午後餘談(문화일보) 2024-02/
02-01(목) ‘연동형’ 정당 난립

오승훈 논설위원
헌법은 정당 설립의 자유와 복수정당제를 보장하고 있다. 목적·조직·활동이 민주적이면 국가의 보호를 받고 정당 운영에 필요한 자금도 준다. 1일 현재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된 정당은 50개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양당을 필두로 원내 의석을 가진 6개와 원외 정당 43개다. 지난달 25일 창당작업을 완료해 정식 등록한 개혁신당이 막내다. 여기에 통합을 추진 중인 ‘새로운미래’ ‘미래대연합’ 등 창당준비위원회가 10개다. 오는 4·10 총선에서 지역구든 비례대표든 후보를 낼 가능성이 있는 정당이 60개다.
총선 참여 정당은 지난 21대 총선에서 폭증했다. 인물·정당의 교차 투표가 가능한 1인 2표제를 처음 도입한 17대 총선(2004년) 15개, 18대 총선 17개, 19대 총선 19개, 20대 총선 25개였는데 21대 총선에선 41개로 늘었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때문이다. 비례대표 선거에만 35개 정당이 쏟아져나오면서, 48.1㎝라는 역대 가장 긴 투표용지가 만들어졌다. 현재의 60개 정당·창당준비위 가운데 합당 등 이합집산과 후보 등록 포기로 줄어들어 50개 정당이 후보를 낸다고 쳐도 직전 선거 대비 총선 참여 정당 수가 20% 이상 늘어난다.
사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사표 방지와 소수 정당 원내 진입을 통한 국회 다양화를 명분으로 독일의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모방했지만 배경은 정반대다. 독일의 경우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완전 비례대표제의 의회가 군소 정당이 난립해 정국 불안을 야기하자 지역구 선거를 결합했다. 한국은 거꾸로 지역구 선거가 양당 과점 현상을 낳는다는 이유로 병립형 비례대표제를 연동형으로 바꿨다. 의원내각제가 아닌 대통령제인 나라에서 군소 정당이 난립하는 것은 분명히 이상현상이다.
당명을 보면 통일, 자유, 민주, 평화, 미래, 환경, 혁명 등 정치 지향뿐만 아니라 자영업, 농민, 기독, 노인, 여성 등 계층과 직군 대표를 표방한 경우도 있다. 당명이 가장 오래된 정당은 1930년 임시정부 때 창당된 한국독립당으로, 한동안 중단됐다가 2007년에 다시 등록됐다. 민주당은 1955년 창당을 기원으로 삼지만 현재 당명은 2015년 개명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정당은 1834년 창당한 영국의 보수당이다. 우리가 역사 깊은 정당을 갖는 것은 요원한 일일까.⊙
02-02(금) 윤-한 사진 밸런스게임

이현종 논설위원
어릴 때 가장 곤란한 질문이 “아빠 엄마 중 누가 더 좋아”라는 것이다. 어린아이도 이런 질문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다 좋아”라고 넘어간다. 젊은층에서 인기 있는 ‘밸런스 게임’도 마찬가지다. 지금 국민의힘 예비후보들이 이런 딜레마에 빠져 있다. 현수막이나 SNS 사진 등을 올릴 때 누구와 찍은 사진으로 할 것인지 고민이다. 보통 집권 여당의 경우 대통령과 찍은 사진을 올리는 것이 상례이지만, 지금은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더 인기가 있다 보니 한 위원장과 찍은 사진을 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과 한 위원장 갈등 이후 사진을 내리거나 눈치를 보는 경우가 많아졌다.
윤 대통령의 최측근인 주진우 전 대통령실 법률비서관은 지난달 29일 부산 해운대갑 출마선언을 하면서 윤 정부의 성과는 언급했지만, 윤 대통령과의 개인적 인연은 말하지 않았다. 이 지역 현역인 하태경 의원이 서울로 옮기면서 출마선언을 했지만, 자칫 ‘윤심 논란에 휘말리지 않을까’하는 우려 때문이다. 인천 연수을에 출마하는 김기흥 전 대통령실 부대변인도 SNS 프로필 사진에 윤 대통령과 찍은 사진을 올렸다가 한 위원장과 찍은 사진으로 교체하더니 ‘윤-한 갈등’ 이후에 자기 사진만 올렸다.
경기 성남 분당을 선거구에 출마를 선언한 김민수 국민의힘 대변인은 한 위원장과 지난달 23일 충남 서천 화재 현장을 방문한 사진을 올렸다. 한 위원장이 서천 화재 현장을 함께 둘러보며 김 대변인에게 직접 우산을 씌워주는 모습이다. 서울 구로갑에 출마하는 호준석 대변인도 한 위원장이 본인 어깨에 손을 얹는 사진을 올리며 ‘한 위원장과 드레스 코드가 겹쳤다’고 적었다.
일부 야당 의원들도 한 위원장 사진을 게재했다. 더불어민주당 김영배(서울 성북갑) 의원은 4년의 의정 활동 보고서를 공개하며 한 위원장이 장관 시절 국회에서 자신과 설전을 나눈 장면을 강조했다. 이병훈(광주 동남을) 의원은 의정 활동 보고서에 한 장관을 상대로 한 대정부질문 장면 사진을 배치했다. 4년 전 제21대 총선 때 여당 후보는 문재인 대통령, 친박신당과 우리공화당은 박근혜 전 대통령 얼굴을 담기도 했다. 후보들에겐 대통령이건 여당 대표건 도움이 되는 사람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를 보는 윤 대통령의 심정은 어떨까.⊙
02-05(월) 워터 리스크

이철호 논설고문
삼성전자 화성 공장에는 서울월드컵경기장과 맞먹는 압도적 크기의 UT4 건물이 있다. 반도체 공정에 들어가는 초순수(超純水·미립자 등을 제거한 순수한 물)를 만드는 장치다. 반도체는 막대한 전력과 함께 불순물 세정과 장비 냉각에 엄청난 물을 잡아먹는 ‘자원집약’ 산업이다.
“쌀을 포기하고 반도체를 만든다.” 100년 만의 대가뭄이 닥친 2021년, 대만은 농업용수까지 TSMC 반도체 공장으로 돌렸다. 18만 에이커 논에서 벼농사를 망쳤다. 연간 TSMC가 사용하는 물은 총 1억500만t. 한 방울의 물도 3.5회 재사용할 만큼 아껴 쓰는데도 주변 민심은 메말라 가고 있다. TSMC의 타이중 3공장은 현지 반발을 뚫고 간신히 승인을 받았지만, 첨단 1나노 공장 증설은 무산될 가능성이 크다. TSMC가 미국 애리조나와 일본 구마모토에 공장을 짓는 데는 ‘워터 리스크’가 한몫했다.
SK하이닉스는 용인 반도체 공장에 여주보 물을 끌어오려 했다. 용수 관로가 지나는 여주시가 “일방적 희생은 안 된다”며 몽니를 부렸다. 이에 앞서 안성시도 “반도체 방류수가 논으로 유입되면 농민들이 피해를 본다”며 물고 늘어졌다. SK하이닉스는 지역산 쌀 소비, 현지 반도체 인력 양성 등 온갖 상생협력 선물 세트를 내밀며 간신히 설득에 성공했다. 삼성전자도 300조 원 규모의 용인 반도체 단지에 팔당 물을 끌어오기로 했다. 하지만, 언제 워터 리스크에 직면할지 몰라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 자구책으로 아예 경기도 5개 지역 하수처리장 배출수 47만4000t을 재처리해 사용하는 협약을 맺었다. 삼성의‘3R(Reduce·Reuse·Recycle)’ 경영이 오염수에서 초순수를 뽑겠다는 역발상을 낳은 것이다.
비단 워터 리스크는 반도체뿐 아니다. 최근 인공지능(AI)과 함께 컴퓨팅 용량이 급증하면서 데이터 센터도 ‘물 먹는 괴물’이 됐다. 이로 인해 구글의 우루과이, 메타의 스페인 데이터 센터 설립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다. 현지 주민들은 “우리 먹을 물도 없는데 서버 냉각수라니…”라며 반발한다. “일자리도 사치”라고 할 만큼 강경한 입장이다. 물은 전통적으로 농민끼리의 분쟁 대상이었다. 이제는 쌀과 반도체 등 전략 물자들끼리 ‘물 전쟁’을 벌이고 있다. 치수(治水)가 다시 국가 운명을 좌우하는 시대다.⊙
02-06 北 인권에 진심인 부시

이미숙 논설위원
2005년 11월 부산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 중 경주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은 양국 정상이 북한 인권 문제로 정면 충돌한 회담으로 기록된다.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북한 인권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압박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체제와 종전선언이 중요하다며 맞섰다. 회담에 배석했던 한 인사는 “회담장을 나설 때 양 정상의 얼굴이 벌게진 상태였다”고 회고했다. 현장에 있던 알렉산더 버시바우 당시 주한 미 대사도 퇴임 후 한 강연에서 “경주 회담은 최악이었다”고 회고했을 정도다.
부시는 재임 중이던 2004년 미 의회에서 북한인권법이 제정되자 서명 후 대북인권특사를 임명해 북한 인권 문제의 국제 공론화를 주도했다. 경주 정상회담 후에도 한미 정상회담이 열릴 때마다 북한의 열악한 인권 실태에 심각하게 우려를 표명하면서 한미 양국이 북한 변화를 앞당기기 위한 사업에 나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노 대통령은 시큰둥했지만, 부시에게 북한 인권은 중요 어젠다였다. 그는 퇴임 후 텍사스주 댈러스에 조지 W 부시 센터를 설립, 퇴역군인과 탈북민 지원 사업 등을 시작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로스 두서트는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선 니키 헤일리 전 유엔 대사 관련 최근 칼럼에서 “헤일리는 가장 위험한 대통령이 될 수 있다”면서 그를 부시에 비유했다. “매파적 외교정책으로 미국을 쇠퇴로 몰아넣은 부시처럼, 헤일리는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를 비판하면서 부시 시대 네오콘 같은 외교정책을 주장한다”는 게 그 이유다. 부시가 헤일리 때문에 난데없이 대선 국면에 소환된 셈이다. 9·11테러 이후 감행한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침공이 미국 쇠퇴의 뿌리라는 분석이 최근 힘을 얻으면서 부시는 미국을 수렁으로 몰아넣은 지도자란 비판을 받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 인권에 대한 부시의 진정성은 평가해야 할 것 같다. 그는 부시 센터 산하 연구소에 2017년 북한자유 장학금을 신설해 그간 총 75명에게 30만 달러를 지급했다. 이 연구소는 올해도 북한자유 장학생 모집 공고를 냈다. 미국에서 학위를 받으려는 탈북민은 누구나 신청이 가능하며 마감은 4월 1일이다. 전직 미국 대통령의 혜안 덕분에 자유 북한을 이끌 미래 리더가 성장하고 있다.⊙
02-07 명절 해외여행 신기록의 그늘

문희수 논설위원
올 설 연휴 역시 해외여행 붐이다. 가까운 일본은 물론, 대만·베트남·태국 등을 여행하려는 수요가 급증했다. 인천국제공항 하루 이용객(출국·입국)은 지난달 14일 이미 4년 만에 20만 명을 넘었는데, 이번 설 연휴엔 역대 명절 중 최대치를 기록할 것이란 관측까지 나온다. 국제항공운송협회는 올 세계 항공 여객수가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45억 명)을 넘어 47억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설 연휴 기간인 오는 9∼10일에 체크인 하는 2박 이상의 숙박 예약을 기준으로 할 때 한국인이 해외로 가장 많이 떠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보복 여행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해외여행 경비는 갈수록 부담이 커진다. 각국의 물가가 오른 데다 원화도 약세 추세인 탓이다. 게다가 세계 각국이 밀려드는 관광객을 감당 못 해 관광세·입국세를 올리거나 신설하는 추세다. 태국은 이미 1만1000원 수준의 입국세를 받고 있다. 인도네시아 발리는 오는 14일부터 10달러(미화)의 관광세를 받고, 이탈리아 베네치아도 오는 4월 말부터 5유로의 입장세 부과를 시범 운영할 예정이다.
우리나라 여행수지는 다시 적자가 확대됐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여행수지 적자는 11월까지 112억9000만 달러로, 코로나 전인 2019년(-118억7000만 달러) 수준에 육박했다. 이 기간 내국인 출국자는 2030만 명으로 2800만 명대였던 2018·2019년에 근접한 반면, 한국 입국자는 999만5000명으로 2019년(1750만3000명)의 57%에 그친다. 한류가 전 세계로 확산하는데, 정작 외국인 관광객은 늘지 않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정부는 올 외국인 관광객 2000만 명을 목표하고 있지만,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역대 정부마다 목표만 화려할 뿐 부진한 성과가 반복되는 것을 보면 대응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 중국인 관광객이 예전 수준만 못한 게 사실이지만 변명이 안 된다. 서울 외에 부산도 가고 싶은 인기 지역으로 뜬 지 이미 오래고, 외국인 관광객들이 지갑을 여는 데 그리 인색한 것도 아니다. 수요자 입장에서는 먹거리, 볼거리, 살거리가 부족한 것이다. 유치 방안을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 전 세계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일본을 벤치마킹해 전면 점검해 보는 것도 좋겠다.⊙
02-08(목) 정의를 버린 정의당

김세동 논설위원
2020년 총선을 앞두고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2심에서까지 의원직을 상실하는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정의당 이은주 의원(비례)이 지난달 25일 의원직을 사퇴하면서 동료 의원들과 환하게 웃으며 악수하는 모습은 충격이었다. 이 의원이 대법원 확정 전에 미리 사퇴함으로써 정의당의 비례 후순위 후보가 4개월짜리 의원직을 승계토록 꼼수를 쓰면서 무슨 장한 일을 하는 양 “당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밝힌 사퇴의 변은 엽기적이었다.
제21대 의원 임기 만료(5월 29일) 4개월 전인 1월 30일 이후에는 비례의원이 의원직을 박탈당하면 승계되지 않기 때문에 벌인 기상천외한 꼼수다. 총선 때까지 현재 의석수 6석을 유지해 ‘기호 3번’을 사수하고, 정당 국고보조금 삭감을 막기 위해 이런 일을 저지르면서 당명에 정의를 내건 당이 아무런 부끄러움도 못 느낀다는 게 문제이자 비극이다.
이은주 꼼수 사퇴를 보면서 작은 이익을 위해 정의당 간판을 내린 소탐대실이라고 생각했는데, 더 심한 사태가 사흘 뒤 벌어졌다. 정의당은 1월 28일 전국위원회를 열어 4월 총선에서 당선되는 비례대표 의원은 ‘2년 순환제’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4년 임기의 국회의원직을 2년씩 수행하게 함으로써 당 소속 의원 경력자를 2배로 뻥튀기해 2026년 지방선거와 2028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약력을 만들어주겠다는 ‘왕꼼수’를 부린 것이다. 헌법에 보장된 국회의원 임기를 임의로 절반씩 잘라 나눠 먹자는 것인데, 당내에서도 ‘헌법 우롱’ ‘정치 희화화’라는 비판을 받았다.
지난 총선 직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제정에 협조하는 대신 연동형 비례대표 선거법을 받은 야합으로 ‘민주당 2중대’로 전락한 이후 정의당은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고 있다. 21대 국회가 180석의 압도적 다수 의석인 민주당의 폭주로 역대 최악이라는 오명을 얻은 데는 정의당의 민주당 기생적 행태도 적잖이 기여했다. 이재명 대표 등장 이후 “더불어민주당에 ‘더불어’도, ‘민주’도 없고 심지어 당도 아니다”는 비판을 받았다. 국민의힘은 윤석열 대통령의 강한 당무 개입 때문에 ‘용산의힘’이라는 비아냥도 들었다. 막판에 정의당이 당 간판에서 정의를 떼서 바닥에 팽개치고 있다.⊙
02-13(화) 박근혜 실패의 반면교사

오승훈 논설위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최근 펴낸 회고록 ‘어둠을 지나 미래로 1·2’는 “헌정사에서 유일하게 탄핵으로 물러난 대통령”의 “후회스러운 결정과 잘못 판단했던 것”에 대한 술회가 무겁게 읽혔다. 사실 교정과 해명, 어려운 정책 결정 과정도 있었지만 반성과 회한이 더 아프게 다가왔다.
박 전 대통령은 “가슴 아팠던 총리 잔혹사”를 기록했다. 2012년 12월 대선 후 총리로 지명된 김용준 인수위원장, 안대희 전 대법관, 문창극 전 중앙일보 주필이 모두 개인 문제로 중도 하차했다. 이완구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70일 만에 사퇴한 최단명 총리가 됐다. 박 전 대통령은 “인선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나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썼다.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에 대해선 “가장 처참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했다. 피로 누적으로 연가를 신청한 줄로 알고 관저에서 ‘쉬던 그날’은 혼선의 연속이었다. 세월호가 기울어진다는 신고가 119에 접수된 것은 오전 8시 54분, 대통령이 휴대전화를 받지 못해 직원이 들고 온 보고서를 읽고 사태를 인지한 건 10시 20분. 세월호는 이미 9시 30분쯤 복원력을 상실했고, 10시 30분에 거의 침몰한 상태였다. 그런데 11시쯤 방송 자막에 ‘전원 구조’가 떴다. 안도했다. 11시 20분 구조된 숫자가 적었지만 따져 묻지 않았다. “너무 안이한 판단이었다.” 오후 1시 7분쯤 ‘370명 구조’로 보고됐으나 2시 50분엔 “잘못된 보고”라고 했다. “그제야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빨리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로 가야 했지만 교통 문제로 지연됐고, 호출한 적도 없는 미용사가 와서 머리 손질을 했다. “가장 후회스러운 순간 중 하나”였다. ‘세월호 7시간’에 제기된 의혹들이 “아무런 근거 없는 날조”였으나 “일일이 해명하려 애쓰지 않았다”. 그 때문에 “사실처럼 받아들여져 사회분열과 혼란의 악순환이 발생했다.”
4월 17일 실종자 가족들이 모인 진도 실내체육관을 찾아 조치를 하고, 자신과 직접 연결할 고리로 정무수석비서관을 남겨 놓으려 했으나 주변 반대로 거둬들였다. 그 후 유가족과 청와대 사이에 거대한 불신의 벽이 생겼고, 그 틈을 야당과 시민단체들이 메웠다. 국정 오판과 실수를 경계하는 징비(懲毖)일 듯하다.⊙
02-14 연탄의 추억과 한동훈

이현종 논설위원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는 시는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다.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 보면 연탄재에 장미꽃 한 송이가 꽂혀 있고, 그 옆 골판지에 ‘뜨거울 때 꽃이 핀다’는 글귀가 있다. 이효열 작가의 설치 작품인데 무심코 지나가다 문득 이 글귀를 읽으면 많은 생각이 든다. 나는 언제 타인에게 뜨거운 연탄이었는지, 열정은 있었는지 반추해 본다.
1990년대 이전을 살았던 세대는 연탄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 부모님들은 여름부터 겨울을 나기 위한 연탄 걱정이 많다. 광에 가득 차 있어야 안심이다. 서민들이 동네 구멍가게에서 새끼줄에 연탄 2∼3장을 끼운 걸 사서 가져가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금은 도심에서 찾아볼 수 없지만, 동치미 국물만 보면 어릴 적 연탄가스에 중독돼 머리가 아플 때 마시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기름·가스보일러가 일반화했지만, 여전히 전국에서 연탄을 난방 연료로 사용하는 곳은 7만4000가구나 된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매년 공장도 가격 및 판매소 가격을 고정해 연탄 가격이 일정 금액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최고 가격을 정하고 있다. 2023년 기준으로 연탄 한 장당 가격은 전국 단일가격으로 공장도 가격은 639원, 판매소 가격은 656.75원이다. 한 가구가 겨울을 나기 위해선 평균 150장이 필요하다. 연탄은행에 따르면 2019년 480만 장에서 2021년 520만 장으로 증가했던 연탄 기부는 2022년 400만 장으로 감소했고 지난해에도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특히, 연말이 지나 1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 기부가 줄어들어 연탄 보릿고개라고 한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설 선물로 당에서 책정해 놓은 예산 7000만 원을 연탄은행에 기부했다. 외교 사절 등 유력 인사들에겐 별것 아닌 선물이지만, 이 돈이면 7만 장이 넘는 연탄을 기부할 수 있다. 그런데 지난 8일 한 위원장이 서울 노원구 백사마을에서 연탄 배달 봉사를 하다가 얼굴에 묻은 연탄 검댕을 두고 더불어민주당 민형배 의원이 ‘정치쇼’라고 비난하면서 연휴 내내 논란이 됐다. 논쟁거리도 안 되는 것을 괜히 논란을 불러일으켜 홍보만 해 준 셈이다. 민 의원은 누구에게 연탄처럼 뜨거웠던 적은 있었나.⊙
02-15 中 부동산 폭탄 나비효과

이철호 논설고문
중국은 한국과 일본의 교훈을 열심히 배웠다. 한국 외환위기를 통해 자본시장 개방의 위험성을 깨쳤고, 일본에선 저금리가 초래한 자산 거품의 해악을 배웠다. 중국이 외환위기 차단을 위해 자본시장을 단단히 걸어 잠근 것이나, 금리보다 지급준비율 조절을 금융정책의 기본 수단으로 삼는 배경이다. 춘제(春節) 이후 중국은 대출우대금리(LPR) 인하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자본시장 개방도를 높여 외국 자본의 탈출을 막는 데도 안간힘이다. 그만큼 중국 경제가 다급해졌다는 의미다.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는 금융 네트워크를 타고 전 세계로 번졌다. 올해 세계 경제의 최대 위협 요인은 중국의 부동산 부실이다. 폐쇄적인 금융 때문에 외부 파급 효과는 크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많았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 우선, 중국 부동산 부실 규모가 너무 크다. 중국은 2006년과 2010년 부동산 과열 억제를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미 서브프라임 사태와 유럽 재정위기가 터져 부동산 부양으로 급선회했다. 그렇게 누적된 거품은 허컹(賀갱) 전 국가통계국 부국장이 강연에서 “30억 명이 살아도 될 만큼 빈집이 넘쳐난다”고 할 정도다.
또 하나는 해외 부동산 매각이라는 숨은 전파 경로다. 중국은 3년 전 ‘삼도홍선(레드라인)’으로 부동산 기업들의 대출과 주식·회사채 발행을 막아 버렸다. 자산 매각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궁지에 몰린 헝다·비구이위안 등은 생존을 위해 해외 부동산을 대거 내다 팔기 시작했다. ‘광저우 R&F’는 영국 런던의 2조2500억 원 규모의 부동산을 매각했다. 비구이위안은 말레이시아 최남단의 134조 원 규모의 포레스트시티 평당 가격이 최고치 대비 3분의 1로 고꾸라지자 호주 멜버른 외곽의 땅부터 2172억 원에 팔아 치웠다. 매입가를 크게 밑도는 급급매였다.
최근 세계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은 데는 재택근무 증가나 고금리뿐만 아니라 중국발 손절 물량도 한몫하고 있다. 국내 금융업계가 55조8000억 원이나 판 해외 상업용 부동산 대체 투자 상품도 비상이 걸렸다. 한때 뉴욕 월가가 날갯짓하면 전 세계에 폭풍이 불어닥친다는 말이 있었다. 이제 베이징의 날갯짓에 전 세계가 몸살을 앓는다. 중국 부동산 부실이 글로벌 경제에 전염되고 있다.⊙
02-16(금) ‘살인자ㅇ난감’ 콤플렉스

김세동 논설위원
설 연휴에 넷플릭스 드라마 ‘살인자○난감’을 정주행했다. 긴박한 사건 전개와 살인범 이탕(최우식 분)과 형사 장난감(손석구 분) 등 주인공들의 열연에 나름 재미있게 봤다. 죽어 마땅한 악인을 제거한다는 영웅 놀이를 줄기로 한 만화 같은(알고 보니 원작이 웹툰이다) 설정과 잔혹한 장면들이 거슬렸지만 큰 문제의식은 없었는데, 연휴 막바지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지지자들의 반발로 이슈가 돼 논란이 된 장면들을 다시 봤다.
이 대표 지지자들은 드라마에 등장하는 건설사 대표 형정국 회장이 반백의 머리를 뒤로 넘기고 검은 테 안경을 쓴 모습이 이 대표를 연상시킨다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불만을 터트렸는데, 자세히 보니 많이 닮아 보였다. 수감된 형 회장이 구치소 접견실에서 외부에서 들여온 생선 초밥을 먹는 장면도 이재명 경기지사 재직 때 아내 김혜경 씨가 연루된 법인카드 불법 유용 사건에서 소고기와 샌드위치, 초밥을 10인분씩 집으로 배달시켰다는 전 경기도청 공무원의 폭로와 오버랩 됐다. 형 회장의 손녀 이름이 ‘형지수’인 것도 이 대표가 성남시장 시절 형수에게 했던 심한 욕설과 연결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형 회장의 죄수번호 ‘4421’이 대장동 개발에 참여한 한 시공사가 챙긴 수익과 일치한다는 주장도 그럴싸하게 들렸다.
매사를 음모론으로 보는 데 익숙한 민주당 지지자들의 정신 구조로 보면 넷플릭스의 제작 의도를 의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지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건 드라마를 보이콧 하겠다는 반발이 도대체 이 대표에게 무슨 도움이 되냐는 것이다. ‘살인자○난감’을 보지 않았던 사람들도 이재명 지지자들의 불매 운동 운운에 일부러 찾아보지 않겠나.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속담처럼 찔리는 쪽에서 괜히 이슈를 만들어 몰랐던 사람들에게까지 널리 알린 긁어 부스럼 아닌가.
맹목적 충성심에 눈이 멀어 모시는 ‘주군’에게 외려 해가 되는 일을 벌일 때가 있는데, 이번 드라마 시비가 딱 그렇다. 부산 가덕도에서 흉기 습격을 당한 뒤 부산대병원 권역외상센터로 이송된 이 대표를 헬기에 태워 서울대병원으로 전원(轉院)토록 한 측근들이 이 대표 모시기에 급급, 부산·경남 선거를 망쳤다는 비판이 나온 게 불과 얼마 전이다.⊙
02-19(월) 한류 품격 높이는 고궁

문희수 논설위원
글로벌 명품 업체들이 고궁과 한옥을 행사장으로 이용하는 사례가 부쩍 늘어 관심을 끈다. 첨단 빌딩과 고가 아파트가 밀집한 서울 강남 청담동, 청춘 남녀의 성지 격인 성수동 등의 인기에 못지않다.
지난해 5월 경복궁에서 첫 패션쇼가 열렸던 것이 큰 전기가 된 모양이다. 이탈리아 패션 업체인 구찌가 경복궁 근정전에서 열었던 이 패션쇼는 세계적으로 화제였다. 이를 기화로 서울 종로 북촌과 서촌, 삼청동 등의 한옥에서도 이벤트가 잇따른다. 지난달엔 우이동 북한산국립공원 내 사유 한옥 카페·예식장인 선운각에서 스포츠업체 나이키가 행사를 열었다. 북촌 가회동 사유 한옥인 휘겸재에선 지난해 프랑스 패션·뷰티업체 샤넬이 향수 신제품, 루이비통모에헤네시 그룹에서 프랑스 샴페인 신제품 행사를 열었다. 명품 업체들의 만족도는 높다. 세련된 도심 행사보다, 고즈넉한 한옥에서 여는 이벤트가 중장년층은 물론, 2030 소비자들에게도 훨씬 큰 감동과 추억을 남긴다고 평가한다.
정부는 지난 2일 국민 체감형 서비스 개선의 하나로 오는 4월부터 경복궁·창덕궁·덕수궁 등 고궁 야간 개방 확대를 발표했다. 잘된 결정이다. 그동안 선착순 예약이어서 봄철 벚꽃시즌이나 가을철 단풍시즌은 고사하고 평일조차 야간 탐방 기회를 잡기가 매우 어려웠다. 탐방객이 늘면 주변 상가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게 분명하다.
고궁은 한국의 멋과 품격을 보여주는 정수다. 서까래·대들보·창틀 하나하나에 고유한 한국의 미가 담겨 있다. 특히, 외국인 관광객들은 감탄한다. 영국의 버킹엄 궁전, 프랑스의 마르세유 궁전 등에서 보듯 개방이 훼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화재는 많이 활용해야 관심과 보호를 더 받을 수 있다. 윤석열 정부는 방한하는 국빈 만찬 장소 섭외에 적지 않게 애를 먹는다고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물론, 떠나온 청와대 영빈관을 쓰기도 했다. 경호·보안 문제가 없다면 경복궁 같은 고궁을 활용해도 좋겠다. 전 세계에 고궁의 멋을 전파하는 계기도 될 수 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한국을 빛낸다. 훈민정음·예비군복 문양의 패션이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의 격찬을 받기도 했다. 고궁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 국가의 품격을 높이고, 한류 확산과 해외 관광객 유치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다.⊙
02-20 ‘아시아 오바마’의 배신

이미숙 논설위원
조코위로 불리는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아시아의 오바마’라는 별명으로 친숙한 지도자다. 1961년생인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동갑인 데다가 인상이나 체격, 피부색까지 비슷해 붙여졌다. 인도네시아 최초로 군 경력이 없는 민간인 출신 대통령인 조코위는 2014년 취임 직후 신선한 개혁 정책으로 오바마처럼 대중적 인기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신망이 높았다. 그러나 이제 아시아의 오바마라는 별명을 내려놓아야 할 것 같다. 퇴임을 앞둔 그가 보이는 세습 족벌 행태가 오바마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지난 14일 실시된 인도네시아 대선에서 조명을 받은 인물은 대통령 후보인 프라보워 수비안토(72) 현 국방부 장관이라기보다 부통령 후보 기브란 라카부밍 라카(37)다. 조코위의 장남으로 현직 수라카르타 시장이다. 인도네시아 선거법상 정·부통령 입후보 자격은 40세 이상이어서 기브란은 출마 자격이 없다. 그러나 조코위의 매제인 헌법재판소장이 예외를 편법으로 인정해줘 길을 터줬다. 수비안토 후보는 군부 독재 시절 동티모르 독립운동 탄압 혐의로 1998년 민주화 이후 불명예 제대했는데 러닝메이트 덕분에 내달 20일경 발표되는 대선 결과의 승자가 될 것이 확실하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번 대선을 1998년 이후 최악의 부패 선거라고 했다. 조코위가 퇴임 후 권력 행사를 위해 장남을 부통령으로 세우고 부정선거를 했다는 지적이다.
아시아에서 선거가 권력 세습·족벌 체제 구축의 수단으로 전락한 나라는 인도네시아뿐만이 아니다. 필리핀에서는 1986년 피플 파워로 축출된 독재자 마르코스의 아들이 대통령이 됐다. 캄보디아 훈센(71)은 20년 집권 후 장남 훈 마넷(45)에게 총리직을 넘겼다. 지난해 7월 총선 때엔 야당 유력 후보의 출마까지 저지해 “총선이 장남의 대관식이냐”는 비아냥까지 받았다. 캄보디아 국왕의 훈 마넷 총리 지명은 요식절차였을 뿐이다. 김대중(DJ)·리콴유(李光耀)의 아시아 민주주의 논쟁이 있었던 게 30년 전이다. 당시 DJ는 ‘포린 어페어스’에 민주주의의 보편성을 주장하며 “민주주의가 우리의 운명”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시아 국가들은 여전히 “민주주의는 동아시아에 부적합하다”며 아시아적 특수성을 거론한 리콴유적 수준에 머물러 있어 씁쓸하다.⊙
02-21 ‘어그로’ 정치꾼

오승훈 논설위원
“자신의 부고만 빼고 뭐든 신문에 나는 게 낫다.” 전직 대통령의 어록에 수록된 것인데, 정치인에게 이름 석 자를 알리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함축한다. SNS 시대엔 “무플(무관심)보다 악플(악성댓글)이 낫다”는 말로 달라졌다. 증오의 정치가 판치는 환경에는 부정적 방식으로라도 유권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려는 ‘노이즈 마케팅’, 또는 관심을 끌기 위해 도발적인 말과 글, 행동을 하는 어그로(aggro·aggravation의 축약) 정치도 한몫할 것이다.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19일 비상대책위원회에서 행한 ‘차별어 금지 퀴즈쇼’에 잔잔한 파동이 일고 있다. 시각장애인인 김 의원은 “언어는 민주주의와 정치를 움직이는 힘이다. 총선을 앞두고 혐오 표현, 차별 표현 등 막말이 또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면서 즉석에서 비대위원들에게 퀴즈를 냈다. “‘장애를 앓고 있다’가 맞을까요, ‘장애가 있다’가 맞을까요”(한동훈), “‘외눈박이 같다’는 말을 어떻게 고칠 수 있나요”(윤재옥), 회계사인 김경율 비대위원에게는 “눈먼 돈”, 구자룡 비대위원에게는 “절름발이 행정”을 문제로 냈다. 머뭇거리다 답을 맞히는 비대위원들 사이에 연신 웃음이 나왔다. 김 의원은 “증오와 배제의 언어를 몰아내는 것은 정치의 소명”이라며 “막말 마케팅을 하는 정치와 맞서 싸우겠다”고 했다. 지난해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코이의 법칙’을 인용해 화제를 낳았던 김 의원이 또 한 번 신선한 퀴즈쇼로 정치권에 ‘차별어’ 경계령을 내린 셈이다.
언어사회학자들이 정의하는 차별어란 특정 대상을 직간접으로 경멸·공격하는 언어 표현이다. 차별 의도가 직접적인 경우가 많지만, 간접 차별어도 있다. 여의사, 여류 작가, 여기자, 남간호사 등이 그러하단다. 존댓말과 반말이 구분되는 한국어 특성상 ‘나이 차별’도 빈번하다. 선거 때마다 노인폄하 등 나이와 관련한 논란이 가장 예민하게 여론에 작용하는 배경이다. 절차 진행이나 운영에 차질이 빚어질 때를 이르는 ‘파행(跛行)’도 엄밀하게 따지면 차별어다. 본래 ‘절뚝거리며 걷는다’는 뜻이다. ‘절름발이 국회’라는 표현은 사라졌으나 ‘파행’이란 단어는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혐오 표현과 차별어로 증오 정치 조장에 앞장섰던 막말 의원들이 이번 총선에서 걸러질까.⊙
02-22 유튜브 전성시대 명암

문희수 논설위원
그야말로 유튜브 전성시대다. ‘국민 메신저’로 불리는 카카오톡을 제치고 한국인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앱으로 부상했다. 분석업체인 아이지웨이웍스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유튜브의 월간 이용자(MAU)는 4565만 명으로 가장 많았다. 통계를 집계했던 2020년 5월부터 줄곧 정상이던 카카오톡은 4554만 명으로 2위로 밀렸다. 올 1월에는 유튜브 4547만 명, 카톡이 4525만 명으로 격차가 더 커졌다.
유튜브는 빠르게 전방위로 확산하는 추세다. 음식·여행·음악·영화·피트니스·우주·역사·오락·정치 등 다루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다. 미국·유럽은 물론 아시아·아프리카 변방국에서도 영상물이 끊임없이 만들어져 올라온다. 이용자가 급증하면서 조회수가 100만 회를 넘는 유튜버가 즐비하다. 가입자가 2억 명이 넘는 채널도 있다고 한다. 국내에선 최근 유재석 신동엽 같은 인기 연예인도 속속 유튜브를 만들어 인기를 끈다. 어떤 영상물은 총 조회수가 800만 회를 넘는다. 유튜브가 1위에 오른 비결 중 하나로 쇼트폼(일명 쇼츠)이 꼽힌다. 1분 이내, 30초 정도의 짧은 동영상인 쇼츠는 화젯거리, 이색적인 볼거리로 주 고객층인 2030 MZ세대의 취향을 파고드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다.
2006년 유튜브를 인수한 구글은 광고 수입이 엄청나다. 지난해엔 전년보다 8% 증가한 315억 달러(약 42조 원)를 벌었다. 유튜브의 세계 이용자 수가 27억 명 수준으로 추정되니 그럴 만도 하다. 이 덕에 인기 유튜버는 수입이 상당하다. 유망 직종으로 뜨는 이유가 있다.
물론 문제점도 많다. 특성상 공신력이 크게 미흡하고, 사실상 검열이 없다 보니 포르노에 가까운 유해 영상물, 가짜뉴스와 음모론을 전파하는 영상물이 쏟아져 나온다. 진실과 진리보다 단지 흥미와 재미를 추구하는 세태의 단면도 엿보인다.
유튜브의 부상은 비즈니스에서 영원한 승자는 없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운다. 새로운 업체·서비스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X(옛 트위터)도 새로 나온 스레드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인공지능(AI)의 확산은 이런 추세를 더욱 강화할 게 분명하다. 국내에서도 일찍이 동영상 플랫폼이 출현했지만, 저작권 등 규제에 묶여 밀려났다. 유튜브의 성공은 혁신이 가능한 환경의 중요성을 다시 환기시킨다.⊙
02-23(금) K-반도체 위기와 기회

이철호 논설고문
“삼성전자, TSMC에 밀리고 인텔에 추격당하고….” 요즘 삼성 반도체는 위기다. 엔비디아는 그래픽 카드 H100으로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을 독식하고 있다. 지난 분기 매출이 265%나 폭증했다. SK하이닉스도 고대역폭메모리(HBM)로 한발 앞서 있다. 챗GPT 성공으로 AI 특이점이 예상보다 일찍 찾아와 삼성 반도체가 역풍을 맞는 분위기다.
삼성은 권오현 CEO 시절 초격차용 비밀 병기로 게이트올어라운드(GAA)와 HBM을 지목했다. 그 직후 이재용 회장이 사법 리스크에 휩싸이면서 공격적인 투자를 주저한 게 탈이 났다. GAA는 쭉 밀어붙여 TSMC와 맞붙는 원동력이 됐지만, HBM은 담당 인력을 정리하는 등 소홀히 했다. 고성능 그래픽용 D램인 GDDR로도 충분하다고 오판한 것이다. 반면, 하이닉스의 HBM은 엔비디아의 H100과 찰떡궁합을 이루며 흥행 중이다. HBM은 미세한 구멍을 맞추면서 쌓아가는 고난도 기술이 필요하며 고속·저전력이 강점이다.
삼성의 ‘1등의 저주’에도 오히려 퀀텀 점프를 점치는 전문가도 적지 않다. AI가 여러 분야이기 때문이다. 엔비디아의 H100은 고용량을 강력하게 처리하는 만큼 챗GPT 같은 범용 AI에는 절대 강자다. 하지만 적은 용량으로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AI들이 갈수록 대세다. 그만큼 소형·맞춤형이 필요하다. 구글·마이크로소프트·애플·아마존 등 빅 테크들이 자체 AI 반도체 개발을 선포하는 배경이다.
AI 반도체가 메모리 반도체와 시스템 반도체를 통합한 PIM(processor-in-memory) 쪽으로 진화하는 것도 삼성에 유리한 흐름이다. 하나의 칩에서 연산처리와 데이터 저장을 동시에 진행해 효율성을 높이면서 초고속·저전력을 구현한다. 삼성은 세계 1위 메모리, 세계 2위 파운드리 능력에다 전공정과 후공정 기술까지 종합적으로 갖춘 유일한 업체다.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굴기로 K-반도체가 위험한 샌드위치 신세다. 하지만 AI 시대에 반도체 수요가 폭발하고 있다. 한쪽에선 거대 AI들이 머신러닝에 한창이고, 다른 쪽에선 가전·모바일용으로 소형 연산장치(AP)와 경량화된 HBM 수요가 급격히 늘고 있다. K-반도체가 다시 신발 끈을 묶고 잘 대처한다면, 엄청난 기회와 새로운 시장이 열리고 있다.⊙
02-26(월) ‘파업 유도’ 음모론의 부메랑

김세동 논설위원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얼마 전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방침에 대해 ‘정부가 정치적 이득을 노려 일부러 의사 파업을 유도한 정치쇼’라는 취지로 말하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다. ‘지라시’로 도는 수준 낮은 음모론을 대통령에 당선될 뻔했던 제1당 대표가 공식 석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따라 하는 가볍고 무책임한 정신 구조도 문제지만, 작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의료 대란을 부추기는 듯한 선동을 서슴지 않는다는 게 더 충격이었다.
우선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이 대표는 의사 파업의 핵심 전력인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서 제출이 예정된 지난 19일 최고위원회의에서 “항간에 이런 시나리오가 떠돈다.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요구를 던진 다음에 혼란과 반발을 극대화시켜서 국민 관심을 끌어모은 후에 누군가 나타나서 규모를 축소하면서 원만하게 타협을 끌어내는 정치쇼를 하려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저도 똑같은 생각을 한다”고 했다. 위급한 환자와 가족들을 죽음의 고통으로 내모는 의사 파업이 길어질 경우 정권에 치명타가 될 수 있는 중차대한 일을 총선 승리나 아직 한참 먼 대선을 위해 누군가가 기획했다는 것인가? 이 대표는 ‘타협을 끌어낼 누군가’로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는데, 한 위원장에 대한 이 대표의 위기의식을 이해 못할 바 아니지만, 콤플렉스만 자백한 셈이다.
천안함, 세월호 등 중대한 사건 때마다 음모론으로 정부 공격에만 몰두해 온 민주당의 무책임한 속성이 여전한 것도 그렇지만, 공당의 대표로서 정치적 이해득실에만 민감할 뿐 나라의 백년대계가 걸린 큰 문제에 대한 공감이나 책임감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은 더 문제다. 정무 감각도 낙제점인 게, ‘의료 파업 유도’ 발언은 곧바로 부산 가덕도 피습 이후 부산대병원을 버리고 서울대병원으로 헬기 타고 전원(轉院)함으로써 발생한 이 대표의 지역 병원 홀대를 상기시킨다. 자승자박, ‘셀프 디스’라고 볼 수 있다.
이 대표가 추미애 전 의원을 서울 동작을 등에 전략공천 하려는 행태도 경기도지사 재직 당시의 도청 법인카드 유용 사건을 소환하는 패착이다. 추 전 의원은 민주당 대표 시절 선관위에 등록한 정치자금 카드를 가족 행사 등에서 쓴 정황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바 있다.⊙
02-27 ‘李 체포안’ 관심법 공천

이현종 논설위원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 지난 2000년부터 2년 동안 KBS가 방영해 히트를 기록한 ‘태조 왕건’에서 김영철이 연기한 태봉 왕 궁예가 한 말이다. “내가 관심법(觀心法)으로 그대들의 마음을 읽었다”며 호통을 친 뒤 이렇게 말한다. 미륵불을 자처했던 궁예는 관심법으로 신하의 마음을 봐야겠다고 눈을 감았는데, 누군가 기침을 하자 이렇게 말한 뒤 부하를 시켜 기침한 사람을 철퇴를 내리쳐 죽인다.
관심법은 불교의 마음 수련법 가운데 하나인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성찰해 본래 자신의 마음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폭군으로 변해간 궁예는 철원으로 천도한 뒤 신정적 전체주의를 추구하면서 관심법으로 철권통치를 하게 된다. 결국, 왕비 강 씨도 관심법에 걸려 죽었다.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고려 태조 왕건처럼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것을 인정하는 길밖에 없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의 공천 과정에서 ‘신종 관심법’이 등장했다. ‘비명횡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비명계가 공천에서 잇달아 탈락하자 지난해 9월 이재명 대표의 2차 체포동의안 표결이 결정적이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당시 표결 결과, 1차 때 부결된 것과 달리 2차 때는 찬성 149표, 반대 136표, 기권 6표, 무효 4표로 가결됐다. 이 대표가 단식하면서 부결을 요청했지만, 최소 29명 이상의 의원이 찬성표를 던진 것이다. 무기명 비밀투표여서 누가 찬성표를 던졌는지 알 수 없지만, 친명 사이트에서는 찬성표 찍은 의원들의 명단이 나돌았다.
문제는 이번 공천 과정에서 하위 20%에 속하는 의원 31명 중 상당수가 당시에 가결표를 던졌다고 추정되는 비명계 의원에게 집중됐다는 점이다. 박용진 윤영찬 설훈 송갑석 김영주 의원 등이 이번에 하위 10∼20%를 받았다고 공개했다. 그런데 친명 핵심이자 인재영입위원회 간사인 김성환 의원은 “작년 9월 말 이 대표 체포동의안 표결 과정에서 우리 당에서 서른 분 정도가 가결표를 던졌고, 열 분 정도는 기권·무효표를 던지지 않았나”라며 “이런 요소들이 평가에 반영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다. 누가 찬성표를 찍었는지도 모르면서 관심법으로 이를 추정하고 공천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자인이다. 궁예가 환생한 모양이다.⊙
02-28 트럼프 러닝메이트 불안

이미숙 논설위원
11월 미국 대선에 출마할 공화당 후보가 오는 3월 5일 슈퍼 화요일 경선을 앞두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으로 굳어지는 기류다. 니키 헤일리 전 유엔 대사가 공화당 주류파의 지지 덕분에 선전할 것으로 기대됐지만, 오하이오, 뉴햄프셔에 이어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도 패하면서 트럼프 대세론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여기에 보수 진영의 큰손 ‘코크 네트워크’가 자금 지원 중단을 선언하자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Make America Great Again)’를 내세운 강성 지지층은 헤일리의 사퇴를 압박하고 있다.
미시간 등 경합주 여론조사에서 트럼프가 조 바이든 대통령을 앞서는 결과가 거듭 나오자 미 언론들도 트럼프의 재선 가능성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트럼프가 진행 중인 여러 재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승기를 굳히기 위해 조만간 부통령 후보 선정에 들어갈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부통령 후보군으로 여성의 경우 헤일리(52)와 크리스티 놈(52) 사우스다코타 주지사, 세라 허커비 샌더스(41) 아칸소 주지사, 엘리스 스터파닉(39·뉴욕) 하원의원을 꼽았다. 남성의 경우 흑인인 벤 카슨(72) 전 주택·도시개발부 장관과 팀 스콧(58·사우스캐롤라이나) 상원의원, J D 밴스(39·오하이오) 상원의원 등이 물망에 오른다. 보수 진영의 연례행사인 보수정치행동회의(CPAC)의 최근 총회에서는 놈 주지사와 인도계 기업인 비벡 라마스와미(38)가 부통령 후보 공동 1위에 올랐다.
러닝메이트 후보군 중 지명도 측면에선 헤일리가 유리하나, 밴스를 주목하는 사람이 많다. 오하이오 백인 빈민 가정에서의 성장기를 기록한 ‘힐빌리의 노래’로 스타가 된 그는 2020년 선거 때 트럼프 지지로 상원의원이 됐다. 그가 최근 뮌헨안보회의에서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지원중단론을 대변하자 “트럼프의 러닝메이트 같다”는 얘기도 나왔다. 미 부통령은 대통령 유고 시 승계 1순위이다. 고령 문제로 곤욕을 치르는 바이든(81)처럼 트럼프(77)도 나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재임 중 대통령 승계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부통령 후보군이 대부분 MAGA 성향의 외교 안보 문외한이어서 이래저래 트럼프 2기는 끔찍할 것 같아 걱정이다.⊙
02-29(목) 차기 국회는 범죄자 소굴?

오승훈 논설위원
제21대 국회가 29일 본회의에서 법안들을 처리하고 사실상 마지막 회기를 마친다. 4·10 총선을 치르고 나서도 5월 말까지 임기이지만, 마무리 수순이다. 국회는 법을 만드는 곳이다. 입법이 가장 중요한 책무다. 국회 의안정보 시스템에 따르면 21대 국회에서는 28일 기준 2만5733건(정부 발의 포함)의 의안이 접수돼 9319건(36.2%)이 처리되고 1만6414건이 계류(미처리)돼 있다. 역대 최저 기록인 20대 국회 때 2만4141건 발의, 8799건(36.4%) 처리의 성적보다 낮다. 마지막 본회의와 4월 임시국회에서 추가로 법안들이 본회의를 통과된다손 쳐도 1만6000건이 넘는 법안이 폐기된다. ‘일하는 국회’ 기준으론 가장 본연의 직무를 내팽개친 국회가 되는 셈이다.
법안 발의가 늘어난 건 의안 제출을 의정활동의 홍보 수단으로 삼고, 사건·사고와 이슈가 생길 때마다 ‘입법 만능주의’로 대응하는 구태가 변하지 않은 탓이 크다. 품앗이하듯 의원들끼리 이름을 빌려주는 풍토에선 폐기돼 마땅한 법안도 많다. 다른 한편으론 양곡관리법, 간호법, 노란봉투법, 방송 3법, 쌍특검법 등 여야 간 합의 없는 법안들이 야권 일방으로 통과돼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역대 최다를 기록할 정도로 정치 실종의 국회였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소야대의 국회라지만, 극한 대결 정치로 조정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한 무능 국회였던 셈이다.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의 통계를 보면 21대 국회의원 300인 중 검찰 고발·수사·기소·재판을 받는 국회의원은 총 100명(중복 제외·무죄 확정 포함)이다. 국민을 대표한다는 의원 중 30%, 셋 중 한 명은 수사를 받는 피의자이거나 재판을 받은 피고인이다. 부동산 관련 신고 누락 등 25명, 국회 패스트트랙 사건 기소·재판 12명, 공직선거법·정치자금법 위반 혐의 28명, 부정부패 등 각종 의혹 35명 등이다. 3개 재판을 받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포함돼 있다.
역대 최악이란 불명예가 21대 국회로 끝나진 않을 것 같다. 22대 총선 공천에서 다수의 피의자, 피고인이 후보로 나서고 있다. 옥중 창당해 출마하는 송영길, 2심 유죄 판결을 받은 조국 전 장관, 여러 전과가 많은 인사들이 참여하는 민주당의 비례위성정당 등 원외도 있다.⊙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