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한성우 교수의 맛의 말, 말의 맛] 문화일보 2023/ 01-06 딸기 - 12-29 일상커빵사

상림은내고향 2024. 3. 10. 15:51

[한성우 교수의 맛의 말, 말의 맛]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문화일보 2023

 

01-06 딸기

 

‘동지 때 개딸기’라는 속담이 있다. 요즘에는 잘 안 쓰이는 속담이지만, 제철이 아니어서 도저히 구할 수 없는 음식을 구하려 할 때 쓰는 말이다. 눈이 펑펑 내리는 12월에 딸기라니, 그 흔한 개딸기도 나지 않는 시기이니 나온 속담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 속담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시장에 가면 빨갛게 잘 익은 딸기가 수북하게 쌓여 있으니 말이다.

시장에서 사 먹는 딸기는 유럽이 원산지이고 20세기 초에 이 땅에 들어온 것으로 본다. 그러나 16세기에 편찬된 책에도 딸기의 옛 표기가 나온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산딸기, 뱀딸기, 멍석딸기 등 여러 종류의 딸기를 가리키는 말이 쓰여 왔으니 이 딸기가 굳이 20세기 초에 들어온 딸기여야 할 이유가 없다. 오늘날 시장에서 사 먹는 딸기는 유럽에서 개량돼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간 것이니 20세기 초에 들어온 딸기는 재배용 딸기일 것이다.

여러 딸기 중에 산딸기는 고혹적인 외양 때문에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과일은 색, 모양, 맛 등이 관능적인 매력을 뽐내는 경우가 많은데 산딸기는 영롱한 붉은색에 터질 듯한 이슬방울을 닮았다. 크기는 조금 크지만 같은 색감의 앵두가 고운 입술에 비유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인지 ‘산딸기’라는 제목의 에로 영화가 시리즈로 여러 편이 제작되기도 했다.

산딸기는 귀해졌지만 맛있는 딸기는 흔해져 시도 때도 없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개딸기라면 야생에서 찾아야겠지만 비닐하우스에서 속성으로 재배한 덕분이다. 오히려 추운 겨울에 맛있는 딸기가 많이 나온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동지 때 개딸기’는 쓰는 이도, 이해하는 이도 없는 옛 속담이 되어 버렸다. 어쩌면 제철은 아니지만 가장 맛있는 때를 가리키는 말로 ‘동지 때 딸기’란 새로운 속담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부지런한 농부와 때를 맞춰 시장에 내는 상인들 덕분이다.

 

01-13 캬~

‘맛의 말’과 ‘말의 맛’에 대해 글을 쓰다 보니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상황이 종종 생긴다. 학교 홍보실을 경유해 들어온 한 기자의 질문, 왜 맥주를 마시고는 ‘캬∼’라고 소리를 내는지를 밝혀 달란다. 그것도 어원, 과학적 근거, 규범에 맞는 표기 등등까지 포함해서. 다소 엉뚱한 질문이지만 이 땅의 모든 말은 이유가 있다고 말해 왔으니 답을 찾아야 한다.

독한 것, 시원하게 톡 쏘는 것을 목으로 넘기는 순간 고통이나 청량감 때문에 저절로 무엇인가 터질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렇게 터져야 하는 소리이니 파열음, 한글로 치자면 ‘ㅂ, ㄷ, ㄱ’ 중 하나의 소리여야 한다. 이왕이면 크게 터져야 하니 공기가 입 밖으로 많이 나오는 거센소리인 ‘ㅍ, ㅌ, ㅋ’이 더 좋다. 그래서 무엇인가 터지는 소리가 ‘팡, 탕, 쾅’ 등으로 표현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터져야 하는가? ‘ㅍ’은 입술에서 터지는데 참았던 웃음을 터트리면 ‘푸하하’라고 표현하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ㅌ’은 혀끝과 이의 뒤에서 터지는데 가장 세밀하게 움직일 수 있는 부위여서 기관총 소리를 ‘타타타’로 묘사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된다. ‘ㅋ’은 혀뿌리와 여린입천장 사이에서 터지는데 폐에서 나온 공기를 제일 먼저 터트릴 수 있으니 목을 넘어간 즉시 다시 터지는 소리는 ‘ㅋ’일 수밖에 없다.

그럼 왜 ‘카’를 넘어 ‘캬’인가? ‘아’는 입을 가장 많이 벌려서 내는 소리이니 ‘카’라고 하면 가장 시원하게 터트릴 수 있다. 그런데 ‘야’는 입을 최소로 좁혔다 벌려야 하니 소리를 참고 또 참았다 극적으로 터트릴 수 있다. 독한 술을 마시면 차마 입을 벌리지 못하고 ‘크’ 소리를 내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러나 이런 소리는 높은 알코올 도수, 탄산 등에 의한 통증 때문에 나는 소리다. 고통에 겨운 소리를 내는 음료보다는 부드러운 목 넘김을 즐길 음료가 더 좋지 않을까?

 

01-20 과줄

명절이 되면 한과 선물이 많이 오간다. ‘한과’라 하면 당연히 우리의 과자이고 한자로는 ‘韓菓’라고 써야 할 것 같지만 사전에는 중국의 과자를 뜻하는 ‘漢菓’만 올라 있다. 한과의 뜻과 범위도 모호해서 요즘 사람들은 한과라 하면 찹쌀 반죽을 기름에 튀겨 부풀린 후 조청을 발라 튀밥을 붙여 만든 것을 떠올린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산자 혹은 유밀과라 하는 한과의 일종이니 정확한 연상은 아니다.

여기에 흔히 약과라고 부르는 ‘과줄’까지 끼어들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과줄은 17, 18세기 문헌에는 ‘과즐’로 표기되었다. 그런데 ‘과즐’의 ‘즐’은 우리말에 흔한 소리는 아니어서 어색함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과즐’은 19세기 문헌부터 ‘과줄’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래도 ‘과즐’이든 ‘과줄’이든 도대체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과자(菓子)’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은 여전하다.

과줄은 아무래도 과자의 중국어식 발음과 관련지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중국어식 발음대로라면 ‘궈쯔’나 ‘궈찌’가 돼야 한다. 채소 ‘가지(茄子)’를 중국어식 발음대로 하려면 ‘체쯔’ 정도가 돼야 하는데 첫 글자는 한국 한자음대로 읽고 다음 글자는 중국 한자음 ‘쯔’를 우리 마음대로 ‘지’로 읽는 것을 고려하면 ‘과지’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중국어에도 없는 ‘ㄹ’이 어디서 뜬금없이 나타난 것일까?

유력한 해결책 중 하나는 중국의 베이징(北京) 지역어에 많이 나타나는 ‘얼화(얼化)’이다. 쉽게 말하자면 중국어 단어 뒤에 ‘ㄹ’을 붙이는 것인데, 이것을 적용하면 ‘궈쯔’가 ‘궈절’ 비슷하게 발음되니 가능성은 있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에서는 과자란 말을 쓰지만 중국에서는 쓰지 않는 것이 문제이고 얼화의 시기도 문제이다. 아니 더 큰 문제는 ‘과줄’을 아는 이나 먹는 이가 점점 줄어든다는 데 있다. 시간이 더 지나면 과줄의 기원을 찾아갈 필요조차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01-27 초(醋)와 초[燭]

초와 초, 제목을 이리 한글로만 써 놓았으면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했을 것이다. 그나마 한자를 붙여 놓으니 한자를 아는 이들은 요리에 쓰는 시큼한 액체인 초와 어둠을 밝히는 둥근 막대형의 초를 구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남는 문제가 있다. 불을 밝히는 물건을 가리키는 한자 ‘燭’은 ‘촉’으로 읽어야 하니 뭔가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둘 다 한자어이지만 한 음절짜리 한자어가 겪는 변화를 잘 보여주는 재미있는 사례이다.

곡물을 발효시켜 신맛을 내는 초는 음식의 맛을 돋우는 액체 조미료이다. 이것을 가리키는 고유어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15세기의 한글 문헌에서부터 한자어 ‘초’로 나타난다. ‘산(山), 강(江)’ 등 한 음절 한자어도 꽤 되니 문제 될 것이 없는 용법이다. 밀랍, 동물성 지방 등을 정제해 심지를 넣어 굳힌 초 또한 한자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부르는데 15세기의 문헌에는 ‘쵸’로 나타난다. ‘화촉(華燭)’에서는 본래의 음인 ‘촉’으로 발음하지만 나중에 중국어 발음을 접촉하며 ‘쵸’로 다시 받아들였다.

15세기에는 ‘초’와 ‘쵸’가 발음상 명확하게 구별되었으니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런데 ‘ㅈ, ㅊ, ㅉ’의 발음이 바뀌면서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늘날 ‘쥬스’와 ‘주스’를 구별해서 발음하려 해도 결국 같은 발음으로 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된다. 그 결과 불을 밝히는 ‘쵸’가 발음과 표기 모두 ‘초’가 된 것이다.

서로 다른 대상을 가리키는데 소리와 표기가 같아지니 혼동이 될 법도 하다. 그런데 현명한 조상들이 한 음절짜리 한자어를 두 음절로 바꾸어 해결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식초(食醋)’와 ‘양초’이다. 초는 본래 먹는 것이니 굳이 ‘먹는 초’라 밝힐 필요는 없다. 양초는 동물 지방이나 석유에서 추출한 파라핀으로 만든 것이니 전통 초와는 다를 수 있다. 그래도 둘을 혼동할 일이 없으니 현명한 해결책이었다.

 

02-03 요리사의 등급

 

주방에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이들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가장 일반적인 이름은 요리를 하는 사람을 뜻하는 ‘요리사’일 것이다. 그리고 이 요리사 중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주방장’도 흔히 쓰이던 말이었다. 요리를 주제로 한 만화가 인기를 끌고 그 주인공이 궁궐 주방에서 ‘숙수’로 불렸던 까닭에 전통 요리를 하는 이들은 숙수로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셰프’가 모든 요리사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셰프는 프랑스어 ‘chef’에서 유래한 것으로 수석 요리사 정도의 뜻이니 주방장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이탈리아 요리인 파스타를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 속의 까칠한 주방장이 인기를 끌면서 셰프가 우리말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쓰이기 시작한 지는 꽤 되었으나 이를 외래어로 수용하고 이에 대한 정확한 표기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아직은 외국어인 셈이다. 그 사이 드라마에서는 이마저도 줄여 ‘?’으로 부르는 것이 흔한 일이 되기도 했다.

셰프가 프랑스어에서 유래하다 보니 서양 요리를 파는 고급 레스토랑의 주방을 책임지는 이들은 셰프라고 불러야 할 것처럼 되었다. 그리고 주방장은 ‘중국집 주방장’이라는 구(句)가 가장 자연스러울 정도로 지위가 격하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여러 요리 프로그램에서 한식, 중식, 일식 주방장을 출연시켜 셰프라고 부르면서 결국 셰프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최고의 요리사를 부르는 명칭이 되었다.

외국어나 외래어가 높은 대접을 받는 것은 오래된 현상이니 씁쓸하기는 해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듯하다. 그러나 최고의 요리사 자리를 셰프에게 물려줄 이유는 없다. 가끔 비싼 음식점에 가서 셰프의 음식을 즐길 수는 있겠지만, 최고의 요리사는 역시 매일 식구들이 먹는 밥을 만드는 이일 것이다. ‘오늘은 내가 우리 집 요리사’라고 팔을 걷어붙이는 이들 누구나.

 

02-10 나박김치

대여섯 살 무렵부터 지금까지 지상 최고의 김치를 먹어왔으니, 이 김치의 모양새와 맛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길이로 네모나게 썬 무와 희고 노란빛의 배추, 꽃잎 모양이 나도록 빙 돌려 홈을 낸 후 얇게 썬 당근, 달콤하면서도 사각거리는 배나 사과가 정갈하게 들어 있다. 태양초를 곱게 빻아 고혹적인 붉은빛 국물을 내고 여기에 푸른 미나리와 쪽파를 같은 길이로 썰어 넣어 보색의 대비를 맞춘다. 바로 나박김치다.

어린 시절 이름이 궁금해 왜 나박김치냐고 어머니께 여쭈었더니, 채소를 나박나박 썰어서 그렇단다. 사전을 찾아보면 ‘나박나박’은 채소를 이런 모양으로 써는 것을 가리키니 나박나박이란 부사는 오로지 요리를 위한 칼질을 묘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란 사실이 흥미로웠다. 게다가 말을 연구하는 직업을 갖다 보니 ‘나박’만 떼어 ‘김치’와 결합해 특이한 구조의 단어를 만든 까닭에 나박김치는 더더욱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런 김치가 되었다.

‘송송’이나 ‘깍둑깍둑’ 등도 오로지 요리를 위한 단어들이다. 모든 재료를 송송 썰 수 있지만 송송 썰기의 대상은 역시 파가 제격이다. 그러니 ‘파송송 계란탁’이란 영화가 만들어질 법도 하다. 깍둑깍둑의 대상은 역시 크고 단단한 무여야 하고, 그러다 보니 이 무로 만든 김치의 이름은 아예 ‘깍두기’가 되었다.

‘송송’과 ‘깍둑’도 예쁘지만 여전히 ‘나박’만 못하다. 눈으로도 즐기고 입으로도 즐길 수 있는 그 모양과 맛 때문이다. 나박김치는 시원한 맛으로 먹으니 겨울이 제격이다. 너무 빨갛지 않은, 그렇다고 너무 허여멀건 하지도 않은 나박김치를 찾아볼 법하다. 경기 남부와 충청남도 북부의 손맛을 가진 이들이 담그는 나박김치여야 그런 빛과 맛이 난다. 겨울이 가기 전에 먹어야 한다. 아니 그런 맛을 내는 이가 이 땅에 계실 때 부지런히 먹고 찬사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02-17 도다리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는 ‘넙치’와 ‘양철북’이란 작품으로 우리에게 기억된다. ‘넙치’의 첫 문장 ‘일제빌은 소금을 더 쳤다’는 2007년 독일 소설 중 최고의 문장으로 뽑혔다지만 사실 소설의 첫머리를 읽어보면 도대체 작가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하지만 겨울이 끝나갈 이 무렵에는 그런 복잡한 고민을 할 필요는 없다. 도다리를 넙치 혹은 광어와 구별해 내고, 도다리쑥국만 먹으면 된다.

넙치는 그 모양새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바다의 모래나 펄에 바짝 붙어 살자면 몸은 얇고도 넓어야 하니 이런 모양새가 됐다. 그래도 눈은 빛이 오는 위를 향해야 하니 눈이 한쪽으로 몰리게 되었다. 거의 모든 물고기는 좌우 대칭인데 넙치류의 물고기는 좌우나 상하가 대칭이 아니다. 넓기로는 더 넓은 가오리나 홍어가 있지만 이들은 좌우 대칭인데 넙치류는 아니니 괴이해 보이기도 한다.

넙치의 생김새를 인정하고 나서도 남는 문제가 있으니 흔하게 접하는 두 종류의 넙치를 구별하는 것이다. 넙치는 한자 이름인 ‘광어(廣魚)’로 더 많이 불린다. 대규모 양식이 가능해 가장 흔한 횟감인데 횟집 수족관에 가보면 이와 생김새가 똑같아 보이는 도다리가 있다. 좌광우도, 넙치처럼 바닥에 엎드려 물고기를 마주 보면 된다. 바라볼 때 눈이 왼쪽에 있으면 광어고 오른쪽에 있으면 도다리다.

도다리는 광어보다 비싸고 작은 도다리는 뼈가 연해 뼈째 썰어 먹어도 맛있어 흔히 ‘세꼬시’라 하는 ‘뼈째회’로도 먹는다. ‘봄 도다리, 가을 전어’란 말이 있듯이 도다리는 봄에 가장 맛있다. 회로 먹어도 좋지만 된장을 푼 뒤 막 싹이 돋아난 쑥과 봄 도다리를 넣어 끓인 도다리쑥국을 으뜸으로 꼽는다. 봄기운이 가장 먼저 오는 남해 바닷가에 가야 제맛을 볼 수 있으니 도다리쑥국을 맛보고 밀려오는 봄기운에 뒤로 쓰러지는 경험을 해 보는 것도 좋겠다.

 

03-03 토렴

 

줄을 서서 기다리고 난 뒤에야 먹을 수 있다는 국밥집이라는데 베테랑 주인장의 국자질이 영 어설프다. 한 번에 푹 퍼 담고 인심 좋게 좀 더 담아내면 될 텐데 몇 번을 담았다 쏟기를 반복한다. 모르는 이의 눈으로 본다면 퍼주기 아까워하는 것처럼 보일 듯하다. 그러나 추운 날씨에 국을 풀 때는 할머니와 어머니도 그러셨으니 익숙한 풍경이기는 하다. 어렸을 적엔 그저 동작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토렴’이 이 동작을 콕 집어 가리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음식마다 먹기에 적당한 온도가 있다지만 우리는 그 온도에 특별히 민감하다. 한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셔야 하고 탕은 밥상 위에서도 뚝배기 안에서 펄펄 끓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따뜻하게 먹어야 할 국이 차가운 그릇 때문에 식을까 염려돼 토렴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동작은 퍼주기를 아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맛있는 국을 따뜻하게 먹을 수 있도록 하는 주인장의 배려인 셈이다.

따뜻한 밥과 국, 혹은 찌개는 우리 밥상의 가장 기본이기도 하다. 전기밥솥이 없던 시절 주발에 담긴 밥이 아랫목의 이불 속에 고이 모셔져 있었던 것, 국을 담은 대접이 온기가 남아 있는 솥 안에 놓여 있었던 것이 그 증거이다. 밥상의 주인이 늦게 들어오면 찌개 데우기를 몇 번을 반복하다 졸아들어 너무 짜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과정에 비하면 토렴은 비교적 손쉽다.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는 3월엔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가 많다. 특히, 학생들은 앞자리가 바뀐 학교나 새로운 학년의 교실에서 새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서먹서먹할 수밖에 없는 첫 만남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토렴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새롭게 만날 사람에 대해 미리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 놓는 것이 그것이다. 혹은 큰 가마솥의 국이 작은 국그릇에 온기를 나눠주듯 새롭게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나눠주는 것도 방법이다.

 

03-10 이빨

말이나 글에 ‘이빨’을 쓸 때마다 웬만하면 ‘이’를 쓰라는 권유를 받는다. 이빨은 이의 낮춤말이고 주로 동물에만 쓴다는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이빨’의 ‘빨’에 낮추는 뜻이 있다는 말인가? 아니, 도대체 ‘빨’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이빨’은 아무래도 ‘이의 발’을 뜻하는 ‘잇발’로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발’의 정체가 문제인데 ‘국숫발’에도 쓰이는 ‘발’과 관련지어 볼 수 있다. 이때의 ‘발’은 실이나 국수 따위의 가늘고 긴 물체의 가락을 뜻한다.

이빨이 촘촘하고도 가지런하게 나 있는 이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굳이 낮추는 뜻을 찾기는 어렵다. 게다가 한 음절로 된 단어는 쓰거나 말할 때 그 뜻이 잘 전달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니 두 음절 이상의 단어로 바꾸는 경향도 한몫한다. ‘기(旗)’만으로는 뜻이 잘 전달이 안 되니 ‘깃발’로 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빨’은 ‘이’에 뜻을 더하거나 의미 전달을 분명하게 하고자 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이빨은 사람을 포함해 동물에게 생명 유지를 위해 매우 중요한 기관이다. 살기 위해선 먹어야 하고 먹기 위해선 음식을 자르고, 찢고, 씹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앞니, 송곳니, 어금니가 각각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이런 역할을 하는 이가 없다면 제대로 먹을 수 없는데 나란하고도 촘촘하게 나 있는 ‘이빨’이 ‘이’보다는 나은 셈이다.

이빨을 더 높이는 말로는 ‘치아(齒牙)’가 권장된다. 그런데 이것은 이를 나타내는 ‘齒’와 어금니를 나타내는 ‘牙’가 결합된 말이다. 우리는 이빨 치료를 위해 치과에 가지만 중국에서는 ‘아과(牙科)’에 가니, 한자를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용법으로 쓴다. 인간의 긴 수명에 비하면 이빨은 내구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이빨은 썩고 잇몸은 상하기 일쑤니 나이 들면서 치과를 더 자주 드나들 수밖에 없다. 본래 그렇게 설계된 이빨이라면 치과든 아과든 더 일찍부터 드나들며 관리하는 것이 답일 것이다.

 

03-17 공깃밥

노래 경연 프로그램이 한창 유행이던 시절 심사자 중 한 사람이 언급한 ‘공기 반 소리 반’이 꽤 화제가 됐었다. 자신이 가진 목소리에 감성을 더 불어넣는 방법일 텐데 최근에 이 표현이 다시 언급되고 있다. 가파르게 오른 물가 때문에 음식점의 공깃밥에 ‘공기가 반’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그런가 하면 쌀 소비가 줄어 한 사람이 하루에 먹는 밥의 양이 한 공기 반밖에 안 된다는 기사도 나온다.

밥은 어디에 담아야 할까? 우리의 밥상에서 밥그릇과 국그릇의 모양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밥그릇은 국그릇보다 입구는 좁지만 높이는 더 높다. 따라서 사기로 만든 사발이나 놋쇠, 스테인리스 등으로 만든 주발이 밥을 담는 역할을 주로 해 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 빈 그릇을 뜻하는 ‘공기(空器)’가 밥그릇이나 밥의 양을 재는 단위로 쓰이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음식을 담지 않은 모든 그릇이 공기이니 공기를 밥에 한정시키는 것은 옳지 않은데 말이다.

1938년에 간행된 사전에서는 공기를 빈 그릇의 뜻으로 풀이해 놓았지만 1920년대의 신문에서는 공기를 밥을 담는 그릇의 용도로 쓰고 있다. 우리의 밥상에서 밥이 가장 중요하니 이런 용법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용법에 불을 지핀 것은 식당에서 요리에 밥이 포함돼 있지 않아 별도로 주문해야 하는 ‘공깃밥’일 것이다.

우리에게 식당은 ‘밥’을 먹는 곳이니 ‘공깃밥 별도’라는 문구는 왠지 인심이 사나워 보인다. 반면, 먹성 좋은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식당의 ‘공깃밥 무제한’이란 문구는 한없이 푸근해 보인다. 그런데 그 공깃밥에 변화가 보인다. ‘공깃밥 천원’이 불문율이었는데 물가가 오르다 보니 천원에 맞춰 공기(空器)에 공기(空氣)를 더 많이 담게 된 것이다. 다른 음식을 더 먹어 쌀 소비는 줄고 있지만 ‘밥심’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밥의 양이 곧 쓸 수 있는 힘의 양이다. 공깃밥에는 역시 밥이 훨씬 더 많아야 한다.

 

03-20 앙금

마음속에 앙금이 남아 있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나 앙금이 없으면 달콤한 단팥빵도, 부드러운 식감의 묵도 없다. 아니 여러 요리에 두루 쓰이는 전분도 없다. 젊은 사람들의 머릿속 사전에서는 앙금이 마음속에 남아 있는 불쾌한 감정이 첫머리에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앙금은 본래 녹두, 도토리, 팥, 감자 등등을 곱게 간 뒤 고운 천이나 체로 걸러 물에 가라앉힌 것을 가리킨다. 화학에서는 화학반응 결과 가라앉은 침전물을 가리키기도 한다.

앙금의 본뜻을 이해하려면 묵을 만드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녹두로 만든 청포묵이나 도토리로 만든 도토리묵의 첫 단계는 맷돌로 거피(去皮)를 내는 일이다. 맷돌로 재료를 거칠게 갈아 껍질을 깬 뒤 물에 담가 껍질을 제거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물에 불린 녹두나 도토리를 다시 맷돌로 곱게 갈아 고운 천으로 만든 자루에 담아 물에 뿜어내거나 고운 체로 거른다. 이 물을 여러 시간 놔둬 가라앉힌 후 위의 맑은 물을 따라내면 남는 것이 앙금이다.

비중의 차이로 물에 포함된 물질을 분리해 낸 것이 앙금이니 이 과정을 거친 것은 모두 앙금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가장 친숙한 것은 역시 녹말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니 녹말 앙금이 가장 널리 쓰였다. 그러다 단팥빵이 인기를 끌면서 팥뿐만 아니라 동부, 완두 등을 소로 쓰면서 소로 쓰기 위해 가라앉힌 것도 앙금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묵은 부드럽고, 단팥빵의 소로 들어가 있는 각종 앙금은 달콤하다. 그러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앙금은 여러모로 찜찜하다. 이때의 앙금은 불순물이고, 오랫동안 가만히 있다 보니 가라앉은 것이다. 그러니 마음속에 앙금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는 불순물이 들어오지 않게 하는 것이 먼저다. 그래도 불순물이 들어왔다면 가만히 쌓아두기보다는 무슨 수를 쓰든 내보내는 것이 좋겠다. 마음속의 앙금은 쌓이면 병이 되기 때문이다.

 

03-31 사리

단어 ‘사리’에게 ‘곱빼기’는 원수와 같은 존재이다. 떡볶이나 부대찌개에 넣어 먹는 사리와 중국집의 곱빼기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싶어 의아하겠지만 단어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렇다. 오래전 농촌에서 살아본 이들에게 ‘사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짚으로 꼰 새끼다. 사리는 본래 가늘고 긴 것을 둥글게 포개어 감아 놓은 것을 가리키니 새끼나 실이 먼저 떠오른다.

볏짚을 고르게 잘 추린 뒤 손으로 비벼 꼬면 새끼가 되고 긴 새끼를 정해진 길이만큼 둥그렇게 포개어 사리면 비로소 새끼 한 사리가 만들어진다. ‘사리다’란 동사의 본래 뜻을 생각해 보면 긴 끈이나 기다란 몸뚱이의 뱀에게 어울리는 단어다. 여기에 뜻이 점점 넓혀져 사람이 몸을 조심하는 것에까지 몸을 사린다고 쓰게 된 것이다. 이런 연원을 생각해 보면 ‘사리’와 ‘사리다’는 ‘신’과 ‘신다’ 또는 ‘띠’와 ‘띠다’처럼 본래 기원이 같은 단어이다.

음식 중 가늘고 긴 것은 역시 국수이니 적당량의 국수를 사려놓은 것도 곧 사리였다. 국수와 국물을 함께 끓이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손님을 치러야 하는 잔칫집에서는 이렇게 국수를 사려놓았다가 손님이 오면 국물에 말아서 내곤 했다. 많은 양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한 사리를 더 넣으면 되는데 아예 두 사리를 한 그릇에 담은 곱빼기가 나오다 보니 사리의 본래 뜻을 아는 사람들이 점차 줄어들게 된 것이다.

요즘 사람들에게 사리는 다른 음식에 넣어 먹는 라면이나 쫄면, 나아가 면발이 아닌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게 다 ‘사리다’란 동사가 너무 몸을 사린 까닭이다. 아니, 새끼를 꼬아서 사릴 일이 없으니, 국수를 삶아서 사릴 일이 없으니 이리되었다는 것이 맞겠다. 그래도 몸을 사려야 할 상황은 점점 더 많아지니 앞으로 ‘사리다’란 동사의 목적어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새끼가 아닌 몸일 것이다. 몸을 사려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다면 그래도 좋다.

 

04-07 소기시대(塑器時代)

 

밥상 위의 그릇은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인류가 발전시켜 온 문명의 산물이다. 나무로 만든 젓가락, 흙을 구워 만든 접시, 구리에 아연을 섞어 만든 밥그릇, 철에 크롬 등의 광물을 섞은 스테인리스강으로 만든 숟가락이 그렇다. 인간이 사용한 도구의 재료를 기준으로 시대를 석기, 청동기, 철기시대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각 시대의 산물이 밥상에 올라와 있는 것이다.

철기시대를 잇는 다른 명칭이 없으니 우리는 여전히 철기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겠지만,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이도 있다. 바로 20세기 초반에 발명돼 급속도로 사용영역을 넓혀 오고 있는 플라스틱 때문이다. 떡볶이집에서 많이 사용하는 옥색의 멜라민 그릇, 군대나 학교 식당의 플라스틱 식판, 생수를 비롯한 각종 음료수를 담은 페트병을 보면 우리는 지금 플라스틱 시대를 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석기시대나 철기시대 등은 한자어인데 그 뒤를 잇는 시대를 플라스틱 시대라고 하는 것은 뭔가 운이 맞지 않는 느낌이다. 나무(木), 돌(石), 쇠(鐵) 등은 한자가 있으나 플라스틱은 극히 최근의 문물이어서 한자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플라스틱을 뜻하는 중국어 ‘塑料(suliao)’나 ‘塑胶(sujiao)’가 참고할 만하다. ‘塑(소)’는 흙을 빚는다는 뜻인데 ‘플라스틱(plastic)’ 또한 재료를 빚어 형상을 만든다는 뜻이니 서로 딱 들어맞는다.

우리는 인류세(人類世) 소기시대(塑器時代)에 살고 있다. 학문적으로 정립된 명칭은 아니지만 인간이 환경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특히 인간의 발명품 플라스틱 공해가 심각해지면서 그 시대를 체감하고 있다. 무궁무진한 플라스틱의 쓰임새를 생각하면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물질이니 소기시대를 벗어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플라스틱이 밥상 위의 그릇이 아니라 미세한 가루가 돼 음식에 섞여 있는 시대라면 소기시대는 결코 반갑지 않다.

 

04-17 당근

당근이지! 이 말을 당연하다는 듯이 ‘당연하다’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조금 나이가 든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PC 통신 시대의 유행어였는데 아직도 가끔씩 쓰이니 그 뿌리가 깊은 편이긴 하다. 요즘 사람들은 ‘당신의 근처’를 줄인 온라인 중고거래를 떠올리는 이가 더 많을 것이다. ‘당근과 채찍’도 두루 쓰이니 누구나 접해본 말이자 채소이긴 하다.

당근은 단맛이 좀 강한 뿌리채소이니 한자로는 ‘糖’을 떠올리기 쉬우나 ‘唐’을 쓴다. 당면(唐면)에서 알 수 있듯이 ‘唐’이 앞에 쓰이면 중국에서 유래한 것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당근 역시 중국에서 건너온 뿌리채소라는 뜻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중국에서는 당연히 ‘당근’이란 말을 안 쓴다. 중국에선 무를 뜻하는 ‘나복(萝卜)’ 앞에 오랑캐를 뜻하는 ‘호(胡)’나 붉은색을 뜻하는 ‘홍(紅)’을 붙여 쓴다. 우리말에서 ‘胡’는 중국을 가리키기도 하니 당근의 다른 말인 ‘홍당무(紅唐-)’는 중국어의 두 말을 모두 합친 것이기도 하다.

당근을 일본에서는 ‘닌진(にんじん)’이라 하는데 그 한자를 보면 놀랍게도 ‘인삼(人蔘)’이다. 당근이 일본에 전래됐을 때는 잎의 모양을 보고 ‘미나리 인삼’이라고 불렀는데 어느 순간부터 미나리를 뗀 ‘닌진’이 곧 당근을 가리키게 됐다. 그러다 보니 진짜 인삼은 ‘조선인삼’ 또는 ‘고려인삼’으로 구별해 부르게 됐다.

예쁜 색과 단맛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향 때문에 당근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 삶은 뒤의 물컹한 식감이나 애매한 단맛을 접하면 그럴 법도 하다. 그러나 모든 채소가 그렇듯이 골고루 먹으면 몸에 이롭다. 향이 낯설더라도 인삼을 먹는다는 생각으로 친해지면 그 또한 보약이 될 것이다. 당신의 근처에 있는 중고물품과도 가까워지는 것이 좋겠다. 파는 이나 사는 이 모두가 좋을 뿐만 아니라 자원 재활용과 지구환경 보호에 좋은 건 ‘당근’이니 말이다.

 

04-11 입술

‘입술의 용도는?’이란 질문에 아이들이 ‘뽀뽀’라고 표현하는 것을 떠올렸다면 영혼이 그리 맑은 사람은 아닐 것이다. 입술로 휘파람을 불 수도 있지만 그 역시 부차적인 기능이다. 입술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입의 일부분으로서 입을 여닫는 문의 기능을 한다. 그래서 먹은 음식을 씹을 때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하니 여는 기능보다 닫는 기능이 더 중요하다.

‘술 중에 가장 단 술은?’이란 질문에 ‘입술’이란 말장난 식의 답을 떠올리는 이 또한 마찬가지다. 아니, 이 질문과 답은 처음부터 입술의 어원을 잘못 이해한 결과이다.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입술은 ‘눈시울’과 형제지간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활처럼 휘어진 것의 가장자리를 뜻하는 ‘시울’을 알아야 한다. 사람의 눈과 입은 가로로 길쭉하되 활처럼 휘어져 있다. 그 휘어진 모양 때문에 눈시울과 ‘입시울’이다. 그런데 눈시울과 달리 입술은 ‘시울’이 ‘술’로 바뀌어 둘이 형제가 아닌 것으로 보일 뿐이다.

먹고 말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관인 입의 범위를 명확히 아는 이는 드물다. 사전에서는 입술에서 후두까지라고 정의하고 있으니 꽤나 넓은 범위인데 입술은 가장 밖에 있어 눈에 보이는 부위이니 입술이 곧 입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도 입술을 여닫아야 음식을 섭취할 수 있으니 입술이 중요한 부위인 것은 분명하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순망치한(脣亡齒寒)’ 또한 먹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와 입술이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관계를 말해준다. 그런데 음식의 소화를 위해서 필수적인 침을 입술에 바르는 행동은 곧 거짓말과 통한다. 입술의 주된 기능 중 다른 하나는 발음기관의 가장 바깥에서 바른 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입술에 침을 바른 소리로 누군가의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면 입을 잘못 놀린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04-28 덕용

‘원님 덕에 나팔 분다’는 말에서 ‘덕’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한자 ‘德(덕 덕)’과 관련을 지어야 할 텐데 이 한자의 훈과 음이 같으니 오늘날에는 고유어는 없는 셈이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고유어가 애초부터 없었다면 우리는 한자 ‘德’ 덕에 우리말의 빈자리 하나를 채우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자전을 보면 이 한자의 훈과 음이 ‘큰 덕’으로 표기된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 한자가 ‘크다’의 뜻으로도 쓰인다는 것인데 그런 뜻으로 쓰인 예를 찾기 어렵다.

그런데 대용량의 식재료 포장을 보면 ‘덕용’이란 표기가 보인다. 작은 단위로 판매하기도 하는 제품이지만 큰 용기에 한데 담아 포장하니 포장비를 줄여 저렴하게 판매하는 상품이다. 한자로는 ‘德用’이라 쓰니 이 용법에서 한자 ‘德’이 ‘크다’의 뜻으로 쓰인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 단어는 한자의 고향인 중국에서는 안 쓰이니 일본에서 먼저 쓰이기 시작해 우리말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덕용을 ‘득용(得用)’이라 쓰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德’과 ‘得’의 발음이 같아서 두 단어를 모두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자를 보면 이득이 있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니 덕용에서의 ‘德’이 ‘크다’의 뜻으로 쓰인 것인지 고개가 갸우뚱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크기 때문에 이득이 있다고 보면 발음뿐만 아니라 뜻이 통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일본에서 유래한 한자어를 꺼리는 이들도 있으니 덕용이란 한자어가 그리 정겹지는 않다. 그러나 낱개로 포장된 스낵류에 질소를 더 많이 넣어 크게 보이려 하는 것을 보면 덕용 포장이 반갑기도 하다. 포장비를 줄여 원가를 절감할 수 있다면, 일일이 포장을 뜯어 사용해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다면 나쁠 것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값이 싸다고 덕용 포장으로 샀다가 채 쓰지도 못하고 버려야 한다면 덕용은 결코 득이 되지 않으니 반드시 커서 싸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05-12 이팝나무

 

고슬고슬한 밥알이 탐스럽게 피어나는 나무가 있다. 흔히 아카시아라고 부르는 아까시나무의 꽃을 떠올리는 이들은 그 꿀을 벌에게 양보하지 않고 먹어 본 이들일 것이다. 이 나무는 가시 탓에 가로수로는 쓰일 수 없어 동네 어귀의 언덕이나 야트막한 산에서나 볼 수 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4, 5월의 거리를 하얗게 밥알로 장식하는 가로수가 부쩍 늘어 이 나무를 먼저 떠올리는 이도 있을 법하다.

이 나무의 이름은 이팝나무인데 ‘이팝’이 좀 낯설다. 이 나무와 짝을 이루는 조팝나무 역시 조금 작은 밥알 모양의 꽃을 촘촘히 피우는데 ‘조팝’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조팝은 요즘에는 ‘좁쌀밥’이라고 부르는, 조로 지은 밥이다. ‘조’는 ‘머리’와 마찬가지로 과거에는 받침으로 ‘ㅎ’을 가지고 있었으니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조팝’이 되는 것이다. 이에 견주어 보면 이팝의 ‘이’ 또한 과거에 받침으로 ‘ㅎ’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팝보다 더 익숙한 것은 멥쌀의 다른 말인 ‘입쌀’이나 ‘이밥에 고깃국’에 쓰이는 ‘이밥’이다. 이 단어들에서 ‘?’이나 ‘이’를 추출해 낼 수 있는데 놀랍게도 이것은 ‘끼니’의 ‘니’와 같은 단어이다. 끼니는 때에 먹는 밥이라는 뜻이니 ‘니’가 밥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팝이나 입쌀도 함께 고려하면 ‘니’는 ‘벼’를 가리키는 옛말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겠다.

하얀 쌀밥이 건강의 적이 되었으니 이 나무를 보고 밥을 떠올리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이밥에 고깃국은 기와집에 비단옷과 함께 풍족한 삶의 상징이었는데 이제는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그래도 이팝나무의 뜻을 알게 되면 그 꽃이 더 정겹고 탐스러워 보인다. 이 땅의 어디에선가 아직도 배불리 먹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팝 혹은 이밥은 여전히 선망의 대상이다. 이 가로수가 이 땅의 모든 곳에 탐스럽게 꽃을 피우기 바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05-19 주물럭과 두루치기

식객들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는 음식점 주인장이 늘 반갑다. 이에 곁들여 국어 선생은 새로운 음식에 맛깔스러운 이름을 지어 주는 이들이 고맙다. 특히, ‘주물럭’과 ‘두루치기’를 접한 순간 작명자들의 언어 감각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주물럭, 생각해 보면 이상한 말이다. ‘주물럭’은 ‘주물럭거리다’의 뼈대이지만 홀로 쓰이지는 않는데 이것을 독립시켰다. ‘두루치기’ 또한 ‘두루’와 ‘치기’가 이렇게 결합할 수 있나 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말 그대로 두루 쳐서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냈다.

사실 주물럭과 두루치기가 정확히 어떤 음식을 가리키는 것인지 사람마다,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다. 돼지고기에 양념을 해 주물럭거린 뒤 직화로 구우면 주물럭이 된다. 주물럭거린 것을 양념이 배도록 재워둔 뒤 볶아내면 제육볶음이 되고, 국물이 자작자작하도록 냄비에 조려내면 두루치기가 된다. 양념과 그에 따른 색, 조리법에 따라 그 이름이 제각각이지만 그 경계가 모호하고 맛도 비슷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음식점 주인장이나 주방장이 맛있게 만들어서 식탁에 올려주면 되니 재료, 양념, 요리법을 따져 굳이 각각의 경계를 명확히 할 필요는 없다. 주물럭과 두루치기가 등장한 지는 꽤 되었지만 레시피가 명확한 요리로 정립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해 보이니 그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우리의 말을 이리저리 주물럭거리고 두루 쳐대는 저들의 감각과 노력에는 경의를 표하고 싶다. ‘주물럭’이란 요리 이름에 조리법은 물론 그 모양새가 바로 떠오르지 않는가? ‘두루치기’란 이름만 보면 재료와 양념을 휘뚜루마뚜루 넣고 마구 조리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상상이 되지 않는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말, 즉 ‘신조어’에 대해서는 다들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낸다. 그러나 무심한 듯하지만, 말의 맛을 위해 정성을 쏟은 말은 언제나 맛있고 반갑다.

 

05-26 송화 다식

소나무도 꽃을 피운다. 그것도 고운 보라색과 노란색의 꽃을. 솔방울은 소나무의 열매이고 그 안에 씨를 감추고 있으니 소나무가 꽃을 피우는 것은 분명한데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모를 뿐이다. 5월의 앞산에 바람이 불 때 노란 가루가 흩날리는 것을 보았다면, 비가 그친 뒤 고인 물이 마를 때 가장자리에 노란 가루가 뭉쳐 있는 것을 보았다면 그것이 바로 소나무의 꽃가루이니 소나무 꽃은 분명히 있다.

소나무 꽃은 몰라도 송홧가루나 그것으로 만든 음식을 접한 이들은 있을 것이다. 송홧가루로 만든 대표적인 음식이 ‘다식(茶食)’인데 말 그대로 풀자면 차를 마실 때 곁들여 먹는 음식이다. 송화다식은 송홧가루를 모아 꿀이나 조청으로 반죽을 한 뒤 나무로 제작한 다식틀로 찍어내 만든다. 특유의 향을 머금은 노란 가루가 꿀로 반죽이 돼 있으니 독특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 다식틀의 문양이나 글자가 다식에 박히니 그것을 관찰하며 먹는 재미도 있다.

우리 산에서 참나무 다음으로 흔한 것이 소나무이니 소나무는 우리의 음식에 꽤나 많이 활용된다. 추석 때 먹는 송편을 찔 때도 솔잎을 깔아야 향이 제대로 산다. 과거에 배고플 때 간식 대용으로 먹기도 했던 소나무 순 또한 약재로도 쓰이고 송이버섯은 소나무 아래에서 자라니 우리 음식에서 소나무의 비중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송화다식은 우리의 먹거리에서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소나무 재선충이 창궐하자 이를 막기 위한 농약이 문제이다. 이 농약으로 벌레로부터 나무를 지켜낼 수 있게 되었으나 나무에 주입된 농약이 줄기와 잎은 물론 꽃에도 퍼져 나가니 문제이다. 벌레가 좋아하는 먹거리는 사람의 입맛에도 맞기 마련인데 벌레가 못 먹게 하다 보니 사람도 못 먹는 안타까운 상황이 초래된 것이다. 그래도 밤, 콩, 참깨 등의 가루로 만든 다식은 여전히 있으니 더 멀어지기 전에 맛을 기억해 두는 것도 좋겠다.

 

06-02 닭갈비와 계륵

 

춘천에 가면 먹을 만한 것은 없으나 버리기엔 아까운 것을 먹어야 한다. 굳이 춘천까지 가서 이런 음식을 찾아 먹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이 음식이 춘천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이니 안 먹을 수도 없다. 이 음식의 이름은 닭갈비인데 이를 한자로 쓰면 ‘鷄肋(닭 계, 갈비 륵)’이 된다. 고유어와 한자어가 지시하는 대상은 같은데 중국의 고사에서 유래한 ‘계륵’은 쓸모는 없으나 버리기는 아까운 대상을 가리키니 좀 다르다.

닭의 갈비 부위를 보면 살이 거의 없으니 중국의 고사가 이해된다. 이런 부위로 요리하면 먹을 만한 것이 없을 텐데 춘천의 ‘닭갈비’는 그렇지 않다. 닭의 갈비 부위가 아니라 닭다리와 가슴살을 쓰니 이런 이름을 붙이는 것 자체가 이상할 수도 있다. 이는 이 음식이 돼지갈비를 대신하기 위해 탄생한 것과 관련이 있다. 비싼 재료인 돼지갈비 대신 닭을 갈비를 요리하듯이 넓게 저며 편 뒤 돼지갈비 양념을 해서 구워내다 보니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갈비란 단어를 들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소나 돼지의 갈비이다. 이 동물의 가슴 부위를 보호하기 위한 12개의 굽은 뼈가 있는데, 이 부위에 붙은 살이 지방과 살이 적당히 조화를 이뤄 특별한 풍미를 낸다.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부위이나 한 마리에서 얻을 수 있는 양은 제한돼 있으니 비쌀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저렴한 닭으로 갈비 맛을 내니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이 될 수 있었다.

고유어와 한자어가 같은 대상을 가리킬 때 한자어가 선호되거나, 그 결과 고유어가 사라지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山’의 훈과 음이 ‘뫼 산’인 것을 보면 ‘뫼’가 고유어로 쓰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江’은 훈과 음이 ‘강 강’이어서 고유어의 흔적조차도 찾을 수 없다. 다행히 ‘닭갈비’와 ‘계륵’의 관계에서는 고유어 닭갈비가 더 우위에 있다. 닭갈비는 우리말에서의 계륵이 아니라 진짜 갈비인 셈이다.

 

06-09 맛난이

세종대왕 덕에 우리는 글자로 마술을 부릴 수 있다.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지우면 ‘님’이 되고 ‘돈’이라는 글자에 받침 하나 바꾸면 ‘돌’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못난이’란 단어에 모음 하나를 돌려 붙이면 ‘맛난이’가 된다. 그저 한글로 장난을 친 것일 수도 있고 맛난이의 뜻도 낯설지만 본래의 뜻과 변화 과정, 그리고 그것의 생태적 의미를 생각해 보면 결코 허투루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음식은 입으로 먹고 혀와 코로 맛을 즐기지만, 눈으로도 먹는다. 그래서 음식을 만드는 이들은 ‘플레이팅’에 힘을 쏟고 채소, 과일, 고기 등을 생산하는 이들도 보기 좋은 식재료를 공급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그래서 크기, 모양, 색, 질감 등이 좋은 것들은 비싼 값에 팔리고 그렇지 못한 것은 헐값에 팔리거나 버려지기도 한다. 못난이에 대한 푸대접이 음식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못난이가 아닌 ‘맛난이’란 말이 종종 보인다. 새롭게 만들어진 말로 보이지만 본래 ‘맛을 돋우기 위하여 음식물에 넣는 조미료’란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북녘에서 화학조미료를 ‘맛내기’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뜻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못생긴 과일이나 채소 등을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하는 생산자나 상인들이 이 말을 새로운 뜻으로 쓰고 있다.

‘못’을 ‘맛’으로 바꾼 마술은 여러 가지로 놀랍다. ‘못난’은 잘못 태어난 것, 혹은 없어도 좋은 것이란 뜻인데 ‘맛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있다는 뜻이다. 눈으로 보면 격이 떨어지지만, 혀와 코로 느끼는 맛은 결코 뒤떨어지지 않으니 마음껏 즐기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다 자칫 버려질 수도 있는 것을 맛있는 음식으로 바꿔 놓은 말의 주인이자 마술사들에게 감사할 일이다. 그리고 싼값으로 사서 맛있게 먹어 주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06-16 거냉(去冷)

‘거냉’은 ‘去(갈 거)’와 ‘冷(찰 랭)’이 합쳐진 한자어인데 한자를 알아도 뜻을 파악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去’는 ‘제거(除去)’에도 쓰이니 ‘없애다’의 뜻으로 이해하면 조금 쉬워진다. 한자의 뜻을 조합해 보면 차가운 것을 없앤다는 뜻인데 사전에서는 약간 데운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흔히 쓰는 말은 아니지만 냉면집에서는 너무 차갑지 않은 냉면을 가리킨다.

음식은 따뜻하게 먹어야 할 것과 차게 먹어야 할 것이 따로 있는데 따뜻하게 먹어야 할 것이 더 많다. 그래서 ‘면’이라 하면 보통 따뜻한 국수를 가리키니 차갑게 먹는 면을 따로 ‘냉면’이라 한다. 그런데 냉면을 거냉해서 내면 ‘차갑지 않은 냉면’이 되니 ‘네모난 원’만큼이나 이상한 말이 된다. 그러나 냉면을 즐기고 싶지만 차가운 것이 장기에 부담을 준다면 차가운 기운을 걷어내고 먹는 것도 방법이니 그리 이상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다.

냉면은 본래 겨울 음식이었는데 더울 때 먹는 음식으로 인식이 바뀐 데에는 냉장고가 큰 역할을 했다. 냉장고 덕에 한여름에도 얼음을 얻을 수 있고 음식도 차게 보관할 수 있으니 기온과 관계없이 냉면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냉면뿐만 아니라 각종 술과 음료수도 차게 해서 먹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 결과 우리는 소주, 맥주, 막걸리 등 모든 술을 차게 해서 마신다.

중국을 방문해 본 이들은 미지근한 맥주에 당황스러워하기도 한다. 중국인들은 상온 맥주도 즐겨 마시니 차가운 것을 따로 주문하지 않으면 겪게 되는 일이다. 그런데 의외로 거냉한 술, 즉 상온의 미지근한 술을 마셔보면 청량감은 없을지 모르지만 술 본연의 맛이 더 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냉기로 덧씌워진 음식과 음료 탓에 그 본연의 맛을 모르거나 맛없는 것을 냉기로 덮은 것을 먹는 경우도 많다. 날이 더워질수록 찬 것을 많이 찾다 탈이 나는 일도 많아지니 적당히 거냉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06-23 두부

고기는 푸줏간에서 구해야겠지만 밭에서 작물을 길러 집에서도 구할 수 있다. 밭에서 나는 고기, 혹은 살이 찌지 않는 치즈라 불리는 두부 때문이다. 두부와 고기는 근본적으로 다른 음식이지만 단백질을 비롯한 각종 영양소가 풍부한 두부가 고기 못지않아 생긴 이야기다. 게다가 식물성이어서 채식주의자들이나 살이 찌는 것을 걱정하는 이들에게도 제격인 음식이다.

두부는 중국에서 발명되었다는 것이 정설이고 이 음식을 부르는 동서양의 모든 이름 또한 ‘豆腐’에서 유래되었다. 한자의 뜻 그대로를 보면 ‘콩이 썩다’의 의미인데 두부는 콩을 썩혀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콩물을 끓여 응고제로 엉기게 해서 만드는 음식이다. 어떤 응고제를 쓰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단백질을 중심으로 한 두부의 영양가는 달라지지 않으니 썩 괜찮은 식재료이기도 하다. 교도소에서 막 출소한 이에게 두부를 먹이는 연유를 여러 가지로 설명하지만, 두부로 영양을 보충하라는 의미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음식으로서는 이렇게 좋기만 한 두부가 일상의 말에 스며들면 그리 좋은 뜻으로 쓰이지는 않는다. ‘두부살’이라고 하면 뽀얀 피부를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지만, 대개는 근육이 부족해 무른 살을 가리킨다. 영어와 결합된 신조어로서 최근에 많이 쓰이는 ‘두부멘털’ 역시 강인하지 못한 정신 상태를 가리킬 때 쓰인다.

재료와 만드는 법이 같더라도 음식의 이름은 여럿일 수 있는데 이 음식의 이름은 거의 모든 언어에서 같다. 두부 또는 이와 유사한 발음으로 이 음식을 부르는 것은 이 음식이 중국에서 만들어져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음식을 가리키는 말이 곧 그 음식의 기원을 나타내니 밭에서 나는 고기를 발명하고 그와 함께 이름까지도 널리 퍼뜨린 중국에 감사할 일이다. 적어도 두부에 한해서는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것이라 마음대로 우겨도 되겠다.

 

06-30 잇몸

튼튼한 이는 오복 중의 하나라고 하는데 그 이유 역시 먹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음식을 뜯고, 찢고, 자르고, 갈아 먹어야 소화가 잘되는데 이 역할을 하는 것이 치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를 튼튼하게 하기 위한 약도 있을 법한데 이와 관련된 약을 찾아보면 대개는 잇몸을 치료하거나 튼튼하게 해준다는 약이다. 법랑질, 상아질 등으로 이뤄진 단단한 치아를 건강하게 할 약이 딱히 없으니 그것이 자리 잡고 있는 잇몸을 튼튼하게 하자는 것이다.

‘잇몸’이라 하면 누구나 ‘이의 몸’이라 생각할 텐데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오늘날은 잇몸이라고 쓰지만 거슬러 올라가 보면 ‘닛므윰, 닛?윰’ 등이 나타난다. ‘어금니’ 등에 나타나는 ‘니’에 사이시옷이 붙은 것이 ‘닛’인 건 분명한데 ‘므윰, ?윰’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다. 그래도 18세기까지는 ‘닛무음’으로 쓰였으니 이전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니 이때까지는 잇몸은 이의 몸이 아니다.

그런데 19세기에 이르러서 우리 조상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도대체 뜻을 알 수 없는 말 대신 이해가 가능한 ‘니몸’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오늘날과 표기가 조금 다를 뿐 ‘므윰’과 그 후대 어형을 ‘몸’이라 해석한 결과이다. 이 부위가 결국은 이가 박혀 있는 살이니 뜻으로 보아도 크게 이상하지 않아 이때부터 잇몸은 이의 몸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치과 의사들은 잇몸이 이를 품고 있는 몸이라 인식하는 것을 반길지도 모르겠다. 이가 썩으면 찾게 되는 것이 치과이지만 실제로는 이가 아닌 잇몸까지 포함한 치주조직에 문제가 있는 이가 많이 찾는다. 이뿐만 아니라 이를 둘러싸고 지지하는 그 몸까지 건강하게 하는 것이 치아 건강의 목표이다. 아니, 이뿐만 아니라 이의 몸까지 잘 챙겨 치과 의사들의 환자를 줄이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 좋겠다. 애나 어른이나 치과는 절대 가고 싶지 않은 곳이기 때문이다.

 

07-07 소화제와 피로회복제

 

잘 먹고 잘 자는 것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그런데 너무 잘 먹다 보면 체하고 너무 못 자다 보면 피로가 쌓인다. 음식이 어딘가에 얹혀 체했을 때에는 소화제가 도움이 되고, 몸에 피로가 쌓이면 피로회복제가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일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말이지만 피로회복제는 좀 이상한 말이다. 피로를 회복시키면 더 피로해질 텐데 피로회복제는 그 반대의 목적으로 마시니 그렇다.

소화제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부채가 그려진 약병에 담긴 ‘생명을 살리는 물’이란 뜻의 약이다. 한자로 지어진 ‘올드’한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약은 19세기의 끝 무렵에 만들어졌다. 청량감을 더하기 위해 탄산가스를 첨가하고는 ‘가스’가 아닌 ‘까스’를 붙인 것만 봐도 그렇다. 오늘날의 외래어 표기법에는 맞지 않지만 이 규정보다 훨씬 더 오래된 약이니 규정도 힘을 못 쓴다. 약효뿐만 아니라 상표와 이름 면에서도 역사적인 약이기도 하다.

피로회복제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로마신화 속 술의 신 이름을 딴 음료이다. 한자어의 조어법이 불친절해 말 그대로의 뜻만 보면 피로를 되살린다는 의미이지만, 우리말의 토씨를 넣어 친절하게 풀이하면 ‘피로에서 회복시키는 약’이란 뜻이다. 이름에서는 술 냄새가 확 풍기지만 신화를 눈여겨 읽은 이의 작명일 뿐이다.

생명을 살리는 물이나 술의 신을 자주 마시는 삶은 그리 건강한 삶은 아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의 급체는 오랜만에 접한 음식을 허겁지겁 먹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오늘날의 급체는 바쁜 시간에 쫓겨 음식을 입안에 욱여넣었기 때문이다. 피로회복제를 마셔야 하는 이들 역시 바쁜 일상이 늘 피로를 회복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느긋한 마음으로 먹고 자면 생명을 살리는 물이나 술의 신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된다. 이 약을 만드는 이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 모두의 바람이기도 하다.

 

07-14 장모님 손맛

‘장모님 족발’이란 간판을 단 어느 시골의 족발집을 보면서 동행한 외국인이 묻는다. 장모님의 다리로 만든 음식이냐고. 그것이 아니라 장모님의 손맛으로 맛있게 만든 족발이라고 설명해 주니 이 친구는 한술 더 뜬다. 장모님의 손에 특별한 맛이 있냐고. 한국에 온 지 오래고 한국어도 꽤나 능숙하게 하니 국어 선생을 상대로 말장난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익숙해 아무렇지도 않은 말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이상할 수도 있는 말이다.

장모님의 손맛은 특별한가? ‘손맛’은 세 가지 뜻이 있는데 이때는 ‘음식을 만들 때 손으로 이루는 솜씨에서 우러나오는 맛’이라는 세 번째 뜻의 용법이다. 그런데 요리를 할 때 손에서 맛을 낼 수 있는 성분이 정말로 우러나온다면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니 이때는 성분이 아니라 정성과 노력이 내는 맛이라 해야 할 것이다. 젓가락을 비롯한 여러 도구로 휘휘 저어 음식을 만들 수도 있지만 손으로 조물조물 꼼꼼하게 무치고, 빚고, 싸서 만드니 그에 대한 특별한 경외의 뜻이 담긴 말이다.

그런데 왜 굳이 장모님일까? 사실 자신의 장모님은 아내 형제자매들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자신의 어머니는 누군가에게 장모님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때의 장모님은 어머니의 또 다른 말이기도 하다. 자식들을 위한 끔찍한 사랑이 손끝을 떠나 혀끝으로, 그리고 마음에까지 와 닿는 것이다.

문제는 왜 장모님, 혹은 어머니여야 하는 것인가이다. 음식 중의 최고는 남이 해 주는 음식이라지만 그 남이 자신과 아내를 낳아 길러 준 어머니여야 할 이유는 없다. 손맛은 정성과 노력이니 누구에게나 있다. 손에 양념을 묻히는 게 싫으면 일회용 비닐장갑이나 라텍스 장갑도 있다. 장갑을 끼고 음식을 만들어도 어느 누구도 ‘장갑 맛’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 장모님께, 그리고 어머님께 손맛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가 많지 않을 수도 있으니 지금이 바로 그때다.

 

07-21 돈가스

이제는 드물어진 경양식 집에서는 ‘까쓰’가 주된 메뉴였다. 돼지고기로 만들었으면 ‘돈까쓰’이고, 쇠고기로 만들었으면 ‘비후까쓰’이다. 생선으로 만들었으면 ‘피시까쓰’여야 할 텐데 그냥 ‘생선까쓰’이고 다진 고기로 만든 ‘함박스텍’도 이 흐름을 따라 ‘함박까쓰’가 된다. 이 모든 까쓰의 기원은 일본어인데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이탈리아어 ‘코톨레타(cotoletta)’에 이르게 된다.

19세기 후반 서양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일본에서 ‘커틀릿(cutlet)’을 ‘가쓰레쓰(カツレツ)’로 받아들였고 재료로 돼지고기를 쓰면서 ‘돈가쓰레쓰’가 자리를 잡았다. 이 음식이 외래어표기법이 정착된 요즘에 들어왔다면 ‘돈가스’가 되어야 하겠지만 20세기 초반에 들어왔으니 결국 부르는 사람들 마음이어서 ‘돈카쓰, 돈까쓰, 돈카츠, 돈까츠’ 등 다양하게 표기되고 발음되었다. 오늘날 가장 흔한 발음은 ‘돈까쓰’이지만 ‘뻐쓰’라고 발음하면서 ‘버스’라고 쓰는 것처럼 ‘돈가스’가 외래어표기법에서도 인정하는 표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 돈가스가 점점 힘을 잃고 있다. 이 음식은 경양식집을 넘어 분식집의 메뉴로, 나아가 학교 급식의 메뉴로도 나오니 음식 자체의 인기가 떨어졌다는 것은 아니다. 음식 이름의 접미사처럼 쓰였던 ‘까쓰’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비후까쓰’는 ‘비프스테이크’로, ‘함박까스’는 ‘햄버거스테이크’로 더 많이 불리게 되었다. 심지어 원조 격인 돈가스도 요즘에는 ‘포크커틀릿’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늘어가고 있다. 경양식집보다 스테이크 하우스가 익숙한 이들, 일본어가 아닌 영어가 익숙한 이들이 늘어난 결과이다. 동시대를 살면서 누군가는 돈가스를 먹고 누군가는 포크커틀릿을 먹는다.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변화의 흐름을 타고 있는 문제이다. 같은 식탁에서 같은 음식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며 평화롭게 먹으면 될 일이다.

 

07-28 떡볶이

1938년에 발표된 ‘오빠는 풍각쟁이야’에는 ‘불고기 떡볶이는 혼자만 먹는’ 오빠가 등장한다. 이 노랫말을 들으면 일제강점기에도 떡볶이가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되고, 비싸지도 않은 떡볶이를 동생한테 양보하지 않은 오빠한테 한 번 더 놀라게 된다. 그러나 떡볶이는 조선 시대에도 있었고 꽤나 고급스러운 음식이었으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더 놀랄 만한 것은 이 음식의 이름에 포함된 ‘볶다’이다.

고추장 양념을 푼 물에 떡과 몇 가지 재료를 넣고 국물이 졸아들 때까지 익힌다. 이 음식의 조리법은 이것이 전부인데 왜 ‘볶다’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 연유를 알려면 오늘날 ‘궁중 떡볶이’란 음식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 이 음식은 떡볶이와 달리 기름을 두른 번철에 고기와 갖가지 채소를 넣어 달달 볶다가 가래떡을 넣고 간장으로 양념을 한다. 오늘날 분식점이나 포장마차에서 먹을 수 있는 떡볶이와는 재료와 색이 딴판인 고급 음식이다.

고추는 우리 음식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는데 떡볶이도 그중의 하나이다. 비싼 고기와 채소는 빼는 대신 값싼 ‘오뎅’이 들어간다. 기름을 둘러 볶는 대신 고춧가루를 주재료로 한 양념을 풀어 빨갛게 졸여낸다. 여기에 라면을 사리로 넣고 삶은 계란도 추가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아이들은 물론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는 어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다.

재료와 조리법은 바뀌었는데 그 이름은 여전히 ‘볶다’와 관련이 있다. 조리법에 맞춰 이름을 다시 짓는다면 ‘떡조림’ 정도가 될 듯한데 이 조리법을 ‘조림’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사실 ‘멸치볶음’을 생각해 보면 ‘떡볶음’이 아닌 ‘떡볶이’인 것도 이상하다. 그러나 이 음식은 이런 것들을 복잡하게 따지며 먹는 음식이 아니다.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며 철없는 마음으로 먹는 것이 더 맛있다. 다만 ‘떡볶이 집 아줌마’가 이 조리법에 대한 멋진 이름을 지어주길 바랄 뿐이다.

 

08-04 아아와 따아

 

‘쪄 죽을 만큼’의 더운 날씨가 연일 지속되고 있다. 이렇게 죽을 만큼 더울 때 생각나는 것은 역시 찬 음식인데 과거에는 얼음을 넣은 미숫가루나 콩물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얼음을 가득 넣은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이런 날에는 추운 겨울에 얼어 죽더라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얼죽아’들이 아니더라도 시원한 커피를 주문하는 것이 이상할 이유가 없다.

커피에 진심인 이탈리아 사람들은 진하게 내려 홀짝 마시는 에스프레소만 커피로 쳐 준다. 그러니 고온 고압으로 내린 커피 원액에 물을 넣어 희석한 커피를 경멸한다. ‘아메리카노’라는 말은 미국 사람이 만든 커피가 아니라 미국 사람들이나 먹는 덜떨어진 커피란 뜻도 담겨 있다. 상황이 이러니 물도 모자라 얼음을 듬뿍 넣은 커피는 정말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 사람들이 그렇게 마신다고 해서 따라 할 이유도 없고, 이탈리아 사람들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경멸한다고 해서 마시길 주저할 이유도 없다.

요즘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아아’로 줄인 것도 모자라 ‘얼어 죽어도’까지 붙인 것을 보면 이 말은 틀림없이 젊은이들이 만든 말일 것이다. 줄임말에는 거부반응을 보이는 어른들도 ‘아아’에는 그리 큰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습성과 효용이 이해가 되는 듯하다.

본래 아메리카노는 따뜻한, 혹은 뜨거운 것이 당연했으니 이를 따로 부를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아아라 부르니 이와 짝이 맞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 짝을 누군가는 ‘뜨아’라고 하고 누군가는 ‘따아’라고 한다. 뜨거우면 입을 데니 적당한 온도의 따아가 더 나아 보이는데 같은 모음이 반복되니 좀 꺼려지기는 한다. 아니다. 지금은 더워서 아아를 마셔야 할 때이니 뜨아나 따아에 대한 고민은 날이 선선해진 뒤로 미루는 것이 좋겠다.⊙

 

08-11 시동을 푸다

잘 먹었으면 소화를 잘 시켜야 하고 남은 것은 잘 배출해야 한다. 잘 비워내야 다시 잘 먹을 수 있으니 배출하는 것은 먹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몸 밖으로 배출된 이것은 다시 거름이 되어 작물을 길러내니 이 과정은 자연의 순환 과정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입에 올리거나 글로 쓰기를 누구나 꺼리지만 이것은 똥과 오줌이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국어학자들은 이 ‘똥’과 오래도록 씨름을 해 왔다.

오늘날에는 똥의 첫소리가 ‘ㄸ’이지만 세종대왕 당시에는 ‘ㅅ’과 ‘ㄷ’이 나란히 쓰였었다. 이와 비슷한 것이 오늘날의 ‘쌀’인데 당시에는 ‘ㅂ’과 ‘ㅅ’이 나란히 쓰였다. 글자가 둘이니 소리도 둘일 것이라 추정할 수 있고 ‘쌀’은 증거도 있다. ‘조’와 ‘쌀’이 합쳐진 단어가 ‘조쌀’이 아닌 ‘좁쌀’인 것이 그 증거인데 이를 통해 쌀은 세종대왕 시절에는 ‘읍살’과 비슷하게 발음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똥도 ‘스동’ 또는 ‘시동’으로 발음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는데 증거가 없다. ‘ㅅ’이 앞에 쓰였던 것은 모두 된소리로만 남아 있고 ‘소’와 ‘똥’이 결합한 것이 ‘솟동’일지라도 결국 된소리이니 확인할 길이 없다. 유일한 길은 문헌이나 방언에 남아 있는 ‘스동’이나 ‘시동’을 찾는 것인데 아직까지 보고된 바가 없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그런데 목포 출신의 선배 교수님의 고향에서는 거름으로 쓰기 위해 모아 놓은 똥을 ‘시동’이라 하고 보통은 ‘시동을 푼다’는 말로 주로 쓴다고 말씀해 주신다. 소화되고 남은 것이 몸에 오래 머무르면 변비가 되는데 변비가 말끔히 가시는 느낌이 이런 느낌일까? 이로써 다른 글자와 나란히 쓰인 ‘ㅅ’도 발음이 되었을 것으로 볼 근거 하나가 생겼다. ‘딸’과 ‘떡’도 이와 비슷한 예인데 이 땅의 어디에선가 시달과 시덕을 맛있게 먹고 시동으로 잘 퍼내며 사는 사람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08-18 샥스핀

중국집의 메뉴는 한·중·일 세 언어의 ‘짬뽕’이다. 짜장면의 ‘짜장’은 중국식 발음이고 ‘면’은 한국식 발음이다. 중국의 ‘당초육(糖醋肉)’이 변형된 탕수육은 한자 하나는 바꾼 뒤 첫 글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한국식으로 읽는다. 우동은 일본어로 인식되고 짬뽕은 음식도 그 이름도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유독 특이한 메뉴가 하나 있으니 샥스핀이 그것이다.

샥스핀의 ‘샥’은 한·중·일 삼국에는 없는 말이니 다른 언어에서 기원을 찾아봐야 한다. 이 요리가 상어의 지느러미를 말린 것을 주재료로 하니 아무래도 상어와 지느러미를 뜻하는 영어 ‘샤크(shark)’와 ‘핀(fin)’에서 유래를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두 단어를 합친 ‘샤크핀’이 되어야 할 텐데 영어식 조어 ‘shark’s fin’을 그대로 가져오되 ‘샤크스핀’이 아닌 ‘샥스핀’으로 변형시켜 가져온 것이다.

중국의 3대 진미 중 하나로 꼽히는 상어 지느러미 요리는 중국어로는 ‘위츠(魚翅)’라고 한다. 따라서 본래 중국 음식이니 메뉴에 ‘위츠’라고 올리거나 한국식으로 읽은 ‘어시’라고 올려야 할 것이었다. 국어사전에는 어시가 올라 있긴 한데 물고기 지느러미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지 상어 지느러미를 특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이 요리가 상어 지느러미로 만들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영어 단어를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샥스핀이 고급 요리로 취급되지만 주재료인 상어 지느러미는 아무 맛도 없으니 독특한 식감이나 양념 맛으로 먹는 것이다. 문제는 이 재료를 구하기 위해 상어를 잡아 지느러미만 취하고 몸통은 버리는 데 있다. 지느러미가 잘린 상어의 운명을 생각해 보면 탐욕스럽게 즐길 만한 음식은 아니다. 게다가 중국이나 한국 모두에서 이 음식은 권력과 돈이 결탁된 부패의 상징으로 인식된다. 이 괴상한 이름의 요리는 메뉴에서 아예 사라지는 게 더 좋을지 모른다.⊙

 

08-25 먹태

한정 판매, 웃돈 거래, 되팔이 등 소문난 명품에나 어울릴 법한 말이 과자에 적용돼 쓰이고 있다. 유명한 제과점에서 만든 수제품이라면 이해가 갈 법도 한데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는 과자에 이런 일이 벌어지니 의아할 법도 하다. 이 제품을 개발한 이들의 많은 노고 덕이겠지만 이 제품에 들어간 ‘먹태’의 맛과 인기에 힘을 입은 것이기도 할 것이다. 아니 먹태 이전에 수없이 변신을 거듭하는 명태 덕일 것이다.

상태나 가공법에 따라 이처럼 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물고기가 또 있을까? 생물이면 생태고 얼리면 동태다. 반쯤 꾸덕꾸덕하게 말리면 코다리고 배를 갈라 바싹 말리면 북어다. 배를 가르지 않고 얼고 녹고를 반복하며 말리면 황태다. 날씨가 도와주지 않아 황금빛 황태가 되지 못하면 먹태다. 그 새끼까지 잡아 말리면 노가리가 되니 붙일 수 있는 이름은 다 붙였다.

먹태는 흑태라고도 하는데 ‘먹’이든 ‘흑’이든 검은색을 뜻한다. 날씨가 잘 도와줘 황금빛 황태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 거뭇하게 마른 것이니 아무래도 상품성이 떨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이 술안주로 개발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잘 건조된 황태는 해장국집이나 구이집으로 팔려나가고 상태가 조금 아쉬운 것은 술안주가 된 것이다. 그런들 어떠하랴. 고추장, 간장, 마요네즈 등등을 듬뿍 찍어 술에 곁들여 맛있게 먹고 마시면 되는 것이니.

험한 바다에서 명태를 잡는 이, 곱은 손을 호호 불며 손질해 말린 이, 거뭇하게 마른 것의 새로운 소비처를 개발한 이, 웃고 떠들면서 맛있게 먹고 마시는 이들의 합작품이 먹태다. 그리고 그 맛을 살려 과자에도 담아낸 이들의 노고까지 더해졌다. 여기에 배를 갈라 소금으로 염장한 뒤 말린 북녘의 짝태까지 더해지면 더할 나위 없겠다. 먹태 과자와 짝태 술안주를 한반도의 모든 이가 즐길 수 있어야 명태의 변신이 완성된다.

 

09-01 오이소박이

 

아삭한 오이의 식감과 향긋한 부추의 내음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오이소박이는 그 모양새만큼이나 이름도 알차고 예쁘다. 주재료인 ‘오이’의 속에 ‘소’를 ‘박은’ 것이 이 음식이니 이름에 주재료와 만드는 방법이 오롯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박이’에 음운 현상이 적용돼 ‘소배기’가 되기도 하니 그 이름이 더 정겹게 느껴진다. 그런데 받침의 유무로 갈리는 ‘속’과 ‘소’는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

‘속’은 거죽이나 껍질로 싸인 물체의 안쪽 부분을 뜻하고 ‘소’는 음식의 속에 넣는 여러 가지 재료를 뜻한다. 그러니 속이 더 넓은 뜻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적인 용법에서는 속이 소를 대신하기도 한다. 만두의 소를 속이라고 하기도 하고 배추김치를 담글 때 넣는 김칫소를 ‘김칫속’이라고 하는 이도 많다. 뜻과 소리가 모두 비슷하니 둘을 같이 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는 ‘속’이 받침이 떨어져 생겨난 것은 아닐까? 받침이 떨어지려면 그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멀쩡한 ‘ㄱ’ 받침이 떨어질 이유가 없다. 게다가 ‘속’은 길게 발음하는데 ‘소’는 짧으니 그 변화까지 설명해야 한다. 익산의 옛 이름 ‘이리’가 본래 ‘솝리’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더욱 아니다. ‘솝’은 오늘날은 안 쓰이지만 17세기까지 ‘속’과 같이 쓰였다. ‘솝’이 ‘속’과 기원이 같다 보니 속을 뜻하는 한자 ‘裡(속 리)’를 지역 이름에 쓴 것이다.

오이와 부추를 재료로 하되 ‘버무리’가 아닌 ‘소박이’를 만든 것은 독특한 칼질 덕분이다. 오이를 네 등분하되 한쪽 끝은 남겼으니 속이 생기고 거기에 소를 넣을 수 있으니 소박이가 된 것이다. 사실 오이소박이의 속은 완전한 속이 아니니 겉과 속의 구별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형상이기도 하다. 그러니 오이소박이를 먹을 때 베어 먹기 애매하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속이 아닌 속에 소를 넣을 방법을 고안한 이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09-08 먹요일

세종대왕께서 만든 한글로 받침 하나, 모음 하나 바꿔 다른 단어를 만드는 마술은 오늘도 계속된다.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지워 ‘님’으로 만들고, 못생긴 열매 ‘못난이’를 모음 하나 바꿔 ‘맛난이’로 알뜰하게 파는 마술이 그것이다. 이 마술이 ‘다이어터’들의 ‘치팅데이’까지 점령해 ‘먹요일’을 새롭게 탄생시켰다. ‘목요일’을 모음 하나 바꾸면 ‘먹요일’이 되지만 꼭 목요일일 이유는 없다. 다이어트로 굶주리다 어느 하루 맘껏 먹어도 되는 날이면 된다.

체중 조절을 위해 음식을 조절하는 것을 뜻하는 다이어트는 우리말의 일부가 되었다. 외국어에서 유래한 외래어는 사전에 순화어가 올라 있기도 한데 이 단어에는 그런 흔적이 없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식이 요법’이나 ‘덜 먹기’를 제안하기도 한다. 그러나 앞엣것은 의학 용어 느낌이 강하고, 뒤엣것은 단어가 아닌 구인 까닭에 널리 쓰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북녘에서는 화끈하게 ‘살까기’란 말을 쓰는데 어감도 좋지 않고 음식이 아닌 살을 없애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으니 적절하지 않다.

다이어트나 치팅데이는 인류가 굶주리던 시기에는 절대 있을 수 없는 말이었다. 먹을 것이 차고 넘쳐 각종 질병이 생기면서 비로소 생겨난 말이다. 먹요일이나 살까기는 외래어나 외국어가 넘쳐나는 시기에 생겨나기 시작한 말이다. 알아듣기 어려운 다른 나라의 말을 줄여 우리말을 살찌우자는 시도이기도 하다.

다른 나라 말이기 때문에 무조건 ‘말까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말은 소통을 위한 것인데 외래어나 외국어를 남발해 누군가는 알아듣지 못하는 문제라면 모두가 함께 소통할 수 있는 말을 찾아야 한다. 사실 음식을 적당히 먹고 말을 적당히 가려 쓰면 살까기나 먹요일이 따로 필요할 이유가 없다. 절제되고 균형 잡힌 식생활, 말생활이면 매일이 먹요일이어도 좋을 것이다.

 

09-15 겨자

겨자씨를 본 일이 있는가? 씨를 뿌리고 길러 수확하는 농부가 아닌 이상 겨자씨를 보았다고 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의외로 겨자 잎과 겨자씨로 만든 소스는 흔하다. 쌈 채소가 모둠으로 나온다면 쌉싸름한 맛이 도는 잎을 찾으면 된다. 자줏빛이 진하다면 적겨자이고 녹색이면 청겨자이다. 냉면집에 갔을 때 살짝 뿌려 먹는 것, 혹은 오리고기 등을 먹을 때 찍어 먹는 노란 소스인 머스터드가 바로 겨자이니 우리 일상에서 꽤 흔하게 볼 수 있다.

성경에 따르면 겨자씨는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한다. 성경에서는 믿음이 부족할 때 ‘겨자씨만 한 믿음’이라 표현하는데 작으면 작을수록 맥락에 맞으니 가능한 한 작아야 한다. 그런데 막상 겨자씨를 보면 크기가 그리 작지 않고 이보다 작은 씨앗도 많으니 성경의 표현이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이것이 자라 나무가 된다는 성경의 표현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겨자는 풀이지 나무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을 이리 읽고 해석했다가는 목사님에게 꾸중을 들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표현이니 그 맥락을 잘 따져야 할 것이다. 겨자를 한자로 써 놓은 ‘芥子’도 연원을 잘 따져 읽어야 할 것이다. 이 한자는 아무래도 ‘개자’라고 읽어야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겨자’라 읽는다. 중국어를 직접 차용해 발음하다 보니 우리의 한자음과는 달라진 것이다.

우리말을 뒤져 보면 한자로 쓰지만 중국어 식으로 발음하는 것이 꽤 많다. ‘백채(白菜)’라 읽어야 할 ‘배추’, ‘가자(茄子)’라 읽어야 할 ‘가지’, ‘기(箕)’라 읽어야 할 ‘키’ 등이 그것이다. 한국과 중국이 한자를 공유하고 있고 그것의 발음이 저마다 다를 수 있지만 이처럼 생활에 밀접한 것들은 직접 접촉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이 많은 까닭이다. 겨자씨보다 조금 크게 눈을 뜨고 이런 말들을 찾아보면 꽤 많아서 모아 보면 나무처럼 커 보이기도 한다.

 

09-22 배알과 뱃살

비위에 거슬려 아니꼬운 상황이면 ‘배알이 뒤틀린다’는 표현을 쓴다. 이 표현에 쓰인 배알은 줄여서 ‘밸’이라고도 하는데 창자를 낮춰 부르는 말로도 쓰이고 속마음이나 배짱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인다. 배알의 가장 기본적인 뜻은 첫 번째일 테고 나머지는 여기에서 파생돼 비유적인 표현으로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배알의 뜻을 캐기 위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의외로 ‘뱃살’과 만나게 된다.

‘배알’의 두 번째 음절은 15세기 문헌에선 첫소리에 반치음(ㅿ)이 확인되고 끝소리에 ‘ㅎ’이 확인된다. 이는 ‘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살’과 ‘고기’가 합쳐진 말이 ‘살코기’로 나타나는 이유는 ‘살’이 과거에 끝소리로 ‘ㅎ’을 가졌기 때문이다. 첫소리 ‘ㅅ’은 ‘배’와 결합되면서 반치음으로 바뀐 것일 테니 결국 배알은 뱃속에 있는 살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창자를 왜 뱃속에 있는 살이라 했을지는 조상님들에게 여쭤봐야 할 테지만 과거엔 오늘날의 ‘뱃살’이 문제가 되던 시기가 아니었으니 문제 될 일은 없다.

‘뱃살’은 단어의 구성만 따지면 배에 있는 살이어야 하겠지만 오늘날에는 좀 더 특별한 용법으로 사용된다. 즉, 단순히 특정 부위의 살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필요 이상으로 배 부위에 찐 살을 가리킨다. 이 살은 많이 먹고 운동을 안 해서 생긴 살이니 전혀 반갑지 않은 살이기도 하다.

의사들은 뱃살이 찌는 것도 안 좋지만 배알이 찌는 것은 더 안 좋다고 말한다. 배알이 찌는 것은 창자에 필요 이상의 살이 찌는 것이니 곧 내장비만이기 때문이다. 음식을 먹으면 어차피 배알, 즉 창자를 지나야 하지만 소화가 잘되고 배변이 원활하기 위해서는 이 길이 널찍하고 장애물도 없어야 한다. 배알이든 뱃살이든 필요 이상이라면 스스로에게 배알이 뒤틀릴 텐데 화를 내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없애려는 노력도 기울여야 할 것이다.

 

10-06 식용유

 

‘기름에 튀긴 음식,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 재봉틀 기름, 기름진 음식’ 등에는 모두 ‘기름’이 쓰였지만 서로 같고도 다르다. 이 중에서 앞의 셋은 물보다 가볍고 불이 잘 붙는 성질이 있는 액체란 공통점이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음식에 쓰이는 것을 따로 부를 말이 필요한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식용유’이다. 이는 음식에 쓰는 기름이란 뜻이니 먹을 수 있는 기름 모두를 가리켜야 할 텐데 우리의 일상적인 용법에서는 조금 다르게 쓰인다.

영어로는 식용유를 쿠킹 오일(cooking oil)이라 하는데 이는 조리용 기름을 가리킨다. 즉 끓는점이 높아 재료를 튀길 수 있고, 식재료끼리 달라붙지 않게 하면서 독특한 풍미도 내주는 액체란 의미이다. 이 말을 그대로 번역했으면 ‘조리유’가 될 텐데 한자를 사용하는 한·중·일 모두 식용유란 말을 쓴다. 이 말대로라면 식용유는 먹을 수 있는 기름 모두를 가리켜야 할 텐데 우리의 일상적인 용법에서 식용유는 상당 부분 조리용 기름의 뜻으로 쓰인다.

우리의 전통적인 기름은 참기름과 들기름인데 이 기름을 식용유라고 하는 이는 드물다. 식용유는 보통 콩, 면화나 해바라기 씨, 유채 등에서 짜낸 다소 값이 싼 기름을 뜻한다. 그리고 이런 기름은 튀김이나 볶음에 사용하면서 특별한 풍미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참기름이나 들기름은 향신료의 성격이 강하니 조리용 기름이기도 하지만 맛내기용이기도 하다.

식용유가 없던 시절에는 튀김은 꿈도 꾸기 어려웠으니 식용유를 싸구려 취급해서는 안 된다. 식용유는 먹는 기름인 동시에 다른 음식을 더 맛있게 해주는 음식이기도 하다. 그래도 우리의 전통 기름은 식용유라 부르기 꺼려진다. 계란 프라이를 식용유가 아닌 들기름으로 부쳐 먹어보면 그 이유를 안다. 들기름은 끓는점이 낮으니 불 조절을 잘해서 프라이를 부쳐내면 식용유와는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풍미를 즐길 수 있다.

 

10-13 수육과 편육

냉면의 면발 위에 얇게 저민 고기 두어 점이 나올 때가 있는데 이것을 뭐라 불러야 할까? 별도의 접시에 얇게 썬 고기 여러 점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건 또 뭐라 해야 할까? 순댓국집에 가면 머리고기를 눌러 굳힌 뒤 얇게 썰어낸 것을 접시에 내어 놓는데 이건 또 뭐라 해야 할까? 차례로 편육, 수육, 편육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흔한 듯한데 반드시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음식의 이름은 만들고 먹는 사람 마음대로 결정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수육은 물에 삶아 익힌 고기를 뜻하는 한자어 ‘숙육(熟肉)’이 변한 것으로 본다. 첫 음절의 받침 ‘ㄱ’이 왜 탈락했는지 모르지만 ‘목욕’도 방언에서는 ‘모욕’이라 하기도 하니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 고기는 굽고, 삶고, 튀겨 익힐 수 있지만 가장 손쉬운 방법은 삶는 것이다. 이렇게 삶은 고기를 덩어리째 먹을 수 없으니 얇게 썰어내면 편육이 되는 것이다. 냉면의 편육은 육수를 우려낸 고기를 얇게 저며 낸 것이고 수육은 따로 삶아낸 후 잘라 나온 것이니 같은 냉면집에서 나온 것이라도 조금 다르다.

그런데 돼지의 머리고기도 편육으로 먹기도 하니 헷갈리기도 한다. 고사를 지낸 돼지머리를 바로 썰어서 먹기도 하지만 여러 부위를 잘게 썰어 틀에 넣은 뒤 눌러 굳히기도 한다. 여러 부위가 콜라겐 성분으로 붙어 굳으니 독특한 무늬, 색감이 나는데 이걸 얇게 잘라 접시에 담아내니 이 역시 편육이 되는 것이다.

고기를 구울 때도 얇게 썰기는 하나 이를 편육이라고 하는 일은 없다. 그러니 편육은 삶은 고기, 곧 수육을 가리키기도 한다. 수육은 고기를 가장 건강하게 먹을 수 있는 방법으로 꼽힌다. 굽는 과정의 여러 나쁜 물질이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삶는 과정에서 지방도 빠져나오기 때문이다. 고기는 불맛과 기름진 맛 때문에 먹는 것이라지만 그 맛 때문에 건강을 해칠 수도 있다면 수육과 그 동생 편육을 더 가까이 할 만하다.

 

10-20 호박범벅

늙는 것은 서럽지만 호박은 그리 서럽지만은 않다. 꽃이 지고 난 뒤 막 살이 오른 애호박도 맛이 있지만 때를 놓쳐 따지 못했든 일부러 묵혔든 시간이 지나면 노란빛의 늙은 호박도 쓸모가 많다. 호박 하면 떠올리는 모습도 애호박보다는 늙은 호박이니 호박이 늙는 것은 정말 늙는 것이 아니라 호박의 본 모습을 완성해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0월이 되면 이 늙은 호박을 수확하게 되는데 그 용도가 꽤 다양하다.

늙은 호박의 속을 파내고 겉살을 수직으로 사과 깎듯 깎아 말리면 호박고지가 된다. 이 고지는 떡을 찔 때 넣으면 단맛과 함께 예쁜 노란빛을 보여준다. 고지는 그나마 호박의 형상이 남아 있지만 잘게 부수거나 갈아 요리하면 더 다양하게 변신하게 된다. 각각의 요리는 호박 조각의 크기와 농도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호박죽인데 호박의 형상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노란색으로만 그 흔적을 남긴다.

호박의 흔적이 좀 남아 있는 것은 버무리와 범벅이다. 버무리는 말 그대로 다른 재료와 호박을 버무려서 쪄낸 것이다. 주된 재료는 쌀가루인데 쑥과 버무려 쪄내면 쑥버무리가 되고 호박과 버무려 쪄내면 호박 버무리가 된다. 버무리는 떡과 비슷하니 물기가 별로 없는 덩어리 상태이다. 그런데 범벅은 호박과 곡물가루를 된풀처럼 쑤어내니 그 상태가 죽과 버무리의 중간이다.

범벅과 버무리는 조미료와 식품 첨가물이 범벅된 음식 속에서 순수함의 정수를 보여준다. 곡물가루의 담백한 맛에 늙은 호박의 단맛이 버무려져서 적당한 단맛을 내준다. 그런데 이 범벅이나 버무리마저 욕심을 내서 설탕 범벅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 자극적인 맛으로 승부해야 하는 판매용 음식이 그러하다. 순수한 범벅을 먹으려면 직접 늙은 호박을 수확해 삶은 뒤 곡물가루와 섞어 쑤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땀범벅이 될 테니 쉬이 용기가 나지는 않아 아쉽기만 하다.

 

10-27 탕후루

설탕과 조롱박이 만난 당호로(糖葫蘆)의 열풍이 심상치 않다. 우리의 한자음으로 읽으면 당호로지만 중국식 발음인 탕후루로 불리는 음식이다. 본래 작은 사과 모양의 과일인 산사에 설탕물을 씌워 굳힌 것인데 둥근 모양의 과일을 꼬치에 꿰어 놓으니 그 모양이 조롱박 같대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둥근 모양 자체에 초점을 맞춰 당구(糖球)라고도 하니 우리말로 풀면 ‘단 공’ 정도가 되겠다.

시고도 달콤한 과일에 설탕을 덧씌워 놓았으니 그 자극적인 단맛에 아이들이 끌릴 만도 하다. 그러나 단맛에 대한 걱정이 많은 사람, 처치 곤란한 탕후루 꼬치를 접한 이들, 버려진 용기의 설탕물에 꼬이는 벌레를 꺼리는 이들에게는 결코 반가운 음식이 아니다. 게다가 아이들이 탕후루를 직접 만들겠다고 설탕물을 다루다 여러 사고도 나니 살림을 하는 이들에게도 반갑지 않다. 일시적인 열풍이라고 믿고 싶지만 그 열기는 쉽사리 식을 듯하지 않다.

과일에 설탕을 덧씌워 먹는 것은 아무래도 과일에 대한 모독으로 보인다. 과일은 여러 가지 맛으로 즐길 수 있지만 주로 단맛으로 먹는다. 그래서 과일을 생산하는 농부는 어떻게든 당도를 높이려고 애쓴다. 이렇게 세상에 나온 과일에 또 설탕을 덧씌우니 과일 자체가 가진 고유한 맛을 가리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음식의 참맛을 즐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재료 자체의 맛을 즐기는 것이다. 온갖 조리법과 양념이 가해지는 것은 더 나은 맛의 음식을 개발하기 위한 노력일 수도 있지만 재료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눈속임일 수도 있다. ‘호로’의 본래 뜻인 조롱박이든 둥근 박이든 그 속을 먹는다는 생각을 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연포탕에서 낙지와 어우러지면 최고의 맛을 낸다. 때로는 이런 심심한 맛이 더 큰 맛을 내기도 하니 설탕의 달콤한 유혹을 이겨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11-03 교푸사루

 

교푸사루, 우리는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이지만 유행에 민감한 일본 사람은 이 음식을 잘 알고 있다. 이 음식의 뿌리가 우리 음식에 있다는 것을 알고 이 발음을 몇 번 반복해 보면 ‘겹살’, 나아가 ‘삼겹살’에 접근할 수 있다. 그렇다. 우리의 삼겹살이 바다 건너 일본에도 퍼져 ‘사무교푸사루’ 또는 ‘교푸사루’라 불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음식과 이름이 바다를 건너면서 묘한 변화를 겪어서 우리가 아는 삼겹살과 일본 사람들이 먹는 교푸사루는 조금 다르다.

우리의 삼겹살은 지방과 살코기가 겹을 이룬 돼지고기를 가리키는데 일본에서는 익힌 고기를 다른 음식과 함께 쌈에 싸 먹는 것 전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쌈에 싸 먹는 고기는 반드시 돼지고기가 아니어도 되고, 불판에 구운 고기가 아니어도 된다. 고기보다는 다른 음식과 함께 고기를 잎 넓은 채소에 싸 먹는 것을 가리키니 고기쌈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도 있다.

고기를 구워 먹는 문화는 어디에나 있어서 일본에는 야키니쿠가 있고 우리에게는 너비아니나 불고기가 있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구운 고기를 쌈에 싸 먹는 문화를 보고 야키니쿠와는 다른 고기 요리로 받아들인 것이다. 따라서 돼지고기 샤부샤부를 쌈으로 싸 먹기도 하니 우리와 일본의 음식 문화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음식으로 변화된 것이다.

고기나 회의 참맛을 즐기려는 이들은 쌈을 싸 먹는 것을 꺼린다. 쌈장과 온갖 음식이 뒤섞이니 고기나 회의 참맛이 가려진다는 이유다. 그러면 어떠랴. 쌈을 싸서 먹는 것이 더 맛있다면 되는 것이다. 음식이나 말도 그렇다. 샤부샤부란 음식이나 그 이름을 일본 것이라 해서 꺼리면 우리가 즐길 수 있는 음식의 선택지가 줄어든다. 고유의 음식이든 외래의 음식이든 넓은 마음으로 쌈을 싸서 더 맛있게 먹으면 된다. 정치와 외교가 복잡하게 꼬여도 음식은 이렇게 서로를 넓은 쌈으로 보듬는다.

 

11-10 인절미

떡메로 친 쫄깃한 찹쌀에 콩, 팥, 녹두 등의 고소하고 단 고물을 묻힌 떡, 바로 인절미다. 가장 쉽게 만들 수 있는 떡, 그래서 요즘엔 떡집마다 손바닥만 한 스티로폼 용기에 담아 랩으로 포장해서 파는 필수적 품목으로 기억되는 그 떡이다. 음식과 그것을 가리키는 말은 친근한데 그 이름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아리송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딱 봐도 한자어처럼 보이는데 어떤 한자일까 유추하기도 쉽지 않고 사전에도 한자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모두에게 친근한 떡이니 민간에서 유래한 어원이 있을 법하다.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 공산성으로 피한 인조에게 임 씨 성을 가진 이가 떡을 만들어 바쳤는데 이를 먹어 본 임금이 맛있어 했다. ‘임(林·任)’씨가 만든 떡이 천하의 ‘절미(絶味)’여서 ‘임절미’가 ‘인절미’가 되었다는 것이다. 인(印) 씨도 있지만 너무 드문 성씨여서 임 씨로 슬그머니 바꾼 것은 귀여움마저 느껴지지만 ‘임’이 ‘인’이 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하니 그리 믿음이 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자로 풀이하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드는데 예상대로다. 찹쌀(米)을 늘여(引) 칼로 잘라(切) 만든 떡이니 ‘引切米’라는 한자어를 조합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굳이 한자를 끌어다 이름을 지었을 거라는 주장은 늘 그렇듯이 이미 있는 이름에 한자를 갖다 붙인 흔적이 역력하다.

인절미가 가장 맛있을 때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찹쌀 반죽을 접시로 대충 길게 잘라낸 뒤 칼로 숭숭 썰어 고물에 던져놓은 그 순간이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 조상 누군가가 이름을 지었을 텐데 그에 대한 설명을 남기지 않았으니 아쉬울 뿐이다. 인절미의 맛을 더 진하게 해 줄 맛깔 난 이름 유래가 있으면 좋겠지만 임 씨 성을 가진 조상이나 한자를 좋아하는 조상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외려 그 맛있는 떡을 개발한 조상, 그리고 그것을 지금도 구현해 내는 손맛에 감사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11-17 드렁허리

장어(長魚)나 광어(廣魚)는 참으로 원색적인 이름의 물고기이다. 길게 생겨서 장어이고 넓게 생겨서 광어이니 말이다. 눈이 한쪽으로 쏠린 광어의 생김새가 괴기하기는 하지만 팔다리가 없이 기다란 뱀과 비슷한 장어는 혐오스러울 만도 하다. 그렇지만 몸에 좋은 건강식으로 인기가 높다 보니 그 생김새는 잊고 많은 사람이 잘 먹는다. 그런데 중국을 방문했다 길고 가는 물고기 요리가 있어 맛있게 먹고 났더니 장어가 아니어서 기겁을 한 경험이 있다.

드렁허리, 이름이 낯설지만 ‘논두렁 헐이’로 이해하면 편하다. 생김새는 장어 비슷한데 논에 살면서 논두렁을 넘어 다녀도 될 텐데 굳이 논두렁을 뚫고 다녀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멍 난 논두렁으로 물이 빠지면서 결국 논두렁이 허물어지니 이런 이름이 붙었다. 중부 지역에서는 ‘웅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해서 강물에 사는 웅어와 헷갈리기도 한다. 생김새는 뱀과 장어를 섞어 놓은 듯한 데다가 하는 짓도 이러니 전혀 사랑을 못 받는 물고기이다.

장어가 건강식으로 사랑을 받는 것은 넘치는 활력 때문이다. 잡아서 양동이에 담아 놓으면 꼬리의 힘으로 도망갈 정도이니 특히 남자들이 꼬리에 침을 흘린다. 드렁허리의 활력 또한 이에 못지않다. 생김새나 하는 짓이 미워 먹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국내에서도 간간이 음식이나 약으로 먹는 이들이 있기는 하다.

식재료를 맛이 아닌 외양으로 판단하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맛은 혀와 코로 즐기더라도 눈으로 즐기는 맛까지 더해지면 나쁠 것은 없다. 이런 이유로 드렁허리도 식재료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췄지만 혹시라도 건강식으로 소문날까 걱정이다. 게다가 누군가 이름에 착안해 ‘허리’에 특효라고 광고하면 씨가 마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김새로 논두렁을 헐며 살아가는 드렁허리도 같은 땅에서 같은 시대를 살고 있으니 공존해야 할 존재인데 말이다.

 

11-24 유산슬

음식점에 가면 맛있는 요리를 즐기는 것이 최우선이지만 요리의 참맛을 즐기기 위해서는 그 요리에 관련된 정보를 가능한 한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다. 그 정보의 기본은 요리 이름의 유래를 따지는 것인데, 유산슬(溜三絲·류산쓰)은 그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우리의 한자음으로 읽으면 ‘유삼사’가 돼야 하는데 한자의 뜻이 가리키는 ‘낙숫물 셋과 실’은 궁금증만 더할 뿐이다. 그러나 이 이름은 조리법과 재료는 물론 재료를 다루는 법까지 알려준다.

‘유(溜)’는 원료를 익힌 후 전분을 넣어 걸쭉하게 졸여 진한 맛을 내는 조리법을 가리킨다. ‘산(三)’은 세 가지 재료를 쓴다는 의미인데 실제로는 채소, 해산물, 고기 중에서 재료의 수급 상황에 맞춰 세 가지 이상을 쓴다. ‘슬(絲)’은 재료를 실처럼 가늘게 썰었다는 뜻인데 규범을 따르자면 ‘쓰’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말끝에 우리 식으로 설명하자면 ‘ㄹ’을 붙이는 중국어에서의 습관 때문에 ‘슬’이 된 것이다.

중화요리 집의 메뉴에서 ‘유린기’나 ‘유니짜장’ 등이 발견되나 앞의 것은 기름(油)을, 뒤의 것은 고기를 진흙처럼 잘게 다졌다는 의미의 ‘러우니(肉泥)’의 발음이 변한 것이니 유산슬과는 관련이 없다. 삼선(三鮮)짜장에도 ‘三’이 쓰이는데 이때는 ‘산’으로 읽지 않는다. 중국에서 온 요리사가 직접 조리하는 곳의 메뉴에서 ‘絲’가 발견된다면 ‘쓰’로 읽으면 된다.

최근에 한국에 들어온 중국인 요리사가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을 진짜, 혹은 정통으로 부른다면 뭔가 어폐가 있다. 본토의 요리와 반드시 같아야만 정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오랜 기간 뿌리를 내려온 요리도 정통이라 부를 수 있다. 중국 요리를 부르는 이름도 이와 유사해서 규범에 맞게 ‘류산쓰’로 해야 한다고 고집할 이유가 없다. 음식은 만드는 사람과 먹는 사람이 주인이기 때문이다. 표기가 어떻든 조리법, 재료, 써는 법까지 알고 더 맛있게 먹으면 된다.

 

12-01 나박김치 시즌 2

 

드라마의 제작과 방송 환경이 바뀌면서 ‘시즌제’가 자리를 잡았다. 나박김치가 시즌을 달리해서 다뤄야 할 만큼 중요한 음식일까 싶지만 한번 다룬 주제를 다시 다뤄야 할 이유가 생겼다. ‘맛의 말, 말의 맛’의 열혈 독자께서 꼭꼭 눌러 쓴 글씨로 편지를 보내와 이전 글의 오류를 지적하며 당신의 의견을 피력해 주셨다. 요약하자면 나박김치의 ‘나박’은 나박나박 썰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재료인 무의 옛 이름이 ‘나복(蘿蔔)’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복’의 한자는 지극히 어렵고 이 식물을 가리키기 위해서만 쓰인다. 나복이 무의 한자어로 사전에도 올라 있기는 하지만 요즘에는 한약방을 제외하고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게다가 이 식물의 고유어는 15세기 문헌에서도 발견되니 이 식물의 이름을 굳이 어려운 한자로 쓰고 불러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나복이 무를 가리키니 이를 주재료로 쓴 김치가 ‘나복김치’일 가능성이 있고 첫음절의 모음에 이끌려 ‘나박’이 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관건은 이 음식을 만든 이들과 먹는 이들의 마음이다. 이들이 먹물깨나 든 사람들이어서 한자나 한자어를 잘 아는 이들이었다면 나복김치라고 이름을 지을 법도 하다. 이 음식을 ‘무김치’라고 하는 이들이 있으니 뜻도 충분히 통한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드라마가 만들어졌을 때 허구가 가미되기 마련인데 드라마만 본 이는 허구를 사실로 믿을 가능성이 있다. 나박김치를 둘러싼 이야기도 이와 유사할 수도 있다. 옛날 사람들은 나복으로 담근 김치로 이해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재료를 나박나박 썬 김치로 이해할 수도 있다. 먼 훗날 ‘나복’이란 말이 아예 쓰이지 않게 되면 모든 사람이 나박나박 썬 김치로만 이해할지도 모른다. 지금은 시즌과 시즌 사이의 휴식기와 비슷하다. ‘나박’을 무와 관련짓는 시청자와 써는 모습으로 판단하는 시청자가 다음 시즌을 기다리는.

 

12-08 떡은 억울하다

과거에 수없이 많은 금주령이 내려진 주된 이유는 술 권하는 사회의 폐단을 없애려는 데 있지 않다. 술의 주재료인 쌀은 주식이기도 한데 이를 마셔 없애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사례로 보면 떡의 주재료도 쌀이니 떡은 꽤나 귀한 간식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우리의 일상 표현에서 떡은 후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일이 많다. 맛있는 떡을 먹다 ‘떡칠, 떡고물’ 등의 표현이 생각나 떡 본 김에 제사를 지내본다.

물감이나 화장품을 여러 겹 두껍게 바른 것은 왜 떡칠이라고 할까? 떡에 고물을 묻히기도 하니 그것에 착안해 한 말일 수도 있지만 떡을 빚을 때 고물을 ‘떡칠’하는 일은 별로 없다. 결국 여러 겹으로 너무 많이 바르다 보니 떡처럼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떡칠은 ‘떡이 지다’와 같은 표현으로 확대되기도 하는데 예쁘게 한 화장이 떡이 지면 반길 일은 아니나 죄 없는 떡의 처지에서는 억울할 노릇이다.

부정하게 일을 보아주고 받는 금품을 왜 떡고물이라고 할까? 떡의 주재료인 쌀만으로 충분히 맛이 있지만 여러 종류의 고물을 묻히면 특별한 맛이 더해진다. 고물이 맛있을지라도 떡의 핵심은 역시 쌀로 빚은 부분이니 떡고물을 노리는 것은 간이 작은 도둑이 소소한 이익을 취하려는 태도를 비꼬는 말일 것이다. 떡고물을 넘어 아예 ‘떡값’을 취하는 도둑 심보를 가진 이도 있으니 떡고물은 귀여워 보이기도 한다.

부정으로 떡칠을 일삼고 떡고물을 넘어 떡값을 탐하는 집단이나 개인이 있다면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그런 행위를 보고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려는 태도도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떡고물이나 떡값과 관련된 표현은 주로 공직자들에게 쓴다. 떡의 참맛은 고물이 아니라 쌀로 빚은 것 자체에 있다. 스스로 떡메를 치고 고물을 위한 가루를 내어 떡을 빚어본 이는 스스로의 노력하는 과정에 흘린 땀의 소중함을 안다. 그렇게 빚어진 떡을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12-15 ‘뜨아’와 ‘따아’의 전쟁

엄동설한의 한가운데 있으니 ‘얼죽아’가 아닌 한 ‘아아’를 마실 일은 없다. 그런데 ‘아아’의 반대말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가리키는 ‘뜨아’와 따뜻한 그것을 가리키는 ‘따아’가 경쟁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뜨아’가 더 많이 쓰이지만 ‘따아’도 만만치 않다. 커피는 뜨거워야 하는가, 아니면 차가워야 하는가. ‘뜨겁다’와 ‘따뜻하다’는 물리적으로 어떻게 정의되는가?

액체의 온도를 표현하는 말은 ‘차다-미지근하다-따뜻하다-뜨겁다’의 단계를 설정할 수 있다. 이 단계는 물리적 온도가 아닌 사람의 느낌에 기댄 것이니 그 기준을 사람의 체온인 36도 정도에 두는 것이 좋겠다. 따라서 미지근함과 따뜻함의 경계는 이 체온이 될 수 있다. 따뜻함과 뜨거움의 경계는 모호하지만 피부에 화상을 입히는 온도가 경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70도 이상의 물은 1초만 피부에 닿아도 따가우니 이 어름이 경계가 될 것이다.

사전을 보면 ‘따뜻하다’는 ‘덥지 않을 정도로 온도가 알맞게 높다’로 정의되고 ‘뜨겁다’는 ‘손이나 몸에 상당한 자극을 느낄 정도로 온도가 높다’로 정의된다. 이 정의에 따르면 심한 자극에 쾌감을 느끼는 이들이 아니라면 ‘뜨아’를 마실 이유가 없다. 뜨거운 액체는 입안은 물론 식도까지 상하게 할 수 있으니 의사들도 너무 뜨거운 음식을 먹는 것을 말린다.

커피가 아닌 사람이라면 ‘뜨거운 사람’과 ‘따뜻한 사람’ 중 어느 편이 좋을까? 젊은 시절 불꽃 같은 사랑을 하고 싶은 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따뜻한 사람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따뜻하다’의 두 번째 뜻은 ‘감정, 태도, 분위기 따위가 정답고 포근하다’이니 더더욱 그렇다. 뜨거움은 곧 식어서 따뜻함이 되고 따뜻함은 꽤나 오래 지속된다. 커피나 차는 따뜻해야 천천히 오래 머금어 맛과 향을 느끼며 사색에 잠길 수 있다. 물리와 느낌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따아’가 승리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다.

 

12-22 쩔어!

제목에 쓰인 표현을 아는 이라면 젊은 축에 속할 것이다. 반면에 뜻을 모르거나, 알더라도 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는 바른말, 고운 말을 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 이일 것이다. 그래도 ‘K-팝’ 열풍의 중심인 방탄소년단이 부른 노래의 제목이기도 하고 ‘K-음식’의 대표인 김치와 관련된 표현이기도 하니 그 속내를 들여다볼 이유는 충분하다.

이 표현의 기원은 ‘푸성귀나 생선 따위에 소금기가 배어들다’는 뜻의 ‘절다’이다. 이 단어가 땀이나 기름, 술 등으로 쓰임이 확대되기도 하고 된소리가 되어 ‘쩔다’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쩐다’로 쓰이면 대단하거나 엄청나다는 뜻이며 ‘쩔어!’와 같이 쓰이면 엄청나게 좋다는 표현일 수도 있고 끔찍하게 나쁘다는 뜻일 수도 있다. 단어의 변화가 무쌍하고 된소리에 쓰임도 종잡을 수 없으니 고운 시선을 받기는 쉽지 않아 보이는 표현이다.

‘절다’ 또는 ‘절이다’는 김치를 담그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김칫거리에 소금을 뿌려 간을 하는 동시에 수분을 빼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맛을 더하고 저장성을 높이니 겉절이를 제외한 모든 김치에 꼭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이 ‘땀에 절다’처럼 쓰이면 고된 일상을 나타낸다. 옷이 기름때에 절었다면 그 옷 주인공의 치열한 삶과 함께 남모를 어려움도 보인다. 그러니 이 단어가 삶에 적용되는 것은 그리 반갑지 않다.

누군가 ‘오늘 구내식당 밥 쩔어!’라고 표현하면 맥락을 잘 살펴야 한다. 예상 밖으로 맛나고 영양가 높은 식단일 수도 있고 도저히 못 먹을 정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올 한 해 쩔었어!’라고 스스로 표현한다면 한 해에 대한 성적표가 이미 나온 것이다. 땀과 기름때에 쩔었더라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둔 한 해였길 기원한다. 혹시라도 일, 피로, 스트레스에 절어서 한 표현이라면 다가올 해에는 ‘쩔어!’라는 표현이 뿌듯함과 만족감에 가득 찬 것이길 기원한다.

 

12-29 일상커빵사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일, 옛사람들은 다반사(茶飯事)라는 말을 통해 일상(日常)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는 마시고 먹는 행위 자체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늘 있는 예사로운 일을 뜻하기도 한다. 이 말이 가리키는 일상은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일상은 늘 있으나 먹고 마시는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먹고 마시는 일상을 다시 들여다본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커피 전문점의 아메리카노를 한 손에 들고 일터로 복귀하는 것이 직장인들의 흔한 일상이다. 밥보다 잠이 좋아 아침은 거르거나 빵 몇 조각으로 대신했으니 점심이 첫 끼인 사람이 많다. 일과 모임 등으로 저녁 시간이 안정적이지 않은 이들에게는 점심이 더더욱 중요하다. 술에 곁들이는 안주로 저녁을 대충 때운다면 저녁도 밥이 주인공은 아니다. 빵이 밥을 완전히 대신하지는 못하고 있으나 밥이 하루 세 번 늘 있는 일상도 아니다.

차는 커피에 그 자리를 양보해야 할 상황이다. 차를 일상으로 즐겨 마시는 이가 얼마나 될까? 커피, 크림, 설탕이 삼위일체로 들어 있는 인스턴트커피나 두세 집 건너 하나씩 있는 커피 전문점의 아메리카노에 그 지위를 빼앗긴 지 오래다.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신 날, 속이 좋지 않은 날, 어쩌다 전통찻집에 간 날에야 커피 아닌 차를 찾게 됐다. 상황이 이러니 일상에서 차가 차지했던 자리는 커피에 넘겨줘야 한다.

일상커빵사, 우리의 일상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바뀌었다. 불교에서 일상다반사는 일상에서의 평상심이 곧 깨달음의 마음과 연관돼 있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평상심이 유지되려면 일상이 평온해야 한다. 한두 끼를 빵으로 대체하더라도 삼시 세끼를 갖춰 먹을 수 있는 일상은 평온한 일상이다. 여기에 커피를 곁들여 바쁜 삶에서 사색의 시간을 찾을 수 있다면 더욱 좋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먹고 마시는 일에서의 깨달음을 기대해 본다.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