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포도 / 이육사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집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단풍의 산길
서리 내린 가을날
산길을 가면
찬 바람 살랑살랑
불어오고요
찬바람을 타고서
단풍잎들이
사뿐사뿐 길 위에
떨어집니다
바람찬 가을날에
산길을 가면
쓸쓸히 들국화만
피어있고요
떨어진 단풍잎을
밟아서 가면
단풍의 붉은 길이
열리입니다
―목일신(1913∼1986)
★꽃이 때린다
아파트 화단 앵두나무에 / 앵두꽃이 피었다 / 코로나를 뚫고
저가 피고 싶어서 피는 건 아니겠지만
나더러 보라고 피는 건 더더욱 아니겠지만
봄이 와서 앵두꽃은 피고
봄이 와서 머리가 더 허예진 사내가
어린아이처럼 그 꽃을 보는 것은
어딘가 다른 곳, 다른 시간 속에서
누군가와 함께 보는 것은
어쩐지 좀 미안하고 기쁜 일
쬐끄만 흰 꽃들은 / 편종 소리를 내며 / 나를 때린다
―제가 떠나가면 당신도, 세상의 누추도 사라질 거예요
―전동균(1962∼ )
★‘할머니들 이마가 아름다운 할머니들’
‘할머니들 이마가 아름다운 할머니들// 아름다운 이마를 맞대고/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있는 할머니들// 펼치면 넓어지는 것/ 이야기 속의 벌판은 넓었고// 멈출 수가 없었지/ 벌판엔 없는 것이 없었고// 나를 좀 끼워줄래’
- 신해욱 ‘할머니들 이마가 아름다운 할머니들’(시집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주말
‘해야 할 일들을 꺼내놓고 자판을 두드려댄다/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다가/ 가방에 넣어 온 샌드위치나 우걱거리는 주말 오후,/ 내 삶도 이렇듯 지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한 게 대체 뭐지? 그새 날은 저물어오고/ 내가 한 일이라고는 샌드위치를 먹은 게 전부 같다’
- 박성우 ‘주말’(시집 ‘남겨두고 싶은 순간들’)
★중환자실에서
탁자 위
맑은 유리컵에 담긴
물이 자꾸 먹고 싶어
입을 벌리다가
나는 내 육신이 불쌍해졌다
주인을 잘못 만나
이 무슨 고생인가
나는 내 육신에게 진정 사과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정채봉(1946∼2001)
★길조
어젯밤 치마끈이 저절로 풀어지더니, 오늘 아침엔 거미가 날아들었네.
연지분을 이젠 못 버리겠네. 분명 낭군이 돌아올 징조이려니.
(昨夜裙帶解, 今朝蟢子飛. 鉛華不可棄, 莫是藁砧歸.)
―‘옥대체(玉臺體)’·권덕여(權德輿·759∼818)
★사랑 달아요
“안녕, 할부지! 사랑 달아요.”
슬그머니 눈을 드니 ‘아가의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본다. 두 돌이나 지났을까. 혀가 짧아 사탕을 사랑이라고 발음하는 아가가 ‘나’에게 사탕을 내민다.
“고맙다. 아가야. 고마워.”
사탕을 건넨 아가는 엄마 손을 잡고 멀어진다. 작은 성자 같은 아가의 온기는 무릎 꿇고 있던 노숙인을 일으켜 세운다.
눈 감고 아가가 준 사랑을 입에 넣는다.
달다. 살아야겠다.
- 배역시인(配役詩人) 정우영
★그대가 별이라면
그대가 별이라면
저는 그대 옆에 뜨는 작은 별이고 싶습니다
그대가 노을이라면 저는 그대 뒷모습을
비추어 주는 저녁 하늘이 되고 싶습니다
그대가 나무라면
저는 그대의 발등에 덮인
흙이고자 합니다
오, 그대가
이른 봄 숲에서 우는 은빛 새라면
저는 그대가 앉아 쉬는
한창 물오르는 싱싱한 가지이고 싶습니다
―이동순(1950∼ )
★임께서 부르시면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곤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 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아란 하늘에 백로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신석정(1907∼1974)
★언젠가 한 번은
우지마라 냇물이여,
언젠가 한 번은 떠나는 것이란다.
우지마라 바람이여,
언젠가 한 번은 버리는 것이란다.
계곡에 구른 돌처럼,
마른가지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삶이란 이렇듯 꿈꾸는 것,
어차피 한 번은 헤어지는 길인데
슬픔에 지치거든 나의 사람아,
청솔 푸른 그늘 아래 누워서,
소리없이 흐르는 흰 구름을 보아라.
격정에 지쳐 우는 냇물도
어차피 한 번은 떠나는 것이다.
-오세영
★공존(共存)의 이유
깊이 사귀지 마세
작별이 잦은 우리들의 생애
가벼운 정도로 사귀세
악수가 서로 짐이 되면 작별을 하세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세
너만이라든지
우리들만이라든지
이것은 비밀일세라든지 같은 말들을 하지 않기로 하세
내가 너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나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어디메쯤 간다는 것을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작별이 올 때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사귀세
작별을 하며, 작별을 하며 사세
작별이 오면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악수를 하세
- 조 병 화 (1921~2003)
★수척1
슬픔이
인간을
집어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은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 유병록(1982∼ )
★짚방석 내지마라
짚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솔 불 혀지 마라 어제 진 달 돋아온다
아이야 박주산채(薄酒山菜)일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병와가곡집 한호(1543∼1605)
★‘두목의 단풍 시에 화답하다’
차가운 산 시월의 아침, 서리 맞은 나뭇잎 일시에 바뀌었다.
타는 듯해도 불이 난 건 아니요, 꽃 핀 듯하지만 봄이 도래한 건 아니라네.
가지런히 이어져 짙붉은 장막을 펼친 듯, 마구 흩날려 붉은 수건을 자른 듯.
단풍 구경하려고 가마 멈추고, 바람 앞에 선 이는 우리 둘뿐이려니.
(寒山十月旦, 霜葉一時新. 似燒非因火, 如花不待春. 連行排絳帳, 亂落剪紅巾. 解駐籃輿看, 風前唯兩人.)
―‘두목의 단풍 시에 화답하다’(화두녹사제홍협·和杜綠事題紅葉) 백거이(白居易·772∼846)
★편지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김남조(1927∼2023)
★거울 속을 들여다보네
황폐해지는 내 피부를 보네.
그리고 이렇게 말하네. “하나님께서 차라리
내 심장을 저렇게 수척하게, 사그라지게 하셨더라면!”
그러면 차라리 점점 싸늘해지는 심장이
나를 괴롭힐 리 없으니,
나는 평온하게
영원한 안식을 외로이 기다릴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세월’은 나를 슬프게 하려고,
어떤 부분은 빼앗아 가고, 어떤 부분은 남겨 두네.
그리고 한낮의 두근거림으로
이 저녁의 허약한 뼈대를 흔드네.
-토머스 하디(Thomas Hardy)
(윤명옥 옮김)
★새해에 쓰는 시
새해 들자 더욱 간절해진 고향 생각, 하늘 끝에서 외로이 눈물짓는다.
늘그막이라 매사 남보다 뒤지는 터, 봄조차 이 몸보다 먼저 고향에 가 있으리.
산속 원숭이들과 아침저녁을 함께 보내고, 강 버들과는 바람과 안개를 같이 나누지.
장사부(長沙傅)처럼 멀리 쫓겨난 처지, 앞으로 몇 년이나 더 버텨야 할는지.
(鄕心新歲切, 天畔獨潸然. 老至居人下, 春歸在客先. 嶺猿同旦暮, 江柳共風煙. 已似長沙傅, 從今又幾年.)
―‘새해에 쓰는 시(신년작·新年作)’·류장경(劉長卿·709∼789)
★‘배적에게 술을 권하며(작주여배적·酌酒與裴迪)’
그대에게 술 따르니 그대 마음 푸시게. 사람 마음은 파도처럼 쉼 없이 뒤바뀐다네.
백발 되도록 사귀었대도 칼을 빼들 수 있고, 출세한 선배가 갓 벼슬길에 나선 후배를 비웃기도 하지.
초록 풀은 가랑비 덕분에 촉촉해지지만, 꽃가지는 움트려는 순간 찬 봄바람에 시달리기도 한다네.
세상사 뜬구름 같거늘 무얼 더 따지겠는가. 느긋하게 지내며 몸 보양하는 게 차라리 낫지.
(酌酒與君君自寬, 人情翻覆似波瀾. 白首相知猶按劍, 朱門先達笑彈冠. 草色全經細雨濕, 花枝欲動春風寒. 世事浮雲何足問, 不如高臥且加餐.)
왕유(王維·701∼761)
■시바타 도요의 시
★외로워지면
외로워질 때는
문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손으로 떠
몇 번이고 얼굴을
적시는 거야
그 온기는
어머니의 따스함
어머니
힘낼게요
대답하며
나는 일어서네
- 시바타 도요'
★약해지지 마
있짆아, 불행하다고
한숨짓지 마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쪽 편만 들지 않아
꿈은
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
나도 괴로운 일
많았지만
살아 있어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 마
★저금
난, 말이지 사람들이 친절을 베풀면
미음에 저금을 해둬
쓸쓸할 때면 그걸 꺼내 기운을 차리지
너도 지금부터 모아두렴
연금보다 좋단다...!
★살아갈 힘
나이 아흔을 넘기며 맞는 하루하루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뺨을 어루만지는 바람,
친구에게 걸려온 안부전화
집까지 찾아와 주는 사람
제각각
나에게 살아갈 힘을 선물하네...!
★말
무심코 한 말이 얼마나 성처 입히는지
나중에 깨달을 때가 있어,
그럴 때 나는 서둘러 그이의 마음속으로 찾아가,
미안합니다 말하면서
지우개와 연필로 말을 고치지.
★하늘
외로워지면 하늘을 올려다본다.
가족 같은 구름, 지도 같은 구름,
술래잡기에 한창인 구름도 있다.
모두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헤질녘 붉게 물든 구름,
깊은 밤 하늘 가득한 별,
너도 하늘을 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나
침대 머리맡에 항상 놓아두는 것,
작은 라디오, 약봉지,
시를 쓰기 위한 노트와 연필,
벽에는 달력 날짜 아래
찾아와 주는 도우미의 이름과 시간,
빨간 동그라미는 아들 내외가 오는 날입니다.
혼자 산 지 열 여덟 해
나는 잘 살고 있습니다.
★비밀
나,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어.
하지만 시를 짓기 시작하고,
많은 이들의 격려를 받아
지금은 우는 소리 하지 않아.
아흔 여덟에도 사랑은 하는 거야.
꿈도 많아,
구름도 타보고 싶은 걸...!
★바람과 햇살과 나
바람이 유리문을 두드려 문을 열어 주었지.
그렜더니 햇살까지 따라와
셋이서 수다를 떠네.
할머니 외롭지 않아?
바람과 햇살이 묻기에
사람은 어차피 다 혼자야 나는 대답했네.
그만 고집 부리고 편히 가자는 말에,
다 같이 웃었던 오후...
★화장
아들이 초증학생 때
너희 엄마 참 예쁘시다 친구가 말했다고,
기쁜 듯 예기했던 적이 있어,
그 후로 정성껏 아흔 일곱 지금도
화장을 하지.
누군가에게 칭찬받고 싶어서...!
★어머니
돌아가신 어머니처럼,
아흔 둘 나이가 되어도 어머니가 그리워,
노인 요양원으로
어머니를 찾아 뵐 때마다,
돌아오던 길의 괴롭던 마음,
오래오래 딸을 배웅하던 어머니,
구름이 몰려오던 하늘.
바람에 흔들리던 코스모스,
지금도 또렸한 기억...!
★나에게
뚝뚝,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눈물이
멈추질 않네,
아무리 괴롭고 슬픈 일이 있어도
언제까지 끙끙 앓고만 있어면 안 돼
과감하게 수도꼭지를 비틀어
단숨에 눈물을 흘려 버리는 거야.
자, 새 컵으로 커피를 마시자...!
★잊는다는 것
나이를 먹을 때마다 여러가지 것들을
잊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사람 이름, 여러 단어, 수많은 추억,
그걸 외롭다고
여기지 않게 된 건 왜일까.
잊어가는 것의 행복,
잊어가는 것에 대한 포기,
매미 소리가 들려오네...!
★너에게
못한다고 해서,
주눅 들어 있으면 안 돼.
나도 96년 동안 못했던 일이 산더미야.
부모님께 효도하기, 아이들 교육, 수많은 배움,
하지만 노력은 했어 있는 힘껏 했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닐까,
자 일어나서 뭔가를 붙잡는 거야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아침은 올 거야
혼자 살겠다고 결정했을 때부터
강한 여성이 되었어,
참 많은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주었지,
그리고 순수하게 기대는 것도
용기라는 걸 깨달았어.
"난 불행해..."
한숨을 쉬고 있는 당신에게도
아침은 반드시 찾아와,
틀림없이 아침 해가 비출 거야...!

시바타 도요 (しばたとよ, Shibata Toyo) 시인
1911년 6월 26일 ~ 2013년 1월 20일
★누에
세 자매가 손을 잡고 걸어온다
이제 보니 자매가 아니다
꼽추인 어미를 가운데 두고
두 딸은 키가 훌쩍 크다
어미는 얼마나 작은지 누에 같다
제 몸의 이천 배나 되는 실을
뽑아낸다는 누에,
저 등에 짊어진 혹에서
비단실 두 가닥 풀려나온 걸까
비단실 두 가닥이
이제 빈 누에고치를 감싸고 있다
그 비단실에
내 몸도 휘감겨 따라가면서
나는 만삭의 배를 가만히 쓸어안는다
-나희덕(1966~)
★‘달걀도 사랑해’
‘우리 서로 어깨와 어깨를 기대요/ 딱딱은 안 돼요/ 톡톡만 괜찮아요// 우리 서로 심장과 심장을 맞대요/ 쾅쾅은 안 돼요/ 콩콩만 괜찮아요// 우리 서로 볼과 볼을 비벼요/ 싹싹은 안 돼요/ 살살만 괜찮아요// 그러니까 왜 이리 조심이냐고요?/ 깨지니까!’
-김민정
★ 가을날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시고
들판에 많은 바람을 풀어놓으소서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무르익도록 재촉하시고,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안에 스며들게 하소서
이젠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이라면 이후로도 오랫동안 고독하여
잠들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안절부절하며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