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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史 속의 雜事 2024-4/ 10.05 명성황후 시해한 외교관 호리구치의 편지 - 12-12 935년 12월 12일 통일신라 마지막 왕, 백성 살리려 내린 결단

상림은내고향 2024. 12. 8. 07:10

韓國史 속의 雜事 2024-4/

10.05 명성황후 시해한 외교관 호리구치의 편지

130년 전의 비밀편지, ‘우리가 왕후를 죽였다’

⊙ 명성황후 시해 주모자, 외교관 호리구치 구마이치가 친구에게 쓴 비밀 편지 8통
⊙ 나라의 고문(古文) 학자 3명이 2년 동안 해독 성공
⊙ “호리구치가 친구에게 쓴 여덟 통의 편지는 그 맥락이 이미 밝혀진 역사적 사실에 부합”(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원)
⊙ 소장자 하세가와 스티브, “이 편지가 한국에 남길 원한다. 일본에 있으면 없어질 가능성 높아”


 그날 밤 그녀는 달구경을 했다. 궁녀들과 함께였다. 명성황후 민씨. 닥쳐올 운명을 예감이라도 했을까. 몇 시간 후 명성황후와 궁녀들은 참혹한 죽음을 맞는다. 어느 곳보다 안전하다고 믿었을 궁궐에서였다. 1895년 10월 8일, 지금으로부터 129년 전 일이다. 을미(乙未)년에 일어났기에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일본 외교관의 비밀 편지

▲호리구치의 편지를 소장한 일본계 미국인 수집가 하세가와 스티브.

 

길었던 여름 어느 날 이돈수 한국해연구소 소장에게서 급한 연락이 왔다. ‘역사의 진실을 증언하는 아주 중요한 편지가 한국에 와 있다.’ 이 소장은 고지도(古地圖)와 한국 근현대 자료 전문 수집가다. 전문적인 수집가끼리는 서로 친분을 맺고 교류도 하는 게 골동(骨董)의 세계다.

편지의 소장자는 일본계 미국인 하세가와 스티브(長谷川·Stephen J. Hasegawa·80). 하세가와 씨는 동아시아 근현대 유물(遺物) 수집가다. 특히 우표와 인지(印紙)로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10년 전엔 한국 전쟁 기간 국군과 북한이 제작한 포스터 100여 점을 공개하기도 했다. 당시 《월간조선》에 포스터를 분석하는 기사가 실렸다.

서울의 한 카페에서 하세가와 씨를 만났다. 조심스럽게 그가 파일을 펼쳤다. 일본어로 쓰인 편지와 봉투들이 보였다. 흘리는 필기체로 쓰여 있는데다 고어(古語)가 섞여 있었다. 알아보기 매우 힘들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몇 단어가 읽혔다. 대원군(大院君), 왕후(王后), 죽이다(殺)… 바로 을미사변의 진실을 증언하는 편지였다.

편지를 쓴 이는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一·1865~1945년). 을미사변 당시 주(駐)조선 일본 영사관에 영사관보(補)로 재직 중이었던 인물이다. 고향 친구였던 한학자 다케이시 사다마쓰(1868~1931년)에게 보냈다. 총 8통이다. 1894년 11월 17일 자부터 1895년 10월 18일 자까지다. 편지지엔 ‘재조선국 경성일본영사관’이라 쓰여 있었다. 이 소장은 ‘한지가 아닌 일본 종이로 보인다’고 말했다.

사실 이 편지는 일본 언론을 통해 한 차례 공개된 적이 있다. 《아사히신문》이 2021년 11월 16일 자에 보도했다. 편지가 세상에 공개된 경위와 대략적인 내용을 소개했다. ‘진입은 내가 담당했으며, 담을 넘고 (중략) 겨우 안궁에 도달하여 왕비를 시해하였다.… 뜻밖에 일이 쉽게 이루어져 오히려 허무할 정도였다.’ 기사에 편지의 자세한 내막은 담기지 않았다. 당시 편지가 제대로 독해되지 않아서다.

▲2021년 11월 16일자 《아사히신문》에 보도된 호리구치 서간. 사진=아사히 신문 캡처

2년 만에 해독 성공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이제는 알 수 있다. 나라에서 고(古)문학을 전공한 교수진 3명이 2년간 달라붙어 읽어냈다. 그 내용을 재일사학자 김문자(金文子·73)씨가 분석했다. 편지 해독에 2년이나 걸린 이유는 편지 원본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필기체를 알아보는 것도 문제지만, 만연체 형식도 난관이다. 한 문장이 끝도 없이 계속되어 한 페이지 전체를 차지하는 부분도 있다. 지금은 잘 쓰지 않는 일본어 표현을 비롯해 중국 한자까지 섞여 있다. 이를테면 흥선대원군이 쓴 한시(漢詩)를 인용한 대목이다. 하세가와 씨 역시 “(현대 일본어로) 번역 전에는 대략적으로만 이해했고, 자세히는 이해 못 했다”고 말했다.

재일사학자 김문자씨는 을미사변을 오랫동안 연구해왔다. 일본 ‘낭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알려진 을미사변이 일왕 직속의 최고통수기관인 대본영에 의해 저질러진 국가범죄라는 걸 밝혀냈다. 저서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에 잘 정리되어 있다.

김문자씨는 편지를 분석해 논문을 썼다. 2023년 12월 일본에서 발간된 《조선사연구회논문집》에 논문의 일부를 발표했다. 제목은 ‘왕비를 죽였다-새롭게 발견된 호리구치 구마이치의 서간에서’. 김씨의 논문을 바탕으로 편지가 담고 있는 을미사변의 진실을 살펴보겠다.

 

1895년 10월 7일 밤 조선 군부 고문관인 오카모토 류노스케, 영사관보 호리구치, 영사관 경찰서장인 오기하라 히데지로 경부와 순찰들, 장사(壯士)라 불리는 자들 수십 명이 무장하고 용산에 집합한다. 이들은 공덕리에 머물고 있던 흥선대원군을 데리고 나온다. 조선군 훈련대와 일본군 경성수비대와 합류해 경복궁에 침입한다.

조선군 훈련대는 공사관 무관인 구스노세 유키히코가 경성수비대 소속의 사관 및 하사관을 활용해 양성하고 있던 조선군이다. 구스노세는 훈련대의 양성에 관해 대본영의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육군 중장에게 직접 보고를 올렸다. 훈련대는 사건 당일 밤 일본인 교관으로부터 야간 훈련 명령을 받고 경복궁 앞으로 출동해 있었다.

미우라 공사가 지휘한 을미사변

▲을미사변 당시 주조선 일본 영사관보였던 호리구치 구마이치.

 

경성수비대는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앞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군대다. 청일 전쟁이 일어나던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후 탄생했다. 사건 당시, 제18대대가 경성수비대 임무를 맡고 있었다. 18대대는 3중대에 편제되어 있었다. 원래는 제1, 제2중대가 광화문 앞에 주둔하고, 제3중대는 공사관과 영사관이 있는 일본인 거류지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10월 8일 새벽부터 제3중대도 광화문 앞으로 이동해왔다. 조선공사 미우라가 명성황후를 살해하기 위해 의존한 군사력이 바로 이 경성수비대다.

대원군을 태운 가마가 경복궁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광화문 앞에는 일본군이 증병되어 있었고, 일본군과 훈련대 병사들이 왕궁을 포위해버렸다. 보고를 받은 고종은 일본 공사관에 사자(使者)를 보내 미우라 공사를 호출한다. 이른 새벽이었음에도 미우라 공사,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서기관, 통역관은 정장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경성수비대와 조선군 훈련대는 왕궁수비병을 쫓아버리고, 호리구치와 오카모토 등의 암살단은 궁궐 가장 안쪽, 왕비의 침실로 진격해 명성황후를 살해한다. 명성황후 이외에도, 궁내대신, 훈련대 연대장, 궁녀들이 살해당했다. 이미 날이 밝아 10월 8일 아침이 되어 있었다.

기다리던 성공 소식을 받은 미우라 일행은 경복궁에 도착한다. 장사들에게 시체 인양을 명령하고, 고종을 알현한다. 알현 자리에는 일본군이 데려온 대원군도 동석했다. 이 자리에서 미우라는 고종에게 세 통의 문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한다. 한 통에는 ‘이제부터 일절 국무는 내각에 맡겨 처리할 것’이라는 내용, 다른 두 통에는 궁내대신 등을 임명하는 내용이었다. 고종은 여기에 서명한다. 10월 7일 밤부터 10월 8일 아침까지 경복궁을 배경으로 일어난 일이다.

우정 깊었던 호리구치와 다케이시

▲호리구치 구마이치의 아들 호리구치 다이카쿠. 시인 겸 프랑스 문학자다.

 

호리구치 구마이치는 1865년 1월에 현재의 니가타현 나카오카시 아타고 마을에서 태어났다. 20세에 사법성법학교의 관비학생이 되었다. 8년에 걸쳐 프랑스인 교사에게 프랑스어로 프랑스 법을 배우는 곳이었다. 관비생은 수업료가 무료이고 매월 용돈까지 받았다. 입학시험은 자치통감, 논어, 맹자에서 출제했다. 이 입학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호리구치는 나카오카의 한학숙, 성의숙에 들어갔는데, 바로 여기에서 다케이시 사다마쓰를 만난다. 다케이시는 호리구치보다 세 살 어렸지만 이미 그때부터 한학 실력이 출중했는지, 호리구치의 시험 공부를 상당히 도운 듯하다.

호리구치가 입학한 직후 사법성법학교는 제국대학에 흡수된다.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이 된 거다. 호리구치는 대학 재학 중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제국대학의 아카몬 앞에 살던 시절이었기에 아들의 이름을 ‘다이가쿠(大學)’라 지었다.

1893년, 호리구치는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을 졸업한다. 대학 졸업 이듬해인 1894년 9월, 제1회 외교관급 영사관 시험에 합격한다. 합격자는 단 4명이었다. 호리구치가 상당히 똑똑한 인물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때는 이미 조선에서 청일 전쟁이 시작됐을 때다. 호리구치는 11월에 조선의 인천영사관에 영사관보로 부임한다. 이듬해 3월에는 경성영사관으로 이동한다. 약 반년 후인 10월 8일, 황후 살해 사건이 일어난다. 서간 8통은 호리구치의 인천 부임 직후부터 사건 이후까지 두루 걸쳐 쓰였다.

호리구치와 다케이시의 우정은 니가타에서 상당히 유명하다. 둘의 우정을 기리는 동상도 있을 정도다. 나카오카시 와카미야신사의 경내에 세워져 있는데, 일본 전통복 차림의 다케이시와 양복을 입은 호리구치가 손을 잡고 있는 흉상이다. 그 고장의 유지가 돈을 모아 다케이시 사다마쓰의 동생, 다케이시 히로사부로에게 제작을 의뢰했다. 히로사부로는 당시 저명한 조각가였다.

이번에 발견된 편지 중 제3서간에 히로사부로의 얘기가 나온다. 호리구치는 히로사부로가 미술학교를 경험해보길 강하게 권한다. 결과적으로 히로사부로는 조각가가 됐다.

“대원군에게 쓸 답시 고쳐달라”

편지가 쓰인 건 1894(메이지 27)년 11월 16일부터 1895(메이지 28)년 10월 18일까지의 11개월간이다. 제1서간부터 제4서간까지는 거의 매월 1회꼴이다. 7개월 반 정도 흐른 후 제5서간, 즉 사건 전일의 편지가 쓰인다. 서간의 전부가 남아 있는 게 아닐 수도 있다. 편지를 보면, 매번 다케이시로부터 빌린 돈의 상환 계획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 빌려준 돈에 대한 기록이 담긴 편지만 다케이시가 선택해 남겨둔 것일 수도 있다.

제1서간에는 ‘지난 7일에 (다케이시가) 보내준 편지를, 16일 오후에 읽음’이라 쓰여 있다. 우편으로 니가타에서 인천까지 9일이 걸렸단 얘기다. 서울에서 니가타까지도 역시 열흘 정도 걸렸을 터다. 따라서 사건 전날(10월 7일)의 제5서간, 사건 다음 날(10월 9일)의 제6서간을 다케이시가 받은 것은 각각 10월 17일, 19일로 추정된다. 8통의 편지 중 제5서간과 제6서간이 가장 중요하다.

제5서간은 1895년 10월 7일, 황후가 살해되기 전날에 쓰였다. ‘대원군으로부터 한시를 받았고, 답시(答詩)를 만들어보았다, 더 좋게 다듬어주지 않겠나’라며 한학자였던 다케이시에게 부탁하는 내용이다. 호리구치가 대원군과 면담한 것은 분명 사실이다. 이들은 언제 만났을까. 1932년, 호리구치는 대원군과의 한시(漢詩) 응수 장면을 상세하게 재연한 회상기 〈10월 8일 사건의 발단〉을 《문예춘추》 11월호에 게재했다. 이것을 자신의 수필집 《외교와 문예》에 다시 실었다. 또다시 제목을 〈민비 사건의 추억〉으로 변경해 《군사사연구》에 실었다. 이 글들은 아직도 ‘을미사변 대원군 주도론’, 혹은 ‘대원군-미우라 공모론’을 논할 때 근거로 쓰인다. 김문자씨는 ‘호리구치의 회상기는 창작’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던 차에 사건 전일 호리구치가 쓴 서간을 보고 그 생각이 더 굳어졌다.

예상보다 앞당겨진 시해작전

호리구치는 ‘회상기’에 ‘미우라 공사 부임 후, 즉 1895년 9월 이후에 흥선대원군을 만났다’고 썼다. 김문자씨는 두 사람이 만난 게 1895년 4월경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이준용 역모 사건’ 이전에 만났을 걸로 보기 때문이다. 이준용 역모 사건은 대원군의 손자이자 국왕의 조카인 이준용(후일 이준으로 개명)이 1895년 4월 18일 막 신설된 재판소에 소환된 사건이다. 청국군·동학농민군과 연계해 일본군을 공격하고, 왕위를 찬탈해 반일 정권을 수립하려 했다는 혐의였다.

이 재판은 법부 고문 호시 도루(星亨·1850~ 1901년)가 지휘했다. 무쓰 무네미쓰(陸奥宗光·1844~1897년) 외무대신과 이노우에 구 조선공사는 외교기밀비로 호시 도루의 빚을 청산해주고, 조선의 법부 고문에 앉혔다. 호시 도루는 시해 사건 전날인 메이지 28년 10월 7일 미우라 공사 앞으로 법부 고문으로서의 업무보고서를 제출한 후 10월 11일에 인천을 거쳐 귀국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호시는 1895년 4월 15일에 법부 고문에 임용되고, 조선의 재판제도 개혁에 착수했다. 재판소 구성법을 편제하고 발포, 이에 근거해 4월 20일에 특별법원을 설립하고, 이준용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이후 고종의 특별사면으로 10년 유배형으로 감형되었다가 8월에 석방된다.

대원군은 손자를 만나러 한강 선착장까지 간 것이 발각되어 공덕리의 별저(別邸)에 연금되었다. 석방된 이준용도 여기에 들어와 대원군과 함께 근신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준용 역모 사건 이전 대원군은 부담 없이 일본인을 만났다. 대원군 방문기가 일본의 신문에 실렸을 정도다. 사건 이후엔 대원군 면회가 쉽지 않아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호리구치가 회상기에 일본인 여행객으로 위장해 경비원들에게 돈을 내고 대원군을 면회해 필담으로 한시를 나누며 궐기를 촉구했다고 썼는데,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이유다.

제5서간을 보면, 호리구치는 자신의 한시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다케이시에게 좀 더 잘 만들어주지 않겠냐고, 빨리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서울과 니가타 사이를 우편이 왕복하려면 적어도 20일이 걸렸다. 당시 조선에 체재하면서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1864~1946년)과 같이 호리구치의 동료였던 오사노 뎃칸(與謝野鐵幹·1873~1935년)이 후에 말한 것처럼, 호리구치도 11월 상순에 왕비를 시해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수 있다.

3시간 버틴 대원군

제6서간은 1895년 10월 9일, 즉 사건 다음 날에 쓰였다. 하세가와 씨의 파일을 보니 편지지는 8장인데, 봉투는 9개다. 8통 중 이 서한만 이중으로 밀봉되어 있었다. 편지의 끝부분에는 다른 서간에서는 볼 수 없었던 표현이 쓰여 있다. ‘입 밖에 내지 말아달라’는 말이다. 이 서간의 내용이 기밀로 남아야 한다는 걸 호리구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편지엔 현직 외교관이 임지(任地)의 왕궁에 침입해 왕비를 죽였다는 고백이 담겨 있다. 제국주의 식민지 침략사 중에서도 드문 사료다.

제6서간엔 7일 오후 7시 영사관을 출발한 후 경복궁에 침입해 황후를 살해할 때까지의 경로와 시각이 적혀 있다. 호리구치는 용산에서 오카모토 야나유스케, 영사관 순사들, 장사라고 칭하는 자들과 함께 공덕리의 대원군 별저로 이동한다. 대원군을 데리고 나온 다음 조선훈련대·경성수비대와 합류해 경복궁에 침입, 왕비를 살해했다고 쓰여 있다. 장사 중 한 명인 고바야카와 히데오(당시 《한성신문》 편집장)가 쓴 〈민후조락사건(閔后殂落事件)〉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시각에 대한 기술에 두 개의 글이 서로 다른 대목이 있다. 고바야카와는 대원군과의 교섭에 꽤 시간이 걸렸다고 기록했다. 대원군이 일본 측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호리구치는 편지에 ‘담판’이라고 썼다. 고바야카와는 남대문 부근, 다시 서대문 밖에서 일본군과 합류하기 위해 약 2시간을 기다려야 했다고 기록했다. 원래 오전 4시경 경복궁 침입 예정이었던 것이 크게 지체됐다고 기록했지만, 호리구치는 이런 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호리구치의 조작

▲호리구치가 쓴 편지.

 

이 때문에 호리구치가 쓴 ‘시각’은 주의 깊게 봐야 한다. ‘대원군 별저습격 시각 8일 오전 1시경/ 대원군 데리고 나온 시각 2시 반경/ 경복궁 침입 시각 4시 반경’으로 썼다. 이것은 명확히 사실과는 다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해산 명령에 화가 난 훈련대가 대원군을 앞세워 왕궁에 침입해 왕궁수비병과 충돌했다, 소동을 다스리기 위해 경성수비대가 출동했다, 이 소동 속에서 황후가 죽었다’고 하는 잘 만들어진 연극이 완성됐을 터다.

실제로는 고바야카와가 증언한 대로였다. 대원군 가마 앞뒤에 훈련대를 붙이고, 그 훈련대가 도망치지 않도록, 그 앞뒤를 경성수비대가 둘러싼 대열이 경복궁에 침입했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아 있었다. 이 때문에 서양인을 포함한 많은 목격자가 나왔다. 일본인 및 일본군의 관여를 숨길 수 없게 됐다.

호리구치는 10월 11일 하라 다카시 외무차관에게 긴 편지를 쓴다. 거기에는 시각을 이렇게 기록했다.

‘대원군 별저 습격 시각 8일 오전 2시/ (대원군 데리고 나온 시각은 안 쓰여 있음)/ 서대문 도착 시각 4시 반/(경복궁 침입 시각 안 쓰여 있음).

그리고 계속해서 ‘내실에 들어간다. 왕비가 세상을 떠난다. 때는 5시 반. 하늘은 완전히 밝았다’라고 썼다.

2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동일 인물이 쓴 시각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대원군 주모론’을 날조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던 호리구치가 대원군이 쉽게 동행에 응하지 않았다고 쓸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김문자씨는 분석했다. 다케이시에게는 계획보다 30분 지연된 시각을 썼지만, 온갖 정보가 모이는 하라에게는 그것이 통용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대원군을 데리고 나온 시각과 경복궁 침입 시각을 쓰지 않았다는 얘기다.

10월 8일 서울의 일출 시각은 6시 반경이었다. 하늘이 완전히 밝았다는 것은 적어도 일출 시각이 지났다는 뜻이다. ‘때는 5시 반’이라고 쓴 것 역시 작전이 크게 늦어진 것을 감추려 호리구치가 조작한 걸로 추측된다.

사실 담은 우치다의 편지

을미사변 당일 우치다 사다쓰치 영사는 하라 외무차관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오늘 아침 5시 반경, 포성에 놀라 일어나 나가 보니…’ 이것은 경복궁 광화문 앞에서 최초의 총격전이 있었던 시각을 말한다. 즉 명성황후가 살해된 것은 이후 꽤 시간이 경과한, 완전히 밝아진 후였다.

〈민비조락사건〉을 보면, 원래 계획은 남대문으로 들어가 오전 4시경 경복궁에 침입할 예정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실제로는 급하게 서대문으로 들어가는 걸로 변경됐다. 공덕리와 서대문을 연결하는 길은 2개가 있는데 일본군과 대원군의 가마를 멘 일행이 서로 다른 길로 가고 말았다. 말에 타고 있던 호리구치와 오기와라가 군대를 찾으러 갔다. ‘그렇기 때문에 오전 4시 왕성에 진입한다는 예정은 전부 어긋나서 시간은 크게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고 〈민비조락사건〉에는 쓰여 있다.

남대문에서 서대문으로 급히 변경한 이유는 대원군 때문이었다. 일본도를 든 살기등등한 일본인들이 침입했는데도, 대원군은 3시간여를 안 나가고 버텼다. 이 때문에 남대문의 새벽 시장에 인파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공사관은 급히 서대문에서 입성하는 걸로 변경 지시를 내릴 수밖에 없었는데, 지시 전달이 잘 안 된 거다.

호리구치는 계획대로 잘 진행된 것처럼 썼다. 이것은 미우라 공사와 상의해 결정한 줄거리라고 볼 수 있다. 우치다 영사가 10월 9일 하라에게 쓴 편지에는 범행에 가담했던 장사들이 언급되어 있다. 그들 중 다수는 신문기자였다. ‘어제 오후 이들이 모여들어 미우라 공사의 방에서 본토(일본) 신문에 낼 통신을 협의’라고 썼다.

범행 당일인 8일 오후 미우라 공사의 지시 아래, 관계자가 입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호리구치도 이 자리에 있었을 터다.

‘왕비를 죽였다’

▲을미사변 당시 주한일본공사 미우라 고로.

 

편지에는 ‘진입은 담을 넘어 문을 여는 것을 열대여섯 번 하고 겨우 안쪽 어전에 도착, 왕비를 살해했다’라고 쓰여 있다. 생략되어 있는 주어(主語)는 ‘우리’일 것이다. 호리구치는 장사대의 지휘관을 자임하고 있었다.

호리구치는 10월 11일 하라에게 쓴 편지에 ‘미우라 공사 입관, 대원군과 담화. 소생은 계속 미우라 공사의 옆에 대기’라고 썼다. 미우라가 입궁하고, 장사들이 일제히 왕궁 밖으로 나갔지만 호리구치만은 미우라 일행과 함께 있었다. 왕궁을 나온 것은 오후 3시였다.

호리구치는 다케이시에게 쓴 편지 외에는 어디에도 ‘왕비를 죽였다’고 쓰지 않는다. 살해 작전의 흥분이 식지 않은 채, 고향 친구에게 ‘왕비를 죽였다’고 고백한 제6서간이 특히 귀중한 사료인 이유다.

이들의 목적지는 경복궁의 가장 안쪽에 있던 왕가의 거주지 건청궁이었다. 경복궁 안에는 문과 담으로 둘러싸인 다수의 건물군이 있었다. 건청궁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건물군의 담을 뛰어넘어서, 안쪽에서 문을 여는 것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했다. 호리구치가 ‘담을 넘어 문을 여는 것을 열대여섯 번 하고 겨우 안쪽 어전에 도착했다’라고 쓴 것도, 과장이 아니다. 공사관에서는 미리 사다리와 도끼를 준비해놨다.

결국 제6서간을 통해 황후 살해를 꾀한 자들이 사전에 사다리와 도끼를 준비한 후, 일직선으로 안쪽 어전, 건청궁에 침입해 들어간 모습을 볼 수 있다. 스스로 장사 대장을 자임하고 국왕의 면전에서 장사들의 폭행을 지휘한 영사관 호리구치의 손을 통해 ‘왕비를 죽였다’는 명백한 증언이 나온 것이다.

을미사변 직후 이미 일본 신문에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대원군이 훈련대를 이끌고 왕궁에 들어갔다. 왕비는 행방불명’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때 호리구치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전자에서는 대원군의 한시에 답시의 대작을 의뢰하고, 후자에서는 왕비를 살해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다케이시는 꽤 놀랐을 터다.

김문자씨는 을미사변이 ‘명성황후 살해’만을 노린 것이 아니라고 봤다. 진짜 목적은 친일 정권 수립이었단 얘기다. 왜 대원군과 훈련대를 작전에 참여시켜야만 했을까. 이 사건을 조선인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해산 명령을 받은 훈련대가 격노해 대원군을 모시고 왕궁으로 갔다는 이야기와 대원군이 정권 재탈환 의지를 호리구치와의 한시 대담을 통해 미우라 공사에게 전하고 도움을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진 이유다. 호리구치 서간은 특히 두 번째 이야기를 일소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을미사변은 일본 정부가 계획

129년 전의 편지가 우리에게 전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 일본 현직 외교관이 ‘왕비를 죽였다’고 자백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도 많은 이가 을미사변을 일본 낭인들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죄로 여기고 있다. 을미사변 직후 일본 정부는 가담한 자들을 일본으로 소환했다. 이들은 재판을 통해 ‘증거 불충분’ 면소(免訴) 처분을 받았다. 무죄 판결을 받은 것과 다름없다. 뒤늦게 영사관이 나서서 시해 작전을 지휘했다는 걸 알려주는 증거들이 나왔다. 일본의 학자 야마베와 재일사학자 박종근은 일본공사 미우라가 사건을 주모해 일본 군인, 외교관, 영사관, 경찰, 대륙낭인 등을 동원했다는 사실을 실증했다.

둘째, 일본 정부의 계획적인 암살이었다는 점이다. 을미사변을 연구한 사학자 신국주 역시 명성황후 살해가 일본의 ‘대한(對韓) 비상수단’으로 사전에 계획된 정략이었다고 주장했다. 미우라 공사가 주모해, 일본수비대가 주역을 맡고, 일본 민간인이 하수인 역할을 했다는 얘기다.

 

일본에서는 명성황후 시해 자체가 거의 안 알려져 있다. 학계의 연구도 많지 않다. 그나마 쓰노다 후사코의 책 《민비암살》로 알려진 정도다. 지속적으로 을미사변을 연구하는 김문자씨 같은 일본 학자가 소중한 이유다. 편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하세가와 씨도 빼놓을 수 없다.

일각에서는 편지가 진품일까 의심할 수 있다. 김문자씨는 호리구치가 쓴 다른 서간과 필체를 비교했다. 호리구치가 하라 다카시에게 쓴 편지 원본이 하라 다카시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편지와 비교해보니 같았다. 동북아역사재단의 김영수 연구위원 역시 이 편지는 중요한 역사적 사료라 말했다.

“호리구치가 친구에게 쓴 여덟 통의 편지는 그 맥락이 이미 밝혀진 역사적 사실에 부합합니다. 을미사변의 진실을 밝히는 중요한 사료라 할 수 있습니다.”

130년 만에 드러난 진실

이 편지는 어떻게 130여 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까. 편지의 수신인, 즉 다케이시 사다마쓰의 인생을 잠깐 살펴보자. 다케이시는 호족 집안 출신으로 1868년에 태어났다. 1931(쇼와 6)년 6월 16일 63세로 사망했다. 《니가타신문》 6월 18일 자에 ‘시인 다케이시 사다마쓰’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가 실렸다. 여기에서 시는 한시(漢詩)를 뜻한다. 기사에는 ‘시문에 있어서는 현에서 따라올 자가 없는 대가’라 쓰여 있다. 사다마쓰의 장남 사다이치는 교토 근교에 있는 산토리 야마자키 공장에서 근무했다. 이때 부근에 주택을 지어 이사한다. 1957년 사다이치가 죽고, 그의 아들 사다오는 2000년에 사망했다. 이후 사다오의 부인, 그러니까 다케이시 사다마쓰의 손자 며느리가 혼자 지냈다. 원래 며느리가 사망하기 전에 편지를 태웠어야 했는데 알츠하이머에 걸려 태우지 못했다고 한다. 며느리가 죽은 후 2017년 집이 매각되어 헐리게 된다. 대대로 깊숙이 보관해오던 호리구치 서간이 고서시장에 나온 것도 이때로 보인다.

하세가와 씨의 설명이다.

“어느 날 골동품 판매상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편지 봉투에 조선의 소인이 찍혀 있으니 연락을 한 겁니다. 제가 조선 관련 골동품을 수집하는 걸 아니까요. 소인이 아니었다면 다른 사람에게 연락했을지 모릅니다. 판매상은 편지의 내용을 몰랐습니다. 우표와 소인을 보고 ‘아 이건 조선에 관련된 거구나’ 생각하고 연락한 거죠.”

― 편지를 본 후 내용을 바로 짐작했나요?
“그렇지요. 편지를 직접 보고 표정을 못 숨겼습니다. 놀란 표정을 지었어요. 그래서 판매상이 중요한 서간이라는 걸 눈치챘습니다. 싸게 사진 못했어요.”

― 《아사히신문》에 소개 기사가 나간 후 어떤 반응이었나요.
“주일 한국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제가 나고야에 살고 있다고 하니 서간을 들고 도쿄에 있는 대사관으로 오라고 하더군요. 당황스러웠습니다. 안 갔어요. 한국에서 1932년에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실이 탄생했습니다. 셔우드 홀 박사가 만들었지요. 그에 대한 연구 자료를 제가 영어로 출판했습니다. 지금도 세계적으로 중요한 카탈로그지요. 그때 미국에 사는 홀 박사의 딸 필리스를 만나러 직접 갔어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직접 보러 와야 되는 거 아닙니까. 나고야로 왔다면 보여줬을 겁니다.”

― 이 편지가 어떤 역할을 하길 기대합니까.
“이 문서는 일본보다 한국에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 편지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보낸 소인까지 그대로 찍혀 있기 때문에 누구도 쉽게 부인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역사 공부하는 사람이 이걸 기초자료 삼아 연구할 수 있을 겁니다. 일본에 계속 있으면 없어질 가능성도 높다고 봅니다.”

죽기 전날 밤 명성황후는 달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라의 안녕을 기원했을까. 왕족의 평안을 바랐을까. 기억해야 할 점은 명성황후는 비참한 죽음을 통해 조선인들의 가슴에 은은한 한(恨)으로 스며들었다는 점이다.⊙

월간조선 10월 호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10-07 독은 돌(石) 사투리 ‘석도’는 ‘독도‘…’경상국립대,우리나라 최초 국어사전 기증받아

▲KakaoTalk_20241007_150455079_01

1933년 ‘한글맞춤법 통일안’ 따른 최초 국어사전
하동군 옥종면 고 정찬화 선생 물려받아 소장한 것
‘독’은 ‘돌’사투리로 명시‘석도’가 ‘독도’뒷받침
11월‘박물관 개관 40주년 기념전시’때 공개 예정

진주=박영수 기자

경상국립대학교 박물관은 하동군 옥종면의 고 정찬화 선생이 소장해 온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사전인‘朝鮮語辭典(조선어사전)’ 1점을 기증받았다고 7일 밝혔다.

조선어사전은 1938년 청람 문세영 선생(1895~1952년)이 편찬해 발간한 사전으로 1946년 조선어학회가 선정한 일제강점기 우리말 관련 3대 저술이자 해방 이전 유일한 우리말 사전이다. 사전은 지은이 말씀 3쪽, 일러두기 5쪽, ㄱ~ㅎ 2634쪽, 음 찾기 26쪽, 이두 찾기 21쪽 등 모두 2689쪽으로 구성돼 있다. 크기는 가로 15.5㎝·세로 22.7㎝·두께 6.4㎝다. 기증받은 조선어사전은 1938년 12월 재판본 2000권 중 한 권으로 추정된다.

이 사전은 1933년 조선어학회에서 제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의해 표기된 최초의 국어사전으로 당시 표준어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KakaoTalk_20241007_150455079_03 조선어사전을 편찬한 청람 문세영 선생. 경상국립대 제공

 

조선어사전 수록 어휘는 초판 기준 8만여 개, 개·수정증보판 기준 9만여 개로 방대하고 표준말뿐만 아니라 방언·옛말·이두·학술어·속담·관용구 등 다양한 우리말을 수록했다.

특히 ‘독’은 ‘돌’의 사투리라고 명시돼 있고, ‘석(石)’이라는 한자어까지 병기하고 있어 대한제국 칙령에 나오는 ‘석도’가 ‘독도’임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자료가 되고 있다. 또 1957년 한글학회의 ‘큰사전’ 완간 이전까지 대표적인 사전으로 기능했으며 현재 국립국어원의 ‘근현대 국어사전 서비스’를 위하여 활용되고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기증자 대표 정연웅 씨는 "조부에게서 물려받아 선친이 소장해 왔던 이 자료가 우리 지역 박물관에서 잘 보존되고 활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정재훈 경상국립대박물관 관장은 "오는 9일 한글날을 앞두고 조선어사전을 자료를 기증받아 뜻깊다"며 "기증자의 뜻을 잘 받들어 11월 열리는 ‘박물관 개관 40주년 기념전시’에 맞추어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문화일보 박영수 기자

 

10-10 1592년 10월 10일 끊어내야 할 때 과감히 끊어낸 진주대첩 리더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지켜낸 김시민 장군의 동상. 동아일보DB

 

임진왜란은 예상할 수 없었던 재앙 같은 전쟁이었다. 일본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나라 간에 원한이 쌓인 것도 없는데 15만 대군의 침입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일본은 참혹한 학살을 자행하며 조선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불어넣었다. 경상도 지방의 백성들은 산속으로 피신해 목숨을 부지했다. 백성들이 사라지자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군사를 징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바다에서 승전보가 올라왔다. 이순신이 이끈 수군이 적의 서해 진입 시도를 격파했다. 이로써 일본군의 보급이 난망해졌다. 부산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보급선도 의병들의 봉기로 위험해졌다. 일본군은 새로운 루트도 개발해야 했고 곡창 지대를 노리기 위해서라도 전라도 지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 길목에 진주성이 있었다.

진주 목사 이경은 성을 버리고 지리산에 숨어 있다가 병사했다. 이에 진주 판관이었던 김시민이 경상우도관찰사 김성일의 명으로 진주 목사를 맡게 됐다. 김시민은 북방에서 여진족과 싸웠으며, 임진왜란 발발 후에는 의병장 김면과 함께 거창을 지키며 격전을 치렀다.

 

김성일은 통신사로 일본을 정탐하러 갔다가 전쟁이 없을 것이라 주장했던 남인이다. 하지만 전쟁 발발 후에는 경상도 초유사로 의병과 관군 사이를 조율하면서 일본군을 격퇴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는 각처의 의병들을 진주성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김시민이 백성들을 모으고 의병장들이 속속 합류했지만 진주성을 지킬 병력은 3800여 명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진주성 공략을 위해 출정한 일본군은 2만여 명이었다. 한 명의 병력이 아쉬운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김시민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유숭인이 10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진주성에 도착했을 때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병마절도사는 종2품이고 목사는 정3품이다. 상급 지휘관이 들어와 방어전에 혼선을 빚으면 우왕좌왕하다 성이 함락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유숭인은 김시민의 뜻을 받아들였다. 유숭인은 진주성 외곽에서 일본군을 만나 격전 끝에 전멸하고 말았다. 김시민이 피눈물을 흘리며 이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김시민이 유숭인을 성으로 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이런 계책으로 성을 온전하게 지킬 수 있을 것이니, 진주 사람들의 복이로다”라고 말했다.

진주성은 평지성으로 주변에 보조할 산성도 없고 신축한 동쪽 성벽은 넓고 약해서 결정적인 약점이기도 했다. 진주성을 제대로 방어하기 위해서는 1만여 명의 병사가 필요했다. 이것을 메운 것은 김시민의 기책이었다. 김시민은 온갖 계책을 동원해 적병을 막아냈다. 병사와 백성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일치단결했다. 4000∼5000명쯤 되는 의병들의 외부 지원도 큰 몫을 했다. 곽재우, 정기룡 등 용장들이 산에 포진해 일본군을 포위하듯이 했다. 병력은 적었지만 일본군을 견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렇게 한 끝에 6일간의 격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적을 물리친 김시민은 적병의 탄환에 맞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제갈량은 군의 기강을 잡기 위해 사랑하는 부하 마속의 목을 베었고, 김시민은 아군을 사지로 몰았다. 리더는 독하게 끊을 것을 끊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평화로울 수 있다.

동아일보 이문영 역사작가

 

10.12 “정치의 잘잘못은 사람 때문” 풍수 아닌 실력으로 성장

고려 남경은 어떻게 조선의 서울이 됐나

 조선 왕조가 개창되고 한양으로 천도한 것이 1394년 10월 25일(음력)의 일이니, 서울은 지금까지 꼭 630년 동안 수도의 자리를 지켜왔다. 그럼 그전에 서울은 어땠을까? 삼국시대에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는 나라가 주도권을 장악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말은 지금 서울 지역이 전략상 요충지였음을 의미하지만, 반대로 삼국 모두의 변경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쟁의 위험이 상존하고, 주인이 여러 번 바뀌는 땅에서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 서울은 언제부터 도시로 발전했을까?

고려초엔 양주, 1067년 남경 승격

평양·경주 다음 세 번째 지방 거점

문·숙종 때 천도 주장 잇따랐지만

여진 정벌, 왕조교체설에 발목

교통 이점 2대 도시로 자력 성장

풍수 거부한 조선 새 수도로 선택

▲우리나라 풍수의 창시자로 알려진 도선국사 진영. 남경(서울)으로 천도를 예언한 『도선기』가 고려 문종 때 주목받았다. [사진 디지털영암문화대전, 서울역사박물관, 중앙포토]

 

왕실의 근거지인 개경(지금의 개성)을 수도로 삼은 고려 왕조는 지방에 거점 도시를 만들었다. 개경 호족 출신이라는 왕실의 한계를 극복하고, 지방 세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지방 통치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함이었다. 그 첫 대상은 평양이었다. 삼국 통일 후 오랫동안 신라 영토에서 벗어나 있던 평양에는 위협적인 지방 세력이 없었고, 고려 왕실이 일찌감치 점령해서 배후 거점으로 삼았다. 게다가 당시 유행하던 풍수에 따르면 평양은 우리나라 지맥(地脈)의 뿌리가 되는 길지였다. 고려는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높이고 우대했다. 두 번째는 경주였다. 신라의 1000년 수도 경주는 전국에서 문화 수준이 가장 높은 곳이었다. 그뿐 아니라 신라 경순왕이 스스로 항복한 덕분에 고려에 적대적인 감정도 없었다. 경주에는 동경(東京)을 설치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의 서울에 주목했다.

풍수 시조 승려 도선의 천도 예언

 지금 서울은 고려 초에 양주(楊州)라고 불렸고, 983년 전국 12목에 지방관을 파견할 때 양주목이 되어 광주목과 함께 양광도(楊廣道)의 어원이 되었다. 그 뒤 잠시 양주로 강등되었지만, 1067년에 갑자기 남경(南京)으로 승격되어 서경, 동경과 더불어 3경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때 국왕 문종이 남경 천도를 꿈꿨기 때문이다. 문종 대(1046~1083년)는 고려 500년 역사에서 가장 평화롭던 시기이다. 그런데, 왜 천도를 생각했을까?

▲북한산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 도선이 “무학이 길을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른다”고 새겨놓았다고 알려졌으나 추사 김정희가 직접 답사해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혔다. [사진 디지털영암문화대전, 서울역사박물관, 중앙포토]

 

우리나라 풍수의 시조인 승려 도선(827~898)이 지었다고 하는 『도선기』가 문종 때 주목되었다. “개국 후 160여 년 뒤에 목멱양(木覓壤)에 도읍할 것이다”라는 구절 때문이었다. 목멱양이란 목멱산 아래 땅이란 뜻이고, 목멱산은 지금 서울 남산의 본래 이름이다. 918년에 고려가 건국되었으니, 그로부터 160여 년이 지난 문종 때 지금 서울로 천도하게 되리라는 예언이었다. 또 『삼각산명당기』라는 책에는 “임자년 안에 땅을 파면 정사년에 성스런 아들을 낳을 것이요, 삼각산에 제경(帝京, 황제의 서울)을 건설하면 9년째 되는 해에 온 세상이 조공을 바칠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마침 임자년(1072년)과 정사년(1077년)이 모두 문종 재위 기간에 들어 있었다. 이런 비록(秘錄)을 믿고 천도를 추진했던 것이다. 문종은 즉위 후 일성으로 선왕의 사치를 비판하고 시정했던 검소한 국왕이었지만, 그런 그가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천도를 추진했을 만큼 도선의 위력은 대단했다.

 

천도를 결정하고 한 해 뒤에 남경에 새 궁궐이 완성되었다. 이제 국왕이 옮겨올 일만 남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러질 못했다.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개경 귀족들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천도는 추진 동력을 잃어 갔다. 결정적으로 정사년이 되어도 왕자가 태어나지 않고, 9년이 지나도 조공을 바치는 나라가 없었다. 믿고 싶은 대로 믿은 결과였다. 이렇게 해서 문종의 남경 천도는 흐지부지 끝났지만, 아들 숙종이 아버지의 뜻을 이었다. 숙종은 조카 헌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조선의 세조와 같은 인물이었다. 그 약점을 천도를 통해 만회하고자 했고, 이런 국왕의 마음을 김위제라는 술사(術士)가 읽었다. 그는 『도선답산가』라는 책에서 “송도(松都, 개경)의 운이 다하면 어디로 가려는가? 동짓날 해 돋는 곳에 넓은 땅이 있네. 후대에 어진 이가 그곳에 큰 우물을 파니 한강의 어룡(魚龍, 물고기와 용)들이 바다로 통한다”라는 구절을 인용해서 왕에게 남경 천도를 권했다. 동짓날 해 돋는 곳이란 개경의 동남쪽에 있는 남경을 가리키며, 남경을 흐르는 한강의 북쪽 땅은 왕조가 영원히 이어지고 온 세상이 조공해 올 명당 중의 명당이란 해설을 덧붙였다.

숙종 때 청와대 자리에 “궁궐 건립” 기록

▲용산이라는 지명은 고려 숙종 때 남경 천도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처음 보인다. 1861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 수록된 ‘경조오부도’에는 무악에서 만리재를 거쳐 한강까지 이어지는 산세가 분명히 나타나 있고, 그 끝에 ‘龍山(용산)’이라는 지명이 적혀 있다(화살표 부분). [사진 디지털영암문화대전, 서울역사박물관, 중앙포토]

 

숙종은 남경에 직접 행차해서 지세를 살피는 열성을 보였고, 사람을 보내 궁궐 자리를 정하게 했다.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신 등이 노원역과 해촌(海村), 용산 등에 가서 산수를 살펴보았는데 모두 도읍을 세우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오직 삼각산 면악(面嶽)의 남쪽이 산수 형세가 옛 문헌에 부합합니다”라고 했다(『고려사』 숙종 6년 10월 8일). 이에 따라 면악 남쪽에 남경 궁궐을 새로 지었다. 면악은 뒷날 백악으로 불리다가 지금의 북악산이 되니, 북악산 남쪽에 고려 궁궐이 건립된 것이다. 시간이 한참 흘러 조선 개국 후 한양에 궁궐터를 정하면서 고려 숙종 때 지은 궁궐이 너무 좁으니 그 남쪽의 평평하고 넓은 터로 하자는 말이 나왔고, 그 말을 좇아서 경복궁 자리가 정해졌다. 이것을 거꾸로 읽으면 경복궁 북쪽, 즉 청와대 자리가 옛 고려 궁궐터가 되는 셈이다. 지금 서울 한복판에 1000년 전 고려궁궐이 숨어 있을 수 있으니, 청와대 일대를 잘 보존해야 할 이유다.

▲고려 숙종 때 지금의 서울인 남경에 건립한 궁궐은 경복궁 북쪽, 청와대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디지털영암문화대전, 서울역사박물관, 중앙포토]

 

숙종의 강력한 왕권으로도 남경 천도는 끝내 이루지 못했다. 반대도 반대지만, 때마침 동북쪽 국경이 소란스러워지고 여진과 전쟁을 시작하게 된 것이 중요한 원인이었다. 그만큼 천도는 안팎의 조건이 모두 갖추어져야만 할 수 있는 어려운 일이었다. 숙종의 남경 천도와 관련해서는 재밌는 야사가 전한다. 먼저, ‘용손십이진설(龍孫十二盡說)’이다. 용의 후손인 고려 왕실이 12대가 지나면 끝난다는 이야기다. 숙종은 15대 국왕이고, 태조의 6대손이지만, 왕건의 시조 호경(虎景)으로부터 따지면 꼭 12대가 된다. 용손이 끝나면 다음은 누가 왕이 될 것인가? 이어 나오는 것이 ‘십팔자위왕설(十八子爲王說)’ 또는 ‘목자득국설(木子得國說)’로, 이씨가 왕이 된다는 이야기다. 오행으로 풀이해서 신라는 금덕(金德)이고 고려는 수덕(水德)이니, ‘수생목(水生木)’에 따라 다음은 목덕(木德)인 이씨가 주인이 될 것이라는 그럴듯한 풀이가 뒤따랐다. 숙종이 이 말을 믿고 불안했던 것일까?

 

조선 후기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에 도선이 비기를 남겼는데, ‘왕씨를 잇는 자는 이씨이고 한양에 도읍한다’고 했다. 그래서 고려 중엽에 윤관을 시켜 백악산 남쪽에 오얏나무를 심고 나무가 자라면 그때그때 베어내서 이씨의 기운을 억눌렀다. 조선이 개국하고 무학대사에게 도읍지를 정하도록 했는데, 무학이 궁궐터로 정한 곳이 다름 아닌 고려 때 오얏나무를 심었던 곳이더란 이야기다. 이 역시 근거 없는 참언이지만, 고려에 이어 이씨 왕조가 실제로 들어섰으니 거짓이라고 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적중한 예언은 십중팔구 결과가 나온 뒤에 만들어진 것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묘청 서경 천도 좌절 후 2대 도시로

 숙종의 남경 천도가 중단된 뒤 얼마 안 가 묘청이 서경 천도를 주장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반란을 일으켰다. 그때도 개경의 지덕이 쇠했다는 풍수론이 근거가 되었다. 반란이 진압되면서 서경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서경을 대신해서 2대 도시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 바로 남경이었다. 남경은 개경 못지않게 국토의 중앙에 위치했을 뿐 아니라 한강과 서해의 뱃길을 이용해서 상인들이 활동하기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3경 가운데 서경과 동경이 풍수나 역사 전통에 근거해서 권위를 누렸다면, 남경은 자기 실력으로 성장한 도시였다. 그래서 고려 말에도 수차례 남경 천도 논의가 있었지만, 그때까지도 풍수와 비록을 근거로 들었다. 서울은 결국 새 왕조 조선의 수도가 되는데, 당시 실력자 정도전은 이렇게 말했다. “신은 음양술수의 학설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어지러움은 사람에게 달렸지 땅의 성쇠에 있지 않습니다.” 500년 풍수의 영향을 깨트린 획기적인 발언이었다. 서울은 이렇게 인문주의를 바탕으로 탄생했다.

중앙일보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10.18 60년간 조선 쥐락펴락, 농부 동생 정2품 출세시켜 

 명나라 환관 된 윤봉의 탐욕

 “윤봉(尹鳳) 등 세 사신이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왕은 황해 감사에게 “사신의 서흥(瑞興) 본가를 즉시 수리할 것과 영접하고 접대하는 모든 일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는 영을 내린다.(세종 9년 3월 23일) 윤봉은 황해도 서흥 출신의 명나라 내사(內史)이다. 그의 출현으로 우리 역사 최고 성군 세종까지도 좌불안석이 되는데 윤봉, 그는 누구인가.

 사신으로 본국 온 명의 환관

 윤봉은 화자(火者)로 명나라 황제의 환관으로 차출된 사람이다. 화자를 고자(鼓子)라고도 하는데 생식 기능이 제거된 사람으로 내시 또는 환관의 자격 요건이기도 하다. 명나라는 주변국으로부터 화자와 공녀를 정기적으로 차출해 갔는데, 환관의 경우 양국의 외교나 무역 문제를 조율하는 사신의 자격으로 본국으로 투입하곤 했다. 이소사대(以小事大)의 국제질서에서 중국 황제의 칙사를 응대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들은 황제의 측근에서 황제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선에 파견되는 황제의 내사는 대개 중국인과 조선인으로 구성되는데, 본국 출신 환관에 대한 견제와 관리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봉은 태종 5년(1405년) 20세의 나이로 “아주 쓸모있는 환관”에 뽑혀 명나라 황궁으로 들어간다. 소년 화자들이 통상 14세에서 18세 사이인 점에서 보면 윤봉은 늦은 나이다. 바로 전해에 사은사(謝恩使)로 중국 경사(京師, 수도)를 다녀온 양부(養父) 이빈(李彬)의 권유가 있었던 것이다. 중국으로 떠난 지 1년 후에는 황제의 배려로 본국 출신 화자 18명과 함께 부모를 뵈러 고국 땅을 밟는다. 다시 1년 후에는 황제의 칙서를 든 사신의 하나로 조선의 어린 화자 300~400명을 뽑아가는 임무를 띠고 왔다. 2달간 머무는 동안 그는 조선 국왕의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 그리고 명나라 황제의 환관이 된 지 4년, 사신 온 윤봉은 조선 국왕에게 자신의 족친들에게 벼슬을 줄 것을 청한다. 태종은 그가 요청한 10여 인 모두에게 서반직(西班職)을 제수하였다.(태종 9년 5월 6일)

“어리석은 동생 대접, 전하 은혜”

▲황해도 서흥 출신으로 명나라 황제의 환관이 된 윤봉이 동생 윤중부에게 관직이 내려지자 기뻐하는 내용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사진 서울대 규장각]

 

윤봉이 황제의 사신으로 다시 고국 땅을 밟은 것은 16년만인 세종 7년 2월이었다. 그간의 윤봉은 명황제 영락제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오고, 또 조선으로 들어가는 내사 편에 자신의 본가에 곡식을 내려주고 요역과 잡공을 면제시켜 줄 것을 요청해온 터였다. 윤봉이 사신으로 오게 되자 조정에서는 그의 아우 윤중부(尹重富)의 벼슬을 높여 형을 마중하게 했다. 시골 농부에 불과했던 불학무술(不學無術)의 아우가 종5품 부사직(副司直)이 되어 나타나자 윤봉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는 “중부의 어리석음은 그 외모만 보아도 알 수 있는데, 무슨 공로가 있어 전하의 이와 같으신 은혜를 받았단 말인가”라고 하며 조선의 임금이 황제를 공경하고 자신을 생각해 준 것에 감격한다. 윤봉은 또 “서흥을 도호부로 승격시켜 만대(萬代)에 내 이름을 남기고 싶다”(세종 7년 2월 14일)는 욕망을 피력한다. 이에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흥군을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윤봉이 체류한 3개월 내내 왕은 윤봉의 서흥 본가에 쌀과 콩을 보내는 것은 물론 그가 이르는 곳이면 어디든 술과 고기를 보내주며 황제가 보낸 사신의 마음을 얻고자 했다.

 

사신 길이 열린 윤봉은 이후 해마다 조선에 들어왔다. 세종 7년(1425)에서 14년까지 8년 동안 매년 사신으로 입국한 윤봉은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간 체류하면서 무역과 청탁 등의 일에 몰두했다. 이제 태감(太監, 최고지위의 환관)이 된 그는 자신의 가계 3대(代)를 추증해 줄 것과 족친에게 관직을 제수할 것을 요청한다. “윤봉의 아버지 윤신에게는 가정대부 경창부윤(慶昌府尹)으로 증직하고, 조부 윤단에게는 통정대부 공조 참의로 증직하며, 증조 윤공재에게는 통훈대부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로 증직한다.”(세종 8년 4월 8일) 윤봉의 족친 8인에게도 관직을 제수했다. 윤봉은 황제가 하사한 물품을 싣고 와 더 많은 물품을 바꾸어갔다. 한번은 윤봉이 요구한 물건이 2백여 궤(櫃)나 되었는데, 궤짝 1개를 메고 가는 데 8인이 필요하여 그 행렬이 숭례문 부근 태평관에서 사현(沙峴, 영천고개)까지 빈틈없이 이어졌다.(세종 11년 7월 16일) 사신의 물품 요구가 이보다 더 심한 때는 없었다는 불만이 나온 것은 당연하다.

 

 

이듬해 다시 온 윤봉이 산삼 등을 미리 준비하라고 하자 도감에서 “(황제가 요구한) 칙서에 없다”며 거절하자 노한 빛을 띠기까지 했다.(세종 12년 6월 24일) 또 어떤 해는 사신 네 사람에 두목 150명이 따라 왔는데, 윤봉의 본가에서 머물겠다며 요청한 비용이 너무 많아 호조(戶曹)에서 그들을 대접할 물자의 부족을 호소했다.(세종 13년 7월 21일) 이 때 세종은 윤봉이 요구한 물건을 칙서에 없다는 이유로 거절한 대가가 새 칙서에 조선국 왕을 농락하는 표현으로 나타났다며 폐해를 만들지 않을 방안을 모색한다. 가능한 내시들을 후하게 대우하자며 황희·맹사성·허조 등의 재상들과 논의한다. “윤봉을 위로하는 데에는 그 아우 중부(重富)에게 총제의 벼슬을 주는 것 만한 것이 없다. 중부가 비록 이 벼슬을 받을지라도 허직(虛職)과 다름이 없으니 무엇이 그렇게 아까우랴.”(세종 13년 8월 19일) 정승들은 입을 모아 “윤봉의 사람됨이 음흉하고 욕심이 많아서 불의(不義)한 일을 마음대로 행하는 자이니 후대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지금 황제의 권세가 이 무리에게 있으니 섬기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세종은 윤봉의 아우 윤중부가 사위를 본다며 안장 갖춘 말을 하사했고, 윤봉은 조카사위 김숙리와 윤중부의 처족 이정에게 관직을 요청했다.(세종 14년 12월 1일)

돌아와 살 집까지 건축 요구

▲정유재란 때인 1598년(선조 31년) 파견 된 명나라군의 경리(經理) 양호(楊鎬)와 만세덕(萬世德) 등을 영접하는 일을 담당한 조선 관리들이 만든 계첩(契帖)인 ‘황화사후록(皇華伺候錄)’의 일부. 계첩 의첫머리에 실린 그림으로 만세덕 일행을 압록강 변에서 영접하는 장면으로 추정된다. 조선은 명나라 경리 영접을 위해 영접도감(迎接都監)을 설치했다. 명나라에서 조선에 파견된 사신 가운데 간혹 조선 출신 환관도 있었는데, 이들은 조선 정부와 교섭하는 과정에서 많은 횡포를 부리기도 했다. [사진 서울대 규장각]

 

이후 윤봉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6년이 지난 세종 20년에는 “북경에 가는 통사(通事, 통역관)들은 궐내에서 윤봉을 만나면 피하고 불러도 가까이 가지 말라”는 조칙이 내려졌다. 그런데 윤봉이 다시 나타나는데, 문종의 책봉 칙서를 들고 12년 만에 입국한 것이다. 윤봉의 나이도 65세에 이르렀다. 이 해에 윤봉은 5개월 이상 머물면서 각종 이권을 챙기는 데 분주했다. 윤봉은 왕에게 자신이 살 집을 지어달라고 요청한다. “황제의 은혜를 입어 사직하여 고향에 돌아오게 된다면 이 집에 거주하면서 주어진 내 수명을 마치게 될 것이니 어찌 감격스럽지 않겠습니까.”(문종 즉위년 8월 7일) 그리고 자신이 본국으로 돌아오면 조카이자 양자인 윤길생과 함께 살 것이니 노비와 진원(珍原)에 있는 양자의 농장 곁에 자신이 쓸 땅 100결을 달라고 한다.(문종 즉위년 10월 17일) 윤봉은 왕이 지어주는 자신의 집을 직접 감독하는데, 수시로 그를 위로하는 궁중의 술과 음식이 내려왔다. 집이 완성되자 윤봉은 그곳에서 하룻밤을 잔다.(문종 즉위년 10월 26일) 가족에 대한 청탁 또한 계속되어 동생 윤중부는 정2품에 올랐고, 조카사위 김숙리는 강화부사를 청하기에 이르렀다.(문종 즉위년 11월 8일) 당연히 그에 대한 대신들의 평은 좋지 않아 “탐욕이 과도해서 구하는 것이 만족함이 없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6년 후 세조 즉위를 알리는 황제의 고명을 들고 윤봉이 다시 고국을 찾았다. 그의 나이 71세, 그렇게 아끼던 아우 윤중부가 죽은 지도 5년이 지났다. 윤봉은 세조에게 서흥을 향관(鄕貫)으로 삼을 것을 청하여 ‘서흥 윤씨’를 개창한다.(세조 2년 4월 28일) 자신은 비록 생물학적 후손을 둘 수 없는 몸이지만 그 아우 윤중부를 서흥 윤씨의 시조로 삼아 자신의 존재가 대대손손 이어지길 바랐다. 5개월 가량 머물다 간 세조 2년의 방문을 끝으로 윤봉의 고국 방문은 다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돌아와 살 새로 지은 집은 ‘매우 흡족하고 안온하게’ 하룻밤 자는 것으로 끝이 났다.

 

고국 땅을 밟지는 못했지만 황궁에 상주하며 본국을 향한 윤봉의 청탁은 계속되었다. 예종 1년 이후 그의 입김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80여 생의 그의 삶도 막을 내린 것이다. 황제를 등에 업고 조선 전기 60여 년을, 강한 군주 태종과 세종, 세조마저도 쥐락펴락했던 윤봉(1386~1469년 이후)에게 권력이란 무엇일까. 고향과 가족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최대한의 욕망을 투사한 윤봉에게 핏줄 또는 친족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싶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10.19 1905년 1월 고종은 국가 이권 사업 23개를 일본인에게 넘기려 했다

 국익 70%가 사라질 뻔한
'일한동지조합' 사건

 1905년 3월 14일 이세직(일명 이일직)이라는 사내가 대한제국 경성 시내에서 치안 방해 혐의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됐다. 그런데 소지품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런 서류들이 튀어나왔다. 고종 칙명 도장(勅命之寶·칙명지보)이 찍힌 ‘차관 도입 칙명서’ 7건, ‘일본에 망명 중인 을미사변 범인들 일망타진’ 칙명서, 그리고 ‘국가 이권 사업 특허 계약서’ 23건. 계약 당사자는 대한제국 궁내부 대신 이재극과 ‘일한동지조합’이라는 일본인 투자 집단. 토지조사사업부터 산업 단지와 항만 개발, 가스 회사 설립에서 염전 개발까지 ‘조선 국익 70%에 이르는’ 국책 사업을 일본인에게 넘기고 고종은 그 대가로 상납금 총 490만원과 매년 수익의 일정 비율을 받는 계약이었다.

 

그해 대한제국 예산이 1496만원이었다.(김대준, ‘고종시대의 국가재정 연구’, 태학사, 2004, p159) 나라 예산 30%에 해당하는 이 거액을 국고가 아니라 본인이 상납받고 일본인에게 국가 이익을 통째로 넘기겠다? 황제가?

▲고종./국립고궁박물관

고종의 측근 정치와 이세직의 서류 뭉치

이세직은 1894년 일본에서 홍종우를 사주해 김옥균을 암살한 고종 측근이다. 당시 일본 정부 수사 결과 이세직 수중에서 고종 옥새가 찍힌 암살 명령문이 나왔다. 고종은 모른다고 부인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이하 ‘기록’)4, 5-3-(11)-4. 김옥균 및 박영효 암살계획 혐의자 이일직 일파에 관한 건4) 일본에서 추방된 이세직은 ‘주상의 은혜를 두터이 입어 임금 거소를 들락날락할 정도로’ 고종 총애를 받았다.(1898년 1월 18일 대한제국 관보. 김선주, ‘이세직의 활동을 통해 본 대한제국기 정치와 외교’, 역사와 현실 99호, 한국역사연구회, 2016, 재인용)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정부대신들을 불신하고 미천한 계층 인물들을 측근으로 중용해 비밀리에 정국을 운영했다. 이용익, 이세직, 김홍륙, 홍종우 같은 인물이 그들이다. 일본공사관은 대놓고 ‘한 사람도 정당한 인물이 아니며 요사스런 마귀의 소굴’이라고 평가했다.(’기록’11, 5-1,2-(2)내각원과 총신 간의 알력) 이들이 고종과 은밀히 행한 정치로 인해, 훗날 을사조약 직후 자결한 민영환은 윤치호에게 “나라가 다 결딴났다”고 말했다.(1897년 2월 2일 ‘윤치호일기’) 그 결딴난 풍경을 적나라하게 담은 문서가 이세직이 가지고 있던 서류뭉치들이다.

▲①1905년 1월 15일 고종 칙명으로 대한제국 궁내부와 '일한동지조합'이 맺은 '토지조사사업' 특허권 계약서. 대한제국 정부가 파악하지 못한 토지를 찾아내 세금을 징수할 권리를 양여한다는 계약서다. 고종은 이 사업을 현금 100만원을 받고 이 조합에 넘기고, 조합은 매년 징수하는 세금의 40%를 수익으로 갖기로 계약을 맺었다./국사편찬위원회

이권(利權) 23개, 국익의 70%

아래는 1905년 1월 15일 대한제국 광무제 고종이 ‘일한동지조합(日韓同志組合)’이라는 일본인 단체와 계약을 맺은 특허권 목록이다. 이 조합은 많게는 100만원, 적게는 5만원까지 상납금을 황제에게 납입하고, 15년 동안 각 사업 수익을 황실과 나눠 갖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황실-조합 이익 배분은 2대8에서 6대4까지다. 계약 주체는 고종 8촌인 궁내부 대신 이재극과 ‘일한동지조합’ 대표들이다. 칙령과 계약서는 모두 국사편찬위원회에 영인돼 있고, 누구나 온라인으로 열람할 수 있다. 길지만 모두 인용한다. 모든 사업은 ‘특허권’, 그러니까 독점 사업권이다.

 

1. 탁지부 장부에 빠진 토지[隱結·은결] 조사정리사업권 2. 연강·연해 매립사업권 3. 연강·연해 제방 수축 및 전답 관리권 4. 연해·연강 요지 권업장 설립 및 운반권 5. 기타 연해·연강 매립에 관한 사업 일체 6. 각 도시 및 항구 가스 회사 설립권 7. 수력을 이용한 공업행사권 8. 적지(適地) 양어권(養魚權) 9. 각 지방 표고버섯 재배 및 판매권 10. 담배 증식권 11. 염전 증식권 12. 구 목장 재흥권(再興權) 13. 습지 전답 조성권

2주일 뒤인 1월 29일 대한제국과 일한동지조합은 추가로 10개 이권에 대해 계약을 맺었다. 조건은 동일했다.

 

1. 황실 소유 석유 전매권 2. 제주도 관유(官有) 목장 확장권 3. 전 항구 지역 항만[船渠·선거] 확장설치권 4. 설탕 전매권 5. 온천 및 냉천 개발사업권 6. 모범 농장 적지 설립 및 종자 개량, 비료 제조, 농기구 개량권 7. 제주도 장뇌 제조 전매권 8. 탁지부 장부에 빠진 토지[隱結·은결] 일반 역둔토 조사정리사업권 9. 소금 전매권 10. 담배 전매권.

 

같은 날 고종은 각 특허권에 대한 상납금을 완납하면 그 10%를, 매년 황실에 납입하는 수익금의 10%를 조합 대표에게 준다는 칙명을 내렸다.(‘기록’25, 6-(5)이익금의 100분의 10을 일한동지조합 대표에게 지불한다는 칙명)

▲②1905년 1월 17일(15일의 오기로 보인다) 대한제국이 ‘일한동지조합’과 맺은 이권 특허 13건에 이어 1월 29일 별도 10건에 대해 이권 사업 특허권을 주겠다는 추가 계약서. 대한제국이 ‘일한동지조합’에게 넘기기로 계약한 국가 이권사업은 모두 23건이었다. /국사편찬위

 

토지 개발 및 징세, 항구 개발, 산업단지 개발, 농산물과 양식, 각종 전매사업이 총망라돼 있다. 23건 계약으로 고종이 받기로 약정한 상납금 총액은 490만원이었다. 특히 수익이 큰 토지조사사업 상납금은 50만~100만원으로 최대였다.

 

‘일한동지조합’ 대표인 모리베 도라주(毛利部寅壽·인주, 도라히사로도 읽는다)는 주한일본 영사에게 이렇게 서면 진술했다. “다 합쳐보니 한국 13도 중 대략 10분의 7은 ‘일본국’의 손에 들어오게 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기록’26, 1-잡(雜)1~3-(2)일한동지조합 대표 모리베 도라주의 국내 사업 특허 전말과 경위 해명) 로비 자금을 비롯해 이들이 투입한 경비는 2만엔으로, 이 돈은 ‘이퀴터블(Equitable)’이라는 미국 보험회사에서 투자했다.(‘기록’25, 10-(17)모리베 등이 받은 특허의 건)

▲③1904년 12월 13일 고종이 측근 이세직에게 내린 밀칙. 일본에 망명한 을미사변 주범들을 일망타진하라는 명령서다./국사편찬위

을미사변 국사범 박멸

이권 계약보다 한 달 전인 1904년 12월 13일 고종은 이세직에게 두 가지 칙명을 내렸다. 첫째, 일본으로 망명한 을미사변 주범들을 일망타진하고 역모의 간담이 싹트기 전에 파멸시키라.’(사진3·'주한일본공사관기록’25, 6-(1)도일 망명자 처리에 대한 대한제국황제의 밀칙) 이를 위해 일본 정부 및 경성주차 일본군 사령부 내 비밀을 탐지할 각국 인사 10명을 포섭하고 이들에게 선수금 5만원, 상금 50만원을 지급하라.(사진4·'기록’25, 6-(13), (14))

 

1884년 갑신정변 이래 고종은 일본에 망명한 국사범 처단에 몰두했다. 지운영(지석영 형)을 보내 김옥균 암살을 시도했고 이세직을 보내 김옥균을 암살하고 박영효 암살을 시도했다. 을미사변 이후에는 또 다른 측근 고영근이 망명한 우범선을 암살했다.

▲④1904년 12월 13일 고종이 이세직에게 내린 기밀 탐지 성공보수 밀칙. 착수금 5만원과 성공보수 50만원을 기밀 탐지자에게 준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고종은 이세직에게 잔당 처리 밀명을 또 내렸다. 이를 위해 경성과 도쿄 두 군데에서 일본인을 포함한 외국인 각 5명을 포섭해 일을 처리하라는 추가 지시도 함께 하달했다.

 

둘째, 같은 날부터 이듬해 2월 6일 사이 고종은 이세직에게 50만원에서 2만원까지 7건에 이르는 차관 도입 밀칙도 내렸다.(사진5·'기록’25, 6-(6)~(12)) 밀칙에는 ‘외채를 차입하여 황실의 수용에 공급하고 러일전쟁이 끝난 후에 즉시 상환’이라고 적혀 있었다.

 

당시 대한제국 황실은 돈줄이 끊긴 상태였다. 1904년 8월 22일 체결된 ‘1차한일협약’에 의해 탁지부 고문으로 임명된 일본 대장성 소속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郎)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황제가 영수증 없이 쓰던 황실 내탕금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차관 밀칙은 이 통제를 벗어나 통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고종이 내린 명령으로 추정된다. 압수된 칙령을 포함해 고종이 이세직에게 명한 차관 총액은 2642만원으로 그해 예산 두 배에 가까웠다.(김선주, 앞 논문)

▲⑤1904년 12월 13일 고종이 이세직에게 내린 차관 도입 밀칙 가운데 하나. 50만원 규모 차관을 도입하라는 명령서다.

일본 정계를 휩쓴 로비

문서를 접한 일본 측은 일한동지조합 대표인 모리베 도라주를 조사했다. 모리베는 “도쿄에서 여러 제현과 상의해 동의를 얻었다”며 “망명자 처분 서류 따위는 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기록’26, 10-잡1~3-(2)) 모리베가 언급한 ‘여러 제현’은 거물들이다. 이토 히로부미, 전 내각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전 외무대신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 역시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등.

 

이세직 체포 한 달 뒤인 4월 14일 가토 다카아키가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에게 “선처를 바란다”는 편지를 보냈다. 같은 날 오쿠마 시게노부도 편지를 보냈다. “시정 방침에 어긋나지 않는 한 부디 편의를 주시기 바란다.” 편지에는 현직 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이름도 언급돼 있었다.(‘기록’26, 10-잡1~3-(3)毛利部의 방한 설명에 선처 요청, (5)伊藤博文·桂太郞·小村壽太郞의 동감과 동 사업 승인 요망)

일본이 취소시킨 계약

일본 정부 공식 입장은 달랐다. 로비를 받았던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는 6월 27일 주한공사 하야시에게 공문을 보냈다. “한국 경영에 관해서는 정부에서 일정한 방침을 가지고 실행을 기하고 있음. 이 사업을 허용하게 되면 대한(對韓) 경영은 근저부터 파괴돼 유명무실로 돌아갈 것임.”(‘기록’25, 10-(15)모리베 등이 획득한 양여에 관한 선후 처분의 건) 병합 후 일본 정부가 통제해야 할 대한제국 이권 사업을 민간에 허용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완전히 종속된 대한제국

7월 11일 일본은 대한제국 외무대신에게 사건 해명과 ‘조약 이행 각서’를 요구했다. 1904년 8월 체결된 1차한일협약에는 이렇게 규정돼 있다. ‘외국인에 대한 특권 양여와 계약 등의 처리에 관해서는 미리 일본 정부와 토의할 것.’ 7월 17일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이세직이 외국인과 사통해 나라 간 관계를 손상시켰다”며 “협약을 마땅히 준수해 영원 불변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이틀 뒤 관보에 발표했다.(1905년 7월 17일 ‘고종실록’, 7월 19일 ‘관보’) 관보를 확인한 주한공사 하야시가 본국에 보고했다. ‘이리하여 일한협약서(日韓協約書)의 효력은 실제적으로 강화됐음.’(‘기록’26, 1-1~4-(181) 이세직의 이권 문제와 일한협약서 효력 강화 건) 4개월이 지난 11월 17일 2차 한일협약인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이세직은 태형 100대와 제주도 유배형을 받았다. 1906년 8월 고종은 유배 중인 이세직을 방축향리(고향으로 돌려보냄)형으로 감형했다.(1906년 8월 20일 ‘황성신문’) 을사조약으로 조선 통감이 된 이토 히로부미가 이렇게 말했다. “이세직 사면 같은 일은 사법대신 상주를 얻어 국가 원수가 이를 행하는 것인데 귀국에서는 갑자기 위에서 내려오는 것 같다.”(‘통감부문서’1, 6-1~3-(11) 한국의 시정 개선에 관한 협의회 제11회 회의록)

 

1905년 1월 7일 위정척사파 최익현이 고종 면전에서 통곡하며 말했다. “삼천리강토가 일본에 의해 망할지 누가 알겠는가. 사람이란 반드시 자기가 자신을 멸시한 다음에야 남이 멸시하는 법이니 어찌 전적으로 저들에게만 죄를 돌리겠는가.”(1905년 1월 7일 ‘고종실록’) 1차 이권 양도 계약 체결 8일 전이었다. 고종, 식은땀이 흐르고 소름이 끼쳤으리라.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

 

10-21이조 소속 관청 ‘내수사’

 왕실 재산 관리하며 권한 막강… 고리대금·토지임대에 백성들 피해도

딸린 전답들은 왕실 소속이라
면세특권 받으며 재산 불려가
궁녀·내시도 왕의 소유로 여겨
선발 관여하고 투옥까지 담당

관원은 왕의 총애 받으며 횡포
소속 노비까지 권세 누리기도

▲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 알고 보면 최고 권력 기관

내수사(內需司)는 궁궐에서 소용되는 물품을 관리하는 기관으로 이조에 소속되어 있는 관청이다. 왕실의 쌀, 베, 잡화, 노비 등 실질적인 왕의 재산을 관리하는 곳으로서, 이곳 관원의 대부분은 환관들이었다.

조선 개국 초에만 하더라도 내수사라는 기관은 없었다. 당시엔 고려 왕실로부터 물려받은 왕실 재산과 이성계가 원래 가지고 있던 사유재산을 관리하는 곳을 본궁(本宮)이라고 칭했는데, 이것이 내수사의 전신이다. 본궁이란 곧 이성계의 본가를 칭하는데, 다른 한편으론 왕실 재산을 의미하기도 했고, 왕실재산을 관리하는 곳을 지칭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본궁은 공식적인 국가기관은 아니었다.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공식적인 기관이 생긴 것은 세종대에 이르러서였다. 세종은 재위 5년(1423년)에 내수소(內需所)라는 기관을 만들어 왕실 재산 관리를 맡도록 했다. 이후 세조 12년(1466년)에 관제 개편이 이뤄질 때 내수사로 개칭되어 고종대까지 존속하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내수사의 관원은 전수(정5품) 1인, 별좌(정5품 또는 종5품) 1인, 부전수(종6품) 1인, 별제(정6품 또는 종6품) 1인, 전회(종7품) 1인, 전곡(종8품) 1인, 전화(종9품) 2인이 있었고, 이들 중 별좌와 별제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환관이었다. 이들 관원 아래로 사무를 담당하는 서제 20인을 두었고, 많은 수의 노비가 있었다.

내수사 관원은 왕이 직접 임명했기 때문에 내수사 관원의 권세는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관원이 아니더라도 내수사의 노비들조차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그들의 권세는 물론 내수사에 딸린 땅과 돈 덕분이었다. 내수사에 딸린 모든 전답은 왕실 재산이었기 때문에 면세의 특권을 받았다. 왕실 재산이 비대해지자, 내수사에서는 고리대금업이나 토지 임대업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재산을 불려 나갔고,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백성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내수사는 왕실 재산 관리 외에도 몇 가지 일을 더 관장했다. 궁녀를 뽑는 일에도 관여하였으며, 궁중에서 죄를 지은 내시나 궁녀들을 내수사 감옥에 가두는 일도 맡아 했다. 이는 내시나 궁녀도 왕에게 딸린 재산처럼 여겼다는 것을 말해준다.

내수사에서는 왕의 비자금을 관리하기도 했다. 왕의 비자금을 내탕금이라고 하는데, 내탕금의 용도는 다양했다. 이를테면 공주나 왕자들을 도와준다든지, 절에 시주를 한다든지, 또는 손자들에게 용돈을 준다든지, 아니면 특별히 왕이나 왕비를 위한 건물을 짓는다든지 하는 일에 사용했다. 물론 왕의 의식주에 필요한 경비는 국가기관에서 정해져 나왔지만, 정해진 경비 외에 왕이 사사로이 써야 할 돈은 모두 내탕금에서 꺼내 썼던 것이다. 그렇다고 내탕금을 꼭 개인적으로만 쓴 것은 아니었고, 나라에 재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왕이 내탕금을 풀어 해결하기도 했다. 백성들의 어려움을 구제하고 국가적인 위기를 헤쳐 나가는 자금으로 쓰이기도 했던 셈이다. 하지만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내탕금은 대부분은 왕실의 사사로운 용도에 쓰였고, 내수사에서는 내탕금을 유지하고 확충하기 위해 고리대리금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내수사 별좌 강오손과 이팽동

내수사의 직책 중에 환관이 아닌 일반 관리가 맡은 직책이 있었는데, 별좌와 별제였다. 별좌와 별제는 대개 5품 내지 6품 관리가 맡았는데, 육조의 정랑이나 좌랑이 겸임하기도 했고, 때론 왕의 총애를 받는 인물이 지명되기도 했다.

내수사 별좌와 별제는 왕실 재산을 관리하고 유지, 확충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왕의 총애가 없으면 결코 오를 수 없는 직책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횡포와 전횡도 심했다. 법상으론 내수사 별좌와 별제는 각각 1명을 두도록 되어 있었으나, 때에 따라서 겸별제 또는 겸별좌라는 이름으로 10명 이상 임명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숫자가 많을수록 백성들에 대한 수탈이나 횡포는 심해졌다. 또한 이들은 왕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매우 오만방자했는데, 특히 내수사 별좌를 가장 많이 뒀던 연산군 시절의 인물들이 그 절정을 이뤘다. 그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강오손이다.

강오손에 대해 연산군 시절의 한 사관은 이런 평가를 내리고 있다.

“왕이 하고자 하는 바를 내수사가 오로지 맡아 봉행하므로 왕이 이를 의지하고 중하게 여겼는데, 별좌 강오손이 강희맹 첩의 소생으로서 총애를 믿고 스스로 방자하여 조신(朝臣)을 업신여기니, 겸별좌들은 감히 겨루지도 못하였다.”

사관이 이런 평을 남긴 것은 연산군 11년(1505년) 8월 29일인데, 이날 연산군은 내수사의 관원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겸별좌 6명을 더 임명하였다. 이들 겸별좌는 모두 연산군의 총애를 받고 있던 인물들인데, 그들이 비록 왕의 총애를 받았다손 치더라도 강오손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시 연산군은 강오손을 몹시 신뢰하고 총애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연산군 12년(1506년) 8월 6일엔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내수사 별좌 강오손은 우의정 강귀손의 서제(庶弟, 서자 아우)로 성질이 흉측하고 사나운데 왕은 매우 총애하고 신임하여, 그로 하여금 금표(禁標) 안에서의 놀이 때 공봉(供奉)하는 일을 맡아 보게 하였는데, 궁중에 드나들며 친히 일을 아뢰므로, 왕이 무릇 금표 안에 영조(營造, 건물을 짓거나 물건을 만듦)가 있을 때 반드시 먼저 오손에게 물었고, 오손은 이로 인해 방자와 횡포가 더욱 심하였다.”

말인즉, 연산군은 도성 곳곳에 금표를 설치하고 백성들의 출입을 막았는데, 그곳에서 놀이를 하거나 또는 새로운 건물을 만드는 일을 모두 강오손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강오손은 수시로 연산군과 직접 대면하며 놀이나 공사에 대해 의논했고, 그로 인해 매우 방자하게 행동했을 뿐 아니라 횡포도 심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강오손과 함께 이 오만한 행동과 횡포를 일삼는 별좌들이 여럿 더 있었는데, 그들 별좌 중에는 심지어 노비 출신도 있었다. 신분이 원래 노비였는데, 일약 정6품 별좌에 오른 그 인물은 이팽동이란 자였다. 이팽동은 원래 장원서의 노비였는데, 그의 아내가 연산군의 딸 휘순 공주의 유모였다. 그래서 연산군은 휘순 공주의 청탁을 받아 이팽동을 면천시키고 내수사 별좌로 삼았다. 내수사 별좌는 최소 6품 벼슬이니 이팽동은 공노비 신분에서 졸지에 양반이 된 셈이었다.

 

이팽동의 파격적인 신분 상승에 대해 당시의 사헌부 장령 서극철이 반대하는 의견을 올렸으나 연산군이 듣지 않자, 사헌부 전체가 이 문제를 공론화했다. 이에 연산군은 마지못해 이팽동의 내수사 별좌 직을 뗐지만, 양인의 신분은 유지하도록 했다. 이후 연산군은 이팽동에게 내수사 직책 대신 군직을 내렸다. 이 역시 사헌부에서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연산군은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았다. 이에 이팽동은 비록 양반의 신분은 아니었지만 군직을 받은 덕분에 중인의 신분은 유지할 수 있었다. 군직을 받은 이팽동은 여전히 내수사 일을 보았는데, 강오손과 손발이 잘 맞아 함께 횡포를 일삼곤 했다는 것이다.

■ 용어설명 - 내탕금(內帑金)

조선조 왕실의 사유 재산. 호족 출신의 태조 이성계가 함경도 전체 면적의 3분의 1에 달한 토지를 소유했던 것이 그 원천이다. 국왕이라 해도 국가 재정을 마음대로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왕조 묘지 확장이나 사찰 건축 등에 주로 사용됐다고 한다.

문화일보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작가

 

10-31 1443년 11월 1일 明과 日 사이 대의-실리 다 잡은 외교관 이예

▲충숙공 이예 초상화. 사진 출처 전통문화포털

 

세종 때 일이다. 쓰시마에 파견되었던 체찰사 이예(李藝)가 명나라 사람인 서성을 구출하여 데려왔다. 그는 중국 절강성의 군인으로 순찰을 나갔다가 왜구의 배를 만나 붙잡혔는데 1년 5개월을 잡혀 있었고 나이는 60세였다.

이예가 쓰시마에 갔던 것은 1443년 6월에 제주를 침입한 왜구 때문이었다. 이들은 제주를 약탈하여 우리 백성들을 납치해 갔는데, 관군의 반격으로 달아났다. 이때 마침 태풍이 불어 배 한 척이 부서졌다. 덕분에 왜구들을 포로로 잡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이들을 돌려보내고 피랍된 백성을 찾아오기로 했다. 칠십이 넘은 이예는 자진해서 쓰시마에 가서 납치된 사람들을 모두 찾아오겠다고 나섰다.

이예는 본래 울산의 향리였다. 24세 때 왜구가 노략질하러 와서 울산군수를 잡아가자 자진해서 그를 따라갔다. 왜구는 본래 군수와 이예를 모두 죽일 생각이었으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예가 상관을 극진히 모시는 것을 보고는 마음을 돌렸다. 조정에서는 군수를 모시고 무사히 귀국한 이예의 충절을 높이 사서 그를 양반으로 신분을 올려주었고 그는 중인에서 종2품까지 승진한 입지전적 인물이 되었다.

 

이예가 8세 때 어머니가 왜구에 잡혀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쓰시마에서 집집이 수색했지만 어머니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가족이 헤어지는 비극을 겪었기 때문에 일본을 왕래하며 잡혀간 사람들을 구해내는 데 최선을 다했다. 40여 회 일본을 오가며 구해낸 사람이 667명에 이른다. 왜구가 팔아버린 조선 포로를 찾아 유구국(오키나와)까지 가서 44명을 구해오기도 했다. 그중에는 21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도 있었다.

이예가 쓰시마에 갔을 때 서성은 그가 빠져나올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알고 매달렸다. 하지만 이예는 자국민이 아닌 그를 구해갈 명분이 없었다.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었기에 도주(島主)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고 언질을 주었다. 서성은 쓰시마 도주에게 청하여 송환을 허락하는 서류를 받아냈다.

이예가 명나라 사람까지 구출해서 돌아오자 조선 조정에 비상이 걸렸다. 명나라 허락 없이 외국에 사신을 보내 소통하는 것을 그가 다 알릴 것이니 내보내지 말고 산골에 유배해서 가둬놓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격론 끝에 서성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현명한 결정으로 인해 양국의 우호 관계가 더 단단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예는 어머니의 원수인 일본을 국가 대계 안에서 대할 줄 알았다. 그는 쓰시마와 조선 사이에 체결되어 평화를 유지하게 한 계해약조를 맺은 주역이기도 했다. 계해약조를 통해 조선은 화약을 만드는 데 필요한 유황을 얻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전함과 화포의 개량에 대해 진언하는 등 국방 문제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국방에 대비가 없다면 왜구는 언제든 날뛸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예는 세종에게 일본을 대하는 외교 정책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의를 설파하고 생계를 도모해서 마음속으로부터 복종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명이라는 초강대국과 사납기로는 짝이 없는 일본 사이에 있는 조선에서 이예는 평화를 모색하는 길을 찾는 외교관이었다. 북방의 정세가 날로 험악해지는 오늘날 대의와 실리를 다 같이 도모한 이예와 같은 외교관이 절실히 필요하다.

동아일보 이문영 역사작가

 

11.10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냐 안창호냐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 ‘작사자 논쟁’ 70년의 종지부를 찍다

 ⊙ 1955년 국사편찬위, 사실상 윤치호 인정하고서도 윤치호의 친일 행적 의식해 외견상 ‘미상’으로 발표
⊙ 서재필 영자신문 칼럼에 “윤치호가 행사 기념으로 지었다”고 기술
⊙ ‘애국가 작사자 안창호’설은 전기 소설 《도산 안창호》에서 비롯
⊙ 윤치호 역술 《찬미가집》에 현 ‘애국가’와 흡사한 ‘무궁화노래’ 수록
⊙ “‘무궁화노래’는 한국의 계관시인 윤치호가 이날 행사를 위해 작사”(《아펜젤러전집》)
⊙ 일각에선 “친일파 윤치호는 작사자 될 수 없다” 주장
⊙ 김을한, “윤치호는 ‘애국가’ 남긴 것으로 할 일 다 했다”

金煉甲
1954년생. (재)국제한국연구원 기획실장, 사운연구소 연구부장 역임. 現 (사)아리랑연합회 이사장, 국가상징연구회 애국가분과위원장, 아리랑사업회 회장 / 저서 《아리랑시원설연구》 《애국가작사자연구》 등


 1955년 4월부터 7월까지는 ‘애국가’ 작사자 논쟁으로 뜨거운 4개월이었다. 4월 2일자 《서울신문》에는 〈우리나라의 ‘애국가’, 미 백과사전에 삽입〉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미국의 한 출판사가 주한 미국 대사관에 ‘애국가’의 연혁(沿革)을 문의했고, 문교부(현 교육부)는 “‘애국가’의 작사자는 안창호(安昌浩·1878~1938년), 작곡가는 안익태(安益泰·1906~1965년)”로 기재해 전달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내용이 보도되고 열흘이 지나는 동안 문교부에는 수많은 제보와 항의가 빗발쳤다. 이 때문에 문교부는 산하 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에 작사자 조사를 지시했다. 1955년 4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국사편찬위원회는 13인으로 구성된 ‘작사자 조사위원회’를 통해 3차에 걸친 조사, 그리고 이후 1년간의 자체 조사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조사위원회의 최종회의 결과는 사실상 윤치호(尹致昊·1865~1945년)의 작사 여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문교부, 윤치호 확정하고도 발표 안 해

▲작사자 문제를 처음으로 보도한 《서울신문》 1955년 4월 2일자. 사진 오른쪽은 국사편찬위원회가 1955년 5월 13일 발행한 조사자료. 사진=김연갑

 

1955년 7월 28일 개최된 제3차 회의 결과는 이렇다. 《서울신문》은 “윤씨가 유력하다로 ‘애국가’ 작사자 규명 일단락”이라고 했고, 《경향신문》은 “격론 끝에 ‘윤치호씨가 작사자로 가장 유력하다’고 결정”, 《동아일보》는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 유력하다고 낙착”, 《한국일보》는 “무기명 투표 결과, 11대 2로 현재까지 수집된 사료 중 ‘윤치호설이 가장 유력하다는 판정’을 짓고, 작사자 조사 문제의 일단락을 지었다”라고 보도했다.

그러고 1년 후인 1956년 8월 31일, 《국도신문》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자체 조사 결과, “윤치호씨로 결론, ‘애국가’ 작사자에 종지부, 국사편찬위원회 불원 문교부 장관에게 보고하려 한다”는 보도를 했다. 국사편찬위가 1년간 자체 조사를 더해 윤치호로 결론을 낸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문교부는 윤치호를 작사자로 확정해 공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외견상 “‘애국가’ 작사자는 미상(未詳)”으로 유포될 수밖에 없었다.

▲1955년 4월부터 8월 사이의 신문 기사들. ‘애국가’ 작사자로 윤치호를 지목하고 있다. 오른쪽은 이선근(李瑄根) 당시 문교부 장관이 사견으로 윤치호가 작사자라고 밝힌 기사. 사진=김연갑

 

 그 이유는 맨 처음 문제를 제기한 성악가 박은용(朴殷用·1919~1985년)과 국사편찬위 조사 과정의 발언에서 유추(類推)가 가능하다. 박은용은 “윤치호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 무시하고 거짓으로 도산 (안창호) 선생 작품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또 하나는 국사편찬위 ‘작사자 조사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위원의 발언으로, 그는 “윤치호는 친일(親日)한 사람이므로 작사자가 돼서는 안 된다는 뜻이 고의적으로 작사자 판명에 무형의 압력을 가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즉 친일 문제에 대한 우려에서 정부는 ‘애국가’ 작사자를 윤치호로 하지 않고 ‘미상’으로 두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부가 주저하는 사이에 ‘애국가’ 작사자 문제에는 ‘틈’이 생겼고, 이로 인해 왜곡과 조작이 끼어들 여지를 만들었다. ‘안창호 작사설’은 바로 이런 과정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안창호 소설에 ‘안창호설’ 끼워 넣은 편집자

▲1947년 1만 부를 판매한 초판 《도산 안창호》 표지. 이광수가 썼으며 편집자 박현환이 가필 과정에서 ‘안창호설’을 삽입했다. 사진=김연갑

 

 안창호설’은 문제의 전기 소설 《도산 안창호》에서 출현했다. 이 소설은 1947년 5월 30일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명의로 발간됐다. 초판 1만 부를 발간했는데, 읽을거리가 변변치 않았던 시기에 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실제 작가는 이광수(李光洙·1892~1950년)다. 1947년 1월,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실무자로 임시정부 시절 춘원을 도왔던 작가 박현환(朴賢煥·1892~?)이 양주 봉선사(奉先寺)로 춘원을 찾아와 요청해, 춘원이 4개월여 만에 완성한 책이다.

그런데 6·25 전쟁 직후인 1953년 10월, 부산에서 발간된 ‘한글 3판’ 이전까지는 ‘지은이 이광수’는 숨겨진 채 발간됐다. 이광수의 친일 문제를 우려했을 테지만, 그 내용에 대한 문제도 있었기 때문이다. 내용 문제는 박현환의 자의적 부연(敷衍)과 의도적 가필(加筆)에 대한 불만으로 이광수가 거부했을 것이란 추정이다. 이광수의 원고에 부연과 가필을 했다고 추정하는 부분은 첫머리 1쪽 분량의 ‘예언(例言)’과 ‘편자식(編者識)’으로 넣은 14쪽 분량의 ‘서언(緖言)’이다.

특히 목차에는 있으나 실제 내용에서는 없는 것도 있다. “살아 있는 태극기와 ‘애국가’”란 대목은 이광수가 쓴 원고에는 있었으나, 출판에서는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대신, 박현환은 ‘애국가’에 대한 언급이나 가사를 제시한 부분에서는 안창호가 작사했다는 내용을 작은 활자로 가필했다. 임시정부 청사의 아침 일과를 시작하며 의례(儀禮)로 ‘애국가’를 부른다는 대목에서 ‘애국가’에 대한 에피소드를 박현환이 끼워 넣은 경우다. 소설 《도산 안창호》에서 ‘애국가’를 언급한 부분으로 문제가 되는 대목은 이렇다.

① 정청(政廳)은 매일 아침 사무 개시 전에 전원이 조회를 하여 국기를 게양하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하는 ‘애국가’를 합창하였다. 도산은 그 웅장한 음성으로 힘을 다하여서 ‘애국가’를 불렀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점잔을 빼던 사람들도 아이들과 같이 열심히 부르게 되었다.

② ‘애국가’ 끝 절에, ‘임금을 섬기며’를 ‘충성을 다하여’라고 도산이 수정하였다. 원래 이 노래의 시방 부르는 가사는 도산의 작(作)이거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려서 국가를 대신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애국가’는 선생이 지으셨다는데, 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도 아니하였다.

③ 정청을 정제(整齊)하는 외에 큰일은 《독립신문》 발행과 민족운동 거두(巨頭)를 일당(一堂)에 모으는 일이었다.

《도산 안창호》 제6편 ‘상해시대’라는 부분의 일부인데, 맥락상 임시정부 청사 일과(日課) 의례 상황이다. 일과를 시작할 때 ‘애국가’를 부르는 상황에다 가사 일부를 수정한 사실은 물론, 작사까지 하였다는 듯한 ②를 끼워 넣은 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계 기로 지었다는 전제도 없고, 지었느냐고 물으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이유도 없는 허술한 내용이다. 그야말로 작사자라고 거짓말은 못 하겠다는 듯한 표현으로, 이는 일종의 ‘조작’이다. 정리하면, 항목과 내용상으로는 ②를 뺀 ①에서 ③으로 연결되어야 맥락에 맞는다.

안창호의 또 다른 ‘애국가’

▲안창호가 1907년 일본에서 귀국할 때, 《태극학보》에 발표한 지금의 ‘애국가’와는 전혀 별개인 ‘애국가’. 사진=김연갑

 

《도산 안창호》의 이 기록 때문에 ‘작사자 안창호설’이 유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필자는 2차에 걸친 ‘흥사단’과의 논쟁에서 “‘애국가’를 지으셨느냐고 물었을 때 도산이 대답하지 않은 것은 평소 윤치호와 교분이 두터웠던 도산이 윤치호와 ‘애국가’에 대한 배려 차원이었을 것”이라며 “만일 윤치호가 작사했다면, 임정 초기 요원들은 ‘애국가’를 부르지 않겠다고 했을 것이며, 이는 결국 윤치호를 폄하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1945년 태평양 전쟁 종전 직전, 중국에서 발간된 《김구 선생 제 한국애국가(金九 先生 題 韓國愛國歌)》에서 “50년 전 한 애국지사의 수필(手筆)로 창작되었는데, 이미 일명(佚名)해버렸다”고 한 이유와 같다. 만일 안창호가 작사자라면 김구가 이를 모르고 이렇게 썼겠는가. 50년 전이란 ‘무궁화노래’가 작사된 시기이고, 윤치호는 분명 ‘한 애국지사’인 것이다.

‘안창호 작사설’이 나온 두 번째 배경은 의외로 흥사단이나 안창호 작사설 주장자들이 은폐하고 있는 안창호 작사의 현재의 ‘애국가’와는 별개의 ‘애국가’의 존재 때문이다. 안창호가 1907년 일본을 거쳐 귀국할 당시, 일본에서 회합을 가진 단체가 서북 지방 출신의 일본 유학생 단체 ‘태극학회’였다. 바로 이 단체가 발행하는 《태극학보》 1908년 2월호에 ‘애국생(愛國生)’이란 필명으로 발표한 ‘애국가’다. ‘애국생’은 안창호가 ‘산옹(山翁)’과 ‘섬뫼’와 함께 쓴 필명이다. 곡조를 찬송가에서 따와 노래로 지은 것이 분명하다.

▲안창호는 ‘신앙 고백’ 한 적 없어

이 작품이 ‘안창호 작사 애국가’임은 홍언(洪焉·1880~1951년)과 이강(李剛·1878~1964년)의 기록에서 확인이 된다. 홍언은 1913년 안창호와 함께 흥사단을 창단했고, 일곱 번째 단우(團友)로 경기도 대표를 맡았던 인물이다. 《신한민보》 1943년 11월 5일자 행사에서 이 노래를 부르며 “안창호 선생이 지은 노래”라고 했다. 이강은 1904년 안창호와 함께 공립협회를 창립해 기관지 《공립신문》 주필을 맡고, 1907년 신민회에 참여해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1954년 잡지 《새벽》 창간호 〈내가 본 안창호, 성(誠)의 사람〉이란 글에서 “… 도산 선생의 자작자음(自作子吟)하던 ‘애국가’ 일절(一節) ‘긴날이 맛도록 생각하고, 깊은 밤 들도록 생각함은 우리나라로다, 우리나라로다…”라고 회고한 바가 있다.

그러면 안창호설 주장자들은 안창호의 ‘또 다른 애국가’의 존재를 왜 은폐해왔을까? 이 자료가 영인본(影印本)으로 공개된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안창호가 1907년경에 지었다고 주장해 왔던 것을 숨기려 한 것이다.

한편 이 작품에서 주목해 봐야 할 것은, 당시 ‘애국가’의 일반적인 내용인 기독교적 신앙심으로 나라를 위하자는 구절이 없다는 점이다. 이는 많은 연구자들이 말했듯이 안창호는 신앙고백(信仰告白)을 한 바가 없다. 그래서 현 ‘애국가’의 ‘하나님이 보우하사…’와 같은 가사를 작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안창호설’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사 때는 단순하게 등장해 별다른 논의 없이 끝났다. 그런데 ‘안창호설’이 또다시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두됐다. 이것은 윤치호 작사 사실에 대한 집요하고 지속적인 왜곡과 조작이었다. 작사자 조사가 국사편찬위 조사위원들의 조사 결과에 따른 ‘지상 논전’이었다면, 이는 순흥 안씨 계열과 흥사단과 그 진영 논리를 따르는 이들에 의해 자행된 것이다. 이 반대편에서 필자가 논쟁을 맡아왔다. 이는 두말할 여지없이 1955~56년 문교부가 ‘작사자 미상’으로 남긴 폐해(弊害)의 여파다.

윤치호의 《찬미가》

앞서 문교부가 《도산 안창호》를 근거로 작사자를 안창호로 넘겨짚은 일로 작사자 문제가 발생했음을 설명했다. 최초 국사편찬위 작사자조사위원회는 ‘애국가’ 작사자를 최초의 서양음악 교사인 김인식(金仁湜·1885~1963년), 도산 안창호, 좌옹(佐翁) 윤치호 등 3인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했다. 이후 김인식은 조사위원회에 출석해 증언해달라는 요청을 거절하면서 제외됐다. 안창호는 1차 회의에서 “안창호는 작사자가 아닌 것만은 명백히 되었다”라는 말이 나오면서 제외됐다.

결국 윤치호만 3차까지 남았고, 그러고 이듬해 국사편찬위원회 자체 조사 결과로 ‘애국가’ 작사는 윤치호라고 재확인하게 됐다. 여기에는 거의 유일하게 입증이 되는 증거 자료가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초기 사진으로 논박을 벌이다 원본이 도착하자 과학적 감식까지 받게 된 친필 〈가사지(歌詞紙)〉, 5월 2일 ‘윤치호씨 저 찬미가집 가지신 분 알려주시길 요망’이란 광고까지 내서 입수해 살핀 《찬미가》, 그리고 1910년 9월 21일자 미주 《신한민보》 소재 ‘윤티호작’으로 표기된 현 ‘애국가’ 4절 소개 기사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 친필 〈가사지〉와 동일 후렴의 2편의 작품이 수록된 《찬미가》는 절대적인 증거력을 갖는 자료다.

1908년 재판 윤치호 역술 《찬미가》는 현 ‘애국가’를 비롯한 두 편의 ‘애국가’와 12편의 번역 찬송가를 수록한 《애국 찬미가집》이다. 윤치호가 1906년 개성에서 한영서원(韓英書院)을 개교하며 첫 입학생 14명을 위해 발행한 프린트본 초판과 1907년 제2회 입학생들을 위해 인쇄본 18쪽의 소책자로 발행한 것이 이 재판본이다. 1970년 《국회도서관보》에 발표된 해제(解題)에 의하면 서지 사항과 그 가치는 다음과 같다.

“尹致昊 譯述, 隆熙 二年(1908), 活字本 一冊, 17.5cm x 12.5cm 18p, 裝幀 赤黃色 表紙 湖附裝. (중략) 초판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초판 인쇄는 재판으로 미루어 보아 1년 미만에 발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명치 45년(1912) 2월 7일 판매 금지도서가 되었다. (중략)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하여 국가기관에서도 엄연한 사실을 밝히지 않고 적당히 넘겨왔으나, 이제는 사실대로 밝혀서 그릇된 역사를 시정하여야 한다.”

국회도서관 귀중도서 《찬미가》의 존재를 분명하게 기록한 자료다. 주목할 점은 일제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는 점, 관계기관이 윤치호를 작사자라고 하지 않은 점을 질타한 부분이다. 전자(前者)는 탄압으로 국사편찬위원회 조사 당시 희귀했던 이유를 알게 하는 것이고, 후자(後者)는 문교부가 ‘작사자 미상’으로 남긴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현 ‘애국가’의 원형인 ‘무궁화노래’

▲《찬미가》 제10장에 들어 있는 ‘무궁화노래’. 애국가와 후렴이 같아 현재 ‘애국가’의 원형으로 불린다. 오른쪽은 ‘무궁화노래’가 처음 불려진 독립관. 현판이 보이는데, 최초로 공개되는 사진이다. 사진=김연갑

 

 이 《찬미가》에는 서양 찬송가 번역 12편과 윤치호 작사 작품 3편이 수록돼 있다. 이 번역 12편과 창작 3편을 묶어 ‘윤치호 역술(譯述)’로 발행한 것이다.

Patriotic Hymn No[1] TUNE AULD SANG SINE/ 제10장/ 무궁화노래

一 승자신손 천만년은 우리 황실이오/ 산고슈려 동반도난 우리 본국일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히 보전하세

二 애국하난 열심의긔 북악갓치 놉고/ 충군하난 일편단심 동해갓치 깁허

三 이천만인 오즉 한맘 나라 사랑하야/ 사롱공상 귀천업시 직분만 다하세

四 우리나라 우리 님군 황천이 도으사/ 국민동락 만만세에 태평독립하세

▲《독립신문》 1897년 8월 13일자로 ‘무궁화노래’의 첫 출현을 알리고 있다. 사진=김연갑

 

현재의 ‘애국가’와 후렴, 곡조, 곡명, 형태가 같다. 이 때문에 현 ‘애국가’의 원형(原型)으로 취급된다. ‘민요론’에서 보면 같은 노래의 각편(各遍) 관계다. 그런데 이 노래의 문헌상 첫 출현은 《독립신문》 1897년 8월 13일자에 ‘무궁화노래’로 등장한다. 조선 개국 505주년 기념식을 보도한 기사에서 기자는 가사 일부와 곡명만을 소개하고 있다.

〈무궁화노래를 불으니-우리나라 우리님군 황텬이 도으샤 님군과 백셩이 한 가지로 만만셰를 길거야 태평 독립 하여 보셰- 하니 외국 부인이 악긔로 률에 병챵 했다더라.〉

배재학당 학생들이 지었다?

이 한 소절의 가사는 앞에서 살핀 ‘Patriotic Hymn No[1]’의 제4절 ‘우리나라 우리 님군 황천이 도으사/ 국민동락 만만세에 태평독립하세’를 우리말로 풀이한 것이다. 다만 한자를 우리말로 풀어 운율에서 벗어난 것일 뿐이다. 곡명을 ‘무궁화노래’라고 하였고,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과 가사 1~3절은 생략했다. 기사를 보면 작사자와 곡조에 대해서도 밝히지 않았는데, 이에 대한 이유를 추정한다면 당일 프로그램을 소개한 전단(팸플릿)이나 이를 제시한 보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런데 2년 후 1899년 6월 29일자 《독립신문》 배재학당 방학식 기사에는 전체 4절이 등장한다. 이에 대해 《친일음악론》의 저자 노동은(魯棟銀) 전 중앙대 교수는 자신의 논문 〈‘애국가’ 언제, 누가 만들었나〉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배재학당 학도들은 이를 반증이나 하듯이 ‘무궁화노래’를 지어 그때까지의 ‘애국가 부르기’ 운동을 종합하여 점차 일반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1899년에 지어 부른 ‘무궁화노래’가 그것이다.

一 성장신손 오백년은 우리황실이오/ 산고수려 동반도난 우리 본국일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四 우리나라 우리님군 황천이 도으사/ 국민동락 만만세에 태평독립하세(2, 3절 생략)〉

이 기사를 통해 ‘무궁화노래’ 가사의 전모가 처음으로 드러난 것인데, 노 교수는 배재학도들이 노래를 지어 《독립신문》이 주도해온 ‘애국가 부르기 운동’을 종합해 일반화시켰다고 했다. 그리고 밑줄 친 두 곳에서 동사 ‘지어’라는 표현을 썼다. 이 ‘무궁화노래’ 4절 가사의 작사자는 ‘배재학당 학도들’이라고 한 것이다. 문제적인 이 주장에 대해서는 뒤에서 검토하기로 한다.

제10장 ‘무궁화노래’와 제14장 ‘애국가’와의 관계

▲《찬미가》 제14장의 ‘애국가’. 현재 우리가 부르는 윤치호작 ‘애국가’다. 사진=김연갑

 

한편, 이 《찬미가》 10장에는 기존 찬송가집의 편찬 방식에 따른 곡명과 곡조 표기 다음에 유일하게 ‘No[1]’이란 번호를 부여했다. 이는 지금부터 살피게 될 제14장, 즉 현 ‘애국가’에 앞선 작품임을 밝히는 것으로, 전·후편 또는 제1편이란 의미다. 제14장과 같은 곡명, 곡조, 성격(애국적 찬미가)의 작품이지만, 이것이 첫 번째 작품이라고 표시를 한 것이다.

1897년 작사했기에 1907년 작사한 제14장(현재의 ‘애국가’) 간의 선후(先後)를 밝힘과 동시에 같은 작사자의 작사임을 밝힌 것이다. 이 《찬미가》를 지은 윤치호는 실용성을 중시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서문이나 주(註)를 달지도 않았으니, 이런 표기로 보완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노동은 교수는 1897년 조선 개국 505주년 기념식에서 불린 일부 가사와는 서로 간에 영향을 주고받은 관계에서 1899년 완전한 4절 가사로 나오게 되었다고 보았다. 서로 다른 노래라고 한 것은 물론, 전자는 작사자가 없고, 후자는 배재학당 학도들이 작사자라고도 하였다. 노 교수는 두 작품을 윤치호가 재판 《찬미가》에 작사한 것이 아니라 ‘감수’하여 옮겨놓았을 뿐이라고 하며, 현 ‘애국가’의 후렴도 이 노래에서 차용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이후 윤치호를 작사자로 보지 않게 하는 가장 큰 논리로 작용했다.

Patriotic Hymn TUNE AULD SANG SINE/ 제14장

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히 보전하세

二 남산우헤 저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긔상일세

三 가을하날 공활한대 구름업시 놉고 밝은 달은 우리가슴일편딘심 일세

四 이긔상과 이 마음으로 님군을 섬기며 괴로오나 질거우나 나라사랑 하세

민족운동 현장 경험 통해 민중이 ‘애국가’ 선택

현 ‘애국가’의 문헌상 첫 출현이다. 앞에서 살핀 제10장 ‘무궁화노래’와 함께 기독교계에 널리 확산되면서 1910년을 전후해 대표성을 갖게 됐다. 그리고 1919년 3·1 운동 현장의 거의 유일한 ‘애국가’로 불리게 됐다. 이는 작사자의 의도도, 누군가의 권유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민중의 선택으로 된 것이었다. ‘만세삼창’과 ‘태극기’와 함께 ‘애국가’는 3·1 운동 구성원의 ‘무기’로서 그 위상을 확보한 것이다.

이렇게 민중이 민족운동 현장 경험으로 스스로 ‘애국가’를 선택한 사례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일제의 눈을 피해 지하에서 부르는 노래가 되었으나, 해외 독립운동 진영과 교민단체에서는 각종 의례에서 ‘국가’ 기능으로 불러 그 위상을 공고히 했다. 특히 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 개원식과 광복군 성립식과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식에서 연주됨으로써 관습법적인 국가(國歌)로 오늘에 이른 것이다.

윤치호 친필 〈가사지〉

▲윤치호가 작고 직전인 1945년 9월에 딸 문희씨에게 남긴 친필 〈가사지〉. 미국에서 윤치호의 장남 윤영선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사진을 보내왔다. 최남선 등이 이 자료로 육인 감식을 했다. 〈가사지〉 뒷면에 문희씨가 ‘아버지께서 친히 써주신 것’이라고 적었다. 사진=김연갑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작사자 조사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연합신문》 7월 30일자는 “윤씨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단정하는데, 그 물적 증거는 윤치호 친필(親筆) ‘애국가’ 사본(寫本)과 샌프란시스코 거주 양주은(梁柱殷)씨로부터 온 앨범 복사판 및 윤치호 작 찬미가(讚美歌)를 목도(目睹)하였다는 인사(人士)들의 증언 등에 의한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여기서 ‘친필 애국가 사본’, 즉 ‘친필 가사’의 증거력이 입증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당시 미국에서 보내온 사진판은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 다음과 같은 해제로 보존돼 있다.

“愛國歌 / 분류 書畵 〉 筆蹟 / 등록번호 史資 2220 / 본문 愛國歌 / 대한제국 때의 정치가 佐翁 尹致昊(1865~1945)가 ‘애국가’ 가사를 자필로 쓴 원고. 자료 끝 부분에 一九0七年 尹致昊 作이라고 쓰여 있음. / 소장 서울특별시 尹永善.”

조사 당시 〈가사지〉에 대해 최남선(崔南善·1890~1957년) 위원이 “자필이 맞다면 작사자를 좌옹으로 봄이 타당하다”는 발언을 하면서 국립과학수사소 치안국 감식과의 감정을 거쳐 친필임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1945년 9월 윤치호의 셋째 딸 문희(文姬)가 일부 구(句) 제4절 ‘임군을 섬기며’를 세간에 바꿔 부르는 것이라고 윤치호에게 알려 ‘충성을 다하여’로 고쳐 쓰고, 원본 《찬미가》대로 현대 철자법으로 써서 가족에게 남긴 것이다. 뒷면에는 ‘1945년 9월 아버지께서 친히 써주신 것’이라고 되어 있어, 해방으로부터 한 달, 서거하기 석 달 전에 남긴 것이다. 1907년 작사 시점과 한글맞춤법을 이른 시기에 실천한 사실과 충군애국적 신앙관을 입증하는 자료로 국사편찬위원회가 이를 인정한 것이다.

1980년대에 다시 문제 등장

▲서지학자 안춘근이 1903년 필사했다고 주장하는 ‘애국충성가’ 내용이 보도된 《조선일보》 기사. 사진=김연갑

 

그런데 《찬미가》와 함께 이 자료의 증거력을 와해시키려는 책동들이 나타났다. 1980년대 들어 ‘애국가’ 작사 문제가 다시 발생한 것이다. 그것은 1981년 한 달 사이에 ‘애국가’ 가사를 필사한 자료 3종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서지학자 안춘근(安春根·1926~1993년)이 2차에 걸쳐 공개한 자료들인데, 1981년 4월 2일자 《조선일보》에 공개한 1903년 필사 ‘애국충성가(愛國忠誠歌)’와 《중앙일보》 4월 11일자에 공개한 유명인사가 썼다는 ‘한문 애국가’ 외 1편이다. ‘애국충성가’는 곡명부터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는데, 현재 ‘애국가’와 내용이 거의 유사했고, 필사 시점이 1903년이란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현 ‘애국가’를 윤치호가 작사했다고 볼 수 없었다.

그리고 10일 후 2종이 더 공개됐다. 천도교 주요 인물로 3·1 운동 33인 중 한 분인 김완규(金完圭) 선생이 1905년에 옛 철자법대로 필사했다고 했다. 또 하나는 김수항(金壽恒)이란 사람의 필사 ‘한문 애국가’로, 비단천에 ‘甲辰(1904년)’이란 간지(干支)를 밝힌 자료라고 했다. 필사자가 각각 다르다는 점에서 “현 ‘애국가’를 특정인이 작사했다고 단정하기 어렵게 한다”는 평을 했다. 이대로라면 놀랍지 않을 수가 없다. 당연히 윤치호의 1907년 작사 사실은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1907년 윤치호 작사 사실’을 부인하기 위해 수집하였다가 공개한 듯한 인상을 갖게 했다.

‘공동작사설’ 등장

1994년 뜻밖에도 이들 자료 공개로 인해 영향을 받은 논문이 발표됐다. 근대음악사와 친일음악론을 전공하는 노동은 전 중앙대 교수(2016년 작고)가 1994년 《역사비평》 25호에 〈‘애국가’ 언제, 누가 만들었나〉라는 글을 발표한 것이다. 안춘근의 공개 자료에 나타난 1905년이란 시점을 ‘애국가’의 작사 시기와 《찬미가》 초판 발행 시점으로 잡고, ‘공동작사설’이란 논리를 전개했다. 이것은 윤치호 작사에 대한 핵심 증거인 《찬미가》와 친필 〈가사지〉의 관계를 해체시키려는 논리로 작용했다. 이를 바탕으로 창출된 것이 ‘역술’의 편협한 해석이다. 역술을 단지 ‘감수하여 옮긴 것’이라고 풀이한 것인데, 1908년 윤치호 역술 《찬미가》 수록 3편의 작품은 ‘감수하여 옮긴 것’이라고 했다.

〈‘우리황상폐하’ ‘승자신손 천만년은’ ‘동해물과 백두산’, 이 세 작품의 가사는 윤치호가 ‘감수하여 옮겼다’라는 뜻을 가진 역술일 것이다. 이것은 이미 앞서 살펴보았듯이 배재학당 학도들이 1899년 지은 ‘무궁화노래’가 다름 아닌 윤치호 역술의 ‘승자신손 천만년은’이었기 때문이다.〉(노동은, 〈애국가 언제, 누가 만들었나〉, 31쪽)

‘역술’에 대해 노 교수의 해석을 수용하기는 어렵다. 1998년 필자는 졸저 《애국가 작사자 연구》에서 “일부는 번역이고, 일부는 지은 것으로 역과 술의 합성어”라고 했다. 객관적으로 보아 번역 12편 찬송가와 번역이 아닌 3편의 창작을 엮어서 한 권의 책으로 냈다면, 이를 달리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에서다. 당시 급속히 밀려오는 선진 학문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근대출판 용어로서, 오히려 윤치호는 합리적 표현을 썼다고 봐야 한다. 1895년 일본 《제국문학》 8월호 〈번역의 진상〉이란 글은 ‘역술’을 이렇게 설명했다.

〈번역이 곤란하여 때로 오류가 불가피한 경우가 있으니 이것이 역술로 되는 것이고, 이것 역시 가능하더라. 무릇 역술이라 함은 7할의 번역과 3할의 창작을 가미한 것이라더라.〉

이러한 해석에 비춰볼 때 노동은의 주장은 매우 자의적인 해석이다. 노 교수는 이를 확대해 윤치호의 두 자료에 대한 증거력을 와해시키거나, 안창호를 중심에 둔 ‘공동작사설’을 입론화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펜젤러전집》에서 윤치호 자료 발굴

▲배재대 발행 《아펜젤러전집》에는 윤치호를 ‘무궁화노래’의 작사자라고 밝힌 《독립신문》 영어 기사가 실려 있다. 사진=김연갑

 

2010년대 들어 다시 ‘애국가’에 대한 관심이 일게 된다. 흥사단이 2014년 창단 100주년을 기념해 ‘애국가 작사자 규명위원회’를 조직하고 학술대회 등을 준비하면서부터다. 이 과정에서 필자도 흥사단 측과 2차에 걸친 공개 토론회를 벌이기도 했다. 필자는 두 자료의 증거력을 강화하는 주장을 발표했다. 흥사단 측은 윤치호가 친일파이기 때문에 작사자가 될 수 없다는 ‘진영(陣營) 논리’를 기본으로, 안춘근과 노동은 주장으로 비롯된 《찬미가》와 친필 〈가사지〉의 증거력을 무시하는 투로 나왔다. 그러다 보니 격렬한 논쟁으로 변질했다.

이렇게 격론을 벌이던 중, 필자는 배재대학교에서 발행한 《아펜젤러전집》을 보게 됐고, 여기에서 획기적인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 그것은 1897년 8월 17일 조선 개국 505주년 기념식 영어판 기사로, 그동안 곡명과 일부 가사만 소개된 8월 19일자 한글판보다 자세하게 다룬 〈The Day We Celebrate Editorial Notes〉다. 독립문 근처 독립관(獨立館)에서 행한 기념식의 식순은 물론, 윤치호의 강연 내용이나 부른 노래를 상세하게 보도했다. 그리고 매우 놀라운 내용도 있었다.

〈배재 청년들이 ‘무궁화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는 한국의 계관시인 윤치호가 이날 행사를 위해 작사한 것이다. 학생들은 이 시를 스크랜턴 여사가 오르간으로 반주하는 ‘올드 랭 사인’ 곡조에 맞춰 불렀다.(The Paichai boys sang a song ‘National Flower’ which was composed by the poet lauriate of Korea, Mr. T. H. Yun, for the occasion. They sang it to the tune of ‘Auld Lang Syne’ accompanied by Mrs. M.F. Scranton on the organ.)〉

계관시인(桂冠詩人) 윤치호가 ‘무궁화노래’를 지어 배재학당 학생들이 불렀다는 내용이니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글판 기사에는 작사자를 밝히지 않았는데, 윤치호가, 그것도 국가의 행사 의례문을 지어내는 계관시인이란 명예를 부여한 기록이었다.

《독립신문》에는 ‘지어’라는 말 없어

이로써 노 교수가 배재학도들이 지어 불렀다고 한 1899년 방학 예식 기사를 다시 꼼꼼히 살펴봐야 했다. 노 교수는 논문에서 이 기사에 대해 각주를 달았는데, 의외로 내용이 없는 ‘《독립신문》 1899년 6월 29일자’만 달았다. 그래서 다시 해당 기사를 찾아보았다.

〈배재학당 학원의 방학예식 行하다. 前報에 기재얏거니와 昨日下年 二時에 정동회당에 배재학당 교장 교원 학원이 제회, 無窮花歌로 송축고, 下 五時에 歸엿더라.〉

그런데 “無窮花歌”를 언급한 부분에서 노 교수의 글과는 다른 점이 확인됐다. 여기에는 분명히 ‘지어’라는 동사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노 교수의 글에는 학도들이 ‘지은’ 또는 ‘지어’라는 언급이 세 곳이나 있었다. 그렇다면 노 교수는 의도적으로 ‘지어’를 넣었다는 것이다.

 

2014년은 흥사단이 창단 100주년을 맞아 윤치호 작사 사실을 무력화(無力化)시키고, 정부에 안창호 작사를 공표해달라는 청원을 했음에도 낭패를 본 해이다. 순흥 안씨 후손 안춘근에 이어 안창호설 띄우기에 가담한 안민석(安敏錫)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동원해 ‘안창호설’을 부각시키려 했다.

그런데 오히려 되치기를 당했다. 이 프로그램은 윤치호 친필 〈가사지〉의 필적 감정을 다시 해 ‘진품’이라는 감정 결과를 받아 방영했다. 무엇보다 관심을 모았던 안춘근 공개 자료를 화면을 통해 공개하는 바람에 ‘육안 감정’을 한 이들로부터 격(格)이 떨어지는 자료라는 평가를 받았다.

방송을 통해 소장처를 알게 된 필자는 완주책박물관 박대헌(朴大憲) 관장에게 진위 감정을 의뢰했다.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안춘근의 공개자료 3종 모두 ‘끼워 넣기’ 등의 수법에 의한 위작(僞作)임이 밝혀진 것이다.

최남선이 지은 〈독립선언서〉도 인정

이렇게 격렬한 ‘애국가’ 논쟁 시대였던 2014~2019년을 전후해 윤치호가 작사자임이 확인됐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최남선이 지은 〈독립선언서〉를 인정하듯이 ‘애국가’도 이같이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인지. 또한 1897년 ‘무궁화노래’ 작사로부터 1907년 현 ‘애국가’ 작사까지 윤치호의 ‘충군애국’ 활동을 이후의 친일 행위로 소급해서 그 작품까지도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인지 말이다. 특히 당시 윤치호의 사상 검증을 하여 ‘애국가’ 작품을 의뢰한 것이 아닌데다, 개인적 애국심으로 지은 작품을 우리가 필요해 3·1 운동 현장에서 선택함으로써 오늘에 이른 각별한 현상을 무시해야 할 것인지도 고민해야 할 문제다.

당시 국사편찬위원회의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위원은 “현재 작사자 판정을 주저하는 큰 이유는 불건전하고 감정적인 선입견이 내재해 있기 때문에 계속 조사의 필요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라며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 첫 회합에서 작사자가 판명되기도 전 편찬위원 간에 ‘윤치호가 작사자라면 애국가는 개작돼야 한다’는 무모한 망언을 하기도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것은 조사위원의 상황 한계를 벗어난 지나친 불평”이라면서 “윤치호씨는 친일한 사람이므로 작사자가 돼서는 안 된다는 뜻이 고의적으로 작사자 판명에 무형의 압력을 가한 오류를 범한 일”이라고 했다.

“윤치호는 ‘애국가’ 작사로 할 일 다해”

▲춘원 이광수. 이광수는 윤치호와 막역했던 안창호를 통해 윤치호의 인간됨을 파악하고 있었다. 사진=조선일보

 

《도산 안창호》의 발간인인 서영훈(徐英勳)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전 부회장(2017년 작고)은 “도산 선생이 직접 ‘애국가’를 지었다는 기록이 없다면, 오히려 선생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춘원 이광수는 일찍이 윤치호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좀 더 큰일을 할 수 있는 명망과 재능과 재산과 지위를 가지고도 일신의 안락(安樂)에만 탐(耽)하여 세사를 잊어버린 사람이라 씨를 비난하였다. 나도 그러한 사람 중에 하나였었다. 그러다가 기미년 간에 내가 상해에 유랑할 때 씨의 예전 동지이던 안씨(안창호)를 만나 ‘윤씨는 전전긍긍(戰戰兢兢)한 수성(守成)의 인물일지언정 그가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을 위하여 일하려 하는 지(志)와 성(誠)을 나는 굳게 믿노라’라고 누누이 역설(力說)함을 듣고 나와 및 나와 같이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다시 씨에 대하여 존경과 정중(鄭重)을 갖게 되었다.”

작가 이광수가 윤치호를 인식하게 된 배경이 ‘안창호의 윤치호 평가’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재일한국신문》 주필을 지낸 김을한(金乙漢·1905~1992년)은 1955년 ‘애국가’ 작사자 조사 미상 결정을 비난이나 하듯 《연합신문》 1959년 11월 27일자 〈애국가만으로도 할 일을 하였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를 남기고, 윤치호는 ‘애국가’를 남긴 것만으로도 할 일을 다 했다.”⊙

월간조선 11월 호 글 : 김연갑 애국가 연구가·(사)아리랑연합회 이사장

 

11.15 벼슬 멀리한 장인, 연암이 과거 포기하자 오히려 기뻐해

연암 박지원의 청빈했던 친·인척

“명분과 절개를 닦지 않고, 가문과 지체를 밑천 삼아 조상의 덕을 판다면 장사치와 뭐가 다를까. 이에 양반전을 짓는다.” 불면증에 시달리던 스무살 무렵의 연암 박지원은 ‘양반전’ ‘학문을 팔아먹는 큰 도둑놈전’ 등 작품 9편을 짓는다. 병을 이기기 위해 시도한 글쓰기가 시대의 아픔을 해학으로 풀어낸 명작으로 탄생한 것이다. 44세(1780년)의 연암은 연행 사절단에 끼여 청국을 방문하는데, 그 5개월의 여행 기록 『열하일기』는 우리 시대의 고전이 되었다.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있다면 우리나라에 박지원이 있다고 할 만큼 그를 우리나라 최고의 대문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연암 손자 박규수 개화파 정치가

문학가이자 사상가로 큰 이름을 얻은 박지원(1737~1805)이지만 일흔에 이르는 긴 삶의 여정과 그 면모에 대해서는 별 이야기가 없는 것 같다. 그의 아들 박종채(1780~1835)가 아버지의 위대함을 일상에서 건져냈다면, 그의 손자 박규수(1807~1877)는 우의정을 지낸 개화파 정치가로 조부의 사상을 계승하여 현실 정치에 접목시켰다. 이해(利害)를 따지기보다 의리(義理)를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자기 수양에 철저했던 연암의 삶이 자손을 움직인 것이다. 박종채는 아버지 연암에 대한 기억과 그 가르침을 『과정록(過庭錄)』에 담았다. 과정이란 『논어』에 나오는데, 공자가 뜰을 지나는 아들을 불러 가르침을 준 것에서 가정 교육을 뜻하는 용어가 되었다. 연암에 대한 폭넓은 정보가 담긴 이 책을 통해 인간 박지원의 풍미를 맛볼 수가 있다.

대사헌 조부 별세 때 재산 열냥 안돼

연암 금강산 유람, 종 없어 못 갈 뻔

“뽕나무 1000그루 심겠다” 약속에

투병 형수 벌떡 일어나 “내 오랜 뜻”

“어머니는 가난을 견디는 군자”

아들, 가정교육서 『과정록』서 추모

▲손자 박주수가 그린 연암 박지원의 초상. 본가는 물론 처가까지 청빈을 실천하는 집안이었다. 만년에 “인순고식 구차미봉”이라는 문구를 가까이하며 편안함을 좇는 임시변통의 삶을 경계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평화문제연구소]

 

박지원은 영조 13년 서울 야동(冶洞, 서소문 밖에 위치)에서 박사유와 함평 이씨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박필균이 경기 관찰사를 비롯해 참판과 대사헌 등 고위직에 있었지만, “청빈(淸貧)이 뼛속까지 스며 별세하던 날에 집안에는 단 열 냥의 재산도 없었다”고 한다. 효도 외에는 내세울 게 없었던 아버지 박사유는 아들이 벗들과 함께 금강산 유람을 떠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아버지는 “명산에는 인연이 있는 법이거늘 젊을 적에 한 번 다녀오는 게 좋겠다”고 하지만 노자가 없었다. 그때 마침 곁에 있던 지인이 듣고 돌아가 나귀 살 돈 100냥을 보내면서 이 돈이면 유람을 떠날 수 있겠냐고 물어왔다. 돈은 되지만 데리고 갈 하인이 없었다. 이에 어린 여종이 골목에 나가 “우리 집 작은 서방님 이불 짐과 책상자를 지고 금강산에 따라갈 사람 없나요?”라고 소리쳤다. 응하는 사람이 몇이 나와 새벽에 출발하여 다락원(의정부 근처)에서 먼저 떠난 두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유람의 기록으로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구경하다(叢石亭觀日出)’라는 제목의 7언 70행의 장편 고시(古詩)가 남았다.

“아버지 생각 날 때 형님 수염 쳐다봐”

어머니와 아버지를 차례로 여읜 서른의 박지원은 형과 형수를 부모처럼 섬겼다. 박지원이 세 살 무렵 16살의 나이로 시집온 형수 이씨(1724~1778)는 어린 시동생을 길러 주었다. 박지원은 개성을 유람하다가 연암골을 발견하고 몇 차례 오간 후 아예 온 가족을 이끌고 이거를 단행한다. 연암골은 개성에서 30리 길의 두메산골로 자호(自號) 연암은 여기서 유래하는데, 그의 나이 42세 때의 일이다. 이사한 그해 형수 이씨가 세상을 떠났다. “힘을 다해 열 식구를 먹여 살렸으며 제사 받들고 손님 접대하는 데서도 명문대가의 체면이 손상될까 준비하고 변통하기를 거의 20년, 애가 타고 뼛골이 빠졌다.” 평소에 박지원은 형수에게 이런 약속을 해왔다.

 

 “담장에는 빙 둘러 뽕나무 1000그루를 심고, 집 뒤에는 밤나무 1000그루를 심고, 문 앞에는 배나무 1000그루를 접붙이고, 시내의 위와 아래로는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 1000그루를 심고, 세 이랑 되는 연못에는 한 말의 치어(稚魚)를 뿌리고, 바위 비탈에는 벌통 100개를 놓고, 울타리 사이에는 세 마리의 소를 매어 놓고서, 아내는 길쌈하고 형수님은 여종더러 들기름 짜게 해서, 밤에 이 시동생이 옛사람의 글을 읽도록 도와주십시오.”

▲북한 개성시 외곽에 위치한 연암 박지원의 묘.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평화문제연구소]

 

당시 병이 심해 누워있던 형수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웃으며 “이는 바로 나의 오랜 뜻이었소!” 하였다.(‘형수 이씨 묘지명’) 이로부터 9년 후 형 박희원이 죽자 연암골에 잠든 형수 곁에 모신다. 형은 아들 셋을 낳았지만 다 잃었고 박지원의 장남을 양자로 들인 것이다. 형을 생각하며 쓴 시는 이덕무를 비롯한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다. “우리 형님 얼굴 수염 누구를 닮았던고,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날 때마다 우리 형님 쳐다봤지. 이제 형님 그리우면 어드메서 본단 말고, 두건 쓰고 도포 입고 가서 냇물에 비친 나를 보아야겠네.”(‘연암에서 형을 생각하며(燕岩憶先兄)’)

 

연암 박지원의 성취에서 처가 가족들의 역할을 들지 않을 수 없다. 16살에 처사 이보천의 집안에 장가들면서 장인에게 『맹자』를 배우고 처숙(妻叔) 이양천에게 사마천의 글을 배우며 문장 짓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장인은 사위 박지원을 애지중지 가르치며 옛사람이 이룬 바와 같은 성취를 기대했다. 다만 “악을 지나치게 미워하고 뛰어난 기상이 너무 드러나는 게 걱정”이라고 했다. 이는 “박지원은 의론이 준엄하고 과격해 권세가의 비위를 거스르는 내용이 많다”는 벗들의 충고와도 통한다. 그래서인지 장인은 그 아들 이재성에게 “지원이 회시(會試)를 보았다고 하여 그다지 기쁘지 않았는데 시험지를 내지 않았다고 하니 몹시 기쁘구나”라고 하였다. 즉 사마시 초시에서 장원급제한 박지원은 주위 사람들이 부추기는 바람에 회시 시험장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과거에 뜻이 없었던 그는 시험지에 그림만 그리다 나온 것을 두고 한 말이다.

 

팔도는 곡식으로 살아가지만 서울에서는 돈으로 살아간다는 말이 있는 만큼 재지(在地) 기반이 없던 서울의 양반은 벼슬 의존도가 높았다. 그럼에도 지위나 직책 보기를 돌같이 한 장인 이보천이야말로 연암이라는 보석을 제대로 알아본 것이다. 박지원은 장인의 은혜를 평생을 두고 갚고자 한다. “공의 모습 빼닮은 아들 한 분 두셨으니, 즐겁거나 슬프거나 함께 손잡고 서로 책선(責善)하고 화기애애하여, 알아주신 은혜 보답 잊지 않으리.”(‘처사이공제문(處士李公祭文)’) 공(公)의 아들이란 처남 이재성을 말한다. 이재성에 의하면, 책 읽는 속도가 매우 더디면서 암기력도 약한 연암은 느리지만 철저하게 텍스트를 익혀 완벽하게 장악하는 쪽이었다. 연암은 한 편의 글이 완성될 때마다 반드시 처남에게 보이며 “나를 위해 비평을 좀 해주게!”라고 하였고, 이재성 또한 글이 완성되면 연암에게 보여 평가를 받고자 했다. “두 분은 반평생을 한 집에 거처하며 친구처럼 형제처럼 다정하게 지냈는데, 아버지의 글을 제대로 논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제대로 안 사람은 외삼촌 한 분뿐이었다.”(『과정록』)

아내 사별 후 18년간 홀로 살다 떠나

▲연암 박지원의 청나라 여행 기록인 『열하일기』. 여행 문학의 백미, 현대의 고전으로 꼽힌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평화문제연구소]

 

연암은 51세(1787년) 때 부인 전주 이씨의 죽음을 맞는다. 박지원의 집안은 사대부 가의 명성과 달리 경제적으로 배우 빈곤하여 3대가 한집에 살았다. 혼인을 하고도 부인 이씨는 거처할 곳이 없어 친정에서 지내는 날이 많았다. “어머니는 가난을 견디며 독서하는 군자 같았다.”(『과정록』) 한번은 연암이 아내의 의복이 너무 낡은 것이 마음에 걸려 쓰고 남은 돈 스무 냥을 보자기에 싸서 주었는데, 아내는 도리어 “집안 살림을 책임진 형님은 늘 가난하고 쪼들리십니다. 이 돈을 왜 저한테 주십니까”라고 했다. 아내의 말에 몹시 부끄러웠다며 마음에 담아두었다. 형수와 아내는 우애가 깊었다. 형수의 아버지 이동필은 딸 집에 곡식을 보내며 그 동서까지 챙기곤 했다. 연암의 진가를 알아차린 정조 임금은 벼슬을 주며 불러내는데, 음직으로 벼슬길에 든 지 반년도 채 못되어 아내는 세상을 떴다. 아내를 애도하는 연암의 시 20편은 안타깝게도 소실되었다고 한다. 안의 현감, 면천 군수등 외직 생활에 끼니를 챙겨 줄 사람이 없어 사람들은 소실을 얻으라고 했지만 연암은 농담으로 대꾸할 뿐 종신토록 재혼은 물론 첩을 두지 않았다. 18년을 홀로 살다 떠난 연암, 이익을 멀리하고 의리를 추구한 마지막 실천이 아닐까.

 

연암은 타고난 성품이 호방하고 고매했으며 명예와 이익이 몸을 더럽힐까 봐 극도로 경계하고 삼갔다. 만년의 병상에는 “인순고식(因循姑息) 구차미봉(苟且彌封)”이라는 문구의 병풍을 쳐놓고 자기 수양의 끈을 놓지 않았다. 즉 눈앞의 편안함을 좇아서 임시변통으로 땜질하는 태도를 경계한 것이다. 재물과 권력에의 탐욕이 온 국민을 조롱하는 이 세태에서 연암 같은 인물은 없는지 밝은 대낮에 등불을 켜고 찾아 나서고 싶은 심정이다.

중앙일보 이숙인 동양철학자·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1-21 1010년 11월 24일 정보 오판한 고려 강조, 거란군에 무너지다

▲KBS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전투 장면. KBS 제공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가 고려의 킹메이커가 된 사연은 이러하다. 천추태후가 병약한 아들 목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는 정부(情夫)인 김치양과 고려를 말아먹는 중이었다. 목종은 궁여지책으로 절에 피신해 있던 왕순을 불러 왕위를 물려주기로 하고 강조를 불러 자신의 호위로 삼고자 했다. 그런데 개경으로 가던 강조는 목종이 이미 승하한 뒤라는 잘못된 첩보를 받았고, 이에 군대를 동원해 천추태후를 몰아내고자 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정보로 목종은 여전히 건재했다. 강조는 왕명도 없이 군대를 끌고 온 셈이 되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반역자가 될 생각도 없었다. 그는 목종을 폐위시키고 왕순을 모셔 와 제8대 왕 현종으로 즉위시켰다. 목종은 그날로 유배되었다. 강조는 후환을 남겨둘 수 없었다. 부하를 시켜 목종을 시해하고 말았다.

다음 해 봄, 북방에서 작은 사건이 있었다. 등주(함경남도 안변)에 여진족이 침입하여 30여 부락을 불태웠다. 이에 고려 장수가 여진 사람 95명이 내조하였을 때 그들을 모두 죽여버리는 참사를 일으켰다. 분개한 여진은 거란에 복수를 청했다. 거란은 마침 잘됐다면서 군사를 일으켰다. 침략의 핑계는 강조가 목종을 시해한 대역죄를 벌하겠다는 것이었다. 당 태종이 연개소문의 영류왕 시해를 침략의 핑계로 댄 것과 마찬가지였다.

강조는 도통사가 되어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북방을 방비하였다. 거란의 성종은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넜다. 강조는 군사를 셋으로 나누고 중앙에 칼날을 꽂은 수레인 검차를 배치하여 거란의 기병을 상대했다. 검차가 펼친 진에 거란 기병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몇 번이나 공격을 받았지만 고려군은 훌륭히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강조는 이에 기고만장한 생각이 들어 ‘탄기’를 놀았다. 탄기는 당송 시대에 유행한 놀이로 바둑과는 다른 놀이다. 이것은 중앙부가 불룩한 네모난 판 위에서 네모난 말을 가지고 하는 놀이다. 전해지기로는 한나라 성제(재위 기원전 32∼기원전 7년)가 축국을 너무 좋아하자 신하가 축국 대신 방에서 놀거리로 만든 것이라 한다.

강조가 노는 사이에 거란군은 검차를 돌파할 방법을 찾아내 돌파에 성공했다. 거란군이 검차를 우회하여 진을 파훼했다는 것을 알고 당황한 강조에게 귀신이 된 목종이 나타났다고 한다. 살해당한 목종이 “네 놈은 끝났다. 천벌이 너를 멀리하겠는가!”라고 하자 강조는 투구를 벗고 엎드려 죽을죄를 지었다 빌었다고 전해진다. 전군의 총수가 이러고 있으니 고려군이 전황을 뒤집을 리 만무했다. 강조도 포로로 잡혔다. 거란 성종은 강조에게 자신의 신하가 되라고 말했는데, 강조는 “고려의 신하가 어찌 네 신하가 되겠는가?”라고 대꾸하며 고려에 대한 충심을 끝까지 지켰다. 포로가 된 다른 장수가 얼른 신하가 되겠다고 하자 강조는 그를 발로 차며 꾸짖기도 했다.

정보를 잘못 읽고 군주를 시해했으며, 군사 정보 파악에 실패해서 나라의 큰 위기를 불러일으켰지만 그래도 끝까지 나라에 대한 충성은 잊지 않았던 문제적 인물이 강조다. 그의 오판은 모두 정보를 잘못 파악한 데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미-중-러의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정보 분석은 정말 중요하다. 자칫하면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문영 역사작가

 

12-12 935년 12월 12일 통일신라 마지막 왕, 백성 살리려 내린 결단

▲통일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초상. 동아일보DB

 

신라의 멸망은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첫 위기는 자연 현상으로부터 왔다. 헌덕왕 때 여름에 눈이 올 정도로 기온이 떨어졌었고 이로부터 천연두라는 역병이 유행하며 사회를 피폐화시켰다. 이와 같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신라는 백성은 안중에도 없이 권력 다툼에만 골몰했다. 역병으로 지방이 피폐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가혹한 세금을 거두려고만 했다.

진성여왕(재위 887∼897년) 때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조정은 이들을 탄압하기에 급급했고 그 결과는 김씨 왕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효공왕에게는 김효종과 박경휘라는 사위가 있었는데 김효종이 밀려나고 박경휘가 왕위에 올랐다.

박씨 왕조는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으로 이어지는데 경명왕은 궁예를 내쫓고 고려를 세운 왕건에게만 매달리는 외교적 실책을 저지른다. 박씨 왕조의 잘못된 선택으로 각 지방의 세력가들은 신라에 대한 충성을 거둬들이고 각자도생의 길을 걸어갔다. 경명왕 때 후백제는 대야성을 점령하여 언제든지 서라벌을 노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런데도 신라는 가까운 곳의 후백제는 무시하고 먼 곳의 고려와 동맹을 체결했다. 후백제의 견훤이 서라벌로 쳐들어오자 경애왕은 부랴부랴 고려에 원군을 요청했다. 하지만 원군이 도착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견훤은 경애왕을 살해하고 서라벌을 쑥밭으로 만든 뒤에 김효종의 아들 김부를 왕에 앉혔다. 그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다.

 

이때 신라는 영토를 대부분 상실해서 이미 국가라 하기 민망할 정도였다. 주변에서 식량을 보급받지 못하면 서라벌의 백성들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경순왕은 백성들의 삶을 위해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심했다. 태자는 멸망하더라도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순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고립되어 위태로우니 세력을 보전할 수가 없다. 강해질 방법도 없고 더 약해질 것도 없으니, 죄 없는 백성들의 간과 뇌가 땅에 널리게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다.”

싸울 군사와 병기는커녕 먹을 식량도 없는데 백성들을 전쟁으로 끌고 가면 벌어질 비극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지켜야 할 무엇이 경순왕에게 있었을까? 이미 신라는 혜공왕(재위 765∼780년) 시절부터 권력 다툼으로 100여 년을 보냈고 진성여왕 때 백성들을 보살피지 못해 각처의 반란으로 무너졌다. 신라는 국가의 존재 이유인 백성을 보호하는 일을 하지 못했다. 음력 935년 12월 12일 고려는 신라의 항복을 받아들인다.

당시의 상황은 일제가 조선을 잡아먹은 것과 같이 식민지가 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오로지 왕이 자신의 지위를 내려놓음으로써 백성들의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신라는 경제를 잘 운영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살아갈 수 있도록 하지 못했고 그것이 그들이 망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였다. 경순왕은 남에 의해서 갑자기 오른 왕위를 아낌없이 포기함으로써 자신도 지키고 백성들도 살릴 수 있었다.

경제가 어려운 시기다. 소비심리는 냉각되었고 내수시장과 해외시장이 모두 어렵다. 이런 엄중한 시기에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군인들을 동원한 비상계엄 때문에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이다. 백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왕좌를 버린 경순왕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동아일보 이문영 역사작가
 

한국의 영부인 역사

韓國史 속의 雜事 20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