橫說竪說(동아일보) 2024-01/
01-01(월) 암 환자 생존율 72%의 희망

마흔이 넘어가면 건강검진 결과를 맘 졸이며 기다리게 된다. ‘암’이라는 말을 듣게 될까 봐 그렇다. 한국인 사망 원인 1위가 암이다. 여자는 40∼69세는 유방암, 70∼74세 폐암, 75세 이후는 대장암에 가장 많이 걸린다. 남자는 45∼54세 대장암, 55∼64세 위암, 65세 이후부터는 폐암이다. 그래도 암 환자의 5년 이상 생존율, 즉 완치율이 72.1%로 20년 전보다 20%포인트 높아졌다.
▷지난해 12월 28일 공개된 ‘2021년 국가암등록통계’에 따르면 암 환자의 상대 생존율은 갑상샘암(100.1%), 전립샘암(96%), 유방암(93.8%)이 높고 간암(39.3%), 폐암(38.5%), 췌장암(15.9%)은 낮다. 상대 생존율이란 일반인을 100%라 할 때 암 환자가 5년 이상 살 확률이다. 갑상샘암이 100%를 넘는 것은 암 진단을 받은 사람이 아닌 사람보다 오래 산다는 뜻으로 불필요한 치료를 받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갑상샘암을 제외하면 상대 생존율은 67.8%로 떨어지지만 다른 나라보다는 여전히 높다.
▷미국 예일대 의대 연구진이 재작년 선진 22개국의 암 사망률을 분석한 결과 한국이 가장 낮았다. 건강검진 활성화로 암을 조기에 발견하고, 의료비가 저렴해 조기에 치료하는 덕분이다. 한국은 신약 임상시험을 가장 활발하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유명 정치인은 2017년 폐암 4기 진단을 받았으나 신약 치료 덕에 현재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암에 걸리면 무조건 빅5를 찾는 ‘환자 쏠림’ 현상이 심각한데 역설적이게도 많은 환자를 본 덕분에 임상 실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 됐다.
▷암 치료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면역 항암제다. 나이 들면서 세포분열 과정에서 암이 될 돌연변이 세포는 늘어나고 이를 제거하는 면역계 효율은 떨어진다. 면역 항암제는 면역계 효율을 높여주는 약인데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99)이 2015년 면역 항암제인 ‘키트루다’로 피부암을 치료해 화제가 됐다. 코로나 백신을 개발한 모더나는 암 백신을 개발해 임상시험 중이다. 지난해 4월에는 암세포만 겨냥해 파괴하는 중입자 치료기가 국내에 들어왔다. 지금까지는 전립샘암만 치료했고 올해부터 다른 암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흔히 암은 가족력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실제로 위암과 폐암은 부계, 대장암과 간암은 모계 유전 비율이 높다. 하지만 가족력의 영향력은 10%를 넘지 않는다. 흡연과 식습관이 62%로 가장 중요하다. 가족력이 두드러져 보이는 이유는 부모에게서 짠 식단 같은 나쁜 생활습관을 물려받기 때문이다. 암을 이겨낸 사람들은 비결 1순위로 ‘건강한 습관’을 꼽고 그중에서도 긍정적인 마음 먹기가 중요하다고 한다. 세계폐암학회는 매사 긍정적인 사람의 생존율이 12% 높았다고 보고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1-02 1441일 만에 문 닫은 코로나 선별진료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 동안 긴 줄이 늘어섰던 전국의 선별진료소 506곳이 지난해 12월 31일 일제히 문을 닫았다. 방역당국은 코로나19 확진자가 급감함에 따라 선별진료소 운영을 종료하고, 확진자를 수용할 격리병상 376개도 모두 지정 해제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처음 발생한 2020년 1월 20일부터 1441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운영됐던 선별진료소가 사라진다니 코로나19의 종식이 새삼 실감이 난다.
▷선별진료소는 확진자를 신속히 골라내 격리하고 치료하는 ‘K방역’의 최전선이었다. 거의 4년에 달하는 선별진료소 운영 기간 1억3100만 건의 유전자증폭(PCR) 검사가 이뤄졌다.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약 2.5회씩 검사를 한 셈이다. 주로 컨테이너에 설치됐던 선별진료소는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며 검사를 받는 ‘드라이브 스루’, 공중전화 부스 같은 1인용 음압 부스에 의료진이 손만 집어넣어 검체를 채취하는 ‘워크 스루’ 등으로 진화했다. 대기와 소독 시간이 줄면서 검사 횟수가 최대 10배까지 늘어났다.
▷의료진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코로나19 확진자가 폭증하던 시기에도 빠른 검사가 가능했지만 지금껏 선별진료소가 차질없이 지속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은 말 그대로 의료진의 헌신 덕분이다. 의료진도 미지의 감염병이 두려웠다고 한다. 혹시 모를 감염 우려에 가족과 떨어져 지내며 두려움과 싸우면서도 레벨D 방호복을 입고 N95 마스크를 낀 의료진은 묵묵히 밀려드는 검사를 했다. 확진자가 폭증할 때는 끼니도 거르고 화장실도 못 가기 일쑤였다.
▷골목을 돌고 돌아 늘어선 행렬을 안내하던 공무원들은 여름에는 더위, 겨울에는 추위와 싸웠다. 휴일 없이 일하면서도 위험한 근무를 마다하지 않았다. 선별진료소 근무자들이 버틸 수 있었던 건 시민들의 응원 덕분이기도 하다. 시민들은 빵과 커피 등 간식을 보내고 ‘힘내세요’ ‘감사해요’ 손 편지를 남기며 지친 그들을 위로했다.
▷방역당국은 지난해 6월부터 코로나19 위기 단계를 ‘경계’로 하향 조정하고 실내 마스크 착용과 확진자 격리 등을 자율에 맡겨 왔다. 현재 표본 감시로 집계하는 코로나19 확진자 수는 하루 평균 1000명에 못 미친다. 오미크론이 유행하던 2022년 3월 하루 최대 62만 명까지 확진자가 늘었던 것에 비하면 이제 독감처럼 관리가 가능한 수준이 된 것이다. 변이를 거듭한 바이러스가 남아있긴 하지만 치명률은 미미하다. 최근 질병관리청 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 10명 중 8명이 “코로나19로부터 일상을 회복했다”고 응답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전례 없이 길었던 팬데믹…. 이젠 잘 견뎌냈다고, 잘 헤쳐왔다고 서로서로 등을 두드려줘도 될 것 같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1-03 덕담인가 스팸인가… 새해 카톡 인사 스트레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늘 건강하세요.” 새해 첫날이면 ‘까똑’ ‘까똑’ 하는 카카오톡 알림음이 시도 때도 없이 울린다. 메시지나 이미지의 내용은 대개 비슷하다. 단체 카톡방마다 어김없이 붉은 태양이 떠오르고, 청룡이 용틀임을 한다. 1월 1일은 연중 메시지가 가장 많이 몰리는 날이다. 2017년과 2020년 새해 첫날엔 안부 메시지가 한꺼번에 폭주해 카톡이 수시간 먹통이 되기도 했다.
▷동창, 지인, 직장 동료 등의 단톡방에서 누군가 새해 인사를 먼저 올리면 슬슬 눈치게임이 시작된다. 하나둘씩 답장이 늘어갈수록 불안감이 점점 커진다. 형식적인 인사치레가 귀찮지만 그렇다고 답을 하지 않으면 무심하고 예의 없는 사람으로 찍힐까 걱정이다. 수직적 인간관계에서 ‘읽씹’(메시지를 읽고 답장하지 않는 것)은 큰 도전이기도 하다. 한 대학에선 교수가 단체 카톡방에 새해 인사를 올린 학생에게만 가산점을 줘 논란이 된 적도 있다.
▷말주변이나 글재주가 없는 사람들에겐 인사 문구 하나 만드는 것도 스트레스다. ‘새해 복’ ‘건강’ ‘하시는 일마다’ 등 상투어를 빼고 말을 지어내려면 머리에서 쥐가 난다. 그래서 요즘엔 포털 사이트나 소셜미디어에서 센스 있는 문구를 검색하기도 하고, 유료 인사 문구 서비스나 인공지능(AI) 추천 메시지를 이용하기도 한다. 좋은 문구를 찾았다 해도 여러 사람에게 같은 인사말을 ‘복붙’(복사와 붙여넣기)했다간 성의 없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 부담이다.
▷4월 총선을 앞둔 올해는 불청객이 더 늘었다. 지난해 12월부터 예비후보 등록이 시작되면서 유권자들에게 이름을 알리려는 문자가 부쩍 많아졌다. ‘희망 찬 새해가 밝았습니다’ 같은 말로 시작하지만 주된 목적은 본인의 치적이나 출판 기념회 등을 홍보하는 것이다. 복 많이 받으시라고 보낸 덕담이 아닌, 내 표를 얻어 본인이 복 받겠다는 그 의도가 불편하다. 내가 사는 곳과 전혀 상관없는 지역에서까지 문자가 오면 짜증이 확 난다. 도대체 내 개인정보가 어디까지 퍼졌을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문안 인사를 가든, 연하장을 돌리든, 전화를 하든 과거엔 물리적 한계 때문에 새해 인사의 범위가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가족과 친지, 정말 가까운 지인에게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면 족했다. 하지만 모바일로 1초 만에 새해 인사가 가능한 시대가 되니 어디까지 인사를 돌려야 하나 애매해졌다. 양해와 합의가 필요하다.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형식적인 문자는 하지 않기로 하자. 인사 문구만 덜렁 보내지 말고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고 서로 공유하는 추억을 언급하자. 이번 설엔 형식적인 명절 인사의 공해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좋겠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1-04 대형 쓰나미·방사능 유출 악몽 되살린 日 노토반도 지진

바다 건너 일본에서 발생한 지진이 한국에 영향을 미칠 대표적인 위험 요소는 두 가지다. 먼저 원자력발전소에 문제가 생겨 방사능이 유출되면 한반도에 직간접적 피해를 줄 가능성이 있다. 지진해일(쓰나미)도 공포의 대상이다. 특히 일본 서부에서 일어난 지진해일은 동해를 거쳐 바로 한반도를 덮칠 수 있다. 1일 일본 노토(能登)반도에서 발생한 규모 7.6의 강진은 이런 악몽들을 동시에 떠올리게 했다.
▷일본 본토인 혼슈섬 중서부에 위치한 이시카와현 노토반도 일대는 유라시아판과 오호츠크판의 경계 지점에 있어서 평소에도 지진이 잦다. 최근 3년간 진도 1 이상의 지진이 500차례 넘게 일어났을 정도다. 하지만 진도 6이 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례적인 강진으로 70여 명이 목숨을 잃고 수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도로는 갈라지고 산사태까지 이어지면서 구조와 복구 작업이 늦어지고 있다. 일본 전문가들은 깊은 지하에서 고온의 유체가 상승하면서 지진이 커졌을 것이라는 등의 분석을 내놓고 있다.
▷노토반도는 강릉에서 직선거리로 약 730km 떨어져 있다. 그 사이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있을 뿐 망망대해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에는 일본 본토가 쓰나미의 방파제 역할을 해서 한국으로 밀려오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쓰나미가 발생한 지 약 2시간 만에 동해안에 도착했고 묵호에서 가장 높은 85cm의 쓰나미가 관측됐다. 동해안에는 1983년 일본 아키타현 서쪽 해상에서 발생한 쓰나미가 최고 2m의 높이로 밀려와 3명이 목숨을 잃은 적이 있다. 당시의 참상을 기억하는 동해안 주민들은 가슴이 철렁했을 것이다.
▷노토반도 인근에는 일본 최대 원전인 가시와자키가리와 원전과 시카 원전 등이 밀집해 있다. 내진 설계가 충실하게 돼 있더라도 단전 등으로 인해 기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도 전기 공급이 끊기면서 원자로 냉각장치가 작동을 멈춘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나온 방사성물질은 대부분 해류를 타고 태평양으로 이동하는데도 한국에선 걱정하는 이들이 적잖다. 동해를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마주 보고 있는 일본 서부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면 훨씬 직접적인 위협이 될 것이다.
▷일본 정부는 현재까지는 원전의 안전성에 이상이 없다고 밝혔다. 지진 발생 인근 지역에 내려졌던 쓰나미 경보도 해제됐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여진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본 기상청은 1주일 안에 진도 7 수준의 지진이 또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자연재해를 완벽하게 예측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언제, 얼마나 강력한 지진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만큼 바짝 긴장하면서 대비하는 것이 최선이다. ‘설마’ 하고 방심하다가 뒤늦게 가슴을 치는 일은 없어야겠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1-05 고법 판사 로펌 직행도 취업 제한으로 막으면 된다

한때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법관의 꽃’으로 불리었으나 지금은 고등법원 판사가 ‘법관의 꽃’ 비슷해진 모양이다. 법원 인사철마다 고법 판사의 대형 로펌행이 줄을 잇고 있다. 고법 판사 퇴직자는 2022년 13명, 2023년 15명이었고 올해도 벌써 서울고법에서만 10명 안팎의 판사가 사표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종전에는 판사가 되면 지방법원 배석판사, 지방법원 단독판사, 고등법원 배석판사, 지방법원 부장판사 순으로 경력을 쌓았다. 지법 부장판사까지는 대부분 됐다. 고법 부장판사부터는 자리가 많지 않다. 고법 부장판사로 승진하면 법원장이나 대법관을 바라볼 수도 있고 중도에 사직해도 전관(前官)으로서의 활용 가치가 높기 때문에 대형 로펌에서 모셔갔다. 과거에는 고법 부장판사의 로펌행이나 고법 부장판사가 못 된 지법 부장판사의 줄사표가 법원 인사철마다 주요 기사였다.
▷지금 고법 판사의 줄사표는 승진을 못 해서 그만두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과거 지법 부장판사의 줄사표와는 성격이 다르다. 지법과 고법 인사를 분리하는 이원화는 김명수 대법원에서 처음 시행된 것이 아니라 이미 2010년에 도입됐다. 이에 따라 2011년부터 지법 부장판사가 될 기수에서 매해 20여 명이 고법 판사로 선발됐다. 이때부터 6년간 고법 판사 선발이 고법 부장판사 조기 선발처럼 인식되는 특수한 시기가 있었다. 고법 판사 선발에 떨어진 판사들은 너무 이른 시기부터 근무 의욕을 잃게 됐다. 그런 이유도 있고 해서 2017년 김명수 대법원에서 고법 부장판사 승진제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주목할 것은 고법 부장판사가 더 이상 승진 자리가 아니게 된 다음에도 서울 수원 등 수도권 고법 판사 선발 경쟁률은 10 대 1을 넘고 지방 고법도 2 대 1 정도의 경쟁률은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법이 대등합의부로 운영되면서 고법 판사들의 업무량이 크게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과거와 같이 고법 부장판사의 권한을 누리고 법원장 보임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건 없어졌지만 법원 내에서 실력을 검증받은 판사로 인정돼 중도에 사직해도 대형 로펌에서도 귀하게 모셔가는 자리가 됐기 때문이다.
▷고법 부장판사는 2021년부터 대형 로펌으로 직행할 수 없다. 고법 판사는 고법 부장판사와 위상이 크게 다르지 않은데도 취업 제한이 없다. 고법 판사를 고법 배석판사라고 하지 않는 것은 고법 부장판사와 대등하게 합의부를 구성하기 때문이고 고법 판사는 시간이 지나면 대개 고법 부장판사가 된다. 억지로 고법 판사 시킨 게 아니다. 그렇다면 고법 부장판사에게 적용되는 취업 제한을 고법 판사로까지 확대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1-06(토) 약국에 감기약이 없다

애들은 감기를 달고 산다. 성인은 여러 감기 바이러스에 노출되다 보니 면역력이 생겨 연간 1∼3회 감기에 걸리고 마는데 미취학 아동들은 6∼10번, 많게는 매달 감기에 걸린다. 감기와 독감이 유행하는 겨울이면 부모들은 콧물 훌쩍이고 열 나는 아이 데리고 병원 문 열기 전부터 긴 줄을 서는 ‘소아과 오픈런’을 한다. 요즘은 약을 구하러 ‘약국 뺑뺑이’까지 돌고 있다.
▷약사들이 이용하는 의약품 도매 사이트의 품절약 1위부터 20위까지가 어린이용 시럽과 타미플루 같은 감기약들이다. 의사 처방전을 들고 가도 찾는 약이 없어 약사가 의사와 통화해 다른 약을 지어주거나, 근처 약국에서 구해다 주거나, “다른 약국 가보라”며 빈손으로 돌려보낸다. 애가 타는 엄마들은 맘카페에서 “기침약 시럽 있나요” “○○동인데 해열제 파는 약국 있을까요”라며 정보 품앗이를 하고, 남는 약을 나눠 받거나 사기도 한다.
▷약국에 감기약이 없는 건 수요가 폭증한 탓이 크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첫 겨울을 맞아 그동안 마스크 덕에 안 걸렸던 감기와 독감에 몰아 걸리는 사람들이 급증했다. 최근 5년 새 가장 많은 독감 환자가 발생했고 독감 주의보도 1년 4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외래환자 1000명당 독감 의심환자 수가 6.5명이면 유행 단계인데 지난달엔 61명까지 갔다. 여기에 어린이를 중심으로 호흡기세포융합바이러스 감염병과 마이코플라스마 폐렴까지 돌고 있다.
▷다른 나라도 정도는 덜하지만 사정이 비슷하다. 감기약을 포함한 의약품 수요는 급증한 반면 코로나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글로벌 공급망 위기로 원료 물질 공급이 지연되고 의약품 무역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한국은 완제 의약품의 31%, 원료 의약품은 88%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글로벌 공급망 위기에 더욱 취약하다. 특히 어린이 감기용 복제약은 마진율이 낮은 데다 출산율 저하로 국내 제조사가 몇 안 남아 있다. 생산에 차질이 생기면 바로 품귀 사태가 벌어지는 구조다.
▷감기약 대란은 2022년 치명률이 낮은 오미크론 대유행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부는 의료체계 부담을 줄이려고 재택 치료로 전면 전환했는데 오미크론 환자들이 대거 감기약을 처방받으면서 일시 품절→ 가수요→ 품절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대한아동병원협회는 지난해 6월 정부가 소아 필수약 품절을 방관하고 있다며 대책을 촉구하기도 했다. 정부는 약가를 찔끔 인상하고 생산을 독려하는 소극적 대처로 일관하다 어제 의약품 사재기를 집중 단속한다고 발표했다. 3년째 반복되는 감기약 수급 불안이 사재기 탓이겠나. 근본적인 공급 안정화 대책이 나와야 흔한 감기약 하나 사려고 약국 뺑뺑이를 도는 현상이 사라진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1-08(월)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재심… 21세기에도 이런 참혹한 일이

2009년 전남 순천의 한 시골마을에서 50, 60대 여성 2명이 새참으로 막걸리를 마시다 숨지는 사건이 있었다. 청산가리가 든 막걸리였다. 더 충격적인 건 “숨진 여성 중 1명의 남편과 딸이 공모한 살인”이란 수사 결과였다. 남편 백모 씨(당시 59세)는 무기징역, 딸(당시 26세)은 징역 20년이 확정됐다. 잊히는 듯했던 ‘독(毒) 막걸리’ 사건은 14년여 만에 원점으로 돌아왔다. 광주고법이 4일 사건을 재심하라고 결정하며 부녀를 풀어줬다. 검찰이 자백을 강요했고, 부녀에게 유리한 증거를 고의로 누락시켰다는 이유에서였다.
▷‘딸이 저(와) 함께 엄마를 죽였다고 인정했다면 저도 인정합니다.’ 백 씨는 용의자로 검찰에 체포되던 날 자술서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 한 문장을 썼다. 열흘 뒤 작성된 추가 자술서에는 상세한 범행 경위가 깔끔한 글씨체로 적혀 있다. 검찰은 아버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온 딸이 이를 눈치챈 어머니를 살해하려 아버지와 짜고 범행을 저질렀다면서 백 씨 모녀의 자백을 주요 증거로 법원에 제출했다. 1심은 자백의 신빙성을 의심해 무죄로 봤지만 2심, 3심은 “범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진술”이라며 유죄 판결했다.
▷재심은 판결 확정 뒤에 무죄 증거가 새롭게 나오거나 수사기관의 위법한 수사가 확인될 경우 가능하다. 이번 재심 결정은 후자에 해당한다. 당시 조사 녹화 영상에는 범행을 부인하는 백 씨 부녀를 상대로 유도 심문이 집요하게 반복되는 장면이 담겨 있다. 검사가 자백 진술서를 받기 위해 한글을 잘 모르는 백 씨에게 ‘당신이 불러주면 직원이 대신 쓸 것’이라고 압박하기도 했다. 초등학교도 못 나온 백 씨와 발달장애를 가진 딸은 체념한 듯 질문마다 “네”라고 짧게 답했다.
▷검찰은 증거를 취사 선택해 불리한 건 법원에 내지 않았다. “(백 씨처럼) 오이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해충을 없애려 청산가리를 사용한다”는 일부 진술만 제출하고 “그건 유황가루를 오인한 것이고, 청산가리는 절대 쓰지 않는다”는 오이농부 수십 명의 진술은 숨겼다. 또 부녀가 막걸리를 사왔다는 순천의 국밥집 인근 폐쇄회로(CC)TV를 통째로 확보해 범행 관련 행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도 법원엔 “CCTV 기록이 없다”고 했다.
▷사건을 초동 수사했던 경찰은 피의자를 특정하지 못한 채 검찰에 송치했다. 하지만 사건을 넘겨받은 광주지검 순천지청 K 검사는 꿰맞추기 수사로 백 씨 부녀를 기소하고 사형을 구형했다. 부녀가 재판에서 자백을 번복해 무죄를 호소했음에도 유죄가 확정됐을 때 K 검사는 미궁에 빠질 뻔한 사건에서 정의를 실현한 스타 검사로 불리기도 했다. 과거 화성 연쇄살인 사건 등에서도 재심을 거쳐 진범을 잡은 사례가 있지만 21세기에도 이런 억지 수사가 통한 것이다. 강압 수사를 한 검사는 물론 이를 검증하지 못한 법원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1-09 ‘조의금 6개월 할부’ 무인결제기의 등장

사회생활을 시작한 청년들이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경조사 예절이다. 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경조사비로 얼마를 내야 하는지가 고민거리다. 물가가 다락같이 오르는 요즘엔 경조사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도 고민이 깊다. 뛰는 물가를 감안하면 한참 올려 내야 할 것 같은데 수입은 제자리걸음이라 성의 표시의 적정선을 찾기 쉽지 않은 것이다.
▷요즘 결혼식 축의금은 ‘밥값’을 기준으로 내면 큰 무리가 없다. 결혼정보회사의 최근 설문 조사에서는 결혼식에 참석해 밥을 먹으면 축의금으로 평균 8만6300원을 내고 불참하면 6만4000원을 내는 것으로 나왔다. 일반 예식장 뷔페가 1인당 7만 원, 호텔 코스 요리는 14만 원이 넘는다. 축의금으로 10만 원 이상 내기가 부담되면 5만 원만 하고 가지 않는 게 예의다. 부부 동반으로 10만 원 들고 가 밥 먹고 오면 경우 없는 사람 소리 듣는다.
▷조의금은 대개 축의금보다 적게 낸다. 조의금은 한 사람에게 여러 번 내야 하는 경우가 많고 밥값도 상대적으로 싸기 때문이다. 평균 조의금은 7만 원대이고 직장인을 기준으로 같은 부서 사람이면 10만 원, 다른 부서 사람은 5만 원이다. 하지만 친한 친구가 부모상을 당한 경우라면 20대는 10만 원, 30대는 20만 원, 30대 후반은 30만 원은 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직장인들의 월평균 경조사가 1.5건이라는데 고령자 사망률이 최고점에 이르는 12월과 1월이면 조의금 부담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지게 된다.
▷현직에 있는 사람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은퇴한 사람들에게 경조사비는 주머니 거덜 내는 주범이다. 법정 정년과 무관하게 평균 퇴직 연령이 49세인데 50대 중반부터 자녀 결혼과 부모 별세로 경조사비 지출이 몰린다. 수입이 줄어도 경조사비 줄이기는 쉽지 않다. 현직에 있을 때 받은 게 있으면 퇴직 후라도 그만큼 돌려줘야 하고, 나중에 받을 때를 생각하면 ‘투자금’을 무턱대고 줄이기도 어렵다. 경조사비 문제로 부부간에 다투는 경우가 많아 은퇴한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하는 조언으로 빠지지 않는 게 “현업에 있을 때 경조사용 딴 주머니를 마련해 두라”는 것이다.
▷조의금 부담이 커지자 서울의 대학병원 장례식장에 조의금을 카드 할부로 낼 수 있는 무인 결제기가 등장했다. 조의금 액수를 지정하면 6개월까지 할부 납부가 가능하다고 한다. 한마디로 빚내서 조의금 내라는 것인데, 이쯤 되면 큰일 있을 때 서로 돕는 아름다운 ‘상호부조’가 아니라 ‘상호부담’이라 해야 할 것이다. 축의금 문화는 결혼이 줄면서 안 주고 안 받기, 스몰웨딩으로 서서히 변화하고 있다. 조의금 문화도 체면치레를 위해 빚을 내야 할 정도라면 바꾸는 게 맞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1-10 혹시 나도 비행 공포증?

비행기가 활주하는 순간 어떤 이는 설렘과 기대에 부풀지만 어떤 사람은 초조함과 두려움에 휩싸인다. 비행기가 이착륙하거나 난기류를 지날 때 단순한 불안감을 넘어 신체 이상을 초래하는 극심한 불안을 느끼는 게 ‘비행 공포증’이다.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리거나 현기증, 질식감 같은 이상을 느끼고 심하면 기절하거나 심장 발작을 일으키기도 한다. 성인 10명 중 1명이 겪는 흔한 질병이라는데 국내엔 집계된 수치가 없다. 미국에선 2500만 명이 비행 공포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해외 출장이 잦은 사람이 아니라면 1년에 비행기 탈 일이 몇 번 되지 않아 과소평가되지만 비행 공포증은 일상은 물론이고 직업을 위협할 만큼 문제가 되는 병이다.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한 시간 남짓 비행하는 제주도 여행도 망설이게 되고, 심하면 아예 비행기 탑승을 거부한다. 네덜란드 축구의 전설적 공격수 데니스 베르흐캄프는 비행 공포증 때문에 자동차, 배, 기차로 방문 경기를 다녔다. 비행기를 못 타 연봉 협상에서 손해를 보기도 했다. 북한의 김정일이 모스크바를 오갈 때 왕복 24일에 걸쳐 기차를 탄 것도 이 병 때문이라고 한다.
▷비행기 사고는 극히 드물어 걸어 다니는 것보다 안전하다는 말이 있다. 비행기 사고로 사망할 확률은 자동차의 65분의 1, 상업용 비행기 사고로 사망할 확률은 2억 명당 1명꼴이다. 하지만 비행 공포증을 앓는 사람들은 이를 몰라서가 아니라 사고가 나더라도 내가 대처할 수 없다는 통제의 상실에 더 큰 불안을 느낀다. 폐소 공포증이나 고소 공포증, 공황 장애 같은 불안 장애와 얽혀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연초부터 일본 하네다공항의 비행기 충돌 사고에 이어 미국에서도 대형 참사로 이어질 뻔한 사고가 나면서 비행기 타기가 두렵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5일 미국에서 비행 중이던 보잉737 맥스9 항공기 동체에 큰 구멍이 뚫린 사고가 벌어졌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미국 정부는 해당 기종의 운항을 전면 중단시켰다. 맥스 기종은 보잉의 대표적 중·장거리 여객기지만 앞선 맥스8 기종은 두 차례 추락으로 탑승자 전원이 숨지는 비극을 겪었다. 이쯤 되면 비행 공포증이 아닌 ‘보잉 공포증’이 올 판이다.
▷다른 불안 장애와 마찬가지로 비행 공포증도 피하지 않고 약물, 노출 치료 같은 전문 치료를 받는 게 필요하다. 미국, 유럽 항공사들은 오래전부터 공포증을 완화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승객들이 이륙 때 눈을 감고 음악에 맞춰 명상을 하거나 공항에서 개, 토끼 같은 동물을 직접 쓰다듬으며 긴장을 낮추는 식이다. 비행 정보를 입력하면 그동안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고 가능성을 예측해주는 앱도 개발됐다. 국내엔 아직 이런 움직임이 없어 아쉬울 뿐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1-11 “韓 젊은 남성 70만~80만, 韓 여성과 결혼 힘들 것”

요즘 출산을 앞둔 부부들 사이에선 아기 성별 공개 파티가 유행이다. 성별 관련 힌트를 풍선이나 케이크 안에 넣어두고 가족, 친구들을 불러 맞혀 보게 하는 이벤트다. 참석자들이 풍선을 터뜨려 분홍색 꽃가루가 나오면 딸, 자른 케이크의 단면이 파란색이면 아들을 뜻한다. 미국, 유럽에서 보편화된 ‘젠더 리빌 파티(Gender Reveal Party)’가 수입된 것인데 종주국의 방식은 조금 다르다. 예비 부모들이 산부인과에서 받은 성별 확인서를 열어보지 않고 있다가 친지들과 파티를 열어 깜짝 개봉한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문화가 확산되는 건 아기 한 명 한 명이 귀해져 성별에 상관없이 출산을 축하해 주는 세태가 반영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성비 불균형 국가란 오명을 벗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여아 100명당 남아 105∼107명이 태어나는 게 생물학적 정상 범주인데 이 수치가 1985년 110, 1990년대 116까지 치솟았다. 2000년대 들어 110으로 떨어졌다가 2010년쯤 정상으로 돌아왔다. 30년간 이어진 ‘남초 출산’이 어떤 부메랑으로 돌아올지 연구한 논문이 8일 학술저널 ‘컨버세이션’에 실렸다. 저자인 미국 텍사스A&M대 더들리 포스턴 교수는 1980∼2010년 한국에서 태어난 남성 중 70만∼80만 명은 한국인 여성과 결혼하기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여성 한 명이 평균 6명을 낳던 1960년대에는 남아 선호가 더 뚜렷했음에도 성비가 균형을 유지했다. 문제는 1980년대 들어 출산율이 가파르게 떨어지는데 남아 선호가 교정되는 속도는 이보다 더뎠던 데 있다. 1, 2명만 낳을 거라면 아들은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상당 기간 지속됐다. 산아 제한 정책을 폈던 중국, 인도,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들도 이런 이유로 결혼 적령기 남초 현상이 심각하다. 중국은 남성이 여성보다 3400만 명이 많고, 인도에선 3700만 명이 많다.
▷넘치는 독신남은 사회적 시한폭탄이 될 수 있다. 학계에선 치안이 불안해질 수 있다고 본다. 미국 컬럼비아대 연구 결과 중국에서 남자 성비가 1% 오르면 폭력·절도 범죄가 7%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1인 가구여도 남성은 여성에 비해 노후가 불안정한 경우가 많아 복지 부담을 가중시킬 가능성이 있다. 지방일수록 남초가 심하다 보니 남성들이 연애·결혼 기회를 찾아 수도권으로 몰리면 지방 소멸을 가속화할 수도 있다.
▷중국에선 원치 않게 독신으로 남겨진 남성들을 가리켜 ‘수동적 독신’이라고 칭한다. 이들 간에 신부 모시기 경쟁이 격해지면서 신랑이 신부에게 주는 지참금이 15년 새 100배나 뛰었다. 요즘은 3000만∼4000만 원이 예사라고 한다. 아들 쪽 부모들의 물량 공세로 ‘결혼 군비 경쟁’이란 말까지 생겼다. 저출산 늪에 빠진 우리나라에서도 2030세대의 남초는 남성들이 결혼에 기권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1-12 몰래 한 녹음 증거능력 있나 없나

“선생님이 제게 ‘1, 2학년 제대로 나온 것 맞냐’고 말했어요.” 초등학교 3학년 아들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엄마는 책가방에 몰래 녹음기를 넣었다. 얼마 뒤 교사가 아이에게 “구제 불능”, “쟤가 맛이 갔어” 등의 발언을 한 것이 고스란히 녹음됐다. 이에 엄마는 교사를 아동학대 혐의로 신고했다. 1, 2심에서는 교사에게 유죄가 선고됐지만 대법원은 11일 원심을 파기했다. 녹음파일을 증거로 인정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형사재판에서는 아무리 결정적인 증거라도 적법하게 수집하지 않았다면 유죄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녹음파일의 경우 대상이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의 대화’라면 증거로서의 가치가 사라진다. 먼저 ‘타인 간의 대화’인지를 놓고 원심과 대법원의 판단이 갈렸다. 원심은 “녹음자(엄마)와 대화자(아들)를 동일시할 정도로 밀접한 인적 관련이 있다”는 이유에서 증거능력을 문제 삼지 않았지만, 대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모라고 해도 직접 대화에 참여하지 않은 이상 당사자가 될 수는 없다는 취지다.
▷다음 쟁점은 교사가 수업 시간에 한 발언이 ‘공개된 대화’에 해당하는지였다. 원심은 교실에서 30명 정도의 학생이 함께 수업을 듣는다는 점 등을 감안할 때 공개적인 대화라고 봤다. 하지만 대법원은 수업은 학생들에게만 공개되는 것일 뿐 불특정 다수가 듣는 것은 아니라는 이유로 비공개 대화라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유·무죄에 대해선 판단하지 않았지만, 유죄 판결의 핵심 증거가 효력을 잃음에 따라 교사에게는 유리한 결과가 됐다.
▷교사들은 교실에서 몰래 녹음이 이뤄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하소연한다. 일부 학생은 첩보영화에나 나올 법한 펜형·목걸이형 녹음기를 차고 등교한다고 한다. 주변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는 앱을 자녀의 스마트폰에 깔아서 수업 내용을 실시간으로 들은 학부모도 있었다. 이를 근거로 민원을 제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고, 이 사건이나 웹툰 작가 주호민 씨 아들 사건처럼 법정 다툼으로 비화하기도 한다. 비슷한 소송에서 대법원의 이번 판결이 기준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몰래 녹음한 파일의 증거능력이 쟁점인 사건은 여럿 있다. 대법원은 아내가 남편의 불륜을 의심해 남편 모르게 통화녹음 기능을 활성화한 결과 녹음된 파일이라고 해도 부부간에 통화한 내용은 형사재판의 증거로 쓸 수 있다고 판결했다. 그러면서 “증거 수집 절차가 사생활이나 인격적 이익을 중대하게 침해해 사회 통념상 한도를 벗어난” 경우라면 증거능력이 부정될 수도 있다고 판단한 부분은 의미가 있다. 사건의 실체 입증이 다소 어려워지더라도 증거의 적법성을 엄격하게 따지는 것이 절차의 정의를 중시하는 사법제도의 발전 방향에 맞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1-13(토) “전 국민 상대로 한 毒性 시험”

공식적인 사망자만 최소 1258명에 이르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책임을 둘러싼 공방은 이 사건이 공론화된 지 14년째 이어지고 있다. 옥시의 전 대표는 2018년 유죄가 확정돼 이미 형기를 끝마쳤다. 반면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의 전 대표는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가 11일 진행된 항소심에서 유죄로 뒤집혔다. 이들 제품에 쓰인 화학 원료가 인체에 유해한지에 대한 판단이 관건이었다.
▷옥시가 만든 ‘옥시싹싹 뉴가습기당번’의 주원료는 PHMG다. 피부에 닿을 때는 문제가 없지만 흡입하면 폐 질환을 일으킬 수 있는 성분이라는 점이 확인됐고, 옥시 전 대표는 1심부터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SK케미칼과 애경이 만든 ‘홈크리닉 가습기메이트’의 원료인 CMIT·MIT는 유해성을 입증하기가 한층 까다로웠다. 결국 1심 재판부는 ‘SK·애경이 만든 살균제와 옥시의 살균제는 성분이나 위해성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는 취지로 판결했다.
▷1심 판결 이후 국립환경과학원에서 CMIT·MIT가 호흡기를 통해 폐로 전달된다는 점을 입증하는 논문을 발표하는 등 새로운 연구 결과들이 나왔다. 이를 근거로 항소심 재판부는 SK케미칼·애경의 살균제를 사용한 것과 폐 질환과의 인과관계가 입증됐다고 판단했다. 특히 안전성에 관해서는 제조·판매업자에게 강력한 주의 의무가 요구된다는 것이 법원의 시각이다. 원료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 길이 없는 소비자로서는 ‘인체에 해가 없는 제품’이라는 업체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더 근본적으로는 SK케미칼의 전신인 유공이 1994년 살균제를 만들 때부터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유공은 독성시험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제품 출시를 강행했고, 이듬해 서울대에서 ‘문제 소지가 있으니 추가 실험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는데도 판매 중지나 회수 조치를 하지 않았다. 2002년 이 제품을 이어받은 홈크리닉 가습기메이트를 생산할 때도 별도의 검사는 없었다. 그 결과 “장기간에 걸쳐 전 국민을 상대로 살균제의 만성 흡입 독성시험이 행해진 사건”이 됐다고 재판부는 질타했다.
▷가습기 살균제는 그동안 약 900만 명이 사용했을 만큼 인기 제품이었고 주로 큰 기업들이 만들었다. 그런데 문제가 불거지자 기업들은 ‘유해 성분인지 몰랐다’ ‘살균제가 피해의 원인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등의 변명만 내놨고, 이는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다. 대법원의 최종심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번 재판을 통해 가습기 살균제 업체들의 법적 책임은 보다 분명해졌다. 기업들이 하루라도 빨리 배상·보상 방안에 합의해 피해자의 어려움을 덜어 주는 게 조금이나마 사회적 책임을 지는 길일 것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1-15(월) “입 안 데고 한국 컵라면 먹게 해달라” 푸틴 정적의 청원

러시아에서 가장 악명 높은 감옥은 북극권 시베리아에 있는 제3교도소(IK-3)다. 면회가 어려운 건 물론 편지도 주고받기 힘들 정도로 외진 곳이다. 영구 동토층에 있어 겨울이면 영하 20도 밑으로 내려간다. ‘북극의 늑대’라고 불리는 이 감옥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최대 정적인 알렉세이 나발니(47)가 지난해 말 이감됐다. 푸틴이 올 3월 대선을 앞두고 야권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나발니를 시베리아에 고립시킨 것이란 시각이 많다.
▷혹독한 옥중 투쟁 중인 나발니는 최근 제3교도소의 반인권 실태를 법원에 고발하며 한국의 컵라면 ‘도시락’을 언급했다. “판사님도 아십니까. 교도소 매점의 최고 인기 품목은 단연 도시락입니다. 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7∼10분을 기다려야 아주 맛있게 익는데 식사 시간이 제한돼 뜨거운 채로 빨리 먹느라 혀를 데었습니다. 행복해야 할 시간이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교도소 측이 수감자가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을 아침에 10분, 저녁에 15분으로 제한하고 있어 이를 없애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시베리아 감옥에 갇힌 야권 지도자가 ‘도시락 먹을 자유’를 호소할 정도로 러시아에서 도시락의 인기는 대단하다. 컵라면의 현지 발음은 ‘다쉬락’이다. 우리나라에서 미원이 조미료의 대명사였듯, 러시아에선 도시락이 곧 컵라면이다. 컵라면 시장에서 도시락의 점유율은 62%에 달해 10년간 1위를 지키고 있다. 몇 년 전 초코파이가 러시아의 ‘국민 간식’으로 주목받은 데 이어 도시락이 ‘국민 라면’으로 자리 잡았다. 러시아는 해외 브랜드 중 샤넬, 아디다스, 펩시 등 유명 기업 220여 곳만 저명 상표로 등록해 줄 정도로 까다로운데 도시락은 그 틈을 비집고 저명 상표로도 인정받았다.
▷국토가 광활해 기차가 주요 교통수단인 러시아에선 휴대용 사각 용기에 수프를 담아 기차에 오르는 사람이 많다. 1994년 도시락이 러시아에 수출됐을 때 현지인들은 수프통과 비슷하게 생긴 직사각형 용기에 열광했다. 둥근 사발 모양 용기에 비해 가방에 넣기 편리하고 먹을 때 흔들림도 덜했다. 현지인 입맛에 맞게 국내에 없는 8가지 다양한 맛으로 출시한 전략도 주효했다. 2년 전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후로는 전시 비축용으로 도시락을 사재기하는 러시아인도 많아졌다.
▷러시아 대법원은 식사 시간 제한을 폐지해 달라는 나발니의 청구를 결국 기각했다. 나발니가 러시아인들에게 친근한 ‘도시락’을 언급한 것을 두고 감옥에서도 국민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려 한 것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사법부로선 푸틴의 눈엣가시인 나발니의 손을 들어주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가 입 델 걱정 없이 도시락을 즐기기 어렵게 돼 유감이지만 북극 교도소마저 녹이는 K푸드의 위력이 확인된 건 반가운 일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1-16 15% 투표율로도 美 대선판 흔드는 아이오와의 힘

미국 대통령이 미중 정상회담 때 빼놓지 않고 요청하는 게 미국산 콩과 옥수수 수입 확대다. 간장 두부 식용유를 만드는 데 필요해 중국은 이들 작물의 최대 수입국이다. 수출 증대를 꾀한 것이겠지만, 두 작물이 대통령 선거에 영향력이 큰 ‘정치 곡물(穀物)’인 것이 진짜 이유일 수도 있겠다. 대선에서 이기려면 아이오와주의 대표 농산물인 콩과 옥수수의 판로 확대에 기여하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중서부 대평원 지역의 아이오와 그리고 지역 농산물이 정치적으로 대접받는 이유가 있다. 4년마다 돌아오는 대선의 해 1월 가장 먼저 코커스(caucus·당원 대회)를 여는데, 그 경선 결과가 앞으로 펼쳐질 주별 경선에 심리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오와에서 우리 시간으로 오늘 오전 10시 공화당 코커스가 열리고, 오후쯤 결과가 나온다. 민주당과 공화당의 경선은 1∼6월 50개 주마다 1등 후보를 뽑는 방식으로 진행하는데, 2가지 방식이 있다.
▷우리처럼 하루 날을 잡아 방문 투표 또는 우편 사전투표를 하는 프라이머리(primary) 방식이 일반적이다. 코커스 방식은 예외적이다. 아이오와처럼 1500곳 투표소 현장을 직접 찾아 오후 7시부터 연설 듣고 토론한 뒤 투표하니 꽤 긴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렇다 보니 투표율에도 차이가 있다. 아이오와 코커스는 투표율이 15% 선에 그치는 반면 프라이머리는 2배인 30%를 넘어선다.
▷역설적이게도 낮은 투표율이 아이오와를 주목하게 만들었다. 공화당 후보라면 이론상 등록 유권자의 7∼8%만 내 편으로 만들어 투표시키면 50% 득표율로 1위가 될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인구 300만 정도인 아이오와를 대선 주자들이 더 자주 찾는다. 맥줏집, 교회와 극장 앞, 학교 운동장에서 뉴스에서 보던 후보들과 선 채로 대화하는 경험이 많은 것이 아이오와 정치의 자부심이다.
▷올해 공화당 아이오와 코커스는 80년 만의 폭설과 영하 20도 맹추위로 낮은 투표율을 더 떨어뜨릴 수 있다. 오죽했으면 1위인 트럼프조차 “죽도록 아프더라도 투표하고 죽으라”고 독려할까. 후보 캠프마다 한국에선 불법인 투표장까지 교통편 제공을 위한 당번을 정해 놓았고, 2위 경쟁을 하는 후보 캠프들은 역시 한국에선 불법인 가가호호 노크 유세를 혹한에도 중단하지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50년 동안 4년마다 같은 날 열던 민주당의 코커스는 올해부터 3월로 미뤄졌다. 흑인 지지세가 주춤한 것을 감안해 흑인 유권자가 많은 2월 초 사우스캐롤라이나 경선을 올해의 첫 경선장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현직인 조 바이든 대통령이 있어 민주당 후보 경선은 크게 의미가 없어졌지만, 낮아진 흑인 지지율을 올리려고 머리를 짜낸 것이다. 이래저래 첫 경선장에 전략적 의미를 부여하는 건 대선 후보들에겐 인지상정이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1-17 “평화 배당금 끝나… ‘포스트 워’에서 ‘프리 워’로”

영국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2.2%인 국방예산을 2.5%까지 끌어올리겠다고 선언했다. 냉전 한복판이던 1960년대(5∼7%) 수준은 아니지만 21세기 최고 수준으로 올리겠다는 의지다. 그랜트 섑스 국방장관은 어제 이런 구상을 밝히면서 “평화 배당금을 누리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평화 배당금이란 국방비를 삭감해 생긴 여유 예산을 투자 배당금을 받아 생긴 목돈처럼 보는 표현이다. 냉전 후 각국은 복지와 교육 등에 더 썼다.
▷섑스 국방장관은 현 시점을 “전후(post-war) 시기를 벗어나 (전쟁을 앞둔) 전전(戰前·pre-war) 시기에 접어드는 새 시대의 여명”이라고 진단했다.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에서 2개의 전쟁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지만 ‘진짜 전쟁’은 따로 올 듯이 말한 것이다. 그러면서 “5년 내 러시아 중국 이란 북한에서 분쟁 현장을 보게 될 것”이라며 4개국을 거론했다. 미국과 동맹이고, 북한과 대적하고, 중국과 협력해야 하는 우리로선 엄중한 상황 평가가 아닐 수 없다.
▷영국이 국방비 증액에 나선 이유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의 한 축인 서유럽이 평화 배당금에 취해 국방 태세를 놓아버렸기 때문이란 판단에서다. 나토는 국방예산의 70%를 미국에 의존하는 기형적 구조다. 독일 슈피겔지는 자국 주력 전투기인 128대 가운데 4대만이 비상시 실전 투입이 가능하다고 보도했다. 독일의 비축 탄약이 이틀 분량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영국이 보유한 장거리포는 12문에 불과하다. 우리 흑표 K-2 전차가 방산 경쟁 때 명성 높던 독일 레오파드 전차를 번번이 이긴 것도 이래서 가능했다.
▷트럼프의 미국 중심주의도 유럽을 긴장하게 한다. 그가 11월 재선될 경우 나토 탈퇴를 검토할 수 있다는 전망이 있다. “미국이나 유럽 회원국 한 곳이 공격받으면 모두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조약 5조가 나토의 핵심이다. 트럼프는 2017년 나토 정상회의 때 모든 미 대통령이 반복 다짐했던 ‘조약 5조의 중요성’을 일부러 빼고 말했다. 한국에 주한미군 주둔비용 추가 부담을 요구한 것 이상으로 유럽 부자 나라들에 방위비 증액을 압박했던 것이다.
▷탈냉전 평화를 벗어나 새로운 전쟁 시대의 전야(前夜)가 된 지금 미국과 영국이 보는 적대세력에 러시아 외에 중국 이란 북한이 추가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섑스 국방장관은 연설에서 “냉전 때는 상대가 이성적으로 보였지만 지금은 불안정하고 비합리적”이라고 말했다. 향후 30년 안보 위협의 성격을 보여주는 말이다. 미영의 전략 구상이지만, 한미동맹을 통해 연결된 우리 처지도 다를 게 없다. 1981년 GDP 대비 6.4%였던 우리 국방예산은 김영삼 정부 이후 2%대를 유지하고 있다. 2022년은 2.7%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1-18 “내 속엔 울음이 산다”… 美 에미상 휩쓴 ‘성난 사람들’

“가능하다고 보세요?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게?” 올해 미국 에미상 미니시리즈·TV 영화 부문을 휩쓴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에서 에이미(앨리 웡)는 상담사에게 이렇게 묻는다. 사업가인 에이미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행복을 포기했다는 분노와 딸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크다. 가난한 건축업자인 대니(스티븐 연)는 부모를 다시 미국으로 모셔와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리지만 되는 일이 없다. 심리적으로 벼랑에 몰린 두 사람이 사소한 시비에도 화를 참지 못하고 악연을 키워 가는 모습은 현대인의 초상 같다.
▷외로움, 불안, 죄책감, 질투, 자기혐오, 인정 욕구…. 손대면 톡 하고 터질 듯 취약한 것이 사람의 자아다. 이 드라마 3화 제목 ‘내 속엔 울음이 산다’는 실비아 플라스(1932∼1963)의 시 ‘느릅나무’에서 따왔다. “내 속엔 울음이 산다/밤마다 울음은 날개를 퍼덕이며 나와/자신의 발톱으로, 사랑할 무언가를 찾는다”. 피부색이 어떻건 누구나 남모르는 어둠과 공허가 있게 마련이다. 드라마는 갈피를 잡지 못한 분노가 어떻게 상대를 해치는 발톱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성진 감독과 배우 스티븐 연을 비롯해 한국계가 대거 제작에 참여한 이 드라마의 수상이 특히 반가운 건 그래서다. 감독은 이민자라는 특수성 대신 보편적 고민으로 승부를 걸었다. ‘성난 사람들’은 미국에서 이민자로서의 정체성 문제를 핵심 주제로 다루지 않고도 한국계가 만든 드라마가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설렁탕집과 깍두기 등 한국적 배경과 소품이 등장하는 건 부차적이다.
▷‘모범적 소수자(model minority)’라는 아시아계 이민자에 대한 찬사가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그려지는 건 덤이다. 에이미는 성공한 사업가이지만 돈이 넘쳐나는 백인 조던 앞에선 ‘을’에 불과하다. 조던에게 사업체를 팔기 위해 갖은 아양을 떨어야 한다. 가족이 극도로 아끼는 시아버지의 유품마저 “얼마면 되는데?” “가격이 있을 텐데?”라는 조던의 탐욕에 사실상 빼앗긴다. 에이미가 “분노는 일시적인 의식 상태일 뿐”이라며 화를 잘 참는 이미지를 지켜야 하는 건 아시아계에 대한 억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드러낸다.
▷예측불허의 전개 끝에 대니와 에이미는 서로에 대한 이해에 이른다. 과격한 다툼을 통해 비로소 내면에 숨겨두었던 부정적 감정을 직면하는 것이다. 에이미는 말한다. “정상인들이…맛이 간 사람들일 수도 있어.” 마음 건강이 ‘괜찮다’고 자부하는 건 역으로 곪아 있는 감정을 부정하려는 것일 수 있다. ‘새들은 노래하는 게 아니야. 고통에 울부짖는 거지’(드라마 1화 제목). 당신도,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울고 있는지 모른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01-19 젊은이 따라 어른까지 잘못 쓰는 지점이란 표현

어제는 언론 보도에서까지 부적절하게 쓰인 ‘지점’이란 표현을 보게 됐다. 존 플럼 미 국방부 우주정책 담당 차관보가 북한의 정찰위성과 관련해 ‘그들의 전쟁 능력을 가능하게 하는 지점이 있는지 여부에 대해 진지하게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는 구절이다. ‘그들의 전쟁 능력을 가능하게 하는 지점이 있는지 여부’란 부분이 영어로는 ‘if there are things that enable their ability to do a war fight’로 돼 있다. 왜 ‘things’를 굳이 지점으로 번역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10일 경남도당 신년인사회를 마친 뒤 기자들이 현직 검사들의 총선 출마가 잇따르는 사태에 대해 묻자 “우려 지점은 우리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우려할 점’이라고 하면 될 것을 우려 지점이라고 해 어색했다.
▷지난해 말 방한한 피아니스트에 관한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다가 한 방송사 라디오 PD가 올린 영상을 보게 됐다. 지점이란 표현을 수차례 사용하는데 어느 것 하나 적절하지 않았다. ‘자유롭고 독창적인 그의 커리어가 가능했던 지점은 그가 전형적인 콩쿠르 출신의 피아니스트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의 지점은 이유라고 써야 한다. ‘30개의 곡(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의미)을 그냥 갖다 붙여놓은 것 같은 연주가 되면 자칫 지루해질 수 있다. 그런 지점들을 상쇄시키기 위한 노력을 열심히 했다’의 지점은 그냥 점으로 쓰면 된다.
▷한 위원장은 51세다. 앞의 라디오 PD는 인터넷을 찾아보니 50세로 나와 있다. 지점(地點)은 글자 그대로는 땅의 한 점이다. 흔히 사고가 난 지점과 같은 말을 쓴다. 출발 지점, 도착 지점이라는 말도 쓴다. 사실 이런 말만 해도 ‘지’를 빼고 출발점, 도착점이라고 쓰면 된다. 그러나 거꾸로 언제부터인가 구체적인 장소가 아니라 포인트(point)할 만한 추상적인 것에 대해서까지 지점이란 표현을 마구 갖다붙이는 버릇이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더니 이제는 젠체하는 50대들까지도 무반성적으로 그런 말을 쓰고 있다.
▷이제 상당수가 60대가 된 ‘86세대’들은 부분이란 표현을 유행처럼 사용했다. 지금도 그들은 ‘그런 부분에 대해서’ 같은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독일 헤겔 철학에서 전체와 부분의 동일성에 기초해 만들어진 표현이 국내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쓰이다가 1980년대 운동권을 통해 확산된 것이다. ‘그런 부분’은 ‘그런 점’ 혹은 ‘그런 측면’으로 해도 부족할 게 없고 오히려 더 적절하다. 요새 ‘지점’의 용례는 ‘부분’의 용례보다 훨씬 부적절해 보인다. 언어를 무반성적으로 쓰면 내가 말하지 않고 말이 말을 하게 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1-20(토) K드라마 봤다고… 北 16세 소년에 12년 노동교화형

북한의 한 야외경기장 무대에 16세 청소년 2명이 나란히 섰다. 이내 이들의 양손에 수갑이 채워졌다. 12년 노동교화형이 선고된 직후였다. 한국 드라마를 본 게 죄목이었다. 무대 뒤로 교복 차림의 학생 수백 명이 도열해 이 공개재판을 지켜봤다. 영국 BBC방송이 18일 탈북자 단체로부터 제공받아 보도한 영상 속 모습이다. 북한이 이념 교육용으로 2022년 제작한 이 영상에는 ‘썩은 꼭두각시 정권의 문화가 10대들에게 퍼졌다. 고작 16살인 이들은 스스로 미래를 망쳤다’는 내레이션이 흘렀다.
▷북한은 2020년 말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이란 무시무시한 법을 공포했다. 남한 영상물을 보거나 소지한 경우 5년 형이던 처벌을 15년 형으로 강화했다. 유포한 자는 사형이다. 미성년자도 예외가 아니다. “미드 보다 걸리면 뇌물을 주고 나올 수 있지만 한국 드라마 보다 걸리면 총살”이란 말이 탈북자들 사이에서 돌았다.
▷북한은 MZ세대가 K콘텐츠에 젖어드는 현 상황을 특히 경계한다. MZ세대가 기성 질서에 도전적인 건 북한이라고 다르지 않다. 이들은 ‘당이 있어 먹고 산다’는 부채의식으로부터 자유롭다. 장기간 기근 속에 성장해 김씨 백두혈통의 은덕이랄 것을 별로 누린 적이 없다. 생활용품은 상당수가 중국 암시장에서 온 것들이다. 거기에 섞여 들어온 남한 영상물을 보고 자라 선전선동이 쉽게 먹혀들지 않는다. 이들은 연인을 부를 때 ‘동지’ 대신 ‘오빠’ ‘자기’ ‘남친’ 같은 애칭도 곧잘 쓴다. 북한이 이런 남한 말투를 ‘핀셋 단속’ 하겠다고 나선 것도 오죽 불안하면 그럴까 싶다.
▷북한이 K콘텐츠에 늘 적대적이었던 건 아니다. 2018년 남측예술단이 평양 공연을 했을 때 걸그룹 레드벨벳은 환대를 받았다. 당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내가 레드벨벳을 보러 올지 관심들이 많았는데 원래 모레 오려다가 일정을 조정해서 오늘 왔다. 평양 시민들에게 이런 선물을 해줘 고맙다”고 했다. 하지만 이듬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의 하노이 회담이 틀어지고 경제가 악화 일로에 들어서면서 북한은 문화 장벽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한국 드라마는 어려운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약”이라고 탈북자들은 전한다. 큰 희망을 갖긴 어려워도 소소한 재미와 세상에 대한 호기심만은 포기할 수 없는 북한 젊은이들에게 K콘텐츠는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다. 이런 기본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한 처벌을 아무리 세게 해도 효과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날로 무자비해지는 북한의 내부 단속은 남한의 ‘문화 침공’이 그만큼 두렵다는 자백이나 다름없다. 미국의 한 싱크탱크는 북한이 미사일을 쏠 때마다 ‘오징어게임’이나 BTS 뮤직비디오가 담긴 USB를 평양으로 날려 보내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당장 실현 가능성은 낮지만 북의 도발에 대한 응징 효과만은 확실해 보인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1-22(월) ‘저질 판사’ ‘저질 검사’

법정에서 판사는 ‘슈퍼갑’이다. 재판 진행과 판결이 전적으로 판사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당사자들은 법관의 눈치를 살피고 지시에 따른다. 수사와 기소에서는 검사가 절대적이다. 피의자와 피고인은 “사건에 있어서는 검사가 하느님”(김두식 ‘불멸의 신성가족’)이라고 느낄 정도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조용히 판검사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다. “법관은 재판을 할 때 재판을 받는 것”이라는 아하론 바라크 전 이스라엘 대법원장의 말처럼 판검사의 언행과 판단은 추후 평가의 대상이 된다.
▷재판과 수사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변호사들이 지적하는 판검사의 대표적인 문제는 막말이다. 서울변회의 법관 평가를 보면 피고인에게 “예전 같았으면 곤장을 칠 일”이라거나 “반성문 그만 쓰고 몸으로 때우라”고 하는 등 거친 말을 한 판사들이 낮은 점수를 받았다. 검사에 대한 대한변협의 평가도 비슷하다. “피해자에게 변제할 돈은 없고 변호인 선임 비용은 있냐”, “죄를 지은 사람이 너무 당당한 것 아니냐” 등 모욕적인 발언을 하는 검사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다음으론 맡은 업무를 얼마나 철저하고 공정하게 처리했는지가 중요한 요소다. 별 이유 없이 재판을 1년 넘게 방치하거나 서면으로 제출한 내용도 파악하지 않은 채 공판을 진행한 판사, 원고와 피고를 혼동해 판결을 번복한 판사가 나쁜 평가를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검사 평가에서도 피의자를 한 번도 조사하지 않은 채 불기소 처분하거나 증거물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재판에 들어온 검사들이 하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판검사들은 옷을 벗은 뒤에야 남의 눈에 본인이 어떻게 비쳤는지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한다. 변호사로 전업하고 법원을 다시 보게 됐다는 판사 출신의 정인진 변호사는 “인간 존중 없는 취급에 법대(法臺) 앞에 선 사람들은 분노하고 좌절한다”고 썼다. 검사 경력이 있는 변호사들도 “변호인으로서 검사를 보면 ‘나도 예전에 저랬을까’ 싶을 때가 종종 있다”고 말한다. 현직에 있을 때 깨달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역지사지의 자세로 성찰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가능한 일이다.
▷물론 밤잠을 아껴가며 재판과 수사에 전념하고 당사자들을 배려하는 판검사들이 적지 않다. 그렇지만 판검사에게는 예외 없이 높은 윤리적 기준과 업무의 완결성이 요구된다. 재판과 수사의 당사자들에게는 인생이 걸린 일이어서다. “사법기관이라는 것은 온 국민의 생명과 신체, 재산과 명예 등을 결정하는 일을 가지기 때문에 자가(본인)의 수양을 더욱 긴급히 아니하면 안 될 것”이라는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의 말은 지금도 판사와 검사 모두에게 유효하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1-23 초인종 의인, 사다리차 의인, 맨발의 의인

아찔한 화재 현장엔 의인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경기 군포시 불길이 치솟는 아파트에서 12층과 15층 베란다에 피신한 주민들을 구해낸 ‘사다리차 의인’, 서울 도봉구 쌍문동 아파트 화재 당시 집집이 돌며 잠자는 이웃을 깨운 ‘초인종 의인’, 자정 무렵 치킨 배달하다 경기 성남시 아파트에 난 불을 소화기로 끄고 사라진 ‘라이더 의인’ 등이다. 18일 새벽 서울 강서구 방화동 영구임대 아파트 화재 현장엔 ‘맨발의 의인’이 있었다.
▷15층짜리 복도식 아파트 6층에 사는 우영일 씨(23)는 이날 새벽 출근 준비를 하다 타는 냄새를 맡고 불이 난 사실을 알았다. 14층 거주자가 담뱃불을 붙이다 주변에 뿌려둔 살충제에 불똥이 튄 것이다. 우 씨는 화재경보기가 작동하기 전부터 소방차가 도착할 때까지 30분간 1∼13층을 두 차례 오르내리며 문을 두드리고 소리쳤다. “불이 났어요. 빨리 대피하세요.” 그는 한 주민이 건넨 물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고 위아래층으로 뛰어다니느라 신발이 벗겨진 줄도 몰랐다고 한다.
▷고령자와 장애인 100여 가구를 포함해 150가구가 생활하는 이 아파트는 준공된 지 30년이 넘어 스프링클러가 없고 연기 확산을 막아줄 방화문도 열려 있었지만 사상자는 없었다. 맨발의 의인이 신속하게 대피시킨 공이 클 것이다. 그는 3년 전 아버지를 여읜 후 어머니와 단둘이 살면서 공사장과 식당 등에서 일해 왔다. 지금은 이동통신 판매업을 하고 있다.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에도 위기에 처한 이웃을 지나치지 않은 의로운 마음씨가 장한 청년이다.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 살지만 아파트 화재 대비는 부실한 편이다. 최근 1년 동안에만 아파트에서 299건의 불이 나 35명이 숨졌다. 새벽 시간대에 불이 난 줄도 모르고 자다 대피가 늦어져 유독가스에 질식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명 피해를 막으려면 빠른 인지, 초기 소화, 안전한 대피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소방차 출동 4건 중 1건이 화재경보기 오작동에 의한 것일 정도로 오작동이 잦다 보니 잘못 울린 줄 아는 경우가 많다. 화재 초기 가장 효과적인 진압 설비인 스프링클러는 2005년에야 11층 이상 건물에 설치가 의무화됐다. 아파트 화재 상황별 대피 요령을 아는 사람도 드물다.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과 고령자들이 주로 사는 영구임대 아파트는 특히 화재에 취약하다. 실수로 불을 내기 쉽고, 불이 나면 빠르게 대피하기 어렵다. 21일엔 방화동의 또 다른 임대아파트에서 정신지체 장애인이 실수로 불을 내 화상을 입었다. 이런 영구임대 가구가 서울에만 2만여 개인데 99%는 스프링클러가 없다. 용감한 의인이 없으면 꼼짝없이 화마에 갇혀야 하는 취약 주거지부터 대책을 세워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1-24 ‘바다의 잡초’에서 ‘바다의 채소’로

김 수출의 역사는 19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말이 좋아 수출이지, 조선을 무단 통치한 일본이 완도 어민들에게 김 양식과 가공법을 가르친 뒤 생산한 김 대부분을 수탈해 갔다. 광복 이후에도 김은 외화벌이 1등 공신이어서 “완도에서는 개도 500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돌았다. 김 최대 주산지가 지금은 고흥이다. 1978년 일본이 자국 어민을 보호하겠다며 한국산 김 수입을 막은 이후 완도의 김 양식장이 미역, 다시마, 톳으로 바뀌면서다.
▷한 세기가 훨씬 지나 김 수출은 1조 원 시대를 열었다. 김을 대규모로 생산해 상품화하는 나라는 한중일 3개국뿐인데, 우리가 세계 시장의 70%를 휩쓸며 압도적 1위를 자랑한다. 여의도의 218배 규모에 달하는 양식장에서는 중국, 일본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김이 생산되는데 맛과 향 등 품질도 한국산이 우월하다. 특히 김 두께를 조절하는 가공 기술이 탁월해 얇은 김밥용 김은 우리만 생산할 수 있다.
▷해외에서 인기가 좋은 건 밥에 싸먹는 김보다 간식용 김이다. 김부각, 김스낵, 김칩, 김스틱처럼 형태를 다양화하고 겨자, 김치, 치킨, 아보카도 등 각양각색의 맛을 입혀 나라별 입맛을 공략했다. 아시아뿐 아니라 미국, 유럽, 중동, 남미 등 120개국으로 수출 시장을 넓힐 수 있었던 힘이다. 얼마 전만 해도 서양에서 김을 먹으면 ‘검은 종이(black paper)’를 먹는다며 조롱받았지만 지금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건강과 다이어트에 좋고, 맛도 좋다’며 김 사진을 올릴 정도다.
▷그래도 서구권에서는 여전히 김을 ‘바다의 잡초(seaweed)’로 인식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미국에선 전체 가구의 5% 정도만 김을 먹는다고 한다. 이를 바꿔 말하면 우리가 개척할 시장이 그만큼 넓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부와 기업들은 바닷가에 버려진 해조류와 달리 김은 양식장에서 정성껏 키운 ‘바다의 채소(seavegetable)’라는 점을 꾸준히 홍보하고 있다. 김 산업과 수출을 체계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김 산업 진흥구역’도 처음 지정했다.
▷일본에선 양식 어민이 가공, 판매까지 도맡아 하는 사례가 많다. 이와 달리 한국은 양식, 마른김 생산, 수출 등으로 분업화가 잘돼 있지만 진흥구역을 만들어 한층 더 발전시키겠다는 것이다. 1차로 선정된 곳은 친환경 김으로 유명한 전남 신안·해남군, 충남 김 생산의 95%를 차지하는 서천군이다. 최근 서천에서는 전국 최초로 ‘마른김 거래소’가 문을 열었다. 거래소를 통해 입찰 방식으로 수출 계약을 진행해 김값을 제대로 받겠다는 취지다. 첫날부터 8개국 바이어들이 몰렸다고 한다. 이런 노력들이 더해져 김이 ‘바다의 반도체’라는 이름값을 하길 기대한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1-25 “세상은 꼭두각시의 무대”… 동아연극상 60년

한국 연극사에서 1960년대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의 그늘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근대극의 사실적 재현에서 벗어나 표현주의극과 부조리극 같은 새로운 형식을 선보인 현대극의 정착기다. 1964년 제정돼 연극인들의 다양한 미학 실험을 응원하며 현대극의 역사를 함께 써온 동아연극상이 60회를 맞았다.
▷국내 최초의 연극상인 동아연극상은 파격의 역사다. 1회 상금 30만 원부터 가난한 연극인들을 놀라게 했다. 쌀 한 가마에 3000원 하던 시절로 30만 원은 1년 치 제작비였다. 최고상인 대상작이 60년간 25편만 나올 정도로 심사가 엄격하지만 작품만 좋으면 무명의 신인들도 과감히 발탁했다. 2회 대상작 ‘토끼와 포수’는 희곡작가 박조열의 첫 무대작이고, 1995년 대상작 ‘문제적 인간 연산’은 당시 배우였던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만든 극단 ‘유’의 창단 기념 작품이다. 2013년에는 ‘가모메’의 다다 준노스케가 외국인으로는 처음 연출상을 받았다. 그가 말했다. “정치는 상처를 주지만 예술은 구원합니다.”
▷연극계를 끌어가는 역대 수상자들은 동아연극상을 “내 연극 인생의 마중물”이라고 한다. 연출가 고선웅 김광림 김광보 박근형 손진책 오태석 윤호진 한태숙 등이 이 상을 거쳤다. 배우로는 오현경 백성희 장민호 윤소정 박인환 김혜자 손숙 박근형 송승헌 등 원로들과 예수정 윤제문 장영남 길해연 박해수같이 요즘 TV와 영화에서 활약하는 이들이 망라돼 있다. 박정자 이혜영과 함께 연기상을 세 번 받은 신구는 “동아연극상 받으며 쌓은 내공이 지금까지 버티게 해준 재산”이라고 했다.
▷올해는 대상작을 내지 못했지만 9개 부문 수상 작품들엔 인간의 오랜 고민과 시대적 질문이 고루 담겨 있다. 작품상을 공동 수상한 ‘키리에’는 죽음을 통해 삶을 관조하고, ‘비비비’는 꿀벌 연기로 인간 중심의 사유에 질문을 던진다. 연출상을 받은 ‘싸움의 기술, 졸’은 정치적 분열의 시대에 이롭게 싸우는 법을 고민하다 나온 작품이다. 김풍년 연출가는 2020년 신인연출상 수상자인데 “앞으로도 까불어서 미움받던 옛날처럼 성깔 있는 작업을 하겠다”고 한다.
▷지난해 공연 시장 규모가 1조2696억 원으로 영화 시장을 처음 앞섰지만 이 중 연극 매출은 647억 원(5%)에 불과하다. 그래도 다시보기, 빨리감기를 할 수 없고 온전히 ‘지금 여기’에서만 가능한 일회성의 예술은 연극뿐이다. 연극판을 지켜온 연극인, 관객들과 지금껏 사랑받는 2015년 대상작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의 대사를 공유한다. “세상은 꼭두각시의 무대. 북소리 피리 소리에 맞추어 놀다 보면 어느새 한바탕 짧은 꿈. … 우환을 만들지도 당하지도 마시고 부디 평화롭기만을.”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1-26 ‘희망적금’ 깨는 청년들

2022년 대선을 보름 남짓 앞두고 지난 정부가 청년들의 목돈 만들기를 돕겠다며 내놓은 게 ‘청년희망적금’이다. 만 19∼34세가 매달 50만 원 한도 안에서 2년간 저금하면 연 10%에 가까운 금리를 받을 수 있는 상품이다. 은행 기본금리에 정부가 주는 장려금과 비과세 혜택이 더해져서다. 급여가 3600만 원 이하인 사람만 가입할 수 있어 “무직, 실직 청년은 어쩌란 말이냐”, “금수저 알바생은 되고 고연봉 흙수저는 안 되냐”는 불만이 쏟아졌지만 290만 명이 가입하며 히트를 쳤다.
▷한도를 꽉 채워 꼬박꼬박 저축한 청년이라면 만기가 되는 다음 달 1298만 원이 찍힌 통장을 받아들고 꽤나 뿌듯해할 것이다. 스무 번째 저금 날이던 지난해 9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1000만 원을 모았다는 인증샷이 쏟아졌다. 이들과 달리 파격적 금리 혜택을 포기하고 중간에 적금을 해지한 청년도 86만 명이 넘는다. 가입자 10명 중 3명꼴이다. 직장에 들어가면 희망적금과 비슷했던 ‘재형저축’부터 가입해 종잣돈을 모았던 부모 세대라면 혀를 찰지 모른다.
▷물론 중도 해지 청년 중엔 “티끌 모아 티끌”이 싫다며 코인이나 주식 ‘한 방’을 찾아 떠난 이들도 있다. 하지만 “저축은커녕 생활비도 빠듯하다”며 마지못해 적금을 깬 청년이 대다수다. 번듯한 일자리를 얻지 못해 소득은 불안한데 전월세 가격부터 지하철 요금까지 안 오르는 게 없으니 허리띠 졸라매고 적금부터 깨는 것이다. 희망적금의 업그레이드 버전 ‘청년도약계좌’가 외면받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도약계좌는 5년간 매달 70만 원까지 저축해 5000만 원 정도를 모으는 것인데, 가입자가 정부 예상치의 20%도 안 된다.
▷SNS에 ‘거지방’을 만들어 돈 쓰지 않는 것을 서로 독려하고, 생활비를 한 푼도 안 쓰는 ‘무지출 챌린지’에 도전하는 청년들에게 저축은 사치일 뿐이다. 취업난 속에 고물가와 고금리의 충격을 온몸으로 맞다 보니 빚 수렁에 빠진 청년도 한둘이 아니다. 2030세대가 금융권에서 대출받았다가 갚지 못한 돈은 반년 새 40% 넘게 늘었다. 빚 돌려막기를 하며 금융회사 3곳 이상에서 돈을 빌린 20, 30대는 142만 명이나 된다.
▷총선을 앞두고 이번에도 정부와 정치권이 2030세대를 겨냥한 청년 대책들을 연이어 내놓고 있다. 하지만 교통비와 아침밥을 지원하고 전월세 대출을 늘려주고 빚을 탕감해주는 땜질식 처방으로는 벼랑 끝에 몰린 청년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미래 세대에게 필요한 건 푼돈 얹어주는 적금 통장이 아니라 꼬박꼬박 월급 주는 질 좋은 일자리다. 그래야 자립해서 스스로 돈도 모으고 빚도 갚아 나갈 수 있다. 청년을 ‘희망고문’하는 공약들을 가려내는 건 이제 우리의 몫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1-27(토) “몇초만 기다렸다 건너세요” 빨간 숫자 보행 신호등

횡단보도 녹색불이 켜질 때 몇 초가 남았는지 알려주는 신호등은 한 ‘딸바보’ 아빠의 교통사고에서 시작됐다. 1998년의 일이다. 아버지와 여섯 살 딸이 횡단보도에서 녹색등이 깜박이는 걸 보고 함께 뛰어 건너는데 갑자기 빨간불로 바뀌었다. 그 순간 승용차가 횡단보도로 달려들어 딸을 치었다. 중상을 입은 딸에게 전자부품 회사에 다니던 아버지는 약속했다. 보행 가능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숫자로 표시해 주는 신호등을 만들겠다고. 그 후 6년 뒤 경찰청은 그가 만든 신호등을 도입했다. 그의 딸이 다니던 초등학교 앞에 맨 먼저 설치됐다.
▷올 들어 서울 도심 횡단보도에는 빨간불의 잔여 시간이 표시되는 신호등이 등장했다. 녹색불 잔여 시간 표시가 건널 사람은 서두르고 아니면 다음 신호에 건너라는 메시지를 준다면 빨간불 시간 표시는 몇 초 뒤면 건널 수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보행자들을 다독인다. 빨간 숫자로 표시되는 잔여 시간은 99초부터 시작해 6초까지 줄어든다. 마지막 5초는 표시되지 않는다. 보행자들이 1, 2초를 남겨 두고 예측 출발을 하면 미처 횡단보도를 벗어나지 못한 차량에 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가 올해 350곳에 설치 예정인 이 신호등이 전국 최초로 시행된 곳은 경기 의정부시다. 도입 6개월 만인 지난해 초 효과 조사를 해보니 보행자 교통사고가 3분의 1로 줄었다. 시민들도 10명 중 9명이 환영했다. “무단횡단을 자제하게 된다” “아이들 인내심 교육에 유용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민간에서도 이런 시도가 일찌감치 시작됐다. 티맵이나 카카오내비 같은 자동차 내비게이션 앱은 서울 일부 지역을 지날 때 전방 300m 앞에서부터 신호등의 색상과 잔여 시간을 표시해 준다.
▷횡단보도 빨간불이 얼마나 남았는지 카운트다운 해주는 기능은 성격 급한 한국인에게 특화된 서비스 같지만 꼭 그렇진 않다. 미국 독일 일본에도 최근 도입되고 있다. 사람들에게 갈수록 시간이 귀해지는 공통적 시대상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역 전광판에는 분 단위로 특정된 도착 시간이 뜨고, TV나 유튜브 영상에 광고가 나올 때도 몇 초를 더 봐야 하는지가 화면에 표시된다. 잔여 시간 알림 기능이 여러 영역으로 확산되는 건 이용자들이 몇 분, 몇 초의 시간 동안 택할 수 있는 대안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횡단보도 앞에서 20∼30초짜리 쇼츠 영상을 보는 보행자라면 적색등 잔여 시간 표시 장치가 특히 유용할 수 있다. 녹색불로 바뀔 때까지 남은 시간을 알아야 보던 영상을 잠시 멈출지, 아니면 마저 다 볼지를 판단할 수 있다. 요즘엔 횡단보도 보행자 대기선에 LED등이 켜지는 바닥신호등이 설치되고 있는데 이 역시 스마트폰 보느라 교통신호에 둔감한 ‘스몸비(스마트폰 좀비)들’이 늘어나는 세태를 보여 준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1-29(월) 한일 우호 상징 ‘군마현 조선인 추도비’ 20년 만에 철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반세기가 흐른 1995년, 일본 곳곳에서 ‘침략의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도쿄에서 서북쪽으로 100km쯤 떨어진 군마(群馬)현에서도 조선인 6000여 명이 강제징용으로 끌려왔고, 이 중 상당수가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다 숨진 사실이 밝혀졌다. 이들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지역 시민단체와 기업,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추도비 건립에 나섰다. 재일동포들도 총련, 민단 가릴 것 없이 힘을 보탰다.
▷그렇게 2004년 세워진 것이 다카사키시 ‘군마의 숲’ 공원에 있는 ‘군마현 조선인·한국인 강제연행 희생자 추도비’다. 비석 앞면엔 ‘기억 반성 그리고 우호’라는 글이 일본어와 한글, 영어 순으로 크게 쓰여 있다. 뒷면에는 한국인에게 큰 손해와 고통을 입힌 역사를 반성해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긴 글이 일본어와 한글로 적혔다. 일본의 반성을 담은 추도비가 지자체 소유 공원에 들어선 건 군마현이 유일한데, 당시 현은 정치적 행사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설립을 허가했다.
▷그런데 20년간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 있던 이 추도비가 29일부터 철거에 들어간다. 군마현은 2주 동안 공원 전체를 폐쇄하고 추도비를 철거한다고 한다. “강제동원 역사를 부정하는 만행”이라며 철거를 반대하는 시민단체와 철거를 지지하는 우익단체의 충돌을 고려한 조치다. 시민단체가 추도비 앞에서 정치적 발언을 했다는 것을 트집 잡아 극우 세력들이 철거를 주장한 건 아베 신조 정권이 출범한 2012년 무렵이다. 이때부터 일본 각지의 한국인 위령비, 추모비가 우익 세력의 표적이 됐다.
▷이어 2014년에는 도쿄에 있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철거를 주장해 온 혐한 단체가 군마현 추도비 철거 청원을 냈고, 자민당 의원이 다수였던 현의회가 이를 받아들였다. 군마현은 일본의 첫 부자 총리인 후쿠다 다케오·후쿠다 야스오, 나카소네 야스히로, 오부치 게이조 등 자민당 출신 총리를 4명이나 배출한 보수 텃밭이다. 추도비를 지키는 시민 모임이 소송으로 맞대응하며 법정 싸움에 들어갔지만 보수 색채가 짙은 일본고등재판소에 이어 최고재판소까지 군마현의 손을 들어줬다.
▷일본 전역에 150개가 넘는 조선인 추모비가 있는데, 지방정부가 직접 철거에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집권 내내 역사수정주의적 관점으로 과거사를 미화하려고 했던 아베 정권의 ‘침략의 역사 지우기’가 군마현에서 실현되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한일 정상의 수차례 만남으로 파행을 거듭하던 양국 관계가 정상화 궤도에 복귀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가해의 기억을 지워 가는 일본의 변화 없는 태도가 계속되고 있어 씁쓸하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1-30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

최근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를 여행했다”는 제목의 한국 관련 유튜브 영상이 화제다. 미국 베스트셀러 ‘신경 끄기의 기술’(2016년)의 저자 마크 맨슨이 여행기 형식으로 한국 사회의 극심한 경쟁과 정신건강 문제 등을 짚은 영상이다. 착점이 흥미롭다. 영상 도입부는 아파트 이층 침대에서 합숙했던 과거 스타크래프트 게임 프로팀의 집중 훈련을 소개한다. 한국의 케이팝 스타나 운동 선수, 첨단 기술도 이 같은 경쟁 압박을 통해 세계 무대에서 성공했다는 것. 하지만 ‘100점이 아니면 0점이나 마찬가지’라는 식으로 도태되는 이를 양산하는 부작용을 만들었다는 비판이다.
▷영상은 한국 사회가 물질주의와 돈벌이를 강조하면서도 개인주의와 자기표현은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실 한국인이 물신을 숭배해서 그런 게 아니다. 양극화한 노동 시장이 고착돼 모두가 소수의 대기업 정규직이 되기 위해 달려야 하는 탓이다. 선점한 이들만 ‘지대(地代)의 이익’을 누리다 보니 영상 속 전문가의 말처럼 많은 이들이 ‘항상 실패의 느낌을 가지게’ 된다.
▷일부 대목은 다소 피상적인 느낌도 든다. 영상은 ‘유교적 수치심(shame)과 (타인에 대한) 비판(judgement) 문화’가 문제라고 했다. 사람이 부끄러움을 알고 남의 평판을 의식하는 걸 중시하는 건 그나마 물질주의가 한국을 모두 좀먹는 것을 막는 방패다. 오히려 미국에서 대낮에 마약에 찌든 이들이 좀비처럼 걸어 다니는 현실은 극단적 개인주의의 해독과 관계가 없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이 가족을 중심에 놓고 사는 것이 문제’라고 짚은 건 앞뒤 맥락을 더 살펴야 한다. 한국 사회는 압축적 발전을 하며 사회가 져야 할 책임을 가족에게 지워 왔다. 가족 안에서 특히 여성이 양육을 하며 미래 노동력을 키웠고, 살림을 하며 현재의 노동력을 재생산했고, 노인을 부양하며 과거의 노동력을 책임졌다. 하지만 과거 한국 사회는 이를 무시했다. 노동력이 스타크래프트의 SCV(일꾼)처럼 마우스를 클릭하면 만들어지는 셈 쳤다. 그러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겪고 가장이 가족을 부양하는 구조가 해체되면서 각종 사회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것이다.
▷강대국인 미국도 우리보다 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인종 마약 이민 범죄 총기 등 많은 사회문제를 갖고 있다. 우울증 유병률도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라는 말은 충격 요법으로 받아들여도 좋겠다. 제작자 맨슨의 격려 섞인 믿음처럼 ‘우리는 길을 찾을 것이다’. 관용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삶이 각자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개성적으로 살아도 먹고살 수 있어야 한다. 패자가 부활할 수 있게 안전망도 촘촘히 구축해야 한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01-31 443조 빚더미 中 ‘부동산 공룡’ 몰락… ‘헝다’로 끝일까

약 443조 원의 부채를 진 중국 2위 부동산 개발업체 헝다에 홍콩 법원이 청산 명령을 내렸다. 올해 우리 정부 예산이 657조 원이다. ‘부동산 공룡’으로 불리던 헝다의 부채가 얼마나 천문학적인지 짐작할 수 있다. 실제 청산에 돌입한다면 중국 역사상 최대 파산이 된다. 2021년 역외 채권 채무불이행(디폴트)에 빠지며 ‘중국 경제 위기론’의 진원지였던 헝다가 다시금 중국 경제를 흔들 수 있다는 비관론이 흘러나온다.
▷중국 경제는 ‘콘크리트 GDP(국내총생산)’라고 불린다. 그만큼 주택 및 인프라 투자에 기대 성장했다. 중국 정부는 매년 GDP의 40% 이상을 부동산에 투자했고, 이런 ‘건설 주도 성장’ 덕분에 토지를 소유한 지방정부도, 집을 산 개인도 부자가 됐다. 그런데 2년 전부터 헝다, 완다 계열사, 비구이위안 등 부동산 개발사들이 줄줄이 디폴트 위기에 처했다. 최근에는 이들 기업에 대출해준 중즈그룹이 파산하며 금융시장으로도 불똥이 튀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40년 고도 성장을 견인했던 중국의 성장 모델이 고장 난 것 같다”고 했다.
▷헝다그룹 회장 쉬자인은 허난성 빈민촌에서 태어나 중국 최고 부자가 됐다. 1996년 선전시에 ‘헝다 부동산’을 차린 그는 저리로 땅을 빌려 건설사에 외상 발주하며 기업을 키워 왔다. 미리 받은 분양대금으로는 축구 영화 생수 등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문제는 중국 정부가 과열된 부동산 시장 연착륙을 위해 대출을 조이면서부터다. 곧바로 유동성 위기가 찾아왔다.
▷“내가 가진 모든 것과 헝다그룹이 이룬 것은 당과 국가, 사회 전체가 준 것이다.” 쉬자인이 중국 공산당에 극진한 감사함을 표한 것이지만, 사실에도 부합한다. 중국에서 토지는 지방정부 소유이고, 은행은 국영이다. 헝다그룹은 정부로부터 토지도, 자금도 빌려 빚잔치를 벌인 셈이다. 헝다의 빚 폭탄을 넘겨받은 데다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한 추가적인 부양 부담도 지게 된 중국 정부야말로 이번 사태의 최대 피해자일지 모른다. 지난해 9월 해외로 자산을 불법 유출한 혐의로 구속된 쉬자인과 그의 아들은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이 때문에 창업주 개인 비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헝다와 은행, 지방정부의 권력형 비리로 보고 중국 정부가 칼을 빼 들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번 홍콩 법원의 결정을 중국 본토 법원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므로 중국 경제에 미칠 여파가 크지 않다고도 한다. 하지만 1위 부동산 개발사인 비구이위안의 ‘도미노 위기설’이 재부상했고, 이들 기업의 직원과 협력업체, 분양받은 집 주인까지 충격이 번질 수 있다는 점에서 중국 정부의 고심은 깊을 수밖에 없다. 미국과의 경제 전쟁 중에 체력이 떨어지는 것도 부담이다. 여전히 중국과의 교역 규모가 큰 한국에도 결코 달갑지 않은 소식이다. 가뜩이나 세계 무역 질서의 재편으로 고전하는 우리 기업들에 숙제가 또 늘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