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1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조선일보 2024
2024.02.03
〈101회〉“‘김일성의 아이들’아, 이승만의 ‘건국 전쟁’ 보러 가자!”
변방의 중국몽 <19회>

▲이승만 전 대통령과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만남. 1948년 8월 김포 공항 추정. 동경에 있던 맥아더 장군 내외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기념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로 갔다. 이때가 맥아더의 한국 첫 방문이었다. /공공부문
‘김일성의 아이들”을 위한 영화 “건국 전쟁”
1980년대 대학에 들어가 마르크스 추종자가 되고 “김일성의 아이들”로 거듭났던 86세대 운동권들은 날마다 머릿속으로 이승만을 형틀에 묶어두고 “미제 꼭두각시 남북분단 원흉”이라며 돌팔매질 해댔다. 해방 전후사에 관한 극좌 편향 역사관에 빠져 김일성 주체사상을 신봉했던 주사파 집단은 더더욱 이승만 죽이기에 혈안이 되었다. 그들은 풍문과 헛소문만 듣고서 이승만을 증오하고 조롱했으며, 거짓 선전과 허위 선동을 일삼으며 그의 인격을 살해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 김일성을 향한 숭배심이 자라날수록 이승만에 대한 적개심은 커져만 갔다.
문제는 86세대가 이승만에 관해선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을 향해 “분단 원흉,” “친일 매국노,” “미제의 꼭두각시,” “독재자” 등 막말을 일삼는 이들은 정작 이승만이 누군지 제대로 아는 바가 없다. 모르면서 분노하고, 모르니까 증오한다. “먹물”의 자기기만, 레닌이 말하는 좌익 소아병이다. 역사적 무지가 정치적 극단주의를 낳는다.
동유럽 여러 나라를 누비며 1950년대 북한전쟁 고아들의 진귀한 영상을 발굴하여 다큐멘터리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2020년)을 만든 김덕영 감독이 최근 “건국 전쟁”으로 돌아왔다.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이승만을 둘러싼 악의적 모함, 무도한 거짓말, 음해성 가짜뉴스, 교묘한 이미지 조작을 하나하나 파헤치고 해체하는 정직하고 성실한 작품이다.
희귀 영상과 함께 논쟁적 이슈가 치밀하게 연결되어 흥미진진하면서도 스릴감이 넘친다. 누구보다도 1980~90년대 북한의 선전·선동에 넘어가서 청춘을 허비했던 “김일성의 아이들”이 꼭 봐야 할 중요한 기록영화다. 바로 그들의 귓가에 속삭이고 싶다. “김일성의 아이들아, 함께 손잡고 ‘건국 전쟁’ 보러 가자!”
대한민국을 만든 이승만의 의지와 비전
40년의 세월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스탈린 공산 전체주의의 직접적 위협을 물리치고 대한민국이라는 자유민주주의 신생 독립 국가를 극적으로 건립한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위인이다. 류석춘 교수가 지적하듯 대한민국의 건국은 60여 년 긴 세월에 걸쳐서 이승만의 근대화 의지, 항일 의지, 그리고 반공 의지가 역사적으로 실현되어 간 파란만장의 과정이었다.
1) 이승만의 근대화 의지란 서구의 근대 문명을 받아들여 왕조사의 구습과 병폐를 철폐하고 한반도에 자유롭고, 민주적이고, 개방되고, 헌정적인 근대적 국민국가를 세워야만 한다는 간절한 염원과 선명한 비전과 부동의 확신을 이른다.
2) 이승만의 항일 의지는 미·영 중심의 새로운 자유주의적 세계질서의 도래를 내다보고서 한국의 운명을 그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구체적인 외교 전략이자 구체적인 독립 노선으로 표출되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가 시대착오적 군국주의에 빠져 이미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확신하고, 미국이 일제를 무너뜨릴 때 한국에 독립이 을 수 있음을 내다봤다. 자유민주주의자 이승만의 항일 의지는 단순한 종족주의적 반일 감정이 아니었다. 그는 전 세계를 향해서 일본 제국의 정신병적 천황 숭배, 쇼비니즘적 팽창주의, 전체주의적 인간성 파괴와 민족 말살의 식민주의를 체계적으로 비판하고 신랄하게 고발했다.
3) 이승만의 반공 의지란 스탈린의 지령을 받는 북로당과 남로당의 연합 작전에 대항하여 천신만고의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았던 그의 확고부동한 자유의 정치 철학과 예언자적 혜안을 이른다.
1940~50년대의 국제 정세 속에서 이승만은 자유 진영의 그 어떤 지도자보다 공산주의의 이념적 악마성을 더 명확하게 꿰뚫어 보았다. 이승만의 반공 의지는 공산정권과 타협하려는 미국 시민사회의 여론을 움직여 미국 의회의 정치인들을 압박하고 미국 정부를 설득하여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의 최전방으로 존속시키는 그의 능수능란한 외교술로 표출되었다.
예지자 이승만의 독립운동: 국제 정세를 바꾸는 외교 노선
이승만은 진주만 공습 이전에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에서 임박한 일제의 미국 침략을 정확하게 예언했다. 그는 무섭도록 날카로운 형안(炯眼)의 예지자였다. 진주만 공습이 터진 후 패닉 상태에 빠진 미국인들은 이승만의 설명을 듣고서야 왜 미국이 일제의 급습에 속수무책 당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이승만은 1882년 조미 통상조약을 어기고 일제의 조선 합방을 방치한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의 원칙 배반과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고도 “대한 독립”을 외면한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1856-1924) 대통령의 자기모순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미국이 외교적 고립주의의 미망에 빠져서 전체주의 파쇼 정권의 등장을 수수방관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승만은 미국 정부를 향해서 미합중국을 건립한 국부들의 의도에 따라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임무를 완수하라 촉구했다. 미국 헌법의 기본 정신을 일깨워 미국 정부를 움직이는 이승만의 “도덕 외교(moral diplomacy)”는 세계 대전의 격변기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
지금도 이승만을 미국의 꼭두각시였다는 근거 없는 악성 루머가 한국의 다수 대중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 지난 60여 년에 걸쳐서 이승만에 악감정을 품은 학계와 언론계와 문화예술계의 좌편향 인사들이 줄기차게 역사를 왜곡하고 허위 정보를 생산하고, 가짜뉴스를 유포하고, 영상매체를 악용해 거짓 선동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교육활동과 외교 독립운동을 재조명한 책 저서 <<외국 친구들(Foreign Friends)>>의 저자 미국 위스콘신 대학 대빗 필드(David P. Fields) 교수는 일언지하로 그러한 악성 루머가 모두 거짓이라 단언한다.
미국 여론을 움직여 미국 정부를 견인하는 외교술
이승만은 미국의 요구에 굴복하지도, 미국의 권력자에 아첨하지도 않았다. 그는 1945년 이전부터 이미 미국 시민의 마음을 사로잡아 미국 정치를 움직이는 놀라운 외교력을 발휘했다. 특히 일제의 진주만 습격 이후 이승만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펄 벅(Pearl S. Buck, 1892-1973), 대통령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Eleanor Roosevelt, 1884-1962) 등의 후원을 받으며 중요한 집회 현장에서 미국의 세계사적 임무와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했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미국의 사명이 무엇인지 새삼 일깨웠던 미국인의 스승이었다. 1910년대부터 이승만은 미국 전역을 다니며 수백 회의 대중 연설을 통해서 자유민주주의 기본 정신과 미국의 임무를 설파했다. 물론 그의 목적은 “대한 독립”의 역사적 당위성과 도덕적 정당성을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코리아란 국명도 잘 모르던 평범한 미국인의 의식에 이승만은 한국이 일본과 투쟁하는 미국의 친구라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1942년 1월 12일자 시카고 데일리 타임스(Chicago Daily Times)의 삽화에는 한국이 일제의 첫번째 희생자로 묘사되어 있다. 당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인식이 급격하게 바뀌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1945년 4월~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 창설을 위한 국제회의에 참석한 이승만은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그해 2월 얄타 회담 당시 소련의 스탈린과 비밀 조약을 맺었다고 맹비난하면서 국제사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요청했다. 같은 해 10월 16일 33년의 해외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이승만은 도착하기 무섭게 미국이 제안한 신탁통치안이 소련의 한반도 지배를 감추는 속임수라 비판하면서 즉각적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미군정 하지(John R. Hodge, 1893-1963) 중장은 격노했지만, 신탁통치를 반대했던 대다수 국민은 그를 지지했다. 이승만은 미군 점령기 소련과의 모든 타협 시도를 철저하게 비판하고 저지했다. 1948년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미국의 지원이 있든 없든 북진통일을 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이승만은 한반도가 재통일될 때까지 전쟁을 중단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는 휴전협정에 한국군 대표를 보내지 않았고, 심지어는 휴전 지역에 한국군 공군을 보내서 폭격하기도 했다. 휴전 회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3년 6월 18~19일 이틀에 걸쳐 이승만은 “제네바협약과 인권 정신”을 근거로 전국 8개 포로수용소에서 2만7388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중대 결정을 감행했다.
놀랍게도 그 결과 유엔군 사상자가 더욱 늘어났음에도 미국인의 다수는 이승만을 지지했다. 1953년 6월 갤럽 조사에 따르면 “한국이 우리와 협조한다고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57%의 국민이 긍정 답변했다. 부정 답변은 22%에 그쳤다. 명실공히 세계 최강국 미국의 다수 시민은 왜 태평양 건너 약소국의 대통령 이승만을 그토록 지지하고 응원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연세대학교 이승만 연구소에 소장된 2,700여 점의 “지지 서한(letters of support)”들 속에 숨어 있다. 이 서한들은 대부분 미국 각계각층의 다양한 시민들이 자유 투사 이승만에게 자발적으로 발송한 감사의 글이다. 미국의 계관 시인(poet laureate)들도 그를 칭송하는 시를 써서 헌정했다.
“그대가 든 횃불로 별과 사람이 움직이니
그대 정신은 드높이 타오르는 코리아이려니~”
“Yours is the torch that men and stars move by,
Your Spirit is Korea flaming high.”
미국의 시민들은 그렇게 미국의 기회주의적 정치인들을 꾸짖고 일깨우는 완강한 자유민주주의자 이승만의 슬기와 용기에 경탄하고, 강단과 기지에 열광했다. 이승만에 대한 미국 시민의 광범위한 지지와 존경이 있었기에 이승만은 공산 세력과 타협하려는 미국의 정치인들을 당당하게 꾸짖을 수 있었고,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과단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승만의 시론, “왜 나는 홀로 섰는가?” 1953년 8월 16일 이승만의 시론을 2면에 걸쳐 게재한 워싱턴 D.C.의 이브닝스타(Evening Star)지.
돌이켜 보면 그의 탁월한 외교력은 국제정치에 대한 그의 해박한 식견,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 인류적 보편가치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그의 과감한 결단력에서 나왔다. 이승만은 범인류적 보편가치를 선양하고 자유주의의 기본원칙을 설파하고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확신했기에 언제 어디서든 그의 발언은 일관되고, 정연하고 당당했으며, 돌직구처럼 날카롭고 간명했다.
1954년 7월 28일 이승만은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회의에 초빙되어 연설했다. 그는 미국의 공군과 해군이 중국과 북한의 공산 세력과 전면전을 준비하는 한국의 150만 병력과 대만의 63만 병력을 지원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자유 진영이 중국 본대륙을 되찾지 못하면 공산 세력의 궁극적 승리를 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중국공산당은 250만 상비병력을 갖추고 있지만 한국전 당시 중국 측 포로 14,369명이 대만으로 간 반면, 오직 220명 만이 대륙을 택했음을 기억하자고 그는 미국 의회에 촉구했다. 연설 막바지에 그는 “이 세상을 힘겹고 두렵게 만든 공산 세력에 대해 부드럽게 대하면 곧 노예 신세를 면할 수 없다”면서 미국 독립전쟁의 이상과 남북전쟁의 원칙을 수호하기 위해 모두 궐기하자고 부르짖었다. (New York Times, 1954. 7. 29) 이승만의 연설에 대한 미국 의회는 33차례나 열광적인 기립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1954년 8월 2일 뉴욕 맨해튼 영웅의 협곡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카퍼레이드를 하는 모습. 영화 '건국전쟁'의 김덕영 감독이 2023년 6월 미 워싱턴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발굴한 약 45초 분량의 동영상 화면 캡쳐/김덕영 감독 제공
닷새 후인 8월 2일 이승만은 뉴욕 맨해튼 중심가를 관통하는 마천루 사이 “영웅의 협곡(Canyon of Heroes)”에서 수십만 뉴욕 시민의 환대를 받으며 가두 행진을 할 수 있었다. 강건한 자유민주주의자 이승만은 그렇게 미국의 건국 이념을 미국 의회에서 일깨웠고, 이에 감동한 미국의 시민들은 자유·민주·독립의 혁명가 이승만에게 지상 최고의 가두 행진을 누리는 기쁨을 베풀었다. 그 순간 자유 투사(freedom fighter) 이승만은 진정 세계사적 인물로 기록되고 있었다.
2023년 4월 중순 김덕영 감독은 캐나다에 살고 있는 생면부지의 나에게 이승만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겠다며 이메일을 보내왔다. 며칠 후 첫 전화 통화에서 그는 나에게 도서관과 기록원을 몇 달 동안 샅샅이 뒤졌건만 1954년 8월 2일 뉴욕시 맨해튼 이승만 대통령 가두 행진의 동영상을 찾을 수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김 감독은 1950년대 대한 뉴스를 면밀하게 검토하다가 누군가 바로 그 가두 행진의 첫 프레임만 남겨놓은 채 나머지는 싹둑 잘라 제거했음을 발견했다. 누군가 고의로 그 필름을 가위질했지만, 지구 어딘가엔 그 영상이 존재함을 확신한 김덕영 감독은 땅속의 유물을 캐는 고고학자처럼 사라진 영상을 찾아다녔다.
결국 지난해 6월 그는 미국 워싱턴 DC 부근의 국립 문서기록 보관소(NARA)에서 긴 세월 미국 정부에서 요원으로 근무했던 한 미국인의 도움을 받아 45초짜리 문제의 동영상을 찾아냈다. 70년의 세월 어둠 속에 묻혀 있던 그 영상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빛나는 한 장면이다. 이제 그 영상이 영화 “건국 전쟁”의 은막 위에서 국민 눈앞에 공개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세운 이승만, 공산 디스토피아를 만든 김일성
1948년 건국된 이래 대한민국이 단계적으로 성취해 간 산업화, 민주화, 선진화의 전 과정은 이승만의 근대화 의지, 항일 의지, 반공 의지가 없이는 설명될 수가 없다. 구체적으로 이승만은 남로당의 반란과 폭동, 북로당의 공산 침략 전쟁에 맞서서 미국 주도의 자유적 국제질서(liberal international order) 속에 대한민국을 편입시킨 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개방적 무역 입국의 기초를 닦았다. 이승만의 3대 의지를 빼고서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존재를 역사적으로 논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북한에선 불멸의 절대군주로 추앙되며 전 인민의 인격신으로 군림하는 김일성이란 인물의 강력한 공산화 의지, 불굴의 반미 의식, 완고한 쇄국 열정, 마오쩌둥식 대민지배욕, 스탈린식 불멸 의지를 빼고선 오늘날 북한 현실을 절대로 설명할 수 없다. 히틀러를 빼고서 독일 제3제국의 정치범죄를 논할 수 없고, 스탈린을 빼고선 구소련의 인권유린을 논할 수 없음과 같은 이치다.

▲2024년 2월 1일 전국 120여 개 상영관에서 동시 개봉된 김덕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김덕영 감독 제공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면, 이승만이 추구한 자유민주주의가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들었고, 김일성이 추구한 공산주의와 주체사상이 오늘날의 북한을 만들었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승만 노선은 자유와 민주와 독립과 번영의 큰길을 열었다. 김일성 노선은 억압과 독재와 예속과 빈곤의 수렁을 팠다.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는 인류적 보편가치며 한국사의 정통 이념이다.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전체주의적 궤변이며 민족사의 반역 사상이다.
바로 그 점에서 86세대 주사파 운동권들은 한국 헌정사 최악의 이념적 일탈자들이었다. 그들은 1960년대 대한민국에 태어나 학교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배우며 자랐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의 헌법이 보장하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역으로 악용해서 그들은 김일성을 떠받들었다. 단파 라디오로 북한 방송을 들으며 조선노동당과 통일전선을 이뤄서 대한민국의 체제 전복을 꾀했다. 그동안 한국 사회는 “김일성의 아이들”이 손쉽게 정치권력을 거머쥐고 승승장구하는 부조리와 불합리를 속수무책 방치해 왔다. 인간의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고 믿고 다시금 그들의 귓가에 속삭여 본다. “‘김일성의 아이들’아, 함께 손잡고 ‘건국 전쟁’ 보러 가자.” <계속>
〈102회〉‘이승만 죽이기’ 60여 년, ‘팩트’를 지어내는 역사가들
변방의 중국몽 <20회>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건국을 선포하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공공부문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의 한 유명 교수(역사학자)가 2년 전 어느 대중 강연에서 1952년 최초의 국민 직선제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를 통해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 대통령을 폄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당시에 문맹률이 높은데 누가 기호 1번 차지하느냐가 되게 중요하거든요. 이승만 대통령이 기호 1번이에요. 당연히 (당선)되는 겁니다. 이건 뭐, 기본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강한 권력을 차지하게 되는 거고요······.”
이 역사학자는 이날 강의에서 김구도 김규식도 없는 1952년 상황에서 국민이 아는 정치인이라곤 이승만이 유일했으며, 전쟁 중이라 다수 국민은 정치엔 관심이 없었을뿐더러 유권자 대부분은 문맹이어서 누구든 기호 1번을 달고 나오면 당선되는 게 당연했다는 주장을 마구 펼쳐댔다. 이승만이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이유는 이승만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 승인도 아니라 국민적 무관심과 무지의 결과였다는 기괴한 해석이다. “독재자 이승만”이 비민주적 속임수로 우매한 대중을 기만하여 독재 권력을 연장했다는 86세대 좌편향 학자들의 전형적인 논법인데, 과연 학술적 타당성이 있을까?

▲유튜브 채널 “캐내네 스피치”: [최강 1교시] “끝나지 않는 전쟁, 끝나야 할 전쟁,” 38분 30초경. https://www.youtube.com/watch?v=MsfAVHvC_lI&t=2429s
서울대학교 유명 역사학자의 발언이라 무조건 믿고 본다면 큰 오산이다. 세상에는 정치 편향에 휘둘려 현실을 왜곡하고 문서를 곡해하는 역사학자들이 수두룩하다. 역사 서술에서 악마는 잠복한 바이러스처럼 언제나 디테일 속에 똬리 틀고 있다. 그 악마를 찾아내기가 그다지 어렵지도 않다. 인터넷 검색창에 “제2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라는 검색어만 넣고 클릭하면 관련 사실이 줄줄이 굴비처럼 엮여 나온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 선거 역사관과 나무위키 “제2대 대통령 선거” 참조
1952년 8월 5일 전쟁 와중에 치러진 제2대 대한민국 정·부통령 선거에서 기호 1번을 달고 출마한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이 아니라 조봉암(曺奉岩, 1898-1959)이었다. 이승만은 기호 2번이었다. 또한 전쟁 상황이었음에도 전국 투표율은 88.09%에 달했다. 사상 처음 치러지는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 국민 다수는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을 증명하는 놀라운 수치다. 그 결과 74.61%라는 실로 무서운 득표율을 과시하며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선거 관련 자료를 조금만 들춰보면 누구나 위의 객관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번을 달고 출마한 조봉암의 선거 포스터도 수없이 발견된다.
그럼에도 대중 앞에서 왼손 검지로 1자까지 만들어 보이면서 이승만이 기호 1번을 달고 나와 문맹의 유권자들은 무조건 1번을 찍었다고 단언하고 있는 저 역사학자는 대체 왜, 무슨 생각으로 그런 뻔한 거짓말을 하는가? 무엇을 바라고, 어떤 정치적 목적으로 그런 가당찮은 허위 정보를 퍼뜨리는가? 직접 확인도 하지 않고 지레짐작을 객관적 사실처럼 꾸며서 말했다면 용서받기 힘든 학문적 부정직(academic dishonesty)이다. 이승만을 폄훼하기 위해 고의로 그런 거짓을 말했다면 이념적 인격 살해이며 정치적 역사 날조이다.

▲조봉암은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기호 1번을 달고 출마했다.
역사학자의 거짓말을 폭로한 영화감독
이 역사학자의 터무니없는 오류를 내게 알려준 인물은 최근 전국에서 상영 중인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 전쟁”을 만든 김덕영 감독이다. 2023년 4월 중순 김덕영 감독은 캐나다에 있는 나와의 첫 전화 통화에서 “건국 전쟁”의 기획 의도를 소상히 알린 후 말했다. 저 역사학자의 말이 진짜인지 검증하기 위해 “1950년대 선거 포스터를 샅샅이 찾아봤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단 한 번도 기호 1번을 달고 대선에 출마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 벽보와 1960년 제4대 정·부통령 선거 벽보. 1956년 이승만은 기호 2번으로, 1960년에는 기호 3번으로 출마했다. /공공부문
김덕영 감독이 조사한 바와 같이 1952년 기호 2번으로 출마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그 이후 대선에서도 기호 1번으로 출마한 적이 없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기호 3번이었고, 1960년 선거에서는 기호 2번을 달고 있었다. 반복하지만, 1952년 선거는 물론, 그 이후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승만은 단 한 번도 기호 1번을 달고 출마한 적이 없다.
김덕영 감독은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쳐서 봉급 받아 먹고사는 전문적인 역사학자가 아니다. 그는 과거의 문서와 영상을 발굴해서 대중의 눈앞에 생생하게 과거의 실상을 재현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이다.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 전문 역사학자의 과거사 왜곡을 밝혀내고 엉터리 해석을 물리치는 힘은 모순과 부조리를 거부하는 시민의 상식과 거짓을 물리치려는 인간의 정직함에서 나온다.
누구든 진실 규명의 의지를 품고 집요하게 역사적 기초 사료를 발굴하고 탐구하면 역사학자의 왜곡과 궤변을 오로지 팩트(fact)에 근거해서 허물어 버릴 수 있다. 역사학은 절대로 역사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시민사회가 눈을 부릅뜨고 정치화된 역사학계의 상습적 역사 왜곡을 낱낱이 밝혀나갈 때, 대한민국 현대사를 보는 국민의 시각이 바로잡힐 수 있다. 대중 강연에서 이승만이 기호 1번을 달고 나와서 문맹의 유권자들에게 몰표를 받았다고 거짓말을 해대는 역사학자가 자라나는 청소년의 머릿속에 그릇된 역사관을 심어주는 이 현실을 이제는 근본적으로 고치고 바꿀 때가 됐다.
김영삼 정권 때의 “역사 바로 세우기” 대신 지금은 “현실 바로 세우기”를 위해서 역사를 제대로 탐구해야 할 때다. 1980년대 이래로 디테일에 악마를 숨긴 섬뜩한 거짓의 역사관이 대한민국이란 열린 사회의 공론장을 점령하고 오염시켜 왔기 때문이다. 한편 “건국 전쟁”은 현재 누적 관객 수 10만 명을 넘기는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을 만든 김덕영 감독. /이신영 기자
역사적 진실을 밝히려는 김덕영 감독의 작가정신과 예술혼이 거짓 뉴스와 허위 정보를 마구 엮어서 일방적으로 이승만 악인전(惡人傳)을 집필해 온 역사학계의 고루한 시대착오와 부족주의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다. 그 어떤 역사가의 전문지식도 정직한 시민의 상식을 이길 수 없다. 하물며 기호 2번을 1번이라 조작하고, 88.09% 투표율을 보인 유권자를 무관심한 군중이라 둘러대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74.61%의 유권자를 닥치고 1번만 찍는 문맹의 무지렁이로 몰아가는 황당무계한 역사 왜곡의 주체임에랴.
“슬픈 중국”에서 왜 한국 현대사를 논하나?
독자로서 “슬픈 중국”이란 제명 아래 왜 전근대 한국사를 논하고, 왜 또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의아해할 수 있다. 쉽게 말해 그 이유는 동아시아의 오랜 역사에서 중국 문명의 영향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에선 왕조 멸망의 전야까지 다수 유생(儒生)이 오매불망 명나라를 그리면서 위정척사의 고립에 빠져 있었다.
중국을 대국으로 숭상하는 오랜 전통의 관성은 실로 강력하여 일제에 강점당해 식민 지배를 겪고 난 후에도 한반도 지식인들은 중국을 향한 존경과 흠모를 극복하지 못했다. 중국 마오쩌둥의 대규모 파병으로 파멸을 면한 북한 김일성은 마오쩌둥의 “자력갱생”을 그대로 베껴서 “주체사상”을 만들고는 마오쩌둥식 대중 동원과 대민 지배를 그대로 흉내 내었던 마오쩌둥의 ‘꼬맹이 동생’(little brother)이었다. 김일성의 남침으로 3년의 참혹한 전쟁을 겪었던 대한민국의 지식인들도 중국을 숭모한 점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1970~80년대 노무현·문재인 전 대통령들이 사상의 스승으로 떠받든 저널리스트 리영희의 중국 관련 서적들은 소위 “진보세력”의 의식을 지배하는 운동권의 바이블이 되었다. 문제는 리영희의 저서들이 마오쩌둥을 미화하고 칭송하는 중국공산당 선전물을 방불케 한다는 점에 있다.

▲리영희의 친중주의 역사관이 고스란히 반영된 <<8억인과의 대화>>와 <전환시대의 논리>. /송의달 기자
1960~70년대 한국 대다수 언론은 외신을 통해서 중국 문화혁명에 관한 꽤 상세하고 객관적이며 정확한 보도를 일상적으로 전하고 있었다. 한국의 대중은 날마다 신문만 봐도 문화혁명의 참혹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리영희의 저서는 그러한 한국 사회에 중국공산당의 선전물을 버젓이 옮겨와선 “문혁의 실상”이라며 마오쩌둥의 인격 숭배까지 정당화하는 지적 착오를 범했다. 리영희의 영향을 받은 대한민국의 “진보세력”은 희대의 독재자 마오쩌둥을 존경하는 시대착오와 최악의 전체주의 파시스트 김일성을 “위대한 수령”으로 섬기는 정신착란을 연출했다. 그렇다면 리영희는 왜 마오쩌둥을 극찬했는가? 그 이념의 뿌리가 구한말 위정척사파에서 이어지는 친중 사대주의의 황무지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을 숭상하고 북한을 옹호하는 이들은 예외 없이 이승만에 대한 혐오감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이승만은 중국 문명에서 벗어나 중화 중심주의적 세계관을 타파하고 구미(歐美) 모델의 근대화를 지향했다. 이승만은 해방공간의 극한적 좌우익 대립 속에서도 대한민국이라는 자유민주주의 신생국을 건립하여 미국 주도의 자유적 국제질서(liberal international order)에 편입시킨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마오쩌둥을 흠모하고 김일성을 존숭했던 세력은 반미와 반자유로 무장한 시대착오적 이념의 일탈자들이었다. 선명한 반공의 기치를 내걸고 제네바 협정과 인권의 가치를 내세워 2만 6천 명 반공포로를 석방한 이승만은 시대착오적 이념의 일탈자들에게 불구대천의 “원쑤”가 되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그들은 이승만이 세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무너뜨리는 이념 공세를 가해 왔다.
리영희의 악의적 오역, 반대한민국 세력의 정치전 무기로
그런 악의적 이념 공세 중에서도 특히 리영희가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관련해서 유엔 총회의 결정문을 왜곡한 사례는 앞으로도 두고두고 역사학의 타산지석이 되어야 마땅하다. 1948년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결의 제195호(Ⅲ) 2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어 번역: “2.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감시하고 협의할 수 있었으며 한국인의 대다수가 살고 있는 한반도 내의 지역에서 유효한 지배권과 관할권을 가진 합법 정부(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점, 또 이 정부는 임시위원회의 감시 아래서 한반도 그 지역의 유권자들의 자유로운 의사가 적법하게 표현된 선거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한반도 유일의 그러한 (합법) 정부라는 점을 선언한다.”
영어 원문: “2. Declares that there has been established a lawful government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having effective control and jurisdiction over that part of Korea where the Temporary Commission was able to observe and consult and in which the great majority of the people of all Korea reside; that this Government is based on elections which were a valid expression of the free will of the electorate of that part of Korea and which were observed by the Temporary Commission; and that this is 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의 모습. /나무위키
리영희는 대한민국이 유권자의 자유로운 의사가 표현된 공정한 선거에 의해서 성립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유엔 총회의 결의문을 “대한민국은 38선 이남에 수립된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악의적으로 오역했다. 그의 오역은 대한민국의 국제법적 합법성과 헌법적 정당성을 부정하는 학계, 언론계, 정계, 문화계의 반대한민국 세력에 의해서 끊임없이 악용되었다. 리영희는 왜 “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를 “38선 이남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오역했을까? 몰라서 틀렸나? 알면서 왜곡했나?
“대한민국은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거쳐 8월 15일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 중앙선관위 자료에 따르면, 5월 10일 총선거는 전국 만 21세 이상 남녀 총유권자 813만여 명 중에서 785만 명(96.4%)이 선거인 등록을 했고, 그중 95.5%가 투표를 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선거는 그렇게 국민의 압도적 다수가 ‘나라 세우기’의 열망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명실공히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였다. 그날 선출된 198명의 국회의원은 5월 31일 제헌의회를 개원했으며, 7월 17일에는 드디어 대한민국 헌법이 공표됐다. 그 헌법에 따라 국회의원의 간접선거로 제1대 대통령 이승만이 선출되었다. 요컨대 한국 헌정사 최초의 ‘민주 정권’은 1948년 수립된 바로 그 정부였다.” (송재윤, “’1948년 정부’가 대한민국 첫 민주정부다,” 朝鮮 칼럼, 2022년 3월 8일).
마오쩌둥을 흠모하고 경애하여 숱한 가짜 뉴스와 허위 정보를 엮어서 그의 공적을 미화하고 그의 인격을 찬양했던 리영희는 1948년 유엔의 감시하에서 국민 총선거를 거쳐 국민 절대다수의 승인을 얻어서 수립된 대한민국의 국가로서의 정통성을 흔쾌히 인정할 수 없었다.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를 “38선 이남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왜곡한 그의 의도는 진정 무엇이었을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대한민국만큼 합법적이라 주장하고 싶었음일까? 리영희의 글을 다시 읽어보면, 뿌리 깊은 그의 친중주의가 반미주의와 동전의 양면처럼 딱 붙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친중·반미는 곧 반대한민국으로 이어진다. “슬픈 중국”에서 한국의 서글픈 친중 사대주의를 다뤄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계속>
〈103회〉벼랑 끝 이승만, 최강국을 움직인 약소국의 비밀병기는?
변방의 중국몽 <21회>

▲1952년 7월 9일, 이승만 대통령이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시찰하고 있다. 반공포로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통령을 열렬히 환영하고 있다. 1953년 6월 중순 이승만은 바로 이 포로들을 포함한 2700여 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공공부문
강대국 틈에 끼인 약소국의 생존전략
세계열강의 전쟁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는 약소국의 비결은 무엇인가? 1959년 시카고 대학 출판사에서 펴낸 폭스(Annette Baker Fox, 1912-2011) 교수의 <<약소국의 힘: 2차대전 중의 외교(The Power of Small States: Diplomacy in World War II)>>은 슬기로운 외교 전략으로 국체를 보전한 터키,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스페인 등의 사례를 분석했다. 이 모든 나라들은 2차 대전의 화마 속에서도 강대국에 병합되지 않고서 오히려 더 강성한 국가로 거듭났다.
세계 외교사에는 군사적 열세에 처한 약소국이 강대국을 압박하여 큰 양보를 받아내는 외교술을 발휘한 사례가 적지 않다. 약소국 지도자가 다양한 전술과 기상천외한 술수를 써서 강대국 실권자들을 절절매게 가지고 노는 흥미로운 장면도 종종 보인다. 북한의 기습 침략으로 절멸의 위기까지 내몰렸던 대한민국의 국체를 지키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 이승만의 외교 노선이 대표적 사례이다. 그에 비하면 1990년대 이후 북한의 벼랑끝전술은 전체 인민을 볼모로 잡은 전체주의 세습왕조의 권력 유지책으로 인류 외교사의 하지하책(下之下策)일 뿐이다.
한국전쟁 중 이승만 정권과 미국 정부의 대립은 1951년 정전 협상이 개시될 때부터 1953년 7월 말 마침내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직전까지 계속됐다. 시간이 갈수록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정계를 뒤흔드는 더 강경한 외교 전술을 구사했다. 마침내 1953년 6월 반공포로 전격 석방이라는 이승만의 기습 작전에 한 방 얻어맞은 미국 정부는 이승만을 억류하여 권력을 교체하는 “에버레디(Ever-ready)” 작전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이에 질세라 이승만은 더 당당하게 미국을 압박했고, 그 결과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수세에 몰려 대규모 경제원조, 지속적 군사 지원, 상호방위조약을 약속하는 외교사의 역설이 일어났다. 미국을 쥐고 흔든 이승만의 외교력에 대해 미국의 한 연구자는 장기판 “졸(卒, pawn)”가 “차(車, rook)”처럼 활약한 사례라고 평가했다(Barton J. Bernstein, “Syngman Rhee: The Pawn as Rook,” Bulletin of Concerned Asian Scholars, 10:1, 38-48).
“반공포로석방,” 무엇을 위한 포석이었나?
1953년 7월 27일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Mark W. Clark, 1896-1984) 장군은 17일에 걸친 마라톤 군사 회담 끝에 중국 펑더화이(彭德懷, 1898-1974)와 북한 김일성(1912-1994)을 상대로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한국 측 대표는 그 자리에 없었다.
항간엔 지금도 유엔군에 작전 지휘권을 넘긴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이 휴전의 당사자도 될 수 없었다는 낭설이 떠돈다. 뜬소문에 현혹당한 한 유명 철학자는 2019년 공영방송에 나와선 이승만을 미국의 꼭두각시로 매도하는 역사적 몰상식을 드러냈다. 대체로 이러한 발상은 당시 상황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추측이거나 조선노동당과 북한에 동조하는 남한 좌익 세력의 흑색선전일 뿐이다.
▲유엔 측 대표 해리슨 중장(왼쪽 테이블 착석)과 북한 대표 남일 대장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문에 서명하고 있다. /공공부문
이승만은 휴전 협상을 거부했다. 당시 이승만의 입장은 줄기차게 “통일 없인 휴전 없다,” “중공군 철수 이전엔 휴전 없다”였다. 이승만은 휴전회담 한국 측 대표를 소환하고 “단독 북진”의 주장을 이어갔다. 완강하게 정전에 반대하며 중국군의 전면 철수와 북진 통일을 부르짖었던 이승만은 당연히 자의에 따라 휴전회담에 불참할 뜻을 분명히 밝혔다. 5월 25일 유엔사령부의 결정문은 이승만이 강력히 요구했던 “휴전 직후에 곧 반공포로를 석방한다”는 약속을 빠뜨렸으며, 대신 인도군이 중국군과 함께 포로들을 관리하고 문책한다는 조항을 포함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한국 측은 협상 테이블에 못 낀 게 아니라 협상을 거부하고 안 나갔다.
휴전협정 39일 전인 6월 18일 이승만은 전국 9개 전쟁포로 수용소에 억류돼 있던 2만5000여 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벼랑 끝 조치를 감행했다. 그 소식 전 세계로 타전되자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격노했고, 처칠 수상은 면도 중 놀라서 얼굴을 베었다고 전해진다. 서방세계의 반응을 익히 예측했던 이승만은 눈도 깜작이지 않은 듯하다. 그 후 며칠에 걸쳐 그는 2천여 명의 반공포로를 더 석방하는 초강수를 이어갔다. 6월 19일 새벽 도쿄 주재 미국 언론사 특파원들이 전한 포로 탈출 현장의 긴박한 상황은 읽는 이의 머리털이 주뼛 서게 한다.
“저항하는 남한이 어제 임박한 협정(truce)에 닥칠 위협 따윈 생각지도 않는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2만5000명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오늘 이른 새벽 서울 부근 항구도시 인천의 수용소에서 1500명 반공포로 대규모 탈출을 시도했고, 미국 병사들 및 해병대 병력과 충돌했다. 최초의 비공식 보고에 따르면, 포로 1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10명 사망, 93명 중경상). 이 수용소는 포로 탈출이 일어난 다섯째 캠프였다.” (The Evening Star, 1953. 6. 18. 도쿄와 워싱턴 사이 시차로 미국 동부 시간으로 18일에 보도됨.)
▲전쟁 중 반공포로 수용소를 시찰하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수행원들을 포로들이 태극기를 들고서 열렬히 환영하는 장면. /공공부문
수용소에서 탈출하는 대규모 반공포로들을 향해 미군 병력이 급기야 발포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이승만이 입을 열었다. 그는 “유엔사령부와는 충분히 협의하지 않고서” 그런 명령을 내렸다고 했다. 대한민국 정부 대변인은 우리가 그들(중국과 북한)의 계획을 수포로 돌렸다”고 공식적으로 발언했으며, 라디오 방송으로 대한민국 국민을 향해서 “석방된 반공포로들을 도와주라” 촉구했다.
당시 중국과 북한은 반공포로 문제를 협정의 중대 이슈로 삼고 있었다. 휴전협정이 임박한 상황에서 이승만이 단독으로 감행한 반공포로 석방은 미국의 협상 노력을 수포로 돌리는 “유엔에 대항한 공개적 저항(open revolt against U.N.)”이나 “진짜 사보타주(real sabotage)”라 보기에 충분했다.
이승만은 대체 어떤 힘을 믿었나?
그해 6월 초 미국은 백선엽 등 대한민국 육·해공군의 실세를 미국으로 초빙하여 이승만을 압박하는 방법도 모색했었다. 미국의 의도가 먹힐 새도 없이 그들은 오히려 이승만의 입장에서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필요성만 역설했다. 6월 5일 이승만은 공산 세력의 요구를 수용하는 미국에 항의하면서 단독자결권 행사를 천명하고는 이틀 후 방미 중인 장성들에게는 즉각 소환을, 도미 예정이었던 장성들에게는 출발 중지를 명령했다. 11일 후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초강수로 이승만은 정전협정으로 지리멸렬한 교전 상황을 서둘러 끝내려 했던 아이젠하워 행정부를 위기에 빠뜨렸다. 미국 정부는 이후 한 달 이상 지체된 휴전협정을 다시 이어가야 했다.
반공포로 석방의 초강수를 두고 나서 미국 정계는 일면 이승만에 등을 돌리는 분위기를 보였다. 6월 19일 워싱턴포스트지 사설(社說)은 “이승만, 세계를 괴롭히다(Rhee spites the world)”라는 제명 아래 이승만의 도발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한국의 정전협정을 고의로 망치려는 이승만의 담대한 시도는 상상을 넘어선다. 이 완고한 늙은이는 수백만의 희망을 짓뭉갠 막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전체 구조를 깨부수겠다는 그의 태도는 ‘내가 간 다음에 홍수(après moi le deluge)’라는 선언이다. 2만5000명을 성공적으로 석방한 이승만 박사의 음모보다 더 놀라운 점은 유엔사령부, 특히 미국이 이승만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뒀다는 점이다(The Washington Post, 1953. 6.19.).”
이 사설은 미국 정부가 이승만의 도발을 사실상 묵인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나아가 미국의 정부 임원들이 사전의 이승만의 계획을 몰랐었기를 희망하지만, 정황상 미국의 공모한 혐의를 배제할 수 없다며 국정 조사를 요구했다. 사설은 근본 문제가 미국 정책에 있다며, 장개석과 마찬가지로 이승만은 “더 완강하게 저항할수록 더 큰 존중을 받는” 역설을 배웠다며 미국의 유순한 아시아 정책을 비난했다. 신경질적인 어조로 “더 좋은 자가 없어서 작은 독재자(petty tyrant)를 지원한 미국의 죄과”라고 이승만에 휘둘리는 미국 정부를 비판했다. 이승만 때문에 휴전협정이 결렬되어 또 다시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미국 젊은이들이 죽어갈 판이니 미국 언론인들이 분노할 만도 했다.
▲1953년 6월 19일 워싱턴 포스트 사설 “이승만, 세상을 괴롭히다(Rhee Spites the World”(왼쪽 첫째). /The Washington Post
신기하게도 이승만은 향후 1년에 걸쳐서 그토록 강경하게 돌아선 미국 언론의 논조를 슬그머니 자기편으로 되돌리는 외교적 마력을 발휘한다. 그 이듬해 7월 28일 이승만은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하는 특전을, 8월 2일에는 뉴욕 맨해튼 마천루가 즐비한 “영웅의 협곡(Canyon of Heroes)”에서 장엄한 오픈카 행진의 영광을 누렸다. 과연 그는 어떻게 불과 한 해전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비난의 화살을 열렬한 환영의 색종이로 뒤바꿀 수 있었을까?
당시 미국 정부의 관련 문서를 분석해 보면, 이승만의 극적인 “도발”을 미국 정가 주요 인물들은 어느 정도 예측했으며, 특히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클라크 장군은 모르는 척 눈감고 슬그머니 도와준 혐의가 있다. 1953년 5월 25일 클라크 장국은 다음과 같이 합참 본부에 쓴 보고문에서 남한 9개 수용소는 한국군이 실질적으로 관할하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지금 [수용소 경비를 담당하는] 한국군을 미군 병력으로 대체한다면 민감한 상황을 오히려 더 악화시킬 것입니다. 만약 미군이 오직 공산 지배를 벗어나려 저항하는 한국인들을 저지하는 강력한 작전을 맡게 된다면 매우 불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William Stueck, The Korean War: An International Histor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8], 333).
클라크의 이 발언은 당시 미국의 군부가 반공포로석방을 강력하게 막을 의지도, 명분도 없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실제로 클라크는 미군 병력이 반공포로의 탈출을 막기 위해서 발포하게 되면 이후 한미 양국 사이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을 크게 우려했다. 그는 반공포로가 탈출을 시도할 때 발상할 수 있는 대량 학살의 우려를 사전에 인지하고, 수용소에 배치된 미군 병력을 향해 기관총·소총 등의 사용을 금지하고 오직 시위 진압 전술만 사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물론 클라크에게도 이승만의 반공포로석방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클라크 장군이 고의적인 미온적 대처로 반공포로의 탈출을 묵인한 정황을 부인할 수 없다(Grace Chae, “”Complacency or Complicity?: Reconsidering the un Command’s Role in Syngman Rhee’s Release of North Korean pows,” The Journal of American-East Asian Relations, Vol. 24.2/3 [2017]: 128-159).
이승만의 반공포로석방이 막가파식 도발이 아니라 유엔군 사령부의 입장, 미국 정가의 분위기,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정책, 아울러 한국군의 객관적 전력까지 다 따져 본 후 성공 가능성을 확신하고서 감행한 정밀한 작전이었음을 보여준다. 약소국 대한민국의 지도자 이승만에게 대체 무엇이 있었는가?
첫째, 이승만은 전쟁 중 유엔군의 명령을 듣는 대한민국 군부를 완벽하게 장악하는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발휘했다. 둘째, 그는 3년간 함께 공산 세력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유엔군 사령관의 암묵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셋째, 공산주의 세력에 완강하게 맞서는 이승만의 진정한 투혼은 미국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미국 의회에서 최소 여섯 명 이상의 의원들이 공개적으로 이승만의 반공포로석방을 지지했다.
▲유력지 <<이브닝 스타(Evening Star)>>의 일요판 매거진 <<선데이 스타>> 1953년 8월 16일 1면(왼쪽)과 7면(오른쪽). 왼쪽 잡지 표지 아래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사진과 함께 7면에 게재된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사: 이승만의 ”왜 나는 홀로 섰는가“를 소개하고 있다.
1953년 8월 16일 당시 미국의 유력 석간지였던 워싱턴 “이브닝 스타(The Evening Star)”는 일요판 잡지 “선데이 스타(The Sunday Star)”에 이승만의 장문이 실렸다. 일요판 제1면 표지 맨 밑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사(an article of historic significance)”이란 설명과 함께 이승만의 “나는 왜 홀로 섰나?(Why I stood alone)”이 소개되었다. 이승만의 기고문은 7면 전면을 장식하고, 21면과 22면의 상단으로 이어진다. 편집인은 다음 문구로 이승만을 소개한다.
“훗날 역사는 이승만에 대해 무슨 말을 할까? 많은 이에게 그는 한국의 평화를 지연한 완고한 사내이다. 다른 이들에게 그는 공산주의 세력에게 뮌헨 협정 같은 유화책을 쓰는 것에 반대했던 고독하고도 영웅적인 인물이다. 이번 주 잡지에선 그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 박사의 개인적 성명문을 특별히 독점적으로 게재한다. 당신의 평가가 어떠하든, 그가 이 글을 쓴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든, 지금도 진행 중인 우리 시대 역사의 일부로서 이 글을 읽고 싶어 할 것이다.”
이승만은 장문의 서두를 “반역적”이란 비난을 감수하며 아시아에서 공산 세력의 침략에 강력하게 맞선 자신의 투쟁이 1940년 나치 세력에 맞서 고독하게 싸운 윈스턴 처칠의 투쟁만큼이나 역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선례가 될 것이라는 당당한 선언으로 시작한다. 벼랑 끝 이승만의 비밀병기는 자유 투사(freedom fighter)의 도덕적 정당성이었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한국 현대사 최고 명문 중 한 편이 아닐까. 다음 회에 이 글을 상세히 분석할 예정이다. <계속>
▲1949년 8월 6~9일 한국의 진해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장제스 총통이 만나 극동의 반공 태세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태평양 동맹의 제1보를 내딛었다. /공공부문
〈104회〉“자유 투사” 이승만의 절규, “나는 왜 홀로 섰는가!”
변방의 중국몽 <22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1875-1965). /공공부문
1953년 8월 16일 미국 수도 워싱턴의 유력지 “이브닝스타(Evening Star)”의 일요판 “선데이스타(Sunday Star)”는 이례적으로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의 특별 기고문을 7면, 21면, 22면 3면에 걸쳐 독점 게재했다.
1953년 7월 27일 대한민국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미국, 중국, 북한이 정전 협정을 맺은 지 불과 20일 만이었다. 그 당시 조속한 정전을 요구하던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주요 일간지는 “호전적 늙은이”, “작은 독재자” 등 이승만을 향한 거친 말 화살을 쏘아대고 있었다. 이 글에서 이승만은 그런 언론의 목적과 의도를 냉철하게 꿰뚫어 보면서 왜 자신만 혼자서 정전 협정을 거부하고 고독하게 투쟁했는지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편집인은 당대 최대의 논쟁적 인물로 부상한 이승만을 “58년 동안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해 온” 인물로 소개했다. 지난 회에 언급했듯 편집인은 이승만의 장문을 게재하는 의의를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신의 평가가 어떠하든, 그가 이 글을 쓴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든, 지금도 진행 중인 우리 시대 역사의 일부로서 당신은 이 글을 읽고 싶어 할 것이다.” 편집자의 이 권유는 바로 한국의 모든 국민을 위한 소중한 조언이다. 71년 만에 전문을 완역하여 한국의 독자들에게 내놓는다.
이승만은 명실공히 대한민국 헌정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이승만이 희구했던 자유의 가치, 민주의 이상, 인권의 소망, 법치의 염원은 바로 오늘날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네 개의 기둥이다. 그가 그토록 경계하고 비판했던 공산주의 이념은 20세기 인류사에서 무려 1억 명의 인명을 살상한 죽음의 극단론으로 판명되었다. 그가 “북진 통일”을 외치며 해방하고자 했던 북한은 지금도 인류사 최악의 공산 전체주의 세습 전제 정권이 되어 인구의 10% 이상을 노예로 삼는 세계에서 가장 악랄한 노예제 국가로 남아 있다.
바로 지금도 역사를 제멋대로 조작하고 편의적으로 왜곡하는 대한민국의 일부 집단은 공산 세력의 기습 침략으로 사흘 만에 수도가 무너지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전략적으로 급히 후퇴한 이승만을 “런(run)승만”이라 폄훼하고 조롱하고 있다. 스스로 조선노동당의 정치전(political warfare)에 놀아나고 있음을 그들은 언제나 깨닫게 될까? 한국 사람이라면 이승만을 비판하기 전에 그가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행동한 사람인지 최소한의 공부라도 해야 한다. 자, 이제 1953년 8월 16일로 돌아가서 이승만의 육성에 귀 기울여보자.

▲1954년 7월 28일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 /이승만 기념관 제공
“나는 왜 홀로 섰는가(Why I Stood Alone)!”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
한국 서울에서
내 삶의 퇴조기에 나는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침략에 맞서 계속 싸워야만 했다. 그 때문에 나는 많은 비판에 휩싸였다. 휴전 협상 과정에서 최근 한국이취한 태도와 행동을 윈스턴 처칠과 같은 저명한 정치가는 ‘반역적(treacherous)’이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한국의 단호한 태도가 공산 제국주의 폭정에 맞서도록 역사의 조류를 돌리는 데 이바지할 것이라 확신한다. 히틀러에 맞서 홀로 계속 싸우겠다는 1940년 처칠 자신의 결정이 나치즘과 검은 폭정의 종식에 이르는 출발점이 되었음과 같다.
위대한 웅변가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은 왜 한 나라가 일시적 파괴의 위험을 무릅쓰고 싸우는 편이 투쟁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나은 선택인지 전 세계를 설득할 수 있었다. 그 처칠을 두고 “자멸적(自滅的, suicidal)”이라거나 “무모하다(reckless)”고 하는 말이 나왔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내가 한국에서 발휘한 리더십을 두고는 이런 말들이 즐겨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내 나라 한국은 [1938년 9월 뮌헨협정을 체결하여 히틀러의 요구를 다 들어주고서도 불과 1년 만에 침략을 당해서 항전에 나섰던] 1940년의 영국이 그러했듯, 우리 스스로 자살행위라고 확신하는 유화적 정전 협정을 수용하기보다는 계속 싸우는 편이 최선이라 믿는다. 우리의 지속적인 저항이 시간을 벌어줄 것이고, 여러 사태의 압력 아래서 붉은 세력의 망동이 벌어지게 되면, 자유 진영의 다른 국가들은 공산 중국의 괴물들을 국경 밖 그들 땅으로 몰아내는 것이 자국의 이익에 부합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공산 중국이라는 괴물이 또 다른 점령지를 뜯어 먹으면서 아시아 전체를 향한 힘과 먹성만을 키울 것이다.
“나는 결코 확신을 잃지 않았다(I Never Lost Confidence).”
나는 긴 세월 기독교 윤리와 유교 윤리를 모두 연구해 온 학자다. 이 두 철학에 뿌리박힌 격률은 미국인의 문구로 이렇게 표현된다: “옳음이 승리한다(right will prevail).” 결국 내 생애 58년 가까이 걸려서야 비로소 조선 국왕들과 일본인들의 반동적 지배로부터 남한만의 해방이라도 성취할 수 있었다. 나는 결코 옳음이 결국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잃지 않았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내가 옹호하며 싸웠던 원칙들이 내가 죽은 뒤에야 실현될 듯 보이던 그 암울한 시절에도 늘 그렇게 믿었다.
우리 시대의 극동판 뮌헨협정처럼 보이는 휴전 협정을 거부한 우리 한국인의 동기에 대해 서방 세계에 너무나 심각한 오해가 있는 듯하여 참으로 유감이다.

▲1953년 8월 16일 “이브닝스타” 일요판 “선데이스타” 7면.
정전 협정 원안의 구체적 쟁점을 따져보자. 수백만 중공군이 무력으로 점령한 북한 땅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고, 우리나라 안에서 붉은 적군(敵軍)의 지속적인 불법 주둔이 종료되어야 할 시한도 전혀 휴전 협정에 명시되지 않았는데, 그 누가 진지하게 공산 침략이 격퇴되었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1950년 당시 우리나라는 50만가량의 북한 적병에 직면하고 있었다. 1953년 현재 우리가 대치하고 있는 중국과 북한의 연합 병력은 수적으로 최초 침략자들의 3배에 달한다. 새로운 공산 군대는 아시아 최초로 제트기를 가진 공군을 비롯하여 1급의 최신식 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데다 우리나라 수도 서울은 전선에서 최단 거리로 20마일 이내에 놓여 있다. 우리는 이 험악한 현실에 너무나 가까이 처해 있어서 붉은 세력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이를 진보라 부를 수가 없다. 침략자가 다시 쳐들어올 경우 미국의 자동 지원을 보장해달라는 우리의 요구가 정말 그토록 터무니없는가?
다수의 유엔군 고위 장교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38선 인근에 배치된 강력한 공산군 조직의 위협을 우려하고 있음을 나는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 공산 세력이 통제하는 북한 내 비행장은 남한뿐만 아니라 일본, 오키나와 등지의 미국 진지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투쟁(The Struggle)
넓은 의미에서 한국과 우방국 사이의 유감스러운 의견 차이는 공산주의 폭정과 팽창주의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최선인지에 관한 서로 다른 진단에 근거하고 있다. 현재 한국이 처해 있는 곤경은 압제에 맞서 투쟁하는 일개인으로서 직접 겪은 나의 초창기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1896년의 일이었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국민의회를 갖춘 입헌정부의 수립을 요구하고 조선 국왕과 일본 고문관들의 독재적 방식에 항의하고 있었다. 조선 국왕이 우리 독립운동의 지도자 17명을 체포해 간 후, 나는 계속 대중집회를 열었다. 집회는 여러 날에 걸쳐 계속되었고, 때로는 수십만 군중이 운집하기도 했다. 독립투사들이 석방된 후에도 우리는 대중 시위를 이어갔다. 만약 우리가 해산하면 경찰이 절대로 우리의 재결집을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마라톤 집회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경찰이 무력으로 집회를 해산시키려 한다는 경고를 들었다. 주변에서는 내게 집회를 그만 단념하고 몸을 숨기라고 충고했다. 그런데 정작 경찰이 나타났을 때 우리 집회의 대중은 똘똘 뭉쳐서 완강하게 저항했고, 경찰은 감히 군중을 공격할 수 없었다. 경찰은 민중의 결기를 보건대 진압을 행동에 옮기는 순간 전국적 봉기가 촉발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의 저항에 그들은 겁을 먹었다. 만약 그때 내가 흔들렸다면 나는 길을 잃고 헤매었을 것이다.
▲같은 글, 21면 게재
한결같은 원칙(Same Principle)
내가 늘 그렇게 운이 좋았던 건 아니다. 무자비한 통치자에 맞서는 모든 애국자가 그러하듯 나도 투옥되어 고문당하는 내 몫의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원칙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승리를 위해 위험을 무릅쓸 각오가 그대의 적만큼 충분히 되어 있지 않다면 싸움을 시작도 하지 말라. 그대는 흔들려선 안 된다. 그 어떤 종류의 편의주의도 적에게 그대의 한계점을 노출하여 더 악랄하게 나오도록 적을 부추길 뿐이다.
이것은 어떤 괴상한 오리엔탈 심리학이 아니다. 역사적 유례들을 고찰하면 국가적 태세를 명확히 정립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될 수 있다. 2차 대전 당시 프랑스의 사례를 생각해 보자. 1940년 프랑스 총리 페탱(Philippe Pétain, 1856-1951) 원수(元帥)는 “빈손보다는 반쪽이라도 얻는 편이 낫다”는 판단으로 프랑스 절반을 독일 점령지로 내어주는 휴전 협정에 합의했다. 나치가 법적 재가를 얻게 되자 프랑스인의 저항 의지는 약해졌고, 무도해진 독일인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할 때 나머지 영토도 접수하고 말았다. 페탱은 이후 자기 국민에 의해 반역자로 낙인찍혔다.
한 국가를 ‘반은 노예, 반은 자유 상태(half slave, half free)’로 남겨둠으로써 빚어지는 비극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기에도 여러 사례를 통해 거듭 입증되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붉은 진영과 자유 진영으로 분단하는 조치는 결국 분란만 낳았다. 왜 한국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해야 하는가? 우리는 분명히 안다. 공산주의자들의 철권통치를 맛보고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북한 주민은 오직 압제의 공포와 모욕을 몸소 맛본 자들만이 품게 되는 강렬한 열망으로 자유를 희구한다는 사실을.
최대한의 힘(Maximum Power)
한국은 3차대전을 원하지 않는다 대신에 우리는 공산 침략자를 국경 밖의 자기네 땅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유일한 길은 그가 국제연합이 실제로 작동함을 깨닫게 하는 데에 있다고 확신한다. 만약 유엔이 이러한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최대한의 힘을 발휘할 각오가 되어 있음을 명백하게 한다면, 중국의 붉은 무리가 6개월 안에 코리아에서 물러갈 것이라 믿는다. 끝없는 망설임과 흔들림은 나약함의 징후이며, 붉은 세력은 결코 이를 놓치지 않고 이용해 먹을 것이다. 이는 또 다른 적화 침략을 부추기고 공산 세력에 유리하게 이 세계의 세력 균형을 교란하여 3차대전의 발발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
▲같은 글, 22면 게재.
현장에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자기기만은 언제나 더 쉬워진다. 지난 1945년, 이미 나는 많은 욕설을 들었다. 미국이 러시아와 합의하여 38선 이북에서는 소련이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할 목적으로 코리아를 점령하기로 한 결정에 대하여 내가 강력하게 항의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정부의 관리들은 그것이 일시적인 편의상의 조치일 뿐이고 러시아가 해당 지역을 계속 장악하도록 용납할 의도는 전혀 없다고 장담하면서 나를 안심시켰다. 미국의 의도는 분명 훌륭했다. 하지만 붉은 세력의 북한 장악이 “일시적으로” 허용되고 나자 미국은 그 어떤 평화적 수단으로도 그 세력을 흔들 수 없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정치적 협의를 통해 중국을 설득해서 북한에서 물러가게 할 수 있으리라고 진심으로 기대했다는 점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강성해진 오늘의 중국이 대체 왜 갑자기 북한을 떠나려 하겠는가?
물론 나 역시 나만의 이기적 야심을 채우려고 홀로 버티는 것 아니냐는 수군거림에 맞서기가 고통스러웠다. 내가 편의와 안락과 권력을 원한다면, 절반만 얻는 편이 더 간단하지 않겠는가? 내 세상이 끝난 다음에 공산주의의 홍수가 덮치기를 희망하며 더 싸우지 않고서 여생을 살다 가도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일평생을 대의에 바친 사람이 막바지에 이르러 세속적 안락을 바라고 단념할 순 없다.
협박은 안 통한다(Threats Don’t Work)
우리에게 원조와 지지를 끊겠다고 암시하는 등 갖은 협박으로 우리를 좌우하고자 했던 서방 정치가들은 우리를 완전히 잘못 이해했음에 틀림없다. 그러한 협박은 한 국가가 자유를 지키려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원대한 신념보다 일시적 유불리만 따지는 나라들에만 통할 뿐이다. 한국에 대한 유엔의 지원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우리가 치르는 비용이 붉은 세력에게 그런 우위를 점하게 하여 그들이 원할 때면 언제든지 우리를 압도할 수 있다면?
상황이 더 악화되어 한국이 혼자서 투쟁을 이어가야 한다면, 우리의 운명이 마침내는 선의를 가진 모든 나라들을 규합할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고서 우리는 고독하게 싸워나갈 것이다. 우리는 특히 미국이 독재정권들과 공화국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 지구적 내전(global civil war)에서 우리가 아는 자유의 존속 여부가 바로 지금 여기에서 붉은 세력의 침략을 막는 데에 달려 있음을 잘 알리라고 믿는다. <끝> (번역: 송재윤·이동민)⊙
▲1954년 7월 28일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 /이승만 기념관 제공
〈105회〉국제정치 이론가 이승만의 혜안, “공존은 가능한가?”
변방의 중국몽 <23회>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상무대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을 사열하고 있다. /공공부문
“건국전쟁”이냐, “백년전쟁”이냐?
이승만의 진실을 밝힌 김덕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개봉 27일 만에 누적 관객 100만을 넘어서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거짓부렁과 가짜뉴스가 난무하는 부박한 시대, 대중은 “건국전쟁”을 보면서 거짓 신화를 깨부수는 팩트의 위력에 충격을 받고 있다. 대동강 다리를 한강 다리로 둔갑시키는 사기 집단의 선동술, 사료를 날조하고 정보를 조작하여 이승만을 암살범, 학살범, 폭력범, 간통범, 횡령범, 친일파, 반역자로 몰고 간 음해 세력의 선전술에 속수무책 속고만 살아온 시민들은 분노하고 있다. 대중의 충격과 시민의 분노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갑작스러운 이승만 현상을 낳고 있다. 만시지탄이나 다행이다. 이승만 재평가 없이는 대한민국이 바로 설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60여 년 대한민국의 학계, 교육계, 언론계, 문화·예술계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역사의 악인(惡人)으로 만드는 집체적 역사 왜곡을 자행해 왔다. 특히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대한민국을 파괴하려는 극좌 세력은 북한의 김씨 왕조와 통일전선을 이루고서 ‘이승만 죽이기’에 앞장서 왔다. 급기야 중학교 역사 교사가 수업 중에 허위 정보와 가짜뉴스로 이승만의 인격을 살해하는 역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민족문제연구소, 2012년작)을 상영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때 한 학생이 ‘이승만은 민주주의자였다’고 반박하자 교사는 “손 들고 복도로 나가라” 했다. 역사의 상식을 말하는 학생의 발언권을 교사가 무참히 짓밟는 순간이었다. 북한이나 중국이라면 모를까, 대한민국과 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선 절대로 용인될 수 없는 인권유린이다. (2024년 2월 20일, 조선일보, “매달 1만원 보낸 고교생, 기부금에 詩 첨부 80대...이승만 기념관 100억 모금.”)
▲2012년 민족문제 연구소가 제작한 역사 다큐<<백년전쟁>>은 다른 시기에 촬영된 두 장의 사진을 떼어 와서 범죄혐의자의 머그샷(mugshot)으로 조작했다. 포토샵을 이용한 조작 기술이 나치 선전부와 히틀러 정권의 선전·선동 기법을 능가한다. 2018년 법원은 표현의 자유를 근거로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백년전쟁>>를 무죄 판결했다. /화면 캡처
북한식 정치전(政治戰), 대한민국 파괴 공작
세계 10대 부국이자 대중문화 선진국 코리아의 학교 교실에서 어떻게 그토록 무지몽매한 일이 발생할 수 있는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의 극좌 전체주의 세습 전제국가가 대한민국을 향해서 펼쳐 온 정치전(政治戰, political warfare)에 주목해야 한다. 미국 군사 전략가의 최신 분석에 따르면, 오늘날 중국은 전 세계 자유 진영 국가들을 겨냥해서 지속적인 정치전을 자행하고 있다.
중국공산당의 기본 노선에 따르면 정치전은 “싸우지 않고서 이기는 전쟁”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은 지금도 “전쟁의 부재가 곧 평화”라고 생각한다. 이때의 전쟁은 물리전(物理戰, kinetic warfare), 곧 무력 충돌에 국한된다. 무력 충돌은 전쟁의 한 양상일 뿐이다. 냉전 이래 공산 정권은 “평화”의 시기에도 은밀하게 자유 진영에 침투하여 정치전을 펼쳐왔다. 정치전은 심리전(心理戰), 이념전(理念戰), 선전전(宣傳戰), 언론전(言論戰), 방송전(放送戰), 학술전(學術戰), 문화전(文化戰), 사이버전 등 사회 전 분야에서 복잡한 양상의 진지전(war of position)으로 전개된다.
▲북한은 6·25 전쟁 이전부터 소련의 선전 기법을 도입하여 소련식 정치 선전전을 펼쳤다. /월간조선, 2014. 7.
대한민국의 소위 “진보세력”은 1980년대 이래 북한의 김씨 왕조와 이념적으로 결탁하여 대한민국의 체제를 무너뜨리는 이념전쟁에 몰두해 왔다. 북한의 정치전은 1980~90년대 남한의 주사파 운동권 집단을 통해서 대한민국 학계, 교육계, 언론계, 문화예술계를 파고들었다. 일례로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미제”와 “이승만 괴뢰도당”을 몰아내려는 남로당 빨치산 세력과 북한 김일성 정권의 연합 작전을 찬양하고 미화한 작품인데, 700만 부가 팔려나갔다. 역사적 배경지식 없이 <<태백산맥>>을 읽으면 누구나 김일성의 대남침략은 “민족해방 통일전쟁”으로, “이승만 도당”은 “분단의 원흉”이자 “미제의 꼭두각시”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反전체주의 이론가 이승만의 혜안
구소련이 붕괴하고 동구 공산정부가 줄도산하던 시절, 대한민국의 지식인들은 남로당 빨치산 투쟁과 김일성의 대남침략을 “민족통일”과 “인민해방”의 이름으로 미화하는 시대착오에 빠져들었다. 남한의 극좌 세력이 대한민국을 내부에서 파괴하는 북한의 정치전을 대리로 치르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하고 폄훼하는 세력은 어김없이 이승만을 향한 인격 살해의 칼날을 휘두른다. 왜 그래야만 할까?
이승만은 1950년대에 이미 공산 세력의 정치전을 꿰뚫어 보고 치밀한 정치적 논리로 전 세계 자유 진영을 향해서 반공 연대를 촉구했던 당대 최고의 이론가였기 때문이다. 1955년 9월 25일 미국 워싱턴의 유력지 <<이브닝스타(Evening Star)>>는 일요판 <<선데이스타(Sunday Star)>>에 무려 5면에 걸쳐서 이승만의 시론 “공존은 가능한가?”를 게재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한국전쟁이 휴전 상태로 들어간 지 2년 만이었다. 소련에서는 스탈린 사후 집권한 흐루쇼프는 “평화적 공존”을 부르짖고 있었다. <<이브닝스타>>는 미국 전역에서 널리 읽힌 소위 ‘등재 일간지(Newspaper of Record)’였다. 특히 이승만의 시론들을 게재하던 1950년대에 이 신문은 수백만 부를 찍어내는 인쇄소를 갖추고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 문제의 시론에서 냉철한 이론가 이승만은 평화의 시기에 공산주의자들이 전개하는 이념전쟁(理念戰爭)의 실태를 낱낱이 고발하면서 자유 진영의 강력한 대응을 촉구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슬픈 중국”에서 지난 22회에 소개한 “나는 왜 홀로 섰는가?”만큼 강력한 문장이다. 문장 하나하나에 이론가의 통찰, 전략가의 지략, 예언자의 혜안, 정치가의 신념이 깃들어 있다. 더 무엇을 말할 것인가? 이승만 대통령의 이 글은 한국 외교사에 빛날 최고의 명문이며, 한국 헌정사에 길이 남을 중대한 문서이다. 70년이 다 된 지금 읽어도 현장감과 시의성이 느껴진다면 과장일까.
지난 회처럼 이번에도 전문을 완역하여 세상에 내놓는다. 이 글에서 이승만은 공산 세력의 “이념전쟁”에 대항한 자유 진영의 적극 대응을 촉구했지만, “건국전쟁”이 조목조목 지적하듯, 그는 가짜뉴스와 역사 왜곡이 범람하는 대한민국 현실에서 스스로 “이념전쟁”의 최대 피해자가 되었다. 잠시 모든 선입관을 버리고 69년 전 이승만의 육성에 귀 기울여보자. 편집자의 변(辯)대로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그 누구도 이 글의 역사적 중요성을 부인할 수는 없으리라.
▲1955년 9월 25일, 워싱턴의 유력지 “워싱턴 이브닝스타”의 일요일판 “선데이스타”는 5면에 걸쳐서 이승만의 시론을 게재했다./ Evening Star, The Week Magazine, 1955. 9.25. 7면.
“공존은 가능한가? (Is Co-Existence Possible?)”
(편집자) 전 세계가 평화 논의로 분주한 이때, 조국의 절반을 공산 세력에게 잃은 한 유명 정치가의 엄중한 경고를 게재한다.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
(번역: 송재윤, 이동민)
질문: 오늘의 질문은 캘리포니아 샌마테오(San Mateo)의 미셸 말터(Michel Malter) 양이 보내왔다. 말터 양은 “명예로운 공존은 가능한가(Is honorable co-existence possible)?”라 질문하면서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에게 답변을 듣고 싶다고 특별히 요청했다.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독자 여러분은 정전 상태의 한국에 관한 이승만 대통령의 이 생생한 현장 보고가 다음 달 제네바에서 열리는 국제 외무장관 회담에서 논의될 세계 문제의 중요한 일면이라 생각할 것이다.
답변: 평화에 굶주리다 보면 언제나 투쟁을 기꺼이 포기해버리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특히 투쟁을 포기하는 방식이 베일에 싸여 있거나 유화적이거나 쉽게 알 수 없도록 은폐되어 있을 때라면······.
실제로는 오늘날 자유세계가 공산주의에 흡수될 위험이 어느 때보다 크다. 자유세계 여러 국민의 맑은 정신이 과도한 희망과 근거 없는 확신으로 혼탁해져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세계 정복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기본적 사실은 한 치도 변함이 없는데, 크렘린이 내뿜는 거짓된 감언이설과 얄팍한 겉모습에 자유 국가들은 속절없이 현혹되고 있다.
요즈음 같은 때에는 민주국가의 최고 지도자라 할지라도 아이들 동화책에서 “빨강 망토 모자 소녀(Little Red Riding Hood)” 이야기를 다시 꺼내 읽는 게 좋을 듯하다. 그러면 그들은 최근 불가닌(Nikolai Alexandrovich Bulganin: 1895-1975; 흐루쇼프 집권기의 소련 수상 1955-58) 씨가 쓰고 있는 할머니 모자 바로 밑에서 늑대의 탐욕스런 눈빛과 날카로운 이빨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 사상이 과거 중국 정치의 핵심 사상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공공연히 다 알고 있다. 바로 “하늘의 태양은 하나, 땅의 통치자도 하나”라는 것이다.
▲Evening Star, The Week Magazine, 1955. 9.25. 34면.
민주주의 전통 아래서 우리는 전쟁의 부재를 평화라 여긴다. 그런데 공산주의 철학자들은 이념전쟁(ideological warfare)에 의한 새로운 정복의 방법을 개발해 왔다. 앞으로 이 점을 이해하여 효과적 반격 수단을 터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미궁에 빠질 것이다. 최근의 역사와 당면한 세계정세를 간략하게나마 검토해 보면 이념전쟁이 어떻게 자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확실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다섯 가지 새로운 종류의 전쟁 (Five New Kinds of War)
1. 사회적 소요(Social Unrest). 첫째로, 사회적 병폐나 경제적 불평등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공산주의자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이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해 먹는다. 올해 영국에서 그랬듯이 그들은 노조에 침투하여 파업을 선동하고 계급적 증오심을 부추긴다. 그들은 이미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가공할 규모로, 영국과 미국에서는 이미 상당한 정도로 노조를 파고들었다. 또한 그들은 인종갈등이 있는 곳에선 서둘러 약자(underdog)의 옹호자를 자임한다. 식민주의가 문제가 되는 지역에선 민족주의의 불길을 부채질하고 인종적 증오심에 격화하려 전력을 기울인다.
그리하여 그들은 [인종 갈등이 존재하는] 미시시피와 남아프리카연방[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신]에서는 인종 평등의 벗이지만, [식민주의가 문제인] 베트남, 인도, 인도네시아에서는 인종 평등의 적이 된다.
2. 법질서 교란(Civil Disorder). 분란이 격렬하게 폭발하여 반란으로 치닫는 곳이면 어디서나, 공산주의자들은 법과 질서를 전복하는 자들을 전폭 지원한다. 인도차이나에서 그들은 이미 어느 정도 성공하였고 그들의 전복 공작은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모리타니)와 마우마우단의 나라(Mau Mau country,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모리타니)에서 공산주의자들은 그 지역의 독립 요구를 이용하여 민주 동맹을 악랄하게 약화시키려 온 힘을 쓰고 있다.
3. 중립주의 정책(Neutralism). 공산주의자들은 안전을 원한다면 자유세계와 유대를 끊어야만 한다고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중립주의” 정책을 설교한다. 지난 몇 년간 그들은 인도, 버마,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소위 아시아-아프리카 권 일부 국가들의 지도부를 그런 방향으로 몰아가는 데에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다.
▲Evening Star, The Week Magazine, 1955. 9.25. 36면.
4. 경제적 압박(Economic Pressure). 또한 공산주의자들은 새롭게 재편되는 세계열강들 틈에서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전 세계 여러 지역을 찾아다니고 있다. 최근 전쟁에서 패배하여 경제 전망이 어두운 일본은 공산 세력이 침투하려 눈독을 들이는 곳이 되었다. 그들은 일본 국민에게 시장과 원료 공급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과거 군사 제국의 회복을 돕겠다고 약속한다. 그들은 일본인들에게 계속 이차대전에서 놓쳐버린 (한국을 포함한) 일본의 식민지들이 다시 일본 차지가 될 수도 있다고 떠벌린다.
5. 전쟁 위협(War Scares). 끝으로, 그들은 영국처럼 전쟁에 지친 국가들을 향해서 끊임없는 선전으로 새로운 세계대전의 공포와 위험을 호소한다. 자유국가들이 실제 전투를 촉발할 수 있는 모든 방어적 조치를 포기해야만 전 지구적 패권 경쟁은 선전활동과 경제적 경쟁이라는 신사적인 차원으로 억제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이다.
한편 미국은 자유세계를 이끌고 다방면의 전선에서 바로 이러한 공산주의의 전 세계적 음모를 분쇄하기 위해 분투해 왔다. 미국은 다양한 형태의 장점을 갖고 있고, 그중에서도 특히 인류역사상 가장 자유롭고 가장 생산성 높은 사회이지만, 기질적으로 그러한 투쟁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자유에 대한 위협 (Danger to Freedom)
핵심적 문제는 민주주의의 본질 그 자체다. 자유 진영의 국민들은 자유에 대하여 의심의 여지없이 명백한 도전이 닥치면 분연히 일어나 싸울 것이다. 그들 자신의 자유뿐만 아니라 이웃 국가나 동맹국의 자유를 위해서도 싸울 것이다. 그러나 자유 진영은 경제적으로도 큰 풍요를 누리기에 가급적이면 싸움을 회피하려 하지만 그 때마다 큰 규모의 희생이 따른다. 이러한 특성은 자유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며, 이념전쟁을 벌일 때 소련에는 엄청난 자산이 된다.
자유세계는 미국의 비할 바 없이 큰 아량과 희생에 큰 은혜를 입었으며, 그중에서도 우리 한국인은 가장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러나 참담한 현실은 한국전쟁에 따른 큰 희생까지 기꺼이 치를 만큼 큰 아량일지라도 이후 한국에서 나온 정전 협상 같은 무익한 타협책으로 상쇄되어 버린다면, 미국이 아량을 베푼 본질적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점이다.
여전히 지고 있다 (Still Losing)
미국인들은 당연히 내게 물을 것이다. 미국의 넓은 도량 덕분에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더 크게 혜택을 본 나라가 당신네 나라이거늘 당신은 왜 불평하는 기색이냐고. 나의 대답은 이러하다. 나는 위대한 미국 국민이 실제로는 여전히 지고 있는 전 지구적 전쟁(the global warfare)을 이미 다 끝났다고 여겨버리는 비극적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미국인들을 도와야만 하는 나의 명백한 임무를 수행해야만 한다.
바로 지금 공산주의자들은 소리 높여 “평화적 공존(peaceful co-existence)”을 외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앞서 요약한 다섯 형태의 세계 투쟁을 거침없이 계속 강화할 기회만 엿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조직적인 이념 공세에 대한 미국의 저항이 느슨해지기를 원한다.
“평화적 공존”이란 판문점에서 체결된 불행한 정전협정을 통해서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에서 따낸 바로 그것이다. 대부분의 미국인에게 한국은 먼 나라일 뿐이며, 한국전쟁도 필시 이미 먼 옛날 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냉전 투쟁에서 가장 중차대한 바로 이 지역 내가 처한 위치에서 나는 날마다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가장 엄중한 약속을 어떻게 스스로 깨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명확한 증거를 보고 있다. 여기 그 기록의 일부가 있다.
● 판문점에서 내 희망에 반하여 체결된 정전협정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들은 어떠한 공군 병력도 북한으로 들여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최소 300대의 제트 전투기 외에 더 많은 다른 유형의 군용 비행기를 들여왔다. 그리고 그들은 35개 비행장을 복구했으며, 더 많은 전투기와 폭격기를 수용하기 위해 12개 비행장을 신축했다.
● 정전협정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들은 귀환을 희망하는 모든 포로를 즉각 송환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지막 남은 미군 조종사단의 석방을 2년간 미루었고, 2만여 명의 대한민국 군인과 우리의 민간인 납북자들 수십 명을 여전히 억류하고 있다.
● 정전협정에 따르면, 중립국 정전 감시위원회를 설립하여 정전협정의 준수를 강제하게 되어 있었다. 유엔 측은 진정한 중립국인 스위스와 스웨덴을 지명했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이에 러시아의 두 괴뢰국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를 추가했다.
▲Evening Star, The Week Magazine, 1955. 9.25. 37면.
● 정전협정에 따르면, 이 위원회는 정전협정에 위반되는 전력 증강을 차단하기 위해 북한과 남한 양측의 “출입항”을 정기적으로 시찰해야 했다. 그러나 위원회는 본부를 우리 측에 배치함으로써 남한 내의 모든 군사적 발전 과정을 면밀하게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있는데, 공산 측 위원들은 진정한 중립국 위원들이 북한 내 군사 상황을 시찰하기 위해 기울이는 모든 노력에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다.
● 정전협정에 따르면, 중립화된 전전[=비무장지대] 양측의 어느 쪽도 군사력 증강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실제로는 유엔-한국군 측의 병력은 2개 사단을 제외한 미군 전부와 나머지 유엔군의 거의 전부가 철수함으로써 대폭 감축되었다. 반면 감시위원회의 스웨덴과 스위스 위원들이 밝힌 바에 따르면, 휴전협정을 직접 위반하여 인원, 중포병대, 전차, 보급물자가 여러 차례 기차에 실려서 북한 내로 들어왔다는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
● 정전협정에 따르면, 중립국감시위원회는 군사력 증강을 확실히 차단하기 위한 출입항의 시찰 외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폴란드와 체코 측 위원들은 우리 영도 안에 있는 그들의 주둔지로부터 파괴, 전복, 간첩 활동의 목적으로 남한 전역에 걸친 비밀 요원들의 조직망을 수립한 상태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우리 영토로부터 그들이 철수하기를 줄곧 요구하였으나 그들은 여기에 머물면서 우리의 자유 정부를 허물기 위한 노력을 날마다 지속하고 있다.
● 정전협정에 따르면, 늦어도 1954년 10월 28일 이전에 한국의 평화적 재통일을 협의하기 위한 정치회담을 개최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54년 4월 말까지 그러한 회담은 전혀 개최되지 않았다. 게다가 공산주의자들은 우리나라 전역에 대한 지배력 확장을 보장하는 조건들 외엔, 한국의 재통일을 위한 그 어떤 제안도 수용하지 않았다.
● 정전협정에 따르면, 전투의 종식은 한국 전체를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재통일된 국가”로 복원한다는 국제연합 정책의 최종적 완수로 귀결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공산주의자들은 정전협정을 그들이 강력히 염원하는 한국 전체의 공산화에 이르기 위한 디딤돌로 악용해 왔다
이 모든 사항이 내가 왜 공산주의자와의 “평화적 공존” 발상을 거부하는지 말해준다. 무슨 약속을 맺든 그들은 즉시 위반하기 시작한다. 어떤 계획에 합의하든 그들은 즉각 추가적 정복을 위해서 정반대의 프로그램으로 그 합의안을 왜곡한다. 그들이 말하는 “공존”이란 전쟁도 없이, 자기편의 희생도 없이 자유세계가 그들 손아귀에 투항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산주의자들에게 공존이란 정복을 지속하는 그들 나름의 수법에 보험을 드는 것임이 확실하지만, 공존이 민주국가들의 지도부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전혀 명확하지 않다.
▲Evening Star, The Week Magazine, 1955. 9.25. 39면.
자유세계의 지도자들에게 공존이란 “긴장 완화”를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그 문구는 경각심의 이완 외에 무슨 의미겠는가? 군비축소를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민주국가들이 무장을 해제하는 동안 소련은 기습 정복을 위한 최신식 무기 증강을 계속하리란 게 자명하지 않은가?
반혁명 운동? (Counter-Revolution?)
민주국가들은 공존의 허상 위에서 그들 자신이 이념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희망하는가? 그렇다면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에게 과연 어떤 수단으로 내가 요약한 다섯 형태의 침략을 포기하라고 요구할 작정인가? 그리고 민주국가들은 그들 나름의 이념적 반혁명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과연 어떠한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가?
끝으로, 만약 자유 국가들이 공존을 목표로 받아들인다면, 이미 철의 장막과 죽의 장막 뒤에서 신음하고 있을 9억 명의 사람들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점진적 투항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는 대신 무엇을 할 것이냐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간단하다. 나는 자유 진영의 국가와 국민이 기본적 안보와 자유가 위협당할 때면 언제나 늘 해왔던 일을 하겠다. 나는 반격해서 싸울 것이고, 승리하고야 말겠다는 담대한 결의로 싸울 것이다.
이는 예방 전쟁의 옹호가 아니다. 나는 러시아든 붉은 중국이든 전 지구적 열전(熱戰)을 수행할 의지도 능력도 이제 없다고 생각한다. 붉은 중국은 한국에서 싸울 때 처음 몇 달간은 제법 사나워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유엔이 붉은 중국의 기지에 대한 전략적 폭격을 자제한 탓에 한 손은 묶인 채로 싸우기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그런 불리한 조건에서도 유엔군과 한국군은 곧 공산군이 지구력 없는 종이호랑이임을 폭로해 버렸다.
나의 냉철한 판단에 따르면, 자유 진영은 공산주의자들이 얄타, 포츠담, 판문점에서 이미 맺은 약속을 지키라고 강력히 요구하는 것만으로도 큰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이 이미 맺은 약속을 계속 깨고 있는 지금 또 그들과 새로운 약속을 더 맺어선 안 된다고 확신한다.
소련 제국주의의 본래 계획은 점진주의적 정복이다. 작고 약한 지역은 서방의 저항 없이 복속당해 왔다. 더 큰 규모의 중국 정복은 능란한 사안 흐리기를 통해서 이뤄졌다. 더 위험한 것은 전면적으로 항복하기엔 너무나 오만한 국가들의 성채 내부에서 저항을 약화하고 무력화하는 소련식 방법이다.
▲2022년 8월 13일 오후 서울 중구 숭례문 앞에서 열린 8·15 전국노동자대회 및 자주평화통일대회 참가자들이 용산 대통령실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조선일보
세계의 절반 (Half the World)
이 과정은 이미 너무 멀리까지 진행되어서 러시아가 오늘날 세계의 절반이 훨씬 넘는 지역을 전면적으로 지배하거나 절반 정도 지배하고 있다고 하면 정확할 정도이다. 이 모든 것이 한 생애도 채 못 돼 달성되었거니와 그 대부분은 불과 10년 안에 이루어졌다.
17년 전 네빌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 1869-1940; 영 수상, 1937-40)은 뮌헨에서 돌아올 때 스스로 자랑스럽게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선언한 문서를 들고 왔다(나치 독일의 요구를 들어주고 전쟁을 피할 수 있다면 “명예로운 평화(peace with honour)”가 얻어진다고 믿는 유화정책을 추구한 결과 1938.9.30.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사이에 체결된 뮌헨협정 문서). 그가 얼마나 비극적인 실수를 저질렀는지 우리는 이제 안다. 우리는 그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자. <계속>
〈106회〉1919년 이승만의 ‘독립전쟁,’ 뉴욕타임스에 코리아의 진지 구축
변방의 중국몽 <24회>

▲1919년 4월 필라델피아 한인 회의. 왼쪽 세 번째 이승만이 보인다. /공공부문
지금도 한국의 학계, 교육계, 언론계, 문화·예술계엔 김일성의 항일 투쟁은 흔쾌히 인정하면서 이승만의 외교 독립운동은 악의적으로 폄훼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나치식 이미지 조작과 공산당식 선전·선동으로 이승만을 악마화하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역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의 유튜브 조회수가 200만을 넘어섰다는 점이 그 점을 웅변한다.
조선노동당과 남측 주사파의 선전과는 정반대로 김일성의 항일 투쟁은 한 꺼풀만 벗겨보면 역사 왜곡, 증거 날조, 거짓 선전, 허위 선동으로 가득한 정치 신화에 불과하다. 김일성 항일 투쟁 신화의 허구성을 폭로한 서재진 전 통일연구원 원장의 기념비적 저술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통일연구원, 2006)에 따르면, 북한은 조직적으로 중국 동북항일연군의 역사를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으로, 중국공산당의 역할을 김일성 당 조직의 성과로, 중공 주요 군사 지휘자의 업적을 김일성의 위업으로 바꿔 치는 황당무계한 역사 조작을 자행했다.
반면 이승만 항일 독립운동은 숱한 증거물을 통해서 누구나 직접 맨눈으로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지금 당장 인터넷 뉴욕타임스의 검색 창에 “Syngman Rhee”라고 이승만의 영문 이름을 치면, 관련 기사들을 누구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기사들 하나하나가 이승만 독립운동의 발자취다. 그중에서도 1919년 3.1운동을 전후하여 46세의 이승만이 전 세계를 향한 벌였던 대한 독립 홍보전은 한국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장면이다.

▲1919년 4월 한인자유대회. 미국 필라델피아 시내에서 대한민국 독립을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공공부문
뉴욕타임스, 이승만의 예언 주목
1919년 1월 26일 <<뉴욕타임스>> 일요판은 “코리아, 윌슨에게 자유 호소(Korea Appeals to Wilson for Freedom)”라는 제목으로 한국 독립운동 관련 특집 기사를 2면에 걸쳐 게재했다. 3.1운동이 발발하기 33일 전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당시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 중이던 미국의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1924) 대통령은 한국 대표단으로부터 한국의 자치권을 고려해 달라는 해외전보(cablegram)를 받았다.
기자는 바로 첫 문단에서 한국 대표단 중엔 윌슨 대통령이 프린스턴 대학 총장이던 시절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윌슨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운 이승만이 속해 있음을 특별히 강조한다.

▲1919년 1월 26일, 뉴욕타임스 일요판에 실린 특집 기사 “코리아, 윌슨에게 자유 호소.”
한인 대표단의 나머지 두 명은 이승만의 배재학당 동문 민찬호(閔燦鎬, 1877-1954)와 정한경(鄭翰景, 1890-1985)이었다.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는 1918년 12월 뉴욕에서 개최된 제2차 소약속국(小弱屬國) 동맹회의에 세 사람을 파견하려 했으나 하와이에 있던 이승만은 참석할 수 없었다. 이어서 세 사람은 1919년 1월 18일부터 열리는 파리 평화 회의에의 참석을 시도했으나 미국은 이들에 대한 비자 발급을 거부했다. 승전국으로 회의에 참석하는 일본을 고려한 처사였다. 참석이 불발되자 이들은 윌슨 대통령을 향한 외교적 로비를 시도했다. 뉴욕타임스는 장문의 특집 보도로 한국의 입장을 집중 조명했는데, 정확한 배경을 알 순 없으나 기사 내용만 뜯어봐도 이승만의 주도적 역할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경복궁 근정전, 세종로에서 보는 북악산, 독립문 등 세 장의 커다란 사진을 담은 이 기사는 전편에 걸쳐서 한국 독립의 역사적 당위성과 외교적 중대성을 한국 편에 서서 지극히 우호적으로 기술했다. 이 기사는 특히 일본이 한국의 식민화에 머물지 않고 중국을 향한 침략 야욕을 갖고 있다는 한국인의 견해를 충실히 전달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한인 대표단은 한인들 절대다수가 한국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 일본 지배로부터의 자유와 국가적 독립을 원하고 있음을 역설했다. 특히 그들은 전 세계를 향하여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약소국 및 강대국 식민지들의 민족자결권을 보장해 달라고 간청했다. 기자는 기사 중간에 “한국 정치학도”와의 인터뷰를 소개한다.
“한국의 정치학도(the Korean political student)는 주장한다. 한국에서 만주의 비옥한 땅으로 도로가 직결되어 있으며 만주에서 중국으로 여러 도로가 이어진다. 여러 사건의 진행 추이를 보면, 일본의 급속한 인구 증가를 감당하기에 한국은 너무나 작아서 일본은 자연스럽게 점점 더 북쪽의 만주로 눈을 돌리고, 거기서 다시 남쪽으로 중국을 넘볼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경고하는 종착점이다. 일본은 본성상 자신의 전멸을 막기 위해서 저항이 가장 작은 길을 따라서 국경을 넓혀갈 수밖에 없으며, 그 길은 만주를 통해서 광대한 면적과 무한한 기회를 가진 중국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이 한국의 정치학도”는 의심의 여지 없이 이승만이다. 때는 만주사변(1931) 발발 12전이었으며, 본격적인 중일전쟁이 개시되기 18년 전이었다. 1919년 이승만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향후 전개될 일본의 팽창주의 침략노선을 정확하게 내다보고 분명하게 예언했다. 동서고금 어느 나라에서든 훌륭한 지도자는 정세를 파악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1919년 40대 중반의 이승만이 동서양 고전을 섭렵하고 당대 최고의 신지식을 아우르는 장시간의 지적 훈련을 거쳐 복잡한 국제정세를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이미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19년 6월 18일 각 국가 원수들에게 “대한민국을 주권국가로 인정하라”는 내용의 문서를 쓰고 친필 사인을 하고 있는 이승만. /우당기념관 제공
이승만을 비롯한 대한인국민회의 대표단 3인은 비록 파리평화회의에 직접 참가할 순 없었지만, 국제사회를 향해 대한 독립의 당위를 적극적으로 설파하여 마침내 당대 미국 최고의 언론사에 2면에 걸쳐 한국 독립을 옹호하는 단독 특집 기사를 싣게 하는 커다란 성과를 냈다. 이로써 일단 미국 언론의 심장부 뉴욕타임스에 코리아의 진지가 구축되었다.
3.1운동을 불과 한 달여 앞둔 상황에서 이승만이 주도하는 미주 교포들의 독립운동 소식은 연해주, 중국, 일본 등지의 해외 한인들을 큰 희망에 부풀게 했다. 특히 파리 강화 회의에 이승만 등 3인의 한인 대표가 참여한다는 뉴스가 일본서 간행되는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에 토막 기사로 실리면서 3.1운동의 직접적 도화선이라 평가되는 도쿄 한인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에 직접적 영향을 주었다(손세일, <<이승만과 김구>>2권, 711-722).
뉴욕타임스, 3.1운동 이후 한국에서 자행된 일제의 만행을 폭로
3.1운동 발발 직후부터 뉴욕타임스는 수개월에 걸쳐서 한국 독립운동을 계속 보도했다. 한반도 전역에서 수백만 명이 전개한 비폭력 시위를 일제가 무력으로 짓밟는 과정에서 대량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베이징, 상하이, 도쿄 등지에서 전송되는 해외전보를 타고 그대로 보도됐다.
1919년 3월 15일 뉴욕타임스는 “절단된 소녀의 손(Girl’s Hands Cut Off)”이라는 기사는 이미 4만 명이나 구속됐다는 한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보도했다. 시위 현장에서 자행된 인권유린의 사례도 보도됐는데, 일제 경찰이 일본도로 독립선언문을 잡은 어린 소녀의 손을 절단하자 그 소녀가 다른 손을 치켜들었다는 한 사람의 목격담을 실었다. 4월 13일 <<뉴욕타임스>>는 “투쟁, 코리아 전역으로 번져(Fighting Spreads All Over Korea)”에서 일본이 3월 27, 28일 서울에서 비폭력 시위에 나선 시민들을 수천 명이나 잔인하게 학살했다는 한 한인 목사의 주장을 전송된 문자 그대로 소개했다.
7월 13일 같은 신문은 “코리아에서 일본의 만행 혐의(Horrors in Korea Charged to Japan)”란 제목 아래 일제의 인권유린 실상을 폭로하고 규탄하는 미국 장로교단의 공식 보고서를 전면 소개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일제는 독립운동 가담 혐의자들을 마구 구속하여 잔악한 방법으로 고문했다. 그 과정에서 남자들 다수가 죽임을 당했으며, 여자들이 알몸으로 모욕을 당하는 사례도 속출했다.
미국인 일본 예찬론자의 “3.1운동” 폄훼
물론 뉴욕타임스가 일방적으로 코리아의 편에 서서 “대한 독립”을 옹호했던 친한파 언론은 아니었다. 1919년 5월 11일 뉴욕타임스는 미국인 일본 예찬론자(an American admirer of Japan)로 알려진 예일대학 철학 명예 교수 래드(George T. Ladd, 1842-1921)의 “한국 봉기의 원인(Causes of the Korean Uprising)”을 게재했다.
래드는 1892년부터 1899년까지 무려 7년간 이토 히로부미(1841-1909) 내각에서 외교 자문관으로 활약했던 대표적인 미국의 친일 인사였다. 같은 기간 그는 일본의 제국대학(帝國大學)에서 강의했는데, 그 당시 그의 교육 개혁 관련 강의는 일본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덕분에 그에겐 메이지(明治) 시대 일본의 비군사 부문 최고 훈장 욱일장(旭日章)이 수여됐다.

▲왼쪽: 일본 예찬론자로서 예일대학 교수로 재직했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 조지 래드George T. Ladd, 1842-1921), 오른쪽: 래드의 저서 <<이토 후작과 함게 한국에서(1908)>>의 표지. /공공부문
1906년 그는 일본 정부의 초대를 받아 시애틀에서 일제 군용 선박을 타고서 50일에 걸친 항해 끝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이때 세 번째로 일본을 방문한 래드는 한국에 주재하던 이토 히로부미의 초대로 한국 방문의 특전을 누렸고, 이듬해 무려 505쪽에 달하는 <<이토 후작과 함께 한국에서(In Korea with Marquis Ito>>를 집필하여 뉴욕에서 출판했다. 미국인의 입을 빌어 일본의 한국 병합과 식민화의 당위를 설파하게 하려는 이토의 간계였던 듯하다. 래드는 서울과 평양 등지에서 기독교계 단체가 주선하는 대중 강연을 했다. 그의 강연에는 많게는 1천5~6백 명, 적게는 수백 명의 청중들이 몰려들었다 한다.
이 책은 분명 1906~7년경 한국의 사회 현실은 물론, 대한제국 조정의 정치 현실을 예리한 시선으로 생생하게 묘사한 중요한 사료임에 틀림이 없지만, 책 곳곳에 한국인의 국민성을 나쁘게 단정하는 대목이 보인다. 그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인종적 우월의식과 문화적 편견이 유감없이 표출돼 있다. 그 밑바탕엔 낙후된 코리아의 자치 능력을 부정하고 일제의 병합을 옹호하는 일제 식민주의의 논리가 깔려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한국을 떠나기 전 그는 고종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서 이미 중국과 러시아를 물리치고 세계적 강국으로 부상한 일본과의 무력 충돌을 피해야 한다며 방외인의 충심 어린 충고를 전한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자면, “개인적 이익뿐만 아니라 고종황제와 그의 신민에 대한 실로 현명한 배려에 따른 [고종황제의] 가장 신성한 의무는 일본 정부가 한국에 보호국을 설치하고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다(”The most sacred obligations, not only of self-interest, but also of a truly wise regard for the Emperor and his subjects, bound the Japanese Government to establish and maintain its protectorate over Korea,” 같은 책, 149쪽).”
190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제국의 친일 외교관 스티븐스(Durham Stevens, 1851-1908)가 저격당하고, 이어서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피살된 후 한국인에 대한 래드의 부정적 편견은 최고조에 달했던 듯하다. 일본 문화에 깊은 애정을 품었던 래드는 3.1운동 발발 직후부터 뉴욕타임스가 일본의 가혹한 진압과 인권유린을 비판하는 기사들을 게재하자 심기가 불편했었나 보다. 1919년 5월 11일 같은 신문에 게재된 “한국 봉기의 원인”에서 래드는 한국의 봉기가 비밀결사 조직의 선동에 휘둘린 천도교 극렬분자의 책동이었으며, 기독교 선교사들도 일부 가세했다는 비현실적인 분석을 제시했다. 3.1운동의 의의를 그렇게 왜곡하고 축소하고 폄훼하면서 그는 자치(自治) 능력이 없는 한국인은 이토 히로부미가 제시한 방법에 따라 일본의 통치 아래서 일본 제국에 적극적 동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빠르면 20년 전부터, 늦어도 1906년 이후부터 한국 방문 이후부터 뇌리에 박혀버린 그의 생각이었다.
뉴욕타임스 대논쟁: 이승만 대 래드
불과 나흘 뒤인 5월 18일 뉴욕타임스는 래드의 칼럼에 대한 이승만의 반박문, “한국 대 일본(Korea Against Japan)”을 게재했다. 래드의 칼럼을 읽은 이승만은 격분했음이 분명하지만, 문장 속 그의 어조는 오히려 담담하고 차분하다. “독립운동 관련 래드 교수의 견해에 대한 답변”이란 부제가 붙은 이 글에서 이승만은 래드의 논리적 허점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예리하게 파헤치고, 논거를 샅샅이 캐묻는다. 엿새 후인 5월 21일 뉴욕타임스는 정한경의 반박문도 게재했다. 이승만과 정한경의 협공을 받은 래드도 가만있진 않았다. 5월 25일 같은 신문에 래드의 답변, “한국의 봉기(The Korean Revolt)”가 실렸다. 물론 이승만도, 정한경도 조국의 명운이 달린 여론전에서 한 치도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1919년 3.1운동. /공공부문
딱 일주일 후인 6월 1일 뉴욕타임스는 “극동 문제들(Far Eastern Questions): 한국 독립운동 관련 일본 입장 비판(Japan’s Position Criticized in Regard to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이라는 제목 아래 이승만과 정한경의 반론을 좌우 양단에 나란히 실었다. 이승만이 반론이 좀 더 길어서 좌단을 다 채우고 우단의 3분의 1쯤까지 갔고, 정한경의 글은 우단 아래쪽 3분의 2를 차지했다. 한국독립운동사의 중요한 문장이므로 다음 주 전문을 번역해서 소개하기로 한다. 그 전에 우선 5월 15일 이승만의 반론에서 다음 문단을 읽어두자. 이승만은 스스로 거쳐간 이 모든 과정을 “독립전쟁”이라 불렀다. 이 단락을 읽을 때 머리털이 주뼛 솟는 전율이 느껴졌다. 나만의 과민 증상인가?
“일본인과 그들 선전부대는 자주 지난 시대 한국 정부를 한국적 실정(失政)의 사례로 들먹이면서 일본 현 정권 아래서의 근대적 발전을 자신들의 우월함을 보여주는 실례라고 말한다. 그러나 구시대의 한국을 근대화된 일본과 비교하는 것은 구시대의 일본을 근대화된 한국과 비교하는 것만큼이나 공정하지 못하다. 일본 그 자체를 예로 들어보자. 페리 제독이 처음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의 상황은 당시의 한국보다 정치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비할 바 없이 열악했다. 정치적으로 한국 정부는 온전히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누리고 있었지만, 일본은 수많은 봉건 국가들로 쪼개져서 서로 싸우고 있었다······. 서양 문명을 수용한 이후 일본은 전 국가가 완전히 변화하였다. 한국도 서양 국가들에 문호를 개방한 후에 근대 문명에 보조를 맞춰 필수적인 개혁을 개시해 왔다. 혼자서 나름의 프로그램을 시행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일본인이 일본에서 이룬 바를 한국인도 한국에서 스스로 능히 이룰 수 있었으리라.” <계속>
〈107회〉이승만의 국제여론전: “독립운동은 논리 싸움이다!”
변방의 중국몽 <25회>

▲1919년 4월 서재필과 이승만 등 필라델피아 한인대회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조선일보DB
“제국의 논리” v. “독립의 논리”
19세기~20세기 세계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한 약소국이 독립을 되찾기 위해선 독립의 논리가 절실했다. 당시 열강들은 자체적으로 아시아·아프리카의 미개발 국가들은 자치(self-government)의 능력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근대 문명의 확산을 위해서 식민화가 불가피하다는 제국의 논리로 무장하고 있었다. 제국의 옹호자들은 빈곤과 질병의 나락에 굴러떨어진 미개발 지역의 주민들에게 근대 문명의 혜택을 베푼다는 보편적 인권과 자유 무역의 이념을 들고서 식민화를 정당화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이 되어 중국으로 영향권을 확대하고 있던 일본제국은 서구식 근대화론에 범아시아주의(Pan-Asianism)를 섞어서 식민 지배의 논리를 계발하여 유포했다. 일제의 범아시아주의는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일례로 중국 민국혁명(1911-1912)의 아버지 쑨원(孫文, 1866-1925) 역시 일본의 범아시아주의에 적극 찬성했었다. 일제가 식민주의의 논리를 계발할 때 적극적으로 동참했던 서양 지식인도 적지 않았다. 지난주 소개했던 미국 예일대학의 철학과 명예교수 조지 래드(George T. Ladd, 1842-1921)가 대표적이다. 1906년 이토 히로부미의 초대로 한국을 방문한 래딩은 이후 한국인들은 자치 능력이 없으므로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전형적인 제국의 논리를 설파했다.
이승만 v. 레딩의 논전, 뉴욕타임스의 논조 변화 이끌어
1919년 5월 11일 래드 교수는 뉴욕타임스에 3.1운동의 의의를 폄하하고 일제의 한국 통치를 노골적으로 미화하는 문제의 칼럼을 실었다. 이에 대항하여 이승만(李承晩, 1875~1965)과 정한경(鄭翰景, 1890~1985)은 래드의 논리를 비판했고, 논리적 열세에 몰린 래딩이 반론을 펼치자 다시 또 한 번 래드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5월 11일부터 6월 1일까지 뉴욕타임스의 지면에서 전개된 “이승만·정한경 대(對) 래드”의 논전은 이승만과 정한경의 완벽한 승리로 막을 내렸다. 래드는 사실관계 기술에서 숱한 오류를 범했을뿐더러 한국인의 국민성을 낮춰보는 서양인 특유의 우월의식과 속물근성(snobbism)까지 털려버리고 말았다.

▲1919년 5월 11일 뉴욕타임스는 한국의 자치 능력을 부정하는 일제 예찬론자 래드의 칼럼을 일요일판 4~5면에 걸쳐서 대서특필했다. 당시 뉴욕타임스의 논조가 일본 쪽으로 상당히 기울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공공부문
3.1운동에 대해서 미온적으로 짧은 기사만 다루던 뉴욕타임스는 지난 1919년 6월 15일 뉴욕타임스는 일요판 42면에 “한국이 독립을 선언하다(Korea Proclaims Independence)”라는 제목으로 3.1운동을 꽤 크게 조명했다. 최초의 기사에 비하면 다섯 배 이상의 분량을 할애했다. 래드와의 논전을 치르기 한 달 전인 4월 14~16일 필라델피아 대한인 총대표 회의에 참석한 이승만은 이미 대한공화국 임시정부의 사실상 수반으로 부상해 있었다. 4월 23일 서울에서 한성정부가 수립됐을 때 이승만이 집정관 총재로 추대되었다.

▲1919년 6월 15일 뉴욕타임스 6면, “한국이 독립을 선언하다”가 실렸다. 3.1운동을 집중 조명한 꽤 상세한 기사다. 이승만의 적극적인 국제여론전으로 이 신문의 논조가 변화했음을 시사한다. /공공부문
독립을 향한 전 세계 한인 대표들의 움직임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이승만은 래드와의 한 판 논전을 명쾌한 논리로 물리쳤다. 다음 회에서 그 당시 미국의 주요 언론들이 전한 3.1운동 관련 보도를 상세히 보기로 하고, 이번 주에는 예고한 대로 1919년 5월 11일 자 뉴욕타임스 래드의 칼럼에 대한 이승만의 반박문을 완역하여 싣는다.
“제국의 논리”에 맞서는 “독립의 논리”가 없다면, 그 어떤 나라도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 독립해야만 하는 이유나 명분도, 독립을 이룰만한 실력이나 의지도 못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 이제 “제국의 논리”에 대항하여 이승만이 제시한 “독립의 논리”를 조목조목 뜯어보자.
“일본에 항거하는 한국(Korea Against Japan)”
독립운동에 관한 래드 교수의 견해에 답한다
이승만
(뉴욕타임스 1919년 5월 15일 게재, 번역: 송재윤, 이동민)
널리 읽히는 뉴욕타임스 칼럼난에 래드 교수의 “한국에서 일어난 봉기의 원인들”(1919.5.11.)이 실렸기에 답변이 필요하다. 2천만 [한국인들]이 지금 독립을 위한 투쟁에 발 벗고 나선 상태이다. 이 싸움은 래드 교수조차 “프로이센 군국주의를 본떴다”고 하는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찾는 투쟁이다. 미국의 시민들은 저명한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맡은 사람의 발언을 무조건 신성하게 여길 공산이 크다. 무명작가의 발언이었다면 면밀하게 검토되겠지만, 래드 교수의 발언은 그러한 검증을 피해 가기 쉽다. 바로 그렇기에 교수직에 있는 사람에게는 매우 엄중한 책임감이 요구된다. 한일관계사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문제의 원문을 살펴보고 래드 교수가 스스로 늘 자신의 책임을 유념하고 있지는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지금 한국에서 거대하게 일어나는 평화적(비폭력) 혁명이 특정 비밀 결사들의 책동에 의한 것이라 주장한다. 그는 확신에 차서 그 단체들을 거명할뿐더러 놀랍게도 여러 나라에 산재한 이들 조직의 인원수까지 제시한다. 이 “정보”의 출처는 어디인가? 래드 교수 자신이 이 모든 단체의 회원은 분명 아니다. 만약 그가 기껏 미국 내에 있는 일본 선동가들의 풍문에 권위를 부여하여 이토록 세밀한 사항까지 말하였다면, 자기 자신의 권위와 지식에 근거하지 않고 풍문을 빌어 말하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어야 했다.
한국인 독립단은 한국을 제외한 그 어떤 곳에서도 비밀 결사가 아니다. 분명한 필요에 따라 한국에서는 비밀이었지만, 이제는 모두 과거의 일일 뿐이다. 래드 교수가 놀랍도록 쉽게 그런 말에 속는다는 점, 또 그가 일본의 동화 같은 얘기를 어린아이처럼 맹신한다는 점은 “천도교를 창시한 손헤이케이(Son-hei-kei, 손병희[孫秉熙, 1861~1922]의 일본식 발음 로마자)가 지난 황제의 아들”이라는 그의 발언에 잘 드러나 있다. 손병희는 작고한 황제의 아들이 되기엔 훨씬 나이가 많을뿐더러(역주: 원문은 “손병희는 작고한 황제보다 훨씬 연상”으로 잘못 기술되었지만, 문맥상 취지를 살려 수정) 두 사람은 전혀 혈연관계가 아니다. 천도교는 “한국 기독교도들 사이에서 영향이 크다”는 래드 교수의 발언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확실한 비기독교 조직이다. 물론 천도교도들 역시 대한독립을 간절히 바라지만, 천도교도가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그러하다.

▲1919년 5월 18일 뉴욕타임스 일요판 38면에 실린 이승만의 칼럼, “일본에 대항하는 한국”
래드 교수는 한국인들이 “가장 저열한 수준의 외세에 지배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한 발언은 일본이 한반도에 보호국을 선포한 1905년 이후에만 적용될 뿐, 절대로 사실이 아니다.
한밤중에 한국의 왕후(Queen)를 암살한 사건에 관한 래드 교수의 설명을 보면 일본을 옹호하기 위해 그가 어떻게 “과녁 너머로 마구 쏴대는(overshoots the target)” 무리를 범하는지 알 수 있다. 역사상 가장 잔혹하고도 혐오스러운 살인 중 하나인 그 암살에 관한 설명은 래드 교수의 저술 <<한국에 이토 후작과 함께(In Korea with Marquis Ito)>>에 담겨 있다. 그 책을 이토 후작에게 보여주자 그는 말했다. “너무 좋군요! 너무 좋아서 사람들이 안 믿을 거요.” 아닌 게 아니라 누구라도 그의 설명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황후 시해) 범죄는 분명 황후의 숙적 대원군에 의해 조작되었지만, 일본 정부는 제몫으로 부과된 책임을 결코 회피하려 하지 않았다(219쪽).”
아래는 히로시마에서 열린 일본 예심 법원의 미우라 자작에 대한 심리(審理)의 발췌본이다. 예비 진술 이후에 법원 서기가 공증한 문서에는 특히 아래의 “조사 결과(findings)”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피고인 미우라 고로(三浦梧楼, 1847-1926)가 1895년【원문에는 1896년으로 나와 있으나 실제로는 1895년 9월에 취임했으며,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발생】 천황의 특명전권공사로 서울에서 직무를 시작했음을 확인했다. 조선 정부는 국사의 처리에서 [일본인들에 대해] 날로 전횡을 일삼았다. [이는 보호국이 선포되기 10년 전이었다]. 일본 제국정부의 지도와 조언에 따라 막 재편된 행정 체계는 이처럼 다시 무질서와 혼란이 시작됐다. 조선 조정은 다시 일본을 배신하기에 이르렀다.
미우라 등 피고인들은 이러한 사태에 효과적인 처방을 쓰는 것이 시급하다고 여겼다······. 이러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대원군이 그에게 은밀하게 접근해서 지원을 요청했다’. [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로 왕후의 요구에 밀려 섭정직에서 물러났다.] [재판 중인 일본인] 피고인들은 공관에서 [대원군은 불참한] 회의를 열고서 왕후를 살해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이 제안을 담은 각서를 대원군에게 보내서 미우라 공사가 그에게 기대하는 바가 담겨 있다고 이야기했다. 대원군은 이에 동의했다.”
이 대목까지 스스로 시해 계획의 주동자를 인정하는 미우라의 자발적 진술에 근거한 조사 결과는 부군 옆에 있던 왕후를 끌고 나와 살해하고 광장에서 시신을 불태우는 범행 과정을 상세히 묘사한 후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피고인 누구도 그들이 애초에 계획한 범죄를 실제로 범하였음을 증명하는 충분한 증거가 없다”면서 그들을 석방하라 명한다.
미우라는 순식간에 일본 대중의 영웅이 되었으며, 그는 모든 훈장과 직위를 돌려받았다. 그러나 래드 교수는 이러한 대중적 열광에 동조하지 않고서 늘 철저하게 일본의 공식적 입장만을 받아들인다. 그는 죄악을 변호한 후에 그저 “현명치 못했다”고 선언한다.

▲프랑스 주간지 <<르 주르날 일뤼스트레>> 표지 기사 '조선 왕비 암살”. /공공부문
이 박식한 교수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믿고 맡겨야만 한다. 왜냐면 어이없게도 “한국의 일반인들은 너무나 미신적이어서 자치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일반인이 미신적이라니!
그런 취약점은 일본인들에게도 해당되는가? 래드 교수의 동료 예일대학 카사카와 교수가 콜럼버스 신대륙 도착 400주년을 기념하는 시카고 만국 박람회(1893) 일본제국위원회를 위해 편찬하고 이후 책의 마지막 제4부를 증보한 <<일본제국사>>에서 다음을 인용한다.
“1905년 5월 28일 쓰시마 해전(원문은 울릉도 해전)을 보고하면서 토고(東郷平八郎, 1848-1934) 제독은 자신의 승리라는 ‘기적’은 ‘전적으로 천황의 명덕(明德) 덕분이며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넘어서는 것’이고, ‘일본군이 입은 상대적으로 작은 손실은 제국 선조들의 혼령이 지켜주었기 때문임을 믿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이 저명한 교수는 말한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예전에 누렸던 ‘자유’의 흘러간 영광을 자랑하고 있다.” 우리는 결코 그런 “자랑”을 한 적이 없다. 래드 교수는 살아 있거나 이미 죽은 한국인의 발언 중에서 자신의 주장을 증명해 줄 단 하나의 문장도 인용할 수 없다.
일본인과 그들 선전부대는 흔히 지난 시대 한국 정부를 한국적 실정(失政)의 사례로 들먹이면서 일본 현 정권 아래서의 근대적 발전이야말로 자신들의 우월함을 보여주는 실례라고 말한다.
그러나 구시대의 한국을 근대화된 일본과 비교하는 것은 구시대의 일본을 근대화된 한국과 비교하는 것만큼이나 공정하지 못하다. 일본 자체를 예로 들어보자. 페리(Matthew C. Perry, 1794-1858) 제독이 처음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의 상황은 당시의 한국보다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비할 바 없이 열악했다.
정치적으로 한국 정부는 온전히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누리고 있었지만, 일본은 수많은 봉건국으로 나뉘고 다시 쪼개져서 서로 싸우고 있었다. 물질적으로도 일본에는 언급할 만한 도로도 없었으며, 일본인들이 자랑하고 있는 빌딩이나 개량된 위생시설도 없었다.
서양 문명을 수용한 이후 일본은 전 국가가 일변하였다. 한국도 서양 국가들에 문호를 개방한 이후 근대 문명의 모든 면에 걸쳐 필요한 개혁을 개시해 왔다. 혼자서 나름의 프로그램을 실행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일본인이 자기 나라에서 이룬 바를 한국인도 자기 나라에서 스스로 능히 이룰 수 있었으리라.
한국에서 일본이 이룩한 모든 놀라운 물질적 성취는 실상 한국인이 스스로 시작하였다. 일본이 현지의 한국인들에게서 무엇을 앗아갔는지 읊어본다면, 일본인들이 옛 정부 아래서 무엇을 누렸는지 정확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별것 아닐지나 내 것이라오(a poor thing, but mine own).”
켐프 양(Miss Kemp, 미상)이 제시한 일본의 약탈 목록은 일부에 불과하다. 일본은 이제 한국인들을 실제로 완전히 벌거벗겼으며, 그들의 땅을 강탈하고, 그들의 사찰과 교회를 파괴하고, 선교 학교를 폐쇄하고, 한국인 자신들의 학교에서 한국어 교육을 금지했다. 일본은 한국 어린이들에게 미카도(御門, 일왕)와 그 조상에 대한 숭배를 강요한다. 일본은 한국 학생들의 해외여행을 금지하고, 그들이 일본에서 받을 수 있는 교육도 공업계 학교에 제한하였다.
구체제 아래서 한국인들은 적어도 비교적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한국을 다녀간 모든 유럽인의 기록에 따르면, 한국인의 집과 감옥은 놀라울 정도로 깨끗했다. 그들은 동방의 그 어떤 나라 사람들보다 도덕적 우월성을 보였으며, 지금의 일본보단 그 수준이 한량없이 높았다.
목적에만 맞으면 래드 교수는 아무리 하찮은 사건이라도 다 끌어다 쓴다. 그는 일본인 고리대금업자의 손아귀에 걸려든 한 한국인이 공금을 애인에게 탕진했다는 이야기까지 끌어온다. 물론 그런 일이 미국에선 일어날 수 없으리라! 그래도 잠시 상상력을 발휘해서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치자. 어느 정신 멀쩡한 사람이 그런 사건을 내세워서 자치는 미국인들에겐 부적합하다는 논거로 쓰겠는가? 이승만. <계속>
〈108회〉“한강 다리 폭파 사건”의 진실 (1)
변방의 중국몽 <26회>

▲1950년 6월 28일 폭파된 한강 인도교는 1958년에야 복구되었다. 그 사이 시민들이 강을 건너다닐 수 있게 부교가 설치되어 있었다. /공공부문
“일견폐영(一犬吠影)하니 백견폐성(百犬吠聲)하더라”는 말이 있다. 개 한 마리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니, 백 마리 개들이 떼로 그 소리를 듣고서 짖더라는 뜻이다. 허깨비를 보거나 거짓말에 속아 무리 지어 난동하는 우중(愚衆)을 꼬집는 날카로운 풍자(諷刺)다. 한(漢)나라 때부터 내려오는 이 한마디가 21세기 2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가슴을 친다. 과거사에 관한 가짜 뉴스와 허위 정보가 “역사”의 이름으로 숱한 매체를 통해서 날마다 널리 멀리 뿌려지기 때문이다. 흔히 500~800명의 양민이 학살됐다 “카더라”는 “한강 다리 폭파 사건”이 대표적 사례다. 우리는 과연 그 비극적인 사건의 진실에 대해서 무엇을 제대로 알고 있으며, 무엇에 허망하게 속아 왔는가?
1950년 6월 28일 오전 2시 30분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던 순간 그 다리 위에 3인의 미국인 종군 기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탄 지프차는 발파 지점에서 불과 20야드(19미터) 떨어져 있었는데, 바로 앞의 2.5톤 군용트럭이 날아가면서 폭풍(爆風)을 막은 덕분에 뒤에 있던 세 사람은 기적적으로 생존했다. 바로 그날 그들이 천신만고 끝에 수원에 도착해서 급히 작성한 기사문들은 곧바로 캐나다와 미국의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이들의 기록 속에 “한강 다리 폭파 사건”의 진실이 담겨 있다. “슬픈 중국”에서는 앞으로 3회에 걸쳐서 이들의 기록을 샅샅이 검토해 보기로 한다.
“슬픈 중국”과 한국 현대사
왜 “슬픈 중국”에서 “한강 다리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가? 지금도 대한민국에는 “슬픈 중국”의 영향 아래서 “변방의 중국몽”을 꾸고 있는 정치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의 나라”라 칭송하고, “한국은 작은 나라이지만 중국몽에 동참하겠다”고 공언하는 바로 그 세력이다. 제후국으로서 황제의 나라를 천조(天朝)로 떠받들던 왕조사의 관성인가?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하고 반란을 일으켰던 남로당의 영향인가? “위·수·김·동의 주체사상”에 세뇌당한 “주사파”의 잔존인가?
갈라파고스 제도(諸島)의 코끼리거북처럼 이념적 진화를 거부하는 그들의 머릿속은 온통 낡은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슬픈 중국” 시리즈는 조선 주자학과 노비제 논의를 거쳐서 “홀로 선” 자유 투사 이승만의 업적을 재조명해 왔다. 앞으로는 1970~80년대 재등장한 친중 세력과 1980~90년대 주사파의 “맹활약”을 다룰 예정이다. 여전히 한국 정치권에선 바로 어제의 그 세력이 무리 지어 국사(國事)를 쥐락펴락하고 있기에. “슬픈 중국”과 한국 현대사는 떼려 해야 뗄 수 없다. 6.25전쟁이 단적인 사례다.
대륙 공산주의 vs. 해양 자유주의
6.25전쟁은 소련제 중화기로 무장한 북한 김일성이 유엔 승인을 받은 신생국 대한민국에 대해 일으킨 기습적 침략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중소 중심의 대륙 공산주의와 미국 중심의 해양 자유주의가 한반도에서 충돌한 사건이었다. 그 세계사적 의의를 해석하면, 2차대전 이후 공산 전체주의의 군사적 팽창을 저지하는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환태평양 방어 전쟁이라 할 수 있다. 그 전쟁의 결과 해양 자유 진영에 들어간 대한민국과 대만은 이후 70여 년에 걸쳐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이루고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 반면 대륙 공산권에 들어간 북한은 인민의 10%를 노예로 삼은 인류사 최악의 전체주의 세습 전제국가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에 암약하는 반미·친중 세력은 김일성의 남침을 “민족해방 통일전쟁”이라 부르면서 이승만의 인격을 살해하여 악마로 둔갑시키는 공산당식 정치전(政治戰, political warfare)과 나치식 여론전을 펼쳐왔다. 그 결과 6.25전쟁과 관련하여 허위 정보와 가짜 뉴스가 지금도 판치고 있다. 특히 침략군 저지 목적의 한강 인도교 폭파 작전을 이승만 정권의 대민테러로 뒤바꾸는 정치적 선동술에 많은 국민은 속절없이 넘어갔다. 한강 다리 폭파의 진실은 무엇인가?
한강 인도교 폭파 현장, 3인의 종군 기자
1950년 6월 28일 2시 30분경, 북한군이 침략을 개시한 지 70시간 지난 시점이었다. 한강 인도교 남쪽 다리 제2, 3번 상판에서 “역겨운 오렌지색 불길(sickly orange flame)”이 치솟았다. 고막을 찢을 듯한 폭음과 함께 제1번 상판 남단에서 2.5톤 군용트럭이 나동그라졌다. 바로 그 트럭 뒤에 있던 지프차가 붕 뜬 후 뒤로 밀렸다. 그 지프에는 세 명의 미국인 종군 기자들이 타고 있었는데, 정면 유리막이 부서지면서 앞에 탄 두 명은 얼굴에 부상을 입었다. 뒷자리 기자는 무사했다.
이 세 명의 미국인 종군 기자는 버튼 크레인(Burton Crane, 1901-1963), 프랑크 기브니(Frank Gibney, 1924-2006), 카이스 비치(Keyes Beech, 1913-1990). 당시 49세의 크레인은 미군정기 일본의 뉴욕타임스 특파원이었다. 1922년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1937년부터 줄곧 뉴욕타임스 금융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일본에서 가수로도 활동했으며 극작가로서 여섯 편의 연극을 연출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인도교 폭파 당시 그는 지프의 운전대를 잡고 있다가 눈가에 상처를 입고 피를 철철 흘렸다. 그가 당일 수원에서 작성한 인도교 폭파 관련 기사는 다음날인 1950년 6월 29일 자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한국군과 민간인들이 부상당한 미군 해병 1인을 기관총을 이용해 만든 간이 들것에 실어 나르고 있다. /Life(Photography by David Douglas Duncan. 1950)
26세의 일본통 기자 기브니는 1950년 당시 타임지와 라이프지의 특파원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예일대학 출신으로 2차대전 당시 미해군에서 일본 포로들을 직접 심문했고, 미군정기 일본에 배치되어 “맥아더 장군과 일본 국민을 잇는 자그마한 인적 교량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기브니는 이후 아시아에 관해서 10권이 넘는 저술을 출판하여 권위 있는 저널리스트이자 학자로 성장했다. 당일 그가 쓴 기사는 1950년 7월 10일 타임지에 게재됐고, 같은 날 라이프지에 그 축약본이 들어갔다. 다리가 폭파될 때 지프 조수석에 앉아 있던 그는 눈가에 찰과상을 입었다. 그의 안경은 박살이 났다.

▲버튼 크레인은 일본 체류 중 가수로 데뷔하여 인기를 누렸던 다재다능한 저널리스트였다. 왼쪽 기사는 1950년 7월 10일 라이프지에 게재된 기브니의 기사. 부당당한 크레인의 사진이 실려 있다. 오른쪽 하단은 1950년 6월 29일 뉴욕타임스에 실린 크레인의 기사.

▲1966년 3월 4일 모닝스타(Morning Star)에 실린 프랭크 기브니. /공공부문
37세의 비치는 1947년 이래 시카고 데일리 뉴스(Chicago Daily News)의 임원이 되어 아시아 관련 기사를 담당했다. 그는 2차대전, 한국전쟁을 취재하고 이후 베트남전쟁의 현장까지 달려간 베테랑 기자였다. 특히 한국전쟁 관련 그의 기사들이 큰 반향을 일으켜서 그는 1951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폭파 당일 그가 작성한 기사는 같은 날짜인 1950년 6월 28일 밴쿠버 데일리 프로빈스(Vancouver Daily Province) 제1면에 특종으로 실렸다.
비치의 저서 <<도쿄와 동방의 요지(Tokyo and Points East)>>(1954)의 “서울 탈출기(Escape from Seoul)”는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의 진상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기록이다. 이 장은 3인 종군 기자의 기록을 집대성하고 있다. 사건 당일 작성된 세 명 기자들의 기사들에 오류가 있었다면 비치가 충분히 검토해서 교정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에 관한 3인 종군 기자의 최종 보고서라고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비치는 카메라를 들이댄 듯한 정확한 기억력(photographic memory)으로 폭파 전후 직접 겪은 일들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가장 상세한 비치의 기록을 기본으로 삼고 다른 두 기자의 기록과 대조하여 당시 3인이 거쳐간 구체적 상황을 재현해 보려 한다.

▲2차대전 중 전쟁터에서 타자기로 기사를 쓰고 있는 카이스 비치의 모습. 오른쪽은 한강 인도교의 진실이 담긴 그의 저서. /공공부문
김포 공항 도착, 한강 쪽으로 피난
일본 남부 후쿠오카(福岡)의 이타주케(板付) 미공군기지에서 운송기 C-54에 오른 미국인 종군 기자들은 1950년 6월 27일 저녁 7시에서 8시 사이 김포 공항에 도착했다. 1950년 6월 27일 저녁 8시경 공항 주차장에 버려진 미국 차량을 몰고서 서울 시내로 향했다.
저녁 9시경 그들은 지프를 몰고서 한국군 헌병대의 삼엄한 경계선을 통과해서 용산의 주한 미 군사고문단(KMAG) 본부 건물로 들어갔다. 500명에 달하는 군사고문단은 대부분 수원으로 철수하고 60명 정도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스털링 라이트(Sterling Wright, 1907-2009) 대령은 차분하게 적이 바로 그 순간 불과 12마일(19.2 킬로미터) 밖에 있다고 말했다. 27일 일찍 남쪽으로 철수했던 군사고문단은 오후 2시경 도쿄 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다시 서울로 복귀하는 혼란이 빚어졌다고 했다.

▲1950년경 서울 용산의 주한 미 군사고문단 본부. /US Army File Photo·공공부문
비치의 기록에 따르면, 3인이 군사자문단 사무실 소파에서 잠시 잠을 청하는데, 황급히 군인 한 명이 바지 단추를 잠그면서 뛰어 들어와서 적이 서울로 진입했다며 당장 수원으로 가라고 했다. 밖에선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들은 옷가지와 타자기를 들고서 지프에 올랐다. 그들은 일단 한국 육군사령부로 향했다. 총성이 들렸지만 아직은 멀게 느껴졌기에 기자의 취재 본능이 동물적 생존 본능을 억눌렀다.
위급한 순간 내린 바로 그 결정이 세 사람을 한강 다리 폭파의 진실을 밝히는 역사의 증인이 되게 했다. 한국 육군사령부 건물 앞에 도착해서 운전대를 잡은 크레인은 지프 안에 남았고, 기브니와 비치는 건물 2층으로 올라갔다. 미군 소장 세드베리(George Sedberry)와 한국군 대령 김백일을 잠시 만났다. 세드베리 소장은 그들에게 위급한 상황을 알리며 당장 한강을 건너 수원으로 가라 했다.

▲라이프(Life)지의 데이비드 던킨 기자가 1950년 9월 서울 수복 당시 현장에서 촬영한 사진. 북한군 탱크가 화염을 내뿜는데, 지하도로 한 가족이 피신하고 있다. David Dougals Duncan. /공공부문
이상은 비치의 기록이다. 이와 달리 기브니와 크레인은 모두 새벽 2시 15분경 본부에서 전화가 왔다고 했다. 2시 15분이면 다리가 폭파되기 불과 15분 전이었다. 비치의 말대로 그들이 한국 육군사령부에 들러서 대화까지 하였고, 이후 한강 인도교 입구에서 인파에 밀려서 소걸음을 쳤고, 중지도 상판 위에서 완전히 정차한 상태에서 한참을 기다렸으며, 또 그 상황에서 언쟁까지 벌이고 있었다면, 15분보다 훨씬 더 걸렸을 수밖에 없다.
세 가지 이유에서 기브니와 크레인의 기록보다 비치의 기록이 신빙성이 있다. 첫째, 크레인과 기브니는 현장에서 부상을 당했으나 비치는 멀쩡했다. 둘째, 크레인과 기브니보다 비치의 상황 묘사가 훨씬 더 정교하고 상세하다. 셋째, 비치는 현장에서 작성한 칼럼 말고도 1954년 책을 출판하면서 당시 상황을 다시 파악하고 정리해서 최종적으로 기록했다. 따라서 “한강 다리 폭파 사건”의 진상 규명에서 비치의 증언이 다른 두 기자의 증언보다 더 중시될 수밖에 없다. <계속>
〈109회〉美 종군 기자 3인이 전한 “한강 다리 폭파 사건”의 진실 (2)
변방의 중국몽 <27회>

▲6.25전쟁 당시 피난민들의 모습. 남자들은 모두 징집당했는지 이 피난민들은 모두 여자들로 보인다. /https://www.iwm.org.uk
지난 회 “‘한강 다리 폭파 사건’의 진실”(1)에 이어서 이번 회에서도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반 한강 인도교가 폭파될 때 현장에서 극적으로 살아났던 미국인 종군 기자 3인의 기록을 꼼꼼히 읽어보자.
1993년 KBS 역사 다큐멘터리, 상상으로 신화를 창작
1993년 KBS에서 제작·방영한 다큐멘터리극장 “한강 인도교 폭파와 부산 정치파동”의 첫 장면은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반 경의 상황을 “재현”한 영상으로 시작된다(전체 재현 영상, 26분 40초~28분 01초).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비가 쏟아지는데, 한강 인도교 상판 위에는 인파에 밀린 피난민들이 봇짐을 인 채로 소걸음을 하고 있다. 지게에 실려 가는 한 어린 소녀가 힘없이 왼손에 든 주먹밥을 먹으려는 순간, 다리 위로 노란 화염이 치솟는다.
다큐멘터리는 배경에 깔리는 두 군인의 대화로 폭파 직전의 상황을 묘사한다. 현장에서 폭파 단추를 누르기 직전 병사는 폭파할 수 없다고 울부짖지만, 상관은 “명령이다!” 외치며 폭파를 종용하고, 피난민 다수가 폭살될 것임을 알면서도 병사는 어쩔 수 없이 폭약 펌프를 누른다. 이 대화에는 피난민들이 가득 차 있는 한강 다리를 군인들이 뻔히 보면서 상부의 명령에 따라서 다리를 폭파했다는 주장이 깔려 있다. 혼비백산 달아나던 국군이 피난민이 몰려드는 사실을 알면서도 폭탄을 터뜨렸다는 소위 “양민 학살”의 신화다.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임에도 이 재현 장면은 정확한 자료 분석도, 현장 답사도, 증언 수집도 없이 거친 상상력을 발휘하여 지어낸 허구일 뿐이다. 이 영상을 보면 당시 한강 인도교 위에는 차량이 단 한 대도 없이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피난민이 인파를 이루고 있다. 반면 여러 증언을 취합해 보면 그 순간 인도교 상판 위에는 군용 차량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군용트럭은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켜고 있었으므로 폭파 직전 다리 위가 칠흑 같은 어둠일 수도 없었다. 폭파 지점은 중지도 남단 한강 인도교의 제2, 제3 상판이었다.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누구든 가장 중요한 1차 사료를 우선 정독해야 한다. 당일 발파 지점에서 불과 20야드(19미터) 떨어진 제1 상판 위에서 지프차를 타고 있던 3인의 미국 종군 기자들의 기록이 바로 그러한 1차 사료이다. 이제 다시 그들의 기록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인도교 북쪽 진입로 상황
6월 27일 저녁 7시경 김포 공항에 도착한 4인의 미국인 종군 기자들은 공항에 방치돼 있던 미국인 차량 3대를 몰고서 용산의 주한 미 군사고문단으로 갔다. 그 4인 종군 기자 중에서 유일한 여성 마거릿 히긴스(Marguerite Higgins, 1925-1966) 기자는 군사고문단의 스털링 라이트(Sterling Wright, 1907-2009) 대령과 함께 움직였다. 나머지 3인은 군사고문관 건물에서 잠시 눈을 붙이려는데 한 군인이 황급히 달려와서 빨리 한강 다리를 건너서 수원으로 피난을 가라고 했다. 긴급한 상황에서도 3인의 종군 기자는 취재를 위해서 한국 육군사령부에 잠시 들렀고, 결국 그 때문에 한강 인도교 폭격 현장의 증인이 되었다.

▲1944년 지성당(至誠堂)에서 제작한 “경성(京城) 안내” 지도. 76X54cm. 당시 서울의 성벽, 산악, 사원 신사, 경찰서 위치 등이 그려져 있으며, 철도, 전차, 버스 노선 등 교통 정보도 표시되어 있다. 사각형은 한강 인도교, 중지도, 한강 철교가 놓인 위치. 다음 지도 참조. /국토지리정보원 국립지도박물관.
육군사령부 건물에서 세드베리(George Sedberry) 소장에게 북한군 탱크가 서울로 진입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3인의 종군기자는 황급히 건물을 나와서 지프를 거칠게 몰며 한강을 향해 달려갔다. 이때는 도시 전체가 들썩이고 있었는데, 사람들의 발길은 모두 한강 쪽을 향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컴컴한 밤중이었다. 다음은 비치의 원문 번역이다.
“우리는 더 빨리 가기 위해서 큰길 왼편으로 차를 몰았다. 정체는 거의 없었지만, 길이 다리로 좁혀 들 때(as the street narrowed into the bridge) 우리는 갈수록 더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는 몰려드는 피난민들, 소달구지들, 트럭들, 자전거들 사이에 끼었다. 우리의 지프는 거의 멈춰 있는 듯 느리게 움직였다(Our jeep could move no faster than the slowest). 걸어가도 더 빨랐을 것이다.”
지프가 용산 방향에서 인도교 북쪽 진입로까지 가는 상황의 묘사다. 비치는 북쪽 인도교가 시작되는 지점을 “도로가 다리로 좁혀 들 때”라고 적었다. 바로 이 지점에 피난민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길이 다리로 좁혀” 든 곳은 다리가 시작되는 지점으로 아마도 아래 지도의 “A” 지점 부근으로 추정된다. 1980년대 한강의 36km가 준설되면서 한강의 수량이 대폭 늘어나서 지금은 노들섬(중지도) 북쪽으로도 수량이 가득하지만, 1950년 당시엔 물은 없고 넓은 모래톱이 펼쳐져 있었다. 비치와 기브니 두 명 다 중지도를 지나 인도교 남쪽 다리 제1 상판 위에 차가 정차된 바로 그 지점(아래 지도의 B)을 다리 중간쯤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A: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전후, 몰려든 차량과 피난민 인파로 길이 막혔던 지점. B: 이들이 탄 지프차가 트럭 뒤에서 멈춰 서 있던 위치. 별표: 발파 지점. 오른쪽 아래 사진은 오늘날 노들섬(중지도)과 한강대로의 모습. /송재윤 제공
기브니의 1950년 7월 10일 자 타임지 기사 속에서도 두 차례에 걸쳐서 피난민들이 등장한다. 그는 “큰 철제(big steel) 한강 인도교를 향해 남쪽으로 가는 길에서 체증이 심했다(Traffic was heavy on the road running south to the big steel Han River bridge)”고 했다. 위의 지도에 표시된 A 지점쯤으로 추정된다. 바로 다음 문단에 중요한 대목이 등장한다.
“군사적 궤멸 흔적은 없었다. 후퇴 병력을 포함해 대다수 병사는 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헌병 지시에 따라 차량들은 엄격하게 줄을 맞추고 있었다(Guided by MPs, automobiles kept strictly in line). 무질서는 오직 행진하는 군대 행렬 밖의 수천 명 가난한 피난민들, 머리에 봇짐을 인 여인들, 가사용품들을 지게에 맨 사내들, 그들 사이에 있었다. 김포 공항에서 서울로 갈 때 느껴졌던 시민들의 침착함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이어지는 문단에서 기브니는 다시 상황을 되짚어 묘사한다.
“다리에 이를 때까지는 교통이 원활했다. 다리에서 속도가 느려지더니 곧 멈춰 서버렸다. 우리 지프차가 군인들을 가득 태운 거대한 2.5톤 트럭(6 by 6)과 다른 지프차들 사이에 바싹 끼어 있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미 거의 다리 중간에 와 있음을 알게 됐다. 우리는 지프에서 내려서 대체 왜 막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앞으로 걸어갔지만, 다리 위로 쏟아져서 밀려드는 피난민들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했다. 우리는 지프로 가서 기다렸다. 경고도 없이 역겨운 오렌지색 거대한 불길이 하늘을 밝혔다. 우리 바로 앞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우리가 탄 지프가 폭풍(爆風)에 들려서 15피트(4.5미터) 뒤로 밀려났다.”
기브니의 기록에 오류가 개입되지 않았다면, 그는 “거의 다리 중간(almost halfway over the bridge)”에서 정체가 심해져서 상황 파악을 위해 차 밖으로 나갔다가 “다리 위로 쏟아져 들어오는 시민들”에 휩싸였다는 얘기다. 이 문단에선 “거의 다리 중간” 지점이 중지도로 보인다. 중지도까지 피난민들이 모여들었다는 증언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기브니의 기록이 비치의 증언과 어긋난다는 점이다. 비치는 인도교 진입로에서 몰려드는 피난민을 보았고, 그 장면을 “소달구지들, 트럭들, 자전거들”을 열거하며 상세하게 묘사했다. 기브니가 “쏟아져서 밀려드는 피난민들”을 중지도가 아니라 위의 지도 A지점에서 보았다면 비치의 기록과 부합한다. 만약 기브니의 말대로 중지도에 피난민들이 물밀듯 밀려들었다면, 왜 비치와 크레인은 그들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을까? 상식적으로 그런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종군 기자라면 피난민의 동향을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다. 상식적으로 전쟁 상황에서 전사하는 군인들보단 희생당하는 민간인의 모습이 더 특종감이기 때문이다.

▲한강 인도교 및 철교가 폭파된 후 미국 공군이 상공에서 촬영한 사진. /미국 공군 정보부대(U.S. Air Force Intelligence).
세 사람의 기록을 세밀하게 대조해 보면, 기브니의 기록보다는 비치의 기록이 더 정확해 보인다. 기브니가 중지도가 아니라 인도교 북쪽 진입로에서 길이 막혀버렸을 때, 차 밖으로 나가서 목격했던 장면을 사후에 착각하여 중지도 부근처럼 묘사했을 수도 있다. 세 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첫째, 라이프지에 게재한 축약본에서 기브니는 자신이 쓴 타임지의 문장을 다음과 같이 좀 더 분명하게 요약했다. “교통이 빨리 움직였지만, 다리에서 멈춰섰다. [다리를] 반쯤 지났을 때, 지프가 2.5톤 트럭 뒤에 끼어 있게 되었다(Traffic moved quickly, but at the bridge it stopped. Half-way across, our jeep was wedged behind a huge six-by-six truck full of soldiers).”
기브니 스스로 차가 정차했던 위치가 인도교 북쪽 진입로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도록 기록했다. 기브니가 “다리에서 멈춰섰다”고 말한 그 지점의 풍경을 묘사하면서 비치는 “우리는 몰려드는 피난민들, 소달구지들, 트럭들, 자전거들 사이에 끼었다”고 썼다.
둘째, 기브니의 묘사가 진정 정확했다면 비치는 왜 1954년 “서울 탈출기”를 출판할 때 최종적으로 기브니의 기록을 반영해서 기록을 수정하지 않았을까? 1954년 최종 기록을 남길 때 비치는 기브니의 타임지 기사를 반영하여 자신의 기록을 바꾸기보단, 더 분명한 언어로 북쪽 진입로가 막혔음을 밝혔다.
셋째, 만약 중지도 폭파 현장 부근에 그토록 많은 민간인이 운집해 있었다면, 어떻게 그 중요하고도 놀라운 장면에 대해서 비치와 크레인과 같은 베테랑 종군 기자들은 일언반구 언급조차 하지 않았겠는가? 상식적으로 중지도에 피난민들이 몰려 있었다면, 세 사람 모두 그 피난민들의 존재를 인지하고 기록했어야 정상이지만, 비치와 크레인은 중지도 지나 인도교 남쪽 상판 위에선 피난민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남기지 않았다.
중지도 지나 인도교 상판 위의 정체
비치는 “다리 중간(in the middle of the bridge)”에서 차량 행렬이 완전히 멈춰 선 상황을 다음과 같이 쓴다. 여기서 다리 중간이란 문맥상, 또 정황상 인도교 전체의 중간 지점, 곧 중지도를 가리킴이 틀림없어 보인다.
“다리 중간에서 전체 행렬이 완전히 멈춰섰다(the entire column came to a halt). 우리는 지프 안에 앉아서 기다렸다. [북쪽에서 북한군이 쏘아대는] 중화기의 괴성이 더 가깝게 들렸다. 그 소리는 심히 고통스러웠다. [막힌 차량의] 행렬(the column)이 움직일 수만 있다면, 안전한 곳은 불과 100야드(91.44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공산 세력의 탱크가 만약······
크레인은 격하게 핸들을 흔들면서 소리쳤다.
‘사령부를 들르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다리를 다 건넜겠다.’
그건 사실이었다. 내가 사령부에 들르자고 했었다.
‘지금은 뭘 했는지를 생각할 때가 아니라 대체 뭘 해야 할지 생각할 때잖아.”
나는 뒷자리에서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앞의 크레인 옆자리에 앉은 기브니는 슬기롭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때 우리 앞에서 온 세상이 폭발하는 듯했다. 오렌지색 불빛이 솟는 장면과 그 불빛을 배경으로 트럭 가득한 한국 군인들을 본 기억이 난다. 트럭이 허공으로 들렸다. 우리가 탄 지프도 뒤로 밀려났다.”
여기서 완전히 멈춰 선 전체 행렬(the entire column)이란 용어에 주목해야 한다. “행렬(column)은 군사용어로서 정연하게 이어지는 군용 차량의 행렬을 의미한다. 같이 현장에 있던 크레인은 1950년 6월 29일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우리와 함께 다리를 건너가던 “트럭 행렬의 군인들(the soldiers in the truck columns) 허둥대지 않았다”고 했다. 중지도를 지났을 때는 차량들이 다리를 관통해서 가기 위해 길게 줄을 맞춰서 늘어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93년 KBS 다큐멘터리가 재현한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반의 한강 인도교 장면, 곧 차량은 단 한 대도 없는 다리 위에 피난민들이 인파를 이루고 멈춰 서 있듯 느리게 걸어가는 그 영상은 역사적 사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폭파 직후 3인은 지프에서 내려서 일단 상판 위에 엎어졌다. 더는 폭음이 이어지지 않았고, 야릇한 정적 속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잠시 후 3인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시 지프를 몰고 다시 다리를 건너가려 했다.
눈가에 상처를 입어 출혈이 심했던 크레인은 조수석에, 부상이 덜 심했던 기브니는 운전석에 앉았다. 전혀 상처를 입지 않은 비치가 다리 앞으로 걸어가면서 수신호로 지프차를 인도했다. 다리는 이미 파괴되었지만, 혹시나 다리 한쪽에 덜 부서진 곳이 남아 지프가 통과할 수 있을까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뒤집힌 트럭, 널브러진 시신들을 지나 다리 위로 걸어가던 비치는 마침내 절단면에 이르렀다. 상판이 잘려 나간 다리 아래로 그의 눈앞에 시커먼 강물이 보였다.
할 수 없이 3인은 지프를 버리고 인도교 북쪽 용산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누군가의 안내로 한 미군인 집으로 찾아갔다. 그 집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휴식을 취한 3인은 그 집 마당에 정차해 있던 두 대의 지프를 몰고서 다시 수원으로 향했다. 폭파 현장에서 북쪽으로 16킬로미터쯤 올라가서 그들은 강을 건널 수 있게 됐다. 한 뱃사람(boatman)이 손수 만든 엘에스티(homemade LST, 상륙용 수송선)가 운행 중이었다. 그들은 뱃사람에게 미화 10달러를 주고서 트럭을 엘에스티에 싣고서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임시 한미사령부가 세워진 수원에 다다른 세 사람은 그 즉시 사고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한 기사를 작성하여 캐나다와 미국의 본사에 송고했다. 곧바로 윤전기를 통과한 기사는 바로 당일과 다음 날 미국과 캐나다에 뿌려졌다.
인도교 폭파 사건의 가장 중요한 1차 사료
이 3인 종군 기자의 기록들이 의심의 여지 없이 한강 인도교 폭파의 상황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1차 사료(史料)다. 누구든 한강 인도교 폭파 현장의 진실을 알고 싶다면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서, 그 밖의 모든 2차 사료를 일단 제쳐놓고서, 이들의 기록을 꼼꼼히 정확하게 읽어야만 한다.
우선 이 3인은 바로 당일 폭파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생존자들이며, 목격자들이다. 사건의 진상을 규명할 때 이들의 증언에는 법적으로 최고의 중요성이 부여되어야 한다. 게다가 이들은 일반인이 아니라 전쟁 발발 후 도쿄에서 서울로 날아온 종군 기자들이었다. 잘 훈련된 전문 기자답게 이들은 육하원칙에 따라서 직접 경험한 사태를 있는 그대로 디테일을 살려서 생생하게 기록했다.
이들의 문장 하나하나엔 현장의 디테일이 꿈틀꿈틀 생동하고 있다. 한강 인도교 폭파 현장을 이보다 더 상세하게 묘사한 기록은 이 세상에 없다. 이들이 당일 작성한 기사에 비하면, 20년 후의 인터뷰나 30년 이후의 회고록 따위는 정확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현장 검증과 정확한 피해자 조사도 없이 사후 작성된 유엔군 감찰관의 기록은 신빙성이 낮다. 1950년 9월 최병식 공병감에 사형을 선고한 군법회의 기록 역시 전시 즉결 재판이라서 사건의 진상 규명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와 달리 3인 종군 기자의 기사들은 육하원칙에 따라 바로 당일 작성된 기록이다.

▲1950년 6월 28일 자 “밴쿠버 데일리 프로빈스” 제1면 왼쪽 상단에 카이스 비치가 수원에서 작성한 기사가 실렸다. /공공부문
구사일생으로 한강 인도교 폭파 현장에서 살아난 종군 기자 3인의 기록은 한강 인도교 폭파를 둘러싼 헛소문, 과장, 추측, 거짓말, 유언비어, 틀린 통계, 잘못된 통념, 정치적 음모, 허위 조작 등등 모든 거짓을 걸러내는 거름종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이 3인이 우리에게 전한 기록을 분석하여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을 둘러싼 세 가지 쟁점을 검토해 보자.
쟁점(1)은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를 전후해서 과연 “군경에 의한 차량 및 인파 통제가 있었는가?”이다. 쟁점(2)는 그날 한강 인도교 폭파로 발생한 사상자 규모이다. 쟁점(3)은 민간인 희생자 발생 여부이고, 발생했다면 과연 그 수가 얼마나 되냐는 점이다. <계속>
2024.04.06
〈110회〉美 종군기자 3인이 전한 “한강 다리 폭파 사건”의 진실 (3)
변방의 중국몽 <28회>

▲6.25전쟁 피난민들의 모습. 이 사진 속에선 여인들과 어린이들이 대다수다.
/ https://www.awm.gov.au/collection/C294093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반 한강 인도교가 폭파될 때 바로 그 현장에서 폭풍(爆風)을 맞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난 3인의 미국인 종군기자들이 있었다. 당시 국군은 인도교 남쪽 제2, 제3 상판을 폭파했고, 이 3인의 종군기자들은 발파 지점에서 불과 25야드(23미터) 떨어진 제1 상판 위에서 지프를 타고 있었다. 그날 아침 천신만고 끝이 한강을 건넌 수원까지 간 3인은 “한강 다리 폭파” 관련 특종 기사를 쏟아냈다.
당시 37세 카이스 비치(Keyes Beech, 1913-1990) 기자의 기사는 1950년 6월 28일 자 캐나다 밴쿠버 데일리 프로빈스(Vancouver Daily Province)에, 49세 버튼 크레인(Burton Crane, 1901-1963)의 기사는 6월 29일 뉴욕타임스에, 26세 프랑크 기브니(Frank Gibney, 1924-2006)의 기사는 7월 10일 타임지와 라이프지에 각각 실렸다. 1954년 비치 기자가 출판한 <<도쿄와 동방의 요지(Tokyo and Points East)>>의 제10장”서울 탈출기(Escape from Seoul)”에는 “한강 폭파 사건” 관련 가장 세밀하고, 정확하고, 공평무사한 종군기자의 체험담이 진술되어 있다.

▲한강 인도교 폭파 현장에 있었던 3인의 미국인 종군기자들. 왼쪽부터 기브니, 비치, 크레인.
“슬픈 중국”에서는 지난 <26회>와 <27회> 두 차례에 걸쳐서 이 3인의 종군기자가 전한 “한강 다리 폭파 사건”의 진실을 상세하게 소개했다. 이미 언급했듯, 이들이 쓴 기사들은 생존자들의 목격담이면서, 동시에 직업적으로 훈련된 베테랑 종군기자들이 육하원칙에 맞게 작성한 현장 보고서다. “한강 다리 폭파 사건”과 관련하여 이들의 기록보다 더 중요한 1차 사료는 없다. 예컨대 1950년 9월에 열린 “한강 인도교 조기 폭파로 인한 아군 피해의 책임자 처벌을 위한 재판”의 판결문이나 1982년 출판된 이창록의 회고록 “전환기의 내막” 등 역시 중요한 사료이지만, 바로 당일 그 시각 폭파 현장에 있었던 종군기자들이 당일 작성한 특종 기사들에 비하면 정확성, 세밀성, 현장성이 떨어진다.
그동안 대한민국 사회는 폭파 현장에서 살아난 3인 종군기자의 기록은 버려둔 채로 온통 가담항설에 유언비어를 뒤섞은 “카더라” 신화만으로 군사작전 상 착오로 빚어진 불행한 사태를 “이승만 정권의 양민 학살” 사건으로 둔갑시키는 반대한민국 세력의 정치적 야바위에 속수무책 속아왔다. 단적인 일례로 1993년 방영된 KBS 역사 다큐멘터리 “한강 인도교 폭파와 부산 정치파동”에선 해설자가 “당시의 자료를 종합해서 추정해 볼 때, 이 다리가 폭파되면서 현장에서 희생된 시민의 수가 약 700~800여 명이었다”고 단정적으로 주장한다.
이미 2회에 걸쳐 살펴보았듯 널리 퍼진 이러한 주장은 당시 현장에서 직접 폭풍(爆風)에 휩싸였던 3인 종군기자의 진술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국민 혈세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이 역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자료 검증도, 사료 분석도, 현장 점검도, 증언 대조도 제대로 하지 않고서 가담항설을 기정사실로 뒤바꾼다면 대한민국의 불행이다. 자, 이제 3인의 종군기자들이 남긴 기록을 근거로 “한강 다리 폭파 사건”을 둘러싼 3가지 쟁점을 따져 보자.
쟁점 (1): 군경에 의한 차량 및 인파 통제가 있었는가?
한강 다리 폭파로 500~800명의 양민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는 세력은 당일 그 다리 위에 피난민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고 가정하고 있다. 당시 그 현장을 재현한다면서 군용 차량은 단 한 대도 없는 한강 인도교 위에 구름떼처럼 몰려든 피난민들의 영상을 제작한 KBS가 대표적이다. 그러한 거친 상상의 저변에는 폭파를 앞두고 군경에 의한 차량 및 인파 통제가 전혀 없었거나 태부족이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3인 종군기자의 기록을 분석해 보면 당시 용산 방면의 한강 인도교 진입로에서는 엄격한 차량 및 인원 통제가 이뤄지고 있었으며, 그 때문에 중지도가 아니라 용산 방면 진입로에서 이미 심각한 체증이 발생했다.
비치와 기브니의 진술을 보면 인도교 북쪽 다리 진입로로 수많은 피난민이 몰려들었고, 그래서 숭숭 잘 빠지던 차량이 소걸음을 치다가 정체되고 말았다. 바로 그때 그 상황을 묘사하면서 기브니는 “헌병 지시에 따라 차량들은 엄격하게 줄을 맞추고 있었다(Guided by MPs, automobiles kept strictly in line)”고 썼다. 헌병단이 군용트럭들을 줄 맞춰 세운 후에 차례차례 다리로 진입시켰음을 말해준다.
바로 이 대목은 1970년 4월 30일 중앙일보에 실린 김홍도 씨(사건 당시 시경경비계 주임· 1970년 당시 노량진경찰서장·47)의 다음 증언에 대체로 부합한다.
“나는 ‘드리쿼터’를 타고 김병두 경감은 지프로 한강으로 달렸지요. 내 바로 앞에 김태선 국장의 차가 있었는데 한 육군 대위가 강을 못 건너게 막아요.’국장차인데 왜 통과시키지 않느냐?’고 항의하여 겨우 다리를 건넜습니다. 막 건너온 순간 ‘쾅’소리와 함께 내가 탄 ‘드리쿼터’의 뒷부분이 공중에 떴고, 소방과장 신인우 총경이 탄 지프 유리창이 박살이 났지오. 또한 이때 종로경찰서원들이 타고 건넌 트럭이 하늘로 붕뜨면서 짐짝처럼 경찰관들이 차 밖으로 내동댕이쳐졌구요. 정말 악몽이었습니다.”
최근 다큐 영화 <<건국전쟁>> 김덕영 감독은 열 살의 나이로 어머니와 동생들을 데리고 한강 다리 부근에서 있었던 김중남(1941년 생) 씨를 인터뷰했다. 김중남 씨는 건국전쟁을 보지 않았고, 그의 손자가 할아버지의 체험담을 김 감독에게 알려왔다. 김중남 씨의 증언에 따르면, “삼각지 로터리와 용산역 중간쯤에서” 피난민들에 섞여서 한강 인도교 쪽으로 몰려가가는데, 다리 진입이 통제됐다면서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오는 한 무리의 피난민들과 마주쳤다고 한다. 김중남씨는 말한다.

▲2024년 3월 17일 다큐 영화 “건국전쟁”의 김덕영 감독과 인터뷰하고 있는 김중남씨(1941년 생, 올해 83세), 강원도 홍천 거주, 고향은 대전, 1950년 6월 당시 거주지는 제기동.
“내 생각으로는 못 가게 하니까, 반대(편)에서, 거기서 누가 통제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못 가게 했을 거 아닙니까? 군인이 됐든 경찰이 됐든. 누가 통제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분명히 뭐 한두 사람이 오는 게 아니라 여기 피난 가던 사람이 도로 돌아온 거니까요. 수많은 군중이었으니까.”
상식적으로 국군 차량의 진입도 이처럼 엄격하게 통제했는데 인파 통제가 전혀 없었다고는 생각할 수는 없다. 여러 증언과 “헌병의 지시에 따라 여러 차량이 엄격히 줄을 맞췄다”는 기브니의 기록에 비춰볼 때 한강 인도교 북단에서 군대나 경찰에 의한 진입 통제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쟁점 (2): 성급한 폭파로 과연 몇 명이나 희생되었나?
한강 인도교 폭파는 적군의 남하를 지연하고 저지하기 위한 군사작전이었다. 여러 증언에 따르면 이미 그 전날부터 한강 인도교에는 TNT가 장착되어 있었다. 다리 폭파 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폭약은 다리 기둥이 아니라 가장 약한 상판에 장착되었다. 폭파 직전 짧게는 10분에서 길게는 40분가량 다리 상판 위의 차량을 모두 건너가게 하는 조치가 있었지만, 통신상 착오가 발생하여 발파 시 다수 차량의 손실과 병력 희생이 발생했다. 과연 몇 명이나 희생되었는가?
3인 종군기자들이 바로 당일 수원에 도착해서 작성한 기사들은 인명 손실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폭발로 지프가 땅에서 들렸고, 전면 유리가 깨져서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오직 뒷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부상을 피할 수 있었다. 우리 앞에 있던 한 트럭 가득한 남한 군인들이 산산이 조각났다. 우리는 어둠 속을 비틀비틀 걸어갔다. 나는 출혈로 앞을 못 보는 크레인을 인도했다. 불타는 다리에서 적의 탱크가 있는 서울 쪽으로 돌아나갈 때 시신들과 죽어가는 군인들이 우리 발길에 걸렸다. 희생자가 구해달라 외치는데 어둠 속에서 부상자들이 손을 뻗고 있었다.” (카이스 비치, “목격자 전쟁 보고(Eyewitness War Report,” 밴쿠버 데일리 프로빈스 1950. 6. 28.)
“우리와 함께 한강 다리로 향하던 트럭 행렬의 병사들은 허둥대지 않았다. 장교들은 그렇지 못했다. 한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확보하여 남한 육군이 재결집할 수 있도록 하려고, 또한 북한군 탱크 행렬(tank column)이 밀고 내려와서 그렇게 할 수 없을까 두려워서 그들은 다리를 폭파해서 수백 명 아군 병사들을 죽였다. 우리 통신원들이 탄 지프는 폭파 지점에서 불과 25야드(23미터) 떨어져 있었는데, 군인들로 가득 찬 커다란 트럭 뒤에 있어서 보호를 받았다. 그 군인들은 모두 죽었다.” (버튼 크레인, “남한, 성급한 폭파로 자체 병력 살해,” 뉴욕타임스 1950. 6. 30.)
바로 사고 당일(6.28.)과 다음날(6.29.) 게재된 칼럼에서 비치와 크레인은 모두 희생자가 전원이 트럭에 실려서 이동 중이던 군인들이라고 기록했다. 비치는 희생자 인원을 추산하진 않았다. 대신 그는 사망자와 부상자가 널브러진 다리 상판 위의 참혹한 상황을 생생한 언어로 묘사하는 데에 그쳤다. 섣부른 추정이나 판단을 배제하고 철저히 직접 경험한 바를 있는 그대로 재생하려는 기자 정신이 돋보인다.
비치와 달리 크레인은 “수백 명의 군인들”이라는 다소 애매한 일상어로 사상자 수치를 대략 제시했는데, 그 이유는 쉽게 설명된다. 크레인은 안구 주변 심한 출혈로 앞을 볼 수 없어서 비치가 그를 인도하며 걸어야만 했다. 반면 부상당하지 않았던 비치는 다리 위를 직접 걸으면서 현장의 구체적 상황을 나머지 두 기자보다 훨씬 더 상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비치와 크레인은 민간인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지만, 기브니는 희생자 중에 민간인과 군인이 섞여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 점은 더 아래서 상세히 논구하고, 일단 그가 제시하는 사상자 수치를 보자. 그는 참혹한 폭파 현장을 묘사한 후(아래 참조), 사상자의 수를 다음과 같이 강한 언어로 추정했다.
“단번의 폭발로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음이 틀림없다(there must have been over one hundred casualties from the one blast).”

▲1950년 6월 28일 이후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촬영한 한강 인도교 폭파 후의 참상. 1993년 KBS 역사 다큐멘터리에 삽입된 북한군 동영상 화면 캡처. 이 장면은 비치 기자가 묘사한 폭파 직후 다리의 상황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여기서 사상자는 사망자와 부상자를 함께 이르는 군사적 개념이다. 이 수치는 놀랍게도 지금까지 확인된 경찰 사망자 77명과 대동소이하다. 물론 정확한 현장 조사도, 철저한 사망자 확인의 과정도 없었기 때문에 사망자의 숫자를 확정할 수 없다. 다만 폭파 현장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던 하우스만의 추정치 500~800명보다는 다리 위에서 나자빠진 트럭과 널브러진 시체는 물론 다리 절단면까지 직접 보았던 종군기자들의 추정치가 더 신빙성이 높다. 희생자 규모에 대해서 크레인은 “군인 수백 명”이라 했고, 기브니는 “사상자 100명 이상”이라 했고, 비치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피해자 규모에 관한 구체적 언급을 피했다.
쟁점 (3): 민간인 희생자가 있었는가?
이제 가장 민감한 쟁점인 민간인 희생자 존재 여부를 따져 보자. 공영방송의 역사 다큐멘터리에 삽입된 재현 장면에 따르면, 폭파 당시 다리 위에는 민간인들이 구름 떼를 이루고 있었다. 지금도 대한민국 좌파 진영에서는 바로 그 이미지를 선정적으로 부풀려서 이승만 정권의 양민 학살을 운운한다. 그러나 그런 주장에는 아무런 물증도, 정황증거도 없다. 폭파 현장을 목격한 3인의 종군기자는 대다수 희생자가 군인이었다고 기록했다.
폭발 직전 지프 조수석에 앉아 있던 26세의 기브니는 안면에 상처를 입었고, 쓰고 있던 안경알이 박살이 났다. 폭파 후 기브니는 지프의 핸들을 잡고서 비치의 인도를 따라 차를 조금 앞으로 움직였다. 비치와 크레인과는 달리 7월 10일 타임지와 칼럼과 같은 날 라이프지에 실린 축약본에서 기브니는 민간인 희생자도 있었다고 기술한다.
“우리는 계속 불타고 있는 2.5톤 트럭의 유체를 보았다. 그 뒤로 30피트(9미터) 아래 강 수면으로 상판 두 개가 떨어져 있었다. 우리 앞의 트럭에 타고 있던 군인들은 모두 사망했다. 이미 시신들과 죽어가는 민간인과 군인들이 (civilians and soldiers) 다리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다리 위에 민간인들과 군인들이 함께 널브러져 있다고 기록한 기브니는 사상자의 수를 “100명 이상”이라고 거의 확정적으로 “there must have been”이라는 표현까지 써서 기록했다. 위에서 언급했듯 그는 “단번의 폭발로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음에 틀림없다”라 적었다.
종군기자라면 전장에서 민간인 희생자의 유무에 가장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이상 3인의 종군기자 중에서 비치와 크레인은 민간인 희생자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기브니는 중지도 부근 상판 위에 널브러진 사망자와 부상자 중에 민간인과 군인이 섞여 있었다고 기록했다. 다만 그가 직접 기록했듯, 폭파 당시 그의 안경은 박살이 났고(“my glasses were smashed”), 머리에서 피가 쏟아졌다.
반면 비치는 완전히 무사했다. 기브니가 지프의 운전대를 잡고 있을 때, 비치는 직접 상판 위를 걸으며 기브니에게 수신호를 주었다. 정황상 비치가 세 사람 중에서 가장 가까이에서 폭파 직후의 참상을 정확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그는 그 상황을 다시 더 심층적으로 파악해서 “서울 탈출기”를 집필했다. “서울 탈출기”의 문장에는 놀랍도록 생생한 디테일이 살아 있다. 예컨대 다리에서 빠져나와서 세 사람은 한 미국인이 살던 어느 집을 찾아서 들어갔다. 비치는 그 집 내부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벽에는 커다란 흰색 냉장고가 있었다. 그 문을 열었는데, 음식이 가득했다. 베이컨, 달걀, 상추, 토마토, 마요네즈, 주스 깡통 등. 벽장 안에는 조니워커 블랙 라벨을 포함한 양주병이 여럿 있었다. 거실에는 밝게 색상의 어린이 음반들이 한 구석의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콜리어스(Collier’s, 잡지), 토요 석간 포스트(Saturday Evening Post), 토요 문학 리뷰(Saturday Review of Literature)가 있었다.”
이처럼 비치의 글은 직업적으로 오랜 시간 훈련된 전문 기자의 문체를 보인다. 구체적 상황을 묘사할 때 그는 카메라를 들이대고 직접 촬영한 듯 디테일을 살려서 기록했다. 눈에 들어온 모든 사물을 일일이 빠짐없이 열거하는 정확한 기억력과 치밀한 기록의식이 돋보인다.
▲1950년 6월 28일 오후 북한군 선전대가 촬영한 한강 인도교 상판 위의 사망자. 헬멧 위의 헌병 글자가 선명하다. 동영상 캡처.
그러한 비치가 상판 위를 걸어 다니면서 참혹한 폭파의 현장을 관찰했는데, 민간인 희생자를 단 한 명도 언급하지 않았다. 게다가 37세의 베테랑 종군기자 비치는 다른 두 기자와는 달리 부상을 입지 않은 온전한 상태였다. 반면 26세의 기브니는 기자 경력이 짧았는데, 안경이 파손되었으며, 얼굴이 피로 덮인 상태였다. 결론적으로 3인의 증언을 취합해 보면, 민간인 희생자의 존재 가능성을 전면 배제할 수는 없으나 사망자의 대다수가 군병력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신화를 넘어 역사를 찾아서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 Hausman, 1918-1995)의 증언록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한국문원, 1995)에는 한강 다리 폭파로 “5백~8백 명의 인명 희생”이 있었다는 언급이 나온다. 당시 미 군사고문이었던 제임스 하우스만은 다리가 폭파되기 직전 다리를 건넜고, 그 순간 폭음과 열이 너무나 강하여 지프 전체가 불바람에 휩쓸려 날아가는 것 같았다는 짧고 강렬한 기억을 기록했다. 하우스만이 추정한 500~800명 희생자는 미군 측 공식 입장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던 듯하다.
가령 미군 전쟁사가 로이 애플만(Roy E. Appleman, 1904-1993)은 6.25전쟁 초기 미국의 위업을 기록한 <<남으로 낙동까지, 북으로 압록까지(South to the Nakdong, North to the Yalu>>(1961)에서 “가장 정보가 많은 미군 장교들에 따르면 다리 폭파로 500~800명이 폭사하거나 익사했다”는 언급이 있는데, 각주를 보면 하우스만과의 인터뷰도 인용했다. 문제는 비록 하우스만이 다리를 건너면서 폭발음을 직접 들었던 것은 사실이라 해도 그는 곧바로 수원으로 내려갔으므로 현장의 실상을 직접 볼 기회는 없었다는 점이다.
다리 위에 있었던 3인의 종군기자와 달리 미 군사고문단 스털링 라이트(Sterling Wright, 1907-2009) 대령과 함께 움직였던 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마거릿 히긴스(Marguerite Higgins, 1925-1966) 기자는 한강 이북에서 다리 폭파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는 다리가 폭파된 후 집합한 59명의 군사고문단 앞에서 라이트 대령이 경멸조의 음성으로 말했다고 기록했다.
“남한 군대가 우리에게 경고도 주지 않고 너무 빨리 다리를 폭파했어! 도시 대부분이 아직 적의 손에 있는데 말야. 주요 상판 위에서 여러 트럭을 타고 있던 군인들을(truckloads of their own troops) 날려버렸어. 자기편 인원 수백 명(hundreds of their own men)을 죽였어.”
라이트 대령의 이 발언 역시 누군가의 전언에 따른 부정확한 정보일 뿐이다. 라이트는 긴박한 상황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대략의 추정치를 말했을 뿐인데, 여기서 “자기편 인원 수백 명”은 바로 앞 문장의 “truckloads of their own troops)”을 가리킨다고 볼 수밖에 없다. 라이트 역시 사망자의 거의 절대다수가 병력이라 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50년 6월 28일 오후 북한군 선전대가 촬영한 한강 인도교 상판 위의 사망자. 헬멧 위의 헌병 글자가 선명하다. 동영상 캡처.
미군뿐만 아니라 국군 역시도 다리 폭파 직후 곧바로 수원으로 향했으므로 직접 피해 상황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하지도 못했다. 하우스만은 대략적인 추정치를 말했을 뿐, 피해자 규모에 관해선 그 어떤 구체적 증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결국 하우스만이 말하는 500~800명의 사망자 수는 시체 수습도, 현장 검증도, 사후 조사도, 유가족 인터뷰도 없이 대충 눈대중으로 어림잡아 내놓은 최대한의 희생자 수치일 뿐이다. 그것도 스스로 직접 목격한 장면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에 기초한 숫자이다.
위의 사진들이 보여주듯, 6월 28일 낮에 한강 다리를 접수한 북한군은 파괴된 다리 위 상판에 널브러진 사망자를 동영상으로 촬영했다. 1993년 제작된 KBS 다큐멘터리 <<한강 인도교 폭파와 부산 정치파동>>의 도입부에는 바로 문제의 그 영상이 삽입되어 있는데, 다리 위에 널브러진 최대 10여(?) 구의 시신이 보이는데, 모두 군용 차량 옆에 쓰러져 있는 군인이나 경찰로 보인다.
만약 하우스만의 증언대로 500~800명이나 몰살당했다면, 다음날 다리를 접수한 후 상판 위 참혹한 현장을 촬영했던 북한군은 왜 그 민간인 희생자들을 찾아내서 찍지 않았을까? 단 하루 만에 수백 명의 시신들이 모두 수장되거나 산화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민간인 희생자 수백 명이 널려 있는데도 북한군 선전대가 그들을 외면하고서 오로지 국군의 시체만을 골라 촬영했다고 볼 수는 더더욱 없다.
현재까지 밝혀진 77명 경찰 사망자 외에 민간인이나 군인 희생자들이 400~700명 이상 더 있었다면, 북한군이 당연히 그 처참한 상황을 찍어서 정치선전에 활용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알려진 동영상은 KBS 다큐멘터리에 포함된 그 짧은 영상밖에는 없는데, 그 영상 속 희생자 10여 명은 모두 국군 사망자들로 보인다. 결국 한강 인도교 폭파로 민간인 500~800명이 몰살됐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물증은 없다!
정황상 민간인 희생자가 다수였을 가능성도 희박해 보인다. 500~800명의 사망자가 나왔다면 왜 지난 70여 년의 세월 그 많은 이들의 가족들, 친지들, 친구들, 동료들, 지인들 그 누구도 진상 규명이나 국가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을까? 상식적으로 500~800명이 사망했다면 그 이상 되는 사람들이 부상당한 채로 또는 멀쩡하게 생존했어야 하지 않나?
이제 한강 인도교 폭파의 ‘신화’를 넘어서 ‘역사’를 찾을 때가 되었다. 그 첫걸음은 지금껏 3회에 걸쳐 소개한 3인 종군기자의 기록을 면밀하게 샅샅이 분석하는 일이다. 폭파 순간 발파 지점 지척에 있다가 폭풍(暴風)을 맞은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당시 상황을 세상에 알린 종군기자 3인의 기록이 우리에게 전해진 가장 중요하고도 신빙성이 큰 목격자들의 직접 증언이다. 반면 이미 수원의 임시 사령부로 후퇴한 하우스만의 주장은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전혀 신빙성이 없는, 불확실한 사망자 최대치의 추정일 뿐이다.
▲폭파된 한강 인도교, 1953년 1월 1일 존 리치 촬영. /월간조선
이렇게 중대한 사건의 진상이 지금껏 제대로 규명되지도 못한 채로 가담항설과 유언비어만이 나돌고 있었다는 점은 한국 역사학계의 오점이다. 무엇보다 종군기자 3인의 가장 중요한 증언이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니 한국 학계의 무성의와 불성실에 경악을 금할 수가 없다.
지난 70여 년 “이승만 괴뢰 도당과 미제”를 악마로 만들면서 남로당 빨치산을 “민족해방의 전사들”로 미화해 온 세력은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의 비극을 제멋대로 왜곡해서 사료 분석도, 자료 점검도, 현장 검증도, 증언 취합도 없이 “카더라”에 “거봐라”를 뒤섞어서 양민 학살이라 우겨왔다.
그들이 제멋대로 거짓 선동과 허위 조작을 일삼고 있을 때, 역사의 진실을 담은 가장 중요한 기록들은 왜 방치되었을까? “시간이 더 흘러야 역사의 진실이 밝혀진다”는 누군가의 말은 전혀 현실성이 없다. 목숨을 건 3인의 종군기자들이 지친 몸으로 타자기를 들고 다니면서 밤을 새워가며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었다면, 우리는 영원히 거짓부렁에 속고 신화에 세뇌되어 음험한 정치 세력의 지배를 받아야 했을 것이다. 역사의 진실은 땅속에 파묻힌 공룡의 화석과도 같다. 공들여 파헤치지 않으면 영원히 묻히고 만다. <계속>
▲1950년 서울 수복 전투. David Douglas Duncan. /공공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