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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조선일보) 2023-12/ 12.01(금) 키신저와 한반도 - 12.30(토) 노래가 돌아보게 한 가족 사랑

상림은내고향 2023. 12. 22. 16:53

만물상(조선일보) 2023-12/

12.01(금) 키신저와 한반도

▲일러스트=이철원

 
 

6·25전쟁이 터졌을 때 헨리 키신저가 미 대통령의 귀를 잡고 있었다면 휴전선은 지금보다 150~200km 북상(北上)했을지 모른다. 키신저는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미국이 중국을 자극하지 말고 청천강과 함흥만을 연결하는 선(線)이나 남포~원산 주변의 북위 39도를 기점으로 휴전했어야 한다고 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 국민은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을지 모르나 결과적으로 현명한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1954년 하버드대 박사가 될 때부터 강대국 위주의 세력 균형에 관심을 가진 키신저에게 중견 국가나 약소국은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2017년엔 미국과 중국이 ‘북한 정권 붕괴와 주한 미군 철수’를 맞바꾸는 ‘빅딜’을 해야 한다고 했다. 당사국인 한국의 입장은 무시한 채 패권 국가로 떠오른 중국을 인정, ‘거인’들끼리 동북아 안보를 결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TIME지 표지에 20번 넘게 등장할 정도로 화려한 경력을 가진 그에게 가장 굴욕적인 순간은 1973년 노벨 평화상 수상이다. 그가 베트남 평화협정의 공으로 레 둑 토 월맹 정치국원과 함께 노벨상을 받게 되자 노벨위원회 위원 2명이 항의의 의미로 사퇴했다. 뉴욕타임스는 그가 남미 군부 정권을 지지하고 캄보디아 비밀 폭격 작전 등에 책임이 있다며 “노벨 전쟁상을 받았다”고 조롱했다. 결국 키신저는 시상식에 참가하지 못했고, 1975년 베트남 적화 후 노벨상 반납 의사를 밝혔다.

 

▶30일 키신저가 100세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은 올 초 “꺼지지 않는 호기심으로 세상과 역동적으로 소통하는 것”을 그의 장수 비결로 꼽았다. 축구 팬인 그는 자신의 독일 고향 축구팀의 평생 후원자 겸 명예회원으로 지냈다. 여성에게도 호기심이 많아 국무 장관으로 재직 중에도 틈틈이 연예인들과 데이트를 즐겨 신문 가십난에 오르내렸다. 공직에서 물러난 후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며 재산을 약 5000만달러(약 646억원) 규모로 불렸다.

 

▶키신저의 호기심이 마지막으로 도달한 곳은 인공지능(AI)이었다. 그는 90세가 넘으면서 AI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 2021년 에릭 슈밋 전 구글 CEO 등과 ‘AI의 세계’를 출간했다. 지난 5월 100세 기념 인터뷰에서 “역사상 적군을 완파할 능력이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제는 AI 때문에 그런 한계가 없어졌다”고 경고했다. 키신저가 최후까지 관심을 갖던 AI가 국제 문제에서 그에 버금가는 통찰력을 발휘할지 궁금해진다.

이하원 기자

 

 

12.02(토) ‘정조의 꿈’이 현실로 된 화성

▲일러스트=이철원

 
 

경기도 화성(華城)의 이름은 조선 정조가 작명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으로 옮겨 현륭원을 조성했다. 정조는 능을 보호할 성곽 터를 둘러보면서 장자의 화인축성(華人祝聖) 고사를 떠올렸다. 화(華) 지방 제후가 요 임금에게 부귀, 장수, 다산을 기원했다는 내용이다. 정조는 ‘백성은 왕실의 안녕을, 임금은 백성의 번영을 기원하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의미로 ‘화성’이라 이름 지었다. 풍요의 고을이 되라는 염원을 담은 셈이다.

 

▶정조의 바람과 달리 현대사에서 화성은 ‘오욕’에 시달렸다. 1986~1991년 사이 화성군 태안읍 일대에서 10건의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잔혹하게 살해된 여인들 사체가 농수로, 논바닥 등에서 잇따라 발견돼 전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2003년 ‘살인의 추억’이란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화성 매향리 일대는 1951년부터 54년간 주한 미군 사격장으로 쓰였다. 운동권 학생들이 몰려와 “미군 철수”를 외쳤다.

 

▶2000년대 들어 환골탈태의 싹이 텄다. 삼성전자가 화성에 반도체 공장을 지었다. 반도체 초호황으로 기흥 공장(용인) 생산 능력이 한계에 이르자, 기흥 공장 인근의 화성 땅 17만 평을 매입, 반도체 공장을 지은 것이다. 2002년부터 화성공장에서 300㎜ 웨이퍼를 양산, 생산 원가를 획기적으로 낮췄다. 현재 삼성전자 본사는 수원에 있지만 반도체 사업 본진은 화성이다. 작년 6월 EUV(극자외선) 공정으로 3나노 파운드리 제품을 세계 최초로 출시한 곳도 화성 공장이다.

 

▶2003년 화성 남양만 매립지 106만 평에 현대차의 연구개발(R&D)센터인 남양연구소가 들어섰다. 현대차가 세계 5대 자동차 메이커로 거듭난 힘은 8000명의 연구원들이 불철주야 연구하는 남양연구소에서 나왔다. 현대차는 최근 24조원을 투자하는 전기차 공장 신설 계획을 발표하면서, 화성시를 생산 기지로 낙점했다. 화성시는 반도체와 자동차, 우리나라 양대 산업을 모두 가진 유일한 도시다. 화성시의 역사는 산업화 시대 최대 공업 도시로 부상한 울산의 진화 과정과 비슷하다.

 

▶2001년 시 승격 당시 21만 명에 불과했던 화성시 인구는 올해 100만 명을 돌파한다. 양만이 아니라 질도 특A급 도시다. 재정자립도 전국 1위(61%), 지역내총생산(GRDP) 전국 1위(82조원), 아동 인구 비중 전국 1위(20%). 화성 시민의 평균연령은 38.8세로 전국에서 가장 젊다. 정조의 작명이 230년 만에 현실이 됐다. 풍요의 꿈을 실현한 힘은 결국 기업에서 나왔다.

김홍수 논설위원

 

 

12.04(월) 대한민국 소멸?

▲지난해 신생아 수는 25만명을 밑돈다. 합계출산율 0.7명으로 세계 최저 출산율을 기록했다. 한국이 흑사병으로 인구가 급감한 14세기 유럽보다 더 심각한 인구 감소기를 맞고 있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사진은 신생아의 발. /픽사베이

 
 

▲일러스트=이철원

 

독설가로 유명한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가 지난해 5월 X(트위터)에 출산율이 가장 낮은 한국과 홍콩을 꼽으며 “출산율이 변하지 않는다면 3세대 안에 한국 인구는 현재의 6% 밑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현재 5100만명인 우리나라 인구가 300만명 정도로 쪼그라든다는 것이다. 머스크는 출산율이 낮은 일본과 이탈리아도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부부 2명에 자녀 두 명이면 인구수가 유지될 듯하지만 태어난 아기가 모두 성년까지 자라는 게 아니라서 대체 출산율을 2.1명으로 잡는다. 현재 우리 출산율은 0.7명으로 떨어졌다. 이대로면 대략 한 세대마다 유소년 인구가 3분의 1로 준다. 지난해 태어난 아기는 25만명이 채 안 된다(24만9186명). 2070년에 태어날 아기는 연간 10만명 정도라고 한다. 이런 추세를 멈추지 못한다면 100년 전으로 돌아가는 날도 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 한반도 인구가 1330만명이었고 1920년에 1700만명이었다. 머스크의 악담을 웃어넘길 수만은 없다는 얘기다.

 

▶1960년에 우리나라 출산율은 6.16명에 달했다. 현재 아프리카 국가들의 출산율과 비슷하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는 표어까지 도입해 강력한 산아제한을 실시한 바람에 출산율이 1970년에 4.5명, 1984년에는 대체 출산율 수준인 2.1명으로 뚝 떨어졌다. 많이 태어난 아기 덕에 1949년 2000만명을 갓 넘은 우리나라 인구는 2012년에 5000만명을 돌파했다. 60여 년만에 인구가 2.5배로 불었다. 인구 증가와 경제 성장이 맞물려 국부가 빠르게 커졌다.

 

▶하지만 대체 출산율 수준에서 멈추지 않고 2001년에 출산율이 1.3명으로 하락하면서 2020년을 기점으로 인구 감소기에 접어들었다. 문제는 인구 감소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가 ‘한국은 소멸하는가’란 제목의 칼럼에서 대한민국 출산율이 0.7명으로 지속되지는 않겠지만 2060년대에 인구가 3500만명 정도로 줄 것이라는 추산은 현실적으로 보인다고 했다. 대략 1970년대 중반으로 회귀하는 셈이다.

 

▶스웨덴의 부부 학자 알바 뮈르달·군나르 뮈르달은 1934년 작 저서 ‘인구 위기’에서 “출생률 저하를 막으려면 무(無)자녀를 추구하는 복잡한 심리적 동기를 없애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했다. 자녀를 가짐으로써 드는 비용을 줄여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나라 전체를 가족 친화적 사회로 쇄신하는 일대 혁신이 이뤄져야 ‘대한민국 소멸’에 브레이크가 걸릴 것이다.

강경희 기자

 

 

12.05  8개 면에 쓴 키신저 부고

▲일러스트=이철원

 
 

한 분야를 오래 맡아 취재하다 보면 ‘이런 사람의 인생은 잘 정리해서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려면 취재원에 대한 깊은 공부가 필요하다. 문학을 담당하던 시절 필자는 박경리·박완서·이청준 세 작가의 부고 기사를 썼다. 인생과 작품 세계를 파악하고 작가에 대한 평론까지 대강 읽어 두었는데도 준비 부족을 절감했다. 준비가 돼 있지 않으면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없는 게 부고 기사다.

 

▶영미권 언론은 부고 기사에 각별한 정성을 쏟는 것으로 유명하다. 16세로 미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가 된 엘리너 스미스에 대한 뉴욕타임스 부고 기사는 놀랍게도 그녀가 만 20세였던 1931년에 처음 작성됐다. 스미스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할 경우에 대비해 미리 써 뒀고, 이 글을 80년간 보관하면서 이후의 삶까지 차곡차곡 더해뒀다가 2010년 별세하자 완성된 부고 기사를 냈다. 뉴욕타임스 부고 담당 기자들의 세계를 소개한 다큐멘터리 영화 ‘오빗’에 나오는 실화다.

 

▶미국 외교의 거목 헨리 키신저가 지난달 29일 별세한 뒤 뉴욕타임스에 실린 부고는 이런 전통을 새삼 돌아보게 한다. 다음 날 1면 스트레이트를 포함해 3개 면에 발자취를 냈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글 말미에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싣겠다’고 예고했다. 다음 날 1면 포함 8개 면에 펼쳐진 부고는 키신저의 ‘미니 전기’였다. 이 중 6개 면을 30년 기자 생활을 통해 키신저를 꾸준히 만나고 취재한 외교 전문 데이비드 생어 기자가 썼다.

 

▶부고만 쓰는 기자를 따로 두는 곳도 많다. 부고 기사에 실리는 사연들에 대한 독자의 관심도 크다 보니 부고 전문 기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와 TV 드라마가 제작될 정도다. 부고 기사만 따로 모은 서적 출간도 활발하다. 뉴욕타임스 부고 기사는 정확하기도 하지만 흡인력 있는 스토리로도 유명하다. 몇 해 전엔 1851년 창간호부터 2016년까지 165년간 보도한 부고 기사를 모아 ‘뉴욕타임스 부고 모음집’이란 책도 냈다.

 

▶유명인만 대상으로 삼는 것도 아니다. 부고 기사를 1000건 넘게 쓴 월스트리트저널의 제임스 해거티 기자는 평범한 이들의 죽음에서도 의미 있는 이야기를 발굴한다. 115세로 타계한 할머니에 대해 그가 쓴 기사 첫 문장은 ‘온갖 뉴스와 논평에 시달리는 시대에 소셜 미디어에 접속하지 않으며 TV도 거의 보지 않았다’로 시작된다. 해거티는 “누구나 책 한 권만큼의 이야깃거리가 있고 어떤 인생이든 남기고 가는 메시지가 있다”고 했다.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과 존중이 이런 전통을 빚어낸다.

김태훈 논설위원

 

 

12.06  90세 현역들 ‘수퍼 에이저’

▲일러스트=이철원

 
 

지난 5월 93세 워런 버핏이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총회를 주재했다. 버핏은 영업실적을 보고한 뒤, 주주와의 질의응답 시간을 통해 5시간 동안 미·중 관계, 달러의 미래, 인공지능 등 세상만사에 대한 자기 견해를 밝혔다. 인생에서 큰 실수를 어떻게 피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자기 부고 기사를 미리 써보고, 그 내용에 맞게 살도록 노력하라”고 ‘오마하의 현인’다운 답을 내놓기도 했다.

 

▶올해 95세 홍콩 재벌 리카싱은 아시아의 워런 버핏으로 불린다. 그는 남다른 통찰력으로 인터넷 전화 스카이프(2005년), 페이스북(2007년), 화상회의 플랫폼 줌(2013년)에 투자해 대박을 터트렸다. 최근엔 인공지능(AI) 산업에 대한 투자를 지휘하고 있다. 헤지펀드 대가 조지 소로스는 93세임에도 현역 펀드매니저로 뛰고 있다. 미국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은 92세까지 폭스 회장직을 수행했다. 영화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93세임에도 ‘2번 배심원’이란 영화를 제작 중이다.

 

▶한국에도 놀라운 90대 현역들이 있다. 90세 태영그룹 창업자 윤세영 회장이 5년 만에 CEO로 복귀했다. 그룹 모태 태영건설이 경영난을 겪자 구원투수로 등판한 것이다. 윤 회장은 매일 헬스장에서 1시간씩 근력 운동을 하고, 골프장 18홀을 걸어서 돌 정도로 체력이 좋다. 91세 가천대 이길여 총장은 대학 축제장에서 싸이의 말춤을 추며 ‘지구 최강 동안’을 자랑했다. 동원그룹 김재철(88) 회장은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내 꿈의 정점”이라며 해운사 HMM 인수전을 진두 지휘하고 있다.

 

▶미국 은퇴자협회가 11월 호 잡지에 수퍼 에이저(super ager) 특집 기사를 냈다. 수퍼 에이저란 나이가 80~90대인데 뇌 기능이 청년 못지않은 사람을 뜻한다. 미국 아인슈타인 의대가 수퍼 에이저 1만 명을 조사한 결과 운동, 독서, 취미생활을 즐기며 잠을 잘 자는 공통점을 확인했다. 수퍼 에이저의 뇌에선 기억, 직관적 판단을 관장하는 뉴런의 밀도가 더 높았다. 유전자 덕도 있는 셈이다.

 

▶”만약 당신에게 차가 한 대뿐이고, 평생 그 차만 타야 한다면 엄청 그 차를 아낄 것입니다. 당신은 평생 몸 하나만으로 살 것입니다. 50살부터 관리하는 건 소용없습니다. 이미 녹슨 뒤이기 때문입니다.” 워런 버핏의 말이다. 유전 요인은 어쩔 수 없지만, 혈압·혈당 관리, 운동·명상을 통한 스트레스 관리, 잠 잘 자기, 노안·난청 적극 대처 등이 세계 뇌건강협회(GCBM)가 추천하는 수퍼 에이저의 생활양식이다.

김홍수 논설위원

 

 

12.07 국방과학연 창립 멤버 강춘강씨

▲일러스트=이철원

 
 

1971년 12월 16일 청와대에서 소총·박격포 시제품 전시회가 열렸다. 시제품을 가져온 국방과학연구소(ADD) 연구진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작업복은 기름과 땀에 절었고 고약한 냄새까지 풍겼다. 4주 동안 집에 못 가고 무기 개발에 매달리느라 면도, 이발, 목욕, 세탁을 못 했다. 구상회 박사는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꼴”이라고 회고했다. 대통령은 개의치 않았다. “금년도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환호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ADD를 세운 건 자주국방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1971년 11월 ADD에 소총과 박격포 국산화를 지시하며 “연말까지 시제품을 보고 싶다”고 했다. 소총 한 자루 만들어본 적 없는 ADD에 날벼락이었다. 미군 무기를 분해해 역설계한 도면을 들고 청계천에 가 부품을 하나하나 만들어야 했다. 박 대통령은 ADD를 수시로 찾았다. 나라는 가난했지만 연구진에겐 파격적 보수와 고급 관사를 제공했다. 해외 유수의 대학·연구소에서 모여든 두뇌들은 고생을 마다 않고 헌신적으로 일했다. 과로, 무기 폭발 사고 등으로 순직한 직원도 많다.

 

▶애국심과 헌신이 넘쳤던 ADD 출신들은 자긍심도 남달랐던 것 같다. ADD 창립 멤버인 재미교포 강춘강씨가 평생 모은 연금저축 100만달러 전액을 ADD에 기부한 사연이 본지에 소개됐다. ‘나라에 보탬이 되자’는 생각으로 1970년 ADD 창립과 함께 합류한 강씨는 신응균 초대 소장의 비서로 일했다. 1972년 퇴직 후 미국에 정착한 그는 80세가 되고 얼마 전 유언장을 쓰다가 기부 결심을 굳혔다. 한국 무기들이 전 세계 방산 시장을 휩쓴다는 소식에 애국심이 차올랐다고 한다.

 

▶방위산업의 기반은 중화학공업이다. 박 대통령이 ADD보다 4년 앞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세운 이유기도 하다. 미국이 1000만달러 원조를 제안하자 KIST를 세워달라고 역제안했다. 과학계에선 “장영실 뒤엔 세종이, KIST 뒤엔 박정희가 있다”고 했다.

 

▶57년간 KIST는 생명공학연구소·전자통신연구원 등 전문 연구소 16곳을 분가시켰고, 석·박사급 과학 인재 4000여 명을 길러냈다. 포항제철, 현대조선의 밑그림을 그린 것도 KIST다. 1980년대 삼보컴퓨터를 창업한 이용태 전 회장을 비롯해 기업인도 다수 배출했다. KIST 직원들도 2012년부터 ‘월급 1% 기부’로 돈을 모아 공익 재단을 설립했다. 직원의 60%가 동참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경제 기적은 이렇게 이름 없이 헌신해 온 분들 덕분일 것이다.

이용수 논설위원

 

 

12.08 ‘세계 최강 투기 본능’

▲일러스트=이철원

 
 

가상화폐 비트코인 가격이 6000만원을 넘어섰다. 비트코인의 연말 랠리는 내년 1월 미국에서 비트코인 현물 ETF(상장지수펀드)를 승인할 것이란 전망과 내년 4월 비트코인 공급이 절반으로 주는 반감기가 도래한다는 점이 호재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11월 전 세계 비트코인 거래에서 한국 원화 결제 비율이 43%로, 달러 비율(40%)을 넘어섰다. 한국 사람들이 세계 비트코인 랠리를 이끌고 있다는 뜻이다.

 

▶2018년 첫 코인 광풍 때 한 투자 전문가는 “증시 박스권에 10년간 갇혀 있던 ‘세계 최강 투기 본능’의 봉인이 풀렸다”고 진단했다. 정말 그랬던 것 같다. 투기 광풍은 증시, 부동산 시장으로 옮겨갔다. 2차 전지 테마주 가격이 330년 치 이익을 모아야 달성할 수 있는 수준까지 부풀려졌다. 저위험·장기 투자 상품인 ETF가 한국에선 투기 상품으로 변질됐다. 주가 변동률의 2~3배 수익을 내는 레버리지·곱버스 ETF가 거래 상위 종목을 싹쓸이하고 있다.

 

▶2030세대는 영끌 빚투(영혼까지 끌어모아 빚내서 투자)로 부동산 투기에 나섰다. 집값이 피크를 기록했던 2021년 서울 아파트 매수자의 42%를 2030세대가 차지했다. 불행히도 그때가 상투였다. 작년 한 해 30대 주택 소유자 중 대출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집을 판 사람이 10만6000명에 달했다. 그런데도 올해 들어 집값이 반등하자 2030세대가 75조원 빚을 내 또 집을 샀다.

 

▶영끌 빚투의 이면엔 3포 세대(연애·결혼·출산 포기),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수저 계급론 등 청년들의 절망이 도사리고 있다. 열심히 살아도 부모 세대와 같은 재산 형성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란 절망감이 ‘대박 꿈’을 좇게 만든다. 하지만 투기로 인생 역전 꿈을 이룰 확률은 희박하다. 가치 투자 대가 벤저민 그레이엄은 “투자는 철저한 분석을 바탕으로 원금의 안전과 적절한 수익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런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행위는 투기”라고 경계했다.

 

▶요즘 병원 정신과를 찾는 2030청년 중엔 투기 중독 환자가 적지 않다고 한다. SNS(소셜 네트워킹 서비스)에서 대박 투자 성공 사례를 접하다 보면 ‘나만 뒤처지는 게 아닌가’ 하는 포모(FOMO·소외 불안감) 증후군에 사로잡힌다. 나도 성공 모델이 돼보자는 욕심에 투기에 몰두하다 패가망신의 길로 접어든다. 주식 투자에 미쳐 인생을 망칠 뻔한 젊은 정신과 전문의가 ‘살려주식시오’라는 책을 썼다. 그의 결론은 “욕망으로 물든 대뇌피질로는 절대 투자에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홍수 논설위원

 

 

12.09(토) “알파고가 돌아왔다”

▲일러스트=이철원

 
 

1년 전 미국 실리콘밸리 마운틴뷰에서 ‘구글 엔지니어링의 전설’이라던 인공지능(AI) 연구 총괄 선임 부사장 제프 딘을 만난 적이 있다. 오픈AI의 챗GPT가 막 출시됐지만 아직 주목받지 못하던 때였다. 회색 스웨터에 청바지 차림의 그는 구글의 압도적 AI 기술력을 설명하며 자신만만해했다. 하지만 그 여유는 채 한 달이 가지 못했다. 챗GPT 열풍이 불면서 AI 주도권이 완전히 오픈AI로 넘어갔다.

 

▶구글은 오랜 기간 AI 기술력 1위 기업이었다. 2016년 구글의 자회사인 구글 딥마인드는 AI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를 개발해 인류에게 충격을 줬다. 알파고는 이세돌 9단과 5회 대국해 네 번 이겼다. 이세돌은 2019년 은퇴 이유를 밝히며 “(사람 중) 1인자가 돼도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존재가 있다”고 했다. 인간이 AI를 능가할 수 없다는 탄식이었다.

 

▶한순간에 AI 주도권을 뺏긴 구글은 ‘코드 레드’를 발령하고 천재 AI 엔지니어들을 한데 모았다. 알파고를 만들었던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와 구글의 AI 총괄 제프 딘이 손을 잡았고, 은퇴했던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이 복귀했다. 다시 모인 ‘알파고팀’은 절치부심하며 밤낮 없이 컴퓨터 코드를 짰다. 116조원대 자산가인 브린도 엔지니어들과 나란히 앉아 밤을 새웠다. 이렇게 개발한 대형 AI 언어 모델 ‘제미나이(Gemini)’가 엊그제 공개됐다. ‘쌍둥이자리’란 뜻으로, 이미지·글·비디오를 쌍둥이처럼 동시에 인식하고 이해한다는 의미로 이름이 붙었다.

 

▶제미나이는 수학·물리학·역사·법률·의학·윤리 등 57가지 주제를 복합적으로 활용해 문제 해결 능력을 평가하는 테스트에서 90%를 맞혀 인간 전문가의 정답률 89.8%를 최초로 넘어섰다. 구글이 공개한 영상에는 제미나이가 사람이 그리는 스케치를 보며 실시간으로 어떤 그림인지 추측하는 장면이 나온다. 구글 측 수치를 보면 제미나이의 성능은 대부분 항목에서 챗GPT를 앞선다. 다만 그 격차는 작은 정도이고 압도적 우위는 아니란 분석이 많다. AI 패권을 둘러싼 제미나이와 챗GPT의 불꽃 튀는 경쟁이 시작됐다는 뜻이다.

 

▶소셜미디어엔 ‘알파고가 돌아왔다’는 말이 나온다. 오픈AI에 뒤처졌던 구글이 알파고팀을 소집해 또 한번 ‘알파고 모먼트(혁신의 분기점)’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앞으로 구글과 오픈AI는 더욱 치열하게 AI를 개발하고 더 빠르게 세상에 내놓을 것이다. 용광로처럼 뜨거운 기업들의 AI 경쟁이 앞으로 어떤 미래를 그려낼까. 디스토피아가 아닌 유토피아가 되길 기도한다.

김성민 논설위원·디지털기획팀장

 

 

12.11(월) 노인 대신 ‘선배 시민’

▲일러스트=박상훈

 
 

지난봄 한강에서 열린 행사를 보러 갔다가 “어르신, 조심하세요. 차 지나갑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내가 50대 중반인데 왜 어르신이냐?”고 따졌다. 병원에서 ‘아버님은 어디가 불편하시냐?’는 말을 듣고 그 병원에 다시 가기 싫었던 적도 있다. 50대도 나이 먹은 사람 취급이 싫은데 60~70대는 오죽할까 싶었다.

 

▶한자 기(耆)와 노(老)는 ‘늙었다’는 뜻이다. ‘예기’(禮記)에선 ‘기’를 60세, ‘노’를 70세라고 했다. 수명이 극단적으로 짧았던 과거엔 두 한자가 귀한 대접을 받았다. 조선 시대 왕이 연로한 고위직 관리들을 예우하기 위해 만든 관청 이름이 기로소(耆老所)였는데, 요즘 표현으로 회원 가입 경쟁이 치열했다. 반면 지금은 ‘노인’이란 표현이 들어가기만 해도 외면 당하기 십상이다. 단지 명칭 때문에 ‘노인 대학’에 가기 싫고 지하철 ‘노약자석’을 피한다는 반응도 있다.

 

▶유엔은 1950년대에 노인 기준을 65세로 정했다. 우리도 1964년부터 이를 따른다. 그런데 지난 반세기 수명이 크게 늘면서 이 기준이 정서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맞지 않게 됐다. 일본 의학연구소가 조사했더니 2007년의 87세는 1977년의 70세에 해당했다. 지금의 65세는 한 세대 전 45세의 몸으로 산다. 45세가 노인인가. 내년에 경로 우대를 받는다는 지인은 “내가 노인이라니 황당하다”고 했다.

 

▶경기도 의회가 65세 이상 도민을 ‘선배 시민’으로 명시하는 조례를 만들었다. ‘풍부한 경험을 쌓은 선배로서 사회 활동 하시라’는 응원의 뜻을 담았다고 한다. 서울시도 10년 전 공모를 통해 노인을 대신할 용어로 ‘어르신’을 택했다. 활기차게 산다며 ‘골든 에이지’ ‘신중년’도 쓴다. 일본은 60대를 ‘활발히 경륜을 펼칠 나이’라는 의미로 실년(實年)이라 부르고 그보다 나이 많으면 고년(高年)이라 한다. 중국은 60대를 장년(壯年), 70대를 존년(尊年)이라 부른다. 영미권에선 젊은(young)과 노인(old)을 합성한 ‘욜드(yold)’라는 단어도 등장했다.

 

▶고대 로마 철학자 키케로는 ‘노년에 맞서는 최고의 무기는 학문을 익히고 미덕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미 2000년 전에 ‘노인 됐다고 은퇴할 생각 말고 늘 새것을 배워 세상과 지혜를 나누라’고 했다.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령 인구가 내년 1000만명을 넘어선다. 국민 5명 중 한 명꼴이니 그들을 ‘뒷방 노인’ 취급했다간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기 어렵다. 아직 ‘선배 시민’ 나이가 안 된 후배 시민으로서 그분들의 활약을 응원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12.12 ‘개딸’ 이름 바꿔 달라는 개딸

▲일러스트=김성규

 
 

몽골은 한자 문화권에서 오랫동안 몽고(蒙古)로 불렸다. 몽골인들은 이 명칭을 싫어했다. ‘몽(蒙)’은 ‘어리석다’는 뜻이니 국호로는 부적절한 게 사실이다. 우리는 “몽골로 불러달라”는 요구를 존중해 1990년대 초부터 그렇게 쓰고 있다. ‘튀르키예’도 비슷한 사례다. 튀르크는 ‘용맹한 자’에서 유래됐는데 ‘터키’라는 국명은 영어의 칠면조와 발음이 같고 속어엔 ‘멍청한 자’라는 뜻도 있다. 유엔이 요구를 받아들여 국명 변경을 승인했다.

▶버마도 1988년 자신들을 미얀마로 불러 달라고 했다. 하지만 여러 나라가 여전히 버마로 부른다. 국제사회의 공감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영미권에서 미얀마 군부 통치 세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버마라고 부른다. 직업의 명칭을 바꿀 때도 사회적 동의가 필요하다. 파출부가 가사 도우미로, 운전사가 기사로, 청소부가 환경미화원으로 바뀐 것은 해당 직업 종사자의 요구도 있었지만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 공감했기 때문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강성 지지자들이 스스로 만든 ‘개딸’이란 이름을 파기하고 ‘민주당원’ 또는 ‘민주당 지지자’로 바꿔달라고 한다. ‘개혁의 딸’을 줄인 말이라며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새로운 정치 행태’라고 자랑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앞으로는 지구상에 있지도 않을 개딸’이라고 단언한다. 이재명 대표도 얼마 전까지 “참 많은 우리 개딸, 개이모, 개삼촌, 심지어 개할머니까지 함께해주셔서 정말 큰 힘이 난다”며 “개딸님들 사랑한다” 했었다. 의외의 돌변이다.

 

▶개딸은 개명의 이유를 “상대 진영이 우리를 프레임해 선동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개딸에 나쁜 이미지가 덧칠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미지를 만든 사람들은 다른 누구가 아니라 개딸 자신들이었다. 몇 해 전 서울 서초동 촛불 집회를 주도한 사람들도 처음엔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조국을 돕겠다’는 뜻으로 자신들 이름을 ‘개싸움국민운동본부’라고 했다. 그러더니 나중에 ‘개혁국민운동본부’라고 이름을 바꿨다.

 

▶철학자 야스퍼스는 “말이 들어맞아야 참다운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름을 걸고 지향하는 취지와 실제로 하는 행동이 명실상부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입으로는 ‘개혁의 딸’을 외치면서 실제로는 퇴행적 행태를 거듭한 개딸은 ‘참다운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반대파 좌표를 찍고 떼로 몰려가 공격하는 행태는 민주당 내부에서도 ‘나치’ ‘파쇼’라는 우려를 낳았다. 이에 대한 반성은 하나도 없이 개딸 이름만 바꿔달라고 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12.13 구글 검색 세계 1위, 비빔밥

▲일러스트=박상훈

 
 

파리 특파원 시절, 한식당에서 프랑스인을 대접할 때 비빔밥을 추천하면 성공 확률 100%였다. 식도락 내공이 남다른 프랑스 사람들은 비빔밥을 먹을 때 세 번 찬사를 표시했다. 밥·나물·계란·고기가 어우러진 다채로운 색 조합이 첫 번째, 고추장·참기름을 넣어 직접 비벼 먹는 이색 체험이 두 번째, 단백질·탄수화물·지방 3대 영양소가 고루 들어 있는 균형식이라는 점이 세 번째 찬사 포인트였다.

 

▶프랑스인들은 비빔밥의 기원 스토리도 재밌어했다. 제사를 올린 뒤 조상신이 남긴 밥·고기·나물을 후손들이 한데 모아 비벼서 나눠 먹었다는 ‘제사 음식 기원설’을 들려주면 동양 유교 문화를 신기해했다. 비빔밥의 기원설에는 다른 버전도 있다. 모내기나 추수 때 품앗이 일꾼들을 먹일 음식 재료를 들판에 갖고 나가 한꺼번에 비벼서 먹인 데서 유래했다는 설, 한 해의 마지막 동짓날, 먹다 남은 반찬을 새해로 넘기는 것을 꺼려 밥에 남은 반찬을 모두 넣고 비벼 밤참으로 나눠 먹었다는 설도 있다.

 

▶비빔밥 문화의 대표 도시는 호남의 전주, 영남의 진주다. 전주비빔밥은 소머리를 곤 물로 밥을 짓고, 콩나물을 듬뿍 넣고, 날달걀을 넣어 비비는 게 특징이다. 소고기 육회가 들어가는 진주비빔밥은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에서 돌멩이를 나르던 부녀자들이 병사에게 고칼로리 즉석식을 제공하기 위해 만든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비빔밥이 세계에 알려진 계기는 1997년 대한항공이 기내식으로 비빔밥을 제공하면서부터다. 웰빙 기내식으로 주목받아 1998년 세계 최고 기내식 상을 받았다. 요즘도 대한항공 국제선에선 연간 300만개 이상 비빔밥이 소모된다. ‘팝 황제’ 마이클 잭슨이 대한항공 기내식으로 처음 맛보곤 ‘비빔밥 마니아’가 됐다. 그가 머물던 신라호텔에선 비빔밥만 찾는 그를 위해 고추장과 육류가 안 들어간 ‘MJ 비빔밥’ 레시피를 개발했다.

 

▶구글이 발표한 올해의 세계 최다 검색 레시피(음식 조리법)’ 부문에서 비빔밥이 1위를 차지했다. ‘태양의 후예’ 같은 K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한 덕분이라고 한다. 비빔밥은 같은 ‘밥’ 문화권인 일본, 중국에는 없는 독특한 음식이자, 한국형 패스트푸드라 할 수 있다. 햄버거, 핫도그처럼 비만을 낳는 서양 패스트푸드와 달리, 비빔밥은 ‘음식과 약은 뿌리가 같다’(食藥同源)는 한국 음식 철학이 담긴 균형식이다. 재료 배합에 따라 저열량 다이어트식이 될 수도 있다. 비빔밥이 구글 검색 넘버1을 넘어 세계인이 즐기는 패스트푸드 반열에 오르면 좋겠다.

김홍수 논설위원

 

 

12.14 수공(水攻)

▲일러스트=박상훈

 
 

1938년 6월 일본군이 중국 정저우로 진격했다. 이곳이 함락되면 총사령부가 있는 우한이 위태로웠다. 장제스는 황허(黃河) 제방을 폭파했다. 수많은 일본군이 강물에 휩쓸리며 발이 묶였다. 그런데 이를 주민에게 알리지 않아 무려 89만명이 죽고 1250만명이 집을 잃었다. 일본군은 정저우를 우회해 그해 10월 우한을 접수했다. 일본군의 진격을 넉 달 지연시킨 대가로 제 국민 89만명이 죽었다.

 

▶2차 대전 때 독일군도 물을 이용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그 후의 마켓 가든 작전에서 연합군 낙하산 부대를 막기 위해 낙하 예상 지점에 수많은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실제로 많은 낙하산병이 이 웅덩이에 빠져 익사했다. 이탈리아에서 북진하는 연합군을 막기 위해 대규모 저수지를 터뜨리기도 했다.

 

▶1~3차 중동 전쟁을 모두 이기며 시나이반도를 차지한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 옆에 ‘바레브 라인’이란 모래 방벽을 구축했다. 이집트 침공에 대비한 높이 39m짜리 방어 시설이었다. 이스라엘은 철벽이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바레브 라인은 1973년 10월 6일 4차 중동 전쟁 발발 수 시간 만에 무용지물이 됐다. 이집트군이 독일제 고성능 펌프로 물을 뿌리자 모래 방벽은 허무하게 붕괴됐다.

 

▶세계 최대의 수력발전소인 중국 후베이성 싼샤(三峽)댐은 높이 185m, 길이 2.3㎞에 총저수량은 393억t으로 소양강댐의 13배가 넘는다. 이 댐이 무너지면 양쯔강 하류의 광저우, 난징, 상하이 같은 대도시에서 4억명 넘는 이재민이 발생할 것이란 말도 있다. 우크라이나, 가자지구 다음 전쟁터는 대만해협이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상황에서 일부 군사 전문가들은 대만군이 미사일로 싼샤댐을 겨누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억지력이 될 것이라고 한다.

 

▶하마스와 전쟁 중인 이스라엘의 최대 골칫거리는 땅굴이다. 하마스는 서울 면적의 60%인 가자지구에 총연장 500여 ㎞의 땅굴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지휘부, 무기고, 벙커, 지하 통로로 활용한다. 과거 이스라엘의 파상 공세에도 궤멸되지 않고 재기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이스라엘로선 땅굴 파괴에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다. 이미 로봇 부대, 특수공병대, 화학무기, 불도저를 투입해 전방위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다 이제는 지중해에서 끌어온 바닷물을 땅굴에 들이붓기 시작했다. 일부에선 전쟁을 끝낼 전략이라고 하고, 일부에선 땅을 황폐화시킬 반인도적 행위라고 한다. 많은 첨단 무기가 있지만 자연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무서운 듯하다.

이용수 논설위원

 

 

12.15 도심 속의 시니어타운 거주 시대

▲일러스트=박상훈

 
 

서울 지하철 건국대역 옆에 있는 ‘클래식 500′은 국내 최초 도심형 특급 실버타운이다. 370여 객실 호텔 형태로 운영된다. 노부부가 살기 편하게 거실과 안방, 화장실이 크고, 부엌은 작다. 하루 두 끼 이상을 내부 식당서 먹거나 외식한다. 물리 치료와 운동 재활실이 있고, 매일 간호사에게 건강 상태를 체크받을 수 있다. 서예, 일본어 등 문화 프로그램 강사 대부분은 입주자다. 이 안에도 고교 동문회가 있는데, 70세 입주자가 막내 노릇 하기 싫다며 떠나기도 했다.

 

▶일본 도쿄에는 동네마다 고령자 거주 타운인 노인홈이 있다. 대개 200가구 아파트 형태다. 크기는 12평에서 24평까지 다양하다. 식사, 빨래, 청소, 운동, 재활이 제공된다. 자산과 연금 액수에 따라 입주금과 거주비 등이 다양하게 구성된다. 대개 기운 떨어지는 75세쯤에 집 팔고 들어온다. 90세가 넘으면 입주비를 할인해주는 곳도 있다. 일본에 이런 노인홈이 약 3만개 있는데, 한 건설회사가 같은 브랜드 노인홈 수십개를 운영하는 형태다.

 

▶노인홈 운영에 최첨단 기술이 동원된다. 하루에 10시간 이상 변기 물이 안 쓰이거나, 40분 이상 수돗물을 계속 쓰면 안전 요원이 달려간다. 공동 목욕탕에 들어간 지 1시간이 넘었는데도 퇴실 키 터치가 없으면 알람이 울린다. 24시간 상주하는 간호사와 거실에서 천장 스피커폰으로 대화할 수 있고, 화장실에는 낙상 긴급 호출 버튼이 곳곳에 있다. 외출 시 위치 추적 시계를 손목에 채우기도 한다.

 

▶국토교통부가 엊그제 경기도 화성 동탄 신도시에 시니어타운을 조성한다며 민간 사업자를 공모한다고 밝혔다. 이제 본격적으로 고령층 주거를 위한 시니어타운 조성이 활성화될 전망이다. 인공지능 챗GPT에 한국의 고령화 상황을 알려주고 시니어타운 청사진을 짜보라고 했더니, 먼저 지역 전체를 휠체어를 타고도 어디든 접근할 수 있는 배리어 프리(barrier free)로 만들라고 조언했다. 그래야 고령자가 고립되지 않는다고 했다.

 

▶국제노년학회가 정한 초고령 사회 3대 목표는 1. 아주 늦은 나이까지 돌아다니기 2. 최후까지 사회와 섞여 지내기 3. 살던 곳에서 끝까지 살다가 삶을 마감하기 등이다. 나이 들어 어디서 사는 것보다 어떻게 지내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일본 노인홈 회사들은 댄스 교실, 취미와 운동 동호회를 위해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별도로 운영한다. 인생 끝까지 타인의 돌봄 없이 돌아다니며 남과 섞여 지내기에 시니어타운은 좋은 방안이다.

김철중 논설위원, 의학전문기자

 

 

12.16(토) 소고기 밀매는 공개 처형인 나라

▲일러스트=김성규

 

일본인이 소고기를 먹기 시작한 것은 1872년 메이지 유신 이후다. 불교에 심취한 덴무 천황이 675년 선포한 육식 금지령 탓에 1200년간 소뿐 아니라 모든 고기 맛을 모르고 살았다. 불교와 함께 농업에 필수적인 소를 지키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일본인의 왜소한 체격에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도 있다. 스키야키, 돈가스, 규동은 근대의 산물이다.

 

▶조선 시대에도 소를 도축하는 게 불법이었다. 이를 우금(牛禁)이라 했다. 농업에 생사가 걸린 나라에서 소는 없어선 안 되는 생산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엔 모든 임금 대에 걸쳐 우금령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몰래 도살하는 일이 빈번했다. 적발되면 일가족 전부가 변방으로 유배 가는 전가사변(全家徙邊)이란 벌을 받았다. 이것이 갑오개혁 때까지 계속됐다.

 

▶북한의 농촌은 조선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협동농장별로 농기계가 보급되긴 했지만 기름도 부족하고 작동하는 기계도 드물다. 교체할 부속품이 없다. 비료가 없으니 갈탄을 태우고 남은 재를 뿌린다. 매년 1월이 되면 지방 당에 퇴비를 상납하기 위해 온 가족이 아침마다 동네 변소를 뒤져 인분을 찾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변소를 지키는 당번도 있다. 21세기에 이런 농업을 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그런 북에서 소는 과거 조선이나 일본과 같이 필수적 생산 수단이다.

 

▶그러니 북한에는 당연히 우금령이 있다. 그런데 조선 시대보다 처벌이 더 가혹하다. 소를 몰래 잡아먹었다간 경제사범이 아니라 정치범 취급을 받는다. 죄질에 따라 처형당하기도 한다. 북엔 소를 도축·유통하는 시스템 자체가 없다. 정육점에도 ‘국내산’ 소고기는 없다. 부유층이 사 먹는 중국산 수입 소고기만 있다. 식용 소는 호위총국이 운영하는 1호 농장에서 길러 고위 당 간부 등 특권층에만 공급된다. 그 나머지 소들은 모두 협동농장에서 영농 목적으로 기른다. 이 소가 병들거나 죽으면 농장 간부들 차지가 된다.

 

▶몇 달 전 북한에서 소를 대규모로 시중에 유통시킨 혐의로 9명이 공개 처형당했다고 북한 전문 매체들이 보도했다. 멀쩡한 소가 아니라 병들어 죽은 소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도 자연사한 소는 관아의 허가를 받아 도축·매매가 가능했다. 우금령 자체도 농번기가 아닐 땐 탄력적으로 적용했다. 소 한 마리를 몰래 도축해 팔았다가 모두 정치범 수용소로 가고 주범은 처형됐다는 탈북민 증언도 있다. 탈북민들은 “북한에선 사람보다 소 목숨이 더 귀하다”고 말한다. 기막힌 얘기다.

이용수 논설위원

 

 

12.18(월) ‘바람의 손자’, 아버지를 넘나

▲일러스트=박상훈

 
 

한국 프로야구에서 이름을 날린 이정후(25)가 미국 메이저리그 선수가 됐다. 정식으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팀의 일원이 됐고, 지난 주말 입단식과 기자회견을 가졌다. 아버지는 한국 야구의 ‘레전드 오브 레전드’인 이종범(53)이다. 얼마 전까지 LG 트윈스 코치였다. 이종범은 1994년 한 시즌에 84도루를 달성하는 주루 능력을 선보여 ‘바람의 아들’이란 별명을 얻었다. 아들은 자연스레 ‘바람의 손자’가 됐다.

 

▶이정후는 “현역 시절 아버지는 정말 빨랐다. 나보다 빠르다”고 했다. ‘아버지에게 무엇을 배웠냐’고 묻자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잘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배웠다”고 했다. 이종범은 아들에게 ‘기본적인 예의’나 ‘자기 관리’를 당부할 뿐 야구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한다고 한다. 딱 하나, “타석은 왼쪽에 서라”는 것뿐이었다고 했다.

 

▶여러 분야에서 대를 잇는 집안을 볼 때 부모가 자식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 세간의 관심이 쏠린다. 특별한 성공 비책을 전수하는 것은 아닐까 궁금하다. 이정후는 야구 기술은 배워본 적이 없고 “경기를 잘했든 못했든 집에 오면 항상 ‘잘했다’고 격려만 해주셨다”고 했다. “야구로 혼난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아버지는 알고 계셨던 거죠. 경기를 망치면 가장 속상한 게 선수 본인이라는 것을요.”

 

▶축구 선수 차두리는 아버지 차범근을 이렇게 말했다. “이놈의 축구를 아무리 잘해도 아버지의 근처에도 못 가니까 조금 밉기도 했습니다.” 물론 진짜 밉다는 뜻은 아니다. ‘아버지의 벽(壁)’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두 아들을 농구 선수로 키워낸 ‘농구 대통령’ 허재는 “아무쪼록 근성 있는 선수가 돼라”고 했다. 아들에게 “특혜는 없다”고도 했다는데 한 TV 방송에서 둘째가 “아빠는 뭐 해줬어?”라고 묻자 허재는 “DNA 줬잖아”라고 했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는 경기에서 아들 찰리에게 “휴대폰 좀 그만 봐” 하면서도 “내 스윙 베끼지 말고 매킬로이를 따라 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로리 매킬로이의 ‘균형 있는 샷’을 배우라고 한 것이다. 그게 부모 마음이다. 반면 자식에겐 ‘스타 부모’를 뒀다는 꼬리표가 부담이다. 우쭐한 기분은 잠시다. 이정후는 아버지가 세운 통산 1797 안타를 때려 낼 수 있을까 생각한다. ‘아버지만큼만 하라’는 말을 듣고 자라나 이젠 ‘아버지를 넘을 수 있을까’ 고민한다. 이때도 아버지의 마음은 오직 한 가지다. “정후야. 실패해도 고개 숙이지 말고....”

김광일 기자

 

 

12.19 국제분쟁의 중심, 해협의 역사

▲일러스트=김성규

 
 

두 육지 사이의 좁은 바다를 뜻하는 해협(海峽)은 요충 중에서도 요충이다. 육지에서 포격해 배가 지나갈 수 없게 만들 수 있는 좁은 바닷길은 많은 나라의 목줄을 쥐고 있다. 해협 중에서도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보스포루스 해협과 바로 옆의 다르다넬스 해협은 늘 유럽의 중대 관심사였다. 동로마제국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튀르크에 멸망하며 이 두 해협이 모두 튀르키예 수중에 떨어졌다. 기원전 12세기 트로이도 여기에 있었고, 기원전 5세기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한 페르시아군이 도주할 때도, 알렉산드로스가 동방 원정에 나설 때도 이 해협을 건넜다.

 

▶19세기 러시아 흑해 함대가 지중해에 진출하기 위해 손에 넣어야 했던 곳도 당연히 이곳이었다. 크림전쟁은 그런 러시아를 막으려 영국·프랑스가 이 지역에 원정한 전쟁이었다. 1차 대전 때도 격전지였다. 영국이 독일의 배후를 치기 위해 다르다넬스 해협 앞 갈리폴리 반도 상륙작전을 펼쳤다가 오스만 제국군에 패했다. 지난해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두 해협의 전략적 가치를 새삼 입증했다. 튀르키예가 모든 군함의 두 해협 통과를 금지하자 러시아가 흑해 함대를 보강할 길을 잃고 말았다.

 

▶바다 사이 좁은 육지 길인 ‘지협’의 전략적 가치도 못지않다. 북미와 남미 대륙을 잇는 지협에 자리 잡은 파나마는 자신의 지정학적 가치를 활용해 콜롬비아에서 독립했다. 파나마에 운하 건설을 추진한 미국이 독립을 도왔다. 해협과 지협의 가치는 오늘날에도 전혀 다르지 않다. 미국은 파나마에 운하 관할권을 돌려주면서 평시, 전시를 막론하고 개방돼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아시아에도 중요한 해협이 있다. 전 세계 해상 물동량의 20%가 통과하는 믈라카 해협과 중국과 대만 사이의 대만 해협이다. 국제사회는 믈라카 해협을 특정국의 영해가 아닌 국제 수역으로 관리하며 해적 퇴치에도 함께 나서고 있다. 대만 해협은 언제 중국의 공격으로 미사일이 날아다닐지 모른다.

 

▶최근 가장 걱정인 해협은 홍해 남쪽 끝에 있는 바브엘만데브 해협이다. 이곳을 지나면 수에즈 운하다. 예멘의 이슬람 반군 ‘후티’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에 대한 보복이라며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지나는 상선들을 무차별 공격하고 있다. 전 세계 해상 컨테이너 30%가 오가는 이 해협은 워낙 좁아 미사일 공격에 취약하다. 가자지구 전쟁으로 이란이 자국 앞바다인 호르무즈 해협도 위협하고 있다. 이곳이 막히면 세계 유가가 폭등한다. 모두 이성을 찾기를 바랄 뿐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12.20 “동성애 커플 축복 허용” 가톨릭의 변신

▲일러스트=양진경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소돔 이야기는 동성애를 보는 부정적 시각이 담겨 있다. 소돔은 동성애가 만연한 도시다. 이 도시 남자들은 외부에서 손님이 오면 성폭행까지 시도한다. 분노한 창조주가 불로 소돔을 멸망시켰다. 동성애는 지금도 기독교에서 허용할 수 없는 금기다.

 

▶그런데 로마 교황청이 동성애 커플에 대한 사제의 축복을 허용한다고 발표하며 이 금기에 스스로 도전했다. 반발을 부를 게 뻔한데도 이렇게 결단한 데는 교회가 세상 변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고민이 담겨 있다. 동성애 합법화 추세를 무작정 외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동성 결혼엔 반대한다는 원칙은 유지하되 동성애자도 하느님의 자녀이니 축복받을 수 있다는 절충적 입장을 취했다.

 

▶가톨릭교회가 세상의 변화를 수용한 것이 처음은 아니다. 가톨릭의 상징인 교황 자체가 시대에 따라 역할을 바꿔 왔다. 중세 많은 교황이 지금과 같은 종교적 자애의 상징이 아니라 엄혹한 군주였다. 16세기 교황 식스토 5세는 교황령에 사는 주민을 교수형으로 다스렸다. ‘교황은 교회 권력과 정치 권력에 더해 사치도 누릴 자격이 있다’며 이를 상징하는 삼중관을 머리에 쓰고 다닌 이도 있다. 지금으로는 상상이 안 되는 교황의 권세는 1870년 이탈리아 통일에 나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교황령을 빼앗으며 끝장났다.

 

▶이후 새로운 역할을 찾아나선 교황청이 주목한 것이 유럽을 강타한 산업혁명이었다. 교황 레오 13세는 1891년 아동노동과 장시간 노동을 신의 뜻에 반하는 악덕으로 규정하는 회칙 ‘노동 헌장’을 반포했다. ‘새로운 사회 경제 질서의 대헌장’으로 불리며 가톨릭교회가 세상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사례로 꼽혔다.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요한 23세는 더 나아가 “교회가 너무 덥다. 환기를 해야 한다”는 말로 교회가 세상 변화에 발맞출 것을 역설했다.

 

▶동성애자 축복에 이어 가톨릭교회의 쟁점으로 떠오른 것이 여성 사제 인정 여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세계 각국 주교를 뽑는 심사위원에 교황청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3명을 임명하며 변화를 시작했다. 이탈리아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의 장편 ‘장미의 이름’은 신의 진리는 고정불변이라고 믿는 성직자가 변화를 추구하는 다른 성직자들을 연쇄살인하는 내용이다. 주인공인 윌리엄 수사는 범인을 잡은 뒤 “진리에 대한 집착에서 우리를 해방하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진리”라고 외친다. 가톨릭교회가 교리를 지키면서도 세상 변화를 슬기롭게 수용하기 바란다.

김태훈 논설위원

 

 

12.21 보복운전 대응법

2017년 6월 일본 도메이고속도로에서 20대 남성이 모는 차가 40대 남성이 운전하는 승합차 앞에서 급정거를 반복했다. 그 직전에 두 사람은 휴게소에서 주차 문제로 가벼운 실랑이를 벌였는데 20대 남성이 고속도로까지 따라와 벌인 일이었다. 결국 4인 가족이 탄 승합차가 급정차하는 사이 뒤에서 대형 트럭이 덮쳤고 40대 남성과 아내가 숨지고 두 딸이 크게 다쳤다. 일본은 이 사건을 계기로 보복 운전 단속과 처벌을 크게 강화했다.

 

▲일러스트=이철원

 

 ▶우리나라에서도 사소한 시비로 상대 운전자를 위협하거나 불안을 느끼게 하는 보복 운전이 빈번하다. 경찰에 신고한 건수만 한해 4000~5000건에 이른다. 형사정책연구원이 2020년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운전자 47%가 보복 운전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2021년엔 식품 기업 재벌가 부회장이 상대 차량을 앞질러 급정거해 차량을 파손하고 운전자를 다치게 한 일도 있었다. 보복 운전 피해를 당할 경우 특별 보험금을 준다고 홍보하는 자동차보험사가 있을 정도다.

 

▶평소 온순한 사람도 한순간에 도로의 난폭자로 돌변하게 만드는 원인은 무엇일까. 차 안에서는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생각에 평소보다 분노를 더 강하게 표출한다고 한다. 깜빡이를 쓰지 않고 끼어드는 것이 시비의 시작인 경우가 많다는 것도 놀랍다. 차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심리 때문에 깜빡이도 없이 갑작스럽게 들어오면 무시당했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경적음 때문에 시작된 시비도 적지 않은데, 자동차 경적음은 사람 귀를 괴롭히는 3500Hz 안팎 소리여서 특히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결국 보복 운전은 순간적인 분노를 참지 못해 생기는 것이다. 친이재명계로 꼽히는 이경 민주당 상근부대변인이 보복 운전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는 2021년 11월 서울의 한 도로에서 다른 차를 여러 차례 급제동으로 위협했다고 한다. 보복운전은 본인들은 물론 다른 운전자에게도 큰 위험이다. 그래서 도로교통법이 아닌 형법을 적용하고 7년 이하의 징역 등 엄벌에 처하고 있다.

 

▶교통안전공단은 혹시라도 보복 운전 원인을 제공했으면 비상등을 켜서 사과하라고 했다. 그래도 보복 운전을 당할 경우엔 절대 맞대응하지 말고 블랙박스 등으로 영상을 확보해 신고하라고 했다. 일본 분노관리협회가 제시한 방안이 더 현실적이다. 화가 나면 6초만 참으라고 했다. 분노라는 감정이 발생하고 뇌 전두엽에서 이성이 발동하기까지 대략 6초가 걸린다고 한다. 이성이 작동하면 보복 운전 같은 위험한 짓은 차마 못할 것이다.

김민철 논설위원

 

 

12.22 모두를 감시하는 나라, ‘여행 기피국’ 된 중국

▲일러스트=이철원

 

올 크리스마스 시즌, 여행 가성비만 보면 일본보다 중국이 훨씬 낫다. 도쿄 최고급 제국호텔의 1박 숙박비는 230만원에 달하는 반면 상하이 최고급 호텔 월도프 아스토리아의 스위트룸은 100만원 수준이다. 상하이 5성 호텔의 평균 숙박비는 50만원 정도로 도쿄의 절반도 안 된다. 황금 시간대 서울~도쿄 왕복 항공료는 100만원에 달하지만 서울~상하이는 50만원 선이다. 상하이가 가성비 여행지가 된 이유는 간단하다. 외국인들이 발길을 끊었기 때문이다.

 

▶올 상반기 중 중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47만명에 불과했다. 일본 방문객(1071만명)의 4% 수준이다. 코로나 이전인 2019년 상반기(856만명)에 비하면 95% 격감했다. 요즘 자금성, 만리장성에선 서양인 관광객들이 누구나 셀럽(유명인) 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중국 현지인들이 앞다퉈 “같이 사진 찍자”고 달려들기 때문이다. 중국이 여행 기피국이 된 데는 7월부터 시행한 반간첩법 영향이 크다. 간첩 행위를 ‘국가 안보 및 이익에 위배되는 활동’이라고 맘대로 규정하면서, 외국인 체포·억류가 빈발하자 많은 서방 국가가 중국 출장, 중국 여행 자제령을 발동했다.

 

▶국내 기업들도 중국 출장자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고 있다. 중요 정보가 저장된 기존 스마트폰은 국내에 두고, ‘서브 폰’을 갖고 가게 한다. 삼성전자는 중국 출장자에게 중국 비판 기사를 검색하지 말 것, SNS(소셜 네트워킹 서비스)로 파일을 전송하지 말 것, 군사·방산시설, 시위 현장 방문이나 사진 촬영을 하지 말 것 등 금기 사항을 사전 교육하고 있다.

 

▶AI(인공지능) 안면 인식 기술에 바탕한 중국의 국가 감시망은 중국 내 탈북민 신변 안전에도 큰 위협이 되고 있다. 호텔, 기차역, 주요 거리 곳곳에 설치된 ‘안면 인식기’로 탈북자를 색출해 내는 통에, 탈북 지원 활동이 급격히 위축되고 있다고 한다. 한 탈북민 지원단체 관계자는 “개인 민박만 이용했는데도 중국 경찰이 동선을 모조리 다 파악하고 있어 모골이 송연했다”고 말했다.

 

▶모두를 감시하는 나라가 된 중국은 세계 3대 금융 허브였던 홍콩에 직격탄이 됐다. 2020년 반중국 활동가를 종신형에 처하는 국가보안법이 시행된 이후, 글로벌 금융회사들이 대거 철수하자, 홍콩 금융인들은 홍콩을 ‘금융 허브 유적지(遺址)’라고 자조하고 있다. 골드만삭스 직원은 “세계 3대 금융 허브를 건설하는 데 100년이 걸렸는데 폐허로 변하는 덴 5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고 한탄했다. 공산당 숭배자 시진핑이 만든 새 중국이다.

김홍수 논설위원

 

 

12.23(토) 간병 지옥

▲2022년 2월 6일 대구의 한 병원 외벽에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보호자는 코로나19 검사 음성(72시간 이내) 확인 후 병원 출입 가능' 안내문이 붙어 있다. 병원 측은 "상주하는 보호자 1인만 면회를 허용하며 PCR(유전자증폭) 검사 비용은 8만원 이상 소요된다"고 안내했다. 환자 보호자가 '코로나19 PCR 우선 검사 대상자'에서 제외되면서 간병인도 병원에 가려면 사비를 내고 검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자 지난 4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변경된 PCR 검사 정책 때문에 환자들은 너무 힘이 듭니다"라는 제목의 청원이 올라오는 등 환자와 보호자들의 불만이 속출하고 있다. /뉴스1

 
 

▲일러스트=이철원

 
 

1994년 9월 남해안 소도시에서 70대 노인이 90대 노모를 목 졸라 숨지게 한 사건을 취재한 일이 있다. 70대 노인은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자신도 지병 악화로 노모를 모실 길이 막막해지자 수도권에 사는 자식 다섯을 차례로 찾아갔다. 그런데 모두 할머니를 모실 수 없다고 하자 아내 무덤 옆에서 노모 목을 조른 것이다. 넋이 나간 듯 “어머니를 더 이상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다”는 말만 중얼거리던 70대 노인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벌써 30년 가까이 된 일인데 간병 문제는 오히려 더 심각해졌다. ‘간병 지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집안에 간병이 필요한 노인이 생기면 시한폭탄을 안게 된 것과 마찬가지다. 환자를 병원에 모시고 가는 순번을 시작으로 형제자매 간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주변에 흔하다. 그다음 간병을 누가 할지, 이어서 간병비를 어떻게 분담할지를 놓고 분쟁이 생기지 않는 집이 적을 정도다.

 

▶요즘엔 하루 15만원을 줘도 좋은 간병인을 구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월 400만~500만원은 한 가족이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다. 병을 오래 끌면 수천만원이 들고 1년을 넘기면 예금은 물론 부동산까지 처분해야 한다. ‘간병 파산’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한 가족은 딸이 직장을 그만두고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기로 했다고 한다. 이렇게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어머니 명의 땅을 딸이 상속하기로 남매들이 합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구 10명 중 3명이 노인인 일본에서 ‘100세 시대’ 최대 리스크로 꼽히는 것이 간병 비용이다. 간병이 예고없이 갑자기 닥치고 간병이 시작되면 자산이 빠른 속도로 감소하기 때문에 대비하지 않으면 비극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오랜 간병 끝에 존속 살인을 저지르는 ‘간병 살인’이 해마다 40~50건 발생하고 있다. 요즘엔 특별한 뉴스 취급도 못 받을 만큼 흔한 일이 됐다고 한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다.

 

▶정부가 ‘간병 걱정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며 간병 부담 경감 방안을 발표했다. 현재 전담 간호 인력이 환자를 24시간 돌보는 간호 간병 통합 서비스는 29%에 불과하다. 이를 확대하고 요양병원 간병비 지원 시범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문제는 막대한 비용이다. 요양병원 간병비에 건강보험을 적용할 경우 연간 최대 15조원이 추가로 필요하다. 하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다. 간병 쓰나미는 이미 닥쳐 왔는데 대응은 너무 느리다.

김민철 논설위원

 

 

12.25(월) 안방 난로로 돌아온 ‘미스트롯3′

▲일러스트=이철원

 

드라마·영화·쇼비즈니스 같은 엔터테인먼트 세계엔 ‘3의 저주’ 징크스가 있다. 처음 두 기획이 흥행해도 세 번째에선 부진에 빠지는 현상을 뜻한다. 지난여름, 트로트 오디션 ‘미스트롯3′가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도 많은 사람이 ‘3의 징크스’를 떠올렸다. 트로트 애호가들조차 “앞의 두 편에서 이미 다 보여준 것 아니냐” “새로운 게 있겠느냐”고 했다.

 

▶괜한 걱정이었다. 지난 목요일 닻을 올린 ‘미스트롯 3′는 새로움을 위해 과감한 모험을 택했다. 많은 가요 경연이 조(組)를 나눌 때 우승 후보를 톱시드에 앉히는 월드컵 방식을 따른다. ‘미스트롯 3′의 대진표는 이런 안이함을 버렸다. 첫 대결부터 우승 후보끼리 맞붙는 ‘죽음의 조’였다. ‘우승 전력감’이던 채수현과 김나율도 첫판부터 대결했다. 채수현이 먼저 올하트를 받고 김나율 얼굴이 굳어졌을 때 TV 앞에 앉은 시청자들도 손에 땀을 쥐었다. ‘결승전에서나 만나고 싶은 고수’라는 말을 듣던 오유진과 김소연도 1회전에서 격돌했다.

 

▶참가자들도 트로트의 새 모습을 선보이기 위해 저마다 필살기를 갈고 나왔다. 소프라노 복지은은 ‘트페라’를 부르러 나왔다며 민요 ‘배 띄워라’를 선택했다. ‘트로트와 오페라의 결합’이란 설명은 필요 없었다. ‘아이야 벗님네야/ 배 띄워서 어서 가자~’는 대목부턴 오페라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의 아리아’를 트로트로 듣는 황홀경이었다.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졌다.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 리듬체조 선수였던 신수지의 ‘리본 춤 트로트’는 우아했고, 수빙수가 방어회를 뜨며 부른 ‘자갈치 아지매’는 흥겨웠다.

 

▶저마다 사연도 곡진했다. 72명만 나가는 본선 진출자로 뽑혔다는 통보를 받은 진혜언은 다니던 고교를 자퇴하고 무대에 섰다. ‘삼국지’에서 유일한 퇴로인 장판교를 끊고 조조의 대군 앞에 섰던 장비의 결의를 보는 듯했다. 첫회 가장 주목받은 출연자는 방송 하루 만에 유튜브 통합 조회수 250만을 넘어선 11살 소녀 빈예서였다. 이미자의 ‘모정’을 부르는 모습에 마스터 박칼린은 ‘어머, 어머!’ 감탄사를 연발했고, 11세 소녀의 애절한 목소리에 매료된 마스터 진성은 “가슴으로 폭포 같은 눈물을 흘렸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미스트롯3′가 첫 회 최고 시청률 17%를 넘기며 새로운 장정에 나섰다. 영하의 강추위가 연일 이어지며 온 나라를 얼리는 이 겨울, ‘추워서 밖에도 못 나가고 집에서 뭐하나’ 싶었는데 기우였다. ‘미스트롯3′라는 따뜻한 국민 안방난로가 우리 곁에 있었다.

김태훈 논설위원

 

 

12.26 인공지능(AI)은 태생적 좌파?

▲일러스트=이철원

 

대표적인 우파 인사인 일론 머스크가 선보인 AI(인공지능) 챗봇 ‘그록’이 좌파 성향을 드러내 우파들을 화나게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록이 “내년 대선에서 바이든과 트럼프 중 바이든에게 투표하겠다” “이슬람 세계의 빈곤은 서방 착취 탓” 같은 답변을 내놔 출시 2주 만에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심지어 그록은 트럼프를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 5명에, 바이든을 최고의 대통령 5명에 포함시켰다. 챗GPT의 좌(左) 편향을 바로잡겠다던 머스크의 의도가 무색해진 것이다. 당황한 머스크는 AI의 훈련 기반인 인터넷이 심한 좌편향이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지난해 11월 생성형 AI ‘챗GPT’가 등장한 이래 미국과 영국 등에서는 AI의 정치적 편향이 민감한 주제로 떠올랐다. 영국 이스트앵글리아대 연구진에 따르면 챗GPT는 이념형 질문 60개에 대해 미국 민주당, 영국 노동당, 브라질의 룰라 지지자 등 좌파에 가까운 대답을 내놨다. 챗GPT뿐 아니라 구글의 AI 챗봇 ‘바드’도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어리석은 짓”이라고 영국 노동당 같은 답변을 했다. 또 노동당은 “사회 정의와 평등을 위해 싸우는 오랜 역사를 가졌다”고 긍정 평가하고, 보수당은 “부유한 집단만 대변하는 그룹”이라고 부정 평가했다.

 

▶AI별로 정치 성향이 차이 난다는 연구도 있다. 미국 카네기멜런대와 워싱턴대, 중국 시안교통대가 14개 AI의 정치적 편향성을 조사해 챗GPT는 좌파, 구글의 버트는 중도, 메타의 라마는 우파로 분류했다. AI 챗봇이 내놓는 선거 관련 정보의 30%가 오답이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AI별 한국 정치 성향을 알아보려고 ‘최악’ ‘최고’ 대통령을 5명씩을 알려달라고 했더니 챗GPT4는 ‘최고의 대통령’으로 ‘김대중, 노무현, 박정희, 이승만, 이명박’을, ‘최악의 대통령’으로 ‘전두환, 박정희, 박근혜, 이명박, 노태우’를 꼽았다. 구글의 바드는 최고의 대통령에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을, 최악의 대통령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을 꼽았다. 그런데 바드는 ‘박정희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압에도 책임이 있다’ ‘이명박은 세월호 참사에 책임이 있다’고 설명해 기초 사실조차 엉터리였다.

 

▶2024년은 미국 대선, 한국 총선 등 세계 40여 국에서 선거가 치러진다. 가뜩이나 양분화된 정치 지형에, AI의 정치적 편향성까지 가세하면 화합은커녕 세상이 더 쪼개질 것 같아 걱정이다.

강경희 기자

 

 

12.27 유모차 대신 ‘개모차’

▲개모차

 

길에 강아지 태운 유모차, 이른바 ‘개모차’를 밀고 다니는 풍경이 흔해졌다. 올해 전자상거래 업체에서 아기용 유모차보다 개모차가 더 많이 팔렸다는 뉴스가 나왔다. 2년 전엔 유모차 판매량이 반려동물용 33%, 아기용 67%였는데 올 1~3분기엔 57% 대 43%로 역전됐다고 한다.

 

▲일러스트=김성규

 

▶반려동물 키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견생(犬生) 20세’가 목표다. 반려견 훈련사 강형욱씨가 16세 노령견을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시키는 동영상이 유튜브에 떠있다. 16세 노령견은 사람 나이로 환산하면 소형견은 80세, 중형견은 87세, 대형견은 99세쯤 된다. 강씨는 “나는 활동적인 훈련사여서 반려견용 유모차를 선호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3개나 갖고 있다. 강아지가 12살 넘으면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개도 장수하는 시대이지만 나이 들면 아프거나 관절에 이상이 생겨 잘 걷지 못한다. 그럴 때 유모차에 태우고 바람을 쐬게 하거나 산책하기 적당한 곳에 풀어놓고 잠깐 걷게 하는 것이다.

 

▶꼭 노령견이 아니어도 반려견용 유모차를 구입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강아지는 매일 산책 시켜줘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강아지 데리고 나갔다가 주인이 물 한 병, 커피 한 잔 사 마시기도 힘들다. 버스나 지하철은 말할 것도 없고 ‘애견 동반 가능’ 매장도 이동용 가방 안에 넣어야만 입장 가능한 곳이 대부분이다. 강아지를 가방에 넣고 다른 소지품까지 들면 그 무게가 만만치 않아 유모차에 태우고 강아지 용품과 사람 소지품도 이것저것 담아 밀고 다니는 것이다.

 

▶요즘 젊은 부부들 사이에서 아기용 유모차는 “살까, 대여할까, 당근(중고 거래)할까”를 고민하게 만드는 품목이다. 한 자녀가 대세인 데다 아기가 목을 가눌 수 있을 때부터 걸음마 뗄 때까지 앉혀서 사용하는 용도라 의외로 사용 기간이 길지 않다. 반면 개모차는 이동 수단으로 쓰임새가 두루 있다. 바퀴 달린 몸체는 접어두고, 바구니 부분만 분리해 차 안에서 펫 시트로 사용하거나 이동용 가방으로 사용도 가능하다. 개를 여러 마리 키우면 한꺼번에 태워 이동하기 편하고, 개 싫어하는 사람을 배려해 공공 장소나 엘리베이터에서는 차양을 덮어 보이지 않게 하는 ‘펫티켓’(펫+에티켓) 용도로도 쓴다.

 

▶반려동물 키우는 가정이 늘면서 반려동물용품 시장이 커지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아기용 유모차보다 강아지 유모차가 더 팔린 게 뉴스가 된다는 건 그만큼 우리 사회의 저출생이 심각하다는 얘기다. 아기용 유모차 판매량이 는다는 뉴스는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

강경희 기자

 

 

12.28 독일, 대만식 ‘인생 진로 결정법’

▲일러스트=이철원

 

독일 초등학교는 4년제다. 4학년 말이 되면 담임교사가 학부모에게 면담을 요청한다. 학업 성적과 학습 태도, 성실성 등을 근거로, 대학에 갈 학생인지, 직업학교행 학생인지 통보한다. 대학 진학 코스인 김나지움엔 전체 학생의 30% 정도만 간다. 만 열 살에 인생 진로가 정해지는 셈이니 어찌 보면 잔인한 제도다. 유럽 특파원 시절 만난 독일 학부모는 “대부분 교사의 추천을 군말 없이 받아들이지만 집에 가서 눈물을 흘리는 학부모도 간혹 있다”고 했다.

 

▶독일 학부모들이 자녀의 직업학교행 통보를 대부분 수용하는 이유는 독일 직업교육 제도가 워낙 믿을만하고, 기능인의 삶이 대졸자 못지않게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5~10년 실업 학교를 거친 다음, 기업과 정부가 함께 운영하는 3~4년제 전문 기술학교에 진학해 월급을 받으며 기술을 배운다. 졸업 후 기업에 취업하면 급여를 대졸자 임금의 90% 이상 받는다. 기술을 더 익혀 ‘마이스터’ 자격을 따면 대졸자 이상의 대우를 받고 직업학교 교사도 될 수 있다.

 

▶중세 동업자 조합인 길드(guild)의 도제식 교육법이 독일 직업교육의 뿌리라고 하는데, 아시아권에도 성공 사례가 있다. 대만에선 중학교 3학년 때 대학 진학을 위한 일반고와 직업학교(대부분 공업고) 진학으로 진로가 나뉜다. 공업고를 가면 일반 대학 진학이 안 되고, 직업훈련 기관인 과학기술대학만 진학이 가능하다. 과기대 졸업생은 TSMC 같은 대기업에서 대졸자와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 얼마 전 대만 여행 때 만난 현지인은 “명문고로 이름난 공업고가 많고, 그런 학교에 합격하면 마을에 플래카드가 걸린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26일 국무회의에서 “교육 등에서 과도한 경쟁이 저출생의 원인”이라고 했다. 같은 날 한국은행은 전국 제조업 공장에서 구인난이 심각하다는 보고서를 냈다. 고교 졸업생 70%가 대학을 진학하는데 구직을 포기한 채 집에서 노는 청년이 68만명에 달한다. 대학 진학을 위한 사교육에 돈을 쓰느라 부모들은 노후 대비를 못 해 노인 빈곤율이 세계 1위다. 독일·대만식 청소년 진로 결정 모델이 우리나라에선 정말 불가능한 걸까.

김홍수 논설위원

 

 

12.29 수학 디바이드

▲일러스트=이철원

 

현재 중2 학생들이 치르게 될 2028학년도 대입 수능에서 심화 수학이 빠지고 지금 문과 수준 수학 시험만 치른다는 발표가 나오자 대학에서 우려가 나온다. “미·적분도 모르는 학생들한테 어떻게 AI(인공지능)를 가르치나” “수학 교육 강화가 세계적 추세인데 거꾸로 간다”는 반발들이다.

 

▶올 초 리시 수낙 영국 총리가 “수학은 더 많은 월급을 받을 능력과 변화하는 세상을 헤쳐나갈 자신감을 줄 것”이라며 수학 의무교육을 현행 16세에서 18세까지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영국은 16세 때까지 의무교육을 마치고 GCSE 시험을 치르는데 수학 과목에서 학생 3분의 1이 낙제점을 받는다. 영국에 수학 문해력이 9세 아동 수준을 못 넘는 성인이 800만명 이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영국 교육계는 “지금도 수학 교사가 턱없이 부족한데 총리 계획이 실현 가능하겠느냐”며 회의적이다.

 

▶영국 총리 말대로 어렸을 때 수학 실력이 사회 경제적 격차를 가져온다는 ‘수학 디바이드(divide)’ 연구 결과도 있다. 영국 에든버러대에서 1958년생 1만7000명을 대상으로 7세 때 수학과 읽기 실력, 11세 때 지적 능력, 16세 때 학습 동기, 42세 때 사회 경제적 지위를 비교 분석했더니 7세 때 수학 성적이 낮았던 그룹은 42세 때 사회 경제적 지위도 낮고 수학 성적이 좋았던 그룹은 사회 경제적 지위도 높았다고 한다.

 

▶아주대 총장을 지낸 수학자 박형주 교수가 프랑스 명문고와 한국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수학 문제지를 바꿔 치르는 실험을 해봤더니 양국 학생들 다 성적이 형편없었다고 한다. 프랑스 고등학교 수학 시험은 120분 동안 5문제 푸는 서술형, 한국 고등학교 수학 시험은 50분 동안 20문제를 푸는 것이었다. 수학 잘한다는 프랑스 학생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내 평생 이렇게 많은 문제는 처음 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최근 OECD 학업성취도 평가에서 우리나라 15세의 수학 성적은 영국, 프랑스, 미국보다 월등히 높았다. 그런데 한국 고교생 상당수가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사람)라고 하고, 대학 수학과 수준은 선진국에 떨어진다.

 

▶논란이 커지자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심화 수학의 기본 개념은 다 배운다. 우리 교육은 한창 창의적일 나이에 문제 풀이만 시켜 사교육을 유발한다”고 했다. 수학은 제대로 알면 예술과 같은 극치의 미까지 느낄 수 있는 학문이다. 유럽의 예술가, 철학자, 문학가들이 수학자였던 이유가 있다. 수능 수학이 쉬워지는 대신 우리 수학 교육이 제대로 이뤄졌으면 한다.

강경희 기자

 

 

12.30(토) 노래가 돌아보게 한 가족 사랑

▲일러스트=이철원

 

가수 김목경은 20대 시절 부모 슬하를 떠나 영국에서 공부했다. 주말이면 맞은편에 사는 영국 노부부 집에 아들 내외와 손주들이 방문하는데, 아들네가 돌아갈 때면 부부가 밖에 서서 오래 배웅했다. 그걸 보고 만든 곡이 국민 애창곡인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다. ‘막내아들 대학시험 뜬눈으로 지새우던 밤들/ 큰딸아이 결혼식 날 흘리던 눈물방울이 모두 말라/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려 하오~.’ 김목경은 “여러 해 뵙지 못하는 부모님을 생각하며 만든 곡”이라고 했다. 이 곡을 몇 해 전 임영웅이 ‘미스터트롯’에서 다시 불렀는데 올 상반기까지 유튜브 누적 조회 수가 1억뷰를 넘었다.

 

▶가난한 집 막내로 태어난 가수 김광석도 이 노래에 마음을 빼앗겼다.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막내아들 대학 시험~’ 대목에서 부모 생각에 목이 메었다. 그 길로 김목경을 찾아가 “나도 부르고 싶다” 했다. 한 지인의 부인은 ‘칠갑산’에서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이 시작되는 대목만 들으면 울컥해진다고 했다. 저마다 마음속에 간직한 가족의 사연을 노래의 특정 가사가 비춰주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인의 애창곡 리스트엔 부모와 자녀의 사랑을 노래한 명곡이 즐비하다. ‘불효자는 웁니다’(진방남), ‘기러기 아빠’(이미자) 같은 옛 노래부터 ‘어매’(나훈아) ‘사모곡’(태진아)을 거쳐 X세대 노래인 ‘아버지와 나’(신해철),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이한) 등으로 이어진다. 유튜브엔 이런 곡들을 모은 ‘부모님을 그리는 노래’ 등이 수십만~수백만 조회 수를 올릴 만큼 인기다.

 

▶그제 ‘미스트롯3′에 출연한 9세 소녀 이수연이 2년 전 세상을 떠난 아빠를 위해 ‘울아버지’를 불렀다. ‘울 아버지 울 아버지 보고 싶어요~’라고 노래한 뒤 감정이 북받쳤는지 “아빠가 돌아가셔서”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걸 본 아빠들이 ‘이수연 어린이는 대한민국의 아버지들을 울리면서 모든 아버지의 딸이 되었다’는 응원 댓글을 달았다. 지난주 이미자의 ‘모정’을 불러 TV 앞에 모인 이들을 울린 빈예서양과 함께 이 연말, 가족 사랑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아이콘이 됐다.

 

▶며칠 전 불이 난 아파트에서 어린 딸을 안고 뛰어내려 자식을 살리고 하늘로 간 아빠 뉴스가 온 국민을 울렸다. 한 해의 끝에 빈예서·이수연 두 소녀가 부른 노래도 내 부모, 내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돌아보게 한다. 노래가 고맙고, 불러준 가수가 고맙다. 새해에는 가족을 더 많이 사랑하겠다고 다짐한다.

김태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