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午後餘談(문화일보) 2024-09/ 09-02(월) 성난 사람들 - 09-30(월) 희귀한 ‘3패 무승부’ 바둑

상림은내고향 2024. 9. 16. 13:18

午後餘談(문화일보) 2024-09

09-02(월) 성난 사람들

 

최현미 논설위원


2010년 30여 쪽짜리 소책자가 전 세계적인 분노 신드롬을 일으켰다. 제2차 세계대전 레지스탕스였고 그 뒤 외교관과 인권 운동가로 활동했던 스테판 에셀(1917∼2013)의 책 ‘분노하라(Indignez-Vous!)’이다. 당시 93세였던 저자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깊어진 양극화, 금권정치로 인한 민주주의 위기 속에서 무관심이야말로 최악의 태도라며 젊은이들에게 현실에 눈감지 말고 분노하고 저항하라고 주문했다. 책은 프랑스에서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고 30여 개국에서 번역돼 500만 부 이상 팔려 나갔다.

우리나라에도 그 이듬해 저자 인터뷰가 추가된 소책자로 나와 화제가 됐다. 그때 한국에서는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다는 삼포 세대, 집안·재산·학벌·인맥 등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수저 계급론이 잇따라 나오고 있었다. 일종의 자조 섞인 분노였다. 이와 함께 한쪽에서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베스트셀러로 만든 공정에 대한 욕구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의 분노는 어떻게 됐을까. 최근 유명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팀의 연구 결과를 보면 분노는 울분이 된 듯하다. 연구팀이 한국 성인 남녀 1024명을 대상으로 ‘한국인의 울분과 사회·심리적 웰빙 관리 방안 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자의 49.2%가 ‘장기적 울분 상태’에 있다고 답했다. 울분은 ‘부당함과 모욕 등 스트레스 경험에 대해 분노뿐만 아니라 깊은 좌절과 무력감이 동반되는 감정적 반응’이다. 간단히 말해 좌절된 분노인 셈이다.

희로애락 인간의 감정은 모두 개인적이고 또 사회적이다. 하지만 분노는 분노 신드롬에서 보듯 다른 감정에 비해 사회적 성격이 강하다. 분노는 어떤 상황에 대해 화가 나는 1차적 감정이라기보다는 수치감, 무력감, 불안감, 좌절감 같은 1차적 감정이 해결 안 될 때 발생하는 2차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번 조사에서도 자신을 하층이라고 인식하는 경우 장기적 울분 비율이 60%로 높아졌고 세상이 공정하다는 믿음이 클수록 울분을 적게 느꼈다. 세상이 공정하다는 믿음은 20, 30대에서 가장 낮았고, 60세 이상에서 가장 높았다. 그 결과 심각한 울분을 느끼는 비율은 30대가 13.9%로 가장 높았고, 60세 이상은 3.1%로 가장 낮았다. 우리의 울분은 언제쯤 사그라들까.

 

09-03 대출총량제 고육책

 

이철호 논설고문


결국 시중은행들이 대출총량제에 들어갔다. 우리은행은 유주택자에겐 주택담보대출은 물론 전세대출도 전면 중단했다. 외견상 ‘자율’이지만,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의 압박이 결정적이었다. 그제 시행된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2단계는 언제 종이호랑이 신세가 될지 모른다. 금리가 내려가면 대출 한도가 다시 크게 늘어날 수 있다. 반면, 대출총량제는 부동산으로 들어가는 유동성을 차단하는 만큼 약효가 강력하고 즉각적이다.

일본은 1990년 3월 27일 대출총량제를 도입한 이후 3년 만에 집값이 반 토막 났다. 중국도 2021년 주택담보대출 총량관리제를 실시하면서 집값이 확 꺾였다. 한국도 ‘미친 집값’이 절정이던 2021년 8월 고승범 금융위원장이 가계대출총량제를 꺼내 들었다. 그해 대출 증가율을 6%로 제한하고, 2022년엔 4%로 더 묶기로 하면서 집값은 급락하기 시작했다. 비난도 엄청났다. 대선에 출마한 윤석열 후보까지 “국민의 삶이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다”고 했지만, 고 위원장은 ‘묘수’로 돌파했다. 전세대출을 총량제에서 제외하면서도 대출 한도를 전세금 증액 범위 내로 묶은 것이다. 1년 사이 최대 관심 지역이던 서울 둔촌동 주공아파트 재개발 입주권(전용면적 84㎡)은 15억 원으로, 8억 원이나 떨어졌다.

문제는 부작용이다. 대출 절벽을 피해 은행들을 뺑뺑 도는 ‘풍선 효과’가 대표적이다. 또, 신용도가 낮은 서민들이 상대적으로 더 피해를 본다. 가계대출 급증은 집값 폭등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국민이 정책 실패 책임을 뒤집어쓰는 셈이다. 그렇다고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 8월 가계대출이 역대 최대인 9조6259억 원 늘었다. 연체율이 치솟으면 금융 시스템 전체가 위험해진다.

집값 수준을 가늠하는 대표적 지표는 가처분소득 대비 중위 아파트값인 PIR이다. 한국의 PIR은 6월 말 기준 20.7배로 일본(11.3배)·독일(9.4배)·영국(9.1배)보다 너무 높다. 2013년 10배였던 PIR이 문재인 정부 시절 26배까지 치솟았던 후유증이다. 이번 대출총량제도 기준금리 인하 전 마지막 골든 타임에 시장 심리를 냉각시키기 위한 극약 처방이다. 그러나 DSR 강화라는 ‘정공법’을 유예한 자충수가 결국 뒤늦게 초강수를 꺼내 들게 만들었다. 정책 실패가 부른 자해극이다.

 

09-04 TK통합 기만극

 

김세동 논설위원


대구·경북(TK) 행정통합 논의가 무산됐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지난달 27일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더 진행하는 건 무의미할 것으로 보인다”고 파탄을 선언했다. 홍 시장의 5월 17일 통합 제안에 이철우 경북지사가 호응한 지 102일 만이다. 홍 시장이 TK 통합 무산을 기자회견 등으로 밝히지 않고 SNS로 덜컥 선언한 가벼운 처신 등에 대한 비판도 나오지만, 처음부터 어려운 과제였다.

앞서 권영진 대구시장 때 이 지사 제안으로 2019년 말부터 시작된 통합 논의는 2022년 당선된 홍 시장의 반대로 중단됐다. 홍 시장은 당시의 통합안인 ‘대구경북특별자치도’는 경북도에 대구시가 편입되는 방식이라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번 ‘대구경북특별시’ 안은 대구가 경북을 흡수하는 방식이다. 면적이 압도적으로 넓고(경북 1만9036㎢, 대구 885㎢) 인구도 많은(경북 254만 명, 대구 237만 명) 경북이 흡수 통합되는 불만은 차치하고 무리한 발상이라는 지적도 많았다. 대구경북특별시 안은 서울시 자치행정을 모델 삼아 경북도 시군의 자치권을 대폭 축소하는 방식이라 기초단체들의 반발이 특히 거셌다.

대구청사, 경북청사(안동), 동부청사(포항) 3개 설치 안에도 경북의 불만이 컸다. 대구청사는 대구와 경북 11개 시군(경산·청도·영천·고령·성주·칠곡·의성·상주·구미·김천·청송), 경북청사는 7개 시군(안동·예천·문경·영양·영주·봉화·울진), 동부청사는 4개 시군(포항·경주·영덕·울릉)을 관할구역으로 정했는데, TK 491만 명 중 대구청사 관할 인구가 366만 명에 달한다. 경북의 땅과 인구, 권한 대부분을 대구에 뺏기는 ‘흡수 합병’을 주민투표도 거치지 않고 두 단체장의 의기투합과 시도의회 의결만으로 추진하겠다는 자체가 너무 안이했다.

농업 중심 왕조시대 산맥과 하천을 기준으로 나뉜 행정구역을 경제·생활권 중심으로 재편해야 한다는 논의가 오래됐지만, 국회의원 및 자치단체장·지방의원 등 정치 기득권 때문에 답보 상태다. 17개 시도와 226개 시군구 체제는 행정의 비효율과 자원 낭비가 심각하다. 국가-시도-시군구의 3단계 행정체제를 2단계로 축소하는 게 바람직한데, 지자체에 맡겨 될 일이 아니다. 여야가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 개혁으로 집권 경쟁을 벌였으면 한다.

 

09-05 원전 르네상스와 지원法

 

문희수 논설위원


원전산업 생태계에 온기가 돈다. 국내외 수주 물량이 늘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300여 개 업체가 몰려 있는 경남 창원을 중심으로 원자력 업계가 일감 확대에 대비해 모처럼 투자·인력을 늘리는 등 활기를 띠고 있다. 탈원전 질곡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회생하는 모습이 참으로 반갑다.

사상 최대인 24조 원 규모의 체코 원전 수주가 결정적인 계기다. 특히, 최근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원천기술을 주장하며 한국에 태클을 걸고 나선 것에 체코 정부가 “탈락 업체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며 K-원전에 대한 신뢰를 재확인하면서 찜찜했던 요인을 털어내 더욱 고무적이다. 실제 세계가 인정하는 K-원전의 경쟁력은 이번 체코 수주전에서 그대로 입증됐다. 당장 원전 건설 단가는 중도 탈락했던 웨스팅하우스는 물론, 강력한 경쟁자로 여겨졌던 프랑스의 절반 수준으로 압도적이다. 체코에 절실한 공사·가동 일정 요건에서도 몇 년씩 지체되기 일쑤인 프랑스를 크게 제쳤다. 체코가 한국이 모든 기준에서 앞섰다고 밝힐 정도다.

유럽이 다시 원전 건설로 속속 유턴하는 만큼 추가 수주 기대가 크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최근 스웨덴·핀란드·네덜란드·슬로베니아를 유력 국가로 꼽았다. 여기에 폴란드·영국 및 아랍에미리트 등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업계에선 2027년까지 수주가 10기 이상일 것으로 예상한다. 윤석열 정부가 2038년까지 최대 3기의 신규 대형 원전과 차세대 소형모듈원전(SMR) 1기 건설 계획을 밝힌 것도 긍정적이다.

그렇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무엇보다 딴죽을 걸 기회만 엿보는 웨스팅하우스 변수를 해소하는 게 급선무다. 1978년 원자력공급국그룹(NSG) 지침에 따라 우리 기술로 개발한 한국형원전(APR1400) 수출도 웨스팅하우스의 동의를 받게 돼 있는 게 현실이다. 미국 정부는 원전 수출을 통제하기 위해 미국인 또는 미국법인만 신고할 수 있게 한다. 이런 규제를 틈타, 이젠 원천기술만 남은 웨스팅하우스는 부분적인 일감이나 기술 로열티를 노리고 툭하면 시비를 건다. 이런 분란의 소지를 원천 봉쇄해야 한다. 아울러 국회도 입법을 통해 적극 지원해야 한다. 무엇보다 정부가 이달 국회에 발의할 예정인 원전산업 지원 특별법 제정안부터 빨리 처리하는 것이 절실하다.

 

09-06(금) 어머니의 추도사

 

이미숙 논설위원


“누구라도 어디서든 제 아들 허시를 만나면 보살펴주세요. 허시는 저의 전부입니다. 가자 지구에서 사는 분들도 엄마가 있겠지요. 저도 엄마로서 어디서든 어려움에 처한 여러분의 아이를 돕겠습니다.” 지난해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 테러 때 아들 허시(23)가 납치되자 예루살렘에서 상담교사로 일하는 레이철 골드버그는 ‘누구라도 어디서든 제 아들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세요(I hope someone somewhere is being kind to my boy)’라는 글을 뉴욕타임스에 기고했다. ‘누구라도 어디서든’이란 표현은 후렴구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인질 석방 캠페인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했다.

이스라엘·가자 국경 부근에서 열린 노바 음악축제에 친구들과 함께 갔던 허시는 하마스 테러 당시 자동차로 대피했지만, 수류탄 폭발로 왼팔을 잃는 사고를 당한 뒤 납치됐다. 아들을 구출하기 위한 골드버그의 싸움은 다보스에서 바티칸, 유엔, 미국으로 이어졌다. 그가 지난 1월 다보스에서 납치 피해 가족과 캠페인을 벌였을 때엔 ‘매너리즘에 빠진 다보스가 하마스 테러 피해 가족 덕분에 활기를 되찾았다’는 평이 나오기도 했다. 또, 남편 존 폴린과 8월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해 인질 석방 촉구 연설을 했다.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열악한 조건을 견뎌낸 허시는 지난 4월 왼쪽 팔이 없는 상태로 하마스 공개 영상에 등장해 가족에게 일시적 희망을 줬지만, 지난 1일 라파 지하터널 부근에서 5명의 납치자 주검과 함께 시신 상태로 발견됐다. 이스라엘군은 이들이 라파 터널로 옮겨지기 직전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하마스는 지난해 테러 때 250여 명을 인질로 끌고 간 뒤 이스라엘 정부 압박용 심리전 수단으로 이들을 활용하며 살해하는 수법을 반복하고 있다. 허시 등의 ‘시신 귀환’ 후 이스라엘에서는 인질 석방 요구 시위가 뜨거워지고 있다. 골드버그는 2일 아들 장례식에서 “지난 332일 내내 1밀리초(1000분의 1초)마다 괴로웠고, 내 영혼은 3도 화상을 입은 듯했다”고 했다. 이어 “너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로, 아들이 끌려가기 직전 보낸 ‘엄마 사랑해. 그리고 미안해’ 메시지에 답했다. 그러고는 “우리 가족이 시련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이젠 네가 지켜줘야 한다”며 추도사를 마쳤다.⊙

 

09-09(월) 초선들의 초당 모임

 

오승훈 논설위원


여야 초선 의원들이 초당적 모임을 놓고 설왕설래하고 있다. 국민의힘 초선 모임 대표인 김대식 의원이 최근 더불어민주당 초선 모임 ‘더민초’ 대표인 이재강 의원에게 양당 초선 모임 집행부 회동을 갖자고 제안했다. “민생 협치를 위한 조찬·오찬 모임 성격”이라고 했다. 반면, 이 의원은 “여야 소통 구조를 초선들이 만들어보자는 취지인데 그 방식은 한가로운 식사 자리가 아니었다. 수해 복구 지원·연탄 배달 등 자원봉사를 함께하는 걸 추진해왔다”면서 “아직 성사된 건 아니다”고 했다. 추이를 지켜봐야겠지만, 성사 전망이 썩 밝지만은 않다.

제22대 총선에서 당선된 국회의원 300명 중 초선은 131명(44%)이다. 21대보다 20명이 줄었다. 민주당은 70명, 국민의힘은 44명으로 각 당에서 40∼41% 수준이다. 이들에게 거는 기대는 새로운 정치이지만, 임기 시작 3개월이 지나도록 주목할 만한 ‘초선 현상’ ‘초선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계파 공천을 바탕으로 당선된 초선이 많기 때문이란 분석이 많다. 친윤석열, 친한동훈계로 나뉘는 여당이나, 친이재명계가 주류인 민주당이나 개혁적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는 주류의 일원으로 자리 잡으려는 노력이 먼저일 수밖에 없는 구도란 얘기다. 특히, 민주당 초선 상당수는 ‘비명횡사’ 진통 끝에 공천을 받았다. 대치 정국에서 상대를 공격하는 전사 역할을 하거나, 당 대표 등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초선도 적지 않다. 이들에게 정치 개혁, 여야의 초당적 협치 구호는 언감생심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동료 의원의 체포동의안 통과를 막기 위해 5시간 동안 원고 없이 연설한 최초의 필리버스터, 노무현 전 대통령이 5공 청문회에서 스타로 부상한 일, 오세훈 서울시장이 기업의 정치자금 후원을 금지하고 지구당 폐지를 주도한 것, 모두 초선 때다. 당 쇄신을 주도한 15대 국회 시절 민주당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 16대 국회 때 한나라당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도 남 전 의원을 빼면 모두 초선 때다. 설익고 거칠어도 여당이면서 정책을 놓고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고, 주류 패권에 맞서면서 당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 “지금은 주류에 줄 서는 직업형, 생계형 초선들뿐”이라는 한 중진의 장탄식이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09-10 대통령의 명절 선물

이현종 논설위원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부터 매년 설날과 추석 명절에 각계 인사 및 사회적 배려 계층에 대통령의 선물이 전달됐다. 명절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대통령의 마음을 전달한다는 차원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 때를 제외하곤 관례처럼 됐다. 대통령의 국정 철학과 화합·통합의 메시지, 취향을 담기 위해 선물 내용을 무엇으로 할지 정하는 데 꽤 고심이 많다고 한다.

선물 내용물도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국군 장병에겐 담배를, 해외 파견된 근로자들에게는 고추장과 김치를 보냈다. 중동 건설 현장에 파견된 근로자들에게 아주 좋은 선물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신문 배달원과 광원들에게 방한 외투 및 내의를 보냈다. 선물 포장에는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 휘장과 ‘대통령 하사품’이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각각 고향의 특산품을 선물로 보냈다. YS는 부친이 운영하는 멸치 어장에서 나는 ‘김홍조표 멸치’를 보냈다. DJ는 고향인 전남 신안에서 나는 김이 빠지지 않았다. 한과와 녹차도 포함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 들어서는 처음으로 지역 안배형 선물이 채택됐다. 각 지역에서 나는 특산품에 전통주가 꼭 포함됐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주로 농산물을 보냈는데 기독교인이어서 전통주는 제외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역 특산물 3종을 소박하게 보냈고, 문재인 전 대통령은 지역 특산물 6종에 전통주를 다시 포함시켰다.

선물 때문에 논란도 벌어졌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황태, 멸치 등을 선물로 준비했다가 불교계에선 생물을 먹지 않는다는 내부 지적을 받고 황급히 다기 세트로 교환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다기 세트를 수해 피해자들에게 보냈는데 ‘차를 마실 여유가 있느냐’는 비판을 받고 교체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월 한센인들이 그린 카드를 동봉했는데 여기에 십자가와 ‘아멘’ 등의 문구가 적혀 있는 바람에 불교계가 발끈하는 일이 있었다. 당시 이관섭 비서실장이 조계종 총무원을 찾아 공식 사과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번에도 더불어민주당의 이성윤, 조국혁신당의 김준형 의원 등이 선물을 거부한다며 돌려보내는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지지층의 반윤 정서를 겨냥했다. 선택은 자유지만, 명절·경조사 등에 대한 전통적 예절과는 거리가 멀다.

 

09-11 기후난민 한국인

 

최현미 논설위원


오늘도 폭염이다. 올해는 한반도 기상관측 사상 가장 더운 여름이 될 전망이다. 최근 기상청에 따르면 올여름 평균기온은 25.6도, 열대야 일수는 20.2일로 기상관측이 전국적으로 이뤄진 1973년 이후 역대 1위라고 한다. 평균기온은 종전 최고였던 2018년(25.3도)보다 0.3도 높고 열대야 일수는 평년(6.5일)의 3.1배다.

세계 곳곳도 폭염에 시달렸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이슬람 성지 순례인 ‘하지’에 50도가 넘으면서 1300명 넘게 숨졌다.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선 더위로 관광지가 폐쇄됐고 미국 캘리포니아에선 폭염에 산불이 연이어 발생했다. 미국에서 가장 더운 데스밸리의 8월 평균기온은 42.5도로 관측 사상 최고다.

폭염은 당연히 기상 도미노로 이어졌다.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빠르게 녹아내렸고 이어 해수면이 상승, 해안 저지대 도시 침수를 거쳐 기후난민 급증으로 귀착됐다. 지난달 기준 전 세계 빙하 면적은 1991년부터 2020년까지 30년간 평균보다 약 280만㎢, 전체의 10% 넘게 줄었다고 한다. 세계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기후위기로 2050년까지 전 세계에서 2억1600만 명의 기후난민이 발생한다고 한다.

기후난민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올여름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이 무더위 쉼터를 찾았다. 마침 역사적으로 한국인의 뿌리가 기후난민이라는 연구도 나와 눈길을 끈다. 박정재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가 20여 년간 한반도 고기후를 연구한 결과인 ‘한국인의 기원’에 따르면 한민족은 추위를 피해 북방에서 한반도로 남하한 기후난민이라고 한다. ‘한국인 형성 기후 가설’은 이렇다. 마지막 빙기에서 가장 추웠던 2만5000년 전과 현 인류가 사는 홀로세에 속한 8200년 전 북방에 거주하던 수렵 채취인들이 극심한 추위를 피해 대거 내려왔고, 그 뒤 중기 청동기 저온기에 산둥·랴오둥 등에서 온 농경민 집단이, 철기 저온기에 랴오시·랴오둥에서 온 점토대토기 문화 집단, 중세 저온기 북방에서 내려온 고조선과 부여의 유민이 섞여 현대 한국인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미래 한국인들은 고대 조상들처럼 다시 ‘기후난민’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기후위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일상을 위협한 폭염이 예고하듯 지금 우리 이야기다.

 

09-12 가계부채의 역습

이철호 논설고문


윤석열 정부의 임기 반환점을 돌면서 집값과 가계부채를 향한 사회적 시선이 싸늘해졌다. 윤 대통령은 문재인 정부와 비교하며 “가계부채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90%대 초반에서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하지만 GDP 산출 기준연도가 2015년에서 2020년으로 바뀌면서 분모가 커졌을 뿐인데도 마치 정책 효과처럼 내세웠다가 역풍을 맞았다. 서울 집값도 급등했다.

무엇보다 코로나 사태 이후 전 세계가 금리를 올려 부채를 감축하는 동안 한국만 가계부채가 늘어났다는 게 문제다. 부동산 경착륙을 막는다며 저금리 정책대출을 2년간 100조 원 넘게 풀고, 서민들을 위한답시고 대출금리를 찍어 누른 결과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수출이 크게 늘고 있지만, 내수 부진이 문제”라며 ‘고금리’를 원흉으로 지목했다. 대통령실도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동결을 “아쉽다”며 압박했다. 하지만 가계빚 자체가 너무 많다는 본질은 외면한다.

눈길을 끄는 것은, 11일 나온 국제결제은행(BIS)의 정례 보고서다. BIS는 부채와 성장이 초기에는 정비례 관계지만 어느 순간 꼭짓점을 찍은 다음부터 반비례로 돌아서 ‘역U자형’ 곡선을 그린다고 분석했다. 그 변곡점에 이른 대표적 나라로 한국과 중국을 지목했다. BIS는 “가계부채와 기업부채를 합쳐 GDP의 100%를 넘을 때부터 성장률이 꺾인다”고 경고했는데, 한국은 그 비율이 이미 222%까지 치솟아 위험수위다. 가계부채가 GDP의 100.5%, 기업부채는 122.3%나 된다.

경제부총리·금융위원장·금융감독원장은 뒤늦게 “가계부채 증가 속도가 너무 빠르다”며 태세를 전환했다. 하지만 9월 들어 전방위 대출 제한에도 가계대출 열풍은 꺾이지 않고 있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내리고 정부가 ‘국군의 날’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해도 빚 상환 부담 때문에 내수를 살리기 쉽지 않다는 평가가 많다. 한은은 가계빚이 GDP 대비 80% 이하가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금리 인하로 주택담보대출이 1% 늘면 집값이 0.7% 상승한다. 로마 전성기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정책을 결정할 때 ‘천천히 서둘러라’를 원칙으로 삼았다. 언제 ‘부채의 역습’이 시작돼도 이상할 게 없는 위험수위다. 가계부채는 고통스럽더라도 꾸준히, 집요하게 줄이는 수밖에 없다.

 

09-13(금) 민주당의 ‘계엄 유령’

 

김세동 논설위원


계엄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공공의 안녕질서 유지를 위해 대통령이 선포할 수 있다(헌법 77조 1항). 따라서 민주당이 주장하는 것처럼 대통령 마음대로 계엄령을 발동할 수 없고 전쟁 등 엄격한 요건이 갖춰진 상황에서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선포할 수 있다. 국회 재적 의원 과반수가 계엄 해제를 요구한 때는 대통령은 지체 없이 해제하여야 한다(헌법 77조 5항, 계엄법 11조).

사정이 이런데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까지 지낸 4성 장군 출신 김병주 최고위원이 불을 지폈고 김민석 최고위원이 기름을 부은 계엄 선동은 이재명 대표가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의 회담에서 언급하면서 민주당의 당론처럼 돼 버렸다. 이 대표는 “최근 계엄 얘기가 자꾸 이야기된다”고 했는데, 민주당 지도부 외에 누가 그런 얘기를 뒤에서 말고 공개적으로 하나. 또 “국회가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의원들을 계엄 선포와 동시에 체포·구금하겠다는 계획을 꾸몄다는 얘기도 있다”며 “완벽한 독재국가 아닌가”라고 했다. 별다른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그런 얘기가 있다’는 식으로 없는 유령을 만들고 국민더러 두려워하라고 겁박하는 격으로, 너무 황당하고 저급하고 한심하다.

계엄법 13조에 ‘계엄 시행 중 국회의원은 현행범인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아니한다’고 규정돼 있다고 지적해도 막무가내다. 범야권 의석이 192석이니 계엄 해제 요구를 막으려면 야당의원 42명 이상을 체포·구금해야 하는데, 이게 진짜 가능하다고 믿는 지력인가.

너무 많은 사법 리스크를 안고 있는 이 대표로선 재판을 최대한 늦추는 동시에 대통령 탄핵으로 조기 대선을 치르는 게 최선이다. 계엄은 윤석열 대통령이 자신의 탄핵을 막으려 선포한다는 주장인데, 대통령 탄핵소추에는 국회 재적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해 개혁신당까지 모든 야당의원이 찬성해도 국민의힘에서 8석 이상 이탈해야 하는 만큼 불가능에 가깝다. 설혹 국회를 통과해도 헌법재판관 6명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불가능한 대통령 탄핵을 전제로, 더 불가능한 계엄을 우려한다는 민주당은 이재명 유죄 판결 공포에 정신 줄을 놨거나, 정국 불안 조성을 위해 거짓 선동에 나선 것이다.

 

09-19(목) 中 배터리 업체의 충격 고백

문희수 논설위원


얼마 전 세계 전기차 배터리 1위인 중국 CATL 회장의 충격 증언이 화제다. 지난해 중국에서 발생한 전기차·수소차 등 신에너지 차량의 화재 발생률이 1만 대당 0.96대나 된다는 것이다. 중국 내 전기차가 2500만 대에 달하니, 지난해 약 2400건의 화재가 발생했던 셈이다. 지난 1일 ‘2024 세계 배터리 콘퍼런스’ 기조연설을 통한 공개 발언이어서 더욱 무게가 실린다. 그는 중국 전기차의 안전 문제도 고백했다. 많은 배터리가 고장률을 100만분의 1 수준이라고 하지만, 실제론 1000분의 1(0.1%)이라며 고(高)위험을 지적했다.

세계 각지에서 전기차 화재가 빈발하면서, 특히 중국 배터리의 안전성이 의문시되는 터여서 크게 주목된다. 전기차 포비아(공포)가 기우만은 아니라는 방증도 된다. 물론 그의 발언은 자신의 회사인 CATL 배터리는 안전하다는 것을 부각하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다른 중국 업체엔 엄청난 충격을 몰고 올 게 분명하다. 올 상반기 글로벌 배터리 시장 점유율 상위 10위권을 보면 한국 배터리 3사와 일본 파나소닉을 뺀 나머지 6곳이 모두 중국 업체다. 중국을 뺀 세계시장 점유율에서도 마찬가지다. 자국 배터리를 장착한 중국 전기차에도 걸림돌이 될 소지가 크다. 높은 안전성과 품질을 인정받는 K-배터리·전기차엔 반사이익이 기대된다.

조짐이 보인다. 벤츠 화재가 발생한 지난달부터 국내 전기차 판매실적은 현대차그룹과 해외 업체 간 명암이 엇갈렸다. 현대차는 7월보다 29.1%, 기아는 12.7% 각각 증가한 반면, 중국 배터리를 부분적으로 쓰는 해외 업체들은 대체로 부진해 전기차 판매 비중이 7월 20.9%에서 8월 18.5%로 줄었다. 현대차의 캐스퍼, 기아의 EV3 등 신차 효과가 컸다.

물론 캐즘(일시적 수요 침체) 상황인 만큼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마침 현대차-GM 동맹이 체결됐다. 미국·유럽 등에서 선전이 지속된다면 좋은 신호가 될 것이다. 앞으로 국내외에서 옥석 가리기가 확산할 게 분명하다. 미국에 이어 유럽이 관세 인상 등으로 중국 전기차 견제에 나선 것도 우호적인 변화다. 폭스바겐의 충격적인 몰락도 힘을 더할 전망이다. 기회는 준비하는 자에게 찾아온다는 교훈을 거듭 확인할 시간을 맞고 있다.

 

09-20(금) 낸시 펠로시 ‘권력의 기술’

 

이미숙 논설위원

 

미국 하원의장을 지낸 낸시 펠로시(84) 하원의원은 “가정주부에서 하원의원, 그리고 하원의장이 됐다”는 말을 자주한다고 한다. 가정주부·하원의원·하원의장이 모두 ‘하우스(house)’로 시작한다는 데서 착안한 농담인 동시에 다섯 아이를 키운 전업주부 출신 하원의장이라는 독특한 정치 인생을 압축한 표현이다. 미 주간지 뉴요커는 펠로시를 ‘의회 역사상 설득력이 가장 뛰어난 정치인’으로 꼽았다. 1950년대 상원의원 시절 ‘상원의 대가(master of Senate)’로 통했던 린든 존슨 대통령에 비견된다는 평가다. 펠로시가 2023년 1월 하원의장에서 물러날 때 월스트리트저널은 사설에서 ‘공화당은 반대만 하지 말고 펠로시의 효과적 권력 행사법을 배워야 한다’고 썼다.

펠로시는 지난 8월 펴낸 자서전 ‘권력의 기술(Art of Power)’에서 자신의 정치 비결을 털어놨다. 그는 자서전 출간 후 언론 인터뷰에서 “하원의원 생활 30여 년간 정보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당면 위기를 헤쳐나가는 방법과 리더십을 익혔다”고 했다. 그는 “정치 해법을 찾는 과정에서 중요한 두 요소는 정치권 내부의 치열한 이견 조율 노력과 유권자들의 장외 압박”이라고 했다. 펠로시는 정치 원칙과 관련해 “유권자를 존중하고, 의견을 주의 깊게 듣는 데서 내 정치는 시작됐다”면서 ‘정치의 3 No 원칙’을 소개했다. 첫째 시간을 낭비하지 말 것, 둘째 어떤 정치 자원도 과소평가하지 말 것, 셋째 선거 패배 후 후회하지 말 것 등이다. 세 원칙을 견지하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정치적 역동성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펠로시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대선 후보 사퇴를 이끈 주역이기도 하다. 지난 6월 말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TV토론에서 바이든이 완패하자 후보 사퇴론을 띄운 뒤 여론을 움직여 관철시켰다. 바이든이 버티면 트럼프의 백악관 재입성 길을 열게 되고 민주당은 상·하원을 모두 잃게 될 수 있다는 설득이 주효했다. 이 과정에서 펠로시는 바이든의 입장을 존중하며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상대를 존중하고 의견을 경청하는 펠로시의 정치적 설득술 덕분에 ‘대선 후보 축출 쿠데타’가 성공한 셈이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아마도 1등 공신은 펠로시가 될 것이다.

 

09-23(월) ‘이재명 대 조국’ 1차전

오승훈 논설위원


10·16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호남에서 야권 내전(內戰)이 불붙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 간의 맞대결이다. 혁신당이 전남 곡성·영광군수 재선거를 호남 교두보 확보, 당세 확장의 계기로 설정해 사활을 걸면서다. 지난 총선 때 ‘지민비조’(지역구는 민주당, 비례는 조국혁신당)는 벌써 옛말이 됐다. 정부·여당을 향해선 연합전선을 펼치는 두 사람이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하다.

조 대표는 19일 영광군에서 열린 현장 최고위원회의에서 “조직 세는 못하지만, 여기가 나비효과의 출발점이다. 당선되는 순간 호남 전체에 태풍이 불 것”이라고 호언했다. 황운하 원내대표는 “호남에서는 민주당 ‘1당 독점’이다” “독점이 좋은가, 경쟁이 좋은가”라고 했다. ‘비명횡사’한 비명(비이재명)계의 목소리가 혁신당에서 나온다. 조 대표는 월세방을 구해 숙식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추석 연휴가 낀 5박 6일간 1500㎞를 돌았다고 한다. 혁신당은 총선 때 곡성·영광에서 각각 39.88%, 39.46%의 비례득표율을 기록했다. 호남 전체로는 혁신당(45.6%)이 민주당(38.1%)을 앞섰다.

민주당은 ‘어∼’하는 분위기다. 박지원·정청래 의원 등이 뒤늦게 현지 한 달살이에 들어갔단다. 이 대표도 직접 선거 지원에 나서기로 했다. 전략은 다르다. 민주당은 이번 재·보선을 차기 대선과 연계해 ‘진보 분열론’을 펴고 있다. 박 의원은 대놓고 “호남에서 경쟁하면 진보의 분화가 시작된다. 민주당 후보가 당선돼야 이 대표가 대통령 된다”고 했다.

반면, 조 대표는 대선 출마와 관련해 “이 대표에 비해 경륜과 능력이 많이 모자란다”고 몸을 낮추면서, “제가 지난 대선에서 심상정 정의당 후보였다면 완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 대표가 패배한 원인 중 하나로 꼽히는 심 후보의 완주를 상기시킨 것이다. ‘진보 분열’ 시각을 차단해야 호남 교두보 확보가 가능하다는 판단일 것이다. 내년 재·보궐선거, 2026년 지방선거 등에서도 맞대결이 불가피하다. 조 대표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아 대법원 판결을 남겨놓고 있다. 이 대표는 공직선거법 위반 1심에서 징역 2년을 구형받았다. 호남 정서를 놓고 경쟁하는 두 사람의 정치 행로가 모두 재판 결과에 달려 있다는 게 역설적이다.

 

09-24 헌재 10월 마비 음모론

 

김세동 논설위원

 

다음 달 17일 임기가 끝나는 이종석 헌법재판소장과 이영진·김기영 헌법재판관의 후임이 아직 추천되지 않아 ‘10월 헌재 마비설’이 현실화할 우려가 커지고 있다. 헌법(제111조)에 따라 9인의 헌법재판관은 대통령 임명, 대법원장 지명, 국회 선출 각 3인으로 구성되는데, 위 세 재판관이 모두 국회 추천 몫이다. 여야는 이들의 임기 만료를 23일 남겨둔 24일까지 후임 추천에 관해 아무런 의견 접근을 보지 못하고 있다. 국회 인사청문회와 표결 등을 생각하면 제때 선출되기 쉽지 않아 보인다.

헌재 출범 이후 현재까지 굳어진 국회 몫 선출 관례는 여당 1명, 제1야당 1명, 여야 합의 1명이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이 압도적인 의석수를 내세워 2명을 추천해야 한다고 태도를 바꿨기 때문이다. 지난 총선 때 민주당은 171석, 국민의힘은 108석을 얻었다. 헌재가 시작된 1988년에는 여당인 민정당과 평화민주당·통일민주당이 1명씩 추천해 선출했고 1994년엔 민자당 2명, 민주당 1명 추천으로 됐다가 2000년에 한나라당 1명, 열린우리당 1명, 여야 합의 1명 추천 이후 이 관행을 유지해 왔다.

그러다 2016년 총선에서 여당인 새누리당 122석 대 민주당 123석으로 초박빙 승부를 펼쳤고, 안철수의 국민의당이 38석으로 제3당을 구성하자 2018년 6기 헌재 때부터 여당과 제1·2야당이 재판관 1명씩 나눠 추천해오고 있다. 당시 야당이던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 이종석·이영진, 민주당이 김기영 재판관을 추천했는데, 민주당이 이번엔 야당 몫 2명을 다 가져가겠다고 고집한다. 여당이 양보하지 않으면 헌재의 기능 중단 사태가 실제로 벌어지고, 오래갈 수 있다. 헌법이나 헌법재판소법, 국회법에 국회 추천 재판관 3인의 선출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헌재는 재판관 9인 중 7인 이상이 참석해야 심리를 열 수 있다. 따라서 국회 몫 3명을 임명하지 못하면 10월 18일부터는 헌재가 기능 불능 상태에 빠진다. 이 경우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탄핵 심판 절차가 진행되지 못해 직무정지 상태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다. 민주당이 강백신·박상용·김영철·엄희준 검사의 탄핵소추를 감행하면 이들의 직무정지도 부지하세월로 늘어질 수 있다. 민주당이 국회 관행을 따를 이유가 없어 보인다.

 

09-25 ‘쇼군’과 1인치 장벽

 

최현미 논설위원

 

“자막의 장벽, 1인치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2020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기생충’으로 외국어영화상을 거머쥔 봉준호 감독의 인상적인 소감이다. 자막을 싫어하는 미국 관객과 할리우드의 ‘영어 중심주의’를 향한 예리한 비판에 전 세계 영화팬은 열광했다. 하지만 봉 감독도 자신의 말이 인용·재인용되며 새로운 문화를, 그것도 이렇게 빨리 몰고 올지 몰랐을 것이다.

지난 15일 디즈니 계열 FX 채널의 미드 ‘쇼군’이 에미상의 작품상·감독상 등 18개 부문을 휩쓸었다. 제임스 클라벨 소설을 원작으로 17세기 일본의 정치 암투를 담은 작품은 제작자, 감독, 스태프 다수는 미국인이지만 출연진 대부분은 일본인으로 대사의 70% 이상이 일본어이다. 같은 작품이 1980년 NBC 드라마로 제작됐을 당시엔 많은 일본 배우가 모두 영어를 썼으니 세상이 참 많이 달라졌다.

달라진 세상이 놀랍지만 새롭진 않다. 거슬러 가면 ‘1인치 장벽’이라는 이름을 붙여 현상을 분명하게 각인시킨 봉 감독이 있다. 뉴욕타임스도 ‘쇼군’의 에미상 소식을 전하며 봉 감독의 소감을 다시 인용했다. 이어 ‘오징어 게임’은 비(非)영어 대사에 대한 인식을 결정적으로 바꿨다. 니혼게이자이신문도 ‘쇼군’ 흥행 이유로 ‘한국 드라마 약진이 만든 토양’을 꼽았다.

이제 미국인이 자막을 싫어한다는 것도 옛말이다. ‘오징어 게임’ 이후 아시아 콘텐츠가 약진했고 어느새 비영어권 사람들이 영화·드라마에서 영어를 쓰면 오히려 문화 제국주의로 불편해졌다. 특정 언어가 전하는 뉘앙스는 진정성 요소가 됐다. 기술적으로도 유튜브 등 온라인 환경에서 자막이 자연스러워졌다. 한 조사에 따르면 미국 넷플릭스 시청자의 50% 이상이 자막을 이용하고 미국 Z세대의 90% 이상은 콘텐츠에 자막을 넣는다.

인공지능의 동시 통번역으로 언어의 차이가 사라지는 시대에 문화 콘텐츠에서 개별 언어의 가치가 더 빛나게 살아난다니 흥미롭다. 이 의미 있는 트렌드를 연 ‘오징어 게임’의 시즌 2가 올해 말 공개된다. 최근 나온 예고편에서 프론트맨(이병헌)은 당연히 한국어로 말한다. “게임 준비가 완료됐다.” 1인치 장벽을 가볍게 넘은 우리 콘텐츠가 또 다른 장벽도 뛰어넘을 준비가 됐기를 기대해본다.

 

09-26 빅 컷과 삼(Sahm)의 법칙

 

이철호 논설고문

 

지난 18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시장 예상과 달리 기준금리를 0.5%포인트(p) 내리는 빅컷을 단행했다. 인플레이션 둔화와 ‘R(경기침체)의 공포’ 때문이라는 분석이 대세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삼의 법칙(Sahm Rule)’에 대한 위기감이 깔려 있다. 클라우디아 삼 박사의 이 이론은, 미 실업률의 최근 3개월 평균치가 지난 1년 최저치보다 0.5%p 이상 높으면 경기가 침체한다는 것이다. 1950년 이후 11번의 미 경기 침체 중 1959년을 제외하고 10번이나 들어맞은 법칙이다.

미 8월 소비자물가 상승률 2.5%만 보면 금리는 0.25%p 내려도 충분했다. 공포감을 키운 것은 3년 만에 발동된 삼의 법칙 때문이다. 미 8월 실업률은 4.3%로 역사적으로 낮은 수준이다. 조 바이든 행정부 들어 이민자 유입도 확대했다. 문제는 삼의 법칙에 따른 실업률 격차(최근 3개월 평균치-지난 1년 최저치)가 0.53%p로 치솟아, 기준치인 0.5%p를 넘어선 것이다. 노동 전문가들은 “코로나 사태로 과열됐던 노동 시장이 정상화되는 과정”이라 평가절하했지만, 미 Fed의 빅컷을 막지 못했다. 삼 박사도 “미 경제의 약세 위험이 존재하며, 가장 우려되는 수치는 실업률”이라고 지원 사격에 나섰다.

미 Fed가 물가와의 전쟁을 끝내고 실업과의 전쟁에 돌입했지만, 주요국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호주·영국·일본 중앙은행은 불안한 소비자 물가를 지목하며 기준금리를 동결했다. 중국 런민은행은 내수 부양을 위해 전격적으로 은행 지급준비율을 대폭 인하했다.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부동산 침체 등에 따라 각자도생에 나선 것이다. 한국은행은 얼어붙은 내수 부양을 위해 기준금리 인하가 시급하지만, 가계부채와 집값이 걸림돌이다. 한국투자증권·신영증권 등은 한은이 시장의 기대와는 달리 10월은 건너뛰고 11월에야 금리를 내릴 것으로 전망했다. 윤석열 정부 들어 부동산 경착륙을 막는다며 대출 금리를 누르고 디딤돌·버팀목·신생아 특례 등 온갖 정책대출을 방만하게 살포한 후유증을 치르는 것이다. 느닷없이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2단계 시행을 두 달 연기한 것이 결정적 자충수였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고 한다. 어떤 행위나 정책에도 반드시 기회비용이 발생한다는 게 경제의 기본 원리다.

 

09-27(금) 독대 정치의 명암

 

이현종 논설위원

 

장관이나 대통령 참모들이 대통령과 독대(獨對)를 한 경험은 매우 드물다. 여러 명이 함께 볼 수는 있지만, 대통령과 단둘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권력과 가깝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박근혜 정부 시절 당시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이 기초연금 문제로 대통령 독대를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퇴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물론 당시 청와대는 이를 부인했다. 박 정부의 청와대의 어느 수석도 1년여 재임 중 대통령과 독대하지 못했다고 한다.

독대는 배석자 없이 대통령과 단둘이 만나는 것을 말하는데,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에는 정보기관 수장들이 대통령과 독대를 많이 했다. 중앙정보부장(국가안전기획부장)은 정례적으로 대통령을 만나 정치인들의 사생활까지 보고했다고 한다. 이러니 정보기관장에게 권력이 집중됐다. 대통령에게 어떤 보고를 하느냐에 따라 정치인이나 장관들의 생사가 좌우됐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도 이런 문제 때문에 원칙적으로 임금과 신하의 독대는 금지됐다. 당파 싸움이 치열하던 때 누군가 임금을 독대하면 상대 당파에 의해 모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례적으로 1659년 기해년 3월 효종이 우암 송시열과 북벌 문제를 논의한 ‘기해 독대’가 유명하다.

김대중 정부 때 초대 비서실장을 한 김중권은 노태우 정부에서 정무수석으로 일했던 경험을 살려 독대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독대 매뉴얼을 만들었다. 국가정보원장이 보고할 땐 외교안보수석이, 감사원장이 보고할 땐 민정수석, 당 대표는 정무수석이 배석하도록 했다. 권력 주변에서 호가호위하는 걸 막겠다는 취지에서다. 노무현 대통령은 독대를 금지했고, 이명박 대통령은 국정원장 등으로부터 독대 보고를 자주 받았다. 반면, 박근혜 대통령은 비서실장조차 자주 만나지 않을 정도로 폐쇄적이었다.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는 박 대통령과 독대만 했어도 탄핵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구중궁궐 같은 청와대를 벗어나 소통을 강화하겠다면서 용산으로 대통령실을 옮겼다. 그러나 갈수록 불통 이미지만 쌓인다. 한동훈 대표가 요청한 독대도 형식과 절차를 들어 거절했다. 여당 대표도 만나지 않으면 누굴 만날까. 편한 사람만 만나선 안 된다.

 

09-30(월) 희귀한 ‘3패 무승부’ 바둑

문희수 논설위원


바둑 규칙은 많지만, 덤 제도는 특히 유별나다. 무승부(빅)를 막기 위해 흑과 백의 집을 계산할 때, 흑 집에서 통상 6.5점, 많게는 7.5점을 공제해 백에 그만큼 덤을 준다. 가상의 ‘반집’을 도입한 것도 승패를 가리기 위해서다. 덤은 4집으로 출발했지만, 그래도 먼저 두는 흑이 유리해 7.5집까지 확대됐다. 커진 덤에 이젠 백 쪽을 선호하는 기사도 많다.

그래도 간혹 무승부가 나온다. 양패·3패·4패·5패와 장생 등이 발생하면 흑·백 한쪽이 계속 두지 않은 이상 무승부가 된다. 이는 바둑에서 ‘동형 반복’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패는 한쪽이 돌을 따내면 상대방은 그곳에 바로 두지 못하고, 다른 곳(팻감)에 둔 뒤에야 패를 따낼 수 있게 규정돼 있다. 양패는 승부에 영향이 없을 땐 대국이 계속 진행되기도 한다. 그러나 3패 이상은 통상 흑·백 모두 많은 돌(대마)이 엉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서로 돌아가며 패를 따내는 일이 무한 반복되므로 대부분 무승부로 처리한다. 또, 장생은 흑과 백이 서로 두 점씩 따내는 모양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바둑을 더 둘 수 없어 빅이 된다.

지난 11일 희귀한 ‘3패 빅’이 나와 화제다. ‘살아있는 전설’ 이창호 9단과 현 세계 최강인 ‘신공지능’ 신진서 9단이 맞붙은 제47기 SG배 명인전 8강 대국에서 207수 만에 좌상귀에서 3패가 발생해 무승부로 처리됐다. 빅은, 이 9단(49)은 처음이고, 신 9단(24)은 두 번째라고 한다. 무승부 직후 재대국에선 신 9단이 아무래도 체력 부담이 컸던 이 9단에게 불계승을 거둬 통산 3승 1무 1패로 앞서게 됐다. 신 9단은 이 9단을 ‘굉장히 존경하는 사범님’으로 공경하고, 이 9단도 신 9단을 “세계 대회에서 워낙 잘해 주고 있어 뿌듯하게 지켜본다”고 격려한다. 신 9단은 신기록 제조기이지만, 세계 바둑 우승 횟수에선 그에게도 이 9단은 넘사벽이다. 통산 21회(메이저대회 17회)로, 신 9단을 더블 스코어로 앞선다.

한국 바둑은 중국의 높은 벽을 넘는 데 갈수록 어려움을 겪는다. 과거 이 9단은 중국엔 공한증의 대상이었고, 지금은 신 9단이 중국 기사들을 압도하며 외로이 막강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다. 신 9단은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테지만, 그의 뒤를 받칠 어린 천재 기사들이 계속 나와 한국 바둑이 더 탄탄해지길 기대한다.

# 오후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