최후에는 그 권총을 빼앗아 든 시민군의 손에 죽었다. 카다피가 여기저기에 금괴와 보석을 숨겨 뒀다는 소문이 있어, 사후 10년이 지나도록 이를 추적하는 ‘금괴 사냥꾼’도 있었다.

 

▶부자(父子) 세습으로 시리아를 53년간 통치했던 알아사드 가문이 축출된 후, 국제사회가 최대 17조원으로 추정되는 그들의 재산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가족과 함께 러시아로 도피한 바샤르 알아사드 전 대통령은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일반 승용차를 몰며 검소한 척했다. 하지만 그가 떠난 대통령궁에서는 페라리·람보르기니·롤스로이스 같은 최고급 차량과 고가의 명품이 쏟아져 나왔다.

 

▶전혀 반대의 경우도 있다. 1960년 하야한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 교민들의 도움을 받아 생활했다. 곤궁한 형편에 이발비 5달러를 아끼려고 머리 손질도 집에서 했다. 손님은 아내 프란체스카 여사가 가루 주스를 물에 타서 대접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스위스 비밀 계좌에 거액을 은닉해 뒀다는 소문이 돌았다. 몇 해 전 민주당의 한 정치인이 “박정희의 통치 자금이 300조”라며 이를 찾아내겠다고 했다. 그런 자금이 있다고 그 사람도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한국의 기적은 저절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김진명 기자

 

12.19 법사(法師)

▲일러스트=이철원

 

석가모니 부처의 생전 제자 중에 유마힐이라는 부유한 상인이 있었다. 유마힐은 부처를 따라 탈속하지 않았지만 재가(在家) 제자로 지내며 승려를 후원하고 부처의 가르침을 전했다. 어느 날 문수보살이 그에게 “어떻게 하면 불도에 통달할 수 있는가” 물었다. 유마힐은 “도가 아닌 길을 가더라도 그것에 구애되거나 빠져들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남들이 기피하는 유곽과 노름방까지 찾아갔다. 유혹을 경계하며 밑바닥 사람들을 돕고 부처의 자비를 설법했다. 불가에서는 유마힐을 오늘날 법사(法師)의 원형으로 본다.

 

▶법사는 승려와 신도를 모두 아우르는 용어로 오래 쓰였다. 아무나 얻을 수 있는 호칭이 아니었다. 절 내에선 스님을 대상으로 불법(佛法)을 가르치는 학식 있는 스님이란 뜻이었고, 속세에선 해박한 불교 지식으로 포교하는 이를 뜻했다. 오늘날에도 종단이 시행하는 자격증 시험을 통과해야만 재가 법사가 될 수 있다. 태고종은 재가 법사를 승려의 일종으로 보지만 조계종은 포교사로 한정하고 스님을 보좌해 일반 신도를 가르치게 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법사가 남자 무속인이란 의미로 쓰이고 있다. 무속인들이 굿을 하며 각종 경문을 읽는 것조차 불교를 흉내 내 독경(讀經)이라고 한다. 이런 경문이 중국 송나라 때 도교 경전인 ‘옥추경’을 비롯해 수십 종에 이른다. 조선 중기 허균이 쓴 소설 ‘장산인전’에 ‘옥추경을 수만번 읽어 통달한 뒤 귀신을 부리고 요괴를 물리치는 신통력을 얻었다’고 서술된 걸 보면 그 뿌리도 깊다.

 

▶일명 ‘건진 법사’ 전모씨가 불법 정치 자금 수수 혐의로 체포됐다. 윤석열 대통령 부부와 친분이 있다면서 자신을 국사(國師)가 될 인물이라고 주장하고 다녔다는 보도도 있었다. 전씨는 일광조계종 소속이라 하는데 정식 불교 종파가 아니다. 일광조계종은 몇 해 전 제사상에 가죽 벗긴 소를 올린 적도 있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 가르침과 거리가 먼 무속 의식이다.

 

▶종교인은 근대 이전엔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학식 있는 법사 중에도 경전과 계율, 불교 논문에 두루 조예가 깊으면 삼장(三藏)법사라 했다. 서기 7세기 인도를 다녀와 대당서역기를 쓴 당나라 고승 현장이 대표적인 삼장법사다. 국사도 그런 호칭 중 하나다. 고려 시대 백성의 존경을 받았던 지눌과 의천은 입적 후 왕실에서 보조국사와 대각국사 시호를 받았다. 어느 불교 종단도 소속 법사에게 굿을 하거나 점을 치게 하는 경우는 없다. 불교와 상관도 없는 무속이 활개 치는 일은 그만 보고 싶다.

김태훈 논설위원

 

12.20 '2분 만에 잠들기'

▲일러스트=이철원

 

히틀러는 새벽 4~5시까지 잠을 못 자는 불면증 환자였다. 수면 무호흡 증세까지 있어 침실에 산소탱크를 두고 자주 산소를 들이마셨다. 손톱을 물어뜯고 피가 날 정도로 목을 긁어대는 등 신경쇠약 증세에 시달렸다. 히틀러가 전략적 후퇴를 주장하는 군 지휘관을 패배주의자로 몰아 처단하며 자멸을 재촉했던 건 불면증으로 인한 인지장애 탓이라는 분석이 있다. 히틀러의 맞수 윈스턴 처칠도 불면증 환자였지만 나름의 해법을 찾았다. 밤엔 3시간밖에 못 잤지만, 샴페인을 잔뜩 마시고 2시간 낮잠을 자는 것으로 수면 부족 문제를 풀었다.

 

▶사람들은 불면의 고통을 덜 수 있다면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아편에 의존했다. 찰스 디킨스는 침대를 정북향으로 하고 매트리스 정중앙에서 잠을 청했는데, 숙면에 효과가 있다고 자랑했다. 일반인들이 많이 쓰는 고전적 방법은 숫자 거꾸로 세기다. 침대에 누운 뒤 의도적 숨 멈추기로 뇌를 산소부족 상태로 만든다는 사람도 봤다.

 

▶2차 세계 대전 중 미 해군에서 전투기 조종사가 시끄러운 환경에서도 잠들 수 있도록 돕는 ‘해파리 수면법’을 개발했다. 자신을 ‘의자에 걸친 해파리’라고 가정하며 이마부터 시작해 눈, 뺨, 턱, 목으로 내려가며 근육의 긴장을 풀고, 심호흡을 하면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당시 실험에서 6주 만 연습하면 조종사 96%가 2분 만에 잠에 들었다고 한다. 최근 유튜브를 통해서 다시 알려지며 관심을 끌고 있지만, 효과를 둘러싼 논란도 있다.

 

▶우리나라의 수면장애 환자는 110만명에 이른다. 수면 장애는 우울증, 비만, 치매 등 각종 질병을 일으키고, 인지 장애, 주의력 결핍을 유발해 경제적 손실을 초래한다. 잠이 부족하면 근육 생성을 못해 특히 노년층 건강에 큰 위협이 된다. 옛날엔 수면제 처방이 고작이었지만, 최근엔 AI 기술을 활용해 수면 데이터를 분석, 수면의 질을 높이는 ‘슬립테크’(sleep+technology)가 각광받고 있다. 글로벌 가전 전시회인 CES에서 슬립테크 전용관이 등장할 정도다.

 

▶AI가 코골이 소리를 분석하고 베개 속 에어백을 조정해 머리 위치를 바꿔줌으로써 숙면을 유도한다. 생체시계가 현재 시각을 밤으로 인식하도록 멜라토닌 분비를 촉진하는 파장의 빛을 쏘아준다. 수면 중 뇌파를 포착해 맞춤형 오디오를 들려줌으로써 숙면을 돕는다. 이미 상용화된 슬립테크 사례들이다. 2032년엔 슬립테크 시장이 1000억달러 수준으로 커진다고 한다. 100% 성공률 ‘2분 만에 잠들기’가 등장하면 인류에게 복음일 것이다.

김홍수 논설위원

 

12.21(토) 총알받이

▲일러스트=박상훈

 

전투에서 최전방은 늘 하층민과 신병 몫이었다. 이들은 적 화살과 전투 마차 공격의 집중 표적이 됐다. 히타이트 전차 부대의 진격에 이집트군 선두 신참 보병들이 쓰러졌지만 전차 부대가 약화되면 이집트 정예부대가 나섰다. 로마 군단도 신병 ‘하스타티’가 선두에 섰다. 후방의 주력 고참병 ‘트리아리’를 보호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많은 하스타티가 죽어가며 적을 약화시키면 트리아리가 뛰어들어 적을 제압했다.

 

▶총포가 등장한 뒤 최전방 병사의 희생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나폴레옹 전쟁과 미국 남북전쟁 때 밀집 대형으로 돌격하던 병사들이 총알받이가 됐다. 기관총이 처음 등장한 1차 세계 대전은 수많은 청년을 기관총 총알받이로 만들었다. 적을 향해 돌진하다 철조망에 걸리면 기관총 세례를 받았다. 하루에 수만 명 사상자가 나는 날이 숱했다. 2년간 500만명이 죽었다. 양측 참호 사이엔 총알받이 시신만 나뒹굴어 ‘무인 지대(No Man’s Land)’로 불렸다.

 

▶총알받이 전술을 가장 많이 사용한 군대는 2차 대전 때 소련군이다. 이른바 ‘인간 파도’ 전술이다. 지휘관의 능력 부족과 무기 성능 부족을 총알받이 병사들로 때웠다. 총알받이들이 끊임 없이 투입돼 독일군의 탄약·포탄·지뢰를 소진시켰다. 독일군이 기관총을 재장전하는 짧은 시간에 주력 부대를 투입해 독일군 진지를 덮쳤다. 총알받이들이 도망치면 즉결 처형했다. 소련 전국의 죄수들도 총알받이로 이용했는데 이들을 ‘형벌 부대’라고 불렀다. 200일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 병사 100만명이 죽었다. 1만3000명은 아군 장교 총에 죽었다. ‘러시아 들판이 아들 잃은 어머니들의 눈물로 젖었다’고 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총알받이 전술을 쓰고 있다. 이른바 ‘스톰 Z’ 돌격으로 불린다. 병사들을 ‘무작정 돌격’에 내몰아 총알받이로 만든다. 우크라이나군 탄약과 포탄이 부족해지면 주력 부대를 보내 진지를 점령한다. 일부 총알받이 병사는 드론을 향해 살려달라고 빌었다. 죄수들로 구성된 형벌 부대도 다시 등장했다. 살아남으면 사면해 준다고 했지만 실제 생존자는 거의 없다고 한다. 교도소가 텅 비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북한 병사들이 러시아의 새로운 총알받이 부대가 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미 북한군 100여 명이 죽고 1000여 명이 부상했다고 한다. 낯선 환경에서 낯선 무기에 대응하지 못해 떼죽음을 당하고 있다. 왜 싸우는지도 모른 채 김정은의 주머니를 채워주려 이역만리에서 주검이 되고 있다.

배성규 기자

 

12.23(월) 사랑의열매

▲호랑가시나무.

 

식물의 공기 정화 기능에 대해 처음으로 본격 실험을 진행한 건 미 항공우주국 나사(NASA)였다. 우주선에서 장기간 지내야 하는 우주인들이 건강을 잃지 않으려면 공기 정화가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나사는 10년 연구 끝에 1989년 아레카야자, 관음죽, 스킨답서스 등 50종의 실내 식물의 공기 정화 능력이 탁월하다고 발표했다. 과장됐다는 지적도 있지만 여전히 실내 식물을 고르는 기준으로 이 연구 결과가 쓰인다.

 

▲일러스트=이철원

 

▶제주도 곶자왈 부근에선 빌레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환경부 소속 국립생물자원관은 2018년 이 빌레나무가 실내 미세 먼지를 20%가량 줄인다는 실험 결과를 얻었다고 발표했다. 미세 먼지가 극성을 부릴 때여서 생소한 빌레나무가 포털 사이트 검색어 순위에 오를 정도로 관심을 끌었다. 정부는 이 나무를 화분에 심어 교실에 보급하는 시범 사업을 하고 있다.

 

▶국립생물자원관은 22일 실내 공기 질을 개선하는 자생식물 15종을 추가 공개했다. 자생식물들과 나사가 공기 정화 식물로 인정한 스킨답서스를 비교 실험한 결과 호랑가시나무, 섬초롱꽃, 산수국, 꿀풀 등 15종이 미세 먼지, 총휘발성유기화합물(TVOCs) 제거에 효과적임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특히 호랑가시나무는 스킨답서스보다 시간당 미세 먼지 제거량이 1.4배, 총 초미세 먼지 제거량이 2배 많았다고 했다. 자원관은 호랑가시나무 열매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사랑의열매’로도 알려졌다고 소개했다.

 

▶사랑의열매는 1970년대 초부터 성금을 모금할 때 상징으로 사용했다. 2003년 2월 산림청은 백당나무를 이달의 나무로 선정하면서 나무 열매가 사랑의열매와 닮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엔 생물자원관이 호랑가시나무 열매가 사랑의열매와 닮았다고 한 것이다. 제주도에서 자라는 식물 산호수·자금우 열매도 정말 사랑의열매와 똑같이 생겼다. 다만 처음 이 상징을 디자인한 분은 우리나라 야산에 자생하는 산열매를 형상화했다고 했다. 특정 열매를 본뜬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공동모금회가 진행하는 연말연시 모금액은 22일 현재 2820억원이 모아져 사랑의온도탑이 62.7도를 기록하고 있다. 올해 목표액은 지난해보다 3.4% 오른 4497억원이다. 아직은 대기업들이 예년 수준으로 기부하고 있지만 불경기와 비상계엄, 탄핵 정국까지 겹쳐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 공동모금회는 노심초사하고 있다. 특히 일반 시민들의 기부가 목표 달성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한다. 지금처럼 어렵고 뒤숭숭할 때일수록 따뜻한 마음이 더 모아졌으면 좋겠다.

김민철 기자

 

12-24 로봇도 보행자?

 

▲일러스트=이철원

 

최근 인천에서 배달용 로봇 ‘뉴비’가 무단 횡단을 하다가 차량에 부딪히는 사고가 발생했다. 보험 처리 과정에서 “이 로봇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보행자’이기 때문에 운전자 과실도 있다”는 얘기에 운전자가 황당해하면서 인터넷에 사연을 올렸다. 도로교통법에 따르면 보행자가 무단 횡단을 했더라도 사고를 낸 운전자에게도 책임을 물린다. ‘뉴비’도 보행자 자격을 취득했으니 인간과 같은 법 조항과 보험을 적용받는다는 것이다.

 

▶로봇이 사람 비슷한 대우를 받는 건 공상과학 영화에서 보던 얘기였다.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에 등장하는 원통형 로봇 R2D2는 성실하고 의리 있으면서 재치 넘치는 캐릭터로 많은 사랑을 받아 시리즈 전편에 등장하는 ‘주연급’ 로봇이다.

 

▶이제는 현실에서 로봇의 법적 권리를 논하는 시대다. 지난 2017년 유럽의회는 로봇에게 ‘전자 인간(electronic personhood)’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로봇 시민법 규칙’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유럽 각국이 준수해야 하는 법은 아니고 관련 국내법 만들 때 참고하라고 낸 권고문이지만 논란을 야기했다. 로봇은 자율성과 감정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법적 권리까지 주는 건 지나치다고 유럽 각국의 로봇 전문가, 변호사, 기업가 등이 반대 서한을 냈다.

 

▶학계에서도 여전히 논쟁거리다. 로봇의 법적 지위 부여는 시기상조라는 입장도 많다. 반면 조안나 브라이슨(독일 헤르티행정대학) 같은 학자는 로봇이 자율적으로 행동할 경우 그 결과에 책임을 물려야 한다며 로봇의 법적 지위 부여를 주도한다. 로봇을 도덕적 존재로 대우해야 한다는 학자(데이비드 건켈 미국 노던일리노이대 교수)도 있다. 물론 이때도 로봇을 인간처럼 감정을 가진 존재로 바라보자는 건 아니고 인간 사회에서 점점 더 많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법적, 사회적 책임을 부과하자는 취지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11월부터 ‘지능형 로봇법’이 시행되면서 배달, 순찰, 청소 등의 서비스를 수행하는 실외 이동 로봇은 운행안정 인증을 받을 경우 법적으로 보행자 지위를 얻게 됐다. 로봇을 보호하려고 만든 법은 아니다. 로봇도 보행자와 동일하게 무단 횡단 금지 등 도로교통법을 지켜야 한다. 어기면 범칙금도 물린다. 로봇이 사고를 일으킨 경우, 법적 지위가 없으면 피해자가 보상을 받기 어려운 경우가 생길 수 있어 만든 조항이다. 똑똑해진 기계와 더불어 살려니 그에 걸맞은 법과 제도도 촘촘하게 갖춰야 한다. 그래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강경희 기자

 

12.25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

▲일러스트=박상훈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어머니가 생전 썼던 왕관에는 105캐럿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근대 이전 세계 최대 다이아 산지였던 인도 광산에서 생산된 것이었다. 인도 다이아가 고갈될 즈음인 19세기 후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다이아 광산이 발견됐다. 이후 10년간 남아공에서 캔 다이아가 그 이전 수백 년 인도 생산량을 능가할 만큼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다. 공급이 넘치며 가격이 하락했다.

 

▶위기에 몰린 다이아 업계를 구한 이가 영국 사업가 세실 로즈였다. 로즈는 아프리카의 대형 광산들을 사들여 그 유명한 드비어스사(社)를 창립했다. 드비어스는 한 줌 귀족 시장을 포기하고 다이아몬드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 결혼 반지에 금이나 은 대신 다이아를 끼우는 아이디어가 대박을 냈다. 1947년 선보인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는 광고는 영원한 사랑을 갈망하는 청춘 남녀를 매혹했다. 오늘날 미국 여성 넷 중 셋은 다이아 반지를 끼고 예식장에 들어간다. 결혼반지를 되파는 것이 사랑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되면서 엄청난 양의 다이아가 장롱 속에 갇혔다. 덕분에 많이 팔리면서도 가격이 유지됐다.

 

▶그랬던 다이아 가격이 추락하고 있다. 2022년 3월 최고점을 찍은 후 지금까지 40%가 빠졌다. 가장 큰 이유는 랩 그로운(Lab Grown) 다이아몬드의 등장이다. 랩 그로운은 ‘실험실에서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감정서가 없으면 전문가조차 천연 다이아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성분·경도·굴절률에 차이가 거의 없는데 가격은 천연의 20% 수준이다.

 

▶가성비 따지는 청년 커플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할리우드 배우 메건 마클도 2018년 영국 해리 왕자와 결혼할 때 랩 그라운 다이아를 착용했다. 2010년대 연 10억달러였던 시장 규모는 2030년대엔 500억달러를 넘어설 전망이다. 미국에 이어 다이아몬드 2위 소비국인 중국이 대거 금으로 갈아탄 것도 가격 하락을 부추기고 있다.

 

▶인조 다이아 다음 타깃은 금이 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고대 이집트에서 연금술이 탄생한 이후 인류는 실험실에서 금을 만들기 위해 무던히 땀을 흘렸지만 허사였다. 그런데 핵분열·핵융합이 가능해지며 마침내 인공 금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다만 금 1g을 만들려면 전기 먹는 하마인 입자가속기를 5000년 넘게 돌려야 해 당장 경제성은 없다. 그래도 누가 알겠는가. 옥의 빛깔에 반해 흙을 굽기 시작한 게 자기의 탄생을 불렀다. 다이아몬드가 실험실에서 먼저 만들어졌지만, 싸고 질 좋은 랩 그로운 금이 곧 나올지 모른다.

김태훈 논설위원

 

12.26 이혼 후 친구처럼 지내기

▲타이거 우즈(빨간색 상의)와 엘린 노르데그렌이 포옹하는 장면. /유튜브

 

할리우드 배우 커플로 유명했던 브루스 윌리스와 데미 무어는 1987년 결혼해 세 딸을 낳고 2000년 헤어졌다. 재작년 윌리스가 중증 치매를 앓게 되며 둘의 ‘이혼 후 관계’가 주목받았다. 두 사람은 이혼 후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무어는 전남편을 매주 문병 간다. 윌리스와 마주 앉아 그를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자신의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띄우기도 했다. 그러면서 윌리스를 ‘친구’라고 했다.

▲일러스트=이철원

 

▶두 사람은 이혼할 때 “세 딸을 위해 좋은 친구로 남자”고 약속했다고 한다. 아빠 노릇, 엄마 노릇도 충실히 했다. 윌리스와 재혼한 에마 헤밍이 “치매는 가족병”이라며 “간병하는 게 힘들다”고 방송에 나와 토로하자 무어의 세 딸이 “당신이 자랑스럽다”며 새엄마를 응원하기도 했다. 이런 얘기가 미국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도 이혼 후 친구처럼 지내는 사례가 꽤 있다. 결혼 13년 만에 성격 차이로 갈라섰다는 한 여자 연예인은 관심을 서로가 아닌 아이에게만 쏟을 수 있게 되면서 전남편과 사이가 다시 좋아졌다고 했다.

 

▶미국 프로 골퍼 타이거 우즈가 전처 엘린 노르데그렌과 만나 화해의 포옹을 나눴다. 윌리스-무어 커플과 달리 둘은 2010년 파경 이후 최근까지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찰리가 출전하는 골프 대회를 보러 갈 때도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그런데 지난 23일 가족 대항 골프 대회에 선수로 출전한 우즈 부자와 캐디로 동행한 딸이 뒷정리를 하는 자리에 노르데그렌이 나타난 것이다. 품에는 몇 해 전 재혼해 낳은 딸을 안고 있었다. 노르데그렌은 우즈와 포옹한 후 아들과 딸도 차례로 끌어안았다.

 

▶가수 김명애는 노래 ‘도로남’에서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도로 남’이 되는 게 남녀 사이라고 했다. 그러나 현실에선 자녀 양육비 부담과 면접권 등으로 인해 헤어지더라도 완전히 안 보고 살기는 쉽지 않다. 우리나라는 해마다 결혼한 사람 1000명당 3.7명이 이혼하는데 그중 절반 가까운 42.9%는 자녀가 있다. 이들의 상당수는 자녀 때문에라도 인연을 끊지 못한다.

 

▶전문가들은 완전히 안 보고 살 수 없다면 이혼을 관계의 끝이 아닌 관계 전환의 계기로 삼으라고 권한다. 그러려면 이혼 후에도 자식 앞에서 전남편이나 전처를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가정 폭력이 이혼 사유가 아닌 한, 상당수 자녀는 이혼한 부모 모두를 여전히 사랑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서도 이전 배우자에 대한 나쁜 감정을 최대한 씻어내라고 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12.27 전쟁터에서 온 편지

“사랑하는 루, 드디어 우리는 짐을 꾸리고 있는 중이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도록 빌고 있소. 내일부터 며칠 동안 일어날 소식은 신문을 통해 알 것이오.” 독일군 사단장 롬멜이 1940년 5월 전장에서 아내에게 보낸 편지다. 롬멜이 아내에게 예고한 것은 프랑스 마지노선 돌파였고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롬멜전사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일러스트=이철원

 

▶전쟁터에서도 많은 글이 쓰여졌겠지만 그중에서도 편지는 가장 내밀한 감정이 담겨 있다. 어머니·아내 등 가까운 가족이나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일수록 애틋할 수밖에 없다. 나폴레옹은 전투가 끝나면 아내 조세핀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서둘러 텐트로 들어갔다. 그는 생전 5만5000통의 편지를 썼다. 오스트리아 철학자 비트켄슈타인은 1914년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했다. 그는 최전방 근무를 자원해 적탄이 귓전을 스치는 관측 망루에서 “총격을 받고 있다. 총성이 날 때마다 영혼이 움찔거린다.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고 썼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실제로 이오지마 전투에서 발견한 편지를 모티프로 제작했다. 일본군 병사가 아내에게 남긴 편지엔 “갓 태어난 딸이 보고 싶다”와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태평양전쟁 등에 참전한 일본 병사들의 편지를 모은 책엔 ‘고향집 나무와 꽃들이 잘 있는지 궁금하다, 초밥을 먹고 싶다’ 같은 내용들이 많았다고 한다. 과달카날 전투에서 죽은 일본군 병사의 품에선 ‘어머니, 제가 내일 이 풀 향기를 맡을 수 있을까요’라고 쓴 편지가 나왔다.

 

▶전쟁터에서 오는 편지도 받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성석제 단편소설 ‘협죽도 그늘 아래’ 주인공은 결혼하자마자 6·25가 나서 합방도 하지 못한 채 학병으로 입대한 남편을 기다리는 70세 할머니다. 스무 살에 결혼했으니 50년째 남편 소식을 기다리는 것이다. 집으로 온 것은 남편 편지가 아니라 행방불명이라는 통보였다. 그래도 할머니는 동네 입구 협죽도 그늘 아래에 앉아 여전히 남편의 편지를 기다린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파병됐다가 사망한 북한군 병사 편지가 공개됐다. “정다운 아버지 어머니의 품을 떠나 여기 로씨야 땅에서…”로 시작하는 편지는 친구 생일을 축하하려고 쓴 짧은 편지다. 내용을 보면 제대로 끝맺지도 못한 것 같다. 이 편지 하나를 남기고 눈 덮인 이역만리 땅에서 시신이 됐다. 왜 싸우는지, 왜 죽는지도 모른 채 식어간 이 병사는 마지막 순간에 누구를, 무엇을 떠올렸을까.

김민철 기자

 

12.28(토) 파나마 운하

▲일러스트=이철원

 

인류 최초의 운하는 기원전 5~6세기 이집트를 정복한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1세가 완성한 고대 수에즈 운하였다. 나일강과 홍해를 연결해 나일강 하류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홍해 너머 메마른 아랍 땅으로 실어 날랐다. 중국도 7세기 수나라 때, 강남 곡창지대와 수도 장안을 연결하는 대운하를 건설했다.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지금의 수에즈 운하는 프랑스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가 1869년 완공했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파나마 운하도 그가 착공했다. 그러나 고작 길이 80㎞ 지협을 끝내 뚫지 못하고 미국에 넘겼다. 마침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빼앗은 필리핀 해군기지에 함대를 신속하게 보내야 했던 미국이 반색하고 뛰어들어 1914년 완공했다.

 

▶레셉스가 파나마 운하 공사에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인부 2만2000명의 목숨을 앗아간 말라리아였다. 개미를 매개로 알고 엉뚱한 데 헛심을 썼다. 미국은 모기가 원흉이란 사실을 밝혀내 유충이 사는 물웅덩이를 없앴다. 가톨릭교회의 성수(聖水) 그릇조차 금지할 만큼 철저히 방역했다. 운하 완공 후 파나맥스급(級)이란 어휘가 탄생했다. 폭 32m(현재는 49m로 확장)인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최대 크기의 배란 뜻이다. 그보다 큰 배는 지금도 남미 대륙과 남극 사이, 남위 60도에 있는 드레이크 해협으로 우회한다. 엄청난 유속과 악천후로 악명 높아 ‘절규하는 60도’로 불릴 만큼 지구에서 가장 거친 바다다.

 

▶미국은 파나마 운하를 손에 넣기 위해 온 정성을 쏟았다. 10년 공사 기간 중 6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콜롬비아 지배를 받던 파나마의 독립도 지원했다. 그렇게 손에 넣은 운하였는데 1977년 카터 행정부가 양도 조약을 체결해 파나마에 넘겼다. 미국은 1999년 운하 양도식 행사에 정부 고위 관료를 보내지 않았을 만큼 이를 애석해했다.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이 파나마 운하 통행료를 인하하지 않을 경우 운하 반환을 요구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핑계이고 속내는 남미 국가들에 영향력을 확대해 온 중국을 견제하려는 포석이라고 한다. 1956년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이 영국 영향력 아래 있던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하자 영국은 프랑스·이스라엘과 손잡고 2차 중동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반대로 철수하며 수에즈 운하에 대한 영향력을 영구 상실했다. 역사가들은 유럽 패권 시대의 종언과 미소(美蘇)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사건이라고 했다. 이제는 파나마 운하가 미·중 패권 다툼의 최전선으로 떠오르고 있다.

김태훈 논설위원

 

12.30(월) 초록색 눈동자의 '허시'

▲일러스트=이철원

 

올리비아 허시는 열일곱 나이에 이미 세계적 유명 배우였다. 스물한 살에 첫 결혼을 했는데, 한 TV 방송에서 진행자가 물었다. “당신 같은 완벽한 여성을 얻은 남자의 비결이 뭡니까?” 허시는 갑자기 손바닥으로 진행자의 눈을 가린 뒤 자신의 눈동자가 무슨 색인지 물었다. 진행자가 대답을 못 했다. 허시가 말했다. “제 눈은 초록색이에요. 모든 남자가 제 가슴만을 볼 때 그 사람이 유일하게 ‘초록색’ 대답을 했답니다.”

 

▶확인도 안 된 일화였지만 젊은이들이 열광했다. 돈, 명성, 육체적 매력 따위보다 상대를 향한 깊은 배려와 관심으로 짝을 찾아야 한다는 울림이 컸다. 사실 이 대답엔 연유가 있었다.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이 대성공을 거뒀던 1968년은 여배우 성희롱이 예사롭던 때였다. 살색 옷을 입힌다 해놓고 현장에서는 완전 누드를 강요했고, 툭하면 허시를 ‘왕가슴녀’라고 불렀다. 다이어트 약도 강제로 먹이려 했다. 현실의 허시는 진실한 사랑을 목말라 했던 것 같다.

 

▶어릴 때 벼락 출세는 때로 불운이 되어 앞길을 막는다. 허시는 트라우마가 겹치고 ‘줄리엣’ 이미지가 강렬했던 나머지 차기작을 정하지 못하고 방황했다. 존 웨인, 리처드 버턴 같은 당대의 전설들과 함께하는 영화 제안까지 걷어찼다. 높은 인기에 감사하기보다 반항했다. 짧은 치마에 술에 취한 채 춤을 추며 어른을 조롱했다. 영국 부모들은 ‘비행 청소년의 우상’처럼 흉내 낼까 자식을 단속했다.

 

▶허시는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명작들을 여럿 남겼다. ‘블랙 크리스마스’ ‘나사렛 예수’ ‘마더 테레사’ 같은 작품은 ‘줄리엣’ 못잖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허시는 파란만장한 일생을 운명처럼 ‘줄리엣’으로 살았다. 세월의 흔적은 있었지만 아름다운 자태는 여전했다. 허시의 오똑한 코와 짙은 머리색은 동서양의 아름다움을 겸비했다고 했다. 이마, 눈·코, 입·턱으로 이어지는 얼굴 구성이 절묘하게 1대1의 균형미를 갖췄다고도 했다.

 

▶엊그제 유방암 후유증으로 세상 뜬 허시는 한국에도 가슴 뛰는 올드 팬이 많다. 어떤 작가는 ‘70년대 남자 고교생 자취방에 가장 환영받은 사진은 허시였다’고 했다. 얼굴 사진을 코팅해서 ‘책받침 여신’으로 떠받들었고, 입대 후엔 철모 파이버에 사진을 넣어 다녔다. 팬들은 ‘한 시대가 저문다’ ‘익숙한 얼굴이 하나씩 사라지니 서운하다’고 했다. 연말에 들려오는 옛 여배우의 사망 소식은 독일 작가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목록 같다.

김광일 기자

 

12.31(화) 버드 스트라이크

▲일러스트=이철원
 

한전 직원들은 봄마다 전신주 위 까치집을 제거하느라 곤욕을 치른다. 까치는 나뭇가지, 철사, 쇠붙이 등으로 둥지를 짓는데 비가 오면 이들 물질이 전선과 접촉하면서 정전 사고가 발생한다. 정전 사고의 5%가 까치집 때문에 생긴다. 한 팀이 하루 100개 이상 까치집을 제거해도 까치가 같은 곳에 둥지를 또 짓기 때문에 매년 같은 작업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까치가 싫어하는 뱀 소리를 내보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아직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풍력 발전기도 새와 박쥐가 충돌하는 사고로 골치다.

 

▶까치집 정도는 피해가 경미하지만 새 떼가 항공기와 충돌하는 버드 스트라이크(bird strike)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시속 370km로 이륙 중인 항공기에 900g의 새 한 마리가 충돌하면 항공기가 받는 순간 충격은 4.8t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특히 새가 엔진 부분에 빨려 들어가면 엔진 팬 블레이드를 쳐서 깨뜨릴 수 있다. 깨진 블레이드 조각이 다른 부품과 충돌해 불꽃을 일으키면 폭발과 엔진 정지로 이어질 수 있다. 무안공항 참사가 그 경우였던 것 같다.

 

▶전 세계 항공 당국은 조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공항 주변 습지를 메우고 나무를 잘라내는 것은 기본이다. 조류 퇴치팀을 운영하며 공포탄을 발사하거나 경보기를 부착한 차량을 상시 가동하고 새들이 두려워하는 송골매나 독수리 로봇을 날리는 등 온갖 방법을 쓰고 있지만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고궁 건물 처마 밑엔 새들이 드나드는 것을 막는 망을 설치해 놓았다. 인터넷엔 항공기 엔진 입구에도 망을 치는 것이 어떠냐는 질문이 적지 않다. 항공기 제작 업체들이 이미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비행기가 뜨는 양력을 얻으려면 강력한 흡입력으로 공기를 빨아들여야 한다. 엔진 입구에 망이 있으면 이 흡입력이 줄어들 수 밖에 없다. 또 이 망 자체가 엔진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재앙이기 때문에 진작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903년 최초 비행한 라이트 형제도 비행 중 새와 충돌했다는 일기가 남아 있다. 새들과 하늘을 공유한 이후 조류 충돌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매년 1만여 건, 국내에서도 100~200건 나오고 있다. 인명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조류 충돌로 인한 항공기 손상, 비행 지연과 취소 등 경제적 손실도 매년 2조원이 넘는다고 한다. AI가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시대에도 새 떼와 공존하며 안전을 유지하는 일은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김민철 기자

 

#만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