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의 노벨상 프로젝트 스카이데일리 김기삼 변호사 2024
△ 미 프린스턴 대학 졸업
△ 1970년대 중반 이후 현재까지 시카고 트리뷴지(Chicago Tribune)·프랑스 파리의 IHT(International Herald Tribune)지를 비롯해 50년간 한반도 문제 전문 최고령 현역 기자
정리= 박혜수 편집위원
△김기삼 변호사의 블로그(https://niswhistleblower.tistory.com/)를 방문하면 좀 더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41] 문고리 권력 된 김한정… 노벨상 막판 다지기
박지원 北과 비밀 협상… 현금 5억 달러‧25억 달러 차관 제공하기로
김한정, 정신적 지도자 스톨셋과 실무 책임자 룬데스타트 집중 공략
청와대 제1부속실장에 임명된 김한정
1999년 12월14일, 이날은 김한정에게 아주 특별한 하루가 되었을 것이다. 꿈에 그리던 일이 드디어 실현된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날 그는 청와대 제1부속실장에 임명됐다.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데서 보좌하는 자리에 부름을 받은 것이다. 대통령 집무실로 드나드는 모든 인원과 정보를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로서는 지난 1년 반 동안 은밀하고 치열하게 노력해 왔던 결과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날이기도 했다.
그의 책상은 대통령 집무실 바로 앞에 있었다. 이제 그를 거치지 않고는 누구도 김대중과 직접 만날 수도 통화할 수도 없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이를 ‘게이트 키퍼(Gate Keeper)’라 하지만 한국에서는 ‘문고리 권력’이라고 하는 것 같다. 물리적으로나 심정적으로 최고 권력자와 가장 가깝다는 말이다. 이로써 김한정은 노벨상 공작의 컨트롤 타워에 앉아 모든 키를 조작할 수 있게 되었다.
‘양심 증언’ 물타기 위한 월간중앙 인터뷰
월간중앙 2003년 7월호엔 ‘전 청와대 부속실장 김한정 DJ 보필 1200일의 소회’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는 물론 당시 필자의 양심 증언을 물타기하기 위해 김한정이 월간중앙을 선택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기사다. 이 기사는 제1부속실에 대해 마치 관광 안내원처럼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청와대 제1부속실이 대통령을 보좌한다는 점에서는 대통령 비서실의 여타 직원들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근무 장소가 ‘대통령의 바로 곁’이라는 물리적 거리 면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인다.
제1부속실은 청와대 본관 2층 대통령 집무실 바로 옆에 붙어 있다. 제1부속실 외에 본관 2층 근무자는 의전팀장밖에 없다. 심지어 비서실장실도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본관과 걸어서 5분 정도 걸리는 비서실동에 자리해 대통령과의 물리적 거리는 비서실장보다 훨씬 가깝다. 따라서 대통령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근무하는 비서실 직원은 의전팀장을 제외하면 제1부속실장을 포함한 제1부속실 근무자들 뿐이다.”
IMF 경제위기 벗어난 1999년 연말 풍경
당시는 새천년을 2주 정도 앞둔 세밑이었다.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고 시내 곳곳에선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졌다. 지난 2년간의 악몽과도 같았던 국제통화기금(IMF)발 외환위기, 소위 IMF 경제위기도 이제 어느 정도 회복되어 가는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경제적‧심리적 고통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었다.
언론은 엉뚱맞게 연일 ‘Y2K’에 관한 기사를 쏟아냈다. Y2K는 “1999년 12월31일에서 2000년 1월1일이 되면 숫자 변환에 따라 모든 컴퓨터 프로그램이 오작동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괴담이었다. 그만큼 뉴스거리가 없었다는 얘기다.

▲ 1998년 6월16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함께 북한으로 가는 ‘소떼’를 태운 트럭들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넘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이처럼 사회가 온통 새천년의 흥분에 들떠 있는 가운데 김한정과 그의 노벨상 프로젝트팀은 다가올 한 해의 시간표를 꼼꼼히 계산하고 있었다. 그는 국정원에서 은밀하게 진행했었고, 아태민주지도자회의에서 치열하게 전개했던 모든 사업들의 열매를 어떻게 하면 수확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에 여념이 없었다.
김한정은 향후 몇 달간의 결정적인 시간을 차근차근 준비하기 시작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물’이라 하지 않았던가.
‘내년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스톨셋 주교가 언질해 준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돌파구‘를 만들어 내서 대통령님께서 블루카펫을 사뿐히 즈려밟고 단상으로 걸어 올라가 영광의 노벨평화상 메달을 목에 걸게 해야 한다’…. 아마도 그는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을 것이다.
김정일 상대로 공개 구애와 물밑 협상
김한정의 부속실장 취임과 발맞춰 남북 간 비밀 특사들의 물밑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2000년 1월, 임동원 국정원장은 김보현 대북전략국장을 중국으로 보내 북측과 비밀 접촉을 하도록 지시했다. 그 이전에 이미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은 재일동포 2세 요시다 다케시를 통해 몇 차례 평양을 방문하여 ‘터 고르기’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김보현이 북측과 대화의 물꼬를 튼 다음 박지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박지원의 비밀협상에는 국정원에서 김보현과 서훈이 수행했다. 2000년 3월9∼11일 사흘간 박지원은 싱가포르에서 북한의 송호경 아태위원회 부위원장을 만나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같은 시간 2000년 3월10일, DJ는 유럽으로 날아가 북한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공식화하는 이른바 베를린 선언을 낭독했다.
그로부터 한 달 전쯤인 2000년 2월9일, DJ는 일본 도쿄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김정일 총비서는 식견 있는 지도자”라고 추켜세우며 ‘밑밥’을 깔아 놓았다.
이처럼 DJ는 김정일에게 한편으로는 공개적인 구애를 하면서 동시에 물밑으로는 비밀협상을 진행했다. 잘 짜여진 각본대로 노벨상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한 것이다.
2000년 3월17일, 박지원과 송호경은 상하이에서 다시 만나 협상을 이어 갔고, 3월23일에는 베이징에서 만나 의견을 조율했다. 이윽고 둘은 4월8일 북경에서 남북정상회담에 최종 합의했다. 한참 후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이때 박지원과 송호경은 북측에 현금 5억 달러를 지불하고, 25억 달러 규모의 투자 및 경제협력 차관을 제공하기로 비밀리에 합의했다.
정신적 지도자 스톨셋과 실무 책임자 룬데스타트
김한정은 스톨셋과 룬데스타드를 노벨상 수상 결정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핵심 인사로 점찍었다. 스톨셋은 노르웨이의 루터교 최고 수장으로 그 나라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이를테면 노르웨이의 김수환 추기경과 같은 인물이었다. 또한 룬데스타드는 노벨평화상 수상 관련 모든 행정 업무를 총괄하는 실무 책임자였다.
김한정은 이 두 사람에게 일찍부터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1999년 2월 말에는 스톨셋과 그 가족을 서울로 몰래 초청해 대통령과의 만남을 주선했고, 제주도 관광을 함께 하면서 친목을 다졌다. 같은 해 8월 말에는 이종찬과 함께 오슬로를 방문하여 더욱 단단하게 친분을 굳혔다. 또한 그 자리에는 은퇴한 양세훈까지 불러 인수인계 작업까지 마쳤다. 이제 이 노회한 주교에게 사탕발림을 계속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머쥐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국정원이 입수한 스톨셋 주교의 경력에 따르면 그는 지역 교구에서 시작하여 노르웨이 교회협회 사무총장,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루터교세계연맹(LWF) 사무총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폭넓은 경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스톨셋은 실용적이면서도 이론적인 신학자로 알려졌으며 노르웨이 교회협회 사무총장,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루터교세계연맹(LWF) 사무총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폭넓은 경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스톨셋은 실용적이면서도 이론적인 신학자로 알려졌으며 노르웨이 교육부 장관 특별보좌관‧오슬로대 신학대학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5년간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중앙당 대표를 지내기도 했으며 세계교회협의회(WCC) 및 인권운동위원회 위원으로도 일했다.
특히 스톨셋은 1985년부터 2000년까지, 중간에 몇 년의 휴지기가 있긴 했지만, 최장기간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의 위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DJ에 대해 특별한 관심과 호의를 표시해 왔다. 1987년도에는 박경서를 통해 DJ에게 노벨상을 거의 안겨 줄 뻔하기도 했다.
박경태 노르웨이 대사의 숨은 공로
그러니 김한정이 타겟으로 삼아야 첫 번째 목표는 누구보다도 스톨셋이었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스톨셋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김한정을 대신해 박경태 노르웨이 대사를 통해 이뤄졌다. 박경태는 전임 양세훈과는 달리 노벨상 임무에 비교적 순순히 협조했다. 훗날 이종찬은 그의 회고록에서 박경태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지금 이야기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가장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을 꼽으라 한다면 나는 박경태 대사를 꼽고 싶다. 그런데 아무도 그의 공로를 알아주지 않았고, (그는) 수상식장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42] 노벨위 부위원장 된 스톨셋 주교… DJ 노골적 지지
박경태 대사가 전담 마크… DJ 베를린 선언 등 다양한 활동 소개
스톨셋 “金대통령 미얀마 인권·동티모르 파병 주도 높이 평가”
박경태 노르웨이 대사와 스톨셋 주교의 만남
2000년 3월31일, 김남용 파견관이 본부로 보낸 장문의 전문을 보면 이날 저녁 박경태 노르웨이 대사와 스톨셋 주교 사이에 주고받은 대화 내용을 상세하게 알 수 있다. 이날 박경태는 스톨셋 부부를 대사관저로 초대해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이들은 노벨위원회의 내부 동향과 국제관계, 한국의 국내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놓고 폭넓게 대화를 나눴다.
김남용의 전문은 “스톨셋 주교는 공관장이 자신의 생일(2월10일)을 축하하고 만찬에까지 초청해 준 데 대해 감사를 표하면서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는 말로 시작된다. 스톨셋이 언급한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스톨셋, 노벨위원회 부위원장 선임
△노벨위원회는 지난번 새로이 위원진을 구성했는데, 운영상 다소 민감한 문제가 있었지만 모두 잘 적응하고 있음.
△당초에는 자신을 위원장으로 선임하려 했으나 자신은 주교직과 위원장직을 겸임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두 가지 직책을 정체성(identity) 면에서 생각할 때 위원장직을 사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부위원장 직책을 맡기로 했음.
△템플턴상 위원회와 서울평화상 위원회에서도 심사위원직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있었으나 노벨 위원과 겸임할 수 없어 모두 사양했음.
△2002년 본인의 임기가 만료되면 중앙당 출신의 다른 인사가 후임이 될 것임.
에릭 솔하임, 스리랑카 정부와 타밀 반군 중재
△최근 에릭 솔하임 의원이 스리랑카 정부와 타밀 반군 간의 중재를 위해 6개월간 한시적인 외무부 특별자문관을 맡게 되었음.
△스톨텐베르그(Stoltenberg)정부가 새로 출범했지만 대외 정책은 기존의 정책과 별 차이 없이 지속적으로 추진될 것이며, 야글란드 신임 외무장관이 역할을 훌륭히 수행할 것임.
△본인의 초청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투투 주교가 이튿날 노르웨이를 방문, 종교의 자유와 평화에 관한 세미나에 참석할 예정임.
△본인은 중국의 초청을 받고 5월7∼9일 북경을 방문하며 ‘종교의 자유와 평화’라는 주제로 기조연설을 할 예정임.
스톨셋, 동티모르에 대한 한국의 역할 인정
이들은 특히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에 관해 장시간 대화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동안 스톨셋 주교 등 노르웨이 측의 관심이 동티모르 독립의 촉매 역할을 했다는 공관장의 지적에 대해) 동티모르 문제는 다행히 한국 등 국제사회의 관심 속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잘 잡았다고 봄.
△본인은 와히드만이 인도네시아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3주 전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와히드만과 면담했는데, 와히드만은 비전을 갖춘 지도자라고 생각함.
△본인은 당시 와히드만에게 한국의 김대중(DJ) 대통령과 남아공의 만델라를 직접 만나 두 분의 과거를 배우라고 권유했음.

▲ 2000년 10월9일 서울공항에서 동티모르에 파병되는 상록수 부대원들이 비행기에 오르고 있다. 연합뉴스
동티모르의 라모스 호르타, DJ 노벨상 추천
스톨셋의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은 노벨상 공작팀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2000년 1월 말 동티모르의 노벨상 수상자 라모스 호르타가 2000년도 DJ의 노벨상 추천장을 써 줬기 때문이다. 김남용의 전문에는 인도네시아 정세와 그에 대한 자신의 역할에 관한 스톨셋의 설명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어지는 대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와히드만은 메가와티의 당선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에 주변에서 대통령 후보로 추천했으며, 그래서 지난달 대통령 출마를 수락했다면서 인도네시아의 평화를 위해 위란토를 부통령 후보로 고려하고 있다고 언급함.
와히드만, 스톨셋 조언으로 메가와티를 부통령 후보로
△“일각에서 위란토가 동티모르 사태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부통령 후보로 삼을 경우 부담이 될 것이므로 재고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는데, 나중에 와히드만이 위란토 대신 메가와티를 부통령 후보로 결정한 것을 알고는 ‘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음.
△(공관장이 작년말 김 대통령께서 와히드만 대통령을 아세안 정상회담 시 처음 대면하셨을 때 김 대통령께 ‘선생님’이라고 호칭하여, 김 대통령께서 “학생을 당할 선생은 없다”고 응대했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고 소개하자) 주교는 두 분 대통령 간의 아름다운 이야기라면서, 자신이 김 대통령을 좋아하는 만큼이나 와히드만 대통령도 좋아하고 있다고 언급함.
△와히드만 대통령은 오는 6월 노르웨이를 방문할 예정임.
한편, 박경태가 스톨셋에게서 진심으로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노벨위원들이 한반도와 DJ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평가하고 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DJ, 독일 자유대학에서 베를린 선언 발표
전문에서 박경태는 스톨셋이 DJ의 근황에 대해 질문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DJ의 동티모르에 대한 경제적‧군사적 지원에 대해 스톨셋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있다. 다음은 이어지는 대화 내용이다.
△(스톨셋 주교가 김 대통령님의 근황을 문의한 데 대해) 공관장은 김 대통령께서 고령임에도 상당히 정력적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면서 지난 3월 초 이탈리아‧바티칸‧프랑스‧독일을 각각 방문했으며 특히 독일 자유대학에서 연설하면서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다고 설명함.
△(스톨셋 주교가 베를린 선언 내용을 모르고 있다고 하자) 공관장은 주교에게 베를린 선언 내용 및 북한과 주요국들의 반응을 설명했음.
DJ, 미얀마와 동티모르 파병에 주도적 역할
△(공관장이 며칠 전 주재국의 본데빅 전 총리와 오찬 회동을 했을 때 본데빅이 미얀마의 인권 문제를 거론하면서 아세안 국가들이 더욱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관여할 것을 촉구한 사실을 거론하자) 스톨셋 주교도 마찬가지로 관심을 표명하고 동시에 아세안 국가들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데 동감을 표하면서 “김 대통령이 미얀마의 인권과 동티모르의 파병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언급함.
△(스톨셋 주교가 한국의 경제 문제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면서 서민층의 경제회복에 대한 체감 정도‧재벌 개혁‧학생운동의 파급력 등에 대해 문의하자) 공관장은 10%대에 달하는 높은 경제성장률, 2% 안팎의 낮은 인플레이션, 은행과 재벌에 대한 구조조정 등을 예를 들어 설명하면서 “지난 2년간의 경제회복이 기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소개하고 “한국 경제가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정부가 사회보장 정책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기 때문에 서민층의 체감 수준도 비례하여 높아지고 있다”면서 70‧80년대와는 달리 현재는 학생 운동보다 비정부기구‧단체(NGO)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음을 설명함.
△(현재 한국의 가장 큰 국내 현안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에 공관장이 앞으로 있을 4월13일 총선이라고 대답하자) 주교는 총선의 향배와 한국 대통령의 중임 가능성 여부 등 정치적인 질문을 이어 갔고, 공관장은 총선 관련 동향과 단임제 헌법 조항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함.
대화가 막바지로 치닫자 이들은 서로 간에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든다. 다음은 대화의 마지막 부분이다.
△스톨셋 주교가 “임기 동안 남북관계에 진전이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고 언급한 데 대해 공관장은 “김 대통령께서 일부 오해와 비판에도 지난 2년간 미국‧일본 등 주변국들과의 공조하에 일관되게 햇볕정책을 추진해 오고 있으며, 당장의 통일보다는 남북 간 평화와 공존을 통해 북한 주민을 기아에서 구출하는 것이 김 대통령의 여생의 희망이다. 김 대통령의 노력으로 북한 측의 태도 변화 조짐도 조금씩 감지되고 있으며, 금년 말까지 좀 더 구체적인 변화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고 설명함.
이날 밤, 박경태 대사와 스톨셋 주교와의 3시간 15분에 걸친 대화는 이렇게 마무리되고 이 둘은 주교의 북경 방문을 전후해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43] 비전향 장기수 북송은 노벨상 노린 반역
스톨셋 비전향 장기수 언급… 63명 장기수 북송 결정에 단초 제공
남북정상회담 후 김정일의 답방 가능성에 스톨셋 “세기의 이벤트”
박경태 대사와 스톨셋의 두 번째 만남
박경태 주 노르웨이 대사와 스톨셋 주교의 다음 만남은 2000년 4월14일에 이뤄졌다. 이날 박경태 대사는 노르웨이 외무부 인권 담당 대사인 라그네 비르테 룬드 전 서울 주재 노르웨이 대사 부부를 관저에 초청하면서 스톨셋 주교 부부를 함께 만찬에 초청했다. 이 자리에는 노르웨이 교포 정순미 비올리스트 부부도 같이 초대됐다. 그녀가 동석한 것은 룬드 대사와 특별한 친분이 있다는 점이 참작된 것 같다.
이날 박경태가 스톨셋 부부를 예정에 없이 급히 초대한 것은 며칠 사이에 벌어진 남북정상회담 발표와 총선 결과를 전해 주려는 의도에서였지만 정작 이날 대화에선 주로 김 대통령의 베를린 자유대학에서의 연설과 비전향 장기수와 국가보안법 문제가 주요 화제로 올랐다.
라그네 룬드가 당시 노르웨이 인권 담당 대사였기 때문에 대화의 주제가 한정되었던 것 같다. 이날 만남에 대한 김남용의 전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비전향장기수들에 관심 보인 스톨셋
스톨셋은 “2주 전 공관장이 전해 준 김 대통령의 베를린 자유대학 연설 전문을 꼼꼼히 잘 읽어 보았다”며 자료를 지원해 준 데 대해 사의를 표했다. 또한 주교는 “김 대통령이 자유대학 연설에서 독일의 경험을 적절하게 거론하면서 한국의 대북 관계를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지 구체적으로 밝혔다는 점에서 하나의 ‘결정판(master piece)’이란 인상을 받았다”는 소감을 밝혔다. 특히 그는 “김 대통령께서 자유대학 연설에서 밝힌 구상대로 남북정상회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기를 기대하면서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또한 스톨셋 주교는 “국제사면위원회(AI)의 보고서에 의하면 아직도 한국에 비전향 장기수가 있다고 하는데, AI 보고서의 내용이 분명하지 않아 잘 이해가 안 된다”며 운을 뗐다. 스톨셋은 “비전향 장기수의 의미가 뭔지, 정확히 몇 명이나 있는지, 그리고 이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은 무엇인지 등 확실한 내용을 알고 싶다”고 밝히면서 관련 자료를 제공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이에 대해 박경태는 추후에 관련 자료를 제공해 줄 것을 약속하면서, 국가보안법의 배경과 그 취지, 그리고 인권침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에 대한 우리 정부의 개정 노력 등을 설명하고 앞서 있었던 3‧1절 특사의 내용 등에 관해서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비전향 장기수의 북송 결정에 단초를 연 스톨셋
이날 스톨셋의 비전향 장기수에 대한 언급은 그해 9월에 있게 될 비전향 장기수 63명의 북송 결정에 단초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2000년 9월, 김대중 정권이 국내외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을 물리치고 무리하게 비전향 장기수를 송환한 이유는 노벨상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그 과정에서 아직도 북한에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수백 명의 국군 포로와, 전후 북한에 의해 강제 납북된 수백 명의 대한민국 국민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는 점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한편, 더욱 큰 문제가 된 것은 비전향 장기수가 아니라 일본에서 간첩 활동을 하면서 일본인을 납북한 주범이었던 신광수를 송환 명단에 포함시킨 일이었다. 당시 신광수의 대북 송환은 일본 정부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한‧일 간에 심각한 외교 문제로 비화했다.
노벨상 공작팀으로서는 일본과의 외교관계 악화라는 부정적인 면과 장기수 송환이 노벨위원회를 설득하게 될 긍정적인 면을 저울질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들은 전자를 버리고 후자를 택한 것이다. 사익을 위해 또 한 번 국익을 희생시킨 예이다.
이날 만찬에서 한 가지 특기할 점은, 박경태와 김남용의 매의 눈과 같은 날카로운 눈썰미가 스톨셋 부부의 포크가 김치 그릇 주위를 자주 오간다는 것을 적절하게 포착해 낸 일이다. 이튿날 박경태의 부인은 두말없이 김치 한 박스를 주교의 자택으로 전달했다. 그들은 아마도 그해 여름 그 김치가 익어 가면서 노벨상도 함께 무르익어 가기를 빌었을지 모른다.

▲ 김대중(오른쪽) 대통령 부부가 2박3일간의 북한방문을 마치고 2000년 6월15일 오후 서울공항에 도착해 화동으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박 대사, 남북정상회담과 김정일의 답방 가능성 언급
박경태 대사와 스톨셋 주교는 2000년 6월5일 오슬로 시내의 블롬(Blom) 식당에서 다시 만나 점심 식사를 같이했다. 이날은 6.15 남북정상회담을 열흘 앞둔 때이고, 6월20일 노벨상 중간회의를 2주 앞둔 시점이었다.
김남용의 전문은 서두에서 이 만남이 남북정상회담 홍보활동의 일환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자리에서 스톨셋은 “노르웨이 유력 일간지인 아프텐포스텐(Aftenposten) 6월5일자에서 김정일이 올해 8월 서울을 답방할 것이라는 기사를 보았다”고 운을 떼면서 정상회담의 준비 동향과 한국의 여론 등에 대해 문의했다.
스톨셋 “남북정상회담은 새천년 최고의 이벤트”
이에 박경태는 남북 간 15개 합의 사항과 선발대의 방북 동향 등을 설명하면서 “한꺼번에 많은 성과를 거두기 위해 서두르기보다는 남북관계 개선의 길을 뚫는 역할을 통해 후임 정부가 계속 발전시켜 나갈 토대를 마련한다는 생각으로 금번 정상회담에 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스톨셋은 남북정상회담이 “새천년의 문턱에서 전 세계를 위한 가장 큰 이벤트”라고 생각한다면서 “좋은 결과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며 기대감을 표시했다. 이에 대해 공관장은 최근 김정일의 방중 사실과 우리 측의 평가 내용 등을 설명하면서 “북한의 김정일이 남북정상회담 전에 중국 고위당국자들과 회동한 것은 북한으로서도 남북정상회담을 중대하게 취급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고 평가했다.
스톨셋이 “김정일이 서울을 방문한다면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북한 측의 적극적인 입장이 확인되는 셈이고 남북정상 간의 협의 채널이 계속 유지된다는 점에서 ‘대단한 일’이 될 것이다”고 언급하자 공관장은 “김 대통령의 대북 포용 정책이 국민으로부터 85%에 이르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이번 정상회담이 추진되고 있다”는 점을 설명했다.
박 대사, “방북단 명단에 이희호 여사도 포함”
또한 스톨셋은 최근 김정일의 방중 사실과 우리 방북 대표단의 규모와 외신들의 정상회담 취재 여부 등을 질문했다. 박경태가 “이희호 여사가 방북단에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하자 “북한 측이 예의를 갖추어 접대하려는 느낌이다”면서 “아주 잘된 일이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이어서 “현재까지의 북한의 입장이나 태도로 보아 금번 정상회담의 결과를 어떻게 전망하는가”고 되물었다.
이에 대해 박경태는 “우리 정부로서는 분단된 지 55년 만에 처음으로 가지는 정상회담이니 만큼 만남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면서 차분하고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한 번의 회담으로 모든 것을 얻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고 있다”면서 “회담 결과도 중요하지만 회담 자체의 의미와 노력을 평가해 주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박경태 대사는 이번 남북정상회담이 이제까지 국제사회에서 탕아 집단으로 매도되어 온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 냄으로써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설득하고 유도하는 지난한 과정의 첫걸음임을 설명했는데, 스톨셋 주교도 이에 공감을 표시했다.
이날 김남용의 전문은 “스톨셋이 동티모르‧인니‧미얀마‧쿠바‧중국 등에서 인권 및 평화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6월20일 노르웨이 국왕으로부터 훈장을 수여 받을 예정이다”고 보고하면서 “그 시기를 전후해 스톨셋과 재접촉하여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를 설명하고 훈장 수여를 축하하는 모임을 갖겠다”는 계획을 보고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44] 남북정상회담 성공… DJ, 노벨상에 ‘성큼’
오슬로로 날아간 김한정… 스톨셋 주교에게 정상회담 성과 브리핑
막판에 스톨셋이 귀띔해 준 뜻밖의 경쟁자, 빌 클린턴 미 대통령
DJ 부부의 방북과 남북정상회담
2000년 6월13일 김대중(DJ)은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서울공항에서 평양으로 향했다. 서울공항은 원래 군용 공항이지만 청와대가 사용하는 공군 1호기가 이착륙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날 이곳에서 한국 항공기가 최초로 평양으로 날아간 것이다.
순안공항에 마중 나온 김정일은 DJ를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은 함께 리무진을 타고 한 시간여 동안 차 안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다음 날 두 사람은 정상회담을 갖고 5개 항의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서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했다”면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 제안 간에 공통점이 있다”고 인정했다.
또한 두 사람은 8·15광복절에 즈음해 가족과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고, 경제와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기로 합의했다.
이와 같은 합의 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해 빠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갖기로 했다는 내용도 성명에 포함되었다. 아울러 DJ는 김정일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했으며, 김정일은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이렇게 두 정상이 서명한 합의문은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에 노벨 프로젝트팀의 활동도 급피치를 올렸다. 이 시기에 박경태가 스톨셋 주교를 만나 남북정상회담에 관해 설명했을 것으로 판단되지만 아쉽게도 그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어쩌면 박경태 대신 김한정이 직접 스톨셋과 룬데스타드를 만나 브리핑했을 가능성도 크다.
김한정, 남북정상회담 후 급히 오슬로 방문
2000년 6월24일, 김한정은 급히 오슬로를 방문해 3일간 체류했다. 아마도 이때 그는 박경태와 함께 스톨셋을 만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만남 자리에는 김남용은 동석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만나 무슨 대화를 나눴고 무슨 작전을 짰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때 김한정의 오슬로 방문이 그 후 DJ의 노벨상 수상을 결정하는 데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미얀마 군부와 한국 군부의 유대관계 언급한 룬드 대사
2000년 8월20일, 박경태 주(駐)노르웨이 대사는 관저에서 룬드 인권대사의 태국 대사 임명을 축하하는 만찬 모임을 열고 이 자리에 스톨셋을 초청했다. 이 자리에는 지난봄에 동석했던 교민 음악가 정순미 부부와 함께 노르웨이 작곡가 아르네 노르드하임도 초대되었다. 예술인들을 동석시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포석이었을 것이다.
룬드는 자신의 태국 대사 임명 배경이 “미얀마의 민주화와 인권 개선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향후 한국 측과 긴밀한 협조 관계 유지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또한 사견임을 전제로 “한국 군부가 미얀마 군부와의 유대관계를 강화, 이를 활용해 간접적으로 미얀마의 민주화 및 인권 개선을 촉진하는 방안도 생각할 수 있지 않느냐”고 언급했다.
정상회담 후속 조치… 남북 각료급 회담‧이산가족 상봉‧경의선 복구공사
만찬이 끝나기 전 스톨셋은 박경태에게 별도로 잠시 환담할 것을 요청했다. 스톨셋은 5분간에 걸친 짧은 환담에서 정상회담 이후에 추진되고 있는 후속 조치에 대해 물었다. 그는 특히 비전향 장기수 문제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관해 관심을 나타냈다. 이에 박경태는 남북 각료급 회담‧이산가족 상봉‧경의선 복구공사 등 후속 조치에 대해 개괄적인 내용을 설명한 후 “조만간 다시 오찬 회동을 갖고 상세한 내용을 설명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 2000년 12월10일 노르웨이 오슬로 시청에서 열린 김대중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식장에서 바레트 듀(왼쪽)·정순미 부부가 연주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0년 9월 5일, 박경태와 스톨셋은 대사관저에서 다시 만났다. 이날은 그야말로 노벨위원회가 그해 노벨평화상 수상자 결정을 하기 전 마지막 순간이었다. 김한정을 비롯한 노벨상 프로젝트팀으로서는 일 분 일 초가 침이 마르고 입이 타들어 가는 순간이었음에 틀림없다. 이 자리에는 이전과는 달리 외부 인사는 아무도 동석하지 않고 김남용 파견관만 배석했다.
남북정상회담의 성과… 냉전체제 종식과 긴장 완화
박경태는 이 자리에서 지난번 만찬에서 주교가 요청한 정상회담 후속 조치의 최신 내용을 정리한 영문 자료를 전달했다. 박경태는 정상회담에 관해 “개별적인 후속 조치 내용 및 성과 여부보다는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존재하는 분단국인 한반도의 냉전체제를 종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한 점과 긴장 완화를 통해 제2의 한국전쟁을 예방한 점, 그리고 기아와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 주민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지원체계를 구축한 점 등에서 정상회담의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만남에서 스톨셋은 “김정일이 태도를 바꾼 이유가 무엇인지”와 “정상회담 후 김정일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등에 관해 물었다. 이에 대해 박경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아직까지 김정일의 사상 변화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북한의 누적된 경제적 어려움과 함께 햇볕정책의 진의가 북한을 흡수 통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북한을 돕고자 하는 데 있다는 점을 깨닫고 있어서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응한 것이다. 김정일은 정상회담을 통해 여러모로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또한 스톨셋 주교는 “한국의 대북 경제협력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했는데 이에 대해 박경태는 “한국 정부는 서두르지 않고 점진적으로 경협을 추진하고 있다”면서 “대기업 및 금융 분야의 구조조정이 아직 진행 중이지만 한국이 성공적으로 외환위기 및 경제난을 극복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기수 문제 다시 거론한 스톨셋
스톨셋 주교는 이 자리에서 또다시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거론했다. 그는 “며칠 전 북송된 63명의 비전향 장기수 외에 한국에 비전향 장기수가 더 남아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박경태는 “북한으로 가기를 희망하는 비전향 장기수는 전원 북송했으며 이제 한국에는 북송되기를 희망하는 비전향 장기수는 한 명도 없는 상황이다”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 스톨셋 주교는 “그거 잘됐네요”라며 활짝 웃었다. 스톨셋의 이와 같은 반응이 박경태에겐 엄청난 청신호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스톨셋의 이 한마디가 박 대사에게는 올해 노벨상이 DJ로 결정된 것을 사전 통보해 주는 의미로 들렸을 것이다.
곧이어 박경태는 “미얀마 정부의 아웅산 수치 문제 관련해 한국 정부가 외교부 대변인을 통해 미얀마 정부에 우려를 나타냈다”는 사실을 설명했고, 스톨셋은 자신도 “얼마 전 뉴욕 방문에서 홀부르크 주(駐)유엔 미국 대사와 이 문제를 논의했다”면서 관심을 보였다.
한편 스톨셋은 “미 대선에서 고어가 승리한다면 홀부르크 대사가 국무장관에 기용되어 클린턴 행정부의 외교 정책을 승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막판에 나타난 뜻밖의 경쟁자, 빌 클린턴
이날 만남에서도 스톨셋 주교는 노벨위원회의 내부 동향에 대해 박경태에게 귀띔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내일 노벨상위원회가 이번 노벨평화상 후보자 선정을 위한 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며, 그 후 한 차례 더 회의를 가질 계획”이라는 등 수상자 결정에 관한 일정을 알려 주었다. 스톨셋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중동평화협상안을 중재하고 있는 클린턴 대통령에 대해 높이 평가하는 일부 견해가 있다”면서 이 협상의 성공 여부가 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했다.⊙
[45] 北에 퍼 준 햇볕정책, DJ 노벨상 ‘일등 공신’
룬데스타드 “결정적 계기” 시인… 입이 찢어질 정도로 좋아하더라
김정일과 남북정상회담 가진 해에 수상한 건 우연 아닌 ‘공작의 힘’
제2의 공작 목표 룬데스타드
김한정이 스톨셋 주교 다음으로 공작 목표로 삼았던 것은 룬데스타드 노벨위원회 사무총장 겸 노벨연구소장이었다. 그는 수상자 선정 투표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노벨위원회 관리자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룬테스타드는 1983년 하버드 대학에 연구원으로 있을 때 김대중(DJ)의 강연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2023년 10월4일 자 조선일보 노석조 기자의 뉴스레터는 룬데스타드에 관한 흥미로운 일화들을 소개하고 있다.
“룬데스타드는 1990년부터 25년간 노벨위원회 사무총장을 지냈는데, 그는 2023년 9월 사망하기 전 노벨위원회 내부 인사로는 유일하게 노벨상에 관한 ‘세계에서 가장 명예로운 상: 노벨평화상 내막 이야기’라는 저서를 남겼다.”
물론 이 책은 필자들의 ‘노벨평화상 원정’에 대응하기 위해 출판한 것으로 판단된다. 룬데스타드가 책에서 밝힌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수상 소식을 듣고 가장 기뻐했던 수상자로 DJ를 꼽고 있는 점이다.
수상 소식에 입이 찢어져라 기뻐한 DJ
“DJ는 수년간 노벨평화상 수상의 희망을 품고 열심히 노력했다. 노벨상 수상은 그에게 꿈이 실현된 것이었다. 통상 수상자들은 처음에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데, DJ는 소식을 듣고 입이 이쪽 귀에서 저쪽 귀까지 찢어질 정도로 웃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룬데스타드는 DJ가 상을 받은 이유에 대해 “오랜 기간 노력해 온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헌신, 북한에 대한 햇볕정책이었다”고 설명했다.
“햇볕정책은 DJ를 여러 좋은 ‘후보자들 중 한 명’에서 ‘바로 그 후보자’로 끌어올린 결정적 계기가 됐다. 2000년 6월 DJ와 북한 지도자 김정일의 평양 회담은 하이라이트였다. 그 정상회담은 DJ에게 큰 업적이었다. 그런 그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해가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 해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DJ정부의 햇볕정책을 높이 평가한 룬데스타드
한편 2000년 2월3일, 김남용 파견관이 본부로 보낸 보고서 전문에는 그날 오찬 회동에서 박경태 대사와 룬데스타드가 나눈 대화 내용이 상세히 실려 있다. 전문에서 김남용은 먼저 이날 접촉 결과의 요지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이 전문에서 공관장이란 박경태 대사를 말한다.
“△룬데스타드 소장은 아시아 경제위기가 예상외로 빨리 회복된 데 놀라움을 표하면서 공관장에게 한국 경제가 조속히 회복된 배경을 질문
△공관장이 미 CIA 부장의 시각을 중심으로 북한 정세를 설명하자 동 소장은 이에 큰 관심을 표명
△공관장이 룬데스타드 소장에게 한국의 대북 햇볕정책에 대한 평가를 요청하자 동 소장은 전적으로 동감을 표시하고, 지속 추진 필요성을 언급
△금년 중 방한 가능성을 타진한 바, 동 소장은 금년에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하고 명년 이후에 추진하는 것을 고려하겠다고 답변
△공관장이 룬데스타드 소장에게 한국의 경제회복, 김 대통령님의 남북 경제 공동체제의 등 현안 사항을 설명한 바, 동 소장은 이를 경청하고 관심을 표시”
이어서 전문은 항목별 대화 내용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박 대사, “IMF 극복은 DJ의 리더십 덕분”
박경태 대사와 룬데스타드는 자녀 문제‧근황 등 신변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했다.
이어서 아시아와 한국의 경제회복과 관련해 룬데스타드 소장은 “아시아 경제위기가 예상외로 빨리 회복됨에 따라 아시아의 경제위기에 관한 글을 다시 쓰고 있는 중이다”면서 “한국 경제가 이렇게 빠르게 회복된 배경이 무엇인지”를 질문했다.
이에 대해 박 대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김 대통령의 훌륭한 리더십과 집념에 의한 업적이며
△아시아 경제위기가 야기하게 될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에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적 차원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집중된 점
△대통령의 성공적인 기업 구조조정에 관한 정책적 노력을 우리 기업들이 잘 이해하고 따라준 덕분이다.”
박 대사는 “한국이 1년 전까지만 해도 마이너스 경제성장을 기록했으나 1999년에는 무려 9%의 높은 경제성장을 이루었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박 대사, 북한‧인도가 새로운 핵 공급국이 될 가능성 언급
북한 정세와 관련해 박 대사가 “북한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고 질문하자 룬데스타드 소장은 “신문 등 공개 출처를 통해 북한 정세를 접할 뿐”이라면서 북한 정세에 대해 역으로 질의를 했다. 이에 박 대사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2월2일 미 CIA 부장이 ‘북한 급변 가능성 상존’이라는 제하의 미 상원 청문회 증언 내용을 중심으로 김정일이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고 국제사회로부터 최대한의 원조를 얻기 위해 대미‧대일‧대EU 외교 공세와 대(對)한국 경제 접촉을 시도하고 있지만, 개방의 한계와 정책의 모순 때문에 김정일이 선택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은 제한되어 있다.”
또한 박 대사가 “북한의 노동미사일 판매로 인한 중거리 미사일의 확산이 중동과 아시아의 전략적 균형을 크게 변화시키고 있으며, 장래 북한과 인도가 새로운 핵 공급국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하자 룬데스타트 소장은 “매우 흥미로운 설명”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편, 박 대사가 한국의 대북정책에 대한 평가를 부탁하자 룬데스타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의 대북정책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현 단계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을 것이다. 김 대통령님도 과거 서독의 빌리 브란트 수상이 동방정책을 추진하던 당시 직면했던 어려움과 유사한 어려움을 갖고 있다고 본다. 김정일이 개방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북측의 반응이 긍정적이지 않더라도 대북 햇볕정책은 계속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북측에 남북 경제공동체를 제안한 DJ
박 대사는 룬데스타드에게 DJ의 남북경제공동체 제의와 관련, 최근 DJ가 신년 메시지를 통해 남북한 경제공동체 구성을 제의한 내용을 설명했다. 이어서 “이는 어떤 실체적 메커니즘이라기보다는 개념적 형태이며, 남북한 경제협력의 총칭으로서 실질적 협력의 가시화를 위한 시도이다”고 덧붙였다.
이에 룬데스타드 소장은 “북한 측의 반응은 어땠는가”고 질문했다. 박 대사는 “북한 입장에선 달리 선택할 대안이 없기 때문에 아직 구체적인 반응은 없는 상황이지만, 뭔가 좋은 반응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답변했다.
박 대사, 룬데스타드의 방한 가능성 타진
박 대사가 금년도 방한 가능성을 질문하자 룬데스타드는 “금년 중에는 어려울 것 같다”면서 지난 1997년 9월 한국 국제교류재단 초청으로 방한했었는데 다음번에는 충분한 시간을 갖고 한국 내부를 두루 둘러볼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또한 룬데스타드 소장은 입양아 문제에 대한 박 대사의 생각을 물었다. 박 대사가 “입양아들이 기본적으로 노르웨이에 감사하면서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다”고 대답하자 룬데스타드는 “과거엔 한국이 가난했기 때문에 입양아들이 왔지만 이제 나라가 발전했는데도 계속 오는 이유가 무엇인가”고 질문했다.
이에 공관장은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유교적 가치관 때문에 국내 입양이 어려운 데 기인한 것이나, 앞으로는 복지 정책을 통해 해결해 나갈 것으로 본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이날 룬데스타드는 자신의 이모가 1960년대 노르웨이 의료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파견되어 한국전쟁 참전용사회 회원이라면서 “한국 대사관이 매년 참전용사회 연례 모임을 개최해 주어 감사히 생각한다”고 사의를 표했다. 박 대사는 3월 이후 적절한 시기에 대사관저에서 부부 동반 만찬을 가질 것을 제의했고 룬데스타드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46] 수상자 선정 바로 전날 룬데스타드 만난 朴대사
“DJ 다리 불편하던데” 문의에 “건강 문제 걱정 없다” 설명
10여 일 뒤 다시 만나… DJ 노벨상 수상 당위성 적극 설파
수상자 선정 중간회의 바로 전날의 만남
2000년 6월19일, 박경태 대사는 노벨연구소를 방문해 룬데스타드 소장을 다시 만났다. 이날은 룬데스타드가 “노벨위원회가 6월20일 금년도 노벨평화상 수상자 선정을 위한 중간회의를 개최할 것”이라고 말한 대로, 바로 중간회의 전날이었다.
이날 만남에서 룬데스타드 소장이 던진 질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남북정상회담 관련 룬데스타드의 질문
△한국에선 김대중(DJ)의 평양방문 성과를 예견하고 있었는가
△김정일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남북정상회담을 수용하면서 공동선언에 합의하는 등 파격적으로 나오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한국 측은 금번 김 대통령의 방북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남북공동선언의 내용 중 제2항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데, 이 조항과 관련해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것으로 보는가
△남북 간 합의문서는 과거에도 있지 않았는가
△향후 김정일이 대남 관계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으로 보는가
△한국 내에서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요구가 어느 정도 심각한 수준인가
△정상회담 이후 휴전선의 긴장이 완화됐는가
△중국이 북한에 대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보는가
이날 김남용 파견관이 본부로 보고한 구체적인 면담 내용은 아래와 같다.
남북정상회담‧남북공동선언의 의미 강조
룬데스타드의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공관장은 본부에서 하달한 홍보지침(장재룡 외교부 차관보의 주한외교사절단 대상 설명자료 등)과 파견관이 지원한 자료를 토대로 적절하게 설명하면서 특히 “금번 남북 정상 간 공동선언 및 합의 내용이 과거와는 달리 실질적·실천적 의미를 갖고 있는 바, 정상회담 직후부터 적십자회담 재개 등 후속 조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으며 이에 대해 룬데스타드 소장은 ‘동감을 표시’했다.
DJ의 건강을 염려한 룬데스타드
한편 룬데스타드 소장은 DJ의 건강에 관심을 표명했는데 이에 대해 박 대사는 “김 대통령께서 취임 이후 금번 평양 방문을 포함하여 정력적으로 외국 순방 활동을 하고 계신 것만 보아도 매우 건강한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룬데스타드 소장이 “김 대통령께서 다리가 불편한 것 아니냐”고 재차 문의하자 박 대사는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 김 대통령께서 정치테러(트럭 사고를 위장한 암살 계획‧일본에서의 납치)와 고문을 당한 적이 몇 차례 있었는데, 그 후유증으로 다리가 불편하게 되었으나 건강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동 소장은 “새로운 사실을 확인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 2000년 7월30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제1차 남북장관급회담의 첫 회의가 열려 각 수석대표가 남북 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공작팀, 수상자 선정 중간회의 후 룬데스타드 다시 접촉
마지막으로 전문은 “노벨위원회는 6월20일 금년도 노벨평화상 수상자 선정을 위한 중간회의를 가졌다”는 룬데스타드의 전언과 “공관장은 7월6일 룬데스타드와 다시 오찬 접촉을 하기로 약속했다”는 참고사항을 보고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2000년 7월6일, 약속대로 박경태와 룬데스타드는 오슬로 시내 블럼(Blom) 식당에서 오찬 접촉을 가졌다. 이날 김남용이 본부로 보고한 ‘공관장의 노벨연구소장 면담 결과(연:놀357)’이란 제하의 전문은 이날 회동의 결과를 상세하게 보고하고 있는데, 내용을 순서대로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남북적십자회담… 남북정상회담의 첫 번째 후속 조치
“가. (룬데스타드 소장은 남북정상회담의 후속 조치에 대해 문의) 공관장은 2000년 6월27∼30일 개최된 남북적십자회담의 3가지 합의사항을 설명해 주면서 남북정상 간 공동선언의 후속 조치들이 가시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첫 번째 사례라고 강조함.”
이와 관련해 김남용은 “파견관은 동 접촉 전 공관장(박 대사)에게 상기 적십자회담 관련 본부 하달 영문자료(정11372)를 지원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나. (룬데스타드 소장은 상기 적십자회담에 따른 이산가족 상봉이 한 차례에 그치지 않고 계속될 것인지에 대해 관심을 표명) 공관장은 남북 간 합의에 따라 이산가족 면회소가 설치되면 이산가족 상봉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함.”
룬데스타드, 비전향 장기수 추가 송환에 대해 문의
“다. (룬데스타드 소장은 비전향 장기수의 수가 수백 명에 달하지 않느냐고 문의) 공관장은 90명 이내로 알고 있다면서 우리 정부가 9월 초순경 동 장기수 등 북한으로의 귀환을 희망하는 사람은 인도적 차원에서 전원 북한으로 돌려보낼 계획임을 재설명함.”
“라. (룬데스타드 소장은 김정일이 김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역설적으로 그러한 인기 때문에 북한이 과거로 회귀할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들지 않겠느냐고 문의) 공관장은 김정일이 금번 정상회담 시 보여 준 태도 및 약속들을 감안할 때 정상회담 이전의 상태로 회귀할 가능성은 희박하며, 대다수 전문가들도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진전을 예상하고 있어 희망적인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고 설명하였는 바, 룬데스타드 소장은 동감을 표시함.”
김정일의 답방은 남북정상 간 합의사항
“마. (룬데스타드 소장은 김정일의 한국 답방에 관해 진전된 사항이 있느냐고 문의) 공관장은 공동선언에 표현된 대로 김정일의 답방 문제는 남북정상 간 합의된 사항이며 구체적인 방한 일시는 아직 합의된 바 없으나 금년 내 답방이 성사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설명함.”
DJ, 통일 후에도 주한 미군 유지 희망
“바. (룬데스타드 소장은 주한미군 문제가 어떻게 논의되고 있는지를 문의) 공관장은 우리 정부의 입장은 김 대통령께서도 언급하신 대로 통일 후에도 동북아시아의 균형 유지를 위해 주한 미군이 주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라면서, 주한 미군 문제와 관련해 한미 간 갈등이 없음을 설명하자 룬데스타드 소장은 얼마 전 윌리엄 코언 미 국방장관도 김 대통령의 언급 내용과 동일한 요지로 얘기한 바 있다고 부언함.”
남북정상회담에는 야당도 긍정적 반응
“사. (룬데스타드 소장은 남북정상회담 결과에 대한 국내 야당의 입장과 관련 특기할 만한 사항이 있는지를 문의) 공관장은 야당도 정상회담의 결과에 대해서는 심각한 반대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으며, 다만 실천 방법론에 대해서는 앞으로 정부와 심도 있는 대화를 통해 입장을 개진하고 협의해 나갈 것이라고 설명하자 룬데스타드 소장은 현시점에서 야당이 문제를 제기할 계제는 아닐 것이라고 이해를 표명함.”
“아, (룬데스타드 소장은 남북정상회담에 응한 김정일의 의도에 대해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는지 여부를 문의) 공관장은 김정일의 의도가 추가적으로 드러난 것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변함.”
노벨상 시상 100주년 기념 다양한 행사 계획
“룬데스타드 소장은 오는 8월6∼13일 오슬로에서 개최되는 세계 역사학 대회에 노벨평화상 수상자 30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며, 내년이 노벨상 시상 100주년이 되는 해이므로 여러 가지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자신의 휴가가 8월 말까지 계속되므로 급한 용무가 있을 경우 사무실을 통해 연락하자고 공관장에게 제안함.”
마지막으로 전문은 “이번 접촉에서 룬데스타드 소장은 지난번과 같은 관심 사안을 표명한 것으로 보아, 남북정상회담의 후속 조치와 그 진전 동향을 팔로우업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고 끝맺고 있다.
이날 박경태는 남북정상회담을 일종의 ‘신화’로 포장하면서 금년도 노벨평화상이 DJ에게 돌아가야 할 당위성을 적극 설파했다. 룬데스타드는 박경태와 장시간 의견을 나누었지만 그가 얻은 정보는 김한정과 노벨상 프로젝트 공작팀이 사전에 면밀히 검토하고 선전용으로 만든 자료들에 있는 내용뿐이었다. 그는 남북정상회담의 이면에 추악한 거래가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면 전혀 눈치채지 못한 척 연기했는지 모른다.⊙
[47] 대선 이기자 김정일 만나려 안달한 DJ
남북정상회담 성사시키려 2년반 동안이나 물심양면 온갖 노력
정주영 회장 소떼 방북이‘물꼬’… 30억 달러 뇌물로 만남 성사
“방금 평양에서 중학생 두 명 도착했다”
1998년 11월28일, 북한의 고려항공 소속 JS-152 여객기가 베이징 국제공항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비행기 문이 열리고 1등석에서 감색 싱글 양복에 더블 브리지 안경을 낀 올백 머리의 50대 중반의 사나이가 천천히 트랩을 내려왔다. 수행원으로 보이는 40대 남자가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그들을 잘 아는 것처럼 보이는 제3의 사나이와 만나 간단한 수인사를 나눈 후 곧장 ‘외교관 전용’이라고 표시된 입국심사대로 이동했다.
두 사람의 여권을 힐긋 훑어본 입국심사관은 곧바로 이들을 통과시켰다. 세 사람이 빠져나온 공항 출입문 앞에는 벤츠 280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다가 이들을 태우고 미끌어지듯 공항을 빠져나갔다. 멀리서 이 광경을 쭉 지켜보고 있던 중국인 공항 관리가 수화기를 들었다.
“방금 막 평양에서 중학생 두 명이 도착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뚜이(알았어).”라는 한마디와 함께 전화가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두 시간쯤 지난 후 이들 두 사람은 베이징의 조양구 용마로 50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특급 호텔 10층 스위트룸에 모습을 나타냈다. 창밖으로 회색빛 스모그에 휩싸인 베이징 거리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젊은 사내가 “손님들이 도착 했습니다”라는 신호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다. 올백 머리가 객실 문을 열어 주자 문 앞에는 작달막한 키에 네모진 얼굴을 한 중장년의 사나이 일행이 서 있었다.
정상회담 앞두고 베이징서 만난 남북 양측 실무진
올백 머리와 네모 얼굴은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 네모 얼굴이 인사말을 건넸다. “텔레비전에서 자주 봬서 그런지 구면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선생님을 잘 압니다.”
그러자 올백 머리가 대답했다. “선생이 나에 대해서는 잘 아는지 모르겠지만 남조선에 대해서는 나만큼 모를 겁니다.” 올백 머리의 한마디 농담으로 어색했던 분위기가 일순 풀어졌다. 그 둘은 다시 한바탕 크게 웃었다.
스파이 영화 같은 위의 장면은 중앙일보의 최원기‧정창현 기자가 2000년 8월 8일 발간한 ‘남북 정상회담 600일’에 김대중(DJ) 정권이 들어선 후 남북 간 막후에서 벌어진 첫 만남을 극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전혀 근거 없이 꾸며낸 얘기는 아닌 것 같아 보인다. 이 책에서 말한 올백 머리는 북한의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 K모 씨였고, 네모 얼굴은 국가정보원의 P모 국장이라고 한다.

▲ 1998년 6월16일 판문점을 통해 현대그룹 정주영명예회장과 함께 북한으로 가는 ‘소떼’를 태운 트럭들이 통일대교 입구에 도열해 있다. 연합뉴스
대선 승리하자마자 김정일 만나려 한 DJ
1997년 12월, DJ는 대선에서 승리하자마자 김정일을 만나려고 무진 애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DJ가 김정일을 만나는 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남북 양측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지만 그들이 실제 얼굴을 맞대기까지는 2년 반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남북 정상이 만나기 전에 양측의 고위 인사가 만나 합의를 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과정에서 양측은 무수한 난관을 만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남북이 휴전 상태라는 점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주한 미군의 주둔 문제는 양측이 합의에 도달하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 됐을 것이다.
1998년 8월 31일, 북한은 대포동 1호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북한의 발사 움직임을 사전에 탐지하지 못한 미국의 정보 실패에 대해 크게 화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계기로 미·북 간 긴장이 급상승했다. 곧이어 미국의 첩보위성이 북한 금창리에서 지하 핵시설을 포착하면서 긴장 수위는 한층 더 높아졌다. 이른바 2차 핵위기였다.
1999년 3월, 북한이 금창리 시설에 대한 미국 측 조사관의 확인을 허용했지만 북핵 문제를 둘러싼 미·북 간의 갈등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남북 대화의 물꼬 튼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
이처럼 남북관계의 진전이 어려운 가운데 1998년 10월 시작된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의 1001마리 ‘소떼 방북’은 일종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어서 현대아산의 금강산 관광사업은 돌파구를 여는 단초가 됐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남북 간 유혈 충돌은 양측의 관계를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었다.
1999년 6월 서해에서 벌어진 제1차 연평해전으로 적어도 40명 이상의 북한군이 인명피해를 입었다. 2000년 1월, 새천년의 시작과 함께 청와대와 국정원은 남북 간 비밀협상을 위해 전열을 재정비했다. 그 전달인 1999년 12월14일, 김한정이 청와대 부속실장으로 임명된 데 이어, 12월23일에는 임동원이 국정원장으로 취임했다.
남북 밀사들 제3국에서 비밀 접촉
이들은 즉시 비밀 책사의 접촉선을 복구했다. 2000년 1월부터 임동원의 오른팔 김보현이 움직였다. 이때부터 국정원 대표와 통일전선부(통전부) 대표가 본격적으로 제3국에서 비밀리에 만나기 시작했다.
이와 별도로 2000년 1월 말∼2월, 김한정이 DJ의 대리인 자격으로 일본 등지에서 김정일의 아들 김정남을 또다른 라인으로 만났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김정일이 모든 일을 크로스체크 하는 습성이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당연한 일이다. 양쪽 밀사들은 김정일을 만족시킬 돈다발의 두께가 어느 정도면 될지에 대해 협상했다.
김정남의 최측근이었던 재미 사업가 윤홍준에 의하면, 이때 김정남은 도쿄에서 “남측이 15억 달러를 들고 오고 있다”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고 한다.
2000년 2월9일, DJ는 일본 도쿄TV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김정일 총비서는 매우 식견 있는 지도자”라는 이례적인 발언을 했다. 이는 적어도 대한민국 대통령이 일본 기자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었다. DJ의 이와 같은 계산된 발언은 김정일에게 모종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로 해석되었다. 모두가 뜬금없는 발언에 의아해했지만 남북 간에 물밑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DJ의 ‘베를린 선언’
2000년 3월10일, DJ는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이른바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다. 북한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베를린 선언이 한국의 동맹국인 미국과 사전 협의를 거치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적잖이 당황하고 화를 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도널드 커크 기자가 쓴 인터내셔널 해럴드 트리뷴 2001년 1월31일 자 기사는 이러한 정황을 기록하고 있다.
DJ가 베를린선언을 하고 있던 시점에 그의 밀사인 박지원 문화부 장관은 송호경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을 만나고 있었다. 2000년 3월9∼11일 박지원은 국정원의 김보현과 서훈을 대동하고 사흘 동안 싱가폴에서 북한 측의 송호경을 상대로 남북정상회담 뒷거래를 시작했다. 이후 그들은 3월17일 상하이, 22일 베이징에서 연쇄 접촉을 가진 후, 2000년 4월8일 베이징에서 만나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최종 합의했다.
이와 같은 박지원과 송호경의 비밀회동은 2003년 특별검사의 조사가 있기 전까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특검은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조건으로 4억5000만 달러가 북한에 송금된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특검은 전체 거래 규모를 덮었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난 후 2020년 7월에야 전체 뒷거래 규모가 밝혀졌다.
박지원 국정원장의 국회 청문회 과정에서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가 두 장짜리 문서를 공개하면서 그 전모가 드러난 것이다. 이 문서에 의하면 남북정상회담을 갖는 조건으로 DJ와 김정일이 합의한 거래액은 30억 달러였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뇌물 액수였다.⊙
[48] “잔금 줄 때까지 회담 연기”… DJ 갖고 논 김정일
국정원 창설 기념 체육대회 중 北서 전문… 긴급 대책회의
평양에선 경호 수칙 깨고 리무진에 김정일과 단둘이 올라
청와대, 남북정상회담 발표 후 준비에 올인
2000년 4월13일, 남북정상회담 개최가 발표된 후 청와대는 두 달 후 평양에서 있을 회담 준비에 올인했다.
이 시기에 노벨 프로젝트팀이 가장 궁금해한 대목은 과연 김정일이 순안공항에 나타나 김대중(DJ)을 직접 맞이할 것인지, 아니면 김영남 노동당 비서가 대신 방북단을 맞이할 것인지 하는 문제였다. 이 의전상의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임동원 국정원장은 5월과 6월 세 차례나 평양을 비밀 방문하여 막후협상을 벌였다.
궁중요리 원하는 김정일 위해 이희호가 나서
이런 가운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정보가 들어왔다. 북측에서 뜬금없이 “조선 왕의 궁중요리를 맛볼 수 있겠는가”고 물어 온 것이다. 궁중요리란 것이 아무 데서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것은 조선 왕실에서 면면히 이어 온 우리의 문화유산 아니었던가. 물론 평양에서는 오래전에 사라진 전통이었다. 김정일의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자신이 조선의 왕이라는 사실을 DJ에게 상기시키고 싶었던 것일까.
김정일의 궁중요리 요구에 영부인인 이희호가 직접 발 벗고 나섰다. 그는 서울의 최고 궁중요리 전문가 중의 한 사람인 한복려 씨를 호출했다. 한복려는 조선 궁중요리 전문가인 인간문화재 황혜성의 딸이었다.
이들은 냉장 트럭 두 대를 동원해 요리 재료를 가득 싣고 판문점을 거쳐 평양으로 수송하는 계획을 마련했다. 한복려와 함께 10명의 요리사도 수행했다. 이들의 이름은 공식 수행원 명단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정상회담 날짜가 코앞에 닥치는데도 북한 측에선 정상회담을 하겠다는 건지 안 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는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그런 와중에도 청와대와 정부는 만사를 제쳐 놓고 정상회담 준비에 몰두했다.
방북 전 리허설에 올인한 DJ와 측근들
6월6일 DJ의 집무실에는 황원탁 외교안보수석‧이기호 경제수석‧김보현 국정원 대북전략국장 등이 모여 정상회담 리허설을 실시했다. ‘남북정상회담 600일’은 이날 리허설이 얼마나 리얼하게 이루어졌는지를 현장감 있게 전달하고 있다.
리허설은 가상의 북측 참석인원을 설정하고 진행됐다. ‘K’라고 지칭된 인물은 김정일의 대역이었다. K는 이전 1994년 김일성 사망 전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던 당시 김일성의 역할을 맡았던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K가 옷차림부터 머리모양까지 김정일과 비슷하게 꾸몄다. 나이만 김정일보다 젊게 보였다. 과거 일본 봉건시대 쇼군을 대신한 ‘카게무샤(影武者‧그림자 무사)’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상황이었다.
또한 통일부 차관은 ‘J’라는 이니셜로 김정일의 오른팔 김용순 역할을 담당했다. 리허설은 긴장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임동원이 가상 회담의 시작을 알렸으며, 모든 참석자들은 리허설 과정에서의 발언과 반응 등을 자세히 메모했다.
DJ와 K 사이 논쟁의 하이라이트는 양측이 서로에게 압력의 수위를 높이는 부분이었다. K가 말했다.
김정일 가상 질문에 DJ 즉석에서 답변 쏟아 내
“우리는 중국을 비롯해 어느 나라와도 동맹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그런데 왜 남조선은 미국과 동맹관계를 유지하며 일본과도 가깝게 지내는가? 게다가 현재 3만7000명에 달하는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나는 소위 ‘햇볕정책’을 믿지 않는다. 당신들은 햇볕정책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우리를 파괴하기 위한 정책이다”
그러자 DJ는 즉각 원고에도 없는 대답을 쏟아 냈다.
“햇볕정책이 당신들을 파괴할 것이라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중국과 베트남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자본주의 국가들이 당신들을 파괴하지는 않는다. 북한만 공산국가가 아니다. 중국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그들은 자본주의의 혜택은 받으면서 체제를 유지하고 국가를 발전시키고 있다. 이제 미국과 일본은 중국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리허설 결과 DJ는 당장 회담을 가져도 좋다는 합격점을 받았다. 그가 설정한 핵심 개념은 평화였다. 한국 측은 회담에 임하는 북측의 핵심 전략이 통일이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임동원의 국정원은 회담을 위한 최종 준비에 여념이 없었지만 문제는 스케줄 확정이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김정일이 마지막 단계까지도 정상회담 개최에 대해 확실한 답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6월13일 DJ가 탑승한 비행기가 이륙할 때까지도 회담 관련 세부 사항이 확정된 것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 김대중(가운데) 대통령 내외와 한광옥(왼쪽) 비서실장이 2000년 6월13일 평양 방문길에 오르기에 앞서 환담을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회담 무기한 연기 통보한 북측
그런데 2000년 6월10일, 김정일로부터 뜻밖의 긴급 메시지가 전달됐다. 평양에서 “회담을 무기한 연기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메시지가 전해진 것이다. 당시 국정원 차장이었던 김은성이 그 후 월간조선과 가진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이 전보를 받고 “당시 국정원 수뇌부는 완전히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날 임동원과 간부들은 국정원 창설기념 체육대회를 참관하고 있었다. 국정원은 매년 6월10일을 창설 기념일로 정해 축하하고 있었다.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가 1961년 6월10일에 탄생했기 때문이다.
김보현 대북전략국장이 긴급 전문을 들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북한에서 보내온 전문에는 “회담을 연기하겠다”는 말에 이어 “나머지 돈이 도착할 때까지”라는 표현이 덧붙어 있었다. 임동원은 즉각 자신의 집무실에 간부들을 소집하여 대책 회의를 했다.
회담 연기는 ‘기술적’ 이유… 北으로의 계좌이체
김은성 차장은 “북측이 안전 및 통신상의 문제를 들어 회담 연기를 요청했다고 발표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임동원은 “좋은 생각”이라며 답했다. 그리고 그날 청와대는 “기술적인 이유로 회담을 하루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이 ‘기술적인’ 문제란 것은 은행 간 계좌이체, 즉 송금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였다. 그리고 6월13일까지 모든 ‘기술적인’ 문제가 해결됐다.
2000년 6월13일, 이날 DJ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새벽 5시에 눈을 떠서 한국 신문들의 헤드라인을 쭉 훑어본 후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오전 8시15분, 그는 청와대 직원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천천히 청와대를 출발했다.
8시56분, 약 1000명의 환영객이 기다리고 있는 서울공항에 도착한 DJ는 130명의 기업인‧정치인‧관료들, 50명의 취재진과 함께 대통령 전용기로 출발해 1시간 7분 후인 오전 10시25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순안공항에 마중 나온 김정일과 포옹… 역사적 순간
평양에 도착할 때까지도 김정일이 공항에 직접 마중을 나올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DJ 일행이 평양에 도착하자 김정일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베이지색 인민복 차림으로 김대중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악수하고 포옹하는 장면은 사진기자들에 의해 촬영된 후 전송되면서 ‘역사적인’ 순간임을 전 세계에 알렸다.
경호원 없이 김정일과 리무진 타고 평양 시내로
공항에서의 환영 행사를 마친 후 10시48분 두 사람은 김일성이 이용하던 링컨 콘티넨탈 리무진에 올라 평양 시내로 이동했다. 그런데 이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DJ와 김정일 두 사람이 함께 탑승한 리무진 승용차에 한국 측 경호 요원이 한 사람도 타지 못했던 것이다. 초보적인 경호 수칙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이리하여 60만 명의 평양 주민이 도열한 가운데 백화원 초대소까지 약 10km의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차 안에서 김정일과 DJ 사이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알 길이 없어졌다. 김정일이 DJ와 완전히 사적인 대화를 나누기 위해 한국 측 경호원의 탑승을 고의로 막았을 것이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두 사람은 어떤 은밀한 대화를 나눴을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난무하지만 확인된 것은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DJ는 이 시간 동안 완전히 김정일의 손아귀 안에 불가항력의 상태로 들어가 있었다는 점이다.⊙
[49] 보여 주기 쇼… 알맹이 없는 DJ·김정일 회담
당시 아·태민주지도자회의 이사장 한승주 “원론적 합의에 그쳐”
황장엽 “원조 받아 내고 南 정신적 무장 해제시킨 김정일이 승자”
평양에서의 환영 행사
2000년 6월13일, 평양 거리를 가득 메운 북한 주민들은 남측 손님을 열렬히 환영했다. 전 세계로 중계된 TV 화면에는 한복을 차려입은 여성들과 깃발을 흔들며 환호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비추어졌다. 노동당 건물‧전쟁 기념관‧만수대 김일성 동상 앞을 지난 차량 행렬은 11시45분 백화원 초대소에 도착했다. 여기서 김정일과 김대중(DJ)은 차에서 내려 고위 관계자들과 포즈를 취하고 사진 촬영을 했다.
먼저 김정일이 비꼬는 듯한 인사말을 던졌다.
“김 대통령이 무시무시한 길을 오신 점에 찬사를 보냅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도 도덕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아주 잘 모실 겁니다.”
이에 DJ는 간략히 대답했다. “난 처음부터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역사를 만들어 갑시다.”
그러자 김정일은 이번 회담의 중요성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세계의 이목이 우리에게 몰려 있습니다. 우리는 ‘왜 김대중이 북한까지 왔으며, 김정일이 왜 그것을 허락했는지’라는 물음에 대해 답을 줘야 합니다.”
백화원 초대소에서의 첫 회담
김정일은 이렇게 막말 결례를 하면서도 공산주의자에게도 도덕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카메라의 사각지대인 비공개 회담에서는 늘상 해오던 대로 공갈과 협박으로 일관했다. 이날 백화원 초대소에서 열린 첫 회담은 김정일의 엄포로 시작부터 얼어붙었다.
“나는 유감스러운 발언으로 회담을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아침 남조선의 TV 뉴스를 봤더니 대학생들이 인공기를 게양했다고 남조선 검찰이 책임자에 대한 사법 처리 방침을 발표했습디다. 우리가 이렇게 회담을 하는 도중에 이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남조선 대통령이 분명히 우리가 상호 존중한다고 했습니다. 난 남조선 대표단이 모두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있어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며 윽박질렀다.
예상치 못한 일격을 받고 DJ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서울 대학가의 시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일이다. 늘상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김정일은 그것을 꼬투리 잡은 것이다. 김정일식 샅바싸움이었다. 사전에 치밀하게 의도하고 준비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회담을 진전시키기 어렵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남조선에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도 만남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모든 것을 이룬 것입니다. 잘 쉬다가 돌아가십시오.”
김정일의 태도는 단호한 것처럼 보였다. DJ는 김정일이 이런 식으로 심리전을 전개해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로써 정상회담은 시작도 해 보기 전에 벼랑 끝으로 내몰린 형국이 됐다.
김정일의 심리전 전개로 당황한 DJ
이렇게 김정일이 떠나 버린 후 DJ는 이희호와 평양에서 썰렁한 분위기에서 첫 번째 점심 식사를 했다. 이어서 오후 3시에 대표단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 김영남의 초청으로 만수대 기념관에서 열린 평양교향악단의 연주와 전통무용 공연을 관람했다.

▲ 김대중(왼쪽 네 번째) 대통령 내외와 남측 대표단이 2000년 6월13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김정일(왼쪽 다섯 번째) 북한 국방 위원장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첫날 만찬 역시 김영남의 주재로 인민문화궁전에서 진행됐다. 하지만 이 두 자리 모두 김정일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처음부터 DJ를 당황하게 만들려는 김정일의 시도는 제대로 먹혀들어 갔다.
이날 밤 DJ와 이희호는 두 사람 모두 곤란한 문제를 겪었다. 백화원의 침실이 너무 추웠지만 이희호는 에어컨 스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급한 김에 이들은 트렁크를 열어 서울에서 가져온 내복을 꺼내 입고 잠을 자야 했다. 그러는 사이 임동원과 김용순은 막다른 길목에 처한 회담을 정상궤도로 올려놓기 위해 밤샘 협상을 이어 갔다. 애초부터 김정일은 회담을 무산시킬 속셈은 아니었다.
이튿날 아침, DJ는 노동당 총비서 김영남과 회담을 가졌다. 그러고 나서 DJ 일행은 옥류관 식당에서 자체적으로 점심 식사를 했다. 이 자리에서 DJ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유명하다는 옥류관 냉면도 사양했다. 최원기의 책에 의하면 이날 DJ의 식사 모습은 모래를 씹는 듯했다고 한다.
점심 식사를 마칠 무렵 마침내 북측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김정일이 오후 2시에 DJ를 만나 회담할 준비가 됐다는 통보였다. 오찬장 분위기는 급반전됐다. 말 그대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상황이 바뀐 것이다. 이들은 김정일이 주무르는 대로 그저 감지덕지 했다.
두 번째 날 사실상의 첫 정상회담
사실상의 정상회담은 백화원에서 이날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시작됐다. 공산주의자들은 회담장에서 시간을 지키지 않는다. 그들 나름의 협상 기술이다. 회담 상대를 무조건 깔보고 무시하는 것이 그들의 회담 기술의 기본이다.
남측에서는 임동원 국정원장‧황원탁 안보수석‧이기호 경제수석이 배석했고, 북측에서는 김용순만 배석했다. 회담의 주요 의제는 남북한의 통일 방안에 관한 것이었다. 북한은 오래전부터 이른바 ‘고려연방제’를 주장해 왔다. 남북한 양측의 총리와 의회가 중앙정부를 수립하는 문제를 논의하자는 것이다. 이에 비해 한국 측이 제안한 통일 방안은 두 개의 한국이 점진적인 통일로 가는 국가 연합 식의 방법이었다.
통일 방안과 함께 주한미군‧비전향 장기수 문제 등 논의
또 다른 주요 의제들은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주한미군의 주둔‧한국의 국가보안법‧한국 내 북한 비전향 장기수 문제‧이산가족 상봉, 그리고 김정일의 한국 답방 등에 관한 것이었다. 또한 양측은 국가보안법 개정을 위한 노력을 약속했으며, 두 달 후 이산가족 상봉 추진과 63명의 비전향 장기수 송환 등에 대해 합의했다. 특히 DJ는 김정일에게 한국 답방을 간곡히 요청했다. 회담 후 DJ는 김정일이 주한미군의 역할을 이해했다고 밝혔다.
3시간 50분 동안의 회담을 마친 후 남북한 대표단은 공동 만찬을 개최했다. 한국 요리사 10명과 북한 요리사 20명이 만찬 준비에 동원됐다. 앞서 북한 측의 요청으로 준비한 조선 궁중요리가 마련됐다. 이날 만찬 자리에서 양측이 공동합의문에 서명할 예정이었으나 합의문 서명을 갑작스럽게 6월15일로 하루 연기되었다. 굳이 하루 늦춘 것은 이날이 14일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4’자가 들어가 불길한 날이라는 것이었다.
셋째 날, 김정일과 송별 오찬 후 서울로 돌아온 DJ
방북 사흘째인 6월15일, DJ는 아침 7시에 일어나 KBS 뉴스를 위성을 통해 시청했다. 이희호와 아침 식사를 마친 후 DJ는 측근들과 약 30분 동안 산책하며 회담 관련 의견을 교환하고 휴식을 취했다.
이날 점심때 김정일은 예정에 없던 송별 오찬 자리를 마련했다. 그런 후 남측 대표단은 오후 4시5분 평양 순안공항을 출발해, 예정보다 10분 늦은 오후 5시24분 서울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로써 DJ와 김한정은 스톨셋 주교가 누차 일러 준 대로 정확하게 연기를 마친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은 DJ의 노벨평화상 프로젝트 과정에서 분명히 하나의 커다란 ‘돌파구’였음에 틀림없다.
노벨평화상 프로젝트의 돌파구가 된 남북정상회담
하지만 DJ와 김정일의 이 만남이 향후 한반도의 평화에 얼마나 실질적으로 기여했는지는 냉정하게 되짚어 봐야 할 문제다. 당시 아‧태민주지도자회의 이사장이었던 한승주는 “합의문 내용이 대부분 원론적인 것들로서 남북정상회담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라는 의미로 볼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남북정상회담의 본질을 황장엽만큼 정확하게 꿰뚫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평소 김정일을 과소평가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김정일은 평화를 약속하고 막대한 경제적 원조를 얻어 냈고, 남한 국민의 정신적인 무장해제를 이끌어 내는 데도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50] 공작팀의 ‘쓰리 쿠션’ 전법… DJ 지시와 김한정 지휘
이산가족 문제에 무심했던 北정권
한반도의 남북전쟁, 6‧25전쟁의 포성이 멈춘 지 반세기가 다 되어 가지만 전쟁이 남긴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남북정상회담의 테이블 위에 남아 있었다.
6.15남북공동선언의 세 번째 항목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규정되어 있다.
“남과 북은 올해 8·15광복절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이는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결여된 정상회담에서 그나마 실질적인 이행 합의 사항이었다. 어쩌면 정상회담의 가장 의미있고 가시적인 성과가 남·북한 간에 이산가족 상봉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남북 양측은 천만 이산가족 상봉 및 남북 화해를 위한 협상을 여러 차례 시도한 적이 있고, 실제 몇 차례 실행된 적도 있었다.
이 문제는 번번이 남북 간의 뜨거운 감자가 되어 왔다. 그동안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이어진 북한의 세습 왕조는 1953년 7월 휴전 이후 남·북한 양쪽으로 갈라진 이산가족의 재결합을 위한 인도적인 노력에는 무성의한 모습을 보여 왔다. 그들은 헤어진 가족들이나 배우자를 영원히 다시 만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
6‧25전쟁은 300만 명 이상의 인명을 앗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남·북한 군인 100만 명·중공군 50만 명·미군 3만3652명 등이 포함됐다.
더욱 비극적인 사실은 이들 사망자의 절반 가까이가 민간인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곧 전장에서의 죽음만큼이나 후방에서의 살육도 많았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이 점이 6‧25전쟁의 특별한 측면이다.
전쟁 통에 헤어진 이산가족도 10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국민의 거의 세 사람 중 한 명꼴이다. 남·북한으로 흩어진 이산가족이 하루속히 재결합하지 못하는 것은 전쟁이 남긴 상흔 가운데 가장 오래가는 아픔이 아닐 수 없다.
한반도의 아픔… 두 부류의 이산가족
남북 이산가족의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해결이 더욱 어려워졌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날부터 남한 사람들은 비무장지대 이북에 있는 가족을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반면 북한 주민들은 이런 문제를 입 밖에 내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들 역시 사람인지라 남한으로 내려간 가족을 그리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당시 생겨난 이산가족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항복 후 1950년 6월 6‧25전쟁 발발 전까지의 시기에 북한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간 사람들, 다른 하나는 이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로, 1950년 여름부터 가을 사이 전쟁이 북한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남쪽으로 피난을 온 사람들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이렇게 남한으로 간 사람들을 모두 반동으로 취급하며 생이별한 가족들이 서로를 그리워하는 외침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1985년 9월 서울과 평양에서 한 차례 짧은 만남의 기회를 가졌던 것을 제외하고 북측은 이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이산가족 중에는 병이 나거나 사망하는 사람이 계속 늘어 갔고, 이들은 서로의 생사조차 모르는 채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는 일이 빠르게 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이산가족 문제에서 의미 있는 결과를 얻는다면 6‧25전쟁 이후 가장 큰 뉴스가 될 만했다.
2000년 8월15일 첫 이산가족 상봉
두 달 전 남북정상회담에서의 합의에 따라 양측은 2000년 8월15일 광복절을 맞아 남한의 이산가족 100명과 북한의 이산가족 100명, 합해서 총 200명이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다.
당초 남한에선 8·15 이산가족 북측 방문단 단장으로 장재언 적십자회 회장이 내려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류미영 천도교 청우당 대표가 단장으로 나타났다.
류미영은 남편인 최덕신과 더불어 한국을 배반한 반역자들이었다. 1921년 서울에서 태어난 류미영은 남편 최덕신 전 외무장관과 함께 1976년 미국으로 떠났다가 1986년 영구 월북했다. 류미영의 아버지 류동열과 최덕신의 아버지 최동오는 둘 다 북한의 ‘애국렬사능’에 안장되어 있었다.
남한에서 천도교 교령을 지냈던 최덕신은 북한에서 천도교 청우당 중앙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89년 그가 사망하자 류미영이 남편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김정일이 이처럼 의외의 인물을 이산가족 대표로 내세운 것은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인도적인 행사마저도 대남 심리전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북측의 작전에서 비롯된 것이다. 류미영 이산가족 대표 단장 파견은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을 우롱하려는 김정일의 악취미의 발로였다. 하지만 김대중(DJ)에게는 김정일의 이런 무례함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의 궁극적 목표는 북한과의 화해가 아니라 노벨평화상 수상이었기 때문이다.
공작팀, 우회 작전으로 노벨위원회 공략
이와 같은 목표 달성을 위해 노벨상 프로젝트팀은 월드뷰 인권재단의 루네 헤르스빅을 그해 8월 서울로 다시 초청했다. 이제 노벨상 공작이 막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주요 타겟들에 대한 공작이 결정적인 순간에 도달한 때였다. 이번에 DJ의 사냥 타겟 조준경 안에는 노르웨이 기독민주당 대표를 지낸 본데빅 전 노르웨이 총리가 들어 있었다. 그는 2000년 3월 총리직에서 밀려난 후 오슬로 평화 인권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었다.
본데빅 전 총리는 노르웨이의 작곡가 에릭 힐스타드와 루네 헤르스빅을 동반했다.
노벨상 프로젝트팀은 본데빅 일행을 공항 귀빈실로 모시는 등 한국 땅에 내리자마자 극진하게 환대했다. 이들이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전 국정원 차장 라종일과 전 국회의원이자 아시아태평양민주지도자회의(FDL-AP) 사무총장인 김상우가 공항 영접을 나갔다.
노벨상 공작팀은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나 노벨연구소 측 인사들을 직접 끌어들일 경우의 위험성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럴 경우 노벨상 수상을 위해 벌이는 일이라는 것이 너무 ‘티’가 나기 때문이다. 대신 이들은 한 다리 건너의 인물들을 초청해 최고의 의전을 제공함으로써 자신들의 속셈이 간접적으로 전달되도록 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이른바 ‘쓰리 쿠션’ 전법이었다. 본데빅의 방한 초청도 그런 목적에서였다. 물론 이 작전의 배후에는 DJ의 지시와 김한정이 지휘가 있었다.
이들의 한국 방문 일정을 살펴보면 첫째 날 청와대 주최 만찬을 신라호텔에서 갖고, 둘째 날은 국정원장 주최 조찬 후 점심은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만나 함께하도록 했다. 오후에는 코엑스 이산가족 상봉 행사장을 방문하고 아태민주지도자회의 주최 만찬에 참석했다. 마지막 날에는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주최하는 조찬에 이어 신라호텔에서 원광대 명예박사 수여식을 마련했다.
정부 측이 아닌 아태민주지도자 회의가 일정을 주관하도록 함으로써 청와대의 노벨상 공작이 드러나지 않도록 했다. 국정원에서 노르웨이 데스크를 담당하고 있던 박노용이 본데빅의 안내를 맡았다. 박노용은 1996년 8월부터 2000년 3월까지 3년여에 걸쳐 오슬로에서 근무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