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칼럼 광운대 교수 중앙일보 2024

01.25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태블릿으로 클라우드로부터 데이터를 다운로드받는 최초의 사례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오래전에 일어났다. 구약성서에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석판에 신의 계명을 내려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받은 계명 중 하나가 이것이다.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이 계명을 엄수(嚴守)하는 이들이 이 나라에도 있다. 국민의힘에 모여 있다. ‘KKH’(고대 근동에선 자음만 표기했다)라는 이름이 호명되면, 벌집을 쑤신 듯 난리가 난다. 바로 얼마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고, 그 호들갑을 우리는 라이브로 지켜봐야 했다.
배우자 문제 감싸기 급급 친윤들
결국 공천 겨냥한 움직임 아닌가
정권 재창출이 곧 대통령의 성공
리스크 적당히 덮고 갈 수는 없어
여사님을 ‘마리 앙투아네트’에 비유 좀 하면 안 되는가?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들은 자신이 선출한 대통령을 ‘히틀러’라 불러도 된다. 그런데 선출되지도 않은 여사의 이름만 나오면 단체로 경기를 일으킨다. 대체 왜들 그러는가?
요 며칠간의 사건은 그동안 항간에서 의심하고 우려했던 여사의 ‘권력화’가 실체가 전혀 없지는 않다는 불편한 사실을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대통령도, 대통령실도, 당의 대표 역할을 하는 이도 여사의 권력을 견제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얘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동훈 비대위원장을 내치려는 시도가 불발로 끝났다는 것. 그동안 그를 ‘윤석열 아바타’, ‘X세대 윤석열’이라 비난해 왔던 민주당은 머쓱해졌다. 아울러 문제가 된 수직적 당정 관계를 어느 정도 수평화한 것도 ‘성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로써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여사님은 여전히 ‘절대 사과는 못 한다’는 입장이시고, 친윤 의원들은 외려 여사님을 모독한 김경율 비대위원을 내치라고 아우성이다. 한 비대위원장이 거둔 1승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다.
여사가 사과를 거부하고 김 위원을 내치면 그 성과마저 무로 돌아간다. 이번 사건은 전초전에 불과하고, 본격적인 갈등은 공천 과정에서 터져 나올 게다. 성공하려면 한 비대위원장이 공천을 주도해야 하나, 그분들이 이를 좌시하겠는가.
대통령은 당을 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래서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표를 몰아내고, 지지율 2%짜리 후보를 새 대표 자리에 앉히고, 그러다 당이 망가지자 최측근을 비대위원장으로 데려왔다가 그마저 말을 안 듣는다고 내치려 한 것 아닌가.
이번 일을 키우는 데에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대통령의 메신저’를 자처하는 이들이다. 지금이 무슨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이 따로 존재하던 조선 시대인가? 한 비대위원장의 말대로 “당은 당의 일을 하고, 정부는 정부의 일을 하면 된다.”
‘대통령의 사람’ 혹은 ‘여사님의 사람’을 자처하는 이들이 있는 모양이다. 대통령은 이들이야말로 당을 망치고, 결국 자신을 실패한 대통령으로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대통령직의 성공 여부는 결국 정권 재창출에 달린 것이다.
여사님의 사람들은 외친다. ‘여사님은 공작정치의 희생자다.’ 피해자라서 사과를 할 수 없단다. 그래, 여사님은 공작정치의 피해자가 맞다. 하지만 300만 원짜리 백을 왜 받는가? 남편이 대통령이 아니라 일개 검사라도 받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여사님을 정말로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이들은 ‘권력의 크기는 여사님과의 거리에 반비례하다’는 법칙에 따라, 다른 이들은 ‘여사님 심기를 거스르면 공천을 못 받는다’는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이른바 ‘친윤’이 자기를 영원히 지켜줄 거라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게다. 닭이 한번 울기도 전에 배반할 이들이 그들이다. 탄핵국면에서 박 대통령의 “진실한 사람들”, 그 많던 ‘진박’은 다 어디에 있었던가. 대통령의 유일한 보험은 정권 재창출이다.
고로 한동훈 비대위의 승리가 대통령의 승리라 생각해야 한다. 예수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돌리라 하셨다. 즉, 당무는 비대위원장에게 맡기고, 대통령실이 이른바 ‘메신저’를 통해 공천에 개입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
그냥 당이 당의 일을 하고, 정부가 정부의 일을 하면 된다. 지금 이 위기도 이 상식을 깨뜨린 결과로 발생한 게 아닌가. 억지로 제 사람들 심으려 해봤자 위기만 커질 뿐이다. 일단 비대위원장에 앉혔으면 그에게 모든 걸 맡겨야 한다.
친윤들의 희망과는 달리 ‘KKH 리스크’는 적당히 덮고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번 사태로 국민들의 의구심은 외려 더 커진 상태. 그 우려와 의심을 그 일을 처리하는 데서 한동훈 비대위의 자율성을 폭넓게 인정해 줘야 한다.
대통령이 영부인을 일방적으로 싸고도는 모습도 그만 보고 싶다. 국민은 여사라는 리스크 덩어리를 공적 감시 아래 두고 싶어 한다. 대통령의 헌법적 책무는 국민을 수호하는 것이지, 국민의 뜻을 거슬러 아내를 수호하는 것이 아니다.⊙
02.22 방심위인가, 국보위인가
정치인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다. 언론을 장악하면 여론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 이 생각의 바탕엔 국민의 의식이 언론이 먹여주는 밥을 그저 받아먹기만 하는 구강기 아동 수준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근데 국민은 최소한 너희들보다는 똑똑하다. 정말 국민이 그런 수동적 수용자에 불과하다면 지난 선거들의 결과는 설명이 안 될 게다. KBS니 MBC니 TBS니 모두 민주당 정권이 장악해 노골적인 편파방송을 했는데, 왜 민주당 정권이 큰 선거에서 연거푸 세 번이나 패배를 했겠는가?
1심도 안 끝난 ‘바이든, 날리면’
언론사 윽박질러 반성문 받아내
과잉충성은 정권에 부담만 줄 뿐
지난 정권이 밟았던 전철 그대로
사실 민주당의 패배에는 민주당에 편향된 당파적 언론들의 공이 컸다. 민주당에 빨간 불이 들어왔는데도 이들 언론이 이 경고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민주당 편든 결과, 민주당이 자기들만의 세계에 갇혀 민심의 바다로부터 멀어진 게 아닌가.
뭔가를 보고 배운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인 모양이다. 지난 정권이 밟았던 전철을, 지금은 국민의힘 정권이 그대로 따라 밟고 있다. 방식도 매우 조악하다. ‘방심위’나 ‘선방위’의 심의를 들여다보면 그 조악함이 국보위의 언론검열을 연상시킨다. ‘국회의원 수를 줄이겠다’는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공약을 비판했다가 나도 심의에 걸렸다. ‘국회의원이 싫은가. 그럼 간단하다. 국민의힘부터 해산하면 된다.’ 정치혐오에 기댄 실없는 공약을 비판하느라 과장법 좀 썼더니 징계의 사유가 된단다.
징계의 근거도 황당하다. 의원 정수 축소는 ‘국민의 60% 이상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 아니, 그러니까 공약으로 내걸었겠지. 나는 국민의 60% 이상이 지지한다는 그 공약을 비판한 것이다. 40% 이하 국민은 입 다물고 살아야 하나?
또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대남 강경 발언에 대해 “윤석열 정권이 북한에 명분을 준 것”, “자기들이 주적이라고 먼저 규정한 것”이라 평한 것도 문제 삼았다. 이것은 그냥 개인의 의견인데, 정부의 공식 입장에서 벗어나는 의견은 징계를 받는다. 김정은이 “우리의 주적은 남한이 아니라 전쟁”이라고 점잖 떨고 있을 때 괜히 국방백서에 북한을 ‘주적’이라 적어넣음으로써 외려 남한이 호전적이라는 전도된 인상을 주는 게 잘하는 짓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9·19 합의도 우리가 먼저 폐기했다’는 발언도 문제로 삼는다. 먼저 북한이 3000여회 위반을 했다나? 위반과 파기는 다르다. 합의가 유지되고 있으니 위반도 하는 거지. 정 거슬리면 우리도 같은 강도로 위반하면 될 일. 선제적으로 합의의 (부분)정지를 선언할 일은 아니다.
왜 쓸데없이 그자들에게 명분을 주느냐는 비판. 정부의 공식입장과 다른 생각을 말하면 안 되는가? 내가 내 의견을 말하는 게 징계사유가 되어야 하는가? ‘자유’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대통령의 정부에서 꼭 이래야만 하는가? 아무튼 이게 조국 전 장관에게 “진보를 참칭하는 친검찰 친윤석열 인사”라는 소리를 듣고 사는 사람이 이 정권 아래서 겪은 일이다. 그러니 나보다 민주당에 가까운 다른 방송 패널들은 이보다 험한 일들을 겪고 있다고 들었다.
‘바이든, 날리면’ 소동도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그게 굳이 법정까지 갈 일인가? 게다가 왜 이렇게 급한가. 이제 1심이 끝났을 뿐인데, 그걸 징계의 근거로 삼는다. 그래서 징계를 내렸는데 상급심에서 판결이 뒤집히면 어쩔 건가?
MBC는 그렇다 쳐도 그걸 받아서 보도한 매체들까지 줄징계를 하고, 심지어 사실관계가 확정되지도 않았는데도 힘으로 윽박질러 언론사들로부터 반성문(?)을 받아낸다. 완장들의 이 과잉 충성. 여기가 북한도 아니고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아마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게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도움이 된다고 믿을 게다. 김어준도, MBC도, 그 밖의 친민주당 매체들도 자기들의 편파보도가 문재인 정권의 국정운영과 정권 재창출에 도움이 될 거라고 굳게 믿지 않았을까? 그런데 결과는?
국민은 언론에서 불러주는 대로 받아먹기만 하는 바보가 아니다. 언론을 장악해 ‘땡윤’ 뉴스를 국민의 눈과 귀에 쏟아대면 그들이 제 편이 될 거라는 생각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완장질은 쓸데없이 정권에 부정적 이미지만 덧씌울 뿐이다.
얼마 전에 방심위에서 4개 방송사에 모두 1억20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한 적 있다. 그때 그 민원을 넣은 이들 중엔 방심위원장님의 아들, 동생 부부, 처제와 동서, 조카가 끼어 있었다. 방심위가 위원장님의 ‘가업(家業)’인 모양이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징계를 받은 그 방송에서 나는 민주당을 향해 그보다 몇 배 더 표독한 표현을 사용해 왔다. 근데 유감스럽게도 그 발언들은 한 번도 심의에 오르지 못했다. 방심위, 선방위에서 거기에도 관심 좀 가져 주셨으면 좋겠다.⊙
03.21 ‘강간통념’을 활용하라는 민주 변호사\
박용진 의원이 결국 경선에서 패했다. 정봉주 후보가 낙마하고 박 후보에 대한 동정여론이 높아지자, 30% 감산 룰만으로는 불안했는지, 여성·신인 가산점 25%를 받을 후보를 경쟁자로 내보낸 것이다. 박용진만은 기필코 잘라내겠다는 당 대표의 강력한 의지가 읽힌다.
그렇게 공천장을 받은 조수진 변호사.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서 사무총장까지 지낸 분이란다. ‘민변’이라 하면 돈 없는 사람, 빽 없는 사람, 억울한 피해자를 돕는 변호사들의 모임으로 아는데, 이분은 아주 독특하게 성폭행 가해자들을 변호해 온 모양이다. 물론 가해자도 법률적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고, 변호사가 가해자의 변호를 맡을 수가 있다. 하지만 어차피 성폭행 가해자의 죄를 덜어주는 것으로 먹고 살 거라면, 최소한 이마에 훈장처럼 써 붙이고 다니는 그 ‘민주’라는 말은 떼고 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
박용진 꺾고 민주당 공천 조수진
성폭력 혐의자들 위한 조언 논란
‘민주 인사’의 존재론적 분열 반영
전쟁 된 정치판, 실종된 윤리감각
술에 취해 잠든 여성을 성폭행한 남성, 한 여성을 함께 성폭행한 두 남성, 고등학교 여학생을 추행한 강사. 그가 변호한 성폭력 가해자 명단에는 여성 208명의 몰카를 찍은 남자, 심지어 10세 여아의 성 착취물을 제작하고 학대한 자도 끼어 있다. 이 정도면 가히 ‘성폭행 가해자 전문 변호사’라 해도 되지 않을까? 농담이 아니라, 조 변호사는 작년 9월 제 블로그에 10세 여아를 성 착취한 그 남자의 변호를 맡아 집행유예를 받아냈다고 자랑하는 글을 올렸다. 고객 유치를 위해 홍보까지 한 것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문제는 그 변론의 방식이다. 그가 제 블로그에 올린 글(‘성범죄, 국민참여재판이 유리하다?’)에는 성범죄 피의자들에게 던지는 해괴한 조언이 등장한다. 배심원들의 ‘강간통념’을 잘 활용하라는 것이다.
‘강간통념’이란 “여성이 거절 의사를 표현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관계를 원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는 통념”을 말한다. 여성들이 성폭행을 당해도 신고를 못 하고, 설사 신고를 해도 종종 무고로 몰리는 이유가 바로 이 강간통념 때문이라 들었다.
조 변호사 역시 이를 모르지 않는다. 그는 강간통념이 “성범죄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위험한 생각이기에 바로잡아야 한다”며 건전한 민주시민의 양식을 과시한다. 문제는 다음이다. 이어서 그는 재판을 앞둔 성폭력 혐의자들을 향해 이렇게 조언한다.
“자신이 피의자 입장이고 배심원의 판결을 통해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정도의 구체적인 증거자료와 상황이 있다면 이를 올바로 활용할 수 있다.” 한마디로 배심원들은 대개 강간통념을 갖고 있으니, 이를 재판에 잘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그의 인격은 분열한다.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로서 조수진은 강간통념이라는 ‘위험한 생각’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폭행 피의자들 시장을 노리는 개인 사업자로서 조수진은 그들에게 이 위험한 생각을 활용하라고 권한다.
이 ‘분열’은 조수진이라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이 존재론적 분열은 한때 나름 순수함을 가지고 ‘민주화’를 위해 싸웠을지도 모를 그 사람들이 지금 이 사회에서 처한 어떤 보편적 상황의 한 사례일 뿐이다. 또 다른 대표적 사례를 우린 이미 겪지 않았던가. 온갖 문서들을 조작해 딸을 부정 입학시킨 그 사람이 ‘입시기회의 평등’을 공약으로 내건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게 ‘모순’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렇게 망가진 두뇌의 소유자들이 누구를 심판하겠다고 기세를 올리니, 참 어지러운 세상이다.
그 못지않게 해괴한 모순이 여기에도 있다. 조수진 변호사가 박용진 후보를 제치고 공천장을 받은 것은 25%의 가산점 덕분. ‘여성’의 권익을 위한 가산점이, 외려 성폭력과 성 착취를 자행한 남성들에게 강간통념을 활용하라고 권한 이에게 돌아간 것이다.
옛날엔 여성단체에서 비판하면 듣는 척이라도 했다. 그런데 이젠 최소한의 거름 장치마저 사라져 버린 느낌이다. 왜 그럴까? 막 나가도 잠깐 출렁일 뿐 지지율엔 별 영향이 없기 때문이다. 그새 유권자들마저 윤리적 이슈에 둔감해진 것이다. 하긴, 여생을 감옥에서 보낼지도 모를 인물이 제1야당의 대표가 되고, 법원에서 2년 형을 받은 인물이 제 이름을 딴 정당의 수령이 되고, 이미 구속되어 감옥에 들어앉은 인물이 창당하는 ‘아사리판’에, 법보다 약한 윤리나 도덕을 따져서 뭐하겠는가.
정치는 전쟁이 되었다. 전장에는 원래 법도 없고, 윤리도 없고, 도덕도 없는 법이다. 그곳에 필요한 덕목은 오직 하나, 불타는 적개심뿐. 그것이 정치공동체 내에서 제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갖춰야 할 유일한 시민적 덕목이 되었다. 이 도덕적 둔감함 못지않게 답답한 것은 그 불타는 적개심에 기름이나 부어대는 대통령실의 정치적 둔감함이다.⊙
04.18 복화술사의 인형들
크게 패했으면 일단 반성부터 해야 하는데 아직 정신들 못 차린 것 같다. 집권 여당이 총선에 패하는 것 자체가 드문 일지만, 그것도 이렇게 압도적인 차이로 패한 적이 일찍이 있었던가? 그런데도 그 당에서 들려오는 소리라곤 ‘변명’이나 ‘남 탓’뿐이다.
친윤계의 변명부터 들어 보자. 여의도연구원장을 지낸 박수영 의원의 말이다. “참패는 했지만 4년 전보다 의석은 5석이 늘었고 득표율 격차는 5.4%로 줄었다. 뚜벅뚜벅 전략, 가랑비 전략으로 3%만 가져오면 대선에 이긴다.” 아예 현실을 부정하기로 한 모양이다.
총선 참패의 최대 원인은 대통령
그런데도 여당선 변명·남탓 행태
대통령 속내 대변하는 인형인가
젊은 정치인에게 희망 걸 수밖에
4년 전 선거는 ‘K 방역’의 성과로 민주당과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이 하늘을 찌를 때. 그때 국민의힘은 야당이었고, 탄핵 여파로 당이 거의 궤멸한 상태였다. 대선에서 이겨 집권여당 행세하는 지금의 성적표를 왜 그 시절의 것과 비교하는지. 지금 필요한 게 위안인가?
그의 바람과 달리 유권자의 인구학적 지형은 여당에 불리하다. 여당 표밭인 노년층에 586세대가 대거 유입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60대쯤 되면 보수화 경향을 보였으나, 이 세대는 늙어서도 젊은 시절의 정치성향을 유지하는 ‘코호트’ 효과를 드러내고 있다.
이어서 남 탓.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총선 과정에서 대선 행보를 했다. 윤 대통령의 대선 조직을 반윤, 친한 조직으로 바꿨다.” ‘대통령의 멘토’라 불리는 이(신평 변호사)의 말이라 그런가? 문득 이 얼빠진 소리가 어쩌면 대통령의 속내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느낌이 든다.
이번 선거에서 대통령이 야당 선거대책위원장 노릇을 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디올백 담화, 이종섭 출국, 황상무 망언, 의사 파업 담화 등 중요한 고비마다 국민의 염장을 제대로 질러댐으로써 야당 압승의 결정적 기여를 한 게 바로 대통령 아니었던가.
마치 모래에 머리를 박은 타조를 보는 듯하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총선 참패의 책임자로 응답자의 68.0%가 윤석열 대통령을 지목했고,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이라는 응답은 10.0%에 머물렀다. 국민의힘 지지층도 윤 책임 70.4%, 한 책임은 11.3%라 대답했다.
“전략도 없고 메시지도 없고 오로지 철부지 정치 초년생 하나가 셀카나 찍으면서 나 홀로 대권 놀이나 한 것이다.” 홍준표 대구시장의 말이다. 이는 할 수도 있는 비판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본인에게 다가올 특검에게 대처할 일이고, 우리 당엔 얼씬거리지 말라.”
정치는 수십 년 하신 분이 설마 참패의 원인이 대통령에 있다는, 온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을 모르겠는가? 다 알면서 저러는 거다. 한마디로 제 당의 참혹한 패배 속에서 반성은커녕 그저 차기 대권 레이스의 막강한 경쟁자를 제거할 기회만 보고 있는 것이다.
참패의 근본 책임자(대통령)에게는 찍소리 못하면서, 머리 박은 타조 무리의 정서에 편승해 애먼 사람을 물어대는 것은 그 때문일 게다. “문재인 믿고 그 사냥개가 되어 우리를 그렇게 모질게 짓밟던 사람”이라고, 그런데 그 사냥개들의 수괴가 바로 윤 대통령 아니었던가?
이들의 공통점은 입술을 움직이면 안 되는 대통령 대신 그의 속내를 말해주는 인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변하지 않는 한 그 어떤 수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 그게 인형들과 그 뒤의 복화술사가 애써 외면하려 하는, 이번 선거의 메시지다.
패배의 ‘원인’이 어디에 있든 어차피 패배의 ‘책임’은 선거를 이끌었던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지는 것이다. 본인도 직을 사퇴하며 깔끔하게 책임을 온전히 자신에게 돌렸다. 이 불필요한 희생양 제의는 참패의 원인을 감추어 패배를 연장할 뿐이다.
일찍 끌려 나오는 바람에 그는 많은 것을 잃었다. 막판 과격한 표현의 남발로 도회적 세련미와 합리적 보수의 이미지를 침식당했고, 대통령과 충분히 차별화하지 못해 ‘검사 정권’ 프레임에 함께 묶여 버렸다. 이 부분은 그에게 두고두고 부담으로 남을 것이다.
그나마 이번 선거가 보수에 남긴 희망이 있다면 김재섭, 김용태, 이준석 같은 30대 후보의 당선. 이들은 금배지 달려고 누구처럼 소신을 굽히지도, 최고 권력자에게 아부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보수는 부분적으로나마 세대교체에 성공했다는 얘기다.
이승만 기념관이나 짓고, 박정희 동상이나 세우는 것은 정치적 상상력의 빈곤을 스스로 자백하는 것이다. 민주화 서사가 ‘과거’라면 반공과 산업화 서사는 ‘대과거’. 하류의 물을 상류로 퍼 올려 되흘리는 게 ‘미래’일 수는 없지 않은가.
한국 정치의 미래는 어차피 젊은 세대에게 달려 있다. 구원의 전망을 잃어버린 두 진영의 앞날은, 어느 쪽에서 먼저 시효가 다한 구약을 대체할 정치적 신약을 쓰느냐에 달려 있다. 이들 젊은 당선자들 덕에 적어도 그 경쟁에선 보수가 반걸음 앞섰다.⊙
05.16 이재명 유일 체제와 여의도 대통령
“이 대표는 말도 못 꺼내게 손사래를 치고 있지만, 제가 당대표 연임 추대 분위기 조성에 앞장서겠으며 이재명 대표를 설득하고 권유하는 데 총대를 멜 생각이다.” 민주당 정청래 최고위원의 말이다. 어차피 다 예정된 절차라 새로울 거 없는 얘기다.
“이 대표는 말도 못 꺼내게 손사래를 치고 있지만”이라는 말이 흥미롭다. 그가 연임하리라는 것은 대선 패배에도 불구하고 당 대표 선거에 나설 때부터 이미 예정된 것 아닌가. 밖에선 다 아는데 민주당 사람들만 모르나 보다. 대내비인가?
공천 거치면서 당내 다양성 실종
선거 사라지고 추대 목소리만 커
‘민주적 통제’ 핑계 삼권분리 위협
의회·정당 민주주의 죽음 불러와
바람잡이로 나서는 것으로 모자라, 구겨진 대표님의 체면까지 알아서 펴드리는 저 깨알 같은 아부 정신. 어차피 이재명은 사법리스크로 낙마할 가능성이 높으니, 개딸들이 보는 앞에서 미리 후계자 자리에 침 발라 놓으려는 것이다. 정 최고위원이 동을 뜨자 지도부 전체가 앞다투어 추대 운동에 나섰다. “이재명 대표께서 개혁 국회를 위해 연임을 결단해 주십시오.” 이 대표 추대 운동이나, 1950년대 이 박사 추대 운동이나 본질은 동일하지 않겠는가.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연안파, 소련파, 갑산파 숙청으로 김일성 유일 체제가 확립된 것처럼, 민주당에선 공천이라는 이름의 숙청을 통해 이재명 유일 체제가 완성됐다. 그 결과 ‘지도자와 대중의 직접적 결합’이라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상한 정당이 탄생했다. 심지어 김용민 같은 강성조차도 결이 다른 목소리를 냈다고 ‘수박’ 취급을 받는다. ‘대표직을 내려놓는 게 대선 레이스에 유리하다’는 의견조차 허용이 안 되는 것이다. 안쓰럽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다 당신들이 만들어낸 천국인 것을.
등질적 집단엔 다양성이 없고, 다양성이 없으면 ‘고를’ 일도 없다. 그래서 민주당에서 ‘선거’가 사라진 것이다. 원내대표 선거처럼 국회의장이나 당대표 선거도 사실상 한 사람을 추대하는 찬반투표로 치러질 것이다. 어디 무서워서 출마하겠는가?
이 모든 게 그 잘난 ‘당원 민주주의’의 결과라니 어쩌겠는가. 문제는 이 민주주의의 자살이 민주당 내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원래 집단이란 안으로 동질성이 강해질수록 밖으로 배타성도 강해지는 법. 파괴의 에너지는 바로 밖을 향하게 된다.
민주당 국회의장 후보들은 국회의장에게 부여된 ‘중립의 의무’를 부정하는 발언을 경쟁적으로 쏟아냈다. ‘민의의 전당’이어야 할 국회를 한 당파의 ‘투쟁 무기’로 바꾸어 놓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이들이 공격하는 것은 의회민주주의 제도 자체다.
입법부의 본질을 변질시키는 것으론 만족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대장동 변호사로 이번에 당선된 이 대표의 측근은 “사법부 개혁을 넘어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압도적 의석의 힘으로 사법부마저 자기들의 통제하에 놓겠다는 얘기다.
이게 어디 한 사람의 개인적 일탈이겠는가. 민주당에선 이화영의 거짓말을 공식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6월 7일 선고를 앞두고 (이 대표 구속영장 기각 때 이미 인정된) 이화영 진술의 임의성을 인정하지 말라고 판사에게 요란한 압력을 넣고 있는 것이다. ‘민주적 통제’란 말속엔 사법부만은 자기들 뜻대로 안 된다는 답답함이 담겨 있다. 그게 삼권분립이다. ‘사법에 대한 민주적 통제’란 곧 사법에 대한 민주당의 통제를 말한다. 그게 두 야당 대표를 비롯한 부패한 정치인들의 꿈이기도 하다.
입법부와 사법부 다음의 목표는 행정부다. 민주당에서는 22대 국회가 열리면 이재명 대표의 공약인 전 국민 25만 원 지급을 행정부나 사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처분적 법률’의 형태로 추진하기로 했다. 이젠 행정부의 권한까지 넘보는 것이다.
헌법상 예산편성권은 행정부에 있기에 이 법률은 위헌 소지가 크다. 통상 이런 포퓰리즘 공약은 선거 때 재미 좀 보다가 선거 후엔 없었던 일로 하기 마련. 그런데 선거도 끝났는데 위헌의 위험까지 무릅써가며 밀어붙이는 이유는 뭘까? 바로 지도자의 트레이드마크 공약이기 때문일 게다. 입법, 사법, 행정의 3부를 겨냥한 이 모든 월권의 중심에는 이재명 대표가 있다. 대선이 아직 3년 남았는데 민주당 사람들의 머릿속에선 이미 그가 대통령으로 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 것이다.
국회의장 후보로 출마했던 민주당 조정식 의원은 아예 헌법을 고쳐 대통령 거부권에 대한 재의표결 의석수를 180석으로 하향하겠노라고 공약한 바 있다. 그 경우 정말 이 대표가 비유가 아닌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여의도 대통령’이 될 것이다. 민주당 내에서 사실상 ‘선거’라는 제도가 사라진 것은 정당 민주주의의 죽음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런 병적 현상이 일개 정당을 넘어 국가의 시스템까지 감염시키고 있다는 데에 있다. 물론 과장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 경향은 분명 ‘위험’하다.⊙
06.13 대표 결사옹위 정신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가 법정에서 9년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그에게 중형을 선고하며 판사는 그를 이렇게 꾸짖었다. “수사기관에서 법정에 이르기까지 범행 일체를 부인하고 비합리적인 변명으로 일관해 엄한 처벌이 불가피하다.”
원래 이는 그의 뜻이 아니었다. 처음에 그는 사실을 고백하고 재판에 협조함으로써 형량을 줄이는 합리적 선택을 했었다. 부인이 법정에서 난리를 치며 변호인을 해고했을 때에도 여전히 자신이 선임한 변호인에 대한 신뢰를 표명한 바 있다. 그랬던 그가 부인의 등쌀에 시달린 후 자신의 검찰 진술을 번복했다. 부인이 남편에게 사법적 자해를 강요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솔직히 소름이 쫙 끼쳤다. 아무리 정치에 환장해도 그렇지, 어떻게 당 대표를 구하려 제 남편을 희생시키나?
이재명 지키려 진술 번복한 이화영
당대표 위해 사법적 자해 저지른 셈
민주당은 대표 일인의 정당 돼버려
방탄 입법에 국가시스템까지 위협
이상한 재판이다. 변호인들 역시 피고인 이화영이 아니라 그 재판에 기소되지도 않은 이재명을 변호했다. 왜 그럴까? 이화영 측 김현철 변호사의 말이다. “이화영에 유죄가 선고된다면 이재명의 유죄를 추정하는 재판문서로 작용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게 이화영 재판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대표는 향후 대선에 출마할 것으로 예견된다. 유죄를 판결할 경우 공범으로 기재된 이재명의 유죄를 설시하려는 이유를 정확히 밝혀야 한다.” 변호인들의 관심은 의뢰인이 아닌 이재명에 가 있다.
‘이화영이 유죄면 이재명도 유죄다.’ 이는 이화영 변호인 측도 인정한다. 그런데 법원에서 이화영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이 대표 역시 법정에서 무죄를 받기 어려워졌다는 얘기. 그렇다면 남은 것은 재판을 법정 밖으로 가져 나가는 것뿐.
민주당에선 대표 한 사람에 맞추어 당권 대권 분리를 명시한 당헌 25조에 예외규정을 첨가했다. ‘중대한 사유가 있을 경우.’ 뭐가 중대한 사유인지는 누가 규정하나? 당무회의에서 결정한다. 근데 그 당무회의의 장이 바로 이 대표다. ‘기소 시 직무정지’ 내용을 담은 당헌 80조는 아예 삭제했다. 이번 판결로 다시 기소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번 기소는 사실상 법원에서 결정한 것이다. 그러니 지난번처럼 예외규정을 이용해 ‘검찰의 정치적 기소’라는 변명으로 피해 가기도 뭐하잖은가.
한때의 자유주의 정당이 이렇게 대표 일인의 정당이 되었다. 대표를 결사옹위하리라, 개딸 백만이 총폭탄 되리라, 이재명 대표 목숨으로 사수하리라. 특히 이화영 재판은 ‘자폭용사가 되자’는, 어느 전체주의 국가의 섬뜩한 구호를 연상시킨다.
문제는 이 불순한 움직임이 그 당만이 아니라 국가 시스템까지 망가뜨린다는 것이다. 기소검사 탄핵으로 수사를 방해하고, 그걸로도 모자랐던지 아예 ‘법왜곡죄’를 만든단다. 이 대표에게 유죄를 선고하면 판사까지 처벌하겠다는 겁박이다.
이 모든 광기에 나름 합리성이 있다면, 어차피 그들에게는 이재명의 대통령 당선이 이 모든 리스크의 종합적 해법이라는 것이다. 지금 재판을 받는 측근들은 중형을 피하지 못할 터, 대통령이 된 그의 사면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이재명 대표와 조국 대표의 사법 리스크 역시 차례로 대통령이 되어 서로 사면해주면 풀릴 일. 그러니 이 대표를 대선에 출마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그게 이 대표가 사는 길이요, 또한 당이 사는 길이 아닌가.
이 야무진 꿈이 실현되려면 재판을 질질 끌거나, 아니면 대선을 앞당겨야 한다. 그래서 증거 부동의하고 수백의 증인을 신청하는 식으로 재판을 지연시키는 한편, 대선을 앞당기기 위해 국회에서 온갖 특검법을 남발하는 것이다. 물론 특검을 통해 대통령 탄핵으로 갈 사유와 명분을 쌓고, 대통령이 특검법을 거부하면 그 또한 ‘탄핵사유’로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달콤한(?) 회유도 있다. 대통령 스스로 ‘임기단축 개헌’으로 업적을 남기고 명예롭게 물러나라는 것이다.
똥줄이 타는 것은 이해 못 할 일이 아니나, 인생 잘못 살아 개인적 실존의 위기에 처한 범죄 혐의자들의 허황한 꿈이 우리가 어렵게 발전시켜 온 민주주의 시스템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다수당이 대표 일인의 사당이 되면 국회 자체가 그 당 대표의 사유물이 되기 마련. 지금 국회에서 얘기되는 법들을 보라. 10여 개에 이르는 특검법에 판사선출제, 법왜곡죄 등. 이게 대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국회가 ‘국민을 위한 입법’이 아니라 ‘대표 일인을 위한 입법’을 하는 곳으로 전락한 것이다. 민주당에선 법사위, 운영위, 과방위는 물론이고, 여차하면 18개 상임위 모두 가져갈 태세다. 그게 다 당 대표의 방탄을 위한 포석이다.
유권무죄 무권유죄. 권력을 가진 자는 처벌받지 않는다. ‘처벌을 피하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잡아야 한다.’ 한 개인의 인생 철학이 벌써 이 사회의 시대정신이 되어 버린 느낌이다.⊙
08.08 마지막 기회
개원한 지 두 달. 그동안 여야가 합의처리한 민생법안은 한 건도 없었다. 8개 상임위에선 아예 법안심사 자체를 하지 못했다. ‘개점휴업’ 상태에서도 정쟁을 향한 열정은 충만하다. 그새 7건의 탄핵안, 9건의 특검법이 발의됐다. 지금 시도되는 국정조사만 무려 4건이라 한다.
그동안 국회를 통과한 법안은 6건. 민주당에서 일방처리한 것들로, 모두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폐기될 예정이다. 발의→거부권→폐기→재발의→거부권→폐기→재재발의→거부권→재재재발의→거부권→폐기. 쓰레기통 속 법안을 재활용해 다시 쓰레기통으로 되돌리는 무한루프.
일방처리→거부권→폐기 무한루프
개원 두 달 넘도록 민생법안 ‘0건’
특검·탄핵 등 이젠 무감해질 지경
여당 새 지도부 ‘정치 복원’ 나서야
결과가 빤히 보이는데 지치지 않는 그 열정이 부럽다. 야당의 192석은 ‘전능’하다. 실제로 그 힘으로 사법부를 위협하고, 행정부를 넘보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들이 그 ‘전능’으로 증명한 것은 철저한 ‘무능’이다. 요란하기만 했지 192석 갖고 두 달 동안 뭘 했는가?
국정운영의 책임을 진 정부·여당도 느긋해 보인다. 낮은 지지율은 상수가 됐다. 거부권 행사에 따른 정치적 부담도 한두 번. 자꾸 반복되면 국민도 둔감해진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635건의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탄핵이 거론되지 않았다.” 아직 615회 정도 여유가 있다는 얘기다.
야당은 뉴턴의 1법칙에 따라 특검, 탄핵을 관성적으로 시도한다. 야당의 독주는 3법칙에 따라 거부권 행사라는 반작용을 낳는다. 그 싸움은 뉴턴의 제2법칙을 따른다. 두 달 만에 벌써 9건의 특검, 7건의 탄핵이 시도되고, 그에 맞춰 거부권 행사의 속도도 점점 빨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예외로 여겨졌던 극단적 현상들이 이제는 나라의 정상적 상태가 되었다. 하도 남발하다 보니 ‘특검’조차도 이젠 별로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탄핵의 근거는 갈수록 억지스러워지고, 그 사유 또한 점점 사소해지고 있다. 자기들 스스로 그 시도가 성공하리라 믿는 것 같지도 않다.
여당은 필리버스터를 한다. 그걸로 야당의 입법 독주를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걸로 야당의 부당함을 알리려는 것 같지도 않다. 그들의 얘기에 아무도 관심이 없지 않은가. 국민의 눈에 그것은 그저 방광에 가해지는 압력을 누가 오래 견디는지 겨루는 이상한 게임으로 비칠 지경이다.
통신 조회를 놓고 벌이는 공방도 해괴하기 짝이 없다. 2021년 공수처가 통신 조회를 했을 때 윤석열 후보는 “미친 사람들”이라 비난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적법한 절차”란다. 반면, 2021년 통신 조회는 “사찰이라 할 수 없다”고 했던 이재명 전 대표가 지금은 “윤석열식 블랙리스트”를 운운한다.
다들 실없어졌다. 왜 그럴까? 이유가 있다. 한 사회가 유지되려면 상식(common sense), 즉 사회 성원 대다수가 공유하는 공통의 양식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그 공통의 지반이 무너져 버렸다. 그 결과 국가 전체가 통약 불가능한 두 극단으로 쪼개져 버린 것이다. 이 양극화는 유튜브 정치의 필연적 결과다. 민주당은 당 전체가 유튜브 정치에 잡아먹혀 이상한 전체주의 정당에 가까워졌다. 대통령실과 집권 여당 역시 극우 유튜브 정치에 함몰되어 수구꼴통의 정당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민심에서 떨어져 스스로 고립되니 총선에 참패할 수밖에.
그나마 국민의힘은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극우 유튜버들을 주변화하는 데에 성공했다. 대통령실과 당의 주류에서 반대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한동훈 후보를 대표로 선출한 것은, 그 보수적인 지지층의 3분의 2가 이번에 전략적 선택을 했다는 것을 뜻한다. 당원들이 준 이 마지막 기회를 살려야 한다.
중요한 것은 실종된 정치를 복원하는 것이다. 그게 국정을 책임진 집권 여당의 책무다. 그 일은 물론 극과 극으로 대립하고 두 당 사이에서 조금씩 공통의 분모를 찾아 나가는 것으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 두 당의 원내대표가 비쟁점 민생법안은 합의처리하기로 했다고 한다.
다음은 쟁점 법안이다. 그동안 여당은 민주당에서 발의하는 법안을 거부하기만 했다. 민주당의 입법에 설사 문제가 있더라도, 그 취지가 타당하다면 새 대표의 말대로 ‘대안’을 가지고 야당과 협상을 해야 한다. 언제까지 대통령에게 정치적 부담을 안기며 거부권 행사해 달라고 조를 것인가.
마지막은 정쟁용 법안이다. 민주당에서 추진하는 특검이나 탄핵은 대부분 말도 안 되는 것들이나, ‘채 상병 특검’처럼 널리 국민적 공감이 존재하는 사안을 그냥 피해갈 수는 없는 일이다. 정쟁에 악용될 독소조항을 빼고 오직 진상규명에 도움되는 형태의 대안 입법으로 야당을 설득해야 한다.
여당의 마지막 기회, 어쩌면 한국정당의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른다. 여당은 여당다워야 한다. 승리는 야당을 말싸움으로 누르는 데가 아니라, 여당으로서 책임의식을 가지고 ‘정치의 복원’을 주도하는 데에 있다.⊙
09.05 언어의 하이퍼인플레이션
계획적이라기보다는 우발적인 실수로 보인다. 단초는 ‘법원판결에 승복해야 한다’는 한동훈 대표의 발언이었다. 심기가 불편해진 이재명 대표가 이 발언을 받아치려다가 선을 넘어 버린 것이다. “최근 계엄 얘기가 자꾸 이야기된다.”
사실 계엄령 시나리오는 민주당 강성 지지층 일각의 하위문화 현상이었다. 그런데 공당에서 이 음모론을 덜컥 받아들인 것이다. 이재명 대표가 자꾸 들었다는 그 “계엄 얘기”는 사실 그 당 지도급 인사들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지지층 일각 떠돌던 계엄 음모론
민주당 지도부 공식 입장 돼버려
탄핵을 전제로 하는 집단 상상력
당대표 판결 앞둔 히스테리 불과
“차지철 스타일의 김용현 경호처장을 국방부 장관으로 지명하고 ‘반국가세력’이란 발언도 했다. 이런 흐름은 국지전과 북풍 조성을 염두에 둔 계엄령 준 작전이라는 게 나의 근거 있는 확신이다.” 김민석 의원의 말이다. 그는 민주당의 수석최고위원이다.
“국방장관 후보자, 행안부 장관, 방첩사령관 등 이른바 계엄령 키맨들이 모두 윤 대통령의 고교 동문이다. 대통령 탄핵 상황이 오면 계엄령 선포가 우려된다.” 그 당에서 최고위원을 하고 있는 김병주 의원의 말이다.
당의 전략기획위원장도 말을 보탠다. “박근혜 정부 시절 실제로 계엄에 대한 검토가 있었고 준비됐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지지 않았나. 지금 이 정권에서도 어딘가에선 그런 고민과 계획, 기획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보고 있다.”
당을 대변하는 수석 대변인까지 “여러 가지 의심과 정황이 있다”고 거들고 나섬으로써 이 계엄령 시나리오는 지지층 일각에서 떠드는 음모론의 수준을 넘어 아예 대표를 위시한 민주당 지도부의 공식 입장이 되어 버렸다. 한 마디로, 자기들이 보기에도 남세스러워서 안에서 자기들끼리만 주고받던 얘기를, 대표회담에서 평정심을 잃고 실언을 한 대표님을 엄호하려다가 얼떨결에 밖으로 끄집어내 주책없이 공식화해 버린 꼴이라고 할까.
‘근거’와 ‘제보’가 있다고 했지만 민주당에선 그것들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김용현 체제에 불만을 품은 국방부 인사들이 제보를 해왔지만 정확한 근거는 확보하지 못했다”고 실토했다. 도대체 무슨 제보를 해왔다는 것일까? 이 대표의 심복이라는 정성호 의원이 그 제보의 실체를 밝혔다. “제보도 받고 있다고 하는데 대개 그런 상상력 아니겠나.” 그 무시무시한 시나리오의 근거가 고작 ‘상상력’이란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간단하다. 극단적 언어를 남발하다 보면 대중은 자극에 둔해지기 마련. 무뎌진 대중의 감성에 충격을 주려면 언어는 더 자극적이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언어가 인플레이션에 빠지게 된다. 신문에 도배되는 ‘탄핵’ ‘특검’ ‘국조’ ‘청문회’ 같은 말들. 하도 남발되어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무게를 지니지 못한다. 새로 등장한 ‘계엄령’은 평범한 인플레이션을 넘어 하이퍼인플레이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1경 짐바브웨 달러를 US 달러로 바꿔야 1달러도 안 된다고 한다. ‘계엄령’도 마찬가지다. 그 말의 액면가는 어마무시하다. 총을 든 군인들이 막 야당 국회의원들을 체포·구금한다지 않는가. 그런데 실체 가치는? 달랑 1원짜리 ‘상상력’.
이 싸구려 ‘상상력’은 민주당을 사로잡은 어떤 ‘불안감’에서 비롯된다. ‘계엄’이라는 상상의 논리적 전제는 ‘탄핵’의 상상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현 정권이 계엄을 계획하는 것은 다가올 대통령 탄핵을 저지하기 위해서라지 않는가. 사실 ‘탄핵’ 역시 허무맹랑하기는 ‘계엄’ 못지않다. 그런데도 민주당의 정치인과 지지자들은 우리와 달리 그 허구를 꽤 현실적인 가능성, 아니 곧 다가올 현실로 믿는 듯하다. 그래서 지레 ‘계엄’ 걱정까지 하는 것이다.
사실 ‘탄핵’이나 ‘계엄’ 같은 파국의 언어는 민주당 정치인과 지지층의 종말론적 멘탈리티를 보여준다. 원래 제힘으로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적 상황에 처한 인간들에게 허용된 마지막 희망이 바로 종말론 신앙이 아닌가.
불안의 근원은 역시 대표의 사법 리스크. 이를 피하려면 대법원 확정판결 전에 대선이 치러져야 한다. 그런데 판결이 언제 내려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불확실성을 제거하려면 인위적 파국이, 즉 대통령 탄핵이 필요하다. 이 주관적 소망을 그들은 이미 반쯤은 객관적 ‘현실’로 인지한다. 그래서 ‘계엄령’ 운운하며 아직 오지 않은 그 ‘현실’을 앞당겨 놓고, 목하 종말의 날에 벌어질 아마겟돈의 결전을 대비해 지지자들의 전의를 다지고 있는 것이리라.
‘탄핵’과 ‘계엄’이라는 언어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은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극도의 불안에 빠진 민주당과 그 지지층이 부리는 집단 히스테리라 할 수 있다. 이 격한 반응을 촉발한 ‘투셰(touche)’, 혹은 이 바닥 전문용어로 ‘발작 버튼’은 한동훈 대표의 모두 발언. “(검사 탄핵은) 이 대표 판결 결과에 불복하기 위한 빌드업….”⊙
10.03 기억의 조작술
“위증교사인지 직접 판단해 보라.” 이재명 대표가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2018년 말과 이듬해 초에 김진성씨(김병량 전 성남시장의 수행비서)와 가졌던 통화의 녹취록을 올렸다.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해 30분 분량의 녹취록을 들어 보았다. 녹취는 이재명 대표가 구사하는 어법의 전형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이 전형성은 녹취만이 아니라 이 사건 재판의 변론에도 자주 눈에 띈다. 그러므로 사건의 이해를 위해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먼저 눈에 띈 것은 거짓말의 낮은 수준. 거짓말은 모름지기 그럴듯해야 하나, 그의 거짓말은 상식을 벗어난 음모론 수준이다. ‘KBS와 성남시가 짜고 자신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웠다.’ 이걸 믿으라는 건가.
이재명 대표 스스로 올린 녹취록
음모론, 허구 주입, 교묘한 압박 등
위증교사의 전형적인 어법 노출
사법 문제를 정치로 풀려는 의도
‘KBS와 성남시의 거래’라는 주장의 근거는 오직 본인의 말뿐이다. “KBS하고 우리 시장님하고는 실제로 얘기가 좀 됐던 건 맞아요.” 물론 법정의 증인신문을 통해 그런 거래는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PD에게 사칭할 검사의 이름을 대주며 ‘불법 취재라 방송이 불가능하다’는 PD를, ‘익명의 제보자에게 받은 걸로 하자’며 설득하고, 직접 그 ‘익명의 제보자’가 되어 사진까지 찍은 것도 본인이 아니었던가. 이것만 봐도 그는 검사사칭의 ‘공범’임에 분명하다.
게다가 그 사건 재판의 2심과 3심에서는 본인도 그것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제가 되니 자신도 포기했던 그 주장을 다시 들고나온 셈이다.
둘째, 상대의 기억을 조작하는 것. 그 녹취의 핵심은 대화 상대에게 반복적으로 자신이 창작한 허구를 주입하는 것. 괴벨스의 말대로 거짓말도 끝없이 반복하면 듣는 이의 의식 속에서 진실로 둔갑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없었던 일에 관한 기억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김진성씨는 ‘기억에 없다’며, 자신은 당시 회의현장에 없었기에 (KBS와 성남시 사이의 거래를 증언하는 게) “애매할 수 있을 거”라 말한다.
그리고 결정적인 대목이 등장한다. “그런 얘기를 들었다고 해주면 되지.” 기억도 없는 이에게, 아예 현장에 없었던 이에게 ‘그런 얘기를 들었다’고 해달라는 것이다. 위증교사의 고전적이며 전형적인 사례다.
반복적 주입으로 거짓말을 기정사실화하고, 상대가 말려들면 서둘러 그걸 둘 사이의 공통의 ‘사실’로 선언하고는, 기억이 없는 상대에게 변론요지서를 보내 증언을 뜯어 맞추도록 유도한 것이다.
셋째, 협박 혹은 압박. 네 번째 녹취에서 이재명은 느닷없이 이상한 얘기를 한다. 김진성씨에게 조서에 ‘누군가에게 3천몇백만 원을 주었다고 적혀 있다던데’라고 말하며 ‘흐흐흐’ 징그럽게 웃는다.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다. 도대체 이 사건과 아무 관계도 없는 다른 사건 얘기를 꺼내는 걸까? 내막은 잘 모르지만 내 귀에 그 말은 ‘내가 너의 약점을 쥐고 있으니 알아서 기라’는 협박으로 들린다.
넷째, 알리바이 만들어 두기. 녹취록에서 앞의 거짓말만큼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말이 있다. 사실만 말해 달라는 주문이다. “있는 대로 얘기해 달라”, “없는 사실 얘기할 필요 없다”, “사건을 재구성하자는 게 아니다.”
지시의미(denotation)와 함축의미(connotation)를 뒤섞는 말장난이다. 가령 내가 여행을 간다고 했더니 누군가 농으로 “선물 사오지 말라”고 극구 당부를 한다. 이 말의 지시의미는 ‘사오지 말라’이지만 함축의미는 ‘사오라’는 것.
정말로 ‘사실대로만’ 말해주기를 원했다면 상대가 ‘기억에 없다’고 했을 때 증언 받기를 포기했어야 한다. 그 주문이 30분 동안 12번이나 반복됐다는 것은 외려 그 행위의 불법성을 본인이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섯째, 언어를 혼란시키기. “‘나는 일본사람 아닙니다’에서 ‘아닙니다’를 빼면 내가 일본사람이라고 말한 게 되겠죠.” 사실대로 말해 달라고 한 부분을 뺐으니 검찰의 공소장은 ‘악마의 편집’이라는 것이다.
공소장 안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없으니 ‘편집’은 필수. 하지만 모든 편집이 맥락의 왜곡인 것은 아니다. 실제로 법정에서 녹취록 전체를 재생했지만, 일본사람이 한국사람이 되는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섯째, 나 혼자 살기. 김진성이 위증을 자백하자 그를 대하는 태도가 돌변한다. “김씨와 저는 애증 관계이자 위험한 관계로, 거짓말을 해달라고 요구할 관계가 아니다.” 이 꼬리 자르기에 김씨는 “인간적 배신감”을 토로했다.
2002년 구속 당시 최모 PD는 자신의 구명을 위해 이재명에게 아내를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여긴 왜 왔냐’며 문전박대를 당했단다. 이 꼬리 자르기는 이재명이 관련된 모든 범죄에 등장한다.
그 녹취는 위증교사의 강력한 물증이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게다. 그런데 이 대표는 그걸 스스로 공개했다. 이 비합리적 행동은 이제 전장을 사법이 아닌 정치의 영역으로 옮기겠다는 뜻일 게다.⊙
10.31 가마솥의 개구리들
보수는 더이상 이 나라의 주류가 아니다. 보수와 진보가 대등하게 분포하는 연령층은 과거엔 50대로, 지금은 60대로 올라갔다. 586세대 다수가 이제는 60대. 이른바 ‘코호트 효과’에 의해 그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보수화하지 않을 게다.
결국 보수엔 7080세대만 남게 된 셈이다. 거기에 잔혹한 자연사까지 개입한다. 총선 한번 치를 때마다 보수 유권자는 100만 명씩 준다고 하지 않는가. 과거엔 호남이 고립되었으나 지금은 외려 TK 지역이 고립되어 버렸다.
민심에게서 고립 자초하는 용산
‘돌 맞아도 갈 길 간다’ 변화 거부
고작 특별감찰관 놓고도 다투나
국민의 분노가 끓어올라도 태평
지지층의 협소화는 이념의 우경화로 이어진다. 미래의 전망을 잃은 보수. 좋았던 과거의 추억을 먹고 살 수밖에. 누구는 어디에 근사한 이승만 기념관을 짓겠다고 하고, 누구는 역광장에 거대한 박정희 동상을 세운다고 한다.
광화문 광장에 100m 높이 국가상징물을 세우겠다는 얘기도 있었다. 이 메갈로마니아는 일반적으로 독재정권의 미학적 취향이다. 이게 다 지지를 받겠다고 하는 짓이니, 그들이 소구하는 지지층의 범위를 짐작할 수 있다.
국책기관의 장은 국회에 나와 버젓이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의 국적은 일본이었다’고 말한다. 우리와 국가공동체의 기억을 공유하지 못하니, 국민의 눈엔 어디 멀리 떨어진 이념의 은하에서 이주해 온 외계인 집단으로 보일 수밖에.
이 고립은 정치에서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대통령실과 ‘민심’의 분리다. 지지율 20%는 내각제 국가에서라면 의회를 해산해야 할 수치. 그러니 야당도 거리낌 없이 ‘탄핵’ 운운하며 극단을 치닫고 있는 게다.
둘째는 여당과 ‘당심’의 분리. 당원의 압도적 다수가 정치 초보를 대표로 선택한 것은 그 말고는 딱히 대통령실을 바꿀 의지를 가진 인물이 안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세운 대표를, 당의 주류는 주저앉히지 못해 안달이 났다.
당은 당원들로부터, 정권은 국민들로부터 고립되었다. 그런데도 다들 태평하다. 대통령과 한 몸이 되어 여사 방탄의 한길로 나아가면 된다고 보는 모양이다. 지난 2년 반을 그렇게 지내다가 지지율이 20%로 떨어진 게 아닌가.
더 이상 그래선 안 된다는 건 지난 2년 반의 시간이 충분히 확인해 주었다. 역대 최저의 지지율로도 정신 차리기엔 부족한 모양이다. 생쥐도 시행착오를 통해 미로에서 길을 찾아내던데, 영장류가 설치류만도 못해서야 쓰겠는가.
‘돌을 맞아도 갈 길을 가겠다.’ 변화를 거부하는 대통령의 어조에선 결연함마저 느껴진다. 이를 말려야 할 참모들은 ‘인적 쇄신’ 요구에 반발해 집단행동까지 하려고 했다. 사실 20점짜리 성적의 참모들이라면 알아서 스스로 그만둘 일.
대통령은 원래 전광판을 보지 않는 분이시다. 축구에는 상대가 있고, 상대가 있으면 스코어가 나기 마련이다. 스코어보드를 보지 않고 싸우는 선수가 있다면, 아마 그는 목하 상대 팀이 아니라 관중과 싸우는 중일 게다.
‘대통령은 장님 무사, 여사는 장님 어깨에 올라탄 주술사’라던데, 결국 장님 무사의 어깨에 올라앉은 주술사를 당과 대통령실의 호위무사들이 감싸고 있는 셈이다. 이미 국민은 명태균의 비유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 당에서는 고작 ‘특별감찰관’을 놓고 다툰다. 인적 쇄신, 여사의 활동 중지, 여사의 사법 리스크 해소라는 3대 요구가 다 거절당한 마당에 ‘특별감찰관’인들 국민 눈에 차겠는가. 그런데 그걸 놓고도 싸운다. 심심한가?
국민의 분노가 가마솥을 끓이는데, 그 안의 개구리들은 태평하다. 솥 안의 분란만 없으면 모든 게 잘 될 거란다. 분란이라는 부정만 안 타면 승리를 보장해주는 무슨 부적이라도 갖고들 있는 걸까? 합리적으론 이해가 안 된다.
이 부조리의 유일한 설명은 그들이 집권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굳이 집권 안 해도 의원만 하면 되니, 좋은 지역의 공천을 좇아 줄이나 잘 서면 되지 않겠는가. 저 태평함은 오로지 이 처세술로만 합리적으로 설명된다.
모처럼 당의 중진들이 대통령에게 “결자해지”를 요구하고 나섰다. 그런데 이번엔 ‘주어’가 아니라 ‘목적어’가 없다. 결국 성명의 방점은 당 대표의 “리더십의 부재”에 찍혀 있는 셈인데, 그래도 다른 목소리를 낸 그 용기만은 가상하다.
다만 그런 소리 해도 되는 분위기를 만든 건 ‘리더십’ 없다는 그 사람이라는 점, 그 당엔 리더십만이 아니라 팔로어십도 없다는 점, 그리고 ‘결자해지’의 목적어를, 그 거룩한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다간 자신들도 그 사람 꼴이 되는 점은 꼭 기억해 둬야 한다.
한편, 리더십이 부재하다는 그 사람은 리더십의 기초가 무한책임의 자세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7:1의 책임을 1:1로 바꿔놓은 백서가 맘에 안 들어도, “평가는 백서가 아니라 국민이 하는 것”이라 해서는 안 된다. 그 말은 국민의 입에서 나올 때만 자연스럽다. ⊙
11.28 뜨거운 선언과 썰렁한 분위기 진중권 칼럼
1960년 4월 25일 오후 3시 27개 대학교수 258명이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14개항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서 교수들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3·15 부정선거와 4·19 사태의 책임을 물으며 ‘즉시 하야하고 재선거를 실시하라’고 요구했다. 이어서 400여 명의 교수들이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서울 시내를 행진하며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다. 당시는 계엄 상황이었기에 교수들의 시국선언은 국민들에게 ‘지식인들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졌다.
잇단 시국선언, 사회적 반향은 약해
탄핵·하야의 정치적 명분 부족한 탓
사법 리스크 걸린 누군가만 돕는 꼴
보편적 상식·가치 지니는지 자문을
제자들의 희생을 더이상 보고 있을 수 없어 교수들이 나섰다는 거룩한 명분. 이는 학생과 시민들로부터 열광적인 호응을 끌어냈다. 흑백의 사진으로 기록된 교수들의 시가행진은 제1공화국 몰락의 결정적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지난 19일 오후 대구 북구 경북대 북문 앞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경북대학교 교수·연구자들이 시국선언 발표 및 기자회견을 열자 지나가던 학생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뉴스1
지금 대학가엔 시국선언의 봇물이 터지고 있다. 규모가 4·19 때의 무려 열 배다. 시국선언에 참여한 전국 교수들의 수가 벌써 3000명을 넘었단다. 거기에 연구자와 재학생, 동문 단체들까지 이 선언에 가세하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시국선언을 바라보는 사회의 분위기는 냉랭하기 그지없다. 여야 정치권의 소모적인 정쟁에 충분히 지쳐있는 일반시민들의 눈에는 그저 ‘늘 하던 사람들이 늘 하던 짓을 하는’ 현상 정도로 비치는 모양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 이유가 있다. 첫째, 명분의 부족이다. 민주당에선 “이승만 정권의 비참한 전철” 운운하며 “역대 대통령 가운데 본인과 가족을 대상으로 한 특검을 거부한 사람은 윤석열 대통령이 유일하다”고 말한다.
특검을 거부하는 것을 정치적으로는 비난할 수 있을지언정, 그게 탄핵이나 하야까지 논할 정도로 중대한 사안은 아니다. 그저 ‘특검의 거부가 이재명 대표와 문재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와 형평이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면 족하다.
하야나 탄핵의 요구가 의미를 가지려면 그 명분이 여야, 진보와 보수의 차이를 넘어선 공통의 사회적 합의 위에 서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그것은 ‘보복’이라는 당파적 감정에 호소해 ‘대통령 지지율 끌어내리기’ 용으로 남용되고 있다.
둘째, 하나도 위험하지 않다. 요즘 시국선언 한다고 누가 잡아가는가? 대학가에서 한마디 했다가 고초를 당한 유일한 사례는 문재인 정권 시절 ‘표창장이 위조’라고 했다가 감사받고 쫓겨난 동양대 총장의 경우. 그때 그들은 모두 침묵했었다.
셋째, 이중 잣대다. 박근혜 정권 시절에도 대학가에 시국선언이 봇물 터졌었다. 그때 기폭제가 된 게 정유라의 입시 비리. 근데 조국 자녀들의 여러 입시 비리에 연루된 대학들의 정의로운 교수님들께선 다들 입을 다물고 계셨다. (이건 조금 위험할 수도 있었겠다.)
넷째, 학생들의 고통과 아무 상관이 없다. 4·19 때 학생들은 국가폭력으로 고통을 받았다면, 요즘 학생들은 죽을 만큼 힘든 삶의 조건으로 고통받고 있다. 제자들의 고통보다 ‘김건희 특검’에 더 관심을 보이는 교수들이 얼마나 존경스러울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23일 서울 광화문광장 앞 도로에서 열린 '김건희·윤석열 국정농단 규탄·특검 촉구 제4차 국민행동의 날' 집회에 참석해 있다. 뉴스1
주목할 것은 두 현상 사이의 이 현격한 온도 차다. ‘뜨거운’ 선언의 열기와 ‘썰렁한’ 사회의 분위기. 이 온도 차는 이번 시국선언이 일반의 민심보다는 외려 민주당에서 밀어붙이는 탄핵 드라이브와 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대통령이 국민들의 열통을 터지게 하는데도 정작 민주당에서 추진하는 탄핵 집회에는 좀처럼 불이 붙지 않는다. 1차 집회 1만7000명, 2차 집회 1만5000명, 3차 집회 2만5000명, 4차 집회 9000명. 참가자의 수는 외려 줄어들고 있다.
민주당에선 열심히 성냥으로 불을 지피려 하는데, 국민이라는 장작은 그동안 먹고 사느라 흘린 땀과 눈물로 속까지 흠뻑 젖은 상태. 그래서 특단의 조치, 즉 전국 대학가의 시국선언이라는 ‘번개탄’이 필요했던 게다.
이를 국민들은 모르지 않는다. 또 하나 국민들이 모르지 않는 게 있다. 즉 ‘탄핵’, ‘하야’와 같은 극단적 시나리오가 사법 리스크에 걸린 누군가의 대권 시간표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 그래서 국민이라는 배우들이 그 시나리오에 맞춰 연기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촛불이 출범시킨 정권 아래서 ‘촛불’의 정치적 자산이 철저히 횡령당하는 과정을 지켜본 국민들은, 탄핵을 또 해봤자 어떤 부패정치인과 그 주위의 탐욕스런 기회주의자들에게만 좋은 일 해주는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교수들이 시국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은 바람직한 일. 하지만 사회적 반향을 받으려면 일단 그 명분이 사회의 보편적 상식과 가치 위에 서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과연 지금이 그러한가?
너무나 뜨거운 선언과 너무나 싸늘한 민심. 그 현격한 괴리 속에서 우리는 질펀한 이권, 혹은 철 지난 이념의 관성으로 묶인 그들 공동체만이 느끼는 어떤 실존적 처절함, 어떤 종말론적 절박함만을 본다.⊙
12.26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1605)는 멘털리티의 역사에서 어떤 전환기의 문학적 기념비다. 중세만 하더라도 은유와 사실이 명확히 구별되지 않아, 유사성이 곧 동일성의 증거로 통하곤 했다. 돈키호테는 그런 시대의 마지막 인물이다.
돈키호테는 비루먹은 말을 타고 소설로 들어가 늘어선 풍차를 거인으로, 양떼를 군대로, 농부의 딸을 귀부인으로 착각한다. 이렇게 저만의 이상(망상)을 좇아 현실을 떠나는 것을 ‘키호티즘(quixotism)’이라 부른다.
자신만의 세계 빠졌던 윤 대통령
극우 유튜브의 환상서 못 벗어나
주변엔 이익 위해 망상 돕는 이들
머릿속 구국 드라마 계속되는 듯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8월 “반국가세력이 사회 곳곳에서 암약한다”며 “국민 항전의지를 높일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이분은 현실을 떠나 가신들을 데리고 극우 판타지의 세계로 이주하신 듯”이라고 쓴 바 있다.
사실 키호티즘의 징후는 오래됐다. 작년 삼일절과 광복절 기념사는 거의 6·25 기념사를 방불케 했다. 이미 그 시점에 대통령의 인식이 외교안보 라인의 소수 극우 분자들의 세계관에 경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누가 그에게 이 망상을 주입했을까? 내각도 반대, 대통령실도 반대, 당에서도 계엄에 반대했다. 비상계엄은 노상원-김용현과 같은 군부의 극소수 극우분자들이 기획하고 실행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대통령은 집권 초부터 자신을 유폐시켜 왔다. 중도를 쳐내고, 당 대표 쫓아내고, 자기가 세운 당 비대위원장마저 내치려 했다. 그 결과 주위에 기회주의자들만 남고, 그들의 아첨 속에서 벌거벗은 임금님이 된 것이다.
모두 등을 돌리니 믿을 것은 극우 유튜브뿐. 그러니 피곤한 영혼이 그리로 도피해 거기서 위안과 안정을 찾을 수밖에. 어차피 세계란 머릿속에 입력되는 데이터의 총체. 그렇게 극우 유튜버들의 환상이 그의 세계가 되어 버렸다. 망상은 현실과 만나 깨지기 마련이나, 정작 망상에 빠진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인지부조화’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낸다. 가령 돈키호테는 거인으로 믿었던 게 풍차로 드러나자 ‘누군가 거인에 마법을 걸어 풍차로 만들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극우의 개표조작설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잘하고 있다, 그러니 선거에 이겨야 한다, 질 리가 없다. 그런데 결과가 참패라면? 그건 누군가 투표함에 마술을 건 것이다. 즉 개표가 조작된 것이다.
개인의 성벽(性癖)도 한몫했을 게다. 윤 대통령은 민주당을 지지하던 검사 시절에 이미 김어준의 음모론을 굳게 믿었다. 당시 세월호 추모집회에 나온 그와 나눈 대화를 누군가 공개했는데, ‘18대 대선은 부정선거’라고 하더란다.
이준석 의원은 국민의힘 대표 시절 그와 나눈 첫 대화를 매우 인상적인 것으로 기억한다. “대표님, 제가 검찰에 있을 때 인천지검 애들 보내 가지고 선관위를 싹 털려고 했는데 못하고 나왔습니다.”
키호티즘의 또 다른 원천은 매우 영적이다. 손바닥의 ‘王’ 자는 그냥 웃어넘기더라도 천공, 건진, 무정, 지리산 도사(명태균), 안산보살(노상원) 등 도사와 법사의 이름이 끝없이 이어진다면, 이건 그냥 해프닝이 아니다.
돈키호테의 모험에는 시종 산초 판사의 조력이 필요하다. 산초 판사는 돈키호테와 망상을 공유하지 않으나, 그럼에도 그에게 충실한 시종으로 남는다. 지금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바로 그런 관계에 있다. 그중에서 홍준표 시장의 역할이 눈에 띈다. 그는 대통령과 계엄의 망상을 공유하지는 않으나, 대통령을 탄핵하는 데에는 반대한다. 심지어 탄핵에 찬성하는 의원들의 색출을 주장하면서까지 대통령의 모험을 응원한다.
기사문학에 낭만이 빠질 수 있겠는가. 돈키호테는 둘시네아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건 모험을 한다. 이 상남자 로망을 부추기는 우리의 산초 판사. “자기 여자 하나 보호하지 못하는 사람이 5000만 국민을 지킬 수 있겠나.”(홍준표)
홍 시장이 대통령을 비호한다는 것은 오해다. 국힘에서 누구보다 먼저 탄핵을 기정사실화한 게 바로 그다. 벌써 ‘조기 졸업’ 운운하며 이사 걱정하지 않는가. 그의 눈은 이미 돈키호테의 말과 갑옷에 가 있다.
산초 판사가 돈키호테의 망상을 거들고 나선 것은 주인이 그에게 어떤 섬의 통치권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산초 판사들이라고 다르겠는가. 서비스의 대가는 고립된 섬으로 전락한 TK의 공천권이다. 산초 판사는 점점 돈키호테를 닮아간다. 우리의 산초 판사들 역시 망상을 깨는 대신 그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 망상을 유지하기 위해 그걸 깨려 했던 이들을 당에서 쫓아내려 한다.
산초 판사의 엄호 덕에 우리의 돈키호테는 모험을 계속하기로 했다. “결코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의 머릿속에서 구국의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돈키호테처럼 그 역시 언젠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망상을 부정하게 될까? 그럴 것 같지도 않다.
진중권 광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