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토크 2023/
07.01 깊이에서 오는 충만감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Midjourney
“조금만 덜 먹을 걸!” 이라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이 있다. 폭식 끝에 남는 건 소화제인데도 멈추지 못한다. 배가 부르다는 느낌은 후행적이다. 충분하다는 느낌을 넘어 만족하는 순간 속이 더부룩하고 가스가 찬다. 폭식, 폭음, 과로 역시 충분함에 대한 각자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서 발생한다. 생존과 적응을 위해 ‘불안’을 느끼는 능력이 진화된 것에 비해, 만족감은 ‘안정’의 영역이기 때문에 애써 기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충분함에 대한 감각을 깨우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가 여전히 사랑니처럼 불필요한 기관을 달고 사는 건 진화의 느린 속도 때문이다. 먹을 수 있을 때 양껏 먹어야 굶어 죽지 않는다는 원시인의 뇌가 아직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다가 맹수에게 물어뜯길까 봐 경계하는 건 원시 시대에 어울린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불안을 벗어나, 반대편에 있는 충분함을 알아차리는 기술이다.
충분함에 대한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선 나를 타인과의 비교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알아야 할 건 비교의 특징이다. 우리는 주로 직업이나 나이, 삶의 방식이 비슷한 사람을 시기한다. 작가는 작가를, 정치인은 정치인을 시기한다. 걸인 또한 부자보다는 자신보다 형편이 조금 나은 걸인을 시기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주기적으로 비교 지옥의 대명사인 디지털 디톡스가 필요하다.
불만족을 유발하도록 설계된 알고리즘에서 벗어나 책을 읽는 것도 도움이 된다. 독서가 끝나면 우리는 책을 덮는다. 완벽히 문이 닫힌 것이다. 여러 개의 창을 열어둔 채 끊임없이 새 창을 여는 인터넷과 책의 물성은 다르다. 종일 검색해도 새로운 최저가, 초특가 티켓이 나오는 ‘검색’과 달리, 한 권의 책을 읽었을 때 밀려오는 만족감은 닫힌 세계가 약속하는 ‘사색’의 만족감이다. 여러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더 큰 충분함은 한 권의 책을 여러 번 읽는 것이다. 무엇이든 쏟아지는 시대의 처방은 닫는 것이며, 그 답은 넓이가 아닌 깊이에 있다.
조선일보 백영옥 소설가
07.04 “잔소리와 충고가 어떻게 다르지요?”

‘타이르는 말을 기꺼이 듣는 사람은 지식을 사랑하는 자이나, 책망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이다.’ 고대 지혜문학 중 하나인 ‘솔로몬의 잠언’ 중 한 구절(12:1)이다. 영문을 찾아보니 타이르는 말(라틴어 disciplina)은 규율(discipline)이나 훈육(instruction)으로, 책망(라틴어 Increpatio)은 질책(reproof) 또는 교정(correction)으로 씌어 있다. 우리말과 영문 번역본을 여럿 비교한 끝에 ‘타이르는 말을 귀담아듣고 그것이 옳다면 싫더라도 따르라’라는 뜻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한고조(漢高祖) 유방에게 장량이 공자의 말씀을 빌려 이렇게 말했던 것처럼.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행실에 이롭고(忠言逆耳利於行), 독한 약은 입에 쓰나 병에 이롭습니다(毒藥苦口利於病).”
충고와 ‘꼰대’가 동의어 된 세상
어른들에 대한 젊은이의 반감
영화 ‘오토라는 남자’의 긴 여운
친근함과 배려로 마음 얻어야
꽤 오래전 어떤 TV 프로그램에서 사회자가 길 가던 여고생에게 던진 질문과 대답. “잔소리와 충고가 어떻게 다르지요?” “잔소리는 듣기 싫은 말이고, 충고는 기분 나쁜 말이에요.” 몇 해 전 같은 질문에 두 초등학생은 이렇게 답했다. “잔소리는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쁜데, 충고는 더 기분 나빠요.” 뒤이어 이런 자막이 등장했다.
‘노터치, 난 나야, 넌 너고….’
으레 ‘기분 나쁘게 듣지 말고…, 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니까’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만 보아도 듣는 이 입장에서 타이름은 잔소리이고 충고는 참견이고 조언은 오지랖이다. 좋은 얘기도, 재미있는 얘기도, 무엇보다도 별 도움 되는 얘기도 아니면서 내 의지에 반하는 그 무엇을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듣고 기분 좋을 리 없다. 가치관을 달리하는 사람의 시선은 불편하고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조언은 거북하고 우월한 지위나 우월감에 근거한 충고는 자존감에 생채기를 낸다. 무엇보다도, 결정에 대한 궁극적 책임의 주체는 ‘나’이니 제발 그냥 내버려 두라는 게 듣는 이의 솔직한 심정이다.
잔소리와 충고를 기분 나쁘다고 했던 그 초등학생들이 사춘기 소녀가 되어 다시 등장했다. “젊은 세대와 잘 소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 질문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당찬 대답이 돌아온다. “그냥 세대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빠르지 않을까요?” 덧붙여 “어른이 되면 꼰대가 된다”라며 일침을 가한다. 그야말로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니 모든 간섭을 거부한다는 선전포고다.
경험이 곧 삶의 지혜였던 시절, 세태의 변화가 한가한 소걸음처럼 느릿느릿하던 시절, 어른의 말씀이 농사의 성패를 좌우하고 마을이나 집안의 뜻을 한데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하던 시절과 달리, 오늘의 어른은 온갖 자동화기기 앞에서 절절매고 말 한마디 하기에 앞서 그것이 ‘라떼’(나 때)나 ‘꼰대’ 소리 들을 이야기는 아닌지 눈치를 살핀다. 이렇게 급변하는 세상이 경험과 연륜에 의한 지식과 생각을 경직된 가치관과 아집으로 격하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니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린다.
‘아! 세월이여, 아! 세태여’(O, tempora! O, mores!) 라는 키케로(BC 106~BC 43)의 탄식은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늘 있었던 말이지만, 이 세상은 늘 더 나은 곳으로 변해 왔으니 그 말은 언제나 구세대의 푸념이었을 뿐이라며 외면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은 어른으로서, 아니 이 사회 구성원으로 해야 할 도리가 아니다. 보기에 불편한 것은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고, 염려하는 것은 세상사의 흐름을 미처 좇지 못하기 때문이고, 언짢은 것은 내 뜻과 저들의 뜻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그들과 함께해야 마땅하다.
성공한 30대 여성 사업가 줄스와 퇴직 후 회사를 다시 찾은 70대 시니어 인턴 벤의 이야기 ‘인턴’(2015). 모든 사람이 무시하고 아무런 일도 주지 않으니 벤 스스로 일거리를 찾아 나선다. 친근함과 배려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얻고 경험과 연륜으로 그들의 온갖 고민과 어려움을 해결하며 어느새 그들에게 꼭 있어야 할 사람으로 자리매김한다.
『오베라는 남자』(프레드릭 배크만)를 원작으로 한 영화 ‘오토라는 남자’(2022)의 오토는 퇴직 후 아내를 따라 세상을 뜨려 하지만, 본의 아니게 이웃을 돕느라 번번이 기회(?) 를 놓친다. 운전이 서툰 이를 대신해 주차하느라고, 이웃의 난방시설을 수리하느라고, 이웃의 아이를 대신 보고 얼어 죽을 위험에 처한 길고양이를 돌보느라고,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지려다 말고 철로에 추락한 사람을 구하느라고…. 이렇게 급한 일(?) 부터 처리하느라 죽음을 하루하루 미루다가 어느새 그는 가장 소중한 이웃이 되어버렸다. “이게 사는 거지….”라는 그의 독백이 귓가에 맴돈다. 그리고 “심장이 너무 크다”라는 의사의 말이 그의 사인(死因)이 아니라 그의 따뜻하고 어른스러운 행실에 대한 은유로 들린다.
중앙일보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07.06 “갑자기 제 아내와 아이가 죽었다고요?”
뇌출혈로 응급실 실려온 30대 여성, 배 속에는 알고보니 임신 19주 태아
아이 심박동 먼저 멈추고 엄마도… 남편은 꼼짝 않고 대기실서 며칠째
어떤 상실은 他人이 이해 못해… 당신은 무엇인가 잃어본 적 있습니까

▲일러스트=이철원
의식이 없는 삼십 대 여성이 응급실로 왔다. 호흡이 가빠서 간신히 숨을 들이켰다 내뱉고 있었다. 구급 대원은 환자가 19주의 임신부라고 했다. 새벽에 자고 있던 남편이 기척이 이상해서 가보니 화장실에 아내가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 두 동공은 커다랗고 비대칭이었으며 불빛에 반응이 없었다. 전형적 뇌출혈이었다. CT상에서는 모든 뇌를 짓누를 정도의 커다란 뇌출혈이 발견되었다. 집중 치료실로 돌아오자 환자의 숨이 멎었다. 출혈량이 너무 많아 뇌 기능이 유지될 수 없었다. 심폐 소생술을 시행한 끝에 환자의 맥박이 돌아왔다. 하지만 호흡도, 다른 어떤 생체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뇌사가 예견되는 상황이었다. 뇌출혈이 너무 커다랗게 뇌를 잠식하고 있었다.
대기실에는 환자를 발견한 남편이 앉아 있었다. 나는 상황을 설명했다. “갑자기 뇌출혈이 발생했습니다. 뇌 손상이 심해 심정지가 왔습니다. 간신히 심장이 돌아왔지만 회복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태아를 분만하기에도 너무 적은 주수이고 이미 모체 심정지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중환자실에서 지켜보는 것이 최선일 것 같습니다.” 남편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짧게 물었다. “갑자기 제 아내와 아이가 죽었다고요?” “아직은 돌아가시지 않았지만 너무, 뇌출혈이 큽니다.” “... 네. 알겠습니다.” 그는 마치 이런 소식에 적절한 반응이 어떤 것인지 아직 찾지 못한 것 같았다. 신경외과 의사는 즉시 응급실로 내려와 CT를 열어놓고 절망적 사실을 나열했다. “수술은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태아도 거의 가망이 없을 겁니다.” 일방적으로 듣고 있는 남편의 어깨가 굽어 보였다. 환자는 곧 중환자실로 올라갔다.
한 사람도 아닌 두 사람의 망실(亡失)로 응급실 새벽을 보냈다. 마침 담당 환자가 있어 아침 회진 때 중환자실에 갔다. 환자의 남편이 우두커니 대기실 구석에 앉아있었다. 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남편은 같은 자리에 앉거나 누워 있었다. 새벽에 아내를 발견한 옷차림과 급하게 꿰어 신은 슬리퍼가 그대로였다. 다만 조금씩 수염이 자라고 조금씩 더 수척해졌다. 잠시 집에 다녀올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았다. 벽 너머에 자신의 모든 것이 있으므로 굳이 다른 곳에 갈 필요가 없는 것 같았다. 응급실에서 한 짧은 대화가 겹쳐 괜히 그를 볼 때마다 몸이 움츠러들었다.
매일 출근하자마자 환자 상태부터 확인했다. 태아를 확인한 산부인과는 아이의 심박동이 없어 사망했다고 선언했다. 환자에게선 뇌사를 의미하는 뇌파가 확인되었다. 아직도 남편은 하루 두 차례 면회를 제외하고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곧 병원에 소문이 돌았다. 부부는 바로 전주에 태아의 성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딸이었다고 했다. 누군가는 그가 무엇인가를 먹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가끔 그가 숨 쉬는 일도 잊는 것 같아 보인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가 나오면 모두가 말을 아꼈다. “선생님. 그분 아직도 거기 계신대요.” “벌써 며칠째인지요. 건강 상하시면 안 될 텐데.” 내가 맡은 중환자실 환자 옆에 그의 아내가 있었다. 아내는 점점 더 사망에 가까워져 갔고 남편은 벽 너머를 지키고 있었다. 모든 존재를 벽 안에 두고 온 사람처럼.
나는 매일 그에게 어떤 말도 건네지 않고 지나쳤다. 그리고 세상이 갑자기 온통 어두워지는 상상을 했다. 무엇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상실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유무형 재산일 수 있고 가족의 생명일 수도 있고 본인의 신체 일부나 목숨 그 자체일 수도 있다. ‘모든 것’을 잃었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어둠을 상상하며 적어도 나는 무엇인가를 잃어본 적이 없다는 것과, 어떤 종류의 상실은 영영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바깥 영역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인간을 허물어버리는 절망적 상실은 엄연히 존재한다. 끔찍하게 슬프고 두려운 일이 존재한다고 언급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에는 있다.
조선일보 남궁인 이대 목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
07-07 세상이 아름다운 이유

이호섭 작곡가, 방송인·문학박사
아파트에서 마주친 꼬마 아가씨
두 손 가지런히 모으며 배꼽인사
초등학교 시절 배곯던 제자 보고
부러 혼낸 뒤 도시락 주던 선생님
서울 밤하늘엔 여전히 별이 총총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다
어느 날 저녁,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머리에 노란 나비 리본을 예쁘게 꽂은 처음 보는 꼬마 아가씨랑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잡고 있던 엄마의 손을 풀고 두 손을 가슴에 가지런히 모으며 배꼽 인사를 하는 그 품이 정말 사랑스럽고 예스러웠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하고 빙그레 웃으며 다정히 인사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을 뻔하다가 ‘헉’ 하고 얼른 손을 거둬들였다. 내 맘과 달리 그의 엄마가 언짢아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2017년 3월 26일에 방영된 ‘KBS 전국노래자랑 서산시 편’에서 초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가 심연옥의 ‘아내의 노래’를 멋지게 불렀다. 그러자 진행자 송해 선생이 놀라워하며 “남자가 맞나 어디 고추 한번 만져 보자” 하며 그의 아래쪽을 만지는 시늉을 했다. 이것이 문제가 돼 국민 MC 송 선생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품위유지 위반’ 권고처분을 받아 한동안 논란이 된 일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어린이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말이나 행동에는 그 나라와 민족만의 고유한 관습이 있게 마련이다. 송 선생의 ‘고추 한번 만져 보자’라는 표현도 우리 민족의 언어 관습에서 유래한다. 주로 남자아이에게만 쓰는 이 말 속에는 ‘남자로 대를 잇는다’는 남성 본위의 전통적 사회구조와 의식이 깔려 있다. 오늘날과 달리, 성희롱의 의미가 아니라 ‘예쁘다’는 뜻과 ‘남아 선호’에 대한 의식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아기가 예쁘면 이웃 사람들이 “아유, 참 밉상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 아기 엄마는 그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이며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곤 했다. 홍역·디프테리아·파상풍·백일해 등의 백신이 없던 그 시절, 이들 질병으로 백일도 채 못 넘기고 아이를 잃는 일이 더러 있었다. 사람의 명(命)을 저승사자가 관장한다고 여기던 시절이라 “아유 정말 예쁜 아기다” 하고 칭찬하면 이 소리를 들은 저승사자가 나타나 아이를 냉큼 잡아간다고 여겼다. 그래서 예쁠수록 반어법으로 ‘밉상이다’라고 해서 저승사자를 따돌리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관습이나 문화는 시대에 따라 그 모습과 가치를 달리한다. ‘고추 한 번 따먹자’라는 말은 이제는 성희롱의 한 범주에 해당할 수 있고, ‘참 밉상이다’라는 말은 모욕죄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께서 사기를 당해 길바닥에 쫓겨나 있던 때의 일이다. 당시는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뒤에 담임선생님의 가정방문이 있었다. 그날 나는 다 쓰러져 가는 우리 집으로 오실 선생님께 무엇 하나 대접할 게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드디어 선생님께서 도착하셨고, 너무나 곤궁한 우리 집 형편을 보신 선생님께서 대뜸 “호섭아, 목이 마르다 물 한 잔만 다오” 하셨다. 끓인 보리차도 있을 리 만무한 우리 처지에 “선생님예, 이것밖엔……” 하며 수돗물을 한 대접 받아 드렸다. 벌컥벌컥 그 큰 대접의 물을 바닥까지 드신 선생님께서는 “앗따, 느거 집 물은 정말 맛있다, 한 그릇 더 다오” 하셨다.
그 선생님께서 점심시간 전 수업 때면 나를 교단으로 불러내 발바닥을 때리며, “이호섭! 고개 바로 세워라. 고개가 삐뚤면 네가 보는 모든 세상이 다 삐뚤어진다”라고 호통치셨다. 억울했다. ‘항상 고개를 똑바로 세우고 있는데 왜 저러시지?’ 고개를 정중앙으로 세우고 두 눈으로 세상을 올바르게 보는 법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의 그 큰 사랑을 내가 깨달은 것은 나중의 일이다.
점심시간 직전, 선생님께선 꾸중만 하시는 게 아니라 “출석부 가지고 교무실로 와”라고 매정하게 말씀하셨다. 무서움에 달달달 떨리는 가슴으로 교무실로 갔다. 난롯가에 앉아 계시던 선생님은 “앉거라. 이거 먹어라” 하시며 양은 도시락을 건네셨다. 놀라서 “예?” 하며 멍하니 서 있으면 “한창 클 때는 많이 먹어야 하능기라” 하시면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건네주셨다.
그랬었구나! 가정방문 때 가난한 나의 처지를 보셨던 선생님!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해 점심시간이면 늘 학교 뒤편 수돗가에서 물배를 채우던 제자가 자존심이라도 상할까 하여, 다른 학우들이 모르게 일부러 호통쳐서 출석부를 핑계로 교무실로 부르신 것이었구나! 그리고 말없이 제자를 끌어안아 주시던 그 사랑을 나의 전신에 파종하셔서, 이제는 가수 제자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된 나로 하여금 그 사랑을 가요계에 퍼뜨리게 하신 것이었구나! 정녕 존경스러운 선생님, 이시창 선생님! 이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사랑이 있었기에, 많은 가수를 가르치면서 제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을 거저 얻었다.
이렇듯 가정과 학교교육은 그 사람의 인성뿐 아니라 미래를 결정하게 한다. 아이를 보면 그 부모를 알 수 있듯이. 처음 보는 내게 그렇게 예스럽게 인사를 건네던 꼬마 아가씨의 예절로 보건대, 그 부모님의 인품도 불문가지다.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얼른 손을 거둬들이던 내게 “괜찮아요, 우리 아이는요”라며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그제야 세상에서 가장 큰 행운을 얻은 양 꼬마 아가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유, 예뻐라! 이 담에 크면 둥근 해처럼 온 세상을 다 비추는 사람 되세요”라고 축원해 주었다, 배춧잎 용돈과 함께.
이 순간에도 사회는 학교폭력과 묻지마살인, 수능 킬러문항으로 시끌시끌하다. 하지만 이런 꼬마 아가씨가 있고 이런 부모님이 계셔서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로구나! 그리고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오! 별이 총총…. 서울 밤하늘에도 별이 살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오늘 이 꼬마 아가씨로 인해.
문화일보
07.12 조선 불교는 왜 여성 신도를 ‘보살님’이라고 불렀을까

▲성파 스님은 “무엇이든 근본을 깊이 따져보면 이치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남들 50년 시간을 줄여서 쓰는 것”이라고 말한다. /샘터
대한불교조계종의 최고 어른인 종정(宗正) 성파(性坡) 스님은 관심 분야의 폭이 참 넓은 분입니다. 특히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를 되살리는 데 앞장서고 계시지요. 쪽[藍]을 비롯한 천연 염색과 한지, 도자기, 옻칠, 민화(民畵)뿐 아니라 차(茶)와 야생화까지 직접 연구, 복원, 보급하고 계시지요. 스님들 사이에서도 “뵐 때마다 항상 일하고 계시는 분”으로 통합니다.
저는 작년과 올해 틈날 때마다 경남 양산 통도사 서운암으로 스님을 찾아뵙고 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내용을 모아 얼마 전 ‘일하며 공부하며, 공부하며 일하며’란 제목의 책으로 정리했습니다. 스님께서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수행자의 직관력으로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차원의 말씀을 많이 들려주었습니다. 그 말씀 가운데 분량의 문제 등으로 책에 담지 못한 이야기도 많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조선시대 불교의 여성 우대’ 이야기를 소개할까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보살님’이란 호칭 이야기입니다.
성파 스님은 "전 세계 여러 나라에 불교가 있지만, 여신도를 ‘보살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선 불교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찰에 가보시면 여성 신도를 ‘ 보살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더러 보셨을 겁니다. 식사를 준비해주는 분들도 ‘공양주 보살님’이라고 부르지요. 그런데 불교에서 ‘보살’은 무척 중요한 존재입니다.
사전에서는 ‘보살’을 ‘부처가 전생에서 수행하던 시절, 수기를 받은 이후의 몸’ ‘위로 보리(진리)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제도하는, 대승불교의 이상적 수행자상’ 등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관세음보살’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또 ‘문수보살’ ‘보현보살’도 들어보셨을 겁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여성 신도를 이런 보살로 대우하고 있는 셈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부대중(四部大衆)’이란 말이 있습니다. 남녀 출가·재가자를 통칭하는 단어입니다. 구체적으로 나누면 비구(남성 출가자), 비구니(여성 출가자), 우바새(남성 재가자), 우바이(여성 재가자)를 가리키지요. 정식 분류는 이렇지만 실생활에서는 일반적으로 남성 신도는 ‘처사님’ ‘거사님’이라고 부릅니다. ‘처사(處士)’의 사전적 설명은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던 선비’이고 ‘거사(居士)’ 역시 ‘숨어 살며 벼슬을 하지 않던 선비’입니다. ‘처사’ ‘거사’에 비해 ‘보살’은 불교에서는 차원이 다른 호칭인 것이지요.
성파 스님은 한국 불교가 여성 신도를 ‘보살님’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을 조선시대부터로 봅니다.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여성을 우군(友軍)으로 삼기 위한 방편의 하나가 ‘보살님’ 호칭이라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조선왕조를 개국(開國)과 함께 통치 이념으로 불교를 억눌렀습니다. 스님은 “조선의 억불숭유 정책은 중국 역사에서 불교를 탄압한 것으로 유명한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法難)’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의 멸불(滅佛) 정책”이라고 말합니다. 중국의 법난은 특정 황제 때 길어도 수십년간 벌어진 탄압이었지만, 조선의 억불숭유 정책은 500년 내내 이어졌기 때문이지요. 조선시대에 승려는 졸지에 천민으로 추락했고 한양 도성 출입도 금지됐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정권이 바뀌면 관료와 지식인 사회의 지형이 바뀌곤 하지요. 하물며 왕조시대에 새 왕조가 건국이념으로 특정 종교를 배척하고 억압한다면 지식인과 관직에 나가려는 이들은 당연히 그 종교를 멀리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므로 조선시대 불교는 사대부 남성은 사실상 포기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숨이 끊어질 지경에서 불교가 눈을 돌린 것이 여성이었다는 것이 성파 스님의 가설입니다. 게다가 고려시대에 여성의 활동이 활발했던 것에 비해 유교를 바탕으로 건국한 조선은 남존여비(男尊女卑) 사회였습니다. 불교와 여성은 조선 사회에서 억압받는 존재로서 동병상련(同病相憐)도 느꼈을 겁니다. 이런 배경에서 불교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여성에겐 ‘보살님’이란 호칭으로 우대했을 것이라고 성파 스님은 짐작했습니다.
가정과 사회에서 대접받지 못하던 여성들이 사찰에서 ‘보살님’으로 우대 받으면 기분이 어땠을까요. 게다가 사찰에선 철에 따라 다양한 행사가 많습니다. 가족의 안녕을 위해 기도를 드리러 사찰을 찾는 여성들을 굳이 집안에서도 막지는 않았겠지요. “교통도 불편하던 시절, 여성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사찰을 오가는 길에 때로는 남편과 시어머니 험담도 하면서 스트레스도 풀고, 사찰에 가서는 ‘보살님’ 호칭을 들으니 얼마나 좋았겠노”라는 게 성파 스님의 해석입니다.
이렇게 “멸불의 시대 500년 동안 불교가 버틸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은 여성 우대”라는 것이 성파 스님의 주장입니다. 요즘도 통도사 서운암에는 옻칠 민화와 차문화 등에 대한 강좌가 계속되는데, 많은 여성이 수강하고 있습니다. 성파 스님은 지금도 ‘여성 우대’를 실천하는 셈이지요. 물론 스님도 여성 수강생들을 “보살님”이라고 부릅니다.
조선일보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07.25 아이작 뉴턴은 위조화폐 범죄 수사도 전문가였다

▲일러스트=이철원
1600년대 말 윌리엄 3세 시대 영국은 위조화폐로 골머리를 앓았다. 위폐범은 물론 참여한 직공들도 손목을 잘랐지만, 돈을 만들어 돈을 벌려는 사람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유통되는 동전의 20%가 가짜인 지경이 됐다. 영국은행 창립 멤버 찰스 몬터규는 부패한 왕립 조폐국을 바꿔야 한다며 케임브리지대 교수를 감사관으로 추천했다. 이 감사관은 집요하게 위폐범을 추적했고, 수십 명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다. 1699년 조폐국장까지 올라 25년간 화폐 개혁을 이끈 이 인물이 바로 아이작 뉴턴, 만물의 법칙을 수식으로 표현해 낸 천재였다.
뉴턴은 합리적 추론과 함정 수사, 스파이를 동원한 심리전으로 위폐 조직을 와해시켰고 조폐국 인력과 기계 수요를 계산해 재배치했다. 불량 화폐 문제도 해결했다. 금·은으로 만든 동전의 가장자리를 깎는 ‘클리핑’은 기원전 6세기 리디아 지역에서 시작돼 뉴턴 시대까지 이어졌다. 동전은 동전대로 사용하고, 깎아낸 금·은은 팔거나 동전 위조에 활용하는 식이었다. ‘악화가 양화를 사라지게 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이 바로 불량 동전이 계속 늘어나는 현상에서 비롯됐다. 뉴턴은 동전 가장자리를 톱니 모양으로 만들었고, 톱니가 사라진 화폐는 유통되지 않게 됐다. 2000년 넘은 난제(難題)에 대한 뉴턴의 답은 오늘날 동전에도 남아 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100달러 지폐의 얼굴 벤저민 프랭클린도 화폐 전문가였다. 미국 노트르담대 연구진은 지난 17일 국제 학술지 미 국립과학원회보에 “프랭클린이 만든 지폐를 현미경과 레이저로 분석한 결과 시대를 앞선 인쇄와 제지, 잉크 기술을 발견했으며 위조지폐 판독에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열두 살 때부터 인쇄소에서 일한 프랭클린은 스물네 살에 인쇄소를 차렸고 펜실베이니아 식민지 정부와 4만파운드를 찍는 계약을 하면서 조폐 사업에 진출했다. 연구팀은 대학 도서관의 18세기 미국 지폐 600장을 살펴 프랭클린 지폐에서 세 가지 특별한 점을 발견했다. 우선 프랭클린은 지폐의 종이에 필라델피아 지역 광물 백운모와 파란 실을 넣었다. 연구팀은 이 반짝이는 광물이 종이 지폐의 내구성을 높이는 동시에 위폐 판독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했다.
프랭클린은 또 허브의 일종인 세이지 잎을 동판으로 만들어 지폐에 인쇄했다. 혈관처럼 복잡하게 얽힌 세이지 잎 무늬는 같은 잎이 하나뿐이어서 모방이 어려웠다. 무작위 패턴으로 진품에 고유성을 부여하는 현대 기술을 이미 활용한 것이다. 잉크도 특이했다. 당시 지폐에는 기름이나 뼈를 태울 때 나오는 인과 칼슘 비율이 높은 검댕을 활용했는데 프랭클린 지폐의 잉크는 흑연이었다. 연구팀은 “역사가들은 미국에서 흑연이 인쇄에 사용된 것을 훨씬 뒤의 일로 여겼다”고 했다.
그 후로 수백 년간 희토류, 홀로그램 같은 첨단 기술이 화폐에 적용될 때마다 곧이어 모방하는 기술이 탄생했다. 2010년 이후 영국·호주 등 각국 정부는 종이 지폐 대신 위조 방지 기술을 담기 간편한 고분자(폴리머) 지폐를 도입하고 있지만 위조범들은 이마저 뛰어넘고 있다. 뉴턴의 후예들은 위폐를 뿌리 뽑을 방법을 찾고 있다.
영국 워릭대와 더럼대 공동 연구팀은 모든 폴리머 지폐가 고유 패턴을 갖고 있다고 국제전기전자공학회 학술지에 발표했다. 지폐에 불투명 코팅을 하는 과정에서 잉크가 고르게 펴지지 않기 때문에 일종의 각기 다른 지문이 생긴다는 것이다. 추출된 지폐 지문 정확도는 홍채 인식보다 4배 이상 높은데, 영국에서 유통되는 지폐 40억장의 지문을 저장하는 데 필요한 용량은 1테라바이트에 불과했다. 구상이 실현되면 언젠가 스마트폰 카메라만으로 위폐를 즉석에서 판독할 수도 있다.
위폐 방지 기술의 역사는 지키는 기술과 훔치는 기술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모순을 보여준다. 위폐가 없으면 위폐 방지 기술이 없고, 해커가 있어야 보안 기술이 발전한다. 돈이라는 원초적 욕망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케 한다. 뉴턴이 명예로운 교수 자리를 버리고 조폐국으로 간 것은 돈 때문이었다. 당시 조폐국 감사관 연봉은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네 배였다. 그런 뉴턴도 말년에 주식 버블 사건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복잡한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지만, 인간의 광기는 알 길이 없다.”
조선일보 박건형 기자
07.28 마음 비우기
채운 자만이 비울 수 있다
비움은 진정한 채움이다
일찍이 노자는 “있음은 이로움을 위한 것이지만, 없음은 쓸모가 생겨나게 하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평소 머릿속이 복잡한 사람치고 신선한 아이디어를 내놓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텅 비어있는 상태는 삶의 포맷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불가에선 3독(毒), 즉 탐욕·분노·어리석음(貪瞋癡)을 버리고 자신을 비우는 것을 ‘방하착(放下着)’이라고 한다. 법정 스님이 언급한 ‘텅빈 충만’의 신묘한 경지가 이것이다.
작금의 혼탁한 세상에선 특히 일상에서의 공(空)의 체험이 중요하다. 새 또한 높이 날기 위해 뼛속까지도 비워야 하는데 이 상태가 ‘골공(骨空)’이다. 과연 비움은 채움을 위함이요, 채움은 나눔을 위한 것이리라. 본격적인 휴가철이다. 원래 휴가(vacation)란 한마디로 ‘비우는(vacant) 시간’이다.
조선일보 이동규 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
07.28 “온전할 때 떠나고 싶다” 알츠하이머 남편 마지막 선택 지지한 아내
美 소설가 에이미, 남편과 함께한 회고록… 존엄사 논쟁 불붙이다

▲에이미 블룸(오른쪽)과 남편 브라이언 어미치의 모습. 브라이언은 생전에 ”우리는 죽음에 관해 좀처럼 얘기하지 않지만 죽음 없이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Elena Seibert
2020년 1월 스위스 취리히의 ‘조력 자살(존엄사)’ 기관 디그니타스. 미 소설가 에이미 블룸(70)은 남편 브라이언의 옆에 앉아 그의 숨소리에 귀 기울였다. ‘약물’을 스스로 마신 남편의 숨소리는 고르게 변했고 이내 마지막 숨을 뱉었다. 나중에 아내 에이미는 이렇게 회고한다. “그의 존재를 느끼는 감각을 잊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시선과 손을 그에게서 떼지 못했다. 여전히 잠들 때마다 그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남편 브라이언은 67세에 알츠하이머를 진단받고 6개월 뒤 디그니타스를 찾아 스스로 생을 놓았다. 이 과정을 함께한 아내의 회고록이 작년 미국에서 출간됐다. 책은 작년 타임지(誌)가 선정한 ‘최고의 논픽션 1위’에 올랐다. 최근 국내에 번역된 책의 제목은 ‘사랑을 담아’(원제 ‘In Love’). 미국에서 ‘조력 자살’이 옳은가에 대한 법적·윤리적 논란에 더 불을 붙였다. 남편 브라이언의 부탁으로 쓰여진 책. 자신의 조력 자살 과정을 아내에게 책으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아내 에이미는 남편의 선택을 지지했지만 곳곳에서, 수시로 눈물이 쏟아지는 것까진 어쩌지 못한다. 에이미는 1993년 작품 활동을 시작해 4권의 소설과 5권의 단편소설집 등을 썼다.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남편과 사별 후 3년 6개월이 흐른 지난주 서면으로 만난 에이미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부터 코로나 기간 동안 손녀를 돌보면서 매일 이 책을 썼다”며 “수많은 슬픔의 순간이 있었지만, 남편이 원한 것을 성취할 수 있어 약간의 평화로운 감정도 있었다”고 했다.

▲미 소설가 에이미 블룸. /ⓒElena Seibert
50대에 사랑에 홀딱 빠져 각각 재혼해 결혼 생활을 시작했던 이들 부부의 행복은 10여 년 남짓이었다. 브라이언은 어느 순간부터 일정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고, 집중력과 방향감각을 잃었으며, 아내가 전혀 입지 않는 취향의 옷을 사들고 와 건네기도 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병원에서 ‘조발성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남은 기억력은 40~50% 수준이라고 했다. 회복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래도 아직 또렷하게 의식이 남아있는 남편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했다.
에이미는 남편의 뜻을 받아들였다. “예일대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했고 건축가로 40년 일한 남편의 삶의 원칙 중 하나는 ‘좋든 나쁘든 싸움이 날 것 같으면 첫 주먹은 내가 날려야 한다’였다”며 “치매에 무방비로 당하고 싶지 않다는 게 그의 뜻이었다”고 했다. 디그니타스가 조력 자살을 허가하는 조건은 까다롭다. 불치병에 걸려 견딜 수 없는 신체적·정신적 장애가 있어야 하며, 스스로 온전한 분별력을 가지고 일관된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태여야 한다. 우울증을 진단받은 적이 있으면 안 되며, 여러 차례 전문가와 면담도 통과해야 한다. 브라이언은 우여곡절 끝에 디그니타스의 문턱을 넘어 원하는 바를 이뤘고, 에이미는 집에 돌아와 가족과 지인들을 모아 남편의 추도식을 열었다.
그는 “남편이 알츠하이머라는 불치병을 앓은 것은 깊이 유감스럽지만, 그가 죽는 때와 방식을 선택한 것을 지지했던 것만큼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도 조력 자살을 택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임종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어요. 우리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독자에게 달려있습니다.” 조력 자살이라는 선택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별을 앞두고 드러나는 사랑과 보살핌, 주변인과의 연대 등을 통해 무엇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란 독자들의 평이 많다.
에이미는 “‘왜 나에게…' 같은 원망을 한 적은 없다”고 했다. “이 세상엔 많은 슬픔과 고통이 있고, 슬픔은 우리가 사랑과 삶에 지불하는 대가라고 생각해요.” 책에는 남편이 떠나기 직전 미식축구 선수 시절 이야기를 하는데 ‘도저히 관심 있는 척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 등 익살 맞으면서도 미안함이 가득한 이야기도 담겼다. “남편이 떠난 뒤 제게 남은 것은 우리의 삶과 주위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것, 모든 것에 친절하고,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필요한 것보다 더 너그럽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조선일보 김민정 기자
08.04 92세 총무과장의 조언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Midjourney
돌아가신 할머니는 세 손주가 학교에 가면 더러워진 운동화를 빨아주시곤 했다. ‘아직 더럽지 않으니 괜찮다’고 해도, 학교에 다녀오면 어김없이 마당 한편에서 말끔해진 녀석들이 햇빛 아래서 마르고 있었다. 하루는 집에 돌아오니 한 켤레가 짜글짜글 망가져 있었다. 처음 사 본 ‘스웨이드’ 재질 운동화였다. 할머니는 “그게 ‘세무’인지 모르고 빨았다”며 미안해하셨다. 물론 속상했지만, 이후 할머니의 세탁법에는 한 가지가 추가됐다. 늘 깨끗한 ‘세무 운동화’를 신게 됐음은 물론이다.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여전히 농사를 짓는 집이 많은 고향 마을에 갈 때마다 ‘노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정신없는 도시에 있다가 청년은커녕 중년도 발견하기 어려운 마을을 찾으면 처음에는 후퇴라는 단어만 떠오른다. 관리도 하지 않아 무너져가는 빈집도 여럿이다.
그런데 찬찬히 보면 더디지만 작은 변화가 하나씩은 꼭 있었다. 젊은 축에 속하는 환갑 앞둔 주민이 새로운 농기계 사용법을 배워 오면, 여든 넘은 노인들도 그 기술에 맞춰 함께 일한다. 감자 심는 작업을 몇 배나 쉽게 도와주는 ‘다목적 씨앗 파종기’ 사용법은 유튜브에도 올라와 있다. 내가 몰랐던 방식으로 배우고 나아지고 있었을 뿐, 후퇴는 아니었다.
최근 번역 출간된 ‘오늘도 일이 즐거운 92세 총무과장’이라는 책이 있다. 1930년생으로 25세에 일본 산코산업에 입사해 66년간 경리와 서무 업무를 맡아온 총무과장 다마키 야스코 할머니의 조언을 담은 책이다. 초고령 사회인 일본이 2021년 정년을 70세로 늘렸다지만, 아흔 넘은 총무과장은 이례적이다. 최고령 총무부원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책에선 신입 시절 격무에 일주일 무단 결근하고 잠적했던 사연, 쉰 넘은 나이에 처음으로 컴퓨터를 접했던 기억, 어린 직장 동료에게 ‘5G’ 개념을 설명할 수 있게 공부했던 사연들이 할머니가 머리맡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이어진다.
주판으로 일을 시작했던 야스코 할머니는 1970년대 전자계산기를 배웠고, 컴퓨터를 익혔다. 그는 “컴퓨터라는 하드웨어보다 엑셀 같은 소프트웨어에 익숙해지기 더 힘들었다”고 하지만 장부와 전표를 정리하는 업무에선 젊은 동료들과 비슷하게 엑셀을 다루게 됐다. 주식에는 관심이 없지만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를 정기 구독하고 매일 아침 신문도 빼놓지 않고 읽는다고 한다. 버스와 지하철 출퇴근길에는 전자책으로 책을 읽는다. 합격률이 8% 수준인 국가 공인 자격인 ‘사회보험 노무사’ 시험에는 여러 번 낙방했지만 계속 도전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여전히 공부하고 있다.
최근 한 정치권 인사의 발언으로 ‘노인’이 또 화제였다. 노인 세대를 가리켜 “미래가 짧은 분”이라고 했다가 “저도 곧 60, 노인 반열(班列)”이라고 횡설수설하다가 뒤늦게 사과했다. 미래가 짧다는데, 야스코 할머니는 ‘오늘도 손톱만큼 자라볼까’ 하는 신념으로 100세에는 수필을 쓰겠다는 새 목표를 세웠다. 곧 예순이라 노인이라는 정치인과 ‘손톱만큼’이라도 성장하겠다는 아흔셋 총무과장 할머니 중 미래 세대에 누가 더 훌륭한 조언을 할 수 있을까.
조선일보 이정구 기자
08.08 “자신 없으면 한 걸음 더”
시골 화장실에서 만난 표어… 어떤 공공 게시물보다 명료해
나이를 먹으며 자신 없는 일이 하나씩 늘어가고 있어
멀었던 노화의 길이 어느덧 보이지만… 한 걸음 더 다가서야겠다
▲일러스트=이철원
강원도 홍천 읍내 오일장에 들렀다가 중앙시장 화장실에서 이런 문구를 봤다. ‘자신 없으면 한 걸음 더.’ 근래 본 어떤 공공 게시물보다 직관적이면서 명료한 표어였다. 메시지의 타깃도 인구지리학적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었다. 시골 읍내 화장실은 자신 넘치는 세대의 방자한 방사(放射)보다 자신 없는 사람들의 보잘것없는 배출 빈도가 훨씬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충분한 근접 위치에 서 있었지만 과연 자신 있는지 다시 생각해봤다. 나의 곡선은 언젠가부터 뚜렷한 포물선을 그려왔다. 마무리 단계에서는 하향세가 두드러져 일부러 고각(高角) 발사한 뒤 동해상에 떨어뜨리는 북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의 낙하 궤도와도 비슷했다.
그에 맞춰 언젠가부터 시끄러운 TV 광고 가운데서도 남자는 지구력 어쩌고 하는 소리가 도드라져 들리기 시작했고, 미국 남동해안에서 자라는 야자수를 쏘팔메토라고 부른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나는 조용히 변기 앞으로 일보 전진했다.
어른들께는 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나이를 먹으며 자신 없는 일이 하나씩 늘어가고 있다. 컴퓨터를 많이 들여다보는 직업 때문인지 원시(遠視)가 40대 초에 찾아와 돋보기를 쓴 지 꽤 됐다. 얼마 전엔 마트에서 소면을 샀는데 가격표에 적힌 세일 내역이 너무 깨알 같아 평소보다 싸겠지 하고 그냥 집어 들었다. 계산대에 이르러서야 그게 1+1 세일이었고 두 개를 들고 와야 했다는 걸 알았다. 부엌 환풍기 퓨즈가 끊어져 전파사에 사러 갔을 땐 돋보기로도 퓨즈 규격 글씨가 보이지 않아 사진 찍어 확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력에 자신 없어진 나는 카드 모양 돋보기를 늘 지갑에 넣어 다닌다.
나는 자동차 블랙박스에 찍힌 사고 영상을 보며 혀를 차는 TV 프로그램을 보지 않는다. 그걸 보노라면 세상에 미친 사람이 너무나 많아 운전할 자신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도로에서 직접 마주치는 광인(狂人)들만 해도 괴로운데 그보다 훨씬 다양하고 괴이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화면으로 확인하는 일은 끔찍하다. 나는 1초 빨리 가려고 경적을 울리거나 이른바 칼치기 하는 차를 만났을 때 더 이상 창문을 열어 그 운전석의 낯짝을 확인하지 않는다. 죽고 싶어 오장육부가 뒤틀린 사람들과 엮여 시간과 마음을 축낼 자신이 없다.
미국 작가 노라 에프론은 69세에 펴낸 회고록 ‘내게는 수많은 실패작들이 있다’에서 “육체적인 것이 아니면서 정말 늙었다는 기분이 들 때”를 몇 가지 꼽았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말할 때, “내가 젊었을 때는”이라는 표현을 자주 쓸 때, 농담을 바로 이해하지 못할 때, 영화나 연극을 두 번째로 보러 갔는데 생전 처음 보는 것 같을 때라고 했다. 그는 “이런 일들은 나를 슬프고 애석하게 하며 최악의 노화에 다가서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고 했다.
나는 에프론에게 크게 공감한다. 젊은 후배들과 만나면 나도 모르게 “우리 때는 말이야” 하고 말을 꺼내고는 아차, 하곤 한다. 나의 선배들은 원고지에 기사 쓰고 활자로 신문 만들던 시절을 즐겨 말했지만 나는 컴퓨터가 인터넷에 연결돼 있지 않던 시절을 후배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렇게 못난 일인지 나는 모르겠다. 다만 굳이 구닥다리 소리 듣는 모험을 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나이 차가 적은 선후배들, 속칭 ‘같이 늙어가는 처지’끼리 어울리게 된다. 이들과 만나는 자리는 ‘나 때는 타령’의 범벅이며 그 끝은 늘 “요즘 같으면 어림없지” 같은 끌탕으로 수렴한다. 예전에 한 이야기 또 하는 건 이런 모임의 전형적 특징이다. 그 얘기를 이미 했다는 사실을 잊은 건지, 다시 들어도 재미있어서 또 하는 건지, 최근에는 재미있는 일이 없었던 건지는 불분명하다. 이야기가 재탕될 때마다 조금씩 그 내용이나 일부 고유명사가 달라질 때는 약간 우울한 생각도 든다. 도중에 “아, 그거 뭐더라?” 하는 추임새 없이 이야기가 완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는 노인으로 불리기엔 아직 멀었지만 내가 달리는 레인이 노화와 죽음의 먼 주로(走路)로 이어져 있음을 문득문득 느낀다. 까마득히 멀어서 보이지도 않던 그 길이 어느덧 지평선의 점처럼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몇 년이나 흙 속에서 살았던 매미가 한 달 삶의 최후를 앞두고 맹렬히 운다. 교미할 암컷을 찾아내야만 굼벵이 세월에 후회가 없을 테니 귀청 찢는 세레나데가 구슬프다. 매미가 다 죽으면 여름이 끝나고 더위가 꺾이면 또 한 해가 포물선을 그리며 저물 것이다. 한 걸음 더 다가서야겠다.
조선일보 한현우 문화전문기자
08.12 “엄마는 양공주였지만 부끄럽지 않아… 나한테는 영웅이니까”
‘전쟁 같은 맛’으로 전미도서상 후보
한국계 미국인 사회학자 그레이스 조
▲사회학자 그레이스 조는 6·25전쟁, 가족 상실, 미군 기지촌, 혼혈아 출산, 미국 이민 등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겪은 어머니 군자(1941~2008)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만난 그녀는 “엄마는 숱한 고통을 겪었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갔다”며 “내게는 영웅이었다”고 했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기자
엄마는 양공주였다. 부산 어느 기지촌에서 청춘을 보냈다. 이름은 군자(1941~2008). 사회학자인 딸 그레이스 조(Grace M Cho)는 엄마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6·25전쟁, 가족 상실, 굶주림, 미군 기지촌, 혼혈아 출산, 미국 이민, 사회적 죽음 등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몸과 정신에 진열해 놓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레이스 조는 미국 브라운대를 졸업한 뒤 하버드대에서 교육학 석사를 받았고 현재는 뉴욕시립대 사회학·인류학 교수다. 엄마의 생애를 복기한 회고록 ‘전쟁 같은 맛(Tastes Like War)’은 2021년 전미도서상 논픽션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고 시사주간지 ‘타임’은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다. 2022년에는 아시아·태평양 미국인 도서상을 받았다.
최근 국내에 번역된 ‘전쟁 같은 맛’은 들추기 겁나는 세계로 독자를 잡아끈다. 책장이 바삐 넘어간다. 군자는 전쟁으로 오빠와 아버지 등 가족의 절반을 잃고 기지촌 클럽에서 일하다 상선 선원이던 백인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1971년 혼혈아 그레이스를 낳고 추방되다시피 미국 워싱턴주의 시골로 이민을 갔지만 인종차별이 심한 그곳도 피난처가 되진 못했다. 군자는 조현병을 앓으며 망상과 환청에 시달리다 2008년 생을 마감했다.
지난달 11일 서울 광화문에서 그레이스 조를 만났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사회학자는 첫인상이 견고해 보였다. 두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간 그녀는 “아이구! 답답으라” 등 몇몇 단어 말고는 한국어를 하지 못했다. “이 책은 상실의 슬픔을 글쓰기로 달래고 엄마라는 존재를 되살리려 시작한 프로젝트였어요. 한국어판이 나오고 한국 사람들이 엄마와 나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니, 기적적인 귀향(miraculous homecoming) 같아요.”
▲그레이스 조는 “엄마의 인생을 담은 ‘전쟁 같은 맛’은 쓰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던 이야기”라며 “돌아갈 곳이 없었던 엄마라는 존재를 글쓰기로 되살리고 싶었다”고 했다. "독자들이 열린 가슴과 열린 생각으로 읽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기자
◇엄마의 삶은 추방의 연속이었다
비가 내려 축축한 날이었다. 인터뷰에는 그레이스의 아들 펠릭스(10)가 함께했다. 13년 만에 한국에 왔다는 그레이스는 “이번 방한은 내 자식과 같이 왔다는 점이 특별하다”며 “고향 부산을 비롯해 엄마와 외할머니의 나라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독자에게 이 책을 소개한다면.
“크게 두 갈래예요. 하나는 어머니에게 발병한 조현병의 사회적 근원에 대한 연구입니다. 상당 부분은 전쟁과 가족 상실, 미군을 위한 매춘 등 한국에서 비롯된 것이니까요. 다른 하나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10여 년 동안 제가 엄마를 위해 해드린 한국 음식에 대한 회고록입니다.”
-제목은 왜 ‘전쟁 같은 맛’인가요.
“말년에 엄마는 식욕을 잃고 음식을 거부하곤 했어요. 라면과 과일 통조림만 드실 뿐 단백질 섭취가 부족했습니다. 올케가 분유를 드렸더니 ‘그 맛은 진절머리가 나. 전쟁 같은 맛이야’라고 하셨지요. 미국이 식량 원조로 준 분유를 먹고 (유당 불내증 때문에) 복통과 설사로 고생한 사람이 많았다는 자료를 본 기억이 났습니다.”
-그것은 어떤 맛이었을까요.
“냄새를 맡거나 맛을 볼 때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이 있잖아요. ‘ 전쟁 같은 맛’은 잊고 싶은 시절의 고통을 불러내는 맛이겠지요. 듣는 순간 ‘책 제목이 되겠구나’ 직감했어요. 음식 회고록은 따뜻하고 아름다운 추억만 소환하는 게 아니라 훨씬 더 복잡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과거에 끝난 전쟁이 아니라 현재에도 무엇과 연결돼서 사람들에게 어떤 기억을 불러일으키기를 바라면서.”
▲그레이스 조가 엄마의 생애를 복기해 쓴 회고록 '전쟁 같은 맛'. /글항아리
-성명이 Grace M Cho인데 외할머니의 성(姓)이라고 들었습니다.
“모계를 기억하기 위해서예요. 다른 이유도 있는데, 오빠와 올케 등은 과거를 덮어두고 싶어합니다. 저는 엄마의 진실을 말하되 다른 가족은 보호해야 했어요. 그래서 엄마의 엄마, 외할머니의 성을 사용합니다.”
-가족사를 세상에 공개하는 게 두렵지 않았나요?
“공포보다 해야 한다는 욕구가 더 강했어요. 엄마가 말하지 않은 비밀이자 트라우마,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침묵은 우리 가족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크게 보면 가족을 넘어서는 거대한 역사의 일부라서, 숨기지 말고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선택에 어머니도 동의하실까요.
“2008년 펴낸 학술서 ‘한인 디아스포라의 출몰: 수치심, 비밀 그리고 잊힌 전쟁’에서 양공주 문제를 다룰 때 엄마가 지지해줬어요.”
그 책에 따르면 6·25전쟁 이후 미군을 상대로 술이나 성(性)을 파는 서비스업에 종사한 한국 여성은 약 100만명에 이른다. 10만여 명은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정부가 사실상 기지촌을 운영했고, 혼혈아가 태어나면 해외 입양을 권장한 시절이었다.
-책에 ‘군자의 삶은 추방의 연속이었다’고 썼는데.
“정말 그랬습니다. 군자는 일본으로 강제징용된 가정에서 태어나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전쟁을 겪으며 가족을 잃었고 ‘외국인과 살을 섞었다’는 경멸과 낙인 때문에 사실상 쫓겨났어요.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의 조건을 마련해주기 위해 이주한 미국에서도 차별을 당하고 환청에 시달리며 방에 틀어박혔습니다. 생물학적 죽음 이전에 사회적 죽음을 맞은 거예요.”
-어머니를 사회학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습니까.
“엄마에게 제 학업은 당신의 과거와 얼룩을 지워내는 방편이었어요.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사회정의에 대한 제 의식은 가족사와 더 밀접하게 얽혀 갔습니다. 오랫동안 연구 주제가 ‘트라우마로 점철된 역사’였기 때문에, 엄마의 질병 밑에 숨어 있는 뿌리가 무엇인지 궁금했어요.”
-어머니가 함구한 비밀을 알게 되고 글로 옮기는 과정은 고통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엄마의 이상한 증상은 제가 열다섯 살 때 시작됐는데 조현병이라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어요. 올케가 ‘어머님이 매춘부였대요’라고 한 스물세 살부터는 엄마 인생의 맥락을 이해해보려고 애쓰며 성인기를 보냈으니 긴 여정이었습니다. 엄마의 비밀은 내 정체성의 일부가 된 셈이에요. 고통요? 과거에는 괴로웠지만 진실을 파헤치고(excavate the truth) 글쓰는 일로 옮겨간 다음부터는 고통스럽지 않았어요. 정면으로 마주할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1974년 경기도 송탄의 기지촌 풍경. /글항아리
◇마침내 고향에 돌아온 기분
이렇게 말할 때 그레이스는 엄마의 진실을 발굴하는 고고학자처럼 보였다. 과거를 한 꺼풀씩 들추다가 깜짝 놀라 다 덮어버리고 싶은 적은 없었을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그녀는 답했다.
-왜 불가능합니까.
“가족 중에 ‘그만 멈추라’고 한 분들이 있었고 학계에서도 ‘그것은 진짜 사회학이 아니다’라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반대가 심할수록 중요한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했어요. 엄마는 거대한 억압의 역사로 가는 입구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사회학이 아니라는 비판은 핵심이 뭐였나요.
“미국 사회학계에는 백인 중심으로 어떤 관행과 역사가 있어요. ‘ 전쟁 같은 맛’은 동양적 의미의 영혼이나 귀신, 목소리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기 때문에 사회학에서 벗어나 있다는 지적을 받은 겁니다. 이 일은 2008년 엄마의 이른 죽음을 애도하며 심리치료 겸 추도사처럼 시작한 거예요. 글로 애도하는 장례식과 같았습니다. 쓰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어요.”
-2021년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호평이 쏟아졌습니다.
“올해의 책은 금방 잊히지만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로 뽑힌 책은 기록이 남고 꾸준히 읽힙니다. 강연과 인터뷰 등으로 바빠졌지만 정말 뿌듯했어요.”
-이렇게 한국어판이 나온 감회라면.
“초조하고 불안해요. 혼혈인인 저는 한국과의 관계에서 아웃사이더(국외자)였습니다. ‘전쟁 같은 맛’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몰라 감상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분명한 건 딱 하나, 기적 같은 일이라는 점입니다.”
-왜 기적이라고 생각하나요.
“제 복잡한 내면을 설명하고 싶었는데 그동안 언어 장벽 때문에 답답하고 슬펐거든요. 이 땅에 남겨둔 모든 사람, 모든 것을 이어주던 엄마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책으로 내가 누구인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지 한국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됐어요. 엄마와 저 같은 혼혈 가족은 한국이 오랫동안 잊고 싶어한 존재라서 더 감격적이에요.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 기분입니다.”
▲2021년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오른 그레이스 조의 '전쟁 같은 맛'. /전미도서상 홈페이지
-목소리를 내도 들어줄 사람이 없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책이라고 썼는데.
“어떤 여성이 기지촌에서 일했다는 비밀을 말할 수 없을 때, 그 트라우마는 무의식에 선명한 자국을 남깁니다. 다음 세대로도 전달되고 유령(ghost)처럼 출몰하게 돼요. 제 정신과 무의식에 그런 유령이 존재한다고 저는 생각했어요. 긴 침묵을 깨야만 했습니다. 소외돼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이 목소리를 들었으면 좋겠어요. 사회에서 거부당한 사람들의 초상을 완전한 인간으로 그려내는 것이 제 목표 중 하나예요.”
-사회가 그들에게 진 빚도 있다고 생각하나요.
“미국 사회는 음식을 만들고, 화장실을 청소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이민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국가 안보의 최전선에서 제 몸과 성노동을 바쳤지만 사회악 취급을 받은 기지촌 여성들에게 한국 사회가 진 빚도 있어요. 그렇게 만든 구조가 문제이지 그들이 수치심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숨죽인 채 유령처럼 살지 않아도 돼요.”
-아들 펠릭스에게 당신은 어떤 엄마인가요.
“엄마가 그랬듯이 저도 아이에게 굉장히 열정적이고 때로는 불같이 화를 냅니다(웃음). 내 안에 엄마가 있구나 느낄 정도로. 그런데 저는 어떤 비밀도 없어요. 아이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합니다.”
지난해 9월 대법원은 기지촌에서 미군에게 성매매를 제공한 여성들이 “정부의 기지촌 조성·운영·관리 등 불법행위로 피해를 입었다”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6억7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그레이스는 “한국 사회가 이 여성들을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보상할 준비가 됐다는 신호이기를 바란다”고 했다.
▲어릴 적 그레이스 조와 어머니 군자의 모습. 이 모녀는 1972년 여름 부산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레이스 조 제공
◇엄마가 물려준 가장 귀한 선물
딸의 성공은 엄마가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었다. 그레이스는 “내 교육은 엄마에게 다시 주어진 기회라는 것을 깨닫는 데 평생이 걸렸다”고 썼다. “엄마는 제가 클 때 부엌엔 얼씬도 못 하게 했어요. 한번은 나중에 요리사가 되고 싶다 했더니 ‘안 돼! 열심히 공부해서 멀리멀리 제일 좋은 대학 가야지. 넌 의사, 변호사, 교수도 될 수 있어!’ 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어릴 적엔 어머니가 당신을 ‘순희’라 부르곤 했다면서요.
“순희는 ‘가장 순진한 소녀’라는 뜻이었어요. 엄마가 내 순진함을 그토록 바란 이유는 당신에게는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지촌에 발을 들이기 전 엄마의 삶에서 엄마가 깨끗하게 간직하고 싶었던 건 아무것도 없었는지도 몰라요.”
-어머니의 소망을 이뤄드렸다고 생각하나요.
“하하. 매우 그렇습니다. 엄마는 제가 박사가 됐을 때, 교수가 됐을 때 굉장히 좋아했어요. 미국에서 책으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을 누린 데 대해서도 엄마가 영혼으로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한다는 걸 느낍니다.”
-책에 ‘내게는 세 엄마가 있었다’고 썼는데.
“유년기의 엄마는 요리를 좋아했고 활기찼고 이상적인 엄마에 가까웠어요. 낯선 미국 사회에 적응하려고 애썼지요. 두 번째 엄마는 조현병으로 아프고 아무것도 못한 채 사그라들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때 저는 엄마를 잃어버렸어요. 세 번째 엄마는 나를 당신의 요리사로 받아들이고, 외할머니가 해주셨던 한국 음식을 내게 가르쳐주며 되살아난 엄마예요. 마지막 10여 년간 같이 밥을 먹으며 옛날 이야기를 빵 부스러기처럼 흘려주시곤 했지요. 연구를 시작하도록 추동한 사람은 두 번째 엄마였지만, 그것을 끝마치도록 자양분을 준 사람은 세 번째 엄마예요.”
-콩국수, 생태찌개, 쇠고기국, 생선조림 같은 음식을 나누며 관계를 회복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어요. 가장 좋아하는 한식이라면.
“(주저 없이) 미역국요! 어린 시절과 연결돼 있는 음식입니다. 아침에 미역국 냄새가 나면 제가 금세 일어나서 밥을 먹고 제 시간에 등교한다는 걸 엄마는 아셨어요. 하나 더 꼽자면 비빔밥을 좋아합니다. 엄마가 해주시던 비빔밥은 간단했는데 한식당에서 주문한 비빔밥에는 온갖 재료가 들어가더군요. 그때 깨달았어요. 비빔밥은 무슨 재료로든 만들 수 있구나.”
▲이번 한국 방문에서 부산 생가를 찾아낸 그레이스 조. /그레이스 조 제공
-이번 여행에서 특별히 경험한 게 있나요.
“제가 미국으로 가기 전에 부산에서 살던 집을 찾아냈어요. 형태는 달라졌지만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주인 허락을 받고 마당에 들어가 사진도 찍었어요.”
-지금 어머니가 생존해 계시고 이 책을 읽는다면 뭐라고 하실까요.
“글쎄요, 상상이 잘 안 되지만 ‘아이구! 답답으라’는 아닐 것 같아요. 엄마는 늘 내 편을 들어주셨으니까 아마도 ‘우리 딸, 잘했다’ 하지 않을까요? (웃음)”
-당신에게 어머니는 어떤 분인가요. 물려받은 가장 귀한 것이 있다면.
“엄마는 타락한 여자라는 꼬리표에도 불구하고 명예로운 삶을 살았고, 정신병자라는 꼬리표에도 불구하고 이성적인 존재였어요. 저는 엄마가 처한 삶의 조건은 단순한 망명 상태가 아니라 도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자녀들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기, 미국에서 삶을 꾸려나가 보겠다는 의지, 음식을 만들며 생존하려 한 방식까지. 엄마는 그런 도전 정신을 물려줬어요. 저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아요.”
‘전쟁 같은 맛’의 끄트머리에 모녀가 나눴다는 대화가 나온다. “준비 중인 책에 양공주(yanggongju)라는 단어가 등장한다”고 하자, 그레이스의 눈을 피하며 군자가 지적한다. “오, 그건 나쁜 말이야.” 딸은 이렇게 대꾸한다. “내가 글쓰기로 그 의미를 바꾸려고 해요. 그 단어가 더 이상 수치스러운 말이 아니었으면 해요. 그 여자, 내게는 영웅이니까. 나는 엄마가 조금도 부끄럽지 않아요.”
조선일보 박돈규 기자
08.19 뜻밖에 남 탓이 도움이 될 때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Midjourney
소설가 엘리자베스 길버트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인간의 창의성이 신성한 혼, ‘지니어스(Genius)’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천재성이 인간에게 나오는 게 아니라, 우렁각시나 지니처럼 어딘가 숨어 있다가 우리를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예술가들은 작품이 형편없을 때, 자기 비하 대신 지니어스가 돕지 않아서 망했다고 푸념할 수 있었다. 반대로 작품이 뛰어나 큰 성공을 거둬도 지니어스 덕에 위대한 작품을 만들었다고 겸손할 수 있었다.
이것은 탁월한 심리 전략이다. 성공과 실패 모두를 자기 탓으로만 돌리지 않고 심리적 거리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덕분에 당시 예술가들은 자신의 빈약한 재능을 원망하며 술과 도박에 빠지는 대신, 긴 세월 작품 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다. 비빌 언덕, 하소연할 지니어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삶에는 내가 어쩔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 아무리 준비해도 시험에 떨어질 수 있고, 죽어라 노력해도 대회를 망칠 수 있다. 이때 자기 탓만 하면 자존감은 무너지고 술과 약에 의지한 채 불면의 밤이 이어진다. 이때야말로, 나를 비추는 ‘거울’이 아닌 세상을 비추는 ‘창문’을 봐야 한다. 농사를 망친 농부가 비를 내려주지 않는 하늘을 원망하듯, 닫힌 창을 열고 내 밖에 존재하는 것에 기댈 수 있어야 한다.
지독한 고난에 처했을 때, 종교는 우리에게 지혜를 준다. ‘신의 뜻대로 하소서!’ 라는 말을 나약한 패배주의나 회피주의로 치부하면 우리가 얻는 심리적 편익은 없다. 그 말은 우리에게 닥친 상황과 한계를 수용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벌어진 일의 한계를 수용하면 우리는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긴 거지?” 라는 한탄 대신 “어차피 벌어진 일이라면 지금 내가 뭘 해야 하지?” 라는 다른 방식의 질문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때 내가 ‘의식적’으로 쓰는 방법은 간단하다. ‘위기’를 ‘기회’로, ‘행복’을 ‘다행’으로 바꿔 부르는 것이다. 지금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을 다친 게 얼마나 다행인가.
조선일보 백영옥 소설가
09.01 이판사판
이론을 모르면 무식하다
현실을 모르면 바보다
화엄경은 인간사를 ‘이(理)’와 ‘사(事)’로 구분한다. 절을 운영하기 위해선 교리를 담당하는 이판승(理判僧)과 살림을 맡는 사판승(事判僧)이 필요하다. 조선 시대에 승려가 된다는 것은 막다른 선택이었다. 이후 두 가지가 결합된 이판사판은 ‘끝장’을 의미하는 엉뚱한 말로 전이되고 말았다.
사실 진정한 고수는 이판과 사판 모두 걸림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요즘엔 과학도 무시하는 얼치기 ‘운전수 지식(Chauffeur’s knowledge)’이 판치고 있다. 나아가 작은 가게 운영조차 못 해본 사람들이 서민 경제를 살리겠다고 큰소리치는 세상이 되었다. “무지보다 위험한 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버나드 쇼의 말이다.
조선일보 이동규 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
09-01 자동 주문기의 두 얼굴

이호섭 작곡가, 방송인·문학박사
가게 자동주문기 앞 어르신
조작법 몰라 허둥대며 탄식
인건비 내세우며 설치 바람
아날로그 세대는 문화 단절
문명 이름으로 편리하다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불편
폭염이 맹위를 떨치던 8월 초, 푹푹 찌는 날씨에 목이 무척 말라 시원한 커피라도 한 잔 마시려고 패스트푸드 판매를 겸한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광화문 사거리여서 그런지 숍 안은 젊은이들로 북적거렸다.
음식이 나오는 곳에 가서 “카라멜 마키아토 한 잔요” 하고 주문했더니, “고객님, 여기선 주문 안 받아요. 출입문 쪽에 있는 자동 주문기(키오스크)를 이용해 주세요”라고 했다. ‘그냥 주문 좀 받아주면 어때서’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키는 대로 자동 주문기 앞에 늘어선 줄 끝에 섰다. 그런데 내 앞에 선 연세 지긋한 어르신이 자동 주문기 조작법을 몰라 허둥대고 있었다. 몇 번이고 화면이 리셋(Reset)돼 주문이 되지 않자, “이런 답답한…”이라고 짜증 섞인 탄식을 했다. 다행히 내 뒤에 서 있던 40대 남성이 도와 드려 가까스로 주문을 마쳤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 어르신과 40대 남자 그리고 나는 한자리에 앉게 되었다.
아직 분이 덜 풀리셨는지 어르신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이게 말예요. 젊은 사람들이야 자동 주문기를 잘도 만지겠지만, 나 같은 사람은 저런 기계 앞에 서면 눈앞이 하얘져 아무것도 안 보여요. 앱인지 뭔지 그런 것 잘 못 만지는 나 같은 사람들은 저런 기계한테도 차별을 받아야 하니 참 서럽지요. 그냥 사람이 주문받으면 편할 걸….”
“다 인건비랑 인력난 때문이죠.” 40대가 끼어들었다. “그래도 그렇지. 정 그러면 나 같은 노인을 위해 도우미라도 쓰든지. 큰 병원에 가니까 입력을 대신해 주는 도우미가 있어 편하더구만….” 어르신은 입맛을 쩝 하고 다시며 미간을 찌푸렸다. “업주가 돼 보면 이 꼴 저 꼴 안 보려고 자동기기를 쓸 수밖에 없어요.” 40대는 자신의 일인 양 두 팔을 휘저으며 힘주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사회가 당면한 노인 문제의 첨예한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자동 주문기이기도 하다. 업주 측이 인건비 절감과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별수 없이 선택하는 방법은 자동 주문기와 로봇 자동 배달기와 같은 기계들이다. 이 기계들은 골목 상권에서부터 대형 음식점까지 그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다. 사정이 이러고 보니 디지털 문명에 익숙하지 않은 노년층은 식사 주문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문화 단절을 경험한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자동 주문기에서 디지털 세대의 효율성과 아날로그 세대의 문화단절이라는 두 얼굴을 본다.
두 사람의 말을 듣노라니, 지난 4월 말에 내가 겪었던 악몽 같은 사건이 휙 뇌리를 스쳤다. 공연 차 지방에 갔다가 생수를 사기 위해 고속버스 터미널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생수병을 가지고 계산대로 가니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무인 편의점임을 알았다. 카운터에 있는 가격 리더기로 물품 가격은 가까스로 입력했지만, 카드를 넣어도 결제가 되지 않는 것 아닌가. 카드를 아이시칩으로 꽂아도 되지 않고, 마그네틱으로 긁어도 영 결제가 되지 않았다. 막차 시간이 5분밖에 남지 않아 별수 없이 생수를 포기하고 나오려는데, 어럽쇼? 이번엔 출입문이 잠겨 열리지 않았다. 정말 큰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생방송에 나가려면 이 막차를 타지 않으면 안 되는데, 꼼짝없이 편의점에 갇혀 버린 것이었다. 갑자기 멘붕이 되어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현대의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그저 편하다는 이름으로, 경제적이라는 이름으로, 자동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사각지대에 감금되어 불안에 떠는 경우도 있음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누군가의 편리는 또 다른 누군가의 불편이 될 수도 있음을 몸으로 겪는다.
2023년 이 시대를 사는 세대, 특히 그중에서도 1955∼1963년 사이에 태어난 세칭 베이비붐 세대는, 아날로그 시대와 디지털 시대의 양쪽에 걸쳐 있다. 6·25전쟁 이후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도 없는 3무(無) 시대를 살면서, 잿더미 속에서 피땀으로 일으켜 세운 대한민국이다. 어떤 시인이 말했듯이 이 시기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 세대는 이미자 노래 한 자락에 굶주림과 헐벗음을 달래며 쟁기질을 하고 호미질을 했다.
“부르즈 할리파(Burj Khalifa)라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내 손으로 지어 올렸지.” 그 어르신도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에서 10년 가까이 일했단다. “우와∼ 진짜요? 톰 크루즈가 나오는 영화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을 찍었다는 그 건물 맞죠?” 나는 놀라워하며 물었다. “그 건물을 우리나라 건설회사가 지었다면서요?” 40대도 맞장구쳤다.
그 어르신처럼 아날로그 세대가 나라 안팎에서 피땀을 쏟아 가난했던 이 나라를 도약시킬 웅대한 토대를 만들었다면, 디지털 세대는 세계 10대 강국의 기술력과 세계를 한국화하는 한류 문화 콘텐츠를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의 기적을 만들었던 아날로그 세대들은 나날이 문화 단절의 절벽으로 밀려나고 있다. 달리 찾을 것도 없이 이 어르신이 바로 그 표본이다.
잠시 후, 40대가 말했다. “제가 식당을 운영했었는데요. 종업원을 쓰면 4대 보험 들어 줘야죠, 그나마 며칠 일하다가 말도 없이 나가 버리죠, 최저임금은 올라가죠, 그러니 자동기기를 안 쓸 수가 없죠. 게다가 가게 세(貰) 나가죠, 대출금 갚아야죠, 결국 코로나19 시기를 지나며 투자한 돈 다 까먹고, 이제는 거리에 나앉았어요.”
40대는 다시 한숨을 푹 쉬더니 “이제 실업급여 신청하러 가려고요”라며 서류 봉투를 보여주었다. 폐업사실증명원, 부가가치세 과세표준증명원이라는 서류 위에 굵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가벼운 목례를 하더니 문을 열고 나갔다.
그 문틈 사이로 한 무리 시위대의 확성기 소리가 귀청을 뚫는다.
문화일보
09.15 시골 소녀의 7대 불가사의
안나는 작은 시골 마을에 사는 소녀다. 3학년까지 밖에 없는 시골 초등학교에 다니다가(attend elementary school at her village) 4학년부터는 근처 도시 학교에 입학 허가를 얻어야(get admission to a school in a nearby cit) 했다.
첫날, 버스에서 내리자 다른 학생들은 각자 자기 교실로 향하기 시작했다(start going to their classes). 낯선 분위기에 잠시 쭈뼛대던(be hesitant for a while) 안나도 미리(in advance) 안내받은 교실을 찾아갔다. 그런데 같은 반이 된 학생들이 안나를 반갑게 맞아주기는커녕 작은 시골 출신이라고 놀려댔다(make fun of her).
대부분은 중국의 만리장성(Great Wall of China), 이탈리아 로마의 콜로세움(Colosseum), 영국의 스톤헨지(Stonehenge), 이집트의 피라미드(Pyramid), 이탈리아의 피사의 사탑(Leaning Tower of Pisa), 인도의 타지마할(Tajmahal), 페루의 잉카 유적지 마추픽추(Inca ruins of Machu Picchu) 등을 써냈다.
선생님은 학생들이 적어낸 답을 읽어주다가 마지막으로 안나의 답안지를 읽기 시작했다. “7대 불가사의는 우리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웃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친절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be able to see, hear, feel, laugh, think, be kind and love) 것입니다.”
선생님은 감동해서 멍하니 서 있었고(stand in a daze, overcome with emotion), 다른 학생들도 모두 말을 잊은 채 앉아 있었다(sit speechless). 작은 시골 마을에서 온 소녀가 그들에게 불가사의한 귀한 선물 7가지를 일깨워준(remind them of the seven precious gifts) 것이다.
조선일보 윤희영 에디터
09.22 에디슨을 키워낸 엄마의 사랑

토머스 에디슨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come home from school) 어머니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hand a paper over to his mother). “선생님이 꼭 엄마에게만 전해드리라고 하셨어요.”
편지 내용을 살펴본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become tearful). 한동안 말없이 서 있던(stand still without a word for a while) 어머니가 에디슨에게 큰소리로 편지를 읽어주기(read the letter out loud to her son) 시작했다.
“에디슨은 천재(genius)입니다. 그런데 이 학교는 아드님을 교육시킬만한 훌륭한(be good enough to educate him) 선생님이 없습니다. 어머님께서 직접 가르치시는(teach him yourself) 편이 나을 듯합니다.” 그 이후 에디슨은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어머니로부터 가르침을 받게 됐다.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집을 찾아갔다가 선생님이 어머니에게 전해드리라고 했던 편지를 발견했다(find a folded paper). 편지에 쓰인 내용(message written on the letter)은 이랬다.
“아드님은 제정신이 아닙니다(be out of his mind). 정신적 질환이 있는(be mentally ill) 것으로 보입니다. 학교에 계속 다니게 할(let him attend our school)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드님은 퇴학당해 제적됐습니다(be expelled from the school).”
“토머스 에디슨은 어머니가 세기의 천재로 변화시킨(turn into the genius of the century) 정신병이 있던 아이였다.”
조선일보 윤희영 에디터
09.23 구름 타고 하늘로 떠나는 날

▲꽃상여, 전남 화순, 1992년 ⓒ김녕만
이삿짐은 없다. 그저 한세상 살아낸 몸 하나만 달랑 구름처럼 하늘로 떠나가는 참이다. 하얀 상복을 입은 상여꾼들이 메기는 구슬픈 소리는 죽은 자보다 산 자가 들어야 할 노래 같다. 한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하는 죽음을 애달파하며, 그러므로 죽음 앞에서 삶이 얼마나 찬란한가를 곱씹으라는 반어법 같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삶을 대하는 태도와 직결된다. 죽음조차 가볍고 상업화되어 가는 현대사회에서 생명을 경시하는 현상이 팽배함을 우연의 일치라 할 수 있을까?
남도를 여행하다가 전남 화순군 동복면에서 한천 농악을 이끌어 온 상쇠 할아버지의 초상과 맞닥뜨렸다. 그저 지나던 나그네였지만, 찾아 들어가 예를 표하고 하룻밤을 머물며 사라져가는 우리의 전통 장례식을 지켜보았다. 30년 전만 해도 이미 대단한 유학자가 돌아가시는 경우가 아니면 좀처럼 전통 장례식을 보기가 어렵던 때였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팔십 평생 농사짓고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꽹과리를 치며 농악대를 이끌던 노인의 평범한 죽음인지라 내가 어렸을 적에 보았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민간 풍습 그대로였다. 초상집에서 동네 아주머니들은 종일 부엌과 뒷마당에서 전을 부치고 음식을 장만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조문객들이 계속 들락거렸고 밤이 이슥해지자 내일의 상여 행렬을 주도할 상여꾼들이 빈 상여를 메고 마당을 돌며 상여놀이를 벌였다. 더러는 눈물을 훔치고 한쪽에선 과장되고 떠들썩한 너스레로 슬픔을 감췄다.
한 사람이 귀한 생명을 받고 태어나 한평생 살다가 떠날 때 이 정도의 예우는 받아야 하지 않을까. 일가친척과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고인이 탄 상여 행렬을 배웅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든 생각이다. 모두가 마음을 모아 진실로 고인을 애도하며 정성스럽게 이별하는 방식은 꽃가마 타고 시집오는 혼례길보다 더 눈물겹게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얀 구름과 하얀 상복과 하얀 꽃상여가 하늘로 가는 길을 하얗게 밝혀주는 것 같았다.
중앙일보 김녕만 사진가
10.05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약
전중윤은 오쿠이에게 읍소 “꿀꿀이죽 먹는 국민 구하겠다”
두말없이 무료로 알려줘… 세계 라면의 역사를 만들었다

▲1960년대 삼양식품 서울 공장을 방문한 일본 묘조식품의 오쿠이 사장(맨 왼쪽)과 전중윤 회장.
9월 15일은 한국 라면의 환갑날이었다. 삼양공업(현 삼양식품)의 삼양라면 출시일이기도 하다. 오늘은 60년 전 이날에 얽힌 한일 두 기업인의 라면 얘기를 해볼까 한다. 전중윤 삼양식품 창업자와 오쿠이 기요스미 일본 묘조식품 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동방생명(현 삼성생명) 부사장을 지내고, 제일생명 사장을 하던 전중윤은 1961년 8월 서울 하월곡동에서 창업에 나섰다. 목표는 라면 사업. 어느 점심 시간 남대문시장에서 미군 부대 잔반으로 끓인 꿀꿀이죽(일명 유엔탕)을 사려는 긴 줄을 보며 결심했다. 직접 먹어 보니 깨진 단추는 물론 담배꽁초까지 나왔다. “동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밥 한 끼인데, 미래를 준비하는 보험이 무슨 소용인가. 값싸고 배부를 수 있는 음식을 만들자.”
1959년 일본 출장길에 맛본 라면을 떠올렸다. 창업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일본에 가서 기계와 기술을 사오자.”
사재를 털어 자금은 마련했는데, 달러 구할 방도가 없었다. 당대 최고 실세 김종필 중앙정보부 부장을 찾았다. “혁명을 왜 했느냐. 국민 잘살게 하자는 것 아닌가.”
설득에 성공했고 5만달러를 확보했다. 1963년 4월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본 최고 라면업체와 또 다른 라면 기업 등을 찾았지만 죄다 퇴짜를 맞았다. 낙담한 그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찾은 곳이 묘조식품이었고, 사장이 오쿠이 기요스미였다. 오쿠이는 전중윤에게 “왜 라면 사업을 하려는가”라고 물었다. “꿀꿀이죽 먹는 동포들이 더 이상 배곯지 않게 구하고 싶다”. 오쿠이는 답 없이 다음 날 다시 오라고 했다. 오쿠이 옆에 두 사람이 더 있었다. 제면기 업체의 우에다 사장과 튀김 가마 제조 업체의 오쿠타니 사장이었다. 그 자리에서 오쿠이는 “선생을 전면적으로 돕겠습니다. 기술료, 로열티는 필요 없습니다. 기계 값도 실비만 받겠습니다. 일본은 6·25전쟁으로 일어섰습니다. 묘조식품이 직접 그 혜택을 입은 건 아니지만 갚겠습니다. 내일부터 두 사람에게서 기술을 배우세요.”
그렇게 열흘 동안 배웠다. 하지만 수프 제조법만큼은 알려주지 않았다. 묘조의 핵심 경쟁력이었기에, 혹 다른 업체로 흘러갈까 우려해서였다. 귀국길에 오쿠이 사장 비서가 공항에 밀봉한 봉투 하나를 들고 왔다. 봉투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작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수프 배합표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저 말고 회사에 몇 사람 없습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배고픈 사람을 위한 좋은 제품을 만들기 바랍니다.”
삼양라면 출시 가격은 ‘꿀꿀이죽’ 5원을 감안해 10원이었다. 커피 35원, 담배 25원인 시절, 오쿠이 사장이 ‘너무 싸다’고 할 정도였다. 전중윤은 ‘막노동 일당이 100원인데, 그나마도 매일 일거리가 없는 상황에서 이 가격은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두 사람이 맺은 11개 항의 계약서 중 2항은, 기자가 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약 문구’였다. ‘갑(묘조)은 을(삼양식품)에게 제조 기술을 무상으로 제공한다. 을은 갑의 기술 전수에 따른다. 위생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다.’
이렇게 탄생한 한국 라면은 세계 음식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올 들어 9월 16일까지 100여 나라에 수출한 한국 라면만 6억5700만달러(약 9000억원)어치다. 전년 대비 23.5% 성장했다. ‘인간백회 천세우(人間百懷 千歲憂)’. 사람은 100살을 살지만 1000년 후를 생각해야 한다는 전중윤의 경영철학이다. 반목과 광기의 시대라던 20세기 중반, 배고픔과 전쟁을 벌였던 두 기업인을 다시 한번 추모한다.
조선일보 이인열 산업부장
10.13 북한과 괴뢰
어떤 국가나 지역에 대해 타자가 부르는 이름을 ‘외부 명칭(exonym)’이라고 한다. 반대로 해당 국가나 지역이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을 ‘내부 명칭(endonym)’이라고 한다. 역사와 언어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유럽에서는 외부 명칭과 내부 명칭이 꽤 다양하다. 이를테면 독일의 내부 명칭은 도이칠란트(Deutschland)이지만, 영어로는 저머니(Germany), 프랑스어로는 알마뉴(Allemagne), 폴란드어로는 니엠치(Niemcy) 등 주변국과 얽힌 역사적, 지리적 관계에 따라 다양한 외부 명칭으로 부른다.
한자 문화권의 동아시아 국가 간에는 내부 명칭과 외부 명칭 문제가 외교적 갈등 거리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를테면 중국은 과거 일본이 사용하던 ‘지나(支那)’라는 명칭에 멸시 의미가 있음을 들어 호칭 변경을 요구한 적이 있다. 지금은 대만을 두고 ‘타이완’이라는 명칭을 타국이 쓰는 것에 대해 외교적으로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국에서 일본의 ‘텐노(天皇)’를 ‘일왕’으로 부르는 것도 호칭을 둘러싼 갈등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국과 북한은 같은 언어를 쓰지만 분단국 특성상 내부 명칭과 외부 명칭 문제가 있는 특이한 경우다. 최근 아시안게임 기자회견장에서 북측 관계자가 한국 기자들의 북한 명칭 사용에 신경질적 반응을 보인 것도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다. 북한 입장에서 ‘북한’은 한국이 사용하는 외부 명칭으로, ‘한국의 북측 일부’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북측 관계자가 과잉 반응을 보인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국가를 대표하는 처지에서는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호칭 문제이기도 하다.
정작 호칭 문제를 제기한 북한은 국내적으로 아시안게임을 보도하면서 한국을 ‘괴뢰’로 표기하였다고 한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거친 입담이 스스로 격을 떨어뜨리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상대에게 정상적인 문명국의 상호 존중 원칙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조선일보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주일대사관1등서기관
10-13 수육과 편육

냉면의 면발 위에 얇게 저민 고기 두어 점이 나올 때가 있는데 이것을 뭐라 불러야 할까? 별도의 접시에 얇게 썬 고기 여러 점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건 또 뭐라 해야 할까? 순댓국집에 가면 머리고기를 눌러 굳힌 뒤 얇게 썰어낸 것을 접시에 내어 놓는데 이건 또 뭐라 해야 할까? 차례로 편육, 수육, 편육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흔한 듯한데 반드시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음식의 이름은 만들고 먹는 사람 마음대로 결정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수육은 물에 삶아 익힌 고기를 뜻하는 한자어 ‘숙육(熟肉)’이 변한 것으로 본다. 첫 음절의 받침 ‘ㄱ’이 왜 탈락했는지 모르지만 ‘목욕’도 방언에서는 ‘모욕’이라 하기도 하니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 고기는 굽고, 삶고, 튀겨 익힐 수 있지만 가장 손쉬운 방법은 삶는 것이다. 이렇게 삶은 고기를 덩어리째 먹을 수 없으니 얇게 썰어내면 편육이 되는 것이다. 냉면의 편육은 육수를 우려낸 고기를 얇게 저며 낸 것이고 수육은 따로 삶아낸 후 잘라 나온 것이니 같은 냉면집에서 나온 것이라도 조금 다르다.
그런데 돼지의 머리고기도 편육으로 먹기도 하니 헷갈리기도 한다. 고사를 지낸 돼지머리를 바로 썰어서 먹기도 하지만 여러 부위를 잘게 썰어 틀에 넣은 뒤 눌러 굳히기도 한다. 여러 부위가 콜라겐 성분으로 붙어 굳으니 독특한 무늬, 색감이 나는데 이걸 얇게 잘라 접시에 담아내니 이 역시 편육이 되는 것이다.
고기를 구울 때도 얇게 썰기는 하나 이를 편육이라고 하는 일은 없다. 그러니 편육은 삶은 고기, 곧 수육을 가리키기도 한다. 수육은 고기를 가장 건강하게 먹을 수 있는 방법으로 꼽힌다. 굽는 과정의 여러 나쁜 물질이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삶는 과정에서 지방도 빠져나오기 때문이다. 고기는 불맛과 기름진 맛 때문에 먹는 것이라지만 그 맛 때문에 건강을 해칠 수도 있다면 수육과 그 동생 편육을 더 가까이 할 만하다.
문화일보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10.24 “나 노벨상 먹었어” “미국국민 만세다!”

▲일러스트=최정진
“여보세요?” “여보세요?” “엄마 아들이에요(It’s your son).” “아 정말? 잘 지내고 있니?” “잘 지내요. 아버지 옆에 계세요(Is dad around)?” “그래, 아버지도 통화 연결돼 있다(be on the phone).” “아, 전해드릴 소식이 있어서요(have some news).” “말해보렴.” “두 분 다 듣고 계세요?” “(아버지) 그래!” “저 노벨상 타게 됐어요(I won the Nobel Prize).” “오, 이런 세상에. 오 이런 세상에. 축하한다. 정말 잘됐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엄마는 지금 바닥에 쓰러질(fall on the floor) 지경이다. 결국 해냈구나! 축하한다, 내 새끼. 네가 성심성의를 다한 결과(product of your hearts)다.” “감사해요.” “축하한다. 너는 노벨상 받을 자격 있다(deserve it).”
4전5기로 유명한 권투 선수 홍수환은 1974년 남아공 더반에서 WBA 밴텀급 타이틀을 차지한 뒤 어머니와 한 통화에서(in a phone call with his mother)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 했고, 어머니는 “그래, 대한국민 만세다!” 라고 외쳤다.
mRNA 백신 개발에 기여해 코로나 대유행에서 인류를 구한(save humanity from the coronavirus pandemic) 공로로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게 된 드루 와이스먼(64)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의대 교수도 가장 먼저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다(call his parents before anyone else). 홍수환식으로 말하자면 “나 노벨상 먹었어”라고 알렸고, 91·90세인 부모님은 “오, 이런 세상에. 축하한다, 내 새끼”라며 기뻐했다. 이 통화 장면 동영상은 큰 인기를 얻으며 퍼지고 있다(go viral).
CBS방송에 따르면, 와이스먼 교수의 부모는 그가 다섯 살 때 노벨위원회가 있는 스웨덴 스톡홀름을 방문했다. 당시 가이드의 안내로 노벨상 시상식이 열리는(be held) 강당에 들어가 본 그들은 “여기 두 자리 예약해 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부모님은 이후 와이스먼에게 종종 그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tell him the story every so often).
어릴 땐 아버지와 같은 엔지니어를 꿈꿨다. 학교에서 생물학을 배우기 시작하면서(start learning about biology) 진로를 바꿔 1987년 보스턴대학교에서 면역학(immunology)과 미생물학(microbiology)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코로나 백신 개발 후 노벨상을 탈 수도 있겠다는 기대가 생기기는 했다. 하지만 5년 후쯤에나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 노벨상은 통상 어떤 큰 성과 이후 8~9년이 지나야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는 장난(prank)이거나 백신 접종 거부자(anti-vaxxer)가 곯리며 희롱하려는(play a joke on him) 것으로 여겼다.
와이스먼 교수는 12월 10일, 약 60년 전 부모님이 “자리 예약해 두라”고 했던 그 노벨상 시상식장 강당에 선다. 그는 자신의 성공을 부모님 덕으로 돌린다(credit his success to his parents). “항상 배움에 흥미를 갖는 가정에서 성장하게(grow up in such a household) 해주신 덕분입니다. 부모님의 응원과 사랑이 노벨상 수상 쪽으로 나를 띄워줬습니다(buoy me towards the Nobel win).”
조선일보 윤희영 에디터
10.24 “미군은 날 구했고, 난 그의 손자에 장학금… 내 삶이 한미동맹 표본”
백성학 영안모자 명예회장

▲부천시 오정동 영안모자 본사에 있는 ‘영안역사기록관’에서 백성학 명예회장이 6·25 전쟁 당시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미군 빌리와의 인연을 담은 기록물들을 보며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이태경기자
부천시 오정동에 있는 영안모자 본사. 2층에 있는 창업주 백성학(83) 명예회장의 집무실로 들어서자, 모자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책상 뒤 신문 크기의 액자에 담긴 흑백 사진이었다. 4명의 아이들이 군복을 걸친 채 군용 텐트 앞에 서 있었다. 백 명예회장은 “1953년 6월 강원도 화천 어디쯤 있던 미군 야전병원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백 명예회장이 미군 부대에서 키 작은 꼬마 심부름꾼이라는 뜻에서 ‘쇼리(shorty)’라고 불리며 허드렛일을 할 때였다. “6·25 전쟁 끝나기 한 달쯤 전인데, 북한군 포격으로 미군 유류 저장소가 불타는 바람에 화상을 입었지. 그때 치료 받으면서 미군 부대에 있던 하우스 보이 출신들과 찍은 사진인데, 엊그제 일처럼 기억이 선명해.”
전 세계 12개 공장에서 연간 1억 개 이상 모자를 만들어 세계 모자 생산·판매량 1위 기업을 일군 ‘모자왕’ 백성학 명예회장은 “한미동맹을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나를 보면 생각이 바뀔 거야”라며 웃었다. 주변에선 이런 백 명예회장을 두고 한미동맹의 ‘살아있는 표본’이라고 말한다.
혈혈단신 월남해 고아로 자란 그에게 가장 필요했던 먹을 것을 준 것도, 정규 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그가 세계 무대로 나아갈 때 무기가 된 영어를 가르쳐 준 것도 미군이었다. 그의 사업도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만나 꽃을 피웠다. 백 명예회장은 미국과의 인연을 과거의 일로만 두지 않았다. 자신을 도와준 미군 은인을 10여 년에 걸쳐 어렵게 찾아냈고, 그의 손자에게까지 장학금을 지원하는 것으로 보은했다.
◇미군 쇼리에서 세계 모자왕으로
전쟁 전 평안북도 원산에 살던 백 명예회장은 1950년 12월 가족과 헤어져 혼자 남한으로 내려왔다. 열 살 어린 나이에 사실상 고아(孤兒)가 된 그를 거두어 준 것이 미군 부대였다. 그곳에서 ‘빌리’라는 이름의 미군을 만났다. 그는 백성학을 친동생처럼 돌봐줬다. “당시 나는 먹을 것, 입을 것이 필요해 미군을 따라 다녔는데, 빌리는 나에게 예의범절과 영어까지 가르쳐 줬어. 내가 미군들이 쓰던 영어 욕설을 쓰면 야단을 치며 못하게 했지.” 북한군 포격으로 화상을 입고 냇물에 빠졌던 백성학을 구조해 화천 병원까지 데려다 준 것도 ‘빌리’였다. 하지만 6·25 전쟁이 끝나고 빌리가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둘 사이의 연락도 끊겼다.

▲1952년 겨울 강원도 김화군의 미군부대 진지에서 열두 살 백성학이 빌리와 사진을 찍으며 웃고 있다./영안모자
전쟁이 끝난 후 백 명예회장은 서울 종로의 한 모자 제조 공장에 취업했다. 그렇게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1959년 서울 청계천에 모자 노점을 차려 사업을 시작했다. 끊긴 것 같던 미국과의 인연은 1967년 미국에 모자를 수출하면서 이어졌다. 납품 업체를 찾던 미국 바이어가 백 명예회장의 모자를 보고 거래를 터 줬다.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지만, 미군 부대 ‘쇼리’로 있으면서 익힌 영어와 매너로 미국 바이어를 상대했지. 당시 국내 모자업계에 영어 하는 사람이 없어서, 미국 바이어들이 죄다 우리 회사에 왔다고.”
사업이 자리를 잡자, 가장 먼저 한 일이 빌리를 찾는 일이었다. 1975년 주한미군 신문인 ‘스타스 앤 스트라이프스’(Stars and Stripes)에 ‘빌리’를 찾아 달라고 의뢰했다. 1980년대 중반엔 주한 미국대사관 관계자에게 ‘빌리’란 미군을 찾고 싶다며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는 빌리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의 의미를 담아 1985년 강원도 홍천에 사회복지 시설 ‘백학마을’을 세우면서, 건물 이름은 ‘빌리 사랑의 집’으로 정했다. 이런 그의 사연이 미국 유명 월간지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1986년 6월 호에 6페이지에 걸쳐 게재됐다. 그리고 미국 지인의 도움을 받아 6·25 당시 빌리가 근무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300대대 출신 퇴역 군인 수십명을 미국 캔자스시티로 초청하면서 당시 찍은 사진들을 가져오게 했다. 그 속에서 ‘빌리’의 얼굴을 찾아냈다. 알고 보니 그의 본명은 데이비드 비티(Beattie). ‘비티’라는 발음을 빌리로 들었던 것이다.
1989년 그토록 그립던 빌리와 재회했다. 빌리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빌딩 청소부로 일하고 있었다. 그들의 재회 얘기는 리더스 다이제스트 1990년 2월 호에 또 실렸다. 그는 “미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피 흘려 지킨 한국의 어린 고아가 성공해서 다시 자신들을 찾아온 스토리가 감동적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代를 이은 보은과 인연
빌리는 2010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인연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백 명예회장은 빌리의 자녀와 손자들이 원하면 미국 내 영안모자 회사에 근무할 수 있도록 했다. 대학에 진학한 빌리의 손자에겐 장학금을 지원했다.
지금도 빌리의 가족과는 서로 연락을 한다. 그는 “개인적으로 은혜를 갚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6·25 전쟁 때 미국에 도움을 받았던 한국이 이제 미국을 도울 수 있는 형편이 된 것 같아 뿌듯하다”고 했다.
백 명예회장은 한국과 미국 사이의 가교 역할에도 적극적이다. 그는 미국에서 공장 등을 운영하며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동생인 젭 부시, 존 매케인 전 상원의원, 록펠러재단 회장을 지낸 J. 록펠러 등과 인연을 쌓았다. 한국 기업인들이 원하면 자신의 미국 네트워크를 활용해 도왔고, 미국 기업인이 한국에 관심을 가지면 한국 기업을 소개해 줬다. “한국과 미국은 눈앞의 이익 때문에 흔들릴 관계가 아니야. 나처럼 서로 돕고 도우며 오랫동안 끈끈하게 이어가야지.”
조선일보 이성훈 기자
10.28 어린 소년과 할머니가 神을 만난 이야기

신(神)을 만나보고 싶은(want to meet God) 소년이 있었다.
여행 가방에 쿠키와 청량음료를 가득 채우고(fill up his suitcase with cookies and soft drinks) 길을 떠났다(start off on his journey). 가다 보면 어디에선가(somewhere on the way) 신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막연히 생각했다(vaguely think).
공원에서 한 할머니를 만나게 됐다. 배가 고파 보이셨다(look hungry). 쿠키를 몇 개 드렸더니 고맙게 받아 들고는(gratefully accept it) 미소를 보이셨다(smile at him).
미소가 아름다운 할머니 모습을 한번 더 보고 싶은 마음에 음료수도 드렸다. 할머니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소년과 할머니는 쿠키와 음료를 먹고 마시며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주고 받았다(exchange smiles without saying anything).
날이 어두워지자(grow dark)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섰던(turn around after saying good-bye to her) 소년이 다시 돌아왔다. 할머니를 껴안아드렸다(give her a hug). 그러자 할머니는 더 큰 미소로 맞아주었다.
집에 도착한 소년을 보고는 엄마가 깜짝 놀라 물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길래 네 얼굴에 그렇게 행복과 기쁨이 넘쳐 보이는 거니?”
소년이 대답했다. “신과 함께 점심을 먹었거든요(have lunch with God). 제가 여태까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갖고 계셨어요.”
할머니가 대답했다. “오늘 공원에서 신을 만났는데, 쿠키와 음료수를 나눠주시더라.”
☞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나누고 다른 사람들이 그분을 느끼기 위해 미소 짓게 하기만 하면 됩니다.
신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나눠주고 미소 짓게만 해줘도 신을 느낄 수 있다.
조선일보 윤희영 에디터
11-03 영조가 드신 것은 고추장일까, ‘고초장’일까?

미꾸라지는 특유의 비린내 때문에 그 자체로 요리해 먹기는 힘들다. 추어탕에 초피나무의 열매인 천초를 넣는 이유도 비린내를 잡기 위함이다. 예부터 천초의 맵고 알싸한 향기는 미꾸라지뿐 아니라 다양한 민물고기의 비린내를 없애는 귀중한 양념으로 쓰여 왔다. 천초는 경상도에선 제피라고도 불리는데 주로 천초 껍질을 가리켰다. 일부에선 ‘고초(苦椒)’라고도 부른다.
조선의 장수 임금인 영조는 평생 입맛이 없기로 유명했다. 영조 44년의 실록은 영조 본인의 말을 인용해 그가 즐긴 음식이 4가지라고 밝혔다. “송이, 전복, 어린 꿩고기, 고초장(苦椒醬), 이 네 가지 음식이 있으면 밥을 잘 먹으니, 이로 보면 내 입맛조차 그렇게 늙어 버린 건 아닌가 보다.” 늙은 영조가 자신의 입맛을 사로잡았다고 밝힌 고초장을 ‘고추장’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천초로 만든 장아찌의 한 종류라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영조 25년 실록에 이미 고초장을 “천초의 종류로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천초는 흔히 산초와 혼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완전히 다른 식물이다. 산초나무는 주로 가을 초입에 꽃을 피우는데 초피나무는 5∼6월에 꽃을 피운다. 산초는 기름으로 많이 사용되는 반면 천초는 주로 약재로 쓰인다. 지리적으로 볼 때도 산초는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나지만 천초는 남부지방과 중부지방 해안지대에서 주로 생산된다.
천초는 열매가 많다. 주렁주렁 많이 달린 붉은 열매의 알은 다산의 상징이기도 했다. 왕후가 거주하는 궁궐이 ‘초방(椒房)’이라 불린 이유도 그 때문이다. 천초의 줄기껍질, 열매, 잎 등에는 산시울이라는 매운맛을 내는 성분이 있어 강한 살충과 진통 작용을 했다. 예전에는 이런 천초의 강한 향기가 악기(惡氣)를 쫓는 효험이 있다 해서 왕후의 방인 초방의 벽을 천초나무로 바르기도 했다. 임금의 처남들을 “초방의 인척”이라고 부른 것도 여기에서 기인했다. 아이들의 건강을 해치는 나쁜 병균을 쫓아내기 위한 목적으로도 쓰인 것은 덤이다.
천초는 조선시대에는 전염병을 물리치는 데에도 쓰였다. 특유의 강한 향기와 뾰족한 가시, 살충 성분은 몸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사기(邪氣)를 몰아내는 벽사(辟邪)의 용도로 사용되기에 충분했다. 중국의 세시풍습을 담은 ‘형초세시기’에는 “1년 동안 전염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정월 초하루에 도소주와 초백주를 마셨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때 도소주는 천초·방풍·백출·진피·계피가 주재료였고 초백주는 천초 7개와 측백나무 잎 7개를 넣어 빚은 술이었다. 두 술 모두에 천초가 들어간다는 점을 미뤄 보면 전염병 예방과 퇴치에 있어 천초의 옛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천초는 예나 지금이나 이비인후과 질환의 약재로 각광받고 있다. 영조 18년 좌의정 송인명은 치통으로 고생하던 영조에게 천초탕을 추천한다. 이 외에 천초는 가을철 비염으로 막힌 코를 그 특유의 맵고 알싸함으로 뚫어주고 감각상피세포에 냄새 입자가 도달하도록 인도해 사라진 후각을 되찾아 준다. 한편 천초는 청력 회복에 도움을 주는 ‘자석양신환’이라는 처방에도 들어가는데, 귀밝이술처럼 매운 성분으로 귀의 감각신경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다양한 숨은 약효를 보면 천초는 추어탕의 비린내를 잡는 향신료만으로 쓰고 말기에는 너무 아까운 약재임이 분명하다.
동아일보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11-10 사기주의보! 아폴론도 당했다

사기는 과욕이 부른 성격장애
자기만족 위해 도덕 내팽개쳐
영화 ‘리플리’ 사기꾼 보노라면
그때와 지금 조금도 다르지 않아
헤르메스가 아폴론 농락하듯
좋은 것에 눈멀면 알고도 당해
다른 나라에서는 범죄 중 절도가 1위를 차지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사기가 1위라고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 회원국 가운데 사기 범죄율이 가장 높다고도 한다. 우리나라 치안은 안전하다고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처럼 사기 범죄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한 가지 이유로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 경우든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과욕이나 지나친 추구가 도덕심을 내던져 버리게 만든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기’하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알랭 들롱 주연의 ‘태양은 가득히’(1960)와 맷 데이먼 주연의 ‘리플리’(2000)다. 두 영화 모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 씨’(The Talented Mr. Ripley)를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스토리 전개 과정이 다르다. 이 소설은 1955년 초판이 나올 때도 히트를 했고, 영화화된 두 편의 영화가 모두 세계적으로도 흥행에 성공했다. 이는 리플리라는 캐릭터가 그만큼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 결과다.
‘태양은 가득히’는 원작과 달리 주인공 톰의 사기극이 결말에서 발각되는 인과응보로 결론지어지지만, ‘리플리’는 원작에 더 가깝다. 영화 ‘리플리’의 오프닝은 톰 리플리가 손목을 다쳐 피아노를 칠 수 없는 피아니스트 대신 그의 프린스턴 졸업생 재킷을 입고, 부자들의 화려한 파티에서 성악가의 반주를 하는 장면이다. 낮에는 호텔 보이, 밤에는 피아노 조율사로 살아가며 호텔에서의 클래식 연주자들을 부러운 눈으로 보던 톰이 밤에 남몰래 호텔의 피아노 앞에서 연습한 실력으로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다. 이후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지울 수 있다면, 나 자신부터 지우고 싶다. 재킷을 빌린 것부터”라는 톰의 내레이션으로 그가 내면적으로 갈등하는 입체적 캐릭터임을 보여준다.
그는 이 연주로 선박 부호 허버트 그린리프의 눈에 띄게 된다. 그린리프 내외는 졸업 기수가 적힌 프린스턴 재킷을 보고 그를 아들 디키 그린리프(주드 로 분)의 친구로 생각하게 된다. 아니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얼결에 거짓말을 하게 된 톰은 그린리프의 조선소에 초대되면서 거짓말을 본격화한다. 이탈리아에서 여자친구 마지(기네스 팰트로 분)와 돈만 쓰고 노는 망나니 아들 디키를 집으로 돌아오도록 설득하면 천 달러를 주겠다는 제안을 그린리프에게 받은 톰은 디키와 친해지기 위해 그가 좋아하는 재즈를 연구하며 자연스럽게 부를 수 있기까지 가사를 외운다.

톰은 그린리프가 보내준 유럽행 고급 크루즈 티켓의 R석에 타게 되는데, 출입국 수속을 밟으면서 섬유 재벌가의 딸인 메러디스 랜들(케이트 블란쳇 분)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선박 가문 그린리프의 아들 디키라고 말한다. 디키의 많은 것을 연구한 터라 디키에게도 자연스럽게 다가가 프린스턴에 같이 다녔다며 접근한다. 톰은 점차 디키와 마지 사이에 치밀하게 끼어들어 언변으로 신뢰를 얻게 된다. 디키가 뭘 잘 하느냐고 묻자 톰은 “서명 위조, 거짓말, 다른 사람 흉내 내기”라고 답해 디키가 당황하지만, 아버지 말투를 그럴듯하게 흉내 내는 톰의 재주에 디키는 웃어넘기게 된다. 게다가 재즈클럽에서 재즈곡을 멋지게 불러 톰은 디키의 마음에 쏙 들게 된다.
그러나 변덕스러운 디키는 톰에게 스키도 못 타고, 옷도 못 입는 가난뱅이라 놀리기 일쑤고, 둘이서만 요트를 탔을 때, 심지어 ‘거머리’라고 무시하며 지겹다고 화를 낸다. 흥분하여 다투던 톰은 디키를 홧김에 죽이게 된다. 이후 그는 디키가 되어 그의 서명으로 그의 여권을 위조하여 살아간다. 그를 의심하는 디키의 친구 프레디까지 살해한 톰은 프레디의 죽음을 조사하는 로마 경찰에게는 자신이 디키라며 거짓말을 하고, 베니스로 도망쳐서 베니스 경찰에게는 자신이 톰 리플리라고 경찰의 취조에 응한다. 그를 향한 모든 의심은 톰이 위조한 디키의 유서로 운 좋게 마무리되고, 톰은 자신을 디키로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가 하면, 톰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살해하며 결말로 치닫는다.
톰 리플리는 우발적이든 의도적이든 사람을 살해한다. 위기를 모면하고자 비밀을 눈치챈 사람들까지 죽이고, 재벌 2세로 행세하며 살아가는 반인격장애 캐릭터다. ‘리플리증후군’(Ripley syndrome)의 어원이 되었던 소설 ‘리플리-재능 있는 리플리’는 사기가 여전히 사회에 팽배하다는 주제의 영화와 인과응보로 주제가 변형된 두 영화 사이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사기란, 영화에서 보여주듯이 타깃을 다양하게 분석하여 타깃의 욕망을 알고 전략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마음이 약한 사람일수록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
그리스 신화 속 예언의 신 아폴론은 음악의 신이기도 하다. 도둑질하는 능력이 출중한 전령의 신 헤르메스는 아폴론의 소들을 훔치면서 풀잎 신발을 신겨 훔친 소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속인다. 예언의 신 아폴론은 헤르메스가 범인인 줄 알았지만, 헤르메스가 리라(lyra·고대그리스의 작은 현악기)를 연주하고 있을 때, 그 리라를 갖고 싶어졌다. 헤르메스는 훔친 소들을 다 내게 주면 리라를 주겠다고 했다. 음악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아폴론은 리라를 받고 소들을 전부 주게 된다. 어느 날은 헤르메스가 피리를 만들어 불고 있었다. 아폴론이 피리를 갖고 싶어 하자, 헤르메스는 황금지팡이를 주면 피리를 주겠다고 한다. 아폴론은 귀중한 황금지팡이를 주고 피리를 선택한다. 좋아하는 것 때문에 당하는 것이다.
신들도 그러니 인간이야 오죽할까. 좋아하는 것이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문화일보 황영미 시네라처문화콘텐츠연구소장, 영화평론가, 前 숙명여대 교수
11.12 어느 의사와 환자 보호자
의사가 응급수술(emergency surgery) 연락을 받고 급히(in hurry) 병원으로 들어섰다. 그는 옷을 갈아입자마자 수술실로 달려갔다(rush directly to the operating room).
수술을 받을 소년의 아버지가 의사를 보자마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rant and rave).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거야? 내 아들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는 걸 몰라? 당신은 책임감(sense of responsibility)도 없어?”
의사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왔습니다(come as fast as I can). 제가 어서 들어가 수술을 할 수 있도록 진정해(calm down) 주십시오.”
소년의 아버지가 악을 썼다(yell out). “진정할 수 있겠어? 당신 아들이 의사 기다리다가 죽으면 당신은 어쩔 거야?” 의사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do my best). 아들의 생명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pray for your son’s life)”라고 대답하고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몇 시간에 걸친 수술이 끝난 후 의사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천우신조로(by the grace of God) 아드님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러더니 소년의 아버지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궁금한 것 있으면 간호사에게 물어보세요”라고 서둘러 말하더니 병원 밖으로 휑하니 나가버렸다.
아버지는 간호사에게 불만을 터트렸다(vent a grievance). “왜 저리 거만한 거요(be arrogant)? 수술을 집도한(perform the surgery) 의사가 환자 상태에 대해 설명도 안 해주고 저렇게 매정하게 가버리다니(be coldhearted enough to go away)….”
간호사가 눈물을 흘리며(shed tears out of the blue) 말했다. “의사 선생님 아들이 어제 교통사고로 죽었어요(be killed in a car accident). 수술 때문에 호출했을 때 아들 장례식장에 계셨는데(be at the funeral), 곧바로 병원으로 와서 아드님 목숨을 구해드리고(save your son’s life) 다시 장례식장으로 달려가신 겁니다.”
☞ 그들의 삶이 어떤지, 그들이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모른 채 누군가를 판단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의 삶이 어떤지, 무엇을 겪고 있는지, 알지 못하면서 절대 함부로 그 사람을 평가하지 마라.
조선일보 윤희영 에디터
11.18 존엄하게 사라지기
십 수년 전 이혼과 함께 루게릭을 선고받은 한 남자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서 처음 ‘디그니타스’의 존재를 알았다. ‘죽을 권리’를 주장하며 의사의 조력으로 죽을 수 있는 스위스 단체였다. 알츠하이머에 따른 긴 고통을 끝내기 위해 남편과 ‘디그니타스’로 가는 여정을 그린 ‘에이미 블룸’의 책은 절망적이다. 그럼에도 이 책 제목이 ‘사랑을 담아’인 것은 절망을 통과하지 않은 희망은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테러 단체 ‘하마스’에 딸을 잃은 한 아버지가 ‘아이가 죽어 다행’이라고 말하는 인터뷰를 봤다. 딸이 살아있길 바라는 게 아니라, 끔찍한 고통 없이 빨리 사망했길 바라는 그 비통함을 우리가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눈을 부릅뜨면 죽음보다 못한 삶은 도처에 있다.
의학의 발전에도 기대 수명만큼 건강 수명은 늘지 못했다. 역설적으로 초고령 사회 진입은 각종 말기 암, 치매, 심혈관 질환으로 인한 다양한 기능 상실까지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의 증가를 의미한다. 어떤 진통제로도 통증을 참을 수 없던 날, 아들을 바라보며 아저씨는 누구냐고 묻던 날, 유일하게 움직이던 왼쪽 눈꺼풀마저 마비로 잠식당하던 날, 불치병으로 죽음을 유일한 희망이라고 부르게 된 사람들의 고통에 귀 기울여야 한다.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라 부르게 된 사람들 말이다.
2018년 나는 사전 연명 의료 의향서를 작성했다. 그 후 26만명 이상이 무의미한 연명 의료를 중단했다. ‘연명 의료 결정법’이 도입된 후, 사전 연명 의료 의향서를 등록한 국민은 164만명을 넘어섰다. 2025년에 대한민국은 노인 비율이 20퍼센트가 넘는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다. 24시간 켜진 인공 불빛 아래, 온 몸에 생명 연장 장치를 달고 수시로 주삿바늘에 몸이 찔리는 중환자실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나 자신으로 존엄하게 사라지는 것이다. 좋은 죽음 없이 좋은 삶도 없다.
조선일보 백영옥 소설가
11.21 누가 사기꾼의 먹잇감이 되는가
재벌 사생아면서 여자인 동시에 남자의 시한부 삶이라니
輕重 차이는 있지만 우리 모두 한 번쯤은 당하지 않나
욕망 좇다 ‘꾼’의 손아귀를 찾아 들어간 자신을 책망할밖에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4년 차에 사기를 당했다. 당시 유행하던 기(氣) 관련 특집 기사를 준비하다가 어떤 기 수련 단체를 알게 됐다. 중국에서 대단한 능력의 기 수련가가 온다고 했다. 죽은 닭을 살려내고 공중 부양도 한다고 했다. 그들은 미심쩍어하는 나를 확신에 찬 목소리로 설득했다.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그 사람이 오면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얼마 뒤 그 도사가 정말 한국에 왔는데 20대 젊은 친구였다. 군살이라곤 전혀 없는 몸매에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처럼 표정과 어조가 근엄했다. 산 닭의 목을 칼로 친 뒤에 기를 불어넣어 봉합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말투가 마치 닭고기만 있으면 닭곰탕을 만들어 보겠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는 봉오리만 맺힌 꽃에 기를 불어넣어 즉석에서 만개(滿開)시킬 수 있다고 했고 가부좌 상태에서 공중에 떠오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기 수련은 서커스가 아니므로 그런 행위 자체는 별 의미가 없다고도 했다.
나는 그의 위세에 기가 눌렸고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는 기의 경지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신문사에 와서 시범을 보여주면 기사로 쓰겠다고 제안하니 그는 흔쾌히 수락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중국 무슨 산에 오면 840살 넘은(84살이 아니다) 자신의 스승을 전 세계 언론 최초로 인터뷰시켜 주겠다고. 나는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하는 대신 세계적 특종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사기꾼들의 스케일은 상상을 초월하는 법이다.
며칠 뒤 신문사로 온 그는 몸이 좋지 않아 닭 부활 쇼와 공중 부양은 어렵다며 꽃 피우는 건 할 수 있다고 했다. 여러 명의 제정신인 동료와 사진기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꽃봉오리에 장풍을 불어넣는 시늉을 하더니 손바닥으로 꽃을 문질러 펴기 시작했다. 그가 다 피웠다고 내민 꽃은 말 그대로 뭉개진 꽃봉오리였다. 그가 쫓겨나다시피 떠날 때 나도 회사에서 쫓겨나는 줄 알았다. 중국 가짜 도사가 신문에 보도되지는 않았으므로 여러 사람 점심시간 빼앗은 죄만 인정됐다.
경중(輕重) 차이는 있어도 누구나 한 번쯤 사기를 당한다. 전세 사기나 보이스피싱처럼 아무 잘못 없이 사기에 걸려들기도 하지만 욕망을 좇아 사기꾼 손아귀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이를테면 한때 백화점에서 물건 가격을 두 배로 매긴 뒤 50% 세일하는 것이 일종의 관행이었다. 물건을 반값에 사고픈 욕망이 사람들을 사기 세일에 빠뜨렸다. 1992년 대법원이 이런 상술을 사기죄로 인정하면서 관행은 사라졌다.
지난 2007년 수많은 사람이 “저 민정인데요. 저한테 전화번호 준 오빠 맞죠? 사진 보고 맞으면 문자 주세요”라는 문자를 받았다. 무려 40만명이 확인 버튼을 눌러 엉뚱한 사진을 봤고 휴대폰 요금에서 정보 이용료 2990원이 결제됐다. 범인들은 3000원 미만은 본인 확인 없이 자동 결제되는 점을 악용해 어떤 민정이가 나를 찾나 하고 설렌 남자 수십만 명에게 17억원을 뜯었다.
“당신은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거나 존경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비판적인 경향이 있다. 당신은 장점으로 살리지 못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를 잘 통제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못하다….” 성격 검사 결과가 이렇게 나왔다고 치자. ‘나에게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1948년 미국 심리학자 버트램 포러가 모든 실험 대상자에게 이런 검사 결과를 주고 ‘당신과 얼마나 일치하는가’를 묻자 응답자들은 평균 4.2점(5점 만점)을 줬다. 나는 최근 유행한 MBTI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향을 심리학 용어로 ‘바넘 효과’라고 한다. 바넘은 19세기 미국에서 관객 속마음 알아맞히기로 유명했던 마술사다. 바넘을 비롯한 점쟁이들은 이런 말을 확신에 찬 표정과 목소리로 말하는 기술자다. 점을 보는 것은 신통력에 의지하고픈 욕망 때문이다. 우리 동네엔 점 보는 노점이 하나 있는데 그 출입구에 딱 두 문장이 쓰여 있다. “언제 재물이 생기나? 언제 애인이 생기나?” 사람들의 가장 큰 욕망이 정확히 응축돼 있다.
유명 펜싱 선수는 어떤 욕망 때문에 사기꾼에게 걸려들었을까. 그가 사기를 공모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최악의 피해자인 것도 사실이다. 재벌의 사생아이며 승마 선수였고 자산이 51조원이나 되는데 여자이기도 남자이기도 한 시한부 환자라니, 세상의 모든 막장 드라마를 합쳐도 압도하고 남을 사기 사건을 보며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조선일보 한현우 문화전문기자
11-24 사람의 향기

은미희 작가
향을 싼 종이에는 향이 배고
생선 싼 종이에는 비린내가…
사람의 도리와 삶의 이치는
시대 달라진다고 변하지 않아
우주로 삶의 지경 넓히는 지금
근본으로 돌아가야 길 안 잃어
책장에서 책을 꺼내 드는데 무언가 툭 발등으로 떨어졌다. 뭘까? 주워 보니 한 펜화가가 그린 풍경화였다. 진품은 아니고 인쇄된 2호 크기의 작품이었는데, 웅숭깊은 계곡에 고즈넉이 들어앉아 있는 정자가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너럭바위를 발치에 거느린 정자는 단아하면서도 기품이 느껴졌다. 화려하지 않고 꼭 있어야 할 것만 갖춘 그 작은 정자 주변으로 우거진 나무들이 담장처럼 자리하고 있고, 제법 그늘도 깊어 정자의 운치를 더해 주고 있었다. 기실 화가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풍경보다는 건물이었다. 문화재들을 찾아 세밀화로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인데, 일종의 기록화인 셈이었다.
그는 현존하는 문화재뿐만 아니라 허물어져 사라진 문화재도 그린다고 했다. 그의 손끝에서 다시 복원되고 재현되는 문화재들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 것이었는데, 그만큼 선조들의 미적 수준과 자연을 해석하고 향유하는 감각이 뛰어났음을 보여주었다.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만 적어도 50만 번에서 80만 번의 선을 그어야 한다고 했던가. 그는 선 하나 긋는 일에도 허투루 하지 않는다고, 기계처럼, 관성처럼 긋지 않으려 조심한다고 고백했다. 어쩌면 그 일은 구도(求道)의 과정과도 같을 것이다.
그렇게 0.03㎜의 선들은 그의 손끝을 따라 더해지고, 더해지고, 더해지다 경계를 이루고, 면을 채우고, 그렇게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했다. 그런 그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기사를 통해 알았다. 더 살아도 좋았을 나이인데. 폐허가 되고 무너진 문화재를 복원하듯 자신의 건강도 잘 건사해 회복했으면 좋았으련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그의 죽음은 개인의 소멸이기에 앞서 가족과 우리 사회의 손실이기도하다. 그만큼 그의 작품이 갖는 위치와 의미가 크다는 이야기다. 어쩌면 그는 스스로 육신의 허물을 벗어 버리고 자신이 그려 온 사물과 자연 속에 숨어들어 하나의 바람으로, 한 마리의 새로 떠도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일 때문에 그를 만났다. 그의 작업실은 바다와 접한 어느 도시의 변방에 있었다. 버스와 택시를 번갈아 갈아타고 그의 작업실에 도착하니 그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맞아주었다. 그 웃음이 맑고도 푸졌다. 작업실 안에는 세월의 더께가 또 다른 외피로 내려앉은 물건들로 가득했다.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다 도장을 찍듯 하나씩 가져온 기념품들이었다. 그것들은 유랑의 흔적이었고, 작품의 대상이었고, 그리고 자신이 숨을 곳이었다.

그가 그랬다. 향 싼 종이에는 향이 배고, 생선을 싼 종이에는 생선 냄새가 밴다고. 그 촌철살인 같은 경구가 식곤증으로 자꾸만 느른하게 풀리던 나의 신경줄을 팽팽하게 되감아 주었다. 어디선가 들어봄 직한 그 이야기는 어느 광고 문구였고, 카피라이터는 그였다. 그때부터 향 싼 종이와 생선을 싼 종이는 되돌이표에 걸린 후렴구처럼 내내 내 귓가에서 웅웅거렸다. 기실 향기와 냄새와 악취는 시간이 빚어낸 존재의 증거이다.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삶을 어떻게 운용해 왔는지, 삶의 양태에 따라 사람에게서 나는 체취는 저마다 다르다. 살아온 시간들이 축적되고 응집돼 풍기는 그런 삶의 체취 말이다. 과연 나에게서는 어떤 냄새가 날까.
삶이 지향하는 목적지로 견인하는 것은 개인의 욕망이다. 어떤 이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되 그 욕망이 세상에 빛이 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이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마키아벨리즘적으로 세상을 소비하는 이도 있다. 그 삶의 에너지와 기척들은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타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내 삶도 온전히 운용할 수 없는데 타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다니, 두려울 일이다.
향 싼 종이에는 향이 배고 생선을 싼 종이에는 생선 비린내가 밴다는 그의 말의 원전은 공자가어의 육본이다. 논어 교우편에 실리면서 비로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선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지초와 난초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오래되면 향기를 맡지 못하니, 그 향기에 동화되기 때문이다. 선하지 못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치 비린내가 전 생선 가게에 들어간 것과 같아서 오래되면 그 악취를 맡지 못하니, 또한 그 냄새에 동화되기 때문이다. 주사(朱沙)를 가지고 있으면 붉어지고, 검은 옻을 가지고 있으면 검어지게 되니, 군자는 반드시 함께 있는 자를 삼가야 한다.’
향기와 냄새에 동화되고 물이 들게 된다는 말이 두렵지 않은가. 사람을 가려서 사귀어야 할 일이다. 자신만 아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과, 주변을 돌아보며 챙길 줄 아는 사람 중 나는 후자를 만나고 싶고 후자인 사람이 되고 싶다. 인공지능(AI)이 사람을 대신하고 우주로 삶의 지경을 넓히는 시대에 무슨 공자냐고 하겠지만, 그럴수록 근본으로 돌아가야 길을 잃지 않는다. 사람의 도리와 삶의 이치는 시대가 달라진다고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다워야 세상은 사람이 살 만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이 각박해지고 가상과 현실이 뒤섞일수록 다시 고전에서 사람의 도리를 따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향 싼 종이와 생선 싼 종이. 코끝에서 냄새가 뒤섞인다. 내게서 나는 냄새일 것이다. 나를 위해서도, 내가 살아갈 세상을 위해서도 진중해야겠다. 그 풍경화를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문화일보
11.24 옥수수, 고구마, 감자의 유래
한국인들이 즐겨 먹는 옥수수는 중국어 ‘옥촉서(玉蜀黍)’에서 유래했다. 촉나라 기장을 의미하는 촉서는 수수에 해당하는데, 중국어로는 ‘슈슈’로 발음한다. 옥촉서는 17세기 조선 문헌에 ‘옥슈슈’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한국식 한자음(옥)과 중국식 발음(슈슈)이 결합한 하이브리드 발음이 옥수수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달콤함의 대명사 고구마는 일본어 ‘효자마(孝子麻·일본어 발음 고코마)’에 그 이름의 유래를 두고 있다. 영조 때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조엄은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는 ‘해사일기(海槎日記)’에서 대마도인들이 이 작물을 효자마로 부른다고 하면서 그 발음이 ‘고귀위마(古貴爲麻)’와 같다고 소개하였다. 그가 종자를 들여와 동래부 아전들에게 재배하도록 한 것이 고구마 전래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감자는 중국어 ‘감저(甘藷)’에서 온 말이다. 중국에서 감저는 주로 고구마를 이르는 말이다. 감자는 ‘마령서(馬鈴薯)’라고 한다. 조엄의 후임 격인 동래 부사 강필리가 1765년 저술한 ‘감저보’도 고구마 재배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렇듯 도입 초기에는 감자와 고구마를 모두 이르는 명칭으로 감저가 혼용되었으나, 점차 고구마라는 명칭이 퍼지면서 감저는 감자만을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추론이다.
옥수수, 고구마, 감자는 모두 중남미 원산인 외래 작물이다. 인류의 굶주림을 해소하고 먹거리를 풍성하게 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구황식품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현대 한국인들도 그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외부에서 좋은 것을 받아들여 스스로에게 이롭게 활용하는 것은 진화의 기초이고 발전의 토대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누구보다 더 한국 사랑을 실천해 온 푸른 눈의 외래 한국인이 정당 혁신을 집도(執刀)하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이 실험이 한국 정치에 옥수수, 고구마, 감자와 같은 이로움을 가져다주길 기대해 본다.
조선일보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주일대사관1등서기관
12.04 젓가락과 숟가락
일본 현지 식당에서는 숟가락이 나오지 않는다. 소바나 우동을 먹을 때조차 숟가락이 안 나올 때가 많다. 일본에서는 밥을 젓가락으로 먹고, 국물은 그릇을 입에 대고 먹는다. 밥도 국도 숟가락으로 먹는 한국인은 일본 현지 식당에서 숟가락 없이 식사하는 게 불편할 수 있다. “왜 일본인은 숟가락을 쓰지 않는 거야?” 한국인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쉽게 말하면, 숟가락이 필요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그릇을 손으로 들고 먹는 게 예의다. 그릇을 들지 않고 고개 숙여 먹는 모습을 오히려 좋지 않게 여긴다.
일본의 밥그릇은 도자기로, 국그릇은 나무로 된 것이 많다. 철로 된 그릇보다는 뜨겁지 않기 때문에 들고 먹어도 불편하지 않다. “계속 그릇을 들고 먹으면 무거워서 힘들지 않아?” 한국인 친구가 의외의 질문을 했다. 생각해보니 식사하는 동안 계속 손으로 그릇을 들고 있진 않고, 들었다 내렸다 하니 그렇게 힘들진 않다.
참고로 일본 라멘집이나 일부 우동집에서는 ‘렌게(れんげ)’라고 불리는 숟가락이 나오기도 한다. 이 숟가락은 국물을 먹을 때 외에도 사용법이 있다. 한 입 양의 면을 일단 렌게에 넣고, 국물과 그 면을 함께 먹으면 된다.
숟가락 없이 젓가락만으로 먹으려면 젓가락 쓰는 법을 잘 익혀야 한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만 나이로 2~3세 때부터 ‘올바른 젓가락 사용법’을 배운다. 유치원에서도 가르쳐주니 대부분의 일본인은 젓가락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다. 심지어 일본 연예인이 방송에서 식사할 때, 젓가락을 이상하게 쓰면 비판을 받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일본에서도 카레나 오므라이스, 차완무시(일본식 계란찜)를 먹을 때는 숟가락을 쓴다. 하지만, 일반적인 일식집이나 돈부리(덮밥)집에서 따로 말을 하지 않으면 숟가락이 나오지 않는다. 혹시 숟가락이 필요하면 “스푼 구다사이(スプーンください)”라고 직원에게 부탁하면 된다. 젓가락만으로 먹는 일식 문화가 특별한 것이지, 외국인이 숟가락을 달라고 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조선일보 에노모토 야스타카·' 진짜 도쿄 맛집을 알려줄게요’ 저자
12.19 영국이 만든 ‘오징어 게임’을 보다가
드라마를 리얼리티 쇼로… 상금 456만달러 놓고 456명이 게임
사탕 없던 시절, 가난 잊게 한 ‘뽑기’가 세계인의 게임 되다니
필사적으로 ‘달고나’ 혀로 핥는 외국인들… 왠지 아찔하다
▲일러스트=양진경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리얼리티 쇼로 만든 영국 TV 프로그램을 봤다. 실제 참가자 456명이 1등 상금 456만 달러를 차지하려고 각종 게임을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거쳐 설탕 과자를 동그라미나 세모 같은 모양으로 잘라내는 게임을 했다.
그들은 드라마에서 본 대로 흉내 냈다. 침을 발라 과자를 흐물흐물하게 만들고 도형의 가장자리 선을 따라 바늘을 긁어가며 과자를 떼어내려 애썼다. 피부색이 달라도 혀는 다들 붉었다. 그 혀로 설탕 과자를 맹렬히 핥아 침 범벅을 만들었다.
한국 드라마에서 어른들이 아이들 놀이로 생사가 갈리는 것은 그 나름의 부조리극 장치였다. 그러나 외국인들이 필사적으로 설탕 과자를 핥는 모습은 그들이 젓가락으로 깻잎 무침을 떼어내려고 기를 쓰거나 산낙지를 삼켜보려고 입을 오물거리는 것과는 매우 다른 느낌을 줬다. 할리우드 영화에 한국인이나 한국 풍경이 등장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달고나’라고 알려진 그 놀이 겸 간식은 내 어릴 적 서울에서 ‘뽑기’라고 불렀던, 엄마들이 사 먹지 말라고 엄포 놓곤 했던 길거리 불량 식품이었다. ‘달고나’는 다른 식품 포장지에 써있었던 이름으로 기억하는데, 인터넷을 뒤져 보니 녹여 먹는 포도당 덩어리에 그런 상표가 있었다고 한다.
연탄불에 설탕을 녹여 베이킹 소다 넣고 저으면 뽑기가 되고, 소다를 좀 더 넣으면 두툼하게 부풀어 오르는데 뒤엣것을 ‘소다빵’이라고 했다. 뽑기를 잘 뽑으면 하나 더 받을 수 있었고 소다빵은 그런 조건이 없었다. 드라마와는 달리 뽑기에서 바늘 쓰는 것은 반칙이었다. 누군가 몰래 바늘로 뽑기를 뽑아 오면, 뽑기 장수는 그런 아이를 기막히게 적발해 추가 증정 이벤트에서 제외했다.
초등학생 형은 동생에게 “너는 어차피 뽑기 못하니까 그냥 소다빵 먹어” 하고 기회를 차단하곤 했다. 동생이 덜 여문 손으로 서툴게 뽑기를 만지다 뚝 부러뜨리면 뒤통수를 때렸고, 울며 집에 돌아간 동생은 빗자루 들고 달려 나온 엄마로 바뀌기 마련이었다. 코흘리개 동생은 곧 빠질 앞니로 소다빵을 야금야금 먹으면서 형이 뽑기 뽑는 모습을 지켜봤다. 형도 코를 흘렸지만 가끔 오른쪽 소매로 능숙하게 콧물을 정리했다. 뽑기 풍경을 떠올리면 콧물이 아이들 소매에 얼어붙어 햇빛에 반들반들 빛나던 것이 생각난다. 아마도 이맘때 같은 계절이었던 모양이다.
설탕 녹인 물에 베이킹 소다 넣어 굳힌 것이니 좋은 음식은 아니지만 못 먹을 것도 아니었다. 엄마들이 뽑기를 못 사 먹게 했던 이유는 그 영양 성분이 불량해서라기 보다 뽑기 장수 주변에 아이들이 몰려 있는 불량한 환경 때문이었다.
그때 아이들은 학원도 가지 않았고 집에 있지도 않았다. 죄다 골목에 몰려 나와 해질 때까지 있었다. 나이와 성별과 덩치에 따라 제각각 그룹을 만들어 놀았다. 드라마에 나오는 놀이 대부분이 실제 그때 했던 것들이었다. 다만 ‘오징어’는 그때 ‘오징어 가이상’이라고 불렀는데 ‘가이상’은 ‘가이센(合戰)’이란 일본어가 변한 것이라고 한다.
골목마다 흩어져 놀던 아이들은 뽑기 장수가 오면 광장의 비둘기 떼처럼 한데 모였다. 덩치 큰 아이들이 꼬맹이들 뽑기나 소다빵을 빼앗아 먹기도 했고 남자애들이 여자애들 팔뚝을 툭 쳐서 뽑기를 망가뜨리기도 했다. 형들과 오빠들이 동생들 대신 싸웠고 집에서 뛰쳐나온 엄마들은 빗자루로 아이들 궁둥이를 몰아 집으로 데려가면서 나지막하고 단호하게 속삭였다. “엄마가 뽑기 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그런 뽑기였다. 전통 음식도 아니고 한국의 맛도 아니다. 6·25 전쟁 때 미군 물자가 들어오던 부산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싸구려 설탕 과자일 뿐이다. 사탕도 초콜릿도 없던 시절에 전쟁과 가난을 잠시 잊게 해준 진통제가, 잘만 뽑으면 60억원 상금에 한 발 다가설 수 있는 세계인의 게임이 된 셈이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느꼈던 이상한 기분이, 내 어릴 적 뽑기와 지금의 달고나가 충돌해 휘몰아치면서 생긴 현기증임을 깨달았다.
싸이의 ‘강남 스타일’은 전 세계에서 폭발적 인기를 얻었지만 이후 그가 세계를 겨냥해 내놓은 노래들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나는 그 이유를 아직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어쩌면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과 영국 리얼리티 쇼 ‘오징어 게임’ 사이에 그 해답이 있는지도 모른다. 대중문화란 스포츠와 달라서, 과녁을 향해 쏜다고 엑스텐에 꽂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한현우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