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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 한국인이 본 20세기 일본사]03/ 2024-01-05 “반대파 포용” 쓴소리 무시 - 03-29 사무라이들도 직언 경청… 민심 이기는 권력은 없다 日

상림은내고향 2024. 5. 26. 14:21

[박훈 한국인이 본 20세기 일본사]03/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동아일보  2024

 

01-05 “반대파 포용” 쓴소리 무시… 내전에 자멸한 미토번 영주

▲미토번의 다이묘 도쿠가와 나리아키를 그린 그림. 반대파에 의해 실각하며 이성을 잃기 전까지 그는 유능한 인물을 기용해 토지 조사, 불교 억압 같은 파격적 개혁을 시행한 명군이었다. 아래쪽은 그가 가신들에게 보낸 서한.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아마존 홈페이지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1800∼1860)라는 다이묘(大名·봉건영주)가 있었다. 도쿄의 동북쪽 일대에 있던 미토(水戶)번이라는 봉건국가의 영주였다. 정실에게서 난 형이 세자로 있었으니, 측실 자식인 그는 평생 한편에 찌그러져 있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병약하던 형이 젊은 나이에 죽었다. 나리아키의 인물을 눈여겨보던 젊은 사무라이들은 즉시 그를 세자로 밀어 올리는 운동을 벌여 1829년 마침내 다이묘가 되었다.》

 

나리아키 개혁 함께한 후지타

▲나리아키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신하 후지타 도코. 사진 출처 일본대백과사전 홈페이지

 

나리아키는 자기에겐 기회가 오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젊은 시절 남몰래 개혁을 구상해 왔었다. 이제 그 정책들을 하나하나 실행해 나갔다. 미토번의 ‘덴포(天保)개혁’이다. 일약 ‘명군(名君)’이 되었고, 막부 정책도 비판하기 시작했다. 명군 뒤에는 ‘명신(名臣)’이 있었으니 후지타 도코(藤田東湖·1806∼1855)다. 천하의 호색한이었던 주군에게 후지타가 “제발 여색을 조금만 멀리하시라”고 충언하자 나리아키는 “그대는 술을 좀 작작 마시시오”라고 해, 호주가인 그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야말로 ‘수어지교(水魚之交)’였다. 나리아키는 후지타를 비롯해 신분은 낮으나 유능한 인물들을 대거 발탁해 토지 조사, 불교 억압 같은 파격적인 개혁을 해나갔다. 그와 후지타는 ‘계급장 떼고’ 토론을 벌이며 최선의 정책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세상의 박수를 받던 나리아키의 개혁은 1844년 된서리를 맞았다.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막부는 은거(隱居) 명령을 내리고, 그의 아들을 새 다이묘에 임명했다. 강제 사퇴당한 것이다. 나리아키는 총애하던 중신 유키 도라주(結城寅壽)가 음모를 꾸며 자신을 실각시킨 것으로 의심하며, 분노에 차 어쩔 줄 몰라 했다. 잠깐만 옆으로 새겠다. 유키는 명문가의 자제로 젊고 뛰어난 미남이었던 모양인데, 이 둘의 관계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증언이 있다. 나리아키와 가까웠던 에치젠(越前)번 다이묘 마쓰다이라 요시나가(松平慶永)에 따르면 나리아키가 “색욕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유키의 잘생긴 용모에 빠져, 그를 남색(男色)의 대상으로 삼았다. 유키도 간악한 자였으므로 때때로 이에 응해 공(公)에 아부하여 남색의 유락(遊樂)이 거듭되었다”는 것이다.

 

 이성 잃은 주군에 쓴소리

정치적 미움 때문인지, 연인에 대한 배신감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유키와 그 당파에 대한 증오로 나리아키는 이성을 상실했다. 이때부터 미토번 내의 나리아키파와 막부파 간에 격렬한 당쟁이 벌어졌다. 나리아키는 다이묘로서 가신단을 통합하기는커녕 추종자들을 선동하여 미토번을 양 진영으로 갈라놓았다. 후지타는 이러다 미토번이 두 쪽 날 수 있다며 나리아키에게 반대파를 포용하라고 진언했다. 진짜 지도자의 역량은 위기상황에서 드러나는 법이다. 그런데 이때 나리아키는 오히려 진영싸움을 주도했다. 후지타의 충언도 점점 귀찮아했다.

 

후지타는 ‘쓴소리’를 하기로 작정하고, 주군의 폭주에 브레이크를 걸고 나섰다. 그는, 문벌파(門閥派)를 대표하던 유키가 중하층 사무라이들의 정치적 도전을 막으려고 막부에 공작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지만, 나리아키의 폐위까지 의도한 것은 아닐 거라며 “다만 약발이 지나치게 들어서, 노공(老公·나리아키)까지 이같이 되신 것에는 유키도 놀랐을 것”이라고 나리아키를 달랬다. 또 나리아키를 몰아낸 혐의를 받고 있는 문벌파 대신들을 개인적으로 만나 대화해서, 그들이 심복하게는 만들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적대하지는 않도록 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나 나리아키의 마음을 읽은 과격파들은 더욱 설쳐댔다. 그들은 스스로 ‘유지(有志)’라고 칭하며, 상대 진영을 싸잡아 간신배라고 공격했다. 후지타는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졌다고 해도 같은 가신단에게 간신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 된다며 “제가 생각해 보건대, 간인(姦人)이라고 할 정도의 자는 아무리 봐도 안 보이고, 공자가 말하는 비부(鄙夫)만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이것도 간(姦), 저것도 간이라고 지목한다면, 점점 비부(鄙夫)의 당류(黨類)는 많아지고, 당대뿐 아니라 자자손손까지 파를 나누고 당을 세우게 되어 국가영세(國家永世)의 대해(大害)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상대방이 못났다고 비판할 수는 있어도, 아무에게나 ‘간(姦)’의 ‘레테르’를 갖다 붙이면 대화와 협상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얘기다. 상대 당이라고 무조건 악마화하면 진영 대립은 깊어지고 거기서 빠져나오기란 매우 힘들 것이었다.

 

후지타 호소에도 자멸한 나리아키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사망한 뒤 미토번의 가신들이 일으킨 텐구당의 난을 그린 그림. 나리아키는 반대파를 포용해야 한다는 후지타의 충고를 듣지 않았고, 이들을 가혹하게 숙청했다. 결국 미토번은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 휩싸여 자멸하고 말았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당시 나리아키 일파는 보안을 위해 ‘신발가나(神發假名)’라는 암호 비슷한 문자를 사용하기도 했고, 은명(隱名·사람의 이름을 보안상 은어로 표기하는 것)을 쓰기도 했다. 아무리 보안 때문이라지만 누가 봐도 정도(正道)는 아니었다. 후지타는 이런 식으로 해서는 상대방을 ‘간사하다’고 하는 사이에 이쪽도 간(姦)에 휩쓸리게 될 것이라며, 일을 신중하게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디까지나 광명정대(光明正大)의 기상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이 정도로 간언(諫言)하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며, 이런 심복을 옆에 둔 주군은 행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리아키는 끝내 후지타의 호소를 듣지 않았다. 몇 년 후 권력을 되찾자 그는 유키부터 종신금고형에 처했다. 후지타는 종신금고라는 극형을 내리면 퇴로를 차단당한 그 일파가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이라며, 일정 기간 구금하는 데 그치도록 진언했다. 유키가 종신금고를 당하자 후지타의 우려대로 그 일파는 극렬한 저항에 나섰고, 나리아키는 결국 유키와 그 일당들을 아예 처형해버렸다. 이쯤 되자 양 진영 간 원한은 걷잡을 수 없게 되고, 결국 미토번은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 휩싸여 자멸했다.

쓴소리는 누구나 싫다. 가족이 해도 싫은데 신하나 부하의 쓴소리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성공에는 필수요소다. 한두 번까지는 불쾌한 걸 참고, 귀를 열던 사람도 그 이상 계속되면 등 돌리고 싶어진다. 바로 여기가 위대한 지도자와 범부(凡夫)가 갈리는 지점이다. 동서고금, 예외가 없었다. 귀에 달콤한 말은 다 독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지금 누리는 권력은 쓴소리로만 유지될 수 있다. 그 대신 권좌에서 내려왔을 때, 달콤한 찬사가 쏟아질 것이다.⊙

 
 

02-02 막부에 250년 눌려 있던 천황, 제왕교육 받고 ‘깜짝 반기’

▲헤이안 시대부터 에도 시대 말기까지 천황이 머물렀던 천황궁 교토 고쇼. 사진 출처 ‘리브 저팬’ 홈페이지

 

《1858년 초 일본에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당시 에도에서는 미국 총영사 타운센드 해리스가 막부에 통상조약 체결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반대 여론을 무마하고자 막부 쇼군은 로주(老中·총리) 홋타 마사요시(堀田正睦)를, 그동안 정치에는 간여하지 않던 교토의 천황에게 보내 칙허를 얻으려 했다. 도쿠가와 시대 내내 천황은 막부의 명령에 순종해 왔으니, 이번에도 간단히 일을 끝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고메이(孝明) 천황이 이를 보기 좋게 거절한 것이다.》

 

천황, 막부의 조약 칙허 요구 거절

▲막부의 대미 통상조약 칙허 요구를 거부한 고메이 천황(재위 1846∼1867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천하가 이를 목도했고, 그 충격에 따라 정치 지형이 급속히 바뀌었다. 철옹성 같던 막부의 권위에 생채기가 생겼고, 철벽처럼 보였던 조정-막부 관계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둘이 대립할 수도 있음을, 나아가 이 작지만 충격적인 균열이 엄청난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을 눈치 챈 세력들이 감춰뒀던 발톱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원래 도쿠가와 시대의 조정과 천황은 정치·군사·경제적으로 막부와는 비교가 안 되는 미약한 존재였다. 외교를 비롯하여 모든 정무는 막부가 전담했으며, 조정(천황)은 막부의 경제 원조를 받아야 체통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존호(尊號) 사건 같은 막부에 대한 자그만 도전도 없지 않았지만 늘 조정 측의 완패로 끝나고 말았다.

 

상황이 이랬으니 막부가 가벼운 생각으로 홋타를 교토에 보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감히 천황이 막부의 요구를 거절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천황 궁궐이나 천황 친척의 일 같은 문제도 아니고 미국과의 조약 체결이라는 정무적 일이었으니 더 말할 나위 없었다. 그런데도 막부뿐 아니라 만인의 예상을 깨고 고메이 천황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간 일본사에서는 ‘막부의 통상조약 칙허 요구를 고메이 천황이 거절해서 막부는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는 식으로만 서술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의아한 일이다. 250여 년간 막부에 찍소리도 못 하던 천황이 어떻게 이렇게 중차대한 시점에 반기를 드는 것이 가능했을까. 그간 교토의 조정 내에서는 어떤 일들이 전개되어 온 것일까.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수면으로 올라온 것이 1858년 초의 사태가 아니었을까.

역사서 학습, 군주의식 배양

다행히 최근의 연구들로 이런 의문들이 많이 해소되었다. 짐작대로 조정의 변화는 하루아침에 드라마처럼 생긴 일은 아니었다. 멀리는 18세기 말부터 늦어도 19세기에 들어서 천황과 조정은 자신이 일본의 치자(治者)라는 ‘군주 의식’에 눈뜨기 시작했다는 것이다(김형진, ‘도쿠가와 후기 조정의 부상과 학문의 역할’·‘막말 조정의 학습원과 공가사회의 정치화’). 1780년부터 재위하던 고카쿠(光格) 천황은 ‘효경’ 같은 기초교육을 넘어 ‘십팔사략’ ‘정관정요’ 같은 역사나 통치 이념과 관련된 사서를 학습했다. 이것들은 자칫 천황의 정치적 각성을 초래할 수도 있는 책들이었다. 비슷한 시기 고사쿠라마치상황(後櫻町上皇)도 ‘논어’ ‘맹자’ ‘상서(尙書)’ ‘예기’ 같은 경서와 ‘정관정요’ 같은 제왕학, ‘좌전’ 같은 사서를 공부하는 학습회를 수십 년간 계속했는데, 여기에는 20여 명의 공가(公家·조정 신하)도 참여했다. 이 무렵 봄·가을에 농민이 상황의 궁궐(仙洞御所)에 들어와 모내기와 수확하는 시범을 보이고, 이것을 천황이 관람하는 의식이 연중행사로 정착되었다. 이는 동아시아 군주들의 친경(親耕·왕이 농업 장려에 솔선하는 뜻으로 적전에 나가 몸소 갈고 씨 뿌리는 의식)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천황의 ‘군주 의식’ 배양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김형진은 닌코(仁孝) 천황(재위 1817∼1846년) 때가 되면 역사서 강독은 정례화되었고, 운영 방식, 커리큘럼도 체계화되어 가는 것을 발견했다. 지금까지는 거의 중국 사서를 읽는 한어회(漢御會)만 있었던 데 비해, 1830년대 중반에는 일본 사서를 강독하는 화어회(和御會)도 곧잘 개최되었다. 여기서는 ‘일본서기’ ‘속일본기’ ‘일본 후기’ 등 일본 정사인 육국사(六國史) 학습이 이뤄졌다. 치자 의식과 함께 자국의 역사에 대한 인식도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닌코 천황기의 학습회에는 더 많은 공경들이 참석했고, 때로는 황족도 들어왔다. 이런 분위기는 마침내 공가를 위한 교육기관 설립 움직임을 불러일으켜 1847년 학습원의 창설이 실현되었다. 이를 통해 천황과 자리를 함께할 수 있는 상급 공경뿐 아니라 다수의 하급 공가들도 경서, 사서 학습에 뛰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학적(學的) 네트워크’가 형성되게 되었다.

 

천황-신하, 토론 통해 정치적 각성

▲19세기 에도의 학습원에서 회독 학습법으로 공부 중인 사무라이들을 그린 당시 삽화의 일부. 참가자들이 글을 읽고 각자의 해석을 나누는 회독 학습법은 자연스레 정치 토론과 비평으로 이어졌고 천황과 조정 신하들의 정치적 각성에 기여했다. 사진 출처 마에다 쓰토무 ‘에도의 독서회’ 일본판 표지

 

주목할 것은 회독(會讀)이라는 학습 방법을 채택했다는 것이다. 회독은 참가자들이 같은 텍스트를 읽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해석하는 공부 방식이다. 해석이 끝나면 각각 질문과 대답, 토론 등이 활발하게 이뤄졌기 때문에, 각자가 텍스트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갖지 않으면 견뎌내기 힘든 공부 방법이었다. 필자가 연구한 사무라이들의 회독에서는 이 토론이 곧잘 정치비평으로까지 이어지곤 해 사무라이들의 정치화에 중요한 촉매 역할을 했다. 천황과 공가의 회독에서 민감한 정치문제가 얼마나 언급되었을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그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정치적 각성’도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도쿠가와 후기의 천황들은 강렬한 ‘군주 의식’ 내지 ‘황통 의식’을 갖게 되었고(藤田覚, ‘江戸時代の天皇’), 공가들도 일본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을 새로 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막부와 사무라이들이 천황과 공가들을 ‘긴소매(長袖) 입은, 유약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업신여기며 자만에 들떠 있는 사이, 교토는 느리지만 착실하게 변하고 있었다. 막부가 통상조약 칙허를 얻기 위해 홋타 마사요시를 파견했던 1858년 고메이 천황은 재위 12년째를 맞는 37세 청년 군주였다. 이상과 같은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고 학습해 온 이 젊은 천황과 공가들이 개항이라는 국가의 대위기를 맞아 독자적인 정치 행보를 보인 것은, 이렇게 보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눈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오래 쌓여온 변화가 수면 위로 드러나는 순간, 세상이 경악하는 일은 역사에서 드물지 않다. 평소 눈여겨 살펴볼 일이다.

 
 

03-01 조선-明 공론정치를 서양과 접목한 日, 1890년 의회 개설

▲일본 제국의회 상원이었던 ‘귀족원’ 그림. 일본의 정치체계는 무사 중심이었기에 전통적으로 언론 기능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막부 말 하급 사무라이와 상층 평민 중심으로 정치에 관심을 갖고 발언하는 이가 늘었고, 메이지 유신 후 정부 내 언론기관인 집의원 설치와 1890년 의회 개설로 이어진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바야흐로 총선의 계절이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총선은 그 유명한 2·12총선이다(1985년). 김대중과 김영삼이 연합한 신한민주당(신민당)이 전두환 정권에 일격을 가한 선거로 투표율 84.6%는 지금도 깨지지 않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김영삼의 대리인으로 출마한 이민우 후보가 사자후를 토하던 유세장에서 정치의 후끈함을 느꼈다. 선거 결과 창당한 지 보름도 안 된 신민당이 제1야당으로 올라섰다. 특히 서울 득표율은 43.9%(민정당 27.3%)로 중선거구제가 아니라 소선거구제였다면 신민당이 싹쓸이했을 것이다.》

 

명나라 순안어사, 지역 여론 전달

당시가 어떤 때였던가. 전두환 철권통치의 한복판으로 김영삼은 정치규제에 걸려 제대로 활동할 수 없었고, 김대중은 미국 망명에서 막 귀국한 때였다. 아무런 기반도 없는 그들에게는 오로지 민심과 여론만이 우군이었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강권 통치도 결국 민심을 이기지는 못했다. 참 대단한 전통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서양의 민주주의가 알려지기 전인 전통 시대에도 민심과 여론을 중시해 왔었다. 중국 명나라에서는 도찰원(都察院) 등 언론기관이 잘 갖춰져 있었는데, 특히 15세기 중반 각 성에 파견된 순안어사(巡按御史) 제도는 주목할 만하다(이하 차혜원 논문 “중국근세관료제와 ‘언론’”·43회 동양사학회 동계연토회 기조발표문). 순안어사는 현지 상황과 지역 여론을 조정에 전달하는 등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신경망 역할을 했는데, 이에 따라 지방관에 대한 인물 비평 같은 지역 여론이 중앙에 전달되었다. 여론의 진원지는 학교였다. 악덕 관료가 있으면 학교를 중심으로 생원(生員)들이 대자보를 붙이고 여기에 일반 서민이 가담하여 실력행사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명나라의 언론기관은 감찰과 언론의 양 기능을 함께 하는 성격의 것이었는데, 이는 언관(言官)으로 관료에 대한 감찰, 탄핵을 행한 조선의 대간(臺諫)으로 계승되며, 아래서 보는 것처럼 감찰 기능을 주로 하던 도쿠가와 막부의 메쓰케(目付)를 막말기(幕末期·1853∼1868)에 언론기관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의 배경이 되었다.

이런 흐름의 정점은 명나라 말기 동림당(東林黨)과 복사(復社)운동이었다. 고헌성(顧憲成)을 중심으로 동림서원에 집결한 사대부들이 공론을 배경으로 황제 권력을 독점한 환관 세력 엄당(閹黨)과 맞섰다. 하지만 명의 공론 정치는 이민족인 청 지배하에서 종말을 고했다. 청은 순안어사제를 전격적으로 폐지했고, 중앙의 언관 조직은 지방 정보원으로부터 차단되었다. 이제 정보는 비밀리에 수집되었고 황제와 군기처만이 그 정보를 독점했다.

 

조선 서원·향교, 공론 형성 중심지

▲1696∼1870년 사헌부, 사간원에서 올린 소를 발췌해 편찬한 ‘간의등록’. 사간원과 사헌부는 왕에게 충고, 비판을 전달하고 관리의 부정부패를 감시해 고발하던 일종의 언론기관이었다. 사진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홈페이지

 

정점에서 무너진 명나라의 공론 정치가 실현된 곳은 조선왕조였다. 특히 17, 18세기 조선은 훗날 ‘당쟁’으로 저명해진 여론 정치의 무대였다. 정부 내에는 삼사(三司·홍문관, 사간원, 사헌부)라는 언관이 국왕과 정부를 가차없이 비판했다. 이 언관의 활동은 세계사적으로도 특필해야 할 정도로 활발하고 강력했다. 정부 바깥에서는 사림(士林)들이 서원, 향교라는 공간, 향회(鄕會)라는 조직, 상서와 서한이라는 매체를 통해 중앙정치에 발언했다(박훈 논문 ‘근대일본의 공론정치와 민주주의’). 예를 들어 17세기에 전국적으로 벌어진 예송논쟁에서는 수만 통의 상서가 정부에 제출되었고, 연명 상서에 등장하는 이름도 18, 19세기에는 1만 명을 넘어섰다. 아마도 한국 민주주의는 긍정적인 면이든, 부정적인 면이든 이 시기 공론 정치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을 것이다.

 

이런 공론 형성의 중심은 조선에서도 학교였다. 양반들은 18세기에 전국적으로 900개교를 헤아린 서원을 거점으로 삼았고, 19세기에 활발해진 평민들의 향중공론(鄕中公論)은 향교나 향회가 기반이었다. 전국의 유생들이 한자리에 모여드는 과거 시험장은 공론 형성의 중요한 무대였는데, 그 규모가 엄청났다. 1774년 평안도 무과시험에 4만여 명이 응시했고, 1794년 응시 자격시험인 3일제(三日製)에 2만3900명이 응시하더니, 19세기 후반 과거 시험장에는 무려 20여만 명이 쇄도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오수창 ‘조선후기 평안도 사회발전 연구’).

 

日 막부末 공론정치, 의회제도로

▲당시 공론의 장을 이끌었던 사무라이들. 왼쪽이 조선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이런 동아시아 공론 정치를 새롭게 발전시켜 서양 의회제도와 접맥한 것은 19세기 후반 일본이었다. 원래 도쿠가와 정치체제는 공론 정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전국시대를 종식시킨 도쿠가와 막부는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해 가신단을 해체하지 않고 방대한 군사 조직을 유지했다. 평화가 이어지자 이것이 그대로 관료제가 되었으나 원래 군사 조직이었으므로 언관 같은 언론 기능은 취약했다. 메쓰케(目付)라는 기관이 있었지만, 이는 상부의 명령을 전달하거나 다른 정부 조직을 감사하는 것이 주 임무였지, 쇼군(혹은 다이묘)의 정부를 비판하는 일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막말기다. 광범한 하급 사무라이들과 상층 평민들이 정치에 대해 공공연하게 발언하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당시 공의여론(公議輿論), 처사횡의(處士橫議)라 불리던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때 개혁가들은 중국의 예를 들면서 메쓰케를 언관 조직으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이런 움직임은 메이지유신 후 정부 내에 집의원(集議院) 같은 언론기관 설치로 이어지고, 이윽고 1890년 의회 개설을 이뤄냈다.

주말에 광화문을 걷는데 예외 없이 시위대가 귀를 찌르는 확성기로 열을 내고 있었다. 정말 고막이 터질 것 같아 귀를 막고 종로2가 쪽으로 피신했는데, 거기에도 반대쪽 시위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마이크를 잡고 목이 터져라 격한 말을 쏟아내던 사회자가 갑자기 말한다. “여러분∼ 제가 노래 한 곡 할까요?” 어느 연구자가 한국 시위는 조선시대 장터 문화 영향이 크다고 한 적이 있다. 고종 죽음과 3·1운동의 관계처럼 장례가 시위에 깊숙이 간여하는 전통도 조선시대 이래 유구하다. 또 작금의 한국 정치판을 보고 있노라면 ‘당쟁’이라는 익숙한 얼굴이 겹쳐 보인다. 외래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된 개념을 갖고, 한국 정치의 현상을 분석하는 글을 보고 싶다. 다음 총선 때는 가능하려나.

이제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따뜻한 봄과 함께 거리도 소란스러워질 것이다. 한국인들은 정치라면 욕부터 해대며 혐오하는 척하지만, 열 내며 욕한다는 것 자체가 관심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한국 정치의 ‘정체’를 모른다.

 

03-29 사무라이들도 직언 경청… 민심 이기는 권력은 없다

▲번주가 직접 관리들을 만나 민심을 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조슈번의 무사이자 사상가 요시다 쇼인(1830∼1859).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1853년 7월 미국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가 에도만에 나타났을 때, 조슈번사(長州藩士)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마침 공무로 에도에 와 있었다. 당시 23세. 집채만 한 시커먼 증기선이 연기를 내뿜고 쏜살같이 일본 해안을 휘젓는 걸 목도한 이 영민하고 야심만만한 젊은이가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번주에게 상서를 올렸다. 병학자였던 그는 함선, 총포, 마법(馬法) 등 군사 부문에 관한 대응 방안을 피력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맨 먼저 강조한 것은 ‘청정(聽政)’, ‘납간(納諫)’ 등 군주의 민심 수용이었다.》

 

 언로 열기 시작한 위정자들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글씨가 담긴 각종 서찰과 문서. aucfan 홈페이지 캡처

 

당시 번주(藩主)들은 의례나 유흥을 일삼으며 정무는 몇몇 대신들에게 맡기는 게 통례였다. 쇼인은 번주가 오전 7시부터 11시까지 직접 회의를 주재해 하급 관리나 지방관리의 말도 직접 들어보고, 상서는 그 자리에서 개봉하여 열람하라고 촉구했다. 상서에 볼 만한 점이 있으면 쓴 사람을 직접 만나 끝장토론을 벌이라고도 했다. 특히 직간(直諫), 즉 신하가 주군 면전에서 간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는 “근래 직간하는 풍조가 사라지게 된 것은 나라가 쇠퇴해 가는 징조로 실로 탄식할 만하다”고 전제한 후 주군이 언로를 활짝 열어,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는 자가 있으면 심야라도 만나줘야 한다고 했다. 예로부터 직간은 전쟁터에서 적진에 제일 먼저 뛰어드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이라는 걸 인정하면서, 주군이 아무리 직간을 권장하더라도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모두가 입 다물고 면종하는 사람들만 있을 것이니 특단의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急務條議’)

 

미토번(水戶藩)에서는 번주 자신이 민심 수용을 주도했다.(박훈 ‘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 명군으로 회자되던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는 취임 직후 언로 개방을 선언하며, 말단 관리까지 직접 불러 민정(民情)을 탐문했다. 이에 긴장한 대신들이 관례에 없는 일이라며 말리자, “무릇 내 신하는 내외, 대소 없이 모두 하나다. 만약 물을 일이 있으면 비록 보졸(步卒)이라 할지라도 부르는 것이 어찌 불가하겠는가”라고 일축했다. 그 장면을 하나 소개한다. “(나리아키가) 복도에서 정원으로 내려가 쪽문을 지나 마루로 올라가셨다. 주위 사람을 물리친 후에 모토지메(元締·향촌관리)들이 어전에 와서 엎드리자, 번주께서 향촌의 일에 대해 여러 가지로 물어보셨다. 마실 것도 주시고 두 종류의 술잔에 직접 술을 하사하시었다.” 향촌 관리들이 감격하여 심기일전했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미토번주, 직접 순행에 나서다

▲번을 지배하는 제후인 번주(藩主)가 수행원들과 함께 이동하는 모습을 그린 19세기 삽화. 이처럼 번주가 행차할 때는 수백 명에 이르는 인원이 동원되는 게 보통이었지만, 미토번의 번주인 도쿠가와 나리아키(1800∼1860)는 단 10여 명의 수행원만 데리고 백성들을 직접 만났다. 그는 향촌관리들을 직접 만났을 뿐 아니라 농촌을 찾아가 농민의 집을 직접 방문하고 글씨를 하사하기도 했다. 일본의 근대 개혁인 메이지유신은 민심을 들으려 한 이런 위정자들의 노력에서 싹텄다고 할 수 있다. 사진 출처 에도-도쿄 박물관 컬렉션 홈페이지

 

나리아키는 관리를 두루 만나는 데 그치지 않고 백성과 직접 접촉하려 했다. 순행(巡行)이다. 고산케(御三家)로 쇼군(將軍)의 가장 가까운 친척 중 하나인 미토번주는 자기 영지에 있지 않고 에도에서 쇼군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래서 ‘천하의 부장군(副將軍)’이라 했다. 그러나 나리아키는 15년 재임 기간 동안 3분의 1을 미토에서 보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미토 농촌을 4번 시찰했는데 그 행보가 자못 파격적이다. 번주가 지방을 행차하면 수행원 400∼500명 동원되는 게 보통이었지만, 그의 순행에는 달랑 17명 정도가 동행했다. 순행 행차는 모두 간소화해서 주먹밥을 갖고 다니며 해변을 지날 때는 모래사장에서 점심을 때우기도 했다. 농민의 집을 방문하여 하오리(羽織) 등을 하사하거나 글씨를 써서 사인을 한 뒤, ‘아무개에게’라고 받는 사람의 이름을 직접 적어주기도 했다. 자기 이름이 적힌 번주의 글씨를 받아 든 이 농민의 심정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한번은 향촌의 유력자 집을 방문하려고 하자, 그 사람이 놀란 나머지 너무 누추하니 다른 곳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그러자 나리아키는 “그런가, 그렇다면 오히려 들러보고 싶군”이라며 기어이 찾아갔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집은 많이 파손되어 있었다. 문자 그대로 ‘민폐(?)’다. 그러나 민중들은 이런 나리아키를 ‘미토노공(水戶老公)’이라 부르며 흠모했다. 요시다 쇼인도 앞에 인용한 상서의 맨 첫머리에서 조슈번주에게 ‘미토노공’과 잘 사귀어 두라고 할 정도였다.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보면 민심에 이러저러한 파이프를 대고 선제적으로 대응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公議輿論’)


동아시아 ‘민심주의’ 전통

동아시아 역사에 민주주의는 없었지만, ‘민심주의(民心主義)’의 강력한 전통이 있어 왔다. 순종적인 일본인들이 저럴진대, ‘소용돌이의 정치’를 자랑하는 한국의 민심 파워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무릇 군주란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 한국의 민심은 사납고 무섭고 전광석화 같다. 그간 배가 뒤집히는 것도 많이 봐왔다. 민심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

오늘 칼럼을 끝으로 붓을 잠시 놓으려 한다. 일본사를 주제로 3년이나 써왔다. 아마 일본 신문에 한국사 칼럼을 3년간 연재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무모한(?) 기획에 지면을 내준 동아일보에, 그리고 낯선 내용을 진지하게 읽어준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한국은 해방 후 80년이 다 되어가는 동안 세계가 경탄할 만한 성취를 이뤘다. ‘한국혁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변화가 일어났고, 그 결과 한국은 2차 대전 후 독립한 150개 국가 중 유일한 선진국이 되었다. 모든 분야가 변했고 성숙해졌다. 그런데 딱 한 군데 변하지 않은 분야가 있다. 바로 일본에 대한 인식이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는 1000년이 가도 변하지 않는다’거나 ‘다시는 지지 않겠습니다’는 말이 일국의 대통령들 입에서 나올 정도였으니 일반 시민은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지금은 식민지 시대도, 해방 직후도, 그리고 후진국이던 때도 아니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일본을 대하는 것은 선진국 시민의 품격이 아닐 것이다. 이제는 있는 그대로, 불편한 사실도 당당하게 직시하며, 거기에 기반하여 선진국에 걸맞은 새로운 역사상을 수립해야 할 때다. 세계가 요동치고 있다. ‘차라리 냉전 시대가 평화로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불안과 공포가 늘어나고 있다. 세계가 불안하게 지켜보는 곳은 우크라이나, 중동, 대만, 그리고 불행하게도 한반도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역사 인식, 자기 인식만이 이 난세에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진지(陣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