萬物相(조선일보) 2024-10/
10.01(화) 해저 케이블의 세계

▲일러스트=이철원
중국 대륙에서 10여㎞ 떨어진 대만 마쭈(馬祖) 열도는 약 200㎞ 밖 대만 본섬과 2개의 통신용 해저(海底) 케이블로 연결돼 있다. 지난해 2월 2일, 그중 하나가 끊어졌다. 중국 어선의 소행으로 추정됐다. 엿새 후, 중국 화물선이 나머지 하나마저 절단시켰다. 인터넷이 먹통이 돼 주민 1만4000여 명이 애를 먹었다. 선박이 닻을 내리거나 어구를 끌고 가다가 해저 케이블을 절단시키는 사고는 전 세계에서 연간 100건 정도 일어난다. 그런데 마쭈 열도에서는 5년 간 27건이나 일어났다. 대만은 중국의 고의적 전술을 의심하고 있다. 유사시 대만과 세계를 잇는 해저 케이블을 절단해 ‘정보 봉쇄’를 하기 위한 연습 아니냐는 것이다.
▶세계 인터넷 통신량의 99%는 해저 케이블로 이뤄진다. 한국에서 일본, 중국, 동남아를 거쳐 미국과 유럽까지 케이블이 이어져 있다. 전 세계에 깔린 해저 케이블만 약 600회선, 140만㎞다. ‘스타링크’ 같은 인공위성 인터넷 서비스가 등장했지만, 비용 등에서 아직 약점이 많다.
▶해저 케이블은 수압과 염도를 견디면서 수십~수백㎞씩 이어지게 생산해야 한다. 그 설치는 포설선(鋪設船)이라고 불리는 전문 선박이 맡는다. 케이블 수천 톤을 감아 놓은 대형 턴 테이블과 선박의 이동 속도에 맞춰 케이블을 바닷속에 풀어 넣는 장비들이 갖춰진 배다. 해저 지진대·화산·해구 등을 피해야 하기 때문에 지질학자와 해양학자 등이 모여 사전에 매립 동선을 정한다. 이후 원격 조종 로봇(ROV)을 해저에 내려 보내 실제 환경을 탐지하고 케이블을 매립한다. 해저 케이블 생산과 매설을 모두 할 수 있는 기업은 세계에 5개 정도밖에 없다. 그중 하나가 한국의 LS전선이다.
▶통신용 해저 케이블의 역사는 170년이 넘었다. 1851년 영국 도버와 프랑스 칼레를 잇는 전신용 케이블을 설치한 것이 시초다. 미국·영국 등은 이 통신용 해저 케이블을 감청해 세계의 정보를 수집했다. 그런 때문일까. 미국은 2020년부터 ‘클린 네트워크 계획’을 세워 중국 기업의 해저 케이블 건설 참여를 막고 있다.
▶미국 국무부가 26일 한국, 영국, 호주, 일본 등 동맹들을 모아 ‘해저 케이블의 안보와 회복탄력성’에 대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해저 케이블의 사이버 보안과 물리적 보호에 모두 최선을 다하자는 내용이다. 미 정부는 20여 일 전 러시아가 ‘참모본부 심해 연구국(GUGI)’이란 비밀 부대를 창설, 해저 드론을 이용한 해저 케이블 파괴 등을 꾀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바닷속도 편치 못한 시절이다.
10.02 코끼리 문제 풀기

▲일러스트=이철원
지난 6월 인도 케랄라주(州)의 한 힌두교 사원에 키 3.3m, 무게 800㎏의 실물 크기 ‘코끼리 로봇’이 등장했다. 실제 코끼리를 대신해 힌두교 의식에 쓸 수 있도록 기증한 로봇이었다. 힌두교도들은 코끼리 머리가 달린 가네샤(Ganesha)신에게 빌면 사업·학업의 장애가 해결된다고 믿는다. 종교 행사를 위해 불법 사육되던 코끼리가 학대를 견디다 못해 폭주하는 사고가 종종 일어난다. 케랄라주에서만 15년간 526명이 사망했다. 동물 보호 단체는 코끼리 학대를 줄이자며 눈·코·귀·꼬리를 움직일 수 있는 로봇을 만들어 사원에 기증하고 있다.
▶코끼리는 침팬지나 돌고래만큼 지능이 높다. 미국이 이끄는 연구진은 지난 6월 국제 학술지에 코끼리들이 서로 ‘이름’을 부른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14개월간 케냐에서 녹취한 코끼리 울음소리를 인공지능(AI)으로 분석한 결과, 특정 코끼리를 식별하는 소리를 찾았다는 것이다.
▶현생 육상동물 중 가장 몸집이 큰 코끼리는 먹이도 그만큼 많이 먹는다. 조선 태종 때인 1411년 일본 사신이 코끼리를 바쳤는데, 매일 콩 너덧 말을 먹어 골치를 앓았다. 코끼리 8만4000여 마리가 살고 있는 짐바브웨는 지난해부터 이어진 가뭄으로 국민 760만명이 기아에 직면하자, 지난달 코끼리 200마리를 도살해 고기를 나눠주겠다고 발표했다.
▶보츠와나는 아프리카에서 코끼리가 가장 많은 국가다. 13만마리에 이르는 코끼리를 줄이기 위해 ‘트로피 헌팅(레저형 사냥)’을 허용하고 있다. 올봄 영국과 독일이 문제를 제기하자 보츠와나는 “영국에 1만마리, 독일에 2만마리를 보내주겠다”고 협박했다. 그렇게 소중하면 같이 살아보라는 것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誌)가 최근 국경을 맞댄 탄자니아와 케냐가 코끼리 보호 논쟁을 벌이고 있다고 전했다. 케냐 암보셀리 국립공원에 사는 코끼리 2000마리 중 600마리 정도는 탄자니아를 자주 찾는다. 지난해 탄자니아 정부는 “국토의 40%에 이르는 야생 보호 구역 관리 비용으로 쓰겠다”며 ‘트로피 헌터’들에게 코끼리 사냥 허가를 내주기 시작했다. 탄자니아에 건당 1만~2만달러(약 1300만~2600만원)를 낸 사냥꾼들은 웅장한 상아를 지녀 ‘수퍼 터스커’라고 불리는 코끼리들까지 잡는다. 국내총생산(GDP)의 8~9%를 관광으로 버는 케냐에서 “코끼리가 줄어 관광객도 줄어들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어떤 나라에서 살 것인가는 코끼리에게도 중대한 문제다.
10.03 송이 1kg이 160만원

▲일러스트=박상훈
솔 향기 물씬 풍기는 우리 송이버섯은 대대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8세기 초 신라 성덕왕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오랜 임금님 진상품이었다. 중국 사신이 오면 가장 받고 싶어한 선물도 송이였다. 동의보감은 ‘맛이 향기롭고 나무에서 나는 버섯 가운데 으뜸’이라 했다. 일본은 자국 송이가 귀해지자 한국산을 수입하는데 미국이나 중국 송이 가격의 최고 10배를 쳐준다.
▶송이엔 가난 극복과 자식 교육에 모든 걸 바친 부모 세대의 땀과 눈물도 기록돼 있다. 1970년대 대학은 소 팔아 자식 등록금을 댔다 해서 우골탑(牛骨塔)이라 했다. 강원도 경상도에선 산에서 캔 송이도 그 일을 했다. 사립대 등록금이 30만~40만원이던 때, 송이는 20~30㎏을 캐면 60만원 넘게 쥘 수 있는 고소득원이었다. 그러나 송이의 연중 수확 가능 기간은 약 28일로 짧다. 그로 인해 비극도 빚어졌다. 1996년 9월 우리 군이 북한 무장공비 소탕전을 벌일 때 강원도 주민들에게 송이 채취를 금지했다. 위험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부 주민이 “이러다 송이가 다 썩는다”며 산에 갔다가 공비 공격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
▶국내 송이 생산량은 연평균 219t이다. 한때 연 1300t을 수확했지만 기후변화로 생장 환경이 나빠졌다. 송이 균주는 섭씨 19.5도 이하에서 성장이 시작되는데, 일단 자라게 되면 14~24도를 2주간 유지해야 한다. 송이가 나오는 9월엔 비가 충분히 와야 하는데 배수가 안 되면 썩는다. 소나무에만 붙어 자라는 데다 수령 30~40년짜리 소나무를 가장 좋아한다. 이처럼 생육 조건이 까다로워 재배가 어렵다.
▶지난달 30일 강원도 양양에서 거래된 송이 1등급품의 ㎏당 공판 가격이 160만원으로 사상 최고액을 기록했다. 156만2000원이었던 지난해도 역대 최고가였는데 두 해 연속 최고가를 경신했다. 전문가들은 폭염을 이유로 든다. 추석이던 지난달 17일 강릉 낮 최고 기온은 32도였고 송이가 자라는 지표면 기온은 이보다 5도 정도 높았으니 송이가 나올 수 없는 환경이었다.
▶송이는 반세기 전만 해도 경기도 가평과 광주, 충남 예산, 전남 담양·함평·화순에서도 났지만 지금은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90%가 나온다. 고려 말 문인 이규보는 문집 ‘동국이상국집’에서 ‘솔 훈기에서 나왔기에 맑은 향기 어찌 그리 많은지/(중략)/ 듣건대 솔 기름 먹은 사람/ 신선 길 가장 빠르다네’라 했다. 1000년 넘게 이 땅의 가을을 그윽하게 물들이던 송이 향을 우리 후손들은 기록으로만 읽게 될까 걱정스러운 마음이다.
10.04 '미션 임파서블' 모사드

▲일러스트=이철원
2018년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TV에 나와 “이란이 거짓말을 했다”며 무언가를 가린 검은 천막을 걷어냈다. 이란 핵개발 증거라는 문서 5만5000여 쪽과 CD 183개가 드러났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빼온 것이다. 핵 문서 창고를 2년간 감시하다 경비가 허술한 새벽 시간대를 틈타 32개 금고를 털었다. 무게만 500㎏인 핵 자료를 2200㎞ 떨어진 이스라엘까지 운반했다. 이란 정보기관에 심어둔 이중 첩자들의 공이 컸다고 한다.
▶이 방송 후 트럼프가 미국·이란 간 ‘핵 합의’를 깼다. 이란은 우라늄 농축 농도를 높여 핵무기를 만들려 했다. 2020년 테헤란 인근에서 ‘이란 핵 아버지’로 불리는 파크리자데의 승용차가 교차로에 진입하자 인근 트럭에서 7.62㎜ 저격용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트럭은 자폭했다. 그런데 암살자는 현장에 없었다. 모사드가 1600㎞ 떨어진 곳에서 AI 기관총을 원격조종한 것이라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이란은 파크리자데의 얼굴도 공개하지 않았지만 모사드는 이란에서 14년 이상 그를 쫓았다.
▶아랍계 유대인이 있다. 이집트·시리아 등에서 태어나 외모도 아랍인이고 아랍어도 유창하지만 마음속 조국은 이스라엘이다. 모사드의 ‘블랙 요원’이 되곤 한다. 시리아의 국방 차관까지 오른 엘리 코헨이 대표적이다. 그는 모사드 자금으로 거부 행세를 하며 시리아 군부에 인맥을 쌓았다. 사병을 위한 그늘을 만든다며 시리아군 진지에 유칼립투스 나무를 심었는데, 이스라엘군의 포격 타깃이 됐다. 난공불락이던 골란 고원의 요새 사진을 빼낸 덕분에 이스라엘이 승리했다. 신분이 들통난 그를 구하기 위해 이스라엘은 백방으로 뛰었지만 시리아의 공개 처형을 막지 못했다. 시신도 돌려받지 못했다.
▶이란 전 대통령 아마디네자드가 1일 방송에서 “모사드의 이란 내 활동을 색출해야 하는 정보기관 부서장과 이란 요원 20명이 오히려 이스라엘 첩자였다”고 밝혔다. 2021년 이들이 탈출할 때까지 이란의 이스라엘 관련 정보가 모사드로 줄줄 샜다는 뜻이다. 프랑스 일간지도 이날 “이스라엘은 이란에 심어둔 첩자를 통해 (폭살한 헤즈볼라 지도자) 나스랄라의 위치를 귀띔 받았다”고 했다.
▶이란 전 장관이 2년 전 인터뷰에서 “테헤란의 고위 관리들은 모사드에 생명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해야 한다”고 했다. 이스라엘 숙적인 이란 정보기관까지 파고든 모사드의 ‘미션 임파서블’급 능력을 감안하면 엄살은 아닌 듯하다.
10.05(토) '비밀번호' 스트레스

▲일러스트=이철원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 나오는 “열려라 참깨’는 비밀번호의 조상 격이라 할 수 있다. 나무꾼 알리바바는 도둑들이 보물을 숨겨 둔 동굴을 여는 주문을 엿들어 부자가 된다. 알리바바의 형이 그걸 알고 동굴에 몰래 들어갔다가 비밀번호를 잊어버린다. 도둑들에게 붙잡힌 형은 사지가 절단된 채 죽음을 맞는다. 왜 하필 ‘참깨’였을까. 중세 아랍어 참깨(simsim)에는 ‘문(門)’이란 뜻도 있다고 하는데, 정설은 아니다.
▶1940년대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를 지휘한 미 육군 장군이 부임 첫날, 극비 문서를 보관할 금고를 보고 ‘당장 가장 튼튼한 금고로 바꾸라’고 호통을 쳤다. 그런데 1주일도 안 돼 비밀번호를 잊었다. 금고 업체 기사를 불렀더니 20분 만에 문을 열었다. 금고를 만들 때 기본 세팅된 비밀번호를 그대로 썼던 것이다. 현장에서 지켜보던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 박사가 “그런데 왜 20분이나 걸렸느냐”고 물었더니 “출장비를 받으려 적당히 시간을 때웠다”고 했다.
▶냉전 시절 미국 지하 격납고에 저장된 핵미사일의 발사 비밀번호가 ‘00000000′ 상태로 15년간 사용됐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1962년 국무장관이던 로버트 맥너마라가 사임한 뒤 비밀번호 때문에 미사일 발사가 늦어질까 걱정한 방공전략사령관이 비밀번호를 이렇게 바꿨기 때문이다. 글로벌 보안업체가 선정한 ‘최악의 비밀번호’ 1위는 ‘12345′이다. 그런데 민간 해킹 단체 어나니머스가 시리아 독재자 알 아사드 대통령의 이메일을 해킹한 결과 ‘12345′를 비밀번호로 쓰고 있었다.
▶휴대폰, 이메일, 금융 거래, 쇼핑 등 현대인의 일상과 비밀번호는 불가분의 관계지만, 큰 스트레스 요인이다. 주기적으로 새로 설정해야 하는데, 많게는 20~30개씩 되다 보니 쉽게 까먹고 관리가 너무 어렵다. 어떤 사람이 휴대전화 메모장에 비밀번호를 계속 업데이트해 왔는데, 메모장을 여는 비밀번호를 잊어버려 패닉에 빠지는 모습도 봤다.
▶비밀번호 스트레스가 싫은 사람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가 2007년에 만든 ‘영문 대소문자, 숫자, 특수문자 1개 이상 포함’, ‘90일마다 변경’ 같은 비밀번호 설정 기준을 폐기했다. NIST는 대신 ‘GoodbyePasswordForever’(잘 가라 비밀번호)같이 기억하기 쉬운 문장형 비밀번호를 쓰라고 권고했다. 이렇게 길어도 22개 글자인데,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의 휴대전화 비밀번호는 24자리라는데, 과연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10.07(월) 낙하산 사고

▲일러스트=박상훈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85년 우산 모양 낙하산을 설계했다. 근대 낙하산의 시초였다. 100년 뒤 베네치아 발명가 베란치오는 이를 기반으로 최초의 낙하산을 발명했다. 100m 종탑에서 뛰어내렸는데 죽지 않았다. 1783년 프랑스 르노르망은 공개 실험에 성공했지만 얼마 뒤 목숨을 잃었다. 1802년 프랑스 가르느랭은 1000m 높이 기구에서 뛰어내렸는데 겨우 목숨을 구했다. 1911년 오스트리아 라이헬트는 낙하복을 입고 에펠탑에서 뛰었다가 사망했다.
▶현대적 낙하산은 1912년 러시아 과학자 코텔니코프가 개발했다. 1차 대전 때 조종사 탈출용으로 보급됐고, 2차 대전 직전 나일론이 개발되면서 비단 낙하산을 대체했다. 독일은 1936년 ‘팔슈름예거’ 공수부대를 창설, 네덜란드 전투에 투입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땐 미 공수사단이 맹활약했지만 피해도 컸다. 독일이 설치한 나무·철조망·해자 등 로마네스크 방벽과 고사포 공격에 무수한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낙하산으로 착륙할 때 속도는 시속 20km를 넘는다. 아파트 3층에서 떨어질 때 충격과 같다. 다리가 받는 충격은 체중의 3~4배다. 그래서 발목·무릎·엉덩이·어깨 순으로 몸을 구르는 PLF 낙법과 낙하산 속도 제어술을 써야 한다.
▶낙하산은 펼 수 있는 최소 고도가 있다. 수동은 150m, 비행기·점프대에 연결된 자동은 60m다. 하지만 줄이 꼬이거나 팔다리에 휘감기면 펴지지 않는다. 예비 낙하산도 펼 여유가 없을 때가 많다. 집단 강하 땐 낙하산끼리 부딪힐 수 있다. 물·나무·건물 등에 착지해도 위험하다. 2019년 미 공수부대 훈련 때 강풍이 불어 3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2020년 폴란드에선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병사들이 숨졌다. 1992년 프랑스 낙하산 대회에선 강풍으로 여러 명이 숨지거나 다쳤다. 2009년 스위스 융프라우에선 전문가 5명이 암벽에 부딪혀 사망했다.
▶작년 국군의날 행사 때 특수부대 장병 9명이 집단 강하 시범 훈련 중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군 지휘부가 일렬을 맞추려 위험 고도에서 ‘낙하산 줄을 놓으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공중 충돌 방지와 대오 유지를 위한 조치라지만 낮은 고도에서 줄을 놓으면 조종력을 잃고 속도를 줄이지 못해 큰 부상을 입는다. 그런데 ‘보여 주기’를 위해 무리한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북한은 지난 4월 김정은이 지켜보는 가운데 강풍 속 집단 낙하 훈련을 하다 낙하산이 얽혀 부대원 다수가 죽거나 다쳤다. 안 그래도 위험한 낙하산 훈련에서 북한과 같은 후진적 사고가 일어나선 곤란하다.
10-08 대통령의 딸

▲일러스트=김성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장녀 앨리스는 ‘파티 걸’로 사교계를 주름잡았다. 정치인과 결혼했지만 다른 정치인과의 불륜으로 자식도 낳았다. 당시 풍습과 달리 바지를 입고 담배를 피우고 옥상에서 춤을 췄다. 아버지는 공화당인데 딸은 한때 민주당에도 가입했다. 그래도 “시원하고 개방적”이라며 그녀를 응원하는 국민도 있었다.
▶앨리스는 1905년 조선을 방문했다. 을사늑약 체결 직전이었다. 고종은 일본 만행인 명성황후 사건을 고발하려 앨리스를 홍릉에 데려갔다. 승마를 즐겼던 그녀는 왕실이 신성시하던 석상 위에 올라가 사진을 찍었다. 조선에 있던 한 외국인은 “그녀의 망나니짓에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나는 국정과 딸 보살핌 둘 중 하나는 해도, 둘 다는 못 한다”고 했다. 그녀는 1980년 96세로 사망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딸 다혜씨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건 대선 전날인 2017년 5월 8일 광화문 유세 때였다. 다혜씨는 자신을 “문빠 1호”라고 소개하며 “아이들 키우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러더니 대선 직후에 아버지가 소속된 민주당이 아닌 정의당에 가입했다. 그즈음부터 평범한 주부라던 그녀의 다양한 이야기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문 대통령은 2018년 7월 인도 방문을 한 달 앞두고 갑자기 모디에게 “세계 요가의 날을 축하한다”는 트위터를 보냈다. 그 이유는 곧 밝혀졌다. 다혜씨가 요가 강사를 하고 있었다. 그 후 다혜씨는 한국 집을 팔고 태국으로 이주했다. 2019년 일본 언론은 문 대통령이 반일(反日)을 하면서 딸은 일본에 유학 보냈다고 보도했다. 2020년 말부터 청와대 주변에선 “다혜씨가 태국서 돌아와 청와대에 살고 있다”는 말이 나왔지만 다들 쉬쉬했다.
▶문 대통령은 딸로 인해 퇴임 후 계속 화제가 됐다. 평산마을 책방과 ‘굿즈’ 사업들은 다혜씨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참모는 “전직 대통령이 수익 사업을 하면 안 된다”고 반대했다. 사위의 특혜 채용, 김정숙 여사가 친구를 통해 딸에게 5000만원을 보낸 것, 대통령 자서전 디자인비로 2억원을 받은 것 모두 다혜씨와 관련된 일이다.
▶지난 5일 새벽 다혜씨가 혈중 알코올 농도 0.14% 인사불성 상태로 운전하다 사고를 냈다. 그녀의 차는 문 대통령이 2021년 광주형 일자리 홍보를 위해 구입해 딸에게 준 것이지만 다혜씨는 과태료를 체납했다. 대통령들에게도 자식은 행복이겠지만, ‘자식이 웬수’가 되는 경우도 있는가 보다.
10.09 유치원이 노치원으로

▲일러스트=양진경
문득 아이가 어릴 적 자주 다닌 키즈 카페가 생각나서 찾아보니 ‘노치원’으로 바뀌어 있어서 씁쓸했다는 글을 보았다. ‘노치원’은 ‘노인 유치원’을 줄인 말이다. 어르신들이 낮 동안 머물며 돌봄을 받는 주간보호센터(데이케어센터)다. 경로당엔 가서 할 일이 마땅치 않고 요양원은 집을 떠나야 하는데, 노치원은 여러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집에서 통원할 수 있어 만족도가 높다고 한다. 장기 요양 인정 등급을 받고 이용할 수 있다.
▶저출생·고령화 여파로 유치원 등 육아 시설은 크게 줄고 노치원 등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교육·보육 통계를 보면 지난해 전국 어린이집과 유치원은 3만7000여 곳으로, 10년 전인 2013년(5만2000여 곳)보다 28%나 감소했다. 같은 기간 노치원 등 노인 시설은 7만2000여 곳에서 9만3000여 곳으로 27% 늘어났다. 8일 국감 자료를 보면 지난 10년간 어린이집·유치원이 곧바로 노치원 등 어르신 시설로 바뀐 사례가 283건으로 해마다 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지난달 폐교를 실버타운 등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조례를 개정해 서울에서도 학교가 실버타운으로 변신하는 일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유치원과 노치원은 대상은 다르지만 비슷한 점이 많다. 낮 동안 돌봐주는 것이 같고 정부 지원을 받아 이용하는 것도 같다. 노치원도 유치원처럼 셔틀버스로 데려오고 데려다준다. 진행하는 프로그램도 색칠 놀이와 노래·율동 등으로 비슷하다. 심지어 유치원장은 노치원 설립 자격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아 유치원에서 노치원으로 전환이 수월한 편이라고 한다.
▶인구 감소 여파에 교육 업체들도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어린이 학습지 ‘눈높이’로 유명한 대교는 사업이 침체 국면에 접어들자 노치원 등 시니어 사업을 전담할 자회사를 설립해 확장에 주력하고 있다. 역시 학습지로 알려진 구몬도 시니어를 대상으로 학습지를 배달하고 주 1회 교사가 방문해 관리하는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등 시니어 분야를 키우고 있다.
▶노치원 설립이 순항만 하는 것은 아니다. 서울 여의도 등 일부 아파트 재건축 단지에서 서울시가 기부 채납 시설로 노치원을 제시하자 아파트 소유주들이 반대해 진통을 겪고 있다. 65세 이상 1000만 시대에 접어들어 노치원 수요는 앞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노치원이 보호자 부담을 덜고 어르신 삶의 질을 높이는 순기능을 하는 것도 분명하다. 일본과 독일 등 선진국에선 보편적 복지 시설이기도 하다. 서울시 등이 행정 역량을 잘 발휘해 도심에도 공급을 늘려가야 한다.
10.10 문해력이 아니라 漢字력?

▲일러스트=박상훈
어느 중학교 지리 선생님이 한국 기후 특성을 가르치며 칠판에 “새마을 운동 전만 해도 많은 논이 천수답이어서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못 지었다”고 썼다. 학생들은 문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천수답’이 생소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天水畓’이라고 한자를 쓰고 “하늘에서 비가 와야 농사짓는 논이란 뜻”이라고 설명하자 그제야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사는 “한자만 알려 줘도 문장을 더 잘 이해하더라”라고 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올해 한글날을 맞아 실시한 조사에서도 한자 능력과 문해력의 상관관계가 새삼 지적됐다. 고 3 학생이 ‘풍력(風力)’을, 중3이 수도(首都)의 뜻을 몰라 교과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코미디 같은 일도 벌어진다. “가로등은 세로로 서 있는데 왜 가로등이냐?”거나 “대충돌(大衝突)은 ‘대충 만든 돌[石]’ 아니냐?”고 묻는다. ‘막역(莫逆)한 사이’라고 하면 ‘막연한 사이’를 잘못 쓴 줄 안다.
▶이런 빈약한 어휘로 독해가 제대로 될 리 없다. 수업이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이번 설문에서 일선 교사 92%가 “학생들 문해력이 전보다 떨어진다”고 대답했다. 학생 5명 중 1명은 남의 도움 없이는 교과서조차 이해하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교사들은 시험문제를 내면서 아이들이 잘 풀까 걱정하기 전에 질문이나 이해할까 걱정해야 하는 지경이라고도 했다.
▶다만 청년 세대의 문해력 자체가 낮다고 볼 수는 없다는 반론도 있다. 지금 청소년과 20~30세대는 어려서부터 외국어를 모국어 못지않게 접하며 자란 국제화 세대다. 성경을 읽다가 한자어 앞에서 막히면 부모 세대는 사전을 뒤졌지만 요즘 청년들은 인터넷에서 영어 문장을 찾아 읽고 정확한 의미를 파악한다. ‘이성 교제’라 하면 못 알아듣고 ‘데이트’라 해야 고개를 끄덕인다. 문장을 읽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말 70%가 한자어이기 때문이다. 결국 문해력의 근본 원인은 한자 이해력인 것이다.
▶교사들은 문해력을 높이기 위해 디지털 기기를 멀리하고 어휘력을 늘리고 책을 많이 읽으라고 권했다. 특히 고차원의 사고와 관련된 추상적인 개념어는 한자를 모르고선 이해할 수 없다. 영어권 국가들이 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언어철학자인 이규호 전 연세대 교수는 저서 ‘말의 힘’에서 이성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자라난다고 했다. 단어를 많이 알수록 인식의 지평도 넓어진다는 의미다. 한자를 익히고 어휘를 늘려야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
10.11 'AI 킹' 허사비스

▲일러스트=이철원
네 살 때 체스를 시작해 영국 주니어 체스팀 주장, 14세 이하 세계 2위가 된 내성적인 소년은 항상 같은 질문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난 체스 말의 움직임을 나는 도대체 어떻게 떠올린 걸까?” 인간 뇌와 사고 과정, 지능에 대해 골몰하던 그는 대회 상금으로 컴퓨터를 산 후 금방 답을 떠올렸다. “자동차가 인간 능력을 물리적으로 증폭하듯, 컴퓨터는 인간의 정신을 확장하는 도구라는 것이 즉각적으로 이해됐다”고 했다. 올해 노벨 화학상을 공동 수상한 데미스 허사비스(48) 구글 딥마인드 최고경영자(CEO) 얘기다.
▶허사비스는 기상천외한 괴짜들이 몰려 있는 테크 업계에서 유독 조용한 학자형 인물이다. 거부(巨富)가 된 지금도 런던 북부에 살며 통근 기차로 출퇴근한다. 일렉트릭 음악을 들으며 일하고, 저녁 식사는 매일 가족과 함께 한다. 보드게임·체스·바둑을 즐겨 취미조차 소박한 그는 샘 올트먼 오픈AI CEO와 함께 인공지능(AI) 업계를 대표하는 양대 거두(巨頭)이자, 천재 중의 천재로 불린다.
▶허사비스는 지난 10여 년간 급진전한 AI 역사의 한복판에 있었다. 2016년 이세돌 9단과의 바둑 대결에서 승리한 ‘알파고 쇼크’는 그의 존재를 온 세상에 알린 상징적 장면이었다. 2011년 창업한 딥마인드를 2014년 구글에 약 7000억원에 넘겼고, 2020년엔 단백질 구조를 분석해내는 AI인 ‘알파폴드’를 개발했다. 챗GPT를 만든 오픈AI도 딥마인드가 구글에 매각되자 그 반작용으로 설립됐으니 허사비스야말로 체스로 치면 AI 판의 ‘킹’(가장 중요한 말)이었던 셈이다.
▶그는 프로그래머라기보다 뇌신경 과학자에 가깝다. AI 그 자체가 주연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신성을 이해하기 위한 궁극적인 도구로 사용되길 원하기 때문이다. AI ‘알파폴드’로 생물을 이루는 근본 단위인 단백질 구조를 파악함으로써 생명의 비밀을 규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가 ‘화학’ 부문 노벨상을 받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허사비스가 노벨상을 받자 테크 업계엔 “AI가 모든 것을 휩쓸어가기 전 울린 전주곡”이라는 반응이 쏟아졌다. 지금까지의 AI가 미풍이라면 다가올 AI는 태풍이 될 것이란 얘기다. 허사비스는 “현재 우리는 10년 후 가능할 것으로 여겨지는 것의 겉부분만 긁고 있는 수준”이라며 “어쩌면 과학 발전이라는 새 황금기의 시작 단계에 있는 것일 수 있다”고 했다. 과학의 ‘새로운 황금기’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이 엄청난 변혁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 궁금하고 착잡하다.
10.12(토) 제 국민을 가두는 장벽

▲일러스트=이철원
인류 최초의 장벽은 4000여년 전 시리아에 세워진 160km 길이 ‘트레 롱 뮈르’다. 돌·모래로 쌓은 장벽으로 흔적만 남아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 아메넴헤트 1세와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장벽 건설 전문가였다. 중국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길이 2만km로 인류 최대 토목공사라 불렸다. 장벽은 당연히 외적 침입을 막는 방파제였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막아주지는 못했다.
▶21세 들어 장벽은 불법 이민·난민·테러 방지용으로 바뀌었다. 전 세계 장벽은 10여년 만에 20개에서 70개로 급증했다. 프랑스·오스트리아·헝가리·그리스·터키 등은 난민을 막으려 수백km에 걸쳐 4m 높이 철조망 장벽을 치고 있다. 사우디는 테러 단체 IS 유입을 막으려 총 2400km에 달하는 중동판 만리장성을 쌓고 레이더와 땅굴 감지 센서까지 설치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을 둘러싼 810km 장벽, 미국은 멕시코 국경에 1126km 장벽을 쌓았다.
▶드물지만 이 장벽이 자기 국민의 탈출을 막는 용도로 쓰이곤 했다. 로마가 영국 북부에 건설한 하드리아누스 장벽은 나중에 주민 탈출을 막고 세금을 징수하는 용도로 변질됐다. 만리장성도 나중에는 주민 이탈과 반란 방지 목적이 컸다고 한다. 프랑스는 1950년대 알제리 국경에 전기 철조망과 감시탑, 지뢰 등으로 ‘모리스 선’을 구축했다. 주민의 국경 탈출을 막은 것이다.
▶소련은 2차 세계대전 후 동유럽 국가들에 ‘철의 장막’을 쳤다. 국경 철조망·지뢰로 주민 이동과 외부 교류를 철저히 막았다. 동독은 1961년 서독으로의 주민 탈출을 막으려 베를린 장벽을 설치했다. 1991년 장벽 붕괴 전까지 이를 넘으려다 많은 동독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미얀마와 아프가니스탄도 주민 탈출을 막기 위해 국경을 봉쇄하고 있다.
▶외적 침입이 아니라 제 국민의 탈출을 막는 용도로 쌓는 장벽 중 사상 최악을 북한이 기록할 모양이다. 북한은 지금 1400km에 이르는 북·중 국경에 철조망을 치고 있다. 중국 측 2중 철조망과 감시 시스템까지 더하면 철통 장벽이다. 지뢰와 못을 심는다는 얘기도 있다. 248km 휴전선에도 콘트리트 방벽과 지뢰밭을 설치 중이다. 주민과 군인 탈북을 막으려 북한 전체를 거대한 감옥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만리장성은 과부의 눈물에 씻겨 무너진다”고 했다. 로마인들은 “장벽 뒤에 숨는 자는 반드시 망한다”고 했다. 아무리 이중 삼중 장벽을 쳐도 모순 덩어리 체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10.14(월) 한국인의 못 말리는 '장비 욕심'

▲일러스트=김성규
40대 한국인 남자가 몽블랑 빙하 트레킹을 가게 됐다. 한국에서 준비해 간 고기능성 등산복과 등산화,고글 등으로 무장하고 나갔더니 동행할 현지 산악인이 놀라며 “혹시, 암벽 등반 가냐?”고 물었다. 산악인은 허름한 패딩 점퍼 차림이었다, 그걸 본 남자는 “한국인은 뒷산에 갈 때도 히말리야 장비(裝備)를 갖춘다더니 내가 그랬다”고 쑥쓰러워했다.
▶‘크루(crew)’라는 이름으로 유행하는 각종 운동 동호회의 ‘장비 욕심’도 등산 애호가 못지않다. 주말 한강 시민공원에 나가보면 사이클 대회가 열리는 벨로드롬 경기장에서나 볼 법한 차림으로 떼 지어 자전거 타는 ‘라이딩 크루’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땀이 차지 않는 상의인 저지, 안장에 오래 앉아도 아프지 않다는 빕숏 하의 차림으로 수백만원짜리 자전거를 탄다.
▶달리기 동호회인 ‘러닝 크루’의 복장도 육상 선수들 뺨친다. 달리기 입문자들이 찾는 인터넷 사이트엔 마라톤 2시간 벽을 깬 킵초게가 신었다는 카본 소재 마라톤화, 심박수 센서와 GPS를 갖춘 스마트 워치, 휴대폰과 신용카드를 넣어서 몸에 묶어주는 러닝 벨트, 기능성 운동복 같은 장비가 나열돼 있다. 골프도 마찬가지다. 외국의 많은 주말 골퍼가 평생 드라이버를 한두 개만 쓴다. 한국인은 3~5년에 한 번씩 바꾼다. 10년간 드라이버와 우드를 15개씩 샀다는 이도 있다. “장비를 바꿀 게 아니라 연습을 많이 하라”는 전문가 조언은 뒷전이다.
▶운동이나 취미보다 장비에만 정성을 쏟는 모습을 풍자하는 소설도 등장했다. 소설가 장류진의 단편 ‘라이딩 크루’에 나오는 두 남자는 여성 회원의 남자 친구가 될 자격을 두고 자전거 대결을 벌인다. 둘은 공정하게 경쟁하자며 쫄쫄이라 부르는 기능성 옷을 모두 벗고 고성능 기어를 갖춘 자전거에서 내려 따릉이를 탄다. 작가는 알몸의 두 남자가 따릉이를 타고 한강변을 달리는 기괴한 장면을 통해 운동은 뒷전이고 장비에만 몰입하는 일부의 빗나간 세태를 꼬집는다.
▶러닝 크루가 애용하는 카본 소재 운동화는 탄성이 너무 강해 근육이 약한 일반인의 관절에 무리를 줄 수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씨는 “초보 운전자한테 배기량 6000㏄ 스포츠카를 몰게 하는 것”이라 했다. ‘인증샷’ 문화도 과도한 장비 욕심을 부추긴다. 많은 러닝 크루가 사진가와 동행하며 자기들이 달리는 모습과 의상 등을 찍게 해 소셜미디어에 올린다. 취미와 운동의 본래 목적은 사라지고 보여주기만 성행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10.15 비워둔 자리

▲일러스트=김성규
2011년 일본 대지진 때 미야기현 유리아게에서 9m 쓰나미로 주민 5700여 명 중 750명 이상이 희생됐다. 유리아게중학교에서도 14명 학생이 목숨을 잃었다. 이듬해 학교 터에 위령비와 작은 가건물이 세워졌다. 여기엔 14명을 기억하기 위한 빈 의자와 책상, 칠판이 놓여 있다. 참사 현장이지만 주변에 트레킹 코스까지 개발해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유족들도 찬성했다.
▶우리는 제사 때 조상이 집으로 찾아온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제사상 빈자리엔 조상 이름이 써 붙여졌다. 어릴 적 제사엔 관심 없고 젯밥 생각뿐인데, 어른들은 조상님 오신다고 대문 열어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음 단계가 초혼(招魂)인데 돌아가신 분의 혼을 부른다.
▶자리를 비워 망자를 기억하는 것은 동서(東西)가 다를 게 없다. 2021년 카불 공항 테러로 미군 13명이 숨졌다. 유해가 조국 땅에 도착하자 미국 곳곳의 식당과 술집에서 맥주 13잔을 올려놓고 테이블을 비워놨다. ‘예약석’이라는 팻말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13명을 위해’라는 메모가 놓였다. 빈자리를 둔 이발소까지 등장했다. 올해 2월 파리에서 열린 하마스 테러 추모식에는 사망한 프랑스인 또는 프랑스계 이스라엘인 42명의 초상화와 함께 실종자 3명을 위한 빈 의자가 함께 놓였다.
▶베트남전 이후 미군 식당이나 추모 행사장에선 ‘전사자 테이블’ ‘실종자 테이블’로 불리는 의식(儀式)이 생겼다. 이미 떠났으나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란 믿음을 담은 테이블인데 각각 의미가 있다. 하얀 식탁보는 조국의 부름에 응한 순수한 마음, 붉은 장미는 희생자의 피, 소금은 가족들의 눈물, 양초는 귀환을 위한 희망이다. 건배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잔은 뒤집혀 있다. 작년 한미 정상회담 오찬장에도 한미 장병을 위한 빈 테이블이 놓였다.
▶지난달 용산 전쟁기념관에선 6·25 때 포로로 잡혔거나 실종된 미군 7465명을 위한 테이블이 차려졌다. 참석자들은 7465명을 빠짐없이 호명했다. 이 행사는 6·25 때 실종된 미군 가족들에게 ‘우정의 액자’를 보내온 시민 단체가 주최했다. 한정윤 회장은 “그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있다”고 했다. 13일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딸 결혼식장에도 ‘전사자 테이블’이 놓였고 한미 전우들을 위한 묵념의 시간도 있었다. 신부와 미국인 신랑 모두 장교 출신이다. 신랑 신부가 모두 장교 출신인 결혼식은 수없이 많았겠지만 그 자리에 전우들을 위해 비워둔 의자를 놓고 묵념까지 한 결혼식은 없었을 것 같다.
조선일보
10.16 현대판 '호국신산'

▲일러스트=김성규
1274년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 황제의 명령으로 여몽 연합군이 일본 정벌에 나섰다. 합포(마산)를 출발해 대마도를 거쳐 규슈로 쳐들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들이닥친 태풍이 원정을 망쳤다. 1281년 여몽 연합군이 2차 일본 정벌에 나섰다. 또 태풍이 불었다. 병사 14만명 중 살아서 온 병력은 3만명에 불과했다. 일본인들은 이 태풍에 가미카제(神風)라는 이름을 붙였다. 일본인들에게 신풍은 신성한 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대만에는 신풍 대신 신산(神山)이 있다. 고구마 모양의 대만섬 동쪽엔 남북을 종단하는 중앙산맥이 있다. 3000m 이상 고봉을 200개 이상 거느린 험산 준령이다. 대만 섬 동쪽은 지진대 단층이라 매년 크고 작은 지진이 1만5000번 이상 발생한다. 필리핀 해상에서 발생하는 태풍이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도 대만섬 동쪽 연안이다. 그런데 거대한 중앙산맥이 태풍을 막고, 지진 충격을 완화하는 보호막 역할을 한다. 그래서 대만인들은 중앙산맥을 호국신산(護國神山)이라고 부른다.
▶요즘 대만인들이 호국신산이라고 부르는 대상은 중앙산맥이 아니라 세계 1위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기업) TSMC다. TSMC가 중국의 대만 침공을 막는 ‘전략 무기’ 역할을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엔비디아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에 AI 반도체를 독점 공급하다시피 하는 TSMC가 중국 수중에 들어가는 것은 미국이 막을 것이란 계산이다. 실제로 미국의 군사전략가 중엔 유사시 대만 반도체 생산 시설을 폭파하는 ‘초토화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기업의 호국신산 기능은 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이 여실히 보여줬다. 포드, 보잉 등 미국 기업들은 전쟁 기간 군용 트럭 200만대, 항공기 30만대, 탱크 8만6000대, 선박 6만500척, 대포 19만문을 생산했다. 독일 나치즘의 유럽 지배, 일본 제국주의 확산을 막은 일등 공신은 미국 제조 기업의 가공할 생산력이었다.
▶북한 독재자 김정은은 핵폭탄을 호국신산으로 여길 것이다. 한국의 호국신산은 무엇일까. 우리의 진정한 호국신산도 대만처럼 글로벌 첨단 기업들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여전히 세계 D램 메모리 반도체의 70%를 공급하고 있다. 미국은 군함 수리 및 제조를 세계 최고 한국 조선소에 맡기려 한다. 우리는 배터리 산업의 강국이다. 한국 기업이 만든 K-9 자주포, K-2 전차, 천궁 대공미사일, 잠수함, 구축함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기업의 세금과 생산품으로 나라를 지키니 그야말로 호국신산이다.
10.17 부산 출생 노벨상 1호

▲일러스트=박상훈
노벨상 홈페이지에 한국 출신이 3명이라고 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소설가 한강에 앞서 1987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찰스 J. 피더슨(1904~1989)의 출생지가 한국이라는 것이다. 노벨위원회는 홈페이지에 국적을 표기하지 않고 출생지, 소속기관 등만 명시한다.
▶찰스 J. 피더슨은 대한제국 시절이던 1904년 10월 3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노르웨이인, 어머니는 일본인이었다. 아버지는 일찍이 노르웨이를 떠나 극동행 화물선 기관사로 일했다. 한국에 정착해 해관(세관)에도 근무했고 이후 평안북도 운산군 운산금광 엔지니어로 일했다. 무역업 하는 가족을 따라 한국으로 이주한 일본인 여성 야스이 다키노를 만나 결혼했다.
▶운산금광은 20세기 초반에 동양 최대의 수익을 올린 광산이다. 미국 외교관 호러스 알렌이 고종을 설득해 채굴권을 따냈다. 미국 기업 동양합동광업이 1939년 일본 기업에 넘기기 전까지 근 40년간 금을 캐냈다. 영어 ‘노 터치(No Touch)’에서 비롯된 유행어 ‘노다지’가 이곳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알렌의 서한 기록에 따르면 1902년 당시 운산금광은 서양인 70명 이상, 일본인 40~50명, 중국인 600~700명, 조선인 2000~2500명 이상을 고용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서양인들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고 별도의 클럽 건물까지 두었다.
▶피더슨이 평북 운산 아닌 남쪽 땅 부산에서 태어난 건 마적단의 공격이 잦아지면서다. 피더슨의 어머니가 다른 미국인 여성들과 부산으로 피란 가 출산했다. 다시 운산금광으로 돌아가 살다가 8세 때 일본에 있는 외국인 학교로 조기 유학을 갔다. 대학은 미국 오하이오주에 있는 데이턴대로 진학했고 MIT에서 유기화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금을 추출할 때의 냄새와 금이 쏟아지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고 어린 시절 운산금광의 기억을 떠올렸던 피더슨은 결국 화학을 전공했다. 아버지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겠다고 박사 과정에는 진학하지 않고 1927년 미국 화학회사 듀폰에 취직했다.
▶듀폰에서 42년간 근무한 피더슨은 박사 학위 없는 노벨상 수상자로도 유명하다. 1967년 ‘크라운 에테르’라는 고리 모양의 화합물을 발견한 뒤 1969년 퇴직했다.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건 퇴직 후 18년 만이다. 그의 ‘크라운 에테르’ 연구를 확장시킨 미국 화학자 도널드 크램, 프랑스 화학자 장마리 렌과 공동 수상하고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이제는 한국 출생 노벨화학상 수상자 말고 한국인 노벨화학상 수상자가 나왔으면 한다. 꿈으로 끝나지 않길 빈다.
10.18 오빠

▲일러스트=김성규
‘오빠’는 K팝, K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한국어 단어 중 하나다. ‘오빠’를 영어로 표기한 ‘Oppa’는 2021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출간하는 영어 사전에 정식 등재됐다. 지난해 2월 미국의 지식 문답 사이트 ‘쿼라(Quora)’에 “한국인들이 남자 친구를 손위 남자 형제란 뜻의 ‘오빠’라고 부르는 것은 이상하지 않냐”는 질문이 등록됐다. 개인주의가 강한 서구에서는 형제 간에 주로 이름을 부른다. 아주 허물없는 관계의 남성 지인을 브러더(형제)의 줄임말인 ‘브로’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쓰임이 한정돼 있다. 남녀 관계인 상대를 ‘브러더’라고 부르면, 혈육에게 성적인 감정을 품는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가족주의가 강한 사회일수록 혈연관계가 아닌 사람도 친족 간의 호칭으로 부르는 일이 흔하다. 아시아 국가들이 주로 그렇다. 한국처럼 유교적 가족주의의 영향을 받은 베트남에서는 형·오빠를 뜻하는 ‘안(Ahn)’, 누나·언니를 뜻하는 ‘치(Chi)’, 동생을 뜻하는 ‘엠(Em)’이란 호칭이 널리 쓰인다.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서는 나이와 무관하게 남자가 ‘안’, 여자가 ‘엠’이 된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여성들도 손위 남자 형제를 뜻하는 ‘아방(Abang)’ ‘방(Bang)’ ‘마스(Mas)’란 말을 남자 친구나 남편을 부를 때 흔히 쓴다.
▶1970년~1990년대 초반 여자 대학생들은 남자 선배를 ‘오빠’가 아니라 ‘형’이라고 불렀다. 학형(學兄)의 줄임말이라고도 하고, 운동권 문화라고도 한다. 1989년 가수 이승미는 ‘사랑도 아닌 우정도 아닌, 그때 그 마음 뭔지 몰랐었지만, 형이 없는 그 찻집이 외로워요’란 가사의 ‘형’이란 노래를 발표했다. 1990년대 중·후반 학생운동의 쇠퇴와 함께 ‘형’은 ‘오빠’로 바뀌었다.
▶북한에서 ‘오빠’를 쓰면 감옥에 간다. 김정은 정권이 한국 문화의 유행을 막는다며 3~4년 전쯤부터 ‘오빠’라는 말을 쓰는 행위를 처벌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제정된 평양문화어보호법 제19조에 “혈육관계가 아닌 청춘남녀들 사이에 ‘오빠’라고 부르는 행위”는 “괴뢰식”이라고 명시했다. 최근에는 친오빠도 ‘오라버니’로만 부를 수 있다고 한다. ‘아빠’도 금지됐다. 전 세계가 다 아는 단어를 북한에서만 쓰지 못한다.
▶김건희 여사가 명태균씨에게 보낸 카톡 속 ‘우리 오빠’가 친오빠인지 남편 윤석열 대통령인지 논란이다. 혈연 관계의 오라버니부터 남성 지인이나 연인·남편까지 ‘오빠’란 말이 쓰이는 범위가 넓어서 벌어진 일이다.
10.19(토) 확 달라진 저녁 식당가

▲일러스트=박상훈
1990년대 초 기업에 입사한 대학 동기들과 만나면 너나 없이 저녁 회식과 야근의 고충을 토로했다. 매일같이 회식했고 그 후엔 퇴근하지 못하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근처의 식당과 주점들도 직장인 업무 사이클에 맞춰 밤 늦도록 영업했다. TV에선 야근 마치고 자정까지 술 마신 뒤 퇴근하는 이들을 위한 숙취 해소 음료 광고가 나왔다.
▶‘다른 저녁’도 있다는 사실을 유럽에 출장 가서 처음 알았다. 퇴근 후 곧장 귀가해 가족과 저녁 식사를 하는 그들의 모습은 낯설었다. 오후 6~7시면 서울은 초저녁인데 유럽 도시들은 일부 유흥가 외엔 적막강산으로 변했다. 우리나라 생각하고 늦게 나갔다가 문 연 식당을 찾지 못해 저녁을 굶은 적도 있다.
▶어느덧 우리 삶도 그렇게 바뀌고 있다. 한 카드사가 서울 광화문·강남·여의도·구로·경기도 판교 등 5곳 직장인들의 교통카드 이용 시간대를 분석했더니 퇴근 시간이 5년 전보다 평균 19분 앞당겨진 것으로 조사됐다. 오후 6~7시대가 43%로 여전히 가장 많았지만, 7시 이후 퇴근이 5년 전보다 줄었고 오후 5~6시 퇴근이 13%에서 23%로 크게 늘었다. 퇴근 후 어디서 카드를 쓰는지도 봤다. 식당과 주점에 덜 가고, 대신 헬스장 사용이 늘었다. 저녁의 삶이 선진국형으로 바뀌고 있다는 의미다.
▶서울 광화문에서 음식점을 하던 지인이 최근 가게 문을 닫았다. 2차 손님을 받아 술을 팔아야 하는데 다들 1차만 하고 귀가해 이익이 안 남는다고 했다. 직장인 사이에 밤 9시가 회식 마감 시간으로 굳어지면서 이후엔 영업할수록 손해 나는 ‘적자 타임’이라고 했다. 자정까지 술 마시다가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란 노래 듣고 일어서던 게 옛날 일이 됐다. 이젠 밤 8시에 종업원이 다가와 “라스트 오더(마지막 주문) 하라”고 한다. 밤 9시쯤 식당 내부엔 손님이 없다시피 하다. 과거 이 시각 식당은 시끌벅적했다. 인건비와 재료비의 상승, 코로나 이후 고착된 회식 자제 분위기, 맞벌이 증가 등이 ‘한국인의 저녁’에 근본적인 변화를 부르고 있다.
▶한국인의 근로시간은 2011년까지만 해도 OECD 회원 23국 중 최장이었다. 하지만 2022년엔 5위가 됐다. 장시간 노동을 개선해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우리를 추월해가는 중국은 과업이 주어지면 완수할 때까지 며칠이고 밤샘을 불사한다는 뉴스도 접한다. 그렇다면 적게 일하고 많이 버는 고부가가치 산업구조로 가야 하는데 우리가 그 길로 가고 있는지 걱정스러운 생각도 든다.
10.21(월) AI 안면인식

▲일러스트=박상훈
1967년 미국의 수학자이자 컴퓨터 과학자 우드로 윌슨 블레드소가 참가자들에게 얼굴 사진 100장을 제시하고, 같은 인물의 사진들을 가려내게 하는 실험을 했다. 가장 빨리 해낸 사람이 6시간 걸렸다. 컴퓨터는 같은 작업을 불과 3분 만에 끝냈다. 컴퓨터가 사람의 얼굴 초고속 인식에 처음으로 성공한 장면이었다.
▶블레드소가 얼굴 인식 프로그램 개발에 나선 것은 미 중앙정보국(CIA)이 위장회사를 통해 연구비를 대고 개발을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2차원 평면의 ‘문자’ 인식도 어려운 당시에 3차원 ‘얼굴’ 인식은 상상 속에서나 머물던 기술이었다. 같은 사람의 얼굴 사진도 표정이며 헤어 스타일, 촬영 각도와 시점에 따라 천양지차다. 컴퓨터가 인식하기 어렵다는 회의론이 지배적이었다.
▶블레드소는 사람 얼굴을 눈, 귀, 코, 눈썹, 입술 등 주요 부위 간의 위치 관계로 데이터화하는 발상의 전환으로 한계를 돌파했다. 얼굴 각도가 바뀌어도 각각의 좌표를 비교 분석해 같은 사람인지 확인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시작한 컴퓨터의 얼굴 인식은 법 집행기관의 사진 데이터베이스와 머그샷(피의자 인상착의 사진)의 동일 인물 여부를 확인하는 용도 등으로 쓰이면서 사용 범위가 확대돼왔다.
▶10여 년 전만 해도 컴퓨터의 얼굴 인식은 노화 정도, 조명의 강도, 모발의 길이 등 각종 변수로 오류가 잦아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인공지능(AI)의 딥러닝 기술이 꽃을 피우면서 수천만 장 이상 얼굴 사진을 학습해 장애물을 줄줄이 뛰어넘었다. 점, 속눈썹, 눈가의 잔주름까지 정교하게 분석하고, 수많은 군중 속에서 움직이는 인물의 얼굴을 인식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공상과학영화의 얼굴 인식 기술들이 실현된 것이다. 안면 인식 기술력에서 최첨단을 달리는 중국은 범죄자나 간첩 색출, 심지어 탈북자 적발에도 이 방법을 사용하며 전 국토를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었다.
▶국가정보원이 우크라이나 전선에 투입될 북한군 추정 인물이 지난해 8월 김정은 위원장을 수행한 북한 미사일 기술자인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북한 관영매체 사진과 우크라이나 정보기관이 제공한 현지 사진을 자체 AI 안면 인식 기술로 분석한 결과다. 그러나 안면 인식을 통한 대북 정보 수집엔 한계가 있다. 북한인 얼굴 사진을 관영 매체가 공개하는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반면 북한은 방대한 한국인 사진 데이터를 갖고 있다. 지금도 북한의 AI가 한국 인터넷에 떠있는 수많은 인물 사진과 중국산 감시카메라로 유출된 사진들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 중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곽수근 논설위원·테크부 차장
10.22 가슴 아픈 이름 '영 케어러'
‘영 케어러(Young Carer)’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병든 부모를 돌보고 생계까지 책임져야 하는 젊은이들이다. 젊은이들은 자신의 어려움을 외부에 잘 알리지 않으려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선진국 사회복지 분야에서도 영 케어러라는 개념은 늦게 생겼다. 1980년대 영국에서 그 존재들이 드러나기 시작해 1993년 영국 학자가 개념을 명확히 한 책을 내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일러스트=이철원
▶한국에도 영 케어러가 없을 리 없지만, 그로부터 무려 30년 가까이 지나서야 우리 사회에서 처음으로 영 케어러가 주목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2021년 아픈 50대 아버지를 간병하다 포기해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 대구 20대 청년 사건이었다. 그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영 케어러를 복지 대상자로 발굴한 사례가 한 건도 없었다. 이후 이들을 ‘가족 돌봄 청년’이라 부르고 있다. ‘소년 소녀 가장’의 상위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을 불행한 운명의 젊은 ‘효자·효녀’로 여기며 부담을 덜어줄 생각조차 못한 것이다.
▶사회가 무관심한 사이 이들은 복합적인 고충에 시달렸다. 간병의 부담 외에도 병원비와 생계비 등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대구 청년도 감당할 수 없는 병원비 때문에 아버지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퇴원할 수밖에 없었다. 월세와 공과금도 밀려 가스와 휴대전화가 끊긴 상태에서 2시간마다 아버지 몸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돌봐야 했다. 자신의 삶을 끌어가기에도 벅찬 나이에 어깨에 큰 바위를 지고 산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아픈 가족을 돌보느라 자신의 미래마저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진로를 결정하고 학업을 이어가야 할 시기에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한 영 케어러는 가족 간병과 학업을 병행하는 자신의 삶에 대해 ‘포기의 연속’ ‘끝이 없는 터널을 지나는 느낌’이라 표현했다. 이들이 고아보다 못한 처지라는 말이 결코 과장만은 아니다.
▶조부모나 부모, 형제자매를 돌보는 10대 영 케어러가 서울과 경기 지역에만 7만명을 넘는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국내 첫 추산 결과다. 이 수치를 전국으로 확대하면 20만명 안팎의 영 케어러가 있다는 얘기다. 20대까지 포함하면 엄청난 숫자일 것이다. 규모를 추산해본 것이 처음이니 그동안 지원 정책이 있을 리 없다. 몇몇 지자체에서 조례를 제정해 지원하기 시작한 수준이다. 이제라도 이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내 도와야 한다. 숫자가 많고 처한 위기 상황도 심각한 만큼 서둘러야 한다. 국민 세금은 이렇게 가슴 아픈 처지의 사람들을 돕는 데 써야 한다.
10.23 정치와 점술

▲일러스트=이철원
미국의 IT 전문 잡지 ‘와이어드’는 지난 8월 점성술사들이 미국 대선을 이용해 추종자를 모으고 있다고 보도했다. 에이미 트립이란 점성술사는 2020년 X(옛 트위터)에 “토성이 귀환하기 때문에 카멀라 해리스가 2024년 대선에 출마할 것”이라는 글을 썼다가 해리스가 출마하면서 유명해졌다. 다만 그는 “트럼프가 다음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이런 온라인 정치 점성술사들에 대해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정치적 예언을 해서 유명해진 뒤 고액의 개인 상담을 하는 “수익성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점술과 주술은 고대부터 정치와 연관이 깊었다. 중국 고대의 상(商) 왕조는 소뼈나 거북 딱지를 불태워 나오는 균열을 보고 국사에 대한 점을 쳤다. 이때 점술사인 정인(貞人)이 점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 중국 한자의 시초인 갑골문이다. 그리스·로마 정치가들은 무녀의 신탁을 받았고,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점성술을 중시했다. 신미양요, 병인양요 때 조선 왕실은 무녀의 말에 따라 궁궐 뒷마당에 솥단지를 묻었다고 한다.
▶현대에도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부인 낸시가 점성술사 조앤 퀴글리에게 의존했고,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이 점성술사 엘리자베스 티시에에게 자문했다. 1981년 인도의 한 점성술사가 일간지에 ‘인디라 간디 총리가 이번 달 암살당할 것’이란 예언을 해서 경찰이 그를 연행하는 소동이 일었다. 간디 총리는 그 3년 후 암살당했다. 운인지 신기인지 신통력을 발휘한 정치 점술가도 많았다. 일본 정치 평론가가 쓴 책에 자민당 내 한 파벌을 돕던 예언가가 다음 총재 선거 결과를 득표수까지 거의 정확하게 맞혔다는 내용이 나온다.
▶한국에서도 선거 때마다 ‘누가 된다’ ‘누구는 안 된다’고 예언하는 점술가들이 등장해 소문을 탄다. 각 캠프가 이 점술가들을 관리한다는 얘기도 있다. 이들이 대중에게 영향력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한 정치인이 ‘오늘은 어느 방향으로 나가지 말라’는 점술가 말을 따라 대문을 피해 사다리로 담을 넘어 출근했다는 얘기도 있다. 한국 공무원들이 점을 많이 본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다. 승진과 보직에 목을 매기 때문이다.
▶21일 국회 법사위에서 명태균씨와 관계가 있는 강혜경씨가 출석해 김건희 여사가 명씨의 “예지력”에 의존했다는 취지의 증언을 했다. 대통령 내외가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시신이 안치된 곳에 조문하지 않았던 것 등이 명씨의 조언이란 얘기다. 2021년 대선 경선 때 ‘손바닥 왕(王) 자’부터 시작된 주술 논란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10.24 上노인 下노인

▲일러스트=이철원
법적 노인 연령인 만 65세 이상도 ‘경로당 가는 상노인(上老人)’과 ‘카톡창 여는 하노인(下老人)’으로 활동성의 차이가 크다는 보도가 나왔다. 최근 대한노인회는 현행 65세인 노인 기준 연령을 매년 1년씩 높여서 75세까지 상향하자고 정부에 제안했다.
▶”내가 늙어 머리가 빠지면 넌 여전히 생일 축하 인사와 와인을 보내줄까? 내가 64세가 되어도 여전히 나를 필요로 하고 나를 돌봐줄까?” 비틀스의 1967년 음반에 실린 ‘내가 64세가 되면(When I’m Sixty-Four)’의 한 구절이다.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가 작사·작곡한 이 노래는 영국 남성의 평균수명이 69세, 여성이 75세이던 시절에 지은 곡이다. 몇 년 전 영국의 대학 연구팀이 노화를 묘사한 대중가요 76곡을 분석했는데 늙어감을 부정적으로 묘사해서 노인들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 대표곡으로 이 곡을 꼽았다.
▶그로부터 22년 뒤인 1989년, 영국에서는 사회학자 피터 라슬렛이 인생 4단계 분류법을 제시하면서 60대를 완전히 새롭게 정의했다. 태어나서 교육받는 시기(제1기), 취업해서 가족을 책임지는 시기(제2기)를 지나면 퇴직해서 건강하고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인생 3기(Third Age)가 펼쳐진다는 것이다. 그게 60대다. 그만큼 젊고 활력 있는 고령층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65세 노인’ 기준은 19세기 말 독일이 국가 연금 수급 연령을 65세로 정한 것에 연원을 두고 있다. 이제는 도저히 노인이라 부를 수 없는 ‘젊은 65세’ ‘팔팔한 70대’가 대거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서구권에서는 60대 이상도 연소 노인(young-old), 중고령 노인(middle-old), 고령 노인(old-old)이라 나누기도 하고, 65~74세 ‘영 올드’와 75세 이상 ‘올드 올드’로 나누기도 한다. ‘경로당 가는 상노인’과 ‘카톡창 여는 하노인’은 ‘올드 올드’와 ‘영 올드’의 우리식 표현인 셈이다.
▶65세 이상 인구가 1000만명을 돌파해 인구 5명 중 1명이 ‘법적 노인’이다. 하지만 경제활동에서는 60대 취업자가 50대, 40대, 30대, 20대보다도 더 많다. 길어진 수명만큼 오래 일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60대 노동력을 생산적으로 활용해서 저출생으로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고 청년 세대 부담도 덜어줘야 하는 것이 국가적 과제이기도 하다. 달라진 현실에 맞춰 과거에 만든 ‘노인 기준’도 바꿀 때가 됐다.
10.25 브루노 마스의 '아·파·트'

▲일러스트=이철원
한국에서 아파트는 1930년 서울에 처음 등장했다. 1970년대 서울 용산에 들어선 한강맨션은 수도꼭지만 틀면 더운물이 쏟아지며 ‘아파트=편리함’이란 인식을 강화했다. 가수 윤수일이 1982년 ‘아파트’를 발표할 때만 해도 전체의 5%에 불과했던 아파트 주거율이 지금은 전체의 절반 이상으로 늘었다. 이러니 아파트를 빼고 한국인의 삶을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온다.
▶문학작품 중에 아파트를 다룬 소설이 유난히 많은 것도 한국적인 현상이다. 최인호의 ‘타인의 방’이나 박완서의 ‘마흔아홉 살’은 대도시 아파트에 사는 한국 중산층의 고독과 위선, 물욕 등을 다룬 작품들이다. 외국인도 한국을 알고 싶다면 ‘똘똘한 한 채’ 같은 단어가 지닌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한국식 재테크, 교육열, 중산층 문화를 분석하는 ‘아파트 공화국’이란 책을 낸 프랑스인도 있다.
▶한국을 처음 접하는 이들은 ‘아파트’라는 한국식 공동주택 이름을 낯설어한다. ‘아파트먼트’라는 영어 단어가 있기는 하지만 누가 이를 줄여서 ‘아파트’라고 했는지는 모르겠다. 이런 형태의 주택을 영국에선 플랫(flat), 미국은 콘도(condo)라 한다. ‘아파트’는 외국인들이 발음하기도 어렵다. 특히 영어는 단어 끝에 ‘으’ 발음이 없다. ‘데이빗(David)’이라고 하지, ‘데이비드’라고 하지 않는다.
▶걸그룹 블랙핑크 가수 로제가 지난주 세계적인 팝스타 브루노 마스와 듀엣으로 낸 곡 ‘아파트(APT.)’가 세계 젊은이들의 귀를 사로잡고 있다. 한국에선 브루노 마스가 정확한 발음으로 ‘아~파트, 아파트’를 반복해 외친 것이 화제가 됐다. 마스뿐 아니라 그 노래에 매료된 전 세계 청년들이 한국 발음으로 ‘아파트’라고 따라 하는 동영상도 퍼지고 있다. 이 노래에 나오는 ‘건배 건배’ ‘소맥’처럼 한국의 음주 문화와 관련된 어휘, 로제와 마스가 두 손을 겹쳐가며 재현한 한국의 아파트 게임 밈(meme·유행 동영상)도 번지고 있다.
▶과거 한국인이 외국에 나갈 때면 ‘아파트’는 콩글리시라 쓰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어느덧 외국인이 한국식 명칭을 이해하고 발음도 한국인처럼 하려 애쓴다. 미국의 패션 월간지 ‘보그’도 최근 로제를 인터뷰한 기사에 “이 곡은 로제가 한국 태생이란 사실을 존중하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식 ‘apateu’로 발음한다”는 설명과 ‘아파트’라는 한글을 병기했다. 외국인이 알아야 할 한국 항목에 아파트 명칭과 발음법도 포함됐다. K컬처가 전 세계로 얼마나 뜨겁게 퍼지는지 보여주는 문화 현상이다.
10.26(토) 노노 상속
▲일러스트=박상훈
두 자녀와 저녁을 먹다 집 얘기가 나와 농담조로 “아파트는 너희 둘이 사이좋게 나눠가지라”고 해보았다. 그랬더니 반응이 뜻밖이었다. “어느 세월에요?” 할 말을 잃고 가만 생각해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우리 세대가 평균수명인 80대까지만 살아도 자녀들도 50대다. 서울에서 아파트 한 채 장만하려면 한 푼 안 쓰고 월급 다 모아도 25년 걸린다는 통계도 떠올랐다.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를 겪는 일본의 고민거리 중 하나는 ‘부의 고령화’다. 일본은 금융자산의 60%를 고령층이 갖고 있는데 고령층은 여간해선 투자나 소비를 하지 않는다. 반면 젊은 세대는 재산이 많지 않아 투자나 소비를 할 여력이 없다. 돈이 고령층에 머물며 돌지 않는 것이다. 일본이 겪은 장기 불황의 한 원인이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상속이 이루어져도 문제다. 일본에서 상속하는 사망자 나이가 80세 이상인 비율이 70%가 넘는다. 또 2022년 기준으로 유산을 상속받는 사람 중 60세 이상의 비율이 52%였다. 절반 이상이 60세 넘어 물려받는 것이다. 이른바 ‘노노(老老) 상속’이다. 이 같은 ‘자산 잠김’이 이어지면 국가 경제에는 재앙이다. 일본에선 이에 따른 세대 갈등도 나타났다. 지난해 37세인 나리타 유스케 예일대 조교수는 “고령화 부담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결국 고령층이 집단 자살 또는 집단 할복하는 것 아닐까”라고 말한 것이 알려져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나중에 “추상적 은유였다”고 해명했지만 일본 사회의 공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기시다 내각은 이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2022년 ‘부의 회춘(回春)’ 정책을 실시했다. 막대한 고령층 자산을 젊은 세대로 이전시키기 위해 사전 증여가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각종 세제를 정비한 것이었다. 자녀가 주택을 최초 구입할 때 일정 금액까지 지원해도 비과세하고 손자녀 육아비와 교육비로 각각 1000만엔(약 9140만원), 1500만엔까지 과세하지 않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노노 상속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진행 중이거나 곧 본격적으로 닥칠 문제다. 부작용이 커지기 전에 우리에게도 적절한 수준의 ‘부의 회춘’ 정책이 필요할 것 같다. 지난해 자녀 결혼자금 증여 시 공제한도를 1억5000만원으로 늘렸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정부가 상속세 공제액을 늘리는 방향으로 법 개정을 추진 중이지만, 상속만 아니라 증여를 통해서도 사회의 부가 젊은 층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가도록 유도하는 방안도 고민해야 한다.
10.28(월) 전쟁 영웅 된 軍馬

▲일러스트=김하경
춘추시대 천자가 다스리는 주(周)나라를 만승지국(萬乘之國)이라 했다. 말이 끄는 전차[乘] 1만대를 보유한 나라라는 뜻이다. 군마(軍馬)의 수가 국력의 척도였다. 한무제(漢武帝)도 흉노와의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당시 최고 군마인 중앙아시아 한혈마(汗血馬)를 원했다. 마침내 한혈마 3000마리를 손에 넣고는 “모든 오랑캐가 복종하네”라며 기뻐했다. 여포와 관우가 탔던 적토마도 한혈마였다고 한다.
▶군마는 지구력과 주력을 갖춰야 한다. 한혈마는 기병을 태우고 폭 360㎞ 중앙아시아 카라쿰 사막을 물 한 방울 마시지 않고 사흘 만에 주파한다. 유럽에선 데스트리어, 코서, 라운시 등 3종을 꼽는데, 중세 기사들은 그중에서도 빠르게 돌격하는 데스트리어를 으뜸으로 쳤다. 눈 덮인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을 그린 화가 다비드의 ‘생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에 등장하는 백마는 용맹하기로 유명한 이집트산 마렝고다.
▶1·2차 대전까지 군마는 전쟁 수행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철도로 군수품 대량 수송이 가능해진 1차 대전 때는 군용 화물을 역에서 최전방까지 나르는 말의 역할이 더 커졌다. 영국과 프랑스 군마 900만필이 임무 수행 중 전사했다. 지금도 도로가 없거나 산악 지형인 곳에선 말에 의지한다. 눈이 오면 거대한 진창이 되는 우크라이나 평원 전쟁터에선 말 달구지가 무기와 식량을 나른다.
▶수많은 전쟁터에서 말은 인간과 생사를 함께하는 전우였다. 동방 원정에 나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전장을 함께 누빈 군마 부케팔로스가 인더스강 근처에서 전사하자 말의 이름을 딴 도시를 세워 전공을 기렸다.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은 자신을 등에 태우고 왜구와의 전쟁터에 나갔다가 화살 세 발을 맞고 부상한 말을 특히 아꼈다. 그 말이 죽자 무덤을 쓰고 돌 구유를 만들어 부장품으로 넣었다.
▶6·25 전쟁 중 미 해병대 소속으로 적의 포격을 뚫고 탄약과 부상자를 날랐던 한국산 군마 레클리스의 동상 제막식이 그제 제주에서 열렸다. 레클리스(reckless)는 무모할 정도로 용맹하다는 의미다. 미군은 레클리스를 전쟁 영웅으로 예우했다. 군마로선 미 해병대 역사상 처음으로 하사 계급을 달아줬고, 죽은 뒤엔 해병대 기지에 안장했다. 레클리스가 머물렀던 축사엔 전공을 기리는 기념비도 세웠다. 라이프지(誌)는 레클리스를 워싱턴, 링컨 등과 함께 미국 100대 영웅으로 꼽기도 했다. 전쟁에서 희생한 이들을 기억하고 예우하지 않는 나라가 오래 존속할 수는 없다. 그것이 사람 아닌 말이라도 마찬가지다.
10.29 읽는 것은 멋지다 '텍스트 힙'

▲일러스트=박상훈
베스트셀러 코너에 19세기 철학자 ‘쇼펜하우어’ 책들이 꽂히고 있다. 2021년 1종, 2022년 2종이었던 쇼펜하우어 책은 작년 9월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이후 32종이 출간됐다. 작년 말 배우 하석진이 방송에서 쇼펜하우어를 소개하면서 시작됐고, 걸그룹 ‘아이브’ 장원영이 관련 책을 언급하자 판매가 폭증했다. 장원영은 “염세주의적 쇼펜하우어를 통해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군자는 떳떳하고 소인은 늘 근심한다는 말이 좋다”며 공자의 ‘논어(論語)’도 추천했다.
▶아이돌이 입은 옷이나 들렀던 식당처럼 요즘은 그들이 읽은 책이 소셜미디어를 타고 유행이 된다. 책이나 활자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20대 아이돌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힙(hip)하다(멋지다)는 이미지를 줬다고 한다. 그래서 ‘읽는 것은 멋지다’는 의미의 ‘텍스트 힙(text hip)’이라는 용어가 MZ세대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읽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해서 독서와 도파민의 합성어인 ‘독파민’도 등장했다. 광화문광장에 누워 책을 읽고, 홍대나 합정동 카페에서 와인을 마시며 책을 읽는다. 국밥 한 그릇을 비운 뒤 올리던 완식(完食) 인증 샷 대신 책 한 권을 읽고 완독(完讀) 인증 샷을 올린다.
▶‘지적 허세’라는 비판도 있지만 그 부모 세대들도 그 나이 때 마찬가지였다. 80년대에는 읽지도 않는 ‘타임지’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대학생이 수두룩했다. 미국서도 교양인 행세 하려면 잡지 ‘뉴요커’ 구독이 필수였고, 카페에서 ‘르 몽드’를 읽어야 파리지앵 취급을 받았다. 요즘은 잡지 ‘뉴요커’보다 부록인 에코백이 교양인의 상징이다.
▶유명인들이 공항에서 입은 옷들이 유행하면서 ‘공항 패션’이 화제가 됐다. 요즘은 공항 패션 대신 ‘공항 책’이다. 걸그룹 르세라핌의 허윤진은 출국 때 자주 책을 들고 나온다. 그녀는 메이크업 중간에도 독서를 하거나 인상적 문구를 필사(筆寫)한다. 이유를 묻자 “생각 정리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정치인도 공항에 책을 들고 나타나고 있다.
▶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텍스트 힙’ 유행에 기름을 부었다. ‘힙하다’는 건 남들과 다르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성인 10명 중 6명이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나라에서 ‘텍스트 힙’은 그래서 역설적이다. 얼마나 책을 읽지 않으면 책을 읽는 게 남달라 보이고 멋있어 보이겠나. AI 시대에서 읽기와 쓰기로 단련된 사고력은 대체할 수 없는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10.30 '노실버존'

▲일러스트=이철원
서울에 사는 50대 회사원이 동네 헬스장 직원의 전화를 받았다. “어머님이 운동하다가 쓰러지셨다”며 “연세가 80을 넘기셨으니 이참에 잘 말씀드려서 헬스장을 그만 나오시게 하라”고 권했다. 너무 야박하다고 생각해 다른 곳을 알아보니 거긴 더했다. 75세부터 헬스장 출입을 막았고, 정 운동하고 싶으면 보호자인 자녀의 동의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65세 이상 이용 금지’라고 써붙인 곳도 있었다.
▶헬스장과 수영장을 중심으로 어르신 고객을 받지 않는 노(no)실버존이 늘고 있다. 운동하다 다치기 십상이어서라고 하지만 노인 회원이 많으면 젊은 손님들이 떨어져 나간다는 이유를 드는 곳도 있다. 젊은이들은 운동하는데 말을 걸거나 몸을 쳐다보는 것도 불편해한다. 반면 요즘 노인들은 건강에 관심이 많고 건강에 투자할 여윳돈도 있다. 80대 노교수 지인도 헬스장에서 단련한 팔뚝을 소셜미디어에 공개하며 노년의 건강미를 뽐낸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8일 스포츠 시설에 대해 “65세 이상 회원 가입을 제한하는 것은 차별”이라며 “고령자의 체육 시설 참여가 배제되지 않도록 하라”고 권고했다. 1년짜리 헬스클럽 회원권을 사려다가 65세가 넘었다는 이유로 퇴짜맞은 68세 시민이 인권위에 진정하자 이렇게 결정했다. 요즘 누가 65세를 노인이라 하는가. 그런데도 국가 기관이 나서야 할 만큼 생각 없는 업소들이 많다.
▶노실버존이 헬스장과 수영장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많은 어르신이 외식하기가 너무 어려워졌다고 하소연한다. 예약 전화를 걸면 “네이버로 하시라”며 전화를 끊기 일쑤다. 온갖 인증과 노쇼 방지용 선금까지 디지털로 요구하니 예약을 포기하고 만다. 식당에 가도 이번엔 무인 주문 키오스크를 다룰 줄 몰라 허둥댄다. 음식점도 디지털 장벽을 높게 친 노실버존이 많아지고 있다.
▶한국은 내년에 인구 20%가 65세를 넘는 초고령 사회에 진입한다. 수명 연장은 좋은 일이지만 노인을 혐오하고 배제하는 노실버존 같은 음영도 짙어졌다. 우리보다 먼저 노인 대국이 된 일본은 어르신의 헬스장 출입을 국가가 권장한다. 노인병 치료에 돈 쓰느니 운동으로 건강 지키도록 돕는 게 낫다며 ‘메디컬 피트니스‘라는 운동을 보급하고 헬스장 다니는 노인에게 세제 혜택도 준다. 이 운동을 가르치는 니가타의 한 헬스클럽은 이용자의 53%가 60대 이상이고 70대 이상도 14%나 된다. 모든 세대가 머리를 맞대고 초고령 사회에서 공존의 길을 찾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노년은 금방 다가온다.
10.31(목) 폴크스바겐이 어쩌다

▲일러스트=이철원
1929년 세계 대공황이 1차 세계대전 패전국 독일 경제에도 직격탄을 날렸다. 국민 40%가 실업자가 됐다. 갓 집권한 아돌프 히틀러가 실업자 구제와 경기 진작책으로 자동차 전용 도로망 건설을 발표했다. 세계 최초의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 ‘라이히스 아우토반’(Reichsautobahn·제국 자동차 도로)은 독일 경제 부흥의 밑거름 역할을 했다.
▶히틀러는 “자동차가 귀족들의 독점물이 되어선 안 된다”면서 ‘국민차 프로젝트’를 함께 추진했다. 천재 자동차 공학자 페르디난트 포르셰 박사를 불러 1000마르크 아래 가격으로 네 사람이 탈 수 있고, 100㎞ 이상 속도를 내며, 기름 1리터로 12㎞ 이상 달리는 ‘폴크스바겐(Volks국민+wagen차)’을 만들라고 주문했다. 오토바이 한 대 값으로 살 수 있는 저렴한 승용차를 만들라는 황당한 요구였다.
▶포르셰 박사는 3년간의 연구 끝에 공기 저항을 줄이는 딱정벌레 모양의 몸체에 냉각수가 필요 없는 공랭식 엔진을 차체 뒤에 장착한 ‘비틀’ 모델을 만들어냈다. ‘악마와 천재의 악수’로 탄생한 비틀은 2100만대나 판매돼 자동차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 이후 경영권을 승계한 창업주의 외손자 페르디난트 피에히가 비틀 후속 모델 ‘골프’를 성공시키고 그 자금력으로 람보르기니, 벤틀리, 아우디를 잇따라 인수했다.
▶그런데 창업자 포르셰 박사가 1898년 처음 만든 자동차는 배터리로 움직이는 전기차였다. 3마력 전기 모터를 탑재해 시속 35㎞ 속도로 80㎞를 주행했다. 무거운 배터리가 치명적 약점임을 간파한 포르셰는 1901년 세계 최초로 가솔린 기관을 발전기로 채택한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개발하기도 했다. 그의 전기차 개발은 1차 대전 발발과 군 입대로 중단된다. 포르셰의 군 입대가 없었다면 일론 머스크에 의해 100년 뒤 열린 전기차 시대가 한층 앞당겨졌을지도 모른다.
▶세계 1위 자동차 기업(매출 기준) 폴크스바겐이 중국 전기차 공세에 휘청이고 있다. 매출의 30%를 의존하던 중국 시장을 비야디 등 중국 전기차 기업에 뺏긴 데다, 안방인 유럽 시장마저 중국 기업에 밀리고 있다. 중국 전기차는 가격이 30~40% 이상 싼 데다 최신 자율주행 성능까지 갖췄다. 보통 4년 걸리는 신차 개발을 중국은 1년 반 만에 해내기에 도저히 경쟁이 안 된다. 결국 폴크스바겐은 1937년 창사 이래 처음으로 독일 공장 3개를 폐쇄하고 직원 임금을 10% 깎는 내용의 비상 대책을 발표했다. ‘국민차’ 기업이 독일 국민을 큰 충격에 빠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