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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의 시선(중앙일보) 2024.01.25 01.04 좋은 병원에서 치료받고 싶다는 희망 - 06.20 "우리 아들만 여기 없다"는 어머니의 울부짖음새창으로 읽기

상림은내고향 2024. 6. 20. 14:29

안혜리의 시선 중앙일보 논설위원  2024

01.04 좋은 병원에서 치료받고 싶다는 희망

▲지난 2일 부산 가덕도 신공항 부지에서 피습당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헬기로 서울로 이송된 후 다시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이송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오전 10시 27분 목의 1.5㎝ 열상으로 경정맥 손상이 의심되는 중증 외상 환자 발생. 구급 장비 갖춘 소방차가 출동해 응급조치 취한 후 20여 분 뒤인 10시 49분 구급차 현장 도착. 10㎞ 거리 병원 응급실 대신 14㎞ 떨어진 인근 축구장으로 이동. 11시 4분 119 헬기(소방 응급의료헬기)를 타고 사고지점에서 27㎞ 떨어진 부산대병원 권역외상센터 도착. 응급 조치와 수술에 필요한 검사를 마친 13시 무렵 다시 119 헬기를 타고 410㎞ 떨어진 서울대병원으로 출발. 원래 14시 무렵 도착 예정이었으나 서울대병원 헬기장 공사로 인해 서울 용산구 노들섬 헬기장으로 착륙지점이 바뀌는 바람에 1시간 지연된 15시 도착. 구급차 이용해 18㎞ 떨어진 서울대병원 응급의료센터로 출발해 15시 19분 병원 도착. 15시 45분 수술 시작.

 

지난 2일 부산 가덕도 신공항 부지를 둘러보던 중 "살해 의도로 달려들었다"는 60대 남성의 흉기에 피습당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이날 이송 동선이다. 만약 다른 정보 없이 경로만 알려졌다면 대다수 국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섬뜩한 테러를 규탄한다"며 이 대표의 빠른 쾌유를 기원하는 한편, "우리나라 응급의료체계가 이렇게까지 엉망이었느냐"며 의사와 병원을 향해서도 욕을 바가지로 퍼부었을 거 같다. 중증 외상 환자가 무려 총 450㎞에 달하는 거리를 이동하고 허공에서 지체하느라 사고 발생 5시간을 넘겨서야 수술을 받은 건 누가 봐도 비상식적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통상 중증 외상 환자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골든타임은 1시간 내외다.

 

 ▲지난 2일 이재명 대표가 서울 용산구 노들섬 헬기장에 도착한 후 서울대병원 이송을 위해 구급차로 이동하고 있다. 서울대병원 헬기장 공사로 도착이 지연됐다. 연합뉴스

 

표면상 응급실 뺑뺑이처럼 보이지만 이 비상식적 동선은 의료진·병상 부족에서 파생하는 응급의료체계의 문제나 취약한 지방 의료 인프라 탓에 빚어진 일이 아니었다. 부산일보 보도에 따르면 부산대병원 의료진은 대량 출혈 등 이송 중 혹시라도 생길 수 있는 위험을 차단하고자 전원 없이 직접 수술할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서울 행은 향후 일정을 고려한 이 대표 가족과 민주당 측 결정이었다는 얘기다.

부산대 대신 서울대 택한 이재명
민주당 의료정책의 허점 드러내
이념 대신 현실 기댄 진단 내놓길

중증 외상에 관해선 국내 최고인 부산대병원 권역외상센터를 두고 이 대표가 119 헬기 최대 운항 거리(편도 400㎞, 전국 8대인 닥터헬기는 지역에 따라 70~120㎞)를 꽉 채우는 서울대병원까지 이동해 수술받은 소식이 전해지자 적잖은 의사들이 비판을 쏟아냈다. 이들 의사들은 일부 반(反) 이재명 세력의 자작극 음모론이나 증상 부풀리기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촌각을 다투는 응급이 아닌데 세금으로 무상 지원하는 119 헬기를 두 차례나 이용한 것은 특혜가 아니냐"고 지적했다.

 

SNS에서 이런 논란이 빚어지자 강선우 민주당 대변인은 "테러로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본인 가족이 당해도 중증이 아니라거나 특혜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느냐"며 "정치색이 달라도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선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인물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당장 큰 봉변을 당한 사람을 두고 너무 야박하다는 마음일 것이다.

 

아마 대다수 국민 역시 강 대변인 주장에 동의할 거라 본다. 다친 사람이 있으면 절차상 잘잘못을 따져 묻기 전에 치료부터 하는 게 우선이다. 또 강 대변인 지적대로 내 가족이 다쳤다면 당장 생사의 기로에 놓인 위중한 상태는 아닐지라도, 아니 그 정도로 긴박하지 않으니 오히려 수백 ㎞를 헬기로 이동해서라도 최고의 병원이라 생각하는 곳에서 수술받기 원할 거다. 인지상정이기는 한데, 지난 2004년 KTX 개통 이후 지방 사람들이 인근에 크고 좋은 병원이 있어도 서울의 빅5 병원만 찾는 통에 수도권 쏠림이라는 기형적인 의료 왜곡을 낳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민주당이 추진해온 일련의 의료 정책들을 보면 보통 사람들의 이런 바람과 욕망을 무시한 채 이념에 경도돼 엉뚱한 해법만 내놓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우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가령 지난해 '지역·필수 의료 살리기 TF'까지 만들어 무리한 지역의사제와 공공의대법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배경에는 지방에 의사와 병원이 없다는 진단이 깔려 있었다. 이를 토대로 헌법상 자유를 침해하든 말든 지방 붙박이 의사를 만들고 공공병원을 더 짓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는데, 의도치 않게 이번 사건으로 민주당 진단과 해법의 허점을 드러낸 셈이 됐다.

 

욕망을 부인하고 이념이나 당위에만 기대는 정책은 성공할 수 없다. 특혜를 따져묻는 사람들에게 발끈하기 전에 민주당이 그걸 깨닫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

 

01.25 친윤, 개딸 행태를 답습해서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23일 충남 서천특화시장 화재 현장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만나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하고 있다. 이로써 두 사람의 갈등은 표면상 봉합됐다. 연합뉴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충돌은 한 위원장의 90도 폴더 인사로 일단 '봉합'됐다. 아무 죄 없이 영조의 노여움 앞에서 석고대죄할 수밖에 없었던 사도세자처럼 한 위원장은 살을 에는 한파에 패딩도 입지 않고 우산 없이 눈을 맞으며 10여 분을 기다린 끝에 충남 사천시장을 찾은 윤 대통령을 맞았다. 만남 뒤 취재진에게는 "대통령에 대한 깊은 존중과 신뢰의 마음에 변함이 전혀 없다"며 낮은 자세를 유지했다. 한 위원장이 한껏 굽히고 들어가는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일단 급한 불은 껐다. 윤 대통령 체면은 살려주면서 다가오는 총선에 악재로 작용할 소모적인 내분 확산을 막았기에, 여권은 일단 안도하는 분위기다.

윤-한 갈등 촉발한 김건희 명품백
대통령 무리수에 친윤은 궤변
상식 외면하면 민심 멀어진다

두 사람의 속마음은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다. 다만 국민 눈높이로 보자면 안도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단순히 누군가의 사과나 누군가의 사퇴와 같은 특정 사안에 대한 '봉합'이냐 '해결'이냐의 차원을 넘어 윤석열 정부의 근본적 한계를 만천하에 드러냈기 때문이다. 한계란 바로 김건희 여사다. 그동안 적잖은 사람들이 막연하게 추측만 했다면, 이번 대통령실의 비대위원장 사퇴 요구 소동을 계기로 다들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20년을 동고동락한 최측근에다 지난 문재인 정권에선 모진 탄압까지 함께 맞서 싸운 동지적 관계조차 한순간에 위험에 빠뜨릴 만큼 김 여사는 이 정권의 불가침 성역 같은 존재라는 사실 말이다.

 

한 위원장은 법무부 장관 시절은 물론 비대위원장 취임 후에도 줄곧 김 여사를 두둔하는듯한 모습이었다. 대통령과의 수직관계를 벗어나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수준의 변화를 기대하는 적잖은 국민은 그래서 오히려 실망했다. 김 여사와 관련해 당내 인사로선 처음으로 김경율 비대위원이 문제를 제기한 이후인 지난 18일과 19일 한 위원장이 한 발언도 국민 눈높이에선 과하기는커녕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대통령더러 야당의 김건희 특검법을 받으라거나 김 여사더러 명품백 수수와 관련해 당장 사과하라는 것도 아니었다. 고작 "국민이 걱정할 부분이 있다"라거나 “국민 눈높이에서 생각할 문제"라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대통령실은 이를 문제 삼아 다른 꼬투리를 대서 취임 28일밖에 안 된 집권당 대표를 '또' 갈아치우겠다고 나섰다. 게다가 이 문제를 제기한 비대위원 사퇴를 양측 화해의 조건으로 내걸었다는 얘기마저 들린다. 누가 봐도 명분이 없을뿐더러 비상식적이다.

 

 ▲김경율 비대위원(가운데)이 지난 22일 국민의힘 비대위에 참석했다. 김 위원은 앞서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논란과 관련해 당내 인사로는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뉴스1

 

그런데 이른바 친윤이라는 사람들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다. 이들은 이번 갈등을 촉발한 김 여사의 명품백 논란과 관련해 "피해자에게 사과하라는 격"이라며 김 여사 엄호에 나섰다. 윤심의 핵심이라는 이철규 의원은 "국민이 진실을 모르기 때문에 우려한다"는 식으로 국민을 가르치려드는 태도까지 보였다. 이 의원을 비롯해 장예찬 전 최고위원, 이용 의원 등 윤 대통령 부부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이들이 말하는 진실은 딱 하나다. 전후 맥락 다 잘라내고 몰카 함정이었으니 그저 김 여사는 무고한 피해자라는 거다.

 

대통령 부인이 특정 세력의 저열한 몰카 공작에 속았다는 걸 누가 모르나. 그걸 몰라서 민심이 요동치는 게 아니다. 민심이 김 여사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건 애초에 대통령 부인 자리에 걸맞은 공적 마인드 하나 없이 그런 인사와 거리낌 없이 만남을 이어가고, 아무리 사석이라지만 국정에 개입하는듯한 부적절한 언행을 쏟아내고, 결정적으로 값비싼 여러 선물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하다 하다 이젠 공작을 진행한 친북 목사한테 받은 300만 원짜리 디오르 백을 김 여사가 돌려주면 국고 횡령이라는 궤변까지 이철규 의원 입에서 나왔다. 김 여사는 이 선물을 사적으로 받은 게 아니라 정상적인 절차와 규정에 따라 받아 처리했다는 주장을 하려고 이런 무리수까지 두는 모양인데, 기가 막히다. 법상으로는 대통령이나 공직자가 직무수행과 관련해 국가적 보존 가치가 있는 선물인 경우 즉각 신고하고 선물을 인도하도록 돼 있는데 디오르 백이나 샤넬 화장품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호위무사들의 일련의 발언은 조국 사태 때 어용 지식인을 자처한 유시민 작가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측의 증거 인멸 시도를 "증거 보존"이라는 궤변으로 옹호하던 걸 떠올리게 한다. 또 적잖은 친윤 유명 인플루언서들이 김경율 비대위원을 맹비난하며 사퇴를 요구하는 대목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하나 지키겠다고 당내의 합리적인 다른 목소리를 억압하는 '개딸' 행태와 정확히 겹쳐 보인다. 개딸 전체주의를 비판하며 출발한 비대위에 개딸의 그림자라니. 이래저래 국민의 근심만 깊어진다.

 

02.15 '건국전쟁'의 박수엔 이유가 있다

▲이승만 다큐멘터리 '건국전쟁'이 14일 현재 관객 38만명을 넘으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상영관마다 매진이 이어지고, 영화가 끝난 후 박수가 터져 나오는 이례적 현상까지 등장했다. 연합뉴스

 

남다른 집안 분위기 덕분에 지난 수십 년간 대한민국에서 자행돼온 전 국민적 이승만 폄훼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다. 지금도 집 이곳저곳의 책꽂이에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1875~1965)의 업적을 기술한 관련 서적 10여 권이 손때 묻은 채로 꽂혀 있다. 대한민국 번영을 이끈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1953)이나 독도를 우리 영토로 편입한 평화선(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선언·1952) 발표,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법무부 장관 시절 상공회의소 제주포럼 연설에서 언급한 농지개혁(1950) 등등. 뛰어난 외교 역량을 토대로 시대를 앞서간 이런 공은 쏙 빼고 과오만 부각한 초·중·고 역사 교과서를 통해 이승만을 편향적으로 배운 다른 사람들보다 그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했다.

다큐로 드물게 38만 흥행 가도
4·19 이면의 역설적 상황 다뤄
교과서가 안 다룬 평가에 울림

이승만을 재조명한 김덕영 감독의 '건국전쟁'이 다큐멘터리로는 이례적으로 관객 30만명(14일 현재 38만명)을 넘기며 흥행 가도를 달린다기에 보러 가면서도, 그래서 오히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그저 숙제하는 심정으로 일단 영화 예매는 했지만 내심 '뭐 새로운 게 있겠나'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착각이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 당시 맨해튼 카퍼레이드 모습. 100만 인파가 몰렸다. '건국전쟁' 김덕영 감독은 이 사진을 본 후 워싱턴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어렵게 45초 분량의 동영상을 발굴해 70년만에 공개했다. [사진 기파랑]

 

무방비로 영화를 보다 도입부부터 울컥했다. 요즘 말로 '국뽕' 차오르는 영웅적 면모의 1954년 맨해튼 100만 인파 속 카퍼레이드 동영상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정반대로 그의 가장 치욕스런 과오인 1960년 3·15 부정선거가 촉발한 4·19 시위 직후 서울대병원 문병 장면에서였다. 주위 만류를 뿌리치고 다친 학생을 위로하러 달려간 그는 울음을 가까스로 삼키며 한없이 죄스럽고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를 가까이에서 보필한 김정렬 전 국무총리의 회고록 『항공의 경종』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부정을 보고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며 "한 사람도 더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며 하야를 결심하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는 증언이 나온다. 영화는 사진으로도 미처 다 담지 못한 그의 진심을 이렇게 수 초 동안 울먹이는 표정으로 고스란히 전달한다.

 

국익이나 국민 의사에 반하는 잘못을 해도 진정한 사과는커녕 남 탓이나 남일 말하듯 하는 요즘 여야 정치인들의 유체이탈식 화법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평생 그토록 이 땅에 뿌리내리려고 노력했던 대한민국 국민의 자유민주주의에의 각성을 목격하고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 것이다. 그게 비록 자신의 정치적 사망과 맞바꾼 것이라도 말이다. 실제로 그는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을 비난한 적이 한 번도 없다(『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 오히려 하야 후 사저인 이화장에 머물 때 대만 장제스 총통의 위로편지에 '나는 위로받을 필요가 없다, 불의에 궐기한 백만 학도가 있으니 나라의 미래가 밝다'는 답장까지 썼다. "이승만은 4·19를 유발한 부정적 존재인 동시에 4·19를 촉진한 긍정적 존재"라는 평가(박명림 등『이승만 대통령 재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1960년 4월 23일 4·19 시위로 다친 학생을 위문하러 서울대병원을 찾은 모습. 그는 시위대를 비난하기는커녕 부정을 보고 일어섰으니 "장하다"고 했다. [사진 기파랑]

 

결코 과장이 아니다. 줄곧 꿈꿔온 문명 부강한 나라, 그런 나라를 만들려고 힘쓰는 국민을 만들기 위해 그는 교육을 가장 중시했다. 왕을 몰아내려는 역모죄로 1899년 투옥된 후 1904년 29살 나이로 옥중 집필한『독립정신』서문에는 '무식하고 약한 형제자매들이 스스로 각성하여 올바로 행하며, 아래로부터 변하여 썩은 데서 싹이 나며, 죽은 데서 살아나기를 원하고 또 원한다'고 썼다. 영화에도 그가 교육에 기울인 노력이 잘 나타나 있다. 건국 후 대통령 취임 이후뿐만이 아니라 일제 치하 1910~20년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하던 시절부터 8개 섬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학생을 모으고, 여자라는 이유로 버려진 아이를 구해 공부시킨 감동적인 스토리가 나온다. 차별 없이 공부하라고 여학생들을 위한 기숙사까지 지었다.

 

심지어 6·25 전쟁 중에도 학교 문을 닫는 대신 전시연합대학을 세우고, 전후 복구의 원동력이라며 대학생의 병역 유예 조치를 했다. 이런 정책 덕분에 광복 직후 70%가 넘었던 문맹률을 크게 낮췄을 뿐 아니라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교육 기적을 이뤄냈다. 그렇게 공부한 학생들이 이후 박정희 시대 산업화는 물론 4·19라는 민주화의 토대를 이뤘다. 영화 말미에 "이승만이 놓은 레일 위에 박정희의 기관차가 달렸다"는 내레이션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영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과연 소문대로 아무도 시킨 사람이 없는데 한 자리도 비지 않은 영화관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모두 같은 마음 아니었을까. 고마움, 미안함, 그리고 부끄러움 말이다.

 

03.07 기어이 의사의 굴복을 원한다면

▲윤석열 대통령이 의사를 향한 강경 발언을 이어갔다. 6일 국무회의에서 “국민의 생명을 볼모로 하는 불법 집단행동에는 법과 원칙에 따라 엄중히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의사들은 "국민 생명을 볼모로 잡는 건 정부"라며 반발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의대 교수가 잇따라 사직 의사를 밝혔다. 경북의대 이식혈관외과 윤우성 교수와 충북의대 심장내과 배대환 교수다. 두 사람 모두 윤석열 정부가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의 주요 명분으로 삼는 부족한 지역 필수의료를 책임지고 있는 핵심 인재들이다. 공교롭게도 이들이 공개적으로 사직 의사를 밝힌 날은 윤 대통령이 경북대에서 열린 16번째 민생 토론회에서 "지역 기반 명문 의대 정원을 대폭 늘려 좋은 의사를 길러내겠다, 대구를 비롯한 지방에서 그 혜택을 더 확실히 누리도록 만들겠다"고 약속한 바로 그 당일이었다.

 

윤 교수는 "외과가, (신장이식 등 혈관질환을 다루는) 이식혈관외과가 필수과라면 그 현장에 있는 우리에게 왜 귀를 기울이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모든 걸 짊어진 전공의 뒤에 (교수가) 숨는 현실이 부끄럽다"며 사직했다. 배 교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10년 뒤 의사 1만명 늘리겠다고
의사 8000명 면허 취소 옳은가
이미 접어든 필수의료 붕괴의 길

젊은 교수들의 사직 소식에 언론은 "수억 원 버는 배부르고 선민의식 가득한 엘리트 의사들의 밥그릇 투쟁에 교수까지 합류했다"는 식으로 비판하지만, 난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사직은 파국으로 치닫는 작금의 의·정 갈등의 본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출발은 지역의료·필수의료 살리기와 고령화하는 의사집단에 새 피 수혈하기였다. 그런데 그 명분이 사라진 건 이미 오래고, 처벌 만능 검사 정부의 의사 군기 잡기로 변질해 가뜩이나 부족한 필수의료 인력만 의료현장을 떠나게 만들었기에 하는 말이다.

 

정부의 일방적인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방침에 반발해 가장 먼저 현장을 떠난 건, 수억 원 버는 성형외과·피부과 개업의들이 아니다. 명예와 사회적 지위를 누려온 의대 교수도 아니다. 정부가 진작에 해결했어야 할 비정상적인 원가 이하 의료수가 구조 탓에 저임으로 중노동을 견뎌온 각 종합병원의 가장 약한 고리인 필수의료 전공의들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원가 이하로 물건을 팔아 계속 적자를 보는 어떤 회사가 비용을 줄여보겠다고 직원 40%를 저임의 수습사원으로 채워놓고는 연속 36시간 잠도 못 잘 만큼의 엄청난 노동강도를 강요해온 것과 같다. 이런 회사에 더는 미래가 없다고 전부 사표를 던졌더니, 사측이 이건 사표가 아닌 불법 파업이라며 사표는 수리할 수 없으니 무조건 근무하라고 윽박지르다 못해 여길 나가면 아무 데도 취직 못 하게 불이익 주겠다고 협박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윤 교수가 "모든 걸 짊어진 전공의 뒤에 숨어 부끄럽다"고 한 이유다.

 

결코 비약이 아니다. 가령 의료진 12명이 투입돼 평균 14~15시간 하는 '고혈류 뇌혈관 우회수술'의 수가는 237만 5000원이다. 수가를 적용받지 않는 성형외과 코 수술보다 훨씬 싸다. 또 '뇌동맥류 결찰술' 수가는 250만원인데, 일본은 1140만원이다. 이렇게 낮은 수가 탓에 수술할수록 병원이 적자를 보는 구조라, 병원은 전문의를 적정 인원만큼 채용하는 대신 공백을 전공의들로 채워왔다.

 

모든 전공의가 대체 불가하지만, 전국 모든 병원이 이런 상황이라 특히 필수의료 전공의는 더더욱 귀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난해 말 집계된 2024년도 전공의 지원율을 보면 필수의료 진료과목 지원율 감소 추세에 따라 올해도 소아청소년과 25.3%, 흉부외과 38.5%, 산부인과 67.4%, 응급의학과 79.6%에 불과했다. 환자를 제대로 보려면 꼭 필요한 적정 정원조차 채우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 부족한 수만큼 해당 필수의료로 진로를 택한 전공의들이 이미 오랫동안 눈 한번 못 붙이고 어쩔 땐 연속 36시간, 또 누구는 이틀에 한 번 당직을 서는 가혹한 업무환경을 견디며 지금까지 병원을 지켜왔다는 의미다. 이들은 의사면허는 땄으니 선배 수만 명이 그리했듯이 굳이 어려운 전문의를 따지 않고 지금 당장에라도 '진료과목 성형외과·피부과' 간판을 내걸고 얼마든지 쉬운 돈벌이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도 그 동안 병원을 지켜왔다. 그런데 돌아온 건, 정부의 의대 2000명 증원 방침 첫날부터 대통령·총리·검찰총장 등이 돌아가며 내뱉은 "협상 불가, 면허 취소, 처벌" 발언, 즉 범죄자 취급이었다. 히포크라테스 아니라 예수도 견디기 어려운 모욕 아닐까.

 

혹자는 "이번에 윤 정부가 2000명 증원을 관철하면 총선 승리는 떼놓은 당상"이라며 응원한다. 총선 결과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2000명을 관철하든, 단 1명의 정원도 못 늘리든 이미 소아청소년과에서 목격했듯이 앞으로는 의대 정원과 무관하게 모든 필수의료를 선택하는 의사가 크게 줄어들 것이고, 이미 고령인 현직 전문의들이 다 떠나면 우리 생명을 살릴 의사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전 세계가 부러워하던 수준 높고 값싼 한국 필수의료의 붕괴, 우린 이미 그 길에 접어들었다.

 

03.13 춘천서 출퇴근만 4시간…75세 소아외과 의사, 병원 못 떠난 이유

▲지난달 16일 박귀원 중앙대학교병원 소아외과 임상석좌교수와 만났다. 10년전 서울대병원에서 정년퇴임한 '한국 소아외과의 전설'인 박 교수는 "의사가 없다"는 호소에 은퇴를 번복했다. . 김경록 기자

 

한국 '소아외과의 살아있는 전설'인 박귀원(75) 중앙대병원 소아외과 임상 석좌교수를 만난 날은 수련병원 전공의들의 집단사직 소식이 막 들려오던 지난달 16일이었다. 의사들은 "의료수가 조정 없는 정원 확대는 필수의료 대책이 될 수 없다"고 반발했지만, 정부는 증원 규모·시기는 협상 대상이 아니라고 못 박으면서 "집단행동 시 처벌하겠다"고 강경 대응에 나섰다. 결국 필수의료 전공의를 필두로 1만명 가까운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다.

편견을 실력으로 극복해온 삶
소아외과의 없어 은퇴 못 하지만
의사란 원래 '봉사'하는 직업
사회도 의사 소명감 꺾지 않길

박 교수는 서울대병원 1호 '여성' 외과 전문의이자 '소아외과' 전임의 1회 출신이다. 35년 넘는 서울대병원 재직 동안 무려 3만 건 넘는 경이적인 수술 기록을 남긴 그는 평생 학회 아닌 해외여행은 한 번도 못 갈 만큼 쉼 없이 달려왔고, 정년퇴임과 함께 은퇴를 마음먹었다. 하지만 "소아외과 의사가 없다"는 말에 정년퇴임 한 달 만에 중앙대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후임을 못 구해 10년째 병원을 지키고 있다. 필수의료의 산증인에게 의사의 인생에 대해 물었다. 안혜리 논설위원

인생의 결정적 장면, 하나
정년 한 달 만의 복귀

원치 않던 의대 입학, 여성을 아예 안 받던 외과 지원, 그 시절엔 개념도 생소했던 소아외과로의 방향 전환 등 인생의 모든 선택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2014년 3월, 정년퇴임 한 달 만의 현역 복귀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서울대병원 수술방에서 소아 마취를 해주던 대학 1년 선배이자 당시 중앙대병원 의료원장이던 김성덕 남양주 현대병원 의료원장이 "여기 소아외과 의사가 없으니 몇 년만 봉사해라"기에 그냥 "알았습니다" 하고 출근을 시작했다. 퇴직에 맞춰 집을 서울대병원 근처에서 춘천으로 옮겼기에 매일 기차·지하철을 갈아타며 출퇴근만 4시간 넘게 걸렸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선배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하기도 어려웠지만, 소아외과 의사가 얼마나 부족한지 잘 알았기에 순순히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그땐 이럴 줄 몰랐다. 내심 길어야 3년을 생각했다. 곧 춘천에서 의료봉사나 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 거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갈수록 소아외과 전문의가 줄다 보니 10년이 훌쩍 흘렀다. 탈장부터 고난도의 신생아 선천성 기형, 외상 수술 등이 가능한 대한소아외과학회 회원 수는 현재 50~60명, 고령이 많아 현장엔 20~30명만 있다. 어린이병원을 둔 서울대병원을 비롯해 대한민국 모든 병원에 소아외과 전임의가 단 한 명도 없을 정도다. 오는 5월 군 제대하는 의사 1명이 서울대병원에 들어올 예정이었는데, 최근 의·정 갈등 여파로 이마저도 불투명해졌다.

 

이유는 간단하다. 소아과·외과도 안 하려는 마당에 더 어려운 소아외과는 더더욱 기피하기 때문이다. 소아외과 전문의는 외과 전공의(레지던트)를 마치고 추가로 2년의 전임의(펠로)를 거쳐야 하기에 돈·시간을 더 투자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더 공부해 전문의를 따도 진로가 마땅치 않다. 수익에 도움이 안 된다며 대형병원조차 적정 수만큼 채용하지 않고, 저출산 여파로 개업도 쉽지 않아서다. 그 결과 2013년 52명이던 소아외과 전문의 지원자 수는 2018면 2명, 2021년엔 단 1명도 없었다. 박 교수는 "외과 전공의 시절엔 흥미를 보이다가도 다들 현실의 벽 앞에서 결국 포기하더라"고 했다.

 

가령 레지던트 하나는 "이제 결혼하니 돈 벌어야 한다"며 전임의 대신 개업을 택했고, "꼭 소아외과 하겠다"던 다른 레지던트도 "(개업이 가능한) 대장 항문 분야를 하겠다"고 도망갔다. 결국 2027년 2월 삼성서울병원에서 정년퇴직하는 교수가 후임으로 오기 전까진 만 78세에도 주 3회 외래에, 주 2회 수술을 박 교수 혼자 감당해야 한다. 비단 소아외과뿐 아니라 웬만한 필수의료는 이렇게 정년퇴직한 의사들 돌려막기로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

 

그땐 다들 했는데 지금은 왜 안 할까. 그래도 젊은 의사들 탓 못 한다. 오히려 이해한다. 박 교수가 1979년 소아외과에 발을 들였을 때만 해도 신생아 출생 수가 연 120만명이었는데, 지금은 20만명대다. 소아는 조직이 작고 연약한 데다 면역 등 모든 면에서 성인과 달라 난도가 훨씬 높은데도 수가는 예나 지금이나 원가 이하라 생명을 살리는 보람과 무관하게 병원에선 천덕꾸러기 신세로 눈칫밥을 먹어야 한다. 업무 강도는 센데 보상은 턱없이 부족하니 후배에게 차마 권할 수 없다. 수가나 과잉 의료 쇼핑 등 전반적 의료 시스템 정비 없이 전체 의사 수만 늘려선 소아외과(필수의료) 의사 확대로 이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이유다. "시스템을 바꾸려면 나라가 돈을 쓰고 국민을 설득해야 하는데 왜 무리수를 두는지…. "

인생의 결정적 장면, 둘
"여자는 안 된다"던 외과에 입성

 ▲정년퇴임 한달만에 중앙대병원으로 돌아온 박귀원 교수[사진 중앙대병원]

 

의대를 졸업하던 1972년엔 과를 먼저 정한 후 인턴을 했다. 퇴근하면 지쳐 누워만 있던 산부인과 개원의 엄마를 봐서인지 산부인과는 싫었다. 환자 차도가 바로 안 보이는 내과도 성질에 안 맞았고, 외과가 딱이었다. 그런데 남 말할 것 없이 서울의대 외과 교수였던 아버지(박길수)부터 결사반대였다. "누가 여자한테 배 내놓고 수술하겠느냐"는, 그 시절 보수적인 여느 아버지다운 반응이었다. 아버지 강권에 못 이겨 원했던 법대 대신 세 언니와 똑같이 의대를 택했지만, 이번엔 물러서지 않았다. "수술 맡기겠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외과를 하겠다"고 버텼다.

 

"알아서 하라"는, 체념에 가까운 허락을 받은 후 위암의 세계적 권위자였던 고(故) 김진복 당시 의국장한테 승인 도장을 받으러 갔다. 외과 지원자 중 성적이 가장 우수한 편이었는데도 그는 2시간을 "하지 마라"고 설득했다. 통금이 있던 시절이라 수술이 늦게 끝나면 다들 야전 침대나 책상에 엎드려 잤는데, "여자는 그럴 수 없다"는 거였다. "당직 서겠다, 외과 하겠다"고 고집부리니 이번엔 "이화여대 병원에 가서 하라"고 했다. "서울의대 나와서 왜 이화여대 가느냐, 안 받아주면 미국 의사 면허 시험에 이미 합격했으니 미국 가겠다"고 맞섰다. 이렇게 설득 반, 협박 반으로 겨우 도장을 받았다.

 

여자라 당직실엔 못 들어갔지만 간호사실에서 쪽잠을 자면서도 기어이 똑같이 당직을 섰다. 일복은 넘쳤다. 당시 서울대병원에선 외과 전문의가 되려면 무의촌 진료 경력이 필요해 막 문을 연 춘천 도립병원에 근무한 적이 있는데, 술 먹어 위궤양 터지고 복막염으로 온 농부들이 많아 6개월 동안 수술을 참 많이 했다. 서울도 아니고 스무 살 넘은 처녀 보기 힘든 시골 동네였으니 25살 미혼 여의사를 곱게 봐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젊은 여의사한테 수술받는 게 겁 안 나냐"고 물으면 나이 든 농부들은 씩 웃으면서 "바느질은 여자가 다 하잖느냐"고 했다. 서울 최고 인재들보다 편견이 없었다.

 

그렇게 1977년 서울대병원 여성 외과 전문의 1호가 돼서 원자력병원에서 일했다. 마침 미국에서 막 돌아온 김우기 교수가 서울대병원에 생긴 소아외과로 부임했다. 그가 "어른을 수술하면 4~5년이지만 애들은 수십 년을 더 살릴 수 있다, 그만큼 보람이 있다"며 설득하는 통에 2주 동안 답을 피하다 결국 1979년 소아외과로 전공을 바꿨다.

인생의 결정적 장면, 셋
아버지의 죽음, 구본무의 지혜

 ▲생전 구본무 LG 회장이 인재 확보 차원에서 대학생 초청 행사를 하는 모습. 구 회장의 봉사하는 삶에 대한 얘기가 박귀원 교수 삶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중앙포토]

 

아버지는 박 교수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지난 2001년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져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실려 왔다. 상태를 본 신경외과 교수가 결과가 안 좋을 거라며 "안 하겠다"는 걸 억지로 우겨서 수술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후 8~9개월 동안 끝내 단 한 번도 의식을 못 차리고 돌아가셨다. 의료비, 가족의 고생, 무엇보다 아버지 당신의 불필요한 고통. 후회했다. "의료라는 명목으로 아버지한테 못 할 짓 한 게 아닌가. "

 

현역 시절엔 머릿속이 오로지 아이들 살릴 생각으로 가득 차서인지 아버지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막상 정년이 다가오니 덜컥 겁이 났다. 미혼이라 고독사가 제일 무서웠고, 그다음으론 언니든 조카든 본인 의지와 무관하게 불필요한 연명 치료를 선택해 결국 아버지 같은 마지막을 맞이할까 두려웠다. 평소 알던 비구니 스님이 머무는 춘천 감주사에 내려간 이유다. 그리고 맘 속에 품기만 하다 3년 전쯤 연명의료결정서도 작성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지만 죽음을 이렇게 허망하게 의사 손에 맡기고 싶진 않았다.

 

 ▲반려견 효리와 함께 춘천 감주사 근처 산책에 나선 박귀원 교수. [사진 박귀원]

 

그에게 대체 의사란 무엇일까. 박 교수는 이 질문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봉사"라고 답하면서, 고 구본무 LG 회장이 생전 로터리 클럽 강연에서 했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사과 10개 중에 3개를 애들 셋한테 하나씩 나눠줘서 먹게 하고는 "몇 개 남았느냐"고 물었더니 한 놈이 "7개"라고 답하지 않고 "3개 남았다"고 하더란다. "먹는 게 남는 거"라면서. "구 회장님 말씀이, 죽어서 한 푼도 못 가져가는데 돈이 아무리 많으면 뭐하냐, 죽을 때 내 돈은 내가 가진 돈이 아니라 내가 여태까지 남을 돕느라 쓴 돈이라는 거예요. "

 

어디 돈뿐일까. 의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살릴 수 있는 의술을 갖고 있으면 뭐하나, 실제로 살려야 의술이지. 그리고 박 교수는 "여전히 전성기"라는 그의 일생을 통해 실제로 이런 봉사하는 삶을 보여줬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남을 위해 봉사한다는 생각이 없으면 하기 힘든 게 의사에요. 그런데 최근 다들 의사를 욕하니. 우리 때 산부인과 레지던트 하나가 3일 휴가 가보겠다고 3일 연속 연장 근무한 끝에 강원도 해변에서 심장마비로 죽기도 했어요. 지금은 그렇게까진 아니어도 고생은 여전한데, 중환자실 들어가면 무조건 살아나온다고 생각하니까 의사에 대한 불신이 더 커지는 거 같아요. 지금 갈등의 해법을 좀 찾았으면 좋겠어요. " 완곡한 바람이었다.

 

03.27 "그러나 난 부끄럽다"…아프리카 먹여살려 칭송 받은 그의 후회

▲지난 3월 4일 경기도 광교 한상기 박사 자택을 찾았다. [사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우리는 아프리카를 모른다. 구호단체 모금 영상 속 기아·질병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어린이의 이미지가 아프리카의 전부라고 착각하며 겁을 먹는다. 전 세계 정보가 실시간으로 쏟아지고 해외여행이 일상화한 지금도 그러한데 하물며 1970년대엔 어땠을까. 가난과 재해, 전염병, 여기에 내전까지 덮친 저 먼 땅을 자기 삶의 터전으로 삼겠다는 생각을 하기란 그 누구라도 쉽지 않다. 그런데 그 시절 서울대 교수라는 안정된 삶, 그리고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원이라는 빛나는 커리어 대신 아무런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아프리카를 선택한 남자가 있었다. 나이지리아를 세계 8대 작물 카사바(타피오카 원재료) 세계 1위 생산국에 올려놓은 '나이지리아의 우장춘' 한상기 박사(91)다. 그는 왜 '한국의 우장춘'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우장춘'이 된 걸까. 1994년 은퇴 후 미국생활을 거쳐 2013년 귀국해 수원 광교에 자리 잡은 한 박사를 지난 4일 만나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 그날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2024년 대한민국과학기술유공자로 한 박사를 지정하고, 그의 집에 명패를 부착한 날이었다.

'슈퍼 카사바'로 기아 해결 기여
세계은행서도 공로 인정받아
현지 연구 자립 위해 700명 배출
핵심 후학, 내전 속 살해돼 먹먹

#명예 대신 도전, 운명이 된 선택

어떤 선택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서울대 농과대학 교수 시절인 30대 후반 영국과 나이지리아에서 각각 날아온 두 개의 초청장이 딱 그랬다. 하나는 케임브리지대 식물육종연구소(Plant Breeding Institute)라는 명예의 길, 다른 하나는 건물도 없이 이름뿐이던 나이지리아 국제열대농학연구소(IITA)라는 도전의 길이었다.

 

명예보다 도전을 택했다. 위험하다며 어릴 적 수영도 못 하게 했던 아버지, 가지 말라고 눈물로 호소하던 어머니. 두 분이 연이어 갑작스럽게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편안한 삶에 안주했을지도 모른다. 효도 한 번 못했다는 죄책감은 뒤로 한 채 중학생 큰딸은 제자에 맡기고 아내와 어린 삼 남매만 데리고 험난한 아프리카행에 나섰다. 어떻게 그런 담대한 결정을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 선택이 운명이 됐다는 것이다.

 

 ▲지난 1983년 나이지리아 이키레 읍(邑) 추장 대관식 후 아내와 함께. 아내는 떠났지만 지팡이는 아직 갖고 있다.[사진 한상기]

#첫 번째 도전, 미네소타 프로젝트

고향 충남 청양은 칠갑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샛강과 백마강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장마철이면 강물이 범람했고, 가난한 농부들은 농사를 망치고 보릿고개를 겨우 넘기며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대전중학교 국어 시간에 우장춘(1898~1959) 박사 얘기를 듣고 인생 경로를 정했다. 우 박사 같은 사람이 되어 우리나라의 배고픔을 해결하고 싶었다. 그런 열정으로 서울 농대에 갔고, 졸업 수학여행 때 만난 우 박사는 그런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줬다.

 

대학원 졸업 후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미 국제협력처가 1000만 달러를 지원한 '미네소타 프로젝트' 교환교수 기회를 얻은 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제3 세계 43개국에서 진행한 국가 재건 프로젝트 중 하나였던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형편없던 한국 의학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실은 의학뿐 아니라 한국의 공학·농학 발전도 여기서 기인한 바가 크다. 1955~62년 서울대 교수진 226명이 미네소타 대학에 장단기 연수·유학을 갔는데, 여기에 선발됐다. 1960년부터 1년 동안 학비는 물론 숙식 등 모든 비용 걱정 없이 식물육종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서울대 최규남 총장(가운데)은 1954년 9월 5일 미네소타 대학교와 원조 협정을 체결했다. 한상기 박사는 이 프로젝트 수혜를 입어 유학을 다녀왔다. [사진 서울대]

 

서울대가 한국에선 최고의 대학이지만 그 시절 기초학문을 연구하기엔 초라했다. 선진 학문을 접해보니 배움의 욕구가 더 커졌다. 교수로 막 임용된 1965년 이 분야 거목 존 그래피우스 교수에게 청해 미시간주립대에서 박사를 했다. 가족은 시골 부모님 댁에 두고 홀로 유학을 갔다. 한국에 남은 가족은 비록 쥐꼬리만 해도 서울대에서 나오는 월급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는데, 무슨 영문인지 갑자기 외국 체류자에게 주던 봉급이 끊겼다. 그래피우스 박사는 이 소식을 듣고선 "가족에게 송금하라"며 매달 내 책상 위에 50달러 수표를 놓고 갔다.

 

다시 봉급이 나와 돈을 갚겠다고 하자 "100년 후에 갚으라"고 했고, 귀국 땐 비행기 표 살 돈까지 마련해줬다. 미국은, 그리고 그 나라 최고 석학은 이렇게 가난한 나라의 미래를 위해 유학생 하나를 정성껏 키워냈다.

 

박사를 마치고 돌아온 1967년 서울대 교수 월급으로 살 수 있는 곳은 방 한 칸짜리 사글세뿐이었다. 얼마 후 수원에 온 가족과 함께 들어간 수원 서울농대 교수 관사도 비만 오면 지붕에서 물이 새고 부엌에 물이 차는 열악한 곳이었다. 그렇다고 공부 열정이 꺾이진 않았다.

#두 번째 도전, 나이지리아의 식량난

유학 시절 논문 세 편이 영국 유명 학회지 '헤레더티(Heredity)'에 등재돼 영국과 나이지리아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다. 잠깐의 면접을 위해 김포공항을 떠나 홍콩, 태국 방콕, 인도 뭄바이, 예멘,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케냐 나이로비, 우간다 엔테베를 거쳐 4일 만에 나이지리아 라고스 공항에 도착했다. 당시 가장 빠른 항로였다. 육로로 100㎞를 더 달려 국제열대농학연구소(IITA)가 있는 항구도시 이바단에 도착했다. 10만 전사자와 100만 아사자를 낸 참혹한 비아프라 내전(1967~70) 직후라 엉망인 길 위로 파괴된 탱크와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희망조차 말라 죽은 대륙이었다. 이상하게 두려움 대신 아프리카 식량난을 해결하고픈 도전 욕구가 솟구쳤다. 당초 귀국편에 다른 면접장소 런던이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나이지리아였다.

 

당시 미국은 '굶주리면 공산화된다'는 우려에, 포드 재단과 록펠러 재단을 통해 식량난 해소를 목표로 전 세계 곳곳에 농업연구소를 세우던 중이었다. IITA는 통일벼로 유명한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IRRI)와 멕시코 국제밀옥수수연구소(CIMMYT)에 이은 세 번째 연구소였다. CIMMYT에서 일하던 노먼 볼로그(1914~2009) 박사가 내병다수성(耐病多收性·병충해에 강한 다수확) 밀을 만들어 멕시코·인도에 보급한 녹색혁명 공로로 1970년 노벨평화상을 받을 정도로 성과가 뛰어났다.

 

 ▲나이지리아 농민에게 개량 카사바 사용을 권하고 있는 한상기 박사. [사진 한상기]

 

노벨상 같은 보상을 기대하고 이바단에 간 게 아니다. 북한 수교국 나이지리아는 당시 우리와 국교가 없어 위험했고, 연구해야 할 카사바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작물이었다. 참고할 자료도 없었다. 앞서 아프리카에 온 서구 연구진이 있었지만 이들은 고무 같은 돈 되는 작물에만 관심 있고 아프리카 기아를 해결할 카사바 같은 식량 작물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내가 내병다수성 슈퍼 카사바 개발에 성공(1976)한 지 10년쯤 뒤 일본 재벌 사사카와 료이치 일본선박진흥회 회장 부탁을 받고 가나에 온 노먼 볼로그조차 3~4년 만에 큰 성과 없이 아프리카를 떠났다. 명분은 기아 해결이라면서도, 서양 연구자들은 돈벌이에 급급하거나 아프리카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배곯아본 난 달랐다. 그들의 아픔을 이해했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었다. 수확량이 기존 카사바의 두 배가 넘는 신품종 카사바의 성공은, 그래서 내겐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연구소 반대를 무릅쓰고 카사바 줄기를 차에 싣고 시장에 가 나눠준 이유다.

#세 번째 도전, 한상기 프로젝트

'한상기 박사 연구로 카사바 병 문제가 해결되다.'

나이지리아 식량 혁명의 시작을 알린 나이지리아 데일리 타임스 1면 기사(1976)다. 치명적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로 생산량이 절반으로 줄었던 카사바를 개량해 나이지리아를 비롯해 아프리카 41개국 식량난 해소에 지금까지 도움을 주고 있다. 그 덕에 영국 기네스 과학공로상(1982), 영국생물학술원(Institute of Biology·영국 생물학회의 전신) 펠로 상(1984), 브라질리아 대학 주최 카사바 학회 공로상(2006) 등을 받았다. 케네디 정부 국방장관을 지낸 로버트 맥나마라 세계은행 총재(1968~81 재임)는 "한 박사의 슈퍼 카사바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땅에 빚을 덜 지게 해주는 신기술"이라 칭송했다.

 

 ▲지난 1973년 나이지리아 연구소를 찾은 맥나마라 세계은행 총재와 함께. [사진 한상기]

 

영예로운 상들보다 더 기뻤던 건 1983년 연구소에서 50㎞ 떨어진 이키레 읍에서 '농민의 왕'(세레키아그베)이라는 칭호를 받고 요루바족 추장으로 추대된 일이다. 내 연구가 연구소 안에 머물지 않고 그들의 삶을 도왔다는 인정을 받아서다.

 

추앙받는다고 언제까지나 아프리카 왕으로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국이 나를 키운 것처럼, 나도 아프리카 사람을 키우고 싶었다. 1994년 IITA를 떠나 아이들이 있는 미국에 갈 때까지 23년 동안 위험한 출장을 마다치 않은 건 이런 이유도 있다. 아프리카 비행기는 퇴물이라 언제 추락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기상 정보 입수조차 안 되는 아프리카 공항은 토네이도가 몰려와도 알 길이 없었고, 활주로는 엉망이었다. IITA 직원 3명이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할 정도였다. 그래도 끊임없이 가서 지도했고, 연구소에 데려와 훈련시켰다. 그렇게 키운 게 700여명에 달한다.

 

 ▲한상기 박사는 아프리카 현지에서 후학을 키우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가 연구소로 불러 가르친 숱한 제자들 목록. 국가별로 분류해 보관하고 있다. [사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그중 잊히지 않는 인물이 자비 들여 만든 ‘한상기상’ 1, 2회 수상자인 르완다의 조지 은다마제 중앙농업시험장장과 조셉 물링다가보 지방농업시험장장, 그리고 시에라리온의 은잘라 농과대학 다니야 학장이다. 은다마제와 물링다가보는 1994년 6월 르완다 내전 당시 온 가족이 폭도들에게 몰살당했다. 시에라리온 내전(1991~2002) 때 값비싼 가재도구는 다 버려두고 슈퍼 카사바만 자동차에 싣고 피난 갈 정도로 그 나라 농업의 미래를 고민했던 다니야 역시 강도에 살해당했다. 르완다와 시에라리온은 이렇게 허무하게 아까운 인재를 잃었다.

 

하지만 가장 안타까운 건 한국 농업발전에는 아무런 기여를 못 했다는 점이다. 나이지리아 정착 초기부터 가족 전부 흡혈 파리(sand fly)에 물리고 말라리아에 걸리는 등 희생했고 이를 밑거름 삼아 나는 명예를 얻었다. 하지만 20년 넘도록 1년에 얼굴 한 번 본 게 고작인 큰딸의 결혼식엔 아예 못 갔고, 치안이 불안한 타지에서 남편 양말 기워가며 외롭게 가족 뒷바라지한 아내는 2009년 미국에서 치매 증상을 보인 끝에 2013년 귀국 후 2020년 세상을 떠났다. 땅이 꺼지고 세상이 무너지는 거 같았다. 미안한 마음뿐이다. 하지만 더한 후회는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거보다 한국을 돕지 못했다는 점이다. 비록 그땐 아프리카 식량난이 내 조국보다 더 극심해 여기에 인생을 걸었지만 부끄럽고 죄송하다. 내 조국 한국에, 그리고 사랑하는 내 가족에게.

 

03.28 '정치재해' 보상법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총선이 2주 앞으로 다가오면서 정치 열기가 고조되는 게 아니라 국민의 혈압만 치솟고 있다. 각 당은 요동치는 지지율 그래프를 보면서 차지할 의석수와 그로 인한 정치적 역학관계 계산에 여념이 없겠지만, 대다수 국민은 이제 아예 총선 결과를 궁금해하지도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 정확히는, 기대를 접었다.

 

여야 각 정당의 대진표를 보고 있자면 대략 난감이다. 투표하든 말든, 무슨 당을 선택하든 결국 사리사욕·권력욕에 눈 멀어 자기 당 보스의 아부꾼 노릇을 자청하며 충성 경쟁할 사람만 국회에 가득 채워질 게 뻔해서다. 한마디로 표 줄 곳이 없다. 민생에 눈 감은 사상 최악의 21대 국회를 견디고, 거대 양당의 수준 미달 공천 파동과 저질 막말 경쟁을 겨우 참아냈더니 저 앞에 놓인 게 역대급 퇴행적 국회라니. 게다가 이들이 막대한 국민 세금을 받아가며 반드시 저지르고야 말 온갖 분탕질을 생각하면 화가 나다 못해 총선 이후가 정말 두렵다.

표 줄 곳 없는 역대 최악 22대 국회
조국·정치 검사의 보복정치 임박
'정치판 중처법' 도입하고픈 심정

안 그런가. 어느 당이 몇 석을 가져가는지와 무관하게 이미 안정적 당선권에 든 각 당 비례대표·지역구 후보의 면면만 봐도 22대 국회에서 펼쳐질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 국회에 입성한 정치 검사들의 보복 정치, 패싸움 정치다. 지난 문재인 정부 시절 나라를 두 동강 낸 조국 전 법무부장관이 윤석열 정부에 대한 정치 보복을 내걸고 창당한 조국혁신당은 현재 지지율(22%)대로라면 지역구 한석 없이 무려 12석을 확보한다. 비례대표 명단엔 2심 징역 2년을 받은 조 전 장관 본인(2번)은 물론 '윤석열 찍어내기 감찰'로 해임된 박은정 전 부장 검사(1번), 울산시장 선거 개입으로 1심에서 징역형 받은 검수완박 주역 황운하 의원(8번) 등이 포함돼있다.

 

지난 21대 국회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방탄 국회 운영에 지칠 대로 지쳤는데 아예 복수심에 사로잡힌 범죄자들이 모인 이 기묘한 당 의원들이 국회에서 어떤 난장을 벌일지 벌써 한숨만 나온다. 내놓겠다는 1호 법안이 '한동훈 특검법'이니 할 말 다했다. 여기에 현직 검사 신분으로 조국 북 콘서트에 등장해 윤석열 정부 비판을 쏟아냈던 이성윤 전주시을 후보 등 민주당의 친문 검사 출신 4인까지 가세하면 정말 목불인견이겠다.

 

지난 2019년 조국 사태는 우리 사회에 공정과 정의를 다시 세우고, 내로남불을 일삼는 위선적 인물을 정치권에서 솎아내는 계기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민심의 심판과 사법적 판단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인물들이 기존의 몰상식에 더해 몰염치까지 장착하고 막강한 입법 권력을 쥐게 되다니 기가 막히다.

 

여기엔 윤석열 대통령과 집권당인 국민의힘의 책임이 적지 않다. 표 갈 곳 없다는 고민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콘크리트 보수층마저 선뜻 찍기를 저어할 만큼 오만한 국정 운영이 이어지는데 당은 대통령 눈치 보느라 국민은 안중에도 없었다. 공천이라도 잘했으면 어느 정도 만회했겠지만 이마저도 혁신과는 거리가 먼 구태 그 자체였다.

 

명분 없는 의원 꿔주기로 탄생시킨 국민의힘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는 부실 검증 논란에 한 차례 대대적 조정을 했는데도 실망스럽기는 매한가지다. 동교동계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 조카인 한지아 비대위원(11번), 그리고 조정 끝에 13번에서 당선권(16석) 밖(21번)으로 밀리긴 했지만 이명박 정부 법무비서관 강훈 변호사의 딸인 강세원 전 대통령실 행정관을 공천해 불필요한 '(큰)아빠 찬스' 논란을 만들었다. 이러니 정치적 자신이라고는 후광밖에 보이지 않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사위인 곽상언 민주당 종로 후보를 제대로 비판하지 못한다. 이 시대 젊은이들이 그렇게 기회의 공정을 요구해왔는데 22대 국회는 여야가 합심해 세습 권력의 힘만 보여주게 될 판이다.

 

지역구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국민의힘은 당초 약속과 달리 현역 85%에 공천을 몰아줬다. 그 과정에서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 마구잡이 돌려막기 공천을 했다. 이러니 '비명횡사'(친이재명 아니면 공천에서 살아남지 못함)로 벼락공천돼 본인 지역구 투표권조차 없는 한민수 민주당 강북을 후보의 흠을 부각하지도 못한다.

 

이런 의문이 든다. 민생 법안은 외면하고 맹목적 추종이거나 발목잡기만 일삼는 국회의원이 왜 필요한가. 무엇보다 국민은 왜 이걸 지켜보느라 스트레스받아야 하나. 이쯤 되면 웬만한 산업재해는 저리 가라 할만한 '정치재해'를 온 국민이 겪는 셈인데, 정치판 중대재해 처벌법이라도 만들어 수준 미달 정치인들이 국민 뒷목 잡게 할 때마다 당 대표에게 1년 이상의 징역이나 10억원의 벌금을 물렸으면 좋겠다. 아니면 선거 치를 돈으로 국민에게 정치재해 보험금이라도 주든가. 너무 답답하니 이런 헛된 망상까지 든다.

 

04.18 '잘못이 잘못이 아닌' 대통령의 남은 3년

병식이 전혀 없네. '

여당의 4·10 총선 참패 이후 윤석열 대통령의 첫 육성 입장표명 자리였던 지난 16일 국무회의 모두발언 생방송 직후 한 젊은 의사가 SNS에 올린 글이다. 이 포스팅을 보자마자 좀 과하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왜 이렇게까지 썼는지 묘하게 이해가 가는 구석도 있었다. '병식(病識)의 부재'는 병에 걸렸지만 인지를 못 하거나 아예 부정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의학용어인데, 오죽 답답하면 이런 표현까지 썼을까 싶었다. 대통령이 이번에도 또, 진솔한 사과를 기대한 국민을 배반해 화만 더 돋웠으니 하는 말이다.

형식·내용 부적절한 담화 반복
강서 보궐 참패 때도 "웬 호들갑?"
총선 참패 불구 태도 변화 없어

지금껏 민심과 어긋난 게 어디 사과의 타이밍뿐인가. 중요한 정책 결정을 할 때도 해당 분야 전문가들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사회적 합의를 구하기는커녕 정부 내의 공론화 과정조차 없이 대통령 혼자 어느 날 뜬금없이 불쑥 관련 이슈를 꺼내 방침을 지시하곤 했다. 이렇게 나온 대통령 말 한마디로 입시(사교육)·연구 개발(R&D)·의료 등 우리 사회의 중요한 여러 시스템이 한순간에 초토화되다시피 하는 걸 국민은 무기력하게 목격해야 했다. 취임 후 2년 넘게 지속해온 이같은 일방통행식 국정 운영의 원인을 놓고 그동안 '김건희 여사의 입김'이라느니 '대통령실 내 특정 강성 문고리 권력의 오판', 혹은 '참모의 무능' 등 여러 해석이 분분했다. 공식적인 보고 라인을 통한 결정과 집행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석연찮은 구석이 많다고들 느꼈기에 나온 반응들이다. 이런 추측을 하다 하다 '병식의 부재'라는 상상력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디올백'으로 상징되는 김건희 여사의 부적절한 처신을 작위적 연출의 KBS 사전 녹화 대담으로 어물쩍 넘기려던 것이나, 출국금지까지 당한 해병대 채 상병 사망 사건 피의자인 전 국방부 장관을 굳이 대사로 임명하고 서둘러 출국시켜 외교적 망신을 자초한 일, 1999나 2001은 절대 안 되고 꼭 2000명이어야만 하는 오로지 대통령만 납득 가능한 의대 증원 수 지침 탓에 단 한 발도 앞으로 못 나가고 교착 상태에 빠져버린 의료대란까지….

 

잘못은 알지만 고집을 꺾기 싫어하는 성정의 발현이거나, 적당히 버티면 해결될 거라는 오판에서 내린 결정일 거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뭐가 잘못인지에 대한 인식이 국민과 사뭇 다른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특히 정권 초부터 반복되는 인사 참사를 볼 때마다 이런 의구심이 더 강하게 든다.

 

 ▲지난해 10월 12일 김기현 당시 국민의힘 대표가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 뒤 열린 국민의힘 최고위원회의에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다. 여당은 국민의 경고로 받아들였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생각이 달랐다. 연합뉴스

 

이번 총선 참패의 예고편과도 같았던 지난해 10월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몇 주 뒤 대통령 최측근 중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가 들려준 얘기는 충격적이었다. 잠시 복기해보자면 국민의힘 소속 김태우 당시 강서구청장의 대법원 유죄 확정판결 3개월 만에 윤 대통령이 무리하게 특별 사면을 하고, 바로 그 보궐 선거의 귀책 사유자를 다시 강서구청장 국민의힘 후보로 공천하도록 한끝에 결국 17.1% 포인트의 큰 차이로 더불어민주당에 완패했다. 여당의 선거 전략 실패라기보다 측근만 계속 돌려쓰는 윤 대통령 인사의 결정적 실패였다.

 

언론의 비판이 들끓었던 것은 물론이요, 여당 내에서도 독선적 국정운영에 대한 국민의 경고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정작 그런 민심을 가장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할 윤 대통령이 선거 다음 날 이 최측근에게 "그깟 구청장 선거 하나 진 걸 갖고 웬 호들갑이냐"고 오히려 타박하더란다.

 

총선 참패와 관련해 겉으로는 참모를 내세워 비공개 대리 사과를 했지만, 이번에도 속으로는 "웬 호들갑이냐"며 의아해하고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결코 비약이 아니다. 요직을 검사와 지인으로 돌려막는 인사 스타일까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그런 의심을 할 만한 사례가 차고 넘친다. 여당의 총선 열세가 점쳐지던 지난달 말, 윤 대통령이 여론은 아랑곳없이 갑자기 없던 자리를 만들어 본인의 20년 지기인 검찰 수사관 출신 주기환 전 국민의힘 광주시당위원장을 민생특별보좌관에 임명한 게 대표적이다. 한동훈 당시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측이 위성정당 비례대표로 지원한 그를 안정적 당선권 밖 순번에 배치한 데 따른 분풀이 인사였다. 국회의원 자리를 거저 주지 않는다고 대통령 측근이 몽니 부리는 꼴도 볼썽사나운데, 대통령이 이를 만류하는 대신 그 엄중한 시기에 없는 자리까지 만들어 불필요한 논란을 만들다니 정말 뜨악했다. 특히 정권 초기 주 특보 아들을 대통령실에 불러들여 이미 사적 채용 논란을 일으킨 전력을 고려하면 국민 입장에선 더더욱 해석 불가라고 느낄 수밖에 없다.

 

앞으로의 3년, 정말 걱정된다.

 

05.09 대통령의 확신, 불안한 복지부

▲총선을 앞둔 지난달 1일 윤석열 대통령은 의료 개혁과 관련한 51분의 생방송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면서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이 근거가 있고 의료계와 충분한 논의를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의료계에선 정반의 소리가 나온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 여러분, 전공의들의 집단행동으로 얼마나 불편하고 불안하십니까?"

4·10 총선을 코앞에 둔 지난달 1일, 정부가 자초한 의료대란으로 국민적 피로감이 쌓여가던 와중에 갑작스럽게 마련된 윤석열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는 이렇게 국민 공감으로 포장한 전공의 비판으로 시작했다. 대통령은 이날 생방송 51분의 상당 부분을 의대 증원 2000명과 관련해 갈등을 빚고 있는 의사 집단 비판에 할애했는데, 핵심은 "억울하다"는 거였다. 정부 결정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다양한 의료 단체는 이를 수차례 협의해놓고는 자기 밥그릇 챙기느라 환자 내팽개친 무책임한 의사들이 그런 적 없다며 오히려 정부를 비난하고 있어 직접 국민에게 설명한다는 주장이었다.

 

"일부에서는 정부가 주먹구구식, 일방적으로 2000명 증원을 결정했다고 비난합니다. 정부가 꼼꼼하게 계산하여 산출한 최소한의 증원 규모이고, 결정하기까지 의사단체를 비롯한 의료계와 충분하고 광범위한 논의를 거쳤습니다. …논의가 부족했다는 일부 의료계의 주장은 사실을 왜곡한 것입니다. 의료현안협의체, 의사인력 수급추계 전문가 포럼,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보정심)와 산하 의사인력전문위원회 등 다양한 협의 기구를 통해 37차례에 걸쳐 의사 증원 방안을 협의해 왔습니다. 의사인력전문위원회에서는 무려 9차례에 걸쳐 증원 규모, 의대 정원 확대 '규모'와 의대 교육 역량 등을 논의했습니다. …정부는 확실한 근거를 갖고 충분한 논의를 거쳐서 2000명 의대 정원 증원을 결정했습니다. " (담화 일부)

"근거·논의 충분" 대통령 담화 후
법원 자료 요청에 정부 우왕좌왕
쓸데없는 밀실 논란 자초한 측면

담화에 앞서 2000명 증원이 결정된 2월, 그러니까 기재부가 예산 배정을 하기도 전부터 이런 정부의 정당성을 국민에게 알리겠다며 예비비를 미리 끌어다 90억원의 홍보비까지 썼다.

 

일반 국민은 대부분 그러려니 했겠으나 당사자인 의사 집단과 이를 취재해온 언론은 대통령의 강경한 어조의 담화에 의아했다. 증원 규모를 놓고 이런저런 추측이 나오긴 했지만 2000명이란 파격적인 숫자가 처음 공개된 건 조규홍 복지부 장관이 이를 공식 발표한 지난 2월 6일 당일이었기 때문이다. 형식상 발표 1시간 전에 보정심 회의를 거치기는 했다. 하지만 위원들은 사전에 숫자와 근거자료를 공유 받기는커녕 회의에 들어가서야 2000이란 숫자를 처음 봤다고 한다. 보정심 뿐 아니라 의료현안협의체에서도 숫자에 대한 논의 자체가 없었다. 서울의대 교수협의회 비대위는 이틀 뒤 '담화문 팩트 체크'를 발간해 대통령 발언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정부가 꼼꼼하게 계산했다면 산출 과정을 공개해 달라"고 요구했다. 또 "복지부와 의료계가 만났지만 '규모' 논의는 한 번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증원을 둘러싼 서로 다른 입장은 나름 그 타당성이 양립할 수도 있으나, 팩트를 놓고 정반대로 엇갈린 정부와 의료계 양측의 주장은 그럴 수 없다. 한쪽은 틀린 말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7일 의사 집단행동 대응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날 복지부는 증원 근거와 관련해 여러 회의록 존재 여부에 대해 또 말을 바꿨다. 연합뉴스

 

상식적으로 대통령이, 그것도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생방송 담화에서 여러 차례 반복하며 강조한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믿기는 어렵다. 그래서 지난달 30일 의대 교수와 전공의·의대생 등이 낸 의대 증원 집행정지 항고심 심문에서 서울고법이 정부 측에 "10일까지 증원 규모 2000명의 근거 등의 자료를 내면 그다음 주 (가처분 인용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했을 때 사법부의 지나친 정책 간섭이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대통령이 워낙 자신 있게 "근거가 있고 논의도 충분했다"고 했기에 법원이 가처분을 인용해 의대 증원 자체에 제동이 걸릴 일은 없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이젠 모르겠다. 증원과 관련해 대통령이 언급한 4개 회의를 주관한 복지부와 교육부가 동시에 회의록이 있느니 없느니, 회의록 작성이 의무니 아니니 하는 본질과 벗어난 발언을 수시로 번복하면서 2000명 증원 근거에 대한 신뢰를 정부 스스로 갉아먹고 있는 탓이다. 이러다간 "2000명이라는 숫자는 정부 내 논의 과정 없이 대통령실 내 일부 강경파 주도로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내려보낸 것"이라는 항간의 소문이 사실로 판명 날지 모를 일이다. 이는 비단 의료개혁뿐만 아니라 정부 정책 전반에 대한 신뢰 저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가처분 결과를 지금 장담하긴 어렵다. 다만 결정과 무관하게 정부의 자료 제출 시한에 앞서 오늘(9일) 열리는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단순히 "근거가 있고 논의를 했다"는 기존 언급을 넘어 누가 어떤 보고를 했으며 이후 불거진 논란에 대해 어떤 사실 확인 절차를 거쳤는지 명확하게 답했으면 좋겠다. 가뜩이나 이런저런 비선 논란에 시끄러운데, 이런 주요 정책까지 그런 쓸데없는 논란에 휘말릴까 걱정돼서 하는 말이다.

 

05.30 훈련이 아니라 고문이었다

▲중대장의 무리한 군기훈련 과정에서 고작 입대 10일 된 훈련병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지난 27일 군사경찰 차량이 사고가 난 해당 부대 위병소를 통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과실치사가 아니라 살인이다. '

군대 간 아이가 자대 배치받은 후론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던 훈련병 가족 커뮤니티 앱 '더 캠프'를 13개월 만에 다시 열었다가 이런 울분 섞인 포스팅을 여럿 봤다.

 

여야 할 것 없이 정치권은 '해병대 채 상병 특검' 부결에만 정신이 팔렸는지, 입대 열흘 만에 주검으로 돌아온 육군 훈련병의 기막힌 죽음에 대해선 형식적인 추모 메시지 한 줄 달랑 내놓고 관심을 끄다시피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앱의 자유게시판은 지금 훈련병을 죽음으로 내몬 해당 중대장(대위)에 대한 엄중한 처벌 요구와 함께 온통 분노로 끓어오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상적인 훈련 중 발생한 피치 못할 사고가 아니라 고문에 가까운 가혹 행위가 벌어진 정황이 속속 사실로 확인된 탓이다. 게다가 군이 사망한 훈련병과 같이 훈련받은 병사들이 아니라 본인 신상이 밝혀질까 불안을 호소하는 문제의 중대장을 보호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전해지면서 강력한 처벌을 원하는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왜 입대 10일만에 죽어야 했나
간부의 '화풀이 대상' 삼은 의혹
시대착오적 병사 학대에 분노

지난 26일 밤 육군의 첫 공식 발표는 "훈련병이 군기훈련 중 쓰러져 치료를 받았으나 상태가 악화해 이틀만인 25일 사망했다"며 "군기훈련이 규정과 절차에 맞게 시행됐는지 면밀히 조사 중"이라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 시각 커뮤니티엔 이미 '(완전군장에) 책을 더 넣어 40㎏ 만들어 메고 뺑뺑이와 얼차려를 시켰고, 다리 인대 근육 다 파열됐는데도 게거품 물고 상태가 악화한 후에야 이송돼 골든타임을 놓쳤다, 소변으로 까만 물이 나왔다'는 구체적 내용이 공유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틀 뒤인 28일 부검 결과, 갑작스런 무리한 운동과 과도한 체온 상승 탓에 근육이 녹아내려 콩팥을 망가뜨리고 까만색 소변을 보는 '횡문근융해증' 소견이 나왔다. 또 이날 육군이 해당 중대장과 부중대장(중위) 2명에 대해 과실치사와 직권남용 가혹 행위 혐의 의견을 붙여 강원경찰청에 사건을 이첩하면서, 커뮤니티에서 제기된 각종 의혹은 대체로 사실로 드러났다.

 

그날의 사고를 복기해보면, 문제의 중대장은 훈련병들이 전날 떠들었다는 이유로 한여름 무더위에 맞먹는 섭씨 27.4도 뙤약볕 날씨에 완전군장 상태로 연병장에서 '선착순 뺑뺑이' 구보와 팔굽혀펴기 등을 쓰러질 때까지 시켰다고 한다. 26.5도만 넘어가도 기초체력이 좋지 않은 신병 훈련에 각별히 주의해야 하는 온도지수별 행동기준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완전군장 구보 금지 등 군기훈련 규정까지 전부 위반했다.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이 지난 28일 군기훈련 중 사망한 훈련병 빈소를 조문했다. 연합뉴스

 

히 훈련병을 직접 통솔하는 조교나 소대장도 아닌 중대장이 직접 이렇게 가혹한 군기훈련을 시키는 건 매우 이례적이라 분노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정상적이라면 훈련 기간 내내 훈련병이 중대장을 직접 대면하는 일조차 드물다. 비단 이번뿐만 아니라 이전 기수에서도 문제의 중대장이 훈련병 괴롭히기로 악명 높았다는 커뮤니티의 증언이 잇따르면서, 그동안 군기훈련을 빙자해 훈련병을 본인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활용한 게 아니냐는 의혹마저 불거지고 있다.

 

관련 규정이 비록 이번 비극을 막지는 못했지만 이런 특정인의 일탈이 야기하는 무고한 인명피해 등 심각한 부작용을 차단하기 위해 군기훈련과 관련해 엄격한 규정을 적용하는 것이다. 이런 규정이 더 철저하게 지켜졌어야 할 신병훈련소에서 왜 완전히 무력화됐는지에 대한 철저한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 사건의 본질은 아니지만 해당 중대장이 여군인 탓에 기 싸움 차원에서 필요 이상의 가혹 행위를 한 게 아닌지도 꼭 확인해야 한다고 본다.

 

이와 별개로 우리 사회의 군에 대한 잘못된 인식 역시 이번 기회에 바로잡았으면 한다. 훈련병의 안타까운 사망 사고 소식을 전하는 뉴스 댓글마다 "군의 사기" 운운하며 군기훈련 규정을 어긴 간부가 아니라 오히려 해당 훈련병을 탓하는 글이 넘쳐나는 걸 보면 정말 기가 막히다. 주로 자신을 60대 이상이라 밝힌 이들인데, "군대에서 이런 사고는 늘 있는 것"이라거나 "우리 때는 완전군장에 몇㎞ 뛰는 건 예사로 했는데 고작 이런 훈련으로 죽었다는 건 다 억지""요즘 애들이 약해빠져서 군에서는 일상과도 같은 훈련조차 견딜 수 없게 됐으니 한심하다"고 막말을 한다.

 

훈련을 빙자해 어린 병사들을 '고문'한 중대장에게는 물론, 이런 중대장을 옹호하는 이들에게 진심으로 묻고 싶다. 현역으로 입대할 정도로 건강했던 청년이 불과 몇 시간 만에 다발성 장기 손상과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극심한 고통 속에 사망했는데, 이게 어떻게 정상적인 훈련인가. 그런 군대에 귀한 아들을 보낼 부모는 없다.

 

06.20 "우리 아들만 여기 없다"는 어머니의 울부짖음

 ▲신병 훈련소에서 중대장의 가혹행위로 사망한 박모 훈련병이 지난달 13일 입영식 당시 어머니를 업고 있는 모습. [사진 군인권센터] 

 

어제(19일)는 중대장의 군기훈련(얼차려)을 빙자한 시대착오적이고 잔혹한 가혹 행위로 신병훈련소 입소 10여일 만에 허망하게 숨진 박모 훈련병의 동료 훈련병들의 수료식이 있던 날이었다. 비극적인 사고가 없었다면, 5주간의 훈련을 마친 박 훈련병도 이날 다른 병사들처럼 단 몇 시간이라도 아들과 함께하려고 차로 6~7시간 걸리는 먼 전남 나주에서 단숨에 달려온 부모님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입대 당일 엄마 아빠를 향해 어설프지만 든든한 생애 첫 "충성" 경례를 외치며 연병장에서 엄마를 업어주던 아들은 이제 세상에 없다. 아들이 있어야 할 자리엔 수료식에 참석한 동료 병사 부모님이 한 송이씩 놓은 국화 250송이만 보일 뿐이었다. 

 

강원경찰청은 아들 사망 17일이 지나서야 가해자로 지목된 중대장을 처음 소환 조사하고, 무려 사망 24일만인 수료식 바로 전날에야 중대장(대위)과 부중대장(중위)에 대해 직권남용 가혹 행위와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해 검찰에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춘천지검은 19일 영장을 청구했다. 훈련병을 직접 통솔하는 조교나 소대장이 아니라 중대장이 직접 얼차려를 시키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고, 또 군경찰의 초기조사와 마찬가지로 실제로 가혹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으면서도 고의성이 인정되는 상해치사 혐의를 적용하진 않았다.

 

과거에도 반복됐던 사안인지, 왜 유독 이 중대장이 무리한 얼차려를 했는지, 중대장이 여자임을 의식한 군의 과잉보호는 없었는지 등 사건 초기 제기된 여러 의문은 여전히 무엇 하나 밝혀진 게 없다. 군은 "경찰이 수사 중이라 아는 바 없다"는 말만 무한 반복 중이고, 경찰 수사는 비상식적으로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아들 수료식에 참석할 수 없는 어머니는 수료식 날 "수료생 251명 중 우리 아들만 없다"며 고통 속에 편지를 띄웠다. 군인권센터를 통해 공개된 A4 두 장 분량의 긴 편지를 읽다가 슬픔과 분노로 감정이 북받쳤다.

 

어머니는 아들이 쓰러진 다음 날인 지난달 24일 새벽 3시쯤 아무 의식 없이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는 아들을 마주하곤 죄인처럼 회복만 기다렸다고 한다. 5시간 뒤 "열이 안 떨어져 곧 포기할 때가 올 것"이라는 의료진 설명에 "응급헬기 띄울 힘 있는 부모가 아니라 너를 죽인다"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맨 처음 "아들이 쓰러졌다"며 "빨리 (아들이 있는 병원으로) 올 수 있는 교통편을 알아봐 주겠다"고 훈련소 측에서 연락이 왔을 때, "우리가 어떻게 갈지 고민할 게 아니라 빨리 응급헬기 띄워서 큰 병원으로 이송해달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매뉴얼에 적시된 응급헬기 이송은 없었고, 아들은 쓰러진 지 이틀 뒤인 지난달 25일 오후 3시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떠난 아들의 장례식에 온 대대장이 "나는 (아들이 쓰러진) 그날 부대에 없었다"며 "옷을 벗을 것 같다"고 했다는 대목에선 기가 막혔다. 본인 부대에서 철모르는 병사도 아니고 간부인 중대장이 규정을 전부 어긴 무리한 군기훈련으로 멀쩡한 훈련병을 죽음에 이르게 했는데, 자식 잃은 부모를 앞에 두고 마치 "내 잘못도 아닌데 억울하게 책임지게 생겼다"는 식의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나.

 

게다가 문제의 중대장이 (무더위에 얼차려 받느라) 굳은 팔다리로 40도 넘는 고열에 시달리다 쓰러진 아들에게 처음 한 명령은 "야! 일어나. 너 때문에 뒤 애들이 못 가고 있잖아!"였다는 편지 속 주장을 읽으니, 어쩌다 우리 군이 이 지경이 됐나 싶다.

 

사실 앞서 지난해 해병대 채 상병 사망 사건 때도 군 간부들 행태에 적잖이 놀랐다. 해병대수사단 조사에서 혐의자로 지목됐다 빠지면서 온 나라를 시끄럽게 만든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이 지난 10일 낸 탄원서 내용에 경악했다. 형식은 부하의 선처를 요구하는 탄원서인데, 실제론 순직 책임을 부하에 떠넘기면서 "군인은 국가가 필요할 때 군말 없이 죽어주도록 훈련되는 존재"라고 했다. 누구보다 군 장병 사기를 고려해야 할 군 최고위 간부 입에서 나온 발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전시 상황이나 국가 위기 상황에서 국민 안위를 지키려다 희생된 게 아니라, 비상식적인 전시행정 탓에 허망하게 숨진 병사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저질의 막말이 아닌가 싶다. 오죽하면 말을 삼가며 인내하던 채 상병 어머니조차 지난 12일 공개 편지를 썼을까.

 

이번 훈련병 사망의 비극도 우리 군이 장병을 얼마나 소모품처럼 경시하는지를 다시 한번 보여준다. 우리 군이 강군이 못 된다면 그건 요즘 젊은 애들이 군기가 빠져서가 아니라 이런 시대착오적인 간부들 탓이다.⊙

 

안혜리의 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