橫說竪說(동아일보) 2024-04/
04-01(월) 사과, 대파 이어 양배추… 두더지 잡기 된 먹거리 물가

쌈직한 가격에 풍성한 밥상을 차리기엔 양배추만 한 채소가 없다. 크기도 큼직하고 절여 먹어도, 삶아 먹어도, 볶아 먹어도 맛있는 ‘만능 채소’다. 덕분에 흙대파가 금(金)대파가 되고 상추 낱장을 세면서 먹는 수상한 시절에도 듬직하게 밥상을 지켜 왔다. 그랬던 양배추마저 귀해질 모양이다. 지난달 30일 서울시 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양배추(특급) 8㎏당 가격은 1만6570원으로 일주일 전인 23일(8696원)에 비해 거의 두 배가 올랐다. 양배추 한 통당 소매 가격은 전국 평균 5300원. 양배추 한 통 값이 지난해 시간당 최저임금(9860원)의 절반을 넘어선 것이다.
▷2월 사과, 배 등 과일 물가가 3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며 차례상 차리느라 가계가 휘청했다. 정부가 할인쿠폰을 뿌리며 과일값이 겨우 진정되는가 싶더니 이번엔 채소값이 뛴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흙대파, 애호박, 적상추가 이달 초에 비해 11∼52%가량 올랐다. 작황이 부진해 올봄 출하량이 급감한 채소들이다. 덩달아 밀가루, 과자, 설탕, 소금 등 가공식품 가격도 오르고 있다. 마치 ‘두더지 잡기’ 게임을 하는 듯하다.
▷인플레이션은 실질 임금을 감소시킨다. 그 고통은 서민에게 더 크게 다가온다. 주부들은 장보기가 겁나고, 식당 주인들 사이에선 곡소리가 난다. 문제는 ‘비싼 채소’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장기적인 추세라는 점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채소값이 오르는 원인으로 기상 이변, 재배 면적 감소, 국제 유가 등 비용 상승을 꼽았다. 기상 이변으로 작황이 부진한 가운데 인건비며, 유가는 오르기만 한다. 농사를 포기하는 농가가 늘고, 고령화까지 겹치면서 재배 면적 감소는 이미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됐다.
▷전 세계가 기상 이변으로 인한 ‘푸드플레이션’(음식+인플레이션)으로 떨고 있긴 하다. 코코아, 올리브유, 감자, 오렌지 등이 자고 나면 최고가를 갈아치웠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지난해 OECD 식품 물가상승률은 10.5%였다. 한국은 농업 생산 기반이 약해진 상태에서 기상 이변까지 덮쳐 밥상 물가를 더욱 자극하고 있다.
▷민심이 술렁이자 정부는 부랴부랴 세금을 투입해 할인 품목을 늘리고, 납품 단가를 지원하는 등 물가 잡기에 나섰다. 하지만 이런 일회성 대책은 시장 가격만 왜곡시킬 뿐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지속적인 농업 인구와 재배 면적 감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생산기반 구축엔 별 관심도 없던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은 대형마트를 찾아다니는 ‘보여주기 행정’에 여념이 없다. 평소에 장을 볼까 싶은 정치인들이 ‘대파값 875원 논쟁’을 벌이더니 물가 안정에 역행하는 돈풀기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이쯤이면 누가 물가를 올리고 있는지 되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4-02 월스트리트저널의 1면 백지 기사

미국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3월 29일자에 4개 면으로 구성된 특별 섹션을 발행했다. 그 섹션을 통상 인쇄되는 신문 섹션들을 바깥에서 감싸도록 했다. 이렇게 탄생한 1면이건만 가장 중요한 머리기사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로 취재 출장을 갔다가 간첩 혐의로 체포된 자사 기자 에반 게르시코비치(32)의 구금 1년째 되는 날이었다. 백지(白紙) 편집은 러시아에 대한 항의였고, 용기 있는 저널리즘에 대한 다짐이었다.
▷기자 생활 8년째인 게르시코비치의 부모는 옛 소련의 경제난을 피해 1970년대 미국에 정착했다. 그런 그가 냉전 종식 후 러시아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된 첫 미국인 기자가 된 점이 기막히다. 그는 프랑스 통신사 AFP를 거쳐 4년 전 WSJ에 합류했다. 간첩 행위로 몰린 지난해 봄 출장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투입된 용병기업 와그너 그룹 취재를 위해서였다. 푸틴의 요리사였다가 쿠데타를 일으킨 뒤 의문의 항공기 사고로 숨진 프리고진이 설립한 그 회사다.
▷특별 섹션 1면은 3분의 2가 백지였는데, 위쪽에 제목은 달려 있었다. “빼앗긴 1년: 그의 취재기사가 여기 실렸어야 했다.” 그런 뒤 4개 면에 걸쳐 그가 1년 동안 놓쳐야 했던 친구 결혼식과 축구 경기 시청을 비롯한 일상의 소중함 등을 기사로 담았다. 그는 지난달 모스크바 콘서트장 테러를 자행한 범인들과 같은 구치소에서 독방에 감금돼 있다. 외부 접촉 없이 비공개 재판 절차를 밟는 동안 러시아가 공개한 짤막한 법정 동영상으로 그가 살아있음을 확인할 뿐이다.
▷러시아는 강력한 언론 통제 국가다.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뉴스매체가 외국과 인적-경제적 인연을 맺었다면 모든 기사 첫머리에 “외국 기관(Foreign Agent)이 관여했다”는 딱지를 붙여야 할 정도다. 정부 매체의 발표만 믿으라는 뜻이다. 푸틴의 정적 나발니의 의문사처럼 ‘권력의 반대편’이란 말은 독살 납치 구금의 위험을 뜻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지구촌 삶의 방식을 바꾼 러-우크라니아 전쟁과 그 이면을 알려야 한다는 믿음은 꺾이지 않고 있다. WSJ와 취재 기자는 이런 위험 감수를 언론의 길이라 믿었다.
▷언론 탄압은 러시아 외에도 중국 이란 미얀마 등 권위주의적 독재국가에서 자행되고 있다. 국경없는 기자회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가택연금 혹은 투옥된 언론인이 520명이 넘는다고 한다. 중국에만 100명 넘는 기자가 체포 또는 구금됐고, 팔레스타인 전쟁을 시작한 이스라엘에서도 기자 35명이 억류 중이라는 것이다. 저널리즘엔 남다른 용기가 필요하다. WSJ 특별섹션 1면의 커다란 빈칸은 강렬한 메시지다. 신문은 독립적으로 취재한 진실을 담을 것이고, 외부의 힘이 우리를 잠시 멈추게 할지라도 누군가가 그 일을 지속할 것이란 점이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4-03 ‘배달비 0원’ 출혈경쟁, 그 끝은?

배달앱 시장을 삼분하고 있는 배달플랫폼 간 점유율 전쟁이 다시 달아오르고 있다. 쿠팡이츠는 지난달 ‘배달비 0원’을 선언했다. 업계 막내의 도전에 배달의민족은 “이달부터 우리도 0원”이라며 응수했다. 쿠팡이츠는 와우 멤버십(월 4990원) 고객을 대상으로 무료 배달을 하고, 배민은 동선이 겹치는 곳을 묶어 배달하는 알뜰배달에 무료 혜택을 준다. 지난달 업계 2위 자리를 뺏긴 요기요 역시 배달비 무료 혜택을 받는 멤버십인 ‘요기패스X’의 월 구독료를 2900원으로 2000원 내렸다.
▷지난해 배달 음식 온라인 거래액은 26조4326억 원. 2017년 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줄었다. 코로나19 특수가 끝난 데다 음식값 못지않은 배달비에 배달앱을 지워버린 사람이 늘었다. 한껏 콧대가 높아졌던 배달플랫폼들이 시장이 정체되자 ‘배달비 0원’을 선언하고 고객을 사수하는 생존 게임을 시작했다. 원래 배달비는 소비자와 음식점주가 절반씩 부담한다. 배달플랫폼에서 소비자 몫을 부담해 떠나는 소비자를 붙잡겠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출혈 경쟁의 원조는 미국 기업 아마존이다. 당장의 이익을 포기하더라도 가격을 낮추는 ‘제로(0) 수익’ 전략으로 소비자와 판매자를 빠르게 흡수했다. 일단 사람이 모이도록 해 시장을 독점한 다음 비용을 회수하는 전략이다. 그 결과가 ‘빅테크’로 성장한 아마존이다. 지난해 10월 미 연방거래위원회(FTC)는 아마존을 상대로 반(反)독점 소송을 제기하며 “시장에서의 지배력을 남용해 경쟁자를 퇴출시키고, 소비자와 판매자에게 과도한 비용을 부담시켰다”고 했다.
▷배달앱 시장의 90% 이상을 배민, 요기요, 쿠팡이츠가 차지하고 있다. 이들의 시장 지배력이 커지면서 음식점주들은 “팔면 팔수록 손해”라고 호소한다. 지난해 음식점주가 부담하는 건당 배달비는 평균 3473원이었다. 2015년 중개수수료 0원을 내세웠던 배민은 현재 음식값의 7.48%를 수수료로 받고 있고, 2019년 중개수수료 1000원으로 시작했던 쿠팡이츠는 음식값의 9.8%를 떼는 새 요금제를 내놓았다.
▷소비자도 ‘배달비 0원’ 경쟁 초기에는 참았던 야식을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배달앱 삼국지가 소비자의 편익으로 결론 날지는 의문이다. 배달비는 슬금슬금 올라 기본이 3000원이고 2km가 넘어가면 7000∼9000원까지 뛴다. 음식점주들이 배달앱의 높은 수수료를 전가하기 시작하면서 외식 물가도 무섭게 올랐다. 앞으로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한 배달앱이 출현하면 더한 횡포를 부려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감내해야 할지 모른다. 경쟁이 사라지는 시장에서 소비자는 ‘호갱’이 되기 마련이다. 그간의 혜택까지 곱절로 얹어서.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4-04 유엔 제재대상 北 석탄 수출선 첫 나포

우리 해경과 해군이 지난 토요일 여수 앞바다를 지나던 3000t급 화물선을 나포했다. 이 배는 중국 산둥반도에서 출항해 북한 서쪽 남포항에 열흘쯤 머문 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던 중이었다. 선박에는 러시아 수출용으로 보이는 북한산 무연탄이 가득 실린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북한의 석탄 수출은 대북 제재 대상이다. 이 배는 아프리카 토고 국적선이었지만 지금은 무국적이다. 비슷한 국적세탁 사례로 볼 때 북한 통제하의 선박으로 정부는 의심하고 있다.
▷이번 나포는 미국 요청에 따른 것으로, 우리 정부가 대북 제재 위반 의심 선박을 나포한 것은 처음이다. 유엔 안보리 결의 2397호는 제재 위반이 의심되면 문제의 선박을 영해(領海)에서는 나포·검색·억류할 수 있다. 이 배는 북한 남포항 입출항을 전후로 국제적 의무인 자동식별장치를 껐다고 한다. 북한 흔적 지우기다. 우리 당국이 정선 명령을 내렸지만 불응했다. 중국인 선장은 “석탄을 실은 곳은 북한이 아닌 중국”이라고 부인했으나 정찰위성에 따르면 남포에 머물 때 석탄이 채워졌다고 한다.
▷이번 나포는 구멍 뚫린 대북 제재망을 방치할 수 없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북한은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를 반복하면서 안보리 제재를 받았다. 하지만 2017년 이후로는 러시아와 중국의 반대로 추가 제재가 불가능해진 상황이다. 그 사이 벤츠 등 사치품이 평양으로 흘러들어갔다. 지난주엔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을 감시하는 유엔 전문가 8인 패널을 아예 없애버렸다. 적절히 통제만 한다면 핵 가진 북한이 미국을 괴롭히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일 것이다.
▷북한에 선박은 생존 통로다. 중-러 국경에서 육상 운송도 가능하지만, 경제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일정량 이상 수입이 금지된 석유 제품을 배에서 배로 옮기는 선상 환적을 자행하고, 미사일처럼 돈 되는 수출품도 배로 실어 나른다. 2002년 서산호 사건은 미국이 해상 차단의 근거 마련에 주력하게 된 계기가 됐다. 북한은 스커드미사일 15기를 예멘에 수출했는데, 미국 요청으로 스페인 해군이 공해(公海)에서 나포했다. 하지만 안보리 제재와 같은 근거가 없었던 때여서 미사일을 예멘에 넘겨야 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미국 대응의 속도와 강도다. 유엔에서 중-러가 북한 감시 패널을 없애버린 것은 지난주 목요일이었다. 우리가 선박을 나포한 것은 이틀 뒤인 토요일이었다. 미국은 과거에도 비슷한 위성 추적을 했지만 이번처럼 한국에 나포 요청을 한 적은 없었다. 북한은 포탄과 미사일을 제공하며 전쟁 중인 러시아를 돕고 있다. 미국으로선 북한의 돈줄 차단도 중요하지만, 러시아 견제도 감안했을 것이다. 한반도 안보 질서는 우리 뜻과 관계없이 가변성이 더 커졌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4-05 줄였다 늘렸다 ‘고무줄’ R&D 예산

“내년도 연구개발(R&D) 예산은 역대 최고 수준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예산 비효율을 이유로 올해 국가 R&D 예산을 대폭 줄였던 정부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3일 대통령실은 “세계가 기술 경쟁에 뛰어드는 유례없이 빠른 기술 변화의 파고 속에서 개혁 작업에 매달릴 수만은 없다”며 “대폭 증액을 할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이라고 했다. 글로벌 기술 경쟁이 올해 들어 갑자기 격화된 것은 아닌데, 1년 만에 R&D 예산을 줄였다 늘렸다 하는 형국이 됐다.
▷지난해 R&D 예산 삭감은 갑작스럽게 진행됐다. 지난해 6월 말 윤석열 대통령이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면서였다. 이는 ‘R&D 이권 카르텔’ 논란으로 이어졌다. 증액 기조로 예산안을 짜놨던 정부는 부랴부랴 일괄 삭감 작업에 들어가 두 달 만에 전년 대비 16.6%(5조2000억 원) 줄인 예산안을 들고나왔다. 국회에서 6000억 원 증액돼 최종적으로는 4조6000억 원 깎였다.
▷외환위기, 금융위기에도 늘었던 R&D 예산이 33년 만에 처음으로 줄자 과학기술계의 충격은 컸다. 연구비가 20%씩 일괄 삭감된 대학 연구실은 부족한 인건비를 충당하기 위해 실험은 제쳐두고 신규 연구과제 확보에 혈안이 됐다. 연구비가 대폭 깎이거나 과제가 중단된 연구실에선 연구원과 학생들의 인건비가 삭감됐고, 계약을 연장하지 못해 연구실을 떠나는 경우도 있었다. 무엇보다 ‘카르텔’ 논란에 휩싸인 과학기술계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았다.
▷한국이 R&D 예산을 줄일 때 경쟁국들은 투자를 늘렸다. 이달 초 중국은 올해 과학기술 예산이 3708억 위안(약 69조 원)으로 지난해보다 10% 증액됐다고 밝혔다. 한국의 올해 국가 R&D 예산 26조5000억 원은 중국 통신장비업체 화웨이의 지난해 R&D 예산(약 30조6000억 원)보다도 적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2022년 기준 국가 중요 과학기술 11대 분야에서 한국의 기술 수준이 처음으로 중국에 추월당했는데 격차가 더 커질까 두렵다.
▷정부가 뒤늦게 예산 복원을 선언한 것은 다행이나 과정은 매끄럽지 않다. 올해 예산안이 국회를 통과한 지 2주 뒤인 올해 1월 4일 첫 민생토론회에서 윤 대통령은 “재임 중 R&D 예산을 대폭 늘리겠다”고 언급했다. 증액 규모에는 ‘상한선’을 두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과학계 카르텔 문제가 해소된 것인지 이렇다 할 설명은 없었다. 예산 삭감 때 불통 지적을 받았다면 예산을 늘리고 정책을 개선·보완하는 과정에서라도 현장과 충분히 소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무줄 예산’ ‘병 주고 약 주기’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4-06(토) 불안정한 세계가 밀어올린 역대 최고 金값

“세상이 지옥을 향해 가고 있을 때만 가격이 오르는 자산에 투자하는 건 괴상한 짓이다.” 작년 11월 99세로 타계한 찰리 멍거 버크셔해서웨이 부회장은 2011년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열린 회사 주주총회에서 금 투자에 관한 의견을 묻는 주주에게 이렇게 답했다. 수십 년간 워런 버핏 회장의 조언자이자 파트너였던 멍거 부회장은 어떤 상황에서도 냉철한 투자자의 자세를 잃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그가 사상 처음 트로이온스(31.1g)당 2300달러 선을 뛰어넘은 요즘 금값을 본다면 뭐라고 조언할까.
▷3일 미국 뉴욕상업거래소에서 6월 인도분 금 선물 종가가 2315달러를 찍었다. 지난달 4일 2100달러를 넘어선 데 이어 한 달 만에 10% 상승했다.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최근 “올해 기준금리 인하가 단행될 것으로 전망되지만 더 시간이 필요하다”며 섣부른 금리 인하 기대를 경계했는데, 시장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표현보다 ‘인하’에 주목했다. 미국의 기준금리가 떨어지면 달러화가 약세를 보이면서 달러의 대체 안전자산인 금은 가격이 오른다.
▷금값 급등에 미중 패권전쟁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 중앙은행인 런민은행은 몇 년 새 지속적으로 미국 국채를 팔고 금을 사들이고 있다. 작년 말 현재 보유한 금이 2235.3t이다.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미국 제재로 러시아 자산거래가 동결되는 걸 지켜본 중국이 언젠가 닥칠 미국과의 정면충돌에 대비해 금 보유를 늘린다는 거다. 최근엔 위안화 가치가 약세를 보이자 1g짜리 ‘금콩’에 투자하는 중국 청년들까지 늘었다고 한다.
▷미국의 재정적자 폭증에 대한 우려도 금값을 자극하고 있다. 미 의회예산국(CBO)은 작년 말 97%였던 미국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비율이 2029년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역대 최대치였던 116%를 넘을 것으로 전망했다. 30년 뒤엔 166%까지 치솟을 것으로 예상했다. 세계대전 때 진 빚은 호황과 인구 증가에 힘입어 갚았지만, 지금 늘어나는 빚은 고령화 등을 고려할 때 감당하기 대단히 어렵다. 결국 달러를 더 찍어 내는 수밖에 없어 금의 가치가 오를 거란 전망이다.
▷국내 금값도 천정부지다. g당 10만 원을 돌파했고, 세공비 포함 한 돈(3.75g)짜리 돌반지는 45만 원을 넘었다. 그제 한꺼번에 몰린 투자자들로 인해 한국 금거래소 홈페이지가 마비되는 일까지 있었다. 미국 투자은행 JP모건은 올해 말 트로이온스당 2500달러, 씨티그룹은 12∼18개월 내에 3000달러까지 금값이 오를 것으로 전망한다. 지금 세계의 큰손들은 세상이 더 불안정하고, 어지러워지는 쪽으로 강하게 베팅하고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4-08(월) 감시 사각지대 국정원 ‘비상금’ 역대 최대

국가정보원 예산은 일부 공개되기도 하지만 전모는 베일에 가려 있다. 국정원 예산은 세 덩어리로 구성된다. 첫째, 지난해 8526억 원이 책정된 공식 예산으로, ‘안보비’라고 부른다. 과거에는 영수증 증빙이 생략되는 특수활동비로 전액 구성됐다가 전직 원장 3명이 재판받는 홍역을 치른 뒤 바뀌었다. 둘째, 기획재정부가 편성한 예비비에서 가져다 쓰는 ‘국가안전보장 활동경비’다. 셋째, 국방부·경찰청 등의 몫으로 책정된 특수활동비를 함께 쓰는 것이 있다.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블랙 예산”으로 부르듯, 합법적으로 숨겨놓은 예산이다.
▷주목받는 것은 안보 활동경비다. 예비비는 태풍 피해가 생기거나, 새만금 잼버리 행사 차질에 따른 긴급대응처럼 1년 전 미리 짜놓기 어려운 일이 생길 때 꺼내 쓰는 돈이다. 말 그대로 비상금이다. 하지만 국정원은 상시 예산처럼 쓰는 듯하다. 추정액 기준 2020년 6000억 원, 2021년 6300억 원이다. 예산 규모도 정식 예산(안보비)의 80%를 넘나드는 수준이다.
▷예비비 집행은 국무회의 의결이 필요하다. 국정원은 지난해 4차례 국무회의를 통해 예비비를 가져갔다. 12월에는 ‘글로벌 원자재 공급망 긴급 확보’ 명목이었다. 하지만 어떤 활동이었는지는 2급 기밀이어서 파악하기 어렵다. 지난해 국정원 예비비가 7800억 원이었고, 역대 최대 규모라는 보도가 지난주 나왔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2020년 이후로는 매년 6000억 원대로 올라섰다는 추정이 틀리지는 않는 듯하다.
▷정부 예산은 국회 예결위 심사를 받는다. 국정원은 기밀성을 감안해 중진급 정치인이 포진한 정보위가 그 역할을 맡는다. 국정원이 3개월마다 고강도 검증을 받는다지만, 예산·결산 심사가 얼마나 정밀한지는 의문이다. 정보위는 인사청문회 등을 빼면 개회 직후 비공개로 전환된다. 언론 취재도 어렵고, 속기록도 확인할 수 없다. 다른 부처의 예산은 예결위의 소인수 회의체인 ‘소소(小小)위’ 대화까지 개방하지만, 정보예산은 비공개다.
▷미 국가안보국 출신 에드워드 스노든이 자국의 불법 행위를 2013년 폭로하면서 예산까지 공개한 적이 있다. 그가 공개한 178쪽 자료에 따르면 CIA가 연 16조 원을 썼다. CIA로선 러시아와 중국이 봤을 이런 노출은 큰 타격이었다. 이 자료를 입수한 워싱턴포스트는 이례적으로 정부와 보도 범위를 상의했다. 보안과 독자 알권리 사이에서 경계선을 찾는 노력이었다. 우리 국정원은 역대 원훈(院訓)처럼 음지에서, 소리 없는 헌신을 해 왔다. 그런 자부심에 걸맞은 예산 투명성 확보의 때가 왔다. 비밀 활동 예산은 100% 보안이 기본이다. 그렇지 않은 활동 예산이라면 국회 정보위가 역할을 더 키우는 쪽으로 변화를 생각해야 한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4-09 “따로 자야 금슬 좋다” 수면이혼 유행

“나는 내 방에서 잔다. 남편은 남편의 방에서 잔다. 그 사이에 둘이 같이 쓰는 침실이 있다.” 2015년 음악가 벤지 매든과 결혼한 할리우드 배우 캐머런 디아즈는 남편과 각방을 쓰는 사실을 고백해 화제가 됐다. 그는 부부가 각방에서 자는 이른바 ‘수면 이혼’이 “수면의 질을 높이고 부부 관계를 돈독하게 한다”고 했다. 코를 골거나 잠버릇이 심한 배우자를 억지로 참고 자느니 침대나 침실을 분리해 따로 자는 것이 낫다는 얘기다.
▷월스트리트저널이 미국에서 수면 이혼이 유행한다고 5일 보도했다. 미국 수면의학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국 성인 남녀 3명 중 1명은 수면 이혼 상태였다. 연령대가 낮을수록 이 비율이 높아 밀레니얼 세대에선 43%에 달했다. 이어 X세대의 33%, 베이비붐 세대의 22%가 각방을 쓴다고 했다. 사실 부부가 한방을 쓰는 문화가 오래되진 않았다. 20세기 들어 산업화·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생겨난 문화일 뿐, 이전에는 부부가 각방을 쓰는 문화가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부부의 속사정도 비슷하다. 한 결혼정보업체가 부부간 수면 환경을 조사했더니 3명 중 1명이 각방을 쓰거나, 한방에서 자더라도 침대를 따로 썼다. ‘수면 궁합’이 상극인 부부들이 있다. 남편 코골이가 너무 심하다며 여행 가서 호텔 방을 2개 잡는 사람도 있다. 늘 에어컨을 켜는 남편과 온수매트를 안고 자는 아내는 같이 자기 힘들다. 잠귀가 밝은데 밤새 뒤척이거나 화장실을 자주 가는 배우자랑 자다간 잠을 설친다. 수면 리듬이 현저히 다른 부부도 있다.
▷잠을 잘 자야 배우자에게도 너그러워진다. 수면이 부족하면 사소한 일에 화가 나고 공감 능력이 떨어져 배우자와 갈등을 빚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한다. 건강에도 해롭다. 매일 밤 7, 8시간을 충분히 자지 못하면 당뇨병, 뇌·심혈관 질환 및 치매에 걸릴 위험이 커진다. 수면 이혼을 시작한 미국 부부의 52%가 수면의 질이 개선됐다고 보고했고, 매일 평균 37분을 더 잤다. 따로 자기를 추천하는 전문가들은 “수면 이혼이 아니라 부부끼리 수면 동맹을 맺는다고 생각하라”고 조언했다.
▷‘부부 일심동체’라거나 ‘부부가 싸워도 한 이불을 덮고 자야 한다’는 결혼 주례사를 듣는 우리나라에선 부부가 각방을 쓰는 데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부부 사이가 소원해진 것 아닌지 실눈을 뜨고 보기도 한다. 나이가 들수록 돌연사 위험이나 심리적 고립감이 커지므로 같이 자는 것이 낫다는 반박도 한다. 하지만 핵가족을 넘어 핵개인이 출현한 시대다. 서로 억지로 맞춰 살거나 이를 견디지 못해 관계를 단절하느니, 개인의 독립성을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요즘 시대에 맞는 부부 관계인 것 같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4-10 “미 금리 8%대로 오를 수도” 경고한 월가 황제

요새 미국 월가 최고의 비관론자는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최고경영자(CEO)다. 미국 주가가 한때 최고치를 경신하는 등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가 만발한 가운데 그는 주주들에게 보낸 연례서한에서 미국 연준(Fed)의 기준금리가 8% 이상으로 오를 수도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는 지난해 9월에도 기준금리가 7%까지 오를 가능성을 경고했다. 올 들어 연준의 금리 인하를 기대하며 주식시장에 부는 훈풍에도 불구하고 금리가 오를 수 있다는 수준을 오히려 더 높였다.
▷JP모건은 단순히 미국 은행 중 하나가 아니다. 지난해 중소 규모 은행인 퍼스트리퍼블릭이 파산해 월가에 위기의 폭풍이 불어닥칠 순간에 그 은행을 인수함으로써 폭풍을 잠재운 것이 JP모건이다. JP모건은 미국 연준이 생기기 전에 사실상의 중앙은행 역할을 한 민간은행이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베어스턴스와 워싱턴뮤추얼을 인수한 것도 JP모건이다. 그래서 JP모건 CEO는 월가의 황제라고 불리고 그의 금리 전망이 남다르다는 건 관심을 끈다.
▷다이먼 CEO는 정부 개입 확대에 따른 막대한 재정 지출과 녹색 경제에 수반되는 기업의 비용 증가, 글로벌 공급망 조정 등이 인플레이션과 이를 억제하기 위한 금리 인상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라고 꼽으면서 우크라이나와 중동 전쟁은 인상 효과를 증폭시킬 수 있다고 봤다. 그가 꼽은 요인이 딱히 특별한 건 없다. 경제전문가들이 대부분 거론하는 것이다. 단지 그만이 이런 요인이 쉽게 극복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 냉정함을 잃지 않고 주목하고 있을 뿐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수석칼럼니스트인 마틴 울프는 지난해 ‘민주적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책에서 2008년 금융위기는 대공황에 버금가는 위기였고, 대공황 이후 뉴딜정책이 부상했듯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 유사한 흐름이 부상하고 있다고 봤다. 과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영어에서 가장 무서운 문장은 ‘저는 정부에서 파견됐고 당신을 도와주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잊혀졌다. 정부 개입은 확대됐고 코로나는 그 확대를 부채질했다. 정부 개입 확대는 케인스주의에서 보듯 인플레이션으로 귀결된다.
▷다이먼 CEO 발언의 핵심은 섣부른 낙관에 대한 경계다. 금리가 오랫동안 낮았기 때문에 투자자와 기업이 고금리 환경에 대비할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저금리 시대로 돌아가리라는 ‘희망적 사고’에 매달린다는 것이다. 미국조차 중하위층의 일자리 창출과 사회보장을 위해 재정지출을 늘리고, 기업은 기업대로 탄소 배출량 감축을 위해 돈을 써야 하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쉽게 인플레이션이 끝날 것으로 보느냐고 묻는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4-11 선거 끝나면 우수수… 정치인 테마株 급락 주의보

4·10총선 전 마지막 거래일이었던 9일 주식시장은 약보합으로 마감했지만, 일부 주식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총선을 진두지휘한 여야 대표들과 관련이 있다는 이른바 ‘정치인 테마주’였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테마주로 꼽혔던 동신건설은 13.60%, 에이텍은 10.20% 올랐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테마주로 주목받은 대상홀딩스와 덕성은 장중 10% 안팎까지 올랐다가 내림세로 마감했다.
▷이들 기업이 정치인 테마주로 엮인 이유는 사실 황당하다. 동신건설은 본사가 이 대표 고향인 경북 안동에 있다고 테마주로 분류됐다. 에이텍은 최대 주주가 이 대표가 성남시장 시절 만든 민관 협의체에 참여했다는 이유다. 대상홀딩스는 한 위원장이 고교 동창인 배우 이정재 씨와 식당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 근거가 됐다. 이 씨가 임세령 대상그룹 부회장의 연인이라서다. 덕성은 대표와 사외이사가 한 위원장과 서울대 법대 동문이어서, 태양금속은 창업주와 한 위원장이 같은 ‘청주 한씨’여서 테마주가 됐다.
▷다른 나라에도 정치 테마주가 있지만, 한국처럼 정책이 아닌 정치인 개인과 엮인 테마주는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에선 유력 정치인과의 혈연, 학연, 지연, 혼맥 등을 매개로 기업 주가가 급등락하는 현상이 매번 선거마다 되풀이된다. 특정 정치인이 새롭게 떠오르면 주식시장 주변의 꾼들이 정치인 주변을 샅샅이 훑는다. 기관투자가들의 관심이 적고 풍문으로 주가를 움직일 수 있는 코스닥 중소형주와 엮어 스토리를 만든다. 정치 이벤트가 생길 때마다 소셜미디어나 메신저, 주식 커뮤니티 등을 이용해 풍문을 퍼뜨린다.
▷정치인 테마주의 끝은 대개 좋지 않다. 후보의 당락이나 정당의 승패와 상관없이 선거가 끝나면 급락하는 패턴을 보였다. 2022년 대선에서 윤석열, 이재명 당시 후보의 테마주로 꼽혔던 NE능률과 이스타코는 선거 전 주가가 10배 이상 올랐지만 선거가 끝나고 상승분을 모두 반납했다. 2021년 홍준표 당시 국민의힘 대선 경선후보 테마주로 엮인 경남스틸은 홍 후보의 패배가 확정되자 한 시간도 안 돼 주가가 44%나 떨어져 하한가로 곧장 직행했다.
▷정치 테마주가 기승을 부린다는 것 자체가 한국 정치와 자본시장의 후진성을 보여준다. 과거 정경유착의 기억이 생생한 투자자들은 권력자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으면 기업이 뭔가 도움을 받지 않을까 기대한다. 정치인과의 관계는 관심 없고 주가 급등락 분위기에서 타이밍을 잘 잡아 ‘나만 먹고 튀면 된다’고 생각하는 투자자도 많다. 유력 정치인과 옷깃만 스쳐도 주가가 요동치는 비상식이 반복되는 한, 기업가치 제고를 통해 주식시장을 띄운다는 ‘밸류업’의 꿈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4-12 ‘개인 맞춤형’ 암 백신 경쟁

암 정복의 신기원을 열어줄 약물로 주목받는 암 백신은 암에 걸릴 확률을 낮추는 예방용과 재발을 막는 치료용으로 나뉜다. 현재 널리 쓰이는 자궁경부암 백신이 예방용이고, 치료용 백신은 작동 원리가 백신과 같지만 엄밀히 말하면 치료제다. mRNA(메신저 리보핵산) 코로나 백신을 선보였던 세계적 바이오 기업들이 mRNA 기반의 암 백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국식품의약국(FDA)이 최근 암 백신 허가 준비를 마쳤다고 발표하면서 상용화의 가능성이 높아졌다.
▷선두주자는 미국 모더나다. 오래전부터 암 백신 개발에 주력해 오다 갑작스러운 코로나 사태로 mRNA 기술의 안전성을 확인한 후론 코로나 백신으로 벌어들인 돈을 미국 머크와 함께 암 백신 개발에 쏟아붓고 있다. 흑색종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 2상에서는 항암제와 함께 썼더니 사망 위험이 62% 줄어들었다고 한다. 모더나는 임상 3상을 마치는 대로 2030년 암 백신을 출시할 계획이다. 미국 화이자와 독일 바이오엔테크는 임상 1상 결과 종양 성장이 멈추거나 작아지는 효과가 나타났다고 밝혔다. 2030년까지 암 환자 1만 명 치료가 목표다.
▷mRNA 암 백신은 환자의 종양에서 채취한 암세포 단백질의 유전정보가 담긴 mRNA를 환자 몸속에 넣어 면역반응을 유도한 뒤 암세포를 죽이게 하는 원리다. 일반 백신과 달리 암세포 단백질의 유전정보만 있으면 바로 백신 개발이 가능해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하면 개인 맞춤형 백신을 6주 만에 생산할 수 있다. 종양의 위치를 몰라도 치료가 가능하고, 항암제와 달리 정상 세포까지 죽이거나 머리카락이 빠지는 등의 부작용이 거의 없어 ‘웃으며 치료받는 약물’로 불린다.
▷하지만 가장 속도가 빠른 모더나도 아직 임상 3상 단계이다. mRNA 암 백신을 맞은 환자가 적고, 장기간 추적 관찰한 환자는 더욱 적다. 백신은 건강한 사람이 맞지만 암 백신은 몸이 약해진 암 환자가 맞는 약물이어서 더욱 조심스럽다. 개인 맞춤형이므로 6년 후 출시돼도 가격이 비싸 엄두를 못 낼 수 있다. 췌장암 백신을 개발 중인 바이오엔테크는 1회 투여용 백신 개발 비용을 35만 달러(약 4억8000만 원)에서 10만 달러로 낮추는 데 10년이 걸렸다.
▷mRNA 암 백신 시장은 2033년 32조 원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다. 암뿐만 아니라 심혈관이나 자가면역 질환 등 모든 질병 치료제로 활용될 수 있어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이 시장을 주도하는 이들이 의과학자들이다. 모더나의 암 백신 개발 책임자도 종양학 전문의다. 환자 한 명 한 명의 생명을 살리는 데서 보람을 찾는 의사도 필요하지만 인류의 건강을 지키는 연구로 세계 바이오 시장을 주도하겠다는 의과학자들도 많아져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4-13(토) “콜레라 확산 방지 영웅”… 세계 유일의 韓 중소 백신업체

“그저 책상 앞에 앉아서 이런 대화를 할 수밖에 없어요. ‘(콜레라 백신을) 아이티로 보낼까요, 시리아로 보낼까요? 아니면 짐바브웨?’”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전한 국경없는의사회 국제의료 코디네이터의 한탄이다. 최근 수년간 아프리카 등에서 콜레라가 대규모로 확산한 가운데 국제 의료구호 단체들이 모진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예방 백신이 극도로 부족한 상황에서 수천 명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지원처 선별을 해야 하는 탓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2021년 22만여 명까지 감소했던 세계 콜레라 감염자가 이듬해 47만여 명으로 늘었다. 콜레라는 카리브해 연안과 중동, 남아시아 등에서 급속히 확산했다. 케냐의 소말리아 난민촌 어린이들 사이에서, 내전으로 기반 시설이 파괴돼 강물을 마셔야 하는 시리아에서, 무정부 상태가 된 아이티에서 창궐했다. 특히 최근 2년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맹위를 떨쳐 7개국에서 집계된 것만 4000여 명이 숨졌다. 백신도 동이 났다. 전쟁으로 콜레라 발생 소지가 큰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공급할 백신마저 없는 실정이다.
▷현재 콜레라 백신을 생산하는 세계에서 하나뿐인 기업이 한국의 유바이오로직스다. 인도의 회사가 한 곳 더 있었는데, 지난해 생산을 중단했다. NYT에 따르면 유바이오로직스는 최근 생산 단계와 성분을 간소화하는 한편 제2공장 가동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올해부터 백신 수천만 회분을 증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유엔의 지원을 받는 국제백신연구소(IVI)의 줄리아 린치 박사는 이 회사를 두고 “(콜레라 대응의) 숨은 영웅”이라고 평가했다. 뒤늦게 인도와 남아공의 회사 세 곳이 백신 제조에 뛰어들었지만 빨라야 내년 말부터 제품이 나온다.
▷지난해 매출이 약 700억 원인 중소기업 유바이오로직스는 서울대 수의대 출신 백영옥 대표가 2010년 설립했다. 국제백신연구소와 기술이전 계약을 맺은 뒤 2015년 WHO 인증을 받고 이듬해부터 콜레라 백신을 수출하며 자리를 잡았다. 질병 퇴치를 목표로 하는 게이츠재단의 지원금을 받기도 했다. 수출용 코로나19 백신도 개발했고, 해마다 연구개발에 적지 않은 돈을 쓰면서 다른 백신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는 중이라고 한다.
▷수인성 질병인 콜레라는 부유한 나라에선 거의 유행하지 않는다. 빈국의 전염병이다. 최근 극단 기후 탓에 가난한 나라의 국민은 홍수로 상하수도 시설이 파괴되거나 가뭄이 들어 깨끗한 마실 물도 모자란 상황이다. 콜레라 백신은 당분간 공급이 달릴 것으로 전망되지만 글로벌 대형 제약사들은 별 관심이 없다. 개당 수 달러에 이문도 적은 탓이다. 그 결과 콜레라와의 전투에서 승부가 사실상 한국의 한 중소기업에 달린 형국이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04-15(월) 내국인 인구 5000만 붕괴… 외국인 의존도 커지는 韓 경제

국내에 살고 있는 한국 국적자, 즉 내국인 인구가 6년 만에 5000만 명 밑으로 내려앉았다. 통계청이 발표한 ‘장래 인구추계를 반영한 내·외국인 인구추계’를 보면 내국인은 2022년 5002만 명에서 지난해 4985만 명으로 17만 명 줄었다. 다만 외국인 체류자가 22만 명 늘어나 전체 인구는 소폭 증가했다. 내국인 인구만 따졌다면 한국은 ‘30-50클럽’(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이상, 인구 5000만 명 이상) 7개국 대열에서 지난해 탈락했을 것이다.
▷대한민국 인구의 미래는 암울하다. 2042년에는 내국인 인구가 지금보다 300만 명 줄어들고, 저출산·고령화에 따라 생산연령인구는 더 큰 폭으로 감소한다. 일할 사람은 적어지고 고령인구는 늘다 보니 청년과 중장년층의 부양 부담은 배로 늘어난다. 인구 감소가 사회 전체적으로 미치는 파장은 엄청나다. 학생이 없어 대학이 문을 닫고, 군대 갈 사람이 없어 안보가 위태롭고, 연금 수령은 급증해 재정 부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인구 감소의 우울한 그림자가 짙어지는 것은 저출산 때문이다. 세계적 인구학자인 데이비드 콜먼 영국 옥스퍼드대 명예교수가 한국을 ‘1호 인구소멸국가’로 경고한 게 벌써 18년 전인데 그새 저출산은 오히려 더 심각해졌다. 지난해 한 대형 온라인쇼핑몰에선 아이가 타는 유모차보다 반려동물을 태우는 이른바 ‘개모차’가 더 많이 팔리기도 했다. 저출산으로 운영이 어려워진 어린이집은 요양원으로 바뀌고, 분유 업체들은 노인용 건강식품으로 사업을 전환하고 있다.
▷국력의 근간인 인구를 늘리려면 근본적으로는 출산율을 높여야겠지만 단기간에 회복되긴 어렵다. 내국인의 빈자리는 외국인이 채우게 될 가능성이 크다. 2042년 외국인 규모는 지난해보다 120만 명가량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저출산·고령화로 내국인 중 절반 정도만 ‘일할 나이’가 되는 것과 달리 외국인은 열 명 중 여덟 명이 생산가능인구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해외에선 외국인 증가가 사회적 갈등의 불씨가 된 사례가 적지 않다. 한국에선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이주 정책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정부는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저출산 대응을 위해 예산 약 380조 원을 투입했지만 뚜렷한 효과를 보지 못했다. 출산, 보육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내용까지 끼워 넣어 관련 예산을 뻥튀기한 측면이 있다. 실제 필요한 곳에 돈을 충분히 쓰지 못한 것은 아닌지도 따져볼 일이다. 우수한 해외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정책도 지지부진하다. 선진국들은 한국에 비하면 출산율이 훨씬 높은데도 다양한 출산 장려 정책과 적극적인 이민자 유입 정책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꼴찌가 오히려 더 게으름을 피우니 답답하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4-16 “목련은 지는데”… 與 서울 편입 추진 지역구 전패한 까닭

더불어민주당 18석 대 국민의힘 0석. 김포를 비롯해 고양 과천 광명 구리 남양주 부천 하남 등 여당이 서울 편입 대상으로 꼽았던 지역들의 4·10총선 성적표다. ‘메가시티론’을 앞세워 서울 주변 지역 주민들의 표심을 얻고, 총선 승리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던 여당의 바람은 수포가 됐다.
▷여당이 김포의 서울 편입을 추진하겠다고 처음 밝힌 것은 지난해 10월 30일이다. 같은 달 11일 치러진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이 예상 밖의 대승을 거두면서 여권에 위기감이 커지던 때였다. 총선에서 수도권 민심을 잡기 위해 여당이 승부수를 던졌다는 분석이 나왔다. 하지만 서울 편입론을 주도했던 김기현 전 대표가 12월 물러났고, 촉박한 일정 때문에 총선 전 주민투표도 무산되면서 메가시티 구상은 흐지부지되는 듯 보였다.
▷그러다 올 2월 초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목련이 피는 봄이 오면 김포는 서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서울 편입론이 다시 부상했다. 그는 22대 국회에서 1호 법안으로 김포 등의 서울 편입과 경기도 분도를 한꺼번에 추진하는 ‘원샷법’을 발의하겠다고도 했다. 서울시와 해당 지자체들은 공동연구반을 꾸렸고 이 지역 여당 후보들은 너나없이 ‘서울 편입’을 외쳤다. 하지만 여당은 총선에서 참패했고, 이미 목련이 지고 있는데도 메가시티와 관련된 움직임은 전혀 없다. 별다른 계기가 없다면 이대로 묻힐 공산이 크다.
▷서울 편입은 주민들의 이해가 복잡하게 뒤엉킨 이슈였다. ‘서울 프리미엄’으로 부동산값 인상을 기대하는 집주인들은 환영하는 쪽이지만 세입자 입장에선 전월세 인상을 걱정해야 한다. 교육 측면에선 서울의 자사고 입학이 가능해지는 장점이 있는 반면 대입 농어촌 특례입학에서 제외되는 것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복잡한 서울 편입보다 지하철 노선 연장 등 당장 도움이 되는 정책을 요구하는 주민도 있다. 전문가들은 ‘메가 서울’에 인구가 더 몰릴 경우 지방도시 소멸을 부추길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그런데도 사전 연구, 여론 수렴 등은 생략한 채 정치공학적 차원에서 불쑥 민감한 이슈를 던져 주민들만 혼란스럽게 했다.
▷이는 여당이 큰 그림을 보지 못한 채 ‘유권자들은 눈앞의 이익에 따라 투표할 것’이라는 구시대적 사고에 머물렀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김포에 출마했던 한 여당 후보는 “‘내가 서울로 안 가도 상관없고 정권 심판이 먼저다’라는 여론이었다”고 전했다. 나라를 걱정하는 주민들 앞에서 실현 여부도 불투명한 지역 공약만 외쳤다는 얘기다. 여당이 유권자들의 눈높이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앞으로 선거에서 외면받는 일이 반복되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4-17 총선 끝나니 치킨·버거값 인상… 눈치 보기 끝났나

4·10총선을 앞두고 정부와 여론의 눈치를 보던 기업들이 총선이 끝나자마자 슬금슬금 가격 인상의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15일 굽네치킨은 9개 제품 가격을 1900원씩 올렸다. 일부 메뉴는 2만 원을 넘어섰다. 파파이스도 치킨, 샌드위치(버거) 등의 가격을 평균 4% 올렸다. 앞서 12일 쿠팡은 유료 회원제 서비스인 와우 멤버십 월 구독료를 4990원에서 7890원으로 58% 올렸다. 총선 이틀 뒤 금요일 밤의 기습 인상이었다.
▷‘금사과’로 대표되는 고물가는 이번 총선 레이스 내내 주요 이슈였다. 과일, 채소값뿐만 아니라 생활품목 전반의 물가 오름세가 좀처럼 꺾이지 않고 있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식용유, 된장 등 다소비 가공식품 32개 품목은 평균 6.1% 올라, 3%대 초반인 전체 물가상승률을 훌쩍 뛰어넘었다. 코코아, 설탕, 김, 올리브 등의 국제 가격이 작황 악화 등으로 오르고 있어 식품업체들은 과자, 초콜릿, 빵 등의 가격 인상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지난해부터 계속된 정부의 물가 관리는 많이 오른 품목을 쫓아다니며 관리하는 ‘두더지 잡기’ 식이었다. 지난해 상반기엔 부총리가 직접 나서 술값과 라면값을 압박하더니 지난해 11월엔 ‘빵 과장’ ‘배추 국장’ 식의 품목별 물가 담당자를 지정해 전담 관리에 나섰다. 과일·채소값이 뛰어오르자 올해 들어 사과, 대파 등 많이 오른 품목을 중심으로 납품단가 지원, 정부 할인 쿠폰 등을 집중 투입했다. 각종 할인으로 가격을 안정시킨 우수 사례를 홍보하려다 ‘대파 875원’의 사달이 났다.
▷사과·대파값이 다소 진정세를 보이자 이달 초 정부는 “3월에 연간 물가의 정점을 찍고 하반기로 갈수록 안정화될 것”이라며 성난 민심을 달랬다. 하지만 최근 물가 흐름은 정부의 기대와는 다르다. 돈을 쏟아부어 한 곳을 틀어막으면 다른 곳이 튀어 나오고 있다. 할인 지원 대상에서 빠진 방울토마토값이 급등하자 정부는 부랴부랴 방울토마토를 지원 대상에 포함시켰다. 그러자 이번엔 양배추와 배추 가격이 뛰었다. 재원은 한정돼 있는데 품목은 많으니 한꺼번에 잡기가 쉽지 않다. 돈을 풀어 물가를 잡겠다는 모순도 지속 가능한 해법은 아니다.
▷정부가 품목별 할인 지원, 인상 자제 요청 등의 대증 대책에 매달리고 있는 동안 중동 전쟁 확전 위기감이 커지며 국제 유가와 환율이 급등하는 등 물가 외부 요인도 불안해졌다. 여기에 총선 때까지 꾹꾹 눌러놨던 전기, 가스 등 공공요금까지 꿈틀대고 있다. 할인으로 가격을 억지로 누르고, 가격을 올린 업체를 찾아가 단속·압박하는 방식만으로 어느 세월에 물가를 잡을지 걱정이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4-18 노후자금 노리는 코인 사기

올 들어 잡코인 가운데 가장 화제가 된 게 ‘월드코인’이다. 은색 구슬처럼 생긴 홍채 인식 기구에 자신의 홍채를 등록하기만 하면 코인 수십 개를 무상으로 받을 수 있어 세계 곳곳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국내에 문을 연 월드코인 행사장들도 공짜 코인을 받겠다며 대기표를 받아든 이들로 북적였다. 그런데 행사장마다 눈에 띈 건 20, 30대보다 지인들과 삼삼오오 온 장노년층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줄 선 노인들도 많아 코인이 뭔지 제대로 알고 온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의문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요즘 우후죽순 열리는 잡코인 투자 설명회도 젊은 세대보다 장노년층이 훨씬 많이 목격된다. 이쯤 되면 젊을 땐 공격적인 투자를, 나이 들면 수비적 투자를 한다는 말이 옛말이 된 듯하다. 하지만 잡코인 중에 정체를 알 수 없거나 시세 조종의 표적이 되는 게 상당수다. 월드코인도 “민간 기업이 개인의 생체정보를 마구잡이로 수집한다”, “실체 없는 폰지 사기다”라는 논란 속에 일부 국가가 사업을 중단시키면서 보름 만에 가격이 반 토막 났다.
▷비트코인 가격이 1억 원을 오르내리며 불장을 이어가자 덩달아 기승을 부리는 것이 가상자산 사기 범죄다. 지난해 경찰에 검거된 코인 범죄자는 1000명에 육박하며 1년 새 3배 넘게 급증했다. 카카오톡 등으로 특정 코인의 매매를 부추기는 ‘코인 리딩방’은 흔한 일이 됐고, 코인을 발행하겠다며 연예인, 운동선수 등을 앞세워 투자를 받은 뒤 잠적하는 ‘스캠 코인’이 성행하고 있다. 거래소에 상장된 종목과 이름만 같은 가짜 코인을 싸게 준다고 속여 돈을 가로채는 사기도 잦다.
▷그런데 코인 사기에 연루되는 장노년층이 늘고 있어 걱정스럽다. 최근 9개월 동안 금융감독원에 접수된 가상자산 사기 피해 3건 중 1건이 50대 이상의 신고였다. 올 들어선 60대 이상에서 피해 신고가 60% 가까이 급증했다. 장노년층 ‘코인 개미’ 가운데 노후자금이나 퇴직금 같은 목돈을 투자하는 큰손이 많다 보니 사기범들의 주요 타깃이 되는 것이다. 국내 가상자산 투자자 606만 명 중 1000만 원 이상의 코인을 보유한 사람이 20, 30대를 통틀어 10%도 안 되지만 50대와 60대 이상에선 각각 13%나 된다.
▷여기에다 장노년층이 블록체인, 대체불가토큰(NFT) 등 신기술에 익숙지 않다 보니 사기에 쉽게 현혹되는 편이다. 경기 불황을 틈타 매달 연금처럼 배당금을 준다고 꼬드기는 코인 사기에 노인들이 넘어가기 십상이다. 소득 없는 고령층이 한번 금융사기를 당하면 회복이 불가능하다. 사회적으로도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코인 범죄를 뿌리 뽑고 노인들에게 피 같은 노후자금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는 것도 시급한 민생 과제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4-19 “2009년생부터 평생 담배 못 사” 英 초강력 금연법 논란

올해 15세인 2009년생부터는 평생 담배를 살 수 없도록 한 초강력 금연법이 최근 영국 하원에서 1차 표결을 통과했다. 리시 수낵 총리가 추진한 법인데 여당인 보수당 의원들은 대거 반대하거나 기권하고 야당인 노동당이 압도적으로 찬성했다. 노동당은 “보건정책의 획기적인 진전”이라고 평가한 반면 보수당에선 “개인 자유를 침해하는, 보수당답지 않은 정책”이란 비판이 거세다. 리즈 트러스 전 총리는 작심 발언을 했다. “국가가 시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해선 안 된다. 경찰국가를 넘어 유모국가로 가자는 것인가.”
▷‘비흡연 세대법’이라고 불리는 이 법은 2009년생이 담배 구입 가능 연령(18세)이 되는 2027년부터 허용 연령을 한 살씩 올려 평생 못 사게 막자는 것이다. 흡연자를 처벌하는 건 아니고, 담배를 판 상인에게 벌금을 물리는 방식이다. 영국에서는 무상의료 시스템이 흡연으로 인한 질병을 치료하느라 과부하에 걸리면서 강력한 금연법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커져 왔다. 이런 목적으로 쓰이는 예산이 연간 28조 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 돈을 의사 채용과 병상 확충에 쓰면 다른 환자들이 의사를 기다리는 기간을 단축할 수 있어 금연법에 대한 서민들이 지지가 높다.
▷수낵 총리는 술 담배를 하지 않고 일주일에 하루는 금식할 정도로 자기관리에 철저한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단지 건강에 대한 소신 때문에 여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연법을 밀어붙이는 건 아니다. 사회복지 축소와 부자 감세 등 반서민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다 영국 역사상 최단기(44일)로 물러난 전임자(트러스 전 총리)의 실책이 그의 결단에 한몫을 했다. 게다가 야당인 노동당(45%)에 대한 국민의 지지율이 보수당(26%)보다 크게 높다 보니 중도·서민층의 지지를 얻으려는 목적도 있어 보인다.
▷이번 금연법이 발효되려면 하원의 최종 표결에 이어 상원까지 통과해야 한다. 작은 정부와 자유방임주의를 표방해온 보수당의 반대가 만만찮아 시행을 장담하긴 이르다. 흡연을 통제하면 담배 암시장이 난립하고, 전자담배 수요만 자극할 것이란 우려도 많다. 뉴질랜드 진보의 아이콘인 저신다 아던 전 총리(노동당)도 같은 내용의 금연법을 추진했지만 지난해 보수당으로 정권이 넘어간 뒤 법이 폐기될 위기에 놓였다.
▷“(시가 애호가였던) 윈스턴 처칠 전 총리를 배출한 보수당이 담배를 금지하려 한다니 미친 짓이다.” 보리스 존슨 전 총리는 수낵 총리를 저격하며 처칠을 소환했다. 처칠은 “나는 시가를 피우지 않는 사람을 믿을 수 없다. 시가는 생각의 동반자이자 실패의 위로자”란 말을 남길 정도로 골초였다. 하지만 그는 오랜 흡연으로 인해 폐질환과 고혈압에 시달리다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처칠의 경우는 금연법 도입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4-20(토) “혼자 사니 원룸에만 살아라?”…뿔난 1인 가구

신혼생활은 단칸방에서 시작한다는 얘기는 부모 세대에나 통하는 옛말이 됐다. 오히려 요즘은 혼자 살아도 방이 2개 이상은 필요하다는 사람이 많아졌다. 주거 환경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면서 더 넓은 공간에 대한 욕구가 커졌기 때문이다. 취미 활동을 위한 공간을 확보하고, 과거보다 훨씬 다양해진 생활가전을 넣다 보면 집이 꽉 찬다. 그런데 정부가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하면서 앞으로 1인 가구는 사실상 원룸에 살 수밖에 없도록 규정을 개정해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논란이 시작된 건 지난달 국토교통부가 ‘공공주택 특별법 시행규칙’ 개정안을 내놓으면서부터다. 영구임대·국민임대·행복주택을 공급할 때 가구원 수에 따라 공급할 수 있는 적정 면적(전용면적 기준)을 새로 정했다. 1명은 35㎡ 이하, 2명은 26∼44㎡, 3명은 36∼50㎡, 4명은 44㎡ 초과 식이다. 지금까지는 1인 가구에만 전용 40㎡ 이하라는 제한을 뒀는데, 1인 가구의 상한선은 낮추고 별도 기준이 없던 2∼4인 가구는 세분화했다.
▷공공임대 입주 희망자들은 선택권이 크게 제약돼 주거의 질이 떨어지게 됐다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1인 가구는 예전 기준대로면 방 1개에 거실이 있는 36㎡형까지 선택할 수 있었지만, 이젠 단 1㎡ 차이로 불가능해졌다. 그 아래 타입인 26㎡형, 29㎡형 등은 원룸 형태뿐이다. 2인 가구의 경우는 방 2개인 46㎡형 대신 그보다 작은 1.5룸 타입만 들어갈 수 있는데, 이런 환경에서 아이를 낳을 결심을 하기는 쉽지 않다. 이 때문에 현실에 맞지 않는 면적 제한을 폐지해 달라는 국민청원까지 올라왔다.
▷면적 기준을 만든 이유에 대해 국토부는 “저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자녀가 많은 가구가 넓은 면적의 공공임대주택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단지 내 1, 2인 가구에 해당되는 주택이 없는 경우에는 기준보다 더 넓은 주택에 입주할 수도 있다고 했다. 한정된 임대주택을 더 필요한 곳에 배분하겠다는 취지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달라진 주거 수요에 비해 면적 기준 자체가 지나치게 낮다는 게 문제다. 수요자 눈높이에 맞지 않는 초소형 임대주택을 무턱대고 지었다가 빈집으로 비어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주거의 질에 대한 요구는 높아지고 있다. 한국의 1인당 주거 면적은 2006년 26.2㎡에서 2022년 34.8㎡로 증가했다. 하지만 여전히 선진국엔 미치지 못한다. 미국(65.0㎡)의 절반에 불과하고 일본(40.2㎡)이나 영국(42.2㎡)보다도 좁다. 혼자 살면, 임대주택에 살면 비좁게 살아도 된다고 정부 당국자들이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하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4-22(월) G7 초청 불발… 외교 실패 논란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한국이 초청받지 못하면서 국내 정치로 불똥이 튀었다. 올해 G7 의장국인 이탈리아가 한국을 초청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전해진 시점이 윤석열 대통령과 집권당의 총선 참패 직후여서 파장이 더 미묘하다. 이탈리아는 6월 중순 열리는 G7 회의 때 정식 회원국 7개국 외에 아르헨티나 브라질(이상 남미), 이집트 튀니지 케냐 알제리 남아프리카공화국(이상 아프리카), 그리고 인도(아시아) 등 8개국 등을 초청하기로 했다.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대중국 관계를 희생시켜가며 미일 등 서방국과 연대를 강화했음에도 이렇다니 참담하다”고 외교 실패라는 주장을 폈다. 문재인 정부에서 국립외교원장을 지낸 한 조국혁신당 국회의원 당선인은 “눈 떠 보니 후진국”이란 표현까지 썼다. 대통령실은 “이탈리아가 자국 내 이민자 문제와 연결된 아프리카·지중해 국가 위주로 정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정부는 애써 태연한 듯했지만 이탈리아 초청을 위한 물밑 노력은 치열했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한-이탈리아 외교장관 회담에서 강력한 희망을 전달했다. 하지만 지난주 G7 외교장관 회의에 이미 조 장관은 초청받지 못했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관측이 늘었다. 정부가 G7 초청에 매달린 데는 이유가 있다. 윤 대통령은 한미일 3국 협력을 외교의 골간으로 삼는 것과 동시에 높아진 국제 위상에 걸맞게 처신한다는 ‘글로벌 중추국가 외교’ 노선을 채택했다. 이런 마당에 계속 초대받던 G7 회의에 초청받지 못한다면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한국이 G7 무대에 처음 초청된 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을 초청한 2020년부터다. 우리 반도체의 전략적 중요성이 주목받던 때와 겹친다. 코로나 위기로 그해 회의는 취소됐지만, 이후로 영국의 문 대통령 초청(2021년), 독일의 미초청(2022년 한국의 정권 교체기), 일본의 윤 대통령 초청(2023년)으로 이어졌다. 2020년 이후 4번 중 3번을 초청받게 되자 국내에선 ‘준(準)회원국쯤은 된다’는 분위기도 생겼다. 하지만 G7 회원국의 속사정은 제각각이다.
▷미국이 G7을 주도하는 가운데 영국 캐나다 일본이 밀착 공조를 한다. 하지만 유럽대륙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는 국익 계산법이 다르다. 미국 영국 일본이 우리를 초청했고, 독일 이탈리아가 뺀 것이 우연만은 아니다. 미국과 함께 쿼드, 오커스, 칩4 동맹을 만들어 중국의 위상 약화를 노리는 나라들은 한국을 품으려 애쓰고 있다. 관행대로라면 내년 이후로 캐나다 프랑스 미국이 차례로 의장국이 된다. 나라마다 초청 기준은 다를 것이다. 그때마다 일희일비할 수는 없다. 초청받았다고 과잉 홍보할 필요도 없고, 공들였던 외교 노력이 실패했을 때 “별일 아니다”라며 축소할 일도 아니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4-23 ‘위안부 동원 강제성 없었다’ 거꾸로 가는 日 교과서

“‘위험한 교과서’ 검정 통과를 즉각 취소하라.” 일본 문부과학성이 19일 레이와서적의 중등 역사 교과서 2권을 통과시킨 것에 대해 일본의 한 시민단체가 발표한 성명이다. 일본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올 만큼 이 교과서에는 일본군 위안부, 한일합병 등 한일 간의 과거사를 왜곡하는 내용들이 들어 있다. 정부가 주한 일본대사를 불러 항의하는 등 후폭풍이 거세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서술이다. 이 교과서는 “일본군이 조선 여성을 강제 연행했다는 사실은 없으며 그들은 보수를 받고 일했다”고 적었다. 돈을 벌려고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됐다는 취지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1993년 발표한 ‘고노 담화’에는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위안부 모집은)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행해졌다”고 돼 있다. 일본 정부도 인정한 내용을 학생들은 반대로 배우게 됐다.
▷이 교과서는 일제의 식민 지배는 미화하고 정당화했다. “안전 보장을 위해 일본이 주도해 조선의 근대화를 진행”한 것이고, 을사늑약 당시 고종이 “만족”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종은 늑약 체결 직전까지 이토 히로부미에게 사람을 보내 ‘대신들이 반대한다’며 유예를 요청했을 만큼 부정적이었고(최덕수 ‘근대 조선과 세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대표단을 보내기도 했다. 일본이 조선을 보호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합병한 게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교과서 몇 줄로 뒤집을 수 없는 역사다.
▷더 큰 문제는 일본 우익 사관을 반영해 역사를 왜곡한 교과서들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3월 검정을 통과한 이쿠호샤 중등 역사 교과서는 강제징용과 관련한 서술을 “혹독한 노동을 강요받았다”에서 “혹독한 환경에서 일한 사람들도 있었다”로 바꿔 징용의 강제성을 흐리게 했고, 야마카와출판의 교과서는 ‘종군위안부’ 표현을 삭제했다. 지난해에는 조선인이 ‘징병됐다’는 표현을 뺀 초등학생용 사회 교과서들이 승인됐다. 프랑스와 공동으로 제작한 역사 교과서로 객관적 시각에서 나치의 책임과 과오를 가르치는 독일과 대비된다.
▷현 정부 들어 한일 관계는 개선되는 흐름이지만 과거사 문제는 제자리다. 한국 정부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제3자 변제 방안을 내놓는 등 노력을 기울인 반면 일본은 달라진 게 없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최근 야스쿠니신사에 공물을 봉납했고, 외교청서에는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주장을 거듭 적었다. 여기에 역사 교과서까지 퇴행하고 있다. 정확하고 균형 잡힌 역사를 배워야 미래 세대에서라도 과거사 문제 해결을 기대할 수 있을 텐데, 일본 정부가 그 기회마저 빼앗고 있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4-24 80년 광주, 중동 분쟁지역 현장 지킨 AP기자 잠들다

1980년 5월 광주의 한 모텔에 몇몇 외국인 기자들이 모여들었다. 모텔 창문 밖으로 멀리 저항에 나선 광주시민들이 보였고, 신군부 진압부대도 대오를 갖추고 있었다. 그때 모텔에서 6m쯤 떨어진 옆 건물 옥상에 총을 든 군인이 나타나더니 기자들에게 손짓하며 떠날 것을 요구했다. 잠시 후 모텔방 유리창이 깨지며 총알이 날아들었다. 한 기자가 카메라를 꺼내 들고 창밖 촬영을 시도했다. 총알이 더 날아들자 기자들은 바닥을 기어서 빠져나왔다. UPI통신 기자가 1989년 미국 LA타임스에 쓴 5·18민주화운동 취재기에 담긴 내용이다.
▷어떻게든 촬영하려고 카메라를 꺼내 든 이는 AP통신 도쿄지국 테리 앤더슨 기자(당시 33세)였다. ‘뉴스 현장’을 찾아 한국으로 건너온 그로선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내밀었을 것이다. 80년 광주에선 희생자 수를 두고 논란이 컸다. 신군부는 초기에 3명이라고 발표했고, 시민들은 261명이라고 주장했다. 앤더슨 기자는 거리 취재 때 시신을 직접 셌다. “그렇게 많은 시신은 처음 봤다”며 하루에 179구까지 확인했다고 기억했다. 왜 굳이 세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기자는 원래 그렇게 일한다”라고 답했을 것이다.
▷앤더슨 기자가 지난 주말 미 뉴욕주 자택에서 76세를 일기로 숨졌다. 그가 세상에 더 알려진 것은 광주 취재 5년 뒤 AP통신 중동지국장으로 일하던 때 내전 중이던 레바논에서 헤즈볼라에게 납치된 일 때문이다. 그곳 수도 베이루트에서 동료와 테니스를 친 어느 날 괴한 3명에게 끌려갔다. 이들은 영어로 “걱정 마라. 이건 정치적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그로부터 2454일, 6년 8개월 동안 그는 인질이 됐다.
▷훗날 쓴 ‘사자굴’이란 회고록에 자세한 기록이 담겨 있다. 대부분을 눈이 가려진 채 지냈고, 수갑과 족쇄가 채워졌다. 몇 시간씩 기도하며 버텼다고 썼다. 당시 약혼녀는 임신 6개월이었고, 그때 태어난 딸은 여섯 살이 되어서야 사진으로만 보던 아빠를 만났다. 그는 귀국 후 헤즈볼라의 배후인 이란 정부를 상대로 1억 달러(약 1400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고, 액수가 밝혀지지 않은 큰 배상금을 받아냈다. 그 돈으로 해병대원으로 참전했던 베트남을 위해 학교 50개를 지었다.
▷언론을 떠난 그의 삶은 대학 강의와 자선사업이었다. 하지만 그는 레바논 근무 시절 “분쟁지역 취재는 내 삶에 가장 매혹적인 일”이라고 했던 대로 ‘현장을 지킨 기자’로 기억될 것이다. 민주화 시위를 기록하기 위해 광주를 찾았고, 남들은 피하는 중동의 분쟁지역을 지켰다. 그의 모습이 담긴 영상에는 왼쪽 가슴팍 주머니에 꽂힌 검은 볼펜과 빨간펜이 눈에 띈다. 세련된 정장 차림은 아니었지만 현장 기자라면 누구나 그랬을 모습 그대로였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4-25 빈 살만의 ‘네옴시티’ 사막의 신기루 되나

사우디아라비아가 사막 위에 짓는 미래형 신도시 ‘네옴시티’에서 가장 주목받는 건 주거지구 ‘더 라인’이다. 조감도를 보면 홍해 연안에서 사막을 향해 좁다란 담벼락 두 개가 끝없이 이어진 것 같지만, 실상은 서울 롯데월드타워만 한 높이 500m의 빌딩 두 채가 200m 간격을 두고 170km 길이로 서 있다. 이 거대한 유리빌딩에 사람들이 산다. 두 빌딩 사이엔 숲이 우거지고 강이 흐르고, 건물 안엔 사무실 학교 병원 등 필요한 게 다 있다. 170km면 서울에서 대전쯤 거리인데, 지하 고속철도로 20분이면 닿는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3년 전 이 길쭉한 선형 도시의 계획을 발표했을 때 웬만한 공상과학(SF) 영화도 울고 갈 정도라는 평가가 쏟아졌다. 실현 불가능한 허상이라는 비판에도 더 라인 프로젝트는 2022년 11월 첫 삽을 뜨며 현실화를 위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사우디의 미래를 이끌 대역사에 국내 건설사도 참여했다. 삼성물산과 현대건설 컨소시엄은 더 라인의 핵심 기반시설인 지하 철도 터널 공사를 맡고 있다.
▷사우디 수도 리야드의 인구가 700만 명인데, 현대 과학기술을 집약해 900만 명이 거주하는 최첨단 선형 도시를 만들겠다는 게 빈 살만의 야심 찬 구상이다. 1단계로 2030년까지 150만 명을 거주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최근 1단계 목표 인구가 30만 명으로 대폭 축소될 것이라는 외신 보도들이 잇따르고 있다. 지금 개발 속도라면 2030년까지 전체 170km 중 2.4km 정도만 공사를 끝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우디의 재정 상황도 회의론에 힘을 보태고 있다. 더 라인을 비롯해 네옴시티 전체 공사비는 당초 5000억 달러에서 1조5000억 달러까지 불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초기 사업비를 대야 하는 사우디 국부펀드는 축구, 골프, 게임, 전기차 등에 돈을 펑펑 쓰면서 보유 현금이 1년 새 500억 달러에서 150억 달러로 쪼그라들었다. 국제유가가 예상보다 낮게 유지된 탓에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의 순이익도 지난해 25%나 줄어 오일머니를 투입하기도 쉽지 않은 형편이다.
▷이러다 보니 사우디 정부는 해외 투자 유치에 공을 들이고 있다. 미국 뉴욕 맨해튼에 사무실을 연 데 이어 전 세계 은행 관계자들을 현장으로 초청해 투자 설명회를 연다고 한다. 최근 ‘세계 최대 토목공사가 24시간 진행되고 있다’는 문구를 달아 더 라인 공사 현장을 촬영한 영상까지 공개했다. 빈 살만이 ‘탈(脫)석유’를 위해 추진하는 네옴시티에는 더 라인 외에도 바다 위에 조성되는 산업단지 ‘옥사곤’, 2029년 겨울아시안게임이 열릴 관광레저단지 ‘트로제나’ 등이 들어선다. 완전체 도시를 표방한 네옴이 사막의 기적이 될지, 신기루가 될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4-26 첫 회의서 ‘용산 비서들 정치 행위’ 근절 강조한 정진석

정진석 대통령비서실장이 그제 정책실장, 수석비서관들과 가진 첫 회의에서 “대통령실의 정치는 대통령이 하는 것이지 비서들이 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실 또는 대통령실 관계자라는 이름으로 부정확한 얘기가 산발적으로 (언론에) 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이런 경고는 용산발 국정 난맥을 끊어내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듯하다.
▷‘말의 기강’을 세우겠다는 첫 지휘 메시지는 공식라인을 건너뛰는 일 없이 업무계통을 정확히 밟으라는 지시이기도 하다. 지난주 불거졌던 ‘박영선 국무총리-양정철 비서실장 유력 검토’ 보도가 남긴 파장을 염두에 둔 것이다. 보도된 대로 ‘문제 발언’의 당사자로 지목된 용산 참모는 인사, 정무, 대언론 접촉이 본 업무가 아닌데도 나섰다. 또 휘발성이 강한 더불어민주당 측 인사의 핵심 요직 발탁 아이디어를 비서실장, 정무수석 등 최고위 참모들조차 알지 못하는 가운데 언론에 흘렸다.
▷민주당 인사의 총리 발탁이 상상 못 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협치 의지를 밝히고, 국회 제1당이 된 민주당에 의견을 구하기도 전에 공개되면서 일의 순서가 뒤엉켰다. 최고 권부의 일 처리가 느슨하다는 인상을 남겼다. 총선을 거치며 얇아진 대통령 지지층의 반발과 실망을 다독이는 사전정지 작업은 할 틈도 없었다. 대통령의 업무가 이렇게 다층적 고려 없이 추진되어도 되나.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대변인은 첫 보도 3시간 뒤 “논의한 바 없다”고 공식 부인했다. 그러나 그런 뒤에도 “아이디어 차원에서 논의한 적은 맞다”는 발언이 이어졌다. 단순 실수를 넘어 ‘말의 실패’였다. 영입 대상으로 삼았던 박영선, 양정철 두 인사는 대통령 부부와 이런저런 사적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와중에 김건희 여사와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 용산 참모가 발언 당사자였다는 점에서 대통령실 계통 파괴의 심각성이 더 부각됐다. 지난 2년간 검찰 출신, 측근 그룹 출신 등 참모 그룹은 ‘누가 윤심에 더 가까운가’를 두고 경쟁이 존재했다고 한다. 과거 정부 때도 있었던 일이라지만, 비서들의 정치가 구설로 이어진 경우는 드물다.
▷“(비서실은) 말하는 곳이 아니라 일하는 곳”이라고 질책한 정 실장은 용산을 어떻게 이끌어 갈까. 그동안 직보(直報)의 형식으로, 다양한 의견 청취라는 이름으로 걸러지지 않은 의견과 정보가 용산 최상층부에 전달된다는 후문이 많았다. 그러던 중 어설픈 언론 플레이로 대통령실의 권위와 기강을 흔든 일이 생겼다. 이런 비공식 정보의 흐름을 교통정리 해내는 것 또한 정 실장이 다짐한 ‘말의 기강’을 잡는 일이다. 그 당사자를 솎아내지 않은 채 용산의 난맥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용산 비서들의 정치 행위를 근절하겠다는 정 실장의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4-27 부자들의 아침 일과, 종이신문 읽기

억만장자들의 신문 사랑은 각별하다. ‘신문 중독자’라고까지 불리는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은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하루에 5, 6개의 신문을 샅샅이 훑는다. 청소년들에게는 “세상을 알려면 신문부터 읽어라”고 조언하곤 했다.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도 매일 아침 신문을 읽고 커피를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소학교만 나와서 어떻게 명문대 출신들을 거느리고 있냐는 질문에 “나는 ‘신문대학’을 나왔소”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 부자들의 아침에는 여전히 신문이 있다. 25일 하나금융연구소가 내놓은 ‘2024 대한민국 웰스 리포트’에 따르면 금융자산 10억 원 이상을 보유한 부자의 33%는 오전 루틴으로 종이신문·뉴스를 본다고 답했다. 금융자산 1억 원 미만인 일반 대중(18%)의 응답보다 훨씬 높았다. 부자 중에서도 자산 규모가 커질수록 신문, 뉴스를 가까이 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일반인들이 주로 연예·스포츠 뉴스를 많이 챙겨 본 반면 부자들은 경제, 정치, 생활문화 순으로 관심을 보였다.
▷부자들이 빠뜨리지 않는 루틴에 독서가 있는 것도 신문 읽기와 무관치 않다. 일반 대중이 1년에 약 6권의 책을 읽는 동안 부자들은 10여 권의 책을 읽었다. 특히 금융자산 100억 원 이상의 부자들은 연간 20여 권을 읽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경영 도서보다는 오히려 인문·사회 분야의 책과 소설을 선호했다. 부자들에게 ‘읽는다’는 행위는 특별히 시간을 내서 하는 것이 아닌 일상 자체였다. 신문과 책을 늘 곁에 둠으로써 사유의 폭을 넓히고 남들이 보지 못한 보배를 활자 속에서 건져 올렸다.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부자들이 종이신문을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평면적이고 파편화된 정보만으로는 뉴스의 가치를 제대로 알기 어렵다. 꼭 필요한 정보를 선별하고 뉴스의 경중을 편집으로 보여주는 종이신문의 힘이 여기서 나온다. 미국 카네기멜런대와 다트머스대 연구진의 실험에 따르면 디지털 화면을 볼 때보다 종이로 글을 읽을 때 내용을 더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창의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고 한다. 종이신문을 매일 꾸준히 읽으면 주의·집중력이 향상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관심 있는 것만 보여주는 알고리즘의 한계에 갇히지 않고 허위 정보에 속지 않도록 하는 것도 신문의 강점이다. 지난해 12월 일본 요미우리신문이 한미일 3국의 3000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신문을 읽는 사람이 그러지 않는 사람보다 허위 정보를 더 잘 가려내는 것으로 분석됐다. 좋은 정보를 골라 꼭꼭 씹어 삼킬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신문의 힘이다. 범람하는 정보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통찰력을 얻기 위해 부자들이 선택한 가성비 높은 투자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4-29(월) ‘필수 의료’ 붕괴의 또 다른 주범, 실손보험

“실비(실손의료비 보험) 있으세요?” 동네 병원에 가면 주민등록번호와 함께 꼭 묻는 말이다. 실손보험은 건강보험이 보장하지 않는 자기부담금과 비급여 진료비를 보상해준다. 허리가 아플 때 받는 도수치료, 감기에 걸렸을 때 맞는 수액주사 등이 바로 비급여 진료다. 환자로선 실손보험이 없으면 치료의 질이 달라지는 건지, 돈이 안 돼서 반갑지 않단 건지 영 껄끄러운 질문이기도 하다.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가 실손보험이 필수 의료 기피 현상을 초래한 원인이라고 보고 개선을 논의한다고 한다.
▷건보가 가격을 정하지 않는 비급여 진료비는 병원이 부르는 게 값이다. 가격이 비싸면 수요가 줄기 마련이지만 의료 시장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국민보험이 된 실손보험 때문이다. 실손보험 가입자 수는 2010년 2080만 명에서 2022년 3997만 명으로 늘었다. 그 사이 비급여 진료비는 32조 원으로 거의 두 배가 됐다. 건보가 부담하는 급여 진료비보다 환자 개인이 내는 비급여 진료비가 빠르게 늘어난 결과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개인 의료비 부담이 가장 높은 나라로 꼽힌다.
▷실손보험이 창출한 고가의 비급여 시장은 필수 의료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소득과 워라밸 격차가 점점 벌어지면서 응급실과 수술실에서 사명감으로 버티던 의사들 중 상당수가 자괴감을 느끼고 개원을 선택했다. 2020년 진료과목별 연간 평균 임금을 보면 안과 의사 4억5837만 원, 정형외과 4억284만 원, 재활의학과 3억7930만 원 순이었다. 모두 실손보험에 기대 비급여 진료를 많이 하는 진료과목인데 의료비가 비싼 미국 의사보다 수입이 높다고 한다.
▷건보는 빈약한 재정에서 출발했다. 그렇다 보니 급여 보장 항목이 적고, 진료비는 원가에 못 미치도록 설계됐다. 병원은 ‘3분 진료’로 환자를 많이 보거나 비급여 진료를 늘려 이런 손해를 벌충해 왔다. 정부가 메스를 대려는 혼합진료가 대표적이다. 무릎이 아파 병원에 갔을 때 의사로부터 진찰받고, 급여 물리치료와 비급여 도수치료를 섞어 받는 것이 혼합진료이다. 이를 금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데 개원가에선 의대 증원보다 더 반발 강도가 세다.
▷비급여 진료 시장은 수요자가 아닌 공급자가 만들어 낸 시장이다. 보험업계는 도수치료, 렌즈 삽입 백내장 수술 등을 보상하는 상품을 출시해 경쟁적으로 가입자를 늘려 왔다. 이는 도덕적 해이를 부추겨 과잉 진료를 하지 않는 의사나, 의료 쇼핑을 하지 않는 환자는 바보가 되는 구조를 만들었다. 실손보험을 이대로 두면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할 비용이 얼마나 불어날지 알 수 없다. 서둘러 바로잡지 않으면 필수 의료를 살리겠단 의대 증원의 효과도 반감될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4-30(화) 유튜브 보는 게 독서가 될 수 없는 이유

요즘 골목책방은 ‘인스타 성지(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 사진촬영 명소)’가 된 곳이 많지만 책방 주인들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다. 손님들이 책은 안 사고 근사하게 진열된 책들을 배경으로 사진만 찍고 가는 경우가 많아서다. 책방의 감성적이고 지적인 분위기를 소비하는 데 그치는 것이다. 또 책 판매는 줄어드는 반면 인테리어 소품용 모형 책은 잘 팔린다고 한다. 책은 안 읽어도 책이 풍기는 지성미는 갖추고 싶다는 게 요즘 세태다.
▷한 해 동안 책을 단 한 권이라도 읽은 성인 비율(종합독서율)은 지난해 기준 43%다. 정부의 독서실태조사가 처음 시작된 1994년 이후 최저치다. 30년 전 이 비율은 86%였다. 조사 대상자들이 책을 안 읽는 이유는 주로 두 가지다. 일하느라 시간이 없고, 유튜브 등 책 이외에 다른 매체를 이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10, 20대 사이에선 유튜브 같은 동영상을 시청하는 것도 독서의 일종이란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독서 인구는 줄지만 유튜브로 책을 소개하는 ‘북튜브’ 채널은 인기다. 가성비 높은 지식 소비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볼거리는 늘었는데 시간이 한정돼 있다면 한 권에 10시간 이상 걸리는 독서보다 10분∼1시간 이내로 핵심을 추려주는 영상에 사람들이 몰릴 법도 하다. 책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이슈와 정보를 정리해주는 지식 콘텐츠가 많아 유튜브로 세상을 배운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독서만큼 도움이 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유튜브를 볼 때와 독서를 할 때 우리 뇌는 다르게 반응한다. 영상은 완제품 형태로 눈을 거쳐 뇌리에 바로 맺힌다. 뇌가 일할 필요가 없다. 반면 책은 뇌를 바쁘게 만든다. 글은 설명과 묘사, 정보를 담은 원재료일 뿐이고 한 문장 한 문장이 머릿속 지식과 경험, 정서와 뒤섞이면서 활발한 시뮬레이션이 펼쳐진다. 책을 읽다 잠시 멈추게 되는 게 이런 작용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영상을 100명이 보면 거의 비슷하게 기억하지만 책 한 권을 100명이 읽으면 각기 다른 100개의 스토리가 생긴다. 스쳐 흘러가는 영상과 달리 책에서 읽은 건 깊이 각인되는 이유는 나만의 맥락이 담겨 저장되기 때문이다.
▷책 대신 유튜브 보는 습관이 들면 당장은 단순명료하게 가공된 지식을 얻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장기적으론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게 될 가능성이 높다. 자칫하면 궁금한 주제를 짧고 흥미롭게 만든 영상만 골라 보고, 그마저 메뚜기 뛰듯 띄엄띄엄 보거나 ‘세 줄 요약’에만 익숙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세상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단순화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은데 영상 제작자가 주관적으로 편집한 지식에 길들여지면 흑백 논리에 잘 휘둘리고, 가짜 정보에 대한 분별력도 떨어지기 쉽다. 독서는 시간이 걸리지만 그 정도 노력을 들여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우리에게 준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