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애의 시시각각 중앙일보 편집국장대리 2024

01.05 선거여론조사, 날 서보이나 무딘...
MBC가 하루 만에 정정하는 걸 보니 새롭긴 했다. 코리아리서치에 의뢰해 지난달 29일부터 이틀간 전국 성인 남녀 1005명을 대상으로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를 물었더니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7%,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22%로 나온 걸 두고 전날 “이 대표가 앞섰다”고 보도했다가 다음 날 오류라고 바로잡았다. 둘의 차이가 5%포인트였으니 오차범위 내(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서 ±3.1%)였다. 단정적으로 말해선 곤란했다.
마땅한 사과였다. 그러나 마뜩잖기도 했다. 사과방송을 할 정도로 선거여론조사가 정확하다는 인상을 줬을 듯해서다. 잘못된 착시다.
여론조사는 전체 집단에서 무작위로 표본을 뽑아서 조사하고 그 결과로 전체 집단의 특성을 추정하는 것이다. 표본오차는 완전한 확률 표집을 전제로 한 건데 선거여론조사에선 대단히 어렵다. 아무리 연락해도 불응하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다. 박원호 서울대 교수가 이태 전에 쓴 글(‘선거여론조사 빛과 그늘’)엔 이런 취지의 대목이 있다. “응답률이 대체로 5~6%인데 20명에게 전화를 걸면 1명이 조사에 응한다는 것이다. 애초 전화를 받지 않거나, 차단하거나 받자마자 끊어버리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미국여론조사협회(AAPOR) 기준으론 아마 5%보다 훨씬 낮은 값일 것이다. 예컨대 이 값이 1% 정도라면 응답하지 않은 99명을 1명이 대표하게 되는 것이고, 여기에 확률 표집에 기반한 표본오차는 아마도 지나치게 낙관적인 추정치일 것이다.”
응답률은 더 낮아지고 있다. 지난달 초 한국조사연구학회 발표(‘누가 선거여론조사 참여자인가’)에 따르면 한국갤럽의 데일리 오피니언 응답률은 2022년 10%대 초반이다가 지난해 10% 아래로 떨어졌다. 응답자들의 조사 피로도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 놀라울 정도로 많은 조사가 이뤄졌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여심위)에 등록된 조사만 봐도 대선·지방선거가 있었던 2022년엔 2423건에 달했다. 단군 이래 최대였다. 한 건당 이틀 정도 조사했다고 치면 매일 13군데에서 전화를 돌렸다는 얘기가 된다. 여심위 관계자는 “한 사람이 40번 이상 받은 경우도 있다더라”고 전했다. 처음엔 응하던 사람도 종국엔 그만두게 됐을 것이다.

▲새해 첫 날이자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를 100일 앞둔 1일 경기도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현관 화면에 '디데이' 표시가 되어 있다. 연합뉴스
그렇다면 극소수의 응답한 사람이, 다수의 응답하지 않은 사람들과 같은 의견일까. 지금까지는 그렇다는 전제였고 설령 달라도 감내할 차이라고 여겼다. 응답률이 더욱 떨어진 지금은?
총선 앞두고 여론조사 급증하나
응답률 하락 등 조사환경 나빠져
결과 맹신하거나 일희일비 말아야
흥미로운 건 양질 조사의 대표 격인 한국갤럽과 전국지표조사(NBS,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 공동조사)가 유사한 시기에 동일한 방식으로 하는데도 정당지지도나 총선 구도 인식 조사 등에선 다른 추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그나마 국민의힘 지지도는 엇비슷한데, 더불어민주당과 무당파(소수정당) 지지도에선 어긋난다. 한국갤럽은 상대적으로 민주당이, NBS는 무당파가 더 잡히는 경향이다. 이를 설명하는 여러 가설 중에 ‘워딩(단어 선택) 효과’도 있다(정한울 한국사람연구원장 등). “정부·여당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NBS), “여당 후보가 많이 당선돼야 한다”(한국갤럽) 정도 차이라는데도 그렇다.
4·10 총선을 앞두고 여론조사가 쏟아져 나올 텐데, 매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자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다. 박 교수의 주장대로 우리 조사는 “충분히 날카롭다고 착각한,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것도 벨 수 없는 값싸고 무딘 칼”일 수도 있다. 공천의 잣대로 쓰이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무기로도 사용되긴 하겠지만 말이다. 민의를 측정할 마땅히 다른 ‘도구’가 없어서라고는 하나 너무 남용되고 있다. 분명한 건 여론조사는 투표가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여심위 등록업체 자체는 좀 줄어든다는 점이다. ‘떴다방’ 수준의 업체를 걸러내자는 차원에서 인적 요건을 강화했더니 30여 곳이 미달했다고 한다. 지난해엔 88곳이었다. 물론 여전히 많다.⊙
01.19 민주당, 위성정당 할 거면 직접 하라
4년 전 현장 기자들의 흥미로운 취재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서울 마포구의 한 음식점에 갔다가 인근 방에서 들려오던 대화가 특종이 됐다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핵심 인사 5인이 위성정당을 하기로 논의하는 과정이어서다. 운이 좋았지만, 운도 실력 아닌가.
당시 민주당은 군소 야당과 담합해 청와대의 의지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신설 법안과 군소 야당의 염원인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법안(선거법)을 강행 처리했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지역구에서 다수의 의석을 얻으면 이에 연동해 비례대표에선 의석을 얻기 어렵게 만든 제도다. 거대 정당인 민주당·자유한국당(국민의힘)이 각각 20석 안팎의 손해를 봐야 했다. 자유한국당은 법이 통과되면 비례대표용 위성정당을 만들겠다고 반발했다. 민주당은 설마 했다. 곡절 끝에 결국 자유한국당의 위성정당(미래한국당)이 등장했다.
위성정당 외주하며 공천도 외주화
그 결과물이 윤미향·양정숙·최강욱
정당의 기본이 공천, 직접 관장해야
5인 회동은 그 직후였다. 방음과 무관한 구조 덕분에 이들의 적나라한 토로를 들을 수 있었다. 공개적으론 자유한국당을 비난했지만 따라 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었다고 한다. 이해찬 대표의 최측근인 윤호중 사무총장은 “저들이 저렇게 나오면 우리도 사실 방법이 없는 게 아니다”고 했고, 국회 정개특위 간사로 선거법 협상을 했던 김종민 의원은 “명분이야 만들면 되지 않느냐. 겁먹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아이러니한 건 한국 정치를 알바니아 수준(위성정당이 난립했다)으로 퇴행시킨 공수처는 3년간 ‘유죄 0건’이고, 애당심의 김종민 의원은 ‘미래’ ‘개혁’을 내세우며 탈당했다. 허업(虛業)이었다.
어쨌든 5인 회동 보도 이후 민주당이 주춤할 줄 알았다. “위헌”이니, “위장정당”이니 그간 쏟아낸 말이 무시무시했다. 민주당의 염치는 상상 이상이었다. 외려 속도를 냈다. 진보 쪽 ‘시민사회’가 만든 플랫폼 정당에 합류하는 모양새만 취했을 뿐이다. 친문들의 비례용 정당인 열린민주당도 창당했다.
위성정당인데도 아닌 양 하는 사이, 공천 결과물이 어떠했는지 지난 4년 절감했다. 위안부 할머니 후원금 횡령 의혹으로 항소심에서 징역 1년6월, 집행유예 3년을 판결받은 윤미향 의원, 부동산 의혹으로 제명된 양정숙 의원, 조국 전 장관의 아들에게 로펌 인턴확인서를 허위로 써 준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한 최강욱 전 의원 등이 도드라진다. 덜 드러났을 뿐, 정상적인 과정이었다면 공천되지 않았을 자질의 인물도 다수다. 이들을 모두 품은 민주당은 공천 과정에 대해선 말을 꺼렸다. 윤미향 의원을 두고도 “더불어시민당에서 논의가 있었다”고만 했다. 위성정당을 외주화하더니 책임도 외주화한 것이다.
이번에도 이래선 곤란하다. 원래 정당은 “다른 조직과 달리 공직 후보를 지명하고 그들을 공직에 선출함으로써 정부를 통제하는 역할”(EE 샤츠슈나이더)을 한다. 공천은 기본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공천 과정에서 검증하고 또 검증도 된다. 민주당이 다시 이를 다시 남에게 넘긴다? 안 될 일이다.
물론 민주당의 선거제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이재명 대표가 “멋있게 지면 무슨 소용이냐”고 한 뒤 이전 방식(병립형)으로 돌아가는 듯하다가 당 안팎의 “정치개혁 후퇴”란 반발이 커지자 주춤한 상태다. 이 대표는 18일에도 “아직 정해진 건 없지만 명분과 실리가 일치하지 않는데 가능한 한 균형점을 찾을 것”이라고 했다. 사실 ‘멋의 포기’와 병립형이 직결되는 건 아니다. 지난 총선 때 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 멋없더라도 지지 않는 기술(위성정당)을 시연했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쉽다. 군소 정당에서 이미 "비례연합정당을 만들자"고 하자 민주당 일각에서 "민주당 주도가 아니니 위성정당 논란과 전혀 상관없다"고 동조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어느 쪽으로든 결론이 날 것이다. 민주당이 현 제도를 고수키로 한다면 눈 가리고 아웅 하지 말고 직접 위성정당을 만들어라. 그나마 책임정치다.⊙
01.31 윤 대통령 사과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의 사과에도 일종의 법칙이 있다. 자신들이 하지 않은 일엔 기꺼이 사과하려고 한다.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선 그 이상으로 사과하길 꺼린다. 대통령하고 가까운 사람과 관련될수록 더욱 그렇다. 마냥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숙여야 한다.
사견 아니냐고? 관련 연구가 제법 있다. 8년 전 ‘위기관리 시 대통령의 사과 유형에 관한 연구’(이정진)란 논문에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했다.
“대통령은 사태가 심각해도 위기의 본질이 자신과 측근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변명의 여지가 있을 때는 유사(類似) 사과를 선택하려 하고, 지지도가 높은 때보다는 지지도가 낮고 여론의 비난이 심할 때 책임을 인정하는 경향을 가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통령의 사과가 사안의 성격과 상황, 지지율의 함수일 수 있다는 얘기다.
대통령들, 사과 늦추다 곤란해져
DJ는 아들 건에 세 차례나 사과도
이미 늦어…이제라도 고개 숙여야
사례는 많다. 우선 YS(김영삼)와 아들 현철씨 건이다. 정권 초부터 암암리에 제기되던 김씨의 국정개입 논란이 1997년 1월 한보 비리 몸통설과 만나면서 끓어올랐다. 한보 부도 직후 야당에서 “한보의 천문학적인 대출에 민주계의 젊은 부통령이 개입됐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주장했다. YS는 “엉뚱하게 현철이 얘기가 왜 나오느냐”고 펄쩍 뛰었다. 국민적 반감은 폭발 국면으로 치달았다. YS는 검찰총장까지 교체해 가며 수사를 지시했고, 결국 검찰이 별건으로 찾아낸 게 YS 대선자금 중 일부가 다른 사람 명의로 예치된 거였다(조세포탈죄). YS는 “아들의 허물이 곧 아버지의 허물”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DJ는 2002년 두 아들(홍업·홍걸)의 금품수수 의혹이 터져나오자 1차로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사과했다. 혐의가 짙어지자 2차로 청와대 비서실장이 대독하는 사과문을 냈다.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는 문구가 있었다. 둘 다 구속된 후엔 직접 카메라 앞에 섰다. “자식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책임을 통절하게 느낀다”
“국민 여러분께 마음의 상처를 드린 데 대해 부끄럽고 죄송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56일간 세 차례 고개를 숙인 셈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30일 경기도 성남시 판교제2테크노밸리기업지원허브에서 열린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 일곱번째, 상생의 디지털, 국민권익 보호'에서 회의 영상을 보고 있다. 사진기자협회
사과 당시 지지율(리서치앤리서치 기준)은 YS는 10%대, DJ는 38%대였다. 공보처 장관으로 YS와 임기를 같이한 오인환은 “김현철씨가 조세포탈죄로 기소된 건 DJ의 세 아들이 금품수수죄로 기소된 것과 다르다”며 “돈을 밝힌 DJ의 세 아들보다 김씨가 더 국민적 지탄을 받았다. 국정 개입 문제를 여론이 더 크게 보았기 때문”(『김영삼 재평가』)이라고 말했다. 실제 DJ의 경우 사과 후 아들들 비리 이슈는 수그러들고 대선 국면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다들 알다시피 MB(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도 용서를 구한 일이 있었다. 사실상 대선을 포기했다는 얘기를 들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 정도만 임기 말 측근 비리에도 버텼다.
윤석열 대통령이 사과의 문턱에 서 있다. 지난해 11월 말 첫 보도 이후 대통령실의 침묵(내지 방치) 속에서 퍼지던 김건희 여사의 디올백 논란이 임계점을 넘어 대통령과 여권 2인자가 충돌하는 사안으로 커졌다. 윤 대통령이 주저하는 사이 김 여사의 처신 문제였던 게 대통령의 국정수행 방식(또는 판단력)에 대한 문제가 됐다. 국민을 가장 앞세워야 할 대통령이 가족을 앞세우느라 국민과 맞서는 모양새가 됐다. 지지율이 내려갔고, ‘설명’이면 됐던 사안이 사과해야 할, 어쩌면 그 이상의 조치가 필요한 사안으로 커졌다. 윤 대통령의 책임이다.
다시 오인환의 글이다. “아들에 대한 수사를 계기로 YS는 가족들과도 편치 않은 입장이 됐다. (중략) 고뇌 속에 YS는 별건 수사 시비에 상관없이 아들을 구속해 법정에 세우는 결단을 내렸다. 냉소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정치 9단의 YS가 자신이 살기 위해 아들까지 희생시키려는 게 아니냐’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대통령은 원래 그런 자리고, 그래야 하는 자리다. 모두 윤 대통령의 입을 주시하고 있다.⊙
02.14 '건국전쟁'이 말하지 않은 것
영화 ‘건국전쟁’을 보며 문득 공로명 전 외교장관이 전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말년이 떠올랐다.
“이 대통령은 4·19 이후 하와이로 간 다음 뇌일혈로 쓰러져 오랫동안 미 육군병원에서 요양했다. 당시 자주 문병했던 이동진 목사에 의하면 말년의 이승만 박사는 영어를 다 잊어버려 한국어로만 통화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는 영어를 잊어버린 이승만 박사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나의 외교노트』)
이 전 대통령의 영어 구사력은 남달랐다. 당시 외무부가 경무대(지금의 대통령실)에 올리는 문서를 영문으로 작성했을 정도라고 한다. 건국과 한국전,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으로 이어진 격랑의 외교 속에서도 이 전 대통령의 영어는 빛났다. 그런데 영어를 잊었다? 하기야 우린 건국(nation building) 과정에서 그의 분투를 잊었다.
자학적 사관의 콘텐트 양산되던 중
이승만의 공 크게 부각한 다큐 인기
역사는 선악문제 아냐, 진영화 곤란
사실 이 전 대통령의 마지막에 대한 동시대 지식인들의 기억은 썩 좋지 않다. 당시 현장 기자였던 조용중은 ‘이승만 12년 왕조’라고 했다. 1954년 4사5입 개헌부터 59년 조봉암 사형으로 이어진 50년대를, 이승만 독재를 지탱하기 위한 격동의 연속이라고 봤다. 다만 조용중은 4·19 직후 부산 데모대를 지켜보던 야당 의원이 “여보, 조 동지, 저건 난동이야. 지금은 아직 이 대통령이 있어야 돼. 학생들이 저러면 안 되는데…”라고 말했을 때 아무런 이론(異論)을 달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건국 과정의 냉철한 관찰자였던 미국 외교관 그레고리 헨더슨의 시각도 미묘하다. 리더십은 인정했다. “미국은 자신들의 이익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반면 이승만은 방향감각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평가가 어떠하든지 간에, 또 민주주의 수행에 그가 과연 진실성을 갖고 있었는지 의심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리고 그의 경제적 지식 결여에도 불구하고 그는 뛰어난 지도자였다. 당시 혼란했던 정세 아래서 철수를 단행한 미국으로선 이러한 인물을 발견한 것이 행운이었다.”(『소용돌이의 한국정치』)

▲이승만 전 대통령의 생애와 정치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예상 밖의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개봉 열흘째인 전날까지 누적 관객 수는 18만여명에 달한다. 사진은 12일 서울 시내 영화관 매표기. 연합뉴스
통치에 대해선 비판적이었다. 이 전 대통령이 민주주의적 개념을 지지하지 않았고 행태도 일본 것 그대로였다고 봤다. 정치적 기능과 정신은 조선시대의 현대판이라고 인식했다. 특히 부정부패를 두곤 “당시 다방가에 유포되던 소문에 따르면 이승만 정권 때 각료 129명 중 재임 중 재산을 늘리지 않은 건 단 두 명인데, 한 명은 어리석을 정도로 정직하고 금욕적이었던 변영태 외무장관이었고 한 사람은 재임 기간이 너무 짧아서 미처 이권에 손을 댈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건국전쟁’이 다큐멘터리라, 그 내용이 진실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 엄밀하게 보면 취사선택한 사실의 나열이다. 상당 부분 맥락이 소거된 채다. 덕분에 이 전 대통령의 공은 크게 증폭됐고 과는 크게 축소됐다. 이승만 정권은 놀라운 성취 못지않게 재난적 말로를 보였다. 다큐는 진실의 일부분을 보여줄 뿐이다.
그렇더라도 불편하기보단 반가웠다. “(영화판에) 좌파가 99.9%”란 김덕영 감독의 말이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그동안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 대해 자학하는 내용의 콘텐트만 양산됐기 때문이다. 교과서까지 그러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실관람평에서 ‘어디까지 진실인지 혼돈스럽다. 내가 배운 역사와 너무 달라. 진실이라면 교육 당국 사형시켜야 함’이란 글을 봤다. 이해한다. 지금 현대사는 진영전의 무기다. 이 전 대통령의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정당이 원내 1당이다. 그 당의 원내대표는 “해방 후 이승만 정권에서 독립운동했던 사람들”이란 말도 했다. 이승만 정권이 대한민국 정부가 아니기라도 한 모양이다. 역사는 선 또는 악 사이 택일이 아니다. 그사이 어디쯤이다.
다큐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무렵 극장 안 곳곳에선 울음소리가 들리고 박수가 터져 나왔다. 우리, 정상은 아니다.⊙
02.28 ○○조국당, 조국○○당
청와대 민정수석은 격무다. 건치 몇 개를 임플란트로 바꿀 정도가 돼야 나올 수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개인 책’을 낸 이가 있으니 2018년 8월 조국 당시 수석이었다. 그의 설명은 이랬다.
“2017년 5월 민정수석으로 임명되면서 연구활동을 전면 중단하게 됐다. 그런데 2006년 미국 민권운동가 타라나 버크가 최초로 제창한 ‘미투운동’이 2017년 미국에서 폭발적으로 전개되고 2018년 한국에서도 전개되는 양상을 접하면서 전면 개정판을 발간하게 됐다.”(『형사법의 性 편향』)
대통령 발의 개헌안까지 관장하던 시기였다. ‘다행히 주말에 짬’을 냈다? 놀랐다. 260여 쪽을 넘기다 마지막 부분에서 이 문장을 발견하곤 더 놀랐다.
“‘여성에게 조국은 없다’고 외치며 거리에 나온 여성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기존 팬덤, 기성 정당 공략해 장악
'조국신당'은 팬덤이 아예 창당
나빠진 정치 더 나빠지게 할 수도
자신의 제안 수용을 바라며 한 말인데, 정작 안희정 전 지사에 대한 1심 무죄 규탄대회의 명칭은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였다. 뜬금없이 ‘조국이 없다’니. 조국(祖國)은 ‘조상 때부터 대대로 살던 나라’란 의미가 강하다. 민족주의적이다. 국가는 공권력을 독점한 단체를 칭한다. 여성들이 요구할 대상은 조국 아닌 국가일 수밖에 없다. 오용한 건 그였다. 그의 이름이 조국(曺國)이 아니어도 그랬을까. 놀라운 자기애의 발현이라고 생각했다.
26일 조국신당(가칭) 창당준비위와 중앙선관위 사이에 오간 문답을 보며 당시 기억이 떠올랐다. 창준위가 14개의 당명 후보를 보냈고, 선관위는 하나만 불허했다. 길지만 모두 쓰면 이렇다.

▲가칭 '조국신당' 인재영입위원장을 맡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25일 오전 서울 동작구의 한 영화관에서 열린 '조국신당 창당준비위원회 인재영입 발표식'에서 1호 영입인사로 선정된 신장식 변호사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국신당, 조국(의)민주개혁(당), 조국(의)민주개혁행동(당), 조국민주행동(당), 조국을 위한 시민행동(당), 조국시민행동(당), 조국민주당, 조국민주당(祖國民主黨), 민주조국당, 민주조국당(民主祖國黨), 조국개혁당, 조국개혁당(祖國改革黨), 조국혁신당, 조국혁신당(祖國革新黨).
이 중 조국신당만 안 됐다. 2020년 ‘안철수 신당’을 금지한 것과 같은 논리일 것이다. 한자어를 병기한 걸 뺀 나머지도 의도적으로 祖國·曺國을 뒤섞은 게 아닌가 싶다. 특히 ‘조국(의)민주개혁(당)’이나 ‘조국(의)민주개혁행동(당)’ 속 조국이 祖國이기만 하겠는가. 선관위가 과거 ‘친박연대’를 허용했기에 이번에도 그리 판단했을 텐데 대단히 아쉽다. 특정인을 위한 정당이란 게 헌법상 허용돼야 하는지 의심스럽다.
많은 이가 총선 과정을 보며 ‘최악’이란 단어를 떠올릴 것이다. 위성정당은 더 나빠졌다. 한쪽은 ‘부하 정당’을 만들고, 한쪽은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는 세력의 여의도행 배지(培地)가 되고 있다. 단지 “50% 가산점을 주는 것만으론 신인엔 도움이 안 된다”던 직전 공관위원장의 고언을 망각한 무감동의 국민의힘은 안타깝고, 친노·친문이 반대파를 날리기 위해 활용했던 ‘시스템 공천’을 더욱 가공할 무기로 업그레이드해 반대파들을 발본색원하는 반민주적 민주당과 그 대표엔 경악하게 된다.
조국신당의 문제도 못지 않다고 여긴다. 그가 지난 7일 2심에서도 자녀 입시 비리와 감찰 무마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은 내로남불의 ‘범죄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누군가 “감옥 갈 확률 99%”의 창당이라고 표현했던데, 국회를 범죄자 도피소로 만들기 때문만도 아니다. 팬덤 정치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여서다. 그간 팬덤은 기존 정당의 인물을 발견해 리더로 삼곤 했다. 그러고는 기성 정당을 압박하고 대체했다. 그 결과 민주당은 10여 년 만에 뿌리를 잊었다.
조국신당은 아예 정당을 차린 경우다. 태생 자체가 팬덤 정당이다. 10석 정도 기대한다는데 여론조사만 보면 불가능해 보이지만도 않는다. 장차 이들이 여의도에서 보일 ‘반정치’가 두렵다. 소수라 괜찮다고? 불타협의 과격한 소수가 때론 가공할 변화를 만들어내곤 했다. 기우였으면 좋겠다.⊙
03.13 민주당, 불평등 한·미 해체 동의하나
'국회 프락치 사건'을 이승만 대통령의 권위주의 통치 시작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교육부 산하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펴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엔 이렇게 기록돼 있다.
“1949년 5월부터 8월까지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소장파’ 국회의원들 10여 명이 검거되었다. 그들이 기소된 이유는 국제연합 한국위원단에 외국군 철퇴와 군사고문단 설치에 반대하는 진언서를 제출한 행위가 남조선노동당 국회 프락치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 모두는 혐의 사실을 부인했으나 재판부는 고문으로 인한 허위 진술의 자백 내용과 신빙성이 검증되지 않은 암호 문서를 근거로 1950년 3월 14일에 국회의원 13명에게 모두 유죄를 선고했다.”
대백과는 피고인 대부분이 한국전 발발 후 월북했거나 납북됐다며 “사건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썼다. 그러나 ‘고문으로 인한 허위 진술’ 등에서 연구원의 판단이 드러난다. 과연 그런가.
민주당 위성정당 비례 1번 사퇴
위성정당 아닌 양 위성정당하려
진보당·반미 인사와 손잡다 사달
1991년 발간된 납북 요인들에 대한 삶에 대한 증언록(『압록강변의 겨울』)엔 프락치 사건 관계자들의 얘기도 담겼다. 조소앙·안재홍 등 납북 인사들이 기거하는 집마다 프락치 사건 관계자들이 한 명씩 있었다고 한다. 북한 정보국 요원들이 이들을 만나 함께 기거하는 다른 납북 인사들의 동태에 관해 묻곤 했다는데, 일부 프락치 사건 관계자들에겐 이게 불만이었다. 이들은 “우리가 남로당 비밀당원으로서 국회에서 큰 활동을 했고 감옥살이까지 했기 때문에 북에 오면 큰 대우를 받을 줄 알았는데…”라고 한탄했다는 것이다.
북한도 1997년 5월 노동신문을 통해 “간첩 성시백이 1948년 가을부터 국회를 대상으로 공작을 폈고 김약수 부의장과 의원 수십 명을 포섭하는 데 성공해 ‘외군 철퇴 요청안’을 발표케 했다”고 보도했다. 공보처 장관 출신 오인환은 “국회 프락치 사건은 뒤늦게나마 진짜 국보법 위반 사건임이 북한에 의해 사실로 확인됐다”(『이승만의 삶과 국가』)라고 썼다.

▲더불어민주연합 비례대표 국민후보로 선출된 왼쪽부터 청년운동가 출신 전지예씨, 농민 출신 정영이씨, 김상근 더불어민주연합 국민후보 추천 심사위원장, 의료인 출신 김윤씨,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 뉴시스
여전히 다수에겐 ‘프락치 사건 관계자=무고한 피해자’로 새겨져 있을 것이다. 반공을 통치 원동력으로 삼아온 권위주의 체제에서의 경험 탓일 것이다. 진짜 무고한 피해자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그러나 북한이 우리 체제에 침투했고,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할 것이란 사실 또한 분명하다. 이를 경계하자고 하면 지금도 관성적으로 ‘색깔론’으로 치부해 버리는 이들이 많다. 불행한 일이다. 민주당도 예외는 아니다. 주축 586 중 일부가 1995년 남파 공작원과 접촉했을 때 북한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당국에 신고하지도 않았던 데서 드러나듯 일종의 ‘못 본 체’도 한다.
요즘 민주당의 비례용 위성정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면 아예 판을 깔아준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과거에도 진보 정당과 선거연대를 한 적이 있다. 당시 노회찬·심상정의 당이었다. 지금 손잡은 진보 정당은 진보 진영에서도 ‘종북’이란 비판을 받던 세력이 집어삼킨 정당이다. 남북 간 전쟁이 벌어지면 남한의 국가시설을 파괴하는 방안을 모색하던 정당의 후신이기도 하다.
결국 비례대표 1번이 유력했던 반미단체 출신의 전지예가 후보 사퇴를 했지만, 박홍근 민주당 의원이 진보당과 각종 반미·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박석운·조성우와 손을 마주 잡을 때부터 예상됐던 일이다. 민주당에선 뒤늦게 “매우 우려한다”고 했던데, 우세스러운 일이다. 덜 소란스러울 뿐 제2, 제3의 전지예가 나올 것이다.
민주당이 대놓고 위성정당을 하면 될 걸, 아닌 듯하다가 이 사달이 났다. 정상적으로 하면 원내에 한 석 얻기도 어려운 정당에 너덧 석 이상을 안겨주게 됐다. 민주당이 그만큼 후한 건가, 순진한 건가, 그리돼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진보당 강령엔 “불평등한 한·미 관계를 해체하겠다”는 게 있다. 이런 곳에 기꺼이 의석을 떠안기는 민주당은 도대체 어떤 생각인가.⊙
03-27 아무나 정치해선 안 됐다
비사회주의 좌파 운동가 중에 사울 알린스키란 인물이 있다. 생전에 “너희가 정말 행동하는 사람으로 살려면 자기 침대에서 죽을 생각은 말라”고 했다는데, 그의 마지막이 그랬다. 길을 걷다 쓰러져 숨졌다. 그가 쓴 책 중에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이 있다. 가진 자들을 위해 권력을 유지하는 법을 담은 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라면,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을 위해 권력을 빼앗는 방법을 담은 게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이라고 그는 자부했다.
급진주의자이니 교조적일 것이라고 짐작하겠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많은 이에게 미움 또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그는 이렇게 단언했다. “독단적 교리를 혐오하고 또 두려워한다.” 그는 그러면서 “인간의 정신은 과연 우리가 옳은지를 살펴보는 내적 의심이라는 작은 불빛을 통해서만 빛날 수 있다”며 “자신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완전히 확신하고 있는 자들은 내적으로 어둠에 가득 차 있고, 외적으로는 잔혹감과 고통·불의로 세상을 어둡게 한다”고 주장했다.
일방 독주나 악마화는 정치 아냐
정치과잉 같으나 실제론 정치부재
대화·타협의 진정한 정치 가능할까
그에게 타협은 ‘아름다운 단어’였다. 100%를 요구했다가 30%에서 타협해도 30%는 얻은 것이라고 봤다. 그게 새로운 출발점이 될 터였다. 그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회는 끊이지 않는 갈등 그 자체며, 갈등은 간헐적 타협에 의해 멈추게 된다. 그 타협은 갈등과 타협 그리고 끝없이 계속되는 갈등과 타협의 연속을 위한 출발점”이라고 인식했다.
의사소통은 절대 중시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험에 비춰서만 사물을 이해한다. 이는 당신이 그들의 경험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더욱이 소통은 양방향이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당신의 생각을 그들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한다면 당신은 사물의 전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길게 인용했다. ‘조직가’를 ‘정치가’로 바꿔도 맞는 말이어서다. 설마 하겠지만, 진짜 그렇다. 실례도 있다.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은 알린스키의 사상적 세례를 받은 이들이다. ‘내적 의심’, 타협과 의사소통은 정치가에게도 필수적 자질이다. 인간 간 적대와 싸움 본능을 평화적으로 처리하는 게 정치여서다. 정치란 본질적으로 “차이를 없애는 게 아니라 차이를 공존할 수 없는 적대가 아닌 생각의 차이나 이견으로 이해하고 그 속에서 좀 더 나은 공적 결정에 도달하기 위해 경쟁하고 타협하고 싸우고 조정하는 ‘종합예술’ 같은 것”(박상훈)이다. 공적 결정에 사(私)가 배제될 순 없겠으나 사로 뒤범벅될 순 없다.

▲(대전=뉴스1) 김기태 기자 = 대전 중구청 직원들이 26일 대전 중구 서대전초등학교에서 진행된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및 중구청장 재선거 대비 사전투표 모의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는 정당 38곳으로 비례대표 투표용지가 51.7cm로 역대 최장 기록을 세웠다. 2024.3.26 /뉴스1
누군가의 표현대로, 요즘 ‘누구나 정치할 수 있지만 아무나 정치해선 안 된다’(박성민)는 걸 절감하고 있다. 정치도 1만 시간이 필요한 고도의 전문직이란 점도 새삼 느낀다. 요새 정치 좀 한다는 이들은 갈등을 증폭하고, 차이·이견을 공존할 수 없는 적대로 키운다. ‘정치’란 외피를 두른 채 말하고 행동하니, 많은 이가 이런 행태를 개탄하며 ‘정치 혐오’로 인식한다. 매번 정치 안 해 본 사람을 새로 소환하지만, 그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일방 독주가 정치인가? 아니다.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게 정치인가? 아니다. 사적 복수를 위해 공적 자원을 소모하는 게 정치인가? 아니다. 우리가 혐오하는 건 정치 자체가 아닌 정치의 부재다.
대체로 원칙이라고 동의하기 어려운 것도 원칙이라고 고집하는 대통령과, 탄핵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치른 지 불과 몇 년인데 또 대통령 임기를 중단시키겠다는 세력이 맞서고, 의원 배지란 사익을 위해선 존엄성마저 내려놓고 돌진하는 혼미한 정신들로 넘쳐나는 총선 목전이라 더욱 진짜 정치를 그리워하게 된다. 대화하고 타협하며 공통의 공익을 찾아가는 것, 답답해 보일지언정 그게 정치다. 어떤 어려움에도 그걸 해내겠다는 사람이 정치가다. 그런 정치와 정치가가 있는가. 우리에게 그걸 가려낼 의지가 있는가.⊙
04.10 이렇게 투표하는 게 맞을까
우리가 사는 세계는 단순다수제(first-past-the-post)가 지배한다. 대선이든, 총선 지역구든, 지방선거든 한 표라도 많으면 승자가 된다. 실제 지방선거에선 한 표 차로 이긴 사례가 있다. 총선에선 세 표 차였다(2000년 경기도 광주).
분명 그렇지 않은 세계도 있다. 후보자가 세 명 이상일 경우 과반 아닌 후보가 당선되곤 하는데, 대표성이 충분하냐는 문제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다. 19대 대선이 예일 수 있겠다. 문재인 대통령이 17%포인트 차로 당선됐다(득표율 41.1%). 기권자를 포함한 전체 유권자로 보면 10명 중 7명(68.4%)은 문 대통령에게 표를 주지 않았다.
단순다수제의 경험이 가장 오랜 영국에선 그래서 19세기부터 대안이 모색됐다(영국답게 여전히 단순다수제다). 토머스 헤어가 제안했고, 친구인 존 스튜어트 밀이 열렬히 옹호한 방식이 그중 하나인데, 단기이양(單記移讓)투표제(single transferable vote)다. 밀의 설명은 이랬다. “유권자가 투표용지에 일차적으로 선호하는 후보 외에 차선의 후보 이름도 적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신이 일차적으로 지지한 후보가 당선 가능한 수의 득표를 하지 못한다면 그다음 순위의 후보가 득을 볼 수 있다.”(『대의정부론』)
한 표 더 많으면 되는 단순다수제
열성층 동원하는 혐오정치에 취약
중도층 위해 결선투표 등 검토해야
대영제국에서 퍼져나가던 아이디어는 호주에서 실현됐다. 한 번의 투표로 과반 당선자를 만들어낼 비법을 찾아냈다. 1918년부터 적용된 선호투표제(preferential voting)다. 5명이 후보라면 투표할 때 1위부터 5위까지 선호도를 표기한다. 개표할 땐 1위 표부터 센다. 절반에서 한 표라도 많은 이가 나오면 그가 당선된다. 없다면 꼴찌(5위) 표에 표시된 2순위 후보에게 꼴찌 표가 배분된다. 과반 득표자가 나올 때까지 이 과정을 되풀이한다. 첫 선호에서 최다 득표자가 당선자가 될 수도 있지만, 않을 수도 있다. 2, 3위 표도 중요해진다. 호주는 투표가 의무이기도 하다. 집단적 거부감을 받는 처신을 해선 곤란하다.
단순다수제와 선호투표제가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궁금할 수 있겠다. 누군가 2022년 호주 하원 선거를 분석했던데, 151석 중 16석에서 1위 최다 득표를 하고도 당선되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 집권당인 ‘연합(자유당-국민당 연합)’에서 노동당이나 소수당·무소속(기타)으로 바뀜이 많았다. 단순다수제였다면 '연합'이 과반에서 3석 모자란 73석으로 노동당(71석)을 제치고 1당이 됐을 것이다. 실제론 노동당이 과반(77석)을 했고, '연합'은 53석으로 쪼그라들었다. 기타가 7석에서 16석으로 크게 늘었다.

▲제22대 국회의원선거 투표일을 하루 앞둔 9일 대구 중구선거관리위원회에서 선관위 관계자가 기표용구를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널리 알려졌다시피 프랑스의 세계는 또 다르다.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가 제안한 방법을 변형해,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1·2위 후보끼리 결선투표를 치른다. 프랑스가 극우정당(국민연합)의 위협을 그나마 저지해 올 수 있었던 비결이다. 2022년 대선에서도 국민연합의 마린 르펜이 1차 투표에서 23.7%를 얻었으나 결선투표에선 17.8%포인트 늘리는 데 그쳤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28.5%에서 58.6%가 됐다.
이미 22대 국회는 21대 국회 이상으로 최악일 거라고 예상한다. 경쟁자를 혐오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더 자극하고 조롱하고 경멸하고 욕설하는 데 능숙한 인물들이 후보가 됐고, 열성적 지지층만 동원해도 당선이 가능한 거로 나온다. 오래전부터 조짐은 있었으나 이젠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된 듯하다. 최악을 상상해도 그 이상의 최악이 등장하고 있다. 반면에 혐오를 혐오하는 중간지대는 발언권을 잃어 간다.
어떤 투표제도 완벽하진 않다. 그렇더라도 혐오 정치의 시대에 단순다수제는 너무나도 한계가 뚜렷하다. 열성 지지층에 과도한 발언권을 준다. 일종의 프리패스가 되고 있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니, 병립형 비례대표제니 하는 것 이상으로, 투표 방식을 고민할 때가 됐다.⊙
04.24 '배신' 너머
‘배신’. 요새 여권을 내적 불안에 빠뜨리는 단어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을 지목해 사용했고, 윤석열 대통령의 멘토란 이가 동조했다. 한 전 위원장이 윤 대통령과 갈등한 걸 두고서다. 한 전 위원장은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라고 반박했다. 윤 대통령과 한 전 위원장 간 오찬이 성사되지 않은 걸 보면 실체가 없는 것도 아니다.
원래 대통령과 2인자의 관계는 늘 미묘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자의 반 타의 반’이란 말을 남긴 JP(김종필), YS(김영삼)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관계가 널리 알려졌으나 다른 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JP로부터 “1인자와 걸을 땐 그림자도 밟지 않도록 물러나라”는 조언을 받은 노태우 전 대통령 정도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철저히 고개를 숙여 무사했다. 반면에 MB는 임기 중반 내키지 않음에도 박근혜 당시 의원이 차기 주자란 현실을 받아들였고, 자신의 손으로부터 권력이 빠져나가는 걸 참아냈다.
대통령과 2인자 갈등 반복돼와
이번에도 윤석열-한동훈 갈등
'배신' 규정 부당…그래도 풀어야
이를 공개적으로 ‘배신’으로 규정한 이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2015년 6월 국무회의장에서 “당선된 후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이 심판해 달라”고 했다. 당시 원내사령탑인 유승민 전 의원을 가리킨 말이었다. 유 전 의원은 지금도 ‘배신의 정치’란 꼬리표를 떼어내지 못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으로선 유 전 의원이 행정부 권한인 시행령 제·개정권을 국회가 제어할 수 있게 야권에 양보한 건 선을 넘었다고 봤다. 과도한 타협이긴 했다. 그렇다고 배신이라고까지 해야 했나. 유 전 의원을 여러 차례 중용해 온 박 전 대통령 입장에선 그렇게 느낄 소지가 충분했다.
유 전 의원의 입장은 다를 것이다. 2005년 초 박근혜 대표 비서실장이 됐을 무렵, 이런 취지의 말을 했었다. “엄청난 대중 호소력을 가졌다. 아직 굳어 있지 않다. 제대로 만들어보고 싶다.” 단순 참모 이상을 기대했다. 자기 뜻이 채택되지 않는다고 느꼈을 때 실망했고 긴 침묵을 택했다. 원내대표직 도전은 ‘정치인 유승민’으로 서겠다는 독자 선언일 수 있었다. 박 전 대통령은 인정하지 않았다. 둘의 공개적 반목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우리는 잘 안다.

▲윤석열 대통령이 1월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오찬 전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대통령실]
매번 그런 걸 보면 권력의 속성일 수 있겠다 싶다. 누군가는 ‘코트(court·궁정)’란 단어를 쓰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1000년 전이나,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문법이 같다. 살아남는 것, 오래 버티는 것 외엔 없다”고 했다. 권력자를 향한 절대 충성 경쟁, 시기와 반목, 음해와 암투 등 말이다. 자의식은 사치라고 했다.
그렇더라도 ‘배신’은 과도한 규정이다. 새로운 시대는 현 시대의 반복일 순 없다. 새 인물은 현 인물의 되풀이일 순 없다. 어느 정도 현실을, 현 인물을 부정하지 않고선 발전할 수 없다. 부정당한 사실, 부정당한 인물에겐 부당한 일이다. 역사는 그러나 그런 사실과 사람들을 지천으로 깔고 전진해 왔다. 자신이 키운 ‘보잘것없는 배경의 여성’ 마거릿 대처에게 밀려난 에드워드 히스는 평생 분노했지만(별칭이 the Incredible Sulk, '놀라운 삐짐'이었다), 역사는 대처의 도전이 옳았음을 입증한다. 그런 대처도 결국 밀려났다.
그러므로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갈등은 필연일 수 있다. 어찌 관리하느냐는 선택일 수 있다. 가까웠던 사람 간 갈등 관리가 더 까다롭다곤 하나, 지지 기반이 해체된 여권이 자기파괴적 내분을 방치하는 건 지나친 호사다. 더욱이 야권과 협치하겠다는 마당 아닌가. 대통령 진영도, 한 전 위원장 진영도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특히 한 전 위원장은 역대 2인자들의 고민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고백하자면 정권 출범 때, 한 정치컨설턴트와 '윤 대통령과 한 전 위원장이 종국엔 갈라설 텐데, 언제가 될지' 얘기한 적이 있다. “둘의 특수관계를 생각하면 그래도 오래가지 않을까” 했다. 단견이었다.⊙
05.08 문재인 그리고 김영한, 조대환
다들 알다시피 앞서 민정수석실을 폐지했다가 16개월 만에 되살린 건 DJ(김대중)였다. 당시엔 직접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12년 후 발간한 자서전엔 생각을 담았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을 신설했다. 여론 수렴을 강화하란 재야 및 시민단체의 건의를 수용했다. 민정수석에 김성재 한신대 교수를 임명했다. 김 수석에게 당부했다. ‘국민 속으로 들어가 국민의 소리를 듣고 상의하는 자리가 돼야 한다.’”
딱 다섯 문장이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짧은 설명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막강한 민정수석이란 자리와 대비된다. DJ는 부인이 거명된 옷 로비 의혹 사건 등으로 어수선한 정국을 다잡고 싶어 했다. 처음엔 학자를 기용했지만 이내 검찰 출신으로 바꾸었다. 업무 범위도 민정(民情·백성들의 사정과 형편)에다 사정(司正)을 더했다. 과거로 돌아간 것이다.
어떤 자리이기에 싶을 것이다. “모든 정보를 취합하고 모든 권력기관 위에 있다.” 한 민정수석 출신의 말이다. 그래선지 MB(이명박) 정부 시절 여권 중진은 신임 민정수석(권재진)에게 이런 조언까지 했다고 털어놓았다. “대통령 말만 들어선 안 된다. 문재인이 사람 좋다 어쩐다 하지만 결국 노무현 대통령의 불행한 말로에 책임이 있는 것 아니냐.”
김성재 이래 7일 임명된 김주현까지 민정수석은 26명에 불과하다. 배타적 세계다. 이들 중 3명 정도만 직·간접적으로 기록을 남겼을 정도로 가려져 있기도 하다.
우선 문재인 전 대통령이다. 그는 자서전(『운명』)에서 대북송금 특검 수용이나 검찰·국가정보원·국세청·감사원 개혁은 물론이고 전시작전통제권 회수와 용산 미군기지 평택 이전, 방폐장 건설, 노동문제까지도 주도했다고 썼다. 대선자금 수사나 측근 비리(나라종금) 사건을 관리했고, 한·미·대북 관계 등 외교안보 문제도 중재했다고 한다. 그는 대통령 인사권을 언급할 때도 ‘우리’라고 했다. “우리는 첫 국방장관으로 준비된 카드가 없었다”고 말이다. 실로 ‘왕수석’이었다.
반면에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 두 수석의 기록은 처연하다. 먼저 세상을 떠난 김영한의 업무일지다. 2014년 6월부터 2015년 1월까지 120쪽 분량인데, ‘영(領, 박 전 대통령)’과 ‘장(長, 김기춘 전 비서실장)’ 등의 지시에 어떻게 짓눌렸는지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7월엔가 이렇게 적혀 있다. ‘領·죽음에 대하여 관대한 전통. 동정론/ 음모론. 사기·조작론/ 지연책임론/ 오로지 fact, 신뢰성을 얻는 것이 중요/ 수사 方向(방향) comment (검찰)-후속 조치/ (중략)/ 성범죄자 身上情報(신상정보) 확인-잘한 일. 弘報(홍보)되도록/ X 휴가철 犯罪(범죄) 유관부처 협조-대처’.
마지막 수석인 조대환은 “(출근) 1주일 만에 혈압약을 다시 복용했다”고 할 만큼 격무였지만, 정작 박 전 대통령 구속영장 청구 건에 대해선 사전협의조차 받지 못했다고 토로했다(『남듬길』). 스스로 ‘앉은뱅이 용틀임’이라고 했다.
셋을 가른 건, 결국 대통령과의 관계였다. 대통령이 어디까지 용인하느냐였다. 대통령이 신임을 거두면 아무리 내로라하던 인사(최재경·신현수)도 몇 달 못 가곤 했다. 분명 가장 신뢰하는 사람을 민정수석에 앉혀야 하지만 민정수석에 앉혔다면 어떻든 계속 신뢰해야 했다. 무슨 말이든 할 수 있게 해야 했다. 그게 직(職)의 본질이어서다.
사실 윤석열 대통령은 민정수석의 관점에서 보면 썩 좋은 보스는 아니다. 국정농단 수사를 통해 민정수석의 공간을 확 줄이는 바람에 훨씬 고난도가 됐는데, 할 수 있는 일도 제한적이 됐다. 윤 대통령은 게다가 불편한 소리를 하면 “내 편 안 든다”고 서운해 한다고 소문나 있다. 과거와 같이 ‘활약’을 하기에 가혹한 조건이다. 그나마 민심의 통로로는 쓸 만할 테지만, 대통령 의지를 관철하는 수단으론 턱없이 미흡할 것이다. 그런데도 기대한다? 험로에 들어선 윤 대통령에겐 사치다.⊙
05.22 지지율, 말만으로 오르지 않는다
취임 2주년이었던 윤석열 대통령의 한국갤럽 지지율(직무수행 긍정평가)이 24%인 걸 두고 “6공화국 출범 이후 대통령들의 같은 시기 지지율 중 최저”란 기사가 나왔다. 이걸 보다 든 생각이다.
먼저 ‘6공화국’이다. 갤럽리포트엔 별 언급 없이 노태우 대통령부터 등장했다. 이 경우 흔히 1987년 체제라고 말해왔다. 이번엔 ‘6공화국’이 다수였다. ‘7공화국으로 개헌’이란 야권 프레임이 통하나 싶었다. 둘째, 취임 2주년을 특정했는데, 전체 그림을 보는 데 외려 지장을 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취임이 5월로 옮겨지면서 주요 선거가 전후에 자리하게 돼서다. 대통령 지지율이 선거에 영향을 주지만 선거 결과 역시 지지율에 반영된다. 문재인 이전 대통령과 다른 점이다.
대통령 지지율 상고하저 패턴 반복
MB만 예외, 위기 때 반전에 성공
국정기조·인사·정책 모두 달라져야
서론이 길었다. 오늘은 둘째 생각, 대통령 지지율에 대한 얘기다. 역대 패턴은 대체로 상고하저(上高下低)다. 취임 초반에 높지만 대세 하락해 마지막엔 낮다. 극단적 사례가 YS(김영삼)로 한국갤럽의 분기별 평가에서 83%까지 올랐다가 6%로 물러났다. 노무현 대통령은 초반 6개월을 제외하곤 20~30%대 머물렀는데 이마저도 4년 차 중반 이후 10%대로 떨어졌다. 문재인 대통령만 높게 시작해(81%) 비교적 높게 끝났다(42%, 정권 재창출엔 실패했다). 반등하더라도 한두 분기에 그쳤다.
예외가 MB(이명박)다. 초기 20%대를 넘나들다가 2년 차 3분기부터 4년 차 3분기까지 줄곧 36% 이상을 기록했다. 3년 차 2분기엔 49%였다. 앞의 표현을 빌리자면 ‘6공화국 대통령들의 같은 시기 최고 지지율’이었다. 정권 재창출에도 성공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윤석열정부 2년 국민보고 및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어떻게 가능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기에 응답했고 반전의 동력을 이어갔다는 것이다. 당시 4·29 재·보선 참패와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여론은 싸늘했고, 여권 내 소장파의 쇄신 요구는 거셌다. MB는 6월 ‘근원적 처방’을 언급했고, 8·15 경축사에선 ‘친서민 중도실용’ 노선을 천명했다. 대통령실을 개편하고 민주당 주자로 거론되던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총리로 영입했다. 경쟁자(박근혜)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실감할 만한 대책도 이어졌다. 무담보 소액대출인 미소금융이나 동반성장이 그 예다. 정치적 불리함에도 세종시 수정안을 내 국회에서 결론짓게도 했다.
MB 스스로는 박형준 당시 홍보기획관의 여론동향 보고를 계기로 들었다. “대선 지지자 상당수가 이탈했는데, 최대 원인이 ‘서민에 대한 배려 부족’으로 조사됐다”(『대통령의 시간』)는 것이다. 청와대 인사는 당시 이렇게 전했다. “대선 때 우리가 5.2(0=강한 진보, 10=강한 보수)였는데, 이번엔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가 6이고 우리가 7로 나왔다는 것이다. 우리와 교감이 없는 내곡동(국가정보원) 쪽에서 시너지가 있었을 거다. 경찰 보고서도 비슷했다는 말도 있다. 다 같으니 MB도 ‘진심으로 충고하는 것 맞네’라고 했다.”
물론 MB도 삐끗하곤 했다. 검찰총장에 자신과 같은 고려대 출신을 앉힌 게 일례다. 이후 검찰 내부가 시끄러워졌다. “민정수석실에선 ‘충성심 높은 사람은 오히려 우리를 더 못 도와준다. 조직 내 신망이 높은 사람을 시켜야 조직이 (우리에게) 잘하고, 그런 사람이어야 우리를 도울 수 있다’고 보고했다. MB는 충성심 높은 사람을 시켰고, 결국 한 명도 못 살렸다.” 내막을 아는 인사의 몇 년 뒤 토로였다.
윤 대통령도 기로에 서 있다. 민생·소통을 강조하지만 기조는 뭔지, 무엇을 어떻게 해나갈 건지 알 길이 없다. 대통령을 오판하게 했다는 이들이 여전히 대통령 옆에 있는 걸 보면 신상(信賞)은커녕 필벌(必罰)도 안 된다. 정책 전달도, 관리도 어설픈데 대통령실부터 키운다. 정치컨설턴트 박동원 말대로 “뭐가 되겠다, 어떤 시험을 치겠다는 목표 없이 공부만 열심히 하겠다는 것과 같은 일”이다. 대통령, 아니 참모라도 MB 지지율 관리에서 배워야 한다.⊙
06.19 이재명, 더 평등하다
23년 전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 등 민주당 내 개혁그룹이 요구한 건 다섯 가지였다. 비선 라인의 국정·당무 개입 금지, 당내 민주주의 확대 등이었다. DJ(김대중)는 당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이게 민주당에서 당·대권 분리의 시작이었다고 우상호 전 의원은 기억했다. 그는 “3김 시대의 사당(私黨)화를 극복하고 정당 민주주의를 정착하자는 것”(『민주당 1999-2024』)이라고 설명했다.
DJ의 기록은 좀 달랐다. 지도부의 수습책이 공허했다고 여겼고, 당 총재직 사퇴는 자신의 결단이라고 했다. DJ는 “총재를 맡고 있는 한 당권과 대권 싸움에 나를 끌어들일 게 분명했다”고 썼다.
어찌 됐든 그렇게 시작된 민주당의 당·대권 분리 제도가 그제 사실상 폐지됐다. 더불어 각급 당직자의 부정부패 혐의 기소 시 직무 자동정지 조항도 없어졌다. 2022년 대선 직후 예외 조항(정치탄압 등)을 두었는데 그마저도 거추장스러웠던 모양이다.
한국 정치의 퇴행이다. 사실 퇴행 자체는 놀랍지 않다. 하도 빈번해서다. 하지만 이재명 대표 주변에 거대한 ‘힘의 장’이 있는 듯, 한국 민주주의 진전을 가능케 했던 것들이 일그러지는 속도와 정도, 방향에 진정 놀라게 된다.
당·대권 분리나, 기소 시 직무 자동정지는 그나마 당 사정이다. 인천의 5선 의원이, 더욱이 인천시장까지 지낸 인물이 뜬금없이 서울시장으로 출마하고 그 덕분에 이 대표가 의원 배지를 단 건 기괴했으나, 복잡다단한 인간사의 부조리극으로 넘길 만했다. ‘일하는 국회’란 명분으로 1987년 체제 아래 여당 몫이었던 국회 운영위원장을 민주당이 차지한 건 ‘원만한 국회 운영’을 위한 가드레일을 없앤 것이라 씁쓸했으나 극단적 진영 전쟁의 파생이려니 했다.
하지만 민주당이 행정부, 더 나아가 사법부를 겁박하는 제도를 찍어내는 도구로 입법부를 쓰려는 데엔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의 중형 선고 후 극심해졌는데, 이 대표의 방어에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길 법한 건 모조리 막겠다는 기세다. 법제사법위와 과학기술방송통신위원회 등에서 수사 착수부터 재판, 심지어 언론까지 손댄다.

▲정청래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과 김승원 더불어민주당 간사가 1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사위 첫 전체회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상임위 일정에 보이콧을 선언한 국민의힘 의원들은 이날 회의에 불참했다.
수사검사들을 수사 대상으로 삼으려 하면서 무고죄로 처벌한다고 으를 뿐만 아니라, 수감된 피의자를 수사할 땐 검사실로 부를 게 아니라 검사가 교정시설로 가라고 못 박으려고까지 한다. 법왜곡죄로 판검사를 옥죄고 판검사 탄핵소추안을 흔들어 보이며 판사선출제로 판사들을 솎아낼 기세다.
더 나아가 특정인에 대한 표적 수사를 금지하자는데, ‘특정인’에 대한 수사를 무조건 표적 수사로 여기는 이들인지라 ‘특정인’을 수사하지 말라는 입법이나 다름없다. 50인의 발의자 중에 이건태·양부남·김동아 의원 등 이른바 ‘대장동 변호사’도 있다. 현행법으론 변호가 어렵다는 실토인지 어리둥절할 뿐이다.
그나마 이건 대부분 발의 단계다. 과방위에선 민주당이 아예 방송3법 등을 일방 처리했다. 법안소위로 넘기는 시늉조차 안 했다. 사실상 방송 지배구조에 자기 쪽 사람들을 넣겠다는 건데, 자신들이 여당일 땐 거들떠보지도 않던 법안이다. 공교롭게 “언론이 검찰의 애완견”이란 이 대표의 거친 발언에 언론단체들이 한목소리로 반발한 바로 다음 날 강행했다. 여론전에서도 밀릴 수 없다는 심정인 듯한데, 옹졸하고도 옹색하다. ⊙
고정애의 시시각각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