橫說竪說(동아일보) 2024-07/
07-01(월) 제2 도시 부산이 소멸 위험?
한때 400만 명이 넘었던 부산의 인구는 현재 329만 명이다. 서울에 이어 ‘2대 도시’ 타이틀을 유지하곤 있지만 얼마 전 인천도 300만 명을 돌파했다. 최근엔 반갑지 않은 소식이 하나 더 늘었다. 부산이 전국 7개 특별·광역시 중 처음으로 ‘소멸위험’ 단계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소멸위험 지역이란 개념은 일본의 사회학자가 만든 것으로 우리 통계청도 2016년부터 쓰기 시작했다. 부정적 뉘앙스 탓에 소멸이란 단어가 적절하냐는 논란도 있지만 인구 감소의 심각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다. 지역의 소멸위험을 판단하는 핵심 지표는 출산 적령기(20∼39세) 여성이 얼마나 살고 있느냐이다. 이 인구를 노인(65세 이상) 인구수로 나눈 값이 소멸위험지수다. 2030 여성 인구가 노인 인구의 절반이 안 되면, 즉 0.5 이하이면 소멸위험에 진입한 것으로 분류된다. 한국고용정보원이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부산의 소멸위험지수는 0.49다. 서울(0.81) 경기(0.781) 인천(0.735)에 비해 크게 낮다.
▷부산 같은 대도시라도 일자리나 아이 키울 환경 등 청년들이 뿌리내릴 여건이 취약해지면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게 이번 보고서가 던지는 경고다. 보고서에는 또 하나 눈에 띄는 게 있는데 부산 해운대구마저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해운대에는 대형 쇼핑몰과 문화시설, 초고층 빌딩이 많아 젊은층이 선호할 것 같지만 임차료와 주거비가 비싸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젊은이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일자리 부족도 문제지만 지역 내 양극화가 심하면 청년들이 발붙이기 힘들다.
▷이런 대도시는 부산만이 아니다. 서울을 제외한 전국 광역시 45개 구·군 중 소멸위험 지역은 거의 절반에 달한다. 대구 대전 울산 등 여러 광역시 일부 지역에서도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지방을 떠난 청년들은 대부분 수도권으로 몰려들고, 그 결과 수도권에선 한정된 일자리와 주거공간을 두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지방의 쇠락을 막지 못하면 저출산 해결도 어려워진다. 지방에선 청년들 자체가 적어서, 수도권에선 전국에서 모여든 청년들이 먹고살기 바빠서 결혼·출산이 쉽지 않다. 한국은행이 최근 발표한 ‘초저출산 및 초고령사회’ 보고서를 보면 출산율을 올리는 데 가장 효과적인 정책이 수도권 집중 완화다. 우리의 도시 인구 집중도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수준(우리의 22%)으로 낮추는 게 저출산 관련 정부 지출이나 육아휴직 사용률을 OECD 평균으로 끌어올리는 것보다 각각 8배, 4배 높은 효과를 내는 것으로 분석됐다. 부산 같은 대도시가 활력을 찾지 못하면 다른 저출산 대책에 아무리 많이 투자해 봐야 소용이 없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7-02 성과도 무용지물 만든 마크롱의 ‘오만’ 이미지

집권당이 선거에 패배했다면 나빠진 경제, 불통 이미지에 빠진 대통령을 패인으로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두 기준에서 비교적 성과를 낸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일요일 치러진 프랑스 총선에서 크게 졌다. 그가 이끄는 중도 연합 앙상블은 제3당으로 밀릴 전망이다. 7일 시행되는 2차 결선 투표가 1차 때와 비슷하다면 극우파가 1당, 좌파 연합이 2당이 된다. 프랑스 언론은 대통령의 엘리트 이미지를 민심이반 요인으로 꼽았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마크롱의 오만하다는 이미지가 치명적이라고 표현했다. 대통령은 임기 초 시민들을 엘리제궁으로 초청했는데, 실직한 청년 정원사와 나눈 대화가 카메라에 잡혔다. 마크롱은 “다른 일을 찾아보라. 가령 식당 웨이터 같은…”이라고 했다. 현실적인 조언일 수 있겠지만, 정원사로서 일했던 경험은 아무래도 좋다는 인상을 남겼다. 프랑스 대중은 상처 받았다.
▷지지율은 30%에 묶여 있지만, 업적이 없는 건 아니다. 그는 전임 대통령들이 엄두를 못 낸 구조개혁에 매달렸다. 엘리트의 길을 걸어온 그로선 ‘나는 할 수 있다. 나 아니면 누가 할까’ 싶었을 것 같다. 그는 해고를 쉽게 하는 친기업적 노동개혁을 했고, 연금개혁을 시도해 구멍난 연금재정을 메워야 하는 납세자의 부담을 줄였다. 정책 수혜자는 쉽게 잊지만, 손해를 입었다고 믿는 유권자는 표로 응징하곤 한다. 이런 표심을 마크롱도 피해 가지 못했다.
▷그가 야당의 반대를 넘어선 것은 절충과 타협 대신 프랑스 특유의 헌법 조항을 활용한 결과였다. 대통령이 49조3항을 발동하면 법안은 국회 표결 없이 발효된다. 의회주의를 거스른다는 비판 때문에 역대 프랑스 대통령은 이 조항을 대체로 1년에 1번 정도만 쓰는 절제력을 보였다. 마크롱은 2022년 재선 후만 따져도 20번 넘게 썼다. 여소야대 속 야당은 일방주의적이란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경제 지표는 좋아졌지만 지지를 되살리지는 못했다. 취임 때 9%였던 실업률이 7% 선으로 떨어지면서 4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6%대 물가상승률도 2%대로 안정됐다. 46세 젊은 대통령답게 메모 한 장 없이 몇 시간씩 시민들의 질문을 받았고, 부유세를 폐지할 때는 전국을 돌며 끝장 토론을 11번이나 벌였다. 이런 마크롱의 ‘진심’은 “소통 쇼” 비판에 가려졌다.
▷1992년 미국 대선 때 클린턴 후보가 들고 나온 슬로건은 “바보야, 문제는 경제란 말이야(Stupid, it’s economy)”였다. 그 후로 먹고사는 민생이 선거의 제1 요건으로 여겨졌지만 이번 프랑스 총선에선 먹히지 않았다. 비교적 좋아진 경제나, 대국민토론을 통한 설득 노력은 평가받을 만하다. 하지만 마크롱에겐 엘리트주의 이미지가 악몽처럼 돌아왔다. 흠집 나기는 쉬워도 되돌리기는 지난한 법이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7-03 매년 이공계 인력 3만명 해외로… 위험수위 ‘두뇌 유출’

4000명 대 3만 명. 2010년 이후 이공계 인력의 연평균 국내 유입과 국외 유출 규모다. 우수 인재가 외국으로 빠져나가기만 하고 한국으로 들어오지 않는 ‘인재 수지 적자’ 상태다. 기초과학 분야는 물론이고 인공지능(AI), 반도체 등 첨단기술 분야에서도 인재 유출이 심상치 않다. 더 우려스러운 건 숫자보다 질이다. 국내의 에이스급 연구자와 학생들이 미국 등 선진국으로 이탈하고, 그 빈자리를 인도 베트남 파키스탄 등에서 온 학생들이 채우는 실정이다. 4대 과학기술원의 박사후연구원 4명 중 1명이 외국인이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봐도 한국 이공계 두뇌들의 ‘탈(脫)한국’은 심각한 수준이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발표한 한국의 두뇌 유출 지수는 2021년 24위에서 2023년 36위로 추락했다. 미국 시카고대 폴슨연구소에 따르면 2022년 기준 한국 대학원을 마친 AI 인재의 약 40%가 해외로 나갔다. 인도, 이스라엘 다음으로 많다. 미 스탠퍼드대가 조사한 1만 명당 AI 인재의 국제 이동 지표에서 한국은 순유출을 보였다.
▷‘인재 엑소더스’의 가장 큰 이유는 확연히 차이 나는 처우다. 구글의 신입 직원 평균 연봉은 18만4000달러(약 2억5000만 원)에 이른다. 이에 비해 국내 대기업들의 평균 연봉은 1억 원을 갓 넘고, 정부출연연구소는 9500만 원에 불과하다. 기초과학 분야에선 처우를 떠나 제대로 된 일자리조차 부족하다. 1990년대엔 이공계 박사 인력 대비 박사급 일자리가 2.6배였는데, 지금은 0.5배에 그친다. 이러니 대학 입시에서 최상위 학생은 의대에 뺏기고, 학부와 대학원에서 기껏 키운 인재는 해외에 뺏긴다.
▷사실 보상에만 초점을 맞추면 애초에 경쟁이 어렵다. 하지만 고급 인재를 붙잡아 두는 데는 보상만큼이나 연구 환경이 중요하다. 해외에서 일하는 한국인 AI 연구자들에게 ‘귀국을 고려할 만한 조건’을 물었더니 우수한 동료 연구진과 연구 인프라,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연구 문화를 우선적으로 꼽았다. 이공계 인재들이 인류와 사회에 기여하는 연구를 한다는 자긍심을 느낄 수 있도록 사회적 위상을 제고하는 것도 과제다.
▷저출산으로 학령인구가 줄어들면서 이공계 인재 확보는 앞으로 더 어려워질 것이다. 우수한 학생들을 이공계 핵심 인재로 키워내고, 양질의 해외 인재를 한국으로 유치하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마음껏 연구하고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혁신 연구개발의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공계 인재는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의 첨병이다. 무역적자보다 더 두려운 인재적자를 해소해야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7-04 트럼프 대항마는 미셸 오바마?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대선 TV토론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지자 여론조사 회사들이 바빠졌다. 바이든 외에 누가 트럼프의 맞상대가 될 수 있는지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인데,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62)의 부인 미셸(60)이 단연 주목 대상이다. 로이터-입소스 조사에서 현직 부통령인 카멀라 해리스 등 어떤 정치인도 트럼프에 못 미쳤지만, 미셸은 50%-39%로 오차 범위 밖에서 앞서는 걸로 나타났다. “두 번까지만 선출될 수 있다”는 수정헌법 22조에 따라 남편 오바마는 출마가 불가능하다. 미셸을 향해 민주당 지도부의 눈이 반짝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오바마라는 지명도를 고려하더라도 예상 밖 수치였다. 미셸은 “선거에 관심 없다”고 말해왔는데, 그냥 하는 말은 아니다. 그의 X(옛 트위터)를 보면 8년을 백악관에서 함께 보냈던 당시 부통령 바이든 이야기가 없다시피 하다. ‘무당파도 투표하자’는 시민운동 응원 글 정도가 눈에 띈다. 바이든의 모금 파티에 남편은 자주 참석하지만, 미셸은 가지 않았다. 미국의 부부 동반 문화를 감안하면 바이든 선거에 관심을 끊었다는 뜻이다.
▷44세에 영부인이 된 미셸은 백악관 8년 동안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퇴임 시점 호감도 조사 때 남편보다 높은 60%대 후반을 기록했다. 시카고대 병원 부원장 출신으로 청소년 비만 퇴치 운동에 앞장섰고, 변호사 경험을 살려 흑인 여성 아동 인권 신장을 위해 일했다. 절제된 언어로 하는 연설 실력도 인정받았다. 첫 자서전(비커밍·Becoming)은 31개 언어로 번역됐고, 1000만 부 넘게 팔렸다.
▷그가 대통령 후보가 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바이든 사퇴와 본인 결심이 꼭 필요하다. 그런 뒤에도 50개 주에서 약식이나마 경선에서 이겨야 한다. 경제, 복지, 범죄, 국방은 물론이고 중국, 러시아, 이스라엘과 중동, 한반도 등 대외정책까지 꿰고 있어야 한다. 11월 5일 대선 때까지 4개월. 가난한 흑인 노동자의 딸로 태어나 역경을 이겨냈지만, 지금 삶의 안락함을 떨쳐낼 수 있을까. 그가 쓴 책의 선인세는 800억 원대였다.
▷만약 미셸이 출마한다면 그건 ‘트럼프만은 안 된다’는 민주당의 요구를 물리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모범적 안주인으로 누린 인기는 내려놓아야 한다. 비판이 집중적으로 쏟아질 것이고, 경험 부족에 따른 실수도 잇따를 수 있다. 여론조사 숫자만 믿고 덤빌 수 없는 이유다. 바이든 대통령은 아직까지는 출마 강행의 의지가 여전하다. 그렇다면 미셸과 바이든 둘 모두 같은 질문을 붙들고 있을 것이다. 내가 나서면 혹은 내가 양보하면 과연 민주당은 트럼프 재선을 막을 수 있을까. 누구도 답을 모를 그 질문 때문에 민주당 핵심부는 당분간 머리를 싸매고 있게 됐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7-05 사망자 비중 특히 높은 고령 운전자 사고

교통사고 사망자는 해마다 줄고 있지만 다른 선진국에 비하면 여전히 많은 수준이다. 인구 10만 명당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5.6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4.7명)을 훌쩍 웃돈다. 38개국 중 28위로 많다(2021년 기준). 한국은 보행자와 고령의 사망자 비중이 특히 높은데 고령 운전자가 내는 교통사고가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사망에 이르는 교통사고에서 고령자는 핵심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셈이다.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연평균 4.6% 증가하는 동안 운전면허 소지자는 10.2% 늘었다. 내년이면 고령자 중 운전면허 가진 사람이 절반가량이 된다. 고령 운전자가 느는 만큼 이들이 내는 교통사고도 증가 추세다. 문제는 고령 운전자가 교통사고를 낼 경우 치사율이 높아진다는 점이다. 인구 대비 교통사고를 가장 많이 내는 연령대는 20세 이하지만 사망자를 가장 많이 내는 연령대는 65세 이상이다. 지난해 고령 운전자로 인한 사망자 비중은 전체의 29.2%였다.
▷정부는 구체적인 사고 원인별 통계는 따로 집계하지 않는다. 한국보다 고령 인구 비중이 높은 일본의 경우 75세 이상 운전자가 낸 사망사고 중 33%가 브레이크와 가속 페달을 착각하거나 핸들 조작 미숙으로 발생했다. 전방 부주의나 안전 미확인(각 21%)보다 비중이 컸다. 최근 3일간 서울광장 앞, 국립중앙의료원, 서울 강남 어린이집 근처에서 고령 운전자가 낸 사고도 ‘돌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운전에 가장 중요한 시력은 60대가 되면 30대의 80% 수준이 되고, 돌발상황 반응 시간은 1.4초로 2배로 늘어난다.
▷한국이 고령 운전자로 인한 치사율이 높은 원인으로는 허술한 면허 관리가 꼽힌다. 면허 갱신 주기가 65∼74세는 5년, 75세 이상은 3년으로 다른 선진국보다 길고, 면허를 갱신할 때 적성검사와 인지능력 검사만 하고 도로 주행 시험은 하지 않아 실제 운전 능력을 평가하기엔 한계가 있다. 평가 결과 면허 유지나 취소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는 것도 고령자들이 면허 관리 강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요인이다.
▷같은 고령자여도 신체와 인지 능력은 천차만별이다. 나이에 따라 일률적으로 제한하기보다 운전 능력에 따라 낮시간이나 일정 지역 내에서만 운전하게 하거나 페달 오작동 방지 장치 설치를 의무화하는 등 안전과 이동권을 조화시키는 규제가 합리적이다. 고령자가 많이 사는 시골 지역에 가로등 같은 안전 인프라를 강화하고 대체 교통수단도 늘려야 한다. 고령자 보행 속도에 맞춰 신호 시간을 조정하는 등 OECD 1.9배나 되는 고령 사망자 비중도 낮출 필요가 있다. 고령의 피해자도 가해자도 함께 줄이는 것이 고령화 시대 주요 교통정책 과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7-06(토) 수백 채 빌라 굴리며 정부 보증금 떼먹는 악성 임대인들

‘빌라왕’ 60대 사모 씨가 전국에 보유한 주택은 718채, 전세보증금은 1874억 원이다. 채당 2억6000만 원꼴이다. 사 씨는 ‘동시 계약 진행’이란 악질적 전세사기 수법을 썼다. 공인중개사 등과 짜고 전셋값을 부풀려 매매가와 똑같이 맞춘 뒤 같은 날 세입자에게 받은 보증금으로 그 집을 사는 방식이다. 집주인으로는 명의만 빌려온 가짜를 내세웠다. 이 집을 담보로 대출받아 가짜 집주인은 파산시키고, 돈은 다른 데 써버리기 때문에 나중에 세입자는 보증금을 제대로 돌려받을 수 없게 된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올해 4월까지 약 7년간 사 씨를 대신해 세입자에게 돌려준 보증금이 546억 원인데, 경매를 통해 회수한 건 2억 원에 불과하다. 더욱이 사 씨 보유 주택 중 전세 만기가 안 된 주택이 200채가 넘고, 보증금도 557억 원 남아 있다. 수사 중인 사 씨가 제때 보증금을 돌려줄 리 없으니 HUG가 변제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범죄 수익을 HUG와 피해자가 나눠서 부담하는 셈이다.
▷사 씨 같은 악성 임대인이 늘면서 HUG가 대신 변제한 금액은 3조 원에 가까워졌다. 회수된 금액은 10%에도 못 미친다. 돈을 빌려주는 은행, 보증금 반환 보증을 서는 HUG 모두 집주인이 전세금을 돌려줄 능력이 있는지 따지지 않는 게 전세자금 대출의 구조적 허점이다. 악성 임대인들이 이 틈새를 파고들어 세입자에게 전세대출을 권유하며 수백 채씩 ‘갭 투자’를 벌였다. 정부가 사실상 전세사기를 방조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사회적 재난’이 된 전세사기에 대응해 정부는 악성 임대인 명단을 공개한다. HUG가 보증금을 대신 갚아준 주택이 3건 이상인 임대인 가운데 상환 의지 등을 고려해 지정한다. 문제는 심의를 거쳐 공개하는 데 수개월이 걸리고, 그사이 애꿎은 피해자가 계속 발생한다는 점이다. 4월 기준으로 악성 임대인 664명이 공개됐는데 이 중 HUG가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거나 형사 고소·고발을 한 악성 임대인은 42명뿐이다.
▷‘주택도시기금’은 국민들이 집을 살 때 의무적으로 구입해야 하는 국민주택채권, 내 집 마련을 위해 붓는 청약저축 등으로 조성된 자금이다. 원래 임대주택을 짓거나 낮은 금리로 서민들에게 주택 구입, 전월세 자금을 지원하는 데 써야 할 돈인데 ‘빌라왕’ 같은 악성 임대인이 떼어먹은 돈을 갚는 데 뭉텅이로 사용되고 있다. 이에 비해 전세사기를 당한 세입자는 피해자로 인정받는 절차가 까다롭고, 구제 방안도 대출 지원 중심이어서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이쯤 되면 대체 누가 정부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7-08(월) 봄, 여~름, 갈, 겨울

최근 서울의 한 도심 농원에서 대표적 열대과일인 바나나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화제가 되고 있다. 국내도 근래 들어 바나나 온실 재배가 충남북과 경북 선까지 확대되긴 했다. 그러나 서울의 노지에서 열매가 열렸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이례적인 결실엔 지난해에 이은 기록적 더위도 한몫했을 것이다. 기후변화 영향으로 지난해 전국 연평균 기온은 기상관측망이 확충된 1973년 이래 가장 높은 13.7도에 이르렀다. 지난달 서울은 평균 최고기온이 30.1도로 근대적 기상관측 이래 가장 더웠다.
▷여름은 계속 길어지는 추세다. 기상학적 정의로 요즘은 일 년 중 넉 달이 여름(일 평균 기온이 20도 이상으로 오른 기간)이다. 1912∼1940년엔 여름이 평균 98일(6월 11일∼9월 16일)이었는데, 2011∼2020년엔 29일이 늘어 127일(5월 24일∼9월 28일)이 됐다. 가을은 짧아져 온 듯하면 간다. 그래서 여름은 길게 발음해 ‘여∼름’, 가을은 짧게 ‘갈’이라는 농담도 나온다. 기상청이 이런 실정을 반영해 통념상 3개월씩으로 나뉜 계절의 길이를 재설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제 중반으로 접어드는 장마는 예측이 어렵다. 게릴라성으로 열대성 스콜 비슷하게 집중호우가 내린다. 낮엔 갰다가 밤에 ‘야행성 폭우’가 내리기도 한다. 장마 기간은 길어지는 추세다. 원래 6월 하순부터 7월 하순까지가 전통적 장마철이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선 8월에 강우량 곡선이 재차 산 모양을 그리며 9월 하순까지 2차 강수가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더워진 대기가 수증기를 더 많이 머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젠 장마가 아니라 ‘우기(雨期)’로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힘을 얻고 있다.
▷남해안까지로 한정됐던 아열대 기후가 점차 북쪽으로 확산하는 모양새다. 지난달엔 아열대 곤충인 러브버그(붉은등우단털파리)가 극성을 부렸고, 뇌염모기의 출현도 빨라지고 있다. 한라봉이 아닌 ‘경주봉’이 나온 건 벌써 옛말이 됐다. 망고와 파파야 등도 경북 등지에서 재배된다. 바다도 뜨거워져 제주도 앞바다엔 열대의 맹독성 바다뱀이 출현했다. 24절기 중 ‘작은 더위’라는 뜻의 소서(小暑)는 7월 6, 7일이지만 이젠 씨 뿌릴 때라는 망종(芒種·6월 5, 6일)이나 하지(6월 21, 22일) 즈음이 어울리는 것 같다.
▷세계기상기구에 따르면 지난해는 기록상 지구가 가장 더웠던 해였다. 하지만 5년 안에 새 기록이 쓰일 가능성이 86%라고 한다. 폭염 발생은 산업화 전보다 세 배 가까이로 증가했고, 발생 시 강도도 강해졌다. 온실가스 배출이 줄지 않으면 이런 현상이 앞으론 더 심각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 바나나야 흥밋거리라지만 그런 기후에 사람이 적응할 수 있을까가 문제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07-09 캠프서 준 질문지로 바이든 인터뷰했다 해고된 앵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독점 인터뷰하는 행운을 얻었던 라디오 채널 2곳의 진행자 2명이 “시키는 대로 질문했다”는 이유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동부 필라델피아의 앤드리아 로풀샌더스 앵커와 중서부 밀워키의 얼 잉그램 앵커가 그들인데, 로풀샌더스는 방송이 나간 뒤 이틀 만인 6일 해고됐다. 두 라디오는 청취자 대부분이 흑인인 곳이다. 노쇠한 바이든이 첫 대선 TV토론을 망친 뒤 압도적 지지층인 흑인 표심을 붙들어 두려고 기획한 인터뷰였다.
▷잉그램 앵커의 첫 질문은 “위스콘신주에서 대통령이 이룩한 성취에 대해 설명해 달라”는 것이었다. 81세 대통령이 국정 수행 능력을 의심받던 그 순간에 자기 홍보의 시간을 안겨준 것이다. 이 질문은 바이든 캠프에서 사전에 제공한 질문이었다. 이 앵커는 5개 질문을 제시받고 그 가운데 4개를 골랐다고 인정했다. 로풀샌더스 앵커는 질문 8개를 캠프로부터 받았고, 그중 4개를 실제로 질문했다.
▷저널리즘의 기본을 깬 행위를 간파한 것은 CNN 앵커였다. CNN은 6일 바이든과 전화 인터뷰를 한 진행자 둘을 연결해 3자 간 화상 대담을 진행했다. 그 자리에서 “둘의 질문이 이상하리만치 비슷하더라. TV 토론 평가, 당신들 주(州)에서 이른 성취, 바이든 안 찍겠다는 유권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혹시 바이든 쪽에서 준 것이냐”고 물었다. 로풀샌더스 앵커는 순순히 인정했다. 대선 4개월을 앞두고 라디오 저널리즘의 독립성을 뒤흔드는 말이었다. 라디오 채널 대표는 주말인 토요일에 앵커를 해고한 뒤 “우리는 바이든의 보호 도구(mouth-piece)가 아니다”라는 성명을 냈다.
▷라디오 인터뷰 때 바이든은 “뭐든 물어라(fire away)”라고 힘주어 말했다. 뭐든 답할 수 있다는 자신감 같았지만, 그는 상당수 질문을 알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바이든은 TV토론이 부진했던 이유에 대해 녹음기 틀듯 동일한 답을 내놓았다. “나쁜 밤(a bad night)이었다. 아버지는 내게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서라고 가르쳤다”고 말했는데, 백악관이 추가로 기획한 지상파 ABC방송과 한 인터뷰에서도 같은 답을 내놓았다.
▷해고된 앵커는 CNN 생방송 인터뷰 중에 “우리 라디오가 (바이든에게) 선택된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바이든 측 질문 가운데 내가 몇 가지를 승인한 것”이라고 말할 땐 표정과 말투에서 문제의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해고되지 않은 잉그램 앵커의 라디오 채널에선 아직 반응이 없다. 하지만 전화 인터뷰 녹음 영상에 달린 댓글에는 지역의 소규모 라디오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대선 공론장에서 기본이 흔들리는 것을 우려하는 의견이 여럿 달렸다. 바이든 캠프는 처음엔 “전례가 없는 일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비판이 커지자 떠밀리듯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며 물러섰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7-10 물에 타서 쓰는 피? 인공 혈액 개발 각축전

미국 국방부 산하 연구개발 기관인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은 실온에서 보관 가능한 분말 형태의 인공 혈액을 개발하는 데 지난해 4600만 달러(약 634억 원)를 지원했다. 군사용 신기술을 연구하는 DARPA가 인공 혈액에 투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전쟁뿐만 아니라 대형 재난으로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태를 대비해 혈액의 안정적인 보급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2022년 코로나19가 한창일 당시 혈액 보유량이 급감해 국가 혈액 위기를 선포한 적이 있다.
▷DARPA가 투자한 프로젝트는 산소를 구석구석 나르는 적혈구 속 헤모글로빈 대체재를 만드는 것이다. ‘에리스로머(Erythromer)’라고 하는데 혈액에서 헤모글로빈을 추출해 지질 막을 씌운 입자다. 혈액은 최장 42일간 냉장 보관이 가능하지만, 동결 건조된 분말인 에리스로머는 2년간 실온 보관이 가능하다. 냉장 시스템이 없어도 되고, 식염수와 섞어 쓰므로 보관과 배달이 용이하다. 혈액형과 상관없이 투여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일본에서도 최근 에리스로머와 같은 원리의 인공 혈액이 개발됐다. 나라현립 의과대 교수팀은 유통기한이 지나 버려진 혈액에서 헤모글로빈을 추출한 뒤 역시 지질 막으로 씌운 입자를 만들었다. 폐혈액을 활용하고 혈액 보관 기간이 15∼16배 늘어난다는 점에서 혈액 부족을 해결할 획기적인 연구로 평가받는다.
▷헤모글로빈을 대체한 인공 혈액은 산소 공급만 가능한 ‘반쪽’ 혈액이다. 몸속에서 진짜 혈액이 충분히 생성될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다. 인공 장기보다 인공 혈액 개발이 뒤처진 것은 혈액의 구성이 그만큼 복잡해서다. 혈액의 절반은 액체인 혈장, 절반은 고체인 혈소판 적혈구 백혈구 등으로 이뤄져 있다. 그래서 진짜 혈액을 모방한 인공 혈액은 추출한 줄기세포로 적혈구를 배양하는 방법으로 만들어진다. 2022년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가 이 방법으로 건강한 성인 2명에게 찻숟가락 정도의 수혈에 성공한 적이 있다.
▷선진국은 저출산 고령화로, 저개발국은 헌혈 인프라 부족으로 전 세계 국가의 60%가 만성적으로 혈액 공급에 차질을 빚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인공 혈액 연구는 임상실험 전 단계로 10년 이내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헤모글로빈의 잠재적인 독성을 해결했는지가 상용화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한다. 지난해 범부처 ‘세포 기반 인공 혈액 제조 사업’이 출범하는 등 국내서도 인공 혈액 개발에 시동이 걸렸다. 인공 혈액 개발에 성공한다면 장기 이식용 혈액, 항암제용 혈액 등 맞춤형 혈액이나 희귀 혈액 생산까지도 가능해진다. 보건 안보로 접근해도, 인공 혈액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7-11 집중호우에 내려진 ‘16자’ 대통령 지시사항

윤석열 대통령이 8일 오후 방미 일정을 위해 하와이로 출국하기 전 정부기관에 내린 장마 대비 ‘16자 지시사항’이 논란이다. 지시 내용이 “이번 장마에도 피해 대비를 철저히 할 것”이라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하천 범람과 제방 붕괴 위험을 점검하라든가, 산사태 취약지역은 미리 대피하도록 유도하라든가 하는 구체적 내용은 전혀 없었다. 이 지시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각 정부 부처에 전파했고 산하 기관과 지방자치단체, 시도교육청, 일선 학교들에까지 통보됐다.
▷전달받은 공무원과 교사 등은 “이렇게 짧은 대통령 지시사항은 처음 본다” “(세부) 내용이 전무하다 보니 너무 건성건성으로 보인다”는 반응이다. 메시지는 내용만큼이나 형식이 중요하고, 분량도 일종의 형식이다. 공무원들이 호우 대비의 각론을 숙지하고 있다고 해도 그를 대통령의 메시지에 담느냐 아니냐는 무게감이 천지 차이다.
▷최근 한반도는 짧은 시간 특정 지역에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지는 ‘극한 호우’가 일상화됐다. 수십 년에서 100년에 한 번 내릴 만한 큰비가 몇 년 만에 찾아오고 있다. 2022년 중부지방 집중호우로 반지하 주택 침수 참사가 났고, 지난해엔 오송 참사가 발생했다. 과거 강수량 기준으로 만든 대책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 제방의 계획홍수위 이상으로 물이 차오르는 일이 잦아지고, 산사태도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번 장마에도”로 시작해 마치 연례행사 같은 느낌을 주는 대통령의 ‘16자 지시’에선 그런 긴장감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지시가 나오고 하루가 지난 9일 밤부터 10일 오전까지 충청과 호남엔 ‘물 폭탄’이 쏟아졌다. 남북 폭은 좁고 동서로 긴 강수 구역이 형성되면서 일부 지역엔 200년 만에 한 번 올 만한 폭우가 내렸다. 전북 군산 어청도엔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많은 시간당 146mm의 비가 내렸고, 충남에도 시간당 100mm가 넘게 왔다. 인명 피해도 적지 않다. 충남 서천에서 산사태로 집이 무너져 70대 남성이 사망했다. 충북 영동에선 저수지 둑이 무너져 주민 1명이 실종됐다. 곳곳에서 주민이 고립되고 집이 떠내려가고 농경지가 침수됐다.
▷대통령은 8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최근 기후변화의 영향 등으로 예측을 넘어서는 기상이변이 자주 발생한다”며 피해 대비를 당부했다는데, 왜 실제 지시는 달랑 한 줄로만 내려갔을까. 그 많은 보좌진 가운데 ‘16자 지시’에 살을 붙일 사람이 없나. 이태원 참사 뒤 대통령비서실장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은 참모 조직이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컨트롤타워”라고 했는데, 참모 기능은 제대로 하는 건지 싶다. 대통령실을 지붕을 대강 얼기설기 엮어 비 새는 집처럼 꾸려가는 것은 아닌가.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07-12 배민 수수료 44% 인상은 비정한 행위”… 외식업주 비명

지난달 21일 자영업자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배민1플러스’의 주문을 껐다는 인증샷이 잇따라 올라왔다. 자영업자 300여 명이 뭉쳐서 하루만이라도 배민1을 쓰지 않겠다고 단체행동을 결의했더니, 적잖은 음식점 사장들이 동참한 것이다. 이들이 문제 삼은 배민1은 국내 1위 배달앱 ‘배달의민족’이 올해 초 도입한 새 요금제다. 그동안 음식점들은 주문 수와 상관없이 매달 8만8000원만 내면 되는 요금제를 주로 이용해 왔는데, 주문 한 건당 음식값의 6.8%를 중개수수료로 떼 가겠다고 했다.
▷새 요금제가 강제는 아니라고 했지만 손님들이 많이 찾는 ‘무료 배달’ 가게가 되려면 음식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이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배달 수수료가 배달앱의 고질적 문제였지만 이제는 팔면 팔수록 손해가 나는 구조가 굳어진 셈이다. 그런데 가뜩이나 부담이 되는 중개수수료를 배민이 다음 달부터 9.8%로 올리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음식점이 부담하는 배달비를 건당 100∼900원 낮추겠다는 당근책을 제시했다.
▷하지만 자영업자 여론은 들끓고 있다. 선심 쓰듯 배달비 몇백 원 내리는 것보다 수수료 부담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앞으로 서울에서 2만 원짜리 치킨을 팔면 2000원에 가까운 중개수수료에 배달비, 카드 수수료, 부가세 등을 더해 6000원 정도가 빠져 나간다. 인건비, 재료비 등을 빼면 남는 게 없다는 자영업자들의 하소연이 괜한 엄살이 아니다. 전국가맹점주협의회는 11일 성명을 내고 “중개수수료를 6.8%에서 9.8%로 44% 인상하는 것은 자영업자의 절박한 호소를 매몰차게 외면한 비정한 행위”라고 했다.
▷최저임금 등의 가파른 상승과 구인난, 고금리로 외식업체들의 어려움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지경이다. 자영업자들의 대출연체율이 크게 치솟고 있는데, 외식업은 그 대표적인 업종 중 하나로 꼽힌다. 배민은 최근 한 달 새 수수료 인상 외에도 무료 서비스들을 잇달아 유료화하는 방침을 내놨다. 그러다 보니 배민의 모기업 독일 딜리버리히어로(DH)가 유럽연합의 반독점법을 위반해 4억 유로의 과징금을 낼 상황에 처했는데, 배민을 통해 자금을 확보하려 한다는 해석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자영업자들은 치솟는 수수료 부담에도 배달앱 시장의 65%를 장악한 배민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최근 내놓은 소상공인 지원 대책에 음식점 등 영세 자영업자에게 배달비를 직접 지원한다는 방안이 담겼지만, ‘갑질 횡포’라 불리는 배달앱의 구조적 문제를 손보지 않고서는 세금으로 배달 플랫폼의 배만 불리는 꼴이 될 수 있다. 자영업자들이 나서서 ‘공정한 플랫폼을 위한 전국 사장님 모임’을 만드는 현실이 서글프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7-13(토) ‘VIP는 해병대 사령관’이라더니 이번엔 “김 여사, 하지만 허풍”

“내가 VIP한테 얘기할 테니까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 사표 내지 마라(고 했다)”는 블랙펄인베스트먼트 전 대표 이모 씨의 녹음파일이 공개된 이후 세간의 관심은 ‘VIP의 정체’에 집중돼 있다. ‘구명 로비설’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누가 로비를 받았는지에 따라 사건의 파장과 성격이 달라질 수 있어서다. 이를 의식해서였는지 이 씨는 당초 “VIP는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이라고 했다가 “말이 되냐”는 비판을 받았다. 이후 그는 “VIP는 김 여사를 뜻한 것”이라고 말을 바꿨다.
▷이 씨와 김건희 여사의 관계를 알려면 먼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을 살펴봐야 한다. 약 3년간 진행된 주가조작은 1, 2차 시기로 나뉜다. 1심 법원은 2010년 10월 시작된 2차 시기에서 이 씨가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고, 이 씨 또는 블랙펄인베스트의 이사가 김 여사의 계좌를 운용하면서 시세 조종에 이용했다고 판단했다. 이 씨는 권오수 전 도이치모터스 회장에게서 김 여사를 소개받았다고 한다. 두 사람이 10여 년 전부터 아는 사이였다는 얘기다.
▷이 씨는 VIP를 언급한 것은 “허풍 과시였을 뿐”이라고 했다. 변호사 A 씨가 이 씨와의 통화를 녹음한 것은 이미 이 씨가 김 여사의 계좌를 관리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인 지난해 5월부터 올해 6월 사이였다. 김 여사와의 관계를 알 만한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섞어 일종의 호가호위를 했다는 게 이 씨의 주장인 셈이다. 공개된 녹음 내용 중에는 모 경무관을 언급하며 “별 2개(치안감) 달아줄 것 같아”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건 허언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흘려듣기 어려운 대목도 적지 않다.
▷그는 지난해 7월 통화에서 “아마 내년쯤에 발표할 거거든. 해병대 별 4개 만들 거거든”이라고 했다. 해병대를 독립시켜 ‘4군 체제’를 만들고 해병대 사령관을 대장으로 격상한다는 취지다. 이 씨는 “신문 기사를 보고 한 얘기”라고 했지만 별도의 채널로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도 있다. 법조계 일각에선 임 전 사단장이 지난해 8월 두 번째 사의를 표명했을 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게 로비와 관련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이 씨가 국방부 장관 인사에 개입한 듯한 발언을 했다는 의혹 역시 확인이 필요하다.
▷이 씨와 임 전 사단장은 서로 모르는 사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올해 3월 이 씨의 녹음파일에는 A 씨에게 “너는 성근이를, 임 사단장을 안 만났구나”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자신은 임 전 사단장을 만난 적이 있다는 전제가 깔린 발언으로 들린다. 김 여사가 결혼(2012년 3월)한 이후 연락한 적이 없다면서 지난해 김 여사를 갑자기 ‘VIP’라고 언급했다는 이 씨의 주장도 수상하다. 이런 의혹들 하나하나가 말끔하게 규명돼야 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7-15(월) “감사한 의대생-전공의-전임의”… 복귀자 신상 공개 논란

의사들 군기는 군대 못지않다. 사소한 실수가 인명 피해로 이어지는 직업적 특성 때문이다. 짧게는 예과와 본과 6년, 길게는 전공의 기간까지 10년 이상 관계가 이어지는 좁고 폐쇄적인 사회인 탓도 크다. 의사들의 기강 잡기는 환자의 안전에 도움이 되는 순기능도 있지만 내부적으로 집단의 결정에 동조와 복종을 강요하는 부작용도 작지 않다. 의대 증원을 둘러싼 의정 간 대치 국면에서 의료계의 집단행동 불참자 신상 공개와 조리돌림도 의사 군기 문화의 폐해를 보여준다.
▷최근 텔레그램에는 ‘감사한 의사-의대생 선생님 감사합니다’라는 제목의 채팅방이 개설돼 ‘감사한 의대생’ ‘감사한 전공의’ ‘감사한 전임의’ 명단이 올라오고 있다. 의대생은 학교와 학년, 전공의와 전임의는 소속 병원과 진료과, 출신 학교 학번 같은 개인정보가 이름과 함께 공개된다. 채팅방 개설자는 ‘이 시국에도 의업에 전념하고 계신 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려 한다’고 했지만 복귀자들을 조롱하며 추가 이탈을 막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경찰은 병원과 수업 복귀를 방해하는 불법 행위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
▷동료들의 복귀를 방해하는 행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3월엔 집단 사직에 불참한 전공의들 명단이 ‘참의사… 안내해 드립니다’라는 제목으로 의사와 의대생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왔다. ‘참의사’ 명단 유출 사건을 수사해온 경찰은 최근 개원의 2명을 포함한 의사 5명을 업무방해와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지난달에는 수업에 참여한 학생에게 공개 사과와 수업 거부를 강요한 혐의로 모 대학 의대생 6명이 입건됐고, 다른 3개 의대도 집단행동을 강요한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폐쇄적인 집단에서 동료 사이의 평판은 결정적이다. 의대는 거의 모든 과목이 전공 필수로 6년 내내 함께 수업을 듣는다. 팀별 과제나 실습이 많아 ‘왕따’ 당하면 학교생활이 매우 어려워진다. 이번 동맹 휴학 중엔 ‘불참자는 시험용 족보를 공유하지 않겠다’며 휴학을 강요하는 대학도 있었다. 의사 면허를 딴 후에도 동료 선후배 관계는 이어지기 때문에 배신자로 찍히는 건 면허 정지보다 무서운 일로 통한다. 2020년 의사 파업 때 불참자도 블랙리스트로 ‘박제’돼 공공연히 배제되는 불이익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의대생과 전공의들은 정부가 의대 증원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서 ‘의사를 악마화’한다고 반발한다. 그러면서 내부적으로는 집단행동을 강요하며 이탈자들을 ‘악마화’하고 있다. 환자 곁을 지키고 수업을 받겠다는 동료들의 소신을 조롱하고 사이버 폭력을 휘두르면서 어떻게 집단행동의 대의명분을 이해받으려 하나. 국민 건강을 책임지는 엘리트들의 건강하지 못한 집단주의 문화가 유감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7-16 ‘36주 낙태’라며 영상 올린 유튜버… 진짜라면 ‘살인’

24세 만삭 임신부라고 주장하는 유튜버가 낙태 시술을 받은 과정을 담은 영상을 올려 충격을 주고 있다. 36주가 된 태아를 지우려 병원을 찾아다니고, 그 과정을 정성스레 편집해 공개하는 발상이라니…. 비윤리적이라기보다 윤리적 감각이 아예 작동하지 않는 듯해 보인다. 현재 이 영상은 삭제된 상태다. 경악스러운 내용에 논란이 확산하면서 유튜브 구독자는 2만4000명으로 20배 넘게 늘었다.
▷우리나라 산모의 평균 출산 주수가 37주다. 엄마 배 속에 있을 뿐이지 36주면 온전한 아기라고 볼 수 있다. 영상에서 유튜버의 수술을 거절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 의사는 “심장이 잘 뛴다. 낳아야 한다”고 했다. 해당 유튜버는 병원 2곳에서 거절당하고, 다른 지역으로 가서 900만 원을 주고 낙태 수술을 받았다. 의사들은 유튜브 내용이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보고 있다. 누리꾼들 사이에선 만삭이 되도록 임신을 몰랐다는 점, 임신이나 수술로 인한 신체적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 점, 수술 3일 만에 영상을 제작했다는 점 등을 들어 ‘조작설’에 무게가 실리는 양상이다.
▷보건복지부는 해당 유튜브 영상의 사실관계를 파악해 처벌해 달라며 경찰에 수사 의뢰했다. 2019년 형법상 낙태죄는 헌법불합치 결정이 났다. 하지만 유튜브 내용대로라면 살인죄 적용이 가능하다. 영상에서 유튜버는 개복 수술을 했다고 주장했는데, 만약 사실로 밝혀진다면 낙태가 아닌 신생아 살인이다. 이미 34주 된 태아를 낙태한 의사가 살인죄로 처벌받은 판례도 있다. 다만 해외에 서버가 있는 유튜브 특성상 해당 유튜버와 수술 의사를 아직 특정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자살을 시도하거나 칼부림 끝에 살인이 일어나는 장면이 그대로 생중계되더니 진위를 떠나 ‘36주 낙태’ 영상이 버젓이 노출됐다. 선정적인 막장 콘텐츠도 자극이 약한 것인지 이제는 폭력, 살인 등 반사회적인 콘텐츠가 유튜브에서 판을 친다. 상식이 용인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 알고리즘을 타고 이런 자극적인 유해 콘텐츠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중독을 낳는 것도 문제다. 하지만 조회 수, 구독자 수가 곧 수익으로 직결되는 구조 안에서 돈벌이 경쟁을 벌이는 유튜버들의 자정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유튜브는 국내 사용자 1위 앱이다. 1인당 월평균 사용 시간도 40시간을 넘어섰다. 어린이, 청소년도 별다른 제한 없이 접근 가능하다. TV 방송처럼 국민 누구나 사용하는 보편적인 공간이 유해 콘텐츠로 도배가 됐는데도 정부는 해외 플랫폼이라는 이유로 규제에 손을 놓고 있다. 불법 콘텐츠에 대한 정보와 이를 삭제할 기술까지 독점한 플랫폼에 책임을 지우지 않고는 유해 콘텐츠의 범람을 막을 길이 없다. 정부가 더 이상 플랫폼 규제를 망설여서는 안 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7-17 “트럼프는 미국의 히틀러” 비판하다 러닝메이트 된 밴스

“J D가 나에게 알랑방귀를 뀌고(kiss my ass) 있다. 그는 내 지지를 간절하게 원한다.” 2022년 9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J D 밴스 공화당 상원의원 후보(오하이오) 지지 유세에서 한 말이다. 사실 밴스는 이민 정책을 두고 트럼프를 “미국의 히틀러”에 빗대는 등 강하게 비판했던 인물이다. 그런 밴스가 자신에게 복종한다는 걸 군중 앞에서 과시한 것이다. 올 11월 치러질 대선에서 승기를 잡은 트럼프가 15일(현지 시간) 밴스 상원의원을 러닝메이트로 지명했다.
▷밴스는 쇠락한 러스트 벨트 출신으로 성공한 이야기를 담은 회고록 ‘힐빌리의 노래’를 2016년 출간하며 전국적 명성을 얻었다. 책엔 삶이 무너진 저학력 백인 노동자 계층의 분노와 좌절이 담겼다. 그가 예일대 로스쿨에 가겠다고 하니 아버지는 지원서를 쓸 때 ‘흑인이나 진보주의자인 척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가 속한 집단의 자포자기 수준이 그렇게나 심했다는 얘기다. 책은 트럼프 핵심 지지층의 정서를 대변했지만 밴스는 보수주의자이면서도 트럼프에 비판적이었다. 2016년 대선 당시엔 트럼프를 “유해하다(noxious)”고까지 했고, 보수 성향의 무소속 에번 맥멀린 후보를 지지했다.
▷그런 그의 입장은 정치 입문을 고려하기 시작한 2018년경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트럼프를 “오하이오주 등 지역민의 좌절감을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이후 자신의 트럼프 비판 트윗을 삭제했고, 트럼프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운동에 뛰어들었다. 트럼프가 패배한 2020년 대선은 부정선거라는 주장에도 동조하는 등 골수 트럼프 지지자로 거듭났다.
▷밴스의 변신이 순전히 정치적 야망 때문인지는 그 자신만 알 것이다. 다만 요즘 미국 정치 현실에서 공화당 소속으로 트럼프에 맞서고서 정치적 성장을 기대하긴 어려운 게 사실이다. 2022년 오하이오주 공화당 상원의원 후보 경선 역시 트럼프가 누구를 간택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밴스가 원래 가진 고립주의와 경제적 포퓰리즘 지향이 트럼피즘에서 길을 찾았다는 평가도 나온다.
▷1984년 8월 2일생으로 만으로는 아직 39세인 밴스는 1952년 리처드 닉슨(당시 39세) 이후 최연소 미국 부통령 후보다. 트럼프의 적지 않은 나이와 도덕성의 결함을 커버할 수 있는 후보로 꼽힌다. 당선될 경우 2028년 선거엔 출마하지 못하는 ‘트럼프 이후’를 노려볼 수도 있다. 밴스가 처음 유명해졌을 때 미국의 진보 성향 주간지 ‘뉴 리퍼블릭’은 그를 두고 ‘블루 아메리카(백인 노동자 계층)를 위한 거짓 예언자’라고 했다. 그 말이 맞을지 진짜 선지자가 될지, 트럼프뿐 아니라 밴스에게도 세계의 시선이 쏠렸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07-18 악성 임대인 절반이 ‘임대사업자 혜택’ 누린다니

주택도시보증공사(HUG)는 ‘안심 전세 포털’을 통해 전세 보증금을 상습적으로 돌려주지 않은 악성 임대인 명단을 공개하고 있다. 지난달 기준으로 127명이다. 그런데 이 중 절반이 넘는 67명이 임대사업자 자격을 유지하며 취득세·재산세, 양도소득세 감면 같은 각종 세제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HUG가 악성 임대인의 전세 보증금을 대신 갚아주고, 정부는 세금까지 깎아주고 있으니 기막힌 일이다.
▷임대사업자 등록이 취소되지 않은 악성 임대인이 세입자에게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아 HUG가 대신 반환한 금액이 무려 7124억 원에 이른다. 1인당 평균 106억 원씩이니 이들이 얻은 경제적 이득이 막대하다. 그 피해자만 3000명이 넘는다. 전세사기를 예방하겠다며 악성 임대인 명단을 공개하고도 국토교통부나 지방자치단체는 임대사업자 취소 같은 후속 조치를 제때 하지 않았다. 명단을 공개했으니 알아서 조심하라는 ‘일하는 척하는’ 행정이다.
▷지난 3년간 전세 보증금을 반환하지 않아 임대사업자 자격이 취소된 건 7명에 불과하다. 악성 임대인 명단에 이름을 올리려면 떼어먹은 전세 보증금이 3년간 2건 이상, 2억 원 이상이고 채무 상환 의지가 없음을 확인해야 한다. 이처럼 악성 임대인 지정까지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데 임대사업자 자격을 취소시키려면 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임차보증금 반환 소송에서 세입자가 승소했거나 주택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 조정이 성립했는데도 반환하지 않는 경우 등으로 한정돼 있다. 세입자 스스로 전세사기를 당했음을 입증하는 절차를 거치고 나서야 임대사업자 등록을 취소시킬 수 있는 구조다. 엄격한 규정이 피해자를 보호하기보다 재량과 책임을 줄여 공무원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HUG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 사고액은 2조6500억 원을 넘어섰다. 지난해 동기 대비 사고액이 43%나 폭증했다. 전세사기로 빌라 기피 현상이 뚜렷해진 데다 집값이 정점이던 때 계약한 빌라, 연립 등에서 역전세난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전세금 반환 보증보험 금액을 올리고 가입 대상을 늘리는 등 섣부르게 전세 시장에 개입했던 대가를 이제사 호되게 치르고 있는 셈이다.
▷나랏돈이 아니라 내 돈을 떼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뻔히 갚지 않을 돈을 빌려주거나, 버젓이 임대 사업을 계속하도록 하면서 세제 혜택까지 줄 수 있을까. 이러니 호텔 가서 밥 먹고, 차를 몇 대씩 굴리는 악성 임대인을 마주치고 사기를 당한 세입자들이 가슴을 친다. 악성 임대인의 임대사업자 자격이 유지되는 동안 어떤 세입자가 추가로 피해를 당할지 모를 일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7-19 공무원 10명 중 3명 ‘조용한 사직’ 상태

공무원을 흔히 ‘공복’이라고 하지만 요즘 젊은 공무원들은 스스로를 ‘공노비’라고 자조한다. ‘복(僕)’이 종이나 머슴을 뜻하니 차이가 없는 것도 같지만 어감은 완전히 다르다. 공복은 국민에 대한 봉사자이지만 공노비에겐 보람과 사명감이 없다. 박봉에 업무는 과중하고 악성 민원에 시달리기 일쑤다. 경직적 조직문화에 자율성을 발휘하기도 쉽지 않다. 힘들다고 하소연하면 ‘누칼협(누가 칼 들고 공무원 하라고 협박했나)’이라는 비아냥만 돌아온다.
▷한국행정연구원이 중앙행정기관 공무원 1021명을 대상으로 가치관 조사를 한 결과를 연세대 행정학과 연구진이 추가로 분석해 보니 공무원 10명 중 3명은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 상태인 것으로 조사됐다. 실제로 사직은 하지 않으면서 최소한의 업무만 하겠다는 태도로 자리만 지키는 것이다. 응답자의 32.52%(332명)가 ‘조직이 원하더라도 추가적인 직무를 맡을 용의가 없다’고 했다. 일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을수록, 연령이 낮을수록 조용한 사직 가능성이 높아졌다.
▷최근 공직사회는 박봉과 악성 민원, 낡은 조직문화 등으로 크게 위축된 상태다. 올해 9급 초임(1호봉) 공무원의 월평균 급여액은 222만2000원(세전)으로, 주휴수당을 포함한 월 최저임금보다 16만 원 많은 수준이다. 하루에만 평균 100건씩 생기는 악성 민원에 시달려 극단적 선택을 하는 공무원까지 나왔다. 선망의 대상이던 공무원의 인기는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 올해 국가공무원 9급 공채 시험 경쟁률은 21.8 대 1로, 1992년 이후 32년 만에 가장 낮았다. 재직 기간이 5년이 안 된 공무원 퇴직자는 지난해 1만3566명으로 5년 만에 2.4배로 늘었다.
▷조직문화는 무기력을 학습시킨다. 한국행정연구원이 공직을 떠난 청년들에게 물어보니 국민의 삶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공직 문을 여는 순간 깨졌다고 했다. 갓 배치되자마자 인수인계도 없이 수억 원의 예산 편성을 떠넘기며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순환보직으로 1, 2년 뒤 다른 자리로 옮기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반복됐다. 능력 있으면 보상과 대우가 좋아지는 게 아니라 업무 부담만 늘어났다.
▷고위 공무원들도 다르지 않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극단을 오가는 정책 기조에 따라 눈치를 봐야 한다. 일을 열심히 하면 직권남용, 안 하다간 직무유기가 될 수 있다. 소신과 적극 행정은 접고 적당히 소극 행정을 하는 게 안전하다는 보신주의가 몸에 밴다. 직원들이 잠재적 퇴사 상태인 회사의 미래가 밝을 수 없다. 젊은 인재들은 공무원 되기를 꺼리고, 기존 공무원들은 자리만 지키려는 분위기에서 국가 행정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7-20(토) 사퇴 궁지 몰린 바이든… ‘실기’ 누구 때문일까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공화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어제, 진짜 관심은 11월 대선에서 트럼프의 상대가 누구냐였다. 현재로선 당연히 조 바이든 대통령이다. 하지만 세 번째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고 백악관 밖에서 치료 중인 81세 바이든은 후보직 포기를 강하게 압박받고 있다. 민주당의 대모 격인 낸시 펠로시 전 하원의장이 총대를 멨고,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돌아선 것 같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젠 백악관 참모들까지 ‘결심 임박설’을 말하고 있다.
▷1968년 린든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 전쟁 여론 악화를 이유로 중도 하차한 전례가 있기는 하다. 다만, 3월 말 결단이었다는 점에서 대선이 100여 일 앞으로 닥친 올해는 사정이 다르다. 그래서 묻게 된다. 왜 백악관은 당연해 보이는 불출마 가능성을 미리 준비하지 못했던 걸까. 1년 전 여름 바이든은 충분히 노쇠해 있었다. 프롬프터 없는 연설에선 논리정연함도, 단단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바이든을 좋아하는 이들의 불출마 촉구가 그때부터 터져 나왔다.
▷백악관 참모들은 감추기에 급급했다. 바이든은 번번이 걸려 넘어졌고, 이름을 헷갈렸다. 그럴 때면 대통령의 일정과 카메라 노출을 줄였다. 참모들은 올봄까지도 “내부 회의 때 바이든은 날카롭고, 디테일에 강하다. 그걸 몰라준다”며 방어벽을 쳤다. 라디오 인터뷰에 응하면서 앵커에게 질문을 미리 제공한 것이 드러난 최근 해프닝도 보좌 실패의 작은 사례다. 바이든 곁 참모들이 진실을 가리면서 바이든은 궁지에 몰렸고, 민주당은 경선을 준비할 시간을 잃었다.
▷언론도 제 역할이 미흡했다. 한국계인 특별검사 로버트 허가 올 2월 “바이든은 기억력 나쁜 노인”이라고 보고서에 썼다. 5시간 대면 조사의 결과였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는 “특검 발표는 새로울 게 없다”는 제목의 사설을 썼다. 그러면서 “바이든은 원래 말을 더듬지 않느냐”며 의미를 평가절하했다. 6월 말 첫 TV 토론 직후 “바이든은 후보에서 물러나라”는 사설을 쓴 뉴욕타임스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동안 건강 상태를 지적했지만 “문제없다”는 백악관 반론을 매우 충실히 싣는 바람에 독자는 판단이 어려웠다.
▷바이든이 만약 7월 중 물러나더라도 실기(失機)했다는 지적은 피하기 어렵다. 가장 큰 책임은 대통령 본인 몫이다. 그는 닷새 전 NBC 인터뷰에서 “여전히 출마한다”고 했는데, 정확한 현실 진단을 못 하고 있었다. 남편에게 큰 영향력을 지녔다는 질 여사도 남편의 명예를 지키는 방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바이든은 출마를 강행해 트럼프를 이기거나, 깨끗이 양보해 민주당 후보가 승리할 환경을 만들어야 했다. 원래 남의 바둑 훈수는 쉬워도, 자기 수는 안 보이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좋은 훈수꾼이 곁에 없었다. 남 탓 할 일이 아니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7-22(월) 서울은 ‘불장’ 조짐, 지방은 ‘미분양’ 적체… 양극화 심화되나

서울 아파트 가격이 슬금슬금 오르며 ‘불장’ 조짐을 보이지만 지방 주택시장은 여전히 냉기가 돈다. 최근 전국 아파트 평균 가격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서울 아파트 한 채(12억9967만 원) 가격이 지방 아파트 3.7채 값이다. 10년 전만 해도 지방 아파트 두 채면 서울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었다. ‘서울 입성’이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
▷서울과 지방 부동산의 ‘초양극화’ 현상은 분양 시장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른바 악성 미분양으로 분류되는 준공 후 미분양은 5월 말 기준 1만3230채로 최근 10년간 최대치를 기록했다. 지방이 80%를 차지한다. 공사가 끝난 뒤 사용 승인이 나고도 안 팔린 아파트를 떠안은 건설사는 프로젝트파이낸싱(PF)으로 조달한 자금을 갚을 수 없다.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도산이라도 하면 가뜩이나 침체된 지역 경제에 이런 악재가 없다. 올해 상반기 부도를 맞은 건설사는 20곳으로 이미 지난해 1년 치 수준과 맞먹는다.
▷도산 위기에 직면한 지방 중소 건설사들은 원금 보장, 할인 분양 등 ‘미분양 떨이’로 유동성 확보에 나서고 있다. 전국 시도에서 미분양 물량이 가장 많은 대구의 경우 전체 분양가의 15%를 깎아주고 2500만 원을 환급해 준다는 아파트가 등장했다. 이 아파트는 입주 2년 후 시세가 떨어지면 원래 매입 가격에 다시 사 주겠다는 약속도 내걸었다. 기존에 분양받은 입주민들과의 갈등도 심해지고 있다. 할인 가격에 분양받은 입주민의 이사를 막으려고 정문을 지키거나 아예 철조망을 두른 곳도 있다. 할인 분양받은 입주민에게는 관리비를 비싸게 물리기도 한다.
▷지방 미분양 재고가 좀처럼 줄지 않는 현상은 고금리로 집 살 사람은 줄었는데 분양가는 높게 책정된 탓이 크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며 치솟은 자재값, 임금 등이 분양가에 반영됐다. 건설사의 자구 노력도 부족했다. 정확한 수요 예측 없이 아파트부터 지었고 원가 절감을 통해 상품성을 높이려 하지 않았다. 수요가 몰리는 서울은 그 격차가 덜하지만 지방 아파트 분양가는 매매가보다 ㎡당 평균 163만 원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 서울의 똘똘한 1채로 투자 쏠림이 더욱 심해지면서 지방 건설업 생태계는 무너지기 직전이다. 지방 곳곳에 철근을 드러낸 채 공사가 멈추거나 입주가 지연되는 아파트가 늘고 있다. 자금력이 달리는 지방 중소 건설사와 그 협력업체들이 줄도산 위기에 처해 있고 인근 상권들도 맥을 못추고 있다. 서울과 지방 주택 시장의 초양극화가 심화하면 지방의 박탈감이 커지고 지방 소멸은 가속화할 우려가 크다. 서울과 지방의 부동산 정책을 달리 쓰는 세심함이 필요한 시기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7-23 ‘아침이슬’ 남기고 떠난 김민기

‘이날까지 그처럼 결 좋은 인간을 만나 본 적 없다.’ 2007년 동아일보에 실린 ‘내 마음속의 별’ 시리즈에서 가수 조영남은 21일 세상을 떠난 고 김민기를 자신의 스타로 꼽았다. 바로 그런 이유였다. 돈 있는 친구를 불러 술이라도 사면 벼락같이 화를 냈을 만큼 “어설픈 돈 자랑, 힘자랑을 싫어한다. 바른 결을 타고났다”고 했다. 고인의 삶을 한 단어로 응축한다면 그의 말처럼 ‘좋은 사람’ 아닐까.
▷1970년 서울대 미대 재학 중에 만든 노래 ‘아침이슬’이 군사정권 시절 광장의 노래로 불리기 시작했다. ‘아침이슬’이 금지곡이 되고 고인은 정보 당국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그가 다시 노래를 부른 건 생계를 위해 취업했던 피혁 공장의 동료 노동자들을 위해서였다. 그가 노동자 합동결혼식의 축가로 만든 곡이 ‘상록수’다. 현실을 노래할수록 그는 시대의 한가운데로 소환돼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1970, 80년대 저항의 상징이었지만 그는 정작 “제 노래를 싫어한다”며 부르지 않았다. 음악을 사랑한 젊은 날, 음악으로 시려웠던 젊은 날. 그 시절에 대한 애증이 묻어난다.
▷1991년 ‘저항의 상징’이라는 틀을 깨고 소극장 학전을 개관하며 연출가로 변신했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 공연되는 29년 동안 국내 창작뮤지컬 시장이 성장했고, 현재 영화계 주역인 배우들이 배출됐다. 배우들과 투명하게 수익을 나누는 등 공연계의 악습도 바꿔 나갔다. “소극장은 농사로 치면 못자리 농사”라더니 고인은 걸출한 농사꾼이었다. 그가 33년간 고집스레 지켜 온 학전은 지금 만개한 우리 문화예술의 못자리였다. “내가 뭐라고 이름을 남기겠나”라고 했지만 빈소에는 마치 부모를 잃은 것 같다며 흐느끼는 문화예술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3월 문을 닫은 학전 경영이 어려워진 건 2004년 ‘우리는 친구다’를 시작으로 수익이 되지 않는 어린이 공연을 꾸준히 올렸던 때문도 있다. 아이들이 웃는 모습이 좋다며 자주 공연을 관람했다고 한다. 고인은 야학에서 달동네 아이들을, 공장에서 어린 노동자를 가르칠 적부터 “우리의 미래인 어린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들여다봐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해 왔다. 민중가요 가수와 어린이극 연출자, 평생 자신보다 타인의 아픔을 견디기 어려워했던 고인이었기에 그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었을 것이다.
▷때론 가혹했을 세상에 고인이 남긴 마지막 말은 “그저 고맙다”였다고 한다. 배우들을 향해 “나는 뒷것, 너네들은 앞것”이라며 빛나기를 거부했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가지고 뭘 안 해도 된다”며 뒷것을 자처했고 가족과 지인에게는 “고맙다. 나는 할 만큼 다 했다”는 말을 남겼다. 김민기. 향년 73세. 좋은 사람으로 살았기에 고단했을 그의 평안을 기원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7-24 아빠찬스’로 63배 수익… 대법관 후보 딸의 기막힌 재테크

이숙연 대법관 후보자가 신고한 재산은 본인 46억 원, 로또복권 운영사 대표인 남편 117억 원가량이다. 국회에 제출한 임명동의안에 ‘무직’이라고 써낸 이 후보자의 26세 장녀는 서울 용산구 재개발구역에 다세대주택을 갖고 있다. 딸은 2년 전 학생 신분으로 별다른 소득이 없는 상태에서 전세를 끼고 7억7000만 원에 이 집을 샀다고 한다. 전세보증금을 뺀 5억1000만 원 중 3억800만 원은 아버지에게 증여받고, 2억200만 원은 아버지에게 빌려서다. 이른바 ‘아빠 찬스’로 재개발 호재를 노린 ‘갭 투자’를 한 셈이다.
▷딸은 1년도 되지 않아 아버지에게서 빌린 돈을 모두 갚았다. 현금 대신 스타트업의 비상장주식을 넘기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비상장주식을 매입하는 과정에도 아빠 찬스가 동원됐다. 이 스타트업은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던 직원이 퇴사해 2017년 설립한 화장품 연구개발 기업인데, 아버지 조모 씨가 초기 투자자로 참여했다. 당시 딸도 아버지 추천으로 주식 800주를 1200만 원에 사들였다. 300만 원은 본인이 저축한 돈이고, 900만 원은 아버지에게 증여받았다.
▷지난해 5월 딸은 보유 주식의 절반인 400주를 아버지에게 3억8529만 원에 팔았다. 매수 당시 주당 1만5000원이던 주가가 6년 만에 96만 원을 웃돌며 63배 넘게 뛴 셈이다. 엄청난 시세차익으로 발생한 7800만 원가량의 양도소득세도 아버지가 내줬다. 결론적으로 딸은 자기 돈 300만 원만 들여 주식 투자로 3억8000만 원 넘게 벌고, 이걸로 부동산 갭 투자 하면서 아버지에게 빌린 돈을 퉁친 셈이다.
▷주식 매도 가격은 해당 스타트업이 투자 유치를 받았을 때의 시가를 따랐고, 딸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과정에서 빠짐없이 증여세를 납부했다는 게 이 후보자의 설명이지만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 마음은 씁쓸하다. 불법이나 위법은 아니지만 고위 법조인들이 ‘엄빠 찬스’ 등을 이용해 경제력 없는 자녀에게 편법 증여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어서다. 얼마 전 취임한 오동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도 국회 인사검증 과정에서 20세 딸이 증여받은 3억 원으로 재개발을 앞둔 어머니 명의의 땅을 헐값에 산 게 드러나 공분을 샀다.
▷오 처장의 딸은 아버지가 소개한 법무법인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3700만 원을 벌었는데, 이 후보자 딸 역시 지분 투자한 스타트업에서 아르바이트와 인턴을 했다고 한다. 이 후보자는 딸의 주식 매입 자금 중 400만 원이 직접 모은 돈이라고 했다가 300만 원이라고 말을 바꿨다. 대법관은 어느 공직보다 높은 도덕성과 준법의식, 청렴성이 요구되는 자리다. 이 후보자는 “편법 표현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지만, 남의 잘못을 심판하는 법관의 ‘꼼수 증여’가 판칠수록 사법부에 대한 국민 불신은 높아질 뿐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7-25 반려견 유치원비보다도 싼 대학 등록금

“반려견 유치원비보다 대학 등록금이 싸다”는 말이 있었는데, 거짓이 아니었다.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 조사 결과 지난해 4년제 사립대의 연간 등록금은 평균 약 732만 원이고, 월평균으로 환산하면 61만 원이었다. 한데 반려견을 위탁업체에 맡기는 비용이 월 60만∼90만 원이어서 대학 등록금과 비슷하거나 더 비쌌다. 등록금은 영어유치원(월 174만 원) 사립초(76만 원) 사립국제중(106만 원) 자사고(75만 원) 고교생 사교육(74만 원) 등에 드는 비용보다 쌌다.
▷다른 물가는 다 오르는 동안 등록금만 제자리에 머무르거나 내렸기 때문이다. 사립대 평균 등록금은 2008년에도 738만 원이었다. 지난해까지 15년 동안 오히려 6만 원이 싸진 것이다. 국립대도 약 420만 원 선에서 거의 변화가 없었다. 해당 기간 소비자물가가 36.7% 올랐음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론 등록금이 2008년 대비 4분의 3 아래로 떨어진 셈이다. 정부가 등록금을 인상한 대학엔 국가장학금Ⅱ 지원을 하지 않거나 재정지원 사업에서 배제하는 방법으로 등록금 동결을 사실상 강요해 온 탓이다.
▷그만큼 학부모 부담은 줄었지만 문제는 등록금이 싸지면서 대학 교육의 질도 ‘비지떡’이 돼 간다는 데 있다. 국회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연구비 실험실습비 도서구입비 등 대학의 교육과 연구 예산이 모두 2011년 대비 18∼26%씩 감소했다. 대학이 구독하던 전자저널을 끊은 탓에 교수가 다른 대학의 아이디를 빌려 쓰는 건 심한 축에 들지도 않는다. 실험에 필요한 장비를 못 사서 대학원생이 장비가 있는 다른 대학까지 몇 시간을 오간다. 건물에서 비가 새도 고칠 돈이 없다. 교수 월급을 물가만큼도 올려주지 못하니 인재가 기업으로 빠져나가거나 중요한 연구를 제쳐두고 기업 과제에 목을 맨다.
▷저소득층 학생이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던 시절이라면 모르지만 이제 그런 사례는 많이 없어졌다. 국가장학금 제도가 확충되면서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 계층은 등록금 전액을 지원받을 수 있고, 그 밖에도 소득 구간별로 연 350만∼570만 원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 정부도 등록금 인상 필요성을 안다. 2022년 6월엔 교육부 당국자가 “정부 내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했으나 여전히 눈치만 보는 중이다.
▷정부가 장학금을 미끼로 등록금 인상을 규제해 대학의 등록금 책정 권한을 침해하는 건 법적 근거도 없다. 등록금뿐이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고등교육에 대한 공교육비 투자가 초·중등교육보다 더 적은 건 한국과 그리스, 콜롬비아뿐이다. 고등교육 투자가 멎은 가운데 우리 대학의 경쟁력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인적 자원밖에 기댈 것이 없는 나라가 무엇이 중요한지 잊고 있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07-26 터질 게 터진 티몬-위메프 사태

동남아 기반의 전자상거래 업체 큐텐이 한국에 이름을 알린 건 2022년 티몬을 인수하면서다. 국내 최초 오픈마켓인 G마켓을 만들어 미국 나스닥 시장에 상장시킨 ‘벤처 신화’의 주인공 구영배 대표가 싱가포르로 건너가 세운 회사다. 지분 교환을 통해 사실상 0원에 티몬을 사들인 큐텐은 거침이 없었다. 2년도 채 안 되는 시기에 국경을 넘나들며 위메프를 포함해 한국과 미국 전자상거래 업체 4곳을 더 사들였다.
▷몸집을 불려 큐텐의 물류 자회사를 나스닥에 입성시킨다는 게 구 대표의 구상이었지만, 업계에선 무리수라는 우려가 컸다. 인수한 업체들이 빈껍데기나 마찬가지여서다. 티몬과 위메프는 2010년 창립 이래 한 번도 영업이익을 낸 적이 없고, 심지어 자산보다 부채가 많은 자본잠식 상태였다. 최근엔 당장 현금이 들어오는 상품권을 과도하게 할인해 팔면서 심각한 자금난에 빠진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더해졌다.
▷우려는 결국 현실이 됐다. 티몬과 위메프가 이달 들어 판매자들에게 대금 정산을 못 하고 있다. 두 쇼핑몰에 입점한 판매업체는 6만여 곳인데, 정산받지 못한 돈이 최소 1700억 원이 넘을 거라고 한다. 티몬·위메프는 소비자가 결제하면 대금을 자체 보관했다가 최대 두 달 뒤에 판매자에게 지급하는 방식을 써 왔다. 다른 이커머스 업체들이 배송 후 하루 이틀 내 정산해주는 것과 딴판이다. 이커머스의 정산과 대금 보관, 사용 등과 관련해 법 규정이 없는 틈을 노려 두 회사가 결제대금을 자기 돈처럼 ‘돌려막기’식으로 운용해 오다 사달이 난 것이다. 큐텐이 인수 과정에 결제대금을 끌어다 썼다는 얘기도 나온다.
▷월 거래액이 1조 원 넘는 티몬·위메프의 정산 지연은 소비자 피해로 이어지고 있다. 휴가철을 앞두고 두 쇼핑몰에서 항공권, 숙박권 등을 산 소비자들은 줄줄이 구매가 취소됐다. 휴가를 망친 건 둘째 치고 결제한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결제대행업체들이 티몬·위메프와 거래를 끊은 탓에 신용카드 신규 결제는 물론이고 기존 결제를 취소하는 것도 막혔다. 두 쇼핑몰이 할인 판매한 상품권을 받지 않는 곳도 늘고 있어 돈을 날릴 처지다. 어제 새벽부터 위메프 본사는 환불받으려는 소비자들로 아수라장이 됐다.
▷두 회사는 결제대금을 자체 보관하지 않고 제3의 금융기관에 맡겼다가 구매 확정 시 곧바로 지급하는 정산 시스템을 다음 달 도입하겠다고 한다. 판매대금을 제때 받지 못해 도산을 걱정하는 영세 판매자들에겐 한가하기 짝이 없는 대책이다. 티몬은 4월 마감이었던 지난해 감사보고서를 여태 제출하지 않았는데, 아무런 제약 없이 영업해 온 게 의아할 따름이다. 이번 사태는 허술한 법·제도 아래서 폭풍 성장한 이커머스 시장의 거품이 터지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7-27(토) “檢조사에서 ‘국민들에 죄송하다’ 말했다”… 명품백 ‘전언사과’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명품백 수수 사건에 대해 사과한 일이 뒤늦게 공개됐다. 김 여사는 지난 주말 대통령경호처 별관으로 출장조사를 하러 온 검사들에게 “이런 자리에서 뵙게 돼 송구스럽다”며 “심려를 끼쳐 드려 국민들에 죄송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검사 앞에서 한 이른바 ‘대국민 사과’는 대통령실 공식 채널이 아니라 현장에 있던 변호사가 25일 신문사 유튜브에 출연해 공개했다. 4월 총선과 국민의힘 전당대회의 뜨거운 이슈였던 김 여사의 명품백 관련 첫 사과였으나, 형식도 어색한 전언(傳言) 사과가 돼 버렸다.
▷수사 때 입회 변호사는 인터뷰에서 “제가 공식적으로 말하는 게 부적절할 수 있다”면서도 준비한 메모를 확인해 가며 답했다. “김 여사가 사죄를 하고 싶어도 정무적 판단을 거쳐야 해 사죄를 쉽게 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런 마음이 진심이라는 거는 말씀드리고 싶다”고 했다. 김 여사의 동의 없이는 할 수 없는 말이다. 해당 변호사는 얼마 전까지 용산 대통령실에서 법률비서관실 소속 행정관으로 일했다. 서울의소리 7시간 전화 녹취 사건 등에서 김 여사를 변호해 왔다.
▷명품백 사건은 ‘몰카 공작’이 분명하다. 하지만 현직 대통령의 배우자가 선물이라며 사진까지 미리 보내온 300만 원 상당의 명품백을 받은 것은 충격적이다. 게다가 용산의 해명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처음엔 “대통령기록물이라 돌려줄 수 없어 보관해 왔다”고 설명하다가, 최근엔 “김 여사가 돌려주라고 지시했으나 실무자가 깜빡 잊었다”고 했다. 온 나라를 뒤흔든 명품백 수수 동영상이 공개된 지 8개월이 지나는 동안 김 여사는 침묵했다. 이런 중대 사안을 뒤늦게 변호인이 당사자의 사과를 갈음하는 듯이 불쑥 공개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김 여사의 변호사는 유튜브 방송 내내 일방적 방어논리만 폈다. 김영란법으론 처벌이 불가능했고, 서면조사로도 충분하지만 12시간 수사에 협조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주가조작 수사가 본 수사였던 만큼 명품백은 시간이 남으면 조사받기로 했다는 설명에선 ‘검찰총장 패싱 논란’을 잠재우려는 의도가 역력했다. 장황한 변명은 이어졌지만 정작 국민이 궁금해하는 명품백을 어떻게 처리했고, 앞으로 어떻게 수사받고 국민 앞에 어떤 설명을 내놓을 것인지는 쏙 빠졌다.
▷김 여사의 이번 ‘전언 사과’는 그 적절성도 문제지만, 사과로서의 효과가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 장면은 4월 총선 패배 후 있었던 ‘윤석열 대통령의 사과 논란’과 비슷한 점이 많다. 당시 대통령은 “민심을 더 받들겠다”는 사과의 말을 비공개 국무회의와 참모회의 때 했다가 거센 비판을 받았다. 결국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열어 다시 공개 사과했다. 사과는 내용 못지않게 형식도 중요하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7-29(월) 혁명적 올림픽 개회식

지금까지 이런 올림픽 개회식은 없었다. ‘물 위의 개회식’이라는 형식부터 파격이다. 단두대에 머리가 잘린 마리 앙투아네트가 노래하고, 여장 남자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하며, 남성 여성 성소수자 3명의 결혼식이 연출됐다. “개회식의 새 지평을 열었다.” “역대 최악의 무례한 개회식이다.” 올림픽 개회식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갈라진 적도 드물다. 1900년, 1924년에 이어 100년 만에 다시 열린 프랑스 파리 여름올림픽이 시작부터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번 개회식은 센강을 중심으로 파리 전체를 무대 삼아 펼쳐졌다. 206개국에서 참가한 선수들이 에펠탑 근처 광장까지 6km 구간을 85척의 배를 타고 입장하는 동안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한 파리의 명소 곳곳에서 2000명의 예술인들이 발레, 캉캉, 뮤지컬, 패션쇼 등을 선보였다. TV 시청자들은 선수단 입장 사이사이 화려한 쇼와 영상을 한눈에 즐길 수 있었지만 현장에 있던 관중은 개회식의 일부만을 지켜봤을 뿐이다. TV 속 이미지가 더 진짜 같다는 점에서 ‘보드리야르적인’ 개회식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내용도 ‘개최국의 역사와 문화 홍보’라는 통념을 깨는 것이었다. 헤비메탈 밴드와 합창단이 협연한 프랑스 혁명의 노래 공연이 대표적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가두었던 파리 최초의 형무소에서 펼쳐졌는데 머리가 잘린 왕비 분장을 하고 나와 합창하고, 형무소 창문 밖으로 붉은 색종이 피가 분출되는 장면은 19금 영화처럼 기괴하고 전위적이었다. 여장 남자들의 ‘최후의 만찬’ 패러디는 가톨릭계로부터 “역겹고 경박한 조롱”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행사 막바지 성화 주자 중에는 프랑스 축구 영웅 지네딘 지단과 함께 스페인 테니스 스타 라파엘 나달, 미국의 테니스 선수 세리나 윌리엄스와 육상의 칼 루이스, 루마니아 체조 전설 나디아 코마네치가 포함됐다. 개최국 스타만이 성화 주자로 등장하는 고정관념을 깬 시도에 대해서는 ‘포용적’이라는 호평이 나왔다. 개회식 마지막 희귀병을 앓고 있는 캐나다 가수 셀린 디옹이 ‘사랑의 찬가’를 열창하는 장면은 논쟁적 행사에서 드물게 보편적 감동을 주는 순간이었다.
▷파격의 개회식을 놓고 프랑스 내부 평가도 “환상적이다” “자기 비하적이다” 등으로 엇갈린다. 한 프랑스 작가는 “자부심의 역사를 기념하는 순간 혁명의 끼가 발동했다. 저급한 취향과 고급스러움, 노골적 유머와 진보적 깨어있음이 뒤섞여 논쟁을 유발하는 혼란의 도가니는 프랑스 정신의 완벽한 구현”이라고 평가했다. 이쯤 되면 오륜기가 거꾸로 걸리고, 한국을 북한으로 소개한 실수도 프랑스적으로 보인다. 파리의 레전드급 개회식에 다음 개최 도시인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고민이 깊어질 듯하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7-30 강제동원’ 빠진 日 사도광산… “韓 정부 합의” 논란

일본 정부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니가타현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전시관을 마련했는데, 제목에서부터 왜곡된 역사 인식이 드러난다. 전시 제목은 ‘조선반도(한반도) 출신자를 포함한 광산 노동자의 생활’. 일본 정부는 원래 강제동원 피해자를 ‘징용공’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피해자의 소송이 잇따르자 동원의 강제성을 희석하기 위해 2018년부터 용어를 ‘구(舊)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로 바꿨다. 그런 용어를 버젓이 쓴 것이다.
▷전시 세부 설명엔 ‘징용’이 나오고, ‘관 알선’ ‘모집’에 총독부가 관여했다는 걸 담긴 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강제동원’ ‘강제노동’ 표현은 빠졌다. 징용과 강제동원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맥락이 확연히 다른 말이다. 일본이 ‘당시 한반도가 일본 영토였고, 전쟁 중 자국민 징용은 강제노동이 아니다’라며 징용도 합법적이라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선 일본 정부 대표단이 “한국인 등이 자기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강제 노역했다”고 인정한 2015년 하시마(일명 군함도) 탄광 등의 등재 때보다도 오히려 후퇴한 셈이 됐다.
▷일본 언론 보도에 따르면 ‘강제노동’ 표현을 안 넣는 걸 우리 정부가 합의해줬다고 한다. ‘해당 문구 대신 상설전시를 하고, 한반도 출신자가 1500명 있었고, 노동환경이 가혹했다는 걸 소개하겠다’는 일본 측 제안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한일이 내년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앞두고 새로운 불씨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작용했다”고 한다. 반면 우리 외교부는 사전합의가 “사실무근”이라며 부인하고 있다. “강제성 표현 문제는 2015년에 정리됐고, 이번엔 협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 언론이 오보를 낸 것이 아니라면 한일 양국 정부 어느 한쪽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외교를 과학처럼 하려고 하면 경직될 수밖에 없다”(헨리 키신저)지만 이번처럼 한쪽이 명백히 국민을 속이는 사안은 따지고 들지 않을 수 없다. 외교부 당국자는 6월 “우리 입장이 충분히 반영됐다고 판단하면 정부는 컨센서스(전원 동의) 형성을 막지는 않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우리 입장’엔 강제동원 명기가 있었나 없었나.
▷강제동원 명기를 요구하지 않았다면 그것대로 문제다. 하시마 탄광과 사도광산 등재는 별개 사안이다. 더구나 일본은 하시마 탄광 역시 ‘전체 역사를 알리겠다’는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 나아가 일본 정부 관계자가 ‘정부는 강제노동이 아니라는 입장’이라고 계속 언론에 흘리고 있다. 일제 징용은 국제노동기구가 1999년 이미 강제노동이라고 인정한 사안이다. 관계 개선도, 미래 지향도 무엇보다 올바른 역사인식이 바탕이 돼야 한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07-31(수) ‘크루즈’ 믿고 고속도로 달리다 ‘쿵’, 올해만 9명 사망

최근 한 유튜브 채널에는 버스 기사가 고속도로에서 경험한 황당한 목격담이 소개됐다. 고속도로 1차로를 달리고 있는데 앞에서 신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 비틀비틀 저속 주행하고 있었다. 상향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주의를 줬지만 변화가 없었다. 차로를 바꿔 추월하면서 살펴보니 운전자는 주행보조 시스템을 켜놓은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최근 들어 주행보조 기능만 믿고 운전을 태만하게 하다 사고를 유발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운전자들이 장거리 주행 때 즐겨 활용하는 대표적 주행보조 장치가 ‘크루즈 컨트롤’로 불리는 ‘적응형 순항 제어 기능(ACC)’이다. 전방 차량을 인식해 앞차와의 거리를 유지하고, 운전자가 설정한 속도로 주행하게 도와준다. 자율주행 1∼5단계 중 2단계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제조사마다 현대차·기아는 SCC(스마트크루즈), 일본 도요타는 DRCC(다이내믹 레이더 크루즈), 미국 테슬라는 AP(오토 파일럿) 등으로 명칭이 다양하다.
▷운전자들이 ACC에 지나치게 의존해 전방 주시를 게을리하다가 돌발 상황에 대응하지 못해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2020년부터 올해 7월까지 고속도로에서 ACC 이용 중 19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해 17명이 사망했다. 올해에만 8건의 사고로 9명이 숨졌다. 5월 호남고속도로에서도 교통사고 현장 관리 중이던 한국도로공사 순찰차를 뒤따르던 승용차가 추돌해 공사 직원이 사망했는데, 가해 차량이 ACC 작동 상태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ACC는 건조한 노면과 평지, 일반적인 중량을 기준으로 설정돼 있기 때문에 비나 눈, 안개와 같이 기상 상황이 좋지 않은 경우 카메라와 센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젖은 노면에서는 제동 거리가 늘어나 앞차와의 거리 유지가 어렵다. 탑승자가 많아 차량 무게가 늘어난 경우나 내리막길, 굽잇길에서도 사고가 발생할 위험이 크다. 앞선 차량의 속도가 느리거나 정차한 경우, 공사 중이거나 사고 처리 중인 경우에 제때 속도를 줄이지 못해 추돌할 수 있다. 사용 설명서에 적힌 인식 제한 상황을 미리 확인해야 한다.
▷미국 고속도로안전보험협회(IIHS)와 고속도로사고데이터연구소(HLDI)가 보험 데이터와 사고 기록을 분석해 보니 주행보조 시스템을 장착했다고 해서 충돌 보상 청구율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감소하지 않았다. IIHS는 “주행보조 시스템이 거짓된 안정감을 주고 지루함을 유발해 운전자가 집중력을 잃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안전기능이 아닌 전동 창문이나 열선 시트 같은 편의기능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결국 안전 운전을 책임지는 것은 운전자 자신임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