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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物相(조선일보) 2024-02/ 02.01(목) 고비용 산후조리원 - 02.29(목) 5촌부터 결혼 허용 검토, 그 근거는

상림은내고향 2024. 2. 22. 16:13

萬物相(조선일보) 2024-02/

02.01(목) 고비용 산후조리원

▲일러스트=이철원

 

“미국 사는 언니가 애 낳고 나서 커다란 간호사가 번쩍 들어 찬물 나오는 샤워기 밑에 세웠다나 뭐라나. 이틀 있다 퇴원했대요.” “제 지인도 초여름에 아기를 출산했는데 바로 찬물로 샤워하라는 걸 안 하고 버티니 냄새 난다고 간호사가 엄청 구박하더래요. 한국 여성들은 왜 그러느냐며.” 해외에서 출산하는 한국 여성과 한국 와서 출산하는 외국 여성이 가장 크게 느끼는 차이가 산후조리 문화다.

 

▶우리나라는 “산후조리 잘못 하면 평생 골병든다”며 출산 후 한 달간 산모를 특별하게 보호하는 문화가 있다. 1990년대까지는 친정어머니나 산모 관리인의 도움을 받아 집이나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했다. 별도 시설을 갖춘 산후조리원이 등장한 건 1990년대 중반이다. 채 30년도 안 됐는데 지금은 산모 10명 중 8명이 아기 낳고 산후조리원으로 직행한다. 입소부터가 치열한 경쟁이다. 평판 좋은 산후조리원은 임신을 확인하자마자 예약부터 해야 한다. 지자체가 운영하는 공공 산후조리원은 월 1회 예약받는데 30초 만에 마감된다.

 

▶”출산 지옥 견디니 산후조리원 천국, 여기 퇴원하면 이제 육아 전쟁이 시작되겠죠.” 아이를 하나씩만 낳아 키우니 초보 아빠·엄마들은 신생아 수유하고 트림 시키기, 속싸개로 아기 감싸기 같은 기초 육아를 산후조리원에서 배운다. 북한에서 탯줄 끊어줄 사람도 없이 혼자 출산한 탈북 여성은 “산후조리원에서 알바를 했는데 이런 곳에서 아기를 낳으면 얼마나 좋을까 눈물 나더라”라고 했다.

 

▶2주간 비용이 지역따라 시설따라 수백~수천만원으로 천차만별이다. 상술이 끼어들면서 2주에 1500만~3000만원의 고급 호텔 뺨치는 곳도 등장했다. 한 연예인은 2주간 입소 비용 빼고, 스파와 마사지 받는 데만 수천만원을 썼다고 했다. “단유(斷乳) 마사지를 안 받으면 나중에 덩어리가 생겨 종양이 되는 경우도 있다”는 공포 마케팅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작년 말 뉴욕타임스가 한국의 초저출산율이 중세 유럽의 흑사병보다도 심각하다고 보도했다. 이번에는 그 매체의 여성 기자가 2주에 800만원짜리 강남의 비싼 산후조리원을 체험해 본 뒤 “산후조리원 입소에 큰돈을 써야 하는데 이는 한국에서 아이 키우는 전체 비용의 극히 일부”라고 보도했다. 전 세계에서 최상의 산후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산후조리원이 널렸는데 우리나라는 세계 최저 출생율을 기록하고 있다. 결혼도, 출산도, 육아도, 교육도 과도한 과시와 경쟁 문화로 점점 ‘고비용 구조’가 되니 그 높은 장벽을 넘을 엄두를 못 내는 것이다.

강경희 기자

 

 

02.02 ‘한국의 칼텍’ 꿈꿨던 포스텍

▲미래의 노벨상 수상자를 위해 포스텍 교내에 설치된 빈 좌대./조선DB

 
 

 ▲일러스트=이철원

 

프랑스 최대 국경일인 혁명 기념일에 파리의 개선문에서 콩코르드 광장까지 군사 퍼레이드가 열린다. 이 퍼레이드에는 언제나 ‘에콜 폴리테크니크’ 학생들이 선두에 선다. 이 학교는 사관학교가 아니다. 이공계 그랑제콜(고등교육기관) 중 하나다. 에콜 폴리테크니크 학생들이 선두에 서는 것은 나폴레옹 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다. 프랑스가 얼마나 이공계 인력을 우대하고 존중하는지 보여주는 모습이다. 이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프랑스 학생들은 지옥 같은 경쟁을 치른다.

 

▶이승만은 1907년부터 하버드대에서 석사 학위를 공부할 때 근처에 있는 MIT를 방문했다. 이때 그는 미국이라는 거대강국의 힘이 과학과 공업에서 나온다는 것을 절절히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 중인 1952년 하와이 한인회관을 매각한 대금 등을 합쳐 ‘한국판 MIT’를 목표로 인하공대를 설립했다. 이 대통령이 국민소득 100달러 시절에 1인당 6000달러씩 국비를 써가며 238명을 유학 보낸 것도 나라가 죽고 사는 게 과학기술에 달렸다는 사실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포항제철 박태준 회장은 1985년 5월 칼텍(캘리포니아공대)을 방문했다. 이 대학은 짧은 기간에 우수한 연구 조건을 갖추고 뛰어난 학생과 세계 최고 연구자를 모은 대학으로 유명하다. 박태준이 “한국에 칼텍과 같은 대학을 만들고 싶다”고 하자 칼텍 부총장 얼굴엔 농담이 지나치다는 듯 웃음기가 번졌다. 칼텍을 모델로, 언젠가는 칼텍과 견줄 수 있는 대학을 목표로 1986년 문을 연 대학이 포스텍(포항공대)이다.

 

▶이후 포스텍은 포스코의 아낌없는 지원을 바탕으로 짧은 기간에 연구 중심 대학으로 자리 잡았다. 이공계열 학생들 사이에서는 서울대와 포스텍, KAIST를 묶어 ‘서포카’라고 부르기도 했다. 1994년 한 국내 대학 평가에서 1위에 오르고 1988년 한 홍콩 언론이 포스텍을 ‘아시아 최고 과학기술대’로 소개할 정도였다. 그러나 근래 포스텍은 개교 30년을 넘기면서 활력이 떨어지고 어느덧 시설도 낡아 쇠락하는 느낌을 주고 있다. 대학 평가에서 연세대, 고려대에도 뒤져 학내에서도 위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포스텍이 올해부터 10년간 학교법인 등에서 모두 1조2000억원을 투자받기로 했다. 세계 톱(top) 대학들과 경쟁하는 대학으로 거듭나는 것을 목표로, 국내 대학 역사상 최대 규모 투자를 받기로 한 것이다. 과학기술이 국가의 부와 미래, 생존까지 좌우하는 시대다. 한국에도 MIT와 칼텍이 생기고 그 대열에 포스텍도 이름을 올리길 바란다.

김민철 논설위원

 

 

02.03(토) 영화 ‘건국전쟁’

▲일러스트=이철원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향한 미국인의 사랑과 관심은 시대를 초월해 뜨겁다. 전기를 읽고 영화와 드라마로도 감상한다. 2000년대 들어서도 영화 ‘조지 워싱턴’(2000)과 ‘자유를 향한 싸움’(2006) 등이 만들어졌다. TV 드라마로도 방영된다. 일본에선 봉건제를 허물고 근대국가를 세운 메이지 일왕과 혁명가들이, 중국에선 마오쩌둥 영화와 드라마가 만들어진다. 건국 주역에 대한 당연한 관심이다.

 

▶반면 한국에선 ‘건국 대통령 이승만’ 영화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워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대통령인데도 그렇다. 신상옥 감독이 1959년 만든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 이후 60년 넘게 그의 생애를 다룬 작품은 스크린에서 사실상 사라졌다. 유튜브에서 ‘이승만’을 검색하면 ‘분단의 원흉’ ‘독재자’라는 키워드를 담은 영상이 쏟아진다.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고 대한민국을 세웠으며 공산화로부터 나라를 지켰고 한미 동맹으로 번영의 초석을 다진 거인의 삶이 그렇게 지워졌다.

 

▶폄훼당해 온 이승만의 생애를 되살려낸 다큐 영화 ‘건국전쟁’이 1일 개봉됐다. 첫날 5400여 명이 관람했다. 소셜미디어에는 ‘기대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지적 임팩트가 강한 작품’ 등의 호평이 줄을 이었다. 영화 티켓을 찍어 올리는 인증 릴레이도 이어진다. 영화를 만든 김덕영 감독은 “이승만 영화 만든다니까 친척들조차 ‘집안 망하는 꼴 보려 하느냐’고 했었다”며 달라진 분위기를 반겼다.

 

▶84학번인 김 감독도 그 시대 운동권처럼 이승만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북한이 1990년대까지도 평양 시내에 ‘이승만 괴뢰도당을 타도하자’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는 사실을 알고서 ‘북한이 이승만을 미워하는 이유’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100년 앞을 내다보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한 한국사 유일의 인물’로 이승만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팩트만 보여줘도 이승만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바뀔 것이란 생각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건국전쟁’ 포스터를 부착한 버스 8대가 지금 서울·부산·대전·광주·인천의 거리를 누비고 있다. 서울 지하철역에도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얼굴을 담은 영화 포스터가 나붙었다. 시민 수백 명이 “광고 만들라”며 후원금을 보탠 덕분이다. 시내에서 이승만 얼굴을 보자니, 지난 정부가 2019년 임시정부 100년을 기념한다며 정작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만 빼놓았던 사실이 떠올랐다. 이번 주말에 ‘건국 전쟁’을 보려고 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02.05(월) 신촌 “아, 옛날이여!”

▲일러스트=이철원

 

설악산 입구에 있는 설악동은 1990년대까지 전국에서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수학여행 1번지이자 신혼여행지로도 인기였다. 호텔과 콘도 등 숙박 업소가 80여 곳에 이르렀고 상가는 150개를 넘나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유령 마을’이다. 오랜 시간 방치된 숙박 업소는 폐가나 진배없고 문 닫은 상가는 간판 도색이 벗겨져 을씨년스럽다. 옛모습만 생각하고 오랜만에 찾아갔다가 사람 발길조차 끊긴 풍경에 놀란다고 한다.

 

▶설악동은 원래 놀거리를 포함해 6개 지구로 계획됐다가 숙박 위주의 3개 지구만 개발했다. 그래도 돈이 벌렸다. 그 돈이 눈을 가렸기 때문일까. 국민 소득 증가로 관광 패턴이 먹고 자고 보는 데서 즐기고 노는 방식으로 바뀌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스포츠와 레저·위락 시설을 넣기로 한 나머지 3개 지구를 개발했다면 급격한 유령화를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한탄이 뒤늦게 나오고 있다.

 

▶1970~1980년대 온천도 설악동 못지않게 인기였다. 그 시절 TV 드라마 ‘야, 곰례야!’엔 정자가 남편 마영달에게 “온천 한번 가자”고 조르는 장면이 나온다. 온천 가는 게 최고의 호사였던 시대상이 드라마에까지 반영된 것이다. 창녕의 부곡 하와이, 구례의 지리산 온천랜드, 충주의 수안보 온천에 연간 수백만명이 몰려갔다. 그랬던 곳들이 지금은 폐업과 무기한 휴업, 방문객 감소로 몸살을 앓는다.

 

▶명동·압구정동과 함께 서울의 3대 황금 상권으로 꼽히던 신촌이 깊은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지하철 2호선 신촌역에서 연세대 정문으로 이어지는 알짜 상권이었던 연세로조차 곳곳에 공실이다. 연대생 카페로 불리던 독수리다방조차 폐업과 재개업의 풍파를 겪었다. 카공족(카페에서 공부하는 학생)의 성지였던 민들레영토는 노래방으로 바뀌었다. 스타벅스와 크리스피도넛 등이 국내 1호점을 냈던 유행의 전진기지라는 명성도 잃었다.

 

▶신촌은 청년 문화의 성지이자 산실이었다. 영화 ‘바보들의 행진’과 ‘겨울 나그네’는 1970~1980년대 신촌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김현식·이광조·이정선·엄인호·한영애가 밴드 ‘신촌블루스’에서 활동했다. 그들의 아지트이자 인근 대학생들이 즐겨 찾던 카페와 주점, 서점이 문을 닫거나 연남동, 홍대 등으로 옮기며 활기를 잃었다. 장사가 되자 임대료를 과도하게 올려 상인들을 밀어낸 탓도 있지만 변화에 뒤처진 것이 근본적인 문제일 것이다. 신촌 상인들이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나섰다고 한다. 다시 일어나 옛 활기를 되찾기를 기원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02.06 기업이 주는 ‘출산 장려금’

▲일러스트=이철원

 

비교적 큰 규모로 출산 장려금을 주는 나라는 극심한 저출생(출산율 1.21명)에 시달리는 싱가포르 정도다. 첫째, 둘째 낳을 때 1만1000싱가포르달러(약 1090만원), 셋째는 1만3000싱가포르달러를 준다. 다자녀를 둔 가족에게는 정부 주택 입주에 대한 우선권도 주고 있다. 일본 정부는 현재 42만엔(약 380만원)인 출산 장려금을 50만엔까지 인상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출산 비용 정도를 보조하는 성격이다.

 

▶지난해 합계 출산율이 0.72명대로 추정돼 세계 최악인 우리나라에서도 출산 장려금이 올라가고 있다. 인천시는 지난해 말 인천에서 태어나는 모든 아이에게 만 18세가 될 때까지 총 1억원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정부와 지자체의 종전 지원금 7200만원에 인천시 자체 예산 2800만원을 보태겠다는 것이다. 충북 영동군은 국비·도비에 군비를 합쳐 최고 1억2430만원을, 경남 거창군은 출생아 1인당 1억1000만원을 지원하겠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부영그룹이 아이를 낳은 직원에게 자녀 1인당 출산 장려금 1억원을 주기로 했다. 또 정부가 민간에 영구 임대주택 사업 기회를 열어준다면 셋째를 낳은 임직원에게는 국민주택 규모 영구 임대주택도 제공하겠다고 했다. 실제로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은 5일 2021년 이후 출산한 직원 자녀 70명에게 출산 장려금 1억원씩 총 70억원을 지급했다. 국가나 지자체가 아닌 기업 차원의 출산 장려금은 한국 외엔 많지 않을 것 같다.

 

▶부영만이 아니다. 한미글로벌은 셋째 출산 시 조건 없이 승진시키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금호석유화학은 올해부터 첫째 500만원, 넷째 2000만원 출산 축하금을 주기로 했다. 기업만 아니라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신자가 첫째 아기를 낳으면 200만원, 넷째 아이를 낳으면 1000만원을 출산 장려금으로 준다.

 

▶프랑스, 호주, 미국 등에는 먹고살기 힘들어지면 아이를 낳는다는 말이 있다. 자녀를 낳을 경우 아동 수당 등 보조금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독신 가구에서 두 자녀 가구로 바뀔 때 조세 부담률이 15%포인트나 떨어진다. 아이를 낳으면 세금을 파격적으로 깎아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난 20여 년 동안 이런저런 저출생 대책을 써보았지만 아직 출산율을 반전시킬 계기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파격적인 국가 차원 출산 장려금은 우리 재정 형편에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 차원의 출산 장려금은 바람직해 보인다. 정부는 독일식 출산 세제 조정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김민철 기자

 

 

02.07 성난 ‘중국 부추(菜)’

▲일러스트=박상훈

 

미래에셋 인사이트, 신한 봉쥬르 차이나. 2007년 한때 인기몰이를 하다 애물단지가 된 중국 투자 펀드들이다. 증권사의 통찰력을 믿으라는 ‘인사이트 펀드’는 출시 보름 만에 4조원을 끌어모았다. 증권사는 중국 경제의 고성장에 올라타야 한다면서 투자금의 80%를 중국에 쏟아부었다. 2008년 리먼 사태 여파로 중국 증시 거품이 터졌다. 인사이트 펀드도 반 토막이 났다. 5년 뒤 겨우 본전이 됐지만 그때까지 참고 기다렸던 투자자는 100명 중 4명뿐이었다.

 

▶요즘 홍콩H지수 ELS 투자자들 걱정이 태산이다. 홍콩H지수의 폭락 탓에 ELS 손실이 속속 확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투자자 15만명이 총 7조~8조원, 1인당 평균 5000만원 이상 손실을 보게 생겼다. 홍콩 증시의 추락은 중국 최대 부동산 기업 헝다의 부도, 텐센트·알리바바 등 중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핍박 때문이다.

 

▶공산당 국가 중국이 왜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주식시장을 도입했을까. 중국은 1978년 개혁 개방을 선언하고, 고속 성장 가도를 달렸다. 경제체제 전환 과정에서 투자금이 부족했던 중국은 국영기업 상장을 통해 투자금을 조달할 요량으로 1990년 상하이와 선전에 증시를 열었다. 증시를 내·외국인용으로 철저히 칸막이를 쳐서 운용하다 2014년 홍콩증권거래소를 통하면 모든 주식에 투자할 수 있게 허용했다(후강퉁).

 

▶외국인 투자 덕에 주가가 급등하자, 도박 좋아하는 중국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1년 반 사이에 신규 증권 계좌가 6000만개나 개설됐다. 상하이지수가 1년 새 2000에서 5000으로 급등했다. 신규 상장 기업 주가가 300년 치 이익을 모아야 되는 수준(PER=300)까지 치솟았다. 증시 과열에 놀란 정부가 돈줄을 죄자 버블이 터졌다. 한 달 새 주가가 32% 폭락하고, 1400종목이 거래 중지 사태를 맞았다.

 

▶중국에선 개인 투자자를 ‘주차이’(菜·부추)라고 부른다. 담긴 뜻이 처절하다. 손실을 보고도 다시 증시에 뛰어드는 모습이 윗부분을 잘라내도 금세 다시 자라는 부추와 같다는 의미다. 기업을 적대시하는 시진핑의 좌경화 정책과 그에 따른 외국인 투자금 이탈로 중국 증시가 연일 추락하자 부추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 한 부추가 검열 사각지대인 중국 주재 미국 대사관 웨이보(중국판 트위터)에 “상하이 증시를 폭격할 미사일 몇 개만 빌려 달라”고 했다. 인도 대사관 게시판엔 “인도 증시는 신(神), 중국은 쓰레기”라고 썼다. 중국 부추들의 분노가 어디로 튈지 궁금하다.

김홍수 논설위원

 

 

02.08 의대 광풍

▲일러스트=이철원

 

1950년대 후반 서울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학과는 어디였을까. 잠사학과와 광산학과였다. 서울대 경제학과 59학번인 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이 인터뷰에서 한 얘기다. 누에를 길러 실크 원단을 만들고 연구하는 잠사학과는 그나마 천연섬유학과를 거쳐 바이오시스템·소재학부로 남아있지만 광산학과는 흔적을 찾기도 어렵다.

 

▶입시 전문 업체 진학사가 분석한 1964학년도 서울대 학과별 예상 합격 점수를 보면 자연 계열의 경우 약학과가 가장 높았다. 취업 잘되는 ‘전·화·기’(전자·전기공학과, 화학공학과, 기계공학과)가 그다음이었다. 의예과는 공대 중위권 학과와 비슷한 수준이어서 10위권 이내에 들지 못했다. 지금은 전국 의대를 다 채운 다음 서울대 공대 등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상식처럼 돼 있지만, 80년대 중반까지도 그렇지 않았다. 지방 의대는 물론 웬만한 수도권 의대도 반에서 공부 좀 하는 정도면 갈 수 있는 학과였다.

 

▶의예과 인기가 급상승한 것은 90년대 이후였다. IMF 위기를 겪으며 대량 실업 사태를 목격하고 졸업 후 안정적으로 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 이 학과에 몰리기 시작했다. 이 바람이 점차 거세져 요즘은 가히 ‘의대 광풍’이다. 특히 정부가 올해 입시부터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리기로 하자 ‘N수생’이 급증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학원가에 대입 수험생은 물론 의대 입시에 관심있는 대학 재학생과 젊은 직장인의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고 한다. 입시 학원들이 직장인을 위한 야간반 개설까지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일단 의사를 충분히 배출하면 위기에 처한 지역·필수의료 분야 해결의 실마리가 풀릴 것은 틀림없다. 공급이 약간 넘쳐야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세상 이치다. 2009년 25개 로스쿨이 개교하면서 매년 1700명 안팎의 변호사를 배출하자 변호사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고 있다. 국민이 보다 폭넓은 법률 서비스를 이용하는 셈이다. 의대 정원 확대라는 정부 방침에 따라 급작스레 인생 항로를 재조정하려는 N수생들도 지금의 선택을 먼 훗날 어떻게 되돌아보게 될지 모른다.

 

▶60~90년대 우리나라 인기 학과는 10년 주기로 달라졌다. 60년대엔 최고의 엘리트가 화학공학과에 갔고 70년대는 기계공학과, 80년대는 전자공학과에 갔다. 이들이 사회에 진출하면 관련 산업이 우리나라 중심 산업으로 발전하는 패턴을 보였다. 이번에 늘어난 의대생들이 필수의료 문제 해결을 넘어 우리나라 의료·바이오산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해주었으면 좋겠다.

김민철 기자

 

 

02.09 남궁원이 정치를 안 한 이유

▲일러스트=이철원

 

최불암은 1992년 정주영이 이끄는 통일국민당 비례대표 의원이 됐지만 인기 드라마 ‘전원일기’에 계속 출연했다. 당시에는 규제가 없었다. 이후 서울 영등포에서 지역구 후보로 재선에 도전했으나 서른 갓 넘긴 김민석에게 밀려 낙선했다. 선거운동 때 김민석은 “국회의원 김민석과 연기자 최불암을 동시에 살리자” “최불암은 무대로, 김민석은 국회로”를 외쳤다. 훗날 최불암은 “그 선거구호 때문에 졌다”면서 “맞긴 맞는 얘기잖아”라고 했다.

 

▶경기 구리에서 당선된 코미디언 이주일은 회고록을 남겼다. “그들은 나를 국회의원이 아니라 여전히 행사나 빛낼 코미디언으로 대했다”면서 “참기 힘들었다”고 했다. 그는 후배 이덕화가 경기 광명에 출마했을 때 충고했다. “연예인 티 내지 마. 입술 부르트고 눈도 충혈돼야 동정표 받아.” 그런데 “이덕화가 말을 안 듣고 가발에 무스 바르고 셔츠에 칼주름 잡더니 떨어졌다”고 했다. “사람들은 후보에게 못난 구석이 있어야 찍는다”고 했다. 본인의 깨달음 같았다.

 

▶연기자 출신만 열서넛이 금배지를 달았다. 70년대 유명 드라마 ‘데릴사위’의 스타였던 홍성우가 서울 도봉에서 3선을 했다. ‘연예인 1호’ 국회의원이었다. 그 뒤로 최무룡 신영균 이주일 이대엽 이낙훈 이순재 최불암 강부자 신성일 정한용 최종원 등을 떠올릴 수 있다. 20대 국회의 ‘유일한 배우 출신’이라는 오신환은 무대 경력이 짧다. ‘장군의 손녀’ 김을동은 서울 송파에서 3선에 도전하다 고배를 마셨다. 그때 맥이 끊긴 셈이다.

 

▶어제 배우 남궁원의 영결식이 있었다. 아들 홍정욱이 추모사를 했다. ‘선거철이면 출마 종용을 받으셨을 텐데 왜 응하지 않았느냐’고 아버지께 여쭌 적이 있다고 했다. “아버지께선 ‘내가 국회의원을 열 번을 해도 사람들은 나를 영원히 배우로 기억할 것이다. 한번 배우는 영원한 배우다’라고 답하셨다”고 했다. “동료들로부터 존경받는 영화배우, 자식과 아내의 사랑을 받는 가장”, 사실 이보다 값진 ‘인생 훈장’은 없을 것이다.

 

▶과거 연예인이 권력층의 강권으로 정치에 발을 들이면 갖가지 ‘이벤트’에 활용당하다 끝이 안 좋았다. 몇몇은 뇌물죄로 징역을 살기도 했다. 이덕화 김형곤 문성근은 첫 도전에 실패한 뒤 꿈을 접었다. 요즘엔 영입 후보로 거론되는 연예인들이 제안을 고사한다. 차인표는 “오로지 연기자로서 전념하고 싶다”고 했다. 남궁원은 오래전 이런 변화를 내다본 것일까. 남궁원이란 이름은 앞으로도 영원히 배우로 기억되게 됐다.

김광일 기자

 

 

02.13(화) “난 이승만을 너무 몰랐다”...‘건국전쟁’ 상영관마다 눈물과 박수

▲일러스트=이철원

 

이승만의 생애와 업적을 조명한 다큐 영화 ‘건국전쟁’ 상영관은 전국 301곳에 이른다. 처음 132곳에서 시작해 두 배를 넘었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과 그가 만든 나라에서 살아온 국민의 상봉이 그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영화가 상영되는 100분 동안 누군가는 어둠 속에서 한숨을 내쉬었고, 누군가는 손수건을 꺼내 눈을 닦았다. 필자도 영화를 보다가 여러 번 가슴이 뛰고 눈이 뜨거워졌다.

 

▶각종 감상평 사이트엔 “이승만을 몰랐던 내가 부끄럽다”는 글이 줄을 잇는다. 베스트셀러 ‘세이노의 가르침’의 저자는 “이제까지 이승만에 대해 갖고 있었던 생각이 편향적이었음을 고백한다”고 했다. 영화를 만든 김덕영 감독조차 “오랜 시간 이승만을 모르고 오해했다”고 했었다. “팩트만 보여줘도 이승만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바뀔 것”이란 김 감독의 확신은 이승만의 진실을 알 게 된 후 자신의 겪은 변화 경험을 국민과 나누고 싶다는 고백이었을 것이다.

 

▶‘건국전쟁’은 이승만에 대한 그간의 오해를 걷어내는 데 많은 정성을 들였다. 이승만을 비난하는 이들은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을 천명한 이승만의 ‘정읍 선언’이 민족을 반쪽 내서라도 권좌를 차지하려는 노욕의 발로였다고 폄훼한다. 영화는 이승만이 귀국하기 전에 소련 스탈린이 북한에 친소 정권 수립을 지시했고 남북 간 38선 통행도 소련이 금지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들어 이를 반박한다. 6·25 초기 주한 미 대사가 해외 도피를 권유하자 권총까지 꺼내 들고 물리친 이승만과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황이 불리해지자 가족을 만주로 도피시킨 김일성의 행태도 대비한다.

 

▶지난 1일 개봉한 ‘건국전쟁’이 예상 밖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첫날 5400명이 관람했을 때만 해도 “설 연휴에 줄줄이 개봉하는 대작들에 밀려날 것”이란 비관론이 우세했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 보니 24만 관객을 돌파했다. 연휴 중 관객이 가장 많이 몰린 ‘빅3′에 들기도 했다. 많은 관객이 한 번 본 것을 여러 번 다시 보는 ‘N차’ 관람에 나서거나 “나만 보기 아깝다”며 표를 사서 주변에 돌렸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면 객석에서 박수가 터진다. 개봉관마다 예외가 없다. “영화 보고 박수 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고들 했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너무 몰랐다’는 자책, ‘이제라도 제대로 알게 됐다’는 반가움, ‘대한민국 기적의 역사 첫 단추를 꿴 거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한꺼번에 녹아 있는 박수였을 것이다. 다음에는 이승만의 삶을 극화한 영화도 만들어지길 소망해 본다.

김태훈 논설위원

 

 

02.14 영화 정치 내로남불

▲일러스트=이철원

 

2012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현지에서 개봉된 ‘2016: 오바마의 미국’은 노골적인 반(反)민주당 영화다. 오바마가 재집권에 성공하면 그러잖아도 좌파 정책에 휘청이는 미국이 결정타를 맞는다는 보수파의 주장을 담았지만 근거가 빈약했다. 4년 뒤 친(親)민주당 영화인들이 반격에 나서 만든 작품이 ‘더 퍼지: 선거의 해’다. 괴물이 된 보수 정치인이 진보 성향 국민을 살해한다는 황당 공포물로 트럼프를 괴물에 비유했다. 둘 다 수준 낮은 작품이었지만 진영의 지지에 힘입어 스크린에 걸리고 흥행에도 성공했다.

 

▶한국에서 영화와 정치의 관계는 미국보다 더 밀접하다. 정식 분류는 아니지만 충무로 영화가엔 ‘대선용 영화’ ‘총선용 영화’가 있다. 선거를 앞두고 정치색 짙은 영화를 개봉하면 관객 몰이에 유리하다고 해서 생겨난 현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다룬 ‘변호인’과 5·18 소재 영화 ‘택시운전사’, 12·12 사태를 다룬 ‘서울의 봄‘ 등이 ‘10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했다. 하나같이 민주당 측이 득을 볼 영화들이다. 그래야 돈벌이가 된다는 것이 우리 영화계의 공식이라고 한다. 이 추세가 심해져 문재인 전 대통령은 영화를 보고 탈원전을 결심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지난 9일 공개 이후 글로벌 순위 4위까지 오른 넷플릭스 드라마 ‘살인자 ㅇ난감’이 정치적 시비에 휘말렸다. 드라마 속 악역인 형정국 회장 캐릭터가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닮았다는 것이다. 이 대표 지지자들이 반발해 불매운동을 한다는 등 한바탕 논란 중이다.

 

▶이 드라마의 원작은 2010~2011년 연재된 웹툰이다. 당시에 이 대표는 지금 같은 사람이 아니었고 당연히 웹툰 작가가 의식할 일도 없었다. 그런데 원작에 ‘형 회장의 손녀’로만 나오는 캐릭터가 드라마에선 ‘형지수’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다. 그 이름에서 이 대표 형수 욕설 논란을 떠올렸다는 반응이 있다. 형 회장이 수감된 후 외부에서 들여온 초밥을 먹는 장면이 법인카드 유용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내용은 10여 년 전 원작에 있는 것이다.

▶“진보 좌파 취향 작품을 만들어야 장사가 된다”는 게 영화와 드라마의 오랜 불문율이었다. 돈벌이하는 제작자, 감독들과 진보 정치권이 ‘영화 정치’로 마치 협업하는 듯했다. 그런데 ‘살인자~’ 드라마는 사실은 무엇이든 그 반대편 입맛에 맞는다고 해서 오히려 관심을 끌었다. ‘서울의 봄’에는 열광하다가 ‘살인자~’ 드라마는 맹비난하는 것도 내로남불이다. 영화 정치 풍토도 조금 달라지나 싶다.

김태훈 논설위원

 

 

02.15 AI 승자가 추천한 의외의 미래 전공

▲일러스트=이철원

 

최근 미국 증시의 강세장을 이끄는 대표 기업이 엔비디아다. 주가가 파죽지세로 올라 아마존을 제치고 시가총액 4위가 됐다. 곧 3위 알파벳(구글 모회사)도 추월할 기세다. 그렇게 되면 애플, 마이크로소프트와 함께 ‘글로벌 빅3 기업’이 된다. AI(인공지능) 반도체 시장의 90%를 장악한 엔비디아야말로 AI시대 최고 승자로 꼽히는 기업이다.

 

▶”나는 항상 30일 뒤 망한다고 생각하면서 일해왔다.” 대만계 미국인 젠슨 황 엔비디아 창업자의 말이다. 그는 친구 둘과 1993년 GPU(그래픽처리장치) 전문 기업을 세웠다. 1963년 대만에서 태어났지만 부모의 교육열 덕에 9세 때 형과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오리건주립대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스탠퍼드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온갖 실패를 겪었지만 컴퓨터와 AI 시대를 한발 앞서가 세계적 성공을 거뒀다. 10여 년 전부터 딥러닝 시장을 보고 딥러닝용 GPU를 개발해 AI 시대의 최대 수혜 기업이 됐다.

 

▶지난해 국립대만대 졸업식 축하 연설에서 젠슨 황은 “걷지 말고 뛰어라. 여러분은 먹잇감을 구하기 위해 뛰거나 아니면 먹잇감이 되지 않기 위해 뛰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했다. 모든 산업을 AI가 혁신할 것이며 지금 그 출발선에 서 있기 때문에 머뭇댈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이 열렬한 ‘AI 전도사’가 최근 한 공개행사에서 “지난 10~15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프로그래밍하는 법을 배우라고 권했을 텐데 내 의견은 정반대”라고 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생물학, 그중에서도 인간 생물학을 택할 것이라고 한다. AI 혁명으로 기술 격차가 완전히 해소돼 세상 모든 사람이 프로그래머가 될 수 있는 세상이 됐으니 이제는 AI를 활용해 혁신을 앞당길 수 있는 분야에 뛰어들라는 조언이다. 그 대표 분야로 꼽은 것이 바이오다. 실제로 인간 질병 극복을 위한 전진은 길고도 더뎌 신약 개발만 해도 10~15년이 족히 걸리고 90%가 실패한다. 단백질 구조 예측만 해도 지난 50여 년간의 난제였다.

 

▶말로만 그치지 않고 젠슨 황은 이미 바이오 분야에 뛰어들었다. 신약 개발 플랫폼 바이오니모를 구축하고 대형 제약사 암젠과 손잡고 아이슬란드에 수퍼 컴퓨터를 구축했다. 엔비디아뿐 아니라 메타와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다른 빅테크들도 AI 기반 신약 개발에 뛰어들었다. AI가 우리 삶에 가져올 변화가 어디까지일지 아직은 가늠이 안 되지만 세상은 놀랍고도 무섭게 바뀌고 있다.

강경희 기자

 

 

02.16 193번째 수교국

 1990년대 중반 한국의 한 여행객이 쿠바를 방문했을 때 가이드는 김일성대 출신이었다. 북한식 억양이 묻어나는 한국말로 통역했다. 하루는 그가 호텔 방으로 전화해 “피델 카스트로가 호텔에 왔다”며 빨리 내려오라고 했다. 뛰어가 보니 카스트로가 탄 차를 60~70대로 보이는 자원봉사자들이 어슬렁거리며 경호하고 있었다. 삼엄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공산주의 국가지만 북한과는 다른 체제라는 감이 왔다. TV에선 “생필품 가격이 너무 비싸다”며 카스트로를 비판하는 방송이 자주 흘러나왔다.

 

▲일러스트=이철원

 

▶쿠바는 공산당 독재체제에 후진국 중 후진국이지만, 이상한 매력이 있는 나라다. 여행 사이트엔 바닷가 선술집, 물라토(혼혈) 여인들 사진과 ‘찬란한 매혹 쿠바’ ‘낭만이라는 매력 가득한 여행’ 등의 수식어가 넘쳐난다. 아바나에 실재했던 음악 클럽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은 영화화된 후, 독특한 쿠바 음색을 알리며 전 세계를 관통하는 문화 코드가 됐다. ‘노인과 바다’로 노벨문학상·퓰리처상을 받은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집필실 핑카비히아는 관광객이 즐겨 찾는 명소다.

 

▶하지만 쿠바의 경제 상황이 좋아지지 않자 외국으로 탈출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미국 통계로 2022년 미국에 불법 입국하기 위해 조국을 등진 쿠바인이 25만명이다. 쿠바 인구 2.5%가 한 해에 떠난 것이다. 니카라과가 2021년 쿠바 국민에 대한 무비자 입국 정책을 실시한 것이 쿠바 이탈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전에는 플로리다 해안에 불법 상륙하는 위험을 감수했는데, 이젠 합법적으로 니카라과에 입국 후, 미국·멕시코 국경을 육로로 넘는 이들이 늘었다. 코트라는 “대부분의 탈출자가 젊은층·고학력·기술 보유 고급 인력으로 장기적인 경제성장 잠재력이 우려된다”고 했다.

 

▶쿠바가 14일 북한과 수교한 지 64년 만에 우리와 외교 관계를 맺은 것은 심화된 경제 위기가 배경이다. 쿠바는 한국의 경제성장을 눈여겨보며 끊임없이 관계 정상화를 저울질해왔다. 쿠바가 2005년 현대중공업의 진출을 허용한 것은 양국 관계가 확대되는 계기였다. 현대중공업이 소규모 패키지형 발전소를 쿠바 전역에 설치할 때 피델 카스트로가 공사장을 방문, “쿠바도 한국을 빨리 배워야 한다”고 했다. 카스트로는 아예 10페소짜리 지폐에 현대중공업이 수출한 이동식 발전설비(PPS) 도안을 집어넣어 ‘한국 배우기’를 장려했다.

 

▶우리 정부는 2015년 ‘젊음의 쿠바, 한국을 만나다’라는 주제로 쿠바 문화예술 축제를 서울에서 공동 개최하며 수교의 문을 계속 두드렸다. 2022년 쿠바가 핼러윈 참사 때 생각지도 않은 위로 메시지를 보내자 이를 놓치지 않고 193번째 수교국으로 만들었다. 북한의 김정은은 왜 아바나 한복판에 태극기가 휘날리게 됐는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이하원 기자

 

 

02.17(토) 전기차 누른 하이브리드車

▲일러스트=박상훈

 

일본 도요타가 지난해 4조5000억엔(40조원)의 순익을 기록, 일본 최초로 순익 4조엔 돌파 기업이 됐다. 시가총액(490조원)도 삼성전자를 제치고 대만 TSMC에 이어 아시아 2위 기업으로 올라섰다. 현대차그룹도 지난해 최대 이익(26조원)을 냈다. 두 기업의 호실적엔 공통점이 있다. 하이브리드 차량 판매가 폭증한 것이다. 도요타는 340만대, 현대차는 84만대를 팔아 최대 이익의 주동력이 됐다.

 

▶하이브리드 차는 전기모터와 가솔린엔진을 함께 쓰는 차를 말한다. 하이브리드의 약진은 2030년까지 도요타를 제치고 세계 1위 자동차 기업이 되겠다던 전기차 선두 주자 일론 머스크를 머쓱하게 만들고 있다. 거침없던 전기차의 기세는 충전 불편, 비싼 가격, 화재와 추위에 취약한 배터리 문제 등으로 제동이 걸렸다. 작년 강추위에 전기차 방전 대란을 목격한 미국 소비자들은 전기차보다 하이브리드 차를 더 많이 사고 있다.

 

▶세계 최초의 하이브리드 자동차는 독일의 천재 엔지니어 포르셰가 1899년에 만들었다. 네 바퀴에 전기모터를 각각 장착하고, 가솔린엔진으로 전기를 공급하는 방식이었다. 당시로선 엄청난 56마력 출력으로 60㎞대 속력을 냈다. 포르셰는 고출력 하이브리드 엔진이 전차에도 적합할 것이라고 보고, 2차 대전 때 독일 주력 전차였던 티거(tiger)의 하이브리드 모델을 만들기도 했다.

 

▶석유 산업 성장과 기계공학의 진보는 내연기관의 발전과 더불어 하이브리드 기술을 역사의 뒷전으로 내몰았다. 100년간 동면하던 하이브리드를 다시 깨운 기업이 도요타였다. 1997년 세계 최초의 하이브리드 양산 모델, 도요타 프리우스가 등장했다. 전기모터 2대를 달아 주행과 충전을 동시에 수행하며 변속기 없이 속도까지 전기모터로 제어하는 방식이었다. 1ℓ당 20㎞를 웃도는 고연비 덕에 하이브리드 표준이 됐다. 그런데 현대차가 2011년 내연 엔진과 변속기 사이에 전기모터를 1대만 집어넣어 같은 성능을 내는 독자 모델을 개발했다. 기술적 난제 탓에 도요타도 포기했던 방식이라 세계 자동차 업계가 놀랐다.

 

▶전기차 수요 위축에도 불구하고 현대차가 사상 최대 실적을 내는 것은 내연차, 전기차, 수소차, 하이브리드까지 모든 종류의 엔진을 독자 생산하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연차 종주국 독일은 하이브리드 기술에서 뒤처져 외부 충전식 배터리와 내연 엔진을 함께 넣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모델 등으로 힘겹게 쫓아오고 있다. 도요타 회장이 “사람들이 (꿈에서 깨어나) 이제야 현실을 보고 있다”고 큰소리칠 만하다.

김홍수 논설위원

 

 

02.19(월) 나발니 사망과 트럼프의 ‘선택적 침묵’

▲일러스트=박상훈

 

푸틴의 정적 나발니가 시베리아 감옥에서 숨지자 서방세계가 들끓었다. 뮌헨안보회의도 푸틴을 강하게 비난하면서 “이번에야말로 가만 있지 않겠다”고들 했다. 미국에선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입장을 물었다. 그가 내놓은 성명은 엉뚱한 곳을 겨냥했다. “절름발이 바이든 아래 3년 반 동안 세계가 비극, 파괴, 죽음을 겪고 있다”면서 “나만이 지난 임기 때처럼 평화, 번영, 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고 했다.

 

▶공화당 경선 중인 헤일리는 “트럼프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면서 “푸틴이 범인이다, 트럼프가 옹호한 푸틴 말이다”라고 했다. 러시아에 의문사가 터져도 트럼프는 푸틴을 역성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가 사람을 죽인다고 하는데 공정하게 말하면 나는 본 적이 없다”는 식이다. 언론인이 잇따라 살해됐을 때 트럼프는 엉뚱하게도 “푸틴은 강력한 지도자이며 똑똑하다”고 했다. 하긴 그는 북한 김정은에게도 “똑똑하다”고 했다.

 

▶트럼프는 재임 기간 푸틴과 각별했다. ‘브로맨스’ 소리를 들었다. 미 정보기관은 2016년 대선 때 러시아가 개입해서 트럼프를 도왔다는 보고서를 냈다. 바이든은 “트럼프가 푸틴에게 머리를 숙인다”고 했다. 그런데도 푸틴은 얼마 전 인터뷰에서 “바이든이 당선되길 바란다”면서 “경험도 많고 예측 가능하다”는 뜻밖의 말을 했다. 푸틴 자신에 대한 ‘비호감’을 감안한 역선택 유도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백악관은 “푸틴은 미 대선에서 손떼라”고 했다.

 

▶동서고금에 정치적 음모론에 싸인 의문사 목록은 꽤 길다. 팔레스타인 지도자 아라파트도 파리에서 저녁 먹다가 급사했다. 얼추 수백명을 헤아릴 것이다. 그러나 근래 러시아 같은 경우는 없었다. 한 웹사이트는 2022년부터 지금까지 “매우 의심스러운 상황 속에” 목숨을 잃은 러시아 기업인 명단 48명을 추려냈다. USA투데이는 2014~2017년 크렘린궁 눈 밖에 난 기업인의 의문사를 38명으로 집계했다. 이것을 “서든 데스 신드롬”이라고 부른다.

 

▶바이든은 나발니 죽음을 놓고 “푸틴의 책임”이라는 입장을 거듭 밝히고 있다. 크렘린궁은 “용납할 수 없다”며 맞받았다. 푸틴은 “시간은 내 편”이라는 듯 버틴다. 무장 반란 주도자 프리고진이 작년 8월 전용기 추락 사고로 죽었을 때 세상이 벌집 쑤신 듯했지만 이내 사그라들었다. 나발니의 유족은 시신도 보지 못했고, 교도소 보안 카메라도 끊겨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 대선은 한 달 남았다. 소용돌이가 칠 것이다. 트럼프는 ‘선택적 침묵’ 뒤에 숨었다.

김광일 기자

 

 

02.20 호모 프롬프트

▲일러스트=김성규

 

기자 훈련을 받을 때 자주 들은 얘기가 “인터뷰의 성패는 질문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제대로 질문해야 제대로 된 답이 나온다는 인터뷰의 철칙은 인공지능(AI) 시대에 더욱 들어맞는 얘기가 됐다. AI가 알아서 글을 쓰고 그림과 동영상까지 척척 만들어 내는 세상에서 콘텐츠 제작 기술은 하찮은 능력이 되어 가고 있다. 대신 AI에 어떻게 명령해 원하는 결과를 정확하게 끌어내느냐는 질문 능력이 중요해졌다.

 

▶지난주 오픈AI가 공개한 고화질 동영상 제작 AI 서비스 ‘소라’는 챗GPT에 버금가는 충격을 주었다. 간단한 명령만 입력하면 몇 분 만에 할리우드가 수개월에 걸쳐 찍었을 법한 고품질 영상을 토해 냈다. 사람들은 자신의 편집 기술과 그래픽 실력을 ‘소라AI’와 비교하며 뒷머리를 긁었다. 팔로어를 2억여 명 거느리고 떼돈 벌던 미국의 유명 유튜버는 “제발 저를 홈리스로 만들지 말아주세요”라고 외쳤다. 영상 제작 기술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항복 선언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프롬프트(지시·명령어)’로 진화하고 있다. 프롬프트를 입력하며 AI를 활용하는 인간종이란 뜻이다. 석기에서 철기·디지털까지 도구 개선과 함께 문명을 발전시켜온 인류가 AI라는 혁신적 도구와 함께 전혀 새로운 진화를 시작했다. 호모 프롬프트 시대엔 인공지능을 이해하고 활용·구사하는 ‘AI 리터러시(문해력)’가 핵심 경쟁력이 된다. 테크닉이나 기능보다 문제를 분석하고 개념을 추론하고 결과를 구성하는 ‘사고의 힘’이 인간의 능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아이들에게 언어를 가르치듯 유년기부터 AI 문해력을 키워주자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다.

 

▶지금의 인류 사회를 만든 과학은 인문학과 만나 꽃을 피웠다. 같은 기술이라도 ‘인간성’과 철학적 맥락을 입힌 기술이 보편화하고 발전했다. 과학과 인문학은 자연과 사람을 이해하려는 비슷한 뿌리에서 나왔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생전 신제품 발표회에서 ‘테크놀로지’와 ‘리버럴 아츠(인문학)’를 각각 가리키는 이정표를 화면에 띄우고 “애플의 창의적인 IT 제품은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 있다”고 설명하곤 했다.

 

▶오픈AI의 ‘챗GPT’와 구글의 AI ‘제미나이’에 “AI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이 무어냐”고 질문했다. 두 AI 모두 ‘AI에 대한 이해’와 ‘비판적 생각과 문제 해결력’ ‘의사소통 능력’을 꼽았다. 첨단 과학기술의 최정수인 AI가 요구한 것은 ‘가장 인간적인 능력’이었다.

김성민 논설위원·디지털기획팀장

 

 

02.21 다이소족(族)

▲일러스트=이철원

 

일본의 초저가 유통 업체 다이소의 창업자 야노 히로타케(80) 전 회장이 세상을 떠났다. 다이소는 ‘크게 번창한다’는 뜻의 회사이름 대창(大創)의 일본어 발음이다. 브랜드명은 일본에서 건너왔는데 한국 다이소는 더 진화해 ‘다이소족(族)’ ‘다이소 팬덤’ ‘다이소 VIP’ 같은 온갖 유행어와 함께 독특한 소비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탕진잼의 성지’ ‘미친 물가 속 만만하게 사치하는 곳’으로 불린다. 돈을 펑펑 쓰는 즐거움을 누린다는 뜻의 유행어가 ‘탕진잼(탕진+재미)’이다. 백화점 VIP가 되려면 연간 소비액이 수천만원은 되어야 하는데 ‘다이소 VIP’ ‘다이소 만수르’들은 “10만원 질렀습니다” “저도 15만원이나 구매한 적 있어요”라면서 수십가지 물건 산 영수증을 띄운다. 판매 제품 3만여 종 가운데 80%가 1000원, 2000원짜리다. 제일 비싼 게 5000원이다. 가격표 안 보고 이것저것 사도 2만~3만원을 넘지 않는다.

 

▶미국의 달러숍, 일본의 100엔숍 같은 균일가 소매점은 불황 산업으로도 불린다. 1879년 프랭크 올워스가 뉴욕에 5센트 균일가 매장을 연 게 효시다. 국내에 1000원숍은 한국 다이소 박정부 회장이 1997년 처음 선보였다. 45세에 늦깎이 창업을 해 원래는 일본 다이소에 납품하던 무역회사였다. ‘아스코’라는 1000원숍을 시작했는데 2001년 일본 다이소에서 4억엔(지분 34%) 투자를 받으면서 이름을 바꿨다. “다 있소”를 연상시켜 받아들인 이름인데 일본 기업으로 오해도 받았다. 지난해 일본 다이소 지분을 몽땅 사들여 100% 한국 기업이다.

 

▶미모의 여배우 한소희가 생일 파티 때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보석 목걸이와 귀걸이를 착용한 사진을 올렸다. 값비싼 보석이 아니라 다이소의 1000원짜리 장난감 액세서리였다. ‘공주 놀이’ 하는 여아용 제품인데 젊은이들 사이에 생일 파티, 크리스마스 파티용으로 불티나게 팔렸다. 초저가 생활용품 매장이어서 알뜰한 40~50대 주부들이 많이 찾을 것 같지만 의외로 최대 고객층은 20대(30%)다. 50대 이상은 5%에 불과하고 10~30대가 전체의 75%를 차지한다. 온갖 생활용품에, 애완동물용품, 가드닝용품, 와인용품까지 구비하고 부담 없는 가격에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젊은 소비자를 공략한 것이 주효했다.

 

▶‘다이소족’ 덕에 1000원짜리 파는 회사가 매출 3조원 넘는 ‘유통 공룡’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초등학생들까지 이것저것 사서 영상 찍어 올리는 ‘다이소깡’이 놀이처럼 유행한다. 알뜰 소비가 아니라 1000원, 2000원의 ‘소소한 낭비’를 습관처럼 즐기다가는 가랑비에 옷 젖듯 돈은 슬금슬금 새고 집에는 필요 없는 물건이 잔뜩 쌓이기 십상이다.

강경희 기자

 

 

02.22  7월 14일 ‘탈북민의 날’

▲일러스트=이철원

 

북에서 남으로 온 사람들은 시기별로 달리 불렸다. 과거엔 ‘실향민’ ‘귀순자’였는데 1990년대 중반 굶주리다 못한 북 주민 수십만 명이 중국으로 쏟아져 나오자 ‘탈북자’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탈북자의 한국 입국 통계도 이때부터 작성됐다. 2002년 1년간 1000명을 돌파해 김정일 말년엔 연간 3000명에 육박했다. 김정은 집권 후 단속이 강화되자 1000명대로 돌아갔다. 코로나 기간엔 두 자릿수로 줄었다.

 

▶누적 탈북자는 작년 말 현재 3만4078명이다. 72%가 여성이다. 이들이 중국서 겪는 일은 비극적이고 참혹하다. 헐값에 팔려 와 중국인과 강제 결혼한다. 말이 결혼이지 감금과 성·노동 착취를 당하는 노예다. ‘조선 돼지’로 불리며 숨어 산다. 북에선 김정은 노예, 중국선 중국인 노예다. 강제 북송되면 짐승 취급을 받는다. 16년 전 정도상의 단편집 ‘찔레꽃’에도, 최근 배우 유지태가 연재한 웹툰 ‘안까이’에도 묘사된 참상이다. 최악의 북한 여성 인권 집단 유린 사태가 중국에서 30년째 벌어지고 있다.

 

▶천신만고 끝에 한국에 오면 탈북 브로커에게 정착금을 거의 다 줘야 한다. 한국에선 일한 만큼 돈을 받는 감격을 누리지만 경쟁에 익숙지 않은 탈북민들에겐 초기 어려움이 크다. 사업으로 성공한 전철우씨, 배우 출신 김혜영씨 같은 유명 탈북자도 시행착오를 겪었다. 억척같이 번 돈은 송금 브로커를 통해 북에 있는 가족에게 보낸다. 연간 2000만달러 정도로 추정된다. 북에선 엄청난 돈이다. 이 돈이 장마당을 통해 북 전역에 스며든다. 이 ‘원시 시장경제’가 언젠가 김씨 왕조를 뿌리째 흔들 수 있다.

 

▶탈북민들은 한국민이 된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애국심도 강하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따가운 시선도 있다. 한 탈북 대학생은 민주당 의원에게 “변절자 ××”란 폭언을 들었다. 다른 민주당 의원은 태영호 의원에게 “쓰레기”라고 했다. 집단 탈북한 북한 식당 여종업원들을 북송하자는 논의까지 있었다. 북송되는 악몽을 꾼다는 탈북민이 적지 않다.

 

▶김정은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가 탈북민이다. 이들로 인해 북한 사회에 한국에 대한 선망이 생겨나 퍼지고 있다. 김정은에겐 대북 전단, 대북 확성기보다 무섭다. 탈북민이 성공적으로 한국에 정착하는 것이 통일을 앞당기는 일이다. 정부가 7월 14일을 ‘탈북민의 날’로 제정한다. 7월 14일은 1997년 북한이탈주민법이 처음 시행된 날이다. 탈북민을 ‘먼저 온 통일’이라 부른다. 정말 맞는 말이다.

이용수 논설위원

 

 

02.23 일본이 부러워하는 ‘한국 그린벨트’

▲일러스트=이철원

 

1971년 6월 박정희 대통령이 건설부 국토계획 국장을 호출했다. 청와대에 달려가니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도 와 있었다. 박 대통령이 서울 외곽에 둥근 띠를 그린 뒤 “그린벨트라는 거 있지, 그거 한번 해봐”라고 지시했다. 한 달 뒤 건설부가 “서울 세종로에서 반경 15㎞ 원형을 따라 폭 2~10㎞의 영구 녹지를 지정한다”고 고시했다. 한국형 그린벨트의 탄생이었다.

 

▶박 대통령은 그린벨트를 어떻게 구상하게 됐을까. 주영국 대사로부터 영국 그린벨트 얘기를 듣고 관심을 두게 됐다는 설명이 있다. 경부고속도로와 연관 짓는 해석도 있다. 경부고속도로 재원 마련을 위한 체비지 매각이 신통치 않자 투기 붐이 일었던 서울 외곽을 그린벨트로 묶어 민간 자본을 체비지 구입 쪽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 본인은 1975년 청와대 출입기자 간담회에서 “조선 500년 동안 땔감용으로 나무를 자르기만 해 전국 산이 민둥산이 됐다. 그래서 그린벨트를 설정했다”고 말했다.

 

▶그린벨트 종주국은 영국이다. 산업혁명 여파로 도시 과밀화, 환경오염에 시달리던 영국은 1938년 그린벨트 법을 제정하고, 런던 주위에 그린벨트를 설정했다. 현재 영국의 그린벨트는 전 국토의 13%에 이른다. 박 대통령은 전 국토의 5.4%를 그린벨트로 묶었다. 80%가 사유지라 ‘재산권 침해’ 민원이 폭주했다. 박 대통령은 ‘그린벨트 규정’ 표지에 친필로 “개정 시에는 반드시 대통령 결재를 득할 것”이라고 썼다. 그린벨트 관리 부실을 이유로 공무원 2500명을 징계할 정도로 엄격하게 관리했다.

 

▶지도자의 강력한 의지 덕에 우리나라 그린벨트는 50년이 지났어도 70% 이상 잘 유지되고 있다. 반면 일본은 한국보다 15년 앞서 그린벨트 제도를 도입했지만, 개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10년 만에 흐지부지돼 한국의 그린벨트를 부러워한다. 중국 덩샤오핑의 경제 자문관이었던 일본 국토부 차관은 “후일을 위해 베이징, 상하이에 그린벨트를 만들어라. 상세한 내용은 한국에 알아보라”고 조언했다.

 

▶윤석열 정부가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해 첨단 산업 단지가 들어설 경우 그린벨트를 풀어주기로 했다. 1999년 김대중 정부가 제주·춘천·여수 등 7개 지방 도시의 그린벨트를 해제한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그린벨트 조정이 이뤄질 전망이다. 도시 광역화, 인공지능(AI) 중심의 4차 산업 혁명 등을 감안하면 50년 된 그린벨트의 조정은 필요하다. 하지만 녹지와 산림은 대대손손 물려줘야 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국부라는 사실만은 절대 잊어선 안 된다.

김홍수 논설위원

 

 

02.24(토) 역사를 바꾼 초대박 상품

▲일러스트=박상훈

 

2000년 전 로마가 세계를 주름잡던 시절, 초대박 상품은 중국 비단이었다. 비단은 이집트 정복으로 돈이 넘쳤던 로마 귀족이 가장 갖고 싶어했던 사치품이었다. 같은 무게 비단과 금이 가격이 같았다. 로마의 한 역사가는 “매년 비단 나라(중국 한나라)로 흘러가는 금이 7t에 이른다”고 썼다. 비단길을 통해 함께 유통된 도자기, 차 등은 중국을 2000년 동안 무역 흑자국으로 만든 대박 품목이었다.

 

▶유럽은 대항해시대를 열어 대박 상품을 찾았다. 16세기에 스페인이 개발한 남미 포토시 은광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잭팟이라 불린다. 스페인은 100여년간 포토시 광산에서 1만5000t이 넘는 은을 채굴했다. ‘은벼락’에 취한 스페인 왕조와 귀족들은 거대한 궁전을 짓고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 과도한 은 유입은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며, 스페인 국력을 시들게 했다.

 

▶은에 이어 향신료와 면화가 노다지 상품이 됐다. 15세기 인도 항로를 개척한 바스쿠 다가마는 인도산 향신료와 면화를 가득 싣고 와 6000% 수익을 냈다. ‘향신료의 왕’ 후추는 같은 무게의 금과 교환됐다. 무겁고 칙칙한 양털 옷을 입던 유럽인들에게 새하얗고 가벼운 인도산 면(綿)의 등장은 패션 혁명이었다. 영국 모직물 산업이 붕괴하자 면 수입 금지령까지 내렸지만 흐름을 뒤집을 순 없었다. 이후 영국은 면화에서 실을 뽑는 방적기를 발명하고, 인도를 식민 지배하는 방법으로 ‘면 노다지’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20세기 인터넷 혁명은 새로운 노다지의 산실이 됐다. 개인용 컴퓨터 시대를 맞아 빌 게이츠의 윈도95가 1호 초대박 상품에 올랐다. 개당 209달러 소프트웨어가 출시 1년 만에 4400만개나 팔렸다. 빌 게이츠는 순식간에 세계 1위 부자가 됐다. 2007년엔 스티브 잡스가 세계 최초의 스마트 폰을 선보여 공전의 히트를 쳤다. 애플 아이폰은 출시 15년 만에 20억대 이상 팔려 애플을 시가총액 세계 1·2위를 다투는 기업으로 만들었다.

 

▶엊그제 엔비디아가 인공지능(AI) 반도체 판매로 작년 4분기에 221억달러 매출에 136억달러 이익을 냈다는 실적 발표를 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100원을 팔면 61원 이익을 얻는다. 초대박 노다지라는 말밖에 할 수 없다. 엔비디아에 고대역폭 메모리칩(HBM)을 공급하는 SK하이닉스 주가도 덩달아 급등했다. 한국 D램 반도체도 한때 이익률이 50%를 웃돌던 초대박 상품이었다. 최근 10년간 한국은 반도체 수출로 9600억달러를 벌어들였다. 한국 반도체도 초대박 신화를 새로 썼으면 한다.

김홍수 논설위원

 

 

02.26(월) AI에 밀려나는 어문학과들

▲일러스트=이철원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한 비결로 어학을 통한 선진 문명 학습이 꼽힌다. 도쿠가와 막부 때부터 네덜란드어를 배워 앞선 의학과 선박 제조 기술을 익혔다. 19세기 영국과 미국 전함의 위용을 잇달아 목격한 뒤엔 영어로 방향을 틀었다. 막부는 네덜란드어만 알던 통역관들에게 “목숨 걸고 영어를 배우라”고 명했다. 뒤늦게 근대화에 나선 우리도 다르지 않았다. 구한말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는 ‘조선이 개화하려면 외국어를 배워야 한다’고 고종에게 권해 1898년 한성에 독일어학교를 세웠다.

 

▶신생 대한민국의 외국어 학습 열망도 뜨거웠다. 8·15 해방 직후 교육과정에 영어·독어·불어·중국어가 포함됐다. 1969년엔 스페인어가, 1973년엔 일본어가 추가됐다. 1960~70년대 중고생 사이엔 “단어를 외우고 나면 사전을 찢어 씹어 먹었다”는 외국어 공부 무용담이 돌았다. “영어 발음 잘해야 한다”며 아이들 혀 밑 설소대를 절개하는 황당한 수술이 한때 유행했던 것도 외국어 학습 열풍이 빚은 그늘이다.

 

▶언젠가부터 외국어 열풍이 수그러들고 있다. 1980년대 후반 제2외국어가 대입 필수 과목에서 제외되더니 지금은 ‘제2외국어는 서울대 입학용’이란 말까지 생겨났다. 1980년대까지 ‘학문의 언어’와 ‘외교 언어’로 인기 있던 독어와 불어가 먼저 퇴조했다. 두 언어를 밀어내고 1990년대 인기를 누렸던 중국어와 일본어도 요즘엔 동양어문학부로 통폐합되거나 아예 없어지고 있다.

 

▶교육부가 2013~2022년 4년제 대학의 학과 변동 추이를 조사했더니 인문계 학과 정원이 어문계 중심으로 20%나 감소했다. 이 기간 중국어과 36개, 일어과 27개가 사라지거나 통폐합됐다. 대학마다 어문 계열 학과의 폐과나 통폐합을 추진하면서 해당 학과의 교수와 학생이 대학 당국과 심각한 갈등을 빚는 일이 반복된다. 대학은 대학대로 사회적 수요가 줄어들어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SF 소설가 듀나가 2016년 발표한 단편 ‘추억충’은 인공지능 시대에 외국어 학습 미래를 내다본 작품이다. 소설에서 번역가인 윤정은 20년 전만 해도 모든 작업을 직접 했지만 지금은 70%를 기계에 맡긴다. 그녀는 생각한다. ‘앞으로 20년이 더 지나면 이 직업은 존재하기는 할까.’ 소설 속 미래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휴대전화에 관련 앱만 깔면 서로의 언어를 몰라도 대화가 가능해졌다. 실시간 동시통역이 가능한 AI 스마트폰까지 나왔다. 덮쳐 오는 거대한 AI의 쓰나미 앞에서 어문 계열 학과가 존폐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김태훈 논설위원

 

 

02.27 도로 위 흉기

▲일러스트=이철원

 

1980년대 서울 올림픽대로에서 일어난 사고다. 차를 몰던 남편이 갑자기 쾅 하는 소리에 놀라 급히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옆자리에 탄 아내가 숨져 있었다. 앞서 달리던 화물차 바퀴에서 튀어나온 돌이 차 유리를 뚫고 아내를 친 것이다. 뒤로 튀어나온 돌의 속도에 차량 속도까지 더해 끔찍한 사고가 난 것이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이런 날벼락이 화물차 주변엔 상존한다. 한국도로공사가 고속도로에서 수거한 낙하물은 연간 20만~30만건에 이른다고 한다. 차량 부품·합판·의자에다 가끔 돼지도 떨어진다. 시속 80㎞만 넘어도 전방 화물차에서 떨어져 느닷없이 날아오는 작은 물건이 뒤따르는 차량엔 치명적 흉기가 된다.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고속도로에서 적재물이 떨어져 발생하는 사고로 숨질 확률은 28.5%. 전체 교통사고 치사율의 2배에 육박한다고 한다.

 

▶화물차에선 어마어마한 ‘흉기’도 떨어진다. 3년 전엔 고속도로를 달리던 화물차에서 13t짜리 강철 코일이 굴러 떨어져 일가족 4명이 탄 승합차를 덮쳤다. 어린 딸이 숨지고 어머니가 크게 다쳤다. 지난해엔 중부고속도를 달리던 화물차에서 아스팔트 등을 다지는 10t짜리 롤러차가 그대로 떨어졌다. 뒤따르던 차들이 이를 피하려다 서로 부딪치면서 1명이 숨지고 3명이 다쳤다.

 

▶엊그제 경부고속도로 경기 안성 부근에선 화물차에서 빠진 바퀴가 반대 차선 관광버스를 덮쳐 2명이 숨지고 1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빠진 바퀴는 버스 앞 유리를 뚫고 지나가 중간 통로까지 가서 겨우 멈췄다고 한다. 화물차 바퀴가 100㎏ 안팎인데 차량 속도까지 더해 충격이 커졌다. 2018년에도 한밤중 고속도로를 달리던 화물차에서 예비 타이어가 떨어져 뒤따르던 승용차, 트럭 등 4대와 연쇄 충돌해 1명이 숨지는 사고가 있었다.

 

▶한국에서 화물차는 ‘도로 위 흉기’라 부른다. 안전 점검이나 적재 불량을 제대로 단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적재 문제만 해도 현행법은 ‘화물에 덮개를 씌우거나 묶는 등 확실하게 고정해야 한다’고만 돼 있을 뿐 구체적 기준도 없다. 10여 년 전 유럽에서 도로를 달리는 거의 모든 화물차에 덮개를 씌운 것을 봤다. 일본도 그렇다. 낙하물 사고를 막으려는 것이다. 그게 돈이 들어 어렵다면 규정을 세밀하게 다듬고 단속이라도 강화해야 한다. 그에 앞서 화물 차주들이 수시로 바퀴 나사를 조이고, 묶는 끈도 조여야 한다. 화물차를 언제까지 공포의 대상으로 남겨둘 건가.

최원규 논설위원

 

 

02.28 ‘우주 광고판’

▲일러스트=박상훈

 

1971년 1월 달에 착륙한 아폴로 14호의 선장 앨런 셰퍼드가 기발한 이벤트를 기획했다. 지구의 6분의 1인 달의 중력을 보여주기 위해 6번 아이언으로 골프공 2개를 쳐서 날린 것이다. 골프공이 멀리 날아간다면서 “마일즈, 마일즈(miles and miles)”를 외쳤다. 당시 달에서 전송된 흐린 TV 화면으론 브랜드 식별이 안 됐지만, 그가 휘두른 골프채는 윌슨(wilson) 브랜드였다. 그가 날린 골프공 2개는 지금도 달에 남아 있다.

 

▶인류 최초로 달을 밟은 우주인 닐 암스트롱은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다. 그의 사인은 1000달러에 팔릴 정도였다. 20년 단골 이발사가 암스트롱의 머리카락을 3000달러에 판 사건도 있었다. 요즘 같은 민간 우주개발 시대라면 ‘달에서의 아이언 샷’, ‘광고 모델 닐 암스트롱’은 천문학적 광고 수익을 창출했을 것이다.

 

▶기업 협찬을 금기시한 미국 나사(NASA)가 광고 마케팅을 허용한 사례가 한 번 있었다. 1980년대 우주왕복선이 대중의 관심을 끌자, 코카콜라가 자사 음료를 우주선에 실어달라고 집요하게 매달렸다. 뒤질세라 펩시까지 가세하자 나사는 우주에서 콜라를 마시는 이벤트를 허용했다. 이 장면을 위해 두 회사는 500만달러를 지출했다. 피자헛은 1999년 달에 레이저 빔을 쏘아 지구에서 피자헛 로고를 보게 만드는 이벤트를 기획하다 미국 텍사스 크기의 레이저 투사 면적이 필요하다는 전문가 답을 듣고 포기했다.

 

▶지난 22일 달에 착륙한 미국 민간 기업의 무인 우주선 오디세우스의 몸체엔 아웃도어 브랜드 컬럼비아 로고가 붙어 있었다. 컬럼비아가 우주선 개발 자금을 지원하며 광고를 조건으로 내건 것이다. 작년 4월 일본의 무인 달 착륙선 하쿠토-R에는 일본항공, 스즈키 등 일본 협찬 기업들의 로고가 찍혀 있었다. 민간 기업이 참여하는 우주개발 시대가 열리면서 ‘우주 광고’가 새 사업 영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영국 신문 더타임스는 “맥도널드가 달에 광고판을 세우는 날이 오겠다”고 보도했다.

 

▶미국, 러시아에선 우주 마케팅 기업이 생겨 다양한 우주 광고 사업을 제안하고 있다. 이들은 고도 600㎞ 이하 저궤도에 10㎝ 남짓한 초소형 인공위성(큐브샛)을 수천 개 띄우고, 태양광을 반사하거나 레이저를 쏘는 방식으로 기업 로고를 우주에 새기는 ‘우주 광고판’을 제안하고 있다. 대도시 상공을 돌면서 1분씩 광고하고 도시를 이동하면 1년에 1억달러 이상 광고 수익을 낼 것이란 사업 계획서다. 밤하늘까지 별이 아니라 광고판으로 뒤덮이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김홍수 논설위원

 

 

02.29(목) 5촌부터 결혼 허용 검토, 그 근거는

▲일러스트=이철원

 

유럽에선 4촌 이내 친족 결혼이 드물지 않았다. 영국은 19세기까지 전체 혼인의 5%가 사촌간 결혼이었다. 스웨덴은 4촌일 경우에만 당국에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유전병이 있는지 확인한 뒤 허가한다.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의 장편 ‘좁은 문’도 사촌 누나와 결혼한 작가 자신의 경험을 녹인 자전 소설이다. 역사도 오래됐다. 고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했다가 그가 죽자 다른 남동생과 결혼했다.

 

▶동양에서도 드물지 않았다. 신라 김유신 장군은 여동생을 훗날 왕이 되는 친구 김춘추에게 시집보낸 뒤 두 사람이 낳은 딸과 결혼했다. 고려 왕가의 가계는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막장 수준이다. 태조 왕건의 많은 자녀가 남매이자 부부였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권력과 부를 독점하려는 목적이 컸다. 다만 그로 인해 큰 대가를 치렀다. 근친 결혼으로 태어난 아기가 저체중과 발달 장애를 앓았다. 생식력도 떨어진다. 용맹한 전사의 나라 스파르타는 무사의 혈통을 지키려고 근친혼을 고집하다가 심각한 저출생에 빠졌던 것이 멸망 이유로 꼽힌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주걱턱 장애를 앓았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근친혼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배우자를 씨족 밖에서 찾은 흔적이 3만4000년 전 구석기 시대부터 나온다. 근친혼을 막기 위해 다양한 문화적 금기도 생겨났다. 모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가 파멸한 오이디푸스왕 이야기도 이런 금기의 반영이었다. 중국은 주나라 시대부터 동성동본 금혼을 시행했고, 우리도 고려 후기 성리학이 수입되면서 같은 길을 걸었다.

 

▶법무부가 친족 간 혼인 금지 범위를 4촌 이내로 축소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8촌 이내 혼인을 무효로 한다’는 민법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결정한 데 따른 조치다. 법무부 연구 용역에서도 혼인 금지 범위를 4촌으로 축소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여기엔 과학적 근거가 있다. 자식은 부모 양쪽에서 절반씩 DNA를 받기 때문에 부모와 자식의 혈연도는 50%이고 형제간엔 25%, 4촌은 12.5%다. 그러나 5촌은 6.25%, 6촌은 3.13%, 8촌은 0.78%다. 5촌만 돼도 사실상 남이다. 근친 간 결혼이 곧장 유전병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유럽 왕가들처럼 대를 이어 결혼을 거듭할 때 문제가 된다. 오늘날 이런 식으로 결혼하는 사람은 없다. 친족 범위를 어디까지로 할 것인지도 따져볼 일이다. 4촌만 넘어도 남으로 사는 시대에 8촌이 모여 고조부모까지 제사를 모시던 ‘4대 봉사’ 시절 가족 윤리를 고집할 수는 없다.

김태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