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속의 雜事 2024-3/
07.01 북한군 사진과 기록으로 본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의 진실
좌파의 날조, 우파와 국방부의 게으름이 ‘학살 괴담’ 키워
⊙ 한강 인도교 폭파 당시 현장에 있던 미국 기자 3명 중 ‘민간인’ 언급한 이는 한 사람뿐… 민간인 숫자가 기억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적었다는 뜻
⊙ ‘제방도로 위 군중을 포함해 4000명이 있었다’가 좌파들에 의해 ‘4000명 폭사 및 익사’로 날조돼
⊙ 라이트 대령, 하우스만 대위 등 미 군사고문단 주장자들 인도교 현장에 없어
⊙ 북한이 작성한 ‘서울 한강교에서의 적의 파괴 및 국방군의 참살 장면’… ‘민간인 학살’이라고 할 만한 상황 없었음을 보여줘
⊙ 국방부, 현장 보지 못한 미군의 추정치를 ‘목격자’에 의한 것으로, ‘people’과 ‘인원’을 ‘피란민’으로 둔갑시켜

▲미군이 노획한 북한군 사진. 인도교 위 상황을 ‘국방군의 참살 장면’이라고 적어놓았다. 사진=국립중앙도서관
아무도 뭐라고 지시도 하지 않았고 검열도 하지 않았지만,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은 금기(禁忌) 사항이다. 아니, 금기가 아니라 ‘논외(論外)’다. 토론이나 논쟁 대상이 아니라 당연시되는 팩트가 됐다.
좌파(左派)에서는 민간인 수백 명이 국가 폭력으로 희생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우파(右派)에서는 전시 상황에서 벌어진 불가피한 희생이라고 말한다. 사건이 벌어진 지 74년이 됐지만 이 두 가지 주장에서 50cm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다. 좌파는 희생자 수치를 증명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파는 그 좌파 논리를 파괴하거나 뛰어넘는 반론(反論)을 내놓지 못한다. 늘 방어적이다.
피해자가 됐건 가해자가 됐건, 이는 사건 당사자인 대한민국 국방부가 초동 조사를 하지 않은 탓이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상황에서 현장을 조사할 방법이 없었다. 그사이에 현장은 물과 세월에 휩쓸려갔고, 사건 실체는 지금까지 미궁(迷宮) 속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좌파는 사건 초기 몇몇 증언자(‘목격자’가 아니다)의 증언을 부풀려 피란민 500~800명이 희생된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규정했다. 실체를 알 방법이 없는 우파에서는 이 같은 공격적인 주장을 팩트로 인정해버리고 이를 해명하고 변명하는 데 급급해왔다. 이게 이 인도교 폭파 사건 실체 규명이 74년째 한걸음도 진전되지 못한 이유다.
우파의 게으름과 비겁
좌파의 주장을 당연시해온 우파의 게으름과 비겁함이 가장 큰 원인이다.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사료(史料)가 엄연하게 존재하는데 우파는 이를 방치해왔다. 대표적인 사료가 당시 폭발로 죽을 뻔했던 미국 종군기자 3명의 기록이다. 이들 기록을 꼼꼼히 분석하면 어느 정도 실체가 보인다. 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촬영한 사진들이 남아 있다. 없다가 나타난 게 아니라 애당초 한국과 미국 기록보존소와 신문 매체에 70년 넘도록 보관돼 있던 자료다. 이들 자료를 분석하면 지금까지 좌파들이 주장해온 ‘피란민 500~800명 학살’이 얼마나 허망한 괴담인지 바로 알 수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30분에 벌어진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을 재구성해보았다. 근거는 미국 국가기록보존소(NARA)와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돼 있는 당시 사진과 자료, 그리고 대한민국 국방부가 시차를 두고 펴낸 6·25 전쟁사, 당시 미국 언론인이 쓴 단행본 등이다. 결론은 이러하다.
첫째, 폭파 사건 당시 희생된 사람들은 군인과 경찰이다. 민간인 희생자는 없거나 극소수다.
둘째, 500~800명이라는 희생자 수는 과장이다. 이는 현장에 없었던 미국 군사고문단 장교들의 상상에서 나온 숫자다.
셋째, ‘민간인 대량 학살’이라는 괴담의 진앙지는 대한민국 국방부다. 좌파가 선동하는 ‘인도교 폭파 사건=민간인 학살극’이라는 논리는 다름 아닌 대한민국 국방부가 제공했다. 이제 보겠다.
짚고 넘어가야 할, ‘런승만’

▲(왼쪽) 이승만이 대전 방송을 숨기라고 했다는 괴담의 원전인 《방송야사》.
오른쪽) 《방송야사》 해당 부분. 전형적인 전시 방송 매뉴얼이다.
본론에 뛰어들기 전에 꼭 짚어야 할 사실이 있다. ‘런(run)승만’이라는 황당한 단어다. 런승만 괴담 요체는 이렇다.
“자기는 대전으로 달아나놓고 6월 27일 대전에서 방송을 했는데, 이승만이 ‘대통령이 대전에서 방송한다는 사실을 서울 시민이 모르게 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의정부를 국군이 탈환했으니 안심하라’고 방송했다.”
수많은 대중이 팩트라고 알고 있는 이 대전 연설에 대해서 좌파는 당시 대전 방송 실무자였던 KBS 원로 방송인 유병은의 저서를 인용한다. 저서 제목은 《방송야사》다.
우파 가운데 이 《방송야사》 원문을 본 사람이 있는가.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원문은 이렇다.
〈이승만 대통령은 잠시 후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1. 이 방에서 내가 밤 9시에 방송을 하도록 준비할 것.
2. 내가 방송하는 것을 서울로 보내 전 국민에게 알리도록 할 것.
3. 방송이 나가기까지는 누가 어디서 무슨 내용의 방송을 할 것인지는 절대 누설하지 말고 비밀에 부칠 것.
4. 방송 내용을 녹음해서 오늘 밤에 여러 번 반복 방송할 것〉(유병은, 《방송야사》, KBS문화사업단, 1998, p184)
이게 ‘서울 시민이 모르게 하라’는 지시로 읽히는가? ‘방송 전까지는’ 방송의 주인공이나 내용을 기밀로 하고 ‘송출 전력이 대전보다 높은 서울로 보내 방송을 하라’는 지극히 정상적인 전시 방송 원칙이다. 이 같은 ‘필드 매뉴얼’을 좌파는 ‘비겁한 방송’으로 뒤집어버렸다. 이 책 원문을 보면 이 좌파의 선동이 얼마나 거짓인지 금방 알 수 있었음에도, 우파는 이를 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좌파의 준동은 이 우파의 비겁한 게으름이 원인이다. 게다가 이 《방송야사》 저자는 이렇게까지 기억한다.
〈뜻밖에도 방송 첫머리에서 “아군은 이미 의정부를 탈환했습니다”로 이어져 결론은 “아군은 서울을 사수할 것”이라는 명백한 결의를 표명하면서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로 끝을 맺었다.〉(유병은, 앞 책, p186)
이승만의 대전 연설에 이런 내용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미국 정보부서에서 만든 대전 방송 녹취본은 ‘의정부를 탈취당했다’로 시작해 ‘침착한 전쟁 임무 수행’으로 끝난다. 우파에서 1998년 출판된 이 《방송야사》를 한 번이라도 읽었다면 ‘런승만’ 괴담은 지금만큼 위세를 부리지 못했으리라고 본다.
‘피란민 4000명 폭사’?
“애꿎은 민간인들이 그 ‘런승만’ 지령에 의해 폭파된 다리 위에서 학살됐다”는 게 지금 좌파들이 말하는 인도교 사건이다. 대표적인 좌파의 주장들을 보자.
“피란민들의 사지가 찢겨 허공을 날아 강물로 떨어질 때”(2023년 6월 28일 ‘오마이뉴스’), “피란민 500~800명가량이 폭살되거나 한강에 빠져 익사”(2022년 12월 7일 《한겨레》), “인도교 위에서 국가로부터 살해당한 수만 수천 명을 헤아린다”(2022년 6월 25일 《한국일보》). 독립기념관장을 역임했던 전 신민당보 《민주전선》 편집인 김삼웅은 “다리를 건너던 피란민 4000여 명이 현장에서 폭사하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고 ‘민간인 4000명 사망’을 주장한다.(김삼웅, 《이승만 평전》, 두레, 2020, p264)
지옥이다. 적게는 500명, 많게는 수천 명 혹은 구체적으로 4000명이 이 다리 위에서 ‘사지가 찢겨 강물로 떨어져’ 죽었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묻겠다. 김삼웅은 도대체 뭘 보고 이런 지옥도를 그렸는가. 《한국일보》는 도대체 어떤 근거로 수천 명이 국가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주장하는가. 팩트를 몰랐다? 그러면 게으른 거다. 팩트를 알았다? 그렇다면 사악한 것이다. 이제 왜 저들이 게으르고 사악한지 똑바로 들여다보자.
‘자기네 병사 수백 명을 죽였다’

▲크레인의 1950년 6월 29일 《뉴욕타임스》 기사. ‘자기네 아군 수백 명을 죽였다’고 보도
사건 당시를 말해주는 증언은 굉장히 많다. 어떤 사람은 중지도(현 노들섬 중심)에서 목격했고 어떤 사람은 강 남쪽과 북쪽에서, 어떤 사람은 인도교 서쪽 한강철교 위에서 폭파 장면을 목격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목격 정도가 아니라 폭발이 일어난 바로 그 다리 상판 위에서 죽다 살아났다.
죽다 살아난 사람들은 미국 기자 3명이다. 이름은 키스 비치(Keyes Beech, 《시카고 데일리 뉴스》), 버턴 크레인(Burton Crane, 《뉴욕타임스》)과 프랭크 기브니(Frank Gibney, 《타임》)다. 이 세 사람의 기사와 저서를 종합하면 이들이 중지도에서 노량진 쪽 첫 번째 상판 중앙에 진입했을 때 다리가 폭발했다. 지프 앞에 있던 크레인과 기브니는 부상을 당했고 뒷자리에 있던 비치는 무사했다.

▲기브니가 쓴 1950년 7월 10일 《타임》 기사. 상판 위 정체 상황에서 폭발했다고 썼다.
강 북쪽으로 후퇴한 이들은 28일 오전 수원으로 탈출한 뒤 전황 파악차 도쿄에서 날아온 맥아더의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가서 기사를 송고했다.(마거릿 히긴스(Marguerite Higgins), 《WAR IN KOREA》, Double day&Company, 1951, p31) 이 가운데 한 기사가 크레인이 6월 29일 자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기사다.
“한국군이 다리를 폭파해 자기네 병사 수백 명을 죽였다(They blew up the bridge, killing several hundreds of their own soldiers).”(1950년 6월 29일 《뉴욕타임스》)
이 상황이 오기까지 기브니는 1950년 7월 10일 자 주간지 《타임》에 이렇게 썼다.
〈다리를 반쯤 지났을 때 우리는 앞에는 6x6 트럭, 뒤에는 여러 지프 사이에 끼여 옴싹달싹하지 못했다. 우리는 지프에서 내려 차가 막힌 이유를 알아보려고 걸어갔다. 하지만 쏟아져 나오는 피란민들로 인해 불가능했다. 우리는 지프로 돌아와 대기했다. 아무 경고도 없이 하늘이 오렌지색 화염으로 밝게 작열했다. 곧바로 우리 바로 앞에서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났다. 우리 지프는 15ft 뒤로 날아갔다.〉
크레인, ‘민간인’ 언급

▲키스 비치의 단행본. 끊어진 상판으로 향하는 장면 서술이다.
차량 전진이 멈추고 잠시 뒤 폭약이 터진 상황은 크레인과 《시카고 데일리 뉴스》 기자 비치 글이 일치한다. 크레인과 기브니는 이 폭발로 머리와 얼굴이 피투성이가 됐다. 뒷자리에 있던 비치가 차에서 내려 상황을 살폈다.
〈나는 트럭 잔해와 탑승자들을 지나 다리 끝으로 걸어갔다. 75ft 아래 검은 한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지프를 버리고 다리를 걸어 나왔다.〉(키스 비치, 《TOKYO AND POINTS EAST》, Double day&Company, 1951, p114)

▲크레인이 《라이프》에 기고한 기사. ‘민간인 희생’이 언급돼 있다.
비치는 소속한 신문은 물론 1951년 출판한 위 단행본에서도 ‘사망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 장면에서 그가 언급한 ‘사람’은 ‘트럭 탑승자들(passengers)’이 유일하다. 이런가 하면 《타임》 기자 크레인은 자매지인 주간지 《라이프》 기사에서 ‘민간인’을 언급했다.
“우리 앞 트럭에 있던 병사들은 다 죽었다. 시체는 물론 죽어가는 사람들이 다리 위에 흩어져 있었는데, 개중에는 군인만 아니라 민간인도 있었다(civilians as well as soldiers).”(1950년 7월 10일 자 《라이프》)
현장에 근접한 사람일수록 기억은 구체적이다. 그리고 근접할수록 기억의 범위는 좁다. 비록 기록과 관찰이 직업인 기자들이지만, 본인이 사고 당사자로서 혼돈 상태에서 끄집어낸 기억은 파편적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동료였던 종군 여기자 히긴스에 따르면 이들이 기사를 작성한 곳은 한국이 아니라 맥아더 항공기에 동승해 후퇴한 일본이었다. 그사이 세 사람의 기억은 서로 상이할 수밖에 없다.
단 중요한 사실이 있다. ‘민간인’을 언급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 《타임》 기자 크레인밖에 없다. 그것도 6월 28일 도쿄에서 송고한(기사에는 ‘수원에서’라고 돼 있지만, 같은 기자인 필자 경험상 이는 현장성을 강조하기 위한 표기로 보인다) 첫 번째 기사에는 이 민간인 언급이 없다가 7월 10일 자 《라이프》지 기사에만 언급이 돼 있다.
민간인 숫자가 기억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적었다는 뜻이다. 심리상태나 기억을 회복하고 안정된 상태에서 재작성한 기사에나 ‘아, 민간인도 있었지’라고 떠올릴 정도로 적었다는 뜻이다.
‘제방에 있던 인원’이 ‘폭사·익사자’로 둔갑

▲로이 애플먼의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1961). ‘인명 피해 500~800명’이라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앞에 소개한 민간인 학살극 주장은 근거가 뭘까. 일단 김삼웅이 말하는 ‘4000명 폭사’의 근거를 보자.
〈정보에 가장 밝은 미군 장교들은 500~800명 정도 사람들이 폭사하거나 익사했다고 추정한다. 이 숫자의 근 두 배에 이르는 사람들이 붕괴되지 않은 다리 위에 있었고, 4000명 정도 사람들이 서울 쪽 강안에 있는 긴 제방도로 위에 있었다.’(The best informed American officers in Seoul at the time estimate that between 500 and 800 people were killed or drowned in the blowing of this bridge. Double this number probably were on that part of the bridge ever water but which did not fall, and possibly as many as 4000 people altogether were on the the bridge if one includes the long causeway on the Seoul side of the river).〉(로이 애플먼(Roy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Department of The Army, 1961, p33)
미국 군사(軍史) 학자 로이 애플먼이 당시 미국 군사고문단 장교들을 인터뷰해 작성한 기록이다. 이 기록에는 ‘제방도로 위 군중을 포함해 4000명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 총수’가 좌파에 의해 ‘4000명 폭사 및 익사’로 날조된 것이다.
아래 사진은 1940년 조선총독부가 만든 〈대경성명세도〉(서울역사박물관) 세부다. 일본군 초소(해방 후에도 재활용했다) 남쪽에 동서로 제방도로가 나와 있다. 이 길에 있던 군중과 용산~중지도 구간 다리 위에 있던 군중을 포함하면 현장에 있던 사람이 4000명이라고 애플먼이 장교들 추산을 인용한 것이다.

▲총독부 제작 1940년 〈대경성명세도〉 부분. x 표시가 초소, 그 남쪽에 제방도로가 나 있다.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지도가 됐든 애플먼 책이 됐든 이런 1차 사료를 우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은 탓에 좌파의 날조된 주장은 ‘서사(敍事)가 있는’ 파괴력으로 대중에게 유통돼 왔다.
서울시의 동판 교체

▲지난 6월 사건 현장인 서울 한강대교에는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박원순 시장 때인 2016년 서울시가 한강대교 북쪽 끝 인도에 설치한 동판(銅版)이 교체된 것이다.
이 동판은 당시 서울시가 ‘서울의 근현대 흐름 속에서 벌어졌던 인권 탄압과 이에 맞서 저항했던 인권 수호의 생생한 역사를 품고 있는 38곳’에 설치한 ‘서울시 인권현장 표지석’ 가운데 하나다. 역사적인 의미보다는 ‘인권’과 관련한 의미를 되새기겠다는 상징물이다.
그때 한강대교에 처음 설치했던 동판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한강 인도교 폭파 현장. 6·25 발발 직후 정부의 일방적인 교량 폭파로 피란민 800여 명 사망 - 인권 서울〉
교체된 동판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 6·25 발발 직후의 교량 폭파로 군중 500~800명의 인명 피해 추정 - 인권 담당관〉
국가의 폭력적 조치를 뜻하는 ‘일방적 폭파’라는 표현이 삭제됐고 ‘피란민’이 ‘군중’으로 바뀌었다. 피해 숫자에도 오차 범위가 생겼다. ‘사망’이라는 단정 대신 ‘피해 추정’으로 바뀌었다.
‘엄청난’ 변화다. 앞에 소개했던 전형적인 좌파 주장이 제법 그럴싸한 신중하고 객관적인 내용으로 바뀌었다. 물론 서울시가 포기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다. 동판 형태다. 서울시에 따르면 이 역삼각형 디자인은 ‘국가 폭력의 현장’을 뜻한다. 내용과 무관하게 서울시는 이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이 국가가 저지른 폭력이라는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과연 그런지 이제 보겠다. 뒤에 말하겠지만, 이 또한 대한민국 국방부가 책임져야 한다.
북한군이 증명하는 인도교 사건

▲미군이 노획한 북한군 사진. 4·3 사건을 주도한 이덕구 시신 공개 장면이다. ‘학살당한 애국자’라고 돼 있다. 사진=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은 미국기록보존소가 수집한 인도교 폭파 직후 북한군 촬영 사진들을 공개 중이다. 모두 17장으로 구성된 이 사진 묶음은 미군이 평양을 접수하면서 노획한 문서들 속에 들어 있다. 지난 2016년 수집해 공개한 이 사진들에 북한 당국은 ‘적에 의하여 학살된 애국자의 시체’라고 제목을 만년필로 적어놓았다.
17장 모두 잔인하게 죽은 민간인이 찍혀 있는 사진이다. 북한은 이들 사진을 대남 및 자체 선동 도구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학살한 애국자의 시체를 강제로 인민들에게 관람시키는 광경’이라고 적혀 있는 사진 속 인물은 4·3 사건 때 남로당 제주도당 반란군 인민유격대 2대 사령관 이덕구다.
이들 가운데 인도교 폭파 직후로 추정되는 현장 사진 세 장이 있다. 당시 폭파로 붕괴된 상판은 중지도(노들섬)에서 노량진 쪽으로 두 번째와 세 번째 상판이다. 사진은 첫 번째 상판 상황이다. 2번, 3번 상판 상황은 이 사진들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파괴된 트럭과 지프에 쓰러져 있는 시신들이 보인다. 왼쪽으로 지프 앞바퀴, 가운데에 트럭, 그 너머 짐을 실은 트럭, 그 뒤로 완전히 찌그러진 차량들이 보인다. 눈대중으로 보면 시신 숫자는 15~16구 정도다.

▲미군이 노획한 북한군 사진. 인도교 위 상황을 ‘국방군의 참살 장면’이라고 적어놓았다. 사진=국립중앙도서관
그런데 이들은 하나같이 군복을 착용하고 있다. 오른쪽 아래 경찰 정모와 한 시신 하반신이 보인다. 또 다른 사진에는 더 남쪽 장면이 촬영돼 있다. 파괴된 트럭 옆과 뒤로 시신들이 쓰러져 있다. 선 세 개가 그어진 헌병 철모도 보인다.
일단 이 사진들만으로도 희생자는 경찰 77명밖에 없다는 주장은 잘못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진 속 인물들은 한 번도 신원을 파악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사진들은 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인도교 현장 사진에 붙은 제목은 ‘학살된 애국자’가 아니다. ‘서울 한강교에서의 적의 파괴 및 국방군의 참살 장면’이다.
이게 무슨 뜻일까. 바로 “북한군 자신들이 민간인 희생자를 찾지 못했거나 ‘학살’이라고 선동할 수 없을 만큼 적었다”는 뜻이다. 민간인 희생자가 절대다수였다면 이승만을 ‘괴뢰’라고 부르고 6·25를 ‘해방전쟁’이라고 우기는 북한에 폭파 사건은 ‘민간인 대량 학살’ 선전용으로 최고의 장면이다. 만일 북한군이 민간인 피해를 목격했다면 촬영을 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그리고 사진들 제목을 ‘국방군 참살 장면’이라고 붙였을 이유가 없다.
자기들이 민간인이 아님을 확인했으니까 국방군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적어도 북한은 ‘민간인 대거 희생’이라는 주장을 빼도 박도 못 할 사진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만 평전》을 쓴 김삼웅 주장처럼 ‘민간인 4000명’이 죽었다면 그 유족이 있어야 하는데 2024년 6월 현재까지 유족이라고 밝힌 사람도 없다.
미 군사고문단 장교들, 현장에 없어
‘대량 희생’을 처음 언급한 사람은 미국 여기자 마거릿 히긴스다. 1951년 히긴스는 “미 군사고문단 라이트 대령이 ‘한국군이 자기네 사람(their own men) 수백 명을 죽였다’고 말했다”고 기록했다.(히긴스, 앞 책, p26) 10년 뒤 1961년 미국 군사학자 애플먼이 장교들 인터뷰를 토대로 ‘사람(people) 500~800명이 폭사 혹은 익사했다’고 기록했다. 인터뷰한 사람은 라이트 대령, 하우스만 대위 등 군사고문단 장교들이다.
그런데 이 기록은 문제가 있다. 라이트는 다리에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히긴스와 함께 용산에서 출발한 라이트는 히긴스 앞에서 지프로 이동하다가 곧 히긴스 일행에게 돌아왔다. 다리에 오르지도 못하고 폭파 사실을 알고 화를 내면서 돌아왔다.(히긴스, 앞 책, p25) 하우스만은 폭파 7분 전 이미 다리를 건너갔다.(애플먼, 앞 책, p33)
다시 말해서 이들은 ‘목격자’가 아니다. 현장 상황을 보지 못한 간접 증언자들일 뿐이다. 그런 사람들이 피해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저 500~800명이라는 숫자는 ‘현장에 없었던 사람들의 추정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1977년 대한민국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는 《한국전쟁사》 1권에 “손실이 인원(人員) 500~800명에 이른 것으로 ‘목격자’에 의해 추산되기도 하였다”라고 서술했다.(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1, 1977, p547) 현장에 없던 저 ‘간접 증언자’들이 ‘목격자’로 바뀐 것이다. 이뿐 아니다. 1995년 국방부가 새로 편찬한 대중용 전쟁사, 《한국전쟁》 상권에서는 또 바뀌었다. 이 책은 과감하다.
〈약 500~800여 명으로 추정되는 ‘피란민들’이 희생되었다.〉(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 上, 1995, p161)
책 주석에는 이 서술 출처를 ‘애플먼 책과 1977년 《한국전쟁사》’라고 적어놓았다. 두 책을 인용했다고 밝혔는데, 두 책에 나온 ‘people’과 ‘인원’이 ‘피란민’으로 둔갑했다. 이게 ‘인용’인가, ‘창작’인가.
괴담의 계보, 국방부

▲초기 미국 기록부터 대한민국 국방부 전사(戰史)까지 ‘인명 피해’가 ‘피란민 희생’으로 바뀌어 온 과정. 그래픽=송윤혜
일단 북한군 사진으로 판단하면 500~800명은 과장이다. 차량이 빽빽하지도 않고 시신 숫자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현장을 보지 못한 미군이 내놓은 ‘아군 수백 명 사망’이라는 추정치가 10년 뒤인 1961년 미국 전쟁사가에 의해 ‘사람 500~800명 폭사 혹은 익사 추정’으로 바뀌었다.
16년 뒤 1977년 대한민국 국방부는 이를 인용하며 ‘목격자 추산’으로 바꿔놓았다. 다시 18년 뒤 1995년 그 국방부는 ‘사람[人員]’이라는 단어까지 ‘피란민’으로 바꿔버렸다. 민간인 여부, 피해자 숫자에 대해 검증하지 않고 단어들만 무책임하게 바꿔왔다.
이게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민간인 대량 학살 사건’ 주장이 사실로 굳어버린 경로다. 현장에 없었던 사람들의 직관적 추정치를 그 누구도 검증 없이 인용하거나 확대해석해 생산한 괴담이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한강 인도교 폭파’를 검색하면 ‘민간인 대량 희생’이 언급된 것은 1990년대부터다. 피란민 가득한 다리 폭파 연출 장면을 내보낸 1993년 6월 20일 KBS1 방송 〈다큐멘터리 극장〉은 압권이었다. 《한국전쟁사》가 출간되고 1년 뒤인 1997년 10월 18일 자 《동아일보》는 “피란민 4000여 명이 건너던 중 폭파돼 800여 명에 이르는 무고한 시민 희생”이라고 보도했다. 시작은 국방부 전사(戰史)였다. 이후 민간인 희생설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돼 사실로 굳어져 왔다.
국방부의 끝없는 괴담 대행진

▲2010년 국방부가 서울시에 보낸 공문. ‘민간인 500~800명 희생’이라고 적혀 있다.
국방부가 저지른 괴담 대행진은 이걸로 끝나지 않았다. 지난 2월 서울시 동판 내용에 의문을 품은 한 시민이 국방부와 서울시에 사실 확인 민원을 제기했다. 원래 있던 서울시 동판 내용은 이보다 6년 전인 2010년 국방부가 서울시에 보낸 공문에 근거하고 있다.
당시 국방부 6·25 전쟁 60주년 기념사업단은 한강 인도교 민간인 추념 위령탑 건립을 추진했다.
그러니까 아무 근거도 없이 ‘아군’을 ‘민간인’으로 둔갑시켜버리고는 자기네가 만든 그 괴담을 근거로 한강대교에 민간인 위령탑을 세우겠다는 희한한 발상이었다.
웃기게도 이를 위해 국방부가 서울시에 보낸 공문에는 1995년 《한국전쟁》이 아니라 《1997년 한국전쟁사》를 인용해 ‘민간인 500~800명 희생’이라고 적혀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1977년판 《한국전쟁사》와 1995년판 《한국전쟁》 두 전사(戰史) 차이를 국방부 자체가 의미를 두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결과 이 공문은 인용한 근거가 잘못된 하자 있는 공문이다. 1977년판 《한국전쟁사》는 ‘목격자 추정 인원 500~800명’이라고 돼 있고 민간인 500~800명은 1995년 《한국전쟁》 상권이다. 《1997년 한국전쟁사》라는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서울시는 이 공문을 접수한 뒤 자그마치 6년 동안 아무 조치도 하지 않다가 2016년 박원순 시장 때 졸속으로 ‘국가 폭력의 현장’이라며 엉뚱한 곳에 국방부 괴담을 담은 동판을 설치한 것이다.
지난 2월 민원이 제기되니까 그때까지 무관심했던 국방부는 자체 조사를 통해 지난 4월 ‘피해자는 민간인으로 한정되지는 않는다’고 민원을 제기한 시민에게 회신했다. 또 이 시민이 서울시에 보낸 민원에 대해 서울시가 국방부에 문의하자 동일한 내용으로 답을 보냈다. 사건 발생 후 74년 만에 처음으로 국방부가 자기 오류를 인정한 것이다. 서울시 또한 내부 검토를 거쳐 이번에 동판을 교체했다.
그러면 민간인 희생자가 없나?

1 1945년 9월 9일 미공군이 촬영한 중지도 모습. 사진=국사편찬위
2 1948년 9월 24일 미공군이 촬영한 한강철교 부근. 사진=국사편찬위
3 1950년 7월 16일 미공군이 촬영한 용산대폭격 장면. 사진=국가기록원
4 2024년 6월 한강대교 풍경. 왼쪽 표시된 부분은 뭍이었다. 사진=남강호
그렇다면 민간인 피해는 전혀 없을까? 통제가 완벽했고 따라서 민간인 희생자는 없다는 추정은 비현실적이다. 통제가 완벽했다면 1번 상판은 물론 6개 상판 어디에도 차량이나 사람이 없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심지어 중지도에서 첫 번째 상판인 1번 상판에도 숱한 차량과 인원이 ‘정체 상태’에서 묶여 있었다. 통제가 작동했다면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최창식 공병감은 “작업 구간에 차량이 침입하지 못하게 구간 양단에 경계병 배치 등으로 차단했다”고 법정에서 증언했다.(피의자 최창식 법정 증언) 이 ‘작업 구간’은 중지도 남쪽 교량을 뜻한다. 중지도까지는 통제가 이뤄지지 않았다.
아니, 불가능했다. 1945년 9월 9일 미 공군이 촬영한 중지도 사진을 보면 현재 노들섬 주변 지형과 완전히 다르다. 중지도 주변은 개활지다. 특히 용산으로 가는 북쪽 다리 주변은 벌판이다. 벌판 위쪽은 제법 폭이 넓은 강물이 보인다. 이 물길만 건너면 개활지에서 중지도 동서 방향으로 포장도로가 나 있다. 사람들이 개활지를 걸어서 중지도로 출입이 가능했다는 뜻이다.
1948년 9월 24일 역시 미군이 촬영한 한강철교~중지도 지역 항공사진에는 북쪽에 있던 강물이 사라져 있다. 물길은 철교 아래 좁은 물길로 축소돼 있다.
폭파 19일 뒤인 1950년 7월 16일 용산대폭격 때 미 공군이 촬영한 사진을 보자. 위쪽 한강철교부터 아래쪽 중지도까지 모두 육지다. 육지 위에 길이 나 있고 시설물도 보인다. 중지도로 오르는 길은 1945년 당시보다 세 갈래가 늘어 있다. 이게 2024년 5월 촬영사진에 표시된 부분이다. 지금은 강이지만 그때는 사람 통행이 가능한 육지였다.
용산 쪽에서 인파를 통제했다고 하더라도 개활지를 통해 중지도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완벽하게 통제하기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폭파 작전을 지휘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은 법정에서 “발파 40분 전 노량진 쪽 지휘소에서 헌병들을 보내 작업 지역을 통제했다”고 주장했다.

▲통제선이 중지도 남쪽 끝이었음을 보여주는 이창록 소위 증언.
당시 국방부 정훈과 이창록 소위는 1981년 5월 26일 “이원등 상사 동상 앞에 중지도 파출소(초소)가 있었고, 그곳에서 폭파를 목격했다”고 증언했다.(이창록, ‘한강 인도교 폭파’ ‘전환기의 내막’, 조선일보사, 1982, pp.348, 358)
고공 낙하 훈련 중 순직한 이원등 상사 동상은 1966년 중지도 남쪽 첫 번째 상판 직전 도로변에 건립됐다가 2017년 도로 건너편으로 이동됐다. 이창록 소위 증언은 최후 통제선 위치를 명확하게 알려준다. 통제선이 중지도에서 첫 번째 상판으로 진입하기 직전에 있었고, 중지도에는 사방에서 개활지를 통해 들어온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병대 헌병들에 의해 통제선이 설치되고 1번 상판에 사람들이 진입해 있는 상태에서 폭발이 이뤄졌다.

▲2024년 현재 이원등 상사 동상과 노들섬 남단.
정체가 애매한 시신들

▲‘국립경찰의 발자취’에 나온 1950년 당시 경찰 복장.
북한군 촬영 사진을 다시 보자. 정체가 애매한 시신이 보인다. 웃옷과 바지 색이 다르다. 봇짐처럼 보이는 흰 물건을 오른팔에 걸고 있다. 그 오른쪽에는 군화도 경찰화도 아닌 신발이 떨어져 있다. 왼쪽에는 벙거지가 떨어져 있다. 외형만으로 판단하면 이 사람은 경찰도 아니고 국군도 아니다.
1968년 내무부 치안국이 펴낸 《국립경찰의 발자취》 p16에는 모자와 신발을 포함해 1948~1966년 경찰 복장이 나와 있다.
이 사진을 보면 북한군 촬영 사진 오른쪽 아래 보이는 모자는 경찰 정모다. 그 오른쪽 바지를 입은 시신은 경찰로 추정된다. 그런데 그 위쪽 신발은 군인 전투화도 아니고 사진에 나오는 경찰화도 아니다. 민간인 신발이다. 저 시신 정체가 특수임무를 띤 사복요원일 수도 있지만 통제선을 뚫고 진입한 민간인일 수도 있다. 통제선 직전까지 몰려 있는 민간인 일부가 좌우 인도를 통해 통제선을 뚫고 진입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최창식 대령 법정 증언에 따르면 중지도와 지휘부 사이에는 소총 발사와 플래시를 통한 ‘발파 신호’만 약속돼 있었을 뿐 ‘도강(渡江) 완료 신호’는 약속돼 있지 않았다. 남쪽 지휘부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도강 완료로 착각하고 발파 명령을 내렸고 2, 3번 상판이 파괴되고 1번 상판은 후폭풍과 파편에 의해 희생자가 발생하고 말았다.
괴담 없는 미래를 위해
‘민간인 대량 희생’은 근거 없는 허구다. 북한군이 찍은 현장 사진이 증명한다. 하지만 시차를 두고 미군이 촬영한 사진은 민간인 완전 통제가 불가능했다는 사실 또한 알려준다. 게다가 사진들은 1번 상판 상황만 보여줄 뿐이다. 폭파로 붕괴된 2번과 3번 상판 위 상황은 영원한 미스터리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본인들 안전을 포기하고 중지도로 복귀해 통제선을 사수한 공병대 헌병들 덕택에 더 많은 희생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대한민국 국방부와 학계의 진실 조사를 기대한다.⊙
월간조선 07월 호 글 : 박종인 조선일보 선임기자
●대만(중화민국)의 6·25 전쟁
국민당군 정보요원·화교, 심리전·정보전 활약
⊙ 장제스, 6·25 발발 직후 3개 사단 파병 제안… 이승만·미국은 거절
⊙ 장제스, 한국에 비밀요원 파견해 국민당 조직 확대
⊙ 샤오위린 주한 대만 대사, ‘심리전 총지휘관’ 자처하며 화교 교사·학생들 선발, 투입
⊙ 국민당군, 미 육군 문관 신분으로 전단 살포 등 심리전, 포로 심문·회유·대만 이송 등 종사
⊙ 한국 거주 화교들, 한국군 HID와 협력해 SC지대 만들어 척후 활동
서상문
1959년생. 대만 국립정치대학 역사학 박사(중국 근현대사, 중국공산당사, 한국전쟁 전공) / 前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베이징대학 및 대만 중앙연구원 방문학자, 現 환동해미래연구원장 / 저서 《毛澤東과 6·25전쟁》 《혁명러시아와 중국공산당 1917~1923》 《중국의 국경전쟁 1949~1979》 《6·25전쟁 : 공산진영의 전쟁지도와 전투수행》(상·하) 《돌파 : 정의를 향한 한 역사학자의 고군분투!》 등

▲SC지대 요원으로 활동한 뤄잉한(오른쪽).
최근 들어 대만(臺灣·중화민국) 문제가 미중(美中)관계의 핵심 사안이 되면서 국제정치학계와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중국의 대만 침공을 의미하는 ‘대만 유사시’는 미국이 개입하게 되고 한국도 이 전쟁에 개입하거나 연루될 가능성이 있는 중대한 문제다. 우리가 국가전략 수준에서 대만 문제와 미중관계를 예의주시하고 다양한 시나리오에 입각한 대응책을 준비해야 할 이유다. 대만 문제는 우리와 관련이 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만 있는 분위기 속에서 한국-대만 관계사 가운데 지난 세기 대만이 한국 전쟁에 참전한 바 있는 역사적 사실을 복기(復碁)해보는 것도 여론 환기 차원에서 무익하지 않다.
대만의 한국 전쟁 참전은 최근까지 국내외 학계에서 연구된 바 없는 새로운 사실이기도 하다. 국내 언론에 한국 거주 화교(華僑)들을 중심으로 소수 중국국민당(‘국민당’으로 약칭)군, 그리고 중국공산당(‘중공’으로 약칭)군에서 도망쳐 귀순한 자들로 조직된 ‘서울 차이니스(Seoul Chinese) 지대(支隊)’(‘SC지대’로 약칭)의 결성과 활동에 대해서만 약간 보도됐을 뿐, 학술 논문은 필자가 약 3년 전 학계 최초로 발표한 것이 유일하다. 이를 토대로 한국 전쟁 발발 제74주년을 맞아 대만의 한국전쟁 참전 사실을 소개하려고 한다.
대만 무관, 자료 공개는 ‘시기상조’
대만은 언제, 어떤 계기로, 왜 한국 전쟁에 참전했을까? 참전의 규모와 성격, 성과 및 의의는 어떠한가? 다년간 한국 전쟁을 연구해온 필자가 보기에 전쟁 시기 국민당군이 참전했을 것으로 판단되는 여러 정황이 눈에 뜨인다. 대만 국방부는 소장한 한국 전쟁 관련 자료를 공개하기 시작한 지 이미 여러 해가 됐지만, 아직까지 국민당군의 한국 전쟁 참전을 증명하는 1차 사료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수년 전 필자는 주한 대만대표부 무관부를 통해 정식으로 대만 정부 국방부에 국민당군이 한국 전쟁에 참전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관련 자료를 공개하거나 제공해주길 요청한 바 있다.
하지만 대만대표부의 무관은 ‘대만’의 참전 관련 자료를 내놓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취지의 답변을 한 바 있다. 이 답변은 대만의 참전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것으로, 현재로선 국민당군의 파견 규모, 조직 및 인원 수, 소속, 무기 장비, 미군 혹은 한국군과의 협력 상황, 주요 활동, 귀국 시기 등을 소상히 밝힐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필자는 10여 년 이상 수집해온 자료들을 근거로 한 연구를 진행했고 이를 통해 대만이 한국 전쟁에 참전한 배경, 과정, 시기 및 활동을 정리하면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미국은 장제스(蔣介石)가 국민당군을 파병하겠다는 제의를 거절했지만 1950년 10월 하순 한국 전쟁에서 중공군의 포로가 잡히자 상황이 달라졌다. 즉 중공군에 대한 심리전(心理戰) 공작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한 주일 유엔군사령부 및 주한 미 제8군에서 주한 대만 대사 사오위린(邵毓麟)을 통해 수차례에 걸쳐 대만 정부에 심리전 요원들의 파견을 요청했다.
둘째, 대만 정부의 행정원장, 외교부장, 참모총장과 국방부 총정치부 주임 장징궈(蔣經國·장제스의 장남. 후에 대만 총통 역임)의 동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장제스의 지시에 따라 대만 국방부에서 수차례에 걸쳐 특무요원들을 선발했다. 이들은 국민당군의 전투병과가 아니라 비전투병과였지만 정규군의 하나인 현역 심리전 군인과 민간인들로서 비밀리에 참전했다.
셋째, 한국에 들어와 미군에 소속되거나 혹은 독자적으로 정보 수집, 미군의 심리전을 수행한 대만의 특무요원들은 각기 국민정부 조사국, 국방부 제2청 국제정보국, 육군정보국 등 세 계통에 소속돼 있었다. 이들을 총지휘한 것은 주한 대만 대사였다.
넷째, 장제스의 반공대륙(反攻大陸)의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국민당이 특별히 국민당 중앙위원회 제6조 부주임 천젠중(陳建中)을 한국에 파견해 특무 공작과 남한 거주 반중공 계열의 화교들로 구성된 민간인 군사 조직인 ‘서울 차이니스 지대(SC지대)’를 지휘, 운영했다. 특무요원들과 SC지대의 활동 경비 역시 주한 대만 대사관의 관리하에 국민당에서 지원했다.
장제스, 최정예 52군단 파병 추진

▲6·25 발발 후인 1950년 7월 말 맥아더 원수는 대만을 방문, 장제스 총통과 회담을 가졌다. 사진=대통령기록관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의 기습 남침 도발은 장제스의 대(對)중공 정책에 변화를 안기는 계기가 됐다. 그해 6월 1일까지만 해도 장제스는 중공과의 국공합작(國共合作) 문제를 재차 협의코자 특사(特使)를 대륙에 파견하는 등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바로 이를 취소해버렸다. 한국 전쟁을 절호의 기회로 포착한 그는 대중공 군사적 대응을 한반도로까지 넓히려는 쪽으로 선회했다.
6월 27일, 장제스는 먼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에게 긴급 전보를 보내 한국을 지원할 수 있는 ‘유효한’ 절차를 밟을 것이라고 알리는 한편, 서울의 대만 대사 사오위린 주한대사에게는 국민당에서 우선 육군 3개 사단과 수송기 20대를 한국에 원조하기로 결정했다고 알렸다. 또한 주미대사 구웨이쥔(顧維鈞)과 후스(胡適)에게도 백악관을 방문해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국민당군 정예 3개 사단과 비행기 20대를 5일 이내에 한국 전쟁에 보낼 것이니 이를 한국으로 운송할 선박의 지원을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장제스의 지시하에 6월 26일부로 제1급 전투태세에 들어간 국민당군 최정예 제52군단은 모든 참전 준비를 마치고 대만 북부 지룽(基隆)항에서 출항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병력을 수송할 C46수송기도 20대나 마련됐다. 이 수송기들은 5일 이내에 출동하도록 명령이 하달된 상태였다.
장제스는 6월 30일 유엔군 측에도 육군 3개 사단 3만 명의 병력과 수송기 20대를 한국에 보내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중공군의 참전을 우려한 미국과 영국의 반대에 부딪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미 행정부 내에서, 국민당군의 참전 필요성을 역설한 맥아더 사령관의 찬성과 국민당군의 파병은 중공의 개입을 불러일으켜 한반도 내 전쟁이 소련·중공의 공산 진영과의 전면전으로 비화될 것이라고 주장한 애치슨 국무장관의 강력한 반대가 대립했다. 결국 트루먼 대통령은 애치슨의 손을 들어줬다.
장제스, 한국 내 국민당 조직 확대
하지만 장제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7월 말 대만을 전격 방문한 맥아더에게 국민당군의 참전 문제를 재차 제기했다.
대만의 한국 전쟁 참전을 두고 두 지도자 간에 의견이 거론되자 국민당군의 파병이 중공의 한반도 전쟁 개입은 물론, 한국군에 대한 미국의 병력, 무기 및 장비, 보급품 지원 감소로 이어지게 될 것을 우려한 이승만 대통령도 파병을 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중(韓中) 국경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중공군을 견제할 심산으로 장제스에게 국민당군을 한반도가 아닌 대만의 대안(對岸)으로 상륙시켜 중공군을 공격해주기를 바랐다.
아울러 장제스는 한국 주재 국민당의 당 조직 확대에 박차를 가했다. 한국 주재 국민당 공작요원들은 그 전년도 7명에서 수십 명으로 늘어났는데, 1950년 3월 현재 이 당무를 수행하기 위해 대만 정부의 국방부와 내정부(內政部) 계통의 공작요원 35명이 서울의 대만 대사관을 거점으로 한국 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주관 부서별 요원은 국방부 제2청 국제정보국의 무관 왕우(王武)와 부무관 왕지셴(王繼賢), 그리고 국방부 제2청 소속 보밀국(保密局) 공작원 7명, 내정부 소속 조사국 26명이었다.
같은 해 9월, 장제스는 국민당 ‘중앙개조위원회’를 통해 당정군(黨政軍)의 전반적인 변화를 꾀했다. 국민당의 해외 조직 재건 및 재정비도 그 일환이었다. 장제스의 당 개조 지시로 국민당 지부의 남한 설립 작업에 착수한 국민당은 서울, 인천, 부산 등 주요 도시에 총 20여 개 분부(分部) 혹은 소조(小組)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서 종사한 국민당 당원은 2000명이 넘었다.
장제스는 중공군 참전 후인 1950년 10월 국민당군의 한반도 파병에 관한 긍정적 여론을 조성할 요량으로 네 차례에 걸쳐 《뉴욕타임스》 등 미국의 유력 일간지에 자신의 군사계획을 공표했고, 백악관에 국민당군의 파병을 제안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10월 15일, 그는 국민당군 창군 이래 최초로 육해공 3군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했다. 해·공군이 육군을 지원하는 형태로 진행된 이 합동군사훈련에서 국민당군은 예전과 달리 현대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전력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됐다.
이승만, “국민당군은 대륙 공격하라”

▲1953년 11월 27일 대만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은 장제스 총통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사진=대통령기록관
12월 4일, 장제스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다시 전문(電文)을 보내 국민당군의 파병을 간접적으로라도 허용해주길 바란다는 의사를 전했다. 이 시기 중공군이 한국 전쟁에 참전한 이상, 자유 진영은 과거처럼 적에 대해 타협하고자 하는 고식적(姑息的)인 정책을 버리고 강력하게 대응해야 할 것이며, 자신은 공산군에 맞서 싸우겠다고 했다.
이 제의도 이승만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이승만은 이번에도 대만 측에 국민당군을 중국 대륙으로 보내 반격을 가하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전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혔다.
장제스의 참전 노력은 중단되지 않았다. 12월 8일, 그는 유엔군이 만약 해·공군으로 국민당군을 지원한다면 대중공 반격을 단행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한국에서 유엔군은 수세(守勢)인 전세(戰勢)를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3일 뒤, 그는 또 미국의 언론매체를 통해 미국이 해·공군으로 대만 방어에 최선을 다해 도와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대만 정부에 ‘대륙 반격’을 중지하라고 요구해선 안 될 것이라고 했다.
이듬해 1월 1일 장제스는 전 국민의 일치단결, 반공 승리를 호소하고 ‘반공대륙’을 천명한 〈고전국동포서(告全國同胞書)〉를 발표했다. 1월 10일에도 그는 한국에 군대를 지원하고자 하는 방침을 바꾸지 않았으며, 국민당군의 대륙 반격에는 미군이 참가할 필요가 없고 단지 전투물자만 지원해주길 바란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처럼 여러 차례에 걸친 장제스의 집요한 한국 전쟁 참전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민당군의 파병 불가라는 기존 트루먼 행정부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美, 중공군 참전 이후 태도 변화

▲맥아더의 정보참모 윌로비 장군. 사진=퍼블릭 도메인
대만 정규군의 파병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워싱턴의 입장은 줄곧 변함이 없었다. 또한 중공군 참전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1950년 7월 말, 맥아더가 장제스와 회담했을 때 그의 정보참모 윌로비 소장이 대만 정부에 영어 회화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중공군을 잘 아는 국민당군 장교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는 등 일찍부터 대중공 정보 수집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이 요청에 대해 대만 국방부 제2청의 제3조(국제정보조)가 맡아서 26명의 명단을 미국 무관부에 전달하고 그들 중에서 선발하게 했다. 그 뒤 장교 명단을 세 차례 더 제공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변화는 중공군이 비밀리에 개입한 1950년 10월 중순 이후부터였다. 뜻밖에 한국군 제1사단의 북진 선봉대에 붙잡힌 포로를 심문한 결과 중공군이 참전한 사실이 확인됨과 동시에 이 사실이 일본 도쿄(東京) 맥아더 사령부의 윌로비 정보참모에게 전달된 것을 계기로 예상치 못한 ‘새로운 적’ 중공군에 대해서 정보 수집과 심리전을 통한 적정(敵情) 파악이 급선무가 됐다. 정보전이든, 심리전이든 미군은 작전 수행 중 중공군을 잘 아는 국민당군의 협조가 불가피했다.
미군은 대만 주재 미군연락조의 도움을 받아 미 제8군의 정보요원들을 중공군 주둔 지역 내로 잠입시켜 군사 정보와 동태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고, 11월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심리전부대를 동원해 북한군과 중공군에 전단 살포 등 심리전도 펴기 시작했다.
중공군 상대로 전단 대량 살포
특히 교육 수준도 형편없었고 8할 이상이 한자를 읽지 못하는 중공군 병사들에게 전쟁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중국어로 된 전단을 집중적으로 살포했다.
미 극동군 사령부의 심리전과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미군은 1950년 12월 5일 하루에만 1억4257만6000장의 전단을 뿌렸다. 이 가운데 중공군에 대해 B29폭격기로 전선을 따라 살포한 중국어 전단은 총 9종 1476만 장이었다. 같은 달 28일에도 한글 전단 72종과 중국어 전단 14종이 살포됐다. 게다가 미군에 잡힌 중공군 포로들이 모두 대만으로 가기를 원함에 따라 그들을 대상으로 한 포로 심문과 전향 회유 공작, 적전 동향 및 정보 수집, 심리전, 적후(敵後) 유격전을 펼쳐야 할 필요성도 대두됐다.
이처럼 미군 측은 대중공 심리전의 문제해결 능력을 갖춘 국민당군의 도움이 필요해지자 주한 대만 대사관에 연락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은 벌써 1950년 11월 5일 이전부터 여러 차례 한국 주재 대만 대사관 측에 중공군을 대상으로 한 심리전에 필요한 협조를 요청했다. 미 제8군의 심리전 수행과 관련된 대만 정부 측과의 모든 교섭은 미국의 폴 린바거 교수가 현역 대위 계급이 부여된 장교 신분으로 주관했다.
심리전 가운데 미군의 대중공군 선전방송은 1951년 1월부터 개시됐다. 이때부터 그동안 미 육군 극동사령부의 정보참모부 심리전과가 심리전을 전담해오던 것을 새로 창설된 미 제8군 작전참모부 아래의 심리전부(PWD·Psychological Warfare Division)가 전담함으로써 미 제8군 차원에서 심리전에 관한 작전계획과 감독이 시작됐다. 미군과 주한 대만 대사관 사이에 작전 협조를 위한 상호 접촉이 빈번해진 것도 미군의 심리전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같은 해 1월 말부터였다.
무초와 사오위린의 만남

▲대만 국방부총정치부 주임 장징궈
이러한 전황(戰況) 변화를 기회로 주한 대만 대사관 측은 지상군의 전선과 공중의 항공기에서 확성기를 이용하는 선전, 전단 살포, 방송, 사진, 동요를 활용함은 물론, 중공군(특히 국민당군 출신 중공군) 병사들을 귀순시킬 수 있는 심리전의 선전강령을 이용하자고 제안했다. 미군 측은 이 제안에 대해 모두 받아들이겠다고 하면서 워싱턴 당국 및 도쿄의 유엔군사령부가 파견한 미군 심리전 전문가들과 같이 일을 추진하고 있다고 알려줬다.
대만 대사관 측은 이 문제에 관해 맥아더와 의견을 나누려고 했다. 그들이 실제로 맥아더와 의견을 주고받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맥아더의 정보참모 윌로비 소장이나 미 제8군 사령부 수준에서는 상호 협력하기로 한 원칙을 일치시킨 상태였다. 그 후 대만 대사관 측은 미군 측과 여러 차례 의견 조율을 거쳐 국민당군 심리전 요원을 미군부대에 배속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전에 한국 거주 화교들까지 미군의 정보부대에 보냈다.
1951년 1월 30일, 사오위린 대사와 전황에 관해 의견을 교환한 무초 주한 미 대사는 대략 2월 초순, 재차 사오위린에게 미군의 심리전을 지원해줄 요원의 파견을 요청했다.
사오위린은 2월 7일 이 요청 내용을 대만의 장제스 총통, 행정원장, 외교부장, 참모총장과 국방부총정치부 주임 장징궈에게 비밀전문으로 보고했다. 이 시기 장제스 총통의 장자 장징궈는 국가안전국 부국장이었지만 실제로는 이 조직을 움직이는 실세로서 대만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사오위린은 미군에 협조하기 위해 대사관의 부무관을 대구의 미 제8군사령부로 보냈다. 또 본국 정부에 사전 선전강령과 기술상의 문제를 포함한 구체적인 지시를 요청했다.
화교 심리전 요원 선발
전투가 아닌 심리전이었지만, 장제스는 미군의 군사작전 지원 요청을 중국 대륙에 대한 반격 준비의 일환으로 보았다.
미군 측에서 대만 대사관에 지원을 요청한 것이 워싱턴의 승인하에 이뤄진 것인지는 현재로선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백악관은 몰라도 적어도 맥아더 사령부 선에서는 국민당의 참전을 비공식적으로, 혹은 비밀리에 용인했다고 봐도 된다. 이는 맥아더의 지시나 의중이 반영됐거나 묵인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2월 10일 전후, 대중공 심리전에 도움을 줄 국민당의 심리전 요원을 선발해줄 것을 부탁한 미 제8군의 요청에 응한 대만 대사관은 영어와 일본어를 할 수 있고 중국어를 최고 수준으로 구사하고 중공군에 대해 많이 알며 사상이 건전하고 체격도 좋은 선전 공작 유경험자를 심리전 요원으로 뽑기로 방침을 정했다.
2월 7일, 이처럼 대만 본국 정부에 국민당 심리요원의 선발을 요청해놓고 기다리던 사오위린은 대만으로부터 국민당 심리전 요원이 파견돼 오기 전에 우선 주한 대만 대사관에서 화교 중 영어, 일어를 할 줄 아는 중학교(현재 한국의 중·고등학교에 해당), 초등학교 교사 및 학생 14명을 선발했다. 그러고 그들을 2월 15일 대구의 미 제8군 사령부로 보내 단기간의 훈련을 받게 한 후 각 부대에 배치해 통역 및 심문과 심리전을 담당하도록 조치했다.
이날 무초 대사는 사오위린 대사에게 당분간 이 사실을 밝히지 말아 줄 것을 당부하면서, 대만 대사관이 보낸 화교 출신 심리전 요원들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대만 대사관의 두(杜)씨 성을 가진 부무관 및 미군 소속 중국계 사병과 고용인들이 ‘춘제(春節)’로 불리는 음력설에 유엔군의 공세를 틈타 항공기를 타고 전선으로 날아가 확성기로 선전전을 펼쳤다. 이 선전에 자극을 받은 전직 국민당군 출신 중공군 몇 명이 투항해왔다.
1951년 6월경에는 미군 심리전단부에 중국인 고문과 한국인 고문이 정식 조직의 한 부서로 설치 및 배속됐다. 심리전부대 책임자는 미국인이었지만 실무 공작원은 대부분 중국인이었다. 중국인 고문도 한국인 고문과 마찬가지로 작성된 문서의 중국어 단어나 문장의 쓰임새를 교정하고 자문하는 일을 맡았다.
화교소학교 교장도 참전

▲주한 대만 대사관에서 지정한 대구의 화교피란소. 사진=서상문
이처럼 전쟁 초기 단계에서 미군 및 한국군의 심리전에 동원된 사람들은 남한 거주 친국민당 계열의 화교들이었다. 화교는 1952년 9~10월 시점 남한에만 약 1만8000명 정도가 살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서울(3563명), 인천(3690명), 부산(4182명), 대구(1275명)에 집중돼 있었다.
당시 남한 내 화교들은 북한 거주 화교들이 평양 주재 중국 대사관의 관리하에 있었던 것처럼 대만 대사관의 관리를 받고 있었다. 이 화교들은 대만 대사관에 참전 의사를 밝혔고, 사오위린 대사는 자국민 보호 및 관리 차원에서 이 사실을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 이에 따라 화교들의 한국전 참전은 대만 정부의 승인을 받았으며, 대만 국방부가 그들을 관리했다.
사오위린의 회고에 따르면, 1951년 6월 5일 시점까지 심리전에 투입된 한국의 화교 청년들은 총 66명이었다. 그들은 미군 심리전부대 및 정보기구, 한국군 정보부대 등 두 갈래로 배속됐다. 이 66명 중 한국군 정보부대로 간 이는 27명, 미군의 심리전에 참여한 이는 39명이었다.

▲한국 전쟁 초기 사오위린 대사가 대구의 화교피란소를 둘러보고 있다. 사진=서상문
심리전에 자원한 화교들은 대개 중·고등학생이거나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교사였다. 심리전 참전자들 중에는 당시 서울의 ‘화교소학교’ 교장 천궈량(陳國樑)도 있었다.
미군 정보 심문부대에 파견된 화교 청년들은 각 미군부대의 G-2로 불린 정보과에 우선적으로 배치됐다. 이 기관은 미군 정보기관이 설치된 곳으로서 전문적으로 중공군 포로를 심문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이 외에 일본의 미 극동군사령부 정보부(G2), 전범조사과(WCIS·War Criminal Investigation Section), 방첩대(CIC·Counter Intelligence Corps), 형사조사부(CID·Criminal Investigation Department), 평민교육부(CIE) 계통의 한국 예하 부대로 배속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심리전에 참여한 이 화교들을 막후에서 지휘한 이는 사오위린 대사였다. 그는 중국 항일전쟁 시기 국민당 중앙선전부의 요청을 받고 대일선전전을 전개한 바 있는 심리전 유경험자였다. 그는 스스로 ‘중국 심리전부대 지휘관’이라고 자칭했다.
대만 특무요원들의 입국

▲1953년 9월 1일 장제스 총통과 함께한 한성하오 회장(뒷줄 오른쪽). 사진=서상문
1951년 봄으로 접어들자 한국 전쟁은 38도선을 중심으로 자유 및 공산 진영 간의 공방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제압할 수 없는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이즈음 장제스는 사오위린 대사를 소환하고 그 후임으로 자신이 신임하던 왕둥위안(王東原)을 새로운 주한 대만 대사로 임명했다. 이어서 기존 대만 대사관 직원들 외에 계통이 다른 적지 않은 정보요원들과 특무요원들이 한국으로 들어왔다. 해외 공작을 담당한 조사통계국 요원들이 한국에 들어온 시기는 대략 1951년 2월이었다.
당시 중국에서 건너온 대만 국적의 한성하오(韓晟昊·한국화교협회장 역임)는 대만 내정부 조사국 소속 특무요원으로서 조직훈련 제2과장을 맡았다가 나중에 중공군 포로 관리에 관여한 인물이다. 그는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국민당의 호출을 받고 대만으로 건너가 국민당의 ‘특무교육’을 받은 후 1951년 2월에 다시 한국으로 와서 국민당군 육군 소령 계급장을 달고 일했다. 그는 민간인이자 국민당원으로서 겉으로는 ‘대만대도(大道)통신사 주한국 특파원’이었지만 실제로는 ‘대만 내정부 조사국 복건조사처(福建調査處) 비서’ ‘대만 내정부 조사국 동북구판사처(東北區辦事處) 제1과장’, 대만 내 최고의 정보기관인 ‘중통국(中統局·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조사통계국) 서울 정보참장(情報站長)’이었다. 그리고 ‘대만대도통신사 주한국 특파원’이라는 직함도 사실은 ‘조사국’의 코드네임이었다.
한성하오는 한국 전쟁에 참전코자 비밀리에 한국으로 파견된 대만의 정보 조직은 크게 40여 명의 대만 내정부 소속 조사통계국(調査統計局·이하 조사국), 대만 국방부 제2청의 국제정보국, 제6조(대륙조)로 불린 국민당군 육군정보국 등 세 계통이 있었다고 필자에게 말한 바 있다.
한국 특무부대와 협력
국민당 정보기관이었던 조사국은 한국에 들어온 뒤 ‘동북국’으로 개칭해 한반도와 중국의 화북·동북 세 지역을 맡았다. 이들의 주된 임무는 한국 내 화교 사회 관리, 정당운동, 청년운동, 부녀운동, 문화운동 및 교육운동을 벌이는 것이었는데, 한국의 치안경찰과 협력했다. 국제정보국은 한성하오 자신이 속한 군통(軍統·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의 후신이었다. 그는 이들이 한국에 들어온 수가 6~7명 정도였을 것이라고 기억했다.
육군정보국은 주한 대만 대사관 무관처와 함께 활동했으며, 주로 한국군과 미군을 상대했다. 한성하오의 증언에 의하면, 육군정보국은 한국군 헌병사령관 원용덕(元容德)과 자주 접촉해 한국군 헌병대와 협력했다고 하고, 또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한국군의 숙군(肅軍)을 주도한 특무부대장 김창룡(金昌龍)과도 협력했다고 한다.
사오위린은 이 세 계통의 대만 정보요원들이 40여 명이었다고 했는데, 이는 아마도 1차 선발 시의 숫자였을 것이다. 이 뒤 여러 차례 들어온 공작요원들까지 합하면 총 140명 정도였다. 공작요원 수가 늘어난 것은 이 세 조직이 각기 세를 불리거나 공을 세우기 위해 경쟁하다시피 한국으로 요원들을 많이 들여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 간에 알력과 마찰도 대단히 심했다. 이들을 총지휘하고 한반도에서의 전황과 중공 관련 정보 수집 및 정보 공작, 중공군 포로에 대한 공작을 총괄한 이는 주한 대만 대사와 천젠중이었다.
미군 심리전 지원 요원 선발
한국에 들어온 국민당 조사국 계통의 특무요원들은 미군의 심리전과 정보 수집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대구의 미군 심리전부대에 보내졌다.
이 시기 주한 미군에는 대공산군 방송 선전을 담당하는 부대가 2개 있었는데, 제1선전 방송부대가 대구에 있었다. 이 부대는 미 제8군의 G-3심리전과의 직할부대였다.
남한의 화교들이 미군 심리전에 동원되던 때와 거의 같은 시기 내정부 조사국과 별개로 대만 국방부도 미군 심리전을 지원할 국민당군 특무요원들의 선발 및 파견 작업에 착수했다.
심리전 요원의 선발 및 파견 주관처는 국방부 제2청이었다. 당시 국방부 제2청장은 훗날 대만 육군참모총장이 된 라이밍탕(賴名湯)이었다. 국방부 제2청은 황런린(黃仁霖) 장군이 부사령관 겸 ‘특종근무처’ 처장을 겸직한 국민당군 후방전투지원(後勤)사령부의 책임하에 과거 중국 대륙 시절 군에서 영어 통역을 맡아본 유경험자들을 대상으로 두 차례의 영어 회화 및 필기시험을 거쳐 심리전 특무요원을 선발했다. 1차로 선발된 자들은 다시 대만 주재 미국 대사관 무관부에 등록한 후 여권 발급과 비자 수속을 밟으면서 한 번 더 미군이 주관한 영어 테스트를 받았다.
이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총 20여 명이 선발됐다. 그들의 국적은 모두 대만이었지만 신분은 국방부 제2청의 승인을 얻어 미 육군부가 고용한 문관, 즉 ‘DAC(Department of the Army Civilion)’였다. 직함과 계급은 미 행정부의 문관 시스템 중의 GS-6로서 미 육군 준위나 소위에 해당됐다. 고용기간은 1년이었으며, 만기 시 계약 연장이 가능했다. 또 대우는 급여로 매월 미화 300달러 정도를 받았다. 이 급여는 당시 대만의 일반 공무원 월급이 미화 15달러 정도였으니 그들보다 20배나 많은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셈이다.
미 육군 문관 대우받아
1951년 3월 9일 밤 타이베이(臺北)를 출발해 도쿄에 도착한 제1진은 미 육군부가 발급한 DAC 신분증과 근무에 필요한 군복, 군모, 군화, 내의, 세면도구 등의 물품을 지급받았다. 군복과 군모에 계급이 부착돼 있지 않은 것을 제외, 그들은 미 육군과 똑같은 신분을 부여받았으며, 미군과 동일한 물품을 제공받았다.
그 뒤 그들은 대구의 미 제8군사령부로 이송됐고 약 일주일이 지나 다시 각지의 미군부대로 분산 배치됐다. 즉 10명은 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 예하 521군사정보중대(521 Military Intelligence Company)에 배속됐고, 나머지는 서부 전선의 미군부대로 보내졌다.
521군사정보중대는 군단 예하 독립부대로서 부대원은 100여 명이었고, 전쟁포로 심문이 주 임무였다. 미군부대로 배치된 대만 출신 미군 문관들은 미군들에게 ‘중국어 통역(Chinese interpreter)’ 혹은 ‘포로 심문관(interrogator)’으로 불렸다. 나중에는 그들 중 일부가 동해안 전선의 미 해병 제1사단 예하 163군사정보대(163 Military Intelligence Service Detachment·당시 ‘163MISD’로 약칭됐고, 부대장은 스미스 대위였음) 그리고 서울 소재 302부대와 함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배속됐다.
163군사정보대는 부대 편제 및 병력 면에서 521군사정보중대보다 규모가 작았다. 이들 중 일부는 휴전협상 과정에서 대만행을 원한 중공군 반공포로들을 대만으로 데려가는 데에 필요한 수속과 통역 업무에 투입됐다.
포로 회유 공작

▲대만 특무요원들이 미군과 협력하여 중공군에게 살포한 전단. 사진=서상문
선발된 특무요원들은 통역 업무 외에 미군과의 협조하에 포로수용소 내 중공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한 심문, 사상 공작, 전향 및 회유 공작을 수행하기 위해 적지 투입 교육도 받았다. 그들은 교육 수료 후 유엔군사령부의 분류로 거제도와 제주도의 포로수용소에 배치됐다.
중공군 포로 심문은 국민당 특무요원 외에도 중국계 미국인, 중공군 포로 중 영어 가능자, 영어가 가능한 일본계 미국인과 한국인이 맡기도 했다. 일본계 미국인 병사는 하와이와 캘리포니아 출신이 많았으며, 그들은 일본어를 구사했기 때문에 북한군과 중공군이 그들을 보고 일본인으로 생각했다.
대만 특무요원들은 또 목사 신분으로 가장해 포로들을 심문하거나 회유공작을 펴기도 했다. 포로수용소 내에서 ‘화교상인’이라고 자칭하면서 중공군 포로들에게 접근해 수용소 내 포로들 가운데 중공당원의 수, 포로들 중 국민당군 출신자를 파악하는 공작에도 투입됐다.
이들은 공중에서의 방송 선전과 전단 살포 등의 심리전 작전에도 투입됐다. 비행기를 이용한 확성기 방송 선전은 38명으로 구성된, 중국어와 한국어 방송요원이 있던 미 제8군 심리작전처 공중조가 담당했다. 출격하는 비행기에는 보통 비행기 좌측에 방송기기를 장착하고 미국인 1명, 한국인 1명, 화교 1명 외에 조종사와 기타 요원 등 3명을 포함해 총 6명이 탑승했다.
미 제8군이 펼친 심리전 중에는 방송 선전전 외에 비행기로 적 후방 지역으로 날아가 중국어와 한글로 된 전단을 대량으로 살포하고 돌아오는 작전도 있었다. 미군이 매일 살포한 전단은 엄청난 양이었다. 1951년 5월 19일, 춘천 이북 지역에 단 15분 동안 뿌린 전단만 154만 장이나 됐다. 6월 16일 43만 장, 7월 29일 60만 장, 8월 19일 63만 장으로, 심리전을 개시한 시점부터 그때까지 약 6개월 사이에 뿌린 전단이 총 4억 장에 달했다. 살포 횟수는 매월 적을 때는 40~50회, 많을 때는 100차례나 되었다.
전단에는 주로 선동적이고 자극적인 글, 표어나 그림으로 전쟁 혐오 사상을 고취시키고, 고향 생각이 나게 하는 내용이 담겼다. 뿐만 아니라 투항해 올 수 있는 길 안내 약도도 그려져 있었다.
1951년 3월 12일 자 대만 《중앙일보(中央日報)》의 보도에 따르면, 유엔군 공군기는 매일 밤 저공으로 적 진지 상공을 날면서 확성기로 “항복할 텐가? 죽을 텐가?”라고 소리쳤다. 5월 중순 북한강 강변의 지암리 상공에서는 유엔군 공군기가 “중공군 ×××사단 병사들아, 너희는 이미 겹겹이 포위됐다. 더 이상 무의미한 저항을 하지 말고, 투항하라. 유엔군은 포로를 우대한다”는 등 중공군을 겨냥한 방송을 내보냈다.
美, 대만의 존재 재인식

▲왕둥위안 주한 대만 대사. 사진=대만 문화부
이처럼 방송과 전단을 이용한 심리전 결과 단 이틀 만에 적 78명을 포로로 잡거나 한꺼번에 20명에서 40명의 중공군이 전단을 들고 투항해 온 적도 있었고, 1951년 4~6월 중공군의 제1~2차 춘계공세 때는 항공기에서 내보낸 방송을 듣고 많은 중공군 병사들이 투항해 왔다. 같은 시기 중공군 제2차 춘계공세에서 중공군이 수백 명 이상 집단적으로 투항해 온 것을 포함해 총 1만 명 이상이 포로로 잡힌 사실이 말해주듯이 효과가 상당했다.
앞에서 언급했던 장제스의 참전 제안과 군사훈련은 중공 지도부에 군사적으로 적지 않은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1951년 5월 1일, 귀국 대기 상태로 부산에 체류 중이던 사오위린이 장제스에게 보낸 보고문이나 심리전의 효과를 언급한 주한 미국 대사의 평가에 따르면, 중공이 참전한 후 장제스 총통이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한 대륙 반격 준비 관련 성명은 중공군 견제와 심리전에 대단히 큰 효과가 있었다. 사오위린 후임으로 1951년 10월 20일부로 주한 대만 대사에 취임한 왕둥위안도 유엔군의 심리전이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고 언급했다.
심리전은 유엔군이 반격을 가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으며, 결과적으로 동부 전선의 간성, 고성 그리고 중부 전선의 중공군 주요 근거지인 철의 3각지의 철원, 김화, 평강 등지를 점령한 전과로 이어졌다. 또 국민당군의 대륙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중공군 제3야전군이 북한에서 중국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미국 대사는 국민당군의 심리전 참여로 한국에서의 대만의 존재를 재인식했다.
이처럼 심리전에 참가한 화교들의 역할과 전공이 뛰어나자 유엔군 측은 대만 정부에 참전요원을 더 늘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미군 심리전에 참가한 대만의 국민당 측 요원은 점차 증가해 사오위린이 대사직에서 물러나 귀국할 즈음엔 100여 명으로 늘어났고, 그 후로도 계속 늘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전과는 적지 않은 인명 살상의 대가가 따랐다. 1951년 6월 5일 현재 심리전에 참가한 화교 청년 66명 가운데 이미 9명의 사상자 및 실종자가 발생했다.
포로 공작
1951년 8월부터 미군은 중공군 포로들 중에서도 적격자들을 선발해 적지 침투 공작 특무훈련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선발된 중공군 포로들을 비행기로 도쿄의 미 극동군사령부 특무학교에까지 데려가 그곳에서 수개월간 교육을 받게 한 경우도 있다. 미군은 1952년 2~4월 중공군 포로들을 미군 C46수송기에 태워 중부 전선 철원 서쪽의 곡산 지역에 공수시킨 일도 있으며, 간첩으로 보낼 포로들을 인천에서 배에 태워 남해 연안의 섬과 서울의 미군 특무학교에 데려가 교육하기도 했다.
국민당 특무요원들은 중공군 포로 활용 교육에도 투입됐다. 1951년 한 해 남한 내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포로가 무려 20만 명이 넘었던 북한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중공군 포로들도 2만 명이 넘었다. 중공군 포로들 중에는 소대장, 중대장급 장교가 600여 명, 대대장급 장교는 30여 명, 연대장급 장교가 5명, 사단장급 장군도 1명이 있었다. 나머지는 모두 사병이었다.
국민당 수뇌부는 중공군 포로들 중 중국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대만으로 가고자 희망한 국민당군 출신들 대부분을 대상으로 사상 공작을 펼칠 필요가 절실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당군은 미군의 중공군 포로 관리를 도와줄 중국어 통역자들을 대폭 증가시켰는데, 기존 한국 화교 출신 학생들과 교사 60여 명 이외에 유엔군이 직접 대만, 홍콩, 일본 각지에서 선발해갔다.
국민당은 거제도와 제주도 포로수용소의 중공군 포로들을 회유, 전향시켜 대만으로 데려오기 위한 공작도 했다. 그 책임자는 천젠중이었다. 천젠중은 당시 50대 중반의 나이로 국민당 정보라인을 장악한 소위 ‘CC 계통’의 국민당 중앙위원회 제6조의 부주임이었으며, 중국 대륙의 정보를 취급하는 정보통이었다. 국민당 중앙위원회 제6조는 국가안전, 정보 업무를 관장하던 기관이었다.
‘국민당군 육군 중장’ 천젠중
한국에서 천젠중은 국민당 중앙위원회 제6조의 부주임으로서 대만 대사관 육군 부무관 직함과 ‘천즈칭(陳志淸)’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다. 당시 장징궈도 같은 중앙위원회 제6조의 부주임이었는데, 천젠중은 대만 측 정보기관을 모두 장악한 장징궈에게 직보하는 조직 라인에 있었다.
그는 국민당군 육군 중장 신분으로 부산 소재 대만 대사관 내에 ‘지도소조(指導小組)’를 설립하고 중공군 포로들의 전향 및 대만 이송 공작에 착수했다. 지도소조에는 왕둥위안 대사, 천젠중, 비서 줘셴슈(卓獻書), 대사관 소속 무관, 2~3명의 공작원, 그리고 나중에 기자 신분으로 한국에 파견돼 이 소조에 가세한 리스펀(黎世芬), 린쩡치(林徵祁), 웨이징멍(魏景蒙)이 있었다.
대만에서 파견돼 여러 가지 신분으로 위장한 국민당군 특무요원들이 거제도와 제주도의 포로수용소 내 중공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한 회유, 전향 및 대만 이송 공작은 대만과 중국국민당 최고 통치자의 승인하에 이뤄졌다. 국민당군 특무요원들은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중공군 포로들 중 친공(親共)포로들을 반공포로로 전향시키기 위해 반공조직을 결성해 여기에 가입시키는 공작을 펼쳤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흔히 중공군 포로들의 대만 이송이 휴전 후에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휴전협정이 조인되기 훨씬 전인 1952년 7월에 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중공군 포로들 가운데 부산 동래읍 거제리에 소재한 포로수용소에 수용돼 있던 83명을 먼저 대만으로 데려갔다는 것이다. 대만 정부가 이들을 대만으로 데려간 목적은 중공과의 이념투쟁에서 민주주의 국가의 이념 및 체제 우위의 상징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당시 중공군 포로들의 대만 압송 공작을 주도한 한성하오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이 사건은 남한 내 대만 특무공작의 총책임자인 천젠중의 지시로 이뤄졌으며, 한국 경찰 당국의 협조를 받아서 진행된 것이었다. 중공군 포로의 대만행은 비밀리에 전쟁포로들을 석방하기로 한 이승만 대통령의 방침에 의거해 한국 정부가 사전에 대만 대사관에 통보해줌에 따라 극비리에 대만으로 데려간 것이었다.
미군의 승인을 득한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공작은 한국 정부나 혹은 최소한 한국군 지휘부와 대만 정부가 사전에 몰랐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동시에 이승만이 반공포로 석방을 이미 1952년 7월 이전에 결심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중공군 포로의 대만 이송 공작은 도중에 83명의 중공군 포로들 중 7명이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지는 통에 잠시 지연됐다. 그러나 천젠중의 지시를 받은 국민당 특무요원들이 탈출한 포로를 다시 검거한 뒤 당시 남한 내 지하조직으로 활동하다 체포된 10여 명의 ‘부산공산당 지하조직원’ 중 9명의 ‘요범(要犯)’들과 함께 그해 10월에 모두 비밀리에 선박에 태워 대만 북동부의 해상관문 지룽항으로 압송해 갔다.
SC지대의 창설
1951년 초봄 대만 내 계통이 다른 복수의 여러 기관이 군인들과 국민당 특무요원들을 한국으로 들여보냈던 시기 한국 거주 화교들을 조직한 주한 대만 대사관이나 대만 국방부와 관련 없이 일군의 중국인이 자발적으로 한국 육군에 소속된 ‘SC지대’라는 ‘특수첩보부대’를 만들었다. ‘SC지대’의 ‘SC’란 영문으로 ‘서울의 중국인’이라는 의미인 ‘Seoul Chinese’ 중 앞 머리글자 S와 C를 딴 약자였다.
SC지대는 류궈화(劉國華)와 왕스유(王世有)의 건의를 받아들인 한국군 정보부대의 책임하에 대략 200여 명의 한국 화교들로 조직된 비밀부대였다. 류궈화는 중국 지린(吉林)성 룽징(龍井) 사람으로, 일제 패망 전 만주국 군관학교인 신경(新京)군관학교 제4기 출신이었다.
SC지대는 중공군이 참전하게 되자 화교들을 모집해 한국군을 측면 지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 류궈화가 신경군관학교의 한국인 선후배 및 동기생들을 만나 그들(해군 강태민 소령, 헌병대장 예관수 대령, 육군정보국장 김일평 장군 등)의 연줄과 소개로 육군첩보부대(HID·Headquarters Intelligence Detachment) 부대장 박경원 대령을 찾아가 화교들로 구성된 정보부대를 결성하자고 제안해 결성된 것이었다.
SC지대는 대만 정부와 한국군 육군정보부대가 서면협정을 체결해 HID부대 소속 중국인 화교부대로 출발했다. 그 시절 한국군 육군정보부대는 ‘4863부대’ 혹은 영어로 ‘HID’로 불렸다.
SC지대는 설립 시기 및 장소, 설립목적, 소재지 정도를 제외하면 여타 조직, 인원, 소재지, 부대편성, 대만과의 지휘계통 관계, 활동 및 전과, 해체 시기에 관한 정확한 전모가 드러나 있지 않은 상태다.
SC지대의 상황을 소개한 회고록을 남긴 친위광(秦裕光)의 증언에 의하면, SC지대는 1951년 3월 HID가 있던 부산에서 창설돼 1953년 9월까지 활동했다고 한다. SC지대는 부산에서 창설됐지만 본부는 창립 후 서울 사직공원 옆의 민가에 두었고, 2개월 뒤 그 인근의 종로구 청진동 소재 이시영의 집으로 옮겼다고 한다. 따라서 대원들의 주요 활동 공간은 부산이 아니라 서울과 그 이북 지역이었다.
SC지대의 진짜 목표는 중국 동북거점 확보

▲박정희 정부는 SC지대 뤄잉한에게 보국포장을 수여했다. 사진=서상문
류궈화와 왕스유의 한국 화교들로 첩보대 성격의 SC지대를 만들어 한국군을 지원하자는 부대 창설 목적은 사오위린 대사가 남긴 회고록 내용과 일치한다. 즉 남침해 온 북한군을 물리치고 스스로 자신을 지킴으로써 대만이 한국의 안전에 기여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겉으로 표방한 원론적인 기치였을 뿐, 내부적으론 장제스의 군사적 반격 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한 여건 조성이 본질적인 목적이었다. 국민당이 SC지대를 결성한 목적은 한국군의 힘을 빌려 압록강을 건너 중국 동북 지역의 후방으로 침투해 들어가 그곳에서 정보망을 구축함과 동시에 대중공 유격전을 위한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앞에서 SC지대의 구성원이 200여 명 규모였다고 한 것은 1951년 3월 최초 설립 시에는 1개 지대로 출발했다가 나중에 더 많은 대원이 모집됨에 따라 점차 지대 수가 늘어난 것으로 판단된다.
SC지대 대원들은 전원 화교들이었고, 한국군 김용덕 소령을 명예대장으로 위촉했다는 설이 있다. SC지대는 한국군 육군정보부대에 소속돼 있으면서 한국군의 명령을 받고 움직였는데, 류궈화가 맡은 군사 방면 외에 주로 한국군이 왕스유에게 임무를 전하면 그가 필요한 무기, 장비와 인원을 모집해서 수행했다고 한다. 왕스유가 실제 행정 지휘를 맡았고, 군사 관계 활동은 류궈화가 지휘했다.
SC지대 출범 시 이 부대의 군사 및 행정의 총 책임자가 된 류궈화와 왕스유 아래에 제1지대장은 웨이쉬팡(魏緖舫), 부지대장은 한국인 SC명예대장으로 위촉된 바 있는 김용덕 소령이었다. 제2지대장은 뤄잉한(羅英漢, 나중에 羅亞通으로 개명)이 맡았으며, 부지대장은 한국인 이백건(李百健·‘李佰建’으로 기억한 이도 있음) 대위였다.
‘중국수색대’
제1지대장 웨이쉬팡은 1923년 중국 안둥(安東, 현 丹東)에서 태어나 국민당군 대위로 임관한 바 있다. 그는 1951년 1월 5일, 당시 28세의 나이로 평양을 포기하고 철수하는 유엔군을 따라 중국인 화교로 결성된 ‘평양화교반공애국청년보위단’ 단원 약 30명을 이끌고 남한으로 내려왔다. 그는 자신이 데리고 온 단원들을 한국군 제1사단 예하 ‘중국수색대’로 재편해 활동을 하던 중 한국군 제1사단 제15연대에 소속됐다. 제1사단 정보참모 김안일(金安一) 중령의 지휘를 받고 있다가 김 중령이 제15연대장으로 승진 발령되자 중국수색대도 그를 따라 제15연대에 소속됐다.
SC지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대원이 늘어났지만 여기에 참여한 전체 대원 수가 정확하게 몇 명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뤄잉한은 중국 화교들이 조직한 몇 개의 부대 중 SC지대의 인원이 300여 명으로 가장 많았다고 했다. 300여 명 중 전선에 약 100명이 나가 있었고, 나머지 약 200명은 후방지원대로 편성돼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뤄잉한은 필자와 만나 대담을 나누기 전인 2005년의 다른 인터뷰에선 SC지대의 대원이 약 500명이었다면서 이 500명 중 실제 전선에 투입된 대원이 약 200명이었고, 나머지 300명은 후방에서 지원 활동을 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한편, SC지대의 다른 참여자인 친위광은 SC지대가 대략 200명을 대원으로 모집했고, 이 중 70명이 무장공작원이었으며, 나머지는 후방에서 지원 활동을 했다고 했다.
대만 정부가 지원

▲SC지대원들이 한국전 참전 공로를 인정받아 보국포장을 받은 후 1973년 9월 22일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서상문
SC지대 대원들은 처음에 모두 자원한 것이었기 때문에 경비도 개인이 부담했고, 부대는 먹을 것과 무기 및 차량만 제공했다고 한다. 경비 가운데 대원들의 급료와 활동비는 대만 정부가 책임졌으며, 대원들은 무기, 탄약 및 차량 등의 장비에다 피복과 음식까지 지급받았다는 증언도 있다. SC지대 대원들이 받은 월급은 나중에 간첩 훈련을 받고 북한 지역의 후방에 투입된 대원들의 경우엔 한국군 소령 혹은 한국 공무원의 부이사관급 대우를 받았으며, 전체적으로 부족한 경비는 대만 대사관의 지도하에 화교들의 모금으로 보충했다고 한다.
SC지대 대원들은 서울시 종로구 내자동과 경기도 파주군 문산의 월룡면에서 10주 정도 정보 및 전투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마친 후 그들은 12명이 1개조가 되어 전선에 나가 있던 HID에 배치돼 적진이나 후방의 정보 수집 임무를 수행했다. 대원들은 육·해·공 3로로 황해도 연백, 해주, 강원도 철원, 김화, 평강에서부터 해로로 멀리 함경남도 함흥에 이르기까지, 또 항공기로 평안도 성천, 순천 등지의 적진에까지 침투해 적정을 살피고 정보를 수집했다.
SC지대 대원들은 동부, 중부, 서부 전선에 배치됐지만, 그들이 주로 활동한 지역은 동부 전선의 속초, 중부 전선의 철원, 화천, 상대일리, 강원도 북한강 강변의 지암리(현 춘천시 사북면 소재), 인제, 서부 전선의 경기도 여주, 의정부, 장단, 교동도, 석모도 등지였다. 교동도의 부대는 인사리에 소재했었다.
서울의 미 제1기병사단에서 일하거나 전방의 전투에 투입되기도 했던 그들의 주된 임무는 적정 파악, 정보 수집 위주의 척후(斥候)공작이었고, 전투는 부차적 활동이었다. 그들은 또한 한국군 육·해·공군에서 파견한 첩보원 신분으로 가장해 적진 깊숙이 들어가 정보 수집을 위주로 한 척후공작도 수행했다. 중공군 포로 심문 시 통역은 물론, 확성기 달린 비행기를 타고 행한 선전, 전단 살포와 대적 방송 선전, 북한 지역에서의 유격전 수행도 임무 가운데 하나였다.
일본인도 참여
SC지대 대원들은 한국어와 중국어를 모두 말할 수 있는 화교들이어서 정보 수집 요원으로서 갖춰야 할 언어소통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정보 수집 면에서도 성공률이 높았다. 그들은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중공군을 생포하거나, 중공군 군복이 바뀌었을 때는 바뀐 군복을 탈취해 오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또 북한군을 맞닥뜨리면 중공군 복장으로 갈아입고 중공군인 체했으며, 중공군을 만나게 되면 북한군 복장으로 갈아입고 북한군 행세를 했다.
SC지대에는 북한에 침투하기 위한 간첩조도 있었는데 밀파훈련에 참여한 이들 중 화교 40명 이외에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도 있었다고 한다. 또 이 훈련대원들 중에는 대만에서 온 5~6명의 여성도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계급 없는 군복을 입었다. 그들도 한국군 소령 혹은 한국 공무원 부이사관급 대우를 받고 훈련한 뒤 대략 1952년쯤부터 북한 지역으로 투입됐다.
또 한국전쟁이 끝난 뒤 그들은 남한에서 암약하던 중공 간첩 40여 명을 검거했다고 한다. 당시 중공 간첩조직의 본부는 인천에 있었고, 검거된 간첩 가운데 2명은 총살당했다.
휴전 사흘 전에도 북파 공작
SC지대는 휴전협정 조인 약 2주 전쯤인 1953년 7월 15일에도 한국군 육군정보부대의 명령을 받고 대원 30명이 유격전을 수행하기 위해 북한에 보내졌다고 한다. 이 중 15명은 백두산에 잠복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임무 수행에 실패했다.
또 SC제55지대 이백건 대위의 명령에 따라 휴전협정이 조인되기 불과 3일 전인 1953년 7월 24일에도 북한군 관련 정보 수집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50명에 가까운 북파공작조가 비행기로 여의도공항을 출발해 원산 앞바다의 여도에 도착한 후 퇴조 시에 배를 타고 들어가 적후 공작을 수행했다. 이 작전에는 SC지대 행정 책임자인 왕스유도 참여했지만, 그는 도중에 서울로 되돌아갔다. 나머지 대원들은 임무 수행 중 적에게 포위돼 대부분이 사망하고, 7명[오중현, 뤄잉한, 푸쉐린(傅學林), 인천에서 온 중국인 2명, 한국인 무전병 2명]만이 살아서 동해안의 청강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SC지대는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전사자와 실종자가 수십 명씩 발생했으며, 특히 적지침투 공수작전에서 피해가 많았다. 뤄잉한은 필자에게 SC지대에 참여해 전쟁에서 희생된 화교들은 100명 이상이었으며, 당시 SC지대 대원들의 중국 둥베이(東北) 지역 침투는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SC지대는 1953년 7월 말 휴전협정이 조인된 이후에 해산됐다. 한국인으로서 SC지대 요원으로 참여했던 김석구는 수년 전 필자와 나눈 면담에서 SC지대는 강원도 쪽 한국군 부대로 배속됐다가 휴전 후에 해체된 것으로 들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대원들 가운데 일부는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도 활동을 계속했다고 주장했다.
국립묘지에 안장된 SC대원들

▲SC지대에서 활동하다 전사한 장후이린(姜惠霖)은 1963년 서울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SC지대가 수행한 심리전, 정보 수집, 포로 심문 등은 미군과 한국군에 유용했다. 이러한 공적들은 그간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하다가 결국 한국 정부로부터 참전 중공군 출신자와 한국 거주 대만 화교들 중 일부가 참전 사실을 인정받게 됐다.
예컨대 육군 제1사단 제15연대에 소속돼 종군하던 중 전사한 장후이린(姜惠霖)은 1964년 12월에 대한민국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이 밖에 왕스유, 류궈화, 뤄잉한, 츠젠판, 김성정, 왕주싼(王竹三), 오중현, 장쉬둥(張緖東), 화위구이(華裕桂), 리수하이(李樹海), 취쭝셴(曲宗愼) 등 11명이 박정희 정부 때에 전공을 인정받아 대통령령에 의거 보국훈장을 받았다. SC제1지대장 웨이쉬팡도 전공을 인정받아 그의 사후 1990년 4월 국립서울현충원(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혔다. 사망자 가운데는 장후이린과 웨이쉬팡 두 사람만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다.⊙
월간조선 07월 호
07.02 파리올림픽을 앞두고 다시 생각하는 88서울올림픽과 全斗煥의 순정
“정권 잃는 한이 있더라도 올림픽은 성공시켜야”
⊙ “올림픽은 하늘이 고생하는 한민족에게 준 선물”
⊙ ‘일본의 國士’ 세지마가 서울올림픽 유치 건의
⊙ 6·29 선언은 서울올림픽 성공과 김대중·김영삼 분열을 계산한 대도박
⊙ 고르바초프도 도왔다

〈대통령에 재임하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이, 자주 입에 올린 말은 ‘88서울올림픽’이었다. 내가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할 만큼 나의 최대의 관심사였다.〉(전두환 회고록)
아무리 힘이 지배하는 국제관계와 세계사지만 간혹 선의(善意)가 힘이 되어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는 수가 있다. 1950년 6·25 남침 때의 유엔군 파병과 1988년 9월의 서울올림픽이 대표적 사례다. 서울올림픽을 매개로 하여 한국의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적 선진화, 소련 및 동구 공산체제의 붕괴, 그리고 북한 정권의 몰락이 대세화되었다는 것은 이젠 정설(定說)이다. 서울올림픽은 도저히 불가능한 조건에서 성공하였는데, 그 동력은 착한 마음들의 집합이었다. 여러 나라 지도자들의 결단과 세계시민들의 선의가 한 덩어리가 되었으므로 지구촌 전체가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더 자유로워졌고 더 평화로워졌던 것이다. 1950년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세 악당의 음모를 저지하고 살아남았던 나라가 그 34년 뒤 ‘사랑의 복수’를 한 셈이다.
파리올림픽을 앞두고 36년 전의 그날, 9월 17일을 생각하면 가슴부터 뛴다. 전날 서울엔 폭우가 쏟아졌지만 개회식은 청명한 하늘 아래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힘차게, 신나게, 아름답게 펼쳐졌다.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던 나는 흥분을 감출 수 없어 잠실로 달려갔고, 그 뒤 2주 동안 경기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우리 세대의 가장 아름다웠던 나날이었다.
많은 사람이 잊고 있는 사실은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은 2년 전에 있었던 아시안게임의 성공이 예약했다는 점이다. 박세직(朴世直)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은 생전에 “아시안게임을 해보니 서울올림픽은 성공할 것이란 자신과 확신이 생겼다”고 했다.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던 김용식(金溶植) 외무장관은 자신의 회고록 《새벽의 약속》에 감동적인 글을 남겼다.
1955년 그가 일본 주재 한국 대표부의 대표로 있을 때 진해에서 휴양 중이던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찾아가 업무보고를 했다고 한다. 대통령은 김 대표에게 지시를 구술시킨 후 늦여름의 조용한 진해만을 내려다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자네, 내가 무엇을 기도하는 줄 아는가?”
노(老)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갔다.
“나는 늘 하나님께, ‘우리 민족도 다른 민족들 못지않게 잘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런 기회가 올 때에 나로 하여금 알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네.”
“각하, 언제쯤 우리도 남부럽잖게 살 수 있겠습니까?”
“한 30년 걸릴 걸세. 그때까지는 지금처럼 바쁘게 지내야 할 걸세.”
〈86년도의 아시안게임이 서울의 잠실에서 개최될 때, 관람석의 한 모퉁이에서 나는 30년 전 이(李) 대통령이 한 말을 회상하였다.〉
‘일본의 國士’ 세지마가 전두환에게 권하다!

▲서울올림픽 유치를 조언한 세지마 류조 전 이토추상사 회장. 사진=조선DB
서울올림픽이란 엄청난 발상은 경호실장 출신 박종규(朴鐘圭)에게서 비롯되었다. 1978년 9월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서울에서 주최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당시 대한사격연맹회장이던 그는 88년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자는 생각을 구체화하여 4개 항의 메모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①남북한 간의 체제경쟁에서 남한의 우위 확보
②제3세계 국가 및 공산권에 대한 외교의 돌파구
③경제발전의 도약점
④사회선진화의 계기가 될 것이다.
대한체육회장이 된 박종규는 1979년 9월 21일 대통령의 재가(裁可)를 얻어냈고 정상천(鄭相千) 서울시장으로 하여금 발표하게 했지만 10·26 사건 뒤 정국이 혼란에 빠지고 5·17 뒤 박종규마저 부정축재 혐의로 연행됨으로써 서울올림픽 유치 계획은 잠시 실종되고 말았다. 이러다가 1980년 11월 이규호(李奎浩) 문교부 장관은 대한올림픽위원회의 건의에 따라 서울올림픽 유치신청서를 IOC(국제올림픽위원회)에 내기로 하고 대통령의 재가를 받게 되었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이 공표한 일을 별다른 이유 없이 변경할 수 없다”면서 유치 신청을 허락했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대통령에 취임하던 때 내 머릿속에는 1988년 하계올림픽 유치가 하나의 아이디어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아이디어를 심어준 사람은 일본 이토추상사(伊藤忠商事) 상담역 세지마 류조(瀨島龍三) 씨였다”고 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의 엘리트 작전참모였던 세지마는 소설 《불모지대》의 모델이기도 한데 이병철(李秉喆) 삼성물산 창업자와 친밀했다. 이 회장의 요청으로 1980년 6월 한국에 와서 전두환의 육사 동기생 권익현(權翊鉉·나중에 민정당 대표)의 소개로 전두환 장군을 만났다. 그해 8월엔 다시 와서 대통령 취임을 앞둔 전두환에게 88올림픽 유치를 권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내가 권익현씨의 증언을 토대로 1990년 8월호 《월간조선》에 소개한 바 있는데 회고록은 이 사실을 확인해준 것이다. 세지마는 “장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사회 분위기를 일신하고 국민의 힘을 한데 모으려면 올림픽을 유치하는 게 좋을 것이다”며 “한반도의 안전이 일본의 안전과 직결되어 있는 만큼 한국의 올림픽 유치를 적극 돕겠다는 뜻을 비쳤다”고 한다.
당시 일본 나고야시 또한 올림픽 유치 의사를 밝힌 상태였다. 전두환 대통령은 ‘혹시 무슨 저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선의의 조언’이란 결론에 이르렀다.
勸善懲惡의 교과서

▲1981년 9월 30일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제84차 총회에서 서울은 일본의 나고야시를 꺾고 88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됐다.
1981년이면 피를 흘리며 집권한 전두환 정부가 국내외의 도전 속에서 첫발을 떼고 있을 때여서 경제 관료들을 중심으로 거의 모든 관계자가 유치 신청에 반대했다. 찬성파는 전두환, 노태우(盧泰愚), 노신영(盧信永·외무장관), 이규호, 유학성(兪學聖·안기부장), 정주영(鄭周永·현대그룹 회장), 조중훈(趙重勳·한진그룹 회장) 정도였다고 한다. 누가 뭐래도 올림픽 유치는 전두환 대통령의 고독한 결단이었다. 바덴바덴의 기적에 대해서는 많은 이의 공이 거론되고 있는데 표를 많이 얻는 데 기여한 것을 기준으로 하면 유치를 총괄 지휘했던 노태우 정무장관을 비롯하여 노신영, 박종규, 정주영, 조중훈, 김운용, 이연택씨 등이 있다.
한국의 선의에 악의(惡意)로 대한 것은 김일성 정권이었다. 북한은 서울올림픽 저지를 당면 목표로 삼고, 1983년 아웅산 테러, 1986년 김포공항 테러, 1987년 김승일·김현희 조(組)의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을 벌이면서도 공동 개최란 미끼를 던지고 대응 행사로 세계청년축전의 개최를 추진했다. 이런 음모는 그야말로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실패했다. 미얀마 외무장관이 정시(定時)에 와서 전두환 대통령을 아웅산 묘소로 안내했더라면 17명의 사망자는 18명이 되었을 것이고, 한국군은 서울올림픽을 포기하고서라도 대북(對北) 응징에 나서 무력 충돌이 벌어졌을 것이다.
일본 외교관이 바레인 공항에서 김승일·김현희의 출국을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또 김현희가 독약이 숨겨진 담배개비를 깨물려다 어머니 생각에 멈칫하지 않았더라면 115명이 죽은 폭파 사건은 안기부의 자작극으로 몰려 서울올림픽의 분위기를 망쳤을 것이다. 북한 정권은 평양 세계청년축전 개최에 50억 달러를 투입했는데 이게 경제를 망쳐 1990년대의 ‘고난의 행군’을 예약했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은 도덕 교과서에서만 배울 필요가 없다. 세계적 규모에서 착한 사람들이 이기고 나쁜 사람들이 진 곳에 서울올림픽이 있었다.
선의는 그러나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힘이 없다. 선의는 유능해야 힘이 된다. 서울올림픽 주체 세력의 유능은 최다(最多)의 참여, 최고(最高)의 경기 운영, 최대(最大)의 수익으로 수치화되었다. 박정희·전두환의 올림픽 대전략을 외교 현장에서 집행한 사람은 노태우 대통령이었다. 동구와 소련 공산체제가 무너지고 있는 기회를 잡아 서울올림픽의 성과를 북방외교로 확대시켜 임기 중에 한소(韓蘇), 한중(韓中), 한·베트남 수교를 이루고 유엔 동시 가입까지 성공시켜 한국인의 활동 공간을 지구촌 전체로 확대시켰던 것이다.
서울올림픽이 동구 소련 사람들을 각성시켜 이듬해 1989년의 공산체제 붕괴를 재촉한 요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많이 하는데, 6·29 선언을 통하여 한국의 민주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에는 인색하다. 전두환 대통령은 단임제 실천으로 평화적 정권 이양, 물가 안정을 기본 축으로 한 경제 성장, 그리고 올림픽 준비를 자신의 3대 임무로 설정, 우직하게 밀어붙였다. 세 개 가운데 가장 정성을 다해 챙긴 것은 서울올림픽이었다.
“올림픽은 하늘이 고생하는 한민족에게 선물로 준 것”
제5공화국의 청와대는 통치사료 담당 비서관을 두었다. 조선조의 사관(史官)을 닮은 이 자리에 있었던 김성익(金聲翊)씨는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출신이었다. 1986~88년 사이 그가 기록한 격동기의 대통령 언행은 드라마 대사처럼 생생하다. 비공개 자리에서 쏟아낸 입담 좋은 전두환 대통령의 솔직한 말은 구수하고 인간적이기도 하다. 올림픽과 관련된 전두환 어록을 따라가다가 문득 ‘순정’이란 단어가 생각났다. 서울올림픽에 꽂힌 한 사나이의 순정!
1986년 3월 1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서울 아시아 경기대회 운영계획보고회가 대통령 주재로 열렸다. 이 자리에는 김만제(金滿堤) 부총리, 장세동(張世東) 안기부장, 손제석(孫製錫) 문교, 박세직(朴世直) 체육, 이해원(李海元) 보사부 장관, 김종하(金宗河) 대한체육회장 등 135명이 참석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이렇게 강조했다.
“86·88을 우리가 어떻게 유치했습니까. 우리 한민족이 하도 고생을 많이 하고 잘해보려고 해도 안 되고 하니 하늘이 큰 선물로 준 것인데 이런 걸 활용 못 하는 민족은 이 지구상에 살아남을 수 없어요. 살아남아도 종노릇밖에 할 게 없어요. 이것을 우리가 소화하지 못하면 후손에게뿐 아니라 나라와 역사에 죄를 짓는 거요. 모든 분야에서 끝마무리를 잘해주기 당부합니다.”
그는 자신의 결단으로 유치에 성공한 88서울올림픽에 유별난 애정을 가지고 준비에 정력을 쏟았다. 수시로 전방과 치안 일선을 시찰, 안전 문제를 점검했으며 틈날 때마다 올림픽 경기장 건설 현장과 태릉 선수촌 등을 돌아보는 등 ‘올림픽 준비단장’을 자처했다.
1986년 3월 17일 대통령은 청와대 만찬에 기독교 지도자들을 초대했다. 여기서 올림픽이 남북관계에서 결정적 변수가 될 것임을 예언했다.
“우리가 올림픽을 하면 자동적으로 16일간 텔레비전을 돌려서 전 세계 40억 인구가 보게 됩니다. 그 선전비를 돈으로 따지면 얼마가 되겠어요. 그게 바로 우리 국력이고 경제력이고 우리 제품에 대한 보장이 됩니다. 그렇게 밀고 가면 북한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체제가 무너집니다. 그걸 북한이 잘 알 겁니다. 자기네 체제를 유지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기로입니다. 김정일이가 세습을 하려면 한국이 86·88을 못 하게 해야 하고, 그러려면 버마 사건 식으로 게릴라를 집어넣는다든지 가만 안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미국과도 협조해서 군경이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대통령이 스스로 자리를 내놓고 물러나는 것을 한 번도 못 한 나라 아닙니까. 그래서 갈등과 불신도 있습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두고 권력을 잡으면 내놓기가 힘들어요. 내가 해보니 그렇습니다. 나한테도 88올림픽이나 마치고 가야지 그냥 가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미국 상원의원, 우리 야당 의원도 있었습니다.
나보고 군인 출신이다 뭐다 하는데 나도 나름대로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내가 집권한 후 학생들이 시끄러워도 치안을, 경찰에 의해서 유지해왔습니다. 군대를 동원해서 한 일이 없어요. 모든 문제를 힘이 아니고 순리로 하려고 무척 애를 써왔습니다. 정치인은 혼란이 생겨야 수지가 맞지만 혼란이 생겨 손해 보는 것은 국가와 국민입니다.”
“사마란치, ‘올림픽까지 계속 집권’ 간청”

▲전두환 대통령과 사마란치 IOC 위원장. 사마란치는 전 대통령이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퇴임하는 것을 우려했다. 사진=조선DB
1986년 4월 28일 낮 대통령은 주요 언론사 사장들을 청와대로 초청, 점심을 함께하면서 비화(秘話)를 털어놓았다.
“내가 늘 말하지만 대통령이 어떤 일이 있어도 임기를 마치기 전에 죽지 않고 임기를 마치고 살아 나가면 민주주의 발전에 큰 전기(轉機)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요. 내가 반드시 살아서 나가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설사 빨리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더라도 나라를 생각해서는 내가 살아서 임기를 끝내고 물러가야 됩니다.
북한이 우리한테 별별 방해 공작을 다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올림픽을 반대하다가 공동 주최하자고 하다가 이제는 종목을 반반씩 나누자, 24개 종목 중에 열 종목만 내놔라 운운. 내가 이번에 IOC 위원장을 만나보니 소련, 중공, 쿠바, 동구권이 어울려 IOC에 겁을 주었답니다. 이북에서 올림픽 종목을 몇 종목 안 주면 서울을 밀어버린다고 한다는 거예요. 언론에는 비밀입니다만 내가 구라파 방문 중에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스페인에서 스위스로 날아와서 만났습니다. 이분이 손을 떨면서 긴장해요. 이북이 군사적 준비가 다 되어 있다고 얘기를 해요. 립시 주한미군 사령관이 미국에서의 기자회견에서 북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고 했는데 괜찮으냐고 나에게 물어요. 그래서 당신이 직접 들었느냐고 물었어요. ‘직접도 듣고 소련, 중공, 쿠바 등 몇 나라에서도 그러더라’는 얘기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러지 말고 이북한테 10개 종목을 떼어주고 서울올림픽을 성공시키면 어떠냐’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절대 그런 얘기하지 말라고 하면서 한국이 이북에 비해서 군사력이 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50년대처럼 그렇게 약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주한미군이 있지 않으냐, 걱정 말라고 했습니다. 내가 이북에 한 종목도 못 준다고 했어요. ‘당신이 지금까지 의연하게 잘해왔는데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한 걱정 마라’고 했습니다.
사마란치 위원장 말이 ‘그렇지만 각하는 88년 2월에 그만두시지 않느냐’고 해요. ‘그만두시면 국내 문제는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요. 그래서 내가 우리 국민이 얼마나 우수하냐, 나보다 백배 잘할 유능한 사람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올림픽은 내가 책임지마, 걱정 말라고 거듭거듭 얘기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 말이 ‘군대 문제는 미군이 있어서 안심이 되는데, 대통령께서 올림픽만 마쳐주고 그다음에 그만두면 어떠냐’고 해요. 그래서 내가 ‘헌법 때문에 안 된다’고 하니 ‘야당과 협상하면 되지 않느냐, 1년 정도인데 뭐 그리 어렵겠느냐’고, ‘88년 2월에 퇴임하시기 때문에 걱정이 된다’고 했어요.
86·88이 다가오는데 나도 대통령을 무사히 끝내고 안전하게 보따리 싸서 우리 집에 돌아가도록 선례를 남겨야 선진화하는 길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가급적 내가 속상한 일을 참고 순리로 여론에 의해 풀려나가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독사도 밟으면 무는 겁니다.
외국 언론이나 외국 국회의원이 정부를 까면 우리 언론은 좋다고 그걸 잡아서 쓸 게 아니라 우리 정부를 보호해주어야 합니다.”
“아웅산 사건 후 군의 보복을 말렸다”
1986년 8월 11일 오전 전(全) 대통령은 청와대 상춘재에서 청와대 출입 기자단과 간담회를 가졌다.
“버마에서 아웅산 사건을 당하고 몇 분(分) 사이로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 난 다음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면서 여러 가지 상념에 잠이 오질 않았어요. 내가 그때 내자에게 말했어요. 이번에 내가 만약 죽었다면 나라가 어떻게 됐겠느냐고. 내가 살았으니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하늘이 하는 일이지, 인력(人力)으로만 되는 일이 아니지 않으냐, 내가 살았다는 것은 분명히 하늘이 나한테 하라고 하는 일이 있지 않겠느냐는 얘기를 했습니다. 내가 새로이 굳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전쟁을 막아야겠다, 그래서 국민들의 고통을 덜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이와 같이 내 집념은 생사를 넘는 강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KAL 007기 격추 사건이 얼마나 슬프고 원통한 일이었나, 그리고 한 달 후에 버마에서 북한이 나를 죽이려고 테러를 했는데 원래 국가 원수에 대한 테러는 선전포고 사유가 될 수 있어요. 그때 우리 군에서는 육군, 해군, 공군 할 것 없이 북한을 때리려고 해서 세네월드 UN군 사령관이 얼굴이 새하얗게 됐어요. 내가 버마에서 돌아와 보니 군에서 전부 때릴 준비가 다 되어 있었어요. 위에서 승인을 안 해도 들어가겠다는 거야.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으냐고. 그래서 내가 그 보고를 받고 바쁜 가운데에서도 전방을 돌고 군 지휘관들을 만나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준 데 대해서는 감사한다. 그러나 전투를 하고 안 하고 하는 상황 판단은 국가 원수로서 폭넓게 보니 여러분보다는 낫다. 내가 필요한 시기, 적절한 시기에 때리라고 할 때 때리라고 했어요. 내 명령 없이 병사 한 명이라도 넘으면 나에 대한 불충이다, 내 명령에 따르라, 그렇게 진정을 시켰습니다.
지금 북한이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은 88년까지 승부를 보려는 저의를 갖고 있다고 나는 봐요. 북한은 30년 이상 국민 복지를 희생하고 군사비에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GNP 규모가 해마다 커지니까 북한이 군사력으로 경쟁하는 데는 한계가 오게 되어 있어요. 88년에 올림픽과 정권 이양이 잘 끝나면 북한은 대화 노선으로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90년에 가면 틀림없이 진짜 대화를 하려고 할 것이고 올림픽만 끝나면 중공과 소련도 우리한테 태도가 달라질 겁니다. 그러나 어떤 분야든 우리가 취약점을 보이면 저네들은 집중 공격을 해요.”
“우리 대머리 세 사람이 야간 경기에 나가면”

▲1986년 9월 20일 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 손을 흔드는 전두환 대통령 부부. 하지만 2년 후 서울올림픽 개막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사진=조선DB
서울올림픽의 예행연습이기도 했던 서울아시안게임은 1986년 9월 20일에 개막돼 10월 5일에 폐막됐다. 9월 14일 김포공항 구내에서 폭발물이 터져 5명이 죽고 30여 명이 부상했다. 지금까지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는데 북한의 테러일 가능성이 높다. 그 사흘 뒤인 9월 17일 낮 전두환 대통령은 사마란치 IOC 위원장 등 국제 스포츠 요인들을 청와대로 초대, 점심을 대접했다.
〈대통령: 아시안게임은 어느 나라에서 치르는 것보다도 훌륭하게 치를 만반의 준비가 다 돼 있습니다. 방해하려는 집단이 있기는 하지만 여러분이 조금도 염려할 것 없습니다.
사마란치 위원장: 제가 이곳에 여섯 번이나 왔습니다. 올림픽 가족을 대표해서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의 성공을 기원하는 저희의 기쁨을 말씀드립니다. 86아시안게임뿐 아니라 88올림픽에서 대성공을 거두기를 희망합니다.
대통령: 내가 사마란치 위원장을 스위스에서 만난 것까지 합치면 일곱 번을 만났는데 여기 계신 여러분을 다 두 번 이상 만났기 때문에 나도 올림픽 가족임을 스스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한 IOC의 티토프 씨는 내가 소련인과 오찬을 같이하는 최초의 손님입니다. 의미가 있고 나도 아주 즐겁습니다. 독일의 바이츠 부위원장은 내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 대통령 오찬 때 이어 오늘이 두 번째 오찬입니다. 두 분이 다 대머리이신데 나와 셋이 나가면 주변이 환해질 겁니다(참석자들 웃음). 야간 경기 할 때 우리 세 사람이 나가 있으면 선수들이 행복해할 것입니다(참석자들 폭소).
대통령: 티토프 씨는 언제 체조 금메달을 땄나요?
티토프: 56년 올림픽에서였습니다.
대통령: 티토프 씨, 우리도 조금만 기술을 배우면 체조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을 텐데 이번에 안 바쁘면 비법을 한두 가지만 가르쳐주고 가시오.
티토프: 작년에 각하를 뵌 후에 소련 코치로 하여금 한국 코치를 일주일 지도하게 했습니다. 각하 말씀을 소련 코치에게 전하겠습니다.
사마란치: 하계올림픽 회장인 국제육상연맹 회장은 이탈리아 출신으로 로마 교황과도 친분이 있습니다.
대통령: 교황께서 이곳을 다녀가셨는데 아주 훌륭한 분이더군요. 오시기 전에 한국말도 공부를 했는지 아주 잘했어요. 우리 경제가 너무 빨리 성장하는 문제가 있어서 경기를 조금 진정시키고 있어요.
사마란치: 다른 나라에서는 부러워합니다. 한국이 이렇게 발전하고 국민들이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은 와서 봐야만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올림픽 준비 상황은 말로가 아니라 진실로 훌륭합니다.
대통령: 1960년도에 우리 개인 소득이 82달러였는데 지금은 2000달러를 넘어섰습니다. 국제 환경에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90년에 가면 약 4000달러가 될 것입니다. 금년에 10.9% 성장될 전망이어서 10% 이하로 떨어뜨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퇴임 후 1986년이 가장 행복했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해는 무역흑자를 처음으로 기록했다고 해서 흑자원년으로 불린다. 1985~87년의 3년간은 민주화 시위가 가장 격렬했으면서도 경제성장률 또한 가장 높았다. 이 시기의 소란을 추억하면 뭔가 밝게 느껴지는 것도 경제호황 속의 최루탄과 투석과 화염병과 함성이었기 때문이다. 평화적 정권 이양과 서울올림픽 성공은 이런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
1980년대 10년간 한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0.1%로서 세계 1위였다. 이를 배경으로 하여 80년대의 위대한 성취들, 평화적 정권 이양·서울올림픽·일본 따라잡기·IT 기반 확보·북방 정책이 펼쳐졌던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善意

▲전두환 대통령은 재임 중 수시로 관련 시설들을 돌아보며 올림픽 준비에 전력했다. 1986년 5월 28일 올림픽 체조경기장을 시찰하는 전두환 대통령. 사진=조선DB
이 무렵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진짜로 돕고 있던 사람은 멀리 모스크바에 있었다. 서울올림픽의 성공 여부는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이후 12년 만에 처음으로 온전한 대회가 되느냐였고 그 열쇠를 쥔 사람은 1985년에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였다.
김일성은 1986년 가을 모스크바로 가서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2년 전 그는 소련을 방문했을 때 “이것이 나의 마지막 해외여행이다”고 얘기했었는데 왜 또 갔을까?
그 수수께끼는 독일 통일 이후 동독 공산당 정치국 비밀문서 속에서 풀렸다. 1986년 11월, 즉 김일성의 두 번째 방소(訪蘇) 한 달 뒤 모스크바에서는 사회주의 나라들의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록에 따르면 고르바초프는 김일성이 자신을 찾아와 소련과 공산권이 서울올림픽에 참가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고르바초프는 김일성의 요구를 거절했다고 밝혔다. 이 수뇌회의에서 서울올림픽 참가 여부가 논의되었다. 쿠바 수상 카스트로만이 보이콧에 찬성했고 다른 나라들은 참가를 결의했다. 남북한이 공동 개최를 하는 방향으로 노력해보고 그것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서울올림픽에 참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재독(在獨) 서병문(徐炳文) 박사는 “86년 11월의 이 150여 페이지짜리 수뇌회의 기록을 읽어보면 이 회의가 공산권의 급속한 개혁·개방을 재촉하는 분수령이었음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는 이 회의에서 공산주의가 실패했음을 솔직히 밝힙니다. 이제는 이데올로기의 껍질을 벗고 국민이 잘살게 하는 쪽으로 나아가자고 말하는 것이 퍽 감동적입니다. 서울올림픽에 참가하기로 공산권 국가들이 결정한 데는 국내적인 압력도 있었을 것입니다. 공산국가는 모두 체육 강국인 데다가 두 차례나 반쪽 올림픽을 치러 또다시 보이콧할 경우 국민들의 불만이 커질 것을 우려했을 겁니다. 북한은 동독에 대해서도 서울올림픽 보이콧을 끈질기게 요구했으나 이것만은 호네커가 듣지 않았습니다. 서울올림픽은 남북한 간의 결전이었을 뿐 아니라 동구 공산권의 붕괴를 앞당긴 촉매제였습니다.”
“평화적 정권 교체와 올림픽 성공시킬 수 있는 인물이 노태우”

▲1987년 6월 10일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는 전두환 대통령의 뜻에 따라 노태우 대표를 대선 후보로 선출했다. 대회장 밖에서는 최루탄이 터지고 있었다. 사진=조선DB
1987년은 공동운명체가 된 전두환과 올림픽에 결정적인 해였다. 박종철(朴鍾哲)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시위가 서서히 모멘텀을 키우고 있던 1987년 6월 2일 저녁 전두환 대통령은 민정당 중앙집행위원 및 민정당 소속 국회 의장단을 상춘재로 초청하여 노태우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추천하는 의식을 진행했다. 대통령은 앉은 자세로 미리 준비해간 ‘추천의 말씀 자료’를 육성으로 낭독해갔다.
“여러분이 잘 아는 바와 같이 노태우 대통령 후보는 그동안 국군보안사령관 등 군의 주요 지휘관을 역임해서 누구보다 군부를 잘 알고 탁월한 안보 식견을 갖추고 있으며 내무장관과 정무, 체육부 장관 등 행정부의 직책을 맡아 정부 조직에 정통할 뿐 아니라 올림픽 조직위원장과 국회의원, 집권당 대표위원 등을 거쳐 당과 정치인의 생리를 알고 체험을 쌓음으로써 국정을 책임질 수 있는 정치 지도자의 경륜을 두루 쌓았습니다. 따라서 우리 당에 대한 국민의 지속적인 신뢰를 확보하고 평화적 정권 교체와 88올림픽의 국가 양대사(兩大事)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최적임자로 노 대표를 추천하는 나의 이 뜻을 여러분이 흔쾌히 받아들여주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1987년 6월 10일부터 격화된 반(反)정부 시위 속에서도 전두환 대통령은 서울올림픽을 챙긴다. 6월 16일 신임 이한기(李漢基) 총리서리 등 국무위원 전원을 부부동반으로 청와대로 초청, 축하 저녁을 함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는 해방 후 10년 주기로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 같아요. 박종철 사건 하나로 시작이 되어 시끄러운 일이 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한 번은 겪어야 할 과정입니다. 체육부 장관이 좀 나서야겠어요. 올림픽을 방해하려는 북괴의 사주에 의해 움직이는 게 분명한데 내가 염려한 대로 벌써 《뉴욕타임스》 등에서는 시위 사태에 따라 올림픽의 안전 문제를 들고나오는 모양이던데, 반체제와 반정부 세력이 연합전선을 펴는 데 빨리 이 줄을 끊어야 되겠어요. 올림픽이라는 게 다시 없는 호기인데 북한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일 거요.”
“정권 잃는 한이 있더라도 올림픽은 성공시켜야”
1987년 6·29 선언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 겸 대통령 후보의 고독한 결단으로 포장되었으나 사실은 전두환 대통령이 먼저 노태우 후보에게 제의하여 이뤄진 것이다. 한국 역사상 가장 성공한 정치적 도박이었다. 이 선언으로 전날까지 가장 미움을 받던 노태우는 가장 사랑받는 정치인이 되어 그해 대선에서 승리, 직선제 초대 대통령이 되고, 서울올림픽을 역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성공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북방 정책을 추진, 격변기의 동구, 소련, 중국, 베트남과 수교, 북한을 고립시키고 한국인의 삶의 무대를 바꾼다. 6·29 선언을 결심하는 데 있어서 전두환 대통령 머리엔 서울올림픽이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1987년 6월 28일 일요일 아침 전두환 대통령은 연설문 담당인 김성익 비서관을 청와대 식당으로 불렀다. 그는 약 50분 동안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담화문 작성에 참고하도록 6·29 선언의 내용과 후속 일정을 미리 구체적으로 일러주면서 직선제 수용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노(盧) 대표 의견도 그렇고 직선제로 나가야겠어. 지식층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그걸 원하고 있어. 우리가 직선제를 안 받을 이유가 없다. 선진국에서도 직선제를 하는 나라가 거의 없고 또 직선제는 선거가 끝나면 결과에 승복을 안 해서 혼란이 야기되기 때문에 내가 그동안 안 받았는데 직선제를 하지 않음으로 해서 야기되는 혼란보다는 적을 것 아닌가. 국민이 원하면 해보자.
직선제를 해서 나라가 망하는 일이 생기면 불행하지만, 중산층이 혼란을 원하지는 않을 거야. 내가 주장해온 대로 대통령 선거법을 고쳐서 직선제에 가까운 간선제를 할 수 있지만 국민들이 직선제를 하자고 하는 것 때문에 이렇게 시끄러워서는 평화적 정부 이양도 안 될 뿐 아니라 세계인들에게 우리가 약속한 올림픽도 안 될 것 같아. 내 소신은 정권이 민정당에서 떠나도 올림픽은 성공시켜야 되겠다는 거야. 그게 나라가 잘되는 길이다.”
역사가 굉음을 내며 달려오는 듯

▲전두환-노태우 콤비는 1987년 6·29 선언으로 정국을 단번에 뒤집어놓았다. 사진=조선DB
“정권이 민정당에서 떠나도 올림픽은 성공시켜야 되겠다는 거야. 그게 나라가 잘되는 길이다”는 말은 서울올림픽에 순정을 바친 한 사나이의 감상적 고백처럼 들린다. 그러나 여기엔 차가운 계산이 깔려 있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단합하지 못할 것이란 확신! 그는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나서 닷새 후에 7월 7일 당 총재직을 사퇴함으로써 정치인과 지식인층, 그리고 국민들한테, 사심(私心) 없이 해온 내 이미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김대중은 직선제가 되면 대통령 선거에 안 나가겠다고 했지만 안 나올 리가 없다. 김영삼도 마음을 비웠다고 했지만 그렇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런 말은 안 하지만 행동으로 사심이 없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확실히 하는 거야.
당 총재직을 내가 가지고 있으면 영구 집권이라고 하고 또 현실적인 권력 구조로 볼 때 다음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 분명해지게 된다. 전 국민과 전 세계인에게 나의 모든 것을 던지고 프리(free)하게, 페어플레이(fair play)하는 거다.”
전 대통령은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그것을 보면서 6·29 선언의 구체적인 내용을 하나하나 구술해주었다. 며칠 전부터 직선제로 방향이 선회되는 느낌을 받고 있었으나 막상 구체적인 내용을 듣는 순간 김 비서관은 “역사가 큰 굉음을 내며 달려오는 듯한 충격과 흥분으로 잠시 먹먹해지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우선 대통령이 민의(民意)를 있는 그대로 읽고 있다는 점과 시국(時局)을 이상한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가지 않고 지극히 정상적인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다는 점에 안도감을 가졌다. 그다음으로 생각이 미친 것은 모든 국민이 소망하는 이 좋은 소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내놓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김대중을 풀어주면 김영삼과 부딪치게 돼”
1987년 6월 28일 오후, 직선제 선언을 대통령 명의로 발표하는 것이 좋겠다는 김성익 비서관의 건의를 받고 전두환은 6·29의 배경 등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직선제 이외에는 국민 대중과 중산층에 뭘 갖다 대도 속임수 인상을 주어서 바람직하지 않다. 힘으로 해서 노 대표가 대통령 된다고 해도 1년도 못 가. 저 사람들이 지금 올림픽을 담보로 잡고 있는데 다음 정권을 힘으로 만들면 올림픽도 못 치른다. 그러면 역사의 큰 호기를 놓친다. 내 손으로 우리 대통령을 뽑겠다는 직선제 민의를 우리가 받아준다고 해서 야당한테 지지 않는다.
김대중을 풀어주면 김영삼과 부딪치게 돼. 외부적으로는 역할분담론이 나와 있지만. 직선제를 받는 것은 야당과 언론의 급소를 찌르자는 거야.
얽히고설킨 것, 원한 많은 사람들한테, 누가 권력을 잡든, 어떤 정권이 잡든지 간에 맺힌 원한을 모두 풀어주겠다, 그래서 모두가 깨끗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나라의 백년대계를 향해서 출발하자는 거지. 내가 그 뚜렷한 명분과 이상을 추구하는 이상 직선으로 다음 정권을 창출해내야 돼. 대통령 후보는 노태우 아닌가. 노 대표가 부각되도록 하는 것이 제일의 목표다. 노 대표 이름으로 해야 돼. 나는 국민으로부터 정치는 무능하구나 하는 소리를 듣더라도 노 대표가 부각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다. 사실은 내가 노 대표한테 직선제를 받도록 시킨 것이다. 2주일 전에 그랬는데 노 대표가 펄쩍 뛰었어. 그렇게 해서 되겠느냐고. 그래서 내가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이라고 했다. 그쪽에 팀이 있는 모양인데 극비리에 작업을 해왔다. 더 이상 보안을 하기도 어려운 모양이야. 괜히 질질 끌어서 미루면 담화 발표의 참뜻이 없어진다.”
전두환 대통령은 6월 18일 부산에서 시위대가 시청을 포위하는 것을 보고 다음 날 군 출동 준비 명령을 내렸으나 오후에 취소했다. 계엄령 선포 소문이 퍼지도록 하여 자제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면 서울올림픽은 날아간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당시 ‘나는 중산층이다’는 이들이 70%나 되었다. 그들은 시위 격화로 서울올림픽이 사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올림픽은 정권과 시위대 양쪽에 다 브레이크 역할을 했던 것이다. 무혈(無血) 민주화의 길을 연 6·29 선언은 그래서 성공할 수 있었다.
“김대중이 열세, 김영삼을 때려라”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1987년 6·29 선언 다음 날 박세직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과 함께 미사리 올림픽 조정경기장을 둘러보았다. 사진=조선DB
‘1노(盧) 3(金)’의 대통령 선거운동이 치열하던 1987년 11월 9일 오전 대통령 주재로 열린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전두환은 김대중과 김영삼의 단일화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민정당은 김영삼 공격에 주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앞으로 공략 목표를 김대중보다는 김영삼에 두라고 하시오. 김대중이 열세야. 이 사람은 구속학생 모임, 서대협, 대구학생 모임 등에 나가는데 2·12 총선 때 학생들이 일어나서 야당 붐을 조성하듯이 이번에도 학생들을 최후 보루로 쓰는 것 같아. 조직의 핵심을 학생에 두고 있어요. 김대중이 열세가 되면 야당 후보가 단일화되거나 김영삼으로 집중될 우려가 있어요.”
1987년 12월 대선(大選)의 가장 큰 쟁점은 전두환 정권의 치부인 12·12 사건이었다. 그해 9월호 《월간조선》에 정승화(鄭昇和) 전 계엄사령관 인터뷰 기사가 실린 직후 김영삼은 그를 통일민주당 부총재로 영입, 군사반란 세력 단죄를 다짐하니 정권 측은 긴장하게 되었고 선거판이 살벌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김영삼이 주적(主敵)으로 되고 김대중을 전략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계산이 이뤄진 것이다.
1987년 12월 8일 전두환 대통령은 교육개혁심의위원회 위원들을 불러 점심을 대접하면서 9일 전에 있었던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에 대하여 올림픽 방해 책동이라고 설명한다.
“KAL기가 공중 폭파된 게 틀림없다고 나는 봐요. 상당히 센 폭탄인 것 같아요. 해상에 떨어진 부상물(浮上物)이 거의 없어요. 범인을 잡아낸 게 우리 국력입니다. 이북은 두 가지를 목표로 한다고 봐요. 첫째는 대통령 선거가 있으니 이북에서는 이 기간에 최대한 혼란을 조성해서 선거가 안 되게 해야겠다 하는 것과, 둘째는 전 세계에서 올림픽에 참가하려는데 다 죽을 위험성이 있다고 겁을 주어서 참가를 안 하도록 하는 것으로 봅니다. 북한의 계획적인 테러인 것만은 분명해 보여요. 다른 나라는 이런 짓을 할 나라가 없고 할 이유도 없어요. 시체와 범인 여자를 인수해보면 상당히 빠른 시일 내에 전모를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정부가 지금 신경 쓰는 게 이북이 대통령 후보 세 사람 중 한 사람을 해칠까 봐 걱정입니다.”
KAL기 폭파 사건이 난 것은 11월 29일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아웅산 테러 때와 마찬가지로 즉각 북한의 계획적인 범행이라고 추정했다. 폭파범 ‘마유미’는 12월 15일 서울로 이송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7년 12월 10일 오전 제5공화국 경제치적 보고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안정을 다지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허무는 것은 삽시간입니다. 건물 짓는 데는 5년에서 7년이 걸리지만 불을 싸지르면 하루 만에 다 타요. 이번 KAL 사건도 보세요. 그 뜨거운 중동에 어려운 사람들이 가서 일을 끝내고 손에 몇 푼씩 쥐고 희망에 차서 귀국하는데 폭발시키는 참사가 났어요.
이것이 한국의 현실입니다. 이것을 외면하고 김일성을 순화해서 평화 공존시킨다고 하는데 김일성이 순화될 인물입니까. 그 얘기 하고 나서 며칠 안 돼 총격을 가해왔고 이런 참사가 일어났어요. 모스크바에서 얘기를 해도 말 안 듣는 김일성을 우리 대통령이 순화하고 타일러서 한반도에 평화 정착을 시키려 하는 것은 얼마나 소견머리 없는 일입니까.”
1988년 12월 18일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는 김대중-김영삼 분열구도 덕분에 3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6·29 선언을 결심할 때의 계산이 적중했던 것이다.
“감정이 북받쳐서 순순히 내놓을 기분이 아닐 때도 있었어요”
전두환 대통령은 1988년 1월 7일 저녁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송별만찬을 가졌다. 인간적인 토로 속에서 또 올림픽 이야기가 나온다. 한 기자가 “집권 연장의 유혹을 느낀 적은 없으신지요”라고 물었다.
“내가 유혹을 느꼈다기보다 유혹한 사람들이 내외국인 중에 많았어요. 내가 85년에 미국에 갔었는데 민주당 상원의원 한 사람이 한국이 유치한 올림픽이 얼마나 중요한 거냐,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이 계속해야 되지 않느냐고 진지하게 얘기했어요. IOC 조직위에서는 수차, 대통령을 보고 서울올림픽을 결정했는데 바뀌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어요. 국내에서도 우리나라 발전을 위해서는 한 임기 더 하는 게 좋지 않으냐고 노골적으로 얘기한 전직 국회의원도 있었어요.
그때마다 나 같은 사람이 대통령 된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느냐, 나보다 훌륭한 분이 줄을 서 있다. 우리 국민은 우수하기 때문에 누가 후임 대통령이 되든 훌륭한 지도자로 양성해줄 거고 어려울 때 단합하는 힘이 있으니 절대 걱정 말라고 했어요. 작년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이래서 정권을 이양할 수 없었겠구나, 이해가 갔어요. 내가 정권을 내놓는다고 하면 내가 잘못이 있더라도 덮어주고 보호해주려고 해야 하는데 내놓는다니까 까뒤집고 해요. 박건석(朴健碩)인가 하는 사람이 떨어져 죽은 사고가 있었는데 내가 그 사람 꼴도 잘 몰라요. 그런데 정부가 그 사람 돈을 먹었다고 공격하고.
사사건건 그런 식으로 물고 늘어지면 정치가 안 되고 투쟁이 돼요. 권투 선수를 뽑아서 권투를 하는 게 낫지. 사람이 감정의 동물입니다. 나가는 사람, 가만있는 사람 약을 올리면 이성을 잃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맞아 죽는 게 창피 안 당하고 더 행복한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어요. 감정이 북받쳐서 순순히 내놓을 기분이 아닐 때도 있었어요.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했어요.”
“겨우 잡은 선진국 문고리 삐끗하면 다시 닫혀”
다른 기자가 “재임 7년간 남기고 싶었던 게 뭐냐고 한다면 선진국의 문고리를 잡게 된 것이라고 말씀한 일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우리가 문고리는 열어놓았는데 이게 잘못하면 닫힌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국민이 조금만 합심하면 선진국이라고 하는 안방을 차지하게 돼요. 그래서 앞으로 4~5년이 정말 중요해요. 소련과 중공을 자유스럽게 여행할 수 있는 환경 변화가 올 것이고 이북과도 동·서독 정도로 교류가 트일 것으로 나는 봐요. 나는 우리 국민의 우수성을 실감했어요. 똑똑한 사람이 많기 때문에 비판도 많고 말도 많아요. 둔한 사람들이 많으면 통치하기는 쉽겠지만 발전은 없어요.”
또 다른 기자가 “대통령으로서의 경험을 후임 정부와 협의하는 문제에 대해서는?”이라고 물었다.
“후임자는 나와 친한 사이니까 고통 스럽고 고민스러운 일이 있으면 자문을 해달라든지 요청이 있지 않겠나 봐요. 그러면 내가 그분을 위해 다소라도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생각해요. 친하다고 해서 요청도 없는데 나서면 상호 불편해져요. 부자지간에도 자기 철학과 원칙에 따라서 하는 거니까.”
김성익 통치사료 비서관은 이런 메모를 남겼다.
〈전두환 대통령은 이 무렵 송별모임에서 자신의 심경을 말하는 일이 많아졌다.〉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음을 실감한 데서 나오는 착잡한 느낌을 감추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언론의 보도를 통해서 후임자 측의 분위기가 전해지면서 청와대 분위기는 쓸쓸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전 대통령 역시 뭔가 섭섭한 느낌을 털어놓을 때가 있었으며 스스로 감정을 추스르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1월 14일 언론사 편집국장들과 가진 오찬 석상에서 “어떤 수모라도 참고 견디겠다는 각오가 없으면 대통령을 내놓을 수가 없다” “노태우가 모든 것을 잘 봐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섭섭한 꼴을 따지면 대통령 못 내놓아요. 요다음 사람이 잘해주면 대통령을 임기 동안 끝마친 전임 대통령이 한 사람 있다 하는 것으로 내외적으로 민주주의 의식이 달라지지 않겠느냐 봐요.”
레이건 대통령의 善意
이 무렵 서울올림픽의 성공에 선의를 가지고 신경을 써주고 있었던 이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었다.
《레이건 일기》의 567페이지에는 1988년 1월 14일 목요일에 쓴 내용이 실려 있다.
〈백악관 안보회의를 열었다. 한국의 스파이 이야기가 보고되었다. 바레인에서 잡힌 24세의 여성은 대한항공 폭파 용의자인데 자신이 북한 공작원이며 올해 열리는 서울올림픽을 방해하도록 명령을 받았다는 자백을 했다고 한다.〉
이 일기는 당일 안기부의 김현희 수사보고를 인용한 것이다. 미국이 서울올림픽이 안전하게 치러질 수 있도록 소련을 통하여 북한 정권에 압력을 넣은 일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레이건 대통령, 슐츠 국무장관, 칼루치 국방장관까지 나서서 소련을 움직였다. 이런 사실은 1988년 6월 8일 청와대로 노태우 대통령을 예방한 프랭크 칼루치 미 국방장관의 설명에서도 잘 드러난다. 칼루치 장관은 크라우 합참의장 등을 대동했다. 그는 그 직전에 있었던 레이건-고르바초프 정상회담에 대해서 보고하면서 서울올림픽의 안전 문제에 대해 거론했음을 밝혔다.
〈북한 문제와 올림픽 안전에 관해서는 수차 소련 측에 의견을 개진하였는 바, 셰바르드나제 외상은 오찬 시 레이건 대통령께 북한은 도발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 이에 대하여 미국 측에서는 그렇다면 다행한 일이나, 분명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촉구한 바 있습니다. 슐츠 장관은 대통령이 보는 앞에서 소련 측에 북한이 최근 SA-5 미사일을 전방배치 한 것을 지적한 바 있고, 본인도 만찬석상에서 옆에 앉은 그로미코 의장(과거 25년간 외상을 지냄)에게 촉구하였던 바, “그는 북한에 알아본 바, 올림픽을 방해할 하등의 의사가 없다고 하더라”고 하였으며, 본인이 한국 측에 그렇게 전달해도 되겠냐고 문의한 데 대해서 좋다고 확답을 하였습니다.〉
“살아서 청와대를 나간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8년 2월 25일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후 손자를 안고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왔다. 사진=조선DB
1988년 2월 8일 대통령은 청와대 식당에서 이념교육 유공 교수들을 초청해 오찬을 가졌다.
“친구지만 노태우도 인간 전두환은 잘 알아도 대통령 전두환은 이해 못 합니다. 그동안 나한테 와서 자기 얘기하고 내 얘기만 듣고 갔지 대통령의 고충을 알 길이 없어요. 앉아보면 ‘권위주의 청산’ ‘보통 사람’ 며칠 후에 없어질 겁니다. 인기만 끌다가는 1~2년 안에 나라 망칩니다.
나는 2월 24일까지 가차 없이 할 겁니다. 사람이 인기 먹고 삽니까. 지금 권위주의 배격 운운하는데 여러분이 전공하는 분야에서는 권위자가 많이 배출되었으면 해요. 교육계에 대가(大家)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옆의 사람 좋은 말하면 깎고 서로 치고받다 보니 대가라는 이름 듣는 사람이 없어요. 대가가 아니라도 추대해서 만들어야 됩니다. 군사독재라고 떠들어도 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리게 된 건 틀림없지 않습니까. 더 이상 정통성의 시비가 있을 수 없게 되었으니 여러분이 교육을 하는 데에도 명분이 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8년 2월 19일 자신의 재임 중에 청와대를 출입한 언론인들과 청와대 출입기자단을 점심에 초대한 자리에서 “청와대가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흉가입니다”라고 했다.
“보통 집으로 말하면 재수 없는 집이지. 이기붕 일가가 몰살하고 이승만 박사 쫓겨나고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와서 육 여사가 시해되고 박 대통령이 또 시해되었어요. 여기 와서 대통령으로 일한 사람치고 제대로 살아나간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개인 집으로 치면 이런 흉가가 없어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은 이런 느낌을 몰라요. 단임을 아무리 떠들어도 내가 버마에서 죽었다고 해봐요. 내가 살아야 단임이라는 것을 사실로서 입증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내가 지금은 죽어도 괜찮아요. 후임 대통령이 있으니. 내가 죽으면 정말 청와대가 흉가가 돼요. 그래서 내가 내 손주를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해요. 총독부 이래 여기서 죽어만 나갔지 태어난 일이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새 생명도 탄생한다는 사실로서 청와대를 바꾸어놓은 겁니다.”
올림픽 개회식 불참
올림픽 개회식을 일주일 앞둔 1988년 9월 10일 박세직 조직위원장이 초청장을 가지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연희동 자택을 찾았다. 전두환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참관하느냐 않느냐로 잡음이 일고 있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런 까닭으로 나는 개회식 참석 요청을 정중히 사양한다.”
박 위원장은 붉어진 눈시울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바쁜 일이 많을 텐데 어서 가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서 TV를 통해서 개회식 광경을 지켜봤다. 단상 로열박스에는 노태우 대통령은 물론 서울올림픽을 히틀러의 베를린올림픽에 빗대며 빈정거렸던 김영삼씨 모습도 보였다. 그래도 나는 행복했다. 북한의 테러가 있을까 봐 노심초사했는데 행사가 무사히 끝나서 기뻤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찾아와서 감사를 표했다. 서울올림픽은 참가국 수와 선수단 규모에서 가장 큰 대회였고 가장 성공적인 대회였다는 치하도 했다. 16일간의 대회가 끝나자 검찰 중수부도 5공 비리 의혹 가운데 내사를 끝낸 사건 관계자들에 대한 소환 조사에 착수했다.〉(회고록)
서울올림픽에 순정을 바치고 이제 힘없는 한 시민으로 돌아온 전두환은 11월 23일 백담사로 떠났다. 6·25로 폐허가 된 나라가 한 세대 만에 세계 앞에서 만들어 보여준 화려한 가을은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월간조선 07월 호 글 : 조갑제 조갑제TV·닷컴 대표
07.04 1455년 제작된 '신숙주 초상화' 국보 된다
세조가 즉위하면서 공신으로
현존 공신 초상화 중 가장 오래돼… 보물로 지정 후 47년 만의 승격

▲국보로 지정예고된 신숙주 초상화. /국가유산청
훈민정음 창제를 도운 관료이자 조선 전기 세 임금 밑에서 재상을 지낸 문신 신숙주(1417~1475)의 초상화가 국보가 된다.
국가유산청은 현존하는 공신 초상화 중 가장 오래된 ‘신숙주 초상’을 국보로 지정 예고한다고 3일 밝혔다. 충북 청주의 구봉영당(九峯影堂)에 봉안돼 전해 오는 작품으로, 1977년 보물로 지정된 이후 47년 만의 국보 승격이다. 공신 초상화란 나라에 공로가 있는 신하를 책봉할 때 그려서 하사하는 그림을 말한다.
초상화 속 신숙주는 풍채 좋고 당당한 30대의 모습이다. 꿩과의 조류인 백한(白鷳)이 가슴에 그려진 녹색 관복을 입고, 허리에는 은으로 장식한 허리띠를 두르고 있다. 문관 3품에 해당하는 복식으로, 이 초상화는 1455년 그가 공신에 책봉됐을 때 포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고 국가유산청은 덧붙였다.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1453년 일으킨 계유정난 때 세운 공이다.
1455년 수양대군이 제7대 임금 세조로 즉위하면서 좌익공신이 됐다. 세조는 “단순한 서생(書生)이 아니라 지장(智將)이고, 나의 위징(魏徵·중국 당나라 초기 공신)”이라고 할 정도로 그를 아끼고 신임했다. 이후에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예문관 대제학, 병조판서,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다음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다.
국가유산청 관계자는 “신숙주 초상화는 조선 전기 공신 초상을 대표하는 작품”이라며 “제작 당시의 원형을 비교적 충실하게 보전하고 있어서 미술사적으로 가치가 있고, 조선 전기 정치와 학문에서 뚜렷한 자취를 남긴 신숙주의 인품이 잘 드러난 그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 허윤희 기자
07.06 100년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는 '고종 독살' 괴담
기록에 나와 있는 고종 사망의 진실은

▲고종 초상화. 조선 26대 왕이자 초대 대한제국 황제로 파란만장한 삶을 산 군주였다. 1919년 영친왕 결혼식을 나흘 앞둔 1월 21일 그의 죽음은 독살됐다는 소문과 함께 거국적인 독립운동을 촉발했다. /국립고궁박물관
105년 전 유인물 한 장
1919년 3월 1일 서울 시내에 유인물이 유포됐다. ‘국민회의’ 명의로 살포된 유인물에는 ‘이완용으로 하여금 윤덕영, 한상학이 궁녀들을 끌어들여 고종을 독이 든 식혜로 죽였다’고 적혀 있었다. 이완용과 김윤식, 윤택영, 조중응과 송병준, 신흥우가 파리강화회의에 독립 불원서(不願書)를 제출하려 하는데 고종이 문서에 도장을 찍어주지 않아 죽였다는 것이다(‘국민회보’. 윤소영, ‘3.1운동 100주년 총서’2, 휴머니스트, 2019, pp.23~25, 재인용). ‘문제는 그날 밤 고종의 병세가 깊다면서 숙직시킨 인물들이 자작 이완용과 이기용(李埼鎔)이란 점이다. 이완용 등이 두 나인에게 독약 탄 식혜를 올려 독살했는데 그 두 명도 입을 막기 위해 살해했다는 것이다.’(이덕일, 2011년 11월 6일 ‘중앙일보’)

▲1919년 3월 1일 아침 서울 시내에 뿌려진 '국민회보' 전단지 필사본.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가 '독립 불원서' 서명을 거부한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적혀 있다. /부산시립박물관
그리하여 ‘이 변고가 전파되니 경성에 수십 만 군중이 모여서 독립의 사상을 고무하는 일대 비풍(悲風)이 되었다.’(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한일관계사료집’4, 독립운동의 사건) 그뿐만 아니었다.
‘매국적신들이 일본에의 병속을 자원하며 독립을 원하지 않는다는 거짓 민의를 조작하고 있는데 그중에는 유림을 대표하여 김윤식도 들어 있으니 유림들이 따로 강화회의에 글을 보내 진정한 우리 뜻을 전하고자 한다’(김황, ‘기파리소서사(記巴里愬書事)’, ‘중재선생문집’13. 허선도, ‘삼일운동과 유교계’, 삼일운동 50주년 기념논집, 동아일보사, 1969, p292, 재인용)
1919년 3·1운동에 대한 몇몇 기록이다. ‘독립 불원서’라는 문서에서 시작된 갈등이 고종 독살을 불러왔고, 임시정부는 이 사건이 3·1운동의 기폭제가 됐다고 평가했다는 것이다.
괴담의 생명력
역사는 때때로 예정되지 않은 사건이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 소위 ‘가짜 뉴스’ 혹은 ‘괴담’도 물줄기를 바꾸는 역할을 한다. 지난달 10일 전남 화순군 능주면 능주초등학교에 있는 정율성 벽화가 철거됐다. 중국 군가를 작곡하고 6·25전쟁 때 북한군으로 참전해 북한 군가들을 작곡한 사람이다. 서울 한강대교에 서울시가 설치했던 ‘한강인도교 폭파 현장’ 동판도 교체됐다. 2016년 박원순 시장 때 설치했던 동판에는 ‘정부의 일방적인 교량 폭파로 피란민 800여 명 사망’이라고 새겨져 있었는데, 새 동판 문구는 ‘군중 500~800명의 인명 피해 추정’으로 바뀌었다. 나라를 분열시켰던 굵직굵직한 왜곡 사례들이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는 중이다.
괴담은 생명력이 강하다.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종 독살설이다. 앞에 소개한 3·1운동 직전 상황을 읽어보면 ‘독살당한 옛 군주’ 스토리는 참으로 드라마틱하고 격정적이다. 임정 평가처럼 고종 독살설은 민족을 단결시키고 항일정신을 분출시키는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설(說)’에 불과하다. 고종은 독살당하지 않았다. ‘독립 불원서’라는 문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완용은 고종 사망 당일 숙직한 사실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괴담은 각종 대중매체를 통해 사실인 양 떠도는 중이다.
영친왕 혼례식과 고종의 죽음
1918년 12월 영친왕과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 혼례 날짜가 결정됐다. 날짜는 1919년 1월 25일이었다(1918년 12월 7일 ‘매일신보’). 1919년 1월 14일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결혼식 준비를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같은 날 이왕직 장관 민병석, 찬사 윤덕영, 찬사 조민희가 일본으로 떠났다(1919년 1월 14일 ‘순종실록부록’). 17일 이왕직 차관 고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郎)도 출국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이완용을 비롯해 송병준, 윤택영, 조동윤, 민영찬 같은 조선 귀족들도 속속 출국했다. 조선총독부 2인자인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郎)는 와병 중이었다. 조선군 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郎)는 지방 순시 중이어서 출국하지 못했다(이승엽, ‘이태왕(고종) 독살설의 검토’, 二十世紀研究10, 교토대 21세기연구편집위원회, 2009). 총독부와 이왕직이 텅 비었다. 결혼식을 닷새 앞둔 1월 20일 저녁 고종이 몸에 탈이 났다. 왕실 주치의 김영배와 총독부 의원장 하가 에이지로가 고종을 진찰하고 돌아갔다(1919년 1월 20일 ‘순종실록부록’). 다음 날인 1월 21일 새벽 고종이 죽었다. 정확한 시각은 오전 6시 35분이었다.
미숙했던 조선총독부
조·일 양국은 대혼란에 빠졌다. 총독부터 친일 귀족까지 자리를 비운 조선은 더 큰 혼란에 빠졌다. 허둥대던 이왕직은 1월 21일 오후 1시 고종이 오전 6시 35분 ‘중태’에 빠졌다고 발표했다. 총독부와 이왕직 수뇌부가 없는 상황에서 고종 사망 사실이나 영친왕 결혼식에 관한 방침을 정하지 못하고 시간을 벌려는 조치였다(이승엽, 앞 논문).
일본에 있던 조선 귀족들은 소식을 접하자마자 속속 귀국했다. 총독 하세가와는 일본 궁내성과 협의해 영친왕 결혼식을 무기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하루가 지난 1월 22일 오전 8시 이왕직은 ‘중태에 빠졌던 이태왕이 22일 오전 6시 죽었다[薨去·훙거]’고 발표했다.

▲1919년 1월 23일자 '매일신보'. 영친왕 결혼식 때문에 수뇌부들이 모두 일본에 가 있던 총독부는 고종이 1월 21일이 아닌 1월 22일에 죽었다고 발표했다. 급작스러운 죽음에 미숙하게 대처한 탓에 독살설을 비롯한 각종 소문이 양산됐다. /국립중앙도서관
이 미숙한 초기 대응이 고종이 독살됐다는 괴담의 첫 번째 원인이었다. 이미 21일 오전부터 고종이 죽었다는 소문이 서울에 퍼지고 있었다. 이날 아침 소식을 접한 윤치호는 ‘왕세자 결혼식이 임박해 있기 때문에 잠시 비밀로 한 듯하다’고 일기에 기록했다(1919년 1월 21일 ‘윤치호일기’).
파리강화회의와 민족자결주의
한 해 전인 1918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약소국 미래는 각 민족이 알아서 결정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했다. 이 원칙은 1차 세계대전 패전국 치하 식민지 처리 방안 가운데 하나였다. 일본이 소속된 연합국 식민지는 해당이 되지 않는 냉혹한 원칙이었다.
조선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조선에도 해당하는 선언으로 받아들였다. 1919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파리강화회의 개최가 결정됐다.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을 청원하는 대표단 파견을 결정했다. 하지만 아무도 참석은 허용되지 않았다.
1919년 1월 6일 재일유학생 단체인 조선유학생학우회가 독립 청원 운동을 결정했다. 이들과 연계한 국내 지도자들도 거사를 계획했다. 그러던 와중에 고종이 죽었다. 2월 8일 재일 조선인들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고종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아다녔다. 조선 팔도에 항일 감정과 적개심, 망국의 설움이 극도로 증폭됐다. 조선 지도자들은 고종 장례일인 3월 1일 거사를 계획했다.
거사 당일 그때까지 소문을 종합한 ‘국민회보’ 유인물이 도처에 깔렸다. 임정이 평가한 대로, ‘독살당한 옛 임금’은 식민지 전락 9년 만에 조선 민중을 극적으로 결집시켰다. 여기까지가 3·1운동까지 전사(前史)다.

▲1919년 1월 21일 '찬시실일기'. 고종 사망 당일 숙직자가 자작 이완용과 자작 이기용이라고 적혀 있다. 이 이완용은 을사오적 이완용(李完用)이 아니라 동명이인인 이완용(李完鎔)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장서각
괴담1 숙직한 이완용이 독살 지휘?
거짓말이다. 덕수궁과 창덕궁 당직실에서 작성한 ‘찬시실일기’에 기록된 당직자는 ‘자작 이완용’과 ‘자작 이기용’이다. 그런데 이 ‘자작 이완용(李完鎔)’은 우리가 아는 후작 이완용(李完用)이 아니다. 한자 이름이 다른 동명이인이다.
그런데 재야사학자 이덕일씨는 중앙일보 기고문은 물론 단행본에 ‘숙직시킨 인물들이 자작 이완용과 이기용(李埼鎔)’이라며 이완용의 한자 이름을 은폐했다(이덕일, ‘조선 왕을 말하다’2, 역사의 아침, 2010, p463). 이완용은 영친왕 결혼식 참석을 위해 일본에 있었다.
식혜를 먹인 궁녀들이 의문사했다는 주장도 괴담이다. 당시 궁녀 두 사람이 죽었다. 고종에게 음식을 올릴 위치가 아니었다. 안동별궁 침방 궁녀 김춘형(79)은 감기를 앓다가 1월 23일 죽었다. 덕수궁 잡역 궁녀 박완기(62)는 폐결핵을 앓다가 2월 2일 죽었다(1919년 3월 15일 ‘매일신보’).
고종 시신이 (독살당한 것처럼) 부풀어 올랐고 이가 빠져 있었다는 목격담도 있다(1920년 10월 3일 ‘윤치호일기’). 이는 사망 후 사흘 넘도록 온돌방에 안치된 시신에 발생하는 자연 현상이다.
괴담2 ‘독립 불원서’를 거부해 독살?
‘독립불원서’라는 문서 서명을 고종이 거부했다는 주장 또한 거짓말이다. 당시 전국 유림들은 이 문서에 유림 대표 김윤식이 서명한 사실에 격분해 ‘파리장서’ 운동을 벌였다. 그런데 그 문서 자체가 괴담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문서를 봤거나 읽은 사람이 없다.
김윤식은 현재 친일파로 분류돼 있다. 총독부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다. 김윤식은 동료 유학자 이용직과 함께 3월 26일 일본 ‘도쿄아사히신문’과 ‘시사신문’, 조선의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에 ‘독립청원서’를 발송했다. 독립 ‘청원서’다.
“나는 합병 때도 극력 반대하였으나 앞서서 찬성한 것으로 오인돼 매국노라 불리워 면목이 없던 차였다. 내가 독립불원서에 서명했다는 소문을 듣고서 어떻게 심사가 사나웠던지 공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김윤식, 이용직 판결문’,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원문사료실 독립운동사자료집) 두 사람은 이 일로 체포돼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귀족 작위도 박탈당했다(1919년 7월 28일 ‘총독부관보’).

▲김윤식과 이용직 작위 박탈을 공고한 1919년 7월 28일 총독부 관보. /국립중앙도서관
괴담3 ‘소문’과 왜곡
독살설은 독립운동 세력을 결집시키는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렇다고 이를 사실이라고 주장하면 ‘광우병 괴담은 사실’이라는 주장과 똑같다. 그런데 21세기에도 고종이 독살됐다는 주장이 떠돈다. 2009년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태진씨는 ‘독살 풍설(風說)’을 메모한 일본 궁내성 관리 일기장을 근거로 ‘데라우치와 하세가와가 독살을 지시했다’고 단정했다(이태진, ‘고종황제의 독살과 일본정부 수뇌부’, 역사학보 204, 역사학회, 2009; ‘끝나지 않은 역사’, 태학사, 2017, p244). 그해 KBS는 이 논문을 토대로 ‘고종 황제, 그 죽음의 진실’이라는 광복절 특집 ‘역사스페셜’을 통해 고종이 독살됐다고 주장했다.

▲고종 생가인 서울 운현궁 홈페이지 안내문. '숙직을 한 이완용이 고종을 독살했다'고 소개돼 있다.
재야사학자 이덕일씨는 동명이인 이완용을 끄집어내 ‘이완용 지시 독살’을 주장했다. 서울 운현궁 홈페이지는 ‘이완용이 숙직을 하면서 나인을 시켜 고종에게 식혜를 올렸다’고 소개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역사 관련 저술 및 강연가로 알려진 썬킴이라는 방송인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고종 황제 승하 당시 당직 담당은 이완용’이라고 주장했다(2024년 6월 18일 E채널 ‘설록: 네 가지 진실: 고종황제의 죽음, 그 숨겨진 진실!’). 사료를 훑어보면 사실이 보인다. 괴담의 근원은 1919년 3월 1일 뿌려진 전단지뿐이다.

▲고종을 이완용이 독살했다고 무비판적으로 소개하는 예능프로그램.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
07.07 김구의 정권 인수 시도는 왜 '1일 천하'로 끝났나
김 주석과 임시정부
실패한 國字 쿠데타

▲일러스트=한상엽
1945년 11월 5일, 김구 주석과 임시정부(임정) 요인 30여 명은 중국 장제스 정부가 보내준 군용기 편으로 충칭을 떠나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임정은 미 군정과 환국 조건을 합의하지 못해 한동안 발이 묶였다. 11월 19일, 결국 김구 주석은 중국 주둔 미군 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에게 편지를 썼다.
“나와 충칭에 주재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들이 항공편으로 입국하는 것과 관련해 공인 자격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입국이 허락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바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입국하여 행정적,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정부로서 기능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합니다.”
‘서약서’를 대신한 이 편지를 받은 후에야 중국 주둔 미군은 임정에 수송기를 제공했다. 수송기가 협소하다는 이유에서 환국은 1, 2진으로 나눠 진행되었다. 11월 23일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등 1진 15명이 김포비행장에 도착했다. 아무런 환영 행사도 없이 미군이 제공한 승용차에 탑승해 ‘금광 재벌’ 최창학의 저택 죽첨장으로 이동했다. 임정에 헌납된 죽첨장은 이후 ‘경교장’이라 불렸다.
12월 1일 조소앙, 김원봉, 신익희 등 20여 명의 환국 2진을 태우고 상하이를 출발한 수송기는 폭설 탓에 김포비행장에 착륙할 수 없었다. 눈이 쌓이지 않은 곳을 찾아 남쪽으로 비행하다가 군산 옥구비행장에 착륙했다. 고령의 임정 요인들은 엄동설한에 미군 트럭을 타고 이동하다가 이튿날 대전 유성비행장에서 군용기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19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임정 개선 환영대회’에는 동아일보가 “15만의 군중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고 보도할 만큼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정파를 초월해 전 민중이 27년 만에 귀국한 김구 주석과 임정 요인을 뜨겁게 환영했다. 하지만 미 군정은 물론 이승만이 주도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인민공화국(인공)’ 어느 쪽도 ‘망명정부’로서 임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 군정 후원하에 정부 수립을 목표로 결성된 독촉은 임정의 ‘합류’를 요청했고, 인공은 임정에 ‘대등한 조건’으로 통합을 제안했다. 두 제안 모두, 임정 주도로 ‘과도 정권’을 구성하고, ‘국민 대표 대회’를 소집해 ‘정식 정권’을 수립하려 한 임정의 구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임정 봉대(奉戴)’를 명분으로 조직된 한국민주당(한민당)과는 정치 자금 제공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 한민당 수석총무 송진우는 임정 환국에 앞서 ‘환국 지사 후원회(후원회)’를 조직하고 임정에 전달할 정치자금을 모금했다. 임정이 귀국하자 송진우는 1차로 900만원을 전달했다. 하지만 김구는 후원회에 ‘친일 실업인’이 다수 포함되었다는 이유에서 그 자금을 반려하려 했다. 임정과 후원회 연석회의에서 송진우는 이렇게 말했다.
“여보시오 임정 요인 양반들, 정부가 받아들이는 세금 속에는 애국자 양민의 돈도 들어 있고, 장사꾼이나 죄인의 돈도 섞여 있는 법이오. 지금은 임정이 정부 행세를 못 하니까, 세금을 거둘 형편도 못 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뜻있는 몇몇 분이 자진해서 성금을 갹출했는데 그걸 가지고 부정이다 뭐다 가릴 여지가 어디 있단 말이오!” 결국 임정은 그 자금을 받기로 했다.

▲1945년 11월 23일 귀국 직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조소앙(앞줄 오른쪽 두번째)과 그 왼쪽부터 차례로 김규식·김구·이시영.
환영 대회를 앞두고 한민당과 임정 요인들이 함께한 회식 자리에서 양측의 갈등은 더 깊어졌다. 술자리가 무르익어 갈 때,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가 “국내에 있던 사람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라고 비난했다.
장덕수가 “그렇다면 해공(신익희), 난 어김없는 숙청감이군 그래!”라고 항의하자, 신익희는 “어디 설산(장덕수)뿐인가!”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매사에 신중했던 송진우도 그날만큼은 모욕을 참지 않았다. “여보 해공!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이 된 임정을 누가 오게 하였기에 그런 큰소리가 나오는 거요? 소위 인공 작자들이 했을 것 같아? 당신들이 중국에서 궁할 때 무엇을 해 먹고 살았는지 여기서 모르는 줄 알아?”
환국 후 한 달 가까이 정국에서 소외되었던 임정은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계기로 정국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모스크바삼상회의 결과가 알려진 12월 28일부터 정당과 사회 단체의 반탁 성명이 줄을 이었다. 29일, 군정청 한국인 직원 3000여 명도 총파업에 들어갔다. 하지 장군의 요리사까지 파업에 동참하는 바람에 하지 장군이 관사에서 식사를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31일, 서울 시내 경찰서 10곳 중 8곳의 경찰서장이 경교장으로 김구를 방문해 “앞으로 모든 경찰관은 김구 주석의 지시를 따라 치안 확보의 중임을 다하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그날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는 “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구 한국인 직원은 전부 임정 지휘하에 예속하게 함”(‘國字 제1호’), “일반 국민은 금후 임정 지도하에 제반 산업을 부흥하기를 요망함”(‘국자 제2호’)이라는 포고문을 공포했다. 사실상 임정이 미군정으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겠다는 선언이었다.
하지는 임정이 반탁을 빙자해 미 군정을 접수하고, 미군을 축출하려는 ‘쿠데타’를 획책한 것이라 격분했다. 미 군정은 임정 요인 전원을 체포해 인천 ‘일본 포로수용소’에 수용했다가 중국으로 추방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이튿날인 1월 1일 오후 2시, 하지와 김구가 반도호텔 미군사령부에서 만났다. 하지는 김구에게 “다시 나를 배반하면 죽이겠다”고 위협했고, 김구는 “집무실 카펫 위에서 당장 자살하겠다”고 맞섰다.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회담은 “반탁 운동을 계속하되 질서 파괴 행위는 자제한다”는 데 합의하고 끝났다. 그날 밤 8시, 임정 선전부장 엄항섭이 라디오 마이크 앞에서 김구의 대국민 선언문을 대독했다.
“나는 질서 정연한 시위 운동에 대하여 십분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나는 이것이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데 있고 결코 연합국의 군정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 우리 동포는 곧 직장으로 돌아가서 본업을 계속할 것이며, 특히 군정청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파업을 중지하고 일제히 복업(復業)하기를 바란다.”
김구에 충성을 맹세한 경찰서장 8명은 ‘명령 불복종’을 사유로 1월 4일 전원 파면되었다. ‘쿠데타’를 주도한 신익희가 CIC(미군방첩대)에 체포돼 이틀 동안 신문을 받고 풀려난 것 외에 이 사건으로 처벌받은 임정 요인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하루 만에 ‘진압’된 임정의 무모한 정권 인수 시도는 김구와 임정에 대한 미 군정의 신뢰를 완전히 깨뜨려 버렸다. 이후 김구와 임정은 해방 정국에서 의미 있는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참고 문헌>
김상구, ‘김구 청문회 2′, 매직하우스, 2014
서중석,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 역사비평사,
이경남, ‘설산 장덕수’, 동아일보사, 1981
정용욱, ‘편지로 읽는 해방과 점령’, 민음사, 2021
조병옥, ‘나의 회고록’, 민교사, 1959
최선우·박진, ‘미군정기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연구’, 경찰학논총 제5-1호, 2010
조선일보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07-18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의 경복궁 침탈, 언론 봉쇄로 진상 은

▲1894년 경복궁을 공격한 일본군이 광화문을 통해 궁으로 입성하려는 모습을 그린 목판화. 동아일보DB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은 기습적으로 조선의 왕궁인 경복궁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이들은 동학농민군에 밀리던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자 이에 맞서 자국 공관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파병한 병력이었다. 명목은 그러했지만 청군의 파병 병력을 파악한 뒤에 그보다 많은 병력을 보냈다. 이들은 처음부터 청과 전쟁을 벌일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은 전주화약을 맺고 해산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청군에 되돌아가 줄 것을 청했고, 청의 원세개(위안스카이)는 오토리 일본 공사에게 같이 철군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그 후에도 계속 증원되었다. 그러면서 청에는 조선 내정을 공동으로 개혁하자고 제안했다. 물론 조선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청이 그런 제안을 받을 리가 없었다. 7월 19일 일본은 청과 전쟁을 결정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 앞서 배후의 위협이 될 조선을 정리하고자 했다.
7월 20일 일본은 조선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청과 절연하고 일본군의 조선 주둔을 허락하라는 내용이었다. “조선 정부에 청나라 군대가 속방(俗方)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주둔한 것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조선이 독립국이라면 청군에게 나가라고 요청해야 한다”고 압박을 가했다. 만일 청군을 몰아낼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면 일본군이 대신 몰아내 주겠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했다.
일본은 조선의 답변이 불만족스럽다는 이유를 들어 경복궁 점령 작전을 진행했다. 각 부대가 한양 사대문을 점거하고 경복궁의 출입문들을 습격할 계획이 수립되었다. 일본군은 23일 0시 30분, 전신선을 끊는 것으로 점령 작전을 개시했다. 청에 연락이 가지 못하게 전신선을 끊은 것이다. 일본군은 오전 4시 20분 경복궁 건춘문에 도착했다. 우리 수비병이 발포하자 응사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다른 부대는 반대편의 영추문을 부수고 진입을 시도했다. 영추문으로 들어온 일본군에 의해 수비병들은 협공을 당했으나 오전 7시 30분까지 물러서지 않고 싸웠다. 일본군은 고종을 찾아 왕궁을 수색했다. 오전 9시경 고종을 체포하고 협박하여 수비군의 저항을 끝내도록 했다. 그럼에도 경복궁에서 총격전은 오후 2시까지 지속되었다.
일본은 이 침탈이 갑자기 조선군이 발포해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거짓말
이다. 대외적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지켜주기 위해 청나라와 싸우기까지 했다고 주장한다. 이웃 국가
의 독립을 지켜주기 위한 의로운 전쟁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도 물론 거짓말이다. 하지만 철저
히 언론을 통제했기 때문에 이 진상을 아는 일본인은 거의 없었다. 일본의 국민 작가인 시바 료타
로는 메이지 유신부터 러일전쟁까지를 다룬 베스트셀러 ‘언덕 위의 구름’에서 경복궁 침탈 사건에
대해서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다. 일본은 8월 1일 칙령 134호를 내려 언론을 사전 검열했다. 이
런 언로 봉쇄가 결국은 군국주의 일본을 낳게 했고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으로 이끈 것이다.
경복궁 침탈과 청일전쟁의 진짜 의도를 감추려했던 일본의 속임수는 역사학자들의 추적에 의해 결국 탄로 나고 말았다. 국가의 일이라 하여 언제나 옳을 수는 없다. 진실은 때로 감당하기 힘들 수 있지만 결국 그 길만이 올바른 길이라는 것을 역사는 언제나 보여준다.
동아일보 이문영 역사작가
07.19 무덤 두 곳에 묻힌 사나이

▲삼척 궁촌리에 있는 공양왕릉. 경기도 고양에도 공양왕릉이 있다. /조선일보 DB
―내 이름은 왕요(王瑤)올시다. 1345년에 태어나 1394년까지 살았지요. 신종(神宗)의 7세손이며,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균(鈞)의 아들이지요. 비(妃)는 창성군(昌城君)의 딸 순비(順妃) 노씨(盧氏)이고요. 이런! 그저 그렇다 이겁니다. 이건 그저 ‘이름’들일 뿐이지요. 허허한 세월의 흐름속에서 이리저리 부는 부질없는 바람에 다 씻겨버려 아무도 돌아보지 않을 낡아빠진 비석에나 몇 자 끄적거려 있을 껍데기일 뿐이라오. 정원부원군이고, 창성군이고, 순비고, 그런 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역사책을 쓰는 사람들은 나를 공양왕(恭讓王)이라고 적습니다. 한 40년 전쯤이던가요, 한 방송 퀴즈프로그램에 이 이름을 물어보는 문제가 나왔어요. “고려의 마지막 임금은 누구일까요?” 거참 놀랐습니다. 만약 고려가 아니고 백제쯤 됐더라면 금방 답이 나왔을텐데 말이죠. 왜 거 있잖습니까. 옆 사람이 의자를 가리키며 답을 가르쳐주니까 “걸상왕이요!”했다는 얘기. 난다하는 배우 가수들이 아무도 나를 맞추지 못하는 거였어요. 그런데 사회자가 힌트를 준답시고 이런 말을 했어요.(아마도 당신들이 ‘뽀빠이’인가 ‘파파이스’인가 하고 부르는 사회자였던 것 같은데) “심청전하고 관련 있는 이름입니다!” 아니, 세상에, 내가 눈이 멀었나 인당수에 뛰어들기라도 했나, 웬 심청전? 난 황당해서 어리둥절했어요. 그래도 아무도 맞추지 못하자 결국 이런 말을 합디다.
“거 왜 있잖아요. 공양미 삼백석!”
―퀴즈 문제에나 나올 이름으로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뿐, 정작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도 별 관심이 없더군요. 참 이상하죠. ‘개국’이나 ‘추동궁마마’나 ‘용의 눈물’ ‘정도전’ ‘태종 이방원’ 같은 드라마에선 내가 등장하지 않고선 분명히 얘기가 안 될텐데, 내 역할을 맡은 배우가 과연 누구였는지 혹시 기억나시는 분 있습니까? 그 포은(정몽주)이 지은 “이 몸이 죽고 죽어…”하는 시조는 누구나 알고 계시죠? 그럼 거기서 말하는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에서 ‘임’이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지 심각하게 생각해보신 적 있습니까? 몇 백년동안 무덤 속에서 곰곰이 생각해 봐도 논리적으로 그건 나 말고 절대로 다른 누구를 생각할 수 없었거든요. 무슨 조국과 사직에 대한 의인화 따위 국어교과서식 생각을 하지 않는 다음에야.
―내가 그래도 헛된 자리일망정 옥좌에 앉아있을 때는 아무도 날 이런 욕되기 짝이 없는 이름으로 부른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날 강제로 끌어내린 자들이 날 공양군(恭讓君)이라고 강등시켜 불러서 그게 내 시호가 되겠거니 짐작하게 됐던 거지요. 왜 ‘공양’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아시겠습니까? 글자를 찬찬히 살펴보시지요. ‘공손하게[恭] 양위했다[讓]’라는 얘깁니다. 양위! 창칼 들이밀고 쫓아내놓고는, 양위라고? 선양(禪讓)을 했다는 거예요 글쎄. 자기가 순(舜) 임금이라는 겁니다. 덕이 높은 사람한테 내가 자진해서 자리를 내놨다는 뜻이지요. 평화적 정권교체를 표방한 겁니다. 이미 쿠데타는 위화도회군때 다 끝나 있었어요. ‘개경의 봄’이라 해야 할까요.
―그래놓고 신하들이 옥새를 가지고 찾아가니까 “이 사람 덕이 없으니 다른 분을 추대하시오”라면서 역대 창업자들의 에프엠 시나리오 대사를 그대로 읊었더랩니다. 한두번 그러고 말겠지 생각했는데 뜻밖에 이게 좀 ‘쎘어요’. 그러기를 나흘 동안 했다는 겁니다. 그 나흘 동안 무슨 박충훈 같은 사람도 없이 그냥 자리가 비워져 있는 상태였어요. 그 나흘 동안이 고려시대에 속하는지 조선시대에 속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러고 있는 동안 난 가슴이 마냥 찢어집디다.
―내가 엉겁결에 왕으로 추대된 건 내 나이 마흔 다섯 살 때였지요. 자식들도 이미 장성해 있었고, 왕족으로서 전답 재산 다 물려받고 음풍농월하면서 살았을 거라고 생각들 하시겠지만, 사실 그랬다고 해서 안될 건 뭐 있소? 그게 그 당시 왕족들의 라이프스타일이었는데. 자꾸 역사상의 인물한테 시대를 초월해서 살 걸 요구하지 마시오. 아무튼 왕위를 이어받을 거라든가, 그런건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죠. 맘 다 비우고 야심없이 살았는데, 그렇다고 특별히 나쁜짓 한 것도 없어요. 이건 왕이 돼서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한 해 전에 이성계 장군이 위화도에서 회군했어요. 비오는데 강을 건너갈 수 없어서 왕명을 거역했답니다. 비 오면 빨리 도강해서 넓은 요동벌로 진군해야지 왜 그 작은 섬에 대군을 몰아넣고 시간을 보내며 잠자코 있었는지, 강을 건너 갈 수 없었다면서 어떻게 강을 건너 올 수 있었는지 그 깊은 뜻이야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마는, 아무튼 전방부대 다 끌고 들어오는데 최영 장군인들 어쩌겠습니까? 우왕(禑王)을 폐위시키고 그 어린 아들 창(昌)을 잠시 옥좌로 밀어넣더니, 아무래도 안되겠다는 듯이 누구 먼 친척중에 말 잘 들을만한 인물 없을까, 이리저리 찾다가 찾은 게 바로 나였습니다.
―글쎄 나는 7대조 할아버지께서 임금이셨을 뿐이니까 언감생심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런데 모든 왕족들의 공통점은 책 읽을 시간이 엄청나게 많다는 겁니다. 내가 ‘삼국사기’ 정도는 읽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찾아 세우고, 견훤이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찾아 세운 케이스가 머리에 그냥 싹 스치는거예요. 옳구나! 내가 여기에 걸려들었구나! 그걸 알았으면 사양했어야지 왜 그 자리에 덜컥 앉았냐구요? 첫째, 그 두 사람은 다 명대로 살았고, 둘째, 당신이었대도 그거… 쉽게 사양 못합니다. 아무리 실권이 없대도, 그렇게 돌아서서 포기할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어요. 내가 안 했더라도 누군가 했을 거 아닙니까? 그럼 내가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글쎄, 즉위하자마자 우·창 두 전왕이 몰래 살해당했다는 얘기를 듣고선 좀 겁나긴 했지만. 아 날 누가 세웠는데? 기록엔 내가 울면서 즉위를 거절했다고 돼 있는데, 그거 다 일종의 절차로 볼 수도 있죠 뭐. 중요한 건 이성계가 날 찜한 이상 내가 아무리 싫다고 발버둥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겁니다.
―내가 제일 열 받는 건 백과사전에 나와있는 내 항목에 ‘과단성이 없다’는 둥 운운하면서 마치 내가 과단성이 없었기 때문에 이성계 일파한테 실권을 뺏긴 것처럼 나와 있는 겁니다. 아니 참, 기가 막혀서. 내 말좀 들어 보세요. 우선, 난 실권을 ‘뺏긴’ 적이 없어요. 나한테는 처음부터 그런 건 있지도 않았으니까. 그리고, 내가 과단성이 있었으면 어떻게 됐을 것 같습니까? 과단성이 없게 처신한 건 나의 가장 확실한 생존의 수단이었어요. ‘삼국지연의’ 보시면 촉 황제 유선이 망국 뒤에 어떻게 멍청하게 처신했는지 잘 나와있습니다. 그게 나름대로의 지혜에서 우러나왔다는 건 이문열 정도 되는 작가나 눈치채더군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줄로 아는 사람도 있는데, 과전법 실시도, 의창 설치도, 무과 신설도, 주자가례 시행도 다 최종결재자는 나였어요. 물론 내가 마지막 거부권을 행사하거나, 그런건 없었지만서도.
―그런데, 3년 후에 포은이 갑자기 살해당했어요. 이제와서야 말이지만 난 처음엔 포은 그 사람 좀 사꾸란줄 알았어요. 이성계하고 같이 날 추대한 게 그 사람이었거든요. 이른바 ‘9공신’ 중의 한 명이었는데, 말이 날 추대한 거지 사실 이성계하고 한 패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죽었어요. 성리학적 이상국가를 꿈꿨던 건 포은이나 그 과거시험 동기인 삼봉(정도전)이나 마찬가지였는데, 포은은 결국 역성(易姓) 혁명엔 반대하고 사라져가는 왕조에 마지막 충절의 피를 뿌렸던 거죠. 그가 죽고 난 그제서야 깨달았어요. 결국 포은이 내 마지막 바람막이였다는 걸.
―그래서 졸지에 원주로 유배 가는 신세가 됐어요. 귀양길을 가면서 곰곰히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요. 도대체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했다고? 아하, 역사의 간계(奸計)에 걸려들면 개인의 도덕적인 잘잘못 여부같은 건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버려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수도 있구나. 그렇게 결론이 나더군요. 여기서 간계란 나중에 헤겔인가 하는 덕국사람이 말한 개념하곤 좀 다르겠지만서도… 참 그건 쓸쓸한 길이었어요. 난 경순왕처럼 지방 호족의 지위를 평생토록 유지한 것도 아니고, 내 아들은 용문사에 은행나무 심고 금강산을 떠돌아다니던 마의태자도 아니었으니까요.
―이태 후에 내가 다시 유배간 곳은 간성을 거쳐 삼척이었어요. 동해안 바다 끝, 허어 참 개경에서 멀리도 왔다. 그저 바다 해돋이나 구경하면서 여생을 욕심없이 살아야겠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 그게 쉽게 됩니까? 일단 생활방식이 바뀌니까 영 불편하고 괴롭더군요. 허울뿐인 권력이었을지언정 훌훌 털어버리기는 여전히 어렵더군요. 그런데 동래현령 김가행(金可行)이란 사람과 동해안 소금감독관 박중질(朴仲質)이란 사람이 울진·삼척 지역의 인사들을 모아 내 복위운동을 하려고 했습니다. 난 그저 모르는 척 했죠.
―그런데 고려의 구신들과 군사들이 이곳으로 모여 거사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결국 진압당하고 난 삼척으로 온 지 달포만에 저들이 보낸 중추원부사와 형조의랑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처형방법은 교살(絞殺)! 아무리 망국의 폐주이지만 너무 참혹했습니다. 돌이켜보건대 고조선의 준왕, 백제의 의자왕, 가야의 구해왕, 신라의 경순왕… 역대의 폐주들은 모두 명대로 살다 갔습니다. 이성계의 후손들인 순종이나 영친왕도 다 마찬가지였고요. 나같은 사람, 정말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내 시신을 매장하러 가다가 갑자기 발이 붙어 그 자리에 매장했다는 것이 지금 삼척에 있는 내 무덤입니다. 그래도 폐주인지라 “무덤 앞에 집을 지으면 그날 밤 태풍이 불어 반드시 무너진다” “무덤 앞에 암장하면 시체가 사라진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철도 개설한답시고 비석과 석물들을 연못에 넣고 산을 깎아 메운 뒤 부근에서 멸치를 말리다 피부병에 걸려 모두 죽었다”는 정도의 전설들은 삼척에 전해 내려온다고 합니다. 어찌 철도 개설하려는 사람들과 멸치 말린 사람들이 동일인물이겠습니까마는. 절절히 서린 한(恨)이 그만큼 컸단 얘깁니다. 지금도 차 타고 동해안을 여행하는 사람들 중에는 가끔 국도변에 서 있는 ‘공양왕릉’ 표지를 보고는 “웬 왕릉이 이곳에?”하고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답니다. 참 쓸쓸하죠.
―그런데 지금 내 공식무덤은 고양에 있어요. 지금 일산 근처인 원당동이지요. 분명히 삼척에서 죽었는데 왜 고양에 무덤이?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 16년에 고양에 내 무덤을 마련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공양군에서 공양왕으로 복위되고, 제사도 지내줬죠. 세종 19년과 중종 13년에도 내 무덤이 고양에 있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1662년 삼척부사 허목이 편찬한 ‘척추지’란 책엔 여전히 내 무덤은 삼척에 있다고 나와 있고, 대대로 민간에서 제사를 지낸 곳도 삼척입니다. 조선 초에 민심을 다독이려 개경과 가까운 고양에 내 가릉(假陵)을 하나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느 쪽이 진짜냐고요? 그걸 가르쳐 드리면 내 마지막 남은 비밀을 공개하는 게 되게요.

▲고양시 원당동 공양왕릉의 모습. 공양왕의 후손인 개성 왕씨들이 매년 이 곳에서 제를 지낸다. /고양시
―그렇게 궁벽하게 역사의 한 구석에 스러져버린 나같은 사람이 신문에 날 만한 일이라곤 오직 하나, 내 무덤이 도굴당하는 일밖엔 없죠. 그런데 것참… 진짜로 그런 일이 일어날줄은 저도 몰랐어요! 2001년의 일이었어요. 고양에 있는 무덤 서쪽 봉분에서 가로 세로 1m씩의 정방형 구멍이 뚫린 겁니다. 어느 신문들은 “공양왕릉 도굴!”이라고 호들갑을 떨었고, 어느 신문은 “훼손되긴 했지만, 무덤의 잔디가 내려앉은 것일 수도 있어 경찰이 도굴 여부를 수사중이다”라고 신중하게 실었더군요. 아아, 내 이름이 이렇게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날이 올 줄이야.
―그런데 정말 창피한 일이죠. 그렇게 해서 신문에 다시 나게 된 내 무덤의 사진 말입니다. 웬만한 고관대작들 무덤도 그것보단 낫다는 말 들을 정도로 초라하기 그지없는 내 무덤이 다시금 공개됐단 말입니다. 잔디가 무너져내릴 수도 있다는 추정을 할 정도로 정말 황폐하기 그지없는데다가, 아래 사진을 좀 보세요. 무덤 앞에 그게 원래는 석호(石虎)입니다. 호랑이죠. 그런데 원당동에는 어떤 전설이 전해내려오는지 아십니까?

▲공양왕릉을 지키는 석호. /조선일보 DB
―내가 쫓겨난 뒤에 이곳 고양 땅으로 빠져나와 떠돌고 있었는데, 어느 누각에 숨어서 근처 스님들이 지어주는 밥을 먹고 연명하고 있다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 일가친족들이 날 찾아다니다가 내가 평소 귀여워하던 삽살개를 데리고 날 찾으려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삽살개가 어느 연못가에 이르더니 마구 짖어댔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다른 곳으로 끌고 가려 해도 한사코 버티며 짖더니 결국 연못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연못물을 다 퍼보니… 나와 왕비, 그리고 시종들의 시체가 모두 거기 있더라는 겁니다. 내가 자살했다는 얘기죠. 물론 난 삼척에서 목졸려 죽었으니, 이 얘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나중에 지어낸 얘기임이 분명합니다만, 도대체 그 삽살개 전설이 어디서 나왔는지 아십니까? 그 삽살개를 기리기 위해 무덤 앞에 저 ‘강아지 석상’을 세웠다는 겁니다! 강아지라니요, 저건 석홉니다, 석호!
―아무튼, 정말 도굴을 한 것이었다면 참으로 부질없는 짓을 한 겁니다. 호랑이가 강아지 모양으로 서 있는 이 초라한 무덤에서 무엇을 가져가기 위해서 그런 일을 저지른 걸까요? 하지만 그는 영악한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쫓겨나 죽은 덕분에, 저 몽고전란기 망명정부였던 강화도를 제외하고는, 지금 휴전선 이남에 남은 고려왕릉이라곤 제 무덤 두 개밖에 없거든요. 아무리 변변찮은 유물이라 해도 15세기 초의 유물들입니다. 만약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말이죠. 그것 참!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허울뿐인 임금’이니 ‘우유부단한 인물’이니 깎아내리는 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말이죠. 만일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이 그때 내가 있던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당신은 과연 얼마나 당신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길을 걸어갈 수 있었을까요? 도대체 어느 정도의 빛좋은 ‘자기결정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역사상의 모든 중요한 국면의 인물들이 모두 영웅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21세기에 사는 당신과 당신 친구들처럼 평범한 인물이어선 안 되는 겁니까? 나를 제물로 삼아 딛고 일어선 그 숱한 영웅과 인걸들… 이성계, 이방원, 정도전, 권근, 조준, 남은, 하륜, 그리고 조선 초의 그 도도하게 흐른 역사. 결과적으로 나는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음으로써 그들을 도와줬던 겁니다. 역사의 숱한 경계선과 모퉁이들에서 마치 아무런 의미 없이 이슬처럼 사라져간 것처럼 보이는 그 숱한 이름들, 난 그 이름들 중 챔피언, 아, 아니지 참, 왕(王)이었던 것입니다.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07.19 김부식의 금 사대 현실론은 역사 퇴보였나
김부식·윤언이·정지상·묘청의 네 갈래 길
11세기 고려는 평화로웠다. 1019년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거란의 침략을 물리쳤고, 이 승리를 바탕으로 평화를 지켰다. 그러다 12세기 초 만주에서 여진이 흥기하면서 위기를 맞는다. 여진은 부족을 통일한 뒤 금나라를 세웠고, 거란과 송나라를 차례로 멸망시켰다. 그사이에 고려와도 충돌했다. 윤관의 9성 개척과 환부(還付)는 여진이 아직 나라를 세우기 전에 있던 일이었다. 금나라의 등장에 따른 동북아 질서의 급격한 변동은 고려의 오랜 평화를 뒤흔들었다. 오늘 이야기는 국가의 위기에 대처하는 네 사람의 서로 다른 방식에 관한 것이다.
조공 바치던 금 돌연 형 대접 요구
묘청 풍수론 “천도하면 금 항복”
좌절되자 반란, 김부식이 제압
경쟁자 정지상·윤언이도 화 입어
신채호 “사대사상에 정복” 한탄
묘청 천도론, 현실성 잣대로 봐야

▲묘청의 난을 진압한 고려 문신 김부식의 영정. [연합뉴스]
김부식(1075~1151)은 『삼국사기』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1135년 묘청이 서경(지금 평양) 천도를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을 때 군대를 이끌고 가서 진압했다. 윤언이(1090~1149)는 학자이자 문장가이며, 윤관의 아들이다. 김부식을 따라 서경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지만 묘청 일파와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아 수난을 겪었다. 정지상(?~1135)은 서경 출신의 시인으로 묘청 편에서 서경 천도를 주장하는 데 앞장섰다. 하지만 서경 반란에 동참하지 않고 죽임을 당했다. 마지막으로 묘청(?~1135)은 서경 출신의 승려이다. 풍수 이론을 가지고 서경 천도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반란을 일으켰다. 이 네 사람이 모두 같은 시대에 살았고, 각각 다른 행동을 보였다.
묘청 “땅 기운 쇠하면 수도 옮겨야”
공을 쏘아 올린 사람은 묘청이었다. 그는 1128년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제의했다. 수도 개경(지금 개성)이 땅의 기운이 다했고 서경은 왕기가 서렸으니 서경으로 천도하면 고려가 천하를 호령하게 될 것이며 금나라가 스스로 항복해 올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전적으로 풍수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풍수란 땅에 기운에 있으며,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 기운이 성했다 쇠했다를 되풀이한다는 이론이다. 따라서 수도를 정할 때는 땅의 기운이 성한 곳을 찾아야 하고 시간이 지나 기운이 쇠해지면 다른 성한 곳으로 옮겨야 하는데, 지금이 바로 개경에서 서경으로 옮길 때라는 것이었다. 그럼 금나라가 스스로 항복해 올 것이란 무슨 말일까?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 [중앙포토]
여진이 부족을 통일하고 거란과 싸워 연전연승하더니 1115년에는 나라를 세우고 대금(大金)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2년 뒤인 1117년 고려에 국서를 보내왔는데, 첫머리부터가 충격적이었다. “형 대여진 금나라 황제가 아우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 금나라 황제를 형, 고려 국왕을 아우로 명시해서 금이 형, 고려가 아우인 형제 관계를 기정사실인 듯 드러냈던 것이다. 고려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오히려 얼마 전까지 여진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며 떠받들었고, 고려는 여진을 조공국으로 간주해서 황제국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요소쯤으로 대우했던 만큼, 금나라의 국서는 거의 도발에 가까웠다. 하지만 금은 자신들의 강성함을 이유로 관계 변경을 강요했다.
처음에 고려는 강력 반발했고, 금의 국서에 응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은 고려 편이 아니었다. 금은 점점 더 강성해졌고, 마침내 1125년에는 거란을 멸망시킨 데 이어 송나라 수도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고려의 대응도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1126년 어전 회의에서 “금이 과거에 작았을 때는 우리를 섬겼으나, 지금은 갑자기 세력을 일으켜 거란과 송을 멸망시켰으며, 병력도 강하여 나날이 커지고 있으니 사대하지 않을 수 없다”는 현실론이 격론 끝에 채택되었다. 그에 따라 금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대가로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민심이 문제였다. 어제까지 아래로 보아왔던 여진을 갑자기 상국으로 받들게 된 상황을 대다수 고려 사람들은 용납할 수 없었고, 그 틈을 묘청이 채우고 나선 것이었다. 서경으로 천도하면 금나라가 항복할 것이란 말은 그래서 나왔다.
개경의 고려 황궁 화재가 천도 명분

▲일제강점기의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 『조선사연구초』에서 묘청의 난을 고려·조선 1000년 역사의 최대 사건으로 규정했다. [중앙포토]
묘청이 보기에 금에게 굴복한 것도 개경의 기운이 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개경의 쇠운을 탓하기에 더 좋은 소재가 있었다. 바로 궁궐의 화재였다. 묘청이 등장하기 두 해 전인 1126년, 이자겸이 군사를 동원해서 궁궐을 범한 일이 있었다. 그때 이자겸 편에 있던 척준경이 인종을 궁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불을 질렀고, 고려 황궁이 전소하고 말았다. 1년 만에 이자겸 일파가 제거되고 반란은 평정되었지만, 불탄 궁궐은 마치 개경의 기운이 쇠했음을 보여주는 것인 듯했다. 묘청은 이것을 풍수로 연결해서 서경 천도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러자 김부식이 즉각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이자겸의 권세가 한창일 때 인종이 이자겸을 신하 이상으로 특별 대우하려는 것에 반대해서 중지시킨 바 있는 강직한 신하였다. 하지만 묘청의 말을 믿은 인종의 천도 의지가 워낙 강해서 말릴 수가 없었다. 얼마 뒤 묘청은 국왕을 황제라고 부르고 독자 연호를 만들어 쓰자고 주장했다. 서경으로 천도하면 금나라가 항복해올 것이라던 주장을 좀 더 구체화한 것이었다. 그러자 천도에는 찬성하지 않았던 윤언이가 동조하고 나섰다. 고려를 황제국으로 만드는 것이 평소 꿈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정지상은 서경 천도부터 칭제건원까지 모두 묘청과 뜻을 같이했다.

▲윤언이의 묘지명. 금나라의 사대요구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이 실려 있다. 그는 묘청 반란 진압에 가담했으면서도 묘청 일파와 내통했다는 혐의을 받았다. [사진 이익주]
그런데 묘청 일파의 계획은 천도를 준비한 지 5년이 되는 1133년 무렵부터 인종의 변심으로 틀어지기 시작했다. 인종은 그사이 여러 차례 서경에 행차했지만 좋은 일이 생길 조짐은 없고 오히려 서경에서 큰 화재가 나고 기상 이변이 일어나자 묘청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초조해진 묘청은 대동강에 기름떡을 가라앉혀 기름이 조금씩 수면으로 올라오게 하고는 용이 침을 토해 오색구름을 만든 것이라고 꾸몄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결국 묘청은 인종의 협조를 포기하고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때 정지상은 개경에 머물고 있었다. 묘청에게 배신을 당한 것일 수도 있고, 서경 천도와 칭제건원까지 동의했지만 반란에는 찬성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개경에서 묘청의 일당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12세기 전반, 국가적 위기에서 네 사람은 각각 다른 길을 걸었다. 그 결과 김부식이 정지상과 묘청을 죽이고 윤언이를 지방관으로 쫓아내고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 승리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차가웠다. 정지상의 죽음에 대해서 “당시 사람들이 ‘김부식이 평소 정지상과 문장에서 명성을 다투었는데, 불평이 쌓였다가 이때 반란에 내응했다는 핑계를 대고 죽였다’고 말들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전한다. 수십 년이 지나서 이규보의 『백운소설』에는 정지상의 귀신이 절간 해우소에서 김부식의 음낭을 옥죄어 죽게 했다는 전설이 실렸다. 윤언이와는 좀 더 긴 이야기가 있다. 일찍이 윤관이 대각국사 의천의 비문을 지었는데 문장에 불만을 가진 문도들이 왕에게 아뢰어 김부식으로 하여금 고쳐 짓도록 했더니 김부식이 사양도 하지 않고 다시 지었으므로 아들 윤언이가 앙심을 품었다. 어느 날 왕이 김부식에게 『주역』을 강의하게 하고 윤언이에게 토론하도록 했는데, 윤언이가 일부러 거침없이 따져 물었으므로 김부식이 진땀을 흘렸고, 이 일로 감정이 상한 김부식이 묘청 난을 진압한 후 윤언이를 모함해서 내쫓았다는 일화이다.
신채호 “묘청·김부식 대립은 진취·보수 싸움”

▲서경(평양) 임원역의 대화 궁 터. 한때 천도 주장에 기울었던 고려 인종이 묘청의 건의에 따라 조성하려다 중단했다. 성벽과 내궁 흔적이 보인다. 1916년 촬영 사진. [사진 이익주]
김부식이 묘청에게 승리한 데 대해서는 더 싸늘한 평가가 있다. 근대의 역사가 신채호의 평가이다. 신채호는 묘청과 김부식의 대립이 “낭가(郞家)·불가(佛家)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며, 국풍파(國風派) 대 한학파(漢學派)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라고 했다. 그러면서 김부식이 승리하는 바람에 고려·조선의 1000년 역사가 사대적·보수적·속박적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다고 한탄했다. 모두가 실패한 사람들에 대한 아쉬움을 담고 있지만, 하나같이 현실적인 판단은 아니다. 그럼, 묘청이 이겼어야 하나? 묘청의 주장대로 서경 땅의 기운을 믿고 수도를 옮겼더라면 금나라가 스스로 항복해왔을까? 여진에 굴복한 데 분노한 민심을 쫓아 금에 적대했다면 평화를 지킬 수 있었을까?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에 대한 평가는 그 주장이 얼마나 현실성이 있었는지를 기준으로 내려져야 한다. 풍수에 국가의 운명을 맡기지 않는 것은 옛날 사람들도 우리와 같았다.
중앙일보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08.15 안중근 "한국 망친 역적을 쐈다"… 의거 후 첫 신문기록 공개

▲안중근 의사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 직후 안중근(1879~1910) 의사를 최초로 신문한 일본인 외교관의 친필 기록이 발견됐다. 국내 컬렉터인 최영호 82갤러리 대표는 “지난 3월 일본 경매에 나온 오노 모리에(大野守衛) 친필 원고와 사진 7점 등 일괄 자료를 구입했다”고 밝혔다. 당시 중국 랴오닝성 잉커우(營口)에서 영사관보로 근무한 오노 모리에는 1910년 3월 원고지에 친필로 쓴 기록 14장과 의거 ‘몇 분 전 촬영한 하얼빈역’ 사진 등을 남겼다.
안 의사는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의거 직후 러시아 영사관으로 압송돼 밀레르 검사가 신문했고, 이날 오후 10시쯤 안 의사의 신병과 취조 기록 원본을 일본 하얼빈 총영사관으로 넘겼다. 당시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하얼빈 총영사도 안 의사의 총탄에 맞아 입원했기 때문에 잉커우 영사관에서 오노 모리에가 하얼빈으로 파견됐다.
오노는 10월 27일 오후 하얼빈 총영사관에 도착해 30일 뤼순에서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 검사가 와서 신문을 시작하기 전까지 안 의사를 먼저 신문했다. 원고는 이듬해인 1910년 3월 쓴 것으로, ‘큰 별이 지다’라는 제목으로 당시 상황을 정리했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직후 안 의사를 최초로 신문한 오노 모리에가 쓴 친필 원고 일부. 이토를 저격한 이유를 묻자 안 의사가 “한국을 망친 역적이기 때문”이라고 답하는 대목이 보인다. /최영호 82갤러리 대표
안 의사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가 담배를 주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오노가 이토의 암살 동기를 묻자 안 의사는 “한국을 망친 역적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또 새끼손가락(실제로는 약지) 절단 이유를 묻자 “나는 원래 북한국(北韓國)의 산 사냥꾼이었는데, 그 당시 토끼를 요리할 때 실수로 손가락을 잘랐다”고 답했다. ‘단지동맹(斷指同盟)’ 동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허위로 답한 것이다. 안 의사는 앞서 2월 7일 김기룡·황병길·백규삼 등 11명 동지와 함께 러시아 크라스키노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다짐하며 왼손 넷째손가락(무명지)을 끊었다. 오노 역시 “그 후 상당한 시일이 지났음에도 상처가 생생한 사실로 비추어 볼 때 답변이 엉터리임을 알 수 있었다”고 썼다.
안중근 연구자인 도진순 창원대 교수는 “미조부치 검사가 진행한 10월 30일 1차 신문은 자료가 남아 있는데 그 이전 오노의 취조는 처음 보는 내용”이라면서 “거사 직후인 27~29일의 공백을 메워주는 자료로 의미가 크다”고 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직전에 하얼빈역을 촬영한 사진. 오노 모리에가 소장하고 있던 사진으로, 친필로 '하얼빈 정거장 플랫폼(조난 수분전)'이라고 썼다. /최영호 82갤러리 대표
안중근 의사 의거 당시 중국 잉커우(營口) 일본 영사관에서 근무했던 오노 모리에 영사관보는 의거 다음 날인 1909년 10월 27일부터 29일까지 안 의사를 신문한 기록과 당시 정황을 ‘큰 별이 지다’라는 제목으로 200자 원고지 14장 분량으로 정리했다. 기록한 때는 이듬해 1910년 3월이었다.
오노는 10월 27일 오후 하얼빈 총영사관에 도착했다. 그는 “하얼빈시 일대에 주범 안중근의 동료들이 잠복하고 있을 수 있다는 의심이 들어 전원 일망타진으로 체포해야겠다는 생각하에 전적인 책임을 지고 안중근을 러시아 관헌에서 인계받아 총영사관 지하 구치실에 감금했다”고 적었다.

▲하얼빈역에 내린 이토 히로부미 - 1909년 10월 26일 오전 이토 히로부미(점선)가 하얼빈역에 도착해 열차에서 내리는 모습. 오노 모리에가 소장했던 사진 7점 중 하나다. /최영호 82갤러리 대표
안 의사는 오노의 질문에 대부분 답하지 않았다. 오노는 “주범 안(安)이라는 자가 조선에서 어떻게 하얼빈으로 잠입해 왔는지에 대해 확인하기 위해 그가 입고 있던 복장과 구두 등을 세밀히 살펴보았으나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고 규명하려 물어도 묵묵부답으로 응하지 않았다”면서 “생생한 상흔을 드러낸 새끼손가락(실제는 약지)의 절단 이유와 그 밖의 질문에 일절 대답할 기색을 보이지 않아 허망하게 반나절이 지나갔다”고 기록했다.
오노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연기를 내뱉으며, 입을 열게 하는 방법을 모색하던 중 통역을 통해 ‘당신은 담배를 피우는가?’라고 안에게 묻자 ‘매우 좋아한다’며 비로소 입을 열었다”고 적었다. 오노는 이후 상황을 상세히 기록했다.

▲그래픽=양인성
“(담배를) 좋아하면 한 대 주겠다 했더니 ‘만약 (담배를) 줄 생각이 있으면 쓸데없는 말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주라’ 하므로 순간 부아가 나서 한 개비를 꺼내 집어 던졌는데 (안이) 받지 못해 마룻바닥으로 떨어졌다.
안은 곧바로 몸을 구부려 수갑을 찬 채 담배를 주워, 궐련 담배 끝을 이빨로 잘라내며 불을 붙여 달라고도 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이를 씹기 시작하더니 ‘생큐’라고 한마디를 흘렸다. 그래서 ‘너는 영어를 할 줄 아냐?’ 물었더니 아니라고 하기에 ‘지금 네가 말한 한마디가 영어가 아닌가?’ 하자 ‘아니, 일본어’라고 한다. 그래서 그 말이 왜 일본어라고 생각하냐고 반문하자 ‘내가 예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선박의 짐꾼으로 종사하고 있을 때, 동료 중에는 일본인도 많았는데 그들은 서로에게 사의를 표할 때 생큐라고 말했으므로 나는 이 말이 일본어라고 믿고 있다’고 했다.”

▲오노 모리에 친필 회고록. 원고지 14장 중 첫 장으로, '큰 별이 지다'라는 제목이 보인다. /최영호 82갤러리 대표
자료를 검토한 도진순 창원대 교수는 “안 의사는 일본어를 몰랐기 때문에 뤼순 감옥에서도 일본인 간수들과 필담으로 대화했다”면서 “냉철한 지식인 스타일이기보다는 전격적으로 반응하는 행동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안 의사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어 흥미롭다”고 했다.
오노 모리에의 기록에는 하얼빈 총영사관의 내부 구조도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다. “하얼빈 제국총영사관은 신시가지 고지대에 있으며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된 멋진 서양식 대가옥”이라고 썼다. “1층은 사무실과 영사관에 딸린 경찰서가 있고 2층은 총영사의 사택이며, 3층에는 관원과 경찰관들이 거주하고 있다”며 “지하 증기기관실에 있는 가마솥은 전투함의 엔진룸을 연상케 하는 대규모였다”고 썼다. 당시 하얼빈 총영사관은 현재 초등학교로 바뀌었고, 사진도 외관만 있어 당시 하얼빈 총영사관의 구체적인 내부 환경을 알 수 있는 자료로도 평가된다.
조선일보 허윤희 기자
08-15 “죽어선 대한의 귀신될 것”… 일제에 뺏긴 의병문서 110년만의 귀환
의병장 허위 글-최익현 서신 등… 역경에 꺾이지 않는 기개 드러내
“일제 탄압 실상 담긴 중요 자료”
임정 편찬 ‘한일관계사료집’도 공개

“막내아우가 여기 있지 않은데 (중략) 눈물을 흘리다가 저도 모르게 어지러워 땅에 쓰러졌습니다. 분하고 원통하여 죽고 싶은데 무어라 형언할 수 없습니다.”
의병장 허겸(1851∼1939)은 역시 의병장이자 동생인 허위(1855∼1908)가 일제에 체포돼 목숨이 위태롭게 된 슬픔을 이렇게 편지에 남겼다. 이들 형제는 1907년 8월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자 경기도 양주에서 조직된 의병인 13도 창의군에서 활동했다. 허겸은 동생을 잃을 위기에도 의연했다. 동료 의병들에게 보낸 편지에 “서로 사랑하고 보호하길 전보다 더한 후에야 국권을 회복하고(하략)”라고 전한다. 하지만 동생 허위는 체포 넉 달 만에 결국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한다.

▲국가유산청이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해외에서 환수해온 문화유산들을 공개했다. 뉴스1
약 110년 전 일제 헌병경찰에게 뺏겼던 항일 의병들의 기록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국가유산청과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은 제79회 광복절을 앞둔 14일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해외에서 환수한 한말 의병 관련 문서 13건과 ‘한일관계사료집’, ‘조현묘각운(鳥峴墓閣韻)’을 공개했다.

▲일제 헌병경찰 아쿠다카와 나가하루가 수집한 문서로, 당대 의병장들의 활동이 생생히 기록돼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이날 공개된 한말 의병 관련 문서는 1851년부터 1909년까지 작성된 문서 13건이다. 13도 창의군에서 활동한 허위 등의 글, 의병장 최익현(1833∼1907)의 서신 등이 포함됐다. 이 문서들은 두 개의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첫머리에 쓴 글을 볼 때 당시 일제 헌병경찰이었던 아쿠다카와 나가하루(芥川長治)가 문서 수집 후 지금 형태로 만들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아쿠다카와는 각 두루마리에 ‘한말 일본을 배척한 우두머리의 편지’, ‘한말 일본을 배척한 폭도 장수의 격문(檄文)’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국가유산청 관계자는 “일제의 입수 경위가 명확하게 기록된 데다 당대 일제의 의병 탄압의 실상을 엿볼 수 있어 중요한 자료”라고 말했다. 의병 전문가인 박민영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이강년과 허위 등 대한민국 건국 훈장 중 최고 등급을 받은 불세출의 의병장들이 실제로 생산한 공문서들을 확인할 수 있어 가치가 높다”고 했다.

문서 곳곳에는 어려움에도 기개를 꺾지 않는 의병장들의 모습이 생생히 나타난다. “살아서는 대한의 백성이 될 것이요, 죽어서는 대한의 귀신이 될 것이다.” 1909년 2월 의병장 윤인순은 이런 고시를 남긴다. 1908년 5월 13일 일제에 체포되던 당일까지 “합진(부대를 합쳐 진을 침)해 군대의 성세를 떨치겠다”고 다짐하는 허위의 서신도 가슴을 울린다. 또 군수 물자 부족, 의병 간 갈등 등 당시 의병들의 활동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1919년 임시정부가 국제연맹에 대한민국 독립을 주장하기 위해 제작한 역사서 ‘한일관계사료집’. 국가유산청 제공
이날 함께 공개된 ‘한일관계사료집’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제연맹에 우리 민족의 독립을 요구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에서 편찬한 네 권짜리 역사서. 삼국시대부터 3·1운동에 이르기까지 연대별로 일본 침략을 고발했다. 총 100질이 제작됐지만 현재 완본은 독립기념관 소장본과 미국 컬럼비아대 동아시아도서관 소장본 등 2질뿐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번에 세 번째 완본이 공개된 것이다. 또한 고하(古下) 송진우 선생(1890∼1945)의 부친이자 담양학교 설립자인 송훈(1862∼1926)이 시를 나무판에 새긴 조현묘각운도 함께 공개됐다. 국가유산청 등은 한말 의병 관련 문서들은 복권기금을 통해 일본에서 구입했고, 나머지 2건은 각각 미국과 일본 개인 소장자로부터 기증받았다고 밝혔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
09.02 나석주는 왜 조선일보에 거사 계획을 알렸나
의거 전 편지 보내 보도 부탁… 절대적 신뢰 있기에 가능한 일
"범인이라 썼다" 비난 몰역사적… 맥락 무시, 역사 재단하는 사람들

▲국립중앙박물관이 제79주년 광복절을 맞아 26일부터 상설전시관 1층 대한제국실에서 '독립을 향한 꺼지지 않는 불꽃, 나석주' 전시를 선보인다고 밝혔다. 사진은 1925년 나석주 의사가 폭탄 투척 의거 계획을 김구에게 알리는 편지. 2024.7.26 /국립중앙박물관
주말 국립중앙박물관에 다녀왔다. 나석주(1892~1926) 의사가 쓴 편지를 전시 중이다. 99~100년 전인 1924~1925년 쓴 편지 7점이다. 내달 9일까지 볼 수 있다. 1925년 7월 28일 김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소지품(폭탄)은 준비되었는데, 비용 몇 백 원만은 아직 완전히 수중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걸릴 뿐이지 안 될 리는 전혀 없습니다”라고 결의를 다졌다. 나 의사는 1926년 12월 28일 일제 수탈 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황금정 2정목(을지로 2가)에서 권총 자결했다.
전시에선 볼 수 없지만 중요한 편지가 하나 더 있다. 의거 직전 거사 계획을 신문사에 알린 편지다. 받는 곳은 조선일보였다. 전시에선 ‘조선일보에 보낸 유서’라고 영상으로만 간략히 소개한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조선일보사 귀중. 본인은 우리 2천만 민족의 생존권을 찾아 자유와 행복을 천추만대(千秋萬代)에 누리기 위하여 의열남아가 희생적으로 단결한 의열단의 일원으로서 왜적(倭敵)의 관·사설기관(官·私設機關)을 막론하고 파괴하려고….’ 거사 대상과 계획도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최후 힘을 진력(盡力)하여 휴대물품(携帶物品)을 동척회사·식산은행에 선사하고 힘이 남으면 시가화전(市街火戰)을 하고는 자살하겠기로…’라고 적었다.

▲나석주 의사가 1926년 12월 28일 의거 계획을 조선일보에 알린 편지. 의거 21주년인 1947년 12월 28일자 조선일보에 실려 처음 알려졌다.
나 의사는 왜 조선일보에 거사 계획을 알렸을까. ‘본인의 의지를 귀보(貴報)에다 소개하여 주심을 바랍니다’라고 이유를 밝혔다. 기밀이 새 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절대적인 신뢰가 없었다면 이런 편지를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일부에선 당대 민간 신문인 조선·동아일보가 나석주·이봉창·윤봉길 의거를 보도하면서 ‘범인(犯人)’이라 썼다고 비난한다. ‘의거(義擧)’라 쓰고 ‘열사(烈士)’라 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투다. 당대 신문이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고 여기는 것이야말로 일제 통치를 찬양하는 일 아닌가. 엄혹한 보도 통제에 ‘범행’이라고 써도 당대 사람들은 모두 ‘의거’로 알아들었다. 그렇기에 나 의사도 거사 계획을 널리 알려달라고 편지를 보내 부탁한 것이다.

▲1927년 1월 13일자 조선일보 호외. 나석주 의거는 일제의 보도통제로 기사가 여러 차례 압수됐고, 게재 금지가 해금된 이날 호외도 제목과 기사 내용이 깎여나간 채 발행됐다.
나 의사는 편지에서 자결하려는 이유도 상세히 밝혔다. ‘본인이 자살하려는 이유는 저 왜적의 법률은 우리에게 정의를 주려고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데 불행히 왜경에 생금(生擒·사로잡힘)이 되면 세계에 없는 야만적 악형을 줄 것이 명백하기로 불복하는 뜻으로 현장에서 자살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고는 ‘12월 28일 희생자 나석주 올림’이라고 거사일과 자신의 이름을 명확히 밝혔다.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고 과거를 함부로 재단하는 이들에게 이제는 세상을 떠나 말할 수 없는 당대 사람들은 한마디 변론도 할 수 없다. 나 의사가 조선일보에 보낸 편지가 후대에 알려지지 않았다면 당대 기자들은 ‘도매금’으로 매도당해도 반박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편지는 당시 사진기자 문치장(1900~1969)이 촬영해 간직하고 있었고, 해방 후 의거 21주년인 1947년 12월 28일 자 조선일보에 보도되면서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의거 80주년인 2006년엔 독립기념관 전시에 나오기도 했다.
나 의사 편지는 적어도 당대 신문사 사람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비밀을 지키고 이후에도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경이롭다. 이들 모두 독립 투쟁을 함께 한 게 아닌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이들은 절대 동의하지 않을 터이지만, 그렇게 험난한 시대를 건너 대한민국을 세웠기에 지금 그렇게 비난할 자유도 얻었다는 사실엔 수긍하길 바란다.
조선일보 이한수 기자
09.07 대한민국 건국의 숨은 조력자 찰스 퍼글러
제헌헌법 평가하고, 대한민국 승인 건의
⊙ 초대 주미 체코슬로바키아 대사 지내… 미국에서 제헌헌법 가르쳐
⊙ 미 군정이 좌우합작 성공 사례로 여기던 체코 모델에 관심 갖고 퍼글러 불러들였을 수도
⊙ 미 군정청 최고법률고문으로 김병로, 이인, 유진오, 홍진기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 법령 정비 노력
⊙ 대통령제와 내각제의 결합 등 체코슬로바키아 제헌헌법과 한국 제헌헌법 간 유사점
이택선
1975년생. 서울대 대학원 외교학 박사, 조지타운대 외교학대학원 아시아연구소 방문학자 / 성균관대 초빙교수, 서울대 강사, 국가보훈부 독립운동훈격국민공감위원 역임. 現 국가기록위원회 정책전문위원, 여순·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 명지대학교 디지털아카이빙연구소장 / 저서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 국가건설의 시대 1945-1950》 《우남 이승만 평전: 카리스마의 탄생》 《죽산 조봉암 평전: 자유인의 길》

▲찰스 퍼글러
찰스 퍼글러(Charles Pergler·1882~ 1953년)는 한국인들에겐 낯선 이름이다. 그는 해방 직후 미군정 법률고문으로 이승만(李承晩), 여운형(呂運亨), 김규식(金奎植), 안재홍(安在鴻), 그리고 삼성그룹 이재용 회장의 외할아버지인 홍진기(洪璡基) 등과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었고, 귀속(歸屬) 재산 처리와 제헌(制憲)헌법 제정 등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初代) 주미·주일 대사를 지냈는데, 아마도 이 시기에 미국과 일본에서 활동하던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상당한 접점(接點)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찰스 퍼글러를 중심으로 한국 독립운동사와 건국 전후사를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주미 대사로 활동

퍼글러는 1882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일부였던 보헤미아의 리블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들은 그가 8세가 되던 1890년 미국의 시카고로 이주했지만, 그가 14세이던 1896년 다시 체코 프라하로 이주했다. 프라하에서 퍼글러는 사회민주주의 및 반(反)오스트리아 운동에 관여하게 된다.
1903년 21세가 된 퍼글러는 법률을 공부하여 사회민주주의 및 체코슬로바키아 민족주의 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켄트대(Kent College of Law)에서 법률을 공부한 그는 1908년 학위를 마친 후 아이오와주의 하워드 카운티로 이주하여 개업했다.
1915~1918년 퍼글러는 영어로 된 저작들을 적극적으로 발표하면서 미국과 영국의 사회 각계에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의 대의명분을 호소하는 한편, 체코어 신문사를 운영하면서 미국 내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을 결속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 시기 퍼글러는 후일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토마시 마사리크(1850~1937년), 2대 대통령이 되는 에드바르트 베네시(1884~1948년)와 깊은 우의를 맺었다.
당시 마사리크는 1914년부터 망명 생활을 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호소하고 있었다. 1918년 5월부터 미국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을 위한 외교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던 마사리크의 활동을 전담했던 사람이 바로 퍼글러였다.
1918년 10월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이 독립을 선포하자 퍼글러는 초대 주미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퍼글러는 미국 국무부와 긴밀하게 접촉하면서 신생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을 위해 차관(借款)과 무기 등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1920년 퍼글러는 주일 대사로 자리를 옮겼다. 퍼글러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도 귀환하지 못하고 있었던 체코슬로바키아인 군대(체코군단)를 귀국시키기 위해 소련 측과 협상하는 한편, 중국과도 외교관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그가 도쿄(東京)에 주재하는 동안 그를 보좌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측근이 거액의 공금을 횡령하여 1921년 3월 미국으로 도주했다. 이 사건으로 퍼글러는 대사직에서 해임되었고, 당시 외무부 장관이었던 베네시와 정적(政敵)이 되고 말았다.
미국에서 제헌헌법 가르쳐

▲라돌라 가이다
이후 퍼글러는 워싱턴DC로 돌아가 아메리칸대(American University)에서 1924년에 LL.M 학위를, 1928년에 LL.D 학위를 취득했다.
1929년 프라하로 돌아간 퍼글러는 1929~1931년 체코슬로바키아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 퍼글러는 한국 독립군과 상하이 임시정부에 무기를 판매했던 체코군단의 영웅 라돌라 가이다(1892~1948년) 장군과 함께 베네시에 대항했다. 가이다의 민족파시스트는 3석의 의석만을 보유한 군소(群小)정당에 불과했다. 1931년 국회의원 직에서 물러난 퍼글러는 곧 프라하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베네시 대통령은 퍼글러의 국적을 문제 삼았고, 결국 그는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미국으로 돌아온 퍼글러는 1936~ 1946년 조지워싱턴대 로스쿨의 전신(前身)인 법대학장으로 일했다. 이 시기에 그는 미국 가톨릭대(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와 아메리칸대에서 제헌헌법(Constitutional law)을 가르쳤다. 체코슬로바키아 외교관으로 도쿄에서 근무한 경력 및 법학자로서의 경력을 인정받아 그는 1946년 4월~1948년 8월 미 군정청 법률고문으로 파견되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건국 후 워싱턴DC로 돌아간 그는 1954년 사망했다.
조미법학원

퍼글러의 한국 파견 결정은 1945년 10월 연합군 총사령부가 한국 주둔 24군단에 그를 추천함으로써 이루어 졌다. 한국으로 온 그는 1946년 4월부터 1948년 8월 7일까지 미 군정청 군정장관 특별고문(Special Advisor) 겸 미 군정청 사법부 수석 법률고문으로 일했다.
퍼글러는 한국에 온 직후부터 법률심의국장으로서 법안의 기초와 법률 해석 작업 등을 총지휘했다. 1947년 12월부터는 미소공동위원회의 법률고문을 겸했고, 법률의 재개정 작업을 담당했다.
퍼글러의 한국에서의 활동은 1946년 4월~1947년 11월, 1947년 12월~1948년 8월까지의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이는 퍼글러가 제헌헌법 제정에 참여한 시기를 중심으로 하여 구분한 것이다.
퍼글러는 1946년 5월 22일 미 군정청 사법부 법률심의국 수석법률고문으로 취임했다. 법률심의국은 국제법과 군정청의 법령, 일본법, 조선의 관습법 등에 대해 해석하는 역할을 맡았다. 영어 번역본이 있었던 일본법과는 달리 조선의 관습법에 대해서는 한국인들의 조언을 받아 조사를 해야 했다. 법률심의국은 종종 실질적인 사법부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배가 법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왔다.
1946년 9월 2일부로 조선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퍼글러는 11월에 조미법학원(Korean-American Legal Academy)에서 ‘미국 재판소의 조직과 기능’에 대해 강연했다. 조미법학원은 한국과 미국의 법률 전문가들이 1946년 겨울부터 1947년까지 포럼 형식으로 모여 정보를 교환한 미 군정청이 1946년 11월 9일 조직한 반관반민(半官半民) 조직이다.
이 모임에는 미국 측에서 퍼글러, 법률조사국 수석법률고문 에른스트 프랭켈(Ernst Frankel), 법률기초국 수석법률고문 찰스 서머 로빈기어(Charles Summer Lobingier), 사법부장 수석법률고문 존 W. 코넬리(John W. Connelly Jr.), 사법부 차장 겸 법률고문·법률기초국 수석법률고문이었던 데니 페어팩스 스콧(Denny Fairfax Scott) 등이 참여했다. 한국 측에서는 김병로(金炳魯·초대 대법원장), 김용무(金溶茂·미 군정하 대법원장), 이인(李仁·초대 법무부 장관), 김찬영, 유진오(兪鎭五·초대 법제처장), 홍진기(법무부·내무부 장관, 《중앙일보》 회장 역임) 등이 참여했다. 이 모임에서 제기된 법률 문제는 대부분 곧바로 법률의 개정이나 제정으로 연결되곤 했다.
이 시기 퍼글러의 활동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 중 하나는 그가 한국민의 법적 지위에 대해 최초로 해석을 내렸다는 점이다. 그는 1946년 4월 25일의 법해석보고서에서 국제법적으로 ‘국민(national)’은 ‘시민권(citizenship)’과 상호 대체 가능하지만 한국의 상황은 특수하여 이러한 기준과 선례를 적용시킬 수 없으므로 새로운 법률 기준을 설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일본 국민(national of japan)’에 대해 “일본법 아래에서 완전한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보유하는 일본 정부의 국민(national)”으로 정의하고, 이와 달리 일본 식민지 치하에서 완전한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보유할 수 없었던 조선인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한국 국민(Korean nationals)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해석했다. 퍼글러가 이런 해석을 내리게 된 것은 한국인과 일본인, 한국인과 서양인 사이의 혼인 관계에서 발생한 상속권 문제들을 판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헌법기초위원회
1947년 가을 법전편찬위원회가 구성되고 그 안에 헌법기초위원회가 설치되자 퍼글러는 여기에도 참여한다.
당시 참석자들을 살펴보면 대법원장 김용무, 사법부장 김병로, 검찰총장 이인, 사법부 차장 권승렬(權承烈·검찰총장·법무부 장관 역임) 등이 있었다. 이때 퍼글러는 실질적으로 사법 결정권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역할은 철저하게 미 군정이 한국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한국인들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조언하고 지켜보는 것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활동이 공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1947년 5월 21일에 재개되었던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중국 대륙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미국은 1947년 7월부터 1948년 8월까지 한국의 단독정부 수립을 적극 지원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법전 편찬 작업 역시 이즈음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1947년 12월~1948년 8월은 퍼글러가 미소공동위원회의 법률고문을 겸하면서 대한민국의 제헌헌법 제정 과정에 참여한 시기이다.
1948년 5·10 총선거로 제헌국회가 출범하자 퍼글러는 제헌국회에서 심의, 통과된 헌법의 초안(草案)과 국회법, 정부조직법,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 문제에 관한 법률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을 수행했다.
퍼글러는 그해 7월 26일 군정장관에게 보낸 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정부조직법이 헌법에서 이미 표현된 대통령으로의 권력 집중과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정부로의 경향을 강화시킨다고 보고했다. 그는 대통령의 행정수반으로서의 지위와 권한이 명확하게 표현되고 있고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국무총리령, 부령 등에 대한 대통령의 권한에 비추어 볼 때, 국무총리와 내각은 대통령에게 예속된 존재로 기능할 뿐이라고 평가했다.
퍼글러는 1948년 8월 2일에는 프랭켈과 협의한 후 대한민국 승인에 관한 의견서를 군정장관 윌리엄 딘(William Dean·한국전쟁 당시 미24사단장으로 대전에서 북괴군의 포로가 되어 3년간 북한 포로수용소에 수용됨)과 정치고문 조지프 제이콥스(Joseph Jacobs)에게 제출했다. 여기서 퍼글러는 미국은 카이로 선언 이래 한국민에 대한 국제사회의 약속을 이행할 법적·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지적하고, 5·10 총선이 한국민 다수의 실질적 의사 표현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를 승인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퍼글러는 1948년 9월 7일에 한국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맥아더 원수로부터 공로민간인상(Meritorious Civilian Award)을 받았다. 이는 민간인이 군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상이었다.
미 군정, 체코의 좌우 합작 경험에 관심

퍼글러가 1946년 4월 미 군정 법률고문으로 한국에 파견된 이유는 그가 독일 법과 미국 법을 모두 공부하여 대륙법 체계를 받아들이고 있었던 한국에 미국법을 전하는 데 적임자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미 군정청 법률조사국장이던 에머리 우달(Emery Woodall)은 일제하에서 대륙법 체계를 수용한 한국 법과 미국 법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는 것을 발견하고 이러한 문제들을 조율할 수 있는 법률가의 파견을 미국 국방부에 건의했다. 그래서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인 퍼글러와 독일 출신인 프랭클이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당시 미 군정이 한국에서 좌우(左右) 합작을 추진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가 건설 모델에 주목하고 있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사실 당시 한국의 정치 상황을 감안할 때, 앞에서 살펴보았던 퍼글러의 법률적 배경이나 역할보다 이 대목이 더 흥미롭다. 필자가 퍼글러에 주목하게 된 것도 실은 이 때문이다.
퍼글러가 한국으로 파견된 무렵이었던 1946년 4월 19일 미 군정 장관 아처 러치(Archer L. Lerch)는 좌파 진영의 박헌영(朴憲永·북한 정권의 초대 부수상 겸 외무상), 김원봉(金元鳳·북한 정권의 국가검열상·노동상 역임), 허헌(許憲·북한 정권의 초대 최고인민회의 의장 역임)과 만난 자리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민족국가를 성공적으로 건설한 모범 사례로 언급했다. 러치는 체코슬로바키아가 2차 세계대전 후 한국처럼 소련군과 미군에 의해 점령되었지만(약간의 미군이 전쟁 말기 잠시 체코슬로바키아에 진입했지만 곧 철수함-편집자 주), 미국식 자본주의 국가나 소련식 공산주의 국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지도자들의 결단에 의해 훌륭한 국가를 수립할 수 있었다면서 한국도 체코슬로바키아와 같은 방식으로 문제들을 풀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2차 세계대전 후 소련군 점령하에 공산당이 주도하는 좌우합작 정부가 들어섰으나 1948년 2월 공산당의 쿠데타로 공산 정권이 수립됨-편집자 주).
이미 살펴본 것처럼 퍼글러는 1차 세계대전 후 체코슬로바키아가 건국될 무렵 소련 측과 체코슬로바키아 포로 송환 교섭을 담당한 적이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그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라돌라 가이다 장군은 김규식, 여운형 등과 교류한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퍼글러는 당시 미 군정이 추진하던 좌우합작 관련 임무에도 적임자였다. 퍼글러는 단순히 법률을 해석하는 것을 넘어 정치적·정책적 판단이 내표된 입법 업무까지도 담당했는데, 여기에도 그의 경력이 고려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좌우합작 논의 과정에서 퍼글러의 구체적인 역할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이 글 역시 퍼글러를 소개하고 당시 그의 역할에 대해 몇 가지 가설(假說)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앞으로 보다 구체적인 연구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체코 헌법과 제헌헌법의 유사점
흥미로운 것은 권력 구조 면에서 대한민국 제헌헌법과 체코슬로바키아 제헌헌법 사이에 공통점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첫째, 두 헌법은 대통령제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의원내각제적 요소를 받아들이고 있다.
둘째, 양국 모두 대통령이 내각의 총리뿐 아니라 국무위원인 장관들도 임명·해임할 수 있다.
셋째, 한국과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정부의 경우 내각(한국은 국무원-편집자 주)회의를 대통령이 주재했다.
넷째, 양국 헌법 모두 위헌법률 심사 제도를 갖고 있다.
이에 대해서 과연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필자는 세 가지 가설을 제기하려 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세 가지 가설 모두 가능성이 있는데, 퍼글러가 직접 관련되어 있는 세 번째 가설을 중심으로 첫 번째와 두 번째 가설에서 지적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결합했을 것으로 보인다.
첫째, 헌법 제정 시 세계 각국의 헌법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 헌법 역시 그 대상 중 하나였고 이 과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와 대한민국 제헌헌법 사이에 공통점이 생겨났을 가능성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승만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1차 세계대전 후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 과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승만 역시 1933년 7월 22일 소련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과정에 지인(知人)이 써준 소개장을 들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인 프라하로 가서 대통령 마사리크, 총리 베네시를 만나려 한 적이 있다. 마사리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할 당시 시베리아의 체코군단을 순방하고 한국을 경유하여 귀국했으므로 그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우호적인 신문 기사들이 일제 시기에도 종종 등장했다.
따라서 당시 한국의 분위기 역시 제헌헌법을 신속하게 만들어야 했던 상황 속에서는 기존 외국 헌법들을 참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일제 시대부터 친근감을 가지고 있던 체코슬로바키아 제헌헌법의 요소들을 받아들이게 된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미 군정 검찰총장이었던 이인에 따르면 충칭(重慶) 임시정부의 조직으로 만들어진 대한민국헌법기초위원회가 1945년 11월 해산된 이후 미 군정청 사법부장 김병로와 함께 8개월 동안 21개국의 헌법을 수집하여 번역, 인쇄했다고 한다. 1947년 5월 10일 미 군정 법률조사국에서는 《각국헌법총집》을 발행했는데, 여기에는 체코슬로바키아 헌법도 소개되어 있었다.
이런 점과 제헌 과정에서 임시정부의 활동을 계승한 측면에 주목한다면 아래의 두 번째의 가설과도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미 군정 시기 민주의원 헌법안도 체코 헌법과 유사
둘째, 임시정부 헌법의 주요 설계자 중 한 사람인 조소앙이 청산리 대첩 등을 통해 깊은 우의를 맺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 모델을 계속하여 주목하고 있었고 이러한 흐름이 자연스럽게 대한민국 제헌헌법 제정 과정으로도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1946년 2월에서 3월에 미 군정 사령관 하지(John R. Hodge)의 요청으로 인해 마련된 민주의원안(民主議院案)을 기초한 기초위원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소앙, 조완구, 김붕준 3인이었다. 민주의원안의 정부 형태는 외형상 내각책임제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 외에도 위헌법령 심사제도를 두고 있었고, 국민의 헌법상 권리에 대해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었다. 이런 점은 체코슬로바키아 제헌헌법과 유사하다.
셋째, 좌우합작을 통한 국가 건설을 추구하던 미 군정이 이에 부합하는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사례에 주목했을 가능성이다. 퍼글러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체코슬로바키아계 미국인 사회민주주의자로 소련과 교섭 경험이 있으며 주일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를 지내 아시아의 사정에도 밝았다. 그런 그가 미 군정의 최고 법률고문으로 제헌 과정에서 상당한 역할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체코슬로바키아의 제헌헌법과 유사한 부분들이 한국 제헌헌법에서 채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제도와 헌법은 칼 포퍼(Karl Popper)가 말한 것처럼 최첨단을 달리는 것이었다. 유진오가 말한 것처럼 “초밥 한 번 먹을 시간에 이루어진 제헌헌법의 제정 혹은 개정”이란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참조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과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 헌법 역시 적극적으로 채택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이 가능하다.⊙
월간조선 09월 호 글 : 이택선 국가기록위원회 정책전문위원
09.14 안중근 유묵을 받은 사카이는 을미사변 범인이었다
안중근 유묵에 숨은 역사의 아이러니

▲서울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앞에 서 있는 안중근 동상. 역사에 그가 남긴 흔적은 깊고 넓다. 사형 선고 후 안중근은 많은 교훈적인 글들을 남겼다. /박종인 기자
1909년 10월 30일 중국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에서 관동도독부 여순고등법원 검찰관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가 안중근에게 물었다. “왜 이토 공작을 적대시하는가?” 첫 번째 답은 이러했다. “이토의 지휘로 한국 왕비를 살해하였다.”(’한국독립운동사자료 안중근편1′, 2.1909년 10월 30일 미조부치 신문조서)
그리고 1910년 2월 7일 첫 공판이 열릴 때까지 안중근은 조선 통감부 경시(警視·총경급) 사카이 요시아키(境喜明)로부터 신문을 받았다. 한국어에 능한 사카이와 안중근은 열세 차례에 걸친 신문 과정에서 인간적 친분을 쌓았다. 2월 9일 안중근은 세 번째 공판에서 다시 한번 왕비 민씨 살인죄를 역설했다. 사카이는 이미 조선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2월 14일 사형이 확정되고 어느 날 안중근이 서울로 복귀한 사카이에게 시를 써서 보냈다.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思君千里(사군천리·천 리 떨어진 당신을 생각하오)’.
사카이 요시아키(境喜明). 본명 사카이 마쓰타로(境益太郎). 이 자가 바로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에 난입해 왕비 민씨 살인에 가담한 일본영사관 소속 순사다. 안중근도 몰랐고 사카이도 몰랐을, 역사의 아이러니.
유묵, 민족주의에 매몰된 진실
서울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앞 광장에는 안중근이 쓴 글들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 후 여순감옥에서 쓴 글들이다.
‘國家安危 勞心焦思(국가안위 노심초사)’. 검찰관 야스오카 세이시로(安岡靜四郞)에게 써준 글이다. 기념관에 전시된 원본에는 이 수신인이 적혀 있다. 그런데 비석에는 이름도, ‘드린다’는 뜻의 ‘謹拜(근배)’ 두 글자도 없다. 광장에서 기념관으로 내려가는 복도 벽면에도 유묵들이 새겨져 있다. 이 가운데 ‘장부가 죽더라도 마음은 철과 같다’는 ‘丈夫雖死心如鐵(장부수사심여철)’ 유묵 또한 ‘맹경시에게 준다’는 ‘贈猛警視(증맹경시)’와 ‘謹拜’가 삭제돼 있다.

▲안중근의사기념관 광장에 있는 '국가 안위'. 글을 받은 일본인 이름이 삭제돼 있다.

▲안중근의사기념관 전시실에 있는 '국가 안위' 원본.
감옥 통역관 소노키(園木)에게 써준 ‘日韓交誼 善作紹介(일한교의 선작소개, ‘한일 간 우의를 잘 소개함’)’ 유묵은 아예 원본이 사라지고 ‘交誼’를 제외한 다른 글자들이 뭉개진 사진만 남아 있다.
사진을 포함해 현존하는 안중근 유묵 66점 가운데 일본인에게 준다고 적혀 있는 글들은 모두 이곳저곳에서 수신인이 훼손된 채 대중에게 소개돼 있다.(도진순, ‘안중근의 ‘근배’ 유묵과 사카이 요시아키 경시’, 한국근현대사연구104, 한국근현대사학회, 2023)
왜 이런가. ‘일본인에게 주는 글’이라는 민족주의적 반감이 만든 왜곡이다. ‘싫은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고 ‘보고 싶은 역사’만 보려 하는 피해의식이 원인이다.
‘思君千里(사군천리)’와 대한의군
획일적 민족주의는 사실을 왜곡시킨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안중근 유묵이다. 안중근이 남긴 글 가운데 매우 서정적인 시가 한 편 있다.
思君千里 望眼欲穿 以表寸誠 幸勿負情(사군천리 망안욕천 이표촌성 행물부정)
천리 밖 님을 생각하며/ 눈이 빠지도록 바라본다/ 작은 마음 표했으니/ 행여 제 정 잊지 마소

▲수신자가 적혀 있지 않은 '사군천리' 유묵. 천리 떨어진 님을 그린다는 내용이다. /'대한국인 안중근'
받는 사람이 적혀 있지 않은 시다. 이 시를 민족주의적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임금에 대한 간절한 충정과 애국열정’(윤병성 역편, ‘안중근 문집’,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1, p639. 도진순, 앞 논문 재인용)으로 해석한다. 심지어 ‘안중근이 속한 대한의군을 만든 고종에게 바치는 시’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이태진, ‘지식인 안중근’, 태학사, 2024, p174)
사실을 무시하고 역사를 ‘보고 싶은 대로’ 보겠다는 시각이다. 흔히 재판 과정에서 안중근이 스스로를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이태진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고종 군자금으로 의군(義軍)이 창설됐고, 그 병력은 대한의군이라고 불렀다’고 했다.(이태진, 앞 책, p150) 하지만 공판 기록이나 예비진술, 본인이 쓴 옥중 자서전 ‘안응칠역사’ 어디를 봐도 ‘대한의군’이라는 조직은 나오지 않는다. 안중근 스스로 밝힌 직책은 ‘의병’ ‘독립군 의병’(‘안중근사건공판속기록’, ‘애국충정 안중근 의사’, 법경출판사, 1990, pp.12, 41), ‘대한국 의병’(‘안응칠역사’) 참모중장이었다. 고유명사 ‘대한의군’은 1961년 3월 26일 ‘동아일보’에 당시 고려대 사학과 교수 신석호가 쓴 ‘인간 안중근’에 처음 등장할 뿐이다.
이 시를 받은 사람은 안중근을 심층 수사한 통감부 경시 사카이 요시아키다. 그리고 사카이는 안중근이 꼽은 이토의 첫 번째 죄목, ‘을미사변’ 가담자였다. 이게 역사적 진실이다. 이제 본다.
통감부가 보낸 수사관, 사카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가 터졌다. 11월 18일 조선 통감부는 대한제국 내부 경무국 경시 사카이 요시아키(境喜明)를 중국으로 파견했다.(1909년 11월 18일 ‘황성신문’) 사카이는 한국어에 능했다. 2년 전인 1907년 순종 번역관에 임명되면서 계급도 경부에서 경시로 승진한 상태였다. 1909년 1월 순종 서북순행 때 번역관으로 수행하기도 했다.(1907년 음11월 28일, 1908년 음12월 30일 ‘승정원일기’)
사건이 터지자 일본 본국과 통감부 사이에 수사 주도권을 잡기 위해 암투가 벌어졌다. 통감부는 고종을 비롯한 국내 세력을 엮어서 통감부 주도 병합을 앞당기려고 했다. 통감부는 ‘일거에 병합을 단행하기 위해 무리하게라도 증거를 만들 것을 건의하고’ 자체 수사관을 파견했다.(당시 일본 외무성 정무국장 구라치 데츠키치, ‘한국병합의 경위’, 외무성 조사부 제4과, 1939, pp.26~28)
이를 위해 파견된 사람이 사카이 요시아키다. 하지만 사카이는 물론 함께 파견된 조선주차군 헌병장교도 ‘배후 없는 안중근 일행 단독 범행’으로 결론을 냈다. 그리고 안중근은 서울로 복귀한 사카이에게 ‘사군천리’ 시를 써서 보냈다.
‘사군천리’ 그리고 사카이
‘하루는 경성에 있는 모씨 소감을 물으니 안중근이 붓을 잡고 “사군천리~”라고 써서 모씨에게 보냈다.’ 안중근 사형 선고 후 20일 정도 지난 1910년 3월 4일 일본계 ‘조선신문’에 실린 기사다. 기사가 이어진다. ‘모씨 이에 대해 ‘大悟誰能(대오수능)~’이라는 시를 적어 안에게 보냈다고 한다.’(1910년 3월 4일 ‘조선신문’) 아래는 그 시다.
大悟誰能得入<玄>/只應神助就安<眠>/乞君臨死休憂國/永古東洋有善<隣>

▲1910년 3월4일자 '조선신문'. '사군천리' 내력과 그 답시가 적혀 있다. /안중근자료집23
그런데 안중근의사기념관 광장에 이런 시가 새겨져 있다.
‘東洋大勢思杳<玄>/有志男兒豈安<眠>/和局未成猶慷慨/政略不改眞可<隣>’

▲안중근의사기념관 광장에 있는 '동양대세' 비석. 수신인 이름이 삭제돼 있다.

▲'동양대세' 유묵 원본. '선경선생에게 줌'이라고 적혀 있다. /민족의 얼 안중근의사 사진첩
이 안중근의 시와 ‘경성 모씨’가 보낸 답시는 운(韻·꺾쇠 부분)이 정확하게 일치한다.(도진순, 앞 논문) 광장 비석에 삭제된 글자가 있다. 원본 사진에는 이 시를 ‘贈仙境先生’, ‘선경 선생에게 준다’라고 적혀 있다. 경성 모씨 이름은 ‘선경’이다. 안중근 자서전 ‘안응칠역사’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내무부 경시인 일본인 선경(仙境)씨가 왔는데 한국말에 매우 능통해 날마다 서로 만나 얘기를 나눴다.’(안중근평화연구원, ‘안중근자료집’1, 채륜, 2016, p448)
안중근은 바로 사카이를 선경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사군천리’에 나오는 ‘군(君)’은 ‘대한의군을 만들었다는 고종’이 아니라 통감부 경찰 사카이 요시아키다.
이제 악연 시작.

▲사카이 요시아키 /도진순 논문 인용
을미사변, 사카이 마쓰타로(境益太郞)
사카이 요시아키 본명은 사카이 마쓰타로(境益太郞)다. 1868년 9월생이다. 경성에 있는 일본 영사관 순사로 있던 1895년 4월, 마쓰타로는 이봉운이라는 조선 학자와 함께 ‘일화조준’이라는 조선어 교재를 만들었다. 판권지에 있는 마쓰타로 주소는 나가사키현 미나미다카키군(南高來郡) 고지로촌(神代村)이다.

▲사카이 마쓰타로 공저 '일화조휴'. 저자 주소는 나가사키현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출판 6개월 뒤인 그해 10월 7일 밤 마쓰타로는 을미사변에 참여했다. 당시 ‘한성신보’ 편집인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에 따르면, ‘영사관 (警部, 경시 아래 계급) 오기하라 히데지로(荻原秀次郎)는 미우라 공사 지시로 사카이 마쓰타로를 비롯한 순사들을 소집해 사복을 입혀 용산으로 떠나게 했고’ 이들은 ‘괴이하고 난잡한 난동 폭도처럼 몰려가서 사변을 일으켰다.’(고바야카와 히데오, ‘민비시해기[閔后殂擊事件]’, 조덕송 역, 범문사, 1965, pp.62,70)
날이 밝았을 때 ‘흰옷에 혈흔이 완연한 채 영사관에 복귀하는’ 마쓰타로가 목격됐다.(1895년 11월 22일 우치다 일등영사 증인신문. 이치카와 마사아키(市川正明), ‘일한외교사료5 한국왕비살해사건’, 한국학진흥원, 1985, p236) 석 달 뒤인 1896년 1월 21일 이들은 히로시마지방재판소에서 모두 방면됐다. 이유는 ‘증거불충분’.

▲을미사변 당시 사카이 행적을 증언한 보고서 /'한국왕비살해사건'
사카이 요시아키, 사카이 마쓰타로
풀려난 영사관 소속 순사들은 속속 조선으로 복귀했다. 가담했던 영사관 경찰 8명 가운데 6명은 조선으로 복귀했다. 경부 오기하라 히데지로(荻原秀次郎)는 상해와 부산 경찰서장을 지냈다. 오타 히데지로(太田秀次郎)로 개명하고 부산에 살다가 죽었다. 사카이 요시아키는 와타나베 타카지로(渡辺鷹次郎), 요쿠 유지로(横尾勇次郎), 시라이시 요시타로(白石由太郎)와 함께 경성 영사관으로 복귀했다. 오타 토시미츠(小田俊光)는 통감부(이사청) 순사로 복귀했다. 키노와키 요시노리(木脇祐則)는 대만총독부 지방경찰서장으로 일했다.(이상 ‘통감부 공보’ 28호,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0권, 14권, ‘臺灣總督府檔案’ 등) 확인하지 못한 나루세 기시로(成瀬喜四郎) 1명을 제외한 모든 경찰 가담자들 이후 행적이다.
국사편찬위에 있는 ‘주한일본공사관 기록’을 종합하면 사카이 마쓰타로는 원산영사관(1896), 인천영사관(1898), 부산경찰서(1899), 목포영사관(1900)에 근무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15, 8-1-2-(56)1900년 9월 21일 활빈당 체포자의 진술에 관한 건 등) 목포영사관 마산출장소에 파견돼 일본 거주지를 건설하고 마산경찰서장으로 일했다. 계급은 경시보다 아래 경부(警部)였다.
1904년 사카이 마쓰타로는 조선인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해 죽을 위기를 넘겼다. 그때 마쓰타로(益太郞)에서 요시아키(喜明)로 개명했다.(스와 시로, 국역 ‘마산항지(馬山港誌, 1910)’, 창원시정연구원 창원학연구센터, 2021, pp.127~129) ‘마산항지’에는 ‘益太郞’가 ‘喜太郞’로 잘못 적혀 있다.

▲마산영사관 경부 사카이 마쓰타로의 보고서(왼쪽)와 개명 사실을 기록한 '마산항지'.
사카이는 1908년 1월 1일 자로 대한제국 내부 번역관 겸 경부로 임명됐다. 임명과 함께 경시로 승진했고, 이듬해 순종의 북쪽 여행 때 호종했고, 여순으로 파견돼 안중근을 조사했다.
1917년 3월 경기도 경무부 경시 사카이 요시아키(喜明)가 퇴직했다. 귀국할 때 그가 밝힌 고향 주소는 ‘나가사키현 미나미다카키군(南高來郡) 고지로촌(神代村)’, 사카이 마쓰타로(益太郞) 주소와 동일했다.(1917년 2월 4일 ‘매일신보’)

▲1917년 2월 4일자 '매일신보'. 사카이 요시아키의 고향 주소가 을미사변 가담범 사카이 마쓰타로 주소와 동일하다. /국립중앙도서관
여순 검찰과 통감부가 갈등관계였으니, 안중근이 여순 검찰에 ‘왕비 민씨를 죽인 이토를 처단했다’고 진술한 사실을 사카이는 몰랐을 것이다. 사카이가 ‘천리 밖’ 경성에 복귀한 날짜는 1910년 2월 10일이니, 전날인 2월 9일 오후 4시 무렵 공판정에서 안중근이 다시 한 번 왕비 민씨 진술을 한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안중근 또한 사카이가 왕비 민씨 살해사건 범인임을 알지 못했으리라.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
09-19 668년 9월 21일 고구려, 형제의 분열로 멸망하다

▲고구려 연개소문은 아들들에게 화합을 당부했으나 결국 형제들 사이의 반목으로 멸망했다. SBS 사극 ‘연개소문’ 화면 캡처
수나라의 백만 대군을 무찌르고 당 태종의 거센 공격도 물리쳤던 고구려는 668년 9월 21일에 멸망했다. 평양성이 당나라에 함락되었다. 이적은 평양성을 한 달이나 포위 공격했다. 이때 신라 역시 군대를 동원해 공격에 나섰다. 신라군은 7월 16일 한성에서 출발했고, 평양 인근의 사천에서 장군 김문영이 고구려군을 무찔렀다. 이어 신라군도 평양성 포위 공격에 합류했다. 신라군은 평양성 성문 공격 등에서 전공을 세웠다.
동북아의 패자를 자랑하던 고구려는 어떻게 평양성이 함락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나. 그것은 내분 때문이었다. 고구려를 철권 통치한 연개소문이 죽고 나서 권력은 그의 장남 연남생에게 돌아갔다. 연남생은 이때 30대 초반이었다. 아홉 살 때부터 관직을 받아 후계자의 존재감을 드러낸 연남생이었지만 실적은 별 볼 일 없었다. 스물여덟 살 때 압록강을 지키는 임무를 받았는데, 당군에 대패해 3만 군사를 잃어버렸다. 이때 연개소문이 사수 전투에서 당군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면 고구려의 멸망은 좀 더 일찍 올 수도 있었다.
연개소문은 죽을 때 자식들에게 “너희들 형제는 고기와 물과 같이 화합하여 작위를 다투는 일은 하지 말라. 만일 그런 일이 있으면 이웃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이들은 화합하지 않았고 이웃의 웃음거리 정도가 아니라 나라를 말아먹기에 이르렀다. 연남생은 당나라와 화친하고자 했다. 연개소문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없어진 마당에 호전적인 당나라와 맞서기가 두려웠을 수 있다. 그를 위해 고구려 태자를 당에 보내 당 고종의 태산 봉선 의식에 참여하게 했다.
형의 이런 행동을 두 동생 연남건과 연남산은 못마땅하게 보았다. 그들은 연남생이 지방 순시를 나갔을 때를 노려 평양을 장악하고 연남생의 어린 아들 연헌충도 죽였다. 연남생은 지방 세력을 규합해 평양 탈환을 꾀했지만 녹록지 않았다. 연남생은 당에 토벌군을 요청했다. 당은 처음에 연남생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연남생이 재차 사신을 보내고 결국 아들 연헌성까지 보내자 진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남생은 자신의 세력 기반인 국내성 등 여섯 개의 성을 바탕으로 당군과 연합전선을 펼쳤다. 당 고종은 연남생을 길잡이로 삼고,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에 임명하여 고구려 정벌군을 발진했다.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고구려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신라에 투항했다. 연정토는 보장왕의 부마이기도 했으니 고구려의 멸망은 이제 머지않은 셈이었다. 연남생은 당에 들어가 당 고종을 알현하고 충성을 맹세했다. 아들을 죽인 원수인 동생들과 화해할 길은 없었다. 고구려는 2년 가까이 항전을 거듭했다. 보장왕과 연남산이 항복한 뒤에도 연남건은 평양성에서 버텼다. 하지만 내부에서 연남생과 내통한 배반자가 나와 결국 평양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연개소문이 유언을 남길 만큼 형제들의 반목이 이미 심했는데도 연개소문은 현명한 사람에게 국정을 맡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왕을 시해하고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감히 그런 선택을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처럼 자기 가족만 생각하고 국정의 대계를 살피지 않은 결과, 나라는 망하고 백성들은 당나라 오지로 끌려가는 비극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동아일보 이문영 역사작가
09-19 “동포 여러분, 일본이 항복했습니다”…日 천황 육성보다 한국어가 빨랐다

▲일본 항복문서 조인식
與 배현진 "미국의소리서 애국가 2절도 함께 송출…큰 의미 있어"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일본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기에 앞서, 미국의소리(VOA)에서 우리말로 일본의 항복을 알리는 방송이 나온 사실이 확인됐다고 배현진 국민의힘 의원이 18일 밝혔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인 배 의원은, 이날 미국 기록관리청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던 해당 방송 파일을 공개했다. 이 방송은 영어와 중국어 등으로 일본의 항복 사실을 알렸는데, 여기에 한국어도 포함돼 있다.
당시 한국어 방송에서는 황성수 전 국회부의장이 "조선 동포 여러분,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하였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이 말씀하기를, 연합국 각 군대로 하여금 여러 공격 작전을 중지하라고 명령하였다고 하셨습니다"라고 알렸다고 배 의원은 전했다. 아울러 애국가 2절도 함께 방송됐다고 한다.
배 의원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학예사들과 함께 이 방송 파일의 진위를 연구했고, 1945년 당시 파일이 맞는 것으로 확인했다고 전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미국 정부와 협의해 이르면 연내에 국내로 정식 자료 이관 절차를 진행할 예정으로 전해졌다.
배 의원은 "한국어를 사용해 일본의 항복을 명확하게 전달한 자료가 드러난 것으로, 애국가를 함께 송출했다는 사실 또한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문화일보 노기섭 기자
09.21 신분 상승 40년 몸부림, 가혹한 신분제에 꺾여
끝내 양반 거부된 노비 이만강
영조 21년(1745년) 전 현감(縣監) 엄택주(嚴宅周)가 아비를 배반하고 임금을 속인 죄로 고발되었다. 영조 1년(1725년)에 실시된 문과 별시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엄택주는 내외직의 관직들을 거친 인물로 태백산에 들어가 수년째 향존 교육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변성명(變姓名)에 개부역조(改父易祖)한 자라니,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과거 급제자들의 인적 정보가 실린 『국조문과방목』에 의하면 엄택주의 본관은 영월이고 아버지는 엄완, 조부는 엄효, 외조부는 신후종이다. 과거 응시용으로 제출된 이 기록을 보면 완벽한 양반인데, 이게 조작되었다는 말인가.
어미가 노비였으나 문재 뛰어나
10대 때 도망, 양반 엄택주로 위장
20년 공부 급제, 관료로 승승장구
죽기 10년 전 탄로나 흑산도 유배
조선 후기 신분 세탁 갈수록 늘어
기득권 세습 폐해 여전하지 않나

▲강원도 영월에 있는 충신 엄흥도의 정려각. 엄흥도는 세조에 의해 사약을 받아 죽은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묻어준 일이 뒤늦게 알려져 훗날 그 후손에게 벼슬이 내려졌다. 정려각은 충신·효자·열녀를 기리기 위해 지은 비각을 뜻한다. 노비 이만강은 엄흥도의 후손을 자처했다.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 규장각]
문과 급제와 함께 관직에 진출한 지 20년 만에 그를 둘러싼 비밀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영조실록』, 『승정원일기』, 『동소만록』 등의 기록을 통해 엄택주 66년의 삶을 따라가 보자. 엄택주의 본명은 이만강(李萬江)이었다. 아비는 전의현(全義縣, 지금의 세종시) 관아 아전이고 어미는 사비(私婢)였다. 그 역시 관아의 심부름 일을 했는데, 신분은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사노(私奴)로 분류되었다.
멸문 처자와 결혼하려다 실패
어려서부터 문재(文才)가 뛰어났던 이만강은 같은 고을의 신후삼(愼後三, 1683~1735년)에게 글을 배워 나이 16, 17세에 이르자 문예가 크게 진보했다. 이즈음 이만강은 노비의 신분으로는 나날이 성장하는 학문을 담을 수 없다는 문제 의식을 갖게 되면서 혼인을 통해 돌파구를 찾으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승 신후삼에게 자신의 뜻을 밝히는데, “어느 고을에 의지할 데 없이 홀로 사는 아무개 가문의 처자가 있는데, 그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 집은 멸문의 화를 당해 모두 죽고 딸 하나만 남았는데, 과년토록 혼인을 못 하고 있었다. 신후삼은 고향이 같은 그 처자의 집안 내력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신후삼은 “어찌 네가 감히 그런 꿈을 꾸느냐”며 크게 화를 내고 “이제부터 내 집에 발을 들이지 말라”며 꾸짖었다. 비록 멸문의 화를 입었지만 양반은 양반인데, 노비 주제에 구혼장을 내려는 이만강이 방자하게 보였던 것이다. 참고로 이후 신후삼은 숙종 43년(1717년) 온양에서 치러진 정시(庭試)에 합격하여 문관의 길을 걷게 된다.

▲영월에 있는 엄흥도 묘.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 규장각]
스승에게 배척당한 이만강은 그 길로 고을을 떠나는데, 아전인 아버지와 모종의 협의가 있었을 것이다. 이만강이 도망한 시기를 놓고 『동소만록』은 16, 17세 때라고 하고, 『승정원일기』는 13, 14세 때라고 한다. 대과에 급제하여 역사 기록에 그 존재를 드러낸 것이 36세 때이니 언제 도망을 갔든 20년 이상의 세월을 홀로 고군분투한 것이다. 도망 노비 이만강은 강원도를 떠돌다가 영월 호장(戶長)의 딸과 혼인을 한다. 이곳에서 만강은 엄흥도(嚴興道)의 후손을 사칭하며 성명을 엄택주로 바꾸었다.
하고 많은 성씨 중에 이만강은 왜 엄씨를 선택했을까. 그가 조상으로 내건 15세기 사람 엄흥도는 동강 가에 버려진 노산군(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묻어 준 장본인이다. 세조가 보낸 사약으로 억울하게 죽은 어린 임금에게 인간적 예우를 다한 그는 후환을 피해 가족을 이끌고 먼 곳으로 숨어 버렸다. 그런 엄흥도의 일이 60년 만에 세상에 공식화되었고 다시 150년이 더 지난 현종 10년(1669년)에는 송시열의 발의로 엄흥도의 후손을 찾아 벼슬을 내리도록 했다. 문제는 엄흥도의 후손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송시열이 문인에게 보낸 1672년의 편지에 “그 자손을 찾아보니 대체로 있기는 있으나 참으로 그 자손인지가 분명하지 않아 마음에 꺼림칙하네”라고 한 것에서 당시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이만강이 엄택주로 변성명한 1705년(숙종 31년) 경은 엄흥도의 충절 정신이 한창 고조되던 시기였다.
영월 엄씨 엄택주로 족보 꾸며

▲영조 때 병조에서 엄흥도 후손에게 발급한 관문서. 군역과 잡역을 면제하는 내용이다.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 규장각]
이만강이 영월 엄씨 흥도의 지손(支孫)으로 신분 세탁을 한 것은 신분 상승을 꾀하던 공사천(公私賤)의 노비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었다. 조선 후기로 가면 지적(知的)·경제적 조건을 키운 비양반층의 활약이 팽창하는데, 돈으로 양반 족보를 사거나 후사가 끊긴 지손을 선택하여 갖다 붙이곤 했다.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사회적 장벽을 뛰어넘기 위한 노력이 양반 기득권을 해체하는 방향이 아닌, 모두가 다 양반이 되는 독특한 길을 걸은 것이다. 이만강의 경우도 영월 엄씨의 족보를 입수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과거 원서에 기입한 외조 신후종(申厚宗)은 평산 신씨 영월 입향조로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의 후손이자 의병장 신돌석의 7대조이다. 그의 딸 신씨가 엄효의 아들 엄완과 혼인한 것은 족보에 나와 있는 사실일 것이다. 다만 엄택주라는 아들은 어떻게 꾸몄는지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생사를 알 수 없던 잃어버린 아들 또는 혈친이 유교적 교양을 갖춘 근사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일 수도 있겠다.
엄택주가 된 이만강은 용문사(龍門寺)에서 독서로 10년 세월을 보내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데, 벼슬자리의 자제들과 교유하며 인맥을 넓혀간다. 권세가의 자제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들에게도 엄택주가 벗으로 삼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엄택주는 1719년(숙종 45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그로부터 6년 후 영조 1년에 개설된 별시 대증광시(大增廣試)에서 44명 선발에 17위로 합격한다. 당시 그의 거주지는 강릉이었다. 그에게 대과 급제는 세상과 맞서 스스로 일궈낸 쾌거이자 인간 승리였다.

▲엄택주에 관한 기사가 보이는 『영조실록』.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 규장각]
엄택주는 책을 만드는 일을 하는 교서관에 배치되는데, 종9품 부정자(副正字)를 시작으로 계속 승진하여 3년 만에 정6품 전적(田籍)에 이르렀다. 글재주가 있는 사람이 맡는 제술관(製述官)을 겸한 것을 보면 문장에 능하고 학술적인 능력이 돋보였던 것 같다. 관직에 든 지 8년 차에 외직으로 나가는데 연서 찰방을 거쳐 경상도 영일(迎日 혹은 延日로 표기) 현감에 제수된다. 여기서 치적의 명성(治聲)을 얻는데, 살벌한 경쟁의 관료 사회에서 단기간에 훌륭한 평가를 얻었다는 것은 능력도 능력이지만 엄택주 내면의 다짐이 있었던 것 같다. 예컨대 경로를 확인할 순 없지만 변성명한 엄택주의 행적을 이미 알고 있었던 약헌 서종화(1700~1748)는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발설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중국 전국시대 진(秦)의 범수(范睢)를 떠올린다(『약헌유집』 8). 사지(死地)에서 살아남아 최고의 정치가로 변신한 범수(장록으로 개명)는 단지 한 끼 식사에 대한 은혜에도 반드시 보답했고 한번 노려본 원한에도 반드시 보복하였다고 한다.
엄택주는 영조 15년(1739년) 제주 판관을 거쳐 봉상시 판관을 끝으로 관직을 털어버리는데, 권력에 빌붙어 떨어질까 전전긍긍하는 족속들과는 다른 정신세계를 가진 것이다. 1745년 그의 과거가 탄로 나기 직전까지, 태백산에 은거하며 글을 읽고 후학을 양성하고 있었던 엄택주다.
윤리 저버린 죄로 다시 이만강으로

▲조선시대 전의현 지도. 지금의 세종시다.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 규장각]
정언(正言) 홍중효는 현감으로 있는 형을 만나러 전의(全義)에 들락거리다가 이만강의 도망 사실을 알게 된다. 족속들을 탐문하여 부모 형제가 서로 못 본 지 30년이 되었다는 사실을 입수한다. 이에 왕은 조정의 논의를 모아 엄택주의 죄목을 공표하였다. “엄택주의 일은 인간 윤리의 문제다. 왕도(王道)는 윤리를 제일로 삼는데 사람이 사람 노릇 하는 것은 오륜(五倫)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 차마 모칭(冒稱, 성명을 거짓으로 꾸밈)하고, 그 조부(祖父)를 잊는단 말인가?” 엄택주에게 아비의 무덤에 성묘하지 않은 죄, 동생 이주영을 찾아보지 않은 죄를 물었다. “흑산도로 유배해 영원히 노비로 삼고, 대소과(大小科)의 방목(榜目)에서 그 이름을 삭제하라.”(영조 21년 5월 26일) 엄택주 아니 이만강의 나이 56세 때의 일이다. 다시 10년이 지난 영조 31년에 엄택주는 나주 괘서 사건에 휘말리며 흑산도에서 서울로 압송되었고, 물고(物故)를 당해 66년 그의 삶도 막을 내린다.
엄택주 그 개인의 삶은 막을 내렸지만,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신분의 굴레를 벗고자 하는 대중의 몸부림은 계속되었다. 살아서는 유학(幼學)이고 죽어서는 학생(學生)이 되는 꿈이었다. 몇 대조 선조 외에는 내세울 게 없는 양반층의 위기의식이 조상 추숭과 부계친족의 결속으로 방향을 틀었다면, 절대다수의 비양반층은 부의 축적과 같은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신분 세습의 고리를 끊어내고자 했다. 엄택주 등의 몸부림이 흘러간 과거의 일일 뿐인가. 종교·돈·학벌·인맥 등으로 똘똘 뭉친 이기적 집단이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 가시덩굴을 치고 있지는 않은가.

중앙일보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09-23 성문 지키는 병사들 군장점검… 트집 잡아 돈 빼앗는 ‘사냥’ 변질

▲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군졸들의 호랑이 ‘도총부’
중앙군 총괄 역할… 요즘의 합참
비변사 설치 뒤 유명무실 전락
군인들 준비물 점검… 벌금 부과
많게는 300냥… 백성들이 갹출
제대로 월급 주어지지 않은 탓
지방관리까지 금전갈취 일상화
# 군졸들의 호랑이로 군림한 도총부 관원들
조선시대 오위(五衛)를 총괄한 최고 군령기관으로 요즘의 합동참모본부에 해당한다. 고려시대에는 삼군총제부로 불리다가 조선 초에는 의흥삼군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의흥삼군부는 태종 1년(1401년)에 승추부로 다시 개칭되었는데, 그로부터 2년 뒤인 1403년에 삼군에 각각 도총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1405년에 승추부가 병조에 통합됨에 따라 삼군도총부는 병조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병조가 너무 비대해졌는데, 병조의 군사 업무를 다시 분산시키기 위해 삼군진무소가 설치되었다. 그러다 세조 3년(1457년)에 중앙군 조직이 오위로 개편되면서 삼군진무소는 오위진무소가 되었고, 1466년에 관제개혁이 이뤄지면서 오위도총부로 개칭되었다.
오위도총부는 중앙군을 총괄하는 역할을 했는데, 중종 때 비변사가 설치되면서 군국기무만 전담하는 기구로 전락했다. 이 때문에 기능이 점차 약화되어 법제상으론 유명무실한 관부로 남아 있다가 1882년에 군제개혁이 이뤄지면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오위도총부가 총괄한 오위는 의흥위, 용양위, 호분위, 충좌위, 충무위 등으로 구성된 전국 군대 전체를 일컫는다. 하지만 오위도총부는 비변사가 설치된 이후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관원이 많지는 않았다. 관원으로는 도총관(정2품)과 부총관(종2품)이 10인 있었는데, 대부분 다른 기관의 관료가 겸임하였다. 그래서 대개 종친이나 부마, 정승 등 고위 관리가 임명되었다. 따라서 오위도총부의 실질적인 운영은 종4품의 경력과 종5품의 도사 4인이 맡고 있었다. 나머지 관원으로는 서리 13인, 사령 20인이 전부였다. 하지만 어쨌든 궁궐 안에 있는 기관이었기에 이들 관원은 매일 궁궐로 출퇴근하였다.
오위도총부는 흔히 도총부로 불렸는데, 주된 임무는 성문을 지키는 위졸(衛卒)들을 점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무는 단순한 편이었는데, 이 사무는 대체로 경력이 총괄하였다. 그럼에도 총관과 부총관이 10인이나 배치되었고, 그 아래 경력이나 도사도 10인 이상 될 때도 많았다. 이 때문에 관제 개편이 있을 때마다 도총부의 고위직과 경력이나 도사 같은 낭청의 수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다.
도총부의 주요 임무가 입직하는 위졸들을 점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군졸들에 대한 도총부 관원들의 불법적인 착취가 심했다. 도총부 관원들은 점검을 핑계로 자주 군졸들을 괴롭히며 재물을 뜯어내곤 했는데, 이런 행위를 두고 당시 군인들은 ‘도총부의 사냥’이라고 불렀다. 도총부 관원들은 마치 사냥하듯이 군졸들의 주머니를 털곤 했던 것이다. 그렇듯 도총부 관원들은 일반 군졸들에겐 호랑이 같은 존재였다.
# 돈을 갈취하던 악습, 악습을 당연시한 조선 사회
광해군일기 4년(1612년) 5월 27일에 병조에서 이런 보고를 하였다.
“무릇 군사가 상번(上番)하여 군장(軍裝)을 점고(點考)받을 때 본조와 도총부의 하인들이 행하(行下)를 빙자하여 사사로이 서로 속전(贖錢)을 징수하는데, 이는 대대로 내려온 고질적인 폐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작년 본조의 계목(啓目) 안에 ‘군장을 점고한 뒤에 시사(試射)하여 불합격한 자는 논죄하거나 혹은 속전을 거둔다’는 일을 아뢰어 윤허받았으니, 이같이 하면 군장은 자연히 정밀하고 좋아질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점고하는 때에 낭청의 하인들이 제멋대로 침학하는 것이 전날과 같았다고 합니다. 말 뒤의 배리(陪吏)가 비록 보호받는 자라 하더라도 대궐 아래의 위졸에게 어찌 징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일의 체모로 헤아려 보건대 매우 온당치 않으니, 도총부의 점고한 낭청을 우선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병조의 이 보고서는 병조와 도총부 관원들의 불법적인 금전 탈취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 군인들이 군역을 지고 서울로 올라오면 그들의 군장을 점검하는 일을 병조와 도총부의 하인들이 맡았는데, 이 과정에서 터무니없는 트집을 잡아 군인에게 벌금을 징수해 돈을 갈취했다.
이런 행동은 고려 때부터 고질적으로 내려오던 악습이었다. 도총부나 병조의 관원들이 하인들을 시켜 군인들의 돈을 갈취하는 행위는 행하(行下)를 빙자한 것인데, 행하라는 것은 원래 군인들의 준비물을 점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점검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준비물을 갖추지 못하면 속전, 즉 벌금을 부과함으로써 준비물을 제대로 갖추게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악습으로 변해 군인들의 돈을 갈취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특히 도총부 관원들은 성문을 지키는 위졸(문졸)로 온 자들을 상대로 돈을 갈취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조선 왕조는 개국 초부터 이러한 악습을 근절시키기 위해 무단히 애를 썼지만 조선 말기까지도 이 악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궐내행하(闕內行下)’라는 이름으로 지방관으로 파견되는 관리들로부터 돈을 뜯어내는 것도 하나의 관습으로 굳어져 있었다. 이때 지방관으로 파견되는 관리는 반드시 임금을 만난 뒤 임명장을 받고 임지로 떠나야 했는데, 도총부 관원들이나 각 문의 별감들이 문을 막고 일종의 통과세를 받곤 했는데, 이를 궐내행하라고 했던 것이다.
궐내행하로 인해 관리들이 내야 하는 금액은 많게는 300냥이 넘었다고 하는데, 이를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약 1500만 원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돈이 관리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임할 곳의 백성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이다. 새로운 지방관이 부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부임지의 이방이 고을의 백성들에게 갹출하여 궐내행하에 쓰이는 돈은 물론이고 신임 관리의 이사 비용과 부임 과정에서 쓰이는 모든 비용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도총부의 관원과 하인, 또는 문지기들이 행하를 빙자하여 돈을 뜯은 것은 그들에게 제대로 월급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성문이나 궐문을 지키는 문졸과 별감들은 월급이 없었기 때문에 기회만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뜯어냈다. 이는 궐문의 문졸뿐 아니라 각 성문의 문졸이나 각 지방 관아의 문졸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는 이렇듯 궁궐에서부터 지방 관아에 이르기까지 관리와 군졸, 그리고 백성들을 대상으로 불법적으로 돈을 갈취하는 것이 악습으로 굳어져 있는 사회였다. 말하자면 궁궐의 도총부 관원과 그 수하의 사령 및 하인들이 문졸들을 상대로 돈을 갈취하면, 그들 문졸은 또 궁문을 드나들어야만 하는 지방관을 상대로 돈을 갈취하고, 지방관은 또 백성들의 돈을 갈취하여 그 돈을 충당하는 식이었다. 또한 지방의 관아를 지키는 문졸들도 같은 수법으로 백성들을 상대로 통과세를 거뒀으며, 관아의 옥졸도 또한 죄수와 그 가족들로부터 돈을 갈취했다.
이러한 금전 갈취 행위는 지방 아전들에게도 일상화되어 있었다. 아전들 역시 월급이 없었기에 백성들에게 각종 세금을 거둬들이는 방법으로 돈을 갈취했다. 그렇듯 조선 사회는 금전 갈취에 대해 매우 무감각한 사회였다.
■ 용어설명 - 비변사(備邊司)
외적 침입에 대한 대책 마련을 위한 임시 관서로 조선 중기 설치됐다. 임진왜란 이후 비변사 역할의 확대에 따라 상설 기관이 됐다. 군사와 외교 업무 외 재정·인사·의례 등 각종 정책의 입안과 집행을 주도했다. 특히 세도정치 시기는 특정 가문의 권력 유지를 위한 기관으로 전락했다.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의 왕권 강화 기조로 혁파됐다.
문화일보 박영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