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橫說竪說(동아일보) 2024-05/ 05-01(수) 지난해 방한한 외국인 환자 198개국 60만 명… 日中美 순 - 05-31(금) ‘1조3800억 재산분할+20억 위자료’… 한국 역대 최대 이혼

상림은내고향 2024. 5. 19. 12:19

橫說竪說(동아일보) 2024-05/

05-01(수) 지난해 방한한 외국인 환자 198개국 60만 명… 日中美 순

 

5월 첫 주는 중국 노동절 연휴와 일본 황금연휴가 겹치는 주간이다. 요즘 피부과나 성형외과는 연휴를 맞아 양국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들썩이고 있다. 5∼10일간의 연휴 기간에 ‘송혜교 피부’나 ‘김수현 콧날’을 만든 뒤 신속 친절한 건강검진을 받고 한의원에 들러 1년 치 한약까지 지어 가려는 의료쇼핑족들이다. 코로나로 주춤했던 의료관광이 재개되면서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환자가 사상 처음으로 60만 명을 돌파했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198개국에서 60만6000명의 환자가 몰려들었는데 가까운 일본(31%)과 중국(18.5%) 비중이 절반이고 미국(12.7%)이 3위다. 피부과, 성형외과, 내과통합, 검진센터 순으로 환자가 많았다. 일본 중국 미국 캐나다 사람들은 피부과, 몽골 베트남 러시아 사람들은 내과통합 진료에 몰렸다. 지난해를 제외하고 역대 가장 많은 환자가 찾았던 해는 2019년으로 49만7000명이 동반자와 입국해 의료비로 3조 원 넘게 쓰고 갔다. 이로 인한 생산유발액은 5조5000억 원이다.

▷한국 의사를 찾는 이유는 의료 기술이 좋고 의료비가 저렴하기 때문. 맹장 수술의 경우 미국은 1800만 원, 한국에선 150만 원대다. 동네 병원에선 오래 기다리지 않고 진료 가능하다는 점도 강점이다. 규모가 되는 병원들은 의료통역사를 두고 검사나 수술 후 회복기를 거쳐 출국할 때까지 전 과정을 돌본다. 대가족을 동반해 오래 머물며 일반 외국인 환자의 6배를 쓰고 가는 중동 환자들을 위해 기도실을 갖추고 할랄 환자식을 제공하는 병원도 있다.

 

▷K의료가 성장세라지만 글로벌 의료 시장의 순위는 10위권 밖이다. 상위권에 진입하려면 의료 기술의 격차가 큰 중증치료 시장을 잡아야 하는데 이 시장의 최강자는 미국과 독일이다. 아시아권의 강자로는 일본, 한국, 싱가포르가 꼽힌다. 이보다 기술은 떨어지되 의료비가 싼 나라들도 무시할 수 없다. 말레이시아와 튀르키예는 매년 100만 명 넘는 외국인 환자를 유치한다. 말레이시아는 공용어인 영어와 할랄 인증을 받은 치료법이 경쟁력이다. 튀르키예의 가성비 좋은 모발 이식 수술은 한국에서도 유명하다. 의료비가 미국의 10∼20% 수준인 인도의 추격세도 무섭다.

▷한국이 중증치료 시장에서 뒤지는 이유는 의료 기술보다는 비자 제도 탓이 크다고 한다. 의료관광비자(단기 90일 이하)를 받기가 어려워 치료와 회복 기간이 긴 환자들을 말레이시아나 튀르키예에 뺏기고 있다. 사전 상담과 사후 관리를 하려면 비대면 진료도 필요하다. 내년이면 치료 목적으로 국경을 넘는 이들이 4400만 명에 이를 전망이다. 의료관광 강국이 되기 위해서도 미용의료 쏠림 해소와 비대면 진료 제도화 같은 의료 개혁이 필요하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5-02 “진짜 개××들”… 합의 요구 국회의장 향해 욕설한 박지원

 

더불어민주당 박지원 당선인이 1일 김진표 국회의장 등을 향해 “개××들”이라고 폭언을 했다. 채 상병 특검법을 2일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는 민주당의 압박에도 김 의장이 여야 합의가 있어야 본회의를 열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유튜브 채널에 출연한 박 당선인은 “그러니까 박병석, 김진표 똑같은 놈들”이라고 했다. 진행자가 ‘똑같은 놈들이라뇨’라고 하자 박 당선인은 “놈이지. 윤석열이나 다 똑같은 놈들”이라고 받았다. 이어지는 대화에서 “아! 개××들이에요. 진짜”라는 말도 덧붙였다.

▷박 당선인은 방송이 끝난 뒤 페이스북에 “방송 시작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적절치 못한 내용을 얘기했다”며 사과했다. 하지만 방송을 보면 그는 30초 넘게 인터뷰를 이어가던 중 불쑥 “지금 방송 나가고 있는 거냐”고 물은 뒤 “아이고, 내가 너무 세게 얘기했구나”라고 웃으며 말했다. 이어 “아무튼 나는 소신껏 얘기했다”고 했다. 방송 출연이 잦은 노회한 정치인이 카메라가 켜진 것을 정말 몰랐을지 의문이다.

▷국회의장을 향한 민주당의 압박은 전방위적이다. 박주민 원내수석부대표는 이날 박 당선인과 같은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김 의장을 언급하며 “환장하겠다”고 했다. 우원식 의원은 “민주주의와 국민의 삶에 결코 중립은 없다”고 했다. ‘국회의장의 당적 보유 금지’ 조항을 통해 중립의 필요성을 강조한 국회법의 취지를 대놓고 무시하는 태도다. 다수 의석을 앞세운 민주당의 국회의장 압박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21년에도 박병석 당시 의장이 언론중재법 개정안의 직권 상정을 거부하자 초선 의원인 김승원 의원은 박 의장을 향해 “역사에 남을 겁니다. GSGG”라고 적었다가 욕설 논란이 일었다.

 

▷정치인이 비상식적 표현이나 막말을 하면 과거엔 거센 질타와 불이익을 받았다. 공개 사과로 부족해서 당직을 내놓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박 당선인의 페이스북은 “잘하셨다” “시원했다” 등의 지지층들의 찬사 댓글로 도배가 됐다. ‘GSGG’를 썼던 김 의원은 징계를 당하기는커녕 멀쩡히 공천을 받아 재선 의원이 됐다. 이를 벤치마킹해 윤 대통령과 여당 의원을 겨냥해 복수형의 의미인 ‘D(들)’를 덧붙여 ‘GSGGD’라고 쓴 민형배 의원 역시 재선과 함께 민주당 전략기획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오히려 이익을 본 셈이다.

▷극렬 지지층은 막말에 환호하고 당 지도부는 이들 눈치를 본다. 무례함을 용기로 포장하는 의원이 늘어나고, 막말이 더 격해진 이유다. 제대로 된 징계 없이 어물쩍 넘긴다면 차기 국회의장이 누가 돼도 민주당 의원들의 압박은 더 거칠어질 것이다. 의사당은 지지층을 자극하는 막말로 더럽혀지고, 협치는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05-03 뱅크런 위기에 1조 수혈받고도 4800억 배당 잔치한 새마을금고

 

지난해 정부 혈세로 뱅크런(대규모 예금인출) 위기를 넘긴 새마을금고가 출자 회원들에 약 4800억 원의 배당금을 지급해 빈축을 사고 있다. 지난해 당기순이익 860억 원의 5배가 넘는 규모다. 순이익이 전년 대비 18분의 1 수준으로 급감하고 전체 1288개 금고 중 3분의 1이 적자를 봤을 정도로 최악의 상황에서 세금으로 한숨 돌리게 도와줬더니 배당만 알뜰하게 챙긴 것이다.

▷지난해 7월 한 부실 금고의 합병 소식에 불안해진 예금주들이 돈을 찾으려고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18조 원이 빠져나갔다. 위기감이 고조되자 정부가 나서 1인당 보호한도(5000만 원)를 넘어가는 원리금까지 보장하겠다며 진화에 나섰다. 금융위원장은 수천만 원을 예치하며 고객들을 안심시켰다.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는 새마을금고의 부실 채권 1조 원어치를 매입했다. 급한 불은 껐지만 새마을금고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연체율이 7%대를 넘어서는 등 위기는 진행 중이다.

▷새마을금고의 도덕적 해이는 심각한 수준이다. 3월에는 대출 컨설팅을 해주겠다며 대출수수료 40억 원을 가로챈 전현직 직원들이 2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신입 직원이 고객의 비밀번호를 바꿔 통장에 있던 돈을 빼돌리는 황당한 사건도 있었다. 양문석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당선인이 대학생 딸을 사업자로 꾸며 금고로부터 대출을 받은 ‘작업대출’ 의혹도 불거졌다. 이 밖에도 부정·부실 대출, 횡령, 직장 내 갑질, 성희롱 등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새마을금고의 가장 큰 문제는 단위 금고 이사장이 인사와 예산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구조에 있다. 이사장은 임기 4년에 2번 연임해 12년까지 연임할 수 있는데, 중간에 대리인을 두거나 상근이사로 근무하는 등 편법을 써서 사실상 종신 근무하는 경우가 많다. 2021년 기준으로 임직원 2만8891명 가운데 임원만 1만3689명인 기형적 조직도 문제다. 직원 100명당 임원이 85명이나 되니 현장 인력의 전문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선 뒤늦게 PF 대출을 확대했다가 부실이 커진 새마을금고에 대해 “주린이(주식 투자 초보자)가 상투 잡은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사고가 빈발해도 관리 감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새마을금고의 주 업무는 금융이지만 금융위원회가 아닌 행정안전부의 감독을 받는다. 1983년 새마을금고법을 만들 때 재무부에서 내무부로 권한이 넘어간 게 여태껏 이어져오고 있다. 금융을 잘 모르는 행안부 직원 10여 명이 1300개 가까운 금고를 관리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다. 덩치만 커졌을 뿐 서민금융기관으로서의 본래의 역할은 제대로 못 하는 새마을금고에 대해 대대적 수술이 필요해 보인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5-04(토) 세 살 조기교육 아홉 살까지만 간다

 
 

조기교육 나이가 얼마나 빨라졌는지 ‘4세 고시’를 보면 알 수 있다. 4세 고시는 유명 영어유치원 입학을 위한 레벨 테스트. 의대 입학이라는 종점을 향한 달리기가 이때부터 시작된다. 알파벳 읽고 쓰기, 간단한 영어 회화 등이 출제되다 보니 늦어도 3세부터 영유 입학을 위해 프렙(Prep·준비) 학원에 다니거나 과외를 받아야 한다. 지난해 동아일보가 초1 자녀 학부모 1만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0∼4세에 영어 사교육을 시작했다는 응답이 15.9%나 됐다. 국어는 15.4%, 수학은 13.3%였다.

▷세 살에 배운 영어, 수학 평생 갈까. 그런 믿음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연구 결과가 최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됐다. 미국 버지니아대 교수팀이 유치원 입학 전 조기교육을 연구한 기존 논문들을 리뷰했더니 단기적으론 학업 성과가 올라갔지만 장기적인 효과를 뒷받침할 과학적 근거가 부족했다. 미 테네시 유치원 조기교육에 참여한 3∼5세 유아들은 초등 3학년(9세)까지만 읽기, 쓰기 등에서 대조군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 이후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다. 미 정부 유아 교육 프로그램 헤드 스타트(Head Start)에 참여한 3, 4세 유아들 역시 초3부터는 더 나은 학습 성취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를 설명하는 용어가 ‘페이드 아웃(fade-out)’ 효과다. 알파벳, 구구단 외우기 같은 인지적인 학습은 반복 훈련으로 금세 효과가 나타난다. 일찍 사교육을 받은 아이가 천재 소리를 듣는 이유다. 그런데 누구나 알파벳, 구구단을 외우는 나이가 되면 선행 학습의 효과는 빠르게 사라진다.

 

▷조기교육이냐, 적기 교육이냐. 교육계의 오래된 논쟁은 뇌과학이 발달하며 적기 교육으로 기울고 있다. 유아기엔 인성과 사회성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발달하고, 초등학생 시기엔 언어를 담당하는 측두엽과 수학 등 논리를 담당하는 두정엽이 발달한다. 그래서 4∼7세 시기에는 인지 능력보다 정서 능력을 자극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앞선 논문에서 다룬 미 테네시 유치원 유아들의 경우, 학습적인 측면에서 조기교육의 긍정적 효과는 자라면서 사라졌다. 반면 학교에서 징계를 받는 등 사회성 측면에서 부정적 효과가 관찰됐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에게 전력 질주를 시켜봤자 소용없듯이 영유아기 과도한 학습은 오히려 뇌 발달에 해로울 수 있다는 증거다.

▷우리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태어나 조기교육으로 단련돼 이른 나이에 재능을 꽃피우는 ‘천재 신화’를 동경한다. 하지만 마흔 넘어 첫 소설을 낸 고 박완서 작가나 시인을 꿈꾸며 고교 중퇴를 했다가 39세에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 등을 보라. 인간의 수명은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 아이의 인생을 일찍 완성하려는 부모의 조바심이 자칫 아이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5-06(월) 4년 새 4배 급증한 노인 상대 ‘사이버 사기’

 

사기 범죄의 악랄함은 상대의 가장 아픈 약점을 공략한다는 데 있다. 투자 사기를 당해 은퇴 자금을 날린 노인들의 사연에는 그들이 헤쳐 가려 했던 힘겨운 현실이 녹아 있다. “안 그래도 먹고살기 바쁜 자식들에게 손 벌리기 싫어서” “병원비 생활비 부담은 계속 커지는데 연금처럼 매달 배당금을 준다기에” “혼자 살아 외로웠는데 살갑게 대해 주는 게 고마워서”…. 사기범들은 노인들의 이런 마음을 피해자의 금고를 여는 열쇠로 이용했다.

▷고령자 상대 범죄 중 최근 급증하는 분야가 사이버 금융사기다. ‘주식리딩방(주식 종목 추천 채팅방)’으로 초대해 투자를 유도하거나, 비대면 방식으로 가상화폐나 다단계 투자를 하게 한 뒤 돈을 들고 잠적하는 경우가 많다. 경찰청 통계에 잡힌 사이버 사기 피해자 중 60대 이상의 비중은 2019년과 비교해 4년 새 4배로 급증했다. 지난해 개인파산자 중에서도 60대 이상이 47.5%로 가장 많았고, 이들이 주식 코인 등 투자 실패로 파산한 비율은 최근 3년 새 4.5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삶의 경륜을 쌓아온 노인들이지만 디지털 세계에선 약자다. 요즘 금융투자는 온라인에서 많이 이뤄지는데 고령일수록 디지털 기술에 대한 이해력과 금융지식이 부족하다. 젊은층보다 정보를 얻는 매체도 제한적이고, 치매 증상 등으로 판단이 흐려질 수도 있다. 여생은 길어지고 고물가 장기화로 어떻게든 자산소득을 올려야 하는 노인들로선 경제 활동의 중심을 온라인으로 옮기는 게 큰 도전이다. 여기에 퇴직금이나 상속 재산 등 쌓아둔 목돈은 많으니 사기꾼들에겐 손쉬운 먹잇감이 되는 것이다.

 

▷피해 노인들 중에는 대기업이나 금융사 임원 출신도 있다고 한다. 투자 기법이 급속히 변화하고 있어 과거 경험만으론 따라잡기 어려운 데다, 유명 금융전문가나 연예인들이 투자했다는 허위 광고에 속아 넘어간 사례가 적지 않다. 최근에는 한 주식리딩방 업체 직원들이 시골 노인들을 찾아가 주식거래 앱을 깔아주며 회원으로 가입시키고, 손실 위험이 큰 관리종목 주식을 사들이게 한 사건도 있었다. 일부 피해자들은 낯선 사람이 휴대전화를 조작하는 게 꺼림칙했지만 평소 연락이 뜸한 자식들이 귀찮아할까 봐 물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노인들이 평생 일군 재산을 투자 사기로 잃지 않도록 지켜주는 건 고령화 시대에 중요한 복지다. 노후 파산이 많아지면 가족이 무너지는 건 물론이고, 국가의 복지 부담도 가중될 수 있다. 고령층이 주요 타깃이었던 보이스피싱이 꾸준한 예방 교육과 제도 정비로 피해가 줄고 있듯 디지털 약자에게 특화된 금융 교육이 필요하다. 요즘 시중은행들이 운영하는 ‘노인 금융학교’에 수강생이 몰려 관광버스까지 대절한다고 하는데 민간에만 맡겨둘 일이 아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5-07 겁나는 가정의 달



가정의 달 5월은 명절 못지않게 스트레스가 많은 시기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같은 기념일을 챙기려니 계획 짜느라 스트레스, 돈 나가서 스트레스, 차 밀려서 스트레스 받는다. 물가가 다락같이 오른 올해 가정의 달은 아예 ‘가난의 달’로 불린다. 월별로 따지면 12월 다음으로 결혼을 많이 하는 시기여서 주말마다 돌아오는 결혼식까지 다니다 보면 5월은 ‘탈탈 털리는 달’이 되기 십상이다.

▷특히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모두 챙겨야 하는 40대들 부담이 크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올해 40대 가정의 달 추가 지출 규모는 평균 56만9000원. 어린이날 아이들과 유명 놀이공원에 다녀온 사람들은 어린이 종일 이용권 5만 원에 외식비와 간식비, 기름값까지 최소 20만 원을 썼다고 한다. 어버이날엔 카네이션 꽃바구니 6만∼8만 원, 트로트 가수 포토카드를 사은품으로 주는 홍삼 선물세트가 최소 10만 원대이니 양가 부모님 뵙고 오는 데 식사비를 제외해도 30만 원이 넘게 든다.

▷각종 기념일에 5만∼10만 원 하는 결혼식 축의금까지 ‘지출의 달’ 목돈 마련을 위한 서민들의 노력은 눈물겹다. 배달 같은 단기 알바를 뛰거나 휴일과 야간 근무로 특근 수당을 챙긴다. 중고사이트에 물건을 내다 팔아 현금화하고 5월 전후로 식비와 여가비를 최대한 졸라맨다. 정기 적금을 들고, 미리 들어둔 적금이 없으면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거나 예금 가입과 동시에 이자부터 주는 적금에 가입해 ‘텅장(텅 빈 통장)’을 채워 넣는다.

 

▷가정의 달 후유증이 커지자 기념일 무용론도 제기된다. “요즘 애들은 모두 금쪽이여서 365일 어린이날인데 꼭 어린이날이 있어야 하나” “명절과 생신 챙기는데 효도하는 날까지 따로 정해져 있어 부담된다”는 것이다. 어버이날 양가 부모님 찾아뵙는 순서, 선물이나 식대 지불 문제로 명절 못지않게 부부싸움을 한다는 집들도 있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없애고 대신 ‘가족의 날’을 만들어 한 번만 지내자는 제안도 나온다.

▷외국에도 ‘마더스 데이’가 있지만 후유증 얘기는 없다. 수수한 꽃다발을 건네는 정도로 부담이 크지 않다고 한다. 가정의 달 특수를 노리는 장사꾼들은 ‘돈 가는 곳이 마음 가는 곳’이라 부추기지만 부모 자식 간 정이 봉투로 전달될 리 없다. 요즘 TV에서 유명 연예인들이 늦둥이 자녀를 키우는 프로그램이 화제인데 다들 여유 있게 사는 집이지만 아이들이 웃는 순간은 아버지와 김밥을 만들어 먹거나 동네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는 때다. 그런 소소한 일상을 부모님과 공유하는 것이 효도 아닐까. 제사상 차리기 힘들어 명절이 싫듯, 놀이공원 입장료와 인기 가수 포토카드 부담에 가정의 달이 ‘겁나는 달’이 돼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5-08 영화 하나가 스크린 거의 100% 독점… 너무 한 것 아닌가

 
 

여러 영화를 상영해야 정상인 멀티플렉스 극장이 또다시 ‘모노(mono)플렉스’가 됐다. 요즘 영화관에 가면 주야장천 ‘범죄도시4’만 튼다. 다른 영화들은 오전에만 반짝 상영하는 탓에 사실상 조조영화가 됐고, 저녁 시간대 등은 거의 100%가 ‘범죄도시4’다. 이 영화의 상영점유율은 지난달 24일 개봉 뒤 80%를 넘었고, 이달 들어서도 70% 안팎이다. 전국에 스크린이 3000개쯤 되는데, 5일에만 2778개 상영관이 이 영화를 1만5002회 틀었다. 스크린을 도배한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영화계에서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이하영 하하필름스 대표)라는 성토가 나온다. 과거 사례와 비교하면 ‘범죄도시4’의 상영관 독점이 어느 정도인지가 뚜렷이 드러난다. 스크린 독과점 논란이 거세게 일었던 2017년 영화 ‘군함도’의 상영점유율이 50%대 중반이었다. 12일 만에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명량’(2014년)의 점유율은 40%대였고, 최근 1000만 영화인 ‘파묘’도 50%대였다. ‘범죄도시4’의 스크린 독점은 2019년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극장으로선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 한다’는 항변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영화관들은 막대한 적자를 봤다. 부채 비율이 치솟았고, 국내 3대 멀티플렉스 중 2곳이 한때 사실상 자본잠식 직전에 이르기도 했다. 계열사의 출자 등으로 연명한 극장들은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줄줄이 지방 상영관의 문을 닫는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범죄도시4’는 ‘서울의 봄’(2023년), ‘파묘’에 이은 구세주 격이다. 특히 비성수기로 여겨지는 4, 5월의 흥행 성공은 가뭄의 단비와 같을 것이다.

 

▷‘범죄도시4’를 제외하고 당장 크게 눈에 띄는 영화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는 역으로 다양성 부족이라는 한국 영화계의 구조적 문제가 극심해졌음을 드러낸다. 박스오피스 10위권 내 우리 영화는 이 영화와 파묘뿐이다. ‘1000만 아니면 쪽박’이라는 말이 현실화한 것이다. 100억 원 이상의 제작비가 들어가는 이런 영화에서 제작진이 새로운 시도나 모험을 하기 쉽지 않다. 2021년 30%까지 떨어졌다가 올해 68%까지 반등한 한국 영화 점유율이 불안한 이유다.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로 관객 300만∼400만 명을 목표로 하는 ‘중박 영화’나 독립영화도 관객을 만날 기회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제2의 봉준호, 박찬욱 감독이 나온다. ‘범죄도시4’를 보고 ‘마동석표 액션은 볼만하지만 되풀이되다 보니 슬슬 지루해진다’는 관객이 적지 않다. 이는 곧 한국 영화가 처한 현실이기도 할 것이다. 프랑스처럼 특정 영화에 일정 비율 이상 스크린을 배정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스크린 상한제 도입을 논의해볼 시기가 가까워 오고 있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05-09 구리값 오르니, 다리 명판 도둑

 

경남 진주시의 농촌 지역 교량에서 다리 이름을 적어 놓은 교명판과 공사설명판 등이 잇따라 사라지고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최근까지 교량 12곳에서 4개씩 동판 48개를 누군가 몰래 떼 갔다. 충북 보은에서도 동판이 사라진 교량이 발견돼 군내 다리를 전수 조사하고 있다고 한다. 2019년에도 대구와 경북 청도 등에서 명판 절도 사건이 발생하는 등 수년에 한 번씩 비슷한 범죄가 되풀이되고 있다.

▷동판이 절도범의 집중 표적이 된 것은 최근 구리 값이 크게 올랐기 때문이다. 인공지능(AI) 열풍과 이상기후 우려로 전선의 주요 소재인 구리 수요가 크게 늘었다. 국제 원자재 시장에서 구리 가격은 지난달 말 t당 장중 1만 달러를 넘어 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도난당한 명판은 구리가 70% 포함된 황동으로 만들었다. 30kg 명판 1개를 팔면 고물상에서 20만 원가량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최근 일본에서도 태양광 발전 시설에서 케이블 절도가 횡행하는 등 구리를 노린 절도가 세계적으로 빈번하다.

▷외환위기나 금융위기 같은 경기 침체 시기나 원자재 가격이 크게 뛸 때마다 쇠붙이 절도 사건이 많이 발생했다. 배수관, 철제 대문, 공사장 철근, 고기불판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기승을 부렸다. 2007년 울산에선 10여 곳의 학교에서 밤새 스테인리스 재질의 교문이 사라지기도 했다. 전신주를 타고 올라가 구리 전선을 훔치는 경우가 많아 한국전력은 10여 년 전부터 전선 재질을 구리 대신 저가의 알루미늄으로 교체해 왔다. 맨홀 뚜껑도 단골 표적이었는데, 최근엔 잠금장치를 단 덕분인지 도난이 많이 줄었다.

▷국제유가가 오를 때는 송유관에 구멍을 뚫어 수십억 원어치의 기름을 빼돌리는 도유(盜油) 범죄도 많이 일어났다. 특히 2007, 2008년에는 한 해에 30여 건씩 발생하기도 했다. 그 자체로도 중대 범죄지만 자칫 송유관 폭발이나 환경오염 등 2차 사고를 부를 수 있는 위험천만한 범죄다. 지금은 첨단감지시스템 덕분에 많이 줄긴 했지만, 지난해에도 모텔을 통째로 빌려 지하실 벽을 뚫고 송유관 근처까지 땅굴을 파던 일당이 목표지점 30cm 앞에서 붙잡히는 영화 같은 일이 있었다.

▷CCTV 보급이 확대되고 현금 보유가 줄면서 절도 사건 자체는 점차 줄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고물가와 경기 침체로 생활이 팍팍해지면서 10만 원 이하 소액 절도는 최근 4년 새 2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코로나19 이후 점원이 없는 무인점포가 크게 늘어난 것도 한몫했다. 깊어지는 불황에 푼돈에 손을 댄 ‘생계형 범죄’에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시민 안전을 위협하면서 공공시설을 훔치는 조직적 절도까지 ‘불황형 범죄’라며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5-10 日 ‘네이버 축출’ 본격화… 우리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나

 
 

한국에 ‘국민 메신저’ 카카오톡이 있다면 일본엔 9600만 명이 쓰는 라인(LINE)이 있다. 메시지만 주고받는 게 아니라 뉴스를 보고 온라인 쇼핑을 하고 만화와 음악을 즐기고 공공요금까지 납부해 일본 신문들이 “라인 앱은 사회 인프라”라고 칭할 정도다. 라인은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가 기획하고 신중호 대표가 개발을 총괄한 한국산 서비스로 2011년 6월 출발했다. 동일본 대지진 때 현지에 머물면서 통신망 붕괴를 경험한 이해진 창업자가 재난 상황에서도 연락 가능한 모바일 메신저로 일본 시장을 공략하자고 한 것이다.

▷일본 정보기술(IT) 기업 소프트뱅크와 ‘반반 경영’을 시작한 건 2019년부터다. 네이버의 라인과 소프트뱅크가 운영하는 일본 최대 포털 야후저팬이 결합해 ‘라인야후’가 자리 잡았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이 온라인 비즈니스를 망라한 거대 플랫폼을 만들겠다며 협업을 먼저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네이버가 13년간 공들여 키워 온 거대 메신저 기업의 경영권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사태의 발단은 지난해 11월 라인의 고객 정보를 관리하는 네이버 가상서버가 해킹당해 개인정보 51만여 건이 유출되면서다. 그러자 일본 총무성은 올 들어 두 차례 행정지도를 통해 네이버와 맺은 지분 관계를 재검토할 것을 요구했다. 민간 IT 기업의 해킹 사고를 문제 삼아 정부가 지분 변경을 요구하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앞서 페이스북이 해킹돼 5억 건 이상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는데도 일본 정부가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던 것과 비교된다.

 

▷이어 라인야후의 이데자와 다케시 사장은 8일 “소프트뱅크가 과반이 되도록 네이버에 자본 변경을 강하게 요청하고 있다”고 밝혔다. 총무성의 행정지도에 따라 네이버에 지분 매각을 공식 요구했다는 것이다. “한국 네이버와 연결된 네트워크를 차단하고, 업무 위탁을 제로로 하겠다”며 기술 협력도 사실상 모두 끊겠다고 했다. 또 ‘라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신중호 대표를 사내이사에서 배제하고 이사회 멤버 전원을 일본인으로 채운다고 한다. 라인야후에서 네이버를 배제하려는 일본의 전방위 작업이 본격화된 셈이다.

▷이는 일본 국민 80%가 쓰는 메신저 플랫폼을 한국 기업 손에 두지 않겠다는 의도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페이스북, 유튜브 같은 미국 공룡 플랫폼은 손댈 수 없으니 라인만이라도 일본의 통제 아래 두겠다는 것이다. 라인야후에 대한 지배력 상실은 단순히 일본 1위 메신저를 빼앗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1억 명 넘는 동남아 라인 이용자를 발판으로 ‘아시아 최고 IT 기업’이 될 기회마저 일본 기업에 넘어가게 된다. ‘네이버 라인’이 ‘일본 라인’이 되는 것을 한국 정부가 뒷짐 지고 지켜만 봐서는 안 되는 이유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5-11(토) ‘뺨 맞아도 다시’ 마크롱의 각본 없는 소통

 

시민들과 설전을 자주 벌이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2022년 재선 도전 유세를 위해 알자스 지역을 찾았을 때 일이다. “당신 때문에 살면서 처음으로 마린 르펜(당시 극우정당 대선 후보)에게 투표하려 한다.”(행인) “이유가 뭔가.”(마크롱) “당신만큼 형편없는 대통령을 본 적이 없다. 오만하고 거짓말쟁이다.”(행인) “많은 토론거리를 줘서 감사하다. 하지만 당신이 계속 당신 생각만 하면 우린 토론을 할 수 없다.”(마크롱)

▷마크롱 대통령이 시민들과 만나는 현장에선 계란이나 토마토가 심심치 않게 날아든다. 극우 청년에게 뺨을 맞는 봉변도 있었다. 이 청년은 마크롱과 악수를 하다 다른 손으로 그의 뺨을 후려쳤다. 대통령이 폭행을 당한 중대 사건이지만 마크롱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폭행 위협이 있더라도 계속 소통할 것”이라며 다시 시민들을 만났다. 이후 영부인과 산책 중 시위대를 만났을 땐 “고함치지 말고 냉정히 말해 달라”며 토론을 청하기도 했다.

▷마크롱의 소통 행보를 ‘쇼’라고 폄하하는 시각도 있다. 개혁 과제를 밀어붙이면서 반대 여론을 끌어안는 것처럼 보이려는 제스처라는 것이다. 마크롱이 추진해 온 정책들을 보면 그런 쇼라도 해야 할 만한 사안이 적지 않다. 집권 초기부터 고용과 해고를 수월하게 만들고, 친환경 에너지 정책의 일환으로 유류세 인상을 시도해 노조와 화물기사들의 저항을 불렀다. 정년을 연장하고 연금 수령 시점을 늦춘 연금개혁 역시 국민 70% 반대를 무릅쓰고 관철시켰다. 여론을 수습하지 못하면 정권이 흔들릴 만한 이슈들이다.

 

▷과거 정부가 미뤄 온 민감한 문제를 건드리니 지지율이 높을 리 없다. 연금개혁 직후 26%까지 곤두박질쳤다가 요즘은 30%대에 머물고 있다. 위축될 법도 한데 마크롱은 더 거침없는 대화로 돌파구를 찾고 있다. 연금개혁에 반대하며 프라이팬을 두드리는 시위대 틈에 파고들어가 “프라이팬으로는 프랑스를 전진시킬 수 없다”고 설득하고 ‘연금 반대 시민’ 500명을 초대해 200분간 스탠딩 토론을 벌였다. 최근에는 농업박람회에 방문했다가 농업용 경유 면세 폐지에 항의하는 농민들이 야유를 퍼붓자 농민 수십 명과 즉석 토론을 했다.

▷‘트랙터 시위(농업개혁 반대)’ ‘노란조끼 시위(노동개혁 반대)’ ‘프라이팬 시위(연금개혁 반대)’ 등으로 바람 잘 날이 없지만 대통령이 시위대와도 기꺼이 마주 앉는 게 프랑스의 민주주의다. 대통령이 불편해할 목소리는 경호원들 선에서 ‘입틀막’ 되는 한국과 다른 대목이다. 9일 대통령 기자회견이 열리긴 했지만 추가 질문 기회가 없어 토론을 못 하는 구조에선 소통을 기대하기 어렵다. 마크롱이 프랑스에서 20년 만에 나온 재선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데는 대화를 통한 정면 돌파 전략이 한몫을 했다. 성공한 정치인이 되려면 까다롭고 날 선 질문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5-13(월) 4년 만에 재등장한 ‘디지털 교도소’

 

주로 성범죄자 신상 공개로 응징에 나섰던 웹사이트 ‘디지털 교도소’는 2020년 n번방 사건으로 사회적 공분이 일던 당시 개설됐다. 협박에 시달리다 성착취물을 찍게 된 여성들은 얼굴을 가리고 숨어 지내며 사회적 죽음을 선고받는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성착취물을 제작, 유포 또는 구매한 범죄자들은 버젓이 거리를 활보했다. 도대체 법은 어디 있느냐는 여론이 들끓었고 이를 계기로 등장한 것이 디지털 교도소다.

▷디지털 교도소는 무고하게 신상이 공개된 대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엉뚱한 피해자가 생겨나자 폐쇄됐다. 그런데 4년 만에 다시 문을 열어 논란이 되고 있다. 최근 부산 유튜버 살인사건 피의자, 여자 친구를 살해한 의대생 등의 정보를 공개하고 추가 제보를 받는다고 한다. 범죄자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처벌인 신상 공개를 통해 피해자를 위로하겠다고 주장하지만 댓글을 통해 피해자의 신상이 유포되는 등 이미 그 부작용이 크다.

▷요즘 온라인에선 사적 제재를 다룬 콘텐츠가 넘쳐난다. 피해자는 보호하지 못한 채 가해자에게만 관대하다는 사법 체계에 대한 불신을 양분 삼아 확산되고 있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 가해자의 개인 신상을 공개하는 등 언론에 보도된 범죄자의 신상을 낱낱이 공개한 일도 있었지만, 소액 사기범을 추적하거나 불륜 배우자와 그 상대를 찾아다니며 낙인을 찍기도 한다. 주차 악당이나 난폭 운전자 등도 쉽게 마녀재판에 오른다.

 

▷법이 주먹보다 멀고, 느린 건 인간의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범죄 사실을 돌다리 두드리듯 검증해야 억울한 누명을 쓰는 피해자를 줄일 수 있다. 대전 교사 사망 사건에서 악성 민원 학부모의 신상이 공개되자 상호만 같은 다른 가게가 망할 뻔했다. 즉각적인 심판과 응징은 속은 후련하겠지만 엉뚱한 피해자가 나올 수 있다. 특히 사적 제재가 돈벌이가 되면서 양산되는 측면이 있다. 최근 마약 운전으로 행인을 친 롤스로이스 뺑소니 사건 가해자에게 신상 공개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3억 원을 챙긴 유튜버가 구속됐다. 4년 전 디지털 교도소 운영자는 암호화폐로 후원을 받았다. 공익을 앞세웠던 그는 사실 성범죄에 연루된 마약 사범이었다.

▷교도소는 형량을 채우면 나올 수 있지만, 디지털 교도소에 신상이 공개되면 영원히 갇히게 된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거나, 묻지 마 범죄로 인생이 무너진 피해자들의 심정이야 오죽하랴 싶다. 국민 법 감정과 거리가 있는 낡은 양형 기준을 손질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하지만 사법적 절차를 밟지 않은, 자의적 기준에 따른 신상 공개는 의도와 달리 2차 피해를 부를 수 있는 범죄 행위다. 개인적인 단죄가 범람하면 우리 사회가 더욱 위험해질 수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5-14 “한국이 美 산업 빼앗아”… 트럼프의 황당한 약탈론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만큼 막말과 궤변이 화제가 되는 정치인을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사실이 아닌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트위터에 올려, 대통령 임기 마지막 달에는 트윗 471개에 ‘허위 정보’ 딱지가 붙어 공개 제한 조치를 받았다. 팬데믹 위기 때는 “백신이 없어도 결국 코로나바이러스는 사라질 것”이라는 비과학적 주장을 늘어놔 조롱거리가 됐다. 11월 대선을 앞두고 다수의 형사·민사 재판에 처해 있는 트럼프에게 미 법원은 재판 관련자들을 비방하거나 위협하지 말라며 세 차례 함구령을 내렸다.

▷그런데 최근 트럼프 전 대통령이 한국을 겨냥해 사실과 다른 발언들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다. 지난달 시사주간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왜 우리가 부유한 한국을 방어해야 하느냐”, “불안정한 위치에 4만 명의 병력을 두고 있는데 한국은 방위비 분담금을 거의 내지 않고 있다” 등의 주장을 한 것이다. 하지만 CNN 방송이 “최소 32개의 오류를 확인했다”고 보도할 정도로 트럼프의 타임 인터뷰는 거짓투성이였다.

▷현재 주한미군은 2만8500명으로 4만 명이라는 숫자부터 사실과 다르다. 또 한국은 통상 인건비를 제외하고 주한미군 주둔 비용의 40∼50%를 부담하고 있다. 특히 조 바이든 행정부와 협상을 통해 2021년 방위비 분담금을 13.9% 인상해 10억 달러 가까이를 냈고, 내후년까지 한국 국방비와 연동해 해마다 분담금을 올리기로 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향해 방위비를 압박했던 트럼프가 공격 대상을 한국으로 옮기면서 근거 없는 ‘안보 무임 승차론’을 내세운 셈이다.

 

▷이어 트럼프는 11일 뉴저지주 대선 유세에서 “한국이 미국의 해운(shipping), 컴퓨터 등 많은 산업을 빼앗아갔다”며 “그들은 미군에 방위비를 낼 만큼 많은 돈을 벌고 있다”고 했다. 한국은 미국의 해운, 컴퓨터 산업을 뺏은 적이 없을뿐더러 한국이 경쟁력을 가진 조선, 반도체로 범위를 넓혀 봐도 억지스럽다. 중국 조선업이 3년째 한국을 제쳤고, 치열한 반도체 패권 경쟁 속에 한국 대표 기업이 미국에 40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하기로 한 상황에서 한국을 겨누는 건 황당하다. 결국 터무니없는 ‘산업 약탈론’까지 들이밀며 방위비 증액을 재차 압박한 것이다.

▷워싱턴포스트는 2015년 트럼프의 첫 대선 출마 선언 직후 인터뷰와 공개 발언, 트윗 등을 점검해 그의 막말과 거짓 주장이 치밀한 계산에 따른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막말을 던져놓고 반응이 좋으면 끝까지 밀고 나가고, 선동적인 거짓말을 뱉은 뒤엔 진실처럼 포장해 지지를 끌어낸다는 것이다. 사상 최대 대미 무역흑자에다 방위비 분담 문제가 걸려 있는 우리로선 트럼프의 ‘거짓말 베팅’, ‘막말 베팅’의 강도가 더 높아질까 우려스럽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5-15 34개월 만에 또 폐지되는 아파트 사전청약

 

아파트 사전청약의 원조는 보금자리주택 사전예약이다. 이명박 정부가 2009년 수도권 그린벨트를 풀어 ‘반값 아파트’를 공급하면서 처음 도입했다. 통상 아파트 착공 즈음에 하는 청약보다 2, 3년 앞당겨 입주자를 모집하는 것으로, 당첨자는 본청약 때 먼저 계약할 기회를 갖는다. 하지만 사전예약 이후 본청약까지 평균 4년, 최장 8년이 걸리면서 보금자리주택 사전 당첨자 중 실제 입주한 사람은 40%에 그쳤다. 무주택자들의 내 집 마련 불안감을 덜어주겠다며 시행된 제도는 얼마 안 가 폐지됐다.

▷사실상 용도 폐기된 카드를 다시 꺼내든 건 문재인 정부다. 전방위 규제에도 부동산 과열이 계속되자 주택 공급 시그널을 보내 집값을 잡겠다며 2021년 이를 부활시켰다. 당시 정부는 “사전청약에서 본청약까지 기간을 2년으로 최소화하겠다”고 했고, 국토교통부 장관은 “영끌해서 집 사지 말고 분양받으라”고 부추겼다. 하지만 단기간에 주택 공급이 어려운 상황에서 민심 달래기용 미봉책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가 높았다.

▷예상대로 우려는 현실이 됐다. 2021년 7월 이후 사전청약을 진행한 공공아파트 99개 단지 가운데 현재 본청약을 끝낸 곳은 13개에 불과하다. 이 중에서도 본청약 시기를 제대로 지킨 단지는 1개뿐이다. 토지 보상이나 기반시설 조성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전청약을 무리하게 밀어붙인 탓에 대다수 사업이 지연되고 있는 것이다. 기존 주민들의 반대로 사업이 미뤄지는 건 기본이고, 지구 조성 과정에서 문화재가 발굴되거나 법정보호종인 맹꽁이가 발견돼 본청약이 하염없이 늦춰진 곳도 있다.

 

▷사전청약 당첨자들은 본청약에 맞춰 계약금, 중도금 같은 자금 마련 계획을 세우고 전월세 계약도 해놨는데 이를 송두리째 바꿔야 할 처지다. 사업이 연기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분양가 상승 부담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 최근 건설 자재 값과 인건비 등이 대폭 오르면서 본청약이 1년 미뤄진 단지의 분양가는 사전청약 때보다 최대 1억 원 넘게 뛰었다고 한다. 민간 사전청약 아파트 중엔 공사비 급등으로 건설사가 사업을 아예 포기한 곳도 나왔다.

▷사업 지연 피해가 속출하자 국토부는 어제 사전청약 신규 시행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10여 년 전의 실패를 답습하고 2년 10개월 만에 사전청약 제도가 또 폐지되는 것이다. 청약 시점만 앞당기는 것일 뿐 실질적인 공급 확대 효과는 없는 불완전한 제도를 재도입한 지난 정부의 잘못이 크지만, 공공분양 ‘뉴홈’에 사전청약을 활용하다가 뒤늦게 폐지한 현 정부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무주택 실수요자들을 희망 고문하는 어설픈 대책을 재탕 삼탕하는 일이 더는 없어야 할 것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5-16 이번엔 저출생수석 신설… 연금수석, 반도체수석은 안 만드나

 

대통령비서실 조직을 보면 정부의 핵심 어젠다를 알 수 있다. 노무현 정부는 국민과 쌍방향 소통을 하겠다며 국민참여수석실을, 이명박 정부는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비상경제상황실을 신설했다. 박근혜 정부는 미래전략수석실에서 창조경제를 주도했고, 문재인 정부는 일자리수석실을 신설해 1호 공약인 일자리 정책을 챙겼다. 집권 3년 차에 접어든 윤석열 정부가 저출생 극복이 시급하다며 저출생수석실을 새로 두기로 했다.

▷윤 대통령은 최근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부총리급 부처로 승격시켜 저출생대응기획부를 신설한다고 발표한 데 이어 13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대통령실에도 이를 전담할 컨트롤타워 신설을 지시했다. 부처 신설은 정부조직법 개정에 시간이 걸리는 만큼 이르면 다음 주에 저출생수석부터 임명해 관련 정책을 챙기겠다는 것이다. 차관급인 초대 저출생수석은 체감도 높은 정책을 내놓을 수 있도록 40대 다둥이 워킹맘 중에서 찾고 있다고 한다.

▷한국은 ‘저출산 함정’에 빠져 있는 ‘국가 비상사태’다. 합계출산율 1.3명 미만인 초저출산이 20년 넘도록 이어지고 있어 강력한 출산장려책을 시행하지 않으면 출산율 회복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새로 조직부터 만드는 것이 능사인지는 의문이다. 저출산 전담 조직인 저출산위의 위원장은 2012년 보건복지부 장관에서 대통령으로 격상됐다. 대통령이 컨트롤타워를 맡아도 성과가 시원찮았는데 행정부와 대통령실에 옥상옥으로 컨트롤타워를 두면 더 나아질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은 출산율 하락세가 평균 13년간 지속되다 반등에 성공했다. 한국엔 없는 별난 조직이 있어서가 아니라 고용 돌봄 교육 주거 문제 해결 등 공식 같은 정책을 꾸준히 실행한 덕분이다. 출산율이 걱정이라면 왜 우리 저출생 대책은 실패했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정책 방향이나 설계가 잘못됐는지, 예산이 부족한 건지, 조직의 문제인지, 조직이 문제라면 새로운 조직이 더 효율적이라고 기대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정책의 중요도에 따라 조직을 만들기 시작하면 연금수석 물가수석 반도체수석은 왜 안 두느냐는 말이 나올 수 있다.

▷박근혜 정부의 미래전략수석실은 ‘창조경제는 한반도 3대 미스터리’라는 우스갯소리와 함께 다음 정부에서 폐지됐다. 문재인 정부의 일자리수석실은 ‘일자리 파괴 정부’라는 혹평과 함께 정권 교체 후 사라졌다. 저출생수석실도 잘못하다간 인구는 못 늘리고 세금 쓰는 자리만 늘리다 끝날 수 있다. 저출생수석실이 생기면 대통령실은 출범 초기 2실장 5수석 체제에서 3실장 8수석 체제로 확대된다. 정부 조직을 슬림화하겠다던 약속과 거꾸로 가고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5-17 세계 유일 대기업 총수 규제… 쿠팡 오너는 손 못 대는 이유

해마다 5월이면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는 공정거래위원회의 발표가 있다. ‘공시 대상 기업집단’ 지정 결과가 나오는데 보통 ‘대기업 집단’이라 부른다. 이 순위가 흔히 말하는 공식 재계 서열이다. 자산 5조 원 이상의 대기업 집단은 올해 88개로 지난해보다 6개 늘었다. 새로 ‘대기업’으로 인정받은 기업들에게 자부심은 잠깐일 뿐이다. 공정거래법과 이 법을 원용하는 다른 41개 법률에 따라 274개의 규제를 새로 적용받는다. 대기업이 안 되려고 성장을 기피하는 ‘피터팬 증후군’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대기업 규제를 받는 기업집단은 매년 5, 6개씩 늘고 있다. 경제 규모는 커지고 있는데 자산 5조 원이라는 허들은 2009년부터 15년 동안 바뀌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2009년 48개였던 대기업집단은 3, 4년 뒤엔 100개를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30대 그룹 정도의 재벌에 대한 과도한 경제력 집중을 완화한다는 취지였는데, 이제는 중견기업 수준까지도 규제 대상이 됐다.

▷기업 지배구조와 경영 환경이 바뀌었는데도 그룹을 지배하는 1인을 특정하도록 하는 ‘동일인(총수) 지정제’도 현실과 동떨어진다. 공정거래법은 ‘기업집단이란 동일인이 사실상 그 사업 내용을 지배하는 회사의 집단을 말한다’고 규정한다. 개인이 동일인으로 지정되면 4촌 이내 친족과 3촌 이내 인척 등의 사업 현황과 주식 보유 현황 등을 신고해야 한다. 평소에 연락도 하지 않고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는 친인척의 자료까지 뒤져야 하는데 자료 제출 의무가 있는 동일인 관련자가 5000여 명, 총수 1명당 60여 명에 이른다. 혹시 자료를 빠뜨리거나 오기를 해도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국내 기업만 규제를 받는 역차별 논란도 크다. 쿠팡의 최대주주인 김범석 이사회 의장은 올해로 4년째 총수 지정을 피했다. 공정위는 김 의장이 미국 국적이라는 이유로 2021년부터 김 의장 대신 쿠팡 법인을 동일인으로 정해 왔다. 쿠팡은 한국 법인인 ㈜쿠팡 지분 100%를 미국 모회사(쿠팡Inc)가 소유하고 있고, 쿠팡Inc 의결권의 76.7%를 김 의장이 갖고 있다.

▷공정위가 올해부터 외국인도 총수로 지정할 수 있도록 근거를 마련했지만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기업집단을 지배하는 자연인(김범석)이 최상단회사(쿠팡Inc)를 제외한 국내 계열회사에 출자하지 않고, 총수 일가가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예외규정을 충족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 의장이 사실상 지배력을 갖고 있는데도 국내 기업과 다른 기준을 적용받는 건 형평성에 맞지 않다. 애초에 국내 경제력 집중을 막으려고 37년 전에 도입한 ‘국내용’ 규제를 국경이 무의미해진 현재에도 그대로 유지할 것인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5-18(토) “젊은층 덜렁덜렁 전세계약”… 국토장관의 경솔한 발언

 

부장검사도 사기를 당한다. 얼마 전 퇴임한 검찰 간부는 10여 년 전 서울의 한 검찰청 부장검사일 때 지인에게 속아 690만 원을 떼였다. 사기꾼들을 숱하게 감옥에 보냈던 그마저 사기를 피하지 못했다. 작정하고 덤벼드는 사기범 앞에선 학력이나 사회 경험도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조심하고 경계해도 한순간에 당할 수 있는 게 사기 범죄다.

▷전세사기 대책을 총괄하는 국토교통부 박상우 장관이 최근 기자들과 차담회를 했다. 보증금 8400만 원을 날린 대구의 30대 여성이 극단적 선택을 해 8번째 ‘전세사기 사망자’가 나온 지 10여 일쯤 되던 날이었다. 박 장관은 피해자 지원 관련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 전에는 전세를 얻는 젊은 분들이 덜렁덜렁 계약을 했던 부분이 있지 않았나 싶다. 이제는 꼼꼼하게 따지는 인식이 생기지 않았겠는가.”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이날 간담회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국토부가 원래 피해자 주거지원대책을 발표하려다 돌연 취소하고 차담회로 대체한 것이어서 장관이 실효성 있는 방안을 내놓을지 기대하던 참이었다. 박 장관은 이날 50분간 많은 얘기를 했지만 ‘덜렁덜렁 계약했다’는 한마디가 피해자들 가슴에 비수로 박혔다. 피해자도 잘못이 있다는 인식이 엿보이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논란이 일자 국토부는 “이전 전세계약 과정에 허점이 상당했다는 취지”라고 해명했지만 피해자들 마음을 돌리진 못했다.

 

▷요즘 전세사기는 세입자가 대비한다고 피할 수 있는 수준을 훌쩍 넘어섰다. 집주인과 부동산 중개업자가 처음부터 짜고 치밀한 각본에 따라 세입자를 속이는 경우가 많다. 계약을 하고 보니 가짜 주인이거나, 동일 매물 다중 계약, 계약 직후 임대인 변경 등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다. 이러니 누구보다 악착같이 미래를 준비해 온 젊은이들도 속절없이 당했다. 한 간호사는 휴일 없이 맞교대 근무를 하며 7년간 모은 결혼자금 수천만 원을 잃었고, 조종사를 꿈꾸며 월급을 모아 온 30대 청년은 훈련비로 쓸 5800만 원을 전세보증금으로 날린 뒤 빚을 갚기 위해 비행기 대신 원양어선을 타고 있다고 한다.

▷전세사기는 개인의 부주의가 아닌 제도의 실패가 낳은 지능 범죄다. 주무 장관이라면 누구보다 철저히 이런 관점에서 대책을 세워야 한다. 박 장관은 그날 간담회 모두발언에서 “피해자들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다”고 했지만 이후 질의응답에서 나온 ‘덜렁덜렁’ 발언은 경솔했다. 올 1월 부산지법의 한 부장판사가 전세사기 사건 주범에게 징역 15년형을 선고한 뒤 방청석의 피해자들에게 건넸던 말이 떠오른다. “절대로 여러분을 자책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뭔가 부족해서 피해를 당한 게 아니란 점을 반드시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5-20(월) “4년 전보다 6석이나 더”… 제대로 된 與 총선백서 나올까

 

총선 3연패 정당.’ 국민의힘 얼굴에 찍혀 있는 낙인이다. 20·21·22대 총선에서 연속 패배하면서 얻은 불명예다. 그사이 새누리당, 미래통합당, 국민의힘으로 당명도 세 차례나 바뀌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인지 원인을 살펴보겠다면서 ‘반성문’ 격인 총선 백서를 쓰기 위해 당 특별위원회까지 꾸렸지만 연일 삐그덕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당내에선 “백서가 나오기는 할까”라는 말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이는 차기 당 대표를 선출할 전당대회가 ‘6월 말 7월 초’ 열리는 방안이 거론되는 상황에서 총선 참패의 주요 원인을 놓고 윤석열 대통령의 독단과 불통, 한동훈 당시 비대위원장의 전략 부재 중 어떤 것을 넣고 뺄지, 어디에 방점을 두고 기술할지 등을 두고 친윤계와 친한계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어서다. 그 와중에 조정훈 백서특위 위원장이 당권 도전을 시사하자 친한계를 중심으로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논란은 더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조 위원장이 자신의 전당대회 출마를 염두에 두고 ‘한동훈 공동 책임론’을 부각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급기야 “현명하신 주권자 국민께서 21대 총선보다 6석을 더 주셨다”는 평가가 나왔다. 정영환 전 공관위원장이 백서특위 회의에서 한 말이다. 국민의힘이 지역구 기준으로 21대 총선(84석) 때보다 6석 더 많이 얻은 건 사실이다. 비례대표까지 포함하면 4년 전(103석)보다 5석을 더 얻었다. 그러나 4년 전은 코로나 정국 때 야당으로 치른 선거였고, 이번엔 수많은 정책 수단과 정보력을 갖춘 집권 여당으로 치른 선거라는 점이 다르다. 범야권에 192석을 내준 건 집권 여당으로선 헌정사에서 가장 큰 패배다. ‘수포당’(수도권을 포기한 정당)이라는 비판까지 받은 당이 ‘6석’ 운운하는 건 민심과는 동떨어진 초현실적 시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 4년 전 총선에서 참패한 미래통합당은 그해 8월 208페이지에 달하는 총선 백서를 발간했다. 백서는 △중도층 지지 회복 부족 △미래 비전 제시 미비 △효과적인 전략 부재 △불공정한 공천 논란 등을 주요 패인으로 꼽았다. 이번 총선에서도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요인들이다. 문제는 이렇게 반성문을 쓰고도 또 궤멸적 참패를 당했다는 데 있다. 혁신을 실천하지 않은 결과다.

▷국민의힘은 2년 뒤 지방선거를 치러야 한다. 그 일 년 후엔 대선도 치러야 한다. 국민의힘에 쇄신은 무슨 구호이거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냉철한 자기 반성은 어물쩍 지나치려 하면서, ‘대표 잿밥’으로만 눈길이 향하고 있다. 입으로만 하는 개혁을 넘어 몸과 마음이 함께 움직이는 혁신이 시급한데, 행동은 보이지 않고 어이없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05-21 영국 상식부 장관이 촉발한 ‘상식이란 무엇인가’

 

영국인이지만 미국에서 활동하고 프랑스 의원이 되기도 한 토머스 페인은 ‘상식(Common Sense)’이란 제목의 팸플릿으로 미국 독립운동과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미쳤다. 이 팸플릿은 상식이 무슨 뜻인지 언급하지 않는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과 국가가 왕정에서 벗어나는 것이 상식이라고 단순히 선언했을 뿐이다.

▷프랑스어에는 영어의 ‘코먼 센스(common sense)’와 달리 ‘봉 상스(bon sens)’라는 말이 있다. 양식(良識)이라고 번역한다. 상식도 양식도 일본에서 번역된 말이다. 일본 철학자 미키 기요시(三木淸)는 양식을 상식의 상위 개념으로 본다. 상식을 무오류의 것으로 단순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상식에 의문을 지닌 지혜를 양식이라고 했다. 실제 영어권과 불어권에서 쓰이는 용법에 맞는 해석인지와는 별도로 상식은 많은 사람이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외에도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는 일리가 있다.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불확실성의 시대’란 책이 한국에서 널린 읽힌 미국 비주류 진보 경제학자다. 그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으면서도 다수가 공유하고 있는 생각을 지칭하기 위해 사회 통념(conventional wisdom)이란 말을 사용했다. 상식을 사회 통념과 구분하고 나서 보면 상식은 양식일 때만 제대로 된 상식으로 성립할 수 있다. 현실에 있어서는 사회 통념에 불과한 것이 상식이란 말로 선동적으로 쓰이기도 한다.

 

▷영국에서는 지난해 말 상식부 특임장관(Minister for Common Sense)직이 신설돼 에스터 맥베이란 여성이 임명됐다. 이 자리의 공식 명칭은 무임소(無任所) 장관이다. 그러나 리시 수낵 총리가 정부 부처가 영국의 상식이 무엇인지 궁금할 때는 맥베이 장관의 판단을 따르라고 해서 상식부 장관이란 별칭을 얻었다. 상식은 본래 자명한 것이어야 하지만 오늘날에는 무엇이 상식이고 무엇이 사회 통념에 불과한지 구별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이런 부서까지 만들었을 것이다. 영국인 특유의 실용성이 느껴진다.

▷맥베이 장관이 공무원 신분증을 목에 걸 때 정부가 제공한 표준 목줄 외에는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동성애를 상징하는 무지개 색깔이 들어가거나 팔레스타인 국기가 그려진 목줄을 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공직이 정치적 행동주의에 오염되는 것인지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상식이라는 게 상식부 장관이 정하면 상식이 되는지도 의문이다. 다만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가 아무리 불분명해졌어도 무엇이 상식인지 따져보는 사회는 ‘법만 저촉하지 않으면 됐지 상식은 무슨 필요가 있냐’는 사회보다는 훨씬 건강해 보인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5-22 도박, 마약, 살인… 태국에 둥지 트는 韓 범죄조직들

 

한국인이 많이 찾는 태국의 유명 휴양지 파타야에서 잔혹한 살인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고 있다. 11일 파타야의 한 저수지에서 태국 경찰이 건져 올린 플라스틱 드럼통 안에서 손가락이 모두 절단되는 등 크게 훼손된 30대 한국인 남성의 시신이 나왔다. 파타야에선 2015년 한국인 20대 남성을 취업 빌미로 꾀어 도박사이트 설계와 운영을 맡기고 감금과 폭행을 하다 숨지게 한 일도 있었다. 이 사건은 영화 ‘범죄도시 4’의 모티브가 됐다.

▷두 사건 모두 한국인이 한국인을 상대로 한 범죄다. 사업, 관광 등으로 왕래가 활발해지면서 보이스피싱, 온라인 도박, 마약 밀매, 납치·살인 등 한국인을 노린 범죄가 동남아시아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국내의 범죄자들과 한탕을 노린 청년들이 치안이 느슨한 동남아로 건너가 범죄조직을 결성하고, 한국과 연계해 범행을 벌이는 경우가 많다. ‘드럼통 살인사건’의 피의자들도 폭력, 절도 등의 전과가 있었고, 국내 폭력조직과 관련됐을 가능성도 있다.

▷동남아의 한국인 대상 범죄는 필리핀에서 가장 많았지만 요즘은 태국이 범죄자들 사이에서 ‘기회의 땅’으로 떠오르고 있다. 일단 90일 동안 무비자로 출입국이 가능해 한국으로 오가기 쉽다. 동남아 국가 중 상대적으로 인터넷 등 정보기술(IT) 인프라가 발달해 도박사이트를 운영하기 유리하다. 2022년 6월 대마를 마약류에서 제외해 사실상 합법화하면서 마약을 유통하기도 쉽다. 범죄가 탄로 나더라도 육로를 통해 인근 국가로 숨어들기 용이하다.

▷특히 태국, 미얀마, 라오스의 접경지대인 ‘골든 트라이앵글’이 범죄의 온상이다. 3국 정부의 공권력이 제대로 미치지 않는 내륙 오지여서 마약 생산과 밀매, 납치·감금 범죄가 빈번하다. 해외 취업을 미끼로 불러들인 뒤 휴대전화와 여권을 빼앗고 보이스피싱이나 투자 사기를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취업 사기를 당했다고 신고한 한국인 건수는 2021년과 2022년 각각 4건에서 지난해 94건으로 급증했다. 지난해 11월과 올해 1월 한국인 27명이 불법 업체에 감금됐다 풀려났고, 범죄의 배후인 한국인 조직원 37명이 최근 검거됐다.

▷동남아에서 벌어지는 범죄는 사실상 국경이 의미가 없다. ‘동남아 한국인 3대 마약왕’ 가운데 ‘텔레그램 마약왕’ 박모 씨는 필리핀에서 체포돼 수감 중이다. ‘탈북 마약왕’ 최모 씨는 태국에서 잡혔다 풀려난 뒤 캄보디아에서 검거됐고, 셋 중 우두머리 격인 ‘사라 김’ 김모 씨는 베트남에서 잡혔다. 중국, 필리핀, 베트남, 태국 등과 합동수사팀을 결성하는 등 협력을 대폭 강화할 필요가 있다. 국경 없는 범죄와 맞서려면 우리 경찰도 좀 더 글로벌해져야 한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5-23 사고로 죽음 맞은 ‘테헤란의 도살자’

 

이란 테헤란 남쪽 하바란엔 묘비가 없는 공동묘지가 있다. 원래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이 묻히는 곳이었는데, 1988년 이란 당국이 정치범을 대규모로 처형한 뒤 시신을 가져다 버렸다. 가족들이 발견했을 때 시신들은 매장도 되지 않은 채 쌓여 있었다고 한다. 이란 정부는 추모를 막았고, 무덤을 식별할 수 있는 표지를 없앴고, 묘지를 불도저로 밀어버렸으며, 꽃도 심지 못하게 석회와 소금물을 뿌렸다. 최근엔 2m 높이의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 밖에서 바라볼 수도 없게 만들었다. 희생자 가족이 구성한 단체 ‘하바란의 어머니들’은 정부의 탄압 속에서도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36년째 멈추지 않고 있다.

▷처형은 이란-이라크 전쟁 말기부터 준비됐다. 희생자들은 이란인민전사(PMOI)나 공산당원 등 좌파들로 1979년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팔레비 왕정을 전복할 땐 같은 편에서 싸운 이들이었다. 혁명 성공 뒤 반체제 세력으로 몰린 것이다. 주로 평화시위를 하다 체포된 이들이었다. 당시 이란 전역에서 5000∼3만 명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증언에 따르면 6인 1조로 지게차에 실려 30분마다 크레인에 목이 매달렸다고 한다. 아이들도 희생됐다. 22일 동안 채찍질을 550번 당한 끝에 숨진 여성도 있었다.

▷최고지도자 호메이니가 처형 명령을 내렸고, ‘죽음의 위원회’로 불리는 4인 위원회가 ‘재심’을 해 교수형 판결을 내렸다. 각 판결에 5분도 안 걸렸다고 전해진다. 4인 위원 중 한 명이 19일(현지 시간) 헬기 사고로 외교장관과 함께 숨진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이다. 1988년 28세로 수도의 검찰청 차장으로 일했던 그에겐 ‘테헤란의 도살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 말고도 대(大)처형에 관여한 이들은 이후 승승장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강경파인 라이시 대통령은 집권 이후에도 반정부 시위를 가혹하게 탄압했다. 2022년 22세 여성이 히잡을 느슨하게 썼다는 이유로 ‘도덕경찰’에 끌려갔다가 의문사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를 겨냥해 ‘독재자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가 등장하기도 했다. 정부의 강경 진압으로 500여 명이 숨졌고, 2만2000여 명이 체포됐다. 정부에 반대하는 이들의 원한은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

▷추락한 헬기에서 죽음은 순식간에 닥쳤을 터이다. “이 쉬운 죽음은 그들에게 충분하지 않아요. 그들은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개처럼 울부짖으며 길고 고통스러운 처벌을 받아야 했어요.” 이란 북서부 라히잔에 사는 한 시민(55)이 미국 뉴욕타임스(NYT)에 밝힌 소감이다. 이런 이들과는 반대로 테헤란의 광장엔 라이시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인파가 운집하기도 했다. 이란의 오래 묵은 한(恨)은 언제나 풀리게 될까.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05-24 “비혼 선언하면 축의금 달라”

 

결혼 축의금 지출이 많은 5월, 결혼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청첩장을 받고 고민이 많아진다. 받을 일 없는데 꼭 내야 하나. 얼굴 안 볼 사이도 아니니 5만 원만 내고 가지 말까. 요즘은 당당하게 ‘비혼식’을 열고 축의금을 회수하거나, 비혼 친구가 여행이나 이사 갈 때 결혼한 친구들이 목돈을 모아 축의금 빚을 갚기도 한다. 몇몇 기업은 “비혼이지만 축의금은 받고 싶어” 하는 직원들에게 지원금을 주는데 일명 ‘비혼 축의금’을 둘러싼 찬반 논란이 뜨겁다.

▷비혼 축의금은 사내 복지와 공정을 중시하는 MZ세대 직원들을 붙들어두기 위해 기업들이 하나둘 도입하기 시작한 제도다. 직원이 결혼하면 유급휴가와 축하금을 주듯 비혼 직원에게도 비슷한 혜택을 주는 것이다. LG유플러스가 비혼 선언 시 결혼 축의금과 같은 기본급 100%와 유급휴가 5일을 주고, 롯데백화점은 40세 이상 직원이 비혼을 선언하면 지원금과 유급휴가 5일을 준다. 최근에는 공공기관으로는 처음으로 IBK기업은행 노조가 이 제도 도입 요구를 준비 중이다.

▷비혼 축의금을 요구하는 쪽에서는 일을 잘해 포상금과 휴가를 주는 것은 괜찮지만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적인 혜택을 주는 것은 부당하다고 본다. 사내 복리후생 제도가 기혼자를 우대하고 있는데, 직원들 대부분이 결혼하고 정년 때까지 다니던 시절엔 문제가 없었지만 요즘은 미혼도 많고 회사도 자주 옮겨 다니므로 시대 변화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료 직원이 신혼여행이나 출산휴가를 간 동안 빈자리를 메우느라 고생한 비혼 직원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하는 차원에서도 지원금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반대쪽에선 경조금이란 결혼하고 아이 낳고 부모님 돌아가시면 힘들고 비용도 드니 주는 것인데 결혼도 출산도 안 하면서 비혼을 선언했다는 이유만으로 축의금을 요구하는 건 경우가 아니라고 따진다. 그런 논리라면 ‘무자녀 학자금 지원’도 해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기업으로선 인구 늘려주는 가족이 있어야 존재하므로 결혼하고 아이 낳는 직원을 우대하는 게 당연한데, 민간기업도 아니고 IBK기업은행 같은 공공기관이 비혼 축의금을 주면 저출산을 부추기는 것 아니냐는 논리다.

▷예전에 어느 기업에서는 임직원 자녀가 대학에 가면 축하금을 주는 문제로 특혜 논란이 제기된 적이 있다. 결국 자녀가 대학을 안 가도 비슷한 지원금을 주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대학진학률이 높아진 후로는 대학 축하금 놓고 누군 받네 못 받네 하는 일은 사라졌다. 비혼 축의금 논란도 소수였던 비혼 인구가 늘면서 벌어진 일이다. 결혼이든 동거든 젊은 청년들이 축하받으며 짝을 짓고 아이도 낳는 문화가 대세가 돼 비혼 축의금 가지고 입씨름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5-25(토) 낙선·낙천자 행렬 이어 ‘문고리 3인방’ 출신까지 용산행

 

윤석열 대통령이 박근혜 청와대의 ‘문고리 3인방’ 중 하나로 국정농단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정호성 전 대통령부속비서관을 대통령실에 기용하기로 했다. 그가 맡을 자리는 시민사회수석 아래 3비서관이다. 정 전 비서관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는 복심 중의 복심이었다. 검찰이 압수한 그의 휴대전화에는 비선(秘線) 최순실과 나눈 대면 대화와 전화 통화가 여럿 녹음돼 있었다. 최순실이 그에게 “받아 적으라”며 지시하는 듯한 육성이 공개되면서 대통령직은 무게를 잃었고, 탄핵으로 이어졌다.

▷윤 대통령은 2016년 특검 파견검사 시절 그를 수사했고, 구속기소했다. 1년 6개월 만기 출소한 이후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에게 우호적이었다. 취임 첫해 사면·복권시켰고, 이젠 비서관으로 기용하기에 이르렀다. 정 전 비서관이 지난해 국가정보원 산하 기관에 자문위원으로 비공개 위촉됐는데, 용산의 힘이 작용했다는 게 정설이다. “수사와 재판으로 소원해졌던 박 전 대통령이 추천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친박계의 설명이다.

▷윤 대통령은 청와대 문서를 최순실에게 유출한 혐의로 자신이 구속한 인사를 발탁해 쓰기로 마음먹었다. 국정 농단의 문제점을 국민들이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논란이 될 게 뻔한 이런 인사를 왜 단행하려는지는 정확지 않다. 정 전 비서관의 대통령실 근무는 부적절하다. 정부문서 유출이란 범죄 말고도 그는 대통령과 최순실의 관계를 알면서도 바로잡지 못했다. 법원이 그의 판결문에 “농단의 방조자가 됐다”고 쓸 정도였다. 그가 맡을 시민사회 3비서관 자리는 민심을 파악해 대통령에게 정확히 보고해야 하는 자리다. 부적절한 인사를 기용한다면 총선 패배 후 “민심에 더 귀 기울이겠다”던 대통령 말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

▷‘농단 문고리’ 인사의 발탁은 4월 총선 참패 후 뭔가 어긋나는 듯한 대통령실 인사의 극적인 사례가 될 듯하다. 공직사회의 복지부동이 확산되는 가운데 국정의 중핵인 용산 대통령실이 낙천·낙선자로 채워지고 있다. 교체된 비서실장, 정무수석, 시민사회수석이 그렇다. 정무수석실 아래 비서관 3명은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지금의 공직기강비서관은 총선 출마를 위해 인사비서관을 그만둔 지 4개월 만에 다시 회전문이 되어 돌아왔다. 탕평이니 삼고초려니 하는 말은 역사책에만 있는 일이 돼 버렸다.

▷민주당은 “탄핵에 대비하는 거냐”는 조롱성 비판을 내놓았다. 형사처벌 대상이 된 총선 후보가 유독 많았던 조국혁신당조차 “(용산은) 부끄러운 줄 알라”고 반응했다. 그런데도 집권당에선 아무런 대응이 없다. 누구도 “발표 전이니 인사 결심을 거둬들여야 한다”는 말을 못 하고 있다. 용산은 민심에서 동떨어져 가고, 여당은 민심의 전달자 역할을 못 하고 있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5-27(월) 삼성전자 상대 前 임원 특허소송에 美법원 “혐오스럽다

 

“부정직하고 불공정하며 기만적이고 법치주의에 반하는 혐오스러운(repugnant) 행위다.” 삼성전자 전직 임원이 회사를 상대로 낸 특허 침해 소송에서 최근 미국 법원이 삼성전자의 손을 들어줬다. 기각 판결을 내린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원고에 대해 강한 비판을 쏟아냈다. 재판을 맡은 미 텍사스 동부지법은 ‘특허권자의 천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원고 승소율이 높은 곳이다. 여기에서 이렇게까지 판단한 것을 보면 원고의 행위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안승호 전 삼성전자 IP센터장(부사장)이 설립한 특허관리전문회사(NPE) 시너지IP와 미국 이어폰·음향기기 업체인 스테이턴 테키야 LLC는 2021년 11월 삼성전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삼성전자가 스마트폰 ‘갤럭시 S’ 시리즈와 이어폰 ‘갤럭시 버즈’ 등에서 테키야의 무선이어폰과 음성 인식 관련 특허를 무단 도용했다고 주장했다. 안 전 부사장은 2010∼2019년 삼성전자에서 지식재산권(IP) 업무를 총괄했다. 이번 소송 대상인 음성 인식 관련 특허 전략 등도 짰다. 그래놓고는 퇴사 후 2020년 시너지IP를 설립하고 친정을 상대로 칼을 겨눈 것이다.

▷미국 법원은 특허 침해 여부를 따질 필요도 없이 소송 자체가 불법적으로 제기됐다고 판단했다. 안 전 부사장이 부하 직원들과 공모해 회사 내부 기밀 정보를 빼돌린 뒤 이를 활용해 소송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법원은 “삼성이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안 전 부사장이 삼성전자 재직 당시 회사 지원을 받아 미국 로스쿨에서 공부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점도 지적했다. 안 전 부사장은 국내에서도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NPE들은 기술적 가치는 높지 않지만 권리 범위는 넓은 특허를 싸게 사들인 뒤 소송을 제기해 거액의 합의금을 노린다. 반도체, 스마트폰, 자동차, 가전 등 다양한 제품군을 수출하는 한국 기업은 좋은 먹잇감이다. 삼성전자는 2019∼2023년 미국에서만 NPE들로부터 9일에 1번꼴인 208건의 특허 침해 소송을 당했다. 한국 기업이 개발한 특허를 사들인 뒤 이를 무기로 한국 기업에 거꾸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한다.

▷NPE를 흔히 ‘특허괴물(patent troll)’이라고 부른다.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트롤은 동굴 등에 숨어 살면서 심한 장난을 걸거나 사람들을 집요하게 괴롭힌다. 온라인에서 고의로 도발하는 것을 ‘트롤링’이라고 하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드는 특허 소송이 남발되면 기업들의 피로감이 커지고 산업 전체에도 부담을 준다. 더 이상 악의적인 ‘트롤링’에 억울하게 당하지 않도록 정부와 기업이 함께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5-28 “한국-일본-홍콩 ‘은둔형 외톨이’ 150만 명”

 

“이미 포기해버린 느낌,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홍콩에 사는 찰리(19)는 열다섯 살 때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스스로를 집에 가뒀다. 부모님과 할머니까지 네 식구가 함께 사는 30㎡ 넓이 아파트, 그중에서도 작은 이층침대가 그의 세계 전부였다. 밥도 침대 위에서 먹었다. 미국 CNN방송은 최근 찰리를 비롯한 아시아 청년들의 은둔 문제를 다루면서 “홍콩과 일본, 한국에 은둔형 외톨이가 150만 명 이상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CNN이 거론한 3개국은 모두 입시 등 경쟁이 치열하고 ‘주변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이 심한 나라로 꼽힌다. 찰리는 교사들이 ‘나쁜 학생’을 꾸짖을 때 했던 “그런 식이면 나중엔 거지가 될 거다”라는 말을 마음속 깊이 받아들였다고 했다. 우리나라 학교에서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세 나라는 모두 자살률이 아시아에서 6위권에 드는데, 특히 우리 20대의 자살·자해 시도는 최근 수년간 급증 추세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은 청년들이 나약해서 갖게 되는 생각이 아니다. 성적이나 취업, 외모 등 획일적 기준으로 모두를 줄 세우니 이제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이들이나 자라는 아이들까지도 일찌감치 ‘낙오했다’, ‘실패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일본과 함께 유난히 타인의 시선에 민감한 문화를 가진 탓인지 ‘비교질’이 잦고, ‘○○계급표’ 같은 게 난무한다. 그러나 성공의 ‘좁은 문’을 통과하는 이들은 엎어놓은 압정 끝처럼 소수에 불과하다. 다수를 자책으로 몰고 가 불행하게 만드는 구조다.

 

▷하지만 압축 근대의 폭력을 앞서 헤쳐온 기성세대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나누기보단 부아만 돋우는 훈계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다들 그러고 사는데 왜 너만 유난을 떠느냐.” 은둔형 외톨이 청년들이 자주 듣는 말이라고 한다. 미국 심리학자 매슬로의 이론을 빌리면 생리적·안전 욕구 충족에 급급했던 부모 세대가 과거의 경험에 갇혀 애정·소속, 존중, 자아실현 등 욕구의 좌절에 잘 공감하지 못하는 건 아닌가 싶다. 자식이 은둔 중이라는 걸 숨기려고만 하다가 문제를 악화시키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스스로가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순간이 기억에 남아요.’ 은둔에서 벗어나 다른 은둔 청년을 돕고 있는 한 청년의 말이다. 우울증 경험을 진솔하게 다룬 에세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의 백세희 작가는 “힘내라는 말, 자신감을 가지고 위축되지 말라는 말은 때론 독”이라며 “난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 의심 없이 편안하게, 그뿐이다”라고 했다. ‘실패해도 괜찮다, 남들과 다르게 살아도 괜찮다.’ 은둔하는 청년들에게 이런 말을 자신 있게 해줄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05-29 “안 쓰는 도로 팝니다” 세수 급감한 지자체들의 고육

 

요즘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선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에게 보유세를 물리자는 얘기가 나온다. 반려동물 증가로 개 물림 사고나 동물 유기 등이 늘고 있는데 여기에 예산을 할애하기 어려울 정도로 곳간 사정이 급하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무자녀세 도입을 검토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지자체들이 저출산 지원책을 내놓긴 했지만 실탄은 없다 보니 이런 고육책까지 거론되는 듯하다. 친환경 차량 세제 혜택을 줄이고 전기차 주행세를 도입하자는 목소리 역시 커지고 있다. 지자체들이 줄어드는 세수를 어떻게든 만회해보려는 몸부림이다.

▷지난해 중앙정부의 역대급 세수 결손으로 지자체 곳간은 직격탄을 맞았다. 소요 예산보다 56조 원이나 덜 걷히다 보니 지방으로 가는 교부세·교부금이 23조 원가량 줄었다. 부동산 경기침체와 공시지가 하락으로 지자체 수입원인 취득세와 재산세 수입도 줄어들었다. 기업들 실적마저 부진해 이들이 내는 법인지방소득세도 감소했다. 쪼그라든 재정으로 살림을 꾸리자니 예산이 줄줄이 깎여나간다. 인천에선 도로에 금이 가고 아스팔트가 깨져도 보수공사를 못 하고 있고, 학생들 무상급식이 중단될 위기에 놓인 지자체도 있다.

▷지방경제 활성화를 위한 예산이 깎이는 게 특히 문제다. 기업 투자유치 보조금, 전문인력 인건비 지원, 대학생 인턴 지원, 골목상권 부활 사업 등이 축소되고 있다. 일자리가 생기고 돈이 돌아야 세수가 발생하는데 경제 활력을 키우는 사업이 위축되면 오히려 악순환에 빠져 재정 가뭄이 더 심각해질 수 있다. 지방채를 발행해 돈을 끌어오려는 지자체도 많지만 잘 팔리지도 않을뿐더러 5%에 달하는 고금리가 큰 부담이다.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 중 재정자립도가 가장 낮은 강원도는 안 쓰는 도로를 민간에 팔기로 했다. 행정 목적으로는 용도가 마땅치 않지만 민간의 수요가 있을 만한 도로를 골라내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강원도는 도내 미활용 도로를 매각하면 향후 10년간 1200억 원의 수입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지자체가 이런 식으로 공공자산을 내다 팔면 당장은 보탬이 되겠지만 장기적으론 세수 기반을 잃게 될 수 있다.

▷감세 기조로 인해 중앙정부부터 세수 확보에 애를 먹는 마당에 지자체 교부세가 늘어나길 기대하기는 당분간 어려운 상황이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지방정부들 사정이 녹록지 않지만 광역단위로 재산세를 걷은 뒤 고르게 배분해 지자체 간 격차를 줄이는 대안을 고려해볼 만하다. 서울은 시가 각 자치구 재산세의 50%를 걷어 25개 구에 나누는 재산세 공동과세를 시행 중인데 이를 전국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물론 이 역시 광역지자체가 쇠락한다면 단기 처방에 그칠 수 있어 지방 세수의 파이를 키워야 하는 숙제는 여전히 남는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5-30 “아파트 한 채면 끝”… ‘인생역전’ 어려워진 로또 당첨금

 

로또’는 단순한 복권 명칭이 아니라 ‘인생역전’의 대명사다. 과거엔 주말 인사로 “월요일에 회사 안 나오면 로또 된 줄 알아라”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이젠 로또 1등이 돼도 회사를 그만두긴 쉽지 않다. 올해 21차례 로또 1등 당첨금은 1개당 평균 20억3300만 원, 세금을 제외하면 손에 쥐는 건 14억 원 정도다. 평균 12억 원인 서울 아파트 한 채 사면 끝이다. 이젠 1등 당첨금액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에 최근 정부도 “의견을 수렴해 볼 이슈인 것 같다”고 응답했다.

▷한국에서 로또는 2002년 12월부터 시작됐다. 처음에는 한 게임당 2000원이었고, 5회까지 당첨금 이월이 가능하도록 했다. 하지만 7∼9회 차 1등 주인을 못 찾으면서 한 주에 2600억 원이 팔릴 정도로 광풍이 일자 2003년 2월부터 이월을 2회로 제한했다. 2003년 4월 약 407억 원의 역대 최고액 당첨금이 나오자 사행성을 우려한 정부는 2004년 8월부터 게임당 1000원으로 가격을 낮췄고, 이후 20년 동안 구조가 크게 바뀌지 않고 있다.

▷로또 당첨금이 20년째 평균 20억 원 수준을 유지하는 동안 주식, 부동산 등의 자산 가격이 가파르게 오르면서 로또 1등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하락했다. 1983년 처음으로 1등 당첨금 1억 원 시대를 열었던 올림픽복권의 경우 당첨금으로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115㎡를 두 채 살 수 있었다. 2004년 1월 로또 1등 당첨금액은 서울 평균 수준의 아파트 10채 값이었다. 하지만 이젠 서울 강남의 고급 아파트를 살 수 있기는커녕 목 좋은 곳의 ‘로또 청약’보다 못한 수준이 됐다.

 

▷한국 로또 당첨금은 해외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미국의 로또인 파워볼과 메가밀리언은 1등 당첨 확률이 3억분의 1 정도다. 814만분의 1인 한국 로또에 비해 극히 희박하다. 이월 제한도 없어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는 경우가 나온다. 역대 최대 당첨금액은 2022년 11월 파워볼에서 나온 20억4000만 달러(약 2조8000억 원)다. 유럽 9개국에서 공동 판매되는 유로 밀리언은 2022년 7월 2억3000만 유로(약 3400억 원)의 당첨자가 나왔다. 일본의 로또7은 이월금이 있을 경우 최대 10억 엔(약 87억 원)까지 가능한데 한국과 달리 세금도 붙지 않는다.

▷지난해 로또 등 복권 판매액은 6조7507억 원으로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팍팍한 살림살이의 서민들에게 로또는 버릴 수 없는 희망이자 행운이다. 안주머니에 복권 한 장 품고 있으면 당첨일까지는 부자가 된 듯 든든하다. 지나치게 사행성을 조장할 정도는 곤란하겠지만 서민들에게 위로를 주는 희망의 가격이 지금보단 조금 높아져도 괜찮지 않을까.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5-31(금) ‘1조3800억 재산분할+20억 위자료’… 한국 역대 최대 이혼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 2심에서 최 회장이 재산 1조3800억 원을 노 관장에게 나눠주고, 위자료 20억 원도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최 회장과 노 관장의 합계 재산을 총 4조 원으로 보고 재산 형성 기여도 등을 반영해 각각 65%, 35%로 나누라는 게 판결의 핵심이다. 그대로 확정될 경우 한국의 이혼소송 사상 역대 최대의 재산 분할이 된다.

▷서울고등법원 가사2부가 어제 판결한 재산 분할액, 위자료는 1심보다 20배나 많다. 1심 판결은 재산 분할 665억 원, 위자료 1억 원이었다. 재산 분할액이 급증한 이유는 나눌 재산의 범위가 확대됐기 때문이다. 1심은 최 회장이 보유한 그룹 지주회사 SK㈜ 지분은 분할 대상이 아니라고 봤는데 2심에서 뒤집혔다. 다만 지급은 지분이 아닌 현금으로 하도록 했다.

▷최 회장 보유 SK㈜ 주식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이냐가 이번 소송의 최대 쟁점이다. 1심은 이 지분이 부친인 고 최종현 선대회장으로부터 최 회장이 증여·상속받은 ‘특유재산’이어서 나눌 필요가 없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2심은 노 관장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노 관장 부친인 고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보호막, 방패막이 역할을 하며 SK그룹의 성공적 경영 활동에 무형적 도움을 줬다”고 판단했다.

 

▷2015년 혼외자의 존재를 공개하면서 이혼 의사를 밝힌 최 회장은 2018년 2월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당초 이혼에 반대하던 노 관장은 2019년 말 이혼을 받아들이는 대신 최 회장 보유 SK㈜ 지분의 절반과 위자료 3억 원을 요구했다. 노 관장 측은 1심에서 패소한 뒤 주식 대신 현금 2조 원과 위자료 30억 원으로 조건을 바꿨다.

▷2심 재판부는 위자료를 20억 원으로 높이면서 “혼인 파탄의 정신적 고통을 보상하기에 1억 원은 너무 적다”고 했다. 근거로 최 회장이 노 관장과 별거 후 김희영 티앤씨재단 이사장과 관계 유지 등에 219억 원 이상을 지출한 점을 들었다. 재판부는 “최 회장이 소송 과정에서 부정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일부일처제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상 초유의 이혼 비용을 어떻게 마련할 건지가 관심사다. 최 회장은 SK㈜ 지분 17.7%와 비상장 계열사인 SK실트론 29.4% 등 2조 원어치가 넘는 주식을 갖고 있다. 현금 1조3800억 원을 마련하려고 일부 지분을 처분할 경우 그룹 지배구조에 구멍이 생길 우려가 있다. 어제 SK㈜ 주식은 경영권 분쟁 가능성 때문에 급등했다. 최 회장 측은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할 뜻을 밝혔다. 대기업 총수의 이혼소송이 한국 재계 2위 그룹의 미래를 흔들고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 횡설수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