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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희의 커피하우스(조선일보) 2023. 01.27 ‘참회록’ 쓰지 않는 사회 - 12.15 대통령에게 필요한 열 번째 사람

상림은내고향 2023. 12. 15. 15:24

[박성희의 커피하우스]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한국미래학회 회장 조선일보 2023

 

01.27 ‘참회록’ 쓰지 않는 사회

24세 윤동주 “나의 거울을 닦아보자” 참회록 써
지금은 개인이나 집단이나 잘못했다는 반성 없어
고은 시인이 참회록 쓴다면 노벨상 탄생할 수도
지난 정부는 잘못 비춰볼 거울 가지고 있긴 하나
국민을 화나게 하는 건 반성 없는 내로남불 태도

‘참회록’은 윤동주 시인이 1942년 조국에서 쓴 마지막 시의 제목이다. 반성과 성찰의 상징인 ‘거울’을 통해 부끄러움의 미학을 전하는 이 시는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로 시작하여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로 맺는다. 만 24세를 갓 넘긴 젊은이가 무어 그리 참회할 일이 있었을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란 이 고운 청년은 이듬해 독립운동을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해방을 6개월 앞두고 숨을 거둔다.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고해성사를 요청했으나 교구장에게 거절당한다. 그러나 니콜라 빌렘 신부가 그에게 고해성사를 해주었고, 2011년 천주교회는 비록 살인을 했지만 그를 시복 추진 대상자로 선정한다. 이 반듯한 31세 청년은 15가지에 이르는 이토의 죄목을 나열하면서도 이토를 살해한 것에 대해 사죄했다. 그의 정결한 인품이 일본인도 감동시켰고, 이문열 소설의 제목처럼 죽어서도 천년을 살고 있다.

 

나라를 잃었거나, 나라를 빼앗길 경각의 시기에 이 땅에서 살다 간 인물 중엔 이렇게 상상도 할 수 없게 맑은 인물들이 있었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어 보이는 이들이 겪었을 고초와 번민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온다. 역사의 아픔조차 자신의 부끄러움과 잘못으로 성찰하는 이들에게는 내면에 양심이라는 거울이 있었기에 그게 가능했다.

 

/일러스트=이철원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사람들에게 내면의 거울은 중요한 성찰 도구다. 인간이라면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 장 자크 루소는 다섯 자식을 유기한 일을 포함한 과거 허물을 모두 고백록에 담아냈고, 톨스토이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고 느낀 순간 위선과 교만에 찬 과거를 돌아보는 참회록을 썼다. 초대 그리스도교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아우구스티누스는 13권에 걸쳐 자신의 모든 죄악을 고백하고 생활을 반성한 참회록을 펴냈는데, 이 책은 기독교 3대 고전 중 하나로 1600년 넘게 읽히고 있다.

 

그토록 원했던 나라를 되찾고, 전쟁과 분단을 넘어 눈부신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참회록 따위는 개나 줘버릴 이름이 되어버렸다. 톨스토이의 고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윤동주 이후 참회록을 접한 기억이 없다. 그동안 개인이나 집단이 여러 역사적 고비에서 시행착오를 했을 텐데, 도무지 잘못했다는 사람이 없다. 반성하는 집단은 눈 씻고 봐도 없다. 스스로 비춰볼 거울이 없거나, 비췄더라도 보이는 모습을 외면했거나, 아니면 그 둘 다일 것이다.

 

얼마 전 상습 성추행 문제로 잠시 활동을 중단했던 고은 시인이 신작으로 복귀하려 하자 여론의 비판에 직면한 출판사가 사과하고 물러선 해프닝이 있었다. 출판사는 사과했는데, 정작 고은 시인은 “가족과 아내에게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성추행 문제를 공론화한 최영미 시인은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권력을 한국 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나는 지켜볼 것”이라고 맞받았다. 만약 고은 시인이 그 유려한 문장으로 참회록을 집필했다면, 혹시 아는가, 노벨 문학상감이 탄생했을지. 여하튼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마음속에 투영된 한 시인의 추한 모습에 기운이 빠진다.

 

최영미 시인의 일갈대로 “권력은 반성하지 않는다”지만, 집단적 반성 결핍증을 앓는 집단으로 지난 정부 사람들이 으뜸 같다. 사실 정권이 교체된 것만으로도 그들은 반성할 거리가 차고 넘친다. 지지해준 사람들에게는 실패한 데에 사죄해야 하고, 그동안 나라를 맡겨준 일반 국민에게는 실패한 정책들에 대해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적어도 미흡했던 부분을 돌아보고 인정하기라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방과 왜곡을 바로잡겠다고 단체를 만들고 모이며 분주하다. 얼마 전 출범한 정책 포럼 ‘사의재’는 ‘성찰과 계승’을 강조하고 있으나, 성찰보다는 대응과 계승 쪽에 방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문재인 정권이 모든 정책적 허물, 예컨대 5년 만에 국가 채무를 거의 두 배로 늘린 것이나,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경제를 교란하고 북한에 대한 일방적 저자세로 나라의 정체를 위태롭게 한, 그런 잘못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부끄러움을 알고 반성하는 자세로 국정을 운영했다면 정권을 연장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국민을 더 화나게 한 건 무능보다 우격다짐과 내로남불 태도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아집에 가깝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새해 첫날 양산을 방문한 이재명 더불어 민주당 대표에게 “어렵게 이룬 민주주의가 절대 후퇴해선 안 된다”며 마치 민주주의가 자신들의 전유물인 양 말했다. 그들에게 거울이 있다면 스스로 비춰보라고 하고 싶다. 문재인 정부 들어 민주주의와 법치가 크게 후퇴했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의 실망과 진단에 대해 어떤 성찰을 하고 있는지. 더불어민주당은 최근 “윤석열 정부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통해 흔들리는 경제와 국민의 삶, 멍드는 안보와 외교, 무너지는 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했는데, 자신들이 집권한 시절 흔들린 경제와 국민의 삶, 멍든 안보와 외교, 무너진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내리는지, 그들에게 자신을 비춰볼 거울은 있는지 묻고 싶다.

 

거울이 없다는 건 내면의 양심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문재인 시즌2는 아마 오지 않을 것 같다. 실패에서 배워야 성공도 도모할 수 있을 텐데, 적어도 지금까지 언행으로 미루어 그럴만한 반성과 성찰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02.24 정치인들은 왜 총밖에 쏠 줄 모르는 걸까

여당은 서로 죄를 만들어 안에서 총 쏘고 야당은 명백한 범죄 혐의 감싸며 방탄복 노릇
‘내부 총질’은 문 닫고 해야 국민에 대한 예의… 野는 어디 총 쏠 곳 없어 거리에 나와 총질인가
공감·경청할 줄 모르니 손쉬운 총 들고 난사한다

 

 

“사람들이 돌 대신 말을 던질 때 문명은 시작되었다”고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말했지만, 돌보다 치명적인 말이 넘치게 많은 세상이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은 셰익스피어 시대에나 환유법에 속했지, 요즘은 그 자체로 사실에 가깝다. 칼로 입은 상처는 외과 수술과 항생제로 되돌릴 수 있지만, 댓글 때문에 자살하고 트위터로 정치하는 요즘, 펜은 진짜 칼보다 강하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것도 옛말, 요즘 권력은 글과 말에서 나온다. 그러다 보니 총보다 말이 더 녹슬고 타락하기 쉬운 물체가 되었다.

 

말이 문명의 시작이기는커녕 오히려 문명을 퇴보시킬 수 있다는 가설은 정치권을 보고 있노라면 심증을 넘어 확신으로 변한다. 저런 거짓말, 저런 막말, 저런 매너 없는 언쟁을 문명인이라면 할 수 없다. 자기 생각이 있는 사람은 거짓말을 일삼고, 자기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좀비의 언어를 쏟아놓는다. 도무지 말다운 말이 없으니 총알이라는 은유가 오히려 걸맞다. ‘내부 총질’이니 ‘방탄 국회’가 나온 게 우연이 아니다. 차이가 있다면 여당은 서로 죄를 만들어 씌우며 총을 쏘는 반면, 야당은 명백한 범죄 혐의도 감싸는 방탄복 노릇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여당은 부패로 망하고, 야당은 분열로 망한다”고 했는데, 요즘은 여당이 분열로 몸살을 앓고, 야당은 부패를 감싸느라 제정신이 아니다. 하기야 이들이 바로 직전에 여·야당이 바뀐 입장이니, 과히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전당대회를 앞둔 여당은 다시 ‘내부 총질’의 악령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같은 당에서 같은 지향점을 바라보는 사람들끼리 왜 저런 말들을 주고받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서로 깎아내리다 보면 모두 난쟁이가 되어 버린다. 누구의 장점은 누구의 약점이고, 누구의 위기는 누구의 기회라는, 영원한 제로섬 게임에서 발버둥 치며 ‘내부 총질’을 하면,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을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 함께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정치인은 다른 사람의 갈등을 조정하는 사람이고, 그러기 위해 공감의 경청과 소통의 말을 도구로 써야 한다. 그런데 그런 도구를 쓸 줄 모르니 우선 손쉬운 총부터 집어 들고 난사한다. 말이 아닌 총을 사용하려다 보니 ‘탄핵의 강’이라는 실탄이 필요하고, ‘부동산 투기’ ‘민주당 DNA’라는 해묵은 탄알과, ‘윤핵관’이라는 대포알도 마구 투척한다. 심지어 ‘바이든’도 소환되었다. ‘울산의 이재명’이라는 프레임은 순식간에 당 전체를 이재명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발언이다. 땅 투기 의혹이 제기되자 해당 후보가 “정치 생명을 걸라, 나도 걸겠다”고 사생결단의 자세로 맞선다. 정체성 논쟁에 대항하는 후보는 “우리 당에 뼈를 묻겠다”고 한다. 삶의 생동감이 넘쳐야 하는 정치가 생사가 엇갈리는 포연 가득한 전장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난사된 총알과 탄피는 고스란히 야당이 주워다가 긴요하게 재활용할 것이다.

 

격한 말과 거친 논리에 노출된 국민은 피곤하다. 자기들 사이의 의견도 조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슨 재주로 사회의 갈등을 조정해낼 것인가. 무엇보다 내가 낸 세금으로 월급 받는 자들이 죽기 살기로 싸우는 모습까지 지켜봐야 하는 국민은 무슨 죄인가. 그러니 국민에 대한 예의로, 내부 총질은 문 닫고 하라. 문 밖에 있는 사람들이 보고 싶은 건 윈-윈 하는 정책 논쟁이지, 선혈 낭자한 서부 활극이 아니다.

 

자녀 양육 헌법 제1조는 ‘아이들 앞에서 싸우지 말라’는 것이다. 정기적으로 부모들 사이의 불화를 목격하며 자란 아이들은 평생 상처를 안고 살아갈 뿐 아니라, 거짓말을 하거나 도벽이 있는 아이로 클 수 있다고 한다. 니코틴이나 알코올 중독, 도박 중독에 빠질 수 있고, 나중에 당뇨, 심장병, 천식, 면역 저하 등의 만성질환에 시달리거나,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앓을 확률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수면 장애, 학습 능력 저하, 결혼이나 연애에서의 관계성 실패, 더 나아가 부모 양쪽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잃어 편견을 갖고 성장하게 되고, 부모 모두를 싫어하게 되어 결국 가정에서 등 돌리고 멀어지게 된다고 한다. 정치인들이 국민에게 부모 같은 존재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문제 해결 능력도 없는 정치인들끼리 싸움하는 모습을 일상적으로 목격한 국민이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정치 냉소주의에 빠진다는 공식은 공통이다.

 

야당은 일찌감치 외부에 적을 만들어 놓고 내부를 단속하는 매우 고전적인 수법을 쓰고 있다. 그들의 표현대로 대통령이라는 ‘정적’과 ‘극악무도한 검찰 독재’에 맞서려니 그들의 총구는 내부를 겨눌 여력이 없다. 그렇게 밖으로 향한 그들의 총구도 국민은 전혀 달갑지 않다. 분노에 눈먼 유탄이 어디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디 총 쏠 곳이 없어서 거리로 나와 총질인가. 대체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들은 왜 총밖에 쏠 줄 모르는 걸까.

 

얼마 전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가 후세에 칭송받는 정치를 한번 해보자며 “20여 년 전 어느 대기업 회장이 한국 정치는 4류라고 해서 파문이 인적이 있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도 우리 정치가 여전히 4류임을 부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세간의 평가는 좀 다르다고 전해드리고 싶다. 과거에는 적어도 ‘4류’는 되었는데, 요즘 정치에는 ‘류’조차 사라졌다고 한다. 칭송 이전에 ‘4류’의 품격이라도 회복하는 게 우선이다. 일단 내부 총질과 방탄 국회만 자제해도 좀 나아질까 모르겠다.

 

 

03.24 남북한의 또 다른 비대칭 전력, 말(言)

북에서 우리말 가르치면 최고 사형인데
남에서는 북한 말이 표현의 자유로 보호
야당 정치인은 ‘견결’ ‘총화’ 북 단어 남발
평양은 ‘퇴진이 추모다’ 투쟁 구호까지 하달
미사일 아닌 말로 붙으면 北이 이길 것 같다

16세기 독일 수도사 그레고르 라이시가 당시 학문을 알레고리로 형상화한 그림 중 ‘수사학의 여인’이라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에서 말의 학문인 수사학은 입에 칼과 꽃을 동시에 물고 있는 여성으로 묘사되고 있다. 즉 말은 꽃처럼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전쟁의 무기처럼 사람을 해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담긴 그림이다.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는 십계명이 우연이 아니다. 거짓말은 사람의 목숨도 앗아갈 수 있는 위험물이기 때문이다.

말의 힘에 일찍 눈뜬 서양 사람들은 말을 잘 쓰면 집을 따듯하게 덥히지만 잘못 다루면 집을 태우는, 불[火] 같은 존재로 인식했다. 그런 위험물을 제법 잘 다룬 서양인들은 수사학을 지렛대로 철학이라는 학문을 일구었고, 말을 통해 민주주의를 꽃피웠으며, 논쟁의 규칙을 세워 갈등 해결의 도구로 삼았다.

 

이에 비해 ‘숭문어눌(崇文語訥)’의 전통이 있는 동양에서는 예부터 말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으나, 북한만은 예외인 것 같다. 각종 구호로 도배된 북한의 거리는 레토릭 낙원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게다가 사상 교육으로 무장된 사람들은 입이 풀려있어 대적하기 부담스럽다. 나는 달변의 태영호 의원을 포함해 TV에 출연하는 북한 이탈 주민들의 거침없는 말발을 접할 때마다, 만약에 남과 북이 미사일 대포가 아닌 말로만 붙는다면 북이 이길 것이라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불행히도 그런 상상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혁명의 수단’으로서의 말의 가공할 위력을 먼저 감지한 북한이 전열을 가다듬고 대대적인 단속과 함께 ‘억세게 싸울 기세’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올해 초 최고인민회의에서 ‘평양문화어보호법’을 만들어 ‘괴뢰말’인 한국식 말투를 쓰면 6년 이상 징역, 가르치거나 인쇄물을 제작 유포하면 최고 사형까지 처벌할 수 있게 했다. 남측 영상물을 유포한 사람을 사형에 처한 것이 3년 전이다. 새 법은 여기에 게임 ID까지 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일러스트=박상훈

 

그들의 표현대로 ‘근본을 알 수 없는 잡탕 말이자 쓰레기 말’로부터 자신들의 언어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문제는 평양발 혁명의 언어들을 우리나라로 계속 흘려보내 사회를 교란시킨다는 점이다. 핼러윈 참사 때 ‘퇴진이 추모다’ 같은 투쟁 구호까지 직접 지어서 내려보내는가 하면, 보수 성향 유튜브 채널에 들어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수 있는 댓글이나 만평을 올려 법적 문제를 일으키는 역공작을 펼치라는 지시도 내렸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윤석열 후보 대망론에 적극 대응하라”고 지시하고, “댓글 팀들이 태극기 부대를 사칭해 윤석열의 (당시) 야권 후보 대망설은 보수 난립을 노린 집권 여당(민주당)의 술책이라는 괴담을 널리 유포시키라”고 했다고 한다. 윤석열 정권 출범 이후 여러 차례 정권 퇴진 운동과 반미 투쟁을 지시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북한에서 내려온 댓글과 시위 구호에 대한민국 국민들이 동원되고 놀아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한없이 찜찜하다.

 

미국과 대척점에 있는 러시아가 어떻게 미국 사회 여론에 침투하는가 하는 탐사 보도를 본 적이 있다. 이들은 아프리카 국가인 나이지리아와 가나 등에 위장 회사를 차려놓고 댓글 공작을 하는데, 주로 미국 내 인종차별 이슈를 부추기고 사회 갈등을 조장한다. 이런 댓글 조작 회사의 운영자가 고액의 수입을 올리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사이트 깊숙이 러시아어가 발견되는 점을 들어 러시아의 개입이 의심된다는 보도였다.

 

다른 대륙(아프리카)에 회사까지 차려 모국어도 아닌 언어(영어)로 미국 사회 불안을 조장하는 러시아의 힘겨운 노력에 비하면, 북한의 대한민국 개입은 땅 짚고 헤엄치기다. 우선 생김새가 같으니 섞여도 모르고, 같은 언어를 쓰니 사투리 배우듯 조금만 신경 쓰면 바로 공론장에서 ‘활약’이 가능하다. 왕래가 자유로운 조선족들을 잠재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자생적인 북한 추종 세력들이 충실하게 지령을 수행하니 이보다 쉬운 장사가 없다. 얼마 전 간첩단 혐의로 기소된 경남 창원의 ‘자주통일 민중전위’가 한 일을 보면 북한의 지령보다 그걸 떠받드는 남쪽 사람들이 더 문제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북한 언어를 조기에 학습한 운동권 세력은 나이가 들어서도 그 사상과 언어 습관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고, 국회에서는 야당 정치인이 북한의 낯선 언어인 ‘견결’ ‘총화’ 같은 단어를 서슴없이 발언한다. 민노총 홈페이지에는 북한조선직업총동맹이 보낸 글이 버젓이 올라있는데도 우리 방송통신심의원회는 ‘표현의 자유 보호’ ‘다양한 사상과 주장을 인정할 필요성’ 등을 근거로 손대지 못하고(않고) 있다.

 

그뿐인가. 입만 열면 거짓말인 정치인들, 그에 대한 무뇌아적 추종 글들, 여야가 따로 없(어야 하)는 외교 문제에도 남의 나라 헐뜯듯 난도질하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 헷갈리는 논객과 정객들, 어떤 괴담과 가짜 뉴스가 올라와도 30% 정도는 진짜로 받아들이는 혼탁한 공론장. 그 속으로 자유와 독이 적당히 섞인 칵테일 같은 북한발 메시지가 해커들의 활약으로 스며들어오고 있다. 사상의 자유 시장 이론에 따르면 거짓 불량 정보는 시장에서 걸러져야 하는데, 우리의 공론장이 과연 그 정도로 자정 능력과 복원력이 있는가? 북에서는 남한 말을 쓰면 사형인데, 남에서는 북한 말이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유포되고 보호되며 사람들의 생각을 흔들고 사회를 움직인다. 심각하고 위험한 전력의 비대칭이 아닐 수 없다. 정말 정신없고 대책 없는 노릇이다.

 

 

05.26 대한민국 국경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이승만, 6·25전쟁 시기 279회 연설
백선엽 “대통령 연설로 軍 사기 고무” 회고
지도자의 핵심 임무는 ‘국경 지킴이’ 역할
한미 동맹 복원, 한일 관계 개선, G7 참석은
대한민국을 자유 진영에 자리매김하는 것

 

/일러스트=이철원

 

전쟁 중인 나라의 지도자는 뭘 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만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지도자도 없을 듯하다. 지난해 전쟁 발발 후 젤렌스키 대통령은 카메라 렌즈 밖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다. 세계 각국을 다니며 지원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고, 수도 키이우에 돌아가서는 끊임없이 밖으로 우크라이나가 살아있다는 메시지를 발신한다.

 

최근 젤렌스키 대통령은 히로시마에서 열린 G7(주요 7국) 정상회의장을 찾아 자유 진영 리더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그의 부인은 각료와 오케스트라단을 이끌고 서울에 와서 조선일보 주최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ALC)에 참석했다. 키이우에서 발행하는 온라인 영자 신문의 편집장도 왔는데, 러시아의 거짓 정보에 경종을 울리는 강연을 하고 유럽에서 오는 길이라고 했다. 전쟁 중에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나 싶을 정도로 책임 있는 사람들이 모두 국경 밖에서 뛰고 있는 형국이다. 그 모양이 마치 위기에 처한 집안의 가장이 정보와 물자를 구하기 위해 집 밖에서 동분서주하는 모습과 닮았다.

 

우리나라 이승만 전 대통령도 해방 전 미국 필라델피아 대한인총대표회의에서 자유주의 국가 건설을 주창하고, 나라 밖에서 유창한 영어 연설로 한국의 좌표를 세계에 알린 수사적 지도자였다. 6·25전쟁 시기에만 연설을 279회 했는데(김명섭 김민식 ‘전쟁과 연설’), 백선엽 국군 제1사단장은 군인들이 대통령의 연설로 사기가 고무돼 전쟁터에 나갈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정전협정과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고 평화와 번영의 토대가 마련된다.

 

한 국가의 지도자는 여러 임무를 띠고 있지만 사실은 ‘국경 지킴이’ 노릇이 핵심이다. 인간의 한계처럼, 국가도 끝까지 간 곳이 국경이고, 넘어봐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국경이다.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심지어 멕시코와 잇댄 국경에 높은 장벽을 쌓았다. 레이건 전 대통령도 일찍이 “국경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국가는 국가가 아니다”라고 일갈한 바 있다. 지난해 5월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에서 가슴 뭉클한 장면은 새 대통령이 대한민국 동서남북의 국경인 독도의 공군, 연평도의 해병대, 마라도의 해군, 강원도 GOP의 육군에서 보고받고 군 통수권을 확인하는 장면이었다. 대한민국 땅은 더도 덜도 아닌 딱 거기까지다.

 

“너의 한계가 어디인지 알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그 한계를 넘어 보는 것”이라는 영국 작가 아서 클라크의 말처럼, 국경이란 본디 넘나들 때 존재감을 나타내는 법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본을 오가며 기시다 총리를 만날 때 일본과의 국경이 보였고, 미국에 국빈 방문 갈 때는 미국과의 국경이 보였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히로시마에서 한국의 원폭 피해자들을 품을 때는 대한민국의 국경이 거기까지 확장되는 느낌이었다.

 

국경을 넘나들며 한미 동맹을 복원하고, 한일 관계를 미래 지향적으로 설정하고, G7 회의에 초대받아 가치 동맹을 확인한 것은 대한민국을 자유 진영의 지도에 위치시킨 외교적 성과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동북아시아의 끄트머리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자유 민주국가로 자리매김했다. 어디가 대한민국인지, 나라의 동서남북 끝이 어디인지, 도무지 흐리멍덩하기만 했던 지난 정부와 크게 대비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윤 대통령은 지난 정부 때 치도곤을 맞은 김관진 전 국방부장관을 대통령 직속 국방혁신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위촉했다. 북한이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인물을 그 자리에 앉힌 것은 북한과 잇댄 국경을 또렷하게 긋는 일이다. 북한과 경계가 생기니 넘어오는 사람도 생겼다. 이달 초 두 일가족으로 추정되는 북한 주민들이 서해 북방한계선인 NLL을 넘어 탈북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가족 단위 탈북은 2017년 7월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새 정부는 국경이 엄연한 국가를 지킨 선열들을 기리기 위해 국가보훈처를 보훈부로 승격하고 국가의 가치를 다잡기 시작했다. 이뿐만 아니라 이제 외국인도 받아들일 만큼 넉넉해진 마음으로 이민청도 신설하려고 한다. 대한민국 국경을 넘어온 이방인들은 우리 안에서 동화되고 적응하며 더 큰 대한민국을 일굴 것이다.

 

대통령 취임 1년을 맞아 그동안의 외교적 성과가 집중 부각되자 이제부터는 그 에너지를 안으로 돌려 내치(內治)에 힘쓰라는 조언이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내치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 국내에 대한민국의 바운더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특히 거대 의석을 지닌 제1 야당이 어디가 동맹이고 주적인지 모르는 발언을 서슴지 않을 때는 대한민국 야당이 아니라 딴 나라에서 파견 나온 출장 사무소 직원들 같다. 아무리 콩가루 집안이라도 바깥에 불량배가 있을 때는 식구끼리 위하고 감싸는 게 상례인데, 우리 야당에는 그런 최소한의 정치적 도의가 보이지 않는다. 미국에 국빈 방문 가는 대통령의 뒤통수에 침을 뱉고, 일본에 가는 원전 오염수 시찰단에게 ‘오염수나 마시라’는 식의 조롱을 퍼붓는다. 그들의 거친 언사와 불안한 눈빛이 중국 관영 매체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며 분열의 국가 이미지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간다. 대한민국의 야당인 그들에게 대한민국이 무엇인지,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이 외국에 나갈 때마다 마치 객사라도 하기를 바라는 듯한 야당이 있다는 건, 어쩌면 대한민국이 미생(未生)이라는 방증일지 모른다. 혹은 유사 전쟁 중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긴장하고 국경을 사수해야 한다. 70여 년 전 전쟁 중의 한국처럼, 혹은 현재의 우크라이나처럼, 내치와 외교를 분리할 사치가 아직 대한민국에는 없어 보인다.

 

 

06.23 공직자의 ‘용서받지 못할 죄’

청와대 관저에서 사용하던 가구·집기 사라지고
前 국회 과방위원장은 올 해외 시찰 예산 다 써버려
공공 기관 직원 250명, 보조금 받아 ‘태양광 장사’
베네치아 공화국이 천 년 동안 번성한 비결은
공직자의 예산 낭비를 ‘대죄’로 엄벌한 것

 

▲일러스트=이철원

 

얼마 전 조국 전 장관이 평산마을 문재인 전 대통령을 만나 올린 사진 한 장에 한 페친(페이스북 친구)이 재밌는 댓글을 달았다. “소확횡(소소하지만 확실한 횡령).” 청와대에서 가져온 것이 확실해 보이는 봉황 문양 술병이 식탁에 놓인 걸 보고 한 말이다. 이런 댓글도 있었다. “문이 찬 시계를 보니 자기 이름이 들어간 시계네요. … 스스로 날마다 잊히지 않을 듯싶습니다.”

 

잊어라 해놓고 계속 나타나는 심사를 탓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횡령은 다른 문제다. 소위 ‘오피스 빌런’이 소소하게 커피믹스나 복사 용지를 빼돌릴 때도 숨어서 하는데, 전직 대통령이 청와대 물품을 가지고 와서 쓰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공개하는 건 ①아직도 대통령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나 ②애초에 횡령에 대한 개념이 없다는 증거다.

 

횡령 규모도 결코 소소하지 않다. 청와대 관저에서 사용하던 가구와 집기류가 사라졌다고 하는데, 지난해 4월 3주에 걸쳐 양산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외국 유명 화가의 그림이 포함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으나, 어떤 물건이 양산으로 갔는지 밝히지 않으니 알 길이 없다. 보통 하루면 끝나는 이사에 3주가 걸릴 정도로 많은 이삿짐을 모두 재임 시 받은 월급으로 샀다고 보기는 어렵다. 통상 국가 예산으로 구입한 모든 것은 물품관리법 적용 대상이다. 여기에는 가구와 집기, 선물 등이 포함되는데, 문재인 전 대통령은 풍산개까지 대통령기록물로 포함해 양육비까지 챙겼다(가 파양했다). 횡령도 문제지만, 국가기록물 관리가 허술하기 짝이 없다.

 

여기까지는 전주곡에 불과하다. 이제야 드러나는 지난 정부의 도덕적 해이와 몰염치와 예산 독식과 낭비는 그 규모와 방법이 혀를 찰 정도다. 지난해 모 부처에 새로 부임한 차관급 공직자는 문 정부가 그해 연구 용역 등의 예산을 이미 모두 집행한 것을 보고 “지독하다”고 느꼈다고 한다. 정상적 조직이라면 후임이 사용할 몫의 예산은 남겨놓는 것이 상식이다. 이달 초에는 국회 과학기술방송통신위원장을 지낸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의원이 상임위원장 교체가 이미 예정되어 있는데도 올해 과방위에 배정된 해외 시찰 경비 예산 약 5000만원을 사실상 전부 사용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쓸 돈과 자리만 생기면 득달같이 모두 쓰는 것이 지난 정부 인사들의 상식인 모양이다. 이 정도면 각종 인사 알박기나 전현희 권익위원장의 버티기는 애교 수준이다.

 

선거관리위원회는 자식을 채용해 대를 이어 세금으로 먹고살려다 적발되었고, 막대한 국고보조금을 받으면서도 연일 정쟁에 매달리며 방탄 국회를 전전하는 국회 역시 나랏돈을 낭비하는 큰 구멍이다. 문 정부는 연간 2조원에 가까운 민간 단체 보조금을 늘렸는데, 이렇게 지원한 각종 보조금은 특정 정파의 정치 운동에 사용되는 등 부정하게 줄줄 새어 나갔다. 최근 감사원 발표에 따르면 보조금 314억원과 지방교육재정교부금 282억원이 부정 사용되었다. 드러난 것만 그 정도다.

 

지난 정부가 밀어붙인 탈원전과 태양광 사업의 수혜 구조는 정권이 바뀌면 필연적으로 드러날 대표적 이권 카르텔이었다. 역시 최근 감사원은 ‘신재생에너지 사업 추진 실태’ 감사를 통해 공공기관 8곳 임직원 250여 명이 본인이나 가족 이름으로 태양광 사업을 하며 보조금을 나눠 가진 것으로 확인돼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국가 에너지 정책을 책임지고 이끌어야 할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들은 에너지 정책을 뿌리부터 망가뜨린 것도 모자라 거기에 들러붙어 뒷돈과 자리를 챙겼다. 그리고 잘못된 정책에 따른 부담 수십조 원을 고스란히 국민에게 떠넘겼다. 세금으로 월급 받는 자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패악이 아닐 수 없다.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는 한 소설에서 소금과 생선밖에 없던 베네치아 공화국이 천년 동안 번성할 수 있었던 비결로 ‘페카토 모르탈레(Peccato Mortale)’를 들었다. ‘용서받지 못할 죄’로 번역되는 이 라틴어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엄벌한 ‘대죄’를 뜻한다. 그 죄는 첫째 공직자가 예산을 낭비하는 것, 둘째 기업가가 이윤을 남기지 못하는 것이었다. 공동체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사적영역의 생산 체계가 자유롭고 원활해야 하고, 공적 영역에서는 그 이윤을 공정하게 사용하고 분배해야 한다는, 현대사회의 정치 경제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단테의 신곡에서도 공직자의 위선과 무능, 기업인의 나태와 방관을 큰 죄로 묘사한다.

 

신약성서의 요한복음은 이런 ‘대죄’를 하느님의 은혜에서 분리된 ‘죽음에 이르는 죄’라고 부른다. 대죄의 성립 요건으로 첫째 죄의 사안이 중대하고, 둘째 죄를 짓는 자가 그걸 알고 있으며, 셋째 자신의 완전한 의지에 따라 죄를 짓는 것이다. 이 분류에 따르면 세금을 낭비한 각급 공직자들이 사안의 중요성을 몰랐을 리 없고, 누구의 강요에 따른 것이 아니었으며, 제정신으로 저질렀을 테니 ‘용서받지 못할 죄’임이 분명하다.

 

성경이 다시 이르시길 ‘죽음에 이르는 큰 죄’는 고해성사를 통해서만 사할 수 있다고 했다. 하느님의 자비로운 용서는 그렇게 구하면 된다. 그러나 현대 법치 사회에서는 사무실 용품을 빼돌리는 ‘소확횡’이나 직원 절도 행위도 엄연한 처벌 대상이다. 용서는 교회가, 처벌은 국가가 해야 한다. 피 같은 국민 세금이 어디서 어떻게 쓰이는지, 철저하고 투명하게 알고 싶다. 공금으로 구입한 물품은 공직이 끝나면 그대로 두고 나오는 것이 원칙이고, 염치이며, 상식이다. 이런 원칙과 염치와 상식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법으로 다스리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08.04 ‘선동 정치’에 춤추는 양평 고속도로

일러스트=이철원

 

영국의 20세기 수사학자 스티븐 툴민은 고대 삼단논법을 보완한 ‘툴민의 논증 모델’로 유명하다. 대전제-소전제-결론으로 구성된 삼단논법이 다소 거칠다고 생각한 그는 전제와 결론을 이어주는 또 다른 장치인 ‘보증(warrant)’이라는 단계를 주목했는데, 가령 이런 것이다. ‘말기 암 환자는 죽는다’는 대전제와 ‘고로 A는 죽는다’는 결론이 있다고 할 때, 그 논리가 성립하려면 전제를 ‘보증’하는 상식과 믿음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즉 암이 곧 죽을병이라고 믿는 사회에서 통하는 논리라는 뜻이다. 눈부신 의학의 발달로 말기 암이 극복되고 생명 연장이 가능해진 사회에서는 ‘말기 암=죽음’ 논증이 통하지 않는다. 상식과 믿음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대통령 처가 일가의 땅값을 올려주려고 국토교통부가 서울-양평고속도로 노선을 변경했다는 야당의 공세가 놀라운 건, 그런 주장을 펼 수 있는 ‘그들의 상식’ 체계다.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전제는 ‘정부는 대통령 일가의 재산 증식을 위해 고속도로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건 전근대적 왕조 체제에서나 통할 논리다. 아마 그들은 집권 당시 그렇게 국가 재산을 이해하고 관리했나 보다. 세종시 부근에 ‘이해찬 나들목’이 있다고 알려진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는 ‘이해찬다운 상상력’을 동원해 의혹을 제기했고, 그걸 현 대표가 ‘이재명식 정치 게임’으로 전환했다.

 

이해찬 전 대표가 과거 어느 인터뷰에서 우파를 겨냥해 “지난 70년 동안 해 먹었으니 이제 우리 차례”라는 취지의 말을 한 기억이 난다. 그에게 권력이란 ‘뭔가 해 먹는 일’임을 드러낸 말이다. 지난 정부가 남긴 금전출납부를 보면 그게 그들의 상식이었음이 분명하다. 사회 각 분야에서 마치 넘어진 사탕 트럭에 사탕을 주우러 달려드는 어린아이들처럼 곳간을 퍼내고 나눠 먹기 바빴으니 말이다. 사탕을 만들어 본 적도, 사탕을 내다 팔기 위해 트럭에 싣고 운반한 적도 없는 그들이 사탕 공장 사장의 세계를 이해할 수는 없다. 그렇게 70년 동안 권력자 재산을 불려주기 위해 고속도로를 놓고 개발을 해왔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난데없이 대통령 처가 땅지기로 공격받은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황당할 것이다. 민주당 소속 전 양평군수처럼 자기 땅도 아니고, 자기 처가 땅도 아니고, 대통령 땅도 아니고, 기껏해야 대통령 처가 문중 땅인데, 그게 설령 오른다 해도 그게 장관에게 무슨 실익이 될 것인가. 조금만 상식을 동원해도 가려낼 수 있는 억지 주장에 온 나라가 시끄러운 건 너무 다른 상식의 세계와 물불 안가리는 정쟁이 뒤엉켜 만들어낸 파노라마다.

 

통상 상식이 다른 사람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서로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국가 재산을 권력자가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과 그래서는 안 된다고 믿는 사람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예산을 짤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가치관이 달라도 합리적인 사람과는 얼마든지 대화와 소통이 가능하다.

 

혹시 합리적 의심을 조금이라도 합리적으로 해소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문제를 논증적으로 접근하면 된다. 양평 고속도로 대안 노선이 건설되었을 때 김건희 일가 땅값이 얼마나 오를지를 논점으로 하여 경제적 이익에 대한 논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이 대통령 부인의 압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증거가 나와야 한다. 이런 증거는 누가 제시해야 하는가. 의혹을 제기한 사람에게 소위 ‘증거 제시 의무’가 있다. 주장은 했지만 증거가 없다면, 그 주장은 ‘무죄 추정 원칙’에 따라 기각되어야 한다. 그게 토론 규칙이다.

 

그러나 막상 현실은 딴판으로 돌아가고 있다. 지난달 26일 국회에서 열린 국토교통위에서는 고성과 (장관에 대한) 훈계만 있었을 뿐, 어떤 증거 제시도, 그에 대한 논박도 없었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대화 근처에도 못 간 것이다. 애초에 논점에는 관심도 없고, 전체주의 사회에서나 통할 ‘유죄 추정 원칙’에 따라 증거 제시 의무를 상대에게 떠넘겨 ‘너의 결백을 네가 증명해라’라는 윽박지름만 있었다. 가상 화폐 같은 재테크 수단에 골몰할 때만 21세기형일 뿐 모든 것이 전근대 수준인 국회가 다시 밑도 끝도 없는 국정조사를 들먹거린다. 합리적 ‘대화’조차 할 줄 모르면서 무슨 ‘조사’를 하겠다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노선 변경 절차의 투명성이나 특혜 의혹은 숫자와 자료로 해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숫자나 과학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무슨 논쟁이나 설득이 가능할까. 유엔 보고서도 믿지 않는 사람이니 분기점(JC)이 땅값에 미치는 영향을 논문으로 써서 갖다 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정부가 대통령을 위해 길을 놓는다는 상식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 생각을 무슨 수로 바꿀 것인가.

 

일각에서는 양평 주민들에게 의견을 물어 이 상황을 해결하자는 주장도 하는 것 같다. 주민의 의견을 경청하고 수렴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앞으로 유사한 일이 있을 때마다 주민 투표에 부쳐 해결할 요량이 아니라면 주민에게 최종 결정을 하게 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책임 있는 사람들이 책임지고 해결하는 것이 낫다. 그래야 나중에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고속도로 노선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너무 다른,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거대한 상식 체계 사이의 대립이자, 진실이나 증거의 합리성을 무시한 거짓 공세와 벌이는 싸움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런 허위와 불합리에 고속도로가 춤추게 할 수는 없다.

 

 

09.15 눈에 보이지 않는 교육 카르텔의 수상한 커리큘럼

11년 전 ‘KBS스페셜 정율성 편’ 심의 경험
배운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인물 조명에 놀라
숨어서 국가 흔드는 ‘교육 카르텔’ 곳곳 성업 중
우리는 이승만도 홍범도도 제대로 배워본 적 없어
일단 정치부터 떼어놓고 근·현대사 교육 새로 해야

▲일러스트=이철원

 

내가 ‘정율성’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2012년 2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KBS스페셜 정율성 편’을 심의할 때다. 배운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정율성이라는 인물을 KBS가 정성 들여 조명한 프로그램이었는데, 당시 위원들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리며 제재 수위를 결정하지 못했다. 음악가를 다룬 프로그램의 실정법 위반 여부를 따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항일이냐 반공이냐를 놓고 경중을 따질 때는 더욱 그랬다. 아무튼 전문가 의견을 듣는다며 거의 2년이나 심의를 보류하고 지지부진하다가 임기가 끝났다.

 

최근 광주시가 48억원을 들여 조성 중인 정율성 역사 공원이 시끄러운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걸 보며 나는 정율성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강기정 광주시장과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사이의 날 선 이념 논쟁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율성이 새삼 경이롭게 다가온 건 교과서에 한 줄 언급되지도 않고, 그의 음악을 들은 국민이 거의 전무하며, 한국에서 살지도 않고 유족도 없는 그가 여지껏 현재진행형으로 펄떡거리고 살아있는, 그 엄청난 생명력이었다.

 

그가 다녔다는 능주초등학교에는 그를 우상화한 벽화와 조형물과 기념관이 있고, 광주에는 생가 표지석과 정율성로와 정율성 노래길이 있으며, 정율성동요제와 정율성국제음악제가 열린다. 19세에 중국으로 건너가 전후(戰後)에는 북한에서 살았고, 1956년 중국에 귀화해 ‘정뤼성’으로 살다 죽은 그를 대체 누가 어떤 교실에서 그렇게 열심히 가르치고 설파했을까. 누군가는 가르치고, 누군가는 설득되었으며, 누군가는 앞장서서 각종 사업에 세금이 흘러가도록 물길을 터주었기에 저 수많은 사업이 가능했던 게 아닌가. 이쯤 되니 11년 전 심의했던 KBS스페셜이 어느 제작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한 ‘점(點)’이 아니라, 이 땅에 거대한 서사 구조를 이루며 집요하게 설득하는 집단적 ‘선(線)’의 일부라는 그림이 그려졌다.

 

2012년 1월 방영한 ‘KBS스페셜 정율성 편’은 그보다 1년 앞서 KBS 전주방송국에서 이미 방영했다. KBS 서울방송국은 원래 2011년 광복절에 맞춰 방영하려 했으나 이사회의 반대에 부딪혀 6개월 정도 지연 방영하게 되었고, 그의 사상 전력을 문제 삼는 민원이 제기되어 사후 심의에 올라온 것이다. 심의는 불발에 그쳤지만, 설사 강한 제재를 했더라도 별무소용이었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 방심위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관계자 징계 및 경고’ 조치한 ‘백년 전쟁’이 6년 후 김명수 대법원에서 ‘문제없음’으로 결과가 뒤집혔기 때문이다. 그렇게 끈질기게 법정 소송을 해서 마침내 정권이 바뀌자 심의 결과조차 뒤집는, 그 은밀하고 지독한 세력을 무슨 수로 대적하겠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학교에서 뭘 가르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정뤼성’이 여러 북한 인민군 군가와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를 작곡해 6·25 당시 적군의 사기를 돋우는 역할을 했고, 전쟁 중 그가 북한으로 가져간 궁정 악보를 1996년 한국 정부가 그의 중국인 아내 ‘딩쉐쑹’에게서 겨우 돌려받았다는 사실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학교는 ‘반공’보다 ‘항일’을 우선으로 가르치며, 광주에 수백억 원을 들여 ‘호남권 차이나 관광 벨트’를 구축해 중국인 관광객을 유치하는 게 좋은 아이디어라고 제안한다. 조총련이 주최하는 행사에 참석하라고 독려하고, 김여정이 탈북자를 지칭하는 단어인 ‘쓰레기’라는 말을 학습시킨다.

 

보이지 않는 학교에서 학습한 학생들이 서울에서, 광주에서, KBS에서, 국회에서, 대법원에서, 배운 대로 실력을 발휘하며 살아가는 한편, 막상 눈에 보이는 진짜 학교는 생사 고비에서 시름시름 앓고 있다. 악성 민원과 괴롭힘에 시달린 선생님들이 잇따라 극단 선택을 하자 그동안 참고 있던 선생님들이 거리로 나와 아동복지법을 개정하고 교권을 법으로 보호해 달라고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제자들의 해코지가 두려워 연락처를 남기지 않는 교사가 있을 정도로 교사와 학생은 멀어졌고, 학부모는 갑질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대학 입시는 의대 블랙홀에 빠져있고, 교육은 거대한 사교육 시장과 일타 강사들이 주무른다.

 

이런 상황에서 감사원은 학원에 문제를 팔아넘긴 교사를 막기 위한 소위 ‘교육 카르텔’에 대한 감사를 시작했다. 이권 카르텔보다 더 무섭고 견고한, 그러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숨어서 국가를 흔들고 정신을 병들게 하는, 그런 교육 카르텔이 버젓이 성업하는데, 문제 몇개 학원에 팔고 돈 몇 푼 받는 개인 비리 탐욕형 카르텔을 캐는 게 무어 그리 대수인가. 갑질 하는 부모와 자살하는 선생님들도 막아야 하지만, 그보다 먼저 부모와 선생님과 학생이 함께 설 땅을 견고하게 다지는 게 중요하지 않은가.

 

나는 정율성을 어디서도 배운 적이 없지만, 이승만도 제대로 배운 기억이 없다. 홍범도도 진지하게 살펴볼 기회가 없었다. 가르쳐 주는 곳이 없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 그리고 전쟁과 대한민국 초기 공화국에 이른 현대사가 교육의 불모지가 되어 아무나 해석하고 아무렇게나 규정해도 되는 영역으로 허공을 떠도는 사이 대한민국은 뭐가 뭔지 모를 곳이 되어가고 있다.

 

잡초 무성한 시골길 같은 우리나라 현대사 교육을 뿌리부터 다시 점검하고, 경부고속도로 닦듯, 교육의 고속도로를 놓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교육과 정치를 떼어 놓아야 한다. 누구 흉상을 세우느니 마느니, 누구 공원을 만드느니 마느니 하는 일이 반복될 때마다, 대한민국이 중요하다 이러면서 논란의 영역에서 건국 논쟁으로 언성 높이는 일을 되풀이하며 살 수는 없다.

 

 

10.20 미래를 제시하라, 지지는 따라온다

▲일러스트=이철원

 

정말 가정(假定)조차 하기 싫지만, 만약 ‘가짜 뉴스’만으로 선거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야당이 압승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에겐 거짓을 만들어낼 상상력과 창의력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자기들에게 불리한 진짜 뉴스 앞에서 발뺌하는 뻔뻔함과 그럴듯한 가짜 뉴스를 제작할 능력을 겸비한 자라면, 누구라도 당해내기 어렵다.

 

지난 대선 막바지에 불쑥 나온 ‘윤석열 몸통’ 뉴스만 봐도 그렇다. 거짓 인터뷰를 악마의 편집을 거쳐 마이너 매체를 통해 유포하고, 그걸 다시 정당이 선거운동 재료로 활용하게 한다는, 이 기막힌 시나리오는 아무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다. 상자 밖 사고의 창의력과 위험을 우습게 여기는 담대함, 거기에 기술적 디테일이 보태져야 가능하다. 아무튼 대선 열기로 한창 뜨거운 지난해, 대장동 의혹의 한가운데 이재명 후보가 얽혀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윤석열이 몸통이래’라고 신원 불상 스피커가 속삭이는 소리에 국민은 잠시나마 ‘오잉?’ 했다. 아, 기막힌 반전, 그리고 상상력. 만약에 그게 먹힌다면 미사일의 위력으로 지축을 뒤흔들어 우리편을 살리고 반대파를 초토화해 선거판을 뒤집을 것이다. 이런 상상력, ‘노벨 정치학상’감 아닌가.

 

그들의 상상력은 그 후에도 사그라지지 않고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과 청담동 심야 술집에서 노래하는 상상을 했고, 없는 사람들 사이의 대화록을 제조해 유포하기도 했다. 얼마 전 법무부 장관 집 앞에 흉기와 토치를 놓은 사람이 구속된 사건이 발생하자 ‘자작극’이라고 되치기하는 순발력도 발휘했다. 그렇다고 그런 그들을 욕할 수는 없다. 그들은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의 말대로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임을 실천하는 사람들이자, 유발 하라리의 이론에 따르면 침팬지에게는 없는 인간들만의 상징조작 능력의 소유자들일 뿐이다. 천안함 유족 윤청자 여사의 표현을 빌리면 “좌파는 똘똘 뭉쳐서 억지를 사실인 것처럼 탁월하게 만들어 내는 데 도사들”이다. 한마디로 능력자들이라는 뜻이다. 유발 하라리는 그 결과 침팬지는 동물원에 갇혀 있고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했다.

 

물론 그들이 지어내는 가짜 세상에 동조하거나, 허위 정보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게다가 우리가 또 보통 국민인가. 지난 한 세기 동안 다양한 정치 체제와 별의별 지도자를 겪으며 작지 않은 정치적 내공과 상상력을 쌓은 우리 국민은 간혹 속아주기는 해도 쉽게 당하지는 않는다. 갈수록 밝아지고 투명해지는 세상에서 결국은 진실이 거짓을 이길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럼에도 부인할 수 없는 건 상상력의 힘, 그리고 그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진리다.

 

지난 문재인 정부도 상상하는 능력과 그걸 소통하는 기술이 탁월한 정부였다. 문제는 너무도 성공적이었던 나머지 국민이 그들이 상상하는 세상을 봐 버렸다는 데 있다. 그들은 뭔가 대한민국을 뛰어넘는 새로운 한반도를 상상했던 것 같고, 그를 위해 북한과 우호적인 협력 관계를 구축할 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언뜻 이해하기 힘든 군사 합의를 하고 종전 협정을 서둘렀다. 공적 영역을 키우기 위해 세금을 많이 거둬 갔고, 그렇게 모은 세금을 여기저기 뿌리기도 했지만 결국 자기들끼리 많이 나눠 가졌다. 필요하다면 통계도 조작했다. 그들은 경제를 비롯한 각 영역에서 비교적 또렷한 비전을 갖고 있었고, 그 비전을 국민에게 잘 전달했다. 그 결과 대선에서 패배한 것이다. 적어도 절반이 넘는 국민은 그들이 상상하는 세상이 펼쳐질까 우려하며 그들의 비전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지금 집권 세력은 어떤 비전이 있고 어떤 정치적 상상을 하며 살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비전이란 마치 지평선과 같아서 끝내 가 닿을 수는 없지만 계속 바라보며 앞으로 가게 하는 힘과 같은 것이다. 건강해지고 싶은 꿈을 지닌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 운동하듯이, 사람들은 상상하는 세계를 꿈꾸며 현재를 움직인다. 정치적 상상력은 그런 사람들의 꿈을 하나로 모으는 촉매제다. 사람들의 꿈을 소유하면 그들의 지지는 자연히 따라온다. 미국의 언론인이자 사회 비평가인 월터 리프먼은 이 과정을 ‘동의 제조 과정(the manufacture of consent)’이라고 불렀다. 그런 기제가 과연 지금 여당과 정부에 있는가.

 

최근 여당이 참패한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결과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대통령실과 집권당 사이의 긴장감 없는 수직 관계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고, 선거 전략이 부실했다는 지적과 함께 명분 없는 후보 공천이 원인이었다는 자성론도 있다. 그 모든 이유의 으뜸으로 빈약한 정치적 상상력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상상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인데, 여당은 눈에 뻔히 보이는 것도 보지 못했다. 집권 세력의 비전이란 대개 어떤 인물을 기용하는가로 드러나게 마련인데, 적어도 지금까지 보여준 인사들은 상상력의 빈곤에 지나지 않았다.

 

요즘에는 기업도 최고경영책임자(CEO)만으로는 부족해 최고비전책임자(CVO)와 최고소통책임자(CCO)를 둔다. 지금 윤석열 정부에는 CEO만 있고, 나머지는 없는 것 같다. 최근 각급 정부 인사들에게 국민과 소통하기를 강화하라고 지시했다고 하는데, 그들이 무엇을 소통할지 알 길이 없다. 법조인 출신인 대통령은 사법적 진실과 정의가 중요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걸 다 가져도 결국 지배하는 건 과거일 뿐이다. 정치인으로 성공하려면 상상 영역인 미래에서 겨뤄야 한다. 유발 하라리의 지적대로 국가는 상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11.17 국민은 국회를 탄핵하고 싶다

巨野, 탄핵을 국정 마비와 협박 도구로 삼아
불체포특권은 범죄자 보호용 방탄으로 사용
與, ‘험지 출마’니 뭐니 서로 등 떠밀며 버텨
국가 미래 고민 없이 자기 이익에만 목매
제도는 잘못 없다, 문제는 그걸 사용하는 ‘인간’

 

▲일러스트=이철원

 

권력이 인간을 타락시킨다는 건 틀리는 말이다. 아일랜드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권력이 인간을 타락시키는 게 아니라, 바보들이 권력을 타락시킨다고 말했다. 잘 쓰면 권력만큼 세상에 이로운 것이 없다. 문제는 그게 바보들 손에 들어갔을 때 어떤 흉기가 돼서 세상을 어지럽힐지 가늠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바보들 손에 권력을 쥐여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요즘 대한민국 국회만큼 잘 보여주는 곳이 또 있을까 싶다. 그게 어떤 흉기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휘휘 휘두르며 노는 모습이 흡사 원시인 같다. 청문회에서 탄핵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도와 수단을 저렇게 철저하게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는 권력 집단을 매일 봐야 하는 국민은 무슨 죄인지 모르겠다. 국가의 미래를 고민해야 하는 사람들이 자기들 미래(공천)에만 목을 매고, 민생 법안은 안중에도 없이 권력 유지에 도움이 되는 입법에 몰두한다. 국민이 위임한 권한을 저렇게 막 갖다 쓸 수는 없다. 아니 써서는 안 된다. 세금으로 월급 받고 국고에서 보조받으며, 온갖 특혜를 철갑처럼 두르고 저렇게 살아도 되는 직종이 하늘 아래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원래는 탄핵도, 청문회도, 모두 좋은 취지로 출발했을 것이다. 회기 중에 국회의원을 체포하지 않는 것도 민주 사회의 신성한 입법권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 좋은 제도를 바보들이 들어가 이상한 도구로 변질시켜 버렸다. 탄핵은 국정 마비와 협박 도구로, 청문회는 망신 주기 대회로, 또 불체포 특권은 범죄자 보호용 방패로 사용하며 본래 취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제도는 잘못이 없다. 그걸 사용하는 인간들의 수준이 망쳐놓았을 뿐이다.

 

거대 야당은 쓸 수 있는 모든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그 큰 덩치로 자기들 본모습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중이다. 힘이 없었다면 모르고 지나갔을 터이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결정을 내리며 사는 집단인지. 어떤 상식이 그 안에서 통하고, 어떤 인물이 그 안에서 추앙받는지, 밖에서는 알 턱이 없다. 힘이 생겨서 그걸 휘두르다 보니 모든 사람이 주목하며 알게 되었다. 바보도 덩치가 작고 힘이 없으면 위협적이지 않다. 국민은 그들을 보며 권력을 엉뚱한 자들에게 몰아주면 어떤 일을 겪는지 교훈을 얻는 중이다.

 

야당이 저러하니 여당이라고 온전할 수 없다. 거기에 대응하는 묘수를 찾는 데 에너지를 소비하느라 집권당이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전념하지 못하고 있다. 여당도 개혁해야 하는데 카운터파트가 형편없으니 동기도 열의도 시들할 수밖에 없다.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이 내놓은 몇 가지 혁신안은, 국민 눈높이에서 보자면 혁신이랄 것조차 없는 지극히 상식적인 요구다. 중진이든, 친윤이든, 그대들은 국민에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다. 국민이 사는 곳을 자기들 기준에서 험지와 비험지로 나누고, 서로 등 떠밀며 버티는 모습이라니, 언제부터 ‘불출마’나 ‘험지 출마’가 ‘희생’과 동의어가 되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저렇게 세상을 철저하게 자기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국가의 미래를 맡긴 국민이 불쌍하다.

 

‘바보’라는 말에 자존심이 상했을 사람들을 위해 뜻풀이를 해야겠다. 바보를 뜻하는 영어 ‘idiot’의 어원은 ‘사적(private)’을 뜻하는 그리스어 ‘idios’에서 나왔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도시국가인 폴리스를 공적 장소라는 뜻의 ‘코이논’이라고 했고, 가정의 울타리 안을 사적 장소라는 뜻의 ‘오이코스’라고 불렀다. 주로 가정 안에서 노동하는 노예나 여성들은 바깥일에 무지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idiot’이라는 단어가 부정적 의미로 쓰이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공적 생활과 동떨어진 삶이 그 어원이다. 그러나 가정의 노동이 바탕이 되어 공적 활동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으니 그 둘은 상호 보완적 관계라고 보았다. 따라서 폴리스에서 중책을 맡아 일하는 공직자나 엘리트, 혹은 똑똑한 사람들에게 ‘공적 마인드’는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었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바보’라는 말조차 과분하다. 바깥 물정에 어두운 사람이라도, 최소한의 염치와 상식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염치는커녕 뻔한 불법을 저지르고도 국회의원의 특권을 한껏 이용해 자신을 보호하고, 당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오늘날 대한민국 국회의원의 자화상이다. 뇌물 받고, 폭력 저지르고, 성추행하고, 후원금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재판 또는 수사를 받고 있는 의원이 37명에 이른다. 그런 그들이 657조원이나 되는 정부 예산을 주무르고 법을 만든다. 이런 국회, 국민은 탄핵하고 싶은데, 무슨 짓을 해도 그들을 벌주거나 탄핵할 방도가 없다.

 

그동안 한국 정치가 수준급 정치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때 희망인 시절도 있었고, 적어도 국가와 국민을 생각한다는 사람 몇몇이 정치 일선에 나가고 물러나곤 하는 걸 본 적이 있는 듯하다. 그 경위와 이유가 어떠하든, 요즘 정치에선 그런 게 보이지 않는다. 서슬 퍼런 권위주의 시절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국회는 사회의 갈등을 녹여내고, 국가의 미래를 밝혀주어야 하는데, 지금은 제 발 앞 등불만 밝히는 정치인들 때문에 나라가 칠흑 같다. 특정 정당과 개인적 인연이 있는 사람을 제외한, 중립적인 대다수 보통 시민이라면 뭔가 변해야 한다고 느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내년 총선에서 그게 누가 되었든, 국민 수준에 턱없이 모자라는 정치를 상식 수준으로라도 끌어올리려고 노력하는 정당 쪽에 표를 던질 것이다.

 

 

12.15 대통령에게 필요한 열 번째 사람

보안 회사는 월급 받고 해킹만 하는 직원 둔다
9명이 A 선택할 때 B라고 할 1명 정부엔 있나
영부인에게 ‘조용한 내조’ 직언하는 참모도 없어
대통령에게 쓴소리하는 것 쉬운 일 아니지만
일렬로 따라가다 망하는 일 막는 장치 있어야

▲일러스트=김성규

 

최근 부산에서 만난 한 공무원은 부산 엑스포가 성사되리라 진짜 믿었다고 한다. 믿은 만큼 실망이 컸음은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다. 부산역 근처 호텔은 엑스포 홍보 팸플릿을 로비에 놔둔 채였고, 길거리에는 아직 거두지 않은 엑스포 휘장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기분 탓인가, 부산은 청소하고 정리할 기운이 없는 집처럼 어수선하고 조용했다.

 

부산 엑스포가 국가적 염원이 된 건 지난여름 출국하던 김건희 여사의 가방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플라스틱 사용 자제 메시지가 담긴 에코 가방에 엑스포 유치 기원이 담긴 키링이 달려 있었다는 보도였다. 김 여사는 자신이 디자인 제작에 참여한 키링을 헝가리 총리에게 건네며 지지를 호소했다고 한다.

 

프랑스 한국문화원 곳곳에도 키링 이미지를 구현한 영상과 홍보 배너가 설치되어 눈길을 끌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부인의 이런 행보는 부산을 향한 용산의 ‘돌격 앞으로’ 메시지로 읽히기에 충분하다. 아니나 다를까 부산 엑스포 열기는 점점 높아지더니 투표 전야는 마치 한일 축구전처럼 후끈 달아올랐다.

 

이튿날, 119 대 29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 든 국민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낭패감에 휩싸였다.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실망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민-관 합동 유치전을 통해 얻은 무형 자산도 있다는 일부 평가에도 불구하고, 실망을 넘어 의아함까지 고개를 들었다. 우리 정부의 외교력과 정보력이 이 정도 수준이라면 대체 무슨 일인들 제대로 할 것인가. 엑스포 유치 결과야 투표로 드러났으니 망정이지, 결과를 알 수 없는, 그러나 실패를 향해 매진하고 있는 일이 이것뿐일까 하는 자연스러운 의심이다.

 

냉정히 따지고 보면 세상에서 이기는 게임만 하라는 법은 없다. 열세인 게임이라도 최선을 다해 임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고, 진다고 무슨 죄를 짓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대통령이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도록 눈과 귀를 막고, 그릇된 정보 위에서 함께 춤을 춘 주변에 있다.

 

한비자에는 군주에게 영합하는 신하의 끔찍한 예가 하나 등장한다. 희귀한 음식을 맛보길 좋아하는 군주에게 자기 맏자식을 삶아서 바친 신하 이야기다. 그러니 군주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표정을 내비치지 말라고 조언한다. 군주가 용맹을 좋아하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자가 많아지며, 허리 가는 사람을 좋아하면 굶는 사람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현명한 군주는 자신의 지혜를 버림으로써 총명해진다고도 했다. 그래야 지혜가 있는 신하가 지혜를 모두 짜내고, 슬기 있는 신하가 재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위의 고사가 케케묵은 이야기로 들린다면, 좀 더 현대적인 예도 있다. 어떤 조직이든 성공하려면 필요한 ‘10번째 사람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조직 내 의사 결정 과정에서 9명이 모두 A를 선택할 때, B를 선택할 나머지 한 명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조직 내 편향 현상을 제거하기 위해 고도로 훈련된 이들을 ‘레드팀’이라고 한다. 이들은 같은 조직 안에서 모의 적군 입장에서 현 조직의 취약성을 먼저 파악하고 문제점을 살펴보는 사명을 지닌다. 보안 회사는 월급 받고 해킹만 하는 최정예 해커들을 두고 있다. 이들은 외부 해커 역할을 맡아 진짜 해킹을 예방하고 보안을 강화한다. ‘레드팀’을 우리말로 풀어 번역하자면 ‘올바른 쓴소리를 해줄 사람들’쯤 될 것이다.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높은 사람에게 직언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진짜 민감하고 두려운 이야기를 해줄 사람은 아주 가까운 가족 외에는 없다. 권력자 입장에서 믿을 사람이 가족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개 자녀나 부인이 그런 야당 노릇을 해야 하는데, 윤석열 대통령에게는 자녀가 없고, 야당 역할을 해야 할 부인은 야당의 먹잇감이 되어있으니 난감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투표함 뚜껑을 열어보고 화들짝 놀랐지만 사실은 정해진 패배였던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 이어 예상 밖의 저조한 성적표로 국민을 실망시킨 이번 부산 엑스포 유치전까지, 유사한 실패가 반복되는 걸 보면 지금 정부에 ‘레드팀’이 없음이 확실해 보인다. 만약에 있었다면 적어도 엑스포 유치 실패에 대비해서 “힘든 승부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부산 시민의 성원에 보답하겠다” 정도로 정직하게 메시지를 관리하고, 그에 따른 자원의 효율적 분배로 낭비와 허식을 줄였을 것이다. 그랬다면 저조한 성적표에도 국민의 실망감은 덜했을 것이다.

 

‘레드팀’이 없다는 심증을 더욱 확실하게 하는 건 ‘우려’에서 ‘리스크’로 확대된 김건희 여사 관련 이슈다. 당선 전 조용한 내조하겠다고 약속했으면 그 약속을 일단 지켜야 한다. 그래야 대통령의 약속도 국민이 믿을 수 있다. 그런 이야기를 주변에서 해주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정파를 넘어서 사람들은 김 여사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그게 진짜 여론이다. 내부의 야당이 그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면, 결국 진짜 야당에서 들어야 한다. 그때는 이미 늦은 경우가 적지 않다.

 

‘대통령의 열 번째 사람’은 일렬로 줄지어 따라가다 함께 망하는 것을 막아주는 장치다. 지금까지 크고 작은,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았던, 여러 실수와 실패를 진단하고, 어디서부터 어떤 정보가 어떻게 꼬였는지 점검해야 한다. 분석을 바탕으로 실패 백서를 만들고, 유사한 실패의 반복을 막을 ‘레드팀’을 가동해야 한다. 무엇보다 윤석열 정부는 그렇게 만든 백서를 아직 활용할 시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조선일보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한국미래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