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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진실의 문’ 연다 3/ <21> “5·18이 민주화운동 된 건 정치권력 야합 탓” - <30>“게릴라戰 나서라” 무장투쟁 부추긴 김대중

상림은내고향 2024. 10. 19. 10:42

(5·18 ‘진실의 문’ 연다) 5·18 진실 찾기 3/ 스카이데일리 허겸 기자

2023.11.01

<21> “5·18이 민주화운동 된 건 정치권력 야합 탓”

김영삼, 노태우에 받은 정치자금 덮으려 5·18 특별법 선물
권력기관에 좌파 세력 대대적 기용… 김대중 집권 길 터 줘

 ▲ 박계동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노태우가 김영삼·김대중에게 건넨 비자금을 폭로하고 있다

 

북한이 사전 계획하고 주도한 것으로 미 정보당국이 확인한 1980년 5·18 광주폭동은 6공화국의 비자금이 탄로 나면서 정치적 야합의 서사 구도가 형성되는 가운데 민주화운동으로 점차 탈바꿈돼 갔다.

 

이 과정에서 보수의 탈을 쓴 좌파 세력에 지속해서 가스라이팅당한 결과 선량한 광주 시민 99.9%가 0.1%의 가짜 유공자를 위해 희생당하는 기형적 구도가 완성돼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한국을 방문 중인 마이클 리(90) 박사(미 조지 워싱턴대·정치학)는 지난달 30일 스카이데일리와 가진 단독 인터뷰에서 전두환-노태우-김영삼(YS)-김대중(DJ)으로 이어지는 정권 인계 과정에서 5·18 광주사태가 어떻게 민주화운동으로 외양을 갖추게 됐는지 담담하게 풀어냈다.

 

40년간 미국 정보요원으로서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조사하며 실체적 진실에 누구보다 가까이 접근했던 그는 북한과 북한 추종 세력의 주도로 무기고를 털고 좌익사범 170여 명이 갇혀 있던 교도소를 습격한 국가 반란 전복 폭동이 민주화운동으로 뒤바뀐 과정을 ‘화려한 사기극’으로 규정하고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운의 사건으로 꼽았다.

 

마이클 박사는 “정계에서는 한때 김영삼과 김대중이 민주화 세력과 민주화운동의 쌍두마차로 인정받았고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면서도 “애석하게도 김영삼과 김대중이 대한민국의 건국이념과 정통성을 부정하면서 평생을 살았던 것은 국민에게 불행한 일”이라고 일갈했다.

 

1987년 6.29 선언 이후 12월16일 치러진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김영삼·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승리했다. 그러나 이듬해 4월26일 실시된 13대 총선에서 민주정의당(민정당)이 확보한 의석수가 국회 과반수에 못 미치는 125석에 그치자 정치 기반이 불안정함을 느낀 노태우는 3당 합당을 시도했다.

 

1990년 1월22일 노태우의 민정당(이후 민주자유당으로 당명 개칭)과 김종필(JP)의 신민주공화당(이후 자민련 개칭),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이 합당했다. 겉모습은 거대 여당이 구축됐지만 3당은 이념적 동질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때부터 대한민국의 정통 애국 보수 세력은 병들기 시작했고 노태우가 김영삼에게 정권을 물려주면서 애국 보수의 몰락이 가속화됐다”고 마이클 박사는 진단했다.

 

5·18이 역사의 변곡점이 된 건 이때부터였다. 노태우는 김영삼을 차기 대선후보로 정하고 정권을 물려주기로 했다. 그가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민정당이 서울 송파구 가락동 연수원을 매각해 발생한 거액의 돈 중 일부였던 수백억 원을 노태우와 영부인 김옥숙 그리고 보좌관 박철언이 착복했다. 이 사실이 김윤환 민주자유당(민자당) 사무총장 귀에 들어갔고 곧이어 김영삼도 알게 됐다. 김영삼은 노태우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런 김영삼의 입을 막기 위해 노태우는 김영삼에게 정치자금 3000억 원을 줬고 대권의 바통을 물려주게 된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양측의 밀약이 외부에 드러나진 않았다. 민자당 후보로 대선에 나섰던 김영삼은 1992년 12월18일 14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김영삼은 대통령 취임사에서 비로소 자기의 정치철학과 본색을 드러냈다. “민족은 이념에 우선한다” “민족의 통합을 위해서라면 적화통일도 수용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애국 보수계 인사들은 대한민국의 정통 건국이념과 애국 보수 세력의 금자탑이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한 시점을 이때부터로 꼽는다. 이승만이 시작했고 박정희가 굳건히 다졌으며 전두환으로 지속된 대한민국의 정통 애국 보수의 궤적이 종착역에 다다른 시점으로 본 것이다. 김영삼의 취임사를 접한 애국인사들이 국가의 미래를 심각하게 염려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김영삼은 대권을 장악하면서 이승만·박정희 인맥과 전두환·노태우 계열의 민정계, 더 나아가 김종필의 자민련계 인사들을 민자당에서 조직적으로 거세했다. 철두철미한 자기 추종 좌파 세력으로 당의 조직을 개편했고 이미지 개선을 위해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꿨다. 이후 자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을 거쳐 국민의힘(국힘)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 보수당의 명맥을 이어 온 간판 정당이었지만 실상은 좌파 이념에 사로잡힌 ‘라이노(RINO)’들이 대거 포진해 있는 이상한 구조였다. 라이노는 미국식 표현이다. ‘Republican In Name Only’의 약자다. ‘무늬만 보수 공화당’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좌파적 생각을 갖고 보수당에 속해 있는 이들을 일컫는다.

 

▲ 김영삼정부가 1995년 11월30일 ‘12.12 및 5·18 사건특별수사본부’ 설치를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환 서울지검장과 수사본부장을 맡은 이종찬 3차장검사, 수사팀장을 맡은 김상희 형사3부장검사가 앉아 있다. 경향신문/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캡처

“5·18 진실 규명 못 하면 대한민국 정통성 무너져

이승만·박정희 정신 단절… 정권교체 아닌 정권교대 그쳐

대한민국 이념·정치 혼란은 모두 전교조 좌편향 교육 때문

5·18 국가 전복 폭동’으로 재정의 하고 역사 바로 세워야

 

마이클 리 박사는 “오늘날 국민의힘의 모태 격인 신한국당은 공교롭게도 김영삼의 정치 유전자를 이어받아 겉만 애국 보수정당으로 위장됐을 뿐 속은 친중·종북·반미세력이 내부에 대거 포진해 있는 형태로 태동하게 됐다”며 “이때부터 고도로 정밀하고 치밀한 공작에 뭔지도 모르는 채 놀아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통 애국 보수 세력 몰락의 시발점은 다름 아닌 김영삼이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미국을 증오하고 반미사상을 외치면 애국이요, 민주화운동으로 착각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고도 했다.

 

이 같은 근거로 “선지자적 혜안으로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진 국부 이승만 대통령과 헐벗고 굶주리던 대한민국을 밑바닥에서 세계 10대 선진국 대열에 들게 한 부국강병의 아이콘 박정희 대통령을 장기 집권 독재자로 폄하한 것을 들 수 있다”고 했다.

 

이어 “김영삼과 김대중계의 두 세력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통해 이승만·박정희의 애국과 번영의 탑을 파괴하는 데는 동일한 노선을 유지하고 협력했으나 권력 쟁탈을 위한 입장에선 서로 앙숙이었다”며 “쉽게 말하면 그들은 필요에 따라 동지이기도, 때로는 적이기도 했다”고 평가했다.

 

5·18도 이런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변질되면서 점차 민주화운동의 양상을 띠게 됐다고 마이클 박사는 지적했다. 그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김대중의 전라도 세력이 김영삼을 공격한 사건이었다”며 “1993년 이후 김영삼이 집권하면서 노태우로부터 받은 정치자금의 스캔들을 덮고 아우성치는 호남 세력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1995년 12월21일 김영삼은 광주 5·18 국가전복 무장 폭동을 민주화 민중봉기로 둔갑시키기 위해 ‘광주민주화운동특별법’을 제정했다”고 역설했다.

 

마이클 리 박사는 “이 같은 망국 범죄를 지원하기 위해 386(현 586) 운동권 세력이 북을 쳤고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협력한 대표적인 인사는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권영해와 자유한국당 대표 홍준표였다”고 좌표를 찍었다.

 

‘광주민주화운동특별법’은 법적으로도 불충분했다.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리기 위해선 재판관 9명 중 3분의 2, 즉 6명 이상이 동의해야 한다. 그러나 헌재는 위헌 5명·합헌 4명으로 한 명이 부족해 위헌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어 1996년 1월23일 5·18 특별법 재심을 위한 공소시효가 만료됐고 대법원은 1997년 4월 광주 5·18 무장 폭동을 민주화운동으로 뒤집는 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5·18을 김대중의 내란으로 판단했던 1981년 대법원 판결은 폐기됐다. 한 번 판결로써 확정된 범죄를 다시 심사할 수 없다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대법원 스스로 어긴 것이어서 오늘날까지 뒷말이 나오고 있다.

 

마이클 박사는 김영삼의 정치적 과오를 6개로 요약했다. △노태우 정권이 축출한 전교조를 다시 불러들였고 △1994년 4월 미국의 지미 카터와 합세해 빌 클린턴 대통령의 북한 영변 핵시설 폭격 작전 계획을 좌절시켰으며 △1995년 광주5·18민주화특별법을 제정했고 △대한민국의 건전한 경제를 훼손하고 IMF 신세를 지도록 한 데다 △박정희 대통령의 부국강병 반공정신을 계승하고 수호하기 위해 결성한 군부조직 하나회를 혁파했으며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이 우파 대선후보로 이회창을 선출했는데 이인제 후보를 내세워 우파의 분열을 야기한 점을 꼽았다.

 

그는 “결과적으로 김대중을 당선시키는 데 김영삼이 직·간접적으로 기여했다”며 “김영삼은 정권 쟁탈을 위한 권모술수에는 능했으나 국가관과 국가 운영의 비전이나 철학은 분명히 수준 미달이었다”고 혹평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이 그동안 겪어 온 온갖 모순과 정치적 혼란은 전교조에 의한 좌편향 교육 때문이었고 그때 미국이 영변 폭격을 계획대로 진행했더라면 남북통일이 성공했을 것”이라고 했다. CIA 한반도 전문가로서 그 당시 북한은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파산 일보 직전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이 영변을 폭격해도 대항 능력이 전혀 없었다고 그는 평가했다. 마이클 박사의 정세 분석 기고글은 월간조선 2014년 9월호에 게재됐다.

 

그는 “광주 5·18 사태를 원래대로 국가전복 무장 폭동으로 복원 판결하고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고 일갈했다.

 

리 박사는 또 “김영삼이 ‘문민정부’를 외치면서 하나회를 혁파한 이후 군부는 점차 좌파 세력으로 오염됐고 민병대 수준으로 전락했다”고 봤다. 그러곤 “김영삼의 5년 통치 기간에 국가 도처에 좌익 세력이 침투해 대한민국 파괴를 위한 조직과 모략을 구축했고 그들이 독버섯처럼 성장하도록 숙주 역할을 충실히 했다”며 허탈한 심경을 감추지 않았다.

 

리 박사와의 인터뷰 주제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정국으로 이어졌다. 그는 “이 시기에 진정한 애국 보수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며 “자유한국당은 좌파 세력의 숨은 시녀였을 뿐”이라고 꼬집었다.

 

그에 따르면 국민이 우파 인사라고 생각하는 이명박이나 홍준표도 김영삼 계열이며 박근혜 탄핵의 공범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명박은 대통령 집권 시기에도 자신과 동일한 계보이자 정신적 동일감을 공유하는 김영삼계 좌파 인사들을 하나도 손대지 않았고 오히려 탄핵정국에 가세했다고 봤다. 탄핵에 주도적 역할을 한 김무성도 김영삼 계열이며 친박 좌장 역할을 한 서청원도 김영삼 계열 출신이라고 리 박사는 개탄했다. 찬탄파(탄핵 찬성파) 주역이었던 김성태·권성동·장제원은 친이명박계이며 그들의 뿌리도 역시 김영삼이다. 리 박사는 조원진 전 의원이 친중 본색을 감추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며 태극기부대 선봉장 역할로 멋있게 ‘스턴트(stunt)’ 하면서 자신의 친중 본색을 위장하고 있는 조원진도 김영삼의 오른팔이었던 주중 대사 황병태의 보좌관 출신이며 그의 뿌리 역시 김영삼”이라고 밝혔다.

 

리 박사는 “이러한 역사적 흐름을 모르는 국민은 아직도 심각한 착각 속을 헤매고 있다”며 “문재인의 칼잡이 윤석열을 우파 대통령으로 당선 시켜 정권이 회복된 것으로 생각하고 큰 기대를 걸고 있지만 그가 취임하고 일주일 후였던 작년 5월18일 국회의원과 정부요인들을 이끌고 광주에 내려가서 김일성을 찬양하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고 비판을 이어 갔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은 지금 정권교체가 된 것이 아니며 겨우 정권 교대를 했을 뿐”이라고 개탄했다. 그는 “이승만·박정희, 그리고 두 전직 대통령에 버금가는 철두철미한 국가관과 기발한 미래지향 한미동맹 강화를 구상하고 실천적 통일정책을 추진했던 박근혜 대통령의 정통성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며 “광주 5·18 사태의 진실규명과 불법탄핵 부정선거의 법치회복 없이는 대한민국은 빈사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22> ‘광주 침투’ 임무… 딱 걸린 간첩 이창룡

李, 5월21일 軍에 막혀 광주 진입 실패… 서울에서 잡혀
당시 美대사 “공산주의자들이 배후 세력” 워싱턴에 보고
노무현·문재인정부 조사위에선 “신군부 조작” 진실 덮기

 ▲ 암호문·난수표·공작금 등 노획품과 함께 있는 이창룡 씨. 이씨는 체포당시 혀를 깨물어 솜뭉치를 입에 물고 있다. 동아일보 사진 캡처

 

1980년 5·18 때 생포된 남파 간첩 이창룡(李昌龍·본명 홍종수·당시 46세)은 광주 침투 임무를 띠고 잠입했다가 검거됐다고 당시 주한미국대사가 워싱턴에 보고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노무현정부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해동)의 2007년 보고서와 문재인정부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위원장 송선태) 6차 중간보고서의 내용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이들 조사위 보고서는 “이창룡(문서에 따라 이창용 혼용)은 광주와 무관한 데도 신군부가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고 주장했다. 진상규명위원장인 이해동 목사는 2019년 김진태 당시 자유한국당 국회의원과 지만원 박사가 5·18 망언을 했다며 국회 제명과 엄정 대응을 촉구한 인물이다.

 

송선태 위원장은 무기고 탈취와 전남도청 점령을 기획한 이른바 ‘자유노트’ 작성자이자 무장봉기 주동자로 드러나 공정한 조사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비난과 함께 위원장 제척 대상으로 거론됐다. <본지 8월2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⑧] 5·18진상조사위원장은 ‘무장봉기’ 모의 주동자 보도 참조>

 

송 위원장의 5·18조사위가 올해 6월30일 발표한 6차 보고서 244쪽은 “1980년 5월24일 간첩 이창용을 ‘광주 시위선동 임무를 띠고 남파된 간첩’으로 검거했다고 발표했던 사건은 5·18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주장했다. 노무현정부 시절인 2007년 국방부 조사위 발표보다 분량이 더 짧아졌고 추가 수록된 정보는 보고서에 없다.

 

올해 12월26일 4년간의 활동을 접는 만큼 보강된 정보 또는 새롭게 드러난 사실 없이 기존 내용대로 내년 최종 보고서에 수록될 것으로 5·18 연구가들은 예상한다.

 

2007년 보고서는 “5월16일 전남 보성을 통해 침투한 이창용의 수사 기록이나 재판 기록에선 5·18과 관련한 임무나 광주로 잠입하기 위한 시도는 발견할 수 없었다”며 “신군부 세력이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과 연관된 것처럼 여론조작을 하기 위해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고 주장했다.

 

이들 두 조사위는 비슷한 시기에 스파이 활동을 하다 체포된 남파간첩 손성모와 마찬가지로 이창룡 역시 광주와 연관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손성모는 1988년 4월 첫 공개 재판에서 “김일성 주석님의 조국 통일 노선을 실현하기 위해 나선 사람”이라고 자신의 남파 경위를 직접 밝힌 바 있다.

 

공판조서에 “조국 통일 노선 실현”이라는 손성모의 자백이 기록됐는데도 광주와는 무관하다는 해석은 “5월27일 남침을 기도한 북한이 최전방에 무력을 배치했지만 실제 남침하지 않았으니 북한이 개입하지 않았다”고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주장하는 측의 아전인수식 미 국무부 문건 해석과도 흡사한 양상을 띤다. 김일성은 박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대남적화를 위한 다수의 교시와 지령을 내렸다.

 

이후 비전향 장기수로 수감생활 하던 손성모는 김대중이 2000년 9월 북한으로 돌려보냈고 북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다.

 

미 국무부가 기밀 해제한 문건에 따르면 5·18은 ‘김대중 추종자들(Kim Daejung followers)’과 ‘북한 민간 공작대원들(North Korean Agents)’이 개입한 것으로 돼 있다. 손성모는 북한군 소속이 아닌 민간 공작원으로 남파됐다. 추종자들과 북한 민간 공작원들의 5·18 가담 과정에 김대중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다면 손성모의 북송이 김대중에겐 ‘직접적인 인적 증거를 없애는 과정’이 될 수 있다. 사실로 드러나면 전직 대통령의 예우를 박탈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 같은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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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생포 간첩 사건 배후에 외부 침입자들과 공산주의 선동가들이 있다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반면 미 정보당국은 이창룡의 배후에 공산주의자들이 있다고 봤다. 기밀 해제된 ‘외교 전문(80SEOUL 006865)’에 따르면 1980년 당시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이씨 생포 등) 이 모든 일의 배후에 ‘불순세력’과 공산주의 선동가들이 있다(‘impure elements’ and communist instigators lay behind the whole affair)”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이로써 미 정보당국과 다른 결론을 내린 노무현·문재인 조사위가 북한의 개입을 애써 외면하려 했다는 관점에 무게가 실린다.

 

5·18 연구가들은 이창룡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남파됐지만 잡히지 않은 간첩들이 더 많을 가능성에 대한 면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앞서 미국의 외교 전문도 ‘외부 침입자들(infiltrators·남파간첩들)’과 ‘공산주의 선동가들(communist instigators·고정간첩들 또는 혁명역량)’이라고 복수로 못 박아 명시하고 있어서다. 이는 북한 인민군이 아닌 민간 공작조가 광주에 침투했다는 마이클 이(Yi) 전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의 본지 인터뷰 발언과도 일치한다. <본지 10월11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⑱] “5·18은 北이 민중 봉기로 조작한 대남공작” 보도 참조>

 

안기부 상황일지와 당시 언론보도 등에 따르면 대공 수사당국은 1980년 5월16일 전남 보성군 득양면으로 침투한 간첩 이창룡을 23일 체포했다.

 

동아일보는 1980년 5월24일자에 이창룡 검거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신문은 “서울시경(서울시 경찰청)은 24일 광주시에 들어가 학생 시민들의 시위를 무장 폭동으로 유도하고 반정부 선전 및 선동 임무를 띠고 남파된 북괴 간첩 이창룡(46·평양시 중구 역경림동36)을 23일 서울 시내에서 검거하고 통신장비와 난수표 등 20여 종을 압수했다고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간첩 이씨는 체포당하는 순간 소지하고 있던 독침으로 자살을 기도했으나 경찰관에게 저지당하자 다시 혀를 깨물어 1.5cm가량의 자해상을 입었다”며 “이씨는 북괴노동당 연락부 소속으로 종전의 남파간첩과는 달리 국내 소요 지역을 대상으로 침투됐고 발각 시 자살을 원칙으로 했으며 시위 군중 속에 들어가 살인 방화 등을 조장하도록 시위군 중에게 줄 환각제를 소지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고 경찰은 밝혔다”고 했다.

 

또한 “이씨는 20일 새벽 2시경 안내원 2명의 인도로 남해안에 침투, 21일 밤 순천에 도착, 광주 잠입을 시도했으나 군경의 검문검색이 심해 모든 진입로가 차단돼 포기하고 순천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야간 특급열차로 서울로 올라와 23일 새벽 5시경 서울역에 도착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씨는 한 시간 가까이 서울역 주변을 서성거리며 오전 5시경 행인과 말을 나누다 거동을 수상히 여긴 정모(49)·최모(48) 부인 등 2명의 여관 안내원이 남대문경찰서 역전파출소에 신고해 붙잡혔다”고 신문은 검거 경위를 설명했다.

 

경찰은 이창룡이 허리에 차고 있던 공작금 193만5000원과 난수표·무전기·독침·위조주민증·은단형 환각제 등 22종 339점을 압수했다. 서울시경은 이씨를 신고한 두 부인에게 5050만 원의 포상금을 지급하고 검거 경찰관을 1계급 특진시켰다고 동아일보는 보도했다.

 

이와 관련해 김희송 씨는 5·18 관련 NGO 연구논문에서 “2017년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확인한 1980년 당시 군 수사 기록(육군 기록정보관리단)에 따르면 이창룡은 검거되기 전 부산에는 다녀왔지만 광주에는 잠입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당시 검거는 경찰이 했고 안기부가 피의자 심문을 주도했다.

 

김씨는 당시 수사했던 남대문경찰서의 피의자 신문조서와 안기부 수사 기록은 논문에서 제시하지 않았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당시 경찰은 이창룡이 군사기밀 탐지 및 국내정세 파악 현 시국과 관련된 지하공작 포섭자 대동 월북 등을 목적으로 남파된 것으로 파악했다.

▲ 1980년 5월24일자 동아일보. 신문은 ‘시위선동 간첩 검거’라고 제목을 달았다.

 

南가족 만나자 이창룡 전향 결심… 안보강사 활약

체포된 순간 독침자살 기도… 경찰 제지하자 혀 깨물기도

본명 홍종수, 고향은 양주… 시위대에 줄 환각제 다량 소지

盧·文정부, 또다른 간첩 손성모도 “광주와 무관” 일방적 판단

 

이런 가운데 본지는 이전 정권 조사위 보고서들이 반쪽짜리에 불과하며 팩트와 정황을 충실하게 파악하지 않았음을 엿보게 하는 증언을 단독으로 입수했다.

 

7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이창룡은 해상으로 침투한 뒤 뭍으로 나와 경기도 양주를 다녀온 것으로 전해진다. 양주는 그의 고향이다.

 

어득용(67) 5·18특전사명예회복위원회 회장은 “간첩 이창룡의 고향이자 원적지는 경기도 양주”라고 말했다. 어 회장의 고향도 양주다.

 

그는 최근 본지와 대면한 데 이어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6·25 전란의 와중에 월북했고 5·18 때 남파 간첩으로 내려온 이창룡은 고향인 양주를 방문했다고 고향 후배 A에게서 들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면서 “58년 개띠인 후배는 죽은 줄 알았던 큰아버지가 북에서 내려와 만났다”며 A씨가 이창룡과의 만남에 대해 어 회장에게 직접 이야기한 사실을 전했다.

 

어 회장은 “고향이 그리워 찾아왔다가 신분을 드러낼 수 없으니 형제들과 친지들이 살아 있는지 제대로 확인하지 못해 전쟁 난리 통에 모두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 임무를 수행하다 검거된 것이란 이야기를 들었다”며 “나중에 붙잡힌 뒤 전향할 수 있었던 것도 안기부 요원들이 직접 그와 형제·친지들을 만나게 해주면서 가능했다”고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했다.

 

어 회장이 전한 A씨 증언에 따르면 이창룡은 5·18 당시 시민군과 계엄군의 대치가 최고조에 달한 5월21일 삼엄한 경비 탓에 광주에 이르는 길목이 봉쇄되자 순천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광주 진입이 불발된 그는 22일 밤 열차 편으로 서울로 올라와 서울역에서 내렸지만 거동수상자로 본 주민이 신고하면서 수사당국에 덜미가 잡혔다.

 

체포되면서 독극물을 복용하고 자결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던 이창룡은 혀의 3분의 1 지점을 깨물었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안기부는 이창룡을 조사하다가 그의 원적지가 양주인 사실을 파악한 뒤 형제와 친지가 생존해 있다고 그에게 알렸다.

 

이창룡은 믿지 않았다고 한다. 6·25 당시 양주와 동두천·포천은 격전지여서 형제와 친지들이 모두 죽은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생과 조카들을 만난 이창룡은 전향의 길을 택했고 안보 강사로 활동하며 5·18 당시 광주 임무에 대해 군부대를 중심으로 강연하다 수년 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생전 남한에서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다. 배우자가 안기부 여직원이라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확인되진 않았다.

 

어 회장은 “이창룡의 여동생이 (과거) 농협에서 일했는데 몇 해 전 연락이 닿아 물어보니 ‘오빠(당숙)가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5·18 당시 계엄군 소속으로 서울의 모 대학에 배치됐던 어 회장은 “광주에 참전하진 않았다”고 표현하면서도 “제2, 제3의 이창룡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편향된 조사라는 비판을 받은 노무현·문재인 조사위는 5·18 당시 붙잡힌 손성모·이창룡 남파 간첩 사건을 광주사태와 무관한 개별 사건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당시 시대 상황으로는 광주의 소요 사태와 연관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게 오히려 합리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무장간첩은 1979년 한 해 동안 5건 침투했지만 1980년에는 1월부터 5월 초까지 4개월 동안 10차례 침투했다. 북한이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을 결정적인 적화통일의 호기로 판단했다는 방증이다. <본지 8월30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⑫] “北 공작조 개입”… 軍 ‘사전 첩보’ 있었다 보도 참조>

 

안기부 자료 등에 따르면 1980년 3월17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남쪽에 침투한 무장 공비와 미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3월23일엔 서부전선 9사단 한강하구로 침투하던 공비가 아군에게 발각돼 교전하다 도주했다. 국군은 무장 공비 3명을 사살했고 소음기가 달린 기관총과 물갈퀴·암호문을 노획했다. 암호문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전사답게 돌격대답게 싸워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3월25일 무장간첩선 1척이 포항만으로 침투하다가 해군에 의해 침몰했고 무장간첩 8명이 사살됐다.

 

3월27일 강원도 15사단 정면에서 남하하던 공비와 교전 상황이 벌어졌다. 모두 도주했고 무장 공비 1명만 사살됐다. 5월12일 비무장지대(DMZ) 공동경비구역 남쪽에 침투한 공비와 미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5월15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미군초소 전방 20m까지 침투한 무장 공비들이 미군과 교전하다가 돌아갔다. 5월16일 전남 보성군 득양면으로 침투한 간첩 이창룡이 5월23일 체포됐다.

 

일본 산케이신문은 탈북한 북한 간부 증언과 각종 기밀자료를 근거로 2004년 6월22~27일에 걸쳐 ‘김일성 비밀교시’를 연재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김일성은 5월 3호청사 부장회의에서 “남조선에서 노동자들이 드디어 들고일어났다 (중략) 남조선 혁명가들과 지하 혁명 조직들은 이번 사북 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되도록 적극 불을 붙이고 청년 학생들과 도시빈민 등 각계각층에 광범위한 민중의 연대투쟁을 조직 전개해 더 격렬한 전민항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 박사의 ‘12·12와 5·18(2009년 출간)’ 239쪽에는 1980년 5월 대공 수사당국은 일본 내각조사실로부터 “북한이 남침을 결정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애초 남침 시기는 4월 중순의 김재규 처형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사행 집행에 따른 항의 데모가 절정에 이를 때를 결정적인 시기로 봤다고 한다. 그러나 처형이 지연되자 “소요 사태가 최고조에 이를 5월15~20일 사이에 남침하기로 재결정했다”고 했다. 그해 5월10일 육군본부가 작성한 ‘북괴남침설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이 첩보는 중국 정부가 일본 방위성에 제공한 것이다.

 ]

 2군사령관도 간첩 침투 실태 보고받았다 5·18 당시 우리 군이 북한의 침투를 인지하지 못했다는 인식과 달리 실제 군당국이 의심한 정황은 곳곳에 있는 기록들에서 확인된다. 민간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위원장 정성홍)가 확보한 1981년 5월22일 발간 육군본부 교훈집 63쪽에는 1980년 5월23일 2군사령관은 참모 작전회의에서 “광주지역의 난동자중에는 가발사용자와 복면한 자 등이 다수 포함돼 있으며 특히 서울에서 온 대학생이라고 자처하는 자 20여 명이 있는 등 북괴의 ‘침투(浸透)’를 의심케 하는 실태”라고 보고받았다.

 

5·18 당시 감청을 통해 간첩 활동을 파악했다는 증언도 나온다. 전두환 회고록은 “무전 감청 결과 현장에는 무수한 간첩이 있었다“며 “하지만 정체를 밝히기 위해 군을 투입할 입장이 아니었다. 투입하면 내전이 되고 내전이 되면 북이 침략한다”고 당시 폭도와 혼재된 북한 스파이 색출이 지지부진했던 배경을 실토했다.

 

이에 따라 5·18 연구가들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보강하기 위한 조사가 아니라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 실체를 조사할 정파적 시비가 없는 조사위 구성이 필요하다고 일치된 의견을 내고 있다.

 

한 5·18 연구가는 “호남을 차별하고 민주화운동을 폄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군인이 먼저 쏜 것처럼 꾸며 낸 북한의 모략과 거짓 선동 때문에 ‘남·남 갈등(남한 시민군과 계엄군의 총격전)’이 시작된 원인을 파헤친 뒤 미얀마 아웅산 테러와 대한항공(KAL) 격추 테러 사건처럼 북한에 책임을 묻고 공산주의가 우리 사회에 끼친 해악을 국민에게 있는 그대로 알려야 할 필요성이 크다”고 본지에 알려왔다. ⊙

 

 

<23> “도청 TNT 설치 ‘北 소행’ 직감”

열차 2량 분량 터졌다면 이리역 참사 맞먹는 피해
순수한 민주화운동이라는 주장 수용하기 어려워

▲ [1] 1980년 5·18 당시 방독면을 쓴 남성들이 인명살상용 세열 수류탄과 폭약, 도화선 등을 분류하고 있다. 인화성 폭발물을 다룰 땐 가스가 분출된다는 점을 인지한 행동이란 점에서 폭약 처리에 능숙한 이들이 순수 시민인가에 대한 의문이 끊이질 않았다. [2] 배승일 문관이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을 들어 보이고 있다. [3] 육군본부가 1981년 발간한 ‘소요사태와 그 교훈’ 46쪽. “광주 소재 한국화약(주)의 보급소에서 폭약 2500상자와 뇌관 35만여 개, 도화선 4만m 등을 탈취했다”고 적혀 있다. [4] 광주매일이 1995년 펴낸 책 ‘正史 5.18’은 “다이너마이트는 계엄군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수단이었을 뿐 공격용 무기는 아니었다”는 시민군의 입장을 전하고 있다.

 

북한이 사전 계획하고 주도한 것으로 미 정보당국이 확인한 1980년 5·18 당시 전남도청 등 광주 일대에 설치된 폭발물을 운송·처리한 계엄군 장교는 “열차 2량 분량의 폭발물을 회수하면서 북한의 소행을 의심했다”고 증언했다.

 

탄약사령부 산하 제1병기탄약창 운영과장으로 근무했던 계엄군 A씨는 최근 스카이데일리와의 통화에서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가 아니고선 도저히 설치할 수 없는 폭발물의 양이어서 참담한 심정을 느꼈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러면서 “만약 폭발했다면 이리역 폭발 사고와 맞먹는 수준의 인명·재산 피해가 발생했을 텐데 폭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수한 민주화운동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현재 전라북도 익산시 위치에 있는 이리역 폭발 사고는 5·18이 일어난 해보다 3년 앞선 1977년 11월 발생했다. 다이너마이트 22t을 비롯해 폭약 30t을 수송하던 화약 열차가 이리역에서 폭발해 반경 1km까지 초토화된 사건이다. 사망 59명·중상 185명 등 사상자만 1402명이었고 완전 파괴 또는 반파된 가옥이 1591채, 일부 파손된 주택은 6042채에 달했다. 1674가정에서 이재민 7873명이 나왔다.

 

1970년 5월 광주에서 장교로 임관해 1972년부터 병기 관리를 해 온 A씨는 이리역 폭발 사고 대책 마련에도 관여했고 5·18을 전후해 광주에 있는 전투병과교육사령부(CAC) 산하 부대에 이동정비로 파견 나간 적이 있어 현지 사정에도 밝다.

 ]

지금까지 5·18 당시에는 전라남도 도청 민원실 지하에서 다이너마이트 2100발(8t)과 수류탄 450발이 계엄군 군속(현 군무원)에 의해 성공적으로 해체·수거된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A씨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 수거된 폭약의 양은 가히 충격적인 수준이다. 도청 외에도 다양한 곳에 실로 어마어마한 폭발물이 설치됐었다는 방증이다.

 

이에 대해 A씨는 “일반 시민으로선 도저히 엄두를 낼 수 없는 양이었다”며 “수거한 양만 해도 탄약고 몇 개를 지어야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심지어 “막 왕창 쏟아졌다”는 표현까지 그는 입에 담았다.

 

계엄군은 작전명 ‘뉴캡투(New Cap-2)’에 따라 광주에서 수거한 폭발물을 경남 김해의 K-2공군전투비행단으로 수송했다. 뉴캡투는 ‘야전군 탄약적송계획’이다. 전쟁 시 야전부대 적재적소에 탄약을 배송하는 군수품 조달 작전의 일환이지만, 5·18 당시엔 광주에서 수거한 폭발물을 안전하게 회수·처리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운용됐다.

 

이 작전에 따라 2만여 평 규모의 탄약창의 하치장(물품 보관·관리소)에는 군 전용 철로와 이후 트럭 편으로 옮겨진 폭발물이 내려졌다. ‘충정작전(도청 점령 작전)’을 통해 계엄군이 압수·수거한 시민군 폭발물 중 TNT를 제외한 나머지 전량이 반입된 것이다.

 

A씨는 “몸통과 뇌관이 분리된 상태로 도착한 수류탄도 있었지만 실밥과 고무줄로 뇌관이 묶인 채로 아슬아슬하게 온 경우도 있었다”고 아연실색했던 경험을 떠올렸다. 그러곤 “11t차라고 군인들이 부르는 대한통운 차 한 대에 보통 4t 분량의 폭발물이 운반되는데 총 3대 차량, 12t 분량의 수류탄이 들어 있었다”며 “나머지 한 차(4t)에는 백색 오성 신호탄 등의 인화성 물질과 폭발물이 적재돼 들어왔다”고 말했다.

 

그는 “모두 합쳐 열차 2량 분량인데 그 규모가 너무 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며 “도대체 무슨 일이 그곳에서 벌어진 것인지 폭발물 규모만 보고도 짐작할 수 있었을 정도”라고 덧붙였다.

 

육군본부가 5·18 이듬해인 1981년 5월 발간한 ‘소요진압과 그 교훈’46쪽에는 “특히 폭도들은 복면과 마스크를 착용한 채 화순광업소를 폭파하고 화약 및 TNT를 탈취하는 한편, 광주 소재 한국화약(주)의 보급소에서 폭약 2500상자와 뇌관 35만여 개, 도화선 4만m 등을 탈취했다”고 적혀 있다.

 

기록들에 따르면 시민군은 화순광업소 외에도 한국화약(주) 광주창고와 화순~광주 사이에 있는 지원동 석산채석장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훔쳤다. 김대령 박사의 ‘5·18 유공자 무용담(비봉출판사)’69쪽에 따르면 민수용(민간용) 다이너마이트와 일부 군용 TNT가 섞여 있었다.

 

이 가운데 일부는 전남도청 지하실로 반입됐고 일부 TNT는 통합병원 부근에도 설치됐다.

 

이 책에 따르면 학군단(ROTC) 장교 시절 특수전 학교에서 폭파 과목을 수강해 도청 폭발물 설치 사건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석관원 씨는 공병 부사관 출신의 공인중개사 김영덕 씨가 폭약의 양이 이리역 대폭발 사고 때보다 2배 이상이라는 것을 알고 경악했다고 한다.

 

수많은 무고한 시민이 대폭발 때문에 희생될 위험이 있었고, 이 사실을 상무대 교회에서 사역했던 문용동 전도사에게 알렸다. 김 씨도 공병부사관 출신이었지만 전남도청에 설치된 폭발장치 뇌관을 스스로 해체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시민 증언을 토대로 쓴 김 박사의 이 책과 지만원 박사의 ‘12.12와 5·18’(도서출판 시스템) 461~465쪽에 따르면 이 폭발물이 터지면 이리역 폭발 사고와 같은 규모의 비극을 초래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시민수습위원회 소속 전남대생 김창길 등은 폭약 해체를 위한 노력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 폐허로 변한 이리역 대폭발 사고 현장.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대폭발 참사났다면 누구도 민주화운동이라 못 할 것”

사 폭발물 전담요원 시민군으로 위장 침투… 몰래 해체

5·18 영웅’ 윤상원 수류탄 자폭… 폭탄해체한 게 천만다행

시위대는 엄포용이라 주장했지만 광주시민 볼모로 삼은 것

 

김창길 학생은 전투병과교육사령부(CAC)와 은밀히 접촉했고 전교사는 폭발물 전담 요원을 시민군으로 위장 투입했다. 전교사 병기근무대 소속의 배승일 군속 등을 무장시민군이 장악하고 있는 도청 지하실로 2회씩이나 잠입시켜 25일에는 밤 9시부터 새벽 1시까지, 26일에 다시 잠입해 오전과 오후에 걸쳐 피를 말리면서 뇌관을 제거했다.

 

배씨는 월간조선 2020년 5월호에 보도된 5·18 특집 인터뷰에서 “도청 내의 TNT·다이너마이트 뇌관과 손가락 길이 정도의 도화선으로 장치한 폭약 뭉치 2100개의 뇌관을 제거한 후 충전물 콤포지션(도폭선)과 한 발당 위력 18m인 인마살상용 세열수류탄 450발의 신관을 제거했다”고 말했다.

 ]

그는 “최루탄 신관을 제거하려고 했으나 잘못하다가는 탄로가 날까 봐 그만두고 다량의 전기뇌관·비전기뇌관·소구경 탄약인 카빈탄·M1탄·30LMG탄·50MG 탄약을 분류했다”고 증언했다.

 

월간조선은 당시 도청에 다이너마이트와 수류탄 등 폭약이 8t 트럭 4대분이 있었고 추정치지만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라고 보도했다.

 

김 박사의 ‘5·18 유공자 무용담’은 전남도청 지하실에 대한석탄공사 화순광업소에서 탈취한 8t 트럭 1대 분량의 다이너마이트(TNT)와 콤포지션에 전문가의 솜씨로 뇌관까지 설치해 언제라도 폭발시킬 수 있는 준비상태로 만들어 놓고 계엄군이 다시 시내로 진입해 오면 이를 폭파해 광주시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협박했다고 했다.

 

시민군은 80만 인구가 사는 광주시 도심 한복판인 전남도청 안에 수십 t의 TNT 폭발 장치를 설치해 놓았다. 그 TNT 폭발 장치는 집단자폭용 무기였고 도청 옆에는 주택가가 다닥다닥 붙어있었기에 일순간에 금남로와 산수동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 피해는 광주 전 지역에 미칠 것이었다.

 

특히 5·18 연구가들은 인화성 물질로 가득한 창고가 대폭발한 2020년 8월4일 레바논 베이루트 항구 창고 폭발 사고와 종종 비교한다. 당시 157명이 사망하고 5000명이 중상을 당했다. 이재민은 30만 명이었다.

 

5·18 연구가들은 베이루트는 주유소와 도시가스·주택이 없는 곳에서 발생했지만 1980년 5월 전남도청 주변에는 주유소와 도시가스가 줄줄이 연결된 주택들이 밀집해 있어 폭발 시 피해 규모가 베이루트를 앞질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광주 최고의 폭약 전문가가 분해하는 데만 꼬박 이틀이 걸렸다. 그런데 5월22일 단 몇 시간 내에 수십 t의 산업용 다이너마이트와 군용 TNT를 도청으로 수송해 전광석화처럼 대형 폭파망을 구성하고 뇌관 설치를 완료한 난동자들이 누구인지 의문은 끊임없이 계속됐다.

 

무등일보는 2015년 4월 화순광업소에 근무하던 김영복 등 13명이 “순전히 엄포용”으로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했다고 보도했다. 이 글은 신문기자가 아닌 당시 광주시 인권옴부즈맨으로 일하던 안종철 씨가 썼다.

 

북한 개입설을 반박한 책 ‘5·18 때 북한군이 광주에 왔다고?(아시아문화커뮤니티·2016년)’의 저자인 안씨는 문재인정부가 만든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위원장 송선태)에서 부위원장을 맡았다. 조사위는 내부 문제로 9월1일 안 부위원장에 대해 사직 권고안을 냈고 위원 7명 중 4명이 찬성했다고 광주MBC가 보도했지만 안씨는 지난달 13일 국회에서 열린 5·18조사위에 대한 국정감사에 출석한 바 있다.

 

안씨는 2015년 무등일보 기고글에서 지 박사가 발언했던 전남도청 지하실에 있던 ‘8t 분량의 TNT, 40㎞ 길이의 도화선’이 거짓이라고 지적하며 실제론 16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를 “한 신문사에서 펴낸 ‘5·18 正史(정사)’”라고 밝혔다. 광주매일이 1995년 펴낸 책이다. 정작 ‘正史 5·18’ 352쪽에는 “이날 밤 전남도청 지하실로 옮겨진 다이너마이트는 무려 8t 트럭 1대분, 전남도청은 물론 광주 시내 중심가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엄청난 양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지 박사가 인용했던 ‘8t 분량의 TNT'라는 내용과 동일하게 기재된 것이다.

 

또한 이 분량은 광주일보 1996년 10월10일자에 ‘당시 폭약량은 리어카 2~3대 분량’이라는 시민군 측 증언보다도 훨씬 많은 것이다.

 

‘正史 5·18’ 350쪽에선 “가공할 만한 살상 능력을 지닌 다이너마이트를 입수한 시위대는 환호한다 (중략) 다이너마이트를 효율적으로 활용한다면 광란상태에 빠져 있는 계엄군들과의 거리를 최소한이나마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라며 “다이너마이트는 계엄군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수단이었을 뿐 공격용 무기는 아니었다”고 적혀 있다.

 

이에 대해 뜻밖에 북한 서적은 그 목적을 달리 설명한다.

 

북한이 발간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588쪽에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건물을 몽땅 폭파해 버리기 위한 모든 장치까지 다 준비했다. 그런데 적들이 공격을 몇 시간 앞두고 밀정을 침투시켜 뢰관(뇌관)을 모두 분해해 버렸기 때문에 계획대로 실현되지 못했다”고 했다.

 

또한 시민군 측이 5·18의 영웅으로 칭송하는 윤상원이 숨지기 전 수류탄으로 자폭한 사실도 드러났다. 배승일 군무원이 뇌관을 폭약의 몸통과 분리하지 않았다면 연쇄 폭발로 광주시가 참혹한 불바다로 바뀔 수 있었다는 점에서 윤상원의 수류탄 자폭사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

김 박사의 ‘5·18 유공자 무용담’ 68쪽에는 “윤상원이 5월27일 아침 수류탄으로 자폭한 이유도 폭발물 뇌관에 불을 붙이려는 순간 수십 톤 분량의 뇌관이 전부 분리된 것을, 시민군 중에 누군가가 자기를 배신했다는 것을 그때에야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고 돼 있다.

 

5·18에 대해 연구해 온 신기훈 육군3사구국동지회 초대회장은 “전남도청의 다이너마이트가 터져서 이리역 폭발사고처럼 현장이 폐허로 돌변하고 광주시민들이 숨졌다면 누구도 5·18을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를 순 없었을 것”이라며 “광주시민 전체의 생명을 인질로 삼은 반란 같은 폭동이었지만 온건파 학생들과 광주에 살지 않는 계엄군은 목숨을 걸고 광주시민을 이리역 폭발 사고의 악몽으로부터 해방해 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광주시민이 잘못 이해하는 것처럼 경상도 계엄군이 전라도 시민을 죽이러 왔다면 계엄군이 들통나면 죽을 각오로 시민군으로 위장해 들어가 그 엄청난 분량의 뇌관들을 하나씩 분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난동자가 누구인지 실체를 규명하는 작업은 호남인을 바라보는 외지인의 편견을 없애는 일에도 분명히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

 

 

<24> 탈북작가 “北 광주 개입은 명백한 사실”

교란작전 참여자, 김일성에 ‘공화국 영웅’ 칭호 받아
5·18 남파특수군 실화담은 ‘보랏빛 호수’ 펴냈다 집유
3년 법적 리스크 벗자마자 본지에 통한의 울분 털어놔

 ▲ 5·18에 남파된 북한 특수군의 실화를 담은 논픽션 ‘보랏빛 호수’의 저자인 탈북작가 이주성 씨가 20일 스카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속내를 털어놓고 있다. @스카이데일리

 

“북한군 1010부대장 문제심의 호위병으로 당시 19세 전투원이었던 정순성(62) 씨는 1980년 5월 광주폭동 때 남조선 광주에 침투해 먼저 파견됐던 북한 특수부대 전투원들의 교란작전을 지도했습니다. 이 공로로 북한으로 돌아간 뒤 김일성으로부터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습니다. 영웅증서에는 1980년 6월15일 김일성 이름까지 쓰여 있습니다.”

 

5·18에 남파된 북한 특수군의 실화를 담은 논픽션 ‘보랏빛 호수(비봉출판사·2017년)’를 썼다가 국론분열의 주역으로 내몰린 탈북작가 이주성(사진·58) 씨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가 민주화운동을 부정하려는 게 아닙니다. 단지 그 자리에 북한군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겁니다. 있는 사실을 사실이라 말한 게 남한에선 이렇게 죄가 된답니까.”

 

인터뷰 도중 긴 한숨을 자주 내쉰 그는 때때로 밀려오는 울분을 참지 못해 말문이 막히기도 했다. ‘동토의 땅’ 북한을 등지고 남한에 정착한 탈북인으로서 첫 수업비용이라 치기엔 너무 비싸고 고통스러웠다.

 

“사기 치는 사람 조심하란 말은 하나원에서 들었어도 말할 자유를 억압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인터뷰엔 짙은 회환이 배어 있었다.

 

마치 영겁의 세월이 흐른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모진 수난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충북 강연에선 60cm 장도(長刀)를 휘두르는 괴한과 마주했지만 살아남았고 광주에서는 겹겹이 에워싼 이들로부터 갖은 쌍소리를 듣고 폭행까지 당해야 했다. 이 모든 과정은 일간지에 보도됐다.

 

김대중이 김일성과 5·18을 배후 조종했다고 썼다가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당한 이씨에겐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됐다. 2020년 6월 서울서부지법 형사3단독 진재경 판사는 “보편적인 자료를 외면한 채 발언해 고인인 피해자(김대중)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판시했다.

 

미국 대북인권운동가 수잔 솔티 여사를 비롯해 미국과 영국 등 국제탈북인권단체들이 공소를 기각해달라며 잇달아 탄원을 제기하면서 교도소까지 가는 수모를 당하진 않았지만 그에겐 악몽과도 다름없는 시간이었다. 자유가 그리워 남한행을 택했다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는 인고의 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뜻하지 않게 한국 사회의 미숙함을 고스란히 책임으로 떠안는 것도 온전히 그의 몫이 됐다.

 

최근 집행유예 형기를 마치며 법적 리스크 부담을 모두 털어낸 이씨는 20일 스카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가짜에 속는 남한 국민이 안타깝다”며 이같이 못다 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3년 동안 말할 권리를 빼앗겼던 그의 입에서 꽁꽁 묶였던 진실이 쏟아져 나왔다.

 

보랏빛 호수는 5·18에 남파됐던 정순성(가명) 씨의 이야기를 담은 논픽션이다. 정씨는 김명국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으며 두 이름 모두 가명이다. 다시 탈북해 남한에 정착한 정씨의 5·18 체험담은 내용이 너무나도 구체적이어서 화제를 모았다. 논픽션은 상상으로 꾸민 허구가 아닌 사실에 근거해 쓴 작품을 의미한다. 표준 국어 대사전에는 실화로 분류돼 있다.

 

이씨는 “소설 형식을 빌렸지만 이 책은 논픽션이어서 사람 이름만 빼고 다 사실”이라고 전제했다. 그러면서 “당시 JTBC 방송국에서 증언자인 정씨를 찾아가는 등 일이 복잡하게 되자 정씨가 나를 찾아와서 ‘없던 일로 하자’ ‘미안하다’며 나한테 사죄한 내용도 녹음 파일로 다 갖고 있다”고 본지에 밝혔다.

 

이씨의 말은 사실이었다.

 

본지가 입수한 녹취파일에 따르면 정씨는 이씨에게 “5·18 때 안 내려온 것으로 하겠다. 나 때문에 (함께 탈북한) 가족들이 힘들다. 내가 끝까지 가지 못해 미안하다”고 이씨에게 입장을 번복한 데 대한 양해를 구한 것으로 확인됐다.

 

정씨는 2021년 3월27일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위원장 송선태)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이씨와 통화했다.

 

이씨가 조사 결과를 묻자 정씨는 “주성이는 잘못이 없다. 내가 말한 걸 책으로 옮긴 것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들(조사위)은 사실에 기초한 논픽션이라는 게 문제라고 하더라”라고 설명했다. 이어 “너한테는 미안한데 이것 때문에 내가 집안에서 몰린다. 우리 딸도 OO 사업 중지해야 하고 아내도 아들도 말린다”고 정씨는 안팎으로 압박이 만만치 않다고 호소했다.

 

이씨가 “형님은 5·18 때 광주에 내려오지 않은 것으로 저들(조사위)이 하기로 한 것인가. 내가 이 문제로 징역까지 받지 않았나. 정확히 말해달라”고 되묻자 정씨는 “2~3년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평양 OO OO 교양실에도 자료들이 있으니 내가 구해보려고 한다고 말했더니 자기네(조사위)는 진상위원회니까 3년 후 보고해야 한다고 하더라”라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정씨는 “정순성도 김명국도 나다. 이런 문제 가지고 내가 돈을 벌려는 것도 아니고 처음에 주성이가 (5·18에 남파된 탈북자) 이런 사람이 (남한에) 들어온 것을 알고 찾아와 내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하고 자료를 제공한 것은 사실인데 머리가 아프니까 나는 안 왔다고 했다”며 “조사위가 내려왔던 적이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 ‘없다’고 했고 앞으론 찾지 말라고 끝났다. (내가 내려온 게 아니고) 우리 조장 이상국이가 말한 소리를 이주성이에게 들려준 것으로 나는 말하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얘네가 (형님이) 안 내려왔다고 했으니까 떠들면서 우리를 사기꾼으로 몰겠네”라고 했고, 정씨는 “나도 그렇게 되겠지”라고 외부 반응을 염려했다. 이씨가 다시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 있나”라고 말하자 정씨는 “니하고 내하고만 (5·18 북한군 개입) 말해서 되겠니. 내가 끝까지 가지 못해서 미안한데 이 문제로 이렇게 복잡할 줄 몰랐다”고 재판을 받은 이씨의 증언을 뒷받침하지 못한 데 대한 미안함을 표시했다.

 

이씨는 본지 인터뷰에서 “당시 정씨의 아내와 아들·딸이 적극적으로 말렸다”며 “사실을 말한다고 돈이 들어오는 일도 아닌데 괜히 나서서 피해받지 말고 가만히 있을 것을 종용했다”고 말했다.

“사실 말한 게 죄냐 가짜에 속는 남한 안타깝다”

논픽션이라지만 등장 인물 이름 빼고 실제 일어난 일

증언자는 남파 총책 김중린 측근 문제심 호위군관 출신

자신의 입장 난처해지자 내게 “없던 일로 하자” 통사정

▲ ‘보랏빛 호수’ 표지

 

보랏빛 호수 93쪽은 문제심의 등장을 묘사한다. 문제심은 북한 1010군부대 부대장이자 중앙당연락소 소장이다. 북한 노동당 대남공작 총책 김중린의 심복이다. 김중린은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남한 내 무장 폭동을 직접 기획하고 김일성에게 보고해 승인받은 당사자이다.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을 지낸 마이클 이(90) 박사는 본지 인터뷰에서 “5·18은 북한이 민중 봉기로 조작한 대남공작이었고 김중린이 총책임자였음을 미 정보당국이 확인했다”고 밝힌 바 있다. <본지 10월11일자 “5·18은 北이 민중 봉기로 조작한 대남공작” 보도 참조>

 

책에 따르면 김중린의 최측근 문제심을 가까이서 보좌한 호위병이 정순성 씨다. 정씨 증언을 기초로 제작된 책에는 문제심의 등장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1980년 1월 중순. 중형 검은 벤츠 승용차 한 대가 평양시 중구역 대동강 옥류교 다리를 벗어나 서포구역 대양리 방향의 도로를 따라 달렸다. (중략) 벤츠 승용차에는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중장(한국군의 소장)복 차림의 군인이 타고 있었다. (중략) 그는 1010군부대 부대장(중앙당연락소 소장) 문제심이었다. 북한 정권 대남전략의 일선에서 한몫을 담당하고 있는 문제심은 당중앙군사위원회 비상회의에 참가하고 오는 길이었다.’

 

‘요즘 문제심은 낮과 밤이 따로 없었다. 3개월 전부터였다. 교도지도총국(저격·경보병·항공육전대)과 조선인민군 정찰국에 김일성의 명령이 하달됐다. 정신적·육체적으로 준비가 된 우수한 전투원들을 선발하라는 지시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저격당한 사건이 일어나자 김일성은 쾌재를 불렀다. 남조선을 먹을 수 있는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죽 가마처럼 끓고 있는 혼란한 남조선의 정세를 이용해서 몇 달 전부터 광주에서 군사작전을 벌일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씨가 처음 정씨의 5·18 남파 이야기를 접한 것은 2006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탈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는 당시 태국에 있었다. 그곳엔 150명 정도의 탈북인이 있었다고 했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픽업하는 일을 도맡았다. 우연히 차에 태운 정씨의 탈북한 여동생이 자기 오빠가 겪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글감이 되겠다 싶어 2007년 3·4월쯤 직접 정씨를 찾아갔고 이틀 밤을 그 집에 머무르며 책의 초고를 작성했다”고 이씨는 말했다.

 

책의 파장은 컸다. 5·18 때 광주에 내려온 북한군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 영웅 대접을 받으며 살다가 개인적인 잘못으로 북한을 도망치듯 빠져나와 남한에 정착한 과정이 마치 소설로 들릴법했다. 이씨는 그가 북한에 있을 때 조사한 내용에다 정씨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조합해 ‘보랏빛 호수’를 썼다. 책이 출간된 게 2017년 5월15일이다. 10쇄를 넘겨 찍으며 꽤 잘 팔린 것으로 전해졌다. 지금은 절판됐다.

 

이씨는 울분을 삼켰다. 필화사건으로 징역형 처벌을 내린 건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했다. 1960년대에는 남정현이 소설 ‘분지’로 용공성 시비에 휘말렸고 1980년대에는 한수산이 장편소설 ‘욕망의 거리’로 인해 법정에 불려 갔다. 2020년에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 시절의 후진성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말해 준다.

 

길고 고통스러운 앓음을 통해 이씨가 깨달은 것은 “한국 사회 만만치 않다”는 류의 진부한 클리셰가 아니었다. 오히려 뭉클한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의 값어치였다. 탈북인으로서 질곡을 헤친 극복의 시간이기도 했다.

 

갖은 수난을 겪었지만 그는 굽히지 않았다. 북한도 아닌 남한, 적어도 그가 살고 있고 살아야 할 이 땅에선 진실을 말한 죗값만큼은 없어야 한다고 믿어서다. 작가로서 그가 녹여내는 삶의 모습은 적어도 진실한 내면에 기초해야 한다는 지론 때문이었다. 여느 사람들이었다면 충분히 움츠러들고 스스로를 감출 법한데도 그는 본지와의 직격 인터뷰에 응했고 가감 없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 그래서 이번 인터뷰는 ‘탈북작가 이주성’만의 낡지 않은 정신의 오롯함을 엿보게 했다.

 

이씨는 “대국민 공개 토론회나 기자회견을 할 생각이었다”며 스카이데일리가 어느 쪽 편도 들지 않고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들어 줄 것을 당부했다. 또한 “인터뷰가 끝난 후 모든 기록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남기고 싶다”고 고백했다. 그는 영화 제작에 도움을 줄 귀인을 찾고 있다고 덧붙였다.

문제심이 김일성에게 보고한 작전계획

(출처: ‘보랏빛 호수’ 101~103쪽)

첫째 :

교도지도국[대남연락소·해상·육상저격부대와 경보병·항공육전대·군단정찰]에서 남조선 광주 현지에 파견할 군인들을 정치 사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준비된 25세 이하 모범 군인들로 인원을 선발하려고 합니다.

둘째 :

아시아 자동차 공장을 습격해 트럭과 장갑차를 노획하려고 합니다. 트럭과 장갑차를 이용함으로써 폭동에 필요한 인원과 물자를 이동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광주와 전라도 나아가 남조선 전역에 폭동을 확대시킬 수 있는 보다 쉽고 효율적인 성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셋째 :

전라도 전 지역에 있는 무기고를 습격 탈취해 폭동군을 무장시키려고 합니다. 이미 구체적인 계획안과 남조선 광주지역 조사를 끝냈으며 현지에 파견돼 활동하고 있는 공작조들이 행동으로 옮길 만반의 준비가 돼 있습니다.

넷째 :

광주 폭동에 파견하는 조선 인민 특수부대원들을 괴뢰군(북한에게 괴뢰군은 한국 계엄군)으로 가장시켜 침투시키려고 합니다. 그들이 시위에 참가한 광주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유언비어를 비롯한 각종 심리전을 벌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광주와 전라도 나아가 남조선 인민들을 극도로 자극시켜 시위 진압군과 괴뢰 군부세력에 대한 분노를 유발케 해 폭동에 합류시킬 계획입니다.

다섯째 :

우리 군인들을 대학생 또는 시민으로 위장 침투시켜 폭동진압 괴뢰군들에게 사격을 하려는 계획입니다. 남조선 군부와 군인들 쪽에서 사상자가 나오면 그들은 자제력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무차별 사격과 진압을 유도해 양측에서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다면 그만큼 폭동을 확대시키는 데 있어 우리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될 것입니다.

여섯째 :

남조선, 특히 전라도 말과 억양에 능숙해야 하는 관계로 언어 교육을 남조선에 침투하는 그날까지 집중적으로 하려고 합니다.

일곱째 :

남조선 대학생들이나 사회 청년들을 비롯한 현지인들과 복장 및 모습이 같아야 하는 관계로 머리를 장발로 길러 활동하는 데 유리한 환경을 만들려고 합니다.

여덟째 :

폭동 성공 가능성입니다. 박정희가 사살된 지금의 정세는 우리가 남조선 괴뢰정부를 무너뜨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입니다. 특히 김대중을 미친 듯이 섬기고 있는 전라도민들, 특히 광주의 민심은 터지기 직전의 화약고라는 소식들이 현지에서 들어오고 있습니다. 작은 사건이라도 지역감정을 건드리는 기폭제 같은 사건을 만들어 낸다면 그들은 불나방이 되는 줄 알면서도 들고 일어날 것입니다. 이런 지역감정들을 폭동에 이용한다면 보다 손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아홉째 :

폭동이 일어나면 그곳 현지 상황에 대한 중계를 구체적이고 신속하게 보도할 종군기자들을 현지에 파견하는 문제들에 대한 대책이 요구됩니다. 국내외 폭동 현장을 현지 중계함으로써 남조선 인민들로 하여금 괴뢰군에 대한 분노를 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전국적인 폭동을 유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려고 합니다.

열째 :

광주폭동에 참가한 전 조선인민군 특수부대원들의 신분이 노출되면 안 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모든 군인들이 마스크 또는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작전에 참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려고 합니다.

 

<25> 위컴 장군 “총 뺏은 폭도는 소탕 마땅”

“공권력에 대응하는 권력은 절대 있을 수 없어”
前공수부대 지역대장 “간첩 섞여 있는 건 상식”

980년 5·18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존 A 위컴(John Adams Wickham) 장군은 광주사태에서 민간인이 군·경(군인과 경찰)의 총을 빼앗아 군인에 대응한 것은 Another Enemy(또다른 적)로 간주되며 정규군이 즉각 소탕해야 한다고 발언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정린 전 국방부 차관은 27일 (사)국군명예회복운동본부(이사장 장낙승) 창립식 축사에서 “위컴 사령관은 ‘국가에는 정규군보다 더 강한 집단이 있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 존 A 위컴 전 주한미군사령관

미 정보당국은 일찌감치 5·18 광주폭동은 북한이 사전 계획하고 주도한 것으로 판단했다. 미 국무부가 기밀 해제한 문건은 5·18이 ‘김대중 추종자들(Kim Daejung followers)’과 ‘북한 민간 공작대원들(North Korean Agents)’이 개입한 것으로 공식 기록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기밀 해제된 문서번호 ‘80SEOUL 006865’의 외교 전문에 따르면 1980년 당시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간첩 이창룡 생포 등) 이 모든 일의 배후에 ‘불순세력’과 공산주의 선동가들이 있다(impure elements’ and communist instigators lay behind the whole affair)”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이런 가운데 미 정보당국과 국무부·주한미국대사에 이어 5·18을 바라보는 주한미군사령관의 인식이 전직 한국 국방차관의 발언을 통해 처음 공개된 것이다.

 

이 전 차관은 “5·18 당시 합참의장 보좌관을 지냈다”며 위컴 장군의 직접 발언을 전해 들었던 시공간적 배경을 설명한 뒤 “공권력에 대응하는 권력은 있을 수 없고, 미국 경찰에 대응하는 자에 대해 미국 경찰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면 미국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고 위컴 장군의 발언을 전했다.

 

이에 대해 한 5·18 연구가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왕조시대에도 무력으로 왕정에 대항하는 것을 항적(抗敵)이라고 했다”며 “역적으로 보고 용인해선 안 된다는 개념인데 오늘날 만약 누군가 서울광장에서 경찰에게서 총을 빼앗아 경찰을 쏘면 강력하게 엄벌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

 

5·18 당시 시위대의 항거 패턴은 부마사태 때와 달랐다는 증언도 나왔다.

 

1979년 부마사태와 1980년 5·18에 폭동진압 작전군으로 참가했던 전직 공수부대 지역대장은 “부마 때와 달리 5·18 당시 폭도들 속엔 분명히 간첩이 섞여 있다는 생각은 공수대원들에겐 상식이었다”고 증언했다.

 

3공수특전여단 13대대 9지역대장으로 광주에 갔던 이상휴(74) 씨는 27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노끈으로 운전대를 고정하고 액셀에 돌을 괸 트럭이 부대원을 향해 쉴 새 없이 돌진하는 사이 신원미상의 운전자는 차에서 뛰어내리길 반복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일들이 되풀이되면서 시민은 도저히 이같이 할 수 없다고 우리(공수대원)들은 확신했고 간첩 한 마리만 잡으면 영웅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작전에 임했다”고 지역대장으로서 당시 느꼈던 책임의 무게를 떠올렸다.

 

대위급 중대장을 지휘하는 지역대장은 통상 소령급이다. 이씨는 최고참 대위였다. 임기를 꽉 채우고 진급을 앞둔 경우다. 곧 소령이 될 대위 최고참으로서 지역대장을 맡았다. 중대장으로서 부마사태에, 지역대장으로서 5·18에서 작전을 펼친 것이다.

 

이씨는 “부마사태는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고 대학생 임원이 지휘했는데 트럭 뒷문을 열고 토끼몰이식으로 에워싸면 자동으로 차량에 승차했고 부산 구덕운동장에 하차시켜 각서 받고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며 “그러나 광주사태는 군조직을 방불케 하는 아주 체계적이고 조직적이어서 간첩이 지휘한 도발이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경기도 성남 위례신도시 쪽에 주둔한 3공수는 5·18 당시 광주 파견 직후 전남대에 주둔했다. 도청으로 향하는 시위대를 차단하라는 임무를 받았고 곧이어 광주시청과 교도소를 사수하라는 무전 명령이 떨어졌다고 했다.

 

당시 3공수는 모든 작전 임무를 지역대 단위로 수행했다. 특수부대인 공수부대는 일반 부대보다 적은 병력으로 운용된다. 한 개 중대는 장교와 하사관을 합쳐 보통 12명이다. 지역대는 4개 중대 50여 명으로 구성된다. 모두 장교와 하사관으로 구성된 공수부대 중에서도 정예부대다. 다른 공수부대는 일반 사병이 포함되기도 했지만 3공수엔 사병이 없었다.

▲ (사)국군명예회복운동본부와 5·18특전사명예회복위원회가 27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국군명예회복운동본부 창립식 및 5·18 진상규명 세미나’를 개최한 가운데 이상휴(왼쪽) 전 3공수여단 13대대 9지역대장이 광주사태에서 체험담을 전했다. 이날 세미나에서 이정린 전 국방부 차관이 축사를 하고 있다. 박미나 선임기자

“간첩개입 확신… 꼭 잡아 영웅되자” 작전 중 결의

노끈으로 트럭 핸들 묶고 액셀은 돌로 누른 채 돌진

부마사태와 달리 조직적·체계적… 전문가 지휘 솜씨

전투력 뛰어난 3공수조차 수세에 몰릴 정도로 강해

 

모두 직업 군인으로 이뤄진 3공수는 전투력이 상대적으로 더 강했다고 당시 육군본부는 평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조차 수세에 몰릴 정도로 조직적인 도발에 직면했고 부대원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고 했다.

 

이씨는 아시아자동차 생산 군용트럭과 민간 관광버스·장갑차(APC)들이 3공수부대원들을 향해 무차별 돌진하는 사태가 연속적으로 계속됐다 트럭 짐칸에 장작을 싣고 기름을 부어 불을 붙이고 운전자는 액셀 아래에 돌을 괴고 운전대를 나무로 고정한 채로 중간에 뛰어내렸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면서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오늘날 각 부대 정문 앞에 있는 철침판과 같은 것을 제작해 도로에 깔아 놓았는데 불에 탄 차량 돌진 공격이 계속되자 타이어가 파손된 차들이 방향을 잃고 도로 옆 민가를 덮쳐 많은 화재가 발생했고 이 차에 부딪친 16대대장 지프차가 전복돼 대대장이 다치고 운전병이 죽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계엄군의 사격도 있었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어느 대대 지역대장인지 확인할 수 없었으나 인도 가로수 뒤에서 돌진하는 차량 바퀴 타이어에 실탄을 자동 발사하는 광경을 봤다”며 “차량이 전복돼야 하는데 한 대도 전복되지 않았다. 타이어가 파손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기억했다. 당시 지역대장에게는 사전에 실탄이 지급돼 탄창을 휴대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총기 제원과 보급된 실탄 양에 대해 묻자 “M16 탄창은 총알 20발들이었고 당시엔 최초 3발은 공포탄을 넣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17발씩 두 개 탄창이니 총 34발이 지역대장에게 있었고 이것을 돌진해 오는 차량을 향해 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씨는 동료 지역대장이 총을 쏴도 타이어가 터지지 않은 상황을 유심히 지켜봤고 5·18이 끝난 뒤 부대에서 타이어를 향해 직접 사격하는 검사를 해봤다고 증언했다. 그는 “(훈련 때) 아무리 총을 쏴도 타이어가 터지지 않은 것을 보고 원인을 연구해 보니 회전하는 타이어가 총알을 튕겨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일각에선 폭도 차량을 향한 사격을 일컬어 “사격명령이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이 전 국방부 차관은 “5·18 때 사격명령을 내린 사람은 없다. 위협을 느끼면 군인이 총을 쏘게 돼 있다”고 잘라 말했다. 불에 탄 채로 군인을 향해 돌진하는 차를 향해 총을 쏘는 건 군인의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한 불가피하고 정당한 조치라는 설명이다.

 

돌진 차량이 아니고선 어떤 예외적 상황에도 시민을 향해 총을 쏜 일은 없다고 단언했다. 이상휴 씨는 “전남대에 집결한 군인들을 수만 명으로 추정되는 시민이 포위했다”며 “실탄 한 발 사용하지 않고 가스탄을 쏘며 대대별로 퇴로를 뚫어 간신히 전남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처럼 수세에 몰려 가까스로 생명을 부지했는데 지난해 KBS 특집 다큐에서 3공수를 학살자로 매도하는 방송에 크게 분개해 KBS 측에 전화와 이메일로 항의했다고 그는 말했다.

 

이씨는 “작년 5월18일 KBS1 방송에서 3공수 정보참모(소령)를 했다는 사람이 전남대에서 시민 180명을 생포해 군용트럭 3대에 60명씩 나눠 태우고 차량 호로(천막)를 씌우고 저항 못하게 가스탄을 3회에 걸쳐 터뜨리면서 교도소로 철수했는데 도착하니 6명이 질식사했다고 말했다”며 “목숨을 걸고 전남대를 빠져나와야 할 상황에 시민군을 생포했고 6명을 질식해 죽게 했다는 건 명백한 거짓 증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방송을 보면서 나와 동선이 겹친다고 느꼈는데 증언이 모두 엉터리였다”며 “탈출하기 바빴는데 시민을 생포하려고 시도했다면 공수부대 군인들이 오히려 시민들에게 붙잡혔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군용트럭은 1개 분대 10여 명 승차가 정원이며 최대 15명까지 승차가 가능할 것”이라며 “호로를 둘러치고 있으면 더 공간이 협소해져 인형도 짐짝처럼 60개를 실을 수 없는 좁은 곳에 생사람 60명을 태웠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반박했다.

 

또 “부사관 3명이 본인인지 대역인지 알 수 없으나 방송에서 시민의 시신 3구를 교도소 정문 앞에 가매장했다고 증언했다”며 “교도소에 대한 폭도들의 군대식 공격이 잇따르자 이에 대응해 참호를 파고 매복을 서던 부대가 내가 통솔하던 9지역대였는데 우리 허락도 없이 정문으로 나와 땅을 파고 시신을 묻는 일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거짓말”이라고 했다.

 

이어 “전남대에서 교도소로 전술 행군을 하던 도중 인근 민가에서 무차별 사격을 가해와 부대원이 총상을 입은 사건이 있었다”며 “민가를 포위하고 집을 수색한 결과 집 천장에서 M1및 칼빈 소총 수십 자루를 노획했다”고 덧붙였다.

 

대학 졸업 후 3사8기 장교로 임관한 이씨는 군 생활 중 육군 ‘재구상’을 받았다. 재구상은 수류탄을 몸으로 덮어 동료를 살린 강재구 소령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투철한 군인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66년 제정됐다. 군인이 가장 영예롭게 생각하는 상이다. 

 

<26> “광주서 北과 5000회 이상 교신

5월29일 영광 불갑산 중계소서 특이 교신 포착
호출부호 ‘청천강’ 北어투로 “천 61번지 어데냐”
5·18 연구가 “사실상 고첩·남파간첩 암약 증거”

 ▲ 1980년 5·18 기간에 광주에서 북으로 넘어간 교신이 5000회가 넘는다는 증언이 나온 가운데 경찰이 5월29일 ‘청천강’이라는 북한 지명을 사용하는 호출부호를 포착한 사실이 확인됐다. 청천강은 북한의 평안북도와 평안남도의 경계를 이루는 강이다. 남쪽에는 평양을 가로지르는 대동강이 흐르고 북쪽엔 압록강이 있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일어난 장소다.

 

북한이 사전 계획하고 주도한 것으로 미 정보당국이 확인한 1980년 5·18 당시 경찰이 북한 호출부호로 추정되는 다량의 교신을 감청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이 5·18 항쟁기간(5월18~27일)을 전후해 광주에서 북으로 넘어간 교신이 5000회가 넘는다는 복수의 증언도 새롭게 공개됐다.

 

5·18 연구가들은 이것이 사실상 고정간첩 또는 남파간첩이 암약했다는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5일 본지가 단독 입수한 20사단 60·61연대 진압 상황일지에 따르면 경찰은 5월29일 전남 영광의 불갑산 중계소에서 특이한 교신 내용을 감청했다.

 

경찰은 이날 오후 2시43분 ‘청천강’이라는 호출부호를 포착했다. 청천강은 북한의 평안북도와 평안남도의 경계를 이루는 강이다. 남쪽에는 평양을 가로지르는 대동강이 흐르고 북쪽에는 압록강이 있다.

 

무전 청취 기록에 따르면 청천강으로 호출한 괴한은 “천 61번지가 정확히 어데쯤되는가?”라고 묻는다. “어데”라는 표현은 북한식 말투이다. 감청 청취자가 간첩 간 교신으로 판단해 의도적으로 이 말투를 기록한 것인지의 여부는 불분명하다.

 

이어 오후 4시01분 무전 청취에선 “감도가 나쁘다. 서울 재식이에게 안부 전해라”고 말한다. 13분이 흐른 4시14분에는 “편지 가져와라. 막바로 이렇게 하면 알아들을 거요”라고 교신했고 다시 “3개 안부 전해라”고 대답한 것으로 무전 청취됐다고 상황일지는 기록했다.

 

일지는 전남 영광 불갑산 중계소와 해안 경찰 병력의 상호교신을 육군 60연대 하모 중위가 입수해 기록한 것이다. 군은 이날 오전 9시30분 경찰관 39명에 대한 배속을 해제했다. 일부 경찰력이 계엄 기간 군의 지휘를 받다가 비로소 자율적 활동에 들어간 것이다. 이에 따라 광주 서부경찰서는 통신감청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60연대 하 중위가 경찰이 감청한 마지막 교신 기록을 기재한 시각은 오후 5시20분이다. 마지막 무전 청취로부터 33분 흐른 시점이다.

 

다시 일지 기록시간으로부터 50분 뒤인 오후 6시10분 서부경찰서 경비과장은 무장 폭도 은신 첩보를 입수한다. 금동 남도극장 부근에 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난동자 15명이 은신해 있다는 내용이다. 경찰 17명과 장교 2명·사병 30명으로 구성된 1개 소대가 출동했고 오후 7시40분 현장 수색에서 용의자 6명을 붙잡아 경찰에 인계했다. 이들의 대공 혐의점 등 추가 정보에 관한 정부 문서는 공개되지 않았다.

 

이보다 50분 앞선 오후 6시50분에는 전일빌딩 뒤편에서 카빈 4정·실탄 81발·경찰요대 1개와 탄창 6개·경찰봉 2개 등을 61연대 2대대가 노획한 것으로 일지에 기록됐다. 비슷한 시각인 오후 7시10분 보안대의 심모 중사는 충정작전 관계 첩보를 20사단 연대와 경찰·전투병과교육사령부(CAC)에 통보한다. 주요 내용은 △폭도가 대인동 사창가에 총 소지하고 은신 △광주시 프린스호텔과 대흥여관은 5월27일까지 폭도 아지트로 사용 등이다.

 

▲ 군·경은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수복한 날(27일)로부터 이틀이 지나 무장폭도들이 서로 위치를 확인하는 신호정보를 감청해 현장을 급습했다.

전두환 회고록 “간첩 많았지만 軍 투입할 입장 안 돼”

“무턱대고 병력 투입했다간 내전… 北이 침략했을 것”

시민군과 섞여 있는 北파견 요원 색출 사실상 불가능

교신 감청 통해 불순분자 빈번하게 수색·차단 작전

 

이날은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수복한 날(27일)로부터 이틀이 지난 시점이다. ‘5·18 북한 개입설’에 따르면 도청 수복을 전후해 무장 폭도들의 조직망은 와해됐고 곳곳으로 흩어진 이들은 서로의 위치를 파악하고 다시 접선하기 위해 무전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앞서 도청이 수복된 27일 밤 광주경찰서는 또 다른 이상 신호를 감청했다. 광주서 감청 내용에 따르면 폭도들은 경계병이 있는지 살피며 만날 장소를 물색했고 신원확인을 위한 표식으로 담배를 물고 오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여기는 공설운동장. 본부 나와라” “사단 경계병 있나 없나” “도청 대인동 파출소 뒤로 오라” “신호는 라이타불 담배 물고 오라”고 교신하며 접선 장소와 방식을 조율했다. 이어 “공설운동장” “본부 패잔병 나와라”고 도착했음을 알리며 ‘패잔병’이란 표현을 사용했고 다시 “현재 위치는 (청취 불가) 대인동으로 오지 말고 월산동 국교 밑으로 오라” “신호는 전과 동(같다)” “약속 시간이 맞아야 그것이 맞는거 아니냐? 알았다”고 무전을 주고받았다.

 

육군 60연대 병력 40여 명은 수색·차단작전에 투입됐다. 오후 11시35분 작전이 종료된 것으로 기록됐지만 성과에 대해선 기재되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오후 7시30분엔 적십자병원에 권총을 휴대한 폭도 4~5명이 난입해 의사 가운을 훔쳐 입고 신고하면 죽인다고 협박했다고 광주경찰서 강 경사가 군에 알렸다. 61연대는 즉시 출동했지만 놓쳤다. 군 상황일지에는 오후 8시 현재 ‘행방 묘연’으로 기록됐다.

 

6월16일 오후 10시50분에는 합동수사단으로부터 ‘무장 폭도가 회의중’이라는 첩보가 군경에 전달된다. 총기를 보유한 약 30명이 시외버스터미널(추정)에 있다는 것이다. 군은 20사단장에게 지휘 보고한 뒤 보안대장이 61연대 1대대 수색중대 등을 이끌고 현장으로 출동했다. 수사과장 등 합수단 요원과 합류한 군은 거북장 다방에서 주동자로 판단되는 한 명을 포함한 3명을 생포했다는 보고가 자정 무렵 전파됐고 10분 뒤 추가로 3명을 검거하며 이튿날 00시17분 상황이 종료됐다. 이후 추가 사항은 육군 상황일지엔 기재되지 않았다.

 

이들에 대한 대공 혐의점을 당국이 파악했는지, 이후 어느 곳으로 인계했는지, 신문 결과가 어떠했는지 등에 관한 정부 문건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이 무렵 ‘제일극장 옆 거북장 싸롱(살롱)’은 화재로 폐허가 된 장소다. 6월5일 이곳에선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불이 발생해 22명이 숨지고 2명이 다쳤다. 오후 10시40분 최초 화재 신고가 접수된 지 한 시간 만에 불길이 잡혔다. 16일 밤 체포된 폭도들은 이곳에서 회의 중이었다는 점에서 일반 광주시민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 6월16일 오후 10시50분 합동수사단으로부터 ‘무장 폭도가 회의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해 현장을 덮친 결과 용의자 6명을 생포했다. 대공 혐의점 등 추가 정보는 공개되지 않았다.

 

5·18 당시 통신감청은 오늘날 시긴트(SIGINT·신호정보)로 표현된다. 각종 첨단 장비를 활용해 통신·통화 등을 도·감청해 취득한 정보다. 2021년 CNN이 김정은 사망설을 보도했지만 한·미 정보당국이 느긋했던 이유는 시긴트 때문이다. 긴박한 상황이 발생하면 통신량이 폭증하지만 당시 양국 정보기관은 북한의 통신 이상 징후를 감지하지 못해 김정은 신변에 이상이 있진 않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군·경이 5·18 당시 감청을 통해 간첩 활동을 파악했다는 유력한 증언도 있다. 전두환 회고록은 “무전 감청 결과 현장에는 무수한 간첩이 있었다“며 “하지만 정체를 밝히기 위해 군을 투입할 입장이 아니었다. 투입하면 내전이 되고 내전이 되면 북이 침략한다”고 공개했다.

 

폭도와 혼재된 북한 스파이 색출이 지지부진했던 이유를 전두환 11·12대 대통령 스스로 분석한 것으로 풀이된다.

 

5·18 당시에 광주 일원의 교신량이 급증했으며 이 가운데 광주에서 북한으로 넘어가는 통신이 5000회 이상이었다는 복수의 증언도 확보됐다.

 

민간5·18진상규명진상조사위원회(민진사·위원장 정성홍) 위원과 최근 만난 한 인사는 “5·18 전 기간 걸쳐 ‘광주에서 북으로 넘어가는 통신을 오대산 감청기지에서 5000회 이상 잡았다’는 말을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정보원에게서 들었다”고 밝혔다.

 

1시간 남짓 이 인사와 독대했던 민진사 위원은 “5·18 당시 계엄군이었던 예비역 군단장급 고위 인사가 측근으로 있어 고급 정보일 가능성이 있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당시 합동수사본부의 고위 관계자도 비슷하게 증언했다. 이 관계자는 본지 통화에서 “김대중(당시 국민연합 공동의장)이 선전포고한 5월16일 이후 북한과의 통신량이 급증해 5·18을 전후해 5000회 이상이 포착됐”고 설명했다.

 

5·18 당시의 군·경의 감청부대 현황은 아직 상세하게 공개된 바 없다. ⊙

 
 

<27> “3억 받게 해 줄 게”… 인요한에 뒷돈 요구

정성홍 민진사 위원장에 당시 ‘검은 제안’ 공개
“통역만 했을 뿐 유공자 자격 없다” 단칼에 거부

 ▲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이 10월30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 행방불명자 묘역에 헌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이 5·18 유공자가 돼주면 3억 원을 받게 해 줄 테니 소개비를 달라고 요구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인 위원장은 “5·18 당시 통역만 했을 뿐인데 유공자를 신청할 이유가 없다”는 취지로 말하며 단호하게 뿌리친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선량한 광주시민을 도매금으로 욕 먹이는 이른바 ‘가짜 5·18 유공자’ 문제에 관해 인 위원장이 비교적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음이 드러난 사례로 회자된다.

 

제안한 쪽이 5·18 유공자를 선정하는 기관, 혹은 공공기관을 빙자해 돈을 뜯으려는 단순 사기 혐의자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본지는 제안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인 위원장 소유 2개의 휴대전화 번호로 전화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인 위원장으로부터 답신도 오지 않았다. 전날 인 위원장의 비서는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다”고 답했다.

 

12일 스카이데일리 취재를 종합하면 인 위원장은 지난달 1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제58회 전국여성대회에 참석했다. 특별상 수상자로 선정된 어머니 로이스 린튼(한국명 인애자) 여사를 대신해 상을 받기 위해서였다. 순천기독결핵재활원장을 지내며 30여 년간 한국에서 결핵 퇴치 운동을 펼쳤던 린튼 여사는 9월에 별세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하기 전에 별도 공간에서 기다리던 인 위원장은 정성홍 민간5·18진상규명진상조사위원회(민진사) 위원장과 만나 가짜 유공자에 대한 솔직한 견해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인 위원장은 “가짜 5·18 유공자에 관한 뉴스를 읽었는데 나 역시 가짜 유공자 제안을 받았다”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다고 한다. 그는 “나를 유공자 시켜 줄 수 있고 유공자가 되면 3억 원을 받는데 거기서 얼마를 커미션으로 달라고 했다”며 “5·18 때 광주에 머물렀던 걸 가지고 내가 어떻게 유공자라고 할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진짜 5·18 유공자는 현장에서 민주화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 돼야 하기에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며 “(유공자의 숭고한 가치를 깎아내리는) 가짜 유공자만큼은 낱낱이 진상을 밝혀내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했다고 정 위원장은 전했다.

인요한 “가짜 유공자 큰 문제”… 박민식 장관과도 상의

朴장관 “지금은 5·18 이야기는 하지 말아달라” 만류

“특수계급 창설” 끊임없는 위헌 제기… 각계 큰 우려

앞서 국민의힘은 10월23일 인요한 연세대 의대 교수를 당 쇄신을 이끌 혁신위원장으로 임명했다.

 

혁신위를 이끌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가운데도 인 위원장은 ‘가짜 유공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대내외적으로 틈틈이 표명한 것으로 보인다.

 

인 위원장은 “가짜 유공자는 문제가 있다고 박민식 보훈부 장관에게 말했는데 ‘지금은 5·18 유공자 이야기를 하지 말아달라’는 말을 들었고 그 이후부터 나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고 민진사 위원장에게 말했다고 한다.

 

본지 취재 결과, 5·18 유공자는 공훈과 기초적인 피해 사실조차 구분하지 않은 채로 오랫동안 등록·관리돼 온 것으로 드러나 엄정한 재선별 작업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본지 7월19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⑥] 빨치산·진압軍 살해범까지 유공자로 ‘둔갑’ 보도 참조>

 

시위대 총에 맞거나 시위대 트럭에 치였을 개연성이 큰 사람들이 유공자가 되거나 실수로 감전 또는 총성에 놀라 계단에서 떨어져 다친 사람, 총알을 가지고 놀다 다친 청소년도 유공자로 등록된 것으로 취재 결과 확인됐다.

 

또한 시위대에 휩쓸리지 말라는 정부의 경고를 듣지 않고 호기심에 시위 구경을 나갔다가 총에 맞거나 폭도로 오인돼 잡혀가 고초를 겪은 이들이 모두 유공자로 등록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차량 돌진 공격으로 경찰을 4명이나 깔아 죽였거나 계엄군을 트럭으로 깔아 죽인 가해자도 버젓이 유공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일고 있다.

 

가짜 5·18 유공자는 새로운 사회적 특수계급을 창설한다는 점에서 헌법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5·18 유공자 명단 공개와 진위 판별은 실체적 진실을 발굴하고 비극의 역사를 균형 잡힌 시각에서 재조명하기 위해 첫 단추를 끼우는 것이라는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헌법 제11조는 ‘훈장 등의 영전은 이를 받은 자에게만 효력이 있고 어떠한 특권도 이에 따르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가짜 5·18 유공자는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하지 않음을 대변하는 상징처럼 받아들여지는 현실이다.

 

특히 문재인정부 시절 5·18에 관한 발언 자체를 성역으로 묶어 두고 제재하기 위해 정부·여당이 도입한 특별법 시행 탓에 5·18 유공자 명단을 공개하라고만 해도 망언이라 비난·매장하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된 데 따른 반발기류가 점차 증폭되고 있다.

 

민진사는 9월 창립식에서 “명징(明澄)하게 확정되지도, 다수 국민한테 동의받지도 않은 사회적 특수계급이 존재하고 특권이 자손에게 세습되고 있다“며 “불량 유공자를 가려내고 누가 이런 가짜 유공자를 양산했는지를 낱낱이 파헤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본지가 단독 입수한 보훈부 통계에 따르면 올해 9월 현재 5·18 유공자는 4484명이다. 2019년 4410명에서 이듬해 4406명으로 줄었고 2021년 4417명으로 소폭 증가한 뒤 지난해와 올해 9월까지 4484명이 유지되고 있다. 

 

 

<28> “北 특수공작조 항쟁 전부터 대둔산 은신”

5월6~9일 직파 공작조 거점확장 근거지 활용
광주항쟁 기점으로 무장 폭동 전국 확산 기도

북한이 사전 계획하고 주도한 것으로 미 정보당국이 확인한 1980년 5·18 당시 북한 특수공작조가 항쟁 기간에 대둔산에 은거했다는 유력한 증언이 나왔다.

 ▲ 전북~충남과 맞닿은 대둔산. 연합뉴스

 

19일 스카이데일리 취재를 종합하면 5월18일 전에 미리 침투한 북한 공작조의 일부가 전라북도 전주와 충청남도 논산에 맞물려 있는 대둔산에 은신했었다는 정보가 본지와 접촉한 ‘(가칭)5·18대북정보수집팀(이하 정보수집팀)’에 의해 입수됐다.

 

정보수집팀을 이끄는 A씨는 지난달 서울 모처에서 취재진과 만나 “5·18 직전 6일부터 9일 사이에 직파된 북한 공작조가 광주에 이어 대전과 전주로 거점을 넓히는 과정에서 이동 경로상에 있는 대둔산에 몸을 숨긴 사실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광주에서 점화기폭조로 활동한 이들(북한 남파 공작조)은 대전과 전주·마산·부산에 이어 서울로 활동 반경을 넓히려 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러면서 “대전과 전주를 제외한 마산·부산에 직파된 북한 공작조가 은신했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며 “남으로 전주와 북으로 대전 사이에 있는 대둔산에 머무른 사실만 ‘우리 라인’ 사람들이 확인했다”고 강조했다.

 

본지는 첩보-소명-정보-확증 단계로 정보의 단계를 임의로 구분한다. 단순히 알려졌으나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단계는 ‘첩보’, 낮은 단계의 입증은 ‘소명’으로 간주해 첩보와 정보의 중간 단계로 임시 분류한다. 북한 정부의 직접적인 확인 발표가 없는 구조적 한계 속에서 사실일 개연성이 농후하다면 ‘정보’로 표기한다. 복수의 정보로 교차 검증이 가능한 때 ‘확증’으로 표기한다.

 

A씨의 진술은 소명과 정보의 중간단계로 본지는 파악하고 있다. 정보수집팀은 국내 정보기관이 수집한 대북 정보를 토대로 현장 조사를 병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본지는 정보수집팀의 북한 현지 조사 방식에 관해 일부를 확인해 ‘소명’ 단계 이상으로 봤지만 자료 일체를 확보한 것이 아니어서 아직 ‘증명된 정보’ 단계엔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대신 국내 복수의 소식통을 통해 A씨가 획득한 정보의 사실성을 구두로 보장받았다. 구체적인 방식은 추후 공개할 예정이다.

 

산세가 험준한 해발 878m의 대둔산은 노령산맥을 따라 남서쪽으로 전북 김제의 만경평야로 이어지고 북동쪽으론 충남 대전으로 이어진다. 그에 따르면 침투 공작조는 광주에서 5·18 촉발을 기점으로 전국으로 무장 폭동을 확산시킬 뚜렷한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A씨는 ‘북 공작조’의 침투 경로를 묻자 육로와 해로의 2개 루트라고 답했다. 그는 육로로 침투한 공작조와 관련해 구체적인 시·군·구 단위의 지명을 밝혔다.

 

또한 바닷길은 서해안 백바위 해안선 등이라고 언급했다. 백바위는 법성포로부터 백수해안도로를 따라 20km 남쪽으로 전남 영광군 염산면 두우리에 자리한 곳이다. 간조 시 차량이 다닐 정도로 개펄이 견고한 이 지역과 해안선이 맞닿은 남쪽 신안군 앞바다를 통해 5·18 직전 북한 공작조가 침투했다는 첩보가 군에 전파된 사실이 본지 취재에서 확인된 바 있다. <본지 8월30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⑫] “北 공작조 개입”… 軍 ‘사전 첩보’ 있었다 보도 참조>

 

A씨는 인터뷰 내내 “우리 직원” 또는 “우리 라인”이라고 표현했다. 구체적인 신원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그러나 “현재 북한에 있는 이들이 있다”고 현지 취득 정보임을 시사했다.

 

그러면서 이른바 ‘북파공작원(HID)’으로 불리는 군 첩보부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가 관여했다고 밝혔다. 5·18 대북 정보의 최초 입수 경위를 묻자 “안기부/정보사 자료”라고 최초 정보 수집 주체에 대해 답했다. 그 시기는 “2000년대 초반”이라고 덧붙였다.

 

2000년대 초반 HID가 현지 취득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보유 자료를 기초로 북한 현지에서 팩트 체크를 거듭한 방식으로 풀이된다.

 

북한에서 협력하는 이들이 정보기관이 확보한 휴민트(HUMINT·인간정보)인지, 별도의 금전적 대가가 오가는 용병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는 “우리와 협력하는 라인이며 (북한 거주 남파 경력자) 방문 및 대면조사 방법도 동원했다”고 언급했다. 본지는 A씨가 이민트(IMINT·이미지 정보)를 제시한 만큼 현지 정보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봤다. 그러나 아직 5·18에 직파된 뒤 북으로 돌아가 ‘공화국 영웅’ 칭호를 얻었다는 인물들을 실제 대면 접촉했는지 현재로선 교차 검증할 방법이 없어 ‘첩보’ 단계로 분류하고 이에 관한 보도를 유예하고 있다.

 

취재진은 A씨와 계속 접촉할 계획이다.

 

▲ 5·18 기간에 산세가 험준한 지역에 거동 수상자들이 은신했다는 첩보가 잇따랐다. 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분지처럼 평탄한 대지에 물이 고인 저수지인 향등제는 장기 은신이 가능한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다. 광주=남충수 기자

 

“대둔산 은거팀 육로 침투… 구체적 동선까지 확보”

북파공작 담당했던 정보사 자료 2000년대초 확인

北 활약 협력자들이 남파 경력자 방문·대면조사도

 

무장 괴한들이 산세가 험준한 곳에서 은신했다는 첩보는 또 있다.

 

본지는 5·18 진실 찾기 취재 과정에서 이 같은 첩보를 다수 입수했다.

 

1980년 5·18 직전 광주 무등산의 증심사(證心寺)에서 눈빛에 살기가 도는 비무장 장발 남성 100여 명이 체력강화 훈련 중인 국군 장교 70명에게 목격된 사실도 비슷한 첩보로 분류된다. <본지 8월23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⑪] 무등산 절에 정체불명 100명은 누구? 보도 참조>

 

이 밖에 올해 여름 본지 취재진이 답사한 광주의 저수지 ‘향등제’도 거동수상자들의 은신처로 꼽힌다. 정확한 지번은 광주시 남구 덕남동 370번지다.

 

향등제는 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분지처럼 평탄한 대지에 물이 고인 저수지다. 장기 은신이 가능한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다. 남쪽으로는 나주·남평 방향에서 들어오는 입구가 있고 북쪽으로는 덕남동과 효덕동을 통해 광주 시내로 가는 출구가 있다.

 

대공 혐의점이 줄곧 거론돼 온 송암동 오인사격 현장 뒤쪽 야산 안에 있는 향등제는 특히 남동쪽 화순 방향으로 이어진 깎아지른 산들에 지금도 은거하기 용이한 곳으로 거론된다. 정작 광주시 남구청에서는 남쪽으로 불과 1.5km, 차로 5분 거리에 있어 도심 접근도 용이하다.

 

▲ 향등제 저수지 뒷산. 광주시 남구청에서 불과 1.5km 떨어져 도심 접근이 용이한 이곳에서 5·18 항쟁기간에 한마리가 통째로 해체된 소뼈가 무더기로 발견됐다. 광주=남충수 기자

산세 험준한 향등제서 소뼈 해체한 이들은 누구

향등제 뒷산에선 소뼈가 통째로 발견됐다는 국회 청문회 증언이 나왔다.

 

1989년 1월31일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에서 증인으로 나온 주민 김복동 씨는 향등제에 관해 김영진 위원(국회의원)과 일문일답을 주고받았다.

 

김 의원이 ‘(목격된 이들이) 공수부대인가요’라고 묻자 김씨는 “공수부대인가 어딘가 군인이 끌고 들어가고 (중략) 셋이 들어가는 것을 봤는데 그 사람들이 틀림없이 산골짝에서 죽었다고 본다 (중략) 총소리가 났으니까 죽었다고 그랬죠. 우리 동네사람들도 아! 저 사람 죽어버렸다고 하는 거지요”라고 증언했다.

 

김 의원이 시신을 확인했는지 묻자 김씨는 “거기는 간 일이 없는데 통장이 거기를 한번 내가 가봤냐고 그러니까 가서 그 근방을 조사해 보니까 누가 소를 잡아먹고 소 뼈다귀만 한 마리가 오글오글 모여 있다라고 그 말만 합디다. 그런데 하필 그 골짝에 누가 길게 밭을 쳐버렸어요. 내가 한번 가보니까”라고 답했다.

 

본지가 입수한 작전 상황일지와 일자별 계엄군 부대배치 현황에 따르면 5·18 항쟁 기간(5월18~27일) 계엄군은 향등제 야산에 배치되지 않았으며 탈영병이 있었다는 기록도 없다. 준전시 상황인 계엄시 주둔지를 이탈해 탈영하면 최고 사형에 처할 수 있다. 5월21일 저녁 61연대 2대대가 가까운 송암동에 배치돼 일반도로에 철조망 장애물을 설치하다 오후 8시쯤 목포 방면에서 광주 시내로 진입하려는 폭도들로부터 선제사격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에 따라 외관상 군인으로 보이는 장정들이 신원미상의 사람들을 향등제로 끌고 가 총으로 쏴 죽였다는 증언이며 그 장소에서 소를 한 마리 해체했다는 말이 된다. 계엄군과 시민군이 총격을 주고받는 사실상 전란의 와중에 한가롭게 야산에서 소 한 마리를 뼈만 남기고 해체해 먹는 이들은 평범한 시민일 수 없다고 5·18연구가들은 보고 있다.

 

▲ ➊5월16~31일 일자별 계엄군 작전배치 요도. 계엄군은 향등제에 배치되지 않았다. ➋ 소뼈를 무더기로 발견한 주민의 국회 청문회 증언 녹취록.

 

향등제는 5월24일 오후 2시 11공수여단과 보병학교 교도대 간의 오인사격 현장으로 알려진 송암동으로부터 멀지 않은 지근거리에 있다.

 

버스로부터 사격을 당한 61연대2대대는 5월23일 오후 보병학교 교도대에 임무를 인계하고 철수했으며 그 다음날 오인사격이 발생한 것이다. <본지 7월13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⑤] ‘송암동 오인 사격’은 게릴라 전술에 軍이 당한 것 보도 참조>

 

애초 아군끼리 교전에 따른 사망사건으로 알려졌지만 봉쇄 지점을 통과하려는 아군이 착각하도록 지속해서 민가에서 군 차량을 향해 총격이 있었다. 결국 군은 대응 사격했고 매복하던 쪽에서도 90mm 무반동총으로 응사해 아군 트럭 4대가 불에 탔고 9명이 현장에서 즉사했으며 36명이 중상을 입었다. 총사망자는 11명이었다.

 

추후 군은 사태 수습 과정에서 매복조로부터 장비들을 노획했지만 병력 수송 장갑차를 반파시킨 90mm 무반동총이 나오지 않아 계엄군 간의 교전이 맞는지 또 다른 의문에 빠지게 했다. 당시 마을 쪽에서 착각을 유인토록 지속해서 총을 쏜 이들이 누구인지, 향등제 쪽 무장한 거동수사자들은 아닐지 의문을 낳게 했다.

 

호남이 고향인 김덕수 민간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민진사) 위원(예비역 계엄군 중대장)은 “향등제 뒤편 야산을 보면 군 생활을 오래 한 나조차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은신과 칩거가 용이하고 시선을 압도하는 산세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29> “무기고 습격 폭도들 北 말씨 썼다”

5월21일 20여 명 화순 무기고 덮쳐… 말리자 “개수작 말라우”
돌까지 마구 집어 던져… 당시 예비군 중대장 무릎에 큰 부상

 ▲ 5월21일 정오 무렵 신원미상의 남성들이 해남 경찰서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있다.

 

북한이 사전 계획하고 주도한 것으로 미 정보당국이 확인한 1980년 5·18 당시 무기고를 습격한 폭도들이 북한 말씨로 욕설을 했다는 증언이 처음 나왔다.

 

지금까지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보는 쪽에서는 계엄군의 폭력성에 항의하기 위해 일반 시민이 무기고를 습격해 총기류를 탈취했다는 주장을 폈다. 정작 5·18 유공자 중에서 무기 탈취에 가담했다고 스스로 밝히고 공적이 인정된 이들은 3·4명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된다. 전남 전역의 무기고 44곳을 누가 습격했는지 40여 년간 의문이 제기된 이유다.

 

5·18이 끝나고 무기를 회수·적재한 탄약사령부 산하 제1병기탄약창 운영과장 A씨는 스카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열차 2량 분량의 어마어마한 무기류를 시민군 몇 명이 삽시간에 약탈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본지 11월15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 <23> “도청 TNT 설치 ‘北 소행’ 직감” 보도 참조>

 

국가의 혜택이 주어지는 유공자 중 무기 탈취 유경험자가 극소수라는 것은 오히려 북한 공작조가 남파됐을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 줬고, 과연 선량한 광주시민이 전남 44개 무기고를 직접 습격했겠냐는 의구심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이런 가운데 무기고를 습격한 폭도 중에 북한 말씨를 쓰는 사람이 있었다는 목격담이 처음으로 전해진 것이다.

 

▲ 장낙승 명본 이사장.

 

(사)국군명예회복운동본부(이하 명본·이사장 장낙승)는 전남 화순 예비군 무기고에서 총기류를 강탈한 폭도들이 “개수작하지 말라우”라는 표현을 썼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명본은 대한민국 안보 역사를 재조명하고 북한과 연계된 주사파가 전복시킨 왜곡된 국군사(史)를 바로잡기 위해 국방부 인가 공법단체로 11월 창립됐다.

 

 거짓의 산에 세뇌된 5·18의 실체를 벗기고 계엄군이 무고한 양민을 선제사격으로 쏴 죽이지 않았다는 역사적 자료를 확보하는 것을 주요 역점 사업 중 하나로 정하고 있다.

 

장낙승 명본 이사장은 인하대 학군단(ROTC) 출신 공병장교이자 소령으로 예편한 건축업자를 만나 5·18에 관해 주고받은 대화를 2019년 5월 공개했다.

 

 “우리 동기 송희선을 잘 안다고 한다”고 밝히며 증언의 신빙성과 증언자의 실재성을 보충했다. 육군사관학교 31기인 장 이사장이 육사총구국동지회 회장을 맡을 때였다.

 

장 이사장은 “그(건축업자)의 아버지도 육군 소령으로 예편해 비상기획관으로 근무했다고 한다”며 “그가 인하대 1학년 때 5·18이 있었고 그의 아버지는 화순에서 근무했는데 5월21일 폭도들이 화순 무기고에 들이닥쳤다”고 설명을 이어 갔다.

 

그러면서 “폭도들이 들이닥치기 전 폭약과 무기들을 진지에 감추고 있었는데 마지막 무기들을 운반하는 도중에 폭도들이 들이닥쳤다”며 “그의 아버지는 소문대로 학생으로 생각하고 다독이고 설득해서 돌려보내려 했는데 갑자기 뒤에서 ‘개수작하지 말라우’라며 돌이 날아와 아버지가 무릎을 맞고 쓰러졌고 무기를 모두 빼앗겼다고 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그때의 부상으로 무릎을 다쳐 90세가 되어 돌아가실 때까지 다리를 절었다”며 “대한민국에 아무리 불량한 사람들이 있어도 어른에게 ‘개수작하지 말라우’라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이 말은 북한 사람들이 많이 쓰는 말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에 더해 “돌을 던져 무릎을 못 쓰게 만든 것도 예사 실력이 아니다”라며 “전남 44곳의 예비군 무기고를 턴 것은 북괴 특수요원들의 짓이었고 역사는 분명히 밝혀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장 이사장은 26일 스카이데일리와 통화에서 “북한 욕설을 들은 증언자의 아버지는 당시 화순 예비군 무기고의 중대장이었다”고 보강 설명했다. 그러곤 “트럭 한 대에 탑승한 청년 20여 명을 소문으로 듣던 대학생이라고 생각한 증언자의 아버지는 ‘무기를 빼앗아도 군을 상대로 이길 수 없다’고 설득하려 했는데 이때 돌이 날아와 정확히 무릎을 맞혔다고 증언했다”고 말했다.

 

▲ 서울고법 1996년 판결문. 팩트가 거꾸로 기재돼 있다. 5.17 계엄 확대가 신군부 반란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데 법원이 이처럼 잘못된 팩트를 근거로 사용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광주진입 폭도가 먼저 쐈는데… 법원 판결문은 ‘거꾸로’

軍이 ‘선제사격’ 적시… 틀린 팩트가 판결 영향줬을 수도

본지 입수 ‘도발 일지’엔 폭도 총격에 병사 먼저 관통상

부대 동료들이 일제히 대응사격… 치열한 교전으로 번져

 

이런 가운데 화순과 나주·목포 방면에서 무기를 탈취해 광주로 진입하는 폭도들이 계엄군을 향해 먼저 총을 쏘며 장애물을 돌파했지만 1996년 법원 판결문은 이 사실을 반대로 기재한 사실이 새롭게 확인됐다.

 

계엄군이 시민군에게 선제사격을 가한 것으로 판결문에 적시된 것이어서 틀린 팩트가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당시 서울고법 재판부는 5.17 계엄 전국 확대를 신군부 반란 행위의 일환으로 볼 것인지를 심리하면서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를 반란수괴로 각각 규정했다. 재판부의 이 같은 본안 판단 결과는 1996년 12월16일 서울고법 제1형사부 판결 선고문에 고스란히 담겼고 이후 대법원도 이 판단을 받아들였다.

 

판결문은 ‘① 1980.5.21 22:10 효천역 부근에서 20사단 61연대 2대대가 버스와 트럭 등 차량 6, 7대에 탑승하고 목포 쪽에서 광주 쪽으로 이동하던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여 시위대 버스 2대를 전복시켰다’고 기재했다.

 

법원은 계엄군이 오후 10시쯤 먼저 시민군에게 총을 쐈다고 본 것이다.

 
 
 

▲ 폭도 도발상황 반전지 차트.

 

그러나 본지가 입수한 계엄군 61연대 2대대 ‘폭도 도발 상황’ 반전지 차트에 따르면 폭도들이 먼저 총격을 가해 병사 한 명이 관통상을 입은 것으로 기록됐다.

 

효천역은 1번 국도를 따라 정남 쪽으로 7~9km 내려간 뒤 봉학산을 앞두고 남평리에서 좌회전하면 화순 방면이고, 우회전하면 나주 방면이다. 광주에서는 나주를 거쳐야 목포에 다다른다. 5·18 당시 광주 시민군이 나주·목포 무기고로 향하려면 효천역 일대를 지나는 1번 국도를 가야 했다. 광주~화순 구간은 너릿재가 지름길이지만 지방도로인 관계로 다량의 트럭이 이동하기엔 효천역을 통과하는 1번 국도(현재 고속도로)가 이동이 원활했다.

 

시민군은 21일 도청 앞 집단발포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정당방위 차원에서 그날 오후부터 무기고를 습격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무기를 탈취한 뒤 광주로 돌아오는 시간은 저녁 이후 시간대가 된다. 61연대 일지에 묘사된 트럭을 탄 채로 집단 이동하는 폭도들과 동선이 일치한다. 이들이 광주로 진입하면서 계엄군을 향해 먼저 총을 쐈다는 게 반전지 차트 기록이다.

 

‘광주~목포 도로 효천역 총격전’ 폭도 도발 상황은 ‘상기 일시 및 장소에 동부대가 20:00경 도착 도로(4차선) 봉쇄 작전을 위해 매복 준비 및 도로 장애물을 약 50%가량 설치 중 목포 방향에서 폭도들이 탑승한 트럭 및 버스 6대가 광주 방향으로 진입하기 위해 장애물을 설치하던 동부대 요원에게 사격을 가하면서 전속력으로 광주 쪽으로 봉쇄망을 뚫고 탈주하므로 해서 교전이 전개됐다’고 적었다.

 

또한 ‘이때 사병 1명이 관통으로 부상을 입자 동부대 요원은 일제히 응사(應射·대응사격)함으로 교전이 치열하였으며 이미 폭도 차량 3대는 광주로 이탈하였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 광주 목포의 1번국도 중 효천역 앞~효덕동삼거리~백운동로타리 구간 표시. 61연대는 5월21일 광주시 남구 금당산(303.5m) 일대 효천역에 장애물을 설치했다. 효덕동삼거리의 우측 진월동 방행은 용산동을 거쳐 지원동 주남마을 쪽으로 연결되는 지방도로다. 이 도로는 11공수여단이 철수 시 사용했다. 보병학교 교도대가 이 61연대 2대대로부터 도로봉쇄임무를 인수받았고 이후 이곳에서 송암동 오인사격이 발생했다.

 

이 내용은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 지휘부와 출동 진압부대의 장성급 지휘관 7명 이상에게 보고된 내용이다.

 

그러나 법원 판결문은 폭도가 선제사격한 8시30분 상황은 제외하고 10시10분 상황만 기재된 것이다. 이 사실관계는 1996년 8월26일 선고된 서울지법 제30형사부의 1심 판결에는 기재되지 않았다. 2심에서 틀린 팩트가 처음 등장한 것이다.

 

그동안 재판부가 김영삼정부의 민주화운동 방침에 따라 답을 정해놓고 판결했다는 의혹은 꾸준히 제기됐었다. <본지 11월1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 <21> “5·18이 민주화운동 된 건 정치권력 야합 탓” 보도 참조>

 

폭도 도발 상황 차트에는 특이한 내용도 기록돼 있다.

 

차트는 ‘피해를 보고 도주한 폭도들 (중략) 재차 동부대 위치까지 접근 총격을 가해오자 (중략) 이때 (부상자를 구출하기 위해 되돌아온) 폭도들의 증원군에는 여자 30~40명이 편성돼 있어 더 이상 우군(계엄군) 측에서 교전을 회피했음’이라는 기록이다.

 

총격전이 오가는 와중에 부상자 구출에 투입된 여성 30~40명은 일반 부녀자일 가능성이 작다는 점에서 관련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한 5·18 연구가는 “봉쇄 장애물을 향해 전속력으로 관통하며 선제사격을 가한 데다 아군 관통상까지 입힌 기록을 외면한 것은 사법부가 심리에서 편견을 갖고 있었다는 분명한 정황 증거”라고 지적했다.

 

▲ 무기 피탈 현황. 전교사

 

한편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와 검찰 기록 등에 따르면 시민군 등이 전남 예비군 무기고 44곳 등을 공격해 총기류 7276정(안기부 다른 기록엔 5403정)·실탄 36만7847발 등을 탈취했고 전남도청엔 3000상자 분량의 폭약을 설치했다. 5·18 항쟁이 끝나고 수거된 폭발물은 열차 2량 분량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북한 서적도 피탈된 무기 현황을 구체적으로 나열한다.

조선노동당출판사가 1985년 5월16일 출판한 ‘광주의 분노’는 35쪽에 ‘무기 탈취 투쟁을 시작한 21일 오전부터 오후 4시 현재까지 폭동 군중이 탈취한 무기는 카빈총 2240정·엠-1보총 1235정·권총 28정·실탄 4만6400여 발이었고 장갑차가 4대·군용차량이 400여 대에 달했으며 수백 킬로그램에 달하는 폭약과 수백 개의 뢰관(뇌관)들도 획득했다. 무기 획득을 위한 봉기군중들의 투쟁은 이날 오후부터 광주의 주변 지역으로 확대됐다’고 밝혔다.

▲ 북한이 발간한 '광주의 분노' 35쪽에는 시간대별 무기 탈취 현황이 기록돼 있다.

 

북한 책은 ‘21일 오후 4시 현재’라는 획득 무기류 파악 시점을 언급한 점이 눈길을 끈다. 피습 직후 안기부는 피탈 무기류의 전수 조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시점에 북한은 정확한 노획량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 전라남도 나주 예비군 무기고 탈취 현장에 들어선 사적비. 나주=남충수 기자

 
 

<30>“게릴라戰 나서라” 무장투쟁 부추긴 김대중 

80년 5월11일 정읍서 “월남식으로 국민 속 침투” 선동
송선태는 같은날 전남도청 점령 계획한 ‘자유노트’ 작성

 ▲ 김대중의 5·18 이전 발언들. @스카이데일리

 

 

김대중은 1980년 5월11일 월남처럼 도시게릴라전(戰)을 하라고 대중을 선동했고, 전남대생 송선태는 같은 날 다이너마이트를 활용해 전남도청을 점령하는 대(對)정부 무장 폭동 계획인 자유노트를 직접 작성했다.

 

이들의 계획은 정확히 일주일 뒤 5·18 항쟁 기간에 현실이 됐고, 44년이 흐른 오늘날 김대중은 ‘민주화의 영웅’으로, 송선태는 문재인정부가 만든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장관급 위원장으로 각각 자리매김하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펼쳐졌다.

 

7일 스카이데일리가 단독 입수한 영상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은 1980년 5·18 발생 일주일 전인 5월11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월남식으로 국민 속에 침투해 도시게릴라 농촌게릴라전을 하라”는 대중 선동 문구로 열변을 토해낸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김대중의 정확한 발언은 “그러면 유일한 길은 월남식으로 국민 속에 침투해서 국민의 지지를 받아 가지고 도시게릴라 농촌게릴라의 게릴라전을 하는 것입니다”였다.

 

그는 유일한 해법으로 게릴라전을 모색하게 된 원인을 바로 앞선 연설에서 스스로 밝혔다. ‘북한의 전면 남침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제였다.

 

구체적인 사전 발언은 “오늘날 우리 국군의 반응 태세가 이와 같이 튼튼하고 미군이 여기에 주둔해 있는 한 북한 공산군의 전면 남침은 거의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중국과 소련도 그러한 전면 남침은 찬성하지 않습니다”였다.

 

김대중에 대해 당시 사법부는 “반(反)정부 봉기의식을 고취한다”고 판단했다. 법원 판결문에는 “동학혁명과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같다”는 취지의 발언도 등장한다. 이에 따르면 김대중은 11일 오전 10시55분~11시45분 정읍 연설에서 “동학혁명은 처음부터 폭력주의가 아니라 상소하고 주장을 건의했으나 관철되지 않아 봉기한 것으로 오늘날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라고 발언했다. 이 같은 연설 내용은 1980년 9월 선고된 육군계엄보통군법회의의 1심 판결문(80보군형공 38호)에 고스란히 담겼다.

 

김대중은 ‘민주주의를 막으려는 음모’라고도 언급했다. 법정 기록상 군부를 의식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1심 판결문은 “10.26사태 이후 조그마한 민주주의의 숨통이 터졌는데 그것을 막으려는 음모가 있다”고 김대중의 발언을 적시했다.

 

신군부’를 직접 겨냥한 발언은 5월1일 나온다. 김대중은 이날 “김재규 재판에 대한 사법권 독립을 침해하고 노골적인 정치개입을 일삼는 보안사령관(전두환)은 물러나야 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하도록 지시하고 서명했다. 이 선언문은 문익환 등에 의해 7일 내·외신기자들 앞에서 발표됐다고 판결문은 기록했다.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김재규 수사를 총괄했다.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을 죽인 시해범이다. 대통령을 총으로 암살한 범인과 김재규의 범행을 알고도 직속상관인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하지 않은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의 공범 혐의 연행을 김대중은 ‘정치개입’으로 단정했다. 연행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대통령 피살 사건 연루자에 대한 수사책임자의 강제 직권조사를 군사 반란으로 본 것이다.

 

▲ 김대중의 1980년 5월11일 전북 정읍 연설 영상 캡처

 

1981년 대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군사 반란’이라는 관점은 김대중, 그리고 그와 함께한 이들에겐 대정부 공격의 명분을 제공했다. 1997년 대법원은 이 시나리오를 인정한다. 최규하 대통령과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전 보안사령관)에 대적한 무장봉기 세력을 헌법수호 세력으로 간주한 것이다. 사법 최후의 보루인 대법원에서 사상 초유의 판결이 나오게 된 이유다. 정승화가 훗날 5·18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하는 촌극이 연출된 배경이기도 하다.

 

1980년 5월12일 김대중은 군인을 상대로 정부 명령 불복종을 촉구했다. 정부는 이를 ‘시한부 선전포고’로 여겼다. 5월19일까지 최규하정부에 △비상계엄 즉각 해제 △신현확 국무총리 퇴진 △정부 개헌 심의위원회 해체 등을 요구했고 19일까지 확답을 하지 않으면 실력행사에 들어가겠다고 공표했다. 이번에도 전제는 '신군부 집권 시나리오에 따른 비상계엄령은 무효'라는 것이었다.

 

이는 명백한 반란행위에 해당해 5월17일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의 근거가 됐고 정부는 김대중을 체포했다. 하지만 민주화 세력은 5.17 계엄령의 전국 확대를 신군부의 집권 시나리오로 간주하고 대정부 공격의 구실로 삼았다.

 

김대중의 경호를 담당한 함윤식 전 비서이자 김대중을 직격한 '동교동 24시'의 저자는 한 언론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분명한 것은 5·18이 누군가의 각본에 의해 일어난 건지는 모르겠으나 5·18이 일어나도록 상황을 몰고 간 사람은 김대중이라는 사실”이며 “그때 김대중의 과격한 노선이 없었다면 군이 개입할 명분은 없었다고 확신한다”고 폭로했다.

 

1980·1981년 1·2·3심 판결문을 종합하면 사법부는 군인에 대한 김대중의 정부 명령 불복종 촉구를 내란 음모로 간주했다.

 

1심 재판부는 “김대중은 15일 오후 2시 문익환 등과 회합해 국민연합 명의의 ‘민주화 촉진 국민대회 선언문’을 검토했고, 17일 북악파크호텔에서는 문익환이 16일 선언문을 발표했다는 말을 듣고 김대중이 확인했다”고 적시하면서 “제2국민선언문에서 예고한 바와 같이 전 국민적 봉기를 결의하는 등 내란을 음모했다”고 판시했다.

 

이듬해 대법원은 “누구나 헌법과 법률에 위반된다고 명백히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고도의 정치·군사적 행위인 비상계엄선포는 당연무효되지 않는다”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계엄사령관의 조치는 위헌·위법하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삼권분립 원리를 준용해 “계엄선포가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권한은 사법부에 없다”고 못 박기도 했다. 하지만 1997년 대법원은 헌법상 일사부재리 원칙을 깨고 종전 판결을 뒤집는 근거로 계엄선포가 헌법에 위배된다고 번복했다.

 

이는 16년 전인 1981년 대법원 판결과 정면으로 배치됐다. 5·18 이듬해 대법원은 “국가 변란이나 국헌 문란의 목적이 없었다”는 김대중의 주장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김대중이 국가 변란을 획책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 근거 중 하나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일본본부는 북괴와 조총련 지령으로 구성되고 자금 지원을 받아 목적을 이루는 반국가단체”라고 이적성을 판단했다.

 

앞서 대법원은 1978년 6월13일 판결(78도756)에서 “한민통 일본본부는 정부를 참칭하고 대한민국을 변란할 목적으로 불법조직된 반국가단체인 북괴 및 반국가단체인 제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의 지령에 의거 구성되고 그 자금지원을 받아 그 목적수행을 위해 활동하는 반국가단체”라고 판결했다.

 

“DJ가 지역 대학생 선동한 게 광주소요 발단”

군인들에 명령 불복종 부추겨… 명백한 반란행위

당시 비서실장 함윤식 “과격노선이 군 개입 불러”

헨리 스콧 前NYT 지국장 “광주사건은 DJ 사기극”

 

이 같은 판례를 근거로 판결한 1981년 대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한민통 일본본부 기관지 ‘민족시보’는 북괴 헌법 전문을 게재하고 “김일성 수상은 독재자 박정희가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았을 것”이라며 북괴를 선전하거나 정치노선을 찬양했다. 또한 ‘고려연방공화국으로’라는 제목으로 김일성 사진과 연설 내용을 게재하며 북괴와 조총련 활동을 비호했으며 민단활동과 대한민국 정부 시책은 극렬히 비판했다.

 

1980년 1심 판결 이후 김대중은 “한민통 일본본부가 반국가단체라 하더라도 피고인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지만, 2심 재판부는 “원심(1심)이 적법하게 증거조사를 마쳐 채택한 한민통 일본본부 발기인의 대회선언문·민족시보·한민통일본본부 구성원 들에 대한 성분 분석표·한민통 일본본부에 대한 보고 등에 관한 영사증명서 및 여러 증거와 증인의 법정진술·자필진술 등을 종합하면 한민통 일본본부 주요 구성원들은 반국가단체인 조총련 구성원이거나 그에 동조하는 자들임을 인정할 수 있다”며 김대중의 주장을 배척했다. 이어 “한민통 일본본부가 대외적으로 대한민국 지지라는 정책을 내걸었다 하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활동의 편의를 위한 선전적 명분에 불과하다”고 해석했다.

 

당시 김대중은 “공소사실이 특정돼 있지 않아 위법하다”는 주장도 폈다. 이에 대해 1981년 대법원은 “범행의 일시·장소·주체·수단·방법 등이 모두 특정돼 있고 수괴가 누구인지 폭동 지휘자를 조사·심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원심이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며 “원심판결에 내란음모죄의 구성요건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과오나 위법이 없다”고 판시했다.

 

이에 더해 “내란음모죄는 실행 착수 전에 2인 이상이 내란의 내용에 합의하는 것이고 세부 계획까지 모의할 필요는 없고(1975년 4월8일 선고 74도3323) 구성요건도 형법 제90조에 따라 내란죄를 범할 목적으로 음모함으로써 족하다”며 김대중의 내란 음모행위를 인정했다.

 

계엄사령부는 항쟁이 끝난 뒤 31일 김대중이 학생을 배후 조종하고 선동해 사태를 야기했다는 중간 수사 결과를 공개하면서 김대중의 체포 경위를 밝혔다. 구체적으로 “광주사태의 발단이 계엄군과 전남대생들의 충돌에서 일어났으나 사태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간 데에는 학생소요를 배후 조종해 온 김대중이 전남대 및 조선대의 추종 학생 주로 복학생들을 선동해 온 것이 소요사태의 발단이 됐다”며 “사태 악화 과정에서 광주시내 골수 추종자들이 이를 격화시킨 사실이 드러났다”고 계엄사는 발표했다.

 

그러면서 “간첩과 간첩에 협력하는 불순분자들 책동이 있었다”고 사태의 악화 배경을 언급했지만 고정간첩인지 남파간첩인지 계엄사는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았다.

 

이 같은 판단을 내린 것은 한국 정부만은 아니었다.

 

복수의 미 국무부와 중앙정보국(CIA) 문건에 따르면 미국은 5·18의 성격에 관해 △북한 민간 공작대원들(North Korean Agents) △김대중 추종자들(Kim Daejung followers·Associates) △공산주의 선동가들(communist instigators) △불순세력(impure elements) 등이 사전 계획하고 주도한 ‘내란(insurrection)’ ‘반란(rebellion)’ 형태의 대남공작으로 일찌감치 파악하고 있었다. <본지 2023년 11월29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 <25> 위컴 장군 “총 뺏은 폭도는 소탕 마땅” 보도 참조>

 

1980년 5·18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존 A 위컴(John Adams Wickham) 장군은 “광주사태에서 민간인이 군·경(군인과 경찰)의 총을 빼앗아 군인에 대응한 것은 ‘Another Enemy(또 다른 적)’로 간주되며 정규군이 즉각 소탕해야 한다”며 “국가에는 정규군보다 더 강한 집단이 있어선 안 된다”고 발언했다.

▲ 김대중의 첫 공판 소식을 게재한 1980년 8월14일자 경향신문.

 

이른바 ‘폭도’로 간주되기도 하는 무장 시민군의 대정부 공격이 범국민적 설득력을 갖기 위한 대전제는 크게 두 가지로 꼽힌다. 첫째 정부군(계엄군)이 먼저 사격명령에 따라 시민을 집단 사격으로 쏴 죽였거나 둘째 정부 전복이 합리적이라고 볼 만한 결정적 잘못과 그에 대한 책임이 정부에 있어야 했다.

 

계엄군의 사격 명령은 오늘날까지 증거 불충분으로 논란이 이어진다. 김대중이 군중을 선동했던 44년 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문재인정부가 만든 5·18조사위도 ‘증거 부족’을 이유로 전두환 사격명령을 규명하는 데 실패했다고 광주의 언론이 보도했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법언에 따라야 한다. 피고인이 유죄인지 무죄인지 확신이 없을 때는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는 헌법과 형사소송법상 원칙이다. 전두환 합수부장은 법리상 무죄이지만 정서상으론 여전히 유죄로 간주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12.12가 군사 반란이라는 해석 역시 논쟁이 거듭되고 있다.

당시 검찰 수사 기록에 따르면 정승화는 대통령이 시해된 1979년 10월26일 피 묻은 옷을 걸친 채 나타난 김재규와 같은 차에 탄 뒤 그가 새 옷과 구두를 갈아신는 것을 보고도 직속상관인 노재현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김계원 비서실장이 정승화·노재현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김재규가 범인임을 알린 밤 11시40분까지 무려 4시간 동안 침묵했다.

 

그는 또 차지철 경호실장만 할 수 있는 경호 인력의 시해 현장 출동명령을 전화로 중단시켰다. 상식적으로 차 실장이 죽은 사실을 인지해야 가능한 행동이었다. 대통령과 차지철이 죽고 김재규가 피범벅이 됐다면 직속상관과 내각 각료들에게 정황을 알리는 게 군인으로서 기본이었다. 이에 따라 수사 책임자였던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상급자이자 육군 참모총장인 정승화를 반드시 조사할 의무가 있었다.

명백한 반란… DJ 예비내각 구성”

김대중은 5월1일 과도내각을 결성한다.

 

김대중 내란음모 1·2·3심 판결문에 따르면 재판부는 “김대중이 이날 자택에서 문익환 등과 교내시위를 교외시위로 유도하고 시민이 가세하도록 선동해 폭력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면 정부가 붕괴될 것이니 학원에 영향력이 있는 청년조직원들이 학생선동에 더욱 주력하도록 하고 결행 시기는 5월 중순경으로 정했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면서 김대중 자신의 집권을 위한 제반 전략지휘본부이자 정부 전복 후 과도내각역할을 할 ‘한국민주제도연구소’가 빠른 시기에 활동을 개시하도록 이사장·소장을 선임하기로 했다고 대법원은 판단했다.

 

대법 판결문에 따르면 김대중이 시켜 미리 준비한 한국민주제도연구소 정관과 이사 취임 의뢰서 및 위임 승낙서는 참석자에게 배포됐고 전원 이사직 취임을 승낙해 연구소가 결성됐다. 사법부는 “전문위원과 보좌위원 구성을 위임하고 선임하는 등 정부 타도를 위한 폭력시위 선동과 과도내각 역할의 조직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과도내각 모의도 있었다고 대법원은 판단했다. 대법관들은 “4월16일 오후 2시 서울 도봉구 수유동 크리스챤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문익환 등과 회합해 ‘한국민주제도연구소’를 설립해 자신의 사조직을 통할하고 집권목적을 위한 제반 전략지휘본부이자 집권준비를 위한 조직구성을 모의했다”며 “4월 초에는 사조직을 비롯한 종교계·청년학생들을 앞세워 일시에 범국민적 반정부 폭력시위를 유발하기로 합의했다”고 사실관계를 확인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연구소는 △전문위원 민족재생담당 김관석 △역사문화담당 백낙청 △종교교육담당 장을병 △노동담당 탁희준 △농업담당 유인호 △경제담당 임재정 △안보외교담당 양호민 △통일담당 문익환 △도의정치담당 안병무 △행정담당 이문영 △노동담당 장기표 △농민담당 황한식 △종교(천주교)담당 이태호 △종교(개신교)담당 서경석 △여성담당 이응경 △학원담당 김학민 △지역담당 김세균 등을 각각 선임했다.

 

예비내각 명단은 뜻하지 않게 세상에 나오게 됐다. 신동아 1999년 7월호 등에 따르면 이종찬 중앙정보부 총무국장이 김대중을 연행한 1980년 5월17일 이희호 여사가 예비내각명단을 갖고 있다 빼앗겼다. 이 여사는 서랍에서 꺼낸 종이를 핸드백에 넣고 밖으로 나가려다 중정 수사관에게 발각됐다. 수사관은 제출을 요구했고 결국 두 쪽짜리 종이를 압수했다. 한 장은 예비내각이었다. 당시 신문들이 이 사실을 보도했다. 또 한 장에는 22일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열리는 집회 계획이 담겼다.

 

이에 따라 대법원은 5·18을 김대중의 반(反)국가 무장 반란으로 1981년 확정했지만 같은 사건에 대해 다시 심리하지 않는다는 헌법상 일사부재리 원칙을 깨고 1997년 판결을 번복하며 김대중에게 면죄부를 줬다.

 

이 과정에선 정치적 해석이 새롭게 발굴된 증거를 압도했다. 헌법재판소는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간주하는 법을 인정했지만 합헌 4명, 위헌 의견은 5명으로 턱걸이했다. 헌재가 위헌 결정을 내리기 위해선 6명이 필요했지만 한 명이 부족했다. 헌법재판관 9명 중 과반인 5명이 위헌으로 판단한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대법원 스스로 일사부재리 원칙을 깬 만큼 5·18특별법은 또다시 대법원에서 재심할 여지가 있다는 얘기다. 5·18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끝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 헨리 스콧-스톡스 전 NYT 기자.

 

헨리 스콧-스톡스(Henry Scott-Stokes) 전 뉴욕타임스(NYT) 지국장은 저서 ‘영국기자가 본 연합국전승사관의 허망’ 중 ‘내가 만난 아시아 지도자’ 대목에서 “김대중은 사기꾼이고 거짓말쟁이”라며 “광주사건이야말로 김대중의 민주주의 기만이 뚜렷이 드러난 사건”이라고 일갈했다.

 

그는 “김대중이 노린 것은 권력이었고 광주사건이 벌어진 가운데 김대중은 권력을 쟁취하는 것에 가장 많이 신경을 썼다”고 혹평했다. 그러면서 “1980년 광주사태는 김대중 자신이 민주화 기수를 가장해 대통령이 되기 위해 폭동을 사주한 사건이었다”며 “광주사건을 일으킨 사람들, 김대중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김대중이 얼마나 세속적 지위나 돈을 중요시하고 일족의 재산 축적에 혈안이 돼 있었는지 잘 알고 있다. 우리 외국 언론들은 그 사실을 감춰 왔다”고 했다. 또한 “저널리스트로서 어리석었던 나 자신이 부끄럽다”며 “재산 축적보다 훨씬 무거운 죄는 나라를 팔아버린 국가 반역 행위였다. 말할 것도 없이 북한과 연관된 일이다”고 덧붙였다.

 
 

▲ 김대중은 1982년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제출한 자필 각서에서 국가안보에 누를 끼친 잘못을 자백했고 향후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전 대통령은 김대중을 비롯해 관련자들을 대대적으로 석방했고 ‘광주의 아픔’을 묻고 가겠다며 더는 폭동의 배후를 캐묻지 않았다. 그러나 김대중의 5·18 무장반란은 노태우의 6공화국 비자금이 탄로 나면서 정치적 야합의 서사 구도가 형성되는 가운데 민주화운동으로 점차 탈바꿈돼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