萬物相(조선일보) 2024-08/
08.01(목)사라지는 DJ 동교동 사저

▲일러스트=이철원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속주인 달마티아의 작은 마을에서 해방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이 들어 은퇴한 그는 고향에 7m 높이 성벽으로 둘러싼 요새 같은 사저(私邸)를 지었다. 후임 황제가 “로마로 돌아와 도와달라”고 했지만 “양배추를 심고 돌봐야 한다”며 거절했다. 그가 죽고 300년 후 야만족 침공 때 주민들이 사저로 피신해 목숨을 구했다. 이후 주변에 건물이 잇따라 들어섰고 크로아티아 제2의 도시 스플리트가 됐다.
▶미국 독립선언문을 쓴 제퍼슨 대통령은 버지니아 시골 마을에 손수 집을 지어 58년간 살았다. 회랑과 연못 등 로마 건축 양식을 딴 아름다운 사저엔 당시로선 혁신적이었던 자동 여닫이문과 날짜·요일 시계 등 최신 장치가 가득했다. ‘몬티첼로’라 불리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먼로 대통령은 퇴임 후 생활이 곤궁해 사저를 팔았지만 독지가가 구입해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미 대통령 사저 대부분이 대통령이 쓰던 물건과 책 등을 복원해 전시하는 기념관이 돼 있다.
▶한국 대통령의 사저는 현대사의 굴곡에 시달리며 끊임없는 정치적 논란을 낳았다. 서울 종로 이화장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야 후 한 달밖에 살지 못하고 하와이로 망명하면서 빈집이 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당동 사저도 10·26 이후 사실상 방치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연희동 사저는 추징금 미납으로 압류당했고 가재도구까지 경매에 넘어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상도동 사저를 기부했지만, ‘김영삼 도서관’ 건립 과정의 부채 때문에 압류 위기까지 갔다.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논현동·삼성동 사저도 공매에 넘어가 기업인이 인수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동교동 사저는 김영삼의 상도동 사저와 함께 민주화의 상징이었다. 부인 이희호 여사는 “사저는 기념관으로, 노벨평화상 상금은 기념 사업에 쓰라”고 유언했다. 하지만 3남 김홍걸 전 의원은 사저를 개인 소유화했다. 형인 김홍업 전 의원과 소유권 분쟁이 벌어지자 뒤늦게 유언을 따르겠다고 했다.
▶그는 이달 초 동교동 사저를 100억원에 매각했다. “거액의 상속세 때문으로 어디까지나 사적인 일”이라고 했다. 매입자가 사저 일부에 DJ 유품을 전시하기로 했다고 했다. 유언을 어기고 유품 관리까지 남에게 맡긴 것이다. 그는 과거 거액의 코인 거래가 드러나자 “상속세를 충당하려고 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사저 접견실 등 집안 곳곳엔 DJ와 한국 정치사의 흔적과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런 소중한 역사까지 모두 없어질 판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08.02 중독시키기 위한 뇌과학 연구

▲일러스트=이철원
10여년 전과 비교할 때 눈에 띄게 움직임이 많아진 신체 부위가 있다. 엄지손가락이다. 아침 기상 직후부터 잠들기 직전 늦은 밤까지 엄지는 쉴 새 없이 일을 한다. 스마트폰 화면을 위아래, 좌우로 밀어대느라 바쁜 것이다. 지난해 영국 연구진 조사에 따르면, 한 달 동안 스마트폰 화면을 움직이는 스크롤 이동을 거리로 환산해보니 1인당 평균 396m에 달했다. 에펠탑(330m)보다 높다.
▶페이스북을 비롯한 소셜미디어 앱은 ‘바닥’이 없다. 아래로 내려도 내려도 계속 게시물(피드)이 이어지는 ‘무한 스크롤’로 설계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뇌과학자들은 카지노에 시계와 창문이 없는 것과 같은 이유라고 지적한다. 도박에만 몰두하게 설계된 카지노처럼 소셜미디어 앱도 사용자가 빠져나올 수 없는 덫을 곳곳에 숨겨놓았다는 것이다.
▶행동심리학자 스키너가 수행한 실험 중에 굶주린 쥐를 상자 안에 넣은 뒤 매번 동일한 보상을 줄 때와, 무작위로 줄 때를 비교한 것이 유명하다. 누를 때마다 동일한 먹을거리가 나왔을 때보다, 아예 안 나오거나 많이 나오는 등 매번 결과가 달랐을 때가 쥐를 훨씬 더 흥분시켰다. 쾌락과 관련된 신경전달물질 ‘도파민’이 무작위 보상 때 더 왕성하게 분비되기 때문이다. 카지노에선 고객이 결과를 기대하며 슬롯머신 레버를 당길 때 가장 설렌다고 한다. ‘가변적(무작위) 보상’은 도박의 강력한 중독성을 설명하는 데 쓰인다.
▶이를 적용해 소셜미디어 회사들이 내놓은 기능이 ‘새로 고침(refresh)’이다. 슬롯머신 레버를 당길 때처럼 스마트폰 버튼을 누르거나 스크롤하는 단 한 번의 동작에 의해 새로운 게시물로 화면이 확 바뀌는 것이 더 큰 기대와 만족감을 준다는 얘기다. 이용자 글에 달리는 ‘좋아요’ 알림이 늦게 뜨도록 일부러 지연시키는 것도, 상대방이 답장을 입력하는 중이라고 보여주는 기능도 결국은 앱에 더 머물게 하려는 전략이다. 소설미디어 회사들이 뇌 인지 과학자들을 채용해 끊임없이 기능을 업데이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뇌를 중독시킬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비벡 머시 미국 의무총감이 본지 인터뷰에서 “소셜미디어 회사들이 이용자 중독을 강화하려고 뇌과학까지 동원한다”고 말했다. 페이스북의 전직 고위 임원도 7년 전 스탠퍼드대 강연에서 도파민이 계속 나오도록 설계한 소셜미디어가 사회를 파괴하고 있다고 털어놓으며 “엄청난 죄책감을 느낀다”고 했다. 사용자들을 중독시키려 혈안이 된 소셜미디어들이 ‘마약상과 다름없다’는 소리를 듣는 이유다.
곽수근 논설위원·테크부 차장
08.03(토) 남성 염색체 가진 여자 선수

▲일러스트=이철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성전환자다. 길에서 짝짓기 하는 뱀 암컷을 막대로 쳤다가 뱀의 저주를 받아 여자가 됐다. 7년을 여자로 산 뒤 이번에는 수컷 뱀을 때려서 다시 남자가 됐다.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난 헤르마프로디토스는 한 몸에 남녀 생식기를 모두 지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애매했다. 오늘날 의학에선 이를 간성(間性·intersex)이라고 한다.
▶성전환이나 간성 같은 성적 정체성이 종교나 성 윤리 논란만 빚는 것은 아니다. 신체 능력으로 겨루는 스포츠에서도 골치 아픈 문제로 떠올랐다. 재작년 미국에선 남자 수영 선수가 여자 대회에 나가 우승했다. 193㎝ 거구와 긴 팔로 여자 선수들을 압도했다. 여성 호르몬을 맞은 뒤 여자라고 주장했지만 생식기 제거 수술을 받지 않은 사실이 드러나며 이후 엘리트들이 겨루는 미국 내 대회와 국제 대회 출전이 금지됐다.
▶현역 시절 여자 육상 800m 최강자였던 남아공의 캐스터 세메냐는 2009년 세계선수권에서 처음 우승한 뒤 얼굴에 난 수염과 근육질 몸매 때문에 ‘신체검사’를 받았다. 외부 생식기는 여자인데 자궁과 난소가 없었고 정소에서 남성호르몬이 쏟아져 나왔다. 염색체 검사도 여자(XX)가 아닌 남자(XY)였다. 세메냐의 성별을 두고 스포츠계는 반으로 갈라졌다. 올림픽을 주관하는 IOC는 세메냐를 여자로 인정한다. 반면 세계육상연맹은 남성 호르몬 수치가 기준치를 넘는다며 여성 대회 출전을 금지했다.
▶파리 올림픽 여자 복싱에 출전한 알제리와 대만 선수가 남성 염색체를 지녔다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일고 있다. 알제리 선수와 겨룬 이탈리아 여자 선수가 “너무 아프다”며 46초 만에 기권하자 이탈리아에선 “남자가 여자를 때렸다”며 분노하고 있다. 국제복싱협회(IBA)도 지난해 두 선수가 XY 염색체를 지녔다며 실격 처리한 바 있다. 반면 IOC는 염색체가 아니라 정부 발행 여권이 성별 판단 기준이라며 “IBA 조사도 자의적이어서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알제리 선수는 성전환자는 아니고 XY염색체 소유자인지도 불분명하다. 그런데도 논란이 인 이유 중엔 그동안 성전환을 했거나 간성인 선수치고 남자 대회에 나가는 경우를 볼 수 없었다는 것도 있다. 남자에서 여자로 성전환 한 선수 상당수는 남자의 신체 능력을 잃지 않는데도 애매한 성 정체성을 이용해 싸우기 쉬운 여자 대회에 나간다는 비판도 있었다. 공정한 대결은 스포츠의 핵심이다. 성 소수자 부문을 따로 만드는 게 떳떳한 길일 것이다.
08.05(월) 전기차 화재 공포

▲일러스트=이철원
소음도 때로는 필요한 경우가 있다. 전기차가 그렇다. 전기차는 무소음이 큰 장점 중 하나지만 보행자가 기척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무소음 공포’가 일자 유럽과 미국은 각각 2019년, 2020년부터 이를 규제 대상에 올렸다. 유럽은 전기차가 시속 20㎞ 미만으로 달릴 때, 미국은 시속 30㎞ 미만일 때 경고음을 내는 장치를 달게 했다. 차 안에 가상 엔진 소리를 내는 스피커를 붙여 인공 소음을 내는 방식이다. 우리도 2020년에 이를 도입했다.
▶올 초 미국에선 전기차 ‘방전 공포’가 일었다. 체감온도 영하 50도 안팎의 북극 한파가 몰아친 시카고 등에서 전기차가 대거 방전된 것이다. 충전소마다 긴 대기 줄이 늘어서고 설상가상 충전기마저 얼어버려 전기차들이 꼼짝 못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내연기관 차도 한파 상황에선 배터리 방전이 잦아지는데 전기차는 배터리 닳는 속도가 훨씬 빠르고, 배터리 양극과 음극의 화학반응까지 느려져 충전도 어려워진다고 한다.
▶전기차의 더 큰 공포는 화재다. 진화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전기차 배터리에서 나는 불은 일반적 방법으론 끄기 힘들어 이동식 수조에 차량을 통째로 담그는 방식을 주로 쓴다. 진압에 통상 2~3시간, 많게는 8시간까지 걸린 경우도 있다. 지하 주차장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최악이다. 이동식 수조를 쓰기 어렵고, 주차장 입구 높이가 낮아 소방차가 아예 진입하지 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작년 대구의 한 지하 주차장에서 발생한 전기차 화재도 소방차가 진입하지 못해 대형 화재로 이어질 뻔했다. 결국 소방대원들이 들어가 불을 껐다.
▶국내 지하 주차장 전기차 화재는 2018년 0건에서 지난해 10건으로 늘었다. 그러자 아파트 단지마다 갈등 요소가 되고 있다. 아예 ‘지하 주차장 전기차 출입 금지’ 플래카드를 붙이고 어기면 앞 유리에 경고장을 붙이는 곳도 나왔다. 주민들은 불안하지만 전기차 소유주로서도 불쾌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잠재적 방화범이냐”고 토로한다. 갈등이 이어져 아예 입주민 투표를 한 곳도 있었다.
▶지난 1일 인천의 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발생한 전기차 화재로 차량 140여 대가 불에 타고, 주민들이 대피했다. 보통 전기차 화재는 충전 중 많이 발생하는데 이 차량은 사흘간 세워둔 상태에서 불이 났다고 한다. 원인부터 미스터리여서 불안감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사고 직후 경기도 한 아파트에선 ‘지상에만 전기차 주차’ 건을 놓고 주민 회의가 열렸는데 멱살잡이가 벌어져 결론도 못 냈다고 한다. 이런 문제일수록 역지사지해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08.06 라이벌들의 동지애

▲일러스트=이철원
2016년 US여자오픈에서 박세리가 미국 무대 고별전을 치렀다.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호주 카리 웹에게 안겨 울었다. 전성기를 함께했던 라이벌이자 친구 사이였다. 박세리의 연장전 6승 중 3승은 웹을 상대로 거둔 승리였다. 그래도 웹은 “네가 정말 보고 싶을 것”이라고 했다. 진심임을 아는 박세리는 진한 눈물을 쏟았다.
▶한일 스피드스케이팅 스타 이상화와 고다이라 나오는 여자 500m 종목에서 경쟁했다. 2018년 평창 올림픽에서 3연패를 노리던 이상화가 2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뒤 눈물 흘리자, 우승자 고다이라가 다가가 끌어안으며 위로했다. 4년 뒤 베이징 올림픽에서 고다이라가 17위에 머물자 이상화는 중계방송 해설을 하다가 울먹였다. “고다이라가 심리적 압박이 정말 컸던 것 같다. 그동안 내가 보지 못했던 모습을 봐서 힘들었다”고 했다.
▶세계 정상급 스포츠 선수들은 오랜 기간 라이벌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박세리와 웹은 아마추어 시절부터 보면서 자랐고, 이상화와 고다이라는 고등학생 때 한일 스포츠 친선 교류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짧으면 수년, 길면 10년 이상 경쟁한다. 그런데 같은 목표를 품고 훈련하다 보니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고 깊이 교감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경기에선 이겨야 할 대상이지만, 서로 고민과 아픔을 가장 잘 아는 사이이기도 하다.
▶남자 골프 세계 랭킹 1위 스코티 셰플러와 김주형은 미국 같은 동네에 살고 같은 교회에 다니며 생일까지 같은 여섯 살 차이 절친이다. 최근 PGA 투어 대회 2라운드를 마치고 함께 생일 파티를 했는데, 이틀 뒤엔 둘이 연장 승부를 벌여 셰플러가 김주형을 꺾는 일도 벌어졌다. 4일 파리 올림픽에서도 최종일 같은 조로 출발해 셰플러는 금메달, 김주형은 8위로 마쳤다. 경기 후 김주형은 “셰플러가 평소 제 고민을 많이 들어주다 보니 제 생각을 잘 알고 고생했다고 해주는 말이 고마웠다”며 눈물을 보였다.
▶같은 날 남자 양궁 개인전 결승에선 김우진과 미국 브레이디 엘리슨이 ‘4.9㎜ 차이’ 명승부를 펼쳤다. 한국인 코치에게 훈련받은 엘리슨은 한국 선수들에게 오랜 세월 경계 대상이었다. 하지만 엘리슨은 이날 패배 후 김우진을 끌어안고 팔을 번쩍 들어올리며 축하했다. 엘리슨은 “오늘 내가 꿈꿔온 승부를 펼쳤다”고 했고, 김우진도 “축구에 메시와 호날두가 있다면, 양궁에는 엘리슨과 내가 있는 게 아닐까”라며 주먹 인사를 나눴다. 서로에 대한 존중을 넘어 진한 동지애가 느껴졌다.
08.07 선진국서 본 도서관들이 우리 동네에

▲일러스트=김성규
미국이나 유럽 특파원을 마치고 돌아온 선배들에게 인상 깊게 들은 얘기 중 하나가 도서관 체험담이었다. 동네에서 가장 쾌적하고 좋은 공공 시설이 도서관이라고 하는데 믿기지 않았다. 열람실에 앉아 시험 공부만 했던 게 도서관 경험의 전부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연수차 선진국에 가보고서 비로소 실감했다. 건물 디자인부터 달랐다. 우리 공공 도서관처럼 네모진 곳은 하나도 없었다. 동네 주민이 가장 많이 찾는 마을 쇼핑 센터나 체육관·수영장과 붙어 있는 것도 신기했다.
▶그곳에서 대출 카드를 만들고 무슨 책이 있나 살펴보다 책 대출은 도서관 업무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도서관은 마을 동아리 활동의 중심지였다. 독서 동아리는 그러려니 했는데 영어 회화반도 있었다. 사서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우리 동네에 정착한 이민자를 도울 목적”이라고 했다. “이런 게 선진국 도서관이구나” 싶었다. 도서관은 비즈니스 워크숍, 공연, 집회 장소 등으로도 쓰였다.
▶외국 얘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우리도 그런 도서관을 가진 나라가 돼가고 있다. 어디를 가든 냉난방 잘되는 쾌적한 공간에서 직접 책을 골라 읽을 수 있다. 다양한 프로그램도 갖췄다. 강원도 인제에 지난해 문을 연 ‘기적의 도서관’은 주변 군부대 장병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연다. 의정부 음악 도서관에선 음악을 들을 뿐 아니라 직접 연주도 할 수 있다. 대구의 국채보상운동기념도서관은 독서 교실에서 책 읽는 습관을 키워준다. 건물 설계가 아름답거나 주변 경관이 수려해 연간 수십만 명이 찾는 도서관도 여럿이다.
▶디지털 도서관의 편리함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휴대전화로 공공 도서관 앱을 내려받으면 도서관에 가지 않고도 장서 목록은 물론이고 이미 대출됐는지 여부와 대기 순번까지 알 수 있어 무작정 책 빌리러 갔다가 허탕 칠 염려가 없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서울도서관 장서 상당수는 디지털 파일로 저장돼 모바일로 접속해 열람할 수도 있다.
▶지난해 전국 공공 도서관 이용자가 2억200만명을 기록했다. 재작년 1억7500만명에서 1년 새 15% 넘게 늘었다. 공공 도서관은 2019년 1134곳에서 2023년 1271곳으로 늘었고 도서관 한 곳당 방문자 수도 지난해 15만9000여 명으로 전년 대비 11.9% 증가했다. 도서관이 제공하는 프로그램 참가자도 연 2700만명을 넘어서며 친숙한 생활 공간이 됐다. 우리 사회가 눈부신 발전을 이룬 분야가 한두 곳이 아니다. 도서관도 분명 그중 하나일 것이다.
08.08 西進하는 '백색 가전' 패권

▲일러스트=이철원
과거 프로레슬링 TV 중계가 있을 때, 동네 사람들은 텔레비전 있는 집에 모여들었다. 그때 스위치를 켜고 30초 이상 기다려야 화면이 뜨던 미국산 제니스 진공관 TV를 보았다. 당시엔 이 TV가 있는 집은 부잣집이었다. 이 TV는 시간이 흐르며 금성사 흑백 TV, 삼성전자 컬러 TV로 바뀌었다. 한국 가전 산업의 발전과 맥을 같이한다. 그런데 몇 년 전 독립한 아들 자취방에 가니 TV, 무선 청소기, 선풍기, 제습기가 모두 중국산이었다. 아들은 “가격, 품질 모두 만족”이라고 했다.
▶백색 가전이란 말은 영어 ‘White Goods’에서 유래했다. 백색 가전 산업의 초대 제왕은 미국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장고, 세탁기 등 백색 가전이 미국 가정에 하나둘 보급됐는데, 제너럴일렉트릭(GE)에서 만든 가전제품이 대부분 흰색이었다. 청결을 강조하기에 적합한 색이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중산층은 GE·제니스의 TV, 월풀의 냉장고·세탁기에 열광했다.
▶1980년대 이후 백색 가전의 패권은 일본으로 넘어갔다. 소니 TV, 도시바 냉장고가 원가 경쟁력에서 미국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부터는 한국이 백색 가전의 새 강자로 부상했다. 럭키금성(LG의 옛 이름)과 삼성전자 간 피 튀기는 경쟁 덕에 가격·품질 경쟁력을 키운 덕분이었다. TV에선 삼성이, 나머지 백색 가전에선 LG전자가 세계 1위로 올라섰다. 특히 LG는 2019년 월풀을 제치고 세계 1위 백색 가전 기업이 됐다.
▶근래엔 중국이 백색 가전 패권을 노리고 있다. 중국 1위 하이얼은 미국 GE, 일본 산요, 이탈리아 캔디 등 유명 가전 기업을 인수해 세계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성과도 놀랍다. 중국 백색 가전이 일본에선 세탁기, 냉장고 시장의 20% 이상을, 한국에선 고급 로봇 청소기 시장을 80% 이상 장악했다. 중국 로봇 청소기의 독보적 경쟁력은 인공지능(AI), 3D 센서, 라이다 등 차별화된 자율 주행 기술과 가격 경쟁력 덕이다.
▶LG전자가 최첨단 로봇 청소기 개발 및 생산을 중국 기업에 위탁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기술 격차’가 낳은 제휴라는 점에서 뒷맛이 씁쓸하다. 최첨단 중국 로봇 청소기는 백색 가전의 미래를 보여준다. 스마트폰으로 원격조종해 외출 시에도 청소, 세탁, 냉난방 등 모든 가사를 자유자재로 하게 될 것이다. 중국은 AI, 빅데이터 분야에서 세계 최고 기술 선진국 중 하나다. 백색 가전 패권이 미국, 일본, 한국에서 이제 중국으로 서진(西進)하는 흐름을 막을 수 있을까.
08.09 북·일 합작 범죄

▲지난 2019년 12월16일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에 보도된 '재일동포 귀국실현 60주년 기념보고회'. 이날 행사는 1959년 재일교포 975명이 일본 니가타항을 출발해 청진항으로 향하면서 시작된 북송 사업이 60주년을 찬양하기 위해 열렸다./노동신문 뉴스1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17세 재일 교포 소녀는 1960년 4월, 니가타에서 청진으로 향하는 북송선에 홀로 올랐다. “북한은 지상낙원, 공짜로 공부할 수 있다”는 조총련 교사들의 말에 북송을 결심했다. 아버지 만류는 귀에 안 들어왔다. 일본에서 차별 속에 사느니 ‘평등하고 발전한’ 북한에서 당당하게 살고 싶었다.

▲일러스트=이철원
▶청진에 도착한 소녀는 수천 명의 환영 인파에 가슴이 떨렸다. 배가 항구로 접근하자 1년 먼저 북한에 온 선배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그는 부두에서 일본말로 “일본으로 돌아가라”고 절규하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배가 항구에 닿고 환영 인파의 모습이 자세히 보이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행색은 거지 떼였다. 북한 실상을 알게 된 소녀는 두 달 만에 자살하려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1년 뒤 북한에서 합류하기로 한 가족들을 말려야 했다. 먼저 자살한 사람이 가마니에 싸여 버려지는 것을 보고 죽음은 접었다. 북한은 자살한 재일 교포를 반역자로 몰았다. 그녀는 2003년 탈북했다. 지옥 같은 시절이 몸서리쳐져 북한 이름을 지우고 가와사키 에이코라는 일본 이름으로 살고 있다.

▲1971년 5월 재일교포를 태우고 북한으로 갈 선박이 일본 니가타항에 정박해 있는 모습. 북·일 양측은 1959년부터 1984년까지 9만3000여명의 재일교포를 북송했다./조선일보 DB
▶일제 패망 이후 일본 좌파들은 북한을 ‘이상 사회’로 칭송했다. 일본 언론들은 재일 교포 북송에 대해 호의적 기사들을 쏟아냈다. 요미우리, 아사히신문의 당시 1면 제목은 “귀환선, 희망을 싣고 니가타에서 청진으로 출발”이었다. 도쿄대 운동권이었던 오가와 하루히사 현 도쿄대 명예교수도 당시 사회주의를 위해 북송을 택했던 조선인들에게 감동받았다고 한다. 그는 북송의 참상을 알게 된 이후 지금까지 북한 인권 운동을 하며 속죄하고 있다.
▶1959년부터 1984년까지 9만3340명이 북송선에 올랐다. 이 반인륜 범죄의 공범은 북한과 일본이다. 북한은 김일성 체제를 선전하고 부족한 노동력을 위해 북송 사업이 필요했다. 재일 조선인들을 멸시하고 차별했던 일본 정부와 사회에 조선인 북송은 바라던 바였다. 북한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국교가 없던 북한과 일본을 대신해 양측 적십자사가 협정을 체결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인도주의로 포장됐다.
▶과거사위원회가 재일 교포 북송 사건을 북한과 조총련에 의한 인권유린으로 공식 규정했다. 과거사위는 “1차 책임은 북한과 조총련에 있다. 당시 일본 정부와 일본 적십자사는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사업을 지속시켜 인권침해를 용인했다”고 했다. 김씨 왕조의 죄악에 입을 다물고 있는 한국 운동권은 과거사위의 이번 발표에 대해 뭐라 할지 궁금하다.
08.10(토) 하버드 출신의 금메달

▲일러스트=양진경
공부하는 운동선수가 흔한 미국에서도 개브리엘 토머스는 특별한 사례다. 명문 하버드대 출신으로 파리 올림픽 여자 육상 200m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육상 단거리는 스포츠 세계에서도 경쟁이 격심한 분야다. 하버드 전공도 학사는 신경생물학·국제보건학이고, 석사는 공중보건학(텍사스대)이다.
▶하버드대 2학년 때 수업 외에 인턴십, 클럽 활동까지 할 일이 쌓여가자 육상을 그만둘 생각도 했다고 한다. 공부가 늘 우선이고, 육상은 그다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엄청난 스케줄을 소화해 냈다. 늘 잠이 부족했다. 대학원을 고를 때도 학문적 수준이 높으면서 가까운 곳에 육상 훈련 팀이 있는 곳을 택했다. 최근까지도 건강 클리닉에서 고혈압 환자 건강 관리 등 주 10시간 일하면서 올림픽을 준비했다.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 감사하다. 건강 클리닉에서 일할 땐 육상 훈련이 기대되고, 훈련에서 돌아오면 다시 완전히 다른 일에 집중하며 성취감을 느낄 수 있어 좋다”고 했다.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어머니 제니퍼 랜들 교수였다. 어머니는 넉넉지 않은 형편에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대학교수가 되는 꿈을 이뤘다. 그는 “엄마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보면서 자랐다”며 “노력하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것을 엄마가 보여줬다”고 말한다. 엄마는 늘 바쁜 딸에게 “그다음엔 뭘 할 거니? 흑인 여성들을 위해 뭘 할 거니?”라고 물었다. 도쿄 올림픽에서 은메달과 동메달을 따고 전화했을 땐 엄마는 “멋지다. (그런데) 수업은 언제 시작하니?”라고 물었다고 한다.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에서 남자 피겨 금메달을 따낸 미국의 네이선 첸은 통계학·데이터과학 전공으로 2018년 예일대에 입학했다. 오전 수업을 듣고, 교내 링크장에서 90분간 피겨 훈련을 한 뒤, 인근 지역 링크장으로 이동해 90분 더 훈련하고, 저녁에 학교로 돌아와 토론에 참여하고 숙제하는 생활을 했다. 그러다 국제 대회가 있으면 출전하고 돌아와 중간고사를 치렀다. 올림픽을 본격 준비하는 동안에는 휴학을 했지만, 복학 후 공부할 교과서를 미리 읽었다. 그는 힘든 대학 생활이 인생을 바꿨다고 말한다.
▶토머스는 대학 생활을 통해 세계관이 확장되는 경험을 했고, 스포츠에선 자신감과 회복력을 얻었다고 한다. 그것이 다른 일에도 적용됐다고 한다. 모든 노력을 쏟아부은 결과 공부와 스포츠가 최고의 시너지 효과를 낸 것이다. 한국에서 이런 ‘진짜로 공부하는 운동선수’가 나오지 못할 이유가 없다. 머지않아 나올 것이다.
08.12(월) 들개 공포

▲일러스트=양진경
제주도 한라산 자락은 대표적인 들개 서식지로 꼽힌다. 2021년 조사해 보니 약 2000마리가 해발 200~600m의 한라산 자락에서 살았다. 상당수는 뭍에서 놀러 간 이들이 버린 유기견이다. 들개는 닭·오리뿐만 아니라 송아지·망아지처럼 큰 동물도 잡아먹는다. 어느 해엔 가축 약 850마리가 물려 죽었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사냥 행위 자체를 즐기는 잔혹한 습성도 있다. 몇 해 전 수도권의 한 양계장에 들이닥친 들개 떼는 먹지도 않을 닭 1000여 마리를 물어 죽이고 사라졌다.
▶사람도 들개의 공격 대상이다. 엊그제 부산에서 반려견과 산책하던 60대 남자가 들개 두 마리의 공격을 받았다. 팔다리를 문 채로 머리를 마구 흔드는데 “내가 오늘 죽는구나” 하는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연초에는 20대 청년이 얼굴을 물려 50바늘이나 꿰매는 화를 당했다. 떼 지어 다닐 때는 더욱 대담해진다. 두 달 전 대구에선 들개 10여 마리가 아파트 단지에 쳐들어가 차를 포위하고 공격한 일도 있다.
▶들개가 사회 문제로 떠오른 것은 반려동물 키우는 게 유행처럼 번진 시기와 대략 일치한다. 전국 반려동물 등록 현황을 보면 2018년 130만마리에서 2022년 278만마리로 폭증했다. 등록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800만마리를 넘는다. 이 가운데 해마다 11만~13만마리가 버려지거나 분실되는데 개가 70% 이상이다. 들개가 되는 것은 그중에서도 몸무게 10㎏ 이상인 중형견이다. 단독 주택에 살다가 아파트로 이사 가면서 마당에서 기르던 개를 유기하기도 한다.
▶들개 피해가 잦아지면서 지자체마다 포획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서울시도 대표적인 들개 출몰 지역인 관악산과 북한산에서 해마다 봄이 되면 들개 포획 작전을 펼친다. 그러나 유기견 10마리 중 잡히는 것은 한두 마리에 불과하다. 들개는 지능이 높아 포획 틀에 미끼를 넣어도 잘 속지 않는다. 마취총에 맞아도 약 기운이 퍼지기 전에 산속으로 도망간다.
▶물러 터진 동물보호법이 문제로 지적된다. 이 법은 들개라 해도 일단 동물 보호소에서 새 주인을 찾는 절차를 거친 뒤 주인이 나타나지 않을 때만 안락사시킬 수 있다. 한 지자체는 들개를 사냥하려 했다가 동물 보호 단체의 항의를 받고 철회했다. 반면 미국에선 개가 사람을 물려고만 해도 경찰이 발포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는 유기견 발생 자체를 막아야 한다. 개를 당국에 등록하지 않으면 아예 키우지 못하게 해서 주인이 개를 버리지 못하게 하는 독일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08.13 마르크스 경제학의 퇴장

▲일러스트=이철원
얼마 전 이사 가면서 서가를 정리했다. 전공 서적 틈에 먼지가 소복한 마르크스 경제학 책과 노트가 있었다. 곳곳에 친구들과 스터디하고 강의 들으며 적어 놓은 메모와 밑줄이 보였다. 하지만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 구닥다리 책을 지금도 읽느냐”고 가족이 물었다. 결국 37년 만에 책과 노트를 모두 버렸다.
▶'정치경제학’이라고도 불린 마르크스 경제학은 수요와 공급이 가격을 결정한다는 주류 경제학과 달리 노동이 모든 가치를 결정한다고 믿었다. 자본가가 노동이 만든 잉여가치를 착취하고 이에 따라 잉여 이윤율이 떨어져 불황이 거듭되면서 자본주의가 붕괴한다고 했다. 카를 마르크스의 책은 군사 정권 시절 금서(禁書)였다. 불심검문 때 이 책이 나오면 잡혀갔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대학생의 필독서가 됐다. 운동권은 이를 신봉했다. 일반 학생들도 소명감을 갖고 ‘자본론’과 해설서를 읽었다. 난해한 개념과 문장, 방대한 분량 때문에 소화하기 어려웠다. 이름과 내용은 대충 알지만 제대로 읽은 사람은 드문 ‘고전’이었다.
▶대학에선 정식 강좌 개설 요구가 빗발쳤다. 대자보가 붙고 서명 운동도 벌어졌다. 1989년 서울대에서 김수행 교수의 강의가 처음 시작됐다. 학생이 구름처럼 몰렸다. 인문·사회대는 물론이고 공대생도 적지 않았다. 300명 규모의 강의실은 매번 만원이었다. 비좁은 계단과 강의실 뒤까지 학생들이 빼곡히 들어찼다.
▶하지만 1990년대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이 붕괴되면서 마르크스 경제학은 된서리를 맞았다. 운동권식 이념 투쟁의 퇴조, 취업 중심의 실용주의 바람도 컸다. 2000년대 중반엔 수강생이 수십명 대로 줄었다. 서울대는 2008년 김 교수 정년 퇴임 후 후임을 뽑지 않았다. 일부 대학에선 마르크스 경제학을 가르친다고 국정원에 신고가 들어갔다. 김수행·정운영 등 간판 교수들이 잇따라 세상을 뜨면서 명맥이 점차 끊어졌다.
▶서울대는 올 2학기부터 마르크스 경제학을 폐강하기로 했다. 수강생이 급감해 일부 강의는 4명뿐이었다고 한다. 강의 개설 35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동료 엥겔스는 자본론을 펴내면서 “자본가들 머리에 투하된 거대 폭탄”이라며 “자본주의 타도”를 외쳤다. 하지만 실제 무너진 건 공산주의였고 그 기본 이론마저 대학에서 사라지게 됐다. 학문의 다양성이란 측면에선 아쉬운 일이다. 200년 전 교조적 이론에 사로잡혀 급변하는 시대 변화에 따라가지 못한 결과다.
08.14 연평해전 영웅의 아내

▲일러스트=양진경
스물여덟 살 김한나씨는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으로 남편 한상국 중사를 잃었다. 결혼한 지 6개월 만이었다. 그 후 겪은 일은 더 기가 막혔다. “남편 좀 바다에서 빨리 꺼내 달라”고 하소연했다가 “당신 남편 구하려고 함정을 대거 투입했다가 북한을 자극해 전쟁 나면 책임질 거냐”는 말을 들었다. 남편의 1주기 때 주한 미군 사령관의 위로 편지를 받았다. 우리 정부는 편지 한 통 안 보냈다. “이러면 누가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치겠느냐”며 미국 이민을 떠났다.
▶파출부와 식당일로 3년을 버텼는데 향수병이 생겼다. “남편이 목숨 바쳐 지키고자 한 나라인데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매사추세츠 우스터의 6·25 기념탑을 방문했다가 미국인들이 연평해전 전사자 추모 벽돌까지 전시한 것을 보고 감동한 것도 귀국을 결심한 계기였다.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제복 입은 사람들’을 존중하는 나라로 만들고 싶었다.
▶돌아온 그녀는 연평해전 영웅을 기리는 일에 팔 걷고 나섰다. 추모 로고를 새긴 티셔츠와 버튼을 만들어 배포했고 연평해전 전사자와 유족에게 가해진 부당한 처우를 질타하는 수기 ‘영웅은 없었다’도 썼다. ‘서해교전’ 명칭을 ‘연평해전’으로 바꾸고 남편이 최후를 맞은 참수리 357호 모형의 전쟁기념관 전시와 연평해전 부상자의 유공자 대우, 남편의 상사 추서 진급을 모두 이뤄냈다. 연평해전 전사자를 순직이 아닌 전사로 대우하는 특별법 제정도 요구해 관철했다. 그 사이 병마로 쓰러졌다가 수술도 받았다.
▶김한나씨가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는 뉴스가 어제 조선일보에 실렸다. 남편 계급이 상사로 바뀐 뒤에도 국방부 연금은 중사 계급에 준해 지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관련법 개정을 촉구하는 피켓을 들었다. 지난해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1인 시위를 했고 올 3월부턴 국회로 장소를 옮겼다. 21대 국회에서 발의됐던 것인데 이번 국회 들어서도 여야 정쟁에 뒷전으로 밀렸다고 질타했다.
▶법이 바뀌어도 김씨는 소급 적용이 안 돼 혜택을 받지 못한다. 그래도 불볕더위 속에 땀 흘리며 서 있는 것은 “제복 입은 영웅들을 위한 일이어서”라고 했다. 김씨의 수기에 그녀가 왜 이 일을 하는지 밝힌 대목이 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제 남편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남편이 한 일’을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남편 잃은 아픔을 보훈 운동으로 승화한 삶에 고개가 숙여진다. 그녀가 서 있는 시간이 길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08.15 "다시 한번 서울올림픽"

▲일러스트=김성규
파리올림픽 폐막식에 할리우드 배우 톰 크루즈가 깜짝 등장했다. 2028 LA올림픽을 예고한 장면이었다. 올해 개최지 파리(1900·1924·2024년)와 차기 개최지 LA(1932·1984·2028년)는 런던(1908·1948·2012년)과 더불어 올림픽을 세 번 유치한 도시다. 세계 유력 도시들이 올림픽을 다시 유치하는 이유는 저비용 올림픽을 치를 자신이 있거나 도시 재생 등의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다.
▶2024 파리올림픽과 2028 LA올림픽은 7년 전에 동시 결정됐다. 프랑스 파리 말고도 독일 함부르크, 헝가리 부다페스트, 미국 보스턴과 LA가 2024 올림픽 유치에 관심을 보였는데 시민 반대, 재정난 등으로 포기했다. 파리와 LA만 남게 되자 IOC가 2024년, 2028년에 개최하라고 순번을 정해줬다. 그간 올림픽 유치 도시들은 막대한 비용을 들여 경기장 짓느라 ‘올림픽의 저주’에 시달렸다. 파리올림픽은 2000년 이후 처음으로 100억달러 미만만 들인 저비용 올림픽이다. LA는 새 경기장을 짓지 않고 파리보다 더 ‘짠돌이 올림픽’을 치르겠다고 한다.
▶60여 년 만에 올림픽을 재유치한 런던은 낙후된 동부 지역 재개발이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실업률 높고, 소득 낮은 이민자들이 밀집한 지역이었다. 올림픽공원이 들어선 2.5㎢는 빈 공장과 창고, 오염된 수로로 이루어진 폐허였다. 오염된 흙을 파서 사상 최대의 토양 정화 작업을 벌였다. 건설 공사에 고용한 인력 1만2000여 명 중 4분의 1이 지역 주민이었는데 그중 상당수가 실업자였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서울은 더 잘해낼 수 있겠다”며 2036 서울올림픽 유치 의사를 밝혔다. ‘다시 한번 서울올림픽’의 시도가 처음은 아니다. 전임 문재인 정부가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의 북한팀 참가를 계기로 2032년 올림픽 남·북한 공동 유치를 추진했다. IOC에 유치 의향서까지 제출했지만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유치 신청서는 못 냈다.
▶‘88서울올림픽’의 성공은 우리를 한 단계 도약시킨 역사적 자산이다. 냉전이 와해되는 세계사적 전환기에 160국 1만3000여 명 선수단이 참여한 ‘동서 화합의 제전’이기도 했다. 2036년 올림픽에는 인도, 인도네시아 같은 아시아 국가를 비롯해 두 자릿수 후보지가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유치 경쟁에 앞서 올림픽 재도전으로 이루고자 하는 비전과 목표부터 분명하게 제시해야 ‘다시 한번 서울올림픽’의 명분과 추진력도 생길 것이다.
08.16 '자식 자랑' 스티커

▲일러스트=이철원
소설가 한수산은 70년대 한국 문단의 아이콘이었다. 데뷔는 신춘문예 당선작 ‘4월의 끝’이었는데, 작품 속 대학생 주인공이 국민학교 6학년 여자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쉬는 시간에 라디오 광고가 들린다. “두통 치통 생리통에 사리돈 한 알”. 그러자 아이가 묻는다. “선생님, 생리통은 뭔지 모르겠어요.” 주인공은 얼결에 “언니한테 물어봐” 해버렸다. 아이가 아래층에 내려간 잠시 뒤 “뭐 저 따위 가정교사가 다 있어” 하는 비명이 들린다.
▶이 작품이 발표되던 해가 1972년이다. 소설은 이어진다. ‘결국 나는 후임 여학생의 가슴에서 OX를 겹쳐 놓은 것 같은 국립 서울대학교의 배지가 빛나는 것을 보면서 하야해야만 했다.’ 작가는 대학 상징 엠블럼을 통렬하게 꼬집는다. ‘나는 그 집을 빠져 나오며 저 학생은 아마도 가슴의 배지처럼 모든 문제에 선명하게 O나 X를 그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요즘 작가라면 망설일 대목이 없지 않겠지만 당시 독자들에겐 유쾌했다.
▶라틴어로 ‘진리는 나의 빛’이라고 쓰인 서울대 배지는 OX를 겹쳐 놓은 듯 보인다. 공부의 정답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세상살이의 정답에는 벽창호일 것 같은 인상 때문에 자주 희롱의 대상이 됐다. 이런 사연은 대학마다 다 있을 것이다. 대학마다 배지와 로고는 오랜 세월을 견디면서 상징으로 굳어져 널리 퍼졌고, 근년 들어 다양한 디자인의 스티커로 제작돼 홍보용으로 보급되거나 굿즈로 팔리기도 한다.
▶어제 신문에 ‘서울대 자식 자랑 스티커’ 기사가 실렸다. 기부금을 모은 곳에서 발급하는 이 차량 스티커는 영어로 돼 있는데, ‘(서울대) 자랑 가족’ ‘(서울대) 자랑 부모’ ‘난 (서울대) 엄마야’ ‘난 (서울대) 아빠야’ 같은 문구가 쓰여 있다. 기사 반응이 다양하다. “웬 선민의식이냐” “좀 과한 것 아니냐”도 있고, “불법도 아닌데 왜 난리냐” “자기만족 좀 하자는데 뭐가 문제냐”도 있다. 그러나 대학 로고는 저작권을 비롯한 여러 측면에서 조금 더 복잡한 사정을 안고 있다.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들도 상징 로고를 새긴 스티커나 굿즈가 엄청 유통된다. 수익 또한 만만찮다. 이젠 ‘하버드’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었다고 해서 그 학교 학생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연세대 ‘독수리’ 문양을 새겼든, 고려대 ‘호랑이’가 입 벌리고 있든, ‘OX’ 배지 위에 ‘내가 엄마야’라고 썼든, 몇 천 원에서 몇 만 원쯤 하는 굿즈의 가격이 아니라, 중한 것은 기부금이다. 대학 재정이 고갈되고 있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리는지 따질 겨를이 없다.
/김광일 논설위원
08.17(토) 미세 플라스틱 공포

▲일러스트=박상훈
당구공 판매로 부를 쌓은 당구 선수 마이클 펠란이 1863년 ‘코끼리 상아를 대체할 수 있는 소재를 발명하는 사람에게 상금 1만달러를 주겠다’는 광고를 내걸었다. 당시 상아 한 쌍으로 만들 수 있는 당구공이 8개에 불과한 데다, 코끼리 수가 줄어드는 상황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수많은 이가 신소재 개발에 뛰어들었고, 인쇄 기술자 존 웨슬리 하이엇이 질산섬유소에 장뇌를 혼합한 셀룰로이드를 내놓았다. 최초의 플라스틱이 이렇게 나왔다.
▶지난해 지구과학계의 화두는 새로운 지질시대로 ‘인류의 시대(인류세)’를 규정할지였다. 46억살 지구의 가장 최근 지질시대를 ‘홀로세(世)’라고 부르는데, 이를 잇는 인류의 시대를 인정하자는 요구였다. 이때 새 시대를 특징짓는 대표 지표 중 하나로 꼽은 게 ‘미세 플라스틱’이었다. 이전 시대에 없던 물질이라는 것이다.
▶미세 플라스틱은 1마이크로미터(100만분의 1미터)~5㎜ 정도의 플라스틱 조각을 말한다. 나노미터(10억분의 1미터) 수준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치약이나 각질 제거 화장품에 쓰려고 의도적으로 미세 플라스틱을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폐플라스틱이나 비닐이 마모·분해되거나 합성섬유 세탁 과정에서 떨어져 나와 잘게 부서진 것들이다. 이렇게 대기와 바다로 흘러든 미세 플라스틱을 동식물이 흡수하고, 이를 인간이 섭취한다.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
▶지구촌에서 매년 플라스틱이 4억t 이상 생산되고, 미세 플라스틱은 20만t 안팎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4년 전 미국 유타주립대 연구진은 빗물과 대기 성분을 분석해 미국 영토의 약 6% 면적에 매년 생수병 3억개에 달하는 미세 플라스틱이 내려앉는다고 했다. 매주 인체에 유입되는 미세 플라스틱이 신용카드 한 장 무게에 해당하는 5g에 이른다는 연구도 있다.
▶최근 서울시가 도심 대기 1㎥에 미세 플라스틱이 평균 70개 있다는 검출 결과를 발표했다. 여기에 더해 플라스틱병에 담긴 생수를 얼렸다 녹이면 더 많은 양의 미세 플라스틱이 나온다는 해외 연구 결과가 알려졌다. 숨만 쉬어도 미세 플라스틱을 들이마시고, 무더위에 얼린 생수도 마음 놓고 마실 수 없다는 불안이 확산하고 있다. 하지만 생수병에 든 미세 플라스틱에 대해 WHO(세계보건기구)는 현재 검출된 수치는 건강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하진 않는다는 입장이다. 150마이크로미터 이상의 미세 플라스틱은 소화기관을 따라 몸 밖으로 배출된다고 한다. 미세 플라스틱 노출을 피하려는 노력은 필요하지만, 지나친 공포감도 바람직하지 않은 이유다.
곽수근 논설위원·테크부 차장
08.19(월) '사상 감별'이라는 야만

▲일러스트=양진경
중세 마녀 감별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지목된 여인을 돌덩이에 매달아 호수에 던졌다. 가라앉으면 무죄, 떠오르면 마녀였다. 마녀면 화형이다. 뜨겁게 달군 쇠판 위를 걷게 해서 쓰러지면 무죄, 견뎌내면 마녀였다. 한번 지목되면 어차피 죽었다.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이라는 15세기 책에 나와 있다. ‘마녀를 심판하는 망치’라는 뜻인데 지침서 역할을 했다. 일본 에도 시대에 기독교를 탄압하면서 신자를 색출하는 방법도 기가 막혔다. 십자가 상이 새겨진 금속판 위를 밟고 지나가게 했다. 밟으면 집으로 갔고, 거부하면 망나니에게 붙들려 갔다.
▶중국 문화혁명 때 베이징의 어떤 여교사는 학생들에게 “지진이 나면 최대한 빨리 대피하라”고 했다. 학생들이 “모택동 초상화를 들고 나갈까요?” 물었다. 교사는 얼른 대답을 못하고 “최대한 빨리 피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이 50세 여교사는 반모택동주의자로 몰려 홍위병 여학생들에게 맞아 죽었다. 캄보디아 ‘킬링필드’ 때는 손에 굳은 살이 없거나, 안경을 썼으면 학살 대상인 지식인이었다.
▶한국에서도 인간의 속생각까지 가려내는 ‘감별 DNA’가 정치판을 흔들곤 했다.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진박 감별사’ 파동이 벌어졌다. 박근혜 대통령의 마음, 즉 ‘진짜 박심’을 얻은 후보를 감별한다는 사람들이 여당 공천을 좌우했다. 특정 지역의 일부 후보들은 마치 암수 판정을 기다리는 병아리라도 된 신세였다. 이것이 탄핵으로 이어진 보수 몰락의 시발점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야당에 횡행하는 ‘수박’ 감별은 원래는 간첩 잡는 데 쓰던 말이었다. 겉으론 선량한 시민이지만 속으로 빨강 사상을 가졌다는 뜻이다. 근년에 야당 개딸들에 의해 완전히 의미가 뒤집힌 수박 감별은 비명계 색출용으로 쓰인다. 작년 가을 인터넷에 퍼졌던 ‘수박 감별기’가 섬뜩하다. 모두 6가지 기준으로 채점을 했다. 1) 검사탄핵 발의 2)불체포특권 포기 3)대의원 1인1표제 같은 쟁점에 어떤 입장인가를 물었다. 당도(糖度)를 0~5점으로 매겼는데, 5점이면 축출 대상이 됐다.
▶며칠 전 독립유공자의 자손들이 주축이 된 광복회에서 누군가의 속생각을 들여다본다는 감별법을 제시했다. 이른바 ‘뉴라이트 판별법 9가지’인데,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이라고 하는 자’ ‘1948년(8·15)을 건국절이라고 하는 자’를 우선 찍어냈다. ‘건국’ ‘건국절’을 입에 올리면 ‘친일 매국’이 된다는 식이다. 한 발자국 삐끗하면 사상 검증 종교 재판소가 될 판이다.
김광일 논설위원
08.20 로봇 과로사

▲일러스트=이철원
“삼가 고철의 명복을 빕니다.” 최근 경북 구미 시청의 ‘1호 로봇 주무관’이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파손되자 네티즌들 사이에 ‘로봇 과로사’라는 말이 번졌다. 구미시는 작년 8월에 행정 서비스 로봇을 도입해 공무원증도 붙여주고 임명식까지 했다. 우편물과 행정 서류 등을 배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도입 1년도 안 돼 계단에서 추락해 부서지니 “일이 너무 힘들었나 보다”라며 감정이입을 한 댓글이 많이 붙었다.
▶미국 시애틀에 있는 아마존 물류 창고에 ‘채용’돼 시험 운행 중인 2족 보행 로봇 ‘디지트’는 ‘과로사 로봇’으로 일약 세계적 유명세를 탔다. 지난해 3월 시카고에서 열린 물류 박람회에서 20시간 연속 작동하다 픽 쓰러지는 영상 때문이다. 충전만 하면 벌떡 일어나는 로봇인데도 ‘측은하다’는 동정론을 받았다. 로봇도 과로하면 쓰러지는데 사람은 얼마나 힘들겠냐며 많은 이가 감정을 투사했다.
▶2015년 미국 로봇업체 보스턴 다이내믹스가 4족 보행 로봇 ‘스폿’을 공개하면서 발로 강하게 밀치는 테스트 영상을 올렸다. 로봇 기술력을 자랑하는 영상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로봇 학대’ 논란이 일었다. 지난해 호주에서는 술 취한 여성이 로봇 개 ‘스탬피’를 걷어찬 영상에 공개됐다. 일부 네티즌이 ‘스탬피를 위한 정의’라는 해시태그를 붙이며 그 여성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국내에서도 야당 대표가 로봇 박람회에서 4족 보행 로봇을 뒤집었다가 로봇 학대 논란이 일어났다. 그는 “(나를) 난폭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반발했다.
▶로봇일 뿐인데도 일본에서는 반려견 로봇 ‘아이보’의 합동 장례식까지 열린다. 절에서 문상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지 스님이 불경까지 낭독한다. 아이보는 일본 소니가 1999년 출시해 2006년 생산 중단한 반려견 로봇이다. 15만대가량 팔렸는데 수리마저 중단되자 아이보 주인들이 낙담했다. 외로운 노인들에게 가족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소니 출신 엔지니어가 수리 회사를 차리고 전국에서 고장난 아이보를 기증받아 그 부품으로 다른 아이보를 수리한다. 더 이상 작동 안 하는 아이보를 해체하기 전에 2015년부터 장례식을 치러주기 시작했다. 로봇이 아니라 아이보에 의지해 외롭게 살아온 사람들을 위로하는 절차다.
▶요즘 주부들 사이에 “우리 집 이모님”으로 불리는 존재는 로봇 청소기, 식기세척기, 건조기다. 가사 도우미처럼 집안일을 척척 해주기 때문이다. 로봇도, 가전제품도 놀랍게 똑똑해지니 절로 의인화되는 것이다.
08.21 로마자 표기법\

▲일러스트=이철원
박찬호와 박세리는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 유명해졌지만 많은 미국인은 둘의 성(姓)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박찬호는 ‘Park’을, 박세리는 ‘Pak’을 쓰기 때문이다. 현행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은 또 달라서 원칙대로 쓰면 ‘Bak’이 된다. 김씨도 ‘Kim’과 ‘Gim’이 혼용되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이름도 그런 혼선을 빚었다. 대구시와 구미시가 박 전 대통령 이름의 로마자 표기를 두고 다툰다는 뉴스가 어제 조선일보에 실렸다. 대구시가 ‘동대구역 광장’ 이름을 ‘박정희 광장’으로 바꾸며 표지석에 ‘Park Jeong Hee’라 쓰자 박 전 대통령의 고향인 구미시가 그가 생전에 쓴 ‘Park Chung Hee’로 해야 한다고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이런 논란은 한국어 음운의 독특한 특성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한국인은 자음 ‘ㄱ’ ‘ㄷ’ ‘ㅂ’ ‘ㅈ’이 초성에 오면 무성음 ‘k’ ‘t’ ‘p’ ‘ch’로, 모음 뒤에 오면 유성음 ‘g’ ‘d’ ‘b’ ‘j’로 발음한다. 분명히 다른 발음인데 한국인의 귀는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과거 우리 어문 당국은 실제 발음을 중시해서 부산을 ‘Pusan’으로, 김포를 ‘Kimpo’로 썼다. 박 전 대통령 이름도 ‘Chung Hee’에 더 가깝다. 그런데 이 표기법이 우리의 언어 감각에 맞지 않는다는 반발이 계속되자 2000년 로마자 표기법을 개정해 무성음도 유성음처럼 쓰도록 했다. 그 후 Busan, Gimpo 등으로 쓴다. 새 표기법에 따르면 ‘Jeong Hee’가 맞는다.
▶로마자 표기법을 둘러싼 논란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서울 지하철 3호선 일원역의 로마자 표기는 ‘Irwon’이다. 발음대로 쓴다는 원칙에 따라 ‘이뤈’을 표현한 것이라지만 외국인 누가 그렇게 읽겠느냐는 지적이 많다. 거북선(Geobukseon)도 ‘지오북세온’으로 읽힐 수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외래어 표기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오렌지’를 영어 발음에 가깝게 ‘아륀지’라 써야 한다는 주장도 논란을 빚은 적이 있다.
▶한 나라의 말을 로마자로 어떻게 표현할지는 그 나라 언어 체계에 따라 정하기 나름이다. 중국은 대부분 나라가 ‘si’라 쓰는 ‘시’ 발음을 유독 ‘xi’ 로 적는다. 다만 로마자를 쓰는 대표 국가가 미국이니 영미권에서 발음하기 쉽게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표기 방식을 통일해 혼란을 막는 것이다. 전직 대통령 이름의 로마자 표기조차 통일하지 못해 다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08.22 韓日 여행객들의 '성지순례'

▲일러스트=이철원
일본 기후현 히다후루카와역은 하루 이용객 400명이 안 되는 시골역이다. 그런데 2017년 한국에서만 370만명이 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 이후 한국과 대만 여행객들이 찾기 시작했다. 영화에 나온 역사(驛舍), 식당,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영화 장면과 자신이 찍은 사진을 비교하는 ‘인증샷’도 남긴다. 한 식당에는 “순례(巡禮)의 감상을 노트에 남겨보라’라는 문구와 영화 포스터가 걸려 있다. 좋아하는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를 찾아다니는 문화를 마니아들은 ‘성지순례’라고 한다.
▶만화 ‘슬램덩크’ 팬에게 가나가와현 가마쿠라도 성지다. 가마쿠라 시대의 문화유산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언제부터인가 슬램덩크가 이곳 문화유산이 됐다. 북산고 농구 선수들이 타고 다니던 ‘에노덴’이라는 낡은 전차를 타보고 강백호와 서태웅이 달린 에노시마 해변을 거닐며 추억에 잠긴다. 만화에 나온 전차 건널목은 해외 관광객들의 과잉 ‘인증샷’ 때문에 안전 경고장까지 붙었다.
▶대통령을 포함해 중장년층을 ‘먹방’계로 이끈 일본 TV 프로그램 ‘고독한 미식가’의 식당들도 한국 관광객의 성지순례 장소다. 변두리 허름한 식당까지 한국 관광객들이 줄을 섰다. 주인공이 한국서 촬영한 부산과 전주의 낙곱새, 청국장 가게도 화제다. 이 정도는 아저씨들도 이해 가능한 분야다. 하지만, ‘러브라이브’ ‘최애의 아이’처럼 소녀 아이돌이 등장하는 만화에 이르면 순례가 어려워진다.
▶작년 남이섬에서는 일본인 60여 명이 참가한 ‘한국 여행’ 퀴즈 대회가 열렸다. 남이섬은 2003년 일본서 방영돼 신드롬을 일으킨 드라마 ‘겨울 연가’ 촬영지다. ‘한류 20주년’을 기념해 열린 이 퀴즈 대회에는 K팝, 음식, 드라마, 관광지 등의 20주제의 문제가 나왔다. 1위를 한 50대 일본 여성은 10년 전 한국을 처음 방문해, 이번이 39번째 방문이었다고 한다. 욘사마 팬으로 시작해 지금은 방탄소년단(BTS) 팬클럽인 아미가 됐다.
▶BTS와 뉴진스 한류로 일본인들의 한국 성지순례도 급증했다. 걸그룹 마니아였던 한국 대학생은 외국인 상대 ‘성지순례’ 여행사를 창업했다. BTS 투어에는 월드컵대교, 학동공원, 멤버들이 다녔다는 식당까지 포함됐다. 최근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 ‘눈물의 여왕’ 투어까지 있다. 수원 화성, 용산의 야구 연습장, 충북 괴산 새마을회관이 코스였다. 일본 참가자는 “가는 곳마다 흥분을 억누르기 어려웠다”는 댓글을 남겼다. 일본 산골부터 한국 새마을회관까지, 두 나라 여행객들의 성지순례는 확장 중이다.
08.23 전투식량

▲일러스트=김성규
전투식량의 발전사는 수분을 어떻게 빼느냐의 역사였다. 음식의 부패 때문이었다. 고대 로마 병사들은 유럽을 제패할 때 수분을 뺀 건빵을 들고 전투에 나섰다. 12세기 칭기즈칸의 몽골 기마병은 말린 고기 가루인 보르츠를 말 안장에 달고 싸움터로 갔다. 그러나 보르츠건 건빵이건 수분이 없는 탓에 맛은 거의 포기해야 했다. 오늘날 건빵에 별사탕이 들어 있는 것도 맛을 위해서가 아니라 침샘을 자극해 입안에 수분을 퍼지게 하는 용도라고 한다.
▶물기가 있는 근대적 전투식량의 시초는 1809년 나폴레옹이 전투식량 보존 아이디어를 전국에 공모할 때 1등으로 뽑힌 병조림이었다. 건조하지 않아 먹기 수월하고 열량이 높았지만 여전히 맛은 형편없었다. 참호전으로 치러진 1차 세계대전은 병조림을 먹으며 싸운 전쟁이었다. 병에 담긴 차가운 죽과 고기 스튜를 먹은 군인들은 ‘이틀 굶어도 먹을 수 없는 맛’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오래 보존되고 먹기 수월하면서도 맛도 좋은 전투식량 개발은 지금도 세계 각국이 심혈을 쏟는 분야다. 미국은 남북전쟁 때 인스턴트 커피를 선보였고, 스페인은 내전 당시 설탕 입힌 초콜릿을 보급했다. 이탈리아 전투식량엔 입맛을 돋우라며 식전 술까지 들어 있다. 스팸도 2차 대전 때 미군에 보급되기 시작한 전투식량이었다. 우리 군은 베트남 전쟁 전까지만 해도 전투식량이라 할 게 없었다. 6·25 때 국군은 주먹밥과 미숫가루, 말린 쌀을 먹고 싸웠다. 그러다가 베트남전에서 1967년 흰밥과 김치, 파래무침, 콩자반 등을 곁들인 ‘K레이션’이 첫선을 보였다. 그래도 통조림 형태라 맛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1980년대 이후 한국 전투식량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휴대하기 간편하고 발열팩이 들어 있어 불과 물 없이도 요리가 된다. 고기볶음밥, 마파두부밥, 닭갈비, 피자, 파스타 등 메뉴도 다양하고 맛도 좋다.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한국 전투식량에 들어 있는 햄볶음밥과 양념소시지를 먹고 아몬드케이크 후식까지 맛본 뒤 ‘엄지 척’ 하는 동영상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2017~2018년 우리 군에 납품된 전투식량에서 하자가 드러나 군과 제조 업체 사이에 소송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전투식량에 포함된 참기름 등의 유통기한이 잘못된 것이 밝혀지면서다. 그 전에도 전투식량에서 고무줄이나 벌레가 나온 적이 있다. 장병이 먹는 식량은 단순한 식사를 넘어 전투력 유지의 핵심이다. 나폴레옹은 “잘 먹은 군인이 잘 싸운다”고 했다. 진리일 것이다.
08.24(토) 청약 점수 백태

▲그래픽=박상훈
1970~80년대, 직장인이 꼭 들어야 할 금융 상품이 있었다. 목돈 마련용 재형저축, 내 집 마련용 청약 통장이다. 정부는 청약 통장 가입자들이 낸 돈으로 주택도시기금을 조성, 공공 주택을 지어 공급했다. 1977년 만들어진 주택 청약 제도는 돈 없는 후진국 정부가 대규모 주택을 공급할 수 있었던 묘책으로 여겨졌다.
▶외환 위기 이후 주택은행이 독점해 온 청약 통장 판매가 2000년부터 전 은행으로 확대됐다. 1999년 160만명이던 청약 통장 가입자가 2500만명으로 불어났다. 당첨 확률이 낮다는 불평이 높아지자, 정부는 2007년 ‘청약 가점제’를 도입했다. 무주택 기간(32점) 부양가족 수(35점), 저축 가입 기간(17점)별로 점수를 매겨 합산 점수(총점 84점)가 높은 순으로 당첨자를 정하는 방식이다. 무주택·통장 가입 기간 각 15년 이상, 부양가족은 6인 이상이어야 만점을 받을 수 있다.
▶문재인 정부 시절 85㎡ 이하 아파트는 100% 가점제로 공급하고 강도 높은 분양가 상한제를 시행하자, 새 아파트 당첨이 ‘로또’에 비유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서울 강남권을 중심으로 만점 청약자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투기 지역, 분양가 상한제 적용 지역에선 대출받기도 어려워 ‘10억원대 현금을 가진 사람만 안심하고 청약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결국 ‘7인 대가족 현금 부자가 15년 이상 무주택자로 살아야’ 만점 당첨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아파트 당첨 실익이 크다 보니 온갖 꼼수가 판을 친다. 1980년대 6회 이상 떨어진 사람에겐 우선 당첨권을 주는 ‘0순위 통장’이 등장하자, 0순위 통장 불법 거래가 성행했다. 2008년엔 ‘허위 입양’하는 수법으로 자녀 수를 3명 이상으로 불린 당첨자가 대거 적발됐다. 2년 전엔 외손녀가 장애인 외할머니를 위장 전입시켜 ‘노부모 부양자’ 자격으로, 그다음엔 딸이 모친을 부양하는 것으로 꾸며 ‘장애인 특별 공급’ 아파트를 각각 분양받은 사례가 적발됐다. 부부가 위장 이혼을 통해 ‘한 부모 가족’을 만든 다음 각각 청약하는 사례도 매년 수십 건씩 적발된다.
▶‘당첨만 되면 차익 20억원’으로 화제를 모았던 서울 반포동 래미안 원펜타스 당첨자 292명 중 50명이 계약을 포기했다. 정부가 당첨자 모두에게 자격 조사를 하겠다고 하자 꼼수 당첨자들이 포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부정 청약이 드러나면 3년 이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 아파트가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 돈 버는 물건이 돼 버린 나라에서 벌어지는 씁쓸한 백태다.
08.26(월) 원전 거인 '웨스팅하우스'의 추락

▲일러스트=이철원
조지 웨스팅하우스는 ‘전기 혁명’ 선두 주자 자리를 놓고 토머스 에디슨과 싸운 경쟁자였다. 남북전쟁 당시 북군 참전 용사였던 웨스팅하우스는 기차용 공기 브레이크를 발명해 돈을 번 다음, ‘전기 사업’으로 눈을 돌렸다. 천재 기술자 테슬라를 영입해 교류 전기 시스템을 개발, 직류 전기를 고집한 에디슨과 경쟁했다. 1886년 에디슨을 물리치고 시카고 만국박람회 점등 계약도 따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 발전소를 세워 전기 대중화 시대를 연 것도 웨스팅하우스 전기회사였다.
▶1957년 웨스팅하우스 전기 회사는 세계 최초로 원자력 발전소를 선보였다. 이후 전 세계 원전의 절반 이상을 건설한 원전 거인으로 성장했다. 우리나라 첫 원전, 고리 1호기도 웨스팅하우스의 기술 전수로 이뤄졌다. 승승장구하던 웨스팅하우스는 1979년 미국 스리마일 원전 사고로 위기를 맞는다. 미국 정부가 30년 이상 신규 원전 건설을 중단하자 경영난에 빠진다. 2005년 일본 도시바가 54억달러를 주고 웨스팅하우스를 인수했다.
▶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일본은 가동 중인 원전 50기를 폐쇄하고, 다른 나라들도 원전 건설 계획을 속속 백지화했다. 원전 사업은 도시바에 7조원 이상 손실을 안겼다. 도시바는 2015년 막대한 부실을 감추려 분식 회계를 하다 들통나 그룹이 공중분해되는 지경으로 내몰린다. 도시바 의료기기 사업은 캐논에, 백색가전은 중국 기업에, 반도체 사업은 SK하이닉스가 포함된 다국적 컨소시엄에 매각됐다.
▶모기업 도시바가 손을 들자, 웨스팅하우스는 2017년 미국 법원에 파산을 신청했다. 1년 뒤 캐나다의 투자펀드가 46억달러에 웨스팅하우스를 인수했다. 4년 뒤인 2022년 웨스팅하우스는 캐나다의 우라늄 채굴 기업 컨소시엄에 78억달러에 재매각됐다. 130년 전통의 원전 원조 기업이 주인이 여러 번 바뀌면서 투자펀드의 돈벌이 수단이 된 꼴이다.
▶2009년 한국이 아랍에미리트에 원전을 수출할 때, 웨스팅하우스가 특허권 침해 운운하며 막대한 기술료를 요구한 바 있다. 당시 한국은 법정 다툼을 벌이지 않고 웨스팅하우스와 도시바의 설비를 구매해 주는 방법으로 체면을 세워 주었다. 그런데 최근 한국이 독자 개발한 ‘K원전 모델’로 24조원 규모 체코 원전을 수주하자, 웨스팅하우스가 또 ‘기술 침해’를 이유로 딴지를 걸기 시작했다. 한때 세계를 주름잡던 원전 거인이 자릿세 뜯는 조폭 같은 신세가 됐다.
08.27 부조금도 기계가 받는 세상

▲일러스트=이철원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축제’엔 우리 옛 상가의 조문 풍경이 담겨 있다. 주인공의 노모가 별세하자 조문객들이 빈소를 찾아 슬픔에 빠진 아들을 위로하는데 겉보기엔 잔칫집이다. 술상이 차려지고 밤새도록 노름판이 펼쳐졌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초상집 가면 술 마시고 화투 치며 밤샘하는 이가 많았다. 빈소가 쓸쓸해선 안 된다는 사회 통념이 만든 장례 문화였다.
▶부조 봉투를 쓸 때는 격식을 차리고 정성을 다했다. 봉투에 사인펜이나 붓펜으로 賻儀(부의)라고 적었고, 속지에 위로 문구와 조의금 액수를 적을 때도 손 글씨로 정성 들여 썼다. 경조사에 빠지는 것은 큰 결례였다. 그러나 워낙 하객과 조문객으로 북적대다 보니 이런저런 사고도 적지 않았다. 축의금이나 부의금 봉투를 엉뚱한 부조함에 넣었다가 찾는 소동이 빚어졌고, 부조함 속 돈을 슬쩍하는 범죄도 끊이지 않았다. 영화 ‘축제’에도 조문객이 노름 판돈을 모두 잃자 부의금에 손대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결혼식 축의금을 사람이 받는 접수대가 없어지고 대신 컴퓨터 모니터에 축의금을 직접 입력하는 키오스크가 등장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키오스크에 축의금을 넣고 하객 이름을 남기면 주차권과 식권이 나온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키오스크로 주문하는 데 익숙한 MZ세대는 편리하다며 반기지만 “축의금을 기계가 받느냐”며 낯설어하는 이도 적지 않다.
▶축의금 키오스크 이전에도 모바일로 청첩장 돌리고 부고를 알리는 세태는 이미 낯설지 않은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코로나 사태에 따른 사회적 거리 두기로 오랫동안 결혼식과 장례식에 참석하기 어려웠던 상황도 ‘SNS로 성의 표시’라는 신풍속을 빠르게 확산시켰다. 모바일 부조금을 받은 이들은 도난과 분실 위험이 없어서 좋다고 한다. 부조금은 미래의 부채인데 혼주나 상주 이름과 계좌를 모두 기록할 수 있기 때문에 누가 누구에게 돈을 보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도 장점으로 꼽는다. 관가에선 모바일 부조가 김영란법 이후 법정 한도를 넘는 부조금을 받았을 때 되돌려주기 편리하다며 선호한다.
▶시대가 바뀌면 축하와 위로의 방식도 변하기 마련이다. 결혼 축의금 접수 키오스크가 생겨난 데는 돈을 대신 받아 줄 사촌조차 드물어진 저출생 시대의 음영도 드리워져 있다고 한다. 요즘엔 전과 달리 상가에 오래 머물지 않는 게 예의다. 부의금을 속지로 싸면 번거롭다며 봉투에 돈만 넣으라는 상주도 있다고 한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든 이웃의 기쁜 일과 슬픈 일에 함께 웃고 우는 마음만은 바뀔 수 없을 것이다.
08.28 두로프와 텔레그램
2012년 5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 위로 종이비행기 수십 개가 날아다녔다. 주변 건물에 있는 소셜미디어(SNS) 회사 VK(프콘탁테)의 20대 사업가가 5000루블(약 7만3000원)짜리 지폐로 수백만 원어치 비행기를 접어 날린 것이다. 거리엔 종이비행기를 낚아 채려는 사람들로 난장판이 벌어졌다. 창틀에 앉아 이 장면을 보고 웃던 이가 VK 창업자이자 텔레그램을 만든 파벨 두로프(40)다.
▲일러스트=박상훈
▶두로프는 러시아의 저커버그로 불린다. 198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이탈리아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 언어학 학사를 땄고, 2006년 VK를 차렸다. 사용자 3억명을 모아 러시아 최대 SNS 업체로 급성장했다. 그는 표현의 자유를 신봉했다. 야당 정치인의 페이지를 폐쇄하라는 러시아 정부의 압력에 혀를 내민 개 사진을 게시하며 저항했다. 반정부 시위대의 정보를 내놓으라는 압박에도 굴하지 않았다. 결국 2013년 보안성을 극도로 강화한 메신저 텔레그램을 만들었고 이듬해 독일로 망명했다. 그가 날렸던 종이비행기를 로고로 썼다.
▶그의 기이한 생활 습관과 자유분방함은 괴짜 일론 머스크를 능가한다. 그는 영화 매트릭스의 열렬한 팬으로, 주인공 ‘네오’가 입은 듯한 검은색 옷만 입는다. 설탕, 고기, 패스트푸드를 먹지 않고 차, 커피, 술도 마시지 않는다. 무정부주의자를 자처하며 카리브해 섬나라 세인트키츠 네비스, 아랍에미리트, 프랑스 등 4개 국적을 갖고 있다. 극단적 노마드 성향으로 엔지니어들과 전 세계를 여행하며 지냈고, 2010년부터 정자를 기증해 12국에 생물학적 자녀가 100여 명에 이른다. 미혼인 그는 “사랑도 마약이어서 안 한다”고 했다.
▶텔레그램도 그의 성격을 닮았다. 텔레그램은 암호화된 메시지와 서버에도 남지 않는 특성이 주목받으며 사용자가 9억명에 이를 정도로 폭풍 성장했다. 반면 텔레그램의 이런 특성 탓에 범죄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이슬람 무장 조직(ISIS)이 텔레그램을 통해 신규 세력을 모집하고, 국내에서 N번방 성범죄 사건이 텔레그램을 무대로 이뤄졌다.
▶며칠 전 프랑스 정부가 아제르바이잔에서 프랑스로 입국하는 두로프를 공항에서 체포했다. 텔레그램에 넘쳐나는 아동 성적 학대 콘텐츠, 가짜 뉴스, 허위 정보, 증오와 폭력 조장 콘텐츠를 적절히 관리하지 않은 혐의다. 두로프의 체포는 표현의 자유와 SNS 플랫폼의 관리 책임 문제에 대한 논쟁을 촉발하고 있다. 자유분방한 기인, 두로프가 위기를 헤쳐나갈지 주목된다.
08.29 울분 사회

▲일러스트=이철원
화병은 화를 잘 해소하지 못하고 참아서 생기는 우리 고유의 병명이다. 참고 견디는 것을 미덕으로 보았던 문화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미국정신의학회에서 발간한 정신 질환 분류 책자(DSM)에 한때 ‘Hwa-Byung’이란 영문으로 실리기도 했다. 예전에는 중년 여성에게 많이 나타났지만 스트레스가 많아지면서 발생하는 나이도 낮아지고 남성들도 화병 증상을 호소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통독 이후 큰 환경 변화로 많은 동독 주민들이 혼란을 겪었다. 많은 사람들이 실직하거나 고향을 떠나 이주해야 했다. 사회적 차별까지 겪으며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하는 주민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 중 일부는 신체적인 증상까지 나타났다. 베를린 샤리테 대학의 미하엘 린덴 교수는 이 증상을 지속적으로 연구해 ‘울분(embitterment)’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이 증상이 큰 정치·사회적 급변만 아니라 직장 갈등, 이혼, 해고, 지인의 사망 등 일상생활에서 부정적 경험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독일판 화병’인 셈이다.
▶'울분’이 나오는 기사를 검색해 보면 공통점이 있다. ‘내 노력과 기여가 무시당했다’는 것이다. ‘공정’ 문제와 닿아 있다. 2020년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때 취업 준비생들이 울분에 찬 것도 이런 이유였다. 2018년 평창 올림픽에서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을 구성할 때 일부 한국 선수가 탈락하자 2030세대는 “불공정하다”고 울분을 토했다. 통독 과정에서 나타난 울분 증상도 바뀐 세상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주로 나타났다.
▶우리 국민의 절반(49.2%)이 장기적인 울분 상태에 놓여 있다는 서울대 보건대학원 조사 결과가 나왔다. 젊은 층에서 비율이 더 높았다. 놀랍게도 이 비율은 독일인을 대상으로 비슷하게 조사한 결과치(15.5%)의 3배에 달했다. 다만 이번이 네 번째 조사인데, 과거 세 차례 조사(2018년 54.6% 등)보다는 약간 수치가 낮아졌다. 연구진은 “우리 사회 구성원의 울분 감정이 간과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했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는 ‘울분 사회’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한국은 분명 성공한 선진국인데 왜 그런지 궁금하다. 한국은 타인과 비교가 일상화되고, 경쟁이 심한 사회인 탓일까.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하루 평균 자살 사망자 수가 37.7명에 이르는 것도 이와 관련 있을 듯하다. 경쟁이 불가피하다면 공정한 경쟁에 사회가 더 관심을 쏟아야 할 것 같다.
08.30 비혼 출생

▲일러스트=이철원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은 딸 클로드를 깊이 사랑했다. 어느 날 기자들에게 “좋은 소식이 있다”며 독신인 딸의 출산 소식을 알렸다. 손자를 품에 안고 웃음 짓는 ‘대통령 할아버지’ 사진을 본 프랑스 국민들도 함께 기뻐했다. 한국인 교수가 프랑스인 제자에게 “자네도 결혼해 가정을 꾸려야지”라고 하자 제자가 놀란 눈으로 “제 부모님도 결혼하지 않으셨는데, 왜요?”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동거나 미혼 상태로 자녀를 낳아 키우는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나라가 프랑스다.
▶프랑스가 처음부터 동거나 비혼 출산이 자연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유럽의 다른 기독교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결혼만 신성시했고 혼외 출산을 결혼의 오점으로 취급했다. 혼외자를 경멸하는 의미로 쓰는 영어 단어 ‘bastard’는 불어 ‘bâtard’에서 왔다. 우리말 ‘사생아’도 비혼 출생을 문제시하고 혐오하는 단어다.
▶20세기가 끝날 때까지 프랑스는 유럽의 대표적인 저출생 국가였다. 이원복 교수가 그린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 프랑스 편엔 아프리카 출신 이민자가 프랑스 국기를 들고 ‘우리나라’라고 하는 장면이 있다. 프랑스의 소멸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비등했다. 아이 낳기를 꺼리는 이유로 결혼 밖 출산을 터부시하는 분위기가 지목되자 1999년 사실혼을 보호하는 시민연대계약을 도입했다. 동거 중 태어난 아이를 방치하던 관행도 개선되며 1.76명까지 추락했던 합계 출산율이 반등했다.
▶우리나라 전체 신생아 중 비혼 출생아의 비율이 지난 2분기 4.7%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고 한다. 그러나 OECD 평균인 41.9%에 비하면 여전히 매우 낮다. 우리나라 합계 출산율은 0.7명도 안 된다. 출생률을 높이려면 결혼한 남녀만 ‘합법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작은 노력들도 있었다. 2020년엔 대한산부인과학회가 윤리 지침을 바꿔 난임 시술 대상을 법률혼 부부에서 사실혼 부부로 확대했다. 그러나 ‘비혼 여성 등 혼인 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의 시술은 제한한다’고 규정했다. 의사들이 의학적이지 않은 이유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제약할 권한이 있는지 의문이다.
▶방송인 사유리씨처럼 결혼은 안 해도 엄마는 되고 싶은 여성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비혼 출산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는 것은 출생률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모든 아기는 축복 속에 태어나 사랑 받으며 자라야 한다. 비혼 출생아도 그럴 수 있다는 걸 다른 나라들이 보여주고 있다.
08.31(토) 74년 만에 美 해군에 보은하는 'K조선'

▲일러스트=양진경
1950년 12월 흥남 부두에서 피란민 수만 명의 목숨을 구한 미 해군 수송함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미국 ‘조선왕’ 헨리 카이저가 2차 세계대전 때 3800척이나 만든 리버티 수송함 중 한 척이었다. 후버댐 건설에도 참여한 건설 업자 카이저는 선박 건조법을 혁신해 한 척당 건조 시간을 355일에서 17일로 단축했다. 기록 경신을 위한 시험 제작에선 4일 15시간 만에 리버티 한 척을 완성하기도 했다.
▶카이저의 혁신은 크게 두 가지였다. 배를 만들 때 용골부터 세우고 나무, 철판을 붙이던 방식을 버리고, 선박 부품이 들어간 블록을 공장에서 먼저 만든 다음, 조선소로 가져와 최종 조립했다. 또 하나는 리벳(버섯 모양 못)으로 철판을 붙이지 않고, 용접으로 철판을 붙이는 방법을 채택했다. 그의 조선소가 배를 워낙 빨리 만들어 내자, 카이저에게 ‘론치얼랏(Launch a lot·대량 진수) 경(卿)’이란 별명이 붙었다.
▶조선 강국 미국이 1920년에 제정된 존스법(Jones Act)으로 망가지기 시작했다. 이 법은 미국에서 만든 선박만이 미국 항구에서 다른 항구로 물품을 운송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미국 조선사에게 자국 선박 독점권을 준 것이다. 경쟁력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 조선소들이 1960년대부터 미국 조선사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현재 미국에선 사실상 항공모함, 구축함, 잠수함 등 군함 건조만 이뤄지고 있지만 생산성은 한심하다.
▶미국 조선업 몰락은 세계 안보 지형에 격변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의 세계 패권을 지탱하는 미 해군이 몇 수 아래로 보았던 중국 해군에 밀릴 위기다. 중국의 선박 건조 능력은 세계 1위다. 항공모함 수는 11대3으로 미국이 여전히 우위에 있지만 전투함 숫자는 370척 대 280척으로 중국에 역전됐다. 미국 싱크탱크가 “한국·일본 조선사에 빨리 SOS를 쳐야 한다”고 조언하고, 상원의원들이 바이든 대통령에게 대책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지난 2월 미 해군성 장관이 한국 조선소를 방문, “원더풀”을 연발하고 돌아가더니, 엊그제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한화오션이 미 해군 함정 정비 1호 계약을 따낸 것이다. 앞으로 한국 조선소 도크에서 미 항공모함을 보게 될 날이 올 수도 있다. 미 해군 함정 MRO(유지·보수) 사업 규모는 연간 20조원에 이른다. 실적이 쌓이면 미 해군이 군함 건조를 맡길 날이 올지도 모른다. 미 군함에 피란민 운송 신세를 졌던 한국이 74년 만에 미국이 해군력을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지원국으로 거듭났다.
#만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