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2013
07.01 신식 화장과 신여성
“잡티 없어져 얼굴 고와집니다” 박승직 상점 ‘박가분’ 열풍
서울 도심 한복판, 즉 대한민국의 중심에 ‘광화문’ 현판이 걸려있다. 유교적 가치와 덕목으로 백성을 교화해 태평성세를 이루고자 했던 조선의 이념적 지향이 응축돼 있다. 약 150년전의 개항을 깃점으로 새 문물이 밀려들어 ‘광화문’ 현판 앞을 거니는 사람들의 겉모습이 바뀌고 생각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광화의 시대가 저물고 개화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새로운 사조는 그 때까지 조선을 떠받치던 전통과 때로 갈등하고 때로는 조화를 이뤄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 우리의 모습, 우리의 생각,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다양한 요소 가운데 상당 부분이 ‘개화기’ 혹은 ‘모던의 시기’에 바깥에서 유입되고 안에서 생성된 것들이다. 개화기를 되짚어 보는 작업이 지금의 우리를 성찰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이유다. 종로를 중심으로 한 서울 도심은 그 거대한 변화의 실험장이자 근대 문화의 기록장이었다.
중앙SUNDAY는 ‘종로 모던(Jongro Modern)’ 프로젝트를 추진중인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과 함께 개화기 서울 도심과 한국인의 모습을 되짚어 보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조선의 여인에게 있어 색조화장은 정숙하지 못한 여성의 ‘금지된 욕망’이었다. 성리학과 유교를 기반으로 한 여필종부(女必從夫),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숙명에 충실해야 했던 조선의 여성들에게 색조화장은 감추고 덮어야 할 허물이었기 때문이다.
서구문물의 유입으로 전통의 화장 문화에 급격한 변화가 찾아왔다. 1894년 갑오개혁을 계기로 조선은 당시 수공업 단계에 머물러 있던 화장품 산업을 정부 차원에서 관장하고 규제하기 시작했다. ‘위생국’을 설립해 해외 화장품 수입, 국산 화장품 제조에 간여했던 것이다.
신경림 ‘목계장터’ 시에도 박가분 등장

▲1920년대 평양 권번에 속했던 기생 김영월. 소리에 능하고 연기에도 소질이 있어서 ‘낙양의 길’이라는 영화에도 출연했다.[사진 국립민속박물관]
개항 이후 조선에는 서양의 화장품과 화장법이 물밀 듯 밀려왔다. 조선 최초로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이화학당 교사 하란사(1875∼1919)는 검정 통치마의 양장차림에 모자, 퐁파두르 스타일의 머리 모양 등을 학생들에게 유행시키며, 신여성들의 화장법과 옷차림에 변화를 주도했다. 이러한 신식 옷차림과 화장법은 서양식 교육을 받은 신여성들은 물론 기녀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유행했다. 여성이 외출할 때 몸의 윤곽과 얼굴을 최대한 감추고 다녔던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조선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여성들이 세상 밖으로 나와 양장(洋裝)을 하고 자유롭게 얼굴을 내놓고 다니면서 ‘얼굴과 피부를 가꾸는 일’이 중요해졌다.
1900년대에는 백분, 크림, 향수, 비누 등 서양의 화장품을 모방한 일본의 화장품이나 밀수입 서양 화장품이 크게 유행을 탔다. 특히 러시아에서 들여온 서양 화장품은 매우 귀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 무렵부터 여성들은 전통의 연지 대신 베니(적색 안료)를 사용하였고, 입술에는 다양한 색상의 구찌 베니 (입술연지)를 발랐다. 서양의 화장 문화가 색조화장을 천시하는 전통을 밀어내며, 근대적 여성 주체는 자신을 입증할 문화적 표상으로 화장품을 선택하고 구성하며 전통의 가치에 반하는 자아의 이미지를 표출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는 일본 화장품이 주종을 이루며 시장을 주도하였다. 이에 대항하는 국내자본으로 종로 박승직 상점의 ‘박가분(朴家粉)’이 1916년 우리 최초의 브랜드 화장품으로 등장한다. 박승직 상점은 1896년 한성부 종로 4가에 창립하였으며, 박가분을 제작한 사람은 박승직의 아내 정정숙이었다. 그녀는 입정동에 갔다가 한 노파가 백분을 직접 만들어 포장하여 파는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어, 남편 박승직과 상의한 끝에 공장형 가내수공업으로 10여 명의 아낙을 모아 백분을 만들어 공산품으로 팔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박승직이 운영하는 포목점 단골에게 사은품으로 주기 시작했지만, 박가분은 곧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다.
“박가분을 바르시면 주근깨와 여드름이 없어지고 얼굴에 잡티가 없어져서 매우 고와집니다.”(『동아일보』 1922.11.24. 2면, 박가분 광고)

▲1920년대 초반 선풍적 인기를 끈 화장품 ‘박가분’. 기존 백분보다 두께가 두껍고 은은한 향도 풍겼다. [사진 부산근현대역사관]
위 신문광고의 문구와 같이 박가분이 미백 효과에 뛰어나다는 소문과 함께 전국 각지에서 방물장수들이 종로 박승직의 집으로 모여든다. 박승직은 1918년 ‘박가분제조본포(朴家粉製造本鋪)’라는 제조업체를 차리고 재래식 화장분을 현대식 상품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당시 박가분은 50전의 싼 가격과 향이 첨가되면서 가히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박가분이 인기를 모았던 또 다른 이유는 포장 방식에도 있었다. 일반적인 백분들과는 달리 박가분은 두께가 매우 두꺼웠고, 작은 갑 형태로 판매했다. 종래의 백분은 두께가 약 3㎜정도 되는 것을 백지로 싸서 팔았으나, 박가분의 경우는 두께가 8㎜였다. 또한 ‘박가분’ 인쇄 라벨을 붙여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방식을 채택했다.
잘 나갈 때는 하루에 1만 갑이 넘게 팔릴 정도로 박가분은 당시 최고의 히트 상품이었다. 박가분은 종로에서 만들어져 방물장수를 통해 전국 각지로 팔려나갔는데, 이는 충주 노은 출신의 신경림 시인이 노래한 「목계장터」라는 시를 통해 알 수 있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구하기 쉽고 사용이 편한 박가분은 신분 계층을 막론하고 더 많은 여성들이 화장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기미와 잡티를 감쪽같이 감춰주고 은은한 향기까지 나니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박가분이 날개 돋친 듯 팔리자 1930년대 들어 서가분(徐家粉), 장가분(張家粉), 서울분, 설화분 같은 유사품이 등장했다. 또한 박가분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조선인들은 1930년대에 대거 화장품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그 중 피카몬드, 에레나 화장품, 동보 구리무 등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화장품 브랜드였다.
그러나 1920년대 말부터 일제의 고급화장품이 유입하기 시작하면서 박가분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박가분은 피부와 백분의 부착력을 높이기 위하여 납 성분을 넣었는데, 화장을 자주 하던 기생들에게서 그 부작용이 발생하자 인기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결국 1937년을 기점으로 박가분은 생산을 중단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 후 화장품 광고에는 ‘무연(無鉛)백분’이나 ‘절대로 납이 안 들었음’이라는 문구가 필수적으로 들어갔다.
1920년대 서구화에 대한 저항의 풍조가 일었다면, 1930년대에는 거꾸로 서구를 동경하는 분위기가 급속히 번졌다. ‘추파를 파러(팔아) 사는 여자는 얼골을 횟박가티 분을 처발러야되고(『조선일보』 1933.10.27. 「만추풍경」)’라는 신문기사와 같이 서양인의 흰 피부를 닮으려는 욕망이 ‘근대의 몸’에 바르는 화장품을 통해 표출되고 있다. 1930년대에 유행한 화장법은 ‘얼골에 분을 허엿케 발르고’, ‘처승달처럼 실낫 같은 눈썹을 곱다라케 그리고’, ‘입에 구찌베니를 칠하는’( 『신여성』 7권 6호, 1933년 6월, 「숙녀 비망첩」) 것이었다. 조선의 모던걸, 모던보이들에게 아름다움은 곧 서구의 백색 미인이었다.
1930년대 ‘서양미인 따라잡기’ 바람

▲양장에 신식 화장을 한 김영월을 찍은 사진엽서.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흰 얼굴과 함께 서구적 미인의 전형이 보편화하는 경향은 미국 할리우드 영화의 유행과 백분을 비롯한 화장품 광고의 영향이었다. 1930년대 풍조메루크림, 우데나분백분, 헤치마코롱, 구라부백분, 당고도랑 등 화장품 광고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개는 금발머리 백인여성이었다.
1930년대 서양미인 따라잡기 열풍은 여성잡지를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1933년 7월 『신가정』지에는 서양인의 눈을 ‘신에게서 받은 아름다운 눈’, 동양인의 눈을 ‘신의 실수’에 비유하며 서양인의 눈처럼 강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방법을 다룬 기사가 실린다. 이 시기에 코를 높여준다는 융비기(隆鼻器) 광고도 등장하며, 1939년에는 쌍꺼풀을 만들어 준다는 ‘아이호-ㄴ은 미안기’ 제품 광고도 『여성』지에 실린다.
남성 지식인들 역시 잡지를 통해 여성미와 화장에 관한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였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여성의 외모가 ‘조선의 근대화 정도를 반영하는 척도’라고 여겼다. 즉, 가부장적인 조선사회가 갖고 있던 여성미에 대한 기준을 폐기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아름다움을 추구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들은 나아가 문명과 야만을 구분 짓는 신체의 외양을 여성의 아름다움과 결부시켜 조선의 여성과 서구 여성의 외모를 비교하였으며, 서양여성들처럼 코가 높고, 입술이 얇은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개항과 더불어 서구문물이 들어오면서, 화장은 ‘신여성’이라는 사회적인 정체성의 도구로서 자리를 잡아갔다. 기생들이나 배우들이나 하던 화장이 일반 여성 대중에게도 일상적인 행위로 여겨지면서 일상적 모더니티가 구현되었다. 여성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근대적 행위이자 담론이 된다. 결국 화장을 통해 여성들은 스스로 ‘소비의 주체’ 로 자리매김했으며, 화장한 얼굴·단발머리·최신 유행 스타일의 의상 등을 통해 근대사회에서 ‘새로운’ 혹은 ‘서구화된’ 여성상을 투영하였다. 화장은 평등과 자유를 상징하는 서구‘화(化)’로서 여성차별에 대한 저항을 ‘몸’으로 드러낸 근대의 도구인 것이다.
문혜진 부경대학교 HK연구교수
07.08 신식 헤어스타일 유행
까불까불 지진 파마, 억눌렸던 여성의 욕망을 깨우다
‘머리털을 까불까불 지지고 틀고 빗꼬아 매고 하는 소위 파마넨트란 괴상한 양머리’가 20세기 초반 들어 대중의 관심 과녁으로 떠올랐다. 서울의 한복판 종로에 여성들의 새 머리 스타일 ‘파마’가 등장하면서다.
이 머리꼴은 단순한 스타일의 변화가 아니었다. 머리 모양새를 두고 벌인 소비 양식의 단순 전환도 아니었다. 좀 거창하게 이르자면 ‘서구 지향의 가치와 전통사회 관습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었다.
1920년대 서울 거리에 파마머리를 한 일본 여성이 선을 보이는가 싶더니, 1933년에는 종로 복판에 조선인 자본이 세운 화신백화점에 오엽주라는 여성이 세운 ‘화신 미용부’가 선을 보이면서 파마라는 여성들의 머리 양식이 유행을 불러오기 시작했다.
최신 유행 이끈 ‘모던 걸’ 오엽주가 운영

▲오엽주라는 신여성이 설립한 최초의 미용실인 ‘화신 미용부’에서 고객이 파마를 하고 있다. 당시 파마는 ‘괴상한 양머리’ ‘경박한 외국 풍습의 천박한 본뜨기’라는 비난을 받았다. [중앙포토],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단정하게 빗어 넘겨 묶은 머리에 비녀를 질렀던 전통과 관습의 여성 머리는 ‘지지고, 틀고, 비꼬아 매는’ 파마머리로 서서히 옮겨가고 있었다. 남성들에 비해 전통과 관습으로 더 오래, 더 무겁게 눌렸던 여성들이 문물과 제도의 개방적 흐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일은 이 시기에는 매우 자연스러웠다.
파마는 여성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신체를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강요되던 규범을 파괴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아울러 전통적인 역할에 대한 여성들의 거부행위로 비쳤다. 돈을 내고 아름다움을 사들이는 여성들의 소비 패턴은 미용실이라는 ‘장소’와 함께 번져갔다. 조선의 땅에 미용실이라는 곳이 처음 들어온 때는 1920년대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경성(京城)이라고 불렸던 당시의 서울 명동 인근에 등장한 미용실은 어디까지나 일본인의 소유였고, 고객 또한 일본인이었다.
종로의 화신백화점은 일본인이 운영하던 미쓰코시백화점(현재 신세계백화점 자리) 또는 조지야백화점과 달리 조선인이 설계하고 경영한 최초의 ‘우리’ 백화점이었다. 말하자면 최초의 ‘민족 백화점’이었다.
웬만한 소비품을 한데 모아 판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백화점(百貨店)’이라고 부르는 이 ‘장소’ 또한 근대의 상징을 이루는 곳이다. 우리 자본에 의해 세워진 백화점에 들어선 오엽주의 ‘화신 미용부’는 근대를 상징하는 뚜렷한 표지였던 백화점이라는 공간 위에서 개화기 여성들의 격렬한 ‘근대 반응’이 겹쳐지는 곳이기도 했다.
화신 미용부는 파마, 세팅, 매니큐어, 신부 화장 등을 했으며 항상 더운물이 나오고 드라이어가 있는 최신 시설로 가득했다. 내부 공간 역시 고급스럽고 경대와 소파 등으로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그런 화신 미용부를 운영했던 오엽주는 ‘최신’의 유행을 선도하던 장안의 유명인이었다. 그녀는 고무신에 한복이 아닌 하이힐에 양장을 하고,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쌍꺼풀 수술을 통해 미적 욕망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당대 모던 걸의 상징 자체였다.
그러나 당시 파마는 누구나 할 수 없었다. 파마 비용은 5원 정도였는데, 이는 금가락지 하나 값과 비슷할 정도로 매우 높은 가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백화점’ ‘최신’ ‘유행’ ‘금가락지’ 등과 같은 표상들과 얽혀 있었던 파마는 영화배우·기생·신여성·상류층 등 부유한 계층 사이에서 향유되는 새로운 소비문화이자 패션이었다. 유행을 선도하던 이들이 선보였던 파마는 근대성의 상징이었으며, 새 계급 구분의 수단이었다. 또 이는 이후 근대적 미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모던 걸의 패션이자 유행이었던 파마는 당시 사회에서 어떻게 비쳤을까. 미적 욕망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던 신여성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규범이 강하게 작동하던 사회에서 ‘불온한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러니 유행하는 패션이라는 이유로 머리카락을 전기나 불에 지지는 여성의 행위가 너그럽게 받아들여졌을 리 없었다. 당시 한 신문 기사에 실린 사회의 시선이다.
미용실 방문, 혼례 준비 절차로 자리잡아

▲오엽주 미용원 광고 사진. [중앙포토],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요즘 신식 여자들이 머리털을 까불까불 지지고 틀고 빗꼬아 매고 하는 소위 파마넨트란 괴상한 양머리 이런 것이 온 국민정신에 위반되는 부허하고 경박한 외국 풍습의 천박한 본뜨기라고 한동안 금하리라고 하자 그 짓을 질겨하던 신여성들은 새둥지가튼 머리를 다시 못하게되는가 해서 얼떨해 하는 한편에 저 꼴을 못하게 하면 저들이 또 머리를 가지고 어떤 짓을 할까하고 구경삼아 파마넨트의 운명을 궁금히 생각하는 사람이 또 많았는데…새둥지머리가 이러케까지 이야기꺼리가 되리라구야 이게 오늘 세상인가.’(색연필, 『조선일보』 1939년 9월 4일)
당시 전기로 지진다고 하여 전발(電髮)이라고도 불렸던 파마는 사치스럽다는 이유로 금지되기도 했다. 이처럼 파마를 한 여성에 대한 인식과 시선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또 파마는 신여성들의 다른 규범 파괴 행위인 ‘자유연애’를 상징했다. 그래서 파마를 하면 “바람난다”는 식의 인식이 지배했다.
이러한 담론 속에서 여성은 가부장적 규범이 강요하는 여성상에서 벗어나 자제력을 잃고 더 많은 소유물을 축적하기 위해 돈을 낭비하는 존재로, 즉 성적 무절제와 경제적 무절제가 결합된 존재로 여겨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백화점인 화신백화점 안에 1933년 ‘화신 미용부’가 문을 열었다. 사진은 종로네거리 화신백화점 주변의 거리 풍경.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파마는 높은 가격과 부정적 시선으로 인해 평범한 여성들이 누리기가 어려웠다. 당시 여성들이 파마를 하려면 집안의 어른들과 남편의 승낙이 있어야만 했을 정도다. 그럼에도 파마는 여성들이 선망하는 대상으로 떠오르면서 이를 금지하려는 사회의 움직임과 여성의 욕망은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성들은 미적 욕망을 표출하기 위해 고도의 전략을 세우기 시작한다.
그 전략은 바로 혼례에서 수행된다. 과거 전통사회에서 여성들이 머리 모양을 바꿀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 혼례의 과정에서만 가능했다. 혼례를 치르면서 여성은 ‘기혼’임을 드러내기 위해 어린 시절 길게 땋았던 댕기머리를 말아 올려 비녀를 찔렀다. 머리모양의 변화는 곧 존재의 변환을 알리는 ‘기호’였다. 그리고 전통적 관습이 강요되는 사회 속에서 이 변환의 기호는 파마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로 여겼다. 즉 혼례의 이러한 절차는 여성 주체의 미적 취향을 관철할 수 있는 전략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파마가 쉽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파마를 했다가도 어른들 눈치에 다시 비녀를 찌르기도 했고, 시집와서 몇 년 동안은 비녀를 찌르고 있다가 어른들과 남편을 겨우 설득해 머리카락을 자르고 파마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또 집안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자 몰래 파마했다가 한동안 이를 숨기려 수건을 뒤집어쓰고 있기도 했다. 어른들의 허락을 받아 그토록 원하던 파마를 했지만, 막상 하고 나니 부끄럽게 느껴져 어른들 눈을 피해 다니기도 했다. 이처럼 과도기에 파마는 혼례를 치른 여성들 사이에서나 겨우 할 수 있었다.
그런 시기를 거쳐 기혼여성이 파마를 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자 혼례 준비를 위해 미용실에 가는 것은 하나의 절차가 되었다. 이제 비녀를 한 여성은 구시대적인 사람으로 치부됐고, 파마를 한 채 시집을 온 여성이 신세대로 여겨졌다.
여성 주체들이 결혼이라는 ‘의례’에 파마를 얹은 것은 근대적 취향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기획이자 전략이었다. 이전과 다른 문화적 배경, 서구 근대문물의 유입으로 인한 새로운 문화적 경험을 지닌 세대들이 기존의 전통적인 문화양식인 혼례에 근대적 소비문화의 하나인 파마를 한 데 섞은 셈이었다. 이로 인해 신여성 혹은 모던 걸 등 근대적 인물을 상징했던 파마는 기혼여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수월하게 자리를 잡아갔다.
공다해 안동대 민속학연구소 연구원
07.15 한국 첫 근대적 상설시장
일제 상권 침략에 맞서, 조선 상인들 광장시장 세웠다

▲조선시대 지금의 종각~관철동 구간에는 881간의 작은 점포가 좌우로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사진은 1910년 촬영한 남대문 시장(선혜청 장시) 모습.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외국인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종로 광장시장(廣藏市場)의 연원은 조선 임진왜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왜군의 전격적인 침략으로 조선 조정은 군사력 동원이 필요했고, 그 군인들의 군복 제조에 필요한 옷감을 거래하는 장터가 종로거리에 생겼다고 한다. 조선 말 궁중에서 의복을 만들었던 침선비(針線婢) 출신의 증조모 때부터 지금까지 4대째 광장시장에서 포목점을 운영하고 있는 이현애(54)씨의 전언이다. 그 옷감 장터가 바로 지금의 광장시장이다.
1905년 구한말 일본인들이 남대문시장 경영권을 장악한 뒤 상권을 종로 쪽으로 넓혀오자 조선 상인들과 고종이 조선의 자본으로 이 시장을 세웠다. 공식 명칭은 ‘동대문시장’이었고, 청계천 광교와 장교 사이에 자리를 튼 까닭에 광장시장이라고도 불렸다.
조선시대 종로는 시장의 거리였다. 지금의 종각에서 관철동 구간에는 작은 행랑채 모양의 점포가 좌우로 늘어서 있었다. 모두 881간(間)이 있었다. 이들이 바로 시전(市廛) 또는 육의전(六矣廛)이라 불렸던 어용(御用)의 상인 그룹이다. 궁궐을 비롯한 관아에 물건을 공급하던 상인들이다. 정부에서 정식 영업 허가를 받은 이들은 정부 허가를 거치지 않은 가게, 즉 난전(亂廛)을 단속할 권한이 있었다. 이른바 금란전권(禁亂廛權)이다. 나름 위세를 떨치던 집단이었다.
개항 이후 밀물처럼 밀려오는 청나라와 일본 상인들을 지켜보며 이들도 적극 대응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외세가 조선의 상권을 모두 잠식하는 상황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종로거리에 광장시장이 정식 자리를 잡은 이유와 같다.
전통 물품 대신 수입 잡화상 들어서

▲남대문통 1정목(현 남대문로 1가)에 1916년 창립한 종로양복점(점주 이두용) 모습.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개항 이후 육의전 상인이 보유하고 있던 금란전권과 시전상인 일반이 국가로부터 보장받았던 권리들은 각국과의 통상장정 규정에 의해 사라졌다. 또한 청·일 양국 상인들이 육의전의 주요 취급물자였던 옷감을 판매함으로써 우리 상인들이 타격을 받았다. 이에 1897년 수립된 대한제국은 어용상인인 종로 상인들에게 관부(官府) 소요 물품의 조달에서 특권적 지위를 주고자 했다. 이어 대한제국의 ‘황도(皇都) 건설사업’으로 종로 상가의 공간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1896년 10월 16일부터 종로 일대의 가건물을 철거하고, 11월 하순에는 도로를 정비했다. 1898년 초에는 한성전기회사가 종로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전차궤도 부설에 착수했다.
이에 따라 종로에서 동대문으로 이어지는 거리에 새로운 상점, 회사들이 들어섰다. 1897년 광교 옆 대한천일은행 사옥을 비롯해 각종 회사, 상회가 종로 길가에 등장했다. 1899년에는 옷감을 파는 의전(衣廛) 도가에 피물회사(皮物會社), 명함 인쇄를 전문으로 하는 종로개문사(鐘路開文社), 약재를 취급하는 약재회사(藥材會社) 및 종로의약회사 등이 점포를 냈다. 1900년에는 전국 최대 규모의 약재상인 제생사(濟生社)가 종로에 들어섰다. 같은 해 백목전 상인들이 직조단포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백목전 도가에 공장을 설치했다.
그러나 종로 상권의 자주적 근대화는 1905년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가 단행한 화폐개혁과 재정개혁으로 큰 피해를 본다. 화폐개혁과 한전(韓錢) 어음 폐지는 아무런 유예조치 없이 단행됨으로써 조선사회에 ‘전황(錢荒)’을 야기했다. 메가타 개혁 이후 일본 상인들이 통감부로부터 각종 관급(官給) 물자의 조달을 청부받으면서 종로 시전 상인들의 관청 공납도 끊겼다. 반면 일본 은행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융자받은 일본 상권은 급속히 뻗어나갔다.
메가타 개혁 이후 종로 시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전통적인 시전(市廛) 형태였던 점포는 주단포목상, 양화점, 잡화상, 양복점, 권연(卷煙)제조소 등으로 변신했다. 아울러 규모가 큰 시전들은 ‘회사’라는 형식으로 갈아탔다. 서구의 회사제도와 자본주의 경제사상이 유입되면서 민간인 다수가 자본을 모으는 중인합자(衆人合資)식 상업회사를 설립하는 방안이 전통의 종로 시전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종로 시전은 먼저 가족·동족끼리 자본금을 모아 가족기업·동족기업 형태의 상점을 설립 운영하는 방안을 추진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종로 시전 김태희 집안이다. 김태희 집안은 조선 후기 이래 서울에서 살아온 무인양반(武班)계였다. 1897년 김성호의 4남 가운데 김상열·상태·상학 삼형제가 공동출자·합자·동업 방식으로 종로 시전의 수진상전(壽進床廛) 동쪽 끝에 수남상회라는 20칸짜리 포목상점을 열었다.
1905년에는 박승직·김종한·박기양·신태휴·김한규·홍충현·최인성 등이 광장주식회사 설립에 참여해 새 ‘광장시장’을 세우고자 했다. 1906년에는 박승직이 백목전 상인들과 함께 합명회사 창신사(彰信社)를 설립하였으며, 1907년에는 30~40명의 포목상과 함께 합명회사 공익사(公益社)를 설립했다. 1910년대 중반부터 종로 거리 곳곳에 신식 건물이 조선인들에 의해 지어졌고, 간판도 내걸리기 시작했다.
화신, 조선 최대의 상업회사로 성장

▲국내 최초의 상설시장인 광장시장은 외국인도 즐겨 찾는 핫 플레이스가 되었다. [중앙포토]
일제는 ‘회사령’을 통해 조선인 자본가의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억압했지만 조선 상인들은 나름대로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추진해 나갔다. 조선 상인들의 근대적 기업 활동을 보여주는 자료는 상업회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20년대 조선인 상업회사는 종로 2정목(현 종로2가), 남대문통 1정목, 다옥정(현 다동)에 2곳씩 들어섰다. 1930년대 조선인 상업회사는 종로 2정목에 17곳, 남미창정(현 남창동)에 9곳, 종로 1정목과 낙원정(현 낙원동)에 각각 8곳, 남대문통 4정목과 태평통(현 태평로) 2정목에 각각 6곳이 세워졌다. 요컨대 종로 2정목과 종로 1정목은 수와 규모에서 조선인 상업회사가 가장 많았다.
또한 조선인 상업회사의 개별적인 규모를 보면, 공칭자본금이 20만 엔 이상이었던 상업회사 중 조선인 상업회사는 17곳으로 종로 2정목의 화신연쇄점의 자본금 규모가 가장 컸다. 그 외 종로에 있던 상업회사는 화신(和信), 대창사(大昌社), 삼환상회(三環商會), 대성무역(大成貿易), 선일지물(鮮一紙物), 조광상사(鮮光商事) 등이 대표적이다. 1938년 당시 상업자본의 규모가 컸던 조선 상인으로는 화신백화점의 박흥식, 조선관염판매(朝鮮官鹽販賣)의 박호양, 최윤석상점(崔潤錫商店)의 장기천, 유한양행(柳韓洋行)의 유일한, 대창사의 백락원 등이었다. 이 중 백락원은 유일하게 누대에 걸친 종로 시전 상인 집안 출신으로 1916년 전통의 가업인 견직물 상점을 대창무역주식회사로 전환하였다.
종로뿐만 아니라 조선 제일의 상업회사 화신연쇄점은 박흥식이 대표였다. 박흥식은 평남 용강 출신으로 1926년 7월 상경하여 종로 2정목에 선일지물을 창설하였다. 이의 성공으로 박흥식은 일약 종로의 주목 받는 청년실업가가 되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히라다(平田), 쵸지야(丁子屋), 미나카이(三中井), 미츠코시(三越) 같은 일본인 백화점이 잇달아 들어서면서 종로의 상권은 크게 위축됐다. 그러나 일본 상권에 대응하여 종로에서는 최남의 동아부인상회(東亞婦人商會)와 신태화의 화신상회(和信商會)가 백화점 수준에 근접한 조선인 대형 상점으로 부상했다.
이후 경영난에 빠진 화신상회를 1931년 9월 15일 박흥식이 인수하여, 1932년 5월 10일 콘크리트 3층 건물(약 500평, 남녀종업원 153명)의 화신백화점으로 출범시켰다. 박흥식은 자신이 만든 학교를 전투기 생산 인력 양성소로 바꾸는 등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해 광복 후 반민특위의 1호 체포 인물이 되기도 했다.
박흥식은 1934년 6월 15일 전국 각지에 연쇄점을 설치할 계획을 발표하였고, 1935년에는 350개의 화신연쇄점이 개설되었다. 연쇄점이란 여러 곳에 점포를 설립하되 본부가 상품을 일괄 구매하여 가맹점의 필요에 따라 공급하는 소매방식의 체인이다. 종로에서 최초로 근대 프랜차이즈가 시작되어 조선 최대의 상업회사로 성장한 것이다. 근대 조선의 경제는 종로에서 싹을 틔운 뒤 자라나기 시작했다.
문혜진 부경대학교 HK연구교수
07.22 ‘의복 재단기’ 발명한 이소담
“옷 쉽게 만들어야” 여성들 재봉노동서 해방시킨 대발명

▲종로 동아일보 사옥에서 열린 재봉강습회에서 여성들이 실용복 만들기 연습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 1933년 6월 16일자). [사진 미국의회도서관]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경성에서 변화하는 여성의 옷차림은 ‘모던 열풍’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종로와 명동에는 ‘단발’과 ‘양장’ 차림으로 길을 오가는 여성들이 늘었고, 여학생들의 옷차림 역시 날로 세련돼졌다. 신문에서도 연일 여성들의 옷차림과 관련된 새로운 유행을 소개하고 평가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사람들은 여성들의 옷차림에 정말 관심이 많았다. 세간의 관심과 평가에는 환호도 섞여 있었겠지만, 실상은 비난이 더 큰 부분을 차지했다. 과감한 의상을 입은 여성들은 세상으로부터 쉽게 환영받지 못했다. 여성의 옷차림에 대해서만은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분위기가 꾸준했다. 달라진 여성들의 옷차림은 줄곧 ‘사치’와 ‘낭비’로 취급됐으며, ‘모던 걸’들은 한낱 유행을 따르는 철없는 족속들로 묘사됐다.
‘단정해야 한다’거나 ‘여성스러워야 한다’는 규범 역시 지속적으로 강요됐다. 대다수 여성들은 사회적 편견은 물론 ‘아버지’와 ‘남편’과 ‘오라버니’의 마뜩찮은 시선과도 싸워야만 했다. 그렇기에 여성의 모던한 차림은 큰 용기와 결심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1930년대에도 눈에 띄는 신식 차림의 여성들보다 전통적인 차림의 여성들이 여전히 더 많았다.
대한발명가협회 이사 지낸 여성발명가

▲당시에도 여성은 전통 치마저고리를 입었다. [사진 미국의회도서관]
이소담(李小淡)은 1936년 우리나라 최초로 ‘조선의복 재단기’를 발명한 사람이다.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29년 사리원고등여학교를 나온 뒤, 1933년에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이소담은 졸업과 동시에 가사과(家事科) 전공 경험을 살려 ‘평양편물강습회’에 출강한다.
이후 이소담은 경성으로 진출해 종로 중앙기독청년회(YMCA)에서 주최하는 모사편물강습회에 강사로 나섰다. 1934년에는 서울 여자기독청년회(YWCA) 앞 부인상회 경성당에 ‘이소담 재봉연구소’를 직접 차리기도 했다. 현대적인 의복을 구상하고 제작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연구소 개설과 동시에 편물(編物·뜨개질)과 재단 강습을 시작했다.
당시 종로에 있던 동아일보 사옥과 천도교회관, 기독청년회관 등지에서는 실용의복 재단을 배우려는 여성들을 상대로 크고 작은 재봉강습회가 연이어 개설됐다. 당시 종로는 신식 차림의 여성들로 넘실대는 모던 패션의 거리인 동시에 먼저 깬 여성들이 앞다투어 실용적인 재단 기술과 모던 의복 지식을 익히는 배움의 현장이기도 했다.
여성이 ‘뜨개질’과 ‘마름질’ 따위를 배우는 일은 전통적인 여성의 세계에 안주하는 성(性)역할 고착화로 오해되기 쉽다. 하지만 당시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소담의 현대의복 제작 강습은 파격적인 도전에 가까웠다. 이전까지 여성의복이라는 것은 각 가정에서 전승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짜고 짓는 법밖에 없었다. 일군의 여성들이 신식 의복 제작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갖고 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명실상부한 모던 복식문화 사회공동체로 성장할 계기를 마련했다.
또 그전까지 ‘모던 스타일’의 현대 의복은 너무 값이 비쌌고, 개인이 만들어 입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런 사정이었으니 이소담이 주최한 강습회에 여성들의 호응이 대단한 것은 당연했다. 강의장이 비좁을 정도로 수강생을 늘리고 수업도 더 많이 개설했지만 원하는 수요를 모두 감당하기 어려웠다.
여성용품 비밀주머니 개발, 뉴욕 초청도
이소담은 신식 의복제작 교육을 통해 여성들이 ‘자유’와 ‘해방’을 얻게 하는데 기여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은 금방 변하지 않았다. 개인이 설립한 작은 재봉연구소 하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서양식 바느질과 재봉기술을 익혀 현대 의복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았다. 장비가 없는 가정으로 돌아가서는 연습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소담은 스스로 모던 양장을 입을 줄 아는 깬 여성이었으나, 많은 여성들이 전통 의복을 입어야만 하는 조선사회의 복잡한 사정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소담은 여성들의 열악한 처지와 모자란 용기를 탓하기 전에, 그들의 현실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장치를 발명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치장에만 힘쓴 껍데기만 모던한 여성들과는 한 차원 다른 행보였다.

▲이소담이 발명한 ‘조선복재단형-사광형’의 쓰임새와 이소담의 사진을 실은 기사. (『조선일보』 1936년 1월 9일자)
이소담은 오랜 연구와 시행착오를 겪은 뒤 ‘조선복 재단기’를 발명한다. 기계의 정식 명칭은 ‘조선복재단형-사광형’이다. 특허국에 출원해 ‘실용특허 4호’로 인정받았다.(「특허국에 비친 여성의 창의」『조선일보』1962년 5월 22일) 이 발명품은 여성 의복 중에서도 저고리를 만드는 데 특화된 기계였다. 사광형(四光型)이란 기계 이름은 조작에 따라 네 가지 형태의 재단이 모두 가능하다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하나의 재단기로 ‘소매’와 ‘깃’과 ‘도련’과 ‘섭’ 네 가지를 모두 구현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한복’으로 불리는 조선의복은 손으로만 재단하기 매우 어려운 형태의 옷이었다. 특유의 날카로운 직선과 부드러운 곡선을 모두 살려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소담은 만들기도 어렵고 노동이나 활동에도 적합하지 않은 당시의 조선의복을 개량하고 또 그것을 가정에서 직접 손쉽게 재단할 수 있게 만들었다. 디자인은 검박하지만 활동성을 높였다. 기존 조선의복에서 완전하게 멀어지지 않은 절충적인 형태였다. 전통에서 벗어남이 없으니 비난 받을 염려도 적고, 여성의 노동과 활동에도 편리함을 제공해 주니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 받았다.
여성 발명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발명품의 쓸모와 사회적 기여에 대해서도 높은 평가가 이어졌다. 당시 여러 신문이 동시에 이소담의 발명과 특허출원을 주목했다. 『동아일보』(1936년 1월 1일)는 ‘우리네 옷 재단에 불편한 것을 느끼고 약 1년 동안 틈틈이 연구한 결과 조선복 재단형을 발명하야 특허국에 출원’했다고 기사를 냈다. 또한 『조선중앙일보』(1936년 1월 6일)는 ‘조선의 젊은 여성들이 가장 중요한 시기를 오직 무미건조한 재봉노동에 소비하고 마는 안타까운 사정을 일소하기로 결심하고 두루 고심한’ 결과물이라고 소개했다.
이소담은 당시 여성들이 옷을 만들고 입을 때 겪어야 했던 복잡한 사정과 문제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이해했다. ‘모던’을 앞세워 너무 앞서가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전통’을 방패막이로 안주하지도 않았다. 혹자는 이소담이 여전히 ‘조선옷’에 얽매여 있었다는 점에서 ‘조선복 재단기’의 발명이 여성해방과 거리가 먼 행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근시안적인 평가에 불과하다. 이소담의 발명은 조선의 여성들이 더 나은 미래를 꿈꾸기 위해 내딛은 힘찬 발걸음이었다. 주어진 여건 속에서 가장 필요한 장치를 고안하고, 조금이나마 진전된 변화를 실천해냈기 때문이다.
조선의복을 개량하고, 가정에서 직접 옷을 쉽게 재단할 수 있게 만든 이소담의 발명은 서양에서 장갑의 보급에 기여한 그자비에 주뱅(Xavier Jouvin)의 업적을 연상시킨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에서는 실생활과 노동 현장에서 장갑을 낄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장갑은 인간의 신체 중에서도 구체 관절의 움직임이 가장 복잡한 손에 착용하는 것이라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장인들이 실크와 가죽을 손으로 떠서 만든 장갑은 귀족들이 멋을 내기 위한 사치품에 불과했다.
1834년 프랑스의 그자비에 주뱅이 인체의 해부학적 분석을 바탕으로 손의 모양을 본떠 만든 금속틀이 부착된 재단기를 발명함으로써 장갑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자동화된 공정에 의해 한 번에 여섯 짝씩 만들어낼 수 있는 기계가 보급된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값싸고 질 좋은 장갑을 착용할 수 있게 됐다.
이소담이 더욱 대단한 까닭은 재단기의 특허권을 곧바로 사회로 환원해 많은 사람들이 그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 했다는 데 있다. 그저 누구나 쉽게 옷을 지어 입기를 바랐다. 이소담은 여성이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위해서는, 의복을 갖춰 입는 시간과 비용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대의 규범에 따라 ‘전통적’이거나 ‘여성스럽다’고 평가받는 옷차림보다는, 여성이 실용적으로 입고, 또 스스로 쉽게 옷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소담에게 ‘모던’이란 ‘멋’이나 ‘꾸밈’보다 ‘실용’과 ‘편리’에 가까웠던 셈이다.
이후에도 이소담은 계속 의복개량과 재단기술 연구에 매진한다. 평생을 여성의복과 관련한 발명에 투신했다. 하지만 자료의 부족 탓으로 이소담의 생몰 연대는 아직도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1930년대 여성의복계에 혁명을 일으킨 여성발명가에 대한 사회적 기록이 너무나 빈곤하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씁쓸하다. 더구나 이소담은 1950년대에는 대한발명가협회 이사직을 맡았으며, 1984년에는 여성 위생용품 휴대를 위한 ‘여성의복용 비밀주머니’를 개발한 공로로 ‘뉴욕국제발명전’에 초청되기까지 한 인물이다. 평생에 걸쳐 발명에 투신하며 모던한 세계를 스스로 창안해 낸 이소담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하다.
강부원 근대문화연구자·작가
07.29 개화기 상징 자전거
“축지법 써 남대문 훌훌 뛰어넘어” 라이더 서재필에 탄성

▲미국 망명에서 돌아와 독립신문을 만들 무렵 서재필이 부인 뮤리엘 암스트롱과 함께 자전거 여행을 하는 모습. [사진 서재필기념관]
비올 때 진흙탕은 끔찍하다. 조선말 종로 거리도 그랬다. 조선인 최초의 ‘자전거 라이더’는 서재필이었다. 모두가 진흙탕에 질척거리며 발을 디딜 때 “따르릉” 벨을 울리며 종로와 서대문을 유유자적하게 물 튀기며 지나갔을 그를 상상하니 재밌다. 사람들은 땅 위를 재빠르게 지나가는 서재필을 바라보며 “축지법(縮地法)을 구사한다”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전차(電車)와 기차(汽車), 그리고 자동차와 함께 자전거는 빠른 속도로 사람들의 어지럼증을 불러일으키던 근대 개화기의 상징이기도 했다.
외국 선교사·의사들 자전거 타고 다녀
1928년 발행한 월간잡지 ‘별건곤’ 2호는 1895년 사회 분위기를 다루며 “미국 망명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최초로 자전거를 탔는데, 차력으로 남대문을 훌훌 뛰어넘었으며 종을 한번 울리면 대포 소리 같았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그가 자전거를 타고 당시 청나라 사신 접대용 영은문을 허물고 새로 짓는 독립문 신축 현장을 오갔다는 신문기사도 있고, 이를 본 사람들은 신통방통한 자전거 모습에 놀라 그 물건을 ‘축지차(縮地車)’로 불렀다고 한다.
최초의 조선인 자전거 라이더는 서재필이지만 진정한 ‘최초’는 아니었다. 1884년에 조선에 온 미국 해군장교에 따르면 1886년에 이미 외국 선교사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이어 1893년에는 외국 의사들이 자전거를 타고 경복궁이나 덕수궁에 왕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에 자전거가 출현한 건 1883년에서 1886년 사이로 보인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했던 애비슨(O.R.Avison)은 “고종 황제가 내 자전거를 보고 ‘넘어지지 않고 달릴 수 있는 방법’을 궁금해 했다”고 전한다. 이에 애비슨은 “처음에는 균형을 잡기 어렵지만 오래 타면 넘어지지 않는다”며 시범을 보였다고 한다.
알렌(H.N.Allen)의 『조선견문기 1908』에는 조선인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선교사들을 ‘나리’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가마와 비슷해 보여서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자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구경꾼들의 요청에 못 이겨 길을 여러 번 왔다 갔다 해야 했다”고 한다.

▲조선 제일의 자전거 선수인 엄복동이 1923년 마산체육회 주최 전조선자전차대회에서 우승하고 찍은 기념사진. 당시 일본인들을 누르고 잇따라 우승을 따낸 엄복동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사진 엄복동기념사업회]
처음에는 목격자의 느낌에 따른 명칭이 붙었다. 스스로 가기에 자행거(自行車), 두 바퀴가 인상적이어서 안경차(眼鏡車)나 쌍륜차(雙輪車), 속도가 빨라 축지차(縮地車) 등이다. 그러다 1903년에는 정부에서 자전차(自轉車)라고 명명하고 100대를 업무용으로 구입한다. 이때부터 자전차는 공식 운송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1905년에는 “밤에 등불이 없이 자전거를 타면 안 된다”는 자전거 안전 법규도 생겨나고, 자전거 교통경찰도 등장했다. 1906년 정부에서는 자전거에 세금을 매기기도 했다.
서재필은 18세 때 과거에 합격한 천재로, 1882년에 교서관(校書館)의 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일본 도야마(戶山) 육군학교에 유학하고 귀국해 사관학교인 조련국(操鍊局)을 만들어 사관장이 된다. 그해 12월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사관생도들을 지휘해 신정부의 병조참판 겸 후영영관(後營領官)에 임명된다.
정변은 실패하고, 혁명파는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서재필만 미국으로 떠난다. 혈혈단신 미국에 도착한 그는 주경야독하여 1886년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이름도 필립 제이슨(Philip Jason)으로 개명해 조선인 최초 미국 국적 이민자가 된다. 이후 컬럼비아 의과대학을 졸업하여 미국 최초의 조선인 의사가 된다. 갑오경장으로 12년 만에 다시 돌아온 32세 젊은 서재필은 이번에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된다.
그는 국민의 계몽이 시급하기에 신문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1896년 ‘독립신문’을 창간한다. 사람들은 동분서주하는 그를 “조화꾼”이라 부르거나 미국에서 축지법을 배워 자전거를 타고 종로를 지나 남대문을 타넘어 독립문을 건설했다고 수군거렸다.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가다 반대파들에게 포위당했을 때 그가 자전거 벨을 한번 크게 울리자 이들이 혼비백산 달아났다는 기록도 전한다.
자전거가 본격 수입의 길에 오르자 상인들은 판촉을 위해 상금을 걸고 대회를 자주 열었다. 제 1회 대회는 1906년 4월 22일 훈련원(을지로 6가)에서 100원이라는 큰돈을 상금으로 걸고 열렸다. 대회 참가자 중에는 자전거 가게 점원이 많았고 엄복동 역시 자전거 가게인 일미상회 점원이었다. 그는 1913년 4월 경성일보사와 매일신보사가 인천(12일)·용산(13일)·평양(27일) 등에서 공동 주최한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에서 첫 우승 이후 줄곧 선두를 유지했다. 그의 인기가 얼마나 절정이었는지 조선인 최초의 비행사인 안창남과 함께 “쳐다보니 안창남, 굽어보니 엄복동”이라는 동요까지 유행할 지경이었다.
자전거 경기가 벌어지면 인파가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종로나 용산의 중심가 상점들은 아예 문을 닫을 정도였다. 고관들조차 부인과 자녀들을 대동하여 관람했다.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자전거 하면 엄복동이었다. 자전거 대회에서 일본 선수들을 꺾고 1등을 도맡아 1922년 5월 23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자전거 대회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통일 염원 담아 ‘삼천리호’ 이름 붙여

▲노년의 서재필 선생 모습. [사진 서재필기념관]
“장충단의 자전거 경주회. 일등 엄복동 군. 21일 장충단에서 윤업회(輪業會) 주최 자전거 대 경주회가 있었는데, 마침 일요일이 되자 일기가 좋으므로 군중은 수만 명에 달하는 대성황에 이르렀으며, 이 경주회는 운동장을 40번이나 도는 것으로 만장의 갈채 리에 엄복동 군이 제 일착이 되어 영광스러운 우승기는 엄군의 손에 떨어졌는데. 대판(일본 오사카)에서 멀리 승리를 기약하고 온 일본인 선수들은 그만 낙담실망이 되었고, 이와 같이 성황 중에 오후 6시에 무사히 폐회하였다더라.”
승승장구 인기몰이를 하던 대회도 위기가 있었다. 만세운동 다음해인 1920년 5월 2일 경복궁에서 열린 자전거 경기에서 사달이 벌어졌다. 일본인 경쟁자는 몇 바퀴를 남겨놓았지만 엄복동은 결승선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때 해가 졌다는 이유로 주최 측이 경기를 중단시켜버린다. 화가 난 엄복동이 본부석으로 뛰어들어 우승기를 찢어버리자 일본인들은 몰려들어 그를 구타했다. 이에 가만히 있을 조선인 관중들이 아니었다. 조선인과 일본인 간에 큰 싸움이 벌어지고 경찰이 출동해 겨우 진정시켰다고 한다.
정작 조선에 모던 문명의 이기를 선보였던 서재필의 가문은 갑신정변 이후 멸문지화를 당한다. 부모 형제들 대부분이 옥에 갇혀 참형을 당해 죽거나, 노비로 끌려갔다. 그의 아내는 자살하고 두 살 난 아들은 굶어 죽는다. 서재필에게 조선은 그토록 가혹했다.
1896년 귀국한 서재필은 한국어를 완전히 잊어버린 듯 영어만 사용했다고 한다. 그가 고종을 만났을 때 안경을 벗는 것이 예의라고 하자 “나는 미국 시민”이라며 안경을 쓰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담배를 문 채 절도 하지 않았으며 고종의 물음에는 영어로 대답했다. 그의 마음속에 쌓인 울분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그가 “서양 도깨비에게 홀려서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가 처음 타고 다녔던 자전거의 이미지도 꼭 좋을 리만은 없었다. 그러나 자전거는 거듭 태어난다.
자전거는 해방 이후 서울에만 2만9507대, 1947년에는 5만2451대로 늘어났다. 이 무렵 자전거가 오늘날의 자가용 구실을 하여 많은 직장인들과 학생들이 출퇴근과 통학에 이용했다. 꼬불꼬불 골목길로 자전거는 우편이나 물건 배달하기에 적당했다.
삼천리자전거는 현재 기아자동차의 뿌리였다. 1944년에 경성정공이 국내 최초 자전거 회사를 시작했다. 해방 직후 자전거 주요 부품을 완전 국산화하여 생산 기틀을 마련하고 1952년 경성정공의 이름을 ‘기아산업’으로 바꾸면서 최초 국산 자전거를 제조하였다. 기아는 통일 염원을 담아 자전거에 ‘삼천리호’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호영 서강대 K종교학술확산연구소 연구교수
08.05 공연 근대화의 요람
콜로세움 닮은 소극장, 조선 공연·관람 문화 판을 바꾸다

▲1902년 종로 봉상시 자리에 세워진 협률사. 500석 규모의 원형극장이었는데 최남선은 ‘로마의 콜로세움을 본떴다’고 썼다. [중앙포토]
한국 최초의 극장은 어디일까? 공연에 문외한인 사람도 가져 볼 만한 궁금증이다. 요새는 전국 어디를 가나 흔한 게 극장이지만, 따지고 보면 한국의 극장 탄생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질문에 답부터 먼저 하면, 정답은 협률사(協律社)다. 1902년 8월 15일 『황성신문』은 “희대를 봉상시 내에 설치하고, 한성 내 선가선무(노래 잘 하고 춤 잘 추는)한 여령(女伶, 재주꾼)을 뽑아 가르친다”는 기사를 실었다. 협률사 설치에 관한 첫 소식이다. 희대(戲臺)는 극장을 뜻하는 중국식 명칭이다. 봉상시(奉常寺)는 당시 궁궐의 제사와 의식을 관장하는 궁내부 소속기관으로, 지금의 서울 종로 새문안교회 인근에 있었다.
최남선 “런던 로열극장 같은 국립극장”
희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전속 연희단체의 이름을 따 협률사로 불렸다. 고종황제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경축 행사를 목적으로 설립됐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속편」에서 각국 외교사절 등 “귀빈 접대를 위해 여러 가지 신식설비를 급히 진행할 때, 봉상시의 일부 터에 둥근 벽돌로 로마의 콜로세움을 닮은 소극장을 건설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춤과 노래에 재능 있는 재주꾼들을 뽑아 공연을 연습하게 했다”고 적었다. 이렇게 뽑아 결성된 전속 단체가 협률사요, 나중에 이게 극장 이름이 됐다.
협률사는 종로 도심에 들어선 한국 최초의 실내극장이다. 이 극장이 들어서면서 한국의 근대 공연사가 시작됐다. 다시 최남선의 평가다. “협률사는 규모는 비록 작지만 무대와 층단식 삼방 관람석, 인막, 준비실을 설비한 조선 최초의 극장”이자 “런던의 로열극장, 빈의 왕립극장에 비견되는 유일한 국립극장이었다.”
그 이전 우리나라에는 극장이란 게 없었단 말인가. 정확히 말해 ‘실내극장’은 없었다. 협률사의 등장으로 한국은 본격적인 실내극장 시대로 진입하는데, 그것은 곧 극장의 근대화라는 말로 통한다. 무대와 객석이 엄격히 분리되면서 공연하는 사람과 관객의 만남 방식이 바뀌었다. 작품도 변화된 무대에 맞게 ‘새로’ 만들어야 했다. 야간 공연이 이뤄지면서 없던 밤 문화도 생겼다.
그러면 옛날에는 공연을 어디에서 했을까. 조선시대에 판소리와 농악, 줄타기 등 민간 연희는 정자나 누각, 마당 등 야외 공간에서 주로 공연했다. 중세 유럽의 이동식 무대 같은 산대(山臺)도 있었으나, 공연을 상설로 할 수 있는 실내 무대는 발달하지 않았다. 우리 공연예술의 후진성을 지적하는 게 아니다. 그게 우리 전통 공연의 특징이다.
왕실이라고 사정이 다를 게 없었다. 진연(進宴) 등 크고 작은 잔치를 할 때는 궁궐 내에 임시 가설무대를 만들어 사용했다. 여기서 기녀와 무동의 정재(呈才, 대궐 안의 잔치 때 벌이던 춤과 노래)가 펼쳐졌다. 한가운데에 공연자의 무대 공간을 확보하고, 임금의 좌우로 객석을 배치해 활용했다.
종로 한복판에 파고든 실내극장은 과거로부터 전해오던 우리나라의 이런 공연 문화를 일거에 바꾸었다. 개화기 근대로 향해 가는 우리 사회에 엄청난 변화였다. 우선 당시 도시 미관의 측면에서 실내와 야외의 구분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한성부는 ‘아현동의 무동연희장’ 등 가설극장이 사람들의 통행을 방해하고 거리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도시 내 활동을 금지했다. 실내극장은 도시화 과정의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대안이었다.

▲2021년 10월 국립정동극장이 ‘1902년 협률사에서 공연한 〈소춘대유희〉를 재해석했다’며 무대에 올린 〈소춘대유희-백년광대〉 리허설 장면.[사진 국립정동극장]
서구 문물의 수용이 곧 근대로 통하던 개화기, 실내극장은 근대를 상징하는 자부심이기도 했다. 희대를 “로마의 콜로세움 극장을 본떠 만들었다”거나, 런던과 빈의 유서 깊은 극장과 비교하는 식의 표현에서 그런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또한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도시 기반 중 하나인 전기조명을 사용함으로써 공연 제작 및 관람문화에 획기적 변화를 가져왔다. 밤 문화가 탄생한 것이다. 전차 운행도 이런 변화에 도움이 됐다. 1902년 12월 협률사의 대표작인 〈소춘대유희〉 공연은 극장 내의 전기조명과 극장 밖의 거리 조명, 이와 연계된 전차의 야간 운행을 기반으로 기획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국 최초의 실내극장’ 협률사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극장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급격한 사회 변화를 당시 황실은 감당하지 못했다. 황실은 협률사가 설립 당시의 초심을 잃고, 창기(倡妓)들이 펼치는 풍기 문란의 온상으로 변질했다는 이유를 들어 설치 4년 만인 1906년 폐지한다. 2년 뒤인 1908년 협률사의 명맥을 이어 재단장하고 출발한 극장이 원각사(圓覺社)다. 이인직은 경시청으로부터 연극장 개설을 허가받아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극장 문을 다시 열었다. 개관작으로 자신이 지은 신소설 『은세계』를 신극으로 만들어 선보였다. 『은세계』의 공연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신극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예 영업을 겸했고, 매일 7시부터 공연을 시작했다. 나름 성황을 이루어 “매일 수입이 백여 환에 달했다”고 한다.
“사동 연흥사의 연극 밤마다 인산인해”

▲1912년에 세워진 우미관은 당시 새 예술로 부상한 활동사진(영화)과 신파극, 각종 연희를 섞어서 운영했다.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원각사의 실내 규모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500석 정도의 소극장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근대극 운동의 선구자인 현철은 “수용인원은 500∼600명 정도의 소극장이며, 외형은 붉은 벽돌로 둥그렇게 생겼고 지붕은 삼각형으로 뾰족한 회색 양철지붕”이라고 말했다. 또한 “내부는 원형으로 전열에서 후열로 차차 높아지게 의자를 배치하고 북쪽으로 연단이 있어 이것을 무대로 사용하였으며, 동남쪽으로 출입문이 있었다”고 했다. 현관과 매표소, 분장실, 신발장, 무대를 밝히는 가정용 전등도 구비했다. 다행히 외형의 윤곽을 가늠할 사진이 남았다.
원각사의 레퍼토리는 대부분 당시 유행하던 〈춘향가〉와 〈심청가〉, 〈흥부가〉, 〈화용도〉 등 판소리였다. 그런데 실내극장으로 오면서 공연 형식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옛날 마당이나 누각, 정자 등 야외에서 소리꾼과 고수 둘이 하던 판소리는 이제 배역을 나눠 부르는 분창(分唱)으로 바뀌었다. 창극의 시발점이다. 관기(官妓)의 가무와 광대의 재담도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관립극장의 위탁 경영이라는 운영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원각사는 개관 1년 뒤에 문을 닫았고, 그 후 명맥만 유지하다 1914년 화재로 소실됐다.
이 무렵 종로를 근거지로 활동한 극장은 원각사만이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 한국인이 운영하던 극장 여러 개가 지금의 인사동 일대에 산재해 활동했다. 연흥사(1907)와 단성사(1907), 장안사(1908) 등이다. 영화 상영관으로서 앞으로 한국영화사에 중요한 역할을 할 단성사 외에 연흥사와 장안사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별로 없다. 규모 등은 모르고, 당시의 신문 기사를 통해 무엇 무엇을 했다는 정도만 알 수 있다.
현재 종로구청 자리에 있던 연흥사는 한국 최초의 신파극단인 혁신단의 〈육혈포강도〉 등 신파극 전문극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교동초등학교 근처에 있던 장안사는 1908년 경성고아원 건립 기금 마련을 위해 관기 100명을 동원한 ‘관기자선연주회’를 개최하는 등 자선공연을 많이 했다. 특이하게 〈삼국지〉 등 청나라의 연희도 선보였다.
단성사와 우미관(1912)이 그랬듯이, 새 예술로 부상한 영화(활동사진)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극장 대부분은 활동사진과 신파극, 각종 연희를 섞어서 운영했다. 실내극장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당시의 상황에서 다목적극장은 불가피한 전략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대정관(1912) 등 일본인이 운영하는 극장이 사대문 안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주목적은 영화 상영이었다.
실내극장 중심으로 공연 문화가 정착하면서 신문도 점차 관심을 가지고 ‘공연 정황’을 알리기 시작했다. 1912년 4월 2일 『매일신보』는 “사동 연흥사에서 흥행하는 혁신단 연극은 날이 갈수록 밤마다 인산인해를 이룬다”며 “친목회의 경비를 보조할 목적으로 장차 연주회를 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같은 달 12일 자에는 “원각사에서 공연하던 문수성의 신연극이 기생 연주회로 인해 며칠간 쉰다”는 소식을 실었다.
오늘날 실내극장 없는 공연은 상상할 수 없다. 일찍이 실내극장 전통이 없었던 우리나라는 구한말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구식 실내극장을 수용하여 공연 근대화의 초석을 놓았다. 그 시발점이 된 종로는 소극장의 산실 ‘대학로’와 세종문화회관 등을 품고 여전히 한국 공연 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정재왈 예술경영가·서울사이버대 교수
08.12 수입 식료품 대중화
꿀보다 달콤한 설탕, 조선인 입맛·체형까지 바꾸다

▲조선시대 종로 시전거리에 있었던 잡화점 모습. 여기서 알사탕도 팔았다.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단맛하면 꿀이지만 꿀보다 더 단 게 설탕이다. 예부터 우리도 차조와 찹쌀로 맥아당을 만들어 먹었다. 하지만 맥아당보다 사탕수수를 정제한 설탕이 더 달았는데, 불행히도 조선에는 사탕수수가 나지 않았다. 조선에서 단맛은 꿀과 엿으로 만들었고 중국에서 소량 수입하는 설탕은 궁중과 상류층을 위한 ‘약재’에 불과했다. 그러다 1890년대에 들어서 종로의 잡화점에서 수입 설탕으로 만든 사탕을 판매하기 시작한다.
상점이나 잡화상 하면 우선 종로다. 1887년경 일본인들이 지금 충무로인 진고개를 중심으로 수입품 상점을 열었다. 이에 질세라 조선인들은 종로 대광교에서 남대문까지 수입품, 외래품을 취급하는 ‘모던 상점’을 연다. 박문서관, 천응상점 등이 대표적인 종로의 조선인 상점이었다. 이곳에서 사탕을 비롯한 근대 식료품들을 판매하기 시작한다.
설탕 녹여 얼린 아이스케키 인기 폭발
1890년대 영국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상점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나는 종각 옆에 있는 서울에서 가장 큰 상점에 한번 가 보았다…상점에 있는 주요 상품은 아래와 같다. 흰 면제품 옷감, 짚신, 삿갓…자홍색, 진홍색, 초록색 등 역겨운 염료를 물들인 알사탕, 말린 미역’

▲1930년대에 등장한 아이스케키 통.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이 글에서 눈에 띄는 것이 색색으로 물들인 알사탕이다. 당시에 ‘꿀보다 단 게 사탕’이라는 동요도 있었을 정도로 새로운 맛의 세계를 선사한 설탕의 대표선수였다. 설탕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1910~20년대 요리책인 『반찬등속』, 『부인필지』 등에 설탕이 들어간 음식은 5.1%였지만 1930년대에는 16.5%로 올라가고, 1940년대에는 31.9%로 치솟는다.
그러나 설탕은 눈물이 담긴 상품이었다. ‘설탕 한 근과 눈물 한 되’라는 제목의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그렇다. 1930년 8월 27일자 『중외일보』에는 “(중국에서) 신의주로 인력거를 타고 건너오려 할 때는 철교 근방에서 팔 구세 십여 세 된 소녀들이 십여 명씩 열을 지어 종이에 싼 뭉치 한 개씩을 손에 들고 ‘좀 건너다주서요! 아무 일 없습니다.’ 이런 소리를 애원적으로 연발하면서 따라온다. 처음은 기자도 무슨 영문인지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중에 듣고 보니 그들의 손에 든 뭉치는 사탕(砂糖)봉지요 그들의 요구는 강 건너까지 가져다달라는 부탁이다.” 설탕 밀수에 나선 어린아이들의 고달픈 모습이었다.
1921년 평양에 일본이 독점적인 설탕 공장을 설립한다. 이 공장은 대만에서 수입한 사탕수수와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등지에서 재배한 사탕무를 원료로 삼았다. 공장의 등장으로 조선에서 ‘설탕 문명’이 펼쳐진다. 상류 식자층은 아예 ‘설탕 문명론’을 주장했다. 이들은 설탕이란 서구문명을 상징하는 대표적 상품이었기에 한 나라의 설탕소비량이 문명의 수준을 드러낸다는 주장을 펼쳤다. 상류층에서는 ‘생활개선운동’이란 명목으로 위생과 영양을 위해 가정용 요리에도 설탕을 넣도록 적극 권장했다.

▲제일제당이 만든 선물용 설탕 상자. 설탕은 한국인의 입맛과 체형까지 바꿔 놓았다.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물론 이런 선전에는 제당회사, 설탕 가공 식품업자, 식료품 상회 그리고 일본 유학생 출신들이 앞장섰다. 도시의 상류층 현모양처가 설탕을 요리에 넣는 모습은 매력적이었다.
사탕에 이어 인기를 끈 아이스케키는 1930년대 초부터 등장한다. 1932년에 처음으로 아이스케키 제조기계 신문광고가 등장한다. 아이스케키는 행상이 팔기도 하고 주문 받아 배달해 주기도 했는데 이상하게도 주로 한밤중에 먹었다. 1937년에 갑자기 아이스케키가 엄청나게 유행한 이유는 그 해 여름의 기록적인 폭염 때문이었다. 조선일보 1937년 8월 21자에는 “금년은 예년에 보지 못하든 더위가 오래 동안 계속하여, 여름 장사들이 두둑이 한 몫” 보았으며 “그중에서 가장 고객의 수효를 많이 가진 아이스케키 장사들 중에는 백 개 혹은 이백 개씩 도매로 사서 자전거 행상을 하는 소매업자에게 팔기도 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일확천금의 꿈도 잠시, 아이스케키는 여름철 전염병의 원흉임이 밝혀지며 철퇴를 맞는다. 조사결과 1㎖에 최대 730만여 마리의 세균이 검출되어 “청계천 물보다 더럽다”는 오명을 입고 금지식품으로 전락한다. 그렇다고 안 팔고 안 먹을 한국인이 아니기에 여름마다 아이스케키 행상과 단속하는 순사들의 숨바꼭질을 보며 사먹는 재미가 쏠쏠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조선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단맛은 초콜릿이다. 아이스케키가 대중화에 주력했다면 초콜릿은 고급화 전략을 펼친다. 1927년 모리나가(森永) 광고는 맛도 영양도 아닌, 편지를 쓰는 신사 그림에 “사랑한다면”이라는 카피를 올린다. 요즘으로 치면 발렌타인 데이 식 마케팅이었다. 백화점을 중심으로 여학생의 감상문을 올리고, 동요 현상모집을 통해 어린이의 입맛까지 노리는 광고 전략이었다.
이젠 ‘설탕 한 근은 땀 한 말’ 비만과 전쟁

▲모리나가 ‘밀크 초코레-토’의 일간지 광고.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하지만 모리나가의 ‘밀크 초코레-토’가 아니라도 이미 구한말부터 초콜릿은 조선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1920년대 여성 배우이자 가수였던 이애리수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과자 중에 제일 좋은 것은 초코레트”라고 했다. 심지어는 초콜릿 애호가를 ‘초코레잍당(黨)’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초콜릿 맛에 감동해 조선일보와 인터뷰한 사람은 “조선의 과자는 빙사과, 밥풀강정, 백년을 가야 그 타령인 고사떡뿐”이라고 투덜거리며 조선의 과자도 발전해 새로운 맛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0대에 들어서면서 그렇게 극성이던 설탕 식품 아이스케키와 밀크 초코레-토도 일제히 사그라진다. 입맛이 변해서가 아니라 전쟁 물자가 부족해진 일본이 설탕 소비를 줄이고자 말을 바꾼 것이다. 설탕은 “혈액을 산독화(散毒化)하고, 병에 대한 저항력을 감퇴시키며… 뼈가 가늘어져 부러지기 쉽고, 충치를 생기게 하는” 해로운 식품이라고 건강을 위해 설탕 소비를 줄이라고 강요한다.
일제가 설탕 소비를 금지했다고 입맛이 변하는 건 아니다. 해방 후에는 단맛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이에 정부는 수입을 대체하고자 국내 업자를 육성한다. 이를 통해 급성장하는 기업이 바로 삼성의 모체이자, 창업주 이병철이 세운 제일제당(지금의 CJ제일제당)이다. 정부는 제일제당에 파격적인 경제적 혜택과 수입 독점권을 주며 설탕 제조를 독려했다.
전쟁이 끝나고 전국적으로 다방이 생겨나고 미군을 통한 서양문화의 급속한 전파로 설탕 소비량이 급증한 1953년 제일제당은 설탕생산을 시작한다. 당시 수입 설탕은 1근(0.6㎏)에 300환이었는데 제일제당은 이를 100환으로 정하면서 밀려오는 수요에 공장은 24시간 가동해야 했다.
1960년대에는 음식에도 설탕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명절 선물에는 설탕, 밀가루와 쌀, 계란, 돼지고기, 참기름이 주를 이뤘으나 그 중 설탕은 으뜸이었다. 심지어 손님이 찾아오면 설탕물을 대접했고, 복통이나 설사에 약 대신 따뜻한 설탕물을 마셨다.
근대 개화기에 한반도로 올라선 설탕으로 인해 우리 입맛은 완전히 바뀌었다. 가정에서는 설탕을 듬뿍 넣어 음식을 만드는 기혼 여성에게 ‘근대적 현모양처’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입히기도 했다. 설탕을 녹여 만든 사탕, 아이스케키 그리고 초콜릿 뿐 아니라 일본에서 들어온 과자 센베이, 그리고 설탕을 녹여서 만든 눈깔사탕 ‘옥춘당’도 전통과자가 아니라 모두 설탕으로 조미한 ‘모던 식품’이다. 심지어 번데기나 정어리, 쥐치조차도 설탕으로 다시 조리하면서 대중들의 인기를 얻기도 했다.
각종 먹거리와 결합한 설탕은 한국인의 입맛과 체형, 질병의 종류까지 바꿔 놓았다. 그리고 블랙홀처럼 모든 먹거리를 끌어들였다. 술을 비롯해 쌀과 밀가루 같은 탄수화물은 몸속에선 설탕이다. 결국 설탕은 비만과 당뇨의 원인이자 싸워 물리쳐야 할 ‘악마’로 변했다. ‘설탕 한 근과 눈물 한 되’였던 제국열강과의 설탕 전쟁은 이제 현대 한국인의 살과 혈액으로 전쟁터를 옮겼다. ‘설탕 한 근은 땀 한 말’…. 우리는 러닝머신 위에서 제국열강이 끌어들인 설탕과 뒤늦은 싸움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김미혜 호서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
08.19 식민지 청년 꿈을 깨운 비행기
이응호·서왈보·안창남, 조선 개화·부강의 꿈을 싣고 날다
근대 초기 사람들에게 가장 큰 충격과 매혹을 선사한 첨단 문물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마 비행기였을 터이다. 거친 엔진음을 내며 철제 프로펠러를 무섭도록 팽팽 돌려 창공을 가르는 비행기는 과연 ‘모던’이 무엇인지를 단박에 이해하게 하는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는 누구였을까? 우리나라 사람 열에 아홉은 안창남을 최초의 조선인 비행사로 알고 있다. 1922년 12월 10일 안창남은 ‘금강호’를 타고 조선인 최초로 경성 하늘을 비행했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가 당시 유행가의 노랫말로 쓰일 정도였다. 당시에도 대중에게 최초의 비행사는 안창남으로 많이 알려졌던 모양이다.
그런데 안창남보다 더 일찍 비행사가 됐던 조선인이 있었다. 이응호와 서왈보다. 제 1차 세계대전 말미였던 1918년 미국 공군에 조종사로 임관한 이응호와 1919년 중국 남원비행학교를 졸업하고 비행사가 된 서왈보의 기록이 남아 있다. 1921년 일본에서 파일럿 시험을 통과해 자격을 얻은 안창남보다 2~3년 더 빠른 기록이다. 이후 이응호는 미국에서, 서왈보는 중국에서 계속 비행 이력을 쌓았다. 이들은 그렇게 비행기에 조선의 개화와 부강, 그리고 독립의 꿈을 실었다.
경성 공개비행 시연 보고 미래 결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소장한 1923년 일본 잡지 ‘역사사진’ 8월호에 실린 안창남의 모습. [사진 국립항공박물관]
이응호는 1896년 인천 제물포에서 태어났다. 국운이 쇠하던 1903년 아버지를 따라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다. 이응호는 하와이 주둔 미국 육군 항공대의 비행기를 바라보며 비행사로서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는 유색인종 차별로 미 항공대 입대에 번번이 실패했지만 1917년 제 1차 세계대전이 깊어지면서 조종사 전력이 부족했던 미군이 징병 기준을 완화한 덕에 미군에 입대할 수 있었다. 조종사 교육을 받고 1918년 정식으로 미군장교로 임관한 이응호(미국명 George Lee)는 미군 소속 파일럿으로 참전해 미국과 유럽에서 총 156회의 출격을 기록하고 무사히 전역했다. 당시 조선인 출신 비행사로서 그가 보여준 활약은 미국 한인 교포들이 발행하던 『신한민보』 및 미국 지역지인 ‘스탁턴 데일리 레코드(Stockton Daily Record)’에도 상세히 보도된 바 있다.
1887년 평양 태생의 서왈보는 대성학교를 나왔다. 안창호가 설립한 이 학교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할 일꾼을 길러내는 터전이었다. 그는 대성학교 졸업 후 1910년 안창호와 시베리아로 건너가 독립 운동가를 양성하는 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왈보는 신문을 통해 경성에서 공개비행 시연이 있을 것이란 소식을 접한다. 이전에도 신문이나 잡지에서 서양의 비행기가 종종 소개되긴 했지만, 우리나라에서 대중에게 공개된 최초의 비행(‘조선반도에서 최초의 공개비행 개최키로’, 『경성일보』, 1913년 8월 26일)은 1913년에 이뤄졌다. ‘공개비행대회’가 열리기로 한 용산으로 향한 서왈보는 그곳에서 난생 처음 비행기를 보고 자신의 미래를 결정짓는다.
그는 1919년 중국에서 육군항공학교를 수료한 뒤 조종사 자격으로 의열단에 가입했고, 1924년에는 중국 정부군 풍옥상(馮玉祥) 사령관 휘하의 항공대 대대장을 역임했으며, 베이징 항공학교의 교수로도 활동했다. 이어 1926년 5월 허베이(河北) 상공에서 새로 수입한 이탈리아 제조 비행기 10대를 일일이 시승하면서 점검하다가 기체 이상으로 추락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포장,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인 이응호(맨 왼쪽). [사진 스탁턴 데일리 레코드]
서왈보의 미래를 바꾼 그날의 공개비행 현장에는 13세 소년 안창남도 있었다. 서왈보와 마찬가지로 비행의 꿈을 품게 된 안창남은 이후 1917년 한국을 방문한 미국인 파일럿 아서 스미스(Arthur Smith)가 용산에서 선보인 공개비행을 계기로 일본으로 건너가 진짜 비행사가 되기 위해 도전한다.
이후 천신만고 끝에 아카바네(赤羽) 비행제작소에 들어가 비행기 조립과 정비 기술을 익혔으며, 오구리(小栗) 비행학교에 진학해 6개월간 ‘비행기술수업’을 이수했다. 1920년 11월에 비행학교를 졸업한 뒤, 이듬해인 1921년 5월에 치러진 일본 최초의 비행자격 시험에 당당히 합격해 정식으로 비행사가 됐다. 17명 응시에 2명 합격이었고, 안창남은 수석을 차지했다. 이후 1922년에는 도쿄~오사카 간 우편대회 비행에 참가해 최우수상을 타기도 했다. 조선인에 대한 온갖 차별을 이겨내고 거둔 값진 성취였다.
이로써 우리 동포들 사이에서 안창남은 이미 스타가 돼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에서 자신이 소유한 비행기를 가지고 직접 고국을 방문한다니 대중의 흥분과 열기는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안창남은 1922년 12월 5일 ‘금강호’라 이름붙인 1인승 영국제 뉴포트(Nieuport) 단발 복엽기를 해체해 배를 이용해 일본에서 조선으로 들여온다. 이어 금강호를 손수 다시 조립해 공개비행을 준비했다.
삼천리 방방곡곡에 안창남 열풍이 일었다. 특히 경성의 종로는 안창남으로 인해 거리가 들썩일 정도였다. 종로에 사옥을 둔 공개비행 주최사인 동아일보가 연일 안창남 관련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안창남비행후원회’가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조직됐다. 동아일보 종로 사옥과 종로 경운동에 있던 천도교 수운회관에서는 안창남 환영 및 후원행사가 열렸다. 종로 곳곳에서 열린 강연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거리를 오가던 수많은 인력거꾼을 비롯해 전차 운전수와 택시 운전사들 모두의 최종적인 꿈은 비행사가 되는 것이었고, 안창남은 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일본인 비행사들을 실력으로 압도한 안창남을 통해 조선인들은 식민지인의 울분을 해소하고 조국 독립의 희망을 엿보았다.
조선인 가장 많은 종로의 하늘 날아

▲1917~18년 당시 미 공군 훈련기로 쓰였던 커티스 JN-4호. [사진 미 공군역사관]
입국 닷새 뒤 1922년 12월 10일에는 고국의 수많은 동포 앞에서 시범비행이 실시됐다. 안창남의 금강호가 이륙하는 여의도 비행장 모래톱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군중 5만 명이 운집해 그의 비행 성공을 기원했다. 여의도에서 이륙한 안창남의 비행기는 마포와 서대문을 거쳐 종로를 향했다. 창덕궁 상공까지 날아간 것은 자신의 공개비행을 격려하고 특별 하사금까지 마련해준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안창남이 탄 금강호 날개에는 조선반도 전체 지도와 금강산을 새겨 넣었다. 조선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드러낸 표식이었다. 안창남은 종로 상공을 순회하며 “경성의 하늘! 경성의 하늘! 내가 어떻게 몹시 그리워했는지 모를 경성의 하늘!”(‘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 『개벽』, 1923년 1월호)이라고 격한 감정을 드러냈다. 물론 그 순간 종로 거리를 오가던 수많은 조선인들은 안창남의 금강호가 종로의 하늘을 활공하는 모습을 경탄하며 올려다 보았다.
종로가 안창남의 고국방문 기념비행의 반환점으로 선택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비행기는 당시 경성에서 유일하게 활주로를 갖추고 있던 여의도 일본육군비행장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지만, 가장 많은 조선인들이 모여 살고 있는 종로의 하늘을 반드시 경유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안창남의 비행은 조선인들에게 독립에 대한 기대와 자유와 해방을 향한 희망을 선사하는 가장 중요한 ‘민족주의 의례’이자 역대 최고의 관심과 흥행을 기록한 ‘모던 퍼포먼스’였기 때문이다. 종로의 하늘이야말로 일제에게 절대로 내줄 수 없는 조선인들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으며, 새롭게 쏘아 올릴 해방 조선의 근거지였던 셈이다.
시범비행을 통해 조선인들에게 환대와 애정을 받은 안창남은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해 후배 비행사들을 양성하는 데 매진한다. 안창남은 비행사로서 자신의 노력과 경험이 조선 독립의 자원으로 이용되길 끊임없이 바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1930년 비행훈련 도중 엔진 결함으로 인해 추락사한다. 조선 최초의 비행사다운 죽음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해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한다.
강부원 근대문화연구자, 작가
08.26 소비 욕망의 해방구 백화점
미모의 ‘데파트-껄’ 보려는 청년들로 백화점 문턱이 닳다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자리에 있었던 미쓰코시백화점 전경.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치마를 붙들고 늘어지거나 끈질기게 따라붙는 거지를 가까스로 물리치고 백화점의 문을 밀고 들어서면 그야말로 별천지다. 텁텁한 바깥 공기와는 사뭇 다른 향긋하고 야릇한 도회적인 냄새와 유리 진열장 안에 펼쳐진 고급스러운 물건들이 오감을 자극한다.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총총거리던 발걸음 속도가 줄어든다. 1930년 8월 29일자 조선일보는 “찬란한 일류미네이순과 엘리베이터와 마네킹과 옥상정원 이러한 것들이 주출하는 특이한 긔분 이것이 근래의 요귀 데파-트먼트”가 경성에 등장해 도회인의 소비력을 고갈시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당시 경성에는 5개의 백화점이 성업 중이었다. 그 중에서도 미쓰코시(오늘날 신세계 본점)와 조지야(오늘날 롯데 영플라자 위치)의 경쟁이 가장 치열했다. 이 두 곳과 더불어 한반도와 일본 내지(內地), 만주에 이르기까지 십여 개의 지점을 둬서 ‘백화점의 왕’이라고 일컬어지던 미나카이, 생활용품이 저렴해 서민층에게도 인기가 많았던 히라타는 모두 일본 백화점으로서 본정(충무로) 일대에 밀집해 있었다. 유일하게 조선인 자본으로 종로에 자리를 잡은 화신도 점차 가열되던 백화점 상업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 밖에도 백화점이라는 간판을 단 크고 작은 양품잡화점이 수없이 생겨났다.
꽉 막힌 결혼시장 문을 열어준 존재
화신의 점주 박흥식은 요즘으로 치면 워커홀릭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오전에는 매일 같이 선일지물과 인쇄소에서 회의를 하고 오후에는 백화점을 시찰하고 운영회의를 계속했다. 손에는 새로운 사업계획에 대한 메모가 잔뜩 든 가방이 항시 들려 있었다. 매주 월요일 화신 5층 옥상에서 열린 직원 조회에서는 상업에 대한 상식과 직원들의 단결을 강조하는 박흥식의 탁월하고 명철한 훈화에 많은 점원들이 감복했다 한다. “남이 하지 않는 사업을 하자”는 신조를 가진 혁신적인 사업가로서 일본 내지에도 없는 체인스토어, 즉 연쇄점을 구상하여 1935년 350개의 지점을 완성했다.
화신백화점 여직원은 대체로 16~23세까지의 처녀들로서 이들을 보통 ‘데파트-껄’, ‘쇼프껄’이라고 했고 판매 담당을 ‘우리꼬(賣リ子)’라고 부르기도 했다. 미쓰코시의 쇼프껄들은 보통 월 30원 정도의 급료를 받아 다른 백화점에 비해 높은 편이었다. 이들은 대개 순명, 진명여학교나 여자상업고등학교를 마친 비교적 점잖은 집안의 딸들로서 외모를 우선으로 뽑았다.

▲백화점 중 유일하게 조선인 자본으로 종로에 자리를 잡았던 화신백화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미모의 인텔리 여성을 보기 위해 청년들은 백화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그 때문에 “미쓰코시에는 일 년 이상 가는 우리꼬가 없다”고 할 정도로 백화점을 곧 그만두고 시집을 가버리는 직원이 많았다. 잡지 『삼천리』는 이들을 두고 “남녀교제의 관문이 꽉 막힌 밀폐된 결혼 시장의 문을 열어주는 귀여운 존재”라고 표현했다. 당시 자유연애, 자유결혼이 시대의 새로운 풍조로 등장하면서 백화점은 요즘 세태말로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를 지향하는 이들의 장소였던 셈이다.
하지만 심훈의 소설 『영원의 미소』에서 그려지듯 생활고에 시달려 한때 문사였던 최계숙이 백화점 화장품부에서 마네킹처럼 하루 종일 서서 뭇 사람들의 관음증적 시선을 견디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화신의 경우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 12시간 꼬박 서 있어야 하는 극한 직업이었다. 앉을 수도 없이 퉁퉁 부은 다리로 고객을 응대하는 어린 처녀들이 물건을 사느라 10원짜리 100원짜리를 포켓이나 핸드백에서 꺼내어 주저 없이 쓰는 손님을 바라볼 때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또 어떠했으랴.
미쓰코시와 정자옥(조지야)은 방인근의 소설 『마도의 향불』(1922~1933)에서 등장인물들이 세련된 양복을 맞추거나 애인에게 목도리 같은 ‘프레센트(선물)’를 사는 백화점이다. 명절을 앞두고는 ‘증답품’이라고 부른 선물 용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당시 백화점은 주로 미국 백화점을 모델로 했다. 그 때문에 층별 상품 구성이 서구 백화점과 거의 같고 오늘날까지도 그 틀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맨 윗층에는 식당과 이벤트홀, 그 아래층은 가구와 가전, 중간층에 의류, 1층에는 잡화, 지하는 식품이 주로 자리한다. 백화점 식당은 양식, 화식, 조선식이 두루 갖춰져 있었고 라이스 카레, 야사이 사라다(야채 샐러드), 가쓰레쓰(커틀릿) 같은 새로운 메뉴가 유리 진열장 안에 모형으로 갖춰져 있었다. 여유 있는 가족의 외식 및 인기 있는 데이트 장소였는데 지갑이 얇은 샐러리맨들도 가끔 들렀다.
철마다 옷 해 입는 기생들이 중요 고객

▲미쓰코시백화점 엘리베이터 앞에 선 엘리베이터 걸 모습. [사진 『조선과 건축』 9집 11호]
백화점 매출의 가장 큰 부분은 역시 의류였다. 주로 2, 3층에 위치한 의류 코너에는 신사복, 숙녀복, 아동복이 판매되었다. ‘레디메이드’라고 부르는 기성복은 맞추는 데 시간과 비용이 걸리는 맞춤복에 비해 저렴했고 바로 입어보고 살 수 있어 양복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 백화점 부인복 코너에는 귀부인같이 성장(盛裝)을 하고 하녀를 데리고 부군을 따라 비단을 사러 오거나 옷감을 만져보면서 그 당시 시쳇말로 ‘껄렁껄렁하다(시시하다)’고 하는 이도 있었다. 점원은 으레 비싼 것, 유행하는 것을 권했다. 겨울 조지야에서는 ‘모피-데이’ 행사가 열렸고 철마다 유행하는 옷을 해 입고 손님을 맞는 기생들은 백화점 주단포목부의 가장 중요한 고객이었다. 얼핏 보면 본견과 비슷한 값싼 인조견은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백화점은 말 그대로 백화(百貨)가 넘쳐나는 공간이지만 여기에서 제공하는 각종 서비스, 이벤트, 볼거리도 이곳으로 가는 이유였다. 물건을 사면 가까운 곳은 자전거 부대가 배달해 주었고, 아이들과 남편 옷을 유행하는 스타일로 손수 지어 입힐 수 있도록 하는 재봉강습회는 여염집 부인들에게는 외출의 명분이었고, 백화점은 집객과 판매를 촉진하는 기회였다.
미쓰코시백화점 옥상은 이상의 소설 『날개』 속에서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라고 속으로 외친 ‘나’처럼 답답하고 무기력한 도회인의 감성을 분출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옥상은 여름이면 등나무꽃이 흐드러지게 핀 그늘이 있고 시원한 분수대와 탄산음료를 파는 소다 파운틴(soda fountain), 어린이들을 위한 운동장, 산책길, 온실과 갤러리까지 갖춘 복합 문화공간이었다. 조지야를 비롯하여 옥상에 작은 온실과 동물원을 갖춘 백화점도 있어 꽃과 새, 원숭이도 구경할 수 있었다. 여행객을 위한 ‘투어리스트 뷰로’와 ‘조선물산’이라고 부른 토산품점도 백화점 1층에 자리했다. 조지야는 치과부, 사진부가 있어 백화점에 들른 김에 치과 진료를 받거나 사진을 찍을 수도 있어 편리했다.
사람이 몰려 늘 붐비는 만큼 백화점에는 크고 작은 범죄도 끊이지 않았다. 특히 ‘만빗기(훔치기)’와 ‘와스리(소매치기)’라고 부르는 것이 제일 많았다. 만빗기 범죄자는 시로토(서투른 사람)가 7할에 상습 전문가가 3할, 남자가 3할, 여자가 7할의 비례였다. 훔치는 상품은 대부분 일용 잡화였다. 스리는 특히 엘리베이터 안에서 활동하거나 손님이 물건을 고르는 사이 핸드백이나 보자기를 도둑질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에 백화점 1층에는 청원 사복형사가 혹여 발생할 지도 모를 범죄를 매의 눈으로 감시했다.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욕망은 인간의 본성이다. 백화점은 밑 빠진 항아리처럼 채울 수 없는 욕망의 발전소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김기림의 표현대로 ‘욕망의 집어등’처럼 강하게 이곳에 끌리고 말았던 것이다.
최지혜 미술사학자·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09.02 과학 문명 상징 전차의 등장
“철도깨비” “쇠당나귀”…경성 전차, 도쿄보다 4년 먼저 달려

▲1899년 5월 17일 동대문에서 열린 전차 개통식 모습. 서대문에서 종로를 거쳐 청량리까지 이어진 전차 노선은 서울의 경관과 일상을 송두리째 바꿨다.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1899년 5월 20일, 서울에서 전차가 최초로 운행했다. 사흘 전인 5월 17일에는 동대문에서 성대하게 전차 개통식이 열렸다. 서대문(경교)에서 종로를 거쳐 청량리까지 이어지는 전차 노선은 서울의 도시 경관과 일상생활을 송두리째 바꿨다.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속도로 빠르게 달리는 전차를 구경하기 위해 철로 주변마다 사람들이 북적였다. 전차 기점과 종점에는 어떻게든 전차를 타보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뤘다. 당시로서는 비싼 운임이었던 전차타기에 혼을 뺏겨 가산을 탕진한 촌로가 생겼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우리나라의 근대화가 일본에 비해 뒤처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근대 과학 문명의 핵심인 전기와 전차의 도입만 보면 일본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서울의 전차는 도쿄(1903년)보다 4년이나 앞서 운행을 개시했다. 물론 일본에서는 서울보다 먼저 교토(1895년)와 나고야(1898년)가 전차를 운행했지만, 당시 일본에서 온 군인이나 관리들에게도 전차는 매우 낯선 신식 문물이었다. 일본 군인들이 전차에 탑승하기 위해 조선인을 강제로 내리게 하고 자리를 몽땅 차지해 사회적 문제가 됐을 정도였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고종은 경운궁을 중심으로 제국의 격에 맞는 근대 도시로의 전환을 모색했다. 전차는 고종의 ‘광무(光武) 도시계획’ 일환으로 기획한 작품이었다. 고종은 한양 일대에 전기 공급이 원활하게 이뤄지길 원했다. 자연스레 부대사업으로 전기를 활용하는 전차 노선 부설을 함께 구상했다. 궁을 중심으로 한 종로 일대를 관통하는 전차 노선을 만드는 것은 민간에 전기를 보급하는 일이기도 했다.
운종가(雲從街)로 불리던 종로의 주요 지점마다 전신주를 설치하고, 서울을 동서방향으로 관통하는 전차 선로를 깔았다. 미국 자본으로 세운 한성전기회사에 사업권을 주고, 일본의 기술과 전문 인력을 동원해 사업을 진행했다. 즉, 전차 노선 부설과 운행은 근대 국가 출범을 선언한 고종 황제의 최초 정부주도 기간산업이자, 국책사업이기도 했다.
“상여 같은 전차 탓 불미스러운 일 생겨”

▲종로 화신백화점 앞을 지나는 213호 전차. [사진 서울역사박물관·한국사진사]
초기 전차 운행으로 새로운 문물을 마주한 사람들은 충격과 공포를 경험했다. 평균 시속 15㎞, 최고 시속 30㎞로 달리는 100마력의 40인승 전차는 당시 사람들에게 “철도깨비”, “쇠당나귀”로 불렸다. 당시 가마와 인력거가 주요 이동수단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전차의 속도와 규모가 얼마나 대단하게 느껴졌을지 짐작할 수 있다.
불행한 사고도 잇따라 발생했다. 전차 운행을 시작한 지 열흘째이던 날 종로 파고다공원 앞에서 구경하던 다섯 살 어린아이가 다가오던 전차에 치어 죽었다. 가뜩이나 전차 운행에 신경이 곤두섰던 사람들은 도끼와 몽둥이를 들고 전차를 쫓아갔다. 성난 군중이 전차에 올라타자 겁에 질린 운전수가 전차를 버리고 도망갔다. 화가 풀리지 않은 사람들은 전차를 부수고 불을 질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정부에서는 즉시 전차 운행을 중단했다. 이후 고종이 직접 사과하고, 유가족에게 배상금을 지급했다.
전차의 부설과 운행은 황실의 이해관계를 예민하게 반영한 사업이기도 했다. 고종은 자신의 아내인 명성황후가 묻힌 홍릉 행차에 발생하는 경비와 시간을 줄이기 위해 전차를 사용할 요량이었다. 전차 부설은 황실 재정을 몽땅 투자한 사업이었고, 미국과 일본의 이해관계도 감안해야 했기에 백성들은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황실전용 귀빈차 1대와 의례용 특별열차 1대, 그리고 일반승객용 열차 8대를 합쳐 모두 10대를 운행했다. 귀빈차와 특별차 운행을 핑계로 일반열차는 툭하면 시간이 변경되거나 연착되기 일쑤였다. 전차는 운임만 내면 누구나 탈 수 있었다. 그런데 초기에는 지체 높은 사람들과 고위관료들이 전차 좌석을 독차지하는 바람에 평민들이 함께 타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기기도 했다. 갑오개혁 이후 공식적으로 신분제를 철폐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동일한 공간에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 마주 앉는 일은 어색했다. 그러니 평민들에게 전차 탑승은 그저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전차 운행을 둘러싼 불만은 야릇한 방식으로 터져 나왔다. 대한제국 시기 어수선한 국내정치 분위기와 외세의 야욕으로 빚어진 혼란도 모두 전차 탓으로 돌렸다. “상여 같이 생긴 전차가 종로 한복판을 매일 가로지르니 나라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는 식이었다. 게다가 전차 궤도 부설을 이유로 종로의 수많은 주민들이 터전을 잃으면서 직접적인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졌다. 정부에서는 재산 손실을 보상하겠다고 공표했지만, 이윤을 내야 했던 미국계 한성전기주식회사와 주민들 사이에 보상을 둘러싼 갈등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즉, 인명사고를 계기로 성난 군중이 전차에 불을 지르고, 발전소까지 습격하는 일이 벌어진 까닭은 누적된 민간의 불만과 분노가 극에 달해 벌어진 항의의 성격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경성의 시공간, 전차를 통해 이어지다

▲성난 군중이 도끼로 찍고 불태워 파괴한 전차의 잔해를 한성전기회사의 미국인 직원들이 지켜 보고 있다. [사진 서울역사박물관·한국사진사]
1920~30년대 전차 운행은 안정기에 접어든다. 초기에는 정류소도 따로 없어, 전차를 타고 싶은 행인이 손을 들면 멈춰 태우고, 승객이 내려 달라 말하면 아무 곳에서나 정지해 내려주는 식이었다. 일제에 의한 지배가 시작되고 경성전기주식회사가 전차 운행을 맡게 됐다. 이후 20년 동안 노선을 꾸준히 늘리고, 각 거점마다 정류장도 많이 설치했다. 10대에 불과하던 운행 차량은 200대 이상으로 늘어났다. 체계적인 운행을 하고 시간도 엄수하면서 전차는 경성 주민들의 일상적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는다. 1930년 기준 남쪽으로는 마포와 용산, 북쪽으로는 효자동과 창경궁, 동쪽으로는 청량리와 왕십리, 서쪽으로는 서대문과 아현동까지 이어지는 선로가 마련됐다.
1940년에 이르러서는 경성 전역에 16개의 노선이 갖춰졌다. 노선이 아무리 많아져도 경성 전차의 중심무대는 여전히 종로 일대였다. 종로를 지나는 노선이 언제나 가장 많은 승객을 태웠고, 운행 횟수도 제일 많았다. 전차 노선도는 근대도시 종로의 혈관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차는 종로의 공간을 시간으로 측정 가능하게 만들었다. 가령 종로 일대의 싸전과 포목전 어느 한 곳을 물어보면, “전차를 타고 어디에서 내려 5분 동안 더 걸어가면 된다”거나 “광화문통에서 전차로 십 분이 걸린다”는 식으로 위치와 장소를 설명할 수 있게 됐다.
‘전차가 왔다. 사람들은 내리고 또 탔다. 구보는 잠깐 멍하니 그곳에 서 있었다. 그러나 자기와 더불어 그곳에 있던 온갖 사람들이 모두 저 차에 오른다 보았을 때, 그는 저 혼자 그곳에 남아 있는 것에, 외로움과 애닯음을 맛본다. 구보는, 움직이는 전차에 뛰어올랐다.’(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조선중앙일보, 1934.8.1~9.19)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주인공 ‘구보’의 동선은 종로의 전차 노선과 거의 일치한다. 늦은 아침 구보는 정처 없이 집을 나서 전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난다. 이윽고 밤이 되면 전차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아무런 목적 없이 전차에 올라타 어딘가를 다녀오는 구보야말로 1930년대 경성 주민의 무료하면서도 모던한 일상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대수로울 것도 별다를 것도 없지만, 1930년대 경성의 공간과 시간은 이렇듯 전차를 통해 ‘감각’으로 이어졌다.
전차는 단순히 탈 것의 의미를 뛰어넘어, 경성의 주민들에게 새로운 일상을 구성하게 하는 친숙한 대상이 됐다. 어디를 가기 위해 전차를 탄다기보다, 전차를 타야만 어디든지 갈 수 있게 된 셈이다. 전근대의 도시가 산과 강을 비롯해 성곽과 담장으로 안팎이 구분되었다면, 근대도시는 전차의 선로와 정거장의 배치가 도시를 구획하는 기준이 됐다. 정류장을 기점으로 근대적 상점과 식당이 들어서고, 철로 양옆으로는 버스와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가 생겼다. 1968년 운행이 종료될 때까지 전차는 서울의 가장 대표적인 교통수단으로 기능했다.
강부원 근대문화연구자·작가
09.23 1909년 자동차 출현
서울 거리 질주 ‘쇳덩어리 악마’…“사람들 짐 내던지고 도망”
1909년 이른 봄, 무게가 거의 3톤에 달하는 거대한 쇳덩어리가 포효하며 서울의 거리를 질주했다. 그 정체는 바로 미국의 화이트 모터 컴퍼니(White Motor Company)가 제작한 30마력의 증기 자동차였다. 자동차가 대로를 따라 달려오자 사람들은 “짐을 내던지고 이 새로운 악마로부터 도망칠 수 있길 빌며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주인만큼이나 놀란 소와 말도 유일한 피난처인 근처의 상점과 가정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1914년 이용문, 한국인 첫 면허 취득

▲1909년 숭례문 앞에서 처음 보는 증기 자동차가 달려오자 혼비백산해 달아나는 조선 사람들과 소·돼지 등을 묘사한 『르 쁘띠 주르날』의 삽화. [사진 르 쁘띠 주르날]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이었던 알프레드 마넘(Alfred W. Marnham)이 이 소동을 목격하고 남긴 감상이다. 그는 이 광경을 사진으로도 찍었지만 아쉽게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행히도 이를 바탕으로 그린 삽화가 영국의 『더 그래픽』 (The Graphic, 1909년 2월 20일)과 『르 쁘띠 주르날』(Le Petit Journal, 1909년 3월 7일) 일요판에 게재되어 그때의 모습을 짐작하는데 도움이 된다.
같은 사건을 묘사했지만 『더 그래픽』과 『르 쁘띠 주르날』의 논조는 사뭇 대조적이다. 『더 그래픽』은 조선인들이 느낀 놀라움을 담백하게 서술한 반면 『르 쁘띠 주르날』은 신기술에 대한 현지인들의 무지와 냉담함이 이러한 공포의 원인이라고 꼬집는다. 또한 삽화에서도 차이가 발견된다. 『르 쁘띠 주르날』에 실린 삽화에서는 남녀가 각각 두 명씩 자동차에 타고 있다. 이들의 태연한 표정과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는 한국인들의 모습이 기묘한 대조를 이룬다.
한국의 근대사에 천착하고 있는 로버트 네프(Robert D. Neff)의 연구에 따르면,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은 남자들은 각각 대한제국 황실의 수석 기술자였던 토마스 A. 코엔(Thomas A. Koen)과 그의 미국인 동료인 서울광산회사의 엔지니어 J. F. 매닝(J. F. Manning)이며, 뒷좌석에 스카프를 휘날리며 앉아 있는 두 명의 젊은 여성은 당시 주한 이탈리아 총영사였던 루이지 카사티의 딸이라고 한다.
같은 날에 이 사건을 목격한 어느 일본인 특파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조선인들은 인생에 남을 충격을 받았다. 이제 점차 익숙해지고 있지만, 자동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한국인들은 그들이 지은 많은 죄를 처벌하기 위해 낯설고 괴상한 악마가 이 땅을 찾아왔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정작 죄를 지은 사람은 코엔이었다. 그는 ‘낯설고 괴상한 악마’인 증기 자동차를 한국에 들여오면서 까다로운 수입 절차와 세금을 피하기 위해 이를 광산기계로 위장했던 것이다.

▲경성자동차상회에서 판매하던 자동차.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자동차 산업이 자생적으로 발달하지 않았던 아시아 지역, 특히 한·중·일 3국에서 자동차의 도입은 이처럼 외세나 당시의 왕족 혹은 귀족 계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중국의 경우 북양군벌의 수장인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서태후(西太后)의 환심을 사기 위해 청나라 말기인 1901년에 미국 최초의 가솔린 자동차인 두리에 서레이(Duryea Surrey)를 들여온 것이 최초라고 한다. 한반도에 들어온 최초의 자동차는 고종의 어차였다.
1902년에 조선의 대신들은 고종에게 신식 문물의 상징인 자동차를 타고 즉위 40주년 기념식인 칭경예식에 참여해 줄 것을 간청했다. 고종은 당시 어려웠던 나라 상황과 전염병 창궐 등을 이유로 처음에는 반대했다가 신하들의 강권에 밀려 마지못해 승낙했다고 한다. 어차(御車)의 수입은 고종의 주치의이자 주한 미국 공사였던 호레이스 알렌이 담당했다. 하지만 1903년에 열린 칭경예식에 고종은 어차를 타고 참석하지 못했다. 복잡한 수송 과정 덕분에 행사가 열리고 나서도 4개월 후에나 도착했기 때문이다.
왕족인 서태후와 고종이 직접 자동차를 관리하고 운전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자신의 자동차를 직접 유지하고 운전하는 현대적인 의미의 자동차 소유자는 아시아 지역에서 언제 등장했을까? 세계에서 최초로 자동차 산업이 발달했던 독일에는 ‘헤렌파러(Herrenfahrer)’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영어로는 ‘젠틀맨 드라이버(Gentleman Driver)’로 번역되는 이 ‘헤렌파러’라는 개념은 ‘신사 운전수’라는 뜻으로, 왕족이나 귀족처럼 마차나 자동차의 뒷좌석에 점잖게 앉아있기 보다는 직접 탈것을 관리하고 운전하는 ‘신세대’ 모험가를 일컫는 말이다. 밀수한 증기 자동차로 서울 시내를 공포에 빠뜨렸던 코엔 역시 이러한 ‘헤렌파러’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개벽』 제25호(1922년 7월 10일)에 게재된 글이 흥미를 끈다. ‘중국, 조선, 일본의 3국을 통틀어서 자동차를 제일 먼저 탄 사람이 누구일까? 자동차를 제일 먼저 탄 사람은 이번에 작고한 손병희 선생이라고 한다. 동양 3국 중에서 맨 처음으로 자동차를 구경한 데가 일본이고, 일본에서 가장 먼저 자동차를 점유한 사람이 바로 선생이었다. 일본의 메이지 36년경(1903년)에 선생께서 일본에 망명하였는데, 그때 오사카에 박람회가 열리며 어느 미국인이 자동차 2대를 출품하였다. 이를 본 선생은 곧 그 중의 1대를 매수하여 출품자로부터 운전법을 습득하여 상투 짜고 갓 쓰고 조선복 입은 그대로 자기가 운전하여 오사카 시내를 질주하였다. 그런데 손 선생은 자동차의 운전에 능할 뿐 아니라 자전거를 썩 잘 타는데 만일 자전거 경주를 한다면 엄복동을 압도할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당시 오사카 박람회의 나머지 자동차 1대는 일본 궁내성이 매입하였는데 외국인인 조선인에게 다른 1대가 선점되었다 하여 퍽 섭섭하게 생각하였다고.’
여기서 언급된 오사카 박람회는 바로 제5회 내국권업박람회(内国勧業博覧会)로서 사실상 아시아 최초의 만국박람회이자 일본에 처음으로 자동차가 소개된 행사이기도 하다. 이렇듯 아시아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에서 한국인이 일본 황실보다 먼저 자동차를 구입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더구나 천도교의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의 면모로 잘 알려진 손병희가 실은 동양 최초의 ‘헤렌파러’이자 전설적인 자전거 선수인 엄복동과 비교될 정도로 자전거에 능했다는 이야기는 자못 통쾌감까지 자아낸다.
1919년에 등록된 자동차 416대 달해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YMCA) 앞 거리를 달리던 자동차.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손병희가 1906년에 귀국하면서 그의 자동차도 가져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귀국 이후에도 ‘헤렌파러’로서 활발하게 자동차를 운행했던 것만큼은 사실이다. 같은 시기에 동양합동광업회사 감사였던 찰스 크리스핀은 한국에서의 자동차 운전은 거의 쓸모없는 일이라고 단언했다. 1910년 중반에 어느 한국인이 친구들과 함께 프랑스제 자동차로 서울의 거리를 질주하며 보행자와 동물들을 놀라게 하다가(마치 1년 전에 증기 자동차로 장안을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 넣었던 코엔처럼) 곧 고장을 일으켜 황소의 견인을 받아 집에 돌아가는 일이 벌어지자 크리스핀의 평가는 정확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의 선언은 곧 틀린 말이 되었다.
1906년 5월 15일자 황성신문이 권병수 등이 자동차 5대를 구매했다고 보도한 것을 시작으로 한반도 내의 자동차 수는 날로 급증하여 1919년에는 등록된 자동차가 총 416대였다. 1914년에는 이용문이라는 사람이 한국인 최초로 운전면허를 취득하였으며 1920년에는 최초의 여자 운전수인 최인선이 운전면허를 획득했다. 여성의 대외활동에 관대하지 않았던 당시 분위기를 고려했을 때 이용문의 면허 획득으로부터 6년 정도의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자동차의 수가 늘자 자연히 자동차 관련 사업도 확대되었다. 최초의 자동차 관련 제작업체인 조선와사전기(朝鮮瓦斯電氣)는 1910년에 설립되었고, 자전거와 자동차를 함께 취급한 조선자전차(朝鮮自轉車)는 초기 자동차사업과 자전거 간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자동차운수업에서는 1917년 설립된 평남자동차상회(平南自動車商會)가 최초라고 할 수 있다.
1922년에는 조선인이 운영하는 자동차 정비 공장인 경성서비스가 세워졌다. 현대자동차의 창업주인 정주영은 원래 쌀장사를 하다가 1939년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쌀의 배급제가 실시되면서 장사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먹고 살 길을 찾던 정주영은 이 경성서비스에서 그의 트럭을 도맡아 수리하던 정비사인 이을학의 권유로 이곳저곳에서 돈을 끌어 모아 아도서비스라는 작은 정비공장을 인수하였고 이것이 바로 현재 글로벌 5위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 자동차 산업의 모태였다.
오태경 변호사(디자인 콜렉티브 ‘모임별’ 디렉터)
10.07 ‘조선 8경’과 종로
심훈·임화, 종로를 조선의 심장·청년 아지트로 칭송했다

▲해방 직후의 종로 네거리 풍경.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한국을 대표하는 명소에 대한 흥미로운 설문 조사가 있었다. 『국경의 밤』을 쓴 시인 김동환은 상실된 국토의 상징성을 제목으로 삼아 1929년 6월, 종로구 3가 돈의동 74번지에서 월간 종합잡지 『삼천리』를 창간했다. 그 기념으로 문사(文士) 37인으로부터 조선을 대표하는 ‘반도(半島) 8경’을 추천받았다. 설문 조사 결과 1위는 금강산(34명), 2위 대동강(28명), 3위 부여(21명), 이어 경주(13명), 명사십리(11명), 해운대(10명), 촉석루(8명), 백두산(8명) 등이 꼽혔다. 이 설문 조사에서 ‘종로’를 ‘반도 8경’의 한 곳으로 꼽은 문사들이 있다. 심훈(沈熏, 1901~1936)과 임화(林和, 1908~1953)였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심훈, ‘그날이 오면’ 부분
조국 광복의 ‘그날’이 오기만 한다면 “종로 인경”(보신각종)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다가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라고 노래했던 심훈은 특히 ‘유창상점 3층 『종로』’를 ‘반도 8경’ 중 한 곳으로 꼽았다. 유창상회(裕昌商會)는 김재덕(金載德)이 운영하는 금은 세공공장이자 귀금속 상점으로서 종로2가 101번지, 보신각 바로 옆에 있었다.
당시 청년회 전국에 2000개 달해

▲종로를 ‘반도 8경’의 하나로 꼽고 작품에 녹여낸 시인 심훈.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심훈이 이곳을 꼽은 이유는 “밤마다 벌어지는 반우(返虞)의 행렬”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반우(返虞)의 행렬’이란 장사(葬事) 치른 뒤에 신주(神主)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을 말한다. 상실된 조국의 ‘신주’를 끝까지 지키는 일, 유창상회 3층에 모여 조국 상실에 울분을 토하고 광복의 의지를 드높이던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종로 네거리는 한말에 만민공동회 집회 장소이기도 했다. 이런 연장 속에서 민족의 깨어있음을 상기하는 조선의 심장 같은 곳으로 종로를 호명했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이자 영화배우이던 임화는 ‘반도 8경’으로 ‘부산 잔교’, ‘경성역두’, ‘신의주 세관’ 그리고 ‘종로 네거리’를 꼽았다. 대부분의 응답자들이 과거 조선과 민족의 표상에 주목한 데 비해 임화는 ‘지금 여기’, 근대성이 충만한 장소에 주목하고 있다.
임화가 ‘반도 8경’으로 꼽은 곳의 공통점은 관문이자 두 힘이 첨예하게 갈등하는 경계(境界) 지점이다. ‘부산 잔교’는 일본 제국이 식민 지배를 관철하는 통로이자 한국인들이 배움이나 일자리를 찾아서 고향을 떠나는 출발점이었다. ‘신의주 세관’은 대륙과 한반도의 국경, 일본 제국의 검문이 삼엄한 접점이다. 자본과 권력과 정보와 사상이 집중된 서울, 그 관문이 또한 서울역 곧 ‘경성역두’이다. 그 서울의 중심에 종로가 있는데, 임화는 독특하게 ‘종로’라고 하지 않고 ‘종로 네거리’라고 특정했다. 서로 다른 힘들이 첨예하게 대치하는 경계 지점, 관문으로서 ‘종로 네거리’를 꼽았던 것이다.
임화는 자기 운명의 전환점이나 결단의 순간에 스스로를 ‘종로 네거리’에 세우고 향방을 가늠하는 시 3편을 발표한 바 있다. ‘네거리의 순이’(1929), ‘다시 네거리에서’(1935) ‘1945년, 또다시 네거리에서’(1947)가 그것이다. 그는 ‘종로의 시인’이었다.
오오 그리운 내 고향의 거리여!
여기는 종로 네거리.
나는 왔다 멀리 낙산(駱山) 밑 오막살이를 나와
-임화, ‘다시 네거리에서’ 부분

▲종로 네거리를 “내 고향”이라고 한 시인 임화.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종로 이화동 낙산이 집이었던 임화는 종로 네거리를 “내 고향”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는 13세(1921년) 때부터 17세(1925년) 때까지 거의 매일 종로 네거리를 지나 보성고보를 등하교하면서 ‘청년’으로 성장했다. 1906년 수송동 46번지(지금의 조계사 자리)에서 개교한 보성중학교는 1922년 5년제 보성고등보통학교로 개칭하였고, 1927년 혜화동 1번지로 이전했다. 임화는 감수성 예민한 10대 중반 5년 동안을 종로 네거리로 등하교하면서 성장하였고, 청년이 되고자 학교를 중퇴하고 거리로 뛰어나왔다. 그리고 시인이 되었다.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복판에
순이야!
(중략)
근로하는 청년, 용감한 사나이의 연인아…
생각해 보아라, 오늘은 네 귀중한
청년인 용감한 사나이가
젊은 날을 싸움에 보내던 그 손으로
지금은 젊은 피로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겠구나!
(중략)
자 좋다, 바로 종로 네거리가 아니냐!
어서 너와 나는 번개같이 손을 잡고 또 다음 일 계획하러 또 남은 동무와 함께 검은 골목으로 들어가자
네 사나이를 찾고 또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인 용감한 청년을 찾으러…
그리하여 끝나지 않는 새로운 용의(用意)와 계획으로 젊은 날을 보내라
-임화,‘네거리의 순이’(『조선지광』1929.1.) 부분
임화가 생각한 ‘종로 네거리’는 ‘청년’이 고투하는 장소였다. ‘청년’이라는 시어가 7번, ‘젊은’이란 시어가 7번이나 등장한다.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복판”의 주체는 ‘청년’이다.
종로 네거리는 청년이 만들고, 청년을 만들고, 청년이 주체가 되는, 청년들의 거리라는 것이 임화의 사상이다.
노동·여성운동 조직도 종로에
조선의 중심이 종로 네거리라는 의식은 바로 이렇게 생성되는 것이며, 조선의 미래는 종로 네거리에서 청년들이 열어나갈 것이라는 주제를 설파하고 있다. 감옥에 가둘지라도 청년은 굴하지 않는다. “젊은 피”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힘이다. “검은 골목으로 들어가자”라는 것은 종로의 골목이 “끝나지 않는 새로운 용의와 계획”이 꿈틀대는 아지트이기 때문이다. ‘종로 네거리’는 임화가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한 인큐베이터이자 기획하고 운동하는 아지트이고 이들 네트워크의 중심이었다.
‘청년’은 루소가 『에밀』(1762)에서 소년기와 성인기 사이에 청년기를 설정하고 다음 사회를 준비하는 주체로 등장하였다. 1880년대에 일본에서 근대적 인간형으로 ‘세에넨’(靑年)이란 말이 사용되었고, 한국에서는 1905년을 전후하여 ‘청년’이란 말이 급속도로 쓰이기 시작했다. 『청년에게 고함』이라는 책이 필독서가 되었다.
3·1운동 이후 개조와 계몽의 열기 속에서 ‘청년’은 민족과 사회 그리고 진보의 동력으로 주목받았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청년회(靑年會)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서 전국적으로 2천 개에 달했다. 마침내 전국 차원의 조선청년회연합회가 1920년 말 결성되었다. 청년들은 집합적 결속력을 조직화하고 자기들의 이상을 미디어로 발신하며 사회의 중심세력으로 떠올랐다. 조선청년회연합회는 세종로 네거리 광화문통 209번지에 사무실을 두고 『아성(我聲)』, 즉 ‘우리의 소리’라는 기관지를 출간했다. ‘아성(我聲)’=‘우리의 소리’는 곧 ‘조선청년회연합회의 함성’이었던 것이다. 열화와 같은 청년운동은 문화·사회·노동·여성·언론운동을 견인하였다. 1923년을 전후하여 조선청년회연합회가 광화문통에서 종로 견지동 80번지로 이전하면서 청년의 아지트가 종로 네거리로 옮겨졌다. YMCA회관도 ‘청년회관’이라고 불렸다.
동아일보(종로구 화동 138), 조선일보(관철동 249→견지동 111→태평통), 중앙일보(견지동 60), 조선중앙일보(견지동 111) 등 언론기관도 종로에서 출발했다. 동아일보는 창간에 즈음하여 “국가와 사회의 진보적 세력을 대표하는 자는 청년”(1920.5.26.)이라고 선언하였다. 신흥청년동맹(관수동 92번지), 조선불교청년총동맹(수송동 44번지), 조선노동공제회(종로 2정목 67번지), 노동연맹회(견지동 88번지), 신사상연구회(낙원동 173), 여성운동 조직이었던 근우회도 공평동 43번지에 자리 잡았다. 또 보성·중동·숙명·동덕 등 학교가 우정국로 주변에 있었고 경기·서울·휘문·덕성·정신·진명 등도 종로에 있었다. 학생들은 종로에서 청년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1920년대 종로 네거리 일대, 특히 우정국로 주변은 조선의 민족·문화·사회·사상 운동의 메카였고 그 주체는 청년들이었다.
정우택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0.28 일제에 맞서 피 끓는 투쟁, 종로는 조선 청춘의 전장이었다
조선 사회운동 본거지
1929년 한 기자는 시골에서 친구가 서울에 온다면 꼭 구경시켜야 할 곳을 소개했다. 종합지 『별건곤』 23호 ‘경성 특집호’에 실린 ‘2일 동안에 서울 구경 골고루 하는 법, 시골 친구 안내할 노순(路順)’(『별건곤』 1929.9)에 ‘견지동 80번지’가 있다. 경성역에서부터 남대문~광화문을 지나 인사동 학생6거리를 거쳐 종로2가 쪽으로 내려오다 보성고보(지금의 조계사) 맞은편이다.
(견지동 80번지-인용자) 2층 위에 조선소년총연맹 한 칸. 그다음 간판 많은 2층이 서울청년회, 청년총동맹-무엇무엇하는 사회운동 선상에서 맹렬한 활동을 하고 있는 여러 단체가 간판을 한 데 붙이고 저렇게 한 방에 있다.
이렇게 서술한 곳은 서울청년회, 조선청년총동맹, 조선소년총동맹, 청년회연합회, 경성청년연합회, 토요회, 전진회, 적박단, 신생활사, 카프(KAPF) 등이 입주해 있던, 조선 “사회운동 선상에 맹렬한 활동을 하고 있는 단체”들의 ‘소굴’이자 아지트였다.
한반도 지도 걸개 그림 걸고 창당대회

▲1924년 4월 21일 서울종로중앙청년회관에서 223개 단체 대표 170명이 참가해 열린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 기념사진.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국의 사회운동은 청년운동의 거점이었던 종로에 기반을 두고 확장해 나갔다. 1920년 12월 2일 전국 121개 단체가 모여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조선청년회연합회를 결성했다. 이어 1923년 2월 23일 서울청년회 주도로 견지동에 ‘전조선청년당대회 준비위원회’를 설치했고, 3월 24~29일까지 6일 동안 90여 단체에서 약 200여 명이 참가해 전조선청년당대회를 열었다. 전조선청년당대회 기념사진을 보면, 중앙 상단에 걸린 한반도 지도 걸개그림이 상징적이다. ‘지금 이곳, 종로’에서 열리는 전조선청년당대회를 중심으로 조선의 역사가 새롭게 펼쳐지리라는 메시지를 발화하고 있다.
1924년 4월 21일에는 서울청년회·청년회연합회와 화요회·북풍회계의 신흥청년동맹까지 망라한 청년단체의 전국적 통일조직인 조선청년총동맹이 전국 223개 단체 대표와 700여 명의 방청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출범했다. 대회가 끝난 후에 “노동가를 부르며 시가지 행진을 하다 종로경찰서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다 10여 명의 청년이 검속”(『조선일보』 1924.4.22.)되고, 이에 수백 명의 군중들이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날 밤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이 각 여관을 돌며 24명을 추가로 검속했다. 조선청년총동맹회는 견지동 80번지의 조선청년연합회 사무소를 인계하고, 조선노동총동맹도 견지동 88번지에 사무소를 차렸다. 조직과 단체들은 종로로 결집했다. 종로는 민족·사회운동의 심장이 되어 들끓었다.
단체들은 종로 일대에서 지속적으로 군중집회를 개최하고, 강연 및 가두행진, 선전삐라 살포 등을 통한 대중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러한 사상 조직 운동의 축적과 “이천만 대중의 열렬한 요구”(『동아일보』 1928.2.15)에 의해 좌우합작 민족유일당 민족협동전선, 신간회(新幹會, 1927~1931)가 종로 관수동 143번지에서 준비되고 1927년 2월 15일 종로 청년회관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신간회는 종로에 본부(종로2가 45)와 경성지회(청진동 126번지)를 설치했다. 이러한 민족사회운동과 투쟁은 일제 식민당국과 첨예하게 대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운 사랑하는 동무야-
나는 지금 이 봄의 저녁이 모자 위로 가만히 내려앉을 때
너와 내가 젊은 기운이 타오른 투쟁에로 발길을 날리던
종로 이 길 이 거리를 걸어가며 간 네가 주는 눈물을 먹고 있다
(중략)
지금도 나는 이 길 거리를 걸어간다 네 발자국 내 발자국이 어우러져서 투쟁에 빛나던 그 길을 걸어가던
이 도시 이 길 거리 이 봄을 가고 있다
그러나 이것 봐라 지금 내 옆에는 네가 없구나 네가 없구나
-임화, ‘봄이 오는구나-사랑하는 동무야’(1929) 부분
투쟁·구속·죽음 함께 기억되는 장소
종로 거리는 “젊은 기운이 타오른 투쟁”, “투쟁에 빛나던 그 길, 거리”이면서 동시에, 투쟁의 과정에서 검속과 구속과 죽음이 함께 기록되어 기억되는 장소이기도 한 것이다.

▲조선청년총동맹 등 청년 단체들이 모여 있던 종로2가 일대 지도. [사진 정우택]
지도에서 보듯이, 우정국로 안쪽은 다양한 사회운동단체 및 조직이 운집하여 들끓는 에너지로 새로운 시대를 기획하고 있었고, 종로2가 네거리에는 사법 및 치안 통치의 첨병인 경성법원과 종로경찰서가 길목을 틀어막고 있었다. 조선 민족사회운동은 종로 네거리의 경성법원과 종로경찰서를 돌파하고 진출하여 전 조선을 해방하는 것이었다. 종로 네거리에 있는 경성법원 및 종로경찰서와의 대치를 빼고는 종로의 사상과 장소성을 말할 수 없다. 임화는 ‘적’이라는 시에서 “적이여! 너는 나의 운명”이라고 외치며 “적이 나를 죽도록 미워했을 때/ 나는 적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미움을 배웠다. 적이 드디어 내 벗의 한 사람을 죽였을 때,/ 나는 복수의 비싼 진리를 배웠다. (중략) 적이여! 어찌 우리들은 청춘을 전장에서 찾았겠는가”라고 읊었다. 종로는 ‘청춘의 전장(戰場)’이기도 했다.
조선의 민족·사회·사상운동의 성장과 진출에 따라 일본 제국의 통치 전략과 탄압도 정교해지고 가혹해졌다. 1925년 치안유지법의 공포와 1931년 만주사변 등으로 일본 제국은 점점 파시즘화하고 저항운동에는 가차 없는 탄압과 구속, 회유, 포섭 전략을 구사했다. 1931년 신간회는 해산되었고, 그해 8월 임화도 종로경찰서 고등계에 피검되어 옥살이를 했다. 임화가 서기장으로 있던 카프는 두 차례에 걸친 검거와 탄압에 직면했다. 1934년 문화예술계 동지 100여 명이 구금되었고 임화는 결국 1935년 5월 22일 경기도경찰부에 카프 해산계를 제출했다. 종로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던 많은 조직과 단체들은 잡히거나 지하화하거나 해산됐다. 종로의 청년들은 흩어졌다.
낯선 건물들이 보신각을 저 위에서 굽어본다.
옛날의 점잖은 간판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그다지도 몹시 바람은 거리를 씻어 갔는가?
붉고 푸른 ‘네온’이 지렁이처럼,
(중략)
번화로운 거리여! 내 고향의 종로여!
웬일인가? 너는 죽었는가, 모르는 사람에게 팔렸는가?
그렇지 않으면 다 잊었는가?
나를! 일찍이 뛰는 가슴으로 너를 노래하던 사내를,
그리고 네 가슴이 미어지도록 이 길을 흘러간 청년들의 거센 물결을
-임화, ‘다시 네거리에서’(『조선중앙일보』, 1935.7.27.) 부분
가슴 벅찬 이상과 열정으로 모여들던 청년들의 ‘거센 물결’, 함성이 사라지고, “누구 하나 네(종로-인용자) 위에서 청년을 빼앗긴 원한에 울지도 않”았다. 대신 종로는 “붉고 푸른 네온사인”과 신식 건물(화신백화점 등)들로 “번화로운 거리”가 되어 갔다. 시적 주체는 ‘다시 네거리에서’ 비통하게 종로에게 묻는다. ‘가슴 뜨겁게 이 거리를 장악했던’ 청년들은 다 어디 갔는가? 소비와 향락 혹은 전향으로 “팔렸는가”, “다 잊었는가”, “죽었는가”라고.
종로 네거리의 침탈, 그리고 현해탄
1935년 7월 4일 종로에 가로등이 점화되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1935.7.6.)는 “경성의 심장이요 조선인 상점가의 중심이 되어 있는 종로통 일대는 수일 전부터 가로등이 서게 되어 명랑한 밤거리를 만들”었다고 자랑했다.
원컨대 거리여! 그들 모두에게 전하여다오!
잘 있거라! 고향의 거리여!
그리고 그들 청년들에게 은혜로우라.
지금 돌아가 내 다시 일어나지를 못한 채 죽어가도
불쌍한 도시! 종로 네거리여! 사랑하는 내 순이야!
나는 뉘우침도 부탁도 아무것도 유언장 위에 적지 않으리라.
-임화, ‘다시 네거리에서’(『조선중앙일보』, 1935.7.27.) 부분
종로를 침탈당한 청년들은 흩어져서 지하로 숨어 들어가 활동을 이어갔다. 시인 임화는 종로의 연장으로서 새로운 청년의 영토를 구축했다. “청년들의 거센 물결”이 새롭게 굽이치는 곳, 현해탄이었다. “청년들의 거센 물결”(‘다시 네거리에서’ 부분)이 흘러가고 없는 종로를 대신하여 그는 ‘현해탄’을 청년이 새롭게 태어날 장소로 찾아낸다.
현해탄은 제국이나 국가로 환원할 수 없는 ‘공해(公海)’로서 새로운 아지트였다.
이 바다 물결 위에 올랐을 때,
나는 슬픈 고향의 한 밤,
홰보다도 밝게 타는 별이 되리라.
청년의 가슴은 바다보다 더 설래었다.
-임화, ‘해협의 로맨티시즘’ 부분
시집 『현해탄』 표지는 무겁고 두터운 구름, 휘몰아치는 폭풍, 격동하는 파도로 심란하다. 파도가 높을수록 청년의 이름은 더욱 빛났다. 그리고 현해탄이라는 공해에서 일국적 차원이 아닌 국제주의적 연장(延長)을 상상했다.
정우택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1.04 클래식 틀고 여종업원이 서빙…화신식당 ‘조선 난찌’ 인기
화신백화점의 조선음식

▲1937년 종로 네거리 오른쪽 모퉁이에 개장한 6층짜리 화신백화점. 당시에는 전국 최고층이었다.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1934년 발행한 『화신』이라는 화신백화점 홍보 책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린다.
“종로의 명물이 화신이라면 화신의 명물은 식당이라고 하여도 무방하겠습니다. 화신식당의 명물은 조선요리입니다. 서양요리와 일본요리도 있습니다마는 깨끗한 자리와 그릇에 먹음직하게 조선요리를 제공하는 집은 경성 시내 화신 한 집밖에 없습니다.”
화신백화점이 종로의 명물인데, 화신백화점의 명물은 식당이고 특히 조선요리라고 소개했다. 화신백화점에서 만든 책자라서 그렇겠지만 자랑이 대단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 말이 자랑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옆의 이미지처럼 화신백화점은 종로 네거리의 오른쪽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종로는 조선시대부터 운종가로 불리며 비단·모시·면포 등을 팔던 행랑들이 이어진 곳이었다. 식민지 시대에도 종로 1정목에서 3정목까지는 내로라하는 가게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1937년 12월 『조선일보』에는 이선희의 ‘여인명령’이라는 소설이 연재된다. 소설에서 화신백화점 점원으로 일하는 ‘숙채’는 화신백화점의 모습을 ‘45도로 기울어진 6층 건물의 그림자가 종로 거리를 온통 뒤덮는다’고 했다. 높은 건물이 드물던 당시에 6층 높이로 우뚝 솟아 있었던 백화점의 위용을 실감할 수 있다.
미쓰코시백화점 등선 조선음식 안팔아

▲화신백화점 내부의 식당 모습. 조선런치가 인기 메뉴였다.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화신백화점이 조선인을 고객으로 했다는 점에서 본정에 위치했던 미쓰코시(三越), 조지아(ジョージア), 미나카이(三中井) 등의 백화점보다 뒤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1937년 6층 규모의 신축 건물이 들어선 후 화신백화점의 모습은 그런 편견과는 거리가 멀었다. 새롭게 개장하면서 층별로 다양한 매장이 들어섰는데, 층별로 상품을 구분하고 또 같은 층에 여러 매장이 들어선 모습도 백화점에서 처음 선보인 방식이었다.
화신백화점은 경성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데다가 최신 시설을 자랑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입구에서 3층까지를 연결하는 에스컬레이터로, 조선에서 처음 설치된 것이었다. 그런데 화신백화점 식당의 의미는 최신 시설을 갖춘 대형 백화점에 위치했다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식민지 시대 종로통을 가운데 둔 골목 안에는 조선음식점이 늘어서 있었다. 사람들이 즐겨 찾았던 조선음식은 설렁탕을 비롯해 장국밥·냉면·비빔밥·떡국·만둣국 등이었다. 채만식 소설 『금의 정열』에는 ‘상문’이 이문식당을 찾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문식당은 지금도 이문설렁탕으로 영업하고 있는데, 당시에는 화신백화점 뒷골목에 있었다.
상문은 고춧가루 한 숟갈, 파 두 숟갈을 넣고 소금과 후추로 간을 맞추어 설렁탕을 맛있게 먹는다. 그런데 『금의 정열』에서는 설렁탕 맛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지만 그 내부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다.
철저하게 지저분한 시멘트 바닥, 행주질이라고는 천신도 못 해본 상 바닥, 질질 넘치는 타구 등등 족히 대규모의 쓰레기통으로서 손색이 없다.

▲화신백화점에 설치된 조선 최초 에스컬레이터를 소개한 1939년 4월 12일자 『매일신문』 기사.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매일신보』나 『동아일보』에도 조선음식점에서는 먹고 난 그릇을 제대로 씻지 않거나 먹다 남은 김치를 다시 내놓는 등 비위생적이라는 기사가 자주 실렸다. 또 식탁 역시 높이가 한 자밖에 안 되는 데다 목침 높이만 한 걸상에 주저앉아 먹어야 해서 불편하기도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종로에는 명월관·식도원·태화관 등 조선요릿집도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요릿집에서는 보통 주주총회·환영회·환송회 등 명목상의 회의가 끝나고 나면 곧바로 연회가 이어졌다. 연회에는 술이 빠지지 않았고 기생도 마찬가지였다. 술과 기생이 함께하는 공간이었음을 고려하면, 조선요릿집에서 가족과 함께 외식을 하기는 망설여졌을 것이다.
본정 근처에 있었던 미쓰코시·조지아·미나카이 등의 백화점 식당은 어땠을까? 1936년 12월 김웅초는 『조선일보』에 ‘성녀 씨’라는 소설을 연재했는데, 거기에는 ‘성녀 씨’가 백화점 식당에서 간 장면이 나온다. 칼과 삼지창을 양손에 들고 서양요리를 먹는데 뭔가 불만이 가득하다. 그러고는 차라리 냉면이나 비빔밥을 사줬으면 비위에 맞았을 것이라고 토로한다. 성녀 씨가 간 곳은 위의 백화점 가운데 하나였나 보다.
필자는 『경성 맛집 산책』이라는 책에서 본정에 위치한 백화점들과 화신백화점의 차이에 대해 살펴본 바 있다. 본정 근처의 백화점들은 서양음식, 일본음식, 심지어 중국음식도 판매했지만 조선음식은 메뉴에 없었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백화점에 자리 잡은 식당이었지만, 거기서도 식민지라는 멍에는 작용하고 있었다.
화신백화점에서는 1933년 4월 ‘화신대식당’이라는 간판을 내건 후 ‘조선요리부’를 신설해 조선음식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익숙하지 않은 서양음식을 먹는 데 불편을 느끼던 손님들이 많았음을 고려하면 효과적인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신백화점 식당에서 조선음식을 제공한 것은 깨끗하고 편안한 식당에서 조선음식을 먹기 원하는 손님, 특히 가족 단위 손님의 요구에 적절히 부응하는 것이었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서 구보 씨가 화신백화점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한 행복해 보이는 가족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화신』이라는 책자에서 정갈한 자리와 그릇에 맛있는 조선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은 화신백화점뿐이라고 했던 언급은 여기서 온전한 의미를 얻는다.
이태준·박완서 소설에 당시 식당 묘사
이태준의 소설 『딸 삼형제』에는 필조와 정매가 비를 피해 화신백화점에 들르는 장면이 나온다. 필조는 정매에게 마음이 있었던지 식권을 두 장 샀다며 같이 밥을 먹자고 제안한다. 화신백화점 식당은 입구 진열장에 음식 샘플을 진열해 놓고 옆의 계산 부스에서 식권을 파는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 식당에 들어서면 축음기에서는 재즈나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와 우아한 분위기를 더했다. 또 유니폼을 입은 10대 여자종업원의 서빙을 받으며 여유 있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화신백화점 식당에서는 어떤 조선음식을 팔았으며, 또 가격은 얼마였을까? 1930년대 중반을 기준으로 하면 신선로백반·전골백반·화신탕반·비빔밥이 대표메뉴였다. 가격은 신선로백반이 60전이었고, 전골백반이 40전이었다. 화신탕반과 비빔밥은 둘 다 25전이었다. 약과와 청주도 팔았는데, 가격은 20전이었다.
하지만 화신백화점 식당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음식은 조선런치였다. 런치는 이름처럼 점심시간에 한정해서 판매했던 메뉴로, 채만식의 『태평천하』에서 기생 춘심이 윤 직원에게 ‘미쓰꼬시’에 가서 사달라고 한 ‘난찌’가 바로 그 음식이다. 남촌에 있던 백화점 식당에 가면 으레 런치를 시켰던 것처럼 화신백화점 식당을 방문하는 손님들은 조선런치를 주문했다.
조선런치가 어떤 음식으로 구성되었을지 추정해 보자. 밥과 김치, 나물 등 반찬 몇 가지는 공통적으로 나왔을 것이다. 그 외에는 전골·구이·찜·탕반 가운데서 두세 종류 정도를 제공했으리라 생각된다. 조선런치의 가격은 35전으로 40전에서 50전 정도했던 일반 런치보다 조금 쌌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1만7000원이 조금 넘는 가격이었다.
화신백화점 식당에서 손님들이 가장 즐겨 찾던 메뉴는 조선런치였으며, 그것은 남촌에 있던 백화점의 런치를 변용한 음식이었다. 그렇다면 조선런치는 화신백화점이 남촌에 위치한 백화점의 시스템을 조선인들에게 적용시켰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메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화신백화점과 그 식당의 의미를 가릴 만큼의 무게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화신백화점 식당의 모습은 박완서의 자전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도 나온다. 박완서가 숙명여고보에 합격하자 오빠가 밥을 사주겠다며 그녀를 화신백화점에 데리고 간다. 그런데 당시 화신백화점 식당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는지 식사를 하기 위해 아래층에서부터 온종일 줄을 섰다고 한다. 작가는 화신백화점 식당을 오랜 기다림과 함께 깨끗한 식탁보, 접시에 담긴 수프, 주먹만 한 빵 두 개로 기억한다고 말한다. 작가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깨끗한 식탁보, 수프와 빵은 종로의 모던 음식이 지닌 아우라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현수 성균관대 학부대학 대우교수
11.18 “가두의 도서관” 학생들 서점서 책 읽는 ‘입독’ 문화 생겨
종로에 밀집한 서점

▲한국 서적상 효시로 알려진 회동서관. 소설과 실용 서적 등 다양한 출판 사업을 펼치며 1920년대 후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사진 출판문화]
19세기 말, 조선 사회는 외국의 신식 문물과 지식 도입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개화한 지식인들은 근대적 지식 보급을 위해 ‘책’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896년 6월 2일자 「독립신문」의 논설은 ‘책 회사’의 설립을 촉구했다. ‘각색 서양 책을 국문으로 번역하여 출판’하는 회사를 만드는 일이 급선무라는 것이다. 책을 만들고 파는 일은 문명개화에 필수적일 뿐 아니라 이윤도 많이 남는 ‘큰 사업’이라고도 했다. 개화기의 서적업은 꽤 전도유망한 사업이었다.
충무로·명동 일대엔 일본인 서점 성업
1890년대부터 종로통과 그 주변을 중심으로 책을 파는 가게가 속속 등장했다. 간판에는 서사(書肆), 책사(冊肆), 서포(書舖), 서관(書館), 서림(書林), 서원(書院) 등의 상호를 걸었다. 책을 의미하는 한자와 가게나 공간을 뜻하는 한자를 붙인 용어다. 이 상점들은 책을 파는 일뿐 아니라 만들고 수입하는 일도 겸했다. 책의 출판·유통·판매가 나눠져 있지 않던 상태였다. 출판사나 서점 같은 용어는 1920년대에 대중화되었고, 그 이전의 업계에서 통용되던 명칭은 서적상(書籍商)이었다.
개화기에는 지물포와 잡화점 같은 곳에서도 책을 팔았다. 1907년에 발간된 신소설 『귀의 성』 광고에는 대동서시, 고유상서포, 김상만책사 등과 함께 지전(紙廛), 잡화점, 문방구서점이 판매 장소로 기록돼 있다. 이 상점들 중 일부는 점차 전문적인 서적상으로 변모해 갔다. 한국 서적상의 효시로 알려진 회동서관(滙東書館)이 대표적으로 그러했다.
회동서관이 고제홍서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 때는 대략 1890년 전후로 알려져 있다. 고제홍은 원래 면포전을 운영하던 상인인데, 전업하여 청계천 광교 인근에서 서적업을 시작했다. 고제홍서사가 근대적인 서적상으로 성장하는 데는 아들 고유상의 역할이 컸다. 1906년경 가업을 이어받은 고유상은 1년 뒤 ‘회동서관’으로 상호를 바꾸고 본격적으로 영업에 나섰다. 고유상이 경영한 회동서관은 신구(新舊) 소설과 신문예 작품, 사전류와 학습서, 실용 서적 등 다양한 출판 사업을 펼치며 1920년대 후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고유상의 형제인 고경상과 고언상도 각각 광익서관과 계문사 인쇄소를 운영하며 서적업계에 족적을 남겼다.
종로를 중심으로 성장한 서적상은 회동서관뿐만이 아니었다. 개화기에 종로통과 그 인근에는 서른 곳이 넘는 서적상들이 있었다.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대동서시(종로)를 비롯해 김상만의 광학서포(종로2가), 주한영의 중앙서관(종로3가), 남궁억의 유일서관(종로2가), 김용준의 보급서관(안국동), 민준호의 동양서원(종로2가), 대한기독교서회의 전신인 야소교서회(종로2가) 등이 모두 한국 서적상계의 선구(先驅)로서 신문화 보급과 계몽운동의 일익을 담당했다.
불행하게도 ‘개화’의 시대는 ‘식민화’의 시대이기도 했다. 조선의 서적상들은 신문지법(1907)과 출판법(1909)으로 상징되는 일제의 출판물 통제 정책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조금이라도 ‘애국계몽’의 색채가 있는 책들은 압수와 판금(판매금지) 처분을 받았다. 원고검열과 납본검열이라는 강력한 규제 장치도 서적상의 발목을 잡았다. 서점을 수색하고 단속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게다가 일본의 서점마저 식민도시 경성에 진출했다. 일본 서점들이 자리 잡은 곳은 청계천 남쪽의 본정통(本町通), 속칭 진고개(지금의 충무로2가) 근처였다. 1906년 개점한 일한서방(日韓書房)을 필두로 대판옥호서점(大阪屋號書店), 암송당서점(巖松堂書店), 마루젠(丸善) 등이 차례로 경성 지점을 설치했다. 원래 이 서점들은 조선 체류 일본인들의 문화생활 공간으로 마련되었으나 점차 일본어를 해득하는 조선인들도 자주 찾는 곳이 되었다.

▲1930년대 종로 서점가에서 최고 매출을 올리던 박문서관. 출판사, 인쇄소까지 갖춘 출판·서점 기업이었다. [사진 조선일보·동아일보]
이처럼 경성의 서점가는 종로·관훈동 일대의 조선인 서점가와 충무로·명동 일대의 일본인 서점가로 양분돼 있었다. 시설과 장서(藏書) 등 모든 면에서 열세였던 조선인 서점은 진고개로 손님을 뺏기기 일쑤였다. 하지만 1920년대부터 종로의 서점가는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25년 12월경「매일신보」는 ‘누구나 책을 사려면 반드시 진고개로 향하였었던’ 시절이 있었으나 곧 사정이 나아져서 ‘종로통 일대에 늘어선 신명서림, 영창서관, 창문사, 동양서원, 박문서관, 경성서관, 덕흥서림 등 모든 상점에는 밤마다 밤마다 전등 아래에 서책을 고르는 청년 남녀의 자취가 끊일 줄을 모른다’고 했다.
절도 사건 잦아 ‘책 도적’ 양산하기도

▲책 살 돈이 없어 서서 책을 읽는 ‘입독’ 풍경. [사진 조선일보·동아일보]
지식인층은 진고개 서점 순례를 즐겼다. 예컨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을 계기로 신문사 사장직에서 물러난 여운형은 1930년대 말에 마루젠(丸善) 서점에 자주 들러 구미의 신간 서적과 잡지를 입독(立讀)하며 절치부심의 시절을 보냈다. 그가 즐겼다는 입독, 즉 서점에서 서서 책 읽기는 근대적 서점의 등장과 함께 나타난 새로운 독서문화였다.
가난한 학생의 입장에서 책을 사지 않고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이었다. 한 전문학교 학생은 “가두의 도서관”이자 “강사 없는 교실”이라며 서점을 찬미하기도 했다. 하지만 입독은 아무래도 서점주나 직원의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실제로 입독하는 손님들을 은근히 압박해 쫓아내는 서점도 있었다. 서점에서 쫓겨난 이들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조선인들은 종로 탑골공원 옆에 있는 경성도서관(현 종로도서관의 전신)을 주로 찾았다.
누구나 서점에 들러 자유롭게 책을 꺼내볼 수 있는 문화는 ‘책 도적’이라는 ‘근대적’ 범죄자를 양산하기도 했다. 당시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주로 규모가 큰 서점에서 절도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주로 본정통의 일본인 서점이나 종로의 박문서관 같은 곳이었다. 책을 훔치다 붙잡힌 이들은 대부분 책 살 돈이 없는 가난한 학생들이나 훔친 책을 헌책방에 팔아넘겨 용돈을 버는 청소년들이었다. 당시 서적 절도 범죄는 비교적 엄중하게 다뤄졌다. 이광수 소설의 마니아였던 17세 소년은 책 한 권을 훔쳐서 종로경찰서에 붙들려갔다.
‘김병호(17)라는 소년은 소설 읽기에 중독이 되어 매일 같이 종로 2정목 박문서관에 가서 소설을 읽던 중 지난 13일 오후 4시 10분경 춘원 작 『무정(無情)』에 혹하여 몰래 이를 도적하여 가다가 점원에게 붙들려 종로경찰서에 인도되어 세상의 ‘무정’을 새삼스레 느꼈는지 다시는 그런 짓을 안 하겠다고 울고불고 있다.’ (「조선일보」, 1939년 10월 15일자)
이 소년이 『무정』에 중독되었던 서점은 1930년대 종로 서점가에서 최고의 매출을 올리던 박문서관이었다. 박문서관의 주인 노익형은 적수공권으로 어린 시절부터 종로 육의전과 남대문 시장에서 사환이나 거간 노릇을 하다가 1907년경 상동(尙洞) 예배당(지금의 회현역 근처) 앞에서 서적업을 시작한 인물이다.
박문서관의 전성기는 1925년경 종로 2정목(종로 2가)으로 점포를 이전하면서 시작된다. 1930년대에는 대동인쇄소를 인수하여 인사동에 인쇄공장을 신축하고, 본사 신사옥도 새로 지었다. 신사옥은 2층 양옥의 건물로 1층은 50평 규모의 서점, 2층은 출판사 편집실로 사용했다. 박문서관은 서점, 출판사, 인쇄소를 다 갖춘 출판·서점 기업이었던 셈이다.
박문서관의 주력 상품은 『춘향전』, 『심청전』 같은 활자본 고소설(속칭 ‘이야기책’)과 신소설류였다. 1935년경 『삼천리』의 조사에 따르면, 박문서관이 지방에서 주문을 받아 파는 고소설은 1년에 3~4만 부, 신소설은 2만 부 이상이 팔렸다 한다. 이는 박문서관의 다른 스테디셀러, 예컨대 이광수의 『무정』 판매량 3~4천 부를 훨씬 뛰어넘는 수치다. 종로의 큰 서적상이 찍어내는 수많은 신구 소설들은 시골 장터와 지역 서점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렸다.
1930년대에 박문서관 외에도 종로2가의 영창서관과 덕흥서림, 견지동의 한성도서주식회사가 ‘조선인 측 대출판서사(大出版書肆)’로 이름이 높았다. 이들은 해방 이후에도 종로 서적업계의 명맥을 이어간다. 한국전쟁의 격동기를 거친 후에도 출판사, 인쇄소, 서점이 다시 모여든 곳은 다름 아닌 종로였다.
이용희 출판문화사 연구자·성균관대 강사
12.02 "젊은이들 백이면 백 비참" 종로 '산책자'로 거듭난 윤동주
종로 배회하던 청년 시인

▲서울 종로구 청운동 자하문 고갯마루에 있는 윤동주문학관. 윤동주는 대학 시절 이곳에서 하숙을 하며 ‘종로 산책자’로 지냈다. [사진 종로문화재단]
종로구 청운동 3-100번지, 북악산 자락, 자하문 고갯마루 예전 ‘수도 가압장’ 자리에 윤동주문학관이 있다. 수압을 높여 고지대로 수돗물을 보내던 장소에 그의 문학관이 들어섰다는 점이 이채롭다.
윤동주는 종로와 어떤 인연이 있었는가. 윤동주는 종로 서촌 주민이었다. 장소는 사람을 생성한다. 변방 북간도 출신의 소년 윤동주가 1938년 ‘경성’에 왔고, 종로를 왕래하면서 ‘모던 청년’, ‘도회의 청년’으로 다시 태어났다. 종로에 살던 시절, 윤동주는 ‘서시’를 비롯하여 그의 대표적인 작품을 썼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에는 ‘경성 청년’의 신체가 형성되는 과정의 고뇌가 스며 있다.
명동서 영화 보고 헌책방 순례도

▲윤동주가 전차를 타고 왕래했던 남대문통 1정목의 거리 풍경. 그는 총독부·경찰참고관 등을 지나치며 식민지 청년의 좌절을 체감한다.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북간도 용정에서 연희전문학교에 유학 온 윤동주는 1941년 4월부터 9월까지 종로 인왕산 밑의 누상동 9번지(지금 서촌 수성동계곡 입구)에서 하숙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전차와 기차를 타고 등하교하면서, 살아 움직이는 도시와 사람들의 생활을 보고, 생각하고, 분석하고, 고민했다. 그는 도시의 겉모습만을 훑어보는 구경꾼이 아니라 도시의 내부를 사유하고 분석하는 산책자가 되었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도시의 산책자와 구경꾼(또는 여행객)을 구분한 바 있다.
벤야민은 산책자와 구경꾼(Badaud) 또는 여행객을 동일한 주체로 보지 않았다. 산책자는 도시 공간에서 개성을 확보하고 있는 자이며, 여행객 또는 구경꾼은 외부세계에 열광하고 도취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경꾼은 자신의 개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개성을 외부에 빼앗겨 버린다.(『아케이드 프로젝트』,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05)
윤동주도 벤야민과 같이 도회인 산책자와 구경꾼 또는 여행객의 차이를 구분하면서 ‘경성 산책자’로서의 개성을 키워갔다. 그는 장소를 냉철하게 관찰하면서 자신의 내면과 개성을 동시에 투시하고 성찰하는 산책자이고자 했다. 그는 ‘경성’의 속도와 일상과 대중, 장소의 정치성을 치밀하게 읽어냈다.
윤동주는 등교하기 위해 누상동 하숙집에서 효자정역까지 걸어와서 전차를 탄다. 그리고 전차 안의 사람들을 관찰하며 자신을 본다.
젊은이들 낯짝이란 도무지 말씀이 아니다. 열이면 열이 다 우수 그것이요 백이면 백이 다 비참 그것이다. 이들에게 웃음이란 가물에 콩싹이다. 필경 귀여우리라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수밖에 없는데 아이들의 얼굴이란 너무나 창백하다. 내 상도 필연코 그 꼴일텐데 내 눈으로 그 꼴을 보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다. (윤동주, ‘종시’에서)

▲윤동주가 하굣길에 자주 들러 책을 읽고 사기도 했던 충무로 책방 지성당.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이 글을 쓸 당시 종로 전차에서 본 대중은 대부분 우수에 비참하고 창백하다. 윤동주는 노동자, 사무원, 학생 등 대중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성찰했다. 대중과 산책자는 상호작용한다. 때로는 대중이 산책자에게 하나의 새로운 풍경과 배경이 된다. 이를 통해 산책자는 자신의 개성과 처지를 확인한다. 이를 통해 또 세상을 관찰하고 발견한다. 윤동주가 식민지 자본주의 경성의 모던 청년으로 태어나는 과정은 이런 분열과 고통의 과정이었다.
성벽이 끊어지는 곳에 총독부, 도청, 무슨 참고관, 체신국, 신문사, 소방조, 무슨 주식회사, 부청, 양복점, 고물상 등 나란히 하고 연달아 오다가 아이스케이크 간판에 눈이 잠깐 머무는데 이놈을 눈 내린 겨울에 빈집을 지키는 꼴이라든가 제 신분에 맞지 않는 가게를 지키는 꼴을 살짝 필름에 올리어 본달 것 같으면 한 폭의 고등 풍자만화가 될 터인데, 하고 나는 눈을 감고 생각하기로 한다. (윤동주, ‘종시’, 1941)
그가 탄 전차는 효자동에서 출발해서 경성역까지 연결하는 노선이었다. 효자정역에서 출발한 뒤 진명여고~통의정~(영추문)~적선정~총독부전~체신국전~광화문~부청전~태평통2~남대문역~남대문통5~경성역으로 향했다. 이 효자동 전차선은 1917년 조선총독부 신청사 공사를 위해 놓이기 시작해서 1927년 효자동까지 복선으로 부설되었는데 총독부, 동양척식회사 사택, 총독부 관사 등을 잇는 노선이었다. 이 노선은 조선총독부와 경성부청, 경기도청, 경찰참고관, 체신국, 신문사(동아, 조선, 경성일보사, 매일신보사) 등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고 관리하는 핵심 관청과 언론사를 두루 통과하였다. 윤동주는 매일 이 앞을 지나면서 위압감과 위화감, 참담함 등 복잡한 감정을 경험했다. 그중에서도 ‘경찰 참고관’을 명명할 때는 ‘무슨 참고관’이라고 ‘경찰’을 무화시켜버렸다. 지금의 미국대사관 자리에 있던 경찰참고관은 독립군에게서 빼앗은 소총 등 노획물을 전시하는 등 경찰조직을 선전 홍보하는 시설이었다.
서울시청을 지나 남대문까지 태평통은 불결한 고물상이 즐비한 어수선한 거리였다. 윤동주는 ‘한 폭의 고등 풍자만화’와 같은 조선의 거리를 지나며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긴다.
윤동주, 책 800권 사 모은 독서광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그러는 사이 전차는 경성역에 도착하고 그는 거기서 기차를 갈아타고 경의선 방향으로 출발하여 서소문 간이역-아현역-신촌역에 도착한다. 1930년에 경성역~서소문~아현~신촌~연희~서강~공덕~미생정~원정~용산을 잇는 교외순환선이 개통되어 신촌과 아현리 지역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윤동주는 “내 차에도 신경행, 북경행, 남경행을 달고 싶다. 세계일주행이라고 달고 싶다. 아니 그보다 진정한 내 고향이 있다면 고향행을 달겠다”(‘종시’)며 이 기차가 계속 달려서 다른 세계로 그를 데려다 주기를 꿈꾼다. 그는 이 세상으로부터의 탈주를 상상했다. 윤동주에게 기차와 정거장은 그의 삶이자 신체였으며 추억이었다. 외롭고 그리울 때 윤동주는 기차와 정거장을 떠올리곤 했다.
하학 후에는 기차편을 이용했었고, 한국은행 앞까지 전차로 들어와 충무로 책방들을 순방하였다. 지성당, 일한서방, 마루젠, 군서당 등. 신간서점과 고서점을 돌고 나면 ‘후유노야도(冬の宿)’나 남풍장(南風莊)이란 음악다방에 들러 음악을 즐기면서 우선 새로 산 책을 들춰보기도 했다. 오는 길에 명치좌에 재미있는 프로가 있으면 영화를 보기도 했다.
극장에 들르지 않으면 명동에서 도보로 을지로를 거쳐 청계천을 건너서 관훈동 헌책방을 다시 순례했다. 거기서 또 걸어서 적선동 유길서점에 들러 서가를 훑고 나면 거리에는 전깃불이 켜져 있을 때가 된다. 이리하여 누상동 9번지로 돌아왔다.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에서)
함께 하숙했던 정병욱의 회고다. 윤동주의 하학길은 다시 기차를 타고 경성역에 내린 뒤 전차를 타고 한국은행 앞에서 내려 모던보이처럼 본정을 산보하는 것이었다.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쇼핑도 했을 것이다. 주로 서점에 들러 책을 구경하고 새로운 문물과 지식을 살펴보고 음악다방에서 음악을 듣고 커피를 마시고, 중국집에서 백주를 마시기도 했다. 명치좌에서 영화도 보았다. 종로 인사동과 관훈동, 적선동의 헌책방을 순례하고 서촌 하숙집으로 귀가했다.
윤동주가 사 모은 책이 800권 정도였다니, 그의 독서력은 대단했으며 문학과 철학, 세계정세에 대한 이해가 깊고 넓었다. 그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였다.
윤동주는 근대 도시의 전차와 기차, 화려한 상품, 정보와 지식, 예술과 유행 등을 통해 모던한 감수성을 충전하기도 하고, 식민지 자본주의의 욕망과 착취, 낙오한 도시민의 비참과 절망을 투시하는 비판적 산책자였다. 종로 누상동 9번지 하숙집에서 쓴 시 ‘돌아와 보는 밤’은 경성의 산책자로서 그의 감각과 사유를 보여준다.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 두는 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옵기에―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 할 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안과 같이 어두워 꼭 세상 같은데 비를 맞고 오던 길이 그대로 빗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思想)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윤동주, ‘돌아와 보는 밤’(1941.6) 전문
6월 어느 날, 윤동주는 ‘경성’ 도회 청년 산책자로서 집에 돌아와 피로와 울분을 토로한다. 세상과 시대는 비에 젖고 어둠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그의 사상은 분열과 혼란 속에서 능금처럼 익어갔다. 그는 ‘경성’과 종로에서 도회의 청년으로 거듭 태어났다. 그곳은 윤동주에게 ‘영혼의 가압장’이었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정우택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12.16 "조선 이 사나운 곳아" 여성다움 거부, 자유연애 외친 김명순
근대 여성혐오 피해 본 신여성
“조선아 내가 너를 영결할 제/…/죽은 시체에게라도 더 학대해다구/그래도 부족하거든/이 다음에 나갓튼 사람이 나드래도/할수만 잇는대로 또 학대해보아라/…/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라며 근대사회가 여성을 얼마나 ‘학대’했는지 절규하듯 토로한 시인이 있다. ‘유언’이라는 시 제목처럼 ‘학대’하는 세상에서 매일 죽음의 유혹을 느끼며 살아갔던 작가 김명순(1896~1951)이다.
그녀의 이름 앞에는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최초의 근대여성작가로 시집 『생명의 과실』(1925)을 냈으며, 외국어 능력이 뛰어나 애드거 앨런 포우, 샤를 보들레르 등의 작품을 번역했다. 또 근대문학을 선도하던 문예잡지 『창조』의 동인이자 『매일신보』 기자로도 활동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근대 여성혐오의 대표적 피해자였다.
집필한 소설 속 배경 대부분이 종로
▲18세 때인 1914년 전통 한복을 입은 김명순(왼쪽)과 양장을 하고 한껏 멋을 낸 1927년 31세 때의 김명순. [사진 여성문화예술기획]
전(前)근대의 유습이 아직 강했던 개화기 사회는 ‘현모양처’의 영역에서 벗어난 여성을 철저하게 억압했다. 특히 신교육을 통해 각성한 신여성들에게는 더욱 가혹했다. 김명순·김원주·나혜석·윤심덕 등은 일본 유학까지 한 뛰어난 예술가였지만 선정적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사회적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당시 신여성에 관한 담론을 주도하던 잡지 『신여성』에서는 ‘이혼 후 일본에서 융비술(隆鼻術)을 하고 돌아와 연애생활을 달게 하고 있는 김원주…’(1924.04), ‘이성을 너무 많이 아는 이 중에 훌륭한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김명순도 마찬가지’(1924.11), ‘결혼했는지 이혼했는지 첩이 되었는지 도망했는지, 국경 넘어가 있던 윤심덕이 요사이 조선에 들어와 숨어 사는 것 같다’(1925. 여름호)는 등 이들에 대한 비아냥이 담긴 기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위의 예술가 중에서 문학계가 합심하여 배척하고, 황색언론이 관음증의 대상으로 소비하여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대표적 인물이 김명순이다. 그녀는 대지주이자 평양 참사관을 역임한 고위 관료 김희경과 기생출신 첩 산월과의 사이에서 출생했다. 1912년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시부야 국정여학교로 유학 갔으나 학교를 그만두고 급거 귀국한다. 후일 초대 육군참모총장에 오른 이응준에 의해 데이트 성폭력을 당하고, 심각한 2차 가해까지 당한 충격 때문이다. 심지어 『매일신보』는 그녀가 짝사랑하던 이응준의 결혼 거절로 자살을 기도했다는 식의 왜곡된 내용의 기사를 여러 번 게재한다. 공인도 아닌 19살 여성의 내밀한 사생활이 그녀의 의지와 무관하게 대중에게 노출된 것이다.
어머니가 기생 출신의 첩이라는 출생 배경을 앞세워 ‘더럽고 음탕한 피’ ‘더러운 자궁’을 타고난 여성으로 규정하고, 잘못의 원인을 그녀에게 돌린다. 더구나 ‘순결치 못한’ 처녀라는 소문만으로 기독교계 학교로부터 제적당했고, 개종한 가톨릭교계에서도 정절의 윤리에 어긋난 존재로 인식되자 결국 신앙까지 버린다. 수필 ‘귀향’(1936)에서 그는 ‘일생을 통하야 못 이저지는 그 피압흔 경험을 갓자고 생기어나서 공부하고 일하고 고난당하든 일들이 뜨거운 눈물을 하염업시 자아내고야 맘니다’라며 성폭력의 트라우마로 평생 고통 받았음을 토로했다.
▲1929년 발간된 것으로 알려진 ‘애인의 선물’. 김명순의 시·소설 등이 실렸다. [사진 여성문화예술기획]
그럼에도 좌절하지 않고 숙명여자고보에 편입하여 졸업(1917)하고, 이화여고보에도 입학하여 졸업(1919)할 만큼 학구열이 강했다. 1917년 『청춘』지의 ‘특별대현상’에서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입선하면서 등단했다. 심사위원이었던 이광수의 극찬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한 그녀는 시·소설·수필·희곡 등 장르를 넘나들며 열정적으로 창작활동을 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녀의 소설 속 공간 대부분이 종로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이다. 소설 ‘꿈뭇는 날 밤’(1925)의 주인공은 안국동 네거리를 지나 경복궁으로 향하며 사색에 잠긴다. ‘나는 사랑한다’(1926)에서 헤어졌던 남녀 주인공이 재회하여 불같은 사랑을 확인하는 곳이 동숭동이다. ‘모르는 사람갓치’(1929)에서는 여주인공 순실이 애정문제로 고민하며 걸어 다니는 곳이 북촌 곳곳이다. 그녀가 종로에 공간적 의미를 부여한 것은 근대 종로가 문화예술인들의 사교와 활동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매일신보 기자 활동, 외국서적 번역도
▲김명순에 대한 노골적인 악담을 실은 『신여성』의 표지(왼쪽)와 뒷 표지 광고. [사진 한국대중음악박물관]
그녀는 작품을 통해 자신에게 혐오의 칼을 들이미는 세상과 맞서려는 굳은 의지를 피력한다. 시 ‘탄실의 초몽’(1924)에서는 ‘온 하늘이 그에게 호령하다/“전진하라 전진하라”’고 노래한다. 수필 ‘네 자신의 우헤’(1925)에서는 자신의 아명 탄실을 호명하며 ‘이제 다시 이러나자’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자신을 비난하는 남성작가들에게도 굴복하지 않았다. 김기진이 ‘김명순씨에 대한 공개장’(『신여성』, 1924.11)에서 ‘부정한 혈액’을 언급하며 공개적으로 저격하자 그녀는 ‘사실이 전부 틀리고 없는 말을 조작한 것이 많고 전부 앞뒤가 맞지 않아 모순뿐’이라는 내용의 반박문을 게재한다. 방정환이 잡지 『별건곤』에서 ‘남편을 다섯이나 갈고도 처녀 행세한다’고 근거 없는 가짜기사를 쓰자 명예훼손으로 고소한다.
김명순이 여성혐오의 아이콘이 된 것은 조선이 요구하던 ‘여성다움’을 온몸으로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선 여성에게 필요한 것이 ‘자유’이고, 이를 위해서는 자유연애와 자유결혼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실천했다. 이러한 주장은 같은 여성한테까지 비판받았다. 김활란은 ‘연애라는 미명으로 자기네 양심상 가책을 무찰(憮擦)시키며 사회적 체면을 유지하려는 그런 기만 행동과 진정한 연애와는 엄정히 구별해서 취급해야 할 것’(『신여성』, 1933.02)을 강조한다. 김명순처럼 자유연애를 추구했던 신여성들은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기혼남을 유혹해 가정을 파탄 내는 부도덕한 팜므파탈이라고, 연애의 진정한 가치를 모독한 사이비라고 무차별적 ‘학대’를 받은 것이다.
그녀의 작가적 역량을 인정해 『창조』 동인으로 받아들인 김동인이 비난의 첨병에 서자 김명순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받는다. 김동인은 그녀를 모델로 한 소설 ‘김연실전’(1939)의 주인공으로 문란한 신여성을 등장시켰다. 친하게 지내던 동향의 오빠 친구가 김동인이다. 자신에 대한 오해를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녀였지만 가까운 지인의 노골적 인신공격에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김연실전’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응 없이 쫓기듯 일본으로 건너간 그녀는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다 55세에 외롭게 죽음을 맞았다. 말년에는 정신병원에서 행려병자로 지냈다고 알려진다.
남성작가들이 그녀에게 이처럼 가혹했던 이유는 자신보다 뛰어난 여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열등감, 억압에도 좌절하지 않는 주체적 의지에 대한 거부감에 더해 피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무력감을 여성혐오라는 폭력의 발산으로 대리 보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녀가 발표한 130여 편의 작품과 글들은 모두 자신의 삶에 기반을 뒀다. 시대에 저항하기 위한 대항적 글쓰기로 그녀가 선택한 것이 자전적 글쓰기였기 때문이다. 문단의 역사에서 강제로 삭제됐던 김명순은 요즘 미투(Me, too)운동 속에 새롭게 주목받고, 작품세계가 재평가되고 있다. 소설가 김별아는 그녀의 삶을 복원한 소설 ‘탄실’(2016)을 발표하였고, 그녀의 작가적 삶을 그린 연극 ‘나는 사랑한다-김명순전’(2022), ‘의붓자식’(2023)이 종로문화다양성연극제에서 공연됐다.
물론 김명순 생전에 그녀를 옹호한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최서해가 김기진의 ‘김명순에 대한 공개장’을 비판하며 그녀를 격려해서 창작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얻었고, 자살하려던 그녀에게 누군가 보낸 ‘아름다운 K양(김명순)이 혼탁한 사회에서 아름다운 구원의 여성’이 되기를 바란다는 편지로 인해 다시 삶을 다잡았다. 그녀를 응원하는 작은 목소리가 있었기에 그 폭력의 시대를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그녀와 연대하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비로소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회복하고, 작품으로 시대와 화해하고 있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이은경 한국연극평론가협회장
12.30 "익선동은 서울의 자궁" 우리 소리 울려퍼진 풍류의 고향 - '맛∙멋∙글∙흥∙혼' 흘러넘쳐, 옛부터 여기가 '서울의 자궁'(제목이 이중 등록)
종로의 새 명소 익선동
서울은 만원(滿員)이다. 소설가 이호철은 그렇게 말했다. 그때가 1969년, 인구 500만 명을 육박한 상황에서 그렇듯 비명을 질러댔다. 사람이 살 곳 아니라지만 사람이 살려고 서울로 모이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처럼 ‘서울불(不)서울’이다. 그러나 지금도 늘 익선동 주변을 도는 이른바 종3(종로3가) 세대가 우리 세대에 수두룩하다. 아직도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난다. 익선동 하면 늘 추웠던 기억이 흐른다. 사람을 떠나게 해도 돌아오게 하는, 무언가 알지 못하는 힘을 느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불야성을 이루는 포장마차길 따라 정처 없는 밤안개처럼 떠돌다, 뜨거운 불판 위에 갈빗살을 구워 먹으며, 한여름 밤을 하염없이 울다 떠나는 매미 같은 찰나의 신세지만 불퇴전의 기세로 떠들고 발광하다 헤어졌던 시절이 늘 맴돈다. 아직도 도가 부족한지, 변증법적 애증의 쌍곡선이 밤하늘 무지개처럼 뜬다.
박귀희·박초월 명창이 ‘안주인’ 역할
▲종로 익선동에 있었던 조선축음기상회.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지금은 익선(益善)이지만 익선동은 본래 익동(翼洞)이다. 매미모자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매미의 청렴을 본받아 선정(善政)하고자 한 조선의 해학도 있다. 꼴에 매미를 닮아 이슬만 먹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으며, 자기 집을 짓지도 않고, 때를 알아 허물을 벗고 물러나는 절도를 가진 매미의 오덕(五德)을 경계 삼고자 임금은 매미 날개를 위쪽으로, 신하들은 매미 날개를 아래로 하는 익선관을 나누어 썼다. 그러나 어디 그런 풍류의 삶을 모자 쓴다고 알 것이며, 어디 한 ‘놈’이라도 그런 ‘분’이 있었는지 구중궁궐에다 물어볼 일이다.
익선동을 만든 진짜 매미는 민족 운동가이며 우리나라 최초 부동산 개발업자인 정세권 선생이다. 현재 한옥마을로 지정된 익선동 165번지 일대는 본래 철종의 생부인 전계대원군의 사저 ‘누동궁’ 자리였다. 철종도 익선동 출생이다. 그러나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고 익선관들은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고 제 살길 찾아 간다.
당시 일본인들이 익선동 등 서울 사대문 안 곳곳에 침투하려 하자, 정세권 선생이 익선동 땅을 매입하여 작게 나눠서 20여 평 미만 규모의 작은 한옥들을 다닥다닥 지어 조선인들에게 분양했다. 익선동 한옥마을이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정 선생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강력히 반발해 그 개발을 통해 얻은 이익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한 사람이었다. 모자 안 쓴 진짜 ‘익선관’이었다.
익선동은 조선시대 서울의 중심거리인 종로에 중심을 틀고 있고 인근에 창덕궁, 북촌, 경복궁, 인사동, 종묘, 탑골공원 등 조선 500년의 문화와 역사를 담고 있다. 일제에 의해 조선왕조의 궁궐이 해체되자, 궁 밖으로 나온 궁녀들에 의해 궁중요리, 한복 등 다양한 궁중 문화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조선성악연구회 창립 5주년 기념사진. [사진 국악음반박물관]
이광수, 최남선과 함께 조선의 3대 천재인 벽초 홍명희의 팔홍문집이 바로 익선동에 있었다. 그의 소설 『임꺽정』은 일제 때 살아 있는 우리말 사전이었다. 그리고 우리 소리 대가들로 이뤄진 조선성악연구회가 1937년 익선동 159번지에 들어선다. 판소리 동편제의 명창 송만갑이 입경(入京)하며, 천하 명인명창들의 소리가 익선동에 울려 퍼졌다. 조선성악연구회는 판소리를 일으켜 세우고 창극을 통해 해방 후 국악원을 통해 민족음악을 창출한 집단이다.
익선동 한옥마을이란 공간은 이들 명창 명인들의 보금자리가 됐으며, 종로 권번이나 한성과 한남 권번 인근 기생들을 불러 모았다. 특히 종로 권번 출신 기생들은 극장에서 조선 춤, 서양 춤, 노래, 조선 전통 가무극, 모더니티를 첨가한 호화찬란한 무용 등을 공연하면서 당대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말하는 꽃’ 해어화(解語花)인 기생의 풍류로 조선의 음률과 선이 살아났다. 영화 ‘해어화’에서 기생에 대해 “사람과 말, 학문과 예술을 아는 말, 감히 꺾을 길 없는 고귀한 몸과 꽃이다. 재주란 그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며 기생이란 다름 아닌 예인이다”고 했다는데 맞는 말이다.
▲종로구 계동에 있는 우리소리도서관. [사진 종로문화재단]
해방이 되고 서화가 김용진과 이병직이 살던 집은 훗날 요정 오진암(梧珍庵)이 된다. 1953년 오진암을 비롯, 대하, 명월, 청풍 등의 요정과 한정식집 송암(淞庵) 등이 익선동에 자리 잡았다. 익선동의 요정은 1970년대 초반에 들어 관광 요정 문화가 활성화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일본인 관광객들이 자주 찾던 오진암은 서울에서 가장 많이 세금을 낸 곳이었고, 익선동 요정들이 경쟁하듯 서울시에 세금을 많이 냈으니 생산성 있는 동네였다. 오진암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년에 북한 박성철과 7·4 남북 공동 성명을 논의한 곳이다.
익선동에 우리 문화 운동 세력이 포진한 것은 1990년대 초반이다. 한참 후 인근 건국빌딩으로 옮겼지만, 1980년 전후 민중문화운동을 아현동 애오개에서 열었고, 1990년도에는 버젓이 낙원상가 옆길 은성약국 끼고 익선동 안으로 쭉 들어오면 있던 4층짜리 건물에 드디어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공간을 마련했다. 그때 민족문학, 민족음악, 민족미술, 민족연희 모두 한자리에 모였고 밤이면 오늘날 종3의 포장마차처럼 각 장르 민족예술가들이 산개하며 게릴라처럼 알아서 술추렴을 하다 죽지 않고 다음날 아침에 다 돌아왔다.
그때 기억으로 익선동 한옥마을은 늘 우리들 고향 같았다. 고향 누이들이 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는 조용한 촌이었다. 그리고 어느 소설가 형님이 술좌석에서 한 말, “이 곳 익선동은, 풍수적으로 서울의 중앙인데, 서울의 자궁이야”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그만큼 음기가 강한 곳이다. 반면 안정적이며 생산력이 강한 곳이다. 나중에 2000년 국립극장에서 남북교류를 열고 재일조총련 금강산가극단과 공동음악회를 한 후 이곳 크라운 호텔 인근에서 안기부의 보호 아래 밤새 판을 벌였는데, 익선동은 내게 그런 편한 곳이었다.
민족문학·민족음악·민족미술 다 모여
▲종로구 계동에 있는 우리소리도서관. [사진 종로문화재단]
익선동에 바람이 불면 이곳에서 박귀희 선생을 기린다. ‘순풍에 돛 달아라. 갈길 바뻐 돌아간다’는 자서전 제목처럼, 어찌 보면 박귀희 여사가 익선동 안주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여기가 원래 뼈대가 있는 동네였어요”라며 덕성여대 교육관 앞에 선 판소리 고법 명인 정화영 선생은 “여기가 박귀희 선생님 집입니다. 그 집 현관이 여기에요. 예전부터 박귀희 선생님, 박초월 선생님(박초월은 해방 후 국악원 창극제전에 출연하며 경국지창으로 불렸다. 나라를 흔드는 소리였다) 이곳 집들을 우리가 세배 다니고 그랬어요. 원래 여기 전체에 집이 있었죠. 저 옆의 월드타워까지였죠.” 박귀희, 박초월 두 분이 이곳 익선동에서 언니 동생 하며 정겹게 살았다 한다.
그뿐이랴. 이 일대 국악인들의 연구소에 전수소가 즐비하여 국악촌을 이루었다. 묘하게 익선동 윗동네 운니동에 구(舊)왕궁 아악부와 운당여관이 상징적으로 존립했지만, 박귀희는 서울의 명소 운당여관도 팔고 익선동 삶의 공간도 모두 팔아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를 만들었다. 현재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이다. 해방 후 여성국악동호회가 만든 여성국극 민족오페라 ‘햇님 달님’이 공전의 히트를 치며 모은 돈이 기반이었다. 국내 최초 남장 여인으로 최고의 주가를 올렸고 임방울 명창을 비롯해 많은 명창들을 살렸지만 순풍에 돛달고 모든 것을 내어 놓은 뒤 갈길 바삐 돌아간 익선동 안주인의 삶에서 진정 익선관 매미의 날갯짓이 살아온 듯하다.
2010년대 후반부터 복고풍에 현대적 감성을 더한 ‘뉴트로’ 열풍이 불었고, 익선동 또한 을지로, 홍대 등과 함께 점차 뉴트로의 중심지로 돌아왔다. 이제 종로구 국악로에 국악특화도서관인 ‘우리소리도서관’이 개관하여 익선동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골목마다 각각 다른 매력이 있고 맛집도 많아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로 변했다. 문화·엔터테인먼트 전문 온라인 매체 ‘타임아웃’이 선정한 ‘2021년 세계에서 가장 멋진 동네 29곳’에 종로3가가 3위에 올랐다. 익선동에 오덕(五德)을 지닌 매미들의 삶을 우리가 더 펼쳐나가자.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김태균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