午後餘談(문화일보) 2024-01/
01-02(화) 갈 길 먼 ODA 외교

이미숙 논설위원
유엔은 1970년부터 각국 국민총소득(GNI)의 0.7%를 개발도상국의 경제개발과 복지증진을 위한 공적개발원조(ODA) 기금으로 지원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이를 그대로 이행하는 너그러운 나라는 많지 않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22년 유엔 기준을 넘긴 나라는 룩셈부르크와 스웨덴, 노르웨이, 독일, 덴마크뿐이다. 유엔 193개 회원국 가운데 오직 5개국이 유엔의 권고를 실천하는 것이다. 특히, 유럽의 작은 나라 룩셈부르크는 GNI의 1%(5억3000만 달러), 스웨덴은 GNI의 0.9%(54억6000만 달러)를 지원하고 있다.
선진국 클럽으로 불리는 OECD 회원국의 평균 ODA 지원액은 GNI의 0.36% 수준이다. ODA 규모 면에서는 미국이 550억 달러를 제공해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GNI 비중은 0.22%다. 2위는 독일로 350억 달러(GNI 0.83%), 3위는 일본으로 174억8000만 달러(GNI 0.39%)를 제공했다. 이어 프랑스 158억8000만 달러(GNI 0.56%), 영국 157억5000만 달러(GNI 0.51%) 순이고, 주요 7개국(G7) 멤버인 캐나다는 78억3000만 달러(GNI 0.37%), 이탈리아는 64억7000만 달러(GNI 0.32%)를 내놓았다.
특히, 일본은 지난해 3월 인도태평양전략을 발표하며 ODA와 별개로 해상안전보장을 위해 우호국의 군에 대해 무상 공적안보지원(Official Security Assistance·OSA)을 하겠다고 밝혀 관심을 끌고 있다. 일본은 말레이시아와 방글라데시, 피지, 필리핀 등 아태 4개국을 첫 OSA 지원대상국으로 선정해, 오는 3월까지 20억 엔 상당의 방위 장비품 등을 지원할 계획이다.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개발도상국에 대한 안보 지원 작업을 통해 자유 진영 연대를 강화해나가겠다는 의미다.
한국의 2022년 ODA는 27억9000만 달러로 GNI의 0.17%다. ODA 증가율은 OECD 국가 중 최상위지만, G7은 물론이고 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평균에도 미달하는 액수다. 무상원조를 맡는 외교부의 올해 ODA 예산은 2조7925억 원(21억5000만 달러)이다. 기획재정부 등의 유상원조까지 포함하면 2배 이상이 된다지만, 글로벌 중추국의 ODA로는 초라하다. ODA에서 OSA로 진화한 일본과 비교해도 아직 갈 길이 멀다.
01-03 김성근 一球二無(일구이무)

오승훈 논설위원
패배하면 해체되는 야구팀, 오직 승리뿐(Win or Nothing)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최강야구’ 시즌 마지막 경기에 나선 몬스터즈가 지난 1일 방송에서 대학올스타팀을 누르고 승리해 프로그램 연장 조건인 승률 7할을 넘겼다. 짜고 친 것보다 더 극적이었던 그들의 드라마를 올해도 볼 수 있게 됐다. 그저 TV 예능일 뿐이다. 힘이나 팬심에서 멀어진 은퇴 선수들의 경기다. 누가 관심을 두겠나 싶었는데 오산이었다.
박용택 이대호 정근우 등 전설들이 펼치는 야구 인생 2막의 감동적인 투혼에만 흔들린 게 아니다. 직관 경기마다 2만 명에 가까운 관중이 모이고 늦은 밤 본방 사수를 하게 만드는 주역, 82세의 국내 최고령 현역 김성근 감독이다.
김 감독은 사인을 해줄 때 ‘一球二無(일구이무)’라고 쓴다. 좌우명이다. ‘공 하나에 최선을 다할 뿐 다음은 없다’. 일본에서 20세에 홀로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부상으로 일찍 투수의 꿈을 접어야 했던 선수, 찬사와 비난이 엇갈리는 속에 7개 프로팀 감독을 역임한 명장, 한국시리즈를 세 번 우승하고 통산 1384승을 올린 ‘야신(野神)’의 여정이 네 글자에 담겨 있다. 그는 얼마 전 에세이 ‘인생은 순간이다’를 펴냈다. 순간의 결정과 행동이 축적돼 인생이 된다는 의미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오지만 “그걸 잡은 사람은 준비가 된 사람이다”. 잠재능력을 100% 발휘하는 사람은 없다. “고작 20∼30% 발휘하고, 70∼80%는 스스로 설정한 한계 속에 사라진다.” 그러니 “트라이(시도), 트라이하고 남들의 위로 속으로 도망가지 말라”고 한다. “빗맞은 파울은 실패가 아니다. 파울이 많아야 베스트 인생이다.”
김 감독은 “진정한 리더는 존경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으나 요즘 ‘시대의 스승’ ‘존경할 만한 어른’으로 불린다. 매일 아침 야구장에 가고, 직접 펑고를 쳐주면서 “이대호 양준혁 최정보다 팀워크가 먼저”라는 그다. 세대교체론이 흥미롭다. “나이만 어린 사람을 갖다 놓는다고 해서, 컵의 물을 다 뺀다고 해서 세대교체가 아니다. 물을 계속 부으면 원래 컵에 담겨 있던 물이 자연스럽게 빠져나온다. 헌것 속에 새로움이 있고 새로움 속에 헌것이 있는 법이다.” 그는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해명이라는 것을 하면 안 된다. 책임 전가와 같다”고도 했다.
01-04 백색·적색 테러

이현종 논설위원
프랑스혁명 기간 중 왕당파는 백합이 상징이었다. 왕당파가 혁명파에 보복하자 백합의 흰색을 따서 ‘백색 테러(white terror)’라고 불렀다. 이후로 우파가 좌파를 겨냥해 하는 테러는 백색 테러라고 규정했다. 반대로 적색을 상징색으로 하는 좌파가 우파를 상대로 하는 테러를 ‘적색 테러(red terror)’라고 한다.
미국의 악명 높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인 ‘KKK단’의 흑인 등을 상대로 한 테러가 대표적인 백색 테러다. 반대로 지난 2015년 3월 5일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가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된 행사에서 반미·종북주의자인 김기종에 의해 테러를 당한 것은 적색 테러의 범주에 들어간다. 김기종은 한미연합사령부 해체, 평화협정 체결 등을 주장하며 리퍼트 대사에게 테러를 가했다.
백색·적색 테러는 1945년 해방 이후 친탁·반탁 논쟁이 불거지면서 빈번했다. 송진우, 장덕수, 여운형, 김구 등이 테러로 숨졌다. 1969년 6월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서울 자택 근처 골목길을 나서다 신원 불상의 청년이 던진 질산 유리병에 차량 후미가 맞는 일이 벌어졌다. 1973년 8월에는 일본에 망명해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납치해 바다에 수장하려다 미국의 개입으로 중단된 일도 있었다.
달걀 투척 등은 빈번했는데, 2006년 5월 20일 지방선거에 출마한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의 지원 유세를 하던 당시 한나라당 대표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충호가 휘두른 커터칼에 습격당해 얼굴을 크게 다쳤다. 다행히 신경은 건드리지 않았으나 지금도 음식을 제대로 씹을 수 없는 후유증을 앓고 있다. 2022년 3월 7일에는 신촌에서 유세하던 송영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강경 민족주의 성향의 인사로부터 머리를 둔기로 맞았는데 범인 표모 씨는 구치소 수감 중 자살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테러로 사망하는 등 정치 테러가 줄어들지 않고 있다. 2일 부산 가덕도 신공항 부지를 방문한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김모 씨가 휘두른 칼에 목 부위의 정맥을 다쳐 수술을 받은 것을 보면 섬뜩하다. 하루 전 이 대표는 신년사에서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잘못된 통치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차이가 없다”고 했는데 뒷맛이 씁쓸하다.
01-05(금) 음모론의 달인

김세동 논설위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2일 부산 방문 중에 김모(67) 씨에 의해 목을 찔린 사건은 충격적이다. 자칫 정국을 수습 불가능한 혼란·혼돈 속으로 몰아넣을 뻔했다. 위험한 부위를 피해 다쳤고, 수술이 잘 끝나 회복 중이어서 천만다행이다. 하지만 해방정국의 끔찍한 정치테러를 연상시키는 사건을 놓고 여야 지지자 간에 음모론이 난무하고 일부 정치인들이 이를 악용, 당파적 증오·혐오를 더 키우고 있다.
이 대표 피습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여권 지지자들은 즉각 ‘자작극’ ‘쇼’라는 주장을 쏟아냈다. ‘선거판을 뒤집기 위해’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지지율이 오르자’ ‘총선 전에 1심 판결이 나올 수 있는 사건(위증교사, 선거법 위반)의 재판을 연기하기 위해’ 등이 자작극의 근거로 동원됐다. 경동맥을 찔렸으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도박을 비밀을 끝까지 지켜줄지 여부도 알 수 없는, 전문 칼잡이도 아닌 부동산중개업자에게 사주해 했다는 주장을 그 보수 유튜버는 정말 믿고 있을까. 신년 각종 여론조사는 이대로 가면 민주당의 총선 승리를 예고하는데, 이기는 사람이 판을 뒤집기 위해 정치생명을 넘어 진짜로 목숨을 걸었다는 건가.
야권 지지자들은 ‘여권 사주설’을 퍼뜨리고 있다. 자작극만큼이나 아무 근거가 없다. 이 대표가 입원한 서울대병원 앞에 모인 지지자들은 “김건희가 자객을 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국정 난맥상으로 지지율이 30%에 고착돼 있는 여권으로선 이재명 대표가 빠지면 치명적 손해일 게 뻔한데, 스스로 자해적 행위를 했다는 것인가.
개딸의 막장극을 부추겨온 야권 정치인들도 음모론에 가세하고 있다. 보복 운전으로 벌금 500만 원이 확정돼 민주당 총선 출마 자격 예비심사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은 이경 전 부대변인은 “대통령이 민생은 뒷전이고 카르텔, 이념 운운하며 국민 분열을 극대화하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 아닌가”라고 SNS에 썼다. 출마 자격 회복을 위해 개딸에게 SOS를 친 것으로, 자기 당 대표의 비극을 자신의 구명에 이용한 셈이다. 민주당의 정신적 지주격인 김어준은 4일 “계획범죄”라며 “배후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2년 대선 개표 조작설, 세월호 침몰 음모론 등을 퍼트려온 김 씨의 전력을 보면 놀랍지도 않다.
01-08(월) 빚으로 지은 집

이철호 논설고문
딱 10년 전 미국에서 출간된 ‘빚으로 지은 집(House of Debt)’은 지나친 가계 부채가 어떻게 소비 지출을 끌어내리고 경제를 위험에 빠뜨리는지 분석한 책이다.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도 2000∼2007년 미 가계 부채가 14조 달러로 두 배나 껑충 뛴 게 원인이었다. 역대급 경제 위기마다 항상 가계 부채 급증이라는 현상이 선행됐다고 지적한다.
한국의 ‘빚으로 지은 집’에는 특이한 위기 선행 지표가 있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이다. 외환위기 때 토지 매입 비용이 건설사들의 채무 비율 악화의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새롭게 등장한 해결사가 시행사다. 토지 매입과 각종 인허가, 분양 관리까지 도맡아 처리했다. 자본금 3억∼5억 원 규모의 영세 업체란 게 문제였다. 토지를 매입하려면 신용등급이 낮아 저축은행·증권사·캐피털사 등 제2금융권에서 10% 이상의 높은 금리로 돈을 빌려야 했다. 이게 브리지론이다. 그다음 인허가를 받고 신용도가 높은 대형 건설업체 중 시공사를 선정하는 후반 작업에 들어간다. 이때 시공사 보증을 업고 은행 등 제1금융권에서 낮은 금리로 본(本)PF 대출을 받으면 고금리 브리지론부터 갚는 게 정해진 수순이었다. 시행사는 떼돈을 벌었다.
이런 선순환이 고금리에다 부동산 시장이 식으면서 탈이 났다. 총 사업비 5% 남짓으로 투기성 대출을 일으킨 시행사들이 줄도산하면서 브리지론부터 부실에 빠졌다. 증권사(13.9%)·저축은행(5.6%)·캐피털사(4.4%)의 PF 연체율이 높고, 본PF 위주의 은행(0%)·보험사(1.1%) 연체율이 낮은 이유다. 하지만 부동산 침체가 깊어져 시공사의 본PF 보증까지 부실해지면 금융권 전체로 위기가 번지게 된다.
태영건설이 전체 채무 9조5000억 원 중 브리지론과 악성 본PF 지급보증 등 2조5000억 원 때문에 워크아웃에 몰렸다. 미착공 사업장의 절반이 비수도권이어서 사업성도 떨어진다. 태영그룹의 자구책에 채권단은 “자기 뼈가 아니라 남의 뼈를 깎는다”며 차가운 반응이다. SBS 주식과 사재를 더 내놓으라는 압박이다. 자칫 채권단 반대로 법정관리로 가면 협력업체·수분양자 피해는 물론 건설·금융업계 전반으로 불똥이 튈 수 있다. ‘빚으로 지은 집’이 경고했던 끔찍한 묵시록이 펼쳐진다.
01-09 구본창 ‘항해’

김종호 논설고문
‘버려지고 덧없는 것들에 대한 애착. 나도 버려져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것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현대 사진의 세계적 거장(巨匠) 구본창(71)이 2014년 저서 ‘공명의 시간을 담다-시간을 수집하는 사진가’에 담은 생각이다. 어린 시절부터 친구와도 잘 어울리지 못하고, 비 오는 날의 도랑에 떠내려온 사금파리나 조약돌 등 자그마하고 말 없는 존재들과 말 없는 대화를 하는 것이 즐거웠다고 한다. 수집벽(癖)도 대단했다는 그는 ‘누군가가 골라내고 아낀 것. 오랜 세월 사람들의 손에 닳으면서 품위를 지니게 된 것들. 내게 명품이란 그런 것이다. 나는 사회적으로 큰 주제보다 인간의 가장 보편적 감정과 삶의 통찰을 다루고 싶었다’고도 밝혔다.
그는 ‘사진을 현대미술의 한 장르로 확장해온 작가’ ‘한국 현대사진의 새 지평을 연 선구자’ 등으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그는 ‘사진을 시작하게 된 것은 원대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몰라 방황하다가 사진 작업을 통해 내 존재가치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일로 유학을 떠나 함부르크의 국립조형미술대학을 졸업하고 1985년 귀국한 그는 한동안 ‘사진계의 이단아(異端兒)’였다. 사건·사물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객관적 기록 사진이 아니라, 작가의 의지와 감성을 주관적으로 표현하는 ‘연출 사진(making photo)’을 선보였다. 그가 젊은 사진작가 8명을 모아 기획·주도한 1988년 전시회 ‘사진·새시좌(視座)’ 출품작들을 두고, “이게 사진이냐”는 핀잔도 쏟아졌다. 그래도 그의 실험적 도전은 더 이어졌다. 오래된 사물과 일상 등에 대한 관심은 전통문화 유산을 재발견·탐구하는 시리즈 작품에 나타냈다. ‘탈’ ‘백자’ ‘곱돌’ ‘문 라이징(Moon Rising)-달항아리’ ‘비누’ ‘지화(紙花)’ ‘탈의기’ ‘태초에’ ‘숨’ ‘콘크리트 광화문’ 등 50여 가지 주제의 연작이 나온 배경이다.
그의 회고전 ‘구본창의 항해’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지난해 12월 14일 시작돼, 오는 3월 10일까지 열린다. 새해를 맞아, 더 찾을 만하다. 1972년 파도가 밀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남해 바닷가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며 ‘언젠가는 꼭 바다 너머 세상으로 향하겠다’고 다짐하는 그의 뒷모습을 친구에게 부탁해 찍은 ‘자화상’도 감동적이다.
01-10 신당의 적, 뒤베르제 법칙

오승훈 논설위원
총선을 앞두고 신당 창당을 추진 중인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양향자 한국의희망 대표, 금태섭 새로운선택 대표의 연대론에 관심이 쏠려 있다. 이들이 9일 양 대표의 출판기념회에서 회동했다. 국민의힘 ‘한동훈 바람’, 민주당 ‘이재명 효과’ 외에 이들 4인방의 제3 지대 연대가 새로운 관전 포인트로 부상했다.
본격 논의가 시작된 건 아니다. 느슨한 선거연대 형태가 될지, 합당 수준까지 발전할지 불투명하다. 노선 차이로 무산 가능성도 크다. 정당보조금을 동반한 현역 의원들의 대이동이 없는 만큼 빅 텐트 아닌 스몰 텐트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이 이준석 전 대표를 겨냥해 “부스러기 주워 담기, 이삭줍기, 경쟁력에서 부정적 평가가 내려진 사람이 합류해봤자 소용이 없다”고 힐난한 건 앙숙 관계라 쳐도 일리가 있다.
이낙연 전 대표는 배신자 프레임을 벗어야 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최근 ‘김대중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야권 대통합이 DJ의 유지”라고 언급한 것이 큰 부담이다. 물론 양당 구도에 지각변동을 몰고 올 파괴력은 아닐지언정 균열을 낼 날카로운 칼 정도는 될 것이란 전망도 적지 않다. 신당의 성공 조건으로 거론하는 지역 기반, 유력 차기 주자 등에선 약하지만, 거대 양당의 극단 대결이 초래한 혐오 정치에 신물 난 유권자들이 과거와 다른 양상의 선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란 기대다.
이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선거의 경험칙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뒤베르제의 법칙(Duverger’s law)이 다시 회자되고 있다. 프랑스 정치학자 모리스 뒤베르제가 주장한 가설이다. 결선투표 없이 최다득표자가 당선되는 소선거구제 선거에선 제3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라도 당선이 의심스러울 경우 사표(死票)가 되는 것을 우려해 당선 가능성이 많은 제1·2당 후보에 투표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결과들이 누적되면, 전체 의석 중 제3당의 당선자 비율이 전국 득표율에 못 미치고, 제1·2당이 실제로 얻은 득표율보다 많은 의석 비중을 차지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정치 구도가 양당제로 수렴되는 것이다. 이낙연 전 대표는 “양당이 모두 싫다는 분들에게 선택지를 드리려고 창당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결국 넘어야 할 벽은 유권자의 마음인 셈이다.
01-11 덴마크로 가는 길

이미숙 논설위원
‘덴마크로 가는 길(getting to Denmark)’이란 영어 표현이 있다. 여기서 덴마크는 덴마크라는 나라가 아니라 덴마크처럼 자유민주주의가 뿌리내리고 부패가 적은 나라를 상징하는 개념으로, 자유민주주의가 번창한 나라를 뜻한다. 덴마크로 가는 길이란 숙어는 자유민주주의를 완성하는 방법 정도로 번역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는 “덴마크로 가기 위해선 민주주의 제도 정착과 부패 근절, 평화적 정권 교체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덴마크는 인구가 서울의 60% 수준인 580만 명에 불과한 비교적 작은 나라지만 북유럽 복지 국가의 대표 모델로 통한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6만8000달러에 달하는 선진 부국으로, 탄탄한 복지 제도를 바탕으로 한 높은 교육열과 삶의 질을 자랑한다. 안락하고 아늑한 상태를 의미하는 ‘휘게’는 소박하고 여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덴마크식 라이프 스타일을 상징하는 단어다. 덴마크는 유엔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의 2023년 ‘세계행복’ 순위에서 핀란드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우리나라는 조사 대상 137개국 중 57위였다.
이런 이유로 덴마크는 후쿠야마 같은 민주주의 연구가뿐만 아니라, 행복권을 추구하는 국내 진보 진영 인사들 사이에도 관심이 높다.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는 2013년부터 “덴마크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덴마크 시민사회·학교 탐사 여행을 주도하면서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란 책도 냈다.
덴마크 마르그레테 2세(83) 여왕은 지난해 말 송년연설 때 프레데릭 크리스티안(55) 왕세자에게 양위하겠다고 깜짝 발표를 했다. 권력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나누기 힘든 것이라는 게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사후 왕위에 오른 찰스 3세 사례에서도 입증됐지만, 마르그레테 2세는 즉위 52주년 기념일인 오는 14일 퇴위한다. 덴마크 왕실은 유럽의 여느 왕가와 달리 소박하고 검소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속담이 있듯, 모범적인 덴마크 왕실 덕분에 ‘덴마크로 가는 길’이란 표현이 나온 게 아닌가 생각도 든다. 프레데릭 왕세자는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때 방한한 적이 있다. 마르그레테 2세의 퇴위로 유럽의 여왕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됐다.
01-12(금) ‘국민 술’ 소주의 진격

문희수 논설위원
국민주(酒)라고 하면 소주를 빼놓을 수 없다. 막걸리와 함께 오랜 세월 서민들의 애환을 함께 해왔던 양대 산맥이다. 몇 년 전부터 일본·독일 등 수입 맥주와 와인·막걸리 열풍에 밀리는 듯했지만, 코로나 이후 물가 급등으로 국민의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지면서 서민들이 다시 많이 찾고 있다고 한다. 소주는 무엇보다 가격이 싸면서도, 막걸리에 비해 도수가 높아 음주량이 많지 않다는 게 매력이다.
그동안 소주는 국민의 입맛과 취향에 맞춰 진화를 거듭해 왔다. 지역별로 멀리 제주도까지 특산주가 있다. 수박·석류·복숭아 같은 과일 소주도 다양하다. 특히, 저(低)도주의 등장은 소주 부활의 주역이었다. 도수를 와인보다 살짝 높은 16도 정도까지 낮춰 여성층의 인기를 끌었다. 최근엔 세계화가 두드러진다. 일본은 물론 베트남 등 아시아와 미국 등에서까지 저렴한 ‘한국 양주’로 인기가 확산하고 있다. 세계 80여 개국에 수출되는 정도다. 한류 열풍이 세계화에 큰 몫을 했다. 유명 아티스트(래퍼)인 ‘박재범 소주’로 불리는 원소주의 돌풍도 그런 맥락이다. 도수가 22도에서 28도까지로, 옛 오리지널 ‘두꺼비(진로·25도)’보다도 높고, 가격도 한 병에 최고 2만 원이 훨씬 넘는데도 국내는 물론 아시아를 넘어 미국·유럽에까지 이름이 알려졌다. 법적으로는 전통주(지역특산주)에 속하지만, 소주의 세계화를 보여주는 사례인 것은 분명하다.
이런 소주의 소비자 가격이 새해 들어 많게는 10%까지 내렸다. 아직 일반 식당까지는 아니지만, 롯데마트 CU GS25 등 대형마트와 편의점은 참이슬·처음처럼·무학·한라산 등의 가격을 낮춰 팔고 있다. 지난해 말 국세청이 일종의 세제 할인율인 기준판매비율을 도입해 세금을 줄여준 효과다. 국산 맥주와 막걸리 등도 같은 방식으로 다음 달부터 세금을 낮춰 가격을 내리도록 할 것이라고 한다. 사실 수입 주류는 판매 비용과 이윤이 붙기 전인 수입 신고가에 세금을 부과하는 반면, 소주 등엔 비용과 이윤이 추가된 반출가격에 과세해 역차별이라는 지적이 제기돼 왔던 터다. 그동안 국민주인 소주를 푸대접해 왔던 것을 정상화한 셈이다. 소주 값 인하는 고물가에 시달리는 서민에게 다소 위안이 될 것은 분명하다. 소주가 앞으로 더욱 진화하기를 기대한다.
01-15(월) ‘대남 지령’ 평양방송 중단

이현종 논설위원
“지금부터 27호 탐사대원들을 위한 원격교육대학 물리학 복습과제를 알려드리겠다. 178페이지 99번, 78페이지 40번….” 북한의 대남 국영방송인 ‘평양방송’이 가끔 이런 난수(亂數) 방송을 내보낼 때가 있다. 단파로만 들을 수 있는 이 방송은 사실상 대남 선전용 방송이다. 조선중앙방송의 자매 방송인 평양방송은 “남조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라고 하면서 방송을 시작했다. 조선노동당 대남사업부가 운영하는 이 방송은 예전 국내 운동권 주사파들이 필수적으로 듣던 방송이다. 새벽에 갑자기 이런 난수 방송을 하는 것은 국내에 암약하는 간첩들에게 지령을 내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 10월 17일 ‘부여 간첩’ 김동식은 자신의 수기에서 평양방송을 통해 지령을 받았다고 진술한 바 있다. 아침과 저녁 시간 ‘내 고향’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오면 북한에서 내려온 안내조와 접선할 수 없다는 신호였기 때문에 촉각을 곤두세웠다고 한다. 김동식은 북에서 내려온 안내조와 묘지에서 접선했고, 북한의 ‘거물 직파 간첩’ 이선실을 북으로 귀환시켰다.
난수 방송은 북한이 간첩들과 미리 정한 책자의 페이지와 글의 순번을 불러줘 지령을 내리는 방식인데, 보안에 취약했다. 정보 당국이 입수한 난수표로 해독할 수 있기에 역공작에 사용하기도 했다. 난수 방송은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이후 중단됐다가 지난 2016년 재개됐다. 그러나 실제로는 난수 방송보다 인터넷을 이용해 지령을 전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간첩 활동을 벌인 혐의로 공안 당국에 적발된 종북 지하당 ‘왕재산’은 우리 당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스테가노그래피’ 기법을 썼다. 비밀 지령문을 신문 기사, 그림, MP3 파일 같은 ‘파일 안 파일’로 숨겨 메시지를 전달하는 최첨단 암호화 프로그램이다. ‘민노총 간첩단’ 등도 모두 이런 기법으로 지령문을 받았다.
그런데 지난 12일 오후부터 평양방송이 더 이상 국내에서 수신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김정은이 최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등 대남 기구를 정리하라는 지시를 내린 이후 그 조치로 평양방송이 중단된 것으로 당국은 보고 있다. 간첩들이 재판지연전략으로 모두 풀려나고 버젓이 종북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기에 굳이 방송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은 아닐까.
01-16 K-푸드의 마법

이철호 논설고문
러시아 최악의 시베리아 제3교도소에 투옥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최대 정적인 알렉세이 나발니(47). 나발니는 “매점에서 ‘다시락(한국 팔도 도시락 라면의 현지 발음)’을 제한시간 10∼15분 사이에 먹느라 혀가 데었다”며 대법원에 식사 시간을 늘려 달라 요청했다. 혹한의 러시아에선 뜨거운 물을 붓고 표준(5분)보다 더 긴 7분을 기다려야 가장 맛있게 조리된다는 게 정설이다. 도시락의 현지 점유율은 62%로 10년간 1위다.
CJ의 비비고 만두는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강의 교재로 채택됐다. 일본식 교자(餃子) 대신 ‘만두’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고 현지인 입맛에 맞게 고수와 치킨으로 속을 채운 게 맞아떨어졌다. 미국 냉동식품 기업 슈완스를 인수해 거래 점포도 3만 개로 확대했다. CJ의 비비고 만두는 2020년 단일 품목으로 처음 연 매출 1조 원을 넘었다. 영화 ‘기생충’의 ‘짜파구리’와 ‘오징어 게임’에 나온 ‘달고나’의 글로벌 선풍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눈에 띄는 대미 히트 수출품은 냉동 김밥이다. 지난해 냉동 김밥 영상이 틱톡에 올라온 뒤 ‘먹방’ 열풍으로 관련 조회 수가 13억 회를 넘는 대박이 났다. 미국인에게 역한 냄새의 참기름을 빼고 유부와 채소를 풍부히 넣어 ‘비건 식품’의 건강한 이미지를 얻었다. 영하 45도 급속 냉각으로 재료의 식감이 살아있고 1년의 유통기한에다 전자레인지에 2분만 돌리면 되는 편의성도 돋보였다. 한 줄당 3.99달러의 가격 경쟁력까지 뛰어났다. 경북 구미의 수출업체 ‘올곧’은 100만 줄이 완판되자 딱 1개뿐이던 생산 라인을 2개로 늘렸고, 올해 말까지 7개 라인을 증설한다. 제2공장까지 완공되면 무려 23개 라인이 돌아간다.
덩달아 구미시도 신이 났다. 올곧이 구미산 쌀과 당근, 시금치, 단무지를 더 많이 쓰도록 총력 지원한다. 제2공장이 가동되면 올곧의 연간 쌀 사용량은 2만t에 이르기 때문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쌀 잉여생산량은 20만t. 이로 인해 더불어민주당이 무리하게 양곡관리법을 통과시켰고,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느라 홍역을 치렀다. 올곧 같은 성공 사례가 10개만 탄생하면 더 이상 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K-푸드의 마법이다. 한때 한류가 K-푸드를 키웠지만, 이제 K-푸드가 한류를 주도하는 세상이다.
01-17 아미쿠스 쿠리에

김세동 논설위원
최근 조태열 외교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박근혜 정부 당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 소송 지연과 관련해 ‘재판 거래’ 의혹을 제기하며 맹공을 가했다. 양승태 대법원장의 사법부가 기껏 유엔 등 국제기구에 법관 파견을 재개하는 문제를 놓고 정부와 징용 피해자 재판 지연을 거래했다는, 수준 낮지만 악랄한 프레임은 후임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에서 정통 엘리트 법관의 대거 숙청과 특정 이념 성향 판사 득세의 단초도 됐다.
지난 8일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야당은 조 후보자가 외교부 2차관 시절이던 2013∼2016년 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재상고심 재판과 관련한 외교부의 의견서를 대법원에 제출한 게 판결 지연을 노린 사법 농단이라고 몰아붙였다. 징용 피해자들의 권리 구제, 사법부의 독립성, 한일관계 등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들이 얽힌 사안을 법관 해외 파견 같은 작디작은 문제와 바꿔 먹었다는 주장을 아직도 거듭하고 있다. 민주당 의원들은 이런 거래가 성립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 모양새다. 문재인 정부 당시 집권당 대표 선출 전당대회를 앞두고 국회의원 20명이 300만 원이 든 돈봉투를 받는 것에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는 정당 문화이니 그런 재판 거래 프레임이 먹히나 보다.
미국, 영국 등에선 외교 사안이 소송 대상이 될 경우, 외교 당국에 의견을 묻고 그 판단을 존중해 판결한다. 이를 아미쿠스 쿠리에(Amicus Curiae) 제도라고 하는데, 법정의 친구(friend of the court)라는 뜻의 라틴어다. 다른 국가와의 관계를 파탄 낼 수도 있는 판결을 외교 당국에 자문하지도 않고 판사들끼리만 모여 한다는 게 이상한 것이다. 한일관계를 극단적으로 악화시킨 2018년 대법원 징용 판결의 원인을 제공한 2012년 대법원 1소부(주심 김능환 대법관)의 선고는 행정부 의견 조회도 않고, ‘국가와 그 재산은 국제법상 외국의 재판관할권에 따르지 않는다’(국가면제)는 원칙을 무시한 우물 안 개구리 판결이었다. 기존 판례를 뒤집고 한일청구권협정과도 충돌하는 판결이면 전원합의체로 올렸어야 했으나 퇴임 2개월도 안 남은 대법관이 “건국하는 심정으로” 판결했다. 법 논리가 아니라 정치적 이유로 내린 판결은 두고두고 한국 사회와 한일관계를 괴롭히고 있다.
01-18 듀엣 현경과 영애

김종호 논설고문
‘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에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세찬 바람 불어오면/ 들판에 한 아이 달려가네/ 그 더운 가슴에 바람 안으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서울대 미술대에 재학 중이던 전설적 여성 듀엣 현경과 영애의 포크 명곡 ‘아름다운 사람’ 1절과 2절이다. 너무도 맑게 노래하는 이들에게 반한 미술대 선배 김민기가 작사·작곡해준 노래다. 이에 앞서, 통기타를 잘 치던 이현경·박영애는 1971년 입학한 미술대의 신입생 환영회에서 회화과 대표로 장기자랑에 나섰다. 미국 가수 브라이언 하일랜드의 1962년 팝송 ‘키스로 봉한 편지(Sealed with a Kiss)’로, 학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일을 계기로 “순수하게 아마추어 가수로 대학 시절 4년 동안만 활동하며 소중한 추억을 남긴다”고 약속하며 시한부 듀엣을 결성했다.
첫 방송 출연도 김민기가 주선했다. 유명 DJ 최동욱이 진행하던 동아방송 음악프로그램 ‘3시의 다이얼’이었다. 당시 자신들의 노래가 없던 이들에게 미술대 동기 김덕년이 방송 출연용 노래를 만들어줬다. 데뷔곡이 된 ‘얘기나 하지’다. ‘한겨울 하얀 밤 흰 눈을 밟아/ 소복 소리 들으며 얘기나 하지/ 뜰엔 자욱이 눈송이 쌓여/ 화톳불 피워놓고 얘기나 하지’ 하는. 이들은 졸업을 앞둔 1974년 11월, 4년간의 활동을 정리한 앨범을 냈다. 데뷔 앨범이면서 활동 종료 기념 앨범이었다. 서울대 음대생이던 김광희 작사·작곡의 ‘나 돌아가리라’도 담겼다. ‘나 돌아가리라 쓸쓸한 바닷가로/ 그곳에 작은 집을 짓고 돌담 쌓으면/ 영원한 행복이 찾아오리라/ 내 가난한 마음속에 찾아오리라’ 하고 시작한다. ‘님의 맘은 무슨 빛일까/ 물빛처럼 푸른 빛일까/ 아프게 멍들어 파랄까/ 넓고도 깊어서 파랄까’ 하는 노래 ‘님의 마음’, ‘찬란한 별빛이 바닷물에 쓸리면/ 물 위에 떠오르는 보고픈 얼굴/ 저 하늘 별빛 속에 보고픈 얼굴’ 한 ‘바다에서’ 등은 이현경 작사·작곡이다.
어느 평론가는 이들을 두고 “참으로 싱그럽지 못하던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참으로 싱그러운 가수였다”고도 표현한다. 이들의 유일한 앨범이 나온 지 올해로 50주년이다. 이젠 희귀 음반이지만, 음원을 더 찾아 듣게 된다.
01-19(금) 순항 걱정되는 우주항공청

문희수 논설위원
우주항공청이 오는 5월께 경남 사천에 설립될 전망이다. ‘우주항공청 설치 및 운영에 관한 특별법’이 최근 국회를 통과, 윤석열 대통령의 핵심 국정 과제인 ‘한국판 나사(NASA)’ 출범 준비가 한창이다. 물론 기대가 크지만, 향후 여정이 순탄치 않을 것이란 우려도 제기되는 게 현실이다.
당장 우주항공청을 거느리게 된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어이없는 일을 벌였던 사실이 드러나 구설에 올랐다. 2032년 예정된 달 착륙선의 핵심인 엔진을 국내 독자 개발이 어렵다며 외국에서 수입하려다 정부의 예비타당성 조사에서 퇴짜를 맞았다는 것이다. 국산화를 조건으로 예타를 통과하긴 했지만, 과기부가 업적 쌓기에만 열중한다는 비판을 사고 있다. 우주항공청은 달 탐사 같은 청사진을 만드는 것은 물론 미래가 걸린 항공우주 산업을 육성하는 중책도 맡고 있다. 과기부가 이런 역량이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국내 항공우주업계는 만성적인 매출 부진과 인력난으로 이중 삼중으로 경영난을 겪고 있다. 대부분 업체가 지방이어서 우수 인력을 유치하기가 더욱 힘들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항공우주산업진흥협회가 최근 발간한 ‘2023 항공제조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400개 조사업체 중 중소기업이 94%이고, 업력이 10년 미만인 곳이 52%나 된다. 전체 매출액은 2019년 처음으로 5조 원을 넘었고, K-방산 효과가 컸던 2022년에도 국내총생산(GDP)의 0.29%인 6조3410억 원 수준이다. 회사 한 곳당 평균 매출액이 174억 원에 불과하다. 원가 절감이 어려운 소품종·소량생산이라는 업종의 특성상 매출과 이익을 늘리기 어려운 구조다.
우주 개발·탐사는 험난한 여정이다. 우주선 발사부터 난제다. 나사조차 잇달아 실패하는 게 현실이다. 더구나 지금은 민간이 주도하는 시대다. 아직도 영세한 국내 산업을 도약시키는 것은 시대적 과제다. 우주항공청이 현장을 모르면 불가능한 일이다. 최상급 기구인 국가우주위원회(위원장 대통령)부터 민간 인재를 적극 영입해 요직에 배치할 필요가 있다. 우주항공청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화려한 청사진과 실적 쌓기에 급급한 관료주의, 정책자금 배분에만 익숙한 탁상행정으로는 될 일도 안 된다. 민간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우주시대에 안착할 수 있다.
01-22(월) 이승만의 ‘건국 전쟁’

이미숙 논설위원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는 조지 오웰의 명언은 과거사에 대한 해석과 현재·미래 권력의 연관성을 대구 스타일로 보여준다. 오웰의 ‘1984’에 나오는 이 문장은 이 작품이 소련을 비판하기 위해 쓰인 소설이었음을 고려할 때 전체주의 정권의 조직적 역사 왜곡을 비판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오웰이 소설에서 묘사한 디스토피아는 소련뿐 아니라 중국과 북한에서도 현실화했다. 과거사에 대한 당의 기술은 신성불가침한 공식 입장으로 미래 세대에 교육됐다.
한국사에서 이승만은 망각되고 폄훼된 지도자다. 진보 쪽에선 ‘3·15 부정선거를 주도한 독재자’로, 북한에선 ‘괴뢰’로 불렸다. 일각에선 이승만이 6·25 때 망명을 시도한 것처럼 꾸며 ‘런(run·도망치다)+승만’이라고 조롱한다. 오웰식으로 보면, 좌파 진영과 북한이 대한민국을 뿌리부터 부정하기 위해 이승만 공적 지우기 합작을 벌이는 셈이다. 이승만의 일대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건국 전쟁’이 오는 1일 개봉된다. 동유럽으로 보내진 북한의 6·25 고아를 다룬 ‘김일성의 아이들’을 만든 김덕영(59) 감독의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 제작 때 북한에서 ‘이승만 괴뢰 도당을 타도하자’는 구호를 1990년대까지 내세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비로소 이승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이승만을 지워야 김일성을 내세울 수 있다는 북한 당국의 계산에서도 오웰식 인식이 드러난다.
김 감독은 지난 12일 시사회 후 “잘 모르던 한 노인에 대한 이야기”라면서 “대한민국의 건국은 이승만이라는 거인 덕분에 가능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영화에서 미국인 참전 용사는 이승만을 “조지 워싱턴 같다”고 했다. 정부 수립 후 6·25남침 속에서도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지도자라는 뜻이다. 영화 말미에 “이승만이 놓은 레일 위에서 박정희의 기관차가 달렸다”는 내레이션이 흐른다. 최빈국임에도 예산 20%를 교육에 투자한 덕에 산업화가 가능했다는 얘기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신생독립국 중 선진국이 된 나라는 한국뿐이다. 영화 제목은 이승만의 삶이 곧 대한민국의 건국 여정이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좌파 관점에서 벗어나 이승만을 보는 것이 국가 정체성을 세우는 길임을 김 감독은 보여준다.
01-23 새로운 정치 1번지

오승훈 논설위원
서울 종로구가 제22대 총선에서도 옛 위상과 상징성을 이어갈 수 있을까. 현재로선 어려워 보인다. 중앙선관위 산하 선거구획정위는 두 곳을 합쳐 종로·중구 선거구로 개편하는 안을 내놓은 상태다. 여야 간 협상이 이어지고 있지만, 종로구는 인구 감소로 단일 선거구 하한선을 못 넘길 가능성이 크다. 중선거구제가 실시된 제9∼12대 총선을 제외하면 처음이다.
종로구는 서울의 중심지로 조선 시대부터 권력기관들이 위치하고, 정치 거물들이 출마해 ‘정치 1번지’로 불렸다. 이곳을 거친 대통령이 윤보선·노무현·이명박 등 3명이다. 바람 선거를 노린 잠룡들도 종로 출마를 선택했다. 손학규, 정세균, 이낙연, 오세훈, 황교안 등이다. 전국 표심을 보여주기도 한다. 제21대 총선에서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황교안 미래통합당 후보가 맞붙었는데, 이 후보가 58.3%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황 후보는 39.9%에 그쳤다. 더불어민주당·더불어시민당이 180석(60%), 미래통합당·미래한국당이 103석(34.3%)인 전체 결과와 비슷한 비율이다. 총선 판도의 지표가 된 셈이다.
이번 총선에선 아직 거물급이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 거론되던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는 아예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현역 의원은 최재형 국민의힘 의원이고, 하태경 의원이 험지라며 도전장을 냈다. 민주당에선 노 전 대통령 사위 곽상언 변호사가 지역위원장인데, 저울질하던 ‘원조 친노’ 이광재 전 국회 사무총장은 뜻을 접었다. 전현희 전 국민권익위원장 등이 출마를 선언했다.
더 주목받는 곳이 인천 계양을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의 ‘명·룡 대전’이 현실화했다. 야권의 유력한 차기 주자와 ‘대장동 일타강사’로 불린 여권 잠룡의 맞대결이다. 수도권 판세를 가를 변수들도 집중돼 있다. 역대 전적을 보면 민주당 아성이다. 총선만 아니라 지난 대선에서도 윤석열 후보가 진 곳이다. 하지만 전국적인 주목을 받아 출렁이면 예측 불가란 시각도 적지 않다. 이 대표로선 지역구에 발이 묶이는 것도 부담스럽다. 원 전 장관은 패배해도 명분을 얻지만, 이 대표는 이기고도 정치적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이 대표는 “(원 전 장관이) 나를 왜 따라오냐. 이해가 안 되네”라고 했다.
01-24 준조세 개편 만시지탄

문희수 논설위원
정부가 준조세로 불리는 91개 법적 부담금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고 최근 발표했다. 부담금 제도 도입 63년 만에 통폐합 등 전면 대수술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6일 국무회의에서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는 행위에 대해 예외적으로 부과하는 부담금을 재원 조달이 용이하다는 이유로 남발해서는 안 된다”고 전면 개편을 지시한 데 따른 조치다.
법적 부담금은 공익사업과 관련해 부과되는 것으로, 사실상 강제 조세라는 의미에서 준조세로 통칭된다. 영화관 입장권에 붙는 부과금, 여권 발급 때 부과되는 국제교류기금 등이 대표적이다. 올해 기획재정부가 예상한 부담금 징수 규모는 전년보다 12.7% 많은 24조6000억 원이나 된다. 이런 부담금을 대거 없애면 국민과 기업의 부담이 크게 줄어들 것은 분명하다.
국민과 기업의 의무적인 지출은 세금 외에 국민연금·건강보험 등 사회보장성 지출 부담도 상당히 큰 게 현실이다. 이런 의무지출 총액을 국내총생산(GDP)으로 나눠 산출한 지표가 국민부담률이다. 세금만 GDP로 나눈 조세부담률보다 그만큼 범위가 넓다. 국민부담률은 2021년 29.8%에서 2022년 32.0%로 높아져 처음으로 30%를 넘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치가 2000년 32.9%에서 2022년 34%로 1.1% 오른 반면, 한국은 20.9%에서 32.0%로 급증했다. 문재인 정부 때 종합부동산세·법인세 등 징벌적 과세 강화, 건강·고용보험료 인상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이런 형편이니 정부가 준조세 경감에 나선 것은 바람직하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다. 그렇지만 일각에선 총선용 정책의 일환이라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진작 했어야 했던 일을 미루다가, 총선을 앞두고 개편하겠다니 공연한 의심을 사는 것이다. 더구나 기재부 산하 기금부담금운용평가단은 지난해 총 36개 부담금 중 회원제 골프장 입장료 부가금 등 고작 3개만 폐지를 권고했다고 한다. 정부 안에서조차 사전 조율이 안 돼 손발이 맞지 않으니, 졸속이라는 비판을 자초하는 셈이다. 좋은 정책도 적기를 놓치지 않아야 제대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더는 불필요한 논란이 없도록 하려면 준조세 통폐합에 속도를 내 성과로 입증해야 한다.
01-25 늑대왕 로보와 명품 백 소동

김세동 논설위원
어니스트 시턴은 곰, 코요테, 쥐, 쇠오리 등을 관찰한 실화를 바탕으로 재미있는 단편 동물 소설을 여러 편 썼는데, 이 중 가장 인기 있는 게 미국 뉴멕시코 주 북부의 목축 지대 커럼포를 1889년부터 5년간 장악하고 수많은 소를 잡아먹어 현상금까지 붙은 회색늑대를 다룬 ‘로보, 커럼포의 왕’이다. 한국에는 제목이 ‘늑대왕 로보’로 많이 알려졌는데, 스페인어로 로보(lobo)가 늑대라는 말이어서 ‘늑대왕 늑대’로 동어반복이 돼 버린다.
커럼포의 목장주들은 소들에게 치명적인 로보 패거리를 잡기 위해 갖은 수를 쓰다가 실패한 후 뛰어난 늑대 사냥꾼이자 동물기의 작가인 시턴을 불렀다. 고기에 독약을 넣은 미끼도, 온갖 기발한 덫도 다 피해 나간 로보 일당 포획을 포기하기 직전 시턴의 눈에 우두머리인 로보의 발자국 앞에 다른 작은 늑대의 발자국이 찍혀 있는 특이한 장면이 들어왔다. 서열을 중요히 여기는 늑대 무리에서 우두머리 앞에 나선다면 바로 물려 죽었어야 했는데, 계속해서 로보의 앞에 다른 늑대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고 이내 이 발자국이 아름다운 흰색 암늑대 블랑카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늑대 무리의 서열을 무시하고 앞에 나가도 용인해 줄 정도로 애지중지하는 블랑카가 로보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파악한 시턴은 블랑카를 먼저 포획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로보는 부하 늑대들에게 직접 죽인 사냥감만 먹게 했는데, 끔찍이 아끼는 블랑카는 엄하게 대하지 못했다. 블랑카는 조심성 없이 앞서나가다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갔으며 결국 덫에 걸려들었다. 분노와 상실감에 자포자기 상태가 돼 블랑카를 찾아다니던 로보 역시 평소라면 걸리지 않았을 덫에 걸려 최후를 맞았다.
약간 동화 같고 만화 같은 시턴 동물기를 다시 꺼내 읽은 건, 최근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 명품 핸드백 사태가 연상돼서다. 거대한 덩치에 힘이 장사인 데다 머리까지 좋고 강력한 리더십으로 늑대 무리를 이끄는, 그러면서도 아내에게 너무도 헌신적인 로보와 윤 대통령의 이미지가 겹친다. 야권 성향 인터넷 매체 ‘서울의소리’와 목사가 덫을 놓은 것도 닮았다. 늑대가 아내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야 낭만적이라고 해도 대통령이 아내를 위해 선거 패배를 감내하겠다면 결코 아름다운 이야기가 못 된다.
01-26(금) 플랫폼법 역풍

이철호 논설고문
공정거래위원회가 강행 중인 ‘플랫폼 경쟁촉진법(가칭)’이 사방에서 돌을 맞고 있다. 벤처기업협회는 24일 “혁신 시도가 위축되고 결국 성장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며 ‘제2의 타다금지법’으로 낙인 찍었다. 공정위는 “법 제정이 늦어지면 역사의 죄인이 된다”며 여전히 공세적 입장이다. 연일 “거대 플랫폼들의 반칙행위로 결국 수백만 소비자만 피해를 본다”고 갈라치기 중이다.
플랫폼법은 ‘대규모유통업법’이나 ‘전자상거래법’ 적용 대상에서 빠져 있는 거대 플랫폼들의 자사 우대·끼워 팔기·멀티호밍 제한·최혜 대우 요구 등 네 가지 반칙을 막는 게 골자다. 반대쪽이 지적하는 문제점은 두 가지다. 우선, 규제 대상이 되면 더 이상의 서비스 혁신을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또, 토종 플랫폼 손발만 묶고 미국·중국 등 해외 플랫폼과 역차별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반발이 거세지자 공정위는 ‘지배적 사업자’를 네이버·카카오 등으로 최소화하고 쿠팡·배달의민족 등은 제외하겠다고 슬쩍 물러선다. 구글 등 외국기업도 반드시 포함시키겠다고 장담하지만, 서버 소재지와 매출 회계 적용지가 해외에 있는 만큼 실제 법 집행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각국의 디지털 규제는 철저히 자국 이기주의 우선이다. 미국은 하원과 상원의 빅 테크 반독점 법안(Ending Platform Monopolies Act 등)을 싹 폐기했다. 틱톡·핀둬둬 등 중국 플랫폼의 거센 공세에 자국 플랫폼이 밀리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작동한 것이다. 유럽연합(EU)은 아예 토종 플랫폼의 씨가 말라 미·중의 독과점 횡포에 맞서 자국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 디지털시장법(DMA)을 만들었다. EU는 미국의 챗GPT가 등장했을 때도 가장 먼저 인공지능(AI)을 규제했다. 하지만 프랑스가 강력한 미스트랄AI 개발에 성공하자 발 빠르게 태세 전환 중이다.
한국은 토종 플랫폼들이 글로벌 빅 테크에 맞서 간신히 시장을 방어 중이다. 학계에선 느닷없는 플랫폼법에 대해 “과도한 사전 규제”라는 비판이 대세다. 공정위는 시기도 잘못 골랐다. 중국의 알리 익스프레스와 테무의 살벌한 공습에 토종 플랫폼들이 악전고투하는 현실이다. 총선을 앞둔 정치권도 플랫폼법 입법을 부담스러워 하는 눈치다. 역풍이 거센 만큼 공정위는 명예로운 회군을 고민할 때다.
01-29(월) 시인 김광섭

김종호 논설고문
서로 다른 장르의 예술가로 각별한 우정을 나눈 인물로는, 시인 이산(怡山) 김광섭(1904∼1977)과 화가 수화(樹話) 김환기(1913∼1974)도 대표적이다. 1960년대 초에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서 이웃해 살았다. 김환기가 미국 뉴욕에서 외롭게 지내던 시기에는 편지를 통해 교유했다. 1966년 어느 날의 김환기는 편지에서, 김광섭 시집을 내겠다는 출판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소식에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썼다. ‘원색 석판화를 넣어 호화판 시집을 제가 다시 꾸며 보겠어요. 한 권에 3만 원짜리를 내야겠어요. 되도록이면 비싸서 안 팔리는 책을 내고 싶어요. 이런 게 미운 세상에 복수가 될까.’
김광섭은 시 ‘저녁에’를 잡지 ‘월간중앙’ 1969년 11월호에 발표한 뒤, 편지에 적어 보내기도 했다. 김환기가 창출한 전면점화(全面點畵) 걸작 중 하나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그 시의 마지막 구절을 제목으로 삼았다. 1970년 느닷없는 ‘김광섭 별세’ 비보(悲報)를 접한 김환기는 고국의 그리운 대상들을 떠올리며 찍은 검푸른 점들로 화폭을 가득 채웠다. 비보는 오보였지만, 그 그림은 서울로 보내져 한국미술대상을 받고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일제강점기에 교직에서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했다고 해서 3년 8개월 옥고(獄苦)를 치른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김광섭의 명시는 ‘성북동 비둘기’‘겨울 산’ ‘산’ ‘소일(消日)’ ‘새 얼굴’ ‘생의 감각’ 등 많다. ‘반만년의 역사가 혹은 바다가 되고 혹은 시내가 되어/ 모진 바위에 부딪혀 지하로 숨어들지라도/ 이는 나의 가슴에서 피가 되고 맥이 되는 생명일지니’ 하는 시 ‘나의 사랑하는 나라’도 있다. 시 ‘마음’에선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도 그림자 지는 곳’ 한다.
그의 탄생 연도는 1905년 등으로 표기되기도 하지만,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펴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904년으로 기록했다. 이에 따르면 올해가 탄생 120주년이어서, 그의 시들을 다시 찾아 읽게도 한다. ‘저녁에’는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 본다’ 하고 시작해,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하고 끝난다.
01-30 정당 작명 고통

이현종 논설위원
우리나라만큼 정당의 생성과 소멸이 많은 곳도 드물 것이다. 역사상 등록된 정당은 무려 200개가 넘고, 30일 기준으로 50개의 정당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돼 있으며 10개의 창당준비위원회가 활동 중이다. 이런 정당이 4·10 총선에 후보를 낼 경우 투표용지의 길이가 또 한 번 신기록을 세우지 않을까 주목된다. 4년 전 21대 총선 때 비례대표를 뽑는 투표용지의 길이가 35개 정당이 입후보해 48.1㎝에 달했는데 올해에는 50㎝가 넘을 가능성도 있다.
아직도 창당을 준비하는 정당이 있는데, 가장 큰 문제는 당명이다. 비슷한 당명일 경우 선관위에서 등록을 거부할 수 있는데 당장 이낙연 전 대표가 주도하는 ‘새로운미래’와 더불어민주당 탈당파들이 주도한 ‘미래대연합’이 합당을 의결하면서 ‘개혁미래당(가칭)’으로 정했다. 그러나 이준석 대표가 창당한 ‘개혁신당’이 유사한 당명이라며 바로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이 대표는 “중국집에 전화기가 두 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옆에 신장개업한 중국집 이름 조금 알려져 간다고 그대로 차용 하겠다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비유했다. 개혁을 선점하겠다는 경쟁인데 선관위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주목된다.
지난 2020년 총선을 앞두고 안철수 의원은 당명으로 ‘안철수신당’을 사용키로 하고 선관위에 신고했지만 불허됐다. 또 ‘국민당’을 신청했지만 이미 등록된 ‘국민새정당’과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또 불허했다. 결국 국민의당으로 당명을 허락받았다. 당시 안 의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친박연대는 허락하면서 왜 ‘안철수신당’은 불허하냐고 반발했다.
정당은 허가제가 아니라 5곳 이상의 시·도당을 만들고 5000명 이상의 당원이 있으면 정당 설립은 자유다. 2014년 헌재는 선거에서 2% 이상 표를 얻지 못하면 정당 등록이 취소되는 정당법을 위헌으로 결정함에 따라 이젠 4년 이내에 지방선거나 총선에 참여만 하면 당이 사라지는 일은 없어지게 됐다. 그래서 지금도 국민의힘의 전신인 새누리당, 한나라당이 여전히 등록돼 있다. 당명에 ‘미래’ ‘국민’ ‘대한’ ‘한국’ ‘녹색’ ‘자유’ ‘통합’ ‘민주’ 등이 단골로 들어가기 때문에 이를 제외하고 신당의 명칭을 정하는 것이 크게 어렵다.
01-31(수) ‘쇠락 관리 선진국’ 일본

이미숙 논설위원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경제 대국이던 일본이 3위로 밀려난 것은 지난 2010년이다. 일본 정부는 2011년 2월 “작년 국내총생산(GDP)은 5조4742억 달러로 중국(5조8786억 달러)보다 4000억 달러쯤 적다”며 3위가 된 것을 확인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경제성장으로 1968년 세계 2위 대국으로 올라섰는데, 42년 만에 3위로 밀려났다. 2010년은 일본이 중국의 공포스러운 굴기를 체험한 해이기도 하다. 그해 9월 일본은 센카쿠열도 주변에서 불법 조업 중이던 중국 어민을 체포해 재판에 넘겼다. 이후 중국이 희토류 수출 중단 등을 협박하자, 무조건 석방하는 식으로 타협했다. 법치국가 일본이 중국의 경제 압박에 백기를 든 것인데 이때부터 중국에 대한 공포가 생겨났다.
이제 일본은 3위 자리도 곧 독일에 내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일본의 GDP는 4조2300억 달러로, 4조600억 달러를 기록한 독일과 격차가 1700억 달러에 불과하다. 2020년 3위 일본과 4위 독일의 격차는 1조 달러가 넘었다. 그러던 것이 한 해 뒤 6700억 달러로 좁아졌고, 그 격차는 점점 줄어 이제 추월당할 일만 남았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일본이 2026년엔 인도에도 밀려 5위로 내려앉을 것이라고 한다. 이미 1인당 GDP는 2022년 주요 7개국(G7) 중 7번째로 꼴찌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고 하는데, 1980년대 미국을 넘어설 것 같은 기세로 ‘재팬 넘버 원’을 외쳤던 일본에 딱 들어맞는 것 같다. 1990년대 장기 불황과 침체 속에서 잃어버린 10년이 20년, 나아가 30년이 되면서 만성적 악순환에 빠진 탓이다.
중국 경제 침체가 본격화하면서 피크 재팬이란 용어처럼 피크 차이나 개념이 생겨났다. ‘중국 경제의 일본화’란 표현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중국의 GDP는 2021년만 해도 미국 대비 76.4%였지만, 지난해엔 64.0%로 뒷걸음쳤다. 중국의 G2 지위는 유지되겠지만, 미국을 넘어서지 못한 채 내리막 길로 접어든 듯하다. 일본의 하강 과정은 평화로웠다. 2021년 이코노미스트는 ‘세계가 일본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란 글에서 일본을 ‘쇠락 관리의 선구자(harbinger)’라고 평했다. 요란한 굴기로 이웃을 괴롭혀온 중국이 수축기를 슬기롭게 견디는 일본의 경험을 배울 수 있을까.⊙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