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論直說 2024-03/
03.01 ‘반도체 전쟁’ 사령부의 운명 가를 선거
우리가 ‘政經 유착’이라는
말의 감옥에 갇힌 사이
美·日·대만 ‘政經 원팀’
‘칩 워 사령부’ 선택 총선

▲대만 TSMC는 지난 2월 24일 일본 구마모토현에 신공장을 개소했다. 사진은 같은날 오전 TSMC 공장 바로 앞 양배추밭에서 수확하는 농부들의 모습/성호철 도쿄특파원
일본 남단 구마모토에 세워진 대만 반도체 기업 TSMC 공장은 공장 앞 양배추밭 사진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인구 4만3000명의 기쿠요마치(菊陽町)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면 전혀 다른 모습이 보인다. 얼마 전까지 70대 농부가 소를 키우던 1800평 땅에는 지금 주택 공사가 한창이다. 평당 2만엔 땅이 작년 평당 10만엔으로 뛰더니 지금은 20만엔이 됐다. 계속 오르고 있다. 만면에 미소를 띤 이 농부는 “지금 팔면 3~4억엔 벌 수 있지만, 팔지 않고 공장 사람들 대상으로 임대 사업을 하겠다”고 말했다. 이용객이 없어 무인 역인 하라미즈(原水)역은 아침마다 출근 인파로 넘친다.
일본은 지역마다 최저임금이 다르다. 구마모토 최저 시급은 898엔이고 도쿄는 1072엔이다. 그런데 TSMC 이후 상황이 역전됐다. 인력 회사 사장 시마즈씨는 “반도체 공장 급식 보조 시급이 1500엔인데, 2, 3공장이 만들어지면 3000엔이 넘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반도체 일자리는 넘치는데 기술 인력이 부족해 대학도 비상이다. 구마모토대학은 70여 년 만의 학제 개편으로 문과, 이과생 모두가 지원 가능한 정보융합학과를 신설했고, 도쿄대학도 구마모토 대학에 ‘나노시스템 집적센터’를 만들어 공동 연구에 나섰다. 졸업까지 4년이 걸리니 속성 코스인 반도체 직업 학교에는 트럭 운전사, 요양 시설 종사자까지 몰렸다.
그래 봤자 TSMC는 대만 회사다. 일본이 진짜 칼을 가는 공장은 북단 홋카이도 지토세(千歳)에 건설 중이다. 도요타, 소니, 소프트뱅크 등 일본을 대표하는 8개 기업이 AI(인공지능) 반도체로 사용할 ‘고성능 저전력’ 반도체의 국산화를 위해 설립한 라피더스. 회장은 75세, 사장은 72세다. 고이케 사장은 “우린 20년 늦었다. 2등이면 된다고? 지난 20년 교훈이 뭔가. 목표는 당연히 1등”이라고 말했다. 다시 전투에 나선 반도체 노장들의 피맺힌 외침이다.
라피더스 프로젝트에는 최소 5조엔이 필요한데 일본 정부가 우선 1조엔을 퍼붓는다. TSMC 구마모토 1공장에는 최대 4760억엔, 2공장에는 최대 7320억엔의 보조금을 지급한다. ‘정경 유착’이라고 해도 반박할 도리가 딱히 없다. 대만과 한국은 지금의 일본이 울고 갈 ‘정경 원팀’의 역사를 갖고 있다. 대만의 실세 리궈딩(李國鼎) 장관은 1985년 중국계 미국 엔지니어 모리스 창(張忠謀)에게 “대만의 반도체 산업을 원합니다. 돈이 얼마나 필요합니까”라고 물었다. TSMC 설립 자금의 48%는 대만 정부가 냈지만 여전히 돈이 모자랐다. 기업인들에게 “그동안 정부가 잘해주지 않았느냐”는 전화를 걸었다. 협조를 가장한 협박을 통해 금고가 채워지고 TSMC가 출발했다.
불굴의 기업가 정신과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의 전폭적 지원이 있었기에 지금의 한국 반도체가 있다. 무기의 정확도를 위해 진공관 대신 반도체를 넣으려던 펜타곤의 닦달이 미국 반도체 발전의 촉매가 됐다. 미국은 지금 반도체 보조금을 헬기에서 뿌리고 있고, 중국은 정부와 기업 구분이 의미가 없다.
우리가 정경 유착이라는 ‘말의 감옥’에 갇힌 사이, 미국·일본·대만이 ‘정경 원팀’으로 이 감옥을 박차며 ‘반도체 전쟁’에서 저만큼 뛰어가고 있다. 반도체 전쟁 사령부는 정부와 의회, 그리고 기업이다. 이미 우리 사령부 한쪽이 포격에 무너지고 있는데, 사령부를 맡겠다는 장수와 부대 어디서도 진격 앞으로 구호가 들리지 않는다. ‘칩 워(Chip War) 사령부’의 운명을 결정할 선거가 이제 다음 달이다.
조선일보 정우상 기자
03-01 문재인·이재명 부부가 상징하는 좌파의 公人의식 수준
문재인 청와대 떠나면서 집기 그릇 다 가져가
김정숙 여사 옷들도 반납 이뤄진 것 없어
공짜근성·임자없는 곳간 퍼가기 좌파 특질인데
민주당, 반미친북 세력에 비례의석 안정권 할애
공천 파동 뉴스에 묻힌 감이 있지만, 요즘 정말 경각심을 갖고 주시해야 하는 야권의 움직임은 더불어민주당이 반미친북 성향 세력에 최소한 10석의 국회 비례대표 의석을 할애해주기로 했다는 뉴스다.
민주당은 총선용 비례대표 위성정당을 만들면서 진보당, 새진보연합, 연합정치시민회의 후보 10명을 당선 안정권에 배치키로 했다. 진보당은 해산된 통진당의 후신이고, 연합정치시민회의는 반미친북 활동가들이 만든 급진 좌파 단체다.
정상적인 대의민주 시스템에선 대표권을 갖기 힘들 반체제 성향 인사들이 면책특권 등 수백가지 의원 특권을 등에 업고 국가 기밀과 정책 형성 과정에 깊숙이 접근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예고된 것이다.
국가 안보에 미칠 영향과 더불어 이들의 국회 진출이 우려되는 또 하나의 대목은 나라 금고에 미칠 폐해다.
사람은 누구나 공짜를 좋아한다. 회사 탕비실 디저트를 보면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자제한다. 마음속에 셀프 경계령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지켜본 결과 정치권의 경우 그 셀프 자제의 강도가 좌우파 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우파는 크게 한탕 해먹을지언정 좀스럽고 치사하게 보일 일은 자제하고 조심하는 경향이 있는데, 좌파는 자기 권리를 찾아먹고 공짜를 챙기는 데는 남을 의식하지 않는 경향이 상대적으로 강하다.
대표적인 게 조국 전 장관이었다. 나라를 뒤흔든 논란 끝에 2019년 10월 14일 결국 경질되자 사직서 결재 22분 만에 서울대에 복직신청서를 냈다. 복직 신청 기한이 한 달이나 되는데도 챙길 수 있는 건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 먼저 타먹는다는 뇌 구조다.
이재명 대표 부부의 경기지사 시절 법인카드 사용 행각도 상상을 초월한다. 누구나 법카를 사적으로 쓰고 싶은 욕구를 때로 느끼겠지만 일제 샴푸를 사오게 하고 집에 초밥을 시켜 먹는 걸 다반사로 하는 대담함은 상상조차 어렵다.
섣부른 일반화의 위험성을 경계하면서도 ‘좀스러운 거지 근성이 상대적으로 좌파에서 더 심하다’는 추론을 떨치지 못하게 만드는 화룡점정의 얘기를 최근 들었다.
2022년 5월 정권 교체 시기에 청와대 업무에 관계했던 인사는 “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청와대를 떠나면서 관저의 집기와 가전제품은 물론 접시 수저 등 식기까지 다 가져갔다”고 전했다. 지난해 봄 전언식으로 돌았지만 설마 그랬을 리가 있을까하고 반신반의했던 일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해외 주재 대사관에 물어봤다. 대사가 바뀌면 대사관저 접시 한 개까지 다 재고목록에 기재해 인수인계한다고 한다. 전임자가 비품을 한 개라도 들고 가면 총무담당자가 배임으로 처벌받는단다. 대사관 관계자는 “만약 서방국가에서 퇴임하는 총리나 대통령이 관저 물품을 가져갔다면 사회 전체가 난리날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에 근무할 때 장면이 생각난다. 2009년 6월 백악관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그해 봄 취임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오찬을 했다. 당시 국무장관은 경선 라이벌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대통령이 돋보이게 하려는 배려에서인지 시종 뒤편에서 조용히 따라다니던 클린턴 장관은 테이블 위 접시들을 들어 바닥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8년 전 백악관 안주인 자리를 떠나면서 인계해 주고 간 그 접시들인지 살펴보며 반가워하는 모습이었다.
문 전 대통령 부부처럼 다 가지고 떠난다는 건 아프리카 독재국가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설령 100% 다 사비로 산 것이라 치더라도 그렇다면 입주할 때 있었던 기존 비품을 다 인계해 주고 가야 한다. 사용연한이 지나 폐기했다면 폐기 처분 기록이 있어야 한다.
김정숙 여사의 옷 최소 178벌과 장신구들도 특수활동비로 구입한 게 있다면 국가 재산으로 반납돼 있어야 한다.
이런 행태가 어떻게 가능한지 심리학자에게 물었더니 “아웃사이더 심리에서 비롯된 주인의식의 결핍 탓”이라 분석했다. 즉 공짜를 좋아하고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걸 견디지 못하는 성격에, 공동체에 대한 불신이 가미됐다는 설명이다.
오너가 회삿돈을 펑펑 쓴다고 여기는 직원이 탕비실 음식을 왕창 가방에 넣으며 상대적 보상심리를 느끼듯, 친일매국세력의 나라에서 어차피 기득권자들이 다 해먹는데 나는 이거라도 챙겨 손해를 일부 만회하겠다는 본능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나랏돈, 공공 재원을 아까워하고 소중히 여기는 심리가 실종된다는 것.
나랏돈을 임자 없는 돈으로 여기고, 한발 늦으면 나만 바보된다는 인식을 가진 이들이 국회와 지자체에 진출했을 때 쏟아져 나오는 결과물이 온갖 선심성 사업과 내 편 지원이다. 박원순 서울시장 시절 시민·민주 등의 수식어를 붙인 단체가 급팽창하더니 서울에서만도 2016~2020년 3339곳의 단체가 7111억 원의 예산을 지원받았다.
평생을 제도권 밖에서 활동해온 골수 좌파 인사들이 권력에 접근할 경우 이런 행태는 극에 달할 것이다.
이에 맞설 유일한 방법은 진실 공개와 법적 통제다.
관사 물건을 다 들고 갔다면 심각한 범죄 행위일 수 있는데도 왜 지금까지 공식 문제 제기가 안 됐을까. 대통령실은 문 전 대통령 부부의 행태에 개탄하면서도 이를 문제 삼는 것은 좀스러운 일이라고 판단해 법적 대응을 하지 않고 넘어갔다고 한다. 이해는 되지만 그렇게 묻어버릴 일이 아니다.
좀도둑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문 전 대통령은 소상히 내역을 설명하고, 감사원은 청와대 재산 관리 실태를 조사해 문제가 있다면 책임을 물어야 한다. 명명백백히 드러내는 것은 좀스러운 일도, 정치 보복도 아니다.
상상 초월 수준으로 공인(公人)의식이 결핍된 이들의 권력 진출은 우리 진영·지역 출신이라면 무조건 밀어주는 묻지 마 투표의 산물이다. 국가권력이라는 거대한 논에 어느 쪽 물을 댈지를 결정하는 투표에 앞서 저수지 물속 성분을 면밀히 살피는 것이 유권자의 책무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03.02 자유민주 통일은 남북 온 민족 염원, 김정은이 못 막아
윤석열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3·1운동은 모두가 자유와 풍요를 누리는 통일로 비로소 완결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의 통일 노력이 북한 주민들에게 희망이 되고 등불이 돼야 한다”며 통일의 대한 의지를 강조했다. 역대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는 한일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윤 대통령이 통일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북한이 남북 관계를 ‘동족 아닌 아닌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하고 ‘통일 불가’ 노선으로 돌아선 것과 관련 깊다. 김정은 정권 스스로 ‘반통일 세력’임을 자처한 지금이 대한민국 주도의 자유민주 통일 담론을 확산시킬 적기라고 보았을 것이다.
대통령실은 자유·인권·법치 등 자유 민주주의 철학을 반영한 새로운 통일 구상을 마련 중이라고 밝혔다. 점진적·단계적 통일을 전제로 하는 ‘민족공동체통일’ 방안은 지난 30년간 우리 정부의 공식 입장이었지만 비현실적이란 지적을 받았다. 인류 역사상 분단국이 합의 방식으로 평화 통일을 완수한 사례가 없다. 더구나 북한이 반통일로 돌아선 상황에서 기존 통일 방안을 고수하는 것은 통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가치에 기반한 통일 준비에 나서야 할 시점이다.
오랜 기간 북 주민들은 세상 밖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북한 정권의 유일한 관심사는 김씨 왕조의 영구 집권이고, 이를 위해 극도의 감시·통제·억압으로 귀와 입을 막았다. 그동안 자유민주 통일은 우리만의 주장일 수밖에 없었지만 이젠 다르다. 접경지대에서만 은밀히 유통되던 외부 소식이 수백만대의 휴대전화, 400여 개 장마당을 통해 실시간으로 북한 전역에 중계되는 세상이 됐다. 한류 콘텐츠가 맹위를 떨치면서 북 주민 사이에 한국에 대한 동경과 선망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고 한다. 북한이 남북 교류를 막고 극단적 처벌 조항을 넣은 ‘혐한(嫌韓) 3법’을 연달아 제정한 것으로도 모자라 ‘동족 아님’ ‘통일 불가’까지 선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3·1운동은 일제의 압제에 맞서 자유를 쟁취하려는 민족적 항거였다. 이것이 임시정부 수립과 대한민국 건국으로 이어졌다. 헌법은 3·1운동과 임정의 법통 계승을 기본 정신으로 명시했다. 헌법상 대한민국 국민인 2600만 북 주민은 김정은 정권의 폭정 아래 노예와 가축으로 전락했다. 통일은 이들을 해방시킬 유일한 빛이자 희망이다. 자유민주 통일은 우리만의 주장이 아니다. 7800만 한민족 전체의 염원이다. 김정은 정권이 아무리 막으려 해도 이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멈출 수 없다.
조선일보 사설
월간조선 03월 호 인터뷰
●北 세습·권력 변화 주시하는 김영호 통일부 장관
“윤석열 정권 통일부의 대북 정책은 ‘自由의 北進’”
⊙ “핵전쟁 공포로부터의 자유, 연대의 자유,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적인 자유, 그리고 평화통일을 통한 자유의 실현”
⊙ 김정은, 민생 파탄 내면서 핵·미사일 개발… “의도 전혀 먹혀들지 않아”
⊙ “北 장기 억류자 가족에게 위로금 전달… 인권 문제 해결에 노력할 것”
⊙ “김정은, 이념 공백 지우기 위해 외부 도발 가능성 있어”
⊙ “김주애 등판, 김정은 정권 불안정하다는 증거”
⊙ “북한 실상 정확히 알려야”… 《북한 경제·사회 실태 인식보고서》 발간
⊙ “탈북민, 좀 더 애정 어린 시선으로 봐줬으면”
金暎浩
1959년생.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美 버지니아대 대학원 국제정치학 박사 / 청와대 통일비서관, 외교통상부 인권대사, 성신여대 교수, 통일부 통일미래기획위원장 역임. 現 제43대 통일부 장관 /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 《대한민국과 국제정치》 《대한민국의 건국혁명》(1, 2)

▲김영호 장관이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쓴 ‘자유 평화 통일’ 액자 앞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조준우
‘자유, 평화, 통일’.
서울정부청사 통일부 장관 집무실 한쪽 벽에 걸린 액자에는 이 같은 글귀가 쓰여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썼다고 한다. 통일부와 우리 정부의 통일관을 잘 함축하는 단어다.
2월 6일 서울정부청사 통일부 장관 집무실에서 김영호(金暎浩) 통일부 장관을 만났다. 윤석열 정부의 두 번째 통일부 장관인 김 장관은 진주고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했다. 김 장관은 대한민국 건국, 6·25 전쟁의 기원과 전개 과정, 한미관계 등을 연구한 국제정치 학자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통일비서관과 외교부 인권대사를 역임했다. 성신여대 정치외교학 교수로 일하면서 윤석열 정권 통일부 장관 자문기구인 통일미래기획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중장기 통일 방안인 ‘신통일미래구상’을 연구했다. 북한·통일 문제는 물론,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를 읽는 혜안(慧眼)을 갖추고 있어 통일부 장관으로 안성맞춤이라는 평가다.
김 장관은 인터뷰 내내 북한의 인권 문제가 현재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권과 안보 문제는 분리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소식이 하루 건너 보도되고 있지만, 김 장관은 “통일은 반드시 추구해야 할 가치”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자유의 북진

▲통일부는 ‘자유’를 강조하는 윤석열 정부의 국정철학에 맞게 ‘4대 자유’에 입각한 대북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헌법은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제4조 1항)고 규정하고 있지만, 과거 정권하에서 통일부는 ‘대화를 위한 대화’에 매달리느라 이 부분을 소홀히 해온 것 같습니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유를 30번 이상 강조했습니다. 용산 대통령실에 가면 자유홀이 있습니다. 그만큼 자유를 중시한다는 얘기죠. 이러한 국정철학에 맞춰 ‘4대 자유’의 관점에서 대북 정책과 한반도 평화를 추진하고자 합니다.”
4대 자유라니,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제안했던 4대 자유(언론·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연상케 한다.
― 4대 자유란 무엇을 말합니까.
“핵전쟁 공포로부터의 자유, 연대(連帶)의 자유,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적인 자유, 그리고 평화통일을 통한 자유의 실현입니다. 우선 ‘핵전쟁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정부는 ‘담대한 구상’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담대한 구상’이란 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제안한 것으로 북한의 비핵화 조치와 우리의 경제·정치·군사적 조치의 동시적·단계적 이행을 통해 비핵·평화·번영의 한반도를 함께 만들어 나가자는 제안이다. 물론 북한은 이 제안을 일축했다.
― 나머지 세 가지 자유는 무슨 의미입니까.
“가치와 이념을 공유하는 미국·일본·EU 국가들과 연대해서 북핵 문제, 북한 인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것입니다.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적 자유’는 북한 인권 문제 또한 내포합니다. 북한 주민도 헌법상 대한민국 국민이기 때문에 남북한 전체에서 북한 주민들의 인권이 실현되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마지막으로 헌법 제4조가 규정하고 있는 자유민주에 입각한 평화통일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저희 통일부는 이를 ‘자유의 북진(北進) 정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 ‘자유의 북진’이라니, 공감이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력(武力)으로 북진 통일을 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윤석열 대통령도 무력에 의한 현상 변경에 반대한다는 뜻을 여러 차례 표명한 바 있습니다. ‘자유의 북진’은 결국 북한 주민의 자유와 인권을 증진시켜서 궁극적으로 평화통일을 이루겠다는 의미입니다.”
“북한 실상 정확하게 알려야”

▲통일부는 작년 12월 18일 ‘2023 북한인권 국제대화’를 개최했다. 사진=통일부
― 《북한 경제·사회 실태 인식보고서》가 발간됐습니다. 탈북민 6000명 이상을 인터뷰해 분석한 보고서로 알고 있는데요, 그 의의는 무엇입니까.
“북한의 최근 변화상을 잘 확인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경제 확대, 배급제 중단, 외국 화폐 통용, 여성의 지위 향상 등이 대표적입니다. 분석 결과를 종합해 봤을 때 우리가 원칙을 갖고 취해온 대북 정책이 최근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김정은 정권 들어 각종 사회 지표가 하락하고 있으니까요. 반면 북한 주민의 인권 실태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북한이 주민들에게 돌아가야 할 돈으로 핵·미사일 개발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한미동맹, 한·미·일 공조를 바탕으로 북한을 억제해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북한이 우리가 기대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 같은 보고서를 내는 것이야말로 통일부 본연의 임무인데, 그간 공개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간 실태 보고서는 국가 비밀로 분류됐습니다. 이렇게까지 묶어둘 이유는 없었는데 말이지요. 윤석열 정부는 북한 실상을 국민에게 정확히 알려야겠다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북한을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도 이 같은 보고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지요. 이런 이유로 지난해 《북한 인권 보고서》를 발간한 데 이어 올해 《북한 경제·사회 실태 인식보고서》 내게 됐습니다.”
― 국제사회의 관심도 많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외신 역시 관심이 많고요. 이번 보고서 영문판도 조만간 발간할 예정입니다. 국제사회에 널리 알릴 좋은 기회입니다. 또 조만간 주한 외국 대사를 모시고 북한 인권을 주제로 토의하는 자리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한국판 홀로코스트 박물관’ 건립 추진
― 통일부 장관에게는 “통일 및 남북대화·교류·협력에 관한 정책의 수립, 통일교육, 그 밖에 통일에 관한 사무를 관장해야 한다”는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권 통일부는 북한과 ‘대화만을 위한 대화’에 매달리면서 인권 문제, 북핵 문제, 탈북민, 자유통일을 위한 교육, 홍보 등을 소홀히 해왔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현 정부의 통일부는 어떤 입장입니까.
“현 정부는 당당하고 원칙적인 대북 정책을 세웠고, 이를 실제 따르고 있습니다. 탈북민 강제 북송, 서해 공무원 사살, 개성 남북 연락사무소 폭파 등 북한의 반인륜적 행태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문재인 정부와의 차이입니다. 대화만을 위한 대화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실질적 성과가 있는 대화를 추진할 것입니다.”
― 남북대화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상황에서 장관으로 취임했는데, 그동안 어떤 부분에 주력해왔습니까.
“북한 인권 문제 개선에 노력해왔습니다. 북한 인권은 북한 주민, 탈북민, 해외 체류 중인 북한 노동자, 그리고 북한에 의해 위협받는 우리 국민 인권 모두를 아우릅니다.”
― 우리 국민이요?
“네. 납북자, 억류자, 국군 포로를 가리킵니다. 특히 납북자, 억류자, 국군 포로 문제는 지난 8월 열린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뜻을 모았습니다. 9월엔 장관 직속 납북자 대책팀이 만들어졌습니다. 11월에는 장기 억류자 6명을 납북자로 인정했고, 그중 4명의 가족에게 위로금을 전달했습니다. 북한 정권이 우리 국민에게 가하는 인권 침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 추진 중인 구체적인 사업이 있습니까.
“국립북한인권센터 건립 사업입니다. ‘한국판 홀로코스트 박물관’으로 볼 수 있지요. 현재 서울 강서구 마곡동에 부지를 확보했고, 2026년 완공될 예정입니다. 북한 인권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전시하면서 인권 문제와 관련한 허브 역할을 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인권은 보편적인 가치지만, 정권에 따라 그 관심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까? 그런 문제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북한 인권 문제를 국제적으로 알리고, 제도화하는 기관이 필요합니다.”
― 계획하고 있는 또 다른 사업이 있다면요?
“북한이탈주민(탈북민)의 날을 제정할 계획입니다. 날짜를 언제로 하면 좋겠느냐는 이야기가 많은데, 탈북민들을 만나 의견을 들어보니 통일부가 적절한 날짜를 결정하면 이를 수용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현재 날짜를 의논하고 있습니다. 탈북민은 흔히 ‘먼저 온 통일’이라고 하지요. 이들이 우리 사회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통일 역량을 높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 탓, 미국 탓’ 北, 과거 소련 닮아

▲2023년 11월 20일, 김영호 장관은 폴 라캐머라(Paul LaCamera) 유엔군 사령관을 만나 통일부-유엔사 협력방안을 논의했다. 사진=통일부
― 김정은은 최근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한민국은 제1의 적대국·불변의 주적’으로 헌법에 명기하고, ‘평화통일’ 등의 표현도 삭제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민족 대 민족 관계’에서 ‘국가 대 국가 관계’를 선언한 것입니다. 또 대남(對南) 기구를 정리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한 김정은의 정치적 의도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김정은 정권은 현재 2가지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군사적 딜레마입니다.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기만 하면, 한국과 국제사회를 압박해 요구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지요. 지난 4월 워싱턴 선언이 발표되고 한미 핵 협의 그룹이 구성됐습니다. 한·미·일 공조 역시 강화됐습니다. 북한의 재래식 도발과 군사적 위협에 대해서도 정부와 군이 단호하게 대응하며 위협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요. 민생 경제를 파탄 내면서까지 재원을 핵·미사일 개발에만 쏟아부었는데, 그 의도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 또 하나의 딜레마는 무엇입니까.
“정치적 딜레마입니다. 이 같은 발언과 위협은 식량난과 경제난을 외부로 돌리고, 내부 체제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일환이라고 봅니다. 남북관계를 적대관계로 설정해 남한에 대한 북한 주민의 동경을 차단하겠다는 의도지요. 또 적대관계를 강조함으로써 핵과 미사일 개발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대(先代) 지우기, 개혁·개방과 무관”
― 과거 소련이 보인 패턴과 유사해 보이는데요.
“그렇습니다. 냉전(冷戰) 시기 소련은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모든 원인을 미국 탓으로 돌렸습니다. 현재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입만 열면 미국 탓, 한국 탓을 합니다. 다만 확실히 이해해야 할 것은, 북한이 무력 통일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절대 경계심을 늦춰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 김정은은 남북관계 재설정을 넘어 조국 3대 통일 헌장을 폐기하고 기념탑도 철거했습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업적 지우기에도 나서고 있는데요, 어떤 의도입니까.
“현 상황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정은은 세습으로 권력을 물려받았습니다. 따라서 선대 업적을 지운다는 것은 세습 권력의 기반을 허무는 것과 같습니다. 김정은은 조국 통일 3대 헌장 기념탑을 두고 ‘꼴불견’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과거 덩샤오핑이나 도이모이가 그랬던 것과 달리, 개혁·개방으로 나서기 위해 전임자를 비판하는 게 아닙니다. 최근 상황에 대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관계자들도 당황했다고 하지요. 김일성, 김정일 노선에 익숙해 있던 엘리트 입장에서 볼 때,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즉 북한 내부에 이데올로기적 혼란과 공백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겁니다. 김정은은 이런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외부 군사 도발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 역시 분명한 입장을 갖고 대응해야 합니다.”
― 분명한 입장이요?
“확실한 억제체제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북한이 군사 도발을 일삼는 데 유화적으로 나섰다간 안보 상황을 더 위태롭게 만들 겁니다.”
“총선, 美 대선 앞두고 北 도발 가능성 있어”
― 올해 4월엔 총선이, 11월에는 미국 대선이 예정돼 있습니다. 김정은은 어떤 방식으로든 국제사회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고 할 텐데, 앞으로 한반도 정세가 어떻게 전개되리라 보십니까.
“군사 도발로 남한 사회와 국제사회에 안보 불안감을 조성할 수 있습니다. 군사 도발은 정치 심리전의 성격을 갖고 있거든요. 한반도를 상시적인 분쟁 지역화하겠다는 의도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기 목소리를 내려고 할 겁니다. ‘북한에 일정 부분 양보하고, 유화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는데, 이걸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북한의 심리 선동이 어느 정도 먹혀든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우리 군사력과 한미동맹에 기초해 확실한 억제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통일부 역시 북한의 대남 심리전에 철저히 대응하고, 북한이 위협 발언을 할 때마다 단호한 대응 메시지를 내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해 재집권하게 되면 지금의 대북 정책 노선을 유지하기 어려워지는 것 아닙니까.
“우리와 직결된 문제는 주한미군 주둔 문제일 텐데, 주한미군 관련 법안은 미 의회가 쥐고 있습니다. 미 국방예산법안은 주한미군을 2만8500명 이하로 감축하거나 철군할 경우, 의회 승인을 받도록 규정해뒀습니다. 따라서 미국에서 정치 변화가 일어나더라도 당장 큰 변화는 없을 것입니다. 또 캠프 데이비드 합의를 거치며 실무 단계에서부터 여러 협의체를 구성해놨습니다. 정권 변화가 생긴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되돌리긴 불가능합니다.”
― 트럼프 정권을 상대로 북한 문제에 관해 협의할 때 세워야 하는 전략은 무엇입니까.
“먼저 미국 외교 정책을 알아야 합니다. 미국 외교 정책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이념적 고립주의’입니다. 이념적 고립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나온 미국 외교의 전략적 흐름입니다. 하지만 미국이 고립주의로 갈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적습니다. 대신 ‘타산형 국제주의’를 따를 가능성이 큽니다. 이익에 따라 자국 외교를 펼쳐나간다는 것이지요. 트럼프 정권 1기가 그랬듯이, 트럼프가 재집권하면 우리에게 방위비 인상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 들어 한미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합니다. 주한미군 방위 비용을 지급할 수 있는 경제 역량도 우리는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양국 공통의 이익을 바라봐야 합니다. 트럼프가 방위비 인상을 요구하면 우리는 안보를 더욱 강화할 수 있는 조치를 요구해야 합니다. 또 중국이라는 변수가 있습니다. 트럼프 역시 중국을 견제하는 데 혈안이 됐었지요. 중국을 견제하는 데 한미관계를 악화하는 것이 과연 도움이 될지 고민할 겁니다. 관계 악화를 바라지 않겠지요.”
“김정은-북한 고위 엘리트, 공생관계”

▲김정은은 2023년 8월 27일 딸 김주애와 함께 해군사령부를 시찰했다. 사진=연합뉴스
― 2022년 11월 김정은의 딸 김주애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후 북한은 김주애를 자주 노출시키고 있고, 그에 대한 호칭과 의전이 날이 갈수록 격상되고 있습니다. 김주애를 앞세우는 김정은의 노림수는 무엇입니까.
“북한 정권은 최고 권력 승계 구조를 제도적으로 갖춰놓지 못했습니다. 체제가 만성적인 불안정 상태에 있는 겁니다. 김정은은 2021년 제8차 조선노동당대회를 통해 총비서가 됐습니다. 그 밑에 7명의 비서를 뒀습니다. 제1비서직을 신설했는데, 제1비서는 총비서 유고 시 그 역할을 대행하게 돼 있습니다. 김정은은 그 당시부터 후계 구도를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됩니다.”
― 제1비서에 임명된 사람은 없지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후계 구도와 관련된 제도적 장치는 김정은 외에는 만들 수 없습니다. 최근 행보를 봤을 때, 김주애가 후계자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점점 의전 수준이 높아지고 있잖아요. 그만큼 북한 내 위상이 높아졌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김주애를 내세워 세습을 가시화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김정은 정권이 그만큼 불안정하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 김주애가 후계자가 된다면 대남 정책이나 북한의 대외 정책에 변화가 생길까요?
“큰 변화는 없을 겁니다. 김정은과 북한 당·정·청 고위 엘리트들은 일종의 공생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김정은의 소위 백두혈통이 없다면 이들 역시 호의호식(好衣好食)할 수 없는 구조지요. 이 구조를 굳이 깨뜨리려 하지 않을 겁니다. 결국 피해자는 북한 주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재원을 계속해서 핵과 미사일 개발에 쏟아부을 것이기 때문에 식량난과 경제난은 더 심각해지겠지요.”
― 체제에는 이상이 없을 거란 말입니까.
“우리가 북한을 바라볼 때 북한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보편적 관점으로도 봐야 합니다.”
―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요?
“이념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는다면 체제와 권력을 유지하는 데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북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과거 소련이나 동구권 공산체제에서 공통으로 일어났던 현상입니다. 김정은이 절대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이념을 바꾼다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보는 것은, 역사의 보편적 관점이 결여된 해석이지요.”
― 김주애가 권력을 물려받으면 김여정(김정은 여동생)의 입지는 어떻게 될까요.
“이미 상당히 줄어들었습니다. 아마 역할이 더 축소될 것으로 보입니다.”
― 지금은 숙청됐지만, 김정은 정권 초기 고모부인 장성택이 일종의 후견인 역할을 했습니다. 김주애가 권력자가 된다면 후견인 역할을 할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지금 판단하긴 어렵습니다.”
“‘자력갱생’ 새빨간 거짓말”
― 코로나19 이후 북한 경제는 더욱 어려워졌다고 보도되고 있습니다. 과거엔 외부에서 북한으로 식량 원조도 들어갔는데 지금은 모두 끊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실제 북한의 경제난과 식량난은 얼마나 심각한 상황입니까.
“한국은행이 발표한 북한의 추정 경제성장률을 보면, 2020년부터 2022년까지 마이너스 성장을 보였습니다. 역시 식량을 구매하고 경제를 키워야 할 재원이 핵과 미사일 개발에 쓰이기 때문입니다. 김정은 자신도 이 경제난을 인정했습니다. 지난 1월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지방경제가 초보적인 생활필수품조차 제공하지 못한다’고 했지요. 아마르티아 센이라는 노벨상을 받은 인도 경제학자가 있습니다. ‘자유가 있는 사회에는 기근이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북한에는 자유가 없기 때문에 정권이 재원을 마음대로 핵·미사일 개발에 사용할 수 있는 겁니다. 만약 북한에 자유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정책을 바꾸라는 요구가 나올 겁니다. 그러니 김정은이 자유를 허락할 리 없지요.”
― 핵·미사일 개발에 들어간 돈을 식량으로 바꾸면 어느 정도입니까.
“한국국방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북한 정권이 1970년대부터 핵 개발에 쓴 액수는 11억에서 16억 달러입니다. 북한의 4년 치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는 규모입니다. 2022년에 34회 미사일 도발을 했는데, 그때 사용된 자금으로 100만t의 식량 구매가 가능했습니다. 북한의 연간 식량 부족분인 80여만 톤을 모두 충당하고도 남는 수준이지요.”
― 김정은은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자력갱생(自力更生)하겠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가능하다고 봅니까.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사소한 생필품마저 중국에서 들여오는데 자력갱생이 되겠습니까? 맞닥뜨린 현실과 허구 이념 사이 괴리감만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방 계획 경제를 언급하고 있지만, 이는 북한 주민들에게 다시금 실현할 수 없는 희망만 주는 꼴입니다.”
“통일, 헌법상 책무”
지난해 12월 공개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2023년 4분기 국민 통일여론조사’에 따르면, ‘통일이 필요하다’는 응답자는 64.0%였다. 반면 ‘통일이 필요하지 않다’는 답변은 32.0%로 2015년 조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높았다. 지난해 2분기만 해도 25%가 불필요하다고 답했지만, 그사이 7%나 높아졌다. 북한의 광폭 행보에 질린 나머지 ‘통일이 불필요하다’는 국민 인식이 높아지는 것으로 보인다. 남북 간 경제 격차가 가져올 통일 후 사회·경제적 혼란을 우려해 통일에 대한 기대치 역시 낮다. 김영호 장관은 이런 여론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 통일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낮아지는 데 대해서 통일부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북한이 민족을 부정한다고 해서 민족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통일은 우리 헌법상 책무입니다. 반드시 추구해야 할 가치이자 목표지요. 북한이 우리를 대화 상대로 삼지 않겠다고 해도 우리는 계속해서 통일을 추진해나가야 합니다. 독일 통일의 역사를 보세요. 동독은 ‘2개 국가, 2개 민족’을 주장하며 서독과 맞섰습니다. 반면 서독은 내독성(우리의 통일부 격)에서 통일 문제를 다루며 통일을 꼭 이뤄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결과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습니다. 서독 주도의 평화통일이 이루어졌지요.”
― 통일을 경제적인 관점에서 분석하는 경향도 많습니다. 젊은 세대는 통일이 되면 자신에게 지워지는 경제 부담이 커진다고 불만을 갖더군요.
“통일에 대해 가치 지향적인 관점에서 봐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북한 인권 상황은 굉장히 열악합니다. 노예와 다름없지요. 통일을 경제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권이라는 가치 중심적 관점에서 본다면, 통일은 선택이 아닌 필수로 인식될 것입니다.”
“국제사회, 한반도 비전 지지할 것”

▲통일부는 작년 12월 1일 ‘북한이탈주민 일자리 박람회’를 개최했다. 사진=통일부
― 통일이 남북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국제사회와 협력하고 지지를 받는 것도 중요할 텐데요.
“그렇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난해 8월 캠프 데이비드 선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미국과 일본이 처음으로 ‘자유롭고 평화로운 통일 한반도’에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이 밖에도 영국,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들도 윤 대통령 순방 때 ‘자유, 평화, 통일’이라는 우리의 입장을 지지했습니다. 앞으로 윤 대통령은 각국 정상을 만나면서 한반도 비전을 설명할 텐데, 이 과정에서 많은 지지를 받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 끝으로 우리가 탈북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탈북민 차별 의식은 꼭 근절돼야 합니다. 이를 위해 통일부를 포함한 관련 기관이 여러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 노력만으론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탈북민 일자리 문제나 탈북 청소년 교육 문제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습니다. 국민과 기업 모두 탈북민을 좀 더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글 : 김세윤 월간조선 기자 gasout@chosun.com
03-05 ‘편향논란’ TBS 민영화 빨간불… 폐국 위기

방송인 김어준 씨 등이 장기간 출연하며 ‘정치 편향 방송’ 논란을 자초했던 서울시 출연기관 미디어재단 TBS가 폐국(廢局) 위기로 몰리고 있다. 서울시가 오는 5월 31일 이후 출연기관 지정을 해제한다고 행정안전부에 신청한 가운데 TBS가 자구책 마련의 하나로 시도하고 있는 민영화 가능성도 점점 낮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5일 시와 TBS 등에 따르면 TBS가 발주한 ‘투자자 발굴 용역’이 지난달 27일 무응찰로 유찰됐다. 민영화를 위한 1차 시도가 실패한 것이다. TBS는 이틀 만인 지난달 29일 재공고에 나섰지만 성공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게 투자은행(IB) 업계의 전반적인 의견이다. TBS의 경우 현재 상업 광고가 허용되지 않고 있어 입찰자 입장에선 매력도가 떨어지는 매물일 수밖에 없다. 상업 광고 허용은 방송통신위원회 허가 조건으로 TBS가 민영화에 성공한다 해도 당장 상업 광고 유치에 나설 수 없다. 또 부동산 자산도 없어 TBS 매력도는 더 떨어진다. ‘교통방송 지원 중단 조례’가 2022년 12월 2일 공포된 이후에도 민영화에 대한 움직임이 없다가 5월 31일이라는 데드 라인이 정해진 이후 급박하게 매각이 추진되는 점도 TBS 민영화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리더십 부재도 악재다. 구원투수로 등판했던 정태익 대표이사는 혁신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지난해 12월 말과 지난달 14일 두 번에 걸쳐 사직서를 제출했다. 취임 당시 목표로 세운 TBS 혁신에 실패한 데 대해 책임을 진다는 취지로 알려졌다. 시는 지난해 12월 말 사직서를 받았을 때 반려했고 이번 두 번째 사표는 수리 전 비위 사실 조회 절차를 시작했다. 시 관계자는 “첫 번째 사직서는 구두로 의사를 표명해 반려됐고, 두 번째는 정식으로 사직서를 제출한 상황”이라며 “정상 절차를 거치면 사직서 수리까지 2주 정도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서울시 산하 사업소였던 TBS가 박원순 전 서울시장 시절인 2020년 재정 자립도 증대를 통해 방송 독립을 꾀한다는 명분으로 출연기관으로 독립한 이후 출연금 규모는 매년 줄었지만, 여전히 예산의 70%에 달하는 200억 원 이상의 출연금을 받으면서 재정 자립 노력이 부족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서울시와 TBS 자료에 따르면 TBS의 주수입원인 광고(공익)·협찬 수주 실적이 2020년 약 70억 원, 2021년 약 50억 원, 2022년 약 25억 원대로 떨어지고 있다. 서울시의회는 TBS의 시효가 다했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김현기 서울시의회 의장은 “티맵, 카카오맵 등 스마트폰 기반 내비게이션 앱이 대거 나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상황에서 TBS의 교통정보 서비스 기능은 이제 의미가 없다”며 “박 전 시장 때처럼 정치적으로 악용될 여지가 많기 때문에 아예 폐국 수순으로 가는 게 합당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시도 지난해 말 행안부에 TBS의 출연기관 지정 해제 신청을 해 지원 조례 폐지안에서 정한 5월 31일 이후에는 시가 TBS를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진다.
시 관계자는 “TBS의 용역 결과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시에서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정민 기자 jay@munhwa.com
03.06 현직 판사 “검수완박이 사기 범죄 날개 달아줬다”
모성준 고법판사 작심비판

▲그래픽=박상훈
모 판사의 주장처럼, 지난 2022년 국내에서 발생한 전체 범죄(149만2433건) 가운데 가장 많았던 유형이 사기(32만5848건)였다. 그해 사기 피해 총액은 29조2000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멕시코 마약 조직 ‘시날로아 카르텔’의 두목 엘 차포가 30여 년간 거둔 범죄 수익(16조4000억원)의 두 배에 가깝다. 모 판사는 이런 현상의 원인으로 모바일 메신저, 인터넷, 암호 화폐 등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을 꼽았다. 그것이 보이스피싱, 주식 리딩방, 온라인 다단계 등 범죄와 접목됐다는 것이다.

▲그래픽=박상훈
모 판사는 “조직적 사기 범죄를 막아야 할 국회는 오히려 퇴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국회는 검찰 수사권을 박탈하며 국가의 전체 수사 권한을 토막 내고, 수사 기관과 법원의 인력과 예산을 삭감해 제대로 된 수사·재판을 할 수 없도록 했다”며 “형사법을 파편화해 법원이 개별 사건에 합당한 결론을 내릴 수 없도록 했다”고 밝혔다.
모 판사는 “국회가 앞에서는 형사정의를 부르짖으면서도 뒤로는 사기 범죄 조직에 대한 수사와 처벌을 어렵게 하는 법률을 지속적으로 통과시켰다”라면서 “검찰청법 등을 개정해 경찰과 검찰 사이의 수사 흐름을 끊어 버렸다”고 했다. 그는 또 “수사 흐름에 따른 오너십(수사 주체)의 승계 구조를 해체함으로써 수사 기관의 수사 역량을 대폭 축소시키고 효율적 수사를 할 수 있는 여지를 차단했다”고 했다.

▲모성준 대전고등법원 판사.
이는 문재인 정부가 밀어붙인 ‘검경 수사권 조정’의 폐해를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검찰의 수사 개시 권한이 일부 범죄로 제한되면서 수사를 적극적으로 개시하기 어려워졌다. 또 검찰은 사기 범죄 가운데 피해액 5억원 이상만 직접 수사할 수 있게 됐다.
모 판사는 “(수사를 한 뒤에 알 수 있는) 공소 사실과 적용 법조를 (사전에) 제대로 알지 못하면 수사에 착수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면서 “검찰 수사 권한의 경계에서 활동하는 범죄자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해졌다”고 했다. 검찰이 경찰 수사를 지휘할 수 없게 된 것에 대해서는 “영화 감독이 소품 감독이 책임지는 소품이나 의상 디자인, 작가가 책임지는 대사나 지문에 대해 직접 관여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모 판사는 2020년에 있었던 형사소송법 312조 1항 개정도 비판했다. 피고인이 동의할 때만 검찰 신문 조서의 증거 능력이 인정되도록 한 내용이었다. 모 판사는 “사기 범죄 조직 수괴(우두머리)에게 수사 기관의 모든 노력을 무력화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내준 것”이라고 했다. 법정에서 우두머리가 앞장서 혐의를 부인하고 이에 따라 부하들이 진술을 거부하면 검찰 수사 결과가 휴지 조각이 돼 버리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모 판사는 “이제 수사 기관과 법원은 도저히 사기 범죄 조직에 맞설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면서 “검사, 판사, 수사관은 결국 국제적 범죄 조직과의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절대 승리할 수 없음을 깨닫고 쓸쓸히 퇴장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모 판사는 책의 마지막에 국회를 ‘소문난 맛집 오마카세를 김밥 가격에 먹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하는 허황된 여행 가이드’에 비유하면서 “어리석은 가이드를 따라다니는 대신 어떻게든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광주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2006년 광주지법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했다. 2022년 대검찰청이 개최한 검수완박 법안 공청회에 토론자로 참석해 “조직 범죄의 수괴가 가장 바랄 법한 시스템이라 생각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며 반대 의견을 내기도 했다.
조선일보 유종헌 기자
03-06 “국회 탓에 사기 범죄 천국” 검수완박 비판한 고법 판사
이미 ‘검수완박’ 문제점은 수없이 제기됐는데, 이번에 현직 판사가 사법 현장 경험을 토대로 그 심각성을 구체적으로 제기했다. 모성준 대전고등법원 판사는 저서 ‘빨대사회’에서 ‘국회가 국가의 전체 수사 권한을 토막 내면서 사기 범죄 조직에 날개를 달아줬다’고 지적했다. ‘앞에서는 형사 정의를 부르짖으면서도 뒤로는 사기 범죄에 대한 수사와 처벌을 어렵게 하는 법률을 지속적으로 통과시켰다’면서 ‘범죄자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해졌고, 수사기관과 법원은 제대로 된 수사·재판을 할 수 없도록 했다’고 했다. ‘사기 범죄의 천국이 도래했다’고도 했다.
모 판사가 ‘정치권’ ‘국회’라고 표현한 주체는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다. 검수완박은 문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다. 민주당 주도로 검찰청법 등을 개정해 2019년 검찰의 직접 수사 대상을 6대 범죄로 줄이고 수사 개시를 제한하더니, 2022년 4월엔 2대 범죄로 축소했다. 검찰의 사기 범죄 수사도 피해금 5억 원 이상으로 제한했다. 모 판사는 검찰 신문 조서의 증거 능력을 제한한 형사소송법 개정(2020년)에 대해서도 ‘사기 범죄 조직 수괴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를 내준 것’이라고 비판했다.
모 판사는 ‘검증되지 않은 아이디어를 형사사법 시스템에 덕지덕지 붙여 놓은 결과, 범죄 피해자가 되레 늘고, 좌절감을 느끼고 사직하는 수사관과 검사, 판사들 또한 늘고 있다’고 개탄했다. 따져볼 부분이 없지 않지만, 전반적으로 옳은 지적이다. 이제라도 시정에 나설 필요가 있다.
문화일보 사설
03.07 “수사권 조정과 검수완박 결과가 사기 천국”이란 판사의 개탄

▲148억원대 전세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른바 '건축왕'에게 사기죄의 법정최고형이 선고된 지난 2월 7일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 대책위가 인천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현직 판사가 문재인 정권이 밀어붙인 검경 수사권 조정과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로 국가 수사 역량이 약화돼 “사기 범죄 천국이 도래했다”고 말했다. 대전고등법원 모성준 판사가 최근 펴낸 책에서 밝힌 내용이다. 그는 “국회가 앞에선 정의를 부르짖으면서도 뒤로는 사기 범죄 조직에 대한 수사와 처벌을 어렵게 하는 법률을 지속적으로 통과시켜 수사 역량을 대폭 약화시켰다”고 했다. 그로 인해 2018년 27만건이던 국내 사기 범죄 건수가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1년이 지난 2022년에 32만건으로 늘었다는 것이다. 사기 피해액도 29조원에 달했다. 제도의 실패로 국민 피해만 커졌다는 것이다.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경찰이 수사 종결권을 갖게 됐고 검찰의 수사지휘권이 폐지됐다. 검수완박 입법으로 검찰의 직접 수사 대상 범위도 제한됐다. 모 판사 주장의 핵심은 이렇게 수사가 따로 진행되고 절차가 복잡해지면서 범죄 수사가 제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실제 과거엔 경찰이 수사한 사건을 다 검찰로 넘기면 검찰이 보완 수사를 지시하거나 자체적으로 추가 수사해 기소 여부를 판단했다. 하지만 지금은 경찰이 사건을 검찰에 넘기지 않기로 하면 보통은 당사자 이의 신청이 있어야 검찰이 보완 수사를 요구할 수 있다. 그래도 경찰이 뭉개는 경우가 많아 사건 처리가 지연된다는 비판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경찰에도 과부하가 걸려 고소장을 내도 몇 달이 지나서야 고소인 조사를 하는 경우가 숱하다고 한다. 경찰의 사건당 평균 처리 기간도 2018년 48일에서 2022년 67일로 늘었다. 개선이 아니라 개악이다.
모 판사는 문 정권 때 피고인이 법정에서 동의할 때만 검찰 신문 조서의 증거 능력을 인정하도록 형사소송법이 개정된 것도 비판했다. 범죄 조직의 우두머리가 법정에서 혐의를 부인하고 이를 지켜본 부하들이 검찰에서 범죄를 인정했던 진술을 뒤집으면 검찰 수사 결과가 휴지 조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수사기관의 노력을 무력화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내준 것”이라고 했다. 실제 그런 일들이 법정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문 정권이 검수완박 입법 등을 강행한 것은 정권에 대한 수사를 막기 위한 방탄용이었다. 국민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형사 사법 체계의 골간을 제대로 된 토론과 숙의도 없이 송두리째 뒤집었다. 그 결과가 지금의 수사 역량 약화와 수사 지연으로 나타나고 있다.
조선일보 사설
03.08 나라 먹여 살릴 의사과학자 양성, 서울대 첫 문 열었다

▲정부의 의대 증원 발표 후 전공의 집단사직과 의대생 동맹휴학이 이어진 가운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대학원 학위수여식이 열린 지난달 27일 종로구 서울대의대에서 졸업생들이 기념 촬영하고 있다. /뉴스1
서울대가 내년도 의예과 입학 정원을 현재 135명에서 15명 늘리면서 이와 별개로 의사과학자를 양성할 50명 정원의 ‘의과학과’를 의대 학부에 신설한다고 발표했다. 서울대는 “의과학과는 기초보건과 바이오·헬스 분야를 연구할 의사과학자를 양성할 것”이라고 했다. 의사과학자는 의사 면허를 갖고 있지만 환자 진료가 아니라 새로운 의료 기술, 신약, 첨단 의료 장비를 연구 개발한다.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절반이 의사과학자다. 세계 상위 제약회사 10곳의 최고기술책임자 중 70%가 의사과학자다. 화이자 코로나 백신도 의사과학자가 개발했다. 이 백신 하나로 900억달러를 벌었다. 모더나 공동 창업자 중 한 명도 의사과학자다.
우리나라에선 최상위 수험생들이 의대로만 진학하고 있다. 바람직하다 할 수 없지만 이런 현상이 나타난 지 20년이 돼 간다. 그렇다면 이 인력을 환자 진료만이 아니라 국가의 새로운 먹거리 창출에 기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 의료는 이를 외면해왔다. 세계 의료시장 규모는 1조5000억달러에 달하는데 한국이 차지한 것은 2%에 불과하고 이마저 의사들이 기여한 것은 ‘0′이다. 반도체 분야에서 한국이 두각을 나타내는 것과 너무 다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매년 3300명 의대 졸업생 중 의과학을 선택하는 학생은 1% 미만이어서 의미가 없는 수준이다. 서울대는 2008년부터 의사과학자 양성 대학원 과정을 운영하고 있지만 한계가 분명하다.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 스위스 등 선진국들은 1970년대부터 의사과학자를 체계적으로 양성해 왔다. 미국 하버드대와 매사추세츠공대(MIT)는 합동으로 의사과학자 양성 프로그램인 ‘HST’를 운영한다. 여기서 배출된 의사과학자들이 세계 최고 수준의 미국 의료 산업을 이끌고 있다. 한국에서도 카이스트와 포스텍 등이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한 의학전문대학원 설립을 원했지만 기존 의사들의 반대에 막혀 진전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서울대가 의대 정원 대폭 증원을 의사과학자 양성의 기회로 삼으면서 활로가 열렸다. 서울대는 의과학과 학생들을 공대·약대·첨단융합학부 학생들과 함께 교육시켜 융합을 체감하게 하고 진료 의사가 아닌 우수 연구인력으로 남도록 적극 유도하겠다고 했다. 경기도 시흥에 의과학 연구 허브를 만들 계획도 갖고 있다. 하버드대 병원 의사 3000명 중 3분의 1이 의사과학자다. 이스라엘 명문 테크니온 공대 내 의대는 바이오 산업 중심지이고, 미국 일리노이 공대는 내부에 의대를 두고 있다. 서울대는 최고 수준의 의대생과 최고 수준의 과학 공학 인프라를 갖고 있다. 늦었지만 의료 산업 선진국들을 따라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 서울대만이 아니라 카이스트, 포스텍 등 좋은 과학 공학 인프라를 가진 대학들도 자유롭게 의과학을 연구하고 교육할 수 있어야 하고, 의사들도 이에 대해서만은 반대하지 말아야 한다.
조선일보 사설
03-11 과학한국도 규제완화가 답
지난달 29일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가 공개한 ‘2022년도 기술 수준 평가’ 결과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언론에서는 이 자료를 근거로 ‘중국의 과학기술 수준이 우리나라를 처음 추월했다’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주요 핵심 분야에서 한국은 이미 중국에 뒤처진 상태였다. 이날 공개된 2022년 전체 대상 기술 수준(미국 100% 기준)으로 볼 때 중국은 82.6%로, 한국(81.5%)을 앞섰다. 미국과의 기술 격차는 중국은 3년이지만, 한국은 3.2년에 해당하는 수치다. 달에 자국산 우주선을 쏘아 올린 중국의 과학기술력을 수치로 확인한 것에 대해 과학계는 물론 국민도 적잖은 충격에 빠졌음은 분명하다.
표면적 수치 이외에 내용을 뜯어보면 실상은 더 심각한 수준이다. 평가 대상인 11대 분야 136개 대상 기술 중 ‘국가전략기술’ 12대 기술(반도체·디스플레이, 2차전지, 첨단모빌리티, 차세대원자력, 첨단바이오, 우주항공·해양, 수소, 사이버보안, 인공지능(AI), 차세대통신, 첨단로봇·제조, 양자)에서 중국은 첨단모빌리티, 우주항공·해양, 사이버보안, AI, 차세대통신, 첨단로봇·제조, 양자 등 7개 분야나 한국의 기술 수준을 앞질렀다. 미래 국가경쟁력을 결정지을 기술로 꼽히는 우주항공·해양과 AI, 양자의 경우 중국은 각각 79.2%, 90.0%, 91.9%인 데 반해 우리나라는 55.0%, 78.8%, 65.8%에 불과했다. 또, 이날 공개되지 않은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의 주요 5개국(한국, 미국, 유럽연합, 중국, 일본)의 2012년부터 2022년까지 11개 분야(건설·교통, 재난안전, 국방, 기계·제조, 소재·나노, 농림수산·식품, 생명·보건의료, 에너지·자원, 환경·기상, 우주·항공·해양, ICT·SW) 기술 수준 시계열을 볼 때, 한국은 우주·항공·해양, 국방 분야에서는 단 한 번도 중국의 기술력을 앞선 적이 없었고, 에너지·자원과 ICT·SW는 2018년부터 역전당한 상태였다.
중국의 과학굴기 앞에 한국의 과학기술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과거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며 우리나라에서 중간재를 수입, 조립해 되팔던 국가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자국 내에서 생산 전 과정을 처리하며 한국 등 기술적 우위에 있던 국가들의 의존에서 벗어나고 있다. 중국 정부의 과감한 투자와 정책 지원, 특히 파격적인 규제 완화가 과학굴기의 배경이다. 우리 정부 관계자도 “중국은 정부 차원에서 인력·예산을 집중 투자하고, 규제도 전혀 두지 않는 반면, 한국과 일본은 ICT 분야의 개인정보 활용처럼 규제에 묶여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전했다.
그나마 정부가 최근 출연연구기관의 공공기관 지정 해제와 연구·개발(R&D) 효율을 저해하는 관련 규제를 폐지하기로 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R&D 분야에 정부 예산을 배정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바이오·AI 분야 등 적극적인 데이터 활용으로 새로운 기술과 시장을 만든 후 규제를 해도 늦지 않다. 미래 생존 필수 기술임에도 개인정보 보호, 윤리 등의 관념적 잣대로 규제를 들이대는 것은 미래를 포기하는 행위다. 윤석열 정부는 과학기술 분야에서의 파격적인 규제 완화를 유산으로 남겨야 한다.

문화일보 박정민 경제부 차장
03.12 청년은 무조건 약자? 폐지 줍는 노인이 먼저다
청년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지원? 단편적 세대론에 진짜 약자 묻혀
저숙련 여성·지방 고졸 청년 등 뭉뚝한 세대론보다 세밀 접근을

▲지난 1월 서울시내 한 도로에서 어르신이 폐지를 모은 손수레를 끌고 있다. /뉴스1
친구들과 서울 강남이나 성수동처럼 ‘힙하다’고 알려진 동네에서 저녁을 먹다 보면 종종 착잡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폐지 줍는 노인을 목격할 때다. 한껏 멋을 낸 청춘남녀 사이에서 남루한 옷차림의 노인이 폐지를 줍고 있는 모습만큼 삶의 비참함을 보여주는 장면은 없으리라. 누가 가난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요, 나이 든 건 죄가 아니라고 했나. 굽은 허리로 힘겹게 리어카를 끌고 있는 그 노인들은 단지 늙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시시포스보다 무거운 형벌을 받고 있었다. 제우스의 분노도 한국 사회 현실만큼 모질진 않을 것이다.
보건복지부는 작년 하반기 ‘2023년 폐지 수집 노인 실태 조사’를 실시했다. 해당 실태 조사는 전국의 폐지 수집 노인 수를 약 4만2000명으로 추계하고 있다. 이들의 평균 연령은 76세. 하루 5.4시간씩 주 6일을 폐지 줍는 데 쓰고 있지만 월 소득은 15만9000원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복지부는 실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관리 체계를 구축하고 노인 일자리 사업과 연계하겠다고 밝혔다. 누구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는지는 몰라도 이런 노력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다소 의외의 사실도 알게 됐다. 실태 조사가 진행된 게 작년이 처음이었다는 것이다. 폐지 줍는 노인들은 우리나라 노인 빈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집단이다. 그런데 다들 노인빈곤율이 40.4%로 OECD 국가 중 압도적 1위네, 70세 이상 노인 10만 명당 98.4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네(모두 2023년 기준) 말은 많았지만 정작 그들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가 소외된 집단에 얼마나 무심했는가를 새삼 깨달았다.
정치권은 단순한 세대론을 선호한다. 그 세계관에서 기성세대는 강자고 청년은 약자다. 고령의 국회가 청년보다 노인을 비롯한 기성세대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주장은 단골 레퍼토리다. 그래서 정치의 포커스는 으레 청년들에게 맞춰진다. 2015년 ‘헬조선’ 열풍이 한국 사회를 휩쓴 뒤에는 분노한 청년들을 달래기 위한 각종 정책이 쏟아졌다. 엄청난 규모의 구직·주거 비용을 지원했고 지역마다 관련 단체들이 활동할 센터를 만들었다. 더한 경우에는 성남시장 시절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처럼 단지 청년이라는 이유 하나로 돈을 주기도 했다. 청년 딱지만 붙이면 실효성이나 우선순위를 따지는 비판은 사그라들었다.
단편적인 세대론에 진짜 약자들의 삶은 묻혔다. 폐지 줍는 노인, 저숙련 일자리에 종사하는 중장년 여성, 사회와 단절된 채 살아가는 5060 남성들이 대표적이다. 사실 청년 담론도 ‘지방 공장에서 일하는 고졸’ 청년들은 배제된 채 ‘수도권 4년제 대학에 다니는’ 청년들에게 집중된 경향이 있었다. 정치·사회적으로 대변해 줄 사람이 없는 약자들은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기업 여성 임원 비중을 늘리고 대학생들에게 저렴한 아침밥을 제공하자는 정치인은 있었어도 저들의 삶을 돌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인은 없지 않았나.
청년은 약자이니까 무슨 무슨 지원을 늘리자고 말하는 정치인들을 보면 솔직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2030 세대는 이 사회가 공정하고 상식적으로 돌아가길 바랄 뿐, 뭘 퍼준다고 지지하지 않는다. 각종 지원 사업의 효과를 체감하기 어려울뿐더러 그게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알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그럴 돈이 있다면 먼저 지원해야 할 건 당장 끼니와 병원비를 걱정해야 하는 노인들이라고 생각한다.
공천이 끝나면 각 당은 세대별 공약을 쏟아낼 것이다. 그들의 세대 접근법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청년은 약자”라는 식의 뭉뚝한 세대론을 펴는 정당보다 세밀하게 접근하는 정당에 표를 줘야 한다. 디테일은 결국 국민을 향한 애정과 관심 어린 관찰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말이다.
조선일보 이동수 청년정치크루 대표
03-12 반도체 인재 지킬 ‘징벌과 인센티브’
바야흐로 인공지능(AI) 시대가 열리면서 AI 혁명을 이끄는 반도체의 전략적 가치가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AI 기업에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는 ‘고도의 반도체 성능’은 필수다. 오픈AI를 비롯한 마이크로소프트·구글·메타와 같은 빅테크 기업이 반도체 개발에 뛰어드는 이유다. 치열한 반도체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핵심 요소는 바로 인재다. 반도체는 연구·개발(R&D)과 제조 모두 사람이 완성하기 때문이다.
인재가 있어야만 반도체 산업의 ‘초격차 전략’도 가능하다. 우리 정부가 반도체 계약학과 신설을 지원하는 등 인력 확보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배경이다. 하지만 반도체 인력을 양성하는 제도만큼이나 이미 보유하고 있는 우수 인재의 유출을 막는 정책도 중요하다. 반도체 패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선진 각국이 자국의 반도체 산업의 육성을 위해 대대적인 지원에 나선 가운데, 선진국 업체들은 우리나라 반도체 인력을 영입하기 위해 적극 뛰고 있다.
최근 고대역폭메모리(HBM)가 AI를 위한 필수 반도체로 부상하자, 미국 마이크론이 국내 HBM 기술 핵심 인력을 영입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다. 첨단 기술 개발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인재라면 원수라도 데려다 쓰라는 사마천의 용인술(用人術)이 관행화하고 있다. 이전에는 반도체 굴기(堀起)를 선언한 중국의 기술 인력 영입 시도가 많았다면, 최근에는 미국 등 선진국도 우리의 반도체 인재 확보에 나섰다.
우리도 선진국처럼 국가의 핵심 기술 유출을 간첩죄로 규정하고, ‘경제스파이법’이나 ‘영업비밀보호법’ 등을 제정해 첨단 기술 유출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미국은 경제 스파이로 간주되면 15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만 달러 이하의 벌금형에 처한다. 그뿐만 아니라 영업비밀보호법을 통해 피해 기업이 민사사건으로 연방법원에 바로 제소함으로써 손해를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법적 대응만으로 국내 반도체 기술의 해외 유출을 막기에는 한계가 많다. 중국과 달리 선진국은 높은 연봉 외에도 자녀 교육과 기후조건 등에서 많은 이점이 있으며, 반도체 기업 간 이직(移職)도 쉽다. 지난해 적자를 기록해 처우가 약해진 삼성전자 반도체 연구원들이 파운드리 사업 재진출을 선언한 인텔과 자체 AI 반도체 설계에 나선 구글로 대거 옮겨간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법적 제도의 강화와 함께 더 나은 해외 기업에 합법적으로 옮겨가는 인재에 대한 대책도 필요한 이유다.
반도체 인재 유출을 막기 위해서는 급여와 보너스 같은 처우 개선과 함께 다양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반도체 기술 인력이 퇴직 후 2년간 동종 업계에 근무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충족할 수 있도록 퇴직 패키지를 매력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퇴직 후 비(非)고용 기간에 관련 분야의 재교육을 통해 고급 학위를 취득할 수 있도록 장학금 제도를 신설하고, 퇴직 이후에도 공공기관 또는 산학협력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해 네트워킹을 강화함으로써 2년 후 영향력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취업을 지원해야 한다. 정부도 법률에 따른 징벌적 조치에만 의존하기보다는 퇴직 후 일정 기간 세금 감면과 같은 인센티브 정책과 취업 기회의 문을 넓히는 기술 인력 생태계 프로그램을 적극 도입할 필요가 있다.

문화일보 이호근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
03.13 삼성전자 홀로 고전, ‘초격차’ 줄고 ‘속도전’ 밀리는 K반도체

▲착공 1년 10개월만에 완공한 대만 TSMC의 일본 구마모토 반도체 공장./Kyodo News/AP 연합뉴스 지>
올 들어 대만 TSMC, 미국 마이크론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 주가가 연일 급등하는 속에서도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인 삼성전자 주가는 9% 하락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삼성전자가 인공지능(AI) 반도체에 필수적인 HBM(고대역폭 메모리) 경쟁에서 뒤처진 데다, 주문형 시스템 반도체를 생산하는 파운드리 분야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에 HBM을 독점 공급해 K반도체의 체면을 세우고 있었는데, 얼마 전 마이크론이 4세대를 건너뛰고 5세대 HBM3E를 양산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해 이마저도 위협받게 됐다. 세계 1위 메모리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가 HBM에선 3등으로 추락할 처지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세계 최초로 12단 HBM3E 개발에 성공했다고 밝혔지만, 시장 반응은 냉랭하다. 외국인은 최근 5일간 삼성전자 주식을 965만주나 팔아치웠다. 양산 가능성과 생산성, 엔비디아 납품 가능성에 낮은 점수를 주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2022년 3월 세계 최초로 3나노 반도체를 개발, 파운드리 시장을 개척할 게임 체인저라고 자랑했지만,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2021년 18%에서 2023년 11%로 오히려 뒷걸음질했다. 경쟁자들 도전도 거세지고 있다. 미국 인텔은 “2027년부터 1.4나노 공정을 양산해 2030년까지 세계 2위 파운드리가 되겠다”며 ‘삼성 추월’을 선언했다. 메모리 반도체 패권을 한국에 빼앗긴 일본은 TSMC·인텔과 손을 잡고 범용 메모리 반도체와 2나노급 시스템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다. 일본 정부가 지원한 대만 TSMC 구마모토 공장은 착공한 지 불과 1년 10개월 만에 준공하는 가공할 속도를 과시했다.
반면 한국은 반도체 기술 경쟁에서는 ‘초격차’ 경쟁력을 상실하고 있고, 차세대 생산 라인 구축을 위한 속도전에서도 경쟁국에 밀리고 있다. SK하이닉스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2019년에 투자 의향서를 제출했으나 토지 보상, 용수 공급 문제 등으로 지연돼 이제 부지를 조성하고 내년 3월에 1기 공장 착공에 들어간다. 삼성전자 평택 공장도 송전탑 문제로 5년을 허비했다. 경쟁국들은 민관(民官)이 국가 차원 총력전을 벌이는데 어떻게 경쟁을 이겨낼 수 있나.
조선일보 사설
03.14 "예산 없어질텐데" 압박…집값통계 125회 조작 김수현·김상조 기소
문재인 정부 시절 부동산과 고용, 소득 통계를 조작한 의혹을 받는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국토교통부 장관 등이 재판에 넘겨졌다.

▲14일 오후 대전지검에서 서정식 차장검사가 문재인 정부 시절 발생했던 국가통계 조작사건 수사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신진호 기자
대전지검(검사장 박재억)은 김수현·김상조 전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과 김현미 전 국토교통부 장관, 강신욱 전 통계청장, 홍장표 전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등 11명을 통계법 위반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기소했다고 14일 밝혔다. 검찰은 이 사건이 고위 공직자가 연루된 조직적·권력형 범죄로 국가 통계의 정확성과 중립성을 전면으로 침해한 최초의 통계법 위반 사례라고 설명했다.
한국부동산원 압박, 125차례 걸쳐 조작 지시
검찰에 따르면 김수현·김상조 전 정책실장과 김현미 전 장관, 국토부 관계자 등 7명은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대책 효과로 집값이 안정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주택 통계인 한국부동산원 산정 ‘주간 주택가격 변동률’(변동률)을 125차례에 걸쳐 조작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2017년 6월부터 2021년 11월까지 4년 6개월간 한국부동산원에 변동률이 공표되기 전 매주 3회 대통령실에 미리 보고하게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문재인 정부 시절 대통령 비서실과 국토교통부가 주택가격 변동률을 사전에 검열하기 위해 구축한 시스템, [사진 대전지검]
김 전 정책실장 등은 수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한국부동산원을 압박하는 방법으로 사전 검열하고 주택통계를 조사했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통계 조작은 주로 서울과 인천·경기 등 수도권 부동산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작성 중인 통계를 공표 전에 다른 기관에 제공하는 것은 통계법 위반이다. 이 과정에서 부동산원 임직원들은 사전 보고가 부당하다며 12차례에 걸쳐 중단을 요청했으나 김상조 전 실장은 “사전 보고를 폐지하면 부동산원 예산이 없어질 텐데, 괜찮겠냐”고 압박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文 취임 2주년·2020년 총선 앞두고 집중 조작
김 전 정책실장 등은 2019년 문재인 대통령 취임 2주년과 2020년 제20대 총선을 앞두고 집값이 안정된 것처럼 집중적으로 조작했다. 그 결과 2017년 11월에서 2021년 7월까지 서울 지역 아파트의 부동산원 주택가격 상승률 통계는 12%에 그쳤지만, 실거래가 상승률은 81%로 큰 차이를 보였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었던 KB국민은행 변동률과도 최대 30%포인트 격차가 나타났다. 이로 인해 국민이 시장 상황을 오판했고 국가 통계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고 주택산정에 투입된 세금 368억원이 낭비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검찰은 판단했다.

▲한국부동산원이 산정한 이명박·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주택 통계 비교. [사진 대전지검]
문재인 정부 청와대와 통계청은 고용통계도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김상조 전 정책실장과 강신욱 전 통계청장 등은 정부의 일자리 정책에도 고용통계 조사에서 비정규직이 급등한 것으로 나타나자 정책 실패라는 비난 여론을 피하기 위해 비정규직과 관계가 없는 다른 통계조사 방식 때문에 수치가 증가한 것처럼 왜곡한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고용통계도 조작…'비정규직 급증' 내용 삭제
통계청은 대통령비서실 지시에 따라 보도자료 초안에 포함됐던 ‘2019년 10월 전년 대비 비정규직 근로자가 86만700명 증가했다’는 내용을 삭제했다. 대신 ‘전년도 통계와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내용을 추가했다. 통계조사 결과가 정부에 유리하도록 축소·왜곡됐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지난해 10월 문재인 정부가 집값을 비롯한 주요 국가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이 대통령기록관을 압수 수색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정부의 중요한 국정 기조였던 ‘소득주도성장 정책’도 통계가 조작된 것으로 조사됐다. 홍장표 전 경제수석은 가계소득통계 조사에서 소득 불평등이 역대 최악으로 나타나자 이를 정당화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통계청에 불법적으로 개인정보가 포함된 통계기초자룔 제공하도록 지시했다. 정부는 홍 전 수석이 통계청에서 받은 자료를 근거로 “최저임금 인상 효과로 개인 근로소득 불평등이 개선됐다”고 자의적으로 해석, 정책성과 홍보에 활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 "정부에 불리한 상황 감추려 대통령실이 주도"
대전지검 서정식 차장검사는 “부동산 대책 실패로 주택가격이 폭등하고 일자리 정책에도 비정규직이 증가하는 등 정부에 불리한 상황을 감추기 위해 대통령비서실 주도로 장기간 국가통계를 조작하거나 왜곡했다”며 “민생 경제정책의 핵심지표인 부동산과 고용, 소득 관련 국가통계가 조작돼 국가적으로도 폐해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에서 정책실장을 지낸 김상조 전 실장(왼쪽부터)과 김수현 전 정책실장, 김현미 전 국토부 장관의 모습. 연합뉴스
한편 검찰은 통계법 위반의 법정형이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으로 너무 낮다며 입법 개선을 추진할 방침이다. 지난해 9월 감사원의 의뢰를 받아 수사에 착수한 검찰은 대통령기록관과 국토부를 압수수색하고 문재인 정부 정책실장 4명을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 조사, 수사 요청 대상자 22명 중 11명을 기소했다. 장하성·이호승 전 정책실장과 부동산원 원장, 통계청 공무원 등 11명 대해서는 혐의없음 처분했다.
신진호 기자 shin.jinho@joongag.co.kr
03.15 “선박 사고 선장은 살아 와도 감옥” 이런 법이 중대재해법

▲14일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에서 열린 중대재해처벌법 유예 촉구 결의대회. 대회에 참석한 부산 지역 어업인들은 "선박 사고가 나면 선장이 살아 돌아와도 바로 구속될 것"이라면서 법의 불합리를 지적했다./김동환 기자
중소상공인 6000여 명이 14일 부산에서 모여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중대재해처벌법 유예를 촉구했다. 어업 종사자가 많은 부산 지역 특성을 반영하듯 선주, 선장들이 대거 참석해 기막힌 상황을 호소했다. 한 선주는 선장 포함 9명이 사망한 며칠 전 통영 앞바다 어선 전복 사고를 언급하며 “선장이 살아 돌아왔더라도 안전 관리 책임 탓에 바로 구속됐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중대재해처벌법에 따르면, 선박 사고로 선원이 사망하면 안전 대책 미흡 혐의로 선주·선장이 1년 이상 징역에 처해질 수 있다. 어업인들은 해상 사고는 갑작스러운 기상 악화 등 천재지변 상황이 많고, 어업 자체가 위험도가 큰 작업인데 중대재해처벌법은 이런 특수성을 전혀 감안하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지난 2022년부터 50인 이상 사업장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은 산업 현장에서 사망 사고가 발생할 경우 사업주나 회사 대표를 1년 이상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 벌금으로 처벌한다. 유예기간 2년을 거쳐 올해부터 50인 미만 사업장까지 확대적용됐다. 법 적용 범위가 모호하고 처벌 수위가 과도해 중소상공인들이 “준비할 시간을 더 달라”고 읍소했지만, 노동계를 의식한 민주당이 반대해 확대 시행이 강행됐다. 혼란에 빠진 영세 업체들은 실질적인 사고 예방보다 사고가 났을 때 처벌을 피하기 위한 서류 작업에 더 골몰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소기업 안전 관리 담당자들은 사고에 충분히 대비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작업 일지’ ‘위험성 평가회의 결과’ 등 최대 37종의 서류를 구비하느라 현장 점검은 오히려 뒷전으로 밀린다고 하소연한다.
법 시행 2년의 결과를 보면 사고 예방 효과도 불확실하다. 작년 경우 법이 적용되지 않은 50인 미만 사업장의 사망 사고 감소 폭(8.8%)이 50인 이상 사업장의 감소 폭(4.7%)보다 더 컸다. 50억원 이상 대형 건설 현장에선 사고 사망자가 2022년 115명에서 2023년 122명으로 오히려 늘었다. 사고 예방 효과도 불분명하고 기업인을 과도하게 위축시키는 이 법은 전면 재개정되는 것이 옳다. 임기가 5월 말에 끝나는 이번 국회는 결자해지의 마음으로 그 전에 이 문제를 해결했으면 한다.
조선일보 사설
03-15 연금개혁, 차선이라도 서둘러야 한다
2022년에 여야 합의로 발족한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는 최근 연금개혁 공론화를 통한 여론 수렴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이해관계자 대표로 구성된 의제숙의단에서 500명 국민대표단에 보내기 위한 대안 중 소득대체율과 보험료율 의제와 관련해 논란이 있다.
현재 연금개혁 방향과 관련해 소득 보장을 중시하는 입장과 재정 안정을 중시하는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 이번 의제숙의단에서도 그 연장선에서 소득 보장 강화 쪽에서는 소득대체율을 현행 40%에서 50%로 올리고, 보험료율을 현재 9%에서 13%로 올리는 방안(1안)을 제시했다. 반면, 재정 안정 강화 쪽에서는 소득대체율을 현재 40%로 유지하고, 보험료율을 현행 9%에서 12%로 올리는 방안(2안)을 제시했다.
논란은, 제시된 두 안의 재정효과가 크지 않다는 점이다. 2023년의 국민연금 재정계산위 보고서에 따르면, 소득대체율을 현행 유지한 상태에서 보험료율을 12%까지 올리면(2안) 적립기금 소진연도가 2063년이고. 소득대체율을 50%로 높이고 보험료율을 13%까지 올리면(1안) 소진연도가 2062년이 돼 두 안 모두 적립기금 소진연도가 현행보다 7∼8년밖에 연장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2개 안의 재정효과를 재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 5차 재정 추계에서는 적립기금 운용수익률을 4.5%로 가정했지만, 최근 발표된 국민연금기금의 1988∼2023년 중 누적 평균 운용수익률은 5.92%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는 2022년도 운용수익률은 -8.22%였는데 비해 2023년도에는 13.59%로 크게 높아져 발생한다. 적립기금 운용수익률 가정을 4.5%에서 5.92%로 높일 경우 2안은 2075년 안팎으로 연장되고, 1안도 2071년 안팎으로 연장될 수 있다. 따라서 1, 2안의 재정효과는 16∼20년이 된다. 적립 기금의 중요성과 기금 운용수익률 제고를 위한 노력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적립기금 소진연도가 16∼20년 연장되더라도 재정효과는 불충분하다. 하지만 인구구조, 경제 성장, 기금 운용 여건에 따라 추가 개혁이 필요하고 또 할 수밖에 없다. 향후 연금 지급개시연령이 연장되면(2033년 65세에서 2048년 68세), 추가로 기금 소진연도가 각각 10년 내외 더 연장된다. 이번 숙의단에서 지급개시연령 조정을 적극 검토하지 않은 것은, 현재 63세이고 2033년 65세로 이행되는 과정인 데다 법정 정년은 여전히 60세로 고령자가 계속 일하기 어려운 현실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소득대체율이 현행 40%에서 50%로 높아지면 연금급여 지출은 현행보다 25% 늘고, 이에 상응하는 보험료율은 5%포인트(p) 정도 추가 인상해야 한다. 2안보다 소득대체율이 10%p 높게 제시된 1안에서 보험료율이 1%p만 더 높아서는 재정적으로 등가성이 떨어지므로 별도 대책이 필요하다.
연금재정 입장에서 보험료율은 가능한 한 조기에 인상하고 지급개시연령 연장도 확정하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보험료 인상 부담을 오롯이 져야 하는 근로자·기업주·농민·자영업자의 어려운 경제 여건도 고려해야 한다. 경제가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보험료율 1%p 인상도 여의치 않다.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어떤 연금개혁 대안도 국민 수용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화일보 김용하 순천향대 IT금융경영학과 교수
03.17 검수완박 헌재 판결 1년...사기 고소한 그가 국수본에 편지 보낸 까닭

▲지난해 3월 23일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검수완박) 법안’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권한쟁의심판 선고를 앞두고 헌법재판관들이 재판장석에 착석해 있다. photo 뉴시스
국내 한 미술품 슈퍼컬렉터 이모(67)씨는 요즘 속이 타들어 간다. 2022년 10월 국내 최대 미술품 경매사인 S사와 이 회사 측 감정인이자 중개인으로 활동한 서울 낙원동의 고미술상 임모씨를 상대로 서울 강남경찰서에 낸 사기소송이 1년6개월 가까이 별다른 소식이 없어서다. 10여년 전인 2013년 이씨는 S사와 임씨가 미국에서 국내로 들여온 조선시대 ‘청화백자’ 2점을 4억1000만원에 구매했다. 한데 2017년경 우연한 기회에 해당 작품이 ‘중국산 위작(僞作)’임을 알게 된 것. 이에 해당 물건의 반품과 구매대금 반환을 요구했으나 요구에 응하지 않자 공소시효가 임박해 S사 관계자와 임씨를 사기죄로 강남경찰서에 고소했다.
한데 2022년 10월 이씨의 고소장을 접수한 강남경찰서는 기초적인 3자 대질신문조차 없이 이듬해인 2023년 1월 ‘사건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심지어 강남서는 같은해 2월 검찰로부터 ‘보완수사’ 지시를 받은 이후에도 지금까지 1년 넘게 묵묵부답이다. 기존 강남서 수사팀을 불신한 이씨 측의 경찰관 기피신청으로 강남서 공정수사위원회가 열리고, 급기야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까지 나서 2023년 6월 수사팀이 교체되기는 했으나, 별다른 진전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지난 1년 6개월간 이씨가 거둔 거의 유일한 성과는 지난 2월 16일 오매불망했던 ‘3자 대질신문’이 한 차례 열린 것이 전부였다. 고소장을 강남서에 제출한 지 무려 1년3개월 뒤 열린 3자 대질신문이었다.
하지만 대질신문에 따른 결과가 언제쯤 나올지는 기약할 수 없다. 법원감정사 등 객관적 입장에 있는 제3자가 공인한 ‘진품감정서’ 한 장이면 위작인지 아닌지를 비교적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도통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는 것이 이씨 측 불만이다. 경찰이 움직이지 않는 통에 ‘진품감정’을 위해 이씨가 국내 최고 권위의 감정사에게 감정비조로 지출한 돈만 이미 수백만원에 달한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을 지낸 복수의 전문가들이 내린 판정 결과는 역시 ‘가품(假品)’이었다.
이씨는 “검수완박법으로 경찰이 모든 수사를 담당하게 되면서 간단한 사기사건조차 경찰에서 뭉개면 달리 다른 데 호소할 방법이 없다”며 “나는 그렇다 치고 돈 없고 힘 없고 백도 없는 서민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서울 시내 일선 경찰서 수사과장을 지낸 이씨 측 변호사는 “S사가 자기 측 감정인 임씨를 데리고 미국까지 가서 국내로 들여온 물건”이라며 “경찰이 S사 관계자를 불러 사실관계를 조사하지도 않고 임씨 말만 듣고 불송치 결정을 내린 것은 누가 봐도 석연치 않다”고 지적했다.

▲사기범죄 역대 최다, 검거율 56%로 추락
사실 이씨의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이른바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이라는 ‘검수완박법’ 시행 직후부터 전국 경찰서에서는 이씨와 같이 더딘 수사진행에 불만을 품은 민원이 폭주하고 있다. 이는 금전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사기사건뿐만 아니라 가해자나 피해자가 비교적 명확한 폭행이나 절도, 살인, 강도 사건도 마찬가지다. 지난 문재인 정부 때 ‘검수완박법’을 강행하며 1, 2차에 걸쳐 검경 수사권을 조정할 때 나왔던 ‘수사지체’ 우려가 현실화한 것이다.
여기에 김명수 전 대법원장 시절부터 만성화된 ‘재판지연’까지 더해지면서 일반 국민들의 사법불신은 임계점에 달하고 있다. 대법원에 따르면 민사소송(제1심 합의사건)의 평균처리기간은 2018년 9.9개월에서 2023년 15.8개월로 증가했고, 형사소송(제1심 합의사건) 역시평균처리기간이 2018년 4.9개월에서 2023년 6.9개월로 늘었다.
‘지연되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는 오랜 법언(法諺)에 따라 법조계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지만 개선될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서울 강남의 한 법무법인 변호사는 “피의자 1~2명인 사기사건이라면 대개 6~7개월 정도면 끝나는데 요즘은 3~4개월 정도는 더 붙는다”며 “경찰들도 사건적체로 불만이 많고, 수임료를 이미 받은 변호사 입장에서도 사건 회전율이 떨어져서 불만”이라고 말했다.
정의가 지연되면서 각종 사기범죄도 급증하는 추세다. 경찰청에 따르면 사기범죄 건수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난 2017년 이래 코로나19로 대면접촉이 줄어든 2021년 한 해 주춤했던 것을 제외하고 매년 치솟는 추세다. 사기범죄는 경제범죄 중 절대다수를 차지하는데, 지난해 사기범죄 건수는 34만9786건으로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문재인 정부, 검경 수사권 조정 ‘대못’
반면 사기범죄 검거율은 검경 수사권 조정에 착수한 2017년부터 매년 눈에 띄게 하락하고 있다. 2017년 79%에 달했던 사기범죄 검거율은 1, 2차 검경수사권 조정으로 검찰의 직접 수사권이 사실상 사라진 2023년 56%(잠정)까지 추락했다.
특히 사기범죄 검거율이 2017년부터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추세는 심상치 않다는 지적이다. 사기범죄자의 절반 가까이가 법망(法網)을 피해 활개치는 셈이다. 서울 시내 한 경찰서 관계자는 “검거 건수는 매년 비슷하게 유지되고 있는데 모수인 사기범죄 자체가 늘어나서 검거율이 떨어진 것 같다”고 분석했다.
앞서 이씨의 사례는 ‘검수완박법’으로 인한 대표적 피해사례다. 공교롭게도 이씨가 강남서에 고소장을 접수한 2022년 10월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 날 ‘대못’을 박은 검수완박법이 시행된 바로 다음 달이다. ‘검수완박법’은 2022년 4월 국회 본회의에서 ‘검찰청법 개정안’, 같은해 5월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입법됐다. 국회로부터 법안을 넘겨받은 문재인 정부는 2022년 5월 3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5월 9일 ‘검수완박법’을 공포했다. 2022년 5월 10일 윤석열 정부 출범을 불과 하루 앞두고 벌어진 일이다.
결국 전임 정부가 박은 ‘대못’에 따라 ‘검수완박법’은 윤석열 정부 출범 후인 2022년 9월 10일부터 시행됐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과 함께 여당이 된 국민의힘은 ‘검수완박법’을 헌법재판소까지 가져가 유·무효를 따지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지난해 3월 23일 헌재는 ‘더불어민주당 민형배 의원 위장탈당’ 등 입법절차상 위법을 인정하면서도 “국회 기능을 형해화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다”며 재판관 5 대 4 의견으로 유효를 선고했다. 결국 헌재가 ‘검수완박법’에 새 생명줄을 달아준 1년 만에 전국 일선 경찰서에서 수사지연에 따른 민원이 폭주하는 셈이다.
이씨가 사기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는 금액 역시 4억1000만원으로, 공교롭게도 문재인 정부 때인 2020년 1차 검경수사권 조정이 이뤄졌을 때 검찰의 직접 수사 기준선으로 제시된 ‘5억원’ 미만에 해당한다.
1차 검경 수사권 조정을 강행한 문재인 정부는 검찰의 직접 수사가 가능한 범죄를 ‘부패·경제·공직자·선거·방위사업·대형참사’ 등 이른바 ‘6대 범죄’로 축소했다. 사기·횡령·배임 등 경제범죄에 검찰이 직접 관여할 수 있는 기준은 피해액(이득액) ‘5억원 이상 고액사기’로 범위가 축소됐다. 5억원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상 가중처벌 기준선이기도 하다.
급기야 2022년 2차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검수완박법’이 시행된 이후부터는 검찰의 직접 수사가 가능한 범죄가 부패·경제 등 ‘2대 범죄’로 대폭 축소됐다. 그나마 윤석열 정부 출범 후 ‘대통령령’ 개정을 통해 검찰의 직접 수사가 가능한 사기피해액(이득액) 기준을 삭제해 숨통을 틔워줬지만, 실제 허들(피해금액 기준)은 과거에 비해서도 한층 더 높아진 것으로 알려진다. 이씨는 “사기 피해금액이 30억~40억원 이상은 되어야 검찰이 움직인다고 들었다”고 했다. 한 법조 관계자는 “다단계 사기사건과 같이 공범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보느냐에 따라 피해금액은 달라지기 마련”이라며 “피해금액 기준으로 사건을 분류하는 것은 애당초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보완수사’ 급증, 검경 모두 불만
그나마 이씨의 사례처럼 검찰에서 경찰을 상대로 ‘보완수사’ 지시를 내리면 경찰이 다시 조사를 해야 하지만,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다. 법조 관계자들에 따르면 검찰에서 “경찰 수사에 문제가 있다”는 취지로 ‘보완수사’ 지시를 내려도, 경찰에서 수사담당자가 교체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해당 사건을 한 번 맡아 본 사람이 사건을 가장 잘 알 것이란 취지로 수사담당자를 그대로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는 기존 수사담당자의 사건접근 방향이 애당초 잘못됐을 경우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구조다. ‘검수완박법’으로 수사 개시권과 종결권을 한 손에 틀어쥔 경찰이 사건 관계자와 유착돼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 염려마저 있다.
경찰의 이 같은 사건처리 관행은 검찰과도 확연히 대비된다. 검찰 항고사건의 경우 불기소 처분을 내린 검사를 제외한 다른 검사가 사건을 들여다보는 것이 원칙이다. 검찰사건사무규칙 제92조는 ‘지방검찰청 또는 지청의 장이 직접 불기소처분을 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불기소처분을 한 검사로 하여금 항고에 관한 의견서를 첨부하게 하거나, 재기수사, 공소제기 또는 주문변경 명령된 사건을 처리하게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선 경찰서 수사과장을 지낸 변호사는 “경찰은 검찰과 같은 고려나 제도가 없이 무조건 기존에 했던 수사담당자에게 사건을 맡긴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일선 경찰서 수사관이 조사해야 할 상대가 영향력이 큰 인물일 경우, 수사관 스스로 움츠러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 경찰 관계자는 “검사들은 국회의원이나 재벌 회장 등 거악(巨惡)을 상대로 수사하다가 그만두면 로펌에 가거나 변호사 개업해서 먹고살지만 경찰들은 솔직히 그만두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이씨가 ‘사기’ 혐의로 강남서에 고소한 S사도 국내 최대 미술품 경매회사로,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의 미술품 거래를 중개하면서 급성장한 회사다. 과거에도 박수근, 천경자, 이우환 등 국내 유명화가의 작품과 관련한 ‘위작(僞作)’ 논란으로 여러 차례 홍역을 치른 바 있다.
그나마 4억1000만원에 ‘짝퉁’ 도자기 2점을 살 정도의 재력을 갖춘 이씨는 요지부동인 강남서를 움직인 경우에 속한다. 기초적인 3자 대질신문조차 없이 ‘사건 불송치’ 결정을 내린 강남서를 상대로 수사팀 교체를 강하게 요구했고, 이 같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국수본)에까지 편지를 써서 결국 수사팀 교체를 이뤄냈기 때문이다. 국가수사본부는 지난 문재인 정부 때 검경수사권 조정에 따라 수사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높인다며 ‘한국형 FBI(연방수사국)’를 표방하며 발족한 수사 컨트롤타워다.
비록 동일한 수사과장 아래의 수사팀과 수사관 교체에 불과했지만, 이 정도 교체만도 상당히 이례적 성과라는 것이 법조 관계자들의 평가다. 이씨는 “국수본에 개인형식의 편지를 쓴 것도 답답함을 해소할 길이 없던 차에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라며 “아마 이 같은 사례가 알려지면 국수본에 수사팀을 바꿔달라는 요구가 빗발칠 것”이라고 했다.

▲2022년 검수완박법 관련 공개변론을 앞두고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한 시민이 ‘검수완박은 범죄천국’이란 손팻말을 들고 있다. photo 뉴시스
고법판사 “사기범죄 천국” 경고
그나마 사건 관계자가 몇 안 되는 이 같은 사기사건은 새 발의 피라는 지적도 나온다. 검찰의 직접 수사권이 박탈된 직후부터 피해자가 다수이며 피해금액이 수천억, 수조원대에 달하는 대형 사기사건은 엄두도 못 낼 정도다. 지난 문재인 정부 때 연이어 터진 라임·옵티머스 등 초대형 사모펀드 사기사건은 물론 보이스피싱, 대출사기, 보험사기, 전세사기, 취업사기, 코인사기 등의 수사에 변죽만 요란하게 울린 채 좀처럼 성과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심지어 지난해 12월 대법원에서 징역 30년형이 확정된 라임사태 주범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 수수로 이름이 오르내려 불구속 기소된 2명의 더불어민주당 현역 의원 중 한 명은 4월 총선에서 지역구 공천을 받아 출마한다.
이 같은 일이 속출하자 현직 고등법원 고법판사가 “사기범죄 천국이 도래했다”고 이례적 경고를 날릴 정도다. 모성준 대전고등법원 고법판사는 최근 ‘빨대사회’라는 책을 내고 “수사권 조정 이후 수사지휘권이 폐지된 검찰은 경찰에 보완수사만 요구할 수 있게 되었고 대부분의 형사사건은 오롯이 1차적 수사종결권을 가진 경찰의 사건이 됐다”며 “경찰 또한 일단 마무리하고 검찰에 기소의견으로 송치한 사건에 대해서 검찰로부터 보완수사를 요구받게 된다면, 그 사이 쏟아져 들어온 다른 사건들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면서도 해당 사건의 사건기록을 다시 열어 검찰의 보완요구 사항을 충실하게 챙기는 것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경찰수사관 처우부터 개선해야”
물론 경찰 측에서는 검경 수사권 조정 후 검찰이 ‘보완수사’ 지시를 남발해 수사지체 현상을 키운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경찰청 수사국장과 지방경찰청장을 지낸 송강호 변호사는 “검찰에서 불필요하게 과도한 보완수사 지시를 하는데 이를 줄여야 한다”며 “경찰의 수사에 문제가 많다는 점을 부각시켜서 ‘검수완박’을 원복하려는 의도 아니냐”고 지적했다. 미진한 경찰수사에 불만이 있다면 공소시효가 남아있는 한 이의신청, 재고소 등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법무법인 SH의 임성욱 변호사는 “경찰 수사관들은 수사전문가일지는 몰라도 법률전문가는 아니다”라며 “수사관은 사실관계만 정립하고 법리적 해석이 필요한 부분은 검사가 해야 하는데 수사관이 법리적 해석을 해야 하니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기소가 안 될 사건을 경찰이 무리하게 기소의견으로 올리면 보완수사 지시를 거듭해 불송치시키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여기에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박봉에 업무 부담이 커진 베테랑 경찰 수사관들이 자리를 떠나고, 범죄에 대한 촉과 경험이 부족한 20~30대 수사관들이 빈 자리를 채우다 보니 검찰의 보완수사 지시는 더 늘어나고 이로 인해 수사지체 악순환이 심해진다는 것이 경찰 관계자의 설명이다.
서울 시내 한 경찰서 관계자는 “문재인 정부 때 의무경찰(의경) 폐지결정으로 일선 경찰서 방호인력마저 부족해 수사에 전념해야 할 수사관들이 순번을 돌며 경찰서 정문 경비를 서는 실정”이라며 “이런 판에 제대로 된 수사가 되겠느냐”고 말했다. 송강호 변호사는 “시원찮은 인력들이 시원찮게 수사하니 고소인과 피고소인의 불만이 모두 커지고 경찰에 대한 신뢰도 떨어진다”며 “일선 경찰 수사관들에 대한 처우를 대폭 개선해 우수 인력들이 들어오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간조선 이동훈 기자
03-18 필요성 더 커진 최저임금 차등 개편
높은 최저임금에 가계 부담 커
저임금 차별·인권 침해 논란도
일률적 최저임금 개편이 돌파구
ILO도 다원적인 차등화 인정해
22대 국회 출범 맞춰 결단해야
고령 부모 간병과 육아는 일반 가정에 큰 고통이다. 성인 자녀가 일을 그만두면서까지 치매 부모를 돌보는 데 매달리는 실정이다. 가정이 파괴될 지경이다. 육아도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돌봄 지옥’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이대로라면 저출생·고령화 문제가 더 심각해질 게 분명하다.
취약한 돌봄 구조 탓에 당장 가계의 비용 부담이 너무 크다. 지난 5일 한국은행의 보고서에 따르면 일반 가정은 소득의 절반 이상을 돌봄 서비스에 투입하고 있다. 지난해 간병인 고용에 들어간 돈은 월평균 370만 원으로, 65세 이상 고령 가구 중위소득의 1.7배에 달했다. 가사 도우미 비용도 월 264만 원으로 30대 가구 중위소득의 51.9%나 됐다. 이 때문에 경제활동을 포기하고 가족 돌봄에 전념하는 가족 간병 인력이 2022년 89만 명에 달했다. 20년 뒤인 2042년엔 212만∼355만 명으로 급증할 전망이다. 돌봄 인력난이 부담을 키운다. 돌봄 인력 부족은 2022년 19만 명 수준에서, 2032년엔 38만∼71만 명, 2042년엔 61만∼155만 명으로 계속 확대할 것으로 한은은 추산했다. 가족의 간병을 위해 경제활동을 포기하는 데 따른 국내총생산(GDP) 손실이 2022년 11조 원이고, 2042년엔 최대 77조 원으로 불어날 전망이다. 돌봄은 이제 시급한 국가적 과제라고 봐야 한다.
이에 따라 외국인 인력 도입은 불가피하다. 문제는 최저임금이 적용되면 비용이 크다는 점이다. 최저임금은 현재 시간당 9860원으로, 중위임금의 61%나 된다. 한은은 두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개별 가정이 사적 계약으로 외국인을 직접 고용하는 방식으로 최저임금을 피하거나, 돌봄 서비스업의 최저임금을 차등화하는 방안이다. 두 방안 모두 법 개정이 필요하지 않고, 내·외국인 간 임금 차별을 금지하는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에도 저촉되지 않는다.
반면, 외국인에 대한 임금 차별·인권 침해 같은 논란을 부를 수 있다는 부담이 따른다. 국내에 들어온 외국인이 최저임금을 주는 다른 분야의 일자리를 찾아 불법 체류하거나, 내국인 인건비의 동반 하락을 초래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부작용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과거 미국 등 선진국으로 일하러 가서 임금 차별 등 불이익을 당한 경험이 있다. 국제사회는 주요 7개국(G7)을 G8, G9으로 확대해 한국을 참여토록 하는 방안도 논의하는 중이다. 외국인만 차별 대우하는 것은 한국의 국격에 맞지 않는다.
결국 최저임금 특례나 예외 추가가 아니라, 업종별·규모별 차등화 개편을 통해 돌파구를 만드는 게 옳다. 제도화를 통해 돌봄 문제를 정면 돌파해야 한다. 인적 자원의 재분배도 염두에 둬야 한다. 최저임금 차등화는 2년 전부터 논의돼왔고, 지난해는 영세 소상공인들로 구성된 소상공인연합회가 심각한 경영난을 더는 감당 못 한다며 차등화 도입을 호소했던 터다. 인력 감축도 이젠 한계라는 음식업·도소매업·숙박업·미용 등 생활 밀착 업종 등은 특히 절박하다.
너무 빨리 많이 오른 최저임금이 초래한 폐해는 이미 확연하다. 일자리가 줄고,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 근로자 비율(최저임금 미만율)이 되레 느는 역설을 통계가 입증한다. 최저임금은 최하층 근로자 보호가 명분이다. 그러나 최저임금을 올리면 최하층은 물론, 바로 위 계층부터 그 이상의 상위 계층 임금까지 연쇄적으로 동반 인상해야 한다. 임금 체계가 연공서열형인 탓에 임금 계층 간 격차를 유지하려니 연봉이 1억 원 안팎인 계층까지 임금을 올려야 하는 것이다. 임금 격차·양극화를 오히려 확대한다. ILO 가입국도 절반 정도가 산업별 차별화 등 다원적인 최저임금을 시행한다. 싱가포르 등은 아예 최저임금이 없다.
저출생·고령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인구가 격감하는 노인 국가로 전락할 뿐이다. 국가 소멸을 막기 위해서라도 ‘돌봄 고통’을 시급히 해소해야 한다. 누구나 자녀이고, 부모인 이상 절실한 민생 문제다. 일률적인 최저임금을 개편해야 한다. 자투리 시간에 일하기를 원하는 학생·취업준비자·주부·투잡 희망자의 요구에도 부합해 단기 일자리를 늘리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강성 거대 노조에 편향된 야당 주도의 현 국회로는 어려울 것이다. 4·10 총선 이후 구성될 제22대 국회 출범에 맞춰 결단해야 한다.

문화일보 문희수 논설위원
03.19 AI 광풍 1년, 위기의 한국 반도체
대만계 엔비디아와 TSMC
AI 반도체의 수퍼 파워로 등극
메모리 시장까지 뒤흔들 태세
삼성의 ‘초격차’ 기술은
후발 주자에 따라잡히는 형국
대기업 특혜 논리 못 넘어서면
K반도체의 미래는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탐독한 책 ‘반도체 삼국지’의 저자 권석준 성균관대 교수는 올해 1월 페이스북에 “삼성전자는 불과 6~7년 전만 해도 ‘초격차’라는 수식어의 사용권을 독점해도 된다고 자부할 정도로 기술력에서든 원가 경쟁력에서든 반도체 제조업만큼은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회사였다. 하지만 AI 반도체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을(乙)의 위치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썼다. 삼성전자가 AI 반도체의 핵심 부품인 HBM(고대역폭 메모리) 경쟁에서 SK하이닉스는 물론 메모리 업계 만년 3위인 미국 마이크론에조차 밀리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HBM은 D램 반도체 여러 개를 수직으로 연결해 데이터 처리 속도와 에너지 효율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메모리다. 가격도 기존 D램보다 5배 이상 비싸다. AI 반도체의 황제로 등극한 미국 엔비디아는 하이닉스의 HBM을 공급받아 대만의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기업인 TSMC에 최종 조립(패키징)을 맡긴다. 엔비디아·TSMC·하이닉스로 연결되는 삼각 생산 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삼성이 2019~2020년 HBM 개발에 차질을 빚는 사이, 하이닉스가 빠르게 치고 나가 HBM 시장을 선점했다. 삼성이 수익성 극대화에만 치중해 차세대 제품 개발을 소홀히 한 게 실책이었다.
삼성도 최근 HBM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엔비디아의 제품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해 애를 먹고 있다. 여기엔 기술적인 문제 외에도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정치 역학도 크게 작용한다. 파운드리 분야에서 TSMC와 경쟁하는 삼성이 엔비디아와 TSMC의 혈맹(血盟) 관계를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다는 것이다. 대만계인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TSMC의 모리스 창 창업자를 아버지처럼 존경하며, 지난해 말 대만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도 “모리스 창과 TSMC가 없었다면 지금의 엔비디아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미국 마이크론이 최근 2분기부터 엔비디아에 HBM을 공급한다고 밝히면서, TSMC와의 연대를 유달리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더 뼈아픈 것은 마이크론이 삼성·하이닉스에서 연구원을 100명 넘게 데려가면서 기술 격차를 빠르게 좁혔다는 사실이다.
미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미국 인텔의 파운드리 시장 재진입도 큰 부담이다. 지난달 21일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열린 인텔 파운드리 2024 행사는 미국 정·재계 거물들이 총출동해 ‘팀 USA’의 힘을 과시하는 이벤트였다. 팻 겔싱어 인텔 CEO가 “대만과 한국이 반도체 제조 비율의 80%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제는 미국·유럽 생산 비율이 50%는 되어야 한다. 인텔이 2030년까지 파운드리 세계 2위 기업으로 도약하겠다”고 포부를 밝히자,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아 나델라 CEO가 영상으로 깜짝 등장해 “인텔의 기술로 반도체를 만들겠다. 미국 내 강력한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인텔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화답했다. 현재 파운드리에서 TSMC의 압도적인 점유율(61.2%)을 감안하면 인텔은 현재 2위인 삼성전자를 향해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세계 반도체 산업은 대화형 AI 서비스 챗GPT가 등장한 2022년 11월 이후 현기증 나게 변하고 있다. 엔비디아는 주가가 무려 6배 넘게 치솟으면서 시가총액에서 세계 3위에 올랐고, TSMC 시가총액도 삼성전자의 2배로 커졌다. 또 세계 각국이 쏟아붓는 반도체 보조금은 한국이 장악해 온 메모리 시장까지 뒤흔들 태세다. 일본 히로시마에 신공장을 짓고 있는 마이크론은 투자금의 40%를 일본 정부 보조금으로 받는데, 이 덕분에 마이크론 전 세계 공장의 원가 경쟁력이 단숨에 7%나 향상된다고 한다. 반면 삼성·하이닉스는 일본의 구애에도 불구하고 친일 논란을 의식해 일본 공장 건립을 1년 넘게 검토만 하고 있다. 이런데도 한국 기업들은 대기업 특혜 논리와 각종 규제에 밀려 터 파기 공사만 4~5년씩 해야 하고, 정부 지원도 지금처럼 투자금이 마르는 시기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세제 혜택이 전부다. 우리 기업과 정부가 위기의식을 가지지 않으면 3~4년 뒤 한국의 반도체 경쟁력이 나락으로 떨어져도 이상할 게 없다.
조선일보 조형래 기자
03-19 “한국이 아태 허브 될 절호의 기회” 암참 제언 경청해야
글로벌 기업의 탈중국에 따라 한국이 유력한 ‘아시아·태평양 허브’로 부상하고 있다. 한국에 진출해 있는 800여 개 미국 기업이 가입한 암참(주한 미국상공회의소)은 한국이 과도한 규제를 풀어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기만 해도 중국을 떠나는 기업들을 유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공언해 주목된다. 암참은 이 같은 내용을 담은 32쪽 분량의 ‘한국의 글로벌 기업 아태지역 거점 유치 전략’ 보고서를 최근 대통령실에 전달했다고 18일 밝혔다. 정책 제언까지 담은 암참의 보고서는 1953년 설립 이후 처음이다. 이사진 30명이 동의한다는 의미로 직접 서명한 것도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선의의 당부일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암참 회원사들은 아태본부를 두고 싶은 국가로 한국을 싱가포르에 이어 2위로 꼽았다. 제임스 김 암참 회장은 싱가포르 등에 비해 낮은 생활비, 정보기술(IT) 인프라, 한류, 문화·교육 여건 등이 매력적으로 평가됐다고 분석했다. 일본보다 영어를 잘하고 대만보다 안전하다는 점도 강점으로 꼽혔다. 문제는, 글로벌 스탠더드와 먼 한국의 갈라파고스식 규제다. 보고서는 과도한 규제로 주 52시간 근로제, 비정기 세무조사, 높은 법인세 등을 열거하면서 특히 CEO를 징벌하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과 중대재해처벌법이 한국행을 막는 대표적인 규제라고 지목했다. 일본·홍콩·싱가포르 등에 비해 훨씬 무거운 징역형 또는 벌금형을 부과한다고 비판했다. 김 회장은 “정작 괴롭힌 가해자는 내버려두고 CEO를 처벌하는 법에 많은 CEO가 황당해한다”는 반응도 덧붙였다.
글로벌 기업의 아태본부는 동북아·동남아·오세아니아 지역 사업을 총괄하는 헤드쿼터다. 싱가포르에 이런 허브를 둔 기업은 5000개, 홍콩은 1400여 개인데 한국은 100개도 안 된다. 서울이 글로벌 기업의 아태 허브가 되면 해외투자 유치도 급증할 게 분명하다. 규제 혁파는 국내에서도 이미 수없이 제기된 과제들이다. 암참 제언이 아니더라도 총선 뒤 여야와 국민이 힘을 모아 추진해야 할 과제다.
문화일보 사설
03.20 공시가격 현실화, 더디 가도 가야 할 길 아닌가

▲윤석열 대통령이 19일 서울 영등포구 문래예술공장에서 열린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 - 스물한 번째, 도시혁신으로 만드는 새로운 한강의 기적'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문재인 정부의 징벌적 과세는 분명 잘못된 정책
현실화 목표치는 낮추되 ‘능력 따른 과세’ 지켜야
정부가 부동산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을 폐지하기로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어제 민생토론회에서 “더 이상 국민들께서 마음 졸이는 일이 없도록 무모한 (부동산)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을 전면 폐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20년 문재인 정부가 도입한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은 시세 대비 공시가격 비율인 공시가격 현실화율을 매년 단계적으로 높여 최장 2035년까지 90%로 끌어올리는 계획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로드맵이 집값 폭등과 맞물리면서 ‘보유세 폭탄’이 된 건 주지의 사실이다. 2016~2020년 매년 4~5%대 상승률을 보이던 공동주택 공시가격은 로드맵 도입 이후 2021년 19.05%, 2022년 17.2%가 치솟았다. 윤 대통령이 “과거 정부는 부동산 정책 실패로 집값이 오르자 이를 징벌적 과세로 수습하려 했다”고 비판할 만하다.
지난 정부가 수요와 공급을 아우르는 부동산 정책이 아니라 세금과 대출 규제로 정상적 주택 수요까지 때려잡는 ‘부동산 정치’에 매몰된 점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그렇다고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까지 완전 폐지하는 것은 합리적인 정책은 아니다. 공시가격 현실화는 과거 보수·진보를 떠나 마땅히 가야 할 방향이라는 공감대가 있었던 정책이다. 속도 조절을 둘러싼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공시가격은 재산세·종합부동산세와 건강보험료 등 67개 행정 제도의 기준이다. 공시가격과 시세의 차이가 크면 능력에 따라 세금을 부담하는 응능(應能)원칙이라는 조세의 기본에 어긋난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에 따르면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이 예정대로 2035년까지 진행되면 재산세 부담이 61% 증가한다. 정부는 국민의 경제적 부담이 대폭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 혜택은 주로 부자나 중산층 이상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보유세는 고가 주택과 다주택 소유자가 많이 부담하기 때문이다.
로드맵을 폐지하려면 부동산 공시법을 개정해야 한다. 윤 대통령이 “법 개정 전이라도 폐지와 같은 효과가 나올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한 만큼 공동주택 공시가격은 앞으로도 올해 상승률(1.52%) 수준을 유지할 것 같다. 현 정부는 이미 종부세 세율을 내리고 공시가격을 과세표준에 반영하는 비율인 공정시장가액비율도 인하했다. 과도한 세 부담을 줄이기 위해 로드맵의 공시가격 현실화율 목표치를 낮춰 잡더라도 시세와 공시가격의 차이를 줄이는 건 가야 할 방향이다. 지난해 11월 조세재정연구원도 비슷한 의견을 냈었다. 지금과 같은 시장 안정기에 정부가 보유세 완화 신호를 내보내면 시장을 불안하게 할 수도 있다. 안 그래도 세수 비상인데 총선을 앞두고 귀에 착 감기는 세금 깎아주는 발표가 계속되는 것도 걱정된다.
중앙일보 사설
03-20 ‘공시가 90%’ 로드맵 폐기, 부동산세제 정상화 첫걸음
정부가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을 전면 폐기하기로 했다. 문재인 전 정부가 2030년까지 아파트 등 공동주택의 공시가를 시세의 90%까지 올리겠다고 했던 로드맵을 버리고, 현실화율을 현 수준(평균 69%)으로 동결함으로써 과도한 보유세 부담을 줄인다는 것이다. 이 정책의 연장선에서 국토교통부는 지난해와 같은 현실화율을 적용한 2024년 공동주택 공시가격을 19일 발표했다. 전국적으론 평균 1.52%, 서울은 3.25% 오른 수준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민생토론회에서 징벌적 부동산세 정책을 비판했다. 윤 대통령은 “과거 정부가 공시가격을 매년 인위적으로 상승시키는 공시가 현실화 계획을 시행해 엄청난 부작용이 드러나고, 국민 고통만 커졌다”고 성토했다. 또 “무모한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을 전면 폐지하겠다”면서 “법 개정 전이라도 다양한 정책 수단을 통해 폐지와 같은 효과가 나도록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토부는 지난해부터 공시가 현실화율을 로드맵 이전인 2020년 수준으로 되돌렸고, 오는 11월 연구 용역 결과를 토대로 적정 비율을 정해 변동 없이 적용할 계획이다.
부동산세금 부담을 줄이는 것은 옳은 방향이다. 문 정부가 로드맵을 적용하기 시작한 2021년부터 공동주택 공시가격은 연평균 18% 상승해, 임기 5년 동안의 전체 상승률이 63%에 달했다. 기존 로드맵으로는 시세 변동을 고려하지 않아도 재산세 부담이 61% 급증한다는 게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분석이다. 적정 과세 원칙을 크게 이탈한 징벌세라는 말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로드맵 폐기에 그쳐선 안 된다. 왜곡·편향된 부동산세금을 정상화하는 첫걸음일 뿐이다. 성장과 인구구조 변화 등에 따라 주택환경도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이번 조치를 계기로 종합부동산세·재산세 등 보유세·거래세·양도세 같은 부동산 세제를 시대 변화에 맞춰 전면 재설계에 나설 필요가 있다.
문화일보 사설
03-21 ‘공시가 90%’ 폐지 당연한 3대 이유
공시가(公示價)는 각종 토지 관련 세금의 과세 기준일 뿐 아니라 자산평가 및 공직자 재산 신고 등의 기본 자료, 건강보험료·기초연금 등 다양한 행정 절차에도 쓰이는 근간 지표다. 따라서 공시가가 시세 수준으로 오르면 그 여파에 따른 국민 고통은 극에 달하므로 과도한 징세로 파탄한 왕조에 관한 수많은 역사적 교훈이 떠오른다. 윤석열 정부가 이를 막은 것은 매우 큰 업적이다.
윤 대통령은 19일, 21번째 민생토론회에서 “더 이상 국민이 마음 졸이는 일 없도록 무모한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을 전면 폐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대선 후보이던 2021년 12월 “2022년 주택 공시가격을 2020년 수준으로 환원한다. 한 해에 공시가격을 19%나 올리는 국가는 없다. 문재인 정부가 공시가격을 환원하지 않으면 관련 법, 시행령을 개정해 공정시장가액 비율을 인하할 예정”이라고 한 공약의 실천이기도 하다. 당시 문 정부의 공시가 현실화율 목표는 무려 시세의 90%였다.
참여연대는 지난 10여 년 동안 꾸준히 과세표준을 현실화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2017년 6월 참여연대 정책자료집에 ‘종합부동산세에서는 최고세율을 3.0%로 하고, 공정시장가액 비율도 100%로 올려야 한다’고 한 바 있다. 이는 문 정부의 2018년 9월 관계 부처 주택시장 안정 대책에서 ‘종합부동산세 최고세율을 3.2%로 인상하고 공정시장가액 비율을 2022년까지 100%로 현실화하겠다’는 발표와 맥을 같이한다. 당시는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토지국유화’를 주장하던 때라 이런 정도의 정책은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외국의 지가제도(송석호, 2001)는 공적 지가제도가 있는 일본·독일·대만 등과 시장경제 원리에 맡기는 영국·미국·프랑스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우리나라와 같은 기준의 과세표준으로는 사용하지 않으며, 독일도 매매가격 사례집에 활용하고, 대만은 토지등기부 기재를 위한 지표로 인용하는 정도다. 영국·미국·프랑스의 재산세 산출에서는 각종 주거비용을 제외하며, 양도세 계산 방식도 우리나라와 전혀 다르므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참여연대의 주장과는 달리, 공시가를 감정가 또는 시세의 50∼60% 이내로 산정하는 이유는 크게 3가지다.
첫째, 공시가는 ‘부동산 가격 공시에 관한 법률’에 따라 매년 1월 1일을 기준일로 하여 5월 31일까지 결정·공시한다. 그 사이에 지가의 급등락을 반영하기 어렵기 때문에 완충을 두는 것이다.
둘째, 지가는 국민 개인이 올리고 내리고 할 수 없다. 정부 정책이나 기반시설 건설과 민간 개발사업의 투자 등 수많은 외부경제에 의해서 가치 변화가 생기므로 이 지가 상승분을 그냥 무심코 사는 개인에게 부담시킨다는 것은 과학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다.
셋째, 시세 수준의 공시가를 앞서 말한 모든 자료의 기초로 사용하면 정부는 세수가 늘어나 좋고 부자 징수세를 재분배하는 것이 사회정의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세금은 임차인 등에게 전가(轉嫁)되거나 국민 실소득을 줄여 자금 흐름 경화 현상을 가져와 서민 경제에 치명타가 된다는 증거는 너무도 많다.
민주당과 좌파운동권이 주장하는 공시가 현실화는 무모할 뿐 아니라 국민 고통과 경제 활성화를 무시한 선동이다.

문화일보 윤주선 한양대 부동산융합대학원 겸임교수
03.22 산사태 나자 박정희 지시, 세계적 녹화사업 시동
경주·울산 동대봉산과 산림녹화
박정희 대통령이 재임 중 가장 잘한 일은 무엇일까? 최빈국에 속한 우리나라를 20년 만에 중진국에 올려놓아 지금은 세계 10위권 경제를 자랑하니까 당연히 경제발전이다. 그러나 경제발전을 위해 치른 희생이 만만치 않다. 자유를 크게 제한받은 데다 목표 지상주의로 인한 부작용까지 있어 경제발전과 관련한 공에선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모든 국민이 동의하는 업적이 있을 텐데 그건 산을 푸르게 한 일이 아닐까. 한때 우리 산에는 나무가 없어 대개가 민둥산이었다. 이제는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녹색을 자랑하므로 이는 전적으로 박 대통령의 공이다.
10년간 30억 그루 전 국토에 심어
민둥산 탈바꿈 박정희 최대 치적
담당관 고건, 철근 사방법 채택
박정희 눈에 들고 총리 두 번 지내
국제회의서 비결 문의 쏟아지자
산림청 폐지 없던 일로 하기도
동대봉산 마사토, 단골 산사태 주범

▲경북 포항시 흥해읍 해안가에 조성된 사방기념공원. 동대봉산에 산사태가 났을 때 복구를 지시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사진 김정탁, 김석우]
전 국토가 푸르게 된 데는 동대봉산의 산사태라는 계기가 있었다. 동대봉산은 경주 보문관광단지와 울산광역시 북구를 잇는 산줄기 중간에 넓게 퍼져있다. 1972년 이 지역에 폭우가 쏟아져서 산사태가 크게 났다. 박 대통령이 현장을 직접 방문해 토사가 흘러내려 엉망이 된 동대봉산을 바라보고는 근본적 대책을 지시했다. 박 대통령이 이런 강력한 지시를 내린 데는 이 산의 토양이 평소에는 딱딱하게 굳지만, 비가 많이 오면 곤죽처럼 흘러내리는 마사토여서다. 그래서 식목일 때마다 나무를 심어도 장마철이 되면 심은 나무가 유실되는 상황이 매년 되풀이됐다.
또 다른 이유에서도 근본적 대책이 필요했다. 도쿄 하네다공항을 출발해 김포공항에 가려면 비행기 운항노선 상 동대봉산 위를 반드시 지난다. 그러면 나무가 없어 온통 황토색인 동대봉산과 마주한다. 동대봉산의 이런 황토색은 일본 상공을 지날 때 내려다보이는 울창한 숲의 푸르름과 너무 대조적이다. 게다가 당시 우리나라에는 국제선 항공편이 많지 않아 미국과 유럽에서 귀국하려면 대부분 하네다 공항을 거쳐서 들어와야 했다. 그러니 외국인 눈에 비친 한국의 첫인상은 벌거벗은 민둥산이다. 이 점이 박 대통령의 자존심을 건드려 확실한 복구를 지시하게 된 거다.

▲경주와 울산에 걸쳐져 있는 동대봉산의 한 봉우리의 사방사업 이전과 이후 비교 모습. [사진 김정탁, 김석우]
이에 따라 내무부(지금의 행정안전부)가 해당 도(경남·경북)를 제치고서 박 대통령의 지시를 직접 이행하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내무부 새마을담당관이던 고건에게 이 일이 맡겨졌는데 여기가 관료로서 그의 신화가 시작되는 분수령이다. 그가 박 대통령의 지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자 30대에 전남 지사에 발탁되더니 그 후 농수산부·교통부·내무부 장관을 거쳐서 서울시장과 국무총리를 두 번씩 지내는 관운을 누리게 되었다. 공무원으로서 이런 화려한 경력은 거의 전무후무한데 산림녹화 사업이 뜻밖에 이런 행운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이런 행운은 부산의 한 전문대 토목과 교수의 예기치 않은 방문에서 비롯된다. 고건이 산사태 현장에 내려갔을 때 그가 묵은 경주의 한 여관에 해당 교수가 찾아와 동대봉산과 같은 마사토에선 일반 사방(砂防) 방식이 아니라 철근을 심는 콘크리트 방식으로 사방사업을 해 수로를 터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 방식대로 하니까 정말로 흙이 흘러내리지 않아 심었던 묘목도 잘 자라나 10년 넘게 되풀이되던 실패가 마무리되었다. 동대봉산의 사방사업이 성공해 산이 푸르게 되자 박 대통령은 전 국토를 푸르게 하는 사업에 곧바로 착수했다. 그 실무 책임도 고건에게 떨어졌다.
고건 부친, 형제에게 갹출해 아들 판공비

▲포항시 흥해읍 사방기념공원 건물 전경. [사진 김정탁, 김석우]
참고로 고건의 부친은 한국 철학계 원로로서 서울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고형곤 박사다. 그는 아들이 젊은 나이에 도지사가 되자 판공비가 부족해 부정한 돈을 탐낼까 걱정돼 판공비 보조 명목으로 형제들에게 돈을 갹출해서 매달 보냈던 분이다. 고건이 관료로서 청렴의 아이콘이 된 건 부친의 보이지 않는 이런 헌신 탓이다. 그런데 고형곤 박사가 철학과가 아니라 이리농고 임학과를 졸업했으니 산림녹화와 고건과의 인연은 이미 부친에서 시작된 게 아닌가 상상해본다.
박 대통령은 고건에게 자신이 주재하는 월례 경제동향 보고회의에 동대봉산 사방사업의 성공 사례를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부이사관에 불과했던 고건에게 이런 큰 회의 보고는 엄청난 기회이자 동시에 압박이었는데 그만큼 박 대통령이 이 사업을 중요하게 여겨서다. 곧이어 범정부 차원에서 ‘국토조림녹화 10개년 계획’이 수립되었고, 이 계획에 따라 산림청은 한동안 농수산부에서 내무부로 소관이 바뀌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에 국토조림녹화 계획이 빠짐없이 보고되었다.
1974년 4월 5일 경기도 양주군 백봉산(지금은 남양주시에 위치)에서 열린 식목일 기념행사에서 박 대통령은 “우리 후손들로부터 우리 조상이 10년 동안 고생해서 울창한 산림을 만들었다는 소리를 듣도록 합시다”라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매년 3억 그루의 묘목이 10년 동안 전 국토에 심어졌다. 그러니 총 30억 그루의 묘목이 국토를 푸르게 하는데 동원된 셈이다. 이런 엄청난 양의 묘목은 각 마을에서 재배됐고, 정부가 이를 구매했다. 그렇지만 묘목 심는 일은 주민들의 몫이 돼 대대적인 국민 식수 운동이 전국에서 벌어졌다. 그 결과 우리 국토가 지금처럼 푸르게 되었다.
윤치호(1865~1945)는 자신의 일기에 ‘나무만 보면 부엌 아궁이를 생각하고, 그 나무를 자르지 않으면 행복해하지 않은 조선 사람들에게 질려 버렸다. 산을 벌거숭이로 만들고, 아름다운 꽃을 잘라버리는 무자비한 손에 혐오감을 느낀다’라고 토로했다. 우리 선조들은 당장에 필요한 땔감을 구하기 위해 산의 나무를 마구 벤 게 사실이다. 그래서 비가 많이 오면 산에서 흘러내린 물로 인해 식량 생산까지 차질을 빚었다. 북한이 한때 심각한 식량난을 겪은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도 과거에는 북한 주민이 겪은 비극을 되풀이했을 텐데 1974년 식목일 선언이 이를 마감하는 전기가 되었다.
한편 박 대통령의 나무 사랑은 각별했다. 한 예로 구미시청 입구의 길게 굽은 길을 들 수 있다. 경부고속도로에서 나와 구미시청에 가려면 새마을로와 송정대로를 각각 이용해야 하는데 이 길들이 직각으로 연결되었으면 거리를 단축해서 더 빨리 갈 수 있다. 그런데 새마을로를 크게 우회시켜 송정대로와 연결되게 만들었다.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구미시청 앞의 큰 소나무 단지가 직각으로 연결된 길로 인해 훼손되는 걸 피하기 위해서다. 이 소나무 단지가 박 대통령이 초등학교 시절 등하교 때 나무에 올라타 밥 지을 때 나오는 굴뚝의 연기를 부러워하며 바라봤다는 곳이다.
유엔도 최단 기간 녹화국 선정

▲박정희 대통령이 초등학교 시절 걸어 다니던 구미시청 앞의 소나무 숲. [사진 김정탁, 김석우]
산림녹화 사업의 성공으로 마침내 우리나라는 금수강산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도 한국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개발도상국 중 최단기간에 산림녹화에 성공한 국가로 선정했다. 그래서 독일이 세계대전 이전에 인공조림에 성공한 나라라면 한국은 세계대전 이후에 성공한 나라이다. 그런데 독일은 거의 구릉지라 조림이 쉬웠던 반면 한국은 조림이 어려운 산악지대가 대부분이라 산림녹화 사업의 성공이 더욱 빛난다. 게다가 지금 우리나라는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어 산림녹화 사업의 성공이 기후변화에 미리 대응하는 효과까지 지닌다.
그런데 산림청이 한때 정부조직에서 없어질 뻔했다. 노태우 정부 때 정부 부처 간소화를 위해 행정개혁위원회가 설치되었는데 산림청이 첫 번째 폐지 대상으로 고려되었다. 이때 위원회 책임자였던 신현확 전 총리가 한 국제회의에 참석했다가 많은 개발도상국 지도자들로부터 한국에서 산림녹화가 어떻게 성공했는지에 관한 자료를 간곡히 부탁받고는 태도를 바꾼 덕에 산림청이 다시 살아났다는 일화가 있다.
동대봉산은 지금 유수의 관광지로 다시 태어났다. 그래서 찻집도 많고 정상에는 고급 빌라 단지까지 있다. 게다가 이곳 정상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동해가 웅장하게 펼쳐지고, 가을에는 억새 풀 물결이 은빛을 반짝거리며 빛난다. 이 은빛 물결 가득한 억새 풀숲 사이로 난 좁은 길에 들어서면 내가 걷는지 흔들리는지 모를 정도로 황홀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인데 한때는 산사태로 나무가 자라지 못해 골칫덩이였으니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중앙일보 김정탁 노장사상가
03-22 모호한 출국금지 제도, 위헌성 짙다
호주대사 논란 본질 따져볼 때
野 고발하고 공수처는 뭉개기
출국금지와 해제 권한이 쟁점
기본권 제한으로 최소화 당연
절차 모호하고 행정 재량 과도
기업인 해외 출장 금지도 문제
4·10 총선을 20일 앞두고 여야 간에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의 ‘호주 출국’ 문제를 둘러싼 공방이 치열하다. 논란은, 지난해 7월에 발생한 해병대 채모 상병 사망 사고에 대한 책임자를 경찰에 이첩하는 과정에서 이 전 장관이 당시 사단장의 혐의를 기재하지 말라고 지시를 했다며 더불어민주당이 그를 지난해 9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고발하면서 시작됐다.
공수처에 고발되면 피고발인은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되는데, 이 상태에서 이 전 장관이 주호주 대사로 임명돼 출국을 한 것이다. 쟁점은 이 대사가 출국하는 과정에 공수처의 허락을 받았는지 여부이다. 이와 관련해 짚어 봐야 할 쟁점은 크게 2가지다. 그것은, 공수처에 고발된 피의자는 출국이 당연히 금지되는가와 피의자 출국 시 공수처의 허락이 필요한가이다.
출입국관리법상 피의자의 출국이 금지된다는 규정은 없다. 즉, 기소돼 형사재판 중인 자는 금지되지만, 기소되기 전인 피의자 신분 상태에서 출국이 금지된다는 규정은 없는 것이다. 다만, 범죄 수사를 위해 출국이 적당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1개월 이내의 기간을 정해 법무부 장관이 재량으로 출국을 금지할 수는 있다. 이 사건의 경과를 보면 이 전 장관이 지난 4일 주호주 대사로 지명된 후 지난 8일 법무부가 출국금지를 해제하고 10일 호주로 출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9월 공수처에 고발되고 5개월 정도 지난 후 법무부가 출국금지 조치를 내렸다가 갑자기 해제한 것이다.
만약 이 전 장관이 피의자 신분이 된 직후에 법무부가 출국금지 조치를 내렸다면 이미 지난해 10월에 출국금지 조치가 해제됐어야 한다. 물론, 고발인인 민주당이 법무부에 출국금지 이의신청을 해서 뒤늦게 조치를 내릴 수는 있다. 그래도 여전히 출국금지 조치가 명확한 법적 근거도 없이 법무부의 재량에 따라 자의적으로 집행된다는 의혹을 거두기는 어렵다.
법상 공수처가 해제를 허락할 수 있다는 법적 근거도 없다. 공수처는 직접 수사할 수 있으며, 필요한 경우 대검찰청·경찰청 등 관계 기관의 장에게 수사 협조를 요청하거나 대검에 통보 또는 이첩할 수는 있지만, 출국금지 조치를 하거나 법무부가 해제하는 데 허락할 수 있다는 규정은 없다. 지난 18일 대통령실이 입장문을 통해 ‘법무부에서만 출국금지 해제 허락을 받은 게 아니라, 공수처에서도 받았다’고 한 데 대해 공수처가 즉각 반박 성명을 낸 이유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이 사건의 본질은, 법무부가 관행적으로 사용해 온 광범위한 출국금지 조치라는 재량권 행사에서 찾을 수 있다.
출국금지는 헌법 제10조에서 보장한 국민의 행복추구권 중 이동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제한하는 행정처분이라는 점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만 허용돼야 한다. 출입국관리법도 제4조 제1항에서 형사재판 중이거나 형 집행 중인 자, 벌금이나 추징금을 내지 않은 자, 세금 체납자, 양육비 채무자, 기타 이와 유사한 범죄자만 출입국을 금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다만, 제2항에서 ‘범죄 수사를 위하여 출국이 적당하지 않은 자’에 대해 1개월 이내로 금지 조치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법무부가 이 규정을 폭넓게 사용하다가 이번 사태가 발생한 것으로 이해된다.
헌법은 제37조 제2항에서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구체적인 법적 근거가 있어야 함에도 ‘적당하지 않은 자’와 같은 추상적인 요건을 근거로 출국금지 조치를 하는 것은 법치주의의 원칙 중 명확성의 원칙에 위반되는 위헌적 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수처 역시 고발인의 이의 제기만으로 법무부에 출국금지를 요청하는 것으로도 국민의 기본권을 과도하게 침해하는 데 일조한 공범적 행위임이 분명하다.
법무부의 출국금지 조치는 기업 총수들의 해외 출장을 금지시키는 것과 관련해서도 이미 크게 논란이 된 바 있다. 이번 기회에 여야는 합심해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출국금지에 관한 법무부의 과도한 재량권을 제한하는 입법적 노력이 필요하다.

문화일보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
03.24 5·18이 전 국민의 기념일이 되려면
보수만 때리는 5·18단체… 이중잣대 버려야 한다

▲일러스트=유현호
“(5·18 당시) 북한 개입 부분은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충실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대구에서 국민의힘 공천을 받은 도태우 후보가 5년 전 유튜브에서 한 말이다. 이에 분노한 5·18기념재단은 도 후보의 공천을 취소하라고 촉구했다. 도 후보는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 발족을 맞아 5·18 민주화 운동 당시 북한의 왜곡 방송, 조총련의 활동 등 북한의 개입 시도에 대해 위원회가 철저히 조사해 주실 것을 요청하는 차원이었다”며 “정제되지 못한 개인적 발언들로 심려를 끼쳐드린 데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지만 논란은 더 커졌다.
5·18유족회 등 다른 5·18 단체들이 합세하고, 국힘 공천으로 마포을에 출마하는 함운경도 “말로만 사과하고 넘길 문제가 아니다”라며 사퇴를 요구하자 국힘 공관위는 결국 도 후보의 공천을 취소한다. 5·18은 대한민국이 인정한 민주화 운동이다. 사실이 아닌 내용으로 이를 폄훼한다면 그에 걸맞은 책임을 지는 게 맞다. 문제는 이 잣대가 굉장히 편향적이라는 점이다.
예컨대 대선이 한창이던 2021년 10월, 윤석열 당시 후보가 부산에 가서 “(전두환씨가)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고 말하는 분이 많다”고 한 적이 있다. 경제를 김재익 경제수석에게 맡기는 등 각 분야 최고수들을 중용했다는 의미였지만, 이 말은 곧 엄청난 논란에 휩싸였다. 5·18 단체들이 “광주와 호남 시민들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전두환을 비호한 망언에 대해 즉각 사과하라”며 들고일어났기 때문이다. 민주당도 가세했다. 이재명 후보는 “집단 학살범도 집단 학살 빼면 좋은 사람이라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했고, 호남 지역 의원들은 아예 사퇴를 촉구했다. 결국 윤 후보는 사과했지만, 이 때문에 이재명에게 지지율이 역전되는 등 곤욕을 치렀다.

▲2021년 11월 광주 북구 5.18민주묘역을 찾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의 방문을 반대하는 시민들이 피켓을 들고 진로를 막고 있다. /김영근 기자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3주 뒤인 11월 10일, 윤석열 국힘 대선 후보는 전두환 발언 이후 처음으로 광주 5·18 묘지를 찾는다. 당시 기사를 보자. “‘참배길’은 험난했다. 윤 후보가 오후 4시 20분쯤 5·18 민주 묘지 ‘민주의 문’ 앞에 도착하자 일부 유공자 단체와 시민 단체 회원들은 ‘가짜 사과 필요 없다’ 같은 문구를 적은 피켓을 들고 ‘돌아가라 윤석열’을 외쳤다.” 결국 윤 후보는 추모탑 분향을 포기한 채 “제 발언으로 상처 받으신 모든 분께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며 재차 사과했다.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수록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도 이때였다.
하지만 광주의 여론은 여전히 차가웠다. 오죽하면 이 기사에 다음과 같은 댓글이 달렸을까? ‘5·18 정신이 저런 거라면 차라리 때려치우는 게 낫겠다.’ 기절초풍할 일은 그때부터 한 달 뒤 벌어졌다. 경북 칠곡을 찾은 이재명 후보가 전두환 대통령에게 공과가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전두환은 3저 호황을 잘 활용해서 경제가 망가지지 않도록, 경제가 제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한 것은 성과인 게 맞다.” 이게 윤 후보가 한 말과 대체 뭐가 다른지 모르겠지만 호남, 특히 5·18 단체들은 어떤 비판조차 하지 않았다. 놀란 기자들이 여기에 관해 질문하자 이재명은 사과는커녕 “일부만 떼서 정치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답했다. 민주당 안민석은 이재명의 발언이 윤 후보의 그것과는 “결이 다르다”며 옹호했는데, 이런 충신이 이번 총선 후보에서 탈락한 것은 신기한 일이다.
그때부터 2년여가 지난 2024년 2월 14일, 2심까지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조국은 신당 창당을 선언하면서 5·18을 제대로 비하한다. “5·18 이후 40여 년이 흘렀지만 5·18 항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저와 제 가족, 함께했던 주변 분들이 죽음 같은 수사 대상이 되면서 뒤늦게 그 고통과 분노를 피부로, 몸으로 이해하게 됐다.” 서류 위조와 증거인멸, 감찰 무마 등을 저질러 수사받은 자기 가족을 민주주의를 위해 나섰다가 희생당한 5·18 유족에 비유한 것. 5·18 단체에 이보다 더 큰 모욕은 없을 듯하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5·18 단체 중 어느 한 곳도 여기에 대해 항의하지 않았다.
5·18 단체들은 늘 이런 말을 한다. 보수는 왜 걸핏하면 5·18을 왜곡·폄훼하느냐고. 하지만 위에서 본 것처럼, 보수가 5·18에 적대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해당 단체들이 민주당과 좌파의 망언에는 침묵한 채, 보수 인사들의 발언에만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보수 대통령의 5·18 기념식 참석마저 폄훼하기 일쑤다. 2023년 5월 18일, 윤 대통령은 보수 정권 최초로 취임 후 2년 연속 기념식에 참석한 대통령이 됐지만, 이에 대한 좌파 언론들의 평가는 박하기 그지없었다. ‘오월 정신 지키기 범시도민 대책위원회’는 윤 대통령의 기념사에 대해 “논평하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5·18 역사와 정신에 대한 몰이해와 저급한 인식을 드러낸 역대 최악의 기념사로 기억될 것”이라고 혹평했고, ‘오월어머니집’의 간부는 “나라에서도 행사 때만 5·18을 다루려고 한다. 행사가 지나면 또 말이 없어진다”며 서운함을 표시했다. 심지어 5·18 민주 묘지 앞 도로에서는 ‘윤석열 퇴진’을 외치는 민주노총의 시위도 있었다. 그럼 문재인 전 대통령은 어땠을까 싶어 2년 차인 2018년을 찾아봤더니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올해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에 문재인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이낙연 국무총리가 참석해 기념사를 한다. 정부 관계자는 ‘총리가 5·18 기념사를 하는 것은 문 대통령의 뜻’이라고 설명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여기에 관한 5·18 단체들의 비판은 없었다. 이런 식이라면 보수 대통령이 구태여 5·18 기념식에 참석할 필요가 있을까?
이것 말고도 5·18이 전 국민의 것이 되려면 해결해야 할 문제는 더 있다. 5·18 유공자 수가 날이 갈수록 많아지는 게 대표적이다. 예컨대 민형배 의원은 5·18 당시 신체적 피해 이외에 정신적 피해를 본 사람까지 포함하자는 개정안을 발의했고, 이 법안은 2022년 말 국회를 통과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5·18의 시·공간적 범위를 확대해, 아예 신군부 집권 기간 피해 본 이들로 대상자를 확대하자는 주장까지 나오는데, 이런 것이 국민의 반발을 부르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 두 달 후면 다시 5·18이 찾아온다. 윤 대통령은 당연히 참석할 터, 이번만큼은, 환대는 못 할지언정 욕은 안 했으면 좋겠다.
조선일보 서민 단국대 기생충학과 교수
03.25 범죄자가 재판받으러 오고 싶어 하는 나라

▲권도형 전 테라폼랩스 대표가 23일 출소후 몬테네그로 포드고리차의 한 법원에서 특별경찰에 의해 외국인 수용소로 이송되고 있다./AFP 연합뉴스
450억달러(약 59조원)의 피해를 일으킨 가상 화폐 테라·루나 폭락 사태의 주범 권도형 전 테라폼랩스 대표에 대해 그가 도피한 몬테네그로 고등법원이 한국 송환을 결정했는데 막판 변수가 발생했다. 현지 대검찰청이 재검토를 요청하면서 몬테네그로 대법원이 권씨의 한국 송환을 잠정 보류하고 법리 검토에 착수했다. 23일 출소 후 곧바로 한국으로 송환될 예정이던 권씨는 일단 외국인 수용소로 이송됐다. 조만간 한국 혹은 미국 중 어디로 송환될지 다시 정해질 전망이다. 그동안 이 사건의 관할권을 가진 한국과 미국의 사법 당국이 서로 권씨의 자국 송환을 요구해왔다.
흥미로운 것은 권씨가 한국행을 강력히 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 범죄자에 대한 처벌이 미국보다 한국이 훨씬 약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권씨의 경우, 국내에서 가상 자산의 증권성이 인정되지 않고 있어 금융 범죄로 처벌할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무죄가 날 가능성조차 거론된다. 반면 미국은 각 죄에 따른 형량을 합산하는 ‘병과주의’를 채택하기 때문에 대형 경제 사범에 대해 수백 년 형도 내려진다. 폰지 사기범 버니 메이도프는 150년형을 선고받았다. 권씨는 미국에서 금융 사기 등 8개 혐의로 기소돼있어 미국으로 송환될 경우 100년 이상의 형도 예상된다.
우리나라는 경제 사범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이 내려지기 일쑤다. 지금까지 경제 사범에게 내려진 최대 형량은 김재현 옵티머스자산운용 대표에게 확정된 징역 40년이다. 많은 사람의 삶을 망가뜨리고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된 전세 사기의 경우에도 191명에게 148억원 규모 피해를 입히고 4명을 극단적 선택으로까지 몰고간 ‘인천 건축왕’이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게 최고형이다. 또 다른 전세 사기에서도 무려 355명에게서 보증금 795억원을 편취했는데 주범은 1심에서 고작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국가 핵심 기술을 빼돌려도 형량이 무겁지 않다. 2021년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진 1심 사건 33건 중 무죄(60.6%)와 집행유예(27.2%)가 전체의 87.8%였다. 2022년 선고된 영업 비밀 해외 유출 범죄 형량은 평균 14.9개월에 불과하다. 퇴사한 직원이 핵심 기술을 경쟁 업체로 유출하는 것을 막으려고 전직 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도 법원에서 인용 결정이 나오는 데 1년 가까이 걸린다. 경제 범죄에 대한 처벌이 이 지경이니 사기꾼이 들끓고 권씨처럼 천문학적 피해를 입힌 범죄자가 한국서 재판받겠다고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
03-25 군사법원법 취지와 무능 극치 공수처
지난해 7월 경북 예천에서 실종자 수색 작전에 투입됐던 해병대원이 급류에 휩쓸려 익사한 사건이 있었다. 구명조끼를 입히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군인 사망 사건이 발생하면 이에 대한 재판권을 민간 법원이 갖게 된다. 군사법원이 군인 사망 사건에 대한 재판권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군사법경찰관도 이에 대한 수사를 할 수 없다.
군사경찰과 군사법원이 군인 사망 사건을 수사도 재판도 하지 못하도록 ‘군사법원법’을 개정한 것은, 군이 이러한 유형의 사건을 축소·은폐했다는 의혹이 그동안 많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군부대는 민간과 격리된 폐쇄된 공간 속에서 일사불란한 상명하복 체제로 운영되고 있어 전반적으로 그 치부를 감추려는 속성을 갖게 된다. 그러한 면에서 성폭력범죄와 군인 사망 사건에 대해서 군사경찰과 군사법원의 관할권을 배제하는 입법을 마련한 점은 잘 이해가 된다.
그런데도 해병대 군사경찰은 이 사건에 대해서 일주일 동안 수사를 했다. 군사경찰이 군인 사망 사건을 자체적으로 수사하지 못하도록 법규를 개정한 취지가 몰각(沒却)된 셈이다. 하지만 관련 규정을 찾아보면 수사를 하면 안 된다거나 재판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은 없다. 군사법원이 재판권을 가지지 않는 것으로 확인이 되면 같은 심급의 민간 법원으로 사건을 이송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을 뿐이다. 군사경찰의 경우엔 관할이 아닌 사건을 어떻게 하라는 규정조차 없다.
어쨌든 군사경찰은 하지 말아야 할 수사를 했다. 그리고 사단장 등 모두 8명에게 업무상과실치사 혐의가 인정된다는 결론을 내려서 경북경찰청으로 사건을 이첩했다. 그러자 당시 이종섭 장관은 국방부 검찰단을 통해 사건 서류를 회수하고, 사실관계만 정리해서 사건을 이첩하라고 지시하게 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더불어민주당은 이 전 국방장관이 해병대 수사단에 외압을 가했다며 그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고발했다.
지난해 9월에 고발 사건을 접수한 공수처는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이 사건과 관련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 딱 한 가지, 출국금지 요청은 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관할권이 없는 수사기관이 수사를 한 경우 수집한 증거의 능력을 인정할 것인가 △민간 경찰에 사건을 이첩할 때 수집한 증거만 넘기면 되는가 △아니면 법적 판단까지 해서 함께 전달해야 하는가 등에 대한 판단만 하면 쉽게 처리할 수 있다. 사실관계만 정리해서 경찰에 이첩하되, 인정되는 혐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판단은 전달하지 말라는 지시가 부당하다고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군사경찰이 수사를 해서 결론까지 내린 뒤에 이를 민간 경찰에 넘기면 경찰이 그 판단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군사법원법’을 개정한 취지에 어긋난다.
공수처는 정치적 독립성을 가지고 고위공직자들의 범죄에 대한 수사를 하라는 취지에서 설립된 조직이다. 지금까지 매년 140억 원의 국가 예산을 사용하면서 단 3건만 기소하는 데 그쳤고, 3000여 건은 다른 수사기관으로 이첩해 버렸다. 공수처의 수사 능력은 매우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국방부 장관) 출국금지 사실 등 하지도 않는 수사 관련 정보를 특정 언론에 흘려 정부 여당을 곤란케 하는 일에나 공을 들이는 것 같다. 정말 요지경이다.

문화일보 김성천 중앙대 교수·법학
03.27 기술 유출범 ‘징역 최대 18년’으로 상향, 이것도 낮다

▲반도체 핵심 기술을 중국에 유출한 혐의을 받는 삼성전자 전 수석연구원 A씨가 16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법원을 떠나고 있다. 2024.1.16/연합뉴스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산업 기술의 국내 유출은 최대 권고 형량을 징역 6년에서 9년으로, 국외 유출은 징역 9년에서 15년으로 각각 높였다. 특히 국가 핵심 기술의 국외 유출은 최대 징역 18년까지 가능하게 했다. 기술 유출 범죄에 대한 법원의 형량이 너무 낮다는 한국경제인협회 등 각계의 의견을 이제야 반영한 것이다.
양형 기준을 최대 징역 18년까지 높였지만 이는 상한선일 뿐 보통 선고되는 형량은 징역 10년 안팎에서 정해질 가능성이 높다. 반면 세계 주요국은 산업 기술 유출을 중대 범죄로 다룬다. 대만은 간첩죄를 적용해 최대 사형까지 처할 수 있다. 미국은 피해 액수에 따라 최대 33년 9개월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고 한다. 국내 다른 범죄와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회삿돈 2215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기업 직원이 최근 2심에서 징역 35년을 선고받았다. 은행 돈 수백억원을 빼돌린 은행 직원도 2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수많은 양질의 일자리와 나라의 미래를 빼앗는 국가 핵심 기술 유출이 이런 개인 횡령 범죄보다 가볍다고 할 수 없다. 앞으로 양형 기준을 더 높여야 하고 법도 필요하면 바꿔야 한다.
판사들의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 2021년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진 1심 사건 33건 중 무죄(60.6%)와 집행유예(27.2%)가 전체의 87.8%에 달했다. 2022년 선고한 영업 비밀 해외 유출 범죄 형량도 평균 1년여에 불과했다. 이러니 ‘걸려도 남는 장사’라는 인식이 퍼져 기술 유출 범죄가 끊이지 않는 것이다. 판사들은 대개 기술 유출 범죄자들이 초범이거나 개인적으로 취한 이익이 크지 않다는 이유로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이 범죄는 성격상 거의 다 초범일 수밖에 없고, 범죄 이익을 떠나 국가에 미친 해악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경제 안보 차원에서 이 사안을 볼 필요가 있다.
조선일보 사설
03-27 반도체 전쟁 승부수 던질 때
올해도 글로벌 경제 화두는 단연 ‘반도체’다. 각국의 반도체 투자 확대 소식이 연일 뉴스 1면을 장식하고 엔비디아 CEO의 차세대 인공지능(AI) 반도체 칩 공개에 글로벌 증시가 출렁인다. 강대국들의 반도체 패권 다툼은 이미 연초부터 격화하고 있는 모양새다. 반도체 전쟁을 뜻하는 ‘칩워(Chip War)’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80년대 미·일 간 반도체 갈등이 1차 전쟁이다. 미·일 반도체 협정과 플라자합의 끝에 일본은 반도체 왕국 지위를 내줘야 했다. 우리나라와 대만·일본·독일 간 출혈경쟁이 치열하던 2000년대 초반까지가 2차 전쟁이다. 현재의 3차 전쟁은 2대 강국인 미·중이 맞붙은 데다 AI 혁명까지 가세하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예측불허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반도체가 ‘산업의 쌀’을 넘어 ‘전략물자’로 급부상하며 국가 대항전 성격이 짙다. 반도체가 경제뿐 아니라 세계 정치 질서에 영향을 끼칠 수 있고, 나아가 국가 존망까지 가를 수 있다는 점에서 전 세계가 사활을 걸었다.
중국의 ‘반도체 산업 굴기’를 견제하겠다며 수출 통제 조치로 선제공격에 나섰던 미국을 비롯해 주요국들은 보조금 경쟁에 한창이다. 미국·일본 등 선진국들이 거액의 보조금으로 유수의 반도체 기업 생산시설 유치를 추진하며 반도체발(發) ‘쩐의 전쟁’으로까지 불린다. 과거에는 이 같은 기업 지원 방식이 공정한 자유무역 질서를 해치는 ‘반칙’으로 간주됐다지만, 지금은 ‘뉴노멀’이다. 반도체 전쟁으로 패권 경쟁 승기를 거머쥐려는 ‘게임 체인저’ 미국은 ‘반도체법’을 만들고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에 생산 및 연구·개발(R&D) 보조금용으로 5년간 527억 달러(약 70조 원)의 통 큰 지원을 약속했다. 텍사스주 파운드리(위탁생산) 공장에 170억 달러(약 22조 원) 이상을 투자한 삼성전자는 60억 달러(약 8조 원)의 보조금을 받을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두 번의 전쟁에서 연거푸 패했던 일본도 부활을 꿈꾸며 재기에 나섰다. 구마모토(熊本)현 양배추밭에 건설되는 세계 최대 파운드리 업체 대만 TSMC 공장에 일본 정부는 설비 투자액의 절반에 가까운 4760억 엔(약 4조 원)을 대주기로 했다.
2차 반도체 전쟁 이후 삼성전자·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반도체 강국에 올라섰던 우리나라는 어떤가. 우리 정부도 가만히 있었던 것만은 아니지만, 반도체 산업단지 조성 기간 단축이나 세액공제 확대 혜택이 기업의 구미를 당길 만한 유인책인지 되짚어봐야 한다. 대대적인 정부 지원을 등에 업은 미·일 반도체 기업들이 K-반도체 핵심 인력을 잇달아 빼내가고 있는 실정이다. 올 한 해만 60조 원 등 총 622조 원을 국내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에 투자하기로 한 반도체 기업들이 최근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의 간담회에서 투자 보조금 신설을 건의한 것도 머니 전쟁으로 비화한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 흐름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정부의 올해 수출목표 7000억 달러 중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17.1%나 된다. 우리 경제의 반도체 의존도는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반도체 보조금 지급과 관련한 심도 있는 논의를 포함해 이번 반도체 전쟁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다.

문화일보 박수진 경제부 차장
03.28 국회의 세종 이전, 총선 2주 전 불쑥 내놓을 사안인가
백년대계 사업을 ‘선거용’ 논란 속 추진은 곤란해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어제 국회를 세종시로 완전히 이전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세종시를 미국의 워싱턴 DC처럼 진정한 정치행정의 수도로 완성할 것이라고도 했다. 한 위원장의 세 가지 명분은 ▶행정 비효율의 해소 ▶국가 균형발전 촉진 ▶지역경제 활성화다. 일리가 있다. 특히 2012년을 기점으로 정부 부처 대다수가 세종으로 옮겨간 반면, 입법부인 국회는 서울에 있어 행정적 낭비가 심했다. 비효율 비용이 연간 최소 2조원에서 최대 4조원으로 추정된다는 조사도 있었다. 세종과 서울을 오가며 길 위에 뿌려지는 금전적·시간적 비용이 대폭 절감되는 건 분명하다. 또 오랜 기간 해소되지 않고 있는 수도권 과밀화를 해결할 방안이기도 하다.
다만 총선을 불과 2주 남기고 나온 국회 세종 완전 이전 공약은 몇 가지 문제점을 내포한다. 먼저 법률적 측면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2년 추진했던 행정부·청와대·국회 이전 공약을 실현하기 위해 2003년 ‘신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하지만 이듬해 헌법재판소는 이를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라는 관습 헌법 법리에 따라 수도 이전 및 국회 이전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이후 ‘행정수도’가 ‘행정중심복합도시’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국회가 2031년 완공을 목표로 국회 본원이 아닌 분원의 성격으로 세종의사당을 두기로 한 것도 이런 한계를 감안한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세종의사당 설치’ 규칙에 따르면 세종시로는 정무위, 기획재정위, 교육위, 문화체육관광위 등 11개 국회 상임위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가 이전할 예정이었다. 반면에 운영위, 법사위, 국방위, 외교통일위 등 6개 상임위는 서울에 남고 본회의장과 국회의장실도 서울에 남게 돼 있다. 그런데 한 위원장의 ‘완전 이전’ 발언은 맥락상 모든 시설을 전부 다 세종으로 옮기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렇게 되면 당장 개헌 논쟁이 재연될 가능성이 크다. 또 외교부, 국방부 등 서울에 남아 있는 게 마땅한 행정부처의 경우 거꾸로 비효율이 커지는 측면도 있다.
무엇보다 총선 직전에 사회적 합의가 미흡한 상태에서 이런 중대 국정 사안을 불쑥 발표한 건 적절치 못했다. 당장 충청권과 고도제한 해제의 수혜를 볼 여의도 일대 및 용산·성동·마포·동작 등 이른바 ‘한강벨트’의 표심을 겨냥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 이전의 의도가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선거용’ ‘정략적 접근’이란 비판을 받으면서까지 추진할 사안은 아니다. 나라의 중장기 발전을 위해 백년대계 차원에서 검토해야 할 국가적 대사업일수록 더 그렇다. 세종으로 옮긴 정부 부처가 그랬듯, 국회 또한 한번 옮기면 문제점이 드러나도 다시 서울로 이전하기 힘든 법이다.
중앙일보 사설
03-28 국회의 세종시 완전 이전, 획기적 정치개혁과 병행해야
이번 총선을 계기로 반세기에 걸친 ‘수도 이전’ 문제가 새 국면에 접어들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27일 국회를 세종시로 완전히 이전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했다. 1970년대 들어 서울 과밀화와 안보상 이유 등으로 ‘임시행정수도’(박정희) ‘행정 부수도’(김대중) 제안이 나왔고, 직접적으로는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충청권 신행정수도’ 공약 이후 위헌 결정 등 우여곡절을 거쳐 오늘의 세종특별자치시가 조성됐다. 이 과정에서 보수 정치세력은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는데, 한 위원장 제안으로 초당적 행정·입법 도시 추진이 가능해졌다.
일단 충청권 표심을 노린 측면이 없지 않지만, 국가 기능이 서울과 세종시로 분산된 데 따른 극심한 행정 비효율만 보더라도 기존의 찬반 논란과 다른 접근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한 위원장은 ‘여의도 정치를 끝내는 날’이라는 취지까지 추가했다. 심각한 정치 불신을 고려할 때, 단순히 국회의 이전에 그치지 않고 대대적 정치개혁과 병행해야 그 의미를 제대로 살릴 수 있음은 당연한 이치다.
국회가 이전하면 세종시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워싱턴DC가 되고, 서울은 뉴욕이 될 수 있다. 2012년 정부 이전이 시작됐지만, 대통령실과 국회 및 외교·안보 부처는 서울에 남아 있다. 지난해 통과된 국회의 부분 이전 법은 국가 기능의 비효율을 더욱 증폭시킬 뿐이다. 1차 관문은, 헌법재판소가 2004년 수도 이전 위헌 결정문에서 대통령과 국회를 가장 중심적인 기관이라고 한 부분이다. 원 포인트 개헌이 가장 분명한 방법이지만, 쉽지 않다. 초당적 특별법 제정을 통해 헌재 판단을 다시 받는 게 현실적 대안이다. 물론 국민투표도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실과 사법부의 이전도 함께 논의하면 좋을 것이다.
국회 이전 문제가 재부상한 만큼, 정치개혁 과제도 공약으로 제시해 국민 심판을 받을 필요가 있다. 장소를 옮긴다고 정치가 저절로 나아지지는 않는다. 당장 비례대표제 폐지, 한 위원장이 300명에서 250명으로 줄이자고 했던 국회의원 정수 논란이 있다. 불체포특권의 폐지, 9명에 달하는 보좌진 축소, 세비 삭감 등의 정치개혁 경쟁도 기대한다. 정치 양극화·저질화를 줄이기 위한 중대선거구제와 결선투표제도 장기적으로 검토할 중요한 과제들이다.
문화일보 사설
03.29 고속도로 5000㎞ 시대의 명암
수도권 포천~조안 개통하며
한국 고속道 5000㎞ 시대 열려
문제는 유난히 많은 옥외 광고판
운전자 트인 시야·안전 위험요소
독일 아우토반에는 광고판 없고
미국에는 ‘고속도로 미화법’ 있어
고속도로는 ‘풍경의 항공모함’
미관·경관 갖춘 고속도 선진국을
고속도로 5000㎞ 시대가 열렸다. 지난 2월 수도권 제2순환고속도로 포천~조안 구간 개통에 따른 것으로, 경인고속도로가 뚫린 지 56년 만의 대성취다. 이로써 대다수 국민이 30분 이내에 고속도로에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고속도로 건설 및 유지 과정 전반에 걸쳐 최첨단 기술이 도입되고, 운영에 있어서도 데이터 기반 고속도로 디지털화가 진행 중이다. 얼마 전 대통령 주재 민생토론회에서는 영암~광주 간 ‘초(超)고속도로’ 이야기도 나왔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G. Deleuze)에 의하면 유목 사회와 달리 국가는 도로망(철도 포함)을 통해 완성된다. 지배가 미치는 공간에 ‘매끈한 홈’을 파 교통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에 국가권력의 사활을 걸기 때문이다. 도로는 인구나 물자, 자본 등의 통제와 순환을 담당하는 인프라로서, 대개 국가가 직접 관장한다. 도로 ’보급률’ 같은 용어도 그래서 생겼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도로와 관련하여 피해의식이 많았다. 길이 없는 편이 군사적으로 안전하다고 믿었던 탓에 치도(治道)는 가급적 피했다. 그랬던 나라가 국토 면적 대비 고속도로 연장이 OECD 국가 중 5위로 올랐다니, 이제 우리는 고속도로에 관한 한 세계 최고 수준이 되었나?
선진국을 다니다 보면 우리나라 고속도로 변에 옥외 광고물이 유난히 많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상업 광고가 제일 흔하나 지자체나 공공기관, 심지어 대학이 광고주인 경우도 적지 않다. 업계 추산 1000개 정도인 전국의 야립(野立) 간판 가운데 대부분은 불법이다. 도로 경계선 500미터 이내 설치 금지 규정이 있지만 관공서조차 잘 지키지 않는다. 관계 법률에 따르면 옥외 광고물은 아름다운 경관의 조성과 보존에 유념해야 하고 교통수단의 안전과 이용자의 통행 안전을 방해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현장의 사정은 다르다.
고속도로 종주국인 독일 아우토반의 경우, 특히 속도 무제한 구간이라면, 옥외 광고판 자체가 거의 없다. 순간이나마 광고가 눈길을 뺏어 가는 데 따른 사고 위험성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는 법보다 상식의 문제다. 도로 표지판 또한 속도 규정, 추월 금지, 경적 사용 제한 등 운전과 직결된 기본 정보만 담는다. 이와 같은 옥외 광고판의 부재 및 도로 표지판의 절제에 따라 운전자의 시선은 보다 많은 자유와 여유를 누리게 되고 이는 고속도로 주변의 풍광 향유로 전이된다. 아닌 게 아니라 독일의 아우토반은 자연환경과의 조화와 공존이라는 측면에서도 전 세계 고속도로의 귀감이다.
‘자동차의 나라’ 미국에는 고속도로 미화법(Highway Beautification Act)이 있다. 1965년에 주간(州間) 고속도로를 대상으로 제정된 것인데, 당시 린든 B. 존슨 대통령 부인의 역할이 컸기에 ‘레이디 버드 법’(Lady Bird’s Bill)으로 통한다. 목적은 옥외 광고판 설치의 엄격한 제한과 주민 기피 시설 정비를 통해 고속도로 부근의 자연환경 및 자원을 보존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운전자의 트인 시야 확보와 스트레스 경감, 도로 안전 증진도 기대했는데, 그 효과는 경험적으로 확인되었다. 그 밖에도 1980년대 초 텍사스에서 시작된 ‘고속도로 입양’(Adopt-a-Highway) 프로그램은 현재 북미 전역에 활성화되어 있다. 기업이나 사회단체 등이 고속도로 일부 구간을 맡아 각종 미화 자원봉사를 하고, 이를 해당 구역의 표지판이 홍보하는 방식이다.
우리나라 고속도로를 달리노라면 바깥 풍경이 참으로 빈약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조경의 손길이 닿지 않은 도로변에 먼 산의 송전선이나 철탑, 방치된 분묘까지 오버랩되면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을 정도다. 내비게이션이 보편화되고 자율주행차 시대가 임박한 시점에 이렇게까지 많고, 크고, 복잡한 도로 표지판이 필요한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살(殺)풍경의 압권은 고속도로 곳곳에 나붙은 교통안전 플래카드다. 정장 위에 거적을 걸친 듯한 미적 부조화가 고속도로의 스타일을 구기는 가운데, ‘졸음운전! 자살이자 살인!’과 같은 섬뜩한 경고 문구는 문화 시민에 대한 언어 폭력에 가깝다.
미관이나 경관도 고속도로의 소중한 일부다. 고속도로에는 그곳 특유의 풍경 체험이 있다. 프랑스의 조경가 라소(B. Lassus)에 의하면 고속도로는 ‘풍경 항공모함’(landscape-carrier)이다. 항공모함 활주로와 고속도로 노면이 비슷해서가 아니라 숨어있던 풍경 요소들이 차창 너머 차례차례 나타났다가 금방 하늘 높이 비상하는 이미지 때문이다. 이 정도의 문화적 감수성은 갖춰야 명실상부한 고속도로 선진국을 말할 수 있다.
조선일보 전상인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
03-29 간호법 再입법과 전문간호사 지원책
지난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폐기됐던 간호법 제정안을 정부·여당이 일부 수정해 28일 국회에 다시 발의했다. 새 법안은 ‘모든 국민이 보건의료기관, 학교, 산업 현장, 재가 및 각종 사회복지시설 등 간호 인력이 종사하는 다양한 영역에서 수준 높은 간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간호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을 규정한다’고 입법 목적을 밝혔다.
지난해 폐기된 법안에서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은 ‘지역사회’라는 문구였다. 의사 단체 등은 이 문구가 의료기관 밖에서 간호사의 단독 개원을 가능하게 해 1차 의료기관과 경쟁하고, 의료기사 직역(職域)의 업무를 침해한다고 주장하며 간호법 제정에 반대한 바 있다. 새 법안은 논란이 됐던 지역사회라는 문구를 삭제하는 대신 그동안 법적 뒷받침 미비로 불안정한 상태에 있던 PA(진료보조) 간호사 업무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간호사가 재택간호 전담기관을 개설할 수 있도록 했으며, 간호조무사의 학력 조건을 고졸 이하로 제한해 시대착오적인 규제라고 비판받았던 조항도 삭제하여 합리적으로 개선했다고 한다.
의료법과 별개로 간호법이 필요한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의료법의 관련 조항을 개정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문제는, 현행 의료법이 일제강점기에 제정된 이후 지난 80여 년 동안 의료 환경이 엄청나게 변했는데도 의사와 간호사, 의료기사 등 타 직종과의 법적 업무 관계가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제시대와 달리 타 직종도 대학에서 전문교육을 받고 일정 자격을 갖춘 의료 인력으로 양성되고 있지만, 임상에서는 법적 근거가 모호한 채로 합법과 불법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새 법안은 PA 간호사에 대해 ‘자격을 인정받은 해당 분야에서 전문간호 및 의사의 포괄적 지도나 위임 하에 진료 지원에 관한 업무를 수행하도록 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의사 인력이 부족해 전국에서 1만 명 이상의 PA 간호사가 이미 외래·중환자실·수술실 등에서 처방 대행, 수술 지원, 진단서 작성, 검사 등을 하고 있다. 따라서 현실을 반영해 PA 간호사의 업무를 법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못 한다면 의사들이 그 업무를 직접 맡도록 해야 한다. 내가 하면 합법, 남이 하면 불법이라는 식으로 방치해서는 곤란하다.
현재 PA 간호사 중에서 상당수를 차지하는 인력이 전문간호사다. 전문간호사가 되려면 정부가 인정한 대학원 과정에서 해당 전공 분야의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일정기간 임상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그러나 전문간호사 자격증을 취득해도 임상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가 없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므로 차제에 이에 대한 보완도 필요하다. 외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전문간호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제도적으로 별도의 간호수가를 만들어 적용한다.
의료 대란 속에서 전공의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는 PA 간호사의 업무 부담이 커진 상황에서 법적 불확실성까지 겹쳐 관련 입법이 시급한 상황이다. 이번 간호법 제정안은 앞으로도 수정 보완할 필요성이 여전히 적지 않다. 하지만 간호사들이 임상 현장에서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불안한 상태에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여야가 이를 정치 쟁점화하기보다는 서둘러 입법화하기를 기대한다.

문화일보 김진현 서울대 간호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