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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物相(조선일보) 2024-03/ 03.01(금) 중국 ‘지름신’의 공습 - 03-30(토) 네덜란드의 ‘베토벤 작전’

상림은내고향 2024. 3. 24. 19:06

萬物相(조선일보) 2024-03/

03.01(금) 중국 ‘지름신’의 공습

▲일러스트=이철원

 

최근 지인이 “결혼 30년 되도록 쇼핑 가는 것도 싫어하고, 집 인테리어는 관심조차 없던 남편이 갑자기 욕실 용품 등 온갖 싼 생활용품을 사들이고 있어 황당했는데 알고 봤더니 중국 초저가 직구(직접 구매) 앱에 꽂혀 그런 것”이라고 했다. 그 자리에 있던 남성이 “실은 지금 내가 찬 시계도 그 앱에서 산 초저가 제품”이라며 그간 사들인 물품 목록과 가격을 죽 읊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꼭 필요하지 않은데도 쇼핑하러 가서 이것저것 사들이면 “지름신이 강림했다”고 한다. ‘지르다’에 신(神) 내리다”를 붙여 만든 유행어다. 소비 욕구가 자기 의지로 억제하기 힘들 만큼 강하다는 뜻이다. 중국의 초저가 직구 앱이 국내에 상륙하면서 평소 쇼핑 다니기를 귀찮아하던 중년 남성들에게도 지름신이 강림했다. 국내에서 파는 가격의 절반 이하나 4분의 1, 심하게는 10분의 1까지 있다. 싸도 너무 싸니 호기심에 이것저것 구매하는 것이다.

 

▶초저가를 내세운 중국 직구 앱의 성장세가 거세다. 알리 익스프레스, 테무, 쉬인 등 세 업체, 이른바 ‘알·테·쉬’의 사용자 수를 다 합하면 1509만명으로, 국내 1위 쿠팡(2982만명)의 50%가 넘는다. 알리바바그룹의 해외 직구 플랫폼 알리 익스프레스는 1년 새 사용자가 2배 늘었다. 작년 8월 뒤늦게 상륙했는데도 테무는 5개월 만에 사용자가 11배 늘었다. 쉬인도 1년 새 4배 늘었다.

 

▶알리나 테무에서 산 제품을 개봉하는 것을 동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을 ‘알리깡’ ‘테무깡’이라고 한다. 1000원, 2000원짜리까지 해외 직구를 하게 됐으니 초등학생들까지 ‘알리깡’ 동영상을 틱톡에 올릴 정도다. 발 빠른 소비자들은 저가 제품도 더 합리적으로 쇼핑하려고 손가락 검색이 바빠졌다. “쿠팡이나 네이버에서 후기가 좋은 제품을 사진 캡처한 뒤 알리에서 검색하면 동일한 제품이 거의 다 나오던데요. 어차피 쿠팡이나 알리나 다 중국산 아닌가요.” ”알리에서는 불량이거나 좀 쓰다 버려도 아깝지 않은 것만 삽니다.”

 

▶”저 어쩌죠? 직장 그만두고 쇼핑몰 창업했는데 중국 직구 앱 때문에 망할 판입니다.” 국내 온라인 유통 업체도 비상이지만 중국산 생활용품, 패션 잡화 등을 수입해서 쿠팡 네이버 등에서 팔던 국내 1인 사업자들이 울상이다. 반도체 등을 둘러싼 미·중 패권 전쟁이 공중전이라면, 중국 초저가 직구 앱의 세계 공습은 개미 사업자들까지 유탄 맞는 육탄전이다. 어느 쪽이 최후 승리자일지 예측하기 힘든 세계 유통 대전이 벌어지고 있다.

강경희 기자

 

03.02(토) 소녀가 전하는 위로 ‘바람 바람아’

▲일러스트=이철원

 

3년 전 아홉 살 소녀가 불렀던 노래 ‘바람길’을 잊지 못한다. 원래 장윤정이 부른 곡이었으나 앳된 ‘판소리 신동’ 김태연은 TV조선 미스트롯2에서 전혀 다른 빛깔로 빚어냈다. ‘길을 걷는다/ 끝이 없는 이 길/ 걷다가 울다가 서러워서 웃는다’로 시작하는 노래는 ‘스치듯 지나는 바람의 기억보다 더/ 에일 듯 시리운 텅 빈 내 가슴’으로 이어진다. 때로 슬픔이 넘치면 차라리 웃는다고 했다. 그 시린 서러움에 시청자도 먹먹해졌다.

 

▶가수의 삶을 베껴서 노래가 되기도 하고, 또 가수의 삶이 노랫말을 따라가기도 한다는데 어른키의 절반밖에 안 되는 아이의 목소리가 그토록 어른 애간장을 녹일 만큼 애달플 줄은 아무도 몰랐다. 무방비로 있던 심사위원이 눈물을 쏟았고, 할 말을 찾지 못해 허둥댔다. 심사위원 장윤정은 딸 같은 김태연에게 곡 해석과 창법 모두에서 “네가 다 옳았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태연은 당시로 역대 최고 점수를 받았다.

 

▶그제 미스트롯3에서 톱7 결정전이 펼쳐졌는데, 열다섯 소녀 정서주가 1등을 차지하며 심사위원을 또 울려놓았다. 정서주는 첫선 신곡 ‘바람 바람아’를 들고 나왔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 낯선 바람 바람아/ 덧없는 한 세상 답답한 마음을/ 너는 달래주려나’ 하는 노랫말이 잔잔하게 흘렀다. 연습 때 정서주가 아빠에게 전화로 여쭙자 아빠는 “기댈 곳도 없는, 외로운 마음을 달래는 노래”라면서 “담담하게” 부르라고 말해준다.

 

▶외친다고 감정이 따라오는 건 아니다. 외려 글도 노래도 나직하고 담담해야 공감의 울림통이 커진다. ‘세상에 지쳐 울고 싶은 날/ 나는 바람이 되어/ 한없이 위로가 되는 당신 곁으로 가서/ 참아온 눈물을 쏟고 싶구나’. ‘아모르 파티’의 김연자가 심사위원이었는데 휴지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시작부터 위험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눈물이 계속 나올 것 같아서, 마스터로서 자격이 없네요, 냉정하게 들어야 되는데….”

 

▶김연자도 자신의 어려웠던 시절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것이 미스트롯의 힘일까. 지난 삶의 괴로웠던 순간을 다시 끄집어 올려서 따뜻하게 치유해준다. 중견 방송인 이경규는 “선풍기가 시원하지 않은 것은 그 바람이 어디서 왔는지 알기 때문이며, 자연 바람이 시원한 것은 어디서 왔는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바람을 소재 삼은 노래가 수백 곡이 넘겠지만 어린 소녀들 노래에서 크게 위로받는 것은 그 바람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산들바람이기 때문이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로 가득한 요즘 세상에….

김광일 기자

 

03.04(월) ‘가짜 뉴스 골드러시’

▲일러스트=이철원

 

축구 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가짜 뉴스로도 매스컴을 자주 탄다. 지난해 9월 축구 경기 참여차 이란을 방문했을 때, “호날두가 이란 여성 팬 머리에 입맞춤한 탓에 99대의 태형을 선고받았다”는 뉴스가 떴다. 가짜 뉴스였다. 여성 장애인 화가를 만나 격려한 장면이 그렇게 둔갑했다. 비슷한 시기 모로코 지진 땐 “호날두가 모로코 마라케시의 자기 소유 최고급 호텔을 이재민을 위해 개방했다”는 뉴스가 나왔는데, 역시 가짜였다.

 

▶스포츠 스타, 연예인, 정치인 등 유명인들이 가짜 뉴스의 제물이 되는 것은 조회수를 올려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 좋기 때문이다. “송가인 임신, 충격”, “82세 박근형 투병 숨기고 촬영 강행하다 끝내 안타까운 일생” 등 명예훼손성 가짜 뉴스가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목적은 돈이다. 10분 분량 유튜브 영상에 광고가 붙고 200만 뷰를 얻으면 200만원 정도의 이익을 얻는다. 가짜 뉴스 비즈니스를 미국에선 ‘모욕 산업’이라고 부른다.

 

▶‘가짜 국뽕 콘텐츠’도 단골 메뉴다. ‘한국어가 유엔(UN) 공식 언어로 채택됐다”, “삼성, 파산 직전 애플 인수”, “손흥민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진 해리 케인” 같은 뉴스들이다. 심지어 전쟁 소식도 먹잇감이 된다. 요즘 유튜브에선 우크라이나 군인이 로켓포로 러시아 헬기나 전투기를 격추시키는 장면, 이스라엘 군인이 하마스 장군을 체포하는 가짜 뉴스가 자주 등장한다.

 

▶해법을 고민해야 할 정치권마저 가짜 뉴스의 상업 논리에 포획돼 있다. 2022년 민주당 김의겸 의원과 한 유튜브 매체가 ‘윤석열·한동훈 청담동 술자리’ 가짜 뉴스를 퍼트려 재미를 본 사례가 대표적이다. 화제가 된 덕에 김 의원은 후원금 한도 1억5000만원을 쉽게 채웠다. 해당 유튜브 매체는 한동훈 당시 법무장관 아파트에 잠입해 노크하는 장면까지 찍어 후원금인 ‘슈퍼챗’을 쓸어 담았다.

 

▶아시안컵 축구대회에서 손흥민 선수에게 주먹을 휘두른 이강인 선수가 가짜 뉴스 먹잇감이 됐다. ‘파리 생제르맹(PSG) 방출 임박’, ‘이강인 가족회사 공중분해 위기’ 등 이강인 관련 가짜 뉴스가 361개나 만들어졌다. 조회수가 6940만 회에 달해 가짜 뉴스 제작자들이 7억원대 이익을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오픈AI가 몇 초 만에 진짜 같은 동영상을 뚝딱 만들어 주는 소라(SORA) 서비스를 선보였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유튜브에서 ‘챗GPT 골드러시’ 시대가 열렸다”고 했다. 사기꾼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 될까 걱정스럽다.

김홍수 논설위원

 

03.05 한국인은 밥심? 이젠 육심!

▲일러스트=이철원

 

‘동백꽃’ ‘봄봄’을 쓴 소설가 김유정은 결핵을 앓았다. 1937년 봄, ‘돈 백원이 필요하니 우리말로 번역할 만한 탐정소설을 한 권 소개해 달라’는 편지를 친구에게 보냈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30마리 고아 먹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 썼다. 그러나 고기 살 돈을 구하지 못한 채 열하루 뒤 세상을 떠났다. ‘지극한 효행’을 뜻하는 단어 ‘할고(割股)’의 원뜻은 ‘자기 다리 살을 떼 부모에게 먹인다’였다. 모두 고기 구하기 어려웠던 시대 얘기다.

 

▶고기 먹고 병을 이겨보겠다던 생각엔 의학적 근거가 있다. 동물성 단백질은 체내 흡수율이 높아 많은 영양과 에너지를 낸다. 의사들이 큰 병을 앓은 이에게 고단백 육식을 권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1970년대 독일 프로축구에 진출한 차범근은 유럽 선수와 벌이는 체력전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벽돌 크기 스테이크를 매일같이 먹었다. 베트남 국가대표 축구팀이 박항서 감독 지휘로 좋은 성적을 낸 비결 중엔 박 감독이 부임 후 쌀국수 대신 고기를 먹게 해 체력을 끌어올린 것도 있다고 한다. 메이지 유신 때 일본이 외친 것도 체력 단련과 육식이었다.

 

▶1970년 1년에 5.2㎏에 불과했던 한국인의 육류 소비가 2020년 54.3㎏으로 50년 사이 10배 넘게 증가했다. 명절에나 맛보는 호사였던 불고기와 갈비는 마음만 먹으면 매일 먹을 수 있는 일상 음식이 됐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삼겹살은 한 해 38만t이나 소비한다. 해마다 17만t을 수입한다. 반면 쌀 소비는 꾸준히 줄었다. 1970년 1인당 136㎏이던 것이 2020년 56㎏으로 50년 전의 절반도 먹지 않는다.

 

▶한국인이 지난 한 해 고기를 1인당 60.6㎏ 먹었다는 통계가 나왔다. 재작년엔 고기 58.4㎏과 쌀 55.6㎏을 먹어 고기 소비가 처음으로 쌀을 앞지르더니 당초 2027년에나 도달할 거라던 육류 소비 한 해 60㎏도 넘어섰다. 수북한 고봉밥과 초라한 나물 반찬 앞에 앉아 있던 우리가 한 세기 만에 육식 민족으로 탈바꿈했다.

 

▶70여 년 전 남북으로 갈라진 뒤 양쪽 발전상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고기 소비 격차다. 2012년 북한의 1인당 연간 육류 소비량이 13.2㎏이었다는 통계가 있지만 탈북민 얘기를 들어보면 전혀 다르다. 주요 농사 수단인 소를 잡아먹으면 사형당하는 나라가 북한이다. 돼지고기 한 덩이를 솥에 끓여 멀건 국물을 온 가족이 먹는데, 1년에 몇 번이면 괜찮은 집이라고 한다. 북 주민들도 고기를 마음껏 먹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03.06 믿는 도끼

▲일러스트=박상훈

 

오랜 기간 금융회사 CEO를 맡고 있는 사람이 몇 년 전 겪은 일이다. 차에 탔더니 운전기사가 예상치 못한 말을 던졌다고 한다. “벌어놓은 돈도 없고, 부모님은 아프시고, 내 인생이 참….” 명절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놀란 CEO는 “고향에 다녀오라”며 돈봉투를 건넸다.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사람 심기를 괜히 건드리기 싫었다고 한다. 그 CEO는 아직도 눈치 보며 그 운전기사가 모는 차를 탄다. 수사를 받던 미래저축은행 회장이 중국 밀항 직전 체포된 것도 운전기사 제보 때문이었다.

 

▶특히 정치인에게 운전기사는 최측근 중 한 명이다. 2012년 총선에서 당선된 어느 국회의원은 공천 헌금 건네는 장면을 지켜본 운전기사 신고로 유죄가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2014년엔 운전기사가 국회의원 차에 있던 현금 3000만원과 서류 뭉치가 든 가방을 검찰에 넘긴 일도 있다. 이 의원도 의원직을 잃었다.

 

▶보좌관이나 비서들도 국회의원의 ‘급소’를 쥐고 있을 때가 많다. 2015년 보좌관들 급여를 떼 불법 정치자금을 만든 국회의원에 대한 수사도 보좌관 제보로 시작됐다. 그해 운전기사에 이어 보좌진에게도 “약점 잡히지 말자”는 주의보가 정치권에 내렸다고 한다. 의원들은 “명절 때 가장 먼저 운전기사 챙기고, 다음으로 보좌진을 챙긴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배신 방지’의 뜻도 담겨 있다.

 

▶기업에선 오너들이 가장 믿는 ‘금고지기’들의 횡령이 끊이지 않는다. 2009년 D건설 자금 담당 부장이 1898억원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나자 회사는 일간지에 그의 실명과 얼굴 사진 광고를 싣고 현상금 3억원까지 내걸었다. C그룹 비자금 수사도 그룹 재무팀장이 돈을 빼돌려 투자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시작됐다. 몇 년 전엔 임플란트 업체 자금관리팀장이 회삿돈 수천억 원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회사는 사모펀드 먹잇감이 돼 경영권까지 빼앗겼다. 회장으로선 땅을 칠 노릇이다.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 최근 “비서가 내 개인 돈과 공금 등 26억원을 빼돌렸다”며 고소했다. 비서는 노 관장 신분증 사본과 인감도장까지 이용했다고 한다. 믿었던 측근에게 배신당한 충격은 당해 본 사람만이 안다고 한다. 몇 해 전 전직 정치인 한 사람은 이런 일로 극단 선택까지 했다. 500여 년 전 마키아벨리는 “인간은 배은망덕하고, 이익엔 열정적”이라고 했다. 우리에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이 있다. 사람 쓰는 일이 정말 어렵고 조심스러움을 절감한다.

최원규 논설위원

 

03.07 보험사기 1조원


▲일러스트=강경희

 

보험사기 금액이 해마다 늘어 작년에 1조1000억원을 넘고, 보험사기로 적발된 인원도 11만명에 육박한다고 금융감독원이 발표했다. 적발하지 못한 금액까지 합하면 한 해 4조~5조원의 보험금이 보험사기로 새는 것으로 추산된다.

 

▶적은 돈을 불입하고 사고 시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는 보험의 특성 때문에 보험 범죄의 역사는 보험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세계 최초의 보험 살인은 1762년 영국에서 오늘날과 같은 생명보험사가 설립된 그해에 벌어졌다. 이네스라는 사람이 양녀를 거액의 보험에 가입시킨 후 독살하고 보험금을 타내려다 적발돼 사형에 처해졌다. 우리나라 보험 범죄 역사도 100년이나 된다. 1924년 매일신보에 “보험 가입 후 허위 사망 신고를 했다가 적발됐다”는 기사가 실렸다.

 

▶남편 사망 보험금 8억원을 노린 이은해의 계곡 살인 사건을 비롯해 끔찍한 보험 살인이 1년에 5, 6건씩 일어난다. 하지만 실제 강력 보험 사기 범죄는 적고 전체 보험사기의 절반이 ‘보험빵’ 같은 자동차 관련이다. 보험금을 타려고 고의로 교통사고를 내는 것을 ‘보험빵’이라고 한다. ‘뒤쿵(차를 뒤에서 쿵 들이받는) 알바단’이라는 보험사기단도 있다. 인터넷 카페나 텔레그램으로 “하루 일당 100만원” “고액 알바”라고 광고해 참가자를 모집한다. 무리하게 차선을 바꾸거나 차선을 위반하는 차량 등을 노려 고의로 교통사고를 내고는 보험금을 나눠 갖고 흩어진다. 교통사고 ‘나이롱’ 환자는 이제 흔하다.

 

▶강원도 태백에서 병원장과 보험설계사, 가짜 환자 400여 명이 150억원대 보험사기를 벌이다 들통났다. 보험모집인과 병원 브로커가 군인 800여명에게 접근해 보험을 여러 개 가입시킨 후 병원에서 허위 진단서를 끊어 건당 1000만원 이상의 보험금을 타가게 한 조직적 보험사기도 있었다. 공짜 성형수술을 해주겠다고 실손보험 가입 환자를 모집한 후 서류를 조작해 보험금을 편취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실손보험, 자동차보험, 암보험에서 보험사기는 날로 진화한다.

 

▶10만명 넘는 보험사기를 직업별로 분류했더니 회사원(21.3%)이 가장 많고 무직·일용직(13.2%), 전업주부(9.3%), 학생(5.0%) 순이었다. 20대는 자동차 관련 사기가 많고, 60대 이상은 병원 관련 사기가 빈번했다. 조직적 보험사기가 널려 있어 누구든 피해를 입을 수 있다. 반대로 보험의 특성상 보통 사람도 자신도 모르는 새 보험사기를 저지를 수 있다. 사고를 부풀려 보험금을 더 타내려는 작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다 적발되면 누구든 보험사기꾼이 되는 것이다.

강경희 기자

 

03.08 슬기로운 화성 생활

▲일러스트=김성규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주연한 영화 ‘토탈 리콜’의 무대는 2084년 인류가 화성에 만든 대형 식민 기지다. 그런데 기지 공기를 지구처럼 만드는 장치의 통제권을 쥔 식민지 독재자가 자기의 지배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지하 세계로 내몬다. 쫓겨난 이들은 화성의 유독한 대기를 마셔 돌연변이를 앓는다. 반란군 지도자가 오래전 외계인이 화성에 설치한 대기 제조 장치를 찾아내 작동시키면서 화성 전체가 비로소 파란 하늘과 산소가 풍부한 대기를 갖게 된다.

 

▶화성에서 인류가 살려면 대기 말고도 여러 난제를 극복해야 한다. 화성은 영하 60도에 이르는 저온도 문제지만, 지구와 달리 행성 자기장을 만들지 못해 전자파로 범벅이 된 태양풍을 그대로 맞는다. 대기 95%는 이산화탄소다. 살인적 모래 폭풍은 햇빛을 완전히 차단하고 기온을 단숨에 50도나 떨어뜨린다. 방사선도 지구의 50배나 돼 사람이 3년만 거주하면 평생 허용되는 방사선량을 초과한다. 맷 데이먼이 주연한 영화 ‘마션’은 이런 화성에서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탐색한 작품이다.

 

▶영화에서 모래 폭풍에 휩쓸려 낙오한 남자는 다음 탐사팀이 올 때까지 4년을 버티기 위해 과학 지식을 총동원한다. 유독한 과염소산염으로 가득 찬 흙을 가져다 해독해 미니 농지를 만들고, 실험용 농작물 중 가장 빨리 자라는 감자를 골라 심는다. 우주선 연료에서 추출한 수소를 태워 물도 만든다. 지구와 교신도 시도한다. 평균 2억3000만㎞라는 거리 때문에 발생하는 20분 통신 지연으로 애를 먹는 장면도 사실적으로 그렸다.

 

▶일론 머스크는 2000년대 초부터 인류의 화성 이주 가능성을 타진했다. 2029년 화성에 첫발을 디디고 2050년까지 자급자족 가능한 도시를 만들겠다고 했다. 화성 극지방에 핵폭탄을 터뜨려 지표면 온도를 인간이 살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테라포밍(terraforming·지구화)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지난해엔 비록 실패했지만 인류를 화성에 실어 나르는 우주선도 두 번 발사했다.

 

▶NASA(미항공우주국)도 동참했다. 지난해에 이어 다음 달 2일까지 화성 거주 모의 실험 참가자를 모집한다. ‘마션’ 주인공처럼 과학자여야 선발된다. 식사와 통신을 극도로 제한하는 등 실제 화성 개척에 나설 이들이 겪을 어려움을 미리 알아보려는 목적이다. 인류는 밀랍 날개를 달고 하늘에 올랐던 이카로스처럼 실패를 거듭하며 우주에 도전하고 있다. 달을 정복한 것처럼 언젠가 화성도 인류 영토로 만들 날이 올 것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03.09(토) YS를 있게 한 손명순

미국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는 전국을 돌며 남편의 뉴딜 정책을 홍보하고 348차례나 기자회견을 가졌다. ‘엘리너 행정부’라고 했다. 레이건의 부인 낸시는 적극적 국정 관여로 ‘여왕 낸시’로 불렸다. 카터의 부인 로절린은 국무회의까지 참석했다. 클린턴의 부인 힐러리는 선거 캠페인 때 “한 명 값으로 두 명을 사라”고 했다. 모두 남편의 국정 동반자를 자처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83년 신군부에 항거해 단식 투쟁할 때 서울 아파트 단지에 이를 전하는 뉴스 전단이 뿌려졌다. 현장에서 붙잡힌 사람들은 “부인 손명순 여사 지시”라고 했다. 그는 외신 기자들에게 직접 전화해 단식 상황을 알렸다. 하지만 경찰이 손 여사까지 잡아넣을 수는 없었다. YS의 민주화 투쟁 신화는 그렇게 퍼졌다.

▲일러스트=양진경

 

▶1990년 3당 합당 때 YS의 측근들이 반발했다. YS는 “이 돌(머리)들아”라고 호통쳤다. 뛰쳐나온 이들을 손 여사가 붙잡았다, “저기 큰 돌(YS)을 작은 돌들이 도와주면 안 되겠느냐”고 설득했다. 화가 났던 측근들은 그만 웃고 말았다. YS가 청와대 부부 동반 행사에 혼자 연미복을 입고 갔다가 망신을 당하자 측근을 심하게 질책했다. 손 여사가 “아무 일 없었으니 괜찮다”고 다독였다. YS가 자기 방침을 어긴 측근에게 대로했을 때도 “충성한 사람에게 이러면 안 된다”고 막았다. 그는 누구를 만나도 환하게 웃었다. 40년간 상도동을 찾는 사람들에게 묵묵히 아침 시래깃국을 대접했다.

 

▶그는 사치와 거리가 멀었다. 청와대에 들어갈 땐 남편의 헌 운동화를 챙겨 갔다. 내복엔 고무줄을 새로 넣어 입었다. 청와대 식단도 칼국수 등 서민 음식으로 바꿨다. 경내에 직접 야생화와 쑥, 머위, 돌나물을 재배했다. 남편에게 생활비를 제대로 받은 적 없는 그는 청와대 들어간 지 1년 만에야 직접 월급을 수령하고 감격해했다. 신혼여행도 2011년 60년 회혼식 때에야 갔다. 그래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는 아침마다 10여 개 신문을 읽고 독자 투고란도 챙겼다. 의경 구타 사고나 장애인 차별 기사 등을 남편에게 보여주며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곧바로 시정 조치가 내려졌다. 국민 민원 편지에도 일일이 답했다. 청와대 하급 직원들 복지를 챙기고 청소원에게도 90도 인사했다. 인사나 국정엔 관여하지 않았다. ‘무홍보’ 지침에 동정 보도도 없었다. 해외 언론은 “내조 9단”이라고 했다. 그가 지난 7일 95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치권에선 “YS를 있게 한 진정한 동반자이자 현모양처”라고 했다.

배성규 기자

 

03.11(월) 야구에도 등장한 ‘첨단 기술 심판’

▲일러스트=이철원

 

야구에서 스트라이크 존은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민감한 문제다. 국내 프로야구에선 타격 자세를 취한 타자의 어깨선, 허리선, 무릎선 등을 기준으로 스트라이크 존을 설정해왔다. 이를 심판 눈으로 판단하다 보니 심판 개인의 기준과 성향에 따라 스트라이크 존이 달라지기도 했다. KBO에 따르면 지난해 볼·스트라이크 판정 정확성은 91.3%로 집계됐다.

 

▶2024 시즌 국내 프로야구에 ‘첨단 기술 심판’이 등장한다. 구장에 설치된 카메라와 센서로 투수가 던진 공의 위치, 속도, 각도 등을 측정해 볼·스트라이크를 판정하고 이를 심판에게 전달하는 ‘자동 투구 판정 시스템(ABS)’이다. KBO는 ABS가 판단하는 스트라이크 존 상하 기준을 각각 타자 키의 56.35%, 27.64%로 설정한다고 밝혔다. ABS가 스트라이크 판정을 내리면 심판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삐 소리가 난다. 볼이면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당시 일본의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골라인을 넘어가기 직전 가까스로 살려내 패스한 공이 결승골이 된 것도 첨단 기술 덕이었다. 비디오 판독을 거쳐 공이 나가지 않았다는 판단이 나왔다. 경기장 지붕에 설치된 12대 카메라가 발끝, 무릎, 어깨 등 선수들 신체 29지점의 움직임을 초당 50회씩 수집했고, 공인구 내부 센서가 0.002초마다 공 위치를 잡아 1mm 차이까지 정확하게 집어냈다. 전통을 강조하는 테니스도 2017년부터 선심 무인화를 테스트했다. 기계 판독 시스템 ‘호크아이’가 사람 심판 역할을 대신하는 시도였다.

 

▶로봇 심판이 호응을 얻는 가장 큰 이유는 일관성과 공정성이다. 반면 항의와 몸싸움 같은 재미 요소가 줄어든다며 아쉬워하는 반응도 있다. 카메라 프레임 속도의 한계 등으로 인해 기계가 100% 완벽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2022년에는 호크아이 오작동으로 잉글랜드 축구 2부 리그 경기에서 득점이 인정되지 않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선수들과 골키퍼, 골대 위치 등이 카메라 시선에 영향을 줘서 판독 시스템이 공의 궤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번 ABS 도입을 많은 프로야구 심판들이 환영한다는 점이다. 판정에 대한 선수와 감독의 항의, 팬들의 비난이 거세지면서 압박감과 스트레스에 시달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로봇 심판은 인간 심판의 도우미가 될까, 인간 심판보다 더욱 권위를 인정받게 될까.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는 말은 머지않아 사라질 듯하다.

최수현 기자

 

03.12 ‘찍 對 찢’

▲일러스트=이철원

 

미국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흑인·이민자를 수시로 비하했다. “미국 피를 오염시키는 지능 낮은 사람들”이라고 했고 “침공자”라고도 했다. 인도계인 공화당 니키 헤일리 후보는 이상한 인도식 이름으로 불렀다. 이에 민주당 측은 트럼프의 극렬 지지층을 ‘매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라 부르며 “나라 망치는 세력”이라고 했다.

 

▶과거 영남과 호남 출신을 ‘보리문둥이’와 ‘홍어’로 부른 때가 있었다. 보리를 주식으로 삼았던 영남과 홍어가 많이 나는 호남을 비하하는 말이었다. 한동안 정치권에선 충청도를 ‘핫바지’라고 불렀느니, 안 불렀느니 논란이 되곤 했다. 우파는 좌파를 ‘빨갱이’라고 했고, 진보는 보수를 ‘수꼴’이라고 불렀다. 젊은 남녀들도 서로를 ‘메갈(극단적 페미니스트)’ ‘된장녀’, ‘일베충’ ‘한남충’(한국 남자 벌레)이라 부르며 비하했다.

 

▶대통령을 폄하하는 멸칭도 유행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개구리’ ‘놈현’이라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쥐박’,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닭그네’로 불렀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지지층에선 ‘달님’이라고 했지만, 반대편에선 ‘문재앙’이나 ‘곰’이라고 했다. ‘곰’은 ‘문’을 뒤집은 말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고개를 좌우로 돌린다고 해서 ‘윤도리도리’, 양다리를 벌리고 앉는다고 해서 ‘쩍벌’이란 멸칭이 붙었다. 근래엔 ‘굥’이 추가됐다. ‘윤’을 뒤집은 것이다. 일부 방송사가 ‘서울교통굥사’라고 자막을 잘못 냈다가 국민의힘에서 항의를 받았다. 민주당 지지층은 ‘윤 정부는 공정하지 않다’며 ‘굥정’이라 불렀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 지지층은 스스로를 ‘개딸’(개혁의 딸)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이름이 됐다.

 

▶이 대표가 선거 도중 만난 시민에게 “설마 ‘2찍’ 아니겠지”라고 말했다가 사과했다. ‘2찍’은 지난 대선 때 기호 2번 윤 대통령을 찍은 보수 지지층을 폄하하는 말이다. 대선 때 2번을 찍은 국민은 절반에 달한다. 이 엄청난 숫자의 국민을 대놓고 비하하고 적대시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무슨 득이 있는지 모르겠다. 인터넷에선 이런 이 대표를 향해 ‘찢재명’이나 ‘찢’이라 부르는 댓글들이 홍수를 이룬다. 형수에게 했던 막말을 빗댄 멸칭이다. 사회와 정치를 빨리 타락시키는 건 오염된 언어라고 한다. 오염된 언어 중에서도 상대를 무엇으로 낙인찍는 멸칭이 심각하다. 상대를 비하하면 자기 격도 떨어진다. 혐오와 적대감을 부추기고 국민을 분열시키는 낙인찍기 멸칭은 사라졌으면 한다.

배성규 기자

 

03.13 일본에서 더 맛있는 신라면?

▲일러스트=박상훈

 

일본에 사는 한 유튜버가 “일본에서 파는 신라면이 건더기도 더 푸짐하고 가격도 저렴하다”며 영상을 올려 조회 수가 600만에 달했다. 엔화 가치 하락으로 일본 신라면은 850원, 한국 신라면은 900원인데 파·버섯 같은 건더기는 일본 신라면이 훨씬 크고 푸짐해 비교가 된 것이다.

 

▶내수용보다 수출용이 좋다는 ‘자국민 푸대접’ 인식은 국내 소비자 사이에 오랫 동안 자리 잡아 왔다. 20년 전 미국 주재원으로 근무했던 지인은 현지에서 현대차를 구입해 귀국 때 운반비까지 들여가며 컨테이너에 싣고 왔다. 그는 “현대차가 수출용 차량에는 훨씬 더 두껍고 튼튼한 강판을 써서 안전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소비자 인식이 워낙 뿌리 깊어 현대차는 생산 공정을 영상으로 공개하면서 수출용과 내수용의 강판 두께를 다르게 만드는 게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해명했는데 오히려 비난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미국 시장 점유율 확대를 위해 파격적 보증 기한 등을 약속하며 공격적 마케팅을 펴는 동안 국내 소비자들은 푸대접받는다고 여겼으니 현대차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곧이듣지 않은 것이다.

 

▶급기야 2015년 ‘쏘나타 30주년’ 행사장에서 깜짝 이벤트까지 열었다. 미국 앨라배마 공장에서 만든 빨간색 쏘나타와 아산 공장에서 만든 내수용 파란색 쏘나타를 마주 보게 한 뒤 시속 56㎞로 충돌시킨 것이다. 실험에 앞선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의 74%가 국내용과 해외용 쏘나타의 안전성이 다를 것이라고 답했다. 실험 결과, 내수용과 수출용 차의 파손 정도에 차이가 없었다.

 

▶기업들이 각국 소비자의 취향 따라 나라별로 제품 구성이나 가격을 달리하는 일이 종종 있다. 특파원 시절 프랑스에서 차를 샀는데, 그곳은 수동 기어에 에어컨 없는 승용차가 일반적이었다. 에어컨과 자동 변속기를 장착하고 오토매틱 도어를 다느라 거액을 더 냈다. 분명 ‘오토매틱 도어’라고 했는데 출고한 차를 받고 보니 운전석과 조수석만 자동이고 뒷좌석은 창문도 손잡이 돌려야 열리는 완전 수동식이라 황당했던 경험이 있다.

 

▶한·일 신라면 비교도 해묵은 얘기다. 농심은 건더기 많은 일본 컵라면들과 경쟁하려고 일본 신라면에는 한국보다 건더기를 3g 늘리고 맛도 덜 맵게 현지화했다고 한다. 소비자가격도 원래 일본이 한국보다 비싼데, 엔화 가치가 떨어지고 일본서 신라면 파는 곳도 많아져 할인 판매 제품이 늘어난 결과 이렇게 역전된 사례가 나온 것이다. 세계 100여 나라에 팔린다는 신라면이 유명세를 치르는 듯싶다.

강경희 기자

 

03.14 ‘의사 교수’

▲일러스트=김성규

 

재작년 타계한 조순 전 부총리는 서울대 교수 시절 엄한 스승이었다. 학생들이 시국을 이유로 수업을 거부하면 가차 없이 학점을 깎았다. 1970년 제자로 입학한 아들에겐 더 엄격했다. 한번은 아들이 낸 기말고사 답안지가 사라지자 “네가 얼마나 공부를 안 했으면 시험지가 도망을 다 갔겠느냐”며 F(낙제)를 줬다. 수업 거부와 휴강이 성행하던 1970년대, 조순은 혼신의 힘을 다한 강의와 엄정한 학생 평가로 강단을 지켰다. 그런 스승을 제자들은 어려워하면서도 존경했다.

 

▶이번 주 아카데미상을 휩쓴 영화 ‘오펜하이머’의 주인공인 핵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도 철저한 강의 준비로 유명했다. 버클리 교수 시절엔 영감을 불어넣는 강의에 매료된 학생들이 같은 과목을 두세 번씩 수강 신청했다. 오펜하이머는 다른 교수들이 불성실하게 강의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강의가 마음에 안 들면 수업 중인 교수를 강의실 밖으로 내쫓은 적도 있다.

 

▶강의에 대한 이런 열정은 교수직을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닌 신의 소명으로 보는 서구 대학의 오랜 전통에서 비롯됐다. ‘교수’라는 뜻의 영어 ‘프로페서(professor)’는 라틴어 pro(앞으로)와 fateri(공표하다)에서 왔다. ‘다중 앞에서 공적인 주제로 말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대학의 시초로 꼽히는 11세기 볼로냐 대학에서 처음 개설한 것은 신학이었다. 교수는 신의 진리를 많은 이에게 전하는 신성한 직업이었던 것이다. 중세 이후 교수는 출신에 관계없이 귀족 대우를 받았다. 오늘날 독일 등 중부 유럽에서 교수들이 누리는 사회적 존경에는 깊은 뿌리가 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에 ‘사’를 붙인다. 공적인 일을 하는 판·검사에겐 ‘일 사(事)’를 쓴다. 변호사·변리사·조종사는 전문 지식을 존중하는 의미로 ‘선비 사(士)’를 쓴다. 그런 전문가 중에 특히 사회에 희생하고 봉사하는 직종엔 ‘남을 가르친다’는 뜻의 ‘스승 사(師)’를 붙인다. 아픈 이들을 돌보는 도덕적 사명을 수행하는 의사에게 ‘師’를 쓰는 이유다.

 

▶전공의 파업 와중에 미래의 의사를 키워낼 책임을 진 의대 교수들이 의대 증원에 반발하며 집단 사직하겠다고 했다. “사직서 제출은 진료도 강의도 안 하겠다는 의미”라고도 했다. 파업하겠다는 것이다. 학생이 수업을 거부하면 교수는 말리는 것이 상례인데 다른 풍경이다. ‘의사 교수’는 최고 존칭을 다 모아 놓은 것이다. 그만큼 사람들의 기대가 크다. 그런 사람들이 제자 위한다고 환자 생명 팽개치는 일만은 없었으면 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03.15 놀라운 ‘AI 화가’

▲일러스트=이철원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혼자 그렸다. 비계를 오르내리며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그리느라 4년이나 걸렸다. 후대 화가 루벤스나 렘브란트였다면 몇 달 안에 끝냈을지 모른다. 두 화가는 ‘그림은 화가가 직접 그려야 한다’는 오랜 통념을 깼다. 밑그림만 직접 그리고 완성은 조수들에게 맡겼다. 자신의 대표작 ‘스폿 페인팅’ 연작을 조수와 함께 그린 현대 영국 화가 데이미언 허스트도 “작품의 개념만 잘 전달된다면 그리는 작업을 누가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예술의 통념을 깨는 시도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지난 세기 초 마르셀 뒤샹은 세라믹 재질의 남자 소변기에 ‘샘’이란 제목을 붙여 전시했다. 작품 앞에 선 이들은 당혹스러워했지만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현대미술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 1위로 선정했다. 미국 팝아트 화가 앤디 워홀이 실크스크린으로 복제해 판매한 매릴린 먼로 판화는 ‘작품은 독창적이고 희소해야 한다’는 믿음에 대한 도전이었다.

 

▶재작년 미국 콜로라도 주립 박람회에 출품된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이란 그림이 디지털 아트 부문 1위에 올랐다. 그런데 작가는 화가가 아니라 게임 기획자였다. 붓을 드는 대신 생성형 AI에게 ‘이러저러하게 그리라’는 명령만 했고 그림은 AI가 그렸다. AI에 준 명령어를 ‘프롬프트’라 한다. 그림이 완성되기까지 수백개 프롬프트가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됐지만 작가는 내용 공개를 거부했다. ‘그림이 아니라 프롬프트가 독창적인 창작물’이란 이유였다.

 

▶세계 3대 비엔날레 중 하나인 휘트니 비엔날레가 20일 뉴욕에서 개막한다. 그리는 행위를 표현하는 액션페인팅의 신세계를 펼친 잭슨 폴록, TV 수상기가 예술품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백남준 등을 등장시키며 현대미술을 선도해온 이 비엔날레가 올해 주목한 것도 AI다. 한 출품작은 화가가 프롬프트를 써서 AI에게 자기 뒷모습을 그리게 한 것이다. 그림을 보면 이 AI는 루벤스나 렘브란트의 조수 역할을 넘어서 창작에까지 발을 디딘 것 같다.

 

▶휘트니 비엔날레는 AI 시대에 ‘실제’가 갖는 의미를 탐색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가수 비비가 부른 ‘밤양갱’이 크게 히트하자 누군가 AI에게 아이유와 김광석 목소리를 학습시킨 뒤 두 사람 목소리로 AI가 부른 밤양갱을 유튜브에 올렸다. 조회 수가 폭발했고 노래를 들은 이들은 “대체 AI 세상에서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가” 논쟁을 벌이고 있다. AI가 시작한 혁명의 끝이 어디일지 궁금해진다.

김태훈 논설위원

 

03.16(토) 서울에 온 메이저리그

▲일러스트=양진경

 

2019년 미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전통의 라이벌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가 ‘축구 종가’ 영국의 런던에서 맞붙었다. 메이저리그 정규 시즌이 유럽에서 치러진 건 최초였다. 축구팀 홈구장인 런던 스타디움이 23일간 공사 끝에 부채꼴 야구장으로 바뀌었다. 야구가 낯선 영국 관중을 위해 자원봉사자 700명이 투입돼 좌석을 안내하고 야구 규칙을 설명했다. 전광판에도 R, H, E 같은 약자 대신 Runs(득점), Hits(안타), Errors(실책) 등 본래 낱말을 썼다.

 

▶당시 메이저리그 홈페이지는 ‘야구가 고향 영국으로 돌아간다’고 전했다. 야구가 15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스툴볼’에서 파생됐다는 역사학자들 의견을 강조하며 새로운 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2019년 열린 2연전에 약 12만명, 4년 뒤 다시 열린 ‘런던 시리즈’에 약 11만 관중이 몰렸다. 영국 매체는 “위대한 미국 스포츠가 마침내 런던을 침공했다”고 전했고, 메이저리그 커미셔너는 “우리 미래가 유럽에 있다”고 했다.

 

▶메이저리그 개막전 ‘서울 시리즈’를 앞두고 LA 다저스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선수단이 15일 입국했다. 한국에서 메이저리그 경기가 열리는 건 처음이다. 메이저리그는 1996년 멕시코에서 처음 해외 시리즈를 치렀고, 일본 도쿄돔에선 5차례 경기를 열었다. ‘야구의 세계화’를 위해 시차와 장거리 이동을 감수한다. 소수 국가에서만 인기 있는 야구는 미국 내에서도 시청률과 관중 감소, 젊은층 이탈이 두드러지자 세계화를 활로로 삼았다.

 

▶마이클 조던 은퇴, 선수 노조 파업 등으로 한때 침체했던 미 프로농구(NBA)도 지난 20여 년 동안 세계화에 힘썼다. 그 결과 올 시즌 약 200국 팬들이 50개 넘는 언어로 NBA 경기를 시청하게 됐다. 시즌 개막 기준 등록 선수 중 미국 외 국가 출신은 40국 125명으로 역대 최다였다. 세르비아, 그리스 출신 등이 맹활약하면서 출신 국가에서 농구 인기가 높아졌다. 미 프로풋볼(NFL)도 영국, 멕시코 등에 이어 2022년 독일 뮌헨에서 수퍼 스타 톰 브래디를 앞세워 정규 리그 경기를 치렀다.

 

▶이번 서울 시리즈에는 나흘간 10만명 이상이 몰릴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시는 24억원을 들여 고척 스카이돔을 업그레이드했다. 인조 잔디를 전부 교체했고, 조명을 LED로 바꿨다. 수준이 갈수록 떨어지는 한국 야구가 세계 최고 수준 야구를 경험하고, 어린 선수들이 더 큰 무대 도전을 꿈꾸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최수현 기자

 

03.18(월) 레이저 무기

▲일러스트=이철원

 

지난해 하와이에 대형 산불이 발생했을 때 미국에서는 ‘레이저’가 화재 원인이란 음모론이 소셜미디어로 퍼졌다. 무장 단체가 산을 겨냥해 레이저를 발사해 불이 났다는 소문이었다. 1960년 당시 미국 휴즈 연구소의 연구원 시어도어 메이먼은 높은 에너지를 가진 원자에 빛 에너지를 가하면 더 강한 빛을 낼 수 있다는 이론에 착안해 광자(光子·빛의 입자)를 생성하고 증폭해 쏘는 장치를 개발했다. 영어 약자로 ‘복사 유도 방출에 의한 광증폭’을 뜻하는 ‘레이저(LASER)’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그 훨씬 전부터 공상과학(SF) 소설에서 광선총이 등장했다. 1898년 나온 H. G. 웰스의 소설 ‘우주전쟁’에서 지구를 침공한 화성인들은 번개처럼 빛을 내며 상대를 태워버리는 히트레이(Heat Ray)라는 무기를 쓴다. 오늘날 레이저 무기로 대표되는 ‘지향성 에너지 무기(DEW)’의 첫 구상으로 평가받는다. 광선검을 선보인 스타워즈를 비롯해 SF 영화에서도 레이저 무기는 단골 소재다.

 

▶프레젠테이션 때 쓰이는 저출력 레이저의 초록색 포인터와 달리, 군용 레이저는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고출력 레이저를 기반으로 한다. 수술이나 용접 같은 의료·산업용으로 쓰이던 고출력 레이저가 기술 발달로 먼 거리까지 표적할 수 있게 되면서 무기의 영역으로 급속도로 확산하고 있다.

 

▶지난주 영국 국방부가 레이저를 발사해 공중의 무인기를 타격하는 시연 영상을 공개했다. 약 1㎞ 밖의 100원 동전 크기 표적을 맞힐 수 있고, 한 발 쏘는 데 1만7000원밖에 들지 않는다. 전력이 공급되는 한 계속 발사할 수 있어 레이저 무기는 ‘무한 탄창’으로 불린다. 이미 미 육군은 50kW(킬로와트) 레이저를 보병 전투 차량 일부에 시범 장착했고, 해군도 구축함에 60kW 레이저 무기를 달았다. 러시아와 중국도 앞다퉈 레이저 무기를 개발하고 있다.

 

▶레이저 무기의 한계는 높은 출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미 공군의 항공기 장착용 레이저 무기는 1MW(메가와트) 이상 출력이 필요하다. 전자레인지(1kW)보다 1000배 강한 출력이다. 전장에서 지속적 전원 공급이 쉽지 않은 점과, 엄청난 폐열이 발생하는 것도 문제다. 레이저 빔을 산란시키는 비·안개 같은 기상 상황도 변수로 작용하고, 움직이는 표적에 수 초 이상 레이저를 맞혀야 하는 점도 한계다. 그럼에도 레이저가 방공 무기의 ‘게임 체인저’로 기대를 모으는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벌 떼처럼 등장한 무인기 자폭 때문이다. 21세기 ‘가미카제’와 레이저 무기의 한판 승부가 멀지않았다.

곽수근 기자

 

03.19 ‘저임금 선진국’ 일본

▲일러스트=이철원

 

1990년대 초 일본 사회를 다룬 만화 ‘짱구는 못 말려’. 무역상사 계장인 짱구 아빠의 연봉은 650만엔이었다. 당시 5대1 원·엔 환율을 곱하면 3250만원 수준이다. 한국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는 은행 대리 아빠가 등장한다. 그의 월급은 58만원. 보너스를 600%로 잡으면 연봉이 1000만원 수준이다. 30년 전엔 일본 대기업 연봉이 한국 은행원보다 3배쯤이었던 것 같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 한일 간 임금 역전을 가져왔다. 엊그제 한국경총이 발표한 ‘한일 임금 추이’를 보면, 2022년 기준 한국 대기업의 평균 월급은 588만원으로, 일본 대기업 443만원보다 32%나 많다. 지난 20년간 일본 대기업 연봉은 7% 감소한 반면 한국 대기업 연봉은 158% 오른 결과다. 해외 이민 갔다 돌아온 일본인들이 “어떻게 월급이 30년 전과 똑같냐”고 놀란다고 한다.

 

▶한때 1인당 GDP 세계 1~2위를 다투던 일본에서 경기침체와 물가 하락이 동반하는 디플레이션 탓에 임금도 곤두박질쳤다. 기업들이 물가 하락을 이유로 임금을 계속 동결했다. 도요타 같은 대기업 노조들은 ‘국제경쟁력 저하’를 걱정하며 임금 인상보다 고용 유지를 선호했다. 경제학자 오마에 겐이치는 “종신고용과 근무연수별 임금 탓에 급여가 적어도 직장을 옮기지 않는 풍토가 저임금 동인으로 작용했다”고 설명한다.

 

▶일본 식민 지배를 받고도 일본을 좋아하는 대만도 저임금이다. 10년 전 대만의 대졸 사원 초임은 월 92만원이었다. 월급은 짜고 집값은 천정부지여서 청년들이 대만을 ‘구이다오(鬼島·귀신 섬)’라고 자조했다. 세계 1위 반도체 파운드리 TSMC도 예외가 아니다. 2020년 기준 TSMC 임직원 평균 연봉은 7600만원으로 삼성전자(1억2700만원)의 60% 수준이다. 얼마 전 TSMC가 일본 공장에서 일할 박사급 인재를 채용했는데, 월급이 35만엔(320만원)에 불과해 한국 대기업 직원들을 놀라게 했다.

 

▶일본이 저임금 국가 오명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고 있다. 정부뿐 아니라 기업 단체인 게이단렌도 “임금 인상이 기업의 책무”라고 말한다. 유니클로, 세계 4위 반도체 장비업체 도쿄 일렉트론이 한 번에 임금을 40%나 올리는 등 기업들도 호응한다. 하지만 1000만명이 넘는 근로자는 여전히 연봉 200만엔(1800만원) 이하다. 그래서 ‘연봉 200만엔으로 풍요롭게 살다’ 등 초절약 요령을 알려주는 책이 베스트셀러다. 사회가 이런데도 집단 저항은 전혀 없다. 우리 눈으론 ‘이상한’ 나라다.

김홍수 논설위원

 

03.20 러시아인의 푸틴 사랑

▲일러스트=김성규

 

한국에 사는 프랑스인과 러시아인이 유튜브에 나와 자국의 국민성을 화제 삼아 대화를 나눴다. 러시아인 출연자는 “러시아인은 자유를 싫어한다”고 했다. 자유롭게 살기보다 강력한 지도자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긴다는 얘기였다. 역사적인 근거가 있다. 13세기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 대륙 곳곳에 세웠던 여러 한국(汗國)은 한 세기 뒤에 모두 멸망했지만 오직 러시아에 들어선 킵차크 한국만 두 세기 넘게 존속하며 러시아를 지배했다. 러시아인 특유의 굴종적 태도 탓이라는 분석이 있다.

 

▶스탈린은 러시아인의 이런 민족성을 꿰뚫고 있었다. 그가 1937년 대숙청을 일으켜 최대 120만명의 목숨을 빼앗는 동안 러시아인은 저항하지 않았다. 투하쳅스키 원수 등 전쟁 영웅들이 잇달아 처형될 때 군부도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2차 대전이 터지자 겁먹고 달아났던 스탈린을 찾아가 “다시 우리를 지휘해 달라”고 했다. 스탈린은 “독일군의 공격을 몸으로 버틴 뒤 그들의 전력이 고갈되면 후방의 예비 병력으로 반격하자”며 자국민을 총알받이로 쓰는 작전을 제안한 주코프 사령관을 좋아했다.

 

▶러시아인들은 서방세계에 뿌리 깊은 피해의식과 열등의식을 갖고 있다. 2차 대전에서 소련의 인명 피해가 컸던 이유도 연합군이 소련인을 더 많이 희생시키려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고의로 늦췄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온화해야 할 6월에 날씨가 쌀쌀해진 기상이변을 ‘미국 CIA 음모’라고 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러시아의 크리스마스가 1월 7일인 것도 서유럽에 대한 반감이 한 원인이라 한다.

 

▶푸틴이 다섯 번째 집권에 성공하며 30년 장기 집권 문을 열었다. 그의 승리를 두고 “부정선거여서 인정할 수 없다”는 반응이 나온다. 투명 투표함을 쓰고 기표 용지를 접지도 않으니 투표라고 하기도 힘들다. 한 독립 언론은 열을 가하면 잉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감온(感溫) 잉크를 내장한 기표 용구가 쓰였다며 기표 부위가 라이터 불에 지워지는 장면도 공개했다.

 

▶그러나 압도적 다수의 러시아 국민이 푸틴을 택한 것이 사실이다. 누군가 강한 사람이 질서를 잡아주고 민중은 그냥 따르면 된다는 사고방식이다. 러시아인들은 러시아를 유럽 강국으로 발돋움시킨 표트르 대제를 숭배한다. 그런 지도자가 또 나와 서유럽에 대한 열등감을 풀어주길 바란다. 그 마음을 읽은 푸틴은 ‘표트르 대제는 내 롤 모델’이라고 했다. 러시아인들도 러시아의 영광을 실추시킨 고르바초프보다는 우크라이나를 침략하고 나발니를 죽인 푸틴을 좋아한다. 이 ‘러시아인 의식’은 계속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03.21 ‘엘리베이터 단 반도체’ HBM

▲일러스트=이철원

 

1854년 뉴욕 산업박람회에서 미국의 엔지니어 엘리샤 오티스가 박람회장에 설치한 대형 엘리베이터에 발을 디뎠다. 그는 자신이 타고 올라간 엘리베이터에 연결된 케이블을 끊게 했다. 그가 개발한 엘리베이터는 줄이 끊어져도 추락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도르래를 이용한 형태로 첫선을 보였지만 안전성 우려에 2000년 넘게 물건 나르는 용도에 머물렀던 엘리베이터가 오티스의 시연을 계기로 사람이 탈 수 있는 기구로 도약했다.

 

▶챗GPT 같은 생성형 AI(인공지능) 시대가 열리면서 수요가 급증한 HBM(고대역폭 메모리)은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아파트’로 비유된다. 아파트는 수직으로 쌓아올린 D램 칩을 뜻하고, 엘리베이터는 켜켜이 쌓은 D램 내부를 관통하는 전극으로 위아래를 연결한 데이터 전송 통로를 말한다. 기존에는 금속 배선으로 D램을 복잡하게 연결했는데, 수직으로 통하는 길을 만들어 데이터 처리 속도를 혁신적으로 끌어올렸다. 데이터 통로의 폭을 넓혔다는 의미로 ‘도로의 차선’을 대폭 늘린 것에 빗대기도 한다.

 

▶HBM은 2013년 SK하이닉스가 세계 최초로 개발에 성공하면서 구현됐지만, 상당 기간 주목받지 못했다. 기존 방식의 그래픽 장치용 D램(GDDR)보다 3배 이상 비싸 외면받았다. 경쟁 기업들이 HBM 개발을 접는 속에서도 SK하이닉스는 투자를 이어가 수율(합격품 비율)을 높였고, 지난해엔 D램을 12층으로 쌓아올린 ‘12단 적층 HBM3′를 최초로 내놓았다. 지난해부터 생성형 AI 열풍으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엔비디아에 납품하는 등 투자의 결실을 맺고 있다.

 

▶초기 판단 미스로 HBM 개발이 뒤늦었던 삼성전자는 그동안 엔비디아의 성능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해 고전해왔다. 하지만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19일 기자 간담회에서 “삼성 HBM 제품을 (사용하기 위해) 검증하는 단계”라고 밝히며 일약 주목받게 됐다. 이 발언으로 올 상반기 중 5세대 HBM을 양산할 삼성전자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 삼성전자 주가가 급등했다.

 

▶원래 HBM 개발에 처음 나선 곳은 미국 AMD였지만 이 회사는 SK하이닉스에 손을 내밀어 세계 최초 생산을 돕고도 AI 시대에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약간의 방심에도 주도권이 휙휙 넘어갈 만큼 살벌한 경쟁이 벌어지는 전쟁터다. 젠슨 황은 “앞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엄청난 성장 사이클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두 회사가 AI 시대를 주도하는 엔비디아라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길 기대한다.

곽수근 논설위원·테크부 차장

 

03.22 선거판의 백의민족

▲일러스트=이철원

 

파라오를 숭상한 고대 이집트인들은 흰옷을 즐겨 입었다. 흰색은 태양을 상징했다. 그리스와 로마에선 신부에게 흰 예복을 입혔다. 순결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바로크 시대엔 천사를 하얗게 표현했다. 흰색은 정치적 순결도 의미했다. 로마 집정관과 원로원 의원들은 흰색 양모 토가를 걸쳤다. 공직의 상징이었다. 영어의 공직 선거 후보자 ‘candidate’는 ‘흰옷을 입은 사람’이란 의미의 로마어 ‘Candidatus’에서 유래했다. 정부 보고서도 ‘백서(white paper)’라 부른다.

 

▶우리는 삼국 시대 전부터 흰옷을 즐겨 입어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 했다. 중국 ‘위지(魏志)’에 따르면 부여인들은 흰색 도포와 바지를 입었다. 태양을 숭배하는 제천(祭天) 신앙의 영향이다. 하지만 조선 시대엔 나라에서 흰옷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때가 잘 타 빨래 품이 많이 들고 청색을 숭상하는 유교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일제 때는 흰옷을 입으면 관공서 출입을 금지하고 먹물을 뿌렸다. 그래도 막지 못했다. 3·1 운동이나 의병 봉기 때는 온통 흰색 물결이었다.

 

▶장수가 전쟁에 져 징계당하면 백의종군(白衣從軍)했다. 정치권에선 정치적 재기를 도모할 때 이 말을 썼다. 2012년 김무성 전 대표는 새누리당 공천에서 밀리자 불출마를 선언한 뒤 흰 점퍼를 입고 지원 유세에 나왔다.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도 최근 공천 탈락 뒤 “백의종군하겠다”고 했다.

 

▶2016년 당시 새누리당을 탈당한 유승민·윤상현·주호영·안상수 의원은 앞다퉈 흰색 점퍼를 입고 유세했다. 흰색의 상징 효과에 억울한 마음까지 담았을 것이다. 2020년 총선 때 호남에서 민생당으로 출마한 천정배 후보는 당색인 녹색 대신 흰옷을 입었다. 지난 대선 때 윤석열 대통령과 후보 단일화를 한 안철수 의원도 흰 점퍼를 입고 지원 유세를 했다.

 

▶총선을 20여 일 앞둔 선거판에 또다시 ‘흰 점퍼’가 등장했다. 이른바 험지에 출마한 후보들이다. 민주당으로 서울 서초을에 출마한 홍익표, 강남을에 출마한 강청희 후보는 민주당 색인 파란색 대신 흰색 점퍼를 입었다. 기호·이름만 파란색이다. 지역에선 “민주당 후보인 줄 몰랐다”는 유권자도 있다. 국민의힘으로 수원정에 출마한 이수정, 서울 동작을의 나경원, 중·성동갑의 윤희숙 후보도 흰색 패딩 차림이다. 모두 어려운 지역이다. 지역 내 거부감을 줄여 지지율 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오죽 답답하면 이런 탈색 전략을 쓰겠나 싶다. 그게 먹힐지는 두고 볼 일이다.

배성규 기자

 

03.23 마지막 문자 ‘여보 사랑해’

▲일러스트=김현국

 

마종기 시인의 대표작 ‘바람의 말’에는 사별한 부부의 애틋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 병상의 남자가 영원한 이별을 앞두고 이 시를 쪽지에 적어 아내 손에 쥐여 주었다.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중략)/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바람이 되어 아내 곁에 머물겠다는 맹세를 읽은 아내는 남편을 떠나보낸 뒤 시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가 그리울 때면 늘 이 시를 읽습니다. 그러면 어디에 있다가도 내 남편은 내 옆에 다시 와 줍니다. 이 시가 내게 살아갈 힘을 줍니다.’

 

▶숱한 사고 현장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도 ‘사랑한다’는 문자를 남긴다. 미국에서 9·11 테러 때 무너지는 쌍둥이 빌딩 안에 있던 이들도,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와 세월호 침몰로 생환하지 못한 이들도 마지막 순간에 사랑한다는 문자를 보냈다. 급박한 순간 가족에게 전할 마지막 단어는 ‘사랑’일 수밖에 없다.

 

▶사랑 중에 남녀의 사랑은 지속 시간이 고작해야 18개월에 불과하다는 연구가 있다. 문정희 시인은 부부가 남녀의 짧은 사랑 이후 오래 함께 살 수 있는 것은 ‘서로를 묶는 것이 거미줄인지/ 쇠사슬인지 알지 못하지만/ 서로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게 느끼며/ 오도가도 못하는’ 사이이기 때문이라고 시 ‘부부‘에 썼다. 부부 사이를 ‘웬수’로 표현하기도 한다. ‘원수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지만 웬수는 한 이불 덮고 잔다’는 말도 있다. 미운 정 고운 정으로 사는 게 부부라는 뜻이다.

 

▶일본 시모노세키 앞바다에서 화학 제품 운반선이 뒤집히는 사고로 안타까운 생명들이 희생됐다. 그 사고로 사망한 선장도 아내에게 마지막 문자를 보냈다. 긴박한 순간, ‘여보 사랑해’ 단 한 문장에 모든 것을 다 담아야 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던 아내는 ‘응, 사랑해요’ ‘오늘 노래 교실 간다’ 같은 일상 대화로 답했다. 사고 전에도 이런 사소하지만 소중한 문자를 주고받았을 것이다.

 

▶어느 조사에서 중년 남자들에게 ‘세상을 떠나게 되면 아내에게 무슨 유언을 남기겠냐’고 물었더니 ‘사랑한다’와 ‘미안하다’가 가장 많이 나왔다. 평생을 두고 사랑과 미움, 고마움과 미안함이 중첩되는 관계가 부부 사이 말고 또 있을까. 어떤 인연을 만나 살든 그 끝엔 이별이 있다. 그날이 언제 올지도 알 수 없다. 그러니 ‘사랑한다’는 말을 내일로 미루지 말아야겠다. 유명을 달리한 분들과 유족을 위해 기도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03.25(월) 천덕꾸러기 된 ‘민변’

▲일러스트=이철원

 

1984년 9월 1일부터 3일간 서울에 폭우가 쏟아졌다. 가장 피해가 컸던 곳이 망원동이다. 330㎜가 넘는 집중호우에 유수지 펌프장 수문이 붕괴돼 1만여 가구가 물에 잠기고 수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당시만 해도 천재(天災)로 인식됐지만 조영래 변호사는 달랐다. 부실 공사를 하고 유수지 관리를 잘못한 서울시와 건설사의 인재(人災)라며 주민을 모아 집단소송을 냈다. 수임료는 승소하면 받겠다고 했고, 결국 주민 1만2000여 명이 53억여 원을 배상받았다.

 

▶이 소송을 계기로 모인 변호사들이 만든 단체가 후에 ‘민주 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 됐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순우리말로 ‘모임’이라고 이름 붙인 게 조 변호사다. 민변 초기엔 ‘인권 옹호와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모임 목적에 걸맞게 활동했다. 박종철 고문 치사, 부천서 성 고문 등 시국 사건 변호를 도맡았다. 돈이 되지 않아 일반 변호사들이 맡지 않는 사건이 이들 몫이었다.

 

▶노무현·문재인 전 대통령 모두 민변 출신이다. 문재인 정부는 ‘민변 전성시대’였다. 대법원, 헌법재판소 등 사법부 요직을 장악했다. 행정부의 민간 개방직, 각종 진상조사위원회도 민변 차지였다. 21대 국회에도 11명이 들어갔다. ‘코인 거래’ 김남국 의원, ‘짤짤이’ 최강욱 전 의원 등 대부분 민주당 소속이어서 ‘민주당을 위한 변호사 모임’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민변이 권력화되면서 각종 문제가 나타났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범죄 의혹, 이용구 전 법무 차관의 택시 기사 폭행 등 ‘반인권’ 행태가 불거졌다. 과거사위에서 자기가 조사한 사건의 변호를 맡아 수십억 원의 수임료를 챙겼다가 처벌받은 사람, 강제 징용 소송을 대리하며 제3자 보상안을 거부하다가 막상 피해자가 보상금을 타내자 자기 성공 보수부터 떼어 간 사람도 민변 출신이다. 간첩 혐의자 변호를 도맡아 ‘종북’ 논란도 일었다.

 

▶이번 총선에서 민변은 위성정당에 공개 반대했다. 그러나 막상 만들어지자 집행부가 앞다퉈 공천을 신청했다. 박용진 의원 지역구에 공천받은 민변 변호사는 성범죄 전문 변호 이력이 드러나 물러났다. 아파트와 오피스텔 10채에 38억원을 ‘갭투자’하고 이를 숨겼다가 공천이 취소된 후보도 민변 출신이다.

 

▶조영래 변호사는 인권 변호사로 이름이 높았지만 정치와는 거리를 뒀다. 생전에 “모든 권력은 놔두면 남용된다”며 “내가 스스로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순간 남용의 위험에 빠진다”고 했다. 민변 출신들이 새겨봤으면 하는 말이다.

황대진 논설위원

 

03.26 러시아와 이슬람의 ‘불구대천’

▲일러스트=이철원

 

19세기 남진하는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이 10여 차례 전면전을 벌였다. 러시아가 이겼다. 흑해부터 중앙아시아에 걸친 이슬람 영역을 차지했다. 지금도 러시아 인구 1억4300만여 명 중 2000만명 이상이 무슬림(이슬람교 신자)이다. 차르가 이슬람교 대신 기독교 일파인 러시아 정교를 강요하자 무슬림들이 집단 반발했다. 러시아 혁명이 터지자 차르 체제에 불만을 갖고 있던 무슬림 중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이 나왔다.

 

▶러시아 무슬림들은 레닌과 스탈린을 지지했다. 종교·민족 문제에서 관대하다고 봤다. 커다란 오판이었다. 스탈린은 1920~1930년대 정적과 무슬림 공산주의자들을 대거 숙청했다. 종교·이념·민족이 결합하면 1인 독재를 위협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슬람 사원부터 없앴다. 무슬림 국가 출현을 막으려고 ‘분할’ 정책도 썼다. 중앙아시아를 ‘스탄’ 국가 5곳으로 나눴다. 무슬림이 많은 소련 내 체첸과 인근 주민 40만명을 1944년 카스피해 서쪽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10만명 이상이 객사했다. 소련 무슬림들은 ‘철의 장막’에 막혀 주변 무슬림과도 격리됐다.

 

▶무슬림들도 그냥 있지 않았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했다가 무슬림에 거센 반격을 당했다. 이 일은 소련 붕괴로 이어졌다. 이 틈을 타고 무슬림 체첸이 독립을 선언하자 푸틴이 등장해 짓밟았다. 그는 체첸 탄압을 ‘강한 러시아’ 선전으로 이용했다. 푸틴은 체첸 수도를 지도에서 지우는 공격으로 40만 인구를 절반으로 줄였다. 체첸 무슬림 테러가 이어졌다. 2002년 모스크바 극장 인질 사건으로 170여 명, 2004년엔 북(北)오세티야 초등학교 인질 사건으로 33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1990년대 들어 중앙아시아 ‘스탄’ 지역 무슬림들이 급진화하기 시작했다. 독재와 경제 악화가 겹치면서 젊은층이 이슬람 근본주의에 빠져들었다. 차르 시대부터 소련을 거쳐 이어진 러시아의 이슬람 탄압 역사를 뼛속 깊이 새기고 있다.

 

▶러시아가 24일(현지 시각) 모스크바 공연장 총격 테러 피의자 4명의 신상을 공개했다. 타지키스탄 국적이라고 한다. 이번 테러의 배후라는 ‘ISIS-K(호라산)’의 호라산 지역도 ‘스탄’ 일대다. 기독교 유대교와 이슬람의 충돌은 종교전쟁이다. 그런데 공산주의와 이슬람의 충돌은 알라 부정론(무신론) 대 알라의 전쟁이다. 러시아는 테러 피의자들을 고문하는 장면을 일부러 공개했다. 한 명은 귀가 잘리고 한 명은 성기에 전기 고문을 당했다. 이슬람도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면 ‘불구대천(不俱戴天)’이다.

안용현 기자

 

03.27 잠에서 깬 ‘하이엔드 중국’

▲일러스트=이철원

 

중국은 수천 년간 외국에서 공물을 받고 하사품을 주는 조공(朝貢) 무역을 했다. 조공 체제를 유지한 힘 중 하나는 중국산 하이엔드(high end·최고 품질) 물건이었다. 주변국들은 조공을 통해서만 도자기, 종이, 비단, 의약품, 과학기구 등 당대 최고 물품을 접할 수 있었다. 조선 왕조가 3년에 한 번만 조공하라는 명나라 요구를 무시하고 매년 여러 차례 조공 사신단을 보낸 것도 고품질 물품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다.

 

▶17세기 유럽 왕실, 귀족 저택엔 ‘차이나 룸’이란 별실이 있었다. 중국 도자기, 옻칠 가구, 비단 같은 중국산 공예품을 따로 모아둔 장소였다. 차이나 룸의 규모가 부의 척도로 여겨질 정도였다. 인쇄술·화약·나침반을 발명한 기술 선진국 중국이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유럽에 뒤처졌다. 중국 도자기는 영국 본차이나에, 비단은 인도 면화에 밀려났다.

 

▶공산혁명 이후 개혁개방을 표방하고 중국도 산업화에 나섰지만, 중국 공산품은 수십 년간 싸구려, 짝퉁 지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2010년 이후 MP3, 이어폰, 휴대폰 배터리 등 소형 가전을 중심으로 가격 대비 높은 성능의 제품을 선보이며 ‘대륙의 실수’란 신조어가 등장했다. 이후 인공지능(AI), 우주항공, 양자컴퓨터 등 최첨단 분야의 기술 굴기와 더불어 ‘대륙의 실수’ 영역이 나날이 확장되고 있다.

 

▶요즘 서울 강남 주부들 사이에 중국산 하이테크 로봇청소기가 필수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먼지 흡입은 물론 물걸레 청소까지 하고 청소가 끝나면 걸레 세척, 건조까지 알아서 다 한다. 가격이 150만원을 웃도는데도 시장점유율이 80%에 이른다. 싸구려 가전의 대명사였던 중국 하이얼은 2016년 GE 가전사업을 인수한 후 명품 기업으로 변신했다. 하이얼의 와인 냉장고는 고품질, 최고 가성비로 미국 시장의 60%를 장악했다. 요즘 중국 휴대폰 기업들은 독일 라이카 카메라와 AI 기능을 장착한 첨단 제품으로 애플을 밀어내고 있다.

 

▶'대륙의 실수’ 원조 샤오미가 전기차 진출을 선언한 지 3년 만에 놀라운 스펙의 전기차를 내놨다. 포르셰 타이칸을 닮은 샤오미 SU7은 664마력으로 2.78초 만에 시속 100㎞에 도달한다. 최고 속력 265㎞를 자랑하며 1회 충전으로 800㎞를 달린다. 10년 전 “중국 전기차는 후지다”고 조롱했던 일론 머스크가 최근엔 “중국 전기차가 수입되면 미국 자동차 메이커들이 거의 다 망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잠에서 깬 ‘하이엔드 중국’의 기세가 두려울 정도다.

김홍수 논설위원

 

03.28 ‘셰셰’ 명백인(明白人)

▲일러스트=이철원

 

국민당군에게 쫓기던 마오쩌둥이 공산당 선전 책을 써줄 외국 기자를 물색했다. 미국인 에드거 스노를 근거지 옌안으로 불러 인터뷰했다. 스노가 1937년 쓴 ‘중국의 붉은 별’은 공산당을 지나치게 미화한 내용이 많다. 거짓 수준의 ‘창작’도 있다. 그러나 중공에 대한 서방 인식을 180도 바꿔 놨다. 마오는 문화대혁명 도중에도 스노를 불러 대접했다. 스노의 책은 우리나라 586세대를 포함해 전 세계에 ‘마오쩌둥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스노는 중국의 1호 ‘라오펑유(老朋友·오랜 친구)’가 됐다.

 

▶1969년 중·소 국경 우수리강에서 충돌이 벌어져 200명 가까운 양국 군인이 전사했다. 중국은 소련의 핵 공격에 대비해 수도를 충칭으로 옮기는 계획까지 세웠다. 이때 미·일이 손을 내밀었다. 1970년대 미국은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 박사, 일본은 다나카 총리가 수교의 물꼬를 텄다. 키신저는 100살로 사망할 때까지 중국을 100번쯤 갔는데, 매번 중공 최고지도자의 환대를 받았다. 1978년 덩샤오핑의 방일 당시 다나카 총리는 뇌물 사건으로 가택 연금 신세였지만 덩샤오핑은 다나카를 예방했다. 닉슨과 키신저, 다나카의 공통점은 중국과 가까워지려고 대만과 관계를 끊었다는 점이다. 중국은 세 사람을 ‘라오펑유’라고 부르지만 대만은 키신저를 “중국 대변인”이라고 했다.

 

▶중국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전승절 열병식에 참가하자 ‘라오펑유’라고 불렀다. ‘박근혜 누님(朴姐·퍄오제)’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한국이 사드 배치를 결정하자 중국은 바로 낯빛을 바꿨다. ‘박 대통령 외교 정책은 최순실 영향’이라고 했다. 필리핀 두테르테 대통령도 반미(反美)일 때는 “중국의 가장 중요한 친구”였다.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가 불거지자 ‘친구’라는 말이 사라졌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7년 방중을 앞두고 “시 주석과 라오펑유가 되고 싶다”고 했다. ‘중국은 큰 산봉우리, 한국은 작은 나라’라는 헌사까지 바쳤다. 그런데 돌아온 건 8끼 혼밥이었다. 중국은 팔을 당기기도 전에 먼저 고개를 숙이는 상대방을 우습게 여기고 이용한다. 강대국이 아니면 더 우습게 본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셰셰(謝謝·고맙다)’ 발언에 중국 반응이 뜨겁다. 주요 포털에는 “사리가 밝은(明) 정치인” “정신이 멀쩡한 사람(明白人)” “절대적 친중” 등 댓글이 쏟아지고 있다. 중국은 한·미 동맹, 한·미·일 협력을 쪼개는 틈으로 총선 승리가 예상되는 이 대표를 이용하고 싶을 것이다. ‘셰셰 이재명’이다.

안용현 기자

 

03.29 영빈관의 용접공

▲일러스트=이철원

 

엊그제 울산 HD현대중공업 조선소의 영빈관에 용접공 등 이 회사 외국인 기능공 42명이 초청받아 각별한 대접을 받았다. 세계 1위 조선 경쟁력의 핵심 중 하나가 플라즈마 자동 용접 등 특수 용접 기술이다.

 

▶두 개의 금속 물체를 붙여 하나로 만드는 것이 용접이다. 휴대폰, 아파트, 자동차, 선박, 비행기에서부터 최첨단 우주선에 이르기까지 산업 전반의 뿌리 기술이다. 용접의 역사는 금속의 역사만큼 길다. 기원전 3000년경 청동기 시대에 수메르인들이 땜질로 이어 붙여 만든 칼이 발굴됐다. 불 속에 철광석을 넣어 무르게 한 다음 망치로 두들겨 붙인 최초의 단조(鍛造) 용접이다. 1801년 영국의 과학자 험프리 데이비가 배터리를 이용해 두 개의 탄소 막대 사이에서 불꽃이 일어나는 것을 보여줬다. 이때부터 전기 용접 연구가 시작됐다. 19세기 중반부터 다양한 용접 기술이 개발돼 1·2차 대전을 거치면서 군함 건조 등이 용이해졌다.

 

▶용접공은 우리나라 경제 성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산업 역군이다. 1971년 시작한 서울 반포아파트 건설 현장은 대규모 용접공 교육장이나 다름없었다. 라디에이터에 온수를 순환시켜 난방하는 구조였다. 틈이 있으면 물이 새기 때문에 꼼꼼한 용접이 중요했다. 정주영 회장이 조선업에 뛰어들 때 남들은 무모하다고 했지만 정 회장은 발상의 전환을 했다. “조선이라고 공장 짓는 것과 다를 바 뭐 있나. 철판 잘라 용접하고 엔진 올려놓는 일인데 건설 현장에서 하던 일 아닌가.”(정주영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1970년대에 국내 최초의 산업용 로봇이 도입됐는데 용접용 로봇이었다. 현대차 울산 공장에서 포니 차를 만들 때 스폿 용접용 로봇이 사람 손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1984년 현대그룹에 첨단 로봇사업팀이 만들어졌는데 바로 이 용접 때문에 현대중공업에 배치됐다. 조선업에 뛰어들어 용접공 길러내느라 총력전을 펴본 적 있는 정주영 회장이 “용접 수요가 많은 조선소가 로봇 사업을 담당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오늘날 선박 건조에서 용접 자동화는 많이 진척됐다. 그럼에도 미세한 작업에서는 숙련된 용접 전문 인력의 판단과 경험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조선업 인력난이 가중되면서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용접공을 모셔온다. 정작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3D 직종으로 기피하고, 얼마 안 되는 젊은 용접공조차 기능 인력을 우대하는 호주 등지로의 이민을 꿈꾼다. 숙련된 기능 인력이 사회적으로 더 인정받는 사회가 돼야 이런 인력의 미스매치도 줄어들 것이다.

강경희 기자

 

03-30(토) 네덜란드의 ‘베토벤 작전’

▲일러스트=김성규

 

네덜란드 정부가 반도체 핵심 기업 ASML이 본사 외국 이전을 검토하겠다고 하자, 화들짝 놀라 ‘베토벤 작전’을 내놨다. 25억유로(약 3조7000억원)를 투입해 ASML 본사가 있는 에인트호번 지역의 주택, 교육, 전력망을 개선하고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세제 혜택도 강화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왜 작전명에 베토벤이 붙었을까.

 

▶위대한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집안은 네덜란드 출신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18세기 초 네덜란드 왕국이던 메헬런에서 제빵 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교회 악장이자 베이스 성악가로 활동했다. 베토벤 이름에 있는 판(van)은 네덜란드 플랑드르 지역 말로 ‘from’이란 의미다. 어원으로 보면, 베토벤 집안은 ‘사탕무 밭(bietthoffen) 사람들’이란 뜻이라고 한다. 베토벤 집안이 네덜란드 출신인데 세계인은 베토벤을 독일인으로만 안다. ‘베토벤 작전’은 네덜란드가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의미일까.

 

▶네덜란드 정부는 “베토벤과 ASML은 아름다운 것을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설명한다.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는 기계지만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할 만한 자격이 있다. EUV 장비는 광학 기술의 집약체로, 부품 1만6000개로 구성돼 있다. 과거 장비인 DUV(심자외선)까지는 일본 캐논, 니콘이 경쟁했으나 EUV 장비는 ASML만 성공했다. 180년 역사의 독일 광학 회사 칼 자이스와 협업, 델프트 공대가 포함된 네덜란드 산학연 클러스터의 힘이 컸다.

 

▶ASML의 직원 2만명 중 40%가 최고급 외국인 인재다. 작년 말 네덜란드 의회가 외국인 급여 30%에 대해 5년간 면세 혜택을 주는 것을 20개월로 줄이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ASML의 최고경영자는 “혁신 인재를 데려올 수 없다면 우리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겠다”면서 본사 외국 이전 가능성을 내비쳤다. 2021년 네덜란드 석유 기업 로열 더치 셸이 환경 규제, 불리한 세제 등을 이유로 기업명에서 ‘로열 더치’를 빼고 영국으로 본사를 옮긴 악몽이 재현돼선 곤란했다. ‘베토벤 작전’을 급히 꾸민 배경이다.

 

▶ASML은 작년 말 차세대 노광 장비 ‘하이 EUV’를 새로 선보였다. 1호 시제품을 인텔에 납품했다. 한 대 가격은 5000억원. 역사상 가장 비싼 기계지만, 돈이 있다고 마음대로 살 수도 없다. ASML의 수출 금지로 중국은 구세대 장비로 반도체를 만드는데 생산 단가가 삼성전자의 100배나 된다. ‘베토벤 작전’이 한국에도 도움이 되기 바란다.

김홍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