午後餘談(문화일보) 2024-12/
12-02(월) ‘권력 도취’의 귀결

이미숙 논설위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11·5선거에서 7685만428표를 얻어 당선됐다. AP통신에 따르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7434만7674표로 낙선했는데, 득표 차는 1.6%에 불과하지만, 미국 50개 주가 대부분 승자 독식제도를 택하는 탓에 선거인단 수는 312명 대 226명으로 큰 격차가 났다. 2020년 대선 때 조 바이든은 8130만 표를 얻어 7420만 표에 그친 현직 트럼프를 꺾었다. 표를 계산해 보면, 트럼프는 4년 전에 비해 260만 표를 더 얻어 재선된 반면, 해리스는 바이든 표조차 지키지 못해 패배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책사로 불렸던 칼 로브는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쓴 칼럼 ‘바이든에게 투표했던 유권자들은 어디로 갔나(Where did Joe Biden’s voters go)’에서 “트럼프 승리를 전체 유권자의 지형이 바뀐 탓으로 보는 이들의 분석에 동의할 수 없다”면서 “민주당은 바이든의 과욕 때문에 졌다”고 했다. 바이든이 부적절한 타이밍에 사퇴를 했고, 시대 기류에 맞지 않는 후보를 선택한 잘못이 크다는 것이다. 바이든의 오판에 실망한 유권자들이 투표장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분석이다. 실제 해리스가 얻은 표는 2020년 바이든의 득표수보다 696만 표가 적다. 워싱턴에 사는 한 친구는 선거 후 “민주당의 과도한 진보 어젠다를 부담스러워 하는 이들이 어쩔 수 없이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다”고 했는데 설득력이 있다.
로브의 WSJ 칼럼은 트럼프가 자만심에 젖어 과도하게 어젠다를 밀어붙일 경우, 2026년 중간선거 및 2028년 대선 때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경고인데 트럼프 진영에선 벌써 권력 도취 징후가 드러나고 있다. 1기 때 각 분야의 노련한 전문가를 기용했음에도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막을 내렸는데, 2기 팀은 트럼프와 개인적 인연으로 엮인 모래알 조직과 같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카를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역사는 2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번은 희극으로’라고 했다. 트럼프 시대엔 그 순서가 희극에서 비극으로 갈 것 같다. 1기에 비해 더 함량 미달인 인사들이 권력에 취한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비극이 트럼프 개인에게 그치지 않고 미국과 세계의 재난으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12-03 李 ‘정치 보복’ 허언

오승훈 논설위원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1980년 9월 내란음모 사건 주동자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기 전 이렇게 최후 진술을 했다. “머지않아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이다. 그때 나를 위해서든, 누구를 위해서든 정치적인 보복이 이 땅에서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부탁하고 싶다. 내 마지막 유언이다.”
옥중에서도 “어떠한 증오나 보복심을 갖지 않음을 조석으로 다짐했다”고 한다. DJ는 1997년 12월 대선에서 당선된 뒤 김영삼 대통령의 전두환·노태우의 사면·복권에 동의해줬다. 납치사건 주범 이후락에게 보복은 없다고 안심시켰다. 박정희기념관 건립 요구를 수용해 이행했다. 박정희가 세운 영남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고, 전직 대통령 내외를 초청해 만찬도 했다. 정치적 필요성에 따른 것이었고 역작용도 있었으나, 국민 통합정치의 대표적 실천 사례로 거론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달 28일 이석연 전 법제처장과 오찬을 마친 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왜 보복이 없는 포용과 화해의 정치를 얘기하셨는지 이제는 절감하게 됐다. 내가 정치보복의 악순환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께서도 이제 정치보복을 그만했으면 좋겠다”며 “기회가 되면 제 단계에서 끊겠다”고 했다. 열흘 새 두 재판에서 유·무죄 선고로 천당과 지옥을 오갔으니, 정치 탄압 프레임을 내걸었던 그로선 DJ의 서사에 묻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곧이듣는 분위기가 아니다. 과거 발언들이 다시 회자한다. 이 대표는 성남시장 시절 “법질서를 어기며 사익을 취한 자들에 대한 단죄가 정치보복이라면, 그런 보복은 초고강도로 계속돼야 한다”고 했다. 대선 때는 “어떤 대통령 후보가 정치보복을 공언하느냐. 하고 싶어도 꼭 숨겨 놨다가 나중에 몰래 하는 거지…”라고 했다. 실제로 그렇게 했다.
국회 체포동의안에 찬성했거나 대거리를 했던 인사들에 대한 보복은 지난 총선 때 ‘비명횡사’ 공천으로 나타났다. 수사 검사들을 차례로 탄핵 선상에 올리고, 특수활동비를 삭감한 것도 보복의 범주다. 온갖 수단을 총동원해놓고, 집권하면 보복을 않겠단다. 혹여, 그리된다고 해도, “존경하는 박근혜라 하니 진짜 존경하는 줄 알더라”고 했듯이 “정말 보복하지 않을 줄 알더라”고 할지 모른다.⊙
11-04 벙커 회의와 계엄령

이현종 논설위원
지난 197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 전시대피실로 쓰기 위해 지하벙커(국가위기관리센터)를 만들었다. 각급 부대는 물론 중앙 및 지방행정기관, 전국에 설치된 CCTV와도 연결돼 안보와 재난 상황을 실시간으로 점검할 수 있다. 긴급 상황이 생기면 대통령이 이곳으로 와서 상황을 보고받고 지휘를 내린다. 안보 상황이 더 급하면 고출력전자기파(EMP)도 막는 관악산 벙커로 전시 행정부를 옮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8년 취임 이후 이듬해 지하벙커에 비상경제상황실을 차렸다.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2009년 1월 8일 이곳에서 1차 비상경제대책회의를 개최했다. ‘튼튼한 경제’ ‘신속한 대처’ ‘철저한 확인’이라는 3가지 구호를 벽에 써 붙이고 경제부처 장관들은 물론 기업인들도 회의에 참석해 경제 상황에 대한 정보를 공유했다. 이 전 대통령은 2009년 한 해에만 40회, 전체 임기 중엔 145회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열었다. ‘지하벙커 회의’는 이명박 정부의 금융위기 비상대응을 상징하는 이름이 됐다.
야당으로부터 전시 행정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금융위기가 전쟁과 같은 위기 상황이라는 이미지를 정부와 기업, 국민에게 알리고 긴장감을 불어넣는 데 성공했다. 2009년 당시 마이너스(-)로 예상됐던 한국 경제성장률은 0.8%로 개선됐고, 다음 해인 2010년에는 6.8%까지 상승했다. 이 전 대통령은 최근 한 연설에서 “월급 나오는 공직자들은 위기를 느낄 수 없기에 공직자들이 위기감을 느낄 수 있도록 지하에서 회의를 했다”고 밝혔다.
IMF 위기, 금융위기, 코로나 사태에 이어 최근 경제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등장으로 최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내년 경제성장률도 1%대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김대중·이명박·문재인 전 대통령은 비상경제회의를 통해 위기를 극복했는데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3월 이후 한 번도 회의를 열지 않고 있다. ‘경제 벙커회의’를 해도 시원찮을 판에 윤 대통령은 3일 밤 계엄령 소동으로 경제를 더 나락으로 빠져들게 했다. 주가는 폭락하고 대한민국의 신뢰도는 땅에 떨어졌다. 경제 회생을 논의해야 할 벙커에서 진짜 계엄령 논의를 한 것은 아닌지 참담할 따름이다.⊙
12-05 ‘6시간 계엄’ 피해자와 수혜자

김세동 논설위원
3일 심야에 선포됐다가 6시간 만에 해제된 비상계엄은 충격적이면서도 어이없는 코미디다. 비상계엄 선포 소식을 접했을 땐 가짜뉴스라고 생각했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한 기사와 동영상은 딥페이크인 줄 알았다. 2024년 12월에 지지율 10%대 대통령이 절대 의석의 야당 대표와 국회를 상대로 계엄령을 선포한다는 건 만화에서도 불가능한 설정이라고 봤다.
윤석열 대통령은 야당과 국회를 겨냥해 ‘패악질’ ‘범죄자 집단의 소굴’ ‘내란 획책’ ‘자유민주주의 체제 전복 노린 반국가 세력’ 등 비장한 용어로 비난하며 계엄 선포의 근거를 댔으나 위헌·위법이라는 지적이 야당도 아닌 집권당 대표 입에서 바로 나왔다. 계엄은 헌법 제77조에 따라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 대통령이 선포할 수 있다. 전쟁 중이나 무장폭동·반란 등의 상태에서 행정·사법권만으론 질서유지가 어려울 때 발동할 수 있다는 것인데, 야당의 습관성 장관·검사 탄핵이나 입법·예산 폭주가 문제이긴 해도 그럴 만한 일이라고 보기 어렵다.
대통령의 오후 10시 23분 담화문 발표 후 밤 11시에 발효된 계엄령은 새벽 1시에 재석 여야 국회의원 190명 만장일치 의결로 해제됐다. 오전 4시 30분에 국무회의에서 해제를 의결했지만, 사실상 국회 의결로 2시간 만에 무위로 끝난 것이다. 공교롭게 1884년 12월 4일 별 준비도 없이 일본만 믿고 벌인 갑신정변도 사흘은 갔다. 헌법 제77조는 또 ‘국회가 재적 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요구한 때에는 대통령은 계엄을 해제하여야 한다’고 강행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총장 출신으로, 이 조항을 모를 리 없는 윤 대통령이 정치적 자살과 다름없는 불장난 같은 일을 왜 벌였는지 의문이 든다. 대통령 자신의 위신은 물론 나라 망신도 톡톡히 시켰다.
장난 같은 계엄령 소동으로 나락으로 떨어진 건 윤 대통령 부부고, 최대 이익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볼 것 같다. 탄핵이나 하야로 조기 대선이 치러지면 그가 받고 있는 ‘8개 사건 12개 혐의 5개 재판’이 물 건너갈 수 있다. 그런 일은 있으면 안 된다. 계엄령 사태 후속 처리와는 별개로 재판과 수사 과정은 법과 원칙대로 중단없이 진행돼야 한다.⊙
12-06(금) 대통령과 흥분

이철호 논설고문
윤석열 대통령이 흥분 상태에서 비상계엄을 내렸다는 증언이 꼬리를 물고 있다. 국무회의에 참석한 한 국무위원은 “대통령은 흥분 상태였고, 심의를 마칠 때까지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고 했다. 대부분이 반대했다. 한 국무위원은 “다시 생각해 달라”며 몸으로 가로막았다고 한다. 대통령의 흥분은 밤새 이어져 한덕수 총리가 “더 이상 위법은 안 된다”며 설득하고, 직접 국무회의를 주재해 계엄을 해제했다.
대통령은 4일 당정 수습 회의에서도 “난 잘못한 게 없다. 야당에 경고만 하려 했다”는 완고한 입장이었다. 평소 생각이 돌출적 비상계엄으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계엄 선언문에는 패악질·범죄 소굴·원흉·척결 같은 극단적 표현이 난무한다. 1980년대 공안 검사 같은 시대착오적 표현들이다. 야당 등 상대방을 경쟁자(rival)가 아니라 처단해야 할 적(enemy)으로 보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평소에도 “확 계엄해 버릴까” “나 이대로는 안 죽는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다고 한다.
선진국들은 결정적 시기에 최고 지도자의 자세를 중요하게 여긴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2001년 플로리다의 한 초등학교 책읽기 수업에 참여하던 도중 9·11테러를 처음 보고받았다. 그는 7분 동안 학생들에게 동화책을 마저 읽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정하게 국가 중대사를 판단하고 즉각 진두지휘하지 않은 ‘한가한 정신 상태’가 도마에 올랐다. 국민의힘 친한(친한동훈)계도 국정 운영 능력을 의심하고 있다. 공개적으로 “윤 대통령이 정상적 판단을 못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를 낸다. 미 국무부 커트 캠벨 부장관도 “심각한 오판”이라고 비난했다. 국제 ‘왕따’다.
윤 대통령이 정치적 자산을 탕진하면서 고립되고 있다. 앞으로 더 첩첩산중이다. 국방부는 “국회와 정당 활동을 금지한 포고령은 우리가 작성하지 않았다”며 떠넘기고, 육군참모총장은 “국회 병력 투입은 김용현 장관이 직접 했다”며 선을 그었다. ‘탄핵 찬성 73%, 내란죄 해당 69%’ 같은 여론조사도 쏟아진다. 대통령 부부 육성이 담겨 있다는 명태균의 황금폰이 공개될 경우 어떤 치명상을 입을지 모른다. 이미 레임덕을 넘어 데드덕 신세다. 얼마나 버틸지 모르지만, 더 이상 나라와 국민에 관폐(官弊)는 끼치지 말았으면 한다.⊙
12-09(월) 집단 트라우마 後 성장

최현미 논설위원
한국 근현대사는 집단 트라우마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식민지, 분단, 6·25전쟁, 군부독재,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세월호, 핼러윈 참사까지 한국인은 충격적 사건들을 집단적으로 거치며 큰 상처를 입어왔다. 상처와 흔적은 대를 이어 전해져 한국인과 개개인 정체성의 일부가 됐다. 어쩌면 우리 현대사는 이들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다. 이제 꽤 성과를 거뒀는데 12·3 비상계엄이 이 위에 핵폭탄급 트라우마를 던졌다.
특히, 선진국에서 태어나 영화에서나 볼 일을 직접 겪은 MZ세대에 선명한 상처를 남겼다. 국민을 지켜야 할 ‘상징적 국가’가 국민에게 총을 겨눴다는 사실. 발터 베냐민은 트라우마와 관련해 ‘과거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했던 순간, 찰나의 기억을 잡아채 가지고 온다’고 했다. 완전무장한 군이 총을 들이대고, 국회 유리창을 깨는 순간, 그 장면의 기억은 마음 깊이 각인돼 자신도 모르게 여러 상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할 것이다.
상처를 뜻하는 그리스어 트라우마트(traumat)에서 나온 트라우마는 실제적이거나 위협적인 사건을 경험 혹은 목격한 후 겪는 심리적 외상을 말한다. 삶이 산산조각 난 느낌, 세상은 위험하고 예측할 수 없다는 감각, 말 그대로 터널 끝에 빛이 없는 것 같은 마음이다. 원래 의학에서 신체적 상처를 뜻했으나 19세기 이후 정신적 상처로도 쓰였다. 보다 대중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건 2003년 이라크전 참전 군인들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겪는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면서부터였다.
미국 임상심리학자 에디스 시로는 책 ‘트라우마, 극복의 심리학’(히포크라테스)에서 트라우마에 영향받은 사람들이 보이는 세 가지 반응 방식을 이렇게 정리했다. 트라우마에 갇힌 사람, 회복해 예전 삶으로 돌아간 사람, 앞으로 도약한 사람. 도약한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오히려 삶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이르고 공동체와 더 깊게 연결되면서 살아남는 것 이상의 외상후성장(Posttraumatic Growth)을 이룬다고 했다. 실제로 집단 트라우마는 공감과 상호 지지 위에 연대와 결속력을 강화해 역경을 이겨내는 동력이 된다고 한다. 집단 트라우마의 유토피아적 효과다. 우리의 선택은, 말할 필요도 없이 유토피아적 도약이어야 한다.⊙
12-10 K-방산 질주 덮친 정치 먹구름

문희수 논설위원
올해 K-방산은 눈부신 성과를 올렸다. K9 자주포·K2 전차·다연장 로켓 천무·한국형 요격 미사일 체계인 천궁Ⅱ·레드백 장갑차·경공격기 FA-50 등이 폴란드를 비롯한 유럽·중동·중남미·호주 등 전 세계를 누비며 활약했다. 올 수출액은 200억 달러를 처음 돌파할 게 확실시된다. 2020년 30억 달러였던 수출이 2022년 173억 달러로 증가했고, 지난해엔 140억 달러로 주춤했지만, 올해는 유례없는 도약으로 새 역사를 썼다. 세계 순위가 수출액 기준으로 2022년 9위에서 올해는 5위권 수준으로 도약할 전망이다. 매출·영업이익 급증으로 간판 기업의 주가는 이미 52주 신고가를 경신하며 2∼3배 수준으로 급등했다. 세계가 놀랄 질주다.
글로벌 전문기관의 평가도 확연히 달라졌다. 매년 세계 순위를 발표하는 스웨덴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는 최근 2023년 매출 기준 100대 방산업체에 한국 업체를 4곳 포함시켰다. 한화그룹은 42위에서 24위로 뛰어올랐고, 한국항공우주산업도 75위에서 56위로 급상승했다. LIG넥스원(76위)에 이어 현대로템이 87위로 새로 100대 기업에 올랐다. 일본은 미쓰비시중공업(39위) 등 5곳으로 한국보다 많지만, 매출 합산에서는 한국이 4개사 110억 달러로 일본(100억 달러)을 앞섰다.
전망도 밝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K-조선 호평은 상징적이다.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의 군함·잠수함이 빛을 발할 것이다. 때맞춰 우크라이나 및 이스라엘 전쟁, 트럼프 당선인의 방위비 증액 요구 등으로 지구촌의 군비 경쟁이 가속화한다. EU·중동은 물론 일본·대만 등의 내년 국방 예산도 역대 최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더없이 좋은 기회다.
그러나 계엄 사태로 먹구름이 몰려오는 형국이다. 키르기스스탄·스웨덴 정상의 방산업체 방문이 취소되고, 추진 중인 초대형 계약이 불투명해지고 있다. K-방산은 미국·러시아·프랑스 등 톱 3에는 못 미치지만, 4∼7위인 중국·독일·이탈리아·영국 등 전통 강국들과 치열하게 경쟁 중이다. 2027년 세계 4강 목표 달성이 먼 얘기가 아니다. 진격을 여기서 멈춰선 안 된다. 국내 방산 생태계는 아직 선진국의 60% 수준으로 취약하다. 정치적 격변에 휘둘리지 말고 과제를 하나씩 해결하며 더 나가야 한다.⊙
12-11 다사다난 ‘푸치니 100년’

이미숙 논설위원
자코모 푸치니(1858∼1924)는 주세페 베르디(1813∼1901)와 더불어 가장 사랑받는 이탈리아 오페라계의 거장이다. ‘아이다’ 등 선이 굵은 애국적 소재의 작품을 작곡한 베르디에 비해 푸치니는 이국적인 소재에 센티멘털한 선율의 작품이 많아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다. 특히, 푸치니 서거 100주년을 맞은 올해 세계 각국 오페라극장에선 그의 대표작인 ‘라보엠’ ‘토스카’ ‘투란도트’ 등의 공연이 잇따랐다.
추운 겨울에 봐야 제격인 ‘라보엠’은 지난 11월 서울시오페라단이 무대에 올린 데 이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서도 공연 중이다. 서울 공연에서는 소프라노 서선영·황수미가 미미 역으로 열연했고, 지난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한 바리톤 김태한이 마르첼로 역으로 국내 오페라 무대에 데뷔했다. 뉴욕에서는 BBC 카디프 성악 콩쿠르 우승자인 바리톤 김기훈이 쇼나르 역으로 출연 중이다. 영국 런던 로열 오페라하우스의 겨울 시즌 대표작 ‘토스카’는 김은선 샌프란시스코 음악감독이 주도하고 있는데 테너 백석종이 주인공 카바라도시 역을 맡았다. 그는 올 초 ‘투란도트’의 칼라프 왕자 역으로 뉴욕 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해 ‘푸치니 100주년’의 최대 스타가 됐다.
일본 게이샤와 미 해군 장교의 사랑을 그린 ‘나비부인’과 미국 서부 개척시대를 다룬 ‘서부의 아가씨’는 국내 공연이 뜸한 편이었지만, 푸치니 서거 100주년을 맞아 지난 11월 글로리아오페라단, 지난 5∼8일 국립오페라단이 각각 무대에 올렸다. 소프라노 임세경은 지난 9월 서울시오페라단의 ‘토스카’에 이어 ‘나비부인’과 ‘서부의 아가씨’에서 뛰어난 연기와 가창력으로 갈채를 받았다. 반면, ‘토스카’ 서울 공연 때 루마니아 출신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규는 오만한 무대 매너로 빛을 잃었다. 상대역 테너 김재형의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 앙코르에 반발해 커튼콜까지 거부해 팬들을 실망시켰다.
푸치니의 해는 ‘투란도트’로 마무리된다. 솔오페라단이 이탈리아 베로나 팀 초청 공연을 한 데 이어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 등이 지휘하는 서울 코엑스 공연도 22∼31일 열린다. 아리아 ‘네순 도르마’에서 승리를 다짐하며 빈체로를 외치는 칼라프 왕자의 염원처럼 올해가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으면 좋겠다.⊙
12-12 ‘트럼프 바라기’ 된 이재명

오승훈 논설위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주요 외신의 스포트라이트를 한껏 받고 있다. 10일 뉴욕타임스(NYT),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인터뷰 기사가 실렸고, 여러 매체가 줄을 섰다고 한다. ‘이 남자가 그(윤석열 대통령)를 밀어내려 한다’는 NYT의 기사 제목만 봐도 직감된다. 비상계엄 사태 속에 “한국 민주주의와 자신의 정치 경력에 중요한 전환점”을 만든 주역으로 묘사됐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지금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면 당선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NYT), “매우 근접해 있다”(WSJ)는 평가도 받았다.
더 눈길이 가는 대목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에 대한 ‘상찬’이다. “어떤 사람들은 저를 ‘한국의 트럼프’라고 부른다”(WSJ)고 했다. 대놓고 직접 트럼프와 유사성을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지난달 위증교사 사건 판결을 앞두고 김용민 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가 “트럼프 당선인은 34개 혐의에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피선거권이 박탈당하지 않았고, 유권자 선택을 받았다. 사법 관료가 아닌 국민이 직접 판단해야 한다”고 한 바 있다. WSJ는 “사법적 문제, 열정적 지지층, SNS 영향력 등”을 이유로 해석했으나, 이 대표는 사법리스크 해소에 방점을 찍고 싶었을지 모른다. NYT는 “자신을 윤 대통령이 가한 정치적 복수의 ‘희생자’라고 했다”고 전했다.
이 대표는 트럼프의 1기 때 대북 정책에 대해서도 “매우 감사할 수밖에 없다”면서 “트럼프는 다른 사람들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을 시도했다”고 높게 평가했다. 탄핵 정국에 대해선 “무혈혁명(bloodless revolution)”이라고 했고, 국민의힘을 겨냥해 “그들은 서로를 믿지 않고 두려워한다”며 “한 손으로 서로의 목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안전핀이 뽑힌 수류탄을 휘두르고 있다”고 힐난했다.
이 대표는 10일 열린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재판에 오전만 참석하고, 오후엔 국회 본회의에 참석을 이유로 불참했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처음으로 재판에 출석한 터라 현안과 관련한 질문이 쏟아졌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이 대표는 지난 6일 재판에도 불출석했다. 검찰 측은 “재판이 이런 식으로 공전하는 건 상당히 유감”이라고 했다. ‘이재명 저격수’로 불렸던 윤희숙 전 의원은 SNS에 “물 만난 듯 대통령 놀이를 시작했다”고 썼다.⊙
12-13(금) 혼군과 간신

이현종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은 매우 즉흥적이고 사람들의 말에 잘 휘둘린다는 게 그를 오래 본 사람들의 하나같은 증언이다. 또, 대개의 사람이 똑같은 얘기를 하면 정반대로 하는 청개구리 기질도 갖고 있다고 한다. 한번 화를 내면 말릴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하는 스타일이다. 비상계엄령을 발동하기 직전 국무회의에 참석했던 오랜 측근인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은 당시 윤 대통령 얼굴이 매우 상기돼 있었고, 누구도 말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지인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도 정의감과 의리는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를 향한 분노감에 너무나 예민해져 있었다고 한다. 명군(明君)은 사리에 밝고 의심이 없으며 공도(公道)를 따른다고 한다. 혼군(昏君)은 명군의 정반대다. 국민의 여론이나 상식적인 시각보다는 극우 유튜브만 즐겨보면서 그들의 극단적인 생각에 빠져들었다. 부정선거 주장이 대표적이다. 윤 대통령은 사석에서, 대선에서 10%P 차이로 이재명 후보를 이길 수 있었는데 0.73%P밖에 차이 나지 않은 것은 부정선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 4·10 총선도 150석을 할 것이라는 한 유튜버 주장에 빠져 90석 이하로 떨어진 여론조사 결과를 믿지도 않았다. 사리에 밝지 않으니 고집이 세졌고, 혼자만의 세계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비상계엄 선포가 극단적인 형태다. 모든 참모와 국무위원이 반대하는데도 자신만의 확신에 빠져 밀어붙였다.
이런 혼군 옆에 간신(奸臣)이 있으면 파국은 극대화한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은 윤 대통령의 고교 1년 선배로 후보 시절 매일 같이 보고서를 들고 자택을 찾았다고 한다. 윤 대통령이 청와대 이전을 고민하고 있을 때 대부분의 참모가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그런데 김 전 장관은 3개월이면 군 작전하듯이 용산으로 대통령실을 옮길 수 있다고 윤 대통령을 설득했다. 결국, 너무 무리하게 옮기는 바람에 온갖 후유증만 낳았다. 윤 대통령이 정국 타개를 위해 비상계엄을 검토하고 있을 때 그는 반대는커녕 앞장서 계획을 짰다. 이미 민주당 측에 정보가 새 나갔는데도 무리하게 밀어붙였다. 혼군과 간신이 만나 비상계엄 선포와 2시간 만에 해제되는 역대급 사고를 쳤다. 몸을 날린 참모는 하나도 없었다.⊙
12-16(월) 움베르토 에코의 음모론 경고

최현미 논설위원
심심한 사과, 금일처럼 MZ들이 평소 잘 안 쓰는 한자 단어를 모른다고 이들 세대의 문해력을 손가락질할 일이 아니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최근 발표한 ‘국제 성인역량 조사(PIAAC)’에 따르면 한국 성인(16∼65세)의 문해력은 249점으로 OECD 평균(260점)에 못 미쳤다. 나이가 많을수록 언어능력은 떨어졌다. 한국의 급격한 고령화에 코로나19 직후에 이뤄진 조사로, ‘팬데믹 고립’도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됐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스마트폰 확대로 책과 문자를 접하는 빈도가 줄어든 탓”이라고 한다. 실제로 지난해 ‘국민 독서실태조사’에서 한국 성인 10명 중 6명은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언어는 사고의 도구이기에 언어의 위기는 곧 사유의 위기이다.
11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움베르토 에코, 세계의 도서관’에서 20세기 최고 르네상스인 에코는 끊임없이 책과 진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 감독 다비데 페라리오가 2015년 베네치아비엔날레 설치 작업용으로 찍어둔 에코 영상을 기본으로 생전 인터뷰·강연에 에코 아들·딸·손자의 회고, 그리고 그의 거대한 개인 서재 풍경을 더해 말 그대로 ‘지성의 도서관’ 그 자체인 에코라는 세계를 담아냈다. 열렬한 책 신봉자인 그는 ‘디지털 시대’를 보르헤스의 단편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 비유하며 책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어느 날 말에서 떨어진 뒤 천재적 기억력을 얻은 푸네스. 라틴어 등 여러 언어를 배우고 24시간 동안 벌어진 모든 일을 기억한다. 축복일까? 푸네스는 과도한 정보로 정신이 마비된다. 에코는 푸네스처럼 디지털 시대 정보 더미는 소음일 뿐이라며 소음에선 지식과 진리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에코는 2012년 루브르박물관 2층에서 소설책 ‘장미의 이름’과 전자책 ‘킨들’을 던진 뒤 산산조각 난 킨들을 보여주며 책의 영원한 가치와 디지털의 불안정성을 이야기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챗GPT의 등장으로 빅데이터의 정체성 자체가 바뀌었다. 그럼에도 지식과 진리는 다면적이며 적극적 해석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통찰, 거짓과 음모로 가득한 쓰레기 정보에 대한 그의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대통령이 유튜브 가짜뉴스와 음모론에 휘둘리는 이곳에선 더욱 그렇다.⊙
12-17 검찰 정치의 종언

이철호 논설고문
검찰 출신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소추 되면서 검사들은 “우리는 폐족(廢族)”이라 자조한다. 이미 이창수 서울중앙지검장 등이 탄핵소추 됐고, 내년 특수활동비 예산 587억 원도 전액 삭감됐다. 언제 ‘검찰청 폐지·공소청 전환’ 돌출 입법으로 무장해제당할지 모른다.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은 초읽기에 몰렸다.
윤 대통령의 오랜 지인들은 “그의 독불장군식 성정이 검찰 내부에선 강골 검사 유전자(DNA)로 추앙받았지만, 현실 정치에선 폭군으로 비쳤다”며 안타까워한다. 세련된 특수부 수사와 달리 윤 대통령은 거친 수사로 자주 입길에 올랐다. 그가 수사·기소한 사건 중 패소한 것만 15건에 이른다. 서갑원 전 의원 뇌물 사건은 범행 시간에 다른 장소에 있었다는, 기초적인 사실관계부터 흔들려 무죄가 났다. 김종창 전 금융감독원장의 공직자윤리법 위반 사건도 2011년 당시 ‘처벌 규정’이 없었는데도 무리한 기소로 망신을 샀다.
이재용 회장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사건은 19개 혐의 모두 무죄가 됐다. 서버·노트북·휴대전화 문자 메시지 같은 핵심 증거들부터 수집 절차를 어겨 부실수사라는 비난을 자초했다. 애초 수사심의위의 불기소 권고를 뒤집을 때부터 무리한 기소였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 무죄로 인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유였던 뇌물죄가 토대부터 무너져 내렸다. 요란했던 사법농단 사건도 마찬가지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핵심 관련자 대부분이 무죄가 났다.
윤 대통령의 탄핵소추와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의 퇴진으로 ‘검찰 정치’가 밑천을 드러냈다. 검찰 출신끼리의 폐쇄적 성향은 “100가지 중 1가지만 맞아도 동지”라는 정치판과 어울리지 않았다. 상대방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배타적 습성은 대화와 타협보다 힘으로 제압하려는 폭압적 행태로 나타났다. 상명하복식 ‘검사동일체’ 원칙은 정치권의 다양성을 말살했다. 최근 김후곤 전 서울고검장이 “검사의 정치 참여를 법으로 10년간 금지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과거에는 3∼5년이 이상적이라 생각했지만, 정치로부터 오염된 조직이 바뀌는 데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검찰 정치가 후유증만 남긴 채 끝물로 접어들었다. 정상적인 정치의 복원을 위해서도 검찰과 분명하게 선을 긋는 것이 우선이다.⊙
12-18 법관의 ‘양심’ 판별법

김세동 논설위원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규정한다. 핵심 키워드는 ‘헌법과 법률’과 ‘양심’인데, 둘은 대등 관계가 아니라 종속 관계다. 헌법은 법관의 개인적 양심을 앞세우지 말고 헌법과 법률에 의거한 양심, 즉 직업적 양심을 따르라고 지시하고 있다. 헌법이 말하는 법관의 양심은 정치적 입장, 소신, 철학 등을 말하는 게 아니라 헌법과 법률에 따라 직업윤리에 충실한 재판을 하라는 당부다.
법관이 법 원칙이나 법조문, 확립된 판례에 따르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며 개인의 당파적 입장에 따라 재판한다면 이미 판사라고 하기 어렵다. 현실의 법정에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지만, 내 아버지가 피고인이라도 증거가 가리킨다면 무죄를 선고하지 않는 직업인으로서의 양심을 말한다. 법관이 헌법과 법률보다 자신의 양심을 앞세우면 민주주의의 토대인 법치주의가 무너진다. 김명수 대법원장 때 ‘재판이 곧 정치’라고 믿는 판사들이 득세했고, 일반인들의 법 감정과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정파적 판결이 많아졌다. 현직 판사가 문재인 대통령 비서로 가는 헌정사 유례없는 일도 잇달아 벌어졌다. 모두 법관의 직업적 양심에 반하는 일로, ‘법복을 입은 정치인’이나 ‘법원에 위장취업 한 운동권’이란 비판이 나왔다.
법관이 양심을 지킨다면, 별다른 새로운 증거가 나온 것도 아닌데 1·2심에서 유무죄가 극명하게 갈리는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분명 두 재판부 중 한 곳은 양심을 저버리고 주관적·정치적 입장 또는 확증 편향으로 판결한 것이다. 민감한 정치적 사건을 맡은 판사의 고향, 출신 대학, 정치 성향을 뒤지는 지경이 됐다. 모두 법관의 양심을 믿지 못해서 벌어지는 일이고, 원죄는 법원과 판사에게 있다. 고질병인 전관예우도 양심에 반하는 일이다.
지난달 25일 위증교사 사건 재판부가 위증한 김진성 씨에겐 유죄를 내리고 교사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겐 무죄를 선고하자 판결의 적절성에 대한 비판이 뜨거웠다. 이 대표와 민주당 지도부도 유죄 선고를 우려했는데, 독특한 논리로 무죄를 내렸다. 법관의 독립적 심판권은 판사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사유재산이 아니다. 산타클로스인 양 마음 내키는 대로 인심 쓰라고 준 권리가 아니다.⊙
12-19 ‘감액 後 추경’ 꼼수의 악순환

문희수 논설위원
헌정사에 부끄럽게 기록될 불행한 사태가 속출한다. 상상도 못 했던 12·3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소추는 단연 압권이지만, 야당이 주도한 감액 예산이라는 초유의 사태도 빼놓을 수 없다. 파장이 클 게 분명하다. 엎친 데 덮친 셈이어서 새해 국정 파행이 더 심각할 것으로 우려된다.
기이한 것은 윤석열 정부를 탓하며 예산 감액을 밀어붙였던 더불어민주당이 추가경정예산을 요구하는 점이다. 이재명 대표는 국회 탄핵안 가결 다음 날인 지난 15일부터 여야 대표가 만난 18일까지 거의 매일 신속한 추경 필요성을 강조했다. 앞서 우원식 국회의장은 예산이 확정됐던 지난 10일 바로 추경을 준비하라고 했다. 예산을 줄여놓고 해가 바뀌기도 전에 다시 늘리라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내년 국정이 걱정되기는 하는 모양이다.
저의는 짐작이 간다. 민주당으로선 예산을 삭감(4.1조 원)함으로써 집권에 대비한 여유 자금을 확보한 측면이 있다. 어차피 내년 추경도 국회가 승인한다. 현 정부는 계획만 짜고 돈은 새 정부가 쓸 가능성이 크다. 민주당은 추경을 통해 고교 및 5세 무상교육(1.6조 원) 꼬리표를 붙여가며 줄였던 정부 예비비를 당초 정부안(2.4조 원)대로 복원하고, 끝내 불발됐던 이재명표(標) 지역화폐 예산(최소 1조 원)도 추가할 수 있다. 심지어 전액 삭감했던 대통령실·감사원·경찰의 특경비·특활비와 마약 등 수사경비(총 500억 원 상당), 대왕고래 예산(497억 원)까지 되살려 엉뚱하게 생색을 낼 수도 있다.
사실 내년 초 추경은 요건을 충족하지 못할 것이란 지적이다. 예상보다 많은 초과 세수가 생기면 세입을 늘리는 경정으로 추경이 가능하지만, 1%대 저성장에선 기대하기 어렵다. 정부는 아직 내년 경제 운용 계획도 못 세웠다. 그래도 경제가 비상이니, 어떻게든 추경을 추진할 개연성이 크다. 그러나 이 경우 적자 국채 발행으로 나랏빚은 더 늘게 된다. 벌써 정치권에선 이 대표를 두고 여의도 대통령이란 말까지 나온다고 한다. 민주당이 여당 행세를 하는 양상이지만, 여전히 책임감이 없다. 이러니 수권·집권 정당으로서의 적격성·자질에 여전히 의문 부호가 달리는 것이다. 여당도 야당도 좀처럼 개선 기미가 안 보인다. 새해에도 국민은 정치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12-20(금) 알아사드와 김정은

이미숙 논설위원
‘시리아의 학살자’로 불려온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이 반군의 기습 공세에 밀려 지난 8일 정권을 포기하고 러시아로 떠남으로써 시리아에 봄이 왔다. 바샤르는 24년간 철권 통치를 했고, 그의 아버지 하페즈는 1970년 무혈 쿠데타 후 2000년 사망 때까지 종신 대통령으로서 총칼을 휘둘렀다. 세계에서 가장 잔혹한 독재국가로 분류됐던 시리아의 바샤르 정권이 갑작스레 무너진 것은 2024년의 최대 이변이다. 올해 세계 정세 전망에서 시리아의 체제 변화를 예측한 언론사나 싱크탱크는 없다.
시리아는 북한과만 수교해 우리에겐 금단의 땅이다. 넷플릭스의 ‘더 스파이’ 6부작(프랑스 제작, 2019)에선 부유한 상인으로 가장해 잠입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소속 엘리 코헨(1924∼1965)의 눈에 비친 1960년대 시리아 사회를 엿볼 수 있다. 그는 다마스쿠스 도착 후 ‘간첩 주의, 적이 듣고 있다’는 포스터를 발견한다. “시리아에선 공개된 장소에서 꺼내지 말아야 할 얘기를 하다가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충고도 듣는다. 조지 오웰이 ‘1984’에서 그린 전체주의 사회를 연상시킨다. 코헨은 군부 고위층과 교류하며 얻은 정보를 모사드로 보냈다. 대표적인 것이 시리아의 요새인 골란고원에 배치된 포대와 은폐 진지 등에 관한 사진과 지도다. 이 덕분에 이스라엘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때 골란고원을 10시간 만에 함락시킬 수 있었다. 코헨은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하페즈 알아사드와 유착 관계를 형성하며 정보를 얻었지만, 신분이 발각된 후 1965년 5월 다마스쿠스 광장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최근 공개된 시리아의 감옥은 혈흔으로 가득 찬 도살장 같다. ‘시리아판 킬링필드’인 집단학살 매장지도 발견되고 있다. 바샤르 시대 실종자 15만 명 중 대부분이 묻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시리아와 닮은 나라가 북한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후견인 노릇을 한다는 점도 같다. 그러나 시리아는 코헨 같은 스파이가 활동할 정도의 틈이 있던 나라지만, 북한은 그렇지 않다. 반세기 만에 끝난 알아사드 부자(父子) 독재와 달리 북한에서 3대 세습 독재가 80년 가까이 이어지는 배경이다. 바샤르는 푸틴이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지원을 줄이자 순식간에 몰락했다. 김정은도 언제 그런 운명을 맞게 될지 모른다.⊙
12-23(월) 관망하는 정치 팬카페

오승훈 논설위원
양극화한 한국 정치에서 여론 형성의 전위부대는 ‘강성 팬덤’이다. 지난 탄핵집회에선 촛불 대신 응원봉을 든 20·30대 여성 중심의 K-팝 팬덤이 더해졌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찬반, 조기 대선 전망 등으로 팬덤 정치가 더욱 극성일 것이란 게 일반적인 예상이다.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팬카페 ‘재명이네 마을’의 ‘이장직’에서 물러났다. 공지된 글에서 “이장이라고 해서 무슨 권한을 행사하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비상한 시국인 만큼 저의 업무에 더 주력하겠다는 각오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을 것 같다”면서 “여전히 마을 주민이다. 경청하고, 함께하겠다”고 했다. 당 안팎에선 대선 시간표가 빨라졌다고 판단해 이른바 ‘개딸’과 거리를 두고 중도층 확장에 나서는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재명이네 마을은 이 대표가 정치인으로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당권을 장악하는 데 외곽 전위대 역할을 해왔다. 반대 진영을 향해 ‘수박 색출’ 소동, 문자 폭탄 등을 서슴지 않았고, 이 때문에 ‘집단 쓰레기’란 비난도 들었다. 외연을 넓히려면 강성 팬덤과 결별해야 한다는 요구가 많았다. 카페 가입자 수는 2022년 4월에 20만 명을 돌파했다. 당시 “금방 30만 명이 될 것이고, 100만 명이 되면 재명이네 마을이 나라를 바꿀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즈음 22만여 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이후 2년 8개월이 지난 23일 현재 20만8000여 명으로 큰 변화가 없다. 내년 ‘벚꽃 대선’이건, ‘장미 대선’이건 간에 야권의 기대가 커지는 상황인데도 그러하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를 지지하는 팬카페 ‘위드후니’는 9만2000여 명 수준이다. 2020년 7월 결성됐는데, 더 늘지는 않는 정체 상태다.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결속력은 아이돌 팬클럽에 버금갈 정도’라고 자평하는데, 당분간 확장 계기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다만, 지난 16일 당 대표 사퇴 후에도 ‘탄핵 찬성 의원 징계 반대 서명’ 운동을 벌이고, 당원 유지를 독려하는 등 열기는 식지 않았다. 한 전 대표는 “나는 팬덤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한 바 있다. 팬카페는 유튜브와 SNS의 기반이 된다. “10만∼20만 명의 팬덤 당원만 있으면 당권 장악은 물론 대선 후보가 될 수 있게 됐다”(박상훈)는 시대, 과연 조금이라도 바뀔까.⊙
12-24(화) 주술 정치

이현종 논설위원
지난 2022년 5월 10일 오전 11시 30분쯤 국회의사당 앞에서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고 있을 때 하늘에 무지개가 나타났다. 당시 취임식에 참석했던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은 직접 찍은 무지개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자유!, 자유!, 자유!, 무지개!’라고 썼다. 울산과 대전, 제주 등에서는 햇무리도 관측됐다. 하늘도 윤 대통령의 취임을 축하한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정작 놀란 것은 윤 대통령 부부라고 한다. 대선 때 윤 대통령 부부를 잘 아는 스님 한 분이 당선을 예측하며 “쌍무지개가 보인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런 예측을 알고 있던 윤 대통령 부부는 진짜 취임식 날 무지개가 뜨자 크게 흥분했다는 뒷얘기가 나왔다.
그런데 비상계엄령이 내려지기 전에 이 스님이 “쌍무지개 중 하나가 없어졌다”는 불길한 예측을 했다는 말이 나돌았다. 4·10 총선 패배로 윤 대통령이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예상됐지만, 정작 12·3 비상계엄 사태에 이은 탄핵이 이어지자 다시 이 얘기가 나돈다.
최고 권력자나 기업의 오너들은 미래를 조금이라도 예측하고 싶은 마음에 주술에 빠져드는 경우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다. 제정 러시아의 멸망을 이끈 니콜라이 2세 시절의 요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비롯해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부인 낸시 레이건 여사,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등이 대표적이다. 힐러리 전 장관은 1995년 심령사를 백악관으로 초청해 세상을 떠난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 마하트마 간디와 영적인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낸시 레이건은 남편 임기 중 조앤 퀴글리라는 점성술사에게 전적으로 의지했다고 한다. 하루에 3시간에서 10시간을 이 점성술사와 논의했다는 것이다. 장제스 대만 총통, 샤를 드골 전 프랑스 대통령도 점성술사에게 오랜 기간 의존했다.
지리산 도사를 자처하는 명태균 씨, 건진 법사, 천공 등에 이어 비상계엄의 설계자로 알려진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도 모두 역술과 관련된 이들이다. 명 씨는 김건희 여사와 영적 대화를 했다고 한다. 청와대 이전도 명 씨가 강력히 천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예전에 국가정보원 등 정보기관에서는 역술인들을 관리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그런데 윤 대통령 주변 역술인 중 최근 사태를 예견한 이들은 있을까.⊙
12.26(목) 네란 버거

최현미 논설위원
“한국인들은 농담과 풍자를 통해 분노를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다.” 22일 뉴욕타임스는 윤석열 대통령 퇴진·탄핵 시위 현장에 나부낀 유머 넘치는 패러디 깃발을 조명하며 이렇게 분석했다. 타임스는 ‘만두노총 군만두노조’ ‘빡친 고양이 집사 연맹’ 등 재기 발랄한 깃발을 자세히 소개하며 “심각한 시위조차 매력적이고 낙관적이며 축제 분위기일 수 있음을 보여줬다”고 했다. K-팝 콘서트 같은 시위에 대한 찬사와 같은 맥락이다. 12·3 내란 사태 이후 깃발부터 밈(인터넷 유행 콘텐츠)까지 풍자와 패러디가 넘쳐난다.
그중 최고 화제는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이 주도한 12월 1·3일 롯데리아 모임 밈이다. 계란 네 개를 넣어 내란을 떠올리게 하는 ‘네란 버거’ ‘전국을 집어삼킨 맛’이라는 설명이 붙은 ‘내란 버거’ 포스터 등 각종 밈이 쏟아지고 있다. 노상원의 북풍공작 정황까지 드러나면서 밈은 계속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지난주엔 영국 텔레그래프지가 이들 밈을 다루기도 했다.
인터넷 역사와 함께 시작돼 생성형 인공지능(AI) 등장으로 폭발하고 있는 밈은 한국에서도 단순 재미를 넘어 일상 속 부조리를 폭로하는 수단이 돼왔다. 정치와 이념 양극화, 극심한 젠더 갈등 속에 혐오를 실어나르기도 했지만 지금 이곳에서 그 원래적 기능을 해내고 있다. 이미 세계적으로 디지털 Z세대에겐 밈이 뉴스를 대체하고 있기도 하다. 한편에서 ‘계엄을 너무 희화화한다’ ‘너무 가볍게 다룬다’는 지적도 있지만, 자고 나면 믿기 어려운 사실이 새로 드러나는 숨 막히는 현실에서 유머와 웃음으로 숨통을 틔게 해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웃음은 감정을 정화해주는 비극의 핵심이라 했고, 대표적 풍자 작가 마크 트웨인은 유머는 비애에서 나온다고 했다. 여기에 더해 인터넷 밈 전문가 김경수 평론가는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필로소픽)에서 밈의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을 시사한다. 바로 ‘연대의 가능성’이다. 언어이자 예술이자 놀이 도구인 밈의 관건은 얼마나 높은 퀄리티냐가 아니라 상대를 진정으로 웃길 수 있느냐이다. 당연히 타자를 웃기려고 할수록 상대와의 접점을 사유하게 된다. 이는 곧 타자와 세상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네란 버거를 보고 웃는 순간 우리의 연대 불씨가 타오른다.⊙
12-27(금) 무당 전성시대

이철호 논설고문
샤머니즘은 퉁구스어의 ‘아는 자’라는 ‘사만(saman)’에서 유래됐다. 영적 존재와 소통하며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거나 미래를 예측한다. 요즘 한국은 샤머니즘 공화국이다. 대한경신연합회에 등록된 무당이 14만 명, 역술인단체에 가입한 회원도 20만 명에 이르는 무속인 전성시대다. 불안한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가 그 토양이다.
샤머니즘이 가장 화려하게 부활하는 곳은 정치판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 손바닥에 쓴 임금 왕(王)자의 셀프 부적으로 유명하다. 대통령실 용산 이전과 비상계엄 등 국가 현안마다 건진법사, 천공, 지리산 도사(명태균), 아기보살, 비단아씨 등이 등장한다. 독실한 기독교 장로였던 김영삼 대통령 후보도 당사를 여의도로 옮겼으나 자신의 사진은 관훈동 사무실에 계속 걸어놓았다. “노태우 대통령도 당선된 관훈동은 닭볏 터의 명당”이라는 조언에 따른 것. 천주교 신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도 1997년 부모 묘소를 경기도 용인으로 이장한 뒤 한을 풀었다.
무당에 놀아난 대표적 인물은 명성황후다. 친정아버지 민치록의 무덤을 네 번이나 이장할 만큼 풍수에 집착했다. 2003년 후손들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옮겨 ‘오천육장(五遷六葬)’의 신기록을 남겼다. 임오군란에 쫓겨 경기도 장호원에 숨어 있을 때 한 무녀(巫女)가 몰래 찾아와 놀랍게도 “마마”라고 불렀다. 무녀는 “팔월 보름에 황후를 모셔갈 사자가 올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실제로 50여 일 만에 환궁했다. 이후 무녀는 정2품 벼슬에다 ‘진령군(眞靈君)’이란 봉호까지 받았다. 하지만 10년 뒤 갑오경장으로 전 재산 몰수와 거열형(車裂刑)을 선고받는 자신의 운명은 알지 못했다.
무속의 단골손님은 강력한 권력을 쥔 정치인과 기업가들이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극심한 압박을 덜기 위해 샤머니즘에 의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합리적·과학적 전문성보다 주술에 의존할 경우 대중의 신뢰를 잃고 결국 고립된다. 무당들은 권력자와 관계를 악용해 부패 스캔들을 일으키기 일쑤다. 해법은 정치의 본분을 지키는 것이다. 대중의 다양하고 복잡한 요구를 듣고, 고민하고,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사적(私的) 인맥을 차단하고 공적 참모 조직의 도움을 받는다면 샤머니즘이 끼어들 여지는 사라진다.⊙
12-30(월)월여전한 부정선거 망상

김세동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이 헌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한 비상계엄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는 게 어이가 없었는데, 12·3 계엄의 명분으로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한 건 정말로 충격이었다. 윤 대통령은 지난 12일 대국민담화에서 “선관위 전산시스템이 엉터리인데, 어떻게 국민이 선거를 신뢰할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일부 보수 유튜버와 극우 세력이 전파하는 부정선거론을 대통령이 진지하게 믿는다는 게 황당하다.
계엄의 성패는 국회의원들의 계엄 해제 의결 저지 여부에 달려 있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계엄 선포 직후 중앙선관위에 국회보다 더 많은 군 병력을 더 먼저 보내 선거인명부 서버를 확보하려 했다. 부정선거를 진지하게 믿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해킹을 통한 개표 결과 조작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 이런 지력으로 대통령을 해도 되나 싶다.
선관위 전산 조작으로 당락을 바꾼다는 주장은 투·개표장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둘러본 사람은 믿기 어렵다. 중앙선관위는 전국 지역선관위의 개표 결과를 산술적으로 더할 뿐이다. 지난 4월 총선의 경우 전국 1만4259 투표소의 투표함이 254 개표소에서 개함된 결과를 단순 누적한다. 중앙선관위 개표 결과를 조작한다고 해도 현장 개표 결과와 다르면 안 된다. 전국 개표소엔 선관위 직원은 물론 지자체 공무원·교사 등 개표 종사원도 있고, 각 정당·후보들이 추천한 참관인들도 들어간다. 해킹으로 결과만 조작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이번 총선 때는 수검표까지 했다. 참관인들을 다 쫓아내고 투표함을 바꿔치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대통령이 국민의힘 소속인데 더불어민주당 승리를 위해 선관위가 이런 일을 한다는 게 말이 되나. 망상도 이런 망상이 없다.
대통령은 범야권 192석 대 여당 108석으로 끝난 총선 결과가 부정선거 때문이라고 믿으면 죄의식에서 벗어나 심리적 위안을 얻나. 헌정사 최대의 참패는 김건희 여사 문제를 방치하고 한동훈 사퇴 논란을 일으킨 윤 대통령이 자초한 것이다. 김어준은 박근혜가 당선된 2012년 대선이 전산 조작을 통한 개표 부정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영화도 만들었다. 극우들은 김어준이 진작에 다 퍼먹고 버린 낡은 냄비를 아직도 긁고 있다. 부정선거 주장자는 무지하거나 다른 속셈이 있다고 본다.⊙
12-31(화) ‘트럼프 눈도장’ 찍기

얼마 전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과 현지에서 만나 큰 화제가 됐다. 정 회장이 트럼프의 장남인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의 초대로 당선인의 자택인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리조트에 체류하면서 회동이 이뤄졌다. 고작 15분인 회동이 관심을 끌었던 것은, 트럼프와의 인연이 한국에 얼마나 절실한지를 입증한다. 정 회장이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실세로 꼽히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와 만난 것도 주목된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이 한 달도 안 남았다. 새해 1월 20일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참석은 이미 세계적인 핫 이슈다. 일본·캐나다·프랑스 등 오랜 동맹국 정상들도 직접 만나 눈도장을 찍으려고 온갖 연줄을 동원하는 실정이다. 우리는 더욱 절박하다. 대통령·국무총리 공백을 넘어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조차 탄핵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은 상황이다. 트럼프발(發) 관세 폭탄, 방위비 협상 등 난제가 예고돼 있는 터여서 강력한 한미동맹 확인이 중요한 시점인데, 트럼프 당선인과 만날 인사조차 불투명하다. 상상도 못 했던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기업이 절박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글로벌 업체들은 취임식에 거액을 기부하며 적극 뛰고 있다. 기부금이 역대 최대인 정도다. 이런 와중에 류진 한국경제인협회장(풍산 회장)이 취임식에 초청받았다. 초대된 국내 인사가 극소수인 상황에서 반가운 뉴스다. 비상시기에 정 회장·류 회장 같은 기업인들이 대(對)트럼프 외교에 길을 트는 구원투수로 등장한 것은 다행이다. 트럼프 1기 취임식 때 국내 기업인 중 유일하게 초대됐던 김승연 한화 회장, 트럼프 1기 출범 직전인 2016년 12월 기업인 간담회에 참석했던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등의 활약도 기대된다.
트럼프 2기 행정부와의 관계는 출범 이후 100일도 아닌 100시간이 골든타임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그만큼 출발이 중요하다. 한미 관계는 모든 분야에서 최우선이다. 한미동맹이 더 튼튼하고 더 진전할수록 일본·유럽·대만은 물론 북한·중국·러시아와의 관계도 잘 풀어갈 수 있다. 정치권도 여야 없이 축하 사절단의 방미를 성사시키는 게 바람직하다. 새해 국민이 힘차게 출발할 희망과 동력이 될 희소식이 잇달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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