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미궁… 5·18 ‘진실의 문’ 연다 스카이데일리 허겸 기자
2023.06.15 [단독: 5·18 진실 찾기 프롤로그] 43년 미궁… 5·18 ‘진실의 문’ 연다
무기고 습격·계엄군 최초 사망자 의문점 집중 추적
향등제 인근 야산서 발견 ‘소뼈 무더기’ 진상도 규명
“오랜 세월 빛고을 광주를 덮어 온 5·18의 더께를 이젠 걷어 내야 합니다.”
최근 광주에서 만난 한 시민은 “정겹고 구수한 광주 사투리가 언제부턴가 ‘차별’과 ‘따돌림’ ‘지역감정’을 상징하는 가슴 쓰라린 단어로 통용되고 있다”며 이같이 격정을 토로했다.

▲ 전일빌딩 ‘탄흔’ 진실은? 13일 전남도청을 찾은 5·18 당시 계엄군 중대장 최종원 씨가 새롭게 단장한 ‘전일빌딩245’ 외벽 점선 안에 노랗게 표시된 탄흔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이 탄흔은 헬기의 공중사격으로 생긴 게 아니라 직선거리 약 600m의 전남대병원 옥상에 설치된 LMG30 기관총에서 발사된 탄환 때문에 발생한 흔적으로 최씨는 보고 있다. 광주=남충수 기자
그는 “곡창지대에 터 잡은 인심 넉넉한 광주시민에겐 5·18보다 그후로 40여 년째 이어져 온 불편한 타지 사람들의 시선이 더 큰 생채기를 남긴 게 사실”이라며 “불편한 진실을 낱낱이 들추는 것만이 호남 사람들의 말 못 할 한을 풀어 주는 마중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
스카이데일리는 호국의 달을 맞이해 43년의 세월에 갇힌 ‘5·18의 진실 찾기 시리즈’를 다룬다. 취재진은 지난 두 달에 걸쳐 광주 일원을 집중적으로 찾아 확보한 자료를 토대로 그동안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던 불온한 진실들의 단면을 소개한다.
특히 가슴 설레고 따듯하며 아름답기까지 한 ‘민주화’라는 단어의 이면에 가려진 불편한 진실은 과연 어떤 것들이 있는지 본지가 추적한다. 교도소와 무기고 탈취의 진실은 어떤 것이었을까. 누구보다 진실 규명에 따른 반사이익을 톡톡히 누릴 수 있고 불필요한 오명을 씻을 수 있어 반길 법한 5·18 유관 단체들조차 망설이는 듯한 무기고 습격의 증언을 다룬다.
최초 계엄군 사망자는 누구였을까. 전남도청 앞에서 경계를 서던 권모 일병은 어떻게 숨졌을까. 군인이 후진하는 장갑차에 짓밟혔을까, 아니면 다른 사망 경위가 있었을까. 이를 목격한 증언자는 없을까. 권 일병보다 먼저 목숨을 잃은 계엄군은 없었을까, 있다면 어떻게 사망했을까.
왜 5·18 당시 광주시민들은 ‘인공(인민군의 공습)’에 대비해 집 밖으로 나오지 말도록 서로 당부하는 말을 했을까. “교도소 습격 이야기를 듣곤 6·25 때 북한이 저지른 짓 같았다”고 느낀 광주시민들의 증언은 없었을까. 송암동 오인사격에 가려진 진실은 무엇일까. 퇴각하는 군 트럭을 향해 90㎜ 무반동총을 선제 조준 사격했다는 말은 과연 사실일까. 그것이 진실이라면 체포된 이른바 ‘보병학교 교도대 매복조’의 실체는 누구였을까.
향등제(저수지) 인근 야산에서 발견된 ‘소뼈 무더기’의 진실은 무엇일까. 교전이 벌어져 주민들이 두문불출하던 와중에 야산에서 한가롭게 소 한 마리를 통째로 해체해 잡아먹은 이들은 누구였을까. 나주~광주의 길목에 자리한 이곳은 산세가 험준하고 가까운 국도에서조차 시야가 가려져 은둔하기 쉬운 곳이다.
선량한 광주시민들의 분노를 촉발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계엄군의 선제 총격 때문이었을까. ‘유언비어’ 선전·선동 때문은 아니었을까. ‘5·18의 진실을 찾겠다’고만 목소리를 낼 뿐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정·관계의 작업은 누구나 공감할 만큼 충분했을까. 실체적 진실이 규명됨에 따라 드러나게 될 누군가 혹은 어떤 세력의 민낯이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광주=허겸 기자
2023.06.21
① 軍레커 몰고 무기고 담장 돌진… 청년 20명 ‘우르르’
당시 전남매일 기자 김동문 씨 동네 계란장수 민경수 씨
19일 낮 1시 무기고 ‘쏜살 접근’ 20~30m 떨어진 곳서 탈취 목격
당시 총기 1700정·LMG30 보관 주동자가 “더 밀어… 더” 지시
사적지 돌판엔 21일 탈취 명시 무기고 구멍 뚫리자 총기 빼내

▲ 전라남도 나주 금성파출소 무기고 탈취 현장에 들어선 사적비(왼쪽)와 5·18 당시 전남매일 기자로 근무한 김동문 씨가 본지와 인터뷰하는 모습이다. 남충수 기자
“쾅쾅쾅…, 군용 레커차(견인차)가 몇 번 후진하더니 무기고 문짝이 뜯겼습니다.”
5·18 당시 전남매일 현직 차장급 기자였던 김동문(79) 씨는 1980년 5월19일 오후 1시쯤 전라남도 나주 금성파출소 무기고가 습격당한 현장을 이렇게 기억했다. 그는 무기고 피탈 현장으로부터 100m쯤 떨어진 신문 보급소에서 이 모습을 지켜봤다고 했다. 파출소 2m 옆에는 나주 예비군대대 무기고가 자리잡고 있다. 피탈 무기류의 양이 방대했던 것도 사실상 군부대 무기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나주에서 만난 김씨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날 오후 1시쯤 5t 규모로 보이는 군용 레커차가 쏜살같이 사무실 앞을 지나갔다”며 이상한 낌새가 느껴져 차의 주행 방향을 주시하게 된 이유를 밝혔다. 그는 “(군용차가) 파출소 앞에 서더니 방향을 바꿔 후진해서 담장을 밀어 버렸다”고 증언했다. 무기고 담장이 바깥은 블록, 안쪽은 적벽돌로 축조된 벽체였다고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이 같은 증언은 당시 현장을 더 가까이에서 목격한 또 다른 시민의 진술과도 일치한다.
당시 검찰 수사 기록은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와 나주 시위대가 합세해” 나주경찰서에 진입했다고 적시했다. 또 군용 레커차로 무기고를 파괴하고 칼빈 500여 정‧M-1 소총 200여 정‧실탄 4만6000여 발을 탈취했다고 밝혔다. 관련 기록만 놓고 보면 나주 금성파출소 무기고는 복수의 시위대가 합류해 가장 많은 무기류를 다량 획득한 핵심 습격지로 볼 수 있다.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적어도 무기고 습격 1시간쯤 전에 나주경찰서가 경찰력을 철수토록 지시한 의혹이 새롭게 제기된다.
군용차가 무기고를 들이받는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 그쪽을 주시했다는 김씨는 “쾅 소리가 여기(사무실)까지 들릴 정도였다”고 시각과 청각에 의존한 생생한 기억임을 강조했다. ‘쾅’하는 충격음은 적어도 세 차례였다고 되짚었다. 그러면서 “(3회 이상) 몇 번을 후진해서 밀더니 담벼락이 무너졌고 문짝이 뜯겼다”고 했다. 문짝은 완파되지 않았다는 게 그의 증언이다. 한 켠이 뜯겼고 그 틈 사이로 정체불명의 청·장년들이 들어가 무기류를 빼내 갔다는 것이다. 그는 “그때(문짝 파손)부터 청·장년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무기를 싣고 가는 모습을 눈으로 목격했다”고 말했다. 청·장년이 몇 명인지 구체적인 규모에 관해선 설명하지 못했다. 다만 “많았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김씨는 무기고 탈취 사건 직후 알고 지내던 예비군 대대장에게 연락했다고 한다. 그곳(무기고)에 무기가 어느 만큼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 “총기류 1700정과 LMG30 기관총이 있었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러곤 사견임을 전제로 “나중에 총기류 1700여 정을 860여 정으로 낮춰 집계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김씨가 예비군 대대장으로부터 전해 들은 “LMG30 1정”은 금성파출소 탈취 무기류 목록에 없는 것으로 검찰은 기록하고 있다. 검찰 수사 기록엔 오후 3시35분쯤 시위대가 화순광업소와 동면지서를 습격해 실탄 1만4000여 발을 탈취했으며 이때 LMG 1정을 습득한 것으로 돼 있다. 김씨와 통화한 예비군 대대장의 ‘금성파출소 LMG 보유’ 진술이 틀렸거나 당시 검찰 수사가 부실했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 자료에 따르면 당시 피탈된 LMG30은 호남 각지에서 모두 22정으로 군은 파악했다.
옛 금성파출소 자리에는 5·18 사적지를 알리는 돌판이 자리하고 있다. 취재진은 이곳을 방문했다. ‘(구)금성파출소 예비군 집중 무기고’라는 명칭의 사적비 소개말에 적힌 날짜는 김동문 씨 증언과 발생 시점에서 차이가 있다. 사적비에는 ‘이곳은 1980년 5월21일 계엄군의 발포로 인한 시민 학살 사실이 알려지자 이에 격분한 다수의 시민군들이 아시아자동차에서 탈취한 군용차량을 이용해 (중략) 획득하여 무장하고 무기의 상당수를 광주로 이송하여’라고 새겨져 있다.
사적비가 시민학살이 알려진 시점을 ‘5월21일’로 기술하고 있는 점으로 미뤄, 계엄군의 선제 총격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는 시민들의 무기 획득 시점은 적어도 21일이었거나 그 이후가 된다. 하지만 무기고 습격에 동원된 군용 차량은 “미출고된 새 것으로 보였다”는 증언들이 있다. 무기고 습격보다 차량 탈취가 나중에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김동문 씨는 자신이 아는 최초의 무기고 탈취 시점은 ‘19일’일 수밖에 없었다는 근거로 크게 두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나주시외버스터미널 일대가 19일 아침 아수라장으로 돌변한 사실을 꼽는다. 김씨는 “나는 나주에 살며 전남매일 본사가 자리한 광주의 전남도청 부근으로 1시간 걸려 출퇴근하던 사람이었다”고 했다. 이어 “그날은 해상왕 장보고 기획특집을 만들기 위해 완도로 출장을 가려던 참이었다”며 “오전 8시30분쯤 다다른 터미널 부근은 발 디딜 틈이 없었고 마치 난리가 난 것처럼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갔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기자를 하며 알고 지내던 보안과장(경감)이 호루라기를 불며 교통 정리를 하길래 물었더니 간밤 광주에서 난리가 났다는 말을 들었다”며 “교통편이 끊겼고 출근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본사에 알리려고 터미널에 갔지만 전화기에 긴 행렬이 줄지어 있어서 할 수 없이 전화기를 사용하려고 보급소 사무실로 발길을 돌렸다”고 구체적으로 상술했다. 사무실은 전남매일의 나주보급소에 딸린 작은 사무 공간을 일컫는다.
둘째 근거로 김씨는 19일 이후 자신이 나주에 없었던 점을 들었다. 그는 이후 전남의 한 예비군 대대로 피신했다가 그곳에 7일간 갇혀 지냈다고 한다. 김씨는 예비군 대대에서 겪은 일도 구체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김씨의 아내 클라라 김(77) 씨는 취재진에 “남편이 일주일간 행방불명돼 죽은 것으로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무기고 피습 1시간 전 경찰이 자진 무장해제 왜?
김동문씨 “나주서 경무과장 낮 12시 철수 전화”… 경위 아리송
칼빈 500여 정·M-1소총 200여 정·실탄 4만6000발 털어가
검찰기록엔 “시위대 움직임 일사분란… 무기고 잇달아 습격
본지 취재진은 금성파출소 무기고 탈취 현장을 더 가까운 곳에서 목격했다는 증언자 민경수(65) 씨와 연락이 닿았다. 민씨는 현재 나주에 살고 있으며 발파 현장에서 포크레인 기술자로 일한다.
수소문 끝에 찾은 그는 금성파출소에서 “20~30m 떨어진 곳”에서 무기류 탈취의 전 과정을 목격했다고 했다. 당시 상황을 더 상세하게 설명했고 무기류의 종류와 청장년의 인상착의에 대해서도 더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그들이 했던 말도 일부 기억했다.
당시 22세의 계란 장수였던 민씨는 취재진과 통화에서 인적 규모는 “20명 정도”라고 밝혔다. 그는 파출소에서 200여m 떨어진 곳에 살았다고 했다. 밖이 소란스러워 나왔고 무기류 탈취 현장까지 걸어서 다가갔다는 설명이다.
민씨는 인터뷰에서 “군용트럭이 뒤로 후진해서 몇 번 밀었다”고 운을 뗐다. 구체적으로 “한두 번으로는 파괴가 안 되니 여러 번 (후진)했다”며 “무기고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고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만 문이 무너졌다”고 묘사했다. 이어 “무기고의 문은 일반 가정집의 대문만 한 크기”라며 폭 1m, 높이 2m 정도라고 보충했다.
그는 또 “무기고 앞에서 사람들이 내렸고 주동자가 ‘더 밀어, 더 밀어’라고 외치며 뒤를 봐주자 트럭이 후진해 무기고의 일부만 부쉈다”며 “사람들이 들어갈 정도가 되니까 트럭에서 내린 20명이 안으로 들어가 거기(무기고)를 털고 무기를 많이 빼갔다”고 증언했다.
그러곤 “그후로 M-1인가 빼내 온 총을 쏴보려고 공중에다가 발사하니까 총알이 전선에 맞았다”고도 보충했다. “전깃줄에 맞아서 불이 반짝하며 합선되면서 전선이 떨어졌다”는 설명이다. 기자는 ‘조준사격’이었는지 물었다. 민씨는 “조준사격은 아닌 것 같고 탈취한 총을 테스트하려고 공중에 공포를 쐈는데 우연히 전선에 맞아서 전깃줄이 끊어진 것 같다”고 했다.
민씨는 날짜를 특정하진 못했다. 정확한 날짜가 기억나지 않는다며 구체적으로 못 박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사월 초파일(부처님오신날) 당일은 아니었고 그 전(날)인가 전전날이었다”고 강조했다. 부처님오신날은 음력을 기준으로 매년 달라진다. 1980년에는 5월21일(수요일)이었다. 김동문 씨와 민경수 씨의 기억(19일)은 금성무기고 사적비 기록(21일)과 차이가 있다.

당시 검찰 수사 기록에 따르면 시위대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이른 시간 안에 무기고들을 연쇄 습격했다. 기록은 순차적으로 사건 목록을 기입했지만 시점으로는 피습 지역의 위치 등을 고려할 때 동시다발적으로 습격을 감행했다는 추정이 무리는 아니다. 지휘체계에 따라 조직적으로 움직였다는 유추가 가능한 대목이다.
기록에 따르면 오후 1시 광산 하남파출소에 시위대 80여 명이 차량 3대를 타고 와 칼빈 9정을 탈취했고, 10여 대의 차량에 탑승한 광주 시위대가 함평에 도착해 신광지서에서 총기 100여 정, 실탄 2상자를 확보했다고 검찰 문서는 기재하고 있다. 또 오후 1시35분 화순 소재 4곳의 파출소에서 총기 460정과 실탄 1만 발, 오후 2시 나주 남평지서 무기고에서 칼빈 20여 정과 실탄 7~8상자를 각각 탈취한 것으로 기록했다. 무기고 습격에 관여한 사람의 숫자 또는 연인원은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복수의 시위대가 동시다발적으로 습격을 감행한 곳들은 김씨와 민씨가 증언한 금성파출소 습격 사건이 대표적이다. 여태껏 알려진 바에 따르면 피탈된 무기류의 종류와 양이 탈취 당일 기준으로 가장 많았던 사건이다.
본지 취재에 응한 목격자들의 진술과 검찰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대목도 있다. 당시 전남매일 기자였던 김씨가 예비군 대대장으로부터 전해 들은 “LMG30 1정”은 검찰이 기록한 금성파출소 탈취 무기류 목록에는 없다. 대신 검찰 기록은 오후 3시35분쯤 시위대가 화순광업소와 동면지서를 습격해 칼빈 1108정‧실탄 1만7760발‧M1 72정‧칼빈 296정‧AR 1정‧LMG 1정‧실탄 1만4000여 발을 탈취한 것으로 기록했다. LMG30은 이때 처음 등장한다.

▲ 금성파출소무기 피탈 현황.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상황일지
반면 안기부(현 국가정보원) 상황일지는 LMG 4정·실탄 6만 발이 금성파출소 무기고에서 탈취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밖에도 칼빈 소총 510·실탄 3만600발, LMG 4정·실탄 6만 발, M-1소총 255정·실탄 1만6766발, AR소총 4정·실탄 1440발, 수류탄 182개를 금성파출소 피탈 현황으로 집계해 빼앗긴 무기의 종류와 수량이 가장 많았다는 점에선 공통적이다.
민씨는 금성파출소 무기고 탈취 현장을 지켜본 이들이 더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3~5명의 주민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드문드문 모여 지켜봤다”고 한다. 그는 “한 탈취자는 광주에서 대학생과 시민이 죽는데 당신들은 왜 동참하지 않냐고 고함쳤다”고도 했다. 말투는 광주 말씨였다고 민씨는 증언했다.
김동문 씨는 이번 인터뷰에서 한 가지 미심쩍은 대목을 지적했다. 무기고 습격 사건 발생 시점 직전에 받은 전화를 거론했다. 그는 “나주경찰서 경무과장이 철수한다는 전화를 12시에 받았고, 한 시간 후인 오후 1시쯤 군용 레커차가 사무실 앞으로 쏜살같이 지나갔다”고 했다. 무기고가 습격받기 직전에 경찰이 스스로 무장해제한 경위가 석연치 않다고 그는 말했다.
광주=허겸 기자
② “軍 아닌 시위대 장갑차에 權일병 깔려 숨져”

▲ 광주시민 이태규 씨(74)가 계엄군이 시위대 장갑차에 치여 죽는 모습을 목격한 전남도청 4층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1980년 5월 당시 도청 보건과 직원으로 근무한 이씨는 최근 본지 취재진과 만나 도청 일대를 답사한 뒤 4층 복도에서 목격한 사실을 증언했다. 남충수 기자
“바퀴가 달린 시위대 탈취 장갑차에 권용운 일병이 깔려 죽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1980년 5월 전남도청 보건과에서 근무한 이태규(74·예명 정의한) 씨는 “군인이 몰던 장갑차가 후진하다 동료 군인을 죽였다는 증언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며 끔찍했던 순간의 기억을 이렇게 떠올렸다.
이씨는 최근 광주에서 본지 취재진과 만나 “보건과 사무실이 있던 도청 건물 4층 복도에서 밖을 내다보는데 시위대가 탈취해 운전하던 장갑차가 100m 이상 그대로 직진해 군인을 깔아 죽이는 모든 과정을 목격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검찰 수사 기록에 따르면 사망자는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의 고(故) 권용운 일병이다. 이씨는 권씨 시신을 직접 수습했던 과정도 증언했다.
시신은 동료 장병들이 도청 본관 1층 복도 제일 안쪽까지 이송했다. 간호사들과 함께 뒤덮인 천을 들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시신을 봤을 때의 충격은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는 말도 했다. 그는 “고무 바퀴에 짓눌린 참혹한 모습이었다”고 분명하게 못 박았다. 캐터필러에 짓이겨진 모습은 전혀 아니었다는 설명이다
그동안 권 일병의 사망과 관련해서는 “아군이 후진하다 과실로 죽였다”는 의견과 “시위대 장갑차에 깔려 죽었다”는 의견이 대립했다. 당시 시위대가 아시아자동차에서 탈취한 장갑차는 바퀴형이었고, 계엄군의 장갑차는 캐터필러형이라는 차이가 있었다. 이태규 씨는 “직접 시신을 수습한 보건 담당 공무원으로서 내 증언이 가장 정확하다”며 권 일병이 바퀴에 깔려 사망했음을 거듭 강조했다.
이씨는 구체적으로 “21일 오후 2시쯤 시위대가 도청을 향해 장갑차를 밀고 왔다”며 예사롭지 않은 군용차량의 움직임을 보고 일종의 ‘촉’이 발동했던 기억을 털어놨다. “군인들을 향해서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려오는데 눈을 떼려야 뗄 수 없었습니다. 저대로 돌진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어요. 그런데 그대로 주욱 밀고 왔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어요. 멈추지 않고 그대로 밀어 버린 겁니다.”
당시 도청에선 직원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창밖으로 시위대와 군인이 대치하는 곳을 내다보거나 창가에 있지 말라고 꾸준히 안내 방송했다. 그는 “공무원 생활한 지 6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공무원 감각이 부족했던 것 같다”며 “데모대가 블록을 깨서 쌓아 두고 화염병을 던지며 금남로에서 계엄군과 대치하는 상황에 관심이 있어서 줄곧 내다봤다”고 했다. 그러면서 “함께 지켜보던 동료가 안으로 들어간 후 나 혼자 창밖을 보다가 충격적인 모습을 보게 됐다”고 증언했다.
시위대 장갑차 돌진하자 무너진 軍 저지선
이씨는 목격담을 상세하게 보충했다. 그는 “엎드린 자세로 경계하던 군인 2명이 일어서서 뒷걸음질치다 한 명은 (오른발) 뒤꿈치를 치이며 (현재 롯데리아 건물 쪽 왼편 인도로) 튕겨 나갔고 미처 피하지 못한 군인 한 명이 그 자리에서 깔려 압사당했다”고 강조했다.
숨진 군인이 권 일병이라는 사실은 복도로 옮겨진 시신을 수습하고 나서 알게 됐다고 한다. 취재진은 이씨와 함께 권 일병 사망 현장을 답사하며 좀 더 상세한 사망 경위와 당시 정황·위치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사고 현장에는 가운데 분수대를 끼고 전일빌딩245와 옛 전남도청이 마주하고 있었다. 이씨는 지금은 롯데리아 매장이 입주한 건물의 앞을 사고지점으로 특정했다. 1980년에 수협 도지부 건물이 있던 자리다. 이곳에는 ‘5·18 민중항쟁 사적 5호’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씨 증언에 따르면 시민군이 운전한 장갑차는 전일빌딩 앞 금남로에서 현재 금남지하도상가 윗쪽으로 전력 질주한 뒤 롯데리아 앞에서 권 일병을 치어 숨지게 했다. 금남로~서석로에 이르는 거리는 직각의 굽은 아치형 도로이다. 그러나 전일빌딩 남쪽 모서리에서 롯데리아 앞 기념비까지의 직선거리는 100m 정도가 된다. 이씨의 증언에 따르면 시위대가 있던 곳을 뚫고 금남로를 따라 동쪽 방면으로 서행 직진한 뒤 대치했던 장갑차는 전일빌딩 앞부터 전속력으로 계엄군이 있던 장소까지 직진했다고 한다.
1995년 검찰 수사 기록은 이태규 씨의 증언과 같이 권 일병이 시민군 장갑차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적시했다. 당시 수사 기록 99쪽은 “오후 1시경 공수부대가 철수하지 않는 데 항의하며 시위대가 화염병을 투척해 계엄군 장갑차에 불이 붙는 순간 시위대의 장갑차 1대가 갑자기 공수부대 쪽으로 돌진하자 공수부대의 저지선이 무너졌다”고 기록했다.
이어 “공수부대원들은 장갑차를 피해 좌우로 갈라져 부근 전남도청·상무관·수협 도지부 건물 등으로 산개했으나 미처 피하지 못한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깔려 1명이 사망했다”고 상술했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 김영택 씨도 5·18광주청문회 당시 “시민군 쪽에서 장갑차가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자 계엄군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계엄군이 장갑차에 깔리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반면 ‘집단발포’의 계기와 맞물리면서 권 일병 사망 원인은 화염병에 놀라 후진하던 계엄군의 과실 때문이라는 주장도 계속 제기된다.
이에 대해 이태규 씨는 이번 인터뷰 내내 5·18 최초의 사망자는 군인이었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에게 주어진 시·공간에서는 처음으로 발생한 사망 사건이었다는 일관된 진술이었다. 다만 그는 희생자를 권 일병으로 꼽았다. 그의 이 같은 증언은 지난해 5월 공개된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위원장 송선태)의 중간 조사 발표 결과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배치된다.
“내가 전수조사 때 사망 105명… 지금은 터무니없이 늘어”
도청 가운데 공터에 트럭 탄 청년들 ‘이상한 시신’ 마구 들여와
비도 안 왔는데 진흙투성이에 뼈만 남은 시신들 수두룩
가짜 유공자 판치는 현실에 통탄… 진실규명 불 지펴야

▲ 5·18민주광장에서 바라 본 옛 전남도청 건물.(위) 1980년 5월 당시 전남도청 보건과 직원으로 근무한 이태규(74) 씨가 옛 도청 본관 서문에서 사망자 시신을 수습했던 경험을 털어놓고 있다. 이씨는 정체불명의 젊은사람들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트럭으로 싣고 와 본관 옆 공터에 임시로 안치했으며 나중에 상무관으로 옮겼다고 증언했다. 남충수 기자
5·18조사위 최초 軍 사망자도 규명해야
먼저 5·18조사위는 보도자료에서 “권 일병 사망 사건 현장 바로 근처에 있었던 11공수여단 병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계엄군 측 장갑차가 화염병에 놀라 갑자기 후진하는 과정”에서 아군이 아군을 죽였다는 진술이 있다고 기술했다.
취재진이 조사위 발표 내용을 언급하자 이씨는 “내가 유일한 목격자였다”고 거듭 강조하며 아군에 의해 숨졌다는 주장을 반박했다. 조사위는 올해 말까지 조사 일정을 마치고 내년 상반기 중으로 최종 보고서를 작성·공개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작년 5월 발표는 중간 집계 성격일 뿐 최종 보고서는 아니다.
조사위는 아직 권 일병 사망사건의 사실관계를 규명하진 못한 것으로 발표했다. 조사위는 자료에서 “현장에 있었던 계엄군들의 상반된 주장”이 있었다고 짚었다. 송선태 위원장은 작년 5월12일 대국민 보고회에서 “계엄군들의 상반된 주장을 포함해 사실관계를 확인하겠다”고 말했다. 조사위도 권 일병 사망 원인을 단정 짓지 않으려는 신중한 단계인 것으로 보인다. 시위대 장갑차가 계엄군을 치어 죽였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말도 된다.
다음으로 이씨의 주장과 조사위 발표 자료는 최초 사망 군인이 누구인가에서 차이가 있다.
조사위는 지난해 공개한 보도자료 6쪽에서 “신안사거리에서 차량에 치여 사망한 정모 사건”에 대해 짧게 기술했다. 조사위가 언급한 정씨는 고(故) 정관철 중사다. 계엄군 사망자다. 여태껏 알려진 바로는 최초의 군 사망자라는 증언들이 있다. 본지 인터뷰에 응한 이씨는 21일 도청에서 겪은 일이 있기 하루 전날 정 중사 사망사건에 관한 정보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태규 씨가 처한 상황에선 권 일병이 최초의 군 사망자라고 그가 믿고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따라 5·18조사위가 각종 사건의 발생 시점을 철저히 가려낼 필요성이 제기된다. 실제 사건과 수사문서·사적비에 기록된 시점들이 시간의 흐름으로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꾸준히 있었다. <본지 6월21일자 [기획 시리즈 ‘5·18 진실 찾기’] ①나주 금성파출소 무기고 습격 보도 참조>
뼈만 남고 형체 알아볼 수 없는 시신들
이씨는 조기 퇴직 후 15년 정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지냈다. 최근 5년간은 가족이 있는 미국과 한국에 자주 오갔고 대부분은 미국에서 지냈다. 그는 5·18 당시 도청이 수복된 27일부터 그후 6개월 동안 권 일병을 비롯한 모든 사망자의 시신을 수습하고 전수조사했으며 각 병원 원무과에 전화를 돌려 부상자를 집계한 보건의료 공무의 당사자였다. 부상자는 향후 5년간 관리했다고도 했다.
이씨는 현재 5·18 사상자 집계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엉터리”라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기억에 의존한 진술을 더 늦기 전에 활자매체에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인터뷰에 응했다고 취지를 밝혔다.
고향인 구례에 가족과 피신해 있던 이씨는 27일 도청이 수복됐다는 방송을 청취하고 택시를 타고 도청으로 출근했다. 이때부터 시신과 부상자를 집계해 박인수 과장(작고)을 거쳐 도청 보건사회국장에게, 때로는 김종철 도지사에게 직접 보고했다고 한다.
이씨는 “도청 가운데에 공터가 있었는데 어디선가 트럭을 탄 젊은 사람들이 뼈만 남은 시체, 전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 50구 정도를 갖다 놓고 떠나곤 했다”며 “트럭은 2~3차례 더 왔다 가며 누적 70~80구 정도까지 시신이 늘어났는데 대관절 어디에서 갖고 오는지 몰랐다”고 했다.
그는 “널빤지에 비닐로 싸여진 시신들은 전부 다 황토 범벅이어서 의아했다"며 “마치 어딘가에 묻어두었다가 꺼내서 가져오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광주시민들은 5·18 기간에 대체로 맑은 날씨가 이어졌다고 증언한다. 이씨는 시신을 가져온 젊은 사람들이 누구라고 기억하는지 묻자 “알 수 없었다”고만 말했다.
“5·18 진실 규명의 군불 때야 할 때”
도청의 시신 안치소를 찾은 유족들이 많지 않은 점이 의아했기 때문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이씨는 “몇천 명이 죽었다느니 소문이 났지만 전대병원과 통합병원·기독병원·조대병원 등 병원마다 전화해 사상자를 최종 집계하니 사망자 105명, 부상자는 483명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 동생이나 가족이 5월18일부터 27일 사이에 행방불명됐는데 신고 안 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나”라며 “사망자 600만 원, 부상자는 400만 원씩 정부에서 줬는데도 시신을 찾으려고 오는 사람이 눈에 띄게 없었다는 게 정말 수상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2015년 친척이 별세해 한국에 들어왔을 때 처음 5·18 묘역에 갔는데 800여 명까지 사망자가 늘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며 “공원 관계자 말로는 4000여 명이 더 (사후 묘지에 입관) 들어온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했다.
이태규 씨는 “보건 공무원인 내가 5·18 이후 5년간 관리하는 동안 늘지 않은 숫자가 어떻게 30년 뒤에 몇 배로 증가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고개를 저은 뒤 “지금이야말로 5·18 진실 규명의 군불을 때야 할 때”라고 역설했다. ⊙
③7개 건물 옥상서 집단 발포… 軍 소행 아니었다
5월21일 오전 11시 첫 발포… 당시 계엄군에 실탄 미지급
軍은 도청 앞에서 시민에 포위 당해… 공격할 상황 아냐

▲ ‘집단발포’ 논란이 일었던 1980년 5월21일 전남도청~분수대~금남로 일대 주요 건물 및 총격 사망자 위치 분포도. 계엄군이 대치하던 시위대를 향해 일제히 수평 사격을 가했다면 전일빌딩과 YMCA 부근에 사망자가 몰려 있어야 했다. 하지만 5·18 검시조서와 검안서, 병·의원 발행 사체검안서 등을 재분석한 결과 총격 사망자가 여러 곳에 흩어져 발견된 사실이 확인됐다. 또 주요 고층 건물의 옥상에서 무장괴한들이 광주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했다는 증언들이 당시 잇따랐던 사실도 새롭게 밝혀졌다. @스카이데일리
5·18 당시 전남도청에서 금남로에 이르는 7개 건물의 옥상 위 ‘집단 발포’가 계엄군의 소행이 아닌 정황이 처음으로 드러났다.
4일 본지가 단독 입수한 현직 의료진의 5·18 검시조서·검안서 재분석 결과에 따르면 계엄군의 집단 발포 논란이 있었던 5월21일 총상 사망자 53명 중 낮 시간대에 숨진 47명은 도청 앞 분수대보다 다른 지역 사망자가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계엄군이 마주 보고 대치하던 시위대를 향해 집단 발포했다면 전일빌딩·YMCA 앞에서 대부분의 총상 사망자가 발생해야 한다는 의·과학적 상식에 위배되는 것이다.
당시 계엄군은 1만 명 안팎(시민군 추산)의 시위대에 포위돼 도청 앞 분수대에 사실상 고립돼 있었다. 시민군 측이 주장하는 집단 발포 추정 시점(오후 2시)에는 개별 병사에게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다.
부상자를 포함한 구체적인 피격 지점은 전일빌딩과 관광호텔 주변이 최소 30명으로 집계됐다. 계엄군과 시위대가 대치하던 장소다. 그러나 가톨릭센터 주변은 최소 37명으로 더 많았다. 이밖에 △광주은행 주변(최소 7명) △노동청(최소 5명) △동구청과 광주백화점 주변(최소 4명) △충장로 입구·수협(최소 4명) 등으로 나타났다. 진내과·장동로터리·중앙로·현대예식장·광주여고(신흥주유소)·한일은행·국민은행·전남대 등 다양한 장소에 분포돼 이곳들의 사상자 수는 전일빌딩을 능가했다.
전남대를 제외하고 도청에서 가장 먼 곳 중 하나는 충장로~금남로 사거리(옛 한일은행 사거리) 일대였다. 현재 광주 지하철 1호선 금남로4가역 2·3번 출구 지점으로 하나은행과 씨티은행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 금남로를 따라 도청까지의 직선거리는 800m이며 걸어서 10분 걸린다. 당시 도청 앞에 포위된 계엄군은 금남로를 점유한 시위대에 가로막혀 이곳까지 진입할 수 없었다.
사망 시각도 애초 알려진 것과 달랐다. 시민군이 주장하는 대로 오후 2시를 전후해 계엄군의 수평 일제 사격(집단 발포)이 있었다면 사망자가 병원으로 이송된 시각은 오후 3~4시에 집중돼야 했다. 하지만 오전 11시 고(故) 민청진(당시 18세·이하 1980년 연령 기준)씨 사망(영남신경외과 도착 13시55분)을 시작으로 사망자 47명의 사망 추정 시각은 이날 밤까지 여러 시간대에 흩어져 있었다.
학생 이성자(14)양은 오후 1시 동구청 뒷골목에서 등에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됐다. 칼빈소총에 의한 하향사격이 원인으로 분석됐다. 이양의 사망 시각과 위치는 계엄군의 직사화기가 미치지 않는 범위다. 송원전문대 1학년생 최승희(19)군은 1시15분 전남대병원으로 이송됐으며 오른쪽 가슴 총격으로 숨졌다.
이 같은 사망 및 병원 도착 시각은 1980년 5월28일부터 6월 초까지 실시된 합동조사반의 검시조서와 병·의원에서 발행된 사체검안서를 근거로 한 것이다. 이 자료들은 2011년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돼 추후 위·변조가 불가능했다. 21일 병의원에 입원한 부상환자는 201명이었으며 이 중 157명이 총상 환자로 파악됐다.
M1 사망자가 M16보다 2배↑… “계엄軍과 무관”
옥상 위 집단 발포는 오후 1시15분부터 오후 5시까지 계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후 1~3시에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병원 도착 시간이 기록으로 남은 24명 중 14명은 칼빈 등 M1에 의해 희생됐다.
5·18사료편찬위원회(2009 간행) 기록에 따르면 계엄군이 4층의 도청별관과 상무관 등 도청 주변 건물 옥상에 공수부대원을 배치한 시점은 2차례의 시민군 장갑차 공격 이후 3번째 3차 공격이 시작된 오후 2시50분이 지나서다.
중앙일보 광주 주재 이창성 기자의 증언에 따르면 도청 주변 옥상에 배치된 계엄군이 돌진 차량을 향해 총격을 가하기 시작한 시각은 오후 3시48분이었다. 따라서 병원 응급실 도착시간이 오후 4시 이전인 21명은 계엄군 총격에 의한 희생자가 아닐 가능성이 제기된다.
사망에 이르게 한 총기류도 계엄군의 것과 달랐다는 지적이 나온다. 21일 낮 시간대에 숨진 47명 중 M16(14명) 사망자보다 M1 사망자(30명)가 2배 이상 웃돌았다. 5·18 당시 계엄군(공수대원)은 M16을 보유했다. 당시 정부는 군 현대화 사업의 일환으로 공수부대에만 우선 M16을 지급했다.
칼빈과 개런드를 합친 M1소총은 시위대가 예비군 무기고와 파출소에서 탈취한 총기류로 알려진 상태다. 예비군 대대와 경찰에는 M16이 보급되지 않았을 때다.
칼빈소총을 든 계엄군의 사진이 한때 공개됐지만 도청이 수복된 다음날인 28일 현장 수습을 위해 신규 투입된 경계병력의 모습인 것으로 나타났다. 21일 당시 계엄군은 칼빈소총을 갖고 있지 않았다.
또 당시 시위대는 칼빈뿐만 아니라 M16도 소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M16 사망자 14명도 건물 옥상 위 무장괴한의 총격에 의해 사망하지 않았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당시 시위대는 5월19일 가톨릭센터 빌딩을 습격해 CBS 방송국 경계병들로부터 M16 3~4정을 빼앗았다는 증언이 있다. 21일 오전 8시10분쯤에는 20사단 지휘관 차량을 습격해 M16 4정과 탄창 14개를 탈취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이 같은 사람이라면 21일 금남로 건물 옥상에 있던 무장괴한들에겐 최소 7~8정의 M16 소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주시민들 軍 적개심 키우려 누군가 ‘이간질 공작’
당시 계엄군은 M16 사용… M1 피격 사망자가 더 많아
건물 옥상서 하향 사격으로 인한 사망·부상 상당수 확인
생존 피해자들 “공수부대가 쏜 총 아니었다” 잇단 증언

▲ 비극의 역사가 오롯이 담긴 옛 전남도청 건물(왼쪽). 이 앞에 있는 분수대 광장에서 1980년 5월21일 계엄군과 대치하던 시위대를 향해 고층 건물 옥상에서 무장괴한들이 하향사격을 가했다는 당시 광주시민들의 증언이 잇따랐다. 하향사격은 계엄군을 향한 시위대의 장갑차 돌진 등 잇단 도발행위와 맞물려 자행된 것으로 분석됐다. 건축자재공장 공원 고(故) 박종길 씨의 피격부위 모식도. 박씨는 왼쪽 이마와 턱, 가슴 자상에 이어 탄환이 몸 안에 박힌 맹관총상을 입어 전형적인 하향사격 피해자로 분류됐다. 남충수 기자
이에 따라 계엄군이 있지 않은 지역에서 총격이 누구의 소행인지 의문이 제기되는 가운데 생존 피해자들도 공수부대가 쏜 총격이 아니었다는 증언이 잇따랐다.
이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무장괴한들이 옥상에서 총을 쏜 건물은 △전일빌딩 △YMCA △가톨릭센터 △광주은행 본점 △노동청 △동구청과 그 맞은편 광주백화점 신축 공사장 등 7곳으로 추정된다.
KBS오월항쟁 무장편에서 양화공 이세영 씨는 “나는 도청 분수대 앞에서 총을 맞은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이씨는 “트럭 운전석 뒤 창문에다가 발을 걸치고 태극기를 이렇게 잡고 있었기 때문에 분수대 앞에 있었던 공수부대들은 제가 맞았던 하복부(아랫배)는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하복부로 바로 맞았던 것은 YMCA나 전일빌딩에서 쏜 저격 총탄이었다”고 증언했다.
전남대 5·18연구소 증언집에 따르면 사진사 정재회(38)씨는 “21일 오후 1시경 가톨릭센터 앞에 사람들이 운집해 군인들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중략) 어디에서 총을 쏘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도청 옥상 위나 수협 위에서 갈겨버린 모양이었다”고 밝혔다.
총알이 날아오는 건물 옥상을 향해 대응사격을 했다는 시민들의 구체적인 증언도 확보됐다.
전남대생 이광호(21)씨는 5·18 증언집에서 “전일빌딩 옥상에서 발포하는 공수부대의 총구를 향해 총을 쏘았다”고 증언했다. 광주로 내려와 시위 현장에 간 건국대생 정건호(22) 씨는 “남도예술회관이나 전일빌딩 옥상에서 정조준해 쏜 것으로 추측된다”고 증언했다.
광주를 취재했던 일본인 카지마 고이치(風間公一) 프리랜서 기자는 “(사진촬영을 위해) 관광호텔 옥상으로 자리를 옮기려고 뒷문으로 들어서자 종업원이 ‘만약 이 빌딩에서 사진 촬영하는 놈이 한 놈이라도 발견되면 당장에 불을 놓고 말겠다는 통고가 있었으니 제발 다른 곳으로 가달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또 “한국 각 신문사의 사진기자 다섯 사람이 전남일보사 옥상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며 “때마침 나타난 무장데모대들이 ‘당장 나가라’고 몰아치는 바람에 되돌아왔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21일 관광호텔과 전일빌딩 등 금남로 일대 주요 고층 건물은 시위대에 장악돼 누구도 접근할 수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톨릭센터 직원 유팔동 씨는 “시민군들이 총을 가지고 우리 센터 옥상으로 올라가려고 했다”며 “광주 금남로에서 제일 높은 빌딩에서 도청을 향해 총질을 좀 하겠다고 하더라”라고 했다. 유씨는 “그 양반들이 총을 들고 그러니까 말릴 수도 없고…”라고 덧붙였다. 7층 건물인 가톨릭센터 옥상에서는 더 높은 전일빌딩(10층)에 가려 분수대 앞 계엄군을 볼 수 없다.
“옥상에서 쐈다”… 군복 입고 계엄軍 총격처럼 위장 노린 듯
건물 옥상에서 하향사격을 가한 무장괴한들이 군복으로 위장했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화랑을 경영한 임춘식(28)씨는 “전일빌딩 옥상에 진을 친 공수들은 광주경찰서 방향에 있는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고 관광호텔 옥상에 배치된 공수들은 금남로 5가 쪽을 향해서 무작위로 쏘아댔다”고 증언했다. 고층에서 총을 쏜 이들이 군복을 입고 있었다는 진술이다.
이와 관련해 21일 당시 전남대에 주둔한 3공수 16대대 팀장 김응근 대위(중대장)는 당일 밤 임신부 피격 사망사건에 관한 증언에서 “전남대에 우리 공수부대 복장을 한 애들이 있었다”며 “걔네들이 조장을 하기 위해서 쏘고 그랬다. 우리는 절대로 이탈할 수가 없다”고 당시 기억을 회고했다.
당시 회사원 김용대(28)씨는 공수부대원 3명이 ‘서서쏴’ 자세로 총을 쏘는 걸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KBS의 ‘5·18다큐, 광주는 말한다’에 출연해 수협 옥상을 가리키며 “저기에서 무장괴한이 총을 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면서 “나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며 “금남로에서는 군인의 모습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데 도대체 어디에서 총을 쏘길래 시민들이 쓰러지는 것일까…”라고 의문을 품었던 배경을 밝혔다.
건물 옥상위 하향사격은 죽거나 다친 피해자의 시신 부검 또는 병원 치료 문건에서도 확인된다.
하향사격은 2곳 이상 부위에 동시 손상을 입거나 사선관통의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꼬마상주’ 영정 사진 속 사망자로 잘 알려진 조사천(33)씨는 총알이 왼쪽 머리 위로 들어가 턱을 뚫고 나간 뒤 다시 왼쪽 가슴을 관통한 것으로 분석됐다. 높은 곳에서 아래로 쏜 총알에 맞은 전형적인 하향사격 피해 사례에 해당한다.
검시 기록과 목격자 증언 등을 토대로 탄도(총알의 날아간 각도)를 분석한 결과, 고층 건물에서 아래로 쏜 탄환에 맞아 숨진 하향사격 사망자는 김광석(26)·김정(20)·김형관(22)·박민환(26)·박종길(24)·윤재식(31)·임균수(20)·조사천·최승희(19)씨 등 9명이었고 부상자는 김한호(49)씨 등 20명으로 집계됐다.
전남대 2학년생 김광석 씨는 금남로에서 부상자를 부축하다 총에 맞고 현장에서 숨졌다. 오른쪽 아래턱이 깨지고 가슴에 총알이 박힌 하향사격 피해자다. 체내에서 칼빈 총알이 발견됐다. 선반공 김정 씨는 오른쪽 앞머리와 왼쪽 가슴에 총상이 있어 하향사격 사망자로 분류됐다. 원광대 2학년생 임균수 씨도 왼쪽 머리와 얼굴에 이어 하악골(턱) 골절상을 입었다. 총알이 위에서 아래로 지나 턱을 관통한 것이다.
피격 날짜와 사망 날짜가 확인되지 않은 이발소 종업원 허봉(23)씨는 총알이 들어간 사입구에 우측두정부골절상과 총알이 나간 사출구에 좌전두 타박 열상이 발견됐다. 정수리 오른쪽에서 왼쪽 앞머리를 탄환이 관통한 것이다. 역시 날짜가 불분명한 건축자재공장 공원 박종길 씨도 왼쪽 이마와 턱, 가슴 자상에 이어 탄환이 몸 안에 박힌 맹관총상을 입었다. 이 같은 분석은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20권 중 검시조서에 관한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전방위 총구 겨눈 무장괴한들… 반경 1km까지 피격
옥상 위 무장괴한들이 전방위로 총구를 겨눈 정황도 발견됐다. 군과 시민 간 이간질을 목적으로 양민을 죽인 것으로 추정되는 하향사격의 피격 지점이 분수대에서 반경 1km까지 동서남북으로 확산되기 때문이다.
김은환 씨는 한일은행 사거리(현재 광주 지하철 1호선 금남로4가역)에서 누군가가 쏜 총에 맞고 5·18 유공자가 된 것으로 기록됐다. 김씨는 “한일은행사거리 주위에는 공수대원들이 전혀 없었다”며 “아마 관광호텔 옥상이나 전일빌딩 옥상에서 쏘았던 것 같다”는 증언을 남겼다.
계엄군은 21일 도청 부근에만 주둔했다. 계엄군과 시위대가 대치하지 않은 곳에서 숨진 사망자는 △안병태(대인동 중앙예식장 부근) △조남신(무등극장 부근) △최미애(중흥동 집앞) △강복원(송암동 남선연탄 앞) △김용표(광주여고 앞) △김영철(제일은행 앞) 등 6명이다. 1985년 5월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펴낸 자료에서 안씨는 칼빈 총상, 강복원·김영철 씨는 기타 총상으로 각각 기록됐다.
고교생 박철옥(17) 군은 “노동청 앞 사거리에 26~27세쯤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 총에 맞아 쓰러져 있었다”며 “어디서 총알이 날아오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건물 옥상 같은 위쪽인 것만은 확실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당시 재봉 견습공 이용일(18) 군은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이 가르쳐 준 대로 폼을 잡고 가톨릭센터 옥상을 향해서 쏘았다”며 “내가 쏜 총은 그 반동 때문에 울려서 상체가 뒤로 젖혀졌고, 가톨릭센터 건물의 꼭대기를 빗맞고 나갔다”고 했다.
가게 종업원 장종필(18)씨는 당시 트럭 위에서 총소리를 듣고 누웠다가 다리와 가슴에 총상을 입었다. 장 씨는 “내가 생각하기에 공수들은 (도청) 앞에서 총을 쏜 것이 아니라 전일빌딩 옥상에서 정조준사격을 한 것 같다”고 증언했다. 장 씨는 금남로 지하상가(한국은행사거리)에서 총을 맞았다. 계엄군이 있던 분수대로부터 440m 떨어진 곳이다. 트럭 적재함에 누워있는 사람을 수평사격으로 맞힐 수 없는 각도와 거리다.
목수 차용봉(25)씨는 광주은행 옥상 위에서 무장괴한이 금남로 시민을 향해 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차 씨는 “계엄군은 분수대 주위에 있었기 때문에 총을 쏘면 시위대열 정면을 향해 총알이 날아왔을 것인데 자꾸만 옆에서 총알이 날아와 시민군의 오발이 아닌가 생각됐다”고 증언했다. 그는 이어 “이 일이 계속되자 오발 사고만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며 “계엄군이 인근 건물에 숨어 있는 것 같았다”고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르몽드 기자이자 뉴욕타임스(NYT) 특파원 필립 퐁스는 “시위대 중 몇 명은 계속해서 군중에 총격을 가하고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번 재분석에 참여한 익명을 요구한 현직 의사는 본지에 “실제로는 주변 높은 건물 옥상에 올라가 있던, 계엄군으로 위장한 무장괴한의 총격에 의해 많은 시민이 부상당하거나 사망한 것”이라며 “이는 광주 시위대로 하여금 공수부대에 대해 적개심을 품게 하려고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으로 보인다”고 강조했다.⊙
④ ‘꼬마상주’ 아버지도 옥상 괴한 총격에 희생
의료진 검안 재분석 결과 머리→턱→가슴 관통 확인
당시 검찰 조서 공수부대 M16 아닌 ‘칼빈 총상’ 명시

▲ 1980년 5월21일 광주 금남로에서 숨진 조사천 씨의 아들 조천호(당시 5세) 씨가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뉴시스
5·18 ‘꼬마상주’의 아버지 고(故) 조사천(당시 33세)씨가 옥상 위 무장 괴한이 아래로 쏜 총알에 맞고 숨진 정황이 새롭게 밝혀졌다.
6일 본지가 단독 입수한 현직 의료진의 5·18 검시조서·검안서 재분석 결과에 따르면 조씨의 직접적인 사인은 총알이 머리-턱-가슴 순으로 관통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됐다. 지금까지는 시민군이 아시아자동차에서 탈취한 바퀴형 장갑차 위에서 태극기를 흔들던 조씨가 가슴에 총격을 받고 숨진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5월21일 당시 군과 대치하던 시위대는 정면에서 계엄군이 쏜 총에 조씨가 맞은 것으로 생각하고 크게 동요하며 분노했다. 조씨의 죽음은 시위대가 계엄군을 직접적으로 공격하게 만든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금까지 회자된다.
1980년 5월28일 검찰 검시조서에 조씨는 “칼빈 총상, 좌전흉부 맹관상”으로 명기됐다. 왼쪽 가슴에 맞은 칼빈 총알로 사망한 것으로 검시 당국은 파악했다. 검시 서류 작성에는 광주지검 한광수 검사와 최유섭 의사·나종태 군검찰관(중위)·주영근 경찰관(경사)·박승일 군의관(대위)이 참여했다.
그후 6월2일 전남대학교병원에서 발행한 조씨의 사체검안서 기록에는 “좌전흉부에 1x1cm의 맹관총상과 전흉부에 16x10cm의 피하출혈”로만 적혀 있고 칼빈총상 기록은 누락됐다. 5·18 당시 계엄군(공수대원)은 M16을 보유했다. 당시 정부는 군 현대화 사업의 일환으로 공수부대에만 우선 M16을 지급했다.
당시 검안서에는 칼빈 탄환에 의한 왼쪽 앞가슴 맹관 총상으로 사인이 기록됐다. 맹관 총상이란 총알이 몸 안에 박혀있는 것을 말한다. 탄환의 종류를 통해 쏜 총의 종류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가슴 총격” 검시조서 vs “머리 총격” 목격자 증언 큰 차이
검시조서와 사체검안서의 공통점은 조씨의 사인을 좌전흉부 맹관상으로 기록한 점이다. 가슴에 총격을 받고 숨졌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기록은 당시 주변에 있던 다수 목격자의 생생한 증언들과 크게 차이가 있다. 당시 목격자 20여 명의 증언을 종합하면 조씨는 직립 상태에서 머리에 총격을 받았다. 서 있다가 머리에 총을 맞은 것이다.
이에 따라 검시서류와 목격자 증언 간에 근본적인 모순이 발생한다. 가슴에 총격 치명상을 입었다면 턱과 머리가 함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엔 산탄총이 없었다. 산탄총이란 단 한 번의 격발(방아쇠를 당김)로 여러 발의 총알이 날아가도록 설계된 총이다. 계엄군도 시민군도 산탄총은 갖고 있지 않았다.
대부분의 목격자는 “한 번의 총소리가 났다”고 진술했다. 총성이 한 번만 들린 뒤 조씨가 거꾸러졌다면 단발 사격이었다는 얘기다. 고등학생 김행주(당시 17세·이하 1980년 연령 기준) 씨가 1989년 진술한 전남대 5·18연구소 증언집에 따르면 김씨는 “총알이 그 사람(조사천 씨) 귀 밑을 맞혔다”고 했다.
그는 “오후 2시경 장갑차 위 뚜껑을 열고 태극기를 든 사람이 노래를 부르며 타고 있었다”며 “M16이 불을 뿜었고 턱이 완전히 처지면서 두 개로 나뉘어져 버렸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은 장갑차 위 구멍에서 팔을 뒤로 하고 처져 있었는데 위턱부터는 완전히 뒤로 제쳐져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조씨가 얼굴(턱)에 총을 맞았다고 밝힌 것이다.
재수생 윤석진(19) 씨는 “관광호텔 앞에서 장갑차 뚜껑을 열고 (나온 사람이) 안전벨트를 맨 상태에서 대형 태극기를 흔들어 댔다”며 “총소리가 남과 동시에 그의 턱 부분이 아예 날아가 버렸다”고 진술했다.
이어 “목뼈가 허옇게 보이고 피가 솟구쳤다”며 “도청 옥상이나 전일빌딩 옥상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총을 쏘았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총알이 뚫고 나간 것이 아니라 (턱을) 분리를 시켜 버렸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대학생 나상옥(21) 씨는 “내가 탄 차가 관광호텔 부근에 이르렀을 때 총소리가 들렸다”며 “장갑차에 탔던 청년(트레이닝 바지를 입었음)이 장갑차 밖으로 몸을 내놓고 가다가 목 오른쪽 부위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것을 봤다”고 했다. 나씨는 “금남로와 도청 앞에서도 군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며 “청년이 목에 맞은 것은 정조준에 의한 것이었고 오른쪽 목에 맞은 점을 미루어 아마 관광호텔에서 쏘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상술했다.

▲ [1] 5월21일 금남로에서 시위대와 계엄군이 대치하는 가운데 한 시민이 장갑차 위에 올라와 있다.(붉은색 원안) 이 시민이 조사천 씨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조씨는 사진 속 시민과 같은 모습으로 장갑차 위에 서 있다가 옥상에서 발사한 총알에 맞고 숨진 것으로 분석됐다. [2] 우측 가로수 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얀 건물이 카톨릭센터 빌딩이다. 이 건물 옥상에서 무장괴한이 인도 옆 3차로를 지나가는 장갑차에 탄 조사천 씨를 저격한 것으로 분석됐다. 건물에서 장갑차까지의 거리가 약 7m, 건물의 높이가 약 21m 이므로 발사각은 약 72도로 추정된다. 이 각도는 실제 조사천 씨의 피격 탄도각과 비슷하다. [3] 조사천 씨의 피격부위 모식도. 5.18재단/구글거리뷰
조씨 시신 태극기로 덮고 “계엄군 만행”… 시위대 거짓 선동
당시 증인들 “단발 총성에 조씨 고꾸라져… 귀밑에 맞았다”
시위대 말대로 가슴에 맞았으면 턱·머리가 함몰 될 수 없어
총 쏜 가톨릭센터 옥상 발사각 72도… 조씨 피격 탄도 비슷
화물차 운전사 임병석(19) 씨는 “내가 운전하는 레커 좌측에는 장갑차가 서고 뒤에는 불도저, 지프차가 뒤따랐다”며 “장갑차에서는 화순에 산다는 사람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도청을 향해 서서히 진격했는데 그때 갑자기 총소리가 났다”고 했다.
그는 “장갑차에 탄 그 사람의 머리가 총알을 맞아 닭고기를 칼로 다져놓은 것처럼 돼버렸다”며 “설마 그들이 우리에게 총을 쏠까 했는데 바로 눈앞에서 당하고 나자 지프차 위에 그 시체를 옮겼고 시체를 태극기로 덮어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시민군들에게 계엄군의 만행을 알렸다”고 말했다.
식당 종업원 김용오(21) 씨는 “장갑차가 서서히 도청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며 “제일은행 부근쯤이었을까? 갑자기 ‘땅!’ 하는 총성이 울려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러면서 “차에서 내려보니 장갑차 위에 탔던 (사람이) 온몸이 피투성이 된 채 쓰러져 있었다”며 “언뜻 보아 얼굴에 총을 맞았는지 입이 한쪽으로 처져 있었고 주위에서 시민들이 달려들어 그를 끌어내리고 태극기로 덮고 있었다”고 했다.
당구장 지배인 이규홍(26) 씨는 “관광호텔 부근에서 장갑차에 타고 있던 청년이 상체를 드러내는 순간 도청 앞에서 쏜 M16 총에 턱 부분을 맞고 쓰러졌다”며 “곧 유동 삼거리로 데려와 살펴 보니 장갑차 윗부분에는 피가 흥건히 젖어 있고 청년의 목이 겨우 매달린 정도였다”고 진술했다.
재봉견습생 이용일(19) 씨는 “어떤 사람이 장갑차를 타고 위로 올라오고 있었는데 러닝셔츠만 입고 머리에는 흰 띠를 두르고 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며 “그는 장갑차의 뚜껑을 열고 상체를 위로 내놓고 서 있었는데 도청 쪽에서 저격병이 쏜 총에 목을 맞고 쓰러졌다”고 했다. 앞서 이씨는 “갑자기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총알이 날아와 바로 내 옆 사람이 총알에 맞아 쓰러졌다”며 이미 옥상 총격이 시작된 이후 조사천 씨가 장갑차에서 총격을 받은 사실을 증언한 바 있다.
소방공무원 시험을 마친 장세경(25) 씨는 “장갑차 위에 탄 어떤 청년이 태극기를 들고 도청을 향해 간다고 했다”며 “청년이 탄 차가 관광호텔 앞에 이르자 연발 총성과 동시에 태극기를 든 청년이 장갑차 위에서 뒤로 넘어졌다”고 했다. 그는 “청년은 코에 구멍이 뚫리면서 머리는 반쪽으로 갈라지고 왼쪽 머리가 완전히 날아간 상태에 턱이 떨어져 가슴에 얹혀 있었다”고 묘사했다.
서채원(19) 씨는 “모든 시민의 눈은 그 장갑차로 향했다”며 “그 장갑차가 광주관광호텔 가까이 다가갔을 때 총성이 울려 퍼졌다”고 했다. 이어 “순간 태극기를 들고 앞에 서 있던 젊은이가 머리에서 피를 내뿜으며 축 내려앉았다”며 “분수처럼 솟아오르던 그 붉은 피, 나는 지금까지도 그때 보았던 그 장면을 결코 잊지 못한다”고 증언했다.
대학생 박영순(27) 씨는 “나중에 말을 들어 보니까 장갑차에 탔던 사람 중 한 사람이 머리에 총을 맞고 죽었다고 했다”며 전해 들은 이야기를 전술했다.
재수생 장준영(19) 씨도 “현재 광주백화점 앞에 있었는데 장갑차에 러닝 차림의 한 청년이 대형 태극기를 들고 ‘만세! 만세!’하고 외치고 있었다”며 “그와 동시에 갑자기 총성이 들렸고 장갑차에 탄 청년이 쓰러졌고 장갑차가 후진하는데 목에 총을 맞은 시신이 장갑차 위에서 목 윗부분과 아래의 몸체가 따로 흔들리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조사천 씨의 아내 정동순 씨도 목에 총알이 나온 구멍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정씨는 1980년 8월, 사건 당일을 회고하며 “그곳에 도착하는 순간 여기저기 찾을 것도 없이 출입구 쪽에서 두 번째에 남편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누워 있었다”며 “목에 총알이 관통한 상태로 눈을 뜬 채였다”고 증언했다.
“목과 몸체가 따로 흔들렸다”… 탄도로 추정해 본 살인자는 누구
이 같은 목격자 증언을 종합적으로 추론하면 조사천 씨의 사인은 왼쪽 머리와 왼쪽 턱을 부순 총알이 턱 밑 피부를 뚫고 나온 후 다시 왼쪽 앞가슴을 뚫고 가슴 속에 박힌 것이다.
머리와 가슴 중 치명상은 머리일 수밖에 없다. 일부 목격자들이 머리에서 피가 솟구쳤다고 증언한 것으로 미뤄, 머리는 가죽만 손상된 것이 아니라 머리뼈를 부순 총알이 측두골 부위의 뇌정맥동 즉 측정맥동(lateral venous sinus)에 손상을 줬을 가능성이 재분석 결과 제기됐다.
손상 추정 부위는 순식간에 엄청난 양의 피가 쏟아져 나와 주변을 흥건히 적시기에 충분하고 곧 사망에 이른다. “머리에서 피를 내뿜으며 축 내려앉았다” “분수처럼 솟아오르던 그 붉은 피” “머리는 반쪽으로 갈라지고 왼쪽 머리가 완전히 날아간 상태에 턱이 떨어져 가슴에 얹혀 있었다” 등의 증언이 그 상황을 대변한다.
또 가슴에 직경 1cm의 총알이 들어간 자리와 함께 가로 10cm, 세로 16cm의 피멍이 생긴 것으로 검시 조서는 기록했다. 피멍은 총알이 피부 밑으로 진행하면서 벌려놓은 틈으로 피가 흘러내려 생긴다. 이에 따르면 총알은 피부밑을 지나며 흉곽과 나란히 진행했기 때문에 총알이 흉곽 내부로 들어갔더라도 심장을 뚫지 않고 폐 속에 박혔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번 재분석에 참여한 의학박사 A씨는 본지에 “이 경우 가슴 총상으로는 피가 뿜어져 나오지 않는다”며 “반면 총알이 가슴 정면에서 뚫고 들어가면 조씨의 부검 결과와 같은 크기의 피멍은 생기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검안서에 1x1cm 총상 주위에 16x10cm의 피하출혈이 있었던 사실은 위로부터 날아온 총알이 피부밑으로 16cm 정도를 주행했을 것이라는 합리적 추론을 뒷받침한다.
목격자 증언을 종합해 추론하면 탄도(총알이 날아온 각도)는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씨가 숨진 당일 금남로 일대 7개 주요 건물 옥상에서 무장 괴한들이 시위대를 향해 아래로 총을 쏜 정황이 이번 재분석에서 새롭게 드러났다. <본지 7월5일자 [단독][5·18 진실 찾기③] 7개 건물 옥상서 집단 발포… 軍 소행 아니었다 보도 참조>
현장 목격자 윤석진·나상옥 씨는 총알이 높은 건물 옥상에서 날아왔다고 생각했다. 이용일 씨는 조씨 사망 직전에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총알이 날아와 자기 옆 사람이 죽었다고 증언했다.
조사천 씨가 탄 장갑차는 가톨릭센터에 가장 가까운 차로(3차로)에서 도청을 향해 천천히 운행하고 있었다고 임병석 씨는 증언했다. 당시 금남로에는 약 5000명의 군중이 도로를 점거했지만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무장 괴한이 쏜 총소리에 놀란 시위대가 골목으로 숨어들어 가며 흩어져 장갑차가 주행할 공간이 생겼다.
금남로를 서서히 달리던 장갑차에서 상체를 내밀고 있던 조씨가 일어나 태극기를 양손으로 치켜들고 구호를 외치며 지상 7층 건물인 가톨릭센터 옆을 지날 때 조씨의 머리를 향해 옥상에서 발사된 총알이 날아온 것으로 보인다.
건물에서 3차로를 운행하던 장갑차까지 거리가 약 7m, 건물 높이가 약 21m이므로 발사각은 약 72도로 추정된다. 이 각도는 실제 조사천 씨의 피격 탄도 각과 비슷하다.
의학박사 A씨는 조씨의 검시가 사망일로부터 7일이나 지난 28일 진행된 점에 주목했다. 검시에 참여했던 의사나 검사들은 부패할 대로 부패한 시신을 마주했을 것으로 봤다.
A씨는 “그들의 눈으로는 피범벅이 된 머리카락으로 덮인 측두부의 총상이나 일부러 턱을 치켜들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을 턱밑 피부 열상은 구분하기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며 “검시관들 눈에는 가슴에 난 칼빈 총알 구멍과 그 구멍 아래로 16cm 정도의 길이와 10cm 정도의 폭을 갖는 피멍 자국만 눈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⑤ ‘송암동 오인 사격’은 게릴라 전술에 軍이 당한 것
軍 무전 도청한 뒤 “봉쇄지점 폭도 습격” 잇따라 위장 제보
함정에 빠진 11공수·전교사 시위대 착각 교전… 11명 숨져

▲ [1] ‘송암동 오인사격’ 현장이 자리한 광주광역시 송암동 삼거리를 최근 방문한 5·18 당시 계엄군 중대장 최종원 씨가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 교도대대 매복조가 있었던 위치를 가리키며 당시 상황을 취재진에게 설명하고 있다. [2] 교회 앞 도로의 왼쪽이 주남마을 방면이다. 11공수여단은 왼쪽에서 도로를 따라 송정리 비행장이 있는 오른쪽으로 진입하다 매복조의 총격을 받고 약 50명의 인명피해를 당했다. [3] 송암동에 있는 광주~목포 간 도로의 모습이다. 이곳에는 현재 테슬라(Tesla)가 들어서 있다. 광주=남충수 기자
5·18 당시 아군 간의 유혈 교전 사태로만 알려졌던 ‘송암동 오인 사격’은 군 전력 약화를 노린 무장그룹이 계엄군의 전남도청 수복을 조직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감행한 것임을 증명하는 정황이 새롭게 드러났다.
또 이 사건에는 군 지휘부의 무전을 도청한 무장그룹이 도시 게릴라 전술을 적용한 사실도 처음으로 밝혀졌다.
11일 본지가 단독 입수한 복수의 분석자료들에 따르면 전라남도 계엄사령부인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는 5월24일 새벽 예하 제3·7·11공수부대에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하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실제 도청이 수복된 27일보다 4일이나 빠른 23일에 최초의 도청 탈환 작전을 계획했다가 돌연 연기한 데 따른 후속 조치였다.
이 때문에 시민군은 계엄군의 진압 작전이 언제 전개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이에 따라 집결 명령을 무전으로 도청한 시민군은 도청 진압 작전을 개시하기 위해 공수부대가 송정리 비행장에 집결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즉각적인 대응에 착수한 정황이 포착됐다.
전교사의 이동 명령에 따라 화순 방면을 봉쇄하고 있던 7공수·11공수여단은 이날 오후 1시쯤 주남마을을 떠나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20사단 트럭 약 50대에 나눠 타고 광주~목포 간 도로를 따라 진행하던 11공수는 길 양옆에 매복해 있던 무장그룹으로부터 간헐적인 총격을 받았다.
김철수·박노용 씨 증언에 따르면 이에 맞서 대응사격하며 차량 속도를 높여 진행하던 공수부대는 백운동 쪽에서 내려오는 송암동 삼거리에 이르러 또다시 무장그룹으로부터 총격을 받고 응사했다.
이보다 앞서 전교사 장사복 작전참모장(준장)은 전교사 김병엽 교수부장에게 교도대대 매복조의 배치를 지시했다. “반란군이 군복을 입고 장갑차를 앞세워 15대의 트럭을 타고 봉쇄지점을 돌파하려 한다”는 시민의 첩보 전화를 받은 후였다.
김병엽 당시 교수부장은 훗날 이 사실을 법정에서 증언했다.
김 전 교수부장은 사건 발생 16년 만인 1996년 10월 5·18특별법 2심(항소심)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저지하라는 도로 차단 임무가 부여된 건 사실”이라고 확인했다. 그러면서 “첩보를 주는 것만으로 지휘 조치는 한다”며 “교도대는 교수부장의 통제를 받는 부대이기에 교도대장에게 적절한 조치를 하도록 명령한 바 있다”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출동한 전교사 매복조에게 오토바이를 타고 접근한 남성 2명이 “폭도들이 총을 쏘며 접근하고 있다”고 알리고 사라져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다.
곧이어 총소리가 실제로 들리며 장갑차와 트럭이 빠른 속도로 봉쇄지점을 통과하려 하자 이들이 자기편인지 시민군인지 판단할 여유도 없이 전교사는 일제히 공격을 개시한 것으로 파악됐다.
선두에서 진행하던 병력 수송 장갑차가 90mm 무반동총의 총격을 받고 위·아래로 분리·파괴됐다. 탑승했던 작전참모 차정환 대위가 즉사하고 대대장 조창구 중령의 오른팔이 잘렸다. 동승했던 김동철 병장도 부상했다.
뒤이어 계속되는 총격과 수류탄 공격으로 트럭 4대가 불에 탔으며 9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36명이 중상을 입었다. 부상자들은 헬기에 실려 통합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이튿날 1명이 더 숨을 거두며 오인 사격으로 총 11명이 사망했다. 공수대원 외에 숨진 전교사 안내 병력 1명을 포함한 집계다.
11공수를 공격하기 위해 먼저 전투교육사령부 작전참모에게 시민의 제보인 척 걸었던 위장 전화의 내용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APC 장갑차를 앞세운 트럭 15대가 목포 시민군과 연합하기 위해 봉쇄지점을 돌파하려 한다”고 제보해 작전참모를 속인 것이다. 지시를 받은 김 교수부장은 조교들로 구성된 교도대대를 매복하게 했다.
실제로 이런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11공수가 진행할 도로 양옆에 미리 시민군을 곳곳에 배치해 총격을 가함으로써 공수부대가 응사를 하도록 유인했다. 송암동 삼거리에 마지막 부대를 배치해 사격하게 함으로써 매복군이 11공수를 제보받은 ‘공격자’들로 오인하게 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교전 군 당사자·주민 목격자 “시민군 선제사격” 진술 일치
11공수 63대대 무전병 문병소 중사는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문 중사는 “11여단은 이동 중 송암동 삼거리에 매복하고 있던 자들로부터 산발적인 총격을 받았으나 피해 없이 지나쳤다”며 “APC 장갑차를 선두로 세우고 전진하다가 효천역 500m 전방 고개 밑에서 5~10분 정지했다가 다시 출발하는데 이상한 선두 차량이 끼어든 것을 제가 발견하고 멈출 것을 외쳤으나 그냥 출발하게 됐다”고 증언했다.
그는 “선두 지프에서 장교 복장을 한 자가 빨간 깃발을 내림과 동시에 무반동 총탄이 장갑차에 날아와 장갑차가 폭파됐다”며 “이어 소총과 수류탄 공격이 잇따랐고 트럭 한 대에 안전핀이 31개가 붙어 있을 정도로 치열했다”고 상술했다.
그러면서 “아군끼리 교전이 시작됐는데 11공수 병력이 산 쪽 매복지로 쳐들어가 1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했다”며 “신문해 보니 전교사 산하의 육군 보병학교 교도대였다”고 밝혔다. 문 중사는 “앞 지프를 따라가 추적해 잡았는데 장교 복장을 한 자가 권총으로 자기 턱밑을 쏘아 자살했다”고 덧붙였다.
일부 공수부대원들은 자신을 공격한 시위대를 원점 추적·수색하는 과정에서 비무장 시민 4명을 연행해 사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민간인들이 공수부대를 공격했는지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또한 당시 어린이 피격 사망 사건에 대한 정보도 추가로 드러나진 않았다.
당시 매복군 중 한 명이었던 최영철 씨에 따르면 시민군 책임자는 급히 지프차를 몰아 송암동 삼거리에 못미처 효덕국민학교 부근에 매복조를 내려놓고 갔다. 시민군 책임자는 계엄군이 나타나면 바로 사격을 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들이 매복하고 얼마 안 있어 계엄군 장갑차가 모습을 나타내자 이들이 먼저 총을 쐈다고 김철수·박노용 씨는 증언했다. 계엄군이 대응 사격을 하자 전방에서 매복 중이던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대는 이들을 반란군으로 생각하고 총격을 가하게된 게 송암동 오인 사격의 실체였다. 당시 증언과 기록들은 무장그룹의 철저하게 계산된 공작에 계엄군이 휘말린 사실을 대변한다.
무장 시위대 곳곳 숨어 軍 습격… ‘제보받은 공격자’로 위장
교전 당사자·목격주민·시위대 “위장전술” 한결같은 진술
“무전병 출신 ‘대장’이 軍 작전전개 수시 도청” 증언 잇달아
시민들 “시민군 무전기 입수… 軍 병력 배치·이동 경로 실시간 파악”
당시 정황은 시민들의 증언을 통해서 뒷받침된다.
양화공 최영철(당시 20세·이하 1980년대 연령 기준) 씨는 '5·18 증언집'에서 적어도 5월19일부터 시민군이 계엄군의 무전기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했다. 최씨는 “(19일 오후 3시쯤) 가톨릭센터에 난입해 경계병으로부터 무전기와 총 한 정을 빼앗았다”고 실토했다.
김현채 씨는 “우리 특수기동대를 지휘하는 사람은 두 명이었는데 한 명은 해병 출신(손인국)이었고 한 명은 몇 달 전에 무전병으로 제대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도청 수위실 옆의 쓰레기 더미에서 공수들이 버리고 간 무전기를 찾았다”며 “우리 대장이 무전병이었으므로 망가진 것이나마 잘 고칠 수가 있었고 무전기 3대는 상황실에 주고 우리 차에는 2대를 실었다”고 부연했다.
전남대생 이재의(24) 씨도 비슷한 증언을 했다. 특히 이씨는 김현채 씨가 말한 '무전병' 출신의 대장(지휘책임자)으로 추정되는 성명불상의 인물에 대해 묘사한다. 이재의 씨는 “22일 도청 서무과 작전상황실로 들어가 보았다”고 시간과 장소를 특정했다. 이어 “계엄군들이 미처 가지고 가지 못했던 무전기는 조작해 사용하기로 했다”면서 “군 복무 시절에 통신병이었다는 한 예비군에게 책임을 지워서 계엄군의 퇴각 상황과 작전 전개 내용을 수시로 청취, 점검하게 하고 외곽지역과 무전 연락을 담당토록 했다”고 보충했다.
천영진 씨의 진술은 더 구체적이다. 천씨는 “유재원이라는 고등학교 동창은 상황실에서 무전기를 갖고 있었다”며 “이 친구 얘기로는 상황실에서 무전기로 계엄군들의 무전을 도청하고 군인들이 어느 쪽으로 간다고 자기들끼리 무전 연락을 하면 이쪽에서 시민군들이 그쪽으로 간다고 다시 전문을 보내 군인들이 오인하게 했다는 것”이라고 증언했다.
천씨는 “이 친구가 증인으로 나를 채택했다면서 무전기를 잡은 일이 없다고 증언해 달라는 거였다”며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친구에게 유리할 것 같아 무조건 무전기를 잡은 일이 없다고 딱 잡아떼었다”고 했다. 천씨가 언급한 유재원 씨의 이름은 광주 5·18기념공원 내 지하 추모승화공간에 있는 5·18 유공자 돌판에서 발견된다.
전남대 법대생 김윤기(24) 씨는 “우리에게는 무전기가 한 대 있었는데 예비군 차림의 남자가 주파수를 맞춰 무전을 도청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전남대생 손남승(22) 씨는 “나는 신분과 이름을 속이고 상황실에서 일하게 됐다 (중략) 상황일지를 썼는데 우리 병력은 몇 시에 어디로 배치했다는 것을 쓰고 군인들의 이동사항을 시간별로 정리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YWCA신용협동조합직원 김길식(20) 씨는 “나도 학생들을 따라가 도청 상황실로 갔다”며 “상황실에는 전라남도 지도가 있어서 시민군과 계엄군의 대치 지점 등과 우리 시민군의 활동 범위 등이 표시돼 있었다”고 기술했다.
“무전 도청 후 역이용… 가짜 첩보 던져 계엄군끼리 오인사격 유도”
김철수(21) 씨와 김문수(13) 군은 시민군이 먼저 공격했다고 기억했다. 김철수 씨는 “점심을 먹고 난 뒤 동네 선후배들끼리 학교 운동장에서 야구를 하고 있었다”며 “운동장에는 야구를 하던 청년 20여 명과 구경하던 아이들 10여 명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백운동 쪽에서 시민군 7명이 탄 군용 트럭이 오다가 학교 앞 사거리에서 멈추자 시민군 7명이 차에서 내렸다”며 “바로 그때 계엄군들이 원제마을 쪽에서 장갑차를 앞세우고 엄청 밀려왔다”고 했다. 원제마을은 당시 효덕국민학교에서 지원동 쪽으로 난 군사도로변에 있다. 김씨는 “아마 시민군들이 선제공격을 했을 것”이라며 “그것과 동시에 계엄군들의 일제사격이 시작됐다”고 기억했다.
목공소 직원 박노용(30) 씨는 “정확한 날짜는 기억할 수 없지만 5월24일쯤이라 생각된다”며 “트럭 한 대가 달려와 집 앞 삼거리에 젊은이 대여섯 명을 내려놓았고 청년들은 총을 한 자루씩 메고 있었는데 마침 지원동으로 통하는 국도에서 계엄군 차가 줄지어 나오고 있었다”고 했다. 박씨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시민군 쪽에서 먼저 총을 한 방 쏘자 계엄군들도 차에서 내려 총을 쏘았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송암동 오인 사격 이외에 24일 계엄군 사상자가 발생한 또 다른 오인사격도 있었다.
24일 오전 10시 31사단 모 대대 중대원 30명이 트럭을 타고 영광 쪽 호남고속도로 진입로로 들어섰다. 당시 이들은 사단 본부에서 대대본부로 이동 중이었다. 이때 전교사 소속 기갑학교 하사관 생도들이 이들을 시위대로 오인해 집중사격을 가해 김명철·최필양·강용태가 즉사하고 송준욱 중대장과 안문영·서보원·장태산 등 5명의 장병이 중상을 입었다.
31사단 피격 사고에 시민군이 개입했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같은 날 일어난 오인사격이라는 점에서 불순한 의도를 가진 쪽에서 무전으로 매복조에게 “시민군 트럭이 통과 중”이라고 가짜 정보를 알려 준 것인지 조사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5월24일 발생한 사건사고들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분석해 온 A씨는 본지에 “이날 발생한 한 건의 매복 피습은 (무장그룹이) 무전을 도청해 계엄군의 이동 상황을 파악한 뒤 이동 경로상에 매복 기습을 가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어 “송암동 오인사격은 도청 상황실에서 (무장그룹이) 계엄군의 무전을 도청한 후 이를 역이용해 가짜 첩보를 제공함으로써 계엄군끼리 오인사격을 하게끔 유도한 고도의 도시게릴라 작전을 펼친 데 우리 군이 놀아난 것”이라고 분석했다. ⊙
⑥ 빨치산·진압軍 살해범까지 유공자로 ‘둔갑’
시위 구경하다, 총알 갖고 놀다가 다쳐도 버젓이 등재
김대중·이해찬·설훈 가짜 유공 논란… 재선별 불가피

▲ 광주 북구 민주로에 자리한 국립5·18민주묘지 내 유영봉안소의 영정. 이곳은 시신을 찾지 못한 희생자들과 다른 묘역에 묻힌 고인들의 영정이 있는 곳이다. 남충수 기자
5·18 유공자는 공훈과 기초적인 피해 사실조차 구분하지 않은 채로 오랫동안 등록·관리돼 온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시위대 총에 맞거나 시위대 트럭에 치였을 개연성이 큰 사람들이 유공자가 되거나 실수로 감전 또는 총성에 놀라 계단에서 떨어져 다친 사람, 총알을 가지고 놀다 다친 청소년도 유공자로 등록된 것으로 확인됐다.
18일 본지가 단독 입수한 현직 의료진의 5·18 검시조서·검안서 재분석 자료와 5·18 증언 문건들에 따르면 시위대에 휩쓸리지 말라는 정부의 경고를 듣지 않고 호기심에 시위 구경을 나갔다가 총에 맞거나 폭도로 오인돼 잡혀가 고초를 겪은 이들이 모두 유공자로 등록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차량 돌진 공격으로 경찰을 4명이나 깔아 죽였거나 계엄군을 트럭으로 깔아 죽인 가해자도 버젓이 유공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으로 밝혀졌다.
김대중·이해찬·설훈 등은 5·18 기간 내내 도피 중이었거나 구금돼 있었지만 역시 유공자로 선정돼 유공자 등록자 모두에 대한 엄정한 재선별 작업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전남대병원 의사가 지켜본 5·18 광주항쟁’ 156쪽에는 위성완(당시 16세·이하 1980년 연령 기준) 군은 5월29일 집 앞에서 총알을 가지고 놀다 폭발해 파편이 눈과 몸에 박힌 것으로 기록됐다. 위군은 6월2일 구토와 경련을 동반한 파상풍 증세로 치료를 받았다.
당시 계엄군의 도청 수복은 5월27일 오전 6시에 종료됐다. 이틀 뒤 집 앞에서 총알을 가지고 놀다 폭발 사고로 다친 미성년자도 유공자가 된 것이다. 위군의 이름은 5·18 기념재단이 만든 유공자 명패 4296개 중에 발견된다.
시민군 차에 치여 죽었어도 유공자 등록돼
침구류 도소매업을 하던 조영복(36) 씨는 시민군 차에 치여 유공자가 됐다. 조씨는 5월22일 월산동 파출소 앞에서 친구를 구하려다 중심을 잃고 인도로 돌진해 오던 시민군 차에 치여 척추를 다쳤다. 조씨의 이름도 역시 유공자 돌판에 새겨져 있다.
재봉사 안병복(20) 씨는 계엄군 차량에 치여 숨졌을 가능성 때문에 유공자가 됐다. 전남대 5·18 증언집에 따르면 어머니 김금난 씨는 “1980년 5월21일 10시경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고 한다 (중략) 작은집은 계림동에 있었는데 그곳으로 갔다가 계엄군의 차량에 치여서 사망한 것 같다”고 증언했다.
21일 오전 10시 무렵은 계엄군이 도청과 전남대에 포위돼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갇혀 있을 때였다. 차량을 운행할 수 없었다. 21일 아시아자동차 회사에서 탈취한 군용트럭이 시 외곽을 돌며 시민들을 도청 앞과 전남대 앞으로 실어 날랐다.
봇짐장수 전황금(52) 씨도 21일 트럭에 치여놓고 유공자가 됐다. 전씨는 “5월21일에는 장사를 나가지 않았다 (중략) 길을 건너는데 앞으로 달려가던 군용 트럭이 갑자기 후진하다가 내 다리를 치어놓고 가버렸다”며 “길거리에 쓰러져 있으니까 어디서 나타났는지 지프차를 탄 학생들이 나를 태워 요한병원에 내려놓고 갔다”고 밝혔다.
역시 식료품가게를 하던 임수춘(38) 씨도 21일 오후 5시쯤 학운동 식품 가게 앞에서 군 트럭에 치여 죽은 것으로 기록됐다. 임씨의 아내는 “5월21일 오후 5시경 남편이 가게를 보면서 집에 나가 앉아 있을 때, 군 차량이 무섭게 돌진해 왔고 순식간에 남편이 차에 치이였다”고 증언했다.
이날 오후 5시는 계엄군이 전남 도청을 빠져나와 조선대 방면으로 걸어서 철수를 시작할 시점이다. 피해자는 계엄군 트럭이 아니라 무장 시위대 트럭에 치였을 가능성이 크지만, 광주시청은 가해자를 계엄군으로 단정하고 유공자 명단에 추가했다.
전화국직원 이은형(44) 씨는 총성을 듣고 놀라 4층 계단에서 2층으로 떨어져 유공자가 됐다. 이씨는 “4층 거의 다 올라가서 갑자기 학생들이 뛰어 들어오고 계엄군이 쫓아오면서 총을 쏘는 소리를 들었다”며 “깜짝 놀라 2층 옥상으로 떨어지고 말았고 의식을 잃고 말았다”고 증언했다.
고교생 윤정귀(16) 군은 검문을 무시하고 걸어가다 총격을 당했다. 윤 군은 “나는 호기심에서 거리를 돌아다녔다 (중략) 22일은 아침부터 어머니께 꾸중을 들어 그냥 집을 나왔다”고 했다. 이어 “당시에 교도소 쪽에 작은집이 있었는데 무심히 걷다 보니 동일실고 앞까지 가게 됐다”며 “군인들이 뒤로 돌아가라고 소리를 질러댔는데 계속 앞을 향해 한 50m쯤 걸었을까.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고 순간 몸이 화끈 달아올랐다”고 증언했다.
계엄군 죽인 가해자들도 버젓이 유공자 혜택
김은환 씨는 한일은행 사거리에서 건물 옥상의 무장 괴한이 쏜 총에 맞고 유공자가 됐다. 김씨는 “한일은행사거리 주위에는 공수대원들이 전혀 없었는데, 아마 관광호텔 옥상이나 전일빌딩 옥상에서 쏘았던 것 같다”며 “총소리가 들리자 사람들과 함께 도망치기 시작했는데 뒤에서 몽둥이로 내 허리를 때린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고 피격 당시 체험을 증언했다.
그러면서 “다친 지 8년이 지나도록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을 보면 상처가 잘 치료됐다고 생각한다”며 “보상금도 준다면 사양하지 않고 받겠지만 보상금을 받기 위해 앞에 나서서 설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총에 맞게 된 것은 내가 그곳에 갔었기 때문”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내 잘못도 조금은 있고 또 운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계엄군들도 총을 쏘고 싶어서 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먼저 공격을 하지 않으면 데모하는 시민, 학생들에게 오히려 당하기 때문에 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증언했다.
당시 한일은행 사거리에는 공수부대가 배치되지 않았다. <본지 7월5일자 [단독][5·18 진실 찾기③] 7개 건물 옥상서 집단 발포… 軍 소행 아니었다 보도 참조> 근처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쏜 자들은 국군과 시민을 이간질하려던 신원미상의 무장 괴한들로 파악된다.
김영봉(19) 씨는 5월21일 오후 늦게 계엄군이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날 밤 경계를 서려고 옥상에 올라갔다가 고압선에 감전돼 유공자가 됐다. 김씨는 “옷을 갈아입지 못하고 보초를 서기 위해 그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광주 시내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며 “나는 카빈총을 들고 보초를 서기 위해 총을 비스듬히 드는 순간 뜨끔했다. 총구가 고압선에 닿아 감전된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전남대병원 의사가 지켜본 5·18 광주항쟁’ 155쪽에는 ‘5월21일 낮 아파트 옥상으로 피신 중 고압전선(3300V)에 감전됨’이라고 기술됐다.
이금영 씨는 5월20일 계엄군 첫 사망자인 3공수여단 정관철 중사를 죽게 한 가해자인데도 유공자로 등록됐다. ‘집단 발포’가 있었다고 시민군이 의혹을 제기한 21일보다 하루 빠른 20일 저녁 6시30분쯤 이씨는 전남대 사거리에서 대형트럭으로 계엄군 지프차를 고의로 들이받아 정 중사를 죽게 만든 공적으로 유공자가 됐다. 운전기사 김승철(22) 씨는 전남대 앞에서 붙잡혀 교도소를 거쳐 상무대에서 풀려났다. 김씨는 “그곳에 있을 때 ‘이금영’이라는 사람이 가장 많이 맞았다”며 “그는 대형트럭 운전기사인데 지프차에 타고 있던 공수부대 중위와 운전병을 트럭으로 깔아버렸기 때문에 많이 맞았다고 했다”고 증언했다.
20일 오후 광주역에 고립돼 있던 3여단에 저녁 식사를 운반하려던 급식 차량 2대가 2000여 명의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무기가 없던 병사들이 차를 버리고 도망가자 시위대는 급식 차량을 뒤집어 엎었다. 전남대 앞을 지키던 3여단 16대대가 이를 도우려 나섰는데 이때 이씨가 대형트럭을 전속력으로 몰아 정관철 중사가 모는 지프차를 들이받았다. 정관철 중사의 임신한 아내는 한 달 뒤면 제대할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됐다.
운전기사 김갑진(30) 씨는 경찰 4명을 죽인 차량 동승자였다는 기록 외에는 공적이 없는데도 유공자가 됐다. 김씨 아내는 “그날 밤 그는 버스를 타고 도청을 지나 노동청으로 가던 길이었는데 버스에는 동료기사인 운전수 배용주 씨 외에 몇 사람이 더 타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배용주 씨는 가해 차량 운전사였다. 이어 “그들이 탄 차가 노동청에 가까워질 무렵 최루탄을 쏘며 경찰들이 쫓아왔다”며 “그러자 그들은 모두 차에서 내려 정신없이 도망갔는데 유난히 큰 체구(80kg 178cm)를 가진 남편은 잡히고 말았다”고 증언했다.
김씨는 배씨와 함께 광주고속버스에 타고 대치 중이던 경찰을 향해 빠른 속도로 돌진해 미처 피하지 못한 경찰관 4명을 깔아 죽이고 도망치다 붙잡혔다.
술 먹고 트럭서 떨어져 숨졌는데... ‘총상 유공자’ 요지경
시위대 트럭에 치이고도 軍트럭에 의한 사고로 조작
경찰 4명 죽인 트럭동승자, 기록 뿐인데도 유공자 선정
대학생 데모대에 밀려 넘어져 5개월 뒤 숨지고도 혜택

▲ 스카이데일리 취재진이 올해 5월 광주 5·18기념공원 내 지하 추모승화공간 돌판에 새겨진 5·18 유공자 명단을 살펴보고 있다. 남충수 기자
5·18 당시 광주에 없던 정치인들도 이름 올려
이해찬(28)은 5·18 기간 광주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도 이 기간 내내 도피 생활을 하다가 6월18일 체포됐다. 설훈(27)도 고려대 학생운동권으로서 이해찬·심재철과 함께 학생 시위를 기획·지휘했다. 5·18 기간 내내 도피하다가 6월18일 붙잡혔다.
광주제일고교 출신의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22)은 5·18 기간 내내 검거를 피해 다니다 6월 자진 출두 형식으로 검거됐어도 정작 본인은 유공자로 신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함께 운동한 설훈은 유공자로 등재됐다.
소년 빨치산 출신의 장두석(개명 전 장질석) 씨도 유공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장씨는 6·25 전쟁 당시 소년 빨치산 출신으로 체포됐다가 당시 15세로 나이가 어려 한 달 만에 풀려났다. 5·18 때 전남도청을 출입하며 도청 밖 광주 운동권과 도청 내 무장세력을 잇는 연락책으로 활동한 의혹을 받아왔다. 계엄군법회의에선 징역 7년이 구형됐고 3년을 선고받아 형이 확정됐다.
백주년기념교회 권사 A씨는 2003년 지인의 소개로 장두석이 자연의학으로 사람을 치유한다는 ‘민족생활학교’에서 들은 내용을 전했다. A씨는 “강사라는 사람(장두석)이 6·25 민족해방전쟁을 실패한 이유가 십자가 씨앗을 다 안 말려서 그렇다며 이번에는 모두 죽이고 태워서 통일을 이루자고 선동해 놀랐다”고 증언했다. 민족생활학교는 장두석이 1989년에 세운 단식학교다. 1975년에 세운 ‘자연건강대학’의 후신으로 알려졌다.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 홈페이지는 장두석을 ‘통일애국열사’로 소개한다.
가정주부 홍란(30) 씨는 자녀를 찾기 위해 집 밖으로 나왔다가 총격을 받았다. 홍씨는 “막 시댁 대문 앞에 왔는데 총소리가 났다. 총알이 빗발치듯 나에게 쏟아졌다”고 증언했다. 남현애(24) 씨는 곗돈을 갖다주기 위해 외출했다가 노동청 부근에서 총격을 당했다. 남씨는 “공수부대가 갑자기 총을 난사했다”며 “내 다리가 좀 이상했다. 감각이 없었다. 팔도 그랬다. 총에 맞은 것이다”라고 진술했다. 홍씨와 남씨는 모두 유공자로 등록됐다.
도청 앞 계엄군은 차량 돌진 공격을 받았을 때 돌진 차량을 향해서만 대응사격했다. 당시 전일빌딩 등 주변 고층 건물 옥상의 무장 괴한이 노동청 주위에 몰려든 시위대에 무차별 총격을 가한 사실이 드러난 바 있다.
채소 장사 김동진(49) 씨는 술을 마신 뒤 차를 타고 가다 낙상해 대퇴부가 뭉개졌다. 고인의 유족은 “주위 사람들 말에 의하면 아버지는 21일 동네 친구 세 분과 함께 동네(월산부락) 골목 어귀에 있는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며 그런데 그날 밤이 지나도록 돌아오시질 않아 식구들이 찾아다니던 중 전남대병원 영안실에서 아버지를 찾았다고 한다”고 했다.
이어 “부검을 할 때 얼핏 보니 아버지는 대퇴부가 거의 뭉개져 있었다. 총상으로 인한 상처인지는 잘 모르겠다”며 “나중에 들은 소문에 의하면 아버지는 술을 드신 상태로 차를 타고 가다 떨어져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확인할 길이 없다”고 진술했다.
시민군끼리 오인사격 가능성도 재검토 대상
의학적 소견으로는 총상으로 대퇴부가 뭉개질 수는 없다. 달리는 차에서 떨어지며 다쳐 유공자가 된 것으로 간주된다.
오인 사격 희생자로 보이는 방위병이자 자동차부품공장 직공인 김형관(22) 씨도 유공자로 등록됐다. 고인의 어머니는 “이웃이 뛰어오더니 글쎄 형관이가 백운동 근처 철둑에서 총에 맞았다고 합디다”라며 “얼굴이 푹 팬 시체가 형관이의 옷을 입고 있었다”고 말했다.
역시 양희영(20)·양희태(17) 형제도 백운동 철길 주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5·18 당시 백운동 철둑에는 계엄군이 배치된 적이 없다. 무장 시위대끼리의 오인사격 가능성이 제기된다.
21일 오후 5시 계엄군은 전남도청을 빠져나와 걸어서 조선대로 퇴각하기 시작했고 6시쯤 식사를 하고 7시부터 조선대에서 탈출해 무등산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 5시 백운동 철길 지점에서는 무장 시위대들끼리 오인 사격을 벌여 여러 명이 숨진 정황이 있다.
양동시장에서 야채 장사를 하던 김명철(66) 씨는 22일 실종됐다가 도청 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검시 결과 얼굴 반쪽이 없고 복부에 시퍼렇게 멍든 자국이 발견됐다. 검시조서는 좌전두부 좌상, 타박사로 기록했다. 교통사고로 배를 들이받힌 뒤 숨졌을 가능성이 크다.
고령의 박갑수(84) 씨는 집 앞에서 전남대생 손녀를 기다리며 시위를 구경하다가 계엄군에게 쫓겨 도망치는 시위대에 밀려 넘어져 부상을 당했고 5개월 뒤 사망했다.
손녀는 “할아버지는 집 앞에 있는 현대예식장 앞에서 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을 보고 내가 걱정이 되어 기다렸다”며 “그러다가 계엄군에게 밀리는 시민, 학생들과 부딪혀 쓰러지고 말았다”고 증언했다.
5·18 기념재단이 만든 유공자 명패에는 48년 7월14일생 김영철 씨의 이름이 있다. 5·18 관련 의료기록에는 YWCA 신용협동조합 직원 김영철(32) 씨가 스스로 자기 머리를 콘크리트 기둥 모서리에 박아 다친 뒤 정신 이상증세를 겪었고 9년 뒤 1989년 8월17일 숨진 기록이 있다.
명패에는 또 문기현이라는 이름이 있다. 의료기록에 따르면 사레지오고 2학년생 문기현(18) 씨가 전남대병원에서 37일간 뇌막염 치료를 받았다.
의학박사 A씨는 본지에 “이들은 유공자가 아니라 억울한 피해자이거나 운 나쁜 피해자일 뿐”이라며 “5·18 기간에 죽은 사람이라면 사망 원인을 몰라도 유공자가 된 경우도 있다”고 밝혔다.⊙
⑦ ‘군분교 습격’은 외부세력 개입한 군사작전
무장 괴한들, 광주 진입 길목 3곳 일찌감치 차단… 軍 유인
서울서 급파한 계엄군·전교사와 합류 미리 알고 조직적 기습

▲ 복면을 쓴 무장 괴한들이 장교우의를 입고 전남 도청을 경계하고 있다. 습격받은 군의 피탈품목에 다수의 장교용 우의가 포함된 것은 1980년 5월21일 20사단 지휘차량 탈취가 유일해 동일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관심을 끈다(왼쪽). 지금까지는 칼빈총의 총구를 아래 방향으로 메는 것은 북한군의 특징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끈 바 있다. 그러나 도청을 사수하는 정체불명의 무장 괴한들이 사병용 판초우의 대신 장교용 우의를 착용했다는 지적이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5·18기념자료집
5·18 당시 시위대에 의한 우발적 소행으로 알려져 있던 ‘군분교 20사단 지휘차량 피탈’ 사건은 군 전술에 능한 세력이 개입한 고도의 차단 작전 성격이 뚜렷했으며 5·18이 악화일로로 전환되는 군사적 변곡점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지금까지는 계엄군에게 반발하며 맞서려 한 시위대가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비전문적인 수법을 동원해 우발적으로 군대를 기습 공격한 사건으로만 인식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전날 발생한 대대적인 광주역 공격과 피탈 직후 벌어진 군수품 공장 기습 및 군용차량 탈취와 무기고 습격·계엄군의 교전·전남도청 점령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사건들과 맞물려 완벽한 군사전술이 적용된 가운데 선제적으로 감행된 일종의 신호탄 격 작전인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전날 광주역의 시위 양상은 이전과 달리, 투입된 제3공수여단이 수많은 시위대에 포위된 데다 차량 돌진 공격 등으로 계엄군 사상자가 발생하는 형태로 변질됐다. 이로써 부대가 정상적인 임무 수행을 할 수 없을 만큼 사정이 악화됐다고 판단한 계엄사는 20사단의 광주 추가 투입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20사단은 고속도로를 이용해 지휘관이 인솔하는 지프차 14대를 광주로 보냈지만 21일 오전 8시10분 광주 농성동에서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일부 지프차는 불에 타 전소되고 일부는 총기류와 함께 강탈당했다.
군은 이 사건으로 △지프차 14대 △M60 기관총 2정 △M16 소총 4정 △45구경 권총 1정 △M60탄약 200발 △M16 탄창 91개 △M60 차량장치대 2개 △무전기 16대 △전투복 35착 △우의 18장 △방독면 18개 등을 빼앗겼고 8·14호(헌병)와 13호(보안대) 지프차는 전소됐다. 또 △중상 2명 △경상 5명 △실종 1명의 병력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군은 집계했다.
25일 본지가 단독 입수한 분석자료와 증언들에 따르면 시민군이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있었다고 주장해 온 당일인 21일 군은 일반열차로 병력을 수송하는 상례와 달리 사단장 지프차를 비롯한 사령부 차량과 62연대 지휘부 차들은 화물열차가 아니면 수송할 수 없다고 판단해 상급부대와 협의한 뒤 고속도로를 통해 광주로 이동하도록 결정했다.
이 사실을 육군본부로부터 접수한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CAC)는 그에 따른 적합한 조처에 나서지 않았고 몇 시간을 달려 광주에 도착한 지프차 14대로 이뤄진 62연대 지휘부 차량은 복면을 한 정체불명의 괴한들로부터 차량과 무기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길목에 장애물 사전 적층… 철저한 차단·매복작전 양상 뚜렷
군분교 20사단 지휘차량 피탈 사건에서 괴한들은 일찌감치 중장비를 동원해 서울~광주 시내에 이르는 농성동 일대 길목 3곳을 차단한 뒤 군부대를 유인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분석은 군 차량이 시민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이동하다 우연히 서로 마주치게 됐고 계엄군에 반감을 품은 광주시민들이 우발적으로 군차량을 공격해 무기를 탈취했다고 알려진 그동안의 관점들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 20사단 지휘차량 피탈 현장 요도
당시 군검찰과 안기부 상황일지 등에 따르면 군을 공격한 “수백 명”의 괴한들은 최소 하루 전부터 도로에 다중의 장애물을 적층하는 등 군 전술상 차단작전에 버금가는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매복한 정황이 드러났다.
장애물 설치 시점은 20일 오후부터 밤까지로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군사전문가들은 시점에 주목한다. 고속도로에 장애물 설치하던 시기는 시위대가 광주역에서 파상 공격을 감행하던 시기다. 다른 두 곳에서 같은 시각에 벌어진 시위의 공통점은 병력 또는 군수품 조달 통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군사전문가 A씨의 분석에 따르면 괴한들은 차량 돌진으로 계엄군을 죽이던 시각에 서울 쪽 방면(광천동)에서 광주로 이르는 주요 길목 3곳에 다중의 장애물을 설치하고 도로를 절개(끊어 통행을 막음)했다. 차량이 빠질 정도의 함정도 팠다. 장애물의 길이와 두께를 고려하면 지게차와 페이로더 등 중장비가 동원돼야 가능한 규모라고 군사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구체적으로 서울에서 오며 광천동 사거리를 지나 농성동 공단입구 사거리를 앞둔 군 지휘차량의 관점에서 오른쪽(지도상 왼쪽) 송정리 방면(군분교)과 왼쪽 돌고개 방면, 정면의 월산동 방면을 모두 다중의 장애물로 막았다.
이곳을 통과하지 않고선 군은 광주 시내에 진입할 수 없었다. A씨는 “모여있던 시위대와 조우한 지프차를 성난 시위대가 공격했다는 시민군 측 증언과 군사 전략상 요충지인 길목 전부를 일제히 절개·차단한 당시 현장 상황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특히 군분교는 장애물을 겹겹이 적층했다. 송정리 방면에는 전교사가 있다. 군 전문가들은 본지에 “괴한들은 서울에서 온 병력이 전교사로 합류할 것으로 내다봤을 것”으로 추정했다. 실제 피해 당사자인 62연대 병력이 습격받자 미리 도착한 61연대는 전교사가 있는 서쪽 송정리 방면에서 동쪽의 군분교 방면으로 접근했다. 같은 이치로 새로 진입하는 추가 병력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해 전교사에 집결할 것으로 봤다는 예측이다.
군 지휘부 간 무전을 도·감청해 이동 경로가 사전에 노출된 정황도 포착됐다. 무장세력은 전날 CBS 경계병을 공격해 이미 무전기를 확보했고 아군끼리 오인 교전을 유도하는 등 군 지휘부의 무전을 적극 도청했다는 시민들의 증언이 공개된 바 있다. <7월13일자 ⑤‘송암동 오인 사격’은 게릴라 전술에 軍이 당한 것 보도 참조>
계엄사와 20사단 작전처 상황 일지에 따르면 기습공격은 62연대와 사령부 지휘차량을 상대로 감행됐다. 20사단 화학대장 김이영 소령이 인솔하는 부대는 서울 쪽 방면에서 광천동을 지나 농성동 공단 입구에서 우회전한 뒤 서쪽 송정리 방면으로 진행하다 군분교에서 예상치 못한 급습을 받았다. 분석 자료에 따르면 군중 속에 잠복한 괴한들은 각목과 칼·낫·쇠 파이프를 들고 벽돌·화염병을 투척하며 기습공격했다.
애초 20사단 60·61·62연대는 각각 다른 이동 수단과 경로로 광주에 도착할 계획이었다. 61연대는 전날 밤 10시에 광주로 출발해 21일 새벽 4시에 도착하고 62연대와 사령부는 21일 새벽 2시30분에 서울 용산역을 떠나 아침 9시쯤 광주 송정리역에 다다를 계획이었다. 태릉에 주둔했고 양평에서 추가 병력이 합류했던 60연대와 91포병대대는 가장 늦은 21일 밤 9시 성남 비행장에서 출발할 예정이었다.
전교사·61연대 지원 안 해… 복면 쓴 공수 복장 괴한들 뒤에서 기습

▲ 군분교에 설치된 장애물.
군 차량이 군분교에 다다르는 동안 전교사(CAC)는 안내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미리 도착한 61연대도 현장에 출동했다가 62연대가 피습되는 와중에 돌연 방향을 돌려 회군해 의문을 낳았다.
20사단은 출발 전 사단 군수참모를 통해 병력 이동 계획을 3군 군수참모에게 보고했다. 군수참모는 CAC 군수참모에게 전달·공유했다. 통상의 작전에선 마중물처럼 안내 부대가 배치된다. 당시 육군본부도 전교사가 병력을 보내고 교통을 통제할 것으로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소한 소요 군중이 도로를 봉쇄했다는 첩보라도 미리 확보해 전파했을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교사는 단 한 명도 현장에 파견하지 않았다. 이는 송암동 사건과 함께 5·18 기간 전교사의 미스터리한 행적 중 하나다. 군사 전문가 B씨는 “바로 전날 밤까지 광주역에서 소요가 격화해 공수부대가 퇴각했는데 습격 가능성을 예상해 서울~광주에 이르는 주요 도로망에 대한 교통 통제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첩보전의 실패 이외에도 밝혀지지 않은 모종의 원인이 있을 것으로 본다”고 본지에 밝혔다. B씨는 추정하는 원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혔다.
결국 20사단 62연대는 무방비 상태로 광주 진입을 시도하는 처지가 됐다. 이에 대해 군사기밀인 용산역~광주 간 병력 이동 계획이 괴한들의 도·감청 또는 군 내부에서 누설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군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이런 가운데 공격당한 62연대보다 일찍 전교사에 도착한 61연대는 소요 군중 진압을 목전에 두고 방향을 돌려 부대로 복귀하는 비상식적인 판단을 내렸다.
20사단 충정작전 결과 보고와 1995년 검찰 피의자신문조서에 따르면 당시 61연대는 소요 군중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고 차량 40대에 병력을 탑승시켜 돌고개에 도착했지만 대대장의 보고를 받은 연대장은 사령관에게 현지 상황을 보고한 뒤 상무대로 복귀하라는 지시를 받고 복귀했다. 회군 시각은 최초의 피습이 있은 지 불과 10분이 흐른 오전 8시20분쯤이다.
황석영의 저서로 처음에 알려졌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2017년 5월 증보판)’ 186쪽은 당시 지휘관의 실명을 언급했다. 책에 따르면 61연대 2대대장 김형곤 중령은 “광주시민들이 몹시 흥분된 상태”라고 판단했고 주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만류하자 연대장에게 무전으로 상황을 전하고 상무대로 복귀했다고 한다.
61연대는 열차 이동 중인 사령부를 엄호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에 나섰다는 기록이 없다.
괴한들이 어떤 복장이었는지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군사 전문가들은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시위대와 구분되는 무장세력의 작전 지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사건을 들여다보고 있어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일부 휩쓸린 광주시민들이 “자발적 항거”였다고 증언하고 있지만, 군 전문가들은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체계적인 움직임을 배후에서 조종한 지휘부가 있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인다.
전두환 회고록에는 시위군중과 구분되는 무장 시위대의 존재가 일부 묘사된다. 회고록 1권 404~405쪽은 “인솔 장교가 차에서 내려 통과시켜 줄 것을 설득했는데 갑자기 진행 방향과 반대쪽인 20사단 지휘부 차량 뒤편에서 잠복해 있던 일단의 무장 시위대가 쇠 파이프와 낫·화염병 등으로 공격해 왔고 사단장 차를 비롯한 14대의 차들은 모두 불타거나 탈취당했다”고 상술했다.
그러면서 “잠복해 있던 정체불명의 무장 시위대는 그 장소에 있던 일반 시위군중과는 분명히 구별할 수 있을 만큼 행동거지가 민첩하고 조직적이었다”며 “20사단 지휘부가 광주톨게이트를 통과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잠복해 있다가 화염병 등으로 공격한 것”으로 봤다.
무엇보다 “무장 시위대 가운데 일부는 경찰복과 공수부대 복장을 갖춘 채 복면을 하고 있었다”고 기술한 대목은 눈에 띈다. 회고록은 “사단의 주력이 아닌 단순한 차량 행렬에 불과했고 또 그때는 이미 시위대가 경찰과 군의 무전기를 탈취해 간 상황이어서 군부대의 이동정보를 알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육군 사단 중에서도 정예부대인 20사단 지휘부의 차량 행렬을 게릴라 작전하듯이 공격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복면 시위대의 정체에 의문이 생긴다”고 했다.
육사총구국동지회 초대 회장을 지낸 이두호 (사)자유수호국민운동 대표는 최근 기자와 만나 “(괴한들이) 시민군으로 위장하면 시민의 공격을 계엄군에 책임을 전가할 수 있고 계엄군으로 위장하면 시민의 만행을 계엄군에 책임을 전가할 수 있다”며 21일 하루 동안 위장뿐 아니라 시민군의 전술은 화전(和戰)·공수(攻守)·양동(陽動) 작전의 다양한 특징을 보인 사실을 강조했다.
무장세력 하루 전부터 함정 파… 고도의 전문가 솜씨
62연대·사령부 타격… 지프 14대·각종 무기·무전기 탈취
경찰·공수부대 복장에 복면 쓴 괴한들, 軍위장 양동작전
“사전차단 작전 실패 했더라면 전남도청 장악 못했을 것”
괴한들, 차량 탈취 전 “밖으로 나오지 말라” 주민 상대 방송
이 같은 의구심은 복면을 쓴 공수 복장의 괴한들이 지휘차량 탈취에 앞서 주택가를 돌며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방송한 사실에서 더욱 증폭된다.
20사단 60연대 수색 중대장 김덕수 대위는 2018년 8월 광주 광천동 소재 노인회관을 방문해 1980년 5월의 상황을 노인들로부터 청취했다. 여러 명의 할머니들은 그 시기를 상기하면서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5월21일 새벽 아침부터 일찍 총을 들고 와서 집 밖에 나오지 말라”고 방송을 했다고 증언했다. 일부 구경하다 휩쓸린 이들을 제외하면 공격 주체 또는 지휘부는 평범한 광주시민들로 구성된 시위대가 아니었을 개연성이 커지는 대목이다.

▲ 군분교 사건 검찰 수사 기록.
당시 동아일보 광주 주재 김영택 기자는 “괴한들이 민간인이었느냐 하는 의문이 있다”며 “민간인이 정규군보다 강할 수는 없고 광주시민들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는 취지로 언급했다. 여태껏 이 50여 명의 괴한들이 광주시민들이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김 기자는 덧붙였다. 80만 쪽이 넘는 5·18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역사로서의 5·18 2권(김대령 저)’에 따르면 낫을 든 시위대는 군 무전기를 탈취하자마자 사용법을 알았으며 그날 오후 3시에 중학생 특공대를 조직했을 때 중학생 시민군들에게까지 무전기 사용법을 금방 가르쳐준 사실로 미뤄 평범한 농민들일 수가 없다고 했다.
군 전문가들은 20사단 피탈 사건을 이해하려면 전날 밤 치열하게 시위대의 공격을 받은 광주역이 어떤 곳이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광주역 일대에서 임무를 수행 중인 3공수여단은 20일 밤부터 차량 돌진을 비롯한 집요한 공격을 받으며 수많은 시위대에 포위돼 있었다. 당시 공수 대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차 온다”는 소리를 듣고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고 한다. 결국 3공수는 광주역 경계 임무를 포기하고 시위대에 광주역을 내주면서 간신히 벗어나 주둔지인 전남대로 21일 새벽 2시30분쯤 되돌아올 수 있었다.
광주역은 열차로 대규모 병력과 장비를 수송해 최단 시간 내에 광주 시내로 진입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계엄군의 인원 및 물자 장비 등을 충원하고 보급받을 수 있는 군사 전략상 ‘베이스캠프’와도 같은 곳이었다. 군사전문가들은 20일 밤의 집요한 공격은 계엄군이 광주역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전술적 양상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고속도로와 일반도로로 이동한 20사단 지휘 차량을 대상으로 한 기습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군부대의 이동 상황에 따른 정보를 접하고 고도의 군사작전의 일환으로 일반 시위대가 계획할 수 없는 장애물을 설치한 사실에 주목한다. 상무대 근처 쌍촌동 도로상에, 돌고개와 농성동 부근 도로상에 3곳의 도로가 차량이 빠질 정도로 절개돼 계엄군의 시내 진입을 차단할 목적으로 밤새 장애물을 설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구체적으로 시내 쪽에서나 고속도로 쪽의 도로를 거쳐 상무대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농성동과 화정동의 경계에 위치한 군분교 상에 시외 측과 시내 측에 각각 파손된 차량과 콘크리트관·강철관·원목 등으로 다단계의 장애물이 설치됐는데 이는 고도의 군사적 식견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설치하기 힘들다고 A씨는 분석했다. 그는 “밤사이 짧은 시간 내에 어떻게 토끼몰이식 함정 유인 형태의 장애물을 설치할 수 있는지를 살펴 보면 단순한 장애물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20사단 배치 과정에 미국이 개입했는지에 관한 분석도 있었다. 20사단의 이동 시점과 관련해 김영택 기자는 “전방에 있던 보병부대(20사단)의 공식적인 이동 승인은 22일 받게 되는데 이날(21일) 미리 도착했다”며 “사전 승낙을 받고 출발한 것인지, 작전 지휘권자인 존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이 결국 승인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판단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고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이 대목에서 미국의 5·18 개입 또는 배후를 의심하는 여론이 증폭됐다.
광주역 전투와 연관성… 美 前 대사 “미국과 무관"
이와 관련해 헤리티지재단이 1985년 9월16일 펴낸 대릴 M 플렁크(Daryl M. Plunk) 선임 방문연구원의 보고서는 20사단 역할과 미국의 관련성에 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 보고서는 “윌리엄 글라이스틴 전 주한 미국대사는 (플렁크 연구원에게) 한국군의 사용이 ‘국가 안보에 위협’을 초래하지 않는 한 한국은 행동(결정)을 미국에 ‘통보(notify)’하기만 하면 된다고 설명했다”고 언급했다. 한국이 군사 배치에 관한 한 독자적 결정권한이 있고 미국은 한국의 군사 결정이 주변국을 선제공격하는 등 역내 안보를 저해하지 않는 한 관여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보고서는 또 “5·18 기간에 한국 정부는 20사단 재배치 결정을 미국에 알리는데 주의를 기울였다”고 했다.

▲ 헤리티지재단 광주 보고서
글라이스틴 전 대사는 “(한국의)행동은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하지 않았고 궁극적으로 군대를 사용할 권리는 주권의 기능이었다”며 “미 대사관은 폭동 ‘약 2일 전’까지 광주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마지막날 20사단이 수행한 광주 탈환은 ‘매우 합리적인 조치(highly sensible action)’로 받아들였으며 미 대사관이 군의 재배치를 수용한 것은 ‘승인’ 또는 ‘공모’와는 무관하다(The U.S. Embassy's acceptance of the troop redeployment did not constitute ‘approval’ or ‘complicity’.)”고 재차 선을 그었다.
‘합리적인 조치’로 받아들인다는 미국의 판단은 현재 5.18의 진실을 찾으려는 연구가들의 견해와도 맥이 닿아 있다.
퇴역한 군사전략가 C씨는 “한국 현대사에서 1980년 이후로 5·18과 유사한 사례는 없다”면서 “제아무리 성난 시민들이라고 해도 군부대를 공격해 무기를 탈취한 뒤 지휘 차량 10여 대를 몰고 군납 자동차 생산업체를 또다시 습격해 차량 수백 대를 가로챈다는 건 전무후무한 역사”라고 못 박았다. 그는 또 “이것을 평범한 시민들의 소행으로 보는 것 자체가 5·18이 얼마나 부실하게 조사됐고 정치적 의도로 진실이 덮여 왔는지 반증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군사전문가들의 모임에서 만든 태스크포스(TF)팀도 “5·18 당시 계엄군의 발포를 유도하는 ‘적거아요(敵据我擾·적이 머무르면 교란한다)’식 군중 운집 점화 활동이 발견된다”고 해석했다. TF팀은 20일 밤 시청과 전남도 경찰청·MBC·KBS 무력화로 행정·방송·통신 기능이 불능에 빠졌고 세무서에 이어 광주역을 내주며 군수기지 기능과 교통이 마비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31사단 공공기관 경계 병력에 대한 공격으로 공권력 해체를 기도한 상황에 21일 20사단 지휘 차량 탈취가 감행된 것은 산발적인 일회성 공격으로 보기보다 일련의 군사 전술이 적용된 전체 중 하나로 이해하는 게 맞는다”고 강조했다.
20사단에서 피탈된 군 장비는 추가 무기 획득이나 거점 점령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칼빈총을 거꾸로 멘 채로 전남도청을 사수하는 괴한들에게서 피탈된 장교용 우의가 발견된다고 군 전문가들은 주목했다. 지금까지는 칼빈총의 총구를 아래 방향으로 메는 것은 북한군의 특징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끈 바 있다. 우리 군은 총구를 하늘로 향하게 어깨에 메지만 북한은 비에 젖어 고장 날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총구를 아래로 향하게 멘다는 설명이 곁들여지면서다. 그러나 도청을 사수하는 정체불명의 무장 괴한들이 사병용 판초우의 대신 장교용 우의를 착용했다는 지적이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정부군은 21일 이전에 시위대로부터 습격당하면서 장교용 우의가 피탈된 사실이 없다. 장교용 우의는 20사단 62연대 지휘 차량 피습 때만 강탈당했다. 동일범의 소행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5·18연구가 D씨는 “광주사태(D씨의 표현)의 본질은 제2의 6·25의 불길을 지피기 위한 불쏘시개 역할로 보인다”며 “즉 군사작전이었다고 개인적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D씨는 “이런 관점에서 보면 20일 밤 광주역을 집요하게 공격한 것도 20사단이 광주역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 했던 것이고 군분교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지휘 차량을 탈취한 것이나 61연대 2대대를 저지하기 위해 도로를 차단한 것, 전남도청을 정찰하러 나간 백성묵 단장의 헬기를 공격한 것도 20사단이 광주로 진입하지 못하게 취한 조치들이었다”고 해석하고 “결국 20사단이 광주에 진입하지 못해서 도청을 빼앗겼던 것이고 정부군의 전술적 패배였다”고 주장했다. ⊙
⑧ 5·18진상조사위원장은 ‘무장봉기’ 모의 주동자
무기고 탈취·도청 점령 기획한 ‘자유노트’ 작성자로 드러나
‘첫 발포자·집단 발포 명령’ 진상규명 편향된 의식 논란 커져
명백한 제척 사유…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 각계 비난 빗발

▲ 광주 무장폭동 계획이 적힌 ‘자유노트’. 송선태 위원장이 기록했다는 증언이 있다.(왼쪽). 스카이데일리가 단독 확보한 5·18유공자 명단 중 송 위원장에 관한 기록. 남충수 기자
문재인정부에서 출범한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송선태(67) 위원장(장관급)이 5·18 발생 일주일 전 ‘예비군 무기고 접수’와 ‘도청 점령’을 사전 모의한 이른바 ‘자유노트’를 직접 기록한 것으로 드러나 자격 논란에 휩싸일 전망이다.
또한 송 위원장이 5·18유공자로 등록돼 그동안 혜택을 받아 온 사실이 취재 결과 처음으로 확인됨에 따라 위원장으로서 중립 의무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제척 사유에 해당돼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1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송 위원장은 5·18 당시 전남대 4학년 복적생으로서 사실상의 ‘무장봉기’ 계획이 담긴 ‘자유노트’를 직접 기록한 것으로 밝혀졌다.
‘자유노트’는 일각에서 5·18이 ‘비폭력 민주화운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위중한 문건으로 받아들인다. 방송국과 무기고·공공기관을 죽창을 동원해 접수하고, 탈취한 무기로 도청을 점령한다는 끔찍한 내용이 적시돼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무장봉기를 사전 계획하고 획책하려 한 항쟁계획서로 보고 5·18 진실 규명의 직접적인 대상으로 초점을 맞춘다.
이에 따라 막대한 정부 예산을 들여 누가 먼저 총을 쐈는지, 집단 발포 명령이 있었는지 등의 진실을 가리기 위한 정부 위원회의 장관급 위원장을 5·18 직전에 수립된 구체적인 무력 폭동 계획에 관여한 인물이 맡고 있어 진상규명위원회의 최종 조사 결과를 믿을 수 있을지 의구심이 증폭될 전망이다.
1988년 12월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 제15호에 따르면 증인으로 출석한 한상석 씨는 청문회 위원인 권해옥 민주정의당 국회의원이 ‘자유노트’의 작성자가 누구인지 묻자 “송선태와 내가 같이 썼다”고 답했다.
한상석 씨 증언에 따르면 ‘자유노트’는 1980년 10월25일 합동수사단에 압수됐고 한씨 등이 2심 재판을 받을 때 검찰이 증거로 제시해 법원이 채택했다. ‘자유노트’가 세상에 공개된 과정은 전남 운동권 총책으로 불린 윤한봉 씨가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1980년에 전남 민주청년협의회(민청협)·국민연합 전남지부장이었던 윤씨는 “그 노트를 (전남대) 학생회 간부 중 한 놈이 숨어 있다가 자수하면서 갖고 들어갔는데 다행히 수사가 일단락된 다음에 그 노트가 나와 뒤집지를 못했다”고 말했다. 5·18 직후 정부는 합수단을 꾸려 조사에 나섰으며 ‘자유노트’가 발각된 그해 10월 즈음엔 사실상 수사의 마무리 단계여서 유야무야됐다는 게 윤씨의 설명이다.

▲ 송선태 위원장. 뉴시스
그러면서 ‘자유노트’를 기록한 인물로 ‘송선태’라는 이름을 직접 거명했다. 대중에 공개된 것은 정보공개를 통해서였다. 자유노트는 2007국방부과거사위원회 활동이 종료된 뒤 2010년 국가기록원으로 이관하면서 ‘비공개’ 문서로 분류한 것을 정보공개 신청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됐다. 5·18의 실체적 진실 규명을 위한 매우 중요한 기록물로 꼽힌다.
윤씨의 지시를 받던 전남대 총학생회 총무부장 양강섭 씨는 ‘자유노트’의 도청 점령 계획이 실재했음을 증언으로 뒷받침하면서 송 위원장의 가담 여부를 언급했다. 양씨는 전남대5·18연구소 증언에서 “15일부터 집행부 내부에서는 도청 접수 문제가 심각하게 거론됐다”며 “한상석·송선태·정동년·김상윤 등이 모여 회의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협조적인 시민을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와 고교생을 동원하는 문제, 그리고 도시 침투에 대해 논의했고 특공대 조직까지 거론됐다”고 밝혔다.
‘들불야학’ 강사였고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한 윤상원 씨는 그해 5월9일 청년운동권 회동에서 “군대 투입과 무장진압에 대비해 쇠 파이프·각목·화염병 등을 준비하고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해 총기를 확보하고 TNT(다이너마이트)를 제작해서 자체무장을 해야 한다”고 윤한봉과 동일한 발언을 했다. 윤씨의 증언은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12권 168쪽(광주광역시 5·18사료편찬위원회)에 기록돼 있다. 윤상원 씨는 계엄군의 도청 탈환 때 총에 맞아 죽었다.
충격적 무장봉기 계획… “다이너마이트도 써야”
윤한봉 씨 증언에 따르면 ‘자유노트’는 윤씨가 “부마항쟁처럼 흐지부지 끝나선 안 되고 상징적으로 도청을 점거해야 한다”고 말한 데서 출발한다.
윤씨는 “내가 무장투쟁하고 도청을 장악하고 (하자고 말)했던 이야기를 학생회 간부 애들이 듣고 선배들이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있으니 우리도 호응을 같이 해야 한다”며 “이런 내용을 또 ‘자유노트’라는 데다가 전부 다 기록해 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씨에 따르면 송 위원장은 당시 ‘자유노트’ 관련한 경찰 조사에서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라며 책임과 처벌을 회피하려 한 정황이 엿보인다. 윤씨는 “거기서 송선태가 자기가 그걸 작성했고 상상력을 발휘해서 막 썼다고 오리발을 내밀고 끝났다”고 부연했다.
그러나 ‘자유노트’는 실제 현실화한 점에서 심각성을 더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본지가 입수한 ‘자유노트’ 문건에 따르면 무장폭동을 계획한 이들은 ‘19일 2~6시 북동 성당 시내 진출’이라고 시각과 위치를 좌표 찍듯 못 박았다.
또 카농(가톨릭농민회)과 가톨릭노동청년회·기도회의 연결고리를 제시했고, ‘죽창·밧데리·방송국·공공 건물 접수’에 이어 ‘예비군 무기고 접수’라는 표시에는 동그라미와 별표가 있다. 무기를 획득해야 할 필요성을 특별히 강조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실제 시위대는 19일에 예비군 무기고를 탈취했다는 유력한 증언이 있다. <본지 6월21일자 [5·18 진실찾기①] 軍레커 몰고 무기고 담장 돌진… 청년 20명 ‘우르르’ 보도 참조>
무장봉기 계획 자체가 충격적인 데다 이를 사전 공모한 정황이 포착됨에 따라 명확한 해명 없이는 송선태 위원장의 자격 논란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부마항쟁’ 반성적 고려가 항쟁계획서 ‘자유노트’ 계기
‘5·18 항쟁사 정리를 위한 인물사 연구’에 따르면 윤한봉 씨는 가톨릭농민회의 무장봉기 계획에 대해 더 충격적인 내막을 밝힌 적이 있다. 2006년 윤씨의 직접적인 구술면담에서다.

▲ 5·18기념공원 지하 추모승화공간 돌판에 새겨진 송선태. 광주=남충수 기자
윤씨의 구술녹취록에 따르면 그는 이 면담에서 “사북 봉기가 터지고 동국제강 부산 노동자들이 대투쟁을 하고 카농 농민운동단체들이 5월19일 대규모 시위를 광주에서 하기로 그렇게 결정이 됐고 전남대학교 학생들도 함께 연대투쟁을 하기로 (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또 “도청을 장악하고 끝까지 항쟁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라며 “무장을 하기 위해서는 예비군 무기고가 어디 있고 다이너마이트는 어디에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실제 5·18 때는 예비군 무기고 44곳이 탈취됐고 전남도청 지하에 대규모 다이너마이트 등 폭발물이 설치됐다.
윤씨의 구술면담 발언은 실언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운동화와 똥가방’이라는 저서 55~56쪽에서도 5월15일 8인회를 갖게된 배경을 밝히며 “부마항쟁처럼 흐지부지 끝나서는 안 된다. 상징적으로 도청을 점거해야 한다”고 구술면담과 동일한 내용을 강조한 바 있다.
윤씨는 또 1996년 저서 65쪽에 “우리도 무장해서라도 항쟁을 해야 한다”며 “구체적인 항쟁전략을 세우자고 결정했고 그 결정에 따라 기획부장 송선태가 ‘자유노트’라고 알려진 항쟁계획서를 작성했다”고 구체적으로 못 박았다. 송 위원장이 경찰에 “상상력을 동원했다”고 말한 것은 윤씨 증언대로라면 거짓말이다.
‘자유노트’는 ‘광주권 학생 동원 요청 300+500명’이라고도 기입했다. 19일 봉기와 학생 동원 계획도 역시 현실화했다. 당시 순수 학생 참가자의 규모를 추산하긴 쉽지 않다. 그러나 송 위원장의 계엄군법회의 판결문을 통해 전남대 운동권은 이미 학생 동원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판결문에 따르면 재판부는 △14일 전남대 운동장 500여 명 △광주역 가두시위 5000여 명 △15일 전남 도청 앞 8000여 명 △조선대생 2500여 명 등 학생 1만2000여 명이 경찰 등을 상대로 돌을 던져 상해를 입히는 투석전을 전개하고 가두시위했다고 기록했다.
또한 ‘공용터미널’과 ‘북동성당’에서 타지방으로 확산한다는 향후 투쟁 방향도 ‘자유노트’에 명시된 대로다. 당시 도청 점령 이후 대전으로 진출할 계획이었다는 증언도 확보된 바 있다.
사전 모의 시점도 시사점을 준다. 5·18증언록에 따르면 송 위원장이 모의에 참여했다고 알려진 시점은 5월11일이다. ‘자유노트’에 기재된 날짜를 근거로 한 것이다. 이는 5·18 당일보다 일주일이나 빠르고 집단 발포 논란 직후 시민군이 도청을 점령한 21일보다는 무려 10일이나 앞선 시점이다.
“봉기 주도 당사자가 공정조사 이끌겠나” 회의론 팽배
송선태 5·18진상조사위원장 전력 ‘커지는 불신’
특위에 나온 증인들 “자유노트 송선태와 같이 썼다” 밝혀
“한상석·송선태·정동년·김상윤 모여 도청 접수회의” 증언도
전문가들 “5·18은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닌 준비된 반란 명백”

▲판결문에 따르면 재판부는 당시 송선태 피고인이 “4.19와 같이 학생 폭력 시위에 의해 정부를 전복하고자 결의하고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가담한 사실을 인정했다.
계엄군법회의 판결문… “피고인 송선태, 정부 전복 결의에 참여”
계엄군법회의 판결문에 따르면 재판부는 송선태 위원장 일행이 처음부터 비폭력 민주화 집회 계획이 없었으며 “정부 전복 결의에 참여”한 것으로 봤다.
안영기 위원(민정당 국회의원)은 송 위원장과 ‘자유노트’를 공동 기록했다는 한상석 씨와 관련한 청문회에서 “증인(한상석)의 80년 5월11~16일의 가두시위와 각종 미래를 예견하고 계획한 각본이 사실화 됐다는 것은 우연이기는 너무 참 기적이다”라고 말했다.
박희태 위원(국회의원)도 “자유노트에 되어 있는 그 계획하고 실제 일어난 상황하고 일치가 된다”며 “그러니 누가 이 자유노트에 기재된 그 계획에 따라서 조정을 한 것이 아닌가 그것을 규명하기 위해서 증인을 부른 것”이라고 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광주민주화운동 재판기록 판결문3에 따르면 재판부는 제5 피고인인 송 위원장에 대해 “당시 전국적으로 사북사태·동국제강·근로자들의 파괴·방화농성 사태·불경기로 인한 실업자 급증과 김대중의 차기 집권을 위한 무분별한 선동적 작태 등으로 극도의 정세가 불안했다”며 “광주에서는 윤한봉·박관현 등이 학생 폭력 가두시위를 이용, 이를 저지하고자하는 군경과의 충돌 과정에서 유혈 사태를 유발해 흥분한 시민들을 가세시켜 민중 봉기에 의한 정부 전복을 획책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결과 분위기가 몹시 험악한 상태에 이르렀고 광주의 각 대학이 연계해 일제히 조직적 폭력적 가두시위를 전개하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사회 혼란이 가속화됨은 물론 국기마저 위태롭게 되리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피고인(송선태)도 이에 적극 가담했다”며 “4·19와 같이 학생 폭력 시위에 의해 정부를 전복하고자 결의하고 국헌을 문란할 목적이 있었다”고 봤다.
특히 판결문은 윤한봉 씨와 함께 민중봉기에 의한 정부 전복을 획책한 인물로 정동년과 김상윤에 이어 박관현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구체적으로 열거했다.
그러곤 송 위원장이 박관현과 시위계획을 수립하고 전국 대학에 사람을 파견하며 학생회장은 보호하고 유인물을 배포하며 허가없이 정치적 (불법)집회를 계획하는 과정을 함께하고 결의했다고 판시했다. 판결문대로라면 송 위원장은 윤한봉 씨의 무장봉기에 박관현 씨와 함께 참여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윤씨는 전남대생이던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지만 1977년 출소했다. 1980년 5·18이 일어나자 중심인물로 현상수배된 뒤 미국으로 도피했다. 1993년 수배해제와 함께 귀국해 이듬해 5·18재단 창립을 주도했다. 2007년 사망 후 윤한봉기념사업회가 설립됐으며 이사장으로 문규현 신부가 임명됐다.

▲ 1988년 10월 국회예산결산특별위원회 소회의실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 청문회에 출석한 증인 한상석 씨가 ‘자유노트’ 13쪽 ‘죽창(으로) 방송국, 공공기관 접수 예비군 무기고 접수’라고 표기된 줄은 “역정보가 아닌가? 도대체 저도 귀신이 곡할 노릇이에요”라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한씨는 송선태 위원장과 ‘자유노트’를 함께 기록한 인물이다. 그러나 전남대 총학생회 총무부장 양강섭 씨는 “15일부터 집행부 내부에서는 도청 접수 문제가 심각하게 거론됐다”며 “한상석·송선태·정동년·김상윤 등이 모여 회의했고 (중략) 도시 침투와 특공대 조직까지 거론됐다”고 증언한 바 있다. 5·18 진상조사특위 회의록 제15호
윤씨는 자유노트를 송 위원장이 옮겨 적었다는 대목에서 “그 전에 내가 이야기했던 박정희 이제 암살 계획 팀들 중에서 정상용이 하고 (중략) 도청 항쟁 지도부에 들어가 버렸다”고 밝힌 사실이 5·18기념재단 ‘5·18의 기억과 역사2(2006)’ 199쪽에 기록돼 있다. 윤씨는 또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 씨의 1989년 북한 밀입북 사건의 배후인물로도 거론된다.
5·18을 연구해 온 A씨는 사견임을 전제로 “근현대사에서 폭력과 무장봉기를 사전에 계획했는데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은 사례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송선태는 5·18 유공자… 도둑이 재판장 하는 격
본지가 단독 입수한 5·18 유공자 명단에 따르면 송선태 위원장은 계엄군법에 따른 피해자로 분류돼 5·18 1차 유공자로 등록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동안 송 위원장은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를 지낸 과거 이력이 공정성 논란에 불씨를 제공했지만 그가 직접 유공자 혜택을 받아 온 사실이 공식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본지 취재진은 올해 5월 광주 현장을 답사하면서 그의 이름이 5·18기념공원 내 지하 추모승화공간 명패에 새겨진 사실을 인지했다. 61열 위로부터 25번째 위치다.
이와 관련해 본지는 최근 송 위원장의 의견을 듣기 위해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전화해 유공자 등록에 관한 송 위원장의 의견 청취 목적임을 밝히고 기다렸으나 회신이 오질 않았다.
위원장 보좌관실의 김욱 보좌관은 “송 위원장이 회의 중이다”라며 “위원장께 전달해 연락드리도록 하겠다”고 했지만 무응답이었다. 본지는 또 한번 전화해 요청을 전달했지만 송 위원장은 끝내 회신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김욱 보좌관은 “송 위원장이 유공자인지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5·18을 연구해 온 B씨는 “광주폭동이 우연히 발생한 항쟁이 아니라 고도로 계산되고 준비된 무장반란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또 5·18 당시 계엄군이었던 C씨는 “일주일 전에 어떤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도 모르는데 ‘도청을 점령한다’는 모의를 한 게 사실이라면 5·18에 물리력을 동원하려 한 주범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며 송 위원장은 진상 규명의 주체가 아니라 피고발 대상자로 조사받아야 할 처지라는 입장을 본지에 전해 왔다. ⊙
⑨ “北 기자 2명 5·18 때 광주 취재해 갔다”
北 기자가 찍은 사진·영상 조총련 통해 日 신문과 교환
21일 ‘집단 발포’ 논란 전후한 상황 매우 상세하게 보도

▲ 북한 로동신문 1980년 5월22일자에 게재된 광주 시위대-계엄군 대치 장면. 탈북 제보자는 본지에 “당시 조선중앙TV가 생중계한 장면”이라고 주장했다. 북한 신문이 외신 영상을 인용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만약 북한 기자가 직접 촬영한 영상의 한 장면(캡처)이고 장소가 금남로였다면 촬영 위치가 전남도청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제보자는 “북한 기자들은 서해 무인도에 은신했다가 5·18이 터진 후 광주로 왔다”고 침투 경로를 언급했다.
당시 한국은 계엄사령부가 보도를 전면 통제했다. 하지만 북한에선 시민과 계엄군의 격렬한 대치를 비롯해 광주의 상황이 연일 실황 중계하듯 보도된 것은 익히 검증된 사실이다. 그 무렵 성인이었던 탈북인 대부분이 TV와 신문 보도를 접했다고 일제히 증언한다.
북한의 대대적인 보도를 두고, 지금까지 남한 내 숨어있는 ‘혁명역량(고정간첩의 북한식 표현)’ 또는 외신을 통해 전달된 사진과 영상정보를 북한이 인용·보도했을 것으로 추측됐다.
그러나 북한이 직접 ‘종군기자’ 2명을 광주 5·18 현장에 보내 취재했다는 증언 내용이 언론에서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최근 취재진과 만난 탈북인 A씨는 “5·18 때 북에서 종군기자들이 내려와 여기서 벌어진 일들을 다 사진으로 찍고 동영상으로 촬영해 가지고 갔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로동신문(노동신문)에는 광주의 어느 골목골목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고 어느 무기고가 털렸으며 계엄군이 어디서 어떻게 했는지 짚으며 북한 신문에서 대서특필했다”며 “북한이 기자를 보내 모든 상황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증언했다.
증언이 사실이라고 가정하고 광주에서 취재한 내용을 북한이 보도하게 된 경위를 묻자 “(남파된) 북한 기자들이 찍은 동영상과 사진, 작성한 기사를 일본의 OO신문을 통해 금방 조총련으로 송신했고 조총련에서 받은 것(정보)을 북한에 넘겼다”고 설명했다. A씨는 일본 일간지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본지가 A씨를 통해 건네받은 노동당 기관지 로동신문 1980년 5월22일자는 광주 소식을 매우 상세하게 다뤘다. 상단의 신문 내용에는 인용매체 없이 광주 상황을 기술하며 비평했고 하단에는 조선중앙통신 보도 내용을 전재·배열했다. 조선중앙통신은 노동당 직속 뉴스 통신사다. 통신사란 한국의 연합뉴스·뉴시스, 미국 AP·블룸버그와 같이 속보를 다루는 매체다.
본지는 A씨 취재 이후 그의 발언을 뒷받침할 만한 추가 증언을 물색했지만 확보하지 못했다. 따라서 북한 기자의 5·18 광주 취재 정황은 현재로선 탈북인 한 명의 유일한 증언에 의존한 것임을 밝힌다. 익명을 요구한 A씨 뜻에 따라 개인 소개는 생략하지만 그는 탈북 전 북한 매체 전반의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한국 정보당국은 파악한 바 있다.
北, 5월20일부터 5·18 소식 신문·방송 등 대대적으로 다뤄
A씨에 따르면 북한은 5월20일부터 5·18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5·18 연구가들에 따르면 20일은 광주에서 시위대가 군·경을 향한 무력 도발을 본격화한 시점으로 꼽힌다. 노동청과 광주역에서 각각 버스와 트럭이 돌진해 경찰 4명이 죽고 5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공수부대원 한 명이 숨지는 등 최초의 군·경 인명 피해가 발생한 날이다.
시민군 측이 주장하는 21일 ‘집단 발포’ 논란을 전후한 광주의 상황을 전한 북한 신문의 보도는 대단히 상세하게 기술했다.
A씨가 증거라며 본지에 제시한 3가지 중 하나인 로동신문은 5월22일자 2면에서 상단의 좌우를 꽉 채운 장문 기사로 5·18 소식을 다뤘다.
신문에는 △5월18일 0시 비상계엄령 선포 △북의 남침 위협 구실로 계엄 확대 △탱크 장갑차 출동, 공공건물·대학·보도기관 장악△국회의사당·정당 청사 배치△민주화운동 청년학생 대대적 검거△정계·종교계·학계·언론계 인사들 체포 △5·18은 군사파쇼독재자가 무력 동원해 의회 권력 가로챈 5·16 군사정변의 재판 △민주 역량에 대한 무장 탄압은 시대와 민족 지향에 역행 △민족의 이름으로 규탄 △군사 깡패 전두환을 두목으로 하는 유신 잔당 △남조선 땅을 피로 물들이고 통일 방해 △독재자들의 추악한 앞잡이들 △남조선 인민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독 △무지막지한 자들이 총칼을 휘두르며 공공연한 군사파쇼의 길로 내달림 △유신체제를 지탱해 보려는 유신 잔당들의 필사적인 발악 △또 하나의 군사정변 △유신체제는 인민들을 가혹하게 억압 착취하며 통일 가로막고 전쟁 준비 다그치기 위한 가장 반민족적 반인민적 체제 △헤아릴 수 없는 민중의 고통 강요 △남조선 인민들 반파쇼 민주항쟁에 나섬 △남조선 인민들 투쟁은 민족의 존엄과 통일 위한 애국 투쟁 △평화적 시위 투쟁을 억눌러오다가 마침내 전면적 무력 공세 감행 △이것은 유신 잔당들의 포악한 본성 드러내놓는 것 등의 내용이 담겼다.
로동신문 본문은 ‘유신 잔당 파쇼 독재 정부의 대대적인 민주화운동 탄압을 맹비난’하는 내용으로 갈음할 수 있다.
한국 “파쇼 독재” “유신 잔당”… 맹비난한 로동신문 보도
광주의 일반 시민도 알 수 없는 더 상세한 내용은 하단에 나온다. 로동신문은 조선중앙통신 5월21일자 보도 4건을 게재했다.
통신의 첫 번째 보도는 ‘광주의 폭동군중이 라주(나주)경찰서의 탄약고를 습격’이라는 헤드라인과 ‘경기관총과 실탄을 탈취, 경기관총으로 군대를 사격’ ‘목포에서도 2만 명이 반<정부> 시위’라는 부제목을 달았다.

▲ 로동신문 1980년 5월22일자
통신은 “서울에서 외신보도에 의하면”이라고 인용 출처를 밝히면서 “광주에서 학생, 시민들의 폭동은 21일 무력 충돌로 발전하여 군중과 군대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전했다. 이어 굵은 글씨체로 “반<정부> 폭동에 나선 광주시민들은 21일 라주로 달려가 라주경찰서 탄약고를 습격하여 경기관총 2정과 실탄 4만8천 발을 탈취하였다”고 했다. 한국인도 잘 모르는 내용을 통신은 상세히 언급했다. “무장을 갖춘 그들은 이어 전남대학교부속병원 옥상에 경기관총을 걸어놓고 시민 탄압에 동원된 군대를 사격하였다”며 “이에 괴뢰군(북한 관점에서 한국군)이 맞서 나섬으로써 병원을 무대로 하여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한다”고 덧붙였다.
통신은 또 “한편 광주에서 일어난 반<정부> 폭동의 불길은 목포에로 타 번져갔다”며 “21일 목포에서는 약 2만 명의 시민들이 반<정부> 시위를 벌리였다. 외신은 또한 광주 부근의 다른 도시들에서도 민주화를 요구하는 인민들의 시위가 전개되고 있으며 광주에서의 시위는 전라남도 전지역에로 확대될 기세를 보이고 있다고 전하였다”고 썼다.
두 번째로 게재한 조선중앙통신 보도는 ‘광부’를 제목에서 특정해 눈길을 끈다. ‘폭발물을 가진 광부들을 비롯하여 농민 등 수많은 주민들이 광주에 모여들었다’는 부제목에 이어 더 굵은 글씨체의 헤드라인은 ‘무기고들을 부시고 무기 탈취, 괴뢰기관 점거’였다.
통신은 “외신보도에 의하면 21일 광주시의 20만 폭동군중은 1만 명의 괴뢰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면서 사회의 민주화를 기어이 실현하고야 말려는 자기들의 굳센 결의를 과시하였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괴뢰당국(한국 정부)은 광주의 괴뢰군 부대들을 후원하기 위하여 서울에 진주시킨 2개 보병연대를 광주로 출동시켰다”고 했다.
20사단 2개 연대 군분교 이동 정보 미리 입수한 듯
눈여겨볼 대목은 ‘서울에 진주시킨 2개 보병연대를 광주로 출동시켰다’는 문장이다. 이는 ‘20사단 지휘 차량 피탈’ 또는 ‘군분교 습격’ 사건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은 시위대에 거센 공세에 밀려 20일 밤 광주역에서 철수한 공수부대를 대신해 지원 차 광주로 향하던 20사단 62연대 지휘부 차량이 21일 아침 8시10분 광주 길목인 광천사거리에서 복면을 한 정체불명의 괴한들로부터 습격을 당해 불에 탄 3대를 뺀 지프차 11대와 무기를 빼앗긴 사건이다.
로동신문이 인용한 조선중앙통신은 21일자에 이미 2개 연대가 서울을 떠나 광주로 출동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을 대변해준다.
광주에 북한 기자가 있었다고 가정할 때 로동신문이 22일 아침에 배부되는 시점을 고려하면 적어도 뉴스를 만들어 일본을 거쳐 북으로 전달되기까지 하루 정도는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이 한국군의 지원 계획과 이동 일정을 미리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단, 예외의 상황도 상정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의 5·18 관련 기록에 따르면 외신으로선 5·18 사건을 처음으로 특종 보도한 일본 교도통신(共同通信) 기자들은 광주에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장소에 사용 가능한 전화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 현장으로 가 서울의 지국장에게 소식을 전한 일화가 있다. 만약 북한 기자들이 21일 전화로 정보를 전파했다면 같은날 조선중앙통신 보도가 나오고, 로동신문이 통신 보도를 인용해 22일 아침에 배포할 가능성은 있다.
당시 20사단은 3개 연대를 광주에 지원할 예정이었다. 21일 낮 기준으로는 2개 연대가 이미 광주에 도착했어야 했고 당일 밤 60연대와 포병대대까지 병력 이동을 예고하고 있었지만 습격 사건으로 이후 일정이 변동됐다. 결과적으로 2개 연대만 이동한 상황이었는데 로동신문은 정확히 “2개 연대를 출동시켰다”고 설명했다.
계엄사와 20사단 작전처 상황 일지에 따르면 60·61·62연대는 각각 다른 이동 수단과 경로로 광주에 도착할 계획이었다. 61연대는 전날 밤 10시에 광주로 출발해 21일 새벽 4시에 도착하고 62연대와 사령부는 21일 새벽 2시30분에 서울 용산역을 떠나 아침 9시쯤 광주 송정리역에 다다를 계획이었다. 태릉에 주둔했고 양평에서 추가 병력이 합류했던 60연대와 91포병대대는 가장 늦은 21일 밤 9시 성남비행장에서 출발할 예정이었다. 통신은 60연대의 합류 계획은 언급하지 않았다. 군분교 사건 시점에는 60연대가 이동하기 전이었다.
통신은 또한 “다른 한편에서는 광부를 포함한 시 주변의 주민들 수천 명이 폭발물을 가지고 광산과 농촌지역으로부터 광주 시내로 모여들었다”고 보도했다. 일부 주민이 장갑차를 빼앗고 학생들은 <향토예비군> 무기고를 부수고 총들을 빼앗았다고 보도한 통신은 “광주 가까이에 있는 한 경찰서를 습격하여 카빈총 200정과 다른 보총 100정을 포함한 수많은 탄약과 폭발물을 탈취하였다”고 구체적으로 획득한 총기류의 수량과 종류를 적시했다.
아울러 “폭동 군중들은 버스와 장갑차들을 빼앗아 타고 그것을 폭압에 날뛰는 괴뢰군인들 속으로 들이몰아 저지선을 뚫고 나가곤 하였다”고도 보도했다. 차량 돌진은 광주역과 노동청·도청 앞 광장 등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무력도발 현상이었으며 북한 매체가 이 사실을 소개한 것이다.
통신은 “폭동 군중들은 중무장을 갖춘 괴뢰군과 격전을 벌린 끝에 그들의 장갑차를 빼앗아 <시청>을 점거하였다”고 덧붙여 전했다.
3·4번째 통신 보도는 “광주시의 반<정부> 폭동 20만 명 규모로 확대” “광주의 시위대들이 목포·라주 등 다른 도시들에로 향하고 있다”는 제목으로 광주 소식을 전했다.

▲ 전남도청에 '5.18 진상규명'이라고 적힌 구조물 앞으로 한 시민이 걸어가고 있다. (왼쪽) 북한 로동신문에 게재된 사진이 금남로에서 대치하는 시민군과 계엄군의 모습이라면 유력한 촬영 장소는 전남도청 쪽이고 사진의 구도에 비춰 최상층 또는 옥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북한 기자가 침투한 것이 사실이라면, 도청 옥상 부근에서 동영상을 촬영했다는 얘기가 된다. 남충수 기자
北 “방금 들어온 소식”… 매일같이 광주 영상 TV 보도
로동신문·조선중앙통신도 광주소식 끊임없이 타전
국내자료에 없는 ‘시위대·계엄군 대치’ 사진 실리기도
당시 계엄군 “도청 옥상 있던 괴한들이 찍은 사진 같다”
北 기자 광주 남파 사실이면 어떤 루트로 침투했나
A씨가 주장하는 북한 기자들이 남파된 시점은 상식 밖이다. 그는 “3개월 전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고 했다. 이 증언이 북한군이 5·18에 개입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되진 못한다. 그런데도 마치 5·18을 북한이 미리 예견했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어, 북한 기자들이 미리 와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 되물었지만 직접적인 답변을 듣지는 못했다.
그러면서 A씨는 서해안으로 침투한 과정을 “내가 아는 한”이라는 단서를 전제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5·18 석 달 전부터 전라도 쪽에 무인도가 많지 않습니까. 들어와서 잠복해 있으면서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렸다가 그다음에 해안선 배를 타고 이쪽 여기로 들어왔습니다.”
침투 시점과 은신 장소, 내륙에 다다른 과정이 비교적 구체적이었지만 A씨의 발언은 복수의 증언 또는 물증을 통해 여전히 검증이 필요하다. 특히 북한 기자들이 총칼을 들고 5·18에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남한 정찰행위만으로도 국가보안법상 명백한 간첩 행위에 해당할 수 있다.
우리 군 당국의 기록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이 10·26 사건으로 서거한 이후 북한의 대남 간첩 침투는 1979년 한 해 동안 5건에서 1980년에는 1월부터 5월 초까지만 해도 10건에 달하는 것으로 공식 기록됐다. 북한의 대남 침투가 빈발해졌다는 얘기다.
서해안 도서 지역으로 침투했다는 A씨 발언과 관련해 정보기관에서 근무했던 이혜진(가명) 씨도 궤를 같이 하는 발언을 한 사실이 있다. 이씨의 발언은 A씨 증언을 보충할 뿐 증언이 사실임을 보장하는 것으로 보긴 힘들다.
이씨는 지난달 19일 본지 주최로 열린 5·18 세미나에 발제자로 참석해 “전남 영광군 백수해안도로 끝자락에 있는 ‘백수해안 백바위’ 등은 북한 공작원의 침투 추정 지역”이라고 사실상 좌표를 찍은 바 있다.
그러면서 “5·18 유공자 고은(본명 고은태) 시인의 연작시 ‘만인보’는 백수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물이 빠지면 흰 모래 위로 탱크도 들어올 만큼 단단한 해안이 나타난다”며 “인근에 북한 공작선이 자주 들락거린 송이도·대각이도·소각이도·낙월도가 있고 40노트로 항해 시 송이도에선 7분, 낙월도는 5분이면 해안에 닿는다”고 했다.
박명규 5·18역사학회 회장도 최근 본지 인터뷰에서 “전라도 해안선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해안선을 이용한 침투와 탈출이 용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1980년 5월 합참의장이 전남 목포 해안의 경계를 해제한 사실에 의문을 갖고 연구해 왔다고 한다.
北, 허위 사실로 주민에게 대남 적개심 키워
본지와 접촉한 복수의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은 5·18 기간에 조선중앙TV에서 매일 같이 광주 영상물들을 상영했고 로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도 연속해서 한국 소식을 타전했다.
특히 중대 방송으로 취급해 온종일 광주봉기를 비중 있게 방영했다는 증언도 많다. 광주시민이 무장을 하고 화염병을 뿌리는 장면, 최루탄을 발사하는 경찰 등을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라는 멘트로 시간마다 반복해 보여줬다고 한다.
또한 ‘역사로서의 5·18(김대령 저·비봉출판사)’에 따르면 임신부의 배를 가르는 장면과 어린 여대생의 옷을 벗기고 가슴을 도려내는 장면을 비롯한 끔찍한 살인 장면이 북한 방송에서 방영됐다고 한다.
5·18 기간에는 역대급 유언비어들이 난무한 것으로 기록된다. 대부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거나, 40여 년이 흐른 현재 광주시민 대다수가 믿지 않는 내용들이었지만 당시엔 파급력이 컸다고 5·18연구가들은 입을 모았다.
이런 가운데 북한은 연일 끔찍한 영상물들을 방영하며 북한 주민들로 하여금 대남 적개심을 키우게 했다고 한다. 북한 주민 중 여자들은 “무서워서 사람 죽이는 장면들을 볼 수가 없었다”는 증언들도 있다.
사진 속 장소는 금남로 추정… A씨 “조선중앙TV 생중계 장면”
로동신문 속 사진에서 시위대와 계엄군은 대치하고 있다.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동일한 사진은 아직 5·18 관련 기록물로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종적으로 검증을 거쳐서도 같은 사진이 국내에 없다면 북한 기자들이 찍은 사진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외신 영상을 인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로동신문은 기사에서 ‘외신에 따르면’이라고 출처를 인용하고 있지만 사진에는 출처를 명시하지 않았다. 실제 북한 기자가 찍었다고 해도 현장에서 취재했다는 내용을 언급하지 않았을 것으로 5·18 연구가들은 추정한다.
연구가 B씨는 사진 속 장소와 관련해 “금남로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광주에서 사진에 있는 곳처럼 좌우로 폭이 넓은 도로는 금남로로 봐야 한다”며 “도로 폭이 넓은 점으로 미뤄 전남대가 아닌가 생각했지만 당시 학생과 군경이 대치한 곳은 학교 밖이기 때문에 (로동신문) 사진 속 장소는 아닌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연구가 C씨는 “가로수 배열로 보아 북동성당 쪽으로 처음에 추정했지만 금남로일 것으로 생각된다”면서 정확한 분석일 수 없다고 덧붙였다.
합동참모본부에서 북한 정보를 취급한 예비역 장성 D씨는 사진 정보에 대해선 함구했지만 “당시 김일성은 남한 혁명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며 “북한 기자들의 광주 침투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했다. 김일성의 역점이라는 D씨의 발언 역시 북한이 군을 남파해 5·18에 개입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5·18 당시 계엄군이었던 E씨는 “전남도청 앞 분수대 대치 상황이라고 가정할 때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북한 기자 추정 인물이) 도청에서 사진을 찍은 결과가 도출된다는 점”이라며 “당시 높은 고층 건물은 도청밖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탈북 제보자 A씨는 “로동신문의 사진은 1980년 5·18 당시 북한 조선중앙TV 방송에서 생중계했던 장면”이라고 부연했다. 한 장씩 찍는 스틸컷이 아니라 시쳇말로 영상 캡처라는 설명이었다. 그러곤 “국내 모든 신문·방송이 생중계하는 국민대토론회가 열리면 갖고 있는 증거들을 모두 공개하겠다”고 덧붙였다. ⊙
⑩ “조사위가 내세운 ‘1번 광수’ 차복환은 가짜”
닮은 건 맞지만 목·얼굴 너비 비율 현격한 차이
거짓 인물로 판명되면 조사위 신뢰성에 큰 타격

▲ ❶중앙일보 이창성 기자가 촬영한 김군의 모습이다. ❷광수와 연령대별 차복환 씨의 B/A 비율. ❸광수는 모반이 없지만(왼쪽) 차씨는 모반(사마귀)이 있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위원장 송선태)가 ‘1번 광수’를 찾았다며 제시한 생존 인물이 외관상 닮은 인상을 갖고 있지만 의·과학적으로는 1980년 사진 속 인물과 동일하지 않다는 소견이 제시됐다.
이 같은 의·과학적 소견이 사실로 규명될 경우 5·18조사위가 부실한 조사 결과를 토대로 사실과 다른 인물을 내세운 것으로 볼 수 있어 조사 결과의 신뢰성이 도마 위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15일 본지와 최근 만나 자료를 제공한 현직 의료인의 분석에 따르면 5·18조사위가 1980년 5월 기관총 사진 속 ‘광수 1번 김군’이라고 지목한 차복환(63) 씨의 목과 얼굴 너비 비율이 사진 속 인물과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것으로 분석됐다.
‘광주의 수상한 자’라는 뜻인 ‘광수’는 군사 연구가 지만원 박사가 처음 사용한 표현이다. 5·18 당시 페퍼포그차(최루탄 발사 차량) 위의 총신 앞에 있는 모습이 공개된 사진 속 주인공은 철모에 두른 흰색 천에 ‘김’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김군’이라고도 불린다. 지 박사는 광수를 북한군의 광주 5·18 개입의 근거로 제시한 바 있어 광주 투입 북한특수군이라는 뜻으로도 광수가 통용된다.
이에 따라 5·18이 순수 광주 시민에 의한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해 온 쪽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대대적으로 사진 속 광수의 실제 주인공을 찾아 나섰다. 당시 중앙일보 이창성 기자는 5월22일 아침 8시쯤 금남로 일대에서 광수를 찍었다고 증언했다.
5·18역사학회에 따르면 1999년 5월 한 달 동안 KBS·MBC·SBS의 공중파 3사가 광수 주인공 찾기 캠페인을 벌였으나 단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2015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6개월에 걸쳐 또 한 번 광수 사진의 주인공을 찾는다며 광주 번화가에서 광수 사진전을 벌였지만 역시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지 박사가 지목한 수백 명의 광수 추정 인물들 가운데 사진 속 주인공이 자기 자신이거나 친구 또는 친척·동창·이웃이라는 사람이 당시 한 명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송선태 조사위원장은 5·18조사위 활동 착수 2년 만인 지난해 5월 대국민 보고회에서 “2022년 4월30일 현재 새로운 사실들을 추가로 확인해 발표한다”며 “다큐멘터리 영화 ‘김군’의 사진 속 인물, 즉 지만원 씨에 의해 광주 특수군 일명 광수 1번으로 지목됐던 일명 김군이 생존해 있음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광주에 진입한 북한군이라는 의혹을 받아 온 ‘1번 광수 김군’이 사실은 수도권에서 평범하게 살아온 60대 남자였다며 차씨의 신상과 얼굴을 공개했다.
차씨는 광수를 찾는다는 내용의 영화 ‘김군’을 보고 자신이 주인공이라며 2021년 5월 5·18기념재단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고 그해 10월 재단이 5·18조사위에 넘긴 뒤 조사위가 현장 조사를 통해 차씨의 증언이 사실이라고 확인했다고 당시 언론은 보도했다.
그러나 의학적 분석 결과 광수 1번 김군과 차복환 씨의 목·얼굴 너비 비율은 동일인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크게 차이가 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목·얼굴 너비 비율은 과학적 증거방법에 의해 계량화한 객관적 수치이며 판례가 존재한다. 실제 법원이 이 비율의 측정값을 근거로 판결한 전례가 있다. 이 비율은 목의 좌우 가장자리의 직선거리(목 굵기·B)를 관골궁(광대뼈) 사이의 직선거리(A)로 나눈 값(B/A)으로 측정한다.

5·18조사위가 공개한 20세 때의 차씨 사진에서 B/A는 0.73(73%)으로 나온다. 목 굵기가 광대뼈 사이 직선거리의 73% 수준이라는 것이다. 조사위가 공개한 차씨의 29세 사진과 작년 언론에 공개된 62세 사진에서도 측정값은 0.73으로 동일했다. 여러 차례 재측정에서 차씨 비율은 0.72~0.73으로 측정됐다.
그러나 광수 1번 김군으로 지 박사가 지정한 철모를 쓴 사진 속 인물의 목·얼굴 너비 비율(B/A)은 0.85(85%)~0.87(87%)로 분석됐다. 비율만 놓고 보면 서로 다른 사람이다.
의료인은 철모를 쓴 김군과 1980년 20세였던 차씨의 사진이 직관적으로 다른 점도 구분했다. 분석 자료에 따르면 김군은 강하고 날카롭고 20세에 비해 겉늙어 보이는 인상이지만 차씨는 부드럽고 순박한 인상으로 구분했다.
아직 누군지 100% 확인되지 않았음을 전제로 사진 속 광수의 연령에 관한 정보는 5·18단체 어디에도 없다. 다만, 조사위가 그 사진의 주인공이 차씨라고 밝혔기 때문에 광수를 20세로 가정하고 그 연령에 비해 겉늙어 보인다고 판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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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인은 또 피부색이 김군은 검게 그을렸지만 차씨는 하얗다고 봤다. 눈은 김군이 작고 왼쪽 눈이 더 크지만 차씨는 김군보다 크고 양 눈의 크기가 비슷하다고 분석했다.
B/A 측정 결과와 직관적인 인상을 토대로 의료인은 김군이 고도의 신체 훈련을 받은 자의 목이라고 판단한 반면, 차씨는 일반인의 목이라고 봤다.
일각에선 ‘찔레꽃’이 북한에서 남파된 이들 간에 서로를 알아보기 위한 인식표시라는 주장을 제기한다. 1980년 사진 속 김군은 철모에 찔레꽃을 꽂았다. 김군을 북한군으로 간주할 근거는 이번 의료 분석에선 제시되지 않았다.
광대뼈 거리의 87% 수준의 목 굵기는 일반적으로 운동량이 많은 사람의 목 두께로 간주한다. 권투선수 마이크 타이슨의 현역 시절처럼 후천적으로 운동량이 많을 때 목은 두꺼워진다. 그러나 운동량이 적다고 목 두께가 빠르게 얇아지진 않는다.
따라서 광대뼈 사이 거리와 목 굵기 비율만을 비교할 때 김군과 차씨는 단지 비슷하게 보이는 인상일 뿐 목 두께만으로도 다른 사람이라고 분석 자료는 보고 있다.
두 인물의 차이는 또 있다. 차씨는 오른쪽 인중 근처, 입술 위에 모반(母斑), 이른바 돼지점이 있다. 모반은 살갗에 있는 갈색 또는 흑색의 반문(斑紋)이다.
사마귀나 점 등이 이에 해당한다. 차씨의 20·29·62세 사진에서는 꾸준히 모반이 발견된다.
반면 1980년 사진 속 김군에게선 모반이 없다. 사진의 화질을 고려하더라도 김군이 뒤돌아보는 또 다른 사진에서 역시 모반의 흔적은 드러나지 않는다. 선천성 모반은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진 속 인물이 동일인인지 구분할 때 모반의 위치와 크기를 비교한다. 성형 전 연예인 사진의 동일성을 확인하는데도 네티즌이 종종 활용한다.
차씨의 증언이 실제 상황과 다르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구체적으로 차씨는 △(5월)21일 시위에 가담해 트럭을 타고 시 외곽을 돌며 독재 타도를 외쳤고 △22일 화순경찰서 앞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해 돌아온 후 도경에서 특공조에 속해 경찰복을 지급받고 ‘죽어도 좋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쓰고 페퍼포그차에 올라갔으며 △특공조가 168명인가 있었다고 대국민보고회에서 증언했다.
그러나 의료인은 분석 자료에서 △21일 차량은 시 외곽의 시민을 금남로로 이송하는데 사용됐고 △22일에는 무기 탈취 기록이 없었으며 △22일 기동순찰대가 편성돼 26일 오후 기동순찰대가 기동타격대로 재편됐고 △그 규모는 40명 정도이며 △기동순찰대에 서약서를 썼다는 증언 기록은 없었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따라 의료인은 △얼굴이 비슷한 사람일 뿐 실제 광수에게는 바이오마커인 모반이 없고 △실제 광수보다 목의 굵기가 가늘며 △증언 내용이 실제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근거로 “차복환 씨는 광수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광수’를 처음 제기한 지 박사는 연구소를 찾아온 한 방송 기자에게 “5·18 조사위가 차씨를 광수 1호로 결정한 과정을 모두 공개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입장을 밝힌 바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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