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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13/ 〈121〉북한은 "극우의 나라", 주사파는 극우세력, 중국몽 <39회> - 〈130〉북한을 '反서방' 핵기지로 삼은 중·러의 세계 전략 변방의 중국몽 <48회>

상림은내고향 2024. 10. 5. 15:43

송재윤의 슬픈 중국13/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조선일보 2024

2024.07.20

〈121〉북한은 "극우의 나라", 주사파는 극우세력

변방의 중국몽 <39회>

 ▲1991년 전대협 제5기 출범식. 1987년 결성된 전대협은 민족해방(NL) 노선의 주사파가 장악했다.

한국 헌정사의 “진보” 세력은 진정 누구?

한국 정치에서 “진보(progress)”란 단어는 주술적 마력을 발휘한다. 누구든 진보의 날개를 다는 순간 정치적 면죄부를 얻는다. “진보”란 말 속엔 역사적으로 시대에 앞서며, 정치적으로 올바르며, 심지어 도덕적으로 정당하고 우월하다는 의미까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 “진보”란 무엇인가? 세계사의 큰 흐름에 맞춰 역사 발전을 앞당긴다는 의미가 아닌가?

 

지난 100여 년의 인류사를 살펴서 역사적 진화의 지표를 꼽자면, 개인적 인권 신장, 경제적 자유화, 민주주의 확산, 법치 확립, 권력 분립, 경제적 통합, 문화적 혼융, 범인류적 연대 등을 꼽을 수 있다. 돌려 말하면 집단주의의 퇴조, 전체주의의 몰락, 독재 권력의 파멸, 고립 노선 폐기, 국수주의 퇴출이 세계사적 진보의 큰 흐름이었다.

 

그런 거시적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면, 한반도에 최초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운 이승만 정권, 급속한 산업화를 달성하고 수출형 개방경제로 전 세계를 향해 뻗어나간 박정희 정권이야말로 역사의 진보 세력이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한국에서 이승만과 박정희를 진보가 여기는 사람은 드물다. 진보의 이름을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에 반대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죄악시하고, 북한 정권과 얼싸안고 “우리민족끼리”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선점했기 때문이다.

“극우(極右)의 나라” 북한

어느 나라에서나 낡은 이념에 집착하는 집단은 수구적(守舊的, reactionary)이라 한다. 어느 시대에나 세계사의 도도한 흐름을 거스르는 세력은 퇴행적(退行的, regressive)이라 한다. 희한하게도 대한민국에서만 가장 수구적이고 퇴행적인 세력이 “진보”라 불리는 아이러니가 펼쳐지고 있다.

 

공산정권들이 줄도산하던 1980년 말까지도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빠져서 대한민국의 체제 전복을 시도하던 집단, 북한식 통일 노선에 부화뇌동하여 “양키 고 홈!”을 외치던 세력, 김일성 주체사상을 신봉하며 조선 노동당 선전물을 암송하던 부류까지 한국에선 모두 “진보” 세력으로 분류되었다. 유수 언론들이 주저없이 그들을 “진보”라 불러주니 대중은 그들을 진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대한민국에서는 왜 그렇게도 기묘한 언어 착란이 일어나야만 하는가? 단순한 개념 혼동인가, 음험한 정치 공작인가? 정치 공작이라면, 과연 누구의, 어떤 세력의 정치 공작일까? 정치 공작이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이유로 한국인들은 김일성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무리까지도 “진보 세력”으로 인식하게 되었을까?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선 브라이언 마이어스(Brian R. Myers) 교수의 ‘가장 순결한 인종: (The Cleanest Race: How North Koreans See Themselves and Why It Matters)’(Melville House, 2010)을 정독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한국어 번역본은 ‘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시그마북스, 2011)이다. 번역본의 제목이 말해주듯 마이어스는 오늘날의 북한은 공산주의 정권이 아니라 인종주의적 극우 정권일 뿐이라고 말한다.

 

 ▲북한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한 브라이언 마이어스 교수(오른쪽)의 2010년 저서 <<가장 순결한 인종>>(왼쪽).

 

1945년 이래 조선노동당의 선전물을 분석해 보면 오늘날 북한은 극단적인 외국인 혐오증, 배타적 인종주의, 순혈주의적 민족지상주의에 매몰된 극우(extreme right) 파시스트(fascist) 정권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1980년대 대한민국 대학가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민족 해방의 장군님”으로 추종하는 주체사상파(主體思想派, 이하 주사파)가 학생 운동권을 장악했다는 사실은 당시 북한식 순혈주의가 남한 사회에도 먹힐 수 있었음을 증명한다. 당시 널리 불리던 운동가요의 노랫말, “쪽발이 양키놈이 남북을 갈라 매판 파쇼 앞세우는 수탈의 나라”에는 북한식 핏줄 민족주의의 선전과 반일·반미 인종주의의 편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국사에선 과연 언제부터 그런 순혈주의적 민족의식이 형성되었을까?

 

마이어스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사에서 북한식의 순혈주의적 민족지상주의와 외국인 혐오증(xenophobia)의 인종주의가 형성된 결정적 계기는 일제 식민 지배였다. 구한말까지도 조선 사대부들은 순혈주의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소중화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반도를 접수한 일제는 제국적 통합을 위해 인종적 순혈주의를 내세워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정치 선전을 벌였다. 일제가 내건 내선일체의 구호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은 한 조상에서 내려온 같은 혈통의 형제들이며, 이 두 민족은 세계 다른 모든 민족보다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주장이 담겨 있었다.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일제의 선전 포스터. “협력 일치, 세계의 우승자”는 구호가 적혀 있다.

 

이에 맞서 조선의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단군신화를 되살려 일본 민족과는 다른 조선 민족의 독자적 기원을 강조했지만, 1930년 말부터는 민족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좌익계 지식인까지도 일제 군국주의의 대합창에 동조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조선의 작가들은 천황을 찬양하는 한편 동포들을 향해선 조선 문화를 소중히 여기라 촉구하는 기묘한 “친일 (조선) 민족주의”의 경향을 보였다. 연약한 일본 여인과 강인한 조선 청년의 연애담, 징병 가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배웅하는 갓 쓴 조선 선비 등의 이미지가 당시 일제에 부역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조선인의 이중적 정신상태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일제 치하에서 내선일체의 정치 선전에 적극 참여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일제 패망 후에는 일본을 배제한 조선 민족만의 순혈주의 담론을 이어갔다. 특히 북한의 민족주의 담론은 반미·반일의 정치 선전과 뒤섞이면서 극단적 외국인 혐오증(xenophobia)과 순혈주의적 민족지상주의 이데올로기로 발전했다. 지난 70여 년 대한민국에서도 순혈주의적 민족주의는 국민을 하나로 묶는 가장 강력한 정치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남북한 모두 순혈주의적 단일민족의 신화에 사로잡혀서 있었기에 615공동선언 제1조에는 “우리 민족끼리”의 원칙이 들어갈 수 있었다. 같은 민족이 “통일 조국”을 이뤄야 한다는 발상 밑바탕엔 민족이 체제나 이념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놓여 있다. 물론 대한민국은 전 세계로 활짝 열린 활달한 개방 체제이므로 남한의 민족주의는 북한의 광적인 민족지상주의와는 엄연히 다르다. 북한의 순혈주의적 민족지상주의에 대해서 마이어스는 말한다.

 

“북한 이데올로기를 한마디로 요약하면······'조선인들은 혈통이 지극히 순수하고 따라서 매우 고결하기 때문에 어버이 같은 위대한 영도자 없이는 이 사악한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인종에 기반을 둔 북한 세계관을 굳이 전통적인 좌우 스펙트럼상에 위치시켜야 한다면 극좌보다는 극우 쪽에 놓는 게 더 합당하다.”

 

게르만족의 인종적 순혈성을 지상의 가치로 내세웠던 독일 제3제국 나치 정권이 “극우”였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마찬가지로 김일성 민족의 순혈성을 선양하는 북한 정권은 “극우”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북한의 김씨 왕조가 극우 정권이라면 1980~1990년대 김일성을 추종하던 주사파는 극우세력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주사파들은 주체사상에 대충 공산주의를 버무려서 스스로 극우가 아니라 극좌의 코스프레를 했고, 냉전의 이분법 속에서 한국 언론은 주사파까지 진보 세력으로 분류하는 언어적 오류를 범해왔다.

 

 ▲북한의 선전용 포스터. 1980년대 후반 대한민국 대학가 학생운동의 헤게모니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추종하는 주사파 집단이 장악했다.

 

마이어스는 바로 그러한 언어적 착란을 교정하려 한다. 영어권에서 맹활약하는 친북 성향 수정주의자들이 오늘날 북한의 이념적 뿌리가 공산주의와 신유학이라며 김씨 왕조를 옹호해 왔기 때문이다. 2007년 제1회 후광 김대중 학술상을 받은 미국 시카고 대학의 명예교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1943- )가 대표적이다.

 

그는 지금도 극단적인 쇄국주의의 덫에 빠져 핵무장에만 혈안이 된 북한 정권을 미국발 전쟁을 막으려는 합리적 행위자라 옹호하면서 조선 신유학을 끌어와서 북한의 이데올로기를 긍정해 왔다. 그는 북한 인민의 “어버이 수령”을 자처하는 김일성이 신유학의 가부장적 군주라는 엉성한 논리를 펼쳐 왔다. 심지어 그는 북한 정권의 이데올로기가 “공산주의라는 병 속에 담긴 신유학(Neo-Confucianism in a Communist bottle)”이라는 주장까지 서슴지 않았다.

 

문제는 신유학의 정치적 이상에는 북한식 인격 숭배나 순혈주의적 민족지상주의가 끼어들 틈이 없다는 점이다. 전혀 다른 시대의 다른 이념을 같다고 주장하는 커밍스를 향해서 마이어스는 북한 정권이 나치식 극우 성향이고 말한다. 마이어스의 주장이 학술적으로 훨씬 더 타당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19세기 이래 공산주의는 민족의 단합이 아니라 무산계급의 연대를 추구하는 국제주의에 기초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마지막에서 “전 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부르짖은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 점에서 “민족”을 지상의 가치로 떠받드는 북한의 이데올로기는 정통 공산주의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나치식 극우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북한의 선전용 포스터. 북한의 순혈주의적 민족지상주의는 철저한 반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수정주의자 커밍스의 북한 옹호론

 

2020년 6월 29일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커밍스는 1980년대 자신이 펼쳤던 수정주의 이론이 여전히 건재하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북한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한 후에도 오래도록 존속해 왔습니다. 북한도 함께 무너졌더라면 [한국전쟁에 관한] 나의 [수정주의] 작업은 이미 폐기됐겠지만, 북한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혁명적 민족주의와 반제국주의가 북한 존속의 핵심임을 보여줍니다. 물론 중국, 베트남, 쿠바 역시도 그러한데, 이 나라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공산국가들입니다. 북한은 2차대전 이후 전개된 동아시아 혁명의 일부였지, 결코 소련의 피조물이 아닙니다.”

 

세 가지 이유에서 커밍스의 발언은 인류의 보편 상식과 학계의 일반론을 크게 벗어난다. 첫째, 소련과 동독이 이미 30여 년 전에 무너졌음에도 북한은 지금껏 존재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상식적으로 북한과 같은 공산 전체주의 병영국가는 “혁명적 민족주의”나 “반제국주의” 등의 정치적 구호나 체제선전용 이념이 아니라 전체주의적 감시 체제, 전제주의적 공포정치, 군사주의적 중무장으로 유지된다.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은 마르크스-레닌주의나 “마오쩌둥 사상” 따위 이념으로 유지된 것이 아니라 핵무장에 성공한 군부의 강력한 군사력으로 지탱됐던 것과 같다.

 

둘째, 북한을 중국, 베트남과 한데 묶일 수 없다. 중국은 1978년 이후부터, 베트남은 1980년대 후반부터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갔다. 반면 북한은 2020년대 중반까지도 개혁개방을 거부하고 대신 핵무장으로 국제적 고립화를 자초했다. 그 결과 북한의 인민은 1990년대의 대기근을 겪어야 했으며 그 후로도 빈곤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북한 정권이 핵무장이 “혁명적 민족주의”의 발로인가? 그러한 북한 정권의 고립주의가 반제국주의 투쟁인가?

 

셋째, 중국의 마오쩌둥이나 베트남의 호치민과는 달리 1945년 해방 전의 김일성은 한반도 내에서 혁명의 근거지를 갖고 있지 못했다.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김일성은 이후 당적을 박탈당했다. 북한 정권은 지금도 1937년 스물네 살 나이로 김일성이 200여 명의 유격대원과 이끌고서 보천보 전투를 벌였다고 선전하지만, 실상은 기껏 일본경찰서 한 곳을 기습한 작은 사건에 불과했다. 게다가 1940년 10월 김일성은 아무르강을 넘어서 소련군에 투신했고, 소련 붉은 군대의 훈련을 받으면서 1945년까지 8월 15일 일본 패망 때까지 소련군에 복무했다. 1941년 4월 13일 소련-일본 중립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때문에 김일성이 속한 소련군은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실제로는 단 한 차례 일본군과 무력 충돌을 벌이지도 않았다.

 

 ▲“우리민족끼리”를 절대 이념으로 강조하는 북한의 선전물.

 

요컨대 북한 정권은 반자유적, 반민주적, 반인류적, 반혁명적 세습 왕조이자 전체주의 폭압 정권이다. 마이어스의 지적대로 북한은 인종주의적 극우 정권이다. 그럼에도 북한의 존속 이유가 “혁명적 민족주의”와 “반제국주의”라고 말하면서 수정주의가 건재하다는 커밍스의 주장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

 

지금 다시 커밍스를 비판하는 이유는 그가 1980~90년대 주사파 운동권의 정신적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수정주의는 미국에서 생산된 세련된 반미주의의 이념적 상품이었다. 그 상품을 소비하는 한국의 지식인들은 스스로 “진보적”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커밍스의 수정주의에 매료되어 북한을 추종하던 세력은 절대로 진보가 아니었다. 마이어스의 주장대로 북한의 이데올로기가 인종주의적 극우 이념이라면, “극우의 나라” 북한을 맹종했던 남한의 주사파는 논리상 극우세력이 아닐 수 없다. <계속>

 

〈122〉1980~90년대 "김일성 키즈", 그들은 대체 무엇에 씌었던가?

변방의 중국몽 <40회>

 ▲김일성, 김정일 동상 아래서 참배하는 북한 주민들./공공부문

주사파의 바이블: “주체사상에 대하여”

1988년 여름으로 기억된다. 국립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에 입학하여 첫 학기를 마친 한 친구가 재수생인 나에게 40여 쪽 되는 문건 하나를 건넸다. “주체사상에 대하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탄생 70 돐 기념 전국 주체사상 토론회에 보낸 론문”이었다. 1982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인 김정일”이 직접 썼다는 북한의 선전물이다.

 

그 친구는 “놀라운 문건이니까 마음을 비우고 꼭 정독”하라면서 말했다. “이 논문을 잘 읽어보면 북한이 실제로 어떤 나라인지 알 수가 있어!” 당시 대한민국 대학가에선 그렇게 주체사상 학습 열풍이 일고 있었다. 이제 와 다시 그 문건을 찾아서 읽어보면 전체주의 정권의 선전물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재확인하게 된다. 도입부에 줄줄이 나열되는 “수령님” 찬양 몇 문장을 보자.

 

 ▲대기근을 일으키면서도 핵무장에 몰두했던 북한의 독재자 김정일과 그의 저작 “주체사상에 대하여(1982).”/공공부문

 

“진보적 사상은 사회 력사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인민대중은 진보적 사상에 의하여 지도될 때 력사의 힘 있는 창조자로 될 수 있습니다.··· 로동계급의 혁명사상은 탁월한 수령들에 의하여 창시됩니다.··· 수령님께서는 억압받고 천대받던 인민대중이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등장하는 새로운 시대의 요구를 깊이 통찰하시고 위대한 주체사상을 창시하심으로써 자주성을 위한 인민대중의 투쟁을 새로운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키시였으며 인류 력사 발전의 새시대, 주체 시대를 개척하시였습니다.” (https://ko.wikisource.org/wiki/주체사상에_대하여)

 

인민대중이 힘 있는 역사의 창조자가 되기 위해선 탁월한 수령들이 창시한 혁명사상에 따라야 한다는 말인가? 한 인간의 사상을 절대화하는 전체주의적 복종의 논리는 아닌가? 김정일은 1930년 불과 18세의 나이로 김일성이 창시한 “주체사상”이 “사람 중심의 새로운 철학사상”이라면서 주장한다. “수령님께서는 사람은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밝혔시였습니다.” 요컨대 “주체사상”을 창시한 김일성이 인류 역사 발전의 새 시대인 주체 시대를 개척한 탁월한 수령이라는 전체주의 신정국가 북한의 체제 선전일 뿐이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라면, 왜 북한 인민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그들은 왜 ‘어버이 수령님’만 숭배하면서 살아야만 하는 몰개성의 좀비들로 전락했는가?” 바로 김일성이라는 희대의 독재자가 북한 인민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파괴한 후 전체주의적 사상통제와 무지막지한 세뇌 교육으로 그들의 영혼에 예속성, 맹목성, 복종성을 심었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게 나는 당시 대한민국 국민의 상식에 따라서 “주체사상에 대하여”가 고작 북한 정권의 선전임을 간파했는데, 먼저 대학물 살짝 먹은 그 친구는 이미 “김일성의 아이들” 틈에 끼어서 섬뜩한 안광을 번뜩이고 있었다.

김정일을 “사상가”라 찬양한 남한의 철학자

그로부터 19년하고도 3, 4개월이 더 지난 후였다. 2007년 10월 2~4일 제2차 정상회담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북한을 다녀온 “철학자” 김용옥은 딱 사흘 만에 10월 7일 KBS ‘남북정상회담 특별기획-도올의 평양 이야기’에 출연했다. 바로 그때 그는 그 “주체사상에 대하여” 책자를 한 손에 높이 들고서 강연장을 꽉 메운 청중을 향해 외쳤다.

 

 ▲2007년 10월 초 대통령 방북 특별수행자 자격으로 평양에 간 철학자 김용옥이 북을 치고 있다./청와대 사진기자단

 

“내가 만나서 나도 진지하게 대화를 해봤으면 오죽 좋겠나. 민족의 문제를 위해서 당신(김정일)도 사상가고 나도 사상가인데, 여기 김정일 위원장이 쓴 ‘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책을 가지고 왔는데 이 양반도 사상가란 말이다. 유물 철학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가 대단하다.”(2007년 10일7일 방송 KBS 일요스페셜 ‘남북정상회담 특별기획·도올의 평양이야기’ 中)

 

또 그는 아리랑 공연에 대해서도 “인간이 하는 쇼로서는 최상의 쇼다. 그러나 아리랑은 쇼가 아니다. 그 사람들의 삶이다. 이를 위해 매일매일 훈련할 것이고, 이런 참여를 통해 일체감을 얻고 가치관을 형성한다. 모든 전국 인민들이 모여서 아리랑을 보면서 ‘우리는 주체적·의식적·자발적·능동적으로 이 세계를 개혁해 나간다.

 

굶어 죽어도 좋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명예롭게 살자. 잘 사는 게 뭐가 중요하냐고 느낀다. 아리랑은 어마어마한 가치 체계”라고 주장했다. 나는 이 장면을 KBS 인터넷 방송을 통해서 똑똑히 여러 번 반복해서 보았다. (이 점은 조갑제닷컴에 실린 김필재 기자의 기사로도 확인된다).

 

그는 또 “노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을 기원한 것은 현명한 발언이었다..(중략) 그런데 이번에 보니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를 태음인으로 봤는데 포도주를 절제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공영방송에서 전체주의 국가의 독재자를 찬양하는 실로 야릇한 장면이었다. 진정 “이 정도면 막 가자는 거” 아니었을까?

 

 ▲1990년대 북한 대기근의 참상을 보여주는 희귀한 사진./The Borgen Project

 

2007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출판된 <<북한의 대기근(Famine in North Korea>>에 따르면 1990년대 초부터 1998년까지 김정일이 이끄는 북한 사회엔 대기근이 발생하여 60만에서 100만 명이 아사했다. 오직 “주체사상”의 신정체제 유지를 위해서 김정은 전체 인구의 3~5%를 굶겨 죽이면서도 핵무장에 나섰던 사악한 독재자였을 뿐이다.

 

국민 혈세로 유지되는 대한민국의 공영방송에서 몰상식한 독재자 찬양이 그렇게 공중파를 타고 전국에 뿌려졌다. 그 방송의 피디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 방송국의 사장은 대체 무슨 의도였을까? 마이크를 잡고 큰 목소리로 김정일의 만수무강을 기원한 저 “철학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누구의 이익에 복무했던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선 1980~90년대 대한민국 소위 “진보 진영”을 장악했던 주사파의 정신세계를 파헤쳐야만 한다.

다섯 가지 “안티 의식”과 다섯 가지 “프로 의식”

1980년대 한국 대학가에서 “유신의 아이들”을 “김일성의 아이들로 순식간에 거듭났다. “슬픈 중국”<38회>에서 이미 논했듯, 대략 다섯 가지 역발상이 그들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1) “박정희는 친일 분자였고, 김일성은 항일 투사이다.”

2) “대한민국이 친일파가 외세와 결탁해서 급조한 식민지에 불과하고, 북한은 항일 투사가 외세를 배격하여 만든 자주 국가이다.”

3) “대한민국이 영구 분단 획책 세력이고, 북한이 통일 세력이다.”

4)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민중을 착취하는 노예의 길이고, 공산주의 명령경제가 노동자·농민 주도의 인간 해방의 길이다.

5) 미국을 위시한 “자유 진영”이 사악한 제국주의 세력이고, 소련·중국이 이끄는 공산 진영이 세계 인민을 해방하는 반제국주의 세력이다.

 

이 다섯 가지 역발상을 역사의 진실로 받아들이면, 대한민국은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의 잘못된 나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그 밑바탕엔 반(反)대한민국, 반미, 반일,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라는 다섯 가지 “안티(anti-)” 의식과 친(親)북한, 친중, 친소, 친사회주의/공산주의 정도의 다섯 가지 프로(pro- ) 의식이 깔려 있었다. 1980년대 한국 대학가에선 이상 다섯 가지 “안티” 의식과 다섯 가지 “프로” 의식으로 중무장한 반체제적 이념 집단이 공고한 운동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1989년 5월 충남대 종합운동장에선 전국 100여 개 대학 1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3기 전대협 발대식이 열렸다./공공부문

 

돌이켜 보면, 그 세대의 역발상은 세계사의 큰 방향을 터무니없이 빗나간 시대착오적 미망이었다. 1980년대 말 동유럽 공산정권들이 줄도산했고, 1991년 12월엔 사회주의 종주국 구소련이 무너졌다. 역사적 상황이 그러했음에도 대한민국 운동권의 “그때 그 사람들”은 세계사의 변화에 역행하여 시쳇말로 “갈 데까지 갔다.” 그들의 이념적 확신은 대체 어떤 논리에 근거했는가?

 

우선 그들은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라서 자본주의가 내적 모순으로 무너지고 사회주의가 필연적으로 도래한다는 소위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을 맹신했다. 또한 그들은 레닌의 교시를 받들어 서방세계가 자본주의 최종단계에서 제국주의적 발악을 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한 구시대의 뒤틀린 혁명 이론에 사로잡혀서 그들은 한반도에서 미(美)제국주의자를 몰아내는 북한 주도의 “조국 통일” 투쟁이 비단 “우리 민족” 내부 모순의 해결책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민족을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책무라 믿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북한의 김일성이 단순히 “우리 민족의 수령”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영도자라는 궤변까지 펼쳐댔다.

 

1945~1950년 해방공간에서 철저하게 친일파를 청산하고 “양키들”을 축출하여 “조국통일”을 이뤘어야 했는데, “이승만 괴뢰도당과 미제국주의자들”이 영구 분단을 획책하여 “조국의 절반을 미제의 식민지로” 남겨뒀다는 북한식 정치선전이 1980년대 대한민국 좌파 지식계에 널리 퍼져 있었다. 1960~70년대 중화학 공업으로 굴기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룬 후에도 1980년대 연간 10% 경제 성장률을 과시하며 견실한 제조업 국가로 발돋움하는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그토록 비현실적인 역사관이 먹힐 수 있었을까?

신화가 된 김일성의 항일 무장투쟁

1980~90년대 대한민국 대학가에서 주사파가 그렇게 순식간에 큰 세력으로 자라난 이유를 설명하려면, 위에서 언급한 다섯 가지 역발상 중에서 특히 첫 번째에 주목해야 한다. 바로 1917년생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거친 일본군 장교였지만, 1912년생 김일성은 만주에서 항일 게릴라 투쟁을 벌였다는 점이었다. 쉽게 말해 유신의 아이들은 대학에 들어가서 운동권 세미나나 술자리 토론에서 “박정희는 독립군 잡는 일본군 장교”인 반면 김일성은 만주에서 목숨을 걸고 일본군과 싸웠던 “민족의 영웅”이라는 NL계의 역발상을 접하고 나면, 12년간 관제 교육에 완벽하게 속았다는 자괴감에 휩싸였다.

 

12년의 공교육 과정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주입받아 민족-근본주의자들로 길러졌기에 “유신의 아이들”은 1930년대 만주의 김일성 항일 무장투쟁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 너무나 빨리, 너무나 쉽게, 너무나 맹목적으로 “김일성의 아이들”로 거듭날 수 있었다. 유신 시대의 강력한 민족교육이 “김일성의 아이들”이 자라나는 비옥한 토양이 될 수 있었다는 얘기.

 

북한 조선노동당 선전부는 김일성 항일투쟁을 미화하고 찬양하는 각종 선전물을 만들어서 “유신의 아이들”을 뒤흔들었다. “피바다,” “꽃 파는 처녀,” “한 자위 단원의 운명” 등 김일성이 직접 창작했다는 북한의 소위 “3대 불후의 고전적 명작”은 모두 김일성의 항일 무장투쟁을 과장하고, 극화하고, 찬양·선전하는 노골적인 정치 선동극이다. 1980년대 말부터 북한의 선전물은 대한민국에서 떼로 “김일성의 아이들”을 길러냈다. 고교 시절 이미 그 형을 통해서 “주체사상”에 입문했다는 내 주변 한 친구는 월북작가 석윤기(1929-1989)의 장편소설 ‘봄우레’를 거듭해서 읽고는 “위대한 수령 장군님을 따라서 미제 괴뢰도당을 물리치고 조국 통일을 앞당기는 혁명 투쟁의 전사가 되기 위해서 대학에 들어왔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문제는 북한에서 선전하는 1930년대 김일성의 무장 항일투쟁은 과장 거짓, 왜곡, 날조로 점철된 정치선전용 신화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김일성은 만주 지역 중국공산당 군사 조직인 동북항일연군에 들어가서 중국인의 명령을 받으며 항일투쟁을 했다고 하지만, 그의 항일투쟁에 관한 북한의 선전은 김일성의 권력 강화를 위한 우상화, 신격화, 신화화, 절대화의 조작물일 뿐이다. 북한이 김일성 항일 무장투쟁의 역사를 어떻게 과장하고 조작했는지에 관해선 다음 회에 이어가기로 하고, 마지막으로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시절 그 많던 “김일성 키즈,” 그들은 무엇에 그토록 씌었던가? <계속>

 

〈123〉"당신들의 일그러진 수령" 김일성의 혁명가 콤플렉스

변방의 중국몽 <41회>

▲1990년 8월 연세대에서 열린 제1차 범민족 대회. 북한과의 연계하에 열린 이 대회는 90년대 주사파 운동의 대표적 이벤트였다. 공공부문

 

김일성 신화에 빠졌던 남한 청년들

경상북도 달성군 출신 소설가 석윤기(1929-1989)는 북한에서 “국보적인 작가”라 불린다. 북한에선 김정일의 지시 아래 1972년부터 2015년까지 40편의 가장 우수한 “수령 형상 문학”을 추려서 “불멸의 력사 총서”를 간행됐는데, 그중 ‘고난의 행군’, ‘두만강 지구’, ‘대지는 푸르다’, ‘봄우뢰’ 등 4편이 석윤기의 장편소설이다. 여기서 “수령 형상 문학”이란 “김일성 주석의 혁명업적과 공산주의적 풍모를 반영하는” 작품을 이른다.

 

석윤기의 작품 중에서 특히 장편소설 ‘봄우레’(1984년 작)는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남한 대학가 민족해방파(NL) 운동권 사이에서 널리 읽혔다. 지난 회 언급했듯 지방 출신의 한 친구는 주사파로 활약하던 세 살 위 친형의 지도를 따라 고교 시절 그 작품을 읽고서 “”위대한 수령 장군님을 따라서 미제 괴뢰도당을 물리치고 조국 통일을 앞당기는 혁명 투쟁의 전사가 되기 위해서 대학에 들어왔다”고 내게 털어놓기도 했다. 당시 북한의 정치전이 고교생들에까지 미쳤음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1989년 도서출판 힘에서 출판한 북한 작가 석윤기(1929-1989)의 장편소설 '봄우뢰'(1985년). 석윤기의 묘비에는 북한의 작가동맹 중앙위원회의 위원장이라 적혀 있다. 공공부문

 

궁금증이 일어서 그 친구에게 굵직한 ‘봄우뢰’ 상·하권을 빌려서 읽었다. ‘금단의 열매’를 따 먹는 심정으로 페이지를 넘기는데, 쑥쑥 읽히는 정교한 문체가 예사롭지 않았고, 박진감 넘치는 구성도 훌륭해 보였다. 다만 단 두 쪽을 읽기도 전에 조선노동당의 체제 선전물이라는 점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1930년대 두만강 넘어 간도(間島)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 농민들의 추수 투쟁에서 시작되는 이 소설에는 용떡, 영희, 재률, 상갑 등 숱한 인물들이 어지럽게 등장하는데, 유독 한 사람에게만 “···께서,” “···하시였다,” “드렸다” 등등의 극존칭이 사용됐기 때문이었다. 그 한 명은 다름 아닌 김일성이었다. 다음 몇 가지 사례를 보자.

 

1) “김일성동지께서 일행과 함께 다가오시자 허재률은 총을 그이께 내드리며 사연을 말씀드렸다.”

2) “김일성동지께서는 여전히 웃음을 띠시고 해빛에 번쩍거리는 총을 이리저리 제껴보이시며 말씀하시였다.”

3) “감상갑은 어쩐지 문제가 자기 같은 농민이 대답하기에는 너무 어마어마하게 느껴졌지만 질문 자체가 벌써 대답을 암시하고 있는 데다 김일성동지께서 서글서글 웃으시며 너무 실감있게 말씀하시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끌려들어 선뜻 대답을 올렸다.”

4) “그야 저 녀석 대답이 아닙지요. 김일성동지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데 김일성동지야 우리 조선민족의 령도자가 아니신가요? 그이의 말씀이야 여부가 있겠소?”

 

소설의 첫 배경은 1931년 9.18 만주사변 직후로 설정되어 있었다. 1912년생 김일성은 그 당시 고작 열아홉 살이었다. 벌써 그때 김일성이 간도 농민들 사이에서 “우리 조선 민족의 령도자”라 불렸단 말인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 소설 전체가 형편없는 조선노동당의 선전물처럼 느껴졌다. 결국 다 읽지 않은채로 그 책을 돌려주면서 친구에게 물었다.

 

“이 책은 역사책이 아니라 그냥 지어낸 픽션이잖아? 김일성의 나이가 그때 고작 스무 살도 안 됐는데 간도 어떻게 만주 전역 조선인들을 다 모아서 혁명 운동을 할 수가 있겠어. 아무리 봐도 이건 북한의 선전물인 거 같다.”

 

숫기없고 내성적인 성격의 그 친구는 잠시 입을 다물고 깊은 생각에 빠진 듯했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그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 책이 단순히 소설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철저히 근거한 역사 다큐멘터리이고, 여기 나오는 모든 사건은 수백 명 증인들의 입을 통해서 사실로 입증이 된다고 하더라고.”

 

그는 친형의 지도를 받으면서 북한의 역사서들을 읽었는데, 그런 책들에 제시된 여러 사건이 <<봄우레>>의 내용과 부합한다고 했다. 우리의 대화는 그쯤에서 어색하게 끝이 났다.

 

대체 왜 김일성이 “민족의 태양”이 되었나?

1945년 9월 서른세 살의 김일성은 소련군 수송선 “뿌가쵸프”를 타고 비밀리에 입북했다. 1940년 10월 이래 그는 줄곧 소련 시베리아 극동의 하바롭스크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입북 직전 스탈린의 부름을 받고 모스크바로 가서 앞으로 38선 이북 지역을 다스릴 조선인 최고 영도자로 발탁되는 행운을 얻었다.

 

 ▲북한의 선전 포스터. 공공부문

 

그 후 1994년 8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김일성은 49년의 긴 세월 동안 북한에서 절대군주로 군림했다. 그는 날마다 모든 북한 인민의 눈동자에 강림(降臨)하는 명실상부 인격신(人格神)의 삶을 살다 갔다. 대체 김일성은 어떻게 그토록 강력한 지배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아니, 그는 대체 어떤 이유에서 스스로 “어버이 수령”이자 “민족의 태양”이 되어야만 했을까?

 

구미(歐美)의 소위 북한 전문가 중에는 김일성이 “불멸의 영도자”가 된 이유를 김일성의 업적과 능력에서 찾는 부류가 있다. 시카고대학 명예교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1943- )나 그의 제자인 전(前) 컬럼비아 대학 교수 찰스 암스트롱(Charles Armstrong, 1962- , 2020년 논문 표절로 파면)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북한의 북한을 극단적 스탈린주의의 “악당 정권(rogue state)”이라 비판하는 구미(歐美) 학자들과 언론인들을 질타하면서 김일성이 체현한 혁명적 민족주의(revolutionary nationalism)와 한민족사에 뿌리 깊은 신유학적(Neo-Confucian) 전통을 보라고 외쳐왔다. 암스트롱은 항일 무장투쟁에 덧붙여 6.25남침 이전에 김일성이 이룩한 “북한혁명(1945-1950)”의 혁혁한 위업이 지금까지도 북한 정권의 탄력성(resilience)을 설명하는 열쇠라고 설명(?)한다. 한편 커밍스는 미국의 협박과 압력 때문에 북한이 어쩔 수 없이 핵무장을 했다는 주장도 서슴없이 펼친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1930년대 만주에서 김일성이 쌓은 항일 무장투쟁의 경력이야말로 김일성이 북한에서 지금까지 절대 권위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말한다. 일본의 도쿄대 명예교수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1938- )나 한국 성공회대학의 한홍구, 통일부 장관을 역임했던 이종석도 별반 다르지 않다. 김일성이 만주에서 전개한 항일 무장투쟁이 김일성을 만들었다는 판에 박힌 설명이다. 이들의 연구서를 읽다 보면, 김일성의 위대함을 인정하라 강요하는 듯하다.

혁명가 콤플렉스에 찌든 김일성

김일성이 중국공산당의 동북항일연군에 소속되어 중국인의 명령에 따라 소규모 항일 무장투쟁에 참여했던 점은 어느 정도 사실로 인정할 수 있다. 문제는 중국공산당의 명령과 지시에 따랐던 김일성의 항일투쟁은 이후 그가 누린 절대권력을 정당화하기엔 터무니없이 소소한 경력이라는 점이다.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은 20대부터 중국공산당의 창당 주역으로서 혁명 운동에 투신하여 중국 땅에서 실제로 소비에트 혁명사업을 추진했고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중국의 거의 모든 땅을 군사적으로 점령했던 인물이다. 베트남의 호치민(胡志明, 1890-1965)은 1930년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하고 1941년부터 베트남 독립동맹을 조직하여 프랑스 및 일본의 침략자들에 맞서 전쟁을 벌였던 영웅이다.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미화한 북한의 선전물. 공공부문

 

북한의 수령이 되기 전에 김일성은 대체 무엇을 했던가? 만주에서 중국공산당 하위 조직에 들어가서 20대를 보내다가 관동군에 쫓겨 시베리아로 도주한 후 5년간 소련군의 일원으로 복무했을 뿐이었다. 마오쩌둥이나 호치민의 군사적 활약에 비한다면, 김일성의 무장투쟁은 경찰서 기습이나 민가 약탈 등의 소규모의 “비적질”에 불과했다. 공산주의 혁명가로선 세계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밀 소소한 이력이다. 소련군이 이북을 점령하지 않고서 한반도 전역에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졌더라면, 독립유공자로서 인정받아 연금 타서 살았으면 좋았을 수준이다. 그 점은 누구보다도 김일성 자신과 그 주변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다.

 

평양에서 김일성의 이웃으로 살았으며 이후 김일성의 비서실장까지 역임했던 홍순관(洪淳寬)은 김일성의 항일 활동을 대해일적(大海一滴, 큰 바다의 물 한 방울)이라 했다. 김일성대학 총장으로 김일성 “주체사상”의 유령작가라는 황장엽은 1970년대 초까지 김일성은 입버릇처럼 “만주에서 총질을 좀 했지만 크게 한 일은 없다”고 되뇌곤 했다고 증언했다(이명영, ‘세기와 더불어는 어떻게 날조되었나’ 세이지, 2021, 15쪽). 또 황장엽은 ‘북한의 진실과 허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1930년대 항일 빨치산 군복을 입은 김일성 부부. 김일성의 항일 무장 투쟁을 미화하는 북한의 선전물. 공공부문

 

“아무리 김일성의 빨치산 투쟁을 과장한다 하여도 모택동의 영도 밑에 2만 5천 리 장정을 하고 광활한 중국 대륙을 해방한 중화인민공화국의 투쟁 역사와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김일성의 빨치산 투쟁은 그 규모나 연한으로 보아 큰 것이 되지 못하며 더구나 북한을 ‘해방’하는 데는 직접 기여한 것이 없다. 북한을 ‘해방’한 것은 전적으로 소련의 붉은 군대였고 김일성의 빨치산 부대들은 여기에 전혀 참가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힌다고 하여 젊은 시기에 항일 빨치산 투쟁에 참가한 김일성의 공로를 누구도 과소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김일성은 자기의 경력까지 솔직하게 내놓지 않고 자기의 투쟁 역사를 크게 과장하여, 마치도 젊은 시절부터 ‘인민의 위대한 영도자’로 추대된 것처럼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위의 책, 제1부 4장)

 

베트남 인민들은 자발적으로 사심 없이 온몸을 바쳐 독립운동에 투신한 호치민을 “엉클 호”라 부르며 존경한다. 중국인들도 스스로 군대를 조직하여 참혹한 내전을 종식하고 중국을 통일한 마오쩌둥을 개세영웅(蓋世英雄)으로 떠받든다. 북한 인민은 왜 김일성을 신처럼 떠들어야만 하는가? 조선노동당 선전부가 거짓 선전과 세뇌 교육으로 인격 숭배를 강요하고, 조금이라도 반항기를 보이면 처형하기 때문이다. 물론 신격화된 김일성은 실존 인물 김일성과는 동떨어진 조작과 허구의 ‘데미갓(demigod)일 뿐이다.

 

한 나라의 지도자로 발탁되기에 김일성의 투쟁 이력은 너무나 보잘것없었다. 그는 마오쩌둥이나 호치민을 보면서 몸서리쳐지는 혁명가 콤플렉스에 시달렸을 듯하다. 혁명가 콤플렉스를 벗어날 길이 없었기에 김일성은 공권력을 총동원해서 1930년대 자신의 항일 무장투쟁을 과장하고, 날조했다. 이명영 교수의 표현대로 북한은 “1%의 사실로 날조한 99% 허구”로 김일성 항일투쟁 신화를 만들었다.

 

김일성은 분명 죽는 날까지 혁명가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1992년에서 1996년에 걸쳐 출판된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8권이 그 점을 보여준다. 수천 쪽에 달하는 이 방대한 회고록은 놀랍게도 1912년부터 1945년까지 33년의 이력에 100% 국한되어 있다. 한편 김일성의 회고록은 1950년대부터 계속 여러 차례에 걸쳐서 출판되었는데, 1990년대 완정본(完整本)이 나온 후 북한 정부는 조작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 이전의 판본들을 수거해서 소각했다 한다. 이명영 교수는 김일성 회고록의 여러 판본을 비교하여 김일성 신화가 어떻게 가필·첨삭을 거쳐 조작되었는지를 밝혔다.

 

통상적으로 정치지도자의 회고록은 성장기나 청년기보다는 집권하여 국정을 펼친 시기에 집중되게 마련이다. 이와 달리 김일성의 회고록은 1945년 이전에 국한되어 있을뿐더러 특히 1935년에서 1937년까지 불과 2, 3년의 “항일 무장투쟁”에 거의 절반을 할애했다. 회고록의 절정은 바로 제6권 제17장 “조선은 살아있다(1937년 5월 ~ 1937년 6월)”의 ‘보천보의 불길’(1), (2)라 할 수 있다. “보천보 전투”의 실상에 대해선 다음 회에 살펴보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서 석윤기의 “봄우뢰”를 읽고서 “장군님의 영도를 따라서 반미 구국 투쟁”에 나섰다는 그 시절 운동권의 열혈 주사파 제군(諸君)에게 묻고 싶다.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의 일원이 되어 스스로 ‘만주에서 총을 좀 쏘긴 했다’는 김일성(1912-1994)의 당시 계급이 무엇이었는지 아시나요? 그가 장군이었나요?” <계속>

 

〈124〉핵보유국 북한, "중국의, 중국에 의한, 중국을 위한" 항미(抗美)의 전초기지

변방의 중국몽 <42회>

▲2019년 6월 20일, 베이징에서 열린 김정은과 시진핑의 정상회담. 미국 트럼프 전 대통령과 김정은이 정상회담 계획이 발표된 직후인 2018년 3월부터 2019년 6월까지 시진핑과 김정은은 다섯 차례의 이례적인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중국”의 두 의미: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 문명권

“슬픈 중국”이란 제목을 걸고서 왜 조선(朝鮮, 1392-1) 성리학과 노비제도, 북한의 “어버이 수령” 김일성, 남한의 친중 세력과 주사파 이야기까지 이어가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정당한 질문인 만큼 해명이 필요할 듯하다.

 

2020년에서 2023년 사이 이미 출간된 “슬픈 중국” 시리즈 1, 2, 3권은 중국 현대사에 관한 책이다. 이때의 중국은 1949년 세워진 “중화인민공화국”을 의미한다. 반면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에서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니라 “중화(中華) 문명권”을 가리킨다.

 

왜 다시 “슬픈 중국”인가? “이씨(李氏) 조선”에서 “김씨(金氏) 조선”으로 중화 문명권에 흡입된 한반도의 역사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성리(性理)”에서 “주체(主體)”로 “변방의 중국몽”이 지금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해양 문명의 경제 허브 vs. 대륙 문명의 전초기지

조선은 역사적으로 중화 문명권에 속해 있었다. 조선의 왕실과 사대부 지식인들은 자발적으로 중화 문명의 울타리(藩國)가 되기를 희망했고, 전통 시대 중화 제국의 역대 정권들 역시 한반도의 역대 왕조를 천하(天下)의 일부라 여겼다.

 

1945년 일제 패망 후 한반도의 38선 이남에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생겨나서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에 자연스럽게 편입되었다. 미·소 냉전 시기 40년 넘게 대한민국은 중국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바다를 타고 전 세계로 뻗어나가 “해양 문명의 경제 허브”로 새롭게 발돋움하는 역사를 썼다.

 

 ▲2014년 국제우주정거장에서 나사 (NASA) 우주인이 촬영한 한반도 남북한의 밤풍경.

 

이와 달리 38선 이북에는 소련군의 지도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중국이 국공내전의 폭풍(爆風)에 휩싸여 있을 때 북한은 중국공산당에 무기를 지원했을뿐더러 압록강 이남 지역을 후방 기지로 내줬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중국공산당은 1949년에서 1950년 인민해방군 소속의 한인 부대 3개 사단을 북한에 돌려보냈다. 북한의 병력 증강을 돕는다는 명분이었는데, 어찌 보면 그 조치가 한반도 이북이 다시금 중화 문명권에 빨려드는 첫 신호였다.

 

1950년 한국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이 유엔군에 밀려서 만주로 패주하던 그해 10월 말부터 중국은 대규모 “인민 지원병”을 파병했다. 중국은 유엔군을 한강 이남으로 밀쳐내며 김일성 정권에 이전의 영토를 되찾아주었다. 그때부터 북한은 확실하게 중화 문명권에 재편입되었다. 중국은 실로 어마어마한 군사 지원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망해버렸던 북한 정권을 되살렸기 때문이다.

 

1950년에서 1953년까지 중국은 무려 24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북한 땅에 투입했다. 공군 12개 사단도 참전했는데, 672명의 비행기 조종사와 5만9000 명의 서비스 인력이 포함돼 있었다. 게다가 60여만 명의 중국 민간인들이 군수품 보급, 지원 서비스, 철도·도로 건설 등 여러 방면에서 노동력을 제공했다. 모두 310만여 명의 “지원병”이 참전한 셈이었다. (Li, Xiaobing. “Conclusion: What China Learned.” In China’s Battle for Korea: The 1951 Spring Offensive, 238–50. Indiana University Press, 2014).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 당시 파병된 명군(明軍)의 총수는 대략 5만에서 10만 정도로 추정된다. 당시로서는 상당 규모의 군사 지원을 받았기에 조선 왕실과 유생들은 구한말까지도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베풀어준 천조(天朝)”라며 명나라에 머리를 조아렸다. 한국전쟁 당시 중국은 무려 310만여 명을 보내서 최소 39만여(중국 집계) 명에서 최대 131만여(한·미 집계)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국땅에서 치러진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다. 북한의 김일성 정권으로선 중국의 마오쩌둥에 되갚을 수 없는 커다란 은혜를 입었음이 분명하다. 중국은 그렇게 북한을 살려줬다. 그 결과 북한은 지금도 “대륙 문명의 전초기지”로 남아 있다.

갈수록 커지는 북한의 대중 의존도

오늘날의 북한도 중국의 절대적 영향 아래 놓여있다. 중국에 대한 북한의 의존성을 갈수록 깊어지는 추세다. 북한의 대중 무역의존도는 2000년까지만 해도 24.8%에 머물렀지만 2010년엔 83%에 이르렀고, 2023년에는 95%를 넘어섰다(Jangho Choi and Yoojeong Choi, “North Korea’s 2023 Trade with China: Analysis and Forecasts,” World Economy Brief, Vol. 14 No. 09, pp.1-7). 1961년 처음 체결되어 20년마다 갱신되는 “조·중 우호 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이하 북·중 동맹)”은 2021년 다시 연장되어 2024년 현재 64년을 맞이하고 있다. 북한의 대중 의존도가 최고조로 치닫는 현실에서 북한이 동북 3성인 랴오닝성(遼寧省), 지린성(吉林省),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 이어 ‘제4성’이 된다는 전망도 심심찮게 나온다.

 

물론 양국은 경제 체제나 개방의 정도에서 질적인 차이를 보인다. 개혁·개방을 거쳐 GDP 규모 세계 제2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중국과 고립주의 쇄국 노선으로 세계 최빈국으로 남아 있는 북한을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순 없다. 그럼에도 북·중은 모두 공산주의를 내걸고서 일당독재 및 일인 지배로 돌아가는 반자유적, 반민주적, 반인류적 전체주의 정권이란 점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 개혁개방 50주년을 4~5년 남겨둔 중국과 전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북한을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순 없겠지만, 양국 사이의 이념적 유사성, 제도적 친연성, 정치적 공통성은 자명해 보인다. 시진핑 정권의 정치적 탄압과 대민 감시가 강화되면서 양국은 더욱 서로를 닮아가는 듯하다. 그런 이유로 중국 네티즌들은 시진핑 치하의 중국이 북한 서쪽에 놓인 “시(西)조선”이라 조롱하기도 한다.

 

 ▲2010년 9월 4일 평양에서 개최된 북한과 중국의 친선 마스게임./Roman Harak Wiki Commons

 

중국, 북한의 핵무장을 저지하나, 방조하나?

국제 제재가 계속 강화되고 있음에도 북한이 보란 듯이 핵실험을 하고 대륙간 탄도탄을 쏘아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구촌 삼척동자도 다 아는 얘기다. 유엔안보리의 제재에 구멍이 뚫려 있기 때문이다. 1416킬로미터 늘어진 북·중 국경선에는 유엔 제재를 피해 가는 무수한 구멍이 뚫려 있다. 중국은 북한 정권의 현상 유지를 실질적으로 도와 왔다. 특히 미·중 갈등이 격화되는 작금의 현실에서 “악당 정권(rogue regime)” 북한을 지금 이대로 동북아 반미(反美)의 최후 보루이자 항미(抗美)의 전초기지로 남겨두는 것이 중국의 국익에 가장 부합하기 때문이다.

 

북한 정권을 지금 이대로 살려주려는 중국의 노력은 노골적이다. BBC를 포함한 여러 외신에 따르면, 중국 동북 지역의 공장이나 건설 현장에는 10만에 달하는 북한의 노동자들이 북한 정권에 달러를 제공하기 위해 노예 노역에 시달리고 있다. 중국의 금융기관이 북한의 해커들이 탈취한 암호화폐를 세탁해 주고 있음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일례로 2020년 3월 2일 미국 정부는 북한 해커집단이 사이버 공격으로 탈취한 암호화폐 1억 달러를 세탁해 준 혐의로 중국 국적의 브로커들을 미 법원에 고소한 바 있다. 중국 선박은 제재 항목인 북한 상품을 중국의 항구로 실어 나르고 있으며, 심지어는 북한 미술가들이 노예 노동으로 생산하는 미술품들은 베이징의 갤러리에 전시되어 고가에 판매되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현실이다.

 

중국도 표면상 북한의 비핵화를 요구하지만, 실제로는 유엔 제재를 무력화해 북한을 살려주는 이중 전술을 펼쳐왔다. 중국 정부는 북한 정권이 급격히 무너지면 난민들이 대거 중국으로 몰려올 수 있다며 한반도의 비핵화와 안정화를 동시에 부르짖어 왔으나 설득력이 없다. 항미의 전초기지로서 북한은 휴전선 이북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북한을 딱 지금 이대로 유지·관리하려 한다. 만약 북한에 새로운 지도층이 형성되어 만시지탄이지만 지금이라도 베트남식 개혁개방 노선을 추진한다면, 휴전선 이북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2023년 7월 27일 휴전 70주년을 맞아 북한의 김정은이들과 평양에서 소위 “전승절” 군사 퍼레이드를 관람하고 있다. 이날 행사에는 이례적으로 러시아의 국방부 장관 세르게이 소이구 (Sergei Shoigu)와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이훙중(李鴻忠)이 참석했다.

핵 가진 북한, 중국에 붙어사는 항미의 전초기지

중국은 개혁개방을 마구 추진하던 1979년 2~3월 이미 베트남을 침공하여 쌍방의 수만 명이 전사하는 큰 전쟁까지 불사했다. 같은 맥락에서 중국은 북한의 베트남화를 방치할 수가 없다. 중국으로서 북한이 베트남식 개혁개방의 길로 못 가게 하는 가장 좋은 방도는 “김일성 주체사상”과 “수령유일주의”로 돌아가는 북한의 기괴한 신정체제를 그대로 살려두는 것이다. 그 체제가 유지되려면 자본주의적 개방의 물결을 막아야만 하고, 그 물결을 막으려면 북한의 핵무장을 도와야만 한다. 지난 20여 년 중국이 핵무장에 혈안이 된 김씨 왕조를 국제사회의 비판에도 아랑곳없이 갖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계속 연명시켜 준 까닭이 바로 그것이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자본주의적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간다면,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비유 그대로 중국의 이를 가린 북한이란 입술이 잘려 나가게 된다. 핵무장을 강화할수록 북한은 국제적으로 더더욱 고립되고, 북한이 고립될수록 중국은 북한에 대해 더욱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있다. 중국은 북한이 핵보유국이 된 현 상황을 우려할 필요는 없다. 중국에 비해 북한은 한없이 자그맣고 가난한 나라일뿐더러 이념적 동반자이자 군사동맹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북한이 중국에 핵 위협을 가할 가능성은 미국이 캐나다에 핵 공격을 가할 확률만큼이나 희박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국제정치 전문가들은 마치 중국도 북한의 비핵화를 희망함에도 북한이 너무나 막무가내라서 중국의 영향력(leverage)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식의 해석을 내놓고 있다. 재래식 한계를 넘어서는 중국의 정치전(政治戰)을 전혀 모르는 백면서생의 천진난만한 관전평이 아닐까? 진정 왜 북한엔 아직도 반인류적 “악당 정권(rogue regime)”이 존속되고 있는가? 어떻게든 한반도에 강한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중국의 대외전략 때문이다. 95%의 무역을 중국에 의존하는 북한은 중국의 국익에 부합하는 항미의 전초기지이다. 중국이 바로 그 전초기지에 핵무기를 심어놨다면 무리한 해석인가?

 

1950년 중국 인민지원군의 파병을 앞두고 중국의 한 거리에서 벌어진 지원 시위. 현수막엔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의 구호가 적혀 있다. “미국에 저항하고 조선을 도와주자. 가족과 나라를 보위하자.”

 

참혹했던 625전쟁의 결과 대한민국은 중화 대륙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있었고, 두 세대에 걸친 관민 합작의 노력 끝에 대한민국은 해양 문명의 경제 허브로 웅비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에는 여전히 중국을 칭송하면서 중화 문명권에 자발적으로 투항하려는 세력이 존재하는 듯하다. 동시에 그들은 대개 중화-중심적(Sino-centric) 전통 질서를 뿌리째 흔들었던 해양 세력에 대해서는 극도의 경계심과 혐오감을 드러내기 일쑤다. 20세기~21세기 북한과 대한민국의 친중주의(親中主義)는 반미주의(反美主義)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음을 보여준다. 지금이야 전 세계적으로 반중(反中) 정서가 고조되어 그들은 스스로 함구하고 있지만, 정계, 학계, 언론계, 심지어 재계에까지 반미·친중 노선의 인물들이 적잖은 듯하다.

 

그렇게 21세기 한반도에는 중화 문명의 짙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북한 김씨 정권을 말할 것도 없고, 조선노동당의 선전·선동에 넘어간 시대착오적 주사파와 친중 세력의 부조리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들은 불현듯 출현한 한국사의 돌연변이가 아니라 문화적 DNA의 발현일 수도 있다. 바로 그 점에서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분석하기 위해선 중화 문명권으로서의 “중국” 개념이 여전히 유용하다.

 

74년 전 중국은 “항미원조(抗美援朝)”의 기치를 들고 북한의 김일성 정권을 보위했다. 74년이 지난 지금 김일성의 손자는 명나라의 재조지은(再造之恩)에 보답하려 했던 조선 국왕들처럼 2천600만 인구의 북한을 오롯이 “중국의, 중국에 의한, 중국을 위한” 항미의 전초기지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나는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이란 제목을 내걸고서 한반도에 깊게 드리운 중화 문명권의 그림자를 지금껏 파헤치고 있다. <계속>

 

〈125〉"뉴라이트" 마녀사냥과 시대착오적 여론몰이, 건국의 팩트를 바꿀 수 있나?

변방의 중국몽 <43회>

▲1949년 8월 15일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독립 1주년 기념식’ 모습. 중앙청 건물 윗부분에 내걸린 대형 플래카드에 적힌 문구 ‘한번 뭉처 민국 수립, 다시 뭉처 실지 회복’은 독립 1주년을 기념하여 국민에게 공모한 것이었다./조선일보 DB

 

1949년 건국된 중화인민공화국, 그런데 대한민국은?

중국공산당의 최고 영도자 마오쩌둥은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의 톈안먼 망루에 올라 광장의 군중을 내려다보며 마침내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새로운 국가가 성립되는 사건을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선 한 낱말로 건국(建國)이라 한다. 당연히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 10월 1일 건국되었다. 중국에선 아무도 그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마오쩌둥이 1893년 후난성 샹탄(湘潭)현에서 태어난 것만큼이나 견고한 사실(hard fact)이기 때문이다.

 

1981년 6월 중국공산당은 “건국 이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당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때 “건국 이래”란 명백하게 “1949년 10월 1일 이후”를 의미한다. 2019년 중국 전역엔 “건국 70주년”을 경축하는 포스터가 나붙었다. 중국에서는 삼척동자도 알고 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기 전의 중국은 국민당이 통치하는 중화민국(中華民國)이었고, 1911년까지는 만주족 황제가 통치하는 대청국(大淸國)이었다는 사실을.

 

 ▲201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70주년 포스터 (왼쪽).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10주년을 경축하는 포스터 “우리들의 위대한 조국의 건국 10주년을 경축하며” (오른쪽)./공공부문

 

중국인들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당연시한다. 그런데 왜 대한민국에선 “1948년 건국”이란 말만 나오면 편향된 방송·언론이 떼로 들고 일어나 난데없는 “친일파” 딱지를 붙이면서 광란의 마녀사냥을 펼치는가? 그들은 국민·주권·영토를 갖춘 대한민국이라즌 국가가 1948년 이전에 이미 지구 어딘가에 벌써 세워져서 안으로는 세금을 징수하고 군인을 징집하고, 밖으로는 전 세계를 향해 외교권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판타지에 빠져 있는가?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국민적 동의의 절차도 없이, 국제적 승인의 과정도 없이 1919년 상하이에서 이미 세워져 있었다는 비현실적 주장을 펼칠 수 있는가? 1948년 5월 10일 유엔 감시 아래 치러진 국민 총선거에서 총유권자의 90% 이상이 참여하여 당당하게 세운 “대한민국”의 성립 과정 자체를 통째로 부정하려는가?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을 동일시하는 부자(父子)의 궤변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광복절 사면 발표문에서 “대한민국 건국 50년을 맞이하여 건국기념일인 8월 15일자로 사면을 단행하였다”고 밝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1948년) 민주공화국”을 세웠음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광복회장 이종찬은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음을 극구 부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나라 역사는 중단되지 않았다. 설령 일본이 강제로 점령했다 하더라도 나라는 있었고, 주권 행사가 어려웠을 뿐이다. 대한제국이 소멸되고 나라 전체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보는가? 아니다.” (조선일보, 2023. 08.15.)

 

참고로 이종찬은 “신군부” 전두환 정권에서 중앙정보부 기획조정실장을 맡았으며, 김대중 정권의 안기부장을 지냈던 인물이다. 요즘 건국이란 말만 나오면 발끈하는 이종찬은 최근 언론보도에 따르면 2008년 이명박 정부에서 ‘건국 60주년 기념 사업 위원회’의 고문으로 참여했으며, 심지어는 재미 교포를 상대로 “건국 60주년 기념 특강”을 한 적도 있다. 이종찬의 광폭 횡보가 사회적 물의를 빚게 되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철우(아들)가 언론 인터뷰에서 해명했다.

 

“대한민국은 이미 존재하는 나라였기에 건국을 논할 이유가 없다. 광복회는 없던 국가가 1919년에 건국됐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대한제국은 이미 근대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다자조약도 체결한 국가다. 그 효력이 계속됨을 1986년 대한민국 외교부가 확인했다. 그 국가가 1919년에 이름을 바꾸고 민주공화국을 선포한 것이지, 새로 건국된 것이 아니다.” (동아일보, 2024-08-19)

 

 ▲연세대 법학전문원 교수 이철우(왼쪽)과 그의 부친인 광복회장 이종찬 (오른쪽)./공공부문

 

“나라는 있었고, 주권 행사가 어려웠을 뿐”이라는 이종찬의 주장이나 “대한민국은 이미 존재하는 나라였기에 건국을 논할 이유가 없다”는 이철우의 논변을 보면, 이 두 사람은 조선왕조에서 대한제국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계속 같은 나라가 이어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들의 주장은 사회과학적으로 타당하지 않을뿐더러 상식적이지도 않다.

 

이들의 주장대로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이 같은 나라의 연장이라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만약 국제법상 독자적 국가임을 인정한다면) 대한제국에서 이어진 다 같은 나라인가? 그렇다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같은 나라란 말인가? 시대를 달리하여, 이념을 교체하여 한반도에 들어선 모든 국가가 다 같은 나라란 소리인가? 그렇게 되면 신라, 고려,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다 같은 나라란 말인데, 역사학적으로나 사회과학적으로나 일말의 타당성도 없는 비논리적, 비학술적, 비상식적 주장이다.

 

대한제국은 국가의 주권을 고종(高宗, 재위 1897-1907) 황제가 독점했던 제국(帝國), 곧 황제의 나라였다. 이와 달리 대한민국은 국민주권에 기초한 민주공화제의 나라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국제법상 국가임을 인정한다면) 김씨 왕조가 사회주의 이념을 내걸고 수령 일인이 지배하는 나라다. 이 세 나라는 국체(國體), 정체(政體), 국시(國是), 어느 면에서도 같은 나라가 아니다.

 

황제 일인 지배의 제국(帝國)과 국민주권의 민국(民國)은 물과 기름처럼 결코 섞일 수 없는 완벽하게 다른 정체(政體)의 나라이다. 마찬가지로 유엔에 동시 가입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체제와 이념이 완벽하게 상충하는 다른 나라가 아닐 수 없다.

건국(建國)은 사회과학적 용어, 엄밀하게 사용해야

물론 여기서 “나라”는 그저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이나 터전 따위 모호한 의미가 아니라 국민·주권·영토를 확보하고 “배타적 영토에서 합법적으로 무력을 독점한” 국가(國家, state)를 가리킨다. 모름지기 한 국가의 건국을 논할 때는 사회과학적으로 엄밀하고 역사학적으로 타당한 과학적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 정부 보조금을 받는 광복회의 수장이나 사립 명문대학의 법학자라면 더더욱 엄밀한 용어를 정확하게 사용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들이 사용하는 “나라”라는 개념은 그저 ‘대대로 살아온 우리 땅’ 정도의 의미밖에 없다. 느슨하고 감정적이고, 지극히 비과학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다시금 중국의 사례를 보자. 중국에선 그 누구도 황제 지배체제의 나라 대청제국(大淸帝國, 1644-1912)과 중국공산당이 지배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절대로 같은 나라라 생각하지 않는다. 대청제국은 1911년 공화 혁명을 통해서 무너졌으며, 그 이후 국공내전을 치르고서 중국공산당이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했기 때문이다.

 

건국의 개념은 전통 시대 중국의 여러 조대(朝代)에도 적용된다. 청나라(淸國), 명나라(明國), 송나라(宋國) 등등의 표현이 말해주듯 중국사에서 조대의 교체는 새로운 나라의 시작을 의미했다. 전통의 군현제 위에서 황제 지배체제가 계속됐음에도 중국인들은 조대가 교체될 때마다 다른 나라(國)가 새로 섰다고 생각해 왔다. 쉽게 말해, 대청국(大淸國)과 대명국(大明國, 1368-1644)은 절대로 같은 나라라 할 수가 없다. 대청국과 중화민국,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이 같은 나라라는 이철우의 주장도 타당하지 않다. 그는 “대한제국은 이미 근대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다자조약도 체결한 국가”이고 “그 효력이 계속됨을 1986년 대한민국 외교부가 확인했다”며 “그 국가가 1919년에 이름을 바꾸고 민주공화국을 선포한 것이지, 새로 건국된 것이 아니다”라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19세기 국제외교에서 이미 확립된 국가 계승(succession of states)의 개념에 어긋나는 궤변에 불과하다. 국가 계승의 개념에 따르면, 특정 영토에 새로 들어선 주권 국가(sovereign state)는 계승국(successor state)으로서 동일 영토를 영유했던 과거 국가의 권리와 의무를 수행하는 ‘국제적 법인(international legel person)’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대한민국이 대한제국이 맺었던 국제조약의 효력을 인정한 이유는 바로 그러한 국가 계승의 개념에 근거한 것이지 이철우가 말하듯 대한민국과 대한제국이 같은 나라이기 때문이 아니다.

 

중국사의 사례도 다르지 않다. 대한제국 훨씬 이전에 대청제국은 이미 근대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다자조약을 체결한 국가로서 반세기 이상 존속됐다. 홍콩의 사례에서 극적으로 드러나듯 중화인민공화국은 ‘국제적 법인’으로서 대청제국이 맺은 조약의 효력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세상 어느 학자도 “그 국가가 1949년에 이름을 바꾸고 인민공화국을 선포한 것이지, 새로 건국된 것이 아니다”라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 대청제국과 중화민국,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국가이념과 정부형태뿐만 아니라 국인(國人)의 정체성도 완벽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대청제국에선 황제에 복속된 신민(臣民)은 중화민국에서 국민(國民)으로, 다시 중화인민공화국에선 인민(人民) 혹은 공민(公民)으로 거듭났다. 마찬가지로 대한제국의 신민이었던 한민족의 조상들은 일제강점기엔 황국의 신민으로 지배당하다가 1948년 대한민국이 세워지고 나서야 자유와 인권을 갖는 민주공화국의 국민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대한제국이 1919년에 이름만 바꿔서 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니·····. 그러한 시대착오적이고 비과학적인 주장에 세계 학계의 그 누가 동의하겠는가?

주공화국은 왕조의 유습과 황제 지배의 부정에서 출발

대한민국은 조선왕조의 신분제와 대한제국의 황권에 대한 철저한 부정에서 출발했다. 개개인이 자유와 권리를 갖고 주권자가 되는 국민의 나라 “민국(民國)”의 개념은 온 백성이 황제의 신민으로 살아가야 하는 황제의 나라 “제국(帝國)”에 대한 가장 강력한 안티테제이다. 1919년 상황에서 민국을 세우겠다는 식민지 지식인들의 발상은 그 자체가 의식 혁명이었다.

 

1919년 3.1운동 직후인 4월 11일 상하이에서 공표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바로 그러한 의식 혁명의 결과였다. 또한 4월 23일 13도 대표가 급하게 국민대회를 열어서 당시의 경성부(京城府)에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선포한 “한성(漢城) 정부 약법(約法), 혹은 임시(臨時) 약헌(約憲)”에서도 그 점은 명명백백하게 드러난다.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민주공화제를 채택하며, 제3조는 대한민국 인민의 일체 평등을 천명하고, 제4조는 “종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통신, 주소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누린다”고 명기한다. 한성 약법 역시 제1조에서 “국체는 민주제”를, 제2조에서 “정체는 대의제”를 채택하고, 제3조에서 “국시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여 세계 평화의 행운을 증진케 함”이라고 천명한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 임시헌장과 한성 정부 약법 모두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선양하는 자유주의적 기본 가치, 민주공화제, 대의제 민주주의를 결합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국가의 기본 이념으로 채택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말했듯, 민주공화제의 주인은 공화국의 시민(市民), 공민(公民), 국민(國民)이지만, 대한제국의 주인은 황제였으며, 대한제국의 백성은 황제의 신민들이었다. 제국의 신민들이 공화국의 시민들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명실공히 혁명적 변화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헌장과 한성 정부 약법의 저자들은 공화 혁명의 정신을 반영했으며, 나아가 당대 가장 선진적인 자유민주주의 가치와 이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들은 더 이상 왕조의 백성이나 제국의 신민이 되길 거부하고 스스로 민주공화제의 새로운 나라를 세워서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공화국의 시민이 되고자 했다. 물론 그들의 꿈은 29년이나 한반도 38선 이남에 대한민국이 세워지고 나서야 실현될 수 있었다.

 

 ▲1948년 5월 10일 선거. 유권자의 96.4%가 선거인 등록을 하고, 그중 95.5%가 투표했다./공공부문

 

“대한민국은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거쳐 8월 15일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 중앙선관위 자료에 따르면, 5월 10일 총선거는 전국 만 21세 이상 남녀 총유권자 813만여 명 중에서 785만명(96.4%)이 선거인 등록을 했고, 그중 95.5%가 투표를 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선거는 그렇게 국민의 압도적 다수가 ‘나라 세우기’의 열망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명실공히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였다. 그날 선출된 198명의 국회의원은 5월 31일 제헌의회를 개원했으며, 7월 17일에는 드디어 대한민국 헌법이 공표됐다. 그 헌법에 따라 국회의원의 간접선거로 제1대 대통령 이승만이 선출되었다. 요컨대 한국 헌정사 최초의 ‘민주 정권’은 1948년 수립된 바로 그 정부였다.” (송재윤, 조선칼럼, “’1948년 정부’가 대한민국 첫 민주정부다”)

 

1948년에야 한반도 38선 이남에 비로소 국민·주권·영토를 가진 나라가 새로 서서 합법적으로 무력을 독점한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다. 한자문화권의 모든 언어에서 그렇게 새 나라가 세워지는 사건을 건국(建國)이라 한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팩트다. 신성한 팩트를 정확하게 말하는 이를 일컬어 “뉴라이트”라 부른다면, 온 국민이 자랑스럽게 “내가 뉴라이트다!”라고 외쳐야 하지 않을까?

 

지금이 어느 때인데 대규모 국가보조금을 받는 광복회란 조직이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뉴라이트 판별 기준 9가지” 따위나 제시하며 시대착오적 사상검증을 하고 있는가? 광복회장이 어떻게 아무런 증거도 없이 “용산에 일제 밀정이 있다”는 막말을 내뱉을 수 있는가? 그들의 행동거지가 중국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의 망동과 과연 다른가? 야만적 마녀사냥과 광란의 여론몰이에 맞서서 차분히 역사의 팩트를 살펴야 할 때다. <계속>

 

〈126〉전쟁광 김일성의 제2남침, 마오쩌둥이 불허하자 대남 테러 자행

변방의 중국몽 <44회>

▲1975년 군대를 방문하여 총기를 점검하는 김일성과 김정일. 공공부문

 

북한에선 “민족의 태양”이나 “어버이 수령”으로 통하는 김일성(1912-1994, 본명 김성주)은 한평생 평화 쇼를 벌인 전쟁광이었다. 1950년 6월 25일 그는 소련제 무기로 무장된 인민군을 몰고서 대한민국을 침략했다. 공산권의 우두머리인 스탈린의 개전 허락과 마오쩌둥의 참전 언약 위에서 시작된 전쟁이었지만, 발발의 직접 책임은 김일성 본인에게 있었다.

 

만약 전쟁 중 유엔군에 생포됐더라면, 일제의 총리대신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948)처럼, 김일성 역시 국제 군사재판소에 제소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교수형 당했을 특급 전범이었다. 중국의 도움으로 권좌를 유지한 김일성은 휴전 후에도 쉴 새 없이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 테러를 기획하고 자행했다. 1975년 인도차이나의 정세를 지켜보던 김일성은 드디어 “공산 혁명의 만조기(滿潮期)”가 도래했다고 생각했다. 제2남침의 기회를 노린 김일성은 사이공 함락이 임박한 시점에 마오쩌둥을 알현하려 베이징으로 달려갔다.

1975년 제2의 남침을 계획한 김일성

1975년 3월부터 시작된 북베트남의 총력전은 남베트남을 소생 불능의 궁지로 몰아가고 있었다. 4월 17일 캄보디아에선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 (Khmer Rouge) 세력이 수도 프놈펜을 정복했고, 4월 30일엔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이 함락됐다. 잔뜩 고무된 김일성은 1975년 4월 18일~26일 베이징을 공식 방문했다. 마오쩌둥에게 대남 침략의 의사를 밝히고 중국의 군사적·외교적 지지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1975 년 4월 30일 북베트남에 함락된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의 대통령궁 앞 풍경

 

일단 중국 측은 방중한 김일성을 최고의 외교적 프로토콜로 환영했다. 중소 갈등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김일성을 중국 편에 꼭 묶어두기 위한 외교 전술이었다. 중공 중앙은 “김일성이 한국의 평화적·독립적 재통일을 위한 올바른 노선을 정립했으며,” 북한 정권이 “평화적 통일을 위한 올바르고 합리적인 방법을 계속 제시했다”고 칭송했다. 아울러 중국은 “미군은 남한에서 철수하라”는 북한의 요구에 동의하며, “두 개의 한국을 만들려는 박정희 도당의 정책을 비난한다”며 북한 편을 들어 주었다.

 

중소 갈등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북한을 중국 측에 묶어둬야 한다는 계산속이 작용했던 듯하다. 그러한 중국 측의 찬사에 득의양양해진 김일성이었지만 중국과 더불어 소련을 규탄하기는 꺼렸다. 결국 중국의 관영매체는 “조선노동당과 (북한의) 정부와 인민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원칙을 지키면서 제국주의(미국)와 현대 수정주의(소련)와 견결하게 투쟁하고 있다” 정도의 기사를 내보냈다.

 

4월 19일 베이징의 공식 석상에서 김일성은 사회주의 국가들과 제3세계 인민의 투쟁이 가열되면서 제국주의의 위기는 더욱 고조되고 있다면서 말했다.

 

“우리 인민이 지금도 갈라진 조국의 통일을 위해 전개하는 작금의 투쟁은 전 지구적 반제 민족해방 투쟁의 체인에서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입니다. 남조선에서 혁명이 발생한다면 같은 나라의 성원으로서 우리는 그저 팔짱만 끼고 방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남조선 민중을 힘을 다해 지원할 것입니다. 적대세력이 무모하게 전쟁을 일으키면, 우리는 더욱 견결하게 응전하여 침략자를 완전히 깨부술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우리가 잃을 것이라곤 군사분계선밖에 없지만, 얻을 것은 조국의 통일입니다. "

 

1975년 국제정세에서 이 발언은 베트콩(남베트남 민족해방 전선)의 내란 활동에 베트민(베트남 독립동맹회)이 부응해서 반미투쟁을 전개한 베트남식 통일 전술을 남한의 적화에 적용하겠다는 김일성의 의지 표명이라 해석될 수 있다. 다시금 남한에 과거의 남로당 같은 조직이 생겨나 혁명 투쟁을 전개한다면 다시 그 세력과 연합하여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발상이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김일성은 노골적으로 남한 정치에 개입할 의사를 밝혔다.

 

“만약 미군이 남조선에서 철수하고, 남조선 인민이 열망하듯이 민족의식을 가진 민주적 인사가 권력을 잡게 되면 우리는 한반도에서 영구 평화를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성공적으로 한반도 통일 문제를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달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냉전 시대 관련 중국의 석학 선즈화(沈志華)의 분석에 따르면, 김일성은 “남조선의 혁명 세력”과 연합하여 통일전쟁을 벌이겠다며 개전(開戰)에 대한 마오쩌둥의 허락을 구했다. 김일성은 베트남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바로 그때가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고 한반도를 적화할 수 있는 최적 타이밍임을 강조했다. “잃을 것은 군사분계선밖에 없지만, 얻을 것은 조국 통일”이라는 김일성의 확신 어린 한 마디에 그의 전쟁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Shen Zhihua, A Misunderstood Relationship, Columbia Univ. Press, 2020; 沈志華, ‘最後的天朝,’ 香港中文大學出版社, 2018)

 

그 점에 관해선 당시 동독의 해석도 대략 일치한다. 1979년 4월 29일 동독 외교부는 김일성이 베이징을 방문한 목적과 의의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번 방문에서 북한의 주된 관심은 남한에 대한 앞으로의 정책을 중국과 조율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지표에 따르면, 북한 지도부가 인도차이나의 상황에 근거하여 미국이 압박에 시달리다 주한 미군을 철수할 것이라 평가했던 듯하다. 베이징에서의 첫 공식 석상에서 김일성은 그러한 생각에 따라서 남한의 해방에 관해 극단적으로 공격적인 언사를 쏟아냈다. 우선 그는 남한에서 주한 미군 철수에 관해 이미 잘 알려진 여러 가지를 요구했다. 그는 한국 문제에 대한 미국의 간섭을 종식할 것과 외적 간섭 없는 평화적 통일의 선제 조건으로 남한 박정희 정권의 타도를 요구했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남한에서 혁명이 일어난다면 서둘러 지원하겠다고 선언했다. ‘조선인이 잃을 것은 휴전선이고, 얻을 것은 통일이라’ 했다.” (East German Documents on Kim Il Sung’s Trip to Beijing in April, 1975)

 

중국의 대표적 학자 선즈화와 1975년 동독 외교관의 해석에 따르면 1975년 4월 베이징을 찾아온 김일성은 자신이 평양에서 작성한 제2남침 계획서를 들고서 마오쩌둥의 재가를 앙망하고 있었다. 몹시 들뜬 상태에서 김일성은 “조국 통일”을 위한 제2의 침략 전쟁을 허락해 달라 읍소하고 있었다.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포기시킨 마오쩌둥

1975년 당시 이미 늙고 병든 마오쩌둥은 열일곱 살 어린 예순세 살 김일성의 간절한 부탁을 넌지시 뿌리쳤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한반도 무력 통일 가능성과 중국의 지원을 강조하는 김일성을 몸에 병이 있다며 덩샤오핑에게 떠넘겼다. 덩샤오핑은 김일성과 4차례의 공식 대담을 가졌지만, 그의 완곡어법에 숨겨진 중국 측의 의도는 명백했다. 김일성이 독자적으로 전쟁을 일으킨다면, 중국은 절대로 돕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1975년 4월 18일 베이징에서 마오쩌둥을 만나 악수하고 있는 김일성.

 

1950년 마오쩌둥이 김일성을 멸망의 늪에서 건져 준 지 24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전쟁의 명분은 항미원조(抗美援朝)였다. 항미원조란 일제를 원폭으로 멸망시킨 인류 최강의 미국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함께 공산 혁명의 길을 가는 어린 동생 같은 조선을 도와줘야 한다는 의미였다. “항미원조” 전쟁의 결과 중국은 90만이 넘는 사상자를 내야 했지만 소련을 따돌리고 한반도 북쪽 절반에 대한 전통적 영향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마오쩌둥이 중국 인민의 피로 지킨 김일성의 조선은 그때부터 소련보단 오히려 중국의 ‘리틀 브라더(little brother)’가 될 수밖에 없었다.

 

1975년 4월 김일성이 베이징에 달려가서 대남 침략을 허락해 달라 간청했던 까닭이 바로 그 점에 있었다. 전통적 중화 질서 속에서 조공국은 자국의 중대사에 대해선 천조(天朝)에 사전 보고하고, 사후 승인을 받는 절차를 걸쳐야 했다. 김일성이 베이징에 달려가서 대남 침략의 의사를 밝히고 허락을 구했던 점도 그런 맥락이었다. “주체사상”을 내세우며 민족해방과 자주노선을 금과옥조로 삼는 북한은 실제로 중국의 위성국일 뿐이었다.

 

중국의 반대 의사를 확인한 김일성은 일단 전쟁 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대남 적화 야욕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2개월 후 (1975년 6월 2~5일) 불가리아를 방문하여 지프코프(Todor Zhivkov, 1911-1998) 공산당 서기장을 만난 김일성은 마치 딴사람처럼 평화의 사설을 읊어댔다. 이 점에 관해서 김일성의 선의를 신뢰하는 한 연구자는 베이징에서 김일성이 남침 계획을 설파하던 이유가 전쟁을 일으키기 위함이 아니라 베트남 전쟁 이후 주한 미군의 병력 증강을 막기 위함이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신종대, “1975년 인도차이나 공산화 시 김일성의 북경 방문,” 동아연구 제39권 1호: 221-244). 물론 그러한 주장은 일말의 설득력도 없다. 지프코프와의 대화에서 김일성은 스스로 “남조선” 내부의 반체제 혁명 세력과 연계하여 체제 전복을 획책하고 있다고 실토하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실토, 북한이 남한 내 반체제 혁명 세력을 지도

김일성은 지프코프에게 “서방 언론들이 우리가 베트남 승리에 고무되어 남조선을 공격할 것이라고 악의적으로 보도하고 있다”면서 베이징에서 방방 뜰 때와는 정반대로 미국이 오히려 북한에 위협을 가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김일성은 북한이 당시 대한민국의 제1야당 신민당과 모종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나아가 사회주의 성향의 반체제적 지하 정치세력을 적극적으로 지도하고 있다는 놀라운 발언을 남겼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조선의) 신민당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또한 민주통일당 및 사회민주당과 함께 조국 통일의 인민전선을 구축하고 있다. 종교 지도자들도 인민전선의 구성원들로서 민주화와 조국 통일을 부르짖고 있지만, 그들 대다수는 중산층의 대표들로서 노동자·농민과의 유대나 그들에 대한 영향력도 약하다. 남조선의 마르크스주의 당인 통일혁명당은 불과 3,000명의 당원밖에 없어 수적으로 아직 취약하다. 그들은 중앙 지휘부가 있고, 지방에도 중앙집권적 지도부 조직이 구축되어 있다. 또 여러 공장에 대표들이 있지만, 그들 조직은 불법이며, 그들의 활동은 온전치 못하다. 노동자·농민 사이에서 적극적 활동을 벌이거나 박정희 정권에 대항해 공개적으로 투쟁하면 조직의 영도자들이 숙청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통일혁명당의 당원들에게 합법적인 야당의 대오에 들어가서 노동자·농민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하라 조언하고 있다.” (June 18, 1975 Information on the Talks between Kim Il Sung and Todor Zhivkov).

 

 ▲1973년 10월 평양을 방문한 불가리아 공산당 총서기 지프코프를 접견하는김일성. 2년 후인 1975년 6월 김일성은 불가리아에 답방했다 . 유튜브 캡처

 

이 중대한 발언은 1970년대 이미 대한민국 내부에 북한의 지시를 받는 사회주의 정치세력이 지하 정당의 형태로 암약하고 있었다는 북한의 “어버이 수령” 김일성 자신의 증언이다. 1980년대 대한민국 지식계와 대학가에 민족해방(NL) 계열의 소위 “주체사상파”가 독버섯처럼 급속히 퍼질 수 있었던 이념적 토양이 이미 1970년대 북한과의 직접적 연계 위에서 배태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60~80년대 김일성의 대남 도발

김일성과 지프코프의 이 회담은 박정희가 흉탄에 쓰러지기 4년 전의 일이었다. 이미 그때부터 김일성은 이미 대남 침략의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남한의 정치에 개입하고 있었다. 1980년대에 이르자 김일성은 대규모의 본격적인 군사 테러를 자행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김일성은 1950년대부터 꾸준히 군사 테러를 일으켰다. 1968년 한 해에만 청와대 습격 사건,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이 발생했다. 1974년 8월 15일에는 스물두 살의 재일교포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노리고 총탄을 난사해 부인 육영수 여사를 살해하는 테러가 발생했다. (구동독 외교문서에 따르면, 1974년 10월 25일 김일성은 그 책임을 재일교포 민단 계열의 김대중 추종자들에게 돌렸지만, 2002년 5월 13일 방북한 박근혜를 만난 김정일은 “하급자들이 관련된 것으로 사전에 알지 못했다”는 말로써 북한의 책임을 에둘러 시인했다).

 

 ▲1987년 11월 27일 북한 공작원에 의해 폭파된 대한항공 858기의 잔해. 공공부문

 

1976년 8월 18일엔 미국인 유엔군 장교를 잔혹하게 살해하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벌어졌다. 급기야 1980년대가 열리면서 김일성의 군사 테러는 더더욱 잔악무도한 군사 테러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1983년 김일성은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대한민국 정부 고위 인사 17명을 살해하는 군사 테러를 사주했다. 1987년 11월 29일 115명의 아까운 인명을 앗아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최종 책임자 역시 김일성이었다.

 

1975년 4월 사이공 함락 직전 김일성은 제2남침 계획서를 들고 베이징으로 달려갔지만,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전쟁 도발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김일성은 남한 내 사회주의 혁명 세력과 연계하여 “남조선 혁명”을 일으키는 우회적인 대남 적화 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초부터 북한 선전부는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을 격려·고무했다. 남한의 반체제 혁명 세력과의 적극적 연계를 노렸던 김일성은 1983년 아웅산에서, 다시 1987년 미얀마 상공에서 대규모 인명을 학살하는 군사 테러를 자행했다. 그럼에도 김일성의 대남 적화 전략을 따라 1980~90년대 대한민국의 대학가는 주사파의 놀이터로 전락하고 말았다. <계속>

 

〈127〉중·러 관계의 급소를 찌르는 대만 총통 라이칭더의 지략

변방의 중국몽 <45회>

▲대만 총통 라이칭더. 2024년 5월 27일 대만의 총통부에서 마이클 맥콜(Michael McCaul, Sr.) 미국 하원의원이 선물한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있다./위키 커먼스

중국의 위협에 맞서는 대만의 굴기

1992년 8월 한중 수교를 계기로 흙빛이던 반도(半島)의 ‘중국몽’은 장밋빛이 되었다. 체제와 이념과 상관없이 당시 인구 11억 6000만의 중국은 1인당 GDP 1만 달러를 향해 질주하던 대한민국에 거대한 시장을 제공할 꿈의 대륙으로 여겨졌다. 그로부터 32년, 반도의 중국몽은 빛과 그늘을 동시에 남기면서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한중 수교 32주년은 대만과의 단교 32주년이기도 하다. 1992년 8월 24일 오후 4시 서울 중국 명동의 주한중화민국대사관에서 청천백일기를 하강할 때, 대사관 경내에 세워진 중화민국의 국부 쑨원(孫文, 1866-1925) 동상 아래 모여 울면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2000여 명 대사관 직원과 화교의 손에는 “망은부의(忘恩負義)”라 적힌 플래카드가 들려 있었다. 은혜를 잊고 정의를 저버린다는 뜻이다.

 

 ▲1992년 8월 24일 오후 4시 서울 명동 중화민국대사관에서 열린 마지막 국기 하강식에 참석한 화교 여학생들은 청천백일기가 내려오자 울음을 터뜨렸다./조선DB

 

중화민국은 1930년대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물심양면 지원했고,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선 한국 독립 확약을 주도했으며, 6·25전쟁 이후엔 자유 진영의 전초기지로서 대한민국과 명운을 같이 했던 선린 국가였다. 물론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튼 당시 대한민국의 결정은 세계사의 큰 흐름에 비춰보건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일본은 1972년에 대만과 단교했고, 미국은 1979년에 단교했다.

 

다만 사전 예고도 없이 72시간 이내에 대사관을 비우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한국 정부의 당시 결정은 지나쳤다. 그 당시 주대만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이었던 조희용 전 주캐나다대사는 ‘중화민국 리포트 1990-1993: 대만단교 회고’(선인, 2022)에서 “존중·배려 결여로 상처를 입혔다”고 기록했다.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까? 여러 변명이 있겠지만, 한국 문화에 뿌리 깊은 사대주의(事大主義)도 작용했던 듯하다. 과거 종주국으로 모시던 대국이 급기야 일어났으니 그 옆에 붙은 작은 섬은 하찮게 여겨지지 않았을까.

 

대한민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로부터 매몰차게 버림받았던 바로 그 대만은 죽지 않았다. 인구 2300만의 작은 섬이지만 구매력 기준으론 세계 20대 경제 규모이며 1인당 GDP 미화 4만5000달러를 자랑하는 명실공히 선진국이다. 대만은 전 세계 반도체 60%, 최첨단 반도체의 90%를 생산하는 글로벌 공급망의 허브이다. 군사적으로도 대만은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전략적 요충지다. 일본, 한국을 거쳐 필리핀, 호주로 이어지는 자유의 도련선 한 가운데에 대만이 놓여 있다. 한국은 지금까지 중국의 그늘에서 대만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채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과연 앞으로도 지금처럼 어색한 관계에 머물러야만 할까?

중소 관계를 갈라놓는 대만 총통의 외교적 묘수

지난 9월 1일 취임 100일을 맞아 100분간 진행된 한 언론과의 대담에서 대만 총통 라이칭더(賴淸德, 1959- )는 미소 띤 얼굴로 침착하게 말했다.

 

“민주와 자유는 대만에서 이미 성장하여 번창하고 있다. 민주적인 대만이 이미 전 세계로 울창하게 가지를 치고 잎을 드리우고 있다는 점은 더욱 중요하다. 대만 인민이 누리는 민주와 자유의 생활방식을 중국이 그들에 대한 도전이라 생각할 수는 없다.”

 

이어서 그는 중러 관계의 급소를 찌르는 놀라운 발언을 이어갔다.

 

“중국이 대만을 침범하는 이유는 실상 영토를 온전하게 회복하기 위함이 아니다. 영토 회복이 목적이라면 왜 아이훈 조약(1858년) 체결로 현재 러시아가 점유하고 있는 토지는 돌려받으려 하지 않는가? 바로 지금이 러시아가 가장 약해진 상황이 아닌가? 대만을 침략하는 목적은 진정 무엇인가? 규칙에 기초한 세계 질서를 바꾸려는 의도이다. 서(西)태평양에서, 아니면 국제적으로 패권을 이루려는 의도다.”

 

 ▲2024년 9월 1일 방영된 라이칭더 대만 총통의 인터뷰. “라이총통: 영토를 온전히 보전하려면 중국은 러시아에 대해서 실지를 달라고 요구해야 한다.”/유튜브 캡처

 

중러 관계의 미묘한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서 중국공산당 대외 전략의 모순을 들춰내는 날카로운 한 수가 아닐 수 없다. 중국은 지금껏 대만이 본래 중국의 영토라면서 실지 회복의 차원에서 대만과의 통일을 중화민족의 역사적 사명이라 주장해 왔다. 진정 그러하다면 중국공산당은 왜 러시아제국에 빼앗긴 만주 동북부의 광활한 영토에 대해선 실지 회복을 주장하지 않는가? 대만은 기껏해야 면적 3만6000 평방킬로미터의 작은 섬일 뿐이다. 이에 비해 1858년 아이훈 조약과 1869년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에 넘어간 영토는 그 면적이 각각 60만 평방킬로미터와 40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대만의 27.7배, 한반도 전체의 4.54배에 달하는 실로 광활한 영토이다.

 

라이칭더는 아이훈 조약으로 넘어간 영토만 언급했지만, 1921년 소련의 승인을 받고 독립한 몽골의 영토 역시 과거 청 제국에 속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몽골 북서쪽의 탕드 우랸하이(唐努烏梁海) 지역도 과거에는 청 제국의 일부였다. 이미 독립국으로 1세기 이상 유지된 몽골을 제외하더라도 러시아가 점유하는 150만 평방킬로미터의 영토가 본래는 청 제국의 땅이었다.

 

낮은 음성으로 부드럽게 라이칭더는 시진핑을 향해 돌직구를 던진다. 날마다 국토 수복을 외치며 전의(戰意)를 다지는 중국공산당이라면 당연히 러시아가 점유하는 과거 “중국” 영토를 되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군사 전략상 시베리아 극동 지방 군대가 우크라이나 전선에 재배치된 바로 이 순간이 가장 광활한 실지를 되찾을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는가?

 

 ▲만주와 구소련의 경계선. 맨 위 주홍색 선은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 당시의 국경. 중간 갈색 지역은 1858년 아이훈 조약 때 러시아로 이양된 청의 영토, 맨 아래 분홍색 지역은 1860년 러시아에 이양된 청의 영토./공공부문.

 

물론 중국은 현재 러시아와 국경 분쟁을 벌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그 대신 라이칭더가 총통으로 취임한 후 사흘 지난 시점에 중국은 대만의 분열주의적 망동을 응징하겠다며 이틀에 걸친 대규모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중국은 대만을 향해서는 완강하게 “국토 완정(完整)”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전쟁 불사를 외쳐대지만, 정작 러시아에 넘어간 땅에 대해선 한 마디도 못하고 있는 꼴이다. 잃어버린 국토 수복을 외치면서 북방의 광활한 대륙은 방치하고서 3만6000 평방킬로미터에 불과한 작은 섬만을 위협하는 중국의 태도는 분명 모순적이다. 물론 대만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 문제를 냉철하게 지적해 왔지만, 지금까지 대만의 총통이 전 세계를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이 문제를 직접 제기한 전례는 없었다.

즉각 대응하는 러시아, 입 닫고 침묵하는 중국

라이칭더가 의도했던 결과였을까? 인터뷰 다음 날부터 로이터, 가디언, 뉴스위크 등 서방의 유수 언론들은 잇따라 그의 발언을 대서특필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계속되는 현시점에서 중·러 관계에 잠복해 온 국경 분쟁의 빌미가 수면 위로 표출됐기에 뉴스 가치가 돋보였을 수 있다. 오늘날 러시아가 과거 170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청 제국의 영토를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서방 언론인들에겐 충격적이었을 수도 있다. 당연히 서방 언론의 관심은 온통 모스크바와 베이징의 반응에 쏠렸다.

 

지난 160여 년 동안 과거 청 제국의 영토를 점유해 온 러시아는 당연히 현상 유지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은 1) “하나의 중국 원칙”을 재확인하고, 2) 중국의 일부인 대만은 베이징을 대변할 아무런 자격이 없음을 강조한 후, 3) 중국과 대만의 평화적인 통일을 기원한다고 발언했다. 무엇보다 러시아는 2004년 이미 중·러가 국경 문제에 합의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대만 분열주의자들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과의 국경 분쟁을 감당할 수 없는 러시아로선 최선의 선제 대응이었다.

 

러시아와는 달리 중국은 일단 침묵으로 대응했다. 베이징 외교부는 물론, 국무원의 대만 판공실에서도 라이칭더의 발언에 대해서 공식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9월 1일 라이칭더의 인터뷰가 방송된 후로 침묵은 닷새 동안 계속되었다. 민감한 대만 문제에 대해서 촌각을 다퉈 즉각 대응으로 일관해 온 중공 중앙이 그토록 긴 침묵을 지킨 선례도 없었을 듯하다.

 

라이칭더 발언에 대한 중국 정부의 침묵은 결코 어렵잖게 설명된다. 타이완이 공식적으로 중국 역사의 일부로 편입된 것은 1683년 강희제(康熙帝, 재위 1662-1722)가 파견한 청 제국의 군대가 명나라 수복을 내걸고 대만을 지배하던 정씨(丁氏) 왕조의 동녕국(東寧國)을 복속시킨 후부터였다. 212년이 지나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결과로 1895년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 점에도 대만은 아이훈 조약과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에 넘어간 헤이룽장 동북 지역과 다를 바가 없다. 모두가 청 제국의 실지(失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중국은 러시아에 빼앗긴 영토에 대해선 실지 회복의 의지조차 표현하지 않는가?

 

가장 난감한 집단은 “중화민족”의 “영토 완정(完整)”을 지상 명령이라면서 대만에 대한 흡수 통일을 부르짖어 온 중국 외교가 전랑들과 중국 인터넷의 신세대 홍위병 소분홍(小紛紅, 분노 청년)이다. 라이칭더는 외교 전랑과 소분홍의 논리를 그대로 차용해서 베이징의 중공 중앙을 논리적 함정에 빠뜨린 셈이다.

논리 대신 감정에 호소하는 중국

닷새가 지난 9월 5일에야 중국 국무원 대만 사무판공실의 선전국(宣傳局) 국장 천빈화(陳斌華)가 기자회견에서 라이칭더의 발언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러시아는 2004년 중러 양국이 이미 영토 문제에 합의했다는 사실을 가장 중요한 논점으로 삼았지만, 중국은 라이칭더의 질문에 대한 논리적 대구는 한 마디도 없이 늘 되풀이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만을 소리 높여 외쳤다.

 

 ▲2024년 9월 11일 중국 국무원 대만 사무판공실 천빈화 국장의 기자회견./新華社 陳曄華 제공

 

“라이칭더는 부단히 대만독립의 도발을 자행하면서 소위 ‘중국 위협’을 제멋대로 과장하고 있다. (1992년 홍콩에서 만나 ‘하나의 중국 원칙’을 천명한) ‘92 합의’를 거부하면서 외부 세력의 반중 논조에 완전히 영합하여 ‘무력으로써 독립을 획책하고(以武謨獨)’, ‘외세를 끼고 독립을 도모하고(倚外謨獨)’ 있다. 이는 완전히 대만독립의 입장에 서서 분열을 획책하는 짓거리다. 완전히 개념을 뒤집고 시비를 뒤섞는 그 일파의 망언은 대만독립을 추구하며 국가를 분열하고 대만해협의 평화를 파괴하려는 위험천만한 그들의 의중을 충분히 폭로한다.”

 

천빈화는 러시아가 점유한 실지도 회복하라는 라이칭더의 지적에 대해선 구체적 대응을 피한다. 대신 그의 주장이 “개념을 뒤집고 시비를 뒤섞는” 망언이라고 언급하고 넘어갈 뿐이다. 논쟁을 개시하면 중국이 러시아에 빼앗긴 중화민족의 실지를 회복할 의지가 없다는 사실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천빈화는 고작 대만은 국가가 아니므로 주권이 없다는 판에 박힌 주장만 거듭하면서 중국의 영토와 주권을 온전하게 지켜야 국제질서가 보위된다는 애매한 주장을 펼쳤다. 끝으로 그는 “대만의 동포”을 향해서 “민족 대의에서 출발하여 라이칭더와 민진당의 대만독립 도발에 견결히 반대하라” 촉구하며 언론과의 일문일답(一問一答)을 급히 마쳤다.

러시아령 실지 회복을 꿈꿨던 마오쩌둥

오늘날 중국공산당의 영도자들과는 달리 1960년대 마오쩌둥은 공식 외교 선상에서 19세기 중엽 러시아에 넘어간 청 제국의 옛 영토를 수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드러내곤 했다. 예컨대 1964년 9월 10일 마오쩌둥은 일본 사회당 총수와 만난 자리에서 과거 러시아가 시베리아와 극동의 캄차카반도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일방적으로 점령했다면서 중소 영토 분쟁이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상태라고 말했다. 아울러 마오쩌둥은 소련이 외몽고를 중국에 돌려주고, 쿠릴(일본어: 치시마 千島) 열도는 일본에 돌려줘야 한다는 발언까지 했다. (岡察洛夫[Sergey N. Goncharov], 李丹慧, “俄中關係中的領土要求和不平等條約,” 二十一世纪, 2004.10.)

 

실제로 중소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1969년 3월 우수리강 전바오섬(珍寶島)에서 수백 명의 인명이 희생되는 대규모 군사 분쟁이 일어났다. 그 당시 더 큰 분쟁으로 확전되진 않았지만, 우수리강 이동(以東) 지역은 중러 관계가 나빠질 때면 언제든 분쟁 지구로 변할 가능성이 있었다. 마오쩌둥의 뜻과는 달리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러시아와 1991년, 1997년, 2001년에 걸쳐서 양국의 국경선에 관한 상호조약을 체결했고, 러시아 대변인의 상기 언급대로 2004년 다시 한번 동부 지역 국경선에 관한 합의에 이르렀다.

 

 ▲1997년 7월 22일 국민대회에서 당시 국민대회 대표였던 라이칭더(왼쪽)가 “대만 독립만세”라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활짝 웃고 있다./黃子明 제공.

 

그 점을 모를 리 없는 라이칭더는 중국이 러시아에 대해선 “영토의 온전한 회복”을 포기했음을 지적했다. 그 논점에 대해서 중국 정부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다. 러시아 점유의 실지 회복을 공식적으로 포기한 2004년의 결정은 중국공산당이 지금껏 대만에 대해서 선양해 온 국토 회복의 논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중러 관계의 급소를 찌르는 라이칭더의 예리한 공격 앞에서 중국의 외교 전랑들은 말문이 막힌 듯하다. 상투적으로 거친 언사를 쏟아낼 뿐 핵심을 찌르는 논리적 반론은 한 마디도 못하고 있다.

 

대만은 2300만 인구의 작은 섬이지만 개개인의 자유와 인권은 물론 제도적 민주주의가 온전하게 정착된 선진국이다. 라이칭더가 말하듯, 대만 인민이 누리는 민주와 자유가 중국에 대한 도전일 수는 없다. 전 총리 차이잉원(蔡英文) 때부터 계속된 주장이지만, 대만은 이미 실질적으로 독립된 상태이므로 구태여 대만독립을 소리쳐 외칠 필요가 없다.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에 참여하는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이 양안의 현상 유지를 지지하는 이유가 바로 그 점에 있다. <계속>

 

〈128〉"반통일" 남북공조: 김정은 선창에 임종석 추임새

변방의 중국몽 <46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옆에서 웃고 있는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 /유튜브

 

한반도의 진정한 분단 세력은 누구일까?

지난 19일 한평생 “민족 통일”만 부르짖던 임종석 전(前) 전대협 의장이자 대통령 비서실장이 북한 국무위원장 김정은의 “반통일 2 국가 선언”에 동조하여 “통일 하지 말자”고 발언했다. 2023년 12월 말 김정은이 “미국의 식민지 졸개에 불과한 괴이한 족속”과는 “통일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지 열 달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김정은의 도발적 선언에 대응하여 2024년 신년 벽두 “슬픈 중국” 첫 칼럼은 “노예제 국가 북한에 팽(烹)당한 남한 ‘86′세대 운동권”이 나갔다. 이 칼럼은 우선 1인당 GDP가 3만 달러를 훌쩍 넘은 최첨단 산업 대국 대한민국을 미국의 식민지 졸개라 부르는 김정은의 언어도단을 비판한 뒤, 오늘날 북한이 인구의 10%를 노예로 삼은 세계 최악의 노예제 국가라는 국제 인권 단체 “워크 프리(Walk Free)”의 보고서를 소개하고, 나아가 김정은에게 버림받은 남한 “86세대” 과거 주사파 운동권이 당면한 이념적·정치적 딜레마를 지적했다.

 

김정일의 갑작스러운 통일 포기 선언으로 지난 30여년 북한과 어우러져 “우리민족끼리”를 불러왔던 역대 정권의 수장들과 통일운동 세력은 순식간에 이념적으로 파산했다. 분식 회계로 다 쓰러진 회사를 이어가다 동업자의 배신으로 부도를 맞은 꼴이랄까. 그동안 남한의 좌익 민족해방(NL) 세력은 김정은의 “반통일 2 국가 선언”에 대해 말을 아껴왔는데, 급기야 지난 목요일 그 세력의 좌장 격인 임종석이 김정은의 선언에 노골적으로 동조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그가 내세우는 명분은 다름 아닌 “평화”였다. 그는 평화를 위해서라면 통일을 먼 후세로 무한정 미룰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입만 열면 민족 통일을 외치던 그의 머릿속을 이제 “통일=전쟁”, “분단=평화”라는 새로운 등식이 점령한 듯하다. 졸지에 김정은이 평화를 수호하는 수령을 자처하고, 남한의 종북 세력은 그 수령의 교시를 떠받드는 평화의 파수꾼을 자임하는 부조리가 펼쳐졌다.

 

 ▲임종석 전 “2018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이 지난 19일 오후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9·19평양공동선언 6주년 광주 평화회의 '평화, 가야 할 그날' 행사에 참여해 기념사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지난 74년 북한은 끊임없이 한반도 평화를 파괴하고 위협하는 군사 도발을 저질러 왔다. 불과 열흘 전 기폭장치를 단 오물 풍선을 남으로 날려 보내 방화 테러를 가한 주체도 바로 북한의 김씨 왕조이다. 그러한 북한의 실체를 아는지 모르는지 “반통일 2 국가”라 외쳐대는 북한 김정은의 선창에 남한의 종북세력은 “평화 수호”란 추임새를 붙이고 있다. 왜 하필 임종석의 입에서 통일을 하지 말자는 주장이 나왔을까?

 

보통 시민들이 느끼기에 어리둥절할 수 있지만, 그런 주장의 뿌리는 실상 1980년대 남한 지식계에 들불처럼 번졌던 반미주의(anti-Americanism)에 놓여 있다. 당시 반미 세력은 미국이 핵무기로 북한을 위협하며 전쟁을 일으키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조선노동당 선전부가 바로 그런 관점에서 북한의 핵무장은 미국발 전쟁을 억지하려는 “위대한 수령”의 결단이라 선전해 왔다. 결국 “통일=전쟁,” “분단=평화”라는 임종석의 주장은 미국과 대한민국 정통 세력을 전쟁광쯤으로 매도해 온 북한식 정치선전의 재판에 불과하다.

“안보 상업주의”인가, 안보 불감증인가?

지난 반세기 대한민국의 소위 “진보” 지식인들은 안보 공포를 조장해서 정치권력을 강화하는 과거 군사정권의 “안보 상업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해 왔다. 휴전선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거나 동해안에 무장 공비가 출현할 때면 그들은 군사정권이 대중적 공포를 조장하기 위해서 악마화한 북한을 악용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선거 전후해서 벌어지는 안보 위기는 군사정권의 자작극이라는 의심을 샀다. 안보 사건이 터질 때마다 거센 음모론이 일었다.

 

대표적 사례가 1987년 11월 29일 인도양 미얀마 상공에서 터진 대한항공 858기 폭파 사건이었다. 불과 17일 후인 1987년 12월 16일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예정돼 있던 시점이었다. 선거 하루 전날인 12월 15일 체포된 범인 김현희가 김포공항에 도착하는 장면이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그 사건은 분명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고, 결과에 낙담한 세력은 두고두고 이 사건을 안기부의 자작극이라 여겼다.

 

▲1987년 11월 29 북한의 공작원들에 의해 폭파된 대한항공 858기의 잔해. /공공부문

 

결국 2004년 노무현 정권하에서 발족한 ‘국정원 과거 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3년에 걸쳐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했다. 음모론자들의 주장처럼 그 엄청난 사건이 안기부 자작극이었다면, 소위 “보수세력”은 멸절을 면치 못했겠지만, 조사위는 2007년 10월 “KAL기 폭파 사건이 북한에 의해 자행된 사건이며, 그동안 제기돼 온 ‘안기부 조작설’ 등 의혹은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전혀 없다”고 밝혔다.

 

1987년 대한항공 858 폭파 사건은 선거를 앞두고 정권을 재창출하려는 전두환 정권의 자작극이 아니라 김일성 정권의 군사 테러라는 사실이 전두환 정권을 가장 미워했던 대한민국 진보 세력의 자체 조사를 통해 재확인된 것이다. 115명의 인명을 앗아간 폭탄 테러는 전두환 정권이 아니라 김일성 정권의 무력도발이었다. 다시 말해, 그 참혹한 테러 사건은 남한의 안보 상업주의가 빚어낸 정치적 환상이 아니라 북한의 대남 적화 노선에 따른 명백한 군사적 만행이었다.

 

대한민국 헌정사의 모든 국면마다 북한의 군사 도발이 끊이지 않았다. 북한의 김씨 왕조는 민족해방의 깃발을 들고 625남침을 자행했으며 대남 적화 노선을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고서 무력도발과 이념전쟁을 벌여왔다.

이미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44회에서 소개했지만, 1975년 사이공 함락을 목전에 두고 흥분하여 베이징으로 달려간 김일성은 마오쩌둥을 향해 한반도 통일을 지원해 달라고 간청했다. 1975년 4월 19일 김일성은 베이징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인민이 지금도 갈라진 조국의 통일을 위해 전개하는 작금의 투쟁은 전 지구적 반제 민족해방 투쟁의 체인에서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입니다. 남조선에서 혁명이 발생한다면 같은 나라의 성원으로서 우리는 그저 팔짱만 끼고 방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남조선 민중을 힘을 다해 지원할 것입니다. 적대세력이 무모하게 전쟁을 일으키면, 우리는 더욱 견결하게 응전하여 침략자를 완전히 깨부술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우리가 잃을 것이라곤 군사분계선밖에 없지만, 얻을 것은 조국의 통일입니다.”(Shen Zhihua, A Misunderstood Relationship, Columbia Univ. Press, 2020; 沈志華, ‘最後的天朝,’ 香港中文大學出版社, 2018)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부탁을 거절했다. 두 달 후 (1975년 6월 2~5일) 불가리아를 방문하여 지프코프(Todor Zhivkov, 1911-1998) 공산당 서기장을 만난 김일성은 북한이 당시 대한민국의 제1야당 신민당과 모종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나아가 사회주의 성향의 반체제적 지하 정치세력을 적극적으로 지도하고 있다는 발언까지 남겼다.

 

1970년대부터 김일성이 대규모 대남 침략을 시도했으며, 1980년대부터 2010년까지 대규모 군사 테러를 자행했다는 사실은 북한의 대남 군사 위협이 현존하는 실제 위협이란 사실을 넉넉히 증명한다.

“반전반핵 양키고홈!”에서 “반통일 2 국가”로

1980년대 중반부터 남한의 대학가에 북한 김일성의 주체사상이 역병처럼 거침없이 퍼져나갔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남북한 군사 긴장의 책임은 북한이 아니라 남한의 “독재 정권”에 있다는 북한 선전부의 선전·선동이 큰 효력을 발휘했다. 지식계에 미국발 수정주의가 득세하면서 6·25전쟁도 “미(美)제국주의자들과 이승만 괴뢰도당”의 책임이라는 뒤틀리고 비뚤어진 역사의식이 만연했다. 여순반란을 민족해방 투쟁이자 통일전쟁으로 미화한 ‘태백산맥’ 같은 소설이 수만 질씩 팔리던 시절이었다.

 

 ▲1989년 제3기 전대협 의장 임종석을 환영하는 충북대 대자보. 당시 주사파 운동권은 북한의 수령론에 따라서 학생 대표에게 극존칭을 사용했다. /유튜브

 

그때 한국의 지식계엔 이념적 착란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조선노동당 선전부의 정치전이 대한민국 문교부의 공교육을 완전히 압도하던 시절이었다. 대학가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면서 공산 진영이 선의 세력이고 자유 진영을 악의 세력이라 굳게 믿는 집단이 우후죽순처럼 자라났다. 반역의 세월, 그들은 주체사상을 신봉하며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외치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노동당 선전부가 펼치는 정치전의 포로가 되어 거짓으로 환상의 산을 쌓아 올렸다.

 

1980년 중후반부터 대한민국의 좌익 운동권 세력은 “반전반핵 양키고홈!”을 외쳐댔다. 미국이 핵무기로 북한을 위협하며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는 북한식 선전술이 한국의 대학가에 여과 없이 침투했음을 보여준다. 지금도 대한민국의 소위 “진보 세력” 중에는 그 시절 그 낡은 생각을 그대로 견지하는 집단이 건재한 듯하다. “우리민족끼리”의 깃발을 흔들며 민족 통일을 지상 명령이라 외치던 북한의 김씨 왕조와 남한의 좌익 세력이 뜬금없이 의기투합하여 “반통일 2 국가”를 외쳐대는 작금의 상황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대만 독립의 논리를 훔치려는 김정은의 언어도단

김정은이 제창한 “반통일 2 국가 선언”은 일면 “대독(臺獨, 대만 독립)”의 논리 구조를 차용하고 있다. 첫째, 대만의 라이칭더는 2024년 5월 20일 취임사에서 “중화민국 대만은 독립적인 주권 국가”이며,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서로 예속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표면적으로 김정은도 통일 포기를 선언하고 한반도 “2 국가”를 선언했다. 둘째, 대만은 통일을 부르짖는 중국의 군사 위협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지난 반세기 김씨 왕조는 북한이 마치 대만처럼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려는 미국의 막강한 군사 위협에 맞서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셋째, 대만은 독립의 당위를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중국의 정치체제가 비인도적 전체주의라는 점을 들고 있다. 마찬가지로 북한은 독자노선의 명분으로 “미국의 졸개에 불과한 괴이한 족속”이라 대한민국 체제를 맹비난한다.

 

 ▲2024년 5월 20일 라이칭더 대만 총통 취임식 연설 장면. 라이칭더 총통은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서로 예속되지 않는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유튜브

 

그 점에서 김정은의 “반통일 2 국가 선언”은 북한을 독립적 주권국으로 인정해 달라는 수세적 절규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문제는 형식논리 면에서 유사성이 있을 뿐 대만과 북한이 처한 실제 상황은 원천적으로 양국의 비교를 불허한다. 대만은 전 국민에게 보편적 인권과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투명한 직접 선거로 민주적 권력을 창출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다. 아울러 대만은 전 세계 반도체의 60% 이상을 위탁 생산하는 최첨단 산업국이며, 서태평양 제1도련선 핵심에 놓인 자유민주적 국제질서의 전초기지이다.

 

반면 북한은 극단적 고립 노선으로 극빈의 늪에 빠진 최악의 인권유린국일뿐더러 핵무장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직접 위협하는 전체주의적 세습 정권에 불과하다. 김정은은 대만식 독립의 논리로 엉켜버린 “주체” 노선의 실타래를 풀어보려 하지만, 국제 사회에서 북한 노선을 지지하는 국가는 북한의 현상을 그대로 남겨두려는 중국과 러시아밖엔 없다. 그나마 최근에 김정은이 러시아에 붙으려 하자 중국은 북한 길들이기에 나선 형국이다.

 

요컨대 대만의 현상 유지는 자유, 인권, 법치, 평화, 경제적 안정을 유지하려는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기본 전략이다. 반면 북한의 현상 유지는 반자유적 인권유린, 반민주적 폭압 통치, 전제적 세습 지배를 영속하려는 전체주의 세력의 지배 전략이다. 현 상태 그대로 대만과의 공존은 진정한 세계 평화를 보장한다. 반면 북한과의 공존은 김씨 왕조만 존속시켜 주는 위장 평화만 조장한다. 지금의 대만은 전 세계에 꼭 필요한 자유민주적 모범국가(model state)이지만, 오늘날 북한은 전 세계에 외면당하는 전체주의적 불량국가(rogue state)이기 때문이다.

 

임종석은 왜 갑자기 작금의 상황에서 통일하지 말고 평화를 지키자고 외쳐대고 있을까? 김씨 왕조의 급변 사태로 한반도에 불쑥 통일이 찾아올까 두렵기 때문일까? <계속>

 

〈129〉"바보야, 문제는 북한 인민의 해방이란다."

변방의 중국몽 <47회>

▲1989년 7월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참가한 한국외대 재학생 임수경이 몰려든 북한 군중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공공부문.

칸트의 “영구평화론”: 평화적 공존의 기본 조건

“미래의 전쟁을 위해 군비를 은밀히 남겨둔 채로 체결하는 평화 조약은 절대로 유효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런 경우 조약이란 기껏 적대적 행위의 일시적 중단일 뿐, 평화를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은 근세 서유럽 계몽주의 혁명을 이끌었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1795년에 발표한 “영구평화론”의 첫 두 문장이다. 칸트의 말대로 두 나라가 영구 평화의 조약을 체결하려면 완전한 신뢰 위에서 모두 동시적으로 비무장을 이뤄야만 한다. 양국 모두 완전한 비무장을 이루지 못한다면 계약서에 어떤 규약이 적시되더라도 평화는 절대로 유지될 수 없다. 무력을 독점한 독재자는 언제든 기존의 조약을 파기하고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음을 역사가 증명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조건 위에서 두 나라 사이에 서로 동시에 무장을 해제할 수 있을 만큼의 큰 신뢰가 생겨날 수 있을까? 칸트는 그 제1의 조건으로 양국의 시민사회가 모두 공화주의적(republican) 헌법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독일의 계몽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칸트가 말하는 공화주의적 헌법이란 1) 인간으로서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자유를 보장받으며, 2) 시민으로서 모든 구성원이 공동의 법제에 의지할 수 있고, 3) 시민 모두가 평등하다는 원칙이 보장되는 주권재민의 법제를 이른다. 오늘날의 용어로 풀자면, 바로 입헌주의의 원칙에 입각한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라 할 수 있다. 칸트는 자유민주적 국가들 사이에서만 영구 평화의 조약이 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민 개개인이 독립적 주체로서 정치에 참여하여 정부를 감시하고, 정책을 입안하고,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열린 사회는 합리적으로 전쟁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으며, 그러한 국가들 사이에서만 실질적인 평화협정이 이뤄질 수 있다는 논리였다.

 

229년이 지났건만 ‘영구평화론’에 담긴 칸트의 혜안을 갈수록 빛을 더해가고 있다.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유지하는 나라들 사이에서는 인종과 문화의 차이를 넘어 장기적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음을 이미 인류는 80년 가까이 익숙하게 보아왔다.

 

비근한 일례로 세계에서 가장 긴 국경(8891킬로미터)을 맞대고 있는 미국과 캐나다의 관계를 보자. 양국은 1812년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치열한 전쟁을 치렀던 사이다. 현재 3800만을 조금 넘는 캐나다의 인구는 미국 인구의 11%에 불과하다. 미국은 수천 기의 핵탄두를 보유한 세계 최강의 군사 강국이지만, 캐나다는 군사비로 국내 총생산량의 2%도 사용하지 않아 나토(NATO, 북대서양 조약기구)로부터 군비 증강을 요구받는 군사적 약체이다. 그럼에도 미·캐 전쟁의 발발을 예상하는 군사 전문가는 없다.

 

양국은 나토 회원국으로 장기적인 동맹관계를 성공적으로 유지해 왔으며, 최대 교역국으로서 경제적 유대가 강할뿐더러 공동의 역사·문화적 유산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미국과 캐나다는 모두 자유, 민주, 인권, 법치 등 범인류적 보편 가치를 존중하는 자유민주적 체제의 국가이다. 양국 모두 개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구성원 모두가 국가의 법제에 따라 보호받으며, 평등의 원칙을 구현하는 칸트가 말하는 공화주의적 헌정 체제라 할 수 있다. 바로 그 덕분에 미국과 캐나다는 200년 넘게 평화 관계를 유지해 올 수 있었다.

북한과의 평화적 공존은 왜 불가능한가?

칸트의 ‘영구평화론’에 비춰보면, 북한과 2개의 다른 국가로서 평화적 공존을 모색하자는 정세현·이종석 등 지난 정권의 통일부 장관들과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주장은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외면하는 청맹과니의 몽상에 불과하다.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양에 가서 북한의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을 만나고 돌아와선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다”고 단언했는데, 이 역시 북한 체제의 위험성을 간과한 섣부르고, 성급하고, 무책임한 발언이었다.

 

북한은 인민 개개인이 자유롭지도, 평등하지도 않으며, 법에 의지할 수도 없는 실로 보기 드문 불량국가(rogue state)이기 때문이다. 국명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일 뿐 북한은 세습 왕조가 지배하는 공산 전체주의 체제다. 굳이 칸트의 지혜를 빌리지 않아도 북한과 같은 나라와는 아무리 그럴싸한 평화 조약을 맺어도 그 조약이 절대로 오래갈 수 없음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에 현혹당한 남한의 종북 세력을 제외한다면 정상 국가의 그 누구도 북한이란 불량국가의 대외 조약을 신뢰할 수가 없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에 따라서 오늘날 남한과 북한이 서로를 존중하며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이 반드시 갖춰져야만 한다. 첫째 조건은 영구적이고(permanent), 전면적이고(complete), 검증-가능하고(verifiable), 불가역적인(irreversible) 김씨 왕조의 비핵화이며, 둘째 조건은 70년 넘게 김씨 왕조의 가혹한 지배 아래 놓여 있었던 북한 인민의 해방이다.

 

인민을 억압하는 핵 가진 북한과 더불어 두 개의 별개 국가로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발상은 평화주의자의 천진난만한 몽상이 아니라면 종북 세력의 음험한 계략일 수밖에 없다. 상식적으로 인구의 10% 이상을 노예로 삼은 세계 최악의 노예 국가 북한의 김씨 왕조가 핵무기를 그대로 보유한 채로 대한민국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겠는가?

 

김정일의 “반통일 2 국가론”에 공조하며 “두 개의 국가를 수용하고 대한민국 헌법의 영토 조항을 바꾸자”(임종석)거나 “그 길밖에 없다”(정세현)거나 “정상적인 두 개 국가가 됐다가 통일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이종석)고 외쳐대는 지난 정권의 실세들에 대해선 딱 한 마디면 족할 듯하다. “바보야, 문제는 북한 인민의 해방이란다!”

“미제를 몰아내는” 통일에서 “북핵을 인정하는 반통일”로

1989년 6월 30일 임수경은 평양에서 열리는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참여하기 위해서 독일을 거쳐서 북한으로 들어갔다. 당일 평양 고려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그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한에서는 통일은 곧 좌경이고 용공입니다. 미국과 노태우 일당은 통일이라는 말만 들어도 이상하게 미친 듯이 발광을 합니다.”

 

 ▲임수경 의원 인터뷰./유튜브 캡쳐https://www.youtube.com/watch?v=7UoWwAeDDT8

 

임수경은 7월 1일부터 8일까지 평양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참석했다. 이어서 그는 7월 21일부터 7월 27일까지 30개국 270여 명이 참가하는 “국제 평화 대행진”에 참여했다. 백두산에서 출발하여 사리원, 신천, 개성을 거쳐 판문점까지 가는 7일간의 행진 이벤트였다. 행진이 한창 진행 중이던 7월 25일 임수경은 기자들 앞에서 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미국은 우리 민족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으며 민족의 통일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이 땅에서 45년간 우리 민족에게 범행을 저질러온 미국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다음 순간 임수경은 오른팔을 허공으로 내지르며 목청 높여 소리쳤다.

“조국 통일 가로막는 미국 놈들 몰아내자.”

 ▲유튜브 캡처. https://www.youtube.com/watch?v=7UoWwAeDDT8

 

“미국과 노태우 일당”에 대해선 거침없는 막말을 퍼붓고 미국을 민족의 생명을 위협하는 범죄 집단으로 매도한 임수경은 1980년대 주사파 운동권들이 오매불망 존경하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만났을 땐 대뜸 안기면서 손을 꼭 부여잡고 서 있는 애틋한 장면을 연출했다. 그 순간 77세 김일성과 22세 임수경의 만면엔 화기애애한 웃음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김일성이 누구인가? 1950년 스탈린의 인가 아래 소련제 중화기로 무장하고서 기습적으로 625전쟁을 일으킨 민족사 최악의 전범이다. 또한 그는 수많은 군사도발을 자행하며 대한민국을 끊임없이 위협한 공산 전체주의 정권의 수령이자 북한의 전 인민을 정신적으로 노예화한 잔혹한 독재자이다. 1980년대에도 그의 군사 테러는 계속되었다. 김일성은 1983년 10월 9일 아웅산 묘역 폭탄 테러로 대한민국의 각료와 수행원 17명을 살해하고 1987년 11월 29일 대한항공 858편에 폭탄 테러를 가하여 115명의 인명을 학살한 주범이다.

 

 ▲한복을 입고 김일성을 만나 포옹하고 있는 임수경에 관한 당시 북한의 선전물./공공부문.

 

임수경은 김일성의 실체는 전혀 몰랐던 듯하다. 당시 대학가 주사파 운동권 사이에선 김일성을 “위대한 수령”으로 떠받들며 “장군님”이란 극존칭으로 지칭하는 반역의 문화가 만연해 있었다. 그런 시대착오적 반역(反逆)의 풍조에 푹 빠져 있었기에 북으로 간 임수경은 기자들 앞에서 너무나도 당당하게 미국이 “우리 민족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으며,” “45년간 우리 민족에게 범행을 저질러온” 악의 세력으로 매도할 수 있었다. 임수경은 대한민국에서 나서 자랐지만, 그 당시 그의 머릿속은 조선노동당 중앙선전부가 장악하고 있었던 듯하다.

물론 대한민국은 김씨 왕조에 복무한 반국가 세력에 대해서도 넓고도 따듯한 자유민주적 도량을 베풀었다. 임수경은 2012년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비례대표로 금배지를 달고 국회로 입성할 수 있었는데, 2012년 6월 4일 탈북자들을 향해서 “배신자 XX들 북조선으로 돌아가라”는 막말을 내뱉어 구설수에 올랐다.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자유를 찾아서 북에서 탈출한 탈북자들이 “김일성 수령의 교시”를 저버렸다는 말이었을까?

대한민국 헌법 제4조 통일조항

대한민국 현행 헌법 제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칸트 “영구평화론”에 입각해서 이 조항을 분석해 보면, 그 정치·철학적 함의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통일을 지향해야 한다는 헌법의 준엄한 명령은 단순히 같은 민족이 다시 뭉쳐 함께 살아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발로가 아니라 공산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북녘땅에 자유와 인권을 확장해야 한다는 자유민주적 소명 의식의 천명이다.

 

대한민국 헌법이 명하는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은 “우리민족끼리”의 무조건적 단합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치 제도의 수렴과 보편 가치의 확립 없이는 민족의 대통합이 절대로 이뤄질 수가 없다. 그 점에서 헌법이 명령하는 대한민국의 통일 정책은 공산 전체주의 불량 정권의 독재 아래서 노예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북한의 인민에게 자유와 인권을 되찾아주는 적극적인 자유화, 진취적인 민주화를 의미한다.

 

그동안 대한민국 정부가 통일의 명분으로 수행했던 여러 정책 중엔 북한 인민의 고통은 외면한 채로 김씨 왕조라는 공산 전체주의 불량 정권의 존속과 강화를 돕는 편법과 꼼수가 많았다. 예컨대 정상 회담에 응하는 대가로 북한의 비밀계좌에 뒷돈을 질러주거나 탈북어민을 강제로 북송하거나 ‘대북 전단 금지법’ 따위를 입안했던 지난 정권의 몰상식한 행태는 인류 보편의 가치는 물론 대한민국 헌법 정신에서 크게 벗어난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북한의 김정은과 만난 문재인 전 대통령과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유튜브.

 

어떻게 대한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헌법의 엄중한 명령을 어기고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어기면서 오직 “우리민족끼리”라는 북한식 구호에 얽매여 감상적이고도 무원칙적 통일 정책을 추구할 수 있었을까? 정답은 바로 임종석 등으로 대표되는 1980년대 주사파 운동권의 비뚤어진 역사의식과 잘못된 가치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바로 그들이 소위 진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대북 정책을 쥐락펴락했던 막강한 권력의 자칭 “통일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칸트의 통찰대로 범인류적 보편 가치와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존중하는 국가들은 서로 전쟁을 치를 이유가 없다. 반면 장구한 세월 한 나라를 이루고 살아왔던 같은 민족일지라도 범인류적 보편 가치와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선양하는 대한민국과 그러한 가치와 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북한은 영구적 평화를 유지할 수가 없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생각하며 김정은과 더불어 “반통일 2국가”를 부르짖는 그들의 귓가에 속삭이고 싶다. “바보야, 문제는 북한 인민의 해방이란다!” <계속>

 

〈130〉북한을 '反서방' 핵기지로 삼은 중·러의 세계 전략

변방의 중국몽 <48회>

▲2023년 2월 8일 조선인민군 창설 75주년 기념식에서 모습을 드러낸 북한의 대륙간 탄도미사일/KCNA

 

올해 1월 15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불변의 주적인 대한민국을 “철저한 타국으로, 가장 적대적인 국가”로 규정하면서 전쟁 불사 의지를 드러냈다. 그는 북한 헌법에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대한민국을 완전히 점령·평정·수복하고 공화국 영역에 편입시키는 문제를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도 했다. 이후 김정일의 의중에 관해 국내외 전문가들은 다양한 해석을 쏟아냈다.

 

대내적으로 민심을 동요하게 하는 한류 문화상품의 유입을 차단하고 대민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김씨 왕조의 자구책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대외적으로 핵무장에 성공한 북한이 남한을 향해 핵무기를 앞세워 군사적 협박을 가했다는 풀이도 나왔다.

 

물론 둘 다 일리 있는 해석이지만, 그 정도 설명만으로는 “우리민족끼리”를 금과옥조로 여기며 “통일”을 지상과제로 내걸어온 북한이 돌연히 반민족적 반통일 노선을 천명하게 된 아이러니를 제대로 설명할 순 없다. 김정은이 “적대적 2 국가론”를 선언한 까닭을 밝히기 위해선 보다 거시적인 국제정치의 관점이 필요하다.

러·중·이·북 “악의 동조”와 김정은의 반통일 선언

작금의 국제정세를 보면, 러시아, 중국, 이란, 북한이 “악의 동조(the alliance of evil)”를 이루고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견고하게 유지해 온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에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2022년 2월 러시아는 민주주의 국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지금까지 지리멸렬한 지구전을 펼쳐왔다. 그때부터 러시아는 자체적으로 무기 생산량을 늘리면서도 북한, 이란에서 재래식 무기를 대량으로 수입하고 있다. 또한 중국은 러시아의 방위산업체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기계 장비, 초소형 전자 부품 등을 제공하고 있다. 미 국무장관 블링큰(Anthony Blinken)이 지적하듯, 북·중·이의 지원을 멈추면 러시아는 결코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속할 수 없다.

 

러·우 전쟁이 점점 고조되며 미궁으로 빠져들 무렵인 2023년 10월 7일 하마스는 전격적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초강수를 뒀다. 물론 그 배후에 이란이 떡 버티고 있었다. 이란은 하마스와 팔레스타인 이슬람 지하드 등의 조직에 자금과 군사 무기를 지원하고 군사 훈련 및 기밀 정보까지 제공해 왔다. 국제사회는 이란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에 대량의 군사용 드론과 미사일을 제공하는 그 대가로 러시아에게서 핵 기술과 우주 정보를 받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러시아와 이란이 결탁한 상황에서 이란이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을 뒤에서 지원한 정황이 번연히 읽힌다.

 

▲2023년 7월 19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만난 러시아 대통령 푸틴과 이란의 대통령 에브라힘 라이시(Ebrahim Raisi)/Wiki Commons

 

지난 9월 28일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폭격하여 헤즈볼라의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1960-2024)를 제거했다. 이틀 후인 9월 30일 이란이 이스라엘을 공격할지 전 세계가 예의주시하는 상황에서 미하일 미슈스틴 러시아 총리는 테헤란을 찾아가서 이란 대통령 마수드 페제시키안과 만났다. 공식적으로 양국은 원전, 무역, 농업 등 양국 간 협력 방안 등을 논의했다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공동 대응이 더 급박한 의제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국제정치의 큰 그림을 보면, 김정일의 “적대적 2 국가론” 선언 역시 성마르고 난폭한 한 독재자의 독단적 결정이 아니라 러·중·이·북 “악의 동조” 속에서 이뤄진, 치밀하게 계산된, 북한의 군사·외교적 전술이라 점을 알 수 있다. 북한은 “우리민족끼리”의 “조국 통일”이라는 김일성의 지상명령을 폐기하는 대신 러·중·이와 결탁하여 反서방 연대를 이룸으로써 정권 유지를 할 수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 점에서 김정일의 반통일 선언은 대한민국과 미국 등 자유 진영보다는 러시아, 중국, 이란을 향한 메시지라 볼 수도 있다. 남한과 물밑에서 민족적 화합 따위를 도모하지 않겠으니 4국의 반서방 연대로 부디 휴전선 이북의 북한 땅을 흔들림 없이 지켜달라는 간청인 셈이다.

북한을 반서방 핵기지로 삼은 중국과 러시아

물론 중국과 러시아으로선 남북한의 확실한 분열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북한 정권이 혹시라도 베트남식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대한민국의 경제에 통합되는 상황을 가장 확실하게 막는 방법은 그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 참가 의지를 꺾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이탈을 용납할 수 없듯, 중국 역시 북한이 자유 진영으로 넘어가는 상황을 방치할 수 없다. 중국에 있어 북한의 존재는 ‘이를 가린 입술’ 정도가 아니라 자유의 도도한 물살을 막는 든든한 댐과도 같기 때문이다.

 

2003년 이래 6자회담의 외교 쇼를 펼치면서도 중국과 러시아는 실상 북한의 핵무장을 방조했다. 북한의 핵무장을 실질적으로 방조함으로써 러시아와 중국은 대한민국, 일본뿐만 아니라 인도-태평양 지역 자유 진영을 향한 핵 단추를 갖게 되었다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북한은 중·러의 지원 없이는 단 하루도 견딜 수 없는 중·러의 괴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에서 북핵은 미국발 전쟁을 막는 정당 방어용 무기가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이라는 괴뢰 정권을 이용해서 자유 진영을 위협하는 대량 살상용 무기이다. 반서방 연대의 전초기지로서 북한은 실질적으로 중국과 러시아에 핵기지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2023년 9월 13일 러시아 아무르주에서 만나 악수하는 김정은과 푸틴./Wiki Commons

 

현재 일각에선 북·중 갈등을 과장하고 있지만, 중·러 사이에서 생존의 방도를 모색하는 북한은 절대로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중국과 마찰을 빚는 김정은의 모든 언행은 중국이 관용하는 범위 내에서 벌이는 자주의 제스처에 불과하다. 2024년 7월 21일 발표된 코트라(KOTRA)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북한은 대외 무역의 98.3%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지난 6월 김정은은 평양에서 푸틴을 만나 러시아를 끌어당기며 중국에 슬쩍 밀치는 듯한 모양새를 취했지만, 북한의 대중 의존성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그 모든 행동이 실은 외교적 연막이라 여겨진다.

 

북한의 대중 경제의존도를 보면, 김정은은 절대로 시진핑을 거스를 수 없음이 자명하다. 마찬가지로 시진핑은 절대로 김정은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만약 북한에 반중·친미 정권이 선다면, 1950~1953년 “항미원조(抗美援朝)”의 구호 아래 90만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면서 중국의 영향권에 묶어둔 “조선”이라는 번국(藩國, 울타리 국가)이 송두리째 날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의 김일성 정권을 지켰다는 점에선 현재 러시아도 구소련에서 계승한 지분을 갖고 있다. 중·러는 모두 북한이 자유 진영에 맞서는 반서방 동맹의 전초기지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

 

▲2023년 6월 25일 평양에서 열린 “6·25 미제 반대 투쟁의 날 군중대회”./Wiki Commons

 

바로 그 점에서 중국과 러시아는 겉으로는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노력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북한 정권의 존속을 보장하기 위해서 핵무장을 방조했을 개연성이 높다. 중·러의 묵인과 방조 위에서 핵무장에 성공한 북한은 그 대가로 국제사회의 제재에 부딪혀 개혁개방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극단적 고립주의를 견지하고 있다. 그 결과 김씨 왕조와 소수 엘리트를 제외한 북한의 모든 인민은 인간의 기본권을 박탈당한 채 궁핍하고 노예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북한의 핵무장은 그렇게 중·러·북의 동조가 만들어낸 한반도의 최대 비극이다. 돌려 말하면, 러·중·이·북의 동조가 해체되지 않는 한 북핵 문제는 절대로 해결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군사력 강화에 맞서는 미국의 전략은?

러·중·이·북 4국의 “악의 동조”가 강화되는 현실에 직면하여 최근 미국의 조야에선 점점 가속되는 중국의 군비 강화에 대항하여 미국의 군사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1930년대 독일·일본·이태리 3국의 추축국 동조가 이뤄질 때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무기고(the arsenal of democracy)”를 확충해야 한다면서 군사비를 대폭 증강했다. 미국 전략 국제 센터(Center for Strategic & International Studies)의 방위안전부 대표 세스 G. 존스(Seth G. Jones)는 지난 10월 2일 포린어페어스 기고문 “중국은 전쟁 준비 완료(China is Ready for War)”에서 바로 지금 이때가 미국이 다시 한번 루스벨트의 선견지명을 발휘할 때라고 주장한다. 그의 논거는 다음 일곱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10년 전까지도 중국은 세계 100위권에 드는 방산 기업을 갖지 못했지만, 지금은 세계 10대 기업(방위와 비방위 합산) 중 중국 기업이 네 개나 포함되며, 1위와 2위가 모두 중국 기업이다. 둘째, 중국의 방위 산업은 단순한 양적 팽창에 머물지 않고, 지속적인 연구·개발을 통해 지휘, 조정, 통신, 전산, 사이버, 정보, 감시, 정찰 등 모든 분야에서 최첨단의 군사 장비와 시스템을 구축한 상태이다. 셋째, 특히 중국의 해군력은 놀라운 발전을 이뤘다. 중국 해군력이 아직 미국에 비하면 뒤처져 있는 분야가 없진 않지만, 세계 최고의 조선 기술을 가진 중국은 장기전에선 미국보다 유리할 수 있다. 넷째, 공군력에서도 중국은 미국을 무섭게 추격하고 있다. 다섯째, 미사일 경쟁에서도 중국은 2030년까지 1,000기 핵탄두 보유를 목표로 빠르게 내닫고 있으며, 탄도·크루즈·하이퍼소닉 등 다양한 미사일을 비축해 가고 있다. 여섯째, 우주 산업에서도 중국은 놀라운 성과를 드러내고 있다. 2023년에만 67회로 세계 최다의 우주 발사를 실행했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육군은 세계 최강의 지상 병력을 자랑한다.

 

▲2017년 9월 중국인민해방군 창설 90주년 기념식./Defense Intelligence Agency

 

존스에 따르면 가장 심각한 문제는 중국의 군사력은 이미 최강의 헤비급으로 성장해 있음에도 미국 정부는 최강국의 안일함에 빠져서 사태의 심각성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존스는 국방부는 방산 시스템의 고질적 병폐화 불합리를 일소해야 하고, 의회는 주요 군수품 확충을 위한 다년간의 예산을 편성하고, 펜타곤은 전문 인력의 훈련과 재교육을 위해 방위산업체에 지원금을 제공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아울러 그는 미국이 이미 위축된 조선산업을 시급히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정부를 향한 존스의 경종은 대한민국 정부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듯하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핵무장에 성공한 전체주의 국가의 군사적 위협에 직접 노출돼 있다. 그럼에도 지난 한 세대 대한민국은 감상적 민족주의와 투항적 평화주의에 함몰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대한민국 국군통수권자가 핵무장에 혈안이 된 북한 정권에 거액의 뒷돈을 질러주고는 “더 이상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고 호언장담할 수 있었을까?

김정은의 “반통일 2국가론”은 북한이 러시아, 중국, 이란과 더불어 이룬 “악의 동조”에 기초하고 있다. “악의 동조”를 믿기에 김정은은 민족의 통일 대신 “가장 적대적인 국가”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적 점령·평정·수복까지 말하고 있다. 지금도 북한 노선을 맹종하는 정치 세력이 준동하고 있는데, 한미동맹만 믿고 안보 위기를 망각해 버린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과연 무사하다 할 수 있을까? <계속>

 

#송재윤의 슬픈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