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2024-01]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조선일보
01.06(토) 갈퀴처럼 손 휘두른 조선의 첫 피아니스트 김영환
관립 도쿄음악학교 첫 졸업생…음악회 단골 연주자이면서 하이페츠, 짐발리스트 초청 기획

▲1932년 1월 잡지 '동광'에 실린 김영환 캐리커처.김영환은 얼굴을 건반에 바싹 붙이고 손을 갈퀴처럼 휘두르며 연주했다고 한다.
‘피아니스트로서는 우리 악단(樂壇)의 길을 열은 사람이다. 조선인으로 동경음악학교 본과를 나온 이가 이 사람 혼자뿐인 줄 기억한다. 그가 학교를 졸업할 때 정식으로 졸업증을 주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었다 한다.’
1931년 월간지 ‘동광’(제22호)은 조선의 음악가들을 소개하는 기사를 실었다. 김인식 김형준 이상준 등 서양음악의 개척자들과 함께 홍난파 현제명 김원복 박경호 채동선 안병소 홍성유 계정식 안익태 이인선 안기영 박경희(朴慶姬) 김영의 고봉경 등 성악과 기악을 아울러 신진, 중견을 모두 소개했다. 조선의 첫 피아니스트로 꼽히는 김영환(1893~1978)은 이 명단 앞줄에 든 주인공이다.
1932년 6월 월간지 ‘삼천리’(제4권제7호)도 ‘인기음악가 언파레-트’ 에서 김영환을 이렇게 소개했다.’조선 사람으로 동경 상야(上野) 음악학교 본과를 졸업하기는 처음이요, 조선 악단에서 피아노로 이이를 지나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선인 최초로 도쿄음악학교를 졸업한 피아니스트라는 게 김영환에게 따라다니는 별명이었다.

▲40대에 접어든 김영환은 원로 취급을 받았다. 음악기관 책임자나 지도자로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조선일보 1936년1월4일자
◇조선인 첫 도쿄음악학교 본과 졸업
평양 대지주 집안 출신인 김영환은 1910년 동양음악학교에 들어가 3년간 다녔다. 1913년 도쿄음악학교 선과, 1914년 예과에 이어 이듬해인 1915년 본과에 들어가 1918년 졸업했다. 본과 졸업후인 1918년 피아노 전공으로 연구과에 진학했다. 대학원에 해당하는 전문연주자 과정이다. 본과 졸업 후 우수한 학생만 진학할 수 있기 때문에 김영환의 성적은 뛰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귀국해 연희전문교수로 취임했기에 실제로는 다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영환이 졸업하던 해, 홍난파가 이 학교 예과에 들어가 1년여 다녔다. ‘사의 찬미’로 유명한 윤심덕과 한기주가 중등교사 양성 과정인 갑종 사범과(3년)에 입학한 게 2년 뒤인 1920년이다.
도쿄음악학교는1887년 설립된 일본 유일의 관립 음악학교로 문부성 관할의 근대식 음악전문교육기관이다. 도쿄 우에노 공원 근처에 있어 우에노(上野)음악학교로도 알려져있다. 음악학자 김지선에 따르면, 1913년부터 1941년까지 도쿄음악학교에 유학한 조선인들은 90여명으로 귀국 후 음악계 주역으로 활약했다. 미국, 유럽 유학생보다 훨씬 많다.
◇수료증 거부하고 치른 ‘1인 졸업식’
‘’우에노’는 정말 사립학교와는 질이 달랐다. 연습용 피아노가 한 100대나 되었고 본과의 음악선생은 모두 독일인이었다. 특히 기분이 좋았던 것은 피아노과 학생은 연습때도 그랜드 피아노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처음 보는 파이프 오르간이란 것이 두대가 있었고, 본과, 사범과, 선과까지 합쳐 학생 300명에 선생은 130명이나 됐다.’(‘양악백년’ 28쪽)
평양에서 선교사에게 알음알음 오르간을 배웠던 김영환에게 도쿄음악학교는 신세계였을 것이다. 그런데 졸업식때 사달이 났다. ‘1918년3월25일 이날을 나는 평생 잊어버릴 수가 없다. 당시 관립학교 졸업식엔 문부대신이 직접 나와 일일이 졸업생들에게 졸업장을 주었는데, 청천벽력과도 같이 나에겐 졸업장을 주지 않고 수료증만을 주는 것이 아닌가. 압박받는 민족의 설움과 함께 분노가 치밀어 대신이 보는 앞에서 나는 수료증을 북북 찢어버리고 이유를 따져들었다.’(‘양악백년’ 44쪽)
김영환은 시험쳐서 당당히 합격해 4년간 공부했는데 졸업장을 주지않으면 학비 등 경비를 전부 돌려주던지, 아니면 문부대신을 상대로 소송하겠다고 항의했다. 그러자 3월30일 김영환 혼자 참석한 졸업식이 다시 열리고, 문부대신이 직접 졸업장을 수여했다.졸업후 총독부 학무국에 들어오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우리 음악가는 검을 찰 사람이 아니다’라는 이유를 댔다. 무단통치 시대인 당시엔 문관도 검을 차고 다녔다고 한다.
◇연희전문에서 제자 길러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김영환은 1918년 연희전문 음악과장(주임)으로 부임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처음 약속은 음악과를 곧 만든다고 했는데, 일제 때는 결국 음악과를 설치하지 못했다. 학교측과 일부 교직원들이 시기 상조라며 반대했기때문이다. 김영환은 일반 학생들에게 일주일에 3시간씩 기악, 성악, 작곡을 가르쳤다.윤심덕 동생인 바리톤 윤기성, 피아니스트 독고선, 해방 후 서울대총장, 문교부장관을 지낸 최규남, 테너 이인선 등이 그의 지도를 받은 음악부원들이다. 김영환은 사비로 그랜드 피아노를 사서 대강당에 기증하기도 했다. 학교측 기록에는 1923년 당시 2200원이란 거금을 들여 피아노를 기증했다고 나온다.
1세대 음악인인 만큼 연주회도 활발하게 펼쳤다. ‘한때는 소나 말같이 음악회마다 끌려다니더니’(‘동광’ 22호)란 말을 들을 만큼, 음악회마다 김영환 이름이 빠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이페츠, 크라이슬러,짐발리스트 같은 해외 유명 연주자들이 일본에 연주하러 오는 틈을 타 경성으로 초청하는 공연기획자 역할까지 했다.
◇'머리, 건반에 대고 손은 공중에 춤추듯’
‘피아노 칠 때에 머리는 건반에 대다시피 손은 공중에 춤추듯 한다.이리하여 재박(再拍)이 쏟아지고야 만다.’
근엄한 용모와 달리, 김영환은 연주할 때는 매우 격정적이었던 모양이다. 월간지 ‘동광’(제30호,1932년1월)에 실린 캐리커처를 보면, ‘삼천리’ 기사처럼 얼굴을 피아노에 닿을 듯 바짝 붙인 채 손가락을 갈퀴처럼 휘두르는 모습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연주 자세다.
김영환은 1929년 잡지 ‘별건곤’(제21호,1929년6월)이 기획한 ‘청춘의 자랑 나의 보물’편에서 ‘피아니스트의 보물은 손’이라고 답했다. 손을 아끼기 위해 운동은 ‘핑퐁’(탁구)밖에 못한다면서 늘 손이 부드러워야 하고 민활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여름에도 장갑을 끼고 다녀야 한다’고 했다. ‘(햇)볕에 그을리면 손 피부가 뻣뻣해지니까 보드랍게 하기 위하야 그러는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손이 너무 부드러워도 문제라고 했다. 남녀가 같은 곡을 연주하더라도 그 음이 다른 것은 그 까닭이라는 것이다.
김영환은 서양의 피아니스트는 손가락을 몇십만원짜리 보험에 가입하는 경우가 있지만, 동양에선 아직 음악가의 보물을 알아주는 보험회사가 없다면서 피아니스트에게 손가락은 그만큼 귀중하다고 답했다.
◇'음악 사교가’ ‘연주기관 책임자’
김영환의 연주활동은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뜸해진 듯하다. 1930년 조선음악가협회 창립 때 이사장 현제명, 이사 홍난파 등과 함께 활동했다. ‘이제는 오히려 음악 사교가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동광’ 제22호)이라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취직자리나 학교입학의 청을 대도 꽤 잘된다는 얘기가 돌 정도였다. 1936년 새해 음악계를 전망하는 기사엔 이렇게 났다. ‘악단의 원로격인 김영환씨는 피아노 연주가로 기대한다는 것보다는 연주기관의 결성이라던가 그 지도같은데 마땅히 힘쓸 책임자로서는 누구보다도 가장 조건이 구비된 분이다.’(‘활약이 기대되는 樂人군상’, 조선일보 1936년1월4일)
1941년 설립된 조선음악협회 이사 14명 중 함화진 김관 계정식 김원복 김재훈과 평의원 홍난파 김세형 이애내 등과 활동했다. 광복 이후 서양음악 도입 초기 종횡무진 활약한 김영환은 예전 같은 활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1974년 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양악백년’에 회고록을 연재한 뒤, 이듬해 미국으로 이주해 1978년 뉴욕에서 별세했다.
◇참고자료
‘청춘의 자랑 나의 보물’, 별건곤 제21호, 1929.6
홍종인, 반도악단인만평, 동광 제22호, 1931.6
채규엽, 인기음악가언파레-트, 삼천리 제4권제7호, 1932.6
김영환,양악백년,비온후, 2023
이유선, 한국양악백년사,음악춘추, 1985
김지선, 근대시기 일본의 음악학교에 유학한 조선인-도쿄음악학교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음악사학보 41, 2008,12
정운형, 연희전문학교의 음악교육-한국인 교수와 연전음반을 중심으로, 신학논단 제99집, 2020.3
01.13 나도향은 왜 ‘카르멘’ ‘춘희’에 끌렸을까
1921년 조선일보에 ‘칼멘’ 연재, “문학보다 차라리 음악 전공하고 싶다 ”

▲나도향 대표작 '벙어리 삼룡'이 실린 잡지 '여명' 창간호. 1925년7월에 나왔다. 나도향이 '카르멘'을 국내에 처음 소개한 번역자라는 사실은 그간 주목하지 않았다. 열아홉살 나도향은 '연애소설 칼멘'이란 제목으로 조선일보 1921년 11월~12월에 연재했다.
‘벙어리 삼룡이’ ‘물레방아’ ‘뽕’같은 수작을 쓴 나도향은 1920년대 근대 문학 요람기의 스타다. 5년 남짓 활동하면서 20여편 작품을 남긴 나도향은 스물넷에 요절, 동시대인들에게도 안타까움을 남겼다. ‘벙어리 삼룡이’는 1920년대 영화화되면서 대중 스타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가 ‘카르멘’ ‘동백꽃’같은 소설 번역가로도 활약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드물다.
특히 나도향은 창간 1년을 넘긴 조선일보에 1921년 11월부터 12월5일까지 프랑스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카르멘’을 번역, 연재했다. 당시 제목은 ‘연애소설 칼멘’. 신문에 적힌 연재 횟수는 27회였다. ‘카르멘’은 1925년1월 박문서관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원작인 ‘동백꽃’은 나도향이 타계한 이듬해인 1927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출간됐다. 나도향은 투르게네프 산문시(12편)와 모파상 단편 ‘추억’을 번역해 각각 ‘백조’, ‘신민공론’에 실었고, 톨스토이 단편(7편)은 1925년7월 박문서관에서 펴냈다. 짧은 창작기간 중 잡지 연재를 제외하고 단행본만 3권을 펴낸 것만 봐도, 번역 비중이 만만치 않다.

▲나도향이 1921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카르멘' 최종회. '연애소설 칼멘'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총 27회 연재됐다. 조선일보 1921년 12월5일자.
◇'카르멘’ 첫 번역한 나도향
‘당신의 말씀은 안될 말씀입니다. 나는 벌써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데, 당신은 아직 나를 사랑하세요. 그런 까닭에 당신은 나를 죽이려 합니다. 거짓말을 하여 당신을 속이랴고 하면 아무 것도 아니겠지만은 그러나 나는 그런 긋찮은 일을 하랴고는 하지 않아요. 우리의 사이는 이것뿐입니다. 나의 로미로써 당신의 로미를 죽일 이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칼멘은 언제든지 자유로운 몸으로 있습니다.’(연애소설 ‘칼멘’ 27, 조선일보 1921년12월5일)
‘칼멘’ 연재 마지막은 ‘자유’를 내세우며 돈 호세의 여인이기를 거부하는 카르멘의 저항이 클라이맥스다. 결과는 물론 죽음이다. 카르멘은 순진한 병사 호세를 유혹해 범죄에 빠뜨린 뒤 배신하는 ‘팜므 파탈’(악녀) 전형이다.
비교문학연구자 손성준 한국해양대 교수는 ‘아무도 카르멘을 소개한 적 없던 시기에 홀로 두 차례나 완역을 감행’했다면서 ‘’카르멘’은 나도향 번역의 본령’(‘나도향 소설의 낭만성과 그 문학적 원천-’카르멘’과 ‘춘희’를 중심으로’,2019)이라고 했다. 그는 나도향이 저본으로 삼은 일역본으로 1914년 이쿠다 초코(生田長江, 1882~1936)가 ‘세계문예에센스 시리즈’ 제10권으로 출간한 ‘카르멘’(청년학예사)을 지목한다. 나도향은 저본을 밝히지 않았지만, 이쿠다 책의 번역 어휘 및 표현이 나도향 번역과 대부분 일치한다는 이유다.
나도향이 요약 번역을 신문에 연재한 뒤 재번역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 1925년 1월 출간할 만큼, ‘카르멘’에 공력을 쏟았다는 점도 주목한다. ‘카르멘’의 ‘요부’(妖婦) 캐릭터는 1925년 나도향이 발표한 ‘물레방아’, ‘뽕’ 여주인공에 변주돼 나온다는 것이다. 원하지 않는 남자는 거부하는 ‘물레방아’ 이방원의 처나 ‘뽕’의 안협집은 자유를 선언하는 ‘카르멘’과 닮았다.
손 교수는 나도향 초기작 ‘출학’(黜學) ‘젊은이의 시절’ ‘춘성’의 등장 여성도 요부 캐릭터가 두드러지는데다 사후 출간된 초기작(1920년경 집필)인 중편 소설 ‘청춘’이 살인과 파국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카르멘’이 나도향에게 미친 영향이 압도적이라는 분석이다.

▲1948년 1월16일~20일 명동 시공관에서 국내 첫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가 공연됐다. 이인선(가운데 왼쪽)은 알프레도를, 김자경(오른쪽)은 비올레타를 불렀다. 나도향은 1927년 '라 트라비아타' 원작소설 '동백꽃'을 완역 출간, 한국 오페라의 문을 활짝 열었다.
◇354쪽 대작 ‘동백꽃’
‘동백꽃’ 번역은 나도향이 최초는 아니다.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진학문의 ‘홍루’(紅樓)가 있기 때문이다. 이 번역 소설은 연재 당시 독자 감상문 투고가 줄이을 만큼 반응이 뜨거웠다. 그런데 나도향이 가장 시간과 노력을 많이 들인 번역 작품도 ‘동백꽃’이다. 우선 분량이 ‘카르멘’의 98쪽에 비해 354쪽으로 완역이다. ‘삼총사’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쓴 알렉상드르 뒤마의 아들인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가 1848년 쓴 ‘동백꽃 여인’은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원작이기도 하다. 지식인과 화류계 여성과의 사랑을 다룬 ‘동백꽃’은 나도향의 유일한 장편 소설 ‘환희’에서도 그대로 변주된다. 남자 측 가족 반대로 이별하고,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을 애타게 찾다가 최후를 맞는다는 점이 그렇다.
◇”문학가보다 차라리 음악방면으로 나가고 싶다”
나도향이 번역한 ‘카르멘’ ‘동백꽃’이 지금도 세계 극장에서 가장 많이 올리는 오페라 원작인 점도 흥미롭다. 나도향이 비제 ‘카르멘’이나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를 직접 봤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조선에서 전막 오페라가 공연된 것은 1937년5월 경성 부민관에서 일본 소프라노 미우라 다마키가 주연한 ‘나비부인’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향은 서양 음악 애호가였던 것같다.
노산 이은상은 ‘그는 음악에도 소질이 있어서 어느 때는 문학가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음악방면으로 나가고 싶다고 자기 과거를 고백한 일이 있었다’고 썼다. ‘백조’ 동인들의 비화를 소개하면서 ‘도향은 구노의 ‘세레나데’와 ‘사자수’(四泚水)로 명창’( ‘문단에 사라진 삽화’7.’백조’잡지를 둘러싼 비화, 조선일보 1935년2월26일)이었다는 회고가 있을 만큼 노래도 잘 불렀던 모양이다.
◇ ‘백조’ 창간호 실은 ‘젊은이의 시절’ 음악회 소재
스무살 나도향이 1922년 ‘백조’ 창간호에 실은 단편 ‘젊은이의 시절’이 음악회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나도향은 홍사용, 박종화, 박영희 등과 함께 ‘백조’ 동인으로 문단에 정식 데뷔했다. 그런데 첫 작품부터 음악회를 주요 소재로 활용할 만큼 음악에 대한 이해나 관심이 남달랐다. ‘젊은이의 시절’은 가짜 예술가에게 농락당한 음악가 누이를 향한 애상적 넋두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음악가 얘기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나도향 자신의 신변 고백이라는 추측까지 나온다.
◇1920년대 영화 원작료는 초대권 10장
약간 다른 얘기지만 나도향 소설은 일찍부터, 그리고 여러 차례 영화화됐다. ‘벙어리 삼룡’이 대표적이다. 광복 이후 ‘물레방아’ ‘뽕’은 여러 편이 제작될 만큼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영화계가 출범한 1920년대 원작료를 지불한다는 개념은 거의 없었던 모양이다. ‘아리랑’ 감독 겸 주연 나운규는 1929년 나도향 대표작 ‘벙어리삼룡’을 영화화하면서 원작료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소설(小說)을 영화(映化)하는데 종래에 고료(稿料)(?)라할지 촬영료(撮影料)라할지 하는것이 있었는지?춘원(春園)의 ‘개척자’같은 것도 초대권10매로 때웠다 하고 나도향의 ‘벙어리삼룡’이 역시 공자(空字)이었다 한다.’ (‘문단풍문’, 조선일보 1930년6월7일) 춘원 이광수도 영화 초대권 10장으로 원작료를 때울 정도였으니, 나도향이야 오죽했겠나 싶다. 1929년 개봉한 ‘약혼’은 팔봉 김기진 원작을 토대로 했는데, 당시 교사 월급인 50원을 받은 게 원작료의 효시였다고 한다. 이듬해 약간 올라서 최독견이 영화 ‘승방비곡’ 원작료로 80원을 받았다는 게 뉴스가 될 정도였다.
◇한국 오페라의 씨앗을 뿌리다
광복 후 우리 손으로 올린 첫 오페라가 ‘라 트라비아타’와 ‘카르멘’이었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테너 이인선이 이끈 조선오페라협회가 1948년 1월16일~20일 명동 시공관에서 올린 ‘춘희’를 한국오페라 기점으로 삼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인선은 1950년 1월27일~2월2일 시공관에서 ‘카르멘’을 올렸다.
두 작품이 한국에 널리 알려지게 된 데는 나도향의 공(功)도 무시못할 것같다. 한국 오페라의 씨를 뿌린 나도향은 우리 음악가들이 올린 ‘라 트라비아타’는 물론 ‘카르멘’도 보지 못했다. ‘물레방아’ ‘벙어리 삼룡’의 작가 나도향의 흔적이 한국 오페라의 출발점에 남아있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참고자료
손성준, 나도향 소설의 낭만성과 그 문학적 원천-’카르멘’과 ‘춘희’를 중심으로,코기토 87, 부산대인문학연구소, 2019,2
박진영, 한국에 온 톨스토이,한국근대문학연구 23, 한국근대문학회, 2011 상반기
한상옥, 나도향과 그의 작품세계, 어문연구 24, 어문연구회, 1993,10
이유선, 한국양악백년사,음악춘추, 1985
01.20 이광수, 홍명희, 김동인, 이기영...스타 작가들이 펼친 ‘신문소설 올림픽’
한 신문서 매일 서너편 연재...’신문 소설 전성기’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실로 신문이 있은 후 이렇게도 화려찬란하고 다산적인 신문소설 범람시대를 연출한 일이 있은 것 같지 않다.’
스물 다섯 문인 기자 김기림이 1933년 잡지 ‘삼천리’ 신년호에 당대 인기 신문소설을 해부하는 평론을 썼다. ‘신문소설 올림픽시대’. 이 땅에 신문이 생긴 이래, 연재소설이 이렇듯 화제를 모을 만큼 쏟아져나온 적이 있는가 하는 감탄조로 시작한다.
그도 그럴 만했다.당시 조선일보는 홍명희의 ‘임꺽정’(연재 제목은 ' 林巨正傳'), 최독견의 ‘명일’(明日), 동아일보는 이광수의 ‘흙’, 방인근의 ‘마도(魔都)의 향불’, 중앙일보(조선중앙일보 전신)는 염상섭의 ‘백구’(白鳩)를 연재중이었다. 김동인도 ‘매일신보’에 ‘해는 지평선에’를 실었다. 이광수, 홍명희, 염상섭, 김동인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매일 창작 소설로 경쟁하고 있으니 ‘신문소설 올림픽시대’란 말이 나올 법했다.
▲김동인은 신문소설은 보통 소설과 달리 대중적이고 충동적인 문장을 써야한다고 강조했다. 조선일보 1934년5월14일자
◇1930년대는 신문 소설 전성기
1930년대는 신문 소설의 전성기였다. 김기림이 글을 쓴 시점은 1932년 12월인데, 1930년대 중반이 되면 연재소설 목록은 더 화려해진다. 조선일보는 1933년 4월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4월26일~1934년2월17일·197회)을 필두로 채만식의 ‘인형의 집을 나와서’(5월27일~11월14일·150회), 춘원 이광수의 ‘유정’(9월27일~12월31일·76회), 이기영의 ‘고향’(11월15일~1934년9월21일·252회)을 연재했다. 1932년 12월 연재를 재개한 홍명희의 ‘임꺽정’까지 있었으니, 당대 내로라하는 문단 스타들이 매일 필력을 겨뤘다.
1933년 10월4일자 신문을 보면, 조간 3면하단에 김동인 ‘운현궁의 봄’, 4면 하단에 홍명희 ‘임거정전’, 7면엔 채만식 ‘인형의 집을 나와서’가 실렸고, 석간 3면엔 이광수의 ‘유정’이 실렸다. 11월14일 채만식 소설 연재가 끝나자, 다음날 조간 7면엔 이기영의 ‘고향’이 뒤를 이었다. 조간 3편, 석간 1편 연재 체제는 거의 한해 내내 지속됐다. 지면을 넘길 때마다 김동인, 홍명희, 채만식, 이기영, 이광수가 차례로 등장하는 신문소설의 황금기였다.
동아일보도 1934년 강경애의 ‘인간문제’(8월1일~12월22일·총 120회)에 이어 1935년 심훈의 ‘상록수’(9월10일~1936년2월15일·127회)가 주가를 올렸고, 여운형이 이끈 조선중앙일보는 1934년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8월1일~9월19일·32회)을 실었다. 1920년대 꽃피우기 시작한 근대 소설이 1930년대 신문 연재를 통해 벼락치듯 폭발적으로 성장한 시기였다.
▲이기영 소설 '고향'연재를 알리는 조선일보 1933년 11월14일자 사고. 채만식의 '인형의 집을 나와서' 연재가 완료된 다음날인 11월15일 '고향' 첫회가 실렸다.
◇연재소설이 ‘킬러 콘텐츠’
당시 신문은 왜 앞다퉈 소설을 연재했을까. ‘신문지의 본래 사명인 매일매일의 뉴스를 알리는 한편 신문지의 일단에는 오래 게재되는 한 개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실어서 독자로 하여금 그 ‘이야기’때문에 다른 신문으로 개가하는 것을 방지하여야 겠다, 이리하여 신문에는 신문 소설을 연재하는 것이다.’(신문소설강좌 1 신문은 왜 소설을 요구하나, 조선일보 1933년9월6일) 신문이 충성스러운 독자를 확보하려면 뉴스 전달 이외의 독자적 ‘킬러 콘텐츠’가 필요한데, 그게 연재소설이라는 설명이다.
◇가정주부와 학생이 연재소설 主독자
원래 신문소설은 여성과 학생층을 타깃으로 했던 듯하다. 김동인은 신문 소설 독자에 대해 ‘나는 일찍이 식자(識者) 계급의 사람이 신문소설을 읽는다는 말을 들은 일이 없다’면서 ‘신문 소설의 애독자란 가정 부인과 학생이 대부분을 점령하고 그 밖에는 상로(商路)의 상인과 극안가의 자극밖에는 섭취할 수 없는 직공군(群)과 소점원이 대부분을 점령한다’(‘신문 소설은 어떻게 써야 하나’, 조선일보 1933년5월14일)고 했다. 신문소설 작가는 이런 독자층을 고려하지 않을 수없다고도 했다.
▲여성 소설가 강경애의 '인간문제' 연재를 알리는 동아일보 1934년7월31일자 사고. 인간문제는 8월1일부터 12월22일까지 120회 연재됐다.
◇'신문 독자 90%가 연재소설 읽는다’ 호언
하지만 신문 소설이 주목을 끌면서 독자층도 점점 더 확대된 모양이다. 1935년 월간지 ‘삼천리’(제7권제6호) 설문에 응한 김형원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장은 ‘신문 소설을 가정부녀나 보는 것으로 알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적어도 현대의 복잡한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누구나 위안을 구하게 되고 위안을 얻을 기회가 적은 우리 사회에서는 신문 소설만이 가장 보편적으로 위안을 드리는 재료가 될 줄로 믿습니다’라고 답했다. 여성만이 아니라 현대인 전반을 위해 ‘가장 보편적으로 위안을 드리는 재료’로 신문 소설을 꼽았다.
신문 구독자 중에서 연재소설을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에 김형원 국장은 ‘전 독자의 90파-센트는 소설까지 애독하는 독자로 믿습니다’라고 답했다. 같은 질문에 김동성 조선중앙일보 편집국장은 ‘전 독자의 50파-센트는 되는 줄 아옵니다’라고 했고, 설의식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분명한 숫자는 들기 어렵습니다마는 독자를 유별(類別)해 본다면 이 방면의 독자가 가장 많으리라고 믿습니다’라고 답했다. 3대 일간지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연재소설을 읽는 독자 비중이 가장 크다고 답할 만큼, 연재소설이 신문에서 갖는 비중은 막강했다.
▲춘원 이광수의 '유정' 첫회. 조선일보 1933년9월27일자 석간 4면에 실렸다.
◇'한회라도 독자가 하품할 곳이 없어야’
신문 연재 소설은 단행본이나 잡지 연재와는 어떻게 다를까. 김동인(1900~1951)은 ‘신문 소설이라는 것을 보는 두 가지의 눈이 있다’면서 ‘첫째는 신문인 측의 눈이오, 하나는 청교도적 문인의 눈’(‘신문 소설은 어떻게 써야 하나’, 조선일보 1933년5월14일)이라고 설명한다.
‘신문인 측의 눈으로는 내용의 무엇무엇보다도 제일 먼저 고려되는 것이 ‘이 소설이 신문 지상(紙上)에 적합하냐, 매일 백몇십행씩 연재를 하여 신문을 장식하면 독자가 그 때문에 끊으려는 신문을 끊지를 못하고 그냥 구독하겠느냐, 이 소설은 그만한 흥미와 애정을 가졌느냐, 첫회부터 이 소설은 독자의 흥미를 넉넉히 끌겠느냐, 중도에서 읽기 시작해도 넉넉히 흥미를 끌겠느냐, 남의 집에 이웃을 가서 우연히 그 한회를 보고도 그 소설의 매력에 취하여 이튿날부터 그 신문의 구독자가 되겠느냐, 매회에 넉넉히 클라이막스가 들어서 한회뿐으로도 희넉넉 재미있게 보겠느냐, 지리한 점은 없느냐, 그 한회라도 독자의 하품을 자아낼 만한 곳이 없느냐’하는 것이다.’
신문에 매회 실릴 때마다 독자들의 흥미를 끌 수있느냐가 연재소설의 관건이라는 취지다. TV일일드라마의 요건과 비슷하게 들린다. 하지만 문단의 평가기준은 다를 수밖에 없다. ‘문인측의 눈은 그 소설을 제1회부터 종말까지를 통하여 보아서 거기서 문예적 가치를 발견하면 그것으로 넉넉한 것으로서 그 중도에 비록 20회, 30회를 연하여 독자의 하품을 자아내는 지리하고 귀찮은 장면이 있을지라도 그러한 점은 돌아보지 않는다.’ 신문계와 문단이 말하는 ‘걸작’의 구별이 생긴다는 것이다. 신문 연재소설이 갖는 핵심 특징을 잘 짚었다.
◇'매회 서스펜스가 있어야’
극작가 겸 소설가 윤백남(1888~1954)도 ‘명랑과 유모어를 실은 위에 대중의 갈 길을 암시하고 취미를 향상시키고 마음을 정화시키는 소설이 된다 하면 이것은 대중소설의 극치’(‘신문소설 그 의의와 기교’, 조선일보 1933년 5월14일)라면서 신문 소설은 대중 소설을 지향할 것을 주장했다. 이를 위해 신문소설은 ‘매회매회에 일종의 ‘서스펜스’를 지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조선에 있어 위에 말한 바와 같은 명랑과 청신을 담은 훌륭한 대중소설이 나오지 못한 원인은 작자의 무기력한 것도 있거니와 그보다 더 큰 원인은 우리 조선인 생활 그것에 명랑성이 있기 어렵고 또 번화하고 청신한 생활이 드문 것도 원인이다’고 했다. ‘부르주아라 한들 얼마나 굉장한 부르주아가 있으며 식크하고 모던하다 한들 얼마나 식크하고 모던-할 것이냐’라고도 했다. 명랑과 유모어를 갖춘 계층이 없는데, 어떻게 그런 작품이 나올 수있느냐는 항변이다.
그런가 하면, 이무영은 신문 소설에 대한 애증을 토로하기도 했다. ‘아사(餓死)할 지언정 저널리즘의 사도가 되고 싶지는 않다. 이러한 결심을 한 것은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신문 소설을 쓰게 되는 자신을 돌아볼 때 어떤 때는 눈물이 나도록 자신이 불쌍하여 진다.’ (‘신문소설에 대한 관견’, 신동아 제4권5호, 1934년5월)
◇군국주의에 휘말린 근대 문학의 상처
가끔 대중성, 상업성 논란도 있었지만 1930년대 근대 소설이 신문이라는 뉴미디어와 손잡고 전성기를 구가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국 문학사에 굵직한 자취를 남긴 작품들이 집중적으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1930년대 전성기를 구가한 근대 문학이 전쟁으로 치달은 일본 군국주의의 돌풍에 휘말린 것은 상처이자 손실이다. 하지만 시각을 바꾸면 기회일지도 모르다. 식민지와 파시즘을 통과한 경험이 인간과 사회,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어진다면, 우리가 세계에 내놓을 만한 자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김기림, 신문소설 올림픽시대, 삼천리 제5권제1호, 1933,1
(설문)조선문화와 민중과 신문, 삼천리 제7권제6호, 1935, 7
천정환, 근대의 책읽기, 푸른 역사, 2003
01.27 고종의 덕수궁 생일축하연에 등장한 ‘일본의 마돈나’ 덴카츠
1910년대 덕수궁 중화전, 돈덕전서 日여배우 덴카츠 마술공연
▲1911년과 1916년 9월8일 고종의 생일축하연에는 일본 '마술의 여왕' 덴카츠의 관능적 춤과 마술이 등장했다. 저녁 3시간 동안 덕수궁 중화전과 돈덕전에서 열린 공식행사였다./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1911년 9월8일 저녁 덕수궁 중화전에선 이례적 장면이 연출됐다. 일본 쇼고쿠사이 덴카츠(松旭齋 天勝·1884-1944)의 마술 공연이 열린 것이다. 덴카츠는 메이지 후기부터 쇼와 초기까지 ‘마술의 여왕’으로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한 ‘일본의 국민적인 마돈나’(김성연, 일본 ‘마술의 여왕’ 덴카쓰의 조선 공연)였다. 마술사 겸 배우였던 덴카츠는 스승 쇼고쿠사이 덴이치와 함께 서구 순회 공연까지 다니면서 서구적 테크닉을 접목한 독자적 마술 세계를 개척한 인물이다. 특히 1900년 우의무(羽衣舞)로 스타덤에 올랐다고 한다.얇은 비단을 걸치고 관능미 넘치는 움직임으로 눈길을 끌었다.
중화전 공연이 열린 9월8일은 고종의 생일이었다. 대한제국 황제를 지낸 고종 육순(六旬)잔치의 주공연을 전부 덴카츠에게 할애한 것이다. ‘본일(本日)은 덕수궁 이태왕전하의 육순탄신인 고(故)로 덕수궁에서 창덕궁 이왕 동(同)왕비 양(兩)전하께서는 오전 8시30분에 덕수궁에 행계하야 축하연에 참여하셨다가 오후 중화전에서 천승기술(天勝奇術)을 어람하시고 동 5시경에 환궁하신다더라’
덴카츠의 마술 공연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1911년9월8일)에 실렸다.
▲일본의 '국민적 마돈나'로 알려진 쇼고쿠사이 덴카츠(松旭齋 天勝). 1911년 9월8일 덕수궁 중화전에서 고종 생일축하연 여흥으로 마술이 가미된 무용과 연극을 공연했다. 덴카츠는 1911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경성과 조선 전국을 순회공연했다. 옛날 엽서에 실린 덴카츠 사진이다.
◇종친, 이왕직 고등관 부부와 마술 공연 관람
‘순종실록부록’(1911년9월8일)엔 이렇게 썼다. ‘태왕 전하(太王殿下)를 모시고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쇼쿄쿠사이 덴카쓰〔松旭齋天勝〕의 재주 시범을 관람하였다. 종척(宗戚), 중추원 고문(中樞院顧問), 이왕직 고등관 및 그 부인들도 관람하였다. 창덕궁(昌德宮)에서 만찬(晩餐)을 준비하였다. 귀족과 이왕직 고등관에게는 기념품을 하사하고, 판임관(判任官) 이하에게는 주찬료(酒饌料)를 차등 있게 지급하고, 천승(天勝) 등 직물 1권(卷)과 은병(銀甁) 2개(箇) 및 금(金) 500원(圓)을 상으로 하사하였다.’
순종 부부가 고종을 모시고, 종실, 중추원 고문, 이왕직 고등관과 그 부인들까지 함께 봤다는 것이다.순종실록부록은 대한제국 궁내부를 계승한 이왕직에서 편찬했다.이왕직은 일본 궁내성 소속인데다 편찬 과정에서 경성제대 일본인 교수들이 감수를 맡았고역시 일본인인 이왕직 장관이 최종 책임자였기에 주의깊게 읽어야 한다.
▲1915년 9월11일~10월31일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를 위해 설치한 연예관. 덴카츠는 10월10일부터 19일까지 열흘간 공연해 초만원을 이뤘다. 에로틱한 춤과 마술적 기교를 담은 '살로메' 공연으로 인기를 모았다. /서울역사박물관
◇조선물산공진회 ‘히트작’ 덴카츠 공연
덴카츠가 1911년 덕수궁 중화전에서 어떤 공연을 펼쳤는지 구체적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덴카츠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이하 공진회) 당시 오스카 와일드 희곡 ‘살로메’에 마술을 접목시킨 연극으로 화제를 모았다.
특히 헤롯의 딸 살로메가 추는 ‘일곱 베일의 춤’과 참수당한 요한의 목을 바치는 장면이 눈길을 끌었다고 한다. 쟁반위에 담긴 요한의 머리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는 장면을 마술로 연출해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것이다. ‘일곱 베일의 춤’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페라 ‘살로메’에서도 에로틱한 연출로 늘 화제가 되는 장면이다. 10년 전 세종문화회관에서도 누드 모델 몇 명이 일곱 베일의 춤을 선보여 논란을 빚은 적 있다.
‘공진회’는 총독부가 시정 5주년을 기념해 식민지배 성과를 홍보하기 위해 개최한 관제(官製)행사였다. 1915년 9월11일부터 10월31일까지 경복궁 안팎에서 열렸는데, 행사 시설물을 설치하느라 근정전, 경회루, 교태전 등 주요 건물을 제외하고 경복궁내 전각 4000여칸을 철거했다. 문화재청이 최근 펼치고 있는 경복궁 복원 사업의 단초를 제공한 셈이다. 총독부는 관람객 동원에도 상당히 공을 들여 116만6383명이 경복궁을 찾았다.
덴카츠는 경복궁 전람회의 주요 행사장인 ‘연예관’에서 10월10일부터 열흘간 공연했다.서구식 외관의 연예관은 내부는 일본 전통극장 구조인 800석짜리 공연장이었다.연예관 공연 중 거액의 계약금(약3272원)을 받고 유일하게 일본에서 초빙된 공연이었다.관객을 유인할 만한 대중동원력이 크다고 봤기 때문이다.
첫 공연부터 덴카츠의 반나체를 드러내며 관능미를 앞세운 ‘살로메’를 중심으로 마술과 댄스를 선보인 덴카츠 극단은 16일부터는 날개옷 댄스와 전기를 이용한 나비춤, 희극 쥐잡기를 올렸다. 역시 관능과 재미를 앞세운 쇼로 매일 초만원을 이뤘다.덴카츠 공연은 3시간 가량 걸리는 대규모였다.
◇창덕궁 인정전서 덴카츠 공연 본 순종 부부
덴카츠 극단은 공진회 공연을 마친 10월24일 저녁 창덕궁 인정전에서 어전공연을 했다. 순종은 그날 오후6시 창덕궁 식물원 온실에서 데라우치 총독과 각 부처 장관, 조선 귀족과 그 부인 등 7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만찬을 주재했다. 만찬이 끝난 뒤 순종 일행이 자동차와 마차를 나누어 타고 인정전에 가서 즐긴 여흥이 덴카츠 공연이었다. 마술, 곡예, 서양합주, 독주, 날개옷 댄스 등을 공연했다고 한다. 공연은 10시에 끝났다. 순종은 은으로 만든 화병 1개와 술병 1개, 술잔 1개, 시정 5년 기념 금을 하사했다.
◇ ‘살로메’ 고종 65세 기념 연회에서 공연한 듯
덴카츠는 1916년 9월8일 고종의 생일잔치에 다시 섰다.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3시간 정도 공연했다. 이정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1916년 고종의 65세 탄생 기념연회에서 ‘에로티시즘과 퇴폐미 넘치는 덴카츠의 퍼포먼스로 고종의 관심을 돌리려 한 것같다’면서 ‘1915년 살로메의 폭발적인 인기로 보아 아마도 고종 친림 석상에서도 공연했을 것같다’고 썼다. 1915년 공연한 마술을 가미한 연극 3편(살로메, 신부호궁, 쥐잡기), 모던 댄스, 서양악기 연주, 마술, 곡예에 러시아 여배우가 나선 무용까지 포함된다는 보도도 나온 것으로 보아 덴카츠 극단의 주요 레퍼토리가 망라됐을 가능성이 높다.
▲2023년9월 재건축한 덕수궁 돈덕전. 대한제국 당시인 1903년 외국 외교관을 맞는 공관으로 건립했다. 일본의 강제병합 이후인 1911년부터 고종의 생일 축하연 오찬과 저녁 공연 장소로 쓰였다.
◇돈덕전에서 열린 덴카츠 마술공연
1916년 9월8일 덴카츠 극단의 고종 생일잔치 공연이 열린 곳은 돈덕전이었다.기존 연구는 이 점을 밝히지 않았는데,’덕수궁 찬시실 일기’에 나온다. ‘(오후)7시 태왕전하, 왕전하, 왕비전하가 (함녕전에서) 나와 돈덕전에 가서 수행원들과 10시까지 여흥(덴카츠 마술·天勝奇術)을 관람했다.’ ‘덕수궁 찬시실 일기’는 조선시대 군주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승정원일기’를 본떠 이왕직 산하 찬시실에서 날짜별로 작성했다. 매일 시간별로 고종, 순종의 일상을 기록한 1차 자료다.
찬시실이 1916년 고종 생일축하연 장소로 지목한 돈덕전은 1903년 개관한 서양식 건물이다. 고종은 1910년 경술국치후 매년 9월 생일 잔치가 열릴 때마다 돈덕전에서 서양식 오찬과 저녁 여흥을 즐겼다.종친과 이왕직 고위 관료들이 참석한 양식 오찬을 할 때는 서양음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덕수궁 찬시실 일기에 따르면, 1915년 9월8일 밤 고종 생일잔치 여흥 때는 고종은 참석하지 않고 순종 부부만 돈덕전에서 일본인 가무를 즐겼다.고종은 이날 오전 함녕전에서 신하들의 축하 인사를 받고, 오찬 주재도 건너뛰었다. 순종이 대신 돈덕전에서 서양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오찬을 주재했다.여느 해와 달리 ‘서양요리’라는 언급은 없지만,평소와 같이 양식으로 진행했을 것이다. 순종 부부가 참석한 이날 저녁 여흥은 누가 공연했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아 내용은 알 수없다. 하지만 덴카츠 이외에도 고종 생일잔치 프로그램으로 일본 가무가 올라왔던 셈이다.
◇일제가 궁중 연회문화 변질?
이정희 교수는 ‘1910년대 고종 탄신 기념 연회는 전통 궁중 공연에서 상연되지 않았던 양악, 민간 성악곡, 민간 기악곡, 마술, 영상이 각각 배치됐다’면서 ‘전통을 망각시키고, 유흥적인 분위기로 일제가 몰고 가는 형세에 처해 있었다’고 썼다.일제가 궁중 문화를 변질시켰다는 것이다.고종 생일 잔치를 주관한 것도 일본 궁내성 산하 이왕직이기 때문에 일본이 정해놓은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고종은 자기 생일잔치 여흥 프로그램도 맘대로 고를 수 없을 만큼 무기력했을까. 한사코 싫다고 거부하는데도 총독부가 공연을 강요했을까. 망국(亡國)의 군주는 이래저래 비루(鄙陋)하다.
◇참고자료
덕수궁 ‘찬시실 일기’ 1911-1918
김성연, 일본 ‘마술의 여왕’ 덴카쓰의 조선 공연, 국제어문 제76집 2018,3
이정희, 1910년대 고종 탄신 기념 연회의 공연 양상, 공연문화연구 35권, 2017.8
이주희, 쇼코쿠사이 덴카츠의 춤 전개 양상 연구, 무용예술학연구 제34집, 2011
02.03 순종까지 즐긴 露유학파 김문필의 마술쇼
1925년 7월창덕궁 인정전서 관람…
新공연예술로 선풍적 인기
▲1920년대는 일본인 마술사들이 휩쓸던 공연 시장에 조선인 마술사들이 등장해 인기몰이를 하던 마술의 시대였다. 러시아 유학파 출신인 김문필, 역시 러시아에서 성장한 김완실과 박창순은 마술을 포함한 춤과 노래, 연극이 뒤섞인 공연을 만들어 전국을 순회했다. 예전엔 볼 수없었던 화려하면서 충격적인 마술쇼는 신종 엔터테인먼트 산업이었다. /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김문필은 평안북도 초산(楚山)출생으로 23세에 고향을 떠나서 로국(露國·러시아)에 유학하여 ‘알늑산드럿지’대학에서 7년간 문학을 연구하다가 예술단을 따라서 멀리 불란서 파리까지 최면술과 기술(奇術)을 배우고 이래로 각파 예술단에 참가하여 서반아에서는 김군이 예술계의 일대 명성이 되어 세계적 기술가(奇術家)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으며, 그 후에는 폴란드 여자와 결혼하여 재미있는 생활을 하다가 로국의 혁명이 일어난 후로 재산은 있는대로 주고 단신으로 바람찬 시베리아를 거쳐서 동양으로 향하기 시작하여...’(‘천재 기술의 김문필군’, 조선일보 1924년6월30일)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신문에 특이한 인물이 소개됐다. 러시아로 유학갔다가 마술을 배워 ‘세계적 마술가’가 됐다는 김문필이란 사나이였다.평안북도 초산 출신의 이 남자는 프랑스 파리에서 서양의 최면술과 마술을 배웠고, 유럽 공연을 다니면서 스페인에선 ‘세계적 마술사’대접을 받았다고 했다. 김문필은 폴란드인 여성과 결혼했는데,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때문에 재산을 뺏기고 홀몸으로 시베리아를 거쳐 귀향했다는 얘기였다. 당시 마술은 기술(奇術)로 불렸다.
◇독일어 등 7개국어 능통
경성의 유지 30여명이 1924년 6월 28일 관수동 국일관에서 김문필 후원회를 결성했다는 소식도 함께 전했다. 김문필이 귀향노정에서 하얼빈에서 마술공연으로 번 돈 2400원을 조선 동포학교에 기부하고, 장춘에서도 공연을 펼쳐 수입 2000원을 역시 학교에 기부했다는 미담이 한몫한 것이 아닌가 싶다. ‘군은 어학으로도 동서양 일곱나라 말을 능통하고 기술로는 150여종으로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한 기술(奇術)이 많이 있는 터임으로...’
7개 국어에 능통할 뿐 아니라 150여종의 마술을 할 줄 안다고 소개됐다. 후원회 결성 목적은 기사에도 나오는 것처럼, 경성을 비롯 전국 순회 공연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김문필은 후원회장에서 ‘프리뷰’ 형식의 마술도 선보였는데, 놀라울 지경이었다고 한다.
▲러시아에서 마술을 배워 '세계적 마술사'가 됐다는 김문필을 소개한 조선일보 1924년 6월30일자 기사.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 각 신문들이 모두 김문필을 소개하는 기사를 내보낼 만큼 주목을 받았다.
◇러시아 황실의 격찬 받아
같은 날 동아일보와 매일신보에도 김문필을 소개하는 기사가 났다. 매일신보는 김문필의 상반신 사진까지 실었다. 김문필의 해외 유학과 경력을 나열한 뒤 이렇게 소개했다.
‘세계적 기술가로 여러 번 노국(露國)황실의 격찬을 받고 노경(露京)성피득보(聖彼得堡)의 한 모퉁이에 거대한 저택을 두고 풍유한 생활을 하더니 의외에 노국 혁명이 돌발하여...’(‘세계적 奇術家 김문필군’, 매일신보 1924년 6월 30일)김문필이 러시아 황실의 총애를 받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저택을 소유할 만큼 성공한 마술가라고 전했다.
동아일보는 같은 날짜 신문에 ‘우리들은 이때까지 일본 사람이나 서양 사람의 기술이나 마술을 보고 그 신출궤몰한 재조에 깊이 느낀 일이 있으나 우리 조선 사람의 그만한 재조를 보지 못하든 바’(‘노국유학의 김문필씨’, 동아일보 1924년 6월 30일)라며 김문필의 등장을 소개했다. 이 신문은 김문필이 인도까지 순회했으며, 러시아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 7개 국어에 능통하다고 소개했다.
▲러시아에서 마술을 배워 유럽, 특히 스페인에서 '세기의 마술사'로 정평 높다는 김문필. 1924년 귀국해 조선연예단이란 공연단체를 만들어 마술공연을 펼쳤다. 매일신보 1924년 6월30일자에 실린 사진과 기사
◇조선인 마술사 출현 앞다퉈 소개
마술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 전혀 보지 못한 새로운 공연예술로 주목받던 장르였다. 1915년 9월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에서 일본 마술계의 스타인 ‘쇼쿄쿠사이 덴카츠’(松旭齋 天勝·1884-1944)가 펼친 공연은 이전에 볼 수없었던 화려하고 자극적인 볼거리를 제공해 마술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덴카츠 극단’ 조선 공연은 추후 소개) 1910년대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마술공연은 일본인이 주도했기에 조선인 마술사의 출현은 신문이 앞다퉈 보도할 만한 관심거리였다.
김문필은 소년소녀 20여명으로 이뤄진 ‘조선예술단’을 만들어 그해 10월15일 밤 7시 인사동 조선극장에서 ‘창단 공연’을 가졌다. 창단 공연을 알리는 기사엔 단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까지 실렸다. ‘그의 재주는 유명하다는 일본의 천승(天勝)이나 천화(天華)단에 비길 바가 아니라 하야 벌써 일반의 인기가 높아감으로….’(‘조선예술단 출연과 동아일보 독자우대 할인’, 동아일보 1924년 10월 15일)
티켓 가격은 2층 2원, 1층 1원으로 꽤 비싼 편이었다.

▲1924년10월 조선연예단 창단 공연을 알리는 동아일보 1924년10월15일자 기사. 김문필(뒷줄 왼쪽)과 단원들이 공연 홍보용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가극, 기술, 최면술 등으로 매일 밤 만원’
조선예술단은 전국을 도는 순회 공연에도 나섰다. 11월17일~20일 평양제일관에서 공연을 가졌다는 기사가 실렸다. 레퍼토리는 ‘동요,동화,댄스 등으로 특히 조선의 역사적 예술의 능력을 발휘하야 사회 교화에 필요한 재료이며 그외에도 서양에 유명한 기술 최면술 등의 기이한 것이 많이 있다고 한다’(시대일보 1924년 11월17일)
같은 달 진남포에서도 ‘가극 기술 최면술 등 흥미있는 것을 공연하야 매일 밤 만원의 성황을 이루는’(‘조선예술단의 자선공연’, 시대일보 1924년11월26일)성과를 거뒀다. 하얼빈, 장춘에서처럼 사회 사업을 위한 자선 공연도 계속한 것같다.시대일보 진남포 지국 후원으로 11월25일 밤 기독교청년회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을 돕는 자선공연을 했다.
이듬해 3월 동대문 밖 총독부의원 동물사육장에 움막 같은 교실을 지어놓고 공부하는 ‘고학당’(苦學堂)을 후원하는 공연을 펼쳤다. 3월15일~18일 시내 경운동 천도교 기념관에서 마술 공연을 시작으로 전국은 물론 일본까지 순회 공연을 펼쳐 학교 설립을 돕겠다는 포부였다.(‘고학당을 위하야 조선예술단 출연’, 조선일보 1925년 3월 11일)
◇창덕궁 인정전서 순종이 관람 어전 공연
순종도 1925년 7월 6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종친, 귀족들과 함께 김문필의 마술공연을 관람했다고 한다. ‘금 6일 오후7시반부터 이왕전하께옵서는 창덕궁 인정전으로 이왕가의 어친척과 중요한 귀족, 그외의 이왕직 고등관을 불러서 조선예술단의 김문필일행의 기술을 어람하신 후 일반 내빈에게 다과의 하사가 계실터이라더라.’(‘인정전에서 기술을 台覽’, 매일신보 1925년 7월 6일)
김문필은 1925년 여름 조선 공연을 마무리하고 해외로 나갈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같다. ‘조선예술단 김문필씨는 그동안 1년간이나 조선 각지로 돌아다니며 많은 환영을 받아오던 바 이번 또 많은 경영을 목적하고 고국을 떠나 해외로 향할 터이라는데 고국을 작별하는 마지막 흥행으로 8월 6일부터 5일동안을 평양제일관에서 최면 대 기술(奇術), 마술, 서양인 기술, 남녀무도, 가극, 희극 등 여러 가지 종목으로 특별대흥행을 한다는데, 본사 평양지국에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일반 독자에게 우대권을 발행하여 우대권 가진 분에게는 각 등에 10전씩 할인하여 줄터이더라.’(‘조선예술단 평양에서 흥행’, 조선일보 1925년 8월 9일)
◇조선예술단 출신 신일선, 나운규 ‘아리랑’ 출연
기사에 따르면, 조선예술단은 마술을 중심으로 무용, 노래, 희극을 섞은 버라이어티 쇼를 공연한 것같다. 김문필의 이후 행적은 신문에서 보이지 않는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조선예술단 단원인 당시 열일곱살 신일선이다. 예술단을 나온 신일선은 1926년 나운규의 대표작 ‘아리랑’에서 누이동생 영희 역을 맡아 주목을 받았다. 같은 해 이경손 감독의 ‘봉황의 면류관’, 1927년 심훈이 연출한 ‘먼동이 틀 때’에도 출연하면서 한국 영화 초창기를 장식한 대표적 여배우로 떠올랐다.
◇조선소년군 지원, 공회당 건립 자선공연 나선 박창순
1920년대는 김문필의 ‘조선예술단’뿐 아니라 박창순의 ‘우리기술단’, 김완실의 ‘천연기술단’ 등 조선인 마술공연단이 속속 등장한 시대였다. 1925년 3월 23일 박창순이 조직한 ‘우리기술단’이 경운동 천도교 기념관에서 자선공연을 가졌다. ‘부내 필운동에 있는 필운 강습원은 창립 이래 매우 곤궁한 중에서 지내던 터인데, 이 필운강습소의 경비에 보태어주고자 ‘우리기술단’에서는 23일부터 사흘간 하오7시부터 부내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교육연보기술대회를 열고 기술사 박창순군의 여러가지 기술, 마술을 행할 터이라는데 입장료는 특등은 1원, 대인은 30전, 학생은 20전이라 한다.’(‘필운강습을 위하여 우리기술단 출연’, 조선일보 1925년 3월 23일) 매일신보에도 같은 날 비슷한 내용이 실렸다.
박창순은 같은 달 3일 세우(世友)구락부 주최로 천도교기념관에서 열린 조선소년군(朝鮮少年軍, 보이스카웃 전신)돕기 연예회에도 출연했다.이날 박창순은 ‘기술’(奇術)을 선보였고, 바이올린 독주, 소년소녀가극 등이 함께 열렸다.(동아일보 1925년 3월 2일)
우리기술단은 같은 해 5월 선천, 안동현, 신의주, 6월 용천군 양시(楊市), 7월 숙천, 8월 개성 등 전국 순회 공연을 다녔다(‘우리기술단이 선천에서 대성황’, 조선일보 1925년 5월 15일, ’공회당 기성회와 우리기술단 미거’, 조선일보 1925년 6월 23일). 대부분 자선공연으로 지역단체가 주최하고 신문사 지국이 후원하는 형식이었다.
◇공학도 출신 김완실의 천연기술단
1927년엔 어릴 적 러시아에서 자란 김완실(33)이 ‘천연기술단’을 결성, 공연에 나섰다. 함북 명천 사람인 김완실은 모스크바에서 자란 공학도였는데, 재학 시절 마술을 배워 흥행단을 조직한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김완실도 러시아 혁명 후 만주를 유랑하다 귀국했다고 한다.
‘30년 동안이나 로국(露國)에 길여서 자기 본국보다 로국이 익숙하다고 할 김완실(33)씨는 ‘모스코바’에를 세살 때 들어가 거기서 로국인 수중에서 양육을 받으며 그곳 공업예술학교까지 졸업하였는데 재학 당시부터 학생들끼리 기술 마술 모험술 등을 하는 흥행단을 조직하야 하기 방학이면 각지를 순회하여 많은 환영과 갈채를 받았었다는데 씨는 혁명 후에 만주에 머물다가 두어달 전부터 귀국하야 현저동에 와서 두류하며 남녀 15인으로써 천연기술단을 조직하야 기술과 가극을 연습중이라는데 오는 22일부터 시내 우미관에서 공연을 하리라는 바 실로 종목이 30여종이라더라.’(‘不日공연할 천연기술단’, 조선일보 1927년 12월 18일)
매일신보(1927년 12월 17일자)는 김완실이 ‘출신이 공예가인 만큼 무대배경 의상 등 손으로 만드는 것치고는 못만드는 것이 없다’고 소개했다. 김문필, 박창순, 김완실이 이끌던 공연단체의 이후 행적은 잘 확인되지 않는다. 1920년대는 ‘마술의 시대’라고 할 만큼 마술공연단체가 속출했고 대중의 인기를 누렸다. 현실에선 이룰 수 없는 꿈을 마술로 실현시켜주는 마력(魔力)이 필요한 시대였을지도 모르겠다.
◇참고자료
신근영, 1920년대 마술의 유행과 그 여파, 공연문화연구 제35집, 한국공연문화학회, 2017, 8
홍선영, 제국의 문화영유와 외지순행, 일본근대학연구 제33집, 한국일본문화학회, 2011,8
김성연, 일본 ‘마술의 여왕’ 덴카쓰의 조선 공연, 국제어문 제76집 2018,3
이주희, 쇼쿄쿠사이 덴카츠의 춤 전개 양상 연구, 무용예술학연구 제34집, 2011
02.10 음력설? 100년 끈 ‘二重過歲' 논쟁
광복후에도 40년간 양력설 고수…1985년 ‘민속의 날’로 음력설 부활

▲100년 전 조선은 양력설을 지낼 것인지, 음력설을 지킬 것인지 혼돈상태였다. 1895년 양력 채택 후, 공식적으로는 양력설을 지켰으나 민간에선 음력설을 지키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총독부 권력으로도 바꿀 수없을 정도였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양력설을 치르고 나니까 또 얼마 안 있어 음력설을 맞이하게 되었다 ♦있는 사람은 일년에 몇백번의 설을 맞이하여도 조금도 고통이 없겠지만은 ♦없는 사람은 일년에 한 번 설을 치르는 것도 여간 큰 고통이 아닌데 ♦일년에 두 번씩은 참 못 견딜 일이야 ♦이러나 저러나 양력 그믐에는 모든 것을 음력 그믐에 다 미뤘으나 ♦얼마 안 남은 음력 그믐에는 또 언제로 미룬단 말인가? 오 이중생활의 고통이여.’(‘자명종’, 조선일보 1928년1월16일)
100년 전 신문을 들춰보면, 1년에 두번 새해를 맞는 혼란과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나온다. 공식적으로는 양력설을 지키지만, 음력설이 여전히 대세였기 때문이다. 이른바 ‘이중과세’(二重過歲)문제였다.
◇음력설 맞아 생활고…음독, 할복 줄이어
두 번의 설날은 없는 사람들에겐 더 치명적이었다. 음력설 무렵이면 이런 기사가 실렸다. ‘여자는 음독, 남자는 할복-구력 설이 낳은 此 참극’(조선일보 1926년2월16일). 황해도 신천의 빈민 가정 참극을 다뤘다.
‘음력으로 마지막날인 2월12일 오후4시 황해도 신천읍내 훈련리 곽진규의 처 김씨(34)는 본시 넉넉지 못한 살림을 하던 중 음력설은 당하고 다른 사람은 설 준비 하노라고 떡을 준비하느니 무엇을 하느니 야단법석이나 자기 가정에서는 아무 준비도 못할 뿐만 아니라 집까지 없어서 남의 곁방을 빌어있던 바 이것을 비관하야 염산약 삼십구람을 먹고 죽으려 하였으나 가족에게 발견되어 즉시 읍내 해성의원 의사 최두현씨를 청하야 치료를 받은 결과 생명에는 별로 관계가 없다 하며 동일 오후 5시경에는 읍내 박촌 사는 장(莊)모가 자식들도 있고 가정의 불화도 없었건만 돌연히 자기 집에서 칼로 배를 가르고 죽었는데 이것도 역시 설날은 닥치고 생활난으로 말미암아 그와 같이 죽은 듯 하다더라.’
◇'치마 전당잡혀 애들 입에 떡국물’
‘치마를 전당잡혀 애들 입에 떡국물’(동아일보 1927년2월3일)같은 기사도 심심찮게 나왔다. 섣달 그믐날 오후6시 종로 서린동의 전당포를 취재하던 중, 열살짜리 꼬마가 동생을 데리고 나타났다. 전당포 주인에게 신문지에 싼 옥색 서양목치마 하나를 내밀며 ‘하다못해 20전이라도 달라’고 애원했다. 주인은 하찮은 치마를 잡고 돈을 내주기 민망했던 모양이다. ‘20전짜리 전당이 어디있나? 이것은 여기 두고 30전만 갔다드려라’하고 선심썼다. 자초지종은 이랬다. 아이들 어머니가 떡국이라도 끓여주려고 푼돈이라도 얻을 생각에 입던 치마를 들려 전당포에 보냈다는 얘기다.

▲설빔을 입고 세배다니는 아이들을 촬영한 조선일보 1926년2월14일자 사진. 음력설마다 설빔 입은 아이들 사진이 신문에 종종 실렸다.
◇혼란의 설날
‘조선 사람은 그러지 않아도 살 수가 없어서 걱정인데, 근년에 와서는 과세를 두 번 하기 때문에 더욱이 곤란하단 말이지. 양력설에는 상여금이니 무엇이니 받았으니 남과 같이 망년회한다고 두 번 세 번 요리집에를 가지 또는 신년을 만났다고 신년 연회이니 무엇이니 하여서 이럭저럭하면 쥐꼬리만큼 받았던 돈은 어디로 갔는지 없어지고 전에 저축하여 두었던 것까지 없어지니그것이 지나자마자 음력설이 또 닥쳐오니 어린 아이들과 부인들은 설빔해달라고 야단이지 습관에 의지하여 새해를 만났으니 떡도 좀 만들어야 하고 움파도 좀 사와야 할 터이지 그러니 돈은 자꾸 들어가고 생활은 곤란하여진단 말이야. 그런즉 우리도 하루바삐 어떤 설이든 지정하여 가지고 구력을 지내랴거든 신력을 보지 말고 신력을 지내랴거든 구력은 관계도 말아야 우리의 생활도 어떠한 기초를 세울 터이란 말이야. 이것은 신년에 만날 때마다 일어나는 걱정이란 말이야.’(’잔소리’, 조선일보 1923년1월4일)
양력설과 음력설 사이에 끼여 어려움을 호소하는 의견이 끊이지 않았다.
◇'양력설과 음력설 중 어느 것?’ 공개 질의
신문사에 ‘양력설과 음력설 중 어느 것을 지켜야하느냐’며 공개 질의하는 독자도 있었다. 기자의 답은 이랬다. ‘세계가 한 집안같이 지내는 이상 대세에 벗어나는 것은 결국 자기에게 손실을 끌어오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으니 물론 세계가 공통적으로 시행하는 양력과세를 하는 것이 당연 이상으로 당연할 것이올시다. 그러나 다만 오랫동안 구력을 지키던 습관상 아직도 양력설을 남의 설같이 여기는 것이니 하루바삐 옛 습관을 깨치고 새 길로 나서서 세계의 진운에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올시다(일기자)’(‘어느 설을 지켜야 옳습니까’, 조선일보 1926년1월2일)
‘계몽’과 ‘이성’을 앞세우던 시대다운 답변이었다.
◇양력 채택한 갑오개혁
양력설은 1895년 11월 갑오개혁때 양력을 채택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양력은 외국 관련 업무나 정부 업무에 한정됐을 뿐 농업 사회에 살던 대다수 사람에겐 농사절기와 맞는 음력을 따랐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도시 근로자, 학생, 공무원들이 늘어나면서 양력의 지배를 받는 계층이 늘어났다. 관공서나 학교, 회사는 양력에 맞춰 새해를 시작하고 양력설을 지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천년 지켜온 음력설의 전통과 민속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란 쉽지 않았다. 음력설에 결근하는 직장인과 결석하는 학생들이 속출했다.

▲음력설을 맞아 때때옷을 입고 거리에 나온 아이들이 울긋불긋한 풍선에 눈길을 빼앗겼다. 음력설은 세뱃돈 넉넉한 아이들을 상대하는 풍선장수에게도 대목이었다. 조선일보 1929년2월11일자 만화
◇양력 설이 倭 설이라고?
‘이중과세’ 반대의 가장 큰 명분은 낭비였다. 양력설은 일본 풍습이란 반발도 있었던 모양이다. ‘북촌 일대의 과세(過歲) 기분이 농후하다. 경성보다 지방에서는 더욱이 음력설이 참설이라는 견해로 음력이 실행되고 있다. 그 반면에 양력설은 왜(倭)설이라는 생각, 즉 일종의 감정이 삽입하야 그를 배척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태양력에 의하라는 명령은 한국 정부에서 칙령으로 발포된 바인즉, 결코 왜설이라는 견해는 당치 못하다.’(‘이중의 과세’, 동아일보 1927년2월3일)
민족운동가 민세 안재홍도 양력설이 일본 풍습이라는 속설을 반박했다. ‘일본도 서양제도를 본받아 온 것이오, 조선도 이것을 고치자할 뿐’이라면서 ‘이런 세계적 제도를 채용하는 데는 그러한 명분론 같은 것은 너무 묵은 내나는 소리’라고 비판했다. 그는 ‘양력은 전(前)한국(구한말)시대부터 칙령으로써 발포하고 새로 시행하기로 한 것이니 그러한 의론이 더욱 이유가 안된다'며 양력설을 지킬 것을 주장했다.(’새해를 맞이하여서’3, 조선일보 1926년1월6일)
◇총독부의 이중과세 반대 캠페인
조선총독부는 1937년 12월 이중과세를 폐지하기 위해 대대적인 계몽운동을 펼쳤다.하지만 모래위에 물붓는 격이었다. 양력설을 지키는 사람이 늘어나긴 했지만 음력 설날은 여전히 대세였다. 총독부 권력으로도 음력 설날은 마음대로 할 수없었다.
광복 이후도 양력설날이 법정 휴일이었다. 정부는 1950년부터 양력 설만 인정, 1월1일~3일 사흘간 설 공휴일로 정했다. 1985년 음력설날 하루를 '민속의 날' 공휴일로 지정했고, 1989년부터 음력설 연휴가 3일로 확대됐다. 반대로 양력 설 연휴는 1991년 3일에서 2일로 줄었고, 1999년부터는 양력설 하루만 공휴일이 됐다.
광복후 30여년 양력설만 공휴일로 사흘간 쉬었고, 음력설은 휴일도 아니었다는 사실이 까마득한 옛일같다. 지금은 음력설 연휴 가장 붐비는 곳중 하나가 공항일 정도로 해외 휴가떠나는 시즌처럼 여기는 분위기도 있다. 격세지감이다.
◇참고자료
박수환, 근대 시기 양력 도입의 수용 양상과 갈등-이중과세 문제를 중심으로, 생활문물연구 27, 국립민속박물관, 2011
02.17 100년 전 조선에 온 체홉
1923년 토월회 첫 공연 ‘곰’…김수임, 모윤숙, 노천명도 체홉 연극 출연

▲1898년 그린 안톤 체홉 초상화. 체홉은 20세기 전반 조선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가 중 하나였다. /Public domain
1934년 12월7일 오후 6시반 조선호텔 건너편 경성공회당에서 러시아 극작가 체홉(1860~1904)의 연극 ‘벚꽃동산’(櫻花園)이 올라갔다. 일본 유학생들이 만든 신극단체 극예술연구회(이하 劇硏·극연)가 체홉 30주기 겸 창립 3주년을 기념해 올린 공연이었다. 극장은 가득찼다.
‘정각 전부터 오랜만에 연극다운 연극을 보기 위하야 몰려든 관중은 넓은 장내를 비좁다할만치 채웠다. 개막이 되매 상연된 각본은 벌써부터 소개가 넓게 된 안톤 체홉 원작 ‘앵화원’으로 오랫동안 닦은 무르녹은 연기는 만장한 관중으로 하여금 나를 잊어버리도록 하였다.’(‘세련된 舞臺面에 만장관중은 陶然’, 조선일보 1934년12월8일)
◇연애 스캔들 계기가 된 ‘벚꽃동산’
극예술연구회는 1931년 7월 서항석 유치진 김진섭 이하윤 이헌구 함대훈 장기제 정선섭 조희순 최정우 등 ‘해외문학파’ 계열 신예 10명과 연극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윤백남, 홍해성 등 일본 유학생 출신들이 결성한 신극단체였다. 동경외국어학교에서 노문학을 전공한 함대훈이 번역을 맡은 ‘벚꽃동산’은 홍해성이 연출했다. 단 이틀, 2회 공연이 전부였다. 조선일보 학예부가 후원한 덕분에 신문에 사고(社告)가 몇 차례 실렸고, 30주기를 맞은 체홉의 인생과 작품을 소개하는 기획기사가 집중적으로 나갔다.
당시 여배우들이 부족했는데, 신예 시인으로 주목받던 모윤숙, 노천명 같은 엘리트 여성이 배우로 출연해 주목을 끌었다. 모윤숙이 주인공 라네프스카야를 맡고, 조선중앙일보 기자였던 노천명이 라네프스카야의 딸 아냐로 나섰다. 연극평론가 안영일은 두 사람의 연기에 대해 합격점을 줬다.
보성전문교수 김광진과 노천명의 연애 스캔들도 체홉의 ‘벚꽃동산’이 계기가 됐다. 김광진이 ‘배우 노천명’을 보고 한 눈에 반해버린 것이다. 서른 한살 김광진은 유부남이었고, 스물셋 노천명은 미혼이었다. 둘은 결혼 약속까지 오갔지만, 김광진이 본처와 이혼하려고 고향에 내려갔다가 이혼을 결행하지 못한 채 유야무야됐다.
‘벚꽃동산’은 1930년11월 이화여전 학생들이 홍해성 연출로 올리기도 할 만큼, 조선에서 일찍부터 주목한 체홉의 대표작이었다.

▲극예술연구회가 90년전인 1934년 12월7~8일 경성공회당에서 올린 체홉 '벚꽃동산' 공연을 알리는 조선일보 1934년12월8일자 사고. 모윤숙과 노천명 등 신여성이 배우로 나섰다.
◇'나는 체홉에게 리얼리즘 배웠다’(이효석)
1920년대 조선에서 러시아 문학의 영향력은 유별났다. 영문학을 능가할 정도였다.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1907~1942)은 경성고보 시절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썼다. ‘14,5년전 조선 신문학의 초창기였던 만큼 일반으로 문학열이 지극히 높았던 모양이다…소설로는 하이디와 졸라 등 영불의 문학도 읽히지 않은 바는 아니었으나 노문학의 열을 따를 수는 없었다.푸쉬킨, 고리키를 비롯하여 톨스토이, 툴게네프 등이 가장 많이 읽히워서 ‘부활’이나 ‘그 전날 밤’의 이야기쯤은 입에서 입으로 옮겨져서 (기숙)사내에서는 거의 통속적으로 전파되게 되었다.’( ‘나의 수업시대’158, 이효석전집 7)
이효석은 열여섯, 열일곱살때 ‘체홉의 작품을 거의 통톡했다’면서 ‘그에게서 리얼리즘을 배웠다’고 고백할 만큼 체홉 마니아였다. ‘아무리 ‘지리한 이야기’라도 소설로서는 무척 재미있는 것이 그의 문학이다. 리얼리즘이라고 하여도 훌륭한 예술일수록 그 근저에는 반드시 풍순한 낭만적 정신과 시풍이 흐르고 있는 것이니 체홉의 작품이 그 당시의 것으로는 그 전형인가 한다.’(‘나의 수업시대’ 158~159)

▲토월회가 1923년7월4일~8일 경성 조선극장에서 올린 체홉 단막극 '곰' . 연학년이 주역을 맡았다. 조선일보 1923년7월6일자
◇'체홉은 슬픈 편지를 가져오는 배달부’(이태준)
‘문장강화’로 이름난 소설가 이태준(1904~?)은 자신을 감화시킨 작가로 체홉을 꼽았다. 이태준은 ‘묘사에 거짓이 없고 한 자(字) 한 구(句)가 객설이 없이 간결담려(淡麗)하다’면서 ‘이런 훌륭한 이의 글을 원서로 읽어보지 못하는 것은 한사(恨事)중에 하나이거니와 역서를 통하여서나마 체홉의 향기를 맡아보는 것만도 나는 나의 행복중의 하나로 헤아릴 것이다’라고 했다. ‘체홉은 채플린, 슈베르트와 같은 맥의 예술가라 생각한다. 이들은 모두 우리에게 슬픈 편지를 가져오는 배달부들이다. 이들의 작품을 대하고 날때마다 나는 가엾은 친구의 소식을 들은 것처럼 가슴아프다.멍-하니 눈을 감고 생각하는 것이다.’(이태준, ‘안톤 체홉의 애수와 향기’, 동아일보 1932년2월18일)
◇함대훈, 조선일보에 체홉 작품 연재
외국문학 번역의 역사를 정리한 김병철의 선구적 업적(‘한국근대번역문학사연구’·1975)에 따르면, 1920년대 번역된 러시아 문학은 영문학에 버금갔다. 당시 신문,잡지에 소개된 서구문학 작품(671편) 중 러시아문학은 127편으로 영문학(151편)에 이어 두번째였다. 특히 소설에 관한 한, 러시아문학이 영, 미, 불, 독의 어느 나라보다 많이 소개됐다. 러시아 작가 중에선 체홉 소설이 11편으로 최다를 차지했고, 톨스토이(10편)가 뒤를 이었다. 1924년 권보상이 번역 출간한 ‘체홉단편집’에도 11편이 실려있기 때문에 체홉 소설만 22편 이상이 번역된 셈이다. 1930년대에도 체홉의 단편 소설은 계속 소개됐는데, 특히 ‘곰’ ‘구혼’ ‘기념제’같은 희곡이 번역 소개됐다. 역자는 모두 함대훈이고, 조선일보에 연재된 게 특징이다.
◇토월회 창단에 등장한 체홉의 ‘곰’
초창기 신극단체인 토월회가 1923년 첫 공연에서 체홉의 ‘곰’을 올릴 만큼, 체홉은 한국 연극사에서도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1922년 박승희,김기진·김복진 형제, 김을한, 박승목, 이서구, 이제창, 연학년, 이수창 등 동경유학생 9명이 결성한 토월회는 1923년 단막극 4편을 올리면서 창단을 알렸다.
‘동경 유학생중에 연극과 문학을 전공으로 하는 학생의 조직인 토월회에서는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생들이 동경 각 극장에서도 제일 유행하던 극을 선택하야 오는 6월27일부터 5일간을 두고 단성사에서 거행하리라는데 각본을 듣건대 미국 ‘유-전 필로트’의 작 ‘기갈’과 노국 ‘안톤 체홉’의 작 ‘곰’과 영국 ‘뻐-나드 소’의 작 ‘그 남자가 그 여자의 남편에게 어떻게 거짓말을 하였느냐?’와 박승희씨의 작 길식(吉植)이라 하며 그 후에는 다시 7월25일에 개최할 터인데 역시 이삼종의 재미있는 것이오 7월5일경에는 동아부인상회를 빌려가지고 미술전람회를 개최하리라더라.’(‘토월회의 공개극’, 조선일보 1923년6월13일)
‘곰’주인공은 연학년이 주인공을 맡았다. 준비가 미흡했던지 실제 공연은 7월4일~8일 조선극장에서 열렸다. 첫 날 버나드 쇼 작품을 공연하다가 대사를 잊어버리는 통에 도중에 막을 내리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유학생 중심의 아마추어 공연인데다 대중적이지 않은 작품 때문에 2400원이라는 빚만 지는 참패였다고 한다. 하지만 ‘무대장치와 등장인물의 조화가 매우 교묘하여 식자의 칭찬이 많았다’(동아일보 1923년7월8일)는 호평도 있는 것으로 보아 화제가 된 모양이다. 함대훈은 ‘곰’을 신문(조선일보 1931년 8월8일)에 번역, 소개하기도 했다.
▲지난 1월29일 체홉 타계 120주년과 안똔 체홉학회 창립 10주년을 맞아 서울 종로구 명륜동 체홉극장에서 체홉 흉상제막식을 가졌다. /체홉극장
◇김수임, 체홉 단막극 ‘기념제’ 출연
본격적 신극단체로 꼽히는 ‘극예술연구회’는 1933년 제3회 공연에서 유치진 처녀작 ‘토막’, 카이젤의 ‘우정’과 함께 체홉의 ‘기념제’를 올렸다. 이 공연 역시 조선일보 학예부가 후원했다.
‘극예술연구회에서는 오는 2월 9일, 10일 양일을 기하야 본사 학예부 후원하에 장곡천정 공회당에서 제3회 공연을 한다함은 누보한 바어니와 동회에서는 방금 맹연습중인데 벌써부터 인기는 집중되어 있다 한다. 더구나 금번은 동 회원의 총출연으로 더욱 일반은 이에 커다란 기대를 갖고 있다는데 출연할 동회원은 극문학에 다년 연구가 깊은 조선문단의 활약하는 인사들과 교육계 언론계 실업계에 종사하는 인사들도 출연하게 되어 일반의 흥미와 기대는 더욱 높다.’(‘문단인도 등장’, 조선일보 1933년 1월31일)
‘기념제’는 함대훈이 주인공 쉬푸친, 광복 후 ‘여간첩’으로 처형된 김수임이 쉬푸친 아내로 나서고 유치진 김진섭 이헌구 등 말그대로 회원들이 총출동했다. ‘기념제’도 함대훈이 번역,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지난 1월29일 대학로 체홉극장 앞에 들어선 체홉 흉상/체홉극장.
◇체홉 작품 상설공연하는 ‘안똔 체홉 극장’
체홉의 인기는 요즘도 여전하다. 작년 5월 국립극단이 명동예술극장에서 올린 ‘벚꽃동산’은 내내 매진이었다. 1년 내내 체홉 작품을 올리는 극장도 있다. 러시아 유학파 출신 연출가 전훈이 이끄는 ‘안똔 체홉 극장’이다.
이 극장은 ‘갈매기’ ‘세자매’ ‘바냐 아저씨’ ‘벚꽃동산’같은 체홉 대표작을 상설 레퍼토리로 공연한다. 지난 달 이 극장에선 체홉 타계 120주년을 기념, 흉상 제막식이 열렸다. 안톤 체홉 학회 결성 10주년 기념을 겸한 행사였다.
‘체홉의 향기를 맡아보는 것만도 나의 행복중의 하나로 헤아릴 것’라고 한 이태준의 고백이 새삼 떠오른다. 이런 작가를 낳은 나라가 요즘은 왜 이럴까 싶기도 하다.
◇참고자료
이효석, ‘나의 수업시대’, 이효석전집 7, 창미사, 2003
김진영, 일본 유학생과 러시아문학: 조선의 1세대 노문학도를 찾아서, 러시아연구 제25권제1호, 2015
오원교, 1920~30년대 한국의 문학 비평에서 체홉, 슬라브연구, 제22권1호, 2006
김병철, 한국근대번역문학사연구, 을유문화사, 1975
유민영, 한국근대연극사, 단국대출판부, 1996
02.24 후버 대통령 닮은 현제명, ‘표현파’ 지휘자 홍난파
안석주가 쓰고 그린 음악가 群像…지금 봐도 모던한 캐리커처
▲만문만화가 안석주가 그린 1930년대 음악가 캐리커처를 한 컷에 담았다.왼쪽부터 테너 안기영, 피아니스트 김영환, 바이올리니스트 겸 지휘자 홍난파, 테너 현제명./조선디자인랩 정다운
▲만문만화가 안석주가 조선일보에 실은 1930년대 음악가 초상을 한 컷에 모았다. 왼쪽부터 1세대 음악가 김인식, 바이올리니스트 최호영, 피아니스트 독고선, '봉선화' 작사가 김형준./조선디자인랩 정다운
‘어느 때든지 연미복을 나르는 듯이 입고 옛 임금님의 위력을 보여주는 홀(笏)같이 하얀 종이 조각을 동글동글 말아서 쥐고 가볍게 저으며 청중들의 안전(眼前)에 군림한다. 옥안(玉顔)은 분지(粉紙)로 닦은 듯이 눈이 부시게 빛나나, 파지고 또 여윈 씨(氏)의 양협(兩頰·두 뺨)은 지난 날의 고락을 낱낱이 말하는 듯하지만 안개 자욱한 두 눈은 정열에 반짝인다.’(‘악단인의 철상요태’ 안기영씨’, 조선일보 1931년2월17일)
테너 안기영(1900~1980)을 소개한 만문만화가 석영 안석주(1901~1950)의 글이다. 연희전문 출신 안기영은 1926년부터 3년간 미국 오레곤주 포틀랜드의 앨리슨-화이트 음악학교(Ellison-White Conservatory)에서 공부한 유학파 출신이었다. 1928년 귀국한 그는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로 재직중이었다. 1928년 히트곡 ‘그리운 강남’을 작곡했고, 1929년 조선인 첫 가곡집을 발표한 작곡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음악회에서 청중을 사로잡는 성악가로 유명했다. 안석주는 ‘애련한 멜로디로 언제나 청중의 ‘하-트’를 연분홍색으로 물들여주는 이’라고 썼다.
안석주가의 캐리커처를 보노라면, 글보다 역시 그림이 뛰어나다는 생각이 든다. 연미복 차림으로 종이를 말아쥐고 한쪽 팔꿈치를 기댄 채 아리아를 부르는 안기영의 모습은 노래가 들리는 것처럼 디테일이 생생하다.
▲안석주가 쓰고 그린 테너 안기영 스케치. 조선일보 1931년2월17일자
▲안석영이 쓰고 그린 홍난파. 바이올리니스트 겸 지휘자 홍난파의 모습을 익살맞게 그렸다. 조선일보 1931년2월19일자
◇표현파(?)식 지휘하는 홍난파
안석주는 1923년 토월회 연극 ‘부활’에서 남자 주인공 네플류도프 공작을 연기한 배우이자 화가, 소설가, 시인 겸 신문기자였다. 1927년 조선일보에 들어온 안석주는 소설 삽화를 그리면서 만문만화로 이름을 날렸다.
‘악단인의 철상요태(凸相凹態)’는 안석주가 1931년 2월 신문에 연재한 기획이었다. 당시로선 신종 직업인 음악가들의 이모저모를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서양음악 1세대인 김인식과 김형준을 비롯, 조선의 첫 피아니스트 김영환, 바이올리니스트 홍난파, 테너 현제명, 바이올리니스트 최호영, 피아니스트 독고선 등 8명의 음악가들이 등장한다. 촌철살인의 짤막한 글과 함께 그린 캐리커처가 수준급이다. 공연장 안팎에서 이들을 오래 지켜본 관찰자의 시선이 적절히 녹아있다.
홍난파에 대해선 이렇게 썼다. ‘’빠요린’(바이올린)이 코주부들의 턱밑에 끼고 손가락을 떨어야 소리나는 양국(洋國) 깡깡인줄만 알고 일반이 신기해하던 시대에 먼저 ‘유모레스크’를 독주한 이도 씨(氏)인만큼 악단에 있어서 선진인 씨(氏)다.’(홍난파, 조선일보 1931년2월19일)
홍난파를 조선의 첫 바이올리니스트로 평가하면서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그의 문하를 거치지 않은 이가 드물다고 했다. 안석주는 홍난파를 지휘자로도 소개했다. ‘씨가 ‘콘덕터-’의 위(位)에 올라섰을 때에는 씨(氏)의 심령에 통하는 옛날 악성들의 정령의 활동이 격화하야 표현파나 미래파극의 과작(科作)을 볼 수 있는 것이 몹시도 새로워 보이고….’ 표현파, 미래파까지 거론하는 지휘 스타일은 뭔 소릴까. 안석주가 그린 캐리커처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격렬한 춤을 추듯 지휘하는 연미복차림 지휘자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안석영이 쓰고 그린 테너 현제명. 미국 후버 대통령 또는 남양군도 사람을 닮았다고 썼다. 조선일보 1931년2월20일자
◇남양군도사람 같은 현제명
‘얼른 보면 미국 통령 ‘후버-’같고 또 어찌 보면 남양군도 사람 같은 남성적이면서 순후해보이는 이가 씨(氏)다. 그러나 ‘굿빠이’ 노래만 할 때에는 어디서 나오는 애교인지 굴곡이 많던 얼굴에 오색꽃이 난만해진다.’(현제명씨, 조선일보 1931년2월20일) 테너 현제명은 우락부락한 얼굴이지만 감정을 담아 노래할 때는 따스한 표정으로 바뀐다고 했다. 하지만 육중한 몸집에 비해 성량은 아쉬웠던 모양이다.
‘씨(氏)는 악단에서 드문 체구이면서 음성이 섬세한 것은 기이한 일이나 모(某)씨 모양으로 콧노래로 시종치않는 것은 씨의 행복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체구에 ‘스키파’이상의 우렁찬 소리가 굴러나왔으면 더 없는 만족일것같다는 사람도 있지만 영양부족인 이 강토의 사람인데야….’
티토 스키파(Tito Schipa·1889~1965)는 이탈리아 테너로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시카고 오페라 주역으로 활약한 성악가다. 유성기 음반을 통해 조선에서도 인기가 높았다.가다. 유성기 음반을 통해 조선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안석주가 쓰고 그린 피아니스트 김영환. 머리를 피아노에 바싹 붙이고 두 손을 휘두르는 모습을 재미있게 묘사했다. 조선일보 1931년2월18일자.
◇카리스마 넘치는 피아니스트 김영환
‘씨(氏)가 조선말을 하나 일본말을 하나 양국(洋國)말을 하나 어느 말을 하거나 자기만 알 말 같은 독특한 말을 사용하여 난해는 난해이나 눈치빠른 사람이어야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 귀에 익지 못하면 고상한 줄 모를 씨의 피아노 독주나 마찬가지일 것같다.’(김영환씨, 조선일보 1931년 2월18일)
조선인 첫 동경음악학교 졸업생이자 조선의 첫 피아니스트로 알려진 김영환(1893~1978)은 말투가 좀 어물어물했던 모양이다. 안석주는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았던 피아노 연주에 그의 말투를 빗댔다. 또 음악회란 음악회엔 약방 감초처럼 나서는 김영환이 출연 펑크도 잦다면서 유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언제나 씨의 출연에는 재청 우삼청’이라면서 연주를 반겼다. 가난한 학생들의 학비를 대는 교육가라는 점도 높이 평가했다. 안석주의 진가는 역시 김영환을 스케치한 캐리커처에서 빛을 발했다.
‘피아노 칠 때에 머리는 건반에 대다시피 손은 공중에 춤추듯 한다. 이리하여 재박이 쏟아지고야 만다.’ (’삼천리’제4권제7호, 1932년6월)는 기사처럼,머리를 숙이고, 두 손을 갈퀴처럼 휘두르는 독특한 모습을 그렸다. 안석주의 캐리커처가 눈길을 끌었던지, 월간 ‘동광’은 1932년 1월호에 음악가 특집을 실으면서 이 그림을 다시 실었다.
▲안석주가 쓰고 그린 1세대 음악인 김인식. 인상쓰면서 노래하는 모습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조선일보 1931년2월24일자
◇안면 활동이 무시무시한 김인식, 바이올린만 들고있어도 슬픈 최호영
안석주는 약간 과장된 터치로 인물을 묘사하면서 특징을 짚어냈다. 1세대 음악가로 홍난파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친 김인식(1885~1963)은 짱구머리에 한 손에 부채를 쥔 채 입을 잔뜩 벌린 표정이다. ‘씨(氏)가 독창을 할 때에는 아무리 분장을 잘 하는 배우라도 못따를만치 안면의 활동이 무시무시하다’(김인식씨, 조선일보 1931년2월24일)
홍난파가 이끈 경성방송국 관현악단 바이올린 주자를 맡았던 최호영에 대해선 ‘스타일이나 천생으로 된 그 얼굴이 바이올린을 키지 않고 들고만 섰어도 키고 있는 듯이 그 표정이 슬프면서 급흐다’(최호영씨, 조선일보 1931년2월22일)고 썼다.
▲안석주가 쓰고 그린 바이올리니스트 최호영. 조선일보 1931년2월22일자
홍난파 가곡 ‘봉선화’ 작사자인 김형준은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두루마기를 걸친 노신사로 그렸다. ‘씨(氏)가 근일에 안질이 심한지 캄캄 칠야(漆夜)에도 조고약(趙膏藥) 같은 묵경(墨鏡)을 쓰고 집회에까지 나타나시는 것은 안질이 아니고 변해가는 세태가 꼴같잖아서 풍자적으로 쓰시는지는 몰라도 퀘스천 마크(?)를 사람의 마음 마음에 던져준다.’(김형준씨, 조선일보 1931년2월24일) 김형준은 피아니스트 김원복의 아버지이자 홍난파의 이웃 친구였다.
▲피아노앞에만 앉으면 심각해지는 독고선 캐리커처. 안석영이 그렸다. 조선일보 1931년2월26일자
피아니스트 독고선은 구불구불한 파마 머리에 잔뜩 찌푸리고 연주하는 모습이다. ‘조금도 악감(惡感)을 일으키지 않는 수수한 얼굴이 피아노를 거울로 삼았을 때는 금방 소낙비가 쏟아질듯이 찡그린 하늘 같은데 그의 고운 손이 춤을 출때는 봄날의 궂은 비같이 졸졸졸 흐르는 샘물같이 청아하고 애처롭다.’(독고선씨, 조선일보 1932년2월26일)
안석주의 글과 그림은 직접 만나고 겪은 인물이 아니면 담을 수 없는 생동감이 넘친다. 특히 캐리커처는 90년이 흐른 지금 봐도 모던하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사진만으로 느낄 수 없는 당시 분위기를 헤아릴 수있게 된 것은 순전히 안석주의 작품 덕분이다.
◇참고자료
홍종인, 반도악단인만평, 동광 제22호, 1931.6
채규엽, 인기음악가언파레-트, 삼천리 제4권제7호, 1932.6
신명직, 모던보이, 경성을 거닐다, 현실문화연구, 2003
03.02 ‘안중근’ 영화 만든 ‘상해의 풍운아’ 정기탁
1928년 중국 영화사서 제작…해외 진출한 조선의 첫 영화인
▲배우 겸 감독 정기탁은 1928년 상해에 건너가 중국 영화사에서 '안중근 사건'을 다룬 '애국혼'을 연출했다. 직접 안중근(극중 안중권)역까지 연기했다. 정기탁은 '동아시아의 할리우드'인 상해 영화계를 쥐락펴락한 스타 영화인이었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조선 사람 안중근이 북만 할빈(哈爾賓)정거장에서 이등박문(伊藤博文)공에게 총을 발사하야 당시 내외국 사람의 이목을 경동케하였음은 우리가 모두 아는 바인데 이제 평양 사는 정기탁 군은 상해에 있는 중국 활동사진회사인 백대(百代)필림공사의 후원을 얻어 전기 안중근의 사건을 촬영하야 가지고 방금 상해를 위시하야 중국 각지로 순회하며 일반에게 관람케….’(‘한말 안중근의 伊藤公 저격한 영화’, 조선일보 1928년 10월5일)
‘안중근’ 영화가 중국에서 제작돼 상해를 비롯한 중국 각지에서 흥행하고 있다는 기사가 신문에 났다. 일제 통치가 서슬푸를 때였다. 정기탁이란 평양 사람이 제작했다는 소식을 전한 짧은 기사는 눈에 잘 띄게 2단으로 편집됐다. 정기탁은 누구인가? 1920년대 중국 상해 영화사에서 ‘안중근’을 주제로 한 영화를 만든 인물이라니…
◇나운규와 함께 활동한 1세대 영화인
정기탁(1903~1937)은 ‘아리랑’의 나운규 감독과 같은 영화에 출연하기도 한 감독 겸 배우이자 조선 최초로 해외에 진출한 영화인이다. 평양 태생으로 아버지는 상당한 재산가였는데 광성 소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 배재고보에 입학했다. 고보 2학년을 마치고, 상해에 건너가 4년간 ‘음악과 운동’에 힘썼다고 한다. 야구, 축구는 물론 100미터 기록 11초21로 운동은 조금씩 다 하는데다 바이올린 연주도 ‘범인 앞에서는 내로라고 할 만큼 하는’ 실력이었다.(‘조선영화계 明星점고 4 정기탁,동아일보 1926년10월26일)
▲정기탁은 장기를 '색마역'이라고 호언장담할 만큼 자유로운 연기자였다. 조선일보 1927년 7월2일자
◇'色魔역이 장기’
정기탁은 1925년 이광수 소설을 영화화한 ‘개척자’로 데뷔했다. 계림영화협회 이경손 감독이 연출한 영화로 나운규도 함께 출연했다. 1926년 이수일과 심순애가 주인공인 ‘장한몽’에서 이수일의 연적 김중배로 나서 주목을 받았다. 고려말 홍건적을 다룬 ‘산채왕’ 주역으로도 나섰다. 같은 해 아버지 도움을 받아 ‘봉황의 면류관’을 제작, 주연을 맡아 상해로 수출까지 꿈꿨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1927년 나운규가 감독한 ‘금붕어’에 출연했고, 1928년 제작까지 맡은 ‘춘희’에 김일송과 함께 남녀 주연으로 출연했다. 데뷔작부터 국내 마지막 작품 ‘춘희’까지 6작품 중 ‘금붕어’를 제외하곤 모두 이경손 감독과 호흡을 맞춘 게 이채롭다.
정기탁은 자신을 소개하는 짤막한 설문에 ‘색마역’이 장기라고 답했다. ‘제일 좋았을 때’는 ‘사랑을 찾아 황해를 건너던 때’. ‘제일 좋았던 일’은 ‘크리스마스날 저녁에 첫 연인과 한가지 밤참을 먹던 일’을 꼽았다.(‘영화배우순례 정기탁’, 조선일보 1927년 7월2일). 배우다운 로맨틱한 말솜씨였다.
◇당대 스타 阮玲玉과 출연
‘춘희’ 흥행은 신통찮았던 듯하다. 1928년 여름 아내 김일송(중국에선 정일송이란 이름을 썼다)과 함께 상해로 건너간 정기탁은 안중근 사건을 다룬 ‘애국혼’(1928)을 시작으로 영화 9편을 연출했고, 12편에 배우로 출연했다. 1920년~1930년대 상해 최고 스타배우인 완령옥(阮玲玉) 과 함께 주연을 맡거나 주인공으로 기용할 만큼 중국 영화계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당시 상해는 ‘동아시아의 할리우드’로 소문날 만큼, 영화의 중심지였다. 1927년 중국 전역의 영화사 179개 중 142개가 상해에 있었고, 제작편수도 총 178편 중 172편이 상해에서 제작될 정도였다. 조선 영화계가 1년에 10편 안팎의 영화를 내놓던 시절이었다. 정기탁은 1934년 ‘상해여, 잘 있거라!’(再會吧,上海)를 마지막 연출했다. 이후 행적은 묘연하다.
▲1934년 정기탁 감독의 최후작 '상해여, 잘있거라' 촬영도중 주연 완령옥과 포즈를 취한 정기탁. 조선일보 1935년12월3일자
◇안중근 역, 직접 연기
안중근 사건을 다룬 ‘애국혼’은 1928년 상해의 중국 영화사 ‘대중화백합영화사’(大中華百合影片公司)가 제작해 개봉했다. 상해교민단장인 여운형 소개로 대중화백합영화사 관계자를 소개받았다고 한다. 정기탁의 대중화백합영화사 합류와 ‘애국혼’ 제작은 그해 7월 상해 현지 신문에도 보도될 만큼 관심거리였다. ‘대중화’와 ‘백합’ 영화사가 합병한 이 회사는 상해의 메이저 영화사였다. 정기탁이 감독을 맡았고, 중국 유명 감독이자 배우인 왕원룡(王元龍)이 책임 프로듀서를 맡았다. 정기탁과 김일송, 중국의 탕천수(湯天綉), 왕내동(王乃東)이 출연했다.
◇黎나라 안중권, 魏나라 등박문을 하얼빈서 암살
‘애국혼’은 안중근 의사가 이등 박문을 암살한 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영국 유학파인 위(魏)나라 사람 등박문(藤博文)이 이웃 여(黎)나라를 빼앗자 여나라 사람 안중권(安仲權)이 상해로 망명했다가 혁명가 주한룡을 만나 의기투합하고, 하얼빈에서 등박문을 암살한다는 줄거리다. 이름과 상황을 바꾸었으나 누구나 ‘안중근’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있게 했다. 안중권은 정기탁이 맡았고, 그의 아내 김일송도 안중권 여동생 옥실을 맡아 주한룡과의 러브 스토리를 엮었다.
‘애국혼’은 3개월간의 제작, 촬영을 거쳐 1928년 11월7일 상해 중앙극장(上海 中央大戲院, 현 상해 인민공원 근처 工人文化宮)개봉을 시작으로 시내 주요 영화관에서 교대로 상영했다. 손과지 상해 복단대 교수팀은 당시 신문보도와 영화 광고에 의거, 상해의 ‘애국혼’ 상영 상황을 표로 정리했다. 확인된 것만 19차례, 짧게는 하루부터 길게는 9일간 이어졌다. 북경, 천진, 항주, 남통은 물론 광서성 계림에서도 상영됐다. 한중 혁명가들의 공동 항일 투쟁을 내세워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낸 점이 주효한 덕분에 인기몰이에 성공했다.
◇'애국혼’ 원본 발견 못해
아쉽게도 안중근 사건을 다룬 ‘애국혼’필름은 현재까지 찾을 수없다. 하지만 중국 언론에서 이 영화를 대대적으로 다뤘고 중국 전역에서 상영될 만큼 흥행도 꽤 성공을 거뒀다. 정기탁이 상해에서 영화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애국혼’덕분이라고 하니, 중국 영화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이다.
상해 데뷔작 ‘애국혼’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정기탁은 ‘삼웅탈미’(三雄奪美) ‘화굴강도’(火窟江刀) ‘여해도’(女海盜) ‘정욕보감’(情欲寶鑑) ‘흑의기사’(黑衣騎士) ‘은막지화’(銀幕之花)를 연출했다. 완령옥과 짝을 이룬 ‘정욕보감’을 비롯한 몇몇 작품에선 주연을 겸했다. ‘진주관’(眞珠冠) 등 감독을 맡지 않은 영화에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1930년 8월 ‘대중화백합영화사’가 ‘연화영화사’(聯華影業公司)로 합병되기까지 2년간 영화 7편을 연출하고, 배우로 출연한 작품도 10편이 넘는다. 촬영장에서 밤낮을 지새우는 나날이었다.
◇일본서 찍은 ‘상해행진곡’, 도중하차
1930년부터 1933년 6월까지 정기탁의 행적은 흐릿하다.일본에 건너가 제국영화회사의 ‘상해행진곡’연출을 맡았다는데, 촬영 도중 영화가 엎어졌다. 상해로 돌아온 정기탁은 1933년 6월 연화영화사에 합류, ‘출로’(出路·당시 개봉제목 ‘광명의길’)를 연출했지만 흥행에 실패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상해여, 잘 있거라!’(再會吧,上海)였다. 시골 여교사 백로(白露)가 꿈을 안고 의사의 아기를 낳은 뒤 댄서로 전전한다. 끝내 아이가 죽자 상해와 작별하는 줄거리를 담았다. 인기 절정의 완령옥이 백로를 연기해 대성공을 거뒀다.
▲1936년 6월2일부터 정기탁 감독의 '상해여 잘있거라!'를 상영한다고 알린 조선중앙일보 1936년 6월2일자 우미관 광고.
◇‘상해여, 잘 있거라!’ 필름들고 귀국
정기탁은 1935년 10월 쯤 ‘’상해여, 잘 있거라!’필름을 들고 귀국했다. 당시 신문은 그의 귀국과 영화 상영 소식을 알리면서 줄거리까지 소개했다.
‘정기탁군(鄭基鐸君)은 일즉이 중국 영화계에서 이채(異彩)를 이루던 명감독(名監督)인데 금번 자기의 감독작품인 ‘잘 있거라, 상해여’를 안고 고국으로 돌아왔다.때마침 조선의 영화계도 새싹이 트려는 때라 군(君)의 작품을 물론 반가이 맞아 주리라고 안다. 동(同) 영화의 주연배우는 완령옥(阮鈴玉)이다. 완영옥은 중국의 유일한 인기 여우(女優)로 요전 자살(自殺)하야 죽었는데 그 점으로써도 동 영화는 상당한 인기를 끌지 안을까 한다.( ‘정기탁 감독의 ‘잘있거라, 상해’梗槪', 조선일보 1935년12월3일)
◇우미관서 상영한 정기탁 최후작
‘상해여, 잘있거라!’는 1936 년 6월2일부터 종로 우미관에서 상영됐다. 조선중앙일보 1936년 6월2일자에 우미관 광고가 실려있다. ‘다정다한한 감상의 애상편! 6월2일부터 특별대공개. 상해 련화영업공사 초특작품! 원작 각색 감독 정기탁씨 상해야 잘 있거라 중국이 낳은 요염미희 완령옥 대열연’ 정기탁이 상해에서 만들거나 출연한 영화 중 조선에서 공개된 유일한 작품이었다.
정기탁 감독의 최후작 ‘상해여, 잘 있거라!’는 한국영상자료원이 일부 소장하고 있다. 지금도 관람이 가능하다. 불완전하지만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정 감독의 유일한 작품이다.
◇평양 헌병대에 체포, ‘불온한 계획’
1936년 9월 신문에 돌연 이런 기사가 났다. ‘평양 헌병대 특고과에서는 20일 새벽에 대활동을 개시하여 부(府)내 상수리(上需里) 방면에서 일찍이 영화계의 ‘스타-’로 이름이 높았고 상해에서 영화감독으로도 명성을 날린 정기탁을 검거 유치하고 극비밀리에서 취조를 진행하는 일방, 가택수사를 하여 문서 다수를 입수해갔는데 내용은 일체 알 길이 없으나 중국 방면과 연락하여 모종의 불온한 계획을 하던 것이 탄로된 모양도 같으며 검거는 다른 방면에까지 파급될지도 모른다고 한다.’(‘평양헌병대 정기탁 검거’, 조선일보 1936년9월23일)
정기탁이 독립운동 사건에 연루돼 헌병대에 체포됐다는 소식이었다. 정기탁 체포와 관련된 속보는 더 이상 찾을 수없다.
그러다 1937년 평양 대동강에 투신해 목숨을 끊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가난때문이라는 얘기도 있고, 앞서 죽은 김일송을 그리워해 자살했다는 전언도 있다. 그의 마지막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1937년 이후 행적이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다 그해 숨진 것은 사실인 것같다. 나운규가 같은 해 세상을 뜬 것도 공교롭다. 1920년대~1930년대 조선과 중국 영화계를 넘나든 풍운아의 최후는 이렇게 미스터리로 남았다.
◇참고자료
손과지·유호인,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의 예술적 해석: 정기탁과 그의 영화 ‘애국혼’, 통일인문학 95,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2023,9
배상국, 한·중 영화교류 1세대 대표 영화인 ‘정기탁’ 연구: 중국활동시기(1928~1934)를 중심으로, 씨네포럼 제38호, 동국대영상미디어센터, 2021,4
이영재·홍지영, 협과 액션, 동아시아 액션 영화의 역사적 기원-정기탁의 ‘애국혼’과 상하이 무협영화, 한국현대문학연구 제61집, 한국현대문학학회, 2020, 8
신원선, 일제 강점기 상해 재유동포 영화 연구-’상해여, 잘 있거라!’(再會吧,上海)를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 제56집,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2014,4
안태근, 일제 강점기의 상해파 한국 영화인 연구, 한국외대 정책과학대학원 석사 논문, 2001
03.09 돼지뼈 묻고 아내 죽었다며 보험금 청구
100년 전 등장한 보험사기, ‘문명이 낳은 범죄’

▲100년 전 보험사기는 낯설지 않은 뉴스였다. 신문에는 종종 돼지뼈를 관에 넣고 장사지낸 뒤 아내가 죽었다며 보험금을 청구하거나 환자인 가족을 허위 건강진단서를 첨부해 보험에 가입시킨 뒤, 사망 보험금을 받으려고 한 사건이 실렸다./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1933년 5월 경성 관훈동에 사는 55세 남자 송옹섭이 아내 이름으로 생명보험을 든 뒤 아내가 죽었다며 보험금 5000원을 청구했다.아내와 짜고 한 짓이었다. 송씨는 허위 사망 진단서를 발급받은 뒤 장사까지 치렀다.
‘종로 6정목 장의사로부터 관을 사가지고 동대문 밖 김모방으로부터 도야지뼈 1원50전어치를 사들여 담요에 싸가지고는 이것을 관속에 넣고 못을 친 후에 이것을 방안에 안치하고는 그날밤은 권솔(식구)수대로 도야지뼈 든 관 앞에서 통야(通夜·밤을 지새움)까지 한 후 그 이튿날은 동소문 밖 미아리 화장터에 운상(?)하여다가 화장까지 하였다.’(조선일보 1933년6월26일)
이 남자는 보험회사(安田생명보험사)에 즉각 보험금을 청구했다. 보험사는 나름 의심을 품고 조사를 폈던 듯하다. 그러다 아내를 독살했다는 소문까지 나자 경찰이 개입했다. 경찰의 ‘엄중취조’에 범행을 자백했다. 이 사건을 보도한 기사 제목은 ‘보험금 사취, 넌센스 범죄’였다.

▲멀쩡한 아내 대신 돼지뼈를 묻고 장사지낸 뒤 보험금을 청구한 사건을 보도한 조선일보 1933년6월26일자 기사. 보험사기는 20세기 들어 유입된 문명적 범죄였다.
◇'문명이 낳은 범죄’
100년 전 신문에는 ‘보험 사기’가 종종 등장한다. 화재보험이나 생명보험 사기가 잦았던 듯하다. ‘평양남도 용강군 지운면 진지동에서는 자동차 운전수 임영걸(26)은 김진광과 김덕한이라는 사람과 공동 경영으로 신흥상회란 상점을 경영하여 왔으나 근자에 업적이 좋지 못하고 달리 구정도 없음으로 보험금을 사기할 목적으로 작년 12월1일에 상점과 자기 자동차 등을 걸고 대정(大正)화재 보험회사에 3000원에 가입하고 금년 1월4일 새벽3시경 자동차고에 방화하야 차고를 태우고 근처 현능현의 집까지 태웠었는데 그간 범죄 사실이 발각되어…,’(‘보험금 먹고저 自家에 방화’, 조선일보 1931년 1월17일)
보험 가입 한달만에 화재사고가 났으니 보험회사와 경찰이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탄로날 게 뻔한 일인데도 보험금이 탐났던지 쇠고랑을 차는 자충수를 택했다. 당시 신문은 보험 사기를 ‘문명이 낳은 범죄’로 불렀다. 만약의 사고에 대비하기 위한 근대 보험제도를 악용해 이득을 취하는 사기였기 때문이다.

▲부자도 뛰어들만큼, 보험사기는 당시 만만한 범죄였던 모양이다. 병든 아내대신 건강한 사람을 대리진단케 하고 생명보험에 가입해 보험금을 청구했다 들통난 사건이다. 조선일보 1933년12월26일자
◇'富豪 아내 급사사건’
병약한 환자 대신 건강한 사람을 대리로 진단받게 하고 생명보험에 가입해 환자가 사망한 뒤 보험금을 청구하는 사례도 잇따랐다. ‘피의자 최종수는 그의 아내 오동복(41)이 연래로 위장병이 있던 중에 지난 8월에 그 장남이 병으로 죽은 후에 밤낮으로 번민속에 잠겨 있어서 그 역명(曆命·목숨)이 길지 못한 것을 짐작하고 시내 영락정 복덕생명보험회사 경성지부 권유원인 시외 아현리에 사는 박석배와 의논하고, 보험금 5000원에 전기 복덕생명보험회사에 오동복을 가입시키기로 하고…’(조선일보 1933년12월26일)
1933년 경성 익선동에 사는 최종수는 보험모집인 박석배와 짜고 병약한 아내를 보험에 가입시켰다. 박석배는 최종수 아내 대신 건강한 자기 처형을 대신 진단받게 하고 5000원짜리 생명보험에 가입시켰다. 보험금 일부를 나누기로 공모했을 것이다.
경찰은 먼저 박석배와 그의 처형을 체포해 범행을 자백받고 최종수도 범행을 인정했다. 최종수는 재산이 꽤 있는 집안이었던 듯한데, 보험 사기에 가담했다. 이 사건을 보도한 기사엔 ‘부호 처(富豪 妻) 급사(急死)사건, 보험금 사기로 판명’이란 제목이 달렸다. 부자도 ‘보험 사기’에 뛰어들고 보험회사 직원까지 공모할 만큼 생명보험금을 ‘눈 먼 돈’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신의주에서도 흙으로 만든 인형에 옷을 입혀 관에 넣어 묻은 뒤, 사람이 죽었다며 보험료를 청구한 사건이 있었다.(‘흙으로 만든 인형에 메리야쓰를 입혀’, 조선일보 1934년10월30일)

▲보험금을 노린 가족 살인범이 사형 구형을 받았다는 조선일보 1936년 7월5일자 기사
◇보험금 노린 親父 청부살인까지
보험금을 노린 살인까지 발생했다. ‘패륜의 保險魔! 김인우에 사형구형’(조선일보 1936년 7월5일) 보험금을 노리고 친형, 아내, 장모 셋을 죽이고 장인까지 죽이려다 검거된 희대의 ‘패륜적 보험마’가 사형 구형을 받았다는 보도였다. 일주일뒤 김인우가 사형 판결을 받았다는 속보가 실렸다.
1929년 7월엔 평양 외율리면장을 지낸 지방유지가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한밤중에 검은 보자기를 쓴 괴한이 방에 들어와 식칼로 가슴과 온몸을 난자한 뒤 달아나버렸는데, 범인은 3년 넘도록 오리무중이었다. 1933년11월 피살자의 장남이 보험금을 노리고 청부살인을 시도한 혐의로 취조를 받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의문의 살인사건 참살범인은 實子?, 조선일보 1932년11월29일)
이 사건은 1935년 4월 최종심에서 사형판결이 나올 때까지 공판 상황이 지상중계됐다. ‘패륜 범죄’에 대한 파장이 컸기 때문이다. 사업에 실패한 장남이 아버지에게 자금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아버지의 생명 보험금 2만원과 재산을 노리고 범행을 저질렀다는 게 요지였다.
◇'지능범 보험광(狂)’
멀쩡한 사람을 사망자로 속이거나 살인까지 해서 보험료를 노리는 보험사기는 20세기 들어 이 땅에 등장한 신종 범죄였다. 당시 신문은 보험 사기를 ‘문명이 낳은 범죄’라고 불렀다. ‘지능범 보험광(狂)’이란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이렇게 들어온 보험사기 범죄 적발금액이 2023년 1조1000억원을 넘었다는 금융감독원 발표가 나왔다. 절반(5476억원)이 자동차 보험사기다. 자가용이나 렌터카를 이용, 진로 변경차량이나 교차로 진입 차량에 고의로 사고를 유발해 보험금을 가로채는 식이다. 해마다 이런 범죄는 증가추세인데다 20~30대 젊은이들이 많이 뛰어든다고 한다. 1인당 국민총소득 3만달러 시대에 진입한 지 오래다. 인구 5000만명 이상인 국가로만 따지면 7위(2022년 기준)다. 그런데도 이런 보험 사기범죄는 끊임없이 늘어난다.⊙
03.16 美 메이저리그 야구단 방한, 102년전의 아련한 추억
1922년 동아시아 투어로 방한, 용산 철도운동장서 조선팀 23대3으로 격파

▲15일 메이저리그 개막전 서울시리즈 경기를 위해 입국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주전선수 김하성/연합뉴스
다음주 20일~21일 미국 메이저리그 개막전이 서울 고척 스카이돔에서 열린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리는 메이저리그 공식 경기다. 미국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전신)를 통해 야구를 선보인지 꼭 120년만이다.
박찬호, 류현진이 뛰었고 ‘괴물선수’ 오타니 쇼헤이가 나서는 LA다저스와 김하성, 다르빗슈 유가 소속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가 맞붙는다. 야구에 별로 관심없는 ‘냉담자’까지 들썩거릴 만하다. 1만6700석 규모 고척돔의 20일 개막전 티켓은 발매 8분만에 매진됐다. 내일과 모레 국내 팀과 네차례 시범경기를 가질 예정이라 일주일 정도는 야구가 단연 화제일 것같다. TV 중계를 통해 서울과 고척돔이 소개되고, 한국인의 일상이 세계에 전달될 것이다.
◇야구 전래 120년만의 메이저리그 공식경기
작년 7월 중순 메이저리그 사무국 공식발표가 있기 전만 해도 경기가 성사될지 반신반의했다. 메이저리그 야구선수들이 서울에서 경기를 가진 건 뜻밖에 오래전이다. 물론 친선경기였다.
102년전인 1922년 12월8일 오후3시 용산 만철운동장에서 조선대표팀과 맞붙었다. (‘모던 경성’ 2023년 7월1일 ‘100년전 내한한 미 야구 올스타팀, 조선 軍 무참히 꺽다’참조) 아마추어 선수들로 급조한 팀이었는데, 9회 23대 3으로 참패했다. 3점이라도 얻은 게 다행이지 싶다.

▲투타 일류인 LA다저스 오타니 선수가 15일 메이저리그 개막전 '서울시리즈' 출전을 위해 입국하고 있다. /이태경 기자
◇월드시리즈 제패한 뉴욕 자이언츠 에이스도
1922년 겨울 경성을 찾은 미 올스타 팀은 그해 월드시리즈를 석권한 뉴욕 자이언츠와 뉴욕 양키스, 보스턴 레드삭스 선수가 포함된 강팀이었다. 그해 10월 말 일본에 건너가 대학 팀과 17차례 경기를 치른 뒤 경기 전날인 7일밤 기차로 남대문역(옛 경성역)에 도착했다. 조선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은 다음날 경기를 가졌다. 한파가 잠시 물러나 한낮 최고온도가 영상 4.4도까지 올랐다. 티켓값은 5원이 최고가였고 3원, 2원, 1원순이었다. 관객 7000명이 입장했다고 한다.
당시 기사는 이렇게 전한다. ‘개전되기 전부터 모여드는 관중은 넓고 넓은 만철운동장내에 가득하야 조선에서는 별로 보지 못하던 대성황중에 양군은 수만명 관중의 천지를 진동할 듯 열광적 환호하는 가운데 서로 자기의 위대한 포부의 기능을 뽐내게 되었는데,조선 안에 있는 미국 사람들이 고국의 동포를 응원하기 위하여 쳔리를 멀다하지 아니하고 각지에서 모여들어 수백명의 떼를 지어가지고 각기 팔뚝을 휘두르며 굉장히 환호하는 것도 일대 가관이었더라.’(‘조선일보사와 각 단체의 후원으로 壯絶快絶한 국제적 경기’, 조선일보 1922년 12월9일)
미국인 관중까지 몰려들어 일대 응원전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명예의 전당’ 오른 메이저리거 내한
올스타팀엔 뉴욕 양키스 우완투수 웨이트 호이트(Hoyt)가 포함됐다. 1922년에만 19승(12패)을 거뒀고 1923년, 1924년,1928년 뉴욕 양키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끈 스타였다. 1922년 월드시리즈를 제패한 뉴욕 자이언츠의 1루수 조지 켈리(Kelly)는 팀의 주전 타자로 돋보이는 활약을 했다. 보스턴 레드삭스 투수 허브 페녹(Pennock)은 1923년 뉴욕 양키스로 옮겨 팀이 4차례 월드 시리즈를 제패하는 데 주역이 됐다. 뉴욕 자이언츠의 케이시 스텐겔(Stengel)은 그해 타율 3할6푼8리를 기록한 강타자였다. 훗날 뉴욕 양키스에서 월드시리즈를 7차례나 거머쥔 명감독이 됐다. 모두 ‘명예의 전당’에 오른 최고의 선수들이다.

▲1922년 12월8일 경성에서 조선대표팀과 시범경기를 가진 미국 야구 올스타팀. 동아시아 투어를 출발하기 위해 캐나다 밴쿠버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앞줄 양복입은 사람이 단장 겸 감독 허브 헌터. /위키피디아
◇'경성일보 주최 압박했으나 거부’
조선 대표팀은 박석윤(투수) 김태술(포수) 박천병(1루수) 이석찬(3루수) 안익조(중견수) 김정식(좌익수) 마춘식(중견수) 손희운(우익수) 등이었다. YMCA야구단과 각 학교 야구선수를 모아 꾸린 아마추어 연합팀이었다. 경기 주심은 올스타팀과 동행한 메이저리그 심판 모리아티(Moriarty)가 맡았고, 부심은 조선체육회 이사이자 야구인인 이원용이 나섰다.
조선일보는 이날 경기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경기 후원사였기 때문이다. 미 올스타팀 초청을 주도한 이원용(李源容·1896~1971)은 훗날 ‘당시 서울에서 발행하는 일본인 신문의 경성일보와 조선신문사에서 주최권을 상당한 조건하의 양보하라고 극심한 압력을 가하였으나 이에 나는 굴치않고 관철해 나아갔다’(‘야구반세기의 野話’, 신태양 제5권제6호, 1956년6월)고 회고했다.

▲1922년 12월 방한한 보스턴 레드삭스 좌완 투수 허브 페녹. 7회까지 조선팀 타선을 꽁꽁 묶는 완벽한 피칭을 선보였다. 1923년 뉴욕 양키스로 이적한 페녹은 팀이 4차례 월드시리즈를 제패하는 데 수훈을 세웠다. /위키피디아
당시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보스턴 레드삭스의 좌완 허브 페녹(Pennock)이 투수로 나섰다. 조선팀은 메이저리거 위세에 눌려 7회까지 한점도 내지못했다. 반면 미국 팀은 1회부터 홈런을 날리면서 기선을 제압했다. ‘그들의 기술과 능력을 비교하여 차이가 있던 우리 전 조선군들은 7회까지 한 점도 얻지 못하게 되었음으로 당일의 관람자들이며 선수들은 낙망의 빛을 가지고 있게 되었다.’(‘용장맹사의 전투’, 조선일보 1922년12월10일) 조선군은 8회에 반격에 나섰다. 김정식, 마춘식이 잇달아 안타를 치고 나가면서 1점을 얻었고, 9회엔 2점을 더 얻어 23대3으로 끝났다. 1시간 50분간의 대결은 마무리됐다.
미 야구 올스타팀은 이날 저녁 8시 명월관에서 열린 환영연에 참석한 뒤, 다음날 오전10시 남대문역에서 중국 심양(당시 봉천)으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만 이틀도 안되는 짧은 체류일정이었다.

▲미국 올스타팀의 내한 경기를 보도한 조선일보 1922년12월10일자 신문.
◇이원용의 고군 분투
메이저리그 올스타팀 내한 경기를 주도한 사람은 이원용(李源容·1896~1971)이었다. 1920년 조선체육회 설립을 주도한 이원용은 야구 선수이기도 했다. 미 올스타팀과의 경기 때 당초 주장으로 소개됐으나 시합때는 부심을 맡았다. 스포츠기자 이길룡이 ‘군(君)은 현존한 조선야구계의 대선배로 자타가 공인한다’ ‘조선의 야구사를 알아낸다면 알아낼 사람도 군(君)이오, 또 가장 오랜 문헌을 들추자고 하여도 군(君)이다’(‘운동기자열전’, 신동아 1934년3월호)라고 쓸 만큼 초창기 한국 야구계의 전설이었다.

▲1922년 미 프로야구 올스타팀 초청을 성사시킨 야구선수 이원용
이원용은 박석윤을 앞세워 일본 투어중인 미국 올스타팀 감독 헌터와 만나 교섭을 진행했다. 조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헌터를 졸라 승낙을 얻어낸 이원용은 “사재를 털어” 계약을 성사시켰다. 단 한번의 시합을 위해 일본서 배와 기차를 갈아타며 경성에 오도록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이번 ‘서울시리즈’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선택한 해외 개막전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위상이 그만큼 세계 시장에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졌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김하성을 포함, 일류 선수들이 펼치는 야구 경기를 볼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참고자료
이길룡, 운동기자열전, 신동아 1934년3월호
이원용, 야구반세기의 야화, 신태양 제5권제6호, 1956년6월
홍윤표, 1922년 미국 직업야구단 최초 방한 경기 비화, 근대서지 제17호, 2018년 상반기
이종성, 이원용이 일제강점기 한국 근대 스포츠 발전에 미친 영향, 한국체육학회지 제58권제6호, 2019
대한체육회, 대한민국 체육 100년, 2022
03.23 라디오 놓고 충돌한 新舊 세대갈등
노장층은 전통음악, 청년은 유행가 선호…방송국에 서로 투서보내

▲1927년 개국한 경성방송국 라디오 프로그램 중 음악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오락프로그램 4개중 3개가 음악프로그램일 정도였다. 하지만 방송국은 골머리를 앓았다. 전통음악을 틀어달라는 노장년층과 케케묵은 전통음악은 싫으니 유행가나 서양음악을 틀어달라는 청년층과 일부 지식층의 요구가 팽팽히 맞섰기 때문이다./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1933년 12월 신문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1927년 개국한 경성방송국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을 둘러싸고 장년층과 청년층간 갈등이 심화돼 투서가 쏟아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수많은 청취자로부터 매일 희망 혹은 불평을 열거하야 투서가 여러 장씩 오게 되는데, 한 집안 가족으로서도 늙은 아버지는 신식 유행가는 듣기 싫으니 고래(古來)의 조선 노래를 많이 들려다오, 혹은 양악(洋樂)은 도무지 모르겠으니 가야금 같은 것을 많이 들려다오 하는 반면에 젊은 아들로부터는 케케묵은 예전 조선 노래는 듣기 싫으니 신식 유행가를 들려주오,가야금같은 시대늦은 악기는 듣기 싫으니 최신 양악(洋樂)을 들려주오 하는 등 신구(新舊) 충돌과…'(‘과도기 방송의 교향악-新舊사상이 안테나서 충돌’, 조선일보 1929년 12월17일)
한 집안에서도 늙은 아버지는 전통 음악을 선호하는 반면 유행가나 양악은 거부하고, 젊은 아들은 케케묵은 전통 음악은 싫으니 유행가나 서양음악을 틀어달라는 ‘투서’가 쏟아져 방송국이 골머리를 앓는다는 내용이었다.
◇전통음악 비중이 절반 이상인 라디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다. 1930년대 경성방송국 오락 프로그램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높았다. 박용규 교수 연구에 따르면, 1930년대 하루 4개 정도 편성된 오락 프로그램 중 3개 이상이 음악이었다고 한다. 드라마, 야담, 방송소설 같은 프로그램이 나머지 1개를 차지했다. 프로그램 하나 당 약 30분 정도 편성됐다.
음악프로그램 중에서도 판소리, 잡가, 아악 같은 전통음악이 1930년대 내내 절반에서 70%를 차지했고, 서양음악은 20%~30%를 차지했다. 반면 유행가와 신민요 같은 대중음악 프로그램은 한자리 숫자이거나 최고 10%를 약간 넘어서는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애리수의 ‘황성의 적’(황성옛터) 고복수 ‘타향살이’ 이난영 ‘목포의 눈물’같은 히트곡을 정작 라디오에선 쉽게 들을 수없었다는 얘기다.
◇유성기 음반발매량은 유행가가 전통음악과 비슷
장유정 단국대 교수 연구에 따르면, 일제시대 발매된 유성기 음반 중 대중가요가 4125면으로, 전통음악(4258면)에 버금갈 뿐 아니라 서양음악(816면)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시기적으로 나누면 대략 1935년부터 대중가요 음반이 전통음악 음반보다 더 많이 팔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유성기 음반 발매 현황과 달리, 라디오 방송에선 대중가요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낮았다.
◇유행가는 ‘惡歌, 亡國가요’
경성방송국이 유행가를 덜 편성한 것은 지식층이 대체로 유행가와 신민요 같은 대중음악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 파인 김동환이 그랬다. ‘조선지광’ 1927년8월호에 ‘망국적가요소멸책’을 발표한 파인은 아리랑이나 수심가같은 잡가는 조선 왕조 내내 학대받은 백성들의 신음과 애탄, 곡성이었고, 유행가요 또한 그런 잡가를 답습한 ‘악(惡)가요’이자 ‘망국가요’라고 주장했다.
◇'기생들이 부르는 歌曲을 증오한다’
해외 유학생이나 근대식 교육을 받은 지식인층 가운데는 전통음악에 비판적인 그룹도 꽤 있었다. 춘원 이광수는 ‘사람을 신경쇠약과 주색에 침륜함과 또는 불평과 나타로 인도하는 예술은 불건전한 예술이오, 멸망의 예술’이라고 비판한 뒤, ‘나는 오늘날 조선기생이 대표하는 민중예술이라 할 만한 모든 가곡(歌曲)을 체증(切憎·증오)한다’고 썼다.(‘예술과 인생’, ‘개벽’19호,1920년2월) 전통음악에 대한 반감을 ‘증오’란 표현까지 써가며 드러냈다. 그는 예술이 ‘창조와 표현의 새 힘’을 주고 근대를 달성하는데 결정적 요소라고 생각했다. 전통음악은 도리어 장해가 된다고 믿었다.
◇엘리트 출신 제작진, ‘조선 것 지킨다’ 전통음악 선호
하지만 고학력 엘리트 출신이 대부분인 라디오 제작진은 우리 문화를 지키기 위한 차원에서 전통음악을 의도적으로 많이 편성했다. 윤백남, 김정진, 이혜구, 이하윤, 이서구 같은 경성방송국 음악연예프로그램 담당자들은 모두 고등교육을 받았고, 기자나 문인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이었다.경성제대를 나온 이혜구를 비롯,나머지는 전부 일본 유학생 출신이었다.
1932년 경성방송국에 들어가 음악프로그램을 맡은 이혜구(1909~2010)는 서양음악 마니아였다. 경성제대관현악단에서 비올라를 연주했고, 바이올리니스트 채동선과 현악 4중주단을 함께 할 만큼 조예가 깊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당시 청취자들이 서양음악을 얼마나 이해할지 의심스러웠던 모양이다. ‘어느 활짝 개인 일요일 낮에 사직공원뒤 성벽을 끼고 산보하다가 문득 안하에 납작한 초가집이 다닥 다닥 붙은데서 슬레작(Leo Slezak·체코 출신 명테너)이 부르는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가 산위로 울려나왔다.그때 나는 저런 초가집속에 무명의 가난한 음악가가 있다면 그 ‘푸로’를 즐길까, 도대체 우리나라에서 몇사람이나 외국가요방송을 이해할까 하는 의문을 품었고, 지금도 가끔 그것을 환기한다.’(‘晩堂 文債錄’ 96쪽)
◇주 청취자인 장년층의 요청에 부응
출연진을 섭외하기 쉽고, 제작비가 상대적으로 적게 든다는 점도 전통 음악 방송비중이 높았던 이유 중 하나였다. 기생조합인 권번에 소속된 예기들이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 주요 출연자였고, 한두명 출연료만 주면 30분짜리 프로그램 하나 만드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전통음악 편성을 원하는 청취자들의 수요가 많았던 이유가 크다. 라디오 수신기는 싸게는 10원, 15원에서 고급 기종은 웬만한 월급쟁이 두세달치 월급을 호가하는 100원 이상 가는 사치품이었다. 방송 초기 이런 물건을 들여놓을 수 있는 계층은 상공업자, 회사원, 공무원 등이었다. 조선인의 라디오 보급은 방송 첫해인 1927년 949대에서 1935년 1만4537대, 1939년 7만5909대, 1941년 14만4912대로 급증했다.
◇라디오통해 급부상한 전통음악의 聲價
경성방송국이 1939년 청취자 조사를 했더니, ‘열광적 총애를 받는 음악방송 중에서도 가야금, 거문고, 육자박이 등 조선 음악팬이 압도적으로 많아 양악팬의 약 3배나 되었다’고 한다. 청취료를 내는 등록 청취자 중 장년층이 많았고, 이들에게 인기가 높은 판소리, 잡가, 민요를 주로 편성했다는 것이다.
전근대 궁중이나 양반집 사랑방, 시골 대청 마루에서 듣던 전통음악은 1930년대 라디오라는 뉴미디어를 통해 다시 태어났다. 전국구 스타들도 잇따라 탄생했고, 전통음악 또한 전국적,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국악 연구자들은 경성방송국 프로그램 연구에 뛰어들어 자료집을 내고 논문을 쏟아낸다.라디오가 국악 발전에 기여한 몫이 크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이광수, ‘예술과 인생’, ‘개벽’19호, 1920년2월
이혜구, 만당문채록, 한국국악학회, 1970
박용규, 일제하 라디오 방송의 음악프로그램에 관한 연구-1930년대를 중심으로, 언론정보연구 47권2호,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 2010
장유정, 일제시대 유성기 음반 곡종의 실제와 분류, 한국민요학 제21집,한국민요학회, 2007.12
03.30 ‘이곳은 도시 유랑민의 전당, 나는 가련한 항해사’
’영화의 도시’ 경성의 극장안내양, 타이피스트, 데파트걸, 에스컬레이터걸, 티켓걸 등 신여성 직업의 애환
▲당구는 모던 보이들의 신종 취미였다. 모던 보이들의 게임 점수를 계산해주는 '빌리아드 걸'은 1920년대 등장한 신종 직업이었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1930년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신종 직업들이 생겨났다. 집안에만 갇혀있던 여성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1939년 신문이 소개한 직장 여성의 세계는 이전엔 볼 수없던 신세계였다. 교사나 보육원 보모부터 극장 안내양, 타이피스트, 백화점 퍈매원,전화 교환수, 버스 안내양, 에스컬레이터 안내양, 기차표 판매원에서 당구장 직원까지 새로운 직업의 세계를 조명했다. ‘여성 직장의 초년병’(조선일보 1939년4월8일~29일·총14회)이란 제목의 기획이었다.
◇'나는 어두운 바다의 가련한 항해사’
‘도시의 시민들은 저녁 밥숫갈을 미처 빼지도 못하면서 활동사진관으로 활동사진관으로 밀려듭니다. ‘영화, 영화’ 현대의 매력이요 광상곡이요 계란 노란자위같이 알뜰한 우리 생활의 일부입니다.’
1930년대 경성은 영화의 도시였다. 1년에 영화 몇편쯤 보지 않는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영화관에 밀려드는 관객들을 맞는 극장 안내양은 새로 등장한 여성 직업이었다. ‘환한 바깥세상에 있다가 갑자기 어둠의 바닷속으로 빠지면 그만 손님들의 눈동자는 갑자기 도수를 잃고 확대되지 못하여 허둥지둥 멀쩡한 장님 노릇을 합니다. 이에 안내양은 앞으로 쓱 나서며 노랗고 둥그런 불빛을 시멘트 바닥에 탁 떨어뜨립니다.’
열일곱살 박경자양은 경성시내 명성소학교 졸업 직후인 그해 봄 약초(若草)극장(스카라극장 전신)에 취직했다. 신입 직원인 그는 ‘얼굴이 썩 이쁜 여자라든지 옷을 아주 잘 입은 손님을 보면 마음이 몹시 뒤숭숭하다’면서 얼굴이 새빨개진다. 오전 10시에 출근, 밤 10시반에 귀가하는 고된 직업이었다. 하지만 ‘동생 넷 월사금을 댄다’며 자랑스러워했다.(’이곳은 도시 유랑인의 전당’, 1939년4월18일)
▲백화점 에스컬레이터 안내양은 고된 직업이었다. 넘치는 인파속에서 손님들의 안전을 위해 에스컬레이터 옆에 서서 하루 종일 안내해야 했다. 조선일보 1939년4월23일자
◇하루 12시간 근무 에스컬레이터 안내양
‘조심하십시오. 양편 손으로 꼭 고무 울타리를 단단히 잡으세요.’
백화점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손님을 안내하는 안내양도 격무였다. 아침 8시50분에 출근, 밤 9시30반에 귀가하는 일상이었다. 12시간 근무는 기본이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사람 멀미가 나서 눈속이 따끔따끔하더니…백화점이란 참 사람이 많은데에요.’ 열아홉살 봉순양은 손님들이 엘리베이터보다 에스컬레이터가 더 낫다고 한다고 말한다. 백화점측 얘기론 하루 2만명, 시간당 4000명이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한다. 개구장이 꼬마부터 바람 쐬러나온 신사 숙녀들에게 에스컬레이터타는 재미는 일품이었다. (‘밀리는 손님에 멀미나도 구름다리 옆에서서 에스칼레이타孃’,1939년4월23일)
▲경성역 기차매표원 최수덕양은 매표소 홍일점이다. 오전 8시 출근해서 새벽 3시까지 표를 팔고나면 참 곤하다고 말한다. 자리를 잠시도 비울 수없어 '배가 늘 고프다'면서도 호호 웃었다. /조선일보 1939년4월29일
◇늘 배가 고픈 경성역 매표원
하루 수많은 승객이 오가는 경성역 매표소. 홍일점 티켓걸인 최수덕양은 흰 저고리, 검정 치마차림이다. 견습생이라 유니폼(사무복)도 못받았기 때문이다. 작년에 이화고녀를 졸업했다는 수덕양은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새벽 3시까지 표를 팔고 나면 참 곤하다’고 말한다. 인천행 기차표를 판다는 그는 교대시간도 없고, 점심시간도 없고, 부득이할 때는 누가 잠깐 대신 서 줄뿐이라고 했다. 오전 6시, 7시에 아침을 허둥지둥 먹고 나오니 ‘배가 늘 고프다’며 호호호 웃었다. (’세계로 통한 먼 길도 네모진 적은 창을 거쳐서’, 1939년 4월29일)
◇'직업여성의 재산은 명랑’
본정통 마루젠에 사무원으로 취직한 신복균은 ‘장부 정리’가 주업무다. 직업 여성의 첫번째 ‘재산’은 ‘명랑’이라고 단언한다. ‘모든 여사무원은 진홍 같은 입술엔 항상 미소를 띄워야 하고 조그마한 명령에는 곧 긴장하는 날카로운 신경을 가져야 한다.’
그는 ‘지금 직업을 얻는다는 건 마치 무슨 벼슬이라도 하는 거나 마찬가지’라며 직업 여성이 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월급 대부분은 저금하고 몸치장에 많이 들어간다’면서 ‘그리고 남는 게 있으면 집안식구들도 무어 사다 드린다’는 당당한 여성이다.(’명랑과 친절을 방패로 한 생활전선의 낭자군’, 1939년4월13일)
▲박경숙 양은 오빠가 하는 당구장에서 '껨도리'로 일한다. 살살 눈치봐가며 손님 비위를 맞춘다고 했다. 당구장이 직장이라서 그런지, 당구 실력도 꽤 있었던 듯하다. '맛세이'하는 포즈로 사진 촬영에 나섰다. /조선일보 1939년4월27일자
◇'깨끗하고 점잖은 신사의 유희’
‘삘리야-드’(당구)장 박경숙양도 당차기는 마찬가지다. 어떤 손님들이 많으냐는 질문에 거침없이 답한다. ‘쌜러리맨이 단연 제일입니다. 이 봉급자 가운데는 전문학교 교수도 오고 재판소 검사도 오고 신문사 기자도 오고….’
인텔리 계층이 많이 온다는 얘기다. ‘이 노름이 가장 깨끗하고 점잖아서 가위 신사의 유희인 까닭도 있고 또는 돈이 퍽 적게 들어 종일 사무실 안에서 시달리던 분들이 머리와 육체를 함께 쉴 수있고 그 보담도 더 큰 이유는 아주 홀딱 반하도록 재미있는 점입니다.’ 당구의 즐거움을 열거한다.
귀찮케 구는 손님이 있느냐고 묻자 여자가 남자들 노는 틈에 끼니까 집적거리는 이들이 있긴 하지만 별로 큰 문제가 없다고 답한다. ‘우리 껨도리의 일이란 이렇게 손님들 치시는 다마의 끗수를 헤아리고 그것을 일일히 전표에 쓰는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역시 직업이라 곤해요.’ 살살 눈치 봐가며 손님 비위 맞추는데 여념없다고 했다. (‘푸른 보료에 부딪히는 희고 붉은 왕구슬’,1939년 4월27일)
◇직업 여성들의 월급봉투는?
1930년대 직장 여성들의 수입은 어땠을까? 백화점 점원은 15~40원, 사무원 30원~50원, 전화교환원 25~50원, 전차(버스) 차장 20~30원, 제사공장 직공 20~30원, 간호사 33원~70원, 보통학교 교사 35원~60원 정도였다.(‘삼천리’ 1931년12월호, ‘서울 직업부인의 보수’) 1933년 12월 잡지 ‘신여성’에 따르면, 엘리베이터걸은 20원, 타이피스트 30원이었다. 사대문안 전차 삯이 5전, 설렁탕이 10전~15전 하던 시절이었다.
여성 취업률이 극히 저조했던 시대,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은 경제적 독립이나 월급 봉투 이상의 가치를 느꼈을 것이다. 이들을 ‘헬로 걸’ ‘엘리베이터걸’ ‘데파트걸’ ‘빌리아드 걸’ 등 각종 ‘OO걸’이란 이름을 붙여가며 주목한 것도 사회 변화의 상징, 또는 풍향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여성의 시대는 이렇게 시작했다.
◇참고자료
‘서울 직업부인의 보수’, ‘삼천리’ 1931년12월호
김수진, 신여성, 근대의 과잉, 소명출판, 2009
04.06 1917년 순종의 기이한 교토 행차
이토 히로부미 휘호에서 이름 딴 ‘초라쿠칸’서 3박, 메이지왕릉 참배도
▲벚꽃 명소로 이름난 교토 마루야마 공원의 상징인 수양벚나무. 만개한 벚꽃 주변에 관람객이 가득하다. 1917년 6월22일 오후 교토에 도착한 순종은 이 벚나무 근처 '초라쿠칸'에서 3박4일간 묵었다. 메이지 왕릉 참배가 주목적인 여행이었다. /김기철기자
마루야마(円山) 공원의 수양벚꽃은 활짝 피어있었다. 교토의 첫 근대식 공원(1886년 개원)인 이곳은 이름난 벚꽃 명소다. 만개한 벚나무 아래 돗자리를 깔고 음식을 먹으며 꽃놀이를 즐기는 상춘객들이 공원을 점령했다. 입구를 지나 중심부로 들어가면 공원 상징격인 ‘기온의 수양 벚나무’가 줄기를 늘어뜨린 채 만개한 모습이 장관이었다. 수양벚나무 오른쪽엔 ‘초라쿠칸’(長樂館)으로 가는 출구가 이어졌다. 1917년 순종이 첫번째이자 유일한 일본 여행에 올랐을 때, 교토에서 머문 숙소였다.
▲'일본의 담배왕' 무라이 기치베가 1909년 세운 별장. 이토 히로부미가 쓴 휘호에서 '초라쿠칸'이란 이름을 따왔다. 순종은 1917년 6월22일부터 3박4일간 이곳에서 묵었다. 지금은 호텔과 레스토랑으로 영업중이다./김기철 기자
◇107년 전 초여름, 순종의 교토 방문
1917년 6월22일 오후4시10분 교토역. 특별열차에서 순종이 내렸다. 3박4일 교토 일정의 시작이었다. 역에는 엄청난 환영 인파가 몰려나왔다. 교토시장, 교토대 총장, 지역 사단장 등 정관계 요인들도 나왔다.
순종의 교토 방문은 6월8일부터 28일까지 21일간에 걸친 일본 순방의 일환이었다. 총독부가 마련한 특별열차를 타고 경성을 출발, 부산에서 시모노세키까지는 일본 군함으로 이동했다. 기차와 자동차, 마차와 인력거를 갈아타면서 일본을 여행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5월 이곳을 방문하고 쓴 휘호 '長樂館'(초라쿠칸). 지금도 호텔 2층 입구에 걸려있다. /김기철 기자
◇'일본의 담배왕’무라이 기치베 별장
환영 인파를 뒤로 한 순종은 자동차 편으로 숙소인 초라쿠칸(長樂館)으로 향했다. 1909년 5월 일본의 담배왕으로 알려진 무라이 기치베(村井吉兵衛)가 지은 별장이었다. 미국인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겨 지상 3층 서양식 건물을 세웠다. ‘풍경이 절가한 원산공원 안에 있어 풍치가 아담한 동산의 자태는 앞뜰에 드리우고 10만의 문호가 서로 연한 옛도읍의 시가를 눈아래에 굽어보는 근경은 산해 수천리를 지나 멀리 찾으신 이왕 전하의 OO를 감하야 드림이 있을 듯하고…’(長樂館上의 이왕전하’, 매일신보 1917년 6월23일)
무라이는 1910년대 경남 주남 저수지 근처 늪지대와 황무지를 사들인 뒤 개간해 900만평에 이르는 대농장을 운영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오늘날의 창원 대산면과 김해 진영 일대에 걸친 대산평야다. 무라이는 순종을 이 별장에 묵게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뛰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가 명명한 호텔
초라쿠칸은 이토 히로부미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설립 직후인 1909년 5월 25일 교토를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가 이곳에 묵은 뒤 쓴 휘호에 근거, 초라쿠간’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 호텔 2층 홀에는 지금도 이토가 쓴 ‘초라쿠칸’편액이 걸려있다. 을사보호조약을 강제한 장본인이자 초대 통감으로 강제병합으로 가는 길을 닦은 이토 히로부미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는 이 호텔에 묵은 순종의 심사는 어땠을까.
▲순종의 교토일정을 알린 매일신보 1917년 6월23일자 기사 '장락관상의 이왕전하'
◇메이지왕릉 참배, 니조조 관광
순종은 23일 오전 9시 궁내성 안내로 메이지 일왕릉을 참배했다. 교토 방문의 제1순위 일정이었다. 일본은 순종이 대한제국을 병합한 메이지일왕의 묘소에 참배하는 장면을 연출하고 싶었을 것이다. 조선과 일본 국민은 물론 세계에 일본의 조선 지배가 무리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순종의 일본 방문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를 비롯한 기자단에 의해 시시각각 보도됐다.
다음날인 24일은 일요일이었다. 순종은 니조조(二條城) 등 명소를 둘러봤다. 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3년 축조한 이 성은 199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유명 관광지다. 쇼군의 집무실인 니노마루 궁전은 33개의 커다란 방으로 이뤄진 거대한 목조건물이다. 일왕의 거처인 고쇼를 능가할 정도의 니조조를 둘러본 순종은 그 규모에 압도당했을지도 모르겠다. 25일 아침 7시 특별열차로 시모노세키로 향했다.
▲1917년 6월 도쿄를 방문한 순종은 다이쇼 일왕을 알현했다. 위 사진은 일정을 마치고 도쿄역에서 출발하는 순종 일행. 아래는 도쿄역으로 가는 순종의 마차 행렬. 매일신보 1917년 6월24일자
◇다이쇼 일왕 친견이 첫번째 과제
일본은 1910년 조선을 강제병합한 후부터 순종의 일본 방문을 추진했다. 1912년 메이지 일왕이 죽었을 때 방일이 거론됐으나 성사되지 않았다가 5년이 지나 이뤄진 것이다. 순종의 방일 첫번째 과제는 다이쇼(大正) 일왕 알현이었다.
대한제국 황제에서 이왕(李王)으로 전락한 순종에게 선택권이 있었을 리 없다. 순종은 일제와 총독부가 시키는대로 끌려다닐수밖에 없는 망국의 군주였다. 총독부는 고종과 순종 등 조선의 왕가를 황공족으로 특별대우하면서 조선 통치에 활용하려고 했다. 순종의 일본 방문은 당시 ‘동상’(東上·동경으로 올라간다는 뜻)으로 소개됐다. 순종이 일본 천황앞에 고개를 숙이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일본의 조선 통치가 자연스럽게 정착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목적에서 나왔다. 순종의 방일은 그만큼 일본 측에도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전력을 기울여 일정을 준비했다. 순종이 지나가는 도시마다 환영인파가 줄이었고, 성대한 환영행사를 베풀었다.
◇8박9일간의 동경체류
순종 방일여행단의 규모는 컸다. 민병석 이왕직 장관 이하 직접 수행원만 44명이나 됐고, 고위직이 각자 데리고 온 수행원까지 더하면 이보다 훨씬 많은 대규모 일행이었다. 순종의 방일은 6월12일 오후5시 동경역에 도착하면서 본격적 일정이 시작됐다. 일본 왕족들과 테라우치 조선 총독, 내각 대신, 육해군 고위 장성이 순종 일행을 환영했다. 14일 아침 순종은 대례복 차림으로 고쇼를 방문, 다이쇼 일왕 부부를 만났다. 1907년 10월 왕세자 신분으로 방한한 다이쇼 일왕과의 두번째 만남이었다. 당시 다이쇼는 왕세자였고, 순종은 대한제국 군주였다. 10년만에 역전된 처지의 순종은 비감했을 것이다.
순종은 다이쇼 일왕과 테라우치 전 조선총독 등이 주최한 만찬, 오찬에 참석했다. 일본측 고위 인사들을 초청한 오찬도 주최했다. 6월20일 오후 특별열차로 동경역을 출발해 귀국길에 올랐을 때도 수많은 인파의 환송을 받았다. 동경에 올때의 역순으로 교토, 시모노세키, 부산을 거쳐 28일 오후 5시40분 남대문역에 도착했다. 6시30분 덕수궁 함녕전에 들어가 고종에게 귀국 인사를 한 후 6시50분 창덕궁에 돌아오면서 기나긴 방일은 끝났다.
◇초라쿠칸 찾는 한국 관광객들
순종이 묵은 초라쿠칸은 한국 관광객들에게도 잘 알려진 명소다.(이 호텔 홈페이지엔 순종이 1916년 10월22일 방문한 것으로 소개한다. 이는 오류다.) 호텔 카페의 애프터눈 티 코스가 일본내 2위(2023년 니혼게이자이신문)를 차지할 만큼 인기가 높기 때문이다. 벚꽃시즌인 요즘은 5600엔짜리 애프터눈 티 코스를 예약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일 정도다. 블로그나 인터넷 카페엔 이 애프터눈 티를 다룬 글이 심심찮게 나온다.
◇'이왕가는 천황가의 가족이란 것을 각인’
일제시대 순종의 일본 여행은 별로 알려져있지 않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일지도 모른다. 순종의 일본 방문에 대한 역사학계 평가는 냉정하다. ‘이왕가(李王家)의 공식적 대표인 순종이 동경의 천황가를 방문하여 천황을 알현하고 역대 천황의 사당과 묘소에 참배한 일은, 대외적으로는 식민지 조선이 완전히 일본 제국의 한 일원이며, 이왕가는 천황가의 가족이라는 것을 공식적인 국가의례를 통해 시각적으로 각인시키는 일이었다고 생각된다.’(이왕무, 1917년 순종의 일본 행차에 나타난 행행의례연구, 한국사학보 57, 2014)
한마디로 일제 식민지배에 들러리서는 이벤트에 이용당했다는 것이다. 쓰린 역사의 기억을 안은 채, 교토를 떠났다.
◇참고자료
이왕무, 1917년 순종의 일본 행차에 나타난 행행의례연구, 한국사학보 57, 고려사학회, 2014
정재정, 철도와 근대서울, 국학자료원, 2018
04.13 100년 전 여학생 기숙사를 가다
온수 나오는 목욕탕, 빨래 서비스에 또래와의 공동생활,’에덴 낙원의 선녀놀음’,

▲정신여학교 기숙사는 세탁실이 별도 건물에 있었다. 옷을 삶는 커다란 솥까지 있었다고 한다. 조선일보 1925년 4월22일자
1930년 9월 여학교 기숙사를 탐방한 연재기사가 실렸다. 조선일보 ‘부인면(婦人面)’기획이었다. 딸을 진학시킨 학부모 입장에선 자식이 어떻게 먹고 자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당시로선 극소수였던 인텔리 여성의 일상에 일반인들도 관심을 가졌을 법하다.
◇온수 나오는 목욕탕, 방처럼 깨끗한 화장실
첫회는 숙명여학교 기숙사였다.교사와 강당 뒤에 새로 지은 붉은 단층 기와집이었다,'얼른 보기에는 깨끗한 목재로 단정하게 꾸며논 것이 모두 일본제 비슷'했지만 ‘내부는 서양식,조선식까지 절충한 화양(和洋)잡종식’이었다. 남료(南寮), 중료(中寮), 북료( 北寮) 세채가 나란히 서있었다.
마루를 앞에 끼고 방들이 늘어서있는데,한방엔 최대 4명씩이었다. 정원 67명에 현재 64명이 입주했다. 방 내부는 조선식 온돌에 한쪽 벽에 벽장 4개가 설치돼 소지품은 모두 벽장안에 보관했다. 책상도 학교에서 마련해준 것으로 색깔과 모양이 같아서 한층 더 정돈돼 보였다. 채광이 잘돼 위생상 매우 좋아보였다고 썼다.
식당의 식탁엔 한 상에 8명씩 앉게 돼있다.식당 옆은 목욕탕이었다. '목욕탕은 전부가 돌로 되어 위생상으로 보든지 모양으로 보든지 실로 이 기숙사의 자랑거리가 될만하였다.' '10분 가량으로 물이 더워진다고 한다'
목욕탕 뒷방은 세면소와 화장실.'깨끗하기가 방과 같아 죄다 맨발도 통하게 되었다. 기자는 '사실 이 학기에 처음 들린 집이라 깨끗한 것이 이 기숙사의 특징'이라고 썼다. 외출은 수,금,일요일, 주 사흘 가능했다.(‘새로 지은 깨끗한 집에 가정적인 것이 특색’, 1930년 9월5일자)

▲숙명여학교는 1930년 기숙사를 신축했다. 목욕탕에 온수가 나오고, 화장실은 방처럼 깨끗한 게 자랑거리였다./조선일보 1930년 9월5일자
◇ ‘2층 양옥 넓은 집속에 호사스러운 그들’
이화여학교 기숙사는 2층 양옥이었다.한 방에 2~3명씩 100명을 수용했다. ‘무엇보다 주방이 밝고 넓은 것이 보는 이에게 깨끗한 감을 주었다.’ ‘빨래는 월요일 세탁하는 사람이 걷어 빨아온다.’ ‘한칸 반쯤 되는 방 양쪽에는 침상, 가운데는 책상 2개와 방석이 나란히 놓여있다.’ 식비는 월 11원, 기숙사비 2원이었다. 매일 오전6시 기상, 밤10시 취침에 미션 스쿨이라 매일 아침 기도회가 있다. ‘다 쓰러져가는 우리 집들에 비해서는 호사스러운 생활이었다’는 게 기자의 인상이었다. (’이층 양옥 넓은 집속에 호사스런 그들의 생활’,9월7일자)
◇식당 메뉴 선정부터 운영까지 학생 자치
진명여학교 기숙사의 특징은 '무엇이든지 학생의 손으로 경제와 자치적 정신을 양성'하는 데 있었다. 한달 식비와 사비를 합쳐 12원.'찬을 정한다든지 상을 본다든지 하는 것도 전부 학생의손으로 되어 있으며 빨래와 그 밖에 모든 것을 죄다 학생의 손으로 하게 하여 없는 우리 살림에 할 수있는대로 경제해나가도록 하는 동시에 자치를 주관으로 한다'는 설명이었다. 학생들의 자립심도 길러주고, 인건비 등 경비도 절약하는 묘책이었다.
진명에는 바느질을 하거나 야간 소등후에도 쓸 수있는 '자유의 방'이 있었다.'공부가 하고 싶어도 불끈 후에는 자기 방에서 못하게 되니까 그런 경우에라도 하고싶은 사람은 언제나 여기 와서 할 수있게 새로 된 것'이라고 했다. 면회실을 따로 마련해 방과후 면회가 가능하고, 전화가 걸려오면 이곳에서 받도록 했다.(‘무엇이든지 학생의 손으로 경제와 자치적 정신을 양성’, 9월10일자)

▲이화여학교 기숙사는 2층 양옥에 100여명이 지냈다. 한방에 2명~4명이 썼다. 매주 월요일 빨래를 걷어가는 론드리 서비스까지 있어서 '호사스럽다'는 얘기까지 들었다./조선일보 1930년 9월7일자
◇옷 삶을 수있는 세탁실이 자랑거리
60여명이 사는 정신여학교 기숙사는 4층 건물의 3층에 있었다.이 기숙사의 자랑거리는 세탁실이었다. 독립 건물로 마련한 세탁실은 시멘트 바닥에 넓다란 돌을 깔아 빨래판 대신 썼다. 옷을 삶을 수 있는 커다란 솥도 3개를 걸어놔 한 자리에서 세탁을 끝낼 수있었다. 주방은 당시로선 첨단설비인 가스를 사용해 음식을 조리했다.식비 9원과 사비2원, 도합 11원을 냈다.(‘학교와 기숙사가 함께 있어 설비 완전한 것이 자랑’, 9월11일자)
◇태화여자관 연합기숙사
여러 학교 학생이 함께 사는 연합 기숙사도 있었다. 태화여자관이 운영하는 태화여학교 기숙사였다.많을 때는 11개교 학생이 있었는데, 취재 당시엔 7개교 여학생이 머물렀다.
옛날 한옥을 개조한 집이었다.'전체가 옛날 집이었으나 높고 넓은 것이 섣부른 2층집보다는 시원해보였다.’ 정원은 30명으로 한방에 2명 또는 4명씩 지냈다. 목욕탕이 없고,가끔 강도가 들어 담을 새로 쌓았다고 소개했다.(’학생이면 다 있을 수 있는 ‘내집’셈인 공개기숙사’, 9월9일자)
◇외출은 1주일에 2번, 사감이 편지 검열
금남의 집인데다 당시 여학교에 대한 외부 시선을 의식한 탓인지 규율은 꽤 엄격했다. 외출은 주3회에서 격주 1회까지 제한했다. 소설 ‘B사감과 러브레터’처럼, 서신왕래도 대부분 사감을 거쳐야했다.그래도 구식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또래끼리 처음으로 공동생활을 꾸린 여학생들은 대만족이었던 모양이다.
1931년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한 소프라노 채선엽은 호남 부잣집 출신이다. 기숙사가 불편했을 법하다. 하지만 기숙사를 낙원으로 기억했다. '여기서 우리들은 기숙사 방을 아름답게 꾸미고 사는 방식을 배웠으며 예수의 정신 안에서 가족같이 서로 사랑하는 생활을 터득했으며 방 언니가 되는 경험에서 남의 위에 선 사람은 어떻게 전체의 화목을 도모해야 하는지 또 공동 생활에서 길러진 자기 희생적,봉사적 정신이 사회에 나갔을 때 또 가정을 이루었을 때 그대로 산 지식이 되어주었다'고 회고했다 그리하여 '우리들에게는 낙원이었던 기숙사 생활,그러기에 졸업을 하는 학생들은 학교를 떠나가는 것이 서러워서 우는 것보다도 정말은 이화 기숙사를 하직하는 설움이 커서 졸업을 하고 기숙사에서 짐을 가지고 나가는 전날 밤엔 눈이 붓도록 우는 것이었다'고 했다.
◇ ‘에덴 낙원의 선녀놀음’
채선엽의 동기생 모윤숙은 새학기초 전국에서 모인 학생들이 고향에서 가져온 푸짐한 간식을 나눠먹는'팔도간식파티'를 기숙사생활의 별미로 꼽았다. 평양 출신이 가져온 찹쌀로 빚은 떡 '노티',개성의 강정,함흥 출신인 모윤숙이 가져온 콩가루를 묻힌 수수엿 등이 나왔다. 평양 노티가 제일 인기였다고 한다. 어느 배화학교 학생은 또래들과 어울린 공동생활의 재미가 ‘기숙사의 거친 밥도 맛있게’ 느껴질 만큼 ‘에덴 낙원의 선녀놀음’(‘언니야, 아우야’,조선일보 194년11월1일)이라고 했다. 구식(舊式)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 근대 교육을 받던 여학생들에게 기숙사는 신세계이자 ‘에덴 낙원’이었던 셈이다.
◇참고자료
김초강 외 지음, 이화기숙사 110년 이야기, 이화여대출판부, 1998
04.20 윤극영 ‘반달’히트 이끈 라디오의 힘
1924년12월 조선일보 시험방송서’반달’연주…1933년 조선어 제2방송, 동요 매주 2회 편성

▲1930년대는 윤극영, 윤석중, 정순철, 홍난파 등이 만든 동요가 대유행하면서 동요의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동요 전성시대를 이끈 주역 중 하나는 라디오였다. 1933년4월부터 조선어방송을 시작한 경성방송국은 매주 2회 동요프로그램을 방송해 동요 보급에 커다란 공을 세웠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1931년 월간지 ‘동광’(제22호)에 실린 홍종인의’반도 악단인 만평’은 당대 조선인 음악가들의 활약과 평가를 담은 귀중한 글이다. 한국음악사 연구자들이 단골로 인용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김인식, 김형준, 이상준 같은 서양음악 1세대부터 출발, 성악의 현제명 안기영 이인선 박경희(朴慶姬) 윤심덕·성덕, 피아노의 김영환 김원복, 바이올린의 홍난파,계정식,안병소, 첼로 안익태까지 당시 주목받던 음악가들을 망라했다. 여기에 당시 스물여덟인 윤극영(1903~1988)이 동요작가론 이례적으로 이름을 올렸다. 동덕여고보 교사였던 정순철과 함께였다. 창작 동요를 서양 음악의 한 장르로 인정했고, 그 분야 대표주자로 윤극영과 정순철을 꼽은 셈이다.
‘벌써 6,7년 전 일본 동요의 직역(直譯)이 많이 유행하며 어린이들의 잡지에 동요곡이 많이 실리울 때 이 노래가 한 번 발표되자 크게 유행하였다. 확실히 어떤 때는 ‘푸른 하늘’의 시대를 지었었던 것이다.’
홍종인은 ‘반달’을 ‘창작곡으로 동요 작곡에 한 기축을 지은 귀여운 노래’라고 평가했다.

▲1926 년 출간된 윤극영 동요작곡집 '반달'. '설날' '고드름' 등 10곡이 실렸다.
◇'푸른 하늘 은하수...’, 1924년 11월 잡지‘어린이’에 발표
‘반달’은 소파 방정환이 펴낸 잡지 ‘어린이’(제2권11호·1924년11월)에 처음 발표됐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로 시작하는 가사와 악보를 실어 쉽게 따라부를 수있게 했다. 1926년 윤극영의 첫 창작동요집 ‘반달’의 머릿곡으로도 실렸다. 학계는 윤극영의 ‘반달’이 발표된 1924년을 한국동요의 출발로 보고, 올해를 창작 동요 100년으로 기념한다. 작년 12월 한국동요문화협회 주관으로 ‘창작동요100년사’라는 책이 나왔다.
◇1924년12월 첫 라디오방송서 ‘반달’선보여
‘반달’은 발표 직후부터 화제를 모았다. 라디오 전파를 타고 울려퍼진 첫 동요였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1924년 12월17일~19일 최초의 첫 민간 라디오 시험방송을 실시했다. 수표동 조선일보 사옥 이상재 사장실에서 방송을 진행했다. 청중들은 600미터쯤 떨어진 종로2가 우미관에 모여 스피커로 방송을 들었다. 첫날인 17일 오후1시와 저녁 두차례 시험방송이 이뤄졌는데, 우미관에 인파가 너무 많이 몰려 방송이 두세 시간 연기되는 곡절을 겪었다. 성악가이기도 한 윤극영은 저녁에 출연, 자작곡 ‘반달’을 불렀다. 바이올리니스트 홍난파도 함께 출연했다.
‘벽두에 본사 편집국장 민태원씨의 례사가 시작되며 뒤를 이어서 성악가 윤극영씨의 동요 ‘반달’과 홍영후씨의 ‘바이요린’ 독주가 있었으며 뒤를 이어서 정악전습소원의 관현악 합주와 조동석씨의 단소독주가 있었는데 불행히 첫날에는 용산 육군 무선전신국에서 강한 전파가 흘러오는 영향을 받아 완전한 성공을 못함은 가장 유감이었스나 하는 수없는 일이었었다.’(‘강연에 심취한 학생’, 조선일보 1924년12월18일)

▲윤극영이 간도에서 귀국해 독창회를 갖는다는 소식을 전한 조선일보 1934년4월27일자
◇색동회 창립멤버
경기고보를 나온 윤극영은 1920년 경성법학전문학교에 들어갔다. 1년만에 휴학하고 1921년 도쿄로 건너가 동양음악학교와 도쿄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당시 도쿄에 유학왔던 방정환과의 만남이 인생을 바꿨다. 어린이 노래를 만드는 데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것이다. 윤극영은 방정환이 1923년 5월 도쿄에서 설립한 ‘색동회’에 참여했다. 그해 9월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한 윤극영은 이듬해 8월 최초의 어린이 합창단 ‘다알리아회’를 조직했다.
◇'설날’ ‘고드름’ 앞서 발표
윤극영이 ‘반달’에 앞서 ‘설날’, ‘고드름’을 먼저 발표했다는 사실은 덜 알려져있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구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윤극영이 잡지 ‘어린이’ 1924년1월호에 발표한 ‘설날’은 지금까지도 불리는 히트곡이다. ‘고드름 고드름 수정고드름’으로 시작하는 ‘고드름’은 다음호인 1924년2월호에 선보였다. 꼭 100년 전, 지금도 널리 불리는 어린이 애창곡 3편이 한꺼번에 탄생한 것이다. 이 노래들은 1926년 출간된 첫 창작동요집 ‘반달’에 실렸다. 신문도 주목했다.
‘작곡가로 조선악단에서 이름이 있는 ‘따리아회’주간 윤극영씨는 오랫동안 ‘따리아회’에서 어린이들의 동요교육을 위하야 노력하여 오든 중 금번에 따리아회 어린이들을 위하야 윤극영씨가 작곡한 여러가지 재미있는 동요 수십여 가지를 모아서 윤극영동요작곡집 ‘반달’을 출판하였다는데 이 ‘반달’이라는 작품집은 조선사람의 손으로 된 동요작곡집으로 처음일뿐만 아니라 그속에 있는 여러가지 동요가 전부 조선 정조(情調)가 흘러 조선 어린이들의 마음에 맞는 좋은 동요집이라 한다. 제책과 징정과 인쇄가 미려한 이 동요작곡집이 책사에 나오기는 8일오후이라는데 정가는 50전이라한다.’(‘조선 정조 농후한 동요작곡집’,조선일보 1926년2월8일)

▲한국 동요의 아버지 윤극영
◇라디오 인기 힘입은 ‘반달’
‘반달’의 대유행은 식민지 조선의 애잔한 정서를 담은 곡조와 쉬운 노랫말 등에 크게 힘입었다. 윤극영에 이어 정순철이 1929년 펴낸 동요집 ‘갈닙피리’(총 10곡)엔 윤석중이 노랫말을 쓴 ‘우리 애기 행진곡’이 맨 마지막에 실렸다. ‘엄마 앞에서 짝짜꿍’으로 시작하는 동요 ‘짝짜궁’이다. 윤석중은 당시 열여덟살로 양정고보생이었다.정순철(1901~?)은 천도교 2대 교주 최시형의 외손자로 도쿄 음악학교를 다닌 음악도였다. (’양정고보생 윤석중·동학 최시형 외손자 정순철, 국민동요 ‘짝짜꿍’만들다’, ‘모던 경성’ 2022년 5월4일)
정순철은 1932년에도 동요집 ‘참새의 노래’를 냈다. 같은 해 ‘윤석중 동요집’도 나왔는데, 윤극영과 합작한 ‘우산 셋 나란히’ ‘맴맴’ 등 히트곡이 실렸다. 홍난파도 1929년과 1933년 각각 ‘조선동요 100곡집’ 상,하권을 펴내 동요의 시대를 열었다. ‘고향의 봄’을 비롯, ‘퐁당퐁당’ ‘달마중(달맞이)’같은 한국인 모두가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실렸다. 이렇게 창작 동요는 1920년대 싹 틔우기 시작해 1930년대 만개했다.
◇1930년대 만개한 창작 동요
일제시대 국악 발전에 라디오가 기여했다는 사실은 국악연구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라디오가 동요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간과돼왔다. 1927년2월 출범한 경성방송국은 세계 대부분 라디오 방송처럼 음악프로그램 비중이 상당히 높았다. 특히 1933년 4월26일 조선어 채널(경성방송국 제2방송)이 출범하면서 조선 청취자가 선호하는 전통 음악과 창작 동요의 비중이 커졌다. (’라디오 놓고 충돌한 新舊 세대갈등’, 모던 경성 2023년 3월23일)
박용규 교수 연구에 따르면, 1930년대 하루 4개 정도 편성된 오락 프로그램 중 3개 이상이 음악이었는데, 판소리, 잡가, 아악 같은 전통음악이 절반에서 70%를 차지했고, 서양음악은 20%~30%를 차지했다. 동요프로그램은 서양음악으로 분류했다.
◇매주 2회 동요프로그램 편성
조선일보에 실린 라디오 편성표를 살펴보면, 조선어방송인 제2방송이 생긴 1933년 4월 이후 동요 프로그램은 매주 1~2회(회당 25분~30분), 오후 6시에 주로 편성했다. 예를 들어, 1933년 6월은 7회, 7월은 5회 동요프로그램이 방송됐다.
1930년대 전통음악과 서양음악, 동요 프로그램은 대부분 출연자가 방송국에 나와서 실시간으로 연주했다. 동요는 학교나 단체 합창단이 주로 출연, 제창과 독창을 불렀고, 독창자가 나서는 경우도 있었다. 윤극영의 ‘반달’은 1933년~1939년 매년 서너차례씩 꾸준히 라디오 방송을 탔다. 홍난파의 ‘낮에 나온 반달’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경쟁했으나 ‘반달’의 우세승이었다. 방송에 출연한 연주자들이 ‘반달’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갓 태어난 창작 동요는 1930년대 라디오란 첨단 문명의 이기를 맞아 순풍에 돛단듯 항해를 시작했다.
◇참고자료
홍종인, 반도악단인만평, 동광 제22호, 1931.6
박용규, 일제하 라디오 방송의 음악프로그램에 관한 연구-1930년대를 중심으로, 언론정보연구 47권2호,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 2010
04.27 모던 보이도, 쪽진 婦人도 음악회 오지만…
신문·잡지마다 ‘음악감상법’ 실려…’음악, 이해하는 청중 몇이나 될까’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 경성을 비롯한 전국에서 '음악회'가 자주 열렸다. 모던 보이, 모던 걸은 물론 쪽진 부인네까지 객석을 채울 만큼, 서양 고전음악은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음악을 진짜 이해하는 청중은 몇이나 될까' (홍난파)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다.이때문에 신문,잡지에 '서양 음악 듣는 법'같은 강좌가 자주 실렸다./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서양 음악을 어떻게 들을까’
1929년 홍난파가 연재한 신문 기사 제목이다. 난파는 1929년9월8일부터 6회에 걸쳐 조선일보에’서양음악 감상법’을 썼다. 당시 ‘음악회’가 우후죽순처럼 열렸고, 라디오와 축음기에서도 서양 음악이 흘러나왔다. 신문에 ‘음악감상법’을 소개해야할 만큼, 서양 고전음악이 넘쳐난 세상이었다. 보통 여학생들도 성악공부를 하거나 바이올린을 배우고, 쪽진 구식 부인들도 유행처럼 음악회장을 찾았기 때문이다.
‘근래에 이르러서 음악회가 잦아집니다. 그리하야 일반 여학생들도 성악공부를 한다는 등 혹은 바이올린을 배운다는 등 서양음악에 대한 지식이 점점 늘어갑니다. 음악회를 할 때마다 대성황을 일으키는 것은 전혀 이 까닭이겠습니다.그리고 음악회 때에 유의하여 보면 쪽지신 부인네들도 많이 오셔서 이국(異國)의 서투른 음률에 귀를 기울이고 듣고 있는 것을 볼 수있습니다.’(‘서양음악 듣는 법’1, 매일신보 1925년2월 15일)
난파는 한국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동시에 1922년 서양음악을 교육하고 보급할 목적으로 ‘연악회’를 만든 음악교육자였다. 서양 음악 대중화를 위해 음악감상법을 소개하는 데도 앞장섰다.
◇'클래식 모르면 세기의 쌍놈(?)’
요즘도 서양 고전음악을 어려워하는 이들이 많은데 서양 음악이 처음 들어왔을 때는 오죽했을까. 문제는 100년 전 모던 보이, 모던 걸들은 서양 음악을 모르면 문명인 취급을 못받을 만큼 클래식 음악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이 강했다는 점이다. 식민지로 전락한 민족의 재기를 위해 서구 근대 문명을 빨리 배워야한다는 압박이 강한 시절이었다. 당시 서양 음악은 근대 문명의 일부, 내지는 핵심으로 받아들여졌다. 음악이 취미나 오락이 아니라, 하루빨리 습득해야하는 필수과목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최근 인텔리겐차 사이에 음악열의 침윤이 현저한 것은 하나의 주목할 만한 현상’(음악평론가 김관, ‘사해공론’제4권제7호,1938,7)이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오죽하면 채만식이 서양음악을 모른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갈데 없는 ‘세기(世紀)의 쌍놈’'이라 자학했을까. ‘아무리 해도 음악이란 내게는 난물중에 유수한 난물에 속하는 者이다. 누구 썩 손쉽게 그 놈 음악을 알아듣는 묘방이 있거들랑 좀 전수를 시켜주셨으면 싶다’고 공개 요청하는 신문 칼럼을 썼다. (’클래식 음악 모르면 세기의 쌍놈이라고?’,모던 경성 2021년12월11일)

▲홍난파는 음악회 청중 중 제대로 이해하고 연주를 듣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는 의심을 품었다. 난파는 1929년과 1930년 조선일보에 '음악감상법'을 여러차례 연재했다.
◇'음악을 이해하는 청중이 과연 몇이나 될까’
1920~1930년대 신문·잡지엔 ‘음악감상법’이나 ‘음악상식’같은 칼럼이 종종 실렸다. 홍난파는’(경성)공회당이나 청년회관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가보면 언제든지 만원의 성황을 이루기는 하지만 그 수많은 청중 가운데 참으로 음악을 이해하고 참으로 음악을 듣는 사람이 과연 몇사람이 되는지 이것은 적지 않은 의문’이라고 했다.
그는 ‘귀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들을 수 있는 음악도 여기에 대한 소양이나 예비지식 없이 들으면 그는 마치 쇠귀에 경읽기로 웅얼웅얼하고 똥땅똥땅하는 소리는 들을 망정 참 음악의 소리는 용이히 듣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청각을 음악적으로 훈련’하면서 ‘음악의 예비 지식’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이상 ‘서양음악을 어떻게 들을까’1,조선일보 1929년9월8일)고 강조했다.

▲서양 음악은 1920년대 조선인에게 낯선 현상이었다. 홍난파는 1929년에만 조선일보에 '서양음악을 어떻게 들을까' 라는 주제로 음악감상법을 소개했다. 기사는 1929년9월8일자.
◇ ‘오페라는 얼마나 아름다고 굉장할지 끔찍끔찍하다’
난파는 테너, 바리톤, 베이스(남성)와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알토(여성) 등 음역에 따른 구분, 소나타와 콘체르토(협주곡), 심포니(교향악), 가극(歌劇·오페라)등을 소개한다. 홍난파는 대표적 오페라로 구노의 ‘파우스트’바그너의 ‘탄호이저’ 로엔그린’'마이스터 가인(歌人)’ ‘니벨룽겐의 지환(指環·반지)’과 베르디의 ‘리골렛토’ ‘라 트라비아타’ ‘일 트로바토레’, 롯시니의 ‘세빌랴의 이발사’푸치니의 ‘호접부인’(나비부인) 등을 들었다.’이런 가극 무대장치에도 한 막에 수만원이란 큰 돈이 들며 또 출연하는 배우도 전부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악가들입니다. 죽은 카루소나 살아있는 사람으로는 ‘파-라’ ‘샬리아핀’ ‘슈만하잉크’같은 이들이 유명한 가극배우인 동시에 또한 세계에서 첫째 둘째를 다투는 성악가들인즉 정말 가극은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굉장할지 생각만 해도 끔찍끔찍합니다.’(‘서양음악을 어떻게 들을까’4,10월10일)

▲음악 감상법을 연재한 매일신보 1925년 2월15일자 기사
◇음악의 정조(情調)와 철학을 이해해야
매일신보는 ‘서양음악 듣는 법’1~3(1924년4월20일,5월4일,5월11일). ‘가정상식 통속강좌-서양음악 듣는 법’1~4(1925년2월15일,2월22일,3월1일,3월8일)이란 기획기사를 내보냈다. ‘음악 전체의 기분, 다시 말하면 그 음악 전체에 떠도는 정조(情調)를 맛보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어떤 작품의 정조를 이해하려면 작곡가의 생애와 사상적 경향을 알아야한다는 것이다. 베토벤 음악을 알려면 베토벤의 시대와 사상을 알지못하면 제대로 즐길 수없다는 얘기다. (‘서양음악 듣는 법’3, 매일신보 1925년3월1일)
◇레코드는 가장 좋은 음악감상 도구
음악평론가 김관(金管)도 잡지 ‘여성’에 6회에 걸쳐’음악감상법’을 실었다. 그는’오늘 양악(洋樂)은 널리는 보급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젊은 사람들사이에서 애호되어 있고 이에서 일반 사회인의 관심도 깊어오고 있는 것은 대단 좋은 일이라고 할 수있다’고 운을 뗀 후, ‘한가지 섭섭한 것은 대중은 물론 양악애호자들까지도 말하기를 양악은 알아듣기가 어려운 것이라고 하고 드디어 양악을 감상하는 것은 특수한 기술이나 두뇌를 가져야하는 줄 알고 있음이다’라고 했다.(’레코드에 의한 음악감상법’ 1, ‘여성’ 제2권2호, 1937,2)
◇'실연보다 레코드가 낫다’
김관은 음악감상력을 키우는 방법으로 레코드를 추천했다. ‘음악감상력을 양성하려면 첫째는 될 수있는대로 많이 좋은 음악을 늘 들어야 할 일’이라면서 ‘조선과 같이 음악회라든지 다른 실연(實演)의 기회를 빈번하게 접할 수 없는 곳에서는(樂壇적으로 보아 실력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이 레코드를 이용해서 음악을 듣는 일은 가장 안심할 수 있는 일이고 효과상으로도 상당한 것이다’고 썼다. 김관은 박자와 리듬, 화성(和聲)부터 악기 식별법까지, 상세하게 음악 상식을 소개했다. 마지막회(’여성’제2권7호,1937.7)에선 악기별 추천 레코드를 소개하는데, 오케스트라 분야에선 롯시니 ‘윌리엄텔’ 서곡, 베토벤 교향곡 6번 등을 소개했다.
김관은 ‘성악감상법’(‘여성’ 제3권2호,3호, 1938,2,3)도 소개했다.
◇현대인에게도 버거운 클래식 음악
서양 음악을 어떻게 즐길까는 현대인들의 고민이기도 하다. 낯선 현대음악까지 얘기할 것도 없다. 연주시간만 1시간을 훌쩍 넘기는 말러나 브루크너 교향곡이 자주 연주되는 요즘 음악회에 별생각없이 갔다가는 쿵쾅거리는 소음에 시달리다 기진맥진해 돌아오기 십상이다. 요즘은 서양음악 말고도 들을 수 있는 음악의 종류도 다양하고, 음악말고도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이 넘치기 때문에 굳이 서양음악에 목맬 필요야 없다. ‘비(非)문명인’ 취급 받을까봐 전전긍긍하며 서양 고전 음악을 접했을 100년 전 사람들을 떠올리면 딱한 생각마저 든다.
◇참고자료
김관, 음악감상법 1~6, ‘여성’ 1937년2월호~7월호
김관, 조선에 있어서의 음악교양의 현상, 사해공론 제4권제7호, 1938,7
05.04 ‘심포니에 굶주린 음악팬의 갈증 해소한 冷水’
NHK심포니 전신’新響', 하얼빈 교향악단, 1939년 부민관서 잇달아 연주

▲일본 NHK 심포니 전신인 신교향악단(신향) 상임지휘자 요셉 로젠슈톡. 1940년 신향을 이끌고 온 그는 경성 부민관에서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을 지휘했다. 서른 직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바그너 오페라를 지휘한 로젠슈톡은 당대 유명 지휘자였다. /Public Domain
‘동경서 ‘신향(新響)’ 경성 내연(來演)’
1939년 5월 각 신문에 ‘신향’이 내한공연을 갖는다는 보도가 났다. 다음달인 6월10일과 11일 경성 부민관에서 일본 제1의 오케스트라인 ‘신향’이 연주회를 연다는 소식이었다. 1945년 광복을 맞기 전까지 조선에는 제대로 골격을 갖춘 전문 교향악단이 없었다. 경성제대나 연희전문 오케스트라같은 아마추어 연주단체나 경성방송관현악단처럼 20명 안팎의 챔버 오케스트라가 전부였다.
1939년 3월 경성을 찾은 하얼빈 교향악단은 본격적 전문 오케스트라로선 처음으로 베토벤 교향곡(5번 ‘운명’)과 글린카, 무소륵스키 등 러시아 작품을 연주했다. 그런데 불과 석달 만에 라디오 중계로만 듣던 신향이 처음 부민관 무대에 선다는 뉴스였다.
◇일본 순회 연주 이어 경성 무대에
1926년 창설된 ’신향’은 ‘신교향악단’ 준말로 현 NHK심포니 오케스트라 전신이다. 1936년 폴란드계 유태인 지휘자 요셉 로젠슈톡(Joseph Rosenstock)을 상임지휘자로 맞이하면서 아시아 정상급 오케스트라로 떠올랐다.
‘동경의 신교향악단은 요젭 로-젠슈톡’씨를 지휘자로 하여 이미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있거니와 금춘에 이미 제200회 기념공연을 일비곡(日比谷·히비야)공회당에서 열기로 되었는데 최근 조선으로부터 이 악단을 부르게 되어 오는 6월10일,11일의 2일간 경성에서 연주회를 열기로 결정되었다.’(조선일보 1939년5월12일)
신문은 ‘이 악단은 대판(大阪·오사카) 공연을 마치고서 그 길로 서울로 일행 60명이 건너올 터로 지휘자,곡목 등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으나 로젠슈톡씨는 아마 건너오지 못할 모양’이라고 전했다.

▲일본 제1의 오케스트라 신향이 1939년 6월10일~11일 경성 연주를 갖는다고 보도한 조선일보 1939년5월25일자 기사
◇신예작곡가 임동혁 작품 연주는 불발
열흘 후 속보가 나왔다. 로젠슈톡 대신 신향의 첼로 수석 출신인 사이토 히데오(齊藤秀雄·1902~1974)가 지휘를 맡고, 슈베르트 미완성교향곡과 롯시니 ‘세빌랴의 이발사’ 서곡, 베토벤 교향곡 5번(실제론 베토벤교향곡6번 연주)을 연주한다는 보도였다.
‘이번에는 그 악단의 명지휘자 로-젠스톡씨는 사정이 있어서 오지 못하고 대신 제등수웅(齊藤秀雄)씨가 ‘닥트’를 잡기로 되었다. 그 악단의 멤버는 제1 바이올리니스트 악연현주(鰐淵賢舟)씨 등 동경 악단의 일류가 망라되었으며…특히 우리의 신진 작곡가 임동혁씨의 작곡중에서 한 곡을 뽑아서 연주하리라 한다.이 악단의 내연은 우리 악단에 큰 충동을 줄것으로 예상된다.’(‘악단의 충동 신향 내연’,조선일보 1939년5월25일)
작곡가 임동혁(1912~?)의 작품을 연주할 예정이라는 보도였다. 임동혁은 1938년 도쿄니치니치(日日)신문이 주최한 음악콩쿠르에서 조선인 최초로 작곡 분야에서 입선한 이래 3년 연속 이 대회에서 입선한 기대주였다.
연희전문을 나와 일본 도요(東洋)음악학교에서 유학했고, 세브란스의전 음악부 강사와 경성방송관현악단 지휘자로 활약했다. 하지만 신향 경성연주회에서 임동혁의 작품은 연주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39년 6월 일본 신향을 이끌고 내한한 지사이토 히데오. 세계적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의 스승으로 유명하다. 사이토는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과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을 지휘했다. /Public Domain
◇오자와 세이지 스승 사이토 히데오 지휘
경성 연주를 이끈 사이토 히데오는 1930년~1932년 베를린 뮤직호흐슐레에서 유학한 첼리스트 출신이다. 신향에서 가끔 지휘도 했다. 특히 1936년 로젠슈톡이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이후, 그의 영향을 받아 본격적으로 지휘자의 길에 들어섰다. 지난 2월 타계한 일본의 세계적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의 스승으로 유명하다. 오자와는 스승의 이름을 딴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1992년 나가노 현 마쓰모토시에서 사이토 키넨 페스티벌을 만들어 이름난 축제로 키웠다. 오자와를 가르친 사이토 히데오는 1972년 설립된 뉴재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고문과 ‘영구지휘자’로도 이름을 남겼다.

▲신교향악단 경성 연주를 보도한 동아일보 1939년 5월31일자에 실린 신교향악단 모습.
◇ ‘교향곡의 묘미를 보여준 快演’
사이토가 지휘한 신향은 10일과 11일 3차례 경성 부민관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티켓 최고가는 5원이었고, 3원,2원 순(順)이었다. 설렁탕 1그릇에 15전 하던 시절이었다.
레퍼토리는 조금씩 달랐다. 10일 저녁 7시반엔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 슈베르트 ‘로자문데’, 비제 ‘카르멘’ 모음곡, 요한 슈트라우스의 ‘푸른 도나우강’이었다. 11일 낮1시30분엔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 을 골랐다. 비제, 슈트라우스는 같았다. 11일 저녁 7시반엔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와니부치 겐슈가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했다.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 롯시니 ‘세빌랴의 이발사’ 서곡, 바그너 오페라’뉘른베르크의 가수’ 서곡을 연주했다. 롯시니, 비제를 제외하면 독일 음악 중심이었다.
부민관은 가득 찼다. 신향 연주는 ‘교향곡의 ‘제호미’(醍醐味·묘미,참다운 맛이란 뜻의 일본어)를 맛보기에 충분한 쾌연(快演)’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그 혼일화한 정연히 통제된 연주는 관중을 매료’시켰고, ‘만당(滿堂)의 관중의 떠날 듯한 박수갈채’도 마땅하다고 썼다. (이상,’音樂街', 박문 제10호, 1939년8월)
◇ ‘와니부치의 브루흐 협주곡은 미흡’
와니부치 겐슈(鰐淵賢舟·1908~1983)는 프라하 음악원을 졸업한 바이올리니스트로 신향과 종종 협연했다. 조선 최초의 베를린 유학생인 바이올리니스트 김재훈(1903~1951)은 사이토의 지휘에 대해선 높이 평가하면서도 와니부치의 연주에 대해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아쉬워했다. ‘신교향악단연주는 비록 소규모였지마는 본격적인 연주를 들려준 점에 대하여 공헌이 컸음을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동 악단의 지휘자 제등(齊藤)씨는 가장 침착한 기교의 소유자였다. 이 점으로 지휘자와 연주자간에 긴밀한 팀웍을 스스로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제금(提琴)협주곡에 있어서는 독주자 악연(鰐淵)씨의 곡상조종(曲想操縱)이 무르녹지 못한 곳이 있었음은 현 악단 제1인자로서의 명예를 다소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생각된다.’(‘음악계총평’, ‘조광’제5권12호, 1939,12)
주관적 판단이지만, 베를린 유학파 출신 바이올리니스트이자 경성음악전문학원 원장을 지낸 김재훈의 평가도 무시할 수 없다.
◇로젠슈톡이 지휘한 1940년 신향 연주
신향은 이듬해인 1940년 6월 경성을 다시 찾았다. 무대는 역시 부민관이었다. 일제의 한글 민간신문 강제폐간 직전인데다 전쟁 분위기 때문인지 2차 신향 연주는 덜 알려졌다. 상임지휘자 로젠슈톡이 이끈 신향은 전년보다 훨씬 많은 70여명의 단원이 출동한 ‘대규모’였다. 특히 1939년 9월 조선인 최초로 신향에 입단한 바이올리니스트 문학준(1914~1984)이 제1바이올린 주자로 참여해 주목 받았다.
신향은 전해와 같이 3차례 연주했는데, 베토벤, 브람스, 멘델스존, 스메타나, 요한 슈트라우스, 차이코프스키 작품을 골랐다. 1940년 6월15일 저녁 7시반 베토벤 교향곡 5번, 멘델스존 ‘한 여름밤의 꿈’ 서곡, 스메타나 ‘팔려간 신부’의 폴카, 퓨리언트, 코미디언의 춤을, 16일 저녁 7시반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 브람스 헝가리 무곡 5번과 6번, 요한 슈트라우스 ‘무궁동’(無窮動·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움직임) , ‘박쥐’ 서곡,스메타나 ‘몰다우’를 연주했다. 16일 오후엔 ‘백의 용사’위문 공연 형식이었는데, 베토벤 교향곡 5번,브람스 헝가리무곡 5,6,스메타나 ‘몰다우’를 연주했다. 신향의 16일 저녁 경성연주는 경성방송국을 통해 현장 중계됐다.
◇1929년 메트 오페라 지휘한 로젠슈톡
요셉 로젠슈톡(Joseph Rosenstock·1898~1985)은 폴란드 출신 유태인 지휘자였다. 30대 초반의 로젠슈톡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독일 오페라 전담 지휘자로 모셔갈 만큼 촉망받던 신예였다. 1929년 10월 30일 바그너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데뷔했고, ‘장미의 기사’ ‘발퀴레’ ‘로엔그린’등 독일 오페라를 잇따라 지휘했다. 하지만 부정적인 평단 반응에 상처받았던지 보름여만에 메트로폴리탄 무대를 떠났다. 그는 1933년부터 만하임에서 지휘자로 활동하다 1936년 신향 상임지휘자로 초빙받았다. 유태인 박해가 공공연하게 이뤄진 독일에서 사실상 망명에 가까운 출국이었다.
음악팬들은 경성방송국 중계방송을 통해 로젠슈톡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로젠슈톡의 신향 연주는 경성방송국 제1라디오(일본어), 제2라디오(한국어)를 통해 정기적으로 중계됐다. 신향은 방송 연주를 할때는 ‘일본방송교향악단’이란 명칭을 썼다. ‘조선 뉴스라이브러리’로 검색하면, 로젠슈톡의 신향은 1937년2월 26일 러시아 작곡가 보로딘의 교향시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와 교향곡 2번을 시작으로 최소 연 2~3회씩 경성방송국 전파를 탔다.
◇경성방송국 중계로 익숙한 로젠슈톡
로젠슈톡은 1944년 일본인만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한 정책으로 지휘대에서 밀려나 가루이자와 수용소에 감금됐다. 하지만 그의 대타인 오타카 히사타다, 야마다 가즈오의 지휘 연습을 지도했고, 이들은 전후 일본의 주요 지휘자로 성장한다. 로젠슈톡은 도쿄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일본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습도 지도해 사실상 일본 오케스트라의 대부역을 했다.
로젠슈톡은 1946년 전후 미국에 건너가 1952년 뉴욕 시티 오페라 총감독으로 활약했다. 1961년1월31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복귀한 이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로엔그린’과 ‘반지’시리즈 등 바그너 작품을 주로 지휘했다. 1969년 2월13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마지막으로 메트로폴리탄 무대에서 물러났다.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만 8년간 248회 지휘대에 오른 베테랑이었다.
◇전문 교향악단 첫 연주는 하얼빈 교향악단
신향의 경성 연주는 국내 첫 전문 교향악단 연주로 꼽히는 하얼빈 오케스트라의 내한 3개월만에 전격 성사됐다. 러시아 연주자 중심의 하얼빈 교향악단은 1939년 3월 일본 순회연주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경성에 들러 연주회를 가졌다. 3월26일 오후7시 부민관에서였다. 하얼빈 교향악단은 유럽 연주자들이 중심인 상하이 오케스트라와 함께 아시아에서 쌍벽을 이루는 단체였다.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글린카·무소륵스키 등 러시아 작품 연주
경성 연주 주최자는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였다. 이 신문은 ‘반도 최초의 본격적 심포니’를 내세워 홍보했다. 3월 한달만 12차례 기사를 쏟아내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후원으로 나선 조선방공협회는 1938년 8월15일 중일전쟁 전시총동원체제 수립을 위해 결성한 관제단체였다.
경성 연주회는 러시아 지휘자 세르게이 슈와이코브스키가 이끌었다. 일본과 만주국 국가 연주를 시작으로 베토벤 ‘에그몬트’ 서곡, 교향곡 5번’운명’, 글린카의 ‘루스란과 루드밀라’, 무소륵스키 ‘민둥산의 하룻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스페인기상곡’이 레퍼토리였다.티켓값은 4원, 3원, 2원 순으로 상당히 비쌌다. 도쿄 연주회와 같은 가격이었다.
◇ ‘김빠진’운명’ 교향곡, 하지만 금관에 환호’
최초의 외국 전문교향악단 연주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다. 경성의 음악팬들은 음반과 라디오로 이미 작품을 접한데다 일본 평단의 차가운 반응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 교향악단은 독일 지휘자들이 조련한 정확하고 엄격한 독일식 사운드를 추구했다. 여기에 익숙한 일본 평단은 급조된 단원들이 섞인 하얼빈 교향악단 연주가 거칠고 투박하다고 비판했다.
홍난파는 1부 베토벤 연주에 대해 ‘평소부터 우리가 세계 일류급의 지휘자와 교향악단의 연주를 레코드로나마 너무 많이 들었던 만큼, 이날 밤 우리의 실망도 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동아일보 1939년3월30일)고 썼다. 하지만 2부 러시아 작곡가 프로그램에 대해선 ‘동양에 있어선 다시 얻기 어려운 명연(名演)이라고 생각한다”고 호평했다.
지휘자의 무능과 연주력을 꼬집은 비평도 나왔다. ‘김빠진 ‘제5′(운명교향곡)에 베토벤의 데스마스크가 졸지나 않았는지’라면서도 ‘부분적이나마 우수한 연주자-특히 금관악기 등에-를 본 것은 큰 기쁨이요 또한 심포니에 굶주린 이 땅 음악팬에겐 갈자(渴者)에 냉수(冷水)였음도 사실이니 크게 감사해야할 일’이라고 썼다.(‘음악실’, 박문 제8호, 1939.6)
◇'내선일체 문화사업으로 추진’
하얼빈 교향악단과 신향의 두 차례 연주는 본격 교향악 연주를 갈구하던 음악팬들의 기대를 잠시나마 충족시켰을 것이다. 홍난파는 ‘만시지탄’’열광’같은 단어를 써가며 교향악의 진수를 보여준 연주를 높이 평가했다.’하얼빈교향악단과 동경신교향악단의 두 단체를 맞이하여 조선에 있어서 양악(洋樂)의 역사가 있은 지 반세기를 지난 오늘에 비로소 교향악다운 교향악의 실연을 처음 들은 것은 비록 만시지탄은 있을 망정 과연 예상 이상으로 반도의 호악가(好樂家)들을 열광시키었으며…'(‘조선 악단 1년의 회고’下,동아일보 1939년12월16일)
이경분 교수에 따르면, 신향 경성공연은 하얼빈 악단 연주후에 급조됐고,’내선일체 분위기 도모를 위해 더 없이 효과적인 문화사업’으로 추진됐다고 한다. 주최자인 경성 YMCA는 조선인으로 구성된 황성 YMCA를 흡수통합한 일본인 엘리트 종교단체였다. 수준 높은 문화 공연으로 일본의 우월감을 과시하면서 자발적 복속을 이끌어내는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광복 직후 고려교향악단 출범
이런 의도와는 별개로 하얼빈 교향악단과 신향의 연주는 조선인에 의한 본격적 교향악단 설립을 촉구하는 움직임으로 비화했다. 홍난파는 만주국 수도 신경에서도 거액을 들여 신경교향악단과 음악학교를 설립하고, 하얼빈 교향악단도 시에서 연(年) 수만원의 예산을 지원하는데, 대도시 경성에 음악학교나 교향악단 하나 없는 것은 ‘자괴막심(自愧莫甚)한 일’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광복 한달만인 1945년 9월15일 고려교향악단(서울시향 전신)이 출범한 것은 하얼빈 교향악단, 신향 연주에 자극받은 음악계의 대응인 셈이다.
◇참고자료
이경분, 문화,정치적으로 본 신교향악단의 경성연주회(1939~1940), 한국예술연구 제29호,2020
이경분, 중일전쟁 시기 동아시아 교향악단 교류:하얼빈 교향악단의 일본 연주여행과 경성연주회(1939)를 중심으로, 아시아리뷰 제7권제2호(통권 14호),2019
김재훈, 음악계총평, 조광제5권12호, 1939.12
음악실, 박문 제8호 1939년 6월
음악가, 박문 제10호 1939년 8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아카이브( https://archives.metopera.org/MetOperaSearch)
05.11 北으로 간 日‘신교향악단’(NHK 심포니 전신) 바이올리니스트 문학준
1939년 입단한 조선인 유일 ‘신향’단원…광복 후 고려교향악단 악장,6.25이후 北 국립교향악단장

▲조선일보가 1935년9월 개최한 제1회 전조선남녀음악콩쿠르에서 바이올린 1위를 차지한 문학준. 연희전문 문과에 다니며 연전4중주단 리더로 활약하던 아마추어 음악도였다. 문학준은 1939년 9월 당시 일본 제1의 신교향악단에 조선인으론 유일하게 입단한 실력파였다. 사진은 조선일보 1935년 9월24일자 기사.
1939년 8월13일 낭보가 들어왔다. 연희전문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문학준이 조선인 최초로 일본 최고 연주단체인 신교향악단 제1바이올린주자로 선발됐다는 뉴스였다. 이 날짜 매일신보 기사(문학준군 영예, 동경 신교향악단 입단시험에 파스)는 ‘문학준군은 그동안 동경에서 세계적 제금가 악연(鰐淵)씨의 문하에서 기술을 연마하고 있었는데, 지난 8일 반도인으로서는 최초로 신교향악단의 입단시험에 어렵지않게 통과’했다고 보도했다. 일본인 바이올리니스트 8명이 함께 실력을 겨뤄 문학준만 통과했고, 지휘자 요셉 로젠슈톡의 찬사를 받았다고 전했다. 1926년 출범한 신교향악단(이하 신향·新響)은 창립 100주년을 코앞에 둔 NHK 심포니 전신이다. 경성방송국 중계를 통해 국내 음악팬에게도 익숙한 단체였다.
신향은 그해 6월 경성 연주회를 통해 교향악의 진수를 보여주면서 음악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터였다. 문학준은 이듬해 6월 두번째 경성 연주를 가진 신향의 정식 단원으로 고국팬 앞에 섰다. 로젠슈톡의 지휘로 베토벤 교향곡 5번,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을 연주한 신향의 바이올리니스트로서였다. 1939년 9월 입단한 문학준은 1945년 5월31일 자진 퇴단할 때까지 5년9개월간 신향에 몸담은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문학준이 도쿄 신교향악단 단원으로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한 매일신보 1939년8월13일자.
◇계정식의 경성현악4중주단 활약
문학준(1914~1988)은 국내파 연주자였다. 1933년부터 연희전문 음악부에서 본격적으로 현제명,홍난파의 지도를 받았다. 그가 언제부터 도쿄에서 와니부치 겐슈(鰐淵賢舟)의 지도를 받았는지는 정확히 알려져있지 않다. 기껏해야 몇 달 정도가 아닌가 싶다. 문학준은 1939년2월까지 경성현악사중주단 멤버로 경성방송국에 출연했기 때문이다. 경성현악사중주단은 독일 유학파 출신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이화여전 음악과교수로 있던 계정식(1904~1974)이 주도한 실내악단이다. 문학준은 제2바이올린을 맡았고, 안성교(비올라), 김태연(첼로)이 멤버였다. 경성현악사중주단은 1938년12월~1939년2월 경성방송국에 매달 한차례씩 출연,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현악사중주를 연주했다. 1939년 3월부터 제2바이올린 주자가 김태섭으로 교체됐는데, 문학준의 도일(渡日)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학준은 연희전문시절부터 현악4중주단 리더로 활약했다. 경성방송국에도 자주 출연했는데, 1934년2월26 일 연전사중주단 멤버는 문학준(제1바이올린) 김생려(제2바이올린) 이인범(비올라) 이유성(첼로)이었다. 베토벤의 가보트, 하이든의 미뉴에트처럼 소품 위주로 연주했다. (‘라디오’, 조선일보 1934년2 월26일) 문학준이 이끈 연전사중주단은 1934년 6월9일, 9월18일, 1935년 5월4일에도 경성방송국에 출연했다.(1936년3월4일에도 멤버 이름을 확인할 수없지만 ‘연전사중주단’이 출연했다.)

▲1940년6월 신향의 경성연주차 함께 온 문학준을 소개하는 매일신보 6월17일자 기사. 악단의 규율과 통제가 군대 이상으로 엄격하다고 소개했다.
◇연전 음악부 주최 중등학교 음악회서 1등
전남 영암 출신인 문학준은 경성제1고보(경기고 전신)를 졸업한 뒤, 1933년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 1937년에 졸업했다.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워 실력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1929년1월21일 밤 마포 청년회관에서 열리는 음악과 동화대회에선 열다섯살 문학준이 바이올리니스트 대표로 소개됐다. 소파 방정환이 함께 연사로 나섰다.(’연강순회(沿江巡廻)로 동화대회개최’, ‘조선일보 1929년 1월18일)
경성제1고보 재학중인 1932년 6월 연희전문 음악부가 주최하는 제1회 조선 중등학교 현상음악회에서 1등으로 뽑혔다. 문학준은 독일계 작곡가 요아힘 라프(Raff)의 ‘카바티나’를 연주했는데 음정이 틀리는 곳이 있었지만 경연자 중 음폭이 제일 있었고, ‘익스프레션’(표현)도 어느 정도까지 발휘했다는 평을 받았다. 문학준은 안병소 홍난파 채동선에게 차례로 배웠는데, 경연 당시엔 채동선이 스승이었다. (‘전조선 남녀 중등교 현상음악회를 보고’, 동아일보 1932년 6월15일)
당대 조선의 대표적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레슨을 받을 만큼, 집안이 여유있고 실력도 뛰어났던 듯하다.
◇1935년 제1회 전조선 남녀 음악콩쿠르 1등
문학준이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1935년 9월19일~21일 조선일보가 개최한 제1회 ‘전조선남녀음악콩쿠르’에서 바이올린 1위를 차지하면서부터다. 그해 7월 준공한 조선일보 태평로사옥 강당에서 열린 콩쿠르엔 피아노와 바이올린, 성악 3분야에 110명이 출연했다. 김영환 박경호 홍난파 계정식 현제명 김문보 등 내로라하는 음악가들이 심사를 맡았다. 문학준은 14명이 올라온 본선에서 바이올린 1위를 차지했다. 피아노는 입상자가 없었고, 성악은 이인범과 고종익이 2위로 입상했다. 사실상 전체 1등이었던 셈이다.
홍난파는 심사평에서 ‘일등에 입상한 문학준군(文學準君)은 모든 점으로 보아서 예술가적 소질을 다분(多分)으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제금학상(提琴學上)의 기교나 해석에 대한 조예가 또한 깊음을 알 수있다’고 호평했다. 그러면서도 ‘완강(頑强)한 용궁(用弓)과 바이브레이션의 필요 이상(必要以上)의 급속(急速)으로 인(因)하야 천래(天來)의 미음(美音)을 선상(線上)에서 뇌살(惱殺)시켜버리는 것은 가장 애석한 일’이라고 꼬집었다. 무대에서도 좀 더 대담하게 연주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심사후감’, 조선일보 1935년9월29일)
문학준은 이듬해 콩쿠르에도 참가해, 바이올린 1위를 연속 거머쥐면서 그랑프리격인 사장상(賞)까지 받았다.
그는 ‘별로 숭배하는 음악가라고 따로 없다. 위대한 음악가는 다 숭배한다’면서 ‘앞으로는 들어앉아 공부만 하겠다’며 음악을 전공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앞으로는 들어앉아 공부만 하겠습니다’,조선일보 1936년 10월28일)
◇연전 졸업후 철도국 취직
문학준은 1937년 연전 졸업후 철도국에 취직한 것으로 보인다. 중일전쟁 개전 직후인 1937년12월 조선 불교 단체와 조선문예회 주최로 중국 전선에 일본군 위문공연단이 파견됐다. 전 연희전문 교수로 소개된 현제명과 함께 문학준이 철도국 공무과 소속 직원으로 신문에 났다.(‘연극과 음악을 가지고 北支장병위문行’, 매일신보 1937년 12월19일) 총독부 산하 철도국에 취직했다는 얘기다. 위문공연은 12월22일 경성역을 출발, 봉천(선양)을 경유, 천진 북경 석가장 태원 등으로 20일간 이뤄질 예정이었다.
◇ ‘연습 또 연습’
문학준의 ‘신향’ 생활은 ‘연습, 또 연습’으로 바빴다. 로젠슈톡은 엄격한 지휘자였다. 매달 오디션을 통해 준회원, 정회원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한번 단원이 됐다고 안심할 수 없는 생활이었다. 경성 연주를 위해 내한한 문학준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악단은 규율과 통제가 엄격한 것이 군대 이상이며 매년 정기 공연과 방송을 합해서 10회 연주를 하는데 연주마다 곡목을 교환하는 관계로 연구와 연습에는 상당한 노력이 듭니다. 무엇보다도 실력이 제일이니까 앞으로 동(同)악단의 확충과 한가지 조선인에게도 많은 가입의 기회가 있을 줄 압니다.’(‘신향의 이채,문학준군’,매일신보 1940년 6월17일)
입단 4년차인 1942년에도 ‘현재 나의 생활은 연습, 연주방송의 끊임없는 뒤푸리(되풀이)’라며 ‘기계’ ‘직공’을 자칭할 정도였다.(’음악苦',조광 제8권제1호,1942,1)
◇고려교향악단 초대 악장
8·15 전후 귀국한 문학준은 광복 한달만에 현제명 주도로 결성된 고려교향악단 초대 악장이 됐다. 고려교향악단은 창단 두 달 후인 11월 수도극장에서 계정식 지휘로 창단 공연을 가졌는데 베토벤 ‘에그몬트 서곡’과 교향곡 5번을 연주했다. 이어 이듬해 2월16일~17일 제1회 정기연주회를 비롯, 1948년10월까지 정기공연 26회는 물론 수시로 특별연주회를 열었다. 1947년 6월 미소공위 재개 기념 연주, 1948년 1월 시공관에서 열린 광복 후 첫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반주 등이다. 문학준은 악장으로 연주했을 것이다. 1948년 10월 고려교향악단이 활동을 마무리하자 이듬해 12월 옛 고려교향악단 멤버인 계정식 김생려가 결성한 서울교향악단에 합류했다.
문학준은 현악4중주단(문학준, 최영우,이재옥,김준덕)을 결성, 1948년 12월24~26일 ‘음악애호구락부’ 주최로 충정로 문화의집에서 열린 ‘실내악의 밤’에 출연했다. 이듬해1월2일 같은 곳에서’문학준 4중주단 연주회’를 열었다. 문학준은 1950년4월10일 명동 시공관(市公館)에서 임원식이 지휘하는 서울교향악단과 함께 리사이틀을 열었다. 바흐의 협주곡 2번 E장조, 베토벤 협주곡 D 장조 를 연주했다.(‘문학준 제금독주회’, 조선일보 1950년4월6일)
◇서울대, 연희대 음악학부 교수
문학준은 현제명이 주도해 1945년 12월 인가를 받은 경성음악전문학교 교수진으로도 합류했다. 이 학교는 1946년 8월 개교한 서울대에 흡수,통합되면서 음악교육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문학준은 1948년 작성된 음대 교수 명단에 조교수로 올랐다. 그러면서 1946년 연희대 음악부 주임교수로도 활약했다. 광복 직후 대학이 여기저기 들어서면서 두 학교에서 모두 활약하게 된 듯하다.
문학준은 6.25 직후 월북했다. 북한 자료에 따르면,’1950년 8월부터 조선인민군협주단 관현악단 악장 겸 지휘자, 국립교향악단 악장으로 활약’했다는 것이다. 문학준의 월북 이유는 불명확하다. 서울에 남았다가 피치못할 사정으로 끌려간 건지, 아니면 이전부터 사회주의를 동경했는지 알 수 없다.
자유와 평등을 갈구한’베토벤’을 존경한다던 바이올리니스트가 주체사상의 북한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 알 수없다. 1960년대 이후 그의 행적은 불명확하다. 1970년대~1980년대 북한을 오간 작곡가 윤이상도 문학준을 만날 수없었다고 한다. 한때 국내 최고 바이올리니스트로 알려진 문학준은 이렇게 남북 음악계에서 모두 잊혀졌다.
◇참고자료
허지연, 근대 음악사의 분단 극복하기: 월북 음악가를 통해 본 1940년대 음악계, 민족과 음악 제60호, 민족음악학회, 2020,10
이경분, 문화,정치적으로 본 신교향악단의 경성연주회(1939~1940), 한국예술연구 제29호,2020
문학준, 음악苦, 조광 제8권제1호,1942,1
05.18 우크라이나 ‘코백이 춤’유행시킨 해삼위 학생공연단
1921년 4월~6월 경성, 부산, 대구 등 15개 도시 돌며 23회 공연
▲1921년4월29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첫 공연을 가진 블라디보스톡 학생음악단은 당시만 해도 생소한 러시아 무용과 숙련된 연주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남녀 학생 11명으로 이뤄진 공연단은 6월4일 경성의 마지막 공연까지 전국 15개 도시를 돌며 23회 공연을 가졌다. 개벽사 학예부장 현철은 해삼위 학생음악단 공연을 1921년 최고의 음악회로 꼽았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지난 29일 하오 8시부터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일행들의 주최로 음악무도회를 개최하였는데, 일행의 음악무도회의 개최될 것이 본지를 위시하야 각 신문에 발표가 되자 경성 일반의 인기는 모두 물끓듯이 일행의 음악무도회로 집중되어 29일 낮부터 입장권을 사러 오는 사람이 답지하였었다. 그리하여 정각 전부터 청년회관으로 모여드는 남녀 관중은 조수 밀듯하야 회장 아래위층에 발들여 놓을 틈이 없이 만원에 만원인 성황을 이뤄서 나중에는 입장을 거절까지 하야 여기 저기서 입장을 허락하라고 법석이 일어나기까지 하는 공전(空前·이전에는 없는)한 성황으로 이상재씨의 사회로 개막이 되었는데….’(‘공전성황리에서 眞音樂!!眞舞蹈’, 조선일보 1921년5월1일)
1921년 4월29일 밤 8시, 종로의 랜드마크인 붉은 벽돌색 3층 건물 기독교청년회관(YMCA회관)에 인파가 모여들었다.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톡)에서 건너온 교포학생 음악회를 보러 몰려든 관객이었다. 해삼위는 당시 블라디보스톡을 가리키는 말이다. 숙련된 서양음악 연주 실력을 갖춘데다 조선 관객들로서는 난생 처음 보는 서양 무용까지 선보인 이 음악회는’물끓듯한 인기’를 끌었다. 신문은 ‘만원에 만원인 공전의 성황’을 이룬 이 공연을 현장중계하듯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낱낱이 전했다.
▲해삼위 학생음악단이 1921년4월29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가진 공연 프로그램. 무용과 음악을 섞은 혼합 공연이었다. 매일신보 1921년 4월30일자
◇앞뒷문이 터질듯 밀려든 관객
YMCA가 주최한 29일과 30일 음악회에 이어 학생대회 주최로 5월2일 밤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음악회도 성황을 이뤘다.’1000여명 관람자는 시간 전에 모여들어 앞뒤문이 터질듯이 공전한 성황을 이루었고 아직도 입장하지 못한 관객은 문밖에서 문을 열어달라고 야단을 치며 문안에 있는 사람은 서로 어깨를 부비어 몸이 끼어서 용신을 못하게 되었고 중간에는 사람 다니는 길에까지 앉아 구경하게 되었고 한번 입장한 사람은 나가려고 하여도 나갈 길까지 막히었으며….’(‘학생대회 주최로 해삼위 학생단 음악회’,조선일보 1921년5월4일)
▲1921년 4월29일 해삼위 학생음악단 첫 공연을 자세히 소개한 조선일보 1921년 5월1일자 기사. 러시아 민속춤과 스페인 무용, 김 니콜라이의 바이올린 연주가 갈채를 받았다.
◇해삼위 음악단 소식, 매일 신문에 실려
해삼위 학생 방문단은 1921년4월22일 블라디보스톡에서 배편으로 출발, 원산을 거쳐 27일 밤 경성에 도착했다. 독립운동가 이강(李剛·1878~1964)을 단장삼아 러시아에서 나고 자란 한인 학생 11명(남학생 7명, 여학생 4명)이 고국 방문에 나선 것이다. 한두명을 빼곤 한국어를 못하는 이민 2,3세였다. 학비와 해삼위청년회관 건축비 모금을 위한 목적이었다. 당시 YMCA 초대 한국인 총무를 지낸 이상재가 초청했다.
해삼위학생음악단은 29일과 30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두 차례 공연을 시작으로 6월5일 경성을 떠날 때까지 한달 넘게 경성을 비롯한 전국 15개 도시를 돌며 23회나 순회 공연을 했다. 독립운동 기지인 연해주 동포학생에 대한 동정과 관심,’예술의 나라’로 알려진 러시아의 무용와 음악에 대한 선망에 ‘신생’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까지 섞여 이 단체의 일거수 일투족은 매일같이 신문에 실릴 만큼 주목을 받았다.
◇커튼콜만 네차례, 신기록
해삼위학생음악단이 어떤 공연을 선보였기에 주목받았을까. 당시 신문(매일신보 1921년4월30일자)에 보도된 공연 목록에 따르면, YMCA주최 음악회에선 리스트의 피아노곡’환상’을 비롯,’5부합주-행진곡 회향(懷鄕)’’3부합주-전원시 행운’, ‘무도곡-가봇’, ‘3부합주-왈츠’, 잡곡, 민요 등이었고, ‘수병무’(水兵舞), ‘비행선’(飛行船), 코사크족 민속무(호팍·Hopak dance) 등 러시아 무용과 보헤미안 춤, 스페인 무용을 선보였다. 몇몇 작품외엔 어떤 곡을 연주했는지 불확실하다. 김 니콜라이의 바이올린 실력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김군의 바이올린은 지금 경성에 있는 우리 음악계에는 군(君)만한 재능을 일찍이 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구동성으로 군의 신묘한 바이올린에 누가 감탄치 않는 사람이 없어 박수와 갈채는 쉬지 않음으로 김군은 다시 무대에 나오기는 네번까지 이른 것은 우리 음악계에 신기록이 되었으며….’(‘공전성황리에서 眞音樂!!眞舞蹈’, 조선일보 1921년5월1일)
◇백우용의 극찬 ‘조선음악가는 그를 당할 수 없을 듯’
대한제국 군악대, 이왕직 양악부를 계승한 경성음악대 지도자 백우용도 YMCA 음악회를 극찬했다. ‘내가 지금까지 매우 많은 음악단과 같이 함께 출연도 하였으며 또 듣기도 많이 하였으나 이번 해삼위 학생단의 음악같이 상쾌한 감상을 주는 악대는 별로 듣지 못하였소이다… 그 중에 김 니콜라이군의 바이올린은 조선에서 전문으로 몇해를 단련한 음악가 중에도 도저히 그의 자유롭게 내는 리듬은 당할 수 없을 듯하며 피아노의 주법도 이곳에서 연습한 사람과는 비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음조를 희롱합디다.’(동아일보 1921년5월1일)
▲1921년4월27일 밤 경성 남대문 역에 내린 해삼위 학생음악단. 이민 2~3세로 대부분 조선어를 못했다. 매일신보 1921년4월29일자
◇박태준 ’폴카 풍 무도곡 한동안 유행’
해삼위 공연단은 원산 평양 진남포 사리원 개성 인천 대구 부산 마산 군산 이리 광주 등을 순회했다. 평양 숭실전문을 나와 숭실중학교에서 교사로 있던 작곡가 박태준(1900~1986·전 연세대음대 학장)은 5월9일 평양 기독교청년회 주최로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공연을 봤다. ‘연주회 개막은 기독교청년회 음악부원 곽권응 (나의선배)의 간단한 소개가 있은 후에 남(南)셀게,김(金)니콜라이,박(朴)세묜,채(蔡)페오판의 4부합창으로 시작되었고 김(金)니콜라이의 바이올린은2~3회의 재청을 받았다. 그때 연주된 무도곡중 폴카풍의 2박자 멜로디는 그후로 한동안 유행되어 나는 지금도 외고 있다.’(‘폴카 멜로디는 유행까지’, 조선일보 1972년9월10일)
◇시골까지 대유행한’코백이 춤’
공연평론가 박용구(1914~2016)는 1921년 해삼위조선학생음악단의 내한공연을 ‘서양 음악이나 무용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1920년대 제일 큰 사건’으로 회고했다. 현악4중주와 서양 무용을 소개한 첫 사례라는 것이다.(’박용구: 한반도 르네상스의 기획자’77쪽~87쪽)
박용구는 무용 프로그램에 더욱 주목한다. ‘음악단의 레퍼토리 보면 알겠지만 스페인 춤이 있고 러시아의 호팍 춤도 있고, 창작 무용이 아닌가 할 정도의 것도 있고, 수병의 춤이라든가, 레퍼토리가 다양할 뿐만이 아니라….’특히 해삼위음악단은 한달 넘게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연한 덕분에 경북 풍기(박용구 고향) 같은 시골에서도 ‘코백이 춤’(호팍 댄스)이 유행할 만큼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고 했다. 박용구는 ‘해삼위 음악단이 음악사나 무용사에서 제대로 조명이 안돼 유감’이라고까지 했다.
◇‘1921년 최고의 음악회’
해삼위 학생음악단이 현악4중주를 처음 소개했다는 박용구의 진술은 어떤 근거에서 나왔는지 불확실하다. 당시 공개된 프로그램이나 공연 기사를 보면, ‘5부 합주’’3부 합주’식의 애매한 표현만 나오지 어떤 악기로 구성됐는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박용구는 ‘5부 합주’ 프로그램인 ‘행진곡 회향(懷鄕) ‘을 드보르작 현악4중주 아메리카 2악장으로 추정했는데, 말그대로 추측에 불과하다. 해삼위 공연이 있었던 1921년 박용구는 경북 풍기에 사는 일곱살 소년에 불과했고, 보통학교도 입학하기 전이었다.
잡지 ‘개벽’ 학예부장이자 연극인인 현철(1891~1965)이 1921년 예술계를 결산하면서 ‘노령(露領)조선인학생음악단이 조국을 방문한 외에는 하나도 음악회라고 할만한 무슨 회합이 없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것같다’(‘예술계의 회고 1년간’, 개벽 제18호,1921,12)고 쓴 것을 보면, 해삼위 학생음악단 공연이 깊은 인상을 남긴 건 사실인 듯하다.
◇전국에서 후원금 답지
해삼위 학생공연단은 29일 첫날 경성 공연에 후원금 355원을 모은 것을 시작으로 공연때마다 성금이 답지했다. 하지만 불행한 일도 있었다. 최연소 단원인 열네살 이마리아양이 강행군 탓인지 전염병에 걸려 군산에서 치료받던 중 6월4일 숨졌다. (‘금조 석왕사로 향한 해삼위학생단’, 조선일보 1921년6월6일) 공연 첫날부터 진기한’수병무’를 추어 무대에 재차 불려나온 ‘재롱스럽고 천진난만한’ 소녀였다. 해삼위 학생음악단은 숱한 사연을 남긴 채 6월5일 남대문 역을 출발해 귀로에 올랐다.
해삼위 공연단은 이듬해인 1922년에도 두 차례 내한 공연을 가졌다. 각각 ‘해삼위연예단’(4월18일~8월10일) ‘기독교청년학생음악단’(7월10일~8월9일)명의였다. 열기는 전보다 덜했고’기독교청년학생음악단’은 돌아갈 여비 마련에도 곤란을 겪었다고 한다. 하지만 해외 동포들의 딱한 처지를 끌어안으려는 민족애만큼은 변함없이 이어졌다.
◇참고자료
현철, ‘예술계의 회고 1년간’, 개벽 제18호,1921,12
김은영, 1910~1920년대 YMCA 음악회에서 상상한 ‘민족’, ‘경성의 소리문화와 음악공간’, 서울역사편찬원,2022
조윤영, 조선인 중심의 음악회장,경성기독교청년회관, 음악학 25-2, 2017,12
유선영, 답례로서 연예: 1920년대 문화적 민족주의의 연예, 언론과 사회 22-3. 2014
박용구,’박용구: 한반도 르네상스의 기획자’, 수류산방, 2011
05.25 조선인 음악회의 聖地, 종로 기독교청년회관
홍난파 첫 리사이틀, 베토벤 탄생 기념 음악회 등 열려
▲1908년 12월 완공된 종로 기독교청년회관. 1910년대~1930년대 각종 음악회와 강연회가 열린 근대 문화의 성지였다. 해삼위학생음악단과 하와이학생고국방문단이 공연한 곳도 회관 대강당이었다. 1911년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대저 양악의 반도 유입은 교회를 통하여 점진한 것이로되, 그 일반적 보급은 오히려 지지(遲遲)한 점이 있더니, 기독교청년회를 말미암아 성악, 기악, 관현악의 독주, 2중주, 3중주, 4중주 등이 누누(屢屢) 실연함을 따라 양악 취미 및 양악 지식이 일반화하는 기운을 만났다. 특별히 동양을 내방하는 세계 일류의 악인 가수가 청년회의 소개로써 한국인의 이목에 그 신기를 고동한 예가 허다하여 이것이 반도에 있는 양악 발전에 큰 자극이 되었음은 물론이다.’(‘육당최남선육필원고’, 김은영(2022) 75쪽 재인용)
육당 최남선은 조선 YMCA(기독교청년회)의 주요 업적 중의 하나로 서양 음악의 보급에 기여했다는 점을 꼽았다. 국내 첫 피아니스트 김영환, 첫 바이올리니스트로 꼽히는 홍난파가 YMCA학관(學館)출신이라거나 김인식, 김형준, 이상준 등 1세대 음악인들이 YMCA에서 서양 음악을 가르쳤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
1908년 12월 건립된 종로 YMCA회관은 ‘음악회’의 성지(聖地)였다. 특히 조선인들이 활약한 북촌의 중심 종로에 자리잡은 덕분에 경성공회당(1920년), 부민관(1935년)이 건립되기 전은 물론 1920년대와 1930년대 내내 조선인 음악가들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홍난파는 1918년 동경음악학교에 유학하다 3.1운동으로 귀국했다. 1924년 1월18일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첫 바이올린 리사이틀을 가졌다. 조선일보 1924년1월18일자
◇김영환, 홍난파 등 YMCA 학관 졸업
종로 YMCA회관은 벽돌양옥 600평 건물이었다. 회관내엔 강당, 운동실, 교실, 도서실, 식당, 목욕장, 사진부 등을 갖추고 있었다. 기독교청년회는 1906년 10월 캐나다인 그레그를 청빙, 실업교육 위주의 학관(學館)을 개관했다. 이 학관에 1912년 11월 음악과가 신설돼 1914년 첫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김영환이 1회 졸업생이었다. 같은 해 홍난파도 중학부를 5회로 졸업했다.
◇베를린 유학파 피아니스트 오구라 리사이틀
YMCA에서 열린 첫 음악회는 1909년 2월1일 오후7시 YMCA 월례회로 보인다. 학관 책임자였던 그레그(具禮九)가 월례회 순서중 하나로 ‘환등회’(영화)를 열었는데, 여흥으로 음악과 ‘창가’를 연주한다는 보도(’靑館例會', 대한매일신보 1909년1월31일)가 나왔다. 전문 음악가가 나선 음악회로는 베를린 뮤직호흐슐레에서 유학한 피아니스트 오구라 스에코(小倉 末子·1891~1944)와 성악가 야나기 가네코(柳兼子·1892~1984) 리사이틀을 꼽을 수있다.
도쿄음악학교에서 수학한 오구라는 1912년~1914년 베를린 뮤직호흐슐레에서 수학한 후, 미국에 건너가 시카고 메트로폴리탄 음악원 교수로 가르쳤다. 1916년 귀국해 이듬해부터 도쿄음악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20세기 전반 일본의 대표적 여성 피아니스트로 꼽히는 오구라 연주는 단연 화제를 모았다. 12월19일 오후8시 조선호텔 대식당에 이어 21일 오후8시 기독교청년회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오구라는 22일 오후2시 창덕궁 인정전에서 순종 부부를 관객으로 한 어전연주회(매일신보 1916년 12월24일)까지 치렀다.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의 아내인 야나기 가네코(柳兼子) 리사이틀은 1920년 5월4일 밤 열렸다. 가네코는 도쿄 음악학교 성악과를 나와 훗날 독일 유학까지 다녀왔다. 오페라 아리아와 가곡으로 채운 음악회는 비제 ‘카르멘’중 ‘하바네라’로 마무리됐다. ‘청춘예찬’으로 이름난 작가 민태원(1894~1935)은 야나기 가네코 음악회를 소재로 한 단편소설(‘음악회’)까지 발표할 만큼 파급효과가 컸다.
▲기독교청년회관은 종로 거리의 상징이었다. 북촌과 이어지는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은 1910년대부터 조선인 중심의 음악회가 열린 곳이다. 홍난파 리사이틀도 1924년 1월 이곳서 열렸다.
◇해삼위 학생음악단의 경성 연주
1920년대 초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음악회 중 주목할 만한 것은 1921년 해삼위 조선학생음악단과 1923년 하와이학생음악단의 고국방문 음악회다. 1921년 해삼위조선학생음악단의 내한공연은 ‘서양 음악이나 무용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1920년대 제일 큰 사건’(‘박용구: 한반도 르네상스의 기획자’77쪽~87쪽)으로 꼽혔다. 전국 15개도시 23회 순회공연중, 경성에서 6차례 공연했는데, 기독교청년회관에서만 4차례 열렸다.
◇조선인 첫 바이올린 리사이틀
조선인 첫 바이올린 리사이틀이 열린 곳도 기독교청년회관이었다.’종로 중앙기독교 청년회의 주최로 내일 오후7시반부터 홍영후씨의 ‘바이오링’독주회를 청년회관안에서 개최할 터인데 입장권은 50전, 1원, 2원의 3종으로 할 터이오, 그날 연주할 곡조는 가장 유명한 작품을 선택하여 하리라더라.’(‘바이올린 홍난파 독주회’, 조선일보 1924년1월18일) 홍난파는 김영환의 피아노 반주로 베토벤의 ‘미뉴에트’ G 장조를 비롯, 그리그 소나타 F 장조, 부르흐의 협주곡 G단조, 쇼팽의 ‘녹턴’, 하이든의 ‘미뉴에트’ F 장조, 슈만의 ‘트로이메라이’,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 루빈스타인의 ‘멜로디’ F장조, 암브로시오의 ‘판타지’ 등을 연주했다.
◇베토벤 탄생 기념음악회
베토벤 탄생 기념 음악회도 이곳에서 열렸다.’세계음악역사상 가장 이름이 높은 악성 ‘뼈-토벤’은 150년전 12월16일에 독일 본이란 곳에서 탄생하였음으로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동경음악학교 동창회의 주최로 명 17일밤에 종로중앙청년회관에서 기념음악회를 개최한다는데….’(‘악성탄생기념 대연주회’,조선일보 1923년12월16일)
1923년 12월17일 오후7시30분에서 열린 이 음악회 출연자로는 김영환, 윤심덕, 윤기성, 한기주, 홍난파와 함께 이화학당의 김합라, 윤성덕도 출연이 예고됐다. 입장료는 1원, 50전 두 종류였다. 베토벤 사진과 역사를 실은 프로그램을 증정한다는 예고도 함께 나갔다.
베토벤 탄생일(1770년 12월17일)을 전후한 기념음악회는 3년 연속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렸다.’독일 악상 베토벤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연악회 주최로 금 18일밤 7시부터 종로청년회관에서 세계명곡대연주회를 개최한다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경성안에 있는 일류 음악가제씨의 지난 1년동안에 연주하던 곡조중에서 가장 많이 환영을 받은 것과 가장 자신있게 잘하던 것으로….’(베토벤 기념 명곡 대연주회’, 조선일보 1924년12월18일) 이날 연주회에서도 관객들에게 베토벤 사진을 1장씩 나눠줘 서양음악 홍보 기회로 삼았다. 입장료는 2원, 1원, 50전으로 당시 물가를 헤아리면 상당히 비쌌다.
◇모던 보이의 정신적 고향
조윤영의 조사에 따르면, 1920년~1935년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음악회는 196회다. 음악회 붐이 일어난 1920년 20회를 시작으로 1924년, 1925년 25회를 정점으로 줄어들기 시작하지만 조선인 음악가 중심의 활동 무대가 됐다. 3·1운동 직후 경성을 방문한 미 의원방문단 환영회(1920년8월25일)와 좌우합작 민족통일전선인 신간회 창립대회(1927년 2월15일)가 이곳에서 열리는 등 정치·사회운동의 최전선에 서기도 했다.
언론인 김을한(1906~1992)은 ‘기미 3·1운동을 전후해서 당시 중학교 초년생이던 필자는 학교가 파하기만 하면 의례히 청년회관에 들러서 놀았었다’면서 ‘그 시대의 청년회는 신문화의 중개처였으니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탁구, 농구, 야구, 축구, 기계체조 등의 온갖 운동경기를 맨 처음 소개한 것을 비롯해서 근대식 음악회나 연설회를 시작한 것도 청년회’였다고 회고했다. 김을한은 스스로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를 처음으로 듣고 소프라노나 테너의 성악을 듣게 된 것’또한 청년회 덕분이라고 했다.(’한국문화와 YMCA’,동아일보 1956년2월22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은 서구 문명을 선망하던 학생들과 모던 보이, 모던 걸의 정신적 고향같은 곳이었다.
◇참고자료
김은영, 1910~1920년대 YMCA 음악회에서 상상한 ‘민족’, ‘경성의 소리문화와 음악공간’, 서울역사편찬원,2022
조윤영, 경성의 음악회(1920~1935): 식민지 일상과 근대의 경험, 그 다양한 시각에 대하여, 이화여대 대학원 박사논문, 2018
조윤영, 식민지에서의 베토벤 수용: 음악활동에 대한 사회문화적 접근, 역사연구 제40호, 역사학연구소, 2021
김창욱, 홍난파 음악연구, 동아대 대학원 박사논문, 2004
06.01 '옥색 두루마기 입은 앳된 청년이…', 만주군벌 장학량 인터뷰한 이관용
취리히대 철학박사 출신 특파원, 채원배, 왕정정 등 장개석 정부 요인 연속 인터뷰
▲1928년 봉천 군벌인 아버지 장작림을 이어 만주의 1인자가 된 장학량. 1936년 12월 섬서성 서안을 방문한 장개석을 납치, 감금해 제2차 국공합작의 길을 연 '서안사변'주역이다. 이관용은 장작림폭사사건 직후인 1928년 10월, 장학량을 인터뷰했다./Public Media
‘12시30분경에 조선 궁중말로 하면 아마 ‘듭섯다’는 말인지 누가 와서 이 말이 있자 일시에 분주하더니 4,50명이나 일어서기로 도(陶)씨더러 물어본 즉, 이 사람들이 다 회견할 사람이라고! 아래로는 소위(少尉)부터 위로 성장(省長)까지 자세히 헤아려 본즉 47명이다!’(’동삼성총사령부방문(東三省總司令部訪問) 장학량씨회견기3- 고대(苦待)하는 47명의 회견후보자’, 조선일보 1928년10월27일)
1928년 10월 중국 만주 군벌 장학량(張學良) 인터뷰가 신문에 실렸다. 장학량은 그해 5월 아버지 장작림(張作霖)이 일본 관동군 계략으로 기차에서 폭사당한 직후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는 1936년 12월 ‘서안사변’을 일으켜 제2차 국공(國共)합작으로 중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인물로 유명하다.
아버지 자리를 물려받은 서른 살 장학량은 당시 북경 정부에 반기를 들고 장개석의 북벌(지방 군벌 타파)을 지지했다.이에 힘입어 장개석은 그해 10월 국민정부(國民政府)를 수립하고 통일 중국을 선언했다. 이관용 특파원은 10월25일~28일 나흘에 걸쳐 장학량 인터뷰를 실었다.
◇옥색 두루마기 입은 일개 청년이 나타나…
장학량 측근에 끈을 대 봉천(심양)의 동삼성(東三省·요녕, 길림, 흑룡강성)총사령부를 찾아간 이 특파원을 맞은 것은 47명의 ‘경쟁자’였다. 장학량과 면담하거나 보고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총사령이 이 사람들을 다 만나보려면 해가 질지도 모르는 것이다. 뿐아니라 피곤할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 사람은 내일 오라는 명령이 있을런지도 모르고, 또 내일 온다고 꼭 면회를 허락할런지도 문제이다.’(’장학량씨회견기3′, 조선일보 1928년10월27일)
다행히 3시간 30분 넘게 기다린 끝에 인터뷰가 성사됐다. 이관용이 만난 장학량은 ‘용모는 초최하고 머리는 정돈되지 않고 행동은 자유의 정도를 지나는 20세 좀 넘어’보이는 청년이었다. 나이보다 훨씬 앳되게 보였던 모양이다. 이관용 인터뷰는 조선은 물론 당시 중국 안팎에도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사실을 담고 있다. 장개석의 중앙정부는 외교·군사문제를 관장한다고 공언했지만 장학량은 ‘외교도 필요하면 여기에서 한다’고 말했다. 장개석 정부의 통일이 군벌간 타협에 의한 느슨한 통합이란 사실을 폭로한 인터뷰였다.
▲봉천군벌 장학량을 인터뷰한 조선일보 1928년10월27일자. 한국 언론사상 유일한 장학량 인터뷰로 보인다. 장학량 인터뷰는 10월25일~28일 나흘간 연재됐다.
◇'5.4운동 후견인’ 채원배, 외교부장 왕정정 잇따라 회견
이관용(1891~1933)은 장개석 정부의 외교부장 왕정정(王正廷), 감찰원장 채원배(蔡元培)와 총리를 지낸 왕총혜(王寵惠) 등 전현직 거물들을 잇달아 인터뷰했다. 일본이나 구미 신문도 넘보기 어려운 기획이었다. 1913년부터 영국, 프랑스, 스위스, 독일서 10년간 유학하면서 구축한 네트워크를 발휘한 덕분이었다.
이관용은 1919년 상해 임시정부 파리강화회의 부단장으로 활약했는데, 당시 중국 대표로 참가한 광동정부 전권위원 왕정정과 교분을 쌓았다. ‘5.4운동의 아버지’로 알려진 채원배 북경대 총장과는 1921년 스위스에서 만난 것으로 보인다.
◇'친일파’ 가문의 독립운동가
대한제국때 학부대신을 지낸 왕족 이재곤의 아들이다.1907년 정미 7조약 체결의 주범이자 병합 후 자작 작위까지 받은 아버지와는 반대의 길을 갔다. 1913년 영국 옥스포드대에서 정치사를 연구한 뒤 스위스 취리히대에서 1921년 철학박사를 취득했다. 1923년 2월 귀국했을 때, 신문마다 그의 소식을 다룰 만큼 유명인사였다. 그만큼 폭넓은 지적 편력과 세계적 안목을 가진 지식인은 드물 것이다. 물론 유럽 대학을 전전하며 10년간 공부할 수있었던 것은 왕가 출신 귀족 자제의 부(富)와 배경이 바탕이 됐다.
이관용은 연희전문 교수로 시작, 동아일보·시대일보를 거쳐 1927년쯤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그해 2월 출범한 신간회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이상재, 신석우, 안재홍 등 본지 간부들과 인연을 맺은 게 계기가 됐다.
▲북경대 총장을 지낸 교육가 채원배. 이관용이 인터뷰할 당시 국민정부 감찰원장, 초대 중앙연구원장이었다. /Public Media
◇단재 신채호, 대련서 면회
이관용의 중국 취재는 1928년 10월 장개석 국민정부 출범을 계기로 신흥 중국의 실상을 보도하기 위해서였다. 봉천의 장학량에 이어 대련에 수감된 단재 신채호를 면회하고 인터뷰했다. 남경에선 국민정부 감찰원장 겸 초대 중앙연구원장을 맡은 채원배를 만났다. ‘오래간만에 본즉 벌써 얼굴에 주름이 잡히고 치열이 성그러지게 되는 모양이다. 학자의 고심과 개량가(改良家)의 노력을 다하고 또 혁명가의 풍상을 겪은 까닭인지 지금은 많이 노쇠된 것이 아깝다.’(‘중앙연구원장 채원배 박사’1, 조선일보 1929년2월13일)
채원배(1868~1940)는 신문화운동과 5.4운동의 후견인 역할을 한 개혁적 지식인이다. 청말 진사(進士) 출신이면서 마흔 무렵인 1907년 독일로 건너가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철학, 심리학을 공부했다.신해혁명 직후 교육부 장관이 됐으나 다시 독일,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1917년 북경대총장에 취임하면서 5.4운동에 영향을 줬고, 이후 장개석이 이끈 ‘국민혁명’에 참여, 장개석 정부의 감찰원장, 국민당 중앙감찰위원장 등 요직을 맡았다.
▲이관용은 1921년 유럽 유학당시 스위스에서 채원배를 만나 교유했다. 채원배는 1929년 초 남경을 방문한 이관용을 흔쾌히 맞았다. 당시 국민당 감찰원장, 초대 국립 중앙연구원장으로 저명한 교육가이자 지식인이었다. 조선일보 1929년 2월13일자
◇학문의 독립 지킨 채원배
하지만 ‘감찰원장’보다 ‘북경대총장’을 지낸 교육자 겸 학자 채원배 초대 중앙연구원장을 주목한다. 1928년 장개석 정부가 설립한 중앙연구원은 ‘정치집행기관인 중앙정부 각원(各院) 각부(各部)와 전혀 독립되어서 정부로서 연구 자유를 무시할 정책적 제한을 받지 않는 장처(長處·장점)가 있을 뿐더러 누구든지 학술발전에 공로 있는 인물은 본원에서 일 회원이 되는 동시에 그 설(設·시설)을 이용할 뿐만 아니라 ‘경제보조’까지 형수(亨受·향유)할 수있게 설립된, 세계의 다수한 빈궁 학자에게는 이상적 기관’이라는 것이다.
이관용은 채원배가 정치로부터 학문의 독립을 지키는 아카데미즘의 토대를 닦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이관용의 취재는 ‘다년간의 유학 경험과 거기서 얻어진 국제 문제에 대한 식견을 바탕으로 통일을 달성하고 혁명정부를 수립한 중국의 상황을 취재하는 특파원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다’(김세호 한남대 명예교수)는 평가를 받는다.
◇헤겔, 버나드 쇼 소개한 철학자 이관용
이관용은 구미유학생 최초의 철학박사이자 1세대 철학자였다. ‘헤겔과 그의 철학’(1929년9월3일~15일·총 13회) ‘유물론 비평의 근거’(1929년10월23일~26일·총3회) ‘버나드 쇼의 생애와 사상’(1933년2월24일~26일·총 3회)같은 기사를 조선일보에 썼다. 다른 신문·잡지 기고까지 더하면 총 13건, 52회에 이른다. 서양철학 전공자로서 남긴 글의 분량이 만만찮다.
이관용은 1929년 12월 신간회 민중대회를 준비하다 조병옥, 허헌 등과 체포돼 2년 남짓 옥고를 치렀다. 1932년1월 출감하자마자 복직했지만 이듬해 8월 13일 함북 청진 해수욕장에서 익사했다. 독립운동가, 언론인, 철학자로서 치열하게 살아온 그의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유해는 경성으로 옮겨졌다. 8월19일 밤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선 홍명희 사회로 추도식이 열렸다. 유억겸 방응모 허헌 송진우 조병옥 등이 차례로 추도사를 낭독했다. 이날 자 조선일보는 사설 ‘이관용 박사를 조(吊)함’, 1933년8월19일)을 실어 그의 ‘견확(堅確)한 지조’와 ‘오직 사회와 민중을 위하야 분투해온 그 반생의 역사’를 기렸다.
◇유족 못찾아 건국훈장 뒤늦게 전달
이관용의 불운만큼이나 남은 가족들의 삶도 불행했다. 슬하에 1남2녀를 뒀는데,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일한 이원조(이육사 친동생)가 첫째 사위다. 광복 후 이원조는 아내와 월북했다가 숙청당했다. 둘째 딸도 월북후 생사를 알 수없고, 장남은 6.25 전쟁 중에 실종됐다. 정부는 2008년 독립운동에 기여한 그의 공로를 인정,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유족을 찾지 못해 훈장을 전달하지 못하다가 1년 뒤인 2009년 1월 조카 이해석씨를 찾아 뒤늦게 전달했다.
◇참고자료
김세호, 북벌 직후 ‘신흥중국’에 대한 한국 언론의 일 시각-조선일보 특파원 이관용의 취재(1928.10~1929.2)를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연구 제61집, 한국중국근현대사학회, 2014,3
이태우, 일제강점기 한국철학자 연구(2)-일성 이관용 연구를 위한 예비적 고찰, 동북아문화연구 제25집,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10,12
06.08 스포츠 스타에서 新무용 선구자로 변신한 조택원
상업은행 정구 선수로 대회 석권…최승희와 함께 무용계 쌍벽
▲1924년 토월회가 올린 박승희 무용극 '사랑과 죽음'에서 우크라이나 코사크 민속무용 호팍춤을 추는 조택원. 당시 휘문고보 학생이었다.오른쪽은 바이올리니스트 홍재유로 보인다.
1920년대 중반 정구의 인기는 하늘로 치솟았던 모양이다. 고교, 전문학교간 대항전은 물론 실업팀간 경쟁이 치열해 선수들이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스카우트할 정도였다.
‘은행회사 관청측은 정구열이 다른 그 무엇에 비교하여 더욱 노골화하였으니 작년에 관청 대(對) 은행시합이 그로 증명하는 사실이며 그곳으로부터 생겨나온 파동은 금년에 졸업기에 있는 학교선수에게도 미쳐 졸업증서 받기전에 벌써 다 예정된 모양이다. 더욱이 은행은 시내 각 은행단 리그전이 생긴 후로 경쟁이 일층 더 심하여졌다. 작년에 인기 집중된 이 시합은 상은(商銀)이 우승하였으며 김필응군과 조택원군의 전적은 독무대의 감이 없지 않았었다.’(‘바야흐로 싹트는 조선정구계’1, 조선일보 1928년3월15일)
◇1927년 10월 이시이 바쿠 공연보고 무용으로 돌아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보성전문에 다니던 조택원은 한창 주가를 올리던 정구 스타였다. 보성전문 재학 중인 1926년 상업은행에 스카우트된 조택원은 1927년 은행 리그전을 석권한 주역이었다. 하지만 1927년 10월 내한한 일본 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1887~1962) 공연을 보고 180도 방향전환을 결심한다. ‘그런데 그 때 그의 춤이 바로 내가 꿈꾸던 그러한 춤이었다. 나를 특히 감동시킨 춤이 있었다.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춤이었다. 그날 밤 나는 굳게 마음을 정하였다. 이제 어떠한 사람도, 또 어떠한 사건도 내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아직까지 반신반의로 꿈꾸던 내 인생의 목적이 이제는 확고해졌고 명확해졌다. 내가 나갈 길은 이것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확신했다.’(조택원, ‘가사호접’ 34쪽)
▲1927년 상업은행 직업 정구선수로 활약하던 당시의 조택원(왼쪽). 그해 10월 경성에서 열린 이시이 바쿠 공연은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 조선일보 1927년5월18일자
◇ ‘운동계에선 유감’
일본 신무용 개척자로 이름난 이시이 바쿠는 1926년 3월 경성공회당에서 본격적 현대무용을 선보여 충격을 줬다. 최승희는 이 공연을 보고 이시이 문하에 들어갔다. 조택원은 이시이의 두번째 경성공연을 보고 최승희의 뒤를 이어 도쿄의 이시이 문하로 무용유학을 떠난 것이다. ‘정구선수’ 조택원의 빈자리가 얼마나 컸던지 그가 무용 유학을 떠난 이듬해에도 스포츠계에서 유감이라는 글이 나왔다. ‘금강(구락부)의 명전위로서 작년에는 상은(商銀) 대장으로 은행 리그 전에 우월한 성적을 남겼다. 군(君)이 작년 추기(秋期)에 조선 정구계를 떠나서 일본 무도가 석정(石井)씨의 문제(門弟)가 됨은 사계( 斯界) 일반이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바야흐로 싹트는 조선정구계’3, 조선일보 1928년3월17일)
▲1929년 이시이 바쿠 무용연구소시절 아라비안 춤을 추는 최승희와 조택원(왼쪽에서 두번째 남녀)/연낙재
◇해삼위 학생음악단 박세면에게 호팍춤 배워
이시이 바쿠 이전에 조택원에게 무용가의 꿈을 갖게 해준 사건이 또 있다. 1921년 4월~6월 해삼위 학생음악단의 내한공연이다. 해삼위(블라디보스톡) 공연단 일원으로 온 박세면(박시몬)은 플루티스트이자 무용에도 뛰어나 우크라이나 민속춤인 호팍춤(Hopak Dance)을 유행시켰다. 조택원은 공연단이 돌아간 후에도 경성에 머물던 박세면에게 무용을 배웠다. ‘내가 처음으로, 그리고 정식으로 춤을 배운 것이 바로 이 시몬 박에게서였다. 앞서 말한 코팍이라는 슬라브 풍의 빠른 템포의 춤이었다. 이 빠른 템포의 춤은 내 체질에도, 기질에도 맞았지만 그보다도 테니스로 단련된 내 운동 신경을 가볍게 유쾌하게 흔들어 시원하게 해주는 그러한 신이 나는 춤이었다.’(조택원, ‘가사호접’ 24쪽)
해삼위 학생음악단의 공연은 조택원이라는 한국 신무용의 개척자를 낳는 데 일종의 ‘나비(효과)’역할을 한 셈이다.
◇토월회 무용극 ‘사람과 죽음’ 출연
해삼위 음악단과 박세면과의 인연은 토월회까지 이어졌다. 일본 유학생 연극단체인 토월회는 1924년 1월22일~24일 종로 기독청년회관에서 제3회 공연을 가졌다.
‘토월회 연극부에서는 다시 남녀배우 일동이 제3회 공연을 금 22일밤 7시부터 동 24일까지 삼일간 시내 종로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개연을 한다는데, 각본은 전부 서양것으로 무용가극 ‘사랑과 죽음’, 연애극 ‘회색꿈’이라 하며 이번에는 특히 회원 일동의 우량한 관현악합주도 있다는데 입장료는 백권 1원50전, 청권 1원, 홍권 70전이요, 학생석은 50전씩에 할인으로 하게 되었다 하며… 입장권은 금일 낮부터 청년회에서 좌석번호를 정하여 미리 팔겠음으로 미리 사두면 늦게 가도 좋은 자리에 앉을 수있고 연극 중에 춤과 노래가 들기는 이번 ‘사랑과 죽음’이 처음이라더라.’(‘토월회 공연 제3회로 금일부터 3일간’, 조선일보 1924년1월22일)
◇앙코르 요청에 몇번이나 불려나가…
1922년 5월 박승희와 김기진 김복진 형제, 이서구, 박승목, 김을한, 이제창 등 7명이 도쿄에서 만든 토월회는 1,2회 공연을 거치면서 1924년 3회공연을 할 때는 박승희가 주도한 직업극단으로 변신했다. 박승희는 러시아인의 사랑을 그린 무용극 ‘사랑과 죽음’을 선보였는데, 휘문고보생인 열일곱살 조택원이 호팍춤을 추는 무용수로 출연했다. 3회 공연 때는 박세면(플루트)을 주축으로 최호영 홍재유(이상 바이올린)와 러시아 여성 피아니스트가 합주단을 만들어 참여했다. 조택원에게 무용을 가르친 박세면이 조택원의 토월회 출연을 주선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택원이 호팍춤을 추고 나면 앙코르를 외치는 관중들의 성화 때문에 연극은 중단되고 몇번이고 다시 불려나가 춤을 췄다고 한다. 조택원은 토월회 연극뿐 아니라 학교 행사나 YMCA 주최 음악회에서도 홍난파, 홍재유(바이올린), 한기주(성악), 김원복(피아노)과 함께 출연, 호팍춤을 췄는데 단연 인기였다고 회고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의 춤에서 가장 일찍, 가장 쉽게 배운 엉터리 춤이면서 동시에 가장 신이 나던 춤, 그것이 바로 이 코팍(호팍)춤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1934년1월27일 경성공회당에서 귀국 첫 무용발표회를 가진 조택원(오른쪽). 조선일보 1934년1월21일자
◇'승무의 인상’(가사호접)
이시이 문하에서 5년간 수학한 조택원은 1932년 귀국, 중앙보육학교 교수로 후진양성에 들어갔다. 조택원 무용연구소(처음엔 석정막 무용연구소 조선지부)를 설립, 전통춤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1934년1월27일 경성공회당 첫 귀국공연에 이어 이듬해 1월26일~27일 같은 무대에서 ‘승무(僧舞)의 인상’ 등을 발표했다. 친구인 작곡가 김준영에게 음악을 의뢰, 창작 음악으로 현대 무용을 구성한 첫 사례로 꼽힌다. 신무용의 효시로 거론되는 이 작품은 훗날 시인 정지용에 의해 ‘가사호접’으로 개명돼 그의 대표작이 됐다.
조택원은 일제 말기 3년여 무용단을 이끌고 일본과 만주, 중국, 몽골 일대를 순회하며 일본군 위문공연을 펼치며 최승희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광복 후 이 때문에 친일행위자로 낙인찍힌 것은 물론이다. 1947년 미국에 건너간 이래 일본을 중심으로 서구에 한국 무용을 알리는 순회공연을 가졌고, 1961년에야 귀국, 정착했다. 이후에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한국민속무용단 설립자 겸 단장과 예술원회원으로 활약했다. 1930년대~1950년대 1500회 가량 해외 공연을 다니며 한국 무용을 세계에 알린 공로를 인정받아 1974년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921년 조선을 찾은 해삼위 학생 음악단과 박세면이 최승희와 함께 신무용의 쌍벽을 이루는 조택원을 낳은 하나의 계기가 됐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조택원에게 호팍춤을 가르치고 토월회에서 플루트를 연주했던 박세면의 흔적을 더 이상 확인할 수 없는 게 아쉽다.
◇참고자료
조택원, 가사호접: 창작무용반세기, 서문당, 1973
유민영, 토월회 연국을 풍성케했던 신무용 개척자 조택원, 연극평론 통권 38호, 연극과 인간, 2005, 9
유민영, 한국근대연극사, 단국대출판부, 1996
이주희, 일본의 근대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조선에서의 무용활동 고찰, 무용예술학연구 42~3,한국무용예술학회, 2013
06.15 '무도(舞蹈)의 시대', 춤바람난 조선
1920년대 전국서 舞蹈대회, 사교댄스 열풍
▲방문은 떨어져나가고 창호지와 벽지까지 찢긴 허름한 방안에서 값비싼 축음기를 켜놓고 남녀가 사교춤을 추는 장면. 1930년대는 가정집까지 '무도의 광풍'이 몰아친 시대였다. 석영 안석주의 만문만화 '이꼴저꼴'3, 조선일보 1933년2월18일
1923년 6월2일 밤 8시,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무도회’가 열렸다. 개막전부터 열기가 뜨거웠다.1000명 가까운 관객이 몰렸기 때문이다. 출연진은 ‘예술학원’ 남녀학생 10여 명. ‘화려한 복장으로 나비같이 노니면서 여러가지 딴스를 하는 광경’은 ‘취할 듯 미칠 듯’ 관객을 사로잡았다. 댄스뿐 아니라 중간엔 성악과 기악 등 음악까지 곁들인 무도회였다.(‘성황으로 폐막, 연합무도음악회’, 조선일보 1923년 6월4일)
예술학원은 러시아 유학파 예술가 김동한이 운영하는 국내 첫 춤 전문학원이었다. 서대문동 2정목 7번지에 있던 이 학원은 원래 연극인 현철이 1920년 신극운동의 일환으로 세운 배우 양성소였다. 하지만 운영난으로 1년 만에 문을 닫았다가 1922년 8월 김동한이 인수, 음악부, 연극부, 무용부로 재출발했다. 김동한은 1922년 4월 ‘해삼위(블라디보스톡) 연예단’(4월18일~8월10일)과 내한했다가 국내에 계속 머물며 학원을 인수했다.
▲1923년2월23일 조선통신사 주최로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노국(露國)피난민구제대무도연예회’ 광고. 러시아육군군악대 연주와 함께 무도, 기술(奇術·마술), 희극, ‘활계(滑稽)댄스’ 등이 올랐다. 러시아 혁명과 내전으로 발생한 피난민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열렸다. 매일신보 1923년2월23일
◇국내 첫 춤 전문학원 세운 김동한
당시 신문은 김동한을 피득(彼得 ·페테르부르크)대학 예술과를 졸업한 무용가로 소개했다.(동아일보 1923년 6월1일) 김동한의 ‘예술학원’은 1년만에 연구생이 100명에 달할 만큼 번창했다. 무용학자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1920년대 초반 서양 각국의 고급 사교댄스를 이 땅에 파급시킨 인물’로 김동한을 꼽는다.
무용학계에선 국내 신(新)무용의 출발을 1926년 3월 일본 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 漠)의 경성 공연으로 꼽는 의견이 우세하다. 하지만 그 전사(前史)가 엄연히 있다. 구한말 서양 외교사절을 중심으로 이미 ‘사교댄스’가 소개됐다. 1921년 4월 해삼위 학생음악단의 순회 공연은 우크라이나 전통 호팍춤을 비롯, 러시아, 스페인 민속춤을 선보이면서 조선 땅에 춤바람을 일으킨 기폭제가 됐다. 이듬해 4월 내한한 ‘해삼위연예단’은 무용을 본격적으로 선보였고, 연예단 일원인 김동한이 경성에 남아 무용을 가르칠 만큼 반응이 뜨거웠다.
김동한의 예술학원에 이어 일본과 중국에서 무용을 전공한 해외유학파 이병삼이 1925년 9월 낙원동에 ‘구미무도학관’를 개관,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병삼은 전해인 1924년9월 평양 수옥리에 먼저 구미무도학관을 세워 운영한 바 있다. 종로 기독교청년회관도 1925년 9월 무도과를 신설, 무용을 가르쳤다.
▲용수철 위에 피아노와 의자, 아니 집 전체가 올라가 있다. 빠른 템포로 몸을 흔드는 찰스턴에 취한 세태를 풍자했다. 1920년대 미국에서 시작, 세계적으로 유행한 찰스턴 춤은 경성에서도 인기였다. 가정집까지 침투한 춤바람을 풍자한 안석주 만문만화. 조선일보 1930년11월19일자
◇수해·기근 구제기금 마련 자선무도회
1920년대 초반 경성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무도대회가 열리고 댄스 강습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성기숙 교수가 당시 조선, 동아, 매일신보 등 일간지의 무도공연(1924년2월~1926년12월)보도를 정리한 결과에 따르면, 1924년 28회, 1925년 10회, 1926년 40회나 된다. 이시이 바쿠의 경성 공연 이전, 이미 무도열풍이 전국을 휩쓸고 있었던 셈이다.
무도대회는 단순히 공연을 즐기는 것만 아니라 다양한 공익 목적을 띠고 펼쳐졌다. 각종 수해, 기근 등 구제 기금마련은 물론 학교 기금 마련을 위한 사업으로 이뤄졌다. 1923년 8월10일 예술학원 주최로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서 열린 ‘관서(關西)수해구제 딴스와 음악대회’(‘수해구제의 연예’, 조선일보 1923년8월9일), 1923년 8월18일 인천 가부키좌에서 열린 ‘인천 굴업도 이재동포구제 음악무도대회’(‘인천의 음악무도대회’, 조선일보 1923년8월18일) 등이다.
◇러시아피난민 구제 무도회까지
1923년엔 러시아 혁명과 내전으로 발생한 피난민을 구제하기 위한 무도대회도 열렸다. 1923년2월23일 조선통신사 주최로 경성공회당에서 ‘노국(露國)피난민구제대무도연예회’가 열렸는데, 러시아육군군악대 연주와 함께 무도, 기술(奇術·마술), 희극, ‘활계(滑稽)댄스’ 등이 올랐다. 이 공연은 다음날인 24일부터 종로 단성사에서 계속됐다. (매일신보 1923년2월23일)
1925년7월3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서 열린 ‘대동학원 유지 음악무도대회’는 인력거 차부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 설립한 대동학원 운영비 마련을 위한 목적이었다. 각 학교 학생들과 판소리 명창 이동백이 나섰다.
▲요릿집에서 축음기를 틀어놓고 기생과 사교춤을 추는 모습을 꼬집은 안석주의 만문만화. 조선일보 1934년7월2일
◇정체불명 ‘세계음악무도대회’
음악을 곁들인 무도대회 난립은 당시 음악가들로부터 원성을 샀다. 홍난파는 1924년 음악회가 ‘최신(近日)유행품의 하나’라면서 ‘근래 경성의 악계에는 점점 음악회란 것이 상품화해간다’고 자조하는 듯한 글을 썼다.
‘어떤 회사의 경영에도 음악회, 어떤 강습소 경비보충에도 음악회, 무슨 회(會)에서도 음악회…강연회나 토론회가 고물(古物)이 되어가는 대신으로 걸핏하면 언필칭 음악회라 하니 그래 음악회란 무엇인 줄 아십니까. 하고도 많은 장사에 무슨 장사를 못해서 음악회 장사를 하렵니까’(악단의 뒤에서, 동아일보 1924년7월7일)
홍난파는 종로 기독교청년회관(YMCA)에 들렀다가 우연히 그날 밤 여자강습원 주최로 열린 ‘세계음악무도대회’ 프로그램을 보고 경악했다. 자기와 아무 상의도 없이 출연자로 이름을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중국, 러시아, 조선 음악가들이 연합 출연한다고 광고한 이 공연은 난파가 보기에 ‘세계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음악과 무도만 출연’시켰다. 사교 댄스와 바이올린 연주를 같은 무대에 올려놓는 공연에 음악가들이 불만을 가졌을 법하다.
◇광란아들의 小천국
1930년대 춤바람은 공연장을 넘어 카페와 식당, 가정집까지 침투했다. 만문만화가 석영 안석주는 1930년을 회고하면서 ‘찰스턴’(Charleston)의 유행을 꼽았다. 1920년대 미국에서 시작, 세계적으로 유행한 사교댄스로 빠르고 경쾌한 리듬에 맞춰 추는 춤이다.
‘째즈-촬스톤-,1930년의 마지막 달이 가까워와도 촬스톤이 대 유행이다. 어느 남자가 어느 여자를 가리켜 말하되 ‘그 여자가 촬스톤을 곧잘 추던걸?’ 어느 여자 어느 남자를 가리켜 ‘그 이는 촬스톤을 아주 멋있게 추더군요…’ 얼굴의 선택, 육체미의 선택보다도 모던 걸, 모던 보이들은 이 ‘촬스톤’선수를 찾는다. ‘니그로’도 좋다.
아무라도 좋다. 촬스톤이 다 이리하야 1931년에는 흔들기 좋아하는 남녀들은 집을 ‘용수철’위에 짓고 용수철을 가구로 만들고서 ‘촬스턴’바람에 흔들다가 시들 모양-.이들의 눈에는 굶주린 헐벗고 떠는 사람이 보일 때도 ‘촬스톤’을 추는 것으로만 알게로군.’(’1931년이 오면 2′, 조선일보 1930년11월19일)
피아노와 의자, 아니 집 전체를 용수철 위에 올려놓고 춤추기에 여념없는 세태를 비꼬았다. 요릿집에서도 유성기를 마련해놓고 춤판이 벌어지기 일쑤였다.
‘여봐요 뽀이상! 유성기 가져와요! 뿌르쓰(블루스)판하고 월쓰(왈츠)판하고….기생의 입안에서 껌이 죽겠다고 짹짹 소리를 내면 골아들어가는 척주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양키-의 ‘째즈쏭’이 지레 신은 기생의 버선발을 방바닥에 일으켜 세우면 기생의 껌 씹던 입에서는 혓바닥 장단이 시작되자 제각기 다투어 얼싸안고 춤을 추면 광란아(狂亂兒)들의 소(小)천국이 벌어진다.’(‘인력거 女神의 추잉껌꿈’, 조선일보 1934년 7월2일)
▲1920년대 세계적으로 유행한 찰스턴 춤을 선전하는 포스터/Public Media
◇벽지, 방문 떨어진 집에서도 댄스
가정집까지 침투한 춤바람을 꼬집는 글도 실렸다. ‘화류병이 가정에까지 심지어 규수의 방에까지 침입하여 시집간지 사흘만에 코가 떨어지더니 지금에는 ‘딴스’가 가정으로 들어갔다. 2원 안짝이면 도배를 해서 방이 깨끗할 것을 아니하는 축들이 값비싼 축음기를 사다놓고 비단양말을 햇트리면서 춤을 춘다. ‘사나희여’여! 여자이면 알든 모르든 끼고도는 취미가 왜 그리 좋으냐. 인조견과 같이 유행될 이 ‘딴스’는 퇴치를 하여야할까? 장려를 하여야할까? 금주운동이 더 크니까!’(‘이꼴저꼴’, 조선일보 1933년2월18일)
방문은 떨어져나가고 창호지와 벽지까지 찢긴 허름한 방안에서 값비싼 축음기를 켜놓고 남녀가 사교춤을 추는 장면이다. 안석주는 이 빈한한 살림에 어울리지 않은 꼬락서니라며 댄스를 맹공격했다.
대일본 레코드회사 문예부장 이서구, 끽다점 ‘비너스’ 마담이자 영화배우 복혜숙, 동양극장 여배우 최선화 등 8명은 1937년 신년벽두 경무국장을 향해 ‘서울에 딴스홀을 허(許)하라’(‘삼천리’ 1937년1월호)는 공개질의서를 날렸다. 전쟁으로 치닫는 식민지 조선에 웬 생뚱맞은 일인가 싶기도 하다. ‘무도(舞蹈)의 광풍’은 그만큼 거셌다.
◇참고문헌
‘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 삼천리 제9권제1호, 1937.1
성기숙, 근대 무도의 열풍, 긍정과 부정의 미학, 대한무용학회논문집 제46호, 2006,3
신명직, 모던 보이, 경성을 거닐다, 현실문화연구, 2003
유선영, 답례로서 연예: 1920년대 문화적 민족주의의 연예, 언론과 사회 22-3. 2014
06.22 라디오 방송 휩쓴 '하모니카 스타' 김파원
1930년대 경성방송국 최다 출연 '하모니카 大將' …중앙고보, 경성高商 밴드 지휘

▲1930년대는 하모니카의 시대였다. 경성방송국은 하모니카 연주 프로그램을 1~2주에 한번씩 내보냈다. 하모니카 독주, 2중주, 5중주는 물론 밴드도 유행했다. 주로 클래식 소품이나 오페라 아리아같은 서양음악을 연주했다. /조선디자인랩 정다운
1935년 1월1일자 매일신보에 문화예술계 1인자를 소개하는 기획이 실렸다. 이 중 ‘하모니카 대장’으로 소개된 김파원(金坡 園)은 1930년대 라디오를 주름잡은 하모니카 스타였다.
1933년 4월26일 조선어 제2방송을 시작한 경성방송국은 매일 오후 6시 동화, 동요 등 어린이 프로그램을 20분~30분 내보냈다. 하모니카 연주는 이 시간대 주요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다. 제2방송 첫날인 1933년 4월26일 하모니카 이중주를 시작으로, 매달 2~3회씩 고정 출연했다. 하모니카가 당시 어린이와 학생, 성인을 막론하고, 대중적인 악기로 환영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김파원을 '하모니카 1인자'로 소개한 매일신보 1935년1월1일자 기사. 그는 1930년대 경성방송국 라디오 전파를 가장 많이 탄 하모니카 주자였다. 1933년 조선어방송(제2방송)이 생긴 4월26일 이후 하모니카 프로그램 19번 중 15번 이상 출연했다.
◇1933년 경성방송국 하모니카 프로그램 독차지
김파원은 이 분야의 압도적 1인자였던 듯하다. 경성방송국은 4월 26일 첫 방송 이래 1933년에만 하모니카 연주를 19번 내보냈는데, 김파원은 이 중 15번 출연했다. 독주와 2중주가 각각 5회씩이었고, 3중주 1회, 밴드 지휘가 3회, 5중주 지휘가 1회였다.
5중주는 같은 멤버로 10월31일, 11월24일 두차례 연주했는데, 11월 연주에 김파원이 지휘자로 올라있는 것으로 보아 10월에도 비슷한 역할로 참여한 듯하다. 경성방송국 하모니카 연주의 84%(총 19회중 16회)를 김파원 1인이 주무른 셈이다.
◇'하모니카 1인자’
‘신문을 통하여 라디오를 통하여 프로그램이나 혹은 직접 간접으로 김파원군이라고 하면 그가 하모니카로서는 조선에서 제1인자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할 것이다. 조선에서 라디오가 설치된 후 그가 하모니카 방송은 독점적으로 하였을 뿐아니라…’(‘하모니카 대장 김파원군’, 매일신보 1935년1월1일)
하모니카 역시 일본을 통해 들어왔기에 일본인 연주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조선인 연주자 김파원은 ‘희귀한 사계(斯界)개척자’로 대접받았다. 김파원은 어떻게 하모니카 연주자가 됐을까. 신문은 이렇게 소개한다.
‘보통학교 1학년때 장난감으로 한자루를 사서 불어온 후 하루라도 불지 않으면 입안이 부둑하야 견디지 못할 뿐 소화가 불량할 때에 한번 하모니카를 들고 삐빼하고 불기만 하면 유리병을 씻어내리고 보는 것같이 시원하고 마치 나폴레옹이 수십만 병졸을 거느리고 행진하는 것 같은 기분으로 유쾌한 감은 도저히 형용할 수없었다’(‘하모니카 대장 김파원군’)

▲김파원은 1933년12월7일 중앙고보 하모니카 밴드(사진)를 이끌고 경성방송국에 출연했다. 중앙고보 교가를 시작으로 멘델스존 '결혼행진곡', 오펜바흐 오페라 '호프만 이야기' 중 '뱃노래', 헨델의 '라르고'를 지휘했다. 조선일보 1933년12월7일자
◇'나폴레옹이 수십만 거느리고 행진하는 것같이 유쾌’
김파원은 1930년대 중반 관립 경성고상(高商·고등상업학교·서울대상대 전신)하모니카 밴드와 중앙고보 밴드를 지도하는가 하면, 수십명의 제자 겸 팬으로 구성된 개인 밴드(파원 밴드)까지 이끌었다. 1933년 12월7일엔 중앙고보 하모니카 밴드를 지휘해 경성방송국에 출연했다. 현제명이 작곡한 중앙고보 교가를 합창부와 함께 연주한 후,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 오펜바흐 오페라 ‘호프만 이야기’의 ‘뱃노래’ 헨델의 ‘라르고’ 등을 연주했다.(‘중앙고보하모니카밴드’, 조선일보 1933년12월7일)
1930년대 라디오에 등장한 하모니카 프로그램은 이렇듯 동요나 유행가보다 가곡이나 오페라 아리아, 클래식 소품이 주종을 이뤘다.

▲1935년 11월9일 전조선하모니카 연맹 주최로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하모니카 독주콩쿠르에서 우승한 열아홉살 최재승. 조선중앙일보 1935년 11월10일자
◇전조선하모니카 연맹, 전조선 대회도
김파원은 전(全)조선하모니카 연맹을 결성, 1935년 11월9일 밤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전조선 하모니카 독주콩쿠르 개최를 주도했다.조선중앙일보 학예부가 콩쿠르를 후원했다. 40명이 참가한 예선을 통과한 10명(일본인 4명 포함)이 실력을 겨룬 끝에 열아홉살 최성재가 우승을 차지했다. 선린상업학교 야학부를 다닌 최군은 식산은행을 거쳐 조선제련회사에 재직중이었다. 하모니카를 시작한 지 5년만에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조선중앙일보 1935년11월10일)
김파원은 이틀에 걸쳐 심사평(조선중앙일보 1935년11월16일~17일)을 쓰면서 이런 콩쿠르가 ‘하모니카 음악을 확립시켜서 사회에 없지 못할 ‘에네루기-(에너지)’가 되게 하기를 간망한다’고 했다.
전조선 하모니카 연맹은 이듬해에도 콩쿠르를 개최했다. ‘전 조선하모니카 연맹에서는 오는 10월3일부터 경성공회당에서 제2회 전 조선 하모니카 독주콩쿨대회를 개최한다는 바 심사위원은 홍난파 김파원 길택실(吉澤實) 송일항 하야영길(河野英吉) 최성두 궁촌민부(宮村敏夫) 학전광(鶴田廣) 이완선 등 제씨라 하며 상품은 우승컵이 있고 입상자는 기념방송을 하리라 한다.’(‘하모니카 콩쿨’, 조선일보 1936년 10월3일)
◇하모니카 100주년 기념음악회
하모니카는 1920년대 들어 어린이, 청소년을 중심으로 학교, 사회단체에 널리 보급됐다. ‘하모니카 강습회’ 소식도 여기저기 나고, 음악회에도 하모니카 연주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모니카 발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도 1927년 11월26일 오후7시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렸다. 조선의 대표적 하모니카 연구단체인 ‘고려리드밴드’가 주최했다.신문은 ‘만 근 10년 이래 하모니카는 장족의 진보로 일반 음악의 영역에까지 달하였다’(하모니카 백년 기념음악, 매일신보 1927년11월25일)고 평가했다.
라디오는 하모니카 보급의 1등공신이었다. 김파원을 중심으로 연주자와 밴드들이 매주 1차례씩 방송에 출연해 하모니카 연주를 들려줬으니, 대중들이 친숙하게 느꼈을 법하다. 경성방송국 프로그램에서 하모니카 만큼 대접받은 악기도 드물 만큼 전성기를 구가했다.
▲아동문학가 윤복진이 1929년 작사한 동요 '하모니카'. 홍난파가 곡을 붙여 같은 해 출간한 '조선동요백곡집 상'에 실렸다.
◇윤복진의 ‘하모니카’
스물 둘 아동문학가 윤복진이 1929년 동요 ‘하모니카’를 작사한 것도 이 작은 악기의 인기를 반영한 덕분이다. ‘욕심쟁이 작은 오빠 하모니카는/큰 아저씨 서울가서 사보낸 선물/작은 오빠 학교갔다 집에 오면요/하모니카 소리맞춰 노래불러요/도레미파 솔라시도 부르고서는/도미솔도 도솔미도 재미난다요’(‘하모니카’1절, 중외일보 1929년9월28일)
이 노래는 홍난파가 1929년 펴낸 ‘조선동요백곡집’ 상권에 실리면서 히트곡으로 떠올랐다. 경성방송국에서도 심심하면 흘러나왔다. 다만 ‘우리 아기 불고노는 하모니카는’으로 시작하는 요즘 동요(’옥수수 하모니카’)와는 가사가 약간 다르다. 윤복진(1907~1991)이 훗날 월북하면서 그의 가사를 쓸 수없게 되자 홍난파기념사업회가 1964년 윤석중에게 노랫말을 고쳐달라고 요청해 노래를 되살렸기 때문이다.
◇1955년까지 라디오 출연
김파원은 1930년대 중반 야마하 하모니카 밴드를 이끌면서 경성방송국에 자주 출연했다. 독주 출연도 꾸준히 이어갔다. 광복 후인 1950년대 중반까지도 1년에 두어차례 라디오에 출연했다. 신문에 실린 프로그램 편성표에 따르면, 김파원은 1954년 6차례나 방송에 출연 하모니카를 연주했다. 오후 6시전후 ‘어린이 시간’이었다. 6.25 전란 직후 황량했던 시대에 정겨운 하모니카 연주로 동심(童心)을 달래준 셈이다. 1955년 8월4일 오후6시30분 서울방송에 출연, ‘여름노래 3종’을 독주로 들려준 게 마지막이다.
김파원의 행적이나 집안, 배경은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인터뷰는 물론 그를 다룬 기사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100년전 하모니카 1인자로 군림하며 라디오방송을 휩쓸었지만 그를 기억하는 이도 드물다. 하모니카 열기가 예전같지 않아서 그런건지, 망각이 일상화된 분위기 탓인지 헤아릴 길 없다. 김파원은 이렇게 잊혀졌다.⊙
06.29 '밴조王' 최 리차드, 극성팬들이 호텔방 몰려와…
하와이 이민 2세…1933년 4개월간 순회연주로 인기 절정

▲하와이 이민2세 최리차드는 1933년4월 고국을 처음 방문했다. 청중들은 '밴조'라는 미지의 악기를 신출귀몰하게 다루며 '세계적 밴조가'로 불리는 그에게 환호를 보냈다. '밴조왕'이란 별명을 가진 그는 4개월간 전국을 누비며 순회연주를 할 만큼 선풍적 인기를 누렸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이화여전 교수이자 피아니스트인 박경호(1898~1979)는 폴란드 피아니스트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Ignacy Jan Paderewski·1860~1941)를 존경했던 모양이다. 쇼팽 대가이자 바르샤바 음악원장을 지낸 파데레프스키는 1919년 폴란드 초대 대통령을 지낸 저명인사였다. 어느 날 파데레프스키 사진을 액자에 넣어 보관하려고 가게에 갔다. 가게 점원은 사진속 인물이 누구인지 물었다. ‘세계적 음악가’라고 말하자 점원이 대뜸 ‘최 리차드보다 더 잘 하나요?’라고 물었다.(‘나의 실패한 자장가’, 조선일보 1934년9월28일)
최 리차드는 하와이 교포 2세로 1933년 4월 조선에 와서 전국을 순회하며 이름을 날린 밴조(Banjo) 연주자다. 연주력이 뛰어나 ‘밴조왕’이란 별명까지 얻었다고 한다. 그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던지 세간에서 ‘세계적 음악가’로 대접할 만큼 이름을 날렸다.
◇공학도에서 밴조연주가로 변신
‘조선이 낳은 세계적 빤조家’(조선일보 1933년5월7일) 기사는 최 리차드를 이렇게 소개한다. ‘빤조이스트로 미국에서 이름을 휘날리어 ‘빤조왕’이란 별호를 가진 조선 출신의 최 리차드는 생전에 한번도 보지 못한 고토를 그리워 지난 4일 조선의 땅을 밟게 되었다. 군은 5일 오후5시차로 경성에 도착하야 조선호텔에 투숙하고 있던 중 금 6일 본사를 방문하여 서투른 조선말로 그의 감상을 말하였다.’ 그의 일성은 이랬다. ‘흰 옷을 입고 갓을 쓰고 다니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산수, 거리, 사람, 집 모든 것이 다 말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을 줍니다.’

▲'밴조왕' 최리차드의 방한을 맞아 그의 특이한 이력을 보도한 조선일보 1933년 5월7일자 기사. 공학도 출신으로 공장 관리자로 재직하다 취미로 시작한 밴조에 빠져 세계적 연주자가 됐다고 소개했다.
◇15분에 650달러 연주료 받아
당시 보도를 정리하면, 최 리차드는 1906년 9월2일 하와이에서 태어난 한인 2세다. (’장유정의 음악정류장’34 ‘밴조의 왕 최리차드’, 조선일보 2022년 9월29일 참조) 아버지 최정호는 강릉 출신으로 1903년 하와이에 이주한 이민 1세대였다. 1933년 당시 아버지는 61세로 소개한 것으로 보아 31세때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최 리차드는 하와이에서 초중등 학교를 마치고 ‘시카고에서 공학을 전공하여 처음에는 공업가로 출세하여 800여명의 직공을 거느리는 대공장의 주임까지 되었’는데 ‘그 여가에 빤조에 취미를 두어 지금은 세계적 빤조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군은 그 첫상(賞)으로 시카고 음악협회에서 2500불 가격이 되는 빤조를 상품으로 받은 것을 위시하여 15분간 연주에 650불의 보수를 받은 최고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국립방송국, 컬럼비아 방송국 기타 각 극장 음악회에 출연한 이 남북 아메리카만 하여도 전후 70회에 달한다고 하는데….’‘(이상 ‘조선이 낳은 세계적 빤조家’, 조선일보 1933년5월7일)
아프리카에서 유래한 현악기 밴조는 17세기 미국에서 민속음악이나 재즈 연주에 등장했다. 20세기 작곡가 거쉰은 오페라 ‘포기와 베스’, 오케스트라 음악 ‘랩소디 인 블루’엔 밴조를 포함시켰다.

▲최리차드를 '세계적 빤조家'로 소개한 동아일보 1933년 5월4일자. 이 신문은 최리차드 경성 공회당 독주회를 주최했다.
◇시카고 경연대회 우승한 ‘밴조 킹’
최 리차드는 저명한 밴조 연주자인 해리 레저(Harry Reser)로부터 밴조를 배웠다고 한다. 1930년 시카고 음악 무역센터에서 열린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며 ‘밴조 킹’(Banjo King)이란 별명까지 얻었다.조끼까지 갖춘 양복 정장 차림에 올백으로 빗어넘긴 사진 속 최 리차드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최 리차드는 5월9일 저녁 8시 경성공회당에서 연 고국방문 밴조연주회를 시작으로 4개월간 전국을 순회하며 연주회를 열었다. 동아일보가 경성 연주회를 주최했고, 지방 연주는 각 신문 지국과 사회단체가 나섰다.
◇호텔 방 찾아오는 남녀팬들 줄이어
신문의 열띤 보도 경쟁속에 최 리차드에 쏠린 세간의 관심은 요즘 아이돌스타 못지 않았던 모양이다. ‘군이 머물고 있는 조선호텔로 빤조라는 악기를 좀 보여달라는 성미 조급한 여자가 어제 하루에만 10여명, 사인을 청하러 오는 남자도 상당히 많아 연습으로 인하여 굳게 닫아건 군의 방문을 노크하였다.이렇듯 시정의 인기는 높을 대로 높아져있는데….’(‘그립던 고국에 드리는 천재의 음악예물’, 동아일보 1933년5월9일)
첫 연주 프로그램은 총 27곡으로 꾸렸다. ‘오늘 밤의 연주는 고상한 음악에 비하여 통속적인 재즈를 가미하고 있고, 또 통속적인 듯 하면서도 고상한, 실로 다방면으로 되어있는 곡목이오, 아울러 남북 미주를 1년반동안 순회하면서 가장 환영받고 재청과 3청을 받는 곡목중에서 추리고 추리어 3부에 나누어 전부 27종의 곡목을 연주할 터인데...’(‘미주서 재청삼청받은 27곡목을 추려’,동아일보 1933년5월9일) 최 리차드는 4줄짜리 밴조를 썼는데, 피날레는 가장 유명한 하와이안 송인 ‘알로하 오에’(Aloha Oe)였다.
◇개성, 평양, 진남포, 선천…
최 리차드는 공연 사흘 뒤인 5월 12일 경성을 떠나 기차편으로 북상하면서 개성 평양 진남포 선천 신의주에서 잇따라 연주회를 가졌다. 개성에선 호수돈 학교 피아노 구입 기금 모집 등 모금 연주회의 성격을 겸한 음악회를 잇달아 열었다. 전국 순회 공연도 계속 소개될 만큼,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관심거리였다.
‘하와이 출생으로 세계적 빤조왕이라고 하는 최 리차드군은 구미 각국을 거쳐 중국과 일본 각 중요지를 편답하고 약 2개월전에 고국인 조선에 돌아와 경향각지에서 천재적 묘기를 발휘하고 있던 바, 13일에 목포에서 독주회를 마치고 15일에 당지 상설극장 제국관에서 대성황리에 빤조 독주회를 마치고 16일 낮에는 호남은행 주최로 해(該)은행루상(樓上·건물)에서 지방 다수 유지 참집하에 독주회를 열었다 한다.’(‘세계적 빤조왕 최 리차드 來光’(조선일보 1933년 7월20일)
◇경성방송국서 ‘아리랑’ 연주
최 리차드는 경성방송국에도 출연, 라디오 청취자들에게 연주를 선보였다. 1933년 8월8일 오후8시였다. 모두 6곡을 연주했는데, ‘몽상곡’, ‘세계는 해떠옴을 기다린다’ ‘거짓말’ ‘올드 블랙 조’는 공회당 레퍼토리와 겹친다. 고국 팬들을 위해 새로 연습했는지 ‘아리랑’과 ‘양산도’ 등 민요 두 곡을 보탰다.
◇고아원 분쟁에 휩쓸리기도
순회 연주를 다니다 뜻하지 않은 분쟁에 휩쓸리기도 했다. . 8월 26일 밤 원산관에서 열린 원산고아원 주최 연주회가 그랬다. 주최즉이 개막사를 시작하려던 참에 경영진을 반대하는 측이 고아원을 비난하면서 연설을 막았다. 이어 난투극이 벌어지면서 공연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최 리차드는 귀중한 악기를 보호하기 위해 연주장 밖으로 피신해야 했다. 이 난투극은 고소고발전으로 번져 신문에 오르내렸다. (‘고아원 주최 음악회석의 풍파’, 조선일보 1933년9월10일)
◇하와이서 악기점 운영
1933년 전국 순회 연주 이후 최리차드 소식은 언론에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듬해인 1934년 그가 조선에서 취입한 음반 ‘조선아 잘있거라’가 치안방해라는 이유로 판매금지 당했다는 짤막한 기사(’레코드발매금지’, 동아일보 1934년5월11일)만 나왔을 뿐이다.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치달으면서 최 리차드가 소개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2차 대전 종전 이후에도 연주활동이나 근황을 찾아보기 어렵다. 1970년대 하와이에서 악기점을 운영했다는 소식 정도다. 1974~1976년 최 리차드가 운영하는 악기점을 찾았다는 글이 온라인에 올라있다. 100년 전 떠들썩하게 이름을 날린 스타이지만, 행적조차 확인할 수 없어 쓸쓸하다.⊙
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속의 모던 경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