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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따라 이야기 2023/ 월간조선 07월 호 ‘시대의 얼굴’ 남자 배우로 보는 전후 70년 - 12.28 최정상급 배우까지 비극으로 내몬 마약 파문

상림은내고향 2023. 12. 18. 14:20

 

딴따라 이야기 2023/

월간조선 07월 호 특집 / 戰後 70年

‘시대의 얼굴’ 남자 배우로 보는 전후 70년

‘미국화 된 청년’ 이민에서 ‘불안한 시대의 액션 배우’ 마동석까지

⊙ ‘元祖 꽃미남’ 배우 이민, 〈자유부인〉 등 통해 ‘미국화를 열망하는 청년상’ 보여줘
⊙ ‘1960년대의 얼굴’ 신성일, 근대화 욕망하지만 좌절하는 청춘의 아픔 그려
⊙ 1970년대, ‘호스티스 영화’ 붐과 함께 주목할 만한 남자 배우 실종
⊙ 1980년대를 독주한 안성기는 신성일의 ‘1980년대 버전’
⊙ 고도성장의 열매 따 먹게 된 1990년대에는 한석규, 박신양, 배용준 등 ‘안경 쓴 남자’ ‘부드러운 남성상’ 등장
⊙ ‘푸근한 외모의 중년’ 송강호, 소시민적인 고민·갈등·분노 표현하면서 IMF 사태 이후의 스타로 등장

이문원
《뉴시스이코노미》 편집장, 《미디어워치》 편집장, 국회 한류연구회 자문위원, KBS 시청자위원, KBS2 TV <연예가중계> 자문위원, 제35회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역임 / 저서 《언론의 저주를 깨다》(공저), 《기업가정신》(공저), 《억지와 위선》(공저) 등


 ‘시대의 얼굴’이라는 수사(修辭)가 있다. 대부분 언론미디어에서 붙여주는 칭호인데, 정치·경제·사회·문화 어느 분야건 이런 수사로서 일컬어지는 인물들이 적지 않다. 대중문화계에서도 마찬가지. 이 중 가장 자주 언급되는 게 영화배우들이다. 당대 현실에서 볼 수 있는 특징적 인물들을 구현(具現)하면서 그 당시 대중의 갈망과 딜레마들을 끄집어내 직설적으로 반영하는 부분이 크기 때문이다. 이렇게 몇몇 배우는 시대 자체를 상징하게도 된다.

한국에선 상당 부분 여자 배우들 중심으로 이런 접근이 많다. 예컨대 문희·남정임·윤정희의 ‘1세대 트로이카’, 유지인·정윤희·장미희의 ‘2세대 트로이카’, 심은하·전도연·고소영의 ‘3세대 트로이카’ 등이다. 애초에 ‘트로이카’ 등의 명칭과 분류 자체가 여자 배우들에게만 해당된다. 물론 이 역시도 의미가 있는 작업이다. 당대의 특징적 여성상과 함께 시대에 따른 미적(美的) 기준의 변천(變遷)을 함께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업적 가치가 상당히 높다.

전후(戰後) 70년을 맞는 지금, 이번에는 생각보다 많이 다뤄지지 않는 각 ‘시대의 얼굴’ 격 남자 배우들을 통해 서로 다른 한국 사회 공기(空氣)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큰 차원에선 ‘대중문화를 통해 바라본 전후 70년’, 좁게는 각 시대마다 가장 인기 있었던 스타 배우들의 면면(面面)을 통해 당대 대중의 동경(憧憬)과 아픔을 짚어본다는 취지다. 차례로 살펴보자.

경성제대 출신 ‘元祖 꽃미남’ 이민

휴전협정 직후 1950년대 한국 영화계를 돌아볼 때 당시를 경험했던 원로 영화인들이나 영화학자들에게서 반복되는 언급이 있다. “모든 것은 〈춘향전〉으로부터 시작됐다”는 것. 이규환 감독의 1955년 작 영화 〈춘향전〉 얘기다. 전쟁의 상흔(傷痕)이 아직 가시지 않은 시점, 한국 영화산업의 존폐(存廢)조차 아슬아슬하던 시기에 서울 관객 18만 명을 동원하며 해방 이후 최고 흥행기록을 세웠고, 한국 영화 부활의 신호탄이 됐다.

물론 〈춘향전〉은 영화화됐을 때 늘 좋은 반응을 얻어온 소재다. 1923년 개성의 이름난 기생이었던 한룡(한명옥)을 춘향 역으로 캐스팅한 버전이 영화화 최초다. 흥행에 대성공해 장안(長安)의 내로라하는 기생들이 대거 영화계로 뛰어드는 현상을 낳았다. 이후 1935년 버전 〈춘향전〉은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로서 다른 영화들에 비해 두 배나 비싼 입장료인 1원을 받았음에도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뤘다. 〈춘향전〉은 본래 스테디셀러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1955년 판 〈춘향전〉이 특별한 건 그 시기 탓이다. 1955년 1월 개봉작이니 휴전협정으로부터 1년 반도 채 되지 않은 때다. 당시 경제 상황이나 문화소비 심리 등으로 봤을 때 서울 인구 10분의 1에 해당하는 18만 명이 봤다는 건 누가 봐도 놀랄 일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걸까. 단순하다. 〈춘향전〉을 통해 새로운 스타가 탄생해 세간의 화제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입소문이 워낙 자자했던 탓에 그를 구경하러 비싼 입장료를 내고서라도 극장 앞에 줄을 섰다는 것. 바로 이몽룡 역을 맡은 ‘꽃미남’ 배우 이민(李敏)이다.

1921년생인 이민은 실제로 외모도 빼어났지만 이력도 당시로서 특이했다. 일본 사이타마현(縣)의 명문 우라와고등학교에서 유학 생활을 하기도 하고, 돌아와선 경성제국대학 광산학과에서 학업을 마친 상당한 엘리트였기에 그야말로 귀공자 역할로 딱 적합한 인물이었던 것. 이 같은 배경이 함께 알려지면서 〈춘향전〉은 어마어마한 문화현상으로 거듭났고, 이민도 여기서 성립된 귀공자 이미지로 한동안 승승장구했다.


‘미국화를 열망하는 청년상’ 대변

▲1956년에 나온 〈자유부인〉에 출연한 배우 이민(왼쪽). 그는 ‘미국화를 열망하는 청년상’을 대변했다. 사진=유튜브 캡처

 
 

정확히 1955년부터 1959년까지, 1950년대 후반 한국 영화계는 그야말로 ‘이민의 시대’였다. 적어도 흥행 차원에서는 그랬다. 〈춘향전〉 대성공 이후 1956년에 3편, 1957년에 5편의 영화에 출연하고, 이어 1958년에는 10편 출연으로 또 배가 늘어난다. 그러다 1959년에 이르면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 등 한 해 동안 무려 13편의 영화에 겹치기 출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민 없이는 영화 못 찍는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1960년이 되자 그의 출연작은 다시 4편으로 급격히 줄었고, 심지어 1961년에는 출연작이 한 편도 없었다. 이러다 1963년 〈백마고지〉를 끝으로 주연급 배우로서의 커리어는 막을 내린다. 짧은 전성기, 사실상 ‘반짝스타’였던 셈이다.

이 ‘반짝스타’의 커리어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있다. 이민은 분명 〈춘향전〉의 이몽룡 역으로 스타덤에 오른 것이 맞지만 그를 대변하는 이미지는 바로 다음 해 또 다른 히트작을 통해 굳어졌다. 1956년에 영화화된 정비석 원작 〈자유부인〉이다. 역시 서울 관객 15만 명을 동원하는 대히트작이 됐고, 사회·문화적 파급력은 오히려 〈춘향전〉을 능가했다. 여기서 이민은 유부녀인 주인공 오선영(김정림 분)에게 춤바람을 불어넣는 대학생 춘호 역을 맡았다.

미국행(行)을 앞두고 있다는 춘호는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소위 ‘미국물’이 들어 있는 청년이다. 비니를 쓰고 다니는 차림새부터, 위스키를 즐겨 마시며, “익스큐즈 미” “아이 러브 유” 등 영어를 틈틈이 섞어 대화한다. “그저 프렌드인 여성과 뭐 키스 좀 했다고 해서 뭐가 상관있느냐”는 식으로 예의 영어를 섞어가며 미국식 사고방식을 열변(熱辯)하기도 한다. ‘미국화된 청년’ 또는 ‘미국화를 열망하는 청년’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물상이 당시 대중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미국’이라는 이미지를 전달한 배우

이 탓에 이민은 이후 비슷비슷한 역할, 세련된 양장(洋裝)을 한 도회풍의 신세대 청년 역할을 주로 맡았고, 1959년 작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에선 아예 재미(在美)동포 출신 종군기자 헨리 장 역을 맡아 ‘미국화’ 노선의 정점을 보여줬다. 이에 대해 공영민 영화사연구자의 한국영상자료원 칼럼 “1950년대 한국 영화의 성장과 스타의 등장: ‘미국’이라는 이미지를 전달한 배우 이민”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선망의 대상이자 열등감을 느끼게 하고, 언젠가는 이루어야 할 꿈으로 남아 있는 미국적 생활양식과 소비는 미국 영화에 등장하는 스타의 모방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모방은 원용진의 표현처럼 “영어로 말하기, 다방에서 커피 마시기, 할리우드 영화 보기 등은 단순히 언어, 물질,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을 넘어 자신을 드러내는 이름표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배우 이민은 미국을 경험한 지식인 엘리트 혹은 미국 문화의 수혜를 받은 젊은이의 이미지를 대변했다. (중략) 흥미로운 것은 ‘미국행’ 혹은 ‘미국에서의 귀환’은 〈자유부인〉뿐만 아니라 〈촌색씨〉나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극의 갈등 상황을 유발하거나 해결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사건의 내부에서 얽히고설키는 역할을 한다기보다는 관계에 파문을 일으키는 외부의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즉 미국이라는 나라와 미국 문화를 동경하고 선망하지만, 우리의 내부로 온전히 수용할 수 없는 ‘양가적인 감정’이 이민이 맡은 역할들을 통해 잘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청춘의 얼굴’

▲신성일은 근대화 시대 ‘청년의 얼굴’이었다. 1963년 11월 30일 열린 제1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의 신성일과 엄앵란. 사진=조선DB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에 의해 일본으로부터 해방되고, 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의 도움으로 국토의 절반이나마 자유를 지킨 6·25전쟁이 휴전된 직후 대한민국의 공기란 이처럼 미국에 대한 양가(兩價)감정이 극단적으로 부풀어 오른 분위기였던 셈이다. 그리고 이민은 바로 이 시대 공기를 정확히 보여주는 대표적 청춘 아이콘으로서 짧으나마 현상적인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어찌 됐건 이민의 〈춘향전〉과 〈자유부인〉의 연타석 흥행 홈런 덕에 한국 영화 제작편수는 1955년 15편에서 급격히 성장, 1959년에는 무려 111편에 달하게 된다. 이민이 묘사한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인물들과 그에 영향받은 일련의 신세대 영화들이 함께 이뤄낸 기적적인 산업 부흥이었다.

이민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사실 영화계 ‘시대의 얼굴’ 속성은 ‘청춘의 얼굴’이란 점이다. 대중문화 자체가 10~30대 젊은 층이 주로 소비하는 것이기에 대부분 콘텐츠가 10~30대 주인공을 설정해 주(主)소비층 공감대를 얻어내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민 이후 ‘시대의 얼굴’을 생각해볼 때, 물론 1960년대에는 지금까지도 회자(膾炙)되는 수많은 스타 배우들이 존재했지만, 역시 신성일이라는 걸출한 배우를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960년 작 〈로맨스 빠빠〉로 데뷔해 1964년 〈맨발의 청춘〉으로 스타덤에 오른 그 신성일 말이다. 젠틀한 신사적 이미지를 선보인 김진규, 이와 반대로 반항적인 이미지의 최무룡, 무게감 있는 전통적 남성상을 그린 신영균 등도 물론 당시를 대변하는 영화 스타들이었지만, 역시 ‘1960년대의 청년’ 하면 신성일부터 떠오르게 된다.

신성일, ‘부모 不在’ 청춘들의 고통 그려

이에 대해 한국영화학회 발행 영화연구에 실린 강성률의 논문 〈신성일, 청춘(영화)의 표상〉은 “신성일은 ‘고독한 인상의 반항아’이고 ‘한국의 제임스 딘’이었다”면서 “도시의 이미지를 영화 속에 강하게 그리면서 근대화를 욕망하지만 그 안에서 좌절하는 청춘의 아픔을 그렸고, 부모 세대의 부재를 통한 청춘들의 고통을 그렸다”고 평가하고 있다.

확실히 그렇다. 한국의 근대화 선언은 1962년에 이뤄졌다. 한국 학계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아 미국 케네디 정권의 근대화론을 처음 적용해 학술회의를 연 게 1962년이다. 곧 국가 근대화의 신호탄과도 같았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같은 해 수립돼 추진됐다. 그러고 불과 1~2년 사이 한국 대중의 조건과 환경은 크게 달라졌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물살을 탔고, 이촌향도(離村向都)는 생존의 기본 방향처럼 여겨졌다.

당시 신성일이 출연한 〈청춘교실〉 (1963), 〈맨발의 청춘〉(1964), 〈육체의 대결〉(1966), 〈불타는 청춘〉(1966), 〈만추〉(1966), 〈초우〉(1966), 〈상처뿐인 청춘〉(1967) 등은 대부분 근대화와 함께 피어오른 갖가지 욕망과 삶의 도전, 신분 상승의 의지, 그리고 그런 의지의 처절한 좌절과 패망(敗亡) 등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신성일이 이런저런 청춘영화들에서 고아(孤兒) 출신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던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북한 합쳐 300만 명 가깝게 사망한 6·25전쟁에서 실제로 부모를 잃은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앞선 이촌향도를 통해 기존의 공동사회에서 이익사회로 갑작스러운 이동과 적응을 요구받은 당시 젊은이들은 많건 적건 고아와도 같은 심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신성일은 또 다른 ‘시대의 얼굴’이 된다. 전쟁 직후 젊은이들의 미국에 대한 끝없는 동경과 부적응을 담았던 이민과는 또 다른 시대, 거센 근대화와 압축 성장이 낳은 청춘의 갈등과 고뇌를 담는 그릇이 됐다.

 
 

1970년대, 남자 배우들의 실종

▲신성일·안인숙 주연의 〈별들의 고향〉. 이후 ‘호스티스 영화’가 이어지면서 여배우들에게 중심이 이동했다. 사진=조선DB

 
 

이어지는 1970년대는 영화계 차원에서 조금 기묘한 시대였다. 활동한 남자 배우는 많았지만 그 인상은 대부분 희미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1970년대는 실질적으로 전후(戰後) 70년사에서 유일하게 여성 캐릭터들이 영화 미디어의 절대 중심에 섰던 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단적으로, 1970년대 들어 TV 보급률이 어마어마하게 뛰어오른 탓이다. 1965년만 해도 한국의 TV 등록대수는 3만1701대, 가구당 보급률은 0.6%에 불과했다. 그러나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불과 10년 뒤인 1975년에는 등록대수 206만1072대, 보급률은 무려 30.3%에 이르렀다. TV는 순식간에 극장 관객들을 빼앗아가는 강력한 경쟁 미디어가 됐고, 영화는 TV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존과는 다른 방향을 택해야 했다.

미국의 경우 1950~1960년대 이 같은 경쟁 구도에서 TV로는 보여줄 수 없는 초대형 스펙터클 노선을 선택, 〈성의〉 〈삼손과 데릴라〉 〈벤허〉 등 성서(聖書) 블록버스터와 〈콰이강의 다리〉 〈나바론 요새〉 〈대탈주〉 등 전쟁 영화들을 제작하는 방향으로 갔다. 그러나 아직 자본과 기술력 면에서 미국을 따라잡지 못했던 한국은 성(性) 묘사 중심으로 수위를 높여 ‘TV로는 볼 수 없는 콘텐츠’ 제작에 골몰했다. 1970년대 ‘호스티스 영화’ 붐의 시작이다.

그 신호탄 격이었던 1974년 작 〈별들의 고향〉의 대성공 이후 〈영자의 전성시대〉(1975), 〈O양의 아파트〉 (1978), 〈꽃순이를 아시나요〉(1979) 등등 ‘호스티스 영화’들이 줄줄이 흥행에 성공했고, 호스티스 소재는 아니어도 달라지는 젊은 여성의 성 모럴을 다룬 〈겨울여자〉(1977),가 역대 한국 영화 흥행기록을 경신(更新)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남자 배우들의 존재감은 한없이 옅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대 성 모럴을 다루자니 변화의 중심인 여성으로 핵심 인물이 이동될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시기엔 1960년대에 신성일 등이 맡았던 역할을 여자 배우들이 맡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도태(淘汰)되거나 압축 성장이 낳은 가치관 혼란 속에서 길을 잃고 마는 청춘 군상(群像) 말이다.

‘매운맛 신성일’ 안성기

▲영화 〈안개마을〉에 출연한 안성기. 그는 ‘1980년대의 신성일’이었다. 사진=조선DB

 
 

그렇게 특이한 1970년대를 지나 1980년대로 들어서자 명실상부(名實相符) 1980년대 한국 영화계의 대표 얼굴로 기억되는 안성기가 혜성처럼 등장했다. 흥행 면에서나 연기력 면에서나 모두 안성기가 크게 앞서나간 시대이기도 했지만, 특히 〈고래사냥〉(1984), 〈깊고 푸른 밤〉(1985) 등 그가 출연한 영화들 자체가 곧 1980년대를 대변하는 영화들이 됐다는 점에서 확실히 1980년대 한국 영화는 안성기의 독주(獨走)였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안성기는 많은 점에서 1960년대에 신성일이 맡던 청춘상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6·25 전쟁으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시점인데도 안성기는 〈오염된 자식들〉(1982)이나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 등에서 여전히 고아 출신으로 등장했고, 〈안개마을〉(1983)이나 〈고래사냥〉 (1984) 등에서도 소위 ‘집도 절도 없는’ 부랑자로 분하기도 했다. 모두 근대화와 압축 성장의 뒤안길을 보여주는 캐릭터들이다. 다만 1960년대 당시보다 표현이 자유로워진 만큼 피폐(疲弊)한 청춘 묘사에 있어 한층 극단적인 모습을 띠었다는 정도만 다르다. 요즘 말로 하면 ‘매운맛 신성일’ 정도가 되겠다.

예컨대 1980년대에 안성기가 맡은 역할들은 실질적으로 악역(惡役)과의 구분이 모호한 것들이 많았다. 〈적도의 꽃〉 〈안개마을〉 〈깊고 푸른 밤〉 등에선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서슴없이 범죄행각을 벌이기도 하고, 심지어 〈성공시대〉(1988)에선 자신의 얼굴을 새긴 만 원짜리 복돈에 매일 나치식 경례를 하는 배금주의(拜金主義)의 화신(化神)으로 등장, 사실상 반(反)자본주의적 메시지를 전하기까지 한다.

결국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영화 속 ‘시대의 얼굴’들은 모두 유사한 종류 인물들로서 사실상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던 셈이다. 산업화, 도시화, 근대화, 압축 성장, 그 엄청난 속도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과 그 속에서 가치를 상실하고 삶의 중심을 잃어버린 이들의 처절한 추락을 보여주면서 같은 고통과 번민, 불안을 안고 있던 청년 대중에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역할을 맡았다. 개발연대의 초(超)고도성장은 분명 전무후무(前無後無)할 정도의 획기적인 삶의 질 향상을 단기간에 가져다줬지만, 그 기적적인 성취만큼이나 대가(代價)로서 치러야 했던 대중의 정신적 혼란과 적응의 고통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안경 쓴 남자 배우’의 등장

한석규 등 ‘안경남’의 등장은 경제발전에 따른 ‘남성성’의 변화를 보여준다. 사진=조선DB

 

이처럼 30년 가깝게 지속돼온 기존 패러다임에 처음 대대적인 변화가 생기는 것이 1990년대다. 한국 영화산업의 부흥과 함께 1990년대에는 영화 스타들도 크게 늘어났다. 그중에서도 추리자면 1990년대 초중반에는 박중훈, 문성근 등이, 1990년대 중후반은 한석규와 박신양 등이 영화계에서 대중의 사랑을 받는 흥행 스타로 크게 주목받았다.

여기서 일련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중 한석규, 박신양, 문성근은 ‘안경 낀 남자 배우’라는 점이다. 장난처럼 들리겠지만 의외로 스타산업에선 중요한 지점이다. 예컨대 서구에서도 주연 남자 배우 마이클 케인이 안경을 끼고 등장한 1966년 작 영국 영화 〈알피〉가 특히 미국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미디어의 관심이 집중됐던 바 있다. ‘안경 낀 남자 배우’가 주연급으로 등장하는 일도 드물었지만, 그런 배우가 섹스 심벌로서 청춘스타로 거듭나는 건 사실상 초유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주연급 남자 배우들은 극 중에서 어떤 식으로건 강한 남성성(男性性)을 증명해야 했고, 시력이 좋지 않아 안경을 낀다는 건 일종의 나약함으로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어딘지 ‘범생이’ 같다는 인상을 줘 역할도 제한되고 극(劇) 중심으로는 꺼려지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1990년대 한국에선 영화계뿐 아니라 대중문화계 어디서건 ‘안경남(男)’이 대세처럼 몰려왔다. TV 브라운관에서 역시 안경을 낀 배용준, 손지창, 이창훈 등이 막 스타로 발돋움하고 있었고, 대중음악계에서도 신승훈, 이승환, 서태지 등이 청년 세대를 이끌며 시대를 풍미했다. 이유는 1960년대 당시의 미국과 다르지 않을 듯싶다. 한창 ‘자본주의 황금기’를 만끽하던 당시 미국처럼 1990년대 한국도 이제 막 초(超)고도성장의 열매를 따 먹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자신감도 생겼고, 1인당 GDP 3000달러를 훌쩍 넘기며 중산층이 형성되고 있었다.

맨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 악물고 고군분투(孤軍奮鬪)하던 시절에 요구되던 거칠고 강인한 남성상보다는 지식사회에서 활약할 수 있는 지적(知的)인 이미지와 세련된 매너, 덜 공격적이고 조화를 꾀하는 부드러운 남성상이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서 선호됐던 것이다. 거기다 일정 부분 여성성까지 지니고 있어 여성에 가부장(家父長)적 억압을 가하려 하지도 않을 듯한 남성상이 그렇게 새로운 섹스 심벌로 떠올랐다. 그리고 당시 낮은 도수(度數)를 마케팅 포인트로 홍보하던 어느 소주 광고의 카피는 “독한 남자 싫어요. 부드러운 남자 좋아요”였다. 대략 한석규 정도로 대표되는 영화계 ‘안경남의 시대’의 배경이다.

‘喜悲劇’에 강한 송강호

 그럼 지금은 어떨까. 다소 부침은 있더라도 지금 역시 번영의 열매를 따 먹고 있는 것은 부정하기 힘드니 같은 맥락에서 ‘시대의 얼굴’들이 나타나고 있을까. 현실은 의외다. 지금의 영화계 ‘시대의 얼굴’은 송강호다. 송강호는 첫 단독 주연 히트작인 2000년 〈반칙왕〉 이래 거의 사반세기 가깝게 한국 영화계의 얼굴로서 자리매김하는 어마어마한 지속력을 지닌 대스타다. 그리고 결국 지난해 〈브로커〉로 칸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까지 수상하며 흥행과 연기력 양면에서 모두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존재로 우뚝 서게 됐다.

그런데 송강호는 참 특이한 종류의 스타다. 첫 단독 주연 영화가 한국 나이 34세 때 나오고 대부분 히트작들은 40~50대에 걸쳐 있으니 청춘스타라 보기는 힘들다. ‘꽃미남’과도 거리가 먼 푸근한 인상이다. 부산 출신으로 경상도 억양이 여전히 섞여 있다. 대구 억양이 강한 탓에 대사를 성우(聲優)의 후시(後時) 녹음에 의존하며 전성기 대부분을 보냈던 신성일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무엇보다, 송강호는 희극(喜劇) 연기로 처음 스타덤에 오른 탓에 계속 그 이미지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고, 정극(正劇)에도 다수 출연하지만 진가가 발휘되는 것은 대부분 희비극(喜悲劇)이라는 평판이다. 희극 중심 배우가 딱히 정상급 인기를 차지한 적이 없는 한국 풍토에서 이 역시도 특기할 만한 점이다. 여러 면에서 기존의 스타산업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비단 한국뿐 아니라 세계 기준으로 봐도 그렇다.

그럼 송강호는 대체 어떤 당대 현실을 반영하는 인물인 걸까. 상당 부분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낳은 스타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근대화 선언 이후 처음 무한(無限)성장 신화가 무너지고 기업들의 연쇄 도산(倒産)과 청년 취업 빙하기가 닥치면서 청년 세대의 생존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시작된 시점 말이다. 그런 시대이기에 송강호 같은 푸근한 외모의 중년 남성이 다분히 소시민적인 고민과 갈등, 분노 등을 표현하는 영화들에서 위안을 찾았다는 해석이다. 그리고 이렇듯 만성적인 불안과 공포의 시기이기에 송강호가 품은 해학(諧謔)적 요소가 빛을 발하게 됐다는 것이다. 엄혹한 현실에 대한 냉소(冷笑)로서의 웃음이든 치유(治癒)로서의 웃음이든, 웃음으로 삶의 고통을 덜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세대의 심리가 반영됐다.


‘불안한 시대’의 액션스타 마동석

영화 〈범죄도시〉(2022)의 마동석은 ‘불안한 시대’의 액션스타이다

 

지난 사반세기 동안 한국 영화산업의 상업적 ‘큰 꿈’이라 할 수 있는 ‘1000만 영화’를 4편(〈괴물〉 〈변호인〉 〈택시운전사〉 〈기생충〉)이나 내놓고, ‘대박’으로 분류되는 500만 관객 이상 영화는 무려 13편이나 탄생시킨 송강호의 믿기 힘든 초장기 스타덤은 바로 이런 종류 시대의 아픔, 즉 이제 생존의 위협은 사라졌으나 개인으로서 존재 증명 및 사회적 역할 차원에서 점차 자존감(自尊感)을 잃어가는 신세대 멘털리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요즘은 또 다른 얘기도 들린다. 신작 주연 영화 〈범죄도시 3〉가 6월 4일 현재 불과 개봉 6일 만에 450만 관객을 돌파하고 있는 마동석이 새로운 ‘시대의 얼굴’로 올라선 게 아니냐는 의견이다. 거대하고 육중한 근육질 체구로 상대를 주먹 한 방에 픽픽 쓰러뜨리는 모습들을 선보이며 〈범죄도시〉 3부작은 물론 〈악인전〉 〈나쁜 녀석들: 더 무비〉 등까지 흥행 성공신화를 쓰고 있는 대표적 액션스타. 3년여에 걸친 코로나19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여파로 전 세계 경제와 사회가 불안하게 요동치고 있는 지금, 한국의 청년 대중이 원하는 ‘시대의 얼굴’은 이렇듯 선명한 선과 악 구도에서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며 묵은 체증(滯症)을 속 시원히 날려줄 거구의 액션스타로 옮겨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최고급입니까?”

당연한 얘기지만, 이들 이민에서 신성일과 안성기, 한석규와 송강호를 거쳐 어쩌면 마동석까지 이어지고 있는 영화스타들의 면면(面面)만으로 각 시대 전체를 아우를 수는 없다. 정치학자 헤어프리트 뮌클러가 《파편화한 전쟁》에서 지적했듯 “어떤 특징들이 지배하는 시기로 한 시대를 구성하는 일은 거의 언제나 구상했거나 구상하려는 시대상에 부합되지 않는 것을 삭제”하는 과정일 뿐이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렇기에 더 많은, 다양한 정보와 시각, 관점들이 필요한 것이고, 이처럼 대중문화에서 시대 공기를 찾아내려는 시도 역시 전후 70년을 맞이하는 지금 한 번쯤 되짚어봐야 할 역사의 한 조각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대중문화가 보태는 역사의 조각들은 역사책을 더 두껍게 만드는 정보들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정보들을 ‘입체적’으로 구성하는 데 역할 한다. 2차원에서 3차원으로 정보가 새롭게 나열되는 데 역할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역할이 사뭇 간절해지는 순간들이 온다. 예컨대, 근래 명품 사치 풍조가 만연하다는 보도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가운데 이 같은 풍조가 지금이 처음이 아님을 앞선 이민의 1956년 영화 〈자유부인〉에서 당대 유행어로 거듭났던 대사, “뭐든지 최고급품으로 주시오. 최고급입니까?”를 통해 확인해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글 :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07.03 원로 탤런트 박규채 별세

 

원로 탤런트 박규채(85) 씨가 1일 오후 1시 5분쯤 별세했다. 그는 최근 폐렴 치료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양정고를 졸업한 고인은 고려대에 재학하던 1959년 국립극단 단원으로 입단하며 연기를 시작했다. 이어 TV 탤런트로 방송에 데뷔해 재벌 성장 과정을 그린 ‘야망의 25시’를 비롯 ‘제1공화국’ ‘억새풀’ ‘사랑과 야망’ ‘3김 시대’ 등 드라마에 출연했다.

 

특히 1980년대 초 정치 드라마에서 이승만 정권 2인자 이기붕 역을 맡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드라마 ‘억새풀’에선 ‘오날날’이라는 유행어를 낳기도 했다. ‘전원일기’에서는 김 회장(최불암 분)의 친구인 면장 역을 맡았다.

 

1987년 13대 대선에서 김영삼 당시 야당 후보 지지 연설을 했다가 방송 출연이 막히는 등 어려움도 겪었다.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 영화진흥공사 사장에 임명돼 1년여 재임했다.

 

한국평생교육복지진흥회 회장, 한국사회교육협회 부회장 등을 지냈고, 한일장신대, 배재대, 김천대 등에서 연기를 가르쳤다.

 

빈소 경기도 안산 단원병원 장례문화원, 발인 3일 오전 9시30분. (031)8041-2090

조선일보

 

 

07.09 ‘범죄도시’, 한국영화 첫 3000만 시리즈에...편당 평균은 ‘신과 함께’ 못미쳐

▲마동석 주연의 영화 '범죄도시'가 한국 영화 최초로 3000만 시리즈에 올랐다.

 

 배우 마동석 주연의 범죄 액션 영화 ‘범죄도시’ 1~3편이 한국 시리즈 영화 최초로 관객 3000만명을 돌파했다. 국내 개봉한 ‘3000만 영화’는 ‘어벤저스’ ‘미션 임파서블’ ‘트랜스포머’ 등 해외 시리즈가 다수 있으나 한국 시리즈로는 ‘범죄도시’가 최초다.

 

배급사 에이비오엔터테인먼트는 ‘범죄도시 3′이 8일 오전 1043만 관객을 돌파해 1편(2017) 688만명, 2편(2022) 1269만명을 포함, 누적 관객 3000만명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범죄도시 3′은 개봉 32일 째인 지난 1일 1000만명을 돌파하며 역대 30번째, 한국 영화로는 21번째 천만 영화가 됐다. 2023년 영화로는 ‘아바타: 물의 길’에 이어 두번째 기록이다.

 

편당 평균 관객은 ‘범죄도시’ 시리즈에 앞서 ‘쌍천만’을 기록한 ‘신과함께’ 시리즈가 앞선다. ‘신과함께’는 1편 ‘죄와 벌’(2017) 1441만명, 2편 ‘인과연’(2018) 1227만명으로 편당 1334만명에 달한다. ‘신과함께’ 3편이 개봉해 전작의 인기를 이어갈 경우 ‘범죄도시’ 기록을 깰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조선일보 신정선 기자

 
 
 

07.24 70년 전 휴전 알린 송해를 생각한다

당시 육군 통신병 송해의 전보… 불행을 극복한 인생의 교과서
운명 탓한다고 남의 것 되지 않아… 땡을 받아봐야 딩동댕을 안다

▲다큐멘터리 ‘송해 1927’에 출연한 송해. 6·25 전쟁 중 월남한 그는 육군 통신병으로 남한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스튜디오디에이치엘

 

1953년 7월 27일, 육군본부 통신병들은 손가락과 마음이 바빴다. 전군으로 보내야 할 일급전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머리에 ㅂ자가 붙어 있으면 보통 전보, ㄱ자가 있으면 긴급 전보, ㅇ자가 있으면 일급 전보였다. 통신병들은 암호로 된 모스 부호를 내용도 모르는 채 송신했다. ‘1953년 7월 27일 22시를 기점으로 모든 전선의 전투를 중단한다’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6·25전쟁 참전 용사이자 국가유공자 송해(1927~2022)는 그날 유엔군과 중공군 및 인민군 사이에 휴전이 성사됐다는 사실을 처음 전파한 통신병들 중 한 명이었다. 황해도 재령이 고향으로 징병을 피해 1950년 12월 혈혈단신 월남한 그는 “(고향의 어머니와 누이에게) 돌아갈 길을 내가 끊은 것”이라고 탄식하곤 했다.

 

정전(停戰) 70년은 잿더미가 된 나라를 재건하고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도약한 세월이기도 하다. 본명이 송복희였던 청년은 유엔 군함에 실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망망대해에서 ‘바다 해(海)’를 따 이름을 다시 지었다. 지난 70년은 송해 개인으로 보면 낯선 땅에서 맨주먹으로 다시 시작한 인생 역정과도 같다.

 

만기 제대를 했지만 남쪽에는 일가친척도 의지할 곳도 없었다. 해주음악전문학교를 다닌 경험을 살려 악극단 문을 두드렸다. 자원이 한정돼 있는 악극단은 단원이 노래, 연기, 사회(MC)를 두루 잘하지 못하면 바로 잘랐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던 시절, 송해는 그 지옥 훈련을 이겨내며 무명에서 단역으로, 조연으로 올라왔다. 주연을 바라보면서 용기를 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세대가 가장 불행하다고 푸념하지만 송해 세대에 비하면 잘 먹고 잘 살았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송해는 이념의 칼질을 몸으로 겪었다. 전쟁으로 생사의 기로에 섰고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정전 후에도 인생은 불안정해 3년 앞을 보장할 수 없는 삶이 계속됐다. 송해는 “생애 전체가 공포였다”고 했다.

 

“잡을 것 없는 낭떠러지를 떨어지는 기분이 늘 들었어요. 평생 3년 계획을 못 세워봤습니다. 방송은 춘하추동 4계절 개편을 하잖아요. 다음 계절에도 이걸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부터 했어요. 힘들어서 중도 하차하는 경우도 많이 봤지요. 하지만 돌아보면 유랑극단부터 전국노래자랑까지 배역을 맡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 게 큰 경험과 자산이 된 것 같습니다.”

 

그는 전국노래자랑을 인생의 교과서로 불렀다. 아들을 잃고 ‘야전 부대’처럼 전국을 떠돌며 바람이나 쐬자고 시작한 프로그램이었다. 만인 앞에 서려면 그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읽어야 했다.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생활이 묻어나는 무대였다. 참가자 중 누구는 딩동댕 소리를 들었고 누구는 땡이었지만 송해는 “땡이 있어야 딩동댕이 있다”고 위로했다.

 

땡을 받아봐야 딩동댕의 가치를 안다. 전국노래자랑으로 송해는 34년간 1000만명을 만났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그 앞에서 마음을 열었고 송해는 입을 열어 그 지역 특산물을 맛있게 먹었다. 그가 대중과 맺은 다정한 관계는 오빠, 형, 아버지, 할아버지, 선생님 같은 호칭들만큼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대한민국에 그런 사람이 또 있었나?

 

70년 전 육군 통신병 송해가 전보를 보냈을 때 남과 북은 똑같이 폐허였다. 그런데 지금 남한은 번영했는데 북한은 왜 여전히 가난한가. 미래를 향해 나아간 나라와 남한·미국 탓만 하며 불행한 과거에 갇힌 나라의 차이다. 전쟁의 소용돌이를 뚫고 일어선 우리 현대사를 돌아보며 송해를 생각한다. 그는 “내 인생 목표는 딩동댕으로 남는 것이었다”고 했다. 운명은 탓한다고 남의 것이 되지 않는다.

조선일보 박돈규 주말뉴스부장

 

 

08.12  3년 전 사업가로 근황 알렸는데…배우 이경표 별세

▲배우 이경표씨. 중앙포토

 
 

1990년대 인기 농촌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걸렸네'에 출연했던 배우 이경표(61)씨가 12일 병환으로 별세했다.

'미스 춘향' 출신인 고인은 1980년 동양방송(TBC) 23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고, 방송사 통폐합 이후 KBS에서 활동했다.

 

고인은 KBS가 1990년부터 방송한 농촌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걸렸네'에서 '황놀부' 황민달 댁의 맏며느리 박해숙을 연기했다.

 

이밖에도 KBS 드라마 '청춘행진곡'(1983), '형사 25시'(1986), '토지'(1987), '장희빈'(2002) 등에 출연했다.

 

2000년대 후반 연예계를 떠났고, 2020년에는 한 방송에 출연해 사업을 하고 있다고 근황을 전했다.

 

고인은 1970년대 남성 포크듀오 '그린빈스'의 멤버였던 박재정씨의 아내이며, 작곡가 박시춘 선생의 며느리다. 유족으로 아들 박창조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김은빈 기자 kim.eunbin@joongang.co.kr

 

 

08.20 [르포] K팝 넘어 한국을 즐긴다...역대 최대 인파 몰린 KCON LA 2023

지금까지 누적 방문자 150만명 넘어

‘변방의 문화’ 에서 주류로의 도약 노려

 ▲18일(현지 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 LA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케이콘(KCON) LA 2023에서 팬들이 K팝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CJ ENM

 

19일(현지 시각) K팝 축제 ‘케이콘(KCON) LA 2023’가 열린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다운타운의 LA컨벤션센터 2층 회의장. 데뷔 1개월차인 신생 K팝그룹 ‘제로베이스원’의 멤버 석매튜와 리키가 입장하자, 현장에서 기다리던 500여명의 팬들은 발을 구르며 큰 소리로 환호했다. 이들이 좋아하는 제로베이스원은 오디션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한 다국적 그룹으로, 국내보다 해외에서의 팬층이 더 두텁다. 현장에서 흑인·백인·히스패닉 등 인종이 다양하게 섞인 해외팬들은 ‘사랑해’, ‘잘생겼어’와 같은 한국어를 능숙하게 외쳤고, 몇몇은 감격의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팬 시나이아 디아즈(21)씨는 “밋앤그릿(유료 토크쇼)을 포함한 500달러(약 67만원)짜리 프리미엄 입장권을 구매해서 왔다”며 “멤버들과 가장 가까운 앞자리에 앉고 싶어 이벤트 시작 전 한시간 전부터 와서 기다렸다”고 했다.

 

 ▲18일(현지 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 LA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케이콘(KCON) LA 2023에서 인파가 몰린 모습./CJ ENM

 

CJ ENM이 주최하는 세계 최대 한류 축제 케이콘이 18일 기준으로 현장 누적 관람객 150만명을 돌파했다. 2012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어바인(Irvine)에서 첫 행사를 연지 11년 만이며, 2019년 누적 100만 관객 기록을 세운지 4년만이다.

 

 ▲19일(현지 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 LA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케이콘(KCON) LA 2023에 입장을 기다리는 팬들이 K팝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오로라 특파원

 

실제로 이날 행사장 밖은 긴 줄이 대로변까지 끝 없이 늘어졌다. 관람객들은 긴 대기 시간 중 서로의 ‘최애 그룹’을 얘기하며 빠르게 친구가 됐다. 자발적으로 아이돌 뺨치는 군무(群舞)를 선보이며 분위기를 돋구는 팬들도 눈에 띄였다. CJ ENM에 따르면 18~20일 3일간 열리는 이번 행사를 찾는 관람객은 10만명을 거뜬하게 넘어설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는 역대 케이콘 LA 행사 중 최대 규모의 인파다.

 

▲18일(현지 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 크립토닷컴아레나에서 열린 케이콘 LA 2023 첫날 콘서트에서 셔누X형원(몬스타엑스)가 무대를 하고 있다./CJ ENM

 

18일 오후 8시에 시작한 첫날 공연에는 태민, 셔누X형원(몬스타엑스), 태용, 아이브 등 인기 아이돌이 총출동했다. 세계적 권위의 음악상인 그래미상 시상식이 열리는 크립토닷컴아레나에서 열린 콘서트에선 1층 스탠딩석부터 3층 ‘하늘석’까지 좌석을 가득 채운 해외팬들이 K팝 노래를 따라부르는 ‘떼창’이 이어졌다.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이 나올때마다 좌석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고, 노래에 맞춰 춤을추기도 했다.

 

◇'K문화’ 종합 선물 세트 된 케이콘

 ▲18일(현지 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 LA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케이콘(KCON) LA 2023에서 팬들이 K팝 아이돌의 포토카드를 구경하고 있다./오로라 특파원

 

19일 찾은 LA 컨벤션 센터는 ‘K문화 종합 전시관’을 방불케했다. K팝 스타들이 직접 나서서 팬들과의 만남을 갖는 무대 사이사이엔 한국의 뷰티·패션·음식·생활 분야 등 50곳의 중소기업 부스들이 차려져있었다. 각 부스에는 화장품 샘플 등 경품을 받으려는 K팝 팬들이 수십m씩 긴 줄을 서고 있었다. 화장품 업체 BOM의 이정호 대표는 “올해 미국 진출을 준비하고 있어 부스를 차렸는데, 현장 반응이 너무 좋다”며 “약 500만원 어치의 제품을 갖고 왔는데 부족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행사의 공식 후원사인 삼성전자도 전시장 한 중간에 대형 부스를 꾸리고 스마트폰 신제품 Z플립5의 홍보에 나섰다. 게임사 펄어비스, 한국관광공사, 아시아나항공, 올리브영 등 기업들도 부스를 차리고 팬들을 맞이했다. 아이돌그룹 크래비티가 직접 나서서 한국어를 가르쳐주는 코너에선 구름처럼 모인 팬들이 이들의 노래 가사에 나오는 ‘눈동자’, ‘오묘한’과 같은 아름다운 한국어 단어를 따라 읽었다. 11년 전 중소도시인 어바인의 한 콘서트장을 빌리고, 야외에 텐트를 치는 식으로 시작한 케이콘이 이제는 K팝을 매개체 삼아 ‘한국’ 자체를 경험하게 해주는 플랫폼으로 진화한 것이다.

 

◇앞으로의 목표는 ‘메인스트림’

 ▲18일(현지 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 LA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케이콘 LA 2023에서 팬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AP 연합뉴스

 

전문가들은 “K팝이 향후 20년, 30년 동안 계속해서 성장하려면 글로벌 전 연령층과 접점이 생기는 ‘메인스트림’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BTS·블랙핑크 등 대형 그룹의 성공으로 전세계 K팝 인지도가 최근 수년 사이 폭발적으로 커졌지만, 냉정하게 봤을땐 미국 주류 방송계·미디어계에선 여전히 K팝을 ‘변방의 문화’로 보는 시선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다만 케이콘 현장에선 ‘K팝 주류화’의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들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올해 CJ ENM은 아이하트미디어(iHeartMedia)와 파트너십을 맺고 ‘케이팝빌리지’를 설치해 아티스트 야외 무대 등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했다. 아이하트미디어가 운영하는 라디오 방송은 미국 현지의 초대형 팝스타들도 앨범 홍보에 필수 코스로 삼을 만큼 영향력이 크다.

 

 ▲19일(현지 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 LA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케이콘(KCON) LA 2023을 찾은 중년 K팝팬 마리빅 샌티아겔(53)씨가 아이돌그룹 샤이니의 사진이 프린트 된 옷을 보여주고 있다./오로라 특파원

 

이날 현장에선 중년층 K팝 팬도 만날 수 있었다. 인기 그룹 샤이니의 사진이 프린트 된 하얀 드레스를 입은 마리빅 샌티아겔(53)씨는 “여동생과 중년 친구들과 함께 K콘을 찾았다”며 “집 청소를 할때마다 K팝을 듣는데, 이제 K팝이 어린 친구들의 전유물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현장에선 샌티아겔씨 처럼 좋아하는 K팝 멤버의 사진을 가방에 주렁주렁 매달고 나타난 장년층 팬들의 모습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케이콘을 총괄하는 심준범 CJ ENM 음악콘텐츠본부장은 “K팝이 메인스트림에서 다양한 연령에게 새로운 장르로서 보다 확고하게 자리매김 할 수 있도록 글로벌 관객과의 접점을 지속적으로 마련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로스앤젤레스=오로라 특파원

 

 

08.24 과부라고? '미망인' 뜻 뒤집었다…애 업고 "레디고" 외친 女감독

▲영화 '미망인'을 만든 한국 최초 여성 감독 박남옥(우측 두번째). 남성 일색의 영화판에서 첫 연출 데뷔작을 만들어냈다.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돌도 안 된 딸을 맡길 데가 없어 포대기에 둘러업고 “레디 고”를 외쳤다. 제작비가 부족해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들 밥을 손수 지어 먹이기도 했다. 학창 시절 투포환 선수로 활약한 체력에다, “호탕하고 보기 드문 술고래, 영화밖에 모르는 사람”(유현목 감독)이란 평판도 전해 내려온다.

 

1950년대 남자들의 영화판에서 '여자라서 재수가 없다'는 고루한 편견에 맞서 데뷔작 ‘미망인’(1955)을 만든 한국 최초의 여성 감독 박남옥(1923~2017).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영화계 안팎에서 1세대 여성감독에 대한 조명이 잇따른다.

 

30일까지 메가박스 상암 월드컵경기장‧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리는 제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이하 여성영화제)는 26·29일 양일 간 마련한 특별전 ‘박남옥 탄생 100주년: 여성감독 1세대 탐구’를 통해 박남옥과 같은 시대에 활동한 두번째 여성 감독 홍은원 등을 돌아본다.

 

따라죽지 못한 사람…사전의미 뒤집은 '미망인'

▲영화 '미망인'에서 주인공은 전쟁통에 남편을 잃고 딸을 부양한다. 생계를 돕고자 하는, 죽은 남편 친구의 호의를 받아들이면서도 유부남인 그에게 선을 긋는다. 주인공에겐 따로 사귀는 애인이 있다. 사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특별전 상영작은 총 5편이다. 먼저, 박남옥의 유일한 연출작으로 남은 ‘미망인’이다. 영상자료원에 결말부 영상과 일부 사운드가 유실된 채 네거티브 필름만 남아있던 ‘미망인’을 세상에 다시 공개한 게 1997년 제1회 여성영화제다. 한국영화사에서 여성 영화인이 새롭게 조명되며 이후 사단법인 여성영화인모임 결성, 『여성영화인사전』(2001) 출간 등의 발판이 됐다.

 

 

박남옥은 경북 경산에서 포목상을 하던 대가족의 10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신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화여전 재학 시절 영화에 빠진 그는 대구에서 신문 기자로 일하다 영화 촬영소에 취직하며 영화 일을 시작했다. 편집 조수, 스크립터 등을 거쳐 한국전쟁 중 국방부 촬영대에서 종군영화를 만들고 종전 후 첫 연출작 '미망인'을 내놨다.

그간 박남옥이 영화판의 유리천장을 뛰어넘은 선구자로 회자됐다면, 올해 여성영화제는 ‘미망인’이 여성 서사를 다룬 방식에 주목했다. ‘미망인’은 전쟁 후 어린 딸과 단둘이 남은 주인공이 죽은 남편의 부유한 친구에게 도움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개척해가는 여정을 그린다. 이를 통해 ‘남편이 죽고 홀로 남은 과부,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사람’이란 제목의 사전적 의미를 전복시켰다. 전후 미망인을 팜므파탈 또는 희생적 모성이란 이분법적 사회 통념에 가두지 않았다. 여성영화제 이사장 겸 조직위원장인 변재란 교수(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는 미망인을 등장시킨 수많은 한국영화들과 차별화된 작품이라고 짚었다.

 

1950년대 女판사, 남편 열등감에 고뇌했죠

▲영화 '여판사'로 데뷔한 한국 두번째 여성 감독 홍은원. 영화계 입문 경력은 박남옥 감독을 앞선다. 박남옥 감독과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로 알려져있다.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홍은원의 데뷔작 ‘여판사’(1962)는 당시 주목받은 최초 여성 판사 실화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과년한 딸을 걱정하는 부모에게 “판사가 될 때까지 전 여자가 아니에요!”라고 선언할 정도의 각오로 열심히 공부해 판사가 된 주인공이 여성 판사에 대한 사회적 편견, 자신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남편, 시집살이 고충 등을 헤쳐나가는 과정을 그렸다.

여성영화제 황혜림 프로그래머는 “여성 직업인의 사회인으로서 입장과 가정 내 갈등을 다룬 점이 현대적”이라면서 “‘미망인’과 더불어 여성 서사를 고민한 맥락이 지금 시점에도 유효하다”고 말했다. 29일 ‘미망인’, ‘여판사’ 상영 후엔 대담 및 강연도 마련돼있다. 지난해 영화 ‘오마주’에서 홍은원을 조명한 신수원 감독, 변재란 이사장, 권은선 중부대 연극영화학과 교수가 참석한다.

 

공연계도 박남옥 조명, 뮤지컬 '명색이 아프레 걸'

이에 앞서 26일에는 임순례 감독이 박남옥부터 1970년대 ‘첫경험’을 찍은 황혜미 감독 등 여성 감독들의 활약을 조명한 ‘아름다운 생존: 여성 영화인이 말하는 영화’(2001), 박남옥의 삶과 꿈을 비춘 김재의 감독의 ‘꿈’(2001) 등 2편의 다큐멘터리를 연달아 상영한다.

▲영화 '꿈'. 사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박남옥의 전기 뮤지컬 기록영화 ‘명색이 아프레 걸’(2022)도 26일 상영된다. 첫 딸 출산 사흘 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온 박남옥이 한국전쟁 미망인에 관한 영화 제작을 결심하는 일상과 영화 ‘미망인’ 내용이 극 중 극 형태로 어우러진다. 2021년 김광보 연출로 국립극장에서 초연, 이듬해 규모를 확장한 동명 공연 실황을 기록한 작품이다.

 

탄생 100주년 박남옥 다큐 해외서도 나온다

박남옥에 대한 재조명은 계속된다. 한국영화사에서 영향력을 확장해가고 있는 여성영화인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시도다. 황혜림 프로그래머에 따르면 현재 박남옥에 관한 2편의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대구MBC에서 박남옥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영화연구자 사이먼 맥켄테가트 감독도 한국영화사에서 박남옥이 차지하는 위상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라고 황 프로그래머는 전했다.

▲동명 뮤지컬의 실황을 기록한 영화 '명색이 아프레걸'. 사진 국립극장

 

여성영화제가 2008년부터 수여해오고 있는 박남옥상의 올해 수상자는 섭식장애로 고통받는 딸과 딸의 병에 무력한 엄마 간의 관계를 파고든 다큐멘터리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을 만든 김보람 감독이다. 영화제 측은 “여성의 몸에서 시작해 모녀 관계, 여성 사회활동가였던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여성 생애사를 써나간다”는 심사평을 밝혔다.

중앙일보 나원정 기자

 

 

09.02 반지하 단칸방서 생활고 겪었다…원로가수 명국환 별세

▲원로가수 명국환. 사진 KBS 가요무대 영상 캡처

 

1950년대 큰 사랑을 받았던 원로가수 명국환(96)이 지난달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2일 대한가수협회에 따르면 명국환은 지난달 19일 오전 11시 50분쯤 인천 남동구 요양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그간 홀로 지내온 것으로 전해졌다.

 

1927년생인 고인은 1950년대 '백마야 우지마라', '아리조나 카우보이', '내 고향으로 마차는 간다' 등의 노래로 인기를 끌었다. 한국전쟁 이후 실향민의 아픔을 담은 노래들이다.

 

1957년에는 영화 '김삿갓'의 주제가인 '방랑시인 김삿갓'을 불러 히트시켰다. 2005년에는 제39회 가수의 날에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그가 별세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지난해 방송된 그의 근황이 재조명됐다.

 

지난해 12월 MBN '특종세상'에서는 명국환이 월세 23만원짜리 반지하 단칸방에서 홀로 생활하는 모습이 공개됐다.

 

방송에서 명국환의 지인은 "명국환이 굉장히 어렵게 살고 있다. 가족이 없이 홀로 정부에서 나오는 지원금으로만 생활하고 계신다"며 "마지막 삶을 너무 험난하고 힘들게 보내고 계신다"고 전했다.

 

당시 명국환은 "6·25 피란 나와서 21세 때 결혼했는데 자궁외임신 해서 그냥 다 가버렸다"며 "또 총 세 번의 결혼을 했지만 전부 아기가 유산이 됐다. 팔자가 그런 모양인 것 같다"라고 회상했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 넘어져 다친 상처투성이 다리를 보여주며 "다리가 불편한 건 아닌데 어지럼증이 있어 걷는 게 힘들다"고 말했다. 조카 손녀와 병원을 찾은 그는 파킨슨병 의심 진단을 받기도 했다.

 

방송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진 후 대한가수협회와 한국음악저작권협회는 명국환에게 기부금을 전달했다. 하지만 방송 출연 9개월 만에 별세 소식이 전해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빈소는 오는 3일 경기 부천시 휴앤유 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다. 대한가수협회가 장례주관자를 맡았다.

발인은 4일 오전이고, 장지는 국립괴산호국원이다.

현예슬 기자 hyeon.yeseul@joongang.co.kr

 

 

09.07 원로가수의 마지막을 추모하며

▲가수 명국환.

 

쓸쓸하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겠냐마는 원로 가수 명국환 선생의 부고는 유독 안타까웠다. 지난 8월 19일에 별세하였으나 가족들과 연락이 닿지 않아 무연고 장례를 치를 뻔했기 때문이다. 뒤늦게나마 대한가수협회에서 협회장으로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해 드린 것은 다행한 일이다.

 

2009년과 2018년에 명국환 선생과 면담하며 그 생애를 상세하게 들은 적이 있다. 신문 기사들과 인터넷에는 고인이 1927년에 출생했다고 기재되어 있으나, 삼팔선 이북에 본적을 둔 사람들을 위해 임시로 만든 호적에 잘못 기록된 연도일 뿐이다. 1933년 음력 1월 9일 황해도 연안읍 관철리에서 태어난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누나와 함께 목선을 타고 강화도 교동도로 내려왔다고 한다. 전쟁 당시 북한군이 16살 이상의 남성을 모두 잡아가거나 죽인다는 말을 들은 그는 까만 치마로 여장을 한 채 고향에서 탈출했다는 일화도 함께 들려줬다.

 

맑으면서도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힘 있는 목소리를 지닌 그는 17살 때 황해도에서 열린 콩쿠르 대회에서 남인수의 ‘남아일생’을 불러 3등을 하였다. 샛별악극단을 비롯한 여러 악극단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박경원, 안다성, 권혜경 등과 함께 방송국 전속 가수로도 활동하였다.

 

현재까지의 자료를 종합해 보면, 데뷔곡으로 알려진 ‘백마야 울지 마라’ 이전인 1954년에 ‘저무는 서울 거리’, ‘휴전선의 달밤’ 등을 먼저 발매한 것으로 보인다. ‘방랑시인 김삿갓’, ‘내 고향으로 마차는 간다’, ‘아리조나 카우보이’ 등 많은 인기곡을 낸 그는 1950년대 현인과 더불어 최고의 인기 가수로 꼽혔다. 서부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며 이국적인 정서를 드러내고 있는 ‘아리조나 카우보이’는 아이들마저 재미있게 따라 부를 정도로 유행했고, 조선 후기 실존 인물을 다룬 ‘방랑시인 김삿갓’은 당시 인기 절정에 올라 그의 대표곡이 되었다.

 

하지만 선생은 홀로 병마와 싸우며 가난하게 말년을 보냈다. 한때 대중의 큰 관심을 받으며 화려한 삶을 살았던 원로 가수의 마지막이 쓸쓸한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대중음악인들의 음악적 행보를 일일이 기록하는 작업을 고군분투하며 오랫동안 행하고 있는 것은 이미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난 별들을 역사의 한 장으로 채워 넣기 위해서다.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그분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반짝반짝 빛을 내며 한때 우리를 노래로 위로해준 그들에 대한 예의이자 보답이기 때문이다.

 

노래하는 동안은 무한히 행복하다던 명국환 선생이 부디 저세상에서나마 맘껏 노래하며 즐겁게 지내시길 바란다. 아울러 이 땅의 모든 원로 음악인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조선일보 장유정 단국대 자유교양대학 교수·대중음악사학자

 

 

09-12 “이승만 초대 대통령 하야방송 생생… 철든 후에 그분의 진면목 깨달아”

임동진 배우는 영화 ‘기적의 시작’에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 역을 맡아 열연했다. 푸어웨이픽쳐스 제공

 

■ 다큐영화 ‘기적의 시작’ 이승만 대통령役 임동진 목사 배우

“이념·역사관 비트는 사람들
손발 묶어 달라고 매일 기도

바른 국가관 전하려 공연 계속
하나님이 내게 준 역할 다할것”

“제가 감히 이승만 초대 대통령 역을 하다니 너무 송구해서 할 수 없다고 했어요. 이미지도 맞지 않고요. 그랬더니 제작진이 ‘그저 가슴으로 해 달라’고 하는 거예요. 아, 그러면 해 보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임동진(79) 목사는 특유의 중저음 목소리로 11일 이렇게 말했다. 배우이기도 한 그는 최근 완성된 다큐멘터리 영화 ‘기적의 시작’에서 이 초대 대통령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는 이승만의 일대기를 다루며, 독립운동·건국활동·6·25전쟁 승리·산업화 기초 과정 등에 초점을 맞췄다. 제작사인 퓨어웨이픽쳐스의 권순도 감독이 20여 년 모은 자료를 근거로 했다. 이 초대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 박사 내외, 고 백선엽 장군,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등을 인터뷰한 내용을 담았다. 임 목사는 이승만이 반공 연설을 하거나 하와이에서 외롭게 말년을 보내는 장면 등을 재현했다.

“제가 고교 1학년 때 4·19가 있었습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것이어서 당시에 의기투합했지요. 이 대통령께서 하야 성명을 발표하시는 것을 라디오로 들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부정 선거는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이 저지른 일이어서 이 대통령은 관계없었으나 책임을 지고 하야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지요. 저는 철 들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건국대통령으로서 이 분이 계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오늘의 번영을 누릴 수 없을 것임을.”

그가 수년 전 이승만 건국대통령 기념사업회 자문위원을 맡은 것은 그런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제 능력이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나라인 대한민국의 의(義)를 구하는 데 써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그는 매일 나라와 겨레를 위해 기도한다고 했다. “대한민국의 국가 이념과 역사관을 비틀어놓는 사람들의 손과 발을 묶어주십시오, 라고 간절히 청합니다.”

그는 지난 2006년 루터대 대학원 신학과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경기 용인시에서 교회 담임 목사로 9년간 헌신하다가 지난 2014년 홀연히 떠났다. 후임자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원로 목사’ 직함도 사양했다. 그런 그가 힘을 쏟는 일은 문화 사역이다.

“아시다시피, 그동안 연극 공연 활동을 꾸준히 해 왔습니다. 인문학적 바탕으로 바른 국가관을 전하는 공연을 펼치는 것이지요.”

임 목사는 미자립교회(개척교회)들이 부르면 어디든지 달려간다며 웃었다. “그런 교회의 상황을 보면 마음이 힘들지만, 기꺼이 갑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역할이니까요.”

그는 20여 년 전 급성 뇌경색으로 쓰러져 팬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그런 과거가 무색할 만큼 건강하게 활동하고 있다. 11일에도 경기 동두천시가 곧 여는 ‘어유소 장군 행차 재현’ 축제를 시문화원 관계자들과 논의했다고 전했다. 그가 어 장군 역할을 맡아 시가행진을 할 계획이다. “동두천시가 참 훌륭합니다. 조선 초 장군인 어유소를 통해 나라 사랑을 되새기는 축제를 하니까요. 저는 앞으로도 이런 일을 계속 펼칠 것입니다.”
장재선 전임기자 jeijei@munhwa.com

 
 
 

09.18 '봉준호 페르소나' 변희봉 81세로 별세…완치됐던 췌장암 재발

▲원로배우 변희봉(본명 변인철)이 18일 별세했다. 유족에 따르면 고인은 과거 완치 판정을 받았던 췌장암이 재발해 투병하던 끝에 이날 오전 세상을 떠났다. 연합뉴스

 
 

원로배우 변희봉(본명 변인철)이 81세 나이로 18일 별세했다.

 

유족에 따르면 고인은 과거 완치 판정을 받았던 췌장암이 재발해 투병하던 중 이날 오전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42년 6월 8일 전남 장성군에서 출생해 살레시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이후 서울에 올라와 연극배우로 활동하다가 1966년 MBC 성우 공채 2기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방송 드라마에 진출하기 시작한 그는 '제1공화국'(1981)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1985) '찬란한 여명'(1995) '허준'(1999)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특히 '설중매'에서 손금으로 점을 보는 유자광 역을 맡으며 "~는 내 손안에 있소이다"라는 대사를 했는데 당시 큰 유행어가 됐다.

 

배우 변희봉은 봉준호 감독과의 인연도 깊다. 봉 감독이 삼고초려해 영화 '플란다스의 개'(2000)에 출연했으며 이후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 '옥자'(2017) 등 작품에서도 열연해 관객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영화 '옥자'가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돼 칸을 다녀온 그는 “70도 기운 고목나무에서 꽃이 핀 기분”이라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2020년에는 배우 고두심, 가수 윤항기와 함께 대중문화예술 분야 최고 권위의 정부 포상인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고인의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7호에 마련됐다. 발인은 오는 20일 오후 12시 30분이다.

이수민 기자 lee.sumin1@joongang.co.kr

 

 

09.18 배우 노영국, 심장마비 사망…'효심이네' 출연 중 갑작스런 비보

▲배우 노영국. KBS 방송화면 캡처

 
 

 

 배우 노영국(74·본명 노길영)이 사망했다.

 

노영국이 출연 중이었던 KBS 2TV 토일드라마 ‘효심이네 각자도생’ 측은 18일 공식입장을 내고 “노영국이 오늘 새벽녘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라고 밝혔다.

 

고인의 빈소는 한양대학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유족의 뜻에 따라 장례는 가족 친지들과 동료 선후배들이 참석해 조용하게 치를 예정이다.

 

노영국은 지난 16일 첫 방송된 ‘효심이네 각자도생’에서 장숙향(이휘향 분)의 남편이자 태산그룹 회장 강진범 역으로 출연 중이었다. 제작진은 갑작스러운 비보에 후속 대처를 논의 중이다.

 

1948년생인 노영국은 1974년 MBC 공채 탤런트 7기로 선발되면서 연기에 데뷔했다. 드라마 ‘태종 이방원’, ‘여명의 눈동자’, ‘대왕세종’, 영화 ‘브라보 마이 라이프’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또한 고인은 남다른 노래 실력으로 연기 활동 외에도 가수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지난 2019년에는 싱글 ‘최고의 여인’을 발매하고, 다양한 무대 위에서 대중들을 만났다.

정시내 기자 jung.sinae@joongang.co.kr

 

 

10.21 ‘좌파 개념 연예인’의 태극기 모독, 국민이 분노했다

[아무튼, 주말]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일제시대 유명 만담가 신불출의 탈선과 월북

 ▲일러스트=한상엽

 

만담가 신불출은 한국 최초의 ‘국민 예능인’이었다. 신영일, 신흥식 등 본명도 증언과 기록마다 다르고, 출생 연도도 남한은 1905년, 북한은 1907년으로 다르게 기록된다. 사망에 대해서도 북한 자료에는 그가 뇌출혈로 투병하다 1971년 사망했다고 하지만, 요덕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탈북한 전직 배우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1960년대 초 종파주의자로 숙청돼 1976년쯤 요덕수용소에서 영양실조로 사망했다고 한다. 신불출이라는 예명 외에 자연인으로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정확히 알 도리가 없다는 점은 오늘날 연예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불출이 ‘국민 만담가’로 떠오른 것은 1933년 오케(OKEH)레코드에서 발매한 ‘익살맞은 대머리’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후였다. “영감: 방정맞은 여자 앞에서는 행여 조심해야 한단다. 만일 잠을 자다가 다듬잇돌로 잘못 알고 디립다 방망이질을 해대면… /소녀: 영감님 대가리는 다듬잇돌 대가리. 방정맞은 여자 옆엔 못 잔다누나 /영감: 하하, 어디 그뿐이냐? 해수욕을 갔다가 어부들이 문어로 잘못 알고… /소녀: 영감님 대가리는 문어 대가리. 어부 있는 해수욕장 못 간다누나~”

 

오늘날과는 사뭇 다른 유머 코드였지만, ‘신불출 만담회’는 군중들을 불러모으는 흥행 보증 수표로 자리 잡았다. 행사가 열릴 때마다 주최 측은 ‘바람잡이’로 그를 섭외하려고 열을 올렸다. 웃음 지을 일이 드물었던 일제강점기, 신불출은 ‘입담’과 ‘웃음’으로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해방 후 신불출은 창씨개명과 징용을 소재로 한 만담을 무대에 올렸다. “오란다 해서 다 나가면, 그게 어디 불출입니까? 난 근로봉사에 나가라 해도 나가지 않았어요. 이름이 불출이니까요. 징용에 나가라 해도 나가지 않았어요. 이름이 불출이니까요.” 이어서 신불출은 경찰이 강요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에하라 노하라(江原野原)’로 창씨개명했다고 밝혔다. 경기민요 ‘양산도’의 후렴구 “에라 놓아라”에서 따온 이름으로 “될 대로 돼라”라는 뜻이었다. 경찰이 난색을 짓자, 이번에는 ‘구로다 규이치(玄田牛一)’로 고쳤다. ‘현전(玄田)’을 합자(合字)하면 ‘축(畜)’, ‘우일(牛一)’을 합자하면 ‘생(生)’으로 ‘축생(畜生)’이 된다. ‘가축의 아들’이라는 한국어도 좋은 뜻은 아니지만, 일본어 ‘칙쇼(畜生)’는 한국어 ‘×새끼’에 해당하는 욕이다.

 

하지만 창씨개명 이후 태평양전쟁기에도 ‘조선담우협회’ ‘조선연예협회’ ‘조선연극문화협회’ 산하 ‘이동연예 신불출반’ 등 친일 관변 단체 회원 명부와 활동 기록 등 ‘공식 문헌’에서 그를 지칭하는 이름은 여전히 ‘신불출’이었다. 더욱이 이런 조직에 신불출이 이름만 올린 것도 아니었다. 해방 이후 신불출은 좌익 편에 섰다. 수동적 동조자가 아니라, 조선공산당(조공) 박헌영의 최측근 이강국의 문화 분야 핵심 조직원으로 맹활약했다.

 

1946년 6월 10일부터 사흘 동안 조선영화동맹과 예술통신사는 20주년을 맞이하는 ‘6·10만세운동 기념 연예 대회’를 개최했다. 하지만 ‘만세운동 기념’은 허울일 뿐이었고, 사실상 ‘찬탁 선동 집회’였다. 신불출은 둘째 날인 11일 국제극장 무대에 올라 ‘실소(失笑) 사전’이라는 만담을 공연했다. ‘국민 만담가’의 공연을 보려고 좌우익 가릴 것 없이 관중들이 운집했다. 하지만 ‘우익 관객들’은 시작부터 울분을 삼켜야 했다. 행사 서두에 ‘재일 조선인 연맹’에서 제작한 ‘조련 뉴스’가 상영되었는데, 스크린에 재일 동포들이 인민공화국 만세를 연호하는 장면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뜻하지 않게 좌익 집회에 참석하게 된 우익 관중들은 태극기를 들고 무대에 오른 신불출의 만담에서 폭발했다.

 

“이 태극기 좀 보시오. 태극기의 사괘는 소·중·영·미 4개국의 신탁통치를 받아들이라고 말해 주고 있소. 태극의 상부는 적색이고 하부는 감색이올시다. 세월이 흐르고 비바람이 불어 태극기가 물에 젖으면, 위에 있는 붉은 색깔이 녹아 흘러 감색 부분까지 불그스레해지는 것이 자연 현상이오. 남한도 곧 공산국가가 될 것이외다.”

 

우익 관중 200여 명은 “태극기를 모욕 말라!” “조공 일파의 음모를 분쇄하라!” “적색 괴뢰 만담가 신불출은 사죄하라!”며 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성난 군중은 신불출을 끌어내려 마구 구타했다. 이어서 태극기를 무대 위에 다시 걸고 관중 모두 기립하여 국기 배례, 애국가 봉창, 순국선열 추모 묵도를 올렸다. 국제극장 사주(社主)가 무대에 올라 사과했다. 신불출은 전치 4주의 부상을 입고 ‘백인제 외과’에 입원했다. 사건이 알려지자, 우익 진영에서는 한목소리로 신불출과 조공을 비난했다.

 

“독립된다니까 너도나도 함부로 뛰고 이 판에 정치적 색채를 띠지 않으면 한몫 끼지 못한다는 그릇된 생각을 가진 자 적지 않은 모양. 만담하러 다니는 신불출이란 자까지 날뛰니 이름 그대로 과연 불출(못나고 어리석은 사람)이로군. 이자는 해방 이전에는 악독한 왜놈 경찰의 괴수 미와라는 자의 수양아들로 기괴한 입담으로 징병, 학병, 징용 등의 권고 만담하러 다니어 소위 황민화 운동의 앞잡이 노릇 하던 버릇을 잊은 듯이 해방 후는 진보적 민주주의 미명 아래 지랄발광. 인민공화국 선전하러 다니더니 (…) 제가 무엇을 안다고 천둥벌거숭이 모양으로 주책을 떠는지. (…) 불출이거든 불출대로 그냥 있지 웬 방정을 그리 떠노. 제2 신불출, 제3 신불출이나 나지 마소.”(조선일보, 1946.6.13.)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신불출 역을 연기하고 있는 김종국. /SBS

 

이틀 후 신불출은 병상에서 체포돼 서대문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후 태평양사령부 포고 제2호 치안 교란, 연합군 비방 등 위반 혐의로 기소돼 ‘2만원 벌금 혹은 1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김두한은 1963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나는 광인(狂人) 신불출의 만담을 중지시키고 뚜들겨 주었다. 나의 주먹에 얻어맞아 피를 토하는 신불출을 사살하려고 했지만 다시는 그러한 일은 않겠다고 하므로 일단 놔주었다. 그러나 신은 이튿날 아침 나에게 총격을 받아 왼팔이 관통되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신불출은 총상을 입지 않았으며, 이 사건으로 실제 구속된 가해자는 국학전문학교 재학생 강덕수, 주학건, 박창진 등이었다.

 

태극기 모독 사건 이후 무대에서 퇴출된 신불출은 이듬해 월북했고, 북한에서 미국과 남한 정부를 풍자하고 조소하는 공연을 이어갔다. 6·25전쟁 때는 선전·선동 공연을 위해 전선을 누볐다. 그는 진심으로 공산주의 조국을 사랑했지만, 전후 남로당 숙청 과정에서 그 역시 숙청돼 그의 사랑은 ‘짝사랑’으로 끝나버렸다. 신불출이 바라던 자신의 묘비명은 “잘 죽었다”(삼천리, 1936.11)였다. 그의 공산주의 조국은 그 ‘소박한’ 바람조차 들어주지 못했을 것이다.

<참고 문헌>

김경희, ‘신불출 문예활동과 그 의미’, 국문학연구 제12권, 2004

김두한, ‘피로 물들인 건국 전야’, 연우출판사, 1963

반재식, ‘만담 백년사’, 백중당, 2000

배선애, ‘동원된 미디어, 전시체제기 만담부대와 만담가들’. 한국극예술연구 제48집, 2015

엄현섭, ‘신불출 대중문예론 연구’, 비교한국학 제17-3호, 2009

이승희, ‘배우 신불출, 웃음의 정치’, 한국극예술연구 제33집, 2011

조선일보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11.03 ‘고별’ ‘고향초’ 부른 가수 홍민...대장암 투병 끝에 별세

▲가수 홍민

 

‘고별’ ‘고향초’ ‘석별’ 등으로 1970년대 인기를 끈 원로 가수 홍민(76)이 대장암 투병 끝에 2일 별세했다. 1947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고인은 1971년 가수 장미라와의 듀엣곡 ‘그리운 사람’으로 처음 가요계에 데뷔했다. 이듬해 번안곡 ‘고별’, 리메이크곡 ‘고향초’ 등으로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를 선보여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이어 ‘석별’ ‘공원 벤치’ ‘망향’ 등으로 인기를 이어갔다.

 

고인은 그간 충북 제천에서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며 노래 활동을 이어온 것으로 전해졌다. 2013년 제천시 홍보대사로도 위촉됐다. 하지만 최근 건강이 악화되면서 활동을 멈췄고, 지난 7월 KBS 1TV ‘가요무대’에 출연해 직접 기타를 치며 노래한 것이 고인의 마지막 무대가 됐다.

 

빈소는 충북 제천세종장례식장, 발인은 오는 4일 오전 7시다.

조선일보 윤수정 기자

 

 

11-03 노랫말에 새겨진 전쟁의 상처

이호섭 작곡가, 방송인·문학박사

6·25 아픔 담긴 대중가요
지금도 처절한 심금 울려
北의 허울 좋은 명분 속아

대비 않으면 또 전쟁 불러
참다운 평화는 말이 아닌
강력한 힘의 우위로 가능

바야흐로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다. 주변을 보면 산과 나무들이 앞다퉈 울긋불긋 색동옷으로 갈아입고 그 고운 자태를 뽐낸다. 이렇게 청명하고 아름다운 가을의 정취를 향기처럼 품고 있는 천고마비라는 말 속에는, 다른 한편으로 북쪽 오랑캐를 경계하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한서(漢書)’의 흉노전에 보면, 중국 북방에서 일어난 유목민족 흉노족은 해마다 가을철에 고장의 농경지대를 약탈하려고 침입했으므로, 천고마비(또는 秋高馬肥·추고마비)라는 말은 곧 외적을 대비하라는 경계의 말이기도 하다.

우리 대중가요 중에도 적의 공격에 대비하지 못해 일어난 전쟁의 참화를 담은 노래가 뜻밖으로 많다.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 군인 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 큰애기 사공이면 누가 뭐라나/ 늙으신 부모님을 내가 모시고/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1959년 가수 황정자가 불러 크게 히트한 ‘처녀 뱃사공’은 ‘부길부길 쑈’로 유명했던 윤부길(가수 윤항기·복희의 아버지)이, 아버지는 없고 오빠는 군 복무 중이라 집안에 남자가 없어 처녀가 뱃사공을 한다는 딱한 실화를 듣고 지은 노랫말이다.

6·25전쟁은 1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희생자를 낸 동족 간의 비극으로, 특히 남편과 아들과 오빠를 잃은 수많은 여성 가장을 양산했다. 어머니와 딸 단둘이서 힘든 농사와 가업을 이어가야 하는 전쟁미망인(未亡人) 여성들과 전쟁고아가 휴전 이후 큰 사회 이슈로 떠오르다 보니, 대중가요에도 1969년까지 최정자의 ‘처녀 농군’과 이미자의 ‘춘천댁 사공’ 등 여성 가장 노래가 계속 발표되었다. 1954년에 발표된 박단마의 ‘슈샤인보이’는 휴전 이후에도 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픔을 담은 노래로 세간에 크게 유행했다.

‘슈샤인 슈샤인 보이 슈샤인 슈샤인 보이/슈슈슈슈 슈샤인 보이 슈슈슈슈 슈샤인 보이/헬로 슈사인 헬로 슈사인 구두를 닦으세요/구두를 닦으세요 구두를 닦으세요/ 아무리 피난 통에 허둥거려도/ 구두 하나 못 닦아 신는 도련님은요/ 어여쁜 아가씨는 멋쟁이 아가씨는 노노 노굿이래요’

이 밖에도 6·25전쟁으로 인한 이산의 아픔을 담은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1953년), 남편을 전장으로 보내는 아내의 결의를 그린 심연옥의 ‘아내의 노래’(1952년), 전쟁 중 장병들의 전우애를 담은 현인의 ‘전우야 잘 자라’(1950년), 생사의 전장에서 모정을 그리는 신세영의 ‘전선야곡’(1952년) 등이 발표되었다.

 

 휴전 후에는 영양실조로 딸을 잃은 가수 겸 작사가 반야월의 눈물 참회록이랄 수 있는 ‘단장의 미아리고개’(1956년)와, 국방을 소홀히 하다 나라를 잃을 뻔한 교훈을 담은 최갑석의 ‘삼팔선의 봄’(1959년) 등이 줄지어 발표되어 전쟁 세대의 가슴을 울렸다. 이후에도 친동생을 6·25전쟁으로 잃은 작곡가 전오승의 눈물의 진혼곡이랄 수 있는 허성희의 ‘전우가 남긴 한마디’(1978년), 전쟁으로 인한 1000만 이산가족의 아픔을 담은 설운도의 ‘잃어버린 삼십 년’(1983년) 등 6·25전쟁을 소재로 한 가요들이 줄지어 나와 애창되었다.

전쟁은 무엇일까? 전쟁은 인류가 인류에게 가하는 가장 잔인한 폭압이다. 전쟁은 개인끼리의 투쟁인 ‘싸움’과는 다르다. 전쟁은 집단적이며 선동적이며 허구적이며 위선적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주동자는 대개 독재자들로서, 구국·해방·정의와 보민(保民), 신(神)의 뜻 같은 대의와 명분을 앞세운다. 6·25전쟁 역시 침략자들은 미(美) 제국주의로부터 남조선을 해방한다는 허울 좋은 명분을 달았다. 그러나 권력자들이 자기가 쥐고 있는 권력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선택하는 것이 놀랍게도 전쟁이라는 수단이었음은 역사는 잘 말해 준다.

전쟁은 영토와 주권과 조국과 생명과 재산만 앗아가는 게 아니다. 도덕과 이성과 희망과 인간성까지도 파괴한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여러 가지 트라우마와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 등으로 일생의 고통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전쟁은, 어린이와 여성과 노약자들에게 더 잔인하다. 따라서 전쟁을 예방하기 위한 강력한 억지력은 백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무리 그럴듯한 평화회담도 영원한 평화를 담보해 주지 않는다. 전국시대 합종과 연횡을 믿었다가 진나라에 망한 6국이 그랬고, 나치 독일을 믿었다가 기습 공격에 수도까지 함락당할 뻔했던 소련의 대조국전쟁(獨蘇戰爭·독소전쟁)이 그랬으며, 우리의 6·25전쟁이 그러했다. 이런 사례는 이루 다 손꼽을 수 없다. 평화를 담보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말이 아니라 강력한 군사적 우위로 억지력을 증강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스라엘-하마스의 충돌로 수많은 양민이 목숨을 잃는 현장을 우리는 보고 있다. 이런 반인륜적인 일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지금 북한은 세계의 경제 봉쇄로 1996년부터 겪었던 ‘고난의 행군’ 때보다 더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이런 때 북한 권력자들이 인민들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려고 하는 시도는 삼척동자도 예견하는 일로, 그 수단이 결코 ‘전쟁’이 돼서는 안 된다.

천고마비의 계절을 맞아 우리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할 일이 무엇인지 점검하고, 부족한 병기와 전술을 새로이 갖춰 다시는 6·25의 참상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야 한다. 참다운 평화는 말이 아니라 힘의 우위에서 온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배움을 얻는다면, 우리 가요에 다시는 전쟁을 소재로 하는 가슴 아픈 노래들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문화일보 

 
 
 

11.18 친일파였다 ‘김일성 장군님’ 품에 안긴 스타 작사가의 처세술

‘꿈꾸는 백마강’ ‘선창’ 쓴 조영출의 월북이 빚은 혼란

 ▲일러스트=한상엽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을려고 왔던가/ 비린내 나는 부둣가에 이슬 맺힌 백일홍/ 그대와 둘이서 꽃씨를 심던 그날도/ 지금은 어디로 갔나 찬비만 내린다.”(‘선창’·1941)

 

‘선창’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데뷔 2년 차 신인 가수 고운봉은 일약 조선 최고의 인기 가수 반열에 올랐다. 이 노래는 대한민국에서 80년 이상 수많은 가수가 무대에 올렸고, 노래방 애창곡 순위에서도 빠지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1997년 조영출의 유족들이 소송으로 저작권을 회복하기까지, 이 노래의 작사가는 고운봉의 형 고명기로 등록돼 있었다.

 

1913년 충남 아산 탕정에서 태어난 조영출은 와세다대 불문과 출신 엘리트 시인, 극작가였다. 1934년 ‘서울노래’를 작사한 이래 조명암, 금운탄, 이가실, 김다인 같은 예명으로 ‘세상은 요지경’(1939), ‘꿈꾸는 백마강’(1940), ‘목포는 항구다’(1942) 등 히트곡 수십 편을 작사했다. 1948년 월북할 때까지 작사한 550여 편 중 조명암이라는 예명으로 발표한 작품만 424곡이었다.

 

일본인 조선 가요 애호가 사이토 초지는 매달 발매되던 오케레코드 신곡 음반을 수집했는데, 레코드 라벨에는 십중팔구 ‘조명암 작사’라고 인쇄돼 있었다. 그는 조명암이 어쩌면 개인이 아니라 복수의 작사가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이름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하지만 조명암은 한 사람이었고, 놀랍게도 그가 다른 예명으로 발표한 작품이 130여 곡 더 있었다. 조영출 다음으로 다작(多作) 작사가였던 박영호는 ‘짝사랑’(“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1937), ‘오빠는 풍각쟁이’(1938), ‘번지 없는 주막’(1940) 등 120여 편을 발표했다. 조영출과 박영호는 일제강점기 대중가요의 3분의 2를 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방 후 조영출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조선연극동맹 등을 조직하고 좌익 문예 운동을 주도했다. 일찍이 김일성을 흠모한 조영출은 김일성의 항일 투쟁을 다룬 희곡 ‘독립군’을 창작해 1946년 3·1절 기념 공연으로 동양극장에 올렸다. ‘독립군’은 김일성을 극화한 첫 번째 작품으로 기록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인 1948년 8월, 조영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한 최고인민회의에 참가하는 남조선 대표 일원으로 선출돼 월북했다. ‘김일성 장군’의 품에 안긴 ‘환희’와 ‘감격’을 그는 이렇게 시로 옮겼다. “아아, 감사하여라/ 쏘베트 인민의 은혜여/ 아아, 행복하여라/ 이 땅에 솟은 자유의 태양이여 (…) 나의 조국은 이제/ 그 이름 자랑스러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조선으로’, 1948) 김일성은 조영출이 월북해 처음 무대에 올린 가극 ‘꽃신’(1949)을 관람하고 “작품이 아주 좋다. 앞으로 우리의 가극을 이렇듯 민족적 정취가 풍기도록 발전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치하했다.

 

1946년 박영호가 월북한 데 이어 조영출마저 월북하자, 남한 가요계는 공연 레퍼토리의 3분의 2가 금지곡으로 지정될 위기에 처하는 대혼란에 빠졌다. 음악인들은 가사의 일부를 개사하고, 작사가를 ‘바꿔치기’하는 등 궁여지책으로 일부 작품의 금지곡 지정을 막았다.

 

6·25 남침을 앞두고 조영출은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에 대한 치솟는 증오심”을 담아 전시 가요 ‘조국보위의 노래’를 작사했다. “정의의 총칼로써 원쑤를 무찔러/ 공화국은 영원히 부강하게 살리라/ 나가자 인민군대 용감한 전사들아/ 인민의 조국을 지키자 목숨으로 지키자” 남한 구석구석 인민군의 총구가 향하는 곳마다 이 노래가 함께했고, 지금도 대표적인 인민군 군가로 애창된다.

 

1950년 6월, 서울이 인민군 손에 떨어지자, 조영출은 ‘인민군 종군 작가’로 2년 만에 서울을 다시 찾았다. ‘울며 헤진 부산항’(1940), ‘서귀포 칠십리’(1943), ‘고향초’(“남쪽 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날으면”·1948) 등 히트작 수십 곡을 함께 만든 작곡가 박시춘을 만났을 때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두 사람은 7~8년 전 다수의 ‘군국 가요(친일 가요)’를 함께 만든 흑역사도 공유했다. 조선인이 창작한 군국 가요 62편 중 조영출이 작사한 작품이 40편이었다. 그중 박시춘과 함께 만든 작품이 ‘아들의 혈서’(1942), ‘결사대의 아내’(1943), ‘혈서지원’(1943) 등 12편이었다.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 일장기 그려놓고 성수만세(聖壽萬歲) 부르고 (…) 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혈서지원’)

 

박시춘은 조영출에게 월북 이후 그의 작품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고, 일부 작품은 작사가를 바꾸고, 가사 일부를 변경해 불리기도 한다고 알려주었다. 조영출이 일제 말기 조선인의 처지를 영국의 식민지 노예로 신음하던 인도 인민의 심정에 빗대 작사했던 ‘인도의 달밤’도 그중 하나였다. “아 인도의 달이여/ 마드라스교회의 종소리 울리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인도의 달밤’) 작사가 유호의 데뷔작으로 발표된 ‘신라의 달밤’(1949)은 신인 가수 현인이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전후에도 조영출은 김일성과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작품을 열정적으로 창작했다. “만고의 영웅이신/ 절세의 혁명가이신/ 아아 김일성 원수이시여/ 당신은 우리 인민들 속에/ 광명으로 오셨습니다/ 행복으로 오셨습니다”(‘수령이시어 만수무강하시라!’·1968) 김일성은 그를 만날 때마다 ‘조령출’이라고 친근하게 이름을 불러주고, “낙관적으로 살고, 운동을 많이 하라”며 건강까지 챙겨주었다. 1993년 사망할 때까지, 조영출은 교육문화성 부상, 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 등 북한 예술 분야 최고위직을 두루 지냈다. ‘김일성상 계관인’ 칭호와 ‘국기훈장 제1급’ 등 최고의 예우를 받았다.

 

남한에서 조영출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 행위 705인 명단에 올랐다. 그러나 북한에서 조영출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친일 이력을 반성하거나 사과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그의 친일 이력을 파헤치거나 문제 삼지 않았다. ‘위대한 수령’과 ‘경애하는 지도자’가 아끼는 작가의 흠결을 들춰내는 것은 ‘공화국’에 대한 반역이었다.

 

1992년 대한민국 문공부는 조명암의 작품 61편을 해금해 음반 제작과 판매를 허용했다. 1994년 방송심의위원회는 밥 딜런의 ‘블로잉 인 더 윈드’,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 조명암을 비롯한 월북 작가 작품 64편을 포함한 방송 금지곡 847곡을 해제했다. 강원도 고성 건봉사에 ‘조영출 시와 노래비’(‘고향초’), 충남 예산 덕산온천에 ‘고운봉 노래비’(‘선창’), 목포 유달산에 ‘목포는 항구다 노래비’, 제주도 외돌개 해안에 ‘서귀포 칠십리 노래비’ 등 대한민국 곳곳에는 작사가 조영출의 ‘예술혼’을 기리는 노래비가 서 있다.

 

 ▲작사가 조명암(조영출)의 노래비. 강원도 고성군 건봉사 경내에 있다. /인터넷 캡처

<참고 문헌>

김효정, ‘조명암 대중가요 연구’, 낭만음악 제13-2호, 2001

이영미, ‘일제 말 대중가요의 해방 후 개작 양상과 그 의미’, 대중음악 제3호, 2009

이영훈, ‘그 노래는 왜 금지곡이 되었을까’, 휴앤스토리, 2021

이준희, ‘일제시대 군국가요 연구’, 한국문화 제46호,

장유정·주경환, ‘조영출 전집1: 대중가요’, 소명출판, 2013

정우택·주경환, ‘조영출 전집2: 시와 산문’, 소명출판, 2013

조선일보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12.28 최정상급 배우까지 비극으로 내몬 마약 파문

▲마약 투약 혐의를 받는 배우 이선균씨가 19시간에 걸친 경찰조사를 마치고 24일 오전 인천 남동구 인천 논현경찰서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시스

 

연예인 이어 청소년까지 노출, 전문 수사청 시급

제보만으로 혐의 공표하는 수사 적절한지 살펴야

 

배우 이선균씨가 어제 서울 종로구 와룡공원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마약 투약 혐의로 수사를 받아 오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된다. 아카데미 작품상 등을 받은 영화 ‘기생충’에서 인상적인 연기로 세계에 얼굴을 알린 배우를 마약 때문에 잃었으니 큰 충격이자 손실이다. 이씨는 그동안 세 차례 경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그는 유흥업소 실장 등에게 속았다며 “마약인 줄 몰랐다”고 말해 왔다. 이들에게 협박을 받아 3억5000만원을 뜯겼다는 주장도 했다.

 

실제로 한국은 영문도 모른 채 마약을 복용하고 속아서 중독에 빠질 수 있는 나라가 됐다. 서울 강남 학원가에선 청소년들이 길거리 시음용 음료인 줄 알고 마약을 마시는 일까지 벌어졌다.

 

배우 유아인씨가 재판에 넘겨지는 등 연예계에 파문이 잇따랐고, 청소년 마약 사범도 계속 증가 중이다. 서울과 경기도 일대 대학가에는 액상 대마 광고물이 뿌려졌다. 곳곳에서 경고음이 울리자 수사당국은 강력한 대처에 나섰다. 지난해 경찰의 날(10월 21일)에 윤석열 대통령이 마약과의 전쟁을 주문한 이후 대대적인 검경 합동수사를 벌여 올 8월까지 1만2700명의 마약사범을 검거했다. 작년 전체 실적(1만2387명)을 넘어선 규모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단속 체제로는 마약 확산을 막기엔 역부족이란 지적이 나온다. 국내 마약 공급이 늘면서 가격이 내려가고 있고, 특히 10~20대 사범이 급증하는 상황이다. 한국 마약 사범이 늘면서 중국이나 베트남에서 한국인이 사형당하는 일도 잇따른다. 태국·캄보디아 등 해외 마약 밀매 조직들은 한국을 활동 무대로 삼고 있어 국제 공조가 시급하다. 경찰·검찰·관세청·해양경찰청·국가정보원 등이 마약 범죄 차단을 위해 활동해 왔으나 검경이 마약 수사권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등 한계가 드러났다. 마약 수사를 전담하는 마약수사청 설립을 심도 있게 검토해야 한다. 국경을 넘나들며 청소년까지 무차별로 표적 삼아 한 인생을 파멸로 몰아넣는 마약 밀매 조직에 맞서려면 보다 체계적이고 강력한 대응과 예산 투입이 절실하다.

 

이선균씨의 비극을 계기로 경찰의 수사 방식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마약 관련 의혹 제기만으로도 이미지에 치명상을 입는 연예인들이 사실 확인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혐의가 공개됐다. 최근 경찰이 소환했으나 혐의가 없어 불송치로 결론 난 가수 권지용씨(지드래곤)는 조사를 받고 나오면서 “웃다가 끝났다”고 말했을 정도다. 이씨의 경우도 체내에서 마약 성분이 검출되지 않았다. 제보에만 의존해 유명인의 혐의를 공표하는 게 적절했는지 수사 원칙을 재점검해 봐야 한다.

중앙일보 사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