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진실의 문’ 연다 2/ 스카이데일리 허겸 기자
2023.08.24
⑪ 무등산 절에 정체불명 100명은 누구?
본지, 당시 체력 훈련 나왔던 장교들 목격 증언 첫 확보
장발에 눈빛은 살기 돌아… “왜 왔나” 묻자 “그저 놀러 왔다”

▲ ❶군 장교들의 등산 경로 ❷1980년 5월14일 오후 거동 수상자 100여 명이 우리 군 장교들에 의해 목격된 무등산 증심사 ❸당시 군 장교들이 거동 수상자 100여 명과 조우한 협곡. 붉은색이 길 양옆으로 모여있던 거동 수상자들의 위치 ❹남파간첩 손성모. 스카이데일리
1980년 5·18 직전 광주의 한 절에서 100여 명의 외지 남성들이 국군 장교들에 의해 목격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이들이 무기고 탈취와 교도소 습격의 조직적인 무장봉기에 가담했는지, 이들의 정체를 둘러싼 의문이 새롭게 증폭될 전망이다.
이 절은 김대중정부가 2000년 9월 북으로 돌려보낸 비전향 장기수 손성모가 스님으로 신분을 감추고 간첩으로 암약했던 당시 반(反)국가세력의 거점으로 일부 기능했다. 손성모는 1988년 4월 첫 재판에서 “나는 간첩이 아니다”라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일체를 부인하면서도 “김일성 주석님의 조국통일 노선을 실현하기 위해 나선 사람”이라고 자신의 남파 경위를 직접 밝힌 바 있다.
민주화백서 등 5·18 증언집에서는 시민군이 이 절을 ‘사수’ 하려 했다는 증언이 다수 발견된다. 이런 장소에 5·18 사건의 최초 충돌로 간주되는 전남대 앞 유혈사태 4일 전에 거동 수상자 100여 명이 우리 군에게 포착된 사실이 민간5·18진상조사위원회(민진사)의 초동 조사활동 과정에서 구체적인 영상 증언으로 확보됐다.
민진사는 정보당국과 군 당국 출신 인사에 이어 학계와 민간단체 인사가 자발적으로 합류하며 100명 안팎 규모로 외연을 확대하고 있다. 문재인정부에서 발족한 뒤 편향됐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아 온 기존 정부 조사위 활동의 사각지대로 꼽히는 외부 세력의 개입 가능성 등을 확인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특히 순수하고 순박한 대다수 광주시민을 40여 년간 가스라이팅한 배후 세력이 만약 존재한다면 그 실체를 벗기고 전모를 낱낱이 드러내는 데 역량과 지혜를 모으고 있다.
22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광주시 동구 운림동 무등산 자락에 자리한 증심사(證心寺)에서 5·18 직전 낯선 청년 100여 명이 우리 군 장교들에 의해 목격됐다. 이들에 관한 목격 증언이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시점은 5·18로부터 4일 전이다. 목격자들은 그날이 수요일이었다고 증언했다. 대한민국 육군은 매주 수요일을 ‘전투체육의 날’로 정해 구보와 등산 등 체력강화 훈련을 한다. 그해 5월18일은 일요일이고 5월14일은 수요일이다.
“극도의 경계심… 눈에 살기 돌던 낯선 청년 100여 명”
군수지원단 장병과 군무원들은 버스 2대에 올라 부대를 출발했다. 군인들은 전투복을 착용했고 군무원들은 자유 복장으로 참가했다.
증언은 대단히 구체적이다. 버스는 지산동에서 담양군 남면 방향의 무등산을 넘어가는 산길 도로를 지났다. 이곳은 현재 ‘무등산 옛길’로 불린다. 이어 김덕령묘지 충장사에 도착한 뒤 군인들은 버스에서 내렸다.
국군 일행은 충장사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무등산 산악행군길에 올랐다.
충장사(김덕령 묘지)~바람재~토끼봉을 거쳐 오후 3시쯤 중머리재 정상에 오른 뒤 무등산 정상의 육군 미사일부대가 보이도록 단체 사진 한 컷을 찍은 것으로 장병들은 기억했다.
이후 증심사 계곡의 소로길(작은길)로 내려오던 중 100명이 넘는 수상한 남성들이 장교들의 시야에 잡혔다. 머리는 긴 장발이었고 눈빛은 살기가 돌았다고 목격자들은 증언했다. 군인들은 “극도의 경계심을 갖는 예사롭지 않은 눈빛을 한 이들이었고 긴장한 모습이 있었다”고 훗날 증언했다.
하산길에 계곡 사이에 난 작은 길 양옆으로 약 50명씩 거동 수상자가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그사이를 걸어 내려가던 군인 중에는 대화를 주고받은 이도 있었다. 거동 수상자들을 학생으로 여긴 한 증언자는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왜 여기에 있나?”라고 물었고 한참 뜸을 들이다가 그들 중 누군가가 “그저 놀러 왔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당시엔 군과 시민군이 교전을 벌이거나 유혈 충돌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광주의 애국시민들은 적어도 5·18과 같은 현대사의 처참한 비극이 안방에서 일어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시점이다. 시민군이 트럭과 버스를 계엄군 쪽으로 질주·충돌하며 군의 총격과 대응 사격을 유발해 양측의 격전이 벌어졌다는 시기보다 훨씬 앞선 때였다.
증언에 따르면 군인들은 거동이 수상한 자라는 짐작 정도는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외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왔을 수도 있다고 일부는 생각한 것으로 전해졌다.
낯선 남성 100여 명이 고정간첩 또는 북한에서 남파된 특수작전대원일 가능성은 적어도 그 순간에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일부 증언했다. 반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장교들도 있었다고 한다. 양측은 충돌이 없었고, 증심사 입구까지 다다른 군인들은 부근에 주차한 버스를 타고 부대로 복귀했다.
그러나 4일 뒤 5·18이 본격 시작되고 20일 광주역과 노동청에서 최초의 군인·경찰 사망자가 발생한 데 이어 다음날인 21일 아침 이른바 ‘군분교 습격 사건’으로 불리는 20사단 사령부 및 62연대 지휘차량 피습 사건이 벌어지자, 당시 등산에 참가했던 군인들 사이에서 “그놈들이다”라는 밀담이 조심스럽게 오갔다고 한다. 이후 계엄군을 악마로 묘사하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이 증언은 40여 년간 묻혔다.
거동 수상했지만 “설마”… 5·18 터지자 “그놈들 소행”
당시 마주친 군인들 “20대 중후반에 체격 탄탄했다” 증언
전라도 말씨 안써 의심… 석탄일 앞둔 외지손님인줄 알아
北 자료에 증심사가 시민군 본거지로 쓰인 증거들 수두룩

▲ 증심사 입구. 스카이데일리
“외지 말씨 초라한 행색… 봉양드릴땐 말끔한 차림이어야”
당시 전교사 군수지원단의 A모 대위는 “남루한 복장에 머리가 긴 장발이었고 검게 그을린 인상을 가졌다”고 최근 본지에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러면서 “날카롭게 경계하면서 당황한 눈빛이었고 늘씬늘씬했다”고도 표현했다. 키가 훤칠했다는 뜻인지 ‘늘씬늘씬’의 의미를 되묻자 “덩치가 좋았다는 뜻”이라고 부연했다.
연령에 대한 질문에는 “최소한 재수생 이상의 제대한 남자 나이로 보였고 20대 중반이나 후반으로 보였다”고 그는 답했다.
또 다른 증언자 B모 대위는 “그때 증심사 계곡으로 행군하고 하산하는 우리 전투체육의 날 행사 일행을 보고 지금 생각해 보니 뜻밖에 군인들이 많이 오니까 당혹한 눈치인지 안절부절못한 행동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전라도 학생이라 생각했으나 말투가 달라 수상한 사람들이라는 의심이 들었지만 마침 그때는 초파일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어 불교신자들이 각 지역에서 온 것으로 생각했고 밥은 절에서 제공하니까 그런 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왜 머리 긴 젊은이들이 그곳에 있었는지 또 말씨가 전라도가 아닌 학생 같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그곳에 있었는지 수상하고 궁금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계엄군이었던 C씨는 “석가탄신일에 절에 가는 이들은 말끔하고 단정한 옷차림으로 가게 마련”이라며 “행색이 남루하고 초라하다는 증언은 대공 용의점을 두고 의심하기에 충분한 상황”이라고 보충 설명했다.
광주 무등산 증심사는 남파간첩 손성모가 위장 잠입한 장소다. 대공 수사 기록에 따르면 손성모는 1980년 5월 전남 해남으로 남파돼 승려로 위장해 활동하다 이듬해 2월에 경북 문경시에서 붙잡혔다.
손성모는 1988년 서울형사지법에서 열린 첫 공판에서 인정신문 직후 “김일성 주석님께서 제시하신 ‘조국통일 3대 원칙’은 가장 정당한 통일원칙”이라고 진술했다. 그가 직접 기록한 후일담에선 자신을 기소한 검찰을 향해 “나는 나를 ‘간첩’이다 뭐다 하고 장광설을 늘어놓은 검사 놈에게 ‘나는 간첩이 아니다. 김일성 주석님의 조국통일 노선을 실현하기 위해 나선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썼다.
“김일성의 통일원칙 실현”을 직접 법정에서 자술했고 5·18을 앞두고 남파된 데다 김대중정부에 의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지만 대법원은 국보법 위반 혐의를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대법원은 1988년 10월 “국보법 제3조 1·2호의 국가기밀은 형법 제98조의 국가기밀보다 고도의 국가기밀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며 손성모에 대해 적용한 국보법 혐의에 따라 유죄로 인정한 서울고법의 원심을 깨고 파기환송했다. 당시 대법관은 윤관·김상원·김용준이었다.
대공 혐의점 얽히고설킨 증심사와 손성모는 시민군 사령부?
간첩 공모죄에 대해서 유죄가 확정된 손성모는 사회안전법상 보호감호 조치를 받아 비전향 장기수로 신분이 전환됐으며 김대중정부 특사로 1999년 12월 형 집행이 정지될 때까지 18년간 복역했고 당시 김대중정부에 의해 북으로 돌아갔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당시 대공 수사당국은 손성모가 5·18에 개입한 것으로 혐의를 뒀다. 특히 5·18 당시 침투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북한 특작부대원들의 길 안내자로 역할 하기 위해 5·18보다 일찍 남파된 것으로 당시 정보당국은 파악했다. 재판 기록에 드러난 손성모의 혐의 중엔 그가 5·18이 일어나기 11일 전인 5월7일부터 증심사에서 승려로 신분을 위장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실제 그가 은거했던 광주 무등산의 증심사는 복수의 대공 혐의 사건들과 실타래처럼 얽혀있다. 일각에선 손성모에 대한 혐의만 제대로 규명해도 5·18 북한군 개입이 확실하게 증명된다는 주장도 있다.

▲ 북한 조선노동당출판사가 1985년 펴낸 ‘광주의 분노’ 표지와 목차·103쪽
북한 자료에도 증심사가 당시 시민군의 본거지로 사용됐음을 엿볼 수 있다.
북한 조선노동당출판사가 1985년 펴낸 ‘광주의 분노’ 102~103쪽에는 "이때 놈들에게서 로획한 무기는 기관총 (중략) 군사경험이 있는 50여 명의 청·장년들로 10~20명씩 4개조로 편성했다. 무등산 입구와 남광주 역전, 광주고등학교가 이들의 본거지였다"고 기술됐다.
1988년 강주원·김길식·천순남 씨도 무장한 시민군이 5월21일 오후 전남도청을 점령한 뒤 가장 빨리 배치된 곳이 증심사라고 증언했다. 당시 시민군이 도청 점령 이상으로 간첩 손성모가 있던 증심사를 사수하려 했고 이·삼중으로 경호했다고 천씨 등은 진술했다. 5·18유공자 중에 조영훈 씨는 증심사 종무실장으로 일한 것으로 파악됐다. 조씨는 광주 추모승화공간 지하 돌판 113열2행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황석영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1985년판)’에서 “21일 보급된 무기들로 무장한 시민군들은 각자 지역 단위의 방어 태세로 들어갔는데 지원동 학운동 부근에서 예비군 문장우(27세)를 중심으로 학운동 증심사 입구의 배고픈 다리 부근 각 건물에 배치되어 경계를 서고 있었다”며 “이들은 인근 야산을 수색하면서 밤중에 계엄군들이 접근해 오면 저지 사격을 하였다”고 썼다.
이 때문에 증심사는 광주사태 당시 단순히 손성모의 체류지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시각이 있다. 일종의 사령부와 같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어 이에 대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는 시각이다. 시민군이 절을 사수하려 한 행위는 통상의 상식으로는 쉽게 납득할 순 없다.
증심사 소속 승려들 중엔 시민군에 합세하기도 했다. 불교 관련 신문은 성연 스님이 “계엄군의 폭압을 보고 시위에 가담했다”고 보도했고 진각 스님도 “헬리콥터 기총사격으로 쓰러진 여학생을 적십자병원에 후송한 것이 계기가 돼 적십자 대원으로 합류했다”고 전했다. 이들의 증언은 계엄군의 선제 집단 발포와 헬기 기총사격이 없었다는 주장과 각각 배치돼 다툼의 여지가 있고 조사위의 진상 규명 대상이다. ⊙
⑫ “北 공작조 개입”… 軍 ‘사전 첩보’ 있었다
“전남 신안 앞바다로 상륙 후 잠입” 첩보
사태 파악 급파한 수색 중대 17일 습격당해
軍, 예비군 무기고 탈취 첩보입수 경계 발령

▲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1980년까지 북한의 침투 다발지역으로 꼽히던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면 두우리 백바위 해안. 간조시 차량이 다닐 정도로 땅이 견고한 지역이다. 5·18 직전 이곳과 해안선이 맞닿은 남쪽 신안군 앞바다를 통해 북한 공작조가 침투했다는 첩보가 군에 전파된 것으로 밝혀졌다. 스카이데일리
1980년 5·18 직전 정보당국이 북한 공작조의 서해안 침투 첩보를 군에 전파한 사실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이같은 첩보는 군의 보고체계를 거쳐 사단장급 이상 고위 장성에게까지 올라가 공유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써 군은 사태 파악을 위해 20사단 1개 수색중대를 현장으로 급파했지만 전라남도 해안지대로 향하던 첨병조는 5월17일 광주 송정리 일대에서 괴한들로부터 습격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20사단 수색중대 첨병조의 피습은 새로운 증언이다.
지금까지는 이른바 ‘군분교 습격 사건’으로 불리는 20사단 사령부 및 62연대 지휘 차량 피습 사건이 5월21일 아침에 한 차례 있었다고 기록과 증언을 통해 확인됐지만, 이보다 4일 먼저 수색중대가 습격당했다는 첩보는 처음 공개된 것이다.
수색중대는 차량을 빼앗겼을 뿐 아니라 부대원이 괴한들에게 끌려가 두들겨 맞아 3주간 입원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가운데 군은 같은 날 예비군 무기고가 습격당할 가능성이 있으니 경계를 강화하라는 지시를 예하 부대에 발령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앞서 본지는 무기고 탈취가 21일이라는 시민군 주장과 달리 최초의 무기고 습격은 19일이라는 복수 목격자의 증언을 보도한 바 있다. <본지 6월21일자 軍레커 몰고 무기고 담장 돌진… 청년 20명 ‘우르르’ 보도 참조>
따라서 당시 무기고 피습 가능성을 인지하던 군을 상대로 무기류 탈취에 성공한 이들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당시 군과 정보당국의 첩보를 토대로 이 사건을 보면, 계엄군에 대한 반발 차원에서 무기고를 습격했다는 시민군 측 주장은 더 설득력을 잃게 된다.
29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당시 육군본부는 관할부대이던 20사단과 71사단에 북한 공작조가 5월15일 전남 신안 앞바다를 통해 침투했다는 첩보를 전파했다. 구체적인 규모와 침투루트·은신처는 첩보상황에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서울은 산발적인 시위가 격화됐고 경기 양평에 있던 20사단은 데모 진압을 지원하기 위해 서울로 이동해 태릉에 주둔해 있던 71사단과 합류했다. 예비군을 관리하는 동원사단이었던 71사단은 경찰력이 부족한 데다 관내 6개 대학 시위 대응으로 전력이 약화돼 육군본부에 지원을 건의한 데 따른 병력 이동이었다.
이들 2개 사단은 서울을 위수하던 수도군단 예하 전투부대였다. 복수의 증언에 따르면 육군본부의 첩보는 중앙정보부(중정)로부터 처음 전파됐다. 정보당국이 최초 첩보를 입수해 군에 하달한 것이다.
당시 사단 작전참모를 지냈고 장군으로 예편한 예비역 장성은 최근 본지 취재진에 “5·18이 일어나기 3일 전에 육군본부로부터 전남 신안 앞바다를 통해 북한 공작조가 들어왔다는 첩보가 전파됐다”고 증언했다. 그는 최초 전파일을 5월15일로 특정했고 첩보의 출처로 ‘중정’을 지목했다.
추적하던 軍 첨병조… 5월17일 송정리서 ‘의문의 피습’
신안 앞바다 침투→광주 잠입... 무기고 습격 등 주도 가능성
“계엄군 반발 차원에서 총기 탈취” 시위대 주장 설득력 잃어
5·18을 목전에 두고 북한 침투조가 전남지역에 잠입했음을 우리 정보당국이 인지하고 있었다는 증언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증언자는 “최초 첩보는 중정을 통해 육군본부에 전파됐고 작전참모를 거쳐 사단장 이상에게 보고됐다”며 “서울을 지키는 사단급 부대들이 이 첩보를 인지하고 만일에 있을 사태에 대비했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증언에 따르면 이들 사단의 작전 참모진은 평소 시위 상황을 파악하고 대응책을 공조하기 위해 정보를 교류했다. 육군본부로부터 구체적인 투입 및 차단 지시가 직접 내려온 것도 이 무렵이다. 그 와중에 대학생 데모대가 아닌 북한의 침투 첩보가 육본으로부터 새롭게 하달된 것이다. 증언자는 “5월부터는 퇴근하지 못할 정도로 중정 첩보가 육본을 통해 계속 전달됐다”며 긴박했던 순간을 회고했다.
육군의 작전참모진은 육본 작전참모와 수도군단장 휘하의 군단 작전참모·사단 작전참모·작전과장·작전장교 등으로 구성된다. 증언자는 “사단 참모진끼리도 이 첩보를 공유했다”고 했다.
증언에 따르면 당시 71사단장과 20사단장은 상의한 뒤 첨병조를 전남에 급파하기로 했다. 육본은 직접 첨병을 보내 빨리 사태를 파악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20사단 수색중대는 오히려 송정리역 일대에서 군용차량을 탈취당하고 부대원들은 부상했다. 이에 대해 증언자는 “당시 상황일지와 보고문에도 모두 기록된 사실”이라고 했다.
군 북한정보 관련 부서에 있었던 예비역 장군도 최근 본지와 통화에서 “신안 앞바다를 통한 침투 첩보가 들어왔고 군이 정식 대응했었다”고 확인했다. 그와 또 다른 예비역 장교 출신의 5·18연구가들은 구체적인 해안 침투정보에 대해 본지에 보충 설명했다.
5·18을 전후해 전남 경찰의 움직임은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나주 금성파출소는 19일 경력이 빠졌다는 증언이 나왔고 20일엔 안병하 전라남도 경찰국장이 종적을 감춰 문제가 됐다. 5·18 직전에도 곳곳에 치안 공백 사태가 벌어져 시민 불안이 가중됐다. 사정이 이러자 군은 무기고 피습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 전남 향토사단인 31사에 병력 투입을 지시했지만 명령이 제대로 먹혀들어 가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 직후 투입된 부대가 7공수여단이었고 5월18일 신원미상의 청년들이 7공수를 향해 돌을 던지고 파출소에 방화하면서 5·18이 본격화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 이튿날인 19일 나주 금성 파출소에 있는 예비군 무기고에서 칼빈과 M1·AK소총 등 769정이 탈취됐다.
당시 안기부(현 국가정보원) 상황일지에 따르면 군·경은 총기류 외에도 LMG 4정·LMG 실탄 6만 발과 수류탄 182개를 빼앗겼고 시민과 계엄군의 비극적인 유혈 교전사태가 비로소 시작됐다.
한편 이번 취재 과정에선 김대중 당시 국민연합 공동의장의 5·18 전후 행적에 관한 구체적인 증언들도 있었다.⊙
⑬ 계엄군 만행 폭로 이경남 목사 “北 개입 사실이라면 인정하자”
민주화 평가 아닌 팩트 추구의 문제… 실체 찾기에 나서야
종교가 된 5·18… 증거 드러나도 부정하는 광신 벗어날 때
껄끄러운 진실 밝혀져도 항쟁의 가치·의미는 손상되지 않아

▲ 계엄군의 잔혹성을 처음 고발한 이경남 목사는 최근 본지 인터뷰에서 “5·18 북한 개입설은 충분히 조사해야 하고 그 결과를 고려해야 하는 문제”라고 밝혔다. 남충수 기자
계엄군 관점에서 계엄군의 잔혹성을 처음 고발한 5·18 회고록의 주인공 이경남(67) 목사가 “그들에게 5·18은 종교였다”는 파격 발언을 했다.
이 목사는 최근 담임목사로 있는 평택의 한 교회에서 가진 스카이데일리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북한의 5·18 개입설은 평가가 아닌 기초적인 팩트 추구의 문제”라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처음 회고록을 출간한 뒤부터 속칭 좌 성향 신문방송의 단골손님으로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았다. 해마다 5월이면 언론들은 경쟁적으로 앞다퉈 인터뷰 요청을 해 왔고 이 목사는 광주를 찾아 방송 촬영에 임했다. 이렇게 인터뷰한 TV와 신문의 수만 지금까지 50곳이 넘는다.
2000년에는 전태일 문학상을 받았고 MBC·KBS 토론과 국회 토론에 패널로 출연했다. 영국 BBC와 일본 NHK·독일 ARD 등 외신도 이 목사의 증언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군분교 습격사건… 우리 중에 불순세력 있다 느껴” 심경 변화
계엄군의 시선으로 계엄군이 폭력적이었다고 주장한 데다 전남도청 앞에서 숨진 계엄군 병사가 시민군 장갑차가 아닌 군 장병이 운전하던 장갑차에 깔렸다고 증언하면서 그는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간주해 온 이들에겐 일종의 ‘셀럽(유명인)’으로 여겨졌다.
그러던 이 목사가 이젠 “북한 개입설의 실체를 찾아야 한다”며 그간 그가 보여 왔던 행보로 미뤄 여간해선 쉽지 않은 파격적인 발언을 꺼낸 것이다.
왜일까. 그에게 최근 4~5년 사이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인터뷰 초입부터 심경의 변화를 화두 삼진 않았다. 자연스레 근황부터 물었다. 처음 만난 사이에 근황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앞서 늦은 밤 2시간 가까이 통화한 사이였기에 가능했다.
이 목사는 올해 6월 ‘증언’이라는 책을 펴냈다. 푸른색 톤의 깔끔한 북디자인이 인상적이었다. ‘이경남 목사의 박하사탕’이라는 작고 하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최근에 빚어진 사건부터 43년 전 5·18 당시로 흘러가는 시간의 역순으로 서술됐다. 영화 ‘박하사탕’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했다.
그 책을 신문사로 보내 왔다. 이경남이라는 이름은 이미 익숙했다. 1980년 5월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장갑차에 깔려 숨진 계엄군 병사에 관한 증언이 본지 취재와 달랐던 터였다. 본지는 “시민군 장갑차에 의해 숨졌다”는 도청 보건과 직원 정의한 씨의 증언을 보도했었다.
크게 기대하지 않고 책을 읽다가 기자의 선입견을 깨는 내용들이 연거푸 눈에 들어왔다. 이내 전화를 걸었고 밤늦게 걸려 온 회신으로 비로소 첫 통화가 이뤄졌다. 내친김에 사진기자와 함께 평택에 있는 교회까지 찾아가 만남이 성사됐다.
이 목사는 “소위 말하는 진보·좌파·민주당 쪽 사람들은 왜 거짓말에 능한지 의아하다”고 운을 뗐다. 서두에는 약간 에둘러 말했지만 그는 곧이어 정제된, 그러나 속내를 애써 감추지 않는 말들로 격정을 토로했다.
“아니 세상에 맨날 평화·인권·통일·생태·민주 이런 것을, 이 세상 좋은 것은 다 하겠다는 이들이 5·18 왜곡 처벌법을 만들어 다른 말 하는 사람들을 이제 형사 처벌하겠다는 것 아닌가.” 차분하던 목소리가 약간 격앙됐다.
이 목사는 “왜곡 처벌법의 전제는 서구 독일 사회에서 나치 추종 운동하는 극우주의자들로 (북한군 개입을 입증하려는 이들을) 보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5·18 북한 개입설(說)은 평가의 문제가 아니고 여러 정황상 지금까지 드러난 증거를 놓고 팩트를 찾아 가는 문제”라며 “우리가 군사·안보·전술적 측면에서 충분히 조사해야 하고 그 결과를 고려해야 하는 문제라는 게 분명한 나의 입장”이라고 했다.
“진실 추구가 독일 나치 극우주의자들 대하듯 할 일인가”
유의미한 해석도 곁들였다. 5·18 북한군 개입이 규명되면 광주의 위신에 적잖게 손상이 갈 것이라는 관측이다. 그는 “5·18에 북한이 개입해 어떤 작업을 했다고 하면 5·18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데미지(손상)가 오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그러나 당시 1980년 상황에서 군부의 재집권 의지와 그에 따라 행동했던 군인들의 난폭한 폭력, 그것에 맞섰던 시민들의 저항의 의미와 가치가 손상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 목사처럼 5·18을 신군부의 재집권 시나리오에 따른 계획된 정부 주도형 사태로 보는 주장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본지의 공식 입장은 아니다.
이 대목에서 이 목사는 지혜로운 해법도 제시했다. 그는 “북한의 개입이 사실이라면 인정하고 우리가 내부적으로 혼란이 있을 때 그들(북한) 또는 제3의 외부 세력이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지를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고 제언했다. 우리 사회가 진보와 보수가 대등하게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는 사회가 아니라는 데 초점을 둔 발언이다. 이 목사는 “우리 사회가 다른 사회 같지 않고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이고 김정은의 북한이라는 가장 호전적인 집단을 가까이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제시했다.
5·18 북한 개입설을 바라보는 이 목사의 관점은 내부적으로 혼란이 있을 때 제3자가 어떤 식으로 개입하는지 그걸 알고 향후 유사한 상황에 대비하는 사건으로 이해하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로 요약된다.
그런데 5·18기념재단이나 정부조사위원회,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보는 이들에겐 5·18이 종교가 돼 버렸다는 것이다.
신화가 돼 버린 5·18은 거룩하고 성스러운 영역이 됐기 때문에 다른 어떤 평가도 허락하지 않고 다른 접근법에 대해서도 물리적으로 처벌하겠다는 취지로 변질됐다고 이 목사는 지적했다. 그는 “그러다 보니 이게 일종의 광신이 됐고 객관적인 증거가 나와도 부정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 와중에도 이 목사는 광주 시민의 입장을 거듭 대변하기도 했다. 그는 “5·18 당시 계엄군의 폭력에 저항하며 피해를 당한 이들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1988년 5공 청문회를 거쳐 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받고 피해자들이 보상받는 변화가 일어나며 5·18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는 게 이 목사의 주장이다.
먼저 5·18 유공자 문제를 거론했다. 그는 많은 국민이 5·18 유공자 문제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유공자 명단을 밝히라는 요구를 꾸준히 해 왔지만 번번이 광주광역시와 민주당에 의해 거부되면서 국민적 의구심만 더 키운 꼴이 됐다고 했다.

▲ 이경남 목사는 “가짜 유공자 공개 요구가 번번이 묵살되면서 국민적 의구심만 더 키웠다”고 지적했다.
군분교 습격사건 불순세력 ‘직감’… 심경에 변화
가짜 유공자 의혹 번번이 묵살… 국민적 의구심만 더 키워
우리 사회 또 다른 혼란 때 제2의 北 개입 차단 교훈 돼야
암매장 추모 ‘김군’ 이제 나타나… 그동안 대국민 쇼한 것
“북한 개입 확인된다고 항쟁의 가치 저하되는 것은 아냐”
이번 스카이데일리 보도를 통해 5·18과 상관이 없는 많은 정치인과 문화·에술계·학계 인사들이 유공자에 포함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아, 그래서 정치인들이 그렇게 명단 밝히기를 꺼렸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그는 말했다. 직접 피해자가 아닌데도 훗날 5·18이 재평가받도록 기여했다고 해서 자기들을 유공자 명단에 넣고 돈과 명예를 챙긴 것은 치졸한 일이라며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5·18을 바로잡으며 그 억울한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것은 봉급을 받는 정치인으로서 당연히 자기 일을 한 것뿐인데 내가 이런 일을 했으니 나도 유공자라면서 보상금을 챙기고 그것을 훈장 삼아 명예와 권세를 누리며 감추고 있었다는 게 참으로 부끄러운 행태라고 느꼈습니다. 가짜 유공자들을 골라내는 일이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하게 된 계기였죠.”
다시 북한 개입설로 화제가 이어졌다. 취재진이 우리 사회 분위기가 북한 개입설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게 된 과정을 추가 질문하면서부터다. 설명은 구체적이었다.
이 목사는 “1990년대 중반부터 국내에 들어오는 탈북인이 늘면서 5·18 북한 개입에 대한 말들이 돌기 시작했다”며 시스템클럽 지만원 박사가 수백 장의 사진을 통해 북한 게릴라 침투설을 주장할 무렵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서 많은 국민이 동조하는 일이 벌어지자 당황한 5·18재단이 2017년 미국 국무부가 기밀 해제한 문건을 공개해 북한 개입을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며 “국민을 속인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목사에 따르면 당시 재단은 1980년 5월9일 문서를 번역·발표했는데 전반적인 내용은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경고하는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문건의 시점이 5·18 이전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 무엇보다 “북한은 현재 악화하고 있는 남한의 정세에 대응해 어떤 군사적 행동도 취하려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문장을 재단이 침소봉대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오류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 목사는 “어떤 군사적 행동도 취하려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문장 뒤에는 ‘현 상황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1979년 12월20일과 1980년 2월8일에 우리가 지적했듯, 한국에 널리 퍼진 혼란한 위기 상황이 북한의 한반도 무력 통일을 촉발할 수도 있다. 워싱턴이 남아시아와 미국 내 문제에 정신이 팔린다면, 미국이 한국의 상황을 해결하거나 한국을 방위할 능력이 심각하게 약해졌다는 생각으로 북한은 더 대담해질 것’이라고 말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이 목사는 “이 문서는 아직 북한의 군사적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만약 미국이 남한의 불안한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북한이 언제든지 군사적 야욕을 드러낼 수 있음을 경고하는 문서였다”며 “어떻게 이렇게 (맥락이 다르게) 사용하는지 참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했다.
北 전면 남침설과 北 개입설은 구분 필요… “침투 게릴라 찾아야”
이어 북한 남침설과 북한 개입설을 구분해야 한다고 했다. 북한은 게릴라전으로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는 것이지 전면 남침 의혹은 아니었다는 게 요지다.
이 목사는 “5·18에 북한 게릴라들이 개입했다는 것은 남침이 아니라 소규모 게릴라들이 침투하고 그래서 광주의 소요 사태가 악화되도록 조작한 의혹을 말한다”고 강조했다. 오랫동안 5·18을 연구해 온 측에서는 이를 두고 ‘모략전’이라고 한다. 즉 국군 복장을 한 북한 게릴라가 시민을 죽인 뒤 계엄군의 짓으로 덮어씌우는 방식이다. 그래서 이른바 ‘남-남 갈등’ 즉, 남한 국민끼리 싸우는 분열을 조장했다는 것이다.
실제 기밀 해제된 미 국무부 문건은 북한의 무력 사용 가능성을 강하게 경고하고 있으며 같은 시기 북한은 서해 섬들을 통해 대남 무장 공비들을 대거 침투시킨 사실이 우리 정부 문건에서 확인된다. 전면전을 대비하는 사이 게릴라전은 이미 시행됐다고 보는 게 맞는다는 방증이다.
이 목사는 “당시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이었던 마이클 리 박사는 당시 북한이 남한의 사태에 개입해 서울과 광주 등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면 시민혁명위원회의 이름으로 북한의 개입을 요청하고 그것을 남침의 명분으로 삼으려던 게 북한의 음모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고 전했다.
이에 더해 1998년 황장엽 씨와 김덕홍 씨가 월간조선과 인터뷰하며 5·18 북한 개입에 대해 진술했는데 당시 정보기관의 제재로 제때 보도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또한 1980년 5월21일 아침 광주 농성동에서 20사단 사령부 및 62연대 지휘 차량이 괴한 약 300명에게 피습된 ‘군분교 습격 사건’도 이 목사가 북한 개입 가능성을 눈여겨보게 된 근거 중 하나였다.
그는 1995년 7월 서울지검 국방부 감찰부의 조사 결과는 “군부를 반란죄로 처벌하고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이해하려는 취지에 걸림돌이 되는 내용을 의도적으로 감춘 것 같다”고 추정하며 당시 피탈된 무기 중 기관총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한 개인적 체험을 털어놨다.
이 목사는 “M60 기관총 3문과 실탄 200발, M60 차량 장치대 2개가 피탈된 사실은 우리가 아는 5·18을 다시 보게 하는 중대한 계기였다”며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대와 대치할 때 민간인이 우리를 향해 총을 쏘거나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나름 평화로운 마음으로 대치하고 있었지만 그들 중 기관총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면 단순한 평화시위대로 볼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만원 박사 北 개입설에 김군 동상까지 만들더라”
김군 사건도 그의 생각의 변화를 끌어낸 한 요인이다.
이 목사는 “광주 금남로에 있는 가톨릭센터가 현재 5·18 역사기록관이 돼 있다”며 “전시실 입구에 제일 크게 걸려 있는 것이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군인들을 몰아낸 시민군의 모습인데 이 영웅적인 사람이 누구냐는 의문이 계속 이어졌다”고 했다.
기념재단 측과 교류하며 당시 정황을 잘 알던 이 목사에 따르면 “제일 먼저 당시 21살이던 시민 하나가 자기라며 나섰는데 나이도 그렇고 군대도 아직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중화기(기관총)를 다룰 수 있느냐며 인정받지 못했다”며 “그러자 두 번째로 나타난 사람이 김군이었다”고 했다.
그러곤 “원지교 밑에 넝마들이 살았는데 늘 자기 식당에 와 밥을 먹던 이가 5·18 이후 사라졌다며 김군이라는 말이 나왔다”며 “그리고 다른 증인들이 나타나 그 사람이 5월24일 송암동에서 군인들에게 잡혀가 피살 암매장됐다고 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영화까지 만들고 (시민들이) 광주 공원에 동상까지 만들어 세웠는데 밑도 끝도 없이 이번에는 차복환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자기라고 선언하고 홍보하는 일이 벌어져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며 “차씨가 맞으면 영화 김군은 전 국민을 속인 쇼를 한 것이니 대국민 사과한 뒤 동상을 없애야 할 일인데도 침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런데 (문재인)정부는 이런 일을 조사하고 밝히는 게 아니라 도리어 이런 말을 하면 처벌하는 법을 만들어 위협했다”며 “게다가 이번엔 헌법전문에 넣겠다며 양당이 합작하고 있다. 헌법이라는 건 한번 만들면 다시 고치기 어려우니 전문에 넣기 전에 미심쩍은 일을 먼저 정리하자는 게 내 주장”이라고 했다.

▲ 이경남 목사는 “불의와 폭력에 항거하던 시민들의 숭고한 정신”은 간 데 없고 “비열하고 사악함만 남았다”고 통탄했다.
이념적 와해… “숭고한 정신 사라지고 비열함만 남아” 통탄
이 목사는 “우리가 5·18을 존중하는 것은 그 불의와 폭력에 항거하던 시민들의 숭고한 정신 때문인데 지금 되어 가는 상황은 참 비열하고 사악하다고 생각한다”며 “이런 문제를 잘 분별해서 해야 한다고 고언을 드리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대한민국이 이념적으로 와해된 상태라고 우려를 보탰다.
이 목사는 “정율성 문제는 우리나라가 이념적으로 얼마나 와해된 상태에 빠져 있는지를 보여 주는 극단적인 사례”라고 했다. 이 목사는 정율성이 작곡한 중국인민해방군가의 가사를 직접 찾아봤다고 했다.
그는 “원수들을 모조리 쓸어 물리치고 모택동 기치 높이 날리자고 돼 있는데 가사에서 원수는 중일전쟁 시기에는 일본이었고 국공내전 때는 장개석 군대였으며 6·25전쟁 때는 미군과 연합군·한국군이었다. 대한민국을 없애자는 군가를 작곡한 공산주의자를 추모하는 게 말이 되나”라고 따져 물었다. ⊙
⑭ ‘연고대생 500명 가세’ 진원지는 北방송
北지령 수행한 숫자냐, 서울서 온 대학생 지칭하나
시위 참여한 광주시민들도 잘 몰라… 실체 ‘아리송’
5·18 당시 ‘서울에서 온 연고대생 500명’의 최초 진원지는 북한방송인 것으로 나타났다.
1980년 5월 일련의 사건 전개 과정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표현 중 하나가 ‘연고대생 500명’이다. 계엄령으로 학생시위 주동자들이 군경을 피해 숨어든 상황에서 수백 명의 대학생이 외지, 그것도 서울에서 광주까지 원정을 갈 수 있었겠냐는 의구심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특히 계엄령과 수배령으로 학생시위 주동자들이 종적을 감춘 상황인 데다 서울~광주에 이르는 나주 길목이 차단돼 교통이 사실상 마비된 시점에 대학생 수백 명의 이동을 계엄당국이 낌새조차 차리지 못했겠냐는 의문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북한군 또는 인민군 소속이 아닌 북한 특수작전대원(특작대원)·고정간첩 등이 5·18에 남파됐다고 주장해 온 측에서는 이 숫자를 북한의 지령을 수행한 이들이라고 주장한다. 민주화운동의 틈바구니에 낀 모종의 불순세력이 북한의 개입을 우회적으로 자화자찬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것이다.
반면 5·18은 민주화운동이라고 보는 쪽에선 실제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을 연대생과 고대생이라는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으로 지칭한 것에 불과한데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다 보면 북한 개입설을 뒷받침하는 확증편향에 이를 수 있다고 지적한다.
12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1980년 5월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대공요원들은 북한방송을 시청하다 ‘연고대생 600명’이라는 북한 진행자의 멘트가 자막과 함께 공개된 사실을 접한 것으로 확인됐다. 최초 북한 방송에선 ‘600명’으로 방송됐으나 이후 한국사회에서 ‘대학생 500명’과 ‘대학생 600명’을 혼용하고 있다.
당시 서울의 안기부 가옥에서 대공요원으로 근무한 김영택 (사)자유수호국민운동 상임고문은 “5월18일 오전 9시부터 이북방송이 연고대생 600명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고 증언했다.
최근 서울의 모처에서 기자와 만난 김 상임고문은 “연고대생 600명은 우리(남한)가 만든 이야기도 아니고 남한에서 가능성이 있었던 이야기도 아니다”라며 “시위(시민군)에 참여했다는 광주시민들도 연고대생 600명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계엄령 전국확대와 맞물려) 유언비어가 난무하기 시작할 때 북한 방송이 연고대생 600명이 광주에서 전두환 파쇼정권에 대한 궐기를 시작했다고 대대적으로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김 상임고문은 “전두환 타도 운운하며 북한방송이 연고대생을 언급하는데 남한 사람들도 방송국도, 심지어 정보부도 어떤 맥락인지 몰랐다”며 “다만 확실한 것은 당시 북한방송이 연고대생 600명을 처음 언급했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연고대생 500명’ 언급… 北 ‘광주 개입’ 근거될 수도
북한세력 개입 드러나면 5·18 성격 달라져
기념재단은 홈피서 ‘연고대생 500명’ 들어내

▲ 김영택 (사)자유수호국민운동 상임고문과 광주학생교육문화회관 앞 잔디광장 벽판.
당시 정보당국은 실제 학생 시위대를 언급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해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5월17일 최규하 정권이 부분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김대중을 체포하면서 시위 주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에 나서자 (주동자들이) 일제히 잠적했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그는 “그때 북한방송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면서 “안기부 간부들은 늘 방송을 틀어뒀으니 방송을 듣고 이게 무슨 뜻인가 생각했다”고 했다.
‘북한군 개입설’은 지금까지 5·18과 북한을 연관 짓는 갖가지 의혹들의 정점에 있다. 북한군 또는 군 소속이 아닌 특작부대의 개입이 확인되면 5·18민주화운동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중 상당 부분 사실성을 뒷받침할 만한 주장들도 얽히고설키며 혼재돼 있지만 실제 북한을 최초 진원지로 꼽을 만한 직접적인 자료가 뒷받침되는 실질적 증언은 그동안 많지 않았다. 이번 복수 대공요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중 하나로 연고대생 500명을 꼽을 수 있다.
김 상임고문은 지만원 박사가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 김 고문의 옆 사무실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이 무렵 안기부 대공요원들이 ‘연고대생 600명’을 자막과 함께 내보낸 방송을 시청한 것이다.

▲ 5·18기념재단 홈페이지는 2013년 6월 ‘서울서 대학생 5백여명 광주 도착’이라는 문구를, 두 달이 흐른 8월에 ‘시민·학생 등 800여명 석방’으로 수정했다.
5·18기념재단, ‘연고대생 500명’ 문구 삭제하기도
연고대생 500명이라는 표현이 수상하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5·18측이 게시 문구를 삭제하는 일도 있었다.
광주학생교육문화회관 앞 잔디광장 벽판의 상황일지에는 ‘연고대생 500명’ 문구가 있었다. 이곳은 5·18 기념공원에 있고 5·18기념문화센터와 가깝다.
2013년 6월 5·18기념재단 홈페이지에는 ‘5월 22일 15:08 목요일, 맑음. 서울서 대학생 5백여명 광주 도착, 환영식 거행’이라고 게시됐지만, 같은 해 8월엔 ‘5월22일 15:08 목요일, 맑음 시위도중 연행된 시민·학생 등 800여명 석방되어 도청 도착’이라고 바뀐 채로 게시됐다.
김 상임고문은 “연고대생 500명이 북한군이 아니냐는 개념으로 설명이 되니까 겁이 났는지 그 표현을 지운 것으로 안다”며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기념하는 측에서도 '연고대생 500명'의 출처를 명확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방증이라는 소견을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5·18 연구가는 “남한 사람들도 몰랐던 무기고 습격 소식을 북한방송이 시시각각 보도한 것부터 연고대생 600명에 대한 최초의 방송 멘트에 이르기까지 5·18 당시 북한의 행적을 보면 수상한 게 한두 개가 아니다”라며 “정부 차원의 구체적인 진상조사가 병행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⑮ 임신부 최미애 씨 쏜 건 軍 아닌 괴한들
군복 입은 사람들이 쐈다고 증언… 계엄군 위장 세력 분명
당시 軍은 전남대서 시위대에 포위당해 꼼짝 못 한 상황

▲ ❶임신부 최미애 씨는 1980년 5월21일 오후 1시50분을 전후해 전남대 정문에서 직선거리로 300여 m 떨어진 중흥동 주택가에서 총격을 받고 숨졌다. 이 시각은 계엄군(3공수)이 시민군에 가로막혀 전남대 캠퍼스 안에 갇힌 채로 수세에 몰릴 때였다. 계엄군이 명령을 어기고 주택가까지 오기 위해선 시민군이 점령한 다리와 정문 앞 사거리를 건너야 했기 때문에 최씨의 피살은 군이 아닌 무장괴한의 소행이라는 분석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❷ 최씨의 검시서 ❸ 생전 최씨의 모습.
1980년 5월 계엄군에 의해 숨진 것으로 그동안 알려졌던 임신부 최미애 씨가 군인이 아닌 무장 괴한들에 의해 피살된 정황이 드러났다.
5·18 당시 군복을 입은 이들이 쏜 총에 임신부가 사망했다는 소문은 광주 시민들에게 빠르게 전파됐으며 군중의 대대적인 분노를 촉발한 결정적 사건 중 하나였다.
특히 임신 7개월 차였던 최씨가 퇴근이 늦어지는 남편을 집 밖으로 나와 기다리던 중 이마에 총알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는 소식은 5·18 기간 계엄군의 잔혹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오늘날까지 회자된다.
19일 본지가 단독 입수한 현직 의료인의 5·18 검시조서·검안서 재분석 결과와 관련 증언을 종합하면 최씨의 직접적인 사인은 두부관통 총상으로 사망자 검시서에 기록됐다.
구체적인 부위는 ‘전두부에서 후두부로 관통’으로 적혔다. 총알이 앞머리로 들어가 뒷머리로 나온 것이다. 누군가 최씨의 정면에서 얼굴(머리)을 정조준해 쏜 것으로 볼 수 있다.
검시서에 따르면 최씨는 5월21일 오후 1시50분 광주시 북구 중흥2동 331-45 앞길에서 사망했다. 1957년 2월생인 최씨는 사망 당시 23세였다. 검시는 1980년 6월7일 오전 11시 조선대 부속병원에서 진행됐다.
광주지검 김규섭 검사가 검시했고 의사(박규호)·군검찰관(김이수 중위)·경찰관(주영근 경사)·군의관(정종일 대위)이 각각 검시에 참여했다. 시신 인수자는 남편 김충희(당시 33세) 씨로 돼 있다.
“M16 총상은 軍 소행 개연성… 그러나 계엄군은 시위대 장악한 용봉교 못 건너”
검시서에는 계엄군이 쐈다는 풍문을 입증하듯 사인은 M16 총상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M16이 공수부대원의 주력 화기였던 점으로 미뤄 적어도 의료기록에 따르면 군인이 쐈다는 소문은 뒤늦게나마 사실성을 확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최씨의 사망은 격앙된 광주 민심에 불을 지핀 격이었다. 5·18증언집을 종합하면 “계엄군이 임산부(정확한 표현은 임신 중인 임신부)를 무자비하게 쏴 죽였다” “임산부의 이마를 쏴 죽였다” “엄마가 죽은 뒤에도 태아가 살아 움직였다더라”는 말들이 삽시간에 번졌다.
이 가운데 머리에 맞았고 태아가 한동안 살아 있었다는 소문은 사실로 보인다. 숨진 최씨의 남동생인 유족 최정구 씨는 5·18증언집에서 “머리에 총을 맞은 누나는 (중략) 죽어 있었다”며 “누나를 집으로 옮겨 놓으니 뱃속의 아이가 마구 뛰었다. 아이라도 살려보려고 여러 병원에 연락해 보았으나 아무도 와 주지 않았다. 결국 뱃속의 아이도 누나와 함께 죽고 말았다”고 황망했던 순간의 기억을 전했다.
당시 군과 대치하던 시위대는 이 소식에 크게 동요하며 격분했다. 최씨가 숨진 곳에서 금남로는 걸어서 5분이 채 안 되는 가까운 거리다. 임신부가 숨진 시각 금남로에는 시민군 측 추산 10만여 명의 시민이 전남도청을 사수하던 계엄군과 대치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다.
이때가 5·18에서 가장 뜨거운 논란거리 중 하나인 ‘집단발포(포사격이 아니므로 정확한 표현은 집단사격)’ 주장의 근거가 된 시점임을 감안하면 군인이 임신부를 쏴 죽였다는 소문은 그 진위와 상관없이 시위대를 격노하게 만든 데다 계엄군에 대한 폭발적 반발로 이어지는 한 요인이 됐다고 우파의 관점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들여다보는 5·18연구가들은 일치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실제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 전개는 당시 광주시민이 무고한 광주 임신부 죽음에 얼마나 크게 영향을 받았는지를 대변한다. 최씨의 죽음과 태극기를 들고 있다 옥상으로부터의 하향 추정 사격으로 머리에 총격을 받고 죽은 조사천 씨 사망 사건은 시위대가 계엄군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데 충분한 동기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태극기를 펼쳐 든 비무장 시민과 임신부가 연이어 총에 맞아 죽었기 때문이다. 조씨와 최씨는 둘 다 머리에 총알이 관통했다.
따라서 계엄군이 임신부 최미애 씨를 죽였는지를 규명하는 것은 계엄군과 시민군의 대치라는 5·18의 최초 갈등 단계가 어떻게 교전 단계로 확전됐고 양측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됐는지를 이해하는 데 핵심 열쇠가 된다.
“계엄령 작전 중 탈영은 사형… 군복 입고 군중 속에 들어가 시민 총 쏴 죽인다고?”
첫 번째 의문은 과연 계엄군이 머리에 총구를 겨눠 격발했는지다. 군복을 입은 이들이 총을 쐈다는 주민 목격자들의 증언이 있던 만큼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고 전제해도 가해자들이 군인이라고 보기엔 당시 작전 상황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의문이 강하게 제기된다.
당시 3공수 16대대 팀장 김응근 대위는 5·18을 추적해 온 유튜브채널 참깨방송과 가진 인터뷰에서 “(전남대 앞) 큰 사거리만 방어했다”며 군인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개별 행동으로 최씨 사망 현장까지 갈 수 없던 상황이라고 말했다. “3공수 병력들이 전남대 앞 하숙촌이자 최씨가 죽은 현장 골목까지 깊숙이 들어올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그러면서 김 대위는 “흥분한 일부 병력이 갈 수 있지 않나”라는 질문에도 “아니다. 큰일 난다”고 분명히 못 박고 나서 “데모대원들이 너무 많이 있어 거기 들어갔다간 거의 죽음이고 무식한 놈 아니면 안 된다”고 가능성을 차단했다.
당시 계엄군은 시위대에 둘러싸인 채로 전남대 안에 있었다. 시쳇말로 코너에 몰려 있던 상황이다. 같은 시각 10만여 명의 시위대에 계엄군이 포위된 전남도청 앞 상황과 비슷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병사들이 용봉교(龍鳳橋)를 건너가 시위대가 점령한 민간 지역을 휘젓고 다니며 민간인을 쏴 죽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당시 계엄군 출신 예비역들은 한결같이 증언한다.
본지는 이번 취재 과정에서 1980년 5월의 현장을 지킨 계엄군 출신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이 질문을 던졌지만 “(군인이 민간인을 쏴 죽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대답한 인사는 한 명도 없었다. 계엄군 출신 인사들은 “군인도 사람”이라며 “동료가 총이나 돌에 맞아 죽고 다치는 걸 보면서 흥분한 나머지 폭력을 휘두르거나 과도하게 진압하는 과격하고 비정한 행동은 했겠지만 국민을 쏴 죽이는 건 별개의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이는 비단 명령 불복종의 문제가 아니라는 첨언도 있었다. 한 군 출신 인사는 “계엄령 작전 상황에서 명령 불복종은 군법회의에 회부돼 최고 사형이 언도될 수 있다”며 “가지 말라는 데 작전지를 탈영할 군인도 없거니와 가면 몰매 맞아 죽을 게 뻔한 곳으로 들어갈 어리석은 탈영병도 없다”고 조언했다.
계엄군이 전남대 캠퍼스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포위된 상황은 당시 다수의 시민 증언에서도 파악된다.
“전남대 갇힌 공수부대… 어찌 거리 나가 사람 죽이나”
공수대원 40명 활보했다는 주민들 “얼굴에 위장했더라”
당시 대원들 위장크림 안 써… 오히려 시위대가 검은 칠
투입대원 3분의 2가 호남 출신… 도민 학살 터무니 없어
“임하사가 광주 사람인데 민간인을 총으로 쏜다는 건 말도 안 돼”
장준영(당시 19세) 씨는 5·18증언집에서 “우리는 전남대에서 투석전이 벌어졌다는 연락을 받고 전남대 정문으로 갔다. 그때 시각이 12시30분 정도 되었을 때였다”며 “전남대 로터리에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로터리에서부터 전남대 정문 입구까지 발 디딜 틈이 없이 꽉 차 있었는데 (중략) 그때 계엄군 1개 소대 정도가 전남대 내 당산나무 조금 못 미친 곳에 배치돼 있었다. 시위 군중은 전남대 법대 밑 쪽에까지 꽉 차 있었다. (중략) 시위대는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고 증언했다.
3공수 15대대장 박종규 중령은 월간조선 2005년 1월호에서 “‘과격한 진압을 삼가라’는 말은 돌에 맞아 죽으라는 지시나 다름없었다”고 했다.
박 중령은 “시위 군중은 이미 장갑차와 군용차량으로 무장돼 있었고 우리에게 위협을 주기 위해 전남대학 외곽도로를 질주하면서 위협적 시위를 계속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전남대 바깥쪽은 이미 시위대에 접수됐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광주사태가 절대로 ‘시민항쟁’이나 ‘민주항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그들은 군의 공격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군에 공격을 감행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극렬한 시위분자들이 선량한 민주시민과 계엄군을 싸움 붙인 격”이라고 증언했다.
당시 전남도청 11공수 62대대 최상필 대위는 “공수특전여단은 세계적인 특수부대 이자 최정예 요원 부대로 군기가 엄격하다”며 “공수요원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한 부대가 ‘임산부의 배를 갈랐다’ ‘여고생의 가슴을 도려냈다’ 하는 그러한 상황은 있을 수도 없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밀고 밀리는 대접전이 전남대학 정문에서 수십 차례 있었다”는 박 중령의 증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상황에서 한두 명도 아니고 40명의 계엄군이 군복을 입고 성난 군중이 장악한 학교 바깥쪽에서 돌아다닌다는 말은 상식적이지 않다.
전남대에 주둔한 김 대위는 “팀장인 나도 못 쏘는데 병사가 함부로 총을 쏠 수가 없다. (공수부대는 사병보다 부사관으로 구성돼) 우리 같은 경우는 주로 간부들이 많기 때문에 전부 하사관 장교이고 집에 다 가족들이 있다”며 “우리 선임하사가 광주사람인데 민간인을 총으로 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계엄군이 임신부를 죽였을 가능성을 일축했다.
이웃 목격자 “여기 말씨 아닌 얼굴 검게 칠한 이들이 돌아다니며 막 쏴 죽여”
임신부 최씨가 숨진 전남대 앞 중흥동 사망사건 현장에 있었던 A씨는 갑자기 들이닥쳐 집을 수색한 공수부대원 40명이 최씨를 죽였다며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A씨는 방송에서 “공수부대가 길에서 총을 쏩디다. 가다가 보니 여자가 평화시장 옆에서 딱 꼬부라져 버리고 그 여자가 별안간 죽어 버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얼굴이 우둘우둘해 갖고 그 공수부대들이 (얼굴에다) 뭣을 막 칠했더라고. 한번 쳐다보니까 얼굴이 막 무섭디다”라며 당시 놀랍고 심란한 마음이 들어 담장을 넘어 도망갔다고 했다. 옷은 “군복입었지라 공수부대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A씨는 처음 대면한 순간에 대해 “공수부대가 우리 집으로 싸악 한 40명이 달려들었어. 나 보고선 학생들 있으면 내놓으라고 그러더라”고 기억했다.
이어 “우리 집은 학생이 없소 보시다시피 문을 내가 다 열어 놨어. 열어 보이니까 나가더니 한 놈이 내 모가지를 잡고서 ‘왜 모가지를 잡아요’ 내가 그러니까 한 사람이 ‘놔두라’고 그랬다”며 “군인이 여기 말씨가 아닙디다”라고 했다.
광주 말씨를 쓰지 않고 군복을 입은 이들이 얼굴에 칠을 했다는 증언은 공수부대원의 증언과 배치된다.
3공수 중대장 김 대위는 “공수부대는 광주에서 진압할 때 얼굴에 위장크림을 바르지 않았죠”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또한 전남대 교문 건너편 상황에 관한 질문에도 “공수부대 복장을 한 애들이 있었다. 걔네들이 폭도들인데, 아마 그것을 조장을 하기 위해서 쏘고 그랬다. 우리(공수대원)는 절대로 이탈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역시 공수부대원이 얼굴에 위장크림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질문에도 “그렇다”고 거듭 강조했다.
전남도청을 사수하던 11공수 62대대 문병소 중사도 유사한 증언을 했다. 문 중사는 “21일 오후 2시까지도 저희들은 얼굴에 무슨 위장크림을 바르고 그런 과정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오히려 시민군 쪽에서 위장한 사람들은 한 두 사람씩 있었다고 증언했다.
“공수부대에 위장크림 지급 안 돼… 軍 소행처럼 보이게 모략한 정황”
문 중사는 “특수분장을 하고 이런 사람들은 시민군들 대중들 저 한 블록 뒤에 군용지프차라든지 APC장갑차·대형화물차·버스·택시 같은 데 흰띠 수건 같은 걸 머리에 칭칭 감고 위장을 한 그런 사람들은 한 두 사람씩 차량에 탑승해 가지고 깃발 같은 걸 흔들고 이런 걸 20~30m 조금 멀게는 한 50~100m 중간 중간에 차량을 끌고 움직이는 그런 사람들은 바로 5월21일 오후 2시 직전까지는 제가 가까이서 봤다”고 진술했다.
‘흰띠 수건으로 위장을 한 사람’을 뜻하는 건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혹시 위장크림 바르고 그런 것 못 보았습니까’라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고 뒤이어 “저희들은 위장크림을 바르고 할 시간적 여유 조차도 없고 그걸 바르면 끈적거린다”고 덧붙였기 때문이다.
문 중사는 “그 당시 제품들이 구두약 같은 것이고 미군에서 혹시 나오는 걸 한 번씩 지급받으면 구두약처럼 진득해서 얼굴에 바르면 피부가 약한 사람은 뭐가 생기고 이랬다”며 “광주에선 일체 그런 제품들이 지급된 적이 없다”고 보충 설명했다. 이 증언을 종합하면 공수부대는 5·18 기간에 얼굴에 위장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시민군 중에서 위장한 이들이 가끔씩 목격됐다는 설명으로 풀이된다.
박명규 5·18역사학회 회장은 최근 본지와 만나 “국군이 시민을 학살한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계엄군 학살설을 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면서 “특히 당시 공수부대원의 3분의 2는 전라도 출신이었고 현지 계엄사령관들도 전라도 출신이었다”며 “계엄군의 광주·전라도민 학살 소문은 터무니 없다”고 강조했다. 5·18역사학회는 이 같은 내용을 성명으로 발표한 바 있다.
육사총구국동지회 초대 회장을 지낸 이두호 (사)자유수호국민운동 대표와 국가정보원 고위 간부를 지낸 김영택 자유수호국민운동 상임고문은 “(괴한들이) 계엄군으로 위장한 뒤 시민에 만행을 저지르면 계엄군에 책임을 전가할 수 있다”며 그 수법은 군사학적으로 ‘모략전’이자 ‘게릴라전’의 양상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최미애 씨 사망 검시서에 대한 의학적 분석을 비롯해 당시 상황을 종합적으로 연구해 온 한 의료인은 “증언들로 미뤄 짐작하면 최씨는 계엄군으로 위장한 약 40명 정도의 무장단체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최씨가 살해되던 오후 1시50분에는 시위 군중의 파상 공격에 전남대 캠퍼스를 방어하고 있던 3공수여단이 진땀을 흘리고 있던 시각이었다”며 “그런 시각에 일부 병력이 캠퍼스를 빠져나가 독단적으로 중흥동 골목을 돌면서 시민들을 살해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다”고 밝혔다.
스카이데일리⊙
⑯ 5·18조사위 ‘北개입설’ 은폐 급급
文정부 내내 전남대 운동권 출신들이 조사방향 좌지우지
4년간 혈세 쓰면서도 불공정한 잣대… 법적 책임론 ‘빗발’

▲ 지난해 5월12일 서울 중구 나라키움저동빌딩에서 열린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대국민 보고회에서 송선태(가운데) 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정부에서 출범한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위원장 송선태)가 4년간 막대한 정부예산을 쓰고도 북한군 개입설 조사를 고의로 축소·방치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5·18 직전 ‘사전 무장봉기’를 계획한 것으로 밝혀진 송선태 위원장(장관급)을 비롯해 조사 방향의 열쇠를 쥔 키맨들의 상당수가 전남대 운동권 출신인 조직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2021년 1월 개정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1장 3조의 9는 5·18 당시 북한군 개입 여부 및 북한군 침투조작 사건을 진상규명 조사 범위에 포함했다.
법 규정에 ‘침투 의혹’ 대신 ‘침투 조작’이라는 표현이 사용돼 결론을 미리 정하고 예단하고 있다는 심각한 문제점이 우선 지적된다.
그러나 이 점을 제외하더라도, 막대한 국민 혈세를 쓰는 조사위가 법이 규정한 북한군 개입 문제를 성실하게 조사하고 국민적 의혹을 풀어야 할 법적 책임을 방기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어 조사위 해단 이후 공직자로서 재직 시절의 책임 소재가 뜨거운 감자가 될 전망이다.
26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올해 12월 활동 종료를 앞둔 조사위가 4년간 거액의 정부예산을 쓰고도 북한군 개입 여부를 명백히 가려내기는커녕 고의로 외면 또는 축소·방치해 온 단서들이 포착돼 문제가 되고 있다.
북한군 개입설은 확인 여부에 따라 5·18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뀌게 한다. 우리 군복을 입고 계엄군 행세를 한 북한 무장공비와 고정간첩이 무고한 광주시민들을 총으로 쏜 뒤 계엄군의 잘못으로 덮어씌운 모략전술이 드러나면 정부 폭력에 항거한다는 순수한 민주화운동으로서 명분을 잃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기존 5·18유공자는 대대적으로 물갈이가 불가피하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반면 여전히 진위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 중인 ‘도청 앞 집단사격’(포 사격이 아니므로 ‘집단발포’라는 용어는 잘못) 의혹 등 그동안 사태 유발의 결정적 원인으로 꼽혀 온 계엄군의 만행이 북한군 소행으로 책임이 전환되면 43년간 거듭돼 온 남남갈등과 반목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실추된 군의 위상이 회복되는 전기를 맞이할 수 있다. 당시 계엄군과 시민이 진심으로 손을 맞잡고 화해할 해빙무드가 비로소 조성될 수 있어서다.
또한 호남과 선량한 광주시민에 대해 그간 사회에 만연해 온 차별적 풍토가 일순간 개선될 가능성도 크다. 계엄군으로부터 피해를 당한 광주시민에서, 북한의 계략과 교묘한 선전선동에 휘말려 차별 피해를 당해 온 호남 도민 전체로 피해 회복의 객체가 확대되는 관점에선 국가적 실익도 기대할 수 있다.
따라서 5·18이 순수 민주화운동인지, 북한군 또는 북한 인민군 소속이 아닌 민간 공작조가 개입한 폭동·반란인지 성격을 재정립할 중요한 책무를 조사위가 고의로 외면한 것은 간과해선 안 된다는 비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5·18이 특정 정당이나 이익집단의 정파·정략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상징으로 전락한 결과, 역설적으로 다수의 호남 도민을 현실 피해자로 양산한다는 근거에서다.
광주 출신으로 실체적 진실 규명 차원에서 5·18을 연구해 온 김덕수 전 20사단 계엄군 중대장(대위)은 최근 본지와 만나 “북한의 소행으로 밝혀지는 순간 가짜 유공자가 대거 탄로나겠지만, 어차피 그들은 본인이 가짜인 걸 알고도 오랜 시간 달콤한 혜택을 누리며 위선적인 삶을 지내 온 것인 만큼 그 죗값을 돌려받는 건 당연하다”며 “그보다는 호남 사람 전체에 대한 인식 개선을 염두에 두고 5·18 북한 개입설에 접근하는 게 바람직한 자세”라고 권고했다.
그러면서 “광주의 문화예술은 계엄군을 악마화하는 데 특화됐다고 할 정도로 그간 사회 분위기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과 우리 군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데 혈안이 됐던 게 사실”이라며 “그래서 북한군 개입에 대한 정부의 철저한 조사가 중요했지만 조사위 활동 마감을 앞둔 이제 와서 보면 부질없이 헛된 기대였다는 걸 다시 느끼곤 한다”고 지적했다.
조사위 “북 개입 없다” 결론 점쳐져
조사위는 2020년 본격 활동을 시작한 이후 그해 12월 1차 보고서를 시작으로 올해 6월까지 6차례 중간 보고서를 냈다. 12월26일 활동을 종료하면 내년 상반기 중으로 최종 보고서를 낼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6차 보고서는 북한 개입설에 대한 조사위의 조사 정도를 가늠하고 최종 보고서를 예측케 하는 일종의 ‘풍향계’다. 이의제기 기간 90일을 고려하면 조사위의 본격 활동은 9월에 대부분 일단락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기 때문이다.
조사위가 △최초 사격명령 △도청 앞 집단사격 △헬기 기총사격 등 스스로 밝히겠다며 직권으로 상정한 21개 안건 중 조사위 전원위원회의 진상규명 결정을 통과한 안건은 단 한 건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19일 광주MBC 보도에 따르면 유족이 조사를 요청한 132건 중 20여 건은 활동 종료가 임박한 최근에야 조사가 시작돼 기한 안에 결론을 낼지 불투명하다. 조사위는 132건 모두 기한 내 매듭짓겠다는 입장을 방송에 밝혔다고 한다.
이에 따라 막대한 시간과 인력이 소요되는 북한군 개입설 진위 가리기는 더 어려운 처지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사위는 최근 6월 보고서에서 제기되는 의혹에 대해 대부분 “사실무근”으로 결론냈고 일부 조사하고 있다며 여지를 뒀다. 현 추세대로라면 내년 최종 보고서에서 “북한군 개입은 없었다”고 결론을 내릴 공산이 크고 국민은 이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5·18연구가들은 지적한다.
올해 6월30일 발표한 5·18진상조사위 보고서 244쪽은 ‘간첩 사건, 북한특수군 투입설, 조작과 왜곡’ 문제를 다뤘다. 조사위는 “1980년 5월24일 간첩 이창용을 ‘광주 시위선동 임무를 띠고 남파된 간첩’으로 검거했다고 발표했던 사건은 5·18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확인했다”고 보고서에 적시했다. 간첩 손성모 사건은 추가 행적 조사를 보완해 5·18과의 관련성을 최종적으로 확인할 계획이라고 여지를 남겼다. 일단 5·18과 무관하다고 결론짓진 않은 뉘앙스다.
보고서 245쪽은 “지만원 (박사가) 운영하는 웹사이트 ‘시스템클럽’에서 5·18 당시 주요 인물들을 광수로 지목해 북한과 연계시키는 등의 왜곡과 조작을 일삼아 온 ‘노숙자 담요’라는 필명을 사용해 지만원 (박사) 본인이 3차례 글을 게시한 사실을 인정한 검찰 진술을 확보했다”고 공표했다. 이에 대해 5·18연구가들은 조사위가 본질을 흐리고 실체적 진실을 왜곡한다며 크게 반발하고 있다.
보고서 246쪽은 “북한특수군 침투 및 개입설 등의 왜곡과 조작이 1980년 5·18 등 당시 전두환(보안사령관)의 발언에서 시작해 군과 정보기관에 의해 계획적·조직적·지속적으로 진행됐음을 확인해 가고 있다”고 적시했다. “확인해 가고 있다”고 에둘러 표현했다.
1995년 검찰 보고서 “계엄령 발령 근거는 北 징후”
6월 보고서에 대해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없고 폭동과 무장반란의 성격이 있었다고 주장해 온 쪽에선 조사 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제대로 된 조사가 선행되지 않은 채로 “북한군 개입은 없었다”고 최종 보고서에서 성급히 결론 내릴 공산이 크다고 관측하는 이유다.
5·18연구가들과 군·안보단체 관계자들은 5·18을 전후한 북한의 동태가 예사롭지 않았는데도 북한군 개입 가능성을 외면하는 것은 부실조사의 방증이라는 입장이다.
1995년 7월18일 서울지방검찰청과 국방부검찰부가 공동 발표한 5·18 관련 사건 조사결과 보고서(29쪽)는 “(1980년) 5월10일 김영선 중앙정보부 2차장은 5월 중순 북괴가 남침할 가능성이 짙다는 이른바 북괴남침설을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서리에게 보고했고, 5월12일 임시국무회의가 긴급 소집돼 중앙정보부 담당국장이 출석, 북괴남침설 분석 결과를 보고했으며 군과 경찰에는 비상계엄체제 돌입령이 시달됐다”고 적시했다. 당시 정부는 북한의 징후를 계엄령 발령의 근거로 삼았다.
또한 “비상계엄의 확대 선포와 정치활동의 금지 조치는 북한 군사 동향과 국내 치안 상황을 보고받은 최규하 대통령이 국가위기 상황이라고 판단하고 국가 기강과 사회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 계엄사령관·국방부 장관·중앙정보부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통치권(統治權) 차원에서 단행한 비상조치라고 (중략) 밝히고 있다”고 보고서는 기록했다. 이 보고서는 군 관계자 269명의 진술을 토대로 한 것이다. 일일 최대 14시간씩 며칠간 조사받은 전체 분량은 10만 쪽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북한의 동태가 안보에 위협을 주는 상황에서 북한은 전혀 개입하지 않았고 순수 민주화운동이라고 단정짓는 것엔 무리가 따른다고 지적하는 이유다.
같은 시각 광주·전남 쪽 상황은 남달랐다. 보고서는 “격렬한 시위를 마친 서울대 등 서울시내 23개 대학과 24개 지방대학 총학생회장들은 5월15일 일단 가두 시위를 중지하고 정상 수업에 들어갈 것을 결의해 (중략) 수업이 이뤄졌으나 전남대·조선대 등 광주시내 9개 대학 대학생 2만여 명은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시국 성토대회를 가진 다음 야간에는 횃불 시가 행진을 벌였다”고 했다. 횃불은 이른바 ‘5.16 화형식’을 일컫는다. 밤 9시30분부터 전라남도 도청 앞에서 박정희·최규하 대통령을 화형하는 행사가 열렸고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현수막이 등장했다.
이 무렵 실제 기록된대로 현실화한 사전 무장봉기 계획이 담긴 자유노트 기록자 송선태 위원장과 전남대 상황은 긴급하게 돌아갔다. “횃불시위를 기획한 곳은 기획실”이라고 책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와 박관현(도서출판 선인)’ 103쪽은 기록하고 있다.
최정기·김형주·양라윤·유경남 씨가 (재)관현장학재단 협조로 펴낸 이 책 102쪽에는 “총학생회의 양강섭·박용성, 서클연합회의 문석환, 학자추(학원자주화추진위원회)의 한상석·송선태, 복적생 노준현·박몽구·문승훈 등이 총학생회장실에서 만나 비밀리에 총학생회의 그림자 조직인 기획실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림자 조직 기획실의 생성 배경은 노준현추모문집발간위원회 ‘남녘의 노둣돌 노준현(미디어민 ·2006년)’ 190~191쪽에도 나와 있다.
민주화 운동이냐, 北개입 폭동이냐… 진실 가려야
계엄군 만행으로 오도됐던 사건들 책임소재 명확하게 규명돼야
北 소행 드러나면 43년 南南갈등 해소 실마리… 軍 위상도 회복
내년 최종보고서 ‘北개입 없다’ 결론 가능성… 진실 묻혀선 안 돼
전남대 운동권 출신 조사위 곳곳 포진, 균형 잃은 조사위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와 박관현’ 87쪽에는 “학술부는 최용주(사회학과 3년)에게 부장을 맡기는 방향으로 집행위원회를 개편했다”고 적시했다. 이어 “최용주는 또 박관현 회장과 함께 사회조사연구회 구성원”이라고 전했다.
최용주는 현재 정부 5·18조사위에서 조사1과장을 맡고 있다. 2020년 5월15일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 전화 출연한 허연식 조사2과장은 조사1과 업무에 대해 “집단발포(집단 사격), 그 다음에 헬기 사격, 그 다음에 사망자들을 비롯한 중대 인권침해 이런 내용들을 세세하게 확인할 것”이라고 조사 범위를 밝힌 바 있다. 시민군 측의 집단발포 주장은 우파적 관점에서 5·18을 연구하는 쪽에선 “사실무근”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이는 계엄군이 마주 보고 대치하던 시위대를 향해 집단 발포했다면 전일빌딩·YMCA 앞에서 대부분의 총상 사망자가 발생해야 했지만, 검시조서·검안서 재분석 결과 도청 앞 분수대보다 다른 지역 사망자가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도청 앞 계엄군이 집단사격했는데 길게는 1km 가까운 거리에 있던 시민들이 산발적으로 쓰러진다는 것은 의·과학적 상식에 위배되는 것이다. 또한 당시 계엄군은 1만 명 안팎(시민군 추산)의 시위대에 포위돼 도청 앞 분수대에 고립돼 있었고 시민군 측이 주장하는 집단 발포 추정 시점(오후 2시)에는 개별 병사에게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다.
본지는 5·18기념공원 지하 추모승화공간 돌판에 새겨진 5·18유공자 명단 중에서 ‘최용주’라는 이름 두 명을 발견했다. 1941년생과 1958년생이다.
허 과장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조사3과는 북한군 개입 여부 조사를 맡았다. 그는 “지만원 (박사) 등이 주장하는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조작설을 지금 계속해서 유포하고 있는데 이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업무라고 3과의 조사 방향을 설명했다. 발포 무기의 습득 과정도 전수조사한다.
송 위원장 외에도 추모승화공간 돌판에 적힌 5·18유공자 명단 중에선 정부 진상조사위에서 활동 중인 이들과 같은 이름이 다수 확인된다.
일치되는 이름은 송선태·최용주·안길정·김성훈·김영관·김태종·신치호·이덕재·이상민·이영미·이태규·정경자가 있다.
이 가운데 송 위원장은 유공자 신분을 숨겨 온 것으로 드러나 중립 의무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제척 사유에 해당돼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본지 8월2일자 [5·18 진실찾기⑧] 5·18진상조사위원장은 ‘무장봉기’ 모의 주동자 보도 참조>
北개입 확인 땐 명분 잃어… 유공자 조사위 한계 노정
자유노트 기록자 송 위원장과 안길정은 함께 움직였다.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 박관현’ 102쪽은 “기획실 책임자는 송선태가 맡았으며 노준현·문승훈·박몽구·안길정 등이 구성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책은 이 기록을 최유정(2012년 간) 170-171쪽에서 발췌했다고 출처를 인용했다.
안길정은 현재 조사4과장으로 일한다. 5·18유공자 명단이 기입된 돌판에 동일한 이름이 있다.
조사위 보고서에 등재된 이름을 기준으로 6차례 보고서를 내는 동안 조사에 참여한 구성원은 박진언·신승우·허나온·조환준·한기용·이영민·정문영·양재은·김남진·이춘희·양재은·허연식·박윤모·정호문·황준연·이관형·이춘희·신동일·한은영·김상욱 등 20명이다. 조사과장과 조사관 등 해당 보고서를 낼 때 조사업무에 관여한 이들이다.
유공자 돌판에 이름이 있고 3·4·5회 보고서에 참여한 김태종 조사관은 5·18 당시 궐기대회에서 사회를 봤다. 처음 보고서에 등재된 건 2021년 12월31일이다. 2차 보고서가 나온 같은 해 6월30일 이후 12월31일 이전에 보고서 작성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 개입설에 관한 조사위의 부당한 처신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무장괴한이 북한군이라고 직감하고 다양한 첩보를 상부에 보고했던 5·18 당시 광주 보병학교 교관 홍순영 예비역 소령은 전북 고창에서 조사위 관계자들을 만났다가 낭패를 본 경험담을 토로했다. 홍 예비역 소령은 최근 본지와 만나 “북한군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하니 갑자기 조사를 중단하고 자리를 떴다”며 “북한군에 관한 내용은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는 어처구니 없는 행태에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고 밝혔다.
5·18 당시 남파됐던 한 탈북군인의 5·18체험담을 기록한 실화 소설 ‘보랏빛 호수’의 저자인 탈북작가 이주성 씨를 무례하게 대하며 폭언한 사실이 녹취가 공개되면서 확인된 바 있다.
최근에는 스카이데일리가 주도하는 민간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민진사)의 고문을 맡고 있는 김태산 남북함께국민연합 상임대표가 조사에 출석했다. 체코주재조선무역 대표를 지낸 김 고문과 함께 사진을 식별하던 조사위 관계자는 “그때는 (계엄군이) 머리가 길었다”며 사진 속 인물을 계엄군이라고 강변하려 한 상황도 있었다.
김 고문은 ‘대한민국에 5·18 유공자는 없다’는 주제의 세미나 토론에서 “5·18에 북한이 개입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한국의 좌파들이 더 잘 알면서도 자기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철저히 숨길 뿐”이라고 역설한 바 있다.
신군부 시나리오설엔 적극적… 반쪽짜리 조사 논란
정부 조사위가 북한 개입 조사는 미온적인 가운데 신군부 시나리오설에 대해서는 대대적으로 기자회견을 개최하면서 물꼬를 전환하려 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정체 불명의 무장괴한들이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관련이 있다는 의혹에 대해선 적극적이었다는 것이다.
5·18이 신군부에 의해 계획된 시나리오였다며 당시 신원미상의 무장괴한을 북한군이 아닌 우리 군으로 몰아가는 데는 가짜 미군 정보요원 김용장 씨 탓이 컸다. 김씨는 2019년 JTBC 보도와 기자회견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사살 명령을 내렸고 5·18은 신군부가 짠 각본대로 움직였다”고 주장했지만 모두 허위로 드러났다.
마이클 리 미국 중앙정보국(CIA) 전 요원은 “김용장의 말은 사실무근”이라고 본지에 밝힌 바 있다. 40년간 한국을 담당한 경험을 토대로 쓴 책 ‘CIA요원 마이클 리’의 저자인 리 박사는 “결론적으로 딱 잘라서 5·18은 틀림없이 북한이 계획하고 지휘한 작전이었다”고 단언했다.
미국 공군 중령 출신으로 현재 한국을 방문 중인 타라 오 박사도 최근 민진사 회의에 특별 게스트로 참석해 김용장 씨 발언에 대해 “JTBC가 내보낸 방송 화면만 봐도 그와 관련된 서류에 통역자로 표기돼 있다”며 “그는 (핵심 정보를)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는 개인적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1980년 정부가 북한군 개입에 대해 깊이 있게 파헤치지 않았다는 지적에 대해 5·18 당시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전속부관을 지낸 최종대 예비역 육군대령(육사31기)은 “신군부라는 표현 자체도 정확하지 않지만 군부의 시나리오라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얘기”라고 짚은 뒤 “80년대에는 과거 일을 들춰내 그쪽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지 않겠다는 게 전반적인 분위기였다”며 북한군 개입의 진위를 떠나 개입 여부에 초점을 맞추지 말자고 독려하는 분위기가 군 고위층에 있었다고 전했다.
1995년 검찰 및 군검찰 공동조사 보고서 15쪽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서리 겸직은 최규하 대통령의 10.26사건 이후 사실상 와해 상태에 있던 중앙정보부의 기능 정상화를 위해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적임자로 판단, 인사 발령한 데 따른 것”이라고 해석했다.
사격명령권을 가진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명령·지휘계통이 엄격하게 구분된다고 군 출신 인사들이 예외없이 말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유해는 2021년 11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 임시안치됐으며 아직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못하고 있다. 이순자 여사는 지난해 12월호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남편은 ‘과거는 물에 흘려 보내고 국민이 다시 화합해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균형 잃은 조사위의 편향성을 언급할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가 송 위원장이다. 송 위원장은 5·18 발생 일주일 전 ‘예비군 무기고 접수’와 ‘도청 점령’을 사전 모의한 이른바 ‘자유노트’를 직접 기록한 주동자였던 사실이 본지 보도에서 밝혀진 바 있다.
송 위원장 자신이 5·18유공자로 등록돼 그동안 혜택을 받아 온 사실도 드러났다. 진상조사위의 활동 결과에 따라서는 5·18이 순수 민주화운동보다 폭동과 반란으로서 사회적 공감대가 모아질 수 있기에 유공자가 위원장을 맡거나 조사 실무에 참여해선 안 된다.
육사 출신의 계엄군 장교를 지냈고 5·18을 연구해 온 최종원 민진사 위원은 “방송국과 무기고·공공기관을 죽창을 동원해 접수하고 탈취한 무기로 도청을 점령한다는 내용이 담긴 ‘자유노트’는 5·18이 ‘비폭력 민주화운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위중한 문건으로 일각에서 받아들인다”며 “사실상 무장봉기를 사전 계획하고 획책하려 한 항쟁계획서를 기록한 당사자이자 유공자가 진상조사위원장을 맡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아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까지 버텨 온 것”이라고 말했다.
9명 중 전남대 출신 6명… 3명은 전대5·18연구소 전·현직
조사위는 전원위원회 소속 9명 가운데 6명이 전남대 동문이다. 송 위원장(국문)과 김희송 위원(NGO학)·민병로 위원(법학)·서애련 위원(법학)·오승용 위원(정외)이며, 최근 조사위로부터 사직권고를 받은 안종철 부위원장(정치)이 포함된다. 이중 민병로·오승용·김희송 비상임위원은 전남대5·18연구소 현직 연구소장과 전직 연구교수라는 특수 관계다. 이들 비상임위원은 조사위가 발주하는 용역을 최소 2차례 수주했다.
또한 조사위는 이달 1일 안종철 부위원장에 대해 사직 권고안을 냈으며 위원 7명 중 4명이 찬성해 채택했다고 광주MBC가 19일 보도했다. 안 부위원장의 돌연 사퇴를 놓고 해석이 분분하다. 일각에선 북한 개입설에 대한 부실 조사 책임이라는 시각이 있고 최종 보고서에 참여하지 않아 면책하려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그는 ‘5·18 때 북한군이 광주에 왔다고?(아시아문화커뮤니티·2016년)’라는 책에서 북한군 개입설을 적극 반박한 바 있다.
익명을 요구한 제보자는 “조사위는 심의·의결 권한이 9인 전원위원회에 있는데 이들 중 6인이 전남대에서 학위를 받았고 3인이 특정 연구소의 전직과 현직으로 특수 관계를 이뤄 담합의 여지가 있다면 애초 여야 합의로 위원을 추천해 독립된 위원회를 구성한 취지에 위배된다”며 “국가적 차원에서 공정한 판단이 아니라 광주 지역 특정 세력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뿐이라는 우려가 들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
⑰ “무장공비 신발에 찔레꽃 시신… 北서 온 증거”
1.21 사태 당시 김신조가 신은 통일화와 끈 형태·무늬 똑같아
소총 거꾸로 멘 장정 18~20명, 머리 땋아내린 사람 지휘 받아
당시 北 장성 이을설 女裝 남파설 파다… 무장세력 지휘 가능성
▲ 1980년 5·18 당시 광주 육군보병학교 상황실장을 지낸 홍순영 예비역 소령은 최근 경기도 일산의 한 카페에서 만나 “보고가 묵살되면서 보안사와 정보사에 알리지 못해 북한의 개입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여전히 아쉽다”고 말했다. 남충수 기자
1980년 5·18 당시 전남도청에서 소총을 거꾸로 멘 채로 지시를 받는 듯한 장정들을 목격했고, 보병학교 연병장 시신에선 무장공비 김신조의 ‘1.21 사태’에서 노획된 북한군 통일화와 같은 신발을 발견해 “국군이 아니다”고 직감하고 보고했지만 묵살당했다는 당시 계엄군의 증언이 나왔다.
당시 광주 육군보병학교 상황실장을 지낸 홍순영(74) 예비역 소령은 최근 경기도 일산의 한 카페에서 본지 취재진과 만나 “그때 보고가 묵살되면서 보안사와 정보사에 알리지 못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여전히 아쉽다”고 그날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3사 2기생으로 1970년 5월 소위로 임관한 홍 전 상황실장은 1978년부터 광주 육군보병학교에서 전술 교관으로 근무했다. 5·18이 일어나면서 상황실장에 보임됐으며 주로 야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낮에 잠을 잤다. 그 무렵 그는 전역을 앞둔 동료들과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광주 시내 충장로 화니백화점 옆 건물 2층에서 음식점을 운영했다. 그도 전역한 뒤 합류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홍 전 실장은 5월21일 시위로 문을 닫은 업장을 살핀 뒤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도청까지 걸어가다 낯선 풍경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는 “충장로에서 거리가 얼마 안 되는 전남도청까지 걸어가는데 여자처럼 머리를 땋아 내린 사람이 지프차 위에서 말하고 있었고 소총을 거꾸로 멘 장정 18~20명이 그 사람을 둘러싼 채로 듣고 있었다”며 “지휘관이 지시하는 모습이라는 직감이 들었다”고 했다.
5·18 당시 북한 공작조가 광주에 침투했다고 보는 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장 가운데 하나가 북한 인민군 이을설 원수가 광주를 다녀갔다는 것이다. 신원이 탄로 나는 걸 감추기 위해 이을설이 여자로 분장해 광주에 잠입했으며 도청 점령을 전후해 무장세력을 총지휘했다고 주장하는 견해다.
일반인에겐 터무니없는 소설처럼 받아들여지는 실정이지만 육사 출신으로 정보당국에서 근무했던 지만원 박사가 사진 분석을 토대로 몇 가지 근거들을 제시하고 처음 주장한 뒤부터 5·18 연구가들 사이에선 ‘이을설 총지휘설’을 완전히 배제하진 않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홍 전 상황실장이 봤다는 총기를 거꾸로 멘 18~20명의 장정에게 지시하는 듯한 여성 차림의 신원미상자가 이을설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2015년 사망한 것으로 북한이 밝힌 이을설은 1980년 무렵에는 60세의 인민군 상장이었다. 상장 계급은 우리 군의 중장(3성 장군)에 해당한다.
홍 전 실장은 “군 조직은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자세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의 명령계통인지 통상 유추할 수 있다”며 “(시위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아니었고 지휘관이거나 조직된 군인이 와서 움직이는 것처럼 느꼈다”고 강조했다.
실제 광주에 다녀갔다는 확실한 물적 증거가 없는 가운데 ‘이을설 여장설’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계엄군 목격담이 실제 증언으로 나온 것이다. 홍 전 실장은 “그래서 다음 날인 22일 아침 7시30분 상황 회의에서 보병학교장과 교수부장·처장들 앞에서 내가 보고 느낀 바를 보고했지만 보병학교장으로부터 ‘북괴군이 어떻게 광주에 오나’라며 일언지하에 묵살당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는 교육을 받으러 온 장교들을 상대로 적전술을 가르치는 중대방어 교관이었다. 적전술(適戰術)은 전시 북한군의 전술 체계와 무기·복장·장비·장구·행동 패턴·훈련방식·공격 형태 등을 배우고 익히는 군사 수업이다. 적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적이라고 판단할 근거들을 평소 숙지해야 한다. 따라서 북한군 식별이 주요 업무였던 홍 전 실장으로선 소총을 거꾸로 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북한군 개인에게 지급되는 자동화기 종류인 AK소총은 빗물이나 눈이 들어가면 작동이 잘 안되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총구를 아래 방향으로 향하고 어깨에 메도록 훈련받고, 공격하면서도 아래로 향한 총구를 앞으로 들어 쏘는 게 그들의 일상적인 총기 견착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M16 등을 사용하는 우리 군은 절대로 총구를 아래로 향하게 어깨에 메는 경우가 없다”며 “전방 소대장으로 근무하면서도 본 적이 없고 주변 동료들도 그런 사례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약 20명의 장정이 총을 거꾸로 멘 모습은 대공 혐의점이 있다고 봤기에 확실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 올해 5월 광주에 자리한 한 5·18기념시설의 실내에 ‘바로잡은 역사’ 코너가 관람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학살자로 규정하고 비로소 역사를 바로잡았다는 취지의 글씨가 새겨져 있지만 상당수 국민은 무기고를 탈취하고 도청에 다이너마이트(TNT)를 설치한 폭력 시위를 순수 민주화운동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해석에 이견을 표출하고 있다. 남충수 기자
“北세력 개입 직감한 날 광주교도소 피습… 상상도 못 해”
민주화운동과 거리 먼 폭도… 광주시민 소행 아니라는 확신
‘5·18’ 끝나고 한참 뒤에야 ‘총 거꾸로 멘 사람들’ 의심 커져
北 AK소총 물 들어가면 작동 안 돼… 총구 아래로 메는 게 일상
“우리 군인이 아니다”고 느낀 날 밤 광주 교도소가 피습된 소식에 다시 한 번 놀랐다고도 했다. 그는 “아무리 시민들이 과격하게 시위하더라도 교도소를 습격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러곤 “이제 생각해 보면 순수 민주화운동이라는 명분을 중시하는 광주시민들이었다면 먼 훗날에라도 그들 사이에 탈옥한 흉악범들이 끼어 있었다는 말을 듣고 싶진 않았을 것”이라며 “미전향장기수들이 있는 교도소였다는 사실을 5·18이 끝나고 한참 뒤에 알고 나서 그때 불순한 동기를 가졌거나 가진 이들이 섞여 있었다고 본 내 관점이 맞았고 (도청 앞 소총을 거꾸로 멘 장정들이) 우리 쪽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더 굳히게 됐다”고 강조했다.
21일 이상한 낌새를 차린 그는 22일 보병학교 연병장에 놓인 시신들을 보면서 또 한 번 “불순분자들이 틈바구니에 섞여 있다”고 확신했다고 한다.
홍 전 실장은 “시신이 약 150구 정도 놓여 있어 양쪽이 너무 과열됐다는 참담한 마음으로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살펴보고 있는데 맨 앞줄 좌우에 한 구씩, 그리고 맨 뒤쪽 시신 한 구에 꽂혀 있는 하얀 찔레꽃이 눈에 들어왔고 당시만 해도 수상한 점과 연결하진 못했다”면서 “그보다는 이들 시신에 신겨진 통일화를 보고 북괴군이 왔다고 확신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시신의 통일화는 김신조가 신었던 신발하고 똑같은 무늬였다”며 “우리(군의) 통일화는 좀 두껍고 우리가 신어 봤기 때문에 금방 아는데 북한군 통일화는 줄(끈)이 가는 형태였고 김신조 침투 때 봤기 때문에 구분한다”고 말했다. 김신조는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1968년 침투했다 생포된 무장공비다. 1월21일에 사태가 일어나 ‘1.21 사태’라고 부른다. 당시 남파된 북한 124군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 중 김신조를 제외한 30명이 사살됐다. 당시 노획품 중에 북한군 통일화가 있었고 우리 군의 적전술 교관들은 이를 식별하는 교육을 받았다.
홍 전 실장은 1985년 전역했다. 음식점과 자동차정비소 등을 경영하는 사이 세월이 흘렀다. 1988년 5공 청문회 때도, 1995년 검찰 재수사 때도 그는 증인으로 호출된 적이 없었다. 홍 전 실장은 “광주사태가 정치적 이유로 민주화운동으로 바뀌는 사이에 꾸준히 북한군 개입 이야기가 나왔고 그때마다 김신조 통일화를 본 기억과 거꾸로 멘 소총이 눈앞에서 맴돌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5·18에 관한 소식을 접하던 중에 찔레꽃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던 시신에 꽂힌 찔레꽃이 그것이었구나 생각하게 됐고 (북한군 개입에 대한) 확신은 더 강화됐다”고 말했다.
북한이 5·18에 개입했을 것으로 보고 추적하는 쪽에서는 만약 북한 인민군 또는 군 소속이 아닌 공작조가 침투했을 경우에 평범한 광주 시민과 그들 자신을 구분하기 위한 식별표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송암동 오인사격 등 5·18 당시에는 아군끼리 오인해 교전이 벌어졌다. 인민군복을 입지 않은 이들로서는 서로 뒤섞여 작전에 참여할 때 북한에서 온 사실을 구분하도록 할 비표가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북한 개입을 가정한다면 이렇게 보는 게 합리적인 추론이다. 그 대표적인 인식 방식이 찔레꽃을 두르거나 흰 머리띠 또는 수건 등으로 얼굴을 가리는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이다.
1949년생인 홍 전 실장의 기억은 살아 오는 동안 더해지고 빠졌을 수 있다. 그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그들이 분명히 북한군이었고 상황실장을 하면서 나름의 정보를 입수해 지휘관한테 보고했는데 ‘거짓말하지 말라’며 묵살됐다”며 “북한의 개입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내 보고를 상부에서 가용한 자원을 동원해, 예를 들면 (보병학교의) 대위급 피교육생들만 가지고도 제압하고 충분히 섬멸할 수 있었을 텐데도 사태가 (광주시민 희생이라는) 비극으로 확대됐다. 지휘관들이 지휘 판단을 잘못했다는 생각을 없앨 수가 없다”고 답했다.
광주 시위대를 보고 느낀 솔직한 감정도 전했다. 그는 “5월18일 (경영하던) 업장에 가 보니 데모 때문에 난리가 났는데 그때 당시엔 순수한 시위대로 보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맞아서 머리가 터져 피신해 온 이들은 군인인 내가 보기에도 너무나 안타까워 그 사람들을 다독이고 그랬다”며 “공수단이 너무 과격하게 제압한 것 같아서 내 마음도 광주 사람들에게 동화되는 그런 마음이었다”고 했다.
한편 홍 전 실장은 이번 인터뷰에서 청주에서 발견된 유골에 대한 개인적 견해도 밝혔다.

▲ 5·18 당시 광주 육군보병학교 상황실장을 지낸 홍순영 예비역 소령은 “북한의 개입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내 보고를 상부에서 가용한 자원을 동원해 대응했더라면 사태가 비극으로 확대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지휘관들의 지휘 판단에 문제가 있었음을 내비쳤다. 남충수 기자⊙
⑱ “5·18은 北이 민중 봉기로 조작한 대남공작”
박정희 서거 틈타 대남공작 총책 김중린이 진두지휘
잠복 간첩들에 1월 지령… 2·3인조 공작대 순차 침투
▲ 미 중앙정보국(CIA)의 한국계 요원으로 북한의 5·18 개입을 예측하고 조사한 마이클 이 박사가 9일 서울 종로구의 한 커피숍에서 스카이데일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남충수 기자
1980년 5·18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를 기화로 북한 노동당 대남공작 총책 김중린이 이듬해 1월 지령을 내렸고 2·3인조로 나뉜 민간 공작대가 육·해상으로 광주에 침투한 뒤 대한민국 국가 전복을 목표로 고정간첩과 합세한 북한의 ‘대남공작’이었다는 한국계 전직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의 직접적인 증언이 나왔다.
5·18 당시 북한의 정확한 지령 시점과 구체적인 침투 루트가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 마이클 리 박사
한국을 방문 중인 마이클 이(90세) 조지 워싱턴대 정치학 박사는 9일 서울 종로구 모처에서 스카이데일리와 가진 단독 인터뷰에서 “북한이 민중봉기 형식으로 직접 계획하고 지휘한 대남공작에 광주시민의 명예와 순수를 도둑맞은 게 5·18 사태의 본질”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40년간 CIA 등 미 정보당국에서 한국 담당 요원으로 근무한 마이클 이 박사는 KAL기 폭파 사건과 김신조 1.21 사태, 미얀마 아웅산 테러 등 북한이 획책한 굵직한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사건들의 발단 경위와 배후를 파헤치는 데 깊이 관여했으며 5·18 역시 직접 조사한 뒤 워싱턴에 최초 보고한 미 정보당국의 핵심 ‘북한통’이었다.
그는 서두에 “5·18에 관해선 나보다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다”고 담대하게 운을 떼며 본지와의 인터뷰에 임했다.
마이클 이 박사는 “김중린이 한국에 있는 잠복 간첩들에게 지령을 내린 것은 1980년 정월(1월)이었다”고 구체적으로 시점을 못 박았다. 북한의 지령 시점은 처음 공개됐다. 당시 김중린은 조선노동당 대남공작 총책이었고 김일성 주석과 지근거리에서 숙의하며 공작계획을 수립했다고 한다.
잠복 간첩의 성격을 되묻자 “이미 침투해서 와 있는 간첩들이며 북한은 고정간첩과 잠복 간첩을 합쳐 ‘혁명역량’으로 지칭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최초 지령이 하달된 뒤 몇 개월 동안 계속 2인조·3인조로 침투한 뒤 (남한에) 잠복해 있었던 간첩들”이라고 부연했다.
미 정보당국은 1979년 여름 북한의 특이동향을 포착한다. 이전부터 북한의 동태를 주시해 온 미국은 이 시기 북한이 남침에 대비한 특전대 훈련에 돌입한 사실을 파악했다. 이때만 해도 북한의 고질적인 남침 계획 정도로 파악한 당국은 김중린의 동태에 대한 첩보가 쌓이면서 예사롭지 않다고 보고 정밀 경계했다고 한다.
마이클 이 박사는 “북한이 대남작전을 구체화한다는 사실을 다양한 소식통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며 “17공수여단과 특전대가 훈련해 온 데다 김중린이 지령을 내린 사실을 입수해 워싱턴에 곧장 보고했다”고 확인했다. 그의 보고로 미국 정부는 1980년에 남한에서 북한이 계획하고 지휘하는 소요가 있을 것을 이미 예상했다고 한다. “이 정보를 한국 정부도 공유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그는 언급했다.
한국 정부 문건에 따르면 1980년 5월10일 김영선 중앙정보부 2차장은 5월 중순 북한이 남침할 가능성이 짙다는 이른바 '북괴남침설'을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서리에게 보고했다. 이틀 뒤 우리 정부는 임시국무회의를 긴급 소집했고 중앙정보부 담당국장이 출석, 북괴남침설 분석 결과를 보고한 뒤 군과 경찰에는 비상계엄체제 돌입령이 시달됐다. 정부는 북한의 징후를 계엄령 발령의 근거로 삼았다. <본지 9월28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⑯] 5·18조사위 ‘北개입설’ 은폐 급급 보도 참조>
또한 5·18 직전인 5월15일 우리 정보당국은 북한 공작조의 서해안 침투 첩보를 인지하고 군에 전파한 사실도 밝혀졌다. 당시 첩보는 군의 보고체계를 거쳐 사단장급 이상 고위 장성에게까지 올라가 공유됐다. <본지 8월30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⑫] “北 공작조 개입”… 軍 ‘사전 첩보’ 있었다 보도 참조> 당시 '북괴남침설'의 근거가 된 중앙정보부 정보가 미국 쪽에서 온 정보였는지는 이번 취재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마이클 이 박사는 광주시민 사이에 섞여 시민과 계엄군을 교란하고 싸우게 만든 세력이 규합한 경위를 구체적으로 보충 설명했다. ‘혁명역량’에 관한 부연 설명 과정에서다. 그는 “(남파 간첩 외에도) 부마사태 때 북한이 배후 조종해 내려왔던 간첩들이 (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잔류하고 있다가 광주에 합류했다”며 “1980년 4월에 벌어진 사북사태에도 북한이 개입했고 잔류 인원이 한 달 뒤 5·18에 가세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마이클 이 박사는 “미국 국무부에서 기밀 해제된 외교전문엔 북한 특수군이 왔다는 얘기가 없다”며 “내가 보고하면서 북한 특수군이 개입했다고 하지 않았고, 대남공작 특공대로 서술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미 국무부는 한국의 외교부와 같다. 한국 쪽에서 입수된 첩보를 확인한 뒤 정보로 만들어 워싱턴에 전달하는 일종의 정보 통로다. 국무부에서 기밀해제된 문서에 따르면 5·18은 '김대중 추종자들(Kim Daejung followers)'과 '북한 민간 공작대원들(North Korean Agents)'이 개입한 것으로 돼 있다. 그는 “'Military(군대)'가 아니다. 'Agent'는 간첩이라는 뜻”이라고 보충했다.
이어 “대남공작단을 구성하면서 군인(북한 인민군)이 차출되기도 했지만 조직 자체는 민간 조직으로 꾸려졌고 엄선된 이들은 특수부대원들보다 작전수행 능력이 뛰어나며 고도의 훈련을 견뎌 낸 이들”이라고 강조했다.
마이클 이 박사는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 쪽에서 외교문서를 아전인수식으로 유리하게 해석하는 것에 대해 “어이가 없다”고 반응했다. 그는 “북한이 5·18 시점에 남침하지 않고 대기했다는 문장만 보고 북한이 개입하지 않았다고 단정 짓는 것은 정보분석의 기본이 안 된 처사”라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가장 정확한 것은 나다. 내가 이 문서의 최초 작성자이자 보고한 당사자”라며 “북한은 특수군 남침 계획을 먼저 수립한 상태에서 민간 공작대를 남파해 고정간첩들과 합세하도록 계획하고 행동에 옮겼고 이 사실이 기록된 CIA 보고서를 토대로 국무부가 외교전문을 만들어 워싱턴에 보고했다”고 상세하게 설명했다.

▲ 올해 5월 5·18 구 묘역(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 바닥에 놓인 채로 행인에게 짓밟히고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 기념 비석. 1982년 전라남도 담양군의 한 마을에 숙박한 것을 기념해 마을 입구에 세워진 비석이었으나 전두환 정권이 끝난 뒤 한 시민이 넘어뜨리고 깨뜨린 비석을 망월동 묘역 바닥에 옮겨놓고 지나가는 시민들이 밟게 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동아시아 수석 연구원을 지냈고 1980년 5·18 북한 개입의 막전막후를 모두 조사한 마이클 리 조지워싱턴대 정치학 박사는 9일 스카이데일리 인터뷰에서 “대한민국이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에 국가안보가 굉장히 위태로울 때에 북한 입장에서는 그때를 굉장히 큰 기회로 여기고 노렸지만 전두환 보안사령관에 의해 수습이 잘됐기 때문에 그를 끌어들이고 미워하는 것”이라며 “아무 관련이 없는 전두환에게 광주에 대한 책임을 모두 뒤집어씌우는 것만 봐도 북한은 광주시민에게 총을 쏘고 계엄군에게 충분히 뒤집어씌울 수 있는 집단임을 알 수 있다”고 강조하고 국민이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광주=남충수 기자
“북한 5월27일 남침 기도… 전남도청 수복되자 포기”
부마사태 때 내려왔던 간첩들 잔류했다 광주에 즉각 합류
군인도 일부 차출됐지만 대부분이 고도훈련 받은 민간인
광주시민 폭도 매도해선 안 되지만 反민족세력 가려 내야
마이클 이 박사는 공작조가 주도한 무기고와 교도소 습격에 관해 설명하면서 구속된 지만원 박사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지만원 박사가 너무 많은 것을 파헤쳤고 정확한 일을 훌륭하게 한 공로가 있어 구속된 것이 안타깝다”며 “군부대의 탱크를 탈취했다든지 아세아자동차와 교도소를 습격했다든지 하는 것은 많이 맞는 얘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4시간 이내에 전라도에 있는 17개 시·군의 예비군 무기고 44곳을 탈취했다는 것은 결코 (시민군 주장처럼) 우발적인 일이었다고 간단히 넘길 문제가 아니다”며 “전 세계 어느 군대도 이같이 하지 못할 정도로 철저히 훈련받은 혁명역량이 동원된 것이고, 사전답사를 통해 위치정보를 다 확보한 지원 세력의 합작품”이라고 못 박았다.
이 대목에서 “폭도들을 싣고 가는 트럭 운전수가 차를 세우고 광주시민들에게 도청 소재지 위치가 어디냐고 물었다”며 “고도의 훈련을 받은 북한 공작조도 낯선 환경에서 실수한 사례들이 입수됐다”고 했다.
마이클 이 박사는 “예비군 무기고 44곳을 부수고 5408정의 무기류를 획득했으며 트럭 3대분의 폭약과 뇌관·도화선을 탈취했다”며 “170여 명의 좌익사범을 포함해 2700여 명의 죄수가 수용된 광주교도소를 야간에 다섯 차례 습격한 것은 시민군이 아니라 북한 특수공작대가 주도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어 “이런 사건을 절대 민주화 투쟁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전제한 뒤 “광주사태를 언급할 때 광주시민을 모두 싸잡아 폭도들이었다고 단정해선 안 되지만 김대중 추종 세력과 유공자로 행세하는 인간들을 무고한 시민들로부터 분리해서 같은 하늘 밑에서 숨을 쉴 수 없는 민족 반역세력을 관리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광주시민군이 광주시민을 총으로 쐈다고 봐서도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마이클 이 박사는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의 수가 정확하게 나와 있다”며 “그 당시에 한국 정부가 조사한 대로 총상 시신 116구 가운데 36구는 M16, 80구는 카빈총에 맞아 죽은 시신이었다”고 했다.
당시 군 현대화 사업으로 진압군(계엄군)에게 M16이 지급됐다. 폭도들이 탈취한 예비군 무기고에는 카빈소총이 있었다.
마이클 이 박사는 이번 인터뷰에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당시 CBS 등 방송국에서 경비병이 공격을 받아 M16 3~4정을 빼앗겼고 군분교 사건에서도 계엄군이 M16 4정과 탄창 14개를 탈취당한 점으로 미뤄 M16 총상 사망자 36명도 우리 군이 쏴 죽인 것으로 단정하기 힘들다고 5·18연구가들은 말하고 있다.
5·18연구가들은 “(적의 모략전에 속아 넘어간) 시민들의 공격으로 돌에 맞고 총에 맞은 동료를 본 우리 군인들이 흥분해서 과격한 행동을 했을 수는 있다”면서도 “가정이 있고 처자식이 있는 공수대원들이 민간인을 조준 사격하는 것은 당시 군기와 일반 정서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 바 있다.
미이클 이 박사는 시신 사망 지점이 진압군 주둔 지역이 아닌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발언은 의료인의 검시조서·검안서 재분석 결과를 인용한 본지 보도와도 일치한다.
시민군 측의 5월21일 ‘집단발포(집단사격)’ 주장에 대해 진실규명의 관점에서 5·18을 연구하는 쪽에선 “사실무근”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이는 계엄군이 마주 보고 대치하던 시위대를 향해 집단 발포했다면 전일빌딩·YMCA 앞에서 대부분의 총상 사망자가 발생해야 했다. 하지만 검시조서·검안서 재분석 결과 도청 앞 분수대보다 다른 지역 사망자가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본지 7월5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③] 7개 건물 옥상서 집단 발포… 軍 소행 아니었다 보도 참조>
도청 앞 계엄군이 집단사격했는데 길게는 1km 떨어진 거리에 있던 시민들이 산발적으로 쓰러진다는 것은 의·과학적 상식에 위배된다. 구석구석 골목과 주택가에서 흩어져 발견된 총상 사망자도 과학 수사기법으로 설명이 안 된다. 총알은 좌우로 휘어서 날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계엄군은 1만 명 안팎(시민군 추산)의 시위대에 포위돼 도청 앞 분수대에 고립돼 있었고 시민군 측이 주장하는 집단 발포 추정 시점인 오후 2시쯤에는 개별 병사에게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다.
중앙일보 광주 주재 이창성 기자의 증언에 따르면 도청 주변 옥상에 배치된 계엄군이 돌진 차량을 향해 처음 총격을 가하기 시작한 시각은 오후 3시48분이었다. 이와 관련해 리 박사는 “시신들이 진압군 주둔 지역이 아닌 지역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총구를 아래로 향하게 거꾸로 멘 것도 북한의 개입이 아니고선 설명할 길이 없다고 리 박사는 말했다. 그는 “남한에는 심지어 꿩을 잡는 포수도 총구가 하늘로, 개머리판(총구 반대 방향의 넓은 견착대)이 땅으로 가게 멘다”며 “개머리판을 거꾸로 멘 것은 북한 공작조가 북에서 하던 습관대로 착각해 실수한 것”이라고 했다.
마이클 이 박사는 “광주 유공자를 인정하되 북한 정부의 유공자로서 인정해야 하고 남한의 유공자가 아니다”며 “남한 정부는 그 사람들을 민족 반역 범죄 집단으로서 사법처리 대상으로 삼아야지 유공자로 대우해선 안 된다”고 했다.
이는 탈북 전 북한 외무성 산하 체코주재조선무역 대표를 지낸 김태산 남북함께국민연합 상임대표의 발언과 같은 맥락이다. 김 상임대표는 7월19일 스카이데일리 주최로 개최된 ‘5·18 가짜 유공자 규명 및 민간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출범식’ 세미나에서 ‘대한민국에 5·18 유공자는 없다’는 주제로 “엄밀하게 따지면 한국에는 북한군을 따라서 자기 국민과 군대를 죽이는 데 동조한 난동 분자와 북한군의 총에 맞아 사망한 희생자들만 있을 뿐”이라며 “5·18 당시 무기고를 습격해 칼빈총을 들고 난동을 부린 진짜 유공자들은 북한에 있고 5·18 당시 참가했다가 돌아가서 영웅 칭호를 받은 북한 대남연락소의 전투원들”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마이클 이 박사는 “가장 정확하게 공개 발언한 사람”이라며 김 대표 발언에 공감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면서 “그 사람은 탈북인이기 때문에 나하고 말이 맞는다. 나는 40년간 북한 정보 일을 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헬리콥터 기총사격에 대해서도 정보분석 결과를 공개했다. 그는 “당시 대한민국 육군 헬기에 장착된 기관총은 14.5mm 발칸포였다”며 “광주 시내 어디를 가도 14.5mm 포탄의 탄착점이 하나도 없다. 거짓말이고 다 꾸며낸 이야기”라고 쏘아붙였다.
마이클 이 박사는 북한군은 전혀 개입이 없었는지 묻자 “북한 특수군이 5월27일 남침할 계획이 수립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은 1980년 여름 이전에 남조선 해방을 위한 대사변을 획책했고 서울과 마산·광주에서 동시다발적인 민중 봉기를 일으키고 남조선 지하에 구축해 놓은 혁명역량이 주도하되 표면적으로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민주화 투쟁으로 표방하는 게 1차 전략이었다”며 “이 불길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 인민해방시민군이 북조선에 무력 지원을 요청하는 형식을 취하고 그때 북한에서 17공수여단과 특전부대를 남파해 6·25 전쟁 때 실패한 조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겠다는 정보를 내가 해외 근무 중에 처음 입수해 워싱턴에 보고했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북한은 5월27일 남침을 위해 무력을 휴전선 인근에 배치하고 대기했지만 남한 봉기가 확산되지 않은 데다 27일 새벽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수복함에 따라 북한이 특수군 투입을 포기했다고 한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사살 명령 주장에 대해서도 일축했다.
마이클 이 박사는 “그 당시 계엄사의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 발표된 것이 17일”이라며 “그때 계엄사령관은 이희성이었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아니었다. 당시 전두환은 그럴 자격도 없었고 근거 없는 얘기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전두환 사령관을 끌어들인 이유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대한민국이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에 국가안보가 굉장히 위태로울 때에 북한 입장에서는 그때를 굉장히 큰 기회로 여기고 노렸지만 전두환 보안사령관에 의해 수습이 잘 됐기 때문에 그를 끌어들이고 미워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무 관련이 없는 전두환에게 광주에 대한 책임을 모두 뒤집어씌우는 것만 봐도 북한은 광주시민에게 총을 쏘고 계엄군에게 충분히 뒤집어 씌울 수 있는 집단임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
⑲ “軍, 김일성 ‘광주 침투’ 지령문 확인”
사태 이후 입수… 귀순자 합동신문 보고서 작성
YS·DJ 정부 증거 전량 폐기… 역사의 진실 묻혀
▲ 1980년 5월22일자 미 중앙정보국(CIA) 보고서(위)에 계엄사령관의 협상 객체인 시민그룹에 ‘김대중 추종자들(Associates of Kim Dae Jung)’이 섞여 있다고 기술돼 있다. 전라도의 ‘내란(insurrection)’이 계엄사령부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군이 정전 협상을 벌이고 있지만 ‘반란(rebellion)’을 잠재우기 위해선 무력을 사용해야 할 것 같다고도 CIA가 보고(오른쪽 아래)했다. CIA 보고서 캡처
북한이 사전 계획하고 주도한 것으로 미 정보당국이 확인한 1980년 5·18 당시 미리 남침을 준비한 상태에서 간첩을 남파시킨 김일성 북한 주석의 지령문을 우리 군 정보당국이 5·18 이후에 입수해 진위 여부를 확인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군은 또 5·18 직전 해안방어 상태를 점검할 목적으로 적으로 가장한 특전사 1개 대대를 호남 해안에 분대 단위로 분산해 모의침투시켰으며 모두 상륙하는 데 성공한 사실도 처음으로 밝혀졌다. 전라남북도 해안선이 모두 뚫릴 정도로 해안경계 상태가 허술했다는 방증이다.
익명을 요구한 예비역 장성급 전직 군 정보당국자 A씨는 최근까지 스카이데일리와 여러 차례에 걸친 통화에서 이같이 증언하고 “김일성 지령문을 직접 접했고 투항자와 귀순자에 대한 안전기획부와 정보사의 합신(합동신문) 보고서를 확인했다”고 정보 출처를 밝혔다. 안기부는 현재 국가정보원이고 정보사는 국군정보사령부를 말한다. 투항 시점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귀순 시점은 1980년~1994년이다.
육군에서 40년 복무하며 30년 가까이 북한정보통으로 일한 예비역 장성 A씨는 “5·18은 북한이 주도한 침략 행위임을 확인했다”며 “군과 안기부에 기록이 있었지만 YS(김영삼)와 DJ(김대중)정부가 증거들을 전량 폐기하면서 역사의 진실이 점차 묻히게 된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북한은 남한 봉기가 최소 4개 도(道)로 확산되면 남침하려고 계획했으며 소요사태를 일으키려고 공비들을 침투시켰다. 이는 중앙정보국(CIA) 소속의 주한미국대사관 정보관을 지내는 등 미 정보기관에서 40년간 잔뼈가 굵은 마이클 리(90) 조지워싱턴대 박사의 증언과 일치한다. <본지 10월11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⑱] “5·18은 北이 민중 봉기로 조작한 대남공작” 보도 참조>
A씨는 “육·해상 침투가 없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사실과 다르다”며 “북한은 5·18 때 광주에 분명히 내려왔다”고 역설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5·18 당시는 아니었고, 그때보다 지난 다음에 북한에서 귀순한 주요 인사들이 정보사나 안기부 이런 데서 합동신문 과정에서 5·18 당시에 남침 준비를 이미 한 사실을 진술했고 김일성 지령문을 직접 입수해 확인했다”고 말했다. “사회 혼란이 극대화됐으면 그때 전방에서 남침했을 텐데 광주에서 (계엄군이) 조기 진압하는 바람에 북한이 남침하지 못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A씨는 북한의 개입 정보를 최초 지득했던 시점에 대해 1980년 5월 이후부터 1995년까지 꾸준히 정보를 입수했다고 설명했다.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에 과장(대령급)으로 들어가서 3년 근무한 뒤 장군이 됐고 정보처장 3년·정보참모부 차장 1년 등 7년을 육군본부에서 일했다.
정보를 얻을 무렵 합동참모본부 정보국은 정보본부로 승격했다. 본부장 휘하에는 북한정보부와 기획보안부가 있었다. 기획보안부는 해외 무관을 통제하던 부서였고, 북한정보부는 대북 첩보 입수가 주업무였다고 한다. 그는 기획보안부장과 북한정보부장으로 2년씩 근무했으며 정보병과 장교로서 대북첩보 수집 업무를 10년 이상 한 상태에서 광주에 갔다. 당시 대령 진급 예정자였다.

▲ 우리 군은 5·18 직전 해안방어 상태를 점검할 목적으로 적으로 가장한 특전사 1개 대대를 호남 해안에 분대 단위로 분산해 모의침투시켰으며 모두 상륙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라남북도 해안선이 모두 뚫릴 정도로 해안경계 상태가 허술했다는 방증이다. 민간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민진사·위원장 정성홍) 소속 위원들은 이달 9일 5·18 당시 간첩선 출몰이 잦았고 공비가 침투했다는 첩보를 군당국이 입수한 영광군 염산면 두우리 백바위를 답사했다. @스카이데일리
4개 道로 봉기 확산 땐 남침… 김일성 ‘주도면밀’ 계획
“침투 없었다는 주장 사실무근… 北은 분명 광주 왔다”
적 가상한 모의침투 했더니 전남 해안경계 모두 뚫려
사망자 다수가 시위대 카빈총 뒤에서 맞은 흔적 뚜렷
A씨는 “지역 교육사령부 창설 명령을 받고 준비 책임자로 내려갔다가 5·18이 터지면서 광주에 급파됐다”며 “헬기를 타고 선무방송을 하며 시민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귀가할 것을 권유하는 방송을 하고 유인물을 뿌리는 임무를 수행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적을 가상한 모의침투 훈련에서 해안경계망이 모두 뚫렸다고 증언했다. A씨는 “창설 요원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광주에 가서 있는데 윤모 장군이 전라남북도 해안이 좀 위험하니까 한 번 점검을 해 봐야 되겠다고 말해 특전사 출신들에게 사복을 입혀 저녁마다 전북 해안선 끝에서부터 전남 해안선 끝까지 밤 12시~이튿날 1시 사이에 1개 분대씩을 침투시켜 보니까 밤중에 다 잠자고 있었다”며 “단 한 군데도 방어에 성공 못 하고 다 뚫렸다”고 했다.
그래서 보고한 뒤 상부 지시로 연대장급 이하 부대 책임자들을 모아 놓고 다음 날 강의하는 식으로 전라남북도의 모든 해안을 대상으로 모의 침투훈련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해안 침투가 가능했다”며 “전라남북도는 섬이 많은 다도해 지역이고 섬에 모선 하나를 정박시켜두고 고무보트로 들어오면 다 뚫릴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증언은 본지 보도와 일치한다. 정보병과에서 근무했던 또 다른 제보자는 당시 육군본부가 5월15일 전남 신안 앞바다를 통해 북한 공작조가 침투한 첩보를 예하부대에 전파했다고 증언했다. <본지 8월30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⑫] “北 공작조 개입”… 軍 ‘사전 첩보’ 있었다 보도 참조>
A씨는 “객관적으로 미 CIA도 인정했다. 북한군의 개입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다”며 “북한에서 내려온 거물급 탈북자와 간첩들도 다 얘기를 했고, 5·18 때 북한에서 광주에 내려왔다가 탈북한 사람도 있는데 정부가 딱 입을 다물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마이클 리 박사도 동일하게 증언했다. 그러나 당시 취재에선 한·미 정보당국이 이 사실을 공유했는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북정보통으로 일한 예비역 군 정보당국자의 증언으로 한·미 간에 정보공유가 있었을 개연성이 높아졌다.
A씨의 발언은 9일 통화 도중 나왔다. 대면 인터뷰를 거듭 고사했기 때문에 여러 차례에 나누어 전화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 나온 발언이다. 9일 통화 시점엔 CIA에서 일한 마이클 리 박사의 인터뷰가 성사되기 전이었다. 따라서 A씨는 본지 보도를 보고 발언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통합병원에서 태극기가 덮인 시신을 보고 사병을 시켜 점검을 해 보라고 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면서 “우리한테 총을 맞은 사람은 총을 앞에서 M16으로 맞아야 되지만 카빈총으로 맞은 사람은 뒤에서 맞고 총구가 들어가고 빠져나간 흔적도 다르다”며 “100구가 넘은 시신인데 20 몇 구만 M16으로 맞았다”고 증언했다.
이어 “폭동을 주도하던 사람들이 시민을 등 뒤에서 쏴서 희생자를 많이 늘려야만 전두환 세력에 대한 국민적 저항감을 더 크게 확대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며 “사건을 확대시키려고 이놈들이 일부러 희생자를 늘렸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본지 9월20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⑮] 임신부 최미애 씨 쏜 건 軍 아닌 괴한들 보도 참조> ⊙
⑳ 유언비어로 심리전… 광주 들쑤셨다
지역감정 교묘하게 부추겨 폭력 고조 기폭제로 삼아
‘김대중 처형’ 등 가짜 뉴스 난무… 시민 적개심 조장
▲ 1980년 5·18을 전후해 광주 지역에 유포된 각종 유언비어가 민심을 호도하고 계엄군에 대한 적개심을 키웠다고 미 정보당국이 판단했다. ‘전국 각지에서 동참해 오고 있다’고 가짜 뉴스로 선동하는 유인물(왼쪽)과 국가안전기획부가 추린 유언비어 유형(오른쪽 위), 북한의 프로파간다 공격이 강화되고 있음을 지적한 미 국무부 차관보의 기밀문서.
북한이 사전 계획하고 주도한 것으로 미 정보당국이 확인한 1980년 5·18 당시 선량한 광주시민을 속이고 군중의 대대적인 분노를 유발하기 위해 날조된 악성 유언비어가 활개를 친 것으로 나타났다.
24일 본지 취재 결과 5·18을 전후해 광주 현지에서는 군과 시민의 대치 상황에서 파생된 악랄한 허위 사실이 조직적으로 살포됐으며 최규하정부가 방송과 통신을 통제한 상황에서 사상자 수 등에 관한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했던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허위 사실에 기초한 유언비어는 광주 시민의 불안을 조성하고 공권력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만든 데 이어 폭도들에 휩쓸린 일부 광주 시민이 대(對)정부 공격에 가담하도록 직접적인 단초를 제공한 것으로 파악됐다. 정부와 군 당국은 선무방송을 통해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고 귀가할 것을 시민에게 반복해서 당부했지만 즉시 효과가 나타나진 않았다.
이와 관련해 헤리티지재단이 1985년 9월16일 펴낸 대릴 M 플렁크(Daryl M. Plunk) 선임 방문연구원의 보고서는 지역 차별을 받았다고 느껴 온 광주 시민이 특히 지역감정을 건드리는 선전·선동에 취약했다고 해석했다. 플렁크 연구원은 “지역적 긴장감(Regional tensions)은 폭력이 고조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운을 뗐다.
구체적으로 “한반도 남서부에 위치한 전라도의 많은 도민은 수백 년 동안 중앙 정부로부터 자신의 지역이 차별을 받아 왔다고 느끼고 있다”며 “이웃 경상도 태생의 고 박정희 대통령이 고향의 발전을 모색하면서 전라도의 경제 발전은 고의로 외면했다는 주장도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유언비어가 기승을 부렸던 당시 실상에 대해 진단했다. 그는 “김대중의 체포와 군과 광주 시민 간의 충돌은 특히 전라도를 겨냥해 계엄령을 확대했다는 현지 추측을 불러일으켰다”며 “폭동이 일어난 첫날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민을 죽이러 왔다는 소문이 퍼진 데다 무려 40명이 죽었다는 보고가 있었지만 아무도 죽지 않았고 일부 주민은 김대중이 처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5·18을 직접 겪었던 연구가들에 따르면 실제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의 씨를 말리려고 왔다”는 유언비어가 삽시간에 퍼졌다. 당시 정부가 경상도 출신으로 부대를 구성했다는 낭설에 대해 계엄군 출신 인사들은 일제히 “가짜 뉴스”였다고 입을 모았다. 당시 전남도청 11공수 62대대의 최상필 중대장(대위)은 증언집에서 “공수특전여단은 세계적인 특수부대이자 최정예 요원 부대로 군기가 엄격하다”며 “우리 선임하사가 광주 사람인데 민간인을 총으로 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한 바 있다. <본지 9월20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⑮] 임신부 최미애 씨 쏜 건 軍 아닌 괴한들 보도 참조>
‘역사로서의 5·18’(김대령 박사 저)에 따르면 전옥주(본명 전춘심) 씨는 “내 동생이 계엄군에 의해 살해됐다”고 가두방송 했다. 당시 32세 미혼녀였던 전씨는 친오빠가 한 명 있었을 뿐이다. 5월18일에는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이 계엄군에게 잡혀가 죽었다”는 유언비어가 살포됐다. 정작 박씨는 이날 여수 돌산으로 피신 가는 중이었다는 증언이 있다. 박씨는 1982년 4월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수감됐고 그해 10월 숨졌다.
박씨 사망 유언비어에 이어 ‘전남대 총장 할복자살’ 유언비어가 확산됐다.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2권(광주광역시 5·18사료편찬위원회·2009년 간행) 104쪽에는 ‘광주사태의 진상을 고함’이라는 제목의 유인물에 “5월18일 전남대 교정에서 학생회장이 살해되는 장면을 보고 전남대 총장이 할복자살했다고 진술한다”고 기술돼 있다.
이 유인물은 전남대 국문과 4학년 김태종 씨가 작성했다고 총서는 기록했다. 김씨가 광주 YWCA엠네스티 사무실에서 제작한 유인물은 서울대를 비롯한 전국 대학교로 퍼져 나갔다. 1989년 2월24일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특별위원회 회의록에 따르면 국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김태종 씨는 “5월18일 광주공영터미널 부근(에서) 벌어졌던 공수부대의 잔인한 만행을 목격하고 전 시민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해 친구 몇 사람과 함께 전단을 만들어 배포했다”며 “5·17은 전두환을 위시한 일부 정치군인들의 불법 쿠데타다. 또 그 공수부대들의 잔인한 만행과 이에 대해서 우리 시민들은 끝까지 투쟁하자 이런 내용으로 전단을 약 네 차례에 걸쳐 제작했다”고 증언했다.
김씨의 증언과 달리 정작 5·18증언집에선 “전두환이 누군지도 몰랐다”는 증언이 다수 발견된다. 당시 시민들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공수부대에 직접 명령하는 것으로 오인했고 시민군과 교전을 벌이게 한 원흉으로 지목하며 전 장군에 대한 적개심을 품는 이들이 증가했다.
5월20일엔 조선대 민주투쟁위 명의로 “전두환의 광주 살륙작전”이라고 적힌 전단이 나돌았다.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의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1996년 간행)’에 따르면 전단에는 “전국 일원의 유혈 폭동”이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 정보 유통 경로가 차단됐던 당시 상황에 비춰 볼 때 이 전단은 광주에서처럼 전국 단위의 대규모 유혈 폭동이 일어난 것으로 5·18 가담자들을 착각하게 만든 것으로 분석됐다.
서울대는 22일 ‘전두환의 광주 살륙작전’ 전단을 전국 대학가에 배포했다. 전 장군의 사살 명령 주장은 이때부터 기정사실로 됐고 정설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연구가들은 해석한다.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보는 쪽에선 여전히 ‘전두환 장군과 사살 명령’ 간의 연결고리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위원장 송선태)도 결론을 내지 못한 채 표류하는 것으로 관측된다.
문재인정부에서 출범해 4년 임기 만료를 앞둔 송선태 위원장은 최근 국회에서 열린 5·18조사위 국정감사에 출석해 ‘발포(사격) 명령’에 관한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의 질의에 ‘하나회 출신 진압군’의 연관성에 대해 추정 발언했다가 한기호 국방 상임위원장으로부터 제재를 받고 정정했다.
송 위원장은 이달 13일 국감에서 “광주에 진압군으로 투입됐던 군부대가 전부 하나회 출신인데 하나회 출신들과의 별도의 지휘·지시·보고 체계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증언을 확보했다”고 답변했다.
이에 대해 임기 4년 동안 밝히지 못한 건 전 장군이 사살 명령을 내릴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반론이 예비역 군·안보단체로부터 강하게 제기됐다.
장교 출신인 A씨는 “제아무리 (하나회 출신) 동료들과 연결고리가 있다고 한들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두고 (전두환 장군이) 사살 명령을 내리면 그 책임을 이희성 장군이 온전히 지게 된다는 뜻인데 이런 추론은 군 지휘체계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치”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송 위원장이 통신 암호병으로 군복무했다는 말이 있던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비밀취급 인가도 없는 일반 사병이 ‘음어·암호’를 임의로 관리하고 변경했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 있겠나”라고 반문하며 “그런 일이 벌어지면 비취인가를 받고 음어·암호를 관리해 온 책임자들은 모두 영창에 간다. 별 세 개(전두환)가 별 네 개(이희성)를 대신해 명령을 내리고도 책임을 면하는 게 대한민국 군대와 군기강 측면에선 불가능한 소리”라고 쏘아붙였다.
“경상도 군인, 전라도 씨말리러 왔다”… 지역감정 기름 부어
당시 작전참가 군인들 “말도 안 되는 소리… 너무 황당했다”
‘전남대 총장 할복 자살’ 등 민심 자극 위한 선동질 난무
‘전두환 광주 살륙’ 전단엔… 전국서 유혈 폭동 날조까지
계엄군으로 5·18을 겪었고 방위산업체에서 은퇴한 B씨도 “실체가 없는 연결고리에 집착하지 말고 명명백백하게 북한군 개입이나 밝혀 광주 시민은 차별의 굴레를 떨치고 계엄군은 악마라는 오명을 벗음으로써 해묵은 갈라치기에 종지부를 찍는 게 국민에게 더 유익하고 사회통합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일갈했다. 5·18에 관해 연구해 온 C씨는 “이런 방향으로 정립하려면 가짜 유공자를 들춰 내야 하는데 송 위원장이 유공자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세금만 축내는 꼴”이라고 꼬집었다. 조사위 내부에선 유공자인 위원장 때문에 조사 방향이 편중된다는 볼멘소리가 일찌감치 흘러나오고 있다.
미국과 관련된 유언비어도 있었다. 5월25일 대학가에선 “미 해군 항모 2척이 시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으로 오고 있다”는 대자보를 발견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당시 미군은 북한군 10만 병력이 해주에 집결해 있다는 정보에 따라 비상사태에 대비해 항모 2척과 조기경보기 E-3A 2대를 한국에 급파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미국의 5·18 개입과 무관하다.
헤리티지재단 보고서에 따르면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한국 정부의 군사력 사용이 ‘국가 안보에 위협’을 초래하지 않는 한 한국은 행동(결정)을 미국에 ‘통보(notify)’하기만 하면 된다는 입장이었다. 한국이 군사 배치와 관련한 독자적 결정 권한이 있고 미국은 한국의 군사 결정이 주변국을 선제공격하는 등 역내 안보를 저해하지 않는 한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항모 배치는 고유의 군사 배치 결정권을 지닌 한국을 돕기 위한 안보 전술적 조처일 뿐 시민군 지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5·18의 4대 악성 유언비어는 △전두환이 공수부대원에게 환각제를 먹였다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세워놓고 칼로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 △임산부의 배를 찔러 태아를 꺼냈다 △공수부대가 광주 시민 70%를 죽여도 좋다는 구호를 공공연히 외치고 있다로 연구가들은 압축한다. <본지 9월20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⑮] 임신부 최미애 씨 쏜 건 軍 아닌 괴한들 보도 참조>

▲ 헤리티지재단 광주 보고서
근거 없이 떠도는 유언비어 또는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 정도로 치부해 버렸어야 했지만 당시엔 파급력이 있었고 여전히 정설처럼 믿는 이들도 있다.
플렁크 연구원은 재단 보고서에서 “가장 기이한 소문은 군인들이 광주에 오기 전에 며칠 동안 굶주리고 마약을 먹었다는 것인데 이는 광주 시민을 더욱 분노하게 했다”고 인과관계를 짚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일부 주민은 믿었을 뿐만 아니라 학생이 아닌 많은 이들이 즉각 폭도들과 동병상련의 심정을 갖게 됐다”며 “광주 거리에서 젊은이들과 싸우고 그들을 검거하는 군·경의 유령은 군중을 빠르게 정부에 반대하도록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이 밖에도 5·18 기간에 선동을 위해 사용된 악의적 유언비어들은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에 와서 여자고 남자고 닥치는 대로 밟아 죽이고 있다 △공수대원이 이화여대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3명의 팬티와 브래지어까지 모두 찢어내고 군화로 엉덩이를 찬 후 대검으로 등을 찔러 죽였다 △공수부대원이 수창초등학교 앞 전봇대에 산 사람을 거꾸로 매달았다 △5월18일에 40명의 시위 학생이 죽어 금남로가 피바다가 됐다 △공수대원들이 젊은 놈은 모조리 죽여 버리고 광주시민 70%를 죽여도 좋다면서 개 몇 마리 잡았느냐고 농담을 한다 △계엄군이 출동해서 사람을 깔아뭉개어 죽였다 △김대중을 잡아 죽이고 전라도 사람을 몰살한단다 △공수부대원들이 호박을 찌르듯 닥치는 대로 찔러 피가 강물처럼 흐르고, 시체들을 트럭에 던지고 있다 △여학생들이 발가벗긴 채로 피를 흘리며 트럭에 실려 갔다 △삼립빵 트럭이 시체를 실으러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다 △부녀자의 국부를 찌르고 유방을 칼로 도려내니 참을 수 없다 등이 있었다.
광주일고 출신으로 MBC PD를 지낸 박명규 5·18역사학회장(법학박사)은 앞서 본지 인터뷰에서 “선량한 광주 시민이 이처럼 악의적인 유언비어를 유포한다는 것은 광주 전라도민의 성품과 전혀 맞지 않는다”며 “누군가 정부에 대항하고 반란을 일으킬 목적으로 악한 의도로 퍼뜨린 것이어야 비로소 가능한 이야기”라고 단언했다.
5·18 당시 계엄군 중대장을 지낸 최종원 민간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위원장 정성홍) 위원은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보는 이들도 당시 유언비어가 확산된 사실에 대해선 반박하지 않는 게 중요한 포인트”라고 지적했다. 최 위원은 “당시 계엄군을 악마화하는 유언비어가 널리 퍼진 건 팩트이고 민주화운동을 하겠다는 이들이 퍼뜨릴 내용이 아니라는 것도 팩트로 간주해야 한다”며 “불순한 의도를 가진 쪽에서 계엄군에게 덮어씌우기 위한 모략전술의 일환으로 선동한 것이라면 상황이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총서에 따르면 “800만 서울 시민에게 고함”이란 제목의 유인물에는 “전두환이 26일 자정을 기해 광주시 폭격 작전을 감행하려 했다”는 유언비어도 등장한다. 하지만 이른바 ‘광주 폭격설’은 사실무근으로 드러났다.
5·18 당시 연습용 훈련기를 통해 광주를 폭격하려 했다는 김도호 공군 예비역 소장의 주장과 JTBC 방송 보도는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폭로한 함선필 예비역 대령은 최근 서울 중구의 정부5·18조사위 건물 앞에서 열린 규탄대회에서 “5·18 당시 공군 A-37 훈련기가 광주를 향해 무장 장착 후 대기했다는 주장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인데도 당시 없었던 일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조작하고 거짓 선동했다”고 밝혔다.
이 사실은 문 정부가 꾸린 국방부 조사단이 사실무근으로 결론 내리면서 함 예비역 대령 발언이 사실로 입증됐다. 그는 “공군의 광주 폭격설을 더 부풀리려고 조사에 나선 문 정부가 광주 폭격설이 사실이 아님을 스스로 입증하고 만 꼴”이라고 강조했다.
5·18연구가들은 악성 유언비어의 진원지로 북한을 꼽는다. 계엄령과 수배령으로 학생 시위 주동자들이 종적을 감춘 상황인 데다 방송·통신이 통제됐던 시기에 북한 방송은 5·18 소식을 매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자유북한군인연합은 “당시 중대한 방송으로 취급하며 하루 종일 광주봉기를 방영했다”며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것은 만삭인 여인의 배를 총창으로 갈라서 태아를 꺼내는 모습과 벌거벗은 젊은 처녀의 팔을 도끼로 자르고, 새파란 아가씨의 옷을 홀딱 벗기고 젖가슴을 도려내는 장면, 남한의 공수부대원들이 머리를 해머로 까서 죽이는 장면 등 보기에도 끔찍한 가짜 영상들만 골라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라는 멘트로 시간마다 반복해 보여 줬다”고 증언했다. 당시 서울의 안기부 가옥에서 대공요원으로 근무한 김영택 (사)자유수호국민운동 상임고문은 본지 인터뷰에서 “5월18일 오전 9시부터 이북방송이 연고대생 600명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고 증언했다. <본지 9월13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⑭] ‘연고대생 500명 가세’ 진원지는 北방송 보도 참조>
유언비어는 당시 남한과 북한 서적에 총망라돼 있다. 남·북한 서적에서 언급한 내용이 일치하는 사례도 다수 확인된다.
일본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가 배포한 찢어진 깃폭(1980년 간행) 50쪽에는 유언비어로 쓴 수기 형태의 단편소설이 있다. “도청 지하실에 시체 475구”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광주백서(1982년) 44쪽에선 당시 대학생 소준섭 씨가 “2000명 이상 사망” “대검으로 난자” 등의 주장을 펼쳤고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1985년)는 계엄군을 살인마로 각인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혹평이 뒤따른다.
북한의 평양 조국통일사가 발행한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1982)에도 “희생자 5000명, 총기 사망 2600명, 장갑차 및 차량 압사 150명, 생매장 1700명, 화장 920명, 대검 등 330명, 중경상자 1만4000명, 목포·나주·여수·순천·장성 등지 사망자 1700명”이라고 나온다. 이 내용은 1982년 남한에 뿌려진 삐라에서도 동일한 수치가 확인된다. 삐라에 등장한 동일한 사진은 천주교 광주교구가 낸 ‘5월 그날이 오면’(1987), 평양 한민전이 출간한 ‘아! 광주여’(1990)에도 게재됐다.
미 국무부 동아시아 담당 마이클 아머코스트(Michael H. Armacost) 차관보는 북한이 ‘프로파간다 공격’을 벌인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5·18이 끝나고 두 달 뒤인 1980년 7월27일 미 연방 하원 외교분과위원회에서 5·18에 대한 북한의 반응에 관해 서면으로 답변했다. ‘역사로서의 5·18’(김대령 박사 저) 등 5·18 연구 문헌에 따르면 아머코스트 차관보는 “북한은 상대적인 의미로만 억제돼 있다. 북한은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지만 프로파간다 공격을 강화했고 남한을 국제적으로 정죄하려는 노력을 개시했으며(they have stepped up propaganda attacks, launched an effort internationally to condemn South Korea) 남·북한 대화를 연기하고 계속 무장 침투 시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