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문화일보) 2023-12/
12-01(금) 총선 ‘물갈이’ 역설

오승훈 논설위원
여야가 최근 내년 총선을 위한 공천 기준들을 속속 내놓고 있다. 현역 의원 교체, 이른바 ‘물갈이’가 시작됐다. 국민의힘은 현역 의원 112명 가운데 최대 46명(41%) 컷오프(공천 배제) 가능성이 나온다. 당무감사위원회가 지난달 27일 46곳 당협위원장 교체를 12월 중순쯤 구성될 공천관리위원회에 권고하기로 했다. 여기에 현역 의원이 상당수 포함돼 있고, 그렇지 않은 현역이라도 지지도가 현저히 낮으면 대상이 될 수 있다. 민주당도 당무위원회를 열어 현역 하위 평가자 20%에 대해 페널티를 강화하기로 했다. 이 경우 30명 이상이 물갈이된다고 한다.
여야 모두 다선 의원들을 겨냥한 불출마나 험지 출마 압박이 거세고, 청년·여성 할당 등도 반영될 수 있어 물갈이 경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런 와중에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현역 국회의원 가운데 의정 활동 실적이 저조하거나 사회적 물의를 빚은 의원 22명을 ‘자질 의심’ 의원으로 분류해 명단을 공개했다. 자질 검증 항목 7가지 중 1개 이상 부적합을 받은 의원은 173명(54.7%)이었다.
그렇다면, 새 인물을 많이 공천할수록 제1당이 될 확률이 높을까. 현역 의원 교체율을 보면 지난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38%·통합민주당 19%, 19대 총선은 새누리당 47%·민주통합당 37%, 20대 총선은 새누리당 24%·더불어민주당 33%, 21대 총선은 미래통합당 37%·민주당 28%였다. 국민의힘 전신들은 현역 의원 교체율이 높았을 때인 18대(153석), 19대(152석) 때 승리했고, 민주당 역시 20대(123석) 때 다수당이 됐다. 21대 때만 민주당이 교체율이 낮았으면서도 다수당(180석·위성정당 포함)이 됐다.
유권자들은 여전히 새로운 인물을 희망한다. 깊은 정치 불신 탓이다. 지난 10월 연합뉴스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현재 지역구 의원이 다시 출마하면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53.3%가 ‘다른 인물을 뽑겠다’고 답했다. ‘현역’을 택한 응답자는 27.7%에 그쳤다. 그렇다고 물갈이와 국회 쇄신 강도가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21대 국회에 처음 입성한 초선은 155명으로 전체의 52%에 달했으나 정풍운동과 같은 초선들이 쇄신 바람을 일으킨 사례는 여야 공히 찾기 힘들다.
12-04(월) 사건 브로커와 경찰 승진

김세동 논설위원
법원 검찰 출입기자 2년 차이던 2005년 11월 단군 이래 최대 법조 브로커라는 윤상림 사건이 터졌다. 고검장 출신 변호사, 현직 판사, 경찰 수뇌부 등 고위층 인사들이 뒷배가 되고 그와 돈거래를 한 게 드러나 큰 충격을 받았다. 힘이 센 사람들이 브로커에게 수천만 원을 보낸(받은 게 아니라) 사실도 드러났는데, 말 못할 약점을 잡혔거나 큰 수익이 나는 데 투자한 것으로 짐작됐다. 한동안 잠잠하던 대형 사건 브로커가 18년 만에 광주전남 지역에서 다시 나타났다.
전남경찰청장을 지낸 K 전 치안감이 지난달 15일 경기 하남 검단산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면서 광주전남 지역 60대 S 씨가 연루된 수사 무마, 승진 청탁 의혹이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경찰청장(치안총감)과 7명밖에 없는 치안정감을 제외하고 넘버3인 치안감(정원 32명) 출신 K 씨는 전남경찰청장 재직 때 경정 2명, 경감 3명의 승진 청탁과 함께 3000만∼2000만 원씩을 브로커를 통해 받은 혐의로 입건된 상태였다.
지역 사건 브로커로 활동한 S 씨는 승진 청탁 외 가상화폐 투자 사기 혐의를 받은 T 씨로부턴 18억 원이 넘는 돈을 받아 수사 무마 로비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사업가로 활동하면서 골프 모임을 10여 개 만들어 경찰, 검찰 수사관, 기초단체장 등 정치인, 지자체 공무원들과 어울리며 마당발 노릇을 했다고 한다. 사건 브로커와 경찰 집무실에서 함께 사진을 찍은 현직 치안감, 여러 번 식사를 한 치안정감, 수사 무마 청탁 대가로 4000만 원을 받고 구속된 경무관 등 100여 명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브로커를 통해 3000만 원, 2000만 원을 주고 경찰 간부인 경정, 경감으로 승진한다는 데 놀라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경찰 정원이 13만 명 정도 되고, 경정 이하 승진은 지방경찰청장이 결정하니 이런 일이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 차제에 경찰 승진제도를 대대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 상급자의 평가·추천 등이 승진에 결정적이다 보니 비리가 작용할 여지가 커진다. 승진 심사위에 내외부 인사를 더 많이 넣고, 심층면접 단계를 더 확장하며 객관적인 평가 지표를 더 늘려야 한다. 지방경찰청장이 마음대로 낙점할 수 있게 하는 승진대상자 5배수 추천도 확 줄여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도록 해야 한다.
12-05 中 온라인 쇼핑 대습격

이철호 논설고문
국내 온라인 거래는 쿠팡과 네이버로 양분되는 흐름이었다. 지난해 시장 점유율은 쿠팡 24%, 네이버쇼핑이 23%로 압도적이고,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신세계(쓱닷컴·G마켓·옥션 합산) 10%, 11번가가 7%를 차지했다. 최근 11번가는 최대주주 SK마저 손을 털면서 강제 매각될 운명이다. 이런 가운데 중국 알리바바 계열사인 알리익스프레스(이하 알리)가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온라인 해외 직구는 2019년 3조6000억 원에서 올해는 5조 원, 2025년엔 10조 원으로 전망될 만큼 폭발적인 성장세다. 소비자들이 ‘해외 직구가 25% 정도 싸다’(한국소비자원 조사)고 느끼기 때문이다. 온라인 해외 직구는 이제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 중국 광군제뿐 아니라 일상적 소비습관으로 자리 잡는 추세다. 쿠팡의 로켓직구 등 국내 업체들도 해외 직구에 뛰어들 정도다.
그동안 중국 해외 직구는 국내 짝퉁 적발 건수의 77%를 차지하고 환불·교환도 쉽지 않아 외면받아 왔다. 하지만 코로나 기간에 국내 소비자들이 온라인 쇼핑에 익숙해진 데다 저성장과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값싼 제품을 찾는 소비 행태가 뚜렷해지고 있다. 알리는 중국 현지 대량 구매로 같은 제품을 미국 아마존보다도 20∼30% 싸게 내놓을 만큼 가격 파괴가 최대 경쟁력이다. 초저가 전략 덕분에 한국의 알리 앱 사용자는 지난해 10월 297만 명에서 1년 만에 613만 명으로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알리의 공습이 아마존마저 위협하자 미 의회는 관세 방망이를 꺼낼 움직임이다. 알리가 서울 부근에 대형 물류 창고를 물색하면서 국내 업계도 긴장하고 있다. 최대 2주일인 배송기간을 3∼5일로 단축하고, 짝퉁 이미지를 씻기 위해 무료 배송 및 반품 서비스도 확대하기 시작했다. 시장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알리의 한국 배송을 전담하는 CJ대한통운은 배송량이 올 들어 2.6배로 늘면서 최근 한 달 새 주가가 48% 급등했다. 알리의 참전이 국내 ‘네·쿠(네이버·쿠팡)대전’에 새 변수로 등장했다. 소비자 선택이나 이익 극대화에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불과 6년 전 중국의 사드 보복에 따른 영업정지와 불매운동으로 롯데마트와 이마트가 빈손으로 쫓겨난 기억이 남아 있다. 알리의 거침없는 습격에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까닭이다.
12-06 화성行 우주식량

문희수 논설위원
나사(미 항공우주국)는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거액의 상금을 내건 ‘딥 스페이스 푸드 챌린지’를 통해 미래 우주식량 개발에 나선 것이다. 화성 유인 탐사를 하려면 우주비행사 4명이 우주 공간에서 3년 동안 먹을 식량이 필요해, 이를 위한 대안을 찾으려는 것이다.
이 챌린지에는 32개국에서 300개 넘는 팀이 참여했는데, 8개 팀이 선발됐다. 이들은 내년 8월 각자의 우주식량 개발 방식을 시연할 예정이라고 한다. 광합성을 이용한 식물 재배, 폐쇄된 수조에서 물과 영양분 손실 없이 식물을 키우는 수경재배, 각종 미생물·균류·해조류 등의 배양과 식용 곤충 사육, 단백질 합성 등의 아이디어가 제시됐다고 한다. 미생물학·유전학·우주공학 등 첨단 기술이 뒷받침돼야 실현 가능한 과제들이다. 공상과학영화 ‘마션’에서 우주비행사가 화성 기지에서 감자를 키우는 모습을 상기시킨다.
나사는 아르테미스 계획에 따라 달 유인 탐사를 거쳐 2030년대 말∼2040년대 초 화성 유인 탐사에 나설 계획이다. 나사의 초안에 따르면 내년에 유인 탐사선을 보내 달에 상설 우주기지를 만든 다음, 이 기지를 거점으로 10년 안에 화성 탐사선을 발사한다는 것이다. 달∼화성을 왕복하는 데만 2년 가까이 걸리는데, 화성에 착륙하는 우주비행사 2명은 한 달 정도 머물며 탐사 활동을 벌일 예정이라고 한다. 한국도 2035년 화성 탐사선을 발사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런 탐사 일정에 맞춰 세계적으로 우주식량 개발이 한창이다. 한국 역시 한국해양과학기술원과 민간 스타트업 등이 수경재배, 실제 고기와 유사한 인공 고기 제조, 미세조류인 스피룰리나 배양 등 다양한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우주를 향한 인류의 도전은 속속 현실화하고 있다. 미국의 무인 탐사선인 보이저 1·2호는 이미 해왕성 등 태양계를 넘어 인류가 상상하기만 했었던 다른 행성계로까지 날아가고 있다. 유인 탐사는 현재 달이 당면 과제지만, 인류의 눈은 이제 달을 넘어 화성을 향한다. 물론 가까운 시간은 아니지만, 그렇게 먼일도 아니다. 그런데도 한국은 우주항공청특별법조차 거야(巨野)가 지배하는 국회를 넘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추세는커녕 민간조차 못 따라가는 국회의 후진성 탓에 우주 후진국으로 뒤처지고 있다.
12-07 권옥연 탄생 100주년

김종호 논설고문
“사람들은 내 그림의 색채가 매우 절제됐다고 한다. 팔레트에 짜놓은 원색 물감을 보면, 나는 왠지 거부감을 느낀다. 무섭기까지 할 때도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것들을 반죽해서 나의 톤을 만든다.” 한국 추상미술 1세대로, 동양과 서양,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독창적 예술을 구축한 초현실주의 선구자 권옥연(1923∼2011) 화백의 말이다. ‘벌거벗은 사람’이라는 뜻의 ‘무의자(無衣子)’를 호로 삼은 그는 “인생이란 그저 물거품, 운명에 역행하지 않고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흘려보내야 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애수에 찬 그림이 특징인 그는 ‘로맨티스트 화가’였다. “화가는 정신연령이 다섯 살을 넘으면, 그림을 못 그린다”고도 했다. 상념에 잠긴 인물화도 많이 그린 그가 창출해 구사한 청회색·암회색·녹회색 등은 ‘권옥연 그레이(grey)’로 일컬어진다. 미술평론가 황인은 이렇게도 전해준다. “권옥연은 ‘고유의 체취’를 중시했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그 사람만의 목청, 그 사람만의 톤이 낼 수 있는 표현이 제대로 된 그림’이라고 했다. 그의 목청을 그림 속의 빛깔로 나타낸다면, 오래된 기왓장을 닮은 청회색일 것이다.” 이윤찬 갤러리 바이올렛 대표는 이런 찬사도 보냈다. “프랑스 출신의 화가 앙리 마티스가 ‘원색의 마술사’라면, 권옥연은 아궁이에 짚불이 타고 난 후의 ‘잿빛 연술사(演術士)’다. 그의 캔버스는 무인도의 안개와 같다. 그 무인도에는 상처 입은 예술혼의 쉼터가 있고, 내면의 희구와 갈구에 대한 동경(憧憬)의 짙은 그림자가 숨어 있다. 아름다운 여인의 외면을 덧칠하고 또 덧칠해서 상처 받을까 봐, 고운 회색의 연포(煙包)로 치장한다.”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가 서울 삼청로 현대화랑에서 지난 11월 15일 시작됐다. 오는 16일까지다. ‘파리의 노점’ ‘몽마르트르 거리 풍경’ ‘부인의 초상’ ‘절규’ ‘달맞이꽃’ ‘귀향’ ‘풍경’ ‘소녀’ ‘여인’ ‘첼로와 여인’ 등 대표작 20여 점을 선보인다. “아득한 옛날. 신라의 조상들이 매만지며 흔들던 토기 방울, 그 방울 속에서 시공을 초월한 소리가 은은히 내 귓전을 통해 가슴 가득 스며든다. 우리의 가난하면서도 풍성한 하늘, 늘 푸른 조상의 얼, 끊이지 않는 유한의 정(情), 또는 샘물”이라던 그의 말도 되새기게 하는 자리다.
12-08(금) ‘서울의 봄’과 ‘아수라’

이현종 논설위원
김성수 감독이 만든 영화 ‘서울의 봄’이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있다. 12·12 군사반란이라는 다소 진부한 주제를 다루었지만, 픽션과 논픽션을 적절히 조합해 황정민·정우성이라는 흥행 보증 배우들이 주연을 맡으면서 인기 가도를 달리고 있다. 특히, 12·12를 잘 모르는 20·30대에게 인기가 있다고 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6일 페이스북에서 “영화 ‘서울의 봄’을 봤다. 참으로 뼈아픈 역사다. 아픈 역사일수록 우리는 배우고 기억하고 교훈 삼아야 한다”고 했다.
몇몇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비롯한 진보 진영 인사들은 영화 ‘서울의 봄’을 통해 윤석열 정부 비판에 열을 올리고 있다. 정청래 의원은 “군복 대신 검사의 옷을 입고, 총칼 대신 합법의 탈을 쓰고 휘두르는 검사의 칼춤을 본다”고 했고, 같은 당 김용민 의원도 “내년 총선에서 여당이 승리하면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할 것”이라고 영화를 현실화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김 감독은 지난 2016년 영화 ‘아수라’를 만들었다. 개봉 당시보다 이재명 대표의 대장동 사건이 터지고 난 뒤 이 영화가 현실과 똑같다는 말이 퍼지면서 다시 인기를 끌었다. 주인공도 똑같다. 부패한 안남시장 박성배(황정민)와 부패경찰 한도경(정우성)이 등장한다. 대규모 개발사업을 둘러싼 시장의 탐욕과 부패 경찰, 조폭의 결탁을 다룬 것인데 영화의 무대인 안남시는 안산과 성남을 합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데 5일 저녁 대리운전을 해 집으로 가던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이 트럭과 충돌하는 교통사고가 나자 또, 이 영화가 소환되고 있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국민 다수가 ‘이거 아수라 속편 아니냐’는 식으로 생각할 것이다. 민심이 그렇다는 것”이라고 했다. 하 의원은 “(이 대표 주변에는) 의문의 죽음들이 많다. 이재명 부근에 의문사들이 많기 때문에 계속해서 의심의 눈초리로 (국민 다수가) 쳐다볼 것이라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이 대표 관련 수사 과정에서 4명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등 석연찮은 죽음이 많다. 사고가 나던 날 이 대표가 경기지사 시절 단골 이던 세탁소 주인이 검찰의 법인카드 수사 와중에 유서를 남기고 잠적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마치 영화가 현실처럼 보인다.
12-11(월) 21세기판 로빈 후드?

이미숙 논설위원
로빈 후드는 부자들의 재산을 약탈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의적(義賊)의 대명사다. 귀족과 지주의 재물을 빼앗아 빈민층에 나눠준 로빈 후드의 모험담은 중세 영국에서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인데 소설과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다. 미국 뉴욕에는 로빈후드재단이란 이름의 자선단체도 있다. 1988년 월스트리트의 헤지펀드 거부들이 설립했는데 부자들의 돈으로 가난한 이들을 돕는다는 취지에 따라 이 이름이 붙여졌다. 설립 이후 30억 달러(약 3조9000억 원) 이상을 모금해 빈곤층 지원에 썼다. 특히, 이 재단에는 오프라 윈프리 등 명사들도 참여하고 있다. 헤지펀드 거부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합법적으로 번 돈을 자발적으로 출연했다는 점에서 폭력적으로 강제 약탈한 재산을 빈민 구제에 쓴 옛날 로빈 후드와는 품격이 다른 자선사업가들이다.
실리콘밸리엔 신판 로빈 후드가 있다. 효율적 이타주의(effective altruism) 신봉자들이다. 효율적 이타주의란 “열정에 따른 자선보다 데이터에 기반한 이성적 자선이 더 큰 효과를 낸다”는 이론으로, 윤리학자 피터 싱이 저서 ‘효율적 이타주의자’에서 처음으로 주창했다. 이후 ‘냉정한 이타주의자(원제 Doing Good Better)’를 쓴 윌리엄 맥어스킬 옥스퍼드대 교수가 운동을 이끌고 있다. 그는 “세상을 바꾸는 건 열정이 아닌 냉정이고, 기부를 하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는 메시지로 실리콘밸리의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 FTX를 설립한 샘 뱅크먼프리드가 이 운동을 위해 FTX퓨처펀드를 만들어 기부에 적극 나선 게 대표적이다.
최근 오픈AI 이사회에서 CEO 샘 올트먼 해고 파동을 주도한 인사들도 효율적 이타주의 신봉자들이다. 타샤 매콜리, 헬렌 토너 등은 AI 위험성을 막기 위한 선택이라며 CEO 해고를 밀어붙였다가 역풍을 맞았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오픈AI 사태를 “효율적 이타주의 신자들과 비신자들의 갈등”으로 규정한 이유다. 이후 매콜리와 토너 등은 오픈AI에서 축출됐고, 뱅크먼프리드는 FTX 파산 후 사기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공익을 위한 것이라면 어떤 수단도 합리화된다’ ‘자선을 하기 위해서라면 어떻게 돈을 버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비뚤어진 신념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로빈 후드의 후예라 할 만하다.
12-12 국회의원 인성검사

오승훈 논설위원
인요한 위원장이 이끄는 국민의힘 혁신위원회가 11일 혁신안을 발표하고 활동을 종료했다. 당의 수용 여부를 놓고 논란이 큰데, 여기서도 주목받지 못한 혁신안이 국회의원 자격 시험제다. 지난해 9월 최재형 의원의 혁신위가 제안했던 것이지만 이번에는 빠졌다. 지난해 6·1 지방선거 때 시행됐던 ‘공직후보자 기초자격평가’를 국회의원도 치르라는 것이다.
애초 선출직 공무원에게 자격시험이 필요하냐는 목소리가 컸다. 공천 절차에서 검증이 이뤄지고, 선거운동에서도 TV토론 등을 통해 충분한 유권자 판단 과정이 있다는 이유였다. 선량(選良)은 국가고시나 자격·면허증 획득과는 달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특권이 큰데도 당연히 이행해야 할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 빈발하고, 자질이 의심되는 말과 행동, 비리 연루로 지탄받는 의원이 갈수록 늘어가는 것이 현실이다. 최소한의 검증 과정을 두는 것이 전체 국회의원의 수준 저하를 막고, 국회의 위상과 역할에 긍정적일 것이라는 주장이 만만찮게 제기돼 왔다.
국회의원은 국회의 구성원인 동시에 각 개인 자체가 헌법기관이다. 피선거권 제한을 받는 사람을 제외한 18세 이상 국민은 누구나 국회의원에 출마할 수 있다. 성범죄자, 청소년 관련 범죄자 등 각 당이 공천배제 원칙으로 정한 제한 규정이 있으나 가장 문호가 넓다. 입법활동 보장을 위해 불체포특권, 면책특권을 누린다. 연간 1억4689만 원의 세비와 수당 등을 받고 의전 혜택도 많다. 4급 보좌관부터 인턴까지 총 9명의 보좌진을 둘 수 있다. 그러나 청렴의무, 국가이익 우선한 양심적 직무 의무, 지위 남용 금지 의무(이상 헌법 제46조)는 물론 품위 유지 의무(국회법 제25조)를 어긴 사례가 허다하다.
제21대 국회에서 부정부패와 막말로 53건의 의원 징계안이 발의됐다. 결론이 난 건 회의 진행 방해의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 징계 1건뿐이다. 3건은 윤리심사자문위가 ‘의원직 제명’을 건의했으나 모두 임기를 마치게 됐다. 코인 거래 김남국 의원, 후원금 횡령 윤미향 의원, 피감기관 공사 수주 박덕흠 의원이다. 3번 제소된 의원도 있다. 여성 보좌관을 성추행해도 의원직을 유지 중이다. 중도에 의원직 박탈이 어려운 시스템이라면, 먼저 인성·적성검사라도 하자는 말이 나올 만하다.
12-13 김의겸의 손흥민 모독

이현종 논설위원
대한민국에서 건드리지 말아야 할 대상이 몇 명 있다. 손흥민과 BTS, 김연아, 이대호 등이 대표적이다. 만약 이들을 비난하거나 자신과 비교하기라도 하면 여지없이 비난의 화살이 날아온다. 그만큼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국민의 자랑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얼굴 부상을 당하고도 마스크를 쓰고 몸이 부서져라, 조국의 영광을 위해 뛰는 손흥민의 모습을 보면서 애국심이 무엇인지 뜨겁게 느낀다.
소속팀인 영국 프리미어리그 토트넘에서 보여주는 그의 리더십은 자랑스럽기도 하다. 최근 토트넘이 5연패에 빠지자 한 현지 축구평론가가 손흥민의 리더십을 비판했다가 뭇매를 맞기도 했다. 5연패 끝에 다친 가운데도 지난 11일 뉴캐슬과의 경기에서 손흥민의 1골 2도움으로 4-1로 이기자 안지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쏘니, 아픈데도 나와서 골 넣는 것 봤지? 이게 바로 리더십”이라고 극찬했다. 자신보다 다른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고, 그들에게 성과를 돌리는 손흥민의 겸손함에 영국이 매료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9일 군산에서 열린 김의겸 의원 북 콘서트에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김 의원의 ‘청담동 술자리’ 잇단 헛발질을 손흥민·이대호 선수에 비유하며 옹호했다. 조 전 장관은 “언론에서도 김 의원을 보고 헛발질을 하는 것을 가지고 조롱도 하고 희화화를 하던데 저는 웃긴다고 생각한다”며 “손흥민 선수가 슛할 때 다 골이 되지 않는다. 아마 확률도 계산해 보시면 10번에 1번 들어갈지 모르겠다”고 했다.
앞서 김 의원은 “한 번이라도 골 넣어보려고 하다 보면 헛발질도 하지 않나”라며 “그래서 여러분들께서 좀 이쁘게 봐주셨으면 한다”고 했다. 그러나 손흥민·이대호 선수는 각고의 노력 끝에 성과를 만들어냈는데, 김 의원은 최소한의 사실 확인 노력도 하지 않고 의혹을 제기한 것이라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재명 대표 영장판사가 한동훈 법무부 장관 동기라고 했다가 바로 거짓으로 드러났고, 청담동 술자리·EU 대사 발언 왜곡 등 그가 헛발질 한 내용은 조금만 사실 확인을 해도 발생하지 않았을 일이다. 그저 상대방을 비난하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마구 던지는 가짜뉴스를 귀중한 손흥민의 골과 비교하다니 어불성설이다. 더는 영웅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기 바란다.
12-14 정치 테마주 전성시대

이철호 논설고문
미국 워런 버핏이 한국 주식 투자자였다면 대성공을 거두었을까? 주식 커뮤니티 사이에는 “몇 번이나 깡통 찼을 것”이란 분석이 대세다. “미국 증시는 실적을 따라가는데 한국 주가는 훨씬 복잡한 고차원 함수”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정치 테마주’다. 최근 배우 이정재가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식사를 하고 찍은 사진 한 장으로 대상홀딩스 우선주는 7번 연속 상한가를 찍었다. 8거래일 동안 7670원에서 5만6900원까지 7.4배나 오르는 마법을 부렸다. 내년 총선 한 장관 출마 유력→배우 이 씨와 친한 고교 동창→이 씨가 사귀는 연인→그 아버지의 회사가 수혜를 본다는, 복잡한(?) 추론 결과였다.
정치 테마주의 단골은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이 대주주인 ‘안랩’이다. 2011년 3월 1만6500원이던 주가는 서울시장 보궐선거와 이듬해 대선 때까지 안 의원 몸값이 수직 상승하면서 딱 1년 만에 10배나 올라 16만7200원을 찍었다. 2017년 대선 때도 한 달 만에 2배 넘게 뛰었다. 지난해 3월 대선 후보 때도 6만 원대 주가가 사상 최고치인 21만8500원까지 치솟았다. 정치권에 “안 의원이 안랩 주가를 띄우려고 대선·총선 출마를 반복한다”는 터무니없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다.
해외에도 정치 테마주가 없는 게 아니다. 미국 대선 때 공화당 후보가 유력하면 담배, 총기, 군수업체 주가가 오른다. 민주당 버락 오바마 후보가 대세를 굳혔을 때는 의료보험 개혁 공약에 따라 의료·제약주가 뛰었다. 한국은 공약이 아니라 주로 학연·지연을 따지는 게 독특하다. 최고경영자뿐만 아니라 사외이사까지 옷깃만 스쳐도 정치 바람을 탄다. 수많은 학습 효과 끝에 정치 테마주 종말이 처참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2017년 대선 후 문재인 테마주는 54.8%, 안철수 테마주는 60.7% 폭락했다. 2022년 대선 이후 윤석열 테마주는 60.2%, 이재명 테마주도 최고치 대비 73.3% 폭락했다. 그럼에도 내년 총선을 앞두고 다시 정치 테마주 전성시대다. 테마주로 돈을 버는 건 소수의 작전 세력과 대주주밖에 없는데도 불나방처럼 돈 놓고 돈 먹기에 뛰어든다. 이번에도 임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이 5배 이상 오른 우선주를 전량 매도하면서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증시에 낡은 정경유착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12-15(금) 송영길의 블랙코미디

김세동 논설위원
2021년 4월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혐의를 받는 송영길(60)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달 9일 자신의 출판기념회에서 50세인 법무부 장관을 언급하며 ‘어린놈’ ‘건방진 놈’ 등 막말을 했을 때 ‘5선 의원에 인천시장, 집권당 대표를 지낸 사람 수준이 저 정도밖에 안 되느냐’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후 검찰 소환 때 하는 행동을 보니 거의 개그맨 같다.
송 전 대표는 지난 8일 검찰에 출두해 묵비권을 행사했다. 여당 대표에 당선된 전당대회에서 6600만 원을 뿌렸고, 자신의 외곽 조직을 통해 7억6300만 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를 받는 송 전 대표는 검찰이 관련자들을 조사하고 있어 아직 사건의 정점인 자신을 소환하기엔 많이 이른 5월 초, 6월 초 두 차례 검찰청 앞으로 가서 “주변 사람들 그만 괴롭히고 나를 불러라”고 해 놓고, 정작 검찰에 소환돼선 입을 닫은 것. 자진 출두는 쇼였을 뿐이라는 자백인가. 코미디가 따로 없다.
송 전 대표는 또, 자신의 사건과 아무 상관 없는 김건희 여사를 끌고 들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그는 김 여사 수사를 촉구하면서 “일부 검찰이 대통령 일가의 비리를 방어하는 경호부대 노릇을 자처하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문재인 정권 때 친정부 검찰이 1년 반을 뒤졌으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에 김 여사가 연루된 증거를 찾지 못했다. 91명의 투자자 중 한 명에 불과한 김 여사를 물고 늘어지는 건 자신의 정당법·정치자금법 위반, 뇌물 수수 등의 범죄 혐의를 물타기 하려는 정치 선동으로 읽힌다.
그는 수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전당대회는 자율성이 보장된 당내 잔치”라며 “이를 가지고 특수부가 수사하는 것은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검찰을 비난했는데, 어이가 없다. 매년 수백억 원의 국고보조금을 받는 원내 1당 대표를 뽑는 선거에서 돈이 뿌려졌다면 정당제도와 민주주의의 근간을 무너뜨린 중대 범죄다. 정당법이 당내 선거에 금품 제공을 지시·요구한 자를 징역 5년 이하에 처하도록 규정한 이유다. 송 전 대표가 인천시장에 재직하던 2010∼2014년 무렵 같은 이름의 개그맨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비만 체형에 흑인 같은 심한 곱슬머리로 ‘개콘’ 등에 출연했던 송영길에게, 피의자 송영길을 ‘개그맨’에 비유한 점에 대해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
12-18(월) DJ 이종환의 쉘부르

김종호 논설고문
현악기 중심의 유려한 연주가 돋보이는 프랑스의 프랑크 푸르셀 악단은 폴 모리아 악단 등과 함께, 무드(mood) 음악의 세계 정상이다. 한국 라디오 방송에서도 음악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시그널 뮤직’으로 흔히 사용하는 이유다. MBC FM 심야방송 ‘별이 빛나는 밤에’도 그중 하나다. ‘고마워, 셰리’라는 뜻의 프랑스어 ‘메르시 셰리(Merci Cherie)’가 제목인 곡으로, 오스트리아 출신 가수 우도 위르겐스 노래를 프랑크 푸르셀이 1968년 편곡·연주했다. 심금을 울린다. 그 프로 진행자인 ‘별밤지기’ 제10대 김기덕이 1979년 선곡해, 현재 제27대 김이나까지 변함없다. 1969년 명사 초청 대담 프로로 출발한 ‘별밤’은 전설적 DJ 이종환(1937∼2013)이 1970년 제3대 별밤지기를 맡으며 음악 전문으로 전환했다.
‘영원한 DJ’로 불린 이종환은 MBC ‘밤의 디스크 쇼’ 첫 DJ도 1981년에 맡아 1989년까지 진행했다. 프랑크 푸르셀 악단 연주곡 ‘안녕 졸리 캔디(Adieu Jolie Candy)’를 시그널 뮤직으로 삼았다. 팝송은 라디오나 해적판 LP로 말고는 접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 방송에서 영국 출신 그룹 비틀스의 명곡 ‘예스터데이(Yesterday)’를 소개하며, 중저음의 감성적 음색인 그가 곁들인 해설의 시작은 이랬다. “가버린 날들과 함께 모두 잊은 것 같았던 옛이야기, 또다시 내 곁에 머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쩔 수 없이 나는 가버린 날의 진실 앞에 머뭅니다”. 이어서 읊은 대목 “지금 생각하면 울어버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나는 가버린 날의 진실을 믿고 있습니다”까지 받아 적은 청취자도 있다.
그는 1973년 서울 종로 2가에서 문을 열었다가 1975년에 명동으로 옮긴 라이브 음악 감상실 쉘부르를 통해서도 뛰어난 청춘 가수를 200명 넘게 배출했다.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항구도시 이름을 딴 그 감상실의 무대에 세우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수만·채은옥·남궁옥분·임창재·강은철·강승모·권태수·이태원·위일청·김범룡 등이 그렇게 빛을 봤다. ‘국민 MC’였던 허참도 쉘부르 출신이다. 올해가 그 쉘부르 탄생 50주년, 이종환 타계 10주년이다. 이종환의 2004년 저서 ‘팝송은 죽었다’도 절판됐다. 그의 목소리로 소개하던 음악을 찾아서 듣고 싶어지는 겨울이 깊어 간다.
12-19 하이브리드車 뜨는 이유

문희수 논설위원
자동차시장의 격변기다. 전기차의 질주가 주춤해진 대신 하이브리드차가 뜨고 있다. 소비자들이 높은 가격·충전소 부족 등으로 전기차의 구매를 꺼리자 하이브리드차가 유력한 대안으로 부상했다. 판도 변화는 통계로 드러난다. 올 3분기까지 배터리 충전이 가능한 ‘플러그인’을 포함한 하이브리드차 글로벌 판매 대수는 42.3%나 늘어 전기차 판매 증가율(35.2%)을 앞섰다. 하이브리드차 총 판매량은 856만 대를 넘어, 723만8000대를 기록한 전기차를 처음 추월했다. 전기차 판매량은 2019년 165만여 대에서 지난해 800만 대를 돌파해 3년 만에 4배 이상으로 급증해오다 올해 둔화했는데, 하이브리드차가 그 공백을 메우는 양상이다.
하이브리드차는 내연기관차와 전기차의 장점을 다 갖춘 친환경차로 평가된다. 가격은 내연기관차보다 다소 비싸지만, 전기차보다는 많이 싸다. 시동 걸 때와 저속 주행 때는 전기만 쓰고, 고속 주행 때 연료(대부분 휘발유)를 쓴다. 이 덕에 연비가 휘발유·경유차보다 ℓ당 6∼7㎞나 높아 전기차처럼 연료비 절감 효과가 크다. 연간 2만㎞ 주행 때 연료비를 90만 원 가까이 줄일 수 있다. 또, 전기모터를 쓰기 때문에 운전 때 조용하다. 배터리는 20만㎞ 정도 주행할 때까지는 교체 없이 쓸 수 있다. 공영주차장 주차료 50% 감면 등 혜택도 있다.
글로벌 업체들도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다. 하이브리드차에 강점이 있는 세계 1위 일본 토요타의 재부상이 두드러진다. 특히 토요타는 전기차 전환이 늦어 초비상이었는데, 경쟁력을 만회할 시간을 벌게 된 셈이다. 폴크스바겐·GM·포드 등 미국과 유럽 완성차업체들도 전기차 투자 계획을 줄줄이 늦추며 반전을 모색하고 있다. 현대차·기아는 전기차·하이브리드차 모두 강점이 있는 만큼 오히려 기회를 만들 수 있다.
새해는 가격 부담을 크게 줄인 소형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차의 정면대결이 예상된다. 실제 두 차종 모두 신차들이 대거 출시될 예정이다. 사실 전기차는 지금 속도 조절일 뿐,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관건은 역시 경쟁력이다. 새해 전기차의 명운은 각국의 보조금 감축에 맞춰 가격을 얼마나 낮추고, 충전소 등 인프라를 확대해 소비자의 편의성을 얼마나 높일 수 있느냐에 달렸다.
12-20 성 김의 수구초심

이미숙 논설위원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참모 출신인 마크 리퍼트(50) 전 주한 미국대사는 두산 베어스 열혈팬이다. 대사 시절 두산 베어스 응원을 위해 잠실야구장을 찾았던 그는 퇴임 후에도 야구장을 찾아 경기를 관람했다. 2017년 대사 퇴임 후 보잉 부사장을 거쳐 지난해부터는 삼성전자 북미법인 대외협력팀장 겸 본사 부사장으로 활동 중이다. 성 김(63) 전 주한 미국대사는 최근 현대자동차 자문역으로 위촉된 데 이어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일하게 된다. 국무부 퇴직 절차를 밟고 있는 그는 내년 1월부터 태평양의 신설 조직인 글로벌미래전략센터를 이끌 예정이다.
리퍼트 전 대사에 이어 김 전 대사가 이 같은 선택을 한 것은 한국 기업의 글로벌 위상이 높아진 덕분이라는 점에서 뿌듯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리 한미 양국이 동맹이라지만 전직 주한 대사들의 직무 일관성(integrity) 측면에서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양국의 이해관계가 갈릴 때 미국 정부의 일원으로 한국을 설득·압박하던 대사들이 정반대로 한국 기업을 위한 대미 로비의 최전선에 서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최근 워싱턴에서 국무부 출신 및 싱크탱크 인사들을 만났을 때 두 전직 미국 대사의 행보가 화제가 됐다. 리퍼트 전 대사의 경우 보잉 부사장을 거쳐 삼성전자에 안착했는데 추석이나 설 때 한복 차림의 자녀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려 한국 사랑을 전했던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삼성전자행은 지한파 인사의 행보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이 선택으로 미국의 선출직에 도전할 기회를 스스로 닫았다는 평이 나왔다. 김 전 대사의 경우, 공직을 떠나 민간 부문으로 가기에 앞서 ‘이직(移職)의 시간’을 갖는 게 좋았을 것이란 지적이 있었다. 개인의 선택이 최우선시되는 게 미국이지만, 주인도네시아 대사를 끝낸 후 곧바로 한국 회사로 간다는 얘기가 나온 데 대한 불편한 기류도 느껴졌다.
김 전 대사는 중학교 때 서울을 떠나 1980년 미국 시민권자가 됐고, 검사로 일하다 1988년 국무부에 들어갔다. 이후 6자회담 수석대표에 이어 한국·필리핀·인도네시아 대사까지 지낸 뒤 한국으로 다시 터전을 옮긴다. 20년은 한국인으로, 40여 년은 미국인으로 살아온 이의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해야 할까?
12-21 트럼프 비결은 실용주의

오승훈 논설위원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성공에 대해 좌파나 우파나 일관되게 오판했다.” 미국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 매체인 뉴욕타임스가 최근 보수 성향의 온라인 매체 콤팩트(Compact)의 편집장 매슈 슈미츠의 기고문 ‘트럼프의 인기 비결은 강권주의(authoritarianism)가 아니다’를 실었다. 유력 신문이 앙숙 관계인 트럼프에 대한 지지 글을 다룬 것 자체가 화제지만, 조 바이든 대통령보다 지지율이 4∼5%포인트 높게 나오는 현상을 분석한 시각도 흥미롭다. 슈미츠는 “트럼프가 우세한 것은 미국인들이 강권주의에 굴복하기를 바라거나, 극우파의 생각을 수용할 준비가 돼 있기 때문이 아니다”며 “예측할 수 없는 종류의 온건이지만 실용주의자(a pragmatic if unpredictable kind of moderate)로 인식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민주당은 트럼프를 민주주의 파괴자로 본다. 힐러리 클린턴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바이든은 ‘가장 인종차별적인 대통령’이라고 비난했다. 국내에서도 ‘위험한 민주주의’(야스차 뭉크),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스티븐 레비츠키) 등의 책들이 주목을 받았고, 강권 통치자들의 부상과 민주주의 쇠퇴 현상의 핵심으로 트럼프 현상을 거론하는 게 주류다.
하지만 슈미츠는 최근 여론조사에서 트럼프에 대해 ‘매우 보수적’이란 응답은 27%에 불과하고,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응답이 57%였음을 강조한다. 트럼프의 온건함은 반공주의자이면서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의 실용주의와 닮았단다. 의료정책 등에서 공화·민주 양당의 극단적 주장을 배격하고 온건한 정책을 추진했다. “트럼프의 성공은 유권자들의 온건함에 대한 열망과 극단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회의적 인식을 증명한다”는 주장이다.
트럼프는 4건의 기소 사건에서 91건의 범죄 혐의를 받고 있다. 출마 자격 시비도 있다. 19일에는 콜로라도주 대법원이 주(州)의 공화당 대선 경선 투표용지에서 트럼프를 제외할 것을 주정부에 명령했다. 항소하면 판결 효력이 미뤄지지만, 적지 않은 리스크다. 그런데도 가장 강력한 대통령 후보다. 내년 11월 5일로 예정된 미국 대통령 선거전은 이미 진행 중이다. 양당의 첫 경선 일정이 내년 1월 15일 아이오와주에서 시작된다.
12-22(금) 안철수와 이준석

이현종 논설위원
대통령도 사람이다. 특히 파란만장한 현대사로 인해 역대 대통령끼리 상종을 피할 만큼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런 얘기들이 전해진다. 물론 정식 기록이 없는 경우도 있지만, 상호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어 계속 회자된다.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고 5개월이 지난 1998년 7월 31일 전직 대통령을 초청해 청와대에서 만찬을 함께 했다.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등 전직 대통령 모두가 참석했다. 묘한 분위기는 안 봐도 짐작이 갈 정도다.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DJ는 사형 선고를 받고 미국 망명까지 해야 했다. YS도 전 전 대통령이 가택연금을 하는 바람에 23일 동안 목숨을 건 단식을 했다. 이렇게 악연이 많은 사이였지만 ‘정치 고수’들이라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전 전 대통령이 “경제도 모르는 사람이 대통령을 해서 나라가 절단 났다”고 비판하자, YS가 크게 불쾌감을 토로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공식 발표는 없었지만, 이명박 정부였던 2010년에도 청와대에서 전직 대통령 연회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대놓고 “전두환이는 와 불렀노? 대통령도 아니다. 죽어도 국립묘지 못 간다”고 망신을 주었다는 얘기가 야사(野史)처럼 전해진다. 평생 경쟁과 협력을 반복했던 김영삼·김대중 사이에는 그와 유사한 일화가 수없이 많다.
현재 정치권에서 가장 앙숙은 안철수 의원과 이준석 전 대표라는 데 이견이 없다. 안 의원은 이 전 대표를 “응석받이”로, 이 전 대표는 안 의원을 “아픈 사람” “병×”이라고 치부했다. 악연은 2016년 총선 때 서울 노원병에서 맞붙으면서 시작됐다. 결과는 이 전 대표의 완패. 이후 2018년 바른미래당에서 한솥밥을 먹게 됐지만, 동시에 두 사람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이후 사사건건 갈등을 빚다가 최근엔 한 식당의 옆방에서 서로 밥을 먹다가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급기야 이 전 대표는 20일 한 유튜브 방송에서 당시 일을 얘기하다가 안 의원을 겨냥해 “이 ××가”라는 욕설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번엔 이 전 대표가 사과하긴 했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다. 한때 ‘○○○ 현상’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정치적 기대를 모았던 두 사람의 행태에서 정치 퇴행의 생생한 현장을 보는 듯하다.
12-26(화) 차량 번호판과 反민생 국회

이철호 논설고문
자동차 종합검사에서 ‘뒷번호판 봉인 훼손’으로 퇴짜를 맞았다. 두어 달 전 후진 주차를 하다 보도블록 경계석에 뒷범퍼가 부딪히면서 파손된 모양이다. 40여 년 운전하면서 차 뒷번호판에 봉인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봉인이 없으면 과태료가 50만 원”이라는 겁박에 놀라 왕복 1시간 거리의 자동차 등록센터로 갔다. 800원짜리 봉인 키트를 구입·장착하고 재검사를 받느라 귀찮고 번거로웠다. “이미 폐지됐어야 하는 낡은 검사 항목인데….” 검사소 직원도 혀를 차며 도장을 찍어줬다.
뭔가 억울했다. 알고 보니 자동차관리법 제10조 4항인 ‘등록번호판의 부착 또는 봉인을 하지 아니한 자동차는 운행하지 못한다’는 폐지될 운명이었다. 1962년에 도입된 이 조항에 대해 국토교통부는 지난 1월 2일 ‘국토교통 규제개혁위원회 심의·의결을 거쳐 자동차 봉인제를 폐지하겠다’는 보도자료를 뿌렸다. 친절한 설명도 담겨 있었다. ‘61년 전 도입됐으나, 최근 정보기술의 발달로 번호판 도난 및 위·변조 차량의 실시간 확인이 가능해졌다’ ‘위·변조 방지 효과가 크게 높아진 반사필름식 번호판이 2020년 7월 도입됐다’ ‘봉인 발급 및 재발급에 연간 36억 원의 수수료 등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봉인 부식으로 녹물이 흘러내려 번호판 미관을 해친다’ ‘현재 전 세계에서 한국과 중국·일본에만 남아 있는 자동차판(版) 인감도장’…. 한마디로 국제적으로 뒤떨어진, 낡고 부끄러운 규제라는 것이다. 정부는 “킬러 규제부터 없애라” “규제를 푸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라는 윤석열 대통령 지시에 따라 즉각 지난 2월 자동차관리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나도록 바뀌지 않고 있다. 국회는 항상 까마귀 고기를 먹는 모양이다. 어떤 법안이 넘어와도 표가 안 되면 그냥 깔아뭉개고 본다. 검사소 직원은 “요즘 가벼운 접촉사고나 보도블록 경계석 때문에 의외로 뒷번호판 봉인 손상이 많다”고 했다. 실제로 2021년 재봉인 신청자가 7만8000명을 넘었다. 신규 차량 174만3000여 대까지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시간 낭비, 돈 낭비다. ‘민생 국회’라는 말이 무색하다. 쓸데없이 번호판 봉인 고치느라 한겨울 추위에 떨었던 나와 같은 불쌍한 운전자는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
12-27 송영길·이화영의 아내

김세동 논설위원
문재인 정부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 선출 전당대회를 앞두고 300만 원이 든 돈봉투 20개를 의원들에게 돌리고, 자신의 외곽 조직을 통해 불법 정치자금 7억63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송영길 전 대표의 아내가 “(남편이) 정치적 기획 구속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22일 남편이 수감된 서울구치소 앞에서 ‘송영길 검찰탄압 저지 비상대책위원회’가 연 기자회견에 참석해 “남편이 그동안 윤석열 대통령,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비판하고 공격하니까 발을 묶고자 총선을 앞두고 구속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미 윤관석 의원과 강래구·이정근 씨 등 돈봉투를 만들고 뿌린 피고인들이 대부분 자백했고 증거도 상당수 확보된 마당에 남편을 과잉 평가하면서 앞뒤 안 맞는 말을 하는 송 전 대표 아내가 딱하긴 하지만, 국민의힘처럼 “민주주의 근간을 뒤흔든 중대 범죄 앞에서도 부끄러움을 내던진 부창부수”라고 비판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가족을 편드는 건 인지상정 아닌가. 그리고 송 전 대표 부부만 뭐라고 할 것도 아닌 게 조국 전 장관, 최강욱 전 의원, 한명숙 전 총리 등 사례를 보면 법원에서 유죄가 선고되거나 대법원에서 확정돼도 역사의 법정 운운하며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지 않았나.
이화영 전 경기도 부지사 처지에서 보면 송 전 대표가 대단히 부러울 것 같다. 이재명 경기지사 재임 때 대북사업과 방북 비용을 쌍방울그룹에 대납하게 한 혐의로 재판받고 있는 이 전 부지사는 지난 7월 25일 이 대표 연관성을 법정에서 진술하려다 아내로부터 무서운 질타를 받았다. 그의 아내는 변호인단 해임신고서를 몰래 제출하는 등 남편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를 하고 해임신고서를 취소하겠다는 남편을 향해 “정신 차리라” “변호사한테 놀아나지 말라”고 크게 소리쳐 판사와 방청객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변호사이자 5선 의원에 인천시장, 여당 대표를 역임하는 등 86운동권의 대표 격인 송 전 대표의 정치생명이 거의 끝난 것 같다. 하지만 전후 관계에도 안 맞고 사리에도 어긋나지만 무조건 남편을 편드는 아내를 보면 실패한 인생만은 아닌 것 같다. ‘이 대표를 끌고 들어가지 말고 당신이 중형을 감내하라’는 식의 이화영 씨의 아내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12-28 박인환 ‘세월이 가면’

김종호 논설고문
모더니즘 시인 박인환(1926∼1956)의 고향인 강원 인제군 박인환문학관에는 술집 은성을 재현해놓았다. 배우 최불암의 모친이 6·25전쟁 후 황폐해진 서울 명동에서 운영하던 대폿집으로, 당시 예술가들의 사랑방이던 공간의 시간과 장소를 옮겨 보여준다. 그 유리창에는 시 ‘세월이 가면’ 시작 부분이 적혀 있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박인환이 ‘천재 시인 이상 추모의 밤’부터 4일간 폭음한 끝에 그해 3월 20일 타계하기 1주일 전, 마지막으로 남긴 시다.
그는 극작가 이진섭에게 은성에서 시를 건넸다. 이진섭은 그 자리에서 곡을 붙였고, 함께 있던 가수 나애심이 불렀다. 그 노래 음반이 나온 것은 박인환 별세 2개월 뒤였다. 그 후로 현인·현미·조용필·양희은·채은옥 등 많은 가수가 한두 단어를 살짝 바꾼 곡으로 리메이크해 불렀다. 가장 널리 알려지고 여전히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듀엣 뚜아에무아 1971년 앨범에 실렸던 버전이다. 박인희의 청아한 음색에 이필원의 짙은 감성이 나지막하게 얹힌.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하는 시 ‘목마와 숙녀’도 그의 대표작이다. 그는 서울 낙원동에서 서점 마리서사(書肆)도 운영했다. 시인 오장환의 남만서점을 물려받아, 프랑스의 여성 화가 겸 시인 마리 로랑생의 이름을 붙여 바꿨다. 마리는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와 사랑했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흐른다/ 내 마음속 깊이 기억하리/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온다는 것을/ 밤이 오고 종소리가 울리고/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하는 기욤의 시 ‘미라보 다리’가 나온 것도 그 결과다.
친구와 영화와 위스키를 좋아한 낭만주의자 박인환은 “우리는 위스키를 마신다. 첫 잔은 과거를 위해, 두 번째 잔은 오늘을 위해, 내일 그까짓 건 신경 쓸 필요 없다”고도 했다. 이제 서울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바뀐 망우리공동묘지에 그를 안장할 때 동료들이 관 속에 위스키도 넣어준 배경이다. 또 한 해가 저물어간다. ‘세월이 가면’을 읊조리게도 하며.
12-29(금) 세밑에 찾은 ‘사유의 방’

문희수 논설위원
나무에 까치밥으로 남았던 감도 이제 보기 힘들다. 2023년이 이틀 남은 세밑 가지다. 올해도 예외 없이 다사다난했다. 한 해를 돌아보며 자성의 시간을 갖게 된다. 얼마 전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유의 방’을 다시 찾았다. 박물관은 대부분 무료지만, 특히 사유의 방은 하루에도 수백 명씩 찾는다는 명소다. 본관 1층에 들어서면 복도에 우뚝 서 있는 고려 때의 경천사 십층석탑이 압도적이다. 희귀한 대리석 탑이라는 유산의 귀중함과 함께 복제품이 아닌 실물이란 사실에 새삼 경탄하게 된다.
경천사 탑을 뒤로한 채 2층 상설전시장에 오르면 복도 맨 끝이 사유의 방이다. 어두컴컴한 짧은 복도를 지나 전시장에 들어서자, 두 불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1400년의 긴 세월을 건너온 금동반가사유상이다. 문화재 지정번호 폐지 전엔 왼쪽의 불상은 국보 78호, 오른쪽 불상은 국보 83호로 불렸다. 각각 6세기 후반과 7세기 전반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전시 공간엔 황톳빛의 은은한 조명이 두 불상이 자리 잡은 타원형 무대를 비출 뿐, 아무 장식도 없다. 무대를 한 바퀴 돌면서 불상의 뒷면을 볼 수 있는 것도 이례적인 경험이다.
두 불상은 모두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에 걸치고, 오른쪽 손가락을 볼에 살짝 붙인 채 묵언 수행하고 있다. 찬찬히 보니 두 눈을 뜬 듯 만 듯 감은 채 신비한 미소를 짓고 있다. 바로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다. 무언의 화두를 던지는 불상들을 따라 묵상에 빠져 본다. 잡념과 단절한다는 게 더 맞겠다. 캠핑장의 불이 아니라, 불상을 넋 놓고 바라보는 ‘불멍’이다. 불현듯 저 자리에 앉으면 이 무념의 끝에 닿을까 부질없는 생각이 피어오른다. 역시 아무 대답이 없다. 과연 우문현답(愚問賢答)이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통로에 있는 기념품점은 추억을 간직하려는 관람객들로 제법 붐빈다. 불상 모형 코너는 필수다. 그렇지만 관람료는 무료인데 합성수지로 만든 조악한 모형들은 값이 싼 게 6만5000원이다. 아쉽다. 반값으로 낮추면 두 배 이상 팔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박물관 밖 공기는 쌀쌀했지만 한층 신선하다. 평일 방문이어서 더욱 고즈넉했다. 연말연시 휴일 집에서 불상을 떠올리며 묵상이라도 한 번 해봐야겠다. 더 나은 새해가 되기를 기원하면서….◎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