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上萬事 2024-06/
06.01 툭하면 교도관 고소·진정… "범죄자 인권의 황금기"
죗값보다 인권이 먼저?
슬기로운 감빵생활 백태

▲요즘 구치소와 교도소는 옛날의 상식과 다르다고 한다. 시설부터 먹고 자고 입고 치료받는 모든 복지 수준이 좋아진 것은 물론, 재소자들이 각종 불만을 고소고발과 인권위 진정으로 터뜨리기도 용이해졌다. 오히려 각종 요구와 불만을 다 받아내고 책임져야 하는 교도관 생존권과 인권이 문제될 정도다. /일러스트=김영석
범죄자 인권은 어디까지인가. 이미 국민은 화나 있다. 음주 뺑소니 가수가 버젓이 콘서트 열 때, 묻지 마 살인 피의자의 얼굴과 포승줄을 경찰이 가려줄 때, 아동 성폭력범이 달랑 5년 형 받을 때, 그런 자들이 출소 후 전자 발찌도 없이 돌아다닐 때, 유력 정치인의 재판이 줄줄이 지연될 때.
그들이 교도소에 가면 죗값을 제대로 치를까? 사람들은 잘 모른다. 이 여론 감시의 사각(死角)지대에서 재소자들은 물 만난 듯 자신의 권익만 주장하고, 남에게 뒤집어씌우고,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다고 한다.
한국은 인권 선진국이다. 범죄자도 인간의 존엄을 보장하며 잘 교화해야 한다. 세종대왕도 “옥은 사람 죽이는 곳이 아니니 죄인도 여름엔 냉수를 주고 몸을 씻기라” 하셨다.
그러나 지나치게 대우받아 법을 우습게 여길 정도라면? 교도 행정 실무자와 전문가들은 “요즘 재소자 인권은 황금기를 맞았다”고 한다. 오히려 교정 공무원의 생존권, 범죄 피해자와 납세자의 인권 침해가 우려될 판이라는 것이다.
지난 2022년 완공돼 일반에 공개된 경기도 이천 국군교도소 개방 행사. 탁 트인 실내에 밝은 인테리어, 공기정화 식물 등이 배치됐다. 범죄자들에 대한 응보보다는 교화에 중점을 두는 교정 목표에 따라, 요즘 신축 교도소들은 대개 이런 트렌드를 보인다. /뉴스1
◇빨간테·린스… 끝없는 인권 타령
2021년 홍성교도소의 한 재소자가 ‘빨간 테 안경’이 반입되지 않는다고 소송을 냈다. 화려한 원색 안경테는 심리 안정을 저해하고 위화감을 일으킬 수 있어 금지돼 있다. 그런데 법원은 이 규정이 위헌·위법이라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같은 해 대구교도소의 남성 재소자는 ‘헤어 린스’를 사용하게 해달라는 행정소송을 냈다. “린스가 여성 전용 물품으로 분류된 건 평등 원칙 위배, 행복추구권 박탈”이라고 했다. 이제 남자들도 린스를 쓸 수 있다.
청주여자교도소 재소자가 “생리량이 많으니 생리대 대신 성인용 기저귀를 달라”고 요구했다. 남성인 의무과장이 간호사에게 “생리량을 확인해보라”고 했다가 재소자에게 인격권 침해로 고소당했다. 의사는 기저귀가 위해 물품이 될 수 있어 함부로 지급할 수 없다고 항변했지만 ‘성인지 감수성 교육’ 처분을 받아야 했다.

▲교도소 급식 사진은 종종 군부대나 학교 급식, 결식 아동 식단 등과 비교된다. 매일 쌀밥에 고기 반찬, 명절 특식 등이 나온다. /법무부
요즘 핫한 소송은 과밀 수용 문제다. 재소자들이 “교도소가 좁아서 못 살겠다”며 집단 소송을 벌여 승소하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전국 교도소 수용률이 한계를 넘은 건 사실이다. 범죄의 흉포화·지능화로 징역형은 급증하는데, 교도소 신설은 여의치 않아서다.
그런데 2017년 부산고법에서 “2㎡(0.6평) 침대 매트리스 크기는 확보돼야 한다”는 판례가 나오더니, 2021년 대법원도 과밀 수용은 인권 침해라고 판결했다.
그에 못 미치는 공간이 증명되면 재소자가 이긴다. 물론 지낼 공간이 당장 늘어나진 않는다. 하지만 손해배상을 받고 조기 가석방을 요구할 근거가 될 수 있다. 교도관들을 각종 서류 작업으로 골탕 먹이는 건 덤이다.
재소자 1인당 연 수용비는 지난해 기준 3100만원이다. 2년 전 2800만원보다 11%나 올랐다. 1인 가구 중위소득이 2400여 만원, 9급 공무원 초임이 3010만원이다. 열심히 일하는 서민보다 재소자 처지가 나은 셈이다.

▲재소자 인권과 복지는 급격히 확대되는 추세다. 재소자의 인권위 진정 건수는 지난 2016년까지는 연 3000건대였으나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과 함께 연 4000건대로 폭증했다. 재소자 1인당 연간 수용비는 20년간 3배 늘어 지난해 기준 3010만원, 현재 1인 가구 중위소득 2400여만원보다 훨씬 높다. /그래픽=송윤혜
‘콩밥 먹는다’는 것도 옛말. 매일 쌀밥에 고기 반찬, 복날 삼계탕, 명절 특식이 나온다. 서울구치소는 올 초 닭볶음탕·떡갈비·육개장 등이 담긴 식단표와 사진을 올렸다가 여론 분노에 비공개로 전환했다.
음주 운전으로 인천교도소에서 2년 복역한 29세 남성은 “매일 진수성찬이더라. 국민이 성낼 만하다”고 했다.
한 교도관은 “재소자들이 툭하면 아프다며 CT·MRI 찍고, 대학병원 특실에 누워 수천만 원 혈세를 쓰기도 한다”며 “교도소가 범죄자 요양원이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전주교도소는 2022년 심리치료실에 노래방 기계를 설치했다가 문제 되자 폐쇄했다.
◇‘재소자 진정 맛집’ 된 인권위
재소자 권리와 복지가 늘어난 배경엔 국가인권위원회가 있다. 인권위는 가능한 한 재소자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리는데, 이게 진보 정권마다 대폭 받아들여졌다.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인 1998년부터 사형 집행이 중단되고 2001년 인권위가 설립됐다. 노무현 정부 때 교정시설의 인권위 권고 수용률은 97%였다. 보수 정부에선 40%대로 떨어졌다가 문재인 정부가 96%로 끌어올렸다.
교도관이 진정서를 뜯어볼 수도 없게 했다. 재소자의 인권위 진정은 2017년 4528건으로 최고치를 찍었다. 인권위에 진정하는 4명 중 1명은 재소자다.

▲1991년 11월 7일 한겨레신문에 게재된 문재인 변호사의 칼럼.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 인사나 노동자 편에서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던 당시의 재소자 인권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2017년 집권 후 전국 교정시설에 인권위의 권고 수용률을 100%까지 늘리라고 지시했다. 또 조국 민정수석을 통해 재소자에게 고소당한 교도관의 기소율을 더 높일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한겨레
2022년 호텔급 최신식이라는 상주교도소 재소자들이 하수구와 변기에 쓰레기를 버리고 물을 펑펑 틀어 오수처리시설이 고장 났다. 이 때문에 하루 7시간씩 단수했더니 인권위가 ‘인권 침해’ 결정을 내렸다. 춘천교도소에선 온수 목욕을 주 1회 15분으로 제한한 게 인권 침해였다.
전국의 수감자들은 이런 바깥 동향에 민감하다. 덩달아 온갖 요구와 진정, 고발, 소송이 난무한다고 한다. 원하는 TV 채널이나 영화를 안 보여줬다고, 교도관이 소지품 들춰봤다고, 기분 나쁘게 불렀다고, 채식주의자 전용 식단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난동 부렸더니 장시간 보호 장비를 채웠다고.
한 성소수자가 생물학적 성별이 같은 재소자들과 분리해 독방에 가뒀다고, 다른 성소수자는 독방에 보내주지 않았다고 각각 인권 침해를 주장했다.
언론사에 보내는 편지를 교도관이 열어보고 발송하지 않은 건 ‘통신의 자유’ 침해, 외국인 재소자를 위한 소수 종교 행사를 열어주지 않은 건 ‘신앙의 자유’ 탄압이다.

▲복지 전통이 강한 북유럽은 교도소 내부를 최대한 외부 환경과 비슷하게 만들어 순화와 교화에 중점을 둔다. 노르웨이 교도소는 특히 휴양지 같은 시설로 유명하다. /넷플릭스
인권 침해 진정이 많은 건 인권이 넘쳐난다는 반증일 수 있다. 77명을 죽인 노르웨이 테러범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이 2012년 21년 형을 받고 수감된 교도소는 호텔처럼 고급스러운 방에 개인 주방·욕실, 운동실, 음악실, 안락의자까지 갖춰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런데 그가 정부를 상대로 인권 침해 소송을 쏟아냈다. 이유는 “빵에 바를 버터가 적다, 커피가 차갑다, 보습제를 안 줬다, 수감실 뷰가 지겹다, 수갑이 따갑다” 등인데, 압권은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을 최신형으로 업그레이드해 주지 않는다”였다.
◇교도관과 피해자는 웁니다
진보는 범죄를 개인의 일탈이 아닌 사회 문제로 본다. 재소자에게도 온정적이다. 교도소에서도 바깥 사회와 비슷한 조건에서 잘 지내며 순화시켜 내보내야 범죄가 억지된다고 본다. 자원 풍부하고 인구 적은 북유럽이 이런 모델이다. 반면 최근 아르헨티나에선 재소자 복지를 줄이고 강력한 교화에 집중했더니 범죄가 줄었다.
한국 진보는 일제 독립투사나 군부독재기 운동권이 고문받던 시절이 기준이다. ‘공권력은 억눌러야 한다’는 정서마저 있다. “범죄자 인권이 보호되는 세상이 돼야 내 인권도 보호받는다”(유시민)고 한다.
그런데 교정시설의 인권위 권고 수용률이 최고치에 달한 2019년, 범죄자의 재범률도 26.6%로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편한 교도소에 다시 들어가려는 잡범이 급증했다.
요즘 교도관들은 재소자에게 얻어맞고 욕먹어도 참는다고 한다. 재소자의 교도관 폭행은 2017년을 기해 두 배 늘었다. 이후 5년간 교도관 1만7000여 명 중 절반 넘는 9400여 명이 재소자에게 고소당했다. 이 중 4명 빼곤 모두 무혐의·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태반이 무고라는 얘기다.
교도관의 40%가 정신 건강 위험군으로 소방관을 능가하며, 교도관 사망자 38%의 사인이 자살이다. 교도관 줄사직에 교도소는 통제 불능이 되고 있다.
함혜현 부경대 공공안전경찰학과 교수는 “문제는 범죄자가 잘 먹고 잘 사는 것 자체보단, 그들이 공권력을 농락해 교정 효과가 떨어진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교정이 덜 된 흉악범과 지능범이 사회에 나와 활개 치면, 형벌을 국가에 위임한 피해자는 물론 납세자의 인권도 침해받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 인권은 재소자보단 국민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고 했다.
성폭력 등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은 매년 여름 폭염이 극에 달하기를 기도한다고 한다. 수감된 가해자들이 더위를 가장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제대로 된 벌은 하늘만 내릴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조선일보 정시행 기자
06.01 재판장, 崔 향해 "명백한 거짓말… 잘못 인정 안해" 이례적 질타
崔 자녀들의 탄원서 언급하며 "혼인 존중한다면 못 행할 행위"
SK측 "편파적·감정적인 판결… 일종의 도덕 재판으로 몰아가"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12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의 이혼 소송 항소심 공판에 출석한 뒤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30일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 소송 2심 판결을 내린 서울고법 가사2부의 재판장 김시철 부장판사는 선고를 하며 최 회장을 여러 차례 질타했다. 김 부장판사는 “명백한 거짓말”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일부일처제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 같은 표현을 썼는데, 이혼 소송에선 보기 드문 일이라는 게 법조계의 평가다.
판결 내용에 따르면, 최 회장은 2013년 11월 노 관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김희영(티앤씨재단 이사장)에게 (전 남편과) 이혼하라고 했다’고 했다. 하지만 노 관장과의 소송에선 “김씨의 이혼 과정에 개입한 적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해 김 부장판사 “법정에서 허위 증언을 하였거나, 배우자에게 명백한 거짓말을 한 것”이라며 “최 회장 주장을 전반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고 했다.
김 부장판사는 또 자녀들이 최 회장에 대해 ‘끝까지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합리화하는 위선적인 모습’이라고 쓴 탄원서도 언급했다. 김 판사는 “(최 회장의 행위는) 혼인 관계를 존중했다면 도저히 행할 수 없는 행위”라고 했다.
김 부장판사는 최 회장에 대해 “노 관장에게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거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최 회장이 김씨와 관계를 장기간 유지한 데 대해선 “혼인의 순결과 일부일처제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모습”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SK 측은 “김 부장판사가 편파적이고 감정적으로 판결했다”고 반발했다. SK 측은 “통상 판결문에선 ‘원고 주장은 신뢰도가 낮다’고 표현하는 것과 달리, 불필요한 가치 판단이 들어간 말을 반복하며 일종의 도덕 재판으로 몰아갔다”고 했다. 김 부장판사가 최 회장의 편지를 여러 번 언급한 것도 사생활 침해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김 부장판사는 법조인 가문 출신이다. 부친은 중앙선거관리위원, 방송광고심의위원장 등을 지낸 고(故) 김동환 변호사이고, 친형 역시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김 부장판사의 아들도 대형 로펌에 근무하고 있다.
김 부장판사는 과거에도 외도를 한 배우자에게 역대 최고 수준의 위자료를 내라는 판결을 내리는 등 유책 배우자의 책임을 적극 인정하는 판결을 다수 내렸다.

▲김시철 서울고법 부장판사. /조선일보 DB
06.03 구하라, 그리고 추적단 불꽃
요즘 들어 두 젊은 여성 생각을 많이 한다. 한쪽에게는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다른 한쪽에게는 감사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많다. 헤어지려는 남자친구로부터 성관계 동영상 공개 협박을 받다가 세상을 등진 가수 고 구하라, 그리고 일명 ‘서울대 n번방’ 사건을 밝혀낸 추척단 불꽃의 활동가 겸 온라인 저널리스트 원은지씨 얘기다.
아직도 그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엘리베이터 CCTV 속, 만인의 사랑을 받는 인기 아이돌이 동영상 공개 협박을 하는 남자친구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던 장면. 구씨 이름을 새삼 떠올리게 된 것은 최근 파장을 불러일으킨 BBC 버닝썬 다큐 때문이다. 다큐는 가수 정준영의 불법촬영 범죄와 버닝썬 사건에 대해 우리가 미처 몰랐던 부분들을 드러냈다. 특히 승리 일당과 경찰의 유착 관계를 밝히는 데 구하라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을 최초 보도했다. 승리 단톡방 멤버인 가수 최종훈을 설득해 경찰 간부가 누군지 말하게 한 것이 바로 구하라였다는 것이다. 이런 다큐가 한국 언론이 아니라 해외 매체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이 부끄럽기도 하다. 해외 반응은 ‘K팝 스타들의 악질적 성범죄, 처벌 수위가 이렇게 낮다니 놀랍다’ 일색이다.
경찰 대신 ‘서울대 n번방’ 파헤쳐
딥페이크 등 디지털 성범죄 맞서
신분 위장 수사 범위 더 확대해야

▲지난 19일 공개된 BBC뉴스코리아 '버닝썬: K팝 스타들의 비밀 대화방을 폭로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통해, 구하라의 도움으로 버닝썬 게이트 핵심 인물 '경찰총장'의 존재에 대해 취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유튜브채널 BBC뉴스코리아 캡처
안타까운 죽음 이후에도 구씨의 비극은 계속됐다. 어린 구씨 남매를 버리고 연락 한 번 없던 친모가 갑자기 나타나 거액을 상속하면서, 양육 의무를 다하지 못한 친부모가 자녀 유산을 상속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구하라법’ 제정 목소리가 높았지만, 이 또한 유야무야됐다. 살아서 불법촬영물 피해자였고, 죽어서도 부조리한 세상사에 원통했을 그녀다.

▲서울대에서 피해자가 최소 61명에 달하는 디지털 성범죄가 발생했다. 이들은 서울대 동문으로, 텔레그램을 통해 여성들의 졸업사진, SNS 사진 등을 토대로 불법 합성물을 제작하면서 변태적 취향을 가진 사람들과 공유·유포하는 식으로 범행해 'n번방' 사건을 연상케 한다. 뉴스1
원은지씨가 파헤친 ‘서울대 n번방’ 사건은 서울대 출신 두 남성이 동문 후배 여학생을 포함해 61명 여성의 얼굴에 음란 영상을 합성해 유포한 딥페이크 성범죄다. 돈도 아니고 그저 성적 만족을 위해 ‘지인 능욕’ 딥페이크 허위 영상을 돌려봤고, 피해 여성들에게 영상을 전송하는 과감함도 보였다. 당황해하는 여성의 반응마저 즐기는 변태적 욕망이자, 텔레그램이니 절대 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무려 4차례 수사에도 성과 없이 수사가 중단되자 피해자들이 원씨를 찾았다. 여러 피해자가 공통으로 아는 ‘지인’을 지목한 후, 신분을 위장한 원씨가 그에게 접근해 2년여 친분을 쌓고, 오프라인으로 끌어내 덜미를 잡은 것이다. 반드시 죗값을 묻겠다는 피해자들의 의지와 원씨의 잠입취재 노하우가 만나 만든 성과다.
원씨는 2020년 세상을 흔든 ‘n번방’ 사건에 이어 이번 ‘서울대 n번방’ 사건까지 20대 여성의 몸으로 수사기관도 못 한 일을 두 번이나 해냈다. 원씨는 n번방 관련 다큐에 출연해 잠입취재 과정에서 무수한 성착취 영상에 노출된 트라우마에 오래 시달렸다고 털어놓기도 했는데, 수사기관이 손놓고 있는 가운데 원씨 개인이 오롯이 짊어진 무게가 너무나 무겁다. 원래 여성 2인조였던 추적단 불꽃은 그중 박지현씨가 지난 대선 때 민주당 비대위원장으로 정계에 진출하면서 원씨 1인 체제가 됐다.
딥페이크 불법촬영 범죄는 기술의 발달로 날로 손쉽고 정교해지고, n번방과 같은 실질적인 성착취가 일어나지는 않지만, 피해자에게는 인격이 무너지는 끔찍한 범죄다. 원씨는 가능한 일을 경찰은 왜 못 했을까. 사건 이후 경찰은 아동·청소년 디지털 성범죄에만 허용된 신분위장 함정수사의 범위를 성인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2021년 미성년 상대 디지털 성범죄에 위장수사가 도입된 후 2년여간 경찰은 1000명 넘게 검거하는 성과를 올렸다. 과도한 기본권 침해 논란도 있지만, 가해자의 인권이 피해자의 인권을 앞설 수는 없는 일이다. 과거에도 관련 법 개정 논의가 있었으나 국회를 넘지 못했으니 이번에는 국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거야 주도 ‘특검 정국’이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삼킬 게 빤해 보이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할 일은 하는 22대 국회를 기대해 본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06-03 지자체 노조의 신선한 도전
김성훈 전국부 차장
경북 안동시공무원노동조합(안공노)이 지난 5월 28일 국회를 찾아 ‘거대 기득권 노조의 괴롭힘 방지 법안’을 조속히 입법해달라고 촉구해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전국공무원노동조합(전공노)은 노조지부 탈퇴를 인정하는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탈퇴를 시도하거나 탈퇴한 조합을 대상으로 음해성 전단지 배부나 법적 공방을 이용한 괴롭힘 등을 통해 조합원 의견에 따른 자유로운 노조 결성 및 활동을 제한하고 있다”며 “중앙집행부 의사결정을 따르라는 비민주적 운영 방식을 고수하고, 스스로 약자라고 칭하면서도 자신들보다 더욱 약한 약자를 상대할 때는 무자비하게 짓밟는 ‘내로남불’ ‘내 편이 아니면 적’으로 간주하는 모습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상급 단체인 거대 노총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투쟁하는 일반적인 노조 행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앞서 안공노는 지난해 8월 임시총회를 통해 84% 찬성으로 민주노총 산하 전공노 경북지역본부 안동시지부 탈퇴를 의결하고 독립된 노조를 설립했다. 대법원도 지난 2016년 산별노조 산하 지부가 상급 노조를 탈퇴해 기업별 노조로 전환할 수 있다는 판결을 한 바 있다.
서울시에서는 지하철 1∼8호선을 운영하는 서울교통공사에서 신선한 노조 문화 실험이 나타나고 있다. 공사의 제3 노조인 ‘올바른노조’는 최근 조합원들에게 출산장려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올바른노조는 이른바 ‘MZ세대’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올바른노조는 조합원이 첫째 아이를 낳으면 100만 원, 둘째를 낳으면 200만 원을 지급할 계획이다. 공사 차원에서는 직원들이 출산이나 입양을 할 때 축하금 명목으로 20만 원씩 지원하는 정도였는데, 노조가 조합비를 일부 증액해 자체 기금에서 출산장려금을 지급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기존 거대 강성노조들과 차별화되는 행보가 또 있다. 올바른노조는 5월 23일에는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노조 활동을 명분으로 근로시간 면제(타임오프) 제도를 악용한 노조 간부에 대해 엄중한 처벌과 감사원 감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공사는 지난해 6월 서울시 감사위원회에서 ‘투자 출연기관 근로시간 면제 제도 운영 현황 조사’를 받았고, 같은 해 9월 ‘정상적 근무 수행이 확인되지 않은 사례가 다수 확인됐다’는 감사 결과를 통보받았다. 이에 올해 3월 노조 간부 20명에게 파면, 14명에게 해임처분을 내렸다가 지난 4월 7명에 대해 강등으로 징계를 완화했다. 논란이 일자 공사는 5월에 다시 이들 7명을 해임했다. 올바른노조는 “왜 수십, 수백여 일간 회사에 나오지 않은 간부들을 2차 인사위원회에서 살려주려 했느냐”고 비판했다.
제22대 국회가 개원하면 더불어민주당이 앞장서서 이른바 ‘노란봉투법’ 재입법에 나설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야당이 지배하는 국회가 노조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가능성이 큰 만큼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혁은 좌초될 가능성이 작지 않다. 노동계 내부가 달라지지 않으면 사실상 해법이 없는 상황에서, 지자체 노조에서 싹튼 변화가 사회 전 영역에 확산하기를 기대해 본다.

문화일보
06-03 미복귀 전공의·의대생 ‘원칙 대응’ 더 늦추기 어렵다
정부가 전공의 복귀를 위한 개별 상담 시한을 연기하며 또 한발 물러섰다. 정부는 수련병원에 전공의와의 상담 결과를 지난달 29일까지 제출하라고 했으나 제출 시한을 31일로 늦췄다가 다시 3일로 연장했다. 하지만 전공의 대부분은 전화를 받지 않는 등 여전히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달 28일 기준 수련병원 211곳에서 근무 중인 전공의는 973명(7.1%)에 불과하며 개별 면담 후에도 복귀율은 10%에도 못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의 유화책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이 증명된 상황에서 이제 행정적·사법적 처분 등 원칙 대응에 나서야 할 때다.
미래의 국가 의료 주역이 될 전공의와 의대생 등에 대한 징계조치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법치가 무너져선 안 된다. 지난 3월 정부는 총선을 앞두고 유연한 처리로 선회한 뒤 차일피일 행정처분을 미뤄왔다. ‘전문의 수련 규정’에 따라 전공의들은 지난달 20일을 기점으로 미 수련 기간이 3개월을 초과해 내년 전문의 자격시험 응시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 정부는 미복귀 전공의들에게 면허정지 3개월의 행정처분을 경고해왔다. 정부는 미수련 기간이 3개월을 넘어도 휴가·병가 등 불가피한 사유가 있으면 예외를 인정하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전공의들이 복귀하지 않으면 내년 2910명의 전문의가 배출되지 못하는 등 현실적 어려움을 고려해 최대한 설득해야 하는 어려움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사법적 판단이 내려지고, 2025학년도 의과대학 입시 전형까지 발표된 현실에서 더 이상의 유화책은 무의미하고 무책임하기까지 하다. 수련 기간에 대한 유연한 적용과 병원·전공의들이 요구하는 사직서 수리 역시 개별적으로 이유를 명확하게 소명한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인정해줘야 한다. 미복귀 의대생들도 마찬가지다. 동맹 집단 휴학은 휴학의 정당한 사유가 될 수 없다는 원칙을 그대로 적용하는 게 옳다.
문화일보 사설
06.04 [단독] 오늘 전공의 업무 복귀 명령 해제하고, 사표 수리한다
정부, 의료 정상화 위해 정책 변화
정부는 진료 현장을 이탈한 전공의 1만명에게 내린 복귀 명령을 해제하고, 전공의들이 제출한 사직서를 각 병원이 수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안을 4일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픽=이철원
정부 고위 관계자는 3일 “전공의들의 복귀를 유도하기 위해선 사직서 수리 금지 조치를 풀어줘야 한다는 의료계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며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4일 오후 전공의들에게 내린 진료 유지·업무 개시(복귀) 명령과 각 수련 병원에 내린 사직서 수리 금지 명령을 해제한다는 발표를 할 예정”이라고 했다.
정부 발표 이후 각 대학병원의 병원장은 미복귀 전공의들의 의향을 물어 떠나기를 원하는 전공의의 사표는 수리할 전망이다. 이렇게 되면 일부 전공의는 복귀를 하거나 병원을 옮겨 수련을 이어갈 수 있다. 대형 병원을 떠나 일반의(전문 분야가 없는 의사) 신분으로 소형 병원에 취업하거나 개원할 수도 있다.
정부는 ‘전공의 사표 수리’가 현시점에선 더 이득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의료 정상화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의대 증원에 반대해 지난 2월 20일 전후로 병원을 떠난 전공의들이 복귀하는 것이다. 정부는 그동안 거의 매일 전공의 복귀를 호소하고, 미복귀 전공의에 대해선 ‘선처 없는 처벌’을 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전공의 이탈 101일째였던 지난달 30일, 전국 수련 병원 211곳의 복귀 전공의는 879명으로 전체의 8.4%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공의 사표 수리가 전공의 복귀에 더 도움이 된다고 본다는 것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복귀를 원하지만 동료들의 눈치를 보느라 복귀하지 못한 전공의가 20%가량(2000여 명) 된다고 추정하고 있다”고 했다. 정부는 여기에 원래 수련하던 병원에선 사직하더라도 병원을 옮겨 수련을 이어갈 전공의도 적지 않다고 본다. 정부 내에선 “이런 경우까지 합치면 전공의 복귀율이 50%(5000여 명)에 육박할 수 있다” “전공의 절반 복귀가 목표”라는 얘기도 나온다.
특히 고난도 응급·중증 환자 수술을 많이 하는 ‘빅5(국내 상위 5곳 병원)’의 전공의 충원율이 높아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현재 빅5 전공의 대부분이 이탈했다. 이로 인해 중환자 수술·입원은 거의 반 토막이 났고, 빅5는 이번 의료 파행의 진원이 됐다.
그런데 다른 수련 병원 전공의 중에는 빅5에서 수련한 뒤 전문의 자격을 따고 싶어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빅5 소속 전공의 대부분이 사직하면, 이들 병원은 곧바로 전공의 모집 공고를 내게 된다. 이 경우 빅5에서 수련하고 싶었던 다른 병원의 사직 전공의가 몰려들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정부는 전공의 ‘사표 수리 거부’는 이젠 득보다 실이 더 크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미 내년도 의대 정원 확대는 최종 확정됐다. 또 원칙적으로 3~4년 차 레지던트인 전공의들이 내년 초 전문의 자격 시험을 치르기 위해 복귀해야 했던 마지노선인 ‘5월 21일’도 이미 지났다. 전공의들이 조속히 복귀해야 할 유인이 사라진 상태에서 사표 수리를 계속 거부하면 무엇보다 병원을 지키고 있는 의대 교수들을 자극할 수 있다. 이형민 대한응급의학의사회 회장은 “(사직) 전공의들의 (경제) 사정이 너무 어렵다. 정부가 사직서 수리를 안 해주는 것은 정말 치사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전공의 사표 수리가 전공의 복귀율을 높일 것이란 정부 전망에 회의적인 시각도 많다. 최근 전임의(세부 전공 중인 전문의) 복귀율은 70%를 넘었지만, 이 중 다수는 생명과 직결된 필수 진료과 의사가 아닌 비필수 진료과 의사라고 한다. 서울아산병원의 한 교수는 “내과, 신경외과, 흉부외과, 응급의학과 같은 필수 진료과 전공의 다수는 ‘힘든 수련 생활을 더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고 했다. 필수 의료 의사들은 복귀하지 않고, 전체 복귀율만 올라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법 적용의 불공정 문제도 불거질 수 있다. 정부가 100일 넘게 환자를 떠나 현행법을 어긴 전공의들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개원의 업계로 가도록 면죄부를 줬다는 문제 제기가 생길 수 있다. 정부가 최근 의료계 반발을 의식해 각 대학이 의대 증원분의 50%까지 줄일 수 있도록 ‘자율 모집’을 허용한 데 이어 ‘예외 없는 처벌’이란 법 원칙도 깨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원래 근무 병원으로든, 다른 병원으로든 끝까지 복귀하지 않은 전공의에 대해선 불이익을 주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며 “사직서 수리 문제와 미복귀 전공의 처벌 문제는 별개”라고 했다.
한편 빅5를 비롯한 대형 병원장들은 최근 복지부 고위 관계자를 만나 “2025학년도 의대 정원은 확대하더라도, 2026학년도 의대 정원부터는 원점에서 재논의하자”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공의·전문의·전임의
의대를 졸업하고 국가고시를 통해 의사 면허를 받은 사람을 ‘일반의’라고 한다. ‘전공의’는 의대 졸업 후 전문의 자격을 따기 위해 종합병원 등에서 수련하는 인턴과 레지던트를 말한다. 레지던트를 거친 뒤 특정 분과에서 자격을 인정받으면 ‘전문의’가 된다. 이후 대형 병원에서 1~2년 세부 전공을 공부하며 진료하는 의사를 ‘전임의’(펠로)라고 한다.
06.05 피의자에게 거짓말할 권리를 줘야 하나
김호중씨 거짓말 美선 처벌 대상
우린 허위 진술죄 없어 처벌 못 해
범죄자들 거짓말 악용 사례 늘어
우리도 허위 진술죄 도입 검토해야

▲음주 뺑소니 혐의를 받고 있는 트로트 가수 김호중이 지난 24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구속 전 피의자심문)을 마친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뉴시스
가수 김호중씨의 음주 뺑소니 사건을 보면서 피의자나 참고인에게 거짓말할 권리를 언제까지 줘야 하느냐는 의문이 새삼 떠올랐다. 우리 법은 법정에서 증인이 하는 거짓말은 위증죄로 처벌하지만, 수사기관에서 하는 거짓말에 대해선 처벌 규정이 없다. 대부분 방어권 차원에서 용인한다. 피의자든 참고인이든 마찬가지다. 이젠 웬만한 사람들도 이를 다 안다. 그래서 김씨와 소속사도 사고 발생 열흘 동안 대놓고 음주 사실을 부인했을 것이다.
그 거짓을 덮으려고 김씨와 소속사 측은 운전자 바꿔치기, 말 맞추기, 조직적 증거인멸을 했다. 거짓이 더 큰 거짓을 낳고 범죄로까지 이어졌다. 소속사 대표와 직원은 이 일로 구속됐고, 김씨도 위험운전치상·도주치상 등의 혐의로만 구속됐다. 사법 시스템 농락의 시초는 거짓말이었는데 그것으론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다.
미국은 다르다. 허위 진술죄 규정이 있어 수사기관에서 한 거짓말도 처벌할 수 있다. 미국 연방 대법원도 1998년 피의자에게 거짓말할 권리가 없음을 명백히 밝혔다. 노조 간부가 “회사에서 현금이나 선물을 받았느냐”는 연방 조사관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한 것이 허위 진술죄에 해당한다고 했다. 소극적 범행 부인도 허위 진술죄라고 본 것이다. 미국 헌법이 보장하는 진술 거부권은 불리한 진술을 거부하고 침묵할 권리를 준 것일 뿐 일단 입을 열면 진실을 말하라는 것이다.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진술 거부권의 취지도 미국과 다를 게 없다. 그런데 허위 진술을 처벌할 규정이 없다 보니 이젠 너 나 할 것 없이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이 판치면 힘 있고, 돈 있고, 교활한 범죄자가 법망을 빠져나갈 가능성이 커지고, 범죄 피해자는 구제받기 더 어려워진다. 이것은 정의롭지 못한 것 아닌가.
처벌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간접적이긴 해도 형법상 ‘위계에 의한 공무 집행 방해’로 처벌할 수는 있다. 하지만 유죄로 인정되는 경우가 드물다. 대개의 경우 법원이 수사로 밝혀낼 수 있을 정도의 허위 진술은 처벌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허위 진술이 통해도 이는 수사기관이 충분히 수사하지 못한 결과일 뿐 수사기관을 속인 행위만으로 죄를 묻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허위 진술을 하게 되면 수사기관 입장에선 불필요한 증거 조사나 관련자 소환을 해야 할 수 있고, 자칫하면 무고한 사람이 처벌될 수도 있다.
때로 수사·재판 지연도 초래한다. 그것은 국가의 사법 기능을 방해한 것 아닌가. 그런데도 법원이 허위 진술에 너무 관대해 거의 처벌이 어렵다.
형사 사법의 중요한 가치는 적법 절차에 의한 피의자 인권 보장과 실체적 진실 발견이다. 둘 다 포기할 수 없는 가치다. 미국은 피의자 인권은 보장하되 사건 실체를 밝히는 데 필요한 제도적 장치도 마련하고 있다. 허위 진술죄도 그중 하나다. 그런 균형이 필요한데 우리는 그동안 피의자 인권에만 치중한 측면이 분명히 있다.
우리도 이젠 허위 진술죄 도입을 검토할 때가 됐다고 본다. 자백을 강제하자는 게 아니다. 피의자 입장에선 불리하면 진술을 거부하면 된다. 적어도 적극적인 거짓말은 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다. 진술 거부와 허위 진술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검찰이 이를 무기로 기소권을 남용할 우려가 있다면 그것을 막을 장치를 두면 된다. 적용 대상을 뇌물 등 권력형 범죄, 살인·마약·테러 등 중대 범죄로 제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위 진술죄는 그간 학계에서도 많이 논의했던 내용이다. 이젠 논의를 본격화했으면 한다. 교활한 범죄자들이 법망을 빠져나가려고 거짓말을 방어 수단으로 악용하는 상황을 언제까지 지켜볼 수만은 없지 않은가.
조선일보 최원규 논설위원
06-07 서울의대 교수들 “행정처분 완전 취소”…법 위에 있나
서울대 의대·병원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는 전공의에 대한 정부의 ‘행정처분 완전 취소’를 요구하며 17일부터 전체 휴진에 들어가기로 6일 결의했다. 파업이나 다름없다. 사태 해결에 나서야 할 국립대학법인 소속 의료기관 교수들이 집단이기주의에 매몰돼 의사의 의무는 물론 스승의 책임까지 내팽개친 상황이다. 교수들이 어느 정도 참여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비대위 결정이 그대로 실행되면 서울대병원·분당서울대병원·보라매병원은 응급실과 중환자실 등을 제외하고 진료가 중단된다.
정부는 지난 4일 진료유지명령, 업무개시명령, 사직서 수리 금지 명령 등을 ‘철회’하고, 복귀 전공의에 대해 면허정지 행정처분 절차를 ‘중단’한다고 밝혔다. 지난 2월 전공의들의 병원 집단 이탈 후 견지해온 기계적 법 적용 원칙을 깨고 형평성 비판까지 감수하며 내린 결정이다. 미복귀 전공의에 대해서는 추후 결정하겠다고 선을 그었고 ‘명령 철회의 효력은 장래를 향해 발생한다’는 조건을 걸어 명령 철회 전까지 명령 위반 사실과 책임은 그대로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현행법 테두리 내에서 최대한 융통성을 발휘한 법 해석·적용이다. 더 물러서면 정부 자체가 법을 준수하지 않는 직무유기 문제까지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비대위는 행정명령 ‘중단’은 언제든 재개될 수 있다며 완전 취소를 요구했다. 의료 현장을 이탈한 전공의에게 완전 면죄부를 달라는 도를 넘은 요구이며 정부의 업무 개시 명령, 진료 유지 명령 자체가 잘못됐음을 인정하라는 억지 주장이다. 서울대는 올해 정부출연금이 6129억 원에 달하는 국립대학법인으로, 서울대 교수에겐 국가공무원법이 준용된다. 국가공무원법에 따라 ‘노동운동이나 공무 외의 일을 위한 집단행위’가 금지된다. 교수들의 진료 파업이라는 협박은 실리도 명분도 없다. 법 위에 있다는 특권 의식도 비친다. 국민과 법치를 짓밟으려 하는가.
문화일보 사설
06-07 정부 “전공의 행정처분 전면취소 수용불가”
■ 서울대병원 ‘무기한 휴진’ 파장
정부 ‘미복귀자 면허정지’방침에
의대교수들 17일 집단행동 결의
복지부 “의료개혁 정당성 무너져”
환자·의료계 “공공성 망각” 비판
서울대 의대·서울대병원 교수들이 전공의 면허정지 행정처분의 ‘전면 취소’를 요구하면서 17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전면 휴진)에 들어가기로 결정한 가운데 대통령실이 ‘무리한 요구’라고 사실상 수용 불가 방침을 밝혔다. 국민 세금이 투입되는 국가중앙병원 소속인 서울대 의대 교수들이 국가공무원법을 무시한 채 집단 이익을 위해 위력 행사의 최선두에 섰다는 비판도 커지고 있다.
7일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문화일보와의 통화에서 “(전공의들을) 아예 처분하지 않겠다고 정부가 약속하라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라며 “미복귀 전공의에 대한 처분을 하지 말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 정서도 그렇고, 정부는 큰 틀의 원칙은 지켜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통령실은 17일 이전까지 서울대 의대 교수들에게 정부 입장을 충분히 설명하겠다는 방침이다. 이 관계자는 “서울대병원 의사들이나 정부나 생각이나 목적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며 “정부가 전공의 처분에 목적이 있는 것이 결코 아니고 전공의들이 의료 현장으로 돌아오게 하는 데 모든 정책의 초점이 있다는 점을 지속 설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보건복지부 역시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보건의료 재난 위기 ‘심각’ 단계에서 추진해왔던 모든 정책과 의대 증원의 정당성이 무너지는 요구라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밝혔다. 복지부측은 깊은 유감과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무기한 전면 휴진 경정은 빅5 병원 중에선 서울대병원이 처음이다. 이들 요구는 크게 두 가지다. 전공의 행정처분 전면 취소와 의대 증원 재검토다. 지난 4일 정부는 복귀 전공의에 대한 행정처분을 철회하면서 미복귀 전공의에 대한 행정처분과 고소·고발 등 행정·사법 처리 가능성을 남겨뒀다.
의료계 안팎에서는 서울대 의대 교수들이 공공성을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서울대 의대는 의대 증원 규모가 0명인데도 불구하고 소속 교수들은 총파업 등 강경 노선을 걷고 있다. 5월 31일 기준 서울대병원의 일반 병실 병상 가동률은 51.4%로 빅5 병원 중 가장 낮다. 외래진료율도 50%를 밑도는 것으로 알려졌다. 의대 교수들이 적극적으로 진료에 나서지 않았던 것으로 분석된다. 한 지역 병원장은 “서울대 의대 교수는 의사사회에서 ‘성골 중 성골’인데도 권리만 누린 채 의무를 방기했다”며 “세금이 투입되는 국가중앙병원으로서 마지막 순간까지 의료안전망을 지켜야 한다는 책무를 외면한 채 집단이익만 지키려 한다”고 지적했다. 조승연 전국지방의료원연합회장(인천시의료원장)도 “국민 동의를 얻지 못하는 파업은 성공할 수도 없고 국민 불안을 유발하는 행위는 옳지 않다”고 말했다. 환자단체도 “환자의 생명권을 박탈하는 비인도적 결정을 즉각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한국중증질환연합회는 이날 “법을 어기고 집단행동을 한 전공의들에 대한 정부 조치를 취소하라는 교수들의 요구는 ‘적반하장’”이라며 “무기한 집단 휴진은 의료 집단 이기주의를 합리화하고 환자들을 내팽개친 무책임한 행태”라고 비판했다.
문화일보 권도경·손기은·유민우 기자
06.08 입양아는 '치부'가 아니라 '자산'이다
감춰왔던 해외입양의 속살… 돌아온 입양아 출신 수백명
"정부의 아동 매매" 선동 깨려면 환영과 파격 대책 동시에 내놔야
미국 메릴랜드 대학병원의 심장이식 전문 의사가 발명가 토머스 클레멘트(71)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인간에게 돼지 심장을 이식한 후 약물 투입 방식을 이야기하던 때였다. 빨대로 음료수를 마시던 토머스가 말했다.
“빨대로 음료수를 빨듯, 공기로 심장 판막을 들어올려 주사제를 넣는 건 어때?” 얼마 전 병원은 이 기기로 미국 의료기 발명 대회에 출전, 1등상을 수상했다. 토머스는 60개가 넘는 기술 특허 보유자이고, 의료기 회사를 글로벌 기업에 매각해 큰 돈을 벌었다. 제너럴일렉트릭(GE) 기술자였던 양아버지는 그를 “내 평생 최고의 선택”이라 했다. 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나 버려진 그는 5세 때 미국으로 입양됐다. 얼마 전 방한한 그가 “귀국한 입양인들 형편이 매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그가 큰돈을 기부했지만 그것으론 역부족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중년이 된 해외입양인들이 돌아온다’(7일 자)는 기사로 썼다.
입양인 사정은 천차만별이었다. 네덜란드 출신 시모나는 소녀 가장, 여성 전사처럼 살고 있다. 시민 단체를 꾸려 입양인에게 푸드박스를 보내고, 집을 리모델링해주고, 월세를 내준다. 같은 나라 출신 창우씨는 직업이 없어 굶기를 밥 먹듯 한다. 두 사람 모두 삶이 녹록지 않은데, 그래도 한국에 사는 게 좋다고 했다.
어느 전문가가 이런 말을 했다. “유엔 표결이 있을 때였다. 북한과 가까운 유럽 국가들에 우리 쪽에 표를 주지 않으면 입양을 보내지 않겠다고 을러서 표를 받았다”고 했다. 지독히 가난했던 50년대가 아니라 80년대 출생아의 1%인 8,000명 이상의 아이를 해외 입양 보냈다. 한국은 입양아를 ‘외교 무기’로도 썼던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해외로 아이를 보낸다.
운동가들은 이걸 두고 ‘영아 매매’ ‘인신 납치’라 부른다. “이승만 대통령이 ‘아버지의 나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혼혈아를 해외로 보낸 건 인종 청소였다” “건당 3000~3만달러에 정부가 아이를 팔아 넘겼다.”
동의하지 않는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않는다”며 국내 입양은 하지 않던 나라였다. “미국에서는 거지도 햄버거를 먹는다” “영어라도 잘하게 외국 입양 갔으면 좋겠다”는 농담까지 있던 나라였다. ‘해외 입양 환상’은 지위 고하를 막론, 모두에게 있었던 나라였다.
과거에 대한 진단은 다르지만, 해법은 비슷할 수 있다. 이민은 의지였지만, 입양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양인이 한국에 오면 ‘재외동포비자(F4)’를 발부받는다. 여기서 살며 형편이 아무리 어려워도 정부나 지자체 ‘지원금’을 받지 못한다. 청년주택이나 문화바우처 같은 것은 어림없는 소리다. ‘국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력이 낮거나 한국말도 못하는 사람이 많아 합법적 취업은 어렵다. 그런 사람 수백 명이 지금 한국에 산다.
물론 ‘귀화’ 과정을 밟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유럽·미국 출신 입양인이 ‘마지막 보험’ 같은 입양국 국적을 포기해야 이게 가능하다. 그들이 모국으로 돌아오면 특별한 ‘루트’를 열어줘야 한다. 탈북자나 고려인 후손에 비해 ‘입양인’이 홀대받을 이유가 없다. 그들을 ‘입양 시스템의 피해자’로 남겨둬선 안 된다.
시모나가 이렇게 반박했다. “나는 피해자(victim)가 아니다. 과거를 비판하자는 게 아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고칠 수 있다는 얘기다. 입양인들은 그 나라 언어에 능통하고, 인적, 사회적 네트워크를 갖고 있다. 한국이 우리를 시민으로 인정하고, 취업 지원을 해서 활용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한국은 초저출산 국가라 엄청나게 걱정하지 않나. 왜 우리는 안 보이는 건가.” 그녀에게서 한 수 배웠다.
조선일보 박은주 기자
06.10 아픈 사람 치료는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는 게 아니다
대한의사협회가 내년도 의대 정원 증원 중단을 요구하며 오는 18일 전면 휴진하기로 결의했다.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들이 전공의에 대한 행정처분 취소를 요구하며 17일부터 무기한 전체 휴진(총파업)에 들어가기로 한 데 이어 개원의들이 주축인 의협도 휴진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진료 대신 거리로 나가 총궐기대회를 열겠다고 한다. 의대 증원 확정 이후 의·정 간에 합리적인 후속 논의가 이뤄지길 기대했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
더 답답한 것은 의협이 무리한 조건을 내걸고 있다는 것이다. 의협은 내년 의대 정원 증원 중단을 요구하지만 이미 증원 계획이 대학별로 확정돼 입시 요강까지 발표됐는데 없던 일로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료 현장을 이탈한 전공의들에 대해 정부가 내린 업무개시 명령 등을 ‘철회’가 아니라 ‘취소’하라는 서울의대 교수들 요구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앞서 업무개시 명령 등을 철회하고, 복귀한 전공의는 면허정지 행정처분 절차도 중단하겠다고 했다. 비판을 감수하면서 한발 양보한 것이다. 그런데 행정 처분을 취소해 아예 없던 일로 하자는 것은 정부에 굴복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요구를 정부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나.
전공의 1만여 명 이탈로 의료 공백이 넉 달 가까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그나마 의료 공백을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의대 교수들과 묵묵히 의료 현장을 지킨 의사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마저 현장을 떠나면 의료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서울대병원장이 집단 휴진 불허 방침을 밝히고 서울대 교수회가 파업 자제를 호소한 것도 그런 우려 때문일 것이다.
의사들이 환자 생명을 볼모로 집단 투쟁을 벌이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 환자 치료는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그 자체가 의사의 존재 목적이다. 의사들로선 의대 증원에 불만이 있을 수 있지만 문제 제기도 환자 곁을 지키면서 합리적으로 해야 한다. 그래야 신뢰를 얻을 수 있고 국민도 의사들 요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
06-10 “국민을 적으로 돌리는 의사 파업 선언에 굴복 안 된다”
서울대 의대·병원 교수 비상대책위원회가 오는 17일부터 응급실·중환자실 등을 제외한 수술과 외래 진료를 전면 중단하겠다고 밝힌 데 이어, 개원의가 주축인 대한의사협회도 그 다음날인 18일 하루 전면 휴진 방침을 내놨다. 이대로 실행된다면, 전공의 집단 이탈 사태가 의대 교수 및 개업 의사들의 ‘파업’ 사태로 번지게 된다. 의·정 충돌의 차원은, 의대 증원을 둘러싼 전공의 집단과 윤석열 정부의 대결에서 의사 업계와 국민의 대결로 바뀐다.
임현택 의협 회장은 9일 “정부의 의료농단 교육농단에 맞서 분연히 일어설 것”이라며 “18일 전면 휴진을 통해 14만 전국 의사 회원은 물론 의대생과 학부모 등 전 국민이 참여하는 총궐기 대회를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의협은 의대 증원 등 의료 개혁 백지화를 요구하고 있다. 정부가 복귀 전공의들에 대한 행정처분 중지 등 사태 해결을 위해 한걸음 물러나자 오히려 더 무리한 요구를 밀어붙인다. 특히 올해 정부 출연금만 6129억 원에 달하는 서울대의 의대 교수들이 앞장서는 일은 개탄스럽다. 당장 서울대에 대한 국민 혈세 지원부터 중단해야 할 판이다.
진료 거부의 최대 피해자들 단체인 한국중증질환연합회의 9일 입장 발표는 절대다수 국민 생각을 대변한다. 연합회 측은 “국민을 적으로 돌리는 불법 총파업 선언”이라며 “오만방자한 의사 집단 이기주의에 국민과 정부가 굴복하는 일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고 밝혔다. 나아가 “국민 구성원이길 포기한 의협 간부와 불법 파업에 들어가는 의사들에 대한 행정조치와 사법처리”를 강력 주문했다. 정부는 상황을 봐가며 진료 유지 명령, 업무개시 명령을 내리고, 주동자에 대해선 사법처리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법도 국민도 안중에 없는 ‘떼법’에 절대로 밀려선 안 된다.
문화일보 사설
06.10 명분도 실리도 찾을 수 없는 의사들의 집단 휴진
18일 휴진, 의대 증원 영향 없고 환자만 고통
의협 회장 또 막말…국민 시선만 싸늘해질 뿐
대한의사협회가 오는 18일 전면 휴진하고 총궐기대회를 열겠다고 밝혔다. 임현택 의협 회장은 어제 투쟁 선포문을 통해 “총궐기대회는 대한민국 의료를 살리기 위한 투쟁의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의사들의 휴진이 대한민국 의료를 살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국민은 드물다. 이미 내년 의대 정원은 확정됐다. 수험생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더는 수정이 불가능하다. 정부는 의료개혁 TF를 구성해 개혁안을 마련 중인데, 의사들은 아무런 대안도 내놓지 못하는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환자를 외면한 채 거리로 나오겠다는 것은 명분도, 실리도 찾을 수 없는 행동이다.
오는 17일부터 전체 휴진하겠다고 발표한 서울대 의대 비상대책위원회의 주장도 동의하기 힘들다. 정부는 이미 전공의들의 사직서 수리를 허용하고 행정처분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혹시 다시 징계에 나설 수도 있으니 처분 중단이 아니라 취소하라는 것이 교수들의 주장이다. 눈곱만큼의 불이익도 참을 수 없다며 모든 법 집행을 자기들 중심으로 하자는 것은 지독한 이기주의일 뿐이다. 제자들은 그토록 아끼면서 극심한 고통을 받는 환자들의 처지는 나 몰라라 하는 행동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나.
의대 교수들의 집단행동 예고에 서울대 교수회는 어제 입장문을 통해 “개혁은 국민과 사회의 지지를 받고, 국가를 경영하는 정부의 동의를 얻어야 가능하다”며 “환자가 피해를 볼 수 있는 집단 휴진은 재고해 주길 부탁한다”고 만류했다. 그동안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 추진에 비판적이었던 동료 교수들조차 우려하는 행동을 꼭 해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임현택 의협 회장의 언행은 갈수록 가관이다. 이미 숱한 막말을 쏟아낸 임 회장은 지난 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업무상 과실치상 혐의로 기소된 의사에게 유죄를 선고한 판사의 실명을 거론하며 “이 여자 제정신이냐”고 썼다. 또 “판사와 가족이 병원에 오면 의사 양심이 아니라 심평원 규정에 맞게 진료하라”고 선동했다. 그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의사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더 의아한 것은 의사 집단 내부에서 이런 막말에 대해 자성이나 비판의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두 임 회장과 같은 생각인지, 아니면 그의 뒤에 숨어 이득만 취하겠다는 심산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의사들이 비이성적인 행동을 거듭할수록 국민의 시선은 더 차가워질 뿐이다. 그간 실책을 거듭했던 정부에 대한 비판도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내년 이후의 의대 정원 문제와 의료개혁 역시 일방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의사들은 무작정 집단행동에 나서기에 앞서 어떤 것이 현명하고 사명감 있는 행동인지 숙고해 주길 바란다.
중앙일보 사설
06.10 김호중이 다시 살아날 방법
점령군 미군, 해방군 소련
친일 세력 척결 주장하고
"진짜 판결은 국민이 내린다"
정치인 변신해 떼를 써보라

'▲음주 뺑소니' 혐의를 받는 트로트 가수 김호중 씨가 지난달 31일 오전 서울 강남경찰서에서 나와 검찰로 구속 송치되고 있다. /뉴스1
위험 운전 및 도주 치상 등 혐의로 구속 수감된 가수 김호중이 다시 우뚝 설 방법이 있다. 정치를 한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우선 정의로운 역사 의식을 천명한다. 미군은 점령군이고 소련은 해방군으로 한반도에 진주했다고 주창한다. “친일, 종일, 숭일, 부일하는 모리배·매국노들이 호의호식하고 고위직에 올라 떵떵거리고 사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목소리 높여 외친다. 한국이 1인당 국민소득에서 일본을 제친 사실 따위는 잊어버리는 게 좋다.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도 않았다. 고작 음주운전·도주 혐의에 구속 영장이 바로 떨어진 것은 한갓 연예인이기 때문이다. 구속 기간은 어제(9일) 열흘 더 연장됐다. 이제 ‘그냥 정치인’ 말고 ‘정의로운 정치인’으로 화려하게 날개 달면 판사도 함부로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모두 같은 사람인데 김호중은 처벌받으면 안 되고, 힘 없는 사회 초년생 막내 매니저는 처벌받아도 되느냐” 따위 훈계는 늘어놓지 못한다. “위증교사 혐의는 소명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피의자의 방어권이 배척될 정도에 이른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단서 달아 방면할 것이다.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당당하게 간다. 15만 팬덤이 뒤를 받치고 있다. 물티슈로 먼지 앉은 승용차를 눈물겹게 닦아주고, 문자 폭탄 양념 날리며 한결같이 지지하는 다른 유력 정치인 팬덤을 참고한다. 오직 개혁의 편에 서서 깨어있는 시민만 믿고 검찰 독재의 가혹한 탄압에 맞서 싸울 것이라고 가열차게 외친다. 계속 되풀이해 거듭 주장하면 일반 국민도 “진짜 그런가?” 혼돈에 빠질 것이다.
설령 1심에서 유죄를 받더라도 흔들릴 필요 없다. 정의로운 정치인이 되면 향후 재판은 한없이 지연되고 소환 조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보궐 선거 또는 다음 총선까지 인고(忍苦)의 시간을 견디고 버텨 정의로운 정치인이 되면 달콤한 보상이 따라온다. 역시 정의로운 동료 의원들이 방탄에 나설 것이다. 그래도 재판에서 최종 유죄가 나오면? 걱정 없다. “내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았고, 비난을 받은 것도 이해한다”고 쿨하게 인정하고 옥중에서 스쾃과 팔굽혀펴기를 하며 검찰 정권 무너뜨리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사자후(獅子吼)를 토한다. 정의로운 정치인에게 기회는 반드시 다시 열린다.
모래알처럼 흩어진 다수는 굳게 단결한 소수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미국 하버드대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 교수가 신간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에 썼다. “조직화된 이익단체들은 정책과 입법 과정에서 다수 여론과는 동떨어진 방식으로 종종 강한 입김을 불어넣는다. (중략) 판사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사안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여론과 동떨어진 결론이 나온다고 해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267쪽)
대마(大馬)는 결코 죽지 않는다. 트럼프 사례를 배울 필요가 있다. 혐의 모두 유죄 판결이 나오더라도 “부패한 판사에 의해 조작된 재판” “나는 무죄다. 끝까지 싸울 것” “진짜 판결은 국민에 의해 내려질 것”이라고 선언한다. 지지를 철회하는 팬은 7% 남짓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급선무는 정의로운 정치인을 우선 선언하는 일이다. 위기는 곧 기회가 된다.
※추신: 혹여 오해할지도 모를 독자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위 글은 반어·역설·풍자를 담아 썼습니다.
조선일보 이한수 기자
06.10 세계 양자 물리학계 스타였던 한국계 과학자 남세우를 아십니까?
[김윤덕이 만난 사람]
삼성 호암상 물리·수학상 수상 故 남세우 박사의 NIST 동료들

▲지난 5월 31일, 삼성 호암상 과학상을 수상한 故남세우 박사를 축하하기 위해 한국에 온 미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 과학자들. 킴벌리 브리그만(앞줄 오른쪽에서 둘째)부터 시계 방향으로 리처드 미린, 크리스탄 코윈(연구분과장), 제임스 쿠시메릭(연구실장), 앨런 믹돌, 황지성, 크리스터 샐름 박사다. 이들은 시상식장에 깔린 카펫 문양이 남 박사가 개발한 '단일 광자 검출기' 패턴과 비슷하다며 웃었다. /김지호 기자
“빛의 입자를 감지해 세상의 속도를 높인 연구자”로 평가받는 남세우는, 세계 양자물리학계 스타였다. 양자 기술을 둘러싼 미·중 패권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감도로 빛을 탐지하는 ‘단일 광자 검출기’를 개발해 양자 컴퓨팅, 양자 통신 분야의 비약적 발전을 이루게 한 그는, 이 분야 최고 권위인 ‘존 스튜어트 벨 상’을 받은 데 이어, 2022년 노벨 물리학상에 인용됐다.
그가 지난 1월 5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미국 물리학계는 슬픔에 잠겼다. 남세우가 25년 몸담아온 미국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는 “우리는 뛰어난 과학자, 사려 깊은 멘토, 훌륭한 친구를 잃었다”며 “세계 물리학계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고 애도했다.
남세우는 사후(死後) 그 이름이 모국에 알려졌다. 호암재단은 생존하는 사람에게만 시상한다는 원칙을 깨고 남세우를 ‘삼성호암상 물리·수학 부문 수상자’로 선정했다. 지난 31일 시상식에 참석한 아내 킴벌리 브리그먼 박사와 NIST 동료 과학자 6명에게서 모국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남세우 박사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남 박사를 “고집은 셌지만 유머가 넘치고 한없이 겸손했던 과학자”로 추억했다.
◇ ‘세상의 속도’를 높인 물리학자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다들 자비로 왔다고 들었다.
제임스 쿠시메릭: “NIST와 남세우 박사를 대표해서 왔다. 기쁨과 슬픔이 교차할 킴벌리에게 힘을 보태주고 싶었다.”
-호암상을 알고 있었나?
킴벌리 브리그먼: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이메일을 정리하다 수상 소식이 담긴 편지를 발견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몰라서 NIST 동료인 황지성 박사에게 물었더니 진짜라고 확인해주더라(웃음). 남편의 외삼촌인 김충기 전 카이스트 교수가 31년 전 호암상을 받은 인연이 있어서 남편 또한 매우 영예롭게 생각했을 것이다.”
-한국에선 남세우 박사를 잘 모른다. 그의 업적을 설명해주신다면.
크리스터 샐름: “우리는 빛을 통해 세상을 인지한다. 빛의 가장 작은 단위를 광자(photon)라고 하는데, 빛이 없는 상태에서도 이 광자를 99% 탐지하고 측정하는 기술을 남 박사가 만들어낸 것이다. 이 기술은 물리학의 기초 영역부터 모든 응용 분야에 적용되며 엄청난 파급을 일으켰다.”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에 활용되나.
크리스터: “양자 컴퓨터, 양자 통신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된다. 인간의 두뇌를 모방하는 ‘뉴로모픽’ 컴퓨팅, 우주 암흑 물질 탐색, 보안 통신에 사용되는 ‘양자 키’ 처리에도 활용된다. 특히 지구와 위성, 우주정거장 간의 통신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준다. 지금보다 훨씬 더 빠르고 안전한 방식으로 정보를 보낼 수 있다.”
리처드 미린: “우주, 국방, 자동차, 보안 산업을 비롯해 의학 영상 기기에도 단일 광자 검출 기술이 사용된다.”
-스탠포드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을 때 이 연구를 처음 시작했던데.
킴벌리: “스탠포드대학의 블라스 카브레라 교수 밑에서 우주의 암흑 물질을 찾는 초전도 탐지기를 개발했고, NIST로 오면서 초저온에서 작동하는 초전도 고효율 검출기를 개발해 충돌하는 모든 광자의 99%를 탐지해내는 데 성공했다.”
-20년에 걸친 연구였던데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까?
황지성: “연구하다 보면 새로운 장애가 발견되고 한계에 부딪히지만 남 박사는 이를 해결하고 넘어서는 능력이 탁월했다. 작은 혁신들을 시도했고, 그것들이 쌓여 커다란 혁신을 이뤘다.”

▲남세우 미국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 종신 연구원이 실험실에서 작업하는 모습. 지난 1월 5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는 세계 양자 물리학계의 스타였다. /NIST 제공
◇ 물리학 50년 논쟁에 종지부
-남세우 박사의 단일 광자 검출기는 2022년 노벨 물리학상에도 인용됐다.
앨런: “알랭 아스페, 존 클라우저, 안톤 차일링거는 세계 물리학계의 50년 논쟁거리였던 ‘벨의 정리(Bell’s Inequality Theorem)’, 즉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을 증명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떨어져 있는 두 입자가 서로 강력한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양자 얽힘’ 이론은 아인슈타인, 보어, 슈뢰딩거 등 위대한 물리학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를 실험적으로 증명하는 데 남세우 박사의 단일 광자 검출기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어야 하지 않을까?
킴벌리: “노벨상을 받기에 남편은 너무 젊었던 것 같다(웃음). 오히려 남편은 2010년부터 광자 탐지 칩과 시스템을 제공하며 긴밀히 협력해온 오스트리아의 안톤 차일링거 박사팀이 노벨상을 공동 수상한 것을 무척 기뻐했다. 자신이 기여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리처드: “남 박사는 답을 찾기 위해 과학을 하지, 상을 받기 위해 과학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크리스탄 코윈: “그는 과학계의 협력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경쟁하는 그룹에게도 자신의 기술을 기꺼이 공유했다.”
◇ 경쟁 그룹과도 기술 공유
-국적이 다른 여러 연구 그룹과의 협업이 활발했더라.
앨런: “보통 과학자들은 자기만의 좁은 아이디어에 국한해서 연구하는데 남 박사는 단일 광자 검출부터 핵전이에 이르기까지 워낙 넓은 범위를 연구하다 보니 콘퍼런스를 하면 1만명이 모였다. 그래서 실험실에선 세우와 페이스를 맞추려 하지 말라고, 그러면 다친다고 경고했다(웃음).”
크리스탄: “세우는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뭣보다 능력이 뛰어나서 과학자들이 모이면 ‘세우와 널 비교하지 마라’며 서로 위로한 뒤 일을 시작했다(웃음).”
킴벌리: “남편은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요구했다. 더 빨리, 더 정확히, 더 노력하라고 외쳐서 동료들이 힘들었을 것이다(웃음). 코로나로 재택근무를 할 때도 남편은 아이들과 노인들을 위한 코로나 바이러스 검출기를 개발했다. 바이러스 노출 여부를 스스로 감지하게 해주는 장치였다.”
-일중독이었을까?
킴벌리: “남편은 자신의 일에 5가지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첫째, 열심히 한다. 둘째, 너무 작아서 할 수 없는 연구란 없다(No task was too small to do). 셋째, 공유(sharing)와 다양성이 현장(field)을 더 좋게 만든다. 넷째, 다른 연구자들을 북돋고 신뢰하자. 다섯째, 재미있게 일하자.”
-한국 물리학계와도 협업했을까?
킴벌리: “초고효율 단일 광자 검출이 굉장히 특수한 분야이고 거기에 쏟을 수 있는 시간과 자원이 제한돼 있기 때문에 협업을 요청해온 과학자들과만 교류한 것으로 안다.”
크리스탄: “한국은 양자 과학이 초기 단계라 기회가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황지성: “한국에도 훌륭한 물리학자들이 많다. 남 박사의 수상으로 양자 과학이 좀 더 조명받게 될 것이다.”
-남세우 박사가 한국에 너무 늦게 알려졌다며 아쉬워하는 분이 많더라.
킴벌리: “지금이 딱 좋은 시기다. NIST 동료들이 남편의 연구를 이어가고 있으니 한국 과학자들이 연락해주시면 좋겠다(웃음).”
▲삼성호암상 수상자들이 31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삼성호암상 시상식’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에서 둘째가 과학상 물리·수학부문 수상자인 故 남세우 박사의 아내 킴벌리 브릭먼 미 국립표준기술연구소 연구원이다. 이날 남편을 대신해 수상했다. /호암재단 제공
◇ 반도체 代父 김충기 교수의 조카
-남세우 박사와는 어떻게 만나 결혼했나..
킴벌리: “둘 다 NIST 연구원이었지만 남편은 콜로라도 연구소에서, 나는 워싱턴 D.C 연구소에서 일했기 때문에 15년 동안은 서로 모르고 지냈다. 그러다 오바마 대통령 시절 내가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자문실에 파견을 나갔는데 후임으로 온 사람이 세우였다. 인수인계를 위해 자료를 전달하고 설명하다 보니 일과 후에도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전혀 다른 성격인데도 잘 맞았다.”
앨런: “둘 다 고집이 세다(웃음).”
-어떤 남편이었나?
킴벌리: “에너지가 넘쳤다. 요리하는 걸 무척 좋아했고, 산악 자전거, 스노보드를 즐기는 스포츠광이었다. 휴가지에서도 가만히 앉아 있질 않았다. 심심할 틈 없이 사는 남편의 모습을 좋아했던 것 같다.”
-어떤 요리를 즐겨 만들었는지.
킴벌리: “고급 요리부터 핫도그 같은 길거리 간식까지 다 만들었다. 연구소가 있는 볼더(콜로라도)는 작은 도시라 한국 식당이 없어서 남편이 직접 불고기, 갈비찜을 만들었다. 여름에 만들어준 팥빙수는 정말 맛있었다.”
-부친이 고체물리학계 권위자인 남상부 전 라이트대 교수라던데.
킴벌리: “은퇴하셨지만 지금도 연구하고 논문을 쓰신다. 한국전쟁 후 미국으로 유학 왔다가 결혼한 부모님은 오하이오주 데이턴에 살았는데 어머님이 만삭의 몸으로 잠시 귀국했다가 세우를 낳게 돼 ‘서울 출생’이 됐단다(웃음). 여동생도 MIT를 나왔다.”
-외삼촌인 김충기 전 카이스트 교수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기틀을 닦은 주역이다.
킴벌리: “남편이 삼촌 얘기를 많이 했다. 물리학자인 아버지와 함께 세우가 물리학에 흥미를 느끼고 파고들게 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이다. 그분의 자녀들과 수상 소식을 공유하며 함께 기뻐했다.”
◇ “동료들에게 수상의 功 돌렸을 것
-14개월간 뇌암과 투병하다 떠난 남 박사의 마지막 말은 무엇이었나.
킴벌리: “암 진단은 받았지만 비관적인 상태는 아니어서 풀타임으로 일하며 치료를 받았는데, 작년 12월 갑자기 안 좋아지면서 1월에…. 너무도 급작스러운 상황이라 마지막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앨런: “지난여름 만났을 때 세우는 말했다. 나는 꼭 이겨낼 거라고. 세우의 예측은 늘 맞았기 때문에 당연히 이겨낼 거라고 믿었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장례식 때 국경을 초월해 과학자들이 와서 추모했다고 하더라.
킴벌리: “각자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남편을 만났을 텐데도 다들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라. 유머가 넘치고, 고집이 세고, 겸손하며, 뛰어난 과학자였다고.”
앨런: “그는 자기 업적을 동료들과 나누려 지독히도 애를 썼다. 보통 상은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데 세우는 동료들 이름도 넣어달라고 주최 측과 싸웠다. 자기가 받은 상을 본떠 여러 개를 만든 뒤 동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웃음).”
킴벌리: “남편은 자신의 모든 업적을 팀의 공으로 돌렸다. 남편이 살아 있었어도 한국에 다같이 왔을 것이다(웃음).”
-남세우 박사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는지.
크리스탄: “코어(핵심) 기술을 발견한 과학자로, 창의적이고 열정적이고 헌신적이었던 과학자로.”
황지성: “백범 김구가 ‘눈길을 걸어갈 때 똑바로 걸어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라는 시를 애송하셨다. 세우는 최선을 다해 과학의 길을 걸었고 그 뒤를 수많은 한국계 과학자가 걷게 될 것이다.”
-시상식인 오늘, 남편에게 인사를 건넨다면?
킴벌리: “자랑스럽고 영광스럽다. 당신이 이뤄낸 것이 정말 아름답다.”
☞남세우
1970년 서울 출생. 미국 MIT에서 물리학 학사, 전기공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스탠퍼드대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올해 1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25년 동안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 종신연구원으로, 오바마 대통령의 백악관에서 과학기술정책분석 자문으로 일했다. 2017년 ‘존 스튜어트 벨 상’을 수상했다.
조선일보 김윤덕 기자
06-11 가덕도 공항 부지 공사부터 유찰, 2029년 개항은 백일몽
부산 가덕도 신공항 건설을 둘러싼 졸속 논란이 첫 삽도 뜨기 전에 재점화했다. 당초 개항 목표 시점이 2035년 6월이었지만, 국토교통부는 ‘2030 부산 엑스포’ 유치 명분으로 2029년 12월로 5년 이상 앞당겼다. 이 때문에 지난 5일 마감된 활주로·방파제 등 공항 부지 건설공사 입찰부터 표류하고 있다. 10조5300억 원 규모의 초대형 공사인데도 건설업체가 한 곳도 참여하지 않아 유찰됐다. 무리한 일정에 뒤탈이 우려되자 건설업체들이 등을 돌린 결과다. 국토부는 오는 24일까지 재입찰 신청을 받지만 조건이 그대로인 한 비슷한 양상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예고된 파행이라는 게 더 심각한 문제다. 예정대로 개항하려면 설계는 10개월 이내, 공사는 5년 이내에 마쳐야 한다. 국토부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해상 매립을 줄이려고 당초 해상에 짓기로 했던 공항을 육·해상에 걸쳐 건설하는 것으로 바꿨다. 부동침하(지반이 불균등하게 내려앉는 현상) 우려로 2022년에 이미 배제됐던 방식이다. 사업비가 20분의 1인 소규모 울릉공항조차 개항에 5년, 인천국제공항은 1단계 건설에만 9년이 걸렸다. 정상적 건설업체라면 아무리 일감이 부족해도 발을 빼는 게 당연하다.
가덕도 신공항은 4류 포퓰리즘 정치의 산물이다. 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동남권 신공항 검토로 촉발됐지만 2016년 김해국제공항 확장으로 정리됐는데, 2021년 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여야가 야합해 억지 특별법으로 부활시켰다. 개항을 앞당긴 빌미였던 부산 엑스포도 물 건너간 상황이다. 5년 뒤 개항은 꿈도 못 꿀 일이다. 개항 시점은 물론 공항 타당성 자체까지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할 때다. 부산 지역 반발이 예상되지만, 예산을 낭비하며 안전까지 위협받는 공항을 졸속으로 만드는 것보다 낫다.
문화일보 사설
06.12 건설사도 외면한 가덕도 공항 공사, 재앙 될 수 있다

▲지난 5일 마감된 공사비 10조원 규모의 가덕도 신공항의 '공항 부지 건설 입찰'에 건설사들이 단 한 곳도 응찰하지 않았다
2030년 부산 엑스포에 앞서 2029년 조기 개항하겠다며 공사 일정을 무리하게 앞당긴 가덕도 신공항이 첫 단추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지난 5일 마감된 활주로·방파제 등 공항 부지 조성 공사 입찰에 건설업체가 단 한 곳도 응찰하지 않았다. 10조5300억원 규모의 초대형 공사를 건설사들이 외면하는 예상 밖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무리한 일정과 난공사에 따른 위험 부담이 너무 커 건설사들이 등을 돌린 탓이다.
가덕도 신공항은 애초 2035년 개항으로 추진되다 부산 엑스포 유치전 과정에서 2029년 12월로 일정이 5년 이상 앞당겨졌다. 여기가 무지몽매한 북한인가. 어떻게 10년 걸리는 공사가 5년으로 단축되나. 인천공항의 경우 1단계 건설에만 9년이 걸렸다. 국토부는 공사 기간 단축을 위해 공항 전체를 해상에 지으려던 계획을 수정, 산을 깎아 육·해상에 걸쳐 짓는 것으로 변경하기도 했다. 지반이 불균등하게 내려앉는 부등 침하 가능성 탓에 계획 검토 단계에서 배제됐던 방식을 되살린 것이다. 모든 것이 상식 밖이고 후진적이다.
가덕도 신공항 계획은 처음 등장할 때부터 정치 포퓰리즘의 산물이었다. 2016년 동남권 신공항 입지 선정 작업을 했던 프랑스 전문 기업은 “태풍·해일에 취약하고 바다를 메워야 해 지반까지 약하다”면서 가덕도 공항 후보지에 대해 안전성·경제성 모두 낙제점을 주었다. 그래서 ‘김해공항 확장’으로 결론이 났지만, 부산시장 보궐 선거를 앞두고 문재인 정권이 선거용 카드로 꺼내들었고, 표를 의식한 국민의힘도 동조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부적합 곳에 무리하게 공항을 지으려다 보니 예비 타당성 조사나 사업비 추산 과정을 모조리 생략한 채 ‘무조건 지으라’는 특별법까지 만들었다. 각 당의 대선·총선 공약으로 대못이 박힌 가덕도 신공항은 부산 엑스포 변수로 완공 시점까지 5년 앞당겨졌다.
부산 엑스포 유치는 실패했다. 조기 완공해야 할 이유도 없어진 셈이다. 부산·울산·경남 지역민 대상의 한 여론조사에선 54%가 ‘가덕도 특별법’에 대해 ‘잘못된 일’이라고 답했다. 지역민들도 문제점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이제라도 조기 완공에 대한 집착은 버리고 가덕도 신공항의 경제성, 안전성을 확보하는 방안에 대한 전면 재검토에 들어가야 한다. 만약 무리하게 바다를 메워 공항을 지었다가 지반 침하가 일어나면 국가적 재앙이다.
조선일보 사설
06-12 부안 규모 4.8 지진… 호남지역 역대 최강

▲지진의 상흔 전북 부안군에서 규모 4.8의 지진이 발생한 12일 오전 부안군 흥산마을회관 인근 주택에서 집주인이 지진으로 인해 갈라진 벽을 살펴보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부안군 행안면의 한 편의점 진열대에서 음료수 박스들이 바닥으로 쏟아진 모습. 연합뉴스
포항 이후 내륙 최대 규모
인근 영광원전 피해 없어
정철순 기자, 부안=박팔령 기자

전북 부안군 남남서쪽 4㎞ 지역에서 12일 오전 8시 26분 49초쯤 규모 4.8 지진이 발생했다. 2017년 11월 15일 포항 지역에서 발생한 규모 5.4 이후 내륙 발생 지진으로는 가장 강했다. 호남 지역 지진 중에서도 역대 가장 강했다.
기상청은 이날 오전 전북 부안군 행안면 진동리(진앙 북위 35.70도, 동경 126.71도) 일대에서 깊이 8㎞, 규모 4.8의 지진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기상청은 당초 지진파 중 속도가 빠른 P파를 자동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지진 규모를 4.7로 추정했다가 추가 분석을 거쳐 4.8로 조정했다.
기상청에 따르면 전북 지역 ‘계기 진도(지진으로 인한 진동의 세기)’는 5로 ‘거의 모든 사람이 느끼고 그릇·창문이 깨지는 정도’였으며 전남 지역 계기 진도는 4였다. 또한 호남 지역은 물론 수도권, 충청, 영남에서도 흔들림이 있었다. 관계 당국은 호남 지역에서 이 같은 규모의 지진이 발생한 것을 이례적으로 보고 있다.
국내에서 지진 관측이 체계화된 1978년 이후 이번 지진의 진앙반경 80㎞ 이내에선 규모 3.0 이상 지진이 약 28차례 있었지만, 지금까지 최대 규모는 3.9(2015년 12월 22일·전북 익산 지역)였다.
국내에서 규모 4.5 이상 지진이 발생한 것은 지난해 5월 15일 강원 동해시 북동쪽 52㎞ 해역에서 4.5 지진이 발생하고 약 1년여 만이다. 소방청에 따르면 이날 오전 10시 기준으로 지진 발생지인 전북 77건 등 전국에서 모두 290건의 지진 감지 신고가 접수됐다. 전북과 멀리 떨어진 서울과 경기, 강원에서도 진동이 감지됐다. 산림청은 전북 지역에 산사태 경계경보를 발령했다. 인근 영광군 한빛원전은 특별한 피해 없이 정상 가동 중이다. 정부는 이번 지진과 관련, 오전 8시 35분부로 피해상황 파악 및 필요 시 긴급조치 등을 위해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비상 1단계를 가동했으며, 지진 위기경보 ‘경계’ 단계를 발령한다고 밝혔다.
문화일보
06-12 권익위, 정부지원금 횡령 협회 적발… 부정수급 127억 환수
직원 허위 등록·물품비 부풀려
환경부 고위공무원 출신도 연루
국민권익위원회는 정부지원금을 횡령한 정부 지원 협회와 업체를 적발해 부당하게 지급된 예산 약 127억 원을 환수하고 관련자를 중징계했다고 12일 밝혔다.
환경부로부터 화학물질 관리 업무를 위탁받아 수행하는 한국화학물질관리협회는 2016년부터 2022년까지 약 39억 원의 정부지원금을 부당하게 편취했다. 이 협회는 2016∼2020년 소속 직원에게 인건비를 과다하게 지급한 뒤, 본래 급여를 초과한 금액은 별도 계좌로 돌려받는 수법으로 약 27억 원을 빼돌렸다. 직원들의 급여명세서에 ‘추가 지급된 돈을 되돌려 달라’는 안내 문구와 함께 계좌번호가 버젓이 있었음에도 감독기관인 환경부는 알지 못했다. 또 이 협회는 2018부터 2022년까지 4년간 직원 64명을 사업에 참여하는 것처럼 허위 등록해 인건비 약 11억8000만 원을 부당 수급했다. 심지어 인건비 횡령에 연루된 상근 부회장 A 씨는 감독 기관인 환경부의 고위공무원 출신이었다. 협회는 A 씨를 비롯한 관련자 6명을 징계했다.
B 업체는 물품 가격을 부풀리거나 실제 구입하지 않은 물품을 구매한 것처럼 허위 세금계산서를 발급받는 방식으로 약 34억 원의 연구개발비를 횡령했다. 이를 주도한 B 업체 담당자는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아울러 권익위는 부정수급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바우처 서비스’ 분야의 이용 실태를 점검했다. 그 결과, 2020년 이후 지방자치단체에서 적발한 부정수급 약 2만8000건 중 122건에서 제재부가금(222억 원)이 부과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예컨대 전남 화순 지역에 있는 D 자립생활센터 소속 장애인 활동지원사들은 이용자의 카드를 소지·보관하며, 2021년 1월부터 12월까지 서비스 제공 없이 4억9000여만 원을 부정하게 수급했지만 제재부가금이 부과되지 않았다.
권승현 기자 ktop@munhwa.com
06-12 “의사들 밥그릇 챙기기에 중증환자 죽음으로 내모나”

▲“휴진 철회하라” 12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정문에서 한국중증질환연합회가 서울대 의대 교수 전면 휴진 철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연 가운데 한 췌장암 환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윤성호 기자
■ 빅5 병원 전면휴진에 비판 쇄도
중증질환연합회 규탄 기자회견
“국민에 대한 책임 내팽개친 파업”
휴진에 진료 변경 담당 직원들
“의대 교수들 대신 ‘욕받이’ 돼”
“사정이 생겨 환자가 먼저 진료를 미루면 사실상 진료를 포기해야 할 만큼 힘든 상황입니다. 반면 의사들은 너무 쉽게 휴진을 결정하고 통보합니다. 환자들은 정말 ‘을’이라는 생각이 들어 속상합니다.”(환자 보호자 A 씨)
서울대병원에 이어 다른 ‘빅5’ 병원도 전면 휴진에 동참하면서 ‘패닉’에 빠진 환자와 보호자들이 의업 본질을 외면한 의대 교수들의 행위에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주요 병원 콜센터는 진료 변경과 수술 연기·취소 여부를 문의하려는 환자 전화가 쇄도하고 있다. 빅5 병원 교수들과 대한의사협회(의협)의 총파업은 가까스로 버티는 비상진료체계를 무너뜨리는 직격탄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12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서 만난 췌장암 환자 B 씨는 “6차 항암치료 후 두세 번 검사가 더 필요한데 2주 간격이던 진료가 갑자기 4주로 늦춰졌다”며 “환자들이 왜 계속 불안에 떨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만난 식도암 환자 C 씨는 “의료안전망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는 서울대병원이 파업한다면 나 같은 중증환자들은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빅5 병원에 다니는 임신부 중 일부는 이달 중순 이후 출산예정일인 경우 지역 개인병원으로 옮기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한국중증질환연합회는 이날 오전 서울대병원에서 집단휴진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연합회는 성명서를 내고 “서울대 의대 교수는 단순 돈벌이하는 일반 직업인이 아니며 국민 세금으로 운영하는 국립대병원 교수”라며 “국민에 대한 책임과 의무라는 대의를 내팽개치는 어처구니없는 집단휴진을 강행하려는데 밥그릇 챙기기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고 비판했다. 이어 “중증질환자들이 하루하루 죽음의 공포에서 연명해가던 희망의 끈을 놓아야 할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다”며 “전면 휴진과 맞물려 중증질환자들은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밝혔다.
주요 병원 콜센터에는 환자 문의가 줄을 잇고 있다. 주요 병원에 예약한 환자들에겐 전날부터 진료 취소 문자가 오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대병원 노조에 따르면 서울대병원 본원의 경우 하루 진료받는 환자 수가 1만 명이 넘는다. 분당서울대병원도 휴진과가 늘어나고 있다. 분당서울대병원 노조 관계자는 “지난번 휴진 때 환자 2000명 예약을 변경하는데 해결되지 못한 누적 콜 기록이 1만5000건이 넘었던 적도 있다”고 말했다.
간호사 등 병원 내 다른 직역의 불만도 분출하고 있다. 세브란스병원 간호사 E 씨는 “이번 사태 시작부터 지금까지 진료 연기, 진료 상담 등 불안에 떠는 환자들과 피부를 맞대고 소통하는 건 간호사들”이라며 “의대 교수들은 도망가면 절대로 안 된다”고 말했다. 분당서울대병원 노조 관계자는 “파업 이후로 많게는 5번까지 환자 수술을 옮긴 경우도 있다”며 “이 과정에서 간호사, 원무팀 직원 등 병원 구성원들이 감정노동에 시달리는데 환자에게 (의대 교수 대신) ‘욕받이’가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국 40개 의대 교수 단체인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는 이날 오후 의협의 전면 휴진 동참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정기총회를 연다. 울산의대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도 이날 오후까지 소속 교수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해 18일 전면 휴진 외 추가로 휴진할지를 결정하기로 했다.
문화일보 권도경·유민우·김린아·전수한 기자
06.14 그래도 본분 지키는 의사들이 주는 위안

▲지난 12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서울대병원 노동조합 게시판에 '히포크라테스의 통곡'이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어 있다. 오는 17일 예정된 서울대병원 교수들의 전체 휴진 방침에 따라 분당서울대병원 또한 일부 진료과가 휴진할 것으로 알려지자, 이 병원 직원 등으로 이뤄진 노조가 결정을 규탄하고 나선 것이다. /연합뉴스
의사협회가 오는 18일 전면 휴진하고 총궐기대회를 한다고 했다. 의협은 정부에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중단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서울대 의대 교수 비대위는 17일부터, 연세대 의대 교수들은 27일부터 무기한 집단 휴진을 결의하는 등 의대 교수들의 파업도 확산하고 있다. 이 같은 의사들의 파업에 환자 단체들은 “의사들은 우리 생명을 담보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느냐. 대체 무엇이 생명을 뛰어넘는 것인가”라고 했다.
의협은 내년 의대 증원 절차를 중단하라고 요구하지만 이미 대학별 정원을 확정해 입시 요강까지 발표했다.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며 파업을 하면 대책이 없다. 정부가 불공정 논란을 감수하면서도 복귀하는 전공의에겐 어떤 불이익도 없을 것이라고 거듭 약속했는데도 이미 이뤄진 행정 처분 자체를 취소하라고 한다. 이 경우 법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한다. 지금 의사들의 모습은 환자는 안중에도 없이 자신들 집단 이익을 위해 못 할 일이 없다는 식으로 비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태어나는 아기를 받고 임산부를 진료하는 전국 분만 병·의원 140여 곳은 의협 전면 휴진 날에도 정상 진료할 것이라고 했다. 전국 130여 개 아동병원도 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산부인과와 소아청소년과는 다른 어떤 진료 과목보다도 정부의 낮은 수가 정책 등에 불만이 컸던 진료과다. 그럼에도 환자를 외면하지 못하는 이런 의사들의 헌신을 보며 그래도 위안을 얻는다.
의사는 자동차나 배를 만들고 화물을 나르는 근로자가 아니다.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사람이다. 다른 근로자들처럼 ‘무엇을 해 달라’고 파업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뜻이다. 의대 증원이 얼마나 큰 문제라고 아픈 사람들을 투쟁 도구로 이용하나. 이것은 인간으로서 기본 윤리에 관한 문제다. 국민이 분노하고 혀를 찰 수밖에 없다. 한국 의료계는 오랜 기간 국민의 신뢰와 존경을 쌓아왔다. 어떤 직업보다 명예도 얻었다. 그런데 그 소중한 자산들을 스스로 날리려 하고 있다. 의대 증원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큰 것을 잃는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
06-14 공정위 거액 과징금에 쿠팡 투자 축소 겁박, 부적절하다
공정거래위원회가 13일 국내 최대 온라인 쇼핑몰인 쿠팡에 유통업체로는 최대인 1400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자체 브랜드(PB) 상품과 직매입 상품의 판매를 늘리려고 검색 순위를 조작하고, 임직원에게 호의적인 제품 후기를 남기게 했다는 것이다. 공정위는 이를 통해 쿠팡의 쇼핑몰에 입점한 업체와 소비자가 피해를 봤다며, 공정거래법 위반(위계에 의한 고객 유인) 혐의로 과징금 부과와 함께 쿠팡 법인과 PB상품 자회사(CPLB)를 검찰에 고발키로 했다. 이에 대해 쿠팡은 유례없는 ‘상품진열 규제’라는 논리로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러면서 무료 배송을 위한 3조 원의 물류 투자와 로켓배송 상품 구매를 위한 22조 원의 투자가 중단될 수 있다고 밝혔다. 오는 20일 예정이던 부산 첨단물류센터 기공식도 취소했다고 한다.
쿠팡의 반발은 이해할 수 있다. 이번 과징금은 지난해 영업이익(6174억 원)의 23%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2010년 설립돼 지난해에야 흑자를 낸 처지이니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알리익스프레스·테무 등 중국 이커머스의 공세에 대한 대응도 발등의 불인 상황이다. 그러나 투자 취소 운운하며 겁박하는 것은 대단히 부적절하다. 기업의 투자는 공정위가 아니라, 자신의 성장과 소비자를 위한 것이다. 로켓 배송으로 유통업 혁신을 선도해 정상업체로 부상한 쿠팡이 스스로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격이다.
편향적인 처벌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구글·아마존 역시 자사 상품 우대와 경쟁업체 차별을 이유로 EU와 미국 당국으로부터 대규모 과징금 등 처벌을 받았던 터다. 국내에서도 2020년 네이버가 공정위로부터 267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쿠팡으로선 억울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법원에서 재판을 통해 소명하고 다투면 된다. 정부와 국민을 향해 으름장을 놓는 식의 대응은 옳지 않다. 쿠팡의 상징인 혁신과도 멀다. 물론 공정위도 플랫폼규제법 불발, 김범석 이사회의장의 동일인(총수) 제외에 괘씸죄를 물으려는 일말의 의도라도 있어선 안 된다.
문화일보 사설
06.15 쿠팡의 착각

▲서울 시내 주차된 쿠팡 배송 트럭/연합뉴스
일종의 협박인가. “로켓배송(익일배송) 서비스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쿠팡의 발표를 듣고 처음 든 생각이다. 13일 공정거래위원회가 ‘1400억원 과징금’을 부과한다고 한 직후, 쿠팡의 대응은 로켓배송 중단 검토였다.
공정위는 쿠팡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품을 많이 팔기 위해 소비자를 속였다고 판단했다. ‘쿠팡 랭킹’ 검색 순위 알고리즘을 조작하고 임직원 2000여 명을 동원해 상품 후기를 쓰게 했다는 것이다. 유통업체로서는 사상 최대의 과징금이었다. 쿠팡은 여기에 정면으로 반발한 것이다. ‘이런 것까지 제재한다면, 우리도 고객들에게 더 이상 편의를 베풀기 어렵다’는 엄포였다.
그렇다면 쿠팡에 묻고 싶다. 로켓배송은 ‘시혜(施惠)’이고 ‘선물’인가. 현실과 동떨어진 쿠팡의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로켓배송은 영리 업체 쿠팡이 고객의 관심을 끌기 위해 도입한 매력적인 장치일 뿐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료 봉사라고 착각할지 모르지만, 당연히 공짜도 아니다. 쿠팡 회원은 로켓배송을 이용하기 위해 월 4990원의 회비를 내야 한다. 그나마 8월부터는 가격 인상 때문에 60% 더 비싼 7890원이다. 무료도 아닐뿐더러, 요금도 만만치 않다. 단지 그 편리함을 활용하기 위해 사용할 뿐이다.
쿠팡이 당국으로부터 거액의 과징금을 맞은 이유는 고객을 속인 혐의가 인정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응책이 고객이 가장 편리해하는 서비스를 중단하겠다는 위협이라고? 고객 입장에서는 속은 것도 억울한데 협박까지 받는 셈이다.
쿠팡은 현재 업계 점유율 1위다. 1400만명 넘는 회원이 있다. 쿠팡의 엄포는 이번 과징금 결정 전부터 시작됐다. 지난 4월 한기정 공정위원장이 방송 대담에서 쿠팡의 임직원 후기 작성 등 혐의를 언급하자, 이틀 뒤 보도자료를 내고 공개적으로 ‘공정위가 틀렸다’고 주장했다. 공정위의 조사 결과는 나왔지만, 아직 제재 여부가 결정되기 전이었다. 비유하자면 법원 판결도 나기 전에 “판사가 틀렸다”고 주장한 꼴이었다. 당시 쿠팡 안팎으로 ‘과연 이렇게 대응해도 되느냐’는 의문이 제기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비상식적인 대응은 계속됐다.
쿠팡 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차라리 말뿐 아니라 로켓배송을 실제로 중단해 보라고 요청하고 싶다. 그리고 지켜보자. 1400만 고객 중 과연 얼마나 쿠팡에 남아있을지 말이다.
이번 공정위 과징금은 그간 쿠팡이 일궈온 성과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반칙하지 말라”는 심판의 강한 경고다. 쿠팡 입장에서는 억울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당연히 불복할 수 있고, 이의신청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심판이나 관중을 함부로 을러대도 괜찮다고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쿠팡의 ‘기업가 정신’이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기를 희망한다.
조선일보 권순완 기자
06.15 어떤 이유든 의사가 환자 떠날 권리는 없다
의사협회 이어 서울대 병원 등 집단 휴진 예고
정부는 “엄정 대응”…환자단체는 “절망적 소식”
정치권 중재 주목, 파국 피할 돌파구 모색해야
대한의사협회가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에 반발하며 집단휴진을 결의하면서 환자들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 의협은 의대 증원의 원점 재검토 등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오는 18일 집단휴진을 하고 총궐기대회를 열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지난 2월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확대 발표로 촉발된 의료계와 정부의 갈등이 이미 4개월을 넘겼지만,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 답답한 상황이다. 일방적으로 정책을 발표한 정부도 잘못이 있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환자를 외면한 채 거리로 나서겠다고 선언한 의사들도 정당화될 수 없다. 환자의 건강을 볼모로 한 의사들의 극한투쟁은 명분도 없을 뿐 아니라 실리도 얻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서울대를 비롯한 주요 대학병원의 무기한 휴진 움직임이다. 서울대 의대 교수들은 오는 17일부터, 연세대 의대 교수들은 오는 27일부터 각각 무기한으로 진료를 하지 않겠다고 예고했다. 서울대 의대 비상대책위원회는 “중증·희귀질환 환자의 진료는 계속하겠다”고 했지만, 일반 외래 진료에는 상당한 차질이 예상된다. 다른 의대 교수들도 내부 설문조사와 총회 등을 통해 의견을 모으는 중이어서 무기한 휴진을 결의하는 대학병원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정부는 의사들의 집단휴진을 의료법에서 금지한 진료 거부로 보고 단호하게 대처하기로 했다. 전병왕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언론 브리핑에서 “정부는 비상진료체계를 굳건히 유지하면서 불법행위에는 엄정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마치 마주 보고 달리는 기차처럼 의료계와 정부가 강 대 강으로 부딪치는 모습이다. 가장 속이 타들어 가는 건 환자들이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등 92개 환자단체는 공동 성명서에서 “어떻게든 버티며 적응했던 환자들에게 의료진의 연이은 집단휴진 결의는 절망적인 소식”이라고 호소했다.
의사들은 환자들의 호소를 받아들여 집단휴진 계획을 철회해야 마땅하다. 의료계가 주장하는 대로 정부의 정책 추진이 일방적이고 과학적 근거가 없다 하더라도 그게 의사들이 환자의 곁을 떠나는 이유가 될 순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이 의사의 사명아닌가. 의사들이 환자의 신뢰를 저버리면 결국 환자의 불신을 자초하게 된다. 설령 정부에 대한 강한 불만이 있다 하더라도 의사들이 환자들의 간절한 호소를 무시할 권리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분만병의원협회와 아동병원협회가 의협의 집단휴진에 참여하지 않고 정상 진료하기로 결정한 것은 다행스럽다. 최용재 아동병원협회장은 “정부가 잘못한 건 맞다”면서도 “아이들 상황 때문에 휴진을 못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정책을 비판할 때는 비판하더라도 환자 진료에는 최선을 다하는 게 의사로서 마땅한 도리일 것이다.
이제라도 의료계와 정부는 대화의 테이블에 마주 앉아 돌파구를 모색해야 한다. 의료계가 이대로 집단휴진을 강행한다면 민심과 더욱 멀어질 뿐이다. 정부도 끝까지 대화의 노력을 포기해선 안 된다. 정치권의 중재 노력도 주목된다. 인요한 국민의힘 의료개혁특별위원장은 어제 임현택 의협 회장을 만나 의정 갈등의 중재 역할을 맡겠다는 뜻을 밝혔다. 임 회장도 “이해의 폭을 넓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며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그동안 쌓인 의료계와 정부의 불신이 단숨에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무슨 일이든 시작이 중요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의료계와 정부가 진정으로 한국 의료의 미래를 걱정한다면 건설적 대화를 통해 갈등 해소의 실마리를 찾아 나가야 한다.
중앙일보
06-17 서울대병원 교수들의 ‘진료 파업’은 反생명 反국민
서울대병원 교수들이 17일 ‘무기한 집단 휴진’에 돌입함으로써 사실상 진료 파업에 앞장서는 것은 참담한 일이다. 18일로 예정된 대한의사협회의 집단 휴진을 부추기는 셈도 됐다. 서울대 의료진에게 자신의 생명을 맡기다시피 한 환자들은 물론, 서울대가 2011년 국립대학법인으로 존재 형태가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엄청난 혈세 지원(올 출연금 6129억 원)을 받는다는 점에서, 국민을 정면으로 배신하는 행태도 되기 때문이다. 휴진 의사들은 유사시 병원을 차리거나 다른 병원으로 옮기면 더 많은 돈을 벌지도 모른다. 그런 직업 선택의 자유는 보장돼야 하겠지만, 의료 관련법 위반 여부는 물론 반(反)생명·반국민 행위에 대한 사법적 행정적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서울대 의대·병원 비상대책위원회에 따르면, 산하 4개 병원인 서울대병원·분당서울대병원·보라매병원·강남센터의 진료 교수 967명 중 54.7%(529명)가 휴진에 참여키로 했다. 비대위 측은 17∼22일 예정된 외래 진료 휴진과 축소 및 정규 수술·검사 연기라면서 “진료를 미뤄도 큰 영향을 받지 않는 환자의 외래 진료와 수술을 중단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루하루가 힘겹다는 환자들 절규를 들어봤는가. 중증 질환자들에게는 ‘칼자루를 잡은 슈퍼 갑’ 행태도 넘어 인성 파탄으로까지 여겨진다.
서울대병원 교수들 행태는 전공의 이탈과는 차원이 다르다. 전공의에 대한 행정처분의 소급 철회 요청은 치외법권 요구와 다름없다. 서울대병원 설치법은 국유재산의 무상 양여, 출연금 지급, 적자 보조 등을 규정하고 있다. 진료 파업에 앞장선다면, 이런 지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 정부는 진료 거부 장기화로 병원에 손실이 발생할 경우, 구상권 청구 가능성을 언급했고, 환자 단체는 고소·고발도 불사한다는 입장이다. 의사로서의 윤리·신뢰를 저버린 데 대한 책임을 끝까지 묻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이르렀다.
문화일보 사설
06-17 환자 볼모로 한 의료 거부 책임 물을 때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
서울대 의대 산하 서울대병원·분당서울대병원·보라매병원 등 4개 병원 교수들이 17일부터 휴진(파업)을 시작한 데 이어 대한의사협회의 18일 휴진도 예고돼 있어 의·정 갈등으로 인한 국민의 불안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의과대학 정원 확대 정책에 대한 반발로 촉발된 이번 의료대란은 전공의들의 병원 이탈과 의대생들의 집단 휴학이 이어지면서 파업에 이르렀다. 동네 의원들의 참여가 관건인 가운데 생명의 위협을 받는 환자와 가족들은 발만 동동 구른다.
정부 정책에 반발하는 이익집단은 늘 있고, 파업을 통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려는 일도 흔하다. 그러나 의사의 전면 파업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들은 보통의 직업인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을 지키는 성스러운 일을 하기 때문이다.
국민은 적정 의사 수가 몇 명인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의사 수가 부족하다는 것은 피부로 알고 있다.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는 필수 분야보다 돈 벌기 쉬운 분야로 의료 인력이 몰리는 것을 개선해야 하는 것도, 전 국민이 동등한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의료 체계를 개선해야 하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의사들이 의대 학생 수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에는 이해도, 동의도 할 수 없다. 의사들의 의견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니 그 입장을 듣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결정권은 국민에게 있어야 하고, 국민을 대신해 정부가 의사를 비롯한 전문가들과 협의를 통해 결정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의료계가 의대 정원 확대에 반대할 수는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심지어 대한의사협회장은 지금보다 훨씬 더 정원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왜 줄여야 하는지, 줄인다면 환자의 생명권과 의료 서비스의 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지역 환자들이 서울에 몰려드는 현실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등 수많은 의문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주요 대학병원의 교수들도 마찬가지다. 반대하는 것은 알겠는데, 그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작금의 의료 파업은 환자의 생명을 볼모로 의사들의 밥그릇을 지키겠다는 이기적인 행위로밖에 안 보인다.
가족 중에 의사가 있는 사람들은 정부의 일방적 증원 결정과 2000명이라는 숫자의 자의성, 전공의 사직서와 의대생의 휴학계를 받지 말라는 조치의 부당성을 성토한다. 직업 선택의 자유를 억압하는 위헌적 발상이라며 거품을 물고 정부를 비난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그들에게 물어봐도 왜 의사 수를 현 수준에서 유지하거나 줄여야 하는지, 필수 분야의 의사 부족과 대학병원에서 3분 진찰받기 위해 몇 달을 기다려야 하는 환자의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속 시원히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다.
그냥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세상이 아니다. 국민의 건강과 생명권을 담보로 벌이는 의사들의 파업에 대한 국민의 증오와 불신, 또 혹시 있을지도 모를 생명을 잃는 환자들에 대한 책임은 휴진 참여 의사들의 몫이다. 국민은 밥그릇만 챙기는 의사보다 인간적이고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진정한 의사를 원한다. 그런 점에서 의사협회의 지침에 상관없이 파업에 동참하지 않고 계속 병원을 지키기로 한 분만·아동·전문 병원 의사들의 의로운 결정에 깊은 존경을 표한다.

문화일보
06-17 ‘의사불패’는 깨져야 한다
권도경 사회부 차장
서울 마포구 동교동에는 ‘야간분만’ 간판을 올린 산부인과가 있다. 원장은 산과(産科)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자연분만’ 원칙을 지키고 있다. 수가가 다섯 배 높은 제왕절개는 산모 회복과 신생아 면역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권하지 않는다. 산모가 비싼 비급여진료를 원해도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먼저 설득한다. 의사가 양심을 지키면 손해를 보는 게 요즘 세태다. 더군다나 저출생으로 분만 건수는 급감했다. 원장은 의사 생활 30년 만에 빚만 7억 원을 떠안았다. 풍족한 환경에서도 지켜지기 힘든 게 신념이다. 그는 왜 끝내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걸까. 답은 이랬다. “산모를 쉽게 속일 수 있죠.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을 다 속여도 나 자신은 알잖아요. 내가 환자에게 해를 끼쳤다는 사실을요.”
그는 지금도 24시간 내내 병원에 머물고 있다. 다른 분만병원들도 이번 집단 휴진에 동참하지 않는다. 아동병원 130여 곳도 정상 진료한다. 산부인과와 소아과는 낮은 수가로 정부 정책에 가장 불만이 많은 과다. 심·뇌혈관질환, 화상, 신체 절단 등 골든타임이 중요한 환자들이 찾는 전문병원 100여 곳도 문을 닫지 않는다. 전공의들이 떠난 대학병원이 넉 달째 치료하지 못한 환자들을 받아낸 곳이다. 설사 의대 증원을 반대한다고 해도 환자에게 고통과 아픔을 줄 수 없다는 소명의식 때문이다.
국민 혈세가 투입되는 서울대병원은 무기한 총파업에 들어갔다. 병원장 불허 방침을 어긴 불법 휴진이다. 이들은 국민건강을 잘 돌보기 위해 전면 휴진을 결정했다고 한다. 올바른 의료체계를 세우겠다면서 의료 공백을 불러왔다. 모두 앞뒤가 맞지 않는다. 강희경 서울대의대 비상대책위원장은 휴진을 ‘연휴’에 빗댔다. 연휴에 환자들이 더 위험해지진 않는다는 논리다. 시간의 무게는 다르다. 휴진해도 지장 없는 교수와 시한부 삶을 사는 중증질환자의 시간은 달리 흘러간다. 암 전이가 연휴라고 멈출 리 없다. 의대생 학부모들까지 나섰다. 서울대의대 교수들에게 환자가 불편해도 강력한 행동을 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불편이라고 말하기엔 단어가 너무 가볍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환자들이다. 미래 환자가 오늘의 환자보다 소중하다고도 했다. 미래 이익이 중하다는 욕심을 감춘 궤변이다. 사람 목숨과 돈을 같은 저울에 올린 셈이다.
‘환자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마라(Do no harm).’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나오는 구절이다. 의사 직업윤리의 근간이다. 한 췌장암 환자는 서울대병원 앞에서 “의대 교수들은 살릴 수 있는 환자들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며 “우리 생명을 담보로 뭘 얻으려는 거냐”고 울부짖었다. 의대 교수들 명분은 퇴색됐다. 의대 증원 백지화만 외칠 때는 지났다. 정부는 복귀하는 전공의에겐 면죄부도 줬다. 병원을 불법이탈한 전공의들 면책을 요구하면서 교수들이 진료를 거부한 일은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수십 년간 파업할 때마다 의사들은 환자 피해와 사회적 손실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다. 의사는 법을 어겨도 용인받아야만 하는 ‘계급’이 아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이렇게 끝맺는다. ‘내가 이 맹세를 어긴다면 그 반대가 내 몫이 될 것이다.’

문화일보
06-17 [속보]최태원 이혼 2심 재판부, 판결문 수정…‘1.3조 분할’은 유지
최태원(63) SK그룹 회장이 노소영(63) 아트센터 나비 관장에게 이혼에 따른 재산 분할로 1조3000억 원이 넘는 금액을 지급하라고 판단한 항소심 재판부가 17일 판결문을 일부 수정한 것으로 파악됐다.
최 회장 측이 기자회견을 통해 ‘치명적 오류’라고 지적한 최 회장의 주식 상승 기여분을 축소한 것이다. 다만 판결 결과까지 바꾸지는 않았다.
17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가사2부(김시철 김옥곤 이동현 부장판사)는 이날 판결 경정 결정을 내리고 양측에 판결경정 결정 정본을 송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재판부는 애초 판결문에서 1994년 11월 최 회장 취득 당시 대한텔레콤(SK C&C의 전신) 가치를 주당 8원, 최종현 선대회장 별세 직전인 1998년 5월에는 주당 100원, SK C&C가 상장한 2009년 11월에는 주당 3만5650원으로 각각 계산했다.
이에 따라 1994∼1998년 선대회장 별세까지와 별세 이후 2009년까지 가치 증가분을 비교해 최 선대회장과 최 회장의 회사 가치 상승 기여를 각각 12.5배와 355배로 판단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날 최 회장 측의 주장처럼 1998년 주식 가액이 주당 100원이 아닌 1000원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판결문을 수정했다.
이에 따라 최 회장의 기여분은 355배에서 35.6배로 수정했다. 대신 최 선대회장의 기여분은 125배로 늘어나게 됐다.
다만 항소심 재판부는 오류가 고쳐졌다고 해서 판결 결과까지 달라지지 않는다고 판단해 주문까지 수정하지는 않았다.
최 회장 측은 이런 전제의 오류로 노 관장에게 분할해야 할 재산을 1조3천808억원으로 인정한 항소심의 결과가 잘못됐다며 대법원에서 다투겠다고 밝혔다.
노 관장 측 대리인도 “해당 부분은 SK C&C 주식 가치의 막대한 상승의 논거 중 일부일 뿐 주식 가치가 막대한 상승을 이룩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고 결론에도 지장이 없다”고 주장했다.
문화일보 박준우 기자
06.17 밀양, 20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20년 전 사건 당시에는 격분했고, 이후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한공주’도 가슴 아파하며 봤지만 오랜 기억의 저편에 묻어두었다. 당시 피해 여중생은 이제 30대인데, 정신적으로 피폐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렵다고 한다.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최근 일부 유튜버들의 ‘사적 제재’ 논란과 함께 다시 뉴스의 중심에 선 2004년 밀양 집단 성폭행 피해자 얘기다.

▲2004년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소재로 한 2014년 영화 '한공주'의 한 장면. [사진 무비꼴라쥬]
소도시 밀양을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었다. 남고생 44명이 1년여 동안 여중생을 집단 성폭행했다. 영상을 찍어 공개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했으나 단 한 명도 처벌받지 않았다. 가해자들이 미성년자라는 이유였다. 법원은 철저히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사정을 헤아렸다. 피해자와 떨어져 살던 아버지는 합의금을 챙겼고, 피해자와 어머니에게 한 푼도 주지 않았다. 경찰마저 피해자의 신상을 외부에 흘리고, “여자애가 밀양 물을 흐렸다”며 2차 가해를 일삼았다. 지역사회 여론도 피해자의 행실을 탓하는 쪽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안 되는 일이지만 낮은 성인지 감수성으로 가해자들은 물론 가정, 학교, 지역사회, 수사ㆍ사법기관까지 합심해 한 소녀의 인권을 유린했다.
가해자 신상공개 밀양사건 재조명
유튜버식 정의구현, 사적 제재 논란
처벌 못잖게 피해자 보호 지원 중요
우리 사회가 이를 20년 만에 재소환하는 방식은 어떠한가. 발단은 한 유튜버가 밀양 가해자 일부의 신상과 근황을 폭로하면서다. 요즘 온라인에서 유행하는, 사회적 ‘빌런’들의 신상을 털어 단죄하는 ‘사적 제재’의 일환이다. 사회적 파장이 일자 여러 유튜버가 속속 뛰어들었다. 구독자 수와 조회수가 늘고 후원금도 쏟아졌다. 돈 되는 콘텐트가 된 것이다. 당시 수사팀, 판사들의 신상도 공개됐다. 그 과정에서 엉뚱한 인물이 가해자(측)로 지목됐다. 한 유튜버가 신상 공개 여부를 놓고 가해자와 금전적 거래를 시도한다는 의혹도 나왔다. 맨 처음 신상 공개에 나선 유튜버는 “피해자와 소통하고 있다”고 했으나 사실이 아니었고, 또 다른 유튜버는 피해자 동의 없이 피해자의 통화 음성을 공개하고 이를 내려달라는 피해자의 요청을 한참이나 묵살했다. 이 유튜버에 대해서는 밀양 가해자 중 한 명과 친분이 깊다는 의혹까지 나온 상태다.
피해자를 대신해 정의를 구현한다면서 정작 피해자에 대해서는 그 어떤 고려도 하지 않은 상황.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유튜버들에게는 가해자들의 삶을 무너뜨리겠다는 게 콘텐트화하는 측면이 있다”면서 “그 과정이 피해자에게는 어떨지 전혀 고려되지 않은 기획”이라고 비판했다.
실제 최근 수년간 우리 사회에는 ‘사적 제재’ 트렌드가 거세다. 대중문화에는 ‘스스로 악마가 돼서 악마를 처단한다’는 ‘사적 복수극’이 주된 흥행 요소로 자리 잡았다(심지어 디즈니플러스 ‘비질란테’에서는 미래의 공권력인 경찰대생이 사적 제재에 나선다). 범죄자들이 ‘필벌’도, ‘엄벌’도 받지 않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반발이 낳은 결과다. 뿌리 깊은 ‘사법불신’이 원죄란 얘기인데, 그러나 ‘반영웅 자경단’ 스토리는 드라마와 영화로 충분하다.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사적 제재는 현대 사회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 더구나 신상 공개 과정을 통해 밀양 가해자들이, 명예가 훼손되고 인격 침해가 우려되는 피해자의 자리에 앉는다는 것 자체가 지독한 아이러니다.
죗값을 제대로 물리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게 피해자의 일상 회복과 그를 위한 피해자 보호ㆍ지원이다. 모든 피해자는 피해 이전 삶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피해자의 사회 복귀는 가해자를 엄벌에 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며, (사적 복수처럼)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그야말로 사회의 공적 시스템이 작동해야 가능한 일이다”(홍성수 숙대 교수). 과연 그 수많은 범죄 피해자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국가와 사회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함께 던지는 게 피해자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밀양을 제대로 소환하는 방식이 아닐까 한다.
중앙일보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06.17 '나혼산' 박세리 4층집, 경매에 넘어갔다…무슨 일?

▲나 혼자 산다' 박세리 집./MBC
박세리(47) 전 국가대표 골프팀 감독의 주택과 대지가 강제 경매에 넘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16일 여성동아에 따르면 법원이 박세리가 소유한 대전 유성구에 위치한 두 부동산에 대해 강제 경매 개시 결정을 내렸다.
한 곳은 1785㎡ 규모 대지와 해당 대지에 건축된 주택과 차고, 업무시설 등이다. 이 주택엔 박세리 부모가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바로 옆에 위치한 박세리 소유의 539.4㎡ 규모 대지와 4층 건물도 경매에 나왔다. 이 건축물은 2019년 지어진 것으로, 2022년 5월 MBC ‘나 혼자 산다’에도 소개돼 화제를 모았다. 당시 박세리는 “4층 집은 직접 설계와 인테리어를 했다”며 “부모님 집 옆에 4층 건물을 지어 동생들과 함께 산다”고 말한 바 있다.
두 부동산은 2000년 박세리와 그의 부친이 절반씩 지분비율로 취득했으나, 2016년 13억원가량의 빚 문제로 경매에 넘어갔다. 해당 사건은 2017년 7월 취하됐고, 박세리는 같은 해 부친의 지분을 전부 인수했다.
이후 2020년 또 다른 채권자가 나타나면서 강제 경매 개시 결정이 내려졌다. 박세리가 강제집행정지 신청을 제기했고, 법원이 이를 인용해 경매 집행은 정지된 상태다. 다만 소유권 이전 등기 말소 등 소송을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박세리희망재단 측에 따르면, 재단은 작년 9월 박세리 부친을 사문서위조 혐의로 대전 유성경찰서에 고소했다. 최근 경찰은 기소 의견으로 해당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부친은 새만금에 국제골프학교를 설립하는 업체로부터 참여 제안을 받고 재단의 법인 도장을 몰래 제작해 사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새만금 해양레저복합단지는 올해 10월 개장 예정이었지만, 박세리 부친의 위조문서 제출로 사업이 중단됐다.
조선일보 정아임 기자
06.18 박세리 "부친 빚 갚으면 또다른 빚… 조용히 해결하다 고소까지"

▲박세리 박세리희망재단 이사장이 18일 서울 강남구 스페이스쉐어 삼성코엑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의 부친 고소와 관련 입장을 밝히던 중 눈물을 훔치고 있다. /뉴스1
골프선수 출신 박세리씨가 이끄는 박세리희망재단이 박씨의 부친을 사문서위조 혐의로 고소한 것과 관련, 박씨는 “부녀 갈등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과거부터 부친의 채무 문제가 지속됐던 점이 이번 고소의 배경이 됐다고 밝혔다.
박씨는 18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 회의실에서 진행된 박세리희망재단 사문서위조 및 위조사문서행사 고소 관련 기자회견에서 ‘부친 고소가 부녀 갈등과 관계가 있냐’는 취지의 질문에 “전혀 무관할 수는 없다”고 답했다.
박씨는 부친이 과거부터 지속해서 채무 문제를 일으켰다고 밝혔다. 박씨는 “선수 은퇴 후 한국 생활을 하면서 이런 저런 상황이 수면 위로 많이 올라왔다. 그때부터 문제점을 많이 알게 됐다”며 “그땐 가족이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조용히 해결하려고 했다. 그런데 채무 관계를 하나 해결하면, 또다른 채무 관계가 수면 위로 올라오고, 해결하면 또다른 문제가 등장했다. 이게 (고소의) 이유가 됐다. 그러다 현재 상황까지 오게된 것”이라고 했다.
박씨는 이날 기자회견을 진행하게 된 계기에 대해선 “지금 꿈을 꾸고 있는 유망주들의 꿈이 혹시라도 꺾일까 하는 우려에 다시 한번 강조를 하고자 이 자리에 섰다”고 했다.

▲18일 서울 강남구 스페이스쉐어 삼성코엑스센터에서 열린 박세리 박세리희망재단 이사장의 부친 고소 관련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박 이사장 측이 공개한 위조된 인장이 스크린에 나오고 있다. /뉴스1
박씨는 오래전부터 부친과 소통이 단절된 상황이었다고 털어놨다. 박씨는 “이런 문제가 갑자기 생긴게 아니다”라며 “제 회사를 운영하면서 엄격히 제 권한 하에 모든 일을 시작하고 치뤄지게 되어있다. 제가 승낙해야지만 이름이 사용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 허락이 없다면 불가능하다”며 “저희 부모님이기에, 저희 아빠이기 때문에 갖고 계셨던 모든 채무 관련 제가 다 변제를 해드렸지만 이제 더 이상은 제가 할 수 없는 부분까지 왔다”고 했다.
박씨는 “더 이상 저에게 어떤 채무 관련 문제가 들어와도 제가 더 이상 책임질 수 있는 방안이 없다고 말씀드린다”며 “할 수 있는 방안도 없고, 방법도 없다. 더 이상 제가 책임지지 않겠다”고 했다
이날 박세리희망재단의 법률대리인 김경현 변호사는 “박세리희망재단은 박준철씨와 무관하다. 어떠한 직책이나 업무를 수행한 적이 없다. 앞으로도 함께 진행할 계획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새만금개발청으로부터 위조된 사문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사회 소집하고 대전 유성경찰서에 고소했다”고 했다. 위조된 인장과 실제 재단 법인 인감을 공개하며 “육안으로 봐도 확연한 차이가 있다”고도 했다.
한편 박세리희망재단은 작년 9월 박씨의 아버지 박준철씨를 사문서위조 혐의로 대전 유성경찰서에 고소했다. 최근 경찰은 기소 의견으로 해당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박씨 부친은 새만금에 국제골프학교를 설립하는 업체로부터 참여 제안을 받고 재단의 법인 도장을 몰래 제작해 사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조선일보 박선민 기자
06.18 노인 아닌 노인 400만, 43년 된 연령 기준 이제 바꿔야

▲6일 오후 서울 지하철 종로3가역에서 노인들이 개찰구를 통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시가 각종 노인 복지 혜택을 주는 기준 연령을 만 65세에서 70세 이상으로 올리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65세 이상 인구는 올해 안에 100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인구 20%가량이 65세가 되는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는 것이다. 통계청 인구 추계로는 2050년 65세 이상 인구가 40%를 돌파한다고 한다. 복지 의존 인구가 이렇게 늘어나면 국가 재정이 견뎌낼 수 없다. 노인 연령 기준 상향은 불가피하다.
지금의 노인 연령 기준은 사회 상황과도 맞지 않다. 노인 기준이 65세가 된 것은 1981년 제정된 노인복지법의 경로 우대 조항부터다. 이를 계기로 기초 연금, 버스·지하철 무임승차 등 여러 복지 혜택이 이 기준에 맞춰져 왔다. 하지만 법 제정 당시 한국인 기대 수명은 66세 정도였는데 지금은 82.7세다. 과거엔 60세만 넘어도 노인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70세가 돼도 노인으로 분류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국민 절반 이상(52%)이 노년이 시작되는 나이를 70세로 봤다는 정부 조사 결과도 있다. 이 기준으로 보면 65~70세인 400여만 국민은 ‘노인 아닌 노인’인 셈이다. 43년 된 노인 기준을 유지하는 자체가 비합리적이다.
물론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39.3%)은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 급격하게 노인 기준 연령을 올리면 반발이 생길 수 있다. 노인 연령을 70세로 높이면 60세 정년 이후 10년간 기초 연금이나 다른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발생할 수도 있다. 결국 정년 연장도 함께 논의해야 하는데 기존 임금 체계를 함께 바꿔야 한다. 정년을 늘릴 경우 청년 일자리가 줄어 ‘세대 갈등’의 불씨가 되지 않도록 설계를 잘해야 한다. 역대 정부가 이 문제를 논의했지만 흐지부지된 것도 이런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다. 빨라지는 고령화 추세를 감안하면 이미 늦었다. 노인 연령 기준은 대한노인회도 2015년 상향 조정을 제안한 바 있다. 2년 전 한국개발연구원(KDI)은 2025년부터 10년마다 노인 연령을 1년씩 높이자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정치 문제가 아니니 사회적 합의점을 찾을 수 있다. 지자체 차원이 아니라 정부가 나서서 사회적 논의를 본격화하기 바란다.
조선일보 사설
06.18 4년 새 77% 늘어난 교사 성희롱, 쉬쉬할 수준 넘었다

▲일러스트=이철원
전국 초·중·고교에 접수된 교권 침해 신고 건수 중 학생 등에 의한 교사 성희롱이 2018년 187건에서 2022년 331건으로 77%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교권이 무너지고 학생들이 교사를 만만하게 보면서 성희롱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특히 신체적 발달 등으로 문제 학생들의 연령이 점차 낮아지는 반면 성희롱 강도는 높아지는 추세인 점도 심각하다.
교권 침해 사례집을 보면 교육 현장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믿어지지 않는 일들이 적지 않다. 대구 한 중학교 학생은 수업 시간에 교사에게 “ΟΟΟ 선생님이랑 잤죠?” “아, 뒷모습 보니까 XX하고 싶네” 등 수차례에 걸쳐 교사에게 성희롱 발언을 일삼았다. 충남 지역 한 초등학생은 과학 실험 중 성적 행동을 하다 교사가 저지하자 “ΟΟ년이 ΟΟ하네” 등 욕설을 했다. 서울 한 중학교 학생은 소셜미디어에 “선생님 ΟΟ 만지고 싶다” 등 담임교사를 성희롱하는 글을 수차례 올렸다. ‘학생이니 타이르고 넘어가자’는 분위기가 여전히 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접수되는 성희롱 피해는 빙산의 일각일 것이라고 한다.
이제 더 이상 교사의 인내 또는 지도로 해결할 수준을 넘었다는 것이 교육 현장의 목소리다. 사태가 더 악화하기 전에 방향을 잘 잡아 대처해야 한다. 도를 넘은 학생들의 경우 적극적으로 치료·상담을 받게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또 잘못을 되풀이하거나 범죄에 준하는 행위를 한 학생들의 경우 ‘학교장 통고 제도’를 활용할 수 있다. 학교장이 문제 학생에게 보호 처분을 내려 달라며 가정법원에 신청하는 제도인데 심리적 부담감과 학부모가 항의할 우려 때문에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교사가 학생들을 지도하다 학생이나 학부모에게 아동복지법상 ‘정서적 학대’를 당했다고 고소당하는 일도 여전하다. 모호한 정서적 학대 행위 개념을 구체화해 아동 학대 신고가 무분별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게 해야 한다. 피해를 본 교사들은 1차적으로 교권보호위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이 위원회가 전문성이 부족해 오히려 피해 교사들에게 2차 피해를 주는 일이 허다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조선일보 사설
06.18 의대 증원 반대가 환자 생명보다 중요한가
지원·존중받아 온 국립 서울대 교수 먼저 휴진
구체적 ‘정원 대안’ 없이 휴진 명분만 쌓는 의협
서울대병원 교수들이 어제부터 집단휴진에 들어갔다. 지난주 전체 교수 967명 중 54.7%인 529명이 휴진에 찬성했고, 상당수가 어제 참여했다. 교수들은 환자에게 전화와 문자를 보내 진료 일정 연기를 통보했다. 진료일에 맞춰 모든 일정을 조정하고, 몇 달씩 기다려 온 환자들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서울대병원 교수 비상대책위원회 측은 “응급·중증·희귀병 환자들에 대한 치료는 유지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서울대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치고 위중하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항암 치료가 한 달 연기됐다는 환자의 “신장암 4기가 중증이 아니면 어떤 환자가 중증이냐”는 절규가 현장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항암 치료 검사에서 초음파는 생략하고, 혈액에서 전해질 수치 확인이 안 돼 환자가 발을 동동 구르는 실정이다.
서울대병원 교수들은 국가 최고 병원의 의사로서 많은 직간접적인 공적 지원을 받아 왔다. 올해 정부 출연금만 6129억원에 이른다. 최고의 전문가 집단으로서 명예를 존중받아 왔다. 그만큼 집단 이익보다는 의료의 공공·공익성을 먼저 고려할 것이란 사회적 기대가 컸다. 그런데도 가장 먼저 환자 곁을 떠나는 모습은 실망스러울 따름이다.
교수들의 휴진 명분도 납득하기 어렵다. 이미 확정된 내년 대입 정원을 이제 와 수정할 수 없다는 점은 본인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전공의들에 대한 행정처분도 정부가 이미 철회했다. 정부로서는 부담을 안고 양보했는데, 이마저도 부족하니 아예 취소하라는 것은 법 집행의 일관성을 포기하라는 요구다. 명분이 없기는 오늘부터 집단휴진을 하는 의협 회원들도 마찬가지다. 전공의들과 접촉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의협이 정부에 행정조치 철회를 요구하고, 거절을 빌미로 집단행동에 나서는 것은 그야말로 휴진의 명분 쌓기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정원 재논의’만 외칠 뿐 어떤 구체적 대안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정부는 의사들의 집단행동에 대해 진료명령과 휴진신고 명령을 내린 상태다. 전체 의료기관에 업무개시 명령도 발령했다. 대형병원의 손해에 대해선 구상권 청구를 검토하고 있다. 환자와 국민의 간절한 요청을 외면한 만큼의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런 상황이 오면 다시 책임을 면제해 달라며 집단행동을 할 것인가.
그나마 환자 생명이 소중하다며 힘들어도 현장을 유지하는 의사들이 있어 다행이다. 거점뇌전증지원병원협의체, 대한분만병의원협회, 대한아동병원협회 등은 “환자 곁을 떠나기 어렵다”며 휴진 불참을 선언했다. 의사들은 “10년 뒤에 활동할 의사가 늘어나는 것을 막겠다며 당장 수십만 명의 중증 환자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홍승봉 거점뇌전증지원병원협의체 위원장)이라는 동료의 고언을 되새겼으면 한다.
중앙일보 사설
06.18 집단 휴진에도 대란은 없었다..."문닫은 병원 다신 안가" 분통

▲대한의사협회가 집단 휴진에 돌입한 18일 오전 서울의 한 개원의 소아과 출입문에 의대 정원 확대, 필수 의료 패키지 반대 휴진 안내문이 붙어 있다. /고운호 기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의사 단체인 대한의사협회(의협)가 18일 집단 휴진을 강행했지만 개원가(街)나 대학 병원에서 큰 혼란은 없는 상황이다. 개원의가 운영하는 병·의원 중에서 ‘휴진’ 공지를 내걸고 문을 닫은 곳들도 있었지만 의료 공백으로 인한 혼란이 발생할 정도는 아니었다.
경남 창원시의 한 내과 의원 인근 의료기관 20여곳은 모두 휴진하지 않고 정상 진료 중이었다. 광주의 한 비뇨의학과 의원은 대표 원장만 진료를 쉬었고, 다른 의사는 정상 진료했다. 전북 전주시에는 병원 입구과 엘리베이터 등 곳곳에 휴진 안내문을 붙이고 문을 열지 않은 어린이병원도 있었다.
의료 대란이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환자들의 불편과 불만은 커지고 있다. 경기 수원시에서는 한 소아과 병원이 휴진하자, 다른 소아과 의원에서 수십명의 접수 대기가 생기는 등 환자들이 불편을 겪는 일도 있었다. 일부는 “파업한다고 휴진하는 병원에 다시는 가지 말아야 한다”는 불매운동을 언급했다.
경기 시흥시 지역 인터넷 카페엔 지난 17일 “파업에 동참하는 병의원” 제목으로 이날 휴진하는 병원 정보를 묻는 글이 올라왔다. 이 글엔 “파업하는 병원 안 간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국민 생명을 담보로 파업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파업하는 병원 나도 안 가려고 한다, 진짜 너무한다” 등의 댓글이 달렸다.
대학 병원들도 평소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의료계 파업 취지로 휴진하는 교수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은 이날 외래 진료를 보는 교수 360여명 중 10%가량이 휴진했다. 병원 관계자는 “휴진 참여 교수들은 소수에 불과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2층 장기이식센터 앞에서 만난 신장 환자 현모(64)씨는 “전날 의사들이 파업한다는 뉴스를 보았지만, 평소와 큰 차이를 느끼지는 못했다”고 했다.
경남 양산 부산대병원은 이날 실제 휴진에 들어간 의사가 10명 안팎인 것으로 전해졌다. 울산대병원은 의사 휴진으로 예정된 외래 진료 스케줄 103개 중 31개(30.1%)가 취소됐지만,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이 환자들로 북적였다.
한편 의협은 이날 오후 2시 서울 여의도에서 ‘전국 의사 총궐기 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전날 대국민 호소문을 내고 “이번 휴진과 궐기 대회 개최는 의사들만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부의 잘못된 의료 정책으로 우리나라 의료 체계가 붕괴하는 것을 막기 위한 의료계의 처절한 몸부림”이라고 밝혔다.
조선일보 오유진 기자
06.18 더 내고 더 받는 연금개혁은 속임수다
이번 연금개혁 논의를 보면서 프레임의 무서움을 새삼 느꼈다. 프레임은 검은색을 흰색으로도 바꾸는 고약한 힘을 지녔다. 지난달 말 “소득대체율 44%에 합의하자”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한마디가 연금개혁의 판세를 뒤집었다. 통 크게 양보한 듯한 모양새가 됐다. 민주당은 연금개혁에 찬성하고, 정부와 국민의힘은 반대한다는 프레임이 짜였다. 앞으로 연금에 문제가 생기면 21대 국회 막판에 머뭇거린 정부·여당이 책임을 뒤집어쓰게 생겼다. 정부·여당은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 자체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소득대체율 40→44%인상은 개악
한번 올리면 다시 내리기 어려워져
더 받겠다고 역주행하는 국가 없어
일본 33%, 우리도 동결·인하해야
그동안 이 대표는 연금개혁에 큰 관심이 없었다. 대선 때도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지난 2년간 민주당이 반드시 처리하겠다는 법안에 연금개혁이 포함된 적도 없었다. 이 한방으로 단숨에 연금개혁의 칼자루를 쥐었다. 정략적 셈법에 관한 한 확실히 고단수다. 이 대표가 받아들이겠다는 안은 보험료율 9→13%, 소득대체율 40→44%로 올리는 것이다. 보험료율은 내는 돈(기준소득 대비), 소득대체율은 받는 돈(가입기간 평균소득 대비)이다. 기다렸다는 듯 당시 김진표 국회의장이 “원 포인트 본회의라도 열어 처리하자”고 거들었다. 연금 전문가는 물론 상당수 여당 정치인, 언론이 가세했다. 반대하면 역적으로 몰리는 분위기였다. 어느새 이 안이 연금개혁의 정답으로 자리 잡았다. 22대 국회에서도 그대로 밀어붙일 가능성이 크다.
이들의 주장은 ‘26년째 9%인 보험료율을 13%로 올리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는 것. 일부에선 ‘역사적 합의’라고 치켜세웠다. 얼핏 보기에 그럴듯하지만, 문제가 있다. 보험료율 인상만 강조했지, 소득대체율을 44%로 올리는 게 개악이라는 점은 쏙 뺐다. 소득대체율을 올리면 보험료율 인상 효과를 상당 부분 상쇄한다. 더 내고, 더 받는 건 하나 마나 한 개혁이다. 일종의 속임수다. 미래 세대가 어떻게 되든 기성세대는 큰 손해를 안 보겠다는 뜻이다. 게다가 소득대체율을 올리기 시작하면 훗날 내리는 건 힘들다. 나쁜 선례가 된다.
연금개혁의 목표는 기금 고갈을 막는 것이다. 이대로 놔두면 기금은 2055년 바닥난다. 1990년생 이후는 연금을 붓기만 하다가 끝날 수 있다. 보험료율 13%, 소득대체율 44%로 조정하면 고갈 시기를 2064년으로 9년 늦춘다. 9년으로는 부족하다. 한번 고칠 때 제대로 고쳐야지, 언제 또 손볼지 기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5차 국민연금 재정계산에 따르면 미래세대에 부담을 떠넘기지 않으려면 보험료율을 19.8%까지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40%로 동결해야 한다.
저출생·고령화로 연금 고갈은 전 세계의 고민거리다. 각국은 더 내고 덜 받는 개혁을 하고 있다. 보험료율은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내린다. 가입기간을 늘리고, 수급 연령을 늦추고 있다. 소득대체율을 올리며 역주행하는 국가는 없다. 소득대체율 인상을 개혁이라고 떠드는 나라는 더더욱 없다. 우리도 40년에 걸쳐 소득대체율을 70%에서 40%(2028년 기준)까지 낮춰 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2년 대선 토론 때 소득대체율 인하에 대해 “용돈 연금을 만들 거냐”고 반대했다. 집권 후 소득대체율을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렸다. 소신을 바꿨다. 노 전 대통령이 뛰어난 점이다. 반발을 무릅쓰고 40%로 내리는 안을 관철시켰다. 44%로 다시 올리면 전 세계로부터 ‘한국은 요술 방망이라도 숨겨 놓았느냐’는 조롱을 들을 것이다.
결국 잘못된 안을 갖고, 야당은 빨리 처리하자고 기세등등하게 다그친 셈이다. 정부·여당은 넋 놓고 있다가 주도권을 빼앗긴 채 우왕좌왕했다. 기껏 내놓은 반박 카드가 모수개혁(보험료율·소득대체율 조정)과 구조개혁(국민·공무원·기초연금 조정)을 같이하자는 것이다. 집권 2년 내내 손 놓고 있다가 갑자기 구조개혁을 들고나온 건 궁색하다. 구조개혁은 정권 후반기에 어렵다. 현실성이 없는 것을 갖다 붙이면 연금개혁을 하기 싫어서 그런다는 오해만 산다.
정부·여당이 끌려다니는 건 목표나 입장이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반드시 해보겠다는 의지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구조개혁으로 물을 탈 게 아니라 소득대체율 인상은 안 된다고 맞서야 한다. 보험료율을 13%로 올리되 소득대체율은 40%로 동결하자고 해야 한다. 이렇게 해놓고, 다음에 보험료율을 13%보다 더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40%보다 낮춰야 한다. 갈 길이 멀다. 일본은 보험료율 18.3%, 소득대체율 33%다. 우리보다 두 배를 내고, 덜 받는다. 덕분에 100년 동안 지급할 돈을 쌓아두고 있다.
더 내고 덜 받는 데 속 좋을 사람은 없다. 다들 표 계산을 하면서 개혁하는 시늉만 내는 이유다. 윤석열 대통령 말처럼 “인기 없는 정책”이다. 정부·여당이 보험료율을 올리고, 소득대체율을 내리는 로드맵을 제시하는 게 우선이다. 이 걸 이 대표가 받아들인다면 연금개혁에 대한 진정성을 인정해 줄 만하다.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지도자라면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 젊은이에게 빚을 떠넘겨선 안 된다. 여기에 보수·진보가 따로 없다.
중앙일보 고현곤 편집인
06-18 재판 신뢰 훼손한 최태원 항소심, 대법원이 바로잡아야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이혼 소송 항소심 재판에 치명적인 잘못이 있는 것으로 드러나 재판부가 재산분할 관련 판결을 수정했다. 17일 최 회장의 법률 대리인단이 지난달 30일 2심 재판부가 최 회장이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에게 재산분할로 1조3808억 원을 지급하라고 선고하면서 고 최종현 회장의 회사 성장 기여분을 10배 과소평가하고 최 회장의 기여분을 10배 과대평가했다고 밝힌 것을 항소심 재판부가 수용한 것으로, 어이가 없다. 법원과 재판의 신뢰를 스스로 갉아먹는 치명적인 실수가 단독 재판부도 아닌 합의부에서 벌어진 게 이해가 안 된다.
항소심 재판부는 최 회장이 대한텔레콤(SK㈜ 전신) 지분을 취득한 1994년부터 최종현 전 회장이 별세한 1998년, 1998년부터 SK C&C가 상장된 2009년까지의 주식 가격을 따져 회사 성장 기여도를 최종현 전 회장 12.5배, 최 회장 355배로 결정했다. 그러나 SK C&C의 두 차례 액면분할로 주가가 50분의 1로 낮아졌는데 재판부가 1994년 가치엔 이를 제대로 반영해 주당 8원으로 명시했지만 1998년 가치엔 1000원으로 써야 할 것을 100원으로 잘못 기재했다. SK C&C가 상장된 2009년 11월 주당 가격이 3만5650원이어서 제대로 적용하면 최 전 회장 기여분은 125배, 최 회장 기여분은 35.5배가 맞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일부 수정해 양측에 경정 결정문을 송달했지만,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지급해야 할 재산분할액은 그대로 유지했다. 하지만 산정의 기본 전제가 되는 최 회장의 재산 형성 기여도가 부풀려진 만큼 대법원이 다시 살펴봐야 한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300억 원이 SK 성장의 종잣돈이 됐고, 정경유착으로 기업이 커졌다며 노 관장 기여분을 산정한 법리도 재점검해야 할 대목이다.
문화일보 사설
06.18 검찰, '음주 뺑소니' 김호중 구속 기소…음주운전 혐의는 적용 못 해

▲가수 김호중씨가 지난달 24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트로트 가수 김호중(33)씨가 ‘음주 뺑소니’ 사건으로 구속 기소됐다. 서울중앙지검 형사5부(부장 김태헌)는 18일 김씨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위험운전치상 및 도주치상, 도로교통법 위반(사고후미조치)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지난달 9일 오후 11시 40분쯤 음주 상태로 차를 몰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도로에서 반대편 도로의 택시를 충돌하는 사고를 내고 달아난 혐의를 받는다. 17시간 만의 음주 측정에서 음성(혈중알코올농도 0.03% 미만)이 나왔지만, 지난달 19일 음주 운전 사실을 인정했다.
검찰은 김씨의 만취 상태 운전에 대해서는 도로교통법상 음주운전이 아닌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위험운전치상을 적용했다. 특가법 5조의 11 (위험운전 등 치사상)은 ‘음주 또는 약물의 영향으로 정상적인 운전이 곤란한 상태’에서 차를 운전해 사람을 다치거나 죽게 한 경우에 처벌한다. 혈중알코올농도 0.03%부터 적용할 수 있는 도로교통법상 음주운전과는 달리 기준수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음주 또는 약물의 영향으로 정상적인 운전이 곤란한 상태’라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경찰은 음주량과 체격 등을 기초로 운전 당시 혈중알코올농도를 역산(逆算)하는 ‘위드마크’공식을 적용해 김씨의 혈중알코올농도를 0.031%로 추산했다. 그러나 검찰은 이 계산 결과만으로는 음주 수치를 특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음주운전 혐의를 적용하지 못했다.
김씨와 함께 구속된 김씨 소속사 생각엔터테인먼트 이광득 대표와 본부장 전모씨도 이날 기소됐다. 이광득씨는 사고 뒤 김씨 매니저에게 옷을 바꿔입고 운전자인 것처럼 허위자수하라고 지시했고, 김씨가 도피하는 데 쓴 차량의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도 제거하라고 지시한 혐의(증거인멸교사)를 받는다. 소속사 본부장 전모씨는 김씨 차량의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를 제거하고, 술에 취한 매니저가 운전하는 차량에 함께 탄 혐의(증거인멸, 음주운전 방조)를 받는다. 매니저는 음주 상태로 운전하고, 김씨가 도피하는 데 쓴 차량의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를 제거하고, 파출소에 허위자수한 혐의(음주운전, 범인도피, 증거인멸)로 불구속 기소됐다.
검찰은 “운전자 바꿔치기 등 조직화된 사법 방해로 음주운전의 입증에 필요한 혈중알코올 농도 측정이 불가능해졌다”라며 “사법 방해에 대한 처벌 규정 도입이 절실하다”고 했다.
조선일보 이슬비 기자
06.19 선진국보다 터무니없이 비싼 식료품과 서울 집값

▲식료품 가격이 가파르게 오르면서 외식물가도 고공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4월 기준 냉면값(이하 서울 기준)이 1년 새 9.5% 오른 평균 1만192원으로 처음으로 1만 원을 넘어섰다.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인상된 가격이 종이로 덧대어 수정돼 있다. /뉴스1
한국은행이 우리와 선진국의 물가 수준을 비교한 결과, 식료품 물가가 선진국 평균보다 56% 비싼 것으로 나타났다. 주거비도 23% 비쌌다. 반면 전기·가스·수도 요금은 선진국 평균보다 36% 저렴했다. 정부가 정치적 이유로 공기업 손실을 감수하면서 낮은 가격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은은 식료품의 고물가 원인에 대해 재료를 공급하는 농업 부문의 낮은 생산성, 과일·채소의 낮은 수입 개방도, 과다한 중간 유통 마진 등을 꼽았다. 실제로 우리나라 농업 부문의 노동생산성은 영세농, 농민 고령화 등으로 OECD 최하위권에 속한다. 과일 수입 비율이 미국은 70%를 웃도는 데 비해 우리나라는 40%도 안 된다. 소비자가격에서 유통 비용이 차지하는 비율이 50%에 달한다.
비싼 주거비는 너무 오른 집값 탓이다. 서울의 경우 연 소득 대비 집값 비율(PIR)이 25배로, 뉴욕(11배), 코펜하겐(9배) 등 선진국 주요 도시보다 훨씬 높다. 주거의 질 문제를 관장하는 유엔 산하 해비타트가 권고하는 적정 PIR은 3~5배이다. 미친 집값 탓에 2030세대가 주로 거주하는 서울 신축 빌라의 경우 평균 월세가 101만원까지 치솟아 청년들이 월 소득의 30% 이상을 주거비로 지출하고 있다.
문제는 식료품, 주거비, 공공요금의 선진국 대비 가격 격차가 갈수록 더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식료품의 경우 1990년엔 OECD 평균보다 20% 비쌌는데, 2023년엔 50% 이상 비싸졌다. 공공요금은 1990년엔 선진국 대비 10%가량 쌌는데, 2023년엔 30% 이상 싸졌다.
한은의 지적대로 우리나라 물가의 기형적 구조는 통화정책만으론 해결할 수 없고, 구조적 정책 대응이 필요하다. 식료품 물가는 기업농 육성 등을 통한 농업 생산성 제고, 과일·채소의 수입선 다양화, 유통 마진 축소 등의 대책이 시급하다. 주거비를 낮추려면 좋은 입지의 신규 주택 공급을 늘리고, 청년 임대주택 공급을 더 늘려야 한다. 낮은 에너지 가격은 에너지 과소비를 유발하고 탄소 제로(0) 시대에 지속 가능하지도 않은 만큼 단계적인 가격 인상으로 정상화시켜야 한다.
조선일보 사설
06-19 너무 비싼 식료품, 농산물 보호 정책 전면 재검토할 때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8일 “다른 나라에 비해 높은 생활비 수준은 통화정책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며 “구조적인 문제를 어떻게 개선할지 고민할 때”라고 말했다. 금리나 통화가 아닌 이슈에 한은 총재가 쓴소리를 하는 건 이례적이다. 그만큼 생활과 직결된 물가 문제가 심각하다는 의미다. 한은 조사 결과, 우리나라 식료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56%나 비싼 것으로 나타났다. 선진국과 비교하면 그 재료인 농산물 가격이 사과 279%, 감자 208%, 쇠고기 176%, 오이는 165%나 높기 때문이다. 농업 부문의 낮은 생산성, 과다한 유통 마진, 낮은 수입 개방도가 복합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한은은 유통 구조 개선과 공급 채널 다양화 필요성을 강조했다. 농산물 가격 중 유통 비용 비중은 1999년 39%에서 49.7%로 올랐다. 그동안 유통 구조가 개선되기는커녕 더 나빠진 것이다. 공급 채널 다양화는 수입을 개방하자는 의미다. 수입이 개방된 포도를 제외하고 사과·배·귤·복숭아 등은 이상기후로 생산량이 줄어도 사실상 수입이 막혀 있어 가격이 폭등하기 일쑤다. 농업 대국인 미국도 과일 수입 비중이 70%인데, 한국은 40%도 안 된다.
농산물 가격은 경제 이슈가 아니라 정치 이슈라는 말도 있지만, 실제로 정치권 책임이 적지 않다. 주요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때마다 경북 의원들은 “보수의 심장인 경북 사과를 죽이려느냐”고 압박해 양허 제외 품목으로 따냈고, 그 다음 날이면 호남 의원들이 “경북 사과만 살리고 나주 배는 죽이느냐”고 아우성쳐 배도 같은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소선거구제로 농민 표가 과잉대표 된 상황의 연장선이다. 농산물 가격 파동 때마다 땜질 처방이 쏟아졌다. 더 이상 소비자 후생은 외면하고 생산 농가 보호에 치우친 정책은 곤란하다. 높은 식료품 값으로 인해 소비자들은 2%대 물가 안정을 체감할 수 없다. 농산물 보호 정책의 전면 재검토에 나설 때다. 당장은 까다로운 검역 절차부터 손질하고 농산물 수입을 과감히 확대할 필요가 있다.
문화일보 사설
06.19 20년 뒤에도 65세 이상이 노인일까… '스냅샷의 오류' 경계하라
우리의 노년은 건강해지는 중… 은퇴·간병 시점 달라져야
변화 무시하고 현재 통계만 대입하면 불필요한 혼란·공포
노인 기준 76세로 올리면 2060년 노년 부양비율 절반 줄어

▲그래픽=백형선
최근 한 국책 연구원의 보고서가 입방아에 올랐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이 발간한 ‘생산 가능 인구 비율 감소에 대응하기 위한 재정 정책 방향에 대한 제언’이라는 보고서다. 이 보고서를 쓴 장우현 선임연구위원은 생산 가능 인구 확보를 위한 저출산 대책을 단계별로 나열했다. 은퇴한 노인들을 해외로 이주시키자는 것이 그중 하나다. 이유가 걸작인데 “노령층이 상대적으로 물가가 저렴하고 기후가 온화한 국가로 이주해 은퇴 이민 차원으로 노후를 보낼 수 있다면 생산 가능 인구 비율을 양적으로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책의 효용성을 따지기 전에 실현 가능성부터 낮다. 대한민국은 거주의 자유를 헌법에서 보장한 나라이다. 이민 가고자 하는 노년층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해외로 이민 갔던 이들조차 양질 의료 서비스를 찾아 노년에 귀국하는 일이 적지 않다. 보상을 어떻게 하든 국익을 위해서 낯선 땅에 가라면 갈 사람이 있을까.
더 큰 문제는 노년층에 대한 관점이다. 이 보고서는 노년층을 생산 활동을 하지 못하는 인구 집단이라 전제하고 있다.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상태로 죽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라고 보는 듯하다.
이러한 시각은 한국은행이 지난 3월 발표한 ‘돌봄 서비스 인력난 및 비용 부담 완화 방안’에서도 나타난다. 한국은행은 현재 간병 및 육아와 관련된 돌봄 서비스 부문의 인력난은 큰 비용 부담과 각종 사회적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고 진단하며, 향후 고령화에 따라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예측한다. 돌봄 서비스직 노동 공급 부족 규모는 2022년 19만명 → 2032년 38만~71만명 → 2042년 61만~155만명으로 커질 것으로 보고, 가족 간병 부담에 따른 생산성 손실이 2042년에는 GDP(국내총생산)의 2.1~3.6%에 이를 것이라 내다봤다.

▲그래픽=백형선
돌봄 서비스 부문의 인력난을 완화하기 위해 한국은행이 제시한 대책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급증하는 수요를 국내 노동자만으로 충족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외국인 노동자를 활용해야 한다. 둘째, 외국인 노동자 고용 때 비용 부담을 낮추는 방안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외국인에 대한 고용 허가제 대상 업종에 돌봄 서비스업을 포함하고, 이런 업종에 대한 최저임금을 상대적으로 낮게 설정하는 방식 등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의 관점은 국가 차원에서 건강한 나이 듦이 가능한 여러 정책을 추진해 돌봄 요구를 예방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제언이 빠져 있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걸 차치하고도 한국은행의 견해는 전형적 스냅샷의 오류에 빠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스냅샷의 오류란 변화를 예상하지 않고 세상을 박제된 상태로 보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를 말한다. 기대 수명 향상과 경제 발전을 반영하지 못하고 각 연령대에 따른 사람 사는 모습이 지금처럼 유지될 것이라는 가정이 깔린 것이다. 2042년에 돌봄 서비스 대상이 될 것으로 여겨지는 세대는 베이비붐 세대와 86세대인데, 20년 가까이 지난 뒤에도 이 사람들이 현재 노년층과 유사하게 나이 들어갈 것이라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베이비붐 세대인 현재의 60대 중·후반은 아직 현역인 사람이 많으며 건강하고 정력적이다. 지금 50대인 86세대는 베이비붐 세대에 비해서도 젊고 건강하게 산다. 인구 집단 연구에서도 65세 이상 인구 중 노쇠가 나타난 사람 비율(유병률)은 점차 낮아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고령화를 경험한 일본에서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2012년~2017년에 노쇠가 있는 노인 비율은 7%에서 5.3%로 낮아졌다. 그동안 늙기의 기술에서 다루었던 것처럼 우리나라의 국민 건강 영양 조사 결과를 역사적으로 비교 분석했을 때도 65세 이상 인구 중 노쇠한 사람 비율은 점차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의 노년은 점점 건강해지고 있다. 이처럼 현재 70~80대의 모습과 10~20년 후 70~80대 모습은 상당히 다를 것으로 예상되므로 돌봄 서비스 대상이 되는 연령대와 돌봄 등 일자리에 참여할 수 있는 연령대를 모두 현실에 맞춰 조정해서 미래를 예측해야 더 타당할 것이다.

▲그래픽=백형선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보고서나 한국은행의 분석을 거슬러 오르면 통계청의 장래 인구 추계가 있다. 언론에서 고령화의 재앙을 연일 보도하게 만든 시발점이다. 통계청의 장래 인구 추계에 따르면, 2060년 기준 노년 부양비율(노인 인구를 생산 가능 인구로 나눈 값)이 91.4%에 이른다. 가히 초고령화 시대의 어두운 미래를 보여주는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함정이 있다. 노인 기준을 현행 65세로 고정해서 분석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반면 실질적으로 건강 수명이 향상돼 활동적 노년을 맞는다고 가정해서 노인 기준을 76세로 점진적으로 높이면 2060년의 노년 부양비율은 43%에 불과하다. 단지 현실에 부합하도록 분석 틀을 수정하기만 해도 이렇게 적지 않은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미래를 예측해 정책 방향을 제시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확히 내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2020년에 코로나가 유행하고 그것도 그렇게 오랜 기간 해결되지 않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더라도 최소한 예측 가능한 요소는 반영하는 것이 타당하다. 인간이 예전보다 더 건강하게 오랫동안 일하므로 은퇴 시기나 돌봄 서비스가 필요한 나이 모두 올라간다는 것은 뚜렷한 경향이다. 사회 참여를 지속하는 활동적 노년은 노쇠와 치매, 돌봄 요구를 예방하는 선순환을 만든다는 증거도 충분하다.
이러한 변화를 무시하고 현재 모습에 미래의 인구 피라미드만 그대로 대입하는 식의 스냅샷 오류에 갇혀 있는 정책은 불필요한 공포와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잘못된 정책 분석 때문에 애초에 필요 없거나 적었을 방안을 도입하면 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정책이 일단 실행되면 돌이키기는 매우 어렵다. 초고령화 시대의 미래 예측과 정책 제시가 현실을 정확히 반영해야 하는 이유다.
조선일보 정희원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의사
06-20 종합적 접근 절실한 노인 ‘70세 상향’
최창규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정부가 19일 ‘저출생 종합 대책’을 발표하기에 앞서 서울시는 지난 16일 인구·사회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인구정책 추진 체계와 저출생, 고령화, 외국인·이민정책 등을 포함하는 ‘인구정책 기본계획’을 내놨다. 그중에는 서울시가 각종 노인복지 혜택을 주는 기준연령을 내년부터 신규 복지 사업에 만 65세에서 만 70세로 상향 조정하는 방안도 들어 있다. 다만, 노인복지법에 따라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만 65세 이상 노인 기준을 개별복지사업에 따라 달리 정할 것이라고 한다. 베이비붐 세대에 태어난 노인인구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제도 변경이 불가피해 보인다.
전체 인구구조 변화에 따른 정책들은 상호 연결돼 있어서 정책을 부분적으로만 시행할 게 아니라 종합적으로 다뤄야 한다. 즉, 국가 전체 정책의 방향을 개선해야 하는 과제이므로 중앙정부는 물론 국회와 언론·학계·시민단체가 참여해 함께 논의해 나가야 한다. 노인복지 기준연령을 상향 조정하는 정책만 하더라도 정년의 연장과 맞물려 있다. 정년 연령을 고정시킨 채 노인복지 기준연령이나 연금수급연령을 높이는 것은, 일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노인복지나 연금을 받는 시기 사이에 소득 공백이 커지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2020년 기준 우리나라의 노인빈곤율은 40.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고, 회원국 평균 노인빈곤율(14.2%)보다 3배나 높다. 수치로 보듯이 현재 우리나라 노인들의 삶의 질은 열악하다. 높은 자녀교육비와 과거 연금제도가 미흡했던 부모님 부양에 많은 지출을 하면서도 갑자기 늘어난 기대수명으로 인해 정작 본인들의 미래에 대한 준비는 소홀한 세대였기 때문이다. 정부가 노인들의 삶을 전적으로 책임질 수 없다면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기대수명이 크게 길어진 만큼 일할 수 있는 연령을 높이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일하는 기간이 길어지고 연금을 받는 기간이 짧아지면 기존의 연금기금 재정 건전성도 개선될 것이다. 연금개혁의 경우 나중에 받을 연금이 정해진 ‘확정급여형’보다는 지금 납부하는 돈을 정해 놓고 나중에 투자 성과에 따라 연금을 받는 ‘확정기여형’으로 바꾸는 게 불가피할 것이다.
생산적인 노동을 할 능력과 의사가 있는 사람은 연령에 차별을 두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이상적이다. OECD 노년부양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인구구조상 20∼64세의 생산연령인구 100명이 2023년에는 65세 이상 노인 27.8명을 부양했지만, 2050년에는 78.8명을 부양해야 한다. 젊은 세대가 노인세대 부양에 과도한 부담을 떠안게 된다. 사회 전체적으로 정년 연장이나 계속 고용 등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근속 연수가 길어질수록 자동으로 급여가 올라가는 호봉제를 점진적으로 성과급제로 바꾸는 등 임금 체계 개편도 함께 해 나가야 한다.
정치적으로 선거가 있을 때마다 단기에 득표율을 높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무분별하게 내놓는 포퓰리즘 정책을 자제해야 한다. 중장기적으로 정부의 재정 건전성을 악화시키거나,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게 될 각종 포퓰리즘 정책들을 제로베이스에서 합리적으로 검토해 폐지하거나 재검토해야만 할 것이다.
문화일보
06-20 대법원도 인정한 의대 증원, 명분 더 없어진 진료 거부
의대 교수·의대생 등이 정부의 ‘의대 증원 처분’ 효력을 멈춰달라며 정부를 상대로 낸 집행정지 신청이 대법원에서 최종 기각됨으로써 의료계의 집단 진료 거부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끝났다. 진료 거부의 명분 역시 더욱 약화했다. 대법원 2부(주심 신숙희 대법관)는 19일 의대 교수와 전공의, 의대생, 수험생 등 18명이 보건복지부와 교육부 장관을 상대로 낸 의대 증원 집행정지 사건의 재항고를 기각했다. 대법원은 2심과 마찬가지로, 증원·배정 처분으로 의대생이 볼 손해보다 공공복리에 미칠 영향이 더 크다며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증원 조치로 교육의 질이 크게 저하될 것으로 보기는 부족하다” “입시 준비하는 수험생과 교육 현장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돼야 한다”고 밝혔다. 의대 증원의 원점 재검토를 주장해온 의료계는 ‘법 위의 존재’가 아님을 받아들여야 한다.
대한의사협회가 추진한 이른바 ‘범의료계 대책위원회’ 역시 명분이 약하다. 우선, 의료 파업의 단초가 전공의 이탈인데, 막상 전공의들은 불만을 표시한다. 범대위 공동 위원장을 제안 받았다는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은 “범의료계 협의체를 구성하더라도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지속적으로 표명했다”고 밝히고 심지어 “(임현택) 의협 회장은 입장 표명을 더 신중하게 해주기 바란다”고도 했다. 이런 상황은 의협 지도부가 진료 거부에 나서는 진짜 이유가 뭔지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의대·병원 교수들의 진료 거부 역시 명분과 동력을 잃어간다. 전공의에 대한 행정처분 철회를 내걸고 진료 파업을 벌였지만 환자에게만 피해를 안겼을 뿐 전공의들을 대화의 장으로 데려오는 것조차 설득하지 못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27일부터 무기한 휴진하겠다는 의협 방침에 의사들이 반발하고 나서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의료계 일각의 불법적 움직임에 대해 엄정히 대응해야 한다. 의협에 대한 집단행동 및 집단행동교사 금지 명령, 집단 휴진에 대한 공정거래법 위반 여부 조사 등은 당연한 조치다. 이와 병행해 더 진정성 있게 의료계를 설득하면서 의료개혁을 함께 추진하는 일이 중요하다.
문화일보 사설
06-20 명분없는 투쟁 길잃은 의협… 안팎 해체론에 여론도 싸늘
▲연합뉴스
27일 무기한 전면휴진 동력상실
임현택 회장, 두 달도 안돼 위기
의대 증원에 맞서 명분 없는 총파업을 벌이고 있는 법정단체인 대한의사협회가 출범 이후 최대 위기에 빠졌다. 의사사회에서 의협 해체론이 나오는 데 이어 오는 27일 무기한 전면 휴진을 앞두고 의협 내부 반발도 분출하고 있다. 의대 증원이 확정됐는데도 전면 휴진을 강행한 탓에 국민 여론도 악화되는 현실적 한계에 부딪히면서 서울대병원 등을 중심으로 한 의료계 총파업은 동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0일 의사사회 안팎에서는 의협 해체론이 이어지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수도권 한 병원장은 “의사사회를 대표하지 못하는 의협은 정관개정을 통해 정상적인 법정단체로 탈바꿈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의료법에 따르면 법정단체가 국민보건에 장애가 되는 행위를 할 때 정관을 변경하거나 집행부를 교체할 수 있다. 오주환 서울대의대 의학과 교수도 “의사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하려면 의협 해체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의협 내홍은 격화돼 임현택 의협 회장은 취임 두 달도 안 돼 위기에 빠졌다. 임 회장이 지난 18일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총궐기대회에서 오는 27일 무기한 전면휴진에 들어간다고 ‘깜짝’ 발표했는데 의협 내부 반발이 커지고 있다. 중대 사안이지만 16개 시도의사회와 대의원회 의장단 등과 논의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기한 전면 휴진을 반대한다는 의견을 낸 시도의사회도 상당수인 것으로 알려졌다. A시도의사회장은 “무기한 휴진을 실행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그대로 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시도의사회장은 “개원의 휴진 참여율을 끌어내는 건 쉽지 않다”며 “무기한 전면휴진은 순탄하게 이뤄지기 어렵다”고 했다.
정부는 의협을 다각도로 압박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의협이 불법행위를 한다면 최악의 경우엔 단체 해산도 검토한다는 방침이다.
문화일보 권도경·유민우 기자
06-20 의사 최고 연봉 6억…평균 연봉 가장 높은 병원은 4억
전국 의료기관 113곳 중 개인 의사 중 최고 연봉은 6억 원인 것으로 조사됐다. 의사 1인당 평균 연봉이 가장 높은 곳은 4억 원이었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보건의료노조)은 지난 4월 24일~5월 22일 노조 조합원이 있는 의료기관 113곳을 대상으로 의사 임금 현황을 조사한 이 같은 결과를 19일 공개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의사 평균 연봉이 가장 높은 병원은 영남지역의 한 공공병원으로 1인당 4억 원이었다. 경기 지역의 지방의료원과 호남 지역의 재활병원 의사가 1인당 평균 3억9000만 원으로 뒤를 이었다.
의사 개인별로는 영남 지역 특수목적 공공병원의 의사가 6억 원으로 가장 연봉이 높았다. 이어 충청 지역과 경기 지역 지방의료원 소속의 의사가 각각 5억9478만 원, 5억3200만 원을 받았다.
보건의료노조는 "지방병원과 중소병원의 의사 임금이 높다는 건 그만큼 이들 병원에서 의사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라며 "이들 병원은 의사 구인난에 따른 진료과목 폐쇄와 진료 역량 붕괴, 경영 부담 증가 등의 악순환을 겪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 이번 조사에서 국립대병원과 사립대병원 등 대형병원 전문의 1인당 평균 임금은 1억5000만~2억 원 수준으로 나타났다. 다만 이는 연장·야간·휴일 근로수당이나 연차수당 등을 제외한 임금을 파악됐다.
보건의료노조는 병원 전체 인건비에서 의사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도 조사했다. 의사 인건비 비중이 가장 높은 곳은 영남 지역의 한 민간 중소병원으로 40%를 차지했다. 다음으로는 영남 민간 중소병원인 A 병원(37.8%), 서울 사립대병원인 B 병원(37%), 경기 민간 중소병원인 C 병원(36.9%) 등 순이었다.
보건의료노조는 "의사 단체들은 의사 부족과 구인난으로 지역·공공병원들이 필수 진료과를 폐쇄하고, 천정부지로 치솟는 의사 인건비 때문에 심각한 경영 위기를 겪는 현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최고소득층인 의사들이 의사가 부족하지 않다며 의대 증원 백지화를 내걸고 환자 진료를 거부하는데 대한 비판 여론이 높다"고 지적했다.
보건의료노조는 "의사들은 집단 휴진에 나설 것이 아니라 국민이 납득할 수 있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의사 적정 임금을 제시하고, 그 적정 임금을 받으며 필수·지역·공공의료에 근무하겠다는 대국민 약속이라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화일보 임정환 기자
06.21 서울대병원, 휴진 중단하고 정상 진료…교수 74%가 찬성
비대위 "긴 호흡으로 투쟁 계속"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 비상대책위원회가 휴진을 중단하고 정상 진료하기로 방침을 바꿨다. 서울대병원 본원과 분당서울대병원, 서울시보라매병원, 강남센터 등 4개 병원이 모두 정상 진료체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서울대병원 교수들은 지난 17일부터 중증·응급환자를 제외하고 휴진을 해왔다.
비대위는 “전면 휴진을 중단한다”고 21일 밝혔다. 지난 20일부터 이날까지 실시된 소속 교수 대상 투표 결과에 따른 것이다. 비대위에 따르면, 총 투표인원 946명 중 696명(73.6%)이 무기한 휴진 대신 지속 가능한 방식의 투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192명은 무기한 휴진을 지속해야 한다고 했다. 비대위는 교수들에게 “싸움을 그만 두진 않을 것”이라며 “긴 호흡으로, 지속 가능한 방식의 투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구체적인 활동 방식을 묻는 질문(중복응답 가능)에는 응답자의 75.4%가 ‘정책 수립 과정 감시와 비판, 대안 제시’를 꼽았다. 55.4%는 범의료계와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외에도 65.6%의 교수들이 “환자와 의료진의 안전을 위해 지속 가능한 적정 수준으로 근무시간을 조정해야 한다”고 답했다.
비대위는 투표 결과를 알리며 배포한 입장문을 통해 “전면 휴진을 중단하는 이유는 당장 발생할 수 있는 환자의 피해를 그대로 둘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비대위는 “전면 휴진 기간에도 미룰 수 없는 중증, 난치, 응급 환자에 대한 진료는 유지해 왔으나, 서울대병원 특성상 현 상황이 장기화됐을 때 진료 유지 중인 중증 환자에게도 실제적인 피해가 생길 수 있다”며 “의료 대란 속에서 환자 곁을 지켜왔고 휴진 기간에도 꼭 봐야할 환자를 선별하고 진료해온 교수들이 가장 걱정하는 점”이라고 했다.
비대위는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들의 전면 휴진 결의 이후 정부는 전공의 처분 움직임을 멈추는 등 유화적 태도 변화를 보였다”면서도 “한편으로는 불법 행위에 대한 엄정 대처 방침을 발표하고, 의협 해체 발언을 하는 등 여전히 의료계를 향해 으름장을 놓고 있다”고 했다. 비대위는 “무너져가는 의료, 교육 현장을 하루하루 목도하고 있는 우리는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정부에 더 적극적인 사태 해결 노력을 요구한다”고 했다.
비대위는 “우리는 저항을 계속할 것이며, 정부의 무책임한 결정으로 국민 건강권에 미치는 위협이 커진다면 다시 적극적인 행동을 결의할 것”이라며 “우리는 정책 수립 과정을 감시하고 비판과 대안의 목소리를 낼 것이며, 이를 위해 의료계 전체와도 연대해 나갈 것”이라고도 했다.
조선일보 오경묵 기자
06.22 서울대병원 교수들 진료 복귀, 책임 있는 결정이다
서울대병원 교수들이 지난 17일부터 이어온 전면 휴진을 닷새 만에 중단하기로 했다. 전체 교수를 대상으로 투표를 실시한 결과, 전체 응답자 948명 중 698명(74%)이 휴진을 중단하고 ‘지속 가능한 방식의 저항’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지금 휴진을 이어가는 것은 명분도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대다수다. 이런 여론 앞에서 교수들이 책임 있는 결정을 내렸다.
서울대병원 교수들이 무기한 휴진을 시작한 이후 환자들의 불안은 매우 커졌다. 환자 단체가 다음 달 4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총궐기대회를 열겠다고 할 정도였다. 서울대병원 교수들도 전면 휴진을 중단한 배경으로 환자 피해 우려 상황을 꼽았다. 대법원도 지난 19일 정부의 의대 증원·배분 처분을 중지해 달라며 의대생, 교수 등이 제기한 집행정지 신청을 최종 기각했다. 국민 피해와 분노가 커지는 데다 대법원 최종 결정까지 나와 더 이상 상황이 바뀔 여지도 없어졌다. 더 이상의 파업은 무의미하다. 서울대병원이 휴진을 중단함에 따라 집단 휴진을 결의했거나 논의 중인 세브란스 병원, 서울아산병원 등도 같은 결정을 내릴 것으로 기대된다.
나아가 이제 전공의들도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정부는 불공정 논란을 감수하면서도 복귀하는 전공의에겐 어떤 불이익도 없을 것이라고 거듭 약속하고 있다. 더 이상 전공의들이 밖에 있을 이유가 없다. 의사들이 환자 생명을 볼모로 무엇인가를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군인이 파업할 수 없는 것처럼 의사도 파업을 할 수 없다. 법 이전에 아픈 사람은 치료해야 한다는 인간의 기본 윤리에 관한 것이다.
정부는 필요한 의사 인력을 추계하고 의대 증원 규모를 조정할 기구를 만들겠다고 했다. 마침 의사협회도 범의료계 특위를 구성하기로 했다. 의료계의 공통된 목소리를 낼 조직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제 의사들도 내년도 의대 증원보다 훨씬 중요한 필수·지역 의료 수가 인상, 전공의들의 근무 여건과 처우 개선, 의사 사법 리스크 경감 방안 등을 정부와 본격 협의에 나서기 바란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의료계가 이번 사태에서 잃어버린 국민의 신뢰를 다시 쌓아가는 첫걸음일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
06-22 의사단체가 이번엔 이기기 어려운 이유
서울대 의대·병원 교수들은 17일부터 시작한 무기한 휴진을 닷새 만에 중단하기로 했고, 대한의사협회(의협)가 공언했던 ‘27일부터 무기한 휴진’도 내부 반발로 무산 가능성이 커졌다. 의협이 주도한 18일 하루 휴진의 동네병원 동참률은 4년 전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의사단체 내부에서도 “더 이상은 싸우기 어렵다”는 말이 나온다. 2014년, 2020년 전면 투쟁으로 정부를 좌절시켰던 의사단체가 이번에는 왜 이렇게 고전하는 걸까.
손자병법이 제시한 승부 결정 요소
손자는 손자병법에서 전쟁의 승부를 결정하는 다섯 요소가 도(道), 천(天), 지(地), 장(將), 법(法)이라고 했다.
가장 중요한 ‘도’는 전쟁의 대의명분이다. 2000명이란 숫자에 대한 이견은 있을 수 있지만 주요국이 고령화와 함께 의사 숫자를 늘려온 만큼 한국도 27년 만에 의사를 늘려야 한다는 정부의 대의명분은 알기 쉽고 분명했다. 하지만 의사단체는 ‘원점 재검토’를 외칠 뿐 증원 찬성인지 반대인지조차 의견을 정리하지 못했고, 각각의 이유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국민이 납득할 만한 설명을 내놓지 못했다.
다음으로 ‘천’은 천시(天時), 즉 외부 환경의 변화다. 정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기였던 2020년 의대 400명을 증원하려다 실패했다. 국민들은 보건의료 위기 상황에서 굳이 의사들이 반대하는 정책을 왜 해야 하는지 정부에 물었다. 하지만 이후 ‘응급실 뺑뺑이’와 ‘소아과 오픈런’이 일상화되면서 국민들은 의사 증원의 필요성을 피부로 느끼게 됐다. 의사들은 이런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소아과 오픈런의 원인이 젊은 엄마들의 ‘브런치 타임’ 때문이라는 등의 발언으로 여론의 반발을 샀다.
‘지’는 자신의 강약점을 알고 지형지물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이다. 의사의 힘은 국민 생명을 다룰 수 있는 면허를 독점하고 있다는 것에서 나온다. 그러다 보니 의사 집단 휴진으로 생긴 의료 공백을 해결할 주체도 의사뿐이고, 결국 의사들이 버티면 정부가 물러나는 패턴이 반복됐다. 정부는 과거 실패를 감안해 진료지원(PA) 간호사 투입 등의 대안을 마련했고, 5월 말 대학 수시모집 요강 공고로 수험생과 학부모를 같은 배에 태우며 물러날 수 없는 배수의 진을 만들었다. 돌아보면 의사들이 자신들의 강점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었던 시기는 4월 총선 직전이었고, 마지막으로 발휘할 수 있었던 시기는 5월 말 모집 요강 공고 직전이었다.
‘장’은 지혜(智), 믿음(信), 어짊(仁), 용기(勇), 엄격함(嚴)을 겸비한 장수다. 법정단체 의협의 임현택 회장은 비타협적·기습적 게릴라 전술로 회장이 됐지만 14만 의사의 리더로서 통합적 리더십은 보여주지 못했다. 전공의(인턴, 레지던트) 대표와도 갈등을 표출하며 전공의 복귀가 목표인 정부가 의협을 상대하지 않게 만들었다. 병원을 떠난 뒤 누워 있기로 일관하는 전공의 대표, “가족 같은 전공의가 나갔는데 환자 치료나 하는 건 천륜을 저버리는 것”이라며 병원을 떠난 의대 교수도 덕이 있다고 보긴 힘들다.
마지막으로 ‘법’은 조직을 관리하고 보급망을 유지하는 매니지먼트 능력이다. 하지만 올 2월 전공의 이탈 후 의사단체의 4개월은 내부에서 분열과 불신, 독선과 비방이 반복되는 ‘사분오열’ 그 자체였다.
버티면 이긴다는 생각 이젠 버려야
의사 중 일부는 필자의 글을 보고 “아직 안 끝났다” “더 버티면 이길 수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전쟁의 승부를 결정짓는 다섯 요소 중 어느 것 하나 우위를 점하지 못한 상황이다. 더 이상 싸움을 이어가 봐야 전세를 뒤집기 어려울 거란 생각은 필자만 하는 게 아닐 것이다.
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06.25 뿌리면 독성 내뿜고 연쇄폭발...물로 잡기 힘든 '리튬전지 화마'
[화성 배터리 공장 화재]
화성 리튬 배터리 공장 사망자 왜 많았나
배터리 3만5000개 있는 공장서 '펑, 펑, 펑'… 작업자들 못 나와\

▲24일 경기 화성의 아리셀 공장에서 소방대원들이 화재를 진압하고 있다. /뉴스1
24일 경기 화성 리튬 일차전지 공장 화재는 건물 2층에서 발생했다. 근무시간 2층에서 발생한 화재로 근로자 20여 명이 고립됐고 결국 전부 숨진 채 발견됐다. 불은 이날 오전 10시 30분쯤 발생했지만 본격적인 수색은 오후 3시쯤에야 시작됐다.
경기소방재난본부 등에 따르면, 화재 당시 이 공장의 근무자는 총 67명이었다. 1층에 15명, 2층에 52명이 근무 중이었다. 1층에서 일하던 근로자는 폭발과 동시에 화재경보기가 작동해 전원 무사히 탈출했다고 한다. 2층에서 일하던 근로자 중 30여 명은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등 대피했고 22명은 2층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실종자 1명은 이날 오후 10시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소방 당국은 수색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소방 당국은 배터리 포장 작업 중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갑자기 발생했다고 밝혔다. 조성호 경기소방재난본부장은 현장 브리핑에서 “방범카메라 영상을 확인해보니 배터리에서 흰 연기가 나며 갑자기 발화했고 15초 만에 연기가 작업장 전체를 뒤덮었다”며 “직원이 소화기로 불을 끄려고 했으나 리튬이라 효과가 없었다”고 했다. 리튬 화재는 모래 등으로 꺼야 한다.
불이 난 곳이 2층 출입구 쪽이라 화를 키웠다. 소방 관계자는 “출입구 밖으로 대피했으면 인명 피해가 줄었을 텐데 다들 놀라서 오히려 작업장 안으로 더 깊게 들어갔다”며 “짧은 시간에 유독가스가 퍼졌고 일이 커졌다”고 했다. 실제 사망한 근로자 대부분이 2층 작업장 안쪽에서 발견됐다.

▲그래픽=양인성
리튬 일차전지에 들어가는 염화티오닐(SOCl2)은 무색 액체로, 섭씨 140도 이상에서 염소 가스를 발생시킨다. 물에 닿으면 독성 물질인 염화수소와 이산화황을 배출한다. 탈출한 직원들은 “1층은 대피에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2층은 연기가 심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인명 피해가 컸던 이유로 외국인 근로자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사망자 22명 중 20명이 외국인이었다. 실종자 1명도 중국인으로 파악됐다. 소방 당국 관계자는 “이들 외국인 근로자 대부분이 정규직이 아니라 용역 회사 소속 일용직이었다”며 “공장 내부 구조에 익숙지 않아 피해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사고가 난 공장 2층은 1200㎡ 크기로 여러 구획으로 나눠져 있었다.
당시 2층 근로자들이 탈출할 수 있는 계단은 2개였다고 한다. 하지만 1개는 사무실 쪽에 있어 작업장 근로자들이 대부분 몰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소방 당국 관계자는 “계단 모두 문이 잠겨 있거나 폐쇄돼 있지는 않았다”고 했다.
근로자들이 탈출하지 못하고 고립된 원인으로 당시 공장에 보관돼 있던 전지 3만5000여 개가 지목된다. 소방 관계자는 “보관된 전지 대부분이 지름 30㎝, 높이 45㎝ 크기의 군용 리튬 일차전지였다”며 “이 전지들이 ‘펑펑펑’ 소리를 내며 연쇄 폭발하는 바람에 직원들이 계단으로 탈출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현장 찾은 尹대통령 - 윤석열 대통령이 24일 오후 대형 화재가 발생한 경기도 화성시 일차전지 공장을 찾아 현장을 점검하고 있다. /뉴스1
구조대는 사고가 터진 지 5시간이 다 돼서야 수색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날 오후 11시가 되도록 실종자 1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소방 당국은 “선착대가 도착할 당시 내부에 있던 배터리가 수시로 폭발하며 급격히 불이 번져 진화에 어려움이 있었고, 구조대원의 내부 수색도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일부 실종 직원들은 휴대전화 위치 신호가 잡히지 않아 파악에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최초 발화 원인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경찰과 소방 당국은 25일 합동 감식을 실시해 구체적인 화재 원인 등을 규명할 계획이다. 소방 시설이 적절하게 설치돼 있었는지 여부도 조사할 방침이다.
06.25 소화 대책 없는 배터리 화재, 결국 인명 참사까지

▲<YONHAP PHOTO-5107> 화성 일차전지 제조 업체 화재 현장 (화성=연합뉴스) 홍기원 기자 = 24일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소재 일차전지 제조업체 공장 화재 현장에서 소방관들이 시신을 수습하고 있다. 2024.6.24 [공동취재] xanadu@yna.co.kr/2024-06-24 17:35:17/ <저작권자 ⓒ 1980-2024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
경기 화성의 리튬 일차 전지 공장에서 어제 화재가 발생해 20여 명이 숨졌다. 사망자 상당수는 외국인 근로자인 것으로 알려졌다. 화재는 일차 전지 완제품을 검수하고 포장하는 공장 2층에서 발생했다. 배터리 1개에서 연소 반응이 일어났고 보관 중이던 3만5000개 배터리로 불이 옮아붙으면서 피해가 커졌다고 한다. 리튬 배터리는 양극·음극·분리막·전해액으로 구성되는데, 분리막이 손상되면 열 폭주 현상에 의해 화재와 폭발이 일어난다. 이날 화재 현장에서도 연이어 폭발이 일어나면서 진화에 어려움을 겪었다.
배터리 공장 화재가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대형 참사로 이어진 것은 드물다. 배터리 화재는 큰 폭발로 이어질 수 있어 공장에선 배터리를 조금씩 나눠서 비치하고, 생산 직후 바로 출하하는 등 한곳에 모아두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공정 라인도 구분하고, 일하는 근로자들이 위급 상황 시 대피할 수 있도록 대피로도 여러개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이번 사고 공장에 이런 세밀한 대비가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
배터리 화재에 우리 사회는 아직 취약하다. 충전이 가능한 이차 전지가 쓰이는 스마트폰, 노트북, 전기차 등의 배터리도 분리막이 훼손되면 화재 폭발이 일어날 수 있다. 2년 전 ‘카카오 먹통 사태’를 초래한 SK C&C 데이터센터 화재도 지하 전기실에 보관 중이던 배터리 한 곳에서 스파크가 일어나면서 발생했다. 당시에도 자동 소화 설비가 불길을 잡지 못했고, 소방 인력이 8시간여 만에 불을 껐다. 배터리 한 개에서 촉발된 화재가 많은 사람의 일상을 한동안 마비시킨 것이다.
이제 배터리는 안 쓰이는 데가 없을 정도로 사용이 급증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전기차 한 대의 불을 끄는 데도 몇 시간이 걸리는 게 현실이다. 배터리 시설의 안전 기준과 소화 능력을 높이는 국가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
조선일보 사설
06-25 배터리공장 참사와 금속화재 법규도 없는 답답한 현실
일상생활에서도 배터리 사용이 급속히 늘어나지만, 배터리와 충전 장치는 물론 전기차·에너지저장시스템(ESS) 등에서 발생하는 ‘금속화재’는 소방 사각(死角)지대에 있다.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경기 화성의 리튬 일차전지 공장의 24일 화재 참사는 현장 안전 소홀 등이 기본적 요인이겠지만, 제도적 미비 등으로 인해 소방 작업을 제대로 못한 책임도 크다. 평일 오전 10시30분에 2층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대규모 인명 피해로 이어졌다.
리튬 전지는 전기차, 킥보드, 스마트폰 등의 빈번한 사고에서 보듯 화재 위험성이 크다. 완성된 배터리는 일정 분량씩 분리해 보관하고 신속히 출하했어야 했다. 이런 기본 수칙도 지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망 근로자 대다수가 외국인이다. 공장 구조를 숙지하지 못해 화재 반대편에 계단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수도 있다고 한다. 평소 화재 대비 교육이 제대로 진행됐는지도 의문이다.
이번 사고에서 드러난 근본적인 문제는, 현행 소방법상 리튬 등 금속화재가 화재 유형으로 분류되지 않아 전용 소화기를 개발할 기준조차 없다는 점이다. 정부와 국회의 무능력과 무신경이 황당한 대목이다. 리튬 등 금수성(禁水性) 금속은 연소 중에 물이 닿으면 수소 가스가 발생해 폭발 가능성이 커 전용 소화약제를 사용하거나 마른 모래로 덮어야 한다. 이번 화재가 난 공장에도 소화기는 있었는데, 무용지물이었다. 소방서는 모래를 가지고 왔지만 이미 불길이 커져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전기차, 드론, 로봇, ESS 등 배터리 산업 규모가 커진 현실에 맞춘 입법 등 제도 마련과 소방 설비 보완이 무엇보다 화급한 일이다.
문화일보 사설
06-25 아리셀 화재 사망자 모두 2층서 발견…내부구조 몰라 대피 늦은 듯

▲지난 24일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소재 일차전지 제조업체 공장 화재 현장에서 소방관들과 구급대원들이 시신을 수습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기 화성시 일차전지 업체인 아리셀 공장 화재로 숨진 근로자들은 모두 최초 발화지점인 공장의 2층에서 발견된 것으로 전해졌다.
연기가 갑자기 뿜어져 나오면서 입구 옆 계단을 통한 탈출이 어려웠고 대부분 일용직 노동자였던 피해자들이 내부 구조에 익숙하지 않았던 게 피해를 키운 것으로 보인다.
25일 소방당국 등에 따르면, 전날(24일) 화재로 현재까지 발견된 사망자 22명은 모두 건물 3동의 2층에서 발견됐다. 이들은 대형 작업장 한 곳에서 불길을 피하지 못한 채로 사고를 당했다.
불이 처음 발생한 곳은 대형 작업장의 입구 부근이다. 사고 당시 촬영된 CCTV 영상을 보면 배터리 하나에서 시작된 연기가 실내를 가득 채우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15초에 불과했다.
꽉 막힌 공간에 연기가 빠르게 번지면서 작업자들이 탈출로를 찾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작업장에는 외부와 연결된 창문도 있었지만 사람이 빠져나오기에는 크기가 작았다.
불이 난 3동에는 모두 67명에 있었는데 이 중 52명이 2층에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은 대부분 일용직 노동자로 리튬 배터리 완제품을 검수하고 포장하는 등의 단순 작업을 위해 투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호 경기도소방재난본부장은 "이곳에서 근무하던 외국인 근로자 중에는 용역회사에서 필요할 때 파견을 받는 형태로 근무하는 경우가 많다"며 "공장 내부 구조에 대해 잘 알지 못해 피해가 늘어나는 요인이 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화재와 함께 발생한 유독가스도 피해를 키운 원인으로 지목된다. 환경부에 따르면 아리셀은 리튬 외에 톨루엔, 메틸에틸론, 염화싸이오닐, 수산화나트륨 등의 화학물질도 취급했다. 이중 전지 전해액으로 사용되는 염화싸이오닐이 연소하면 염화수소 등 유독가스가 발생한다. 이 때문에 근로자들의 피해를 키웠을 수 있고, 덩달아 소방당국의 구조 착수 역시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이날 화재는 오전 10시 31분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소재 아리셀 공장에서 발생했다. 소방당국은 유해화학물질 취급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한 데다가 인명피해 및 연소 확대 우려가 있어 선제적으로 대응 2단계를 발령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이후 오후 3시 10분쯤 큰 불길을 잡고 건물 내부로 들어가 수색을 벌였다.
문화일보 김유진 기자
06.28 세계 뒤흔드는 위고비의 살빼는 원리, 한국연구팀이 밝혔다
'사이언스' 최신호에 게재
한미(韓美) 공동 연구진이 전 세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위고비 등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GLP)-1′ 계열 비만 치료제가 체중을 줄이는 원리를 세계 최초로 규명했다. 그동안 비만 치료제가 식욕을 줄이고 포만감을 높여 체중 감량 효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은 알려졌지만, 구체적인 작용 원리가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7일 서울대 의대 실험실에서 최형진 교수와 박준석 연구원, 김규식 연구원(오른쪽부터)이 뇌에 전극을 연결한 실험 쥐를 손에 올려 들여다보고 있다. 최 교수 연구팀은 쥐의 뇌를 레이저로 직접 자극하는 방식을 통해 GLP-1 비만 치료제가 작용하는 뇌의 부위를 밝혀냈다. /전기병 기자
최형진(47) 서울대 의대 교수와 케빈 윌리엄스 미국 텍사스대 사우스웨스턴메디컬센터 교수 공동 연구진은 “최근 비만 치료제로 쓰이는 GLP-1 유사체가 뇌의 시상하부에 위치한 DMH 신경에 작용해 포만감을 높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27일 밝혔다. DMH는 생리적 반응을 조절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동안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부위다. 이번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 최신호에 게재됐다.
이번 연구에는 국내 대표적인 의사과학자인 최 교수가 교신 저자로, 서울대 의대 졸업생인 박준석(25) 연구원이 공동 제1저자로 참여해 의학과 과학의 시너지를 증명한 사례가 됐다. 최 교수는 “부작용은 줄이고 식욕 억제 효과만 끌어내는 GLP-1 계열 치료제를 만드는 등 다양한 활용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했다.
◇뇌 신경 회로에 작용, 포만감 유발
GLP-1은 음식을 먹으면 위·소장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이다. 식사 후 인슐린 분비를 촉진하고, 포만감을 느끼도록 한다. GLP-1 계열 약물이 2020년대 들어 비만 치료제로 출시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과학자들은 지금까지 GLP-1 계열 약물이 식이를 조절하는 뇌의 시상하부를 자극해 비만 치료 효과를 보이는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신경에 작용하는지는 논란이 있었다.
연구진은 뇌의 신경 회로가 빛 자극에 반응하도록 유전자 조작된 실험 쥐를 활용했다. 시상하부의 특정 부분을 직접 자극해 어떤 신경이 GLP-1과 결합하는지 확인에 나섰다. 레이저 장비를 이용해 GLP-1과 결합하는 수용체가 많은 DMH 신경을 자극하자 쥐가 먹는 것을 중단했다. 포만감이 발생한 것이다. 반대로 신경 회로를 억제하자 배부름을 느끼지 못해 식사 시간이 길어졌다.

▲그래픽=김성규
◇배고픔 원인 찾는 의사과학자
연구를 이끈 최 교수는 10여 년간 식욕을 연구해 왔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학병원 내분비내과에 재직하던 2000년대부터 배고픔에 대한 고민은 시작됐다. 최 교수는 “심근경색으로 죽다 살아난 환자도 혈당 조절하겠다고 입원해서 몰래 과자를 먹더라”며 “당뇨, 비만 환자들이 식욕 문제로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식욕을 반드시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10년간 임상과 연구를 병행하던 그는 한계를 느끼고 2015년 서울의대 해부학교실에 교수로 부임하며 연구에만 집중하는 의사과학자로 전향했다. 최 교수는 “환자들을 치료하며 느끼는 보람도 있고, 연구에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환자 수가 많아 연구와 병행하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논문의 공동 제1저자인 박준석 연구원은 이런 최 교수의 연구에 흥미를 갖고 서울대 의대 예과생 시절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그는 지난 2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해 현재 서울대병원 인턴에 합격한 상태로 최 교수 연구실에 적을 두고 있다. 박 연구원은 “처음에는 졸업 요건을 채우기 위해 연구에 참여했는데 예과 2학년 때 GLP-1 계열 비만 치료제의 체중 감량 효과와 당뇨병 지표 간 상관관계에 대한 임상 논문을 주 저자로 발표하는 등 경험을 쌓으면서 연구에 흥미를 갖게 됐다”며 “방학과 연구 집중 기간 등을 이용해 연구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그는 “주변에서 의대 학점에도 영향을 주지 않는 연구를 하는 이유를 많이 물었는데 학생으로서 정말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라며 “앞으로도 ‘연구하는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공동 제1저자인 김규식(30) 연구원은 서강대에서 생명과학을 전공한 후 서울대 의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그는 “임상 경험이 있는 교수님과 함께 환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연구를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최 교수는 “미국의 경우 임상과 연구를 병행할 수 있도록 진료는 적게 보면서 병원에서 돈도 적게 받고, 연구비로 인건비를 충당하는 의사과학자 등 다양한 근무 방식이 존재한다”며 “환자 진료 과정에서도 얻는 아이디어가 많아 양쪽을 병행할 수 있는 체계가 잡힌다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서울의대 측은 “2008년 의과학과를 설립하며 적극적으로 의사과학자 양성에 나서고 있다”며 “최근에는 본격적으로 의사과학자 양성을 확대하면서 현재 환자 진료를 최소화하고 연구에 더 집중하는 의대 교수가 늘고 있다”고 했다.
☞GLP-1 비만 치료제
음식 섭취 시 분비되는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GLP)-1 호르몬 유사체를 기반으로 해원래 당뇨병 치료제로 개발됐다. 체중 감량 부작용이 발생하자, 비만 치료제로 활용 가능성을 주목받았다. 노보노디스크의 ‘위고비’와 일라이릴리의 젭바운드 등 이 성분의 비만 치료제가 여럿 출시됐다.
조선일보 김효인 기자
06.29 6월, 가족이라는 스토리
피해자면서 가해자였던 가족… 부친 몰아세웠던 기억 부끄러워
겨레의 비극이 집안에서 재현… 6월, 이념을 넘어 삶을 생각한다
그해 여덟 살이었던 아버지는, 마을 공회당 마당에서 할아버지를 찾기 위해 매 맞고 널브러진 사람들을 하나하나 뒤집어 보던 기억을 갖고 있다. 같은 때 일곱 살이었던 엄마는, 짐꾼으로 차출되어 끌려가던 남자들의 행렬에서 외할아버지가 자꾸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던 기억을 지니고 있다. 올해 여든둘, 여든한 살이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아버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던 일고여덟 살 아이로 돌아간다. 불도장을 찍은 듯 선명한 기억을 간직하고도 그들은 한 번도 나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여태껏 물어본 적이 없잖아?”
묻지 않았기에 말하지 않았다. 몇 백, 몇 천 년 전에 존재했던 국가와 민족의 역사는 마르고 닳도록 주워섬기면서, 내 피붙이들이 어떻게 시대와 부대끼며 살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묻지 않았기에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절반의 진실이다. 나머지 절반은 ‘피해자’의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의 집안이기에 고초를 겪어야 했던, 아버지가 홀로 간직하며 감당한 비밀이다.
천생 농사꾼이었던 할아버지를 이장이라는 이유로 끌고 가 뭇매질한 인민위원회 위원장은 남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삼촌이었다. 동족상잔이 형제혁장(兄弟鬩牆)으로 집안에서 재현되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사람들 더미에서 피로 칠갑한 할아버지를 찾아냈다. 할아버지의 여동생인 왕고모가 초주검이 된 오라비를 들쳐 업었다. 태산처럼 크고 무거운 가장을 걸머진 소녀와 어린아이가 함께 걸었을 고샅길을 떠올리면 목울대가 뜨거워진다.
사납던 시절에는 아버지의 근무지마다 담당 형사가 찾아와 동향을 살폈다고 한다. 연좌제가 폐지된 후 문자 그대로 ‘빨간 줄’이 그어진 서류를 수정하며 아버지가 느꼈을 복잡한 심정은, 한때 아버지를 ‘보수 꼰대’로 몰아세우며 공격했던 불민한 딸을 부끄럽게 한다.
‘스토리’는 사실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삶의 비밀을 밝히고 사람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 1950년 6월 29일, 서울 출장을 갔던 강원도교육청 소속 교원 일행은 전쟁으로 교통편이 끊기자 걸어서 춘천으로 돌아오다가 마석에서 인민군과 마주쳤다. 인민군은 일일이 신분을 물어 장학사와 교장·교감을 그 자리에서 총살하고 일반 교원들은 풀어 주었다. 전쟁 시작 나흘 만에 살해당해 가매장한 윤찬규 장학사의 시신은 휴전 후에야 의복과 소지품으로 신원을 확인해 수습할 수 있었다.
그때 김진태 강원도지사의 어머니 윤종애 씨는 창졸간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와 10남매의 생계를 책임진 소녀가장이 되었다. 김진태 지사의 아버지 김한규 씨는 6.25 참전용사이자, 1951년부터 2002년까지 7,987명의 동지를 잃은 국군정보사령부특임대(HID)의 북파공작원이었다. 지금도 강원특별자치도교육청 앞마당에는 윤찬규 장학사를 비롯한 순직 교원들을 기리는 동상이 우뚝하고, 화랑무공훈장 두 개를 수여받은 김한규 대위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들어 계신다. 가족의 ‘스토리’는 이념을 넘어 곧바로 삶에 육박한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김진태 지사는 단순히 ‘수구 꼴통’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매타작을 당한 나의 할아버지는 왕고모가 걸러내 온 똥물을 마시고 장독(杖毒)을 다스렸지만, 한번 꺾인 기력을 회복하지 못해 일찍 돌아가셨다. 짐꾼의 쓸모를 다한 외할아버지는 등 뒤로 쏟아진 총알 세례가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가 다른 사람을 맞추는 바람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누군가의 가족이 죽어 누군가의 가족이 살아남았다. 그토록 처절한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더 이상 세상에 없지만, 그들의 자손인 나는 그들로 인해 여기에 있다. 잊거나 잃어버린 ‘스토리’를 돌이켜 곱씹는 유월, 얄팍했던 삶이 갑자기 아프게 두터워진다.

조선일보 김별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