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한성우 교수의 맛의 말, 말의 맛] 2024/ 01-05 더운밥 - 12-27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교훈

상림은내고향 2024. 12. 7. 12:26

[한성우 교수의 맛의 말, 말의 맛]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문화일보 2024

01-05 더운밥


밥은 따뜻하게 먹어야 하는데 같은 온도의 밥이라도 ‘더운밥’과 ‘데운 밥’의 띄어쓰기가 다르다. ‘더운밥’도 띄어 써야 할 것 같지만 갓 지은 따뜻한 밥을 가리키는 말로 자주 쓰이다 보니 한 단어처럼 굳어진 것이다. 같은 이유로 지은 지 오래되어 식은 밥을 뜻하는 ‘찬밥’도 붙여 쓴다. ‘찬밥’은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푸대접을 받는 것을 비유적으로 가리키기도 하니 밥의 온도는 무척이나 중요함을 알 수 있다.

더운밥은 단순히 밥의 온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갓 지어낸 밥을 뜻한다. 뜸을 잘 들이고 난 뒤에 가마솥의 뚜껑을 열면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김 뒤로 가지런히 자리 잡은 밥을 가리킨다. 뽀얀 빛의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탱글탱글한 밥알의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는 밥이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가마솥으로 밥을 지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더운밥을 먹이려 애쓰던 이들의 노고가 이해되는 것도 더운밥이 가진 온도 이상의 의미 때문이다.

데운 밥은 요즘에는 꽤나 드물어졌다. 전기밥솥이 널리 쓰이면서 밥이 완성되자마자 보온이 시작되니 찬밥이 생길 일이 없어졌다. 밥을 짓기가 어렵거나 귀찮은 이들은 즉석 밥을 사다가 뜨거운 물이나 전자레인지에 덥혀 먹지만 이건 데운 밥과는 성질이 다르다. 오히려 밥솥에서 보온이 잘 되고 있더라도 갓 지은 밥이 아니니 이 밥이 ‘따뜻한 찬밥’ 대접을 받기도 한다.

겨울철 학교의 석탄 난로에 도시락을 얹어 데웠던 기억이 있는 이들, 늦게 귀가한 가족을 위해 몇 번을 덥히다 보니 졸아들어 맛이 짜진 찌개를 먹어본 이들은 더운밥의 소중함을 안다. 그런데 정작 더운밥을 매일 먹을 수 있는 이들은 더운밥의 가치와 의미를 잘 모른다. 찬밥 신세가 되어 찬밥을 먹을 때가 되어야 그 의미를 알게 된다. 더운밥을 먹을 수 있는 삶을 지키려 노력해야 하는 이유, 더운밥을 먹지 못하는 이들을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01-12 순살

닭, 아니 ‘치킨’을 주문하려고 메뉴판을 들여다보면 ‘순살’이 눈에 띈다. 누가 이름을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참 잘 지었다. ‘순수한 살’의 줄임말일 텐데 뼈가 없이 순전히 살만 있다는 뜻이다. 먹을 때 편하라고 뼈를 발라낸 후 요리한 것을 가리킨다. 갈비는 일부러라도 살을 뼈에 붙여 놓기도 하지만 닭은 뼈를 발라내는 것 자체가 귀찮으니 주로 닭고기를 재료로 쓰는 음식에만 적용되는 이름이기도 하다.

‘씹다’는 대부분의 음식을 먹을 때 필요한 동작인데 고기에는 특별히 ‘뜯다’라는 동사를 쓰기도 한다. 이는 뼈에서 살을 분리해 내는 동작을 뜻하는데 이것이 고기를 먹는 특별한 맛을 더해주기도 한다. 갈비와 닭 다리는 뜯어야 제맛이라 믿는 이가 많은 까닭이다. 육식동물은 사냥감을 뜯어 먹을 수밖에 없지만 인간은 칼로 살을 도려낼 수 있으니 굳이 고기를 뜯을 필요는 없어도 야생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순살은 고기를 준비하는 이, 혹은 음식을 만드는 이들의 노고를 드러내 주는 말이기도 하다. 소나 돼지의 정육 과정에서 발골은 매우 중요하고도 전문적인 과정이다. 닭의 발골은 이 정도의 전문성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잔뼈를 일일이 다 제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씹기에 편한 것, 목으로 넘기기에 수월한 모든 것이 누군가의 수고 덕분임을 안다면 순살 요리를 먹으면서 늘 감사할 일이다.

그런데 이 순살이 엉뚱하게도 건축, 특히 아파트에도 쓰이기 시작했다. 콘크리트로 건물을 지을 때 철근이 뼈대 역할을 하는데 이 철근을 쓰지 않거나 줄여 쓴 아파트를 순살 아파트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순살 치킨은 먹는 이를 위한 노력의 결과이지만 순살 아파트는 짓는 이의 주머니를 불리려는 얄팍한 술수이다. 게다가 사는 이의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는 짓이다. 그래서 순살 아파트는 ‘순살’에 대한 모욕이자 범죄이다. 짓는 이는 벌을 달게 받을 각오를 해야 할.

 

01-19 훠궈와 불가마

중국 옌볜(延邊)에 거주하는 중국 동포 젊은이 중 상당수는 서울말을 쓴다. 본래 이 지역의 말은 함경도에서도 육진 지역의 말에 기반을 둔 말이었다. 19세기 말부터 육진 지역 사람들이 이주해 집단 거주지를 유지해 왔으니 함경도 말이 이들의 모어인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서울말을 퍼뜨린 결정적 역할은 놀랍게도 가마솥이 담당했다. 더 정확하게는 중국 동포들이 ‘가매 뚜껑’이라 부르는 솥뚜껑이다.

1990년대 후반 시작된 우리의 위성방송은 중국 동포들이 집집마다 커다란 가마 뚜껑을 장만하는 계기가 되었다. 위성방송을 수신하려면 안테나가 필요한데 이 안테나의 모양이 솥뚜껑과 비슷하다 보니 중국어로는 ‘궈가이(鍋蓋)’라고 한다. 이를 번역한 가마 뚜껑을 집집마다 설치하고 한국 드라마와 오락 프로그램을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울말을 익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솥을 뜻하는 중국어 ‘궈’가 꽤 익숙하지 않은가? 그도 그럴 것이 갖가지 고기와 채소를 육수에 데쳐 먹는 ‘훠궈’를 한자로는 ‘火鍋(화과)’로 쓰니 자주 접하는 중국어이다. 사실 우리가 흔히 ‘웍’이라 부르는 중화 팬도 한자로는 ‘鍋’로 쓰고 광둥 말로 ‘웍’이라 발음한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솥, 냄비 등 불을 이용해 조리하는 도구를 옌볜의 동포들은 모두 ‘가마’라고 부른다. 말 풀이를 여기까지 하다 보면 ‘훠궈’는 엉뚱하게 ‘불가마’가 된다.

그런데 우리에게 불가마는 찜질방이나 사우나에 있는 그것이니 훠궈와는 영 다르다. 장작불로 도자기나 숯을 굽기 위해 설치해 놓은 것을 가마라 하기도 하고 열기가 남은 그곳에 들어가 땀을 흘리기도 했으니 이것이 오늘날 불가마의 시초가 되었다. 날씨가 추워지면 몸도 따뜻하게 해야 하고 속도 따뜻하게 해야 한다. 뜨끈한 훠궈가 몸과 속 모두를 달래주니 불가마 집에 가서 지나치게 맵고 짜지 않은 훠궈로 따뜻함을 느껴 보는 것도 좋겠다.

 

01-26 미끼

물고기가 먹으라고, 아니 물고기를 잡아먹으려고 던지는 미끼를 요즘은 사람이 먹는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지만 물에서는 물고기를 이길 재간이 없다. 물에서 자유자재로 헤엄치는 이 생물을 말 그대로 ‘물고기’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물이나 낚시가 있어야 한다. 그물은 물고기가 다니는 곳에 잘 쳐놓기만 하면 되지만 낚시는 그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영리한 물고기를 꼬여 바늘을 물게 해야 하는데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미끼이다.

미끼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ㄳ’을 받침으로 가지는 ‘?’과 마주치게 된다. 본래 한 음절로 쓰였는데 여기에 다시 명사를 만드는 접미사가 결합되어 ‘미끼’가 된 것이다. 방언에서는 ‘잇갑’으로 많이 나타나는데 이를 발음에 따라 ‘이깝’으로 쓰기도 한다. ‘이깝’과 ‘미끼’가 소리가 비슷하기 때문에 서로 관련이 있을 것 같지만 그 관계를 명확히 밝히는 것은 쉽지가 않다. 이들이 합쳐진 ‘미깝’뿐만 아니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제주의 ‘뿡기’까지 만나면 뜻을 종잡기 어렵다.

‘미끼’와 ‘이깝’을 합쳐 놓은 듯한 ‘밑밥’도 많이 나타나는데 이는 아무래도 낚시 밑에 깔아 두는 밥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일 듯하다. 밑밥도 물고기를 유인하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낚싯바늘에 끼우는 미끼와는 엄연히 다르다.

이 미끼를 사람이 먹게 된 이유는 누군가 사람들에게 밑밥을 깔고 낚시를 던져 낚으려는 데 있다. 장사꾼들은 미끼 상품으로 고객을 유인하고 드라마를 만드는 이들은 곳곳에 밑밥을 깔아 사람들을 TV 앞에 붙들어 놓으려 한다. 사기꾼들 또한 더 큰 이득을 취하기 위해 미끼를 던지니 정신 차리지 않으면 낚이기 십상이다. 물고기들은 배고픔에 미끼를 문다지만 사람들은 욕심이나 게으름 때문에 미끼를 문다. 사기를 위한 미끼, 소중한 시간을 빼앗기 위한 미끼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보면 보인다.

 

02-02 차림과 플레이팅

 

다양한 재질과 모양의 도마가 인기를 끈다지만 가끔씩 용도를 가늠하기 어려운 도마를 만나게 된다. 손잡이가 달린 것, 물고기 모양인 것, 칼질을 하기엔 너무 좁고 긴 것이 그것이다. 이런 것들에도 이름에 도마가 붙기는 하지만 보통 ‘플레이팅 도마’라고 불린다. 플레이트는 접시를 뜻하니 플레이팅은 음식을 접시를 비롯한 그릇에 올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말로는 ‘차림’ 정도로 바꿔 쓸 수 있을 듯한데 플레이팅이라 해야 있어 보이니 차림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음식은 입으로 먹어 혀로 맛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코와 귀, 그리고 눈의 역할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더라도 코로 냄새를 맡아 어떤 음식이 있는지 안다. 예민한 후각으로 사냥을 하는 동물과 공유하고 있는 능력이기도 하다. 기름에 음식이 튀겨지는 소리, 콩이 볶아지는 소리, 압력솥에서 김이 빠지는 소리를 들으며 입맛을 다신다. 심지어 유튜브에서는 맛있는 음식의 영상뿐만 아니라 요리하고 먹는 과정에서의 소리까지 담아내려 애쓴다.

플레이팅은 눈을 위한 작업이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왕이면 눈으로 보기 좋게 차려 내는 것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긴 하다. 서양 요리에서는 플레이팅 과정마저 요리의 일부로 보니 우리보다 차림에 더 민감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차림’을 ‘플레이팅’으로 바꾸면 더 그럴싸해 보이는가? 우리에게 차림이란 말이 있지만 아무래도 플레이팅은 서양 요리에서 중시되는 개념이다. 서양 요리에 서양 용어를 쓰는 것이 적절한가, 아니면 우리끼리 하는 말이니 우리말로 바꿔야 하는가? 우리의 밥상, 우리의 말을 고집하는 이에게는 플레이팅이 귀에 거슬리지만 지구촌의 일원으로 살아갈 이들에게는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는 말이기도 하다. 제일 좋은 방법은 두 말을 다 알고 쓰고 이해하는 것이다.

 

02-16 자시다

어린 손주가 할머니께 ‘할머니, 빨리 자셔요’라고 했다면 손주는 말을 잘한 것일까? 김삿갓이 가게에 가서 ‘이게 무엇이오?’라고 물었더니 ‘잣이오’란 대답을 듣고 값도 안 치르고 냉큼 먹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가? 손주가 잠자리에서 한 말이라면 ‘주무세요’라고 해야 할 말을 잘못 한 것이겠지만, 밥상머리에서 했다면 대단한 어휘력이다. 김삿갓의 일화 속 ‘잣이오’의 발음이 ‘자시오’이니 이 단어를 아는 이라면 이 일화도 금세 이해가 될 것이다.

음식을 섭취하는 행위는 ‘먹다’로 대표되지만 높임법이 발달한 우리말에서는 매우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 ‘잡수시다’나 ‘잡숫다’는 가장 높여야 할 대상에게 쓸 수 있다. ‘자시다’ 역시 이와 같은 등급인데 더 예스러운 표현이어서 손주가 이 말을 썼다면 애늙은이 취급을 받을 것이다. ‘들다’ 또한 음식을 목적어로 삼으면 높임의 뜻이 더해진다. 이렇게 높임의 용도로 대체할 단어가 있다 보니 ‘먹다’를 높이기 위해 ‘먹으시다’를 쓰지는 않는다.

임금과 같이 특별히 더 높여야 할 대상에게는 ‘젓수시다’를 쓰기도 했다. 임금의 밥상은 따로 ‘수라’라고 불렀으니 먹는 행위 자체에 이런 표현을 쓰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 말을 쓰지 않는다. 반대로 먹는 것을 비하할 때는 ‘처먹다’를 쓸 수는 있지만 사람에게 써선 안 될 말이다.

높임의 등급이 복잡한 것도 모자라 이렇게 다양한 어휘로 높임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으로 상대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그런데 ‘자실’ 주체는 늘어나는데 ‘먹을’ 주체는 줄어드는 현실은 걱정스럽기 그지없다. 어르신들이 자실 것을 젊은이들이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것도 문제다. 자실 분보다 ‘자셔요’라고 말할 사람이 더 많도록 유지하려는 노력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02-23 모듬과 모둠

어린 학생들은 ‘모둠’이란 말이 꽤 익숙하다. 초·중등학교에서 효율적인 학습을 위하여 학생들을 대여섯 명 내외로 묶은 모임을 이리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른들에게 ‘모둠’이나 이와 비슷한 ‘모듬’은 음식 이름에 붙는 것으로 익숙해져 있다. 여러 종류의 물고기 회를 한 접시에 올리는 것을 ‘모듬회’라 하고, 다양한 전을 한 그릇에 내어놓는 것을 ‘모둠전’이라 하기 때문이다. 같은 음식을 보다 다양하게 즐길 수 있으니 이름도 정답고 맛도 반갑다.

그런데 규범의 잣대로 보면 모듬회나 모둠전 모두가 틀렸다. 사전을 보면 ‘모듬’은 ‘모임’의 다른 말이라 풀이돼 있다. 죽은 물고기들이 접시에서 회합을 가질 리 없으니 모듬회는 성립되기 어렵다. 전을 먹으면서 공부할 일도 없으니 모둠전도 이상한 말인 것은 매한가지다. 그러나 사전은 현실에서의 쓰임을 정리해 놓은 것에 불과하니 규정으로 꼬치꼬치 따질 일이 아니다. 게으른 국어선생들이 이름을 짓기 전에 상인들이 먼저 멋진 이름을 지었을 뿐이다.

음식점에서 여러 종류의 음식을 한데 묶어서 내는 것을 보통 ‘세트 메뉴’라 부르는데 이는 모듬 또는 모둠과는 다르다. 짜장면과 탕수육의 조합이나 햄버거에 감자튀김과 음료수를 함께 주는 것을 세트 메뉴라 하는데 이는 함께 먹기에 좋은 음식을 묶어서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궁합이 좋은 음식을 비교적 값싸게 먹을 수 있으니 유용한 메뉴이기는 하다.

모듬과 모둠 모두 오늘날에는 ‘모이다’ 또는 ‘모으다’와 뜻이 통하나 말소리를 보면 ‘?다’를 상정해야 한다. 실제로 옛말에 ‘?다’가 있었고 방언에서는 지금도 쓰이고 있다. 모듬회, 모둠전이란 단어를 만들어 낸 이들은 옛말이나 방언에 기댔음을 알 수 있다. 사전은 속성상 ‘모듬말’ 또는 ‘말모둠’이다. 더 다양한 음식이 함께 나오면 좋듯이 사전도 더 깊고 넓어져 이런 말들도 모두 포용하길 기대해 본다.

 

03-08 불콰

 

글을 읽다 ‘불콰’라는 단어를 처음 만나게 되면 어떤 느낌이 들까? 이 단어는 보통 ‘불콰하다’와 같이 쓰이니 동작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겠거니 생각할 수 있지만 그래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그도 그럴 것이 ‘콰’가 들어가는 고유어는 이 단어와 의성어 ‘콰르릉’ 정도이고 나머지는 모두 외래어이기 때문이다. ‘불콰하다’는 고유어로서 얼굴빛이 술기운을 띠거나 혈기가 좋아 불그레하다는 뜻이다.

뜻풀이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단어는 술, 그리고 색깔을 나타내는 ‘붉다’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술이 몸에 들어가면 분해되는 과정에서 얼굴이나 몸을 붉게 만드는 물질이 생성된다. 이 물질을 분해하는 기능이 낮은 사람들은 유독 얼굴이 붉어 술을 혼자 다 마신 것 아닌가 하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술을 마시면 얼굴이 붉어지는데 이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불콰하다’란 단어가 만들어진 것이다.

‘불콰하다’와 형태적으로 너무도 비슷한 단어로 ‘불쾌하다’가 있다. 이 단어는 한자어 ‘不快’에 기원을 두고 있으니 ‘불콰하다’와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불콰함의 근원인 술은 불쾌함의 원인이 되기도 하니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불콰해질 때까지 마신 술의 냄새, 불콰한 얼굴로 떠들어대는 소리 등은 자리를 같이한 사람들끼리는 괜찮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불쾌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많은 사람이 새하얀 얼굴을 좋아하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창백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혈색이 좋아 불그레한 얼굴은 건강의 표시이기도 하다. ‘불그레’의 모음을 살짝 바꾼 ‘발그레’는 귀여운 소년소녀나 예쁜 여자의 얼굴, 더 나아가 수줍은 듯 띠우는 미소와 함께 쓰인다. 의사들은 술 한 방울도 독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불콰’가 아닌 ‘발그레’한 얼굴에 미소까지 띨 수 있는 정도라면 약일 수도 있겠다.

 

03-15 잔치국수

국수 중에서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국수는 잔치국수이다. 단어의 구성만 보면 잔칫날에 먹는 국수이지만 칼국수를 비롯한 다른 국수와 구별되는 명확한 특징이 있다. 이 국수는 맑은장국에 국수를 만 뒤 갖은 고명을 얹은 것인데 멸치 국물을 주로 쓰고 면은 흔히 소면이라고 부르는 가는 밀가루 면을 쓴다.

그런데 오늘날 이 국수의 값을 생각하면 잔치에 온 손님에게 국수를 대접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족해 보인다. 게다가 돌과 환갑을 비롯한 생일잔치에 국수를 음식으로 내는 일도 드물다. 이 의문을 풀려면 잔치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이 단어는 한자어일 것 같지만 한자와 전혀 관련 없는 고유어이다. 요즘 사람들에게 잔치를 대체할 영어 단어를 제시하라면 바로 ‘파티’를 떠올릴 것이다. 사전의 뜻풀이를 보고 경사스러운 날 모두를 가리킬 것 같지만 방언에서의 쓰임을 보면 오로지 결혼식 때 하는 잔치만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잔치국수라면 당연히 결혼식 때 먹는 국수를 뜻한다.

밀이 흔해지고 기계로 손쉽게 국수를 뽑아낼 수 있는 오늘날에 국수는 싼값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그러나 귀한 밀을 힘들게 방아로 찧어 반죽한 후 국수를 뽑아야 했던 과거에는 무척이나 고급 음식이었다. 국수를 미리 삶아 찬물에 식힌 후 사려 놓고 손님이 올 때마다 따로 끓여 놓은 장국에 말아 내면 손님 접대에 제격이니 결혼식의 단골 음식이 된 것이다.

요즘 결혼식에서는 뷔페 음식이나 스테이크 종류를 대접해야 하객들로부터 축의금이 아깝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니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개인의 느낌과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게시판을 보면 종종 적정 축의금에 대한 논쟁, 축의금과 답례 음식의 손익 계산에 대한 글이 올라온다. 잔치의 본래 목적은 축복을 위한 것임을 감안하면 잔치국수 한 그릇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03-22 ‘맛있다’의 발음

음식의 맛이 좋으면 ‘맛이 있다’라고 표현하는데 이 표현이 워낙 많이 쓰이다 보니 ‘맛있다’가 한 단어로 굳어져 버렸다. 그렇다면 이 단어를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가? 많은 사람이 특별한 고민 없이 ‘마싣따’라고 발음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단어와 뜻이 반대인 ‘맛없다’의 발음은 어떤가? 당연히 ‘마덥따’라고 답할 텐데 뭔가 이상하다. ‘마싣따’를 감안하면 ‘마섭따’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밥’과 ‘맛’의 발음을 비교해 보면 ‘ㅅ’ 받침은 ‘ㅂ’ 받침에 비해 소리의 변화가 심하다. ‘밥이, 맛이’에서는 받침의 소리가 그대로 나지만 ‘밥도, 맛도’에서는 받침 ‘ㅅ’이 ‘ㄷ’ 소리로 바뀐다. 나아가 ‘밥’은 단독으로 쓰이거나 실질적인 뜻이 있는 ‘알’이 결합된 ‘밥알’에서도 ‘ㅂ’ 소리가 그대로 난다. 그러나 ‘맛’은 단독으로 쓰이거나 실질적인 뜻을 가진 단어와 결합하면 ‘ㄷ’으로 소리가 바뀌어야 한다. 따라서 ‘맛있다’와 ‘맛없다’는 원칙적으로 ‘마딛따’와 ‘마덥따’로 발음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대다수의 사람이 ‘맛있다’의 발음을 잘못 하고 있는 것일까? 그저 잘못된 발음으로 치부하기에는 뭔가 석연찮은 면이 있는데 이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맛있다’는 본래 ‘맛이 있다’인데 이것의 발음 ‘마시?따’를 보면 모음 ‘이’가 겹쳐 빨리 발음하면 ‘마싣따’가 된다. 따라서 ‘맛이 있다’가 ‘맛있다’로 줄어든 뒤에도 이전의 발음 습관이 그대로 유지된다고 보는 것이다.

‘맛있다’의 발음을 ‘마딛따’로 해야 한다고 강요하면 왠지 맛이 떨어져 보인다. 반대로 ‘맛없다’를 ‘마섭따’라고 발음한다고 해서 없는 맛이 생겨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원칙과 다른 발음을 한다면 그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맛있다’의 표준발음 규정을 밥맛없다고 여길 일은 아니다. 표준발음법은 ‘마싣따’란 발음도 넓은 가슴으로 포용하고 있다.

 

03-29 곶감의 새 이름

‘달다’의 반대말로 보통은 ‘쓰다’가 쓰이지만 과일을 대상으로 할 때는 ‘시다’나 ‘떫다’가 쓰이기도 한다. 과일이 익으면 맛이 달아지는데 그 전에는 시거나 떫기 때문이다. 특히 감처럼 탄닌 성분이 있는 과일은 완전히 익지 않으면 떫은맛을 낸다. 이런 감을 땡감이라고 하는데 이런 감이라도 껍질을 벗긴 후 잘 말리면 떫은맛이 사라지고 당도도 높아진다. 이런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감이 바로 곶감이다. 그런데 이 단어에 포함된 ‘곶’의 정체는 무엇일까?

쓰기는 ‘곶감’이라고 하지만 보통은 ‘꽂감’처럼 발음하는데 이 발음이 틀린 것만은 아니다. 곶감의 ‘곶’은 ‘곶다’에서 온 것인데 이 말이 오늘날에 쓰이는 ‘꽂다’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껍질을 깐 감을 말릴 때 싸리나무 꼬챙이에 꽂아 말렸는데 이러한 이유로 ‘곶감’이라 했던 것이다. ‘곶감’보다는 ‘곶은 감’이 자연스럽지만 ‘덮밥’과 마찬가지로 동사의 줄기만 명사와 결합하기도 하니 드물지만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꼬챙이에 꽂아서 말리는 일이 드무니 곶감은 현실과 맞지 않은 이름이 되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이름이 필요한데 말린 감을 뜻하는 한자어 ‘건시(乾시)’가 그 역할을 하기도 한다. 게다가 바싹 말리지 않고 반쯤 꾸덕꾸덕하게 말린 것을 ‘반건시’라고 부르니 ‘건시’가 힘을 얻을 만한 상황이기도 하다. 그래도 ‘곶감’을 대체할 고유어 이름이 필요하지 않을까?

만드는 방법, 우리말의 어법을 고려하면 ‘마른 감’이나 ‘말린 감’으로 하면 간단하다. 그런데 ‘곶감’에서 느껴지는 달콤함과 쫀득함이 없다. ‘곶감’은 ‘곶다’에서 ‘곶’만 떼어 낸 것이니 ‘말리다’나 ‘마르다’에서 앞부분만 떼어 ‘말리감’이나 ‘마르감’이라고 할 수도 있고 글자 수를 생각하면 ‘말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색할 뿐만 아니라 어법에도 맞지 않는다고? 처음엔 어색하지만 곧 익숙해진다. 그리고 음식을 만드는 이들은 이름을 짓는 선수이기도 하다.

 

04-05 욕지기와 구역질

 

눈으로 보기에 흉한 것, 코로 냄새를 맡기에 역한 것, 입으로 먹었을 때 씹는 맛이 고약한 것을 접했을 때 쓸 수 있는 단어로 ‘욕지기’와 ‘구역질’이 있다. 토할 듯 메스꺼움을 느낀다는 뜻의 욕지기는 요즘은 듣기 힘든 단어이지만 15세기부터 써 오던 고유어이다. 구역질은 속이 메스꺼워 토하려고 하는 행동으로서 한자어 ‘구역(嘔逆)’에 행동을 나타내는 ‘질’이 붙은 말이다. 둘 다 느낌이 좋은 말은 아니지만 생명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느낌을 표현한다.

욕지기와 구역질은 병에 의한 몸 상태와도 관련이 있지만 음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음식이 썩으면 색이나 모양이 흉하게 변하고 역한 냄새를 풍긴다. 그것을 모르고 입에 넣었을 때의 느낌은 끔찍하기만 하다. 욕지기와 구역질은 이렇듯 상하거나 변해 먹으면 큰 탈이 날 수 있는 음식에 대한 거부반응의 일종이기도 하다. 배가 고프더라도 메스껍고 토할 것 같은 느낌을 주어 이런 음식의 섭취를 막는 것이다.

그런데 욕지기와 구역질이 때로는 훈련을 통해 억제되기도 한다. 홍어를 삭히거나 청어를 절이면 발효 과정을 통해 고약한 냄새가 난다. 두부를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취두부나 콩을 삶아 발효시킨 청국장 또는 낫토 또한 냄새나 식감이 혐오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음식을 즐겨 먹는 이들은 이 음식에 대해 욕지기를 느끼지 않거나 구역질이 나지 않도록 훈련된다.

욕지기나 구역질은 낯선 것, 그래서 위험할 수도 있는 것에 대한 반응의 결과이다. 그런데 때로는 이 반응이 혐오, 기피, 거부로 나아가기도 한다. 낯선 피부색, 종교, 문화를 접할 때의 과민한 반응이 그것이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닌데 다르다는 이유로 과민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역한 발효 음식도 훈련되면 맛있다고 느껴지듯이 때로는 낯선 것을 포용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특히 지구상 모든 사람의 음식 문화에 대해서는 호기심이 먼저다.

 

04-12 맛과 멋

‘살-설, 남다-넘다, 맛-멋’의 관계를 보면 뭐가 보이는가? 모든 조합이 ‘아’와 ‘어’가 대립을 이루고 있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뜻은 어떠한가? 나이를 세는 단위 ‘살’과 새해 첫날을 나타내는 ‘설’은 의미상 서로 통하는 면이 있다. ‘넘다’는 정해진 범위를 벗어나는 것인데 이리 되면 ‘남다’의 상태가 된다. ‘맛’과 ‘멋’도 마찬가지여서 음식에서 느껴지는 ‘맛’과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멋’도 서로 통한다.

이런 단어들은 모두 기원이 같은데 모음이 교체되면서 그 뜻도 조금 달라진 것이다. 애초에는 모음의 교체에 따라 약간의 어감 차이만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아예 다른 단어가 됐다. 그렇더라도 의미상 통하는 바가 있으니 그 관련성을 추적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어형, 어떤 뜻이 먼저였을까? 설이 되면 한 살을 더 먹으니 ‘설’이 먼저이고 여기에서 ‘살’이 분화된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도 그렇다.

‘맛’과 ‘멋’의 관계는 누구나 ‘맛’이 먼저일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멋은 오감 중 시각으로 느낄 때가 많고, 맛은 미각으로 느낀다. 시각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감각이지만 미각은 ‘먹고살기’ 위해 필수적인 감각이다. 맛있다고 여기는 음식은 인간에게 이로운 것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해로운 것들이니 생존을 위해 반드시 맛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먹고살게 된 후에야 멋을 느끼니 맛이 먼저다.

그런데 멋 때문에 맛을 포기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바쁜 출근 시간, 화장과 치장하느라 시간이 없어 먹는 것을 건너뛰는 것이다. 누군가는 좀 더 일찍 일어나라고, 혹은 겉모양보다는 건강을 챙기라고 잔소리를 하겠지만 굳이 참견할 일은 아니다. 끼니를 거르고 다음 끼니에서 보충해도 충분한 상황이 됐다. 그리고 멋진 모습을 보이는 것 또한 먹고살기 위한 경쟁력이 되니 맛을 위해 멋을 내는 것이다. 그러니 맛과 멋은 여전히 뜻이 통한다.

 

04-19 양갱

양갱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밤양갱’이란 제목의 노래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은박지 포장에 묵처럼 물컹한 식감의 양갱은 이가 시원찮은 어르신들의 간식거리로 여겨졌다. 그런데 요즘에는 노래에 힘입어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기도 한다. 그 전에는 운동을 하는 이들이 열량을 보충하고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 먹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한자로는 ‘羊羹’이라 쓰는데 각각 ‘양’과 ‘국’을 뜻하니 양으로 끓인 국일 듯하지만 의외로 일본의 전통 과자 중 하나여서 과거에는 일본식 발음인 ‘요칸’으로 부르는 이도 많았다. 팥을 주재료로 해서 설탕과 물엿을 넣고 한천을 넣어 굳힌 것이니 도토리나 녹두의 녹말로 만드는 묵과는 조금 다르다. 일본에서 전래되었으니 일본 과자라고 해야겠지만 70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니 우리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양갱을 먹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적당한 단맛과 편안한 식감을 이유로 꼽는 사람이 많다. 달지만 사탕처럼 자극적이지 않고 씹기 쉬운데 엿처럼 이에는 달라붙지 않으니 꽤 괜찮은 간식이다. 게다가 운동 중이나 후에 먹으면 높은 탄수화물 함량 때문에 열량 보충과 피로 해소에 좋으니 여러모로 쓸모가 있는 음식이다. 그런데 ‘내가 늘 바란 건 달디단 밤양갱’이란 가사에서 알 수 있듯이 젊은이들에게는 단맛이 매우 강하게 느껴지나 보다.

양갱은 쓴맛이 도는 녹차나 커피와는 어울리는데 라테나 과일차 등 단맛이 강한 음료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단맛과 쓴맛이 서로의 맛을 상승시키는 데 반해 단맛과 단맛이 서로 싸우는 격이기 때문이다. 노래에서는 ‘달디단 단맛’을 반복적으로 읊고 있지만 이별의 쓴맛 때문에 단맛이 더 그리운지도 모른다. 인생에서 단맛만 있다면 단맛을 모르거나 더 자극적인 단맛만 찾게 될 것이다. 이별의 쓴맛을 보았으니 적당한 단맛의 새 연인을 만나길 기원한다.

 

04-26 천사채

천사가 이 땅에 와서 먹겠다고 하면 어떤 국수를 준비해야 할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우리의 발명가가 ‘천사채’를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다. 횟집에서 흔히 보았을 법한 반투명의 당면 비슷한 것의 이름이 바로 천사채이다. 횟집에서 회를 낼 때 접시 바닥에 그냥 내면 볼품이 없으니 무채를 썼었는데 그것을 대신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의 본래 정체는 무엇이고 왜 이름에 천사가 붙었을까?

이것은 생선회 받침이 아닌 다이어트 식품으로 개발되었다. 다시마를 비롯한 해조류의 추출물을 녹말과 섞어 국수 모양으로 뽑아낸 것인데 열량이 극히 적어 다이어트 식품으로 제격이다. 개발자는, 하늘이 내릴 만큼 귀하고 먹으면 몸이 가벼워져 천사처럼 하늘을 날 수 있다고 해서 이름을 이리 지었다고 한다. 다소 과장된 이름이긴 해도 건강과 가벼운 몸에 대한 사람들의 소망을 담아낸 것이기도 하니 그 마음을 헤아려 받으면 그만이다.

물건이나 음식이 본래의 용도와 다르게 쓰이는 사례는 또 있다. 고구마를 찔 때 냄비 바닥에 까는 접이식 철판이 그것이다. 이것이 미국에서 꽤 인기를 끌고 있는데 그 용도는 놀랍게도 찜이 아닌 불을 위한 것이다. 접이식이어서 휴대가 편하고 철판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 작은 장작불을 피우기에 안성맞춤이다.

천사채는 당면을 대체해 잡채나 전골 등의 요리에도 쓰인다. 그러나 주된 용도는 횟집에서 무채를 대신하는 것이다. 비싸고 관리가 어려운 무채 대신 쓸 수 있으니 횟집 주인들에게는 천사 같은 존재이다. 개발자 또한 식용으로 쓰이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판로가 개척된 셈이니 반길 일이다. 단, 회 밑에 깔린 천사채를 호기심에 먹지만 않으면 된다. 먹을 수는 있으나 혹시라도 세균이 번식했으면 배 속에 악마를 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05-03 안주(按酒)

 

술을 마실 때 곁들여 먹는 음식이 있는데 우리는 이를 ‘안주’라고 부른다. ‘酒(술 주)’는 한자이고 그 앞의 글자도 틀림없이 한자일 텐데 어떤 한자일까? 느낌만으로 추정해 보면 ‘安(편안할 안)’을 쓸 것 같은데 아니다. 이 글자에 손을 뜻하는 ‘手’에서 유래한 글자가 옆에 붙은 ‘按’이다. 이 한자는 ‘누르다, 어루만지다, 당기다’는 뜻이다. 우리는 술을 마실 때 속이 편안해지라고 먹는데 한자의 뜻은 그게 아니지만 어떤 뜻으로 보든 곱씹어 볼 만하다.

술을 누른다는 뜻으로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술이 독하게 느껴지는 것을 누르고 술기운이 오르는 것도 누르니 좀 더 편안하게 마실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술을 어루만진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 술 때문에 속이 쓰리거나, 취기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질 때 그것을 잘 어루만져주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뜻으로 보든 결국 편안하다는 뜻과 통하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통념과 맞아떨어지기도 한다.

문제는 술을 당긴다는 세 번째 뜻이다. 술꾼들은 기름진 중국 음식을 먹을 때는 고량주와 함께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파전이나 홍어에는 막걸리를 먹어줘야 하고, 치킨은 맥주와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결국 안주가 술을 당기게 하는, 즉 생각나게 하는 격이다. 안주가 술을 당기고 술이 안주를 다시 당기니 무한반복에 빠져든다.

‘깡술’이란 말은 사전에 올라 있지도 않은데 우리가 꽤 자주 쓴다. 술만 마시면 몸에 안 좋다는 생각 때문에 깡술은 권하지 않는다. 그리고 속을 보호한다며 좋은 음식을 안주로 준비하기도 한다. 술이 몸에 안 좋은 것이라면 술을 억누르는, 즉 술 생각이 안 나게 하는 음식이 안주이면 좋을 텐데 그런 용법으로 쓰이지는 않는다. 안 마시면 편안할 텐데 굳이 마시면서 억지로 누르고 당기는 싸움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05-10 냄새와 향기

냄새와 향기의 물리적인 기제는 완전히 같다. 즉 후각을 자극할 수 있는 입자가 코의 점막에 도달해 느껴지는 것인데, 그 입자가 어디에서 날아온 것인지에 따라 달리 표현하는 것이다. 꽃에서 나는 것은 ‘향기’라고 하는데 음식에서 나는 것은 ‘냄새’라고 하는 것이 그 예이다. 또한 좋고 나쁨에 대한 언급에서도 차이가 있어서 ‘향기’는 좋은 것에 대해서만 쓰는데, 냄새는 좋고 나쁜 것 모두에 대해 쓴다.

음식은 입으로 먹지만 눈, 코, 귀는 물론 촉각까지 동원해서 즐긴다. 눈으로 보기에 좋아야 맛도 있어 보이고, 코로 좋은 냄새를 맡을 수 있어야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나아가 튀기는 소리, 압력솥에서 김이 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입맛을 다시기도 한다. 그리고 흔히 식감이라고 표현하는 씹는 맛과 넘기는 맛은 촉각으로 느끼는 것이니 결국 먹고 마실 때는 오감을 모두 동원하게 된다. 이 중에 후각으로 느끼는 것을 ‘냄새’라 하지 ‘향기’라 하지는 않는다.

음식에도 ‘향(香)’을 쓰기도 하는데 ‘향신료(香辛料)’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깨, 고추, 후추, 생강, 마늘 등은 맛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각각의 재료가 가진 고유한 향을 음식에 더하기 위해 쓰는 것들이다. 이러한 향신료가 음식에 들어갔을 때 우리는 각각의 재료에 따른 냄새가 나거나 향이 느껴진다고 한다. 그래도 음식에는 역시 냄새가 어울린다.

그런데 음식에서 냄새가 난다는 표현은 보통 나쁜 의미로 쓰인다. 음식이 상해서 원하지 않는 냄새가 날 때 많이 쓰기 때문이다. 사람에게서 냄새가 난다는 표현 역시 고린내, 땀내가 날 때이니 냄새는 이래저래 푸대접을 받는 단어이다. 그래도 음식에서 향기가 난다는 표현을 쓸 수도 있다. 오랜만에 접해보는 음식에서 고향의 향기를 맡을 수도 있고 정성스레 만들어주던 이의 향기를 맡을 수도 있다. 이렇게 냄새에서 향기를 찾을 수 있는 순간은 늘 행복하다.

 

05-17 다방

가수 최백호는 그야말로 옛날식 공간에 앉아 낭만에 대하여 노래한다.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이 있는 곳, 도대체 그런 위스키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도라지 위스키’ 한 잔을 파는 곳이다. 오늘날에는 마담이 도라지 위스키를 파는 옛날식은 없지만 그래도 다방은 여전히 있다. 서울만 해도 을지로, 대학로에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다방’이란 이름을 붙인 곳이 있고 각 지역에도 유서 깊은 다방이 있다.

다방이란 공간을 이해하려면 한자 ‘茶(차 다)’를 알아야 하는데 이 한자가 좀 고약하다. 뜻은 ‘차’이고 소리는 ‘다’일 텐데 ‘차’는 고유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차’ 또한 이 글자의 다른 음 중 하나이니 한자의 음이 마치 뜻인 것처럼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조상들도 식물의 잎을 뜨거운 물로 우려내어 마셨겠지만 그것을 뜻하는 단어가 오늘날에는 남아 있지 않아 이러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 글자의 비밀을 알고 나면 ‘다실, 끽다점, 찻집’ 등이 모두 기원이 같다는 사실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다방은 차를 파는 곳이어야겠지만 다방의 주된 메뉴는 커피였다. 일제강점기의 다방에서는 차나 각종 음료를 팔기도 했지만 커피가 빠져서는 안 됐다. 다방이 전성기를 누렸던 1970∼1980년대에는 저마다의 황금비율을 자랑하는 분말 커피가 다방의 주메뉴여서 오늘날까지도 ‘다방 커피’란 말이 특별한 의미로 쓰이고 있다.

커피가 주메뉴인 다방은 아이러니하게도 커피 때문에 사라지게 되었다. 분말 커피가 아닌 ‘내린 커피’를 파는 커피 전문점, 혹은 카페에 밀려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그래도 달걀노른자가 동동 뜬 쌍화차, 혹은 비엔나의 마부들이 마시던 커피가 궁금하면 찾아갈 수 있는 다방은 지금도 주변에 있다. 그리고 백씨 성을 가진 이가 만든 다방에 가면 다방 커피를 주문할 수도 있고 청년들이 만든 다방에 가면 조화가 의심스럽지만 떡볶이와 커피를 함께 즐길 수도 있다.

 

05-24 소시지

북녘땅을 떠나 남녘에 온 탈북민들은 소시지를 모른다. 북녘의 살림살이가 어려워 소시지를 접할 수 없었다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다. 본래 버려질 운명인 온갖 잡고기를 다지고 양념해 창자에 넣어서 만든 것이니 그리 비싼 음식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소세지, 쏘세지’ 등으로 불리고 쓰이는 소시지가 영어에서 유래한 것이듯 북한에서는 러시아어 ‘콜바사’에서 유래한 ‘칼파스’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고기가 귀하던 시절에는 그냥 먹기엔 꺼려지는 여러 부위와 냄새나는 내장조차도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개발된 것이 소시지인데 여러 부위를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갈아서 다른 재료와 섞고 갖가지 양념까지 했으니 먹을 만하게 되었다. 이것을 창자에 가득 채워 훈연하니 저장성까지 좋아져 훌륭한 가공식품이 되었다. 다만, 만드는 과정이 어렵고 복잡해 웬만해서는 집에서 만들 수 없어 마냥 싼값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다.

재료와 만드는 과정을 보면 우리의 순대와 비슷하지만 소시지는 보통 피를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순대와 비슷하다고 해서 한때 ‘양순대’라고 불리기도 했다. 요즘에는 여러 종류의 소시지를 접할 수 있지만 과거에는 소시지 하면 ‘분홍 소시지’라고도 불리는 어육 소시지를 뜻했다. 지금도 추억의 도시락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그 음식이다.

‘법률은 소시지와 같아서, 우리는 그것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수록 그것을 싫어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이는 법에 대한 말이지만 소시지의 재료와 가공 과정의 위생 상태에 대한 말이기도 하다. 중국에서는 소시지를 ‘샹창(香腸)’이라 하는 것과 맥락이 통한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향기로운 내장이지만 실제로는 여러 냄새를 잡기 위해 갖은 향을 쓴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는 옛말일 뿐, 요즘은 일부러 맛있는 부위를 써 위생적으로 가공하니 안심해도 좋다.

 

05-31 만주

영화 ‘극한직업’을 보면 ‘이것은 갈비인가 통닭인가?’란 대사가 나오는데 일본 음식 ‘만주’를 접할 때마다 이와 비슷한 말이 나온다. 이것은 만두인가 과자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 다 맞다. 만주의 기원은 만두(饅頭)이고 그 이름도 ‘만두’의 발음이 변해서 된 것이니 본래 만두이다. 다만 이것을 과자를 굽듯이 만들어 일본에서 화과자의 하나로 취급되기 때문에 과자이기도 한 것이다. 얇게 편 밀가루 반죽에 재료를 싸서 먹는 중국의 만두가 동아시아를 도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음식이 만주이다.

그런데 중국에 가서 ‘만두’를 주문하면 엉뚱한 음식이 나와 당황하게 된다. 만두의 중국식 발음 ‘만터우’는 소 없이 만든 찐빵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우리의 찐빵처럼 팥이나 다른 소가 들어 있는 것은 바오쯔(包子)이니 이 또한 헷갈린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만두를 중국에서 먹고자 한다면 자오쯔(餃子)를 주문해야 한다. 일본도 마찬가지여서 ‘교자(ぎょ―ざ)’라 말해야 우리가 원하는 만두를 먹을 수 있다.

중국의 만두가 일본에 전해진 후 변화를 겪게 되는데 이는 훈툰()이 변한 우동이나 전병(煎餠)과 서양의 빵이 만나 탄생한 단팥빵과 그 과정이 유사하다. 중국의 만터우는 본래 소가 없었는데 팥을 비롯한 여러 소를 넣게 되었다. 만터우는 증기로 쪄내는 빵이었는데 일본에서는 구워내는 방식으로 만들다 보니 빵이 아닌 과자에 가깝게 되었다. 이렇게 변형된 만주를 중국에서는 ‘일식소만두(日式小饅頭)’라 하니 같으면서 다른 음식이 된 것이다.

우리도 지하철역에서 ‘만쥬’라는 이름이 붙은 음식을 접할 수 있는데 이는 만주가 아닌 풀빵에 가깝다. 지방에 다니다 보면 지역 특산물로 소개되는 빵이 있는데 오히려 이것이 만주에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역 특산물은 일본의 만주를 베낀 것인가? 아니다. 만두, 전병, 빵이 동아시아를 회유하면서 늘 이러한 방식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06-07 접짝국

 
 

어릴 적에 ‘접짝에 가서 놀아라’란 말을 들어본 이는 중부 지역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 중부 지역이라면 표준어와 가까운 말을 쓸 텐데 표준어로 ‘접짝’은 ‘저쪽’이다. 두 말은 같으면서도 다른 말인 듯한데 어찌 된 일일까? ‘접짝’을 들어본 이들은 ‘욥쪽’ 또는 ‘욥짝’도 들어봤을 것이다. 이는 표준어의 ‘요쪽’에 해당하는데 ‘쪽’은 오늘날은 그저 된소리이지만 과거에는 첫소리로 ‘ㅂ’과 ‘ㅈ’을 연달아 가진 단어였기 때문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다 건너 저쪽에 가면 ‘접짝국’을 맛볼 수 있다. 제주도의 토속 음식인데 이름은 물론 재료와 맛이 묘하다. 돼지 뼈에 고기가 붙어 있는데 맛이나 질감은 갈비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작다. 돼지 뼈와 살을 푹 고아낸 국물에 메밀가루를 첨가해 고소하면서도 걸쭉하다. 이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집에 가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국, 밥, 배추쌈과 반찬을 곁들여 상을 차려낸다. 육지, 즉 이쪽에는 없고 바다 건너 ‘접짝’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이름의 유래가 궁금해 제주어 전문가에게 물으니 ‘저’는 ‘곁’을 뜻하는 제주말이라 설명한다. ‘쪽’은 육지와 마찬가지로 ‘ㅂ’이 있었으니 ‘접짝’이 될 수 있다. 돼지의 목에서 갈비 사이의 작은 뼈와 살로 만든다 하니 재료와 이름이 맞아떨어진다. 비싼 갈비가 아닌 곁의 살과 뼈로 알뜰하게 끓여낸 전통 음식이다.

유래를 알고 나니 ‘접짝’에서 ‘저쪽’을 먼저 떠올린 시각이 부끄러워진다. 바다 건너는 저쪽이고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할 만큼 멀면 더 저쪽이다. 그러나 저쪽과 이쪽은 편을 가르는 말이다. 크지도 않은 땅이 남북으로 갈라지고 동서로 나뉘어 싸우는 것도 모자라 바다 건너를 저쪽으로 보니 문제다. 접짝으로 만든 국이지만 맛은 욥쪽 맛, 아니 우리 모두가 익히 즐겨 먹던 맛이다. 바다 건너 접짝뿐만 아니라 욥쪽에서도 맛보고 싶은 그런 맛이다.

 
 

06-14 앵두

2023년에 개봉된 영화 ‘밀수’를 보다 보면 현란한 그룹사운드 반주에 약간 쉰 듯하면서도 매력이 넘치는 ‘뽕짝’이 나온다. 1976년에 최헌이 부른 ‘앵두’인데 믿어도 될지 의심스러운 그 입술이 나오는. 6월의 어느 날 후드득 듣는 비에 말끔히 씻기는, 그리고 비 갠 후의 햇빛에 찬란히 빛나는 이 열매를 본 사람이라면 이 가사가 바로 가슴에 꽂힌다. 흔한 비유지만 왜 ‘앵두 같은 입술’이 쓰이는지도 알 수 있다.

앵두는 한자로는 ‘櫻桃’로 쓰니 본래는 한자의 발음대로라면 ‘앵도’가 되어야 한다. 한자 ‘櫻(앵두나무 앵)’은 벚나무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비록 ‘桃(복숭아 도)’가 함께 쓰였더라도 생김새는 체리와 가깝다. 붉게 잘 익은 앵두를 따서 씹으면 새콤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과육을 맛볼 수 있지만 이 열매는 역시 눈으로 봐야 멋지다. 어떤 립스틱으로도 흉내 낼 수 없는 붉은색과 도톰한 입술을 닮은 모습 때문이다.

노래나 시에서 과일을 여성과 관련짓는 것은 꽤나 흔하다. 앵두 같은 입술은 그렇다 쳐도 왜 동네 처녀가 앵두나무 우물가에서 바람이 나야 하는지 알기 어렵다. ‘수밀도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이란 구절이 포함된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는 요즘에 발표되었다면 봉변을 할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열매를 따다’는 결실을 거둔다는 의미인데 ‘따먹다’는 그 목적어에 따라 지극히 추한 은어로 쓰인다.

모든 열매는 식물이 일생을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과일은 맛, 향, 빛깔을 좋게 해서 따먹힌 후 멀리멀리 씨를 퍼뜨리는 것이 목표이다. 그러니 모든 열매와 과일은 믿어도 된다. 붉은 입술을 연상시키는 앵두도 물론이다. 믿을 수 없는 것은 그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말이지 그 입술, 혹은 그것을 연상시키는 앵두가 아니다. 비 갠 6월의 어느 날 앵두가 보이면 믿고 먹어도 좋다. 그 입술로 거짓말을 하지 않을 맹세를 할 수 있다면.

 
 

06-21 메주의 고향

장맛은 우리 음식의 자부심이다. 장독대에 가지런히 늘어선 항아리와 그 속에서 숙성되어 가는 된장, 간장, 고추장은 우리 음식 맛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바탕이 있으니 바로 콩을 삶아 찧은 뒤 빚어 말린 메주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 메주의 고향은 어디일까? 당연히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일 듯한데 그렇게 단정하기 전에 한 번쯤은 더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쩌면 우리의 자부심을 빼앗길 수도 있을 터이니.

메주의 재료는 콩인데 콩의 원산지는 한반도와 만주 지역이다. 콩을 발효시켜 장을 만드는 것도 동아시아 지역에서 시작된 것이 분명해 보이니 메주의 고향은 당연히 한반도라 하고 싶다. 그런데 일본식 된장을 가리키는 말인 ‘미소(みそ)’가 마음에 걸린다. 게다가 지금은 사용자가 없지만, 만주어 문헌을 뒤져보면 된장을 가리키는 말 ‘미순(misun)’을 만나게 된다. 우리말 ‘메주’의 옛말이 ‘며주’ 또는 ‘몌주’였으니 아무래도 서로 관련이 있을 듯하다.

이럴 때는 어느 한 지역의 말이 다른 말로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흐름을 확인해 줄 과거의 문헌이 없으니 메주의 고향을 확정하기 어렵다. 한국어, 만주어, 일본어가 계통이 같으니 본래 뿌리가 같은 말이었다가 갈라졌다고 보는 것도 방법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공유해 왔으니 고향을 따지는 것이 부질없다.

우리의 자부심이 가득한 음식을 ‘오랑캐’라 여기는 만주, 사이가 좋지 않은 일본과 공유하는 것이 달갑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콩 한 알을 나눠 먹으면 먹을 몫이 줄어들지만, 그것을 공유하면 주인의 덩치가 커진다. 메주의 고향을 놓고 부질없이 싸우는 것보다 주인의 몸집을 키우는 것이 더 힘이 있다. 그래도 ‘옥상에서 떨어진 메주’를 ‘옥떨메’라 줄여 쓰는 우리의 말재주를 당할 이들이 없으니 메주에 대한 자부심은 유지해도 무방하다.

 
 

06-28 뜨뜻미지근

호텔 음식점에 갔더니 음식에 대한 설문조사가 있기에 답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설문 문항 중 하나가 ‘찬 음식은 차갑게, 뜨거운 음식은 뜨겁게 나왔는가?’여서 의아한 적이 있다. 뭐 이런 당연한 것을 묻나? 밥, 찌개, 국, 탕은 따뜻해야 하고 나물이나 김치는 차가워야 한다. 맥주는 시원해야 하고 청주는 따뜻하게 데워 먹으면 좋다. 만드는 이, 봉사하는 이, 먹는 이 모두가 감각적으로 아는데 굳이 묻다니.

그런데 한때 존경하던 이가 정치인이 된 이후의 모든 여정이 뜨뜻미지근한 것을 보고는 이 설문이 다시 생각났다. ‘뜨뜻미지근’은 ‘뜨뜻하다’와 ‘미지근하다’의 말뿌리만을 가져다 다시 합친 것이다. 두 단어의 온도를 따지자면 ‘뜨뜻’ 쪽이 조금 높은데 여기에 ‘미지근’이 결합돼 묘한 느낌을 준다. 이 결합이 가리키는 온도를 정확히 수치화할 수는 없겠지만 체온보다는 좀 낮고 좀 더 따뜻하면 좋을 듯한 딱 그 정도의 온도일 것이다.

우리 밥상의 필수품인 숟가락의 용도는 무엇일까? 젓가락은 반찬을, 숟가락은 밥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아니다. 숟가락은 국물, 그것도 뜨거운 국물을 위한 것이다. 유난히 발달한 국물음식, 그것은 뜨거워야 하고 ‘탕’이란 이름이 붙었으면 식탁에서도 펄펄 끓어야 한다고 믿으니 숟가락은 필수이다.

‘뜨뜻미지근’은 음식이나 사람에 쓰이면 결코 좋은 뜻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사랑을 하려면 화끈하게 해야 하고 일을 처리할 때도 확실히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뜨뜻미지근이다. 그런데 가늘고 긴 이 정치인의 생명력을 보면서 음식도 다시 생각해 본다. 뜨거운 것은 금세 식어 미지근해진다. 차가운 것 또한 상온에 두면 미지근해진다. 바로 차려낸 음식상이 아니면 우리가 대하는 음식의 상당수는 뜨뜻미지근하다. 그러나 불꽃처럼 뜨겁지는 않더라도 ‘미지근’보다는 ‘뜨뜻’에 가까워야 한다.

 
 

07-05 딱복과 물복

 
 

복숭아의 계절이 왔다. 국내에서 재배되고 유통되는 복숭아의 종류가 100종이 넘는다지만 복숭아를 즐기는 이들에게는 딱 두 종류이다. 하나는 딱딱해서 이로 베어 물어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물컹해서 입술로 눌러 먹어도 되는 것이다. 새로운 말을 만들기 좋아하는 이들은 각각에 이름을 붙여주었으니 차례로 ‘딱복’과 ‘물복’이다. 과일에는 ‘딱딱한’과 ‘물’이 어울리지 않지만 이것이 붙은 두 단어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우리는 과일을 먹을 때 ‘과육’에 눈독을 들이지만 과일을 만들어내는 식물의 입장에서는 ‘씨’가 목적이다. 따라서 아직 씨가 다 여물지 않았으면 과육은 딱딱하고 달지도 않다. 그래야 짐승이나 인간이 먹지 않으니 식물은 그만큼의 시간을 벌어 씨앗이 다음 생을 기약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것은 안중에 없다. 적당히 당도가 올라 딱딱하더라도 씹는 맛을 즐길 수 있으면 먹는다. 그리고 당도가 최고치에 다다라 물처럼 먹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먹기도 한다.

그런데 이를 두고 사람들은 쓸데없는 논쟁을 벌인다. 탕수육을 두고 ‘부먹’과 ‘찍먹’의 논쟁을 벌이는 것도 모자라 과일에까지 그 싸움을 확대한 것이다. 복숭아뿐만 아니라 감에도 이 싸움이 번져 땡감만 아니라면 ‘딱감’과 홍시 사이에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런데 결국은 취향의 문제다. 통조림에 담긴 황도 같은, 혹은 까치와 나눠 먹어도 될 정도의 물컹한 과육을 위해서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딱복과 물복을 사람에게 적용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딱딱하지만 패기가 느껴지는 젊은 시절과 물컹하지만 연륜이 느껴지는 노년의 삶 중 어느 것이 나은가? 만나서 교류할 대상은 선택할 수 있지만 자신의 삶은 선택할 수 없다. 누구나 땡감으로 태어나서 홍시로 죽는다. 그러니 딱복과 물복의 시기 모두를 악착같이 즐겨야 한다.

 
 

07-12 아이스크림

날이 더우니 찬 것을 많이 찾는다. 찬 것 하면 떠오르는 것이 아이스크림, 아이스케이크, 쭈쭈바 등이다. 그런데 혹시라도 중국을 방문할 일이 있어 슈퍼마켓에, 아니 ‘차오스(超市)’에 가면 아이스크림이 아닌 ‘빙치린(氷淇淋)’을 찾아야 한다. 한자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그저 중국어 단어일 뿐이지만 한자를 뜯어 보면 빙치린은 ‘super’를 ‘超’로 ‘market’을 ‘市’로 번역한 것만큼이나 재미있고도 귀엽다.

‘氷淇淋’의 첫 글자는 얼음을 뜻하니 이해가 되는데 우리는 쓰지 않는 나머지 두 글자는 이해가 안 된다. 한자음으로는 ‘기림’이지만 중국어에서는 ‘치린’이다. 그렇다면 이 ‘치린’은 무엇일까? 귀엽게도 이는 번역하기 어려운 ‘크림’을 최대한 발음이 가까운 한자로 쓴 것이다. 따라서 둘을 합치면 ‘얼음 크림’이 되니 결과적으로는 영어의 이름과 같은 뜻이 된다.

버터와 우유를 섞어 만든 서양의 음식인 크림이 개화기 문헌에는 ‘소젖니불’ 또는 ‘소젖겁질’로 나타난다. 앞엣것은 크림의 모양이 솜이불 같아서 붙여진 것이다. 뒤엣것은 ‘껍질’의 옛말이 쓰인 것인데 이에 대한 뜻풀이로 ‘우유의 막’이 제시된 것으로 보아 우유에 생기는 얇은 막과 크림을 관련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새로운 문물이 이 땅에 들어왔을 때 그것을 보았거나 아는 이가 없으니 최대한 의역을 해서 그 뜻을 추측하게 하려는 배려의 산물이다.

오늘날 우리는 얼음이 ‘아이스’인 것도 알고 크림은 흔히 볼 수 있으니 ‘얼음니불’이라 하지 않아도 된다. 한글로는 어떤 발음도 유사하게 적을 수 있으니 ‘아이스크림’이라고 써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뜻글자인 한자로는 한계가 있으니 빙치린이란 편법이 쓰인 것이다. 외래어를 배격하는 이들은 ‘얼음과자’나 ‘빙과(氷菓)’를 고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구촌 시대에 가장 과학적인 소리글자 한글을 쓰며 사는 우리의 젊은 세대에게는 아이스크림이 더 어울린다.

 
 

07-19 자두와 돼지

‘李下不整冠(이하부정관)’이라 했다. ‘금일중식미정(今日中食未定)’을 금요일에 미정이와 중국요리를 먹는 것으로 아는 세대에게는 어렵다. 그래서 ‘오얏나무 아래에서는 갓을 고쳐 쓰지 마라’로 고쳐야 한다. 그래도 어렵다. ‘오얏’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 흔한 성씨인 ‘李’의 훈과 음이 ‘오얏 리’라는데 그 많은 이 씨들은 자기 성씨의 뜻도 모르니 반성해야 한다.

아니, ‘자두’는 다들 아니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다. 오얏은 자두의 옛말이자 고유어인데 요즘은 잘 안 쓸 뿐이다. 그런데 사실 자두도 한자로는 ‘紫桃(자도)’라고 쓰고 ‘자두’라고 발음하니 이상한 건 매한가지다. 엄연히 다른 품종인데 자줏빛의 복숭아란 이름이 붙었다가 그마저도 변한 것이다. 자두는 복숭아와 모양은 비슷하더라도 색깔과 과육의 질감은 다른데 복숭아의 아류로 취급되니 억울할 법도 하다.

지역에 따라 자두를 ‘왜지’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게 ‘오얏’과 같은 듯 달라서 고개가 갸우뚱해지기도 한다. 이 둘의 관련성은 엉뚱하게도 ‘돼지’가 풀어준다. 돼지는 본래 ‘돝’이었다. 방언에서 ‘도투’가 나타나고, 씨돼지를 ‘씨돝’이라고 하는 것이 그 증거다. 그런데 ‘돝’의 받침이 떨어지고 새끼를 뜻하는 ‘아지’가 붙어 ‘도야지’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돼지’가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야지’가 지역에 따라 ‘오얏’이나 ‘왜지’로 남은 것이다.

달큼하고 시큼한 자두를 먹으면서 돼지를 떠올리긴 어렵겠지만 기름진 돼지고기를 먹은 후 자두로 입가심을 할 만하다. 단어가, 그리고 말이 이토록 변화무쌍한 것을 안다면 말을 빌미로 젊은 세대들을 구박할 이유가 없다. 한문도 옛말 ‘오얏’도 어려우니 ‘자두나무 아래서 모자를 고쳐 쓰지 마라’라고 말하면 된다. 아니 자두나무 아래를 갓 쓰고 지나갈 일이 없는 시대에 왜 굳이 이 말을 인용하는가. 그들과 통하고자 한다면 그들이 알 만한 말을 써야 한다.

 
 

07-26 수라

외국의 국빈을 초대해 저녁을 함께한다면 주인이나 손님은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들지 않는다. 만찬장에서 음식과 술을 나누며 담소를 나눌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먹고 마시지만 그것이 누구냐에 따라 그 대상과 동작에 대한 표현이 달라지는 것이다. 특히, 임금에게는 ‘어선(御膳)’이나 ‘수라’를 ‘잡수시다’도 모자라 ‘젓수시다’라고 표현했다.

‘御(거느릴 어)’는 임금을 가리키고 ‘膳(반찬 선)’은 본래 반찬이란 뜻이지만 이 단어에서는 음식 전체를 가리킨다. 이 단어는 쉽게 풀이가 되지만 ‘수라’는 조금 복잡하게 풀어야 한다. 이 말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부터 쓰이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몽골어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몽골에서는 고기를 넣고 끓인 탕을 ‘슐런(sulen)’이라 했는데 이 음식이 고려 말 원의 내정 간섭기에 들어온 것이다. 음식과 그것을 가리키는 몽골어가 같이 들어왔으니 처음에는 ‘고기탕’ 정도의 뜻이었으리라.

그런데 고기가 귀하던 시절이었으니 고기를 넣어 끓인 탕은 귀한 음식 취급을 받았다. 고기가 주식인 유목민들에게는 고기가 채소보다 흔한 음식이겠지만 농경을 주로 하는 우리는 사정이 달랐다. 따라서 슐런은 어느 순간부터 귀한 음식을 이르는 말이 되었고 가장 귀한 존재인 임금이 먹는 음식을 가리키게 되었다. 이후 슐런은 아무래도 우리말의 일반적 소리와 다르니 ‘수라’로 바뀌게 된 것으로 본다.

많은 사극이 궁궐을 배경으로 하니 수라와 수라간은 꽤나 친숙한 단어가 되었다. 특히, 세계적으로 알려진 ‘대장금’의 활동 무대가 수라간이니 외국인에게도 익숙한 단어가 되었다. 몽골에서도 ‘대장금’이 방영되었는데 수라는 뭐라 번역이 되었을까? 몽골인들은 수라가 몽골어에서 기원한 것을 알까? 혹시라도 이 드라마를 본 몽골 사람을 만나면 해 줄 이야기가 생긴 셈이다. 안타깝게도 가슴 아픈 침략과 지배의 역사가 있었지만.

 
 

08-02 식감과 씹는 맛

 
 

음식의 맛을 평가할 때 혀로 느껴지는 짠맛, 단맛, 쓴맛, 신맛을 언급한다. 여기에 다섯 번째 맛이라는 감칠맛과 피부의 통각으로 느끼는 매운맛이 더해진다. 이 정도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아주 많은 사람이 ‘식감(食感)’을 언급한다. 한자의 뜻만 좇으면 ‘먹는 느낌’이지만 그 뜻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번역은 ‘씹는 맛’이다. 식감과 씹는 맛은 서로 겹치는 뜻도 있지만 미묘하게 다른 느낌을 나타내기도 한다.

동물의 입은 항문 반대쪽에 있는 입구 이상의 복잡미묘한 기관으로서 먹을 때 입술, 이, 혀, 목구멍이 복합적인 작용을 한다. 입에 들어온 음식을 입술로 가두고는 이로 찢고 간다. 혀는 음식이 잘 갈리고 씹히도록 골고루 뒤집다가 목으로 꿀떡 넘어가게 한다. 이 모든 것이 씹는 맛이고 그것을 한자어로는 식감이라 표현한다. ‘질기다, 딱딱하다, 퍽퍽하다’와 ‘연하다, 부드럽다, 촉촉하다’가 서로 대립하면서 이 느낌을 다양하게 표현해 준다.

음식의 재료는 저마다의 물성이 있으니 씹는 맛은 다르게 마련이다. 이 물성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이 요리이니 식감을 지배하는 것은 요리사에게 꼭 필요한 능력이기도 하다. 그런데 보통사람들의 식감은 그리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특히 같은 회를 두고 어떤 이들은 쫄깃하게 씹는 맛이 좋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부드럽게 목으로 넘어가는 맛이 좋다고 한다. 결국 부정확한 감각에 따른 취향의 문제일 뿐.

사람의 일생은 씹지 않아도 될 젖으로 시작했다가 늙고 병들면 씹지 못해 먹는 죽이나 미음으로 끝난다. 그렇다면 씹는 맛이나 식감은 건강하게 살아가면서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재료가 좋고 싱싱하면 씹는 맛이 살아 있다. 조리하는 과정에서 정성이 들어가면 식감은 덤으로 따라온다. 남은 것은 입이 아닌 마음으로 느끼는 것. 음식을 준비하는 이의 정성에 감사하는 마음이 씹는 맛과 식감을 더해 준다.

 
 

08-09 호미

호미씻이 할 때가 되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농업이 여전히 중요하지만 우리 삶의 중심이 도시로 옮겨진 상황이니 ‘호미씻이’란 말을 알아들을 이가 드물어도 그때가 되었다. 논매기가 끝날 무렵인 음력 7월쯤은 더위가 한창이라 하루쯤은 푹 쉬면서 즐겁게 놀아야 할 필요가 있으니 우리 조상들은 그날을 호미씻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말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한여름에 다들 떠나는 여름휴가로 생각해도 좋다.

농사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필요한 작물을 잘 길러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작물이 자라는 땅은 오로지 그 작물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니 그 땅에는 온갖 것이 뿌리를 내릴 수 있다. 그 모두가 소중한 생명이지만 농부에게는 그저 잡초일 뿐이다. 이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파고, 긁고, 캐낼 도구가 필요한데 이 용도에 특화된 농기구가 바로 호미다. 따라서 호미를 씻어 걸어 놓는 것은 결국 농사일을 하루 쉰다는 의미가 된다.

호미의 생김새와 용도 그리고 이용 빈도를 보면 호미는 우리 고유의 농기구일 듯하다. 그런데 만주어에도 ‘호민(homin)’이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호민의 끝소리 ‘ㄴ’은 명사라는 표시이니 결국 만주어와 우리말이 같은 셈이다. 다만 호미는 과거에 ‘호매’나 ‘호?’였으니 완전히 같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우리말이 좀 더 복잡하니 둘의 관련성도 더 살펴보아야 한다.

만주족과 만주어가 위세를 떨치는 상황이라면 호미의 원조를 두고 싸울 법도 하다. 그런데 만주 땅과 만주족을 품고 있는 중국이 나서지 않고 있으니 그 싸움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상이 같다고 여겨지는 한국어와 만주어이니 같은 말에서 갈라져 나와 공유하고 있다고 보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게다가 걱정할 일도 아닌 것이 우리의 대장간에서 만든 호미는 중국에서 만든 것과 비교도 안 되는 비싼 가격에 팔려 전 세계의 텃밭과 정원에서 쓰이고 있으니 말이다.

 
 

08-16 옥시 철에 놀러 오오

어이 가겠슴둥. 옥시 철에 놀러 오오. 여러 날 웃고 떠들며 방언 조사를 도와주신 아바이(할아버지)와 아매(할머니)의 마지막 인사는 이랬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녘땅 회룡시와 마주한 삼합진, 갈 수만 있다면 두만강을 건너 열차를 타고 한나절 만에 집에 갈 수 있다. 그러나 옌지(延吉)까지 버스로, 다시 옌지에서 비행기로 와야 하니 이틀이 걸리는 여정이다. 과연 이 먼 길을 옥수수 먹자고 다시 올 수 있을까?

요즘에는 옥수수가 나는 철이 별 의미가 없지만, 이들이 사는 땅과 살아온 세월을 헤아리면 그 의미가 깊다. 기차로 이 땅을 다니다 보면 가도 가도 옥수수밭과 수수밭이다. 집집마다 노란 옥수수를 엮어 말리는 더미가 보인다. 가을에 추수한 쌀이 떨어지면 보리를 수확해야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마저 떨어지면 옥수수가 익어야 배고픔을 면할 수 있었다. 결국 대접이 시원치 않아 미안하니 조금이라도 풍족할 때 다시 오라는 말씀이다.

옥수수는 줄기는 수수와 같지만 그 열매가 구슬 같대서 구슬 옥(玉)을 붙여 만든 이름이다. 수수도 굶주림을 달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지만 옥수수만 못하다. 그래서인지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리는 북한에서는 옥수숫가루를 쌀 모양으로 빚어 ‘옥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안데스의 험한 산지에 사는 이들에게 노란 옥수수는 땅에서 나는 황금과도 같은 존재였다.

요즘에는 워낙 대량으로 재배돼 가축의 사료나 공업용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중요한 식량이다. 농사지을 땅이 없어 두만강을 건넌 이들, 벼농사를 짓기엔 척박하고 비가 부족한 이곳에서는 옥수수가 쌀만큼이나 귀한 곡물이었다. 옥시 철이 여러 번 지났고 옥시뿐 아니라 흰술(고량주)과 돼지발쪽(족발)을 배불리 먹여 주겠다는데도 아직 못 갔다. 기차로 서해안과 압록강을 타고 올라가 두만강을 건너서 갈 수 있다면 그때나 가능할까?⊙

 
 

08-23 달달과 달짝지근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단맛이 느껴질 때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농익은 꿀을 한 숟갈 떠서 한입에 먹었을 때의 느낌을 방언에서는 ‘달치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달칠’ 정도의 단맛은 그리 즐거운 맛은 아니다. 달지만 괴롭지는 않은 맛, 설탕 범벅을 먹어 몸에 죄를 짓는 것은 아닌 정도의 기분 좋은 단맛을 우리는 원한다. 우리는 이때 ‘달달하다’와 ‘달짝지근하다’를 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당연히 사전에 올라 있어야 할 것 같은 ‘달달하다’가 사전에 없다. 사전에 없다는 것은 표준어가 아니라는 뜻이다. 사투리이거나 신조어란 말이다. 그런데 ‘달달하다’가 특별히 어느 한 지역에서만 쓰이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신조어일 듯한데 과연 그럴까? 신문을 찾아보니 1990년대 이후에야 나오기 시작한다. ‘덜덜’의 작은말로 ‘달달’이 많이 쓰이긴 하는데 ‘달달하다’는 잘 쓰이지 않았다.

이에 반해 ‘달짝지근하다’는 사전에도 실려 있고 꽤나 오래전부터 널리 사용되어 왔다. 오죽하면 노총각 ‘철벽남’과 대학생 딸을 둔 미혼모의 연애를 다룬 영화까지 만들어졌을까. 달달하다와 달짝지근하다 모두 ‘달다’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달’을 반복한 ‘달달하다’는 아무래도 ‘달달 떨다’에 쓰이는 ‘달달’ 때문에 새로운 단어로 자리 잡는 데 저항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전이나 규범을 찾아보면 생각만큼 달달하거나 달짝지근하지 않다는 것을 종종 느끼게 될 것이다. 기대했던 뜻풀이가 아니거나 자신이 옳다고 여겼던 것과 다른 맞춤법 규정은 그나마 낫다. ‘달달하다’나 ‘둘레길’은 아예 사전에 올라 있지도 않고 규범을 봐도 ‘둘레길’은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사전과 규범을 만드는 이들의 노고를 생각하면 지나친 분노는 삼가는 것이 좋겠다. 그들 또한 달달하고 달짝지근한 맛을 제공하고자 늘 애쓴다.

 
 

08-30 노각

오이는 무슨 색인가? 푸른색이라 대답하는 이는 ‘마트’에서만 오이를 본 사람이다. 밭이나 시골의 시장에 가 보면 누런색의 오이를 보게 된다. 오이가 다 컸을 때 바로 따지 않고 묵히면 늙은 오이가 되는데 색이 누레지고 껍질은 자글자글 갈라진다. 이렇게 늙은 오이를 보면 왜 중국어로 오이를 ‘황과(黃瓜·huanggua)’라고 하는지 이해가 된다.

이런 오이를 그저 ‘늙은 오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노각’이란 이름을 따로 붙여주기도 한다. 아무리 봐도 한자어일 것 같은데 첫소리는 ‘老(늙을 로)’인데 뒤의 ‘각’은 이에 합당한 한자를 찾을 수 없다. 그래도 ‘늙은 오이’보다는 뭔가 ‘있어 보이는’ 이름이기는 하다. 오이는 푸릇할 때 먹어야 제맛이라고 생각하지만, 노각도 여러모로 쓸모가 있다. 생채로 새콤하게 무쳐 먹어도 맛이 있고 장아찌나 김치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심지어 찌개에 넣기도 한다.

노각도 쓸모가 있다지만 일부러 노각이 되게 하는 경우는 드물다. 여름의 오이밭에 가 보면 샛노란 암꽃 밑에 새끼손가락 크기로 생겼던 열매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생장 속도가 빠르다 보니 미처 따지 못해 남겨진 오이가 노각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나 식물 모두 늙는 게 서러우니 일부러 늙힌 것이 아니라 숨어서 저절로 늙은 것이다.

어린아이는 엄마와 할머니를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으로 인식한다. 엄마는 젊고 고운데 할머니는 늙고 주름살이 많기 때문이다. 아이가 나이 들면 엄마나 아빠가 되고 그때쯤이면 엄마가 할머니가 된다고 해도 믿지 않는다. 아니, 엄마의 고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푸른 오이와 고운 엄마만 아는 아이도 자라서는 푸른 오이가 된다. 그때가 돼서야 늙은 엄마, 혹은 할머니도 여전히 엄마라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노각도 오이이고 모든 오이는 언제나 맛있다.

 
 

09-06 손질

 
 

어떤 단어의 뒤에 붙어 새로운 말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말이 있다. 국어 시간에 배운 지식을 되살려보면 ‘접미사’라고 분류하는 말이 그것이다. 접미사 가운데 흔히 쓰이는 것 중 하나가 ‘질’인데 이 말은 좀 고약하다. ‘호미질, 낚시질, 마름질’ 등은 그나마 중립적인데 ‘쌈질, 도둑질, 고자질’을 보면 별로 좋은 데 쓰이지는 않는다. 심지어 ‘호미질’과 비슷한 구조의 ‘삽질’이나 으뜸을 뜻하는 ‘갑(甲)’이 붙은 ‘갑질’은 전혀 좋은 뜻이 아니다.

옌볜(延邊) 조선족 자치주에 방문할 때 안내를 맡은 이의 소개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당황스럽다. ‘이분은 ○○대학에서 교수질을 하는 ○○○임다’라고 소개하니 말이다. 우리들의 용법에서 ‘교수질’ 혹은 ‘선생질’은 딱히 할 일이 없어 하는 일 또는 교수랍시고 잘난 체하는 짓 정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접미사는 어디에나 붙을 수 있는 말이고 특별히 나쁜 뜻은 없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이 접미사가 붙은 말 중에서 꽤나 고마운 말이 있다. 일할 때 쓰는 ‘손’에 붙어 만들어진 ‘손질’인데 사전에서는 이 단어를 ‘손을 대어 잘 매만지는 일’이라 풀이하고 있다. 이것이 음식과 관련되면 조리하거나 먹기에 편하도록 재료를 준비하는 것이 된다. 마트에 가면 손질된 채소나 생선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극대화되면 ‘밀키트’가 된다.

재료부터 구해 모든 과정을 스스로 해서 먹는 음식, 손질된 재료를 사서 조리해 먹는 음식, 조리까지 끝난 것을 배달시켜 먹는 음식 등 여러 단계가 있다. 이 중에 어떤 음식이 가장 좋을까? 저마다의 사정에 따라 선택해야 하니 호불호는 있을지언정 정답은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에서 누군가의 손에 의한 ‘손질’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겠다. 그 손질의 정성을 안다면 함부로 ‘입질’을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 말은 함부로 입을 놀린다는 뜻의 신조어이다.

 
 

09-13 동그랑땡

명절 분위기는 집 안에 가득 찬 기름 냄새로 고조된다. 기름을 듬뿍 두른 번철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것은 역시 동그랑땡이 최고다. 동그랑땡? 이렇게 예쁘고 재미있는 이름이 또 있을까? ‘동그랑’은 모양을, ‘땡’은 소리를 가리키니 모양과 소리로만 만들어진 단어이다. 이 단어가 사전에도 올라 있으니 어엿한 우리말이다. 그런데 이 음식은 동그랗기는 하지만 ‘땡’ 소리가 나지는 않는데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동그랑땡을 이해하려면 돈저냐를 알아야 하고 돈저냐를 알려면 저냐를 알아야 한다. 저냐는 얇게 저민 고기나 생선 따위에 밀가루를 묻히고 달걀 푼 것을 씌워 기름에 지진 음식이다. ‘저냐’라는 단어가 지극히 낯설게 느껴지는데 아무래도 한자어 ‘전유어(煎油魚)’나 ‘전유화(煎油花)’의 발음이 변해서 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엽전 크기와 모양으로 만들었으니 앞에 ‘돈’을 붙여 ‘돈저냐’가 된 것이다. ‘돈저냐’의 돈은 돼지를 뜻하는 ‘돈’이 아니다.

‘땡’은 왜 쓰였을까? 동전을 바닥에 던져보라.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우리 조상들은 ‘땡’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생긴 건 동그랗고, 던지면 ‘땡’ 소리가 나는 엽전을 ‘동그랑땡’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던 것이다. 실제로 1960년대의 신문을 보면 ‘동그랑땡 사정이 안 좋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주머니 사정이 안 좋다’는 말이다. 엽전을 가리키는 귀엽고 예쁜 말이 음식을 가리키는 말로 진화한 것이다.

다진 고기에 두부나 채소 등을 섞어 달걀을 두르고 지져 내는 음식은 맛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다. 맛도 맛이지만 양을 늘리는 방법도 되니 귀한 고기로 만든 음식을 여럿이 맛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걸 담양에서 만들면 떡갈비가 되고 서양에서 만들면 햄버거가 된다. 동그랑땡은 부치자마자 하나 얻어 입에 넣고 ‘허허후후호호’ 하며 먹어야 맛있다. 그리고 음식이 아닌 돈을 먹는 셈이니 더 맛있게 느껴야 한다.

 
 

09-20 안잠자기와 ‘필리핀 이모’

옛날에 지어진 집을 보면 주방에 딸린 작은 방이 있다. 이 방의 이름을 무엇이라 할까? 공식적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이 방을 ‘식모방’이라고 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말 그대로 남의 집에서 주로 부엌일을 맡아 하는 여자를 뜻하는 ‘식모’의 방이다. 식모의 주된 일터가 부엌이니 가까운 곳에 작은 방을 둔 것이다. 식모에게도 방 하나가 주어진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일을 가까이서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이 하라는 의미이니 썩 유쾌한 방은 아니다.

이런 방의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안잠자기’, 나아가 이를 줄인 ‘안잠’을 만나게 된다. ‘안잠’은 집 안에서 자는 잠을 뜻하고 ‘자기’는 잠을 자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나 안잠자기는 단어의 구성 요소만 보면 집 안에서 자는 사람을 가리킨다. 식구 모두가 집 안에서 자는데 굳이 왜 이런 말이 만들어졌을까? 집안 식구가 아닌 이가 집안일을 도우면서 자신의 집에 가지 않고 자니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살림이 커서 남에게 일을 맡겨야 하는 집, 여유가 있어서 살림할 사람을 부릴 수 있는 집에서는 식모든 안잠자기든 얼마든지 고용할 수 있다. 남의 식구이지만 가까이서 언제든 집안일을 도와주는 이니 고마워해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 그이는 집에 갈 수 없는 처지, 그래서 가족과 떨어져 ‘밖잠’을 잘 수밖에 없는 처지이니 배려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집 밖’이 아닌 ‘나라 밖’에서 잠을 자며 집안일을 도울 사람이 대거 이 땅에 들어왔다. 누군가는 ‘식모’라고만 여기지만 가사와 육아 전반에 도움을 주기를 바라면서 들이는 이들이다. 일손은 필요하지만 비싸다고 여겨질 수 있는 품삯을 주며 밖에서 들여야 하냐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영어를 할 수 있는 이들이니 자녀들의 영어 교육에 도움이 될 거란 기대를 거는 이도 있다. 결국 나라 밖에서 안잠을 자게 될 이들에 대한 대접과 활용은 같이 잠을 잘 식구들의 몫이다.

 
 

09-27 계란과 야채를 허하라!

일제강점기인 1937년, 복혜숙을 비롯한 몇 명의 여성이 잡지에 낸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라는 성명서는 제목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준다. 딴스홀은 곧 무도장, 오늘날로 치면 나이트클럽이다. 완고한 총독부가 이를 허가하지 않아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 외침은 여전히 강렬하다. 이들의 외침을 90년 뒤에 끌어와 ‘서울’ 대신 ‘신문’으로, ‘딴스홀’ 대신 ‘계란’과 ‘야채’로 바꿔서 생각해 보자.

텔레비전을 보다 보면 출연자가 ‘계란’과 ‘야채’를 말하더라도 자막에서는 악착같이 ‘달걀’과 ‘채소’로 고친다. 일상에서는 흔히 쓰는 말이지만 방송이나 신문에선 안 된다는 지침 때문이다. 달걀은 고유어인데 계란(鷄卵)은 한자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야채(野菜)’와 ‘채소(菜蔬)’ 모두 한자어이니 말이다. 우리말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분께서 계란과 야채가 일본에서 만든 한자어라고 지적한 뒤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금기어처럼 되었다.

일본에서 만든 한자어를 쓰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리하면 우리의 사전은 무척이나 홀쭉해질 수밖에 없다. 한자어가 폭발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서구의 물결이 밀려오던 시기이다. 우리는 이때 나라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문물과 사상을 한자어로 표현하는 것은 중국과 일본의 몫이었다. 우리는 그저 받아 쓰다 훨씬 후에 동참했다.

일찍부터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일본, 오랫동안 자의든 타의든 서구와 접촉했던 중국은 동등하게 한자 신조어를 만들었다. 따라서 우리말에서 일본제 한자어를 뺀다면 한자어를 반쯤 덜어내야 한다. 한자어도 우리말이니 계란과 야채가 안 될 이유가 없다. 야채가 본래 들나물을 뜻하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미 사전에선 채소와 같은 뜻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쯤 되면 계란과 야채를 허할 법도 하지 않은가?

 
 

10-04 마룩김치

 
 

나고 자라면서 익힌 사투리는 어느 날 갑자기 별똥별처럼 반짝일 때가 있다. 지인들과 밥을 먹는 자리에 배추와 무를 네모로 썰고 파와 배로 색과 맛을 더한 뒤 국물을 듬뿍 잡은 김치가 나왔다. 일행 중 하나가 “마룩김치네!”라고 하자 옆에서 “어? 강화도 사람이야?”라는 말이 뒤를 이었다. 서로의 고향을 모르고 있었는데 ‘마룩’이란 말 때문에 고향을 들키고 고향이 읽힌 것이다. 마룩김치는 황해도와 황해도의 영향을 받은 강화도에서 주로 쓰니 그럴 수밖에.

‘마룩’은 언뜻 보면 우리말이 아닌 듯 보인다. 그런데 본래 ‘말국’이었고, 이것이 ‘국물’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지역에 따라 ‘멀국’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어느 것이든 건더기가 아닌 국물, 그것도 맑은 것에 초점을 맞춘 말이다. ‘말국’이 ‘마룩’이 되는 것은 마술처럼 보이지만 과거엔 ‘ㄹ’ 뒤에서 ‘ㄱ’이 탈락하기도 했다. ‘ㄱ’이 탈락한 자리에 받침 ‘ㄹ’이 옮겨지니 ‘마룩’이 된 것이다.

그런데 김치에 국물이라고? 어떤 김치든 국물이 조금씩 있기 마련이지만 이 마룩김치는 국물이 아주 많은 김치를 가리킨다. 이런 김치는 ‘물김치’라고 불리기도 하고 ‘나박김치’라고 불리기도 한다. 물김치는 국물을 많이 잡아 시원하게 먹을 수 있는 김치이다. 그리고 나박김치는 본래 무를 네모나게 썰어 넣고 국물을 많이 잡은 김치이다. 조금 다른 김치이지만 국물이 많다는 점에서는 같다.

다른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같은 음식인데도 이름이 다르거나, 혹은 이름은 같은데 다른 음식인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짠지’는 무나 오이를 소금물에 절인 것을 이르지만 황해도에서는 김치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옌볜(延邊) 지역에서 찰떡이라고 파는 것은 인절미와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상하다거나 틀렸다고 할 일이 아니다. 지역에 따라 말도 음식도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이 땅에서 난 재료로 만든 음식이다.

 
 

10-11 까나리와 양미리

텔레비전의 예능 프로그램이 많은 사랑을 받게 되면 그 영향력은 놀랍다. 하룻밤을 자며 이틀 동안 전국을 누비는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여서 액젓 혹은 구이에 쓰이는 생선 하나를 전국구로 만들어 놓았다. 마침 액젓의 색깔이 커피와 비슷해 커피 ‘복불복’의 단골손님인 액젓을 만드는 까나리가 그것이다. 그리고 겨울에 살이 오르고 알이 꽉 찬 것을 잡아 굵은 소금을 쳐 연탄불에 구워 먹는 양미리가 그것이다.

이름이 둘이니 서로 다른 생선으로 불리지만 실은 같은 것을 두고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한류성 어종이어서 찬 바닷물을 따라 이동하는데 날씨가 따뜻할 때는 주로 서해안에서 보이다가 알을 낳을 무렵인 겨울이 되면 동해안으로 이동한다. 서해안에서는 채 크지 않은 것을 잡아 액젓으로 만드는데 그것이 까나리다. 동해안에서는 다 크고 알도 가득 찬 것을 잡아 구이나 찜으로 먹는데 이것이 양미리다.

본래 양미리란 물고기는 따로 있지만 크기도 작고 많이 잡히지도 않으니 동해안에서는 그와 비슷하게 생긴 까나리 성체를 양미리라 부르는 것이다. 결국 양미리는 까나리의 동해안 방언인 셈이니 표준어로는 모두 까나리라고 불러야 한다. 그러나 물고기를 잡는 것은 어부의 마음이요, 그것의 이름을 짓는 것은 먹는 이의 마음이다. 까나리 액젓으로 김치를 담그고 양미리 구이를 먹는 것도 결국 선택의 몫이다.

이것을 어느 하나로 불러야 한다고 강요한다면 선택되지 못한 말은 버려야 한다. 그러나 둘 다 인정한다면 우리말은 더 풍부해지고 까나리가 양미리가 되는 마법도 경험할 수 있다. 크지 않은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더니 남쪽에선 다시 동서로 나뉘는 상황을 자주 보게 된다. 동이 있어야 서가 있는 법, 서로를 지독히 미워하며 갈등할 일이 아니다. 서쪽에서 잘 자라 동쪽으로 온 양미리를 먹고 그것이 낳은 알에서 깬 새끼가 다시 서해로 가야 까나리 액젓이 된다.

 
 

10-18 콩쥐와 콩순이

신데렐라와 콩쥐 팥쥐 이야기는 놀랍도록 이야기 구조가 유사하다. ‘신데렐라’는 재투성이 아가씨 정도의 뜻이라는데 ‘콩쥐’와 ‘팥쥐’는 무슨 뜻일까? ‘콩’과 ‘팥’이 곡물인 것은 분명하니 ‘쥐’의 뜻만 밝히면 된다. ‘쥐’라 하면 누구나 자루를 쏟아 콩과 팥을 갉아먹는 동물을 떠올리겠지만 그리 이해하면 석연찮은 점이 많다. 이야기에 쥐가 등장할 이유도 없고, 계집아이 이름에 ‘쥐’를 붙일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성 뒤에 붙어 양민의 아내나 과부를 부를 때 쓰였던 ‘召史’가 ‘소사’뿐만 아니라 ‘조이’로도 읽힌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한자의 뜻과 지시하는 대상 사이에 관련성이 없어 고유어를 소리가 비슷한 한자로 기록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통상적인 한자음이 아닌 다른 음으로도 읽힌다. ‘조이’가 ‘죄’로 줄어드는 것, ‘죄’가 ‘쥐’로 바뀌는 것은 매우 흔한 변화이다. 이렇게 보면 ‘콩쥐’의 ‘쥐’는 여자를 가리키는 말로 볼 수 있지 않은가?

한마을에 살면서도 손 한 번 못 잡아 본 갑순이와 갑돌이, 이들의 이름은 흔한 여자 이름과 남자 이름을 대변한다. 남자 이름에 ‘돌’이란 이름이 많다 보니 중국에는 없던 한자 ‘乭’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여자 이름엔 ‘順’을 썼고 ‘길동이’처럼 이름 뒤에 붙이는 ‘이’를 쓴 ‘順伊’도 많았다. 이런저런 정황을 생각해 보면 ‘콩쥐 팥쥐’에 붙은 ‘쥐’는 계집아이, 나아가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이야기가 오늘날에 지어졌다면 그 주인공은 ‘콩순이 팥순이’였을 터, 콩과 팥의 귀여운 느낌이 잘 살아난다. 우리 조상들에게는 ‘조이, 죄, 쥐’가 이런 느낌이었을 듯하다. 그런데 놀랍다. 이 땅의 모든 여자아이가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듯한 인형의 이름이 ‘콩순이’이고 이들 모두가 즐겨 보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도 ‘콩순이’이다. 이들이 옛날에 만들어졌다면 그 이름은 당연히 ‘콩쥐’였을 것이다.

 
 

10-25 보리꼬리를 파는 할머니

그 생김새는 참으로 해괴하다. 채소라고 팔지만 모양새를 보면 굵은 줄기에 잎이 빼곡한 나무처럼 생겼다. 윗부분만 보면 가을날 뭉게구름 같고, 다시 보면 양의 머리 같기도 하다. 튼실한 줄기처럼 보이는 부분은 꽃대이고 빽빽하게 자리 잡은 것은 잎이 아닌 꽃이다. 채소는 잎, 줄기, 뿌리, 열매 등을 다 먹을 수 있지만 이 채소는 꽃을 먹으니 꽤나 특이한 채소다. 그 이름은 브로콜리, 이름도 특이하다.

영어나 다른 외국어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 이름이 나고 자란 고향에서 평생을 살아온 어르신들에게는 낯설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 우리말에 있는 말소리이지만 이런 식으로 결합한 단어들이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이 말이 입에 잘 붙지 않는다. ‘보리꼬리’부터 ‘부로커’까지. 그래서 용돈이라도 벌 요량으로 집에서 기른 이 채소를 들고 시골 장터에 나온 할머니들은 마음대로 이름을 붙인다. 이 둘은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데 ‘부르크리, 부록걸이, 뿔로콘’까지 가면 난감해진다.

외래어표기법에 따르면 ‘브로콜리’라고 적어야 하지만 평생을 한국어의 말소리만 접해온 분들에게 강요하기 어려운 단어이다. 당신들의 귀에 들리는 대로 적는 것인데 표기법을 들이대며 빨간펜으로 고치려고 애쓸 일도 아니다. 오히려 이런 표기들을 보면 할머니가 ‘몸뻬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 주시는 먼지 묻은 알사탕 같은 느낌이 나기도 한다.

한글학교와 영어학교, 시골의 어르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배움의 기회가 없어 ‘까막눈’으로 살던 이가 많았던 시절에는 한글학교가 필요했지만 오늘날 이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어학교이다. 브로콜리라는 발음이 자연스럽게 입에 붙게 하는 것이 그것이다. 도시나 외국에 가서도 ‘Toilet’을 보고 ‘뒷간’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보리꼬리를 파는 할머니들에게 더 필요할 수도 있다.

 
 

11-01 맘모스빵

 
 

뜨거워진 지구는 북구의 언 땅속에 잠들어 있던 동물들마저 세상으로 나오게 하고 있다. 지금도 살아 있는 ‘코끼리’는 생김새에 어울리는 우리말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본 적도 없는 이 짐승의 우리말 이름이 있을 리 없다. 그 이름은 매머드, 그러나 우리에게는 ‘맘모스’가 더 자연스럽다. 거친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의 토착어가 일본에 ‘만모스(マンモス)’로 받아들여졌고 우리는 일본식 발음을 받아들인 결과이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는 매머드와 관련이 있는 빵을 먹는다. 이미 멸종한 매머드 고기나 다른 부위로 빵을 만들 수는 없을 터, 그 이름을 붙인 빵이 있다는 말이다. 그 이름은 맘모스빵, 외래어표기법을 따른다면 ‘매머드빵’이라고 해야겠지만 근엄한 국어 선생님조차도 이 빵은 ‘맘모스빵’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크고 두툼한 두 겹의 빵에는 밤이나 건포도가 올려져 있고, 그사이에는 크림이나 잼이 듬뿍 들어 있다. 크기나 열량을 감안하면 역시 맘모스빵이 어울린다.

맘모스빵에 쓰이는 소보로빵의 이름은 일본어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의 빵집에서 개량되고 발전된 거대한 소보로빵에 우리가 좋아하는 토핑, 크림, 잼 등을 얹고 발랐으니 우리의 빵이라 할 만하다. 크기와 모양이 마치 이불처럼 보이니 ‘이불빵’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정겹기도 하다.

‘가성비’와 ‘가심비’란 말이 유행하는 시대이다. 음식의 중요한 성능은 역시 배부름이니 크고 값싼 맘모스빵은 최고라 할 수 있다. 토핑, 크림, 잼의 달콤함은 비할 데 없으니 가격 대비 심적 만족도 역시 나무랄 데 없다. 높은 열량, 지나친 단맛 때문에 꺼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추억을 되살리며 가끔씩 배불리 먹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동토에 묻혀 있어야 할 매머드가 세상에 나오는 것은 달갑지 않지만 배부르고 달콤한 맘모스빵은 반갑다.

 
 

11-08 대궁과 잔반

영화 ‘광해’의 가장 익살스러운 장면을 꼽으라면 역시 졸지에 왕이 된 하선이 ‘매화’를 싸고 궁녀들의 시중을 받는 장면일 것이다. 진짜 왕과 달리 시원스럽게 자배기로 쌌으니 경하를 받을 만한 일이기도 하다. 못 먹어보던 기름진 음식을 양껏 먹었으니 푸짐하게 쌀 수밖에. 그런데 그토록 맛나게 먹던 하선은 수라간 사람들이 자신의 먹성 때문에 굶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먹다 말고 수저를 놓게 된다.

하선의 행동은 ‘대궁’을 위한 것이다. 대궁은 먹다가 그릇에 남긴 밥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은’이 아니라 ‘남긴’이다. 입맛이 당기고 양도 차지 않아 더 먹을 수 있지만 식욕을 누르고 밥과 반찬을 남긴 것이다. 궁중의 수라간은 왕실 사람들이 먹을 밥만 짓는다. 일하는 이들의 밥을 따로 짓지 않으니 이들은 먹고 남은 밥을 먹을 수밖에 없다. 이를 아는 윗사람들은 눈치껏 밥과 반찬을 남긴다. 먹고 남은 것이 아니라 먹다 남긴 것이니 아랫사람에 대한 배려가 담긴 것이 대궁이기도 하다.

대궁을 요즘 말로 하면 ‘잔반(殘飯)’일 텐데 말맛이 사뭇 다르다. 이 말은 가정에서는 많이 안 쓰고 군대나 식당 등 많은 사람이 밥을 먹는 곳에서 쓰인다. 더 결정적인 차이는 ‘남긴 밥’이 아니라 ‘남은 밥’이라는 것이다. 입맛이 없든, 양이 많았든 다 먹지 못한 밥이 곧 잔반이다. 의도하고 남긴 밥이 아니니 깨끗하지 않아 남이 먹을 수도 없는 밥이다.

배불리 먹기 어려운 시절의 대궁은 다른 이에 대한 따뜻함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그러나 먹을 것이 넘쳐나는 요즘의 잔반은 감염병 때문에 가축의 밥으로도 쓰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 음식물 쓰레기와 다를 바 없기도 하다. 대궁은 남기는 것이 남을 위한 배려이다. 그러나 잔반은 남기지 않는 것이 설거지하는 이나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는 이들, 그리고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환경에 대한 배려인 시대에 살고 있다.

 
 

11-15 불가사리

바닷가를 거닐다 보면 종종 별 모양으로 생긴 생명체를 보게 된다. 우리가 별을 그릴 때 정오각형의 꼭짓점을 연결하는데 이 생명체의 발처럼 생긴 것이 다섯 방향으로 뻗어 있어 별과 생김새가 비슷하다. 그 이름을 모르는 아이들은 ‘별 물고기’로 부르고 싶어 하겠지만 이 생명체는 ‘불가사리’라는 분명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생물의 분류체계상으로는 극피동물에 속해 성게나 해삼과 같은 부류이지만, 식용으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그런데 불가사리란 이름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이름은 ‘불가살(不可殺)’에서 온 것인데 한자의 뜻 그대로 죽일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 동물이 웬만해서는 죽지 않고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가도 새로 재생되는 특성을 감안하면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에게 가장 큰 적은 인간인데 불가사리는 맛도 없고 냄새도 지독해 먹지 않으니 더더욱 죽을 일이 없기도 하다.

그러나 불가사리란 이름이 이 동물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의 전설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곰의 몸, 코끼리의 코, 소의 꼬리, 범의 다리를 닮은 형상으로 묘사되니 실재하기는 어려운 동물이다. 주된 먹이인 쇠를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점점 더 강해져 결국에는 죽지 않거나 영원히 죽일 수 없는 동물로 묘사된다. 수없이 많은 전설과 설화가 있는데 결국은 나쁜 꿈과 사악한 기운을 쫓는 동물이다.

죽지 않거나 죽일 수 없는 것은 불가사리의 타고난 속성이니 미워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수많은 수산물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으니 먹을 것을 빼앗기는 인간으로서는 좋게 보려야 좋게 볼 수 없는 존재이다. 몸에 좋다면 뭐든 먹는 우리이니 이를 처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몸에 좋다는 소문을 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동물을 이용해 약이나 화장품을 만든다는 소식은 있지만 몸에 좋기는커녕 먹을 수 있다는 소문도 아직은 없다.

 
 

11-22 고명딸

지난 1992년에 방영돼 큰 인기를 누렸던 드라마 ‘아들과 딸’에는 세 남매가 등장하는데 그 이름이 차례로 ‘후남(後男), 귀남(貴男), 종말(終末)’이다. ‘귀한 아들’보다 먼저 태어난 딸은 ‘후에는 남자’가 태어나기를 바라는 이름이다. 그리고 아들 뒤에 태어난 딸의 이름은 ‘딸은 이제 그만’이란 뜻인데 과거에는 ‘꼭지’나 ‘곡지’라고 쓰기도 했다. 지독한 ‘남아선호’에 ‘여아증오’의 이름이다. 음식의 이름이 들어간 ‘고명딸’도 왠지 증오는 아닐지라도 비하의 의미가 담겼을 듯한데 묘하게도 아니다.

고명은 음식의 모양과 빛깔을 돋보이게 하고 맛을 더하기 위해 음식 위에 얹거나 뿌리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고명딸 또한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에 불과하니 딸을 비하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고명딸이란 말이 성립하려면 적어도 아들은 둘이 있어야 하고 딸은 하나만 있어야 한다. 꼭 있어야 할 아들이 둘 이상은 있으니 딸 하나쯤은 양념으로 있어도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고명딸은 ‘양념딸’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런 뜻을 감안하면 딸을 아들 위에 얹힌, 혹은 아들의 맛을 더해주는 존재로 취급하는 것이니 기분이 나쁠 법도 하다. 그러나 남자들만 득실대는 집안의 유일한 딸이니 특별한 사랑을 받을 만한 존재라는 것도 가늠해 볼 수 있다. 실제로 ‘고명딸’이란 말을 대하면 사랑스러운, 또는 사랑을 받는 딸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외동딸’도 딸이 하나라는 뜻이지만 ‘무남독녀(無男獨女)’가 앞에 붙으면 아들을 낳지 못한 아쉬움, 혹은 그래도 딸 하나라도 있다는 안도감이 교차하는 말이다. 아들 하나에 딸 하나만 있으면 외동딸이되 고명딸은 아니고, 아들 둘 이상에 딸 하나면 고명딸도 되고 외딸도 되니 셈과 이름 붙이기가 좀 복잡하다. 음식에 양념이나 고명은 점점 더 화려해지는데 고명딸이나 양념딸이란 말은 사라져 가고 있다. 자식을 셋 이상 낳아야 하니.

 
 

11-29 주스와 쥬스

구약성서 사사기에는 ‘곡식 이삭’이나 ‘강가’ 등을 뜻하는 ‘십볼렛(Shibboleth)’이란 단어가 나온다. 그런데 이 단어는 특정 집단을 구별해 내는 수단을 가리키는 말이 됐다. 이 단어를 ‘쉽볼렛’이라 발음하면 에브라임 사람으로 보고 살려 주고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죽였다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간토(關東)대지진 때 ‘십오 원 오십 전’을 뜻하는 ‘주고엔 고짓센(じゅうごえん ごじっせん)’의 발음 여부에 따라 조선인을 학살한 것도 비슷한 사례이다.

영어 단어 ‘Juice’의 표기와 발음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이 단어를 ‘쥬스’라 쓰고, ‘Television’도 ‘텔레비젼’이라 쓰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쥬-주, 져-저’를 구별해서 발음하거나 듣지 못하니 ‘주스’와 ‘텔레비전’으로 적도록 규정한 것이다. 그런데 평안도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평안도 사람들은 두 소리를 구별할 수 있으며 표기도 ‘쥬스’와 ‘텔레비죤’으로 한다.

이는 ‘ㅈ’이 발음되는 위치 때문인데 세종대왕 당시에는 ‘ㅈ’이 이와 잇몸의 경계에서 발음됐기 때문에 이 둘이 잘 구별되었다. 그런데 평안도를 제외한 지역에서 ‘ㅈ’이 입천장에서 발음되기 시작하면서 구별해 발음하거나 듣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평안도는 여전히 과거의 발음을 유지하고 있으니 자세히 들어보면 ‘ㄷ쥬스’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 때문에 우스갯소리로 ‘주스’의 발음만으로도 간첩 여부를 가려낼 수 있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십볼렛이 돼서는 안 된다. 함경도, 황해도 사람들의 ‘ㅈ’ 발음은 남쪽과 같으니 이 발음 여부로 모든 북쪽 출신들을 가려낼 수는 없다. 나아가 십볼렛이든 방언의 차이에 대한 인식이든 그것이 탄압이나 차별이 돼서도 안 된다. ‘주스’든 ‘쥬스’든 발음 여부와 상관없이 ‘과일 단물’이고, 지역과 말에 대한 차별이 없어져야 모두가 즐기며 마실 수 있다.

 
 

12-06 효종갱(曉鐘羹)

 
 

경기도 광주에서 밤새 수십 리 길을 달려 새벽에 한양의 재상 집에 도착한 국이 있다. 갖은 채소에 쇠고기, 해삼, 전복을 넣어 하루 종일 끓였으니 맛과 영양은 최고일 수밖에 없다. 그 먼 길에도 온기를 유지하고 있으니 담백하고 향기로워 해장국으로는 최고라 할 수 있다. 1925년에 최영년이 쓴 ‘해동죽지(海東竹枝)’에 나오는 ‘효종갱(曉鐘羹)’에 대한 내용이다. ‘효종’은 새벽종이니 그 종이 울릴 때 먹는 국이다.

일제강점기의 책에 단 몇 줄 언급된 게 전부이지만 여러모로 ‘우려먹기’에 좋은 음식이다. 배달의 민족을 자처하는 우리이기에 배달음식의 시초 또는 ‘끝판왕’이라 우길 만도 하다. 장삿속이 밝은 이는 기록에 나온 재료로 밤새 끓여 경기도 광주에 효종갱 간판을 내걸고 해장국 집을 운영할 만하다. 그러지 않더라도 유능한 글쟁이라면 끓이고 옮긴 이의 정성이 마지막까지 온기로 남아 있다는 미담으로 포장해 우리의 음식문화를 찬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거짓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거짓이다. 송파 인근도 광주였으니 이곳에서 우마차나 배로 날랐다 하더라도 너무 시간이 걸린다. 항아리를 솜으로 둘렀다지만 그때까지 온기를 유지하기는 어렵다. 날이 궂으면 길이 막히니 매일 나를 수도 없다. 고정적인 수요가 있다면 도성 안에서 끓여 팔면 될 터인데 굳이 배달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왠지 가끔 바치는 뇌물로 보인다.

그러나 국은 거짓이 아니다. 매일 아침 밥상에 따뜻한 국이 있다면 새벽밥을 지은 이가 있다. 새벽에 해장국집을 찾아도 따뜻한 국이 대령된다면 밤새 국솥을 지키며 끓여낸 이의 노고가 있다. 편의점에서 사다가 데워 먹는 국이더라도 그것을 만든 이들의 굵은 땀방울이 배어 있다. 이처럼 따뜻한 국은 누군가의 노력에 의해 끝까지 온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효종갱이 아니더라도 국은 따뜻해야 하고 그것을 먹는 사람의 마음도 따뜻해야 한다. 그래야 국이다.

 

12-13 김치가 美쳤다

김장을 마치고 김칫독을 묻거나 김치냉장고에 쟁여둔 이맘때면 불안하기 짝이 없다. 과연 김치가 맛이 있을까? 김장하는 날에는 갖은양념과 젓갈, 그리고 보쌈에 눈코입이 가려져 그 맛을 제대로 보지 못한 듯하다. 불안한 마음에 김칫독이나 김치통을 열어 맛을 본다. 아뿔싸! 큰일이다. 양념과 배추가 따로 놀고 배추 줄기에서는 쓴맛이 난다. 맛있게 익어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우러지지 못한 젓갈 냄새만 역하게 풍겨올 뿐이다.

김치가 미쳤다. 덜 익었다는 둥, 맛이 덜 들었다는 둥 여러 표현이 있지만, 이때 딱 맞는 표현은 이것이다. 왜 이런 표현을 쓰는지, 누가 쓰기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주로 전라도 지역에서 이런 식으로 쓴다. 그렇다고 진짜 미쳐서 광기를 부린다는 것은 아니다. 김치가 막 익기 직전에, 채소와 양념 그리고 젓갈이 어우러지지 않아 각각의 맛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 순간이다. 이때가 지나면 비로소 맛이 드니 안심해도 좋다.

미쳐야 미친다. 본래 ‘불광불급(不狂不及)’이니 ‘미치지 않으면 다다르지 못한다’ 정도의 뜻이지만 이렇게 번역해야 운도 맞고 뜻도 잘 통한다. 어떤 일이든 미치광이처럼 몰입해야만 목표에 다다를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뜻에서 김치가 미쳤다고 한 것일까? 맥락이 좀 다르나 김치의 모든 재료가 마지막 발악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맛이 제대로 드니 통하기도 한다.

美쳤다, 혹은 味쳤다. 신문이나 광고를 보면 이렇게 어법에 맞지 않게 쓰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꼰대’의 시각에서는 ‘미친 표기’이지만, 뜻은 전달이 된다. 정말로 아름다움이나 맛이 극에 달한 느낌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이리라. 한자를 배우지 못한 세대가 그래도 마지막까지 살려서 써 보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미치는 시기가 지나야 김치의 맛이 제대로 들고 이렇게 미친 시도가 있어야 비로소 말과 글이 자리를 잡는다. 김치도 말도 미쳐야 미친다.

 
 

12-20 뒤쥭박쥭

여기 활 잘 쏘고 글 잘 쓰는 40대의 중년 남자가 있다. 드라마 덕에 이산(李祘)이란 이름이 알려지기도 했지만 정조(正祖)가 훨씬 더 익숙하다. 신하에게 사적으로 편지를 썼는데 편지의 끝부분이 수상하다. 글 잘 쓰는 이니 당연히 한문 편지인데 난데없이 ‘뒤쥭박쥭’이 등장한다. 당파싸움에 열중한 노론의 세태를 비판한 것인데 분기가 탱천해서인지 한문으로는 도저히 쓸 수 없었는지 이 단어만 한글로 썼다.

오늘날의 표기로는 ‘뒤죽박죽’인데 여럿이 마구 뒤섞여 엉망이 된 모양을 가리킨다. 뜻은 이렇다지만 이 말의 기원은 전혀 가늠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 단어를 유심히 살펴보면 ‘죽’과 ‘박’이 보인다. 죽은 물을 많이 잡아 끓인 밥이고 박은 흥부를 부자로 만들어준 그것으로서 바가지의 재료이다. 박을 가르지 않고 꼭지만 따서 속을 파낸 것이 뒤웅박이니 ‘뒤’ 또한 갖다 붙일 수 있다. 이렇게 죽과 박을 연상하면 또 하나의 민간어원설이 만들어진다.

뒤죽박죽은 어원도 모르고 뜻도 좋지 않지만 뒤죽박죽 음식은 꼭 나쁘지만은 않다. 비빔밥은 나쁘게 말하면 찬밥에 남은 반찬을 쓸어 넣은 뒤 고추장을 넣어 뒤섞은 것이다. 부대찌개는 군대에서 나온 온갖 잡고기에 되는 대로 채소와 양념을 넣어 끓여낸 것이다. 그러나 바가지 혹은 양푼, 그리고 커다란 냄비에 뒤죽박죽 비비고 끓여낸 이 음식의 맛은 최고이다.

한 해를 돌아보면 정치도, 사회도, 자신의 삶도 모두 뒤죽박죽이다. 말도 그렇다. 귀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줄임말이나 외래어가 들려오고 눈으로는 맥락에도 맞지 않는 이상한 단어가 들어온다. 그런데 그것이 삶이고 말이다. 비빔밥은 뒤죽박죽이지만 밥과 나물, 그리고 고추장과 참기름 맛이 어우러진다. 말 또한 젊은네와 노인네의 말, 그리고 각 지역의 말이 어우러진다. 그래야 밥이 맛있고 말이 맛깔나니 뒤죽박죽 어우러진들 어떠하리.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오고 있는데.

 
 

12-27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교훈

잘 사는 게 잘사는 법이다. 띄어쓰기, 생략된 목적어, 그리고 국어의 음운 현상이 반영된 표기까지 감안해야 한다. 그래도 이해가 잘 안 되면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떠올려 보면 된다. 앞의 ‘잘 사는’은 밥을 잘 산다는 말이고 뒤의 ‘잘사는’은 부유하다는 뜻의 ‘잘살다’의 활용형이다. 이 드라마는 밥을 잘 사준 덕에 예쁜 누나가 멋진 남자와 결혼해 잘 살았고, 결국 잘살기도 했을 것을 추정케 하는 이야기다.

우리의 관계는 ‘한 번 하자’라는 말로 진전된다. 물론 이때의 목적어는 차례로 ‘차, 밥, 술’이다. 차를 마시면서 서로의 말문을 트고 밥을 같이 먹으면서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다. 나아가 술 한 잔을 기울이며 얘기를 나눌 정도가 되면 마음속 깊이 감춰둔 얘기까지 나눌 수 있게 된다. 먹고 마실 것을 사이에 둬야 관계가 진척되는 듯하지만 ‘먹고 사는’ 것이 인생이니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이 관계가 남녀 사이의 관계라면 결국 ‘식구(食口)’가 되어 영원히 밥을 같이 먹게 되니 딱 맞는 말이기도 하다.

이 관계를 빠르게 진전시키고자 한다면 ‘한 번 살게’라고 말을 바꾸면 된다.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은 인사치레로 하는 경우가 많아서 말하는 이나 듣는 이 모두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쪽에서 산다고 하면 그 의지가 보다 분명하게 확인이 되고 얻어먹는 쪽에서는 ‘원수를 갚을’ 기회를 자연스럽게 얻게 된다.

잘 사려면 잘살아야 하니 잘 사는 사람은 잘살아온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물려받은 재산이 많은 사람도 있겠지만 열심히 일해 잘살게 된 사람은 베풀 줄도 안다. 자신에게 밥을 사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도 알고 다른 이에게 밥을 사주는 기쁨도 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을 사주면 뇌물이 될 위험이 있지만 적당한 값으로 먹고 마셔 없어지는 것이라면 그럴 걱정은 없다. 해가 가기 전 ‘한 번 살게’라는 약속을 잡거나 이미 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 잘 사고 잘사는 방법이다.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