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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12/ 〈111회〉이제 사법부의 시간: 변방의 중국몽 <29회> - 〈120〉"유신의 아이들"이 "김일성의 아이들"로 거듭났던 까닭은? 변방의 중국몽 <38회>

상림은내고향 2024. 7. 6. 18:10

송재윤의 슬픈 중국12/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조선일보 2024

2024.04.27

〈111회〉이제 사법부의 시간: 3권분립이냐? 중국식 권력 집중이냐?

변방의 중국몽 <29회>

▲제22대 국회의원 선거투표일 (4월 10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종합체육관 개표소에 투표함이 도착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한민국 제22대 국회의원선거 결과는 기묘하게 민심을 왜곡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총투표수의 50.5%를, 국민의힘은 45.1%를 득표했다. 두 당의 득표 차이는 5.4%에 불과하지만, 지역구의 의석수 차이는 161 대 90으로 1.8배 차이로 벌어졌다. 게임의 규칙대로 나온 결과이므로 합법성을 의심할 순 없다. 다만 이번 선거로 결정된 압도적 여소야대의 국회 구성이 민심을 공정하게 반영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의석 배분을 보면, 총투표자 중에서 지역구 민심 범야권의 53.23%(진보당, 새로운 미래, 개혁신당, 녹색정의당 등 포함)의 의지는 192석으로 부풀려지고, 범여권 민심 45.1(+a)%의 의지는 여당의 108석으로 쪼그라들었기 때문이다.

 

반반으로 갈라진 민심, 압도적으로 기울어진 국회

승자 독식의 소선거구(Single-Member District) 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중대선거구제(Multi-Member District) 역시 민의 왜곡과 인구 저밀도 지역 소외 등의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제도의 수정과 보완만으로 민주주의가 절로 바로 설 리는 없다. 어떻게 제도를 고쳐 본들 정치꾼들의 협잡에 다수 유권자가 동조하면, 선거는 권력 집단의 당파싸움으로 전락하고, 민주주의는 농락당하고 만다.

 

범야권은 일단 게임의 법칙에 따라 국회의 2/3에 육박하는 압도적인 다수 의석을 차지했지만, 공익을 저버린 채 사당화의 길로 폭주한다면 의회 독재라는 오명을 벗을 수 없다. 헌법 정신과 국민의 공익을 저버리는 의회 독재는 민주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반민주적 망발(妄發)이다.

 

범야권은 승리에 들떠서 샴페인을 터뜨리기보단 반대편에서 그들의 구태와 막말과 범법과 내로남불을 규탄하고 질타했던 45.1%의 국민 앞에서 옷깃을 여미어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범야권 정치인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장악한 듯 경박하게 섣불리 “대통령 탄핵” 운운하고 있다. 다시금 음모와 술수로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탄핵하려 한다면 민주주의를 이용해 민주주의를 망가뜨리는 반민주적 행태이다.

 

그럼에도 다수당은 벌써 비대해진 권력에 도취하여 의회 독재의 단꿈을 꾸는 듯하다. 헌법 절차와 국회의 관례에 따라 민주주의를 구현하려 노력해야 마땅하거늘, 권력은 진정 이성을 교란하고 상식을 마비시키는 향정신성 약품과도 같은가 보다. 지역구 득표율로는 5% 이하의 차이로 양분된 민심이 희한하게도 여야 의석수에선 192석 대 108석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었다. 그 결과 한국 정치판에는 곧 의회 독재의 광풍이 몰아칠 듯하다. 의회 독재를 막는 방법은 무엇인가?

 

근대 정치이론가들은 의회 권력에 의한 다수 독재(tyranny of the majority)를 막기 위해서 엄격한 3권분립을 통한 견제와 균형을 입헌 민주주의의 생명으로 삼았다. “다수”를 선점하고, “국민”을 참칭(僭稱)하고, “민심”을 내세워 법치를 파괴하는 의회 독재와 대통령의 전횡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한국 정치도 다르지 않다. 의회 독재를 막기 위해선 행정부의 견책, 사법부의 견제, 그리고 시민사회의 비판 이상의 해결책이 있을 수 없다. 안타깝게도 한국 정치판엔 입헌주의적 견제와 균형은 아랑곳없이 민심만 내세우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여기는 유교 포퓰리즘의 망령이 떠도는 듯하다.

 

동아시아를 배회하는 유교 포퓰리즘의 망령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는 이미 여러 차례 서양식 입헌주의를 배격하면서 중국 인민을 향하여 “권력분립”과 “사법 독립”을 막야야 한다고 역설했다. 중국공산당은 권력분립 대신에 행정부와 입법부가 통일되는 “의행(議行) 합일”의 단일체 정부를 지향해 왔다. 헌법학에서는 이를 ‘회의체 정부(assembly government)’로 분류한다. 중국의 사법부 역시 중국공산당의 지도와 통제 아래서 이른바 “의법치국(依法治國)”의 임무를 완수하도록 요구받는다.

 

▲2021년 6월 28일,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식에서 시진핑 총서기는 “의법치국(依法治國)”을 선포했다. 의법치국은 “법에 의한 통치(rule by law)”로서 “법의 지배(rule of law)”와는 다른 개념이다. /Ng Han Guang/AP

 

인류의 보편 상식에 비춰볼 때 그러한 중국공산당의 통치 이념은 레닌주의 국가 통제이자 스탈린식 일당독재에 지나지 않는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무너진 정부는 권력자의 전횡을 막을 방도가 없다. 헌법의 임기 조항을 바꿔서 중공 내부 규범을 어기면서까지 3기 연임에 성공한 시진핑 정권을 세계 각국에서 일인 지배(autocracy)라 비판했던 이유가 바로 그 점에 있었다.

 

문제는 마오쩌둥이 그러했듯 시진핑 역시 민심(民心)을 내세워 일인 지배를 정당화한다는 점에 있다. 마오쩌둥은 표면상 공산주의 이념을 내걸고서 일인 지배를 완성했지만, 마오쩌둥의 권력은 단순히 스탈린 권력의 재판이 아니라 2천 년 중화 제국의 역사에 면면히 흐르는 유교적 포퓰리즘과 무관하지 않다.

 

▲2023년 3월 10일 시진핑 국가주석은 전국 양회(兩會)에서 100% 전표를 얻어서 국가주석 및 중앙군사위 주석으로 당선되었다. 이때 전국인민대표 리후이츙(李慧琼)은 “시진핑의 당선은 민심이 향하는 바”라며 “중국은 다시 시진핑의 영도 아래서 역사적인 성취를 이뤘다”고 말했다. /www.stheadline.com

 

유교적 포퓰리즘은 “민심이 곧 천심(民心即天心)”이란 명제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 온 유가 정치학의 제1 명제다. 같은 맥락에서 <<상서(尙書)>><태서(泰誓)>에 “하늘은 우리 백성을 통해서 보고, 하늘은 우리 백성을 통해서 듣는다(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는 명제가 등장한다. 이 구절은 문왕(文王)의 유지를 받든 무왕(武王)이 상(商)나라 최후의 폭군 주(紂)를 칠 때 수백 명 제후들을 규합하기 위해 들고나온 역성혁명(易姓革命)의 논리였다. 이성계(李成桂)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창건할 때도 바로 이 논리를 들고나왔다. 유가 전통의 혁명 이론은 그렇게 “민심=천심”이라는 테제 속에 압축돼 있다.

 

요즘에도 한국의 정치인들은 “민심은 곧 천심”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지극히 당연한 소리 같지만, 현실은 그보다 복잡하다. 인간 사회에서 민심은 계층, 소득, 지역, 세대, 성별 등의 다양한 이유로 사분오열되기 쉽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민심은 언제나 정권의 입맛대로 획일화된 외양을 띨 뿐그 속의 들끓는 민심은 표출되지 못한다. 이와 달리 다원화된 현대의 민주 사회에서 민심 분열은 자연스럽다. 민심이 거의 반반으로 갈라진 상황이라면 천심은 과연 어느 쪽 민심과 일치하는가? 재22대 총선처럼 양당에 대한 민심이 50.5% 대 45.1%로 갈려서 팽팽히 맞서는 경우가 정치 현실에선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다수결주의에 따라 무조건 조금이라도 다수를 차지한 세력이 국가권력을 독점하게 되면 바로 그 순간이 소수를 억누르는 다수 독재의 시작이다. 천심은 한쪽 민심만을 일방적으로 지지할 수 없다. 바로 그 점에 민심과 천심 사이의 풀리지 않는 긴장이 놓여 있다.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말은 여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정치적 수사일 뿐, 다수 독재의 정당화 논리가 될 수는 없다. 한국의 정치가들과 논객들이 섣불리 민심 운운할 때마다 유교 포퓰리즘의 망령을 느낀다면, 기우일까.

 

민심을 앞세운 유교 포퓰리즘은 전형적인 독재의 논리다. 역사상 모든 독재는 민심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1802년 프랑스 국민의 지지를 받아 종신 통령의 지위에 오른 나폴레옹은 1804년 국민투표를 발의하여 황제로 등극했다. 국민투표에서 그는 99.9%의 찬성을 끌어내어 직접 민주주의의 방법으로 황제 독재를 강화하는 마술적인 정치력을 발휘했다. 나폴레옹에게 국민투표는 민심의 이름으로 황제의 권력을 절대화하는 행정 절차일 뿐이었다.

 

1932년 11월 독일 총선에서 나치당은 의회(Reichstag) 의석의 33.1%만을 차지하면서 이전보다 세력이 다소 약해졌지만, 공산당은 16.9%의 의석을 점하면서 약진했다. 공산당의 권력 장악을 막기 위해서 독일의 보수세력은 나치당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고,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 1847-1934) 대통령은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그 후 2년 안에 히틀러는 의회를 해산하고 독일 제3제국을 창건하여 나치당의 수장으로서 3권을 독점했다. 그 결과 독일은 전체주의 국가로 전락하여 세계대전의 광기로 치달았다.

 

사법부는 할 일을 해야

이번 선거에서 192석을 차지한 그들이 어떤 세력인가? 바로 지난 총선에서도 압승하여 행정부와 입법부를 독점하고 사법부까지 시녀로 둔 것도 모자라 지방 권력까지 독점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바로 그 세력이 아니던가? 그들은 3권을 독점하고도 실정을 거듭하고 악법을 남발하고 내로남불을 일삼다가 정권을 잃었다. 국가권력을 거의 다 독점하고도 정권을 빼앗긴 바로 그 세력이 2년 만에 의회 권력을 계속 장악할 수 있게 되었지만, 두 명의 야당 지도자와 다수의 야당 당선인 앞에는 법의 심판이 놓여 있다.

 

1972년 11월 미 대선에서 선거인단의 96.7%를 싹쓸이한 압도적 승리로 재선에 성공한 리차드 닉슨 대통령은 결국 1년 반 만에 워터게이트 사건에 관한 사법부의 냉철한 판결 앞에 굴복하고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의 사법부가 행여나 의회 권력의 눈치를 보면서 법치를 포기한다면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그날로 사망을 고하고 만다. 그럼에도 총선 직후 한 유명한 법학자가 방송에 출연하여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은 야당 대표를 사법부가 처벌할 수는 없지 않겠냐는 의견을 태연스럽게 입에 올렸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와 입헌주의의 핵심인 3권분립을 깡그리 무시하는 반법치적 발상이며, 헌법 파괴적 망언이다.

 

▲대한민국 법원

 

총선은 인민 재판이 아니며, 선거에 참여하는 유권자 집단은 재판에서 유무죄를 결정하는 배심원단이 아니다. 선거의 승리가 어떻게 범죄자의 죄과를 씻어줄 수 있는가? 그럼에도 한국 사회에선 총선 승리가 사법부에 커다란 여론의 압박으로 작용하여 재판 중인 야권 지도자들이 무죄로 풀려나리란 전망이 우세한 듯하다. 입헌 민주주의의 사법부는 여론재판을 해서는 안 되지만, 지금껏 판사들은 여론 추이에 따라 춤을 추며 정치편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문제의 판결로 수많은 논란을 일으켜 왔기 때문이다.

 

지난 총선에서 대한민국의 민심은 사실상 50.5% 대 45.1%로 갈라졌다. 여론이 팽팽히 맞선 나머지 민심이 맞부딪혀 소용돌이를 일으킬 때, 사법부는 칼과 저울을 들고서 오로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해야만 한다(헌법 제103조). 사법부가 분열된 한쪽 여론에 휩싸여 스스로 법치를 포기한다면, 자유민주주의의 기획은 물거품이 되고, 주권자인 국민은 다수 독재의 폭정에 내던져진 노예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국민은 더 이상 사법부의 비극을 원치 않으며, 무엇보다 천신만고 끝에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의 쇠락을 좌시할 수 없다.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유교 포퓰리즘을 극복해야만 근대정치의 이상이 실현된다. 다수 독재의 야만을 법의 지배로 순치하는 문명의 이념이 자유민주주의이자 입헌 민주주의이다. 재판관 스스로 법과 양심에 따라 지혜와 용기를 발휘해야만 하는 사법부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자유주의 민주공화국의 성패(成敗)를 결정하는 진실의 순간이다. <계속>

 

〈112〉한국 정치를 망치는 주자학적 명분론

변방의 중국몽 <30회>

▲17세기 조선에서 노론(老論)의 영수로서 붕당 정치로 최고 권력을 휘둘렀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초상화. /공공부문

 

한반도를 배회하는 주자학의 망령

하나의 유령이 한반도를 배회하고 있다. 주자학(朱子學)이라는 유령이. 조선 왕조 500년 명실상부 국교(國敎)로 숭상되며 조선 지식층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주자학적 사유체계는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 곳곳에서 강력한 문화적 관성을 발휘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인 대다수는 주자학과 무관하다며 반발하겠지만, 문화란 핏속에 잠복하는 바이러스 같아서 의식 깊숙이 잠재돼 있다가 조건만 갖춰지면 사회심리학적 병증을 드러낸다.

 

중세 유럽인들이 초월적 절대자의 감시 속에서 기독교적 선악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듯, 중세 조선인들은 소중화(小中華)의 자의식 속에서 주자학적 이분법에 빠져 있었다. 주자학적 이분법이란 이 세상을 리(理)와 기(氣), 청(淸)과 탁(濁), 정(正)과 사(邪), 도심(道心)과 인심(人心), 군자(君子)와 소인(小人),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 등의 둔탁한 거대 관념으로 양분하는 사유 방식을 이른다.

 

주자학적 이기론(理氣論)은 표면상 우주적 섭리와 세상의 이치를 논구하고, 나아가 심성(心性)의 작용까지 설명하는 순수 철학(pure philosophy)처럼 보인다. 주자학 신봉자들은 우주적 진리를 밝히고 세상의 도리를 찾고, 인격적 완성을 도모한다는 구도(求道)·수행(修行)의 도학자(道學者)를 자처했지만, 역사의 현실을 탐구해보면 그러한 주자학적 대의(大義)는 공허한 수사에 머물렀음을 확인하게 된다. 주자학적 정치 담론은 아(我)와 적(敵)을 나누고, 군자와 소인을 가르는 파당적 근본주의로 흐르기 일쑤였다. 왜 그러한가?

 

주자학적 이분법, 성리(性理)의 파벌주의

주자학자들은 입버릇처럼 리와 기의 존재론적 통일(ontological unity)을 강조한다. 그들의 표현을 빌자면, “형이상(形而上)”의 리가 언제나 “형이하(形而下)”의 기에 내재해 있다. 기(氣)를 떠난 리(理)는 없고, 리 없는 기란 있을 수 없다. “리와 기는 서로 분리될 수도 없고(不相離), 서로 섞일 수도 없다(不相雜).”

 

화려한 언설과는 달리 실제 그들의 행적을 들춰보면, 주자학자들은 대개 리와 기를 수직적 상하 관계, 도덕적 우열 관계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정(正)과 사(邪), 선(善)과 악(惡), 군자와 소인의 거친 이분법으로 인간세(人間世)를 단순하게 재단(裁斷)했다. 그들은 삼라만상의 섭리를 논할 때는 리와 기를 아울러서 존재론적 일원론을 펼치다가 피아(彼我)를 갈라서 반대편을 적대시할 때면 리와 기를 양분하는 가치론적 이분법의 함정에 빠져든다.

 

바로 그런 단순한 이분법적 사유 구조에서 “나는 군자(君子)이고 우리는 군자당(君子黨)”이며, “남은 소인(小人)이고 그들은 소인당(小人黨)”이라는 주자학적 붕당(朋黨) 의식이 생겨난다. 주자학적 붕당 의식은 도덕적 우열 관계로 나와 남을 갈라치는 정치적 파벌주의다. 정치적 차이를 인간의 심성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성리(性理)의 파벌주의’라 부를 만하다. 성리의 파벌주의는 타협과 절충을 용납하지 않는 극한의 정쟁을 불러온다.

 

주자학이 발흥한 중국 송(宋)나라의 정치판이 이미 그러했다. 그 시절 당파싸움을 기록한 사관(史官)의 언어도 극단적 이분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에게 군자와 소인의 구분은 선인(善人)과 악인(惡人)의 구별, 나아가 성인(聖人)과 도척(盜跖)의 분별만큼이나 본질적인 인격적 이분법이었다. 인간 중에는 본질적으로 선한 존재가 따로 있고, 본성상 악한 존재가 따로 있다는 발상이었다.

 

가령 13세기 남송(南宋, 1127-1279)의 사대부 여중(呂中, 1247년 진사)은 북송(北宋) 말엽의 정치사를 단순명료하게 소인(小人)의 전성시대로 단정한다. 한 명의 역사가로서 그가 사용하는 극단적 포폄의 언어 속에 주자학적 선악 관념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가 선정한 각 사건의 표제를 살펴보자.

 

1. 소인이 군자를 공격하다(小人攻君子)

2. 소인이 나아가고 군자가 물러나다(小人進而君子退)

3. 소인이 국시를 어지럽히다(小人亂國是)

4. 소인이 되살린 법례를 폐기하다(小人廢復法例)

5. 소인이 잘못을 감추다(小人掩過)

6. 소인이 군자를 모함하다(小人陷君子)

7. 소인이 소인을 공격하다(小人攻小人)

8. 소인이 군자를 음해하고, 공의를 내세우는 척하다(小人害君子而自有公議在)

9. 소인이 태후를 무고(誣告)하다(小人誣太后)

(상세한 내용은 Jaeyoon Song, “History as Statecraft: Lü Zhong’s [fl. 1250s] Critique of State Activism,” The Journal of Song Yuan Studies 50 [2021]: 237-294 참조)

 

주자학의 신봉자로서 여중은 소위 도학적(道學的) 세계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는 북송의 역사를 군자와 소인의 투쟁으로 단순화한 후 나라가 망한 책임을 온통 일부 세력에게 100% 들씌우는 극단적 이분법, 단순한 포폄의 역사 기술을 이어갔다.

 

조선 주자학의 이분법적 세계관

남송 시기 한 주자학자의 역사관을 살펴보는 까닭은 그러한 극단적 이분법, 단순한 포폄의 세계관이 그대로 조선조 사대부의 의식 세계로 전이(轉移)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에서 주자학을 금과옥조로 삼았던 조선조의 사색(四色) 당쟁은 이념적 필연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군자-소인의 이분법에 근거한 주자학적 명분론은 권력을 쥐고 휘두르는 위정자들에겐 언제나 달콤한 유혹이다. 잘못된 정책으로 민생을 파괴해도, 엉터리 법안으로 국가 재정을 파탄 내도, 극렬한 당쟁으로 헌정사를 중단시켜도 본래 자신들의 의도는 순수했고 도덕적으로 옳다고 우겨댈 수 있는 자기 정당화와 이념적 변명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주자학적 명분론이란 현실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 도덕적 정당화의 논리를 의미한다. 비근한 예로 최저임금을 급격히 올린 결과 자영업이 무너지면서 실직률이 오르고 소득 양극화가 심화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해도 “소득주도성장” 이론이 원래는 옳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들, 원전 폐쇄가 화력발전을 늘려 오히려 온실가스를 증가시키는 역설을 보면서도 탈원전 정책이 무조건 정당하다고 우겨대는 환경론자들은 모두 주자학적 명분론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도덕적 판단의 근거가 현실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심성에 있다고 믿는 극단적 도덕주의(extreme moralism)의 사고방식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1637)의 수모를 겪은 후에도 수백 년간을 이미 망해 없어진 명(明, 1368-1644)나라 황제들에게 제사를 올리고, 겉으로는 고두(叩頭)의 예(禮)를 행하면서도 속으로는 만주족을 오랑캐라 낮춰보는 조선조 선비들의 처참한 ‘정신 승리’는 그들이 체화한 주자학적 명분론의 발현이었다. 구한말 유생들이 세계사의 흐름에 역행하여 문호를 걸어 잠근 채 “위정척사(衛正斥邪)”와 “파사현정(破邪顯正)”만 부르짖고 있었음도 우연이 아니다. 주자학적 이분법에 빠지면, 언제나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도덕-근본주의적 자의식에 빠져든다. 설혹 나의 정책이 현실정치에서 참혹한 실패로 귀결된다고 해도 나의 이념은 도덕적으로 무조건 옳다는 기묘한 자기 정당화의 논리가 생겨난다.

 

오늘날 한반도 남북한의 권력자들은 혹시 주자학적 이분법을 답습하고 있지는 않은가? 인류사 최악의 전체주의 노예 국가를 만든 북한의 김씨 왕조가 지금도 짐짓 당당하게 주체사상을 외치며 그 험악한 체제를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우기고 있는 부조리한 현실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또한 그런 김씨 왕조의 악마적 이념에 현혹당하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떠받들며 “남조선 해방 투쟁”에 청춘을 바쳤던 주사파 운동권의 헛된 자긍심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들은 현실의 결과에는 눈을 감고서 도덕적 정당성을 인간의 마음에서 찾는 중세적 몽매주의에 빠져 있었다.

 

최근 대한민국에선 고교생 딸을 국제학계에 등재된 최상급의 의학 논문 제1 저자로 만들어서 명문 사립대에 입학시킨 전직 국립대 로스쿨 교수가 2심에서 유죄를 확정받고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정당을 급조하여 23%의 지지를 받는 “막가파식 정치드라마”가 펼쳐졌다. 200억 원의 배임, 800만 달러의 제3자 뇌물, 외국환거래법 위반, 위증교사, 허위사실 공표에 의한 공직선거법 위반 등 9개 혐의를 받고 기소되어 일부 죄가 이미 소명된 자가 정의를 외치며 거대 야당의 총수로 우뚝 선 현실이다. 그럼에도 무조건 자기편은 군자당, 반대편은 소인당이라고 우기며 스스로 그렇다고 굳게 믿고 있다면 진정 주자학적 파당 정치의 재현이 아닌가?

 

192석을 확보하여 오만해질 대로 오만해진 범야권은 다시 대통령 탄핵의 드라마를 쓰기 위해 명분 쌓기에 나서는 모양새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주자학적 명분론은 권력욕을 가리는 외피에 불과하다. 이른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웃지 못할 블랙 코미디가 되어가고 있다. 1995년 이건희 회장이 4류라 혹평했던 한국 정치는 이미 5류 그 아래로 추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타락한 정치꾼들이 주자학의 수사법을 너무나 능수능란하게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

 

〈113〉주자학(朱子學)의 몰역사성: “애들은 역사책을 보지 마라!”

변방의 중국몽 <31회>  

▲1991년 5월 31일 부산대 전대협 5기 출범식/공공부문

 

유럽의 오랜 속담이다. “바보는 체험에 의존하고, 현인(賢人)은 역사를 본다.” 길어야 고작 100여 년 불과한 개별 인간의 체험이 아무리 깊다 해도 장구한 세월 인류가 공동으로 쌓아 올린 역사적 경험에 비할 순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역사를 외면한 채 짧은 견문만 믿고 다반사로 중대사를 그르친다. 비단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에 무지한 오만한 권력자가 솔깃한 정책이나 허튼 이론에 사로잡혀 나라를 망친 사례가 수두룩하다.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주자학(朱子學)은 삼라만상을 관장하는 범우주적 섭리(燮理)와 일용사물을 관통하는 인륜의 도리(道理)를 설파하는 심오한 학문으로 여겨져 왔다. 주자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연계의 물리적 대상뿐만 아니라 생활세계의 모든 문제까지 하나하나 캐묻고 따지는 격물치지(格物致知)를 가장 중요한 공부 방법이라 강조한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인간의 본성을 관념적으로 논의했을 뿐 역사적 탐구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주자학의 비조 주희(朱熹, 1139-1200)는 역사적 탐구의 중요성을 인지하지도 강조하지도 않았다. 주자학의 몰역사성은 500여 년 애오라지 주자학을 신봉했던 조선의 유생들에게 도덕적 우월의식과 역사적 무관심을 심어주었다. 주자학자 특유의 도덕적 우월의식과 역사적 무관심은 19세기 중후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현실 속에서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으로 표출되었다. 오늘날 한국의 지식계는 어떠한가? 오랜 주자학의 영향 속에서 많은 지식인은 아직도 도덕적 우월의식과 역사적 무관심을 체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역사적 무관심과 도덕적 우월의식

주희는 경서(經書)를 드높이고 사서(史書)를 낮춰봤다. 그는 열대여섯 살부터 스무 살 때까진 역사서를 전혀 보지 않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역사는 요긴함이 없는 느슨한 잡담거리(閑是閑非)에 불과해서 어렵잖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朱子語類>><自論為學工夫>23: “某自十五六時至二十歲, 史書都不要看, 但覺得閑是閑非沒要緊, 不難理會.”)

 

“경서를 보는 일과 사서를 보는 일은 다르다. 역사는 표피적인 바깥 사물이라 긴요함이 없으니 적어두었다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경서에서 의문이 생기면 이는 자신에게 절실한 병통이어서 흡사 몸에 병을 앓는 듯하니 잊어버리려 해도 되지 않는다. 어찌 사서를 보다가 의문이 생겨서 종이에 적어놓는 것에 비하겠는가?” (같은 책, <學五>23: “看經書與看史書不同: 史是皮外物事, 沒緊要, 可以劄記問人. 若是經書有疑, 這箇是切己病痛. 如人負痛在身, 欲斯須忘去而不可得. 豈可比之看史, 遇有疑則記之紙邪.”)

 

물론 유가 경전 중엔 <춘추좌전(春秋左傳)>과 같은 역사서가 있다. 주희는 학생들에게 <춘추좌전>과 같은 역사서를 읽히는 같은 시대의 석학 여조겸(呂祖謙, 1137-1181)에 대해서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노라!”며 탄식했다. 그는 방대한 유가 경전 중에서 유독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 등 사서(四書)를 특히 중시했다. 그는 이 네 가지 책 속에서 고대의 성인(聖人)이 전하는 범우주적 섭리와 인륜·도덕의 요강이 다 담겨 있다고 믿었다.

 

▲19세기 제작된 주자학의 비조 주희(朱熹, 1130-1200)의 초상화 탑본./공공부문

 

물론 주희도 역사를 탐구했다. 그는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통독한 후 <<통감강목>>이라는 책으로 재편했다. 그는 연도별로 기술된 편년체의 <<자치통감>>을 다시 사건별로 제목을 달아서 재구성한 후 세부적 내용을 옮겨 적는 방식의 소위 강목체(綱目體)를 창안했다. 주희의 역사학은 과거사에 도덕 관념을 투사하여 단순화하는 방법으로 일관했다. 역사 서술에서 주희는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대결,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의 충돌, 군자와 소인의 투쟁을 명료하게 분별하는 일종의 도덕 사관(史觀)을 확립했다. 흑백과 명암이 분명하게 나뉘는 이분법적 포폄의 역사관이었다. 그러한 역사관은 송조(宋朝)가 망한 후 몽골이 지배하는 원(元, 1271-1368) 제국에서 편찬된 정사(正史)인 <<송사(宋史)>>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주희의 도덕 사관은 이후 주자학자들의 역사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역사학은 복잡다단한 역사의 구체적 맥락과 풍부한 사례를 경험적으로 탐구하여 통찰과 지혜를 얻는 학문이다. 주자학은 그러한 실증적, 경험적, 분석적 역사학에 정면으로 맞서는 단순화된 포폄의 역사관을 제시한다. 그러한 주자학의 몰역사성은 이후 동아시아 사상사, 특히 조선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주자학자들은 대개 역사적 탐구를 배제한 채로 경서에 담긴 성인의 말씀을 통해서 범우주적 진리를 직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서(史書)를 낮추고 경서(經書)를 높이는 주희의 공부론에서 동아시아 특유의 중세적 독단이 생겨났다. 주희를 정신의 스승으로 떠받들었던 조선의 사대부 지식인들은 바로 그러한 주희의 조언을 따라서 역사를 외면한 채로 경서만 숙독하며 공허한 성리(性理) 논쟁에 빠져들었다.

 

조선 주자학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이황(李滉, 1502-1571)과 이이(李珥, 1536-1584)는 한평생 거의 역사 관련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그들은 역사를 배제한 채 주자학의 상투어를 사용하여 인간의 본성에 관한 관념적 논쟁을 벌였다. 그들에겐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려면 인간의 행위를 경험적으로, 역사적으로 탐구해야 한다는 자각이 없었다.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이나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논쟁이나 결국 주희의 어록을 절대 권위 삼고서 전개된 교조적 유교 담론이었다. 인간의 역사 현실에서 유리된 채 인간의 본성을 논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성리학적 공리공담(空理空談)이었다. 그들의 성리 담론은 역사의 무대에서 활동했던 구체적인 인간들에 관한 경험적 탐구가 아니라 추상화된 인간의 본성에 관한 관념적 논의에 불과했다. 인간 탐구가 아니라 경전 독해에 머물렀다면 과언일까?

 

그러한 논쟁을 통해서 조선 주자학자들은 역사적 무관심과 도덕적 우월의식을 드러냈다. 역사적으로 무지한데 어떻게 도덕적 우월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실제로 복잡다단한 역사 현실을 탐구하며 실존적 인간의 시행착오를 핍진하게 추적해 본 사람은 섣불리 도덕적 우월의식에 빠질 수가 없다. 역사적으로 무지한 사람일수록 과거사에 대해서 섣불리 이분법적 포폄(褒貶)의 잣대를 휘두른다. 그런 사람들에게 역사란 고작 소수의 악당이 망쳐놓은 난장판에 지나지 않는다.

 

리(理)·기(氣)와 같은 거대 관념으로 인간의 본성을 논하는 주자학자들은 역사의 전 과정을 군자와 소인의 투쟁으로 파악한다. 역사적 무관심과 도덕적 우월의식은 주자학자들만의 특징은 아니다. 마르크스·엥겔스의 저작물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며 역사의 합법칙성을 깨달았다고 생각했던 마르크스주의자들 대다수가 그러했다. 바로 그 점에서 조선 주자학자에서 1980년대 한국의 좌파 지식인들 사이의 지적 연속성이 감지된다.

 

주자 숭배와 마르크스 우상화

1980~90년대 한국의 대학가는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과 김일성에게 지적으로 점령당한 상태였다. 당시 소련과 동구의 공산주의 국가들은 빈곤의 악순환과 인권 유린 속에서 극심한 체제모순을 드러내고 있었다. 반면 대한민국은 수출주도형 발전 전략으로 연평균 9~10%의 경제성장을 이어가며 “마이카(my car)”의 대중 소비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현실이 그러했음에도 대학가의 소위 “지식인”들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적 질서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철폐하고 소련식 사회주의나 북한이 외치는 민족해방을 실현하기 위해서 날밤 새워가며 혁명의 전략·전술을 짜내고 있었다.

 

왜 그 당시 지식인들은 그토록 세계사의 도도한 흐름을 거꾸로 읽었을까? 시인 황지우는 “급격한 우회전은 승객의 머리를 좌경화시킨다는 걸 몰라요?”란 시구로써 그 당시 대학가의 공산풍(共産風)이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반발이었다고 풀었다. 일면 그럴싸한 해석이지만,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면 그보다 더 뿌리 깊은 좌경화의 “거대한 뿌리”를 만나게 된다. 남로당이 암약하던 해방공간은 그 뿌리의 상단부일 뿐이다. 땅 밑에 놓인 그 거대한 뿌리의 밑동은 주자학이 지배하던 조선조로 이어진다. 표면상 조선의 유생들이나 1980년대 한국의 좌파 지식인들은 상극의 세계관을 가진 듯 보이지만, 한 꺼풀만 벗겨보면 사고방식과 심적 상태가 유사함을 부인할 수 없다.

 

▲마르크스의 동상. 러시아 모스크바./공공부문

 

그 유사점의 첫째는 사상적 교조주의이다. 조선의 유생들이 오직 주자학만을 숭배했듯이 1980년대 대학가의 좌파 지식인들은 마르크스·레닌이나 마오쩌둥·김일성을 숭배했다. 주자학과 마르크시즘은 자연과 인간을 둘러싼 존재론적 문제에 대해서 나름의 정답을 제시한다. 주자를 향한 조선 유생의 흠모와 마르크스·김일성을 향한 좌파 지식인의 존숭은 문화심리학적으로 유사한 현상이다.

 

두 번째 유사점은 바로 탈역사적 관념성이다. 조선 유생들은 역사 현실에 관한 구체적인 경험적 탐구를 배제한 채로 오로지 주자학을 통해서 범우주적 섭리를 직관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마찬가지로 1980년대 좌파 지식인들은 역사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탐구하는 대신 5단계 발전론을 설파한 마르크스가 역사적 합법칙성을 발견했다며 맹신했다.

 

사상적 교조주의는 역사와 현실을 무시하는 데서 발생하는 정신병리학적 현상이다. 교조주의에 빠진 자들은 주자든 마르크스든 김일성이든 한 인물에 절대 권위를 부여한 후, 그들의 발언을 대전제로 삼아서 결론을 도출하는 “연역적 방식의 사유(inductive mode of thinking)”를 전개한다. 그들은 역사적 경험에 대해선 무관심하다. 스스로 힘들여서 사실(事實)을 찾으려 하기보단, 절대 권위의 이론에 의지해서 거대한 진리 주장(truth claim)을 펼치려 든다. 주자학자나 마르크스주의자나 한 인간의 생각을 교조화한다는 점에선 조금도 다르지 않다. 1980년대 한국 대학가의 좌경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주자학 일변도의 조선 사상사를 돌아봐야 하는 까닭이다.

 

한반도를 휩쓸었던 좌익 소아병

그 당시 한국 독서계엔 이미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1918-2008)의 <<수용소 군도>>(총 6권, 1988년)가 번역·소개되어 있었다. 스탈린 정권의 인권 유린과 정치범죄를 생생하게 고발한 이 작품은 공산 전체주의 정권의 참혹한 현실을 알려주는 중대한 역사적 기록이다. 그러나 솔제니친의 작품은 그 당시 대학가 운동권의 커리큘럼은 물론 일반 학생들의 도서 목록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신입생 시절 소규모 독서 모임에서 내가 이 책을 읽고 토론해 보자 제안하자 학교 선배는 세미나 진행이 혼란스러워진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굴라크의 비참한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솔제니친의 작품을 접하게 되면 이상화된 공산주의 이론이 산산이 조각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리라.

 

당시 운동권 집단은 공산 전체주의 사회의 참혹한 현실에는 눈을 감은 채로 소련 공산당이 선전하는 사회주의 혁명 이론서의 번역·번안물을 집단 학습하며 신념을 강화했다. 공산주의 이론에 빠지면 일반적으로 강렬한 도덕적 우월의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자본주의 체제는 소수의 자본가가 다수 근로대중이 생산한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악의 세계인데, 진리의 “경전”을 통해 이를 깨닫게 된 자신은 그 세계에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인류사의 복잡다단한 역사 현실에 대해선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가 이미 역사적 유물론이란 정교한 이론으로 역사의 합법칙성을 발견했다고 믿게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마르크스의 5단계 역사 발전론을 접하고 나면 스스로 역사를 탐구하지 않아도 이미 역사를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좌파 사회과학 이론은 그렇게 많은 청년에게 역사적 무관심과 도덕적 우월의식을 제공한다. 구체적 인간의 언행을 경험적으로 탐구하지 않아도 좌파 사회과학 이론만 알면 전 인류의 역사를 알 수 있다는 지적 교만을 갖게 된다.

 

▲1980년대 한국 대학가를 휩쓸었던 소위 좌파 “운동권”이 탐독했던 사회주의 혁명 이론서의 번역·번안물.

 

주자학자들이 대체로 역사에 무관심했듯, 1980년대 한국의 좌익 지식인들은 대체로 역사에 무관심했다. 주자학자들이 십중팔구 도덕적 우월의식에 빠져 있었듯, 좌익 지식인들도 십중팔구 도덕적 우월감에 도취해 있었다. 그러한 심적 상태를 레닌은 좌익 소아병이라 불렀다. 좌익 소아병은 역사적 무관심과 도덕적 우월의식이 배합되어 극적인 상승작용을 일으킨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주자학의 영향을 돌아보지 않고선 1980년대 대학가의 급격한 좌경화를 설명할 수 없다. 세월이 흘러가고 세상이 바뀌어도 부지불식간에 전수된 문화는 인간의 언행에 큰 영향을 미친다. 500여 년 지속된 조선 주자학의 영향은 1980년대 대한민국 대학가의 좌익 소아병으로 표출되었다. 가장 큰 병증은 바로 역사적 무관심과 도덕적 우월의식이었다. 역사에 무지하면서도 스스로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믿는 나르시시즘이 1980년대 한국 대학가의 극단적 좌경화를 일으킨 심리적 동기였다면 과언일까. <계속>

 

〈114〉주자학적 관념성: 한국인이 정치 선동에 취약한 까닭

변방의 중국몽 <32회>

▲2008년 대한민국을 휩쓸었던 광우병 시위./공공부문

 

외국에 살면서 한국 정치판을 관망하노라면, 언제 어디서 또 무슨 기괴한 이슈가 터져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히지 않을까 가슴이 조마조마할 때가 있다. 가짜뉴스와 거짓 선동이 국정을 마비시키고 정권을 뒤흔드는 사례가 어디 한두 번이었나? 휘발성 강한 선정적 이슈가 들불처럼 일어나면 다수 대중이 균형감각을 잃고서 일제히 한 방향으로 획 쏠리는 현상이 주기적으로 발생한다.

 

구체적 사례를 거론하지 않아도, 지난 세월 꾸준히 한국 정치판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머릿속에 몇 가지 사건들이 떠오르리라. 세월이 조금만 지나면 망각의 늪에 잠기고 마는,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그때 무엇 때문에 그토록 흥분했었나?” 그 이유조차 알기 힘든 그런 사건들 말이다.

 

얼마 전 70년대 중반부터 외국에 체류해온 80대의 교민이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며 내게 물었다. “우리 한민족은 왜 그토록 정치 선동에 잘 넘어갈까요?” 글쎄, 딱히 한 가지 이유만을 꼽을 수는 없겠지만, 나는 한국 정신사의 밑바탕에 깔린 주자학적 관념성을 절대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주자학적(朱子學的) 관념성이란 우주의 섭리나 자연의 질서나 인간의 도리와 같은 중차대한 문제를 논하면서 자연 세계에 관한 과학적 탐구나 인간 현실에 관한 경험적 조사도 없이 오직 머릿속으로만 리(理)와 기(氣) 같은 거대 개념에 의지하여 과대한 일반론을 펼치는 원리적 사유 습관을 이른다.

 

누구든 주자학적 관념성에 빠지면, 구체적 사물에 대해서 스스로 하나하나 따지며 탐구해 보지 않고서도 보편진리를 얻을 수 있다는 사변적 망상에 사로잡힌다. 바깥 세계로 향한 경험적 탐구 없이도 내면적 관조(觀照)만으로 우주적 지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동양철학”의 득도(得道) 문화가 아직도 한국 지성계에 만연해 있는 듯하다. 경험적 탐구가 얕아도 도(道)를 터득할 수 있고, 실증적 검토 없이도 리(理)를 깨달을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힘들여 발품을 팔고 고된 땀을 흘리겠는가? 그러한 믿음이 널리 퍼진 사회에서는 정치 선동이 쉽게 먹혀들 수밖에 없다. 21세기 20년대 한국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선 주자학의 기본 명제를 되짚어 볼 수밖에 없다.

 

 ▲도산서원 전교당에 모인 유생들./월간조선 DB

 

역사를 외면하면 진리가 보이는가?

지난 회 “슬픈 중국”에선 주자학(朱子學)의 몰역사성을 비판했다. 주자학의 비조(鼻祖) 주희(朱熹, 1130-1200)는 왜 역사적 탐구를 경시했을까? 학자들에 따라서 생각이 다소 다르겠지만, 가장 간단명료한 대답은 주자학의 궁극 목적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주자학의 목적은 경제성장이나 군사력 확충 따위가 아니라 개인 스스로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닦는 도덕·수양에 있었다. 주희는 인간의 가장 큰 의무가 인욕(人欲)을 버리고 천리(天理)를 보존하는 것이라 여겼다.

 

주희는 미성숙한 인간이 섣불리 역사책에 빠지면 도덕·수양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저버릴까 우려했다. 역사책 속에는 비루한 인간들의 권모술수와 반인륜적 작태가 빼곡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악한 기질(氣質)이 천태만상으로 펼쳐지는 역사의 무대에 혼을 팔지 말고 위대한 옛 성인(聖人)의 거룩한 행적이 제시된 경서(經書)를 숙독하라는 당부였다. 인간이 도덕적으로 고양되기 위해선 저열한 소인(小人)의 악행 대신 고상한 군자(君子)의 행실을 본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중국 시안(西安) 비림(碑林). 유교의 경구가 적힌 비석들./공공부문

 

그러나 진정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지 않는 자가 현명한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인류사의 갖은 죄악을 직시하지 않고서 인간 본성을 논할 수 있는가? 역사 현실을 떠나서 과연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가? 경험적 탐구 없이 지혜로워질 수 있는가?

 

물론 주희도 구체적 일용사물에서 원리를 궁구하는 “격물(格物)” 공부를 중시했으나 실제로는 경험적 탐구를 경시하는 모순된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주희를 정신의 스승으로 숭앙했던 조선 성리학자들은 주희보다 더 극단적으로 경험적 탐구를 멀리 한 채 우주적 섭리와 인간의 본성에 관한 순수사변적 논쟁에 빠져들었다.

 

격물(格物) 없는 치지(致知)

동아시아 사회에서 교육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익숙히 아는 유교의 경구가 있다. 바로 수신(修身)·제가(齊家)하고 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하라는 말씀이다. 이 경구 속에는 인격을 도야하고, 집안을 바로잡고, 국가를 통치하고, 천하를 평정한다는 원대한 유학의 이상이 담겨 있다. 사서(四書) 중에서도 특히 중시되었던 <<대학(大學)>> 서두에 실린 이 경구의 각 항목은 이른바 8 조목(條目)의 5·6·7·8항에 해당한다. 신분적 위계질서뿐만 아니라 정치적 직분과 권한이 명확한 전통사회에서 치국의 임무와 평천하의 이상은 실상 통치자나 고위 관리에 해당할 뿐, 서민이나 지방 사인들에겐 직접 관련된다고 하기 어렵다. 1·2·3·4항은 각각 정심(正心), 성의(誠意), 격물(格物), 치지(致知)이다.

 

격물치지(格物致知)와 궁리진성(窮理盡性)이 주자학의 공부 방법이다. 격물치지란 자연계의 물리적 대상뿐만 아니라 생활세계의 구체적인 일용사물(日用事物)에 서려 있는 천리(天理, 하늘의 이치)를 궁구하여 스스로 깨닫는 주자학 특유의 공부 방법이다. 궁리진성이란 천리를 궁구하여 실천적으로 인간이 타고난 선한 본성을 다한다는 <<주역(周易)>><설괘전(說卦傳)>의 경구다.

 

주희는 그 어떤 공부보다 격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주희에 따르면, “무릇 하나의 물(物)이 있으면 반드시 하나의 리(理)가 있으니 그것을 끝까지 궁구함이 바로 격물이다.”(<<朱子全書>><大學或問>, 凡有一物, 必有一理, 窮而致之, 所謂格物者也). “물”의 의미에 관해서 주희는 “천지 사이에서 눈앞에서 접하는 모든 일(事)이 다 물(物)”이라고 정의한다. (<<朱子全書>>16冊<朱子語類>“孟子”離婁 下: “凡天地之間, 眼前所接之事, 皆是物.”)

 

주희가 말하는 물은 1) 외부 세계의 사물(事物, things), 2) 인간 사회의 사건(事件, events), 3) 내면세계의 현상(現像, phenomena)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물(物)을 향해 나아가는” 격물은 앎의 극치로 나아가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부로, 사물의 이치를 밝히는 궁리(格物窮理)의 공부로 나아간다. 이론적으로는 격물은 모든 현상의 이면에서 작용하는 존재론적(ontological), 가치론적(axiological), 우주 발생론적(cosmogenic) 원인 및 법칙을 밝히는 원리적 궁구(窮究), 경험적 탐구(探求), 도덕-형이상학적 논구(論究)라 할 수 있다. 실천적으로는 격물은 선악을 판별하고, 시비를 분별하고, 인욕을 제거하는 모든 도덕적 사유, 내성적(內省的) 반성 및 자아 계발의 정신적 활동이다.

 

그렇듯 주희는 스스로 격물을 구체적 대상에 관한 경험적 탐구에서 시작된다고 정의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주자학은 경험적 탐구를 경시하고 멀리했다. 입으론 격물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격물을 외면했다. 격물치지라 하고선 격물 없는 치지를 추구했다. 주자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격물치지를 강조했지만, 과연 그들이 물리적 대상의 원리를 구체적으로 탐구하지 않았다. 생활세계에서 벌어지는 복잡다단한 윤리의 문제와 도덕적 갈등 상황을 캐묻고 따지는 도덕적 추론(moral reasoning)도 정교하게 발전하지도 않았다. 주자학은 유가 경전에 근거한 철저한 관념적 사유였다. 물론 주희 역시 자연학적 탐구를 외면하진 않았으나 주자학의 격물은 자연과학적 탐구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 점에 대해선 앞으로 차차 더 깊이 파헤쳐 보기로 한다.

 

조선 주자학, 관념성이 더욱 강화

그러한 주자학이 조선에 들어와서 관념성이 더욱 강화되었다. 조선 선비들은 오매불망 주자(朱子)를 흠모했지만, 그들은 정작 중화 문명의 역사와 지리와 언어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객관화하여 탐구하지 않았다. 대체로 그들은 유가(儒家) 경전에 의존해서 이상화된 “중국”의 가치를 좇았을 뿐이다. 물론 모든 조선 유생이 중국 역사에 무관심했다고 할 수는 없다.

 

한 연구에 따르면, 규장각, 장서각, 서울대학교 도서관 소장 고도서(古圖書)를 전수 조사하여 찾아낸 조선 학인(學人)의 중국사 연구의 독립 저작은 46종에 불과했다. 그 46종 역시도 중국에서 수입된 역사서를 간추려 요약하거나 편제를 바꿔 기술한 소략한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민두기, 오금성, 이성규, “조선학인의 중국사 연구의 정리 및 평가,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1980).

 

중국 역사를 탐구하려면 중국 역대 왕조가 공식 제작한 역사서에 국한돼선 안 된다. 직접 중국 땅을 밟고서 방방곡곡을 누비며 민간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다양한 문서를 발굴하여 중국인의 삶을 실질적으로 탐구하고 기록해야만 한다. 그 점에서 수천 년 강력한 중화 문명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한반도의 학인들은 중화 문명을 경험적으로 탐구하지 않았다.

 

조선 학인들과는 달리 16세기 이래 영국의 지식인들은 본격적인 중국 연구를 시작했다. 영국 런던 대학교 동양학·아프리카학 대학(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University of London) 도서관에는 1550년에서 1850년까지 300년 동안 간행된 900종이 넘는 중국학 관련 전문 서적들이 쌓여 있다. 여행기, 선교사 기록, 학술 저작 등등 여러 주제에 관한 다양한 종류의 저작들이다.

 

그중 몇 가지 중요한 작품만 소개하면, 1738~1741년 간행된 두 할데(Jean-Baptiste Du Halde, 1674-1743)의 <<중국 및 중국-타르타이 제국에 관한 묘사(A Description of the Empire of China and Chinese-Tartary>>는 제수이트 선교사들의 보고서에 기초하여 중국의 지리, 역사, 문화에 관한 상세한 기술을 담고 있다.

 

 ▲두 할데(Jean-Baptiste Du Halde, 1674-1743)의 <<중국 및 중국-타르타이 제국에 관한 묘사>>에 실린 중국 및 인근 국가 지도

 

1836년 출판된 휴 머레이(Hugh Murray)의 <<중국 역사 서술기(An Historical and Descriptive Account of China>>는 중국의 역사, 문화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을뿐더러 서구의 무역과 외교가 중국에 끼친 영향력을 분석한 역작이다. 1848년 출판된 미국인 선교사 사무엘 웰스 윌리엄스(Samuel Wells Williams)는 <<중국(The Middle Kingdom)>>은 지리, 정부, 교육, 사회 등 여러 방면에 걸쳐 폭넓게 중국을 탐구한 중요한 저서이다.

 

이들 저서는 유럽인들이 직접 중국을 찾아가서 발로 뛰고 몸으로 부닥치고 손으로 만져가며 일궈낸 경험적 탐구의 결과물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서술한 연구서라 할 수 있다. 수천 년 중화 문명의 영향권 속에 있었던 한반도 학인들은 왜 유럽인들처럼 경험적 탐구에 근거한 독자적인 중국 연구서를 저술하지 못했을까?

 

“집 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 수 있다(不出戶, 知天下)”는 도가적(道家的) 교만 때문이었을까? 주자학적 관념성 때문이었까? 격물 없는 치지(致知), 역사 없는 철학, 검증 없는 주장, 내용 없는 형식, 회의(懷疑) 없는 반성(反省)······ 그러한 조선 주자학자들의 사유 방식이 아직도 한국의 정치문화를 지배한다면 과언일까? 그래서 한국인들이 “미국소=미친소”와 같은 정치 선동에 허망하게 넘어간다면 무리한 분석일까? <계속>

 

〈115〉거짓, 과장, 허언, 선동… 어느 "국뽕" 한국사 강사의 마지막 수업

변방의 중국몽 <33회>

▲1904년 러일전쟁 와중에 한반도에 밀입국한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W. A:son Grebst)가 촬영한 조선 머슴들의 모습./공공 부분

 

거짓으로 “역사를 가장 역사답게” 할 수 있나?

며칠 전 서울 사는 한 지인이 물어왔다. 현재 100만 이상의 구독자를 가진 한 “입 큰(big mouth)” 한국사 유튜버가 “조선시대”가 “일제 강점기” 때보다 훨씬 더 살기 좋았다면서 조선의 노비제까지 적극적으로 옹호했다고 한다. 그 유튜버가 조선 500년을 통틀어서 양반 주인이 노비를 살해한 기록이 10건 이상 나오면 강의를 그만두겠다고 공언했다며 지인이 물었다. “조선왕조 500년에 정말 그런 기록이 없나요?”

 

그 유튜버의 주장은 역사학의 기초 상식을 모르는 자의 아둔한 발상이다. 노비는 전답, 가옥, 가축과 더불어 조선시대 양반가의 4대 재산이다. 인류사에 스스로 자기 집에 불을 놓은 광인(狂人)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아무 이유 없이 재미로 가축을 죽인 주인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마찬가지로 노예를 함부로 죽인 노주(奴主)가 많을 수는 없지만, 저 유튜버가 말하듯 민본주의가 실현됐기 때문이 아니다. 소나 돼지도 잘 먹여야 깨끗이 관리해야 새끼들을 많이 쑥쑥 낳듯이 노비 역시 배불리 먹이고 잘 입혀야만 그 자식들이 많이 태어나 주인의 재산이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노주(奴主)들의 노비 관리는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지독하게 합리적이었다.

 

 ▲한국사 소재로 구독자 100만 이상을 달성한 A씨의 인기 유튜브 채널에 2024년 5월 11일 올라온 동영상 “오히려 일제 강점기가 살기 좋았다?”./유튜브 화면 캡처

 

그럼에도 조선시대 사료를 들추다 보면, 주인에게 죽임을 당한 노비들의 사례가 심심찮게 보인다. 그 “입 큰” 유튜버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그런 사례가 10건이 넘으면 마이크를 놓고 강의를 그만두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반나절만 검색하면 누구나 어렵잖게 주인이 노비를 죽인 사례를 찾아낼 수 있다. 지면 제약 상 아래 13개의 사례만을 우선 소개한다.

 

1. <<태종실록>> 28권 1414년 9월 19일 기사에는 여씨(呂氏) 집안의 주인이 독약을 써서 권비(權妃, 顯仁妃)의 노비를 죽였다는 한 종의 증언이 조사 결과 사실로 밝혀진 사례가 기재돼 있다.

 

2. <<세종실록>> 64권 1434년 6월 27일 기사에는 “잔인하고 포학한 무리들이 한결같이 노비를 고소(告訴)하지 아니하고 함부로 때려죽인다”며 죄가 있는 노비라도 국법에 따라 적법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형조(刑曹)의 상소가 보인다. 형조에서 이 정도 언급했다면, 당시 노주가 사적으로 노비들을 죽인 사례가 빈번했음을 알 수 있다. 형조에서 그러한 상소를 올려 노비 학살을 예방하려 했음에도 10년이 되지 않아 노비를 죽이는 사례가 또 발생했다.

 

3. <<세종실록(世宗實錄)>> 100권 1443년 5월 25일 기사에 따르면, 왕실과 인연이 있는 이완(李梡)은 아홉 살, 열 살 난 노비 아이들이 옹주(翁主)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그 아비 석류(石榴)를 결박한 후 때려죽였다. 그 전후 사정을 읽어보면, 이러한 사례가 심심찮게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듬해 세종은 “노비가 죄가 있어서 그 주인이 그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면, 논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그 주인을 치켜올리고 그 노비를 억누르면서 진실로 좋은 법이라고 한다”며 한탄했을 정도였다(같은 책, 1444년 윤7월24일 기사).

 

4. <<세종실록(世宗實錄)>> 37권 1427년 8월 24일 기사엔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 권채(權採)는 여종 덕금(德金)을 첩으로 삼았는데, 권채의 부인이 질투하여 덕금을 이루 말할 수 없이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해서 죽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5. <<세조실록(世祖實錄)>> 37권 1465년 11월 23일 기사에 따르면, 참판 조효문(曹孝門)의 첩 자식 조진경(曹晉卿)이 사내종을 시켜서 한 계집종을 그 자식이 보는 앞에서 다듬잇방망이로 내려치게 했다. 계집종이 죽지 않자 조진경은 피투성이 계집종에게 활을 쏘았고, 그래도 죽지 않자 다시 한 방 더 쏘아서 죽였다.

 

6. <<성종실록(成宗實錄)>> 48권 1474년 10월 10일 기사에는 북부(北部) 참봉(參奉) 신자치(愼自治)의 아내 이씨(李氏)가 신자치가 간통한 계집종 도리를 시샘하여 그의 머리를 깎고 쇠를 달구어 가슴과 음부를 지져서 죽인 후 시신을 유기한 잔악한 사건의 기록도 보인다.

 

7. <<성종실록(成宗實錄)>> 96권 1478년 9월 9일 기사엔, 전 예조 정랑(禮曹正郞) 이병규(李丙奎) 등이 술을 마시다 취한 상태에서 조비(曹婢) 춘비(春非)를 구타하여 살해한 사건에 관해 의론했다는 기록이 있다.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의 반상도./공공부문

 

8. <<성종실록>>217권 1488년 6월 21일 기사엔, 쇠칼(金刀)로 노비를 죽여서 시신을 도성에 버린 한 흉악한 범죄와 관련하여 조정 대신들이 의논하는 장면이 보인다.

 

9.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60권 1505년 10월 3일 기사엔, 연산군이 직접 흥청방(興淸房)의 비(婢) 종가(從加)를 죽이고 그 시체를 자르고 쪼개라고 명령하는 대목이 나온다. 게다가 죄지은 공노비들을 데려와서 모두 그 참혹한 장면을 보게 하고는 그들을 처형해서 사방에 효수(梟首)했다는 기록도 있다.

 

10. <<중종실록>> 60권 1528년 2월 26일 기사엔, “진사(進士) 하억수(河億水)의 처 이씨(李氏)가 종 석을이(石乙伊)를 시켜 여종 복비(福非)를 칼로 찔러 죽인 사건이 등장한다.

 

왕조실록뿐만 아니라 일기 사료와 문집 등에도 노주가 노비를 죽인 사례가 보인다. 우선 널리 알려진 다음 두 사건만 소개한다.

 

11.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의 일기 <<쇄미록(瑣尾錄)>>에 나오는 기록이다. 계집종 강비와 눈이 맞아서 말을 훔쳐 달아난 사내종 한복이 잡혀 오자 오희문은 큰 몽둥이로 70~80대나 그를 치라 명했고, 그 결과 한복은 옥중에서 칼을 찬 채로 숨을 거두었다. (1577년 6월26~27일 기록).

 

12. 18세기 말 서울의 유명한 문장가 이서구(李書九)는 집안 노비들에게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는 사내종 하나를 동구 밖에서 때려죽이라 했다. 이후 포도청에서 조사를 나오자 “내가 죽이라 했다”고 확인했고, 관리들은 알았다며 돌아갔다. (이영훈,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이영훈 교수의 환상의 나라>> “노비는 함부로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 백년동안, 2018).

 

조선 노비제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이러한 사례들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을 소유물로 삼는 노예제는 본질적으로 노예의 인신을 구속·지배하는 합법적 폭력 위에서만 지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관습법에 따라서 일탈한 노비를 폭력으로 다스린 오희문이나 이서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반면 술에 취해서 여종을 때려죽인 이병규는 대명률(大明律)에 따르면 사형당해야 마땅하지만, 조정의 대신들은 여러 감형(減刑)의 이유를 만들어 내 그를 살려냈다.

 

아울러 이어지는 사건은 주인이 노비를 죽인 경우는 아니지만 조선 노비제의 모순을 보여주는 극단적 사례이기에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13. <<영조실록>> 38권 1734년 10월 5일 기사에 따르면, 경기(京畿) 광주(廣州) 사람 김대뢰(金大賚)의 사내종 영만(永萬)이 김대뢰와 그 노비(奴婢)들을 포함해 무려 30여 명을 집단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목숨을 부지한 김대뢰의 사내종 세적(世迪)은 영만을 제 손으로 죽이고 관아에 자수했다.

 

상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격분한 한 사내종이 울분을 참지 못해 주인과 동료 노비들을 다 같이 죽여버린 격정에 이끌린 범죄로 보인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일개인의 단순 일탈이나 사회적 기현상이 아니라 노주와 노비 사이의 계급적 갈등이 빚어낸 광란의 학살극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 조선왕조를 기리는 까닭은?

“입 큰” 한국사 유튜버는 왜 스스로 잘 알지도 못하는 조선 노비제를 미화하고 옹호하는 지적 만용을 부려야만 했을까? 일제 강점기에 비해서 조선시대가 훨씬 더 살기 좋았다는 “조선 제일주의”나 “우리민족끼리”의 이데올로기에 포박당해 있기 때문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더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돼야 한다.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대체 왜 조선시대가 미화되어야만 하는가?

 

자유, 민주, 독립, 인권, 법치 등을 건국이념으로 내건 대한민국은 주자학(朱子學)을 선양하면서 가혹한 노비제를 유지·강화했던 조선왕조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나라다. 대한민국의 성립 자체가 조선왕조의 철저한 부정이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대한민국은 정신적으로 조선왕조의 연장선에 서 있는 듯하다. 외국인이 경복궁을 둘러보고 나와서 광화문광장을 걸어가면 대한민국이 마치 조선왕조의 법통(法統)을 이은 입헌군주제의 나라가 아닌가 착각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화폐를 보면 세종대왕, 이순신, 이퇴계, 이율곡, 신사임당 등 모두가 조선시대 사람들이다.

 

 ▲광화문광장. 2022. 연합뉴스

 

조선왕조는 고려 국왕들의 동상을 세우지 않았으며 고려 영웅들을 기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대한민국은 유독 조선왕조의 인물들을 그토록 미화하고 숭모하는가? 왜 한국인은 지금도 조선시대 위인들을 정신적 지주로 삼고서 살아가고 있을까? 철저히 단절되어 식초와 기름처럼 절대 섞일 수 없는 대한민국과 조선왕조가 오늘날 다수 국민의 의식 속에서 마치 같은 나라인 양 연속적으로 인식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뿌리 깊은 유교적 조상숭배의 유습인가?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는 1960~70년대 민족 교육의 산물인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강조하던 1960~1980년대의 대한민국에서 국사(國史)는 단일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민족정기를 드높이는 국가 이념의 요체였다. 한국인의 절대다수는 반만년 이어온 한민족의 문화적 우수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도록 철두철미한 민족사관(民族史觀)을 주입받았다.

 

물론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중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모든 나라가 고유의 민족사관으로 전 국민적 통합을 도모했다. 중국공산당 시진핑 총서기가 오매불망 부르짖는 “중화민족,” 일본의 극우파가 외치는 야마토 민족주의, 북한식 기괴한 “김일성 민족”까지··· 여전히 동아시아 전역을 민족주의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국사(國史) 열풍은 암암리에 조선(朝鮮) 미화로 치달은 혐의가 짙다. 해방 이후 인문학자들의 조선 미화는 무엇보다 이황(李滉, 1501-1570), 이이(李珥, 1536-1584),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등 조선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우리 조상” 중에서 모두가 존경하고 흠모하는 민족의 스승을 찾아야만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되찾을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근대국가 형성기의 민족사관은 대중교육을 통해 전 국민의 의식 속을 파고들었다.

 

문제는 오늘날 한국이 근대적 민족국가 형성기의 나라가 아니라 전 세계로 촘촘한 그물처럼 뻗어나간 네트워크 국가라는 사실이다. 과연 조선 선비들의 정신세계가 21세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인도하고 계발할 수 있는가?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를 발휘하려 한다면, 조선 선비들의 정신세계에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지 분명하게 가려야만 한다. 전통 비판 없는 전통 미화는 맹목(盲目)이다.

 

한편 “역사를 가장 역사답게” 만든다고 떠벌려 온 “국뽕” 중독의 그 유명한 한국사 강사는 이제 스스로 공언한 대로 마이크를 놓고 강의를 그만둬야 할 것이다. 스스로 역사 교사를 자처한다면 부디 100만 구독자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공언한 바를 그대로 지키길 바란다. <계속>

 

〈116〉노비를 죽이고도 처벌받지 않은 조선의 노주들...그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변방의 중국몽 <34회>

지난 6월 1일 조선닷컴에 나의 글 “거짓, 과장, 허언, 선동: 어느 국뽕 한국사 유튜버의 마지막 강의”가 실렸다. 6월 1일 밤 당사자인 유튜버 A가 나의 글을 반박하는 동영상을 올렸다. 요지는 자신은 강의에서 조선 500여 년 역사에서 “노비를 죽이고도 처벌받지 않은 사례 10가지”를 찾아내면 강의를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나는 “주인이 노비를 죽인 사례 13가지”를 찾아냈으므로 자신의 발언을 왜곡해서 공격했다는 비판이었다.

 

A의 강의에 격분한 서울의 바로 그 지인이 내게 직접 전한 말만 듣고서 꼼꼼히 그의 강의를 다시 청취하지 못한 점은 나의 잘못이다. 이 점에 대해선 A에게 사과의 마음을 전한다. 하지만 때론 단순한 착각 때문에 오히려 더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논쟁이 진행될 수도 있지 않나?

 

이제 오해는 풀렸으니, 더 본질적인 논쟁으로 들어가 보자. A는 조선 500여 년을 통틀어서 주인이 노비를 죽이고도 처벌당하지 않은 사례가 10건 나오면 강의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여기서 “10건”이란 살해된 인명의 수로 따져야 상식에 부합한다. 10명이 죽으면 10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조선왕조 500여 년에 노비를 죽이고도 처벌당하지 않은 사례에 관한 역사 기록이 있는가? 있다면 과연 노비 몇 명이나 죽임을 당했는가?

 

이제 조선의 방대한 사료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선 조선시대 기록의 대부분이 왕실과 양반 계층에 의해 이뤄졌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양반 노주(奴主)가 노비를 죽이는 경우, 관아에 고발되거나 발각되지 않았는데도 노주 스스로 자기가 노비를 죽였다고 기록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하다. 그럼에도 사료 더미를 파고들다 보면 억울하게 죽은 노비들의 이름자와 함께 잔혹하게 노비들을 죽이고도 별일 없이 여생을 살다 간 그들의 양반 주인들의 행적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아래 제시된 사례들은 우연히 일회적으로 드물게 일어난 사건들이 아니라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잔혹한 노비제를 수백 년 이어간 조선이란 나라의 사회적 모순이 중첩되어 터져 나온 대표적 사건들이라 할 수 있다. 때론 사료에 적힌 한 문장 속에 거시적 역사의 진실이 담기기도 한다.

 

<사례 1> “노비를 함부로 죽이는 잔인하고 포학한 무리들”

다른 글을 찾아보기 전에 우선 내가 6월 1일 올린 글에서 제시한 13가지 사례만 잘 읽어봐도 주인이 노비를 죽였는데 처벌받지 않은 사례가 다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세종실록>> 64권 1434년 6월 27일 기사에 실린 형조(刑曹)의 계문(啓文, 아뢰는 문장)엔 다음 문장이 나온다.

 

“잔인하고 포학한 무리들이 한결같이 노비가 고소(告訴)할 수 없으니 함부로 때려죽이옵는데······” “殘暴之徒, 一於奴婢不得告訴, 擅自歐殺.”

 

노비를 함부로 죽이는 행위를 천살(擅殺), 때려죽이는 행위를 구살(毆殺)이라 한다. 형조의 계문에 실린 이 한 문장엔 고소할 수 없는 노비들을 천살하고 구살하는 경우가 매우 빈번하다는 암시가 깔려 있다. 여기서 “한결같이” 때려죽인다는 표현을 예의주시해야 한다. 그러한 악행이 이미 관례화돼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형조가 적시한 “잔폭지도(殘暴之徒)”란 과연 몇 명을 두고 한 말일까? 상식적으로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무리 “도(徒)”자를 써서 분류할 때는 상당한 인수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많게는 100~1000명이 넘을 수도 있고, 작게는 10명 정도일 수도 있다. 백번 양보해서 극단적인 최소 숫자를 쳐도 5인 이상, 곧 다섯 사례 이상이라 짐작할 수 있다. 일상어에서 아무도 단 두 명 정도를 무리라 부르지 않고, 또한 그 둘이 한결같이 고소도 하지 않고 때려죽인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최대한 보수적으로 추산해도 벌써 주인이 관에 고하지 않고서 함부로 노비를 죽인 경우가 최소 5건 이상이라는 얘기다.

 

형조는 구체적 사건을 특정하여 보고하지 않고, 이미 이러한 일들이 온 나라에서 빈발하고 있다고 개탄한다. 그러나 앞뒤 어디를 읽어봐도 형조가 바로 그 “잔학지도”를 잡아서 형벌로 다스렸다는 기록은 한 줄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노비들을 죽이고 슬쩍 그 사건을 넘긴 운 좋고 포악한 노주들이었다.

 

물론 형조의 목적은 과거에 일어난 구체적 사건들을 들춰내서 사후적으로 처벌하려는 게 아니라 앞으로 유사한 사건 발생을 예방하려는 것이었다. “잔학지도”의 천살 행위를 막기 위해 형조가 마련한 방안을 보면 그 점을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금후로는 비록 죄가 있는 노비라 할지라도 만일 법에 따라 형벌을 주도록 하지 아니하고 제 마음대로 그릇 형벌을 하는 자[任情枉刑者]는 삼절린(三切隣, 가까운 이웃 세 집)과 오가장(五家長, 다섯 가장)이 즉시 모여 이것을 금지하고, 만일 법을 어기고 마구 형벌하여 죽임에 이르거든 삼절린과 오가장이 관령(管領)에게 달려가 고발하되, 외방(外方)은 감고(監考)·이정(理正)·이장(里長)이 고하여 검사 증험하고 전보(傳報)하면 법사에서 추핵하여 과죄할 것이옵고, 삼절린(三切隣)·관령(管領)·이정·이장 등이 주의하여 고찰하지 아니하거나, 때려 죽인 뒤에 실정을 알고도 숨겨 준 정상이 나타나면, 본인 자신과 삼절린(三切隣)·색장(色掌)을 추고(推考)하여 중한 죄로 논하게 하옵소서. 그 노비들이 넌지시 삼절린과 색장을 부추겨서 고발한 자는 한결같이 노비가 가장을 고발한 죄[奴婢告家長罪]의 예에 의하여 시행하옵소서.”

 

노주가 죄를 지은 노비를 직접 폭력으로 징치(懲治)할 경우, 고작 이웃 사람들이 관아에 고소해야 한다는 정도의 법령을 반포하라는 제안이다. 노비를 때려죽인 후 이웃 사람들과 작당하면 법적 처벌을 받지 않고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 문단에는 노비들이 이웃 사람들을 부추겨서 노주를 고발하면 처벌한다는 규정이 적시돼 있다. 『경국대전』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노비는 주인의 잘못을 관에 고하지 못하게 규정한다. 이를 어기고 주인을 고소한 경우 해당 노비는 교수형을 당했다. 노비는 직접 주인을 고소할 수도 없고, 주변에 주인의 잘못을 함부로 얘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삼절린과 오가장 등 이웃의 감시만으로 과연 노비 천살을 막을 수 있었을까?

 

<사례 2> 노비의 신체에 대한 폭력의 일상화

16세기 대표적인 일기 사료 『묵재일기(默齋日記)』의 저자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은 집안의 노비들에게 틈만 나면 회초리질을 가했다. 편지 배달을 지체한 사내종(奴)은 회초리 30대를 맞았고, 지시 사항을 늦게 실시한 사내종도 매를 맞았으며, 더운물을 늦게 대령한 계집종도 가차 없이 구타당했다. 가축에게 채찍을 가하듯 이문건은 매를 들고 노비를 다스렸다.

 

<<쇄미록(瑣尾錄)>>의 저자 오희문(吳希文, 1539~1613)도 예외가 아니었다. <<쇄미록>> 전편을 통독하다 보면 가여운 노비들에게 잔정을 베푸는 따뜻한 주인의 모습도 있고, 잘못한 노비를 혹독하게 벌하는 냉혹한 노주의 모습도 보인다. 지난 글에서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오희문은 계집종 강비와 눈이 맞아서 말을 훔쳐 달아난 사내종 한복을 큰 몽둥이로 70~80대나 쳐서 결국 죽게 했다. 오희문은 한복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노주가 사적으로 달아난 노비를 잡아 징벌하는 과정에서 불의의 사고가 났다고 할 수 있다.

 

세종 연간에 형조의 제안처럼 삼절린이나 오가장 등 이웃들이 나서서 그 사실을 관아에 고발했는가? 전혀 아니다. <<쇄미록>>을 읽어 보면 오히려 양반가들이 서로 협력하여 달아난 노비를 잡아 왔다. 또 관아에서도 그 사건의 내막을 다 인지하고 있었지만, 오희문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조선의 노주들은 오랜 관습법에 따라서 가축을 부리듯 노비를 부렸고, 가축을 채찍질하듯 노비들을 매질했다. 어느 사회든 그렇게 폭력이 일상화된 상황에선 언제 어디서든 “턱” 치니까 “억!”하고 죽었다는 식의 무지몽매한 폭력에 의한 불의의 살인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런 사건이 일어나면 대다수는 집안에서 쉬쉬하며 넘어가기 일쑤였다. 따라서 노주가 자력으로 노비를 살해한 기록이 많이 남을 수는 없지만, 사료의 행간을 잘 뜯어보면 억울하게 죽은 노비들의 절규를 들을 수 있다.

 

<사례 3> 무뢰한 노비를 징치한 어느 양반의 논리

오희문은 눈 맞아서 말을 훔쳐 달아난 강비와 한복을 잡아 와서 분한 마음에 벌을 주었지만, 그 노비를 살해할 의도는 없었다. 반면 지난 글에서 소개한 서울의 유명한 문인 이서구(李書九)는 명백한 살인의 의도를 품고서 주노(主奴)의 강상(綱常)을 어긴 사내종을 집안 노비들을 시켜서 직접 쳐 죽이라고 명령했다. 바로 그 사내종이 전날 술에 취해서 주인을 향해 험구를 놀렸다는 이유였다. 이후 형조의 서리가 찾아와서 댁의 종이 시구문밖에 죽어 있는 영문을 묻고자 나왔을 때, 이서구는 “강상을 범한 노를 관에 고한 다음에 다스려야 마땅하지만, 그러면 집안의 수치가 밖으로 드러나게 되니 어쩔 수 없이 내가 사사롭게 죽였다”고 대답했다. 그것으로 사건은 종결되었다. (이영훈,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이영훈 교수의 환상의 나라>> “노비는 함부로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 백년동안, 2018, 참조).

 

이 사건은 조선 정부와 양반 노주들이 노비 관리에서 긴밀한 협력자 관계(partnership)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서구는 사내종 하나를 죽여놓고도 어떻게 그리도 당당할 수 있었을까? 비밀은 바로 조선에서 준용했던 <<대명률>>에 숨어 있다.

 

『대명률』은 주인을 폭행한 노비는 참수형에, 주인을 향해 폭언하거나 모욕적 언사를 내뱉으면 교수형에 처하라고 규정한다. 이서구는 바로 그 법을 잘 알고 있다. 그랬기에 국가를 대신해서 술에 취해서 자신에게 욕설을 내뱉은 사내종을 나랏법에 따라서 처리했고, 포도청에서 조사를 나왔을 땐, 발칙한 사내종을 하나 엄형으로 다스렸다고 말할 수 있었다.

 

본래 조선의 국법에 따르면 그런 사례가 발생하면 관아에 고소해서 공권력에 의한 교수형이 집행되어야 하지만, 이서구의 사적인 노비 처형을 형조는 사후적으로 용인했다.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잘못한 노비를 처형했다면 정의가 실현됐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렇지 않고선 이 중대한 천살의 사건이 그렇게 종결될 수는 없다.

 

<사례 4> 양반과 국가의 협업에 의한 노비 살해

양반과 국가가 공조하여 노비를 학살한 사례는 심심찮게 보인다. 일례로 중종실록 34권 1518년 9월 10일에 기재된 다음 기사를 보자.

 

“의성(義城)에 사는 사노(私奴) 김이동(金伊同)·검동(檢同)·물금(勿金) 등이 그의 주인 김연손(金連孫)을 꾸짖고 욕한 죄는 〈조율하였는데〉 모두 삼복(三覆)이었다. 상이 이르기를, ‘다 율대로 하라.’ 하였다.”

 

여기서 삼복(三覆)이란 사형죄를 저지른 죄인(罪人)에 대한 초복(初覆), 재복(再覆), 삼복(三覆) 등 3차례에 걸쳐 심리(審理) 과정을 의미한다. 김이동, 검도, 물금이란 이름의 사내종들이 국가폭력에 의해 교수형으로 살해되는 장면이다. 표면상 적법한 과정을 통해서 정의가 실현된 듯하지만, 주인을 꾸짖고 욕을 했다는 터무니없이 작은 죄만으로도 국가가 세 명의 노비를 처형했음은 충격적이다.

 

여기서 살인의 주체는 바로 모욕당한 그 주인이다. 그 주인은 자신을 모독한 사내종 3인을 죽이기 위해서 나랏법을 수단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을 꾸짖고 욕했다는 이유만으로 세 명의 사람이 처형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는 노주가 노비들을 죽이기 위해서 국가권력을 이용해서 “합법적” 린치를 가했다. 말하자면 양반과 국가의 공조에 의한 사법 살인이었다.

 

이서구의 경우처럼 직접 잘못한 노비를 죽여도 포도청에서 사후적으로 용인하고 넘어가기도 했지만, 만약 이서구가 그 노비를 관아에 고발하면 국가가 나서서 대신 처형했을 것이다. 주인에게 욕을 한 노비를 국가가 나서서 교수형에 처하는 나라, 그게 바로 조선이었다.

 

<사례 5> 사이코패스 연산군의 노비 대학살

조선 왕실은 대규모 노비 군단(群團)을 소유하고 있었다. 임금이 노비를 죽였다면 그 역시 노주에 의한 노비 살해의 일례라 할 수 있다. <<연산군일기>> 60권 1505년 10월 3일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잔혹한 장면이 등장한다.

 

“흥청방(興淸房)의 비(婢) 종가(從加)를 죽여, 그 시체를 자르고 쪼개라고 명하였다. 또 승지 권균(權鈞)·강혼(姜渾)·한순(韓恂)과 이조 판서 김수동(金壽童), 예조 판서 김감(金勘)에게 명하여 감형(監刑, 형 집행을 감독함)케 하고, 무릇 죄인 노비로서 공천(公賤)에 속해 있는 자는 모두 차례로 서서 보게 한 다음 곧 효수(梟首)하여 사방으로 시체를 보내게 하였다.” (命殺興淸房婢從加, 刳剔其屍。 又命承旨權鈞、姜渾、韓恂、吏曹判書金壽童、禮曹判書金勘監刑, 凡罪人奴婢屬公者, 皆令序立觀之, 卽令梟首, 傳屍四方。)

 

시체를 자르고 쪼개는 형벌인 잔인한 고척지형(刳剔之刑)이 바로 이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기록을 보면 흥청방의 계집종 종가 외에도 죄를 지은 공노비들을 함께 죽이고 그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내걸고서 사방으로 그들의 시체을 보냈다고 해석될 수 있다. 만약 그랬다면 연산군이 잔인하게 살해한 노비의 수는 실로 부지기수다.

문맥상 죄를 지은 공노비들을 종가가 처형되는 현장에서 서서 보게 하여 고통을 줬다고 해석될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해석한다면 사방으로 시체를 보냈다는 구절과 잘 호응하지 않는다. 여기선 성난 연산군이 종가와 함께 죄를 지은 공노비들을 도살했다고 사료된다. 단 한 명의 시신을 사방으로 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미치광이 군주 연산군의 지극히 예외적인 일탈이랄 수 있지만 그의 폭력이 노비라는 사회적으로 아무런 권리가 없는 비천한 존재들에 향해 있다는 점에서 조선왕조의 구조적 폭력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때 도살된 노비의 수는 족히 10명은 넘었을 듯하지만, 기록이 상세하지 않아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다.

 

<사례 6> 영조(英祖)의 아량: 홧김에 울컥하여 처가 계집종을 때려죽였으니 고의라 할 수 없다?

승정원일기 994책 (탈초본 54책) 1745년 11월 26일 계사 14/14 기사를 보면, 시장판에서 술을 팔던 권필재(權必才)란 양인 사내가 전병(煎餠)을 파는 한 여자와 자리다툼을 하다가 때려죽였다. 조정 대신들의 조사에 따르면 권필재에게 맞아 죽은 그 여자의 상전이 공교롭게도 권필재의 장인이었다. 조정 대신들은 그 사실을 들어서 권필재가 고의로 그 처가의 계집종을 때려죽인 게 아니라 홧김에 울컥해서 때리다가 죽었으니 마땅히 권필재를 살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영조는 “사람의 처부모는 성이 다른 사촌과는 다르다. 처가의 노비는 바로 처의 노비다”라면서 “필재가 당초 때린 것은 살의에서 나온 게 아니라 시장서 자리다툼을 하다가 일시에 구타했는데 죽음에 이른 것이니 이는 마땅이 용서해야 한다”고 판결한다. 영조는 덧붙인다. “그 처의 입장에서 보면 그 계집종이 죽어서 자기 남편이 목숨을 잃어야 한다면 얼마나 원통하겠는가? 이는 왕정에서 차마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上曰, 人之妻父母, 異於異姓四寸, 妻家奴婢, 卽妻之奴婢也。以其妻言之, 則以其婢之死, 其夫將償命, 則其冤怨, 當如何? 此非王政之所可忍。且有意而敺打, 則爲故殺, 而必才, 當初所打, 非出於欲殺之意, 不過爭其買賣所坐之處, 一時敺打, 邂逅致斃, 此則宜有容貸之道矣.)

 

영조는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같은 자리에 앉아서 함께 술과 전병을 팔고 있었으니 [권필재는] 상시(常時)로 모욕을 당해서 주인과 노비의 분수가 엄격하게 나뉘지 못했을 듯하고, 그 계집은 필시 나이는 많고 성격은 악독했을 것이다.”(上曰, 同坐賣酒餠, 則常時見侮, 奴主之分, 似未能嚴截, 而此女必年老而性惡者矣.)

 

조정 대신들도 이구동성으로 “처가처럼 가까운 인척의 노비는 곧 그의 노비와도 같으니 용서의 도가 있어야 한다(且緇[緦]麻親中妻家奴婢, 便是渠之奴婢, 則亦有可恕之道.)”고 거들었다. 결국 영조는 홧김에 울컥해서 자기 소유라 해도 진배없을 처가의 계집종을 때려서 본의 아니게 죽였으니 고의라 할 수 없다며 그의 목숨을 살려 줬다. 영조의 판결에 죽은 자의 신분이 계집종인데, 알고 보니 처가의 계집종이라는 사실이 필재를 살려 준 결정적 이유였음은 분명하다.

 

<사례 7> 정조(正祖)의 역발상, “종년의 남편을 죽였다고 주인을 벌하랴?”

요즘까지도 조선 최고의 성군(聖君)이라 칭송되는 정조(正祖, 1752-1800)는 1793년 양반가 계집종의 남편을 징치(懲治)하다가 죽이는 경우, 상전의 형사책임을 감면하는 교시를 내렸다.

 

서울 중부의 박소완(朴紹完)이 계집종의 남편 방춘대(方春大)를 폭행하여 죽게 한 사건을 놓고 심의한 후 정조가 내린 판결이다. 계집종의 양인 남편을 보통 비부(婢夫)라 하는데, 말 그대로 계집종의 남편이란 의미다. 신분은 양인이지만 노비처럼 양반가에서 얹혀살며 갖은 일을 도맡아 하던 경제적 예속 상태의 존재로 사실상 노(奴, 사내종)와 같은 존재였다. 비근한 예로 비부가 처(妻)의 상전을 고발하면 곤장 100대와 3천리 밖으로 유형을 받는다는 규정이 <<경국대전>>에 나와 있다. 비부의 법적 지위는 양인보다 한 단계 낮았다. (이상 정긍식, 1793년(정조 17) <婢夫定律>, <<서울대학교 법학>>제53권 (2012): 267-298 참조).

 

박소완은 비부 방춘대를 징치(懲治)하는 과정에서 살해했다. 여기서 징치란 징계하고 다스린다는 의미지만, 실상은 야단치고 매질하는 행위를 이른다. 기록에 따르면 방춘대는 술에 취해 박소완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성난 박소완은 방춘대의 머리채를 잡고 내치는 과정에서 방춘대를 살해했다.

 

이 사건을 놓고 조선 조정은 비부에 대한 처의 상전이 갖는 징계권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라는 법리적 문제를 놓고 논란을 벌였는데, 결국 정조는 비부로서 처의 상전을 능멸한 방춘대의 잘못에 격분하여 박소완에 대한 형사처벌을 면제했다. 아울러 정조는 계급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발칙한 행위를 한 비부에 대해선 처의 상전이 그를 때리거나 벌을 주다가 설혹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해도 처 상전의 형사책임을 감면하는 법을 제정했다. 형식상 양인이지만 현실적으로 사내종과 다를 바 없는 비부에 대해서도 주인집에 ‘생사여탈권’을 인정한 셈이다. 그런 악법은 이후 대대로 조선에서 시행되었다. 쉽게 말해서 비부를 때려죽여도 처 상전은 형사적으로 처벌되지 않았다.

 

<사례 8> 솜방망이 처벌, 실질적 무죄 방면

<<대명률(大明律)>>에 따르면 노비를 “관에 고하지 않고 함부로 죽이는(不告官擅殺)” 경우 노비에게 죄가 있으면 장형 100대, 죄가 없으면 장형 60대에 도형 1년에 처한다는 규정이 있지만, 조선 군주들은 노비를 죽인 양반 주인들을 법에 따라 엄하게 다스리지 않았다. 조선 국왕은 일반적으로 벼슬이 높을수록, 권세가 클수록 더 큰 특혜를 베풀었다. 아무리 죄질이 나빠도 <<대명률>>의 법조항 따위는 고관대작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일례로 세종실록 89권 세종 22년(1440년) 6월 10일 기사엔 삼정승 중 두 번째로 이재(二宰)라 불리는 좌찬성(左贊成, 종1품) 이맹균(李孟畇)의 처 이씨가 이맹균이 총애하던 계집종을 함부로 죽였다. 집안의 계집종이 죄가 있어 이맹균의 아내가 종들을 시켜서 때리고 머리털을 잘랐는데, 그만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는 집안 종들을 시켜서 그 시신을 몰래 매장하라 시켰는데, 아마도 부당하다고 느낀 종들이 그 시체를 홍제원 길가에 버려뒀고, 결국 온 세상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맹균은 세종 앞에서 자신은 전날까지 알지 못했다고 거짓을 아뢰었다.

 

이미 전후 사정을 소상히 들어서 알고 있던 세종은 맹균이 그 계집종을 가까이 끼고 살자 질투한 아내 이씨가 사적 린치를 가해서 죽였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말했다. 이에 조정 대신들이 나서서 처벌해야 한다고 했는데, 6월 16일 기사를 보면 맹균의 관직을 파면하고 이씨는 작첩(爵牒, 작위를 고하는 사령장)을 빼앗는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다. 멀쩡한 사람을 잔혹하게 죽인 범죄자와 왕 앞에서 거짓으로 발명하던 공직자를 고작 이런 식으로 처벌하는 것은 실제로는 무죄 방면과 다름없다. 치정에 얽혀 살인한 자를 고작 작첩 박탈로 다스렸다면, 상식적으로 형법에 의거한 처벌이라 할 수 있는가? 비유하자면 잔인하게 정부를 살인한 한 의사가 있는데, 고작 자격증 박탈에 그친다면 그걸 과연 누가 처벌이라 생각할까?

 

<사례 9> 사노(私奴) 엄삼(嚴三)의 억울한 죽음

<<세종실록>> 81권, 세종 20년 (1438년) 6월 16일에 실린 기사다. 김종례(金從禮)란 자가 도둑맞은 물건을 찾는다며 사노 엄삼을 때려죽이고는 자신도 병사했다. 이에 국법에 따라서 그의 아들 무상(武祥)과 사내종 황룡이 종범이므로 장형 1백을 시행하고 삼천리 유형에 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결국 세종은 이 두 명의 종범은 치죄하지 않기로 하고 이 사건 자체를 접어버렸다.

 

어질기로 소문난 영의정 황희(黃喜, 1363-1452) 등이 사실상 김종례의 무죄를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김종례가 처음에 죄를 스스로 인정했으나 나중에 취초(取招) 과정이 잘못됐다며 불복하고 항소했다는 이유였다. 아울러 황희 등은 그의 아들과 사내종은 치죄하지 말자고 건의했고, 세종은 이에 따랐다. 설사 노비가 주인의 물건을 훔쳤다고 해도 주인이 관아에 고하지도 않고서 사적으로 때려죽였는데,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사례 10> 잔혹하게 살해된 비첩(婢妾) 덕금(德金)의 한(恨)

<<세종실록(世宗實錄)>> 37권 세종9년 (1427년) 8월 24일 기사엔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 권채(權採)가 여종 덕금(德金)을 첩으로 삼았는데, 권채의 부인 정씨가 질투하여 덕금을 이루 말할 수 없이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해서 죽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국문(鞫問)을 거듭한 결과 의금부는 다음과 같은 계문(啟文)을 발표했다.

 

“권채(權採)가 비첩(婢妾) 덕금(德金)을 고랑으로 채워서 집안에 가두었는데, 그 아내 정씨(鄭氏)가 덕금을 질투하여, 머리털을 자르고 똥을 먹이고 항문(肛門)을 침으로 찌르며 하루 걸러서 밥을 주는 등, 여러 달을 가두어 두고 학대하여 굶주리고 곤고(困苦)하여 거의 죽게 되었으니, 형률에 의거하면 권채는 장 80, 정씨(鄭氏)는 장 90에 해당합니다.”

 

그러한 의금부의 계문에도 세종은 권채에 대해선 직첩 회수와 외방 부처(付處)의 조치만을 취했다. 정씨는 속장에 처하게 하였다. 비첩 덕금을 고랑으로 채워서 집안에 가둔 자는 권채였고, 덕금을 고문하여 죽인 자는 정씨였다. 의금부의 조사 결과 두 사람은 공범으로 드러났다. 그런데도 세종은 집현전 응교였던 권채에 대해선 국법에 따라 제대로 된 처벌조차 내리지 않았다.

 

결론: 노비를 죽이고도 처벌받지 않은 노주들

이상 열 가지 사례에서 우리는 10건을 훌쩍 넘는 많은 인명 사고가 발생했음을 확인했다. 이 기록들 속에서 숨진 노비는 문자 그대로 부지기수(不知其數)이다. 상식적인 독자라면 “잔인하고 포학한 무리들이 한결같이 노비를 고소(告訴)하지 아니하고 함부로 때려죽이옵는데”라는 <사례 1>의 첫 문장만 보고서도 세종 연간 조선 사회에 노비를 함부로 죽이고도 처벌받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글에서 나는 가장 보수적으로 신중하게 사건 수를 한정했다. 연산군이 살해한 공노비의 수도 상세히 할 수는 없지만, 시체를 사방으로 보냈다는 것을 보면 상당수였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그가 죽인 노비들 한 명, 한 명이 하나의 법적 사례를 구성한다. 따라서 아무리 낮게 쳐도 이 글에서 나타난 살해된 노비의 수는 10명을 넉넉히 훌쩍 넘는다. 많게는 수백 명, 수천 명까지 볼 여지도 있다.

 

이영훈 교수의 실증적 연구에 따르면 세종조부터 노비 천살을 막으려는 조정 대신의 노력이 있었지만, 성종조 이후부턴 노주들이 노비들을 벌주다 죽이고도 처벌받지 않는 사례가 계속 늘어났다. (이상 이영훈,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이영훈 교수의 환상의 나라>> 참조).

 

지난 글에서도 말했지만, 노비는 왕실과 양반가의 소중한 재산이므로 양반 주인들은 재산 관리를 철저히 했다. 다른 가축과는 달리 노비는 충분한 지력과 삶의 의지와 복잡한 감정을 가진 인간이다. 조선시대 노비가 격정에 휩싸이거나 모략을 꾸며서 주인을 죽인 사례 역시 부지기수다. 그러나 조선은 노비의 법적 권리를 완전히 박탈한 “노예 국가(slave society)”였다. 세계 노예제 연구의 대가 올란도 패터슨(Orlando Patterson, 1940- )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조선 노비들은 이미 “사회적 죽음(social death)”을 맞은 좀비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100만 이상의 구독자를 가진 한국사 유튜버 A는 말했다.

“조선왕조 500년 갔다라고 했죠. 제가 역사를 공부해본 바로, 500년 동안에 양반 주인들에게 노비가 얻어터져 가지고 (죽었을 경우) 그 노비의 주인이었던 양반들이 어떤 죄[형벌]도 받지 않았던 경우가 500년 동안에 열 건 넘은 거 있으면 제가 마이크 놓고 강의를 그만두겠습니다.”

 

위에서 제시한 10개 사례는 조선조 500여 년에 걸쳐 노비를 천살하고도 적절한 법의 처벌을 받지 않은 노주들이 수없이 많았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들이다. 지성인이라면 그런 사례가 10건뿐 아니라 100건, 아니 1000건도 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누구든 “우리 역사를 진정 사랑한다면” 잔혹한 노비제를 수백 년 이어간 조선의 국왕이나 양반 지배계층이 아니라 양반가 분재기(分財記)에 말똥, 개똥, 소똥, 빗자루 등등의 비천한 이름자만을 올리고 가뭇없이 사라져간 노비들을 사랑해야 하지 않겠나? 전답, 가옥, 가축 그리고 노비를 독점한 지배계급이 아니라 천시와 학대 속에서도 민들레처럼 그 땅에서 꽃피며 살아갔던 어여쁜 조선의 민초들을······.

 

앞으로도 조선 노비 관련된 중요한 사료가 발굴되면 “슬픈 중국” 시리즈를 통해서 알릴 예정이다. 천살(擅殺)당한 노비들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속에 그들의 위령비를 세우고 묵념을 올린다. 한국인은 모두가 결국 조선 노비들의 자손들이기 때문이다. <계속>

 

〈117〉시카고대학의 친북 교수, "조선의 주자학이 김일성 주체사상으로"

변방의 중국몽 <35회>

 ▲김일성 동상에 참배하는 북한 주민들./공공부문

 

외교적 고립과 국제사회의 제재에도 아랑곳없이 북한 정권이 철권 통치를 유지할 수 있는 비밀이 조선 주자학(朱子學, 신유학, Neo-Confucianism)에 있다고 주장하는 미국인 역사학자가 있다. 바로 미국 시카고대학 역사학과의 명예교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1943- )다. 1980년대 그는 한국전쟁 관련 수정주의 이론으로 반미자주파 운동권의 정신적 스승으로 군림했고, 그 덕분에 2007년 “후광 김대중 학술상”의 제1회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커밍스는 과연 어떤 논리로 북한 정권의 존속을 설명할까? 아래 그의 주장을 살펴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 이하 북한)은 일면 마르크스-레닌주의로부터 근본적으로 이탈했기에 지금까지 존속할 수 있었다. 북한은 수백 년에 걸쳐 조선 왕조의 통치이념이었던 오래된 신유학 이데올로기를 상기시키는 정치적 전통을 복원했다. 신유학이라는 아시아의 전통적 학파는 국가가 가족을 본떠야 한다고 가르친다. 인민의 아버지로서 복무하는 통치자의 주요 기능은 인격적 통치와 도덕적 모범으로써 백성을 가르치고 교화하는 것인데, 이는 마르크스를 물구나무 세운 것이다.”(Bruce Cumings, “Getting North Korea Wrong,” 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 2015, Vol. 71(4) 64–76).

 

 ▲1980년대 수정주의 이론으로 한국 반미자주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1943- )./공공부문

 

마르크스가 거꾸로 세운 헤겔을 김일성이 바로 세웠다?

구소련이나 동구 공산권의 교과서에 따르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헤겔의 변증법을 물구나무 세워서 유물론적 변증법과 역사적 유물론을 제창했다. 헤겔은 인간의 사유가 지속적 자기부정을 통해 끊임없이 더 높은 단계로 고양해 갔다고 설명했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헤겔의 관념론을 뒤집어서 인간의 정신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조건이 역사 발전의 변증법적 과정을 이끌었다는 유물변증법을 제창했다는 마르크스 추종자들의 판에 박힌 선전이다.

 

2012년 2월 김정일이 사망하자 브루스 커밍스는 <<르몽드(Le Monte)>>지 기고문에서 “북한이 사상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마르크스를 다시 물구나무 세웠다”고 썼다. 그리고는 “대원군(大院君)의 신유학 기록관들(Neo-Confucian scribes)이 좋아했을 도식”이라는 묘한 사족(蛇足)을 달았다. 커밍스는 김씨 왕조의 주체사상을 평하면서 왜 또 그렇게 “뱀의 발”을 그렸을까?

 

바로 그가 수십 년간 줄기차게 북한의 주체사상은 조선 주자학의 연장이라 주장을 펼쳐왔기 때문이다. 커밍스는 조선 주자학에 관해선 한 편의 논문도 쓴 적이 없다. 또한 그는 주체사상에 관하여 철학적으로 깊이 연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직관적으로 북한이라는 “세계 4대의 병력을 자랑하는 병영국가(garrison state)”가 조선의 연장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거칠게 펼치고 있을 뿐이다.

 

북한이 조선의 연장이므로 북한에 모종의 역사적 정당성이 있다는 주장인지, 아니면 북한은 조선이 배태한 괴물이므로 조선이 북한처럼 생지옥 같은 나라였다는 주장인지 애매하다. 그 점에 대해서 커밍스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북한의 주체사상을 “공산주의라는 병 속에 담긴 신유학이나 마오쩌둥의 자켓을 입은 주희(Neo-Confucianism in a communist bottle, or Chu Hsi in a Mao jacket)”에 비유한다. 문학적 수사로 치장하지만, 그의 주장 속에 담긴 의도는 뻔히 들여다보인다. 바로 조선 주자학을 끌어와서 북한식 전체주의 병영국가 체제를 옹호하려는 목적이다.

 

신종 “오리엔탈리즘”인가? 악마의 변호인인가?

커밍스의 수제자로서 미국 뉴욕 컬럼비아 대학의 한국학 연구자 찰스 암스트롱(Charles Armstrong)은 한술 더 떠서 북한 정권이 고립 상태에서 그토록 오래 버틸 수 있는 이유가 1945년에서 1950년까지 북한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사회경제적 혁명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 스승의 그 제자답게 암스트롱 역시 “김씨 조선의 아버지 수령” 김일성이 제창한 주체사상과 “이씨 조선”의 창건 군주 이성계(李成桂)가 채택한 주자학이 매우 유사하다고 강변한다.

 

“북한의 공산주의 수용은 일면 조선조 초기 유교화 과정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조선 왕조를 창건한 이성계와 개국공신처럼 김일성과 북한의 지도자들은 사회의 전면적 변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조선의 선대들과는 달리 그들은 사회 밑바닥 기층민의 요구와 생각도 주의 깊고 민감하게 포용하려 했다.” (Charles Armstrong, The North Korean Revolution 1945-1950, Cornell University Press, 2003)

 

 ▲북한에 간 찰스 암스트롱(Charles Armstrong). 암스트롱운 2020년 논문 표절로 컬럼비아 대학 교수직에서 파면당했다./컬럼비아 뉴스, “Columbia scholars offer critical context on North Korea.”

 

암스트롱은 이성계와 김일성이 각각 주자학과 공산주의라는 외래 사상을 받아들여 정치 제도, 사회 구조, 경제 활동, 문화 및 일상생활 면에서 근본적 개혁을 추구했는데, 조선과 달리 북한은 기층민의 요구에 부응하여 더 적극적이고 전면적인 사회혁명을 달성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는 구한말까지 주자학에 집착했던 조선조와 오늘날까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집착하는 북한은 모두 종주국보다 더 강력하게 이념적 순수성을 추구하는 한국 엘리트의 정신사적 특징을 보인다고 말한다

 

그는 특히 “북한혁명(1945-50)”의 “자생적 측면(indigenous aspects)”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김일성 정권은 냉전기 구소련의 영향 아래 급조된 “괴뢰정권”이 아니라 만주 게릴라 부대의 항일 무장투쟁에 뿌리내린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정권이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은 “북한의 소비에트화가 아니라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한국화(Koreanization)”다.

 

암스트롱은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이 소련파, 연안파 등 북한의 공산주의 운동가들을 숙청한 것 역시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한국화 과정”이라 말한다. 그렇게 외세 지향적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함으로써 북한은 주체적인 민족주의 공산당 정권을 형성했다고 주장한다. 김일성이 만주 게릴라식 병영국가를 만들고 민족 중심의 주체사상을 제창하여 소련과는 전혀 다른 독창적인 “공산주의의 한국화”를 이뤘고, 그 결과 북한 인민의 자발적 복종을 유도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조선 노비제에서 북한의 노예제로

조선 주자학과 김일성 주체사상을 연결하려는 커밍스와 암스트롱의 시도는 학술적으로 전혀 설득력이 없다. 지난 70여 년 북한 정권은 수령 유일주의, 전일적 일인 지배, 극도의 인격 숭배, 완벽한 언론통제, 전면적 대민 지배, 완전한 상호감시, 집단연좌제, 굴라크 병영정권 등등의 전체주의적 특징을 과시해왔다.

 

그런 식의 완벽한 통제체제의 이념적 기원을 구태여 인류 사상사에서 찾자면, 신유학보다는 선진(先秦) 시대 법가(法家)에 가깝다. 법가는 전국시대 백가쟁명의 다양성을 거부하고 단일한 이념 아래 온 백성을 전면적 국가통제에 복속시킨 통일의 이념이었다. 물론 법가는 통치의 합리성과 마키아벨리적 현실감각을 접목한 그 당시의 진보적 세계관이었다. 법가 이념을 김일성 주체사상에 비유하는 것 자체가 법가에 대한 모독일 수 있다.

 

그럼에도 구태여 북한식 전체주의를 전통 시대의 사상과 연결하려면, “부드러운” 유가적 통치보단 완전 통제의 법가의 통치술이 그나마 차라리 더 가깝다는 얘기다. 분서갱유의 사상통제, 연좌제 방식의 강압 통치, 반대 여론의 탄압, 사상적 획일화, 대항엘리트의 완벽한 제거, 일인 지배의 확립 등등 법가 통치는 바로 20세기 전체주의 통제와 유사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스탈린식 전체주의에 히틀러식 순혈주의와 쇼비니즘을 결합한 무자비한 전체주의 통제국가에 불과하다. 그러한 북한 정권의 폭압 통치를 조선 주자학의 발현이라 한사코 우겨대는 커밍스와 암스트롱의 숨겨진 의도(hidden agenda)는 무엇일까? 베트남 전쟁 이래 미국 학계에 뿌리내린 미국 좌파 지식인들이 북한의 사례를 끌어와서 미국 대외정책을 비판하려는 의도가 뻔히 읽힌다. 문제는 그들이 걷잡을 수 없이 왼쪽으로 치달아 급기야 북한 정권의 편에서 북한 정권을 위해 북한 정권의 폭압 통치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는 학술적 코미디를 연출했다는 사실이다.

 

커밍스와 암스트롱은 조선 주자학과 김일성 주체사상의 유사점을 강조하지만, 두 사람 모두 터부시하는 주제가 하나 있다. 바로 조선 왕조의 광범위한 노비제(奴婢制)가 김씨 왕조에서는 면면히 이어져서 오늘날 북한이 인구 10% 이상을 노예 삼은 세계 최악의 국가 노예제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왜 조선 노비제에 대해선 침묵하는가? 그들은 왜 실질적으로 노예의 삶을 살아가는 북한의 다수 대중에 대해선 언급을 회피할까? 단순하게도 그 이유는 커밍스와 암스트롱이 북한의 옹호를 위해 조선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이들과는 달리 미국의 대표적인 조선사 연구자 중에는 조선을 노예 사회라 평가한 제임스 팔레(James Palais, 1934-2006)나 조선 노비제가 북한으로 연결됐음을 강조하는 마크 피터슨(Mark Peterson, 1946- ) 같은 학인들도 있다.

 

커밍스나 암스트롱이 조선 노비제에 대해서 모르지는 않을 듯하다. 커밍스는 그의 저서에서 미국의 대표적인 한국사 전문가들이 지난 반세계 줄곧 강조해 온 “조선=노예 사회(slave society)”라는 테제를 슬금슬금 소개한다. 다만 그는 조선의 노비제가 북한식 국가 노예제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선 언급 자체를 회피한다.

 

북한의 전체주의적 대민 통제가 조선 노비제의 연장이라 주장하면, 그들이 극구 꺼리는 북한의 악마화 논리가 강화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북한이 “악의 축”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 그들은 주체사상이라는 전체주의 이념을 조선 주자학의 연장으로 미화한다.

 

조선 왕조를 동방 최고의 문명국이라 미화하고 조선 주자학을 훌륭한 이념으로 치장해 온 대한민국 국사학계의 기본 입장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그러한 커밍스-암스트롱의 테제에 부합한다. 돌려 말하면, 조선 노비제 연구를 회피해 온 국사학계와 커밍스-암스트롱의 북한 미화가 조화롭게 공명한다. 커밍스와 암스트롱이 조선조를 미화하는 국사학계에 올라타고서 조선 주자학이 김일성 주체사상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을 펼쳐왔다고도 할 수 있다.

 

그 모든 거친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 있다. 조선 주자학과 북한 주체사상의 연속성을 강조하면 북한 정권의 옹호론이 되고 말지만, 조선 노비제가 북한의 국가 노예제로 이어졌음을 강조하면 북한 정권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 무기가 생겨난다는 점이다.

 

한평생 미국학계에서 북한을 변호해 온 커밍스는 여전히 한국 좌파 지식계에서 우상처럼 군림하고 있다. 한편 암스트롱은 2020년 논문 표절 혐의로 컬럼비아 대학 윤리위원회에 제소되어 불명예스럽게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미주 한국학의 씁쓸한 단면이다. <계속>

 

〈118〉스탈린의 김일성, 푸틴의 김정은

변방의 중국몽 <36회>

 ▲2024년 6월 19일 평양에 간 푸틴이 김정은과 함께 탄 러시아제 고급 리무진 아우루스(Aurus)를 직접 몰고 있다. 이 리무진은 푸틴이 김정은에 내린 하사품이었다. 북한에 사치품의 공급, 판매 등을 금지하는 2017년 유엔안보리 결의안 2397조를 조롱하려는 의도가 읽힌다./조선중앙통신

 

지난 6월 19일 러시아의 전제군주(autocrat) 푸틴은 북한의 전제군주 김정은과 손을 잡고서 전 세계를 향해 보란 듯이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다. 특히 북한과 러시아 “쌍방 중 어느 일방이··· 무력 침공을 받아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면 타방은··· 모든 수단으로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는 제4항이 조약의 핵심이었다. 74년 전 대한민국을 절멸 위기로 몰아넣었던 기습 공격의 주체가 이제는 타국에 의한 “무력 침공”을 우려하는 부조리다.

 

자동 군사개입이란 구절은 포함되지 않았지만, 28년 만에 북·러의 관계가 동맹 수준으로 고양됐다고 볼 여지는 있다. 현재 북한은 실제로 러시아에 대규모의 재래식 무기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2년 말 푸틴은 북한에 무기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부응하여 북한은 벌써 11,000개의 선적 컨테이너에 재래식 무기를 실어서 러시아에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 러시아군은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에 숨어서 북한의 미사일로 우크라이나에 타격을 가할 수 있게 됐다.

 

러시아와 북한이 “반미”의 구호 아래 군사적 연대까지 굳혀가는 셈이다. 이번에 체결된 북·러 조약이 실질적 군사동맹이냐 여부에 대해선 갑론을박이 분분하다. 다만 북한이 군사적으로 러시아를 돕고 있는 현 상황은 이미 실질적으로 양국이 군사동맹 상태임을 드러낸다. 북·러가 다시 냉전 시대의 동맹 관계를 복원하려는 지금, 대한민국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해답을 찾기 전에 우선 냉전의 역사적 맥락을 되짚어보자.

 

안 끝나는 한국전쟁

6.25가 다시 또 코앞이다. 1950년 6.25 전쟁의 발발 원인은 무엇이었나? 전쟁 발발 직후 미국 트루먼 행정부는 스탈린의 전략에 따라 김일성이 소련제 무기를 지원받아 일으킨 자유 진영에 대한 공산 진영의 계획적 침략 전쟁임을 대번에 간파했다. 그러한 전통주의적(traditional) 해석에 대항하여 1980년대 브루스 커밍스 등은 한국전쟁은 한반도 내부의 혁명적 민족 해방운동과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비롯됐다는 수정주의적(revisionist) 해석을 내놓았다.

 

커밍스류의 수정주의가 1980년대 한국의 좌파 지식계에 널러 퍼졌다. 특히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으로 가면서 남로당 활극과 빨치산 운동을 “반미구국” 투쟁으로 미화하고, 김일성의 남침을 민족 통일의 영웅적 결단이라 칭송하는 학술서적과 문예 작품이 대중적 선풍을 일으켰다. 수정주의에 따르면, 분단의 책임은 이승만 정권에 있으며, 전쟁의 발발은 미국의 음모이고, 민족사의 정통은 북한 정권에 있었다. 당시 대학가의 학생운동은 김일성 주체사상에 따라 민족해방 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주사파가 장악했다.

 

1990년대 초반 구소련의 극비 문서가 공개되면서 철옹성 같던 수정주의는 만신창이로 무너져내렸다. 6.25 전쟁은 소련 스탈린의 허락을 받아낸 북한의 김일성이 중국 마오쩌둥의 지원을 약속받고서 소련제 중화기를 앞세워 기습적으로 대한민국을 침략한 냉전 초기의 이념전쟁임이 명확하게 밝혀졌다.

 

 ▲815 해방 5주년을 기념하는 1950년 8월 15일 북한의 해방일보. 북한 인민군 점령 상태에서 서울시는 “김일성 장군”과 “스딸린 대원수” 앞으로 “멧-세지”를 올렸음을 알 수 있다./공공부분

 

6.25 전쟁 발발 이후 74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대남 침략 전쟁의 음모를 짜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 도발했던 소련 스탈린, 중국 마오쩌둥, 북한 김일성의 후예들은 지금도 강력한 독재 정권을 지하며 자유적 국제 질서에 맞서 신냉전의 활극을 펼치고 있다. 70여 년 전에 비해 그들의 권력은 말할 수 없이 더 강화되었다. 풍부한 지하자원을 개발해 에너지 강국이 된 러시아, 공산당 일당 독재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세계 2위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중국, “수령 유일주의” 체제의 유지를 위해 민생을 파탄으로 몰고 가면서도 결국 40~50기의 핵탄두를 보유하게 된 북한·····. 6.25 전쟁을 일으켰던 그 세 주체가 지금 또다시 묘하게 얽히면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위협하고 있다.

 

1950년 스탈린의 국제전략

북한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중국이 경계의 눈초리로 마주 서 있는 작금의 상황은 다시금 1949~1950년의 상황을 돌아보게 한다. 1949년 12월 말까지 김일성은 최소 48차례나 대남 침략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 스탈린은 북한의 전력 미비와 국제정치 등의 이유로 김의 대남 도발에 완강히 반대했다. 그 점에선 중국의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였다. 1949년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 처음으로 스탈린을 만난 마오쩌둥은 전후 복구를 위해선 3~5년 정도 필요하다면서 김일성의 대남 침략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김일성의 요청을 그렇게 48번 이상 물리쳤던 스탈린은 1950년 1월 30일 갑작스럽게 김일성의 대남 침략을 재가했고, 중국에는 그 사실을 숨긴 채로 2월부터 북한에 중화기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1946년 8월 28일 평양에서 열린 조선노동당과 조선신민당의 연합대회. 당시 북한에선 거의 모든 정치 집회에서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가 내걸렸다./공공부문

 

스탈린은 왜 갑자기 변심하여 김일성의 대남 침략을 허락했는가? 우선 그는 미군 병력을 아시아에 묶어둠으로써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더욱 키우려 했다. 한편 미국과 영국은 중국에 대한 유화책을 펼쳐서 중·소 관계를 분열시키는 나름의 쐐기 전략(wedge strategy)을 세우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은 공산혁명의 주체였지만, 천하를 제패한 실질적 황제였던 마오쩌둥의 에고가 이념보다 강했다. 국민당을 물리친 중국공산당이 미국의 경제원조를 받아 전후 복구에 나서는 상황을 스탈린은 방치할 수 없었다. 그는 미·중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갈 방도를 모색했고, 김일성의 남침이라는 묘수를 찾아냈다.

 

전쟁 발발 후 만에 하나 미국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한반도 전역을 공산화하여 극동의 부동항을 확보할 수 있었다. 미국이 개입하더라도 중국이 참전한다면 소련은 배후에 머물면서 미·중 관계의 파탄을 유도할 수 있었다. 그래야만 영미의 대중 포용 정책을 차단하고 중국을 소련의 영향 아래 묶어둘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게다가 1949년 소련은 이미 핵무기를 보유했기 때문에 미·소 전쟁의 가능성은 없는 상황이었다. 스탈린으로선 김일성이 남침하여 이기나 지나 하나도 잃을 것 없는 꽃놀이패를 쥔 셈이었다. (Kim Donggil, Stalin’s Korean U-Turn: The USSR’s Evolving Security Strategy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24, no. 1(June 2011): 89-114)

 

당시 스탈린은 일흔한 살이었고, 김일성은 고작 서른여덟 살이었다. 김일성은 1930년대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에 입대하여 중국공산당의 지휘 아래서 소규모의 항일 투쟁에 참여했다지만, 1941년 관동군의 추격을 피해 소련으로 도망친 후엔 소련군에 들어갔다. 김일성이 소련군에 속해 있던 그 4~5년의 세월 동안 소련-일본 중립 조약에 따라 소련군은 단 한 번도 일본군과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런 김일성은 북한의 수령으로 발탁하여 막강한 권력을 쥐여준 은인은 바로 스탈린이었다. 그 점에서 김일성은 “민족의 태양”이 아니라 스탈린의 괴뢰이며 소련의 앞잡이였다.

 

김일성의 손자 김정은은 올해 마흔 살이다. 이번에 평양에 가서 김정은을 끌어안은 푸틴은 일흔한 살이다. 70대의 스탈린이 33세 연하의 김일성을 갖고 놀았듯, 70대의 푸틴은 31세 연하의 김정은을 감싸고 돌고 있다. 1950년 스탈린은 “미제 타도!” “민족해방!”을 외치는 김일성을 움직여서 중국과 미국 사이의 군사적 충돌을 유도하는 꾀를 냈다. 74년이 지난 오늘 러시아의 전제군주 푸틴은 북한의 전제군주 김정은과 함께 국제 질서를 뒤흔드는 위험한 게임을 펼치려 하고 있다.

 

스탈린이 그러했듯 푸틴은 노회하고, 김일성이 그러했듯 김정은은 무모하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결탁은 6.25 전쟁을 낳았다. 푸틴과 김정은의 결탁은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아니, 대한민국은 과연 어떤 전략으로 시대착오적 전제군주의 군사전략에 대응해야 하는가? 최선의 해답을 찾으려면 북한과 중국과 러시아의 삼각관계를 예의주시해야 한다.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함께 식사하고 있는 김일성./공공부문.

 

북·러의 결탁에 뿔난 중국

북한과 달리 중국은 러시아에 대한 공개적 지지 선언이나 군사적 지원 대신 경제적 공조 규모를 확대해 왔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중국과 러시아 사이의 무역 규모는 2022년 1,900억 달러로 36%나 증가하고 2023년엔 다시 2,400억 달러로 26.3%나 증가했다. 중국이 만약 러시아를 군사적으로 지원한다면, 중국을 향한 미국, 유럽 및 자유 진영 국가들의 반중 연대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북·러의 밀착을 보는 중국의 관영 매체는 애써 말을 아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다. 인민일보는 6월 19일 북·러 정상회담 관련해선 딱 한 줄 기사만 실었다. 중국의 CCTV는 20초 짧은 보도를 내보냈다. 이유야 어렵잖게 설명된다.

 

한국전쟁 당시 3백만 명에 달하는 “지원병”을 파견하여 항미원조(抗美援朝)의 구호 아래 김일성 정권을 구제해준 은인은 중국이었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도 핵무장에 혈안이 되어 있던 북한 정권을 국제사회의 제재에 구멍을 뚫어 연명시켜 준 은인도 중국이었다. 북한이 중·러 사이를 오가며 중간자 게임을 벌이는 현실을 중국은 묵과할 수 없다. 시진핑의 입장에선 자신의 “리틀 브라더”인 김정은이 푸틴을 “빅 브라더”로 모시려 하니 심통이 날 수밖에 없다.

 

 ▲6.25 전쟁 당시 중국의 포스터.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 승리 만세!”/공공부문

 

반면 김씨 왕조의 관점에선 북한이란 나라를 세워 준 은인은 스탈린의 소련이었고, 유엔군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준 은인은 마오쩌둥의 중국이었다. 김정은으로선 중·러 양국에 양다리를 걸치고 두 나라를 공히 우방으로 섬기지 못할 이유가 없다. 반미의 구호 아래 뭉친 북·중·러가 실제로는 서로 다른 셈법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얘기다.

 

오늘날 북·러·중의 복잡한 관계가 신냉전의 삼자 동맹(tripartite alliance)으로 강화될 수 있을지, 아니면 과거 냉전 시대 익히 보았듯 갈등과 분열이 일어나서 소련의 붕괴와 같은 더 큰 역사적 변화를 몰고 올지는 아무도 쉽게 예측할 순 없다. 최근 더 긴밀해지는 러시아와 중국 사이의 군사적 공조를 보면 일단 중·소 분열은 요원해 보인다. 러시아는 중국에 방위산업의 전문지식을 제공해왔다. 중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러시아를 정치적으로 엄호하면서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형국이다. 국제관계엔 그러나 늘 예측불허의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

 

한국전쟁을 공모했던 1950년의 북·중·소는 그보다 훨씬 공고한 반제 동맹을 구축하고 있었지만,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가 등장하면서 중·소 갈등은 이념전을 넘어 군사 충돌까지 비화됐다. 중·소 갈등의 틈을 비집고 들어간 미국은 결국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이끌었고, 결국 체제의 모순에 휩싸인 소련은 결국 붕괴하고 말았다. 북·중·러가 신냉전의 반미 연대로 자유적 국제 질서에 대항하려는 작금의 현실은 지난 냉전 시대 미국의 “봉쇄 정책(containment)”과 “쐐기 전략”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그 점에 관해선 다음 회에 이어가기로 한다. <계속>

 

〈119〉북한, 러시아, 중국, 이란의 "악의 동조(The Alliance of Evil)"

변방의 중국몽 <37회>

 ▲“악의 동조”: 왼쪽부터 중국의 시진핑, 러시아의 푸틴, 이란의 알리 하메네이, 북한의 김정은.

 

“악의 축”이 아니라 “악의 동조”

푸틴과 김정은이 체결한 “포괄적 전략동반자 관계 조약”을 두고 서방 언론의 비판이 날카롭다. 특히 맥스 부트(Max Boot)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의 워싱턴포스트(WP) 6월 20일 자 칼럼 한 편이 이목을 끈다. 부트는 지난해 4월 23일 “한국의 핵무장, 워싱턴이 아니라 서울의 결정”이란 파격적 칼럼에서 한국의 핵무장을 사실상 지지했던 인물이다. 이번 칼럼에서 그는 푸틴과 김정은의 군사·외교적 결탁을 비판하면서 북·중·러·이란 4국이 이미 “악의 동조(同調, alliance of evil)”를 이뤘다고 주장했다. 왜 악의 동조인가?

 

2002년 1월 29일 조지 부시(George W. Bush) 전 미국 대통령은 이란, 이라크, 북한을 묶어서 “악의 축(axis of evil)”이라 했다. “축”이란 단어를 들으면 미국인들은 대번에 2차대전 당시 영·미·중·소 연맹국(Allies)에 맞섰던 독·이·일 추축국(Axis)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라크 침공을 앞둔 부시는 구소련과 동구 공산권이 줄도산하면서 자유 진영의 승리를 낙관하던 미국인들에게 2차 대전의 악몽을 일깨우려 했다. 그 발언의 세계적 파장이 컸으나 정확한 표현일 순 없었다. 당시 그 3국은 군사동맹도 아니었을뿐더러 이란과 이라크는 1980년대 서로 전쟁까지 벌였기 때문이다.

 

 ▲평양 김일성 광장의 푸틴과 김정은. 2024년 6월 19일. /공공부문

 

평양에서 만나 러시아제 최고급 리무진 아우루스(Aurus)를 번갈아 몰며 국제사회를 조롱하는 푸틴과 김정은의 위험한 조약을 보면서 맥스 부트는 북·중·러·이란 4국이 “악의 축”이 아니라 “악의 동조”를 이뤘다고 일갈했다. 이들 네 나라는 나토나 바르샤바 협정(1955년 구소련과 동구 7개국이 체결한 공동방위조직)과 같은 공식적 안보 동맹을 맺지는 않았지만, 미국과 그 동맹국들을 흔들려는 열망으로 똘똘 뭉치고 있다. 자유적 국제질서를 위협하는 독재국가 4국이 반미(反美)의 기치 아래 서로 밀고 끌어주는 형국이다.

 

북한은 러시아에 수십 개의 단거리 미사일과 거의 5백만 개의 포탄을 제공해왔고, 러시아는 북한에 값싼 기름과 가스를 주고 핵무기의 고도화를 방조한다. 북한과 같이 러시아에 무기를 조달해온 이란은 현재 러시아 땅에 자폭 드론 생산공장까지 지어서 가동하고 있다. 러시아는 이란에 러시아제 첨단 무기를 제공해 왔고 이란의 위성까지 궤도에 올려주었다.

 

2015년 이후 러시아는 이란과 동맹 관계인 전체주의 경찰국가 시리아의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에게 공군력을 지원하여 내부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게 했다. 나아가 러시아는 아사드 편에 서서 싸웠던 레바논의 테러 조직 헤즈볼라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헤즈볼라의 테러 활동에 이란과 시리아가 돈을 대고 있음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란은 아직 핵보유국은 아니지만 최근 핵무장에 필요한 여러 시설을 갖추고 핵클럽을 기웃거리고 있다. 중·러가 이끄는 “악의 동조”는 어쩌면 북한에 이은 이란의 핵무장으로 완성될 수 있다.

 

 ▲2022년 2월 4일 베이징에서 만난 푸틴과 시진핑.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20일 전이다. /AP 연합뉴스

 

중국은 러시아에 직접 무기를 대진 않았으나 반도체와 기계 장비 등을 제공해왔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할 직전부터 푸틴과 시진핑은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만나서 독재자들 특유의 브로맨스(bromance)를 과시했었다. 계속되는 중국의 경제적·기술적 지원이 없었다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결코 칠 수 없었다.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에 맞서는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을 끌어안으며 이란을 감싸주고 있는 형국이다. 이 엄혹한 상황을 타개할 묘수는 없는가?

 

북·중·러의 결탁, 지속 가능한가?: 낙관론 대 비관론

북·러 조약을 보는 중국공산당의 시선은 이중적이다. 6월 19일 푸틴과 김정은이 화려한 외교 쇼를 연출하자 중국공산당 기관지들은 말을 아끼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렇다고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큰 틈이 벌어졌다고 볼 순 없다. 며칠 전부터 중국 정부와 학계 전문가들이 북·러의 반미 전선을 옹호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북·중·러 3국 사이를 벌리려는 미국을 비난하면서 이들은 북·러의 연대가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 유지에 기여한다는 주장을 쏟아내고 있다. 북한 문제를 놓고서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긴장이 조성되는 측면이 있지만, 1960~70년대의 중·소 분열과는 전혀 다른 양상임엔 틀림없다.

 

북·중·러·이란의 불길한 결탁을 보는 서방 세계의 시선은 크게 보면 낙관론과 비관론으로 나뉜다. 낙관론의 근거는 미주, 유럽, 아시아 등 자유 진영에 대한 중국 경제의 의존도가 매우 높다는 점이다. 오늘날 중국은 고립된 대륙이 아니라 고도의 기술력을 갖추고 세계 제2위의 규모를 자랑하는 경제 대국이다. 중국의 교역국 중에서 1위가 미국, 2위가 일본, 3위가 한국이다. 블록별로 따지면, 동남아시아의 아세안(ASEAN)이 1위이고, 유럽연합이 2위이다. 체제와 이념이 달라도 자유 진영은 중국과의 경제적 공조를 지속하고 있음은 중국이 냉전의 늪에 함몰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중국 외교 전랑(戰狼)들이야 거친 발언을 이어가지만, 세계 시장을 포기하고서 중국 경제의 지속적 성장을 꾀하긴 어렵다.

 

물론 4209km의 국경선을 공유하는 러시아와 중국은 현재 표면상 반미(反美) 연대를 구축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20일 앞둔 2022년 2월 4일 푸틴과 시진핑은 손을 맞잡고 중·러 양국이 “무제한의 협력관계(‘no-limits’ partnership)”를 선언했다. 시진핑의 뒷배가 없었다면 푸틴은 쉽게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전쟁 발발 후 러시아는 중국에 기름, 액화 천연가스 등 값싼 지하자원을 수출하고, 중국은 러시아에 돈과 기술을 제공해 왔다. 2010년 러시아의 무역 총량에서 대중국 무역의 비중은 10%에 불과했는데, 2022년에는 18%까지 올라갔다.

 

그럼에도 중국은 우크라이나와 교전 중인 러시아에 대한 무기 지원을 자제하면서 오히려 공개적으로 우크라이나의 영토 보전을 지지해 왔다. 중국과 러시아의 사이에 이미 미세한 균열이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이 기껏 담장 위에 앉아서 양쪽 눈치를 살필 뿐, 러시아의 편에 서서 반서방의 전선을 구축할 만큼 무모하진 않다. 중국으로선 미국과 유럽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는 없고, 특히 한·미·일 공조가 강화되는 현실을 방치하기도 어렵다. 북·러의 결탁에 중국이 대뜸 나서 삼각동맹을 꾀한다면 한·미·일 공조, 쿼드(QUAD, 미·일·인·호 4자 안보 협의체)와 미·영·호의 오커스(AUKUS, 미·영·호 3각동맹)의 명분이 더 강화된다.

 

 ▲1960년대 중·소 분열을 조롱하는 미국 언론의 삽화

 

정치 체제와 무관하게 중국 경제는 이미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에 의존하고 있다. 일례를 들자면, 2023년 12월 8일 중국-유럽연합의 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은 중국을 경계하는 유럽의 “디리스킹(de-risking)” 정책을 풀어달라 요구했지만, 유럽 대표단은 외려 중국이 경제적 영향력을 발휘하여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를 혼내주라 촉구했다. 이 에피소드는 중국이 유럽 시장을 원하는 만큼 유럽은 중국에 보편가치와 국제적 규범을 요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바로 그러한 큰 그림 위에서 낙관론자들은 자유 진영의 국가들이 겉으론 단단해 보이는 중·러의 틈새를 벌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1960년 이후 미국은 중·소 분열의 틈을 파고들어 결국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이끌었고, 그 결과 구소련은 해체되었다. 낙관론자들은 미국을 위시한 자유 진영이 같은 방식으로 중·러 사이에 쐐기를 박고서 “악의 동조”를 분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중국으로 이어지는 러시아 시베리아의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Gazprom

 

낙관론에 맞서는 비관론자들의 논리 또한 강력하다. 표면상 러시아에 대한 중국의 지지가 미온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양국은 1960~80년대보다 더욱 강력한 경제적 공생관계 위에서 강력한 반미(反美) 전선을 구축했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 이후 중·러의 무역 총량은 가파른 증가세를 보였다. 2022년 중·러 무역량은 1900억 달러로 36%나 급증했고, 2023년에는 다시 2400억 달러로 다시 25% 증가했다. 러시아의 대중국 수출품은 주로 석유, 파이프라인 가스, 액화 천연가스, 석탄 등 에너지 상품인데, 중국이 서방의 제재를 뚫고 경제적 자립도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무엇보다 중·러가 합동 군사작전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2022년 9월 러시아가 시베리아 극동에서 군사 훈련을 펼칠 때 중국은 3000명의 병력을 보내 공동 훈련을 펼쳤다. 그 이후로도 중·러 해군은 여러 차례 공동 훈련을 벌였다. 특히 2023년 중·러는 3차례나 해군 훈련을 펼쳤고, 2022~2023년 아시아에서 네 차례에 걸친 핵 전투기를 동원하여 아시아 지역을 공동 순찰했다. 미국과 동맹국의 군사 훈련에 비하면 미약한 수준이지만, 양국의 군사 합동 작전은 더욱 강화되는 추세다.

 

 ▲러시아와 중국의 합동 군사 훈련에서 양국의 병사 두 명이 포옹하고 있다. /공공부문

 

경제적으로 더욱 밀착된 중·러가 북한·이란을 감싸고돌며 반미의 기치 아래 공동 군사 훈련을 강화하는 작금의 상황은 분명 신냉전이 도래했음을 보여준다. 신냉전의 현실은 냉전 시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과거 공산 진영은 자유 진영에 맞서 만민평등, 계급철폐, 인간해방, 반제국주의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 경쟁을 벌였다. 오늘날 중국과 러시아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정권 유지의 권력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전체주의 독재정권에 불과하다. 이념과 명분을 내팽개친 전체주의 정권들이 북한·이란 따위 불량국가의 핵무장을 방조하는 현실은 국제질서의 안정성을 근본적으로 해친다. 명분 없는 침공, 동맹 없는 결탁, 규범 없는 폭주······. 실로 “악의 동조”라 아니할 수 없다.

 

구소련의 해체가 33년 전, 중국식 개혁개방이 45년째인데 돌고 돌아 세계는 다시 신냉전이다. 신냉전의 미래는 과거의 냉전보다 더 복잡하고, 더 폭력적이고, 더 지리멸렬할 수 있다.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 규모를 가진 전체주의 정권들이 국제사회의 제재에 맞서 무작정 버티기에 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북한을 끌어안고 핵무장을 고도화시키는 장면을 보면서 그런 악몽을 떨칠 수 없다.

 

지난 냉전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이었다면, 신냉전은 자유민주적 국제질서와 전체주의적 패권주의의 투쟁이다. 대한민국은 한시 빨리 한·미·일 안보 협의체를 발전시켜 군사동맹 수준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지난 냉전이 그러했듯 신냉전 역시 체제 전쟁이자 이념 대립이다. 더는 “우리민족끼리”를 외치며 “동북아 중간자”의 헛꿈을 꿀 여유가 없다. 신냉전의 시대에는 “악의 동조”를 분쇄하는 “선의 연대”가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계속>

 

〈120〉"유신의 아이들"이 "김일성의 아이들"로 거듭났던 까닭은?

변방의 중국몽 <38회>

▲1987년 8월 19일 충남대에서 열린 전대협 발족식. 주사파 조직인 반미청년회가 배후 조종했다./월간조선 2017년 3월호

 

극(極)과 극은 대체로 상통한다. 극우(極右)와 극좌(極左)는 쉽게 공명한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가(道家) 사상이 법무불위(法無不爲, 법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의 법가(法假) 사상을 낳았다는 학설이 있다. 독일 제3 제국의 나치즘과 구소련의 스탈린주의는 전체주의적 쌍둥이(totalitarian twins)였다는 주장도 있다. 양극단의 한 뿌리를 직시하지 못하면 정치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설명할 길이 없다. 1960-70년대 대한민국에서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고 자랐던 세대가 1980~90년대 대학가에서 소위 “주사파”로 돌변했던 사태 역시 마찬가지다.

 

시대착오적 주사파, 한국 대학가 장악

1980~90년대 한국 대학가의 학생운동은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만세”를 공공연히 외치는 주사파의 놀이터가 되었다. 당시 세계사의 흐름을 돌아보면, 1980~90년대 한국 대학가 극좌 세력의 시대착오와 무지몽매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1986년부터 일기 시작한 혁명의 돌풍은 공산주의가 이미 몰락했음을 알리는 거대한 신호탄이었다. 특히 1989년엔 폴란드, 동독,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줄도산했다. 1989년 4월부터 일어난 중국의 민주화 운동은 6월 4일 톈안먼 대학살로 무참히 짓밟혔지만, 같은 해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했다. 급기야 1991년 12월 25일 사회주의 종주국 구소련이 해체됐다.

 

 ▲1989년 6월 30일 전대협 주체로 한양대에서 열린 ‘모의평양축전’ 행사장에서 참가한 학생들이 화염병을 던지며 진압경찰에 맞서고 있다./조선DB

 

1980년대 대한민국은 한미군사동맹의 엄호 아래서 개방형 수출입국 정책에 따라 파죽지세로 세계 시장을 향해 뻗어나가며 연평균 10%에 달하는 경제성장의 기적을 이어가고 있었다. 급속한 경제성장의 결과 1980~90년대 대한민국은 고도의 대중 소비 사회로 변모했다. 그 당시 대학생들은 외국어 실력이 일천해도, 성적표에 쌍권총이 달려 있어도 얼렁뚱땅 졸업만 하면 쉽게 일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1990년대부턴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어 유럽 전역에 한국인 배낭족이 넘쳐났고, 웬만큼 살면 한 대씩 차를 뽑는 “마이카(my car) 시대”가 활짝 열렸다. 한국의 경제 현실은 그렇게 날로 다르게 변해가는데도 대학가는 “김일성 수령의 교시에 따라” “주체의 기치를 높이 들고” “남조선에서 미제를 몰아내는 민족해방의 혁명”을 추구하고 있었다. 실로 낡고 뒤틀리고 꽉 막힌 극좌 세력이 캠퍼스를 붉게 물들이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한 자리씩 잡았던 바로 그 인물들은 그 후로 30년 승승장구하며 한국 정치판을 쥐락펴락해왔다. 세계사의 큰 흐름에 정면으로 역행하며 “위수김동”의 교시를 떠받들던 주사파 운동권이 대한민국의 정치권력을 장악한 불합리와 부조리를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대체 무슨 역사의 신이 개입하여, 이성(理性)의 간지(奸智)가 작용해서 주사파와 같은 극좌의 수구세력이 진보의 훈장을 달고 30년을 설쳐대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일어났을까?

 

1980년대 신군부의 “국풍”

1981년 2월 25일 출범한 제5공화국의 “신군부”는 석 달 후인 5월 28일부터 닷새 동안 여의도에서 대규모 관제 축제 “국풍(國風) 81″을 개최했다. 당시 행사를 주관한 KBS는 민족문화의 주체성을 고취하고 국학에 대한 젊은 층의 관심을 제고하기 위한 문화축제라 선전했다. 여의도 광장에선 사물놀이, 줄다리기, 사자놀이, 고싸움놀이 등등 다양한 민속놀이가 다채롭게 펼쳐졌다. 주최 측 통산으론 전국 194개 대학 6천여 명의 학생, 민속인, 연예인 등 1만여 명이 참여해 총 659회의 공연을 올렸고, 동원된 관객 수는 전국적으로 1천만 명에 달했다.

 

관 주도의 예술 축제가 당시 들끓는 “신군부”의 정치 이벤트라는 비판이 자자했음에도 대중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다고 보인다. 단적인 예로 “국풍 81, 젊은이의 가요제”에서 금상을 받은 가수 이용의 데뷔곡 “바람이려오”는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새삼 43년 전의 관제 예술제를 떠올리는 이유는 당시 청와대 제1 정무비서관 허문도(1940-2016)가 고안했다는 바로 그 “국풍”이라는 기발한 명칭 때문이다.

 

 ▲1981년 전두환 정권 아래서 열린 “국풍 81”: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신군부의 구호, “겨레의 신바람, 겨레의 흥, 겨레의 멋”이란 구호가 보인다./공공부문

 

유가 경전 <<시경(詩經)>><국풍>에는 서주 초기부터 춘추시대까지 15개 제후국에서 널리 불리던 다양한 민가(民歌)들이 담겨 있다. 일상의 시름을 덜기 위해 부른 농부들의 노동요(勞動謠), 청춘남녀의 풋풋한 사랑과 때론 농염한 에로티시즘이 담긴 연애가(戀愛歌), 권력자를 조롱하는 풍자(諷刺)와 탐관오리를 때리는 민중의 채찍질까지 고대인의 희로애락이 담긴 160편의 노랫말이 <<시경>><국풍>에 채록되어 있다.

 

1981년 관 주도의 대중 축제를 기획했던 허문도는 과연 어떻게 “국풍”이란 표제어를 떠올릴 수 있었을까? 그가 <<시경>><국풍>의 의미와 가치를 진정 알고 있었을까? 그랬다고 볼 수는 없을 듯하다. <<시경>>의 “국풍”이란 민족 형성 이전 여러 지방 제후국의 다양한 풍습을 담고 있지만, 허문도가 내세운 국풍(國風)은 하나의 국가와 하나의 민족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의 국풍이란 국사(國史), 국어(國語), 국토(國土), 국사(國師), 국교(國敎), 국학(國學), 국기(國旗), 국기(國伎), 국민(國民) 등의 사례처럼 단일한 민족국가를 상정하고 있다. 그 의미를 풀자면, 민족 고유의 풍습이나 국가의 기풍(氣風)이나 민족의 고유 풍습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극심한 정통성 시비에 휩싸였던 제5공화국 “신군부”는 성난 민심의 수습을 위해 프로야구를 신설하고, 중·고생 교복·두발 자율화 정책을 시행하고, 사교육을 전면 금지했다. 국풍의 기획도 같은 맥락에서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유신체제는 초중고교 학생들에게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간명한 문장으로 민족적 정체성을 심어주었다.

 

극좌 운동권의 다섯 가지 역발상

1960~70년대 초·중·고교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귀에 못박이도록 들었던 “유신(維新)의 아이들”은 1980년대 대학가에서 “김일성의 아이들”로 거듭났다. 박정희 정권과 김일성 정권의 맞대결을 생각하면 의아한 일이지만, 유신 정권 아래서 강력한 민족주의 교육을 이수한 세대가 1980년대 대학가에서 김일성 주체사상에 매료된 이유는 어렵잖게 설명된다.

 

 ▲“국민교육헌장”은 1968년 11월 26일 국회 만장일치의 동의에 따라 박정희 전 대한민국 대통령이 12월 5일 발표한 당대 대한민국 교육의 지표를 담은 헌장이다./공공부문

 

수출입국의 산업화 전략 아래서 세계 전역으로 뻗어나가던 박정희 정권은 국민 통합의 구심을 잡기 위해 개개인의 의식 속에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심으려 했다. 김일성 정권은 반제국주의 사회주의 건설의 최종 목표를 민족 주체성의 확립이라 표방했다. 전자는 국제적 연대를 지향하는 자유 진영의 개방주의 시장경제를 추구했고, 후자는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폐쇄적인 사회주의 혁명 노선을 따랐다. 표면상 양자는 물과 기름처럼 상충적이었지만, 민족주의를 지상의 목표로 내세웠다는 점에선 합력(合力)의 포인트가 있었다. 극과 극이 민족의 이름으로 철썩 달라붙는 아이러니였다.

 

유신 교육의 모범생들이 “김일성의 아이들”이 되는 과정은 간단했다. 12년간 초·중·고교에서 배운 바를 정반대로 뒤집어서 대충 다섯 가지 역발상을 받아들이면 그만이었다. 첫째는 바로 “박정희가 친일 분자였고, 김일성이 항일 투사”라는 역발상이었다. 둘째는 “대한민국이 친일파가 외세와 결탁해서 급조한 나라이고, 북한은 항일 투사가 외세를 배격해서 만든 나라”라는 역발상이었다. 셋째는 “대한민국이 영구 분단 획책 세력이고,

 

북한이 통일 세력”이란 역발상이었다. 넷째는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민중을 착취하는 악마적 제도이고, 공산주의 명령경제가 노동자·농민 주도의 좋은 제도라는 역발상이었다. 다섯째는 미국이 사악한 제국주의 국가이고, 소련·중국이 구조화된 착취제도를 철폐하고 3세계 인민의 해방을 지원하는 반제국주의 국가라는 역발상이었다.

 

 ▲2007년 10월 4일 노무현 대통령의 방북 당시 ‘아리랑’ 공연에서는 ‘우리민족끼리’라는 구호가 등장했다./월간조선 2020년 3월호

 

이 다섯 가지 역발상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여러 방식으로 청년 대중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일례로 1980년대 대학가에는 박정희는 만주 군관학교를 거쳐 일본육사를 나온 일본군 장교이지만 김일성은 만주에서 항일 무장 게릴라 투쟁을 이끌었던 “민족의 영웅”이라는 풍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 풍문을 역사적 사실로 만들기 위해서 대한민국의 극좌 세력은 부단히 노력했다. 2009년 민족문화연구소가 출간한 <<친일인명사전>>이 대표적이다.

 

이 사전의 편찬자들은 박정희와 한국전쟁의 영웅 백선엽(1920-2020)에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딱지를 붙이기 위해 “위관급 이상 장교와 오장급 이상 헌병으로 재직한 자”는 모두 친일파로 분류한다는 자의적 기준을 적용해서 논란을 빚었다. 상식적으로 “인명사전”의 편집자들이 개개인의 행위에 대한 상세한 조사 이전에 먼저 “위관급 이상 장교” 모두를 친일반민족행위자라 단정할 수 있는가? 그런 방식이라면 유신 정권에서 사법고시에 합격한 자나 신군부의 공영방송사에 근무한 이는 모두 독재정권의 부역자란 낙인을 받을 수밖에 없다.

 

민족문화연구소는 과연 왜 그토록 집요하게 박정희와 백선엽을 친일파로 몰아가려 했을까? 근대화의 지도자 박정희와 자유 수호의 영웅 백선엽에 친일파의 오명을 씌움으로써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훼손하려는 의도였음이 분명하다. 대한민국이 친일파의 정권으로 낙인찍히는 순간, 민족사의 이단 세력으로 전락하고 만다. 동시에 북한 정권이 오히려 항일 무장투쟁에 뿌리를 둔 민족사의 정통 세력으로 재평가될 여지가 생겨난다.

 

1980년대 극좌 운동권 세력의 다섯 가지 역발상 중에서도 청년들의 심장에 불을 지른 가장 강력한 정치 감정(political emotion)은 바로 반일(反日)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유신의 아이들”이 “김일성의 아이들”로 거듭났던 이유는 “반공(反共) 민족주의”의 토양 속에 배태되어 있었다. 물론 “유신의 아이들”이 “김일성의 아이들”로 온전히 다시 태어나려면 반일 정서만으로는 태부족이었다. 정치적 좌우를 불문하고 “유신의 아이들”은 대부분 일본에 대한 증오심을 정치적 유전자로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최근 재개봉된 “건국전쟁” 김덕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공공부분

 

“유신의 아이들”이 “김일성의 아이들”로 다시 태어나려면 반일 감정에 반미(反美) 의식이 뒤섞여야만 했다. 그래야만 반(反)제국주의와 반(反)자본주의로 무장하여 “위수김동 만세”를 외치는 극좌 민족주의의 전사로 거듭날 수 있었다. 박정희를 친일파로, 김일성을 항일 투사로 재인식한 유신의 아이들에게 투철한 반미 의식을 심어주는 과정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유신의 아이들”은 원폭을 가해 일제를 패망시킨 주체가 미국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으며, 또한 6.25남침의 주체가 북한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견고한 유신 시대의 신념을 조각내려면 학술어로 포장된 정교하고도 세련된 반미주의(anti-Americanism)의 이론이 필요했다. 1980년대 대한민국을 휩쓴 반미주의는 놀랍게도 바로 미국 학계에서 만들어진 수정주의(revisionism)에서 나왔다. 이 점에 대해선 다음 회에 이어가기로 한다.

 

성공한 대한민국의 정신병리학적 문화 지체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놀라운 성공의 역사였다. 2차대전 이후 신생 국가 중에서 대한민국처럼 불과 두 세대 만에 산업화, 민주화, 선진화를 달성하고, 나아가 문화 대국으로 우뚝 선 사례는 단언컨대 단 한 나라도 없다. 세계사에 빛나는 역사를 구현했음에도 한국 인문·사회과학 분야 지식인 중 다수는 아직도 대한민국의 역사를 폄훼하고 비방하려는 시대착오적 열정으로 들떠 있는 듯하다.

 

지난 30~40년 한국의 지식인들은 대한민국의 성공사를 폄훼하고 북한의 참담한 실패를 모두 바깥 탓으로 돌려 교묘하게 감싸고 도는 몰상식과 불합리를 보여왔다. 바로 그러한 지식인들이 자라나는 미래 세대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음은 대한민국의 커다란 불행이다. 문명사의 첨단에서 세계 10대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에서 대체 왜 그러한 정신병리학적 문화 지체가 계속되고 있는가? 이 활달한 인공지능(AI)의 시대 최첨단의 과학 기술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인문·사회과학계는 왜 아직도 구시대의 낡은 이념과 집단적 확증 편향에 사로잡혀 있어야만 할까? 지금부터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에서는 그 사상적 뿌리를 파헤쳐 보려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