政治(人) 이야기 2024-05/
05-01(수) 의료개혁 공조가 尹·李 협력 시험대
우여곡절 끝에 지난 29일 열린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간의 첫 영수회담을 두고 ‘빈손’이었다는 혹평이 있다. 하지만 꽉 막힌 정국을 풀어나갈 실마리를 제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거대 야당의 당 대표일지라도 ‘형사 피고인’과는 대화하지 않겠다던 윤 대통령의 완고한 태도에 변화가 있다는 점, 의대 증원과 의료개혁에서 협력의 의지를 나눈 점, 그리고 추후 회동의 여지를 남긴 점 등이 말해준다.
윤 대통령의 태도 변화는 정국을 협치로 전환하는 데에 절대적인 필요조건이다. 취임 후 거의 2년 동안 이 대표의 8차례 회동 제의를 거부하면서 정치적 동반자로 인정하지 않았던 입장에 변화가 있음은 분명하다. 물론 총선 대실패의 결과로서 국정 운영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지만, 스스로 먼저 회담을 제안하고 회담에서 듣는 자세를 취한 것은 현실을 인식한 변화이다.
4·10 총선 참패의 원인은 진영 간 극단적인 적대감으로 갈등을 벌여 정권심판론이 드세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통령이 나서서 ‘반국가세력’ ‘카르텔 집단’ 등에 대항해 ‘연대’해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기름을 붓기도 했다. 선거 후보 시절에나 할 수 있는 말을 국가원수로서도 계속했으니 국민을 갈라놓는 지도자를 국민이 선호할 리가 없다. 국가원수는 모든 국민을 포용해야 하고 주요 정치 세력의 지도자는 좋든 싫든 정치의 대상으로 인정해야 한다.
윤 대통령이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는 것은 야당 대표를 정치 동반자로서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대표가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적으로 활용하자’고 해 다른 의중을 보였지만, 향후 여당 지도부가 형성되면 여야 간의 협치 가능성을 열어 놓은 게 사실이다. 이번 회담은 영수가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항간의 말 이상으로 대통령의 태도 변화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야당과 대화의 물꼬를 텄다고도 할 수 있다.
이번 회담을 한층 뜻있게 해주는 것은, 이 대표가 의료개혁과 연금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을 보였다는 점이다. 특히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문제에 대해 이 대표가 ‘민주당도 적극 협력하겠다’고 함으로써 여야 정책 협력의 가능성을 열어 놨다. 의대 증원 문제로 불거진 의료대란은 국민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심각한 사태다. 여론도 초기에는 정부에 유리하다가 사태 악화로 정부에 불리하게 되는 상황에서 야당의 협력은 커다란 정치적 원군이다.
한편 채상병특검법과 김건희여사특검법, 이태원참사특별법과 대통령 거부권 행사 문제, 전 국민 25만 원 민생 지원 등에 관해 정부와 야당의 입장 차이가 크며 협치의 길은 멀기만 하다. 야당 측은 대통령이 민생 회복과 국정 전환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고 비판하고, 회담 이튿날부터 임기가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제21대 국회에서 특검법과 특별법을 통과시키려고 입법 강공으로 몰아치고 있다. 협치를 위해서는 야당의 협력이 충분조건임은 물론이다.
거대 야당은 총선 민심이 정부 심판에 더 무게를 뒀을 뿐 입법 독주와 다수 횡포를 용납한 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22대 국회가 21대를 답습한다면 국민의 회초리는 국회를 심판할 것이다.

문화일보 양승함 前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05.01 역사 막말 김준혁 역사 특강, 양문석엔 환호, 김남국은 복당
민주당 친이재명 조직 ‘더민주전국혁신회의’가 당선자 모임을 갖고 “이재명 대표를 지켜내고 부화뇌동했던 당내 기득권 세력들을 공천 혁명으로 이겨냈다”고 했다. ‘혁신회의’는 작년 이 대표 체포동의안 표결 때 “가결표를 던지는 의원들은 끝까지 추적·색출해 정치생명을 끊겠다”고 했다. 체포동의안이 통과되자 “수박(비명계)과의 전쟁을 시작한다”고 했다. ‘불체포 특권 포기’ 약속은 저버린 채 이 대표의 각종 비리 혐의에 대한 방탄에 앞장섰다. 윤석열 정부 장관과 검사들에 대한 탄핵 때도 “불참하는 의원들 실명을 공개하겠다”고 했었다. 이들에 대한 민주당 공천은 ‘비명횡사 친명횡재’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런 공천을 이들은 ‘공천 혁명’이라고 했다.
‘혁신회의’는 이번에 출마자 50명 중 31명이 당선돼 당내 최대 계파로 떠올랐다. 그 첫 모임에서 공동대표는 ‘미군에 이대생 성 상납’ ‘퇴계 이황은 성관계 지존’ 등 막말로 지탄을 받았던 김준혁 당선자를 소개하며 “보란 듯이 역사학 특강을 듣겠다”고 했다. 대학생 딸 명의로 사업자 대출을 받아 강남 아파트를 산 양문석 당선자엔 “멋지다” “전국구 스타”라는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날 모임엔 민주당 국회의장 출마자와 원내대표 후보가 모두 참석해 구애 경쟁을 했다. 국회의장 후보들은 하나같이 국회의장의 정치적 중립을 규정한 국회법 취지를 무시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이들 입맛에 맞추겠다는 것이다. 이들은 당대표 정무조정실장과 사무부총장, 전략기획위원장 등 주요 당직도 차지했다. 당을 장악하고 국회 운영까지 좌지우지할 것이다.
국회 상임위 활동 중 거액의 코인 거래로 탈당했던 김남국 의원은 ‘당당히’ 복당하면서 “마녀사냥으로 탈당을 당한 것”이라고 했다. 친명 핵심 ‘처럼회’ 소속인 그는 탈당과 총선 불출마로 국회 제명을 피했다. 법원의 결정이 난 뒤엔 사과문까지 냈었다. 그러더니 총선이 끝나자 억울한 피해자라고 한다.
조선일보 사설
05.01 조국·윤미향에 대한 대법원의 책임
불구속 실형, 당선무효형 사건 대법원 선고 지연되는 경우 많아
한명숙 2년, 최강욱 1년 3개월 걸려… 선고 빨리 해야 제때 정의 실현

▲조국 조국신당대표, 한명숙 전 총리, 윤미향 의원(왼쪽부터)
조국혁신당이 지난 총선에서 원내 제3 정당까지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법원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고 본다. 자녀 입시 비리와 청와대 감찰 무마 혐의로 기소된 조국 대표 재판은 1심만 3년 2개월, 2심은 1년이 걸렸다. 1심을 맡았던 우리법연구회 출신 부장판사가 돌연 휴직을 하는 등 재판을 지연하지 않았다면, 2심 재판부가 징역 2년 실형을 선고하면서 조 대표를 법정 구속했다면 총선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법원이 정치적 결과까지 예상해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 대표는 그 상황을 자기 정치에 백분 활용해 결국 ‘성공’했다. 재판 결과도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는 총선 전 유튜브 채널에 나와 형(刑)이 확정되면 “푸시업 하고 스쿼트 하고 플랭크 하면서 건강 관리 해서 나오겠다”고 했다. 2심 재판부는 방어권 보장을 위해 법정 구속을 안 했을 뿐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다”며 그에게 실형을 선고했는데, 그는 수감돼도 ‘반성’ 대신 ‘건강 관리’ 하겠다고 한 것이다. 사실상 법원 판결에 대한 조롱이나 마찬가지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정리할 책임은 대법원으로 넘어갔다. 국회의원은 일반 형사 사건에서 금고 이상 형이 확정되면 의원직을 상실하고, 조 대표의 형량은 당선무효에 해당한다. 그 취지를 살리려면 선고를 가급적 빨리 해야 한다. 그런데 조 대표와 같은 ‘불구속 실형’ 사건에 대한 상고심 판단이 대체로 빨리 나오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정치인 사건은 특히 더 그렇다.
불법 정치 자금 9억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던 한명숙 전 총리가 대표적인 경우다. 그 역시 2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지만 법정 구속은 안 됐는데, 그 형량을 그대로 확정한 대법원 판결은 2심 선고 후 거의 2년이 지나서 나왔다. 피고인이 구속된 사건은 1심 6개월, 2심 8개월, 3심 8개월 등으로 구속 기간 제한이 있어 대부분 재판을 신속하게 진행한다. 그런데 불구속 실형 사건엔 그런 제한이 없어 선고가 늦어지는 경향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불구속 실형의 취지가 그 상태로 몇 년씩 놔두자는 것은 분명 아니다. 제때 정의를 실현하려면 적어도 구속 사건에 준해 최대한 신속하게 선고해야 한다고 법조계 인사들은 말한다. 피고인 입장에서도 신속하게 확정 판결이 나와야 언제 실형이 집행될지 몰라 불안해하는 상황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건이 무죄라고 해도 다를 게 없다.
실형은 아니지만 당선무효형이 선고된 사건도 마찬가지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한 후원금을 빼돌린 혐의 등으로 기소된 윤미향 의원의 경우 작년 9월 2심에서 징역형의 집행유예가 선고됐지만 7개월이 지난 지금도 대법원 판결이 나오지 않고 있다. 당선무효형인데 판결이 늦어지면서 4년 임기를 다 채울 판이다. 조 대표 아들에게 허위 인턴 확인서를 써준 민주당 최강욱 전 의원도 2심에서 당선무효형인 징역형의 집행유예가 선고됐지만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까지 1년 3개월이 걸렸다. 단순한 사건이었는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다. 결국 그는 4년 임기 중 3년 4개월을 채웠다. 이것을 정의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일이 조 대표 사건에서 반복돼선 안 된다. 일각에선 오는 8월 대법관 3명이 퇴임하는 상황이 변수가 될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후임 대법관 임명엔 국회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대법원이 거대 야당 눈치 보느라 조국·윤미향 두 사람에 대한 선고를 늦출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닐 거라고 믿지만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대법원은 최고 사법기관이란 간판을 내려야 한다.
조선일보 최원규 논설위원
05.02 ‘여야 합의’ 요구한 국회의장에 린치 가하는 친명 돌격대

▲김진표 국회의장이 지난 달 30일 국회 의장실에서 열리는 여야 원내대표 회동에 입장하고 있다./연합뉴스
김진표 국회의장이 2일 국회 본회의를 앞두고 핵심 쟁점인 해병대 채모 상병 특검법 등에 대해 ‘여야 합의’를 요청했다. 그러자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2일 채 상병 특검법이 처리되지 않으면 김 의장의 해외 순방에 동행하기 어렵다”고 했다. 민주당 의원 30여명도 “필사적으로 순방을 저지할 것” “국민의힘 편” “환장하겠다”고 했다. 김 의장은 4일부터 국제회의 참석 등을 위해 북·남미 순방을 떠나는데, 여야 이견이 있는 특검법을 직권 상정해주지 않으면 발목을 잡겠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의장이 해외 유람이나 다닌다’는 식으로 비아냥거렸다. 박지원 당선인은 김어준씨 유튜브에서 “(특검법을) 의장이 직권 상정하지 않고 해외에 나간다. 개XX”라고까지 했다. 이후 ‘욕은 사과한다’고 했다. 입법 폭주에 동조하지 않으면 민주당 출신 입법부 수장도 바로 동네북 취급한다.
차기 국회의장 민주당 후보들은 전부 ‘김 의장처럼 하지 않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있다. 추미애 당선인은 “국회의장이 중립은 아니다”, 조정식 의원은 “의장 직권으로 본회의를 열어 (현안을) 처리하겠다”, 우원식 의원은 “민주주의에 중립은 없다”고 했다. 친명 좌장으로 꼽히는 정성호 의원도 “(의장이) 기계적 중립만 지켜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국회법이 의장의 당적 보유를 금지한 것은 최소한의 균형은 맞추라는 뜻인데 대놓고 무시하고 있다. 지금 민주당은 ‘이재명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의장이 되든 이 대표 극성 지지층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의장이 기본적 협치와 중재 노력마저 팽개치면 국회는 전쟁터가 된다.
민주당은 지난 총선에서 압승하자마자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양곡관리법을 일부 수치만 바꿔 다시 본회의에 상정했다. ‘운동권 셀프 특혜법’이라는 민주유공자법도 국민의힘이 위원장인 법사위를 우회하려고 본회의 직회부를 단독 처리했다. 벌써 입법 폭주 허가증을 받은 것처럼 행세한다. 차기 국회에선 일찍이 보지 못한 반민주 폭주가 벌어질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
05.02 윤·이 회담 끝나자마자 입법 폭주, 민주당 협치 의지 있나
2일 본회의 열고 쟁점 법안 강행 처리 태세 확고
‘이태원 특별법’ 합의는 다행, 타협 물꼬 이어지길
더불어민주당이 오는 29일 21대 국회가 끝나기 전에 쟁점 법안들을 잇따라 강행 처리할 태세다. 민주당은 오늘 국회 본회의를 열어 예고했던 채 상병 특검법과 전세사기특별법을 처리할 예정이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폐기된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비롯해 간호법과 노란봉투법, 김건희 여사 특검법 등도 처리를 벼르고 있다. 다만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던 이태원 참사 특별법은 여야가 어제 전격 합의를 끌어냈다. 특조위 구성과 활동 기간은 민주당 입장을 수용하되 특조위 권한은 국민의힘 주장대로 당초 안보다 축소해 타협을 도출했다. 정치권의 합의를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요구한 유족들 뜻대로 여야가 타협을 이룬 점에선 의미가 있다.
하지만 다른 쟁점 법안들에 대해선 여야가 한 치 양보 없이 맞서고 있다. 김진표 국회의장은 양당 간 합의가 이뤄져야 본회의를 열겠다는 입장이지만, 민주당은 김 의장이 오늘 본회의를 열지 않으면 4일 의장의 미주 순방길에 홍익표 원내대표가 동행하지 않겠다며 압박하고 있다. 민주당의 이 같은 입법 폭주는 사흘 전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의 회담 취지에도 역행한다는 점에서 실망스럽다. 결과물 없이 끝난 회담이지만 협치의 물꼬를 튼 출발점으로 의미가 작지 않았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회담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쟁점 법안들만 콕 찍어 강행 처리에 나섰다. 이번 국회 끝까지 정부·여당을 흔들겠다는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국민의힘이 108석으로 줄어들 22대 국회는 민주당의 독주가 더 심해질 게 명약관화하다. 여기에다 ‘윤석열 정권 심판’을 내걸고 12석을 확보한 조국혁신당과 민주당 간에 선명성 경쟁이 불붙으면 여야 대치는 극에 달할 것이다. 이에 더해 국회의장 도전을 선언한 민주당 다선 의원들마저 친명계의 지지를 얻겠다며 의장의 중립 원칙을 부인하는 극언을 쏟아내고 있다. 5선 정성호 의원은 “협의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6선 추미애 당선인은 “의장은 중립 기어를 넣으면 안 된다”고까지 했다. 22대 국회 최고령 의원이 될 박지원 당선인은 유튜브에서 “김진표 의장이 채 상병 특검법 등을 직권상정하지 않고 해외 순방 간다”며 ‘개××’ ‘놈’ 등의 욕설을 퍼부었다. 국회의장 직은 사회 통합과 대화·타협이 특성인 의회주의의 표상으로 중립 의무를 지키는 게 옳다. 그럼에도 이를 겁박하는 문화가 민주당의 관행으로 자리 잡는 것 아닌지 심히 우려될 뿐이다.
여든, 야든 상식에서 벗어난 폭거를 일삼으면 국민은 반드시 회초리를 들게 돼 있다. 민주당이 지지율 낮은 대통령과 지리멸렬 여당을 상대로 마음껏 입법을 요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수권 정당의 면모를 보여주려면 총선 민심을 잘 헤아려 폭주 대신 타협의 정치를 보여주기 바란다.
중앙일보 사설
05-02 국회를 민주당 의원총회로 만들려는 反의회주의 행패
국회의장은 입법부 수장으로서 본회의 사회권을 갖는다. 여야 갈등의 최후 조정자이기도 하다. 국회가 아니더라도 회의 진행자의 중립은, 스포츠 경기의 심판처럼 원초적 요건이다. 국회법에 의장의 당적 보유 금지를 명시해 중립 의무를 부여한 것도, 국회의장 출신은 더 이상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지 않는 관행도, 출신 정당의 당리당략에 따르지 말고 중립적 위치에서 이견을 조정·중재해야 한다는 당위 때문이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국회법 뭉개기를 넘어 의회민주주의 작동을 가로막는 일이다.
김진표 국회의장이 국회 본회의를 앞두고 채상병특검법 등 쟁점 법안에 대해 여야 합의를 요청한 뒤 더불어민주당으로부터 집단적 행패에 시달리고 있다. 박지원 당선인은 유튜브 방송에서 “개××. (김 의장의) 복당을 안 받아야 한다”는 등 욕설을 퍼부었다. 박주민 원내수석부대표는 “환장하겠다”고 했다. 김 의장은 4일 여야 원내대표와 함께 북·남미 의회 외교를 위해 출국할 예정인데, 홍익표 원내대표는 “순방에 동행하기 어렵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순방을 저지하겠다”라는 의원들이 여럿이고, 정성호 의원은 “만일 (다음 국회) 의장이 되면 저를 대신해서 외유를 보내 드리겠다”고 조롱했다. 박 당선인과 정 의원은 물론 차기 국회의장 출마 예정자들은 “민주주의에 중립은 없다”(우원식), “국회의장이 중립은 아니다”(추미애)는 등 대놓고 중립 의무 폐기를 공언하고 있다.
오는 30일 4년 임기를 시작하는 제22대 국회에선 이런 현상이 더욱 악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위선·막말·궤변 등 저질 의원 수가 크게 늘어난 데다, 이재명 대표의 친위조직 격인 더민주전국혁신회의 등 강경 세력이 거대 야당을 주도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입법 폭주와 대통령 거부권 행사가 속출하고, 국정 표류로 인한 피해는 오롯이 국민이 떠안아야 한다. 국민 갈등을 조정하는 민의의 전당은 강경 세력의 힘자랑 난장판으로 전락하게 된다. 국회의장마저 중립 의무를 팽개치면, 국회 본회의는 민주당 의원총회처럼 운영될 것이다. 민주당을 찍지 않은 49.44%의 국민을 무시하는 반(反)의회주의 행태부터 멈추기 바란다.
문화일보 사설
05-02 협치에 역주행하는 여야 강경파 득세
지난 4·10 총선 결과가 나온 직후, 한국 정치가 나아갈 방향으로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는 협치일 것이다. 지난달 29일 2시간여에 걸쳐 진행된 여야 영수회담은 여야 간 협치의 출범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실질적 협치를 보여주지 못한 보여주기 이벤트였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여야 모두 국민을 보고 나아가겠다고 말하지만, 국민보다 지지층을 더 의식한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당은 제22대 국회와 현재 기준 제21대 국회 모두에서 의석비가 36∼38%에 불과해 단독으로 의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따라서 국정 수행에 야당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반면, 야당은 법률안 신속처리안건 지정 및 무제한토론 종결을 행사할 수 있는 의석을 확보했다. 하지만 대통령 거부권(국회 재의요구권)을 무력화할 의석비 3분의 2를 얻지 못해 야당 역시 정부·여당의 협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협치를 학계에서는 거버넌스(governance)의 번역어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여야가 협력적으로 정치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여야 협치의 대표적 모델은 협의제(consociationalism)다. 극단적 분열 사회에서는 다수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으며 협의제만이 지속 가능한 민주주의 체제를 가져다주는 현실적 대안이라고 정치학자 아렌트 레입하트는 주장했다. 협의제 민주주의의 구체적인 요소로 △거국내각 △상호 거부권 △비례대표 △하위 사회의 자치 등이 제시됐다.
협치는 국회 다수가 모든 사안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고 전제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대통령이 모든 사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전제하지도 않는다. 대통령이든 국회 다수당이든 모두 선거 당시의 일시적 다수에 의해 선출된 권력일 뿐이므로 헌정 가치와 합리성에 벗어날 수는 없다. 소수가 다수를 인정하고, 또 다수도 소수를 인정해야 협치는 실천되는 것이다.
정당의 득표율과 의석비 간 괴리에서 알 수 있듯이 현행 준연동제는 전혀 비례적이지 않으며, 또 민심(유권자의 의도)을 제대로 반영하는 제도가 아니다. 협치는 여러 요소를 제도화할 때 실현되고 지속될 수 있다. 최근 대통령의 야권 인사 기용설에 대한 여야 반응에서 보듯이, 거국내각 등의 협치적 요소는 제도화되지 않고는 지지층이나 반대 진영의 의심과 오해만 증폭시킨다.
사실, 진정한 협치에는 여야 간 형식적 만남보다 각당 내부의 협치 즉 자기 혁신이 더 요긴하다. 여야 내부의 기존 지배구조는 4·10 총선 이후 더 공고해지고 있다. 국민적 지탄을 받아 자당 선거에 악영향을 끼친 정치인이 총선 직후 공공연히 당내 주요 직책에 중용되거나 거명되는 등 아전인수 모습이 여야 간은 물론 각당 내부에서도 지배적이다.
야당 지지자뿐 아니라, 여당 지지층까지 정부·여당의 국정 수행 능력을 의심하기도 한다. 정부·여당 지도부는 변화하지 못해 선거에서 이미 참패했는데도 여전히 혁신하지 못하고 외려 안주하는 모습을 보인다. 야당 지도부 역시 진정한 국정 발전이나 여야 협치를 바란다기보다 정치적 이용이 우선인 듯하다.
보여주기 이벤트는, 유권자 다수의 인지와 기억이 좋지 않다고 정치인이 판단해서 하는 것이다. 유권자의 냉철한 판단과 기억이 민주주의를 지속시킨다.

문화일보 김재한 한림대 교수·정치학
05-02 이태원참사특별법, 국회 본회의 통과…특조위 1년 활동

▲2일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여야 합의로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이 통과되고 있다. 연합뉴스
이태원참사 특별법 수정안이 여야 합의로 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태원특별법은 2022년 10월 29일 발생한 이태원 참사 진상조사를 위한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구성이 주요 골자다.
이날 처리한 법안은 윤재옥 국민의힘·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공동으로 대표 발의한 법안이다. 재석 의원 259명에 찬성 256명, 기권 3명으로 통과시켰다. 기권한 3명은 국민의힘 서병수, 우신구, 김근태 의원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월 더불어민주당이 단독 처리한 이태원특별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지난달 29일 영수회담 이후로 여야가 협의에 나서면서, 특조위 구성과 내용에서 서로 한 걸음씩 양보해 전날 수정 합의안을 마련했다. 특조위의 활동기간은 1년이고, 3개월 이내에서 연장이 가능하다.
문화일보 조성진 기자
05.02 지옥의 문 앞에 선 보수
“도덕이 무력해진 선거.”
총선이 끝나고 나간 모임에서 보수 성향의 지인이 울분을 토했다. 이해가 간다. 어려운 중소 자영업자가 받아야 할 돈을 주택 구입용으로 불법 대출받은 후보가 너끈히 당선되는가 하면, 입에 담기 어려운 성적 발언을 떠벌리던 ‘역사학자’도 국회에 입성했다. 대장동·백현동 사건, 공직선거법 위반, 위증 교사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오히려 굳건한 방탄성을 쌓았다. 민주당의 도덕적 문제들이 ‘이채양명주’(이태원, 채 상병, 양평 고속도로, 명품 백, 주가 조작 의혹) 주문 앞에서 묻혀 버리고 말았다는 한탄이 나올 법하다.
인구학적 지형 보수에 불리하지만
선거는 여러 변수 얽힌 역동적 과정
창의적 전략과 외연 확대가 더 중요
육참골단의 각오로 변신 도모해야
이런 무력감은 급기야 정치인구학적 지형이 보수에 점점 불리해지고 있다는 분석에까지 이른다. 보수 정당의 강력한 지지세력인 고령층의 퇴장은 빨라지는데, 새롭게 고령층에 편입되는 86세대는 기존의 ‘반(反)보수’ 성향을 그대로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민주당의 굳건한 기반인 4050세대에 이어 60대마저 친(親)진보 세대가 된다면 보수 정당의 입지는 점점 좁아진다. 보수 정당에는 그야말로 ‘지옥의 문’이 열리는 셈이다.
그렇다고 보수는 지옥의 입구에 쓰여 있다는 문구처럼 ‘모든 희망을 버려야’만 되나. 정치인구학적 결정론이 지배한다면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선거는 반드시 구조적 요인에 좌우되지 않는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 좋은 예가 미국 선거다.
인구 구성으로 봤을 때 미국 대선의 운동장이 민주당에 유리하게 기울어지고 있다는 분석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20년 미국의 백인 인구는 57.8%였다. 10년 전 63.7%에서 보듯 비중이 계속 줄고 있다. 반면에 히스패닉(16.3→18.7%)과 아시아계(4.8→6%)는 늘고 있다. 흑인 비중(12.6→12.4%)은 거의 변화가 없다. 미국은 투표행위에서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가 비교적 작동하는 나라다. 정체성 정치란 인종·성·종교·지역 등 여러 기준으로 분화된 집단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투표하는 현상을 말한다. 정체성 정치는 한국에서는 지역주의 외에는 뚜렷한 사례를 찾기 힘들지만, 미국에서는 꽤 많이 적용되는 분석 틀이다. 2008년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 오바마는 이런 정체성 정치를 잘 이용한 케이스다. 오바마는 흑인, 히스패닉, 아시아계 등 소수 인종을 중심으로 백인 대졸자, 미혼여성, 젊은 층으로 지지층을 넓혀 당선됐다. 일종의 ‘유권자 연합’ 전략이었다.
그러나 인구 구성 변화만 보면 2016년 백인 우월주의자 트럼프의 당선은 설명하기가 어려워진다. 오바마 때보다 분명 백인의 비중은 줄었기 때문에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트럼프가 선택한 전략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박탈감에 시달리는 백인 중산층과 노동자층의 결집이었다. 그 전략이 정체성 정치의 또 다른 부정적 면모를 낳았지만, 어쨌거나 트럼프는 성공했다. 트럼프의 ‘도덕’을 논하자는 게 아니다. 트럼프의 ‘전략’에 주목했을 뿐이다. 그 후 8년이 지난 현재, 백인 인구 비중이 더 줄었음에도 트럼프는 여전히 바이든과 박빙의 대결을 펼치고 있다. 선거에서 정치인구학은 수많은 변수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이번 총선에서 불리한 정치인구학적 조건을 확인한 이상, 보수 정당의 전략은 지금까지와는 달라져야 한다. 객관적 조건을 상수가 아니라 변수로 만들려면 창의성과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 정치 분석가들은 유권자 중 민주당 무조건 지지는 30%, 국민의힘 무조건 지지는 20% 정도로 본다. 결국 31%를 어떻게 더 확보할지가 보수 여당으로선 관건이다. 분명한 것은 부지런히 중도층으로 외연을 넓히는 전략 없이 ‘안보 보수’ ‘아스팔트 보수’에만 기대는 ‘유사 정체성 정치’로는 승산이 없다는 사실이다.
중도 외연 확장을 위해선 ‘선거 연대’ 같은 정치공학적 기술이 필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곪은 문제를 도려내 등 돌린 중도층을 되돌이키는 결단이다. 자기 살을 내주고 상대의 뼈를 끊는 육참골단(肉斬骨斷)의 자세가 절실하다는 이야기다. 김 여사 문제든, 채 상병 특검이든 잘라낼 ‘살’을 고민할 때다. 그 살을 아끼다가 병독이 뼈로 스며들어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이거야말로 보수로선 지옥이다.
희망은 절망 속에서 싹튼다. 그리스 신화의 페르세포네는 죽은 자들의 세계인 명부(冥府)의 여신이지만, 씨앗의 신이자 봄의 신이기도 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총선 뒷수습을 하는 용산과 여당의 모습에선 하늘이 무너졌다는 위기감이 없어 보인다. ‘찐윤’ 원내대표 출마설이 나오는 게 그 예다. 개헌·탄핵 저지선 초과 8석이 잔해 더미를 받치고 있지만, 그 8석이 과연 끝까지 버틸지는 알 수 없다. 진짜 지옥의 문이 열리기 전에 A부터 Z까지 달라져야 한다.
이현상 논설실장 leehs@joongang.co.kr
05.03 이재명 대표의 전성시대
윤 대통령과 만남은 이 대표 정치의 ‘화양연화’,
여기서 끝나지 않으려면 상식 되찾고 중도 확장 노력을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달 29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첫 영수회담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대통령실
이재명 대표가 윤석열 대통령을 만난 순간은 그의 18년 정치 인생의 절정처럼 보였다. 이 대표는 171석을 얻은 총선 승자로 108석의 패자 윤 대통령을 만났다. 태극기 배지를 달고 대통령에게 훈계하듯 15분간 입장문을 읽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마치 이 대표가 대통령 같았다고들 했다.
이 대표는 2006년 성남시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당시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 계보에 속한 부대변인으로 출발했지만 이번 총선에서는 정동영 후보에게 공천장을 주는 사람으로 처지가 180도 바뀌었다. 여야를 통틀어 지금 정치권에서 이 대표를 견제할 사람은 사실상 없다. 국회의장도, 다수당 원내대표도 그가 점찍으면 그만이다. ‘여의도 대통령’이란 말까지 나온다. 진짜 대통령이 되는 일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길은 쉽지 않다. 기소된 7개 사건의 10개 혐의가 모조리 무죄가 된다고 해도 남는 문제가 있다. 국민의 절반 이상은 이 대표가 막강한 입법권으로 무슨 일을 벌일지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그 불안감을 불식시키지 않고서는 이 대표와 민주당이 정권을 잡기가 어렵다.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이 얻은 비례대표 정당 득표율은 26%다. 조국혁신당을 찍은 24%는 정부 여당을 심판함과 동시에 이 대표도 싫다는 의사표시를 한 것이다. 투표장에 가지 않은 유권자를 포함하면 전체 유권자 중 민주당을 찍은 사람은 19%에 불과했다. 이게 이 대표의 진짜 지지율이라고 할 수 있다.
대선은 중도층의 지지를 얻는 싸움이다. 지난 대선에서 중도층은 윤 대통령을 선택했다. 이 대표가 대통령이 되려면 중도층이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변해야 한다. 이 대표 본인도 안다. 경기지사 시절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대선은 5% 이내의 박빙 경쟁으로 본다”며 “나는 사상가나 운동가가 아니다. 편 따지지 않고 내 삶에도 도움을 주는 일을 한다고 하면 중도층을 설득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알고 보면 보수에 가까운 생각도 많이 한다고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농지 개혁을 높이 평가하며 “대한민국 경제가 빠르게 성장 발전하는 토대가 됐다”고 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적 성과도 인정한다고 했다. 운동권 출신이 갖는 편견이 없는 것이 이 대표의 장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편을 가르고 따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이 대표가 대통령이 되는 데 가장 걸림돌도 그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이 대표가 중도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하면 그의 강성 지지층이 가장 먼저 반발할 것이다. 이 대표가 이른바 ‘개딸’의 반대를 어떻게 무마하며 중도를 끌어안느냐가 결국 대선 승부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본다. 그에 대한 답도 이 대표는 이미 알고 있다. 이 대표는 문재인 전 대통령 강성 지지층 ‘문빠’에 대해 “그들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요란하고 시끄럽고 지저분한데, 거기 휘둘리지 않을 만큼 국민 의식이 높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 대표가 ‘개딸’을 문빠처럼 다룬다면 본인은 물론 나라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대표가 중도층을 잡으려면 해야 할 또 한 가지가 있다. 상식을 회복하는 일이다. 대장동 비리를 ‘윤석열 게이트’라고 하는 식으로는 중도층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 국회에서부터 달라져야 한다. 이 대표와 민주당이 추진하는 특검 중엔 필요한 것도 있지만, 해코지가 목적인 ‘무고성 특검’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태원 특별법을 한발 양보해 여야 합의로 처리한 것처럼 상식을 따르는 정치를 한다면 국민도 이 대표를 달리 볼 것이다.
조선일보 황대진 기자
월간조선 05월 호
●‘헌신하는 새로운 보수’ 모습 보여준 光州 출신 청년 의사 박은식
“국민의힘, 광주 망월동이 아니라 광주 산업단지로 가야”
⊙ “대한민국과 고향 광주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후회 없다”
⊙ “기껏 고생해 의사가 됐는데, 왜 하필 우리 아들이 총대를 메야 하나라고 생각”(어머니 조현정씨)
⊙ 선거 치른 다음 날에는 취직할 병원 면접 보고 출근 준비해
⊙ “나가 찍을 테니 할 말은 꼭 하고 사쇼”(60대 남성)
⊙ 빨간 옷 입은 박 후보가 다가가자 “워메, 왜 나한테 오는 것이여”
⊙ “아들 같아서 더 열심히 선거운동했다”(선거사무원들)
⊙ “(여당)비대위원이 꽃길만을 걷지 않고 희생했다는 것도 기억해달라”
⊙ “10%는 꼭 넘기고 싶었다. 비대위원 지낸 사람이 10%도 받지 못하면 도대체 어떤 청년이 도전하겠나?”
⊙ “호남엔 두 개의 눈물 있어. 민주당 지지할 수밖에 없는 다수의 눈물과 보수 정당 지지하는 소수의 눈물”
박은식(朴銀湜)
1984년생. 광주 문성고, 한양대 의대, 고려사이버대 법학과 졸업 / 세브란스병원, 혜민병원(코로나19 전담) 근무, 《조선일보》 《중앙일보》 칼럼리스트, 前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인재영입위원), 現 상식과 정의를 찾는 호남대안포럼 공동대표

▲2024년 3월 20일 오전 광주 동구 학동거리에서 국민의힘 박은식 후보가 출근길 시민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조선DB
제22대 총선에서 광주(光州)광역시 동구·남구을[이하 동남을, 유권자 수 13만1509명(동구 9만2553명, 남구 3만8956명)]에 출마한 박은식(39)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인재영입위원 겸직). 1984년생으로 고향 광주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나왔다. 한양대 의대를 졸업하고 소화기내과 전문의가 됐다. 그도 호남 출신 대다수가 갖는 ‘호남=민주당=진보’라는 정서 속에 성인이 됐다.
2016년 군의관이 돼 최전방인 강원도 철원 3사단(백골부대) GOP부대에서 복무했다. 철책선을 바로 앞에 두고 북한군을 지켜봤다. 평화의 소중함만이 강조된 세태에서 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선 안보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호남에서 나고 자라며 몸에 밴 생각과 관념이 현실과 충돌할 때면 무엇이 맞는지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사이버대에 등록해 법학과 경영학도 공부했다. 그러면서 보수(保守)의 가치, 정신을 알게 됐다.
사회로 복귀하고는 언론에 칼럼을 기고하며 호남의 맹목적 민주당 지지를 비판했다. 시민단체 호남대안포럼 공동대표를 맡아 ‘호남 보수’를 재조명하며 “호남이 변해야 한다”고 외쳤다. 특히 정율성 기념 사업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기념 사업 반대 운동도 했다. 그러던 중 김기현 전 국민의힘 대표의 권유로 현실 정치에 참여하게 됐다.
칼럼 쓰고 시민단체 조직해 호남 보수 再建 활동

▲옛 전남도청이 내려다보이는 박은식 후보의 선거사무소. 5층에 자리했다. 오른쪽 표지판에는 정율성 생가(동그라미)를 알리는 표시가 있다.
박 전 비대위원은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 체제에 참여하며 이번 총선에서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희생하겠다”며 고향인 광주로 내려갔다. 그 대가는 7936표. 득표율 8.62%, 3위. 경제적 손실도 컸다.
공식 선거운동 시작일인 지난 3월 28일 광주를 찾았다. 박은식 후보의 선거사무실은 옛 전남도청 광장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빌딩의 5층이었다. 5·18 당시 시민군이 최후 저항한 곳이 전남도청이다. 이날 오전 6시20분 아침 출근 인사로 하루를 시작했다.
오후 5시 조선대병원 인근 남광주역 5번 출구 앞 교차로에서 공식 선거운동 출정식을 가졌다. 이곳은 동구에서 교통량이 가장 많은 곳이다. 빨간 옷을 입은 선거운동원(선거사무원) 사이에 키가 185cm쯤 돼 보이는 훤칠한 젊은이가 야구 점퍼를 입고는 행인에게 인사하고 있었다. 박 후보를 실물로 본 건 처음이었다.
오거리 교차로엔 이번 선거에 출마한 이들의 공약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박 후보는 ‘무등산 케이블카 설치’를 적었다. 선거운동원, 박 후보 지지자, 선관위 직원 등 약 40명이 모였다. 비를 피해 일부는 고가도로 아래서 출정식을 지켜봤다.
유세차에 오른 송기석 전 의원은 “박은식 후보는 어느 정당에서든 비례대표 당선권에 들어가는 후보다. 하지만 동남을에 출마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광주의 정치 구도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며 “전도유망한 젊은이가 신념을 갖고 나왔다. 보수 정당 불모지인 광주의 변화를 위해 박은식 후보를 선택해달라. 우리가 박은식 후보를 잘만 쓰면 호남을 대표하는 보수 대권 주자로도 키울 수 있다”고 했다.
“제가 당선되면 역사교과서에 실릴 일”

▲3월 28일 공식 선거운동 첫날 박은식 후보가 조선대병원 앞에서 출정식 유세를 하고 있다. 왼편에는 조씨의 어머니 조현정씨.
이어 박은식 후보가 마이크를 잡았다. 후보 오른편에는 어머니 조현정씨가 서 있었다.
“광주의 아들 박은식입니다. 대성초, 금남중, 문성고 나왔습니다. 저는 광주에 있을 때 김대중과 노무현의 민주당을 좋아했습니다. 그때의 민주당은 도덕적으로 앞서갔고 지지층의 반대에도 국익(國益)을 위해 한미(韓美)FTA를 추진하고 이라크에 파병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은 어떻습니까. 당대표부터 전과(前科) 4범입니다.
서울에서 의사로 일하며 광주 시민이 민주당을 무조건 지지하는 것을 볼 때면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광주의 변화를 위해 언론에 칼럼을 쓰고 시민단체도 만들어 활동했습니다. 이를 인정받아 국민의힘 비대위원이 됐습니다. 광주를 바꾸고 발전시키기 위해 쉽고 편한 길보다는 직접 지역구로 출마해 도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광주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충장로에는 공실(空室)이 넘쳐나고 젊은이들은 광주를 떠나고 있습니다. 광주 시민을 피 흘리게 한 공산주의자 정율성을 위해 광역시 재정자립도 꼴찌인 광주가 세금을 퍼붓고 있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정율성 기념 사업도 완전히 폐지하겠습니다.
저는 실현 가능한 공약을 말씀드립니다. 아름다운 무등산 경치를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케이블카를 설치하겠습니다. 충장로에서 케이블카가 출발하도록 해 많은 사람이 충장로로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광주 시민이 저 멀리 대전까지 쇼핑 가는 일 없도록 이케아(IKEA), 코스트코를 반드시 유치하겠습니다. 전남대·조선대병원을 증축해 광주 시민 건강도 챙기겠습니다. 광주 정신,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수록하겠습니다.
광주에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면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당선되면 이는 역사교과서에 실릴 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저는 김대중을 뛰어넘을 수도 있습니다. 큰 정치인이 될 수 있도록 저를 찍어주십시오. 그래야만 광주가 발전하고 민주당도 더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1 학생, “이-조 연합 걱정”

▲3월 29일 한 지지자가 골목 인사를 하는 박은식 후보를 찾아왔다. 박 후보는 응원해주는 분을 만날 때 가장 힘이 난다고 했다.
출정식이 끝나고 한 40대 부부가 노란색 꽃을 사 들고 박은식 후보에게 왔다. 양림동에 거주하는 민주당 당원 출신 장모씨(남)였다. 장씨는 “민주당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게 광주에도 좋지 않아 최근 국민의힘에 입당했다”고 했다.
교복을 입은 고1 남학생도 박 후보와 사진을 찍었다. 지역구 내 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조모씨는 “이재명·조국 연합이 윤석열 대통령을 탄핵할까 봐 걱정”이라며 “과거 전북에서 보수당 후보가 당선된 것처럼 광주에서도 국민의힘 후보가 당선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은식 비대위원의 어머니 조현정씨는 점퍼 뒷면에 흰색으로 ‘엄마’라고 적었다. 조씨는 “온 가족이 아들의 출마를 말렸다”면서도 “아들 덕분에 생전 처음 선거운동을 하고 유세차에도 올랐다”고 말했다.
박 후보에게 공식 선거운동에 나서는 각오를 물었다. 그는 “선거운동원들에게 ‘완주(完走)가 곧 승리다. 법을 어기거나, 다치지 말자. 안전하게 선거를 치르자’고 했다”고 했다. 어젯밤 무슨 꿈을 꿨는지 물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마치 모델 같은 신체 비율에 키가 몇인지도 물었는데 182cm라고 답했다.
박은식 후보는 공식 선거운동 첫날을 맞아 지지 요청 문자 메시지를 주민들에게 보냈는데 욕설이 담긴 답장도 받았다.
박은식 후보는 호남에서 보수 정당, 국민의힘은 “무관심 그 자체”라며 이렇게 말했다.
“국민의힘에 관심 자체가 없어요. 이곳에선 제2당이 진보당이에요. (안철수 의원이 이끌었던) 국민의당도 보수 정당이라고 생각해요. 국민의힘과 국민의당도 잘 구분하지 못해요. 아직도 ‘국민의힘’보다는 ‘한나라당’이라는 명칭이 입에 익어요. 행사장에 가면 진보당 사람이 앉을 자리는 있어도 국민의힘은 없어요. 으레 국민의힘은 참석을 안 해왔으니 그렇게들 생각하는 거죠. 직접 경험해보면 ‘참 쉽지 않구나’를 느낍니다.”
박 후보의 선거운동은 광주광역시 시의회(23명)에서 유일한 국민의힘 소속인 김용임 시의원이 돕고 있다. 김 시의원은 박주선 전 국회부의장의 선임비서관(5급 상당)을 지냈다. 4선을 한 박 전 부의장은 이 지역에서 3번 당선됐다.
김용임 시의원은 박 후보에 대한 반응이 경로당에서 가장 좋다고 말했다. 젊고 훤칠한 사내가 찾아와 살갑게 대하니 노인들이 반가워한다고 했다.
저녁 일정으로 지역 기업인들이 모이는 자리에 참석했다. 빨간색 잠바를 입고 행사장에 갔지만 무관심이었다. 양복 입은 중년 남성들이 포도주잔과 포크를 들어 올릴 때 박 후보는 테이블을 돌며 명함을 돌렸다. 곧이어 300명가량이 참석하는 행사에도 참석해 허리를 굽히고 한 쪽 무릎을 꿇어 몸을 낮춰 자신을 알렸다.
“여의도연구원, 여론 조사 안 해줘”
— 왜 하필 지역구가 동남을입니까.
“동남을은 제가 나고 자란 곳이에요. 부모님도 사시고요. 정율성 문제도 거론하고 싶었습니다. 득표율만을 놓고 보면 동남갑이 더 유리하지만요.”
지난 대선에서 동남갑 지역의 윤석열 후보 득표율은 광주 내 다른 지역보다 높았다.
정율성 생가 앞을 지날 때였다.
— 정율성을 알리는 시설과 표지가 많네요.
“바로잡아야죠. 광주 시민을 피 흘리게 한 공산주의자를 광주 시민의 혈세로 기념할 순 없잖아요.”
박은식 후보는 이렇게 말했다.
“3수를 해 대학에 갔고 그 뒤로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해왔어요. 코로나19가 유행할 땐 코로나19 전담 병원에서 일했죠. 호남의 변화를 위한 문제 제기를 열심히 한 덕분에 현실 정치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죠. 당장 감당해야 할 손해 같은 건 생각지 않고 ‘3개월 동안은 나라를 위해, 고향을 위해 한번 부딪혀보자’는 각오로 출마한 겁니다.”
— 자체 여론조사는 해봤습니까.
“선거비용 보전 때문에 여의도연구원에 요청했는데 안 해주더라고요. 득표율을 알아야 선거비용을 어디에, 얼마나 쓸지 계획할 수 있거든요. 다행인 건 후원금은 채웠어요.”
득표율 15%를 넘겨야 선거운동비(사용총액 제한 있음, 일부 항목 보전 제외)를 전액 보전받는다(10% 이상 15% 미만은 절반). 다만 사무실 임차료 등은 보전 대상이 아니다. 15%를 넘기면 대체로 선거 기간 쓴 돈의 80~90%는 돌려받는다. 박은식 후보는 ‘10% 이상’을 득표해 반액(半額)을 보전받는다는 가정하에 예산을 짰다.
이날 아침 한동훈 위원장이 ‘국회 세종 완전 이전’ 발언을 했다. 이를 두고 박 후보는 “감동이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오히려 세종으로 내려간 행정부처를 서울로 되돌리고 세종에는 다른 걸 해준다고 말했어야 해요. 지금 공무원들이 서울과 세종을 오가며 길바닥에 버리는 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니면 수도를 완전히 세종으로 옮기든가요. 국민을 위해 행정효율성을 올리겠다고 주장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오후 9시쯤 선거사무실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는 명함을 돌리기 위해 남구 백운동으로 갔다. 백운동은 박 후보가 태어난 동네다. 술집과 식당을 돌며 인사했다. 명함을 돌리기 전에는 업주나 종업원의 허락을 받았다. 대체로 명함 돌리는 걸 허락했는데 거절하는 곳도 있었다. 매장이 바쁘거나 적대적인 곳은 명함을 돌리지 못하게 했다.
“안녕하세요. 말씀 나누시는데 죄송합니다. 국회의원으로 출마한 박은식입니다. 고향 발전시켜보고자 서울에서 의사 그만두고 내려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화나 식사 흐름이 끊기길 원치 않는지 명함만 받고는 절반쯤은 본체만체한다. ‘지역구 유권자가 아니다’고 밝힌 이에게도 “주변에 꼭 좀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오후 9시20분쯤 동구 양림동 한 교회 앞에서 선거 벽보를 처음 만났다. 박 후보는 반가운 듯 창문을 내리곤 휴대전화로 이를 촬영했다.
곧이어 정율성 거리에 있는 고깃집에 들어갔다. 50대 여성 3명이 앉은 한 테이블에 다가가 박 후보가 명함을 건네자 한 여성은 “국민의힘이냐?”고 묻고는 명함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10분 뒤 한 카페에서 만난 중년 여성 3명은 명함을 유심히 살펴보고는 박 후보에게 “젊고 미남”이라며 “힘내라”고 격려했다. 당구장에서 만난 60대 남성 두 명은 “프랑(플래카드)으로만 봤는디 인물 좋네” “나가 찍을 테니 할 말은 꼭 하고 사쇼”라고 했다.
“잘생긴 청년이 어찌 어려운 길을 택했을까나”

《조선일보》를 27년째 보고 있다는 횟집 여주인은 박 후보를 반갑게 맞으며 격려했다. 안쪽으로 들어가 보라며 손짓했다. 한창 술기운이 도는 40대 남성 7명이 앉은 테이블 앞에서 박 후보는 ‘이케아’ ‘코스트코’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테이블에선 ‘우리는 쇼핑 난민이다’는 말이 나왔다.
명함을 돌리며 민주당 당원부터 조국혁신 당원까지 다양한 이들을 만났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특히 저녁 시간대에 술집을 돌며 인사를 할 때면 박 후보는 ‘욕받이’가 돼야 했다.
박 후보는 “100명 중 2명은 ‘빨간색 싫다’며 적대적이다. 눈앞에서 명함을 버리는 사람, 찢는 사람도 있다. 내게 침을 뱉는 사람, 손가락으로 욕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100명 중 3명은 응원해 주는데 정말 큰 힘이 된다”고 했다.
선거운동 첫날 저녁 인사에서 양림동과 백운동 일대를 돌며 200명가량을 만났다. 첫날 선거운동은 밤 10시경 끝났다.
2일 차(3월 29일)에는 계림오거리에서 오전 7시30분부터 출근 인사를 했다. 수도권은 주로 지하철역에서 출퇴근 인사(유세)를 한다. 광주는 지하철역과 실거주 지역 간에 거리가 있어 버스를 많이 탄다. 이에 아침 인사도 교통량이 많은 교차로에서 주로 한다.
등굣길 여고생 두 명 중 한 명이 유세차 뒤를 지나며 “국민의당에서 나왔네”라고 하자 옆에 있던 친구가 “국민의힘”이라고 바로잡아줬다.
이날 아침 유세에서 박 후보는 보수의 유산인 건국, 호국, 산업화, 민주화를 주제로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성수, 송진우에 대해 이야기했다. 연설은 15분씩 두 차례 반복했다.
“제가 세브란스병원에서 의사를 하다가 군의관이 돼 최전방에서 북한군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는 깨달았습니다. 안보의식이 갖춰지지 않으면 국가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요. 역사적으로 좋아하지 않았던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게 됐습니다.
이승만은 암흑 시기에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을 제시했습니다. 노예제 국가 조선, 군국주의 일본,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 1인 독재 북한과 싸웠습니다. 미국에도 당당한 자세로 맞서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냈습니다.
예전에 기생충이 너무 많아 학교에 채변(採便) 봉투를 갖고 갔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받은 돈으로 상하수도 시설을 만들었습니다. 이 덕분에 기생충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우리 광주 5·18을 기억해준 대통령을 김대중 대통령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이 5·18특별법을 마련하고 망월동 묘역과 민주공원을 조성하는 데도 힘썼습니다.
우리 호남인들은 일제강점기 이승만을 도왔습니다. 김성수와 송진우 같은 분들이 학교를 짓고 기업을 만들고 신문사를 세워 건국에 기여했습니다. 우리는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산업화 때는 호남의 인재들이 기아자동차, 금호타이어, 정유 산업 단지에서 활약했습니다. 민주화 시기에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이런 광주가 어떻게 이재명, 조국을 선택할 수 있습니까?
저는 비례대표 출마 제안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광주에 출마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민 여러분을 직접 만나 한분 한분의 생각을 바꾸고 제 득표율을 올려놓는다면 제 동생 세대들은 선거비 보전을 걱정하지 않고 광주에서 보수정당 후보로 출마해 자기 의견을 당당히 밝힐 수 있게 됩니다.
광주는 보수당 후보가 당선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제가 당선되면 역사책의 한 페이지에 기록됩니다. 여러분이 저를 한번 키워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열심히 하겠습니다.”
오후에는 경로당을 찾았다. 노인들은 젊은 청년을 만나 반가우면서도 박 후보를 걱정했다.
“잘생긴 청년이 어찌 어려운 길을 택했을까나… 의사나 할 것이지… 하필 왜 2번으로….”
그러면 박 후보는 “고향을 발전시키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라며 “제가 표를 많이 받아야 민주당도 열심히 한다”고 말했다.
일부 시민은 박은식 후보의 젊은 외모로 인해 후보 본인이 아닌 선거운동원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30대 여성, “이케아!”

경로당 네 곳을 찾은 뒤 박 후보는 정율성로와 대남대로가 교차하는 사거리에서 퇴근 유세를 했다. 유세차에 올라 정율성 동상 자리를 마주 보고는 마이크를 잡았다. 동상까지는 약 45m 거리인데 현재 동상은 훼손된 후 철거돼 기단(基壇)만 남아 있었다.
중국 공산당 당원이었던 정율성은 6•25 남침 당시 중(中)•북(北) 군가를 작곡했다. 북한의 ‘조선인민해방군가’도 정율성이 지었다.
박 후보의 팬을 자처하는 73세 이부용(여)씨가 유세 현장으로 찾아왔다. 광주에 온 지는 2년이 됐다. 노무현‧문재인을 지지했으나 조국 사태 이후 민주당에 대해 지지를 철회했다고 했다. 이씨는 “박 후보가 자기주장이 뚜렷하고 건실하다. 민주당 사람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정율성 동상을 마주하고 벌인 유세는 오후 6시 40분에 끝났다. 쌀쌀한 날씨에 황사까지 있었다. 박 후보는 선거운동원들이 마음에 걸렸는지 “오늘도 고생 많았다”며 “오늘은 일찍 퇴근하시라”고 했다. 이에 옆에 있던 유세팀장인 서양길씨가 “10분만 더 하고 가자”고 했다. 선거운동원은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7시 30분까지 활동한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는 일면식도 없는 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지지를 호소했다. 박 후보에게 호감을 느낀 이들이 ‘내가 아는 사람’이라며 한 다리씩 건너 건너는 소개하는 방식 박 후보에게 지역 유권자의 연락처를 알려줬다. 직접 전화한다고 이들이 박 후보에게 투표한다는 보장도 없다. 그럼에도 박 후보는 이것저것 다 해보려고 했다.
“안녕하세요. ○○○ 선생님이시죠? 저는 이번에 국회의원으로 출마한 박은식이라고 합니다. □□□ 선생님 아시죠? 이 분이 꼭 ○○○ 선생님께 연락을 드리라고 하셔서 전화했습니다. 고향 발전 한 번 시키려고 서울에서 내려왔습니다. 꼭 좀 투표해 주십시오. 기호 2번 박은식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박 후보는 밥을 먹을 때도 “회장님~”하며 전화를 걸고 받았다. 한창 바쁠 때는 밥 한 끼를 먹을 동안에도 소속을 알 수 없는 ‘회장님’ 네댓 명과 통화했다. 여기에 수시로 기자들이 전화를 해왔다. 선거 운동하기도 바쁜데, 의료대란에 대한 해법을 밝혔다. 이와 함께 의료계의 입장을 정부와 당에 전달하는 역할도 해야 했다.
저녁에는 동구 동남동으로 갔다. 이곳은 식당과 카페, 주점이 많아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다. 지역구를 가리지 않고 광주의 젊은이들이 모인 곳이라 동남을 유권자 비중은 적다. ‘어디 사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일단 눈앞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두 명함을 전했다. ‘(박 후보) 지역구가 아니다’고 밝히면 박 후보는 “주변에 좀 많이 알려달라”고 말했다.
카페 야외 좌석에서 명함을 받은 이는 “우리 동네네. 근데 나는 빨간색은 안 뽑아”라고 했다.
술집으로 들어가 대학생 8명이 앉은 한 테이블에서 명함을 돌렸다. 전남대 의예과에 다니는 한 남성이 ‘의대 증원’을 어떻게 보는지 물었다.
“물리적으로 2000명은 수용할 수 없어요. 전남대병원에서도 한 해 받을 수 있는 인턴이 70~80명쯤 될 텐데 나머지는 서울로 가 수련을 받아야 해요. 보건복지부도 1000명 이상은 불가하다고 했죠. 대통령이 고집을 부렸어요”
8명이 모인 테이블에 지역구 유권자는 1명뿐이었다.
한 족발집에선 30대 여성 두 명이 명함을 유심히 본 뒤 공약 중 하나인 “이케아!”라고 말했다. 광주에 사는 젊은층의 소비 기반 시설에 대한 갈망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른바 MZ세대는 소비 형태를 SNS 등에 과시하며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광주에는 소비 욕구를 해소할 만한 마땅한 곳이 없다. 이에 대전까지 ‘원정 쇼핑’을 가는 이들도 많다.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가 광주에 복합쇼핑몰을 만들겠다는 공약은 광주 젊은이들이 윤석열 후보에게 투표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박 후보는 호남에 출마하는 후보치고는 선거운동원(약 28명)이 눈에 띄게 많았다. 그간 광주에 출마한 보수정당 후보들은 득표율이 저조해 선거 운동 비용 보전도 힘들었다. 지출을 최소화하고자 선거운동원을 고용하지 않는 출마자도 있었다. 선거 운동비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인건비와 식비 등이기 때문이다. 인력과 자금이 부족하니 선거 조직도 탄탄치 못했다.
유세팀장인 서양길씨는 “선거운동원이 부족하면 후보가 유세차에 올라 연설할 때 초라해 보인다”며 “선거운동원이 많을수록 후보에게 심리적으로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피로회복제는 22개월 딸과의 영상 통화
빨간 옷 입은 박은식 후보가 다가가니 “워메, 왜 나한테 오는 것이여”라고 하며 몸을 뒤로 빼거나 손사래를 치는 일도 있었다.
힘든 선거운동에서 박 후보에게 가장 큰 위로이자 피로회복제는 서울에 있는 22개월 딸 제이와의 영상통화다. 아내는 “아빠”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려고 딸에게 ‘제이는 누구 딸?’ ‘제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제이가 보고 싶은 사람은?’과 같은 질문 두세 개를 계속 물었다.
박 후보의 선거를 돕기 위해 어머니 조현정씨도 지역구를 누비며 인사했다. 조씨는 2023년 2월 한 중학교의 교감으로 정년 퇴임했다.
“아들의 명함을 줄 때면 반드시 90도로 인사해요. 국민의힘을 달가워하지 않지만 아들이라고 소개하면 반응이 좀 부드러워지죠.
‘엄마가 예쁘니 아들도 예쁘다’ ‘아들이 엄마를 영락없이 닮았다’고 하셔요. 그러면서 ‘(국민의힘 후보가) 한 사람이라도 돼야 쓸 것인디’라고 말해요. ‘의사나 하지 왜 2번으로 나왔어…’라고도 하시고요.”
박 후보는 교육자 집안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고대 동양사를 전공한 박사다. 장남인 박 후보는 위로 누나가 있다. 조씨는 “만화 〈슬램덩크〉가 유행할 때는 은식이가 농구 선수가 되려고 농구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저는 학교에서 생물을 가르쳤어요. 문과인이 갖는 사고를 잘 이해하지 못하죠. 정치랑은 거리가 멀어요. 아직도 아들이 정치를 한다는 게 낯설죠. 광주 사람들은 선택권이 없어요. 어차피 민주당이 당선되니까요. 남편이 몸이 좋지 않아 한 달에 1~2번씩 아들이 광주에 내려왔어요. 아들은 광주가 처한 현실을 보고는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나 봐요. 저는 얼굴이 팔리는 걸 싫어하는데 ‘아들을 위해 내 얼굴을 팔아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소수(少數)지만 보수 정당을 지지해온 것을 숨긴 채 살아온 유권자도 많이 만났어요.”
조씨에게 ‘왜 광주 사람들은 5‧18에 민감하느냐’고 물었다. 5‧18 당시 대학교 2학년이었던 조씨는 “광주 시민만이 겪은 독특한 체험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며 “다른 지역 사람들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이 때문에 호남 사람들은 정부의 공권력 행사를 항상 비판적으로 바라본다”고 했다.
“어머니가 마음을 굳게 먹으쇼!”

▲3월 30일 박은식 후보의 어머니 조현정씨가 광주의 문화와 정체성의 상징인 무등산에서 아들을 알리는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조씨는 차를 운전해 무등산 입구로 갔다. 등산로 2차선 도로를 가운데 두고 지그재그로 오가며 등산객에게 아들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선거운동하러 왔습니다. 동구에 멋진 후보가 나왔습니다. 제 아들입니다.”
등산을 마치고 막걸리를 마시는 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탁자를 돌며 명함을 돌렸다.
“어짜쓰까. 우린 민주당인디. 무등산 케이블카 공약은 좋다.”
“의사나 할 것이지…. 어머니가 마음을 굳게 먹으쇼!”
“아이고 엄니가 열심이네. 안 되는 거 뭣 하러 나왔는지 모르것소. 15%는 받아야 쓰는디.”
명함을 건네고자 다가가니 “나는 민주당 당원이오”라고 하며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다. 조씨는 “자기 생각을 밝혀주면 오히려 고맙다”며 명함을 받지 않는 이들에게도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
— 아들이 정치를 한다고 했을 때 어떠셨습니까.
“‘기껏 고생해 의사가 됐는데 왜 하필 우리 아들이 총대를 메야 하나’라고 생각했죠. 정치를 한번 시작하면 계속 정치를 해야 하니까 걱정도 됐고요.”
— 주변 반응은 어떤가요.
“아들이 출마한 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아들의 선거 포스터로 바꿨어요. 10명 중 8명은 응원을, 2명은 ‘굳이 (국민의힘으로) 출마했느냐’며 걱정 섞인 반응이었죠.”
— 땅에 버려진 아들 명함을 보면 어떻습니까.
“속상하지만 그대로 놔둡니다. 그것도 아들을 알리는 방법이니까요.”
“민주당이 잘돼야 광주가 잘돼”

▲2023년 12월 29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비상대책위원 임명장 수여식에서 박은식 비대위원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조씨는 자신이 다니는 무등산의 한 사찰도 들러 아들을 소개했다. 민주당 이탄희 의원의 팬이라는 50대 여성은 이런 반응이었다.
“국민의힘은 역적인디. 의사 허지 왜 전라도서 국민의힘이여. 지역감정은 대대손손 안 없어질 거요. 우리 자식도 서울 사는디 민주당만 뽑아. 민주당도 하는 짓이 똑같아서 난 선거 안 해부러요. 그래도 어머니 힘내쇼.”
3일 차 주말에는 박 후보를 응원하기 위해 서울에 있는 장인과 처제, 동서가 광주를 찾았다. 주중에는 직장에 다니는 박 후보의 아내와 딸 제이도 함께했다. 아시아문화전당(옛 전남도청)에서 어머니 조씨가 명함을 건네면 다른 이들은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 조씨만 선거운동원으로 등록돼 있어 행인들에게 명함을 전했다.
장인은 대구 출신이다. 그는 “출마하는 것을 내심 반대했다. 굳이 하겠다면 비례대표나 서울에 출마하길 권했다”며 “그런데도 (사위는) 당선이 목적이 아니라 도전에 목적을 뒀다. 기백이 대단하다. 양분된 정치 지형을 타파하려는 사위의 도전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주말에는 지역구에서 걷기 행사가 있었다. 뒤늦게 일정을 파악해 현장에 도착하니 행사는 이미 시작한 상태였다. 30명쯤 되는 파란색 복장 선거운동원 사이에서 홀로 빨간 옷을 입은 박 후보가 행인들에게 명함을 돌렸다.
이런 모습에 한 선관위 직원이 박 후보에게 “(여긴 사람이 없으니) 위로 올라가 보라”고 했다.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다 벤치에 앉은 70~80대 여성 3명을 만나 인사했다. 박 후보가 지지를 호소하자 “윤석열이가 나라를 망하게 해부렀는디 뭔 이야기를 혀”라고 했다. 이에 박 후보가 “경쟁해야 민주당도 발전한다”고 했지만 “그런 소리 하지 말어. 민주당이 잘돼야 광주가 잘돼”라는 답을 들었다.
박은식 후보를 수행했던 박지호씨는 “광주는 모두 민주당과 연계돼 있다”며 “민주당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했다. 박씨도 6년 전에는 민주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4월 2일에는 여론조사 결과가 두 곳에서 발표됐다. 한 곳은 지지율 5%, 다른 곳은 8%였다. 박 후보의 예상보다 훨씬 낮은 수치였다. 4월 3일에는 TV 토론회가 있었다. 박 후보가 민주당 안도걸, 무소속 김성환 후보보다 잘했다는 평이 나왔다.
“득표율이라도 올리고 싶습니다”
선거 후반부로 갈수록 박 후보는 지쳐 보였다. 그는 “여론조사 결과가 예상보다 좋지 않아 힘이 빠진다”고 했다. 명함을 주고 이야기 좀 하려고 다가가면 ‘이미 사전투표를 했다’고 밝히는 이들도 많았다.
선거운동 시작 후 두 번째 맞은 주말부터 목 상태도 나빠졌다. 일상적인 대화는 괜찮았지만 고음을 내기 힘들었다. 목이 잠기는 바람에 힘겹게 연설했다. 몸이 좋을 때는 한 번 유세할 때 15분씩 2번을 했던 것도 5분씩 하는 걸로 줄였다.
어머니 조씨는 “어제(7일)부터 아들에게 꿀물을 먹이고 있다”고 했다.
선거 조직이 탄탄한 후보는 이른바 찬조 연설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박은식 후보는 많은 부분을 자신이 직접 몸으로 부딪쳐야 했다.
박 후보는 “사전투표로 자신을 찍었다는 사람을 만나면 힘이 된다”면서도 “지역구에선 민주당이 싫어 저를 찍고, 비례는 조국혁신당에 투표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했다.
선거 후반부가 될수록 박 후보의 선거운동은 ‘하소연’으로 바뀌었다.
“도와주십시오. 어차피 민주당 후보가 당선됩니다. 득표율이라도 올리고 싶습니다. 한 번만 눈 딱 감고 저를 뽑아주십시오.”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지지한 변호사에게도 찾아가 지지를 호소했다. 한 슈퍼에 들어가니 그 주인은 “어머니가 좀 전에 들러 이미 명함을 주고 갔다”고 말했다.
4월 9일 선거운동 마지막 날 유세는 집 근처 삼거리에서 시작했다. 평소와는 달리 머리카락도 다소 정리가 덜된 모습이었다. 유세차에 올라 양 손가락을 V자로 만들고 들어 올려 좌우로 흔들었다. 선거운동 초기와 비교하면 손의 높이도 점점 내려갔다. 연설도 4분40초 만에 끝냈다. 그 뒤로 김용임 시의원, 양혜령 전 시의원, 어머니 조현정씨가 이어갔다.
다른 이가 연설을 하는 동안 박 후보는 유세차에서 내려 거리를 돌며 명함을 돌렸다. 유동 인구가 적어 의미가 없어 보였지만 박 후보는 T자형 교차로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려고 했다.
“박 후보, 최선 다했다”

▲공식 선거 운동 마지막 합동 유세는 오후 6시 계림오거리에서 열렸다. 선거 운동 기간 중 가장 많은 지지자(약 40명)가 모였다.
민생당 비대위원으로 활동했던 한 연사는 찬조연설에서 “옷을 살 때도 가격, 색깔, 디자인을 본다. 하지만 광주는 한 정당만 무조건 지지했다. 불량식품이어도 먹어야 했다”며 “꽃길 대신 험한 길을 택한, 유능한 젊은 후보를 선택해달라”고 했다.
조선대 4학년 정현로씨가 유세차에 올라 찬조연설을 했다.
“정권을 심판하면 광주가 나아집니까? 제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수업이 끝나자마자 이곳으로 바로 왔겠습니까. 박은식 후보에게 한 표 부탁드립니다. 광주 청년들은 광주에서 살고 싶습니다.”
박 후보 옆에서 스쳐 지나가는 차량을 향해 배꼽인사를 하던 어머니도 마이크를 들고 “박은식은 소박하고 부지런하며 광주 시민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박은식 후보는 “9대 1인 정치 구도를 8대 2, 7대 3으로 바꿔야 젊은이들이 민주당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했다.
마지막 합동 유세를 마친 유세단은 산수동 문화마당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박 후보는 버스킹(야외 공연)을 하며 노래 3곡을 불렀다. 선거운동원들의 선거운동은 오후 8시부로 종료됐다. 선거운동을 마치고 선거사무소에 모인 운동원들은 13일 동안 입고 썼던 외투, 빨간 모자, 장갑, 선거사무원 표찰을 반납하고 뒤풀이를 가졌다. 이들은 하나같이 모자와 마스크가 미처 가리지 못한 광대 부위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운동원들은 “고생했다”고 서로 격려했고 박 후보는 선거사무소를 떠나는 이들의 손을 잡고 인사했다.
선거운동원들은 “후반부로 갈수록 후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안쓰러웠다”며 “아들 같아서 더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다”고 말했다. 여러 차례 선거운동원 경험이 있는 A씨는 “다른 후보들과 달리 박 후보는 충분치 않은 여건에서도 최선을 다했다”면서 “곧장 당선되면 더없이 좋겠지만 아니라면 15%를 넘겨 선거비용이라도 보전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들 덕분에 새로운 걸 많이 배웠다”(어머니)
뒤풀이를 마친 모자(母子)는 마지막까지 선거운동을 하기 위해 오후 9시30분경 단둘이 선거사무소를 나왔다. 이때 안도걸 후보 측은 아시아문화전당(옛 전남도청)에 모여 일종의 전야제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백운동으로 차를 몰았다. 주차를 하는 동안 박 후보는 한 카페로 들어가 “어차피 민주당 후보가 당선된다. 제가 한 표라도 더 받아야 중앙정부에 할 말이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어 어머니 조씨도 카페로 와 “제가 은식이를 백운동에서 낳았습니다. 초등학교 때까지 여기서 살았어요”라고 했다. 카페 손님은 “어머니가 나이 드셔서 아들 때문에 고생이다. 한 표라도 더 받으쇼. 오늘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생각하쇼”라고 했다.
30분쯤 인사를 하니 손에 쥔 명함이 다 떨어졌다. 어머니는 약 500m 떨어진 차로 뛰어가 명함을 갖고 왔다. 오후 10시24분에는 명함이 동났다. 조씨는 지나가는 이들에게 육성으로 아들을 뽑아달라고 했다.
박 후보는 이날 오후 11시 마지막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비대위원들은 선거 당일 한데 모여 개표 방송을 봐야 했기 때문이다. 조씨는 광주송정역에 아들을 데려다주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들 덕분에 새로운 걸 많이 배웠습니다. 흔히들 ‘소중한 한 표’라고 말하는데 그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예전에는 선거운동하는 이들을 보곤 형식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게 정말 어렵다는 걸 알게 됐죠. 정년 이후 좁게 살았던 제게 아들이 공동체를 위해 사는 게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가르쳐줬어요. 정년 후 느꼈던 우울감이 사치였던 거죠.”
조씨는 “과거에는 광주에서 보수 정당을 지지하면 대놓고 면박을 주거나 ‘아주 부족한 사람’ ‘생각을 안 하는 사람’ ‘정부 편에 붙어 돈을 탐내는 사람’으로 취급했다”며 “하지만 아들이 경제적 불이익을 감수하고 출마했으니 사람들에겐 신기했을 것이다. 선입견으로 뭔가 허울을 씌우고 싶은데 그게 안 됐다. ‘의사인데 왜 출마했을까?’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봤다”고 했다.
— 어머니가 더 고생한 것 같습니다.
“교사로 지내면서 아들 운동회도 못 가고, 소풍 갈 때 도시락도 제대로 못 싸줬어요. 졸업식도 갈 수 없었고요. 이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는데 선거운동을 하며 한 3분의 1은 갚은 거 같아요.”
“정말 정치하겠다면 밑바닥부터 배우는 게 맞다”
— 비례대표로 출마했으면 어땠을까요.
“쉽게 정치를 시작할 수 있었겠죠. 하지만 얼마나 교만해지겠습니까? 사람을 직접 만나 자기 의견을 관철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선거운동원들이 얼마나 힘들게 선거운동을 하는지도 몰랐을 겁니다. 정말로 정치를 하겠다면 밑바닥부터 배우는, 지금 이 방법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정도(正道)를 걸었으면 합니다.”
어머니 조씨는 예비 후보 기간을 포함해 명함 약 1만 장을 돌렸다. 그는 아들의 도전을 계속해서 응원하겠다고 했다.
박 후보는 총선 다음 날인 지난 11일 오후 5시 광주에 도착했다. 4시간 동안 운전을 했다. 피곤한지 입술이 하얗게 떠 있었다. 아버지가 입원한 요양병원에 들른 뒤 곧바로 선거를 도운 이들을 만나 위로했다.
통상 선거 캠프에선 소셜미디어(SNS) 전담 직원을 둔다. 박은식 후보는 인건비를 아끼고자 선거운동 기간 소셜미디어를 본인이 관리했다. 이 때문에 활동상이 실시간으로 전파되지 않았다. 하루나 이틀 뒤에나 이틀 치를 한 번에 몰아서 올리기도 했다. 4월 7일 활동을 8일 오후 8시45분에 올린 게 마지막 선거운동 게시물이다. 지난 4월 8~9일의 활동상은 올리지도 못했다.
— 9일 밤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에서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무슨 다른 생각을 할 정신이 없었어요. 그날 밤도 마지막까지 투표 독려 문자 메시지를 보냈어요. 선거운동 기간에 매일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날도 문자에 받는 분의 이름을 일일이 입력해 한 통씩 총 200통을 썼어요. 정성을 담고 싶어 전체 문자는 안 보냈어요. 정말 시간이 오래 걸리더군요.”
— 그렇게까지 한 이유가 있습니까.
“대의(大義)를 위해서죠. 한 표라도 더 받고 싶었습니다. 비대위원을 지낸 사람이 10%도 받지 못하면 도대체 어떤 청년이 도전하겠습니까? 10%는 꼭 넘기고 싶었어요.”
— 출구 조사 결과가 발표된 후 당 지도부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여의도연구원도 자체 조사를 했어요. ‘크게 지지는 않는다’는 내용이었죠. 하지만 방송 3사가 실시한 출구 조사 결과 ‘국민의힘이 100석도 건지기 힘들다’고 발표되자 다들 크게 당황했죠.”
“국힘, 적어도 뻔뻔하진 않았다”
— 총선 결과를 어떻게 보십니까.
“사실상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죠. 이번 선거를 통해 지도자의 중요성, ‘대권(大權)’이 왜 대권인지 알게 됐어요. 지역에서 피라미가 물결을 일으키려 해도 중앙에서 고래가 움직이면 아무 소용이 없더군요. 대통령의 한마디, 행동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이른바 집토끼도 잘 챙겨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자기의 소중한 시간을 할애해 투표장에 가는 게 굉장히 수고로운 겁니다. 이분들이 투표장까지 나갈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 당의 선거 전략은 어떻게 평가합니까.
“중도층의 선택을 받으려면 이성(理性)보다는 감성에 호소해야 합니다. 저 역시 말이 너무 길었어요. ‘광주가 이래선 안 된다’ ‘10%는 받아야 할 말이 있다’고 말했는데 통하지 않았어요.”
—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2008년 18대 총선에서 내세운 ‘뉴타운’처럼 선거판을 관통하는, 보수우파의 가치를 대변하는 세 음절 이하의 단어가 필요해요. ‘민생’? 너무 막연해요. 민생은 어차피 ‘대파’로 깨졌잖아요. ‘586 청산’? 민주당은 친명(親明)으로 이미 대체했고요. 이조심판? 검사들 특유의 사고방식이 담겼죠.”
— ‘시스템 공천’이었다고 말합니다.
“동의하지 않아요. 그 ‘시스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후보자를 점수화한 뒤 사심(私心)을 배제한다’는 뜻인 듯한데…. 선거는 이기는 게 우선입니다. 억지로 감동을 주려고 하는 순간 실패합니다.”
— 이번 선거에서 국민의힘이 민주당보다 나았던 점은요.
“이재명, 양문석, 김준혁 같은 이들은 공천에서 배제했습니다. 적어도 뻔뻔하진 않았습니다.”
— 현실 정치를 겪어본 소감은요.
“‘인생은 실전’이라는 말이 있죠. 관찰자와 행위자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절감했어요. 마음을 다하면 광주에서도 통할 줄 알았는데 현실의 벽은 높았습니다. ‘나이브(naive·순진)’했어요.”
박 전 비대위원은 “무관심할 때 가장 힘들다”고 했다.
— 비례대표를 권유받았는데 순번은요.
“모르겠어요. 처음부터 광주로 올 생각이었으니까요. 서울에 좋은 곳도 권유받았지만 거절했습니다.”
— 이번에 당선된 곳입니까?
“네.”
— 인요한 혁신위원장에 앞서 위원장을 제의받았는데 거절했습니다. 총선 참패를 예상한 것입니까.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 왜 거절했습니까.
“이제 막 정치를 경험하는 제겐 너무 큰 자리였죠.”
“보수의 가치 담긴 호남의 상징 발굴해야”
박 전 비대위원은 “5·18을 초월하는 주제를 호남에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5·18은 반미(反美)운동이 아닙니다. 친미(親美)운동이었습니다. 당시 광주 시민들은 미국이 광주에 개입해 신군부를 견제하고 자신들을 보호해주길 원했습니다. 역사적 사실은 이러함에도 좌파 운동권은 5·18에 반미를 덧칠했습니다. 여기에 우파는 좌파가 왜곡해놓은 5·18과 호남을 향해 ‘인종주의적’ 비난을 일삼고 있습니다.”
—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결정권자라면 ‘국민의힘은 5·18묘지가 아니라 광주의 산업단지로 가자’고 할 겁니다. 기아자동차, 금호타이어를 찾아가 현장의 애로사항을 듣고 해결해주는 겁니다. 이게 혁신입니다. 물론 5·18 기념행사가 열리는 날에는 당연히 참석해야죠.
보수의 가치가 담긴 새로운 호남의 상징을 발굴해야 합니다. 김성수와 송진우 생가(生家)에 들러야 합니다. 호남인들이 독립을 위해 재산을 헌납하고, 학교를 세우고 공장을 만들고 민족 계몽을 위해 언론사를 차린 역사를 기려야죠. 좌파가 5·18로 우파를 공격할 때면 주눅 들지 말고 ‘망월동을 누가(김영삼) 만들어줬느냐’고 당당하게 따져야 합니다.”
박 전 비대위원은 “1965년 대선에서 박정희는 윤보선을 15만 표 차로 이겼다. 호남 유권자의 60%, 35만 표가 박정희를 찍었다”며 “호남 보수, 호남 우파를 재조명하고 복원해야 한다”고 했다.
— 보수우파의 가치를 강조하는데 보수는 무엇입니까.
“전통을 존중하며 점진적 발전을 추구합니다. 반공주의, 경제적 자유(시장경제), 작은 정부를 지향하죠. 헌신·희생도 중시합니다. 하지만 이 중 어느 특정 가치에만 매몰돼선 안 돼요. ‘반공이면 다 좋다’는 식의 접근은 우리 안의 파시즘을 키울 뿐이죠. 5·18 폄훼가 대표적이죠.”
“일터로, 가정으로 돌아갑니다”
— 보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상무(尙武)정신으로 스스로 채찍질해야만 합니다. 한반도는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이 충돌하는 곳입니다. 지정학적 숙명이죠. ‘셰셰(謝謝·고맙다)’라고 말하며 대륙에 종속되길 자처하는 이들이 의회를 장악했어요.
오늘날 정치적 불안의 뿌리는 남북 분단입니다. 북한을 해방시킬 때까지 잘 버텨야 합니다. 이를 위해 보수우파는 좀 더 희생, 헌신해야 합니다.”
— 현실 정치에 참여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까.
“대한민국과 고향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했기에 후회하지 않아요. 역설적으로 선거비용 보전도 받지 못하는 결과를 내 호남의 보수우파 청년들의 정치 도전을 주저하게 만든 것 같아 결과에 대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 의료대란, 어떻게 수습해야 합니까.
“저는 의료보험으로 먹고 사는 내과 봉직의(페이닥터)입니다. 현실을 매일 체감합니다. 2000명은 불가능합니다. 350~500명 선에서 더 이상 환자가 피해보지 않도록 하루 빨리 마무리 지어야 해요. 350명은 의약분업 당시 줄였던 인원인데 상반된 이해당사자들(의사‧환자 단체)도 500명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일터로, 가정으로 돌아갑니다. 오늘(4월 11일) 아침에 취직할 병원에서 면접을 봤어요. 곧 출근합니다.”
박 전 비대위원은 4월 11일 오전 비대위원 사퇴 의사를 밝혔다. 그는 “비대위원이 꽃길만을 걷지 않고 희생했다는 것도 기억해달라”고 했다.
“호남 위한 햇볕정책 필요”
선거가 끝나고 일주일이 지나 박은식 전 비대위원의 어머니 조현정씨와 통화를 했다. 정신 없었던 선거를 마치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조씨는 “광주에는 다수(多數)가 흘리는 눈물, 소수(少數)의 눈물이 각각 따로 있다. 이 두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보수가 노력해야 한다. ‘호남을 위한 햇볕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광주(호남)시민은 오래전부터 국가, 정부로부터 ‘소외당했다’는 서운함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민주당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눈물이죠. 이들에게 유일한 선택지는 민주당이었습니다.
이 눈물이 그칠만하면 민주당은 다시 광주 시민을 이용했어요. 선거철만 되면 한(恨), 5·18로 호남을 정서적으로 인질 삼았죠.
또 다른 눈물은 국민의힘, 보수당을 지지하는 소수의 눈물입니다. 5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이들은 호남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조용히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이 두 눈물을 극복하려면 보수가 ‘광주, 호남을 위한 햇볕정책’을 펴야 해요. 호남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듣고, 유능한 사람도 보내야 합니다. 하지만 중앙에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식이 없는 거 같아 아쉬워요. 쉽진 않겠지만 머리를 맞대 서로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글 : 이경훈 월간조선 기자 liberty@chosun.com
●원로 작가 복거일이 보는 4·10 총선 평가와 대한민국의 앞날
“중국 침투 대응하려면 애국 시민들이 윤 대통령 보호해야”
⊙ “가장 열렬히 지지했던 사람들이 실망해서 아예 투표장에 나가지 않은 것이 윤 대통령이 반성해야 될 대목”
⊙ “현 정권에선 정치적 관점에서 살피는 참모가 보이지 않아”
⊙ “문재인 사법 처리하는 것을 기다려온 사람들이 실망해서 윤 대통령으로부터 등 돌려”
⊙ “민주당의 중력보다 몇 곱절, 몇십 곱절 큰 권력을 가진 세력이 은밀히 움직여서 이탈자 막았을 것”
⊙ “후대 역사가들이 ‘2024년 4월의 총선에서 궁극적 승자는 중국이었다’라고 평가하지 않도록…”
張源宰
1967년생. 고려대 국문과 학사, 런던대 로열헐러웨이 컬리지 박사(비교연극사) / 前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경기영어마을 사무총장,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 MBC 라디오 앵커, 現 배나TV·(주)戰後70년 ‘생생현대사TV’ 대표 / 저서 《북한요지경;배나TV 장원재입니다》 《끝나지 않는 축구 이야기》 《논어를 축구로 풀다》 《장원재의 배우열전》

▲사진=조선DB
4·10 총선이 범(汎)야권의 압승으로 끝났다. 이번 총선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우리 현대사에 어떤 변곡점(變曲點)으로 기능할까? 국제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미시적·거시적 맥락에서 총선 결과의 전후(前後)를 살피고 싶었다. 복거일 선생께 인터뷰를 청한 이유다.
― 먼저 이번 총선의 개관이랄까요, 총평(總評)을 부탁드립니다. 결정적으로 어디서 승패가 갈렸다고 보는지요.
“임기 중의 총선은 늘 집권당에 대한 평가의 성격을 띠죠. 이번엔 윤석열 대통령의 치적에 대한 중간 평가의 성격이 두드러졌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 점을 파고든 야당의 전략이 성공했습니다.”
대통령의 임기가 한참 남은 집권 중반기, 여당에 대한 지지가 이처럼 낮은 일은 우리 정치사에서 드문 현상이다. 윤 대통령의 어느 부분이 이렇게 낮은 평가를 초래한 것일까?
“역시 경제가 문제입니다. 살기 어려워지면, 시민들은 집권 세력을 비판하게 마련이죠. 지금 우리 사회는 경기가 좋지 않으면서도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고 있습니다.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라고 부를 만해요. 이런 상황이 시민들로선 견디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의 기억은 짧다”
― 특히 주목해서 살핀 부분이 있는지요.
“네. 건설 경기가 경기의 지표 노릇을 하는데, 요즈음 건설 회사들이 무척 어렵잖아요? 그런데 건축 재료의 단가는 빠르게 올랐습니다. 자기 집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은 마음이 어두워질 수밖에 없죠. 그러다 보니, 작황에 따라 출렁이는 농산물까지 선거의 쟁점으로 떠올랐어요. 대파와 사과가 선거 판세에 영향을 미칠 만큼 중요한 쟁점이 된 배경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파와 사과가 아니라, 대파와 사과가 상징하는 물가 상승 문제에 시민들이 예민하게 반응했다는 얘기죠.”
― 하지만 경제가 어려워진 것은, 따지고 보면 전임 문재인 대통령의 책임이 크잖습니까? 특히 정부 부채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서, 경제 정책을 제대로 펴기가 어려워진 것이 문제의 본질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렇죠. 하지만 그런 얘기의 시효는 짧습니다. 사람들의 기억이 짧거든요. 길어야 일 년? 그 뒤로는 ‘언제 적 얘기를 하느냐?’는 반론이 나오죠. 따라서 윤 대통령으로선 집권 초기에 상황을 시민들에게 자세히 설명했어야 합니다.”
― 뭐라고 했어야 합니까.
“솔직하게 사정을 털어놓고 양해를 구했어야 합니다. ‘전임 대통령 시절에 잘못된 경제 정책을 펴서, 물가가 올랐다. 특히 집값이 가파르게 올랐다. 아울러, 전임 정권이 시장경제의 원리에 어긋나는 정책을 펴서 우리 경제의 생산성이 크게 낮아졌다. 그래서 살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나는 이러이러한 정책들을 펴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겠다. 다만, 경제 정책이 실제로 효과를 보려면, 시간이 걸린다. 경제 정책은 대체로 긴 시간이 지나야 효과가 나온다. 따라서 저의 임기 중반이 되면, 경기가 살아나고 물가는 잡힐 것 같다’ 이렇게 설명하고 희망적 전망을 제시해야 시민들이 상황을 이해하고 기다려줄 것 아니겠습니까?”
“소통 채널 스스로 닫아버려”
그렇다면 이번 총선의 패배는 결국 윤석열 대통령의 소통 부재가 문제였다는 뜻일까? 노(老)작가의 어투는 단호했다.
“그런 셈이죠. 유권자들과의 소통은 선거에 있어 중요한 전략이잖아요? 여기에 이번 선거에서 여당이 맞닥뜨렸던 근본적 장애가 있습니다. 대중 매체들이 거의 다 야당을 드러내놓고 일방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심지어 유튜브에서도 야당 지지 매체들이 훨씬 우세해요. 그러니, 모든 일에서 야당의 선전 선동이 위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런 선전 선동에 묻혀서, 대통령이나 여당이 내는 메시지는 시민들에게 거의 전달되지 않았죠.”
― 그렇다면 그런 편향, 말하자면 ‘기울어진 운동장’은 대통령도 바로잡기 어려운 것 아닙니까.
“어렵지만 길이 있습니다. 대통령에겐 다른 사람이 지니지 못한 강력한 소통 채널이 있어요. 바로 ‘대통령실 출입기자들’이죠. 대통령이 한 얘기는 곧바로 모든 매체가 크게 다룹니다. 윤 대통령도 처음엔 그 채널을 잘 이용했어요. 출근길에 기자들과 문답을 했잖아요? 그러다가 어떤 방송 기자가 무례한 행동을 하면서 갑자기 중단되었죠.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대통령이 지닌 단 하나의 효과적 소통 채널을 스스로 닫아버린 것이니까요.”
― 그런 출근길 문답을 날마다 하는 것은 무리에 가깝잖습니까? 체력에서도 무리고, ‘악마의 편집’ 논란도 있고 말입니다.
“물론 무리죠. 무리하지 않으려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정례 기자회견을 했어야죠. 지방에 내려가면, 지방지하고 대담하고,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으리라고 봅니다. 그렇게 했으면, 현 정권이 맞은 어려움을 국민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잘 이해했을 겁니다. 적어도 권위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지는 않았겠죠. 그래서 아쉽습니다.”
“핵심 지지층이 실망해서 떠나면…”
이번 총선의 의문 사항은 여럿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윤 대통령을 지지했던 유권자들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듯한 현상이다. 여성가족부 폐지 논란과 관련해 20대 남성들이 등을 돌린 건 인과관계가 분명하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지역 기반인 충청도에서조차 거의 전패한 이유는 뭘까? 대전은 의석을 하나도 건지지 못했고, 심지어는 본향인 충남 공주까지도 더불어민주당에 내주었다. 그 많던 지지자는 어디로 간 것일까?
“이번 선거에서 가장 아픈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윤 대통령을 가장 열렬히 지지했던 사람들이 실망해서 아예 투표장에 나가지 않은 것. 그것이 윤 대통령이 정직하게 반성해야 될 대목입니다. 핵심 지지층이 실망해서 떠나면, 진영(陣營) 한가운데에 빈 곳이 생기게 되어 진영 전체가 구조적으로 약화(弱化)됩니다.”
또한 복 선생은 핵심 지지층이 실망한 원인 중 하나로 부정선거에 대한 견해 차이를 들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윤석열 후보를 지지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부정선거의 가능성을 걱정했습니다. 부정선거는 어떤 경우든 민주주의의 근간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 막아야죠. 윤석열 후보도 그 점을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유세 중에 ‘선거 부정을 저지르는 자들은 이 땅에 영원히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요지의 선언까지 했습니다. 기억나세요?”
― 예. 생생합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당선 뒤 그 일을 외면했습니다. 부정선거의 가능성을 없애야 한다는 의견조차 듣지 않았죠. 그래도 사람들은 이해하려 애썼습니다. 그 말을 하면 저쪽에서 ‘그러면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얘기냐? 선거 다시 하자’고 나올 수도 있겠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사소한 선관위의 행정편의적 실수도 용납하지 말고, 선거 과정을 투명하게 운영해 혹시 모를 부정선거의 가능성을 차단하자는 주장도 외면했습니다. 기다렸지만 답이 없었어요.”
―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음모론자’라는 멍에일 겁니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생긴 거예요. 선거 부정의 가능성을 차단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런 기류를 모르겠어요? 모멸감에 몸을 떨었을 것 아닙니까? ‘좋다. 나는 값싼 음모론에 빠진 어리석은 인간이다. 그래 똑똑하고 잘난 너희끼리 잘해봐라.’ 이 쓰디쓴 독백을 윤 대통령은 몰랐을 것입니다. 자신의 태도가 배은(背恩)과 모욕으로 비칠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한 듯합니다. 비극이죠.”
“고령층 투표율 예상보다 낮았다”
― 윤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사라진 이유는 그것뿐인가요? 다른 이유도 있다고 보십니까.
“영부인에 대한 의구심도 다소간 작용했을 겁니다. 온갖 음해(陰害)를 받아온 분에 대해서 쓴소리 하기는 정말로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네요.”
― 영부인과 관련해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영부인 스스로 밝혔잖아요, ‘우리가 실은 좌파’라고. ‘보수는 우리를 찍어줬으니 살짝…’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상심하고 떠난 지지자들이 한둘이겠어요? 그런 고백을 그것도 좌파 유튜버들에게 한 겁니다. 속아서. 그 영상에선 영부인이 ‘북한과의 협상에 나서겠다’고도 이야기합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서늘해졌어요. 좌파 유튜버에게 속아서 할 얘기 안 할 얘기 다 털어놓는 분이 북한과의 협상에 나선다?”
― 영부인의 얘기로 인해 투표장에 안 나온 분들도 상당했을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대다수는 투표했겠죠. 그래도 이번 선거에서 고령층의 투표율이 예상보다 낮았잖아요? 어쨌든, 이 일엔 다른 측면도 있어요. 영부인이 남북협상에 나설 만큼 활동 공간이 커지면, 대통령실 안에서 참모들의 활동 공간이 줄어듭니다.
그동안 대통령실에선 비서실장의 역할이 다른 정권들에서보다 작았어요. 그것이 어쩔 수 없이 이번 총선에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어느 나라나 대통령실이나 수상실엔 모든 일들을 정치적 관점에서 살피는 참모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큰 무게를 지닙니다. 그런데 현 정권에선 그런 역할을 하는 참모가 보이지 않았어요. 영부인의 활동 공간이 넓어지면서, 그런 참모가 옆으로 밀려났겠죠. 아마도 그래서 총선을 앞두고 의대 정원 확대를 추진한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사들의 자존심 건드려”
의대 증원 문제는 선거 얼마 전에 ‘느닷없이’ 튀어나와 판세를 뒤흔들었다. 그 문제가 그만큼 시급을 요하는 국가 현안이었는지, 충분한 숙고 끝에 나온 정책인지 필자 역시 의문을 가지고 있다.
“의사들은 고도의 전문가 집단이고 소득도 높아서 우(右) 성향 유권자가 많습니다. 의사들의 적의(敵意)를 사면, 줄잡아 몇십만 표가 날아가는데도 그 일을 강행한 거예요. 방금 모멸감 이야기를 드렸는데, 이번에 전문직 종사자인 의사들의 직업적 자존심을 건드렸습니다. 집권 초기엔 과학자들에게 모멸감을 줬죠. 그전에도 ‘초등학교 5세 입학’이나 ‘킬러문항 배제’처럼, 보기보다 복잡한 논점들을 쾌도난마식으로 다루었어요. 혼란을 싫어하는 시민들에게 미칠 정치적 영향을 고려하는 절차가 생략된 겁니다.”
―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도 같은 맥락입니까.
“맞아요. 사우디와 경쟁하는데, 우리가 이길 길이 있어요? 요행으로 우리가 이기면, 우리 기업들이 중동(中東)에서 무슨 어려움을 겪을지 생각해본 것 같지도 않아요.”
필자는 ‘부산 엑스포’ 1차 투표 대패(大敗)를 미리 알았다. 특별한 정보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직업 외교관으로 일하다 간발의 차로 테러 사고를 피한 후 뜻한 바가 있어 우동집 사장으로 변신한 신상목 대표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글을 읽고서다. ‘일본은 판세가 기울어져서 자신들의 표가 대세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 경우, 예비 승자국에 미리 양해를 구한 후 자신들의 표를 외교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이 부산 엑스포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것은 그래서 승패가 이미 크게 갈렸다는 증거일지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이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숱한 신호들이 있는데도 끝까지 ‘역전승의 가능성’을 믿었던 듯하다. 이것이 대통령의 의중을 살피느라 어쩌면 ‘보고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은 혹시 아닐까?
“윤석열–문재인 간 양해 있었나?”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초기 행했던 도어 스테핑을 중단하면서 ‘불통’ 이미지를 강화했다. 사진=연합뉴스
― 이제는 사정이 좀 달라질까요.
“글쎄요. 레이건 대통령 시절에 낸시 여사가 대통령의 일정을 관리했어요. 그런데 매사를 점성술사에게 물어보고 결정했다죠? 미국 대통령 일정이 점성술사에 의해 결정이 되니, 일이 제대로 되겠어요? 그래서 비서실장이 낸시 여사에게 점성술사를 내보내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다음 날 백악관에서 나간 것은 비서실장이었어요.”
필자도 그 기사를 기억한다. 재미있는 얘기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는다. 현 정권도 출발은 산뜻했다. 윤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요리를 대접하겠다고 약속했고, ‘도어 스테핑’도 열심히 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됐는가? 불통 이미지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왜 시작된 것일까?
“당선자 시절에 윤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당선 인사를 드리러 청와대를 찾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두 분 사이에 무슨 양해가 이루어졌던 것 같아요.”
― 그렇게 추측합니까?
“네. 저는 그렇게 봅니다. 문 전 대통령의 행위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이 친구인 송철호씨를 울산시장에 당선시키기 위해 청와대 참모들을 통해 공작을 꾸민 일입니다. 이것은 문 전 대통령의 인품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범죄였어요. 증거들이 워낙 확실해서 청와대 참모들이 모두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는데, 정작 지시한 것이 분명한 문 전 대통령은 수사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잖아요? 그러니 사람들이 윤 대통령을 의심하게 되었죠. 윤 대통령은 더더구나 그런 의심을 받으면 안 됩니다.”
― 왜 그렇습니까.
“윤 대통령은 검찰 출신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가 시행되도록 하라!’ 그것이 법률가들에겐 최고의 신조잖아요? 일단 그런 의심을 받으면, 도덕적 권위가 무너져서 아랫사람들에게 법을 제대로 집행하라고 독려할 수가 없어요.”
― 그런 사정이 이재명 대표가 관련된 여러 사건의 소추(訴追)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말씀인가요.
“중대한 범죄를 범한 것이 확실한 전임 대통령을 개인적 의리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소추로부터 보호해주는 것은 중대한 범죄죠. 대통령이 이런 범죄를 저지른다면 법관들이 이런 상황을 어떻게 여기겠어요?”
― 우리 사회는 대통령들이 너무 많이 재판받고 감옥에 갔습니다. 그래서 그런 불행한 전통을 끊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습니다. 윤 대통령도 그런 생각을 한 것 아닐까요.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당한 절차가 아니죠. 재판받아 유죄 판결이 나오면, 그때 사면(赦免)하면 되잖아요? 그러면 개인적 의리도 지키고, 법도 지킬 수 있는 건데, 법적 절차를 밟지 않았기 때문에 문 전 대통령으로부터 ‘칠십 평생에 이렇게 못하는 정부는 처음 본 것 같다’는 얘기를 듣는 거죠. 그런데 여기엔 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 뭡니까.
“현실적으로 표심(票心)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죠. 윤 대통령이 문 전 대통령을 사법 처리하는 것을 기다려온 사람들이 실망해서 윤 대통령으로부터 등을 돌렸다는 사실입니다. 이 분들이 그저 문 전 대통령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어서 문 전 대통령의 기소를 바란 것은 아닙니다.”
“문재인 범죄 혐의 하나도 수사 안 받아”

▲윤석열 대통령은 당선자 신분이던 2022년 3월 28일 청와대로 문재인 당시 대통령을 예방했다. 사진=연합뉴스
― 문제의 핵심은 뭡니까.
“문 전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우리 원자력 발전 사업을 체계적으로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핵무기 개발 능력을 없애려는 뜻이라고 볼 수밖에 없어요. 이 과정에서 아랫사람들이 불법을 저지르도록 강요했습니다. 이런 불법적 행동에 대한 정당한 응징을 윤 대통령은 왜 머뭇거리고 있는 겁니까? 이 밖에도, 우리 공무원이 북한군에 의해 사살되고 시체가 소각되는 것을 막을 생각도 하지 않은 일, 북한에서 귀순한 사람들을 북한으로 강제 송환시킨 인류에 대한 범죄, 가치 있는 자료가 담긴 외부저장장치를 국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북한 지도자에게 넘긴 일… 이런 범죄들이 하나도 수사받지 않았잖습니까?”
이 대목에서 노작가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몇 년째 암으로 투병 중인 사상가의 조용한 분노가 느껴졌다.
“나라를 해치고 민족을 해치고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그가 대통령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법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면, 자유주의 대한민국을 지킬 길이 없다는 생각에서 그분들은 문 전 대통령이 법의 심판을 받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선 문 전 대통령이 법정에 설 가능성은 작은 것 같습니다.
“아마 이재명 대표 생각도 같을 겁니다. 이런 사정에 나름 교훈을 얻어 다음 대통령 선거까지 버티려 할 겁니다.”
민주당이 쪼개지지 않은 이유
― 지금까지는 여당이 패배한 원인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야당을 살펴보겠습니다. 야당이 승리한 요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야당은 이재명 대표가 이끈 ‘친명계’가 당권을 장악한 뒤 문재인 대통령이 이끌었던 ‘비명계’를 숙청했습니다. ‘비명횡사(非明橫死)’라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였죠. 당연히, 비명계는 반발했고 더불어민주당은 둘로 쪼개질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명계의 중심인물들이 공천에서 탈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의 조치를 따르겠다고 선언하고 당 안에 머물렀습니다. 그러자 비명계 모두가 이런 결정을 따랐습니다. 이처럼 당이 쪼개지지 않은 것이 선거에서의 승리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동화에나 나옴직한 이야기입니다.”
국민은 영화 같은 일들이 정치나 스포츠에서 실제로 일어나기를 바란다. 거의 일어날 가능성이 없기에, 현실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면 그 자체로 열광한다. 이번 더불어민주당 공천엔 지지자를 열광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었다.
“여기서 물음이 나옵니다. ‘무슨 일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무슨 비밀스러운 일이, 일어난 것일까?’라는.”
― 실은 저도 그 점이 궁금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우주론(宇宙論)에 비슷한 현상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번 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민주당 분열을 막아준 거대한 ‘암흑물질’
― 자세하게 말해주십시오.
“밤에 하늘을 살피면, 은하(galaxy)들이 회전하는 것이 보입니다. 그런데 은하의 회전 속도는 너무 빨라요. 그럼에도 망원경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은하는 형태를 유지합니다. 이 미스터리를 설명하기 위해 천문학자들은 암흑물질(dark matter)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물질은 5%가량 되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암흑물질이 95%가량 된다는 얘기입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의 19배나 되는 암흑물질이 있어서, 은하들이 빨리 회전해도 흩어지지 않도록 거대한 중력으로 붙잡아준다는 것이죠.”
― 그러니까 더불어민주당이 분열하지 않도록 꽉 붙잡아준 거대한 ‘암흑물질’이 있었다는 말씀이신가요? 숙청당한 문재인계 정치인들이 그 엄청난 중력을 가진 ‘암흑물질’에 붙잡혀 반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남았다는 얘기인가요?
“우주론의 ‘암흑물질’에 비유하면, 더불어민주당의 미스터리가 일단 설명이 되잖아요? 우리 눈엔 보이지 않지만, 더불어민주당의 중력보다 몇 곱절, 몇십 곱절 큰 권력을 가진 세력이 은밀히 움직여 이탈자가 하나도 안 생기도록 했다, 이런 얘기죠. 선거 때 원수는 평생 원수라는 말이 있는데, 미래의 정치적 이익이든 무엇이든, 현실의 불이익을 충분히 보상할 무언가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어떠세요, 이해가 좀 되세요?”
― 일단 현재까지는 그 미스터리를 설명하는 유일한 과학적 이론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암흑물질’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더불어민주당 사람들만이 알겠죠. 그래도 짐작할 단서들이 더러 있어요. 모두 잘 아는 것처럼, 근년에 온 세계에 걸쳐 중국의 영향력이 부쩍 커졌죠. 그리고 많은 나라에서 좌파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중국의 영향 아래 움직이고 있습니다. 강대국이 다른 강대국이나 주변국의 정치에 개입해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것은 사실 어제오늘의 현상이 아니죠.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전후(戰後)에도 예를 들어 소련이 얼마나 미국의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습니까? 미국이나 영국의 고위 공직자 중에서도 나중에 간첩으로 판명난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었잖습니까? 동독이 서독에 대해 벌인 공작도 어마어마했고요.”
― 그렇다면 우리나라도 중국의 ‘의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중국에는, 한국의 상황이 자신들의 국익(國益)과 직결되는 사활적(死活的)인 문제니까요. 상식적으로, 어떻게든 당연히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 정통한 전문가들은 이런 위험이 일반 시민들이 상상하는 수준을 훌쩍 넘는다고 경고합니다. 이번 우리 총선거를 며칠 앞둔 4월 4일에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의 MTAC(Microsoft Threat Analysis Center)는 중국의 개입을 경고하는 성명을 발표했어요. ‘올해에 세계적으로 주요 선거들이, 특히 인도, 남한 그리고 미국에서 실시되는 바, 우리는 중국이 최소한도 자신의 이익을 늘리기 위해서 인공지능생성물(AI-generated content)을 생산하고 확산시킬 것으로 예상한다. 그런 생성물이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아직 낮지만, 밈(meme), 비디오 및 오디오를 증강시키려는 중국의 늘어나는 실험들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앞으로 보다 효과적일 것이다.’”
이재명, 갑자기 윤석열 對中 정책 비판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2023년 6월 8일 중국대사관저를 방문, 싱하이밍 주한중국대사와 만찬 회동을 했다. 사진=국회사진기자단
복거일 작가는 경제학적 관점에서도 이 현상을 분석했다. 이런 식으로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다른 수단을 통해 국익을 추구하는 것보다 덜 드러나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고, 인터넷의 발달로 저비용이라는 점이 핵심이라고 했다.
“시사적(示唆的)인 것은 이재명 대표가 윤 대통령의 중국 정책을 갑자기 비난한 것입니다. ‘왜 중국에 집적대나? 그냥 셰셰(謝謝) 하면 된다’라고 했어요. 문재인 대통령의 굴욕적 대중(對中) 정책이 여러 문제를 불렀고 우리 국민의 80%가 중국에 대해 경계심을 가진 터에, 이런 발언이 득표에 도움이 될 리 없는데도 이 대표는 굳이 이 말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리고 중국 매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크게 보도했지요. 그런데 중국과 관련해선 또 하나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 어떤 점입니까?
“인공지능 시대엔 누구도 거짓 정보를 즉시 가려내고 의도적 배포자를 단시일 내에 찾아내는 일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해요. 특히 화웨이 같은 중국산 장비를 우리 국가기관이 단 하나라도 쓸 경우가 문제입니다. 화웨이 장비들은 모두 ‘뒷문(backdoor)’이라 불리는 정보 탈취 장치가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해요. 영국과 미국의 방첩기구 수장들이 공개적으로 위험을 경고하면서 시민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 애쓰는 상황이거든요. 우리 사회는 중국의 정보 탈취 시도에 특히 취약합니다.”
― 중국의 침투가 전방위적이고 지속적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중국의 침투에 대응하려면 입법이 필요한데, 더불어민주당이 장악한 국회에서 중국의 침투에 대응하는 법안을 통과시킬까요? 후대의 역사가들이 ‘2024년 4월의 총선에서 궁극적 승자는 중국이었다’라고 평가하지 않도록 거대 야당이 국익을 보호해야 합니다.”
“윤 대통령이 외롭지 않도록”
― 말씀 듣고 보니,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마지막으로 당부하실 말씀이 있다면요.
“윤석열 대통령은 대담하게 중국에 대해 자주적이고 합리적인 정책을 폈어요. 윤 대통령의 뛰어난 면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죠. 예상과 달리, 중국도 별다른 반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얼핏 대담한 외교 활동을 펼치던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면모를 윤 대통령에게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우리 애국 시민들이 윤 대통령을 보호해야 합니다. 앞으로 무척 외로울 터인데, 윤 대통령이 너무 외롭지 않도록 해야 해요. 현실적으로, 그것이 우리가 중국의 침투와 위협에 대해 잘 대응하는 길입니다. 중국 사람들에게 ‘셰셰’ 하면, 더 내놓으라고 나올 것 아니겠어요? 중국에 ‘셰셰’ 한 필리핀이 지금 수모를 당하는 모습을 보세요.”
노작가의 마지막 당부는 역시 나라 걱정이었다. 필자도 비장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유동규에게 국회 장악한 이재명 두렵지 않나 물었더니…
“후회? 추호도 없습니다. 계속 증언할 겁니다”
⊙ 유동규, 저서 《당신들의 댄스 댄스》 출간… “이재명 측 항의 없었다”
⊙ “저는 분명히 알려드렸습니다. ‘그분’이 어떤 사람인지”
⊙ “이재명의 ‘마리오네트(꼭두각시)’로 저지른 죄에 대한 반성… 여러분(국민)도 마리오네트가 될 수 있다”
⊙ “(재판)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이재명의 죄가 너무 많아서 그래요”
⊙ “올해 안에 최소한 1~2개 정도는 유죄 판결이 날 것… 반드시 결론 난다”
⊙ “김만배에게서 ‘쌍방울 통해 권순일에게 로비했다’라는 말 들었다”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본부장이 2023년 3월 2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정진상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정무조정실장의 뇌물 혐의 첫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사진=조선DB
“이미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저는 지금 아무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제가 아니면 이재명과 이렇게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유동규(柳東珪·55)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은 비장(悲壯)했다. 지난 4월 4일 그에게 ‘이번 총선에서 야권이 압도적으로 승리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한데, 그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해 증언해왔던 걸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자 유씨는 딱 잘라 말했다.
많은 이의 예상대로, 며칠 뒤 4월 10일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이재명 대표가 이끄는 더불어민주당은 단독으로 175석을 차지하며 의회 권력을 거머쥐게 됐다. 재판을 받으면서도 총선을 승리로 이끈 이재명 대표를 두고 벌써 대권가도에 청신호가 켜졌다는 평가가 쏟아지고 있다.
유동규씨로서는 간담이 서늘할 법한 일이다. 이재명 대표의 대장동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증인으로 나서고 있는 유씨는 지난 4월 2일 법정에서 “차라리 감옥 가는 게 편할 수 있다”며 “이재명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는 것은 목숨 걸고 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법정 안팎에서 ‘개딸’ 등과 같은 이재명 대표 강성 지지자들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유동규씨는 지난 3월 28일 저서 《당신들의 댄스 댄스》를 내고 이재명 대표의 성남시장 시절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폭로했다. 앞으로도 그는 책에서 밝힌 것처럼 “사실을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말할” 수 있을까. 서울 마포구의 한 공원에서 유씨를 만났다.
“감옥 갔다 와서 두려움이란 게 없어졌다”
총선을 불과 며칠 앞둔 시점이었다. 이재명 체제의 야권이 압승해 이 대표의 대권가도가 트이게 되지 않겠냐고 물었다. 떠오르는 권력자를 겨냥한 책을 낸 데 대한 중압감이 없는지도 물었다. 그러자 유동규씨가 되물었다.
“혹시 바둑 두십니까?”
- 둘 줄은 알지요.
“하수는 단수(單手·바둑에서 한 수만 더 두면 상대의 돌을 따는 상태)까지 가야 자신이 죽은 줄 알아요. 하지만 바둑을 어느 정도 둘 줄 알게 되면 한두 수(手) 전에 미리 죽는 돌을 볼 줄 알게 됩니다. 거기서 조금 더 고수가 되면요, 내가 두는 한 수 한 수가 살지 죽을지 보입니다.”
― 그래서요?
“저는 분명히 알려드렸습니다. 이 책을 통해 이재명이라는 사람에 대해 낱낱이 보여줬습니다. 사실만을 적었어요. 사람들이 올바른 선택을 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요. 최악의 상황에 이르기 전에, 많은 분이 하수의 돌을 두지 않았으면 해요.”
― 이번 총선에서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해 의회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면, 그때 가서도 그간 사실을 밝히기 위해 증언을 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요.
“없습니다. 당연하죠. 추호도 (후회는) 없습니다. 계속 사실을 말할 겁니다.”
유동규씨는 한때 ‘이재명의 장비(張飛·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라고 불릴 만큼 그에게 충성했다. 검찰 수사에서도 ‘그분’을 위해 입을 열지 않았다.
― 이재명 대표와 척을 지게 된 걸 후회하진 않습니까.
“나한테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감옥에서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겪었어요. 기도했어요. 저승사자를 빨리 만나게 해달라고. 감옥에 갔다 오고 나선 두려움이란 게 없어졌습니다.”
유동규는 버림받은 장비였다. 그가 처음 구속된 2021년 10월, 이재명 대표는 ‘유동규 측근설’에 대해 “측근의 기준이 뭐냐”며 “(유동규를 자신과) 무리하게 엮지 마라”고 선을 그었다. 유씨에 대해 “측근 그룹은 아니다”라고 분명히 했다. 6개월이 지나 유씨의 구속 만기를 불과 하루 앞둔 2022년 4월 20일, 법원은 증거인멸교사 혐의로 추가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좌절했다. 벼랑 끝에 내몰린 그는 가족과 ‘그분’을 지키기 위해 수면제 50알을 입에 털어 넣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눈꺼풀은 다시 열렸다. 고뇌 끝에 결심했다. “온전히 살고, 온전히 죽으려면 내 죄를 고백하고 모든 사실을 말하자”라고.
버림받은 장비
다음은 그의 저서에서 발췌한 유동규씨가 돌아선 계기다.
〈압수수색이 들어온 날, 내게 휴대폰을 창밖으로 던지라는 정진상의 말을 듣고 던져버린 게 증거인멸에 해당했다.〉(59쪽)
〈정진상이 어느 날 내게 갑자기 핸드폰을 바꾸라고 했다. ‘지사가 아이폰이 아니면 통화를 꺼려한다’라고 해서 (중략)
아이폰으로 처음 바꿀 때 나는 살짝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나까지 못 믿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은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나만 모른 거였다.〉(61쪽)
〈이재명의 입에서 퉁겨져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김문기 몰랐다.” (중략)
내가 구속되기 직전까지 이재명을 옹호하기 위해 같이 일했던 분이 아닌가.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가 죽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 텔레비전 화면을 꽉 채운 이재명 부부의 모습이었다. 산타 복장을 한 부부가 웃으며 춤을 추고 있는 게 아닌가. 더 소름이 돋았던 건 그날이 고 김문기 처장의 장례식 날이었다.〉(68쪽)
〈변호사로서 의뢰인(유동규)의 말을 민주당에 냉큼 전달하는 건 무슨 수작인가. 당신이 감시용 혹은 가짜 변호사가 아니고서야.〉(92쪽)
진술 신빙성 흔들기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본부장이 지난 3월 28일 낸 저서 《당신들의 댄스 댄스》
“검사님, 진짜 사실대로 수사할 자신… 있습니까?”
2022년 9월 26일, 유동규씨가 검사에게 물었다. 그렇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자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대표 측에선 유씨가 검찰의 회유를 받았다는 등의 주장을 하며 유씨의 진술 신빙성을 집중 공략하고 있다.
지난해 5월 2일 유씨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등 혐의로 기소된 정진상 전 민주당 대표실 정무조정실장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재명 대표가 자신의 측근이라고 인정한 정씨는 유씨에게 대장동 수익금 2억4000여만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이때 유씨는 정씨에게 돈을 준 과정과 용처 등에 대해 상세히 증언했다. 그러자 정씨 측 변호인은 집의 구조와 포장지 크기 등을 캐물으며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을 부각시키려고 했다.
정씨 측은 검찰이 유씨를 회유해서 증언을 짜 맞춘 것이라고 의심했다. 정씨 측 변호인은 증언이 너무 생생하다며 “믿음직하게 연출하기 위해 요즘 말로 ‘주작(做作)’을 한 게 아니냐”며 “거짓말이 탄로 나 진술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고 몰아붙였다. 정씨 측 변호인은 또 유씨에게 돈을 전달할 때 사용한 비닐의 종류를 물었고 유씨는 “마음이 너무 아프다”며 울먹이다가 호흡 곤란을 호소했다. 이로 인해 공판이 예정보다 일찍 끝나기도 했다.
이보다 앞서 지난해 4월 28일 유씨는 이재명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공판에도 출석했다. 이때 이 대표는 자신의 변호인과 유씨의 반대신문 도중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느냐”며 끼어들었다. 그러곤 유씨의 말에서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있다고 몰아붙였다. 이 대표는 유씨에게 “웬만하면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많이 힘들죠?”라며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이처럼 유씨로서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는 요즘도 법정에서 이재명 대표 측 변호인이 자신의 진술 신빙성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유씨는 지난 4월 2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대장동·성남FC·백현동 관련 배임·뇌물 등 혐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이 대표 측 변호인으로부터 신문을 받았다. 유씨는 ‘위례신도시 개발 특혜 의혹’에 대해서만 신문을 받기로 했는데 이 대표 측 변호인이 자꾸만 다른 얘기를 꺼내 진술 신빙성을 깎아내리려 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에 대장동 재판하는데 위례신도시에 대해서만 (신문)하기로 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증인 신문을 하는 3일 동안 ‘위례신도시’라는 단어는 다섯 번도 안 나왔습니다. 제 말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려는 데만 3일을 쓴 겁니다. 제가 한마디라도 실수하길 바라면서 유도 신문을 계속한 거죠. 같은 질문을 반복하면서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을 캐내려고 하는데 그럴 때마다 저는 ‘아까 얘기했던 거잖아요’라고 하면서 넘겼어요.”
유씨는 자신의 진술 신빙성을 지키기 위해 “확실하게 기억나는 것만 말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이번에 출간한 271쪽 분량의 저서 《당신들의 댄스 댄스》 역시 마찬가지다.
“마리오네트 역할 끝나면 줄은 끊어진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동규씨를 만난 건 총선을 앞둔 4월 4일이다. 그는 책의 출간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을 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재명의 ‘마리오네트’로 행동하며 제가 저지른 죄에 대한 반성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분도 마리오네트가 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 ‘여러분’은 국민을 가리키는 건가요.
“네, 국민입니다.”
― 선거를 앞두고 있어서요?
“네, 선거를 앞두고 있죠. 투표를 잘못해도 마리오네트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이재명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의 주변 사람들이 왜 죽어나가는지(를 이 책에 담았다). 마리오네트의 역할이 끝나면 줄은 끊어질 겁니다. 줄이 끊어지는 순간 마리오네트는 죽습니다.”
― 책을 쓰는 데 얼마나 걸렸습니까.
“자료 준비하는 데만 1년 정도 걸렸습니다. 그리고 문장을 다듬고 했으니 1년 조금 넘게 걸렸네요.”
― 복잡한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썼네요.
“네. 확실한 것만 담았어요.”
― 오래된 일인데 이렇게 자세히 기억할 수 있나요.
“확실하게 기억나는 것만 썼어요.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 ‘겪지 않은 일들도 추측을 기반으로 이야기해달라’고 요구할 때가 있어요. 어렴풋하게라도 기억하지 않느냐고요. 그러면 저는 바로 거절해요. 저는 증인 신분이잖아요. 제 증언의 신빙성을 지키려면 정확하고 분명하게 기억나는 사실만 말해야 합니다.”
― 책에 등장한 이재명 대표와 그의 측근, 민주당 등으로부터 책 내용에 대한 이의 내지 반박 등 조치를 취하겠다는 항의를 받은 바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재명, 자기 욕해도 된다고 하면서 다 고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24년 1월 1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조선DB
더불어민주당 공보국 관계자는 5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유동규씨의 저서와 관련해 ‘사실관계가 틀리다고 항의하거나 반박 내지 법적 대응 등을 포함한 조치를 할 것인지’를 묻자 “아직은 그런 부분에 대해 논의되지 않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추후에도 그럴 것인지는 아직 말하지 못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논의를 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유씨는 “이번 이재명 대표 피습 사건에 대해 이상한 점을 제기했는데 이재명 대표 측으로부터 고발을 당했다”며 “(이 대표는) 자기를 욕해도 된다고 하면서 다 고소한다”고 꼬집었다. 유씨는 저서 28쪽에서도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은) 병적으로 작은 것 하나도 참거나 그대로 넘기는 법이 없다. 누가 됐든 싸웠다. 말로, SNS 글로, 고소·고발로. 나로선 그것을 수습하느라 진땀 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쳤다”고 비판했다. 106쪽에서도 “이재명은 내게도 이재선 회계사를 고소할 것을 부추기고 종용했다. 고소의 요건이 되지 않아도 재촉했다”고 했다. 이러한 ‘고소 종용’ 대목에 대해 유씨가 경험담을 꺼냈다.
“(이 대표가) ‘고소했다면서?’ 그러자 저는 ‘예, 고소했습니다’라고 했죠. 그러자 (이 대표는) ‘잘했어’라고 칭찬해줬어요. 그렇게 하면 (이 대표의) 측근이 될 수 있습니다. 그의 측근이 되려면 죄를 많이 지어야 해요.”
유동규씨가 입을 연 지도 벌써 2년이 되어간다. 하지만 유씨가 증언하는 이재명 대표 관련 사건 가운데 유죄가 확정된 건 아직 단 한 건도 없다.
― 이재명 대표의 사법 절차가 지체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나요.
“이제 하나씩 하나씩 정리될 겁니다. 그동안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 거죠. 반나절이면 끝날 증인 신문을 3일을 끈다든지 재판에 안 나온다든지, 드러눕고 온갖 쇼를 다 하니까 재판이 질질 늘어질 수밖에 없죠. 판사도 이를 좌시하진 않을 거라고 봅니다. 우리나라에 법치가 살아 있으면 하나씩 하나씩 유죄 판결이 나올 겁니다. 반드시 처벌을 받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만배, ‘권순일이 내 말밖에 안 들어’”
― 그래도 더디지 않나요.
“다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그럼 예상되는 시점이 있나요.
“올해 안에 최소한 1~2개 정도는 유죄 판결이 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 ‘검찰이 이 대표를 탈탈 털어도 수사에 진전이 없지 않으냐’는 시각도 있지 않나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당연하죠. 그건 이재명의 죄가 너무 많아서 그래요. 한두 개가 아니잖아요.”
유씨는 저서 38쪽에 “나는 당시 김만배에게 똑똑히 들었다. ‘쌍방울 통해 권순일에게 로비했다’라는 말을”이라고 적었다. 권순일 전 대법관과의 재판 거래 의혹이다.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2심에서 벌금 300만원을 선고받은 이재명 대표는 3심에서 판결이 확정될 경우 경기도지사직을 잃을 위기에 처했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2020년 7월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 판결을 했고, 권순일 당시 대법관은 이 판결을 주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유씨는 “대법원에서 뒤집힐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하지만 ‘파기 환송’으로 전원합의체에서 ‘무죄’를 받았다”며 “그 어려운 일을 해낸 사람은 다름 아닌 김만배였다”고 주장했다.
유씨는 2020년 10월 대법원 판결 직후 수원 정자동의 한 아파트 단지 스포츠 센터 앞 야외에서 김씨를 만났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이때 김씨는 “야, 내가 1심 판사한테 180억 썼어. 근데 2심 판사는 씨알도 안 먹히더라”라고 했다고 한다.
유씨가 당시 일화를 꺼냈다.
“김만배가 ‘권순일이 내 말밖에 안 들어. 쌍방울 통해서 작업했다며, (권순일) 대법관님이 이야기하시더라’라고 했어요. 그 이야기 듣고 정진상한테 전화를 했어요. 그래서 정진상에게 ‘형, 쌍방울 통해서 권순일 뭐 작업한 거 있어?’라고 물었더니 전화인데도, 수화기 너머로 깜짝 놀라는 게 느껴질 정도였어요. 마치 ‘너 그걸 어떻게 알았어’라는 식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만배 형이 이야기해줘서 알았지’라고 했죠. 그랬더니 정진상이 ‘이야… 진짜 대단하다. 만배 형’ 그러더라고요.”
‘앞으로 모든 걸 문서화하라’
유씨는 저서의 서두에 이런 말을 남겼다.
“만기 출소한 나에게 사람들은 묻는다. 나는 대답 대신 이 책 《당신들의 댄스 댄스》로 갈음한다. 지금, 죄의 무게로 잠을 못 이루는 나날을 품고 있을 ‘그분’과 여전히 ‘그분’ 곁에서 ‘그분’ 죄의 무게를 늘리고 있는 그들을 위해 나는 이 반성문을 썼다.”
― 대장동 사건은 십수 년 전 일이고, 그동안 극단 선택을 시도하는 등 다사다난한 일들이 있었는데 그때의 일들을 어떻게 하나하나 다 기억하나요. 그때 자료를 남겨뒀나요.
“자료는 없습니다. 원래는 없었어요. 여러 재판을 거치면서 관련 자료가 쌓였죠. 그걸 보니 사건 당시의 장면이 떠오르는 겁니다. 직접 겪은 일들이기 때문에 기억이 나는 겁니다. 기억이 안 나는 걸 어떻게 소설로 만들어내겠습니까. 거짓말로 쌓아 올린 성(城)은, 벽돌 하나만 움직여도 무너지게 돼 있습니다. 이재명 쪽에선 당황했을 거예요. 이렇게까지 기억하고 있는 줄은 몰랐을 테니까요. 그때 상황 하나하나를 어떻게 지어내겠습니까. 금방 다른 거(말)하고 안 맞죠. 이재명이 만들어낸 가설, ‘유동규와 김만배가 짰다’는 건 바로 허물어지잖아요.”
― 저서에 따르면, 성남도개공 재직 당시 공사(公社)에 시스템이 구축돼 있지 않아 직접 시스템을 구축했고 그때 정리한 자료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재판에서 도움을 받고 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요.
“맞아요. 제가 (성남도개공에) 인사위원장으로 가 보니까, 우리 애들(직원들)이 징계에 회부된 이유를 물어보면 ‘공무원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한 겁니다’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막상 그 공무원은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해요. 공무원들은 항상 문제가 되면 ‘난 그런 적 없다’며 빠져나가려고 습관처럼 구두(口頭)로 업무 지시를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직원들이 뒤집어쓰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앞으로 모든 걸 문서화하라’고 했어요. 그리고 징계 건이 있을 때 ‘공무원이 시켰다’는 핑계를 대는 건 가만있지 않겠다고 했어요. 일할 땐 무조건 문서화해서 공문으로 주고받고, 말로 전달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렇게 공문이 남게 된 거예요.”
“그 사람은 절대 정치를 해선 안 됩니다”
― 그게 재판에서 도움이 됐군요.
“도움을 받고 있는 거죠. 제가 한 말들이 사소한 부분에서도 그 자료와 맞잖아요. 이재명의 말과 다르게 상황이 다 맞아떨어지잖아요. 그래서 보강 증거로 나오고 있는 거고요. 저도 그런 게 있는 줄 몰랐던 문서들이 나오는데, 검사들도 (자료를) 펼쳐보고 ‘아, 이게 그거였구나’라고 했어요. 그 자료들이 지금 제 진술을 뒷받침하고 있어요. 아무리 가짜 증인을 내세워서 사실관계를 바꿔보려고 해도, 누굴 만나고 했던 것들이 공문을 통해 남아 있잖아요. 겪지 않고서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그날 맑았는지 흐렸는지. 제 말 중에서 하나만 어긋나길 바라는 게 이재명 쪽의 생각일 겁니다.”
― 혹시라도 말이 꼬일까 봐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겠네요.
“아니요. 저는 자신 있습니다. 제 기억이니까요. 또렷한 기억만 말합니다. 권순일 전 대법관과 관련해 김만배에게 들었던 말도 명확하게 어디서 들었는지 그 장면까지 또렷하게 기억나니까 얘기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요, 다 틀어지게 돼 있어요.”
― 앞으로 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참회하는 마음으로 제가 겪은 일들을 사실 그대로 말할 겁니다. 그리고 후세에 우리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조그마한 일들을 해나갈 생각입니다.”
― 이재명 대표를 둘러싼 사건들은 마무리가 될까요.
“당연합니다.”
― 지난해 12월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저에게 ‘이재명 의혹 사건 관련,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라도 계속 증언할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도 같은 생각입니까.
“네. 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할 겁니다. 그 사람은 절대 정치를 해선 안 됩니다.”
총선이 끝난 후 유동규씨에게 총선 결과에 대한 소감을 묻는 문자를 보냈다. 그는 이런 답장을 보내왔다. “나라가 걱정입니다. 베네수엘라 국민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나라가 망하면, 거대 야당의 입법 폭주와 지난 정권의 퍼주기를 탓하는 게 아니라 손발 꽁꽁 묶인 윤석열을 비난할 것입니다 저들은 나라가 망하거나 말거나 하는 인간들입니다.”⊙
글 : 김광주 월간조선 기자 kj961009@chosun.com
05.06 공개 행사 재개 李 대표 부부, ‘법카’ 면죄부 받았다는 건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지난 4월 11일 인천 계양구 선거사무소에서 부인 김혜경(왼쪽)씨와 개표방송을 지켜보고 있다./연합뉴스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아내 김혜경 여사와 함께 4일 지역구가 있는 인천 지역 어린이날 행사에 참석했다. 김씨가 공개 행사에 등장한 것은 지난 대선 때 경기도 법인 카드 불법 사용 의혹이 불거진 뒤 2년여 만이다. 두 사람은 활짝 웃는 얼굴로 사진도 찍고 유튜브도 찍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물론 법인 카드 사건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김씨는 지난 대선 경선 과정에서 경기도청 법인 카드로 민주당 관계자 등에게 식사를 제공한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그동안 이 비용이 7만8000원에 불과하다는 점을 부각해 온 이 대표는 총선 전인 지난 3월 “(이를 기소한) 불공정과 무도함을 이번 총선에서 심판할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더니 총선에서 승리하자 김씨의 사법 리스크에 면죄부라도 받은 양 부부 동반으로 행사에 참석한 것이다.
하지만 총선 민심이 법카 불법 사용에 면죄부를 주었다고 해석한다면 착각이다. 이 대표는 ‘7만8000원’만 부각해 “고작 몇 만 원 갖고 이러느냐”는 인상을 주려 하지만 그것은 선거법 공소시효가 임박해 검찰이 급하게 먼저 기소한 것일 뿐이다. 이 대표 부부가 2018년 7월부터 2021년 9월까지 한우·초밥·샌드위치 시켜 먹고 경기도청 법인 카드로 결제했다는 핵심 의혹은 아직도 검찰이 수사 중이다. 관련 증언은 물론 증거 자료들도 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아닌 듯 행동하고 있다.
이 대표는 김건희 여사의 명품 백 수수 논란과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관여 의혹에 대해 특검을 추진하는 등 총공세를 펴고 있다. 김 여사는 명품 백 수수 논란이 불거진 뒤 지난해 12월 네덜란드 방문 이후 다섯 달째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만약 김 여사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공개 행보를 했다면 민주당과 이 대표는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이 대표는 아내의 법인 카드 부정 사용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김건희씨 수사부터 제대로 하라”고 했다. 그런데 자신들은 수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면죄부를 받은 양 행동한다. 그동안 숱하게 보여온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다.
조선일보 사설
05.06 의원에 대한 당론 겁박은 헌법 위반이다
이재명 대표 “당론 반대 옳지 않아” 총공세
4년 전 국회 독주 후폭풍 명심해야 할 제1당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지난 3일 22대 총선 당선인 총회에서 “당론으로 어렵게 정한 법안들도 개인적인 이유로 반대해서 추진이 멈춰버리는 사례를 몇 차례 봤다”며 “그건 정말로 옳지 않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우리가 독립된 헌법기관들이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 민주당이라는 정치결사체의 구성원”이라며 “최소한 모두가 합의하고 동의한 목표에 대해서는 자신의 신념과 가치의 양심에 상반하는 것이 아니라면 따라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번 총선에서 ‘비명횡사’ 공천을 통해 당내 견제 세력을 제거한 이 대표는 지금 민주당의 절대권력자다. 그런 그가 소속 의원들에게 당론에 따르라고 공개 압박한 것은 어떤 단서를 달든 당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발언이다.
헌법 46조 2항은 “국회의원은 국가 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고 규정했다. 국회법 114조 2항에도 “의원은 국민의 대표자로서 소속 정당 의사에 기속되지 않고 양심에 따라 투표한다”고 돼 있다. 의원에게 당론이란 것은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일 뿐, 당이 특정 의견을 의원에게 강요하는 것은 바로 헌법·국회법 위반이다.
아마 이런 비판을 의식해 이 대표는 “신념과 가치의 양심에 상반하는 것이 아니라면”이란 단서를 단 듯하다. 그러나 의원이 당론에 저항한다면 자신의 신념과 양심에 충돌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나. 현 민주당의 권력 구조상 이 대표 생각은 곧 당론이다. 의원들에게 내 말을 잘 들으라고 요구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재명 1극 체제가 완성된 민주당은 ‘명심(明心)’을 받들어 일사불란한 총공세에 나설 태세다. 3일 단독 추대된 ‘찐명’ 민주당 박찬대 신임 원내대표는 취임 일성으로 국회 법사위와 운영위를 민주당이 가져오겠다고 선언했다. 국회의장과 법사위원장은 1·2당이 나눠 갖고, 운영위원장은 여당 원내대표가 맡는 게 국회의 오랜 관례였다. 2020년 21대 국회 개원 때 민주당이 이런 관례를 깨트리고 전 상임위원장을 독식했다가, 이듬해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패배한 뒤 1년여 만에 국회 관례로 복귀한 전례가 있다.
이제 와서 민주당이 다시 법사위·운영위를 차지하겠다는 것은 국민의힘에 대한 점령군의 선전포고로 비친다. 4년 전처럼 민주당이 단독 개원을 밀어붙이고 전 상임위원장을 독식하는 사태가 재연될지도 모른다. 거대 야당의 일방 독주는 총선 민의와 어긋난다. 민주당은 2020년 총선 압승 뒤 국회에서 힘자랑에만 몰두한 게 민심의 역풍을 맞았고, 결국 대선 패배로 이어졌음을 명심해야 한다. 오만하면 반드시 심판받는다는 것은 집권세력뿐 아니라 거대 야당에도 똑같이 적용될 교훈이다.
중앙일보 사설
05.07 최악의 21대 국회, 임기 종료 앞두고 무더기 해외 출장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전경. /뉴스1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소속 여야 의원 3명과 공동 민간자문위원장 2명이 내일부터 5박 7일간 영국·스웨덴 출장을 떠날 예정이다. 해외 사례를 직접 살펴보며 국민연금 개혁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출장이라는데 지금 그럴 시점인지 의문이다. 오는 29일이면 21대 국회 임기 종료와 함께 연금특위 활동 시한도 끝난다. 그 전까지 특위 산하 공론화위에서 최근 도출한 ‘더 내고 더 받는’ 연금 개혁안을 확정할지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여야의 입장차가 워낙 커 막판 대타협이 시급한 상황이다. 이견을 못 좁히면 지난 2년간의 특위 활동은 없던 일이 되고 22대 국회에서 원점부터 다시 논의해야 할지 모른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해외 출장이라니 말문이 막힌다.
우리 국회에선 임기 종료 직전 상임위별로 해외 출장을 가는 것이 관례처럼 굳어져 있다.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 소속 민주당 의원 2명은 농산물 직불제와 산림 정책을 돌아본다며 최근 스위스와 오스트리아를 다녀왔고, 보건복지위 소속 민주당 의원 2명은 한국의 보건 의료 지원 사업 현장을 살펴본다며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했다. 김진표 국회의장은 ‘믹타(MIKTA) 국회의장 회의’ 참석을 위해 중남미와 미국을 도는 10박 15일짜리 출장에 나선 상태다. 여야 의원 5명을 포함해 수행원 10여 명을 대동했다. 전반기 국회의장을 지낸 박병석 의원도 동료 의원 5명과 함께 우즈베키스탄·일본 출장 중이다. 국회 평화외교포럼 대표단 자격이다.
이런 임기 막판 출장이 4·10 총선 이후에만 최소 15건이라고 한다. 이 기간 해외로 나가는 의원은 50명이 넘고, 쓰게 될 나랏돈도 20억원을 웃돌 전망이다. 올해 국회가 의원들의 해외 출장을 위해 잡아 놓은 예산도 역대 최대인 202억7600만원이다. 이런 출장을 전부 외유성으로 매도하긴 어렵다. 하지만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싸우다 언제 그랬냐는 듯 함께 여행을 떠나는 여야 의원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일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은 2만5830건이지만 처리된 건 36.6%인 9454건에 불과했다. 역대 최악으로 기록된 20대 국회의 36.4%에 버금간다. 그래도 의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외유를 떠난다. 4년 내내 3류 정치 해놓고 임기 막판 1류 정치 공부하러 간다니 영문을 모를 일이다.
조선일보 사설
05-07 임기 한 달도 안 남기고 “배우러 간다”며 외유 떠난 의원들

21대 국회 임기 종료를 앞두고 여야 의원들의 막판 외유성 출장이 줄을 잇고 있다. 동아일보 취재 결과 5월 중 확정된 해외 출장만 8건이다. 대부분 조사·연구나 의원외교가 목적이라는데, 임기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의원들이 뭘 배우고 무슨 의원외교를 한다는 건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출장자 명단엔 낙선·낙천 의원들이 여럿 이름을 올린 경우도 있다. “말년 휴가” “마지막 배려” 등의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국회 연금개혁특위 국민의힘 소속 주호영 위원장과 여야 간사 등은 8일부터 영국과 스웨덴 등 유럽 국가들을 방문한다. 유럽의 연금제도 현황을 파악하고 현지에서 합의를 시도해 볼 계획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유럽 연금제도 현황을 몰라서 연금개혁 합의안을 내놓지 못했다는 건가. 그렇잖아도 연금특위 산하 공론화위가 최근 내놓은 ‘더 내고 더 받는’ 연금개혁안에 대해 ‘개악’ 논란이 큰 상황에서 특위 활동 시한 종료를 코앞에 두고 해외에 나가면 답이 나오나.
새로운미래 설훈 의원과 국민의힘 이헌승 의원, 더불어민주당 신현영 의원 등 3명이 9일부터 탄자니아를 방문하는 것을 놓고도 뒷말이 많다. 이들 중 2명은 낙선자다. 당초 이들은 한-아프리카 보건의료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을 강화하겠다며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마다가스카르를 포함한 출장 계획서를 올렸지만 국회사무처가 마다가스카르 일정은 제외를 권고해 탄자니아만 방문하는 것으로 축소됐다고 한다. 애초 임기가 끝나기 전 평소 가기 힘든 나라를 가보자는 식의 발상 아니었나.
박병석 전 국회의장을 비롯한 민주당 4명과 국민의힘 2명 등 6명의 의원도 우즈베키스탄과 일본 방문을 위해 출국했다. 의원외교 차원이라고 하지만 어떤 시급한 현안이 있는지 의문이다. 막판 출장 신청이 쇄도하자 국회사무처가 “방문 목적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등의 이유로 퇴짜를 놓은 경우도 여럿 있었다고 한다. 어떤 비교섭단체 의원은 5월에만 3건의 해외 출장에 이름을 올렸다가 국회사무처 지적에 따라 제외된 사례도 있다. 각종 민생 법안 처리는 팽개친 채 막 내리는 21대 국회의 또 다른 볼썽사나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동아일보 사설
05.07 ‘보수 대통령’으로 당당했으면
해병대 사건도 문제 있다면
구차한 해명 말고 정공법으로
보수가 부끄럽지 않게
보수 대표로서 당당하라
남은 기간 능동적으로
그래도 국민 시선 차갑다면
자리에 연연하지 말아야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1일 오전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룸에서 의대 정원 증원 등 의료개혁과 관련 대국민담화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발표하고 있다./대통령실
4·10 총선은 우리에게 새삼 많은 것을 일깨워 줬다. 좌·우의 극명한 대결, 지역의 망국적 갈등, 온갖 범법 혐의자들의 금의환향, 그리고 김준혁과 양문석류(類)의 생환으로 상징되는 괴기한 선거였다. 평자(評者)들은 4·10 총선이 윤석열 정권의 실책과 윤 대통령의 불통에 대한 심판이라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런데 선거란 원래 상대적 심판이다. 많은 국민이 윤 대통령에게 실망했다는데 그렇다면 그의 잘못이 범법자들과 그 아류들의 그것보다 더 심각했다는 말인가?
선거라면 으레 집권 세력이나 집권자를 비판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다. 비판이 곧 민주주의의 정석이고 심판이 민주주의의 표현이라는, 교과서적 논리가 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우리는 정책의 옳고 그름을 사리(事理)로 판단하기보다 행위, 말, 주변 상황 등에 휩쓸리는 경향을 보여왔다. 이번 윤 정부에 대한 비판도 정책의 분야가 아니라 부인의 문제, 경제정책보다 대파값 같은 것에 휩쓸리는 것을 보였다. 이것을 좌파 의식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이번 총선에서 또 하나의 두드러진 현상은 지역 갈등 내지 지역 대립이다. 이번 선거는 유독 호남의 승리 또는 호남의 선택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호남 출신인 이낙연, 박용진, 임종석 등은 배제되고 경상도 출신인 이재명, 조국 등이 선택된 것을 어떻게 봐야 하나? 이런 지역적 쏠림 현상이 계속되는 한, 앞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는 심각하게 변형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지금’이고 ‘앞으로’다. 윤 대통령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를 지지했던 보수·우파 국민들은 허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여기저기서 한탄-개탄의 소리가 들린다. 윤 대통령을 겨냥한 모욕적인 언사와 노골적인 분풀이(조국)가 다반사다. 보수층에서도 윤 대통령의 지도력에 대한 불만의 소리가 있다. 여당에서조차 대통령의 무게가 가벼워진 분위기다.
윤 대통령은 보수 정권의 대통령이다. 사람들은 일단 대통령이 됐으면 국민의 대통령이지 어느 한쪽의 대통령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아마도 윤 대통령 자신도 당선된 뒤 ‘모두의 대통령’으로 행세하려고 협치(協治) 운운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좌파가 그를 협치의 상대로 받아준 적도 없다.
야당과 좌파의 공세에 대해 이런저런 구실과 핑계를 대며 무엇을 설명하고 해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듯한 언행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보수 대표로 보수가 부끄럽지 않게 당당했으면 한다. 예를 들어 그는 해병대 사건 특조위 문제에 무슨 설명을 한다는데 부디 구차하게 들리지 않았으면 한다.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더 이상 ‘해명’에 매달리지 않고 정공법으로 맞서 받을 것 받았으면 한다. 윤 대통령이 수동적으로 변명하지 말고 능동적으로 행동하고 전체 국민 앞에 보수의 대표로서 당당한 자세를 보여줄 때 그는 좋은 대통령으로 남을 수 있다.
윤 대통령은 법리(法理)를 잘 내세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문제에도 법과 절차를 따지고 법률가 출신답게 법리를 내세우는 데 익숙한 것 같다. 그가 오늘날 여러 역경을 겪는 주된 요인 중 하나는 의료 파행 사태에서 보았듯이 늘상 법리에만 치중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법치에만 매달리기보다 정리(政理)에 따라 정치를 해야 하는 자리다. 문재인 정권의 좌파 정치와 차별화를 위해 법치를 내세웠지만, 이제는 정치를 잃으면 법치도 가져올 수 없는 세상이다.
국민의힘은 윤 대통령과 공동 패자(敗者)다. 엄밀히 따지면 이번 총선에서 심판받은 당사자는 대통령이라기보다 국민의힘이다. 그런 처지에 내부 총질이나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어쩌면 이번 총선에서 진 것이 대통령의 책임인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아직도 ‘친윤’ 어쩌고저쩌고하는데 솔직히 검사 이외에 공직 경험이 없는 윤 대통령은 친윤밖에 믿을 것이 없는 처지였다. 민주당이 사법적 리스크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당대표를 위해 기꺼이 아스팔트에 나서며 반대투표를 하고 총알받이를 하는 것을 보고 윤 대통령은 그를 부러워했다는 얘기도 있다.
윤 대통령이 앞으로 남은 기간 능동적으로 그 ‘무엇’을 했음에도 국민의 차가운 시선이 거두어지지 않는다면 더 이상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결의로 나가야 한다. 대통령이면서 대통령 대우를 받지 못하고 야당의 모멸이 계속된다면 국정은 위험하다.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야당과 좌파의 파괴 공작이 계속되면 앞으로 3년은 암담하다. 긴박한 세계의 진화(進化) 속에 우리만 3년을 그렇게 보낼 수 없다.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니스트
05.07 이재명 대표의 영수회담 자세 유감
도대체 왜 만났을까? 얼마 전 있었던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 간 이른바 영수회담을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지난 2년간 만남을 회피했던 윤 대통령이 자리를 마련한 건 선거 참패를 겪고 난 후 불통의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는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대표 역시 ‘피의자’가 아니라 야당 대표로 대통령에게 당당하게 인정받고, 또한 총선에서 승리한 장수로서 힘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회담에서 내가 궁금해하며 주목했던 건 이재명 대표였다. 이 대표는 오래전부터 영수회담을 갖자고 제안해 왔고, 그 자리에서도 “여기 오는 데 700일이나 걸렸다”는 말까지 했다. 그렇게 기다린 만큼 영수회담에서는 그동안 이 대표가 보여줬던 것과는 뭔가 결이 다른, 말 그대로 ‘영수(領袖)’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 회의에서 이 대표가 보여준 모습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영수회담에서 미리 준비해 간 A4 10장 분량의 원고를 읽었는데, 형식도 내용도 영수회담의 수준에는 맞지 않았다. 대통령을 만나자고 해 놓고 거기서 자기의 지지층을 향해 연설한 모양새였다.
미리 준비한 원고 읽었던 이 대표
대통령 앞에서 지지층 향해 연설
통큰 자세 기대했으나 기대 미흡
독주·불통의 경고, 야당에도 해당
영수회담을 두고 권위주의 시대의 소산이니 시대착오적이니 하는 말도 있지만, 어느 조직에서나 최고 지도자는 주변의 의견이 분분한 난제에 대해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자리이다. 그런 점에서 ‘영수’가 만나는 것은 각 당이나 진영 내부의 반대나 단기적 이해관계를 넘어 큰 틀에서 막힌 문제를 풀어내기 위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이들이 실무선에서 합의가 어려운 문제를 두 사람이 만나 해결해 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던 것이다. 그동안 해 왔던 주장을 반복하거나 지지층의 목소리를 전달하려고 한다면 대변인 성명이면 될 일이지 영수가 굳이 만나 할 행동은 아니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회담을 보면서 이 대표가 작게 느껴졌다. 총선 승리가 사법 리스크를 없애 주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 승리와 함께 이 대표는 차기 대권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거기에 맞는 격을 기대했는데 크게 미치지 못했다.
더불어민주당이 선거에서 크게 승리했지만 사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 대표로서는 우려할 만한 점도 적지 않다. 특히 당의 전통적 기반인 호남에서 민주당은 조국혁신당에 밀렸다. 거대 정당이 유리한 선거제도의 특성으로 인해 지역구에서는 민주당이 의석을 차지할 수 있었지만, 비례대표 투표에서는 조국혁신당에 이어 2위에 그쳤다. 민주당은 광주에서 36.3% 대 47.7%로, 전남에서는 39.4% 대 44.0%로, 그리고 전북에서는 37.6% 대 45.5%로 조국혁신당에 뒤졌다.
더욱이 총선 이후에 실시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를 보면, 호남 지역에서 민주당 선호도는 51%였지만, 이 대표 선호도는 37%에 그쳤다. 총선을 승리로 이끈 직후의 조사임에도 불구하고 이 대표에 대한 선호는 민주당과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선거 민심이 ‘윤석열이 싫다’고 생각한 건 맞지만 그게 꼭 이재명 대표가 좋다는 뜻으로 보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총선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 대표 역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국민은 권력의 독주나 일방적인 국정 운영을 오만하다고 생각한다. 지난 총선이야말로 대통령이 독주하고 불통하는 데 대한 심판이었다. 그런데 이런 정서는 국회를 장악하게 된 야당에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민주당이 거대 의석의 힘만 믿고 독주하면, 이번 선거에서 윤 대통령에게 가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권력의 오만함을 국민이 느끼게 될 것이다. 대통령 선거는 3년이나 남았지만 보궐선거는 당장 내년이라도 실시될 가능성이 있고, 그 결과는 작년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처럼 정치적 파문을 불러올 것이다. 이번에는 윤 대통령이 심판의 대상이었지만 그때는 민주당이나 이 대표가 될 수도 있다. 권력이 주어졌을 때의 신중함과 사려 깊은 판단이 중요한 것이다.
이번 총선은 민심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권력자가 깨닫게 해 준 기회였지만, 정치제도적으로 보면 대통령과 의회라는 두 개의 권력이 충돌할 수 있는 대통령제의 가장 나쁜 상황이 생긴 것이기도 하다. 미국의 정치학자 린즈(Linz)는 대통령과 의회 간 대립과 갈등을 대통령제의 위험으로 간주하면서 이것이 정치체제의 안정성을 위협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진단이 바로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다. 이런 제도상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여야 최고 지도자 간의 타협과 합의이다. 영수회담은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번 회담은 몹시 서툴고 어색하게 진행되었지만, 그래도 또 만나야 하고, 만난다면 영수회담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격조와 정치력을 보여야 한다. 또 만나면 이번보다는 좀 나아지지 않을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일이니까.
중앙일보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05.08 “법으로 전 국민 25만원” 마치 정권 잡은 듯한 巨野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더불어민주당 새 원내대표가 22대 국회의 1호 법안으로 이재명 대표의 총선 공약인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지원금’ 지급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발의하겠다고 밝혔다. 정부가 25만원 지원을 위한 13조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거부하자 입법을 통해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이른바 ‘처분적 법률’ 방식이다. 처분적 법률이란 행정부의 집행이나 사법부 절차를 통하지 않고 국회가 곧바로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게 할 수 있는 법률을 말한다.
이는 위헌 소지가 크다. 헌법 54조에 따라 예산 편성권은 정부에 부여돼 있고 국회는 정부가 편성한 예산안을 심의·확정하게 돼 있다. 또 헌법 57조는 국회가 정부 동의 없이 지출 예산의 금액을 증가하거나 새 항목을 설치할 수 없도록 했다. 그간 처분적 법률이 적용된 사례는 전두환 은닉 재산 추징법, 최순실 부정 재산 환수법 등 특수한 목적과 대상을 전제로 한 것뿐이다. 전 국민에게 영향 미치는 재정 지출을 법률로 한 경우는 없다. 있을 수도 없다. 정부 예산으로 편성해야 할 전 국민 지원금을 법제화하겠다는 것은 헌법도 무시한 채 민주당이 정부 노릇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 대표와 민주당은 ‘25만원 지급’이 “골목 상권을 살리고 민생을 지원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안”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지나치게 풀린 돈 때문에 고물가가 경제와 서민 생활을 압박하고 있다. 고(高)금리로 자영업자나 다중 채무자가 고통받고 내수가 살아나지 못하는 것도 물가를 잡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빚내서 돈 뿌리면 경기가 살아난다는 주장은 경제 원리에 어긋나는 억지에 가깝다. 불난 데 기름 끼얹는 것과 같다. 부자나 중상류층은 정부가 돈을 준다고 더 소비하지도 않는다. 현금을 뿌린다면 서민, 영세 자영업자 등 저소득 취약 계층에 선별 지원하는 것이 옳다.
나랏빚이 1100조원이 넘고 작년 1년의 관리재정수지 적자가 87조원에 이른다. 민주당 집권 시절의 방만한 씀씀이가 낳은 결과다. 그렇게 국가 재정을 부실화시켜 놓고 재정준칙 법제화를 번번이 뭉개더니 이제 또 전 국민 돈 뿌리기를 법제화하겠다고 한다. 무책임하다.
조선일보 사설
05.08 이상한 尹·李 회담 풍경
함성득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장과 임혁백 고려대 명예교수가 지난달 29일 열린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회담 성사 과정에서 막후 메신저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며 함께 언론 인터뷰를 했다. 함 원장은 윤석열 대통령과 같은 아파트에 살았고, 임 교수는 민주당 공천관리위원장을 했다.
인터뷰를 보면 윤 대통령이 “이 대표가 불편해할 사람을 총리에 기용하지 않겠다” “회담이 잘되면 골프 회동과 부부 동반 모임도 갖자”는 뜻을 이 대표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공식 기구와 참모들 외에 다른 비공식 라인도 활용한 것이냐는 의문이 제기되자, 대통령실은 “회담은 비서실 같은 공식 조직을 통해 이뤄졌다”고 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차기 대선 경쟁자가 될 인사를 비서실장에 기용하지 않겠다”고 했다는 인터뷰 내용에 대해 대통령실은 별도로 반박하지 않았다. 국민의힘 일부 지지자들은 당 게시판에 “대국민 사과에 인색했던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는 너무 굴욕적”이라는 글을 올렸다. 윤 대통령이 일부 같은 당 사람들을 대했던 적대적 태도와도 너무 다르다. 무엇이 진짜 대통령의 모습인지 혼란스러운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과 여야 대표들의 회담, 그리고 대통령의 정치 활동은 대통령실 정무수석실이 맡고 있다. 역대 정부에서 정무수석과 정무비서관들은 국회의 여야 대표 사무실에 수시로 출입하며 대통령의 뜻을 정치권에 전하고, 여당과 야당이 가려워하는 곳을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해왔다. 싸우던 여야가 어느 날 극적으로 정치적 타결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대통령실의 정무 기능 때문이었다. 그런데 현 정부 들어 대통령실의 정무 기능은 사실상 정지됐다.
총선 직후 윤 대통령이 “이제 정치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며 야당 대표와 만난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 과정에서 비공식 라인까지 가동됐다 해도 꼭 탓할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대통령실 내부 비선 라인에 대한 소문이 무성한 터여서 개운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지금 대통령의 메신저를 자처하는 인사들이 대통령 주변에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러니 이번처럼 회담의 협상 과정을 공개하거나 자신들의 역할을 부풀려 자찬하는 일도 벌어진다. 모두가 바람직하지 않으며 잘못하면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조선일보 사설
05-08 처분적 법률과 특검 남발 예고한 野, 삼권분립도 허무나
더불어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민주주의 시스템을 허물 정도의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 입법부 차원의 다수결 원칙을 넘어 행정부의 고유 권한을 심각하게 침해할 ‘처분적 법률’의 무더기 제정을 예고했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예산 편성권을 정부에 독점적으로 부여하고 국회에는 심의·확정권만 부여한 헌법(제54∼57조)까지 대놓고 무시하려 든다. 게다가, 야권 인사들이 연루된 사건을 수사하기 위한 특별검사법 겁박도 쏟아낸다. 이 중에는 관련 사건의 대법원 확정 판결까지 나온 경우도 있다.
박찬대 신임 원내대표는 7일 제22대 국회의 1호 법안으로 ‘1인당 25만 원의 전 국민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발의하겠다고 밝혔다. 이재명 대표가 지난달 29일 윤석열 대통령과 회담에서 제안했다가 “어려운 분들을 더 효과적으로 지원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며 거부당하자 이를 강제하는 법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지난달 17일 “국회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을 발굴하면 좋겠다”면서 “처분적 법률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대상으로 신용 사면과 서민금융 지원을 소개했다. 민주당은 은행과 정유사의 과도한 이익에 세금을 물리자는 ‘횡재세’ 법안도 그런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박 원내대표는 ‘이화영 전 경기부지사 수사 과정,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의 딸 조민 씨 수사 과정에서 검찰의 조작이 있었는지 특검으로 조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자 “매우 심각한 문제”라며 특검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이 전 부지사의 대북송금 사건은 오는 6월 7일 1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조민 씨는 1심에서 벌금 1000만 원을 선고받은 상태다. 조 대표의 부인 정경심 씨는 자녀 입시 비리 혐의 등으로 대법원에서 징역 4년형이 확정됐고, 조 대표도 2심에서 징역 2년형이 선고돼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시작된 수사들이기도 하다.
국회에 입법권이 있지만, 법률이 헌법과 민주주의 일반 원칙을 벗어나선 안 된다. 처분적 법률은 개별사건이나 특정 개인을 대상으로 아주 제한적으로 적용돼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삼권분립도 법치의 안정성도 무너지게 된다.
문화일보 사설
05.08 25만원 지원금 입법, 헌법 정신마저 흔드나
정부의 예산 편성권 못 박은 헌법과 정면으로 배치
3조짜리 양곡법도 강행…민주당 ‘제도적 자제’ 필요
더불어민주당이 지난 총선에서 공약한 전 국민 대상 25만원의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22대 국회 1호 법안으로 추진하겠다고 공언했다. 신용사면 등을 거론하며 ‘처분적 법령’을 많이 활용하자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주문에 박찬대 신임 원내대표가 적극 부응하고 나선 결과다. 민생회복지원금을 나눠주려면 13조원의 재원이 필요하고 정부의 추가경정예산 편성이 불가피하다. 민주당은 추경에 반대하는 정부를 무력화하기 위해 자동적으로 집행력을 갖는 처분적 법률을 활용해 특별조치법을 발의하겠다고 예고했다. 처분적 법률은 행정부의 집행이나 사법부 절차를 거치지 않고 직접 국민의 권리·의무를 발생시키는 법률이다.
처분적 법률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의 공소시효를 정지한 5·18특별법 조항을 비롯해 입법 사례가 적지 않다. 하지만 특정인이나 특정 대상만을 규율하는 과정에서 입법권이 남용되고 평등원칙을 위반할 수 있다.
행정부의 고유 권한인 행정처분을 국회가 행사한다는 점에서 3권 분립에 위배된다는 지적도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공익적 가치가 클 경우에만 처분적 법률을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게 제대로 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헌법재판소도 2008년 이명박 전 대통령 측이 낸 ‘BBK 특검법’ 위헌 소송에서 “처분적 법률에 따른 차별적 규율이 합리적인 이유로 정당화되는 경우에는 위헌으로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민주당의 25만원 특별조치법은 정도가 지나치다. 이미 여러 번 지적했듯이 정부의 재정 여력이 없고 물가만 불안하게 하며 소비 진작 효과도 크지 않다는 점에서 공익적 가치를 주장하기는 힘들다. 민주당의 25만원 입법은 오히려 정부에 예산 편성권을 부여하고, 정부 동의 없이 국회가 정부 제출 예산을 늘리거나 새 비목(예산 세부 단위) 설치를 금지한 우리 헌법을 정면으로 위반할 소지가 크다.
민주당이 양곡관리법과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농안법) 개정안을 단독 처리하겠다고 나선 것도 걱정스럽다. 양곡법이 개정되면 정부가 초과 생산된 쌀을 의무적으로 매입해 보관하는 데만 연간 3조원 이상 들어간다. 특정 농산물의 최저가격을 보장하는 농안법 개정안은 적용 품목을 정하는 과정에서 사회 갈등만 키울 우려가 있다.
입법은 국회의 권한이지만 경제 입법은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전문가 조언을 충분히 듣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지적했듯이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가 위태로운 민주주의를 지키는 가드레일이다. 거대 야당이라고 입법 폭주에 나선 민주당이 지금 이 말을 곱씹어 봐야 한다.
중앙일보 사설
05.09 야권 추진 특검 6개, 상식 벗어나고 있다
민주당 박찬대 원내대표가 ‘조국 사건’을 “정치 검찰의 사건 조작”이라며 특검을 할 수 있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이화영 전 경기도 부지사의 ‘검찰청 술자리 회유’ 의혹, 문재인 정권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수사’에 대해서도 특검 추진을 논의 중이라고 한다. 이미 본회의를 통과한 ‘해병대원 사망 사건’ 특검에다 차기 국회에서 우선 처리를 예고한 ‘김건희 여사’ 특검까지 더하면 총 5건의 특검을 추진하는 것이다. 조국혁신당도 한동훈 전 법무장관 딸의 ‘허위 스펙’ 의혹을 규명하겠다며 ‘한동훈 특검법’을 예고한 상태다. 한 전 장관은 조국 대표를 수사한 사람이다. ‘보복 특검’인 셈이다.
특검에 무슨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조국 사건’만 해도 조 대표는 자녀 입시 비리 등으로 2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아내 정경심씨는 징역 4년이 확정됐다. 이 판결을 내린 판사들이 특검 대상이 돼야 하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사건도 황운하 조국혁신당 원내대표가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는 등 관련자 대부분에게 유죄가 선고됐다. 이 수사는 다 문재인 정권 때 이뤄진 것이다. 문 정권은 이 수사를 덮으려고 수사 검사들을 인사 학살하고 검찰총장까지 쫓아냈다. 그 와중에 무슨 조작이 있을 수 있나. 재판 과정에서도 조작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와 “조작”이라고 한다. 선거에 이기면 없던 ‘조작’이 갑자기 생기나.
‘검찰청 술자리 회유’ 의혹도 마찬가지다. 이화영씨는 제기한 의혹에 대해 검찰이 다 부인하는 근거를 제시하자 음주 장소와 일시를 수시로 바꾸더니 음주 사실 자체까지 번복했다. 그런데도 특검을 추진한다고 한다. ‘쌍방울 불법 대북 송금’ 사건으로 기소된 이화영씨는 다음 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그가 유죄을 받으면 이재명 대표도 유죄를 피하기 어렵다. 결국 민주당의 특검 추진은 이 대표 방탄을 위해 검찰과 법원을 압박하는 수단이다.
민주당은 4년 전 총선 압승 직후에도 불법 정치 자금 수수 혐의로 징역 2년이 확정된 한명숙 전 총리 사건도 검찰 조작이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 검찰이 수사팀을 조사했으나 다 무혐의였다. 이번 총선에서 또 압승하자 무더기 특검 카드를 들고 나오고 있다. 상식을 벗어난 것이고, 무엇이든 지나치면 역풍을 부른다.
조선일보 사설
05-09 할 일 않고 외유 나선 후안무치 의원들
임기 말 국회의원들의 출장을 빙자한 ‘해외 나들이’ 행태가 다시 극성이다. 언론의 보도를 보면, 4·10 총선 다음 날부터 제21대 국회 임기가 끝나는 오는 29일까지 49일간 의원들의 출장이 15건이고, 재적 296명 중 57명이라고 한다. 임기 종료 사흘 전인 26일까지 예정된 출장도 있다고 한다.
국회사무처가 승인하지 않거나 일정과 인원 축소 등의 조건부 승인을 했는데도 이 정도다. ‘친환경 자전거 협력 방안 연구’를 위한 프랑스·네덜란드 출장, 인공지능(AI) 등 ‘첨단 산업 현장 방문’이라는 캐나다 출장 등은 국회사무처의 승인을 받지 못했고, 개혁신당의 모 의원은 해외 출장이 너무 잦다는 국회사무처의 지적에 따라 명단에서 제외됐으며, 몇몇 출장에 대해 국회사무처는 일정을 축소하라든가 아프리카의 유명 관광지 마다가스카르를 제외하라는 등의 조건부로 승인받았다고 한다. 국회사무처는 의원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는 곳이고 예산도 확보됐을 터이므로 웬만해서는 승인하지 않았을 리 없다.
특히 어이없는 일은, 낙선이든 출마 포기든 제22대 국회에 들어가지도 않는 의원들의 출장이다. 의원의 해외 출장은 외국의 의원이나 공직자를 만나 의원외교를 하거나 다른 나라의 제도나 상황을 직접 보고 느낀 바를 의정에 반영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임기가 며칠 남은 의원이 어떻게 의원외교를 할 것이며, 곧 의원 지위를 잃을 의원들이 무슨 수로 출장에서 배운 바를 의정에 반영하겠는가. 이러니 출장이 아니라 ‘졸업여행’이니 ‘말년 휴가’니 하는 비아냥이 나오는 것이다. 국민이 뽑은 대표들의 일탈이니 그 부끄러움은 국민의 몫이겠다.
어떤 직책이든 임기 말은 일을 마무리할 때지 벌일 때가 아니다. 특히, 임기종료와 함께 자신이 발의한 법안이 자동 폐기되는 국회의원이라면 말할 나위도 없다. 제21대 국회에 4년간 법안 2만5830건이 발의돼 9454건이 처리됐고 나머지 1만6376건이 계류 중이라는데, 계류 중인 법안은 제21대 국회 종료와 동시에 폐기된다. 옥석을 가려서 이들 법안 중 처리할 것은 처리한 후 임기 종료를 맞는 것이 국민의 대표가 마땅히 취할 자세다. 여야가 줄기차게 사사건건 대립한 제21대 국회에서 드물게도 여야 합의에 이른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특별법안’ 3건이 있는데, 이마저 폐기될 가능성이 크다. 이들 법안이 조속히 통과되지 않으면 원자력발전소가 폐기물을 처리하지 못해 가동을 멈추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법안도 방치한 채 꼭 가야 할 만큼 긴급하고도 중대한 해외 출장이 있단 말인가.
국회의원으로서 해외 출장의 유혹이 달콤하긴 하겠다. 모든 비용은 나라에서 대주고, 공항 귀빈실로 출국해 도착하면 현지 대사관 직원이 마중 나와 안내와 차량 제공 등 모든 편의를 봐줄 테니 임기가 끝나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나가고 싶은 심정, 이해는 간다. 하지만 이런 유혹에 넘어간다면 국민의 대표 자격은 없다. 이런 자격 미달 의원이 다시는 국회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유권자가 할 일이다. 어느 당 소속이든 임기 말에 달콤한 외유를 하는 의원들의 이름을 끝까지 기억했다가 적어도 제23대 총선에서는 반드시 떨어뜨려야 한다. 그래야 그 달콤한 유혹이 독(毒)이 든 사과임을 알게 되지 않겠는가.

문화일보 이재교 세종대 법학부 교수, 변호사
05-10 윤·한 갈등 해소하고 全大를 여당 재건 계기 삼으라
여권의 심각한 정치적 뇌관의 하나는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불협화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9일 기자회견에서 “한 전 위원장에게 사퇴를 요구했다는 건 오해”라고 규정한 뒤 “비서실장(당시 이관섭), 원내대표(윤재옥), 한 전 위원장이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그런 얘기가 나온 것 같다”는 배경 설명까지 친절하게 덧붙였다. 나아가 “20년 넘도록 교분을 맺어온 한 전 위원장을 언제든 만날 것”이라며 “한 전 위원장은 이제 정치인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했고, 앞으로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잘 걸어나갈 것”이라는 덕담도 했다.
한 전 위원장이 비대위원장에 추대된 지난해 말 이후 두 사람은 김건희 여사 특검법, 이종섭·황상무 사태, 친윤 인사 공천, 의대 증원 대책 등을 놓고 최소 4차례 파열음을 냈다. 총선 참패 뒤엔 윤 대통령의 뒤늦은 오찬 회동 제의를 한 전 위원장이 건강상의 이유를 내세워 거절했다. 지난달 16일 국무회의에서 윤 대통령은 “(총선 참패는) 당의 선거운동이 평가받은 것”이라며 사실상 한 전 위원장 책임으로 돌리기도 했다. 일부 친윤 인사들은 같은 취지에서 한 전 위원장의 전당대회 불출마를 압박한다.
윤 대통령의 기자회견 언급이 갈등의 전모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는 출발점이 될 수는 있다. 새 지도부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는 ‘난파선’ 여당의 재건을 위한 중요한 계기다. 주호영·윤재옥에 이어 또 TK 출신 추경호 의원이 원내대표로 선출된 상황이라 더욱 그렇다. 전당대회 시기, 당심·민심 반영 비율, 당권·대권 분리 등 난제도 수두룩하다.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한 전 위원장의 대표 경선 출마 문제다. 윤 대통령의 ‘오해 불식’ 발언을 계기로 한 전 위원장은 물론 나경원·안철수·김태호·유승민 등 중량급 인사가 모두 나서서 당의 활력을 높이고 지지 기반을 넓히는 기회로 삼아야 할 때다.
문화일보 사설
05.10 YS 손자, 홍준표 저격 "당비 50만원 내는 원로가 당 분열 획책"

▲김인규 전 대통령 정무수석실 행정관. 연합뉴스
연일 여권의 총선 패배 이후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책임론을 언급하거나 황우여 비대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홍준표 대구시장을 향해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손자인 김인규 전 대통령실 행정관이 10일 "점입가경"이라며 쓴소리를 했다.
김 전 행정관은 이날 페이스북에 "국민의힘 전직 상임고문님의 말씀이 날로 점입가경"이라며 "그분의 사전에 반성은 없는 것 같다"고 에둘러 홍 시장을 저격했다.
그는 "2017년 대선의 패배는 어차피 지는 선거에 부득이하게 나간 것이고, 2018년 지방선거 패배도 탄핵 여파로 부득이하게 진 것이며, 21대 총선에서도 부득이하게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한 것이냐"고 따져 물으며 "당심에서 지든 민심에서 지든 선거에서 패배는 패배일 뿐이지, 부득이한 게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날 홍 시장이 지난 대선 경선을 언급하며 "그 당시 민심에서는 10% 이상 앞섰으나, 당심에서 참패하는 바람에 후보 자리를 내줬던 것"이라며 "윤석열 대통령은 부득이하게 받아들여 모시고 있지만, 한동훈은 용서하기 어렵다"고 말한 데 대해 김 전 행정관이 지적한 것이다.
김 전 행정관은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고, 부득이한 일을 반복하면 고의"라며 "내가 하면 부득이한 것이고, 남이 하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에도 동의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어 "왜 우리 당이 여러 선거 참패 이후 외부 인사이던 김종인 위원장에게 당의 수습을 맡길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대선에서 자체적으로 후보를 내지 못했는지부터 생각해야 한다"라고도 했다.
김 전 행정관은 또 "어떻게 정치 지형에서 보수의 파이보다 진보의 파이가 더 커졌는지, 그래서 어떻게 다시 보수의 파이를 키울 것인지, 궁극적으로 자생적으로 후보를 낼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모색하는 것이 순서 아니겠냐"며 지난 대선에서 2030의 지지로 간신히 이길 수 있었다는 점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정말 당을 위하시는 마음이시라면, 어떻게 다시 2030의 지지를 국민의힘이 가져올 수 있을지, 당의 젊은 정치인들을 어떻게 키워낼 수 있을지 그 해법을 말씀해 주시는 게 당을 30년간 꿋꿋하게 지켜온 어르신께서 해주실 역할 아니겠냐"며 "지금 집안이 흉흉한데, 당의 분열을 획책하고 갈라치기 하는 것이 월 50만원씩 당비를 내시는 당의 원로께서 하실 말씀인가. 지금은 당의 분열보다 수습이 먼저"라고 쓴소리를 했다.
홍 시장은 과거 김영삼 전 대통령에 의해 정치에 입문한 후 보수진영에서 꾸준히 활동해왔다.
한지혜 기자 han.jeehye@joongang.co.kr
05.11 국회의장 후보 “국회 단상 뛰어올랐다” 자랑, 비정상 국회 예고

▲2009년 7월 22일 여야의 난투극 속에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이윤성 국회 부의장이 김형오 국회의장 대신 미디어법을 통과시키자 민주당 조정식 의원이 이에 항의하며 셔츠 차림으로 의장석으로 올라가고 있다. /이덕훈 기자
민주당 국회의장 후보인 조정식 의원이 2009년 국회 법안 대치 때 “제가 의장 단상에 뛰어올랐었다”며 “겉으론 제가 부드러운 이미지인데 내면에는 불같은 성격이 있다”고 했다. 당시 사진을 보면 조 의원이 구둣발과 셔츠 차림으로 국회의장 단상을 밟고 올라서자 국회 방호원과 의원들이 그를 제지하는 ‘활극’이 벌어졌다. 의장 단상은 의장이 의사봉을 두드려 법률안 가결을 선포하는 등 본회의를 진행하고 여야 갈등을 중재하는 곳이다. 의장 권위의 상징이기도 하다. 다른 의원도 아닌 국회의장이 되겠다는 6선 의원이 구둣발로 단상을 밟았던 일을 부끄러워하거나 감추려 하지 않고 인터뷰에서 자랑스레 언급한다. 한국 정치의 병리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그가 의장이 된 뒤 국민의힘 의원이 단상에 뛰어오르면 뭐라고 할 건가.
국회법이 의장의 당적 보유를 금지한 것은 특정 정당에 기울지 말고 국민을 위해 최소한의 정치적 중립은 지키라는 취지다. 그런데 의장 후보 4명은 전부 ‘중립은 없다’고 말했다. 추미애 당선인은 “의장이 중립은 아니다”, 우원식 의원은 “민주주의에 중립은 없다”고 했다. 합리적이란 평가를 받던 정성호 의원도 “(의장이) 기계적 중립만 지켜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강경파 목소리가 압도적인 민주당에서 선명성 경쟁을 하는 것이다. 그러자 김진표 현 의장이 “편파된 의장은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개탄했다.
민주당 국회의장 후보들은 ‘명심(이재명 대표 의중)이 자신에게 있다’는 말도 공공연히 한다. 사실상 ‘이재명당’에서 친명 표를 얻어야 당선되기 때문이다. 의장이 돼도 이 대표 극성 지지층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가 서열 2위인 국회의장 후보가 특정 정치인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이 대표는 당론으로 정한 법안에 대해선 소속 의원들이 따라줘야 한다고 했다. 당이 특정 의견을 의원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양심에 따른 직무’를 규정한 헌법 위반이다. 지금 ‘비명횡사’ 민주당에선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없다. 민주당이 당론 법안을 밀어붙이고 ‘꼭두각시 의장’이 거들면 입법 폭주가 계속될 것이다.
과거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나는 법안 통과 의사봉을 두드릴 때 한 번은 여당을, 또 한 번은 야당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국민을 보고 양심의 의사봉을 쳤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 의장 후보 경선에선 ‘구둣발로 의장 단상을 밟았다’는 자랑까지 나오고 있다. 국회가 얼마나 비정상일지 그 예고편을 보는 것 같다.
조선일보 사설
05-13 정치인 한동훈, 낮은 곳 가야 가망 있다
이제교 편집국 부국장
尹 정체성 무언지 고민할 시점
거짓의 세상서 정의 수호 역할
김 여사 수사 특혜 예우 없어야
거야 탄핵은 피할 수 없는 수순
韓은 총선 패배 숙고 시간 필요
밑바닥 국민 만나며 재기 모색
“거기 누구냐(Who’s there)?” 햄릿의 첫 대사는 이 짤막한 실존적 물음이다. 진실이 묻혀버린 덴마크 엘시노어 성에서 속내를 감추고 배회하는 모든 존재에게 던지는 화두다.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현실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독한 대면이다. 권력과 부의 주변에서 흔들리는 ‘정과 의’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분노, 외면·묵인도 하지만 결단을 내려야 한다. 무엇을 해야 할지 열쇠가 숨겨져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사법 시스템의 파수꾼이자 형벌 집행자였다. 그곳에서 그는 화려하게 빛났다. 검찰총장으로 있으면서 청와대 울산시장 선거 개입, 조국 법무부 장관 가족 비리 등 성역없는 수사를 벌였다. 문재인 정부의 탄압은 정치로 가는 시발점이 됐고 대중적 관심을 인화시켰다. 집값은 치솟고 안보는 불안하고, 사회 전체가 마음 줄 곳 없이 팍팍할 때 “사람이 아닌 국가에 충성한다”는 한마디는 국민 모두의 가슴을 때렸다. 위선 가득한 세계에 한 가닥 빛을 안겨 줬다. 그게 윤석열이 가진 정체성이다.
현 상황은 녹록지 않다. 부인 김건희 여사의 300만 원 디올백 수수에 대해 지난 9일 사과하고 국민에게 고개를 숙였다. 채 상병 수사 외압 의혹에 대해서는 ‘선 수사 후 특검’ 의사를 나타냈다. 수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더라도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이 써낸 답은 정해져 있다. 거야의 최종 표적은 탄핵이다. 각종 혐의로 재판 중인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시간은 넉넉하지 않다. 대통령을 끌어내려야 살길이 열린다. 조국 대표도 마찬가지다. 뒤집으면 윤 대통령 입장에선 정면돌파 외에 선택지가 없다는 말이다.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도 수사는 동등하게 이뤄져야 한다. 김 여사는 제1·2야당 대표 부인 김혜경과 정경심 여사처럼 포토라인에 서는 용단을 내려야 한다. 법리적으로 보면 청탁 대가성이 없어 법적 책임을 묻지 못한다. 채 상병 수사 외압 의혹의 본질 역시 사건 은폐·무마가 아니다. 과실치사 적용 혐의 대상을 입수명령을 내린 해병대 1사단장으로 국한할지, 명령을 따른 현장 지휘관까지 확대할지에 대한 판단의 문제다. 그 과정에서 용산의 의견 표명이 있었더라도 탄핵까지 갈 사안은 아니다.
냉정하게 보면 두 사건은 이미 정치적 대가를 치렀다. 야당 192석, 여당 108석의 총선 결과로 나타났다. 국민을 대표하는 영부인 자리에 김 여사가 다시 서려면 일정 기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채 상병 유족들의 아픔은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다. 대연정으로 권력의 반을 내주지 않을 거라면 꽁지 빠진 수탉이 아니라 사바나 초원의 수사자 같은 결기를 보여야 한다. 임기 단축 4년 중임 개헌은 또 다른 논쟁적 돌파구다. 책임질 부분은 책임을 지고 뚜벅뚜벅 가시밭을 걸으며 할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윤석열이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도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누가 뭐래도 그는 제22대 총선의 패장이다. 패배 원인으로는 윤·한(윤석열·한동훈) 갈등으로 시작해 이철규 의원의 ‘선거 디테일’에 의존한 공천 작업 및 인재 등용의 무감동 패착, 이·조(이재명·조국) 심판론에 머문 선거 프레임의 비전 부재 등 여러 가지가 떠오른다. 민주당 인사인 66세 이상민과 69세 김영주 의원의 영입은 치명적 실수다. 이 대표가 버린 낡은 카드를 주워들고 웃었지만, 혁신과 변화의 에너지를 스스로 갉아먹고 말았다.
한 전 위원장은 낮은 곳에 임해야 한다. 그는 압구정동 현대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 재학 시절에 사법시험에 붙는 엘리트 인생을 걸었다. 부인과 장인 등이 변호사인 법조 명문 집안이다. 바닥부터 돌아다녀라. 쇼처럼 보일지라도 주소를 험지 지역구로 옮기고 시장통에 무료 법률사무소를 내는 것도 좋다. 거기서 1000원 때문에 싸우고 거짓말도 하지만, 작은 것을 나누고 도우며 살아가는 보통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은 민주주의 생태계 맨 아래의 실존체다. 이 대표는 그런 과정을 거쳤다. 7·8월쯤 열린다는 전당대회에 당 대표로 나설지 곁눈질할 때가 아니다. 국민은 섬겨야 하는 왕과 황태자가 아니라 함께 아픔과 기쁨을 공유할 친구, 동료 같은 지도자를 원한다.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돋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문화일보
05.15 비전 없는 지도자는 비겁해진다
여야 정치인들, 산타가 됐나
인기 연연해 퍼주기에만 골몰
정작 미래 위한 대비는 외면해
훗날 ‘비전 실종 시대’라 할지도

▲지난달 18일 국회에서 열린 농해수위(위원장 소병철) 전체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 농해수위 위원들이 양곡관리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한 본회의 부의 요구의 건 등 5건의 안건이 처리되고 있다. 이날 전체회의는 여당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야당 주도로 양곡관리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한 본회의 부의 요구의 건,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한 본회의 부의 요구의 건 등 5건의 본회의 부의 요구의 건이 가결됐다./이덕훈 기자
19세기 말 조선은 무능하고 가난했다. 조선 멸망의 첫 번째 문을 연 사건이라는 임오군란도 군인 월급이 13개월이나 밀린 게 화근이었다. 망해가는 나라를 정치 지도자들은 걱정했다. 군란이 터지기 두 달 전, 고종과 대관들이 텅 빈 국고를 걱정하는 회의를 열었다. 고종이 “군사들에게 급료를 여러 달 지급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걱정하자 의정부 고관들이 “계책은 오직 절약하는 것뿐”이라며 근검절약을 대책으로 내놨다. 절약은 개인에겐 훌륭한 삶의 태도이겠으나 그것만으로 국가가 번영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종과 신하들은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들에겐 목숨 걸고 추진해야 할 조선의 미래, 즉 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함재봉 한국학술연구원장은 저서 ‘한국 사람 만들기’에 이 일화를 소개하며 ‘조선의 지도층이 농본사회를 이상으로 삼는 성리학적 왕도정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같은 위기를 겪어도 비전이 있다면 다른 선택을 한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엔 ‘사무라이 칼에는 국가의 미래가 없다’며 근대적 국민국가 건설을 꿈꾼 사쓰마 번(藩) 지도자들의 비전이 있었다. 임오군란 20년 전인 1862년, 사쓰마와 영국 해군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사쓰마는 영국 해군의 함포 사격에 불바다가 됐고 패전으로 배상금까지 물어야 했다. 사쓰마의 리더들은 위기를 내핍으로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 영국의 막강한 힘을 목격한 그들은 더 큰 그림을 그렸다. ‘영국처럼 부강한 나라’라는 비전이 생겼다. 자기를 굴복시킨 이들의 군함을 사고 “유학생을 보낼 테니 가르쳐 달라”고도 했다.
비전은 정치인으로 하여금 사소한 이익에 연연하지 않는 위대함을 품게 한다. 몇 해 뒤 메이지유신에 성공하며 국가 권력을 손에 넣은 사쓰마의 리더들은 특권을 스스로 포기했다. 유신 동지들에게도 보상을 바라지 말라고 했다. 사무라이의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칼 휴대를 금지했고 경제적 기반이었던 영지까지 내놓게 했다.
우리에게도 큰 비전을 품은 지도자가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해방된 나라에서 떵떵거릴 줄 알았던 지주들에게 땅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의 농지개혁 덕에 땅을 갖게 된 농민들이 6·25 때 대한민국 편에 섰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는 비전을 내놨다. 그러나 국민 손에 선물을 쥐여 주지는 않았다. 인기만 구하려 했다면 그랬겠지만 그가 원한 것은 인기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우리가 지금 고생해서 훗날 자식들 잘살게 하자”며 피와 땀을 요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이 땅의 정치인들은 선물 못 줘 안달 난 산타가 됐다. 여든 야든 퍼주지 못해 안달이다. 국민 손에 25만원씩 쥐여주자 하고, 남는 쌀을 무조건 수매해 주자고도 한다. 선심에서 비롯됐을 수도 있지만 미래를 위한 비전으로 삼을 수는 없다. 양곡법만 해도 쌀을 무조건 사주는 것은 농민을 돕는 게 아니라 농업 구조조정을 훼방하고 차세대 농업을 준비해 온 이들의 의욕을 꺾을 우려가 크다.
세계 각국이 반도체에 국가적 사활을 걸고 있다. 매사 느려 터졌다는 일본조차 TSMC 구마모토 공장을 착공 2년도 안 돼 완공했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반도체 공장 지으려면 토지 보상부터 인허가까지 해결하는 데만 몇 해가 걸린다. 막대한 전기가 필요한 AI 시대에 송전선 하나 놓기가 힘겹다. 정치인들이 나서서 해결에 앞장서야 하지만 감히 국민에게 쓴소리를 하지 못한다. 우리가 정말 이래도 되는가. 훗날 우리 자손들이 잠깐 잘살다가 별 볼일 없어진 이 나라 역사를 배우며 지금을 비전 실종 시대였다고 하지 않겠는가.
조선일보 김태훈 논설위원
05-15 公기관장 빈자리 90개… “낙선-낙천자들 줄섰다”
총선 등 이유 공공기관장 인사 스톱
대통령실, 동시다발적 검증 진행중
투자공사 사장 연봉 3억8033만원
전문성 검증안된 ‘보은 낙하산’ 우려

대통령실이 4·10총선 등을 염두에 두고 올스톱했던 공공기관장 인사를 위해 동시다발적인 검증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공공기관 전체 327곳 중 이미 기관장 임기가 끝났거나 상반기(1∼6월) 중으로 임기가 만료되는 곳이 90곳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됐다. 여권에서는 “총선 뒤 공공기관장 인사의 장(場)이 크게 열렸다”며 “총선 낙선·낙천자를 보은성 낙하산 인사로 임명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여권 고위 관계자는 14일 “대통령실에서 공공기관장 인사를 위한 동시다발적 검증이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낙선·낙천자 등을 염두에 두고 총선 전 일정 부분 중단됐던 공공기관 인사 관련 작업이 이제 본격적으로 재개된 것”이라고 전했다. 총선 이후 공공기관장 인사 작업이 진행되는 건 대통령실의 정치적 계산이 깔렸다는 분석도 있다. 총선에서 참패한 여권이 공공기관장 인사를 지렛대로 낙선·낙천자들의 동요나 공개적인 반발을 줄이는 유인으로 활용하는 측면도 있다는 평가다.
동아일보가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 알리오를 전수분석한 결과 기획재정부가 올 1월 지정한 공공기관 327곳 중 이미 기관장 임기가 끝난 곳은 78곳, 올 상반기 만료될 예정인 곳은 12곳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달 17일로 임기가 만료되는 한국투자공사(KIC) 사장은 90곳 가운데 가장 높은 3억8033만 원의 연봉(지난해 기준)을 받아 여권 인사들이 ‘알짜배기 기관’이라며 눈독을 들이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소관 발전공기업인 한국동서발전(사장 연봉 1억9067만 원)도 현 사장 임기가 4월 말로 만료돼 후임 인사가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여권에서는 벌써부터 총선에서 울산 동 지역구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권명호 의원이 거론된다. 올해 안에 임기가 만료되는 곳으로 범위를 넓히면 총 147곳의 공공기관장이 바뀔 예정이다.
윤석열 정부 임기가 3년 남은 상황에서 공공기관장으로 부임하면 3년 임기를 보장받을 수 있어 물밑 경쟁이 치열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관장 인사 후에는 감사와 이사 등 후속 임원 인사도 남아 있어 낙선자들의 눈치 싸움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여당 관계자는 “대통령실에 민원을 전달할 수 있는 친윤(친윤석열)계 인사들에게 특히 공공기관장 인사 관련 부탁이 몰리고 있다”며 “대통령실 정무라인이 인사 민원을 받느라 분주하다는 이야기가 당에까지 흘러들어 오고 있다”고 전했다.
투자公 사장 연봉 4억-주택금융公 3억… “낙선자 尹눈도장 경쟁”
공공기관장 상반기중 빈자리 90개
여권 “험지에서 고생한 인사들… 공기관 수장 자리 챙겨주는건 관례
尹저격 낙선 의원 안보내는게 기류”
전문가 “보은성 인사, 부실경영 초래”
“총선이 본격화된 지난해 12월부터 공공기관장 인사가 사실상 올스톱이었는데 총선 이후 본격 재개됐다.”
한 여권 관계자는 최근 대통령실이 공공기관장 인사를 위해 동시다발적인 검증을 진행하는 상황에 대해 14일 이같이 전했다. 기관장 임기가 이미 끝났거나 올해 6월까지 끝나는 공공기관이 90곳에 달하는 가운데 총선에서 낙선한 여권 인사들이 연봉이 4억 원에 육박하는 한국투자공사(3억8033만 원), 3억 원에 가까운 한국주택금융공사(2억8726만 원), 2억 원을 훌쩍 넘는 한국벤처투자(2억4927만 원) 등 기관장 임기가 만료되는 기관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여권에선 “험지에서 고생한 낙선자에게 공공기관 수장 자리를 챙겨주는 것은 암묵적 관례”라며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이에 “집권 여당이 보장된 일자리 덕에 선거 패배에도 느긋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전문성도, 업무 연관성도 없는 인사들이 검증 없이 보은성으로 낙하산으로 내려꽂히는 일이 반복되면서 공공기관들에서 효율성 하락 등 각종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 “집권 여당은 선거 떨어져도 빈손으로 안 가”
14일 동아일보가 공공기관 경영정보시스템 알리오를 전수분석한 결과 기획재정부가 지정한 2024년 공공기관 327곳 중 90곳의 기관장 임기가 이미 만료됐거나 상반기에 만료될 예정이다. 올해 말 임기 만료 기관까지 범위를 넓히면 총 147곳이다.
이미 기관장 임기가 끝나 장기 공석인 곳도 상당수다. 한국건강가정진흥원도 지난해 5월 31일 전임 원장이 사직한 후 11개월 넘게 후임이 결정되지 않았다.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은 지난해 8월 기관장이 사직한 후 9개월 넘게 기관장이 공석이다. 기관장 임기가 끝난 지 6개월 이상인 곳은 8곳, 3개월 이상인 곳은 26곳, 1개월 이상인 곳은 23곳으로 나타났다.
총선 참패 뒤에도 낙선·낙천자들의 대통령실을 향한 반발이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도 “공공기관장행(行)을 염두에 둔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국민의힘 의원 113명 중 불출마를 포함해 공천을 받지 못했거나 낙선한 의원이 58명에 달한다. 한 여권 관계자는 “낙선자들은 윤석열 대통령 때문에 총선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하면서도 윤 대통령이 지난달 말 주재한 오찬에 참석했다”며 “공공기관장 인사가 남은 상황에서 어떻게든 윤 대통령에게 눈도장을 찍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낙선한 의원실 관계자는 “대통령실에서 ‘낙선 의원 중에서도 대통령을 저격했던 의원은 기관장으로 보내지 않는다’는 기류”라고 전했다.
여당 내에선 이 같은 낙하산 또는 보은성 공공기관 인사가 당연하다는 분위기다. 친윤(친윤석열) 핵심 의원은 “우리는 집권 여당이니까 선거에서 떨어져도 그냥 빈손으로 집에 가지 않는다”고 했다.
공공기관장 인사 규모가 커진 데는 문재인 정부 막판 공공기관장 알박기 여파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다. 여권 관계자는 “공공기관장 인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는 건 문재인 정부 막판 이뤄졌던 알박기 인사 탓도 있다”며 “문재인 정부 임기 말 이뤄진 무리한 인사로 들어온 공공기관장들이 보장된 3년 임기를 채우고 나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 낙선·낙천 인사들 연봉 2억∼3억 원 ‘알짜’ 기관에 눈독
정치권 인사들은 상대적으로 고액 연봉을 받거나 민간 회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를 선호하는 분위기다. 현재 기관장 임기가 끝난 한국주택금융공사, 한국벤처투자 등 금융권 공기업 수장 자리도 낙선·낙천한 정치권 인사들이 노리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산하기관인 KOTRA(연봉 2억2750만 원)는 이달 19일로 기관장 임기가 만료된다. 다음 달 임기가 끝나는 한전KPS 사장의 지난해 연봉은 2억3100만 원이다.
국방부 산하 한국국방연구원(KIDA)도 2월 7일 김윤태 원장이 퇴임한 이후 원장 자리가 3개월 넘게 공백인 상태다. 차기 원장 자리에는 국민의힘 후보로 충남 천안갑에 출마했다 낙선한 신범철 전 국방부 차관과 경기 용인병에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신 고석 전 국방부 고등군사법원장 등이 거론된다. 올 2월로 기관장 임기가 종료된 한국교통안전공단의 경우 경북 김천시가 소재지여서 김천 경선에서 낙마한 대통령실 관리비서관 출신 김오진 전 국토교통부 1차관 얘기가 나온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여야 모두 정권을 잡으면 보은성 인사를 반복한다”며 “결국 공공기관 부실 경영으로 이어진다”고 비판했다. 조진만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공공기관 운영에 대한 평가를 엄중하게 진행해 문제가 있을 경우 즉각적으로 인사 조치를 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혜령 기자 herstory@donga.com
이상헌 기자 dapaper@donga.com
세종=이호 기자 number2@donga.com
정서영 기자 cero@donga.com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05-16 이재명 ‘일극 정당’과 정치 노예의 길
김형준 배재대 석좌교수, 前 한국선거학회 회장
더불어민주당이 총선 압승 이후 참으로 위험한 길을 걷고 있다. ‘이재명 대표 일극 체제’를 향해 무한 질주한다. 원내대표 경선에서 이 대표가 사실상 낙점한 친명 박찬대 의원이 무투표로 당선됐다. 또, 16일 국회의장 후보 선출에서도 사실상 추대가 예상됐었으나 불발에 그쳤다. 애초 6선의 추미애 당선인과 조정식 의원, 5선 정성호·우원식 의원이 출사표를 던졌다. 그런데 조 의원이 추 당선인을 만나 “개혁 국회의 마중물이 되겠다”며 돌연 단일화를 선언했고, 정 의원도 사퇴했다. 친명계 중진인 조·정 두 의원의 급작스러운 사퇴는 이 대표의 뜻에 따른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우 의원은 “국회의장 선거는 적어도 대한민국 권력 서열 2위의 자리 아닌가. 민주당은 상향식 공천, 당내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정당이다. 구도를 정리하는 일을 대표가 관여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항변했다. ‘보이지 않는 손’ 논란이 커지자 4선 중진이며 운동권의 대표 주자인 우상호 의원도 “심각한 문제”라고 거들었다. 그런데 추 당선인은 부끄러움도 모른 채 “당심이 곧 명심(이재명 대표의 의중)이고, 명심이 곧 민심”이라는 충성 발언을 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오는 8월로 예정된 당 대표 선거를 두고도 “지금은 이재명의 시간” “정권교체의 지름길” 등을 외치며 ‘이재명 대표 연임 추대론’을 띄운다. 그러니 시중에선 ‘어차피 대표는 또 이재명’(어대명)이란 신조어가 나돈다. 강성 팬덤 정치로 건전한 경쟁이 사라진 민주당의 추대 정치는 당내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구태다.
이제 민주당은 이낙연 전 대표의 주장처럼 “김대중과 노무현의 정신과 가치와 품격은 사라지고, 폭력적이고 저급한 언동이 횡행하는 1인 정당”으로 변질됐다. 지난 총선 공천 과정에서 ‘비명 학살’을 완성해 이제는 친명 천국이 됐다. 이 대표는 과거 현직 대통령이 당 총재로서 집권당을 쥐락펴락하면서 국회의장과 당 대표를 임명했던 것과 같은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됐다. 더구나 국회 거대 의석으로 ‘이재명의 민주당’을 넘어 ‘여의도 대통령’으로 등극했다.
경쟁과 견제의 절차 자체가 사라지고 아부와 충성이 판을 치는 민주당을 보면서 앞으로 ‘이재명 시즌2’가 어떻게 전개될지 눈에 선하다. 민주주의를 지켜주는 규범인 자제와 존중은 사라지고, 지시와 통제가 난무하면서 극단적 대결 정치가 판을 칠 것이다. 헌법(제46조 2항)은 ‘국회의원은 국가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대표는 지난 3일 제22대 국회의원 당선인들에게 “당론으로 정해진 입법을 무산시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것은 “국회의원의 헌법적 의무보다 ‘이재명의 의중’을 따르라”는 일종의 엄포 정치다.
민주당은 입만 열면 민주주의와 개혁, 검찰 독재를 들먹인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이재명 제왕적 대표 밑에서 입법 독재를 자행하고 맹목적 충성을 강요한다. 소속 의원들의 뜻을 묻고 내부에서 경쟁하는 당내 선거가 사라진 ‘민주당식 추대 정치’는 분명 반헌법적·반민주적·반개혁적인 행태다. 민주당 의원들에게 묻는다. 국민의 대표자로 소신과 양심에 따라 의정 활동을 할 것인가, 아니면 ‘이재명 일극 체제’ 밑에서 ‘당 대표의 정치적 노예’로 전락할 것인가?

문화일보
05-16 “명심” 앞세운 우원식 의장 후보와 여전한 국회 독주 우려
제22대 국회에서는 국회의장이 더불어민주당, 나아가 이재명 대표의 ‘앞잡이’ 노릇을 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국가 의전 서열 2위인 국회의장의 품격과 신뢰 붕괴는 말할 것도 없고, 삼권분립과 국격의 훼손까지 초래할 참담한 일이다. 총선에서 압도적 의석을 차지한 민주당은 16일 당선자 총회에서 국회의장 후보자를 선출했다. 추미애 당선인과 우원식 의원은 모두 ‘명심’(이 대표 의중)을 강조했다. 임기 2년의 전반기 국회의장 후보로는 당초 추 당선인이 유력했으나 예상과 달리 우 의원이 선출됐다.
그간 경과를 보면, 권위주의 시대나 제왕적 총재 시절에도 보지 못한 시대착오적 행태가 벌어졌다. ‘명심’대로 교통정리가 이뤄지고 ‘명심’ 경쟁이 치열했다. 추 당선인이 “이 대표가 ‘잘 좀 해주시면 좋겠다’고 말해줬다”고 공개하자, 우 의원은 “이 대표가 나한테만 ‘형님이 딱 적격이다’고 했다”고 맞받았다. 추 당선인은 “개혁정치가 민심에 부합하고, 그게 차기 유력 대권 주자인 이 대표의 마음”이라며 “당심이 곧 명심이고, 명심이 곧 민심”이라고 말했다. 본회의 사회자로서의 중립 의무를 팽개치고 이 대표 친위대 역할을 하겠다는 공약과 다름없다. 헌법은 국회의원에게 당익(黨益) 아닌 국익 우선 의무(제46조)를 부여하고 있다. 국회의장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을 찍지 않은 유권자가 49.5%에 달한다. ‘명심이 민심’ 발상은 이들뿐 아니라 국민 전체를 모독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추 당선인은 개의치 않는 듯하다. ‘이 대표의 대립군(代立軍·군역을 대신해 주는 사람)’ 비유에 대해 “유기적 역할 분담”이라고 했다. 심지어 “국회의장은 중립 아니다”며 편파적 국회 운영을 공공연히 예고했다. 의회주의 파탄이 어디까지 갈지 걱정된다.
문화일보 사설
05.17 추미애 낙선, 이재명 ‘1인 당’의 이변이 남긴 것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장 후보에 당선된 우원식 의원이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제22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단 후보 선출을 위한 더불어민주당 당선자총회에서 이재명 대표에게 꽃다발을 받고 있다. 왼쪽은 추미애 후보. 뉴스1
더불어민주당 당선자 169명이 참석한 총회에서 22대 전반기 국회의장 후보로 우원식 의원이 선출됐다. 당초 국회의장 경선은 다른 친명 후보자 2명이 추미애 후보와 단일화하거나 자진 사퇴하는 방식으로 ‘교통정리’가 되면서 원내대표 경선처럼 ‘추미애 추대’로 끝나리라 예상됐다. 전례 없는 당 지도부의 경선 개입이라는 비판에도 추 후보는 “이재명 대표가 나에게 잘해달라고 말했다”며 명심(明心)을 내세웠고, 우 후보도 “이 대표가 내게 ‘형님이 딱 제격’이라고 말했다”면서 명심으로 맞섰다. 하지만 민주당 원로의 말처럼 “한 사람을 거의 황제로 모시는 당”에서 추미애 후보의 탈락이라는 이변이 나오리라고는 예상하기 힘들었다.
민주당 당선자 171명 중 초선은 71명이고, 이들 대부분은 비명계를 사실상 배제한 공천에서 선택된 친명(親明) 성향이다. 부정대출 의혹을 받고 막말 전력이 있더라도 이들은 반윤석열 바람을 타고 당선됐다. 이런 민주당 당선자 중 과반이 이재명 대표 체제와 강성 당원들의 지지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 추 후보 대신 우 후보를 선택한 것이다. 이처럼 예상과 다른 선택이 나온 것은 한 사람을 황제로 모시는 ‘1인 당’ 체제에 대한 거부감이 작용한 때문일 것이다.
경선에서 이변이 일어나자 예상대로 추 후보를 지지했던 강성 당원들이 당원 게시판에 “수박 나가라” “언제든 이재명을 배신할 사람들의 명단을 공개하라”며 반발했다. 이재명 대표도 내심 같은 생각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 대표가 지금처럼 민주당을 개인 사당처럼 운영하면 이런 일은 언제든 다시 벌어질 수 있다. 이 대표가 생각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앞으로 국회의장이 될 것이 확실한 우 의원도 사실상 친명 중진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우 의원은 의장 경선에서 “총선 민심은 범야권 192석으로 윤석열 정권에 매섭게 회초리를 들었지만, 개헌선까지 의석을 주지는 않았다” “원칙을 잃지 않으면서도 독선이 아닌 유능하게 국회를 운영하겠다”고 말했다. 국회에는 여야가 싸울 사안도 많지만, 연금·노동개혁, 안보 및 민생 현안 등 정파에 상관없이 협력해야 할 사안도 많다. 국회의장에겐 국가 서열 2위의 예우를 해주면서 당적 보유를 금지하고 있는 것은 이런 사안에서 초당적으로 타협을 이끌라는 뜻이다. 민주당 경선 이변으로 당선된 우 의원은 국회의장의 책임에 대해 새로 생각하기 바란다. “국회에서 대화는 중요하고 여야의 협상과 협의는 존중돼야 한다”는 우 의원의 말 그대로 실행하면 될 일이다.
조선일보 사설
05.17 ‘명심팔이’가 부른 자승자박…국회의장 후보 선출 이변
“명심이 민심”이라던 추미애 대신 우원식 승리
‘여야 간 타협의 가교’ 의장 본연 역할 충실하길
더불어민주당이 16일, 총선 당선인 총회에서 22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후보로 우원식 의원을 선출했다. 당초엔 이재명 대표 측이 친명 핵심인 조정식·정성호 의원을 주저앉히고 추미애 당선인을 의장으로 미는 ‘교통정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추 당선인의 압승이 점쳐졌다. 그러나 총회 결과는 재적 과반을 득표한 우 의원의 승리였다.
겉으로 보면 ‘대이변’이지만 민주당의 의장 경선 과정을 복기하면 ‘사필귀정’이란 설명이 얼마든지 가능해 보인다. 일찌감치 의장직을 노려 온 6선 조정식, 5선 정성호 의원은 친명계의 노골적 지원으로 원내대표에 추대된 박찬대 의원의 요청 한마디에 뜻을 접었다. 최고령 당선인으로 의장직 도전을 저울질하던 박지원 당선인도 이 대표와 1시간 반 오찬 직후 출마를 포기했다. 이 대표와 친명계가 당권과 ‘개딸’(강성 지지층)의 지원을 업고 원내대표에 이어 국회의장까지 입맛에 맞는 인사를 앉히려고 다른 후보들을 끌어내린 모양새가 뚜렷했다. 추 당선인은 추 당선인대로 “명심이 곧 민심” 운운하며 국회 수장의 중립 의무 대신 이 대표의 대립군(代立軍·군역을 대신해 주는 사람)을 자임하겠다고 목청을 높였다.
제왕적 총재 시절과 다를 바 없는 이 대표 측의 경선 개입과 추 당선인의 도 넘은 ‘명심 마케팅’에 비판이 고조되면서 당 지지율은 여당보다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비판 여론에 위기감을 느낀 당선인 상당수가 이심전심으로 우 의원을 찍은 것으로 풀이된다. 총선에서 민주당을 찍지 않은 유권자가 49.5%에 달한다. 민주당 당선인 175명 중 과반이 우 의원의 손을 들어준 건 이런 민심을 의식한 선택으로 보인다. 당내에서 최소한의 이성과 자정 능력이 작동한 결과로 평가된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추 당선인이 워낙 친명 색깔을 선명히 드러내서 그렇지, 우 의원도 ‘명심’을 앞세운 건 마찬가지다. 그는 15일 ‘개딸’이 즐겨 보는 유튜브에 나가 “이 대표가 (내게) ‘우원식 형님이 의장에 딱 적격이죠’라고 말했다”고 했다. 우 의원이 오는 30일 새 국회의장에 취임한 뒤에도 이런 식의 사고와 행동을 하면 곤란하다. 여야 간 타협의 가교 역할에 충실해 땅에 떨어진 국회의장의 권위를 살려 주기 바란다.
이번 의장 경선 결과는 8월로 예정된 민주당 대표 경선에도 엄중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친명계는 이 대표 연임을 주장하며 ‘합의 추대’ 분위기를 띄우고 있지만, 의원 다수의 표심은 ‘명심’이 아닌 민심이 좌우한다는 게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이 대표와 친명계가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또다시 힘으로 ‘대표 추대’를 밀어붙인다면 석 달 뒤 전당대회에서 ‘대이변’이 재연되지 말란 법이 없을 것이다.
중앙일보 사설
05.18 “의장 선거 반란 표 색출” 국회가 ‘개딸’에 휘둘리나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장 후보 당선자 우원식 의원이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제22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단 후보 선출을 위한 더불어민주당 당선자총회에서 당선자로 발표되자 인사하고 있다. 오른쪽은 추미애 후보. /뉴스1
더불어민주당의 국회의장 후보 경선에서 이재명 대표의 의중을 앞세운 추미애 당선자 대신 우원식 의원이 선출되자 강성 이재명 대표 지지자들인 ‘개딸’이 우 의원을 찍은 의원들을 색출하겠다고 나섰다. 이들은 의원들에게 “누구를 찍었는지 공개하라” “투표 인증하라”고 요구하고, 우 의원에게 “사퇴하라”는 압박까지 하고 있다. 민주 정당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국회의장은 입법부 수장으로 국가 서열 2위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공정하게 국회를 운영하도록 당적 보유도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국회의장 경선에 나선 민주당 후보 4명은 “중립은 없다”며 노골적으로 선명성 경쟁을 벌였다. “이 대표가 나를 지지한다”며 앞다퉈 명심(明心)을 내세웠다. 막판엔 두 후보가 추 당선자를 사실상 지지하며 사퇴했다. 이 대표 뜻일 것이다. 그런데 예상을 깨고 우 의원이 선출되자 ‘개딸’들이 나선 것이다.
이번만이 아니다. 작년 이재명 대표 체포 동의안 표결 때도 민주당에서 찬성표가 30표 이상 나오자 친명 외곽 조직은 “가결표를 던진 의원들을 끝까지 추적·색출해 정치생명을 끊겠다”고 했다. 비이재명계 의원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반란군 명단’이 돌고 문자 테러와 살해 협박까지 쏟아졌다. 결국 의원 100여 명이 투표 인증샷을 올리거나 “부결 표를 던졌다”고 고백했다. 여기에 들지 못한 상당수 의원이 공천에서 탈락했다.
자유·비밀 투표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다. 국회의원은 국익을 우선해 양심에 따라 투표해야 한다. 그런데 특정 정치인 열렬 지지자들이 의원들의 투표까지 좌지우지하고 있다. 특히 국회의장 선거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처음이다. 일부 의원의 ‘투표 인증 릴레이’에 이어 또다시 ‘수박 색출’ 소동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우 의원은 이미 경선 과정에서 타협 거부와 강경 노선을 예고했다. 그런데도 개딸의 노골적 압박을 받는다면 그의 여야 중재 역할은 더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민주당 등 야권은 국회 의석의 거의 3분의 2를 점하고 있다. 국회가 ‘개딸’에 휘둘릴 판이다.
조선일보 사설
05.20 도덕적 해이 조장하는 ‘문제적 법안’
나랏돈을 제대로 쓰려는 고민은 사라졌다. 돈을 쓰는 과정에서 빚어질 혼란과 혼선도 무시한다. 정부가 하지 않아야 하는 일과 건드리지 않아야 할 돈에 대한 판단도 흐릿해졌다. 시장 경제 측면에서 ‘문제적’으로 보이는 이런 법안들이 거대 야당의 주도 속 오는 28일 열릴 예정인 21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통과될 전망이다.
대표적인 ‘문제적 법안’은 더불어민주당이 국회 본회의에 직회부한 양곡관리법(양곡법) 개정안과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 안정법(농안법) 개정안이다. 양곡관리법은 쌀값이 폭락하면 팔리지 않은 쌀(초과 생산량)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매입하는 것이 골자다. 농안법은 쌀과 과일·채소 등 농산물 가격이 기준가격 미만으로 떨어지면 정부가 생산자에게 그 차액을 지급(가격 보장제)하는 게 핵심이다. ‘농산물 가격 안정 심의위원회’가 평년 가격을 기초로 생산 비용과 물가상승률을 고려해 기준가격을 정하도록 했다.
더불어민주당은 “농산물 가격 안정 제도는 최근 농산물 공급 부족에 따른 가격 급등으로 살림살이가 힘든 소비자를 위해서도 필요하다”며 “농가 경영이 안정되면 생산도 안정화돼 농산물 공급을 원활히 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금(金)사과’부터 양배추까지 농산물 가격 급등에 질린 소비자에게 ‘가격 안정’이라는 말은 매력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농안법은 그런 것이 아니다. 소비자 이익이 아닌 생산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저가격제다. 생산자 입장에서 가격 보장 품목으로 정해지면 시장 가격이 아무리 내려가도 괜찮다. 정부가 기준가격과의 차액을 보전해주기 때문이다. 이 경우 생산자의 합리적인 선택은 품질과 무관하게 공급을 늘리는 것이다. 이들 품목의 과잉 생산은 불을 보듯 뻔하다.
가격 보장 품목으로의 쏠림 현상은 농산물 전체의 공급과 가격 구조를 왜곡할 수 있다. 정부가 가격을 보장하면서 기르기 쉬운 높은 작물로 생산자가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 대표적인 게 쌀이다. 쌀은 기계화율이 99%에 달할 정도로 영농 편의성이 높다. 게다가 양곡법과 농안법으로 ‘묻고 더블로 가’가 가능한 만큼 이미 자급률이 100% 이상인 쌀 생산량이 더욱 치솟을 것이란 게 정부와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반대로 생산자 입장에서 기르기 힘들고 가격 보장 품목이 아닌 농산물 생산은 꺼릴 수 있다. 해당 품목의 공급 부족에 따른 가격 급등은 예상 가능한 수순이다. 식자재 전반의 공급과 가격이 불안해질 수 있다. 원재료 값 인상에 따른 자영업자의 타격이 예상되고, 외식업계가 경영 부담을 우려하며 법 개정을 반대하는 이유다.
양곡법·농안법, 시장·정책 왜곡
재정부담 늘고 농업경쟁력 약화
전세사기법은 형평성 논란 우려
더 큰 문제는 돈이다. 정부는 양곡법 등이 시행되면 쌀 보관과 매입에만 매년 3조원 이상의 비용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한다. 농안법도 ‘돈 먹는 하마’가 될 수 있다. 한국농촌경제원구원은 5대 채소류에 대해 평년 가격으로 가격보장제를 시행하면 연평균 1조2000억원가량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했다. 게다가 가격 보장 품목을 정하는 과정에서 이해관계가 맞서고 형평성 논란이 빚어지며 품목이 늘게 되면 소요 비용과 예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다. 재정 부담이 커지는 것이다. 이들 작물 매입에 돈을 쏟아붓다 보면 정작 필요한 농업 관련 정책에 쓸 재정은 부족해진다.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양곡법과 농안법을 ‘농망법(농업을 망칠 법안)’이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전세 사기 피해자 지원 특별법 개정안도 또 다른 ‘문제적 법안’이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등 공공기관이 전세 사기 피해자의 전세보증금 반환 채권을 우선 사들여 보상한 뒤 구상권 등을 통해 자금을 회수하는 ‘선(先) 구제 후(後) 회수’가 법안의 골자다. 야당은 전세 사기를 ‘사회적 재난’이라고 강조하며 법안 통과를 주장한다.
하지만 사인(私人) 간 거래에서 발생한 피해를 정부가 구제하는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는 데다, 다른 사기 범죄 피해와의 형평성 논란도 불거질 수 있다. 전세 사기를 더욱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청약저축 등으로 조성한 주택도시기금을 사용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 무주택 서민이 잠시 맡긴 돈(청약저축)으로 전세자금 피해자를 직접 지원하면 수조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손실이 고스란히 다른 국민의 부담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 정부의 이야기다.
‘문제적 법안’의 문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 없이 시장 왜곡을 가져올 도덕적 해이를 조장하는 데 있다. 그에 따른 부담은 결국 사회적 혼란과 긴 세금 청구서로 국민에게 날아든다. 야당의 선심성 돈 잔치에 나랏돈이 눈먼 돈, 쌈짓돈이 될 판이다.
중앙일보 하현옥 논설위원
05-20 “추미애가 아니라 미안합니다”… 민주당의 요즘 ‘꼬라지
‘이재명 일극’ 민주당 국회의장 후보 경선
‘의장 중립 부정’과 ‘明心 팔이’만 난무
추미애 안 됐다고 황당한 ‘수박 색출’ 소동
적-먹이 사라지자 제 살 파먹는 괴물 꼴
의회민주주의 발상지인 영국에서 한국의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하원의장 자리가 처음 생긴 것은 647년 전이다. 초기에는 무척 위험한 자리였다. 하원의 요구를 왕에게 전하는 등의 과정에서 분노를 사 목숨을 잃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1394∼1535년 사이 참수를 당한 이가 7명이나 된다. 그러다 보니 모두가 의장 맡기를 꺼렸다. 이런 이유로 신임 하원의장 취임식 때는 동료 의원들이 양손과 팔을 끌고 나오다시피 해서 의장석에 앉히는 전통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린지 호일 현 하원의장의 취임식에서도 이런 의식(儀式)이 예외 없이 재연됐는데, 그가 의장석에 ‘끌려 나와’ 가장 먼저 한 말은 “중립”이다. 비단 호일 의장뿐이 아니다. 의장직 재임 중에는 물론이고 물러난 뒤에도 기존 소속 정당과의 관계를 끊고 철저한 중립을 지키는 것이,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영국 하원의 확고한 전통이다.
물론 모든 나라가 영국처럼 하원의장(국회의장)에게 중립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도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는 국회의장이 행정부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2002년 국회의장이 되면 당적을 버리도록 법을 개정하면서 영국과 같은 길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갈등과 대결의 낡은 정치를 지양하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로 나아가기 위한, 바람직한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이후 다소간의 굴곡, 진퇴는 있었지만 작은 노력들이 쌓여 이제 ‘중립의 전통’을 쌓아올리기 위한 초석 정도는 닦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22대 전반기 국회의장을 사실상 결정하는 더불어민주당의 의장 후보 경선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의 의회민주주의 시계가 단번에 20년을 거슬러 퇴보하려 하고 있다.
강성 팬덤의 지지와 ‘찐명’ 원내대표의 물밑 지원사격을 한 몸에 받은 추미애 국회의원 당선인은 “(국회의장이) 중립은 아니다”라고 공개선언을 하고, 낯 뜨거운 ‘명심(明心) 마케팅’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한 라디오 방송에 나와서는 “당심이 명심, 명심이 민심”이라는 말까지 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을 자멸의 늪으로 이끈 “윤심(尹心)이 당심이고, 당심이 민심”이라는 말과 엎치나 메치나인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닌 추 당선인의 입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역시 극과 극은 통하는가.
최종 승자가 된 우원식 의원도 추 당선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튜브 방송에 나와 “제가 출마한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이 대표가) 우원식 형님이 딱 적격이죠. 그래서 잘해 주세요’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며 ‘명심 장사’를 했다. 당선 직후에는 “민주당의 법안이 반드시 국회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하겠다. 중립은 몰가치가 아니다”라면서 사실상 중립과는 거리가 먼 길을 가겠다고 공개 선언했다.
그런데도 국회의장 후보 선거 결과를 놓고 민주당 안에서는 또 한 번 홍위병식 ‘수박 색출’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민주당 당원 게시판에는 “수박들 색출해 내자” “우원식에게 투표한 89명을 찾아내자” “의원들은 자신이 우원식을 안 뽑았다는 걸 인증해 보이라”는 글들이 줄을 이었다. 우 의원에게 표를 던진 것으로 추정되는 의원들에게는 문자폭탄이 쏟아지고 있다. 더 가관인 것은 민주당 지도부 일각의 반응이다. 정청래 최고위원은 1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당원이 주인인 정당, 아직도 갈 길이 멀다”며 “상처받은 당원과 지지자들께 미안하고, 당원과 지지자분들을 위로한다”고 했다.
국회의장은 국회의원 재적 과반으로 선출토록 한 국회법에 비춰 볼 때 민주당 국회의장 후보를 민주당 의원 당선인들의 자유로운 투표를 통해 뽑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무기명 비밀투표는 민주당의 당규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의원들의 선택이 일부 강성 당원들의 생각과 달랐다고 해서 명색이 최고위원이 나서서 사과할 일인가. 민주주의 전통과 원리에 뿌리를 둔 대의기구를 전부 무력화하고 강성 팬덤들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이재명 대표가 강조하는 ‘당원중심주의’란 말인가.
폭주하는 팬덤 정치는 의회정치를 황폐화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 대표가 이번 총선에서 시스템 공천이라는 허울을 앞세워 비명(非明)계를 다 쓸어내 버리는 바람에 민주당은 이젠 ‘이재명 일극(一極)’ ‘친명 일색’의 당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강성 팬덤이 미는 후보가 되지 않았다고 해서 ‘잔존 수박 제거’와 같은 증오와 배척의 깃발이 다시 오르고 있다. 주위에 적이나 먹잇감이 없어지자 마침내 자기 살을 파먹기 시작하는 괴물의 모습이 민주당의 요즘 ‘꼬라지’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05-20 더불어민주당이 아니라 더불어공산당?…위키 한국어판 민주당 소개 논란

▲위키피디아 한국어판 캡처
네티즌들이 자유롭게 글을 쓰는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의 더불어민주당 소개 페이지가 20일 ‘더불어공산당’으로 표출돼 논란이 일고 있다. 해당 페이지는 민주당을 ‘대한민국 남로당계에 속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회주의·공산주의 정당(더불어공산당)’이라고 소개하고 있고, 이재명 대표를 ‘리짜이밍(李在明)’으로 표기했다.
이날 정치권에 따르면 위키피디아의 민주당 소개 페이지에는 민주당이 북한의 사회주의 정당이라는 허위 사실이 기재돼 있다. 해당 페이지는 민주당에 대해 “더불어공산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정당으로 대한민국 남로당계 정당의 계보에 속해져 있다”며 “제21대 국회 기준 원내 제1당이자 제1야당”이라고 소개했다. 또 2014년 3월 26일 공산당과 새정치연합의 합당으로 새정치공산연합이 창당됐고, 2015년 12월 28일 당시 원짜이인(文在寅·문재인) 당시 대표 주도로 더불어공산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고 부연하고 있다.
더불어공산당의 표어는 ‘조선반도 인민과 더불어’로, 대표는 ‘리짜이밍’으로 표기했다. 아울러 “2017년 5월 9일 제19대 대선에서 당선된 원짜이인 후보가 대통령에 취임하며 집권 여당이 됐으나 2022년 3월 9일 제20대 대선에서 리짜이밍 후보가 패하면서 5년 만에 국민의힘에 정권을 넘겨줬다”는 설명도 나온다.
정치권에서는 극단적 보수층의 행태일 것이라는 추측이 나온다. 4·10 국회의원 총선거 압승 이후 ‘이재명 일극 체제’가 한층 강화된 민주당 상황을 북한 공산당에 비유했다는 것이다.

▲위키피디아 한국어판 캡처
문화일보 나윤석 기자
05-20 민주 지지율 1주새 6.1%P 급락, 추미애 탈락에 당원 탈당 후폭풍?

▲우원식(오른쪽)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16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제22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단 후보 선출 당선자 총회에서 국회의장 후보로 선출된 뒤 축하 꽃다발을 받아들고 있다. 왼쪽은 이날 낙선한 추미애 국회의원 당선인. 뉴시스
리얼미터 조사 34.5%에 그쳐
놀란 이재명 “당원권한 2배로”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당선인이 국회의장 후보 선거에 패배한 것에 강성 지지층이 반발하면서 민주당 지지율이 일주일 만에 6∼9%포인트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재명 대표를 비롯한 친명(친이재명)계가 일제히 “당내 선거에서 당원 의사 반영 비율을 높이겠다”며 당심 달래기에 나선 배경에도 ‘추미애 낙선’에 따른 후폭풍을 진화하려는 의도가 깔린 것으로 분석된다. 추 당선인의 낙선 이후 탈당 신청자는 1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6∼17일 정당 지지율을 조사한 결과, 민주당 지지율은 전주(5월 둘째 주) 대비 6.1%포인트 떨어진 34.5%를 기록했다.
이 같은 추세는 친야 성향의 방송인인 김어준 씨가 설립한 ‘여론조사 꽃’의 조사에서도 확인된다. 여론조사 꽃이 20일 공표한 자체 조사에 따르면, 자동응답전화(ARS) 조사의 경우 지난 10∼11일 45.1%였던 민주당 지지율은 17∼18일 36.2%로 8.9%포인트 급락했다. 전화면접 조사에서도 같은 기간 40.6%에서 33.4%로 7.2%포인트 하락했다.
민주당 지지율의 급격한 하락에는 추 당선인의 낙선에 따른 지지층의 강한 반발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추 당선인을 밀었던 강성 지지층은 경선에서 우원식 의원을 찍은 89명에 대한 색출에 나섰고, 현재까지 탈당을 신청한 당원만 1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전해졌다.
이 때문에 친명계도 당원 주권 확대를 약속하면서 달래기에 나섰다. 정청래 최고위원은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총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한 정당 지지율이 큰 폭으로 출렁인 것은 매우 이례적이고 심각한 사태”라며 “당원과 지지자들은 추미애를 통해 윤석열 정권과 ‘맞짱 뜨는’ 통쾌감을 보고 싶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대표 역시 광주·대전에서 진행된 당원 행사에서 “당원도 두 배로 늘리고, 당원 권한도 두 배로 늘리자”며 “시·도당위원장을 뽑을 때 권리당원 의사 반영 비중을 높이는 방안을 연구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김민석 의원은 국회의장·원내대표 경선에서 권리당원의 의견을 10분의 1 이상 반영하는 ‘10% 룰’을 제안했다. 인용한 여론조사의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문화일보 나윤석·김대영 기자
05-21 억지로 공수처 만들더니 특검 고집하는 巨野 자가당착
윤석열 대통령은, 국회 본회의에서 지난 2일 야당 단독으로 통과된 ‘순직 해병 수사 방해 및 사건 은폐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에 대해 21일 재의를 요구했다. 오는 28일 열릴 제21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 재상정되겠지만 ‘출석의원 3분의 2’ 요건을 채우지 못하면 폐기된다. 그런데 야당은 이런 헌법 절차와 무관하게 대규모 장외 집회를 열고, 22대 국회가 개원하면 재추진하기로 하는 등 위력 과시에 나섰다.
작년 7월 집중호우 실종자 수색 과정에서 채모 상병이 구명조끼를 착용하지 않은 채 현장에 투입돼 사망한 사건의 책임을 규명하는 일은 당연하다. 현재 경북경찰청에서 사건 본안,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수사 방해 부분을 수사 중이다. 윤 대통령도 지난 9일 기자회견에서 “납득이 안 된다라고 하면 제가 특검하자고 먼저 주장을 하겠다”라며 공수처 수사를 지켜본 뒤 논의하자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은 공수처 수사가 더디고, 기소를 담당할 검찰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특검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적 논란이 있는 모든 사건은 특검 수사에 맡겨야 한다는 궤변과 다를 바 없다.
공수처는 2020년 7월 당시 여당이던 민주당이 야당의 반대에도 법안을 처리해 만든 기관이다. 권력의 작용으로 진상 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의혹이 있을 경우, 대통령을 포함해 고위 공직자의 범죄를 수사하는 게 그 취지다. 그런데 공수처를 신뢰하기 어려우니 특검에 맡기자고 한다. 공수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자가당착이다. 야당 주도의 특검 임명과 수사 브리핑 등 독소 조항도 문제다. 특검을 고집하려면 공수처 폐지법안부터 내는 게 타당하다. 새로운 국회 개원 직전의 길거리 정치도 꼴불견이다.
문화일보 사설
05-21 ‘사상 최악’ 21대 국회의 마지막 책무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
‘사상 최악’으로 불리는 제21대 국회의 임기가 불과 8일 남았다. 국회 의안정보 시스템에 따르면 개원 이래 지금까지 국회에서 발의된 총 2만5003건의 법률안 중 8967건만 처리됐고, 1만6036건이 계류돼 임기 만료와 함께 폐기될 예정이다. 유사 법안도 많고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법안도 많아 폐기될 법안의 건수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회기가 종료되기 전에 반드시 처리해야 할 법안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우선,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관리 특별법’은 1978년 처음 가동한 이후 원전 내 저장 수조에 쌓여 있는 1만8900t가량의 ‘사용 후 핵연료’를 안전하게 처리하기 위한 법이다. 현재 국내 발전량의 30%를 차지하는 원전은 외부 저장시설이 없으면 2030년 이후 순차로 가동이 불가능해진다. 건식 저장시설의 설계, 인허가 및 건설에 최소 7년이 걸리므로 사실상 이미 늦었다. 이번 회기에는 여야 간 입장 차이가 상당히 좁혀졌는데도 해묵은 탈원전 논쟁의 재현으로 통과되지 않고 있다. 원전 가동 중단은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우리나라에 안정적 전기 에너지 공급을 위협한다. 인공지능(AI) 시대에 급격히 증가하는 전력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고 비싼 대체 전원의 가동으로 전력 요금의 급등을 막을 수 없다. 국민과 국가 전체의 명운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법은 회기 내에 반드시 통과돼야 한다.
그리고 올해 일몰을 맞을 예정인 ‘K-칩스법’은 반도체, 2차전지, 전기차 등 국가 전략기술 분야에 시설투자 시 15∼25%의 세금을 환급해 주는 법안이다. 미국·유럽연합(EU)·일본 등 경쟁국은 막대한 지원을 앞세워 이미 반도체를 비롯한 각종 산업을 유치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법을 연장하지 않는다면 지원은 고사하고 기업의 발목을 잡고 무거운 쇳덩어리를 부담으로 지우면서 미래 산업의 발전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 ‘인공지능 기본법’은 아예 법이 없어 AI 분야의 육성과 지원, 윤리 가이드라인 등 정책 수립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법이다. 한시가 급한 이들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면 우리나라의 첨단 산업 경쟁력은 이미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국민연금 개혁의 경우 2022년 이후 특위와 자문위를 통해, 쟁점이 많은 구조개혁은 차차 논의하더라도 모수개혁(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만이라도 하자는 입장에서 활발히 논의돼 왔다. 보험료율을 현행 9%에서 13%로 인상하는 데는 여야가 합의했으나, 소득대체율은 43% 대 45%의 이견으로 합의되지 못하고 있다. 이대로 21대 국회가 끝나면 지금까지 논의는 허사가 된다. 불과 2%p 차이로 모수개혁도 하지 못하는 불상사는 막아야 미래세대에 부끄럽지 않은 국회가 되지 않겠는가.
그 밖에도 중요한 법안은 산더미처럼 많다. 각 정당의 이념과 가치, 처한 상황에 따라 제21대 국회에서 반드시 처리해야 할 법안의 리스트가 다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국가의 미래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위 법안들만이라도 통과시켜야 ‘최악의 국회’라는 오명만은 면할 것이 아니겠는가. 아직 8일 남았다. 이순신 장군의 ‘상유 12척(尙有十二隻)’의 정신을 본받아 지금이라도 밀린 숙제를 마쳐 세비를 준 국민에게 작은 보답이라도 하기 바란다.

문화일보
05-21 ‘당심’ 위에 ‘명심’, 그 위에 ‘개심’… 여차하면 대선주자 바꿀 수도

누가 민주당을 지배하는가
‘개심’이 ‘명심’ 지배했지만… ‘중도확장’ 중시 당선인들 반란으로 추미애 추대 실패 ‘이변’
李 “당원 중심” 표방하며 당원권 강화 추진… ‘개딸 직접민주주의’, 대의민주주의 무력화 우려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장 후보 경선에서 추미애 당선인이 우원식 의원에게 패한 것을 계기로 이재명 대표가 당원권 강화에 나섰다. ‘당원 중심 정당’을 부르짖어온 이 대표로서는 개딸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것이 ‘대권 도전’과 ‘사법 방탄’이라는 두 개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길이라 여기는 것 같다. 확실히 민주당 의사결정 최정점엔 개딸의 집단의사, ‘개심’이 있다.
하지만 극성 팬덤을 상전으로 모시는 정치는 양날의 칼이다. 집단화한 힘으로 정적을 제거할 수도 있겠지만, 여차하면 자신을 찌르는 칼이 될 수도 있다.

◇‘추미애 낙점’ 전말
이재명 대표는 4월 중하순까지만 해도 추미애 당선인에 대한 지지 의사가 없었다. 오히려 조정식(6선)·정성호(5선) 의원 등 오래 뜻을 함께해온 친명 좌장급 인사들에 대한 기대가 컸었다. 민주당 내부 사정을 잘 아는 A 의원은 “이 대표가 처음엔 추미애에 대한 의원들의 비호감도가 높은 점, 추 당선인이 완급을 조절하지 않는 통제 불능 캐릭터라는 점을 우려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개딸은 순한 맛 아닌 매운맛을 원했다. 5월로 넘어오면서 강성 친명 지지층 내에서 ‘강철대오론’이 득세하자 ‘추미애 추대론’이 들끓었다. 친명 B 의원은 “이 대표가 이 같은 흐름을 거역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4말 5초부터 명심이 추미애에게 실렸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정성호 의원의 말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의장 후보 경선 사퇴 전인 지난 8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1주일 전부터 이 대표가 ‘추미애가 (국회의장) 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는데, 그게 헛소문이 아닌 것 같더라”고 밝혔다. 이 대표 입장이 ‘전통의 친명 암묵적 지지’에서 ‘추미애 적극 지지’로 선회했다는 것이다. 이 대표의 변심은 ‘당원 중심 정당’이라는 자신의 생각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더민주전국혁신회의 등 강경 친명 조직도 개딸의 추미애 추대론에 동조·선동했다.
이 대표가 박찬대 원내대표를 통해 조정식·정성호 의원에게 ‘사퇴’를 권한 건 5월 10일쯤의 일이었다. 두 의원은 경선 나흘 전인 5월 12일 의장 후보에서 전격 사퇴했다. 정 의원은 “평소 이 대표에게 싫은 소리를 많이 했는데 이 요구까지 거부하긴 어려웠다”고 말했다. 조 의원은 추 당선인과 ‘단일화 합의문’을 발표했지만, 정 의원은 추 당선인의 전화도 받지 않고 조용히 물러났다. 이 대표의 추미애 낙점은 개심이 명심을 바꾼 사건이었다.
◇확인된 노선투쟁
민주당의 국회의장 후보 경선 과정에서 한 가지 확실하게 드러난 것 중 하나는 당내 노선투쟁의 존재다. 즉 ‘단일대오 구축론’ vs ‘중도확장 강화론’이다. 전자는 강성 당원을 중심으로 ‘반윤-친명 진지’를 구축해야 한다는 논리이고, 후자는 당내 다양성을 살려 중도 확장으로 외연을 넓혀야 당의 미래가 있다는 관점이다. 4인 의장 후보 도전자들의 면면을 놓고 보면 단일대오론은 추미애〉조정식〉우원식〉정성호 순이었다.
의장 후보 경선이 본격화하면서 매운맛을 원했던 개심은 단일대오론으로 정리됐고, 이 대표의 명심은 결국 이를 좇았다. 4인 의장 후보 중 정 의원은 중도확장론에 가장 근접해 있기도 했지만, ‘수박 당도’에서 떨어지면서 개심에서 제외됐다. ‘추미애 의장’으로 정리된 명심이 조정식·정성호 두 의원에게는 전달됐지만, 우원식 의원에겐 따로 전달되지 않았다. 우 의원이 의장 후보로 선출될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웠다는 판단, 경선 들러리가 한 명쯤은 있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국회의원이 유권자인 선거는 일반 국민이 치르는 선거와는 다르다. 22대 국회의원 당선인들의 마음은 추 당선인에 대한 비호감과 이 대표의 과도한 교통정리에 대한 불만이 팽배했다. 서울 출신의 비명 C 의원은 “선수(選數)가 많아질수록 중도확장 심리가 발동하면서 우원식 의원에게 더 많은 표를 행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 의원의 승리 이유는 결국 ①비호감 추미애에 대한 거부감 ②이재명의 과도한 사전 조정에 대한 반발 ③중도확장 강화론 동조화 등으로 모인다. 당내에 광범위하게 분포한 ‘샤이 비명’의 지지, 구 김근태계의 암묵적 도움, 친명과 갈등하는 친문의 지원에 힘입어 우 의원은 국가 의전 서열 2위 국회의장직을 ‘줍줍’했다.
◇개심-명심-당심-민심
우원식 의원의 승리가 추미애 당선인을 밀었던 이재명 대표에게 치명적 장애가 될까. 꼭 그렇지는 않다. 이번 사태는 이 대표에게 득과 실을 모두 안겨줬다. 이 대표는 추 당선인의 낙선으로 다소 체면 손상을 입었지만, 통제 불능의 캐릭터가 국회 수장이 되는 부담에서는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더구나 이를 계기로 개딸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추진할 명분을 얻었다.
이 대표는 지난 주말 호남과 충청 당원들을 만나 권리당원 의사 비중을 확대하는 등 당원 권한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당원 중심 정당’을 거듭 강조하며 차기 시·도당위원장 선출 때 권리당원 의사를 확대 반영하겠다고 약속했다. 당 최고위원회의는 이미 룰 개정 밑 작업에 들어간 상태다. 당원과 당원 권한을 두 배로 늘리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이 대표에게 개딸의 존재는 축복이자 저주다. 잘 쓰면 약, 못 쓰면 독이다. 추미애 당선인은 “명심이 당심이고 당심이 민심”이라고 했다. 하지만 빠진 게 있다. 바로 개심이다. 수도권 출신의 비명 D 의원은 “민심 위에 당심, 당심 위에 명심, 명심 위에 개심”이라면서 “개딸은 이 대표에게 대권 가도를 깔아줄 수도 있지만 그를 무력화시킬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여차하면 대선 주자를 바꿀 수도 있다는 의미다.
민주당 중진 E 의원은 “추미애 패배 이후 개딸의 ‘잔수박(수박 잔당)’ 출당 운동, 89명 반란표 색출, 집단 탈당 러시 등 움직임은 강성 당원들의 이 대표에 대한 지지 표명이자 협박 시위의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강성 지지층의 ‘당 중심 지위 인정’ 요구가 수용되지 않을 경우, 혹은 개딸 직접민주주의 압박이 무산될 경우 개심은 언제든 명심으로부터 분리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위기의 대의민주주의
당원 중심 정치가 극단화하면 개딸의 당무 개입이나 의회정치에 대한 간섭이 노골화할 것이다. 이는 이 대표의 정치생명을 쥐락펴락하는 것은 물론 대의민주주의의 가치와 정신을 무력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윤평중 한신대 명예교수는 “당파성이나 진영 충성도를 중시하는 정치 풍토는 공론장을 오염시키고 사회를 타락시킨다”고 말했다.
■ 용어설명
민주당 ‘노선투쟁’은 ‘단일대오 구축론 vs 중도확장 강화론’의 투쟁. 전자는 반윤-친명 강철대오 구축이 우선이라는 주장, 후자는 정권 교체를 위해서는 중도확장이 더 중시돼야 한다는 것.
이재명의 ‘당원 중심’ 정치는 기득권의 도움 없이 열성적 지지자에 의지해 대선주자가 됐던 경험에서 나온 정치철학. 하지만 지도자-당원의 직접 연결 강조가 대의제와 충돌한다는 지적 있어.
■ 세줄 요약
‘추미애 낙점’ 전말 : 이재명 대표는 차기 국회의장 후보 선출과 관련, 당초 ‘전통의 친명 암묵적 지지’ 입장에서 ‘추미애 적극 지지’로 선회. 이 대표의 ‘추미애 낙점’은 개딸의 생각, 개심이 명심을 바꾼 사건으로 드러나.
확인된 노선투쟁 : 의장 후보 경선 과정에서 민주당 내 ‘단일대오 구축론’ vs ‘중도확장 강화론’의 노선투쟁 확인. 단일대오론이 대세인 듯 보였지만 중도확장을 중시한 당선인들의 반란으로 추미애 추대는 실패로 귀결.
위기의 대의민주주의 : 이 대표는 개심 달래기 차원에서 당원권 강화 추진. 당심 위에 명심, 그 위에 개심이 있는 구조. 개심은 여차하면 대선 주자를 바꿀 수도. 당원 중심 정치가 극단화하면 대의민주주의는 무력화할 것.
문화일보 허민 기자
05.21 법무부 "채상병 특검, 공수처 존재 부정"…총리보다 세게 野 때렸다
법무부가 21일 국무회의에서 채상병 특검법 재의 요구(대통령 거부권)를 의결한 것과 관련 특검은 “공수처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야당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박성재 법무부 장관. 연합뉴스
법무부는 이날 한덕수 국무총리의 국무회의 의결 직후 8페이지 분량의 보도자료를 내고 “특검법안은 국회가 권한을 남용하여 여야 합의 없이 통과시킨 것”이라며 “인권 보장과 헌법 수호의 책무가 있는 대통령으로서는 재의 요구권을 행사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한 총리가 모두발언에서 1300자에 걸쳐 밝힌 것보다 정부부처 차원에서 훨씬 세세하게 재의 요구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법무부는 먼저 “이 법안은 헌법상 대통령에게 부여된 특별검사 임명권을 사실상 더불어민주당이 행사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행정부 공무원에 대한 임명권을 행사하는 것은 대통령의 핵심적 권한”인데 “이 법안은 특검 후보자 추천권을 민주당에게만 독점적으로 부여하여, 대통령의 임명권 실질을 침해한다”는 내용이다.
아울러 법무부는 ‘채상병 과실치사 사건’은 경찰에서, ‘은폐·외압 사건’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에서 수사가 진행 중이고, 각 기관 사건 종결 후 검찰의 추가 수사도 예정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기존 수사기관에서 수사를 해보지도 않고 특검을 도입한 전례가 없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9월 채상병 수사 외압 의혹을 고발한 주체가 민주당인 점에 대해서도 법무부는 “고발인이 수사할 검사나 재판할 판사를 선정하는 것과 같은 불공정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 경우 실체적 진실의 발견보다는 특정 정당의 의도에 부합하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수사를 진행하는 등 정치적 중립성 확보가 불가능할 것이 명백하다”고 덧붙였다.
법무부는 그러면서 “다수당의 정파성이 입법부의 숙의 절차를 집어삼킨 결과로서 헌법상 민주주의 원리를 크게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지난 2일 민주당 등 야당이 국회 본회의에서 법안을 일방 처리함으로써 “입법부의 의사 합일 과정이 형해화되고 다수당의 정파성이 법률에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채상병 특검법 거부권 관련 발언을 하고 있다. 뉴시스
한덕수 발언보다 센 법무부…“민주당, 공수처 일방 설치”
법무부의 이날 보도자료에는 한 총리의 모두발언에 포함되지 않은 비교적 수위 높인 표현도 다수 담겼다. 통상 정부부처가 정치적 발언을 삼가는 관례와 달랐다. 예컨대 “기존 수사기관에서 수사를 해보지도 않고 특검을 도입한 전례가 없다”는 주장을 하면서 공수처와 민주당의 관계를 부각한 게 대표적이다.
법무부는 공수처가 채상병 수사 외압 사건을 담당 중인 걸 언급하며 “공수처는 지난 정부에서 민주당이 검찰개혁의 핵심이라는 기치 아래 제1호 공약으로 안건 신속처리 제도(패스트트랙)까지 동원하여 일방적으로 설치한 수사 기구”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법무부는 2019년 공수처 설치법 추진 당시 민주당의 대변인 브리핑 내용까지 여럿 인용했다.
“공수처 설치는 권력형 범죄에 대한 국민적 공분을 해소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될 것”(홍익표 수석대변인), “공수처 설치로 정치적 손해를 보는 쪽은 야당이 아닌 정부와 여당”(박찬대 원내대변인) 등이다.
법무부는 이를 열거한 뒤 “공수처 도입 취지에 비추어 볼 때, 특검 도입으로 수사가 중단되는 것은 공수처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법무부는 “법안이 삼권분립 원칙에 위반된다”, “공정성 확보가 불가능할 것이 명백하다” 같은 단정적 표현도 많이 썼다. 한 총리가 “헌법상 삼권분립에 위배될 소지가 크다”, “공정성 등 기본 원칙을 훼손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발언한 것보다 강경했다. 정부 부처 출신 정치권 관계자는 “일반적으로 국무총리가 부처보다 정치적 발언이 강한데 이번 건에선 법무부가 총대를 멘 것 같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김준영 기자
05.22 채 상병 사건, 일단 공수처 수사부터 지켜봐야
본격화된 공수처 수사 결과 보고 판단이 순리
민주당이 만든 공수처 불신 역시 자기모순적
윤석열 대통령이 어제 ‘해병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 외압 의혹 특별검사법’(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채 상병 특검법은 지난 2일 국회 본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이 단독으로 강행 처리한 것으로, 윤 대통령은 9일 기자회견 때 이미 거부권 행사를 시사했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취임 후 열 번째인데 이번 거부권이 가장 정치적 부담이 큰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달 초 4개 여론조사기관이 공동 실시한 ‘전국지표조사(NBS)’에 따르면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한 찬성은 67%에 달했고, 반대는 19%에 불과했다. 야권이 특검법을 밀어붙인 것도 이런 압도적 찬성 여론이 배경이다. 공수처가 지난 1월 수사에 착수했지만 좀처럼 진도를 내지 못하면서 특검 여론이 강화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 대통령의 이번 거부권 행사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고 본다. 특별검사라는 제도는 기존 수사기관의 수사 결과가 미진하다는 비판을 받거나, 애초부터 수사의 독립·공정성을 기대하기 힘든 경우에 도입하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채 상병 사건은 이미 공수처와 경찰이 수사를 진행 중인 사안이다. 공수처는 어제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과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을 불러 집중 조사를 벌였다. 뒤늦게나마 수사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때마침 어제 오동운 공수처장 임명안을 윤 대통령이 재가하면서 공수처 리더십 공백 사태도 해결됐다. 이런 상태라면 일단 공수처의 수사를 지켜보는 게 옳다. 특검을 지명해 새로 수사팀을 꾸리는 것보다 공수처가 훨씬 먼저 사건의 진상을 발표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공수처는 문재인 정부에서 민주당이 검찰을 견제하기 위해 당력을 총집결하다시피 해 신설한 독립 수사기구 아닌가. 지금 윤 대통령은 공수처 수사에 영향력을 행사할 방법이 없으며, 공수처가 윤 대통령의 눈치를 살펴야 할 이유도 없다. 민주당이 자신들이 만든 공수처를 못 믿겠다며 특검을 요구하고 나선 것은 자기모순이다.
설령 나중에 특검이 필요한 상황이 오더라도 여야 합의에 따른 특검법 통과가 바람직하다. 민주당 주도로 통과된 특검법엔 대한변협이 특검 후보 4명을 추천하면 민주당이 이 중 2명을 골라 대통령에게 추천하게 돼 있다. 특검의 정파성 논란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여야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인사를 특검에 임명해야만 수사 결과가 정치적으로 오염되지 않을 것이다.
윤 대통령은 9일 회견에서 채 상병 사건 수사와 관련해 “국민들께서 ‘이건 봐주기 의혹이 있다’고 하시면 그때는 제가 먼저 특검을 하자고 주장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니 지금은 일단 공수처 수사를 지켜볼 때다. 특검 도입은 수사 결과가 나오면 그것을 엄밀하게 평가한 뒤 논의를 시작해도 늦지 않다.
중앙일보 사설
05.22 팬덤 정치의 아이러니
“대표님이 좋아서 벽치다 (벽이 무너져서) 원룸 됐어요.” “대표님 때문에 비 와요, 심장마비.”
지난 18~19일 광주와 대전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행사에서 당원들이 이재명 대표를 향해 쪽지에 적어 보낸 메시지다. 사회자가 대신 읽은 내용 중엔 “대표님 미모에 애덤 스미스도 ‘보이지 않는 손’으로 박수 치고 갔다”는 아부도 있었다. 정청래 최고위원이 “이 대표 피부가 우유 빛깔”이라고 말하자, 당원들은 “맞아요”라며 맞장구쳤다. 민주당이 자랑하는 250만 당원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 장면이다.
이 대표에겐 한없이 자애롭던 당원들은 민주당을 향해선 한가득 불만을 쏟아냈다. 전남 여수의 한 70대 당원은 “수박(비명계를 칭하는 은어)을 다 물리쳤으면 이제는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야 하지 않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당원과 국회의원의 의견을 일치하게 하라”는 요구도 나왔다. 지난해 사법리스크 국면에서 ‘이재명 지키기’에 앞장서고 당내 경선에서 ‘비명횡사’를 이끈 권리당원들이 내민 청구서였다.
최근 민주당에선 한층 강해진 권리당원의 영향력을 두고 ‘뉴노멀(new normal, 새로운 표준)’이란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과거엔 국회의원이 당원을 이끌었다면, 이제는 거꾸로 당원이 의원의 목줄을 쥐고 흔드는 시대가 됐다는 의미다. 민주당이 중도 확장 없이 지지층 요구에 집중해 치른 4·10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이런 진단이 급부상했다. 이재명 대표도 18일 “중국·북한 이런 데 빼고, 정당이 실질적으로 경쟁하는 나라에서 대한민국 민주당 당원이 제일 많다”며 “민주주의 정당 역사에서 세계적인 첫길을 여는 상황이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변화”라고 강조했다.
문제는 권리당원의 요구와 현실 정치의 간극이다. 당원들은 틈만 나면 윤석열 대통령 탄핵과 쟁점 법안의 강행 처리를 요구하지만, 200석을 확보하지 않는 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은 물론 대통령 거부권 무력화도 쉽지 않다. 윤 대통령이 국정 기조를 바꾸지 않은 상황에서 여당과의 협상을 벌이는 것도 당원들이 용인할 리 만무하다.
이런 상황에서 그간 당원들의 ‘욕받이’ 역할을 해오던 비명계는 22대 국회에서 자취를 감췄다. 지지층의 실망감을 앞으론 지도부가 고스란히 져야 한다. 당원들의 연임 요구로 이 대표가 대표직에서 물러나기도 어렵게 됐다. 그래서 민주당 일각에선 “이러다 언젠가는 이재명도 ‘수박’으로 몰리는 것 아닐까”라는 우려마저 나온다. 팬덤 정치의 아이러니다.
중앙일보 오현석 정치부 기자
05-22 거부권은 국가권력 견제·균형 징표
임종훈 前 국회입법조사처장, 前 홍익대 법대 교수
야권이 단독으로 지난 2일 국회에서 처리한 해병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 외압 의혹과 관련된 특별검사법에 대해서 윤석열 대통령이 21일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다. 야당에서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국민과 야당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비판하며, 탄핵 가능성까지 거론해 왔다. 여당에서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서 수사가 진행 중인 만큼, 수사를 지켜본 후 특검의 실시 여부를 판단하자고 한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잘못된 것인가?
주지하듯이, 국가의 권력을 입법·행정·사법으로 나누어 이를 각각 별개의 국가기관에 맡기는 것을 권력분립이라고 한다. 그러나 권력분립을 한다고 해서 국회는 입법권을 아무런 제한 없이 행사하고, 행정부는 집행권을 마음대로 행사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국회가 집행권을 침해하는 입법을 하고, 행정부가 입법권을 침해하는 행정행위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분립에는 권력 상호 간에 견제가 반드시 수반돼야 한다. 대통령의 거부권은 국회의 입법권 남용을 견제하기 위해서 대통령에게 부여된 권한이다.
대한민국헌법 제53조에서는 대통령이 법률안에 대해서 ‘이의(異議)가 있을 때’ 국회에 재의를 요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으며(제2항), 구체적으로 어느 경우에 재의를 요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법률안의 내용이 헌법에 위반되거나, 국가이익에 반하거나, 정부의 권한을 침해하거나 간섭할 때 또는 집행이 곤란한 경우 등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헌법 규정은 거부권을 행사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대통령에게 폭넓은 재량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대통령이 거부권을 남용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국회는 재의 요구된 법률안에 대해서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재의결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제4항).
의회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정당이 내각을 구성하는 의원내각제 국가에서는 행정부에서 집행하기 곤란한 법률안을 의회가 입법한다는 것을 생각하기 곤란하다. 그렇기 때문에 거부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결국, 의회에서 의결한 법률안에 대한 행정부의 거부권은 권력분립이 엄격하게 돼 있는 대통령제 국가에서 주로 문제가 된다. 따라서 대통령제의 모국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 거부권이 헌법에 어떻게 규정돼 있고, 실제로 얼마나 행사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 연방헌법에서는 의회가 의결한 법률안을 대통령이 승인(approve)함으로써 법률이 시행되도록 하고 있으며(제1조 제7항 제3호), 대통령이 승인을 거부하는 것이 거부권 행사가 된다. 거부권 행사 사유에 대해서는 우리와 같이 아무런 제한 규정이 없다. 1900년 이후 미국 대통령들은 1584건의 법률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는데, 특히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3∼1945년 재임 12년 중 무려 635건의 법률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국회와 정부 간에 견제와 균형이 잘 작동하고 있다는 징표다. 대통령의 재의 요구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다면, 국회가 재의결을 통해서 통제하면 된다. 그에 대해서는 궁극적으로 국민이 심판하게 될 것이다.

문화일보
05.23 ‘이러면 누가 사단장 할 수 있나’엔 공감한다
채 상병 순직 비통하나
이 일로 사단장 감옥 간다면
군 전체에 심각한 영향
’군용 중대재해법’ 안 돼
해병대 사랑한 채 상병이
바라는 일도 아닐 것

▲11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정의의 해병대 국토종주 행군 및 채상병 진상규명 특검 요구 집회 및 행진이 열리고 있다./뉴스1
필자는 얼마 전 칼럼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해병대 채모 상병 수사 외압 의혹에 대한 특검을 수용하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냈었다. 하지만 그제 윤 대통령은 대부분 사람들의 예상대로 거부권을 행사했다. 민주당은 다시 특검안을 낼 가능성이 높아 여야 충돌과 사회 갈등은 계속될 것 같다.
누차 지적됐듯이 이 사건은 이렇게 커질 일이 아니었다. 해병대 사단장에게까지 과실치사 혐의를 물은 해병대 수사단의 수사는 법적 권한이 없는 참고용 조사였을 뿐이다. 진짜 법적인 수사는 경찰이 하게 돼 있다. 해병대 수사단의 결론에 무리한 부분은 경찰 또는 검찰 차원에서 모두 걸러졌을 것이다. 그걸 참지 못하고 이미 경찰로 넘어간 조사 결과를 회수하는 통에 이 사달이 났다. 국방부나 대통령실의 사건 처리 방식에는 동의할 수 없다.
다만, 장병 사망 사고 때 사단장이 지휘 책임이 아니라 과실치사의 책임까지 져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다. ‘과실치사’는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는 뜻이다. 교통사고가 대표적이다. 그날 채모 상병은 수해 사망 시신을 찾는 대민 지원에 참여하고 있었다. 하천의 물살이 빨랐으나 수색이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었다. 불행히도 채모 상병이 서 있던 물 밑의 땅이 꺼지면서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사단장은 수색 대원들에게 ‘해병대’라는 것이 눈에 띄게 복장을 통일하고 웃는 모습이 보이지 않게 얼굴을 가릴 것, 주차를 잘할 것이라는 등의 지시를 내려놓고 있었다. 대부분 할 수 있는 지시였지만 이 중 ‘해병대라는 것이 눈에 띄게 하라’는 부분이 문제가 되는 듯하다. 그래서 구명조끼를 입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외에 일부 관련자의 일방적 진술을 근거로 사단장에게 과실치사 혐의가 있다고 한다.
이 사단장은 ‘해병대가 수색을 잘해 시신 수습의 성과를 올렸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병사가 사망할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쓸 생각은 추호도 없었을 것이다. 해병대 복장 통일 지시를 구명조끼 입지 말라는 요구로 보는 것도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해병대는 장갑차나 보트 탑승 수색 때는 구명조끼 착용이 의무였지만 채 상병 경우처럼 ‘수변 수색’은 구명조끼가 의무 사항이 아니었다. 이 지침은 채 상병 사고 이후 개정됐다고 한다.
채 상병의 순직은 참으로 안타깝고 비통한 불행이다. 하지만 이 일로 사단장에게 ‘지휘 책임’이 아니라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며 감옥에 가라고 한다면 또 다른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앞으로 사단장에게 중대한 구체적 혐의가 드러난다면 다른 얘기가 된다. 하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대로라면 ‘과실치사’는 지나치다. 이 문제는 우리 군에 미칠 영향도 심각할 것이란 걱정이 든다.
자료를 찾아 보니 2011년부터 작년까지 12년 동안 우리 군에서 각종 군기, 안전 사고(자살 제외)로 사망한 장병은 300명이 넘었다. 60만 가까운 거대 조직이 위험한 장비를 다루고 온갖 위험한 일을 하니 불가항력이기도 할 것이다. 미군은 더 많다고 한다. 그제도 육군 사단 한 곳에서 수류탄 투척 훈련 중 사망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망 사고 하나하나를 채 상병 사건 식으로 보면 해당 사단장들 수십 명 이상에게 ‘과실치사’ 혐의를 씌울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 그런 일은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 군이 어떻게 됐겠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사단은 군 편제의 중추이자 핵심이다. 현재 11개 사단이 휴전선을 지키고 있고 이 덕에 국민이 큰 걱정 없이 생활하고 있다. 1개 사단 1만여 병사들이 지키는 휴전선 길이는 22km가 넘는다. 산과 들, 하천으로 이뤄진 22km는 길고도 길다. 이를 빈틈없이 지키는 일은 실로 지난하다. 해병대 사단은 국가전략기동부대로서 유사시 북한 지역에 상륙한다. 북한은 이 두려움 때문에 상륙 예상 지점에 대규모 부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만약 해병대가 없다면 이 북한군이 전부 휴전선으로 내려올 것이다.
군에는 군단장, 군사령관, 합참의장도 있지만 실제 적과 마주한 채 나라를 지키는 지휘관은 사단장이다. 그 역할은 막중하다. 대민 지원 중 사고로 순직한 병사에 대해 사단장이 지휘 책임을 질 수는 있다. 그런데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며 감옥에 보낸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으로 군의 지휘 체계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질 수 있는 책임에는 한계가 있다. 일부에서는 이른바 ‘시범 케이스’로 사단장에게 과실치사죄를 물어 군 사고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근로자가 사망하면 사장, 회장을 감옥 보낸다는 중대재해법을 군에도 적용하자는 건가. 이런 군대는 이미 군대가 아닐 것이다.
윤 대통령의 판단, 결정에 동의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항간의 얘기대로 윤 대통령이 ‘이러면 누가 사단장을 할 수 있겠느냐’고 화를 냈다면 여기엔 공감한다. 채 상병을 애도하며 이 일이 군 안전 사고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동시에 도를 넘는 처벌로 군에 악영향을 미치는 일도 없었으면 한다. 해병대를 사랑한 채 상병도 바라지 않는 일일 것이다.
조선일보 양상훈 기자
05.23 해야 할 연금개혁 않고… 野, 마지막까지 쟁점 법안 강행
최악의 21대 국회
더불어민주당이 28일 국회 본회의를 열고 지난해 윤석열 대통령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해 폐기됐던 양곡관리법 등 쟁점 법안들을 다시 한번 강행 처리할 것으로 22일 알려졌다. 윤 대통령도 이 법안들에 거부권을 행사할 것으로 보여 21대 국회 마지막까지 여야의 극한 대립이 이어질 전망이다. 반면 여야는 국민연금 개혁안 등 21대 국회에서 반드시 처리하라는 요구가 제기된 국가 미래 관련 입법에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선 “21대 국회는 역대 최악의 국회로 기록될 판”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민주당은 이날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해병대원 특검법에 대한 재의(再議) 표결이 실시되는 28일 본회의에서 양곡관리법, 전세 사기 특별법, 민주 유공자법 등 각종 쟁점 법안들도 무더기로 상정해 강행 처리한다는 방침을 거듭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픽=박상훈
양곡관리법은 쌀값이 폭락하면 초과 생산량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매입하도록 하는 법안이다. 공급과잉에 따른 쌀값 폭락 악순환 등이 우려된다며 윤 대통령은 작년 4월 민주당이 단독 처리한 이 법안에 대해 첫 거부권을 행사했고 결국 법안은 폐기됐다. 그런데 민주당은 이후 폐기된 법안에서 일부 수치만 바꾼 양곡법 개정안을 다시 발의했고, 28일 본회의에서 이를 통과시키겠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날 “우리 당은 기존 입장(거부권 행사)을 가지고 있고 정부도 같은 취지”라고 했다.
민주당은 또 전세 사기로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떼이면 정부가 이를 먼저 돌려주는 내용의 전세 사기 특별법도 강행 처리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 법안을 두고도 사인(私人) 간 거래에 국가가 개입한다는 논란 등을 이유로 정부·여당은 반대하고 있다. 민주 유공자법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다치거나 숨진 이들을 국가유공자로 예우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정부·여당은 민주화 운동 심사 기준이 불명확해 사회적 논란이 된 부산 동의대 사건, 서울대 프락치 사건 관련자 등도 포함될 수 있다며 반대하고 있다.
민주당이 28일 본회의에서 여당의 반대에도 해당 법안들을 강행 처리할 경우 윤 대통령은 21대 국회 임기 마지막 날인 29일 거부권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국회가 본회의 처리 당일 법안을 정부로 이송(移送)하고, 대통령이 그 즉시 거부권을 행사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질 공산이 크다. 28일 본회의 후에 국회의 법안 이송이 늦어질 경우 21대 국회 법안을 22대 국회에 재의 요구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돼 법적 논란이 불거질 수도 있다.
윤 대통령이 29일 거부권을 행사하면 민주당은 당일 본회의를 추가로 열어 재의 표결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야당에서도 물리적 시간 등을 고려할 때 재표결은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결국 이 법안들은 21대 국회 종료와 함께 폐기 절차를 밟게 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런데도 민주당이 21대 국회 종료를 앞두고 이 법안들의 처리를 밀어붙이자 여권에선 “법안 통과보다는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횟수를 늘려 정치적 부담을 키우려는 목적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윤 대통령은 지난 21일 해병대원 특검법에 대해 취임 후 10번째 거부권을 행사했는데, 21대 국회 종료 전에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횟수를 10회 이상으로 만들려는 게 민주당 속셈 아니냐는 것이다. 민주당은 양곡 관리법 등이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폐기되더라도 30일 시작되는 22대 국회에서 재발의할 방침이다.
반면 21대 국회에서도 과반 의석을 가진 민주당 등 야권은 국회 연금개혁특위의 합의안 처리나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을 만드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법의 임기 내 처리에는 의욕을 보이지 않고 있다. 국민의힘도 민주당이 해병대원 특검법 처리를 강행하자 모든 상임위원회 회의를 거부하고 있다. 여권 관계자는 “여당도 정치 쟁점을 방어하느라 정책 입법에 손을 놓은 형국”이라고 했다.
05-23 친명 의원조차 ‘수박’ 낙인 찍은 개딸에 끌려가는 巨野
더불어민주당이 23일 오후 부산에서 이재명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당원 주권 시대’를 주제로 당원 콘퍼런스를 연다. 앞서 이날 오전 워크숍에서 제22대 국회 당선인들은 당원들이 당의 주요 의사결정이나 인선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당원권 강화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지난 16일 전반기 국회의장 후보 경선에서 예상을 깨고 우원식 의원이 선출된 후 추미애 당선인을 지지했던 강성 당원, 개딸(개혁의 딸)이 반발하는 가운데 벌어지는 일들이다.
개딸은 국회 법사위원장 후보 선정과 관련, “국민의힘이 속 터져 죽는 걸 보고 싶다”며 정청래 의원을 내세운다. 법사위원장은 국회의장, 원내대표와 더불어 국회 운영의 핵심 직책이다. 정 의원은 추 당선인이 낙선하자 “당원이 주인이 돼야 한다”고 했다. 경쟁자인 박주민 의원의 지역 사무실 앞에는 ‘민주당 딱지 떼고 당원 없이 혼자 나가 당선되세요’라고 적힌 대자보가 붙었다고 한다. 친명인 박 의원에게조차, 우 의원과 을지로위원회 활동을 같이했다는 이유로 ‘수박 딱지’를 붙인 것이다. 선거로 선출된 국회의원의 선택과 책임은 아랑곳 않는 행태다.
정당이 당원 요구를 수렴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강경·극단 요구를 부추기거나 끌려가선 안 된다. 그런데 의장 선출에 당원 50% 반영하자는 주장(양문석 당선인)도 나왔다. 같은 당 출신의 김진표 국회의장이 “국회의원은 당원에 충성하기 이전에 국민 눈높이”를 당부하자, 윤종군 원내대변인은 “민주당 당원이 500만 명으로, 그 자체가 집단지성”이라고 반박했다. ‘추미애 의원을 국회의장에’ 청원에 동의한 당원이 3143명에 불과하고 ‘재명이네 마을’ 가입자는 20여만 명 수준이다. 극단주의 정치에 함몰되면 복수와 대결의 정치만 남는다. 이는 참여민주주의가 아니다. 개딸에 휘둘리는 정당이 될 양이면 ‘서민과 중산층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당 강령부터 바꾸는 게 옳다.
문화일보 사설
05-23 정치가 법치 흔들면 민주국가 아니다
김성천 중앙대 교수·법학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에 대한 재판에서는 참으로 기이한 모습들이 다양하게 연출되고 있다. 법정에서 부부싸움을 하기도 했고, 배우자가 나서서 일 잘하던 변호사를 그만두게 하기도 했다. 또, 결심공판 직전에는 검찰 수사 당시 검사실 앞방에서 연어 회를 안주로 술을 마셨다고 주장했다가, 슬그머니 아니라고 말을 바꾸기도 했다.
21일 보석 청구 심문 과정에서는 담당 변호사가 ‘이화영에 대한 유죄 판결은 불가피하게 향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유죄를 추정하는 유력한 재판 문서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대북 송금 사건에 대해 유죄를 선고할 경우엔 그 이유를 상세하게 밝혀야 할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구속된 피고인에 대한 보석 청구가 있게 되면 사형, 무기 또는 장기(최고) 10년 이상의 자유형에 해당하는 죄를 저지르지 않았고, 증거인멸이나 도주의 염려가 없을 것으로 믿을 만한 경우 등 사유가 인정되면 반드시 보석을 허가해야 한다. 이 전 부지사의 경우 뇌물죄만 하더라도 금액이 1억 원을 훨씬 넘기 때문에 최고 10년이 아니라 최소 10년이다. 보석 대상에서 제외된다.
법을 아는 변호사라면 보석을 허가해야 하는 사유가 충족됨을 논증해야 하는데, 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 변호사는 이 전 부지사의 행위가 유죄가 되면 이 대표도 유죄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향후 대통령 출마가 확실시되는 이 대표의 앞길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전 부지사의 보석 청구 사건이 아니라, 마치 이 대표 재판을 위한 공판준비기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변호사는 ‘주심 판사가 사건 기록 전체를 통독했는지 의문’이라면서, ‘유죄 설시하려는 이유를 자세히 밝혀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마치 시험을 본 학생의 부모가 교사에게 전화를 해서 ‘우리 아이의 답안지를 전부 읽고 점수를 매길지 의문이다, 점수를 잘 주지 않는다면 그 이유를 자세히 밝혀야 할 것이다, 내가 곧 이 학교의 이사장이 될 것’이라고 겁박하는 분위기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판사의 심정은 어떨까. 일단 보석 청구와 전혀 관계가 없는 이야기를 하는 변호사를 보고 있노라면, 변호사 자격을 도대체 어떻게 취득했을지 의문을 가질 것이다. 대학생 중에도 교수가 답안지 분량만 보고 채점한다고 생각해서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를 꽉꽉 채워 써서 내는 부류가 가끔 있다.
이 대표를 사법처리로부터 보호하려고 사력을 다하는 민주당의 행동양식은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검찰이 자당 소속 정치인들의 범죄행위에 대해서 수사를 시작하면 담당 검사들을 좌천시키고 검찰총장의 수족을 묶어 버린다. 그래도 수사가 계속되면 아예 검찰의 수사권을 박탈하기 위한 입법을 한다. 재판이 시작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연시킨다. 판사에게 겁박도 한다. 유죄 판결이 확정되더라도 역사의 법정에선 무죄라고 우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법치주의’가 싫다는 말이다.
범죄는 처벌해야 예방이 가능하다. 그런데 수사라도 하려고 하면 선출된 권력에 반기를 든다며 화를 낸다. 선출된 권력을 가진 자는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되지 않아야 한다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런 세상을 원하는 국민은 없다.

문화일보
05.24 총선 승리 후 李 대표 관련 재판서 벌어지는 희한한 일들
민주당 이재명 대표 아내 김혜경씨 재판에서 핵심 증인이 진술을 번복했다. 김씨는 지난 대선 때 경기도 법인카드로 민주당 사람들에게 식사를 제공한 혐의로 1심 재판을 받고 있고, 김씨와 이 대표는 2018년부터 3년간 경기도 법인카드를 개인적으로 사용한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그런데 법인카드를 직접 결제했던 실무자인 배모씨가 김혜경씨의 1심 재판 증인으로 나와 “법인카드로 음식값을 결제하면 김씨가 나중에 현금을 줬다”고 증언한 것이다. 검찰 조사에선 “김씨가 음식값을 보전해준 적 없다”고 해놓고 이를 뒤집은 것이다.
이 증언은 상식에 맞지 않다. 김씨가 음식값을 낼 생각이었다면 무엇하러 법인카드로 먼저 결제하도록 했겠나. 배씨는 3년간 김씨에게 배달했던 음식 메뉴도 자기가 정했다고 했다. 배씨가 주문한 대로 이 대표 부부가 그냥 먹었다는 것인데 믿을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상식 밖 증언이 계속되자 재판부는 4차례에 걸쳐 “위증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했다. 배씨 증언 번복이 인정되면 배씨는 죄를 다 뒤집어쓰게 된다. 이 대표 부부는 혐의에서 벗어난다. 배씨가 이러는 것은 민주당이 총선에서 압승하자 죄를 뒤집어쓰는 게 결국 자신에게 더 이익이라고 판단한 것 아닌가.
‘쌍방울 불법 대북 송금’ 사건으로 기소된 이화영 전 경기도 부지사 재판에서는 변호인이 “이 사건에선 이 대표가 공범으로 적시됐고, 이 대표는 앞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것으로 예견된다”면서 “이 사건 판결 결과는 향후 권력에 영향을 주는 정치적 사건”이라며 선고 연기와 이화영씨 보석을 요구한 일도 있었다. 이 대표의 정치적 위상을 거론하며 재판부를 압박한 것이다. 이 대표는 이 사건 외에도 대장동·백현동 비리 등 많은 재판을 받고 있다. 다른 재판에서도 어떤 희한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조선일보 사설
05-24 ‘개딸’에 갇힌 민주당의 대의제 훼손
양승함 前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세칭 ‘개딸’(개혁의 딸)이 거대 야당 더불어민주당을 휘둘러 오더니 마침내 국정 운영도 좌지우지할 지경에 이르렀다. 압도적 의석을 차지한 거대 야당은 지난 19일부터 대전·광주·부산에서 당원 콘퍼런스를 열고 ‘당원 중심의 민주당’을 지향하기 위한 당원권 강화 체제로의 개편을 선언했다. 22일 열린 민주당 당선인 워크숍에서는 국회의장 후보와 원내대표 경선에 권리당원이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것은 제22대 국회의장 후보 경선에서 강성 당원들이 지지한 추미애 후보가 우원식 후보에게 뜻밖의 고배를 마시자 성난 당원들의 항의와 탈당 쇄도를 막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어의추’(어차피 의장은 추미애) 분위기에 젖어 있던 친명계에는, 당선인 대다수가 친명계인 상황에서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동안 당권을 장악하고 22대 총선의 공천 과정과 선거 승리를 통해 1인 지배체제를 공고하게 구축했다고 생각한 이재명 대표에게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차기 대권 및 사법적 위기 모면을 위해 당 대표를 연임해야 하는 판에 심상찮은 징조로 보였을 수도 있다. 민주당 친명계 당선인들의 분위기가 분화하고 있다는 신호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위기를 기회로 이용한 이 대표는 ‘당원권을 두 배로 늘려야 한다’고 ‘당원 주권’을 강조하고 나섰다. 3개월 후 차기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 선출과 2년 후 지방선거에서 공천권을 행사할 시·도당위원장 선출 과정에 권리당원의 의사를 더 반영하는 실무 작업에 이미 착수하고 있었다. 나아가 측근들은 당무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국회의장과 원내대표 선거에도 권리당원 투표 비중을 10%, 심지어 50%까지 늘려야 한다고 강변한다.
이들은 이상한 ‘당원 주권’ 논리를 전개한다. 추 당선인은 의장 후보 경선 과정에서 ‘당심이 명심(明心), 명심이 민심’이라는 낯 뜨거운 ‘명심 마케팅’을 했다. 일부 최고위원은 대학 총장 선출에 학생들이 참여한다며 의장 경선에도 당원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사실상 직접민주주의를 옹호하고 대의제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듯한 논리다.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를 일개 강성 당원들이 참여·통제하겠다는 것은 국회 기능의 부정과 다름없다. 국회는 당파가 아닌 모든 국민을 대변해야 하는데, 명심은 민심의 한 부분일 뿐임을 명심해야 한다.
강성 당원의 주축인 개딸은 정치인 이재명 개인을 열렬히 지지하는 팬덤 정치 집단이다. 이들은 이재명을 위한 정치적 지지와 지원을 넘어 다른 사람들에게 인신공격, 문자 폭탄, 좌표 찍기 등의 위협적 압박을 가하는 과격한 파당일 뿐이다. ‘수박’ 색출로 정평 난 이들은 이재명체포동의안 가결에 국회 난입을 시도했고, 지금은 우원식 의장 후보 압박과 그 지지자 색출에도 나선다. 이들은 이제 ‘이재명의 말도 안 듣는 이재명 지지자들’로 변모했다. 초기 20대 여성에서 40, 50대로 바뀌어 그 정체도 모호한데 집요하게 군집한다. 일각에서는 중국의 홍위병 또는 파시스트 같다고도 한다.
정책에 기반하지 않고 개인에 도취된 팬덤에 기반한 정당은 결국은 역기능에서 헤어나지 못함을 역사가 증명한다. 더욱이 적개심으로 가득 찬 팬덤은 자가당착에 빠져 기호지세(騎虎之勢)의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문화일보
05.25 '여의도 대통령'의 꽃놀이패? 여론 블랙홀이 된 25만원
[아무튼, 주말]
새 국회 민주당 1호 법안
전 국민 민생지원금 논란

▲민주당이 곧 개원하는 22대 국회에서 1호 당론 법안으로 '전 국민 민생회복 지원금'을 밀어붙이고 있다. 입법부가 예산 편성을 할 수 없다는 위헌 논란에, 물가 폭등과 세금 증가 우려, 현금 뿌리기 포퓰리즘은 곧 미래 세대에 빚을 넘겨주는 일이라는 반발은 '25만원의 유혹'에 잠식 당하고 있다. / 일러스트=김영석
25만원. 누군가에겐 가족의 한 달 반찬 값, 누군가에겐 특급 호텔 케이크 값이다. 통근자의 월 주유비일 수도, 골프장 4시간 캐디피로 날아갈 수도 있다. 또는 전단 아르바이트로 번 아이 학원비, 한우 오마카세에서 법카 긁는 기분, 나라 위해 젊은 목숨 걸었던 참전 용사의 명예 수당, 코인 투자로 순식간에 잃어도 눈 깜짝 않는 돈일 수도.
25만원이라는 유령이 대한민국을 휘젓고 있다. 지난 4·10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전 국민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공약을 띄워 승리한 데 이어, 거대 야당인 민주당이 오는 30일 제22대 국회 개원 즉시 ‘1호 당론 법안’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정부·여당은 결사반대다. 재정 건전성 악화, 물가 상승, 사실상 매표 행위, 입법부의 예산 편성은 위헌.... 구구절절 옳다.
그러나 뛰어봤자 25만원 손바닥 안이다. 구도는 ‘25만원 주겠다는 사람’과 ‘25만원 못 주겠다는 사람’으로 짜였다. 받아도 큰일 날 것 같지 않은 돈, 효용은 작지만 확고한 돈, 나만 못 받으면 빈정 상할 미묘한 액수의 돈이 여론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고 있다.
◇준다면 안 받을 사람, 손?
최근 서울의 한 은퇴자 등산 모임에선 이 ‘25만원’ 때문에 분위기가 싸해졌다고 한다. 60대 참석자 A가 “이렇게 현금 퍼주기 포퓰리즘에 길들면 나랏빚이 얼마나 늘고 세금은 또 얼마나 늘겠느냐. 결국 장님 제 닭 잡아먹는 꼴인데”라고 말을 꺼냈다.
다른 회원들이 맞장구를 쳤다. “코로나 때야 워낙 경제가 안 돌아갔다지만, 지금 같은 고물가·고금리에 13조원을 또 뿌린다는 게 이해 안 된다” “간신히 카페 차렸는데 돈 더 풀리면 인건비와 임차료가 더 올라 폐업해야 할지도 모른다” “옛날 ‘고무신·막걸리 선거’처럼 민주당 찍은 사례금 주겠다는 거 아니냐, 세금이 이재명 쌈짓돈이냐”….
듣고 있던 50대 B가 “마음 편히 쓸 수 있는 돈이 생기면 경제가 돌고 소득 재분배 효과도 있다”며 “정부 예산이 600조원 넘는데 고작 13조 나눠준다고 큰일 나지 않는다. 물가는 이미 윤석열 정부의 경제 실패 탓에 올랐다”고 반박했다.
붉으락푸르락 실랑이가 오가던 중, C 회원이 A 무리를 향해 물었다. “그럼 25만원 나눠줄 때 혼자 안 받으실 거예요? 막상 못 받으면 화나실 텐데.”

▲유튜버로 활동 중인 코미디언 김영민 씨가 지난 17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 앞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추진 중인 '전국민 1인당 민생회복지원금 25만원 지급'에 반대하며 삭발식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격론이 지역별 맘 카페, 직장 블라인드와 부동산 투자자·자영업자 커뮤니티마다 벌어지고 있다.
아무리 ‘여의도 대통령’ 공약이라지만, 민생 지원금 지급이 확정된 줄 착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코로나 때처럼 이번에도 소득 하위 80%에 지급될 가능성이 크다며 ‘난 25만원 받을 수 있나 알아보기’ ‘민생 지원금 받는 법 여기서 클릭!’ 같은 김칫국 콘텐츠가 쏟아진다.
벌써 결제 플랫폼과 미용 기기 등 지원금 수혜주가 들썩이고, ‘25만원 받기’ 문자를 누르면 되레 25만원을 털어가는 피싱도 활개 친다.
총선 후 25만원을 두고 전국 여론조사를 했다. 찬성 46%, 반대 48%로 팽팽했다. 이 중 자신이 진보라는 응답자는 63%가 찬성했고, 보수는 70%가 반대했다. 소득과 학력, 직업별 의견 차이는 이렇게까지 크게 벌어지지 않았다. 예컨대 25만원을 가장 유용하게 쓸 법한 ‘주부’는 찬성 41%, 반대가 50%였다.

▲여론조사업체들이 총선에서 승리한 민주당의 1호 당론 법안인 '25만원'을 두고 벌인 조사 결과. 반대가 약간 우세한 가운데 찬반이 팽팽했다. 그런데 소득이나 학력, 지역, 직업별로 예상되는 의견 격차보다는, 진보와 보수 항목에서 가장 큰 의견 격차를 보였다. 민생 문제라기보단 이념 문제라는 이야기다. /그래픽=송윤혜
또 모든 연령대에서 반대가 우세했지만, 진보 성향이 강한 40~50대에서만 찬성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민생 지원금’이 25만원이 꼭 필요한 계층을 위한 민생 문제라기보단 정치 이념으로 갈라치기 좋은 이슈라는 얘기다.
◇한 번도 경험 못한 ‘돈풀기 재앙’
코로나 한창때 내수 활성화를 명분으로 재난 지원금이 수차례 지급됐다. 추적했더니 당시 풀린 돈 중 소비로 이어진 건 30%에 불과했다. 민주당이 주장하는 승수(乘數·정부 지출이 수요를 창출, 쓴 돈 이상의 부양 효과를 낸다는 이론) 효과는 미미했다.
오히려 풀린 돈이 물가를 자극해 2022년 인플레율이 5.1%에 달했다. 당장 손에 쥔 몇십만 원의 행복은 고착된 고물가로, 고금리 탓에 늘어난 빚으로, 경기 침체로 몇 배의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지난 2022년 정부의 코로나 상생 국민지원금을 받기 위해 대전 중구 산성동행정복지센터에서 시민들이 기다리고 있다. 소득 하위 80%에게 지급됐으며, 여론 조사에선 반대가 많았지만 실제 지급 대상자의 수령률은 98.6%에 달했다. /신현종 기자
경제·경영 전문 작가인 최성락 박사는 “전 국민 지원금이 특히 나쁜 건 빈부 격차를 심화시키기 때문”이라고 했다. 1인당 25만원씩 총 13조가 풀리면 물가가 최소 1%는 오르는데, 월급 생활자의 실질 소득은 깎이지만 주식·부동산 등 자산 가격이 급등해 부자들만 웃는다는 것이다. 그는 “양심 있는 학자라면 찬성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런 경제 원리를 이해 못하는 이들, 자산 상승이 기대되는 계층 일부는 침묵한다. ‘베네수엘라 꼴 될까’ 걱정하는 애국 시민도 남들 다 받는 돈 나만 못 받으면 섭섭한 게 인지상정. 코로나 지원금 논란 때도 여론조사에선 반대가 30%를 넘었지만, ‘줘도 안 받겠다’는 응답은 20%로 떨어졌다. 실제 수령률은 98%였다고 한다.
이것이 전 국민에게 똑같이 나눠준다는 보편 복지의 함정이다. 이상이 제주대 교수는 “어려운 서민만 지원하자는 선별 복지는 결국 혜택을 받지 못하는 중산층 납세자의 저항이 커 축소되기 십상이다. 반면 보편 복지는 계층을 뛰어넘는 ‘복지 동맹’을 구축해 조세 저항을 낮춰 복지를 늘리기 쉬워진다”고 했다. 보편 복지가 큰 정부를 표방한 좌파 집권을 쉽게 해준다는 얘기다.
따라서 민주당은 25만원이 어찌 되든 이득이다. 만약 정부가 선별·차등 지원으로 일부 수용하면 ‘이재명 작품’이 되고, 무산되면 ‘윤석열이 야박하다’고 몰아갈 수 있는 꽃놀이패란 것이다. 이 대표 지지자들은 “악마의 재능”이라며 열광하고 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특히 이번 25만원은 이재명 대표가 경기지사 시절부터 대선·총선마다 꺼내 든 ‘기본소득 서사’를 각인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본다. 기본소득은 재산과 소득이 얼마든, 일을 하든 안 하든 정부가 모든 국민에게 똑같이 지급하는 돈이다.
김형준 배재대 석좌교수는 “김대중의 남북 평화, 이명박의 청계천처럼 ‘이재명 기본소득’을 상징적 어젠다로 띄우려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수년 전부터 이 대표를 지지하는 기본소득 전국 네트워크가 조직돼 군불을 때고 있다. 시중에선 ‘이 대표가 차기 대선 후보가 되면 연 100만~300만원의 기본소득을 공약할 것’이란 말이 돈다.
정치컨설팅 민의 박성민 대표도 “25만원은 안 돼도 잃을 게 없는 이재명의 훌륭한 프레임”이라며 “자신의 기본소득 주장에 국민이 익숙해지도록 계속 밑자락을 까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무분별한 현금 복지로 물가 상승과 재정 악화가 현실화되면 무책임한 지도자란 역풍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프레임은 세상을 보는 언어·사고 체계의 올가미를 뜻한다. 미국의 진보 언어인지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20년 전 민주당원을 교육하기 위해 쓴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서 소개한 이론이다.
레이코프는 코끼리, 즉 공화당의 프레임을 일단 받아들이면 그걸 아무리 반박해도 상대의 메시지만 강화시킨다면서, “중요한 건 엄정한 진실을 나열하는 게 아니라 우리만의 프레임을 재구성하는 것”이라고 했다.

▲2004년 미국 언어인지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국내 진보 인사들이 탐독하면서, 정책 관련 팩트보다는 보수를 옭아맬 정치 프레임 선점의 중요성을 알린 진보의 교과서로 통한다. 이런 절실함이 '무상급식'과 '친일 반일' '검찰개혁' '대파' '줄리' 디올백' 같은 강력한 프레임을 낳았다. /예스24
이 책을 유시민·조국·손석희 등 진보 인사들이 필독서로 퍼뜨리며 보수를 옭아맬 프레임 짜기에 집중해왔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무상 복지 시대를 열어젖힌 ‘무상 급식’이나 ‘보수=친일’ ‘검찰 개혁’ 프레임이 대표적이다. 지난 총선에서도 어려운 정책 설명보단 ‘대파’ ‘디올 백’ 선동이 휩쓸었다.
25만원도 전형적인 프레임 전쟁의 형태를 띠고 있다. 벗어나려고 할수록 빨려드는 블랙홀. 탈출할 방법을 아는 자, 아니 새로운 블랙홀을 만들 용자를 찾아야 할 판이다.
조선일보 정시행 기자
05.27 연금 '내는 돈' 13% 합의 먼저 처리하자는 국회의장의 제안

▲김진표 국회의장이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연금개혁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21대 국회 내 국민연금 개혁 처리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남강호 기자
김진표 국회의장이 국민연금 개혁안과 관련해 “21대 국회에서 모수 개혁(연금의 내는 돈과 받는 돈을 조정하는 것)을 하고 22대 국회에서 구조 개혁을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우선 이번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한 범위 내에서” 처리하고 나머지 구조 개혁은 22대 국회의 과제로 넘기자는 주문이다. 국민연금 개혁 과제 중 내는 돈(보험료)을 현행 9%에서 13%로 올리자는 데 여야가 합의했고, 받는 돈(소득대체율)도 의견이 거의 접근했으니 그것만이라도 일단 통과시키자는 뜻이다. 김 의장은 “연금 개혁은 채상병특검법보다 훨씬 중요하다”며 국회 본회의에서 특검법과 같이 처리하는 것이 문제라면 연금 개혁안은 별도 본회의 일정을 잡을 수도 있다고 했다.
민주당이 국민의힘이 앞서 절충안으로 제시한 받는 돈 44%를 수용하겠다고 밝혔으나, 국민의힘은 ‘44%안’은 구조 개혁을 전제로 한 것이라며 거부하고 있다. 그러면서 “정쟁과 시간에 쫓긴 어설픈 개혁보다, 22대 첫 번째 정기국회에서 최우선으로 추진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국민의힘의 이런 주장에는 충분한 일리가 있다. 여야가 의견을 좁혀 놓은 내는 돈 13%, 받는 돈 44% 합의만으로는 앞으로 30~40년 후에 연금 재정이 바닥나는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국회 연금특위 공론화위 논의 과정에서 연금 전문가들이 진짜 ‘재정 안정안’으로 내는 돈 15%, 받는 돈 40%라는 주장을 내놓은 것도 그런 이유다. 여당은 그래서 “급조한 수치 조정만 끝나면 연금 개혁 동력이 떨어질 것”을 걱정하며 한 번에 제대로 된 개혁을 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김 의장이 우선 ‘내는 돈 13%, 받는 돈 44% 합의’를 먼저 처리하자는 것은 완벽한 개혁 달성이 현실적으로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여러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연금 개혁은 정말 어려운 과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국민 눈 높이에 맞지 않는다”며 개혁안을 미뤘다가 후대가 짊어져야 할 부담을 더 늘려 놓기만 했다. 윤 대통령과 여당도 국민 뜻을 받들어 제대로 된 개혁을 하자고 하다가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할 수도 있다. 22대 국회에서 정치 상황이 어떻게 될지 불확실성도 크다. 그래서 이번에 여야가 의견 접근한 내는 돈, 받는 돈 조정안을 처리해 우선 급한 불을 끄고 다음 국회에서 차분하게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의 관계 등 구조 개혁을 논의하자는 국회의장의 제안이 합리적으로 들리는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
05-27 ‘모수·구조개혁 병행 주장은 현실 오판이거나 몽니’
국가의 개혁 과제를 수행해야 할 1차적 책임은 집권 세력에 있다. 연금개혁을 둘러싼 최근 움직임을 보면, 윤석열 정부에서 그런 책임감을 느끼기 힘들다. 정치적 계산을 감안하더라도 야당 주장이 더 설득력을 가질 정도다. 제21대 국회 임기 만료를 앞두고 여야 입장이 거의 근접했음에도 대통령실과 여당은 모수·구조 개혁 일괄 논의를 내세워 ‘몽니’를 부리는 것으로 비친다. 김진표 국회의장이 26일 “구조개혁과 모수개혁을 함께 추진하자는 것은 현재 상황을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연금개혁을 미루려는 의도”라고 했는데, 다수 국민이 공감하는 지적이다.
여권에서 연금개혁의 절박감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시간에 쫓긴 어설픈 개혁보다 22대 국회에서 구조개혁과 동시에 하자”고 한다. 김 국회의장 언급처럼 그간의 연금개혁 논의를 보면 하지 않겠다는 취지로 들릴 지경이다. 윤 대통령의 최우선 관심이 채상병특검법 재의결이어서, 여권 이탈표를 막기 위해 국회 대치 국면을 조성하는 게 아니냐는 분석까지 나돈다. 이러는 와중에 야당 대표의 여당안 전격 수용과 김 의장의 원 포인트 본회의 제안에 스텝이 꼬여 버린 형국이다.
연금 구조개혁이 중요하다면, 윤 대통령이 5월 들어 두 차례나 “임기 내에 기초연금을 40만 원으로 인상하겠다”고 공언한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이 약속을 지키려면 해마다 기초연금을 6.1%씩 올려야 하고, 이는 야당의 협조를 받아 기초연금법을 개정해야 가능하다. 연금개혁은 특검법 정쟁의 희생양으로 삼거나 22대 국회로 미룰 만큼 한가한 사안이 아니다. 개혁이 1년 늦어지면 추가로 보험료율을 0.5%포인트 올려야 할 만큼 사회적 비용과 부담이 엄청나다. 정부는 24개 시나리오만 담은 맹탕 개혁안 때부터 명분도 잃고 개혁 의지도 의심받았다. 윤 대통령이 국가 지도자로서 결단을 내릴 때다. 하루 정도 시간이 있다.
문화일보 사설
05.27 달콤한, 그러나 치명적인 ‘다수의 유혹’
자고 나면 ‘특검’ ‘탄핵’ ‘거부권’뿐인 정치다. 민주당은 “윤석열 정부의 장관·검사들에 대한 새 국회의 일상적·적극적 탄핵”도 예고했다. “채 상병 특검 거부 등 탄핵의 방향으로 기름을 부어 온 건 당사자인 윤 대통령”이라는 게 야당의 자기합리화다. 물론 정권의 독선적 태도, 법 집행의 형평성에 결코 믿음을 받지 못해온 검찰 등이 이 분란의 원인을 제공해 온 측면도 부인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통치다. “그나마 가장 덜 나쁜 제도”이기도 하다. 지난 대선 역시 “윤석열도 미덥지 않지만 그래도 이재명보다는 낫겠다”가 0.73% 차의 다수였다. 지금 윤 대통령의 ‘고난’은 0.73%를 되새겨 포용과 겸손, 소통과 경청을 하지 못해 온 탓이다. 역으로 소수를 존중하고, 다수의 독주가 낳을 해악 역시 막아야 하는 게 민주주의다. 대통령의 전횡을 막으려 의회엔 인사청문회, 총리·장관 해임건의안, 국정감·조사, 탄핵소추 권한을 주었다. 거꾸로 의회 다수의 횡포를 막으라고 대통령에겐 법안 거부권, 예산 편성권 및 (의회의) 예산 증액에 대한 동의권을 갖게 했다.
특검·탄핵·거부권 갈등뿐인 정국
민주당, 일상·적극적 탄핵 예고도
이재명의 미래, 다수 급발진보다
국가 난제 해결 의정 성과에 달려
서로를 견제토록 이리 못박아 놓은 건 그것이 ‘극히 예외적 상황’에서 사용되길 바랐다는 게 상식적이다. 불났을 때만 깨트리라는 소방벨처럼 말이다. 가능하면 그럴 일 없도록 잘 지내라는 기대 아니겠는가. ‘국민 다수’가 앉힌 대통령을 ‘의회 다수’가 몰아내는 건 가장 중대 사건이다. 명백·엄중한 사유여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을 손쉽게 탄핵하려던 다수는 분노의 역풍을 맞았다. 탄핵은 헌법재판소가 최종 결론내라고 2중 안전 장치까지 걸어둔 이유다.
건국 248년의 미국은 3명(앤드루 존슨, 리처드 닉슨, 빌 클린턴)의 대통령만 탄핵에 직면했다. 실제 탄핵된 이는 없었다. 한 세기에 한 번꼴의 시도였다. 반면에 페루에선 ‘도덕적 무능’을 탄핵 기준의 하나로 헌법에 넣어 재앙을 불렀다. 2022년까지 4년간 3명의 대통령이 ‘도덕적 무능’으로 의회 다수에 쫓겨났다. 태국 역시 탁신 총리가 군부에 밀려난 뒤 그의 최측근·매제·여동생 3명의 후임 총리들이 군부가 장악한 헌재에 의해 밀려났다. 그중 최측근이던 사막 순타라웻 총리는 취임 뒤 TV 요리 프로에 나가 네 차례 500달러씩 출연료를 받았다가 ‘(겸직 금지) 헌법 위반’으로 쫓겨났다. 정치가 ‘대통령·총리 사냥터’로 바뀌니 당시 그 나라 꼴은 살펴볼 필요도 없겠다.
특검 역시 문제적 이슈다. 대통령·법무장관 등 행정부가 아니라 대법원 쪽에서 지명, 상원 인준을 받는 원래의 특검법은 미국에서도 시행 21년 만(1999년)에 폐기됐다. 공정을 넘어 무차별 먼지털이로 국가 분열만 가중시킨다는 불만 때문이었다. “4000만 달러를 쓴 클린턴 특검이 밝혀낸 건 르윈스키와의 밀회”뿐이란 여론이 결정적이었다. 미 변협의 강력한 폐지 권고에 미 의회 역시 “역기능이 더 크다”며 동의했다.
미국이 폐기한 그 해에 특검법을 좇아간 우리의 특검은 25년간 14차례. 21년 동안 18건이던 미국과의 나라 크기로 볼 때 잦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게다가 “옷로비 특검이 밝힌 건 앙드레 김의 고향·본명이 구파발 김봉남인 것뿐”이란 조소로 시작, BBK 특검은 ‘맹탕 특검’의 대명사가 됐다. 수사 중 5명이 목숨을 끊은 최순실 국정농단 특검 역시 최근 무죄 판결들이 이어지며 “과도했던 정치 보복” 논란을 벗어나지 못한다. ‘드루킹 특검’ 정도가 성과의 기억일 뿐이다.
의문은 다수 민주당의 급발진 공세의 의도다. 대권이 남은 목표일 이재명 대표는 여전히 사법 리스크에 따라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 운명 공동체인 주변에선 “대선은 빠를수록 좋다”는 충성 경쟁도 감지된다. ‘반독재 투쟁’ 말만 들으면 엔돌핀이 나오는 당내 86세대의 기억과 기질도 작동했을 터다. 젊은 시절의 ‘반전두환’처럼 주동(主動)의 공격·폭력성이 강할수록, 반동(反動)인 자신들도 그래야 이길 수 있다는 ‘중력의 법칙’이 DNA에 남은 그들이다. 그러니 ‘윤석열 검찰독재 타도’야말로 당내 잡음을 진압하고, ‘이재명 대권’의 단일대오를 유지해 줄 만병통치약이다. 특검과 탄핵. 그들의 최종병기다.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엔 그러나 심각한 착시(錯視)가 있다. ‘다음 대선에 윤석열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용산과 여의도에 잘해 보라며 권력을 나눠 준 게 국민이다. 그러나 특검·탄핵으로 치고받고 날 새워 나라를 수렁에 빠트리면, 그 책임 물을 남은 이는 ‘여의도 대통령’이라는 이재명뿐이다. 다음 대선의 새 경쟁 주자들은 닭이 울기 전, 안 그래도 비호감 1·2위인 윤석열·이재명 둘 다를 세번 부인하며 맹공할 것이다. 이재명의 적은 과연 윤석열일까, 국정의 난제들일까.
단순한 구호와 선악 이분의 ‘쉬운 투쟁’만으론 문제 해결이 턱도 없는 복잡계 시대다. 불평등 해소, 약자 보호 복지라는 진보 본연의 사명을 토대로 의정 성과와 수권 능력을 인정받는 게 ‘이재명의 미래’를 보장할 외길이다. 달콤한 ‘다수의 유혹’. 가장 경계해야 할 그의 치명적 독배는 바로 그것이다.

중앙일보 최훈 주필
05-28 247억 세금 지원 받아놓고, 당원 뜻만 따른다는 민주당
최근 더불어민주당 홈페이지에 공고된 ‘2024년 1분기 중앙당 수입·지출 총괄표’에 따르면 올해 1∼3월 민주당의 총수입 710억2077만823원 중 정부로부터 받은 국고 보조금이 247억1781만8010원이었다. 민주당 당원들이 낸 당비 132억9295만1955원보다 많았다.
정부는 정치자금법에 따라 민주당 등 주요 정당에 분기별로 경상보조금을 지급한다. 올해처럼 선거가 있는 해엔 선거보조금도 별도로 준다. 대의민주제에 따라 유권자를 대리하는 정당들을 보호하고 육성하기 위한 비용이다. 물론 이 예산은 민주당 당원이 아닌 사람들도 낸 세금으로 만들어진다. 요즘 민주당이 “당원 중심의 정당이 되겠다”며 앞으로는 심지어 국회의장까지도 민주당 당원 뜻대로 뽑자고 주장하는 것이 어불성설인 이유다.
당원 중심주의는 민주당 안에서도 이재명 대표가 가장 앞장서서 외치고 있다. 추미애 당선인의 의장 경선 패배 이후 약 2만 명의 당원이 탈당해서라고 한다. 이 대표는 21일 “소수 팬덤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정말 근본적으로 들여다봐야 할 상황”이라고 했다. 이틀 뒤엔 “변화의 기운에 걸맞게 당의 조직도, 운영도, 정책도, 권한 배분도 이뤄져야 할 것이다. 대의 민주주의와 직접 민주주의가 충돌하는 현상일 수도 있다”고도 했다. 의장 선거 후폭풍에 따른 일시적 여진 수준이 아니고, 이번 일을 계기로 아예 당의 근간을 바꾸겠다는 취지다.
이 대표의 시그널에 발맞춰 22일부터 1박 2일간 열린 22대 국회의원 당선인 워크숍에서도 “민주당 당원은 500만 명에 달하는 만큼, 집단지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을 중도층이라 하지 않으면 누구를 중도층이라 할 수 있겠나”, “연예인 팬덤처럼, 정당 가입이 하나의 국민적 흐름이고 문화가 되고 있다. 이걸 ‘강성 지지자’ 프레임으로 진단하면 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란 발언이 쏟아졌다. ‘당심이 곧 민심’이라는 거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면 지난 총선 때도 오롯이 당심만 믿고 가지, 왜 굳이 ‘중도층 표심’에 구애했던 건지 되묻고 싶다.
워크숍 토의 과정에선 “앞으로 국회의장 후보를 뽑을 때도, 원내대표를 뽑을 때도 당원 투표 비율을 50%까지 늘리자”(양문석 당선인)는 주장도 나왔다고 한다. 솔직히 민주당이 자기들 대표나 원내대표를 어떻게 뽑든 그건 알아서 할 일이다. 하지만 국회의장은 민주당뿐 아니라 입법부 전체를 대표하는 수장이다. 그 자리마저 민주당 당원 뜻대로 정하겠다는 건 민주당 당원은 아니지만, 성실한 납세로 대의민주주의와 정당 정치를 뒷받침해 온 유권자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다.
게다가 민주당이 “당원들의 뜻”이라며 22대 국회에서 밀어붙이겠다는 전략 중엔 ‘검사·장관 탄핵’ ‘입법권 강화’ ‘패스트트랙 기간 단축’ 등 국회법 개정 사항들이 대거 담겨 있다. 결국 당원을 명분 삼아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 것 아닌가 싶다.
정당법에 따르면 정당은 ‘국민의 이익을 위해 책임 있는 정치적 주장이나 정책을 추진하는 국민의 자발적 조직’이다. 국민 세금으로 보조금도 가장 많이 받는 원내 1당 민주당 의원들이 국민 전체가 아닌 오로지 당원의 입장만 주장한다면 여느 이익집단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김지현 정치부 차장 jhk85@donga.com
05.28 구하라법 또 좌절됐다…법사위 계류 법안 1778개 다 폐기
28일 열린 본회의로 21대 국회가 사실상 끝났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와 각 상임위원회에 쌓여있는 민생법안들도 자동 폐기 수순에 들어갔다.

▲김도읍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 지난 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오동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 후보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뉴스1
이날 기준으로 법사위에 계류된 법안은 1778개다. 법사위 고유 법안이 1665개, 여타 상임위를 통과해 회부된 법안이 113개다. 법사위는 2월 29일 전체회의를 열어 법안 30여개를 의결했으나, 그 뒤로는 2일 처리한 이태원특별법 외에 아무런 법안도 통과시키지 않았다. 국회 입법 기능이 3개월간 멈춘 것이다.
법사위는 각종 법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기 전 체계·자구 심사를 위해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그러나 총선 뒤 채상병 특검법 등으로 여야가 강대강 대치를 이어가면서, 법사위 간사 간 법안 처리를 위한 전체회의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잠긴 문’이 됐다. 더불어민주당 법사위 간사인 소병철 의원이 26일 “심사가 마무리된 법안들은 전체회의를 열어 단 10건이라도 처리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27일 양당 원내대표와 국회의장이 일정 재개 등을 논의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정근영 디자이너
법사위에 묶인 민생 법안의 대표 사례로 상속인이 피상속인에 대한 부양의무를 중대하게 위반했을 경우 상속권을 상실케 하는 이른바 구하라법(민법 개정안)이 꼽힌다. 2019년 가수 구하라씨가 사망한 뒤 어린 시절 집을 나갔던 친모가 나타나 유산을 받아간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적 공분이 일자 추진된 이 법안은 20대 국회에서도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21대 국회에서 재발의 돼 1436일만인 지난 7일 법사위 법안소위를 통과했지만, 전체회의가 안 열리면서 다시 폐기 수순을 밟게 됐다.
다른 법사위 고유 법안들도 마찬가지다. 변호사의 금지 광고 유형을 대한변협 내부 규정이 아닌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하는 로톡법(변호사법 개정안), 세종시에 지방법원과 행정법원을 만들도록 한 세종법원법(법원설치법 개정안), 법관 정원을 지금보다 370명(정부 안)~1000명(민주당 이탄희 안) 늘리도록 한 법관증원법(판사정원법 개정안) 등은 그 필요성을 두루 인정받았지만 폐기가 목전이다.
시·도별 지역장애아동지원센터 설치를 의무화하는 내용의 장애아동 복지지원법 개정안, 위기임산부 지원을 추가하는 등 내용의 한부모가족지원법 개정안 등 분야별 취약계층 지원 입법도 22대 국회로 미뤄졌다.
폐기 예정 목록엔 여당인 국민의힘 의원이 발의한 법안도 다수 포함됐다. 지난해 3월 구자근 의원이 대표발의하고 김기현 당시 당대표가 공동발의자로 이름을 올렸던 국민기초생활보장법 개정안이 그런 경우다. 취약계층이 기초생활보장 급여를 신청할 경우 에너지바우처까지 자동으로 발급 신청하도록 하는 이 법안은 복지위를 무난히 통과했지만, 법사위에서 막혔다. 김용판 의원이 발의한 사기범죄 신고 대응 컨트롤타워를 설치하는 내용의 사기방지기본법 제정안도 같은 경우다.

▲정근영 디자이너
정쟁에 가로막힌 것은 법사위만이 아니다. 각 상임위도 민생 법안 무덤이 됐다. 환노위에는 육아 휴직과 난임 치료 휴가를 확대하는 내용의 모성보호3법(근로기준법·남녀고용법·고용보험법 개정안)이 묶여있다. 산자위에선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리시설을 확보하는 내용의 고준위방폐법과, 대형마트 의무휴업·영업제한 기준을 완화한 유통법 개정안이 멈춰섰다. 기재위에선 정부 재정준칙 도입을 골자로 한 국가재정법 개정안, 반도체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를 연장하는 K칩스법(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 등이 폐기됐다.
국회 관계자는 “20대 국회 마지막엔 본회의를 급히 열어 미처 처리하지 못한 민생법안을 털어내느라 바빴는데, 이번 국회는 어렵게 본회의를 열고서도 특검 재투표같은 정치적 사안에만 매몰돼 민생법안을 외면했다”며 “입법 기관으로서의 헌법 책무를 저버린 작태”라고 말했다.
정용환 기자 jeong.yonghwan1@joongang.co.kr
05.29 여당 이탈표 예상했더니…되레 야권서 최소 6명 이탈했다
집권당에 이변은 없었다. 28일 국회 본회의에서 해병대 소속 고(故) 채수근 상병 사망 수사 외압 의혹과 관련한 특별검사법(이하 특검법)이 여당의 철통 방어로 최종 폐기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해 다시 국회로 보낸 지 7일 만이다.

▲김진표 국회의장이 28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를 진행하는 모습. 연합뉴스
이날 해병대 특검법 재표결은 재석 294명 중 찬성 179표, 반대 111표, 무효 4표로 부결됐다. 공개적으로 특검법 찬성 의사를 밝힌 국민의힘 의원 5명이 찬성표를 던졌다고 보면, 범야권에서 반대·무효·기권으로 최소 6명이 빠져나갔다.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은 국회 재적 의원 과반 출석에 출석 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재의결된다. 이날 가결 기준은 찬성 196표였다.
특검 방어에 총력을 기울인 국민의힘에서는 전날까지 당내 특검 공개 찬성론자가 5명으로 늘면서 이탈표를 우려하는 기류가 컸다. 무기명 투표 특성상 누가 찬성했는지 알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 지도부는 본회의 직전 비상 의원총회를 열어 부결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무거웠던 분위기는 표결 결과 발표 직후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찬성표가 범야권 의석수(180석)에 여당 찬성표(5석)를 더한 185표보다 6표 적었다. 야권에서 최소 6명이 이탈한 것으로 해석된다.
추경호 원내대표는 표결 직후 전체 의원에게 “비상 상황에 우리 의원님들께서 단일대오로 뭉쳐 주신 덕분에 특검법이 부결될 수 있었다”며 “의원님 여러분의 충정과 고뇌를 결코 잊지 않겠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국민의힘 재선 의원은 통화에서 “반대표 숫자를 봐도 국민의힘 의석수(113석)보다 2표 적다. 황보승희 우리공화당 의원, 하영제 무소속 의원 등 여당 밖 친여 성향을 고려해도 여당 이탈표는 한자릿수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날 여당에서는 “공개 찬성론자 중 막판에 마음을 돌린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전원 참석이 의미있다”는 말이 나왔다.
더불어민주당도 “이수진 의원 한 명을 제외하고는 범야권이 전원 출석했다. 그만큼 특검법에 관심이 높고 결집을 한 것”(원내 관계자)이라고 평가했다. 무효 4표를 두고 “그중 3표가 사실상 ‘가(찬성)’ 쪽에 점이나 괄호를 친 것”이라며 찬성표가 실제 더 많았다는 주장도 나왔다.
다만 당초 여당 내 두 자릿수 이탈을 확신하며 “부결돼도 우리에게는 나쁘지 않다”던 분위기는 사라졌다. 재적 의원(296명) 가운데 민주당 소속이던 윤관석·이수진(서울 동작을) 의원만 이날 본회의에 불참했다. 수감 중인 윤 의원과 달리, 자발적으로 공개 기권을 택한 이 의원은 지난 2월 공천에서 컷오프(공천 배제)된 뒤 탈당한 반명(반이재명) 인사다.
판사 출신인 이 의원은 컷오프 당시 기자회견을 열어 “백현동 판결을 보면서 이 대표가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고 이 대표를 공개 저격했다. 야권 관계자는 통화에서 “총선 공천 후유증이 일부 나타난 것 같다. 여당에 공개 찬성 5명 외 ‘샤이 찬성’ 의원이 있었다면, 범야권 ‘샤이 반대’도 있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비명횡사 친명횡재’로 불린 지난 총선 공천 과정에서 낙선·낙천한 현역 의원 중 일부가 친명 체제에 표로 반발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날 본회의는 시작부터 여야 간 기싸움으로 시끄러웠다. 이재명 대표를 비롯한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진보당 소속 야권 의원들은 입장 직전 회의장 앞에서 손팻말을 들고 “국민의힘은 특검법 수용하라, 해병대원 특검법 찬성하라”고 외쳤다. 회의 시작 후에도 고성은 계속됐다. 박성재 법무부 장관이 “정치 편향적인 검사가 특별검사로 임명되었을 경우 수사와 재판 절차가 정치적 여론 재판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고 재의 요구 이유를 설명하자, 민주당 쪽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 “자꾸 거짓말하지 말라”는 항의가 터져나왔다.
반대토론에 나선 유상범 국민의힘 의원이 군 검찰 수사의 불법성을 지적하며 “(수사 과정에서) 무엇이 축소되고 무엇이 은폐됐나”라고 주장하자 자리에서 이를 듣던 김병주 민주당 의원은 “부끄럽지 않나요! 양심이 없어!”라고 소리쳤다. 찬성 토론자인 박주민 민주당 의원이 “이 법에 대해서 문제 제기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과 다르거나 오류”라고 했을 때는 이양수 국민의힘 의원이 “(우리가) 전부 다 부정할 수 있다”고 의석에서 맞받았다. 이후 “왜 고함을 치나”, “조용히 21대 국회 마무리합시다” 등의 소란이 표결 시작때까지 이어졌다.
총선 후 최대 현안이던 특검법이 이날 최종 폐기되면서, 윤 대통령은 정치적 허들을 하나 넘게 됐다. 여당 장악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확보된 데다, 22대 국회에서 이어질 야당의 줄특검 공세에도 대응할 수 있는 여력이 확인됐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통화에서 “국회 표결을 통해 결정된 사안에 대해 대통령실이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면서도 “이번 특검법안은 헌법정신과 특검제도의 취지에 맞지 않고 수사의 공정성과 중립성을 담보할 수 없는 등 문제가 많았다”고 말했다. 여당 이탈표가 예상보다 적었던 것에 대해선 “거대 야당의 입법 독주에 맞서 여당이 단합된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국민의힘 지도부와 친윤계 등 기존 주류의 목소리에도 힘이 실릴 전망이다. 앞서 친윤계는 “낙선·낙천 의원을 낙하산 내려보낼 공공기관장 자리만 90곳”이라며 부결에 힘을 실었다. 다만 수직적 당정관계에 대한 비판은 이어질 수 있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표결 직후 “그렇게 갈취당하고, 얻어 맞으면서도 엄석대의 질서 속에서 살겠다고 선언한 학생들”이라고 SNS에 썼다.
민주당은 22대 국회에서 특검법을 재추진한다는 입장이다. 22대 국회 개원 이틀 뒤인 다음달 1일 이 대표 등이 서울 도심에서 대규모 장외집회를 열어 정부·여당을 규탄한다. 박찬대 원내대표는 본회의 후 열린 야 6당 규탄대회에서 "오늘은 실패했지만 진실을 밝히고 공정과 상식을 바로 세우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겠다"며 "민주당은 22대 국회가 열리자마자 해병대원 특검법을 재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심새롬·전민구·김정재 기자 saerom@joongang.co.kr
05.29 동물국회 식물국회 괴물국회
대만 총통·행정부 권한 축소안
친중 성향 야당이 밀어붙이자
여당, 난투극 벌이며 통과 막아
국힘에 부족한 건 의석 아닌 의지
명확한 목표·지향도 없어
대만서 벌어진 일 남 일 아니야
계속 식물국회로 끌려다니면
'괴물국회' 탄생 보게 될 것

▲2024년 5월 17일 대만 입법원에서 여야 의원들이 법안처리를 두고 몸싸움을 하고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지난 17일, 대만. 신임 라이칭더 총통의 취임을 사흘 앞두고 입법원(국회)에서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다. 특히 민진당 궈궈원(郭國文) 의원이 연단에 놓인 법안 서류를 낚아채 국회를 빠져나가는 장면이 화제가 되었다. 마치 터치다운을 시도하는 미식축구 선수처럼 서류를 끌어안은 채 회의장 밖으로 달려나갔던 것이다. 어제 종영한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의 제목을 빌자면, ‘서류 들고 튀어’라고 할까.
이런 모습이 연출된 이유는 대만이 극심한 정치적 격랑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에 해당하는 총통은 민진당이 가져갔지만 원내 제1당은 야당인 국민당이 차지한 여소야대 정국이다. 국민당은 제2야당인 민중당과 손잡고 과반 의석을 확보한 후 이른바 ‘5대 국회 개혁 법안’을 통해 행정부를 압박하고자 한다.
법안이 통과되면 대만 국회는 총통, 고위 군 장성, 시민 단체 등을 소환하여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소환 대상자가 소환을 거부하거나 증언에 거짓이 있으면 처벌받을 수 있다. 총통은 정기적으로 국회에 보고를 해야 하며 인사권 행사에도 국회의 동의를 요한다.
국회는 반대로 어떤 책임을 부여받게 될까? 전혀 지지 않는다. 도리어 국민이 국회를 비판하는 것조차 어려워진다. 국회를 모독하는 개인은 벌금이나 구류 등 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내용이 ‘국회 개혁 법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소야대 정국 속 여당인 민진당의 입장에서 볼 때 ‘5대 국회 개혁 법안’의 목적은 분명하다. 친중 성향의 국민당이 국회 의석 수를 앞세워 ‘괴물 국회’를 만들고 행정부를 무력화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국민당의 입장에서는 다른 논리를 제시할 테지만 민진당으로서는 허용할 수 없는 일이다. 친중이냐 독립이냐, 국가의 미래가 걸린 사안으로 볼 수밖에 없다. ‘동물 국회’의 오명을 무릅쓰고 난투극을 벌여가며 법안 통과를 막은 이유다.
우리에게 대만은 일본과 중국 다음으로 가까운 외국이다. 더구나 대만은 대한민국과 유사한 지정학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수많은 싱크탱크가 중국의 침공 내지 무력을 동원한 해상 봉쇄의 가능성을 경고한다. 실제로 중국은 이번 달에 대만 봉쇄 군사훈련을 감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총통과 행정부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법안을 친중 성향의 야당이 밀어붙인다. 동물 국회 난투극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닐까?
그런 나라가 있다. 대한민국이다. 21대 국회를 복기해 보자. 민주당은 반발을 무시한 채 대북전단금지법을 통과시키고, 자신들이 만들었던 공수처법을 합의 없이 뜯어고쳤다. 2021년 5월 성폭력 피해자인 공군 중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벌어지자 불과 3개월 만에 군사법원법을 바꾸면서 군내 사건 사고에 대한 수사권과 재판권을 찢어놓았다. 해병대 채 상병 사망 사건의 수사가 지연된 것에는 그러한 졸속 입법의 영향이 없지 않다.
민주당의 입법 폭주는 2022년, 이른바 ‘검수완박’을 위해 민형배 의원이 탈당하면서 그 정점에 달했다. 법제사법위원회 안건조정위에서 양향자 의원 대신 무소속 표를 행사하기 위해 일부러 당적을 버린 것이다. 의회민주주의의 정신을 우롱한 위장 탈당이라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민 의원은 “편법은 맞을지 모르지만, 위법은 없었다”며 되레 목청을 높였다. 이재명 대표에 의해 공천을 받은 그는 22대 국회로 돌아왔다.
그동안 국민의힘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무기력하게 끌려다녔다. 민주당과 우호 세력을 합치면 180석이 넘으니 별 수 없었다는 반론이 들려오는 듯하다. 얼토당토 않은 소리다. 민주당의 연금 개혁 합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국민의힘에 부족한 것은 의석이 아니라 의지다. 명확한 정책적 목표도 이념적 지향도 없이 그저 4년 잘 버티고 공천받아 재선할 생각뿐이었으니 21대 국회가 최악의 식물 국회로 남게 된 것이다.
22대 국회에서 국민의힘은 야당과 다를 바 없다. 총선에서 대승을 거둔 이재명 대표는 ‘여의도 대통령’으로 불리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권한을 줄이기 위해 온갖 입법이 시도될 것이다. 대만에서 벌어진 일은 남의 일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식물 국회로 끌려다니는 건 괴물 국회의 탄생을 방조하는 것이다. 차라리 동물 국회가 나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홍상수 감독 영화의 유명한 대사가 떠오른다. “우리 사람은 못 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

조선일보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05.29 두 번 다시 21대와 같은 국회는 없어야 한다

▲김진표 국회의장이 28일 본회의에서 '채상병 사망사건 수사외압 의혹 특별검사법' 표결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막판까지 정쟁만 벌이다 민생법안 불발
상임위 독식, 장관·판검사 탄핵 신기록
4년 동안 1조원 쓰고 이룩한 성과 뭔가
결국 21대 국회가 역대 최악의 모습으로 막을 내렸다. 21대 국회의 마지막 본회의가 열렸던 어제 여야가 처리한 법안은 고작 6개뿐이었다. 그나마 재의결을 실시한 ‘채 상병 특검법’은 가결 기준(출석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을 넘지 못해 폐기됐다. 여야 합의 없이 민주당이 강행 처리한 전세사기특별법·민주유공자법·세월호피해구제법 등도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폐기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21대 국회는 이렇듯 아무런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막판까지 정쟁만 벌이다 빈손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민주당이 ‘채 상병 특검법’을 밀어붙이자 국민의힘이 이를 막기 위해 사실상 상임위 가동을 보이콧하면서 유탄을 맞고 불발된 민생 법안이 수두룩하다. 핵연료 저장시설 건립을 위한 ‘고준위방사성폐기물특별법’, 반도체 투자액 세액공제를 2030년까지 연장하는 ‘K칩스법’, 육아휴직 기간을 기존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는 ‘모성보호 3법’, 양육 의무를 다하지 않은 친부모의 상속권을 제한하는 ‘구하라법’, 인공지능 산업 육성에 필요한 정부 조직을 신설하고 연구개발(R&D)을 지원하는 ‘AI기본법’, 대형마트 영업시간 제한을 완화하는 ‘유통산업발전법’, 재판 지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법관증원법’,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변호사에 대한 과도한 규제를 해소하는 ‘로톡법’ 등이었다.
이런 법안들은 이미 여야가 합의했거나 이견이 있더라도 조정이 가능한 범위였기에 의지만 있었다면 이번에 충분히 처리가 가능했다. 이제 이 법안들은 21대 국회 종료(29일)와 함께 일괄 폐기되며 22대 국회에서 처음부터 처리 절차를 다시 밟아야 한다. 국회를 통과하는 데 아무리 빨라도 수개월은 걸리기 때문에 그만큼 사회적 비용이 증가할 뿐만 아니라 정국에 중대한 변화라도 발생하면 기약없이 발이 묶일 수도 있다.
민생 법안이 이 지경이 된 것과 관련해 ‘채 상병 특검법’ 저지에만 몰두하면서 법안 처리에 몸을 사린 여당의 엄중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국정을 끌고 가야 할 여당이 오히려 정치적 계산에 얽매여 국회 가동을 중단시켰으니 앞으로 무슨 명분으로 야당에 법안 처리 때 협조해 달라고 설득할 것인가. 특히 ‘고준위방사성폐기물특별법’은 절박한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좌파 단체들과 지역사회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쳐 오랫동안 진통을 겪어 왔던 법안이다. 이번에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게 어떤 부작용을 낳을지 우려가 크다. 국민연금 개혁안도 합의 직전까지 갔지만 여당의 소극적 자세로 무산됐다.
21대 국회는 여러 가지 오명의 신기록도 세웠다. 2020년 6월 개원 때부터 민주당이 18개 상임위원장을 독식하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켰다. 국회를 장악한 민주당은 시장 원리를 무시한 ‘임대차 3법’, 검찰을 무력화하는 ‘검수완박법’ 등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가 민심의 역풍을 맞았다. 북한 정권의 요구를 수용했다는 비판을 받은 ‘대북전단금지법’은 지난해 위헌 결정을 받았다. 국무총리 해임건의안과 장관·판사·검사 탄핵안을 통과시킨 것도 21대 국회가 처음이다. 법안 처리율이 36.6%에 그친 것은 역대 최저 기록이다.
국회의원 세비와 보좌진 급여, 각종 보조금을 합치면 21대 국회 4년간 운영 비용은 1조200억원이다. 이런 막대한 국민의 돈을 쓰면서도 이룩한 성과가 과연 뭔가. 상생과 협의는 실종되고 살벌한 정치 공방만 오갔던 기억밖엔 남지 않았다. 이런 막장 국회는 21대로 끝나길 바란다.
중앙일보 사설
05.29 국회의장을 당원 뜻대로 뽑자? 그게 정당정치 망치는 지름길
최근 더불어민주당은 국회의장 후보 경선에서 ‘당원 중심 정당’이라는 개념을 두고 홍역을 앓았다. 열성 민주당원이 원하는 후보는 추미애 당선인이었는데 정작 우원식 당선인이 선출됐다. 적잖은 민주당원들은 소속 국회의원들이 당원을 무시했다며 반발했다. 탈당 행렬도 이어졌다. 이후 민주당 당선인 워크숍 결의문에선 원내대표와 국회의장 후보 선출에 당원 표심을 일정 부분 반영하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당의 주인은 당원이라는 게 명분이었다. 타당한 주장일까.
헌법상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다. 그래서 국가의 모든 정책을 국민투표로 정하자고 하면 그것은 직접 민주주의가 실천되는 국정 운영일까. 정부는 국정 운영에 국민의 의사를 반영해야 하고 의회도 민심을 대의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와 의회가 단순히 ‘다수 민심’을 그대로 옮겨서 집행하는 기관인 건 아니다. 정부는 ‘당장 다수가 욕망하는 것’보다 더 복잡다단한 국가의 작동을 놓고 정책의 타당성과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따져야 하며 책임도 져야 한다. 의회는 다수에 속하지 않는 국민의 의사도 대변해야 하고, 각기 다른 국민의 이해관계를 조율해 사회적 합의를 창출해야 한다.
유권자는 당원에게 위임하지 않았다
정당은 어떨까. 국가가 단순히 행정부와 국민으로만 이루어진 결사체가 아니듯 정당도 지도부와 당원으로만 이루어진 조직이 아니다. 미국의 정치학자 V. O. 키 주니어에 따르면, 정당이란 세 가지 주요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 첫째는 ‘유권자 속의 정당(party in the electorate)’이다. 정당의 핵심 기능 중 하나가 유권자의 정치적 선택을 단순화하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제가 되는 것이란 이야기다. 실제로 정당의 위상과 규모와 권한 역시 당원 수로 정해지지 않는다. 집권 여당이 되느냐, 제1당이 되느냐 등은 당원이 아니라 유권자가 만들어준다.
정당의 주인이 국민인지 당원인지 논쟁하자는 게 아니다. 유권자는 헌법상 국민의 대표자인 국회의원들에게 국회의장 선출권을 위임했다. 민주당 소속 의원이 다수이니 사실상 이들이 권한을 갖는다. 하지만 이것이 민주당에 가입한 일부 국민에게만 국회의장을 직접 선출할 권리를 위임하겠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둘째 ‘조직으로서의 정당(party as organization)’이다. 정당은 중앙당 지도부와 전국 권리당원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다. 당 안쪽으론 각종 위원회, 당 밖으로는 각종 연대체들이 종으로 횡으로 연결돼 있다. 가령 당내 노동위원회와 당 밖 노조가 연계되어 있을 수 있고, 당내 지역위원회와 그 지역 유권자들이 유기적으로 조직되어 있을 수 있다. 이런 연계가 잘 이뤄질수록 유권자의 지지가 확장될 가능성이 커진다. 한데 정당을 당원 중심으로 운영하는 게 만능이라면 이런 정당 활동 개념이 다 무슨 소용일까.
마지막으로 ‘정부 내의 정당(party in public office)’이다. 정당이란 정책을 구체적으로 실현해 국정 운영에 참여하거나 혹은 정부를 견제하는 기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당을 운영하는 당 대표와 별도로 의원들의 총의를 모아 정책을 조율하는 원내대표를 따로 두고, 국회의 상임위마다 실제로 일을 처리하기 위해 상임위원장과 간사를 둔다.
원내대표는 당의 의사를 반영하되 실질적으로는 정당을 운영하는 게 아니라 의회(정부)의 일을 수행하는 직책이다. 국회 운영위원회를 제외한 모든 상임위원장직은 당 지도부나 주요 당직을 맡은 사람이 겸직하지 않는 관례가 있는 까닭이 뭐겠는가. 형식적으로라도 공정하게 상임위를 운영하고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당에서 ‘당정분리론’에 대한 논의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예컨대, 흔히 대통령을 두고 여당의 제1호 당원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여당 당원들의 총의만 반영해 일하는 것은 아니다.
국회의장은 다수당에서 결정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국회의장의 의무와 역할이 그저 다수당 당원들의 총의를 반영한 국회 운영인 것은 아니다. 역할과 취지가 전혀 다른데, 거기서 당원 중심주의를 주장하는 건 억지다.
왜곡된 당원 중심주의, 정당 정치 위기 불러
국가의 모든 일을 국민투표로 처리하고자 하면 국민 중심 정치가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큰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 이처럼 정당이 개입해야 하는 모든 공적 영역의 일들을 당원 투표로 결정하자는 발상은 당원 중심 정당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정당 정치를 형해화하는 지름길이다.
오히려 당원 중심성을 강화해야 하는 영역은 따로 있다. 당론 채택이나 정당의 운영 부분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한국의 정당은 당론을 정할 때 당원의 의사를 제대로 수렴하지 않는다. 이견을 표출하거나 따르지 않으면 징계까지 받는 게 당론인데, 정작 이를 정할 때는 소수의 고위 당직자들끼리 정하고 형식적으로만 의원 총회에서 추인받는 식이다.
애초에 당원들이 민주적으로 정당 운영의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해 토론하거나 정당 활동을 폭넓게 할 수 있는 (대의) 기구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을 안 하니까 개별적으로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쓰거나, 집회에 찾아가거나, 문자를 보내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탈당계를 내는 것 말곤 의사 표시를 할 길이 없지 않나.
정작 당원 중심이어야 할 정당 운영은 그렇게 하지도 않으면서, 당론이나 정당 운영이란 테두리를 벗어나는 국회의장 선출은 당원들의 참여를 고려하겠다고 한다. 말만 당원 중심 정당이지 실제론 정당 정치 자체를 해체하고 있는 셈이다.
중앙일보 하헌기 새로운소통연구소 소장·전 더불어민주당 상근부대변인
05-29 포퓰리즘 野, 무책임 與…22대 국회 ‘국가 표류’ 걱정된다
제21대 국회 임기가 29일로 끝나고, 22대 국회 임기가 30일 시작된다. 국민은 새 국회가 정치개혁·사회통합·경제활력 등 국가 발전에 앞장서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역대 최악 평가를 받는 21대 국회보다 훨씬 나빠질 것이란 걱정이 앞선다. 거야의 포퓰리즘 입법 폭주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악순환, 여당의 무책임 속에서 국정 난맥과 정치 혼란 등 ‘국가 표류’ 가능성마저 보이기 때문이다.
원 구성 협상부터 난항일 것이다. 국회법이 명시한 ‘개원 후 7일’인 오는 6월 5일 첫 본회의에서 국회의장단과 상임위원장을 선출해야 하지만 장기화할 공산이 크다. 민주당은 개원 즉시 채상병특검법을 포함해 21대 국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폐기된 법안들의 재입법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김건희 여사의 주가조작·명품백 의혹 특별검사법, 방송 3법, 노란봉투법, 양곡관리법 등이 포함돼 있다. 21대 국회보다 늘어난 범야권 의석수(192석)를 무기로 ‘합의 없는 강행’ 처리를 이어갈 게 분명하다. 개헌 저지선을 간신히 넘긴 국민의힘(108석)이 대통령실과 종속적 관계를 이어간다면, 내부 표 단속과 대통령 거부권 외엔 기댈 수단이 없다.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대야 협상과 정책 주도력을 발휘해 협치를 끌어내야 할 여당의 무기력한 행태가 되풀이될 수 있는 것이다.
정치 상황의 획기적 변화가 없다면 입법 폭주와 거부권 행사가 반복된다. 정부는, 야당이 28일 단독 처리한 5건 중 세월호피해지원법만 공포하고, 4건은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한다. 법리에 어긋나고 여야 합의 없는 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는 횟수에 상관없이 불가피한 일이다. 그 와중에 국가 정책은 지체되거나 왜곡된다. 여권이 22대 국회의 과제로 떠넘긴 연금개혁도 한없이 미뤄질 게 확실하다. 민주당은 검사·장관 탄핵소추권도 적극 활용하겠다고 공언했다. 수 개월씩 장관과 검사의 직무가 정지되고, 검찰과 법원이 정치 외풍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외교·안보·경제·기술 각 부문이 급속도로 재편되는 대전환기이다. 국가적 역량을 모아 대응해도 모자랄 마당이다. 국회가 국력을 갉아먹는 최악 집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헌법이 명시한 ‘국익을 우선한 양심에 따른 직무 이행’ 의무나마 되새기기 바란다.
문화일보 사설
05-29 21대 ‘최악 국회’가 남긴 4대 폐해
김형준 배재대 석좌교수, 前 한국선거학회 회장
제21대 국회가 29일 만료된다. 더불어민주당이 2020년 4월 총선에서 180석의 압승을 거두면서 시작된 21대 국회는 파행으로 시작해 끝까지 극한 대치로 일관했다. 지난 4년간 거대 야당의 일방적 국회 운영과 입법 독재로 의회 민주주의는 무너졌고, 여소야대 상황에서 집권당은 ‘무능·무기력·무책임’의 ‘3무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거대 의석을 가진 민주당의 책임이 크다.
첫째, 민주화 이후 지속돼 온 협치 규범과 관행을 파괴했다. 정당의 의석 비율에 따라 상임위원장을 배분하고,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법사위원장을 야당에 양보하는 관행을 전면적으로 깨뜨렸다. 민주당은 21대 국회가 개원하자 17개 국회 상임위원장을 모두 독식했다. 결국, 국회를 극단 대결로 몰고 갔다.
둘째, 국민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법안들을 일방 표결 처리하면서 국회 절차를 무시했다. 가령, 민주당은 2020년 8월 주택임대차보호법, 부동산 3법(소득세·법인세·종부세법) 등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국회법이 규정한 소위원회 법안 심사, 축조 심사, 찬반 토론 같은 절차를 무시했다. 심지어 ‘위장 탈당’을 동원해, 국회선진화법에서 도입한 안건조정 제도를 무력화했다. 한마디로, 삼권분립의 헌법 정신과 국회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법안을 밀어붙였다.
셋째, 민생 살리기 법안보다는 오직 특정 세력의 표심을 잡으려고 포퓰리즘 입법에 매몰됐다. 간호법 제정안, 양곡관리법 개정안, 노란 봉투법 등을 국회 본회의 직회부 같은 입법 폭주를 통해 강행 처리하면서 국민을 내 편과 네 편으로 갈랐다. 민노총을 의식한 중대재해처벌법도 대표적인 포퓰리즘 입법이다. 국가 재정은 살피지 않고 오직 국민감정에 기댄 포퓰리즘 입법은 국가나 사회에 엄청난 부담을 안겼다.
넷째, 민의의 전당인 국회가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를 막기 위한 방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대장동 특혜 의혹 등 여러 비리 혐의를 받는 이 대표의 체포동의안을 부결시키기 위해 민주당은 소속 의원들에게 전방위 압박을 가했다. 결국 ‘의원들이 소신과 양심에 따라 의정 활동을 하라’고 한 헌법(제46조 2항)과 국회법(제114조의 2)을 무력화했다. 이랬던 민주당은 채상병특검법 재의결 때 여당 의원들에게 “양심에 따라 투표하라”는 추한 면을 보였다.
반헌법적, 반민주적, 반민생적 입법 행태를 서슴지 않았던 21대 국회의 지난 4년간 성적표는 처참하다. 지난 3월 14일 기준 발의된 의원 법률안 2만6000여 건 중 9400여 건만 국회 문턱을 넘어 처리율 36.1%로 국회 생산성이 역대 최하였다. 국민의 21대 국회에 대한 평가도 참담한 수준이다. 지난해 한국갤럽 조사(10월 22∼24일)에 따르면, 21대 국회 역할 수행에 대해 오직 13%만이 ‘잘했다’고 평가했다.
제22대 국회가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멀리하고 ‘일하는 국회’로 거듭나 국민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선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갈등 지향적 국회 운영 구조를 바꾸고, 국회 의사 결정 과정에서 절차를 준수하며, 의원들이 당론에 구속되지 않고 자신의 소신과 양심에 따라 의정 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자제와 상호 존중의 민주적 규범을 실천하고, 퇴행적인 진영과 이념에서 벗어나 ‘국민을 위한 국회’로 거듭나야 한다.

문화일보
05-29 포퓰리즘 野, 무책임 與…22대 국회 ‘국가 표류’ 걱정된다
제21대 국회 임기가 29일로 끝나고, 22대 국회 임기가 30일 시작된다. 국민은 새 국회가 정치개혁·사회통합·경제활력 등 국가 발전에 앞장서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역대 최악 평가를 받는 21대 국회보다 훨씬 나빠질 것이란 걱정이 앞선다. 거야의 포퓰리즘 입법 폭주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악순환, 여당의 무책임 속에서 국정 난맥과 정치 혼란 등 ‘국가 표류’ 가능성마저 보이기 때문이다.
원 구성 협상부터 난항일 것이다. 국회법이 명시한 ‘개원 후 7일’인 오는 6월 5일 첫 본회의에서 국회의장단과 상임위원장을 선출해야 하지만 장기화할 공산이 크다. 민주당은 개원 즉시 채상병특검법을 포함해 21대 국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폐기된 법안들의 재입법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김건희 여사의 주가조작·명품백 의혹 특별검사법, 방송 3법, 노란봉투법, 양곡관리법 등이 포함돼 있다. 21대 국회보다 늘어난 범야권 의석수(192석)를 무기로 ‘합의 없는 강행’ 처리를 이어갈 게 분명하다. 개헌 저지선을 간신히 넘긴 국민의힘(108석)이 대통령실과 종속적 관계를 이어간다면, 내부 표 단속과 대통령 거부권 외엔 기댈 수단이 없다.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대야 협상과 정책 주도력을 발휘해 협치를 끌어내야 할 여당의 무기력한 행태가 되풀이될 수 있는 것이다.
정치 상황의 획기적 변화가 없다면 입법 폭주와 거부권 행사가 반복된다. 정부는, 야당이 28일 단독 처리한 5건 중 세월호피해지원법만 공포하고, 4건은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한다. 법리에 어긋나고 여야 합의 없는 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는 횟수에 상관없이 불가피한 일이다. 그 와중에 국가 정책은 지체되거나 왜곡된다. 여권이 22대 국회의 과제로 떠넘긴 연금개혁도 한없이 미뤄질 게 확실하다. 민주당은 검사·장관 탄핵소추권도 적극 활용하겠다고 공언했다. 수 개월씩 장관과 검사의 직무가 정지되고, 검찰과 법원이 정치 외풍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외교·안보·경제·기술 각 부문이 급속도로 재편되는 대전환기이다. 국가적 역량을 모아 대응해도 모자랄 마당이다. 국회가 국력을 갉아먹는 최악 집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헌법이 명시한 ‘국익을 우선한 양심에 따른 직무 이행’ 의무나마 되새기기 바란다.
문화일보 사설
05.30 이정근 "송영길이 '훗날 기약하자' 회유해" 위증교사 새 의혹

▲왼쪽부터 이정근 전 더불어민주당 사무부총장과 송영길 소나무당 대표. /뉴시스
더불어민주당 ‘돈봉투 의혹’의 핵심 연결고리로 여겨지는 이정근(62) 전 민주당 사무부총장이 2021년 5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캠프에서 부외 자금을 받거나 살포한 사실을 송영길(61) 전 민주당 대표(현 소나무당 대표)에게 직접 보고했다고 29일 진술했다. 이씨는 이날 송 전 대표가 ‘훗날을 기약하자’는 회유성 메시지를 보내는 등 위증을 교사했다는 주장도 새롭게 내놓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재판장 허경무) 심리로 이날 열린 송 전 대표의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등 공판에 이씨는 검은색 양복을 입은 채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날 주신문과 반대 신문을 포함한 증인 신문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 20분쯤까지 이어졌다. 이씨는 이 사건 핵심인물 중 한 명이다. 검찰은 이씨의 개인 비리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이정근 녹취록’으로 불리는 휴대전화 속 녹음 파일을 확보했는데 이 파일이 이후 ‘민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사건’ 수사의 단초가 된 바 있다.
송 전 대표가 2021년 민주당 당대표 경선에 나섰을 때 당시 캠프 조직총괄본부장을 맡은 이씨는 2021년 3월 무소속 이성만 의원과 민주당 서삼석 의원이 각각 1100만원과 200만원을 자신에게 부외 자금으로 전달했고, 이는 송 전 대표에게 보고됐다고 증언했다. 검찰 측이 “송영길 캠프에 돈을 내는 사람은 송 대표를 보고 돈을 내는 것이고, 돈을 내는 사람은 그 사실이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 전달했다는 것이냐”고 묻자 이씨는 “당연하다”고 말했다.
이씨는 이성만 의원이 건넨 1000만원은 50만원씩 봉투 20개에 나눠 담아 지역본부장들에게 교통비 명목으로 줬다고 증언했다. 그러면서 이 돈봉투를 나눠준 사람은 강래구 전 한국수자원공사 상임감사위원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금품 살포에 대해서도 송 전 대표에게 보고했다고 했다. 이씨는 이러한 보고를 받은 송 전 대표의 반응에 대해 “으레 있을 수 있는, 해야 할 일을 한 것에 대한 일상적인 반응이었다”고 기억했다.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돈 봉투 의혹' 사건 핵심 피의자 윤관석 무소속 의원(왼쪽)과 이성만 무소속 의원. /뉴스1
이씨는 무소속 윤관석 의원이 2021년 4월 27~28일 두 차례에 걸쳐 300만원씩 들어있는 돈봉투 20개를 민주당 의원들에게 살포한 사실도 송 전 대표가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진술했다. 그는 28일 저녁 캠프 사무실에서 송 전 대표와 윤 의원이 만난 자리에 함께 있었으며, 소분된 돈봉투가 든 갈색 종이봉투가 테이블 위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씨는 당시 윤 의원이 갈색 봉투를 가리키며 ‘빨리 가야지 이것도 돌려야 하니까’라고 말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그리고 검찰 측이 “윤 의원이 송 전 대표 당선 위해서 의원들에게 돈봉투 제공하는 것을 피고인(송 전 대표) 모르게 할 수 있느냐”고 묻자 이씨는 “액수가 적은 액수라면 윤 의원 선에서 처리할 수 있었겠지만, 국회의원에 가는 거액을 의논 없이 자의적으로 집행할 수 있었을까 싶다”고 답했다.
앞서 다른 돈봉투 관련 재판에도 증인으로 나왔던 이씨는 그동안 송 전 대표와 관련한 검찰의 질문에 대개 답변을 거부했다. 그러나 이날엔 송 전 대표의 혐의와 관련해 다양한 내용을 진술했다.
“지금의 심정은 다 부질없는 일이다”라고 하기도 한 이씨는 이같은 심경 변화가 송 전 대표의 회유나 압박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씨는 지난해 10월 사업가 박모씨로부터 각종 청탁 대가로 10억원 상당의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항소심에서 징역 4년 2개월을 선고받았다. 지난해 말 세상을 떠난 남편이 당시 자신의 구명을 위해 사실관계를 잘 알고 있는 송 전 대표에게 통화를 시도하고 그를 만나려고도 했지만 거듭 무시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다 이씨의 남편은 지난해 11월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야 송 전 대표를 만날 수 있었는데, 당시 검찰의 수사선상에 올랐던 송 대표는 책에 ‘나를 믿고 훗날을 함께 도모하자’는 메모를 써서 자신에게 전달했다고 주장했다. 이씨는 “훗날 도모하자는 게, 나에게 훗날이 있는가, 이런 회의적 생각이 들었다”며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오늘 잠깐 모른다, 생각 안 난다 이렇게 말하는 비겁함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비겁한 것도 부질없고, 제가 지금 징역살이보다 더한 지옥에서 살고 있는 상황에서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얘기와 겪었던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었다”고 했다. 송 전 대표의 회유에도 흔들림이 없었다는 뜻을 내비친 것으로 풀이됐다.
이씨는 “송 전 대표가 ‘이정근의 일탈이다’ ‘검찰과 플리바게닝(감형 협상)을 했을 것’이라는 인터뷰...”에 대해 말할 땐 울컥하기도 했다.
송 전 대표는 이에 대해 “(이씨가) 너무 말랐고, 너무 초췌한 모습인데 남편 일은 위로를 드린다”며 “저는 책에 어떤 메모를 썼는지 기억이 나진 않는다. 어쨌든 저는 (이씨가) 힘든 상황에 격려하는 메시지를 쓸 수밖에 없었다. ‘희망을 갖고 견뎌내자’ 이런 취지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씨는 이달 초에도 소나무당 측 사람이 구치소로 찾아와 송 전 대표 상황을 설명하며 송 전 대표의 편지를 전달했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위증 교사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검찰이 수사하면 나올 것이라고 본다”고 지적했다.
이날 송 전 대표가 재판을 마치고 호송차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소나무당 지지자 수십 명이 송 전 대표를 향해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송 전 대표는 2020~2021년 자신의 이른바 외곽 조직인 ‘평화와 먹고사는 문제 연구소(먹사연)’를 통해 기업인 7명에게 불법 정치자금 및 뇌물 7억6300만원을 수수한 혐의, 2021년 5월 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민주당 의원 등에게 줄 6000만원 상당의 돈 봉투를 전달한 혐의 등으로 구속 재판을 받고 있다.
조선일보 박강현 기자
05-30 [속보] 법원, ‘돈봉투 살포 의혹’ 송영길 보석 허가…구속 163일 만
더불어민주당 돈봉투 의혹의 정점으로 지목돼 구속 상태로 재판받아온 송영길(60) 소나무당 대표가 법원의 보석 허가로 풀려난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허경무 부장판사)는 30일 송 대표의 보석 청구를 받아들였다. 송 대표는 이로써 지난해 12월 19일 구속된 지 163일 만에 풀려나게 됐다.
앞서 재판부는 지난 3월 29일 송 대표가 청구한 보석 신청을 한 차례 기각했다. 그러나 증인 신문이 사실상 마무리돼 증거 인멸 우려가 낮아지고 1심 구속 만료 기한도 다가오면서 이번에는 석방을 허가한 것으로 해석된다.
송 대표는 2021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총 6650만 원이 든 돈 봉투를 당 관계자에 살포한 혐의를 받는다. 또 외곽조직인 사단법인 먹고사는문제 연구소를 통해 후원금 명목으로 불법 정치자금 총 7억 6300만 원을 받은 데 관여한 혐의 등이 더해지며 지난 1월 구속기소됐다.
문화일보 김유진 기자
05.31 李 한 사람 위한 당헌 개악 입법 폭주, 제왕적 총재 때도 없던 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앞줄 가운데) 대표와 박찬대 원내대표 등 의원들이 제22대 국회 임기 시작일인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더불어민주당이 이재명 대표의 연임과 대선 도전을 위한 당헌·당규 개정에 나서기로 했다. 당대표와 최고위원이 대선에 출마할 경우 출마 1년 전 당직에서 사퇴해야 하는데 당무위원회 의결로 사퇴 시기를 늦추게 한다는 것이다. 부정부패 연루자에 대한 직무 정지 규정도 없앤다고 한다. 22대 국회 임기 첫날 175석 제1당의 첫 의원총회 첫 의제가 이 대표 단 한 명을 위한 당헌 개정이었다.
지금 민주당에선 이 대표 연임론이 거의 굳어지고 있다. 이 대표가 연임한다면 임기는 2026년 8월이지만 대선 1년 전 사퇴 규정 때문에 그 해 3월 물러나야 한다. 이를 연장해 이 대표가 2026년 6월 지방선거 공천권까지 행사하고 이듬해 3월 대선에 나설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려는 것이다.
부정부패 혐의로 기소된 당직자의 직무를 정지하는 당헌 80조는 문재인 정부 때 깨끗한 정치에 대한 국민 요구를 수용한다며 만들었다. 그런데 민주당은 지난 대선 때 당무위 의결로 이를 적용하지 않을 수 있게 고쳤다. 이번엔 이 조항 전체를 없애려 한다. 대장동 비리와 쌍방울 대북 송금, 위증 교사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를 위한 조치임이 명백하다.
민주당은 ‘당의 귀책 사유로 재·보궐 선거가 발생하면 후보자를 추천하지 않는다’는 규정도 삭제하겠다고 한다. 2021년 박원순·오거돈 전 시장의 성추행 사건 때 일부 규정을 고쳐 보궐 선거에 후보를 냈던 민주당이 관련 당헌 자체를 폐지하려는 것이다. 또 당론 위반자에 대한 공천 부적격 기준을 강화하고 국회의장단과 원내대표 선출 때 권리당원의 의사를 유효 투표의 20%만큼 반영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의원들에 대한 이 대표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강성 지지층인 ‘개딸’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한 조치들이다. 당헌은 정당의 헌법이며 국민에 대한 약속이다. 특정인의 대선 가도를 돕고 정당 지배력을 높이기 위해 마음대로 바꿔선 민주 정당이라 할 수 없다. 과거 제왕적 총재 시절에도 하기 힘들었던 일이다.
민주당은 22대 국회 1호 법안으로 해병대 채 상병 특검법을 수정해 다시 발의했다. 대한변협의 특검 추천권까지 빼고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이 한 명씩 추천하도록 바꿨다. 수사의 공정성을 원천 배제한 이 법안은 법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 대표는 ‘전국민 1인당 25만원 지원’ 대신 ‘차등 지원’을 하겠다고 했는데, 민주당은 그 액수를 35만원까지 높이는 특별법을 발의했다. 당헌 개악도 모자라 이 대표 뜻에 따라 입법 폭주까지 다시 시작했다.
조선일보 사설
05.31 정략적 검사 탄핵도 기각, 탄핵 정치 안 된다
헌법재판소가 30일 민주당이 주도한 안동완 검사 탄핵 소추안을 기각했다. 이 탄핵안은 민주당이 안 검사가 기소했던 9년 전 사건을 갑자기 들춘 것이다. 그가 2014년 이른바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유우성씨를 이미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대북 불법 송금(외국환거래법 위반) 혐의로 기소한 것이 ‘보복 기소’이자 공소권 남용이라며 탄핵안을 밀어붙인 것이다. 검사에 대한 첫 탄핵이었다. 하지만 기각 결정을 한 헌법재판관 5명은 기소 자체에 문제가 없다거나, 일부 위법이 있지만 탄핵할 정도로 중대한 법률 위반은 아니라고 했다.
헌법재판관 4명이 탄핵안 인용 의견을 냈다는 점에서 민주당의 탄핵안 자체가 완전히 엉터리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민주당이 정말 안 검사를 탄핵할 뜻이 있었다면 9년 전에 했어야 한다. 그때는 가만있다가 작년에 탄핵안을 낸 것은 다른 목적이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민주당은 작년 9월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 표결 날 느닷없이 9년 전 일을 들춰내 안 검사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탄핵안도 본회의 불과 이틀 전에 발의했다. 9년이나 놔두다가 왜 하필 이 대표 체포동의안 표결 날 통과시켰겠나. 사실상 이 대표를 수사하는 검찰을 겁주기 위해 급조한 ‘보복 탄핵’이었다.
이런 식으로 민주당이 주도한 탄핵안이 한두 건이 아니다. 일선 법원이 김경수 경남지사 대선 여론 조작, ‘조국 장관 사건’ 등에서 엄정한 판결을 잇따라 내리자 3년 전에 판사 탄핵안을 통과시켰다가 헌재에서 각하됐다. 국무위원의 3분의 1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탄핵을 위협하고, 행안부 장관은 실제 탄핵했다. 그 탄핵안도 헌재에서 기각됐다. 그러다 이 대표를 수사하는 검사까지 탄핵했고, 임명된 지 석 달밖에 안 된 방송통신위원장을 탄핵으로 압박해 결국 사퇴하게 만들었다. 정략적으로 탄핵안을 남발한 것이다. 검사 탄핵안에 있는 내용을 방통위원장 탄핵안에 복사해 붙이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이런 정략용 탄핵은 더는 없어야 한다.
조선일보 사설
05-31 ‘李 대권’ 위해 당헌 개악…헌법도 법률도 그렇게 할 건가
더불어민주당은 30일 제22대 국회의원 첫 의원총회에서 이재명 대표의 차기 대선 도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당헌 조항들을 바꾸겠다는 방침을 내놨다. 필요하면 당헌 개정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해당 조항들은 한결같이 과거에 정치개혁 차원에서 도입한 것들인 데다 ‘이 대표 대권 맞춤형 개정’이라는 데 중대한 문제가 있다.
당헌 개정 시안에 따르면, 대표가 대선에 출마하려면 선거일 1년 전에 사퇴해야 한다는 현행 조항은 ‘당무위원회의 결정으로 사퇴 시한을 늦출 수 있게’ 된다. 현행 당헌에 의하면, 이 대표가 오는 8월 전당대회를 통해 연임에 성공하더라도 2026년 6월 실시되는 지방선거 3개월 전에 물러나야 한다. 그런데 당헌이 시안처럼 개정되면 지방선거 공천권 행사는 물론 대선 직전까지 최대한 당권을 유지할 수 있다. 민주당은 또 부정부패에 연루돼 기소된 당직자의 직무를 정지하는 규정도 삭제하기로 했다. 기소된 당직자의 직무를 당무위 의결로 정지하지 않을 수 있게 지난 2022년 8월 고쳤는데, 이번엔 아예 없애버림으로써 당 안팎의 시비 소지를 원천 봉쇄한다는 것이다. 쌍방울 대북송금 사건이나 경기도청 법카 유용 사건 등으로 추가 기소되거나 위증교사, 선거법 위반 재판에서 유죄가 선고되더라도 대표직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미다.
이뿐 아니다. 민주당은 같은 날 ‘1호 법안’으로 채상병특검법을 수정 발의했다. 21대 국회 막판에 폐기된 법안보다 훨씬 개악된 내용을 담았다. 대한변호사협회의 특검 추천권을 빼고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이 한 명씩 추천하도록 했다. 또, 공동 1호 법안으로 민생위기극복 특별법안도 발의했는데, 전 국민에게 25만 원씩 지급하자던 기존 입장을 25만∼35만 원 지원으로 강화했다. 포퓰리즘 논란은 물론 삼권분립을 해치는 ‘처분적 법률’ 지적도 묵살했다. 만약 민주당이 헌법과 법률도 이런 식으로 바꾼다면, 대통령 1인에게 권한을 몰아주는 ‘유신헌법’도, 헌법과 법률의 토대 위에서 이뤄진 ‘파시즘 독재’도 가능할지 모른다.
문화일보 사설
05-31 국힘, 거야 특검 법안 맞서 ‘민생’ 1호 법안

▲결의문 낭독 우재준(앞줄 왼쪽)·김소희(〃오른쪽) 국민의힘 의원이 31일 오전 충남 천안시 재능교육연수원에서 열린 제22대 국민의힘 국회의원 첫 워크숍에서 황우여(두 번째 줄 왼쪽 네 번째) 비상대책위원장과 추경호(〃다섯 번째) 원내대표 등과 함께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문호남 기자
■ 5대 분야 31개 법안 추진키로
저출생 대응·미래산업 육성 등
윤석열 정부 정책 적극 뒷받침
여야 첨예한 금투세 폐지 담겨
“입법 독재에 맞설 것” 결의문
일각 “폐기 법안 재활용” 지적

국민의힘이 제22대 국회 1호 법안으로 윤석열 정부의 정책을 뒷받침하는 민생 법안을 내세우면서 특별검사법 등 정쟁 법안으로 공세에 나선 야당에 맞불을 놨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108석 여당이 추진하려는 민생 법안 통과를 위해선 야당의 협조가 필수적이지만,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과 생각 차이가 크다. 22대 국회에서도 여야가 평행선을 달릴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국민의힘은 31일 충남 천안 재능교육연수원에서 열린 의원 워크숍에서 22대 국회 1호 법안으로 △저출생 대응(6개) △민생 살리기(10개) △미래산업 육성(8개) △지역균형발전(3개) △의료개혁(4개) 등 5대 분야, 31개 법안 패키지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이 공약한 저출생대응기획부 신설(정부조직법 개정안)을 최우선으로 꼽으며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겠단 의지를 드러냈는데 여야 간 이견이 첨예한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등도 담겼다.
국민의힘은 이날 결의문에서 민생·정책·청년 정당을 자임하며 “협치와 상생의 의회 정신을 지키되, 거대 야당의 입법 독재와 정쟁에는 108명이 단결해 결연히 맞서 싸우겠다”고 밝혔다. 이번 워크숍을 관통하는 주제인 ‘결속’을 재차 강조한 것으로 특검법 등 야당의 정쟁 법안 저지를 위한 단합 결의를 다졌다.
다만 이날 주요 민생법안에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 ‘구하라 법’(양육 의무를 다하지 못한 친부모의 자녀 유산 상속 제한) 등 21대에서 폐기된 법안들을 대부분 ‘재활용’해 신선함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왔다. 더욱이 여소야대 정국에서 민생 법안을 무더기로 추진한다 해도 야당의 협조 없이는 국회 통과가 어려워 법안 추진 과정에서 난관이 예상된다.
야당은 특검법 등을 1호 법안으로 정하며 정부·여당과 대치를 예고하고 있다. 민주당은 전날 윤 대통령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한 채 상병 특검법과 정부와 여권이 사실상 거부 의사를 밝힌 전 국민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골자로 한 민생위기극복특별조치법을 각각 당론 1호 법안으로 발의했다. 여당은 특검법은 대통령의 임명권을 무력화하며, 특별조치법은 정부의 예산편성권을 침해해 위헌 소지가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조국혁신당은 1호 법안으로 ‘한동훈 특검법’을 발의하며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정면 저격했다.
문화일보 이은지 기자 eun@munhwa.com, 천안=염유섭·민정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