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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03/ <21회>日경찰·韓총영사관이 긴장했던 한국계 고교의 고시엔 첫 경기 - <30회>'간도협약은 무효' 국감 자료집 회수한 외교부

상림은내고향 2024. 10. 20. 12:59

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03 조선일보 외교담당 에디터 2024

[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기자·한나라당 취재반장·외교안보팀장·워싱턴-도쿄 특파원·국제부장·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을 역임하며 외교·안보 분야를 25년간 취재해왔습니다. 그간의 경험과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막전막후에서 취재한 주요 사안을 매주 전해드립니다.]

 

2024.08.17 

<21회>日경찰·韓총영사관이 긴장했던 한국계 고교의 고시엔 첫 경기

교토국제고, 한국어 교가 부르며 처음 고시엔 진출하자 일본 우익 불만
선수들 안전 우려해 사복경찰 배치하고 다른 출입구로 운동장 입장
올해도 16강 진출… '동해바다~' 한국어 교가 NHK 통해 日 전역에

고시엔(甲子園) 고교 야구는 일본인 1억 2300만 명을 신도로 거느린 거대한 종교 같습니다. 매년 일본 열도 전체를 들썩거리게 하는 초대형 행사입니다. 요미우리신문이 2020년 10대 국내 뉴스 중 하나로 ‘코로나로 인한 고시엔 중단’을 꼽은 것은 이 대회의 무게감을 보여줍니다

 

고시엔 야구는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西宮)시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리는 고교 야구대회의 통칭입니다. 마이니치신문이 주최해 3월 열리는 ‘봄 고시엔’은 선발고교야구대회, 아사히신문이 주관하는 8월 ‘여름 고시엔’은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로 불립니다. 1915년 시작돼 올해로 106회를 맞은 여름 고시엔에는 일본의 3957개 고교 중에서 지역 예선을 거쳐 49개 학교가 본선에 진출했습니다.

 

▲일본의 한국계 민족학교인 교토국제고가 올해 여름 고시엔에서 2연승을 거두고 16강전에 진출했다. /박경수 전 교토국제고 교장 페이스북

 

일본의 한국계 민족학교인 교토국제고가 2년 만에 다시 출전한 올해 여름 고시엔에서 2연승을 거두고 16강전에 진출했습니다. 교토국제고는 1차전에서 삿포로 일본대학고등학교에 7-3에 이긴데 이어 14일 2차전에서 니가타산업대부속고등학교에 4-0으로 승리했습니다.

 

1963년 고교 과정이 만들어진 후, 전교생이 150명에 불과한 교토국제고는 2021년 처음으로 ‘봄 고시엔’ 본선에 오른 뒤, 여름 고시엔에서 4강까지 오르는 기적을 연출했는데 올해는 어떤 활약을 보여줄 지 기대됩니다.

◇ 출전 고교 교가 연주, NHK가 전 경기 생중계하는 고시엔

고시엔 야구는 출전 학교 교가 연주, 모든 경기 NHK 생중계의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2021년 교가가 한국어인 교토국제고가 처음으로 고시엔에 출전했을 때 일본 우익의 테러 가능성 때문에 당시 학교 고위 관계자들, 재외 공관, 일본 경찰이 긴장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교토국제고의 한국어 교가는 “동해 바다 건너서 야마토(大和)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로 시작합니다. 4절에는 “힘차게 일어나라 대한의 자손”이라는 구절도 있습니다. 어려웠던 시절 한국인의 기개가 느껴지는 가사입니다.

 

2021년 3월 일본 선발고교야구대회(봄 고시엔)에 처음 출전한 교토국제고가 연장 접전 끝에 시바타고(미야기현)에 5대4로 역전승을 거뒀습니다. 선수 전원이 일본 국적인 교토국제고는 이날 6회까지 2대0으로 끌려갔습니다. 7회 초 만루 기회에서 3득점, 역전에 성공했습니다. 이후 시바타고가 1점을 만회해 연장전에 돌입했으나 10회 2점을 얻어 5대4로 승리했습니다. 약 4000개의 고교 야구부 중에서 고시엔 본선에 진출한 것도 경이적인데, 첫 경기에서 승리함으로써 새로운 기록을 만들었습니다.

 

고시엔 전통에 따라 상대 팀이 부동자세로 경의를 표하는 가운데 교토국제고의 한국어 교가가 울려 퍼졌습니다. 앞서 1회 말 공격이 끝난 후, 모든 출전 학교 교가를 소개하는 전통에 따라 이 학교 교가가 처음으로 고시엔 구장에서 불려졌습니다. 두 차례 모두 NHK를 통해 일본 전국에 생방송됐습니다.

 

삼루 측에 위치한 약 1500명의 교토국제고 응원단 모두 감격한 표정이었습니다. 재일교포 사회는 1947년 교토조선중학으로 시작한 교토 국제고의 고시엔 진출로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이 경기를 보기 위해 아침부터 재일교포들은 전세 버스 20여 대에 나눠 타고 고시엔 구장에 집결했습니다. 오사카의 같은 한국계 학교인 건국, 금강학교도 학생들을 보내 응원했습니다. 왕청일 전 교토국제고 이사장은 “한국어 교가가 방송될 때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고 했습니다. 한국 대학 입학을 목표로 공부 중이라는 3학년 구로가와 아스카는 “고시엔 구장에서 교가를 듣게 돼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며 활짝 웃었습니다.

 

▲2021년 일본 선발고교야구대회(봄 고시엔)에 처음 출전한 교토국제고가 연장 접전 끝에 시바타고(미야기현)에 5대4로 역전 승리후 한국어 교가가 울려 퍼졌다. 조선일보는 이를 2021년 3월 25일자 사회면에 톱기사로 보도했다.

◇ 일본 우익 반감에 선수 안전 보호 요청

일반 관람객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날 경기는 일본 경찰과 주일(駐日) 한국 공관이 긴장한 가운데 펼쳐졌습니다. 한국계 학교가 고시엔에 진출한 데 대해 일부 일본 우익은 반감을 보였습니다. 특히’동해’로 시작하는 한국어 교가가 전국에 생방송되는 걸 문제 삼았습니다.

 

이 때문에 교토국제고는 일본 경찰에 학생과 선수 보호를 요청했고, 오사카총영사관과 고베총영사관도 경찰에 신경 써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 학교 선수들도 ‘만약의 사태’를 우려, 기존과 다른 출입구를 통해 야구장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당시 저는 고시엔에 첫 출전한 교토국제고 사연이 기사화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 사전에 교토에 내려가 현장 취재하다가 이런 내용을 알게 됐습니다. 첫 경기 당일 교토역에서 교토국제고 응원단과 함께 고시엔 구장으로 이동, 3루 응원단석에서 취재하면서 혹시 우려했던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지 염려했습니다. 다행히 관계자들이 걱정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약간 문제가 됐던 것은 NHK가 교토국제고 교가를 방송하면서 ‘동해’를 ‘동쪽의 바다’로 번역한 일본어 교가 자막을 내보낸 겁니다. 하단엔 “일본어 번역은 학교가 제출했다”고 소개했습니다. 이에 대해 박경수 교장은 “우리는 교가 음원(音源)을 제공했을 뿐, 그런 일본어 자막을 보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에 앞서 교도통신은 마이니치신문과 함께 대회를 주최하는 일본고교연맹이 ‘동해’를 ‘동쪽의 바다’로 번역한 일본어 자막을 만들어 NHK에 제공할 것이라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일본의 한 중견 언론인은 “학교가 그런 자막을 보낸 적이 없는데 NHK가 왜곡 방송을 했다면 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학교의 김안일 야구부 후원회장은 “일본에는 다른 외국계 학교도 많아 영어 등으로 된 교가도 부른다”며 “70년 넘게 불러온 교가를 문제 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말했습니다.

 

▲2021년 3월 16일 고시엔 경기에 앞서 방문한 교토 국제고는 3층짜리 교사(校舍) 1개, 야구장은 최대 거리가 60m 에 불과한 미니 학교였지만 야구부 학생들의 눈빛과 투지는 강렬했다./조선일보 2021년 3월 17일자 2면 톱기사

◇ 한일 양국 정부가 지원하는 교토국제고…야구장은 외야까지 60m 에 불과

제가 2021년 3월 16일 고시엔 경기에 앞서 방문한 교토 국제고는 3층짜리 교사(校舍) 1개에 불과했습니다. 야구부 선수들이 훈련하는 운동장을 보니 최대 거리가 60m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박경수 교장은 “다른 학교와는 달리 운동장이 작아 외야 연습은 다른 구장을 빌려서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학교에 야구부가 생긴 건 학교를 살리기 위한 고육책이었습니다. 애초 재일교포들이 세운 이 학교는 1990년대 후반 심각한 운영난으로 학생 수가 70명으로 줄었습니다. 선생님들은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때 야구를 특화해 학교를 살리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이 학교는 당시 운영난을 계기로 사실상 ‘한일 연합학교’로 전환했습니다. 2004년부터 일본 문부성 지원을 받으며 일본 학생들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매년 한국(10억원)과 일본(15억원)의 교육 당국에서 약 25억원을 지원받습니다.

 

1999년 야구부가 만들어진 후 처음 출전한 경기에서는 0-34로 5회 콜드게임 패를 당했습니다. 첫 승을 거둔 건 야구부 창단 2년 만인 2001년이었습니다.

 

교토국제고는 그동안 피나는 노력을 거쳐 2021년 지역 예선에서 연속 8승을 거둬 고시엔에 진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일본 국적 학생이 한국계 학생보다 많은데 박 교장은 “일본 남학생들은 야구가 하고 싶어서, 여학생들은 K팝이 좋아서 오는 학생이 대부분”이라고 했습니다.

 

교토 국제고는 한국어, 일본어, 영어를 중심으로 가르치는데 가장 비중이 큰 것은 한국 관련 교육입니다. 수학여행, 개별 체험 연수를 통해 매년 한국에 4~5회 학생들을 보내 교육하고 있습니다. 조선통신사 관련 역사를 비롯, 미래 지향적인 방향으로 양국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사장을 역임한 이우경 교토 민단 고문은 “학교의 성격을 바꿔 일본인 학생을 받아들이기로 했을 때 ‘학교를 팔아먹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며 “우리 학교 졸업생과 학생들이 한일관계를 밝게 만든다는 생각을 하면 그것은 올바른 결정이었다”고했습니다.

P.S.

◇ “하나보다는 둘이 낫다는 것이 내 신념” 박경수 당시 교토 국제교 교장

▲교토국제고의 고시엔 진출을 이끈 박경수 교장은 “외할아버지가 일제 식민지 시절 홋카이도 탄광에서 28세 때 돌아가셨다"며 "일본에 대해서 말하자면 내가 더 할 말이 많지 않겠나. 그러나 이제는 양국이 함께 가야 한다"고 했다/조선일보 2021년 3월 29일 여론3면

 

2021년 3월 교토국제고가 고시엔에 첫 진출, 1승을 거둔 것을 취재하고 도쿄로 돌아오는 신칸센 기차에서 편집국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교토국제고 박경수 교장을 인터뷰, 그 다음주 월요일자에 크게 쓰라는 지시였습니다. 즉각 박 교장과 통화, 인터뷰 약속을 잡은 후 도쿄로 돌아왔다가 다시 교토로 내려갔습니다. 박 교장이 야구 배트 든 모습을 사진 찍어가며 인터뷰를 했습니다. 박 교장은 최근 임기를 마치고 귀국했는데 당시 인터뷰 중에서 최근 광복회 사태 관련, 시사하는 바가 있어서 일부 내용을 발췌해 게재합니다.

 

- 일본 고교야구 팀 4,000개 중에서 32팀만이 진출하는 고시엔 출전이 확정됐을 때 학교 안팎 반응은.

“난리가 났다. 학교 이사회 어르신들이 놀라 자빠지셨다. 일본전역의 교포들로부터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화를 받았다. 90대고령의 한 교포는 굳이 학교를 찾아와서 20만엔을 기부하고 갔다.한국야구위원회(KBO)의 정지택 총재, 국회 교육위의 유기홍 위원장이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어왔다.”

 

- 고시엔 진출을 예상했었나.

“내가 기독교인이다. 잠을 깨면 매일 아침 선수 40명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했다. 심판에게는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고, 우리 아이들은 실수 없이 눈 감지 말고 배트를 휘두르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나는 1승은 거둘 것으로 생각했다.”

 

- 고시엔의 전통대로 경기 중에 한 차례, 승리 후 또다시 한국어 교가가 울려 퍼진 것이 한국에도 큰 화제였다.

“70~80대 재일교포들이 눈물을 많이 흘렸다. 한국어 교가가NHK를 통해 방송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것 아닌가.”

 

- 고시엔 구장 응원석에서 걸음걸이도 힘든 고령의 재일교포들을 많이 봤다.

“우리 학교의 고시엔 진출은 교민 사회가 하나로 되는 계기를마련했다고 생각한다. 서로 입장이 달라도 하나로 뭉쳐서 많은 후원을 해줬다. 교포 사회의 결속을 다지는 자리가 된 것 같아 기쁘다.”

 

- 학생들이 한국어 교가에 대한 거부감은 없나.

“국제 학교로 성격을 바꾼 후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와 관련해서 학생들에게 조사를 한 적도 있다. 그랬더니 학생들 대다수가 반대했다. ‘한국이 좋아서 들어왔는데 왜 한국어 교가를 바꾸느냐’고 했다. 아이들이 너무 예뻐 보였다.”

 

- 일본 국적의 학생이 60%가 넘는다. 한일 학생이 서로 모여서 공부하는데 갈등은 없나.

“(고개를 흔들며) 우리 학교에 오면 금방 친구가 된다. 국적을따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말이 잘 안 통해서 번역 프로그램을 통해서 말하다가 금방 친구가 된다. 한일의 청소년들은 무조건 자주 만나게 해야 한다.”

 

- 학교의 성격을 바꿔서 일본 학생을 받을 때 반대가 많지 않았나.

“학교를 일본에 팔았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죽어가는 학교를살린 것이다. 일본 정부가 지원하는 조건을 맞추기 위해 땅을 더사들여 테니스장을 만들기도 했다. 한국 학교만 고집했으면 벌써 문 닫았다.”

 

- 당시의 판단을 지금 어떻게 생각하나.

“우리가 일본 학생 받아도 한국계 학교다. 외국에 숱한 한국학교가 있다. 그런데 왜 꼭 한국 정부만 해외의 한국 학교를 책임져야 하나. 외국 정부도 지원해서 공생(共生) 사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 한국어 교육은 얼마나 시키나.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에서 한국어 시간이 제일 많다. 내가직접 편집한 조선통신사 책으로 교육시키고, 4~5회 한국을 방문시키고 있다. 학생들에게 한국인의 근성을 갖게 하는 것도 교육 목표다.”

 

- 일본에서 한국계 학교를 운영하면서 느낀 한일 관계는.

“외할아버지가 일제 식민지 시절 홋카이도 탄광에서 28세 때 돌아가셨다. 그 후 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겠나. 어렸을때 어머니가 외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눈물 흘리는 것을 많이 봐 왔다. 일본에 대해서 말하자면 내가 더 할 말이 많지 않겠나. 그러나 이제는 양국이 함께 가야 한다. 우리나라 일부에서 자꾸 과거 역사를 들춰서는 곤란하다.”

 

- 용서하고 가야 한다는 것인가.

“과거에 일본이 잘못한 문제는 과거대로 끝내고 앞만 바라봐야 한다. 과거 · 현재 · 미래의 한일 관계에서 이제는 미래만 생각해서 가야 한다. 하나보다는 둘이 낫다는 게 내 신념이다.”

 

<22>덴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만났던 바이든과 안희정

2008년 미 대선 흑백·남녀·노소 대결로 세계적 관심 고조
오바마 대신 인터뷰한 바이든 "북핵 해결법 10초내에 말 못해"
반미로 구속됐던 안희정, 미국과 인맥 쌓으려 비공개 모임 참석

23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성황리에 막을 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카멀라 해리스 대통령 후보 다음으로 주목받은 인물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오바마는 부인 미셸과 함께 연사로 나서서 2008년 대중을 휘어잡았던 간결한 선거 구호 ‘예스 위 캔(우리는 할 수 있다)’을 ‘예스 쉬 캔(해리스는 할 수 있다)’ 으로 바꿔 말하며 녹슬지 않은 정치 감각을 드러냈습니다.

 

이 장면은 그가 대통령 후보에 지명되던 2008년 민주당 전당대회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2008년 8월 25일부터 4일간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는 흑인인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 전 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습니다.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이틀째인 20일 시카고 유나이티드 센터에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연설을 마치고 열광하는 청중에게 손짓으로 화답하고 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이날 “그녀는 할 수 있습니다(Yes, she can)”라는 말로 대선 후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AFP 연합뉴스

 

당시 워싱턴 특파원이던 저는 덴버 민주당 전당대회를 현장 취재, 총 14건의 기사를 작성해 한국으로 보냈는데 본사 편집국은 이중 절반 이상의 기사를 종합 1, 2, 3면에 배치했습니다. 그만큼 당시 72세의 백인 공화당 대통령 존 매케인 후보와 47세의 흑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맞붙는 미국의 대선은 한국에서도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이 대선은 흑백(黑白)과 노소(老少)의 대결로 극적인 흥행을 일으켰고, 44세의 여성 주지사(알래스카) 세라 페일린이 매케인의 부통령 후보로 합류, 남녀(男女) 대결까지 더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지금보다 더한 관심속에 “미 대선 기사는 쓰고, 쓰고, 또 쓰고!”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민주당의 상징인 푸른색 조명이 행사장을 비추는 가운데 막을 올린 전당대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바마를 공화당의 매케인과 확실히 차별되는 ‘희망과 화합의 차기 대통령’으로 유권자들에게 각인시키는 데 맞춰졌습니다. 이 전당대회의 절정은 역시 오바마가 등장하는 순간이었습니다. 28일 멀리 보이는 로키산맥으로부터 어둠이 깃들기 시작할 무렵인 8시 15분쯤이었습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오바마가 전당대회장인 덴버시의 옥외 미식축구경기장에 모습을 나타내자 8만여 명의 참석자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오바마 후보가 24개의 기둥이 떠받치는 그리스 신전 모양의 연단에서 15m 가량 앞으로 걸어나올 때 열광적인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오바마가 “깊은 감사와 겸손함으로 여러분의 대선후보 지명을 수락합니다”라고 말할 때는 수 천 개의 카메라 플래시가 한꺼번에 터지는 장관이 연출됐습니다.

◇ 오바마 연설에 흑인들 감격의 눈물

오바마는 여기서 대통령 후보 수락연설 중에서 명문으로 꼽히는 유명한 연설을 합니다. “케냐와 캔자스주 출신의 나의 부모는 유복하거나 유명하진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아들이 가슴속에 품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라는 말로 청중을 감동시켰습니다. 이날이 민권운동가인 마틴 루서 킹 목사가 45년 전에 “나에겐 꿈이 있다”는 연설을 한 것을 기억하고 있는 흑인들에겐 감격스러운 날이었습니다. 당시 현장에서 만났던, 샌디에이고에서 온 흑인 재키 마틴은 “오바마가 너무 자랑스럽다. 이번 전당대회에 참석했다는 것을 평생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흑인이 주요 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수락연설을 한 것은 미국의 232년 역사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1863년 노예해방이 이뤄지고 흑인 남성이 1869년 투표권을 확보한 지 139년 만입니다. 오바마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됨에 따라 흑인은 물론 미국 내 소수인종의 권익 신장 속도가 빨라졌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또 ‘오바마 현상’이 세계로 퍼지면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에 대한 지지가 증가할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됐습니다.

오바마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 경제는 침체하고 외교안보엔 구멍이 뚫렸다며 “미국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미래를 향해 행진하자”고 외쳤습니다. 또 미국 혼자서 모든 문제를 풀어갈 수 없으며 다른 국가와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오바마는 특히 이라크에서 4000명, 아프가니스탄에서 500명이 넘는 미군 전사자가 발생한 것을 의식, 매케인과는 달리 미군의 희생자를 최소화하는 신중한 파병(派兵)을 전면에 내걸어 지지를 받았습니다 . ”군(軍) 통수권자로서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을 보임으로써 외교안보 경험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희석하려고도 했지요. CNN방송은 오바마의 연설이 민주당의 분열을 치유하려는 4일 간의 전당대회에서 절정을 이뤘다고 평가했습니다.

 

오바마는 민주당 전당대회를 계기로 그동안 정체상태였던 지지율이 상승했습니다. 오바마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된 후 갤럽 여론 조사에서 오바마는 48%, 매케인은 42%를 기록했습니다. 전당대회 시작직전에 매케인 후보와 박빙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전당대회 효과가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오바마, 바이든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

오바마는 전당대회가 시작되기 이틀전인 8월 23일 지한파(知韓派)인 조지프 바이든(당시 65세) 상원 외교위원장을 자신의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합동유세를 시작했습니다. 오바마보다 18세 위인 바이든은 36년간의 상원 의원 경험을 바탕으로, 오바마의 최대 약점으로 꼽히는 외교·안보 분야의 경험 부족을 보완해줄 것으로 전망됐습니다. 오바마는 일리노이주의 스프링필드에 바이든 부통령 후보와 함께 흰색 와이셔츠 차림으로 나타나 “바이든은 외교 안보의 전문가로 그의 가슴과 인생의 가치기준은 확고하게 중산층에 뿌리박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또, “바이든은 수십 년 동안 워싱턴에 변화를 가져왔지만, (부패한) 워싱턴은 그를 변화시키지 못했다”고 평가했습니다.

 

바이든은 “나와 오바마는 다른 장소에서 태어났지만 공통분모가 있다”며 자신이 노동계층의 가정에서 태어나 오바마처럼 자수성가한 인물임을 강조했습니다. 바이든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미국 망명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 한반도 상황에 대해 자주 의견을 교환해 주목받았습니다. 2001년 8월 청와대로 대통령이 된 DJ를 예방하기도 했는데, 당시 바이든은 김 대통령의 넥타이가 좋다고 찬사를 했고, 김 대통령의 넥타이 교환 제의에 즉석에서 바꿔 맸다고 합니다. 당시 DJ 넥타이에는 수프 국물이 묻어 있었지만, 바이든은 언젠가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행운의 상징물로 여겨, 이후 한번도 세탁하지 않고 그 넥타이를 보관해 왔는데 결국 2020년에 그 꿈을 이뤘습니다.

 

▲2008년 9월 12일자 조선일보 사보. 당시 조선일보 워싱턴 지국은 최우석 특파원이 공화당을, 이하원 특파원이 민주당을 맡아 취재했는데 사보는 전당대회 취재기를 특집으로 게재했다.

◇ 전당대회 3일째 날 오바마 대신 만난 바이든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취재하면서 당시 워싱턴 지국에 함께 근무하던 최우석 선배는 공화당을, 저는 민주당을 맡기로 역할을 분담했습니다. 최우석 특파원은 민주당 전당대회 이후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매케인 후보를 인터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바마를 만나는데 실패했습니다.

 

민주당 전당대회를 취재하면서 주요 취재 대상으로 삼은 인물은 역시 오바마 후보였습니다. 오바마와 경선에서 맞붙었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만 해도 접점이 있는 이들이 있었지만, 초선의 상원이었던 오바마의 선거 캠프는 접근이 쉽지 않았습니다. 흑인 후보 오바마에 대한 테러 가능성이 계속 제기되는 상황에서 오바마가 외국 기자를 만나는데 소극적이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함께 덴버에 간 다른 한국 특파원들도 오바마를 접촉하지 못했습니다.

 

오바마 대신 바이든 부통령 후보를 인터뷰 하기로 하고 기회를 노렸습니다. 전당대회 3일째날 바이든을 만날 기회가 왔습니다. 바이든이 부통령 후보 수락 연설 후, 민주당의 핵심 지지자 100여 명을 만나 간담회를 한다는 소식을 입수했습니다. 2007년 워싱턴 부임 후 잘 알고 지내던 민주당 취재원으로부터 이 모임에 참가할 ‘티켓’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간담회에 가 보니 바이든을 만나려는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그와 사진을 찍으러 몰려든 참석자들 속에서 북핵 문제에 대해 한 차례 질문만 할 수 있었습니다. 바이든은 30년 경력의 노련한 상원의원답게 “북핵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있지만, 10초 내에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음 기회에 북핵 문제에 대해 논의하자”고 말했습니다. 결국 이날의 짧은 만남은 사진 한 장의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정치부 기자로 줄곧 활동해 온 제게 덴버의 민주당 전당대회는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전당대회나 중요한 행사가 열릴 때 당원 동원에 대해 걱정하는 반면, 민주당 전당대회 참석자들은 4일 동안 직장에 휴가를 내고 자비를 들여 축제처럼 참석했습니다. 한국의 정당도 언젠가 미국과 같은 전당대회를 치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비공개 모임에서 재회한 안희정

당시 덴버에서는 전당대회에 맞춰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이 수장으로 있던 ‘국제 지도자 포럼(ILF)’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이 모임은 비공개로 오바마 대통령의 외교·안보 브레인들이 모두 참가하는 회의였습니다. 나중에 유엔주재 미국 대사로 활동하는 수전 라이스와 오바마 대통령의 법률고문에 임명되는 그레그 크레이그가 외교·안보 청사진을 설명했습니다. 수전 라이스는 올해 시카고 전당대회에서도 사실상 해리스 캠프를 대신해 기자회견을 갖고 “카멀라 해리스 정부가 출범하면 조 바이든 대통령처럼 동맹을 중시하고 국제현안에 적극 관여하는 외교정책을 펼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만약 해리스 정부가 출범할 경우, 라이스가 요직을 맡거나 막후에서 외교안보정책을 총괄할 가능성을 시사한 장면이었습니다.

 

▲2008년 8월 29일 민주당 전당대회에 맞춰 개최된 ‘국제 지도자 포럼(ILF)’에 오바마 행정부 출범 후 유엔주재 미국 대사로 활동하는 수전 라이스(왼쪽에서 네번째)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 토론하고 있다./이하원 기자

오바마 정부의 외교안보정책 브레인이 총출동한 이 모임에는 이태식 주미대사와 최형두 문화일보 특파원(현 국민의힘 의원)도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안희정 현 충남지사를 만난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한국 민주당의 최고위원 겸 ‘국제 지도자 포럼(ILF)’의 회원 자격으로 전당대회 관련 행사를 참관하고 있었습니다.

 

회의 후, 안 지사가 민주당 측 인사들에게 명함을 건네며 인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대학 시절 골수 반미(反美) 운동권으로, ‘반미 청년회’라는 모임으로 인해 옥고를 치렀던 그가 미국 전당대회장을 방문한 것은 쉽지 않은 결정으로 보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대선에서 “미국에 갈 필요가 없다”고 했으며, 이러한 인식에는 ‘좌희정 우광재’로 불릴 정도로 최측근이었던 안 전 지사의 영향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많은 돈을 들여 덴버를 방문한 것에 놀라면서도 반가웠습니다. 오랫만에 만난 안희정씨와 식사를 함께 하면서 바깥 세상을 알고자 하는 그의 노력을 느꼈습니다.

 

안 전 지사가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남긴 미 민주당 전당대회 참관기는 저의 관찰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줬습니다. “전 세계 진보주의, 자유주의 정당들이 세계화가 드리우고 있는 양극화와 극심한 경제 전쟁 상태를 연대하여 극복할 수 있는 대안과 비전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런 포부와 구상에 작은 힌트라도 얻으려 노력하겠습니다.” 덴버 방문 중 그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과 민주당 중진 의원들을 만나 한반도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오바마가 당선된 후 인터뷰에서 민주당 전당대회 참관 경험을 이렇게 피력했습니다. “흑인(버락 오바마)과 여성(힐러리 클린턴)이라는 미국 사회의 비주류가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는 여부는 ‘약속과 기회의 땅’이라는 미국 정신이 실현될 수 있느냐를 보여주는 중대한 갈림길”이라며 “한국도 모든 주권자에게 기회가 열린 민주주의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같은 과제를 안고 있으며, 민주주의의 글로벌 표준이 되기 위해 미국과 경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오바마의 승리는 미국 진보주의 및 민주주의 승리이자 세계 민주주의 승리입니다”라고 미 대통령 선거 결과에 대해 평가하며, 버락 오바마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축하했습니다.

 

▲2008년 8월 29일 민주당 전당대회에 맞춰 개최된 ‘국제 지도자 포럼(ILF)’에 안희정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전 충남지사)이 오바마 캠프의 외교안보인사들과 대화하고 있다./이하원 기자

 

그는 특히 세계 지도자 포럼(ILF)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정책 전문가들의 포럼을 지켜보면서 한국 민주주의자들의 정책적 수준과 아젠다는 세계적 수준에서 볼 때, 세계 민주주의 정책 엑스포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아 자부심을 느꼈다”면서도, “다만 그 정책을 실천할 수 있는 정당 문화와 구조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안 전 지사가 덴버에서 짧은 시간 동안 그가 의도한 목적을 얼마나 이뤘는지는 모르지만, 미국 전당대회장을 방문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의 특수성에만 매달려 온 자세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했습니다. 세계의 흐름을 제대로 읽고, 한미 관계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기를 바랐습니다.

 

안 전 지사는 미국에서 돌아온 후 2010년 지방선거에서 충남지사로 당선, 운동권 출신의 정치인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며 비교적 유연하고, 개방적인 자세를 유지하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014년 재선에 성공 후, 한국 진보세력의 새로운 대안이 될 것이라는 기대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폭력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그에게 기대를 걸었던 많은 이들을 실망시켰습니다. 분명 그는 큰 잘못을 했는데, 안타깝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23회>이번엔 여론조사 1위가 일본 총리 될까

이시바, 2020년 8 개월간 압도적 1위였으나
5개 파벌 대표가 담합해 3위로 낙마시켜
이시바, 자민당 총재선거 다섯번째 출마선언
이해하기 어려운 정치현상 이번에도 반복될까

다음달 27일 실시되는 일본 자민당 총재 선거에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간사장이 출마를 선언하면서 열기가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이시바 전 간사장은 사망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정적(政敵) 으로 2012년, 2018년 아베와 총재 선거에서 맞붙은 경력이 있는 중진의원입니다.

 

그는 지난 17~19일 차기 자민당 총재로 적합한 인물을 묻는 교도통신 여론조사에서 25.3%로 1위를 기록한 바 있습니다. 이시바의 자민당 총재 도전은 2008년부터 이번이 다섯번째인데, 숙원을 이룰지 주목됩니다.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이 다섯번째 총재선거 출마를 선언, 관심을 모으고 있다./연합뉴스 자료사진

◇파벌 정치의 희생자, 이번엔 뜻을 이룰까

이시바는 일본 파벌 정치에 희생됐던 비운(悲運) 의 정치가입니다. 저는 이시바가 여론과 상관없이 움직이는 일본 정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쿄 특파원 시절, 이시바가 2020년 1월부터 모든 여론조사에서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차기 총리 후보 1위에 올라 주목했는데, 파벌 정치에 의해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2012, 2018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 악몽’에 시달렸던 아베가 “이시바는 절대 총재가 돼서는 안 된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것이 걸림돌이었습니다.

 

이시바는 돗토리(鳥取)현 출신의 2세 의원입니다. 게이오대 졸업 후 은행원 생활을 하다가 돗토리현 지사, 자치 대신을 역임한 부친이 사망하자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 전 총리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 29세에 처음으로 당선됐습니다. 고이즈미 내각에서 방위청 장관으로 첫 입각 후, 후쿠다 내각에서 다시 방위성 대신을 맡아 외교안보 분야에 대한 식견을 넓혔습니다. 태평양 전쟁 A급 전범을 합사 중인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해선 부정적입니다. 우익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으나 전력(戰力) 보유 금지를 규정한 헌법 개정엔 아베보다 적극적입니다. 아예 헌법을 고쳐서 군대 보유를 명기하자고 주장합니다.

 

이시바는 2020년 1월부터 8월까지 차기 총리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를 지켰습니다. 8개월간 단 한 번도 ‘차기 총리로 적합한 정치인’ 여론조사에서 1위 자리를 놓친 적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이시바는 8월 28일 아베의 사임 발표 후 교도통신의 차기 총리 선호도를 묻는 긴급 여론조사에서 34.3%의 지지율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치고 나갔습니다. 당시 관방장관이었던 스가 요시히데는 2위(14.3%)로 20%포인트 차이가 날 정도로 압도적이었습니다. 일본 국민 사이에선 ‘반(反)아베’ 노선의 이시바가 자민당 총재에 이어 총리가 돼 일본 사회를 바꿔줬으면 하는 여론이 크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2003년 11월 15일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방위청 장관이 도쿄를 방문한 도널드 럼즈펠드(오른쪽) 미국 국방장관과 회견을 갖고 있다.

 

일본이 국민 직선제에 의한 대통령제 국가라면 차기 대권(大權)은 그의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파벌 간 밀실 협상에 의해 자민당 총재가 결정되고 이어 총리가 되는 관례가 바뀌지 않아 다시 분루(憤淚)를 삼켜야 했습니다. 2012, 2018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 악몽’에 시달렸던 아베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시바에게 총리직을 물려 줄 수 없다”며 총재 선거에서 측근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되도록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아베 “이시바는 절대 안 된다”

2020년 6월 2일 발표된 FNN(후지뉴스네트워크)과 친(親)아베 성향인 산케이신문의 여론조사는 아베 총리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이 여론조사에서 ‘차기 총리로 가장 어울리는 정치인’에 이시바가 18.2%로 1위를 차지한 반면 그가 후계자로 밀고 있는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은 1.9%로 최하위였습니다. 당시 일본 내부의 사정을 잘 알던 취재원은 “8년 가까이 집권하던 아베는 2020년 들어서면서 퇴임 시기를 저울질 해왔는데, 이 여론조사를 계기로 정적인 이시바를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는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자민당의 최대 파벌로 100명 가까운 의원을 보유한 호소다파는 2020년 8월 31일 긴급 계파모임을 갖고 9월 14일 총재 선거에서 스가를 지지하기로 결의했습니다. 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과 아소 다로 부총리가 이끄는 니카이파(47명)와 아소파(54명)도 기존 정책 계승을 위해 스가에게 표를 몰아주기로 결정했습니다. 54명을 보유한 다케시타파와 46명의 기시다파도 스가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30여 명의 무파벌 소장파 그룹도 스가에게 입후보를 요청함으로써 그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파벌 정치에 의해 이시바 시게루 전 자만당 간사장 대신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차기 자민당 총재가 될 것으로 전망한 2020년 8월 31일자 조선일보 국제면 톱 기사.

◇파벌주의, 밀실주의 여전한 일본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대부분의 파벌이 스가 요시히데 당시 관방장관을 지지하고 나서자 소속의원 20명의 이시바파 내에서는 그가 입후보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신중론이 나왔습니다. “망신당할 가능성이 크니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시바는 출마를 결심했습니다. 201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 당원 투표에서 아베를 이겼으나 의원 투표에서 역전패한 이시바는 이번 선거가 당원 투표 50%, 의원 투표 50%로 결정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시바를 지지하는 의원들과 지방 당원들도 당원 투표 실시를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소규모 파벌을 이끄는 그의 주장은 아무것도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당원 투표는 하지 않고, 중·참의원 의원 394명과 광역지자체 대표 141명 등 총 535명의 투표로 차기 자민당 총재가 결정됐습니다. 아베의 뜻을 읽은 자민당 5대 파벌 영수(領袖)의 밀약에 의해 스가가 차기 총리로 옹립됐고, 그는 기시다 후미오( 2021년 총재 선거에서 승리)에 이어 최하위인 3위로 탈락했습니다. 그가 얻은 표는 전체 535표 중에서 68표에 불과했습니다. “이시바가 2위를 하면 다음 총재 선거가 위험하다”는 자민당 주류의 인식도 그가 3위를 하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 여전히 1950년대에 머물러 있는 일본 정치

2020년 8월 28일 아베의 총리 사임 후 2주간 나가타초(永田町)에서 벌어진 일은 일본의 정치가 자민당이 출범하던 1955년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파벌주의, 밀실 정치는 여전했습니다. 국민 여론과 민주주의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민당을 지배하는 호소다파 등 5파벌의 영수들은 밀실 회합에서 일찌감치 스가를 차기 총리로 결정했습니다.

 

9월 14일 자민당 총재 선거와 16일 국회의 총리 선출은 요식행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의 평가처럼 전광석화 같았습니다. “막(幕)이 오르자 연극이 끝나버렸다”는 평가도 나왔습니다.

 

▲<YONHAP PHOTO-6028> 아베 총리 손 맞잡은 스가 신임 자민당 총재 (도쿄 교도=연합뉴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관방장관이 2020년 9월 14일 도쿄 한 호텔에서 열린 집권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경쟁 후보들을 압도적인 표 차로 제치고 총재에 당선됐다. 사진은 14일 총재 경선이 끝난 뒤 손을 맞잡은 기시다 후미오(왼쪽부터) 정무조사회장, 아베 신조 총리, 스가 신임 총재, 이시바 시게루 전 간사장. 이시바는 여론조사에서 2020년 1월부터 8개월간 1위였으나 파벌 정치에 의해 3위로 낙선했다. 2020.9.14

chungwon@yna.co.kr/2020-09-14 16:22:53/ <저작권자 ⓒ 1980-2020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사석에서 만난 상당수 일본의 지식인들은 이를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총재 투표에서 3위로 낙선한 이시바는 결국 자신이 만들고 이끌어 온 파벌 스이게쓰카이(水月會) 회장에서 물러났습니다. 12% 득표로 ‘최하위 탈락’한 그는 이시바파 모임에서 “다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책임이 내게 있다”며 사임했습니다. 파벌이 사실상 해체된 것은 물론 그가 자민당 총재 선거에 다시 출마하기 어려워졌다는 평가가 나왔으나, 기시다 총리의 후임에 마땅한 인물이 보이지 않자 출사표를 던진 것입니다.

◇일본 국민은 왜 파벌 정치에 반기를 안 드나

2020년 도쿄에서 이시바 전 간사장 낙마를 지켜보면서 가졌던 궁금증은 일본 국민은 왜 여론과 관계없이 움직이는 파벌정치를 용인하느냐는 것입니다. 일본 국민은 파벌 정치에 의해 스가 요시히데가 사실상 밀실에서 차기 총리로 결정된 데 대해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스가 총리 취임 후 처음 실시된 일본 언론의 여론조사에서 스가 내각은 일본 국민으로부터 약 65% 이상의 높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특히 니혼게이자이신문 조사에서는 스가 내각 지지율이 74%로 정권 출범 당시를 기준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80%), 하토야마 유키오(75%) 내각에 이어 역대 3위를 기록했습니다.

 

한 달 만에 일본사회의 여론이 어떻게 이렇게 급변할 수 있는지, 일본인은 정치는 유력 파벌이 결정하면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새삼 한일 양국의 정치, 국민 차이를 다시 절감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이번 자민당 총재 선거도 과연 국민여론과 별도로 움직일 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24회>"문재인은 백지상태"라며 반일정책 비판한 강상중 도쿄대 교수

자민당 총재선거 출마한 이시바, 한일관계 악화할 때
강 교수의 저서 '한반도와 일본의 미래' 추천
강상중, "문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知日"이라며
"남북관계 때문이라도 한일관계 두텁게 하라" 충고

오는 27일 자민당 총재 선거에 뛰어든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간사장이 2020년 자신의 독서 목록 중 하나로 꼽아 화제가 된 책이 있습니다.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재일교포 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가 2020년 5월 출간한 ‘조선반도(한반도)와 일본의 미래’였습니다.

 

이시바는 이 책이 한일 관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한일관계는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단순한 정치적 접근이 아니라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고 느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책을 근거로 한국과의 관계 개선이 일본의 안전 보장에 필요하다는 지론을 펼칩니다.

 

▲강상중 교수가 2020년 출간한 '조선반도와 일본의 미래' 표지 사진.

◇ 이시바, 아베의 경제 제재 비판하며 한국 공부

이시바는 2019년 9월 한일관계가 악화될 때 아베 신조 정권의 대한(對韓) 경제 제재에 대해 “당분간 이 상태로 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많이 퍼져 있는데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결코 기여하지 않는다”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 그는 “이것(경제 제재)이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상황이 엄중하고 복잡하며 어렵다”고 했습니다. 또, “일본과 한반도는 항상 관계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긴 역사로 볼 때, 정말로 회복 불가능하다고 노력을 포기해도 되는 걸까”라고 했습니다. 이시바는 당시 한일관계가 급격히 악화된 후 일본과 한반도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고 있으며 “(역사를) 알고 상대하는 것과 모르고 상대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고 했는데, 강 교수 책을 추천한 것은 이 같은 맥락에서였습니다.

 

강 교수는 재일교포 2세 정치학자로 한국 국적자로는 처음으로 도쿄대 정교수가 됐습니다. ‘고민하는 힘’, ‘애국의 작법’ ' 세계화의 원근법’ ‘내셔널리즘’ 등을 잇달아 펴내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학자입니다.

 

그는 와세다대 재학 중인 1972년 첫 방한 후 나가노 테츠오라는 일본식 이름을 버리고 본명인 ‘강상중’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 뉘른베르크대에 유학하면서 독일식 합리주의에 기반한 학문 세계를 구축한 후, ‘강류(姜流)’로 불리는 자신의 생각을 지식인 사회를 향해 발신해 왔습니다.

 

강 교수는 201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를 맞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가할 정도로 DJ와 민주당에 애정을 가진 학자였습니다. 그는 당시에도 한일관계를 염려하며 일제 불매를 포함한 ‘노 재팬’ 운동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한미일 관계를 걱정하며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을 연장하지 않으면 한미관계가 악화될 것으로 우려하기도 했습니다.

 

▲강상중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가 2019년 8월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모 행사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2019.8.7/뉴스1

◇ “문 대통령, 일한 갈등에 정치적 자원 낭비”

저는 2019년 도쿄 특파원으로 활동할 때 조선일보와 제휴한 마이니치 신문의 사와다 가쯔미 논설위원의 권유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강 교수는 자신의 ‘승부작’이라고 밝힌 이 책에서 일본의 미래와 한반도를 연관시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지론을 밝혔습니다. 제가 당시 주목한 것은 한국의 민주당을 지지했던 그가 문재인 대통령의 대일(對日)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내보였기 때문입니다.

 

강 교수는 이 책에서 상당한 분량을 문 대통령 비판에 할애했습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지일(知日)’ “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문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을 읽어보면 일본에 특정한 평가를 동반하는 언급은 거의 없다”며 “문 대통령에게 있어서 일본에 관한 평가는 사실상 ‘백지상태’ “라고 했습니다.

 

▲강상중 교수의 저서 '조선반도(한반도)와 일본의 미래' 중 '문재인에게 필요한 것은 知日(줄 친 부분)' 이라고 쓴 소제목이 보인다./이하원 기자

 

강 교수는 2019년 6월 남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판문점에 만난 것을 정점으로 북한문제는 교착상태에 빠졌다고 지적했습니다. “현재 미북 교섭이 막혀 있고, 북한은 한국과의 교섭에 대해 완고하게 거절하고 있다”며 “일한 갈등이 심각해지는 중에 문 정권의 북한 정책도 막혀 있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문 대통령과 그 정권에 결여돼 있는 것은 남북접근과 화해 진전을 도모할 때 일한 간의 의사소통을 깊게 하는 것, 양자(남북관계와 한일관계)를 평행하게 진행해 가는 복안(複眼)적인 외교전략”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일본과의 신뢰관계를 지금보다 더 두텁게 만들어야 한다”고 제언했습니다.

 

▲2019년 6월 오사카 G20 정상회의에서 만난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 “한일기본조약은 더 이상 분규하지 않게 하는 안전장치”

강 교수는 특히 당시의 한일관계를 ‘복합골절’ 상황이라고 규정하며 문 대통령을 김대중 대통령과 비교해가며 비판했습니다. 그는 “돌이켜 보면 남북화해를 진전시키기 위해 한국의 모든 과거 정권은 특히 일본과의 커뮤니케이션에 다대한 외교적 리소스와 에너지를 할애해왔다”며 “김대중의 햇볕정책은 남북통일의 프로세스가 주변 나라, 특히 일본에 바람직한 영향을 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지침을 명확히 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문재인 정권은 김대중 정권에 비해서 일본과 강한 관계 구축의 이니셔티브를 발휘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불신감과 경계심을 풀지 못하고 일한 갈등에 정치적 자원을 낭비할 수 밖에 없었다”고 비판했습니다.

 

강 교수는 ‘일한기본조약을 지킬 수 밖에 없는 이유’ 챕터에서는 “이런 저런 타협과 모순을 갖고 있는 조약이지만, 이미 체결돼 반세기 동안 경과된 일한기본조약은 지켜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적어도 그것은 일한관계가 더 이상 분규(粉糾) 하지 않게 하는 안전정치”라고 했습니다.

 

이는 문재인 정부가 징용 배상 추진 등으로 1965년에 맺은 한일청구권협정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됐습니다. 그는 “만약 어느 쪽이 (기본합의를) 부정하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한일관계의 바닥이 뜯겨져 나갈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강 교수는 그 밖에도 이 책에서 북일관계, 북핵 문제, 문재인 정부의 남북화해 움직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습니다.

 

▲2023년 6월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25주년을 기념해 일본 도쿄 와세다대에서 심포지엄이 개최됐다. 앞줄 오른쪽에서 네번째부터 정진석 당시 한일의원연맹 회장(현 대통령 비서실장), 윤덕민 당시 주일대사, 강상중 교수, 김대중 대통령 3남 김홍걸 의원. 앞줄 왼쪽에서부터 하태경, 윤호중 의원/주일 한국대사관

◇ 한일관계 개선되자 심포지엄 나온 강 교수

저는 강 교수에게 이 책의 저술과 관련한 내용을 듣기 위해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이에 대해 그의 사무실은 “(강 교수가) 코로나 사태이후 출장 등 외부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새로운 취재 요청에 대해 거절하고 있는 상황이니 이해해 달라”고 회신해왔습니다.

 

한국의 문재인 정권에 실망한 강 교수는 이후에도 한국의 정치 상황,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는 가급적 언급을 자제해왔습니다. 그러다가 윤석열 정권 발족 후, 한일관계가 개선되자 모처럼 2023년 6월 도쿄에서 열린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25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저는 그가 한일 관계와 관련된 행사에 모처럼 모습을 드러낸 것이 반가웠습니다.

 

강 교수는 기조 강연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은 외교의 실패로 인해 일어났다”며 “이러한 세계적 위기 속에서 한일관계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또 “재일교포로서 한국이 선진국이 될 것이라고는 50년 전에 꿈도 꾸지 못했다.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가 지배한 나라와 같은 수준에 올랐다는 점에서 한일관계는 매우 독특하다”며 양국관계의 특수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내년(2024년) 미국 대선에서 만일 트럼프 전 대통령이 승리한다면 한일이 하나가 돼서 미국이 우선주의(아메리카 퍼스트)에 빠지지 않도록 안보 정책을 펼쳐야 한다”며 양국간 강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생각할 때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중요한 얘기였습니다. DJ-오부치의 한일 화해 노선을 지지해 온 그가 양국을 오가며 다시 활기차게 활동할 수 있도록 이재명 대표와 그가 이끄는 민주당이 시대착오적인 ‘반일’ 을 그만 거둬들였으면 합니다.

 

<25회>서울 온 체니 부통령, 미 대사관 이전 문제에 불만 토로

노무현 탄핵 직후 방한, 갖은 억측 불러 일으켜
17대 총선 다음날 고 건 대통령 대행과 회담
"좁고 불편하니 대사관 이전 협조해 달라" 요구
3주 후 "캠프 코이너로 확정" 발표에 美 반발

전 세계 이목이 쏠리고 있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최근 주목받은 정치인은 딕 체니(83) 전 미국 부통령입니다. 2001년 조지 W 부시 대통령 취임과 함께 미국 사회의 주류가 됐던 ‘네오콘((NeoCon·신보수주의)’의 대표격인 그가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에게 투표할 것이라고 밝힌 겁니다.

 

▲딕 체니 전 미국 부통령이 2018년 5월 16일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에서 함재봉 아산정책연구원장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체니 전 부통령은 “미·북 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길 바라지만 실패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말했다.

 

부시 행정부에서도 강경파로 꼽혔던 그는 같은 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비판하며 “248년 미국 역사에서 트럼프보다 우리 공화국(미국)에 더 큰 위협이 되는 인물은 없었다”고 했습니다. 또, “트럼프는 유권자들이 자신을 거절한 후에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거짓과 폭력을 사용해 지난 선거를 훔치려고 했다”며 “우리 모두는 시민으로서 당파보다 국가를 우선시하고 헌법을 수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했습니다. 트럼프가 2020년 대선에서 패배하자 이에 불복, 선거 결과를 뒤집으려 한 혐의로 작년 8월 기소됐음에도 출마한 것을 비판한 겁니다.

 

이에 대해 트럼프는 즉각 체니를 ‘라이노(RINO·Republican In Name Only·허울뿐인 공화당원)’라고 부르며 반발했습니다. 해리스는 반색을 하며 환영했습니다.

 

1980년 이후 역대 미국 부통령 중에서 존재감이 있었던 인물로 클린턴 행정부의 앨 고어 부통령과 함께 부시 행정부의 체니를 꼽을 수 있지만, 권력 측면에서는 체니가 단연 앞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체니는 2001년부터 2009년까지 부시 행정부의 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네오콘에 기반한 정책을 주도, 대통령의 눈치나 보면서 존재감이 없었던 미국 부통령의 영향력을 극대화시킨 인물로 꼽힙니다. 네오콘은 세계 최대 패권국인 미국이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전 세계 문제에 깊이 개입해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북한·이란·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부르며 힘에 의한 대응을 주창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2008년 워싱턴 포스트의 탐사보도 ‘앵글러(낚시꾼) 체니 부통령’이 퓰리쳐상을 받은 것은 체니의 권력과 영향력이 지대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 시리즈는 당시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며 체니의 영향력과 그가 미국 정부 내에서 행사한 권력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다뤄서 주목받았습니다.

 

▲2008년 워싱턴 포스트의 탐사보도 ‘앵글러(낚시꾼) 체니 부통령’이 퓰리쳐상을 수상한 후, 책으로 만들어졌다.

◇체니 부통령, 노 대통령 탄핵중인 2004년 방한

공화당원인 체니가 박빙의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의 소신에 따라 민주당 해리스 후보를 지지하기로 한 기사를 접하면서 그의 2004년 3월 방한을 특종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저는 야간 취재를 통해 한 소식통으로부터 “체니 부통령이 방한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엔 그의 방한 가능성이 작다고 보고 그 말에 무게를 두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직전인 3월 12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가결돼 대통령 공백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첫 대통령 탄핵으로 정국이 혼란한 상황에서 과연 미국 부통령이 방한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며 확인 취재를 하다가 그의 방한이 양국 간에 비공개리에 논의되고 있음을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데스크에 보고, 조선일보 2004년 3월 19일 자 1면에 체니 부통령 방한 기사를 썼습니다.

 

딕 체니<사진> 미국 부통령이 우리 정부 초청으로 다음 달 15일쯤 방한(訪韓)할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소식통은 이날 “체니 부통령이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에서의 한·미 협력방안을 비롯해 용산 미군기지 이전, 미 2사단 재배치, 주한미대사관 신축부지 문제 등 양국 간 주요 현안에 대해 우리 정부 관계자들과 논의하기 위해 4월15일 방한할 것”이라고 말했다. 딕 체니 부통령은 방한 기간 중 고건(高建) 대통령 권한대행과 만나 한·미 양국간 주요현안을 협의하고 반기문(潘基文) 외교통상부 장관과도 만날 예정이다. 체니 부통령은 당초 작년 4월 방한키로 했다가,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 3월에 시작됨에 따라 방한을 취소했었다. 체니 부통령의 방한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안 가결 이전부터 추진돼온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일보의 ‘체니 미 부통령 방한’ 특종은 여러 측면에서 억측을 낳았습니다. 왜 조선일보가 노 대통령 방한 중 미 부통령이 방한하는 기사를 썼는지, 그 배경에 관심을 가진 이들도 있었습니다. 특히 17대 총선이 실시되는 4월 15일 체니가 방한할 것으로 알려져 탄핵 정국과 총선 등 국내 정치 상황과 연계시켜보려는 정치적 해석이 나왔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된 직후, 딕 체니 미 부통령이 방한한다는 사실을 전한 조선일보 2004년 3월 19일자 1면 기사

 

이에 대해 외교부는 “체니 부통령 방한은 탄핵안 가결 이전부터 추진돼왔다”고 강조했습니다. 정부는 체니 부통령의 방한 일이 총선일과 겹친 것에 대해서도 아무런 의도가 없다고 해명했습니다. 부시 행정부가 중국, 일본 등 3국 순방 일정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한국 방문이 ‘우연히도’ 15일로 잡혔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그동안 한반도문제 협의를 위한 고위 관리의 동북아지역 방문외교 때 한·중·일을 함께 순방하는 게 관례였습니다.

 

체니는 국방장관 시절인 90년 2월 14일부터 4일간 한국을 방문한 후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는 90년대에 비해 한·미 동맹관계에 갈등요인이 많이 생겨난 후의 서울을 직접 찾아 의견을 청취하고 싶어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우리 정부는 체니의 방한을 준비하면서 헌법재판소의 탄핵안 처리가 4월 15일 전까지 이뤄지지 않을 경우 노 대통령 예방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무척 신경을 썼습니다. 정부 관계자는 3월 12일 탄핵안 가결 직후 미국 측에 이 같은 사정을 설명하면서 “그래도 방한을 원하는가”라고 문의하자 미국 측은 “괜찮다”며 예정대로 방한하겠다는 의사를 전해 왔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고민거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탄핵 파동이 없었다면 체니는 노 대통령을 예방하고, 카운터파트인 고건 총리와 주요 현안에 대해 협의를 하기로 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탄핵사태로 고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 자격으로 체니와 오찬을 겸한 회담을 하게 되면서 정부 관계자들은 회담내용과 의전문제 등에 대해 고심했습니다. 고 대행이 노 대통령이 할 수 있는 말까지 다 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권한대행’ 총리에 걸맞은 수준에서 할지를 걱정했던 겁니다.

◇고 건 대행, 열린우리당 총선 승리 다음날 체니와 회담

예정대로 4월 15일 체니가 방한했습니다. 그날 실시된 17대 총선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열린우리당이 299석 중 152석을 차지하며 과반 의석을 확보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여론이 반영된 결과였습니다. 한나라당은 121석으로 완패했습니다.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이 2004년 4월 16일 방한중인 딕 체니 미 부통령과 회담을 갖고 있다. 반기문 당시 외교부 장관과 토마스 허바드 주한미대사 등이 배석했다./e영상역사관

 

고건 대행은 다음날인 16일 총리공관에서 1시간 30분 동안 오찬을 겸해 체니와 회담을 갖고 “총선을 통해 열린우리당이 과반수 안정의석을 확보한 것은 국내정치 안정에 큰 도움이 된다”며 “이를 바탕으로 참여정부가 지금까지 추구해 오던 외교안보정책을 변화없이 강력하게 추진할 바탕이 마련됐다”고 했습니다. 또 “참여정부의 시장경제와 경제정책기조는 변화가 없으며, 50년 한·미동맹관계를 더욱 강화해 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체니는 “(탄핵사태 이후) 한국의 안정된 상태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받고 있다. 특히 총선이 안정적으로 추진된 것은 한국 국민의 강화된 민주주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라크 사태와 관련, 체니 부통령은 우리나라의 추가파병에 대해서 사의를 표명한 후, “이라크에 대한 한국의 기여에 대해 한국 내에서 논쟁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그러나 양국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서 민주적인 대의민주주의를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 세우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도 했습니다.

◇ 뒤늦게 쟁점된 미 대사관 부지 문제

그런데 체니가 회담을 마치고 간 후부터 당시엔 주목받지 못했던 사안이 불거지기 시작했습니다. 체니가 고 대행에게 미국 대사관 이전 문제를 거론, “건물이 너무 작고, 오래됐으며 필요한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아 문제가 많다”며 불만을 토로하며 우리 정부에 조속한 해결을 촉구했다는 겁니다.

 

사실 주한 미국대사관의 이전 문제는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부터 미 행정부는 미국의 위상에 비춰볼 때 현재의 세종로 건물은 낡고 보안에 문제가 많다며 이전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미국은 주한미국대사 관저와 맞붙은 옛 경기여고 부지를 선호했으나 문화재 문제로 사실상 좌절됐습니다. 이후 진전이 없자 체니가 방한 중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강한 톤으로 문제를 제기했다는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체니가 떠난 후 약 3주만인 5월 초 정부는 주한 미국 대사관 신축 부지로 당초 거론되던 옛 경기여고 부지 대신 용산 미군기지 내 ‘캠프 코이너(Camp Coiner)’를 대안으로 사실상 확정했습니다. 고 대행은 5월 4일 기자들과 만나 “미 대사관이 용산의 ‘캠프 코이너’로 (신축) 이전하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옛 경기여고 부지와 캠프 코이너를 맞바꾸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딕 체니 부통령이 지난달 방한했을 때 정부가 대사관 부지로 종로구 송현동 일대를 제시했는가’라는 질문에는 “정부는 송현동 부지를 제시했으나 미국 측에서 꼭 서울의 사대문 안이 아니라도 괜찮다는 입장이었고, 따라서 그 문제는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다”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이 2004년 4월 16일 방한중인 딕 체니 미 부통령과 식사를 하면서 건배하고 있다./e영상역사관

 

이에 따라 용산기지 이전과 함께 주한 미 대사관을 신축할 경우, 서울 세종로에 있는 주한 미국 대사관은 이르면 2008년쯤 이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장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이를 반박하는 입장이 나왔습니다. 당시 주한미국대사관은 모린 코맥 공보관을 통해 “체니 부통령이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과 만나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을 대사관 신축 담당자도 알지 못한다”고 반박했습니다. 코맥 공보관은 “주한 미 대사관은 옛 경기여고 부지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을 전달받지 못했다는 말 외에는 언급할 내용이 없다”는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고 대행이 캠프 코이너 부지에 미 대사관을 짓는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 겁니다.

 

그후 지난 20년간 주한미대사관 이전 문제는 사실상 아무런 진전도 없는 상태입니다. 이대로라면 상당기간 동안 주한미대사관은 세종로를 못 떠날 것이 분명한데, 미 대사관 문제가 원만히 풀려가지 않으면 장차 한미간의 갈등 요인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26회>경기여고 터로 대사관 이전 무산되자 탁자 내려친 美 외교관

"왜 미국만 사대문 바깥으로 옮겨야 하느냐"
캠프 코이너로 결정 후, 20년째 착공도 못 해
비슷한 시기에 이전 추진한 주중미대사관은
베이징 요지에 2004년 공사시작, 2008년 완공

<지난주 25회 ‘서울 온 체니 부통령, 미 대사관 이전 문제에 불만 토로’에서 계속됩니다>

 

2004년 4월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으로 직무가 정지된 상태에서 딕 체니 미 부통령이 방한, 주한미국대사관 이전 문제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돌아간 후의 일입니다. 미국 정부의 고위 관리 Z씨와 만나 한미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됐습니다. 맥주를 나누며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그가 “체니 부통령이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만난 자리에서 미 대사관 부지 문제를 이야기했는데,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며 대사관 이전 문제를 꺼냈습니다.

 

그는 “미 대사관 부지 문제는 한미관계에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서울 세종로에 위치한 주한미국대사관 전경. 미국은 1980년대 옛 경기여고 터로 대사관을 이전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2000년대 들어 반미 정서가 확산되고 문화재 조사결과 미국에 불리한 결과가 나오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미국은 용산미군기지의 일부였던 캠프 코이너 부지로 2030년경 이전할 계획이다./뉴시스

 

그는 한국을 잘 아는 지한파 외교관이었는데, “대사관 부지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매우 슬프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직원이 화가 나 있다”며 오른손으로 탁자를 내리쳤습니다. 앞에 앉아 있던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주한미대사관이 이전해야 하는 이유로 “너무 낡고, 비좁고, 숙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유능한 외교관들이 한국 근무를 꺼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왜 중국, 일본, 러시아, 영국, 캐나다 등 주요국 대사관이 모두 사대문 안에 있는데 미국대사관만 멀리 떨어져 나가야 하느냐”고 항의하듯 말했습니다.

 

미국 외교관이 한국 기자 앞에서 이 같은 행동을 할 정도로 미국은 불만이 많았습니다. 대통령 권한대행인 고건 총리가 2004년 5월 4일 주한미대사관 신축 부지가 용산 미군기지 일부인 ‘캠프 코이너’로 정해졌다고 발표하자 모린 코맥 주한미대사관 공보관이 “한국정부의 입장을 전달받지 못했다”는 요지의 두 문장짜리 성명을 발표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컸습니다.

 

사실 노무현 정부가 미국이 ‘2류’ 부지로 판정 내린 캠프 코이너안을 기정사실화하며 발표한 것은 고육지책이었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미국이 이곳을 내켜 하지 않는 것을 알지만, 더 이상 부지 선정을 늦추는 것보다는 차선책이라도 결정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체니 미 부통령이 방한 중 대사관 문제를 집중 거론한 것이 정부의 최종판단에 영향을 미쳤던 겁니다.

◇ 미국, 대사관저 인근의 옛 경기여고 부지 선호

미국이 원래 주한미대사관 이전 부지로 점찍은 곳은 옛 경기여고 터입니다. 미국은 정동 미 대사관저 옆의 공사관저와 맞붙은 이곳(덕수초등학교 맞은편)을 선호했습니다. 여기에 대사관을 만들어 대사관저-공사관저-대사관으로 연결되는 ‘아메리카 타운’을 만들 예정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6년 당시 주한미대사가 서울시장과 재산 교환 양해각서를 맺었습니다. 미국은 을지로 롯데호텔 맞은 편의 미 문화원 부지와 경복궁 옆의 송현동 땅을 내 주는 대신 옛 경기여고 터를 소유하게 됐습니다. 여기에 지하 2층, 지상 15층, 연건평 5만5000 ㎡ 규모의 대사관 건물을 세운다는 계획을 만들었습니다. 도쿄 중심가 록폰기의 주일미대사관 숙소처럼 직원 아파트와 군인 숙소도 건립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1987년 민주화가 되고 한국의 국력이 신장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불평등한 한미 관계가 개선되면서 주한미대사관의 정동 이전 문제가 대두됐습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효순-미순 사건을 계기로 반미(反美) 기류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2002년 대선에서 반미 정서를 활용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 된 후 “역사적 가치가 큰 정동 일대로 미대사관을 옮기는 것은 문제가 크다”는 지적들이 나왔습니다. ‘덕수궁 미 대사관 신축을 반대하는 시민모임’ 등의 활동도 활발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문화재연구원은 지표조사 후, 미대사관 신축 예정지가 옛 궁궐터이므로 보존, 복원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냈습니다. 2003년 12월 문화재위원회 매장분과위원회는 이를 토대로 “사안이 중대하다”며 전체회의에 회부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미 대사관이 옛 경기여고 터로 이전하는 것은 불가능해졌음을 의미했습니다. (결국 2005년 1월 문화재위원회는 주한미대사관 신축 예정지 등 총 7800여 평을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보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미국은 이런 과정을 잘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2004년 4월 15일 실시된 17대 총선을 통해 반미 성향의 ‘386′ 운동권이 대거 국회에 진출, 미대사관이 정동으로 이전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고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만난 미 정부 고위 관계자 Z씨는 비아냥거리는 투로 “만약, 한국정부가 서울이 아니라 수원, 인천에 미국 대사관을 지으라면 얼마든지 그곳에 짓겠다”고도 했습니다. 한국에 대해서 큰 배신감을 느낀 듯 했습니다.

 

▲2021년 서울시가 주한미대관 이전 계획을 발표하며 배포한 관련 그래픽. 서울시는 2011년 주한미대사관 건축과 관련한 양해각서를 맺은 후 10년만에 ‘지구단위계획’ 을 확정해 발표했다.

◇ 서울시, 2021년에야 주한미대사관 지을 수 있도록 조치

미국은 우리 정부가 내놓은 캠프 코이너 안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을 뿐, 이를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미국은 용산기지를 반환한다고 하면서 한편에 주한미대사관이 들어서는 것이 장기적으로 한국 국민들에게 좋지 않은 이미지를 줄 것을 우려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주한미대사관 이전 문제는 기자들은 물론 일반인들의 관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2021년 6월 서울시로부터 주한미국대사관 이전 관련, 중요한 뉴스가 나왔습니다. 서울시 도시·건축공동위원회가 용산구 주한미대사관 건축과 관련된 결정을 하자 “주한미대사관이 1968년부터 사용한 현재의 광화문 청사를 떠나 용산공원 북측 옛 용산미군기지 내 캠프 코이너 부지에 자리 잡을 예정”이라고 발표한 겁니다.

 

서울시는 주한미대사관 이전 부지를 녹지지역에서 용적률 200%의 제2종 일반주거지역으로 변경, 높이 55m 이하, 최고 12층 높이의 건축물이 들어설 수 있도록 했습니다. 서울시는 2011년 주한미대사관 건축과 관련한 양해각서를 맺고 대사관 이전을 위한 ‘지구단위계획’ 수립을 추진해 왔는데 10년만에 이 같은 결정이 나왔습니다.

 

서울시는 2021년 용도변경을 해 주면서 신청사 착공이 건축허가 등 후속 절차를 거쳐 약 2년 후 이뤄질 전망이라고 했으나 3년이 다 돼 가도록 아무런 진전이 없습니다. 주한미대사관은 2030년 이전을 목표로 한다고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커 보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미 중앙정부에서 이전에 필요한 예산 배정이 제대로 안 되고 있습니다. 대사관 직원 숙소 건립 문제 또한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이 대사관 이전에 이렇게 소극적인 배경에는 “사대문 밖으로 밀려나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게됐다”는 불만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에 위안이라면 2022년 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대통령실이 용산으로 이전했다는 겁니다. 미 대사관이 캠프 코이너 부지에 건립되면 주요국 대사관 중에서는 대통령실과 가장 가까운 곳이 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미 대사관이 사대문 밖으로 밀려났다는 불만은 사라지게 될 지도 모릅니다. 물론 다음 정부에서도 용산 대통령실이 계속된다는 전제하에서 말입니다.

 

▲중국 베이징 한복판에 2004년 착공, 2008년 완공된 주중미대사관의 초기 전경. "미국 국무부의 두 번째로 큰 해외 건축 프로젝트로 동서양 디자인 전통을 조화롭게 결합한 아름다운 건축물”로 소개되고 있다./주중미대사관 홈페이지

◇ 주중미대사관은 4년만에 완공해 위용 자랑

미국의 고위 관계자 Z씨가 대사관 문제에서 한국의 ‘비협조’를 중국과 비교한 것은 되새겨볼만한 대목입니다. Z씨는 제게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을 보라. 중국은 미중 우호관계를 고려해서 베이징의 가장 좋은 위치에 최신식의 건물을 짓도록 했다. 곧 2~3년내에 들어서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주한미대사관과 비슷한 시기에 대사관 신축 논의를 시작했던 주중대사관은 2004년 베이징 한복판의 차오양(朝陽)구에 착공돼 2008년 완공됐습니다. 베이징(北京) 올림픽 개막식 참석을 위해 중국을 방문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개관식에 참석, 새로운 대사관 건립을 축하하기도 했습니다. 주중미대사관 홈페이지에 따르면 이곳은 대지 면적이 10에이커이고, 총 4억 3400만 달러의 건축비가 들었습니다. “미국 국무부의 두 번째로 큰 해외 건축 프로젝트로 동서양 디자인 전통을 조화롭게 결합한 아름다운 건축물”이라고 소개합니다. 주중미대사관이 베이징의 요충지에 신속하게 건립돼 위용을 자랑하는 것은 아직 이전 시기조차 확정하지 못한 주한미대사관과 여러 면에서 대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P.S.

1. 2004년 탁자를 내리친 미국 외교관 Z씨의 발언 중 또 기억에 남는 것은 “미국에겐 일본이 있다는 것을 한국이 잘 모르고 있다”고 한 것입니다. “한국은, 미군이 한국 국민이 원하지 않아도 남아있으려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완벽한 착각이다. 한국 국민이 원하지 않으면 우린 언제라도 한국을 떠난다. 한미동맹이 깨지면 우리에게도 약간의 손해가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한국이 원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하지는 않는다”고도 했습니다. 그는 지나가는 말로 얘기했지만, 저는 이 말을 오래도록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의 격(格)을 나눠서 생각하는 미국의 본심을 무심결에 드러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보다는 일본을 더 중시하는 미국의 입장은 여전하며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특파원으로 활동했던 워싱턴과 도쿄에서 이를 절감할 때가 많았습니다. 최근에 저는 ‘1950 애치슨 라인, 2025 트럼프 라인’이라는 제목의 조선일보 <태평로> 칼럼에 이렇게 쓴 적이 있습니다.

 

“주한 미군 존재 의의를 일관되게 폄하하는 트럼프의 발언을 듣다 보면 1950년 한국을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한 애치슨 라인을 떠올리게 된다. 한반도를 김일성의 동족살해(同族殺害) 남침으로 이끈 애치슨 라인의 함의는 간단하다. 미국 입장에서는 한반도를 버려도 일본이 태평양의 방파제처럼 버티고 있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이 20년 전의 개발도상국에서 G7 진입을 거론할 정도로 덩치가 커진 것은 분명합니다. 주한미군이 일부 감축된다고 해도 큰 영향이 없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중국 러시아 북한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숙명이 최근 더 무겁게 다가온다는 점에서 20년 전 Z씨의 발언은 여전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27회>문 열고 들어가자 100년 전 모습 보존한 외교공간이 나타났다

옛 주미공사관 33년간 보유한 흑인 엘리트
2010년 본지 요청에 이례적으로 내부 공개
"경제적으로 발전한 한국이 돈 문제로
매입 안 하며 귀찮게 하느냐"며 강수
2012년에 문화재청이 뒤늦게 매입해 공개

최근 제가 주목했던 뉴스는 워싱턴 DC의 주미대한제국 공사관이 지난 11일 미국의 국가사적지(NRHP·National Register of Historic Places)로 등재됐다는 소식입니다. 영어로 Old Korean Legation(옛 대한제국공사관)이라는 명칭으로 지정돼 앞으로는 미국의 법령에 의해서 보호받게 됩니다. 미국내 한국 정부 건물이 미 연방정부의 국가사적지가 된 것은 처음인데, 최근 우호적 분위기의 한미관계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워싱턴 DC의 주미대한제국 공사관이 미국의 국가사적지로 등재됐다. Old Korean Legation(옛 대한제국공사관)이라는 명칭으로 지정돼 앞으로는 미국의 법령에 의해서 보호받게 된다./주미대한제국공사관 홈페이지

 

이곳은 한미외교의 현장으로 미국 역사에서도 중요한 장소라는 점이 건물의 핵심가치로 인정됐다고 합니다. 아울러 건물의 내외부 모두 원형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복원 및 리모델링 공사를 통해 역사적 공간으로 잘 재현된 것이 등재된 배경으로 거론됩니다.

◇2010년 공사관 매도 100주년 계기로 되찾기 운동 본격화

제가 공사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워싱턴 특파원으로 활동하던 2010년 이었습니다. 미국의 한인 사회에 공사관을 되찾아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돼왔는데, 한일합병 100주년을 맞아 공사관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가속화하기 시작했습니다. 1910년 단돈 5달러에 강제 매각됐던 공사관 건물을 되찾기 위한 운동이 본격화한 겁니다.

 

워싱턴에서 알게 된 윤기원 역사보존협회 회장과 로널드 콜먼 전 미 연방 하원의원(변호사)이 2010년 6월 버지니아주에서 ‘주미공사관 건물 매도 100년’을 맞아 기자회견을 할 때 취재했습니다. 이들은 공사관을 되찾아 보존하기 위해서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서의 여론도 중요하다고 보고, 연방의회를 대상으로 서명운동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미국에 사는 대한제국 의친왕의 딸 이해경씨도 기자회견에 참석, 공사관 되찾기의 필요성을 호소했습니다. 서명운동을 시작하자마자 쳇 에드워즈, 실베스트레 레이어스, 진 그린 등 하원의원 7명이 공감해 서명했습니다.

 

▲2010년 6월 대한제국 주미공사관 되찾기 운동에 나선 윤기원 미 역사보존협회 이사장(오른쪽)과 로널드 콜먼 전 미 하원의원(가운데)및 한국인 부인 조경숙(왼쪽)씨./이하원 특파원

 

윤 회장은 “공사관 건물은 미국 행정부 관리였던 세스 L. 펠프스가 1877년 건축하고, 국무부 차관급이던 그의 사위가 대한제국에 매입을 알선한 것”이라며 “미국으로서도 보존 가치가 있는 건물”이라고 했습니다. “양국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이 건물을 속히 사들여 제대로 보존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윤 회장은 미국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다가 워싱턴에 대한제국 공사관이 있음을 알고 역사보존협회를 만들어 되찾기 운동을 펼쳐왔습니다.

 

콜먼 전 의원은 1983년 이후 민주당 소속으로 14년간 7선(選)을 기록한 중진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는 한국인 부인 조경숙씨의 권유로 이 운동에 적극 나섰습니다. 콜먼 전 의원은 “미국 수도 워싱턴에 남은, 100년 넘은 한국의 첫 재외 공관을 보존하는 것은 한미동맹 차원에서도 의미가 크다”며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중요성을 알리겠다”고 했습니다.

 

백악관 북쪽 로간 서클에 있는 주미공사관은 1882년 한미 수교 후인 1891년 고종이 사들였습니다. 지하 1층, 지상 3층에 방 9개가 있으며 대한제국 유품도 일부 간직돼 있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좋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대조선 주차(駐箚·주재) 미국 화성돈(華盛頓·워싱턴) 공사관’으로 명명된 이 건물에는 박정양 초대 주미공사가 1층을 집무실로 사용하고, 직원과 가족은 2, 3층을 썼습니다. 당시 대한제국의 재정 상태로는 거액인 2만5000달러를 들여 매입했으나, 일제는 이를 겨우 5달러에 강제로 사들인 다음 10달러에 미국인에게 팔아버린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옛 주미공사관의 내부 모습을 보도한 2010년 8월 13일자 조선일보 지면

◇건물주, 취재에 일절 응하지 않다가 본지에 공개

공사관 되찾기 서명운동을 기사화하면서 공사관 내부 상황이 어떤지 궁금해졌습니다. 공사관 내부를 취재해 알리면 되찾기 운동이 더 확산하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건물주 연락처를 확보 후, 여러 차례 연락을 했습니다. 그러나 건물주는 일절 취재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매체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후 마지막 방법을 썼습니다. 제 연락처와 함께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건물주의 우편함에 남겨 놓았습니다. 조선일보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문이고, 발행부수가 가장 많으며 한미관계를 중시하는 신문이라는 점도 명기해 놓았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약 1주일간의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건물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건물 내부를 보여주겠다는 겁니다.

 

2010년 8월 11일 살짝 설레는 마음으로 옛 공사관으로 향했습니다. 건물주의 안내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1층부터 100년 전 모습을 보존한 외교공간이 나타났습니다. 1891년 대한제국이 매입했던 ‘대조선 미국 화성돈 공사관’은 100년이 훨씬 지난 후에도 당시의 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1910년 이 건물이 강제로 매각되기 전에 1층을 찍은 사진 2장과 지금의 건물 내부를 비교한 결과 벽난로와 거울, 칸막이와 창문 등의 주요 구조물이 전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특히 식당의 대형 거울은 매각되기 전에 찍은 사진 속의 거울과 크기도 비슷했으며 그 위에 대한제국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있는 꽃 문양도 있었습니다. 이 건물의 2층에는 4개의 침실과 2개의 화장실이 있었으며, 3층은 중간에 얇은 기둥만 있을 뿐 대형 거실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이 건물은 대한제국이 공사관으로 구입한 후 100년이 지났지만 그동안 건물 주인이 자주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 워싱턴 DC 북서부 로건 서클 15번지에 있는 옛 대한제국 워싱턴 공사관의 20세기 초의 사진(왼쪽)과 2010년의 모습(오른쪽)/이하원 특파원

◇ “앞으로 더 이상 건물 내부를 공개하지 않겠다”

건물주인 티모시 젱킨스씨는 1964년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한 흑인 법률가로 워싱턴 DC에 위치한 공립대학교 District of Columbia 대(UDC) 총장을 역임한 엘리트였습니다. 그는 한국 정부가 이 건물의 역사성을 중시, 매입하려는 의사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1977년 이 건물을 구입 후 33년 동안 거주해 온 젱킨스씨는 “이 건물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고려해 가급적 원형 그대로 유지하려고 했다”고 강조했습니다. 1970년대 말 워싱턴 DC 에서 이 건물을 지었던 남북전쟁 당시의 영웅 펠프스를 기리기 위해 매입 후 기념건물로 활용하려고 했다는 일화도 들려줬습니다.

 

그는 “한국 국민들에게 이 건물이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다. 우리 가족이 33년동안 살아온 이 건물을 6개의 조건만 맞으면 양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가 내건 6개의 조건은 구체적이었습니다. “나와 가족들이 영구히 살 수 있는 ‘편안한 건물’로 이전하고, 이에 수반되는 비용을 모두 지불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젱킨스씨는 “경제적으로 발전한 한국이 비용의 문제로 이 문제를 10년 넘게 끌고 자꾸만 이것 저것 물어보며 귀찮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한국정부에서 이 건물의 매입을 위해 자신과 접촉한 부동산 업자만 6~7명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는 “앞으로 더 이상 공개하지 않겠다”고도 했습니다. 당시 젱킨스씨로부터 취재한 이런 내용은 기사화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주미대사관 관계자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주고 매입 협상에 참고하도록 했습니다.

 

▲2010년 6월 미국 워싱턴 DC 북서부 로건 서클 15번지에 있는 옛 대한제국 워싱턴 공사관의 내부가 본지에 공개됐다. 대한제국이 구입했던 19세기말의 구조가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거울의 크기도 똑 같았고, 그 위에 꽃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거실에 놓인 벽난로의 위치도 변함이 없었다./이하원 특파원

 

공사관 내부가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이 본지 보도로 알려지고, 미국내에서 서명 운동이 진행되면서 매입 협상은 속도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2012년 우리 정부는 원래 공사관 매입 비용으로 책정했던 30억원보다 훨신 더 많은 금액을 주고 이를 사들였습니다. 이에 대해 건물주인 젱킨스씨가 너무 무리하게 요구했다는 비판도 나왔습니다. 저는 그런 측면도 있으나 그가 30년 넘게 건물을 그대로 관리하고 내부 시설을 보존한 것은 인정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부 관계자들이 좀 더 책임감을 갖고 전략적으로 움직였다면 우리 정부가 훨씬 더 신속하고, 유리하게 매입할 수 있었을 겁니다.

 

매입 이후 국가유산청은 5년간의 자료조사와 복원 공사를 통해 현재 일반인 관람이 가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저는 서울로 복귀 후 워싱턴 DC에 몇 차례 출장을 갔지만 아직 이곳을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다음에 워싱턴 DC를 방문하게 되면 가장 먼저 공사관을 다시 찾아볼 생각입니다.

 

<28회>남관표·장하성 몰아붙여 사드 '3불' 부인 이끌어내다

2020년 주일·주중 대사관 동시 국정감사 활용해
야당 이태규 김석기 정진석 조태용 박진 의원이
잇달아 3불 문제 집중적으로 제기, '빌드업' 시켜
"中에 약속 없었기에 안 지켜도 돼" 확인 받아내

7일부터 국회 국정감사가 시작됩니다. 야당이 주도하는 국회 국정감사는 정부의 고위 관계자들을 상대로 한 질의·답변에서 새롭거나 주목할만한 사실이 터져 나오곤 합니다.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화상을 통해 실시했던 국회 외교통상위원회의 국정감사가 이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당시 송영길 국회 외통위원장은 여야 간사들과 협의, 주중대사관과 주일대사관을 동시에 연결해서 국감을 실시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상황이 아니라면 국회의원들이 베이징과 도쿄의 대사관을 방문, 현장에서 국감을 진행했겠지만, 당시 상황이 여의치 못했던 겁니다. 이에 따라 2020년 10월 21일 이례적으로 서울-베이징-도쿄를 연결해서 외통위 국감이 열리는 바람에 외교안보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3불(不)’ 관련 뉴스가 나오게 됩니다.

 

▲남관표 주일대사가 21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의 주일대사관, 주중대사관에 대한 화상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2020.10.21 국회사진기자단

 

3불은 2017년 문재인 정부가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로 인한 중국의 보복을 무마하기 위해 ‘미국 MD(미사일 방어) 참여, 사드 추가 배치, 한·미·일 군사 동맹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사드 사태는 2016년 한미 양국이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의 사드를 한국에 배치하기로 결정하면서 발생한 정치적, 외교적 갈등압다. 이에 대해 중국이 강하게 반발, 여러 차원에서 보복 조치를 취해 문제가 돼 왔습니다.

◇국민의당 이태규 의원이 3불 문제 질문 시작

이날 3불 문제를 먼저 제기한 것은 국민의힘 의원들이 아니라 국민의당 이태규의원이었습니다. 이 의원이 주중대사관의 장하성 대사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 의원이 “저 개인적으로 (3불 조치) 이것은 대한민국 외교안보 주권을 스스로 제약한 굴욕적인 조치라고 생각한다”라며 장 대사에게 말했습니다.

 

이 위원은 “그래서 주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어야 동반자 관계고 실리외교인데 우리는 중국한테 3불 정책을 주면서 롯데마트 철수라는 치명적인 경제 손실을 받았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한국 영화 상영이나, 대중문화 공연 부분 이런 부분에서 중국의 한한령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고 했습니다.

 

다음으로 국민의힘 김석기 의원(현 외통위원장)이 나섰습니다. 김 의원은 “3불 정책 얘기가 나왔는데, 우리 정부가 중국에 대해서 사드 추가 배치 안 하겠다, 미국 미사일 방어체계에 편입 안 하겠다, 한미일 군사동맹 철회하겠다. 이게 도대체 얘기가 되느냐. 대한민국의 안보 주권을 중국에게 넘긴 거나 다름없지 않나. 우리가 왜 중국에 대해서 이렇게 굴종적인 저자세 외교를 해야 되느냐. 이것이 저자세 외교가 아니면 뭐냐”고 따졌습니다.

 

▲21일 국회에서 외교통위원회의 주일대사관, 주중대사관에 대한 화상 국정감사가 열리고 있다. (좌측부터 장하성 주중대사, 남관표 주일대사) 2020.10.21 국회사진기자단

 

같은 당의 정진석 의원이 남관표 주일대사에게 3불 문제를 질의하면서 이 문제는 본격화됩니다. 그는 남 대사에게 “지금 (3불 합의후) 3년 지났는데 그것 잘한 결정이고 잘한 합의였다라고 생각이 드느냐,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결정이었다고 생각이 드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 대사는 “3불 약속을 해 줬다 그러는데 어디에서 3불 약속을 해 줬다고 말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도쿄에서 국감을 지켜보던 저는 이 때부터 뭔가 뉴스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 대사는 “3불이라는 말은 우리가 만들어 낸 이야기”라며 “정확한 것은 세 가지 우려”라고 했다. 그는 “중국 측이 그런 문제에 대해서 중국의 입장과 우려를 천명하였고 우리 측은 그간 한국 정부가 공개적으로 밝혀 온 관련 입장을 다시 설명했는데 여기에 어떻게 약속이 들어가느냐”고 반문했습다.그러자 5선의 노련한 정 의원이 남 대사의 3불 발언을 더 깊숙이 끌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MD 참여 안 한다, 사드 추가 배치 안 한다, 한미일 군사 동맹 안 한다라는 이른바 3불 약속을 한 적이 없느냐”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남 대사는 명확한 어조로 “약속한 적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즉각 휴대폰을 집어들고 서울의 조선일보 편집국에 보고했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3불 합의 주역인 남 대사가 3불 합의를 부인하고 있으니 기사를 써야 한다”고 알렸습니다.

 

남 대사는 이례적으로 ‘3불 합의’로 불리게 된 상황도 설명했습니다. “이게 약속이 아닌데 이 합의가 끝나자마자 중국 외무성에서 이 합의문을 올리면서 약속과 비슷한 워딩을 썼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서 두 시간 만에 내려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 언론에서 3불 약속이란 말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에 3불 약속이란 말이 지금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 이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개념”이라고 했습니다.

◇ 결정타 날린 경기고 동기동창 조태용 의원

야당 의원 중에서 네번째로 3불 문제를 제기하며 결정타를 날린 것은 남 대사의 경기고 71회 동기동창인 조태용 의원(현 국정원장) 이었습니다. 조 의원은 “굉장히 중요하니까, 다시 한번 확인한다”며 3불 문제를 하나 하나 다시 짚어갔습니다. 그는 “남 대사가 한중 간에 합의를 했다고 알려졌지만 합의도 아니다라고 몇 차례 분명하게 말씀을 했다”고 논의를 진전시켰습니다.

 

“그러면 사드의 추가 배치나 미 MD 체계에 참여하는 문제, 한미일 군사 동맹에 대해선 만일 대한민국 정부가 추후에 그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하더라도 중국과 관계가 나빠지지 않는 것이지요?”

 

남 대사가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을 받고 머뭇거리자 “그렇게 한다고 해서 중국이 약속 위반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라고 몰아붙였습니다. 조 의원은 결국 남 대사로부터 “약속이 없었기 때문에 약속 위반이라고 할 수 없다”는 답변을 이끌어냈습니다.

 

▲경북 성주군 주한미군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기지에서 주한미군 관계자들이 사드 발사대를 점검하고 있다. 2022.8.18/뉴스1 ⓒ News1 공정식 기자

 

조 의원은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해 주셔서 속기록에 잘 기록이 되고, 이 사실은 국민들께도 많이 알려져야 된다고 생각한다”며 쐐기를 박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박 진 의원(전 외교부 장관)이 나와서 정리를 합니다. 그는 장하성 대사를 상대로 “지난 9월 15일 강경화 외교부장관이 (나의)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3불 합의한 겁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구속력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다”며 “그러면 사드 3불은 합의도 아니고 약속도 아니고 뭐냐”고 몰아붙였습니다.그러자 장 대사는 “남관표 대사가 이야기하신 것처럼 3불은 약속이나 합의로 그렇게 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박 의원이 다시 확약 받듯 “구속력도 없지요”라고 하자 장 대사가 “예” 했습니다.

저는 국정 감사 중에 나온 3불 기사를 빠르게 써서 송고했습니다.

中과 ‘3불 합의’ 주역 남관표 “합의 아니니 안지켜도 문제없다”

2017년 국가안보실 2차장으로 중국과의 소위 ‘3불(不) 합의’를 주도했던 남관표 주일대사는 21일 “중국에 당시 언급한 세 가지는 약속도 합의도 아니다”라며 이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10월 한국의 미국 미사일 방어체계(MD) 참여,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추가 배치, 한·미·일 군사협력에 대한 중국의 우려를 인정한다며 이를 추진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는데, 이 내용이 ‘3불 합의’로 불려왔다. 남 대사는 이날 화상으로 진행된 주일 한국대사관 국정감사에서 조태용 국민의힘 의원의 3불 합의 관련 질의에 대해 “당시 한국 정부가 공개적으로 밝힌 것을 중국에 설명해준 것”이라며 “(3불 합의라는) 근거 없는 것이 떠돌고 있다”고 했다.

 

이에 조 의원이 “그렇다면 대한민국 정부가 나중에 필요성이 있어서 (사드 추가 배치 등을) 추진해도 중국이 약속 위반이라고 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묻자, 남 대사는 “그런 약속이 없기에 약속 위반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장하성 주중대사도 이날 3불 합의 관련 질문에 “남 대사의 말처럼 (한·중 간) 약속이나 합의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남 대사의 발언에 대해 야당에서는 중국이 사드 배치에 반발하며 보복조치를 하자 3불 입장을 표명해놓고 말을 바꾸는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이날 남관표 주일대사·장하성 주중대사의 3불 합의 부인은 야당 의원들, 특히 국민의힘 의원 4명이 잇달아 문제를 제기해서 이끌어낸 겁니다. 당시 야당인 국민의힘은 국가안보실 2차장으로 3불 합의를 주도했던 남관표 주일 대사와 청와대 정책실장이었던 장하성 주중대사가 동시에 나오는 국정감사를 적절하게 활용, 효과적으로 공세를 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야당 의원들이 서로 역할분담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축구에 비유하면 골을 넣기 위한 ‘빌드 업’이 잘 된 케이스에 해당합니다. 정치부 기자로 그동안 국회 회의나 국정감사를 숱하게 봐 왔는데, 비교적 논리적으로 잘 진행됐다는 점에서 기억에 남습니다. 올해 국정감사에서도 이런 국감을 많이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주일·주중 대사관의 3불 합의 부인, 다음주 하편이 이어집니다>⊙

 

<29회>문재인, 남관표의 '3불' 부인 한 달만에 경질 발표

청와대, 국감서 3불 부각된 후 강창일 주일대사 내정
경기고-서울법대 출신 남 대사, 文 민정수석 때 인연
안보실 2차장 지냈지만 도쿄 부임후 文 신임 잃어
1년 8개월만에 교체돼 민단 신년회 참석않고 귀국

 

지난주 막전막후 <28회> [남관표·장하성 몰아붙여 사드 ‘3불’ 부인 이끌어내다]에서 계속됩니다. (https://www.chosun.com/politics/diplomacy-defense/2024/10/05/YQYSJPQGNZADDN7N436FHBZK5A/)

 

문재인 정부의 국가안보실 2차장으로 ‘3불 합의’를 주도했던 남관표 주일 대사가 2020년 10월 국정감사에서 “3불합의가 약속도 합의도 아니다”라고 밝히자 그 파장은 컸습니다. 그동안 3불 합의에 숱한 문제 제기가 있었지만, 문재인 정부의 고위 인사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부인하고 나선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이 즉각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중국 외교부의 자오리젠 대변인은 국감 다음날인 2020년 10월 22일 “중한 양국은 2017년 10월 단계적으로 사드 문제를 처리한다는 합의를 달성했다”며 “양국은 당시 양국관계를 다시 개선과 발전의 정상궤도로 돌려놓기로 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양국의 합의 과정은 매우 분명하고, 양국 공동 이익에 부합했다”며 “중국의 관련 입장은 일관되고 명확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중국은 외교 채널을 통해서도 “3불 합의를 지키지 않겠다는 것이냐”고 항의했다고 합니다.

 

▲<YONHAP PHOTO-2739> 밝은 표정의 문 대통령과 신임대사들 (서울=연합뉴스) 한상균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5월 3일 오후 청와대에서 신임 대사들과 간담회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앞줄 오른쪽부터 남관표 신임 주일본대사, 문 대통령, 장하성 신임 주중국대사. 2019.5.3 xyz@yna.co.kr/2019-05-03 15:28:49/ <저작권자 ⓒ 1980-2019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남 대사는 왜 국감에서 사드 3불 부인했을까

당시 도쿄 특파원으로 일하던 제가 가졌던 의문은 왜 남 대사가 야당이 주도하는 국감에서 지난 회에 전해드린 것처럼 적극적으로 3불 합의를 부인했느냐는 것입니다. 야당이었던 국민의힘 의원들이 국감에서 남 대사를 몰아붙인 것이 발단이었지만, 그는 이례적으로 “합의한 것이 없다. 중국의 세 가지 우려와 관련해서 과거와 그 협상을 하는 협상 당시까지 우리가 취하고 있는 입장에 대해서, 공개된 입장에 대해서 설명을 해 준 것이 전부”라는 등의 얘기를 합니다. 이 때문에 국민의 힘 조태용 의원이 3불을 지킬 이유가 없다는 데 방점을 찍고,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해 주셔서 속기록에 잘 기록되고, 이 사실은 국민께도 많이 알려져야 된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에 대한 실마리를 얻기 위해서는 당시 남 대사가 처했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래 남 대사는 문재인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2019년 5월 장하성 주중대사와 함께 주일대사로 발탁돼 한때 도쿄 주변에서는 “차기 장관이 될 것”이라는 하마평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남 대사는 도쿄 부임 후, 한일관계가 더 악화되면서 본인이 청와대에서 문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입안했던 대일정책의 부작용을 감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엿볼 수 있었던 게 남 대사 부임 첫 해인 2019년 10월에 열린 국정감사입니다. 당시는 코로나 사태 전이어서 국회의원들이 방일, 대면 국정감사가 열렸는데 이때 그가 반년도 안 되는 사이에 뼈저리게 느낀 일본 상황을 비교적 솔직하게 밝혔습니다. “일본 내에서도 양심적인 생각을 가지신 분들이 적지 않게 있다. 간혹 그분들의 목소리가 언론을 통해서 발표되기도 하고 단체적 의사 표시도 하는데 비중으로 봐서는 굉장히 소외된 감이 있어서 상당히 안타깝다.”

 

남 대사는 30년 넘는 공무원 생활 동안 “지나치게 신중하다”는 평을 들어왔는데 ‘굉장히’ ‘상당히’라는 수식어를 사용해 일본내 친한(親韓) 세력이 겪는 어려움을 묘사한 겁니다. 그가 대사로 활동하면서 청와대와 입장 차가커지고 있다는 얘기가 자주 흘러 대사관 밖으로 흘러 나왔습니다. 아베 신조 내각이 한일간 역사적, 정치적 갈등에 대해 사상 초유의 경제제재를 취한 것은 분명 큰 문제였지만, 문재인 정권이 반일을 내세우는 바람에 일본에서 한국 외교관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가 한일관계의 위험성을 느끼고 청와대에 문 대통령 독대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는 얘기도 들렸습니다. 관료 생활을 오래 한 남 대사는 청와대와 잘 소통되지 않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금방 알 수 있었을 겁니다.

 

2020년 10월 국정감사 즈음에 자신의 공직 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을 수 있다는 판단하에 3불 얘기가 나오자 이를 해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보고 적극 부인한 것은 아닐까, 그렇게 추정했습니다. 국감 이후 남 대사의 교체 가능성이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청와대, 남 대사 부임 1년 반만에 경질 통보

아니나 다를까, 문 대통령은 남 대사의 3불 부인 한 달 후 남 대사를 경질하는 조치를 취합니다. 문 대통령은 2020년 11월 23일 주일 대사에 강창일 전 국회의원을 내정, 이를 발표했습니다. 국가안보실 2차장을 지낸 남 대사가 부임한 지 불과 1년 반도 안 됐을 때입니다.

 

청와대는 “강창일 내정자는 일본 동경대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학계에서 오랜기간 일본을 연구한 역사학자다. 4선 경력 정치인으로 의정활동 기간 한일의원연맹 간사장 등을 역임한 일본통”이라고 했습니다. 또 “일본에 대한 전문성과 경험, 오랜기간 쌓아온 고위급 네트워크를 통해 경색된 한일관계 실타래를 풀고 한일 양국 발전으로 나아가길 바란다”고도 했습니다.

 

청와대의 강 대사 내정 성명에는 남 대사에 대한 불만이 담겨 있었습니다. 남 대사가 한일관계 해법 차이로 문 대통령의 신임을 잃고 있었는데, 3불 문제가 부각되자 교체하기로 결정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2020년 10월 21일 외교통위원회의 주일대사관, 주중대사관에 대한 화상 국정감사에서 남관표 주일대사가 업무보고를 하고 있다. 2020.10.21 국회사진기자단

◇ 경기고-서울법대 출신의 외교부 비주류

여기서 ‘외교관 남관표’의 이력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019년 5월 도쿄에 부임한 남 대사는 2004년이 외교관 인생의 전환점이었습니다. 경기고를 졸업 후, 서울대 법대 4학년 때 외무고시 12회에 합격하면서 주목받았지만 눈에 띄는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KS(경기고·서울대) 출신이 주류였던 외교부에서 비주류에 더 가까운 편이었습니다.

 

외교부 조약국 심의관이던 남 대사는 2004년 3월 ‘세력 교체’를 내세운 노무현 정부에서 외교부 혁신 기획관으로 발탁됐습니다. 같은 해 11월엔 청와대 민정수석실로 파견 나갔습니다. 당시 외교부를 뒤흔들었던 ‘동맹파와 자주파’ 논란에서 자주파로 분류됐습니다. 청와대에서 13년 뒤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는 문재인 민정수석 비서관을 만납니다. 1년간 ‘문 수석’을 모시고 일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당시 대한민국 주류 세력의 상징과도 같았던 KS 출신이면서도 비교적 진보 성향을 보인 그에게 호감을 갖습니다. 문 수석은 이후 청와대를 떠나서도 외교관 남관표를 잊지 않았습니다.

 

‘박근혜 탄핵’ 바람을 타고 2017년 5월 청와대에 입성한 문재인 대통령은 남 대사를 즉각 기용했습니다. 외교안보수석 비서관에서 이름을 바꾼 국가안보실 2차장에 임명했습니다. 남 대사가 차관보급 이상의 외교부 요직을 맡았던 경험이 없었기에 정치권에서 “남관표가 누구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파격이었습니다.

 

일본 측은 문 대통령과 남 대사의 이런 오래된 인연에 주목하며 그의 역할을 기대했습니다. 1992년부터 2년 8개월간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으로 근무했던 경력에 기대를 거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남 대사가 부임 하루 만인 2019년 5월 10일 아키바 다케오 외무성 사무차관을 만난 데 이어 13일엔 고노 다로 외상을 신속하게 면담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였습다. 당시 아베 내각의 한 관계자는 제게 “남 대사는 어쨌든 문 대통령 측근 아니냐. 최소한 일본의 분위기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전하는 역할은 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습니다.

 

▲일본 정부가 자국이 한국에 제안한 '제3국 중재위원회'의 설치 시한(18일)까지 한국이 답변하지 않았다며 19일 일본 외무성에 초치된 남관표 주일 한국대사(오른쪽)가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무상과 대화하고 있다./연합뉴스

 

당시 한국에 대한 도쿄의 공기(空氣)는 남 대사가 서울에서 전문을 통해 느끼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습다. 일본 측은 한국이 2018년 10월 대법원 판결을 계기로 징용 피해자들이 압류된 일본 기업 자산의 현금화에 착수하자 매일같이 대응 조치를 점검했습니다.

 

우리 측에서 “정부가 개입할 사안이 아니다”며 ‘제3자론’을 내세우는 데 대해선 화가 나 있었습니다. 저는 양국 관계가 역대 최악이라는 말로도 설명이 부족한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남 대사가 과감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문 대통령이 자신을 잇달아 요직에 발탁한 것만 생각해 국가안보실 2차장 때의 편향된 정책을 고집하다가는 나중에 대통령이 더 큰 비판을 받게 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문 대통령의 성공을 위해서는 문재인 정부가 줄곧 취해 온 ‘혐일(嫌日) 외교’에서 벗어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제언하기도 했습니다.

◇민단 행사에 일본 국회의원 19명 왔으나 남 대사는 불참

남 대사는 문 대통령의 신임을 잃고, 경질 발표가 나자 더 이상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해가 바뀌어 2021년 1월 12일 도쿄 제국호텔에서 민단 신년회가 열렸습니다. 코로나 긴급 사태 상황이었지만 일본 측에서 연립 여당인 공명당의 야마구치 나쓰오 대표, 누카가 후쿠시로 일한의원연맹 회장 등 일본의 여야 중진 의원 19명을 포함, 20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이날 신년회엔 문재인 대통령의 영상 메시지도 없었고 남 대사 대신에 주일 정무 공사가 참석했습니다. 재일교포를 대표하는 민단 신년회 행사에 일본 의원들이 20명 가까이 참석했는데, 주일대사가 불참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습니다. 당시 남 대사를 대신해 참석한 정무공사가 굳은 얼굴로 민망해 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한편, 남 대사의 3불 부인을 계기로 우리 정부 안팎에서는 이에 구애 받을 필요가 없다는 분위기가 확산합니다. 윤석열 정부는 2022년 5월 출범하자마자 3불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입장을 확실히 했습니다. 2022년 8월 기자들을 만난 주중 한국대사관의 고위 관계자는 “문재인 전 정부 5년간 한국이 (중국으로부터) 충분히 존중받지 못했다”며 사드 3불을 거론했습니다.

 

그는 사드 3불은 “전 정부가 합의도 아니고 정책도 아니라고 (남관표 대사가) 이미 밝혔다”며 “새 정부가 챙겨야 할 옛날 장부(帳簿)가 있느냐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중국 외교부가 윤석열 정부 발족 후 “새 관리가 옛 장부(사드 3불 합의)를 외면할 수 없다”며 압박한 것에 대해 반박한 것입니다. 이 관계자는 3불을 통해 양국간 갈등을 잠정 봉합한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우리가 받은 게 없는 데 봉합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아울러 ”3불처럼 자국의 안보에 대해 제3국에 ‘미래에 무엇을 안 한다’고 약속하는 게 합리적인가”라고도 반문했습니다. 결국, 윤석열 정부가 3불 문제를 초기에 정리할 수 있었던 데는 국정감사에서 남 대사가 부인한 것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P.S.

1. 남관표 대사의 3불 부인에 대해 당시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와 여당은 불편한 기색이었지만 외교부 안팎에서는 호응을 얻었습니다. 외교부의 한 관계자는 “남 대사가 결자해지로 이 문제를 정리했다”고 했습니다. 남 대사의 외무고시 선배인 S씨는 최근 “남 대사가 공직에 있을 때 뒤늦게나마 3불을 부인한 것은 잘한 일”이라며 “그렇지 않았다면 퇴임 후에도 평생 멍에를 쓰고 살았을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10.20

<30회>'간도협약은 무효' 국감 자료집 회수한 외교부

노무현 정부 때 중국 "간도 영유권 거론 말라" 요구 후
"외교부가 왜 국감 자료집 회수하느냐" 제보 전화
신구 자료집 비교해 보니 간도 협약 기술 바뀌어
파문 커지는데도 외교부는 당일 아무런 대응 하지 않아

2004년 10월 초, 국회 국정감사가 시작됐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 알고 지내던 국회 외교통상위 소속 A 의원의 보좌관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외교부에서 국회의원들에게 배포한 국감 자료집 중 한 권을 교체해야 한다며 이를 회수하고 새 자료집을 줬는데, 무슨 일이 있는지 아느냐”는 겁니다.

 

다른 정부 부처도 그렇지만, 외교부는 특히 다른 나라와 관련된 일이 대부분이기에 외부로 나가는 자료를 만들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합니다. 이미 배포된 국감 자료집을 바꾸려고 외교관들이 일일이 외통위 의원들을 찾아다닌 것은 뭔가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했습니다.

 

비밀리에 취재를 해보니, 외교부가 국회의원들에게 회수하고 새로 배포한 자료는 ‘국감 자료집 7권’이었습니다. 우선 약 300페이지에 가까운 신구(新舊) 자료집을 확보했습니다. 두 권을 나란히 놓고 한 장씩 넘겨가며 비교 했습니다. 그 결과 186쪽이 달라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원래 배포된 ‘국감자료집 7권’ 186쪽엔 “을사보호조약이 무효인 만큼 이 연장선상에서 간도(間島)협약은 무효”라고 했는데, 새로 배포된 자료집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가 있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기사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4년 8월 23일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고구려사 왜곡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방한한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을 만나고 있다. 우다웨이 부부장은 당시 우리 정부에 간도 영유권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조선일보 DB

◇고구려사 문제에 이어 간도 문제 제기돼

2004년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이어 간도 문제가 불거지면서 우리 국민의 관심이 높았던 때 입니다. 9월 3일 59명의 한국 국회의원이 간도를 중국에 넘겨준 간도협약 무효 결의안을 제출하자 주한 중국대사관이 이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했습니다.

 

간도는 통상 남부 만주 지역 중 두만강 북쪽 땅(동간도)을 뜻하지만, 압록강 북쪽도 서간도로 불려왔습니다. 이곳은 원래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으로 조선과 청 나라가 1712년 백두산 정계비를 만들 때 합의한 것처럼 조선 영토였습니다. 특히 19세기 중반부터 이곳에서 땅을 개간하는 한국인이 급증, 간도협약 당시 동간도에만 10만 여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1900년 대한제국은 간도 조선인 보호용으로 두만강 인근에 변계경무서를 설치했습니다. 1902년엔 간도관리사 종3품 이범윤을 간도에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후, 1909년 간도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을 인정했습니다. 그 대가로 만주 철도·광산 등 이권을 보장받은 게 간도협약입니다. 1905년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조약이 강압에 의한 무효조약이므로 이에 근거한 간도협약도 국제법상 무효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간도협약이 무효가 되면, 이론적으로는 간도협약 이전에 존재했던 한·중 국경선이 양국의 국경선이 됩니다. 국제법상 영토문제의 대체적인 시효 만료가 100년이므로 2009년 이전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당시 분출했습니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목적이 간도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었습니다. 동북공정의 33개 연구과제 중에서 12개는 한·중 변경(邊境)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 고구려사 문제로 방한한 우다웨이, 간도 영유권 문제 거론

이렇듯 간도 협약은 중국에서 볼 때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중국은 2004년 8월 고구려사 왜곡 문제 논의를 위해 방한했던 우다웨이(武大偉) 외교부 부부장을 통해 우리 정부가 간도의 영유권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사실은 조선일보가 2004년 9월 11일자 1 면에 비중있게 보도했습니다.

 

우다웨이는 최영진 외교부차관 등에게 “한국이 동북지방 영토 국경 문제에서 중국 정부와 국민을 우려시키는 시도가 있다”며 간도문제를 언급했다고 합니다. 우다웨이는 “간도 영유권은 중국의 중요한 관심사”라며 “한국이 이 문제를 절대 거론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해 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에 우리 정부는 중국의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조선일보 문화부 유석재 기자가 간도 관련, 의미있는 단독 보도를 했습니다. 유 기자는 2004년 9월 9일 [두만강 이북 ‘간도는 조선땅’ 1909년 일제 제작 지도서 ‘증거’ 발견]이라는 제목의 1면 톱 기사를 썼습니다.

 

▲조선일보 2004년 9월9일자 1면 톱기사는 일본이 간도지역을 중국에 넘겨준 ‘청·일 간도협약’의 바탕이 됐던 ‘토문강=두만강’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지도가 발견됐다고 전하고 있다.

 

일본이 간도지역을 중국에 넘겨준 ‘청·일 간도협약’의 바탕이 됐던 ‘토문강=두만강’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지도가 발견됐다는 겁니다. ‘토문강(土門江)’을 두만강(豆滿江)이 아닌 별개의 송화강 지류로 분명히 밝힌 이 지도는 1909년 ‘청·일 간도협약’ 당시 일본측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조선과 청의 국경인 토문강은 두만강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줄곧 주장해 온 중국에 대한 중요한 반박자료일 뿐 아니라 간도가 조선 땅이었음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였습니다. 이상태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장이 서지학자 고 이종학씨의 소장자료 중에서 찾아내 공개한 이 지도는 ‘메이지(明治) 42년(1909년) 10월, 축척 40만분 1′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 지도는 백두산 부근에서 동북 방향으로 흐르다가 다시 북쪽으로 꺾여 송화강과 합류하는 하천에 ‘토문강’이라는 이름을 명기해 놓았습니다. 동쪽으로 흐르는 강에는 ‘두만강’이라 적어 토문강과 두만강이 같은 강의 다른 이름일 수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1712년(숙종 38년)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는 ‘압록강과 토문강을 조선과 청의 경계로 삼는다’고 적었으나 ‘토문강’을 송화강의 지류로 해석한 한국과 달리 중국은 ‘토문강=두만강’설을 내세워 간도지역이 청나라 영토였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 간도협약은 무효

이렇듯 간도와 관련된 관심이 고조된 상황에서 외교부가 국감 자료집에 ‘간도협약은 무효’라는 입장을 밝혔다가 이를 정정한 것은 주목할 만한 사안이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2004년 10월 13일 조선일보 1면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1면 톱 기사로 게재했습니다.

 

▲우리 정부가 1909년 중국과 일본 간에 체결된 간도협약이 무효라는 입장의 국감 자료집을 배포했다가 회수한 것을 보도한 조선일보 2004년 10월 13일자 1면 톱 사.

 

우리 정부가 1909년 중국과 일본 간에 체결된 간도(間島)협약이 무효라는 입장을 정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외교통상부는 이 같은 정부 입장을 밝힌 ‘국정감사자료집’을 국회의원들에게 배포했다가 중국과의 외교마찰을 우려해 수거한 것으로 12일 밝혀졌다. 이 문제에 관한 정부의 공식 입장이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간도협약은 사실상 조선의 영토였던 간도를 일본이 중국에 넘겨준 대가로 만주 철도설치권 등 특권을 얻은 조약이다. 간도협약이 무효라면 백두산과 두만강 북쪽 지역이 우리나라 영토라는 것이 우리 정부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본지가 입수한 외교부의 ‘국정감사자료 7권’은 186쪽 ‘1909년 청나라와 일본의 간도협약내용’마지막에 간도협약이 무효임을 밝히고 있다. 이 부분은 “우리 정부는 1905년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조약이 강박에 의해 체결된 무효조약인 만큼, 이의 연장선상에서 일본이 우리의 의사와 무관하게 체결한 1909년 간도협약은 무효라는 입장을 견지함”〈사진〉으로 돼있다.

 

외교부는 지난 5일 국정감사에서 이 자료집을 배포했다가 중국과의 외교마찰을 우려해 자료집을 수거키로 결정, ‘간도협약은 무효’ 부분을 삭제한 새 자료집과 교환했다. 새 국감 자료집에는 “간도문제는 북한을 포함한 여러 나라가 관련돼 있는 아주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로서, (중략) 신중히 다뤄나가야 할 문제”라는 입장만 남겨뒀다. 이와 관련, 정부 관계자는 “간도협약이 무효라는 것이 우리의 확고한 입장이지만, 최근 중국이 고구려사 문제와 관련해서도 간도협약 부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 이를 대외에 밝히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외교부, “더 깊이 논의할 필요가 있다”며 당일 아무런 대응 안해

외교부가 ‘간도협약은 무효’라는 입장을 국감 자료집에 밝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외교부는 반기문 장관 주재 실국장회의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조약국과 아시아·태평양국 관계자들이 수차례 대책을 논의하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외교부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간도협약은 무효라는 입장을 갖고 있는 것이 국민들에게 알려져 좋은 측면이 있으나 중국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질까 우려된다”고 말했습니다. 이날 회의에서는 이 기회에 앞으로 간도협약이 무효라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제시됐고, 그에 반대되는 입장도 피력돼 논쟁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외교부 이규형 대변인은 이날 오전 이 문제에 대해 브리핑을 하기로 했으나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더 깊이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제동을 걸었습니다. 그 결과 브리핑이 수차례 연기된 끝에 정부는 당일 아무런 발표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례적인 일이 벌어진 겁니다.

 

<노무현 정부 당시 외교부 국정감사 자료집의 ‘간도협약 무효’ 비사는 다음주에 하편이 계속됩니다>

 

#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