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의 커피하우스]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한국미래학회 회장 조선일보 2024

01.12 의사 선생님, 정치 눈치 보지 마세요
야당 대표 피습, 서울대 의사가 아무리 설명해도
응급이면 부산대, 아니라면 헬기는 타지 말았어야
비전문적·비윤리적 정치인과 타협한 슬픈 자화상
정치 액세서리 된 의사들, 소중한 무형 자산 잃어
후진 정치가 다른 전문 분야까지 수준 끌어내려

▲일러스트=이철원
1981년 괴한의 총격을 받은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조지워싱턴대 병원 수술실에서 의료진에게 “여러분이 공화당 지지자였으면 좋겠네요”라고 한 말은 유명하다. 경호원들로 둘러싸여 잔뜩 긴장해 있던 의사들은 대통령의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그중 민주당 지지자인 한 의사가 “오늘 우리는 모두 공화당원입니다”라고 답해 레이건을 안심시켰고,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정치인이야 의사의 당적이 궁금할 수 있지만, 의사는 환자의 당적이 문제 되면 안 된다. 당적뿐일까. 의사에게는 국경도 없고, 적군도 치료하는 게 의사의 사명이다. 전쟁 중에도 의료 시설은 국제인도주의법에 따라 보호받는다. 의사에 대한 최초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서사시 ‘일리아드’에는 트로이 전쟁에서 파리스 왕자의 화살을 어깨에 맞은 그리스의 치료 영웅 마카온에 대해 크레타의 왕으로 출정한 이도메네우스가 이렇게 말한 구절이 나온다. “의사는 화살을 잘라내고 진통제를 뿌려주기 때문에 만인(萬人)에 해당하는 가치가 있다.” 군의관 한 명이 군사 만 명에 해당하는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두말할 것 없이 사람을 낫게 하는 전문성에 있다. 여기에 히포크라테스가 강조한 직업의 윤리성이 보태져 의사라는 직업은 중요한 전문직의 하나로 추앙받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런가, 병원에 가서 아픈 곳을 치료하거나 생명 연장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사의 전문성에 감탄하며 감사한다. 의사는 환자 상태를 진단하고 최적 시기에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최고의 정확성으로 회복을 예견하고 도와주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환자나 그 가족은 몰라도 의사는 안다. 병이 얼마나 깊고 얕은지, 또 치료와 회복을 위해 노력과 시간이 얼마나 드는지.
아쉽게도 지난 2일 부산에서 발생한 이재명 민주당 대표 피습 사건 언저리 의사들의 모습은 조금 달랐다. 만 명 몫을 하는 전문가가 아니라, 정치의 부속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충격적 정치 테러 사건이 열두 갈래로 진화하며 양산하는 각종 이슈 중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가장 비전문적이고 비윤리적인 집단인 정치인들이 고도의 전문성과 윤리성이 필요한 전문직과 타협하며 그려내는 슬픈 자화상이었다. 각자 영역이 엄연하고 존중받아야 할 현대사회의 노동 분화가 무시되고, 문화가 역류하며, 보편적 응급 의료 체계가 헝클어지는 딱한 현장이었다.
나는 아직도 이재명 대표의 부상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겠다. 의사만 아는 이 대표의 상태에 의사들이 입 다물고 있으니 알 길이 없다. 개인 정보를 발설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에 맞는 의학적 소견으로 치료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주지하다시피 응급 상황이었다면 부산대 병원에서 수술받는 게 맞고, 응급이 아니라면 닥터 헬기를 타고 서울로 올 필요가 없었다. ‘1cm 열상’이든 ‘1.4cm 자상’이든, 그게 3차 병원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일주일 넘게 입원할 부상인지도 의문이다. 지역 의료계를 무시했다며 전국의 병원과 의사회가 성명을 내고, 시민 단체가 수술 집도의 등을 경찰에 고발하는 건 시민들도 뭔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했다는 증거다.
사고 초기 당에서 브리핑을 하다가 민주당 인재 영입 케이스인 의사가 나와 한 것도 이상하고, 서울대 이식혈관내과 의사가 “내경정맥이 절단된 상태였고, 혈관 손상이 보여 응급 수술이 필요했다”며 의학 용어를 동원해 설명했지만, 부산에서 이송해 온 정황을 이해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무튼 서울과 지방 병원들을 시끄럽게 하며 이 대표는 치료를 받았지만, 정치의 액세서리가 된 의사들은 소중한 무형 자산을 잃었다.
정치가 군림하는 것이 비단 의료계만은 아닐 것이다. 최근 만난 한 과학계 인사는 연구-개발 예산이 갑자기 삭감되어 겪은 난감한 상황을 들려주었다. 과기부 정책 과제 2년 차에 들어가는 그의 예산이 절반 이상이 깎여 지속 가능성에 빨간불이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더 황당한 것은 같은 주제로 더 많은 연구비를 배정받은 신규 과제가 발표되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했다. 주무관의 부주의거나, 예산을 배정하는 분야에 대한 무신경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행정이라는 것이다. 대개 한 분야 전문가는 다른 분야 전문가도 존중하는 경향이 있다. 정치가 전문가를 중시하지 않는 것은 전문성을 알아보는 눈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정치의 불행은 정치 자체의 후진성에 그치지 않고 그 후진성이 사회 각 분야를 구석구석 흐르며 자기들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데 있다.
정치와 전문성의 잘못된 만남을 ‘테크노 포퓰리즘’이라고 한다. 그 둘이 편의를 주고받으며 진실을 왜곡할 때 사회는 이상한 곳으로 흘러간다. 과거 우리 조상도 권력자에게 아부하는 지식인을 꼬집어 ‘곡학아세’라고 경고했다. 좋은 정치는 사람들이 저마다 전문성과 소질을 펼치며 살 수 있도록 해준다. 각자의 지식과 기술을 갖고 정치와 상관없이 살 수 있으면 그럭저럭 살만한 사회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든 정치를 의식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정치 과잉 사회는 살기 불편하고 힘들다.
지난 2일, 피습 사건을 둘러싸고 부산과 서울에서 누가 무슨 결정을 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분명한 건 그날, 병원과 정당 틈에서 일부 의사가 수년간 힘든 수련을 거쳐 이룬 자신의 전문성을 정치 아래 두는 타협을 했다는 사실이다. 결과는 참담하다. 벌써부터 소셜미디어에 ‘2024년도 신설학과 서울대학교 정치의학과’ 패러디 포스터가 떠다니는 걸 보면.○
02.16 대한민국은 아직도 ‘건국 전쟁’ 중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태어난 대한민국
그걸 부정하는 친북·종북 세력 여전해
‘북한의 전쟁관은 정의’라는 토론회가
국회에서 열려도 쉽게 잊히는 사회
뒤늦게나마 제대로 된 영화 반갑지만
나라 건국 이야기는 진작 상식 됐어야

▲일러스트=이철원
보름이 넘은 일이지만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다. 지난달 24일 국회에서 열렸으나 일주일이 지나 언론에 보도되며 비로소 알려진 윤미향 의원 주최 공개 토론회 발언들 때문이다. 이날 첫 번째 발표자인 ‘부산 평화통일센터 하나’ 김광수 이사장은 “통일 전쟁이 일어나 그 전쟁으로 결과의 평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면 그 전쟁관도 수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북한의 전쟁을 ‘정의(正義)의 전쟁관’이라고 했다. 아무리 주어 술어가 허술하다고 해도 해독하기 어려운 말이다.
통일 전쟁으로 평화가 만들어진다면, 그런 전쟁관도 수용해야 하는데, 그게 정의라고? 이 무슨 해괴한 문장인가. 그렇다면 만약 북한에서 전쟁을 도발하면, 통일과 평화를 위해 우리는 항복해야 한다는 뜻인가. 전쟁을 하느니 우리가 북한에 편입되어 ‘공동묘지의 평화’라도 누리는 편이 낫다는 뜻인가. 북한의 전쟁이 ‘정의’라면, 그에 응전하는 대한민국의 전쟁관은 무엇인가.
발언이 알려지며 문제가 되자 김 이사장은 ‘학자’라는 가면 뒤로 숨고, 윤미향 의원실은 ‘그의 사견’이며 ‘그 발언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군색한 거짓말이다. 학자라면 자리를 가려 학술 대회에서 발표하는 게 걸맞고, 국회의원이 자기 의견과 다른 사람의 토론회를 주최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별로 새롭지도 않은 그런 거짓말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부분은, 그런 발언, 그러니까 국체(國體)가 혼미한 발언이 국회에서 국회의원의 후원으로 나왔으며, 그조차 선거 광풍에 가리고 잊히는 둔하고 정치적인 우리 사회 분위기다.
물론 우리 사회가 그런 말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 건 체제에 대한 자신감일 수도 있고, 김정은의 ‘전쟁 결심’으로 해석되는 여러 발언과 도발이 곧 전면전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는 관측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한반도 위험 수위가 일상적 경고를 넘어섰다고 보고 있고, 최근 북한과 부쩍 가까워진 러시아의 북한 주재 대사가 북한의 추가 핵실험 가능성을 언급하며 미국을 비난하는 걸 보면 한반도 주변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여기에 김정은은 지난해 조선노동당 전체 회의에서 “북남 관계는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 관계”라며 한국을 ‘가장 위해로운 제1 적대국’으로 규정하고, ‘남조선 영토 평정 대사변 준비’ ‘대한민국 것들과는 통일 안 돼’ ‘협상으로는 평화 못 챙겨’ 같은 험한 말을 쏟아내고 있다. 정세가 이러한데 우리 정치인들은 총선에서 이길 내부 정치 공학에 몰두하며 난수표 같은 선거 제도를 만들어내고 있다. 여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인 문화계에서는 최근 개봉한 ‘건국 전쟁’ 포스터가 잠시 실종되기도 했다. 뒤늦게나마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는 영화가 나온 건 반가운 일이지만, 그 영화를 보고 이승만을 ‘뉴스’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다는 건 우리가 아직 ‘건국 전쟁 중’임을 나타내는 방증이다. 한 나라의 건국 이야기라면 진즉에 국민 상식으로 자리 잡았어야 옳다.
문제의 발언이 국회에서 가능하도록 길을 터준 윤미향 의원은 더불어민주당 위성 정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사람이다. 위안부 문제로 당을 떠나 무소속이 되었지만, 작년 9월 일본 조총련 행사에 참석했고, ‘남조선 괴뢰 도당’ 같은 표현이 나와도 제지하지 않던 인물이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대한민국 정당이라면 누가 집권한들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그러나 문재인 전 대통령 시절 여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 집권하며 보여준 여러 장면은 민주주의와도, 대한민국과도 거리가 먼 것이었다.
특히 최근 이재명 대표를 둘러싼 민주당의 레토릭은 한 사람을 중심으로 반(反)지성이 결집하는 유사 전체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선거 제도를 대표에게 포괄적으로 일임한 후 만장일치로 채택하고 “대표의 말씀처럼 멋지게 이기는 길 열어주시리라” “대표께서 고뇌의 결단으로 큰 방향을 제시해 주시었다”고 반응하는 의원들을 보며 여기가 잠시 북한인가 착각했다. 외국인이 가장 어려워한다는 우리말의 존대어는 그렇게 쓰는 것이 아니다. 굳이 서열을 따지자면 당대표보다는 국민이 위고, 따라서 국민을 향한 메시지에는 평칭을 쓰는 게 기본이다. 뽑아주는 국민보다, 공천 주는 대표가 더 위라고 주장한다면 할 말은 없다.
여당은 다가오는 총선에서 ‘운동권 특권 세력’ 타파를 겨냥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운동권’이어서도 ‘특권 세력’이어서도 아니다. 엄혹했던 시절 민주주의 운동을 한 건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문제는 그들이 지향하는 민주주의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그냥 ‘민주주의’ 혹은 조국 전 교수의 표현대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이기 때문이고, 그런 사상을 북한을 통해 학습했으며, 그중 일부는 북한의 대남 적화 노선을 추종하여 대한민국 국체를 바꾸려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문제는 운동권이 아니라 종북이다.
좌파는 성하고 우파는 빈약한 대한민국에서 또 한번 선거를 치른다. 수도권에서 야당이 압도적 우세라는데, 그 야당이라는 것이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북한에 동조하는 세력과 뒤섞여 뭐가 뭔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아직 절반이 넘는 국민이 지지를 보낸다. 최진덕 교수(철학)의 진단대로 “처음부터 자유민주주의 우파 국가로 태어났으나 아직 우파 시민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전해온 우리나라가 이제는 건국 전쟁의 분열과 혼돈을 마감하고 미래로 나아갔으면 한다. 정치인의 수준이 낮으면 높이고, 무지하면 가르치고, 투박하면 다듬어주면 된다. 그러나 국가관이 혼미한 정치인이 주류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03.15 총선 판의 정치인들 험한 말… 국민 가슴은 멍든다
‘패륜 공천’ ‘비명횡사 공천’ ‘몽둥이로 때려야’…
더럽고 거친 말들 전장의 총알처럼 날아다녀
상대방 공격 위해 온갖 신조어… 천박한 은어도
사람을 이롭게 하는 말은 따뜻한 솜과 같지만
잘못 사용하면 가시·칼·도끼가 돼 사람 해쳐
나는 말 곱게 하는 사람에게 한 표 보태겠다
▲일러스트=이철원
톨스토이가 그랬던가.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고. 정당이 선거에 나설 후보를 공식 지명하는 ‘공천’에 이렇게 많은 색깔과 이름이 있는 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자기 당 후보 공천이나 잘하면 될 일이지, 남의 당 공천이 잘못되었다며 비난하는 데 온 힘을 다해 다채로운 표현을 동원하며 애를 쓰는데, 그 열과 성이 감탄스러울 정도다.
평범하고 나른한 일상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할 험한 말이 마치 전장의 총알처럼 허공을 가르는 총선판을 보며 내가 서글퍼지는 건 무슨 이치인지 모르겠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전장의 총알이다. 바로 이재명의 야당이 이루고자 하는 바가 방탄 국회고, 자신을 보호해줄 총알들을 구비하고자 하는 공천 아니겠는가. 국회의원 배지라면 총알받이라도 감지덕지할 사람들이 줄을 서서 달려들고 있으니 이재명 대표만 탓할 일도 아니다. 그는 한 생명체로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죽지 않고 살아 남으려는 본능을 발휘하고 있을 뿐이다.
모름지기 선거라면 적당히 정책도 있고, 이슈도 있고, 약간 철학도 보이고, 그러고도 매력 있는 몇몇 후보 중에서 고르는 최소한의 재미가 있어야 한다. 불행히도 지금 총선 정국에서는 전장의 포연에 가려 정책도, 이슈도, 매력적 인간도 잘 눈에 띄지 않는다. 하나같이 색깔 점퍼 속에 개인을 감추고, 복잡한 정책보다 화끈한 선심성 공약과 가식적 웃음을 띤, 정체 모호한 인물들이 국민의 선택을 기다리며 서성거리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수십 센티는 될 투표용지에는 생전 듣지도 못한 정당 이름이 그득할 것이고, 내가 찍은 표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이 또다시 22대 국회에 입성하는 꼴을 보게 될 것이다. 과정은 지루하고 결과는 참담할 것이다. 좋은 음악도 다 못 듣는 세상에서 더럽고 거친 정치인의 말을 귓전에 달고 투표장으로 가야 하는 유권자들은 가슴에 멍이 든다. 내가 진짜 이 나라 주권의 원천이라는 국민이 맞기는 하는 걸까.
누구의 창작인지, 운율과 자구와 의미가 딱 들어맞는 ‘비명횡사, 친명횡재’라는 말로 요약되는 자당의 공천으로 깊은 인상을 심어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며칠 전 국민의 힘을 향해 ‘패륜 공천’ ‘친일 공천’ ‘극우 공천’ ‘돈봉투 공천’이라는 말로 맹비난했다. 그러면서 “이런 패륜 정권은 몽둥이로 때려야 한다”고 했다. 이재명 대표는 모를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유권자들이 몽둥이로 얻어맞은 기분이라는 것을 말이다. 지지 정당과 관계없이 심하고 거친 막말은 듣는 사람을 불쾌하고 초라하게 만든다.
그런 막말에 침묵할 수 없는 여당도 ‘패륜이라면 너의 특기’라는 취지로 받아치고, ‘친일 공천’에는 ‘일제 샴푸 법카 의혹’으로 대응하며 ‘귀틀막 공천의 진수’ ‘비명횡사 공천의 끝판왕’이라며 받아쳤다. 적어도 그들 표현대로라면 이번 총선은 무늬만 다른 ‘패륜 공천’ 정당들 사이의 싸움이다. 이런 패륜 집단들 속에서 우리의 선량을 찾아내야 하는 유권자들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가.
명심보감의 ‘언어 편’에는 ‘사람을 이롭게 하는 말은 따뜻하기가 솜과 같고 사람을 상하게 하는 말은 날카롭기가 가시와 같다’는 말이 나온다. 그래서 ‘한마디 말로 사람을 이롭게 함에 소중함이 천금의 값어치요 한마디 말로 사람을 상함에 아프기가 칼로 베는 것과 같다’는 말이 뒤따른다. ‘입은 사람을 상하게 하는 도끼요 말은 바로 혀를 베는 칼이니 입을 막고 혀를 깊이 감추면 몸이 편안하다’는 말도 있다. 말은 마음을 감싸는 솜이 될 수도 있으나, 잘못 사용하면 가시, 칼, 도끼가 되어 사람을 찌르고 죽일 수 있다는 말이다.
서양의 수사학에서도 말은 ‘꽃과 칼’의 양면으로 묘사한다. 16세기 독일의 그레고리 라이히가 남긴 목판화에서 ‘수사학의 여인’은 입의 한 끝에는 향기로운 백합을, 또 다른 끝에는 칼을 물고 있는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말이란 그렇게 향기로울 수도, 치명적일 수도 있다.
부모의 막말을 듣고 자란 아이들은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인간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며, 걱정과 슬픔과 스트레스로 정신 건강이 위협받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말을 험하게 하는 사람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자신의 힘과 자신감을 과시하고 주위를 조정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한다. 요즘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하는 짓이 딱 그거다.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서라면 온갖 신조어를 만들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뒷골목에서나 쓰는 천박한 은어도 마다하지 않는다. 철 지난 ‘독재 타도’를 출마의 변으로 삼으며 멀쩡한 대통령 임기를 조기 종식시키겠다는 후보도 있다. 시대착오적이며 위험한 언행을 일삼는 해로운 정치인이 세상에 뿌리는 그런 말을 일상으로 듣고 사는 국민의 정신 건강이 위험하다.
한 달도 남지 않은 총선 열기가 달아오르며 더욱 거칠고 뾰족해진 정치 언어 틈에서 가슴은 멍들고 마음은 상했지만, 전장의 연기를 헤치고 투표장에 가려고 한다. 더러운 평화보다 더 더러운 말의 전쟁을 막으려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런다. 솜처럼, 백합처럼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국민을 칼과 도끼로 내리찍는 사람이 당선되어 국민의 정신 건강을 해치는 일은 막아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총선에서 나는 무조건 말 곱게 하는 사람 편에 나의 보잘것없는 한 표를 보태려고 한다.○
04.12 22대 총선에서 정책 선거가 실종된 이유
희대의 성상납 망언·딸 통한 불법 대출
혐오·부도덕·적반하장이 지지받는 사회
우리가 아는 상식·인성·염치는 어디 있나
사회를 떠받드는 공통의 가치에 동의해야
정책 논쟁 가능하고 미래 비전 놓고 경쟁
불행히도 우리는 그런 준비 안돼 있는 듯
▲일러스트=이철원
상대방이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가 알아보는 테스트로 ‘그래서 뭐?(So what?) 테스트’라는 게 있다. 가령 동생을 때린 아이에게 엄마가 “왜 때렸어?” 하고 꾸중했다 가정해 보자. 이때 “그게 뭐 어때서?”라고 답한다면, 그 아이는 엄마와 폭력에 대한 가치관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만약 “때린 건 잘못이지만 맞을만한 짓을 했어”라고 답한다면, 그 아이는 적어도 폭력이 나쁘다는 건 알고 있다.
이 테스트를 해야 하는 것은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과는 상호 설득은커녕 소통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사회를 떠받드는 공통 가치 위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사실을 규명하고 정책을 논의할 수 있다. 서로 지향하는 가치가 다른 사람과는 상대방에게 완전히 맞추거나 아니면 포기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한 평화롭게 공존하기 어렵다.
특히 사회를 향한 설득 메시지를 구성할 때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 그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가치와 신념 체계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도 진실보다 진실 같은 거짓이라도 대중이 믿는다면 더 설득력이 있다고 했고, 18세기 영국의 작가 토머스 페인도 상식의 힘을 역설한 바 있다. 그가 말한 상식은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선각자들의 피나는 노력과 희생의 산물이다.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는 사회에서 코페르니쿠스는 역적이다. 사회의 상식이란 그렇게 무섭다.
희대의 여대생 성상납 망언과 전방위 역사 왜곡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더불어민주당 김준혁(경기 수원정) 후보가 논란의 중심에 섰을 때 나는 그가 조만간 하차할 줄 알았다. 그 정도 무지와 무신경, 혐오주의가 드러난 사람이라면 낯이 뜨거워서라도 표를 달라고 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틀렸다. 그는 꿋꿋하게 완주했고, 유권자의 선택을 받아 국회에 입성하게 됐다. 거기에는 이재명 당대표의 도덕적 지지와 일부 극렬 운동가의 퍼포먼스가 뒷심으로 작용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당의 상식에 비추어 김 후보는 크게 문제가 없는 후보였던 것 같고, 그렇게 판단한 근거는 그 지역 유권자들의 상식이었을 것이다.
민주당 양문석(경기 안산갑) 후보는 좀 더 심각하다. 딸의 사업 자금이라고 속여 받은 대출금으로 서울 잠원동 아파트를 샀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그게 편법이 아니라 명백히 불법이라는 사실을 금융감독원이 공식 확인해 주었기 때문이다. 도덕이나 품위 문제도 아니고 법을 어긴 후보라면 적어도 내 상식으로 입법부에 들어가기에 부적격이다. 해서 그도 하차하지 않을까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내가 틀렸다. 그는 오히려 “피해자가 있느냐?”며 언성을 높였고, “내 허물을 덮어달라”고 읍소했다가 “한동훈 너부터 깨끗하게 살라”며 외려 공격 모드로 돌았다. 부끄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역시 완주했고, 그와 상식을 공유하는 지역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아 여유 있게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당에서 후보들의 검증이 소홀할 수도 있고, 과거 허물이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 “그게 뭐가 문제인데?”라고 되묻고 버티는 건 다른 문제다. 아마도 최악의 도덕성 선거로 기록될 이번 선거에서 마주친 불편한 진실은 그런 불법과 부도덕과 혐오와 적반하장이 걸러지거나 비난받기는커녕 오히려 국민의 지지를 얻어 완주하고 승리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이건 정파 문제가 아니라, 상식과 가치, 인성과 염치 문제다.
이름도 나르시시스트적인 ‘조국혁신당’이 의석을 휩쓴 건 연구 대상이다. 사정이야 여하간 그는 특수한 위치에서 보통 사람들은 꿈도 꿀 수 없는 방식으로 자녀의 입시 비리를 저질렀고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가 명예를 회복하고자 급조한 당에 지지자가 몰리고 실제 다수 표로 이어지는 현상은 그를 범죄자로 보기보다 검찰의 희생양으로 보는 사람이 상당수라는 증거다. 조국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상식 체계는 무엇이며, 그들에게 법과 정의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각종 ‘사법 리스크’로 조사와 재판을 받는 당대표가 이끄는 당이 가볍게 의회 과반을 휩쓴 이번 총선을 목도하며 우리 사회가 공유하는 가치는 온전한지, 그리고 상식은 건강한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날조된 사실에도 “그게 뭐 어때서?”라고 치부하고, 혐오성 막말에도 “그게 어디가 어떤데?”라고 반응하며, 법을 좀 어겨도 “그게 뭐 대수야?”라고 하는 사회는 아닌지 말이다.
적어도 드러난 여러 상황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범법자에 대해 한없이 관대한 것 같다. 그런 곳이라면 법을 쉽게 어기고, 처벌도 우습게 알 것이다. 소고기를 먹고 삽겹살을 먹었다는 정치인의 거짓말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그런 곳에서는 거짓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횡행할 것이다. 범죄를 저질렀어도 처벌이 과하다며 무한 온정주의를 발휘한다. 사실무근인 말을 떠드는 후보도 쉽게 용서하는 사회. 산 자건 죽은 자건 아무 말이나 붙여 망신 주는 사람에게 환호하는 사회. 정치적 이득을 위해서라면 모교도 죽이고, 이모도 창녀로 만들고, 자기편이라면 무슨 짓을 해도 감싸는 사회.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에 대한 가치 기준이 흔들리는 사회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정책 논쟁을 하려면 순서가 있다. 먼저 사실관계를 규명하고 동의한 후, 그 사실의 가치에 대해 합의하고, 그다음에 더 나은 미래를 놓고 경합하는 것이 정책 논쟁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아직 그 정도 차원의 논쟁을 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
05.10 설득은 멀고 선동은 가까운 나라
가짜 뉴스는 진짜 뉴스보다 6배 빨리 전파
거짓 정보도 자주 들으면 진짜라고 확신해
정부 여당의 정책 설득은 땅 위에서 노는데
여권을 공격하는 선동은 날개 달고 날아다녀
설득도 선동도 ‘소통’이 핵심… 나서서 말해야
▲일러스트=이철원
가짜 뉴스는 진짜 뉴스보다 6배 빠른 속도로 전파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미국 MIT가 10년간 트위터에서 3백만명 이상이 공유한 뉴스 12만6000건을 대상으로 연구해 2018년 사이언스지에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가짜 뉴스와 헛소문이 진짜 뉴스보다 훨씬 빠르고 넓게, 그리고 멀리 퍼져 나갔다. 연구팀이 제시한 설명은 비교적 간단하다. 가짜 뉴스의 기이하거나 혐오스러운 속성이 사람들의 주의를 더 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 현상을 ‘신기함 가설(novelty hypothesis)’이라고 불렀다.
진짜 뉴스가 헛소문보다 더 빨리 전파되거나, 적어도 비슷한 속도로 전달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갈 때, 검증되어 매체에 실린 뉴스는 이백 리도 못 간다는 계산이니까. 진짜 뉴스를 6배 많이 생산해야 가짜 뉴스 하나를 따라잡을까 말까 하다는 이야기다.
전파의 속도뿐 아니라 효과도 문제다. 정보에는 ‘초두 효과’라는 것이 있어서 처음으로 접한 정보를 진짜로 믿는 경향이 있고, ‘빈발 효과’도 있어 자주 접하면 진짜처럼 여기게 된다. 아무리 거짓 정보라도 처음 접하고 자주 들으면 진짜라고 확신하게 된다. 초기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은 메시지의 효과를 설명하며 ‘피하주사 모델’이라는 말을 썼는데, 이는 주사약처럼 몸속에 들어가면 즉각적이고 강렬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가설이다.
그러나 요즘 미디어 환경에서 인간은 주사를 맞을 필요도 없이 정보의 바다에서 헤엄치듯 노출되어 산다. 정보는 바이러스처럼 늘 우리 주변을 맴돈다. 개중에는 쓸모 있는 정보도 있지만, 어떤 정보는 치명적 질병을 전염시키기도 하고, 대상포진을 일으키는 수두 바이러스처럼 몸속에 들어와 잠복해 있다가 면역력이 약해지면 발병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 좋은 저널리즘이라는 백신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개헌 저지선이 위태로울 정도로 지난 총선에서 여권이 대참패한 원인에 대한 설명은 이미 차고 넘친다. 말이 개헌이지, 국가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바꿀지도 모를 선거 결과였다. 사태가 그 지경까지 이르게 한 윤석열 정부나 여당의 총체적 문제도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거기에 한 가지를 조심스럽게 보태자면, 정보전의 실패를 들고 싶다. 정부의 설득은 땅 위에서 놀고, 정부를 공격하는 선동은 날개를 달고 날아다녔다. 정책 소통은 부족했고, 위기관리는 늘 때를 놓쳤다. 그 틈으로 정부와 여당을 공격하는 각종 선전 선동이 파고들어 자리했다.
법정 고발까지 번진 의료 개혁 사태는, 정부 관료들이 설명하고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했지만, 일반 국민은 왜 2000명이어야 하는지 아직도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미래의 의료 수요를 생각한 정책이라는데 왜 의사들이 저렇게 죽을 둥 살 둥 반항하는지, 왜 그들을 설득하는 논리를 정부가 내놓지 못하는지 안타깝다. 그게 국가의 미래를 위해 중요하다면 정부는 더 소통하고 더 설득하고 무지막지할 정도의 정보를 국민에게 제공해야 한다. 그런 정보는 반대쪽 논리를 하나하나 깰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국민 마음을 살 수 있는 내용이면 더욱 좋다.
요즘 야당이 한껏 고무된 특검 대상으로 지목되고 있는 각종 사안, 즉 채상병 특검이나 김건희 특검이나 기타 여러 특검 사안은, 정책도 아닌 정치 선동에 적합한 소재다. 정부는 이들의 공세에 거의 무방비해 보인다. 소리를 높여 아니라고 말하거나, 반대 증거를 제시하거나, 앞서서 수사를 받겠다고 선수를 치거나, 여하튼 뭔가 적극적으로 응대했어야 할 사안에 미지근하게 대응하는 건, 바로 선전 선동이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역정보(counter information)가 없는 상태에서 원래 정보가 먹히는 건 자연법칙이다. 정책은 설득해야 하고, 선동은 적시에 강렬하게 대응해야 하는데, 정부와 여당은 둘 다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설득은 어렵지만 선동은 쉽다. 왜냐하면 설득은 ‘생각하는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반면, 선동은 ‘생각 없는 다수’를 겨냥하기 때문이다. 설득은 느리지만 선동은 빠르다. 설득은 재료와 증거가 필요하지만 선동에는 약간 상상력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진짜 뉴스는 취재와 보도라는 과정을 거치지만 거짓 정보는 그냥 공장에서 양산할 수 있다. 그러니까 양적인 면에서, 속도라는 측면에서, 또 효과라는 차원에서 설득이 선전 선동을 이기는 건 결코 녹록한 싸움이 아니다.
설득과 선동은 공통점이 있는데, 둘 다 어떤 형식으로든 ‘소통’하는 모양새를 띤다는 점이다. 그러니 소통해야 한다. 사안이 터지면 즉각 반응해야 하고, 사과할 건 사과해야 하고, 나서서 해명하거나, 하다못해 어도어의 민희진 대표처럼 억울하다고 몸부림을 치든가 해야 한다. 대통령은 인물이 아니라 기관이다. 대통령이 하는 말은 그 자체로 뉴스 가치가 있다. 그러니 적극 대응하고 해명하면 적어도 뉴스 가치가 있으니 보도하고 주목할 것이다. 세상에는 헛소문이 나도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억울한 사람이 태반이다.
그러니 나서서 말해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은 도어스테핑부터 기자회견까지 잠재적 소통 기회를 계속 피해 왔다. 그게 가짜 뉴스와 선전 선동에 길을 내어주는 일인 줄도 모르면서. 그러더니 드디어 취임 2주년 기자회견이 헤드라인 뉴스 속보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믿을만한 팬덤이 있어 소통 시스템이 저절로 굴러가는 것 같지도 않은데, 도대체 무슨 수로 국민과 소통하려고 그랬는지 모르겠다.○
06.07 대통령은 무슨 말을 언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일러스트=이철원
지난 월요일 오전 대통령의 산유국 발언이 ‘긴급 속보’로 전해질 무렵, 나는 일본 전문가와 한 행사에 참석 중이었다. 그는 전문가답게 우리나라와 일본이 주장하는 EEZ(배타적경제수역)가 다르다면서,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포항 앞바다가 우리나라 영역인지 부지런히 지도를 찾아보며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석유가 나온다니 좋은 소식 아니냐, 이번에는 진짜일까, 같은 이야기가 오갔고, 그걸로 연금 구멍이나 메꿨으면 좋겠다는 말이 가볍게 오갔으나, 거기까지였다. “막대한 양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지만, 높아봤자 가능성이고, “가능성 20%는 상당히 높은 성공률”이라고 전문가는 말하지만, 별로 높게 다가오지 않는 숫자다. 경제성이 현실화되는 건(된다면) 2035년경이며, 삼성 시총의 5배나 된다는 액수는 애초에 너무 커서 현실감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무엇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을까. 대통령 말씀대로 “차분하게 지켜보는”수밖에.
다음 날 언론들은 산유국 가능성에 흥분하며 대서특필했으나, 나는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서 대통령이 ‘산유국 가능성’ 발언을 그 시점에 그런 방식으로 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의문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긴급 속보로 전하며 국민에게 ‘차분하라’고 하는 모순도 모순이지만, 무엇보다 아직 구체성이 결여된(과학자가 아니라 일반 국민에게) 이야기를 대통령이 나서서 전하는 건 좀 위험하고 섣부른 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하더라도 대통령은 “오늘 내가 탐사 시추 계획을 승인했다” 정도로 가볍게 전하고, 모든 디테일은 주무 장관과 관련 전문가들이 설명하도록 하는 게 더 나은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여하튼 뭔가 좀 어설퍼 보여 관련 자료들을 뒤적여 보았다.
지구상에서 대통령제가 가장 오래되고 비교적 성공한 미국에서는 대통령의 말에 대한 연구가 많이 되어 있다. 대통령의 언어와 정치 수사학을 연구하는 로드릭 하트 교수는 1945년부터 8명의 대통령 연설 9969개를 분석했다. 대통령 수사학의 매크로 트렌드를 추적한 그 연구에서 그는 가령 왜 존슨 대통령이 텍사스에서 90번이나 연설했으며 포드 대통령은 왜 비공개 연설을 많이 했는지, 대통령들은 어떤 자리에서 어떤 주제에 대해 말하고, 의회 상황에 따라 연설 장소나 횟수가 바뀌는지 등을 조사했다. 그는 또 다른 분석에서 대통령이라는 역할이 지니는 수사학적 특성이 있는지를 성직자나 기업인 같은 다른 직군과 비교해 분석하기도 했다.
하트 교수에 따르면 대통령이 가장 많이 발언한 상황은 각종 기념식 같은 ‘공식 석상’(37.6%)이었고, ‘정책 브리핑’(26.5%)이 그다음이었다. 공식 발언의 내용은 ‘국제 협력‘(34.8%)이 가장 많았고, ‘인간적 가치’(19.7%), ‘봉사’(10.9%)가 뒤를 이었다. ‘과학과 농업’은 9.3%였다. 그가 분석한 대통령 수사학의 특징은 첫째 인간성의 강조, 둘째 구체적이고 쉬운 단어를 사용한 실용적 접근, 셋째 확신이 아니라 신중함에 기반한 언어의 사용이었다. 이런 특징은 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대통령이라는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대통령의 말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그의 책 제목처럼 ‘리더십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한때 부통령을 지낸 존슨 대통령과 닉슨 대통령도 대통령이 된 후에는 ‘대통령처럼’ 말했다.
대통령 언어의 첫 번째 특징인 ‘인간성(humanity)’은 대통령이 스스로 인간적으로 국민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뜻한다. 따라서 ‘나’ 혹은 ‘우리’를 주어로 대화하듯 말하며, 전반적으로 문제를 인간화하고, 해결 가능한 것으로 전환시켜 설득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상주의자가 아닌 현실주의자로서, 어린아이도 알아듣게 말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하트 교수는, 대통령은 ‘speaking more, saying less’(이걸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공적이고 역사적인 담론으로서의 스피치 비중이 높아졌다는 쪽으로 번역해야 할까)의 트렌드를 보이고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윤 대통령은 긴급발표문을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서...물리탐사 결과가 나왔습니다”라고 현상을 전달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보다는 “저는 오늘 산업통상자원부의 석유 가스 탐사 시추 계획을 승인했습니다”라는 주어가 있는 말로 전환해서 인간적으로 다가갔으면 어땠을까. 대통령은 ‘막대한 양’이라고 했는데, ‘막대하다’는 건 사실이 아닌, 평가와 의견의 영역이다. 아직 매장량도, 상업성도 모르는 상태에서 단정하는 건 위험하고 비현실적이다. 또 대통령은 1966년, 4500만 배럴, 미국의 액트지오 회사, 물리탐사 심층 분석, 심해 광구, 남미 가이아나 광구, 110억 배럴, 한 개당 1000억 같은 숫자와 기호를 쏟아냈다. 이건 주무 부처 장관도 아니고, 석유 시추 전문 과학자나 실무자가 나서서 설명해야 하는 영역 같다. 무엇보다, 아직 미확정의 가능성을 ‘대통령’이 ‘긴급’하게 전하면, 진짜 산유국이 ‘확정’되었을 때는 ‘누가’ ‘어떻게’ 그 충격과 감동을 전할 수 있을까. 혹은 역으로 내년 상반기에 나올 조사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 뒷감당을 어찌 할 것인가.
하트 교수가 분석한 ‘speak more, say less’ 기준에 따르면, 애초에 김치찌개 행사나, 도어 스테핑 같은 부수적인 소통은 중요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오히려 북한의 오물 풍선 같은 외부의 위협이 있을 때 국민의 마음을 안정시킬 대통령의 언어가 필요했다. 대통령은 결국 그의 말로 기억되고 기록되며, 말을 통해 국민과 연결되고 하나가 된다. 따라서 가장 적시에 가장 대통령다운 언어로 역사에 자신의 궤적을 남길 말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07.05 정의의 여신 디케는 한국에 와서 어떻게 변했나

▲일러스트=이철원
개인적으로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사법 리스크’라는 말에 반대한다. ‘리스크(위험)’란 철저하게 이재명 전 대표와 민주당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그가 위험한 것이 국민과 국가에 오히려 ‘세이프(안전)’하고 좋은 것일 수도 있다. 누구의 관점에서 그렇냐고? 두 눈을 가리고, 손에는 저울과 칼을 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디케’의 관점이다.
디케는 제우스와 테미스 사이에서 태어난 여신 중 한 명으로, 인간 세상에서 정의가 훼손될 때 복수와 재앙을 내리는 신이다. 디케의 어머니인 테미스는 법과 계율의 여신으로 옳고 그름을 관장한다. 천하의 바람둥이에 약점 많은 제우스도 의로운 사람에게는 복을 주고 사악한 인간에게는 벌을 주었다. 옳고 그름이란, 태초부터 인간사에 그렇게 중요했다. 디케는 로마시대에 ‘유스티티아(justitia)’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정의’를 뜻하는 ‘저스티스(justice)라는 말이 거기서 유래했다.
범죄 혐의 11개로 재판 4개를 기다리는 전 당대표와 그를 지키기 위한 로펌으로 전락한 제1당의 기상천외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에 정의의 여신이 있기는 한가,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봤다. 아마도 안대를 풀어헤치고, 고장 난 저울에 무딘 칼을 들고 있는, 굼뜨고 한가한 여인의 모습이 아닐까.
우선 죄의 무게를 다는 저울부터 보자. 정치인의 거짓말이나 위증교사는 일반인의 그것과는 무게가 다르다. 그 해악이 갖는 공적 파장 때문이다. 죄를 제대로 저울 위에 올리기는커녕 있던 죄조차 깃털처럼 가볍게 둔갑시켜준 게 권순일 사법부였다.
2020년 당시 권순일 대법관은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가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대법원에서 유무죄 의견이 5대5로 갈린 상황에서 무죄 의견을 내 판결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는 “상대 후보자의 의혹 제기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나온 발언이고, 단순히 부인하는 답변일 뿐”이라며 “공직 선거 토론회에서 나온 발언을 사후에 사법적으로 판단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그 결과 이 전 대표는 지사직을 유지했고, 그 이후 벌어진 일은 아시는 바와 같다. 그때 저울이 제대로 작동했더라면 이재명 의원도, 당대표도, 비명횡사도, 민주당의 아버지 등극도 모두 없었을 것이다.
그다음은 칼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칼은 종종 시간과 동의어다. 질적인 시간의 신 카이로스도, 양적인 시간의 신 크로노스도 모두 칼과 낫을 들고 있다. 그만큼 시간에는 거부할 수 없는 날카로움이 내재되어 있다. 마감 시간이 ‘데드라인’이라는 번역은 과장이 아니다.
아무튼 이재명 전 대표와 사법부의 관계는 처음부터 시간을 건 싸움이었다. 공직선거법은 100만원 이상의 벌금형이 확정될 경우 의원직 상실은 물론 5년간 피선거권도 박탈된다. 그러니 이재명의 민주당은 최대한 시간이 더디게 가도록 사법부의 시계추를 붙들고, 검사 탄핵부터 대법원 이전 법안 발의까지, 온갖 압박 수단을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시간을 붙들어 매기 위해 저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는데 정의의 여신은 여유롭고 한가하기가 짝이 없다. 지난주 기소 1년 9개월 만에 드디어 이재명 전 대표의 선거법 1심 재판부가 오는 9월로 변론을 종결하고. 10월이면 최종 선고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모처럼의 소식이지만 기소에서 1심 선고까지 25개월 걸리는 셈이다. 선거법 사범의 경우 6개월 이내 결론을 내야 한다는 규정을 어겨도 한참 어긴 기간이다.
여신의 긴장감과 일하는 속도가 이러하니 죄를 진 국회의원이 꼬박꼬박 세비를 받고 무사히 임기를 마치는가 하면, 범죄자 대통령 후보도 나올 기세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는데, 우리 여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름휴가도 가신다고 한다. 이런 여유가 가지고 올 가공할 결과를 우리 여신은 짐작이나 하실까.
이 모든 것 위에 가장 두려운 건 안대를 풀어헤친 여신이다. 다음 대통령 선거는 2027년 3월이다. 대선 전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되면 이 전 대표는 피선거권을 잃어 출마할 수 없지만, 실제로는 대선 1년 전인 2026년 3월이면 사실상 이재명 후보가 확정될 것으로 보고 있다. 대선이 1년도 남지 않았는데 대법원이 유력 대선 후보의 출마 자체를 막는 결정을 내리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 때문이다. 현직 대통령도 잘못이 있으면 수사하라는 ‘공수처’도 만든 나라에서 대통령도 아닌, 야당 후보를 위해 판결을 유보한다니, 이 무슨 메가톤급 눈치 보기인가. 안대를 벗은 여신이 이제 눈치까지 봐야 한다.
하기야 특검법이 남발되는 걸 보면 문재인 정부가 만든 공수처가 그다지 쓸모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최대 업적이 국방부 장관 출신 호주 대사와 총선 출마를 준비하던 국방부 차관을 출국금지시켜 호주 대사를 낙마시키고 차관을 선거에서 낙방시킨 정도인 걸 보면, 문재인 공수처는 나랏돈으로 예산을 확보해 자기들끼리 일자리 나눠 갖는 수많은 수단 중 하나가 아니었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문제는 아무리 굼뜨고 한가해도 우리가 기댈 곳은 정의의 여신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언론이 백날 특종하고 지식인들이 1000개의 칼럼을 써도 결국 정의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존재는 여신밖에 없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는 결국 법이다. 그러니 우리의 여신이 더 분발해 주기를 바란다. 서둘러 눈에 안대를 두르고,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자세로, 온갖 훼방꾼의 지연 작전에 지혜롭게 대처하며, 정의의 칼을 제때 잘 휘둘러 이 땅에 정의를 가져다주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08.02 정치적 개인이 '메뚜기떼'와 싸운다면

▲일러스트=이철원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최소한 1만 시간 훈련이 필요하다는 ‘1만 시간의 법칙’이 정치에는 적용되지 않는 게 분명해 보인다. 1만 시간이면 하루 3시간씩 10년, 하루 10시간이라면 3년이다. 이 법칙에 따르면 29세 때 최연소 상원 의원에 당선되어 팔순에 이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거의 정치의 신(神)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그런 그도 주변의 조언과 압력으로 재선 도전을 포기했다. 자신의 야망보다 국가와 당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는 변을 내세우긴 했지만, 정치는 결코 개인기로 돌파할 성질이 아니라는 걸 노장이 모를 리 없다.
겉으로는 강하고 개성 넘치는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지난달 중순,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나흘간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를 밤낮없이 중계하는 폭스TV를 우연히 지켜본 나는 대회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열띤 표정과 분위기, 서른 명이 넘는 지지자 연설의 반복적 레토릭을 들으며 트럼프(혹은 그와 유사한 사람)를 강하게 열망하는 미국의 얼굴을 보았다. 트럼프는 어쩌면 그런 사람들의 도구에 불과하다면 과한 표현일까. 아무튼 ‘트럼프의 미국’이 아니라 ‘미국의 트럼프’라는 표현이 새삼 와 닿았다.
정치 지도자는 종종 자신의 어떤 부분이 빼어나서 그 자리에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상 자신을 불러내고 만드는 건 시대정신이고 국민이며 지지자들이다.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도, 노력한다고 특별히 더 잘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지지자와 지도자의 역동성 측면에서 한국을 따라올 나라는 지구상에 드물다. 정치 경력이 몇 개월에 불과한 신인들을 불러내 대통령도 만들고 당대표도 만드는 나라니까. 지금 대통령도, 또 압도적 지지율로 선출된 여당 대표도 모두 정치라는 상자 밖에서 커 온 의외의 인물이다. 우리 국민의 정치적 상상력은 늘 우리를 놀라게 한다.
1차 경선에서 62.84%를 득표해 당대표에 선출된 한동훈 대표는 당선 소감에서 “제가 잘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우리 국민의 정치적 역동성의 법칙에 따르면 한 대표는 더 잘할 필요가 없다. 그냥 ‘한동훈이 한동훈 하면 된다’. 여당 지지자들은 ‘한동훈이 한동훈 하기를’ 원해서 선출한 것이지, 더 잘하라고 뽑은 것이 아니다. 노력한다고 더 잘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인간이란 어차피 딱 자기의 크기만큼만 잘할 수 있다.
우리말 표현 중에 가령 “손흥민이 손흥민 했다” 같은 말은 사람들의 기대에 딱 부응했을 때 쓰는 말이다. 우리는 ‘손흥민이 손흥민 하기를’ 원할 뿐이다. 이 말을 정치인에 대입해 보면,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많은 유권자는 “윤석열이 윤석열 하기를” 바라며 그를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그 기대가 어긋나자 지지율이 하락했다. 적어도 여당 지지자들은 “이재명이 이재명 할까 봐” 그걸 막기 위해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아마도 한동훈 대표 선출도 비슷한 맥락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국회 법사위원장 정청래는 탄핵 청문회에서 ‘정청래 했고’ 과방위원장 최민희 역시 방통위원장 인사 청문회에서 ‘최민희 했다’.
고유명사를 순식간에 동사로 바꿔 말하는 그 표현의 묘미는 뜻의 중의성(重義性)에 있다. 애초부터 대통령이 마음에 안 들었던 사람들은 반대로 “윤석열이 윤석열 할까 봐” 당시 이재명 후보를 찍었을 것이다. 그들은 ‘정청래가 정청래 해서’열광하고, ‘최민희가 최민희 해서’ 지지한다.
지난 여당 전당대회가 설전과 폭로전으로 얼룩졌다고 하지만,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청탁이) 개인 차원이었다고요?”라고 발끈하는 나경원 후보나, “제가 잘하겠습니다”라고 하는 한동훈 대표의 말에서 모처럼 ‘개인’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개인은 근대성과 합리성의 출발점이다. 한 대표는 ‘저는’ ‘제가’라는 일인칭 화법을 즐겨 쓰고, “더 경청하고, 설명하고, 설득하겠다”고 했다. 또 “저는 그동안 논쟁을 피하지 않아 왔다” “당원들을 논리로 설득하겠다”고 했다. 설득, 논쟁, 경청은 수평적 관계를 상정한 화법이다. ‘동료 시민’도 그런 개념에서 파생한 것이리라. 비슷한 무렵 지역순회 경선에서 이재명 대표가 90%가 넘는 압도적 지지율을 얻은 야당에서는 비록 작은 소리였지만 “집단 지성이 아니라 집단 쓰레기” “우리가 메뚜기 떼인가” “당원들은 표 찍는 기계” 같은 자성론이 나왔다. 곤충이나 기계에 빗대어지는 야당 전당대회보다는 설전하고 시끄러운 여당의 전당대회가 더 인간적 아닌가.
문제는, 초반에 언급했듯, 정치는 개인적 역량보다 시대적 상황과 지지자의 함수이고, 설득이나 논쟁 같은 개념은 생각하는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소통이라는 점이다. 경청이란 서로 말을 주고받는, 같은 언어를 교환하는 사람들 사이에 하는 일이고, 설득은 스스로 태도를 바꿀 유연성을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하며, 논쟁은 논리와 증거를 받아들이고 논쟁 규칙을 준수하는 사람들 사이의 약속된 소통 방식이다. 무엇보다 그런 소통은 ‘생각하는 수평적 개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수직적 집단’은 설득이 아닌 ‘선동’ 대상일 뿐이다.
근대적 개인은 계몽주의를 이끌고 근대를 열었지만, 정치에서는 맹목적 집단주의가 성공한 사례가 역사에서 새롭지 않다. 지금까지 우리가 ‘민주 대 반민주’ 구도에 익숙했다면, 지금부터는 ‘개인 대 집단’의 대결을 준비해야 할지 모른다. 모처럼 싹을 보인 ‘정치적 개인’이 전체주의라는 ‘폭풍’을 넘어설 수 있을지. 기대와 우려를 안고 지켜보고 있다.○
08.30 당신의 '공동체 감각'은 건강하십니까?
집회의 자유 내세워 고성방가 일삼 듯
권리 강조하며 타인 배려 안 하는 시대
공동체 감각인 '센수스 코무니스' 실종
안세영이 일깨운 '공동체 감각' 확산시켜
정치인들 구습 타파하게 만들어야 한다
▲일러스트=이철원
오래전부터 금지된 행동으로 ‘고성방가(高聲放歌)’라는 것이 있다. 큰 소리를 내어 주변을 시끄럽게 만들고 피해를 주는 경범죄로 처벌의 대상이 된다. 내 목소리를 한껏 높여 노래를 하는 게 무슨 문제라는 말인가. 그런데 그게 주변에 피해를 주면 죄가 된다.
비단 소음뿐이 아니다. 거리에 쓰레기를 방류하거나, 공용 화단의 꽃을 꺾는 것도 유사한 범죄 행위다. 함께 모여 사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상식과 규범이 있다. 소소하지만 자기 목소리의 데시벨을 조절하는 것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내가 속한 사회는 살 만한가? 그런 곳으로 가꾸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무리를 지어 살기 시작한 시점부터 던지기 시작한 이 물음을 탐구하기 위해 고대 철학자들은 ‘공동체 감각’이라는 ‘센수스 코무니스(sensus communis)’에 주목했다. ‘감각’이라는 말 그대로 인간은 미각이나 후각처럼 주변 환경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다. 생존을 위해 인간은 ‘사회적 감각’ ‘연대성 감각’, 때론 ‘상식’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이 감각을 발동시킨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나 로마의 키케로 같은 철학자는 공동체 감각이야말로 사회적 미덕이며 설득의 기본이라고 보았다. 훗날 정치철학에서 이야기하는 공적 이성이나 사회 정의도 그 바탕에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공동체 감각이 있다. 바람직한 지도자란 그런 감각을 갖추고 사회적 규범에 따라 대중을 설득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지도자가 아니라도 공동체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공동체를 해치는 행위는 자제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는 살맛이 날 것 같다.
고성방가에 귀를 막고 도심을 지나갈 때, 혹은 무너지는 공적 영역의 문제를 건드리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우리의 ‘공동체의 상식’은 건재한지 되물을 때가 많다. 물론 집회의 자유가 보장되고 각종 권익이 신장된 것은 괄목할 일이지만, 요컨대 중요한 건 조화와 절제다. 집회의 자유가 고성방가에 우선하고, 신장된 권익이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사회라면, 여전히 불편한 공동체일 것이다.
서로 다른 상식이 부딪치며 늘 반목하고 분열하는 우리 사회에서, 수준 미달의 정치인에 가려 공적 마인드를 눈 씻고 찾으려 해도 잘 안 보이는 우리 사회에서, 최근 ‘공동체 감각’을 하나 발견하고 길어 올렸다. 그것도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과 인물로부터. 배드민턴 종목에서 28년 만에 값진 금메달을 딴 후 협회를 비판하는 작심 발언으로 화제의 중심에 선 안세영 선수 이야기다.
메달을 따자 협회의 운영과 관행에 대한 여러 비판을 쏟아낸 안세영은 “배드민턴이 더 발전할 수 있을 텐데 이번에 금메달이 한 개밖에 나오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보기 바란다”라고 했다. 메달이 더 안 나온 이유를 생각해 보라니. 자신은 메달을 땄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배드민턴 공동체가 발전하는 것이라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는 발언이다. 안세영은 또 “협회는 선수들의 모든 것을 막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방임하고 있다”고도 했다. 그는 “선배 빨래, 방 청소 등 악습을 포함해 대표팀 운영 시스템에 경종을 울리고 싶다”고 했으며,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불합리하지만 관습적으로 해오던 것들을 조금 더 유연하게 바꾸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안세영의 메시지는 “나를 구해줘”가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를 구해줘”였다. 그의 ‘공동체 감각’에 비추어 협회는 바람직한 공동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안세영의 발언에 대해 여러 해석이 가능하고, 젊은 세대의 당당함이나 개인성으로 읽힐 수도 있으나, 나의 관점에서 주목한 것은 기성세대에서 보지 못한 새로운 세대의 ‘공동체 감각’이었다. 금메달도 땄으니 덮고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를 한 발짝 더 나아가 공개적으로 문제 삼은 건 다름 아닌 공적인 의무감이다. 공동체에 대한 그런 감각과 의무감을 지닌 젊은이가 많은 한 우리나라 미래는 밝다.
개인의 기량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선수가 오히려 체육 공동체를 염려하는 동안, 정작 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해야 하는 임무를 지닌 각종 협회들은 불투명하고 방만한 운영으로 조사를 받고 있다. 그들은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공동체 감각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그동안 잊고 있던 감각을 안세영이 일깨워 악습과 관행을 개선하는 계기가 마련된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사실 어떤 협회보다 더욱 공동체 감각으로 무장해야 하는 곳이 정치권이다. 정치인들이야말로 존재 이유가 공공의 안녕이니까. 그런데 언제부터 잘못된 것인지, 요즘 정치라는 직업은 공동체를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공동체를 파괴하는 비호감 인물들이 가득한 직업의 으뜸이 되어 버렸다. 공적 책임은 애초부터 없고 탐욕과 부도덕으로 고성방가보다 더한 스트레스만 안겨준다.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월급 받으며 제대로 봉사하지 않는 정치인이나 공직자에 화가 난다면, 그건 당신의 공동체 감각이 꿈틀거린다는 증거다. 자신의 이해보다 공공의 이해를 앞세우고, 정당의 이익보다 국가의 이익을 염려하며,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복원을 위해 협동하는 정치인을 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들의 ‘공동체 감각’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안세영의 ‘공동체 감각’이 배드민턴을 넘어 널리 확산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잠자던 우리의 공동체 감각을 흔들어 깨우고, 마침내 그 감각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분야의 구습까지 타파하도록.○
09.27 北의 오물 풍선에 대한 야당 당론이 궁금하다
수천 개 오물 풍선, 수개월 동안 내려보내는데
제1야당은 침묵, 조국당은 사실상 두둔 중
오물풍선 잘못이지만, 전단살포도 잘못이라고?
USB·음식·달러가 든 우리 풍선과 어떻게 같나
민주당 입장은 무엇인가, 유권자로서 궁금하다
▲일러스트=김현국
쓰레기 풍선을 만드는 북한 노동자를 상상해 보았다. 비닐 조각에서 담배꽁초와 배설물 등 온갖 오물을 모아 풍선에 집어넣으며, 아무리 당의 명령이라지만 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진 않을까. 조국 해방 전쟁을 위한 대단한 무기도 아니고, 기껏해야 남한 사람들 불편하고 열 받게 할 ‘저강도 도발’용 소품이라니. 멋들어진 핵무기를 놔두고 이런 지저분한 물건을 만드는 스스로를 창피해할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북한의 칼럼니스트라면, 이런 비인간적이고 치졸한 발상에 주민을 동원하는 정부를 맹비난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나는 북한에 살고 있지 않고, 불행한 일이지만 북한에는 그런 언론도 없다.
그런데 그 풍선이 장난이 아니다. 휴대폰에 뜨는 ‘북한 쓰레기 풍선이 서울 상공에 진입하였으니 적재물 낙하에 주의하고 발견 시 군부대나 경찰에 신고 바람’이라는 안전 문자가 수시로 일상의 평화를 방해하는 건 물론, 급기야는 기폭 장치 추정 물체 때문에 화재가 나고 세계 5대 공항인 인천공항에서 여러 번 운항 중지 사태가 벌어졌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풍선은 제주도와 전라도 일부를 제외한 남한 전역으로 떠내려갔다. 8월 초까지 집계된 수도권 피해 규모는 1억원이 넘는다. 발표에 따르면 풍선 하나 제조하는 데 원가가 약 1만원, 전체를 쌀로 환산하면 약 970톤에 이르는 액수라고 한다. 북한의 대학교수 월급이 4500원이다.
피해가 늘자 국회는 국민 피해를 정부가 복구할 수 있는 재난안전법 개정 절차에 들어갔고, 군은 ‘선을 넘었다고 판단될 경우 군사 대응을 검토’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군이 말한 ‘선’이란 인명을 뜻하지만, 사실 풍선은 이미 선(휴전선)을 넘었다.
풍선을 만드는 노동자와 달리 북한 수뇌부는 남한 반응을 넷플릭스보다 재미있게 감상했으리라 상상이 된다. 풍선 수천 개를 수개월에 걸쳐 내려보내는 동안 대한민국의 야당이라는 곳에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거대 야당이 침묵하는 건 물론이고, 조국당에서도 논평을 내고 “남한이 보낸 풍선은 인도적 행위며, 북한 풍선은 치졸하고 저급한 국제법 위반이라는 건 이중 잣대” 운운하며 김여정 편을 두둔했다. 그뿐인가. 야당 성향 논객이라는 사람들도 북한을 비난하며 동시에 윤석열 정부도 함께 비난해 주니, ‘남남 갈등’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을 것이다. 저강도 도발로 맛보는 고강도 재미다.
내친김에 북한은 ‘2국가론’이라는 또 다른 풍선을 띄워 보냈다. 이번에는 야권이 둘로 셋으로 나뉘어 분열하는 모습을 보였다.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통일하지 맙시다”라고 하자,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당장은 통일을 실현하기 어려우니 남북 간에 평화적인 협력적 관계를 구축하자는 게 임 전 실장의 핵심 메시지”라며 친절한 해설을 붙여주었다. 2국가론에 찬성하는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통일을 후대로 넘기자”는 입장인데, 정세현 전 장관도 같은 입장이다. 민주당 김민석 최고위원은 “김대중 대통령이라면 동조하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했으나, 같은 당 조승래 의원은 “당이 정색하고 논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뒤로 물러섰다.
민주당에서는 임 전 실장의 발언을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행여 당론으로 비칠까 선을 긋는 모습이지만, 민주당에서 2국가론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아무튼 선은 그었지만, 그렇다고 반대하거나 통일에 대한 적극적인 입장을 내지는 않았다. 여러 상황에 비추어 민주당의 입장은 2국가론과 오물 풍선 그 사이 어디쯤 있는 것 같다. 그 스펙트럼이 너무 넓어 정체성을 가늠하기 어렵다. 2국가론에 동조하는 입장이라면 대한민국의 헌법을 부정하는 소위 ‘반국가 세력’에 가까울 것이다. 오물 풍선은 잘못이지만 남한의 전단 살포도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북 전단 금지법을 만든 문재인 정부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고, 대북 강성 기조를 비판하며 점진적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김대중의 햇볕 정책 쪽에 가까울 것이다. 민주당 입장은 어디 위치하는지 알고 싶다. 향후 대한민국호(호)의 방향키를 쥘 수도 있는 제1 야당이기에, 유권자로서 나는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역설적이게도 임종석 전 실장의 ‘2국가론’은 그동안 별로 생각하지 않던 통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했다. 두 국가가 되면 이산가족은 외국인이 되고, 통일은 침략이 되며, 남한의 국토는 영원한 섬이 된다. 핵무기를 갖고 오물 풍선을 내려보내는 남의 나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3대 세습의 전근대적 독재국가와 세계 10위권의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이 친구는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북한에 동조하는 사람에게 다시 한번 묻고 싶어졌다. 지금 당장 가족을 데리고 북한에 가서 살라고 한다면 가겠는가? 아무리 해방 언저리에 묶여 건국 논쟁을 수백 번 반복한다 한들, 우리가 북한처럼 살 수도, 살아서도 안 되는 일 아닌가. 이렇게 쉬운 문제에조차 답을 내놓지 못하는 야당은 이상하다.
언제 이뤄져도 이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당장 될 것 같지도 않은 통일을, 그래도 지향하고 소망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더러운 풍선을 제조하며 비판조차 할 수 없는 북한 주민들에게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을 나눠주기 위해서라도. 같은 민족이 아니라도 그게 인류 보편의 가치이기에. USB와 음식과 달러가 담긴 남한의 풍선을 ‘보물’로 여기는 형제가 있는 한, 통일이라는 가치는 유효하다.○
10.25 한국 문화 르네상스 300년 주기설을 아십니까
600년전 세종은 훈민정음·측우기·관현악 작곡
18세기 정조때도 문예부흥… 수원화성은 세계유산
지금 우리는 임윤찬·한강·봉준호·윤여정 보유국
300년 간격으로 찾아오는 한국의 문화 르네상스
축복에 감사…하지만 정치만 바라보면 한숨나온다
▲일러스트=이철원
때론 가까운 곳에 명소가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산다. 지난주 방문한 수원 화성이 그랬다. 화성행궁 옆 에어비앤비에 묵게 된 나는 모처럼 수원 화성의 위용을 코앞에서 확인하고 청량한 기운에 흔들리는 갈대숲의 풍광과 성곽 위로 펼쳐지는 불꽃놀이를 즐기며 가을 정취에 흠뻑 빠져들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보러 외국을 가면서도 정작 바로 옆의 유네스코 문화유산을 이제야 제대로 보다니, 부끄럽기까지 했다.
한때 주택을 허물지 않고 구조를 살려 개조한 숙박 시설은 어느 관광객이 와도 불편함이 없는 시설과 센스 있는 인테리어로 시스템 운영되고 있었다. 요즘 명소로 떠오른 행궁동 주변은 서울 익선동과 북촌, 가로수길과 경리단길과 한옥 마을을 버무려놓은 인상이다. 역사와 함께 볼거리 먹거리 즐길 거리가 넘쳐 젊고 늙은 이들을 불러 모으는, 그야말로 ‘문화 융성’의 현장이다.
행궁(行宮)이란 왕이 지방에서 임시 거처하는 궁으로, 화성행궁은 정조의 비전과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향한 효심으로 유명한 곳이다. 수원 화성이 있는 팔달구 남창동의 거리명 주소는 정조로와 행궁로 등. 아무리 권세가라도 30년이면 잊히는 세태에 정조라는 이름은 18세기 문예부흥기의 유산과 함께 300년을 가고 있다.
그보다 300년 앞선 15세기 역시 괄목할 만한 문화 중흥의 세기였다. 그때 세종대왕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글’이라는 훈민정음을 창제해 국민의 입과 귀를 열어주었고, 농사짓는 백성을 위해 측우기와 천체 관측 기구를 제작했다. 서양보다 앞서 음악을 기록한 정간보를 창안했고, 관현악 곡을 작곡해 문화를 고양했다. 세종대왕 역시 광화문광장의 한가운데 동상으로, 매일 만지는 만원권의 초상으로 우리 옆에서 600년을 살고 있다.
그때부터 300년이 흐른 21세기 현재, 왜소하고 추한 정치에서 조금만 눈을 돌리면 문화 중흥기를 맞고 있는 대한민국을 발견한다. 소설가 한강이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리스트가 환생한 것 같다는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쇼팽의 음반으로 그라모폰상을 받았다. 봉준호 감독과 배우 윤여정은 오스카상을, 박찬욱 감독은 칸영화제 감독상을,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은 비영어권 첫 에미상을 받았다. 사실 그런 수상 소식은 이제 별로 새롭지도 않다. 이른바 ‘K컬처’가 세계로 뻗어나가며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인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오랜 장기인 춤과 노래는 우리 아이돌에게 전 세계 팬이 열광하게 만들고, 영화와 드라마는 창의적 상상력으로 신선한 충격을 던진다. 수출한 웹툰은 우리가 이른바 원조이자 플랫폼이다. 그 밑에는 우리 문화의 축적된 근육이 있다. 15세기에는 한글 창제로 문화적 반석을 다지고 18세기 영·정조 때 문예를 부흥시킨 데 이어 21세기 다시 한국 문화의 중흥을 예감한다는, 이른바 ‘한국 문예부흥의 300년 주기설’이 일리 있게 다가오는 이유다.
사실 이 개념은 한국미래학회 회장을 지낸 최정호 연세대 명예교수가 지난 1997년 새 대통령에게 띄우는 공개 서한에서 제시한 것이다. ‘21세기 한국 문화의 중흥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공개 서한에서 최 교수는 다가오는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로 전망하고, 민족사에서 한국 문화의 제3 르네상스가 될 기대를 이야기하고 있다. 아울러 “군주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만사가 뒤틀리고 인심이 순하지 못하여 악기(惡氣)가 올 것”이라는, 조선 중기 문신 이언적의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인용하며, 밀레니엄을 열 새 대통령에게 새 천 년을 이끌 ‘심지(心志)’와 ‘심술(心術)’을 주문하고 있다.
한 나라의 문화적 중흥을 이끌기 위해 충족해야 하는 전제가 있는데,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이 그것이다. 정치권력은 도덕적이어야 하고, 경제는 풍요롭고 안정적이어야 한다. 경제 정책과 문화 정책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세종은 중농 정책을 통해 보여주었다고 최 교수는 역설한다. 문화와 경제의 시너지는 사실 이미 증명이 끝난 명제라고 할 수 있다. 위 설명에 따르면 지금 우리가 구가하는 문화 중흥은 격동 속에서도 민주화를 향해 꾸준히 발전해 온 우리의 정치와, 눈부신 산업화와 정보화로 이룬 경제적 성공에 힘입은 것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토끼가 가져다준 문화 부흥인 것이다. 국가 간 경제 발전 차이를 연구한 공으로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아제모을루 MIT 교수도 한국을 바람직한 제도에 기반해 세계 역사상 가장 놀라운 경제적 성공을 이룬 나라로 확인해 주지 않았나.
아제모을루 교수가 잘 모르는 게 하나 있다. 21세기 문화 중흥 토대를 마련한 사람은 주로 예전 지도자이며, 근래 정치인은 국민의 평균에도 못 미치는 도덕적 기준과 상실을 지닌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애국심과 비전, 도덕성과 공적 의식, 자기희생과 염치, 그 어느 것 하나에서도 옛 지도자들에게 못 미치는 깜냥의 사람들이 요즘 정치인의 평균이다. ‘정치꾼’은 자신의 선거를, ‘정치가’는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는데, 요즘 정치인들은 전자에 가깝다. 그래서 다시 그에게 질문하고 싶어졌다. 그의 연구에서 지도자 요인은 통제된 변인이었는지, 모자라는 정치인들이 계속 집권해도 문화 강국으로 이어갈 수 있을지 말이다.
세상 곳곳이 전쟁으로 어지러운 이 즈음, 300년 만에 찾아온 문화 르네상스를 축복처럼 누리면서도 정치 쪽을 바라보면 그 축복이 얼마나 지속될지 불안해진다. 어느 자리에서 누군가 말했다. “우리나라는 정치만 바뀌면 돼.” 나도 동감이다.○
11.22 문명사회로 가는 멀고도 험한 길
과일·샌드위치·세탁… 이재명 법카 용도 상상초월
사회 진화하는데 구습에 머무른 '문화 지체' 현상
李, 집회하고 재판받는 건 문명사회 사는 덕분
판결 거부하며 야만적 언어 쏟아내는 건 非문명
법·제도 지키며 세련되게 사는 문명인 세상 왔으면
▲일러스트=이철원
나도 법카(법인 카드)가 있다. 그런데 잘 쓰지 않는다. 다른 카드와 섞이지 않도록 지갑 깊숙이 넣어두고 업무상 필요할 때를 제외하곤 꺼내지도 않는다. 법카를 쓴 후에는 누구와 무슨 일로 썼는지 실명과 함께 서류로 제출해야 해서 번거롭다. 사용 액수도 제한이 있다. 어차피 자유롭게 쓸 수 없으니 사실상 무용지물이나 진배없다고 생각하는 건 내가 대단히 청렴해서가 아니다. 요즘 웬만한 직장인이라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 정도 ‘법카 의식’은 있다.
전직 도지사 아내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최근 1심에서 벌금 150만원 유죄판결을 받았다. 대선을 앞둔 당내 경선 과정에서 지지자와 식사를 하고 음식값 10만4000원을 경기도 법인 카드로 계산한 것이 공직선거법 위반이라는 판결이다. 검찰은 이어 그의 남편인 전직 도지사도 업무상 배임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는데, 검찰 주장대로라면 법인 카드 유용 액수가 1억원이 넘는다. 이번에는 그의 아내는 기소유예됐다. 아직 법원의 판단이 남아있지만, 검찰이 제시한 혐의 내용을 보면 고가의 관용차에서 과일, 샌드위치, 세탁비에 이르기까지 유용 품목의 범위와 다양성이 상상을 넘는다. 분노에 앞서 요즘 세상에 어떻게 법카를 저렇게 막 쓸 수 있는지, 의아할 뿐이다.
적어도 법카 기준으로 그동안 경기도청은 딴 세상이었던 것 같다. 그 도지사 부부처럼 법카를 썼다가는 어떤 조직에서도 온전할 수 없다. 놀라운 건 첫째, 그런 국민 상식에서 동떨어진 세상에서 조직적으로 공공의 돈을 제 돈처럼 여기고 품목 불문 수시로 카드를 긁었다는 것이고, 둘째, 그게 말썽이 돼 1심에서 유죄판결이 나왔는데도 죄가 없다며 항소했다는 사실이다. 상식도, 배움도, 뉘우침도 없는 불량한 죄인이 아닐 수 없다.
관행이 불법으로 바뀌는 순간이 있다. 사회는 진화하는데 인간이 구습에 머물러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때 발생하는 일종의 문화 지체 현상이다. 그런 순간은 대체로 문명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나타난다. 아마 조선 시대 원님들은 세금을 걷어 제 것처럼 쓰거나 노비들을 제 맘대로 부려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법과 인권이 엄연한 문명사회에서는 그 모든 게 범죄가 된다. 조선 시대까지 갈 것도 없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직장 상사들은 부하 위에 군림했고, 남성은 여성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 요즘은 직원에게 던진 한마디가 성희롱 혹은 직장 내 괴롭힘으로 고발되고, 미성년은 별도로 보호해야 하며, 심지어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개나 고양이도 학대하면 법의 처벌을 받는다. 경기도의 법카 유용 사건을 보면 그 전직 도지사 부부는 지금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르거나, 그래도 되는 줄 잘못 알았던 것 같다. 몰랐어도 알았어도, 그들의 범죄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2022년 대선 과정에서 허위 사실을 공표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지난주 1심에서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2년 2개월을 질질 끌던 재판의 첫 선고인 데다 무죄를 주장하던 민주당으로서는 상당한 중형이라 정치권에 던진 파장이 컸다. 선고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미친 정권의 미친 판결”로 받아치고 장외 집회를 통해 전열을 가다듬는 야당을 보면 법과 정치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법조계를 자극해서 중형을 자초했다는 반성도 있고, 법리로 대응해야 하는 것을 정치 논리로만 돌파하려 한 결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모두 일리 있는 해설이지만, 내 생각에는 지나치게 우아한 분석이다. 정치도 법도 아닌, 문명과 야만의 대결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야당의 섬뜩한 언어 어느 구석에 정치가 있는가. “비명계가 나설 경우 다 죽여버리겠다”는 어느 의원의 말은 정치가 아니라 원시적 협박이다. 일부 야권 지지자들이 쏟아내는 말 가운데 “서울 법대 나온 판사가 맞나”라는 건 저급한 수준의 비아냥이며, “판사를 효수(梟首·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다는 일)해야 한다”는 건 야만적인 겁박이다. 문명사회 법정에서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을 로마제국의 16대 황제이자 스토아파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빗대 “신의 사제요 신의 종”이라고 표현하는 데 이르러선 할 말을 잃었다. 이렇게 시공간적 맥락과 내용과 대상이 다 틀리는 비유를 들어보긴 난생처음이다.
야당은 정적 제거에 검찰과 법원이 동원된 것처럼 포장하지만, 야만 사회에서 정적은 재판받지 않고 그냥 제거당한다. 이재명 대표가 펄펄 살아서 집회도 하고 재판도 받는 건 우리가 문명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야당은 “민주주의가 죽었다”고 소리치지만, 민주주의란 ‘법치’의 또 다른 이름이다. 법이 곧 문명이고, 선거도 문명이다.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을 탄핵해서 끌어내리려는 건 선거에 대한 불복이며, 검사를 탄핵하고 판사의 목을 치겠다고 하는 건 법에 대한 모독이다. 요컨대 야만이고 비문명이다.
‘문명사회’의 뜻을 풀어보면 물질적, 기술적, 정신적으로 발전한 세련된 삶의 형태를 말한다. 문명사회는 그 속에서 사는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며, 그를 위한 법과 제도가 마련되어 준수되는 사회다. ‘문명인’이란 그런 환경에서 남을 해치지 않고 친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우리는? 물질과 기술은 앞섰지만 정신적으로는 야만의 경계를 오가며, 친절하지 않고, 남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다. 법카도 쓸 줄 모르는 사람, 선거든 재판이든 결과가 맘에 안 들면 저주하고 저항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나라를 이끌면 지금까지 일군 우리의 문명은 순식간에 고대 유적으로 변할지 모른다.○
12.20 대한민국, 괜찮습니다
대통령의 계엄 선포 다음 날, 학과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다. 뉴욕타임스 서울사무실에서 내 연락처를 물어왔는데, 휴대폰 번호는 개인 정보라 이메일 주소를 대신 알려줬다고 했다. 학교 행사 관계로 뉴욕타임스 인사들과 안면이 있던 터라 미디어 전공 교수인 나와 인터뷰를 원했던 것 같다. 질문의 요지는 이번 계엄령에 대한 미디어의 반응과 한국 내 언론 자유의 향방 관련이었다. 나는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한국의 언론 자유는 굳건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
답변이 너무 간단했는지, 뉴욕타임스 기자는 한국의 언론이 이런 상황에서도 취재 노력을 멈출 것을 거부하는 눈에 띌 만한(stood out to you) 사례가 있는지 재차 질문했다. 그 후속 질문을 나는 그날 밤에서야 이메일을 열어보고 알았다. 종일 이런저런 잡무로 뛰어다니다 늦게 귀가했기 때문이다. 나는 질문이 좀 생소하고 어색해서 한참 생각하다가 이번 사태 중 언론 자유는 위축되지 않았다는 엉성한 답변으로 갈음했다. 그러면서 “이게 왜 궁금하지?”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계엄’이라는 단어의 뜻에 충실하면 국가가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으며 그 안에는 언론 자유도 포함된다. 그걸 생각하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긴 하다. 그러나 한국처럼 인터넷으로 얽히고 신문과 방송이 전국에 포진한 나라의 ‘말길’을 막는 게 가능할지, 얼른 상상이 가지 않았다. 자유는 불가역적 성질이 있어 사람들이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언론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자유는 굳건하고 오래갈 것이라고 믿는 근거다.
물론 뉴욕타임스는 놀랄 만도 하다. 2020년 홍콩 보안법이 통과되자 언론 자유의 위축을 우려해 이듬해 아시아 사무소를 홍콩에서 서울로 옮기는 큰 이사를 한 뉴욕타임스의 입장에서, 당시 아시아 여러 도시를 검토하다 최종적으로 ‘높은 언론 자유 수준(high level of press freedom)’을 이유로 서울을 선택했는데, 일껏 홍콩의 보안법을 피해 온 곳에서 계엄령을 맞다니. 그 황당함과 놀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이번 사태를 겪으며 내가 특이하다고 느낀 건 건 따로 있다. 그건 대통령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계엄을 선포하고 탄핵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는 풍파 속에서도 내 주변의 일상이 흐트러지지 않고 사람들도 대단히 차분해 보였다는 점이다. 계엄 사태가 워낙 조속히 종식된 덕분이기도 하지만, 어차피 지속될 분위기도 아니었다. 계엄 다음 날 만난 동료 교수와는 기말 업무를 이야기하거나 “이건 또 뭐래요?”라고 가볍게 지나가고, 가게와 상인들은 세상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바쁘며, 내가 관여하는 여러 단체도 예정된 행사를 진행했다. 주말에 찾은 재래시장에는 제철 상품이 넘쳐 났으며, 시장을 누비는 외국인 관광객도 여전했다.
어디에도 ‘비상사태’는 없었다. 자기의 위기를 국가의 위기로 착각한 대통령과, 자기의 위기를 정당의 위기로 치환시키는 재주가 비상한 야당 대표, 그 사이에서 나라 꼴이 엉망이라 바로잡아야겠다는 쪽과, 나라 꼴이 엉망이기를 바라거나 그래서 그게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하려는 정치인들이 있을 뿐이다. 외신들은 한국을 불안하게 바라보지만, 우리는 불안하지 않다. 불안한 사람은 이 사태를 정치적 지렛대로 활용하지 못해 안달 난 사람들뿐, 일반 국민은 비교적 태연하게 관망 중이다.
그건 아마도 우리의 낙천적인 국민성과 그동안의 학습 효과, 거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정치적 효능감이 보태진 결과는 아닐까 짐작해본다. 나폴레옹은 자기 사전에 ‘불가능’이라는 단어가 없다고 했지만, 대한민국 정치 사전에는 없는 단어가 없다. 지난 100여 년간 우리는 왕정과 식민지배와 군사독재와 내각제와 민주화를 겪었고, 민주주의의 큰집을 자임하는 미국도 내지 못한 여성 대통령과 고졸 대통령을 비롯해 별의별 지도자를 다 겪어본 우리에게 이번 사태는 별로 새로울 것도 없다. 계엄을 포함해 그보다 더 엄혹한 상황도 겪어봤으며, 대통령 탄핵도 이번이 세 번째다. 물론 얼마간의 혼란이 뒤따를 것이고, 어쩌면 조기 대선도 치러야 할지 모르고, 경제에도 좋지 못한 영향이 있겠지만, 우리의 멘털을 흔들 정도는 아니다. 윈스턴 처칠이 그랬던가. “성공이란 열정을 잃지 않고 실패를 거듭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우리는 많은 실패를 겪었지만, 그건 다시 일어나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한다는 뜻이기에, 그 또한 능력이다.
이번 사태로 우방국 사이에서 한국을 ‘믿을 수 없는 나라’로 본다는 애석한 분석이 있다. 우리에게 믿을 수 없는 몇몇 정치인이 있는 건 인정. 그러나 한국 국민은 그들보다 튼튼하고 상식적이며 신뢰할 만하다고 그들 국가에 전해주고 싶다. 우리의 이런 정치적 역동성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들에게 계속 부러워하라고 말하고 싶다. 북한은 탄핵 직후 ‘괴뢰 한국땅 아비규환’이라고 논평하고, 중국은 이런 한국의 사태를 빗대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강조했다는 보도를 보았다. 그들에게도 확실하게 해두고 싶다. 이 혼란과 불확실이 아무리 지속되어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맞바꿀 성질의 것이 아니니 꿈 깨라고. 그리고 내가 엉성하게 답해준 뉴욕타임스 쪽에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밖에서 바라보는 것만큼 한국 사회는 혼란스럽지 않으며, 사람도 언론도 너무 자유로워서 오히려 문제라고. 무엇보다 우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외국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대한민국은 괜찮습니다.”(그러니 놀러오시고 투자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