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복규의 경성, 서울의 기원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동아일보 2024

04-18 을지로-태평로 닦기 위한 토지매수, 日지주들만 호가 높이며 거부
일제, 1910년 강제병합후 도로 정비… ‘식민지민에게 도시문명 과시’ 의도
총독부, 남대문로 등 새 대로 닦아
당시 경성 정착한 일본인 땅주인들, 매각 협상 불응하며 끝까지 버티기
조선인은 재산권 제대로 주장못한듯
《도시개발 출발점 ‘시구개정’ 사업
‘매일신보’ 1913년 8월 24일자에는 ‘시구개정과 공공심’이라는 사설이 실렸다.
그 한 대목을 보면 “근래 경성 내 각 도로를 개수함에 따라 자연히 인민의 가옥을 범하는 곳이 많은지라. 인민된 자는 반드시 공익을 생각하여 당국의 지휘를 따를 뿐이어늘 혹 완거(頑拒)하는 자도 있으며 혹 가격을 과호(過呼)하는 자도 있다.
목하 조선인은 이를 깨달아 완거하는 자도 거의 없으며 가격을 과호하는 자도 역시 없어 도로의 확장에 조금의 민원이 없을진대, 내지인(內地人)은 무슨 능력을 가졌는지 오히려 완거하는 자도 많으며 가격을 과호하는 자도 많으니 저 문명의 선진으로 자부하는 자가 어찌 이런 치우친 마음을 가졌느뇨?”라고 썼다.》

▲일제는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직후부터 식민지민에게 ‘문명’을 과시하겠다는 의도로 경성 시내의 도로 정비를 시작했다. 1912년 11월 6일 ‘조선총독부관보’에 실린 경성 시구개정 노선도. 이 사업으로 골목에 가까웠던 길들이 폭을 넓히고 직선화했다. 황금정통(을지로), 태평통(태평로), 남대문통(남대문로), 장곡천정통(소공로), 돈화문통(돈화문로), 의원통(창경궁로) 등이 이때 만들어졌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매일신보’는 1910년대 유일한 조선어 신문으로 총독부 기관지이다. 내지인은 일본인을 뜻한다. 사설에 따르면 지금 경성의 도로를 정비하기 위해 연도 주민의 가옥이나 토지를 매수해야 하는데 매수 협상에서 조선인은 반항(완거)하거나 가격을 과하게 부르는(과호) 사람이 없는 반면 일본인 중에는 이런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사설은 조선인보다 “문명의 선진으로 자부하는” 일본인이 어떻게 이렇게 치우친 마음을 가졌냐고 한다. 즉, 총독부 기관지가 일본인을 비난하고 있는 셈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1910년 한국병합 직후부터 총독부는 ‘경성 시구개정’이라는 이름으로 시내의 도로 정비를 시작했다. 이는 일제강점기 경성의 도시 개발, 정비의 출발점이 된다. 시가지의 구획을 바르게 고친다는 뜻의 시구개정(市區改正)은 다른 도시에서도 실시했다. 그러나 지방 도시의 시구개정은 주로 도청 소재지에서 제한된 지방비 예산으로 ‘도청 앞 대로’ 하나 정도를 정비하는 데 그쳤다. 그에 반해 경성 시구개정은 총독부가 직접 대대적인 공사를 벌였다. 경성은 여러 도시 중 하나가 아니라 식민 통치의 핵심 기구가 모여 있는 명실상부한 ‘식민지 수도’였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식민지 수도를 정비하여 그 성과를 보여주는 것이 곧 식민 통치의 ‘정당성’(조선에 근대 문명을 전파하겠다)을 널리 선전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1929년 찍은 경성 시내 조감 사진에서 1926년 준공한 경성부청(옛 서울시청사·실선 안)을 중심으로 정비된 도로들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경성 시구개정 사업은 192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 시대까지는 ‘골목’에 가까웠던 많은 길의 폭을 넓히고 직선화했다. 또 완전히 새로운 도로도 닦았다. 황금정통(을지로), 태평통(태평로), 남대문통(남대문로), 장곡천정통(소공로), 돈화문통(돈화문로), 의원통(창경궁로) 등이 이때 만들어진 대표적인 도로들이다. 시구개정의 결과 경성 도심부는 조선시대 한양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바둑판형 공간 구조로 새로 태어났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공간 구조는 오늘날까지도 기본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총독부가 보여주려고 한 ‘도시의 문명화’였다. 경성 시구개정 사업을 시작하면서 나온 “어떠한 나라를 막론하고 우선 도로를 시찰하여 정정유조(井井有條)하면 그 나라의 문화와 정치는 문명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우선 경성의 도로를 직선으로 사통오달(四通五達)하여 정정유조케 하여 일대 모범을 보인다 하니 이는 총독이 조선을 계발하는 노심노력에서 나옴”이라는 말(매일신보 1912년 11월 7일자 사설 ‘시구개정’)은 총독부가 시구개정을 정력적으로 추진한 배경과 목표를 잘 보여준다.

▲1930년 발간된 ‘경성시구개정회고이십년’에 실린 1913년 황금정통 공사 모습.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191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구개정 과정에서 가장 먼저 정비에 착수한 도로는 남대문 정거장(서울역)에서 남대문까지의 짧은 구간이었다. 잇달아 황금정통, 남대문통 공사가 이어졌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이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인 남대문 정거장에서 남대문까지 이어지는 도로는 ‘서울의 현관’이라고 할 수 있다. 황금정통과 남대문통은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 경성에서 가장 발달한 상업 가로였다. 이미 많은 상점과 회사가 들어차 있었고, 계속 증가할 것이 예상되었다. 경성 시내를 정비하여 자신들의 ‘문명’을 식민지민에게 과시하겠다는 총독부가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도로들이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총독부의 야심 찬 시구개정 사업은 예기치 않은 난관에 부딪혔다. 도로 부지를 매수하는데 토지 소유자들이 총독부가 제시하는 가격에 쉽게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뜻밖에 이들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예컨대 황금정통의 경우 공사를 위해 매수해야 할 토지의 소유자는 총 82명이었는데 그중 19명이 1년 가까이 매수 협상을 거부했다. 마지막까지 협상을 거부하여 ‘토지수용령’ 적용을 받은 사람은 마쓰모리(末森富良)라는 자였다. 남대문에서 종각에 이르는 남대문통의 경우도 사정이 복잡했다. 이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전통적인 상권이 있던 곳인데, 1880년대에는 청나라 상인이 진출하여 자리를 잡았다. 1890년대부터는 일본 상인도 진출하여, 서로 경쟁이 치열했다. 거기다가 드물게 서양인 소유 토지도 있었다. 남대문통의 정비를 위해 매수해야 할 토지 소유자는 100여 명에 달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도로 부지의 매수 교섭에 계속 응하지 않는 20여 명은 일본인들이었다.
앞의 사설에 등장하는 총독부의 교섭에 “완거하는” 혹은 “가격을 과호하는” “내지인”이란 바로 이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대부분 무명의 인사로서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기 어렵다. 그나마 마쓰모리는 러일전쟁 참전 군인 출신으로 제대 후 다시 조선에 건너와 경성에서 주택 임대업, 토지 신탁업 등으로 치부한 사람으로 확인된다. 1세대 일본인이 조선에 건너오기 시작한 것은 1876년 개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 부산, 인천, 원산 등 개항장에 정착한 일본인은 서울로도 진출했다. 서울에 일본인의 거주를 공식적으로 허가한 것이 1885년경이다. 이들은 주로 상인이었다. 대개 변변한 자본 없이 ‘신천지’ 조선에서 성공을 노리는 모험 상인이 많았다. 당시 이런 자들을 ‘히토하타구미(一旗組·한탕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러일전쟁 이후 통감부 시기부터는 일제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하는 것과 궤를 같이하여 2세대 일본인이 건너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관리, 교사, 회사원 등으로 1세대에 비해 엘리트층이었다.
요컨대 마쓰모리는 1세대에 가까운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식민 통치의 대의(?), 식민지 수도의 문명적 정비 따위보다 오직 자신의 재산이 중요할 뿐이었다. 식민지 수도를 정비하여 자신들의 힘을 조선인에게 과시하려는 총독부와 오직 사익만을 추구하는 개별 일본인의 이해관계는 충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도로 부지의 매수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일어난 토지 소유자가 대부분 일본인인 것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이들은 지배 민족의 일원이었다. 따라서 비록 총독부 기관지의 비난은 받을망정 자기 재산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조선인은 그러지 못했던 게 아닐까? “조선인은” “도로의 확장에 조금의 민원이 없”다는 총독부 기관지의 칭찬(?)은 식민지라는 ‘기울어진 운동장’의 실체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경성 시구개정은 총독부가 추구하는 식민지 수도 정비의 목표, 개별 식민자(일본인) 각각의 사익 추구, 일제의 일방적 사업 추진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식민지민의 처지가 부딪치고 뒤엉키는 가운데 진전되었다. 경성의 개발과 정비는 단지 공간의 물리적 변형 과정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05-08 경복궁 전각 헐고 전시관 지어… 경성 박람회 100만명 다녀가
식민통치 5주년 ‘발전상 과시’ 의도… 아관파천후 빈 경복궁을 장소로 선택
궁궐의 전각 대거 공매하거나 철거… 벼-면화 등 일본산 품목 50일 전시
총독부, 지방-학교에 단체관람 지시… 방문객들에 도로 정비 성과도 과시


▲1915년 일제 식민통치 5주년을 기념해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 행사장 전경(위쪽 사진). 위쪽에 광화문(점선 안)과 세종로가 보인다. 일제는 장소를 마련하려 경복궁의 전각을 다수 공매하거나 철거했다. 당시 조감도를 통해 경복궁이 얼마나 훼손당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동아일보DB·국립고궁박물관 제공
《1915년 일제가 연 ‘공진회’ 행사
경성의 도시 개발, 정비사업인 ‘시구개정’ 사업은 192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지만, 공사의 진척 속도가 두드러진 시기는 1910년대 전반의 몇 년간이다. 정확하게는 1915년 여름까지이다. ‘매일신보’ 1915년 8월 12일자 기사는 도로 공사가 한창인 풍경을 이렇게 전한다. “2, 3개월 전부터 착수한 남대문통 시구개정 공사는 조선은행 앞으로부터 종로 십자가까지 대로인데 공진회(共進會) 절박(切迫)한 금일에 황금정으로부터 종로까지 그 사이는 완연히 전장이나 다름없는 소동이라. 좌우를 살피면 가로에는 돌덩이가 산재하고 석공은 돌을 자르며 대목은 재목을 깎고 연와(煉瓦; 벽돌)는 산같이 적치하고 전차궤도가 횡재(橫在)하여 그 혼잡한 상황은 형상하기 어려운데, 인차의 왕래가 번잡함으로 공사의 진척상 방해가 적지 않으나 공진회가 절박했으므로 금일은 주야겸행(晝夜兼行)의 상황으로…”》
안 그래도 왕래가 복잡한 시내 한복판에 전차까지 다니는데, 한편에 자재를 쌓아 두고 기술자와 인부들은 밤낮없이 일하고 있다. 이렇게 “전장이나 다름없는 소동”을 벌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9월 개최 예정인 ‘공진회’가 한 달여 앞으로 닥쳤기(절박) 때문이다.
공진회란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始政五年記念 朝鮮物産共進會)’를 뜻한다. 식민통치 5주년을 기념한 행사이다. 1914년에 접어들면서 이듬해 어떤 기념행사를 할 것인가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고위급 친일파나 민간 일본인 유력자들이었다. 이들은 1910년 이래 5년간 일제 통치 아래에서 조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보여주는 박람회를 개최하자고 주장했다. 총독부는 아직 조선의 발전은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두루 볼만한(박람) 것이 적으므로 앞으로 발전을 기약하는 의미에서 함께 나아가자는 뜻의 ‘공진회’가 적당한 명칭이라고 보았다.
공진회 장소는 경복궁으로 결정했다. 경복궁은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아관파천) 비어 있었다. 총독부는 위치나 주변 경관, 규모 등 모든 점에서 경복궁이 적당하다고 보았다. 일제가 볼 때 경복궁은 중심가에 있으면서 특별한 용도가 없이 비어 있는 넓은 공간으로 큰 행사를 치르기에 알맞은 장소였던 셈이다. 그러나 실무적 이유만으로 공진회 같은 중요한 행사의 장소를 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한 언급은 없지만, 조선왕조 법궁이었던 경복궁의 장소성을 의식했으리라는 점은 짐작할 수 있다.
총독부는 경복궁 경내 12만7000여 평 중 약 7만3000평을 공진회장 부지로 설정했다. 처음에는 근정전 동쪽 부지를 주로 이용할 구상이었으나 공진회 계획이 점점 확대되면서 회장 부지도 근정전을 둘러싼 더 넓은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총독부는 1914년 7월 공진회장 부지로 설정한 영역의 전각 15동을 공매했다. 공매된 전각은 일본 불교 사찰이나 부호의 저택, 심지어 요정에 팔리기도 했다. 그 후에도 행사 준비를 구체화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궁궐의 전각을 공매하거나 철거했다.
전각을 없앤 자리에는 공진회 전시관으로 사용할 가건물을 여러 채 지었다. 주전시관인 1호관, 2호관, 심세관(審勢館·조선 13도의 실태 전시), 동양척식회사 특설관, 철도관, 미술관 등 합계 6000여 평 규모였다. 주전시관인 1호관은 궁궐의 중앙,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에 약 1500평 규모로 지었다. 1호관에는 주로 벼, 보리, 면화, 잠사(蠶絲), 광산물 등 병합 이후 일제가 들여오거나 개발한 생산물의 표본이나 일본인 이민자 수, 일본인 경영 대농장의 성적 등을 보여주는 통계를 그래프로 그려서 전시했다. 단지 새로운 것을 전시하는 게 아니라 ‘비교’를 했다. 예컨대 조선의 재래종 벼와 일본 품종인 조신력(早神力·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벼 품종)의 생산성 차이를 보여주는 식이었다.

▲1915년 9월 11일 공진회 개막일 광화문에 운집한 관람객들. 일제가 식민통치를 과시하기 위해 연 이 행사에 50일간 100만 명이 다녀간 것으로 추산된다.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공진회 기간은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50일로 정했다. 최대한 많은 관람객을 유치하고자 총독부는 홍보와 관람객 동원에 열을 올렸다. 각 군에 지시하여 군수 책임하에 관람단을 조직하게 하고 각급 학교에도 학생 관람단 조직을 지시했다. 조선에 주재하는 외국인에게는 일일이 영문 안내장을 발송했다. 안국선(安國善)이 총독부의 의뢰로 소설집 ‘공진회’를 발간한 것도 이런 홍보의 일환이었다. 신소설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1908년)의 작가로 알려진 안국선은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병합 후 경상북도 청도군수를 지냈다. “문명이니 개화니 발달 진보니 하는 여러 가지 말이 지금 세상에 행용(行用)하는 의례의 말이라. 조선도 여러 해 동안을 문명 진보에 열심 주의하여 모든 사물의 발달되어가는 품이 날마다 다르고 달마다 다르도다. 이번 공진회를 구경한 사람은 누구든지 조선의 문명 진보가 오륙년 전에 비교하면 대단히 발달되었다고 할 터이라”는 구절은 ‘공진회’를 집필한 목적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공진회 관람객이 정확하게 몇 명이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50일간 대략 연인원 100만 명 이상(조선인 약 73만, 일본인 30만)이 입장했다고 추산한다. 당시 조선 전체 인구가 1700만이 못되었으니 지방에서 경성까지 오는 교통편 등을 감안하면 대단한 인원인 셈이다. 총독부는 여러 경로로 관람단을 조직하게 했을 뿐 아니라 공진회가 끝난 후에는 감상문을 작성하도록 각 지방에 지시하기도 했다.
이렇게 두 달이 채 못 되는 공진회 기간 중 각계각층의 수많은 사람이 경성을 방문했다. 따라서 이들의 눈앞에는 총독부가 지난 5년 동안 경성의 시가지를 정비한 ‘성과’가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1915년 가을을 목표로 “주야겸행” “전장이나 다름없는 소동”으로 시구개정 사업을 추진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공사 기록을 보면 시구개정 사업의 핵심 도로들(을지로, 태평로, 남대문로, 돈화문로, 창경궁로 등)은 거의 1915년까지 준공했다.
공진회가 끝난 1년 반 뒤인 1917년 2월 ‘신문계(新文界)’에 발표된 ‘경성유람기’라는 소설도 시구개정에서 총독부가 과시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신문계는 다케우치(竹內錄之助)라는 사람이 발간한 잡지이다. 다케우치는 1910년대 조선에서 신문계, ‘반도시론’ 등의 잡지와 여러 책을 펴낸 언론인 겸 출판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본의 제국주의 노선을 충실하게 따른 자로 알려져 있는데, 신문계의 지면도 총독부의 정책을 선전하거나 식민지화 이후 조선의 ‘발전’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경성유람기는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갑오 때”(1894년) 함경도로 낙향한 이승지라는 사람이 20여 년 만에 경성 구경을 온다는 설정이다. 이승지가 막 경성에 도착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기차가 동대문에 도착하니 좌우 성벽을 헐어 광활한 도로를 개통하고 마차, 자동차, 인력거가 복잡하게 왕래하는 광경은 이승지 고루한 안목에 실로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인데, “이승지는 감탄함을 마지아니하며 경성 사람의 의관 물건이며 시가 좌우의 상점 간판을 낱낱이 유의하여 보며 남대문통 가로로 들어서서 도로 교량의 완전히 개량함을 탄복”한다. 이승지가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맞닥뜨리는 것이 “광활한 도로”, “도로 교량의 완전히 개량”이다. 그리하여 이승지로 대표되는 “고루한 안목”의 조선인이 “감탄함을 마지아니”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총독부가 시구개정 사업을 추진한 진정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05-29 112년 전 부동산 사기극… “경성 개발정보 빼주겠다” 뇌물 가로
대대적 도로정비 둘러싼 사기 사건
조선 황실의 인척인 민영린 백작… 총독부 하급관리에 ‘은밀한 제안’
“개발정보 알려주면 이익 나눌 것”… 관리 “일본인 실무자에 뇌물 줘야”
일본인 ‘배우’로 동원해 돈 빼돌려… 도시개발로 들썩인 당시 상황 반영

▲1930년 숭례문(남대문) 누각 위에서 촬영한 태평통(숭례문~광화문) 거리. 왼쪽 도로 끝에 보이는 건물이 1926년 신축한 경성부 청사(옛 서울시청)다. 1910년대 대대적 시구개정(도로 정비) 사업으로 토지, 가옥 시세 변동이 클 것으로 예상돼 차익을 노린 부동산 투자를 둘러싸고 사기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총독부 하급 관리 설기하는 ‘남대문에서 광화문까지 시구개정 예정’ 개발 정보를 조선 황실의 인척 민영린 백작에게 유출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 개발이익을 노린 부동산 투자자는 토목과 공무원을 접촉해 “개발 정보를 미리 알려주면 이익을 나눠주겠다”고 은밀한 제안을 한다. 공무원은 “실무자에게 뇌물을 줘야 정확한 정보를 빼낼 수 있다”며 사례금을 받아 가로챈다. 일확천금에 눈 먼 욕망들이 속고 속이는 사기극. 오늘 일어난 일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현대적인’ 부동산 투자 사기 사건, 112년 전 경성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이다.
1912년 11월 ‘매일신보’에는 한 사기 사건 기사가 실렸다. 사건의 발단을 보면 “경성 중부 농포동(현재 종로구 권농동 일대) 사는 전 조선총독부 속(屬·하급 관리의 일종) 설기하는 나이 지금 30세인데 명치 44년(1911년) 5월 총독부 속이 되는 동시에 토목과 근무가 되었는데 본년(1912년) 3월경에 구리개길 개축에 당해 그 길에 들어가는 가옥을 훼철(철거)케 하라는 임무를 받은 바 초전골(현재 중구 초동 부근) 등지에 있는 백작 민영린 씨 집이 그 길에 들어가는 고로 이것을 훼철하라고 독촉하기 위해 동대문 밖 민영린 씨 집에 가서 민 백작에게 가옥 훼철을 독촉할 때에…” 》
총독부 토목과의 하급 관리 설기하는 ‘구리개길’의 정비사업, 즉 시구개정 사업을 위해 도로 예정 부지에 들어간 가옥의 철거를 주인에게 통지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중 백작 민영린 소유의 가옥이 있었다. 구리개는 현재 을지로 1, 2가의 야트막한 고개를 부르는 이름이다. 황토로 된 땅이 햇볕을 받으면 마치 구리가 반짝거리는 것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래서 동현(銅峴)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처음에 본정통(현재 충무로 일대)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차츰 구리개로 ‘북상’하여 상점, 은행, 회사 등을 개설했다. 그리고 그곳을 ‘황금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황금정은 일본 도시의 흔한 지명 중 하나인데, 아마도 구리개라는 옛 지명과 연결지으면서 화려한 상업, 금융가의 의미를 담은 게 아닌가 짐작한다. 청계천 남쪽에 있어서 조선시대까지 주요 도로가 아니었던 황금정은 병합 전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일본인 중심의 상업, 금융가로 개발되고 있었기 때문에 시구개정 사업에서도 최우선 순위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경성의 상업, 금융 중심가 황금정. 현재 을지로 1, 2가에 해당한다. 부동산 투자 사기 사건에 연루된 백작 민영린 소유의 가옥이 있었다. 왼쪽의 석조건물은 일본 나가사키에 본점을 둔 18은행 경성지점, 오른쪽의 돔이 있는 건물은 동양척식회사. 일제강점기 사진엽서 속 사진이다. 염복규 교수 제공
“민 백작은 피고 설모에게 그 집은 이익을 볼 작정으로 매수했는데 다 도로에 편입되어 낭패가 적지 않은 즉 그대가 요행히 토목과에 있으니 이후 시구를 개정할 때에 예정선을 미리 알 터이니 그것을 좀 알려달라. 그러면 그 토지를 매수하여 이익을 분배할 터이라는 부탁을 받고 기회를 기다리다가 본년 5월 남대문에서 광화문까지 시구개정의 예정이 됨으로써 이 기회를 잃지 말라 하고 민 백작에게 통기하여 태평통 부근 토지를 매수하라고 권했으나 민백작은 매수 자본금을 변통치 못해 시기를 잃어버렸는데…”
민영린은 황금정 도로를 대대적으로 정비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도로변이 될 것이라는 가옥을 매입했다. 도로 정비를 완료하면 집값이 크게 오를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그의 가옥은 도로 부지에 포함되어 버렸다. 오히려 큰 손해를 본 민영린은 설기하에게 다음 개발 정보를 알려주면 이익을 나눠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래서 “남대문에서 광화문까지 시구개정의 예정”을 알려주었으나, 민영린이 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일단 계획은 무산되었다. “남대문에서 광화문까지”란 태평통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에는 성문에서 궁궐까지 바로 도로가 연결되는 것을 꺼렸다. 따라서 태평통 시구개정은 상당한 부분 새롭게 도로를 뚫는 공사였고, 그만큼 도로변 토지나 가옥의 시세 변동이 클 것이 예상되었다. 민영린은 아까운 기회를 또 한 번 놓친 셈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민영린과 설기하 두 사람의 은밀하고 부적절한 거래, 개발 정보의 누설 문제일 뿐이다. 본격적인 사기 사건은 이제부터다.
“피고는 본년 8월에 민 백작을 방문하고 이왕 말하던 계획을 실행하느냐 안 하느냐 질문하니 민 백작은 돈을 변통치 못해 약조대로 실행치 못했노라고 하고 이후에나 계획을 해볼 터이니 이것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기화로 알고 민 백작에게 금전을 편취할 계획으로 민 백작에게 말하기를 이 계획은 토목국 공무과 내지인 기수(技手)에게 어떻게 안 하면 형편이 좋지 못하다고 거짓말을 하여 돈 내기를 권함에 민 백작은 그러면 그 내지인에게 상당한 사례금을 주리라 하니 피고는 이왕부터 친히 알던 내지인 모에게 말하여 민 백작이 경영하는 종로 공다옥에서 사례금으로 150원을 편취한 일이…”(시구개정으로 사기취재(詐欺取財), ‘매일신보’ 1912년 11월 10일자).

▲황금정에 소재한 대표적인 국책 금융기관 조선식산은행 본점 (일제강점기 사진엽서)
설기하는 계속해서 개발이익을 놓치는 민영린의 다급한 심정을 이용한다. 정확한 정보를 얻으려면 일본인 실무자에게 뇌물을 주어야 한다고 하며 아는 일본인을 ‘배우’로 동원하여 사례금을 가로채는 사기 행각을 벌인 것이다. 이 사건은 식민지 수도의 새로운 외관을 꾸미는 과정에서 욕망의 아사리판이 된 경성의 민낯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가해자 설기하와 피해자(?) 민영린은 어떤 사람일까?
설기하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다. 병합 전 기록은 1908년 계몽운동단체 대한협회 회원 명부에 등장하는 정도이다. 이 사건으로 총독부에서 면직된 후에는 1914년 경성의 수산물 유통 사기범으로 한 번 더 신문에 등장한다. 나름 ‘계몽청년’으로 출발했지만, 시세에 순응한 끝에 점점 타락해간 인물로 짐작된다.
민영린 백작은 명성황후의 먼 인척인 민술호의 아들로 어렸을 때 훗날 순종의 장인이 되는 민태호의 양자로 입적했다. 법적으로 순종의 첫 번째 부인인 순명효황후(1904년 사망 후 추존)의 동생이다. 가문의 후광을 업고 대한제국기 다양한 관직을 거쳐 병합과 함께 백작 작위를 수여했다. 일본 정부는 병합 당일 일본 황실령으로 ‘조선귀족령’을 공포하고 대한제국 황실의 인척, 정부 고관대작, 그리고 이른바 ‘합방 공로자’ 등 70여 명에게 후작에서 남작까지의 작위를 수여했다. 조선 귀족은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화족(華族) 제도를 본뜬 것이다. 화족 제도는 메이지유신 이전 도쿠가와 막부의 고관이나 지방을 통치하던 다이묘(大名)들에게 작위를 수여하여 근대 천황제 국가의 지배층으로 포섭한 제도이다. 조선의 귀족 제도도 비슷한 취지라고 할 수 있다. 민영린은 황실의 인척이자 고관대작 출신으로서 상대적으로 높은 백작 작위를 받았다.
조선 귀족은 작위와 더불어 2만5000엔에서 많게는 50만 엔의 은사금(천황의 하사금)도 받았다. 일제는 이런 특혜를 주는 대가로 조선 귀족이 식민지민에게 ‘모범’을 보여 식민통치 안정화에 기여할 것을 요구했다. 병합 초기 ‘매일신보’에 ‘귀족의 책무’를 강조하는 사설이 자주 실린 것도 이런 맥락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조선 귀족은 일제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많은 수가 사치, 축첩, 도박 등에 빠져 경제적, 도덕적으로 몰락했다. 거액의 은사금을 날리고 무일푼으로 전락한 경우도 허다했다. 그에 비하면 경성의 도시 개발 바람에 편승하여 분주하게 이익을 추구한 민영린은 영리한 편이었달까? 하지만 일본인 관리에게 뇌물까지 주려던 민영린의 ‘투자’는 실패로 끝난 셈이다.
그런데 민영린은 수년 뒤 다시 신문지상에 등장한다. 오랫동안 상습적으로 아편을 흡입한 것이 발각되어 1919년 징역 3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작위를 박탈당한 것이다. 이후에는 더 사정이 나빠진 듯하다. 사후(1932년 사망)의 한 잡지 기사를 보면 “민영린의 패가는 어찌 되었나? 부귀자제의 의례히 좋아하는 호색은 물론이고 호색 끝에 마약의 중독이 극도로 심하야 탈작(奪爵)까지 당하고 도박을 일삼다가 전답은 물론 위토선영까지 다 없애 버렸다”고 했다(‘별건곤’, 1933년 5월호.). 그도 종국에는 경제적, 도덕적으로 몰락한 조선 귀족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06-20 경성의 호캉스… ‘회전또어’ 달린 5층 호텔서 ‘은칼’로 양식 조식
철도 개통 후 여행객용 숙박시설로, 로비-콘서트홀 갖춘 호화호텔 건립
당시 소설에 “몽상-동화 같은 세계”… “사치의 실험실 같다” 문화적 충격
호텔 장미정원은 非투숙객에도 개방… 공연-활동사진 보던 데이트 코스로

▲1936년 개봉된 영화 ‘미몽(迷夢)’ 속 조선호텔의 호화로운 객실 모습.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1914년 준공된 호화 ‘조선철도호텔’
1936년 11월 6일 개봉한 영화 ‘미몽(迷夢)’은 현재 영상이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한국어 유성 영화이다. 영화의 주인공 애순은 남편과 어린 딸이 있는 주부로서 가정에 충실할 것을 강요하는 남편에게 반발하여 가출을 감행한다. 그리고 백화점에서 만난 (신사로 가장한) 건달 창건과 동거한다. 마침내 건달의 정체를 알아챈 애순은 그를 버리고 자기가 스타로 추앙하는 무용가를 따라가기 위해 택시를 타고 무리하게 과속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일으킨다. 그런데 하필 택시에 치인 사람은 그녀의 딸이었던 것이다. 그제야 ‘미몽(헛된 꿈)’에서 깨어난 애순이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자살한다는 신파적인 스토리이다.》
스토리보다 주목할 점은 가출한 주인공 애순이 거쳐 가는 곳들이다. 이는 백화점, 미용실, 극장 등 당시 경성에서 손꼽히는 근대적인 장소들이다. 영화는 이런 장소를 ‘볼거리’로 제공한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곳은 애순과 창건이 동거하는 ‘호텔’이다. 무일푼의 건달이지만 돈 많은 신사인 체하는 창건은 애순의 마음을 사기 위해 무리하게 호텔에 머물면서 수시로 동료를 만나 호텔 고객의 돈을 강탈할 음모를 꾸민다. 영화는 호화로운 객실과 창건이 친구와 음모를 꾸미는 응접실을 교차하여 보여준다. 이곳은 어디일까? 1936년 경성에서 이만한 시설을 갖춘 유일한 호텔은 ‘조선철도호텔’이다. 명칭에 ‘철도’가 들어간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호텔은 철도와 관련되어 있다.
한국 철도의 역사는 1899년 경인선이 개통하면서 시작되었다. 경인선은 처음 미국인 사업가 제임스 모스가 사업권을 따내 부설을 시작했지만 자금난으로 일본 쪽에서 자본을 투자한 경인철도회사가 준공했다. 이후 한반도의 주요 철도는 일제의 침략과 궤를 같이하여 부설되었다. 1904∼1906년 러일전쟁에 출정하는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일본군은 부산에서 신의주를 연결하는 경부선, 경의선을 개통했다. 병합 이후에는 호남선과 경원선이 잇달아 개통했다(1914년). 1928년 경원선을 연장한 함경선(원산∼함경북도 회령)까지 개통하면서 한반도를 ×자로 꿰뚫는 철도망이 완성되었다.
간선 철도망이 완성되어 가면서 철도를 운영하는 총독부 철도국은 수익 사업을 겸해 일본이나 서양의 고위층 혹은 재력 있는 여행객이 이용할 만한 고급 숙박 시설의 건립을 계획했다. 철도는 여행을 낳고, 여행은 호텔을 낳은 셈이랄까? 1912년에는 부산역 구내에 부산철도호텔이 최초로 개관했다. 1914년에는 경의선 종착역인 신의주에, 1922년에는 평양에도 철도호텔이 잇달아 개관했다.
경성의 철도호텔도 1912년경 신축을 결정했다. 위치는 소공동의 대관정(大觀亭) 맞은편으로 결정했다. 기차역과 경성 핵심부의 중간쯤 되면서 일본인 중심지인 남촌의 입구에 해당하는 곳이다. 대관정은 원래 선교사 주택으로 지은 것으로 대한제국 정부가 매입하여 영빈관으로 사용한 서양식 건물인데 러일전쟁기에는 일본군이 사령부로 사용했다. 이 무렵부터 소공동은 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후일 2대 조선 총독)의 이름을 따 장곡천정(長谷川町)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호텔 건립을 예정한 대관정 맞은편에는 대한제국이 건립한 환구단(圜丘壇)이 있었다. 환구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단으로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건립한 시설이다. 총독부 철도국은 환구단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철도호텔을 건립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준공 직후의 조선철도호텔을 담은 사진엽서. 보통 조선호텔로 불리게 된다. 대한제국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제단인 환구단(圜丘壇)을 철거한 자리에 지었다. 왼쪽에 정자처럼 보이는 건물은 원래 환구단의 부속 건물로 제사에 쓰는 신위를 보관하는 황궁우(皇穹宇)다. 염복규 교수 제공
경성의 철도호텔은 식민지 수도의 시설로서 명칭도 경성이 아니라 조선철도호텔로 불렸다. 보통 ‘조선호텔’로 불리게 된다. 설계도 경복궁에 신축할 총독부 청사를 설계한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크 데 랄란데가 맡았다. 그는 중국의 독일 조차지인 칭다오에서 활동하다가 일본으로 건너와 여러 서양식 건물 설계에 참여한 인물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상징성이 있으니만큼 건립 예산도 거액인 80만 원을 책정했으며, 자재는 모두 영국, 독일 등에서 수입했다. 직원용과 고객용을 구분한 엘리베이터, 서양식의 욕실과 화장실, 난방, 세탁, 제빙 설비, 지상층에 로비, 라운지, 콘서트홀, 다목적홀, 응접실, 대식당 등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춘 지상 5층의 조선호텔은 1914년 9월 정식 준공했다. 당시로서는 ‘초고층’ 건물이었다. 사실 총독부 청사, 경성부청, 경성역 등 식민지 수도의 랜드마크라고 할 만한 건물들은 1920년대 중반 집중적으로 준공했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건립된 조선호텔은 앞으로 경성 시가지에 형성될 새로운 경관을 미리 보여주는 건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철도호텔의 여러 시설과 이용 요금을 소개한 팸플릿. 숙박료는 1박에 3원 50전∼14원, 식대는 1∼3원으로 표기돼 있다. 당시 조선인 남자 교사 평균 봉급이 40∼50원 수준이었다. 독립기념관 제공
조선호텔은 보통 사람이 접근하기에는 매우 부담스러운 시설이었다. 이광수는 조선호텔 대식당을 “밝은 전등에 비취인 고전식 붉은 방 장식과 카펫과 하얀 식탁보와 부드럽게 빛나는 은칼과 삼지창과 날카롭게 빛나는 유리 그릇과 그리고 온실에서 피운 가련한 시크라멘, 모두가 몽상과 같고 동화의 세계”라고 묘사했다.(이광수 ‘유정’·1933년) 유진오의 소설 ‘화상보’(1938년)의 주인공 시영은 가난한 지식인이다. 그는 유럽 유학을 마치고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어 돌아온 옛 연인 경아를 만나러 그녀가 묵고 있는 조선호텔로 간다. 그에게 조선호텔은 “마음이 저절로 긴장되”는 곳이다. 당황하지 않으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지만 “붉은 칠한 호텔문을 들어서자 벌써 오지 못할 데나 온 듯이 마음이 불안하기 시작하”고, “정면 현관의 회전또어를 밀고 집속으로 들어가 짙은 자주빛 털담요 위에 섰을 때에는 벌써 가슴까지 약간 울렁거리는 것이었다.” 그에게 조선호텔은 “모든 것이 그저 화려하고 그저 으리으리하다. 사람이 일상 거처하는 곳이라느니보다도 사람이 얼마나 사치를 할 수 있는가를 시험해보는 거대한 실험실 속 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것이 경아의 세계였던가”라고 좌절한다. 실제 조선호텔의 이용 요금을 보면 1925년 기준 숙박료는 1박에 3원 50전에서 14원, 식대는 양식 조식이 1원, 석식이 3원이었다. 당시 보통학교 교사라 하면 조선인으로 굉장히 좋은 직업이었는데 1920년대 조선인 남자 교사 평균 봉급이 40∼50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조선호텔의 ‘문턱’이 얼마나 높은지 짐작할 수 있다. (마침 ‘화상보’의 주인공 시영의 직업도 교사로 설정되어 있다.)
그런데 조선호텔에도 서민에게 개방된 공간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장미 정원’을 들 수 있다. 조선호텔의 명소 중 하나인 장미 정원은 1918년 조성되었다. 1901년 대한제국과 수교한 벨기에 영사관이 문을 닫을 때, 그 뜰의 장미를 인수한 것이라고 한다. 장미 정원은 1924년부터는 호텔 투숙객이 아닌 일반에도 개방되었다. 이 공간은 이태준의 소설 ‘사상의 월야’(1942년)에 등장한다. “은주 어머니는 송빈이와 은주더러 활동사진 구경이나 갔다오라 하였다. 송빈이는 우미관으로 갈까 단성사로 갈까 하는 은주를 데리고 조선호텔로 온 것이다. 전에 윤수 아저씨를 따라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로오즈 가아든’으로였다. 호텔 후원에는 여러 가지 장미가 밭으로 피었는데, 50전만 내고 들어오면 꽃구경은 물론이요 악대의 음악연주도 있고 아이스크림도 주고 나중에는 활동사진으로 금강산 구경까지 하는 것이었다.” 소설의 묘사와 같이 조선호텔 장미 정원은 당시 상대적으로 저렴한 경성의 데이트 코스 중 한 곳이었다. 호텔에 투숙하는 호사를 누릴 수는 없는 가난한 연인이 조선호텔이라는 ‘동화의 세계’의 맛이라도 볼 수 있는 공간이었던 셈이다.⊙
07-10 돈의문은 헐렸는데, 숭례문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두 大門의 두 갈래 길
숭례문-돈의문의 엇갈린 운명
서대문인 돈의문, 당시 전차 통과
총독부 “전차 복선화 위해 철거”
현재는 문 현판만 흔적으로 남아
숭례문은 금융가의 랜드마크 돼
“임란때 왜장이 한양 입성 통과한 문”
기념물로 남기려 존치했다는 설도

▲4대문이었던 숭례문(남대문)과 돈의문(서대문)은 일제강점기에 운명이 엇갈렸다. 1920년대 중반 금융가 랜드마크가 된 숭례문 일대. 일제강점기 엽서에 실린 사진으로, 왼쪽에 1921년 신설한 파출소가, 오른쪽에 이설한 전차선로가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15년 봄 ‘매일신보’에 실린 ‘여(余=나)는 경성 서대문이올시다’라는 기사의 말미는 이렇다. “돌이켜 다시 도량 넓게 생각하여보면 내 몸이 헐려나가는 것이 기쁘기 한량 없습니다. 이전에 사람의 지혜가 열리지 못하였을 때야말로 이런 성문이 능히 도읍의 간성이 되었지만은 세상 매사가 모두 진보 발달되어 지난번 우리 문 아래로 지나가는 양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즉 덕국(독일)의 대포 한방이면 남산이라도 무너진다 하니 나 같은 놈은 골백이 있어서야 조금도 쓸데가 없고 도리어 전과 달라 번화한 경성의 교통에만 방해가 될 뿐이오 더구나 도로 개정으로 인하여 헐린다 하고 내 몸뚱이 되었던 석재는 다시 여러분의 밟고 다니실 길로 들어간다 하니 죽어도 아주 죽는 것이 아니오 공번된 큰일을 위하여 몸을 버리는 것이니 서대문의 면목으로 어찌 기껍지 아니하오리까?”(매일신보·1915. 3. 4.)
여기에서 화자는 물론 서대문, 즉 돈의문(敦義門)이다. 돈의문이 “도로 개정으로” 곧 헐리게 된 모양이다. 이와 관련한 도로는 1914년 7월 정비를 시작한 ‘서대문통’이다. 경희궁 앞에서 출발하여 돈의문(현재 강북삼성병원 입구)을 빠져나가 의주대로와의 교차점(현재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사거리)에 이르는 서대문통은 경성 도심부와 외곽의 전통적인 간선 교통로를 연결하는 중요한 도로이다. (현재 새문안로) 총독부는 서대문통의 폭을 넓히고 직선화하면서 단선인 전차선로도 복선화하고자 했다.
이때 문제가 된 것은 돈의문의 존재였다. 대한제국기 단선으로 처음 부설한 전차선로는 돈의문을 통과했다. 그러나 이를 복선화하면 문을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측량 작업을 마친 총독부는 “길을 넓히게 되”어 “그 문을 부득이 헐어버리”기로 결정했다. 도로 공사의 진전에 따라 철거할 돈의문의 처분도 결정되었다. 기와와 목재는 경매에 부치며 석재는 도로 공사에 사용하기로 했다. 기록에 따르면 목재 일체는 205원에 개인에게 낙찰되었다. 그리고 석재는 “다시 여러분의 밟고 다니실 길로 들어”갔던 것이다. 단 “고고학상에 참고할 자료 될 부속물은 총독부에서 영구히 보존한다”고 했다.(매일신보·1915. 3. 7.) 당시 얼마나 보존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는 돈의문 현판(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이 유일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돈의문이 철거되기 전인 1914년 서대문통의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돈의문은 1396년 한양도성을 축성할 때 도성의 서문으로 건립되었다. 처음 위치는 사직동 부근으로 현재 위치보다 북쪽이었다. 그래서 태종대에 문을 열어 두는 것이 경복궁의 지맥을 해친다고 하여 폐문되었다가, 세종 4년(1422년) 도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면서 돈의문도 남쪽에 새롭게 설치했다. 새롭게 설치했다고 하여 이때부터 신문(新門) 혹은 새문이라고 불렸다. 이렇듯 수백 년 도성의 성문이었다는 위상을 모른 척할 수는 없어서인지 총독부는 철거 결정을 하면서 나름대로 여론의 동향도 살핀 것 같다. 1914년 말 서대문경찰서장이 올린 보고서는 “서대문의 존치를 바라는 선인(鮮人)의 여론도 없지 않”다고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가 바뀌었으니 “나 같은 놈은 골백이 있어서야 조금도 쓸데가 없고 도리어 전과 달라 번화한 경성의 교통에만 방해가 될 뿐”이라는 것이었다. 경성 시구개정의 도시 근대화 논리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도시 근대화를 명분으로 사라진 돈의문과 정반대로 살아남은 것이 숭례문이다. 사실 숭례문은 더 일찍 철거 논의가 있었다. 러일전쟁기 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숭례문이 포차(砲車) 왕래에 지장을 준다고 하여 “그런 낡아빠진 문은 파괴해 버려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전시의 서슬 퍼런 주둔군 사령관을 설득하여 철거될 뻔한 숭례문을 구한 것은 당시 경성의 일본인 거류민단 민장이었던 나카이 기타로(中井喜太郞·일본에서 요미우리신문 주필을 지낸 언론인으로 조선에 건너와 일본어 신문인 한성신보사 사장을 지냄)였다. 나카이는 숭례문은 임진왜란 당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한양에 입성할 때 통과한 문이라고 하며 임진왜란 당시의 건축은 숭례문을 포함하여 두세 가지밖에 남아 있지 않은데 파괴하는 것은 아깝지 않냐고 하세가와를 설득했다고 한다.(中井喜太郞 ‘朝鮮回顧錄’·1915)
물론 나카이의 주장은 그의 회고록에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숭례문은 철거되지 않았다. 1907년 일본 황태자(후일 다이쇼[大正] 천황)의 방한을 맞아 통감부가 기차역에서 도심부로 들어오는 길을 넓히는 과정에서도 숭례문은 그대로 두고 좌우의 성곽을 철거했다. 성문을 통과하던 단선 전차선로를 복선화할 때도 돈의문과 달리 문 옆으로 선로를 이설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후 나카이의 주장은 하나의 통설로 굳어진 듯하다. 예컨대 1927년 발간된 ‘취미의 조선여행(趣味の朝鮮の旅)’이라는 여행안내서는 “그 옛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정벌 때 가토 기요마사가 남대문에서 경성에 쳐들어갔다고 하는데 그 남대문이 이 남대문이다”라고 썼다. 또 경성에서 오랫동안 교원 생활을 하면서 일종의 ‘향토사가’로 활동한 오카다 미쓰구(岡田貢)도 자신의 저서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소개했다. (‘京城史話’·1936) 나카이 주장의 정확한 진위는 물론 알 수 없다. 자신의 업적(?)을 과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회고는 일본인들이 자랑스럽게 받아들일 만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계속 재생산된 것이 아닐까? 일제강점기 숭례문은 자연스럽게 ‘왜장의 한양 입성’을 상징하는 ‘역사 기념물’이 되어갔다.
1921년 숭례문 옆에는 파출소가 신설되었다. 이 파출소를 짓는 데는 보통의 경우보다 훨씬 많은 1만 원의 건축비를 들였다고 한다. 그 비용은 여러 은행에서 기부한 돈으로 충당했다. 건물을 준공하면서 남대문소학교(현재 숭례문 옆 대한상공회의소 자리에 있었던 일본인 학교)를 빌려서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파출소 낙성식까지 열었다. 여러모로 이례적이다. 조선어 언론은 이 파출소 신설은 “경성의 대소은행이 남대문통에 모여 있으므로 여러 은행의 이문(里門) 같은 남대문을 잘 지켜 달라는 의미”처럼 보인다고 했다. 나아가 3·1운동 이후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새롭게 총독으로 부임하여 “잘한 일을 일일이 셀 수 없도록 많은 모양이라 하나 그중에 경찰 확장이 제일 유명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로” 경찰 확장이 “필경 동양 제일의 파출소까지 산출”했으니 “어느 의미로 보면 이 굉장한 파출소는 또한 ‘재등기념탑’”이 아닌가 하고 반문한다.(동아일보·1921. 7. 21.)
기사의 본의는 일제가 이른바 문화통치 일환으로 보통경찰제도를 실시하면서 대대적으로 경찰을 증원한 점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문’이라는 말이 눈에 띈다. 이문은 조선 초기 동네의 경계를 표시하고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 그 어귀에 세운 문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이문 중에는 관아 시설이나 왕실 관련 고위층 주거지 등을 보호하는 표지 역할을 하는 것도 있었다. 이런 경우 ‘이문의 안쪽’은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특수 구역의 이미지가 있었다. “여러 은행의 이문 같은 남대문”에서 숭례문이 이제 경성 식민지 금융가의 랜드마크가 된 현실을 엿볼 수 있다. 도시 근대화 바람 속에 사라진 돈의문과 식민지 수도의 역사 기념물이자 랜드마크가 된 숭례문, 일제 식민지배라는 엄연한 시대적 조건을 빼놓고 그 엇갈린 운명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림 1」 돈의문 철거 전후 서대문통(1914, 1930)의 모습. 총독부는 사진의 대조적 배치에서 경성 시구개정의 ‘성과’를 자랑하고자 했다. (『京城市區改正回顧二十年』, 1930,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그림 2」 1920년대 중반 숭례문 일대. 왼쪽으로 1921년 신설한 파출소가, 오른쪽으로 이설한 전차선로가 보인다. (일제강점기 사진엽서,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아카이브)

「그림 3」 1929년 총독부가 개최한 조선박람회를 선전하는 숭례문의 장식. 식민지 수도의 랜드마크가 된 숭례문의 이미지를 잘 보여준다. (『朝鮮博覽會紀念寫眞帖』, 1930,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08-01 경성 첫 야구장의 등장… 철도단지 개발로 인구 급증한 용산에 건립
청일전쟁 직후 상주 일본인 늘어… 1900년 용산역 개통 후 급속 팽창
러일전쟁 발발에 군사기지 건설… 남은 땅, 일본인들에게 헐값 불하
용산역에 학교-병원-공원 들어서… 조선인보다 일본인 거주자 대다수
《용산역 개발과 도시화 과정
1908년 최남선이 지은 ‘경부텰도노래(京釜鐵道歌)’는 경부선의 출발역인 남대문역(현재 서울역)에서 종착역인 부산역까지 여러 역을 열거하면서 그 주변의 새로운 풍물을 묘사하는 형식의 장편 기행창가이다. 창가의 첫머리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관왕묘와 연화봉 둘러보는 중, 어느 덧에 용산역 다달았도다. 새로 이룬 저자는 모두 일본 집, 이천여 명 일인이 여기 산다네.” 관왕묘는 조선 시대 숭례문 밖에 있었다는 남관왕묘(南關王廟)를 가리킨다.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 측의 요구로 도성 인근에 세운 촉나라 장수 관우의 사당 중 하나이다. 연화봉은 청파동 일대의 옛 지명이다. 1908년은 러일전쟁에서 승전한 일본군이 용산에 상설 군사기지 공사를 한창 진행 중일 때이다.》
‘경부텰도노래’는 군사기지뿐 아니라 이미 일본인 시가지가 대규모로 조성된 당시 용산의 모습을 잘 전해준다. 그렇다면 용산은 언제부터, 어떤 연유로 이렇게 변했을까?
조선 초기 용산은 원래 한강의 본류와 연결되는 지점은 아니었다. 그러나 홍수의 퇴적물로 강물의 흐름이 바뀌면서 서서히 본류와 연결되는 포구가 되었다. 이때부터 용산은 한양으로 모이는 전국 물산의 집산지 중 한 곳이 되었다. 용산에서 도성 중심부까지는 상대적으로 평탄한 지형이었기 때문에 일단 배가 용산까지 들어올 수 있게 되자 한강의 다른 포구들에 비해 입지적 중요성이 커진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 용산에는 정부에서 군량미를 관리하는 군자감(軍資監)을 비롯해 다양한 공, 사의 창고가 들어섰다.
용산에 근본적인 변화의 물결이 밀려온 것은 18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나라, 일본, 영국 등은 이미 개항을 한 인천, 원산, 부산 등과 함께 도성 부근의 편리한 곳을 개방할 것을 요구했다. 처음 개시(開市)가 결정된 곳은 서양 국가들이 선호한 마포 양화진이었다. 그런데 일본 측이 민간이 이주할 거류지를 확보할 수 있고 양화진보다 도성 중심부와 거리가 더 가까운 곳을 찾던 중 용산을 ‘발견’했다. 일본은 곧 조선 정부와 용산 개시를 위한 협상을 진행했다. 그런데 협상을 채 마무리하기도 전부터 용산에는 일본인이 불법적으로 상주하기 시작했다. 기록에 따르면 청일전쟁 직후인 1895년 벌써 공식적인 ‘용산거류민규칙’이 시행되었다. 거류민 규칙이 시행된 것은 용산에 이미 ‘일본인 사회’라고 불릴 만한 것이 형성되었음을 뜻한다.

▲북유럽풍으로 지었다는 일제강점기의 용산역. 용산 일본인 사회의 랜드마크였다고 할 수 있다. 일제 말기에는 용산 기지의 일본군이 각지의 전장으로 출정한 장소이기도 하다. 용산역사박물관 제공
용산 일본인 사회는 1900년 개항장 인천과 도성을 연결하는 경인선 한강 철교를 완공하고 용산역을 개설하면서 더욱 ‘발전’하기 시작했다. 1903년 일본인 초등교육기관인 용산소학교가 개교한 것은 어린아이를 포함한 가족 단위 이주도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처음 형성된 일본인 거류지는 주로 남대문역에서 용산역에 이르는 철도 서쪽 지역이었다. 현재 원효로 일대가 중심이다. 그런데 처음에 그냥 용산이라고 불린 이 지역은 곧 ‘구용산’이라고 불리게 된다. 왜냐하면 ‘신용산’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1910년 강제병합으로 이어지는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한 사건, 러일전쟁이 발발한 것이 계기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한반도를 통과하는 군용철도(경부선과 경의선)를 급히 완공하고자 용산역에 육군임시철도감부(陸軍臨時鐵道監部)를 설치하고 공사를 서둘렀다. 1905년 10월 전쟁은 끝났지만 일본군은 철수하지 않았다. 오히려 철도의 동쪽 약 300만 평을 수용해 군사기지 건설에 착수했다. 용산 기지의 기본적 시설은 병합 전인 1909년 8월경 완공되었다. 여러 부속 건물 공사도 대체로 1913년경까지는 완료되었다. 공사 과정에서 일본군은 기지 좌우 측에 용산에서 경성 도심부로 향하는 외곽 도로(현재 한강대로와 녹사평대로)와 군용지 전체의 중앙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도로(현재 이태원로)를 정비했다. 이 도로에 의해 일본군 기지는 남북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뉘었다.

▲조성된 용산 철도관사단지 전경. 위쪽에 용산역이 있고, 아래쪽에는 경성 최초의 규격 야구장(점선 안)을 갖췄다는 철도운동장이 보인다.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용산 기지의 건설은 당연히 군사기지가 들어섰다는 사실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일본군은 러일전쟁을 빌미로 약 300만 평이라는 넓은 지역을 수용했지만, 실제 기지는 120만 평 규모로 완성했다. 일본군은 철도 동쪽에서 기지 사이의 남은 토지를 이주를 희망하는 일본인들에게 헐값에 불하했다. 이 공간에는 군대를 따라 모여든 일본인들이 새로운 주거지를 형성했다. 한편 용산역이 철도 교통의 중심지가 됨에 따라 1907년에는 통감부 철도관리국이 인천에서 용산으로 이전했다. 철도국의 이전을 좇아 철도 종사자를 위한 관사도 건설되었으며, 순차적으로 철도학교(현재 용산철도고등학교), 철도도서관, 철도운동장(공원) 등 부대시설이 잇달아 들어섰다. 용산철도병원의 전신인 동인병원이 들어선 것도 1907년이다.(광복 후 서울교통병원, 중앙대 용산병원, 현재 용산역사박물관) 용산역 일대에는 거대한 철도 단지(complex)가 형성되었다.

▲한강통 용산우편국 부근 거리 풍경, 오른쪽에 보이는 전차가 도심부에서 신용산을 관통하여 한강교까지 이르는 전차 ‘신용산선’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이런 변화에 따라 더 많은 일본인이 용산으로 이주했다. 통계에 따르면 1904년 350명이었던 용산의 일본인 인구는 1년 뒤인 1905년 1700명으로 증가했고, 1910년에는 1만638명에 이르렀다. 인구 증가의 상당한 부분을 흡수한 지역은 바로 이 새로운 주거지였다. 6년 새 인구가 30배 이상 급증하면서 ‘신용산’이 탄생한 것이다. 경성에서 두 번째 일본인 남녀 중등학교인 용산중학교(현재 용산고등학교), 경성제2고등여학교(광복 후 수도여고 자리, 현재 서울시교육청 신청사 부지)가 1917년, 1922년 삼판통(三坂通·현재 후암동)에 개교한 것은 일본인 커뮤니티로서 신용산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22년에는 일본인이 필요한 물산을 주로 유통하는 용산공설시장(현재 숙대입구역 남영아케이드)도 건립되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용산은 일본인 중심의 도시화가 진행되었지만, 그 내부에서 지역별로 차이를 보인다. 상대적으로 초창기에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구용산에는 조선인 인구가 우세한 곳도 적지 않았다. 한 사례로 1925년의 인구통계를 보면 구용산의 중심인 원정(元町·현재 원효로) 3, 4정목은 조선인 2916명, 일본인 381명으로 비율은 88% 대 12% 정도이다. 그런데 전차 노선에 더 가까운 원정 1, 2정목은 조선인 1234명, 일본인 4138명으로 23% 대 77%이다. 같은 원정인데도 생활의 편의에 따라 민족별 인구 구성이 큰 차이를 보였음을 알 수 있다. 군용지를 불하하면서 형성된 신용산은 더 극단적이다. 한강통 1, 2정목(현재 한강대로변 지하철 4호선 삼각지역에서 신용산역 구간)의 총인구는 1만1534명인데 그중 조선인은 990명으로 10%에도 미치지 못했다.(京城府, ‘京城都市計劃資料調査書’, 1927년)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용산의 일본인 시가지 하면 자연스럽게 신용산 쪽을 떠올렸다. 실제 같은 일본인이라도 구용산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다소 막연하게 ‘신천지’를 찾아온 소상인, 서민층이 많은 데 반해 신용산에는 철도국 관리, 군인, 회사원, 은행원 등 엘리트층이 다수 거주했다. 신용산의 일본인 상류층 주거단지의 대표적인 사례로 “서양식 2층 문화주택 40여 채”로 구성되었다는 삼판통의 조선은행 사택촌(현재 한국은행 후암생활관 자리) 같은 곳을 들 수 있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어느 일본인은 훗날 “소학생인 우리들에게 있어 당시의 경성은 일본인들이 모여 살고, 일본어만으로 생활이 가능한 일본의 일부였다”고 회고했다.(‘京城三坂小學校記念文集’, 1983년·삼판소학교는 현재 후암동 삼광초등학교) 비록 어린아이의 시선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조선 속의 일본, 경성 속의 일본이었던 용산, 정확하게는 신용산의 풍경을 적나라하게 전해준다고 하겠다.⊙
08-21 “도회인 유혹하는 백화점 네온 싸인”… 경성 핫플로 뜬 한은 로터리
식민지 중앙은행이었던 조선은행
1912년 준공 후 내부 관람 행사도… 현재는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으로
현 신세계 본점인 미쓰코시백화점
1930년 등장하자 “도회의 불야성”… “아스팔트 위 지게꾼 설움” 비판도
《상업 중심지 된 한은 앞 교차로
동아일보 1939년 5월 7일 기사는 경성 시내의 한 공사 소식을 전한다. “조은(朝銀) 앞 로터리 경성의 이채로 등장, 조선은행 앞 로터리는 금년 봄 접어들며 공사를 재촉하더니 요즘은 공사는 필하고 잔디 입히고 식목하는 등 채색에 바쁘다. 이제 한가운데 분수를 만들면 조선은행 앞에는 대도시의 면모를 그대로 나타낼 것이다.” 지금도 분수대가 자리 잡고 있는 한국은행 앞 교차로를 가리킨다. 1930년대 후반 이곳 교통량이 계속 증가하자 경성부가 회전 교차로를 설치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로터리는 단지 교통시설만이 아니었다. 잔디와 나무를 심고 분수대까지 만들어, 사진엽서의 설명처럼 “이조 오백년의 전통보다도 오늘날의 경성은 젊은 근대성이 박동치는 왕성하고 명쾌한 도시문화”의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
조선은행 앞이 특별한 공간이 된 연원은 1910년대 시구개정(도시재개발) 사업에서 비롯한다. 처음 발표된 1912년 경성시구개정안에는 황토현 광장(현재 광화문 네거리), 황금정 광장(현재 을지로 3가 부근), 탑동공원 앞 광장, 대안동 광장(현재 안국동 네거리), 대한문 앞 광장, 조선은행 앞 광장 등 6개의 광장 조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1919년 시구개정안을 수정하면서 황금정 광장과 대안동 광장은 삭제했다. 광장의 사전적 의미는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게 거리에 만들어 놓은 넓은 빈터”이다. 그러나 총독부가 그런 뜻으로 광장을 조성하려고 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주요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의 공간을 상대적으로 넓게 만들어서 주변에 대형 건물의 건축을 유도하고 이를 통해 시가지화를 촉진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조선은행 앞 광장도 이때 조성되었다. 남대문통 공사를 하면서 본정 1정목의 7개 필지를 더 매입하여 경성우편국 정면의 오픈 스페이스를 확보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광장은 3개의 꼭짓점으로 둘러싸인 공간이다. 그 하나는 광장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은행(현재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경성우편국(현재 포스트타워 자리)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경성부청이었다. 그런데 당시 경성부청은 새로 지은 것이 아니라 1896년 지은 일본영사관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에 반해 조선은행과 경성우편국은 각각 1912년, 1915년에 상당한 규모로 신축한 건물이었다.
식민지 중앙은행의 권위를 한껏 표현하기 위해 르네상스 양식의 석조, 철골 혼합구조로 설계했다는 조선은행은 1912년 1월 준공했다. 이에 맞추어 민간 유력자들을 초청하여 내부를 관람하는 행사를 가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동양의 제일, 30만 원의 대건축물, 조선의 과요(誇耀·자랑할 만한 것)”라고 표현된 경성우편국은 조선물산공진회 개막에 정확하게 맞추어 1915년 10월 1일 낙성식을 열었다. 내부에 ‘우편, 전신, 전화의 개요’ 전시 공간을 마련하여 대중의 관람을 허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우편이나 전신은 일제가 도입한 대표적인 ‘근대 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경성우편국은 이를 선전하는 무대로서 건물 규모도 압도적이었다.
조선은행, 경성우편국 등이 차례로 등장하면서 조선은행 앞 광장, 일명 ‘선은전(鮮銀前)’은 점차 시내의 다른 광장과는 다른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곳은 경성의 ‘현관’인 남대문역, 숭례문에서 시내 중심부로 이동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점이면서, 경성우편국 옆은 일본인 중심지의 상징 격인 본정통의 입구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일제는 선은전 관리에 힘을 쏟았다. “교통 방해를 명목으로 조선은행 앞에 지게꾼이 모이지 못하도록 순사 한 명이 작대기를 들고 다니며 노동자 백여 명을 내쫓”는가 하면(‘동아일보’ 1920. 5. 24.), 1924년 “이미 좌우 양편에 화려한 전등이 장치되어 밤에도 낮같이 밝아 경성의 문 어구로서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였다(‘동아일보’ 1924. 4. 19.). 더불어 도로는 콜타르로 포장했는데, 이런 여러 가지 정비는 “모두 이 일대에 시험적으로 먼저 시행된 일”이었다(‘동아일보’ 1924. 9. 29.). 선은전은 일제가 건설한 도시 문명을 “시험적으로 먼저” 보여 주는 공간이었던 셈이다.


▲일제는 식민지 중앙은행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르네상스 양식의 조선은행을 1912년 준공했다. 1920년경 선은전(조선은행 앞) 광장(위 사진). 왼쪽이 조선은행, 오른쪽이 경성우편국이다. 1930년대 후반 선은전 광장의 교통량이 늘자 회전교차로를 만들고 분수대도 설치해 화려한 도시문화의 공간으로 바꾸고자 했다. 1940년대 초 분수대가 설치된 선은전의 로터리 모습(아래 사진). 일제강점기 사진엽서에 담겨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그런데 선은전은 1920년대 중반 변화의 고비를 맞았다. 경성부청이 1926년 옛 서울시청사 자리로 신축, 이전하면서 선은전의 한 꼭짓점이 비게 된 것이다. 이 자리에는 “조선은행, 경성우편국과 어울리는 건물”이 들어서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설왕설래 끝에 본격적인 백화점 영업을 선언한 미쓰코시가 부지를 매입했다.
1888년 정식 개업한 미쓰코시오복점(三越吳服店)은 1906년 10월 본정에 경성출장소를 설립하고 조선 영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의류 수출입과 잡화상을 겸했으나, 마침 경성부청이 이전한 자리가 나오자 이를 기화로 영업 규모를 크게 확장하려고 한 것이다. 미쓰코시백화점(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은 1930년 지상 4층, 지하 1층, 건평 2000여 평 규모로 준공했다.

▲1930년 지상 4층, 지하 1층 규모로 조선은행 앞 광장에 신축된 미쓰코시백화점. 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으로 바뀌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미쓰코시백화점의 등장은 그동안 다소 권위적인 느낌이었던 선은전에 자본주의적 화려함을 더했다. 신축 백화점은 “5층 빌딩으로 진을 치고 위풍이 당당하게 북방을 응시하여 진고개의 손님은 모조리 그 품에 안을 듯한 호시탐탐한 형세를 보이게” 되었으며(‘조선일보’ 1930. 8. 29.), “선명한 네온 싸인의 유혹, 이것이 도회인의 우울한 기분을 일전하여 준다. 이 도회의 불야성 중 가장 도회인의 감정, 더군다나 젊은이들의 감정을 이상하게 흥분시키는 곳은 백화점일 것이다. 이 밤의 백화점은 참으로 도회인의 향락장이오 오락장이다. 하루의 피곤한 심신을 쉬려고 하는 도회인이 물건을 사지 아니하고도 찬란한 쇼윈도우에 유혹되어 불야성 백화점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동아일보’ 1932. 11. 22.).
1930년대 이후 선은전 사진을 보면 이전에 없던 높은 구조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レ-トクレ-ム(레-토쿠레-무)” 선전탑이다. ‘レ-トクレ-ム’는 1878년 개업한 히라오산페이상점(平尾賛平商店)의 화장품 브랜드 ‘LAIT cr‘eme(레 크렘·유지크림)’이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상품명에 프랑스어를 사용한 화장품이라고 한다. 1908년 중국에 진출하여 베이징, 톈진, 홍콩에 지점을 냈으며, 1930년대 중반 조선에도 진출했다. 당시 사업적으로 최전성기였던 LAIT cr’eme의 거대한 선전탑이 세워진 것은 경성에서 가장 화려한 상업 중심지로 공인된 선은전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런데 점점 화려해지는 선은전 풍경을 달리 바라보는 시선도 존재했다. 1934년 연말 거리를 취재한 기자는 “거리의 룸펜이 느끼는 바 세말의 풍경은 어떤가 보려고 길 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게꾼의 설음, 구루마꾼의 슬픔, 걸인군, 가로세로 아스팔트 우로 고저청탁을 한골로 쏟은 것 같이 교통음향에 어울려 정신을 몰아간다. 조선은행 앞에서 남으로 바라보고 좌우로 기웃거리며 서울 심장의 푸로필을 비뚜로 보려 했다”(‘동아일보’ 1934. 12. 8.)라고 썼다. 카프(KAPF) 계열 소설가 김남천은 “이 광장을 둘러싼 건물은 실로 돈양이나 먹인 것들인 모양인데 서로 상의하고 짓지 못한 것이어서 그런지 조화라곤 맞을 수 없게 되었다. 저축은행은 금고나 수전노의 느낌을 주어 우리 상하기 쉬운 청년들의 마음을 우울에 잠기게 하고 다소 싱겁고 싯붉은 우편국은 봄바람에 상기한 주정꾼 같아서 심히 더웁다. 광고등은 역전으로 옮겼으면 좋겠고 때묻은 백동전 같은 조선은행도 좀 더 보기 좋게 지을 수 있었을 걸 하고 가끔 건축가를 나무란다”고 쓰기도 했다(김남천, ‘長安今古奇觀’, ‘조선일보’ 1938. 5. 10.). 경성의 자본주의 도시 문명을 상징하는 무대, 선은전의 화려함이 도를 더할수록 그 그늘도 짙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09-12 유원지 된 창경궁, 벚꽃 야간개장… “하루 1만 인파, 꽃구경 사람구경
1907년 창경궁 전각들 대거 철거
동식물원-박물관-도서관 등 건립… 명분은 “거처 옮긴 순종 위로 목적”
밤 벚꽃놀이, 대표적 연례행사 돼… 벚나무에 전등 환히 밝혀 “불야성”
젊은 남녀 몰리는 밤 문화 명소로

▲일제는 1910년 한일강제병합을 전후로 창경궁을 동식물원, 박물관, 도서관 등이 들어선 ‘종합 유원지’로 개조해 일반에 개방했다. 창경원으로 불리게 된 당시 모습은 일제강점기 사진엽서들에 남아 있다. 창경원에 벚나무를 대량으로 심어 1924년부터는 밤 벚꽃놀이를 열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일제가 창경원으로 바꾼 창경궁
대중잡지 ‘별건곤’ 1934년 4월호에는 봄을 맞아 ‘꿈같은 눈물의 환상, 옛 궁궐 창경원의 벚꽃’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창경원의 벚꽃이 서울의 명소요 조선의 명소가 된 지는 오래다. 그러나 해마다 돌아오는 양춘의 봄을 맞이할 때마다 서울의 창경원 벚꽃은 서울 사람의 가슴을 졸이게 한다. 꽃구름 같은 꽃 왕가의 장중한 옛 추녀를 감싸고 도는 꽃구름의 희롱은 화창한 봄의 한없는 기쁨과 끝없는 애절의 느낌을 주는 경색이다. 꿈같은 눈물의 환상이기도 하다.” 만개한 벚꽃의 아름다움과 옛 궁궐의 변모를 바라보는 애잔함의 대조적인 느낌이 묻어난다. 어떤 연유로 ‘궁궐(창경궁·昌慶宮)’은 ‘동산(창경원·昌慶苑)’이 된 것일까? 창경궁은 원래 세종이 상왕 태종을 위해 창덕궁 바로 옆에 지은 수강궁 자리이다. 성종 대에 세 명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수강궁을 크게 확장하고 창경궁으로 궁호를 바꾸었다. 이후 창경궁은 주로 창덕궁에 거처하기 어려운 현 국왕보다 항렬이 높은 왕실 가족의 생활 공간으로 쓰였다. 창덕궁과 합쳐 동궐(東闕)이라고 불린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사실상 하나의 영역으로 이해되었다.》
창경궁이 큰 변화를 맞이한 것은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순종이 마지막 황제로 즉위하면서부터다. 창경궁의 전각들을 대거 철거하고 그 자리에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 등을 건립하기로 한 것이다. 이런 작업을 주도한 것은 메이지 초기 사법 관리 출신으로 대한제국 궁내부 차관으로 부임한 고미야 미호마쓰(小宮三保松)다. 그는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순종의 쓸쓸함을 위로하고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는 것을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고미야는 병합 직후까지 궁내부를 개편한 이왕직(李王職) 차관을 지내며 황실의 식민지적 재편을 주도한 인물이다.

▲창경원 동물원의 대수금실(大水禽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창경원 식물원의 대온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먼저 동물원과 식물원을 건립했다. 동물원은 당시 유한성이라는 사람이 준비하던 사립 동물원의 동물을 인수하여 1909년 개원했다. 1912년에는 냉온수관과 배수관을 설비한 동물 온실까지 설치했다. 주로 독일을 통해 다양한 동물을 수입했다. 동물원과 같이 개원한 식물원은 철골 구조에 유리를 사용한 최신식 건물로 당시 아시아 최대 규모의 대온실로 알려졌다. 조선에서는 볼 수 없는 열대 식물로 꾸몄다. 대온실 앞에는 유럽식의 분수를 설치하고 조선 시대 국왕이 친경(親耕) 의례를 하던 권농장을 파서 춘당지(春塘池)라는 연못과 수정(水亭)이라는 일본식 정자도 지었다.
박물관은 1912년 준공했다. 양식 벽돌 2층 건물에 교토 인근 우지(宇治)의 유서 깊은 사찰인 뵤도인(平等院) 호오도(鳳凰堂)를 본뜬 지붕을 얹었다. 호오도는 지금도 10엔 동전의 뒷면에 새겨져 있는,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유산이다. 박물관을 건립한 자경전 터는 창경궁에서 가장 지대가 높은 자리로 일본 고건축의 예술성을 재현한 박물관의 지붕은 어디서나 잘 보이게 된 셈이다. 이어서 1915년에는 4층 규모의 양식 건물로 도서관 용도의 장서각(藏書閣)도 준공했다.

▲창경원 박물관 전경. 1983년 창경궁 복원 사업으로 동물원과 박물관은 철거됐고 대온실은 건축적 가치가 인정돼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이런 과정을 거쳐 병합 전후 창경궁은 동식물원, 박물관, 도서관 등이 들어선 일종의 ‘종합 유원지’로 개조되었다. 처음에는 어원(御苑)이라고 불렸으며, 곧 자연스럽게 창경원이라고 불렸다. 이런 방식의 공간 개조는 일본에 선례가 있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조성한 일본 최초의 근대 공원이라는 도쿄의 우에노(上野) 공원이 그것이다. 에도 시대 우에노 일대에는 도쿠가와 막부와 에도성의 안녕을 기원하는 간에이지(寬永寺)라는 사찰이 있었다. 간에이지는 일본 천태종의 간토 총본산으로 단지 사찰일 뿐 아니라 도쿠가와 가문의 몇몇 쇼군의 묘와 사당이 있는 ‘막부의 성소’였다. 메이지 신정부는 이곳을 공원으로 지정하여 일반에 개방했다. 또 박물관, 동물원 등을 건립하여 에도 시대의 색채를 지우고 신정부의 이념을 전파하는 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했다.
고미야는 창경원 조성의 목적으로 순종을 위로하는 것 외에 “세인에게 취미와 지식을 보급하고자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에노 공원의 방식을 조선 왕조의 한양을 식민지 수도 경성으로 재편하는 데 적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동식물원을 개원하면서 일, 목요일을 제외한 평일에는 창경원을 일반에 개방하기로 했다. 이로써 옛 궁궐은 완전히 유원지가 되었다.
1910년대부터 창경원은 비교할 대상이 없는 경성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연간 관람객은 늘 10만∼20만 사이였다. 1917년 4월 22일에는 “경성 사람 스무 명 중 한 명은 동물원에 들어”와 하루 관람객이 무려 1만2966명에 이르렀다는 기사도 보인다(‘매일신보’ 1917년 4월 23일).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1917년판에 따르면 12월 말 현재 경성부 인구는 25만3154명이었다. 특히 봄에 관람객이 폭증하자 1918년부터는 4, 5월에는 특별히 매일 개원하고 학생 등의 단체 관람 할인도 적용했다. 종로 4정목에서 북행하는 전차 노선도 처음에는 총독부의원 앞(현재 서울대병원 자리)을 지난다고 하여 ‘총독부의원선’이라고 불렸는데, 어느 새부턴가 ‘창경원선’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해마다 꽃놀이 봄놀이 터로 가장 많은 손을 맞아들이는 동물원”의 인기는 계속되어 1924년부터는 “봄 벚꽃이 만개할 때를 기다려 이, 삼 주일 동안 시기를 정하여 동물원을 밤에도 열고 수천 개의 전등을 장식하여 흥취를 돕기로” 결정되었다(‘동아일보’ 1924년 3월 11일). 이때부터 창경원의 ‘야앵(夜櫻·밤 벚꽃놀이)’은 1945년 8·15 광복 때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실시되며 경성의 대표적인 연례행사가 되었다. 매년 4월 20일을 전후하여 열흘 정도 오후 10시 반까지 특별 개원했는데, 이때는 수백 개의 전등을 나무에 매달고 17m에 달하는 네온탑을 설치하기도 했다. 각종 공연도 개최되었다.

▲벚꽃놀이 철 군중이 운집한 창경원 정문(홍화문) 앞. 오른쪽에 ‘야간 개원’ 안내문이 쓰여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일상의 ‘밤 문화’가 형성되기 어려웠던 당시 경성에서 “25만 와트라는 엄청난 조명”이 “문자 그대로의 불야성”을 이룬 창경원 야앵의 인기는 대단했다(‘매일신보’ 1936년 4월 29일). “사람의 물결로 보자니 불빛이 너무도 현란하고 불빛으로만 보자니 꽃이 그 또한 너무도 황홀하지 않은가!”라는 경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동아일보’ 1939년 4월 18일). 야앵 기간에는 창경원선 전차도 특별히 증차되었으나 “종로 4정목 어구에서는 여차장, 남차장이 밀려드는 노도 같은 인파를 전차 속으로 몰아넣느라고 경매장 앞잡이처럼 목이 터지라고 어서 타요! 앞으로 닦아서세요!를 발악하듯” 외쳤다(‘동아일보’ 1936년 4월 29일). 특히 젊은이들에게 야앵의 목적은 물론 꽃구경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꽃을 구경하는가 하면 그들의 눈총은 으슥한 곳으로 혹은 젊은 여자들의 다리로, 그리고 여자는 사나이의 끔벅이는 눈에 해죽거리며 따르는” ‘은밀한 일탈’도 밤 나들이의 볼거리였다(‘조선일보’ 1930년 4월 12일).
1937년 8월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하면서 조선도 제국주의 전쟁에 휘말려 들어갔다. 창경원 야앵은 계속되었지만 그 의미는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매일신보는 “전시 아래의 인식을 두터히 하여 청아한 마음으로 벚꽃의 밤을 조용히 즐긴다”든지(‘매일신보’ 1938년 4월 20일) “시국 영화와 뉴스 영화를 보면서 꽃향기에 취한 흥분을 가다듬는 군중들의 태도”를 전한다(‘매일신보’ 1939년 4월 18일). 이제 밤 벚꽃놀이마저 전시 후방 국민의 의무를 다하기 위한 경건한 시간으로 설정된 것이다. 나아가 사람들은 “한 송이 두 송이 연연한 모습을 한 벚꽃은 우리 일선의 용사”를 떠올려야 했다(‘매일신보’ 1942년 4월 19일). 태평양 전쟁의 한복판에서 경성 시민의 일상 행락은 군국주의의 애도로 치환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10-03 교통편의 내세운 ‘종묘 관통도로’… 일제, ‘시민에 개방’ 여론은 외면
이어져 있던 종묘와 창경궁-창덕궁
총독부 “도시 정비 위해 도로 필요”… 반대하던 순종 승하하자 공사 속도
“시민공원으로” 등 당시 여론 복잡
1932년 구름다리 설치하며 마무리… 결국 2022년 녹지로 연결해 복원

▲1914년 ‘종묘 관통’ 확정 못 했던 일제 1914년 경성부명세신지도에는 경성 도로정비 사업 예정 노선이 표시돼 있다. 그런데 창덕궁, 창경궁과 종묘 사이를 관통하는 구간만은 표시돼 있지 않다. 처음 계획을 세웠을 때 총독부가 이 공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할지 방침을 확정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염복규 교수 제공
《창경궁~종묘는 어떻게 끊겼나
1922년 늦여름 어느 날 창덕궁에 기거하는 순종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총독부 토목기사들이 종묘 경내에 들어와 도로 예정선을 측량하고 그를 표시하는 침목(枕木)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침목은 영녕전(永寧殿)과 불과 30∼40m 떨어져 있었다. 순종은 “크게 놀라시며” “차라리 창덕궁 땅을 더 범하도록 하고 영녕전에는 가깝지 아니하도록 주선하라시는 처분을” 내렸다. (동아일보 1922년 9월 21일) 순종은 1907년 즉위할 때부터 실제 권력 행사와는 거리가 먼 ‘허수아비 황제’였다.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발언을 찾기 어려운 순종이 총독부가 하는 일에 문제를 제기한 것은 이 사건이 거의 유일하다.》
아무튼 순종이 공개적으로 반대를 했으므로 총독부도 이를 무시하고 측량이나 공사를 마구 진행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1922년은 3·1운동이라는 대사건이 일어난 지 불과 3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총독부 토목부장 하라 시즈오(原靜雄)는 “물론 시구개정(도시재개발)이라는 것은 도시 발전과 일반 공중의 교통을 편리케 하자는 목적이므로 장래에는 그 길을 내어야” 하겠지만 “예정선대로 실행하면 종묘 뒤를 끊게 되는 까닭에 이후에 실행을 한다 하여도 물론 이왕직과 협의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종묘 중지의 존엄은 범치 아니하도록 할 터”라고 얼버무렸다(동아일보 1922년 9월 21일). 그리고 일단 측량을 중단했다.
문제가 된 도로는 1912년 처음 결정된 경성 시구개정 사업의 제6호선이었다. 이 도로는 “광화문 앞에서 대안동 광장(안국동 4거리)을 경유하고, 돈화문통을 횡단하여, 총독부의원(서울대병원) 남부를 관통, 중앙시험소(대학로 한국방송통신대 역사관) 부근에 이르는” 구간이다(오늘날의 율곡로). 이 도로의 완성은 경성 시가지의 ‘바둑판형’ 정비의 관건이었다. 총독부로서는 절대 개통을 포기할 수 없는 도로였던 셈이다. 문제는 도로를 예정대로 부설하려면 조선시대부터 사실상 하나의 공간이었던 창덕궁, 창경궁과 종묘 사이를 ‘관통’해야 하는 점이었다. 더군다나 직선으로 부설하려면 도로는 종묘 경내를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총독부 토목기사들이 부근에 침목을 설치하여 순종을 놀라게 한 영녕전은 정전(正殿)과 함께 종묘의 핵심적인 전각이다.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례를 올리는 시설이다. 조선 건국기 종묘를 처음 조성하면서 건립한 정전에는 현재 국왕의 4대조와 함께 특별히 공덕이 있는 역대 국왕의 신주를 모셨다. 시간이 흘러 더 이상 정전에 모실 수 없는 신주가 생기자 이를 모시기 위해 세종대 영녕전을 추가로 건립했다.
유교 사회에서 효는 최고의 이념이며, 효의 가장 중요한 실천 행위 중 하나는 선대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따라서 왕실의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올리는 종묘는 왕실이 효를 행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순종에게는 국왕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기도 했다. 창덕궁의 ‘마지막 상궁’이었던 김명길은 “(순종은) 덕수궁으로 나들이를 하시는 외에 창덕궁 밖으로 행차를 하시는 것은 종묘에서 제사를 지내거나 선왕들의 능에 참배하실 때”뿐이었다고 회고했다(김명길 ‘낙선재주변’, 1977년). 예기치 않게 순종이 반발한 속내를 짐작할 수 있다.

▲1926년 순종 승하하자 도로 공사 재개 순종의 장의 행렬. 순종 생전에 관통 도로 공사를 주저하던 총독부는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다시 율곡로 공사를 재개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잠시 숨을 고른 총독부는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도로 공사를 다시 시작했다. 소식이 알려지자 이번에는 전주 이씨 종중이 반발했다. 전주이씨종약소는 이틀간 임시 총회를 개최하고 총독부와 이왕직은 물론 일본 궁내성에도 탄원서를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결정을 한 종중 임시 총회에는 백작 이지용, 자작 이재곤 등도 참석한 사실이다. 두 사람은 각각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 1907년 한일신협약에 찬성하여 오늘날 ‘을사오적’, ‘정미칠적’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이지용, 이재곤 같은 저명한 친일파들마저 나서는 등 파문이 커지자 이번에는 총독부의 2인자인 정무총감 유아사 구라헤이(湯淺倉平)가 직접 나서서 “길이 반드시 종묘 안으로 난다는 것도 아닌즉 국장 전에는 누구든지 떠들지 않도록 삼가함이 옳을 줄로 안다”고 하며 진화에 나섰다(조선일보 1926년 6월 1일). 총독부 수뇌부는 순종의 장례를 앞두고 시중의 여론이 시끄러워지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실무 관리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공사의 책임자인 경성토목출장소장 혼마 도쿠오(本間德雄)는 훗날 “이 구간 공사에 대해 전주 이씨 종중의 반대가 심하자 총독은 몇 번씩 기다리라고 지시하는 등” 상당히 주저한 데 반해 자신은 이 공사를 “단연 해낼 작정으로” 곳곳에 “여러 가지 상담을 했”다고 회고했다(友邦協會 ‘朝鮮の國土開發事業’, 1967년). 도쿄제대 공대를 졸업하고 1915년 총독부에 부임하여 줄곧 ‘조선 개발’에 종사한 엘리트 토목관리 혼마는 총독, 정무총감 등의 여론을 살피는 태도, 정치적 고려 등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도로 공사는 다시 2년여가 지난 1928년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되었다. 전주 이씨 종중의 반대는 여전했다. 일반의 찬반 여론도 설왕설래했다. 언론은 이 도로를 가리켜 ‘종묘관통선’이라고도 하고, ‘북부간선도로’라고도 했다. 느낌이 전혀 다른 명명이다. 도로 공사를 둘러싼 여론이 복잡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전에 들을 수 없었던 다른 목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예컨대 이미 도로 공사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진행된 1929년 6월 한 언론은 ‘종묘지대를 개방함이 여하(如何)―안식소 없이 헤매는 북부민을 보고’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이 도로의 개통에 따라 궁궐과 종묘가 ‘분리’됨을 전제로 종묘의 개방과 공원화를 주장한다.
“어디까지든지 종묘의 존엄만을 주장하여 시민의 신고(辛苦)를 그대로 시약불견(視若不見)한다는 것은 열성조(列聖朝)의 성덕에 위반되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직지대가 사직공원이 되고 장충단이 장충단공원이 된 금일에 바늘 꽂기도 어려운 인구 조밀한 북부에 광활한 지역을 점한 종묘지대는 경성부민의 보건과 도시미를 위하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민중의 존숭심을 다시 환기키 위하야 공원으로 공개될 것은 금후의 조선 정세가 여하히 변할지라도 필연히 닥쳐올 운명이라고 아니 볼 수 없다.”(동아일보 1929년 6월 28일) 전통적인 관념에서 종묘의 위상을 논하고 그 훼손 문제를 논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다. 공사가 마무리 단계로 들어간 1931년에는 “불란서 거울방이 강화회의 장으로 되는 오늘에 조선의 종묘도 옛 모양과 옛 위의를 못 가지는 것이 그다지 민중의 서러울 바가 아닌 듯하다”는 언급도 등장한다(조선일보 1931년 8월 2일). 베르사유 궁전이 1차 세계대전의 강화회의장으로 쓰인 일을 빗대어 이제 시대가 바뀌었으니 종묘 같은 장소의 쓰임도 달리 생각해야 한다는 취지이다. 이런 기사는 경성의 조선인 중심지에 예컨대 공원과 같은 절대 부족한 도시 시설을 요구하는 민간의 목소리를 대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32년 창경궁-종묘 사이에 도로-다리 1932년 율곡로 준공 직후 도로와 구름다리 전경.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2022년 녹지로 90년 만에 연결 복원 2022년 복원사업으로 기존 율곡로를 터널화하고 천장이 덮인 도로 위 빈터에 녹지를 조성해 북쪽 창경궁과 남쪽 종묘를 다시 연결한 모습. 서울시 제공
종묘관통선 혹은 북부간선도로는 1932년 6월 둘로 나뉘게 된 궁궐과 종묘 사이의 통행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구름다리를 설치하면서 완전히 준공했다. 첫 측량에서부터 10여 년이나 걸린 셈이다. 이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전통을 고려하지 않는 일제의 ‘무단한’ 도시 근대화의 시도, 여전히 힘이 남아 있는 유교 국가의 관념, 도시민의 아래로부터 도시 환경 개선의 요구 등은 복합적으로 부딪치고 엇갈렸다. 그런데 지난한 과정을 거쳐 도로를 개통했지만, 종묘는 개방되지 않았다. 결국 최종적으로 관철된 것은 식민지 권력의 일방적인 의지뿐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2022년 궁궐과 종묘 ‘관통’ 구간을 터널화하여 원형을 ‘복원’하기에 이른 또 하나의 지난한 과정의 출발점이었다.⊙
10-24 “청계천 범람-낙상, 서울의 걱정거리”… 격론 끝 “덮어씌우자” 복개공사
하천에 버려지는 오물-배설물 문제… 천변 길 좁아 떨어지는 사고도 잦아
예산 부족을 이유로 정비 미뤄지자… “다수 이용자인 조선인 차별” 논란도
1935년 “철근콩크리트 덮겠다” 발표… 사업 순위 또 밀려 1937년에야 착공

▲청계천은 오수와 빗물을 조선 도성 밖으로 배출하는 간선 하수도 역할을 했다. 한편으로는 잦은 낙상 사고와 범람으로 정비 문제를 둘러싸고 일제강점기에 논란이 계속됐다. 1910년경의 청계천.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20년대부터 청계천 정비 갑론을박
청계천은 조선 건국기 한양을 수도로 정하면서 도성 중앙의 시냇물을 더 파고 넓혀서 조성한 하천이다. 전통적으로 도성의 남북을 구분하는 경계선이면서 더러운 물과 빗물을 모아 성 밖으로 배출하는 간선 하수도 역할을 했다. 또 평소에는 메말랐다가 홍수 때는 범람하기 일쑤였다. 청계천은 한양의 도시 기능상 꼭 필요한 요소이면서 도시민의 안전을 위협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 관리와 정비는 늘 중요한 과제였다. 일제강점기에도 이 점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병합 초기 일제는 청계천 정비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다. 총독부 기관지도 “근래에 와서는 다른 것은 모두 혁신이 되고 문명이 되어 오지마는 한갓 간천 같은 것은 손을 대일 생각을 아니했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매일신보·1919년 5월 17일)》
청계천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되었다. 그 하나는 하천에 무분별하게 버려지는 오물과 배설물로 인한 위생 문제였으며, 다른 하나는 천변 양측의 길 너비가 너무 좁아 사고가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문제였다. 1924년 4월에는 “광화문우편국 집배인 고영복이란 사람이 우편물을 가지고 자전차를 타고 부내 관철동 39번지 앞 청계천변 길을 지나가는데 그때에 마침 부내 송현동 11번지 박희선이가 하차(荷車·수레)에 짐을 싣고 그 반대로 옴으로 그것을 피하려 하다가 자전차를 탄 채로 청계천에 떨어져서 자전차가 부스러지고 면상과 발에 중상을 당하고 뇌진탕이 일어나서 인사불성에 이르렀다.”(매일신보·1924년 4월 23일) 이런 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청계천 문제는 경성부회(지방의회) 회의에서도 늘 시끄러운 소재가 되었다. 1926년 회의 기록을 보면 “청계천 양편 길에 대하여 다른 곳을 말하면 도로가 좀 불완전하야 교통이 불편할 뿐이지만 이곳은 전혀 한 사람도 다닐 수 없을 뿐 아니라 여러 길이나 되는 청계천가이므로 어린아이들이 장난을 하다가 개천에 떨어져 부상 당하는 일도 종종 있으며 술 취한 사람들이 때때로 낙상하는 일이 많은데 이에 대해 어찌하겠느냐”는 의원의 공박에 경성부 토목과 관리는 “그곳은 극히 위험한 곳인 줄 아나 경비가 없어서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대답한다. 이에 “경비가 없다는 데는 다시 할 말이 없어서 부득이 입을 다물게 된 의원 측으로부터는 당국이 너무도 다른 도로를 미장하기에만 몰두하고 각일각으로 위험을 느끼게 되는 이곳에 경비 없다는 당황스러운 이유만 내세우는 데 대하야 불평의 기운이 충만했다.”(매일신보·1926년 3월 5일)

▲여름 홍수로 범람한 청계천 모습(매일신보 1918년 8월 17일자).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1920년대 예산 부족으로 도시 정비 사업이 부진한 것은 청계천뿐만 아니라 경성 곳곳이 비슷했다. 아니, 전국 도시 어디나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청계천은 공교롭게도 조선인 중심지인 북촌과 일본인 중심지인 남촌의 경계선이었으며, 천변 도로 이용자의 다수는 조선인이었다. 따라서 청계천 정비의 부진은 다른 곳과 대비되어 경성의 남북 차별, 곧 민족 차별 문제로 비화하곤 했다. “부민 간에는 이것이 남촌에 있었으면 이미 개수하여 안전히 했을 것이다. 북촌에 있는 까닭으로 아직까지 방치하고 있다는 말까지 훤전(喧傳·소문이 퍼짐)되는 중으로 인심까지 험악화하야 가는 형편”이었던 것이다.(매일신보·1929년 11월 25일)
1931년에는 경성부가 “비가 오면 질어서 사람이 괴로워 다닐 수 없다는 이유”로 용산 한강통 도로 포장 예산 4만 원을 부회에 올리자 “부당국자의 처사가 불공평한 것을 비난하는 동시에 의원 간에도 이에 대한 불평이 높아 이번에 열리는 부회에서는 청계천 문제로 일대 파란”이 일어났다.(매일신보·1931년 3월 12일) 겨우 도로가 질다는 이유로 한강통은 포장까지 하면서 낙상 사고가 빈발하는 청계천은 정비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청계천 정비는 예산이 너무 많이 소요돼 당장 시작하기 어렵다는 경성부 토목과장의 답변에 대해 “만약 청계천이 황금정 이남 남촌에 있다고 하면 부당국자는 어떻게든지 이미 처단했을 것”이라는 조선인 의원의 반발은 늘 반복되는 논란의 구도를 보여준다.(매일신보·1931년 3월 14일)

▲청계천을 ‘서울의 걱정거리’ ‘살인도로’라고 명명한 신문기사(매일신보 1932년 6월 17일자). 당시 청계천의 정비가 얼마나 중요한 현안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비슷한 양상으로 반복되던 청계천 정비 논란은 1934년 총독부가 ‘조선시가지계획령’을 제정하면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조선에서 ‘법정 도시계획’을 실시할 수 있게 되면서 도시 개발이나 정비에 대규모 예산 투입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는 십수 년 경성의 골칫거리였던 청계천 정비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줬다. 1935년 경성부는 “종래 도시의 미관상 또는 부민의 위생상 중대 문제로 그 대책을 강구하여 오던 청계천의 정리에 나서기로 하였다. 청계천의 간선으로 합류되는 부내 삼청동에서 의전 병원(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앞을 거쳐서 광화문우편국 앞을 지나가는 청계천의 지선을 비롯하야 다옥정(茶屋町·현재 중구 다동) 남측을 관통하는 청계천의 지선 등등을 일괄하야 모두 그 위를 철근콩크리트로 덮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청계천의 좌우 양편에 역시 일부를 철근 세멘 콩크리트로 덮어 양편의 길을 넓히는 동시에 장래 오물물을 버리는 암랑(巖廊·하수도)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동아일보·1935년 5월 30일) 경성부의 계획은 청계천의 복개, 도로화로 요약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안전과 위생,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이전부터 시중의 여론이 바라는 바였다.
그런데 막상 경성시가지계획이 시작되자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경성부가 남산주회도로 부설을 추진하면서 청계천 복개가 예산 투입에서 계속 후순위로 밀린 것이다. 남산주회도로는 신용산 삼각지에서 신당동에 이르는 도로이다. (현재 이태원로) 경성부는 도시계획 추진을 기회로 남산주회도로를 부설하고 그 남쪽 이태원, 한남동 일대의 경성부 소유 토지를 고급 주택지로 개발하고자 했다. 경성부 재정에 도움이 되고 (주로 일본인일 가능성이 높은) 상류층이 원하는 사업이었지만 서민 다수의 이해관계와는 큰 상관이 없는 사업인 셈이다.
부회 회의에서는 격한 논쟁이 이어졌다. 한 조선인 의원이 청계천 복개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남산주회도로 부설을 “75만 원이나 들여 공사 착수하는 반면 10여 년이나 문제가 되어 온 청계천을 방임하는 것이 과연 말이나 되는가? 그것은 청계천이 북쪽에 있는 까닭이 아닌가?”라는 민감한 발언을 쏟아내자, 일본인 의원이 “청계천 문제는 연일 충분히 이야기되어 더 이상 질문의 여지도 없다. 그런데도 계속 남산주회도로와 연결하여 대립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조선인 의원 측의 편협한 감정의 발작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고 반박하고, 다시 “감정의 발작이라는 말을 취소하라. 우리들은 모두 부민을 위한 부정을 논하는 것인데, 감정이란 무엇이냐? 조선인 의원을 모욕하는 말”이라는 재반박이 이어졌다.(국가기록원 소장 1936년 3월 경성부회 회의록에서 재구성)
논란은 ‘사회적 압력’의 효과를 발휘한 듯하다. 1937년 정식으로 시작된 경성시가지계획의 우선 사업 중 하나로 청계천 복개와 도로 부설이 포함됐다. 물론 청계천 전체의 복개는 “40년 후의 아득한 일”이므로 최초의 복개 계획 구간은 광화문에서 삼각동까지 정도였다. 그나마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시기 도시계획 같은 데 투입되는 예산은 계속 축소됐으며 자재난도 심각했다. 8·15 광복 때까지 청계천은 서린동 구간, 즉 광화문에서 현재 종각역 정도까지 복개하는 데 그쳤다.
일제강점기 ‘복개’는 공론화된 청계천 문제의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도시 정비에 투입할 수 있는 사회적 자원은 한정돼 있었고, 그 배분을 둘러싼 경합은 늘 치열했다. 그리고 종종 그것은 ‘민족적 갈등’으로 폭발하곤 했다. 이것이 ‘식민지 수도’ 경성의 현실이었다.⊙
11-14 경성 명동 아파트 덮친 불… 4명 숨지자 “방화벽-고층탈출 방안 시급”
“1935년 화재 199건, 피해 65만원”
갈수록 손해액 큰 대형화재 늘어… 공장 밀집했던 창신동 빈도 높아
1925년 첫 상설 ‘경성소방서’ 생겨
일제, 군중 동원해 소방훈련 홍보… 중일전쟁 도발후엔 군사훈련 색채

▲1929년 2월 매일신보를 통해 보도된 경성극장 화재 모습. 건물이 전소돼 이듬해 극장을 신축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도시화 따라 늘어났던 화재
1940년 1월 경성의 월간 화재 손해액은 50여만 원에 달했다. 겨울의 한가운데인 1월은 언제나 화재가 가장 많은 달이다. 하지만 1940년은 아주 이례적이었다. 전년 같은 달에 비해 손해액이 거의 5배나 되었기 때문이다. 화재가 상대적으로 적은 해라면 근 1년 치 손해액에 맞먹는 거액이었다. 이는 구용산 경정(京町·현재 용산구 문배동)의 태양제유회사 화재 손해액이 45만 원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이 화재를 두고 ‘매일신보’는 경성의 도시화가 진전되어 점차 공장과 고층 건물이 증가하면서 화재도 대형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매일신보’·1940년 2월 3일). 당시 총독부 소방 당국은 손해액 5만 원 이상의 화재를 ‘특수 화재’로 분류했는데, 1940년 한 해에만 태양제유회사 화재를 비롯하여 특수 화재가 여섯 건이나 발생했다(조선소방협회 기관지 ‘조선소방’·1941년 4월호).》
인류는 불을 사용함으로써 고도의 문명 발달을 이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불에 의한 피해인 화재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화재는 시대를 불문하고 발생하는 현상이었으나 근대화, 공업화의 진전과 더불어 더 강력한 발화 물질을 많이 사용하게 되면서 발생의 빈도와 강도도 높아졌다. 한편 도시화의 진전으로 인구와 건물이 제한된 공간에 밀집할수록 화재의 피해는 커질 수밖에 없었다. 화재는 언제,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는 재해이지만 도시의 화재, 특히 경성 같은 대도시의 화재는 더 큰 피해를 남겼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경성의 일관된 화재 통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몇몇 부분적인 통계를 모아 보면 경성의 도시화와 화재 발생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1914년은 화재 건수는 171건, 손해액은 10여만 원인 데 반해 1935년은 199건, 65만여 원이다(서울시사편찬위원회 ‘서울통계자료집’·1993년). 건수의 증가보다 손해액의 증가가 두드러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형 화재가 증가함을 알 수 있다.

▲1935년 3월 ‘일본 육군 기념일’에 즈음한 종로 소방훈련 풍경. 경성휘보에 실렸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소방훈련의 군사적 성격은 더 강화돼 갔다.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그런가 하면 1930년 경성의 지역별 연평균 화재 발생 건수를 보면 다른 지역은 보통 1, 2건인 데 비해 6건으로 눈에 띄는 지역이 보인다. 창신동이다(‘경성휘보’·1931년 12월호). 종로와 동대문의 경계인 창신동은 당시 작은 공장이 밀집한 지역이었다. 화재의 빌미가 될 수 있는 ‘위험 물질’이 많은 곳인 셈이다. 한편 1936년 경성의 각 경찰서 관내 화재 발생 건수를 보면 다른 경찰서 관내는 모두 100건 이하인 데 도심부인 종로경찰서와 본정(本町)경찰서 관내는 각각 143건, 186건으로 발생 빈도가 확연히 높다(‘매일신보’·1937년 5월 13일).
이전과 다른 도시적 생활 양식도 새로운 화재 대비의 필요성을 불러왔다. 1930년대 들어 경성에는 집합 주거 형태인 아파트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1937년 1월 명치정(明治町·현 명동) 아파트에서 화재로 4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를 계기로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의 방화 규정과 방화 설비 등을 마련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여관에 대하여는 취체규칙(단속규칙)이 있는데 여관과 거의 흡사한 상태로서 그 위에 연로한 사람과 어린이들이 잡거하여 가지고 각 실에서 취사를 하여 위험성이 많은 아파-트에 대하여서는 하등 취체가 없는 것은 자못 고려하여야” 하며 “아파-트는 각 호의 집합체이니까 전후좌우상하의 이웃집에 영향이 미치지 않도록 각 호의 벽은 기어코 내화구조의 건축으로 하여 두지 않으면 안될 것”이고 “현재 아파-트의 높은 층에 거주하고 있는 인사는 만일의 경우에 여하한 방법으로서 피난할 수가 있을까를 미리부터 연구하여 두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매일신보’·1937년 1월 13일).

▲1925년 신설됐던 경성소방서의 청사 신축을 알리는 1937년 매일신보 기사. 새 경성소방서 청사는 광복 후 서울 중부소방서 청사로 사용되다 철거됐다.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화재가 빈발하자 그에 대응하여 소방 기구도 발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소방 기구는 일본의 전통을 본뜬 자치 소방조(消防組)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주로 일본인 조직이었다. 경성에서는 1889년 조직된 남촌의 경성소방조가 효시다. 이어서 용산소방조, 조선인 소방조인 마포소방조도 조직되었다. 조선인 소방조 조직은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현상이다. 가장 큰 도시이니만큼 화재의 위험성도 많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병합 후 총독부는 ‘소방조규칙’을 제정하여 여러 소방조들을 총독부 경찰 관서가 총괄 지휘하도록 했다. 일본인이건 조선인이건 자치 조직이 활동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1925년에는 조선 최초로 상설 소방 기구인 경성소방서를 신설했다. 1944년, 1945년에는 경성소방서 분서가 용산소방서, 성동소방서로 승격했다. 도시 확장과 화재 증가의 결과이다. 8·15 광복 때까지 경성 외에는 청진소방서가 유일하게 존재했다.
총독부는 정기적으로 소방 인력을 동원하여 소방 훈련을 진행했다. 정기 훈련은 매년 1월 4일의 소방출초식(出初式·일종의 신년 하례식), 춘계, 추계 훈련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총독부에 소방 훈련의 목적은 진화 능력의 향상뿐 아니라 대규모 ‘보여주기’의 의미도 컸다. 소방이란 화재라는 재해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소방 훈련은 그것을 주관하는 권력의 힘과 정당성을 보여주는 좋은 선전 재료였다. 그래서 소방 훈련에는 항상 대규모 군중을 동원했다. 또 특별한 이벤트를 연출하기도 했다. 1918년 총독부 초청으로 이른바 ‘재훈춘(琿春) 동포 시찰단’이 경성을 방문했다. 훈춘은 조선인이 많이 이주한 간도의 중심 도시 중 하나이다. 병합 초기 총독부는 만주 일대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초청하여 ‘총독부의 선정(善政)’을 과시하는 행사를 많이 기획했다. 이때 시찰 일정의 하나로 소방대의 화재 진화 훈련을 시연했던 것이다.
“멀리 북간도 지방으로 나아가 훈춘 성내 외에 근거를 닦고 이역풍상의 허다한 간난신고를 겪으며 상공업에 근면 열심하여 일종 무형한 큰 세력을 잡고 있는 재훈춘 조선인 동포는 항상 교통의 불편으로 인하여 조선 내지의 형편을 자세히 목격할 기회가 자연 적어 7, 8년 내로 일취월장하는 조선 사정을 알지 못함이 큰 유감”이었는데 “경무총감부에서는 시찰단 일행에게 구경시키기 위하여 경성소방대를 소집하여 총감부 광장에서 소방 시범을 거행하기로 준비를 정돈하고” “이어 오구마 주임 경부가 여러 가지 기교한 소방기계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한 후 소방대의 활동을 시작”하자 시찰단은 “물을 뿜는 것이며 소방자동차와 증기펌프에 활발 기민한 활동에 모두 경탄하기를 마지아니하였으며 어떤 단원은 저와 같이 인민의 생명, 재산을 위하여 설비를 완전히 하였음은 실로 꿈 밖이라고 탄식”했다(‘매일신보’·1918년 5월 5일). 일제가 소방 훈련의 시연에서 무엇을 보여주려고 했는지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정기 소방 훈련 중 1928년 추계 훈련은 기억할 만하다. “경찰부 보안과에서는 오는 12월 3일 오전 10시부터 부내 훈련원 광장에서 추계 소방점검 및 대연습을 거행하”기로 했는데 “당일은 각 관계자와 기타 관민 다수를 초대하고 경성소방서 및 소속 소방조원에 대한 점검이 있고 이어서 분열행진이 있은 후 그 다음으로 연습에 들어가 ‘비행기 습래(襲來) 폭탄 투하로 인한 이재 가옥의 인명 구조 및 화재 방어법’이라는 연습을 개시하여 훈련원 앞에 시설하여 놓은 100척여 4층 가옥에 폭탄이 떨어져 불이 일어난 것을 구조대(救助袋)와 구조막(救助幕)과 밧줄 및 사다리로 웃층에 있는 아해와 부녀 등을 구출하는 기발하고도 아슬아슬한 광경을 실연”할 것이었다(‘매일신보’·1928년 11월 26일). 경성에서 소방 훈련에 일종의 ‘민방위 훈련’의 요소를 가미한 첫 훈련이었다. 이런 식의 훈련은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한 이후에는 더욱 대규모로 거행되었다. 1937년 추계 소방 훈련은 참가 인원만 이전의 두 배에 가까운 430명에 이를 정도로 대대적으로 추진했다(‘조선소방’·1937년 11월호). 이제 소방은 순수한 화재 대응 활동이 아니게 된 것이다. 이미 벌어진, 또 다가오는 전쟁에 대비한 군사 활동의 색채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12.05 경성 1호 ‘에스카레터’의 충격… “화신백화점 가서 일단 타고 볼 일”
유통거물 된 20대 사업가 박흥식… 화신상회 인수해 백화점으로 개조
‘문화주택’ 한채 경품 행사 등 화제… 1942년엔 일본계 백화점 수준 성장
총독부, 무역 대행 독점회사 지정… 광복후 쇠퇴의 길… 1980년 부도

▲조선인 사업가 박흥식은 1931년 화신백화점을 설립한 후 ‘문화주택’ 한 채를 내건 경품 이벤트 등 공격적 경영으로 키워 맞은편 동아백화점까지 인수했다. 1937년 신축한 화신백화점의 전경.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종로 화신백화점 50년 흥망성쇠
1920년대에 태어나 평생 서울 사대문 안에서 거주한 한 할머니는 당신이 칠십 평생을 보낸 서울을 이렇게 회고한다. “강남은 남의 나라야. 싫어. 나는 어디 갔다가도 종각 들어와서 화신상회가 보이면 마음이 그냥 안도야. 아이구 이제 나는 걸어서도 찾아갈 수 있고, 그냥 골목도 알 수 있고.”(‘인사동 한정식집 할머니의 생애사’ ‘주민 생애사를 통해 본 20세기 서울 현대사’,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2000년) ‘화신상회’는 1930년대 이래 근 반세기 동안 종로의 랜드마크였던 화신백화점이다. (현재 종각역 네거리 종로타워 자리) 원래 화신상회는 전통적인 종로 상인 출신 신태화(申泰和)가 1918년 창업한 귀금속 전문 상점으로 출발했다. 경성의 조선인 귀금속상으로는 최고의 위치에 올라 금은 외에 포목, 잡화 등도 취급하는 등 사세를 확장했다. 그러나 무리한 경영 확대는 화신상회의 발목을 잡았다. 1920년대 말, 세계는 대공황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을 때였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박흥식이다. 1903년 평안남도 용강의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박흥식은 부친과 형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어린 나이에 사업에 뛰어들었다. 개항장 진남포에서 미곡 유통업으로 성공한 그는 1926년 ‘상경’하여 선일지물(鮮一紙物) 회사를 설립했다. 문화통치기 각종 출판이 활발해지면서 종이 수요가 크게 증가하는 데 착안한 사업이었다. 박흥식은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1928년 3대 조선어 일간지 중 하나인 시대일보의 용지 독점 공급권을 따내는 한편 조선인 업자로는 드물게 일본어 신문과도 거래를 트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아직 이십대의 나이에 “우내(宇內·온 세상)에 빗나는 소장 재계의 걸물”로 떠오른 박흥식은 마침 화신상회의 주채권자였다.(‘삼천리’, 1933년 10월호) 그는 경영난에 빠진 화신상회에 자신의 채권을 주식으로 바꾸어 줄 것을 요구했다. 신태화는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1931년 박흥식은 주식회사 화신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와 함께 목조 2층의 건물을 증개축하여 화신상회를 명실상부한 백화점으로 개조했다.
그런데 야심만만하게 새출발을 알린 화신백화점 앞에는 수많은 적이 있었다. 미쓰코시나 조지아 등 이미 성업 중인 남촌의 일본계 백화점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이 무렵 화신백화점 동쪽 맞은편에 4층 건물의 동아백화점이 개업한 점이다. 제한된 종로 상권을 두고 두 백화점의 경쟁은 필연적이었다. 만일 한쪽이 다른 한쪽을 합병할 수만 있다면 산술적인 사업 확대를 넘어서 ‘종로의 유일한 조선인 백화점’의 프리미엄이 따라올 것이었다. 당시 종로 재계 전체가 주목한 양쪽의 경쟁은 의의로 두어 달 만에 결판이 났다. 화신은 구매 고객에게 현금 교환이 가능한 상품권을 증정하는가 하면 ‘문화주택’(고급 서양식 주택) 한 채를 내건 경품 이벤트를 진행하는 등 ‘공격적인 경영’으로 일관했고, 동아는 견디지 못했다. 1932년 7월 화신은 동아의 상품과 경영권 일체를 매수하고 두 백화점을 구름다리로 연결, 화신 동관과 서관으로 재개점했다.

▲동아백화점을 인수해 재개점한 화신백화점의 야경. 두 백화점을 구름다리로 연결해 화신 동관과 서관으로 새단장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그런데 1935년 벽두 거칠 것 없는 박흥식의 기세에 일대 위기가 닥쳤다. 구정 대목을 맞아 북적거리는 백화점에 큰 화재가 난 것이다. 이 화재로 서관 전부와 동관 3, 4층이 소실되었다. 박흥식은 오히려 화재를 계기로 애초 계획하고 있던 백화점 신축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리하여 “장안 한복판, 종로 네거리에 6층인가 우뚝 솟은 근대식 건물, 맨 위에는 전(前)세기적인 왕관의 일류미네-슌이 흠실흠실 쉬지 않고 빛나”는 신축 화신백화점을 준공한 것이 1937년 11월이다.(‘삼천리’, 1938년 10월호) 새 단장을 한 화신백화점은 지하층의 식료품부에서 1∼4층의 각종 매장, 5층의 대식당, 6층의 영화관, 그리고 옥상 정원까지 갖추었다. 3대의 엘리베이터는 물론이고 조선에서 처음 설치된 2대의 에스컬레이터는 장안의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화신오십년사’, 1977년)

▲화신백화점의 명물 ‘에스카레터’(에스컬레이터) 사진이 실린 매일신보 1939년 지면.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서울 토박이로 자란 아동문학가 어효선(1925∼2004)은 어린 시절에 본 화신백화점을 이렇게 기억한다. “새로 지은 화신에는 승강기가 있고 에스컬레이터도 있었다. 사야 할 물건이 없어도, 승강기나 에스컬레이터를 타 보려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손님은 어른보다 아이들이 많았다. 할 일 없는 아이들이 몰려다니면서 깨끗이 닦아 놓은 진열장에 손을 대어 더럽히고, 이것저것 만져 보아 흩뜨려 놓기가 일쑤였다. 에스컬레이터는 곤두박질칠 것 같아 타기를 꺼렸고, 승강기는 저마다 타는데, 배멀미를 하듯이 어지러워 하는 이가 많았다. 이 건물에 옥상이 있었다. 6층 지붕 위인데, 여기서 내려다보면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신기했다. 옥상에는 정원을 꾸몄던 것 같다. 5층인가 6층에는 조그만 극장이 있었다. 여기서 ‘수업료’라는 우리 영화를 본 기억이 있다. 밖에 나와서 이 건물을 쳐다보면 어지러웠다. 그때는 까맣게 높다고들 했다. 6층 꼭대기에 전광판이라는 것이 또 신기했다. 높이 1m에 길이 10m쯤인데, 촘촘히 꽂힌 전구에 불이 켜지고 꺼지고 해서, 글자가 나타나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전광 게시판이라고도 하고, 전광 뉴스라고도 했다.”(어효선, ‘내가 자란 서울’, 2003년)
‘인사동 한정식집 할머니’의 기억 속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식료품부와 대식당이었던 듯하다. “우리가 어렸을 때, 화신백화점 지하실 가면 이 문화적으로 발달된 걸로 해가지고 일본식으로 고로께집, 민찌보루, 민찌보루는 고기 다져서 이렇게 동글동글하게 해서 하나씩 먹게끔, 민찌보루, 슈마이. 슈마이는 고기만두, 고기만두를 잘 빚어가지고 통에다 10개씩 놔서 쪄내는 것, 슈마이. 지하실 가면 그래 가지고 이제 곰보빵 이런 게 있는데, 5층에 가면 고급식당, 거기 가면 시노다 돈부리, 오야꼬 돈부리 뭐 어쩌구저쩌구 한정식 하면 하얀 반상기에 금으로 수복 쓴 것, 그 반상기에다 깍두기 다섯 쪽, 뭐 나물도 요만큼씩 뚜껑 덮어서 얌전히 한 접시씩 나왔댔어.”

▲1943년 영화 ‘조선해협’ 속 화신백화점 아동복 매장.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신축 화신백화점의 ‘성장’은 눈부신 바 있었다. 1931년 일본계 백화점의 4분의 1에 불과했던 영업세액이 1942년에는 거의 비슷해졌다고 한다. 사업적 성공과 더불어 박흥식은 이른바 실력양성운동에도 활발하게 참여했다.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를 지내는가 하면 발명학회, 과학지식보급회 등에도 고문,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런 활동의 백미는 1935년 초 도산 안창호 가출옥의 보증인이 된 것이다. 안창호는 평안도 출신 실력양성운동의 구심점인 인물이다. 박흥식도 넓은 의미에서 그 자장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민족적 색채를 띠는 활동에 참여한다고 해도 성공한 자본가로서 박흥식은 식민지 권력과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는 박흥식을 총애하여 친필 휘호를 써주는가 하면 일부러 화신백화점에서 양복을 맞추기도 했다. 1939년 박흥식은 일제의 판도가 중국 대륙으로, 동남아로 확대되는 데에 발맞춰 화신무역을 설립해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화신무역은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급성장해 총독부에 의해 중소기업의 ‘대동아공영권’ 무역을 대행하는 독점 회사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토록 필승의 신념 아래 몸을 바치다시피 충성을 다한 박흥식에게 하늘도 무심하게 뜻밖에도 일본이 패하고” 말았을 때, 박흥식과 화신의 전도에는 암운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반민자죄상기’, 1949년)
광복 후 박흥식은 끊임 없이 재기를 시도했지만, 신흥 백화점의 성장 속에서 화신은 옛 영화를 되찾지 못했다.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백화점은 1980년 최종 부도 처리되었다. 1988년에는 도로 확장으로 건물마저 철거되었다. 그러나 경성의 조선인 거리 종로의 우뚝한 랜드마크가 있었던 곳, 수많은 사람의 서울살이의 추억이 쌓여 있는 곳, 일제강점기 조선인 자본가의 성장의 ‘빛과 그늘’이 공존하는 곳으로서 그 자리의 기억만큼은 남아 있을 것이다.⊙
12-26 경성 4대 일본계백화점, 조선인 고객 잡기 경쟁… “신여성 꽉 차 성황”
종로 화신백화점 외 4곳이 일본계
미쓰코시-조지야-미나카이-히라다… 청계천 남쪽인 ‘남촌’ 일대에 몰려
조지야 “조선인 고객 본위” 선언
아동복-기성복-잡화 등 품목 보강… 종업원 70%, 고객 60%가 조선인

▲1930년대 중반 경성에는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주요 백화점만 5개가 있었다. 그중 종로의 화신백화점을 제외하면 모두 일본계 백화점으로 일본인 중심지인 남촌 일대에 자리 잡았다. 1940년 사진엽서에 담긴 미쓰코시 백화점 전경. 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30년대 중반 ‘백화점 시대’
“단연! 백화점시대”(‘부산일보’, 1935년 9월 21일)
1935년 한 신문 기사의 표제이다. 이 기사는 경성의 백화점 발행 상품권 총액이 크게 증가하고 있음을 들어 “최근 경성 상업계의 호경기를 백화점이 리드”하고 있다고 했다. 이제 ‘백화점 시대’라는 것이다. 이런 표현처럼 1930년대 중반 경성에는 어느정도 규모가 있는 주요 백화점만 5개가 존재했다. 그중 종로의 랜드마크 격인 화신백화점을 제외하면 모두 일본계백화점으로 일본인 중심지인 남촌 일대에 위치했다. 선두 주자는 경성 경제계의 중심인 조선은행 앞 광장의 한 꼭짓점을 차지하고 1930년 지상 4층, 건평 2000여 평의 화려한 매장을 준공한 미쓰코시(三越) 백화점이었다. 일본의 유력한 ‘재벌’ 중 하나인 미쓰이(三井) 계열의 미쓰코시는 당시 유행했다는 “오늘은 제국극장, 내일은 미쓰코시”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일본 본토에서도 1920, 30년대 대도시의 소비대중사회 발달을 상징하는 고급 백화점이었다.》
1906년 처음 조선에 진출할 때는 오복점(呉服店·원래 일본 전통의상 제작, 판매점이라는 뜻이나 의미가 확대되어 포목을 중심으로 다양한 상품을 취급하는 판매점을 뜻함)이었으나 이미 1910년대 중반 ‘백화점’을 표방했다.

▲미나카이 백화점. 현재 호텔스카이파크 명동점 자리에 있었다.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본정통에 들어서면 미나카이(三中井)와 히라다(平田), 두 백화점이 마주 보고 있었다. 미나카이는 오미(近江) 상인 출신 나카에(中江) 가문의 3형제가 창업했다. 오미 상인은 에도시대부터 간사이 지방 시가(滋賀)현 일대에서 활동한 상인 집단이다. 나카에 형제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세가 뚜렷해지는 것을 기화로 1904년 말 부산으로 건너와 상점을 열었다. 그러나 1876년 개항 이래 이미 많은 일본 상인이 자리 잡은 부산에서 경쟁은 쉽지 않았다. 이들은 다시 근거를 대구로 옮겼다. 경부선이 개통하면서 대구역을 중심으로 일본인이 서서히 모여들고 있는 대구는 신천지인 셈이었다. 1905년 대구에서 잡화점 미나카이를 새롭게 개점한 나카에 형제는 이듬해에는 경남의 중심 도시인 진주에 진출했다. 그리고 병합 직후인 1911년 마침내 경성 본정통에 오복점을 개설했다. 정식으로 백화점을 개점한 것은 1933년이다. 그사이 여러 지역에 지점을 열어 8·15 광복 당시 전국의 미나카이 지점은 12개나 되었다. 히라다 백화점은 히라다 지에토(平田知惠人)라는 사람이 1906년 개점한 작은 생활용품점에서 비롯한다. 히라다 지에토는 초창기 미국 이민자로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서 20여 년간 일본 잡화점을 경영했다. 히라다도 러일전쟁 승전 소식에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조선에 진출할 결심을 한 셈이다. 히라다 상점은 목조 2층 건물에 불과했지만 1926년 전격적으로 백화점 개점을 선언했다. 히라다 백화점 개점은 오복점에 만족하고 있던 미나카이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1933년 경성정밀지도에 표시된 일본계 백화점들(동그라미). 청계천 남쪽인 ‘남촌’ 일대에 몰려 있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조지야, 미나카이, 히라다, 미쓰코시 백화점.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이렇게 백화점이라는 대형 상업 공간이 하나둘 늘어가면서 그들 사이의 경쟁도 치열해졌다. 그와 더불어 젊은이를 중심으로 남촌에 출입하는 조선인도 점점 증가하기 시작한다. 화려한 남촌 거리의 유혹은 강렬했던 것이다. 도쿄의 번화가 긴자(銀座) 거리를 산책한다는 의미의 ‘긴부라’(銀ぶら·銀座와 어슬렁어슬렁 산책한다는 뜻의 ぶらぶら의 합성어)를 본뜬 ‘혼부라’(本ぶら·본정 산책)라는 말이 들려오기 시작하는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이런 풍조가 확산되면서 완연히 눈에 띈 것은 일본계 백화점이 조선인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나서는 현상이었다. “최근에 이르러 일본인 백화점에서 조선인 고객을 끌기 위하여 조선인 소용의 견직물을 비치하고 왕성히 선전함과 같은 것은 조선인 동업자로서는 등한시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나 조선인 고객을 빼앗는 자 어찌 하나의 백화점에 그치랴. 저 본정통의 화려한 진열장 앞에는 왕왕 조선인이 단집(團集)한 것을 볼 수 있나니 이에 대하여 조선인 상업자로서 자극됨이 없었다면 차라리 기괴한 현상이라 하겠다.”(‘사설: 경성 상업계의 신경향’, ‘조선일보’, 1925년 12월 20일) 일본계 백화점의 ‘마케팅’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혹시 남대문통이나 진고개(본정통)를 지나 보신 분이면 누구나 흔히 눈에 띄는 일이겠지만 조지야, 히라다 같은 큰 상점에는 언제나 조선 여학생, 신식 부인들로 꼭꼭 차서 불경기의 바람이 어디서 부느냐 하는 듯한 성황, 대성황으로 물품이 매출되니 그곳들이 특별히 값이 싸서 그런가요? 그렇지 않으면 무엇에 끌려서 그러는지 알 수 없습디다.”(‘별건곤’, 1930년 11월호)

▲미쓰코시와 라이벌이었던 조지야 백화점. 현재는 롯데백화점 영플라자.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조선인 고객 유치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백화점은 미쓰코시 백화점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남대문통 대로변의 조지야(丁子屋) 백화점이었다. 조지야도 출발점은 미나카이와 사뭇 비슷하다. 메이지유신 무렵(1867년) 간사이 지방 미에(三重)현의 작은 양복점으로 출발한 조지야는 점차 사업을 확장하여 1885년에는 미에현청의 용달상인(用達商人·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독점적으로 납품하는 상인)이 되었다. 그리고 1904년 부산과 서울에 지점을 개설하여 조선에 진출한 조지야는 일제 통감부 관리, 경찰관의 제복을 납품하게 되면서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조지야 백화점의 역사에서 1921년은 상징적인 해다. 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경성점을 ‘본점’으로 한 것이다. 사업의 중심을 완전히 식민지로 옮겼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예 “조선인 고객 본위”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정자옥은 창업 60주년 기념으로 사업의 대확장을 계획하여 작년 이래 착착 실행 중입니다. 즉 주단포목부를 신설하여 조선 의복지의 개량에 진력한 것을 위시하여 양품잡화부, 아동복부, 기성복부 등을 증설하여 백화점으로의 개관과 내용을 정비한 것입니다. 더욱이 점내의 모양을 변작(變作)하여 조선인 고객 본위로 들어오기 쉬운 점포의 목표 표준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중략) 정자옥은 대경성의 중앙 멘스츠리트 남대문통에 위치하여 조선 상업가에 직면하여 백화점 실현후는 조선인 제위를 위하여 가장 사기에 싸고 좋은 점포로 조선인 고객 우대 방침을 생각할 것은 물론입니다. 현금 도제(徒弟)의 거의 전부는 조선인을 채용하여 조선 본위의 정제품을 공급하며 점원도 반수 이상은 조선인으로써 채용하며 또 다수한 조선인 점원을 양성하여 대백화점 개설을 준비 중입니다.”(‘남대문통에 조선 본위의 대백화점 건설’, ‘동아일보’, 1927년 5월 1일) 실제 전성기 조지야 백화점은 점원의 70%가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또 고객의 60% 이상이 조선인이었다. 이는 일본인 고객이 90% 이상인 미쓰코시와 분명한 대조를 보인다. 일본인 중심 고급 백화점 미쓰코시와 선명하게 대비되는 조선인 중심 서민 백화점의 이미지는 조지야 마케팅의 핵심이었다.
조지야는 이어서 만주로도 진출하여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수립한 이듬해 1933년 조지야 백화점 신징(新京·만주국의 수도, 현재의 중국 창춘)점을 개점했다. 1935년에는 주식회사 만주조지야를 설립했다. 그러나 짐작할 수 있듯이 조지야의 ‘화려한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의 패전으로 만주에 투자한 거액의 자산을 전부 잃다시피 한 조지야 창업주 일가는 빈손으로 고향 미에현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1956년 조지야라는 이름의 ‘양복점’을 개업하여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근 백 년이 넘는 조지야의 성쇠 드라마는 단지 일개 작은 지방 기업의 역사일 뿐 아니라 근대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과 세력 확대, 그리고 패망의 역사가 반영되어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지금도 성업 중인 서울의 한 백화점은 그 역사의 말 없는 증언자로 여전히 우뚝한 것이다.(1920년대 말부터 신축을 준비한 조지야 백화점은 1939년 준공했다. 이 건물은 광복 후 우여곡절을 거쳐 1954년 미도파백화점으로 재개점했다. 1998년 IMF 외환위기로 부도 처리되어 롯데그룹이 인수해 현재 롯데백화점 영플라자가 되었다.)⊙
[염복규의 경성, 서울의 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