橫說竪說(동아일보) 2024-02/
02-01(목) ‘조동’ 맺으려 ‘2주에 3800만 원’까지

산후조리원이 보편화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출산 여성 10명 중 8명이 이곳에서 몸조리를 한다. 괜찮은 조리원은 임신테스트기에 두 줄이 뜨자마자 줄을 선다. 한국의 독특한 산후조리원 문화는 해외의 주목을 받곤 하는데 일본의 산부인과 전문의는 “출산을 마친 여성을 ‘공주님’ 대접한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최근에는 한국에서 출산한 미국 뉴욕타임스 기자가 “호텔급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라며 조리원(joriwon) 체험기를 전했다.
▷로레타 찰턴 에디터가 이용한 조리원은 2주간 기본료만 800만 원을 받는 고급 시설이다. 서울 산후조리원의 평균 이용료는 422만 원이다. 그는 아기들이 신생아실에 한데 모여 24시간 돌봄을 받는 동안 엄마는 객실에서 룸서비스로 식사하고, 마사지 받고, 천장 높은 방에서 요가와 필라테스를 하며 몸조리에만 집중한다고 소개했다. 출산 후 바로 퇴원해 집에서 남편과 방문 간호사 도움으로 아이와 제 몸을 돌보는 미국 여성이 보기엔 조리원 생활이 신기했나 보다.
▷산후조리원은 1996년 인천에 처음 생긴 후 친정 도움 없이 편하게 몸조리할 수 있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469곳으로 늘었다.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2주간 일반실 평균 이용료가 326만 원이고 최저는 130만 원(충북 청주 산후조리원), 최고는 서울 강남 조리원의 특실료 3800만 원이다. 산부인과 소아과 피부과 통증의학과 정신의학과 전문의가 협진하고 10년 이상 경력의 세러피스트가 스파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홍보하는 곳이다.
▷조리원이 고급화하면서 이용료가 4년 새 24%나 올랐지만 서비스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지난해엔 2주간 이용료가 2000만 원이 넘는 서울의 최고급 조리원에서 신생아들이 호흡기세포융합바이러스에 집단 감염되는 일이 있었다. 그래도 고급 조리원을 찾는 이유 중 하나는 인맥 관리를 위해서다. 같은 시기에 입소한 엄마들끼리 조리원 동기 모임을 만드는데 육아 전쟁을 함께 치른 ‘조동’간 유대감은 군대 동기 못지않고, 조동으로 맺은 아이들 인연이 평생을 간다고 한다.
▷찰턴 에디터는 “한국의 출산율은 세계 최저이나 산후조리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값비싼 조리원 이용료는 아이를 키우는 데 드는 총비용에 비하면 껌값에 불과하다”고 했다. 양육비 부담이 저출산의 원인이라는 뜻이다. 고급 산후조리원 얘기가 나올 때마다 일각에선 “자동차 한 대 값”이라며 혀를 찬다. 그래도 산모들이 ‘조리원 호사’를 포기하기는 쉽지 않다. 남성 육아휴직도, 돌봄 인력 지원도 어려운 한국에선 공주 대접받는 조리원 생활이 끝나는 순간 독박육아의 시간이 온다. 산후조리원을 나서면서 하나같이 우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2-02 신생정당-위성정당 난립… 이름 짓기 백일장

정치 뉴스를 읽으려면 정당명 10개쯤은 알아둬야 할 판이다. 개혁신당(이준석) 개혁미래당(이낙연) 새로운선택(금태섭) 등 제3지대 창당 붐이 일더니 비례 위성정당들도 태동을 시작했다. 국민의힘은 국민의미래 창당 발기인 대회를 준비한다고 밝혔다. 비례대표 선거 방식을 두고 오락가락하는 더불어민주당을 압박한다는 이유라지만 4월 총선 투표용지에 오를지도 모를 페이퍼 정당이다. 야권 전체가 비례 후보를 연합 공천하자는 새진보연합(용혜인)도 갓 태어났다. 익숙해지려던 새로운미래(이낙연) 미래대연합(이원욱)과 한국의희망(양향자)은 통합으로 사라졌다.
▷이러니 괄호 안에 정치인 이름을 안 넣으면 정치부 기자들도 정확히 기억 못 한다. 그럴수록 정치인들은 기억되는 이름 짓기에 골몰한다. 중앙선관위는 기존 정당과 일부 겹치거나 발음이 비슷해도 불허한다. 6년 전 국민의당(안철수)-바른정당(유승민) 합당 때 미래당으로 신청했으나 불허됐다. 우리미래라는 청년 결사체가 존재한다는 이유였다. 더불어민주당(문재인)도 2016년 현직 의원이 없던 민주당(김민석)이 명맥을 유지하는 바람에 민주당 대신 ‘더민주’라는 약칭을 썼다.
▷위성 정당들은 모태 정당이 쉽게 떠올라야 유리하다. 그러니 랩 가사처럼 운율(韻律)에도 신경 쓴다. 국민의힘의 위성정당 이름으로 국민의길과 시민의힘은 막판까지 경합했다. 4년 전에는 더불어민주당-더불어시민당, 자유한국당-미래한국당이란 쌍둥이 조합이 있었다. 첫 위성정당이라 이름이 겹쳐짐에도 당시 선관위가 평소보다 관대하게 나왔다. 현재 원내 정당들은 기억되고 싶은 가치를 담아 더불어, 민주, 국민, 힘, 정의라는 언어를 선점했으니 신생 정당들은 새 어휘를 찾아 나섰다.
▷비례정당명은 아니지만 요즘은 개혁과 미래가 인기어다. 그렇다 보니 벌써 다툼까지 생겼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파트너인 개혁미래당(이낙연)이 비슷하게 지었다고 꼬집었다. “장사 잘되는 중국집 옆에 비슷한 이름으로 또 내는 격”이라고 했다. 개혁미래당에선 “개혁이 어떻게 누군가의 전유물일 수 있느냐”라며 “한강 물에 등기했느냐”고 반문한다. 이름 다툼을 하는 것은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을 높여야 한다는 절박감 때문이다. 앞으로 있을 수 있는 양당 통합의 순간에 당직과 공천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면 지지율이 1차 변수다.
▷이렇게 지은 정당명이지만 조롱의 대상이 되곤 한다. “정의당에 정의 없고, 민주당에 민주 없고, 국민의힘에는 국민도 힘도 없다”는 말은 정치의 실패가 만든 낭패다. 총선 국면에서 잘하기 경쟁에 나서고, 유권자 마음을 사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개혁과 미래를 입증해야 할 의무가 생겼다. 그러나 벌써부터 유권자들을 힘들게 만드니 걱정이 앞선다. 속 빈 강정 같은 정당 이름을 10개 넘게 기억하도록 만들고 있지 않나.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2-03(토) 간호사도 필러 시술… ‘무천도사’ 사라지나

‘프티 시술’은 보톡스, 필러 같은 주사나 레이저 시술처럼 수술의 통증 없이 살짝 예뻐지는 시술을 지칭한다. 미용·성형 카페에서 ‘프티 시술’ 잘하는 곳을 물으면 무조건 최근 출시된 제품이나 장비를 쓰는 곳으로 가라고 한다. 그다음이 시술 경험이 많은 의사다. 의료 기술의 발전이 의사 손 기술을 앞선다는 경험칙이 통하는 셈이다. 실제 피부과는 인턴·레지던트를 거치지 않은, 즉 임상 경험이 전무한 일반의가 많은 진료 과목이다.
▷일반의로 개원해서 미용 시술을 하는 의사를 ‘무천도사(無千都師)’라고 부른다. 전문의를 따지 않고도(無), 월 1000만 원 이상을 벌고(千), 도시에서 일하는(都) 의사(師)라는 뜻이다. 과거 의료계에선 전문의를 따지 못하면 낙오자로 여겼지만 요즘에는 그런 동료 압력도 사라졌다. ‘워라밸’을 포기하며 고되게 일해 봤자 개원의보다 소득은 낮은 대학병원 의사들이 되레 자괴감을 느낀다고 한다. 일반의는 최근 전체 의대 졸업생의 약 15%까지 늘어났다.
▷갓 의대를 졸업한 일반의뿐만 아니라 다른 진료과목 의사들의 개원 러시도 이어지고 있다. 2022년 기준 전국 성형외과 의원(1115곳)은 10년 전보다 34%, 피부과 의원(1387곳)은 33% 늘어났다. 지난해 6월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는 ‘바로 적용하는 보톡스’ ‘고지혈증 일타 강사의 족집게 강의’ 등 다른 진료과목을 배우는 학술대회를 열었다. 저출산으로 미래가 어두운 소청과 의사 800여 명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뤘다.
▷정부가 ‘프티 시술’ 일부를 의사 면허 없이도 할 수 있도록 허용할 방침을 1일 밝혔다. ‘프티 시술’의 의사 독점 구조를 깨서 레드오션 시장이 되면 의사들의 개원이 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지금은 사람을 살리는 어려운 수술은 싸고, 미용에 가까운 피부과 시술은 비싸다. ‘프티 시술’은 건강보험의 가격 통제에서 벗어난 비급여 진료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필수의료 강화를 위해 의사 공급을 늘리더라도 이런 왜곡된 보상 체계로는 피·안·성(피부과 안과 성형외과) 쏠림을 막을 수 없다. 의사들은 부작용 등을 이유로 반발하지만 자초한 측면이 없지 않다.
▷‘프티 시술’뿐만이 아니다. 현재 의사만 할 수 있는 의료 행위를 보면, 의사가 꼭 해야 하나 싶은 것들이 있다. 문신, 피어싱, 제모 등이 모두 의료 행위다. 반면, 정작 의사가 진료해야 할 아토피 피부염, 건선 같은 피부질환 환자들은 동네 의원서 치료받기가 어렵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 뒤에는 낮은 수가를 벌충하고자 비급여 진료에 치중하게 되는 ‘풍선 효과’가 있다. ‘프티 시장’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동시에 의사는 의사가 할 일을 할 때 보상과 보람을 얻을 수 있도록 이참에 건강보험 수가 체계도 재설계해야 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2-05(월) 金사과 金딸기

아침에 먹는 사과는 ‘금(金)사과’라고 할 정도로 건강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5년 전부터 가을이 아닌 여름에 수확하는 신품종 개량 사과가 보급되기 시작했는데 익숙한 빨간색이 아닌 노란색이어서 ‘황금사과’로 불린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요즘 사과를 ‘금사과’라 부르는 이유는 따로 있다. 비싸도 너무 비싸서다. 사과뿐만 아니라 배, 귤, 딸기 등 비싸지 않은 과일이 없다. 마트와 전통시장에선 과일 봉지를 들었다 놨다 한참을 망설이는 소비자들이 많다.
▷국제유가가 안정세를 보이며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반년 만에 2%대로 내려왔지만 농산물 가격은 딴 세상 얘기다. 두 달 연속 15% 이상 올랐다. 특히 사과(56.8%), 배(41.2%), 귤(39.8%), 딸기(15.5%) 등 신선과실 가격이 28.5% 오르며 가격 상승을 이끌었다.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에 따르면 서울 전통시장을 기준으로 400g짜리 사과 3개가 평균 1만3000원이 넘고 700g짜리 배 3개는 1만5000원에 가깝다. 딸기도 500g 한 팩 기준으로 소매가격이 2만 원 안팎까지 올랐다.
▷과일값이 크게 오른 것은 지난해 극심했던 이상기후로 주요 과일의 생산량이 한꺼번에 줄었기 때문이다. 대표 국민 과일이자 명절 주요 제수품인 사과와 배의 경우 봄철 개화기 땐 이상저온으로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했고, 여름철엔 폭염으로 탄저병 등 병충해에 노출됐다. 수확 시기에는 태풍 등으로 낙과 피해도 많았다. 지난해 사과, 배, 단감의 생산량 모두 전년보다 30%가량 줄었다. 겨울철 대표 과일인 딸기도 폭염, 수해 등의 영향으로 출하량이 크게 감소했다.
▷제철 과일의 가격 급등은 작황이 나쁘지 않았던 다른 과일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했던 감귤에 수요가 몰리면서 귤 가격이 27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으며 ‘금귤’이 됐다. 이불 속에서 하나둘 까먹다 보면 어느새 한 상자가 동나곤 했는데 귤 1개가 500원을 넘는 지금은 부담스러워졌다. 국산 과일이 비싸지면서 소비자들은 오렌지, 바나나, 파인애플 등 수입 과일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건과일이나 냉동 과일도 인기다.
▷지난해 과일 생산량이 크게 줄면서 남아 있는 저장 물량도 많지 않아 햇과일이 나오기 시작할 때까지는 가격이 안정되기 쉽지 않다. 이상기후가 일상화되면서 올해 작황은 괜찮을지 불안감도 크다. 과일값 등이 치솟으면서 올해 4인 가족 설 차례상 비용은 대형마트 기준 38만580원으로 역대 최고치라고 한다. 이러다 명절에 조상님들이 처음 보는 외래 과일만 잔뜩 있거나 아예 과일이 없는 차례상에 당황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2-06 가짜가 진짜를 몰아낸다

다국적 금융그룹의 홍콩지부 직원이 딥페이크(deep fake·인공지능 기술로 정교하게 합성된 인물 영상이나 이미지, 음성)에 속아 2억 홍콩달러(약 342억 원)를 송금하는 사기를 당했다고 홍콩 경찰 당국이 2일 밝혔다. 직원은 본사 최고재무책임자(CFO) 및 원래 알던 동료 여럿이 참석한 화상회의에서 내려온 지시에 따랐는데, 사실은 사기범들이 딥페이크로 조작한 얼굴이었다는 것이다. 지난달 말엔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의 딥페이크 음란 이미지가 소셜미디어로 확산해 미국이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딥페이크가 뜨거운 감자다.
▷‘맥락을 잘 살피면 딥페이크를 가려낼 수 있다’고 자신한다면 오산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선 딥페이크가 교란의 도구로 쓰였다. 양국 대통령이 각각 항복하거나 평화를 선언하는 영상을 비롯해 적잖은 딥페이크가 제작됐다. 한데 아일랜드 코크대 연구진이 전쟁 초기 트윗을 분석한 결과 미디어의 진짜 보도에 ‘딥페이크’나 ‘가짜뉴스’라고 잘못된 딱지를 붙인 사례가 조작된 딥페이크 게시물을 잡아낸 것보다 오히려 더 많았다고 한다.
▷2021년 3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선 고교생 치어리더들이 음주, 흡연하는 가짜 영상을 만들어 전송한 혐의로 한 여성이 체포됐다. 영상 속 학생은 ‘명백히 조작된 영상’이라고 했다. 미국 주요 방송사도 학생을 딥페이크의 피해자로 보도했다. 그러나 두 달 뒤 영상은 진짜인 것으로 밝혀졌다. 딥페이크의 확산에 기대어 일단 ‘가짜 영상’이라며 잘못을 부인할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화된 것이다.
▷진실과 거짓이 불확실해지면 사람들이 진실을 더욱 믿지 않게 되는 ‘거짓말쟁이의 배당금(liar’s dividend)’이 생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실수를 모아 놓은 광고 영상을 두고 ‘AI를 사용한 가짜’라며 대놓고 거짓을 말하는 것도 이제 사람들이 영상마저 믿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다. 최근 미국 민주당 경선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의 음성으로 ‘투표를 거부하라’는 가짜 전화가 걸려오는 등 딥페이크가 만든 혼란이 불신을 낳고 있다. 가짜가 진짜를 몰아내고 있는 것이다.
▷딥페이크가 공신력 있는 매체로 유통되면 혼란은 더욱 증폭된다. 지난해 6월 우크라이나와 접경한 러시아 일부 지역 TV와 라디오에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 연설이 방송됐다. ‘우크라이나가 침공했으니 대피하라’는 내용이었다. 우크라이나군 또는 반(反)러시아 민병대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딥페이크였지만 일부 주민들은 실제로 대피했다. 후방 교란 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한국도 총선일에 임박해 악의적인 딥페이크 영상이나 이미지, 음성이 유포되면 사실상 대책이 없다. 딥페이크 등 허위·조작정보를 가려내는 전통 미디어의 어깨가 더욱 무겁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02-08 ‘의대 증원’ 지역전형 확대… ‘꼼수 지방 전학’ 판칠까 걱정

올해 고3이 치르는 2025학년도 입시부터 늘어나는 의대 정원 2000명은 “SKY(서울·고려·연세대) 위 대학이 하나 더 생겼다”고 할 정도로 파격적인 숫자다. 의대 증원이 발표된 이튿날인 7일 한 대형학원의 ‘의대 재수, 반수 전략’ 온오프라인 설명회에는 4100여 명이 몰려 성황을 이뤘다. 의대 증원에 따른 입시 전략을 세우려는 수요라는 것이 학원 측의 설명이다. 의대 합격이 아슬아슬했던 상위권 고3 학생과 N수생, 의대에 떨어지고 이공계로 진학한 반수생, 심지어 미래가 불안한 직장인까지 의대에 도전하고 있다.
▷정부는 지역 의료를 살리기 위해 지역 국립대와 정원 50명 이하 미니 의대를 중심으로 의대 정원을 늘리고, 신입생의 60%까지 지역인재전형을 확대하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의대 지역인재전형 선발 인원이 기존의 두 배인 2018명으로 증가한다. 현재 입학 정원이 49명인 강원대 의대를 예로 들면, 두 배가량 늘어날 정원의 상당 부분을 강원 지역 고등학생으로 뽑아야 한다는 얘기다. 당연히 춘천에 사는 고등학생이 강원대 의대에 합격할 확률이 올라간다. 지금도 지역 의대 수시 전형의 경쟁률은 수도권 의대의 3분의 1 수준인데, 이 경쟁률이 더 낮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지역인재전형은 고등학교를 해당 지역에서 졸업해야 지원이 가능하다. 3년 뒤인 2028학년도부터는 중학교부터 지역에서 다녀야 한다. 이미 지역 공공기관의 ‘기러기 부부’들이 서울 살림을 접고 재결합했다거나 자녀의 지방 전학을 위해 KTX를 타고 아버지가 서울로 ‘역출근’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강남 학원가에는 아이만 지역 중고교로 진학시키는 ‘지방 유학’ 문의도 늘고 있다. 세종 천안 아산같이 수도권과 가깝고 도시 인프라를 누릴 수 있는 곳이 인기라고 한다.
▷지자체들은 의대 증원 효과로 인구 유입이 늘고 대학 상권에 활기가 돌 것으로 기대한다. 이들이 지역에 남아 의사로 일해준다면 ‘지역 의료 대란’ 해소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체리 피커’처럼 각종 보조금을 챙기고, 의대 입시 혜택만 누리는 ‘꼼수 전학’이다. 이를 우려한 지역 대학에선 “중학교가 아닌 초등학교부터 지역에서 졸업하도록 해야 사람들이 정주한다” “지역 의대를 졸업하면 지역에서 일정 기간 의무적으로 근무하도록 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2006년 이후 의대 입학 정원이 동결되면서 의사는 높은 소득과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는 가장 안전한 직업이 됐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이를 홀로 지방 유학을 보내거나 온 가족이 이사를 감수할 만큼 의대 진학이 자녀 교육의 전부가 된 현실은 씁쓸할 따름이다. 의대의 지역인재전형을 확대하려는 본래 취지는 그 지역에서 나고 자란 인재를 키워 지역 필수 의료를 살리겠다는 것이다. 똑똑한 제도 운영이 필요하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2-09 “이른바 파우치, 외국회사 그 뭐 쪼만한 백”

“이른바 파우치, 외국 회사 그 뭐 쪼만한 백이죠”, “방문자가 김건희 여사를 만나서 앞에 놓고 가는 영상이…”. KBS 박장범 앵커가 7일 방영된 윤석열 대통령과의 특별대담에서 부인 김건희 여사의 디올 명품 가방 수수 논란에 대해 물으며 한 말이다. 자막은 “최근 김건희 여사의 ‘파우치 논란’”이라고 달렸다. 이를 놓고 일부 시청자 사이에서는 ‘명품 백을 왜 명품 백이라고 일컫지 못했느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먼저 ‘조그만’을 뜻하는 “쪼만한”. 김 여사가 받은 가방의 크기는 작은 것일까 큰 것일까. 한 손으로 잡을 만한 크기이지만 보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한데도 진행자가 굳이 질문에서 가방이 작다고 강조할 이유가 있는지…. 원래 엄밀함을 요구하는 보도에선 다수가 상식 선에서 납득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크다’ ‘작다’ 같은 형용사엔 ‘…보다’를 붙여 다른 대상과 비교하는 것이 원칙에 맞다. 적어도 ‘비교적’ 등으로 수식해 절대적이지 않음을 드러낸다. 객관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가방이 프랑스 명품 브랜드 디올의 제품이라는 건 빼놓은 채 그냥 ‘외국 회사’라고 한 것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디올’은 값싼 물건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중요 팩트다. 정식 제품명은 ‘송아지가죽 여성 디올 파우치’. 파우치는 작은 물건들이 가방 안에서 섞이지 않게 넣어두는 별도의 주머니를 가리킨다. 하지만 모양도 그렇고, 아직 ‘백’만큼 뿌리깊게 정착되진 않은 외래어여서 그냥 가방이나 백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이 사건을 보도한 외신의 경우 로이터통신은 ‘디올 백 스캔들’이라고 썼고, 블룸버그도 ‘디올 백’,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2200달러짜리 디올 핸드백’, 뉴욕타임스는 ‘영부인과 디올 파우치’라고 했다.
▷‘방문자가 앞에 놓고 갔다’는 것도 알쏭달쏭한 표현이다. 그래서 김 여사가 가방을 받았다는 건가, 안 받았다는 건가? 다수 국민은 김 여사가 악의적 공작에 당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가방을 받은 건 대통령 배우자로서 옳지 않은 처신이라고 생각한다. 주어를 방문자가 아니라 김 여사에 두고 사건의 실체를 궁금해하는 이유다. ‘명품 백(가방) 수수 논란’이라고 이미 통용되는 용어가 있는데, 대통령에게 표현을 바꿔 질문할 이유가 있나.
▷‘대담 프로그램의 진행은 균형성·공정성을 유지해야 한다.’ 방송 심의 규정이다. 만약의 경우를 가정해서 출연자가 ‘방문자가 외국 회사의 작은 파우치를 놓고 갔다’고 말을 했더라도, 진행자가 ‘김 여사가 디올 명품 가방을 받았다는 논란’이라고 첨언해 보완하는 게 옳다. 한데 이번 대담에선 진행자가 먼저 무딘 질문을 던졌고, KBS가 당사자 대신 변명해 준 꼴밖에 안 됐다. 많은 국민이 공영방송에 바라는 건 이런 모습이 아니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02-13(화) “손잡고 떠납니다” 네덜란드 前 총리 부부의 동반 안락사

“부부가 둘 다 많이 아팠고, 서로 혼자서는 떠날 수 없었다.” 드리스 판 아흐트 전 네덜란드 총리가 세운 연구재단은 최근 판 아흐트 전 총리 부부의 부고를 이렇게 전했다. 1950년대 대학 캠퍼스 커플로 만나 70년을 해로한 두 사람은 한날한시에 안락사로 생을 마감했다. 93세 동갑내기인 부부는 마지막 순간까지 손을 맞잡고 있었다고 한다. 판 아흐트 전 총리는 2019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회복하지 못했고 부인 역시 지병 끝에 동반 안락사를 선택했다.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한 네덜란드에서 2022년 안락사를 택한 사람은 8700여 명이다. 이 중 동반 안락사는 58명(29쌍)으로 드문 편이다. 다만 2020년 26명, 2021년 32명으로 많아지는 추세다. 우리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소극적 안락사만 허용하지만 해외에선 의사가 약물 투여 등으로 환자를 죽게 하는 적극적 안락사, 의사 도움을 받아 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조력자살을 허용하는 곳이 적지 않다.
▷안락사가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하는지를 두고 찬반이 팽팽하지만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인간의 기본권으로 인정하는 나라는 꾸준히 늘고 있다. 삶은 선물이지만 버리고 싶을 때 버리지 못한다면 짐이란 인식이 커지는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2015년 안락사를 허용하며 법 이름을 ‘생명종결 선택권법(End of Life Option Act)’이라고 지었다. 엄격한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도 2021년 안락사와 조력자살을 합법화했다. 타인이 목숨을 끊도록 도우면 최대 징역 10년형에 처하도록 했던 스페인의 전향적인 변화였다.
▷하지만 안락사 허용 국가에서도 환자가 자칫 안락사로 내몰리는 등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네덜란드에서 안락사 심사위원회가 열릴 때면 완화치료 등 대안이 없는지를 두고 격론이 벌어진다고 한다. 또 악용 가능성에 대비해 안락사 허용 결정까지 3중, 4중의 안전장치를 두는 나라가 대부분이다. 환자의 고통이 심각하고, 회복할 가망이 전혀 없으며, 의료적 대안이 없어야 하는 건 기본이다. 환자가 자발적으로 한 선택인지, 복수의 의사와 여러 번 면담하면서 결심이 일관되게 유지되는지도 확인하도록 한다.
▷우리나라는 죽음을 드러내놓고 얘기하기를 꺼려 왔지만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가 진행 중인 탓인지 인식 전환도 빠르다. 2021년 서울대병원 조사에서 국민 76%가 안락사 또는 의사 조력자살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5년 전 조사 때 찬성률(41%)보다 거의 두 배로 뛴 것이다. 조력자살이 합법인 스위스 국민의 찬성률(81%)과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2022년 국회에서 존엄조력사법이 발의된 것도 이런 변화가 반영된 것이다. 죽음의 격에 대한 논의를 더 이상 미루기 힘든 때가 오고 있는 것 같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2-14 바이든 조사한 특검 “기억력 나쁜 노인”

올 11월 두 번째 4년 임기에 도전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기억력 문제로 궁지에 몰렸다. 1942년생으로, 미 역사상 최고령 대통령인 그가 재선되면 86세로 퇴임한다. 말실수 잦고, 자주 넘어지더니 이번엔 지난주 특별검사가 내놓은 345쪽 수사보고서가 미 정가를 흔들고 있다. 인스턴트 음식을 즐기는 과체중 도널드 트럼프(77)가 아니라 늘 운동하고 건강 식단을 챙기는 바이든(81)에게 생긴 건강 논란이 역설적이다.
▷한국계인 로버트 허(Hur) 특검은 바이든이 부통령에서 퇴임한 뒤 이란 우크라이나 군사기밀을 자택으로 가져간 일의 불법성을 수사했다. 바이든은 “참모의 단순 실수”라고 해명했고, 1년 수사의 결론은 “중범죄 혐의 없음”이었다. 사달은 그 이유에서 시작됐다. 허 특검은 “기소하더라도 대통령 변호사들은 배심원단에게 바이든을 ‘착하지만 기억력은 나쁜 노인’으로 묘사할 것이고, 결국 유죄 평결을 받기 어렵다”고 썼다. 미 특검은 조사를 마칠 때 유죄 가능성 판단을 밝혀야 한다.
▷허 특검은 지난해 10월 8, 9일 이틀에 걸쳐 5시간 동안 바이든을 백악관에서 조사했다. 그는 보고서 곳곳에 “의사소통이 느리고… 기억력에 한계가 있다”는 표현을 남겼다. 바이든은 반박문을 통해 “조사 시점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7일) 이튿날로, 내가 국제분쟁의 한복판에 서 있을 때여서 그랬다”고 해명했다. 특검은 자택에서 찾은 녹음테이프에 기밀이 담겼는지도 확인했다. 확인 결과 바이든이 책 대필작가에게 구술한 테이프였다. 특검은 “녹음 속 바이든은 때론 듣기 고통스러울 정도로 말이 느렸다(painfully slow)”거나 “수첩을 보고 말하는 것도 힘겨워했다”고 썼다. “대통령이 내부 회의 때나 외국 정상과 만날 때는 판단이 날카롭다”는 백악관 해명을 180도 뒤집은 것이다.
▷메시지를 반박 못 하면 메신저를 공격하라는 정치 공식이 워싱턴에서도 작동됐다. 민주당은 허 특검을 향해 “정치 목적으로 권한 밖의 일을 했다”는 공세를 폈다. 허 특검이 트럼프 대통령에게서 메릴랜드주 연방검사에 임명됐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공화당원이다. 하지만 그를 특검에 임명한 것은 바이든의 법무장관이었다.
▷“돈을 더 안 내면 러시아의 나토 공격을 장려하겠다”는 발언으로 평지풍파를 일으킨 트럼프 캠프는 역공 소재로 삼고 있다. 공화당은 문제의 5시간 대화록을 의회에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녹음 속 하나하나를 따지겠다는 것이다. 91개 혐의로 4개 형사재판을 받고 있는 트럼프, 말과 행동이 둔해지는 바이든. 미국인들은 11월 두 후보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투표권 없는 우리는 한반도 운명에 직결된 미국의 선택을 숨죽이며 지켜보게 됐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2-15 3월 개교인데 어디서 하는지도 모르는 늘봄학교

사교육비는 고교생이 가장 많이 쓰지만 사교육 참여율은 초등학생이 가장 높다. 초중고교 평균이 78%, 초등생은 85%다. 주로 공부가 아닌 돌봄 목적이다. 오후 1시 학교가 끝나면 교문 앞에 기다리는 학원 셔틀버스를 타고 피아노학원, 미술학원, 태권도학원을 뺑뺑이 돌다 부모 퇴근 시간에 맞춰 셔틀을 타고 귀가한다. 사교육비, 정확히 말하면 ‘사돌봄비’ 부담이 버거운 학부모들에게 무료 늘봄학교 개교는 반가울 수밖에 없다.
▷늘봄학교는 현재 운영 중인 돌봄교실과 방과후 학교를 합쳐 확대한 것으로 오전 7시부터 오후 8시까지 학생들을 돌봐준다. 예체능 위주의 방과후 프로그램도 2시간 운영하고 저녁밥도 준다. 올 1학기엔 2700개교, 2학기부터는 6175개 전체 초등학교의 1학년을 대상으로 시행하고 2026년 전교생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돌봄교실은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상당수가 추첨에서 떨어졌는데, 늘봄학교는 원하는 학생은 다 받아준다. 교육부 설문조사에서 초1 예비 학부모들의 84%가 늘봄학교를 이용하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개교가 코앞인데도 교육부는 늘봄학교를 시작할 2700개교 명단을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지역교육청별로 절반가량만 늘봄학교 운영 계획을 공개했다고 한다. 일선 교사들이 “지금도 행정업무와 학교폭력, 학부모 민원 처리로 수업 준비할 시간도 없다”며 반대하고 있다. 서울은 늘봄학교 하겠다고 손든 학교가 없어 지역별로 할당량을 내려보냈다. 교사들은 교육이 아닌 ‘돌봄’은 지방정부 일이라고 하고 지방공무원들은 학교 일은 학교가 알아서 하라고 서로 떠넘기는 상황이다. 늘봄학교 일정에 따라 돌봄 계획을 세우려던 학부모들만 불안해하고 있다.
▷정부가 늘봄학교 도입을 계획보다 1년 앞당기면서 교사들의 반발을 자초한 면이 있다. 정부는 전담 인력 채용을 약속했지만 교사들은 지난해 전국 459개 학교에서 시범 운영할 때도 프로그램 강사를 못 구해 교사가 대신하거나 늘봄학교 전용 공간이 없어 교사들이 일하다 말고 교실을 비워 주는 일도 있었다고 호소한다. 안전사고를 우려해 아이들을 실내에 가둬 놓고 동영상을 틀어주며 시간을 때우는 학교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늘봄학교를 운영하는 이유는 돌봄 공백을 메우고 출발선이 다른 아이들에게 평등한 교육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지역아동센터나 방과 후 아카데미 같은 유사한 돌봄 서비스가 있지만 학부모들이 가장 안심하는 곳은 학교다. 돌봄 없는 교육이 어딨고, 교육 없는 복지 행정이 어딨나. 정부와 학교와 지역사회 모두 아이들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늘봄학교 안착을 위해 제 일처럼 나섰으면 한다. 그래야 젊은 사람들이 살러 오고 지역도 살아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2-16 中 쇼핑앱의 공습… ‘헐값의 역습’ 대비해야

‘운동화 청바지가 1000원대, 그것도 무료 배송’. 알리익스프레스, 테무 등 중국 e커머스 플랫폼들이 ‘초저가’를 앞세워 국내 유통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앱에 들어가 보면 국내 플랫폼 가격의 절반 이하인 물건이 수두룩해 진짜 이 가격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다. 한번 이용하기 시작하면 헤어 나오기 힘들다는 의미로 ‘알리 지옥’ ‘테무 지옥’이라는 유행어까지 나왔다. 쇼핑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중년 남성들까지 해외 직구 시장으로 불러 모으고 있다.
▷알리의 한국 월평균 이용자 수는 지난달 기준 717만 명으로 1년 전 336만 명과 비교해 배 이상으로 늘었다. 업계 2위인 11번가 앱 사용자(759만 명)를 위협할 정도다. 지난해 7월 한국에 진출한 테무의 성장세는 더 가파르다. 진출 직후인 지난해 8월 52만 명이던 이용자 수가 지난달 571만 명으로 11배가 됐다.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광고비를 쏟아붓고, 각종 할인 및 쿠폰을 앞세워 소비자를 유혹하고 있다.
▷중국 플랫폼의 경쟁력은 초저가를 넘어선 ‘극초저가’다. 치솟는 물가에 가성비를 따지는 소비자들의 심리를 파고들었다. 생활용품, 소품, 의류 등은 1만 원 이하인 경우가 많고, 1000원대 상품도 따로 모아 판다. 중국산 저가 제품을 중간 유통과정 없이 소비자에게 직접 전달하니 국내 업체는 경쟁이 안 된다. 경기 침체로 국내 소비가 급감한 중국이 자국 생산품을 해외에 헐값에 내다 판다고 ‘디플레 수출’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싼 게 비지떡’이라고 품질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충전기를 구매했는데 충전이 안 되고, 이동식저장장치(USB)는 저장이 안 된다는 식이다. 옷이 사진과 달리 사이즈가 터무니없이 작다는 등의 불만도 있다. 국내 유명 브랜드 상품을 위조한 ‘짝퉁’도 여과 없이 판매된다. 제대로 된 고객센터를 갖추지 못해 반품, 환불 등 민원을 제기하기도 쉽지 않다. 한국소비자연맹에 접수된 알리 관련 소비자 불만 신고는 2022년 93건에서 지난해 465건으로 1년 새 5배로 늘었다.
▷소비자들은 싸게 사서 한 번 쓰고 버린다는 식으로 가볍게 생각할 수 있지만, 중국 플랫폼의 저가 공습은 국내 유통 생태계에 치명적이다. 관세·부가세, 안전인증(KC) 비용 등을 제대로 부담하지 않아 국내 유통업체들이 역차별을 받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저가의 중국산 제품이 소비재시장을 장악하면 가격 경쟁력에서 밀리는 국내 제조업은 설 자리가 없다. 지금이야 초저가와 각종 혜택을 앞세워 유혹하지만 국내 유통산업 기반을 잠식하고 나면 언제 포식자로 돌변할지 모른다. 중국 플랫폼발 ‘헐값의 역습’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2-17(토) GTX 이어 CTX에 지하화까지… 전국이 철도 공사판 되나

“경부선 신대동∼옥천 구간, 호남선 오정동∼가수원 구간 철도를 조속히 지하화하고 상부는 상업·주거·문화가 융합된 공간으로 바꿔 나가겠다.” 전국 각지를 돌며 민생토론회를 주재하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이 그제 대전에서 한 약속이다. 경부·호남선 철도가 대전을 동서로 나눠 도시 발전을 저해한다며 ‘철도 지하화’ 논의에 다시 불을 붙였다.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에 맞먹는 대전∼세종∼청주 간 ‘CTX(충청권 광역철도)’ 조기 착수 계획도 꺼내 놨다.
▷정부 여당과 야당이 4·10총선을 겨냥해 ‘받고 더블로’식 경쟁을 벌이면서 철도 지하화는 가장 뜨거운 공약이 됐다. 정부는 지난달 25일 전국 주요 도시 철도 지상 구간 지하화 방침을 밝힌 데 이어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경기 수원에서 철도 지하화를 공약했다. 더불어민주당은 곧바로 “경인선, 경부선 등 9개 철도 노선과 수도권 도시철도 5개 노선, 수도권 GTX 3개 노선 등 총 259km 구간을 모두 지하로 넣겠다”며 세게 맞불을 놨다.
▷국토교통부는 이미 추진 중인 수도권 GTX A, B, C노선을 21∼70km씩 연장하는 한편 D노선(김포·인천∼팔당·원주), E노선(인천∼덕소), F노선(대곡∼의정부∼덕소∼수원∼부천종합운동장)을 신설하는 계획도 공개했다. 전국의 지자체들과 협의해 대전과 같은 방식의 지방 광역급행철도도 추가로 놓겠다고 한다. 전국 아파트값이 12주 연속 하락세인데도 ‘철도 호재’를 맞은 관련 지역의 집값은 꿈틀대기 시작했다.
▷워낙 전례 없는 규모다 보니 정말 실행이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정부가 밝힌 철도 등 교통대책에는 134조 원이 든다. 이명박 정부의 22조 원짜리 ‘4대강 사업’을 6번 벌이는 규모다. 정부는 그중 절반이 넘는 75조2000억 원을 민간에서 충당할 계획이다. 철도 지하화 비용 50조∼80조 원도 여야는 상부에 만들어질 땅의 특례 개발을 허용해 민간에서 대부분 조달하겠다고 한다. 수십 년 걸릴 공사에 막대한 자금을 묻어둘 민간 자본을 찾기 어려울 것이란 전문가들의 평가와는 거리가 멀다.
▷철도 지하화의 대표적 성공 사례는 프랑스 파리의 ‘리브고슈 프로젝트’다. 센강을 따라 길게 이어진 노후 철도시설 상부에 인공용지를 조성하고 그 위에 고급 주상복합시설을 지었다. 그런데 1991년 계획을 세우기 시작해 폭 100m, 길이 3km 용지를 만들고 그 위를 개발하는 데 30년 넘게 걸렸고 10년은 더 지나야 완성될 예정이다. 돈도 돈이지만, 수백 km 철도를 지하에 놓겠다는 여야의 공약이 모두 실현되는 걸 보려면 현 세대는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진행되는 철도 공사를 평생 참아내야 할 모양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2-19(월) 청사 접견실에서 수사 중인 사기 피의자 만난 치안정감

사진 속의 경찰관은 양옆에 선 2명의 남성과 친근하게 손을 잡고 서 있다. 경찰관의 어깨에는 큰 무궁화 3개가 달린 견장이 붙어 있다. 경찰에서 경찰청장(치안총감)에 이어 두 번째 높은 계급인 치안정감이라는 뜻이다. 14만 경찰 가운데 단 7명밖에 없는 최고위직으로, 이 경찰관은 현직 모 지방경찰청장인 A 씨다. 문제는 함께 사진을 찍은 한 명이 가상화폐 사기 피의자 최모 씨라는 점이다.
▷경찰의 수사를 받는 상황이 되면 경찰관 그림자만 봐도 피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자수하려는 게 아니고서야 피의자가 제 발로 경찰관서에 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 사진을 촬영한 장소는 A 청장의 접견실이다. 최 씨는 코인 투자금을 모은 뒤 돌려주지 않은 혐의로 A 청장이 관할하는 경찰서 중 한 곳에서 수사받던 시점에 청사를 찾아갔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장면이다. 경찰은 곧 기소 의견으로 최 씨를 검찰에 송치할 방침이다.
▷이 사진을 소셜미디어(SNS)에 공개한 것은 최 씨다. 접견실 내 청장 자리에 최 씨 혼자 앉아 있는 사진도 함께 올렸다. ‘나 이런 사람이다’라고 과시하는 듯하다. 사기 피해자들은 A 청장과 최 씨의 관계를 의심의 눈길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반면 A 청장은 최 씨가 피의자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주장한다. 고향 선배와 그 선배의 아들을 만나기로 했는데, 아들의 친구라는 최 씨가 함께 와서 엉겁결에 동석하게 됐다는 취지다. 시민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인터넷상에는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궁금하다’는 식의 댓글이 여럿 달렸다.
▷A 청장의 해명이 사실이라고 해도 문제다. 수사기관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공직자는 모르는 사람과 만날 때 조심하는 게 몸에 배어 있다. 사진 촬영은 어림도 없고, 남이 들었을 때 오해할 소지가 없도록 말도 가려서 한다. 혹시라도 상대방이 몰래 녹음해서 ‘누구랑 친분이 있다’며 악용할 소지가 있어서다. 이를 모를 리 없는 A 청장이 처음 만났다는 최 씨와 손까지 잡고 사진을 찍어준 처신은 부적절했다. 이들이 만난 경위와 대화 내용 등을 경찰청이 철저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근래 경찰은 잇따른 고위 간부들의 일탈로 바람 잘 날이 없다. 브로커에게 인사 청탁과 함께 금품을 받은 혐의로 조사받던 전직 치안감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이 사건에 연루된 현직 치안감은 기소됐다. 유치장 내 피의자를 불법 면회 시켜준 혐의로 경무관 2명이 재판에 넘겨지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치안정감마저 석연치 않은 언행으로 입길에 오르면서 경찰에 부담을 얹게 됐다. ‘나는 잘못한 게 없다’고 변명하기에 앞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반성부터 하는 것이 최고위직 경찰 간부가 갖춰야 할 몸가짐일 것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2-20 경호처의 ‘입틀막’,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3, 4월쯤 윤석열 대통령의 외부 행사 때 누군가 큰 목소리로 정치적 구호를 외친다고 가정해 보자. 최저임금 인상 요구일 수도, 강제징용 사안일 수도 있겠다. 대통령은, 현장의 경호처 요원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예상 밖 위기와 맞닥뜨리면 몸에 밴 무언가가 툭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최근 불거진 대통령 행사 강제퇴장 문제를 경호처 매뉴얼의 적절성 정도가 아니라 대통령의 정치력과 국정 스타일의 문제로 살펴야 하는 이유다.
▷2번이나 발생했다. 1월 전북 전주에서 진보당 국회의원이, 지난주엔 대전 KAIST 졸업식에서 녹색정의당 대전시당 대변인인 석사 졸업생이 소란을 일으켰다가 들려 나갔다. 둘 다 경호원 손에 입이 틀어막혔다. 평범한 시민의 목소리가 아니라 정치 구호인 것은 맞다. 의도한 소란이란 걸 감안하더라도 ‘입틀막(입 틀어막기)’이라는 신조어가 말하는 과잉 대응 논란은 피할 수 없다. 누구나 촬영하고, 실시간 공유하는 세상이다. 옛 시절에 고여 있는 경호처 때문에 대통령이 손해를 봤다.
▷영상 속 윤 대통령은 행사에 집중했다. 전주에선 국회의원을 지나쳐 갔고, 대전에선 “실패를 두려워 말라”는 연설을 이어갔다. 용산 대통령실에선 두 장면을 복기하며 점검 회의를 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결론이 궁금하다. “규정대로 했을 뿐”이라는 경호처 말에 수긍하고, 동일 상황에는 동일하게 대응하는 쪽으로 마무리했을까. 요즘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현직이던 2013년 연설 영상이 주목받고 있다. 영상 속 오바마는 불법 이민자 강제추방에 반대하는 한국계 청년의 돌발 외침을 40초 넘게 놔두고, 경호원 개입을 제지하고, 그 청년과 대화하듯 연설했다. 그는 능숙하게 경청했다.
▷경호는 순간의 과업이다. 찰나의 대응에 안위가 결정되는 만큼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다. 그걸 인정하더라도 기계적 경호는 아쉬움을 남긴다. 국회의원을, 대학원 졸업생을 요원 4, 5명이 들어내지 않고 걸어 나가도록 안내했다면? 퇴장시키는 동안 주장을 외치도록 놓아뒀다면? 들어내기와 입 막기는 대통령 안위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정치 경호였고, 심기 경호였다. 경호처 판단에는 우리 대통령이 저 정도 주장도 불편해할 것으로 본다는 뜻인가.
▷윤 대통령이 “발언을 멈춰달라. 행사가 끝난 뒤 나랑 더 이야기하자”고 다독였다면 어땠을까 싶다. 노정객 바이든 미 대통령이 작년 9월에 했던 그대로 말이다. 오바마나 바이든이나 오랜 현장정치 경험이 있다. 윤 대통령의 대민 접촉은 사전 기획, 선발대 점검, 경호 통제 속에서 대부분 진행됐다. 그렇다고 이런 일을 2번이나 겪고도 용산 참모들이 매뉴얼도 고치지 않고, 대통령의 임기응변 시나리오를 준비하지 않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입틀막’만큼은 경호처가 경호 규정에서 삭제해야 한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2-21 급할 때만 찾는 ‘진료보조(PA) 간호사’

전공의 집단사직으로 인한 의료 대란을 막기 위해 정부가 진료보조(PA·Physician Assistant) 간호사를 투입하겠다고 하자마자 대한간호사협회가 “사전 협의된 바 없다”며 이를 일축했다. 지난해 5월 간호법 사태 이후 의사와 간호사 간 골이 깊은데도, 간협이 의사 파업을 거드는 듯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2020년 전공의 파업 당시, 정부 지시대로 대체 인력으로 일했다가 “무면허 의료행위를 했다”고 의사들로부터 고발당했던 트라우마가 남아 있어서다.
▷현행 의료법상 의사를 대리하는 PA 간호사의 업무는 불법이다. 4년 전 환자 곁을 지켰다가 봉변을 당한 간호사들은 이번에는 “간호사에 대한 보호 약속이 선행돼야 한다”며 정부의 동원령에 발끈했다. 하지만 전공의가 떠난 병원에선 의사 업무가 간호사에게 물밀듯이 넘어오고 있다고 한다. 의료 현장에선 “지시를 거부할 수도 없는데 혹시라도 환자가 잘못되면 불법을 추궁당할까 두렵다”고 아우성이다.
▷PA는 주로 대학병원에서 전공의가 부족한 필수의료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1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의사들조차 “PA가 없으면 수술실이 마비된다”고 할 정도로 관행이 됐다. 다만 존재 자체를 ‘쉬쉬’하다 보니 정확한 집계가 이뤄지진 않는다. 주로 의사들이 기피하는 외과나 흉부외과에 속해서 수술 내용을 설명하고 동의서를 받고 혈액 검사를 하는 등의 사전 준비부터 절개와 봉합까지 수술 전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부서 이동 없이 수술실에서만 일하다 보니 저연차 인턴·레지던트보다 숙련도가 높은 경우도 많다.
▷전공의를 뽑기 힘든 병원으로선 이들보다 비용이 덜 드는 PA 채용을 늘리지 않을 까닭이 없다. 2020년 보건의료노조 실태조사에 따르면 PA는 약물 처방, 검사, 수술 등 사실상 의사 업무 전반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PA를 제도화하면 될 터인데 의사들이 “간호사가 의사 가운을 입는다”며 반발해 논의조차 쉽지 않다. 석박사 수준의 과정을 밟고 면허를 따서 일하는 미국, 캐나다 등과 달리 우리나라에선 체계적인 교육과 자격 검증 없이 현장에 투입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2010년부터 PA 제도화를 시도했지만 “환자 안전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앞세우는 의사 단체에 밀려 번번이 무산되곤 했다. 정부가 ‘PA 카드’로 의사를 달랬다, 간호사를 달랬다 하면서 환자 안전을 도외시한 탓도 크다. 불법인 PA가 관행이 된 것은 그만큼 수술실과 입원 병동의 의료 인력 부족이 심각해서다. 이번에 의대 정원이 늘더라도 의사 양성까지는 10년 이상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의사 단체의 벽을 넘지 못한 PA뿐만 아니라 비대면 진료, 응급구조사 업무 범위 확대 등도 논의를 서둘러 의료 공백을 메울 필요가 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2-22 슬쩍 물러난 여성가족부 김현숙 장관

부 폐지를 전제로 ‘여성가족부의 마지막 장관’을 자처하던 김현숙 장관이 어제 이임식을 치렀다. 지난해 8월 새만금 잼버리 파행으로 사의를 표명한 지 5개월 만이다. 후임 김행 후보자가 하차하는 바람에 장관직 수행 기간은 21개월로 늘어났다. 후임자 지명 없이 차관 대행 체제로 갈 전망이다. 여성가족부는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1호 공약으로 폐지를 공언했던 조직이다.
▷폐지 추진일까, 존속일까. 대통령의 생각은 파악되지 않는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1호 공약을 110대 국정 과제에서 제외시켰다. 공약 후퇴 논란이 생기자 대통령은 “거짓말을 했다는 말이냐”고 반문했고, 행정안전부는 몇 개월 뒤 폐지안까지 내놓았다. 요즘 용산 대통령실 기류는 애매하다. 공약으로는 살아있지만, 실행 여부는 총선 후 정국에 달렸다는 말도 들린다. 차관 대행 체제는 적어도 총선 전에는 해소될 것 같지 않다. 이를 놓고 인사청문회 부담으로 총선 이후로 장관 임명을 미룬 것일 뿐이란 해석도 나온다. 어느 경우건 1호 공약인데도, 똑 부러지게 설명하지 않는 것은 어색하다.
▷김 장관의 조용한 사퇴는 국정 얼버무리기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새만금 잼버리는 어느 정부의 누가, 무엇을, 왜 잘못했는지 명확히 가려야 한다.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국무총리실이 나서서 김현숙 장관, 박보균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 잼버리 공동 조직위원장은 물론 집행위원장이던 김관영 전북지사를 상대로 정밀조사를 해야 했다. 그러나 정부 차원의 종합 조사는 없었다. 대신 감사원 감사가 9월 시작됐고, 아직 감사가 진행 중이라고 하며, 언제 결과가 나올지 감감무소식이다. 4월 총선 이후 ‘아무도 잼버리를 기억 못 할 때’를 골라 슬쩍 공개될 개연성이 없지 않다.
▷정부가 미적거렸다면 국회라도 갈피를 잡았어야 했다. 정기국회가 시작된 9월에 여가부와 문체부 장관이 ‘때맞춰’ 교체 개각이 이뤄졌다. 잼버리 책임을 지닌 장관에게 직접 물을 방법이 사라졌다. 그러다 김행 후보자의 중도 사퇴가 빚어졌고 11월이 되어서야 김현숙 장관 상대로 본격 질문 기회가 왔다. 민주당 의원들은 소리만 높였지 새롭게 밝혀낸 게 없었다. 김 장관도 “이미 사과한 대로다. 사의를 표명했다”는 식으로 넘겼다.
▷여가부는 어떤 운명을 맞을까. 폐지 추진 가능성이 남았다지만 총선 이후라고 법 개정이 순조로울지는 미지수다. 누가 총선 승자일지 모른다. 국민의힘이 이기더라도 지금처럼 민주당이 반대하면 1년쯤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미제(未濟) 상태에서 김 장관은 숭실대 교수직으로 돌아간다. 하필 3월 개강이 코앞인 시점이다. 국무위원이자, 논쟁적 부처 수장인 그의 면직 결정인데, 1학기 강의 일정에 영향받은 건 아니길 바랄 뿐이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2-23 ‘20년 만에 그린벨트 화끈하게 푼다’… 왜 지금?

“시민분께서 ‘화끈하게 풀어 달라’고 하셨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올해 들어 13번째로 울산에서 열린 민생토론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비수도권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 대폭 해제 계획을 내놓은 뒤 이렇게 말했다. 정부는 획일적인 해제 기준을 바꿔 부산 울산 창원 대구 광주 대전 등 6개 대도시 등지의 그린벨트를 풀 방침이다. 총선을 47일 앞두고 지방 표심을 겨냥한 조치란 분석이 나온다.
▷정부의 국가첨단산업단지, 지방자치단체의 지역전략사업 추진을 위해 필요한 경우 보전가치가 높은 1·2등급 그린벨트까지 풀 수 있도록 하고, 지역별 그린벨트 총량 규제에서도 예외로 인정해 준다는 게 이번 방안의 핵심이다. 현재 전국 그린벨트 3793km² 중 64%가 비수도권에 있다. 전국적인 그린벨트 해제는 2001∼2003년 춘천 청주 전주 여수 제주 진주 통영 등 7개 중소도시 해제 이후 20여 년 만에 처음이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서울 광화문에서 반경 15km 선상의 도넛 모양의 땅이 처음 지정된 후 그린벨트는 전 국토의 5.4%까지 확대됐다. 산업화, 도시화가 진행되는 동안 무분별한 도시 확대 방지, 미래세대를 위한 자연보전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김영삼 정부 때까지 큰 틀이 유지되다가 김대중 정부 때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경제 활성화 명목으로 큰 폭의 해제가 처음 이뤄졌다.
▷이후 역대 정부들은 수도권 주택 문제가 심각해질 때마다 그린벨트에 손을 댔다. 노무현 정부는 국민임대주택, 이명박 정부는 보금자리주택, 박근혜 정부는 민간 기업형 임대주택을 지을 땅을 확보하기 위해 서울 등 수도권의 그린벨트를 풀었다. 2020년 아파트 값이 폭등해 골머리를 썩이던 문재인 정부도 서울 주변 그린벨트를 해제해 아파트를 더 지으려다가 여론이 악화되자 포기했다.
▷이번 그린벨트 해제는 지방 산업기반 강화 목적으로 비수도권 대도시를 겨냥했다는 게 다른 점이다. 수도권 그린벨트 해제는 고려하지 않는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 수도권 해제를 함께 추진할 경우 지방 표심에 미치는 효과가 반감되거나 오히려 역풍이 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그린벨트 해제는 국회에서 법을 고치지 않고도 정부가 자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국토의 효율적 활용은 중장기적인 밑그림을 토대로 추진돼야 한다. 특히 기후변화 때문에 세계적으로 환경 문제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도시의 허파’ 역할을 해온 녹지 규제 완화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총선을 코앞에 두고 대통령이 그린벨트 해제처럼 인화성 높은 개발 정책을 쏟아내는 건 관권을 이용한 선거 개입이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2-24(토) “차라리 평교사로” 기피 보직된 교감 선생님

평교사가 교감 되기는 대기업 평사원이 임원 되는 것 못지않게 어렵다. 지난해 전국 초중고교 교원(교사·교감·교장) 수는 44만 명쯤 되는데 이 중 교감은 2.5%(약 1만1000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감이 “평교사로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해 화제가 됐다. 현행법상 학교의 교원 정원이 주는 등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교감 반납은 불가능하다. 자진 강등은 반려됐지만 이 교감을 다시 모셔 오는 데 꽤 애를 먹었다고 한다.
▷요즘 “괜히 승진했다”라며 후회하는 교감이 많다. 과거에는 학교 살림을 총괄하던 ‘파워맨’이었던 교감의 위상과 보상이 예전 같지 않아서다. 학교 구성원이 교사뿐 아니라 강사, 행정직, 공무직 등으로 다양해지고 이들 사이 갈등이 늘었다. 연공서열이 무너져 영도 잘 서지 않는다. 중간 관리자인 교감 생활이 여간 고달파진 것이 아니다. 여기에 교감 업무는 점점 늘어나기만 한다. 지난해 7월 서울 서초구 서이초 교사 사망 이후 대부분 학교에서 학부모 민원 창구가 교감으로 일원화됐고 올 1학기부터는 늘봄학교 지원실장도 겸임한다. 학교폭력대책위원회 등 27개 위원회도 당연직으로 참석한다.
▷교감들끼린 “무엇이든 하는 자”라는 자조가 나온다. 행정 업무는 갈수록 폭증하는 반면, 그에 대한 보상은 늘지 않았다. 올해부터 교사의 담임 수당이나 보직 수당이 대폭 인상됐어도 교감의 직급보조비(25만 원)는 그대로다. 실제 같은 호봉이면 담임 교사, 보직 교사보다 월급이 적어지는 ‘역전 현상’이 발생한다. 교감은 방학 때도 출근해야 하고, 대체 수업을 해도 수당을 받지 못한다. 이러니 “평교사가 낫다”고 한다.
▷단지 수당이 낮다고 교감을 마다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평교사가 교감이 되려면 보통 20년 이상 걸린다. 연수도 받고 부장교사도 하고, 오지 근무도 하면서 승진 점수를 쌓아야 가능하다. 학교의 궂은일을 솔선하며 교감이 되었는데 존경받기는커녕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서 시달리기 일쑤다. 온갖 민원을 감당하며 교권 추락의 현실을 절감한다고 호소한다. 교감 기피 현상이 확산하면서 승진 중간 코스인 보직교사도 구인난을 겪고 있다. 지난달 서울시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이 ‘올해 보직교사를 맡을 의사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교사 10명 중 8명이 ‘없다’고 했다.
▷교감의 비애는 어느 조직에 있든 중간 관리자라면 공감할 것이다. 기업에서도 과거 업무 스타일을 고수하는 상사와 ‘워라밸’이 당연한 팀원 사이에 낀 중간 관리자의 업무가 폭증했고 스트레스 지수도 가장 높다. 고군분투하는 교감 선생님들의 사기를 올릴 다양한 방안이 나왔으면 한다. 교감의 살림 솜씨에 따라 교사와 학생이 행복한 학교가 빚어지는 법이니 말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2-26(월) 미국통 외교안보 라인의 잇단 기업行

10년 전만 해도 미국 수도 워싱턴에 사무소를 낸 국내 기업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중견기업들까지 가세해 40여 개 기업이 워싱턴사무소를 운영한다고 한다.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부터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기치를 높이 든 조 바이든 행정부까지 미국의 굳건한 보호무역 장벽을 경험한 기업들이 사무소를 두고 워싱턴의 정·관계 채널을 강화하는 데 힘을 쏟고 있는 것이다.
▷특히 미국 정부가 2022년 인플레이션감축법(IRA)부터 이른바 ‘칩스법’(반도체지원법)까지 글로벌 공급망 재편을 위한 공격적 입법을 추진하면서 이런 움직임이 가속화됐다. 한국 기업을 차별하는 IRA가 미 의회를 통과한 뒤에야 부랴부랴 대응에 나섰던 한국 정부에 의존하기보다, 자체 네트워크를 쌓아 각자도생하겠다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한국과 인연이 각별한 마크 리퍼트 전 주한 미국대사를 북미총괄 부사장으로, LG그룹이 15년간 백악관에 몸담았던 조 헤이긴 전 부비서실장을 워싱턴 공동사무소장으로 임명한 게 이즈음이다.
▷최근엔 현지의 ‘친한파’ 인사 대신 ‘미국통’으로 꼽히는 국내 외교안보 출신 인사를 영입해 글로벌 현안에 대응하려는 기업이 늘고 있다. 현대차는 지난해 외교부 북미과장을 거친 김일범 전 대통령실 의전비서관을 부사장으로 영입해 미국 대관 업무를 맡겼다. 아산정책연구원 워싱턴소장을 지낸 우정엽 전 외교부 외교전략기획관도 현대차 전무로 합류한다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외교안보 교사’로 불린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은 HD현대의 조선 지주사(HD한국조선해양) 사외이사 선임설이 돌고 있다.
▷각 기업의 ‘워싱턴 라인’들은 11월 치러지는 미국 대선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물밑 로비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4대 그룹의 대미 로비자금은 벌써 사상 최대 규모로 늘었다. 워싱턴 현지 사무소들은 현재 ‘워룸’(전시 상황실)처럼 운영되며 미국의 경제·통상 정책 동향을 수집하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 쪽이든, 바이든 대통령 쪽이든 접촉을 최대한 늘려 선거 결과에 따른 정책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대선이 8개월 남짓 남아 변수가 많지만, 지금 분위기로는 트럼프의 재집권 가능성이 최대 리스크다. 당선되면 취임 첫날 바이든 정부의 IRA를 폐기하겠다고 공언한 만큼, 미국에서 관련 공장을 가동 중인 국내 기업들은 타격이 불가피하다. 중국에 대한 징벌적 관세나 수출 통제의 여파도 쓰나미처럼 몰려올 것이다. 이미 각국은 트럼프의 귀환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캐나다처럼 아예 정부 차원의 태스크포스를 만든 나라도 있다. 우리만 기업에 대비를 맡겨두고 사실상 손 놓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2-27 삼겹살 ‘비계 밑장깔기’ 잡으려 AI감별기까지 등장

“삼겹살을 시켰는데 커다란 지방 덩어리가 나왔다.” 삼겹살은 고소한 비계 맛으로 먹는다지만 비계가 얼마나 있어야 하는지는 오랜 논쟁거리다. 아무리 그래도 하얀 도화지에 붉은 붓으로 한 줄 직 그은 듯한 수준은 곤란하다. 포장을 뜯었더니 비곗덩어리뿐이라는 원성이 높아지면서 최근 대형마트엔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한 삼겹살 선별기까지 등장했다. 삼겹살의 단면을 분석해 살코기와 지방의 비중을 확인하고, 과지방 삼겹살을 골라내는 기술이다.
▷삼겹살 선별에 AI를 활용하는 건 그만큼 소비자들이 품질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해 3월 3일 ‘삼겹살 데이’ 20주년을 맞아 유통업계가 대대적 반값 할인행사에 나섰는데 도를 넘은 비곗덩어리 삼겹살 때문에 분통을 터트린 사람들이 많았다. 반 이상이 기름이었으니 사실상 제값 주고 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말에는 수도권 한 지역에서 고향사랑기부제 답례품으로 보낸 삼겹살의 3분의 2가 비계여서 항의가 빗발쳤다.
▷눈속임 상술은 대형마트와 온라인몰, 식자재마트 등 유통채널을 가리지 않았다. 특히 윗부분의 때깔 고운 고기를 보고 구매했는데 포장을 뜯어 들춰보니 비곗덩어리만 깔려 있는 것을 확인한 소비자들이 ‘삼겹살 밑장 깔기’라며 분노했다. ‘먹는 게 아니라 불판을 닦거나 김치를 굽는 용도’ ‘고기 대신 기름을 샀다’는 불만도 많았다. 정부가 삼겹살 품질관리 매뉴얼을 배포하고 품질관리 실태 특별점검에 나섰지만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소포장의 경우 일반 삼겹살의 지방 두께는 1cm 이하, 오겹살은 1.5cm 이하로 관리하라고 기준을 제시했다. 하지만 권고 수준이어서 업체들이 따를 의무는 없다. 비계에 대한 선호가 제각각이라 일률적인 기준을 적용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도 참고할 만한 조사는 있다. 축산물품질평가원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소비자들은 ‘지방 함량이 적절한’, 지방 비율로는 25∼30% 수준을 가장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위별로는 흉추 5번, 흉추 9번, 요추 1번 순이었고, 이른바 ‘떡지방’이 많은 흉추 12번의 선호는 낮았다.
▷비계가 많다고 하소연해도 업체에선 ‘비계가 많아야 맛이 좋다’고 하거나, ‘단순 변심’이라며 반품해 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처음부터 지방 함량에 따라 삼겹살을 세분해서 판매하고, 판매대나 포장지에 정보를 표시하면 어떨까. 세종시의 한 마트에선 지방 함량이 많은 것은 ‘풍미삼겹’, 중간 정도는 ‘꽃삼겹’, 적은 것은 ‘웰빙삼겹’ 등으로 구분해서 팔고 있다고 한다. 한국인의 솔푸드로 불리며 사랑받는 삼겹살이 AI 감별사까지 동원해야 할 정도로 불신의 대상이 되는 현실이 씁쓸하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2-28 210년 중립국 스웨덴의 나토 가입

스웨덴이 210년 중립국 원칙을 벗어던지고 집단안보체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에 정식 가입한다. 지난해 4월 튀르키예에 이어 그제 헝가리 의회가 최종 동의함으로써 스웨덴은 32번째 회원국이 되기 위한 행정절차만 남겨놓고 있다. 나토 회원국이 되려면 모든 회원국 동의가 필요하다. 2년 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때 “나토의 동진(東進)이 러시아 안보를 위협한다”는 명분을 내걸었는데, 그 침략 전쟁이 중립국까지 나토의 품을 찾게 만들었다.
▷국가 안보에는 세 가지 방법이 존재한다. 강대국과 한편이 되거나(한미동맹), 강대국의 반대편에서 힘을 합치거나(소련에 맞선 나토), “누구도 편들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중립국이 되는 길이다. 현재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이 영세중립국이다. 스웨덴과 핀란드는 러시아 침공에 놀란 2년 전 나토 가입을 선언하기 전까지는 스위스처럼 중립국으로 평가받았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중립국이 된 스웨덴은 2차대전 때 나치 독일의 침공을 모면하는 등 210년간 전쟁이 없었다. 냉전 붕괴 후에는 육군의 90%를 감축할 정도로 외침 걱정 없이 살았지만, 옛이야기가 됐다.
▷압박을 느낀 러시아 국방부는 모스크바 군관구와 레닌그라드 군관구를 14년 만에 부활시켰다. 그도 그럴 것이, 러시아 해군에 핵심적인 발트해(海)를 나토 8개국이 완벽하게 둘러싸게 됐다. “발트해가 나토해(海)가 됐다”는 평가도 그럴듯하다. 중국도 불만을 감추지 않고 있다. 미국은 지난해 나토 정상회의에 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를 초청했다. 나토를 전체주의에 맞서는 지구적 자유진영 안보체제로 확대하려는 것이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구상이다.
▷스웨덴 가입 과정은 실리 챙기기 외교의 교과서에 가깝다. 헝가리는 친러-친중 총리가 21개월 동안 가입 동의를 미루며 스웨덴의 애를 태웠다. 44조 원 규모의 유럽연합(EU) 지원금, 러시아의 에너지, 중국의 자본 투자를 모두 챙기려는 속내다. 끝에서 두 번째로 동의해 준 튀르키예도 자국이 원하는 유럽연합 가입을 돕겠다는 약속을 받을 때까지 스웨덴을 괴롭혔다. 미국에서 F-16 전투기 40대 추가 수출 승인을 덤으로 챙겼다.
▷스웨덴 핀란드가 선택한 중립국 지위 포기는 한쪽 편에 서서 뭉쳐야 안심할 수 있는 집단안보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미국 도움 없이 스스로를 지켜야 할 수도 있다”는 유럽의 공포감이 배어 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2%도 많다던 나토 회원국들의 국방비는 ‘2%가 최소치’로 바뀌었다. 오죽했으면 미국의 군사 개입에 비판적이던 프랑스가 “우크라이나 파병도 가능하다”고 나설까. 국가 위상과 국익에 걸맞은 군사적 기여는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 되고 있다. 어쩌면 지구 반대편 우리에게도 머잖아 닥칠 일일 수도 있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2-29 애플이 10년 만에 발 뺀 전기차시장

팀 쿡 최고경영자(CEO)가 2014년 “아무도 모르게 하는 게 있다”고 했지만, 애플이 자율주행 전기차를 개발한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애플의 전 이사회 임원이 한 인터뷰에서 “스티브 잡스의 생전 꿈이 혁신 자동차 ‘아이카’를 만드는 것이었다”며 애플 애호가들을 흥분시켰고, 이름난 자동차 엔지니어와 디자이너들이 줄줄이 애플로 자리를 옮겼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CEO가 “애플이 우리가 해고한 사람을 모두 고용한다”고 할 정도였다.
▷10년간 애플이 개발해온 ‘애플카’는 전 세계 언론과 기업, 투자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애플이 공동 개발과 위탁 생산을 위해 BMW, 현대차·기아, 닛산 등을 물밑 접촉했다는 소식이 알려질 때마다 관련 기업 주가가 치솟았다. 월가의 투자은행들은 ‘애플의 차세대 캐시카우는 스마트폰 아닌 자동차’, ‘애플카 출시 4년 내 자동차 강자가 될 것’ 등의 전망을 쏟아냈다. 입 다물고 있던 쿡 CEO도 “그동안 많은 내부 연구가 빛을 보진 못했지만 자율주행은 다를 것”이라며 힘을 보탰다.
▷그런데 애플이 공들였던 애플카 개발을 접고 2000여 명이 몸담았던 전기차 조직을 해산할 것이라고 27일 외신들이 보도했다. 애플카 출시가 2025년에서 2026년으로 연기된 데 이어 2028년까지 미뤄진다더니 결국 포기 수순에 들어간 것이다. 혁신의 상징 애플도 자율주행 기술의 벽을 넘지 못한 탓이 크다. ‘바퀴 달린 스마트폰’을 만들겠다는 야심한 계획은 운전자가 운전대를 잡아야 자율주행이 가능한 수준으로 수정돼 테슬라 짝퉁이 될 것이냐는 혹평이 쏟아졌다고 한다.
▷냉각기에 접어든 전기차 시장 상황도 영향을 끼쳤다. 3년간 연평균 65%씩 고속 성장하던 전기차 판매량은 올해 9% 증가에 그친다고 한다. 얼리어답터들은 이미 구매를 끝냈고, 일반 소비자는 비싼 가격과 불편한 충전 때문에 전기차 구매를 꺼리고 있어서다. 게다가 미국, 유럽 등 주요국들이 전기차 전환 속도 조절에 나서고 있다. 이러다 보니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전기차 대신 전기차로 가는 징검다리로 여겨졌던 하이브리드차 생산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중국 전기차의 공세 또한 무섭다. 테슬라를 제치고 세계 전기차 1위에 오른 중국 비야디를 두고 미국자동차연합은 “중국 초저가 전기차가 핫케이크처럼 팔릴 것”이라며 위기감을 드러냈다. 요즘 중국 차는 싸구려라는 꼬리표를 떼고 품질까지 인정받고 있어 더 위협적이다. 중국 가전업체 샤오미는 최근 첫 전기차를 공개하며 “포르셰와 테슬라가 라이벌”이라고 선언했다. 머스크 CEO가 “무역장벽이 없다면 중국 전기차 업체들이 경쟁사를 다 무너뜨릴 것”이라고 했는데, 우리도 허투루 넘길 얘기가 아니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