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2023-02]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조선일보

07.01 100년 전 내한한 美 야구 올스타팀, ‘조선軍’ 무참히 꺾다
1922년 12월8일 용산 철도운동장, 23대 3으로 격파

▲1922년 12월8일 경성에서 조선대표팀과 시범경기를 가진 미국 야구 올스타팀. 동아시아 투어를 출발하기 위해 캐나다 밴쿠버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앞줄 양복입은 사람이 단장 겸 감독 허브 헌터. /위키피디아
1922년 12월7일 오후 7시50분 남대문 역(경성역 전신)에 미국 야구 올스타팀이 도착했다. 그해 월드시리즈를 석권한 뉴욕 자이언츠와 뉴욕 양키스, 보스턴 레드삭스 선수가 포함된 대표단이었다. 조선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낸 이들은 다음날 오후 3시 용산 만철(滿鐵)운동장에서 조선 대표팀과 맞붙었다. 1904년 필립 질레트 선교사가 황성기독교청년회를 통해 처음 야구를 선보인 이래 20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문제는 날씨였다. 경기장인 용산 만철운동장엔 얼음이 한자(약 30센티미터) 가량 두껍게 얼어 얼음을 깨고 녹여야 했다. 다행히 경기 당일 추위는 잠시 수그러들었던 모양이다. ‘연일 사람을 괴롭히던 근일의 추운 일기도 멀리서 온 귀빈을 기쁘게 맞는 듯이 작일에는 특히 일기가 매우 완화하야 때아닌 봄바람이 불었으매…’(‘壯絶快絶한 국제적 경기’, 조선일보 1922년 12월9일) 한낮 영상 4.4도까지 기온이 올랐다. 입장료는 5원,3원, 2원, 1원으로 학생, 군인은 50전을 받았다. 상당히 비쌌지만 관중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임시 전차 10여대를 증설했지만 만원사태를 이룰 만큼 성황이었다.

▲1922년12월8일 오후 용산 철도운동장에서 기념촬영하는 미국 야구 올스타팀. 그해 월드시리즈에 출전한 메이저리거들이 대거 포함된 정예팀이었다. 조선일보 1922년 12월10일자

▲미국 올스타팀과 맞선 조선대표단. YMCA와 학교 야구단 아마추어 선수들로 급조했다. 조선일보 1922년12월10일자.
‘미국에서 온 직업야구단은 세계에서 능히 당할 자가 없는 노련한 용장들이며 조선군도 조선안에서 이름있는 맹장으로만 조직되었음으로 양군(兩軍)의 승패는 어찌되었든지 용비호략하는 그들의 장쾌한 싸움은 한번 구경치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럼으로 개전되기 전부터 모여드는 관중은 넓고 넓은 만철운동장내에 가득하야 조선에서는 별로 보지 못하던 대성황중에 양군은 수만명 관중의 천지를 진동할 듯 열광적 환호하는 가운데 서로 자기의 위대한 포부의 기능을 뽐내게 되었는데,조선 안에 있는 미국 사람들이 고국의 동포를 응원하기 위하여 쳔리를 멀다하지 아니하고 각지에서 모여들어 수백명의 떼를 지어가지고 각기 팔뚝을 휘두르며 굉장히 환호하는 것도 일대 가관이었더라.’(‘壯絶快絶한 국제적 경기’, 조선일보 1922년 12월9일)

▲미국 올스타팀의 내한 경기를 보도한 조선일보 1922년12월10일자 신문.
◇YMCA와 각학교 선수로 ‘조선軍’꾸려
조선 대표팀은 당초 주장 이원용에 박석윤 손희운(이상 중앙체육단) 이석찬(평양) 박천병 이태훈(이상 중앙) 안익조 김종문(이상 휘문) 마춘식 함용화 장의식 박안득 김성환(이상 배재)등 13명으로 발표됐다. 하지만 실제 경기때 이원용은 누심(壘審)을 봤고, 김정식, 정원복, 김태술, 김종세가 뛰고, 이태훈, 김종문, 김성환의 이름은 빠졌다. 조선대표팀은 YMCA야구단과 각 학교 야구선수를 모아 꾸린 아마추어 연합팀이었다. 경기 스코어는 23대 3. 예상대로 조선군(軍)의 참패였다. 월드시리즈 결승전까지 오른 뉴욕 자이언츠, 뉴욕 양키스 등 메이저리그 최강팀 선수들을 상대로 겨룰만한 실력이 아니었다.
◇관객 몰려 임시전차까지 운행
조선일보는 이날 경기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경기 주 후원사였기 때문이다. 미국은 보스턴 레드삭스의 좌완 허브 페녹(Pennock)이 투수로 나섰다. 조선팀은 메이저리거 위세에 눌려 7회까지 한점도 내지못했다. 반면 미국 팀은 1회부터 홈런을 날리면서 기선을 제압했다. 경기를 지켜보던 관중들은 풀이 죽었다. ‘그들의 기술과 능력을 비교하여 차이가 있던 우리 전 조선군들은 7회까지 한 점도 얻지 못하게 되었음으로 당일의 관람자들이며 선수들은 낙망의 빛을 가지고 있게 되었다.’(‘용장맹사의 전투’,1922년12월10일) 조선군은 8회에 반격에 나섰다. 김정식, 마춘식이 잇달아 안타를 치고 나가면서 1점을 얻었고, 9회엔 2점을 더 얻어 23대3으로 끝났다. 1시간 50분간의 대결은 마무리됐다.
경기를 마친 미 야구 올스타팀은 이날 저녁 8시 명월관에서 열린 환영연에 참석했다. 조선대표팀 주장인 이원용 등이 주선한 자리였다. 미국 선수들은 조선 기생들의 검무와 승무, 노래를 이색적으로 느낀 모양이다.(‘화기융융한 환영회’, 조선일보 1922년12월11일) 대표단은 다음날인 12월9일 오전10시 남대문역에서 중국 심양(당시 봉천)으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만 이틀도 안되는 짧은 체류일정이었다.
◇'명예의 전당’ 오른 메이저리거
메이저리그 올스타팀은 쟁쟁한 실력파였다. 뉴욕 양키스 우완투수 웨이트 호이트(Hoyt)는 1922년에만 19승(12패)을 거둔 스타였고 1923년, 1924년,1928년 뉴욕 양키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1928년엔 23승을 거둬 MVP로 선정됐다. 1922년 월드시리즈를 제패한 뉴욕 자이언츠의 1루수 조지 켈리(Kelly)는 팀의 주전 타자로 돋보이는 활약을 했다. 보스턴 레드삭스 투수 허브 페녹(Pennock)은 1923년 뉴욕 양키스로 옮겨 팀이 4차례 월드 시리즈를 제패하는 데 주역이 됐다. 뉴욕 자이언츠의 케이시 스틴겔(Stingel)은 그해 타율 3할6푼8리를 기록한 강타자로 훗날 뉴욕 양키스 감독으로 월드시리즈를 7차례나 거머쥔 명감독이 됐다. 이들은 모두 야구선수로서 최고의 영예인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1922년 10월 말 일본에 도착한 이 올스타팀은 대학 팀과 17차례 경기를 치렀다. 전승을 거둘 법한데, 이변이 일어났다. 게이오대 졸업생들로 구성된 미타 클럽(三田俱樂部)에 9대 3으로 졌다.미국팀 타자들이 오노 미치로(小野三千麿)란 투수에게 꽁꽁 묶여 타격이 살아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그 올스타 팀은 경성을 거쳐 상해, 마닐라에서도 경기를 가졌다.

▲체육기자 이길룡이 신동아 1934년3월호에 쓴 '운동기자열전'. 이원용을 '조선 야구계의 대선배로 자타가 공인한다'고 썼다.
◇이원용의 고군 분투
메이저리그 올스타팀 내한 경기를 주도한 사람은 이원용(李源容·1896~1971)이었다. 1920년 조선체육회 설립 주역인 이원용은 야구 선수이기도 했다. 체육기자 이길룡이 ‘군(君)은 현존한 조선야구계의 대선배로 자타가 공인한다’ ‘조선의 야구사를 알아낸다면 알아낼 사람도 군(君)이오, 또 가장 오랜 문헌을 들추자고 하여도 군(君)이다’(‘운동기자열전’, 신동아 1934년3월호)라고 쓸 만큼 초창기 한국 야구계의 전설이었다.
경성 출신으로 알려진 이원용은 오성학교와 중앙기독교청년회 영어과를 마쳤다. 1917년 오성학교와 중앙기독청년회 출신들로 고려야구구락부를 조직해 같은 해 5월 인천에서 원정경기를 가졌으며, 7월에 동경유학생야구단과 경기를 가졌다.

▲이원용이 창간한 스포츠전문잡지 '조선체육계' 창간호. 1933년7월호/국립중앙도서관
◇조선체육회 창립 주역
이원용은 1920년 7월 출범한 조선체육회 창립 이사 8명 중 하나였다. 이사 대부분은 교육 관계자나 실업인이었다. 조선체육회가 그해 11월4일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첫 사업으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주최한 데는 이원용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이 대회는 전국체전의 효시로 꼽힌다.
그는 조선체육회에 미국 올스타팀 내한경기를 주최할 것을 제안했지만, 과반수 이사가 ‘야구 기술을 팔아서 밥을 먹는 직업선수를 초빙할 필요가 없다’(‘야구반세기의 야화’, 신태양 1956년6월호)고 반대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미국 올스타팀 초청은 이원용, 박석윤 등 야구인 일부가 주최하는 행사가 됐다.
이원용은 박석윤을 앞세워 일본 투어중인 미국 올스타팀 감독 헌터와 만나 교섭을 진행했다. 조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헌터를 졸라 승낙을 얻어낸 이원용은 “사재를 턴다”면서 개런티 1000원에 계약을 성사시켰다. 단 한번의 시합을 위해 일본서 배와 기차를 갈아타며 경성에 오도록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작년 11월 메이저리그 월드 투어팀이 100년 만에 내한 경기를 추진한다는 뉴스가 나왔으나 무산됐다. 이 땅에 야구가 소개된 지 10여년만에 세계 최고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초청해 경기를 선보인 이원용의 용기는 지금 봐도 무모할 만큼, 경이적이다. 이원용은 1930년부터 3년여 조선일보 운동부기자로 활약했고, 이후 ‘조선체육계’란 스포츠잡지도 냈다가 문닫았다. 여기저기 벌인 사업 때문에 빚에 시달려 고전했다고 한다.
◇참고자료
이길룡, 운동기자열전, 신동아 1934년3월호
이원용, 야구반세기의 야화, 신태양 제5권제6호, 1956년6월
대한체육회, 대한민국 체육 100년, 2022
07.08 보러 갈 오페라도 없는데...대유행한 ‘오페라빽’
辯士시험에까지 등장한 여학생의 ‘핫템’

▲작은 오페라백에서 물건을 많이 넣을 수있는 커다란 핸드백으로 유행이 바뀐다는 내용의 기사. 조선일보 1929년9월15일
‘근래 여학생들의 10분의 7,8은 손에 들고 다니는 ‘오페라빽’-유행중에 유행은 실로 이것이니 모양은 귀주머니 접어서 그려놓은 것같고, 빛은 검정 바탕에 자회색 동을 가로나 세로 단 것, 혹은 검정 바탕에 꽃모양을 접어 붙인 것, 밑에는 솔도 달리고 유리나 ‘세루로이드’로 육모 혹은 방울이 달렸으며 둥그런 쥐일 손은 흰뼈랍니다.’(‘금춘의 류행 의복, 신, 양산’, 조선일보 1925년4월6일)
최신 패션 유행을 소개하는 기사가 신문에 났다. 당시 여학생은 유행을 이끄는 패션 리더였다. 그런데 이 여학생 열명에 일곱, 여덟은 오페라백을 들고 다닌다고 했다. 한 때 거리에서 3초에 1번씩 보인다고 해서 ‘3초 백’ ‘지영이 백’으로 통한 럭셔리 핸드백을 떠올리게 할 정도다. 이렇듯 광적으로 유행한 오페라백의 정체는 뭘까. 이 기사에서 소개한 학생용 제품은 그리 비싸진 않았던 모양이다. 보통은 1원30전, 여학생용 고급은 3원50전이었다. 오페라백이 뭐길래 여학생들이 앞다퉈 필수품처럼 들고 다녔을까.
◇보러 갈 오페라도 없는데…
오페라백은 1920년대 여학생들의 핫템이었다. 원래는 오페라 보러갈 때 들고다니는 작은 핸드백에서 유래했다. 오페라 공연도 없는 조선에서 왜 오페라백이 유행했는지 알 길이 없다. 1920년대엔 경성공회당과 YMCA강당, 그리고 학교 강당 정도가 서양음악 콘서트를 할 만한 공간이었다. 이곳에선 실내악과 독주회가 주로 열렸다. 오페라는 올려본 적도 없다. 전막 오페라 공연은 1937년 5월26일~27일 경성 부민관에서 올린 ‘나비부인’이 처음이었다. 일본 소프라노 미우라 다마키가 주연 초초상을 맡고, 테너 김영길이 핀커튼을 부른 이 땅의 첫 전막 오페라다. 보러 갈 오페라도 없는데, 오페라백만 먼저 들어온 난감한 상황이었다. 일본을 통해 들어온 ‘박래품’(舶來品)이 빚은 촌극이었다.

▲국산 핸드백 공장을 소개하는 기사. 망건 짜던 일꾼들이 쉽게 전업할 수있는 업종으로 소개하고 있다. 조선일보 1936년6월27일
◇변사 시험문제에 등장한 ‘오페라 빽’
1920년대는 아직 무성영화시대였다. 무성영화 상영 때는 내용을 설명하는 변사(辯士)가 필수적인데, 새로 변사가 되려면 자격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1927년 2월25일 경기도청이 주관한 변사시험에 오페라백을 묻는 시사상식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떤 응시자가 ‘괴상한 복면’이라는 엉뚱한 답을 써 시험관을 포복절도하게 했다.(동아일보 1927년3월1일) 변사 면허 응시자들이 대개 남자였기에 생긴 일이다.
◇구슬박은 ‘오페라 빽’ 유행
오페라백은 1920년대 내내 여학생들의 필수품이었던 모양이다. 우산, 양말, 내의와 함께 여성의 일상용품으로 등장할 정도다. 1928년엔 구슬박은 오페라백이 대유행했다.(‘금년 봄에 유행할 양산과 넥타이’, 조선일보 1928년4월4일)
경성제대 예과에 다니던 조용만(1909~1995)은 1928년 안국동을 지나는 모던 걸, 모던 보이를 스케치한 에세이를 썼다. ‘햇빛에 번쩍이는 복사빛 파라솔과 봄바람에 날리는 노란빛 넥타이 그리고 구두 뒤축에 질겅질겅 씹히는 ‘곤세-루’바지와 정갱이 위에 펄렁거리는 ‘사-지’ 치마, 급한 일이나 있는 것같이 부리나케 달아나는 ‘뽀이’의 손에는 발을 떼어놓을 때마다 바이올린이 앞으로 왔다갔다, 황새 같은 ‘뽀이’를 따라가려고 아기적어리는 ‘껄’의 손에는 오페라 빽스가 대롱대롱….’(동아일보 1928년 4월19일) 넥타이와 바이올린, 파라솔과 오페라백은 당시 모던 보이, 모던 걸의 대표적 패션이었다.
◇여성 환심 사는 선물로
오페라백은 젊은 여성의 환심을 사기 위한 선물로도 적당했다. ‘어떤 사람은 ‘오페라 빽’같은 것을 사 보내는 점잖치 못한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개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의 몸치장이 아름답고 모던 껄의 대표적 표본이라 할 만한 차림차리를 탐해서 덤비는 악마의 떼와 같은 무리이었습니다.’ (‘모던 걸 참회록’ 177쪽, 별건곤 제16, 17호, 1928.12)
작은 핸드백을 선호하던 유행은 1930년쯤 서서히 바뀌었다. ‘올 가을의 핸드백 모양은 대체로 큰 것이 유행을 합니다. 실상 넓이 여섯치에 길이 네치쯤 되는 것이 제일 실용적일 것입니다.’(‘올 가을의 핸드백은’, 동아일보 1931년9월2일) 물건을 여유있게 집어넣을 수 있는 큰 핸드백이 유행한다는 내용이다.
◇”핸드백대신 책을 든 이가 더 빛나”
박래품인 핸드백 유행이 못마땅했던지 전통 주머니 ‘엽랑’을 핸드백대신 이용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도 있었다. ‘모던 유행과 정취에다 조선 취미를 살립시다’(조선중앙일보 1936년4월12일)란 제목 아래 핸드백 대신 ‘엽랑’을 쓸 것을 추천했다. 하지만 대세를 바꿀 순없었다. 양식 의복에 전통 주머니차림이 어울릴 리도 없었다.
소설가 상허 이태준(1904~?)은 ‘나는 여성 여러분이 핸드빽 상점에보다 책사(서점)에 더 드나드시기를 바라는 자입니다. 아름다운 핸드빽보다 좋은 책을 든 분이 더 빛나 보이더군요’(매일신보 1941년1월22일)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책은 애당초 핸드백과 경쟁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참고자료
‘모던 걸 참회록’, 별건곤 제16, 17호, 1928.12
이서구, 모뽀모걸의 신춘행락 경제학, 별건곤 제51호, 1932.5
최지혜,경성백화점 상품 박물지, 혜화1117, 2023
07.15 홍난파는 왜 원고를 불살라버렸을까
1920년대 대표적 전문 번역가…”음악이나 잘하라” 친구 변영로 핀잔에 충격

▲홍난파가 번역한 '청춘의 사랑' (신명서림, 1923). 도스토옙스키 등단작 '가난한 사람들'을 번역했다. 물론 일본어 책을 중역한 것이다. 일제시대 도스토옙스키 소설 중 유일하게 출판된 작품이다./국립중앙도서관
◇”네가 불세출의 대천재라고?”
“너는 음악이나 하면 했지, 주저넘게 소설은 다 무엇이야, 그래 개천지(開天地) 통만고(通萬古)해서 두가지 예술에 대성한 천재가 누구란 말이냐?”
스물 대여섯살 난파(蘭坡) 홍영후(1898~1941)가 설날 무렵 문인들과 술자리에 어울렸다가 얼굴에 찬물을 뒤집어쓰는 듯한 수모를 당했다. 권커니 잣거니 순배가 돌다가 취기가 오른 끝에 동갑내기 친구 수주(樹州) 변영로(1898~1961)가 핏대를 올리며 도발한 것이다.
불의의 습격에 허를 찔린 난파가 반론을 폈다. “왜 없니? 바그너도 모르니? 시인이요, 음악가인 바그너 말이다.” 수주가 질 리 없었다. “장하다! 그래 네가 그런 불세출의 대천재란 말이지?”

▲1920년대 전반 최대의 번역가로 손꼽히는 난파 홍영후. 국내 첫 바이올리니스트로 활약하면서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는 물론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폴란드 출신 시엔키에비치의 '쿠오 바디스'까지 번역했다.
◇'수주의 뻔취에 감사’
설전은 멈췄다. 애초 술자리 농담삼아 시작한 얘기니 심각할 것도 없었다. 수주 변영로는 술때문에 빚은 소동을 책(명정 40년)으로 묶어 낼 만큼, 수많은 일화를 남긴 호주가였다. 수주가 가족을 거느린 난파의 집에서 대취해 망신을 당한 일도 ‘명정 40년’에 나온다. 난파도 이런 수주의 술버릇을 잘 알기에 그러려니 흘려 넘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인이자 영문학자인 친구의 일격이 아팠던 모양이다. 밤새도록 뒤척이다 일어나선 출판을 준비하던 창작집 ‘분화구 上에서’ 원고뭉치를 불살라버렸다. 그리곤 문학 쪽은 거들떠보지 않고, 음악의 길만 걸었다. 난파가 마흔 무렵에 쓴 에세이 ‘분서의 이유’(‘박문’8, 1939.6)에 나오는 내용이다. 십수년전 술자리 에피소드를 세밀하게 복기할 만큼, 난파에게 그날의 충격은 컸던 것같다.
난파는 ‘분서를 하고 붓을 꺾지 않았든들 사십평생에 일대의 걸작은 못낳았다 손치고라도 음악가로서의 나의 무재무위한 편보다는, 좀 더 나은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하는 원망을 남겼다. 하지만 ‘수주의 뻔취(펀치)에 아무 통양(痛痒)도 느끼지 않는 반면, 저윽이 감사와 고소를 불금한다’고 마무리했다.
실제로 난파는 1924년 마지막 번역서(에밀 졸라 ‘나나’)를 냈고 1926년 잡지 ‘청년’에 톨스토이 단편 ‘다복한 사형수’를 실은 이후, 음악에만 전념했다.

▲1922년 1월 매일신보 연재소설을 출간한 홍난파 작 '허영'. 메이지시대 인기 가정 소설을 번안했다./국립중앙도서관
◇도스토옙스키,투르게네프, 위고, 졸라 대표작 번역
홍난파가 ‘1920년대 최대의 전문 번역가’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난파는 중장편 9편을 번역해 단행본으로 냈고, 단편 소설 2편을 번역해 잡지에 연재했다. ‘한국근대번역문학사연구’를 쓴 김병철 교수는 난파를 김억과 더불어 1920년대 최대 번역가로 꼽았다. ‘그가 번역한 9편의 작품은 일역(日譯)의 중역(重譯)이긴 하지만, 그 모두가 세계 명작에 드는 작품들’이라면서 난파의 작품 선정 안목을 높이 평가한다. 번역집 목록을 보면 고개를 끄덕거릴 만하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1921.4), 1905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시엔키에비치 소설 ‘어디로 가나’(1921.11),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축약한 ‘애사’(1922,6)와 ‘장 발장의 설움’(1923,2), 뮈세의 장편소설 ‘세기병자의 고백’을 번역한 ‘사랑의 눈물’(1922,11), 독일 극작가 헤르만 주더만의 대표작 ‘매국노의 자’(1923,3), 도스토옙스키의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1846)을 옮긴 ‘청춘의 사랑’(1923,6), 에밀 졸라의 ‘나나’(1924.6)이다. 여기에 새뮤얼 스마일스의 ‘자조론’을 옮긴 ‘청년입지편’(1923.1)까지 추가된다.
‘어디로 가나’는 폴란드 작가 시엔키에비치 ‘쿠오 바디스’를 우리 말로 옮긴 제목이다. 스마일스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으로 유명한 영국 사회운동가다.

▲매일신보 연재소설을 다시 펴낸 홍난파 작 장편소설 '최후의 악수'(박문서관, 1922 )
◇일제하 유일한 도스토옙스키 소설집 번역
난파가 번역한 ‘청춘의 사랑’은 일제시대를 통틀어 유일하게 번역된 도스토옙스키 소설이다. 동경음악학교 예과에 다니던 난파는 1919년2월 자신이 주관한 유학생잡지 ‘삼광’에 ‘사랑하는 벗에게’란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했다가 잡지가 폐간되면서 연재를 멈췄다.1923년 ‘청춘의 사랑’으로 제목을 바꿔달고 출간했다.
출판 준비 중이던 원고도 있었다. 1923년 ‘세계문호단편집’ 광고가 실렸는데, 이 원고로 추정되는 난파의 육필 ‘다복한 사형수’가 단국대 ‘난파 홍영후 기념관’에 소장돼 있다. 여기엔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 오스트리아, 스웨덴 단편소설 11편이 실려있다. 근대문학번역사 전공 윤경애 영남대 일문과 외래교수는 ‘일제 강점기를 통틀어 다섯 권밖에 출판되지 못한 단편소설 번역집의 번역사 안에서 가장 다양한 작가의 대표작들을 선별하여 번역한 번역집’이라며 이 책이 출간되지 않은 것을 아쉬워한다. 홍난파의 번역은 물론 원전이나 영어본이 아니라 당시 일본 유학생에게 익숙한 일본어 번역본이 저본이다. 비록 일본어 저본을 중역했으나, ‘문장과 단락, 내용의 전달과 표현에서 큰 차이가 없는 축자역의 솜씨를 보여, 홍난파의 번역이 저본에 매우 충실하였음을 확인할 수있다’고도 했다.

▲홍난파가 1921년 번역 출간한 투르게네프 '첫사랑'. /국립중앙도서관

▲홍난파가 1921년 번역 출간한 투르게네프 단편 '첫사랑' 신문광고. 영역과 일역본을 저본 삼아 원작에 가깝게 번역했다고 소개한다. 조선일보 1921년5월9일자

▲홍난파가 번역한 스마일스 책 '청년입지편' (박문서관, 1923)에 수록된 홍난파 저역서 광고. 이미 출간된 것만 13종, 인쇄중인 책이 2종, 근간이 5종이다.
◇'서툰 감상주의와 아마추어리즘’
난파는 직접 소설도 썼다. 매일신보에 연재한 소설을 묶은 장편 ‘허영’(1922)과 ‘최후의 악수’(1922), 창작집 ‘향일초’(1923) 3종을 냈는데, 문학적으론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허영’과 ‘최후의 악수’는 메이지시대 일본의 인기 가정 소설을 번안한 작품이다. 박진영 성균관대 교수는 ‘홍난파 소설이 서툰 감상주의와 아마추어리즘을 넘어서지 못한 수준에 머물렀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창작집 4권 출간을 동시에 추진한 난파의 패기와 열정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고도 했다.
◇연악회 결성, 한국인 첫 바이올린 독주회, 작곡...왕성한 음악 활동
난파의 외국 문학 번역이 놀라운 점은 이 모든 작업을 음악 활동을 하면서 병행했다는 사실이다. 1916년 ‘악전대요’을 시작으로, ‘창가집’, ‘악보집’ 등 음악책 13종 15권(출간 예고 포함)을 낸 것도 이즈음이다. 도쿄음악학교 예과에 재학(1918년4월~1919년6월)하면서 1919년2월 예술종합잡지 ‘삼광’(통권3호)을 발간했다. 1922년 음악연구기관 연악회(硏樂會)를 만들어 연주를 다녔고 1924년 1월19일 한국인 첫 바이올린 독주회(‘바이오링 홍영후씨 독주회’, 조선일보 1924년1월18일)를 종로 청년회관에서 열었다. 한국인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음악가로서의 활약만 해도 눈부신데, 번역가로서의 활동은 힘에 부칠 만하다.
난파는 중앙보육학교 음악과 주임으로 가르치던 1931년에도 이런 글을 남겼다. ‘소설 깨나 쓰던 것을 한꺼번에 불살러버리고 일어서지만 안했더라도 그동안에 세계적 작품까지는 몰라도 조선적 작품 한 편쯤이야 쓰지못했으리라고 뉘 감히 단언할까 보냐’(‘유모레스크’上, 조선일보 1931년 2월20일)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했던 모양이다.
◇참고자료
홍난파, 焚書의 이유, 박문 8, 1939.6
박진영, 홍난파와 번역가의 탄생, 코기토 70, 2011.8
윤경애, 홍난파의 쿠오바디스 번역 양상과 번역의 계보 고찰, 번역학연구 제20권2호, 2019 여름호
윤경애, 홍난파의 미발표 단편소설 번역집 ‘다복한 사형수’의 번역 계보 및 번역사적 의의 고찰, 번역학연구 제21권2호, 2020 여름호
김병철, 한국근대번역문학사연구, 을유문화사, 1975
07.22 만주 건국대, 조선 엘리트 청년의 탈출구?
1938년 5월 개교한 만주국 지도자 양성기관, 조선인 학생 91명 입학

▲1938년 만주 건국대 개교와 함께 교수로 부임한 육당 최남선. 육당은 이 대학 개설 당시 유일한 조선인 교수였다. 훗날 총리가 된 강영훈은 육당이 이 학교 교수로 있다는 사실 덕분에 건국대에 지원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소련 볼셰비키혁명지도자 트로츠키. 스탈린과 대립하면서 외국으로 떠돌다 암살당했다. '만주국' 설계자 이시하라 칸지는 당초 트로츠키를 '아시아대학' 교수로 영입한다는 구상을 세웠으나, 대학 설립과정에서 배제되면서 무위로 끝났다. /위키피디아
◇'전대미문의 경쟁률’, 만주 건국대 입시
‘25명 선발에 지원자가 천여명’ ‘만주 建大 조선학생 모집에 전대미문의 경쟁률’(조선일보 1937년10월22일)
1937년 가을 치열한 입시 경쟁이 벌어졌다. 여름에 시작된 중일전쟁도 열기를 잠재우지 못했다. 만주에 신설되는 건국대(建國大)가 목표였다. 1938년 5월 당시 만주국 수도 신경(요즘의 장춘)에 들어설 이 대학은 조선과 일본, 만주, 대만, 몽골, 러시아 등 6개 민족을 합해, 모두 150명을 선발할 예정이었다. 조선에서 모집하는 신입생(일본인 포함) 지원은 10월20일 마감했다. 경성에서만 조선인 155명, 일본인 140명이 몰렸다.
12월27일부터 사흘간 수송동 경성여자사범학교에서 조선내 지원자 1차 시험이 치러졌다. 신체검사가 첫번째라는 게 특이했다. ‘만주 대륙에서 활동하자면 우선 신체가 건강하여야 하겠스므로 무엇보다도 건강을 먼저 보는 것’(‘입시수난 제일번’, 조선일보 1937년 12월28일)이라고 했다. 응시자 670여명중 90명(조선인 60명, 일본인 30명)을 뽑았다. 경쟁률은 7.4대 1이었다.
이듬해 초 신경에서 2차 시험을 치렀다. 조선인 응시자에겐 시험장까지 왕복 교통비와 숙박료 전액이 지급됐다. 유례없는 대우였다. 2차 시험은 면접이었다. 인문사회, 자연과학, 일반상식과 인성 등 세 분야로 나눠 분야당 15~20분의 면접시간이 배당됐다. 1938년 3월 최종 합격자 발표가 났다. 조선내 지원자 중 합격자는 11명(일본인 2명 포함)뿐이었다.(‘건국대학 합격자 조선에서 11명’, 조선일보 1938년3월24일)
건국대 입시 경쟁은 이듬해에도 치열했다. 총독부 학무국은 2회 때인 1939년 입시엔 83명을 추천했다. 조선인 57명, 일본인 26명이었다. 최종 합격자는 전년과 비슷한 13명이었다. 조선인은 9명, 일본인은 4명이었다.(‘건국대학 합격자 발표’, 조선일보 1939년1월17일) 두번째 입시의 특징은 경기중 출신이 5명이나 붙었다는 점이다. 일본인은 광주,대구,원산, 부산중 출신이 1명씩 붙었다.

▲1937년 12월27일 경성여자사범대학에서 만주 건국대에 지원한 수험생 1차 시험이 치러졌다. 만주국 엘리트 양성을 목표로 설립된 건국대는 학비는 물론 기숙사비, 의복비까지 무료였다. 한달 용돈까지 지급해 가난한 집안 수재들이 몰렸다. 조선일보 1937년12월28일자
◇학비, 기숙사비 무료…한달 용돈 5원까지
만주 신경(新京)의 신생 대학에 청년들이 목맨 이유가 있었다. 학비가 전액 무료인데다 전원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기숙사비도 공짜였다.속옷 이외의 의류는 무료로 제공했고, 월 5원의 용돈까지 지급했다. 무엇보다 졸업 후 만주국 고급 관료의 길이 보장돼 있었다. ‘오족협화’(五族協和)를 내건 만주국을 운영할 엘리트를 양성할 목적으로 만든 대학이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엔 대학이 경성제대 하나뿐이었고, 그나마 일본인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경성제대 졸업생 가운데 일본인 학생은 전체 졸업생의 66%, 조선인 학생은 34%에 불과했다.
◇조선인 입학생은 91명…전체 학생의 7%
만주 건국대는 최근에야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정희 인천대 교수의 논문 ‘만주 건국대학의 교육과 조선인 학생’(2016)은 건국대 재학 조선인 학생의 현황과 수업 과목, 향후 진로 등 다양한 정보를 알려준다. 만주건국대학재한(在韓)동창회가 펴낸 ‘환희령(歡喜嶺): 만주건국대학재한동창문집’(1986,1988 총 2권)을 자료삼아 조선인 학생들의 지원 동기, 생활 상황 등을 분석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1938년부터 1945년까지 7년여 존속한 건국대에 다닌 조선인은 약 91명이었다. 전체 입학생 약 1300명 중 7% 정도였다. 일본인과 중국인에 이어 3번째로 많았다. 대만인보다도 약 4배가 많았다고 한다. 1940년 만주국 인구 4320만 중 한족은 85.34%로 대다수를 차지했고, 만주족 (6.2%), 조선인 (3.36%), 몽고인(2.47%), 일본인(1.9%)순이었다. 82만 명에 불과한 만주내 일본인이 건국대 학생의 47%를 차지한데 비해 만주국 인구 91%인 중국인은 37%로 그 다음이었다.

▲1941년 만주 건국대에 들어간 강영훈 전 총리 . 그는 육당 최남선이 이 대학 교수로 있어서 지원하게 됐다고 회고한 바 있다. 재학중 학병으로 끌려간 강영훈은 해방 후 창군에 참여, 6.25 전쟁에서 싸웠다. 육군 중장으로 퇴역한 그는 노태우 정부에서 총리를 지냈다.
◇'황민화운동 너무 심해 만주로…'
건국대에는 가난한 집안 수재들이 많았다. 경성제대나 사립 전문학교, 일본 유학은 돈이 많이 들었다. 국립인데다 학비, 생활비가 들지 않는 건국대는 매력적인 대안이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2등 국민으로 사는 것보다 만주에서 새 기회를 찾으려는 청년들의 모험심도 한몫했다.
건국대에는 조선인 학생에게 매력적인 인물이 하나 있었다. 육당 최남선(1890~1957)이었다. 교과서에도 실린 ‘심춘순례’, ‘백두산근참기’를 쓴 문인이자 ‘3.1독립선언문’ 작성자로 명망높은 거물이었다. 훗날 총리를 지낸 강영훈은 원래 제국대학을 가려다 육당이 건국대 교수로 있는 것을 알고 입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1939년 입학한 김영록도 최남선이 건국대 교수로 있는 게 입학에 영향을 미쳤다고 회고했다.
기억의 윤색이 불가피한 회고임을 감안하더라도 조선인 학생들이 밝힌 건국대 지원 동기엔 진실이 담겨있다. ‘황민화운동이 너무나 심해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졸업하고 상급 학교를 지망하는 사람은 거의 일본의 고교와 만주로 갔다. 조선에 머무르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오창록의 회고 내용이 그렇다. 민족 차별 없는 만주에 가서 꿈을 펼치고 싶었다는 얘기다.
◇군사,무도 훈련 중시…광복후 한국군 창설, 발전에 참여
건국대는 전기 3년, 후기 3년 등 6년제 과정이었다. 전기는 정신 훈련 및 각종 훈련, 일반 과목, 어학과목 시간이 각각 33%, 28%, 39%로 삼분돼 있는데, 특히 훈련과목 비중이 일반 제국대학에 비해 높은 게 특징이다. 전기 2년 1학기엔 매주 월요일 5~6교시, 수요일 3~4교시, 목요일 5,6교시가 군사훈련이었다. 현역 육군 대좌와 보병대위 등 배속 무관이 군사훈련을 맡았다. 분열행진, 사격, 격투 훈련이 실시됐고 글라이더 조종 훈련이 들어간 게 독특하다. 초급 지휘관으로 실제 전투를 이끌 수 있는 것을 목표로 할 만큼 엄격하고 강도높은 훈련이었다고 한다.
조선인학생은 1944년부터 특별지원병, 학도병으로 징집당해 간부후보생 교육을 받고 소위로 임관한 경우가 많았다. 건국대 재학, 졸업생 50명은 해방 후 대한민국 국가 건설에 참가했다. 특히 군대 창설과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재학 당시 받은 강도 높은 군사훈련과 유도, 합기도 등 무도 훈련이 기여했다는 증언이 많았다는 점도 기억할 만하다.
육사교장과 총리를 지낸 강영훈, 육군참모총장 출신 민기식, 육군 중장 예편 후 대한광업진흥공사 사장을 지낸 정진환, 육군대학 교장을 지낸 박중윤, 육군준장, 튀니지 대사를 지낸 안광호, 육군준장 예편후 주일공사, 스웨덴대사를 지낸 방희 등이 대표적이다. 동완(고려대), 진원중(서울대), 김삼수(숙명여대, 고려대), 김재진(경북대) 등 학계에서 활약한 건국대 출신도 여럿이다. 한홍수(한일은행장), 김영록(재무부 이재국장)처럼 경제계에서 활약한 인물도 있다.
◇트로츠키, 간디, 펄벅 등 교수 영입 구상
만주국 기획자인 일본 관동군 참모 이시하라 칸지(石原 莞爾,1889~1949)는 당초 ‘아시아대학’ 설립을 주장했다. 단순한 고등교육기관이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 건설될 ‘동아연맹’을 담당할 엘리트를 양성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교수진으로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 인도의 간디, 소설가 펄벅, 중국의 후스(胡適), 루쉰 동생 저우쭤런(周作人)을 초빙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1937년 이시하라의 경쟁자였던 도조 히데키가 관동군 참모장으로 부임하면서 이시하라는 배제됐다. 학교명도 ‘아시아대학’에서 ‘건국대’로 바뀌었다.
그 결과 건국대 191명 교원 중 외국인은 16명에 불과했다. 조선인은 최남선과 황도연 둘 뿐이었다고 한다. 최남선의 건국대 교수 부임은 대학 설립을 주도한 관동군 참모진의 정책적 판단, 정치적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정준영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는 최남선 임용을 ‘’일종의 쇼케이스’로 추진된 이벤트’로 해석했다.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해 2년반을 복역한 전직 반일(反日)운동의 기수이자 ‘불함문화론’을 내건 대표적 지식인 육당의 명망이 대학의 위상을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고 본 것이다. 육당에겐 만주국 최고위급 관료에 해당하는 간임관 2등의 대우와 일본 본토 제국대학 교수 월급의 2배에 가까운 4급봉의 월급 720원이 제공됐다. 초임 신문기자 연봉에 가까운 월급이었다.
◇최남선과 황도연
1938년4월 건국대 교수에 부임한 육당은 ‘만몽문화’를 강의했고, 조선민족 연구를 담당했다. 그러다 1942년 9월 건강을 핑계삼아 귀국했다. 1949년 ‘반민족행위처벌법’으로 수감된 육당은 반민특위 앞으로 참회록 ‘자열서’(自列書)를 제출했다. 여기에선 건국대로부터 ‘구축’(驅逐)됐다는 표현이 나온다. 쫓겨났다는 뜻이다.
황도연은 다소 낯선 이름이다. 1938년 교토제대 경제학부를 나온 수재였다. 졸업 후 조선저축은행 경성본점과 평양지점에 근무하다 건국대 촉탁 강사가 됐다. 조교수까지 승진한 황도연은 해방 후 경성대(서울대 전신) 교수로 있으면서 민주주의민족전선 경제대책연구회 위원으로 활동하다 국대안(國大案)에 반대해 월북했다. 이후 내각 부수상 김책의 재정, 통계 관련 보좌관으로 활약하다 중앙통계국 국장을 지내는 등 북한 통계학, 재정학의 수립자로 알려져있다.
건국대학은 김대중 대통령 자서전에도 등장한다. 1999년 나온 김대중 자서전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만주의 건국대에 진학할 예정이었으나 일제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회사에 취직’(38쪽)했다는 내용이다. 80여년 전 청년 학생들의 꿈이었던 만주 건국대는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진 과거가 됐다.
◇참고자료
이정희,’만주 건국대학’의 교육과 조선인 학생, 만주연구 제22집, 만주학회, 2016년12월
정준영,’만주 건국대학’이라는 실험과 육당 최남선, ‘사회와 역사’ 통권 110호, 한국사회사학회,2016년 여름
전성곤, 만주 ‘건국대학’창설과 최남선의 ‘건국신화론’, 일어일문학연구 56집2권, 한국일어일문학회, 2006년 2월
정종현, 제국대학의 조센징, 휴머니스트, 2019
07.29 ‘판정 불복’ ‘부정선수 시비’…난투극으로 얼룩진 스포츠
1921년 제1회 全조선축구대회, 우승팀도 못가리고 기권으로 끝나

▲조선체육회가 1920년 11월4일부터 사흘간 주최한 제1차 전조선야구대회. 이상재 선생이 시구하고 있다. 제1회 전국체전으로 알려져있다. 20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도입된 근대스포츠는 초창기 판정불복, 부정선수 시비로 보이코트와 경기장 폭력이 잇따르면서 사회적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 /대한체육회
1921년 6월25일 오후 소년잡지 새동무사(社)가 주최하고 조선체육회가 후원한 제1회 전조선소년야구대회 결승전이 정동 배재학당에서 열렸다. 배재학교 소년부가 성서주일학교에 4대2로 졌다. 배재는 상대팀에 나이를 초과한 부정선수가 있다고 항의했으나 소용없었다. 오후 6시 시상식이 열릴 무렵 배재학생들이 본부석으로 몰려 닥치는 대로 때려부쉈다. 대회 관계자는 물론 관중, 기자들까지 무차별 폭행했던 모양이다. 서대문서 경찰까지 출동한 끝에 사태는 진정됐다. 당시 신문은 이 기이한 ‘경기장 폭력’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금회 소년야구대회 개최중에서 발생한 배재학당 학생의 폭행은 실로 교육계의 불상사로 사회 전반이 조금도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을 사행(肆行)하였다’(’배재학당의 폭행, 조선일보 1921년6월27일)
우승기만 노리는 승부욕 때문에 스포츠 정신은 실종되고 학교 운동장에서 폭력까지 불사한 데 대해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란 표현까지 쓰며 비판한 것이다.
‘성북은인’(필명)은 9차례에 걸쳐 경기장 폭력의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촉구하는 기사를 썼다.(‘소년야구대회 사건’,조선일보 7월26일~8월4일)
이 경기장 폭력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던지 경성의 사립학교장들은 대책 회의를 열어 향후 5년간 배재가 나오는 경기엔 출전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사실상 배재의 출전금지 결정이었다.

▲1921년 6월 배재학당에서 열린 전조선소년야구대회 시상식이 열릴 무렵, 학생 수백명이 본부석을 때려부수고, 관중과 기자들까지 폭행에 물의를 빚었다.
◇응원단끼리 난투극 벌여
100년 전 근대 스포츠의 도입과 함께 ‘경기장 폭력’이 문제가 됐다. 규칙과 판정에 승복해야할 운동 경기가 승리에만 몰두하는 게임으로 변질된 것이다. 초창기엔 심판 판정에 대한 불복이 많았다. 선수들부터 운동 규칙에 익숙하지 않은데다 심판 역시 전문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조선체육회 주최로 금(今) 11일 오전부터 정동 배재학당 운동장에서 각 지방 일류 선수들이 모여서 풋볼 경쟁회를 한다는데, 금일부터 시작하야 13일까지 3일간 하는데, 입장료는 매인 10전씩이며 평양, 개성 기타 여러곳에서 선수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실로 한 번 볼만하다더라.’(‘전선축구대회,배재학당 운동장에서’, 조선일보 1921년2월11일)
1921년 2월11일 배재학당에서 최초의 축구대회가 열렸다. 조선체육회가 주최한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였다. 창립 1년도 안돼 전조선야구대회를 치른 조선체육회는 이번엔 인기종목이던 축구 대회를 시작했다. 일반, 학생부 합해 18팀이 나설 만큼 대성황이었다. 하지만 처음 치르는 축구대회다 보니 곳곳에서 잡음이 들렸다. 11일 학생부 3경기 모두 선수들이 심판 판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항의하다 기권으로 끝났다. 둘째날 일반부인 배재구락부와 숭실구락부 경기도 심판이 후반전 숭실의 오프사이드를 선언하면서 아수라장이 됐다. 숭실이 불복하면서 우승팀도 못가리고 끝났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응원석에서 난투극까지 벌어진 것이다. 난투극의 전모는 자세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대한체육회가 2022년 낸 ‘대한민국 체육 100년’은 ‘불상사로 얼룩진’ 대회였다고 썼다. 정정당당히 겨뤄야할 스포츠 정신은 실종되고, 팀 승리에만 집착하는 고질병이 첫 축구 대회부터 시작된 것이다.

▲1921년6월25일 열린 제1회 전조선소년야구대회는 부정선수 시비가 빚은 무차별 폭행 때문에 사회 문제가 됐다. 심판 판정 불복, 부정선수 시비는 100년 근대 스포츠가 도입될 때부터 논란을 빚었다.
◇1923년 제4회 대회도 부정선수로 얼룩져
1923년 11월21일~23일 경성 휘문고보에서 열린 제4회 전조선축구대회도 ‘부정선수 시비’로 얼룩졌다. 조선체육회는 그해 7월 부정선수 논란을 막기 위해 청년단은 3개월 이상, 초, 중학은 1년 이상 재적해야 한다는 선수 제한 규정까지 만들었다. 철새처럼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선수를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게 화근이 됐다.
중학부에 출전한 오산학교와 영생고보가 숭실과 휘문에 부정선수가 있다고 항의한 것. 숭실 선수 1명이 대회 시작 몇 달전 광성고보로 이적했는데, 각서를 받고 다시 데려와 숭실 선수로 출전시킨 게 발단이 됐다. 조선체육회는 역시 자격 미달 논란이 있던 휘문과 숭실을 퇴장시켰다. 결국 배재와 중앙이 결승전을 벌이게 됐는데, 숭실이 체육회 결정에 불복하면서 운동장을 점거해버렸다. 관객들이 운집한 가운데 결승전을 치르지 못하고 대회는 연기돼버렸다. 이 때문에 고원훈 조선체육회장을 비롯한 집행부는 퇴진했다.
◇교육자 양심 문제가 아닌가
당시 이 사건을 다룬 월간지 ‘개벽’(‘전조선축구대회는 왜 흐지부지하고 말았는가’,제42호, 1923년12월)은 선수 자격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체육회 문제와 함께 교육계의 추태를 지적한다. 조선체육회가 정한 선수 자격 충족을 학교장 또는 단체장이 증명하도록 했는데, 각 학교마다 ‘부정 선수’가 줄잇는 걸 보면 교육자의 양심(良心) 문제가 아닌가 하고 파고든 것이다.
‘재적 1년 이상(자격)을 분명히 알면서 왜 불급자(不及者)임을 분명히 알고도 거짓 증명하야 참가를 시켜놓고 결국 대회에도 똥칠을 하고 제 얼굴 제 학교, 무죄한 수만 학생에게까지 얼굴을 못펴게 하였는가. 만인의 공안(公眼)이 있고 만인의 직설(直說)이 있으니까 더 말은 아니한다마는 자교(自校)의 선수를 자천(自薦)하고 자교의 부정을 자백한 것이야말로 불가사문어타인(不可使聞於他人)이 아니랴.’
‘부정 선수’시비도 문제지만, ‘심판 판정 불복’은 오랫동안 체육계의 고질적 병폐로 남았다. 초창기 경기 규칙 미비나 심판의 자질 문제도 한몫했겠으나 심판의 권위나 경기 규칙보다 자기 팀의 승리나 이익을 앞세우는 분위기가 이런 고질병에서 헤어나지 못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요즘도 국내외 경기를 막론하고 불리하다 싶으면 심판 판정부터 문제 삼는 게 꽤 오랜 내력을 갖고 있는 셈이다.
◇참고자료
전조선축구대회는 왜 흐지부지하고 말았는가, 개벽 제42호, 1923년12월
대한체육회, 대한민국 체육 100년, 2022
김성원, 한국 축구 발전사, 살림, 2006
08.05 ‘조선의 경기(景氣)는 술먹은 경기’
일본産 맥주 소비 10년만에 11배로…1933년 영등포에 조선맥주, 소화기린맥주 건립

▲석영 안석주가 조선일보 1930년4월5일자에 그린 만문만화 '이 사람이 술을 마시면!'. 일본산 맥주 소비 급증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1930년 당시 조선서 팔리던 맥주는 거의 전부 일본산이었다. 맥주는 모던 보이들이 즐겨마시던 술이다. 조선은 '술 권하는 사회'에서 '술 취한 사회'로 바뀌는 중이었다.
‘조선 전토(全土)에서 1년에 소비되는 술이 그중에 맥주만 보더라도 근 900만 병-.돈으로는 삼백 수십만원이라 한다. 그래서 조선서의 술세가 일천삼백만원이라는 놀라운 숫자를 보여준다. 술도 좋은 때는 좋은 것이로되, 이렇게 조선 사람의 생활이 파멸이 이 술에도 원인이 있다는 것은 진실로 두려운 일이다. 조선의 박카-스(酒神)의 신도들이 아직 이 술을 향락품으로….’(‘이 사람이 이 술을 마시면!’, 조선일보 1930년 4월5일)
만문만화가 석영 안석주(1901~1950)가 뉴스를 보고 통탄했던 모양이다. 조선의 술 소비량이 늘어서 총독부가 주세(酒稅)로 거둬들이는 수입만 1300만원이라는 뉴스였다. 특히 ‘모던 보이’들이 사랑한 맥주 소비가 늘어나 지난 1년간 940만 병을 마셨고, 술값만 329만원이었다고 했다.(’1년간 맥주소비 800만병에 300만원’, 조선일보 1930년 4월3일. 제목은 800만병이라고 썼지만, 실제론 940만병으로 기사에 나온다)
이 기사는 ‘없는 살림에 술값이 이렇게 많다’는 부제를 달았다. 조선인이 술을 많이 마시는 것도 문제이지만, 맥주 소비량이 급증한 것도 가계를 압박하는 원인으로 지목됐다. 안석주는 금욕적 금주론자는 아니었다.
‘울분과 설움이 어찌 술 한잔에 풀어지리오마는 정신상으로 잠시라도 고통을 잊게하는 데는 술이라는 게 좋은 때도 있다. 하루 온종일 햇빛도 없는 공장속에서나 등덜미가 패이도록 온종일 등짐을 져도 선술집 막걸리 한잔에 기운을 돋아 너털웃음을 웃는 것도 통쾌한 일이다. 그리고 양복세민들의 쓰라린 마음도 이 술 한잔에 녹아버리는 수도 있다.’ 위 만문만화를 이렇게 시작한 것을 보면 그렇다.

▲맥주 1병이 소고기 150그램의 영양분을 갖고 있다고 선전한 기린맥주 광고. 1930년 신문에 실렸다.
◇일본서 전량 수입한 맥주
1930년 안석주가 비판한 맥주는 전량 일본서 수입했다. 당연히 비쌌다. 1924년 기준, 한병에 요즘 돈으로 약 7500원꼴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소비량은 급증했다. 1923년 약 112만8000병을 마셨는데, 10년 뒤인 1933년 1254만병으로 급증했다. 안석주가 만평을 그린 3년 뒤, 연 300만 병이 늘어난 것이다.
일본 맥주회사는 몇차례 합병을 거치면서 삿포로, 아사히를 생산하는 대일본맥주, 기린 맥주가 시장을 장악했다. 1933년 경성에서 가장 많이 팔린 맥주는 기린이었고, 다음이 삿포로, 사쿠라, 유니온, 아사히 순이었다. (‘경성맥주소비’, 조선일보 1933년3월16일)
나라 없는 식민지에서 우리 기업은 신통찮았고, 일자리는 마땅찮았다. 그런데 주세는 해마다 급증했다. 1935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조선일보 1면 촌평으로 남아있는 ‘팔면봉’ 필자는 이렇게 한탄했다. ‘주세를 일천오백만원이나 내게 되었다고 주조협회(酒造協會)에서 축하회 계획. 맥주의 소비도 삼십만상자에 달(達)한다니, 조선의 경기(景氣)는 술먹은 경기(景氣)로군.’(팔면봉, 조선일보 1935년8월11일)

▲기린맥주는 맥주가 연말연시 선물로 좋다고 선전했다. 맥주는 고급품이었다. 기린맥주 1930년말 신문광고
◇영등포에 들어선 일본 맥주회사
성장성 높은 시장을 그냥 둘리 없었다. 일본 맥주회사들은 조선에 세울 맥주공장 후보지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1924년에 이미 기사가 나기 시작했다. 인천과 영등포가 경쟁 후보였다. 두 지역 주민들도 유치에 나섰다.
‘일본맥주 주식회사 분공장 설치지에 대하여 인천서는 기성회를 조직하고 운동중이오, 영등포에서는 시민대회까지 열고 맹렬한 운동을 계속하고 일방으로는 두 곳이 함께 동경 본사에 교섭위원까지 보내어 극력쟁탈전을 하는 터인데 양편의 주장을 소개하면 영등포편은 공장지은 땅값의 반액밖에 안되고 한강이 가까워서 물 쓸 편의와 경성이 근접한 것을 주창하며 인천편은 인천이란 도시가 배경이오 교통이 편의하고 또 원료의 집산지인 관계상 영등포보다 낫다는 것인데 하여간 이삼일 안으로 결정되리라더라(인천)’(‘맥주 分工場에 인천, 영등포의 경쟁’,조선일보 1924년11월30일)
하지만 정작 공장이 들어선 것은 10년가까이 흐른 후였다. 신흥공업단지로 떠오른 영등포를 낙점했다. 1933년 삿포로와 아사히를 생산하는 대일본맥주회사가 조선맥주를, 기린맥주주식회사가 소화 기린맥주를 세웠다. 이듬해 공장이 완공되면서 가동에 들어갔다. 오늘날의 하이트 진로와 오비맥주의 전신이다.
◇'맥주 1병은 소고기 125그램’
맥주는 대부분의 조선인에게 낯선 술이었다. 일본 맥주회사들은 일종의 ‘신비 마케팅’을 했다. 1920년대 삿포로 맥주 광고를 보면, 아무런 설명 없이 맥주병 그림과 브랜드 이름만 썼다.
흥미로운 사실은 맥주는 술이 아니라 자양식품이라고 광고했다는 점이다. 기린 맥주는 이렇게 선전했다. ‘맥주 한 병의 영양량(營養量)은 우육사반근(牛肉四半斤)과 같다.’ 1근=600그램으로 계산하면, 맥주 1병이 소고기 150그램과 같은 영양가가 있다고 광고한 것이다. ‘런던위생시험소’라는 그럴듯한 서구 연구소 보고서에 나오는 내용이라고 했다. 요즘 같으면 과장광고로 처벌받을 일이다. 삿포로도 체위(體位,체력) 향상에 도움되는 술이라고 광고했다. ‘최고급 순독일식’을 내세우거나 연말연시 선물, 또는 한여름 증정품으로 좋다는 문구를 붙여 이런저런 마케팅을 요란하게 했다.
◇국산 맥주라고 선전
영등포에 공장을 세운 일본 회사들은 한술 더 떴다.
“반도의 발전은 우리 조선 신품의 애용으로부터…
여름은 조선산의 대표품,
삿포로, 아사히를 애용하십시오.”
1937년 삿포로와 아사히를 생산하는 조선맥주는 이렇게 광고했다. 일본 기업이 세운 맥주회사지만 경성에서 만들기 때문에 국산품이라는 주장이었다. 해괴한 논리였지만 일본 맥주회사는 조선산 애용을 내세워 우리 소비자들을 공략했다. 우리 기업인이 세운 맥주 회사는 없을 때였다.
▲1939년 여름 맥주 소비가 급증해 경성에 맥주가 동났다고 전한 조선일보 1939년 9월3일자 기사.
◇'분수없는 過飮이오’
맥주 판매량은 끊임없이 늘어만 갔다. 전쟁 중에도 품귀현상을 빚을 만큼 식지 않았다. ‘현재 조선서 팔리는 맥주 중 가장 많이 팔리는 것은 역시 삿포로와 기린인데 이 두회사에서는 금년도 작년만큼 여기고 각각 20만석 가량밖에는 준비를 안했던 것이 이번 여름의 한발 때문에 초여름 무렵부터 맥주가 무섭게 나가기 시작하여 8월달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스톡’(재고)이 거의 동날 지경에 달하였다는 호경기를 맞이하여 이 때문에 시내 식료품 도매상에서는 맥주가 동이 나서 카페나 빠에서는 하는 수없이 한병 두병씩 사환을 시켜서 잡화상 기타 골목 가게를 순례하여 걷어오는 상태다.’(‘분수없는 過飮이오’, 조선일보 1939년 9월3일)
맥주 품귀 때문에 주당(酒黨)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총독부는 맥주 판매량 일부를 가정용으로 제한해서 공급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 가정용 맥주도 구할 길 없어 불만이 쏟아졌다.
‘’나온다는 말만 들릴 뿐 실물은 영영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이란 수수께끼까지 나오게 된 ‘가정용 맥주’의 가는 곳은 어딜까? 드디어 경찰에서는 ‘가정용 맥주’의 행방수사를 시작하였다. 가정용 맥주는 부내에 배급되는 맥주 전체의 약 2할이 나온다고 회사 측은 말하고 있으나 그같이 많이 나온다는 맥주가 소매상의 손을거처 일반 가정으로 직선 코스를 밟아야할 것이 가정에는 들어오지않고 중도에서 코스를 바꾸어 딴곳으로 빠지는 현상이라 일반 가정의 불평이 많으며….’(‘이름 좋은 가정용,꼴 볼 수없는 맥주’,조선일보 1940년8월10일)
경찰이 도소매상과 요릿집, 카페 등 맥주 배급과 판매 실상을 단속한다는 내용이었다. 중일전쟁의 총성은 높아가는데 조선에서는 맥주 확보를 위한 총력전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참고자료
김명환,모던 시크 명랑, 문학동네, 2016
김태수,꽃가치피어 매혹케하라, 황소자리, 2005
최지혜,경성백화점 상품박물지,혜화1117, 2023
08.19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의 조선인 빙상 삼총사
1936년 일본 대표로 출전한 김정연·이성덕·장우식, 1만미터서 13위

▲남부 독일 휴양지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의 올림픽 아이스링크. 1936년 2월 동계올림픽 피겨 스케이팅과 아이스하키 경기가 열린 곳이다. 왼쪽에 독일 최고봉 추크슈피체에 오르는 산악열차가 보인다. /김기철기자

▲독일 최고봉 추크슈피체에 오르는 산악열차 역.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1936년 동계올림픽이 열린 아이스링크다. /김기철기자
독일 최고봉 추크슈피체(2963m)가 있는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은 한국 여행자들도 많이 찾는 인기 여행지다. 뮌헨에서 자동차나 기차로 1시간이면 도착하기 때문이다.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역 바로 옆엔 추크슈피체에 올라가는 등산열차 역이 있다. 여기서 기차를 타고 올라가면 독일 알프스의 진수를 맛볼 수있다.
추크슈피체 등산열차 역 건너편에는 ‘올림픽 아이스링크’가 보인다.1936년 동계올림픽 경기를 치르기 위해 건설된 곳이다. 몇차례 확장, 보수 공사를 거쳤지만 동계올림픽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다.
87년전인 1936년 2월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 조선인 빙상선수들이 찾아왔다. 동계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일본 국가대표 소속이었다. 김정연, 이성덕, 장우식이다. 스피드 스케이팅 일본 대표 7명 중 3명이 조선인이었다.

▲1936년 독일서 열린 제4회 동계올림픽 빙속 1만m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작성하고도 13위에 그친 김정연의 소식을 전한 지면.(1936년2월 15일자)
◇'빙상강자’ 조선
당시 조선은 아시아의 빙상 강자였다. 1934년 2월4일~5일 압록강에서 열린 전(全)일본빙상선수권대회에서 조선인 선수가 1,2,3위를 휩쓸 정도였다. 일본과 만주, 조선에서 참가한 이 대회엔 일본 첫 동계올림픽(1932년 미국 레이크플래시드)참가자와 일본 신기록보유자 등 쟁쟁한 선수들이 포진했다. 압록강 대회는 1936년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열리는 제4회 동계올림픽 대표선발 전초전 성격도 띠고 있었다. 내로라하는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1위를 차지한 이는 김정연(1910~1992)이었다.
평남 강서출신인 김정연은 평양고보를 나와 일본 메이지대에 유학 중이었다. 당시 빙상선수권대회는 500m, 1500m, 5000m, 1만m 순위를 합산, 총점으로 등수를 정했다. 김정연은 5000m·1만m에서 일본 신기록을 세우며 1위로 들어와 종합1위를 했다. 이성덕이 2위, 최용진이 3위였다.
신의주 출신으로 와세다대에 유학한 이성덕(1911~1968)은 한해전인 1933년1월27~30일 일본 닛코에서 열린 전일본빙상선수권대회를 석권했다. 500m,, 5000m,는 1위였고, 1500m는 2위였다.(‘일본의 패권을 차지한 이성덕군의 수훈’, 조선일보 . 조선일보 1933년 2월1일)
조선인 빙상선수 셋이 일본을 대표하는 올림픽 대표로 뽑힌 것은 이런 탁월한 성적을 냈기 때문이다.

▲1935년 9월10일 태평로 조선일보 대강당에서 열린 '올림픽의 밤' 행사 안내 기사. 이듬해 동계올림픽에 출전하는 빙상선수들을 후원하기 위해 열렸다. 아래는 '올림픽의 밤' 포스터.
◇전국서 ‘올림픽의 밤’행사
‘우리 스포—츠계를 대표하야 세계빙상제패를 목표로 명년(明年) 2월 독일에서 열리는 제4회 동계 올림픽에 출장케된 조선이 낳은 빙상의 삼걸 김정연 이성덕 장우식 삼군은 오는 12월에 전지(戰地)로 향할터인데 이들 스포—츠사절을 국제무대로 보내는 해내(海內) 스포—츠팬들은 충정의 일단이나마 물질적으로 표현하야 장도에 오르는 삼대표(三代表)를 성원하며 격려하려는 의미에서 전 조선 각지에서 ‘올림픽의 밤’을 열기로 되었다함은 누보(屢報)한 바와 같지만 이미 지난 3일에 신의주에서 첫 막을 열어 초성황을 이루었고 평양에서는 6일 밤 숭전(崇專)강당에서 열리게 되었으며 경성에서는 내 십일(來十日) 오후 7시반부터 본사 대강당에서 의의깊은 개막을 맞이하게 되었다.’ (‘경성에서 열릴 올림픽의 밤’, 조선일보 1935년9월6일)
1935년9월10일 밤 태평로 조선일보사 강당에서 동계올림픽에 출전하는 빙상3걸을 후원하는 ‘올림픽의 밤’이 열린다는 예고 기사다. 빙상선수 출신으로 조선일보 스포츠기자인 고봉오가 사회를 봤다. 김정연 등 출전선수들의 인사말과 이화여전 합창단 음악, 무용 공연이 열렸다. 입장료 수입은 선수 파견비에 충당했다. 전국에서 비슷한 ‘올림픽의 밤’ 후원행사가 열렸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독일행
‘세계무대의 제패를 목표로 알프스 산록의 ‘카르밋쉬·바르텐킬르헨’의 빙반(氷盤)위에서 열리는 제4회 세계동계올림픽대회에 출장할스피—드·스케—팅 대표 김정연 이성덕 장우식 세명은 석원성삼(石原省三) 중촌례길(中村禮吉) 남동방문(南洞邦文) 제 선수와 함께 감독 청목미광씨 인솔아래 1일 오후3시 동경역발 부사호(富士號)로 장도에 올랐다.’(’빙상의 김,이,장 삼걸 三傑, 세계 제패의 장도에), 조선일보 1935년12월3일)
세 선수는 3일 서울을 거쳐 5일 중국 심양(봉천)에 도착했다. 여기서 한달 가까이 합숙훈련을 거친 뒤,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독일 베를린에 도착했다. 노르웨이 오슬로 전유럽빙상선수권대회와 스위스 다보스 세계빙상선수권대회에 참가해 컨디션을 체크하고, 2월6일부터 열리는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다. 세계28개국, 646명이 참가했다.
◇김정연, 1만미터 13위
추크슈피체 역 부근 실내 아이스링크에선 피겨 스케이팅과 일부 아이스하키 경기가 열렸다. 조선선수들이 출전한 스피드 스케이팅은 여기서 2킬로미터 떨어진 리제르 호(湖)에서 열렸다. 야외였다. 조선인 선수들은 초반에 부진했다. 중장거리에 비해 단거리 기록은 떨어졌기 때문이다. 500m에선 일본 선수 이시하라가 4위에 올랐다. 이성덕은 16위였다. 국내 경기에서 이시하라를 누른 적도 있는 이성덕은 아쉬웠을 것이다. 5000m에서도 김정연은 21위, 이성덕,장우식은 27위였다. 10위권을 노린 목표엔 못미치는 성적이었다.
1936년 2월15일자 조선일보 석간 2면엔 김정연의 1만m 경기 소식이 실렸다. ‘김정연은 제16조에서 에스토니아 대표 ‘밋트’ 선수와 짝지어 스타—트하야 벽두부터 호조를 보이며 단연 선두에 나아가니 밋트 선수는 2500미터까지는 추종하였스나 김군은 점차 ‘핏취’ 를 올려 스피—드를 내니 ‘밋트’선수는 추종키 어려움을 깨닫고 중도에 기권하니 이로부터 짝을 잃어버린 김군 독주하야 18분2초7로 세계올림픽 기록을 돌파하는 동시에 일본 신기록을 작성코 제13위를 차지하였다. 이성덕군은 동료 장우식군과 동주하야 18분50초2로 제25위를 점하고, 장군은 제26위로 되었다. ‘(’빙상 올림픽初무대 최후전/올림픽 기록 깨엿스나/통분! 13위/이, 장 양군은 각각 25위, 26위’
세계 무대와의 격차는 컸다. 노르웨이가 스피드 스케이팅 4 종목 전부를 석권했다.
◇동계올림픽 주최한 대한민국
대한민국은 해방 후 1948년 제5회 생모리츠대회에 참가한 이래 6·25전쟁 중인 1952년을 제외하곤 매번 출전했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 때는 금메달 6개를 따내 종합 5위에 올랐고, 2018년엔 동계올림픽 주최국이 됐다. 이달 초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 들렀다 ‘올림픽 아이스링크’를 지나면서 87년 전 이곳에 왔던 조선인 빙상선수들을 떠올렸다. 격세지감이다.
◇참고자료
이태형, 은반위의 질주, 국민체육진흥공단, 2000
‘한국 빙상의 위대한 시작, 김정연’, 스포츠 원, 대한체육회, 2014년6월호
08.26 곡물상 급사 출신 ‘조선의 구두왕’…박덕유의 인생유전
1905년 관훈동에 양화점 개업…직원 100명 거느린 제화, 고무업자로 성장

▲곡물상 사환으로 출발한 박덕유. 1905년 관훈동에 양화점을 차려 10년만에 직원 60명을 거느린 제화업자로 성장했다. 1913년 매일신보 기사에 실린 박덕유. 실크해트에 말쑥한 정장차림을 한 신사다.
조선시대 소가죽을 가공해 가죽신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을 갖바치라고 했다. ‘백정’과 같은 천민 대접을 받았다. 구한말 단발, 양복이 소개되면서 서양식 신발(洋靴)인 구두도 함께 들어왔다. 양반, 상놈 구별없이 구두를 신는 시대가 온 것이다.
조선 사람이 연 최초의 구두가게는 1898년 황토현(지금의 세종로사거리 부근)에 이규익이 낸 것이라고 한다. 이 상점은 두어 해 영업하다가 문 닫았는데, 조선의 ‘구두왕’으로 알려진 박덕유(朴德裕)가 인수해 30년 넘게 운영했다. 박덕유는 성공한 기업가로 여러 차례 신문에 등장한다. 매일신보(1913년 10월8일)엔 실크햇에 양복 차림 사진과 함께 ‘경성대사동 양화점점주 박덕유군’ 소개 기사가 실렸다. 대사(大寺)동은 원각사가 있던 곳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지금의 관훈동이다. 매일신보(1917년3월3일)에 따르면, 박덕유가 양화업계에 뛰어든 것은 1905년이다. 10여년 지나자 직원 60명을 거느린 구두공장 사장으로 급성장했다. 그 옛날, 일요일엔 휴업하고 직원들이 교회에 나가도록 했다고 한다. 박덕유는 줄곧 이 분야에 매진해 1930년대엔 신설동에 고무공장까지 운영하면서 종업원 100여명을 거느린 기업가로 성장했다.

▲박덕유는 개업초창기부터 신문광고를 마케팅에 활용했다. 실크해트를 쓴 신사가 구두를 가리키는 지면광고는 박덕유양화점의 상징이 됐다. 박덕유는 20년 넘게 이 광고를 신문에 실었다. 조선일보 1920년7월1일자 광고
◇실크해트 쓴 신사가 구두 가리키는 사진, 20년 넘게 같은 광고
박덕유는 광고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체득한 선구자였다. 매일신보는 박덕유가 신문광고 효과를 일찌감치 확신한 기업인이었다고 소개한다. ‘냉소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씨는 견고한 자신력을 가지고 더욱 광고를 이용한 결과 각지에서 주문이 답지하며 상점이 더욱 번창하였더라’고 했다.
그는 개업 초창기부터 당시 뉴미디어였던 신문광고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실크해트를 쓴 신사가 구두를 가리키고 있는 광고를 조선, 동아일보에 꾸준히 실었다. 박덕유는 ‘저희 집 광고는 아시다시피 언제든지 한 모양으로 내게 되었습니다. 경향을 물론하고 문구는 볼 것 없이 그림만 보면 누구라도 저의 집 광고인 줄을 다 알 줄 압니다. 그래서 지금은 양화를 신는 이로는 저희 집을 모르는 이가 없을만치 되었다고 생각이 되고 보니…’라고 말할 만큼 광고의 연속성을 고집했다.
물론 박덕유가 성공비결로 꼽은 것은 광고뿐 아니라 품질 관리와 신용이었다. 종업원이 대충 만든 구두는 손실을 생각하지 않고 화로에 던져버리고 불량품을 팔지 않았다.

▲실크해트를 쓴 정장차림의 박덕유. 매일신보 1913년3월3일자에 실린 기사다.
◇'조선 양화계의 대왕’
신문에 소개된 그의 이력은 드라마틱하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열두살부터 곡물상 사환으로 10여년 일한 끝에 스물다섯살 때 스스로 곡물장사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곡물을 실은 배가 침몰하면서 빈털터리가 됐다.
경부선 철도부설 보호 순검으로 월급 20원을 받으면서 일했는데, 그나마 통감부가 철도부설권을 인수하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실업자로 전전하다 황토현의 구두가게에서 한달동안 수선공으로 견습생활을 했다. 그리고 마흔살 때 관훈동에 구두수전점을 냈다. 두달치 임금에 불과한 40원으로 시작한 가게였다. 이듬해 친구 둘과 동업으로 양화점을 시작했지만 신통찮았던 모양이다. 1년만에 동업자들은 빠져나가고 박덕유 혼자 가게를 꾸리게 됐다. 그렇게 18년이 흐른 뒤 박덕유는 7,8만원의 대상인이 됐다. 박덕유는 7남1녀를 뒀고, 중앙예배당의 중진으로 독실한 크리스찬이었다.

▲박덕유는 실크해트 차림 신사 광고를 20년 넘게 실었지만, 가끔 다른 형식의 광고도 냈다. 영어가 포함된 조선일보 1921년 4월24일자 광고
박덕유는 서른살 될 무렵까지 일자무식이었다고 한다. 순검시절 글을 배워보려고 늘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품고 다녀 ‘가슴속에 책 품은 순검’으로 알려졌다는 것이다. (이상 ‘사업성공자열전’16 제화로 성공 박덕유씨, 동아일보 1927년1월18일)
박덕유는 예순여섯살인 1936년(매일신보 5월30일)에도 인터뷰에 등장했다. 여전히 현역이었다. 구두 말고도 청년화, 농구화도 직접 개발해 연 10만족(足)씩 팔린다고 했다. 박덕유 양화점과 고무공장, 제화점이 광복 이후 어떻게 됐는지는 불명확하다. 한국 제화의 초창기 역사를 주름잡은 ‘조선의 구두왕’ 이야기였다.
◇참고자료
경성대사동 양화점점주 박덕유군, 매일신보, 1913년10월8일
老鋪박덕유양화점, 매일신보 1917년3월3일
‘사업성공자열전’16 제화로 성공 박덕유씨, 동아일보 1927년1월18일
최지혜,경성백화점 상품 박물지, 혜화1117, 2023
09.02 ‘일본인들아, 自重하라’
경성에도 번진 ‘조선인폭동說’...‘道義를 아는 우리가 어찌 남의 불행을 이용할까’ 社說로 일침

▲일본 시민단체 봉선화의 니시자키 마사오(西崎雅夫)이사가 지난 2013년 8월 도쿄에 있는 관동대지진 한국인 희생자 추모비 옆에서 학살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 후 봉선화 대표를 맡은 니시자키씨는 학살 100주년을 맞은 지난 8월에도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조선인학살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1923년 9월,ㅣ 경성에도 조선인이 일본인들을 습격한다는 ‘가짜뉴스’가 돌았던 모양이다. ‘근일 시내에서 일본인간에 발현한 사실의 일이(一二)를 문(聞)하건데, 조선인이 금번 동경의 진재를 이용하여 일본인을 습격한다는 허황무근한 풍설이 유(有)하야 본정서(本町暑) 관내 어떤 마을에서는 소위 자위단이라는 방어단체를 조직하려고 협의중에 있음을 경찰서에서 문지하고 해산을 명하였다 하니…'(조선일보 1923년9월24일자 사설)
경성의 일부 일본인들이 조선인의 습격을 대비해 ‘자경단’을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서 경찰이 막았다는 얘기다.
사설은 ‘감히 일언으로써 일본인 제군에게 주노니 정청(靜聽)하고 심사(深思)할 지어다’라고 운을 뗀 후, ‘우리 조선인이 비록 잔열무능하여서 현 지위에 거(居)하였으나 도덕을 숭상하고 자선을 낙위(樂爲)함은 절대로 인(人)의 배후에 입(立)코처 하는 자가 아니라…감히 무리한 추측을 우리에게 행하야 평지풍파를 일으키고자 함이 과연 무슨 견지에서 나온 망동(妄動)인가’라고 질타했다. 이어 ‘도의를 아는 조선인으로서는 남의 불행을 행(幸)히 함은 결코 없으리니 일본인들아 자중하라’고 점잖게 마무리했다. 이 사설 제목은 ‘일본인들아 자중하라’였다.

▲2013년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관동대지진 조선인피살자 명부. 이승만 정부때 작성한 기록으로 290명이 수록돼있다.
◇참사 직후 ‘사회주의자 경계’
1923년 9월1일 11시 58분, 규모 7.9 강진이 동경 일대를 습격했다. 요코하마, 가나가와현·도쿄도 등 관동(關東·간토) 일대에서 10만5000명이 사망·실종하고 건물 10만9000채가 무너지고 21만2000채가 불탔다. 참사의 한복판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가짜 뉴스’가 유포됐다. 재난의 원인을 조선인탓으로 돌려 불만을 해소하려는 일부 일본인들의 계략이었다.
관동대지진 소식은 비교적 빨리 한반도에 전달됐다. 조선일보는 9월3일자 석간부터 ‘일본 유사이래 초유의 대지진’ ‘동경역은 4,5건물뿐’ 등 지진 참상을 자세히 보도했다. 3면 절반을 할애한 이날 신문에서 특이한 점은 ‘동경에 있는 사회주의자들은 회합을 할 모양임으로 경시청에서는 방금 엄중히 경계하는 중’이라는 짤막한 기사였다. 해군대장 출신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 権兵衛) 신임 총리 암살설까지 같은 지면에 실려 흉흉했다. 일촉즉발의 긴장이 맴돌았다.
◇북청 출신 유학생 이주천의 목격담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소식은 사건 발생 직후부터 조선에 전해졌다. 일본에는 유학생과 생계를 잇기 위해 건너간 노동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함남 북청군 청해면에 사는 스물여덟살 일본 유학생 이주천은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집에 왔다가 개학을 맞아 현해탄을 건넜다.
‘내가 부산에 도착하기는 8월30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으로 연락선을 타고자 하였더니 만원이 되어 타지 못하고 그 이튿날에야 겨우 타고 하관(下關, 시모노세키)에 상륙하였습니다. 거기서 기차를 탄 조선 학생이 20명 가량 되었는데 명고옥(名古屋, 나고야)에 도달한 즉, 신문 호외가 굉장하며 동경이 전멸되었다 하고 겸하여 동해선은 타지 못한다고 합디다. 그러나 동경이 전멸이라 함은 꿈같은 일인고로 그대로 중앙선을 타고 들어가다가 동경을 앞으로 60리를 격한 천구까지 가매, 몸에 피투성이를 한 사람이 많이 타며 동경 이야기를 하는데 소름이 끼치고 화광(火光)은 그때까지 중천(中天)에 비추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행 20명은 임시회를 열고 사고무친척한 동포의 소식을 듣고자 모험을 하고 들어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계엄령이 내리고 동경에 들어오는 사람은 절대 거절을 한다함으로 눈물만 남기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중도에 귀환한 유학생’, 조선일보 1923년9월8일)
1923년9월1일 현해탄을 건넌 이주천은 나고야에 도착했을 때쯤, 관동대지진 호외를 접했던 것같다. ‘동경 전멸’이란 충격적 뉴스였다. 이주천은 동승한 조선 유학생 20여명과 함께 동경까지 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동경 근교 가와사키(川崎)에서 피투성이 차림의 이재민들이 승차해 대지진의 참상을 전했다.(신문엔 ‘천구’라고 썼지만, ‘천기’(川崎, 가와사키)의 오자인 듯하다) 창밖엔 불빛이 치솟았다. 계엄령이 내린 동경엔 들어갈 수도 없었다. 이주천은 동경의 동포 소식은 알지못한다면서도 “신문 호외에 품천(品川, 시나가와)에서 조선동포 300명을 OO하였다는 기사를 보았다”고 전했다. 생생한 목격담이었다.

▲관동대지진을 보도하다가 총독부 검열에 걸려 삭제된 조선일보 1923년 9월5일자 지면.
◇총독부의 잇단 압수, 삭제
조선총독부는 보도 통제에 들어갔다. 9월3일 발행한 조선일보 호외 중 ‘조선 총독에도 경계’ ‘횡빈(橫濱, 요코하마)에도 OO사건 발발’기사는 압수당했다. ‘3개처에 불온 사건 발생’(9월5일) ‘중도에 귀환한 유학생’(9월8일) ‘조선인의 폭행은 절무(絶無), 경시청이 조사한 보고에도’(9월24일) ‘임시정부에서 항의제출’(10월4일)…. 압수나 발매금지 당한 기사 중에는 당국의 지시 직전 일부 인쇄된 신문에 기사가 실리거나 총독부 검열문서에 일본어 번역본이 실려있어 그 면모를 알 수있다. 동아일보 9월9일자 기사 ‘불바다에서 탈출하여 무사귀국까지’도 압수당했다. 이 기사는 ‘일본인들은 동경을 향하는 열차에 대고 동경에 가면 조선인을 OO하라’는 고함소리를 질러 소름이 끼쳤다’는 증언을 실었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피해 규모는 지금까지도 분명치 않다. 혼란 와중에 사망자를 화장해버리거나 유해를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섬나라 근성 강한 일본에서 무슨 살길을 도모하느냐며 조선인 전원귀국을 호소한 조선일보 1923년10월4일자 사설 '교일동포에게'
◇”섬나라 근성 강한 일본에서 무슨 生을 도모?”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은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까지 비화됐다. 참변의 출발점이 식민지배에서 시작됐다는 주장이다. ‘그들의 당한 금번 불행참변이 우리의 민족적 불행을 축소한 호(好)표본이라는 것이다. 이 참변의 출발점이 지배와 압복(壓服)의 관계에 있는 양 민족의 현재 경우이었지만 그 참변이 있은 이후에 그 감정이 더욱 악화하였을 것은 무엇으로도 엄폐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에 이미 패도(敗倒)하여 죽음을 피치 못한 동포의 고혼을 비분의 누(淚)로써 조(吊)하는 동시에 일본에 재류하는 우리 동포들의 보다 더 혹독한 곤액(困厄)과 고초를 상상하고 누(淚)가 진(盡)하고 성(聲)이 시(嘶)함을 금치 못한다.’
조선인 학살에 분노한 사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헛되이 강자의 정치치율을 신(信)하려함이 아니지마는 하등의 생활권의 보장이 없는 그들의 몸으로써 저 도국(島國)적 근성에 기유하야 민족적 감정이 강렬한 일본인의 틈에 끼여서 그 무슨 생을 도모할 가망은 절대로 없을 줄 믿는다’고 썼다. 식민 지배자를 향해 ‘섬나라 근성’이라고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지금 다시 읽어봐도 섬칫할 정도다.
◇”모두 포기하고 급거 귀국” 권고
사설은 유학생, 노동자에게 즉시 귀국하라는 호소로 이어졌다. ‘이에 우리는 일언(一言)으로써 읍권(泣勸)하노니 이번 진재에 겨우 생존을 얻은 동포이나 그 곤액을 당하지 아니한 타 지방에 재류하는 동포가 다 노동자이나 학생이나 노동도 학업도 무엇무엇도 모두 다 포기하고 무엇도 고견(顧見)할 것없이 극래(亟來)하고 거귀(遽歸)하라는 것이다.’ 사설은 ‘일본만이 어찌 우리의 수학지(修學地)이며 노동의 공급지이리오’라고 호소했다.(이상 ‘僑日동포에게’, 조선일보 1923년10월4일)
100년전 비극의 현장은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다. 희생자들의 시신은 행방을 찾을 수없고 목격자들의 증언과 기억은 마모돼가고 있다. 소수이지만 일부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조선인학살의 기억을 되살리고 추모사업에 나서는 데서 희망의 기운을 찾을 수있다. 하지만 관동대지진 100주년을 추모하는 도쿄도(都)내 행사 10여개 중 조선인학살 언급은 없다는 보도(’도쿄都 ‘관동대지진 기억하자’ 10개 행사, ‘학살’은 언급 없어’, 조선일보 2023년9월1일)엔 가슴이 답답하다. 미래를 함께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기억의 회복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정진석 편, 일제시대 민족지 압수기사모음 1,2, LG상남언론재단, 1998
강덕상 지음, 홍진희 옮김, 조선인의 죽음, 동쪽나라, 1995
09.09 백석이 사랑한 ‘여름의 총아’ 맥고모자
파나마 모자와 함께 인기, 모던 보이들의 여름 패션 소품

▲‘동해여, 오늘밤은 이렇게 무더워 나는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거리를 거닙네. 멋쟁이 시인 백석은 맥고모자 예찬론자였다. /이철원기자
‘여름!여름! 벌써 여름이다. 거리에는 맥고모자 쓴 사람들과 ‘파라솔’(여름우산)든 부인들의 왕래가 잦으니 바야흐로 맥고모자의 시절이오, ‘파라솔’의 시절이다.’(‘初夏가두풍경’, 조선일보 1930년5월9일)
100년 전 ‘맥고모자’는 여름의 대명사로 통했다. 여름철이 다가오면 이런 기사가 종종 실렸다.’비가 개이고 한 이틀 동안 바람이 불고나서는 날이 훨씬 풀리어 완연 여름날이 되었다 ▲어색해보이던 흰 구두며 맥고모자도 조금도 어색한 빛이 없이 아주 서늘해 보인다 ▲역시 이것도 때가 온 것을 말하는 것인데 때를 맞춰야할 것은 흰 구두에 맥고모자뿐이 아니라…'(‘색연필’, 조선일보 1938년5월19일)
오죽하면 ‘여름은 맥고모자로부터 시작된다’거나 ‘푸른 하늘 아래 연록색의 플라타너스 잎이 활짝 퍼진 넓은 빌딩가의 거리로 눈이 부시게 흰 빛의 초출 맥고모자를 쓰고 거니는 젊은이의 모양은 첫 여름 거리의 즉흥시가 아닐 수 없다’ (’초하(初夏)의 즉흥시’ 맥고모, 조선일보 1937년6월27일)는 말까지 나왔을까.
보릿짚 또는 밀짚으로 만든 맥고모자는 시원한데다 값까지 비교적 부담없어서 ‘모던 보이’들이 선호했다. 밀짚모자하면 농부나 노동자의 땀내나는 허름한 모자를 떠올리지만, 산뜻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고급 ‘맥고모자’는 지식인과 모던 보이들의 사랑을 받은 패션소품이었다. 소설가 엄흥섭이 ‘여름엔 산뜻한 파나마모자나 그렇지 않으면 맥고모자라도 써야만 계절에 어울리는 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소하잡기’ 冬帽 夏帽, 조선일보 1936년7월4일)이라고 쓸 만큼 맥고모자는 파나마모자와 함께 여름의 필수품이었다.

▲20대의 염상섭이 동경유학시절, 맥고모자를 쓰고 카메라앞에 섰다.
◇'맥고모자’시인 백석
멋쟁이 시인 백석(1912~1996)은 맥고모자 예찬론자였다. 백석은 수필 ‘동해’(동아일보 1938년6월7일)에서 맥고모자를 여러 차례 거명한다.
‘동해여-오늘밤은 이렇게 무더워 나는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거리를 거닙네.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거리 거닐면 어데서 닉닉한 비릿한 짠물 내음새 풍겨오는데…’
‘이렇게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친구를 생각하기는 그대의 언제나 자랑하는 털게에 청포채를 무친 맛나는 안주탓인데….’
‘이렇게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전복에 해삼을 생각하면 또 생각나는 것이 있습네.’
함흥 영생고보 교사시절 발표한 이 수필을 읽으면, 무더운 여름밤 맥고모자를 쓰고 맥주를 마시며 신나게 거리를 누비는 스물 여섯 시인의 흥겨운 모습이 떠오른다. 털게와 청포채, 전복, 해삼 등 맛난 안주들을 떠올리며 친구를 생각하는 백석의 순정도 애틋하지만, ‘맥고모자’도 덩달아 뇌리에 박힐 만큼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다.
◇50전에서 2원50전까지
1930년 기준 맥고모자는 최하 50전부터 2원50전까지 했다.(‘初夏가두풍경’, 조선일보 1930년5월9일) 제일 싼 것도 15전짜리 설렁탕 서너 그릇값이었고, 비싼 건 다섯배가 넘었으니 싸구려는 아니었지만 비교적 만만한 패션소품이었던 것같다. 엄흥섭은 ‘칠팔십전이나 많아야 일원쯤 던지면 일년 쓰고 내버려도 과히 아깝지 않을 허름한 맥고모자쯤은 살 수야 있다’(‘소하잡기’ 冬帽 夏帽, 조선일보 1936년7월4일)고 했다.
맥고모자의 상위품은 파나마모자였다. 1930년 기사에 따르면 파나마모자 값은 최저 1원30전부터 최고 11원50전까지 편차가 컸다.맥고모자보다 훨씬 고급품이었던 셈이다. 엄흥섭이 ‘삼사원쯤 빚을 내서라도 파나마모 한 개쯤 사쓰지 못할 내 아니었만’이라고 쓴 걸로 보아, 꽤 사치품이었던 것같다.
맥고모자 스타일도 해마다 조금씩 달라졌던 모양이다. ‘금년이라고 유행이 별로 달라진 것은 없으나 챙이 좀 더 좁아지고 리본도 좀 더 가늘어들었답니다.그리고 리본 빛깔은 아무래도 다색(茶色)계통이 우세한 모양인데, 젊은 분네중에는 검은 빛도 찾는 이가 많답니다.’(‘그리운 흰 빛, 산뜻한 맥고모자’, 조선일보 1936년5월7일)
◇파나마모자의 유래
‘파나마 모자’는 파나마산(産)일까. 당시에도 궁금한 사람이 많았던 것같다. 신문에 해설기사까지 났다. ‘파나마모자는 그저 파나마라는 나라에서 나는 것으로 아시지만은 남양 마르날군도로부터 대만이나 류구 등지에서도 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그래서 남양의 야자(椰子)입사로 된 것은 3원50전에서 7원 정도로 가고 류구서 나는것은 8원 이상 60~70원까지 있고 일본, 파나마, 컬럼비아 등은 8원 내외입니다’ (‘그리운 흰 빛, 산뜻한 맥고모자’, 조선일보 1936년5월7일)
파나마 모자의 원산지를 에콰도르, 콜럼비아, 페루라고 밝힌 기사도 있었다. ‘파나마는 어데서 만드느냐고 하면 보통 파나마-저 유명한 파나마 운하(運河)가 있는-에서 산출하는 것이라고 하나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그 원산지는 남아메리카의 ‘에크아돌’ ‘콜럼비아’ ‘페루-’이고 ‘파나마’는 그것이 매매되는 곳입니다.’(‘첫 여름의 패션쇼’-여름모자, 동아일보 1934년5월17일) 파나마는 유통 중심지이지 생산지는 아니라는 뜻이다.
시중에는 싸구려 파나마 모자도 많이 유통됐다. 종이로 만든 파나마 모자는 비를 맞으면 망가져서 ‘싼 것이 비지떡’이라고들 했다.

▲경찰서 분실물센터에 맥고모자가 많이 들어온다고 보도한 조선일보 1937년11월20일자 기사
◇남자 분실물 1위 맥고모자
여름을 대표하는 남성 패션의 상징, 맥고모자는 분실품 순위 선두에 꼽히는 물건이었다. 모자를 벗었다 다시 챙기는 걸 깜빡하는 도시인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1939년 본정서(本町暑) 유실물창고에 보관된 물품 12만점 중 맥고모자와 양산이 4000점씩 차지해 가장 많았다고 한다.(‘도회인은 건망증’, 조선일보 1939년1월24일) 여자는 양산, 남자는 맥고모자가 압도적이었다.
여름철 기차 승객이 남기고 간 분실물 중에도 맥고모자가 두드러졌다. ‘경성역은 예년과 같이 잃어버린 물건 처리에 눈코 뜰 사이 없는 형편이다. 더위로 정신이 빠진 탓인지 열차 발착 시각에 대합실 또는 열차안에 잊어버린 물품은 맥고모자를 필두로 파라솔, 핸드백, 보구미(바구니의 강원도 사투리), 트렁크, 단장 등이 거의 매일 발견되어 지난 6월19일의 18건은 최근의 기록이고 7월에 들어서는 닷새 동안에 39건이 생기고, 5일은 12건으로 더위와 물건 잊어버리는 것과는 떠날 수 없는 관계가 있는 듯하다.’(‘더위와 건망증’, 조선일보 1933년 7월8일)
여름철 분실물은 찾으러 오는 사람도 적어서 역무원들은 분실물 처리에 골머리를 앓았다. 이 기사는 ‘인심이 각박한 이 때에 거의 임자가 나설 터인데 여름 인심은 평소보다 너그러워지는 법이라 할까?’라고 슬쩍 어깃장도 놓지만, ‘역 당국에서는 처치에 곤란하야 더위에 시달리는 여객의 건망증을 근치할 방법이 없는가 고심하’고 있다고 마무리했다.

▲맥고모자 손질법을 소개한 조선일보 1934년7월14일자 신문. 여름이 지나면 이런 기사가 종종 실릴 만큼 맥고모자는 남자들의 여름 패션 아이템으로 인기가 높았다.
◇'한여름만 지나면 소박데기 신세’
‘여름의 총아’도 무더위가 지나면 쓸모 없어졌다. ‘아무리 좋은 맥고모자라도 일년만 쓰면 그만입니다. 말이 일년이지 한여름밖에 안되는데 멀쩡한 놈도 빛깔이 누렇게 되는 통에 더 쓸 자미가 없어집니다’(‘한여름만 지나면 소박데기 신세’. 조선일보 1934년 7월13일)
하지만 내버리기는 아까웠던지 맥고모자 세탁법 기사가 종종 실렸다. ‘과산화소다 가루를 약방에서 한 5전어치 사다가 백배 되는 물에 타서 그 물에 솔을 축여가지고 모자를 또 한번 얼른, 고루고루 문질러 씻으시오. 그 다음에는 맨물로 씻습니다.’(위 조선일보 기사)
이렇게 묵은 때를 씻은 맥고모자는 눈부신 한여름의 전성기를 뒤로 하고 내년을 기약하며 안방 장롱 신세를 졌다.
◇참고자료
최지혜,경성백화점 상품 박물지, 혜화1117, 2023
백석, 정본 백석 소설·수필, 문학동네, 2019
09.16 ‘사랑의 전령사’ 메신저를 아십니까
연애 편지와 물건, 돈까지 전해주는 ‘퀵 서비스’, 경성에만 200명 성업

▲대경성도시대관'(1937)에 실린 메신저사. 유니폼을 입고 자전거를 앞에 둔 채 기념촬영을 했다. 메신저만 15명으로 성업중이었다고 한다.
소설가 이태준이 1940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청춘무성’은 여자고보 교목으로 일하는 치원과 여학생 은심, 득주와의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장편소설이다. 은심 친구인 득주는 어려운 집안형편 때문에 명치정(明治町·지금의 명동 일대)의 빠 ‘마이 디어’에서 여급으로 일한다. 득주에게 눈독을 들인 한량 윤천달이 환심을 사기 위해 돈 300원과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한다.
‘득주가 집에 와서 다시 한잠을 자고 목욕을 하고 오니까 ‘멧센쟈’가 막 들어와 섰다. ‘뭐냐?’ 명함과 무슨 물건 싼 것을 내민다. 윤천달에게서였다. ‘도장 받아오랬어요.’ 득주는 ‘십만원꿈’이 꽃피듯 전개된다. 손이 후둘후둘 떨린다. 방으로 뛰어들어가 도장을 찍어주고 ‘미스꼬시’ 종이에 싸인 것을 허둥허둥 끌른다. 할머니가 기웃거리는 것을 들어가시라고 소리쳐버린다. 이중 봉투가 나온다. 반지갑이 하나 나온다. 우선 봉투부터 뜯는다. 백원짜리 석장, 삼백원, 득주는 봉투속을 들여다본다. 다른 아무 것도 없이 그뿐이다. 한참 피가 머리로 쏠려 현기를 느끼며 꼼짝 못하고 앉았다가 반지갑을 집어 열어본다. 금강석, 그리 작지도 않고 크지도 않다. 오마쓰의 육백원짜리라는 것보다 약간 클 듯하다.’(’청춘무성’110, 조선일보 1940년7월20일)

▲이태준이 1940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청춘무성'. 여주인공 득주에게 300원이 든 봉투와 다이아몬드 반지를 '메신저'를 통해 전달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메신저는 연인간의 편지나 물건을 배달해주는 서비스를 맡았다. 조선일보 1940년 7월20일.
◇유명 다방,식당에 상주
소설 속 ‘멧센쟈’는 ‘메신저’다. ‘사랑의 메신저’같은 은유가 아니라 100년 전의 신종 직업이다. 연인들의 편지나 약속 메시지를 전달하는가 하면 돈이나 물건도 배달했다. 종로와 본정, 명치정 등 도심에서 활동했는데, 유명한 다방이나 식당에는 메신저가 거의 상주했다.
영화감독 겸 평론가 서광제가 쓴 수필에도 메신저가 등장한다. ‘K군은 내가 돈 이십원 있다는 바람에 별안간에 기운이 나서 전화실로 가서 용달사에 전화를 걸고 멧쎈저-뽀이를 불렀다. 한 10분 후에 멧쎈저-뽀이가 왔다. K군은 편지 한장을 써주며 ××정(町)××번지(番地)에 갔다주고 회답을 맡아오라고 하였다. 그 편지가 무엇이냐 물었더니 자기와 요사이 좋아하는 여성이 있는데 군자금이 없어서 사오일째 못만났다고 하며 얼굴은 절세미인이며 보통때 같으면 위험해서 나에게 소개를 아니하여 주려고 하였는데 연애 군자금까지 내주는 씸파에게 인사쯤이야 안시켜줄수있는가 하고 의기충천하야 비둘기같이 날아들어올 자기의 애인을 기다리고 있었다.’(‘봄의 탄식’3, 조선일보 1937년4월2일)
다방에서 용달사에 전화를 걸어 메신저를 부르고 회답까지 받아오게 하는 식으로 운영한 모양이다.
◇동업조합 결성하기도
1930년대 후반 등장한 메신저는 급성장했다. ‘대경성도시대관’에는 1937년 자전거를 앞에 둔 채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단체로 찍은 사진이 실려있다. 앵정정(櫻井町) 1정목 57번지에 있는 이 메신저사는 종업원만 15명으로 사업이 꽤 잘 됐던 모양이다.
1939년 경성에선 메신저들이 동업 조합을 결성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종래로 이 직업은 간편하고 신속하여 여러가지로 좋은 점이 많기는 하면서도 허가제가 아직도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간판만 내어걸고 주문이나 받아서 돈벌이를 하려드는 엉터리도 적잖이 생겨나게 되어 폐단이 적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이 점을 걱정한 부내 유력 용달사 70명이 발기하여 가지고 동업 조합을 조직하여 엉터리 업자를 일소하기로 결의하고 그 창립총회를 작15일 오후1시부터 부내 황금정 아서원에서 열고 ….’(‘거리의 사절 멧센저, 동업조합을 결성’, 조선일보 1939년6월17일)
기사에 따르면, 경성엔 200명의 메신저가 영업중이었다.
◇'연애편지의 전서구’
‘작금 장안 명물의 하나는 무슨 용달사 무슨 ‘메센쟈’하는 장안 ‘심부름꾼’이라할까 최신 서사(書使)라 할까 하는 용달사라는 새로운 명물이 두각을 나타나 번영하는 것일것이다.’ ‘장안의 명물’로 손꼽힌 메신저의 주업(主業)이 연애편지 전달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종로 네거리 용달사의 한달 통계를 집계했더니, 전체 307건 중 남녀사교문(연애편지)배달이 190건으로 단연 1위였고 물품 배달이 54건으로 2위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염서의 전서구’, 동아일보 1939년11월12일)
◇돈 떼먹고 달아나는 메신저
메신저 중엔 부탁받은 물건이나 돈을 떼먹고 달아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경성역전 멧센저 김원준(18)은 19일 오후3시경 경성역에 내린 재령군 재령면 유화리 장인섭이가 성북정 175~2호 그 아우 장봉섭에게로 보내는 이불, 사과, 엿 등 100여원어치를 맡아 가지고, 이불은 잡히고 엿과 사과는 그대로 집어 먹었다가 21일 오전 용산서에 붙들렸다.’(‘엿단지 들이킨 멧센저 검거’, 조선일보 1940년2월21일)
메신저가 부탁받은 물건이나 돈을 횡령했다는 기사가 간간이 보도됐다. 그런가하면 메신저를 이용한 신종 사기도 발생했다. ‘4일 본정서에서는 신내천현 출생 대총가성(大塚嘉誠, 26)을 붙잡아다가 취조중인데 그는 지난달 26일 경춘철도회사의 암영(岩永)이란 사람의 이름을 써서 용달사 편으로 암영의 친구인 장곡천정 판본관일(坂本寬一)에게 돈 30원을 보내달라고 하여 이것을 사취하고 다음날에는 뱃심좋게 암영의 인장을 위조하여 찍은 다음 같은 방법으로 60원을 사취한 뒤 그간 명치정 모 여관에 잠복하여 있다가 본정서원에게 체포된 것이다.’(‘용달사 악용한 사기한 피체’, 조선일보 1939년7월5일)
◇메신저 대항 자전거 경주대회
메신저는 ‘대경성도시대관’에서 보듯, 자전거로 편지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자전거 경주 대회에 백화점 배달부와 함께 메신저 대항 경주도 있었다. 중앙신문사가 1940년 4월27일, 28일 이틀에 걸쳐 경성운동장에서 주최하는 전조선남녀자전거경기대회는 참가선수 120명 중 백화상(百貨商) 대항, 메신저 대항 등의 종목이 있었다고 보도했다.(‘남녀자전차대회 明27일부터 거행’,조선일보 1940년4월27일) 이 대회엔 엄복동, 조수만 등 노장선수까지 출전한다고 소개됐다.
연서(戀書)나 쪽지를 날라주던 ‘메신저’는 사라진지 오래다. 카톡이나 문자, 인스타그램처럼 빛보다 빠른 속도로 연결된 세상에서 이 무슨 고릿적 얘기인가 싶기도 하다. 연인에게 쪽지를 보내놓고 답신을 기다리며 애태우는 풍경은 이제 옛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세상이다.
◇참고자료
박현수, 경성 맛집 산책, 한겨레출판, 2023
09.23 조선의 첫 스포츠스타 엄복동의 인생유전
1913년 日 선수와 겨뤄 우승하며 국민영웅 떠올라…6.25 때 폭격으로 숨져

▲1923년 마산체육회가 주최한 자전거대회에서 우승한 엄복동. '동양자전거왕'이란 별명을 얻었다.
1920년 5월2일 경복궁에서 열린 경성시민대운동회는 후반 아수라장이 됐다. 경성상공연합회가 주최한 운동회에선 6마일 마라톤을 비롯, 15개 종목이 열렸다. 이날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자전거 경주대회 결승전이 발단이 됐다. 엄복동을 비롯한 조선인 선수 셋과 일본 선수 모리시타(森下正一) 등 넷이 출전했다. 경기장을 40바퀴 도는 코스였다. 엄복동은 중반까지 뒤에서 달리다 서른 바퀴쯤부터 속도를 내면서 선두에 나섰다. 흥분한 관중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엄복동을 응원했다. 갑자기 모리시타가 거꾸로 넘어지며 얼굴에 큰 부상을 입었다. 일본인 심판은 경기를 중단시키려고 경기장에 뛰어들었지만 엄복동은 계속 달렸다.
‘소위 심판부에 있다는 일본 사람들은 우승기가 그만 갈데없는 엄복동의 것이 되는 것을 크게 분하게 여겨 엄 군을 돌지 못하게 막아내었다. 그러나 엄군은 조금도 굴치않고 여전히 돌아 39회에까지 이른 것을 여러 일본 사람이 기어코 길을 막고 돌지 못하게 하매 심판계앞에 세웠던 우승기를 그만 엄복동군에게 내어주었다.’ 매일신보는 일본 심판들이 경기를 중단시켰으나 하는 수없이 우승기를 엄복동에게 전달했다고 보도했다.(‘悲風慘雨의 수라장이 된 경주대회’, 매일신보 1920년5월4일)
그런데 일부 일본인 관객들이 엄복동의 우승기를 빼앗고 그를 두들겨패면서 사단이 일어났다. ‘심판과 일본 사람은 때려잡아라!’ 관객들은 돌팔매질을 했고, 순식간에 경기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경찰이 개입하고서야 겨우 진정됐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조차 ‘不可解의 일본 사람’이라며 일본인 심판과 관객의 편파조치를 항의할 정도였다. 매일신보는 다음날에도 ‘호소무처(呼訴無處)의 차한(此恨)을?’기사에서 ‘조선사람은 우승기도 가질 자격이 없는가’라며 따지는 기사를 내보냈다.

▲2010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엄복동 자전거. 1910년대 만든 영국산이다.
◇1913년 전조선자전거 대회 1위로 혜성처럼 등장
자전거 경주는 1910년대~1920년대 최고 인기를 누린 스포츠였다. ‘운동중에는 아마 장쾌하고 볼만한 것은 자전거경주밖에 다시 없을 듯하다’(매일신보 1922년5월23일)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엄복동이 일본인들이 우세한 자전거 경주에 혜성처럼 등장한 것은 1913년 4월13일 용산 연병장에서 열린 전(全)조선자전거 대회였다. 조선 선수 2명과 일본 선수 4명이 겨룬 제일류 경기에서 엄복동은 1위, 황수복이 3위를 했다. 하지만 우승기를 놓고 겨룬 9명(조선인은 엄복동)이 출전한 최종 경기에서 결승점 직전 일본인 선수와 부딪혀 도중탈락했다. 매일신보에 따르면, 이날 경기를 보러 온 관객이 10만명을 넘어 용산까지 임시전차 수십량을 특별운행했다. 인력거와 도보로 용산까지 가는 인파가 가득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엄복동은 4월27일 평양에서 열린 자전거대회에서도 3만5000명 관객이 몰려든 가운데 20바퀴를 도는 ‘조선 일류선수 책임경주’에서 1등을 차지했다. 엄복동은 근대 스포츠가 이 땅에 들어온 이래 대중의 사랑을 받은 최초의 스포츠스타였다.

▲1923년 5월 장충단에서 열린 자전거경주대회에서 일본 선수들을 물리치고 우승한 엄복동. 조선일보 1923년 5월7일자
◇”엉덩이 몇 번 꿈적거리며…” 역전의 명수
엄복동은 1922년 5월21일 경성윤업회(輪業會)가 장충단에서 주최한 전(全)조선자전거경주대회에서도 우승했다. 오사카 등에서 온 일본인 선수 4명과 조선인 선수 7명이 참가한 이 경주에서 엄복동은 막판 스퍼트 전술을 구사했다. 40바퀴를 도는 이 경기에서 내내 뒤처져있다가 35바퀴쯤 돌았을 때부터 ‘엉덩이 몇번 꿈적거리는 바람에 앞선 내지인(일본인)을 멀리 뒤에 떨어뜨’리면서 선두로 치고 나갔다.
이듬해 5월5일 경성윤업유지회(輪業有志會)가 장충단공원에서 주최한 자전거경주대회는 분위기가 더욱 고조됐다. 연전연승하는 엄복동에게 일본에서 제일가는 자전거 선수들이 도전장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자전거 경주를 할 것같으면 의례히 엄복동군이 1등을 하게 되는 고로 작년과 재작년에 일본에서도 몇째 안가는 자전거 선수 몇 사람이 일부러 나와서 참가를 하였으나 마침내 1등은 얻지 못하고 돌아갔었는데 금년에는 일본에서도 제일 유명한 선수 10여명이 며칠전부터 경성에 들어와서 연습을 하며 자웅을 결단코자 하는 중이므로….’(’자전거계의 비장(飛將), 노당익장(老當益壯)의 엄복동군’, 조선일보 1923년5월7일)
엄복동은 경기 중반까지는 뒤처져서 기회를 노리다가 막판 역주로 선두로 치고 나오는 전술을 선호했다. 20바퀴를 도는 이 경기에서 7,8바퀴까지는 뒤에서 슬슬 관망만 했다. 열바퀴가 넘으면서 치고 나오는 듯하다 다시 뒤로 물러났다. 마지막 두세바퀴를 남기고 다시 선두를 노리더니 19바퀴째엔 다른 선수보다 7,8보를 앞서가며 결승점을 통과했다. 역전의 귀재였다.

▲2019년 개봉한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 가수 비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으나 설득력 떨어지는 드라마와 상투적인 반일 코드로 관객들의 외면을 받아 흥행에서 참패했다.
◇'자전거 장물 거래’로 1년6개월 징역형
엄복동은 1924년 10월3,4일 장충단공원서 열린 전조선자전거경기대회를 마지막으로 은퇴한다고 밝혔다. 매일신보 1924년10월4일자는 ‘이번을 마지막으로 하고 영원히 경주회에 출장치않기로 결심하였다는 바, 군은 자기의 평생의 기능을 다하여 최후의 경기를 될 수 있는 대로 화려하게 할이라더라’고 보도했다.서른 두살 노장(老將)이니 그럴 만했다. 엄복동은 4일 16바퀴를 도는 제9회 경기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예고한 대로 은퇴경기를 화려하게 마감했다.
1년 반 뒤 엄복동이 느닷없이 경찰에 체포됐다는 기사가 실렸다.(‘엄복동 피착’,조선일보 1926년 6월23일) 장물거래 혐의였다. 1926년6월20일 오후 장충단공원에서 열린 자전거대회 종료 직후, 본정서(本町署) 경찰이 엄복동을 연행했다. 은퇴를 선언했던 엄복동은 서울윤업회(輪業會)가 주최하고, 시대일보가 후원한 제2회 전조선자전거경주대회에 참가해 8바퀴를 도는 2마일 경기에서 1등을 차지했다.(시대일보 1926년6월22일) 엄복동은 경성시내에서 도난당한 자전거 20여대를 원산에 팔아넘긴 혐의를 받았다.
원산으로 이송된 엄복동은 함흥에서 열린 1심재판에서 징역 18개월과 벌금 60원을 선고받았다. 동아일보(1926년10월7일자)에 따르면, 엄복동은 병목정(並木町, 서울 중구 쌍림동)229번지에서 자전거상점을 운영하던 중, 절도전과범 이효진이 훔친 자전거 10여대를 원산으로 가져가 팔았다. 함흥지방법원은 9월20일 이효진은 징역 4년, 엄복동은 징역 1년6개월에 벌금 50원 판결을 내렸는데, 두 사람은 항소해서 경성 복심법원 재판을 앞두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경주에 참가해달라며 선금이 답지하던 스타가 왜 이런 거래를 했는지,내막은 알 수없다. 엄복동은 항소심에서 뒤엎을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항소를 포기하고 원심대로 징역을 선택했다는 보도가 뒤이어 나왔다.(‘地上鳥人 服役’, 매일신보 1926년 11월7일)
◇48세 엄복동 5000미터 1위
징역형을 살고 나온 엄복동은 1928년 6월23일 평양 기림리공설운동장에서 평양조선인윤업조합 주최로 열린 전조선남녀자전거경기대회에 모습을 나타냈다.(‘인기집중리에 묘기의 예선전’, 동아일보 1928년6월25일) 기림리 공설운동장은 1926년 평양부(府) 공설운동장으로 건립됐는데, 해방 후 한 때 모란봉경기장으로 불렸다가 현재 김일성경기장으로 알려진 곳이다. 엄복동은 20바퀴를 도는 1류 경기에서 1위를 차지했다.
엄복동은 1935년4월28일~29일 조선일보 경남(京南,경성 남부)지국 주최로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전조선남녀자전거경기대회에 모습을 나타냈다. ‘10여년간 그의 존재를 모르던 엄복동’(‘참가선수 150, 박두한 자전거경기대회’,조선일보 1935년4월26일)이란 표현까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오랜만의 공식무대였던 듯하다. 엄복동의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 번외 1500미터 일반 결승에서 1등을 차지했다.(‘飛燕같은 快速에 2만 관중은 陶然’, 조선일보 1935년5월1일)
40대에 접어든 엄복동은 주로 번외경기에 출전했지만 ‘흥행보증수표’였다. 왕년의 스타를 보려는 관객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엄복동은 1935년 5월28일 함흥에서 열린 전조선남녀자전거경기대회에도 참가했다.
‘이날은 은혜받은 쾌청한 날씨로 관중들은 무려 수만명을 돌파하였고 중에도 12년간이나 종적을 감췄던 자전거계의 상승장군 엄복동(45)군의 출전으로 이 대회는 공전의 성황을 이루었는바’(‘함흥자전거경기 성황으로 종막’, 동아일보 1935년5월31일)라는 기사로 알 수있듯, 그가 출전한다는 소식만 들려도 관객들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엄복동은 한달 뒤인 7월8일~9일 정주상무회주최로 정주에서 열린 자전거대회 노장분야에서 1등을 차지했다. 이듬해인 1936년5월30일~31일 황해도 재령에서 열린 자전거경기에도 참가, ‘번외’경기에서 1등을 차지했다.
1939년 5월28일 오전 9시반 인천 도산정 공설운동장에서 전(全)조선자전거 경기대회가 열렸다. 인천 자전거선수회가 주최한 전국대회였다. 참가선수만 200여 명이었는데, 관중 8000여명이 몰려들었다.엄복동은 이날 5000미터에서 1위를 했다.(‘공전의 성황속에 자전거 경기 종막’, 조선일보 1939년5월30일)
◇오리무중인 엄복동의 행적
엄복동의 생애는 출생지부터 은퇴 이후의 행적, 6.25 전쟁 중의 돌연한 죽음 등 여전히 불확실한 대목이 많다. 1892년생으로 알려져있으나 출생지는 서울 관철동, 오장동, 평택으로 제각각이다. 사망일도 6.25때 폭격으로 죽었다는 얘기만 전해질 뿐이다. 1920년대 후반 이후 간간히 전국에서 열리는 자전거경주에 참가했으나 그의 행적은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 없다.
엄복동은 해방 후에도 종종 경기에 출전했다. 1949년 6월5일 군산에서 열린 자전거기록경기대회에서 번외경기로 열린 2000미터 경주에서 엄복동이 1위를 했다. 환갑을 코앞에 둔 엄복동이 번외경기이긴 하지만 1등을 차지한 것이다. 엄복동은 다음달인 7월23일~24일 대한자전거경기연맹 주최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회에도 노장3000미터 속도경기에서 1등을 했다.
◇등록문화재된 엄복동 자전거
‘경기도 양주군 최천면 덕계리에 거주하는 왕년의 자전거 선수 엄복동씨는 생활난에 빠져 그랬는지 지난 (3월)22일 시내 청진동 박연이씨 문전에 있는 자전거를 훔치다가 경관에게 체포되었는데 이를 담당한 안희경 검사는 훈시 정도로 보냈다 한다.’(‘왕년의 자전거 선수, 자전거 훔치다 피검’, 조선일보 1950년4월1일)
엄복동의 이름이 다시 신문에 오르내린 건 1950년 4월이었다. 생활고 때문인지 남의 집앞 자전거를 훔치다 체포됐다는 뉴스였다. 검사도 딱했던지 훈방으로 끝냈다. 하지만 곧 이어 터진 6.25 전쟁으로 엄복동은 세상을 떴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간 전쟁중의 혼란 때문인지 당시 신문에서 엄복동의 부고를 찾을 길 없다. 훗날 엄복동의 자취를 추적한 기사는 그의 최후를 이렇게 증언했다. ‘1950년 6.25때 자전거를 타고 고향 평택을 찾아가다가 관악산 기슭 남태령에서 적탄에 맞아 쓸쓸히 갔다’(‘엄선수 인기 대단, 일본대회 모두 보이콧’, 조선일보 1972년 5월12일)
엄복동이 1910년대 선수시절부터 타던 자전거는 2010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영국 러지 위트워스(Rudge-Whitworth)에서 만든 자전거로 1910년대 제작됐는데, 엄복동이 후배선수에게 넘겼다고 한다.
◇참고자료
하웅용, 이용우, ‘엄복동 자전거의 문화·기술사적 해석’, 한국체육사학회지 제17권제1호, 2012
임석원, 박성수, 김대한, ‘일제강점기 ‘륜패천하’(輪覇天下)의 주역 엄복동 생애의 明과 暗에 관한 소고, 한국체육학회지 제53권제3호, 2014
이준호, 신승환, 유도상, ‘자전거영웅 엄복동의 체육활동과 그의 활동이 대한제국민들의 독립의식 고취에 미친 영향, 한국체육과학회지 제25권제6호, 2016
09.30 ‘억센 조선’ 꿈꾼 夢想家들
尙武정신 박약해 亡國…신문마다 스포츠대회 주최

▲신흥스포츠 권투는 1930년 전후 인기를 누렸다. 조선일보는 권투를 장려했다.청년들의 신체와 정신 단련에 적합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권투대회를 주최하기도 했다. 1932년 2월21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서정권 도미송별시합이 대표적이다. 조선일보 1932년 2월23일자 ‘권투대회에 관중쇄도’ 기사에도 '억센 조선의 건설' 구호가 달려있다.
‘억센 조선의 건설은 우리의 큰 구호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 조선은 약하다. 줄잡아서 억세지 못하다. 못먹고 못입고 못살아서 약하니 가난하여 약한 것이오 못배워서 약하니 지식으로 약한 것이오 뛰고 닷고 밀고 나가고 잡아낫구기에 약하니 체육에 약하고 단련이 약한 것이다. 세상만사가 모두 가난 때문이라고 그만두어버린다면 쓰라리고도 쉬운 일이지만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모아 우리 스스로가 한 걸음씩 ‘억센 조선’을 만들어나가기에 골독(골똘)하여야 하겠다.’(‘억센 조선의 건설’, 조선일보 1932년 1월1일)
‘억센 조선의 건설’은 조선일보가 1932년 신년호에 내건 캐치프레이즈였다. 조선중앙일보 역시 1936년 신년호에 ‘억센 조선을 세우자’는 구호를 내세운 걸 보면, 상당한 공감을 불러일으킨 듯하다. 1936년은 마침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과 베를린 하계올림픽이 열린 해였다. 이 신문은 ‘그 민족의 건강과 그 의기는 그 민족의 사회적 역량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희망의 새해를 ‘억센 조선’의 건설촉진에 총집력할 것으로 믿는다’고 기사를 마무리했다.

▲부녀자들도 한강에 나와 수영과 일광욕을 즐기라고 권하는 신문 기사. 신체와 정신 단련을 위해 스포츠를 권장한 '억센 조선 만들기'프로젝트의 하나였다. 조선일보 1933년7월29일자
◇저명 지식인들이 조선체육회장 맡아
1930년대 신문엔 ‘억센 조선’이란 구호가 종종 등장한다. 특히 스포츠와 연관된 경우가 많다. 근대 스포츠는 20세기 들어 이 땅에 본격적으로 들어왔다. 야구, 축구, 육상 등이 속속 소개되면서 학교 체육을 통해 자리를 잡았다. 1920년 조선체육회 (대한체육회 전신)설립과 함께 각종 스포츠대회가 앞다퉈 열렸다.
신흥우, 유억겸, 윤치호, 여운형 같은 지도층 인사들이 조선체육회(1920년 발족)를 잇따라 이끈 것도 스포츠를 단순히 취미나 여흥거리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족이 유약(柔弱)해서 나라를 잃었다고 생각한 이들은 스포츠를 통해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닦아 민족을 다시 일으켜세운다는 목적의식이 강했다.
◇500년 文弱한 조선, 스포츠로 일으켜세워
‘억센 조선의 건설은 무도(武道)의 부흥-상무(尙武)정신의 부흥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선일보 1932년1월19일자 1면 사설 ‘무도부흥’(武道復興)은 상무정신의 부흥을 내걸었다. 상무정신을 기르기 위해선 체육적 단련과 분위기 조성이 필요한데, ‘조선인은 오백년 문약(文弱)의 끄트머리에 이것을 독자적으로 발휘할 사이가 없이 드디어 엄대한 변국에 다닥드리어 오늘날에는 잃은 것이오 민간적 사업으로 이것을 일으키기 시작한 지 무릇 이십수년래의 일’이라고 썼다.
신문사가 각종 스포츠대회를 주최하거나 스폰서로 나선 이유도 ‘억센 조선의 건설’ 취지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1932년 2월21일 오후 7시반 경성 시내 한복판 경성공회당서 권투시합이 열렸다. 당대 최고의 복서로 인기있던 서정권의 도미(渡美)송별권투대회였다. 조선일보 주최, 조선권투구락부 후원이었다. 이 경기는 경성방송국이 라디오 중계방송까지 할 만큼 화제를 모았다.
‘(권투는) 다른 운동경기보다 절대의 투쟁의식과 인내력이 주체됨에 따라서 더욱 나약하야가는 조선 청년에게 보급시키려는 것이다. 자기의 피를 흘리면서 남의 피를 보게 되는 이 같은 용감한 운동을 볼 때에 어느 누가 가슴의 피가 뛰지 않으며 쾌재를 부르지 아니할 것인가.’(‘권투대회에 관중 쇄도 보건체조 대개강’, 조선일보 1932년2월23일). 요즘 시각으로 보면 낯설지만, 청년의 투쟁의식과 투지를 고무하기 위해 권투를 장려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권투 대회 다음날인 2월22일 중앙기독교청년회(YMCA)와 공동주최로 시민보건체조강습을 시작한 것도 같은 취지였다. ‘나이 16세를 최저로 최고 40여세의 장년까지 백여명이 이른 아침을 불구하고 신선한 대지의 공기를 마음껏 흡수하면서 참회(참석)한 중 더욱 경하할 일은 꽃 같은 여성 두 사람이 본 강습회에 참회한 것이다. 이것은 아마 보건운동사상의 신기원을 지을 장쾌한 일일 줄 생각한다.’(‘권투대회에 관중 쇄도 보건체조 대개강’)

▲조선중앙일보도 1936년1월1일자 신년호에 '억센 조선을 세우자!!'는 기획을 실었다.
◇'억센 조선’을 위한 시민대운동회
1932년 5월 8일 전국각지에서 시민운동회가 열렸다. 평양 각조합연합회 주최로 여자선수 80명 포함, 300명이 넘는 선수가 참가한 평양 시민대운동회, 경성상공협회가 장충단에서 연 상공연합회대운동회를 비롯, 목포, 포항, 부산에서도 운동회가 열렸다. ‘운동장을 메울 조선의 건아는 일어서라 나아가라 모이라! 튼튼한 다리 억센 팔구리로 만든 가슴과 어깨,그리고 굵은 목!(이와 같은 건강은 일하는 사람을 제(除)하고 어느 사람에게 있는 건강일 것이냐?) 이같은 건강한 육체를 신록의 숲 사이에 나타내어라. 5월의 태양 아래서 뛰라! 기림리 그라운드로, 장충단으로, 대성동광장으로, 남빈정염전으로, 박간별장으로 평양, 경성, 목포, 포항, 부산의 시민은 달리어라! ‘억센 조선의 건설’의 표어를 선두에 고양하라!’(‘시민대운동’, 조선일보 1932년5월8일)
느낌표를 남발하며 다소 흥분한 어조의 이 사설 부제(副題)도 ‘억센 조선의 건설’이었다.
◇한강 수영장, 일광욕에 여성 참가 권유
‘조선 가정에서는 여름이 되면 흔히 남자들만 강변이나 해변으로 피서를 하지만 부인들은 대개 골방에서 종일 땀을 흘리며 지나야 합니다. 한 가정에서 남자들만 튼튼하고 부인들이 건강치 못하면 불행의 원인이 됩니다. 부인들도 될 수있는대로 한강을 이용하십시오. 한강가에 설비해놓은 본사의 일광욕 수영장에는 부인들의 탈의장과 휴게장을 따로 꾸며놓았으며 특별히 부인들에게는 일일히 ‘뿌이’를 빌려드림으로 조금치도 위험하지 않습니다.’
한강 수영장, 일광욕장을 이용해 무더위가 기승부리는 여름철, 건강을 유지하자는 내용이었다. ‘억센 조선을 세우자, 부인도 한강에 오시라’(1933년7월29일)는 특이한 제목이었다.운동에 소극적인 부녀자들을 적극적으로 초대해 일광욕과 수영을 배우도록 권장했다.부녀자와 어린 아이들까지 공략한 ‘억센 조선’ 캠페인이었다.
◇'억센 조선 만들기’ 프로젝트의 성공
1930년대 마라톤은 조선의 인기 스포츠였다. ‘마라손에 대한 정열은 비상한 듯하야 작금 동경 신의주간 조선일주, 조선횡단, 국경일주, 황해도 일주 마라톤 등등 이것만으로도 5,6가지에 달한다’고 할 정도로 ‘마라손 황금시대’(‘마라손狂시대’, 조선일보 1933년9월3일)였다. 1932년 제10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김은배, 권태하가 일본 올림픽 대표선수로 당당히 선발됐고 올림픽 본선에서도 각각 6위와 9위를 하면서 기세를 올렸다.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우승과 남승룡 선수의 3위 입상은 ‘억센 조선 만들기’ 프로젝트의 하이라이트였다. 조선인이 열등하다는 편견을 뒤집고 당당히 세계를 제패한 것이다.
주말마다 한강에 나가면, 자전거를 타거나 달리기에 여념없는 남녀들을 만날 때마다 100년 전 선각자들의 ‘억센 조선 만들기’ 프로젝트가 떠오른다. 추석 연휴 항저우(杭州) 아시안게임 발(發) 승전보를 접하면서 더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다. 스포츠는 그냥 스포츠가 아니다.
10.07 100년 전 하와이 학생 고국방문단의 報恩
야구시합·음악회 개최로 한인기독학원 공사비 모금…1954년 인하공대 설립 종잣돈 쾌척

▲1923년 7월 방한한 하와이 학생고국방문단 중 야구단 프로필. 남학생 12명 전원이 야구단원으로 활약, 야구강자 휘문을 제외하곤 전승을 거뒀다./이덕희 소장 제공
‘본보가 기(旣)히 소개함과 같이 현금 포와(布哇)에 재류하는 동포학생이 고국방문단을 조직하야 내 6월경에 도착할 예정인 바, 해지에 재한 동포의 경영인 기독학원을 증축하야 확장할 예정인데 그의 수(需)할 비용 7만원 중 3만원을 재내(在內)동포에게 주급(周急)을 청구할 예산이라 하니.’(‘在포와동포학생의 고국방문’,조선일보 1923년2월6일)
1923년 초 하와이 동포학생들이 고국방문단을 꾸려 찾아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와이 이민단이 1903년초 호놀룰루에 첫발을 내딛은 지 꼭 20년만이었다. 목적은 동포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한인기독학원 신축공사비용 중 3만원을 모금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동아일보는 두 손 들어 고국방문단을 환영하는 기사와 칼럼을 내보냈다. ‘포와에 있는 동포가 모두 5000인인데, 5000인 동포는 유리표박하는 신세로 대다수가 노동의 소득으로 생활을 유지하면서 5만원을 판출하였거늘 재내(在內)한 이천만동포는 아무리 무력하다 할지라도 그 청구하는 3만원 금전에야 무슨 타언이 있을 여지가 없는 바이니...’(‘재포와동포학생의 고국방문’)

▲1923년 7월2일 경성역에 도착한 하와이 학생 고국방문단. 남학생 12명, 여학생 8명과 인솔자 3명으로 구성됐다. 조선일보 1923년 7월4일자
◇ “2000만 동포가 공사비 3만원쯤이야”했지만
그 힘든 농장 노동으로 살아가는 동포들도 돈을 냈는데, 조선 땅에 사는 2000만 민족이 3만원 정도 못 도와주겠느냐며 호기롭게 밝혔다. 조선, 동아일보는 고국방문단 환영 준비 상황을 연일 보도했고, YMCA는 고국방문단을 맞을 준비에 나섰다. 이승만은 독립협회와 YMCA활동을 함께 한 이상재에게 하와이 학생 고국방문단 성사를 위해 연락을 취했던 것같다. 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된 이상재는 방문단 여비(4000원)부터 마련해 보냈다.(‘환영회의 위원회, 포와학생고국방문’, 조선일보 1923년2월14일) 하지만 고국방문단이 목적으로 한 한인기독학원 공사비 3만원을 장담하긴 어려웠던 모양이다. 오가는 뱃삯과 체재비를 마련하는 일에 주력하기로 했다.(‘환영준비의 결의’, 조선일보 1923년 4월7일)
이상재는 독립협회 활동 때부터 이승만과 알고 지내는 사이였는데, 한성감옥에 함께 수감되면서 이승만이 주도한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1904년 석방된 이상재는 YMCA를 통한 청년 교육에 뛰어들었고 1910년 미국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이승만이 YMCA 간사로 일하면서 함께 호흡을 맞췄다. 이상재는 1912년 도미한 이승만의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로 독립운동 차원에서 자신이 모은 자금을 이승만을 후원하는데 썼다.(‘월남이상재평전’, 214쪽)

▲1923년 7월5일 오후4시 정동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펼친 하와이 학생 야구단의 첫 경기. 일종의 OB선수들이 모인 1912팀과 겨뤄 22대16으로 승리했다. 왼쪽 위 사진은 하와이 고국방문단환영준비위원장을 맡은 이상재 선생이 시구를 하는 모습. 조선일보 1923년 7월7일자
◇”君들이 경험한 자유문명, 동포에게 소개하라”
고국방문단 일행은 단장 민찬호, 부단장 김영우, 여자감독 김노디, 그리고 남학생 12명, 여학생 8명 등 23명이었다. 이들은 6월20일 호놀룰루를 출발, 7월2일 부산항에 도착해 당일로 경성에 도착했다. 신문들은 ‘포와학생고국방문단을 환영’(조선일보 1923년 7월3일)같은 사설(社說)같은 기사로 환영하면서 이들에게 거는 기대를 밝혔다. ‘군등의 포상(飽嘗)한 자유 문명의 실지열력(閱歷)이 어떠함을 이중삼중이나 되는 동장철벽(銅墻鐵壁)에 둘러싸인 동포에게 소개하는 동시에 그의 환경을 세심으로 관찰하고 지성으로 방문하야 물질의 소득은 비록 양수(兩袖)에 청풍(淸風)을 만장(滿裝)할지라도 정신의 소득은 쌍미(雙眉)에 부하(負荷)하고 고국을 사별(辭別)하게 하라.’ 학생들이 경험한 미국의 자유문명을 울안에 갇혀 사는 동포들이 느끼도록 애써달라는 당부였다.
◇휘문에만 1패, 나머지는 全勝
방문단은 7월4일 오전 고종이 묻힌 홍릉을 참배하면서 본격적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회와 야구시합, 음악회를 열어 모금활동에 나섰다. 이들이 9월1일 경성을 출발할 때까지 신문들은 매일같이 중계방송하듯 이들의 활동을 보도했다.
방문단은 7월5일 오후4시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OB선수들로 구성된 1912팀과 첫 야구경기를 펼쳤다. ‘경성악대의 류량한 군악과 장내가 떠나갈 듯한 박수성이 일어나며 이번 ‘하와이’학생고국방문단 환영회장인 이상재씨 사회아래에 입장식이 거행된 뒤에 사랑하는 형제들의 열정이 넘치는 악수를 서로 주고 받았고 그 다음에 또 이상재씨의 시구식이 있은 뒤에 두팀의 시합은 시작되었는데…’(‘포와軍 출전의 初日’, 조선일보 1923년 7월7일) 결과는 22대 16, 하와이팀의 승리였다. 하와이 야구단은 7일 배재고보와 맞붙는 등 순회도시마다 시범 경기를 가졌다. 전국 중등학교 야구대회 우승팀인 휘문에 진 것을 제외하곤 전승을 거뒀다고 한다. 야구선수로만 꾸린 방문단도 아닌데, 남학생 통틀어 12명 밖에 안되는 아마추어 야구팀이지만 ‘본고장’실력은 남달랐던 모양이다.
12일까지 경성에 머문 방문단은 13일 인천을 시작으로 해주, 사리원, 정주, 선천, 용암포, 신의주, 평양, 개성, 청주, 이리, 전주, 광주, 대구, 마산, 진주, 부산, 수원, 원산, 함흥, 석왕사 등 30개 이상의 도시를 누볐다.
◇김노디의 고국방문단 참가
김노디는 이승만 추천으로 오하이오주 오벌린대를 졸업하고 하와이로 돌아와 한인기독학원 교사로 재직중이었다.민족문제연구소가 2012년 만든 동영상 ‘백년전쟁’에서 이승만의 ‘정부’(情婦)로 묘사해 논란을 빚은 바로 그 사람이다. 김노디는 한인기독학원을 중심으로 민족교육에 앞장선 여성운동가였다. 정부는 김 지사가 오벌린대학 재학 중이던 1919년 4월 14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재미한인대표자회의에 참석해 독립을 호소하는 연설을 한 것을 비롯, 대한부인구제회 임원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고 미국 각지를 돌며 한국 독립 필요성을 호소한 점을 높이 평가해 2021년 독립유공자로 서훈했다. 단장 민찬호는 목사 겸 이승만의 조력자로 하와이 한인운동에 앞장선 지도자였다. 1919년10월부터 한인기독학원 교장과 한인기독교회 담임목사를 지냈다.
◇한인기독학원 공사비 3분의 1 모금
하와이 학생 고국방문단이 모금하거나 기부받은 액수는 약 2만5770원 13전으로 왕래 경비 9613원을 제외하고 남은 금액이 1만6157원13전이었다. 당시 환율로 계산하면 3600달러다. 이는 당초 목표인 3만 달러는 물론 이승만이 예상한 1만5000달러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성과였다(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312쪽). 이에 대해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소장은 ‘경비를 제외하고 약 4900달러를 학교 건축비로 모았다’(‘이승만의 하와이 30년’ 116쪽)고 써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
고국방문단이 귀국한 다음날인 9월19일 학교 건물과 남녀 기숙사 낙성식을 거행했다. 한인 교포 700명이 참석한 가운데,고국방문단장인 민찬호와 김영우 교사가 보고를 했다. 한인기독학원은 전신인 한인여학원을 합해, 34년간 200명~3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뒤 1947년 문을 닫았다. 학비를 받지 않고, 기숙사비만 실비로 받으며 후원을 받아 어렵게 거둔 성과였다.
◇인하공대 설립 종잣돈 쾌척
1923년 한인기독학원 신축에 모국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하와이 동포들은 광복 후 인하공대(1954년 개교) 설립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 학교 설립자 역할을 한 이승만 대통령의 제의에 따라 한인기독학원 부지 매각 대금 18만 달러(약2331만원)를 쾌척한 것이다. 대학 이름도 하와이 교포들의 도움을 기념하는 의미를 더해 인천의 ‘인’(仁), 하와이의 ‘하(荷)에서 한자씩 따와 지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6.25전쟁 와중에 공학도를 길러내는 학교 설립을 구상했다는 점도 놀라운 일이지만, 학교 개교 당시 고국에서 받은 도움을 갚는다는 데 흔쾌히 동의한 하와이 동포들의 결단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하와이 동포사회는 한걸음 더 나갔다. 지난 달 이승만 기념관 건립을 위해 3만 달러(약 4000만원)를 기부한 것이다. 하와이 한인회를 비롯, 여러 단체들이 참가했다고 한다. 1913년 하와이로 건너가 남녀공학인 한인기독학원을 설립하고, 사탕수수밭 한인 노동자 자녀들을 교육하고, 하와이를 미주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키워낸 이승만의 공로를 기억했을 것이다. 1903년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이역만리 건너간 하와이 동포들의 인연이 100년에 걸쳐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참고자료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역사비평사, 2005
이덕희, 이승만의 하와이 30년,북앤피플, 2015
김권정, 월남 이상재 평전, 2021
최희영, 1923년 하와이한인학생방문단의 인천 방문 주요 내용과 의의, 인천학연구 제36호, 2022
김도훈, 1920년대 전반기 하와이 고국방문단의 추진과 성격-일제의 해외한인 회유정책을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연구 제67집,2013년 겨울호
10.14 ‘첨단을 걷는 모-단적 과자!’ 초코레-트
’연애의 시대’총아, 강장제로 선전도
▲초콜릿을 강장제처럼 선전한 모리나가 초콜릿 신문광고. 조선일보 1931년 2월28일
장편소설 ‘고향’으로 이름난 소설가 이기영(1895~1984)의 초기 단편소설 ‘유혹’엔 초콜릿이 등장한다. 목사 아들인 서울 학생이 시골처녀 옥단의 환심을 사기 위해 건넨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무엇을 한움큼 꺼내 놓는다. 유지로 네모나게 싼 것은 그 전에 어머니가 정거장에서 사다 준-궐연갑 같은데 든 것이었다마는 납지에 똘똘 뭉친 것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싫어요!”하고 옥단이는 무안한 듯이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왜요? 이거 서울서 사온게요!”하고 그는 다시 초코레트를 한 개 집어 준다.’(‘유혹’5, 조선일보 1927년1월8일)
자유연애가 물밀 듯 밀고 들어온 1920년대, 초콜릿은 ‘시대의 총아’였다. 달콤한 연애의 환상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초콜릿만한 게 없었을 것이다. 이기영의 묘사를 보면 은박지에 싼 사각 초콜릿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했던 모양이다.
◇'초콜릿과 연인은 전생의 인연’
‘연인이여! 조코렛트를 먹으라! 나의 손에는 초코레트 하나가 쥐여진다. 그리고 반쪽은 연인의 입으로 그리고 남은 반쪽은 나의 입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야 남은 초코렛트가 하나도 없어지는 때 오랜 시간의 사랑의 속살거림에 어느덧 달도 서편에 넘어지는 때! 우리들의 두 그림자는 문밖 고요한 지는 달빛을 끼고 하룻밤의 이별의 분수(分手)를 하는 것이다.’
월간지 ‘개벽’ 1932년 10월호에 실린 수필 ‘가을달과 연인과 초코레트’이다. ‘조코렛트’ ‘초코레트’ ‘초코렛트’처럼 표기도 제각각이다. 초콜릿은 연애와 ‘전생에서 무슨 인연이나 가지고 나온 기연(奇緣)의 글자들같다’고 쓸 만큼, 동류로 취급받았다.
◇1900년대초 몰려온 양과자
1900년대 들어서면서 양과자를 수입해 파는 상점들이 여러 곳 생겼다. 황성신문에는 인천의 의생성(義生盛), 서울 정동의 홍원호(鴻源號)같은 상점에서 양과자, 양주, 담배 등 서양 잡화를 들여왔다고 알리는 광고가 실려있다. 이런 과자류에 초콜릿은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모리나가(森永), 메이지(明治)제과 같은 일본 회사들이 초콜릿을 본격적으로 만들면서 두 회사에서 만든 초콜릿이 물밀듯 들어왔다.
◇커피와 함께 초콜릿 판 메이지제과 판매점
1916년 설립된 메이지 제과는 대표상품인 ‘명치 메리밀크’를 내놓으면서 인기를 얻었다. 이어 밀크초콜릿, 아이스크림, 우유 등을 생산하면서 일본의 대표적 제과회사로 떠올랐다. 경성에는 1930년 10월1일 본정 2정목(本町 2丁目·충무로2가)에 자사 제품을 판매하는 판매점을 열었는데, 초콜릿과 함께 커피를 내놓아 애호가들의 단골 맛집이 됐다.
◇강장제처럼 광고한 초콜릿
모리나가 제과는 1930년대 신문에 스키를 타는 남자 그림과 함께 초콜릿 광고를 내보냈다. ‘그는 지치지 않는다! 결코 지치지 않는다. 쵸코레-트를 熱愛하는 까닭이다!!’
초콜릿을 강장제처럼 선전하는 홍보문구다. 심지어 초콜릿에 계란, 우유의 3배인 2160칼로리가 들어있어 추위를 이기는 데도 끄떡없다고 광고했다. 초콜릿 1개에 성인 하루 권장 칼로리에 맞먹을 만한 열량을 갖고 있다고 선전한 셈이다. 심지어 영양이 풍부해 성장기 아이의 필수품이라고 선전하기도 했다.
◇여학생 대상 초콜릿 감상문 공모도
‘동경 삼영(森永)회사는 작추에 동경6대학 마크와 심볼을 넣어 만든 ‘칼리지 초코레잇’을 비롯하야 ‘밀크 하모니가’ ‘스포-스맨’ ‘올나이스’ 등의 첨단적 신품을 만들어 전국 남녀노소의 초코렛일당으로 요금 무상의 찬양을 받아오던 바 근일은 이상과 각종 초코레트에 대한 조선 여학생 제씨의 풍부한 감상담을 듣고자 좌와 같은 현상모집을 한다는데….’(조선일보 1931년2월28일)
모리나가 회사는 1931년 2월 신문에 현상공모까지 했다. 특히 여학생을 콕 집어 초콜릿에 대한 감상을 에세이나 시(詩)로 제출하면,1등 100원(1명), 2등 50원(2명),3등 20원(5명), 4등 초콜릿 1상자(5원 어치, 20명)를 준다고 했다.
◇현대 여성의 악취미로 꼽기도
‘초코레-트 선물 한 상자에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습니다. 초코레트는 한 개 두 개 자꾸 받고 싶은 것입니다. 여기에 초코레트의 위험성이 있습니다. 쓸데 없는 말 같지만 이 점이 초코레트는 모-단적 과자! 첨단을 걷는 과자니까요. 받는 사람은 십분 주의하시오.’(‘신여성’1931년6월)
초콜릿에 대한 경계 경보도 발동됐다. 이화고보 교사 김창제는 현대 여성들의 악취미를 꼽아달라는 잡지 ‘삼천리’설문 조사에서 초콜릿을 활동사진(영화), ‘머리 지지기, 입술 칠하기’(화장)와 함께 꼽았다. 달콤한 초콜릿은 너무 가까이했다간 신세 망치는 금단의 열매였다.
◇참고자료
ABC생, 가을달과 연인과 초코레트, 개벽 1932년 10월
김창제, 현대 여성의 악취미, 삼천리 제10권8호, 1938년 8월
최자혜, 경성백화점 상품박물지, 혜화 1117, 2023
10.21 3.1운동 직후 美 의원 방문단이 본 경성은?
1920년 8월 42명 경성 방문, 삼엄한 경비아래 YMCA에서 환영회

▲1920년 8월25일 오후 종로 YMCA에서 열린 환영회에 단독으로 참석한 허스맨. 캘리포니아에서 당선된 하원의원으로 이상재, 윤치호와 함께 연단에 올라 청중들의 환호를 받았다. /위키피디아
1920년 8월25일 오후 종로 YMCA회관에 인파가 몰렸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경성을 방문한 미국 의원방문단 환영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이상재, 신흥우 등 YMCA 총무가 주도했다. 경성에 거주하는 외국인들도 일부 초대됐다.참석자는 500명을 넘어섰다.
조선총독부는 YMCA환영회를 허가했다가 당일 오전 취소했다.종로에서 시위가 일어날지 모르는 데다 총독부 고위관료들을 해치려는 암살단을 체포해야한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미국 방문단에게도 환영회에 참석하지 말도록 요청했다. 하지만 대부분 참석자들은 이런 사실을 몰랐다. 환영회가 열릴 예정인 오후3시30분이 넘어도 방문단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장내는 술렁였다.
30분쯤 뒤인 오후 4시 미국 의원단 일행인 허스맨(Hersman·1872~1954)부부가 YMCA회관에 찾아왔다. 회관밖에서 대기하던 외국인들도 따라 들어왔다. 허스맨은 이상재와 윤치호 등과 함께 연단에 올랐다. 은행가 출신 허스맨은 캘리포니아에서 당선된 민주당 출신 하원의원이었다. 그는 비공식방문이라는 사실을 밝히곤, 일본 당국의 초청을 받고 왔기 때문에 일본을 곤란케하는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조선인 청중을 만나고 싶어서 왔다는 사실을 밝히고, 귀국 후 캘리포니아 주민들에게 조선 실정을 전하겠다고 연설했다. 청중들은 박수를 보냈다.

▲1920년 8월25일 오후 YMCA에서 열린 미의원방문단 환영행사는 일제 경찰 제지로 아수라장이 됐다. 경찰은 허스맨 하원의원을 밖으로 내보내고 조선인 청중을 억류했다가 풀어주면서 무차별적으로 폭행했다. 당시 상황을 보도한 조선일보 1920년 8월26일자
◇경찰이 청중을 발길질하며…
그런데 사달이 났다. 이상재가 감사연설을 하고 허스맨, 윤치호와 단상에서 내려오려고 할 때 경찰이 나타나 회관밖으로 나가달라고 요구했다. 경찰은 조선인 청중들을 회관에 억류했다. 허스맨은 회관에 청중들이 남아있는 한, 한발짝도 움직일 수없다고 버텼다. 회관에서 쫓겨난 외국인들이 조선호텔에 있던 의원단 일행에게 연락하면서 주 경성 미국 총영사 밀러와 의원단 일행이 달려왔다. 억류된 청중들은 풀려났지만 해산 과정에서 경찰이 발길질하고 구타하면서 소동이 벌어졌다. ‘(청중들이)하나 둘씩 나갈 즈음에 1층에 내려가는 사람들을 막 발길로 차며 구타를 하여 상한 사람이 무수하였으며 그 중 동아일보 기자 2인이 중상을 당하였고 그중에 대동무역주식회사원은 졸도가 되어 위험하였음으로 구례구씨가 병원으로 인도하려 할 즈음에 종로경찰서에서 데려갔다더라.’(‘미국의원단 방문중 수라장의 청년회관’,조선일보 1920년 8월26일)
◇상원의원 3명, 하원의원 39명 포함한 123명
미 의원 동아시아 방문단은 상원의원 3명, 하원의원 39명, 그 가족 74명을 포함 총 123명으로 이뤄진 대규모 일행이었다. 필리핀, 중국, 조선, 일본이 목적지였다. 관광목적이었다. 하지만 대규모 의원단 일행이 3.1운동과 5.4운동이 일어난 이 지역을 여행한다는 것은 정치적 의미가 담길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조선 통치를 직접 목격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미의원 방문단은 1920년 7월 미국을 출발, 필리핀을 거쳐 8월5일 상해에 도착했다. 미국 식민지였던 필리핀에 상당수가 남았기 때문에, 상해에 도착할 때는 73명이었다. 항주, 남경, 제남, 북경, 천진, 산해관을 거쳐 23일 밤 9시 만주 봉천(선양)을 출발해 경성을 향했다. 방문단은 8월24일 저녁 8시30분 남대문정거장(서울역 전신)에 내렸다. 다음날 창덕궁과 비원, 조선총독부를 둘러보고 숙소인 조선호텔에서 조선 거주 외국인들로 구성된 국제친화회가 주최한 오찬 환영회에 참석했다. 방문단은 그날 저녁 8시 10분 기차로 남대문역에서 부산으로 향했다. 다음날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 행 부관연락선에 올라 일본 방문을 이어갔다. 미 의원단 경성 방문은 만 하루가 채 안됐다. 경성을 찾은 미 의원방문단은 28명(상하원의원 9명, 가족 19명), 또는 총 42명이라는 보도로 나뉜다.
◇상해 임정, 미 의원방문단을 독립운동 계기로 활용
미 방문단 보도는 7월 들어 조선에 알려졌다. ‘미 의원 동양시찰’이란 제목으로 1920년 7월9일자 조선,동아일보에 기사가 실렸다. 미 의원 방문단 도착 전후 경성 시내는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은 기운이 감돌았다. 상해 임시정부는 미 의원단 방한을 일제 식민지배의 허구를 폭로하고 독립운동을 펼치는 기회로 활용하려 했다. 1926년 6월 안창호를 ‘대미의원시찰단 준비위원회’ 회장으로 선임했다. 임시정부는 조선 독립에 영문 청원서를 만들어,미 의원단의 중국 방문 일정을 따라다니며 전달했다. 임시정부는 방문단이 조선에 들르는 때에 맞춰 군중 시위를 조직했던 것같다. 안창호도 임시정부에 시위운동이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미국 상하 양원의원으로 조직하야 조선으로 건너오는 시찰단 일행이 옴을 기회삼아 조선독립을 운동하는 조선인 일단은 상해가(假)정부와 연락하야 그 일행에게 조선 독립의 청원을 하는 동시에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여러가지로 시위운동을 행할 계획으로 상해에서는 대표자를 파견하여 일행을 환영케 하고 한편으로는 문제의 여운형과 가정부내무총감 안창호 등은 미국의원단 일행에게 하소연을 하고 일본정부에서 조선을 통치하는 것은 모두 조선 민족을 압박하고 해하는 일이요….’ (’미국 의원단의 조선 도착과 소제대서(小題大書)하는 당국의 다심(多心)’, 조선일보 1920년 8월17일)
신문은 상해에서 보낸 청원서를 제출해 조선 독립의 원조를 구할 것,환영회를 개최해 극진히 대접할 것,방문단 도착시 남대문 역에 나가 일제히 만세를 높이 부르고 통곡할 것,과격한 일파의 모험단은 폭탄과 그외 흉기를 가지고 시위적 행동을 하여 일본을 배척하는 태도와 형세의 험악함을 알릴 것 등 상해 임시정부의 전술을 소개했다.
◇폭탄, 육혈포, 독립선언서 압수
한해전 전국을 휩쓴 3.1만세운동의 기억이 생생할 때였다. 마침 3.1운동 지도자 공판이 열리기 시작했다. 제1회 공판이 7월12일이었는데, 신문들은 한달 내내 3.1운동 공판 기사를 지면에 가득 실었다. 미 의원단 방한을 맞아 제2의 독립운동을 계획중이라는 보도까지 나왔고, 폭탄과 권총, 독립선언서가 압수당했다.
‘조선 독립을 운동하는 일파는 명일 경성에 도착할 미국 의원단 일행의 오는 기회를 타 여러가지로 시위운동을 개시하는 동시에 조선 독립을 원조하여 달라는 진정서를 제출코자 세대에 나눠 제1대는 신의주에, 제2대는 평양에 배치하였던 바, 그 2 대는 기왕에 발각돼 검거되고 제3대, 즉 경성대되는 김OO외 9명은 비밀히 폭발탄과 육혈포와 탄환과 기타 조선독립운동선언서 등을 준비하고 그 실행할 계획을 타협하야 명일 미국 의원단 일행이 예정대로 남대문 역에 도착하면 그의 목적한 바를 행하기로 확정한 후….’(’美 의원단 경성 도착을 기하야 독립운동을 재차 개시,조선일보 1920년8월23일)
거사팀은 미 의원단 도착 사흘전인 8월 21일 시내 중국요리점 아서원에서 저녁 식사를 하다 경찰에 전원 체포됐다. 총독부는 바짝 긴장했다. 경비는 삼엄해졌다.
미 의원단은 고베, 교토, 나라를 거쳐 9월2일 밤 도쿄에 도착, 제국(帝國)호텔에 묵었다. 오쿠마 시게노부(大隈 重信) 전 총리와 회견하고, 닛코 관광을 마친 후 9월10일 요코하마항에서 귀국선을 타면서 동아시아 방문을 마쳤다. 미 의원방문단의 일본 체류 때도 일행에게 접근을 시도한 조선인 학생이 있었다. 동경역에선 20여명의 조선인 학생이 체포됐다. 임시정부와 경성 시민들이 미국 의원들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는 미지수다. 당장은 별 효과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국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는 점만은 평가할 할만하다. 광복은 이로부터 25년후에 찾아왔다.
◇참고자료
김권정, 월남 이상재 평전, 이조, 2021
나가타 아키후미 지음, 박환무 옮김, ‘미국의원단의 동아시아방문’, 일본의 조선통치와 국제관계,일조각, 2008
박영석, ‘미국의원단 내한’, 한미수교100년사, 국제역사학회의 한국위원회, 1982
10.28 ‘문명의 전령사’, ‘씽가’미싱
[1905년 경성본점 설치, 방문·할부 판매로 시장 지배

▲싱어사가 19세기 후반 세계를 대상으로 제작, 배포한 세일즈 카드 세트의 'Korea'편. 재봉틀을 사용하는 한복 차림 여성과 옆에서 보조하는 남성의 모습을 실었다. /위키미디어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정동제일교회에서 예원학교 쪽으로 올라가다보면 고풍스러운 4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이 나온다. 1926년 무렵 미국 싱어 미싱회사(Singer Sewing Machine Company) 가 신축한 경성 본점이다. 2008년 국가등록문화재가 된 내력있는 건물이다. 원래 지하1층, 지상2층 건물인데, 1969년 신아일보에 매각된 이후 4층으로 증축했다.
1938년 2월17일 오후 조용하던 정동길이 분주해졌다. 이 건물에서 일하던 싱거회사 경성본점 직원들이 ‘차별대우’를 시정하라며 시위를 벌였기 때문이다. ‘부(경성府)내 정동정(町)1번지 미국 ‘씽-거’회사 경성중앙점 사원 59명은 그 회사 서기장 미국인 크로포-드씨가 동양인을 몹시 차별대우함에 분개하야 17일 오후4시부터 사원대회를 열고 일(一), 서기장 크로포-드와 존스 양씨는 (인종적 차별을 하는)정신을 개선하라 일(一),정신을 고칠 수없거든 미국으로 돌아가라 일(一),독일인비서 치크라 양에 대하야 주의시키라 일(一),식당과 변소에 위생적 설비를 하라….’(‘기계는 수입두절 사원들은 결속동요’, 조선일보 1938년2월19일)
독일인 여비서 치크라가 조선인 직원과 세면기를 같이 쓴 관계로 얼굴에 종기가 생겼다고 크로포드사장에게 일러바치면서 시작됐다. 크로포-드는 일반 사원에게 서양인 전용의 세면대를 절대로 쓰지말라, 만약 쓰면 퇴직시킨다고 윽박질렀다. 조선인 직원들은 이런 차별 대우에 항의한 것이다.

▲여성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세련된 드레스를 입은 모던 걸을 모델로 등장시켰다. 일만 죽도록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당당한 생산주역이라는 이미지를 창출했다. /wikimedia commons
◇분점 260여개에 사원 3000여명
조선인 직원들이 집단행동에 나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일자리가 없어질지 모른다는 불안때문이었다. 6개월전인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 정부는 위체관리법과 수출입품임시조치법을 시행했다. 이때문에 미국에서 생산된 재봉틀을 새로 수입할 수 없고,이미 수입된 제품만 처분하게 돼 회사가 철수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앞의 신문 기사는 ‘이 상회는 조선과 만주 일대를 관할하는 총본부로 관하에 분점이 260여개가 있고, 사원이 3000여명에 달하는 큰 회사’로 소개했다.
미국 아이작 메릿 싱어(1811~1875)가 1851년 자신이 발명한 재봉틀로 특허를 얻어 설립한 회사가 싱어다. 싱어는 1920년대 이전 미국과 유럽뿐 아니라 러시아, 동유럽, 동남아, 서남아, 남아프리카 등까지 진출해 한때 재봉틀 시장의 90%(1912년)를 차지할 만큼 급성장했다. 재봉틀하면 싱어를 떠올릴 만큼, 재봉틀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싱어는 재봉틀을 ‘문명의 전령사’로 포장했다. 재봉틀은 가정용 기계로는 처음으로 대량판매된 상품이었다.
싱어 미싱은 조선에서도 엄청난 위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1936년 조선의 수입품 중 기계류는 492만3000원인데, 싱어 미싱이 대부분을 차지했다.(‘조선무역사정 중요품별가액’, 조선일보 1937년1월8일)

▲싱어사 경성본점 직원들이 회사측의 차별대우에 항의하며 집회를 열었다는 조선일보 1938년2월19일자 기사. 독일인 여비서가 조선인과 같은 세면대를 사용했다가 종기가 생겼다며 분리사용을 요구해 회사측이 받아들이자 조선인 직원들이 항의했다.
◇미싱은 ‘소잉 머신’의 일본식 표기
재봉틀은 미싱이란 말로 더 친숙하다. 일본인들이 ‘소잉 머신’(Sewing Machine)에서 소잉을 빼고 ‘머신’을 ‘미싱’이라고 부르면서 우리도 그대로 따라썼다. 미싱은 1960~1970년대 혼수품 1호로 통할 만큼 집집마다 갖추고 있던 상품이다. ‘꽃님이 시집갈 때…부라더 미싱’ ‘현대 가정의 미싱 부라더’같은 선전문구를 단 신문광고가 자주 실렸다. 미싱은 1877년 김규식 부친인 김용원이 일본에 갔다가 구입해 가져온 것이 최초로 알려져있다. 1896년 이화학당 교과목에 ‘재봉과 자수’가 포함된 것으로 보아 이때쯤이면 재봉틀이 꽤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외교원’ ‘여교사’가 집집마다 다니며 미싱 선전
싱어는 1905년 경성에 지점을 설치하면서 재봉틀 시장을 장악했다. 당시 뉴미디어인 신문에 광고를 실어 상품을 선전했고 방문판매와 할부판매를 통해 시장을 공략했다.예전 화장품이나 요즘 정수기 판매와 비슷한 당시로선 선진적인 마케팅, 판매 방식을 도입한 셈이다. 싱어사는 조선에서 방문판매원을 ‘외교원’, 제품을 안내하는 여직원을 ‘여교사’로 불렀다. 대개 두 사람이 팀을 이뤄 방문했다.
싱어는 또 전국에서 ‘재봉,양재 강습회’를 열어 싱어 미싱을 알리고, 이미지를 높이는 전략을 썼다. 1920~1930년대 신문에는 전국에서 열리는 ‘재봉 강습회’소개 기사가 자주 실렸다. 싱어가 강사를 파견하고 후원하는 형식이었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정동제일교회에서 예원학교 방향으로 가다보면 1926년 경 싱어사 경성본점으로 쓰인 붉은 색 벽돌건물과 만난다. 원래 지하1층, 지상2층 건물이었으나 1969년 신아일보에 인수되면서 4층으로 증축했다. 등록문화재(제402호)다. /김기철 기자
◇월부판매로 공략
월부판매는 싱어만의 판매 전략으로 1907년 조선에서도 도입했다. 미싱은 가격이 비쌌다. 1937년 기사를 보면 싱어 미싱 ‘손틀’은 200원, ‘발틀’은 270원이었다. (’미싱價도 껑충, 15원씩 폭등’,조선일보 1937년6월25일) 여기서 가격을 15원씩 올린다는 예고 기사였다. 보통학교 교사 초임이 35원, 당시 신종 직업인 백화점 여직원이 월 15원에서 40원 정도 받던 시절이었다. (김수진, ‘신여성, 근대의 과잉’ 90쪽)
몇 달치 월급을 바쳐야 살 수 있는 고가 상품을 사게 만드는 방법이 매달 소액을 나눠내는 할부판매였다. 그런데 부작용도 심했던 모양이다. 싱어는 월부금을 제때 안내는 구매자들을 상대로 이미 판매한 재봉틀을 압류하는 소송을 남발했다. 경성지방법원이 1925년 상반기 외국인이 관련된 민사소송사건을 살펴봤더니, 서양인이 청구한 36건 소송중 35건이 싱어사(社)가 조선인 구매자를 상대로 제기한 미싱 차압청구소송이었다.(‘外人대 조선인 소송내용’, 조선일보 1925년7월16일) 기사는 ‘그 회사에서는 재봉기계를 소위 월부로 팔았다가 그 값을 거의 다 내고도 마지막에 이르러 지불기일만 떨어지면 그와 같이 조금도 용서없이 차압청구를 하야 기계를 빼앗아 가는 것이라더라’며 싱어사의 엄격한 소송제기를 비판적으로 봤다.

▲일본 제국미싱의 대표작 '자노메'. 싱어 등 서양 상품의 절반 가격을 내세웠으나 품질은 떨어졌다. '국산'이라고 선전했다. 조선일보 1936년3월17일자
◇싱어 미싱 시장 지배, 중일전쟁 후 일본산 점증
싱어 미싱의 인기는 압도적이었다. 조민영 논문에 따르면, 1919년~1940년 조선에서 판매된 싱어 미싱은 21만8221대이다. 1919년 1만8938대로 시작,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엔 2만5246대로 정점에 올랐다.
1935년부터 일본산 미싱의 수입이 조금씩 늘었다. 특히 파인 미싱을 만들던 파인재봉 기계제작소가 1935년 회사 이름을 제국 미싱으로 바꾸고 내놓은 ‘자노메’(蛇の目)미싱이 인기를 누렸다. 당시 신문 광고에도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품질을 따라잡긴 어려웠던 것같다.
1936년 평북 정주(定州)에 사는 한 독자가 공개 질의를 했다. ‘박래품(舶來品)과 국산 미싱중 어느 것이 조선 내에서 다량판매되며, 국산 미싱회사중 어느 것이 제일 신용 있으며 품질이 우량합니까.’ 여기서 국산 미싱은 일본산을 가리킨다. 답변은 이랬다. ‘최근에 조선에 진출하고 있는 재봉기계는 파인미싱, 사지목(蛇之目)미싱 등 2,3종이 있으나 가격에 비하야 품질이 박래품과 동등한 것이라고 인정하기 곤란한 모양입니다.’(’질의’, 조선일보 1936년 8월23일)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해 외국산 제품 수입을 규제하면서 싱어 미싱은 철수하고 일본산 제품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됐다. 싱어는 해방 후 다시 한국 시장에 복귀했다.

▲1960~70년대 재봉틀은 주요 혼수품이었다. '꽃님이 시집갈때...부라더 미싱'을 선전한 조선일보 1970년4월19일자 광고
◇참고자료
고선정, 근대 재봉틀과 여성의 상품문화연구, 상품문화디자인학연구 제72집, 2023, 3
조민영, 근대 재봉틀의 보급과 생활경제의 변화, 연세대 석사학위논문,2021
최자혜, 경성백화점 상품박물지, 혜화 1117, 2023
설혜심, 소비의 역사,휴머니스트, 2021
김수진, 신여성, 근대의 과잉, 소명출판, 2009
11.04 배구자의 ‘빈사의 백조’, 근대 발레의 효시
러시아 스타 안나 파블로바 대표작, 1928년 배구자 고별무도회에서 피날레로

▲조선일보 1936년5월 8일자에 실린 배구자 사진. 5월5일부터 동양극장에서 열린 배구자악극단 공연을 소개하는 기사다. 배구자는 1935년 남편 홍순언과 동양극장을 개관, 당대 연극의 주요 무대로 키웠다.
‘20년전에 놓쳐버린 한 마리의 소조(小鳥)가 비에 젖은 날개를 첫드리고 옛날의 보금자리로 기어들었다. 그러나 주인은 반가히 맞아줄 줄 몰랐다. 자유롭게 날아볼 공간을 주지 않았다.빈사(瀕死)의 백조는 조그만 동무새들을 모아가지고 그 쭉지 떨어진 날개를 펴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리하야 몇해동안 파득파득 떨다가 그 가느다란 다리를 버티고 일어설만한 무대를 얻은 것이다. 그가 갱생한 배구자요, 그를 중심으로 모인 곳이 순수한 무용단체로는 다만 하나뿐인 그의 연구소다.’(‘새로운 무용의 길로 1-배구자 1회 공연을 보고’, 조선일보 1929년9월22일)
영화 담당기자 심훈(1901~1936)은 종종 무용 기사도 썼다(훗날 소설 ‘상록수’를 쓴 그 사람, 맞다). 1929년9월18일부터 경성 영락정(永樂町·중구 저동)의 극장 중앙관(中央館)에서 올린 배구자무용연구소 제1회 공연을 보고 사흘에 걸쳐 리뷰를 썼다. ‘무용을 잘 알지 못하는 관객의 한 사람’이라고 슬쩍 눙치지만, 영화 ‘장한몽’에서 이수일을 맡았고,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영화 ‘먼동이 틀 때’(1927년)로 주목을 받은 심훈은 남다른 심미안을 지녔다.

▲러시아 황실무용수 출신 안나 파블로바의 대표작 '빈사의 백조'. 1908년~1909년 베를린에서 촬영했다./Public Domain
◇”순수한 조선의 무용을 만들어달라”
심훈은 배구자를 ‘빈사의 백조’로 빗댄 후, 이렇게 썼다. ‘내가 본 배양(孃)은 ‘째-즈 댄스’나 ‘찰스톤’이나 고전적인 ‘빠레-’를 추는 것보다 서정시적이요, 민요적이요, 소야악(小夜樂)적인 예풍을 가지고 있어서 그 방향으로 진출할 수 있는 소질이 있는 ‘딴서’다. 그럼으로 자아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순수한 조선의 무용을 창작해서 민중에게 보여줄 의무를 져야할 것이다.’
배구자는 이 공연에서 ‘아리랑’ ‘수(水)의 정(精)’을 솔로로 췄는데, 심훈은 한해 전 경성공회당에서 올린 배구자의 ‘아리랑’을 봤던 것같다. ‘향토의 색조가 농후한 작품’이라면서 ‘앞으로 연찬을 거듭할 여지를 보여서 그대로 버려두기에는 아까운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창작무용 ‘아리랑’발표
배구자는 1928년 4월21일 경성공회당에서 ‘고별무도회’를 가졌다.당시 경성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공연장이었다. 미국 유학을 앞두고 준비한 리사이틀이었다.(배구자의 미국행은 이뤄지지 않았다. 대신 신당리에 무용연구소를 열고 제자를 양성하면서 서양춤의 한국적 수용을 모색한다.) 오후 7시30분부터 열린 이 공연은 협연자의 피아노, 바이올린 독주외에 배구자가 부르는 노래 2곡과 무용 7편으로 채워졌다. 배구자는 조선, 일본, 서양춤이 골고루 포함된 소품 7편에 출연했다.
요즘 연구자들이 관심을 갖는 작품은 단연 ‘아리랑’이다. 배구자가 ‘자작자연’(自作自演)한 것으로 소개된 이 작품은 물론 민요 ‘아리랑’에 맞춰 만든 무용이다. 나운규 영화 ‘아리랑’이 1926년 공전의 인기를 누린 2년 뒤 만든 작품이니, 당연히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아리랑’은 처음부터 반응이 좋았다. ‘민요곡 ‘아리랑’을 자작한 것은 그 동기로부터 우리는 감사하고 싶다.순진한 시골처녀로 분장하여 아리랑의 기분을 무용으로 나타내었는데 그 얼마는 확실히 성공하였다’(’배구자양의 음악무용을 보고’,중외일보 1928년4월23일)

▲1928년4월19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배구자 '고별무도회' 리뷰. 중외일보 1928년4월23일자에 실렸다. 사진은 '아리랑'을 공연하는 배구자.
◇조선인이 올린 첫 발레 ‘빈사의 백조’
‘고별무도회’ 피날레는 발레 ‘사(死)의 백조’였다. 1905년 미하일 포킨이 안무한 ‘빈사의 백조’를 가리킨다. 러시아황실발레단 주역으로 세계적 명성을 떨친 안나 파블로바(1881~1931)의 대표작이다. 생상스가 작곡한 관현악모음곡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를 바탕으로 죽어가는 백조의 모습을 표현한 독무다. 강수진 국립발레단장을 비롯한 유명 발레리나들이 사랑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김호연 교수에 따르면, 안나 파블로바는 1922년 9월 7주간에 걸쳐 일본 투어공연에서 ‘빈사의 백조’를 올렸는데, 관객들의 호응이 뜨거웠다. 무용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줬던 모양이다. 당시 일본에서 활동한 배구자도 그 영향을 받았던지, 이 작품을 피날레로 골랐다. 조선인이 이 땅에서 올린 첫번째 발레공연로 손꼽힌다.
배구자가 이 작품을 제대로 소화할 만큼 발레를 익혔는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순백색 튀튀를 입고 토슈즈를 신은 채 무대위에서 죽어가는 백조를 연기했다면 손짓만으로도 관객들에게 정서적 호응을 이끌어낼 수있었을 것같다. ' ‘死의 백조’는 양(孃)도 자신있는 바인 듯하다. 양은 이것으로서 무용으로의 가장 가치많은 것을 보여 주었다’(‘배구자양의 음악무용을 보고’, 중외일보 1928년4월23일)는 리뷰를 봐도 그렇다.
◇이토 히로부미 양녀 배정자의 조카
배구자의 출신엔 미스터리가 많다. 이토 히로부미 양녀이자 정보원인 배정자(1870~1952)의 조카로 알려져 있다. 1930년대 이토와 배정자 사이에서 난 사생아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연극학자 유민영 단국대 명예교수는 배구자가 서울토박이 배석태의 딸이고 이토의 사생아란 얘기는 역사적 맥락에 맞지 않는다고 잘랐다. 배구자의 출생연도도 1905년부터 1908년까지 다양하게 나오는데, 1905년생으로 봤다.
배구자는 1915년 경성에 온 일본의 유명 극단 덴카츠(天勝)의 공연을 보고 아버지와 고모를 졸라 입단했다. 3년 뒤인 1918년 경성 공연때 데뷔했다. 10년 넘게 덴카츠의 간판 스타이자 후계자로까지 인정받았으나, 1926년 평양 공연 중 도망나와 탈퇴했다. 신문들은 인기 스타의 야반도주를 대서 특필했다. (’天勝一座의 명성 배구자, 작효 평양서 탈주 입경(入京)’, 조선일보 1926년 6월5일)
그리고 2년 여 잠적했다가 1928년 미국에 건너간다며 ‘고별무도회’를 가진 것이다.

▲1928년4월21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배구자의 고별무도회를 소개한 조선일보 1928년4월18일자 기사.
◇민요, 전통춤을 중심으로 일본에서도 공연
배구자는 악극단을 조직, 제자들과 함께 일본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1932년 일본 최대 연예기획회사인 요시모토 흥행회사와 전속계약을 맺고, 교토, 오사카에서 무용과 음악, 연극이 결합된 공연을 올렸다. 1934년 8월18일 오사카에서 가진 자선음악무용대회에선 무용작품으로 ‘답푸’ ‘청춘’ ‘봄이 왔다 봄이 왔다’ ‘샤인’ ‘나는 명랑하다’ ‘어머니와 사랑’ ‘나는 청춘’ ‘월광을 욕(浴)하여’ ‘오리엔탈’과 민요 ‘방아타령’ ‘아리랑’ ‘길경꽃’ ‘백의의 애수’, 독창, 촌극 ‘금색야차’, 동화극 ‘인형의 제(祭)’ 등을 올렸다.(‘구호의 불길은 異域에서도’,조선일보 1934년8월13일) 다양한 레퍼토리를 올렸지만, 일본에선 한국의 민요와 춤이 도드라졌을 것이다.
배구자는 1935년 남편 홍순언과 동양극장을 개관, 우리 연극사에도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1937년 남편이 죽고, 재혼한 뒤 동양극장을 매각하면서 일본을 오가며 활동하다 광복 후 일본에 정착하면서 활동을 마감했다. 이 때문에 최승희에 비해 덜 알려지고, 당대에도 ‘레뷰댄서’정도로 가볍게 취급됐다. 하지만 최근 배구자의 춤세계를 다룬 박사학위 논문도 나오고, 배구자를 재조명한 논문들이 잇달아 발표되고 있다. 배구자는 말년에 하와이에 건너가 2003년 사망했다.
◇참고자료
김호연, 서양 근대춤의 수용과 변용 양상;배구자를 중심으로, 한국학연구 71, 2019.12
서고은, 김경희, 촉접연구를 통한 배구자춤 다시쓰기: ‘사의 백조’를 중심으로, 무용역사기록학 66, 2022
유민영, 신무용개척자 배구자는 누구인가, ‘한국 근대춤인물사’, 현대미학사, 1999
11.11 1933, 한국 가곡 ‘별의 순간’
홍난파 ‘사랑’ 김동진 ‘가고파’ 현제명 ‘그집앞’ 등 불후의 명곡 탄생

▲한국가곡집 '고향의 봄'을 낸 베이스 연광철. 홍난파의 '사랑' '옛동산에 올라', 현제명의 '그집앞', 채동선의 '그리워' 등 1933년 발표된 불후의 명곡 4곡이 포함돼 있다. 음반에는 일제부터 1970년대까지 나온 대표가곡 16편과 작곡가 김택수가 만든 신작 2편이 담겼다. /이신영 영상미디어기자
베이스 연광철이 낸 한국 가곡 음반 ‘고향의 봄’을 매일같이 듣고 있다. 매년 여름 바그너 마니아들이 몰려드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단골 출연자이자 현지 청중들이 정확한 독일어 발음을 칭찬할 만큼 신뢰받는 성악가가 연광철이다.묵직한 목소리에 담긴 홍난파의 ‘옛동산에 올라’, 장일남 ‘비목’, 김동진 ‘산유화’는 우리 가곡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게 할 만큼, 품격과 정감을 갖췄다. 우리 말 가사의 맛을 이렇게 아름답게 살릴 수 있구나 감탄한다. 집안에서, 또 출퇴근하면서, 주말 자전거 코스에서 듣고 또 듣게 된다.
연광철 음반엔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 한국인의 사랑을 받은 가곡 16편과 신예 김택수의 신곡 2편 등 18곡을 실었다. 해설지를 들여다보니, 홍난파의 ‘옛동산에 올라’, ‘사랑’(연광철이 부르는 ‘사랑’을 들으시려면 클릭하세요), 현제명 ‘그 집앞’, 채동선 ‘그리워’ 등 1933년 발표된 곡이 4편이나 된다. 불후의 명곡이 탄생한 기념비적 순간이다. 노산 이은상이 쓰고 평양 숭실전문학교생 김동진이 작곡한 ‘가고파’도 1933년 태어났다. 한국인의 애창곡이 같은 해에 출현한 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동시대에 활약하면서 르네상스의 꽃을 피운 것처럼, 막 씨앗이 뿌려진 근대 음악분야에서 불후의 명곡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시대였다.

▲홍난파는 1933년10월10일 저녁 7시30분 이화여전 강당에서 현제명과 함께 작곡발표회를 가졌다. 노산 이은상시조 15편에 곡을 붙인 '조선가요작곡집'(1933)에 수록된 '사랑' '옛동산에 올라' 봄처녀' '장안사' '금강에 살으리랏다' 등 한국가곡사에 길이 남을 명곡을 이날 선보였다. /ⓒ세광음악출판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33년 10월10일 이화여전 음악회, 가곡의 기념비
1933년 10월10일은 한국 가곡사에서 가장 빛났던 밤으로 기억할 만하다. 이날 오후 7시30분 이화여전 강당에서 홍난파(1898~1941), 현제명(1902~1960) 작곡발표회가 열렸다. (’현제명홍난파 양씨 작품발표회’, 조선일보 1933년10월10일)
테너 이유선, 소프라노 채선엽, 홍난파 조카인 바이올리니스트 홍성유와 그 아내인 피아니스트 김원복, 그리고 테너 현제명과 홍난파가 재직한 경성보육학교 합창단이 무대에 섰다. 홍난파의 ‘사랑’ ‘봄처녀’는 채선엽이 불렀고, 현제명의 ‘그 집앞’은 이유선이 불렀다. 현제명은 홍난파의 ‘옛동산에 올라’ ‘관덕정’ ‘입다문 꽃봉오리’와 자작곡 ‘새가 되어 배가 되어’ ‘소경되여지이다’ ‘진달래’를 불렀다.
홍난파와 현제명은 1933년 각각 ‘조선가요작곡집’(한성도서)과 ‘현제명작곡집’ 제2집을 발표했다. ‘조선가요작곡집’은 노산 이은상 시조 15편에 곡을 붙인 작품집이었다. ‘옛동산에 올라’, ‘사랑’은 물론 ‘봄처녀’ ‘성불사의 밤’ ‘장안사’ ‘금강에 살으리랏다’ 등 주옥 같은 명곡이 실렸다. 현제명 작곡집엔 그의 대표작인 ‘희망의 나라로’ ‘그집앞’ 등 독창, 합창곡 12편이 실렸다. 노산 시조를 가사로 쓴 게 9편이다.
이화여전 음악회는 홍난파, 현제명 작곡집에 실린 작품을 거의 모두 소개했다. 두 작곡집에 실린 작품들은 우리 가곡사의 전설이 됐다.

▲현제명은 1933년 '현제명작곡집'2집을 발표했다. '그집앞' '희망의 나라로'같은 대표작이 실렸다. 현제명은 1933년 10월10일 이화여전 강당에서 열린 발표회에서 자작곡을 발표하고, 직접 노래를 불렀다.
◇가곡 붐의 모태 ‘노산시조집’
우리 가곡의 아름다움을 살린 일등 공신은 노산 이은상(1903~1982)이었다. 노산은 난파보다 연배가 앞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난파보다 다섯 살 아래였다. 문학청년이었던 난파는 노산이 쓴 시조만으로 작품집을 냈다. 노산이 쓴 시조는 홍난파뿐 아니라 대부분 작곡가들의 텍스트가 됐다. 현제명의 ‘그집앞’, 김동진의 ‘가고파’, 채동선의 ‘그리워’같은 명곡들이 모두 노산 시조를 바탕으로 했다. 스무살 때 숭실전문학생 김동진은 연희전문 교수 현제명이 작곡한 ‘가고파’를 누르고 불후의 명곡 ‘가고파’ 작곡가가 됐다. 채동선의 ‘그리워’는 원래 정지용 시 ‘고향’을 가사로 썼다가 노산 시조로 가사를 바꿔붙였다.
홍난파와 현제명 작곡집은 대부분 1932년 간행된 ‘노산시조집’을 텍스트로 삼았다. 노산이 스물 아홉살에 낸 첫 시조집이었다. 문학과 음악이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면서 ‘별의 순간’을 합작했다.

▲노산 이은상은 1930년대 한국 가곡의 수원지 역할을 했다. 홍난파, 현제명, 김동진 등이 노산 시조에 붙인 '사랑' '그집앞' '가고파'는 불후의 명곡으로 오늘날까지 사랑받고 있다.

▲1933년10월10일 이화여전 강당에서 열린 현제명 홍난파 작품 발표회를 소개한 조선일보 1933년 10월10일자 기사. '향수' '옛동산에 올라' '그집앞' '희망의 나라로' 등 오늘날까지 불리는 불후의 가곡이 탄생한 기념비적 공연이었다.
◇홍난파 저격한 신예 이승학, ‘선율이 부자연스럽고, 싫증난다’
1933년 10월10일 홍난파·현제명 작곡발표회는 또 하나의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이날 음악회를 둘러싸고 음악가끼리 지상(紙上)논전을 펼친 것이다. 1933년 동양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바리톤 이승학이 선배격 홍난파에 대해 비판적 리뷰를 하자 홍난파가 이에 맞서 반박했다. 이승학(1908~2003)은 훗날 서라벌예대학장, 중앙대예술대학원장을 지냈다.
‘시(詩)에 대하여 리듬과 악센트를 조금도 무시치 않고 잘 진행되었으나 선율이 좀 부자연하게 들리는 곳이 있으며 종지에 가서 ‘섭도미난테’의 화음이 소음임을 유감으로 생각한다.’(‘옛 강물 찾아와’) ‘반주로서는 호감을 주었으나 선율에 음의 중복이 많아 싫증을 주게 함은 퍽 유감이었다.’(‘장안사’) ‘씨(氏)의 작품을 총괄하여 보면 전조(轉調)가 드물어 곡에 변화가 없고 민요풍으로 된 선율에 대하야 반주는 배치되는 감(感)이 난다. 씨(氏)는 가요곡보다는 기악곡이 퍽 우월하였고 기악곡에 대하야 동계를 얻는 것과 발전 수법이 퍽 좋음을 느꼈다.’(‘玄洪양씨의 신작을 듣고’, 조선일보 1933년10월19일)
◇난파의 반격 ‘내 음악이 소음이라고?’
스물다섯 이승학은 패기가 넘쳤다. ‘선율이 부자연스럽다’ ‘소음’ ‘선율에 중복이 많아 싫증난다’며 10년 연상의 음악계 대선배를 직설로 저격했다. 난파는 상당히 격분했던 모양이다. 두차례에 걸쳐 반박글을 실었다. ‘작곡법 첫 페이지를 읽은 지식으로 남의 작품을 함부로 평하는 등의 경거는 조심해야 할 것’ ‘’선율의 중복’ 운운은 무엇을 의미한 것인지 알고 싶다. 이러한 애매한 말로써 어물어물할 바에야 구태여 남의 작품을 조상(俎上,도마)에 올려놓을 의사가 왜 생겼는지…'(‘작품발표연주에 대한 이승학씨의 평을 읽고’ 上, 조선일보 1933년11월3일)
홍난파는 두번째 반박문에서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자기의 무지에 가까운 오견(誤見)으로 큰 결점이나 찾아낸 듯이 호언한 것에 대하야 군(君)의 태도를 좀 더 자중하라고 권하고 싶고….’(‘작품발표연주에 대한 이승학씨의 평을 읽고’下, 조선일보 1933년11월5일)
당사자끼리 맞부딪친 실명비판이이었다. 논쟁의 시대였다.
◇연광철 가곡집의 난파와 노산
1933년은 세계 대공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채, 일제가 만주사변으로 침략정책을 노골화하던 때다. 어려운 시기였다. 만해 한용운은 1929년1월1일자 조선일보에 ‘조선청년에게’란 글을 썼다. ‘현금(現今)의 조선 청년은 시대적 행운아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현대는 조선청년에게 행운을 주는 득의(得意)의 시대다. 조선청년의 주위는 역경인 까닭이다. 역경을 깨치고 아름다운 낙원을 자기의 손으로 건설할만한 기운에 제회(際會)하였다는 말이다.’
역경의 시대에 우리 가곡의 꽃을 활짝 피워 문화적,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유산을 물려준 1세대 음악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연광철 음반 ‘고향의 봄’을 들으면서 든 생각이다.
◇참고자료
이유선, 한국양악백년사, 음악춘추사, 1985
이강숙, 김춘미, 민경찬, 우리 양악 100년, 현암사, 2001
‘고향의 봄’, 연광철이 부르는 한국가곡, 풍월당, 2023
11.18 100년 전 ‘바이올린의 神’ 하이페츠 연주회가 열린 날
1923년 11월 경성공회당서 치고이네르바이젠 등 연주, 앞서 5월 크라이슬러도 방문

▲러시아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야사 하이페츠의 1920년 모습. 그는 1923년 경성에 들러 리사이틀을 가졌다./Public Domain
누군가는 그를 ‘황제’, 또 다른 이는 ‘신’(神)으로 불렀다. 바이올리니스트 헨릭 셰링, 아이작 펄만이 그 ‘누군가’다. 핀커스 주커만은 ‘우리들의 왕’이라고도 했다.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이 왕, 황제를 넘어 신(神)으로 치켜세운 이는 러시아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야사 하이페츠(Jascha Heifetz, 1901~1987)다.
영화 ‘아마데우스’음악을 연주한 지휘자 네빌 마리너(1924~2016)卿은 원래 런던 심포니에서 활약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미국 체류 중 하이페츠에게 몇 차례 레슨을 받은 뒤, 마리너는 지휘자로 완전히 전업했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하이페츠만큼 연주할 자신이 없었다”는 게 이유 중 하나였다. 2013년 11월 구순의 마리너가 런던 자택에서 해준 얘기다.

▲하이페츠 공연에 참석한 청중들이 입신한 듯한 연주에 도취했다고 보도한 매일신보 1923년11월7일자 기사
◇앙코르로 ‘치고이너바이젠’ 연주
‘바이올린의 神’ 하이페츠가 스물두살 때인 1923년 경성에서 리사이틀을 가졌다. 중국 연주를 마치고 일본에 첫 리사이틀을 하러 가던 길이었다. 11월5일 저녁 7시30분 현 조선호텔 맞은편 경성공회당에서였다.
‘손을 꼽아 고대하던 악계의 귀재 ‘하이프엣츠’씨의 연주회는 지난 5일 오후7시반에 시내 장곡천정 공회당에서 개최되었다. 순서를 밟아 음악은 진행되어 위대한 그의 예술로 빈약한 조선 악계에 색채를 돋치었다. 천 여 군중이 집합한 그 장내에서 우러나는 묘곡(妙曲)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잃고 취하게 하였다. 한가지 두가지로 끝을 막을 적마다 남산 밑 한 모퉁이를 헐어내는 듯한 박수 소리는 ‘하이프엣츠’의 예술을 이해한다는 그것도 일종의 률같이 들리었다. ‘지고이네와이젠’으로써 끝을 마친 하씨 일행은 많은 인상을 남기고 그날 밤 11시 차로 신호(神戶: 고베)로 출발하였더라.’(‘천여 군중을 도취케한 하氏의 入神한 妙曲’, 매일신보 1923년11월7일)
청중 1000여명이 참석한 연주회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잃고 취하게’할 만큼 열연이었다고 한다. 하이페츠는 이날 무엇을 연주했을까.
◇도쿄 순회연주와 거의 같은 프로그램
테너 겸 음악사학자 이유선(1911~2005)이 쓴 ‘한국양악백년사’(165쪽)엔 하이페츠의 이날 연주회 프로그램이 실려있다. 참고문헌에 출전을 명시하지 않고, ‘음악회 프로그램’이라고만 나와있어 실물을 봤을 가능성이 높다.
이날 하이페츠 연주는 피아니스트 이시도르 아크론(Achron)이 반주를 맡았다. 헨델의 소나타 D장조로 시작, 비에니아프스키의 협주곡 D단조, 그리고 슈베르트 ‘아베 마리아’, 모차르트 ‘미뉴에트’, 쇼팽의 ‘녹턴’ D장조(빌헬름 편), 베토벤의 성악곡 ‘아테네의 폐허’ 중 ‘터키행진곡’과 ‘데르비쉬의 합창’, 차이콥스키의 ‘멜로디’, 바치니의 ‘요정의 춤’순(順)이었다. ‘치고이너바이젠’은 앙코르로 연주한 것같다.
경성 프로그램은 하이페츠가 주말인 9~11일 도쿄에서 연주한 프로그램과 첫번째만 제외하면 일치한다. 도쿄 제국극장 초청으로 간 하이페츠는 공연장인 제국극장이 관동대지진으로 손상돼 사용할 수없게 되자 제국호텔 연예장에서 연주했다. 오후 4시 시작한 연주회 첫번째 프로그램은 레오폴드 샤를리에가 편곡한 비탈리의 ‘샤콘느’였다. 이날 티켓은 6엔, 10엔씩이었다.
하이페츠는 12일 제국호텔 근처인 히비야공원 야외음악당에서 자선음악회를 열었다. 입장료는 1엔씩으로 수입 3000엔(또는 2800엔)을 지진구호사업에 기부했다고 한다. 이 미담은 일본 언론에 두고두고 회자됐다.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 프리츠 크라이슬러. 1923년 일본 연주에 이어 경성에 들러 리사이틀을 가졌다. '사랑의 기쁨' '사랑의 슬픔'으로 유명하다. /public domain
◇하이페츠 초청한 김영환
한국인 첫 피아니스트로 꼽히는 김영환(1893~1978)은 하이페츠 리사이틀을 성사시킨 주역이었다. 조선인 최초로 관립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한 김영환은 1918년 귀국해 연희전문 음악과장을 지냈다. 유학 시절 동경에서 대가들의 공연을 많이 본 그는 경성에서 이런 공연을 선보이고 싶었다. 훗날 남긴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이 때 마침 바이올린의 거장 야사 하이페츠가 일본에 온다는 소식을 알게 됐다. 나는 즉시 동경으로 달려가 우에노 동창생을 통해서 경성에 데려 올 수 있도록 교섭했다. 동경에 머무르는 1주일 동안 하루만 경성에서 연주회를 갖도록 한 것이다.’ ‘개런티는 하룻밤 무대에 2000원을 줘야했다. 게다가 동경-경성간의 여비와 조선호텔에 묵는 숙박비까지 전담해야 했으니 부담이 큰 것이었다.’(김영환 ‘양악백년’ 109쪽)
그는 ‘쌀 한가마 값인 3원씩 받았지만, 500석을 다 팔아도 개런티 정도도 안나왔다’고 했다. 우리나라 청중은 적었고, 대부분 일본이나 서양인이었다고 한다.
◇세계적 연주자 첫 주인공 프리츠 크라이슬러
오스트리아 명 바이올리니스트 프리츠 크라이슬러(Kreisler, 1875~1962)는 하이페츠보다 5개월 여 앞선 1923년 5월23일 밤 경성공회당에서 리사이틀을 가졌다. ‘사랑의 기쁨’ ‘사랑의 슬픔’ 작곡가로도 이름난 연주자였다. 경성의 외국인들로 이뤄진 국제친화회가 초청했다.
‘23일 오후8시40분에 국제친화회 주최로 장곡천정 공회당에서 세계적 제금가 ‘크리이슬너’씨의 연주회를 개최하였는데, 청중은 정각전부터 들어밀리어 세계적 제금가의 미묘한 현악을 최초겸 최후로 한번 듣기를 다투어 그 수효 천여명에 달하였다. 크라이슬너씨는 예복을 입고 한 손에는 제금을 들고 연단 중앙에 오르매 박수성리에서 인사를 마친 후 곧 연주가 시작되었는데, 씨의 신기한 묘곡은 청중을 취케하였으며 악성이라는 칭호를 듣는 이만큼, 군중을 놀라게 하였다.’(‘천여의 청중을 도취케한 악성의 入 神한 美曲’, 매일신보 1923년5월25일)
◇정무총감, 총독, 경무국장 부인 등 참석
최초의 세계적 연주자 내한 공연에 대해 한글 민간지도 환영했다. ‘예술적으로 많이 주리고 있는 우리 곳에도 차차로 세계의 명가를 맞아들이게 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만장한 청객의 적조하던 영혼에 한 생명을 부어주었다.’ ‘그같은 유명한 음악가를 우리 경성에 맞이하였다 하는 사실은 실로 우리 적막한 악단의 한 자랑이라 하겠다더라’(‘四絃琴의 세계적 명수 크라이슬러씨’, 동아일보 1923년5월24일)
크라이슬러의 연주곡목은 알려져 있지 않다. 김영환씨 회고처럼, 연주장에는 조선인들보다 일본이나 서양인이 더 많았을 것이다. 티켓값도 비쌌거니와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조선의 상류층은 적었다. 매일신보가 전한 주요 참석자로는 총독부 2인자인 아리요시(有吉 忠一) 정무총감을 비롯, 헌병사령관, 고등법원장, 식산은행 두취, 총독부 병원장, 총독·정무총감·경무국장 부인 등이 참석했다.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이완용이 포함됐다.
◇세계적 대가 속속 내한 연주
1924년에도 러시아 바이올리니스트 에프렘 짐발리스트가 내한 연주를 가졌다. 김영환은 이런 연주자들의 내한 공연을 기획하면서 빚도 많이 졌던 모양이다. ‘여러 차례 외국 연주가를 데려오다 보니 처음부터 이익보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사업에는 소질이 없어 적자가 말할 수없을 정도였다. 이 때쯤은 고향의 조부님이 돌아가신 다음이어서 땅을 팔아서라도 돈을 댈 수는 있었다.’ 천신만고끝에 모셔온 세계적 연주자들의 리사이틀 뒤에는 이런 사연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참고자료
이유선, 한국양악백년사, 음악춘추사, 1985
김영환, 양악백년, 비온후, 2023
‘1923.11.9 야사 하이페츠 첫 來日’, 마이니치 신문 1922년11월9일
11.25 1930년대式 연애의 방법
소프라노 채선엽과 물리학도 최규남…태평양 건너 온 편지로 시작

▲1938년 5월5일 경성 부민관에서 열린 소프라노 채선엽 귀국 독창회 팸플릿/국립중앙도서관
1931년 봄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한 스무살 채선엽은 모교에 남았다. 피아노와 합창을 가르치는 전임강사였다. 어느날 사환이 항공봉투를 가져다가 책상위에 놓고 갔다. 발신지는 미시간 주립대 기숙사였는데, 모르는 이름이었다.
‘놀라지 마십시오. 저는 미시간 주립대학 물리과에서 피에치디 과정을 밟고 있는 최규남이라는 사람이올시다. 조선에서 온 신문에서 선엽씨에 관한 기사를 읽고 예가 아닌 줄 알면서도 글월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생면부지 남성에게 편지를 받은 채선엽은 당황했다. 신문에 난 이화여전 졸업기사를 보고 무작정 편지를 썼다고 했다. 연희전문을 나와 미국에서 7년째 물리학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해 겨울쯤 박사 학위를 따가지고 나올 수 있는 앞길이 창창한 남자라고 소개했다. 채선엽은 훗날 ‘그 편지는 지극히 사무적인 투로 쓰여진 간결하고 건조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신문 기사 투의 글이었다’고 회고했다. 편지를 서랍 깊숙이 넣어뒀다. 하지만 답장은 하지 않았다.
잊을 만하면 다시 그 덤덤한 투의 편지가 왔다. ‘안녕하시오’로 시작해 ‘안녕히 계시오’로 끝나는 점잖은 편지였다. 봄부터 시작한 편지는 가을이 깊어가자 뚝 끊어졌다. 채선엽은 슬슬 약이 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뒤 신문에 ‘최규남’이란 이름이 실렸다. 미시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는 기사였다. 이듬해봄부터 모교인 연희전문에서 강의를 하게 됐다던지, 그동안은 개성 송도고보에서 수학을 가르친다든지 하는 소식이 신문에 났다. 그런데 연말까지 편지가 없었다.

▲최규남(사진)은 연희전문 재학 시절, 야구 투수와 축구 골키퍼로 활약한 스포츠스타였다. 최규남의 활약덕분에 연전이 1925년 조선체육회 주최 야구, 축구대회에서 우승했다고 소개한 조선일보 1926년 3월16일자
◇연희전문 스포츠 스타 최규남
개성 출신 최규남은 송도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6년 연희전문 수물(數物)과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학업성적도 뛰어났지만 야구부 투수이자 축구부 골키퍼로 활약하면서 1925년 조선체육회 주최 야구, 축구대회에서 전문학교부 우승을 차지한 1등공신이었다. 이 때문에 최규남이 1927년 미국유학을 떠난다는 기사가 스포츠란에 났을 정도다. ‘왕년 延專투수 최씨 渡美유학’(조선일보 1927년4월29일)이란 제목과 함께 사진까지 실렸다. 미국 체류 중 스포츠 기사를 본지에 쓴다는 약속까지 했던 모양이다.
최규남은 1933년 미시간대에서 물리학, 수학을 전공해 이학박사를 받았다. 한국인 최초의 물리학 박사였다. 채선엽도 밝혔지만, 최규남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손에서 자라면서 송도고보 시절부터는 고학을 시작해, 미국 유학까지 고학으로 마친 ‘개룡남’(개천에서 난 용)이었다. 최규남 이력을 보면 1918년 송도고보를 졸업한 직후 송도보통학교와 송도고보 교사를 하면서 학비를 모아 스물넷인 1922년 연희전문에 들어간다. 졸업 직후인 1926년에도 유학가기 전까지 1년간 송도고보 교사를 했다. 제 손으로 벌어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는 처지였다.

▲최규남이 1927년 미국으로 유학간다는 내용의 기사. 연희전문 투수로 유명했기에 스포츠란에 게재됐다. 조선일보 1927년4월29일자 기사
◇'이렇게 좋은 사람이 편지 솜씨는 왜 형편없었을까?’
이듬해 3월 채선엽은 학교 연습실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 연습을 하던 중이었다 사환이 “선생님, 편지!”하면서 봉투를 건넸다. ‘최규남 배상’이었다. ‘제번하옵고’로 시작한 편지는 며칠 뒤 개성에 가서 누님을 만난 뒤 경성으로 갈터니 경성역 식당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외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채선엽은 ‘참으로 간명한 편지였다’고 기억했다.
고민하던 채선엽은 이화여전 동기인 모윤숙과 상의했다. 무조건 만나라고 했다. 나중엔 따라가 줄 터이니 만나라고 했다. 경성역 식당은 조용했다. 모윤숙이 “저기저기, 와 계셔”하며 이끌었다. ‘나는 너무 긴장하여 온 몸이 막대기처럼 굳어 있었다. 최규남, 그 분은 나를 보자 활짝 웃었다.’
데이트는 이렇게 시작됐다. 둘은 종종 용산 야구장에서 만났다. 최규남은 송도고보때부터 야구선수였다. 경성에 시합하러 오면 늘 용산야구장에서 경기를 했다고 말했다. 자기가 치기만 하면 홈런이었다고 자랑했지만 그 말을 믿진 않았다고 한다. ‘나는 그가 한창 정신없이 야구 얘기를 하면 그의 얼굴을 멀거니 지켜보며 ‘이같이 좋은 사람이 왜 편지 쓰는 솜씨는 그렇게 형편없었을까?’하고 생각하며 혼자 웃곤 했다.’

▲채선엽을 피아니스트 겸 성악가로 주목한 잡지 기사. 1931년 이화여전 음악과 졸업 당시 사진으로 보인다. 조선중앙일보에서 발간한 잡지 '중앙' 1934년6월호 기사
◇오빠 채동선 친구 현제명이 약혼식 주례
전남 벌교 출신인 채선엽의 열살 위 오빠 채동선(1901~1953)은 연희전문 교수 현제명과 친구였다. 가곡 ‘고향’ ‘그리워’로 유명한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 채동선이다. 현제명이 채동선 남매를 자기집에 초대했는데, 최규남이 먼저 와있었다. 당황한 채선엽이 쩔쩔매다가 최규남을 오빠에게 소개했다. 채동선은 다 아는 일을 갖고 뭘 그러느냐는 투로 농담을 했다. 채선엽,최규남 커플의 연애는 공식화됐다. 1933년 10월 둘은 약혼했다. 현제명이 주례를 섰다. 이듬해 4월 이화여전 대강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선남선녀의 결혼은 신문에까지 보도됐다. ‘여류 성악가로 이름높은 채선엽씨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오는 26일 오후4시반 이화전문대강당에서 식을 치르는데 신랑되시는 분은 연희전문교수 최규남씨올시다.’(‘결혼하는 채선엽씨’, 조선일보 1934년4월21일) 성악가 채선엽이 야구선수 출신 물리학자 최규남보다 더 유명했던 모양이다.

▲채선엽은 1938년3월25일 동경 일본청년회관에서 독창회를 열었다. 2년간의 유학을 결산하고 일본 무대에 본격적으로 데뷔하는 연주회였다. 조선일보 1936년3월11일자 기사
◇정훈모 독창회의 자극
‘테니스 코트에서 라켓을 받아 ‘탱.탱’소리내며 튀어 오르는 흰 정구공처럼 나는 온 몸이 드높이 떠오르는 듯한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신혼초 채선엽은 맘껏 행복을 누렸다. 첫 아이를 낳아 기를 때까지 그랬다. 하지만 채선엽은 육아에 매달려 제대로 성악을 공부할 수 없었다. 어느날 부부가 함께 정훈모 독창회를 다녀왔다. 동경제국음악학원을 졸업한 정훈모는 1932년 12월1일 정동 모리스홀에서 첫 독창회를 열어 ‘북구의 飛鳥같은 여류 가인’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곡목은 독일 것으로 특히 서정곡을 수로하여 슈베르트와 슈만 등의 것이었다. 그리하야 노래는 독일말로 하여 말을 알아들었을 이는 극히 드물었을 것이로되 그의 맑고 유하고도 힘있는 발성에 명확한 발음과 주의 깊은 ‘엑쓰프레슌’은 가사를 모르고 듣던 사람들도 많이 그 노래의 뜻하는 바를 감득할 수가 있을 만하였다.’(‘새해 음악 스테지의 화형 정훈모여사 박경호씨’, 1933년1월2일) 피아니스트 박경호와 함께 새해 음악계의 희망으로 손꼽히는 기대주였다.
정훈모(1909~1978)는 훗날 서울대음대 성악과 창설 멤버로 예술원회원이 된 성악계 1세대다. 1930년대초까지 찬송가를 부르던 수준의 성악계에서 독일 가곡을 정확한 발음으로 불러 충격을 줬다. 정훈모는 1935년5월4일 경성공회당에서 세번째 독창회를 가졌다.(‘정훈모씨 독창회’, 조선일보 1935년5월5일) 박경호가 반주를 했다. 채선엽 부부는 이 독창회를 본 것 같다.

▲최규남은 광복후 서울대총장, 문교부장관을 지낸 과학계 1세대였다. 채선엽은 이화여대 교수로 김자경 등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부부는 53년간 해로했다.
◇가정부를 엄마라 부르고, 날 ‘동경 엄마’로 불러
공연을 보고 돌아온 채선엽은 부엌에서 눈물을 흘렸다. 소프라노로 이름을 날리던 정훈모가 부러웠고, 갓난 아이 키우는 일에만 전념하는 스스로가 딱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그이는 내가 홀짝거리는 걸 보고도 암말이 없더니 며칠 뒤에 나를 불러 놓고 조용히 말했다.”당신같이 재능있는 사람이 젊은 나이에 집안에서 썩어야 하는 건 나도 가슴아프오. 아이는 내가 어떻든 기를 테니 동경 가서 성악 공부를 정식으로 해보는 게 어떠오”’ 채선엽은 처음엔 거절했지만 결국 동경행을 선택했다.
1936년 돌이 채 안된 아이를 떼어두고 유학을 떠났다. 2년만에 돌아왔더니 아이는 가정부를 ‘엄마’라 불렀고, 채선엽을 ‘동경 엄마’라고 불렀다. 아이를 부르면 잘 오지도 않고 가정부 치맛자락만 붙들고 다녔다.
◇서울대 총장, 문교부장관 최규남
채선엽은 일본에서 벨트라멜리 요시코에게 개인교습을 받았다. 이탈리아에 유학해 벨칸토 창법에 조예가 깊은 일본인 성악가였다. 채선엽은 오사카 공회당과 도쿄 일본청년회관에서 독창회(’채선엽씨 동경서 독창회’, 조선일보 1938년3월11일)를 열고 호평을 받았다. 1938년4월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로 취임했고, 그해 5월5일 부민관에서 귀국독창회를 가졌다. 광복 후에도 이화여대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김자경 김복희 김영환 채리숙 등 음악계를 이끌어간 성악가들이 그의 제자들이다.
최규남은 광복 이후 서울대 총장과 문교부 장관을 지냈다. 1952년 한국물리학회 창립과 함께 초대 회장을 맡았고 1964년 한국과학기술원(KIST) 설립준비위원장을 지냈다. 한국 과학계를 일군 1세대 원로였다. 부부는 53년간 해로했다. 채선엽은 1987년 별세했고 최규남은 5년 뒤인 1992년 아내의 뒤를 따랐다. 채선엽은 ‘남편의 외조가 없었다면 자신은 결코 예술의 길을 걷지 못했을 것’이라며 남편에게 감사했다고 한다. 편지로 맺어진 부부의 아름다운 인생이었다.
◇참고자료
털어놓고 하는 말1, 뿌리깊은 나무,
동운논집,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58
한상우, 기억하고 싶은 선구자, 지식산업사, 2003
이유선, 한국양악백년사, 음악춘추사, 1985
12.02 ‘현해탄 투신’에 가려진 소프라노 윤심덕의 진면목
슈베르트 가곡 등 음반 19장 남기고…생존說, 출산說까지 난무

▲조선의 첫 소프라노 윤심덕. 1920년 일본 관립 도쿄음악학교 갑종 사범과에 들어가 전문적으로 성악교육을 받은 첫 소프라노였다. /퍼블릭 도메인
‘그가 한번 악단에 나서서 두 주먹을 턱 쥐고 긴 목을 내두르며 ‘아아’소리만 치게 되면 만장의 박수소리는 진동하고 그의 몸이 악단에서 내려오면 다시 한번 듣고자 가슴을 졸이는 청중의 박수 소리는 뒤미처 일어나서 그치치를 못한다. 아! 그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기자가 먼저 그를 소개하기 전에 독자 여러분은 반드시 ‘윤심덕 윤심덕’하고 부르짖을 줄 믿는다.’(‘조선의 일류 성악가 윤심덕양’, 조선일보 1924년12월16일)
1920년대 음악계에 혜성같이 등장한 윤심덕은 당시 일본에서 가장 수준 높은 음악교육기관인 관립 도쿄음악학교를 졸업한 신여성이었다. 이전에도 음악회에서 노래한 여성은 있었지만 동경 유학까지 가서 성악을 전문적으로 배우고 귀국해 소프라노로 활동한 이는 윤심덕이 처음이다. 1920년대 초반 음악회가 막 성행하기 시작했을 때,윤심덕은 홍난파, 김영환 등 1세대 연주자들과 무대를 누볐다. 특히 도쿄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1923년 봄부터 1924년 겨울까지가 소프라노 윤심덕의 전성기였다. 당시 윤심덕과 함께 종종 연주한 피아니스트 김영환(1893~1978)은 ‘아직 창가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그 때 윤심덕은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고 슈베르트의 가곡을 불렀다’고 평가한다.

▲윤심덕의 마지막 모습. 1926년 7월 말 '사의 찬미' 등 음반 13장을 취입하기 위해 일본 오사카에 건너가 일동축음기회사에서 녹음하고 있다. 윤심덕 사망 후인 1926년 10월 15일 '일동타임쓰' 제1권4호에 실린 사진이다. /현담문고 소장
◇왈패지만 무대에 서면 환호 연발
게다가 윤심덕은 ‘왈패’로 불릴 만큼 활달한 평양 여성이었다. ‘6척이나 되어보이는 몸에 옥색치마를 발뒤축까지 끌고 평안도 수건을 맵시있게 눌러쓰고 평양 천지를 횡행하다가 종로네거리에 어떤 청년 남자를 만나서 평안도 사투리로 ‘야 오랍아 너 잘있댔니’하고 손을 잡고 절레 절레 흔드는 것을 보았다.’(‘조선의 일류 성악가 윤심덕양’)
‘윤심덕은 키도 크고 눈도 크고 입도 큰 요즘말로 바로 현대여성형이었다. 얼굴은 계란형에 희지는 않았고 눈은 쌍꺼풀이 지고 서글서글했다.’ 김영환은 ‘서구적인 용모에 표정이 풍부하고 사람을 끄는 힘이 있어 그가 한번 무대에 서면 남성 팬들은 환호를 연발했고 여성들 중에도 그에게 매혹되어 존경하는 사람이 많았다’(‘양악백년’ 128~129쪽)고 회고했다.

▲윤심덕이 죽은 직후인 1927년10월15일 발행된 '일동타임쓰' 제1권제4호. '사의 찬미'음반을 비롯, 윤심덕 특별호처럼 꾸몄다. /현담문고 소장
◇잘못 알려진 윤심덕의 이력
일제시대 최대 스캔들을 꼽으라면 소프라노 윤심덕(1897~1926)과 극작가 김우진 커플의 ‘동반 자살’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20대 한창 나이의 앞길 창창한 모던 보이, 모던 걸이 귀국행 관부연락선상에서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는 사실은 당대 신문, 잡지들이 연일 톱뉴스로 다룰 만큼, 충격적이었다. 톱스타 윤심덕의 상대 김우진은 전남 장성 지주 집안의 유복한 아들로 장래가 전도유망한 극작가였다. 특히 윤심덕이 현해탄 투신 직전 녹음한 ‘사의 찬미’는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유성기 붐을 일으킨 주역이 됐다. 최근까지도 두 사람의 ‘정사’(情死)를 다룬 TV드라마, 뮤지컬이 나올만큼 타계 100년이 가까워올 때까지 관심이 뜨겁다.
둘의 연인관계에 주목한 정사(情死)설부터 해외에 도피해 살아있다는 생존설, 외국에서 윤심덕이 아기를 낳았다는 출산설까지 당대에 나돈 사실만 봐도 이 사건이 얼마나 충격을 줬는지 헤아릴 수 있다. 김우진과의 동반자살과 ‘사의 찬미’에 쏠린 뜨거운 관심탓에 ‘조선 첫 소프라노’이자 ‘레코드 가수’ 윤심덕에 대한 이해는 상대적으로 덜하다.
도쿄음악학교를 졸업한 소프라노로서 한국음악사에 기록된 윤심덕의 이력과 관련, 최근까지 잘못 알려진 사실도 많다. 1915년 일본 청산학원(靑山學院) 유학설, 도쿄음악학교 성악과 졸업 등이 그렇다. 윤심덕이 남긴 레코드 목록과 발매 일시도 불충분하거나 정확하지 않다. 소프라노 또는 가수 윤심덕의 본모습을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든 이유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현해탄 동반자살을 보도한 조선일보 1926년 8월 5일자.
◇아버지는 야채장수, 어머니는 ‘전도부인’
먼저 윤심덕의 출신이다. 윤심덕은 평양 출신으로 아버지는 야채장수, 어머니는 평양 서문 광혜여병원 사무원으로 일했다. 부모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특히 어머니는 ‘전도부인’으로 지낼 만큼 열심있는 신자였다. 이 때문에 윤심덕과 여동생 윤성덕, 남동생 윤기성 등 3남매는 모두 어려서부터 서양음악을 접했다. 윤심덕을 비롯한 3남매가 모두 음악가로 성장하는 배경이 됐다. 윤성덕은 피아니스트로서 이화여전을 나와 모교 교수로 일했고, 윤기성은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다녀와 바리톤으로 활약했다.
윤심덕은 사립 숭의여중, 평양여자고보, 경성여자고보 사범과를 나와 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다 1920년 총독부 관비 유학생으로 도쿄음악학교 갑종사범과(3년)에 입학했다. 매일신보 기사에 의거, 윤심덕이 1915년 도쿄 청산학원에 유학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1918년 경성여자고보 졸업 기사에 윤심덕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청산학원 유학은 실현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23년 관립 도쿄음악학교 갑종사범과(3년) 졸업
당시 신문에선 종종 윤심덕이 도쿄 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한 것으로 소개했지만 윤심덕은 도쿄음악학교 갑종사범과를 다녔다. 중등교사를 양성하는 3년제 과정이다. 성악부는 본과에 설치돼있었다. 윤심덕이 다닌 사범과는 음악전문가 과정이 아니라 음악교사 양성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전문 음악가로서의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1887년 설립된 도쿄음악학교(현 도쿄예술대학)는 당시 유일의 관립음악학교로 문부대신 관할이었다. 선과, 예과, 본과,사범과, 연구과(대학원)로 나뉘어져있었다. 윤심덕이 들어갈 당시 갑종사범과는 사범학교 중학교, 고등여학교(수업연한 4년 이상인 학교) 졸업자가 지원할 수있었다.
윤심덕의 유학은 조선총독부 추천으로 이뤄졌다. 조선인 유학생의 도쿄음악학교 입학은 총독부 추천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총독부는 우수한 조선 학생을 선발해 일본에 유학을 시켰다. ‘조선융화회’라는 단체가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했다. 1920년 총독부 관비유학생으로 도쿄음악학교에 진학한 이는 윤심덕 말고도 한기주(갑종사범과)가 있다.
◇'天才가 풍부한 독창을 위시하여…'
1923년 도쿄음악학교를 졸업한 윤심덕은 그해 6월26일 오후 8시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졸업후 데뷔무대를 가졌다. 종로2가에 있는 동아부인상회 창립 3주년 기념음악회였다. ‘금년 봄에 동경음악학교 성악과를 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한 후 경성의 악단에는 아직 한번도 나오지 아니한 윤심덕 양의 천재가 풍부한 독창을 위시하여…’(‘3주년을 迎하는 동아부인상회의 기념적대음악회’,동아일보 1923년 6월25일)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는 알 수없으나 기사에서 가장 먼저 소개될 만큼 비중있는 출연자였다.
그달 30일 오후8시30분 조선여자청년회 주최로 역시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동기생 한기주와 함께 도쿄음악학교 졸업생 리사이틀을 가졌다. 유학으로 쌓은 실력을 본격적으로 펼치는 무대였을 것이다. 이후 윤심덕은 베토벤 탄생 150주년 기념 음악회 등에서 홍난파 김영환과 함께 무대에 서는 등 전국을 누비며 1세대 성악가로 종횡무진 활약했다. 1년 반 뒤인 1924년 12월 돌연 하얼빈으로 떠나버렸다. ‘부호와의 동거’ ‘실연’ 등 각종 소문을 낳은 탈출이었다.
윤심덕이 1925년 6월 다시 경성에 나타나자 ‘스타’의 실종과 내력을 둘러싼 기사가 줄이었다. 윤심덕은 더러 음악회에 출연했지만 이듬해 2월 배우 선언을 하면서 또 다시 뉴스의 초점이 됐다. 토월회 연극 ‘동도’(東道)에 배우로 출연한 것이다. 여배우를 꺼리는 사회 분위기탓에 다들 외면하는 배우에 음악계 스타가 자원해서 나선 사실 자체가 뉴스거리였다.
◇조선인 첫 오페라 음반 ‘라 트라비아타’?
성악가, 가수 윤심덕의 활약은 레코드로 옮겨갔다. 1926년 초 윤심덕은 일동축음기회사와 전속계약을 맺고 음반 취입을 했다. 이 회사에서 발행한 음반잡지 ‘일동타임쓰’에 따르면, 그해 6월까지 독창 음반 4장을 냈다. 이중 주목을 끄는 것은 6월에 낸 독창음반이다. ‘너와 나’ ‘아 그것이 그사람인가’(음반번호 B83)
‘그 사람인가’는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아리아 ‘아, 그이인가’(Ah, fors’e lui) 와 비슷하다. 작가 이서구가 발행한 음반소식지 ‘일동타임쓰’(1권3호, 현담문고 소장)에 실린 가사를 보면, 더 그렇다.
‘저 잔치에 홀로 있는 그이가/과연 나의 사모하는 애인인가/그의 아름다운 형상/그림자같이 내맘속에 삭여있네/부드러운 그의 팔에 /내 몸이 안겨있을 때/근심걱정 사라지고 애정이 불탄다/사랑이 없이 살 수 없는 이 세상/이상하게도 내 가슴 산란하다/아 얼켜나오는 것은 목숨과 또한 기쁨일세/목숨과 또한 기쁨일세 아-, 아-’
한국 음악사 연구자들의 검토가 필요하다. 하지만 음반을 들어보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소장자가 나서길 기다릴 뿐이다.
◇슈베르트 예술가곡 ‘보리수’, ‘들장미’ 발매
한국대중가요사1(한국대중예술문화연구원, 2003)에 따르면, 윤심덕 음반 발표곡은 34곡이다. 하지만, 일동축음기회사가 낸 음반잡지 ‘일동타임쓰’에 따르면, 윤심덕 음반은 모두 19장, 38곡을 수록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사의 찬미’에 가려 나머지 음반들은 주목받지 못했지만, 윤심덕의 음악세계를 살펴보는데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슈베르트 가곡 ‘들장미’를 옮긴 ‘방긋 웃는 월계화’, ‘보리수’를 옮긴 ‘옛꿈’이 눈길을 끈다. ‘메기의 추억’ ‘기러기’ ‘산타 루치아’ 같은 민요나 칸초네, ‘어여쁜 색시’ ‘시들은 방초’같은 유행가부터 ‘찬미가’(찬송가)음반 2장까지 다양한 장르를 아우른다. 특히 메가셀러 ‘사의 찬미’는 같이 수록된 곡이 부활절 찬송가인 ‘부활의 기쁨’인 것도 의아하다.
◇여성해방 연극 ‘인형의 집’ 주인공 노라로
음악사연구자 박정숙은 윤심덕이 도쿄음악학교 졸업공연으로 입센의 작품 ‘인형의 집’ 주인공 노라를 맡은 사실을 주목한다. 여성 해방의 대명사격인 노라 역을 다른 일본 여학생을 제치고 윤심덕이 맡았다는 것에서 그가 여성으로의 자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있다는 것이다.
윤심덕은 토월회 연극 ‘동도’에 출연한 직후인 1926년 2월24일 김을한 등과 함께 토월회를 탈퇴, 백조회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조선극장에서 ‘인형의 집’을 올리려고 했는데, 윤심덕이 주인공 노라로 예정돼 있었던 모양이다.(‘백조회 신극운동의 첫 걸음, 초공연은 인형의 家’, 조선일보 1926년3월31일) 하지만 공연은 올려보지도 못한 채, 단체는 해산했다. 윤심덕은 그해 7월 새 음반 취입차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8월4일 귀국길에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 윤심덕이 귀국해서 ‘인형의 집’ 주인공 노라로 무대에 섰다면 그 후 인생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윤심덕은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배우로 데뷔하면서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로지 힘을 다하여 새로 지으려는 조선 예술의 전당에 한 모퉁이의 무엇이라도 되려는 당돌한 발걸음이 이에 이르게 된 것뿐입니다. 금후의 나가는 앞길의 험로가 나로 하여금 어떠한 피로를 주고 어떠한 권태의 기분을 던져 줄런지는 아직 아득한 바입니다.’(‘예술을 탐하야 배우생활’, 동아일보 1926년2월6일)
윤심덕은 험로를 헤쳐나오지 못하고 피로와 권태에 지쳐 허망하게 스러진 비운의 주인공이 됐다.
◇참고자료
일동타임쓰 1권3호,1926년6월15일, 1권4호 1926년10월15일
박정숙, 근대의 타자 혹은 근대의 주체: ‘소문’과 ‘상상’으로 구성된 여가수 윤심덕(1897~1926), 음악학 37, 2019
전정임, 소프라노 윤심덕 연구, 음악과 민족 4, 2010
김지선, 근대시기 일본의 음악학교에 유학한 조선인-도쿄음악학교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음악사학보 41, 2008.12
김영환, 양악백년, 비온 후, 2023
이유선, 한국양악백년사, 음악춘추사, 1985
한국대중예술문화연구원 편, 한국대중가요사 1, 한국대중예술문화연구원, 2003
12.09 ‘음악회’ 대유행한 ‘음악狂’시대
정체불명 ‘세계음악무도대회’까지 등장…지나친 상품화 우려까지

▲극장 부인석에 여성 한두명만 보여도 주변에 남자들이 붐비는 모습을 풍자한 석영 안석주의 만문만화. 당시 극장과 공연장은 이성을 만나기 위한 사교장 역을 했다. 공연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많는 세태를 풍자했다. 조선일보 1930년10월26일자
1927년 2월12일 평양 제일관(第一館)에서 음악회가 열렸다. 대성학우회가 주최했다. 대성학우회는 1908년 안창호가 평양에 세운 민족교육기관인 대성학교 출신들이 1920년 설립한 일종의 동창회였다. 중등학교 과정인 대성학교는 1912년 일제 탄압으로 폐교됐는데, 학교 재건을 위해 동문들이 나선 것이다. 대성학우회는 1923년 기존의 평양 동명학관을 인수해 중학교로 발전시키기로 하고 교사를 증축하는 등 활동을 펼쳤다. 평양 제일관에서 열린 음악회는 학교 재건을 위한 기금 마련 목적이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이 음악회에 대한 시선이 삐딱했다.
‘그러나 종래의 예로 보아 흔히 유행되는 음악회 따위로서 과연 얼마나한 성적을 얻을지 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동시에 가령 다소의 경비를 얻는다 할지라도 차(此)는 걸인에게 대하여 일시의 ‘식’(食,음식)을 여하는 것과 동양으로 막대한 학관의 비용을 고식(姑息)의 궁책인 음악회 따위로서 지지하여 갈 수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일 기자, ‘대성학우의 음악회’, 조선일보 1927년2월5일)
음악회 수입으로는 학교 운영 비용을 충당하기 어려우니 회원들이 돈을 내 기반을 확보한 뒤에 음악회 같은 활동을 하는 게 효과적이지 않겠느냐는 의견이었다. 필자는 ‘공연히 교육사업을 한다는 중대한 선언을 하(下)하고, 실(實)이 무(無)한 허세를 장(張)하여 명예나 조득(釣得)코저 한다 하면 그 음악회로 인연되어 일반에게 불호한 영향이 파급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학교 재원을 마련한다면서 번드레하게 음악회를 열지만 수입은 보잘 것없고 대중에게 안좋은 인상을 줄 수있다는 지적이었다. 1920년대 평양에서까지 ‘흔히 유행되는 음악회’라는 표현이 등장할 만큼 음악회가 빈번하게 열렸다는 사실을 알 수있다.
◇'음악회는 최신 유행품’
당시 신문, 잡지에는 음악회가 봇물 쏟아지듯 열린다는 기사가 자주 등장한다. 한국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로 꼽히는 홍난파는 1924년 여름 음악회가 ‘최신(近日)유행품의 하나’라면서 ‘근래 경성의 악계에는 점점 음악회란 것이 상품화해간다’고 자조하는 듯한 글을 썼다.
‘어떤 회사의 경영에도 음악회, 어떤 강습소 경비보충에도 음악회, 무슨 회(會)에서도 음악회…강연회나 토론회가 고물(古物)이 되어가는 대신으로 걸핏하면 언필칭 음악회라 하니 그래 음악회란 무엇인 줄 아십니까. 하고도 많은 장사에 무슨 장사를 못해서 음악회 장사를 하렵니까’(악단의 뒤에서, 동아일보 1924년7월7일)라고 들이받았다. 당시 ‘음악회’를 내건 상업적 행사가 빈발했다는 사실을 알 수있다. 난파는 이런 단언까지 했다. ‘나는 아직도 조선 천지안에서는 ‘음악을 위한 음악회’는 별로 본 일이 없습니다.’
◇정체불명 ‘세계음악무도대회’
난파는 종로청년회관(YMCA)에 들렀다가 우연히 그날 밤 여자강습원 주최로 열린 ‘세계음악무도대회’ 프로그램을 보고 경악한 얘기를 썼다. ‘그 음악회를 주최하신 주최자측의 어떤 분도 만난 일이 없었던 나로서 그날 ‘프로그램’지상에서 내 이름과 곡명이 쓰여있음을 볼 때에 건안자(健眼者)인 나로서도 재삼 괄목하고 끽경(喫驚, 몹시 놀람)하지 않을 수없었습니다.’ 자기와 아무 상의도 없이 출연자로 이름을 올려놓았다는 얘기다. 당시 신문을 훑어봤더니, 그해 3월 6일 종로청년회관에서 조선여자강습원 주최로 열린 ‘세계음악무도대회’를 가리키는 듯하다. 중국, 러시아, 조선 음악가들이 연합 출연한다고 광고한 이 공연은 난파가 보기에 ‘세계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음악과 무도만 출연’시켰다.
난파는 1924년을 회고하면서도 음악회의 범람을 우려했다. ‘우리 사회에는 음악회란 것이 일대 유행물이 되어 작년도 총계를 보면 7,8 양월을 제하고도 10개월간 경성에 열린 음악회수가 내외국인을 합하야 30회란 큰 수를 넘었으니, 그중에는 물론 음악을 위한 음악회도 없음은 아니었지만 10의 8,9는 모두 음악계에 하등 관련이 없는 단체의 영리적이나 수단적 흥행에 지나지 못했다.’(‘과거 1년 樂界를 회상하고’, 동아일보 1925년1월1일) 1924년 한해에만 경성에서 열린 음악회가 30회가 넘을 만큼 대유행했다는 것이다. 음악회 프로그램이 충실하지 않고 특정 단체 선전이나 돈벌이를 위해 ‘소비’되고 있다는 게 홍난파의 불만이었다. 난파는 ‘고상한 예술의 힘을 발휘하여 그 민족의 심정과 사상을 도화(導化)시킬 만한’ 음악회를 갈망했다.
◇'음악을 위한 음악회는 없나’
1926년 새해초에도 음악회 풍년이었다. 자선음악회, 기금마련 음악회들이었다. 그런데 연악회가 2월11일 저녁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순전히 음악을 위한 음악회’를 개최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새해를 맞으면서부터 보전(보성전문)과 세브란스의전의 음악회가 본사의 후원아래 열린 것을 비롯하야 우리 소년회의 음악회까지 합 세번이나 열리어 음악계로서 전에 못보던 번창을 이루었음을 일찍이 사계의 팬의 널리 아는 바어니와 이 모든 것은 자선을 위하거나 주최자체의 도움을 위하여 열렸음으로 연악회(硏樂會)에서는 순전히 음악을 위한 음악회를 열고자 그동안 여러가지로 준비중이던 바…'( ‘신춘 악단의 偉觀일 연악회 주최 음악회’, 조선일보 1926년2월6일)
연악회는 홍난파가 1922년 조직한 음악연구기관이다. 이날 음악회엔 연악회 회원인 백남진, 홍성유와 바리톤 스미스 박사, 이화학당 교장 아펜셀러 등 경성 주재 서양인, 이화학당 학생인 피아니스트 김원복이 출연했다. 당시 기사에선 이 음악회를 ‘그랜드 컨-써트’로 소개했다.
◇'음악狂시대’
대중월간지 ‘별건곤’(33호)은 1929년 ‘음악광시대’란 글을 실었다. 일곱, 여덟살 때부터 음악에 열중했다는 필자는 미국 유학을 꿈꾸면서 ‘틈만 있으면 노래, 잠을 자면서도 노래! 밥을 먹으면서도 노래! 길을 걸으면서도 노래! 참 노래 미치광이 말을 들어가면서도! 그저 노래만 불렀다’고 했다. 집안 반대로 미국 유학은 무산됐고, 숙명학교 사범과를 나와 교편을 잡으면서 모은 돈으로 아무도 모르게 일본으로 달아났다는 얘기였다. 100년 전 서양 음악의 광풍이 얼마나 이 땅을 휩쓸었는지 짐작케한다. (필자는 성악가 박경희(朴慶姬)다. 도쿄음악학교에서 공부하다 1927년 상해로 건너가 러시아 제실(帝室)음악학교 교장 출신 ‘마-신’에게 개인 교수를 받으며 실력을 닦고 귀국했다. 기자 출신 사회주의자인 이여성과 결혼했고, 해방 이후 함께 월북했다.)
◇참고자료
박경희, 음악광시대, 별건곤 33, 1929,6
박경희, 동란의 상해, 삼천리 13, 1931,3
이미나, 식민지 근대문학에 나타난 ‘음악’의 의미 고찰,한국문학과 예술 제39집, 2021, 9
이유선, 한국양악백년사, 음악춘추사, 1985
12.16 127년 전 파리 오페라 ‘파우스트’ 리뷰 쓴 윤치호
1896년 파리 가르니에 극장서 관람, ‘과학과 예술의 접목이 만든 경이’에 감탄
▲윤치호는 1896년 11월13일 저녁 파리 가르니에극장에서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를 관람했다. 그는 '과학과 예술이 만들어낸 경이'라며 감탄했다
‘과학과 예술의 접목으로 만들어낸 경이로움’.
좌옹 윤치호(1865~1945)는 프랑스 작곡가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를 보고 이렇게 썼다. 지금부터 127년전, 1896년11월13일 저녁 8시 파리 가르니에 극장(Palais Garnier)을 찾았다. 윤치호는 그해 5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니콜라이2세 대관식에 특사 민영환을 수행한 뒤, 파리로 건너왔던 참이었다.
윤치호는 먼저 이 극장의 화려함에 압도당한 것같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극장 가운데 하나라는 그 극장은 희귀한 대리석으로 조성된 매우 훌륭한 건물이었다. 146만 파운드를 들여 지었는데 외부는 당당해 보이고 내부는 화려하다. 거울처럼 빛나는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기둥, 네군데에 알제리 양식의 손잡이가 있는 웅장한 계단. 기하학적 도형과 기호로 된 우아한 장식, 여러 가지 색채에다 총체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해 황금빛과 자주색깔을 풍부하게 드리운 이 모든 것은 환희와 함께 더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국역 윤치호 영문일기 3, 297~298쪽)
▲1890년 무렵의 파리 가르니에 극장. 1875년 개관한 이 극장은 지금도 파리 오페라발레단 전용극장으로 활용된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발상지이기도 하다. /퍼블릭 도메인
◇'노쇠한 파우스트 박사의 모험’
윤치호는 그날 일기에 오페라 ‘파우스트’ 줄거리를 요약했다. ‘노쇠해 향락을 누릴 수 없게 되고 삶에 지친 파우스트 박사는 자살을 감행하는 비극으로 치달았다. 악마 메피스토펠레는 그에게 다가와서 젊음과 젊음의 모든 기쁨을 제안하는데 그 조건은 박사가 그에게 지하세계에서 자신에게 봉사하라는 것이었다. 이 노인은 주저했지만 아름다운 마가렛의 모습과 그녀와 기쁨을 누릴 생각에 악마의 편을 들어주었다. 계약은 서명되었고, 파우스트는 젊음과 활력이 충만하게 되었다. 악마는 그를 도와 열정의 대상인 마가렛을 얻도록 해준다. 그녀의 오빠인 발렌틴은 그 유혹자와 결투하지만 살해당한다. 그녀는 유아 살해로 감옥에 내던져진다. 악마와 파우스트는 그녀를 감옥에서 빠져 나오도록 하려 하지만 그녀는 자기 죄를 후회하면서 신의 용서를 받고 죽는다. 박사는? 악마가 그를 거두어갔다.’
윤치호의 설명은 요즘의 오페라 해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르니에 극장 내부 계단. 화려한 장식과 조명으로 관람객들의 사진 촬영 명소이다. 윤치호는 가르니에 극장의 화려한 인테리어에 상당히 놀랐던 모양이다. /위키피디아
◇무대에 압도당한 윤치호
윤치호에게 오페라 아리아나 오케스트라 연주는 소음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무대에 더 관심을 쏟았다. ‘나는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지만 무대의 장면 설정은 매우 훌륭했다. 이 무대는 조용한 밤의 어두움에 눈쌀을 찌푸리며 지금 막 산 너머로 사라져가는 태양의 애무를 받아 붉게 물든 라일락과 장미로 장식된 정원이다. 이제 활기에 넘친 거리는 돛단배가 군데군데 떠있는 강을 따라 펼쳐져 있고, 교회는 신비스러울 정도로 고요하다. 대궁전은 압도하는 듯 웅장한 장면을 보이고 있고, 지금 천국의 계곡은 석양의 부드러움과 아침 햇살의 신선함, 그리고 정오의 찬란함이 어울려 조화를 이룬 빛 아래서 미소를 짓는 듯하다.’ 그는 ‘단 한번의 연출로 보여준 과학과 예술의 경이로움이라니!’라며 감탄했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발상지
1875년 개관한 가르니에 극장은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원작인 가스통 러루의 1910년 작(作) 동명 소설로도 유명하다. 마침 윤치호가 방문하기 직전인 1896년 5월20일 극장 천장의 대형 샹들리에가 추락해 직원 1명이 숨졌다. 러루는 샹들리에 추락 사건을 소재삼아 ‘오페라의 유령’을 썼다. 1979석 극장 가르니에는 바스티유 오페라극장과 함께 파리 국립오페라발레단의 양대 공연장으로 쓰인다. 규모가 작은 오페라나 발레 작품이 많이 오른다.
◇볼쇼이극장 글린카 오페라 ‘황제를 위한 삶’
사실 윤치호는 6개월 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오페라를 본 적 있다. 1896년 5월29일 오후 8시였다. 니콜라이 2세 대관식 사절로 간 역관 김득련과 함께 궁내부 초청을 받았다. 대표격인 특사 민영환은 빠졌는데, 명성황후 장례 기간이라 공연을 볼 수없다며 거절했다. 윤치호와 김득련은 볼쇼이 극장에 들어간 최초의 한국인이었을 것이다. 오페라와 발레가 연속으로 이어지는 프로그램이었다. ‘음악은 아주 훌륭했다. 러시아 역사의 한 장면이 나왔다. 그리고 나서 훌륭한 발레가 이어졌다. 발레는 아름답고 우아한 청춘의 향연이었다. 그러나 귀여운 10대 소녀들이 나체에 가까운 모습으로 춤췄다.’(국역 윤치호 영문일기 3, 183쪽)
두 사람이 본 작품은 글린카 오페라 ‘황제를 위한 삶’이었다. 1836년 11월27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가 참석한 가운데 볼쇼이극장에서 초연된 작품이다. 17세기 초 폴란드의 침략에 맞서 싸운 농부 이반 수사닌을 주인공으로 한 국민 오페라다. 이어진 발레는 드리고의 ‘진주’였다. 드리고는 마린스키 극장 발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겸 작곡자였다. 윤치호에게 발레복 차림의 여성 무용수 공연은 망측한 일이었을 것이다.
▲1883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 13년 뒤 윤치호, 김득련이 글린카 오페라 '황제를 위한 삶'을 관람했을 때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퍼블릭 도메인
◇'둥근 집에 수만명을 수용할 수있어…'
김득련은 한시(漢詩)로 된 감상문을 남겼다. ‘둥근 집에 수만 명을 수용할 수있어/황제가 친히 임하여 새벽까지 연극을 즐기네/옛일을 공연하는 데 마치 참모습같아/순식간에 변하고 홀리니 다채롭고도 새롭구나’ 두 사람은 다음날인 5월30일 오후 모스크바 궁전 근처 야외 무대에서 열린 오페라 ‘루슬란과 류드밀라’도 관람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윤치호는 일기에 남기진 않았다.
민영환은 명성황후 장례기간이라며 극장 구경을 거절했지만, 수행원들은 관람하도록 허락했다. 민영환 여행기 ‘해천추범’에도 이날 오페라, 발레 공연을 소개하는 내용이 나온다. 서구 근대 문명을 관찰하는 기회로 생각했을 것이다.
윤치호가 글린카와 구노 오페라를 관람한 51년 후, 조선 땅에서 첫 전막 오페라 공연이 이뤄졌다. 1937년 5월26~27일 경성 부민관에서 올린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이었다. 일본인 소프라노 미우라 다마키가 초초상을, 조선인 테너 김영길과 조영은이 남자 상대역 핀커튼을 불렀다. 하지만 연출, 지휘는 물론 오케스트라(동경중앙교향악단)와 합창단(미우라 다마키 합창단)까지 일본 프로덕션이었다. 한국인에 의한 전막 오페라는 해방을 기다려야했다. 1948년 1월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10회 연속으로 공연한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였다. ‘이 땅에 오페라 시대의 문을 열어놓은 역사적 사건’(음악평론가 한상우)이었다.
◇참고자료
김영수, 100년 전의 세계 일주, EBS북스, 2020
국사편찬위원회 편, 국역 윤치호 영문일기 3, 2015
이유선, 한국양악백년사, 음악춘추사, 1985
12.23 음악회 청중의 ‘해괴막측한 狂態’
노래 끝나기 전에 ‘안다 박수’…잡담은 물론 큰 소리로 ‘야지’까지
▲지휘하는 홍난파를 그린 만화. 대중월간지 동광 1932년1월호에 실렸다. 난파는 "음익화에 불가해한 괴풍이 유행하고 있다"면서 일부 청중의 무례한 '야지'를 비판했다.
‘그런데 오늘 저녁에는 너무 떠들어서 하는 사람도 재미가 적었을 터이야.’ ‘애참 왜그리들 떠드는지, 좀 조용히 있었으면 좋겠더구먼’ ‘아직 정도들이 유치하고 음악의 취미를 모르니까 그렇지.’
1921년 1월 잡지 ‘폐허’(2호)에 발표한 민태원 단편 ‘음악회’에 나오는 얘기다. 이 소설은 1920년 5월4일 종로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야나기 가네코(柳兼 子)의 리사이틀을 소재로 했다. 야나기 가네코는 민속학자 야나기 무네요시 아내로 도쿄음악학교를 졸업한 내로라하는 성악가였다. 조선 최초의 독창회로 알려졌다. 하지만 분위기는 청중들이 내는 소음으로 어수선했던 것같다.
◇'브라보 아저씨’에 ‘안다 박수’까지
요즘 예술의전당이나 롯데콘서트홀 같은 공연장에서도 지휘자나 연주자가 연주를 마치기도 전에 브라보를 외쳐 분위기를 흐트러뜨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연주의 여운을 느낄 여유도 없이 찬물을 뒤집어쓴듯 황망하다. 휴대폰 소음은 물론 악장 간(間) 박수도 금물이지만,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 박수를 쳐대는 것도 연주자나 다른 청중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침묵도 연주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근대 서구에서도 음악회 소음은 논란거리였다. 공연장이 사교장 비슷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세기 말이 되면 침묵을 유지하는 게 관례로 자리잡았다. 서양 음악이 도입된 20세기 전반, 이 땅에서 열린 음악회에서도 소음이 골칫거리였다. 낯선 형식에 적응하지 못한 청중들이 소음을 냈기 때문이다.
‘박경희(朴景嬉)양의 노래, 즉 재청했을 때에 부른 노래 ‘쏠벳지에 노래’의 반주가 채 끝나기 전에 박수를 하는 이가 있었다. 언제나 우리는 연주자나 가수가 인사를 끝낸 후에 박수를 해야겠다.’(음악연주회의 소감: 연주자와 청중의 태도를 논함, 조선일보 1938년5월30일) 한 음악회 평자는 신문에 이런 글을 썼다. 소프라노 박경희가 앙코르 요청에 ‘솔베이지의 노래’를 불렀는데, 피아노 반주가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박수를 쳐댔던 모양이다.
◇타인에게 비평 강요
이 평자는 음악회에 와서 이러쿵저러쿵 큰 소리로 연주를 비평하는 청중도 못마땅했다. ‘우리가 대개 음악회는 다 가보는데 청중은 늘 보던 사람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것같다. 이만큼 음악회를 들으러오는 그룹의 사람들은 빼놓지 않고 음악회 구경은 다 간다. 그래서 이 사람들중에서 한 어떠한 공통어가 생긴다. 그것은 ‘아무개가 제일이다’ ‘나는 아무개가 조화’ 이런 말들이다.물론 우리가 비평을 하지 않으면 안되겠지만 아무개가 제일이니까 아무개가 좋으니까 아무개는 볼 것없다고 아주 납작하게 자기 싫어하는 사람을 깎고 심지어 타인에게까지 자기와 같은 노릇을 하자고 하는 사람이 많다.’
음악회장에서 큰 소리로 연주가 엉망이라는 등 떠들면서 자기 생각을 남에게까지 강요하는 청중을 꼬집었다.
◇피아니스트 박경호 ‘일부 청중, 해괴막측한 광태’
좀 더 심각한 경우도 있다. 피아니스트 박경호(1898~1979)가 ‘해괴막측한 광태’라고 지적한 일부 청중들의 행태다.
‘요사이 빈번히 개최되는 음악적 집회에는 의식이 있는 사람으로는 참아볼 수 없는 해괴막측한 광태를 자아내는 일부 청중을 흔히 볼 수 있다. 아무 이유 없이 고함을 벽력치듯 하고 마루를 구르며 심한 자는 사회자나 연주자에게 욕설을 방송하는 것을 음악회에서는 예사로 아는 듯싶다. 이게 무슨 만행이며 부끄러운 일이냐! 자기의 인권을 유린하고 생존까지도 위협하는 자를 만날 때는 찍-소리 한 마디를 변변히 못하는 그들이 극도의 정숙을 요구하는 이런 집회석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용맹스럽고 다변인지 알 수가 없다.’(‘음악회에서 광태를 짓는 형제들에게’1, 동아일보 1928년3월7일)
박경호는 일부 청중의 돌출행위에 대해 ‘왜 그리 무례하고 경박한가’라고 질타했다. ‘절대의 침묵을 요구하는 음악연주시에 조금만 무엇이 이상하면 격장폭소(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뜨림)하며 조금만 무엇이 비위에 틀리면 질성노호를 연발한다. 우리는 감각이 있고 입이 있는 동물인 동시에 상식과 예의가 있는 ‘사람’이니….’ 이런 어수선하고 일촉즉발 분위기에서 연주가 제대로 이뤄질 리없다.
◇홍난파의 탄식, ‘음악회에 불가해한 怪風이 유행’
홍난파는 음악회에서 청중들이 ‘야지’(야유)를 보내는 악습을 지적했다. ‘근일에는 참으로 일종의 악풍(惡風)이 유행되는 것같습니다. 강연회나 음악회나 기타 어느 공중의 좌석을 불문하고 소위 ‘야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도 잘-선용만 하면 결코 불필요한 것은 아니겠지요만은 음악을 듣고서 거기에 무슨 ‘야지’가 소용될까요? 연주자의 연주가 끝나면 박수하는 한편에서는 ‘쉬-쉬-하는 소리가 들립니다.잘 못했으니 박수를 정지하라는 의미일까요?잘했다고 박수 재청함은 물론 가(可)한 일이오, 정히 잘못했으면 박수를 하지 않더라도 역가-그러나 ‘쉬-쉬-’는 무엇인지요? 이러한 불가해한 괴풍(怪風)이 유행이 되더니, 어린 학생들은 잘해도 ‘쉬-’ 못해도 ‘쉬-’ 의례히 악곡의 종곡(終曲)과 같이 붙어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려.’(‘악단의 뒤에서’續, 동아일보 1924년7월21일)
서구 오페라극장에서 마니아들이 맘에 들지 않는 출연자나 제작진에게 야유를 보내는 관습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음악회가 막 꽃피우기 시작한 조선에서 ‘야유’부터 따라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지적이었다. 난파가 ‘야지’를 거론할 만큼, 당시 음악회 청중의 반응이 거칠었던 모양이다.
◇여학생 구경하러 음악회 찾아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는 음악회 관람 목적이 애초부터 딴 데 있는 이유도 있다. 현진건 소설 ‘까막잡기’에는 친구가 음악회 구경가자고 조르자 이렇게 거절한다. ‘내 귀에는 한다는 성악가의 독창이나 돼지 멱따는 소리나 다른 것이 없네. 바이올린으로 타는 좋다는 곡조나 어린애의 앙알거리는 울음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러자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여보게, 음악은 모른다고 하더라도 여학생 구경이라도 가세 그려. 주최가 여학교측이고 보니 그 학교 학생은 물론이겠고, 서울 안의 하이칼라 여학생은 다 끌어올 것일세.’ 음악 감상은 처음부터 관심없고, 이성을 만나러가는 잿밥에만 관심 있으니 분위기가 잡힐 리 없다.
‘음악회에 가는 것은 음악 들으려 가는 것이 아니다…어여쁜 계집을, 잘난 사내를 또 약속한 님을 보러가는 것이다.’(田堂, ‘隨感-음악회’) 어느 음악회에 참가한 필자가 관람기를 쓴 것이다. ‘이 박수하는 사이에 많은 사내의 눈들이 부인석을 향해서 습격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삶에 주린 도시 사람들이여.그러나 그것은 도시인의 향락할 수 있는 자유이다. 허락된 향락이다. 여기에 모인 모두가 그것 때문에 돈을 허비하고 시간을 허비하고 잠을 허비하고 여기에 온 것이다.’
대놓고 연애하러, 구경하러 음악회에 왔다고 고백한다.
서양 음악이 들어온 지 100년이 지났다. 휴대폰 벨 소리나 ‘카톡’같은 생뚱맞은 소음, 여운을 망치는 박수나 ‘브라보’ 함성이 콘서트홀에서 사라지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참고자료
민태원, 음악회, 폐허 2호, 1921.1
田堂, ‘隨感-음악회’, 신민 제17호, 1926.9
12.30 ‘조선의 디즈니’ 꿈꾼 선구자들
1930년대 조선서 인기 누린 미키 마우스…개 주인공 삼은 애니메이션 ‘개꿈’촬영
▲1936년 조선의 첫 유성 만화영화 '개꿈' 촬영 소식을 전한 조선일보 1936년11월25일자 기사. 주인공 개가 양복을 입고 활보하는 만화를 실었다. 임석기씨가 작곡까지 맡았다고 소개했지만, 완성 또는 상영은 못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미키 마우스’는 1928년 상영한 디즈니 만화영화 ‘증기선 윌리’에 등장한 이래 세계 어린이들의 스타가 됐다.동그란 귀에 익살맞은 눈을 가진 생쥐 미키가 천방지축으로 벌이는 장난은 유년의 호기심을 사로잡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던 듯하다. 1930년대 신문에는 미키 마우스와 제작자 월트 디즈니를 소개하는 기사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어린애들이나 어른이나 작금 전 세계인이 허리를 끊을만치 웃기던 미키 마우스외 기다(幾多)의 골계적(骨稽的, 풍자, 해학적) 교향악 필름을 창작한 월트 디즈니가 과연 그 예술적 재능이 인정되어 금회 영국 예술가조합으로부터 표창문을 보내고 동 조합의 명예회원에 추천되었다.’(‘미키 마우스 作者 英 大예술가들이 표창’, 조선일보 1934년6월26일)
영국 예술가조합이 ‘미키 마우스 아버지’ 월트 디즈니에게 ‘영화 예술과 세계 인류의 행복 향상에 기여한 공로’를 표창하고 명예회원으로 추대했다는 외신 보도였다.
▲미키 마우스 10주년 기념행사를 소개한 조선일보 1938년 11월8일자 기사. 미키 마우스 캐릭터 사진을 실었다
◇미키 마우스 탄생 10주년 소개
미국 할리우드에서 열린 미키 마우스 탄생 10주년 기념제 기사도 소개됐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화배우로 누구에게나 귀여움과 재롱을 받는’(‘미키마우스 탄생 10주년’, 조선일보 1938년 11월8일)다고 했다. 하버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월트 디즈니도 기념행사에 참석했다면서 시내에서 미키 마우스 가장 행렬이 열렸다고 소개한다. 미키 마우스 사진도 함께 실었다.
1937년 12월 개봉한 디즈니 히트작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도 소개됐다. ‘허리우드의 위재(偉才)이며 또한 세계적 인기를 한 몸에 끌어모으고 있는 월트 디즈니는 혼신의 정력을 다해서 제작한 최초의 야심적 장편 만화영화 ‘백설희’(白雪姬)(RKO라디오사 제공)는 팬들의 끝없는 기대중에서 근자에 겨우 완성을 하였다고 한다.’(‘白雪姬’의 프레미아’, 조선일보 1938년3월8일) ‘백설공주’를 ‘백설희’로 번역한 것도 흥미롭다. 신문은 ‘백설공주’ 첫 상영에서 일곱 난쟁이로 분장한 배우들이 갖은 애교를 다 부린 덕분에 극장이 웃음바다가 됐다고 소개했다.
◇'미키 마우스’ 패러디한 일본
미키 마우스가 등장한 어떤 영화가 조선에서 상영됐는지는 불명확하다. 1930년대 일본에서 미키 마우스 영화가 파라마운트 사(社)를 통해 상영된 것을 보면, 유학생들은 이미 접했을 것이다. 경성 영화관에서도 상영됐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은 1929년 9월 미키마우스 관련 애니메이션이 상영됐고 1930년 ‘증기선 윌리’가 선보였고 ‘미키 마우스의 오페라 구경’ ‘쥐의 댄스’ ‘미키의 유령의 집’ ‘미키의 킹콩토벌’ 등이 잇달아 소개됐다. 미키 마우스가 얼마나 인기있었던지 1935년 간사이 지역의 스나가와(砂川) 유원지 안내 팜플렛에 미키 마우스가 등장할 만큼, 친숙한 캐릭터로 떠올랐다.
1930년대에 미키 마우스를 본 뜬 일본산(産) 애니메이션이 잇달아 등장한 사실도 흥미롭다. 오이시 이쿠오(大石郁雄) 감독의 1931년 작 ‘쥐의 집보기’가 대표적이다. 1분 10초짜리 짧은 단편으로 둥근 귀, 가는 팔과 다리 등 미키 마우스와 비슷한 쥐가 주인공이다. 모방이나 패러디, 또는 ‘짝퉁’이라는 얘기까지 들을 만하다.
일본은 미키 마우스를 본 뜬 만화영화를 계속 내놓았는데, 1934년작 ‘장난감상자 제3화 그림책 1936년’은 미키 마우스를 악역으로 그렸다. 장난감들의 섬에 쥐가 박쥐를 타고 날아와 섬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섬에 있던 동물들이 거절하자 박쥐, 뱀, 악어 군단을 이끌고 공격하지만, 모모타로의 도움을 받은 동물들이 맞서싸워 승리를 거둔다는 내용이다. 모모타로(桃太郎)는 일본의 전설적 영웅으로 복숭아를 뜻하는 모모와 남자 아이 이름인 타로가 합쳐진 이름이다. 책,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미국, 중국과 갈등을 빚었다.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하면서 국제적 고립을 자처한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는 작품으로 미국을 상징하는 미키 마우스가 가상 적국으로 등장한다. 몇 년 후 태평양전쟁으로 치닫는 전조로도 읽힌다.
▲1937년 12월 개봉한 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들' 포스터./위키피디아.
◇'조선의 디즈니’를 꿈꾼 김용운, 임석기
1936년 조선에서도 디즈니를 꿈꾸며 만화영화 제작에 뛰어든 선구자들이 있었다. 종로구 예지동에 청림촬영소를 세우고, ‘개꿈’이라는 만화영화를 촬영한 김용운, 임석기다. ‘‘미키!마우스’ ‘베티—부—푸’ 등(等)의 외국 만화영화는 이름이 전세계에 펼쳐 세살먹은 아이들도 벌써 주인공의 낯을 익히게끔 되어있다. 만화영화가 보통 영화와 달라 일일히 화가의 수공(手工)을 빌어 수만매(數萬枚)의 그림이 종합(綜合)되어 비로소 한권(卷)의 작품이 생겨나는 만큼 기계문화가 발달된 금일(今日)에 있어 얼마나 힘드는 일인가 하는 것은 더 물을 필요가 없거니와 조선에 있어서는 더구나 이 만화영화의 생산이 일품(一品)도 없었는데 얼마 전부터 이 방면에 뜻을 두고 연구해 오던 김용운(金龍雲),임석기(林錫基) 양씨가 처음으로 부내 예지동 164번지에 청림촬영소라는것을 세우고 작품제작(作品製作)에 골몰하고 있다.’(’조선의 토—키만화 ‘개꿈’의 初登塲’, 조선일보 1936년11월25일)
임석기씨는 작곡까지 겸했다고 한다. 기사와 함께 실린 강아지 일러스트는 익살스럽다. 첫 유성 만화영화가 될 뻔한 ‘개꿈’은 제작이 중단됐거나 상영이 무산된 것으로 보인다.
▲1937년 월트 디즈니가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캐릭터를 소개하고 있는 트레일러 장면./퍼블릭 도메인/.
◇저작권 시비 달고 다닌 디즈니
미키 마우스는 등장 초부터 저작권 시비를 달고 다녔다. 1936년 호주의 라디오 제작사가 자사 신제품에 ‘미키! 마우스’라는 이름을 붙였다가 디즈니에 의해 고발당했던 모양이다. ‘디즈니사는 호주 ‘상공성상표국’에 ‘미키 마우스는 이미 일개의 생존체가 되어있다. 남의 이름을 제 맘대로 사용하는 것은 법률적으로 묵시할 수없다’하는 항의에 대하야 라디오 회사측이 질랴고 할 까닭이 없다’(‘말 못하는 미키, 상표 때문에 소송’, 조선일보 1936년 6월21일)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라디오 제작사는 ‘미키 그림을 차용해선 안될지는 모르나 이름이 법률에 저촉되느니 어쩌니 하는 것은 디즈니씨가 등록상표와 저작권의 구별을 분간 못하는 소리’라고 반박했다.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미키 마우스를 둘러싼 저작권 논쟁이 조선에도 소개될 만큼 유별났다.
◇디즈니 창업 100주년
올해는 디즈니 창업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디즈니는 1923년 10월16일 스물 두살 월트 디즈니가 형 로이와 ‘디즈니 브라더스 스튜디오’라는 영화사를 개업한 날을 창사 기념일로 기념한다. 만화, 영화로 시작한 디즈니는 ‘디즈니랜드’ 놀이공원, 방송으로 사업을 확대하면서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산업 강자로 떠올랐다. 미키마우스, 도널드 덕, 인어공주로 세계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작년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키이우 대피소에서 일곱살짜리 아이가 부른 ‘겨울왕국’ 노래 ‘렛 잇 고’(Let it go)가 세계인의 공감과 연민을 자아낸 것처럼, 디즈니는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뛰어넘는 유니버설한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있다. 미키 마우스가 이 땅에 소개된 지 90여 년 만에 우리도 세계를 향해 K팝, K드라마 같은 한류를 발산하는 나라가 됐다. 격세지감, 감개무량이다.
◇참고자료
정향재, 193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 속 ‘미키마우스’-캐릭터의 수용과 변화양상을 중심으로-, 일본어문학 제95집,2021, 11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