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식의 시론 문화일보 주필 2023

01-02 이재명·김정은의 윤석열 협공
여야관계와 남북관계 대격변
자유민주주의를 나침반 삼고
70주년 한미동맹 더 확장해야
김정은 군비경쟁 北 종말 예고
李 반발에도 국민 반응 시큰둥
도약이냐 재앙이냐 결단의 해
2023년은 누적된 모순이 폭발해 전혀 새로운 상태를 만들어내는 ‘양질 전환’의 시기가 될 것이다. 특히, 여야관계와 남북관계에서 결정적 변화는 불가피하다. 이재명 범죄 혐의 수사와 윤석열 타도 공격, 윤 정부의 대북 비례대응과 김정은의 대남 도발이 맞부딪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의 신년사만 보더라도 윤석열-이재명 사이엔 정치적 내전, 윤석열-김정은 사이엔 치열한 냉전의 막이 올랐다. 1500년 전 신라 백제 고구려의 삼국 각축을 연상시킨다. 존망의 사투로 이어질지, 궁즉통 묘수가 나올지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윤 대통령이 칼자루를 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재명과 김정은에게서 서·북 양방향 협공을 받는 불리한 형세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운명도 중대한 기로에 섰다. 재도약과 대재앙, 어느 쪽일지는 이제부터의 도전과 응전에 달렸다. 다행히 대한민국은 주권 국가로 탄생한 지 75년 만에 거목으로 성장했다. 자유민주주의 ‘뿌리’ 위에 시장경제로 경제 대국 ‘줄기’를 세우고, 민주화를 통한 법치주의 ‘가지’까지 일궈낸 결과다. 뿌리 깊은 나무는 거센 바람도 견뎌낸다. 상황이 어지러울수록 자유민주주의 나침반은 더 중요해진다.
대한민국 국명 자체가 뿌리의 상징이다. 제헌 국회에서 격론이 벌어졌고, 헌법기초위원회 표결을 통해 대한민국 17표, 고려공화국 7표, 조선공화국 2표, 한국 1표로 결론이 났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최초로 대한민국을 채택했지만, 당시에도 우파는 대한, 좌파는 조선, 중도파는 고려를 주장했다. 국명 결정은 분단을 감수하면서도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한 것과 동전의 앞뒷면이다. 국민 대다수가 문맹이었고, 선거와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던 시대였다. 그래도 무상몰수 무상분배, 세금 없는 천국 같은 공산주의 선동에 넘어가지 않았다.
뿌리의 2차 고비는 6·25 전쟁이었다. 한국은행이 남침 10여 일 전인 1950년 6월 12일 설립됐을 정도로 국가 체제도 완비되지 않았다. 예산 중 조세 비중이 10% 남짓해 세금으로는 공무원 봉급도 주기 힘들 정도였다. 미국과 유엔의 즉각 참전이 없었다면 그때 ‘뿌리’가 뽑혔을 것이다. 이런 위기를 극복하고 한미동맹까지 쟁취한 것은 가위 천운이었다. 1953년 체결된 상호방위조약은 지난 70년 동안 국가 발전의 토대가 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가진 게 없었지만 봉이 김선달처럼 휴전 반대와 독자 북진 등 벼랑 끝 전술로 미국을 압박했다. 반공포로 석방을 강행하자 미국은 이승만을 축출하는 ‘플랜 에버레디’와 한국 중립화 방안을 마련해 실행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이승만의 목숨을 건 결단과 탁월한 외교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다. 이제 명실상부한 쌍방향 동맹으로 확장할 때다.
건국과 호국, 산업화, 민주화 시기를 굽이굽이 지나면서도 자유민주주의 정체성이 흔들린 적이 없다. 1987년 민주화 시기에 국민은 민중민주주의 선동에 넘어가지 않았고,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운동권 인사들이 포함됐지만, 반독재 세력 중심이었다.
그런데 2017년 출범한 문재인 정권부터 달라졌다. 친북·좌파 세력이 주도권을 잡았다. ‘자유’를 삭제한 개헌을 시도했다. 힘든 국가 과제는 회피하고 북한에는 굽실댔다. 이재명 대표가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에 이어 대표가 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했다. 포퓰리즘으로 시장경제를 흔들고, 자녀세대를 위해 고생을 자청했던 국민정신까지 타락시킨다. 당이 아니라 개인이 연루된 범죄 혐의임에도 ‘야당 탄압’을 내걸고 민주당을 방패로 삼았다. 자유민주주의 ‘뿌리’를 파헤치고, 시장경제 ‘줄기’에 도끼질하고, 법치주의 ‘가지’를 꺾으려 든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개딸 같은 극성 지지층을 제외하면 국민이 적반하장 궤변에 더는 휘둘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소극적 각성으론 부족하다. 올해는 전국 단위 선거가 없는 해다. 노동·연금·공공·교육개혁 등 시대적 과제들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김정은이 윤 대통령의 상호주의 대응에 정면 반발한다면, 미국과 군비 경쟁을 벌이다 붕괴한 소련처럼 북한의 최후도 가까워진다. 대란대치의 기회다. 2023년 양질 전환이 올바른 방향으로 귀결되도록 하기 위한 국민의 판단과 결단이 필요한 때다.
01-30 반도체 40년史에 국가 재도약 답 있다
2·8 도쿄 결단 때 이병철 73세
여생 바쳐 반도체 신화 길 열어
이건희 이어받아 초일류 달성
죽창가 아닌 克日이 진짜 애국
기업 뛰게 하고 법치 바로잡아
제2 제3 반도체 기적 만들어야
‘내 나이 73세, 비록 인생의 만기(晩期)이지만 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어렵더라도 전력투구를 해야 할 때가 왔다. 현 단계의 국가적 과제는 산업의 쌀이며 21세기를 개척할 산업혁신의 핵인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난제는 산적해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만난을 무릅쓰고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프로젝트이다. 이처럼 반도체 개발 결의를 굳히면서 스스로 다짐했다.’(호암자전 368∼369쪽)
꼭 40년 전 한국 반도체 신화가 태동한 ‘별의 순간’이다. 1983년 2월 8일 이병철 삼성 회장은 반도체 투자를 결심하고, 3월 15일 초대규모 집적회로(VLSI) 메모리반도체 공장 건설을 선언했다. 나중에 2·8 도쿄 결단으로 명명됐지만, 당시 세계의 반도체 업계는 조롱했으며, 삼성그룹 내부는 물론 가족 사이에서도 그룹 전체를 위태롭게 할 무모한 구상이라는 반대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노(老)기업인은 생의 남은 에너지를 모두 쏟아부어 토대를 다지고 4년 뒤 별세했다. 3남 이건희 회장이 이어받아 삼성 반도체 신화를 일궈내고 지난 2020년 10월에 타계했으니, 대한민국은 두 부자(父子)에게 큰 빚을 진 셈이다.
최근 반도체 산업은 물론 국가적으로도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지만, 반도체 초기의 어려움에 비할 바는 못 된다. 반도체 성공 스토리는 기업과 산업을 넘어 국가 차원에서도 난관을 돌파할 지혜를 제공한다.
첫째, 기업가 정신이 국가 부강의 원천이다. 이병철 회장의 기업관은 사업보국(事業報國)이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분야에 대한 투자가 최우선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뛰어들어선 안 된다. 일자리와 부(富)를 창출하지 못하는 적자 기업은 사회악으로 여겼다. 그만큼 치밀한 준비와 실행을 중시했다. 반도체 결단 뒤에 남모르는 철저한 사전 검토가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둘째, 국가의 적극적 지원이 있어야 기업가 정신이 꽃을 피울 수 있다. 당시 반도체 공장의 입지 요건은 ‘서울에서 1시간 이내 거리’였다. 고도기술 인력 유치에 성패가 달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용지를 구하기 어려웠다. 정부는 정부의 ‘특정 용지’를 사용하게 했으며, 이것이 지금의 삼성 기흥캠퍼스이다. 정부는 기술 인재 양성을 위해 이공계 병역특례 제도를 시행했다. 1984∼1986년에 입사한 200∼300명의 병역특례 요원이 반도체 산업의 기초를 다졌다.
셋째, 기술개발인들의 열정과 애국심도 중요하다. 최근 출간된, 임형규 전 삼성전자 사장과 양향자 의원의 대담집 ‘히든 히어로스’에 초기 상황이 생생하게 나온다. 역공학(reverse engineering)으로 포장됐지만, 일본 칩 베끼기였다. 기술 자립을 앞당기기 위해 월화수목금금금 일했다. 미국에 파견된 엔지니어들은 죽을 힘을 다해 배웠다. ‘반도체인의 신조’를 제정하고, 회식 자리에서 애국가를 불렀다. 이런 결기 덕분에 1987년과 1997년 D램 가격 폭락 때, 오히려 생산 시설을 늘리고 생산성 향상을 이루는 역발상으로 일본을 앞설 수 있었다.
이처럼 반도체 역사는 극일(克日)의 역사이기도 하다. 2·8 결단 당시 일본 경제는 욱일승천 기세였다. 그 2년 뒤 세계 선진국들이 일본에 ‘플라자 합의’를 강요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세계 10대 기업 중 7개가 일본 기업이었고, 페블비치 골프장과 록펠러 센터 같은 미국의 상징물은 일본 자본에 팔렸다. 이런 시기에 일본으로부터 배워 일본을 넘어섰다. 죽창가 반일 선동이 아니라 이런 극일이 진정한 애국이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2월 8일은 1919년 도쿄에서 유학생 독립선언이 있었던 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위대한 도전과 성취가 위험에 처했다. 반도체 특별법은 지지부진하고, 의대는 여전히 이공계 인재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국회를 장악한 야당은 반(反)기업·반시장·반법치 입법과 선동을 서슴지 않는다. 그나마 윤석열 대통령이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을 자임하는 등 국정 정상화에 나섰다. 정치인 부패와 노조 불법, 간첩망에 대한 공권력 행사를 지지하는 국민도 많아졌다. 그러나 소극적 각성을 넘어 적극적 행동이 필요한 때다. 뒤를 돌아보는 거리만큼 앞도 내다볼 수 있다. 반도체 40년 역사에서 배우고, 제2 제3의 반도체 기적을 만들어야 대한민국 퀀텀점프도 가능하다.
02-24 일본에 사죄·배상 압박할 필요 없다
3·1 운동은 대한민국의 뿌리
현 한일관계에도 좋은 나침반
과거보다 현재와 미래가 중요
식민지 콤플렉스 날려버릴 때
일본 혐한이 되레 열등감 산물
징용 대위변제 땐 도덕적 우위
3·1운동은 명실공히 근대국가 대한민국의 뿌리다. 1919년까지 수천 년 동안 한민족의 나라는 있었지만, 빈부귀천 남녀노소 ‘모두의 나라’는 아니었다. 일본 식민지배에 맞선 시위가 일거에 근대국가 의식을 불러일으켰고, 그 직후 임시정부가 채택한 민주공화정이 대한민국의 국체가 됐다.
104년이 지난 지금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독립국임을 밝힐 것’을 천명한 독립선언서 정신을 되새기면서 21세기적 의미를 찾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세계 10대 국가 반열에 올랐다. 한·일 관계는 대등해졌고, 적잖은 분야에서는 일본을 넘어섰다. 그런데 아직도 ‘반일 무죄, 친일 매국’ 선동이 만만치 않다. 망국을 반복하지 말자는 각오를 다지는 일이면 괜찮은데, 반대로 안보와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
독립선언서는 이런 시대착오적 행태를 예견한 듯 미리 꾸짖었다. ‘현재를 수습하고 미래를 대비하기에 바쁜 우리는 묵은 옛일을 응징하고 잘못을 따질 여유를 갖지 못하노라, 일본의 신의 없음을 단죄하려 아니하노라, 자신을 채찍질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여유를 갖지 아니하노라, 우리가 할 일은 자신의 건설일 뿐이다.’
장구한 역사 속에서 인접국끼리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래도 현재의 평화를 지키고 미래의 번영을 위해 아픈 과거는 안으로 보듬는다. 그런데 한·일 관계는 정반대다. 직접적 계기는 위안부 및 징용 배상·위자료 판결을 둘러싼 충돌이다. 그 근원에 1910년 병합조약의 절차적 불법성 문제가 있다. 옥새가 찍히지 않았다거나 순종의 본의가 아니었다는 주장 등이 근거다. 썩은 나무의 마지막 도끼질에 사용된 도끼가 수입품이냐 밀수품이냐의 문제와 마찬가지다. 학자의 탐구 영역이나 시민단체 운동 대상이 될 순 있지만, 국가 차원에서 불법 도끼가 아니었다면 나무는 쓰러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행동하면 세계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물론 일제 침략 자체는 불변의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선언서의 ‘과거 불문, 현재 수습, 미래 대비’ 정신은 훌륭한 나침반이다. 그런 접근을 가로막는 요인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일본의 불충분한 사죄와 배상, 둘째는 독도 영유권 주장, 셋째는 군사 재무장 우려다. 첫째 문제는 어차피 시간을 두고 대처해야 할 과제다. 한국 국력이 증대하면 그만큼 해결된다. 징용·위안부 문제가 1990년부터 본격화한 것 역시 한국의 국력 신장과 탈냉전에 힘입은 바 크다. 둘째와 셋째는 한일 안보 공조가 확고할수록 그만큼 완화될 수 있는 문제다.
더 근본적으로, 한국민은 이제 식민지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조선이 전쟁에 져서 일제 식민지가 된 것도 아니고, 임시정부가 전쟁에 이겨서 독립한 것도 아니라는 애매한 사실이 한국민의 정서를 더 착잡하게 했다. 그러나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하면서 반세기 만에 일류국가 일등국민 반열에 올라섰다. 오히려 일본에서 콤플렉스가 감지된다. 식민지배에 대한 부채 의식을 갖고 한국 재건을 도와주려 했던 ‘전전·전중 세대’ 대신 ‘전후 세대’가 전면에 등장할 시점에 한국에 밀릴지 모른다는 열등감이 보태져 혐한 정서가 악화했다.
과거사를 절대로 잊어선 안 된다. 그러나 더 이상 일본에 ‘돈’과 사죄를 애걸할 필요는 없다. 스스로 해결하기에 충분한 경제력과 외교력을 갖췄다. 엎드려 절 받기 식의 사과는 차라리 거절하고 따끔하게 훈계함으로써 도덕적 우위를 지키는 게 낫다. 윤석열 대통령부터 결단해야 한다. 당면 쟁점인 ‘징용 배상’도 한국 내부에서 ‘대위변제’하는 방안을 찾고, 일본의 책무를 상기시키면 된다. 정부의 직접 출연이 대일 구상권 등의 또 다른 쟁점을 만들 수 있는 만큼 민간 중심으로 하는 게 낫다. 일본이 동참하고 말고는 그들의 문제로 남겨두면 된다.
일본이 정점을 지났다는 ‘피크 재팬’, 중국은 지금이 정점이라는 ‘차이나 피크’ 분석이 유력하다. 한국이 조금만 잘하면 우뚝 설 수 있다. 과거 문제를 극복하고 한미일 3국의 안보·경제·가치동맹을 주도하면, 세계 중심국이 되는 날도 멀지 않다. 반대로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친다면 현세대는 조상과 후손에게 역사적 죄인이 될 것이다.
03-24 민주당式 반일이 이완용의 부활이다
6·3 사태 때 DJ 한일협정 지지
안보 미래 위한 불가피성 인정
대통령 때는 日과 FTA도 추진
민주당은 김대중 정신 뒤엎고
반일 선동으로 국가 도약 막아
국제정세 몽매한 매국노 행태
거짓은 단거리 달리기를 하고, 진실은 마라톤을 뛴다. 가짜뉴스는 순식간에 퍼지지만, 이를 바로잡는 데는 오랜 시간과 힘든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평생 온갖 추문에 시달렸던 마이클 잭슨이 남긴 말이지만, 고금의 다른 많은 유명인도 유사한 표현으로 궤변과 선동의 위험을 경고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징용배상 결단과 방일 뒤 벌어지는 논쟁에도 딱 들어맞는다. 더불어민주당이 집권을 꿈꾼다면, 무책임한 공세를 접고 1964년 6·3 사태 당시 야당 의원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서 배워야 한다. 그때 상황이 지금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한일 국교 정상화를 결단한 박정희 대통령이 “모든 문제가 우리 희망대로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국익 확보에 최선을 다했다. 좋은 결과를 가져오느냐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느냐는 우리 자세에 달렸다”며 호소했지만, 야당은 대선에서 낙선한 윤보선 민정당 총재를 중심으로 결사반대에 나섰다. 일본의 경제식민지로 전락할 것이므로 협상은 곧 매국이라는 논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대중은 지지하고 나섰다. 정권에 매수된 ‘왕사쿠라’ 소문이 퍼졌고, 정치 생명도 위기에 처했다. 그래도 이화여대 토론회에 직접 나섰다. “박 정권을 도우려는 게 아니다. 안보와 경제를 위해 일본을 우방으로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다.” 33년 뒤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은 일본을 국빈방문해 ‘21세기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하고, 한일 자유무역협정(FTA)을 전제로 투자협정도 체결했다.
결국, 박정희·김대중이 옳았고 윤보선이 틀렸다. 김대중은 민주당의 토대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김대중 정신을 배신한다. 최근의 일본 우경화와 온갖 망언을 탓하지만, 6·3 사태나 김대중 집권기에도 결코 덜하지 않았다. 이런 정치사적 교훈과 별개로, 민주당 주장은 원천적으로 괴담 수준이다.
첫째, 과거를 부정하고 왜곡한다. 징용 판결의 본질은 1965년 한일 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의 실효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배상 소송의 핵심도, 1910년 병합조약이 불법인데도 이를 명확히 하지 않은 기본조약은 무효라는 전제 위에서, 미지급 임금이 아닌 ‘불법 지배에 따른 위자료’를 달라는 것이다.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강요 등 식민지배의 모든 행위가 소송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는 기본조약 제2조에서 ‘이미 무효’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합법·불법 여부를 미봉했던 것을 뒤엎고, 한일관계 기반을 붕괴시킨다. 시민단체라면 몰라도 국가 기관이나 정치 지도자가 해선 안 될 일이다.
둘째, 현실에 대한 무지다. 제3자 변제 방식은, 국제법과 국제 정세를 종합하면 불가피한 절충 방안이다. 사법부가 국가 간 쟁점에 대한 해석을 할 때는 행정부와 입장을 일치시키는 ‘사법 자제’가 국제 상식이다. 각국 법원의 애국적 판결이 국가 간 조약을 뒤죽박죽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2018년 징용 판결은 사법 자제와 거리가 먼 ‘건국하는 심정’을 따른 것이었다. 판결 자체에 대한 시비에 앞서, 여기서 촉발된 문제인 만큼 한국 측에 결자해지 책임도 있다. 방치한 문재인 대통령은 비겁했다.
셋째, 미래를 파괴한다. 북한의 핵 위협 현실화, 중국 시진핑의 독재 강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의 정세만 보더라도 미국·일본 등과의 협력 필요성이 더 커졌다. 게다가 경제·안보 강국으로 올라설 절호의 기회다. 한·미·일은 물론 한·중·일 3국의 중심이 될 수 있다. 국제기구 ‘한·중·일 협력 사무국(TCS)’이 2011년 서울에 설립됐다. 주요 7개국(G7)이 아니면서 5030클럽 국가(인구 5000만 명, 국민소득 3만 달러 이상)는 한국이 유일하다. 한국을 포함해 G8로 확대하자는 논의도 나온다.
이재명의 민주당은 “신(新)을사오적”을 외친다. ‘이완용의 부활인가’ 현수막도 내걸었다. 일본과 협력은 배척하면서 핵공격 위협을 하는 북한엔 굽실댄다. 사법 리스크 방탄에 집중하고 국익은 뒷전이다. 그래도 ‘개딸’은 열광한다. 국제 흐름에 몽매했던 척화비와 죽창가의 결말은 망국이었다. 국익을 위하면 애국이고 해치면 매국이다.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은 매국노 소리를 들으면서도 용일(用日) 극일(克日)에 나섰던 지도자와 사람들 덕분이다. 이완용 현수막은 민주당 스스로에 대한 손가락질이다.
04-14 尹 ‘자유 대연합’ 없인 총선 필패한다
여당 존재감 없고 갈수록 위축
이재명 리스크 야당에 뒤처져
정권심판론과 물가고 큰 부담
미워도 이준석 안철수 붙잡고
야당 아우르는 열린 정치 중요
여소야대 탓 말고 기반 넓혀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소설로도 영화로도 유명한 이 작품의 맨 끝에 나오는 기도문은 ‘동료의 죽음은 그대가 속한 집단을 작아지게 하나니…죽은 자를 위한 조종(弔鐘)은 살아남은 그대를 위해 울린다’는 취지다. 1930년대 스페인 내전이 배경이지만, 이 간결한 문구는 시공을 넘어 울림을 준다. 윤석열 정권은 1년 만에 이준석·나경원·안철수 등을 내치고 일사불란한 체제를 갖췄다. 그러나 기반은 위축되고 정책은 무력하다. 윤심을 동원해 세운 김기현 체제는 존재감도 안 보인다. 내일 총선을 한다면 이재명의 야당에 3 대 5로 진다는 여론조사가 속출하고, 벌써 비대위 전망까지 나온다. 반윤·비윤의 볼멘소리는 결국, 윤 정권의 상실을 애도하는 곡소리이기도 하다.
윤 대통령은 자신의 대의(大義)가 불법과 위선과 포퓰리즘 선동에 밀리는 듯한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이는 집권 환경이 최악이라는 사실과 무관치 않다. 국회와 대법원이 이렇게 정권에 적대적인 적은 없었다. 공영의 탈을 쓴 편파 방송, 기득권 노조와 타락한 시민단체도 마찬가지다. 전 정권의 알박기 인사와 정책 대못도 여전히 곳곳에 버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책임은 대통령 앞에서 멈춘다. 지도자는 남 탓을 할 권리가 없다. 문제를 해결할 책무가 있을 뿐이다. 윤 대통령도 여소야대 국회 핑계를 대면 안 된다. 1년 뒤 총선에서 이긴 뒤 국정을 제대로 펼쳐보겠다는 발상은 더 위험하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진정성을 보여야 총선 승리도 꿈꿀 수 있다.
지금 국민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그래서 정치가 중요하다. 안타깝게도, 윤 대통령은 법치에는 달인이지만 정치에는 문외한이다. 법치는 원칙의 집행, 정치는 양보와 타협이라는 점에서 상극이다. ‘뼛속까지 검사’라는 윤 대통령은 퇴임 때까지 정치를 체득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다.
내년 4·10 총선은 윤 정권 명운은 물론 국가 전반에 근원적 영향을 미칠 ‘재정렬선거(realigning election)’에 해당한다. 야당 전략은 뻔하다. 무한 포퓰리즘이다. 이재명 리스크는 어떻게든 해소할 것이다. 중간평가 성격의 총선은 정권 심판론이 작동해 여당에 불리하다. 고물가 등 경제상황도 역풍으로 작용하는 사면초가 상황이다.
최악을 피할 기회는 아직 있다. 정치공학 차원에서 선거의 핵심 변수는 구도와 세력이다. 윤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강조한 ‘자유’의 대의에 동의하는 세력의 대연합을 이뤄내고 ‘자유’를 삭제하려는 세력을 포위한다면, 구도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다. 이준석과 안철수 문제도 그런 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성격이 판이하고 상호 불신이 심각했지만, 민주화를 위해 흔쾌히 손잡았다. ‘텐트 안에서 바깥으로 오줌을 누게 하는 것(pissing out)이 바깥에서 안으로 누게 하는 것(pissing in)보다 낫다’는 미국 정치 속담도 있다.
야권도 ‘포섭’할 수 있어야 한다. 삼고초려 진정성이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미국의 노예제도 폐지 개헌(수정헌법 제13조)을 위해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야당 의원들을 집요하게 회유·협박했다. 그래서 ‘가장 순수한 사람이 부패한 방법으로 통과시킨 가장 위대한 법안’으로도 불린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링컨’은 그런 권모술수와 지도자 고뇌를 잘 그려냈다.
세력 확장에 나서면 당장 내부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기득권을 내놔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정치적 공간이 생긴다. ‘윤핵관’ 몇 사람이 불출마 선언을 한다면 금상첨화다. 그런 변화는 지지 기반을 다지고 넓히며, 다시 국정 동력을 키운다. 이런 선순환이냐, 정반대의 악순환이냐. 윤 대통령의 정치에 달렸다.
링컨은 물론 윈스턴 처칠, 마거릿 대처, 로널드 레이건 등 역사에 이름을 남긴 정치지도자들은 시대적 요구에 따라 급부상해 집권했지만, 초기엔 한결같이 취약한 기반과 개혁 반발로 심각한 궁지에 몰렸다. 그러나 엄청난 소통으로 난관을 돌파했다. 윤 대통령도 초기 어려움을 단련과 전화위복 기회로 삼을 수 있다. 대연합을 위한 열린 정치가 필요하다. 다닥다닥 붙은 기둥들보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둔 기둥들이 더 큰 지붕을 만들고 더 무거운 하중을 떠받칠 수 있다.
05-15 퇴행하는 ‘5·18 광주’
민주투쟁 경력 없다는 이유로
박서보 예술상 폐지는 충격적
‘광주의 비엔날레’ 위축 자초
“피해 당사자가 화해 적임자”
全·盧에 손 내민 DJ 정신 중요
尹 “자유민주 투쟁” 지평 넓혀
박서보(92) 화백은 살아있는 한국 현대미술사(史)로 불리는 세계적 예술가다. 제14회 광주비엔날레 개막식이 지난달 6일 ‘제1회 박서보 예술상’ 시상식과 함께 열렸다. 그런데 비엔날레 재단은 상을 폐지하고 기탁금은 돌려주기로 했다. 광주 미술계가 “4·19 혁명에 침묵하고 5·16 정권에 순응한 인물로, 광주 정신에서 출발한 비엔날레 취지에 어긋난다”고 한 데 따른 조치다.
민주화 투쟁 경력이 없으면 함께할 수 없다는 황당한 발상이다. 문재인 정부가 ‘국제행사 국비 지원 일몰제’ 예외를 적용토록 기획재정부 규정까지 개정해 영원히 세금을 지원받게 됐음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이런데도 전국적 관심은 시들하다. 다른 지역의 많은 사람이 ‘광주니까 그럴 만하다’며 지나친다는 의미다. 광주비엔날레는 1995년 시작 때에 비해 ‘광주의 비엔날레’ 수준으로 위축됐다. 광주시장 초청에도 김건희 여사의 개막식 참석은 무산됐다. 이번 일로 순수 예술전과 더 멀어졌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광주 5·18’에 큰 빚을 졌다. 지금 60대 초중반인 77∼80학번 세대는 더 특별한 집단기억을 갖고 있다. 당시 구전(口傳)과 지하 유인물로 참상이 전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로 인한 부채의식은 지금도 남아 있다. 윤석열 대통령도 필자도 79학번이다. 윤 대통령은 재학 중 12·12 사태 모의재판에서 판사 역할을 맡아 전두환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지하철 출입문이 열릴 때 유인물 뭉치를 선반에 놓고 잽싸게 내리거나, 신문 배달을 가장해 유인물을 던져넣을 때의 무섭게 떨리던 기억은 잊을 수 없다. 민주화운동의 산 증인 김정남은 “1970년대 긴급조치 시대는 악랄, 1980년대 국보법 시대는 살벌, 1990년대 집시법 시대는 교활했다”고 했다.
이런 한(恨)들을 승화시킨 지도자가 김대중(DJ) 대통령이다. 5·18 내란 음모 혐의로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DJ는 1997년 대통령 당선 직후 전두환·노태우 사면에 앞장서고, 취임 뒤 청와대로 초청했다. 박정희기념관 건립을 결정한 뒤 국고 200억 원을 지원했으며, 기념사업회 명예회장도 맡았다. DJ는 줄곧 “피해 당사자가 화해 적임자”라면서 보복의 악순환을 막아 “역사의 진일보”를 이루자고 했다. DJ의 ‘영원한 비서실장’ 권노갑(93)은 인터뷰에서 “반성과 사과가 없어도 용서와 화해를 추구했던 것이 DJ의 위대함”이라면서 “살아계셨다면 전두환 빈소에도 조문했을 것”이라고 말했다.(시사저널 2022년 3월 18일)
물론 그에 앞선 노력도 있었다. 정부 차원에서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180도 바꾼 사람은 노태우 대통령이다. 스스로 신군부 2인자였고 폭동으로 보는 세력이 당시 권력 주류였음에도, 1987년 대통령 당선 뒤 정부 인수기구가 그렇게 건의하자 자신에게 족쇄가 될 것을 예상하면서도 수용했다.(남재희 저 ‘시대의 조정자’ 129쪽)
결정적 역할은 김영삼 대통령이 했다. 전두환·노태우 임기는 공소시효에서 뺀 파격적인 5·18 민주화운동 특별법을 제정해 직전 두 대통령을 처벌했다. 25년 지난 뒤 문재인 정부에서 허위사실 유포 금지를 삽입(광주왜곡처벌법)하면서 악법 비판을 듣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다. DJ 정부 때 제정된 ‘광주민주유공자 예우법’도 무려 40여 차례 개정되면서 보상·교육·취업·의료·주택·금융·양로 혜택까지 담아 유공자 명단 공개 요구가 나오는 배경이 됐다.
윤 대통령은 이런 5·18의 지평을 획기적으로 넓혔다. 지난해 기념식에 참석해 5·18을 ‘자유민주주의 투쟁’으로 규정, 보수 이념의 연장선에도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현지에선 박서보 예술상 철폐가 상징하듯 퇴행 조짐이 보인다. 야당의 온갖 타락상에도 ‘묻지 마 지지’는 그대로다. 오월정신이 광주를 넘어서려면 배타적 피해자 인식과 민주화 투쟁 선민(選民)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DJ처럼 가해자에게 손 내밀어야 확장이 가능하다. 박정희·이승만 동상 건립에 동참한다면, DJ-오부치 선언처럼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에 앞장선다면, 아직 묻히지 못한 전두환 유골의 안장을 주선한다면, 광주는 민주화와 화해의 성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요원해 보인다. 여야 공약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5·18의 헌법 전문 수록이 어불성설인 이유이기도 하다.
06-09 이승만이 드골보다 위대한 이유
70년 전 한미동맹은 神의 한 수
이승만의 통찰과 외교력 덕분
드골과 함께 세계적 건국 영웅
두 지도자 의외로 공통점 많아
학생운동 격화에 스스로 하야
뿌리 잊은 나라에는 미래 없어
한미동맹은 지난 70년 동안 대한민국 자유와 번영의 초석이었다. 상호방위조약이라는 안보 장치만 돋보이지만, 경제·기술·교육·언론 등 모든 분야가 미국 지원에 힘입어 발전했고, 한국은 그 기간 최빈국에서 선진국 반열에 올라서는 세계사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제조업 최강국으로 부흥한 일본(5.1만 명), 독일(3.6만 명), 한국(2.8만 명)이 미군의 해외 주둔 1∼3위 국가라는 사실도 미국과의 동맹이 갖는 의미를 새삼 말해준다.
그런 동맹이 거저 성립된 것은 아니다. 미국은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고, 한국과의 군사동맹은 국익에 반한다고 봤다. 애치슨라인과 한반도 중립화 계획의 배경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탁월한 통찰력과 외교전이 없었다면 ‘신의 한 수’가 된 한미동맹도 없었다. 비밀 문건들이 공개되면서 밝혀진 5단계 협상은 팔순을 바라보던 지도자의 눈물겨운 드라마였다.
1단계는 강력한 ‘휴전 반대’ 투쟁이다. 조기 휴전을 바라는 미국 여론을 역이용해 한미동맹을 끌어내려는 포석이었다. 미국은 1951년 5월 17일 방위계획 NSC 48/5를 통해 휴전 방침을 확정하고, 7월 10일 휴전 회담을 시작했다. 2단계는 상호방위조약을 보장받기 위한 치킨 게임이다. 1953년 1월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3월엔 스탈린이 급사하면서 휴전협상이 급물살을 탔다. 이승만은 “방위조약 없는 휴전 땐 독자 북진”을 천명했다. 미국은 이승만 축출을 위한 ‘에버레디 작전’까지 세웠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았다. 한국군이 유엔군에서 이탈하면 미군의 재앙적 패배가 불가피하다는 현실론이 부상했고, 미국은 5월 30일 ‘방위조약 약속’으로 선회했다.
3단계는 ‘선(先) 방위조약’ 압박이다. 아이젠하워는 ‘휴전협정 조인 뒤 방위조약 협상’을 6월 6일 친서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가쓰라·태프트 밀약, 38선과 애치슨라인을 거론하면서 믿을 수 없다고 회신했다. 6월 18일엔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했다. 벼랑 끝 상황에서 이승만과 월터 로버트슨 미 특사와의 담판이 6월 25일 시작됐다. 소(小)휴전회담으로 불렸던 이 협상에서 방위조약 초안이, 이승만 구상대로 휴전협정보다 10여 일 앞서 도출됐다.
4단계는 방위조약 유효 기간(제6조)을 무기한으로 못 박으려는 시도였다. 덜레스 미 국무장관이 가조인을 위해 8월 방한했다. 우여곡절 끝에 ‘무기한 유효하다. 한 당사국이 통고한 뒤 1년 뒤에 종식시킬 수 있다’로 절충됐다. 5단계는 원조를 최대한 많이 얻어내는 일이었다. 조약은 1953년 10월 워싱턴에서 정식 조인됐고, 1954년 1월 양국 의회 비준 절차도 마무리됐지만, 11월 18일에야 비준서 교환을 통해 발효됐을 정도로 긴 공백기를 거쳤다. 군사·경제 지원을 구체화한 ‘한미 합의 의사록’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한 줄다리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승만과 프랑스의 샤를 드골 사이에는 의외로 공통점이 많다. 두 사람의 생몰 시기(이승만 1875∼1965년, 드골 1890∼1970년)부터,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바로 세운 지도자라는 사실까지 흡사하다. 독선적 성격과 권위주의 통치 스타일도 닮았다. 이승만은 4·19, 드골은 68혁명 여파로 스스로 하야하고 얼마 뒤 서거했다. 지도자의 우열 비교는 주관적 평가지만, 필자는 이승만이 더 위대하다고 본다. 프랑스는 1789년 시민혁명을 경험한 나라이며, 제1차 세계대전 뒤 유럽 최강국이었고, 나폴레옹 시대 등 세계를 호령한 역사도 갖고 있었다. 한국은 선거가 뭔지도 모르는 문맹률 80%의 후진국이었지만,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와 한미동맹 두 축으로 오늘날 프랑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토대를 닦았다.
드골은 오직 ‘위대한 프랑스’를 위해 프랑스를 구해 준 미국·영국과 냉전이 한창일 때 등 돌리고 나토에서 탈퇴한 뒤 소련·중국에 접근하는 전략까지 감행했지만, 이승만은 공산주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결코 자유민주 진영을 저버리지 않았다. 이런데도 세계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드골과 달리 이승만은 한국에서조차 상응한 존경을 못 받는다. 번듯한 동상도 기념관도 없다. 건국 영웅을 홀대하는 나라는 뿌리 잘린 나무와 같다. 물 마실 때 우물 판 사람에게 감사하는 국민적 음수사원(飮水思源)이 절실하다.
07-07 김정은.시진핑에게 쓸모 있는 바보들
더러운 평화가 전쟁보다 낫다
北정권 돕고 안보 파괴할 궤변
중국 공산당 총애받을 일 계속
오염수 괴담은 국익·국격 자해
국민이 가짜뉴스 퇴치 나서야
자꾸 속으면 바보 아니면 공범
적이 실수하고 있을 때는 절대로 방해하지 말라. 탁월한 군사 전략가이자 지휘관, 그리고 독서광이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남긴 많은 명언 중의 하나다. 최근 이재명 대표의 더불어민주당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세력이 적지 않을 것이다.
우선, 북한 김정은이 좋아할 것이다. 이 대표는 “아무리 더러운 평화라도 이기는 전쟁보다 낫다”고 했다. ‘더러운 평화’ 개념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대놓고 핵 공격 위협을 하기에 이른 북한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휴전선 긴장을 완화하자는 취지로 이해된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한미 연합훈련 중단과 유엔의 대북 제재 해제 촉구 등 북한 기대에 부응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한미동맹과 한일 관계 강화에 나선 상황에서, 야당 대표가 북한 구미에 딱 맞는 주장을 했다.
이 대표는 “이길 수 있는 동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싸울 필요가 없는 상태”라고 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책이라는 손자병법 모공(謀攻)편을 교묘하게 비튼 궤변이다. 손자병법 취지는 압도적 전력과 동맹을 확보해 싸우기 전에 굴복시키라는 것이다. 적을 지원하고 달래자는 이 대표 주장과는 정반대다. 전쟁을 좋아할 사람은 없지만, 전쟁은 수시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에 대비하라’ ‘전쟁을 잊은 나라는 반드시 위태롭게 된다’는 교훈이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이유다.
심지어 이 대표는 “대량 살상 후 승전하는 것이 지는 것보다 낫겠지만, 그게 그리 좋은 일인가”라고도 했다. 침략자에 맞서 싸운 전투를 ‘대량 살상’이라고 한다면, 목숨 걸고 자유 대한민국을 지킨 국군은 ‘그리 좋지 않은’ 살상을 저지른 사람이 된다. 김정은이 어찌 기뻐하지 않겠는가.
다음으로, 중국 공산당의 환영을 받고 있다. 중국이 시진핑 독재를 강화하면서 글로벌 신냉전이 격화하고 있다. 그런데 이 대표는 싱하이밍 중국 대사를 찾아가 “중국몽을 모르면 탁상공론” “미국 편에 서면 후회한다”는 훈시를 들었다. 민주당 대표단은 중국 비용으로 티베트를 방문해 박람회 행사에 참석했다. 티베트는 ‘중국판 킬링필드’로 불릴 정도로 인권 탄압의 상징으로 부각돼 있다. 마지못해 불교계에 사과하면서도 “70년 전의 일”이라고 했다. 사드 보복과 북핵 비호는 말할 것도 없고, 홍콩 사태와 반(反)간첩법 등을 보면서도 지금의 중국을 인권국가인 양 포장했으니, 갈수록 중국 공산당의 총애를 더 받게 될 것이다.
그다음으로, 일본의 극우 혐한세력이 내심 반길 것이다. 이 대표는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 유출된 오염수를 처리한 뒤 30년에 걸쳐 방류하는 계획에 대해 “핵 폐수(방류)”라고 했다. 과학적으로 인체에 유해할 수 없다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보고서에 대해서도 “깡통 보고서”라면서 원천 부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세부 내용을 반박하기 힘드니까 아예 IAEA 정당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든다. 과학도 합리성도 배척하는 ‘무조건 반일’ 행태다. 한국 원내 제1당의 이런 행태는 국제적 비웃음을 자초하고, 한국 수산물 안전성을 파괴하는 자해극이라는 점에서 혐한세력을 즐겁게 한다. 한국 멸시로 일본에서 정치적 이득을 취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20세기 초중반 소련에서 공산 독재가 구축되고 있을 때, 유럽 등의 좌파 지식인 일부는 소련을 유토피아 실험장으로, 스탈린을 선량한 사람으로 미화했다. 인권 참상에 눈감은 채 소련을 ‘사상의 조국’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소련 권력자들은 내부적으로 ‘쓸모 있는 바보들(useful idiots)’이라며 비웃었다. 중국을 찬양하고 북한에 굴종하는 민주당 인사들도 다르지 않다. 문제는, 쓸모 있는 바보들이 곳곳에서 환영받는 대가를 대한민국과 국민이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정파적 개인적 이익을 위해 국격과 국익을 팔아먹는 매국노들이다.
쓸모 있는 바보들의 가장 큰 무기는 궤변과 가짜뉴스다. 국민이 속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천성산 도롱뇽, 사패산 고란초, 광우병, 사드 참외, 핼러윈 참사에 이어 오염수 괴담까지 끝없이 이어진다. 처음 속을 때는 속인 사람이 나쁘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속는다면 바보 아니면 공범이 된다.
07-31 ‘자유의 성지’ 다부동과 게티즈버그
1950년 8월 대구에 인민군 포탄
시산혈하 속에서 방어선 사수
미군 주력 투입과 반격 전환점
6·25와 미 남북전쟁에 공통점
경북 칠곡은 호국과 자유 聖地
미래세대 교육장 역할도 중요
많은 사람이 여름 휴가길에 오른 지난 29일 토요일 오전,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도 살을 태울 듯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이틀 전에 이승만 대통령과 해리 트루먼 대통령 동상 제막식이 국내외 관심 속에 열렸음을 믿기 힘들 만큼 인적조차 드물었다. 해설사는 물론 그 흔한 그늘막도 없었다. 그래서 단출한 전시관보다 크게 잘 지어진 사무동이 더 민망해 보였다.
1950년 다부동 사투는 바로 이맘때 벌어졌다. 김일성은 광복절 기념식을 대구에서 하겠다며 8월 공세를 밀어붙였다. 낙동강 방어선이 여기저기서 무너졌다. 8월 4일 왜관철교를 폭파했지만, 인민군은 강을 건너 동명·가산 공략에 나섰다. 8월 18일 인민군 박격포탄이 대구 도심에 떨어지자 임시수도는 당일 부산으로 옮겨갔다. 미군은 유사시 한국에서 철수하기 위한 데이비드슨 라인(마산∼밀양∼울산)을 설정했다.
다부동은 대구를 지킬 남북전선(왜관∼창녕∼마산)과 동서전선(왜관∼영천∼포항)의 꼭짓점에 위치한 마을이다. 그 부근에서 8월 한 달 동안 시산혈하(屍山血河) 격전이 펼쳐졌다.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1사단에 사수 임무가 주어졌다. 8월 21일 11연대가 고지를 빼앗기고 후퇴했다. 백선엽이 그들 앞에 나섰다. “그동안 잘 싸워주어 고맙다. 그러나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더 밀리면 망국이다.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운다.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1948년 8월 대한민국 수립이 선포됐지만, 2개월 뒤 유엔에서 ‘유일 합법정부’ 승인 문제가 한창 논의 중일 때 여수·순천 반란사건이 일어나 국가 요건인 ‘내적 평정’까지 의심받게 됐다. 인근 지역(나주) 제헌 의원 이항발은 “정부는 껍질뿐”이라고 개탄했지만, 국가 자체가 껍데기뿐이었다. 세금을 내는 국민이 거의 없었다. 나라를 지킬 군대도 동맹도 없었다. 국군조직법과 국가보안법은 여순사건 직후에 부랴부랴 만들어졌다. 미국의 안보 측면에서 한국은 검토 대상 16개국 중 15위였다(1947년 5월 12일 국무부·육군·해군 조정위원회 비망록). 1949년 6월 미군 철수도, 1950년 1월의 애치슨 라인도 그 연장선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면 남침을 당했다. 미군 주력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다. 김일성은 정반대 입장이었다. 절체절명의 충돌 지점이 다부동이었다. 따라서 미국 남북전쟁의 게티즈버그 전투와 공통점이 많다. 우선, 승패의 분수령이 됐다.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남군은 일거에 주도권을 잡기 위해 1863년 7월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에서 총력전을 펼쳤지만 실패했다. 자유 수호 전투였다. 북군은 “영토나 전리품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위한 역사상 첫 전쟁”(영화 ‘게티즈버그’)이라고 했다. 게티즈버그 국립 군사공원의 모토 역시 ‘자유의 새로운 탄생’이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불멸의 연설은 전투 종료 4개월 뒤 묘지 봉헌식에서 나왔다. 미국 입장에서 6·25는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다.
필자가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주변 미국인들에게 ‘미국 정신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을 물었는데, 여러 사람이 게티즈버그를 추천했다. 누구라도 그곳이 자유의 성지임을 알 수 있다. 당장 사이버 방문도 가능하다www.nps.gov/gett). 다부동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6·25 당시 인민군이 오기도 전에 인민위원회를 구성해 환영한 지역이 수두룩한데, 칠곡군은 끝까지 맞섰으며, 지금도 매년 전승 축전을 열고 참전용사 시가행진도 벌이는 호국과 자유의 성지다. 이런 위대한 의미에 비해 전적기념관은 너무 초라하다. 성지순례 대상은 고사하고 웬만한 민간 박물관보다 못하다.
호국 영웅들이 후대의 극진한 대접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세대는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 어린 학생들도 찾아와 스스로 배우는 교육장 역할까지 할 수 있게 전적관을 잘 꾸미고 운영해야 한다. 백선엽 장군 파묘를 주장하는 세력이 설치고, 김원봉이 국군의 뿌리라는 식의 반역적 역사관이 판치는 상황이어서 더욱 그렇다. 국내외 곳곳에서 피서와 휴식을 즐기면서도, 다부동의 피어린 전투가 있었기에 북한 주민과 다른 삶을 누리고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08-25 내년 총선, 제헌 총선만큼 중요하다
해방 직후 사회주의 위험 딛고
민주공화국 길 닦은 5·10 총선
내년 4·10 총선도 정체성 선택
자유민주 지속이냐 변질이냐
동맹·법치·도덕 문제도 영향권
대연합 없이는 尹 승리 힘들 것
‘질문 3, 귀하가 찬성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본주의 14% 1189명, 사회주의 70% 6037명, 공산주의 7% 574명, 모릅니다 8% 653명.’(동아일보 1946년 8월 13일자 3면) 해방 1년을 맞아 미 군정청 여론국이 실시한 대규모 여론조사의 결과다. 조사 방법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없고, 응답자 수와 비율의 일부 불일치도 있지만, 당시 분위기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로부터 2년 만에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을 수립하고, 유엔의 승인까지 받아낸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38선 북측에서는 소련이 일찌감치 공산체제 이식에 착수했지만, 남측의 미국은 민주적 선택을 지향했던 만큼 삐끗하면 무정부 상태나 인민공화국으로 귀결될 수도 있었다. 소련의 방해 탓에 유엔이 정한 시한(1948년 3월 31일)을 넘겨 5월 10일 제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고, 제헌의회는 한 달 남짓 만에 ‘국가 설계도’인 제헌헌법을 만들어냈다.
그 기초가 된 ‘유진오 초안’은 양원제와 내각제, 사회정의 내에서의 경제상 자유, 중요기업의 국영화와 농지개혁 등을 담고 있었다. 특히 경제 균등을 앞세웠는데, 토론에 나선 의원들도 당시 여론을 반영하듯 대부분 사회주의적 경제 질서를 선호했다. 광복군 총사령관 출신의 지청천 의원은 ‘만민 평등의 민족사회주의’를 주장했다. 자유시장경제 취지의 논지를 펼친 사람은 조한백 의원뿐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토론 끝에 올바른 선택을 했다. 국제 정세와 공산주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봤던 이승만 당시 국회의장의 향도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지난 75년 동안 개헌과 헌정 중단 등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자유민주주의라는 국가 정체성 자체가 흔들린 적은 없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헌법 정신의 본질에 속하는 ‘자유’를 삭제하려는 세력이 점차 강해진다. 문재인 정권 시절에 그런 개헌이 시도된 적도 있다. 따라서 내년 4월 10일 제22대 총선은 결정적 선거(critical election)를 넘어 국가의 근본 방향을 다시 결정하는 제2의 제헌의회 선거와 다름없다. 천변만화가 예상되지만, 본질은 자유민주주의의 지속이냐 변질이냐 사이의 선택이다. 현실적으로는 윤석열과 이재명의 대선 연장전 양상으로 흐를 개연성이 크다. 상대 진영에 대한 적대감이 너무 강해 내 편 결함은 묻힐 것이기 때문이다. 온갖 사법 리스크에 노출된 이재명의 활로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재명은 신익희-조병옥-윤보선-장면-김대중으로 이어지는 정통 민주당과는 거리가 멀다. 김대중·노무현도 평등과 분배를 강조했지만, 기업을 부의 착취자 아닌 창출자로 인정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직접 기업을 설립해 경영했다. 문재인과 이재명은 필요할 때만 기업을 이용했다. 김대중은 대북 햇볕정책을 추진하면서도 미국과 일본을 중시했다. 노무현 역시 미국과 사사건건 충돌하면서도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이라크 파병 등 필요한 결단을 피하지 않았다. 문재인은 달랐다. “중국은 큰 봉우리”라며 “중국몽을 함께하겠다”고 했다. 이재명은 ‘죽창가 반일’ 입장이 선명하다. 나랏빚을 내서라도 돈을 펑펑 쓰자고 주장한다. 자신의 온갖 혐의가 분명한데도 되레 검찰을 공격한다. 법치주의와 포퓰리즘도 갈림길에 섰다. 윤미향 조국 등을 보면 과학과 괴담, 도덕과 몰염치의 대결도 된다. 이 모든 것이 ‘판돈’처럼 총선에 걸려 있다. 누가 승리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나라가 된다.
윤 대통령의 정치적 운명도 심판대에 올랐다. 이승만은 한국 총선거 실시에 대한 유엔 결의(1947년 11월) 이후 최대한 신속하게 정부를 수립하지 못하면 나라가 나락에 빠질 것을 알고 무조건 서둘렀다. 인민공화국 아닌 민주공화국이기만 하면 다른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관계자들을 설득·압박하고 그래도 안 되면 자신이 양보했다. 윤 대통령에게도 포퓰리즘과 괴담 선동을 뚫고 국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 역사적 책임이 있다. 자유민주 대연합이 승패의 관건이다. 이승만이 일단 정부를 세운 뒤에 고칠 것은 고치고 다툴 것은 다투자고 했듯이, 윤 대통령도 총선 승리에 집중하고, 선거 뒤에 따질 건 따진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국민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예부터 법가(法家)는 행정엔 유능하지만, 민심을 등한시해 결말이 힘든 경우가 많았다.
09-22 이재명 ‘야바위 정치’ 사필귀정
이재명의 단식은 셀프 인질극
목포 오염수 집회 전 횟집 회식
인동초 비유는 DJ와 호남 모독
체포동의 가결은 탄핵에 해당
모두를 오래 속이는 건 불가능
국민 우습게 보는 게 가장 큰 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셀프 인질극’은 일단 비극으로 끝났다. 단식까지 하면서 체포동의안 가결을 막아보려 했지만, 지난 2월과 달리 이번엔 실패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무너지진 않을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영장실질심사에서 뒤집기를 노릴 수 있고, 거기서 또 밀려도 옥중 정치와 재판 투쟁이 가능하다. 그러는 사이에 집권 세력이 헛발질을 하면 정치 풍향은 금방 바뀐다. 이 대표는 스스로에 대해 더 나쁠 수 없는 인생의 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올라왔기 때문에 어지간한 일에는 눈도 깜빡하지 않는 겁 없는 사람,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지금까지는 통했다. 심각한 실정법 위반 혐의들은 물론, 말 바꾸기, 가족 간 욕설과 김부선 파문 등 어지간한 정치인이라면 그중 하나만으로도 매장됐겠지만, 이 대표는 여전히 개딸 등 강력한 지지층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일격을 맞았다. 의원들로부터 탄핵을 당한 셈이다. 단식은 감동을 주지 못했고, 당원도 국민도 더는 속지 않을 조짐을 보인다. 국민을 우습게 보고 혹세무민 재주를 뽐냈던 억지와 선동의 부메랑이다.
지난 6월 19일 이 대표는 국회 대표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에 대한 정치 수사에 대해 불체포 권리를 포기하겠다. 구속영장을 청구하면 제 발로 출석해 영장실질심사를 받고 검찰의 무도함을 밝히겠다. 소환한다면 100번이라도 응하겠다.” 3개월 만에 180도 달라졌다. 표결을 하루 앞둔 20일 SNS에 이렇게 썼다. “윤석열 검찰이 표결을 강요한다면 당당히 표결해야 한다. 올가미가 잘못된 것이라면 피할 것이 아니라 부숴야 한다.” 불체포특권 수호 지령이다.
왜 그랬을까. 특권 포기 연설이 나올 당시엔 이 대표의 정치적 위상이 위협받고 있었다. 1차 체포동의안(2월 27일)은 가까스로 부결됐지만, 돈봉투 사건과 김남국 코인 사태까지 겹치면서 전면 쇄신 요구가 비등했었다. 임박한 이낙연 전 대표 귀국도 신경 쓰였다. 그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특단 카드였던 것이다. 여기까진 괜찮았는데, 검찰 수사가 예상보다 심각하게 흘러갔다. 측근들로 이뤄진 최후 방어선에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화영 전 부지사는 눈에 띄게 흔들렸다. 영장실질심사에서 이길 자신이 없어졌다. 단식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문제는, 그런 방식이 통할 것이라는 인식이다. 이 대표는 수십 권의 심리학 서적을 읽으며 ‘사람의 마음’을 연구했다고 밝혔다. 기상천외한 출퇴근·병상 단식도 그런 맥락에서 나왔을 것이다.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에 대한 대응도 마찬가지다. 동해는 물론 태평양과 수산물을 핵물질로 오염시켜 인류를 도륙할 ‘제2 태평양전쟁’이라고 했다. 목포에서 가진 오염수 방류 규탄대회에서 “일본 핵폐수 해양투기 때문에 이 세상을 하직해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국민항쟁”을 외치기 직전에 횟집에서 회식하는 도착적 행태도 보였다.
이 대표는 지난달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 추도식에서 “인동초 정신”을 거론하면서 “그 길을 따라 전진하겠다”고 했다. DJ는 어떤 경우에도 개인 비리를 방어하기 위해 당을 방탄용으로 활용하거나 단식을 한 적이 없다. 1992년 대선에서 평생의 라이벌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패배한 뒤 깨끗이 물러나 국민의 부름을 기다렸을 뿐, 온갖 편법을 동원해 출마하고 당권을 장악하고 당헌은 바꾸는 등의 일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죽이려 했던’ 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화해에 앞장섰으며, 일본과의 획기적 관계 개선도 이뤄냈다. 만약 DJ가 야당 대표라면, 대장동·백현동·성남FC·법카 사건 등과 연루된 이 대표를 출당시켰을 것이다. 그런데도 인동초 정신을 둘러대면 호남 민심을 잡을 수 있다고 보는 발상이 놀랍다. DJ도 호남도 모욕하는 일이다.
속임수 정치에선 문재인 전 대통령도 뒤지지 않는다. 통계 조작, 소득주도성장과 탈원전, 4대강 보 해체, 울산시장선거 개입 등이 불법과 편법을 총동원해 이뤄졌다. 국민을 영원히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그런 짓을 저지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에이브러햄 링컨이 말한 대로, 소수를 오래 속이거나 다수를 잠시 속일 순 있어도, 다수를 계속 속일 수는 없다. 야바위 정치를 버리지 않으면 이 대표의 재기는 어렵다.
10-20 ‘정치 2년’ 대통령의 아슬한 질주
강서구 참패 뒤에도 계속 실점
사각지대 못 보고 돌진한 결과
운전 익숙해질 때 사고 위험성
국정 성과 내는 게 최고의 가치
마키아벨리 전술도 구사 필요
자유 대연합 이루고 野 만나야
윤석열 대통령은 서울 강서구청장 선거 결과를 보고 깨달았을 것이다. 코피까지 흘리며 열심히 일하지만 국민 평가는 야박하다는 것을, 선거는 과학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정치와 법치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윤 대통령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은 취임 이후 처음으로 당황해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선거 당일 밤늦게 참패가 확인된 직후 “대통령까지 포함한 책임”이 거론됐다. 여기까진 괜찮았다. 다음 날 아침 “차분하고 지혜로운 변화”로 달라졌다. 그 결과 대표-원내대표-사무총장 모두 영남 의원이 맡는 정치적 자폭으로 이어졌다. 여론이 악화하자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 “많이 반성하고 소통하겠다”며 또 급변침했다.
반년 앞 총선은 제헌의회 총선에 버금갈 만큼 국가 진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윤 대통령의 정치적 사활도 걸려 있다. 그런데 전초전에서 벌써 대량 실점했다. 무기력한 여당은 대통령만 쳐다보고, 대통령은 겨우 정치 입문 2년(2021년 6월 29일 대선 출마 선언 기준) 수준임에도 나만 따르라며 무작정 직진한 데 따른 결과다. 자동차 운전을 배울 때, 완전 초보자 시절엔 매우 조심하면서 절대 과속하지 않기 때문에 사고가 나지 않거나, 나더라도 경미한 접촉 사고인 경우가 많다. 운전에 조금 익숙해지고 속도에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 눈앞만 보고 질주하다 대형 사고를 내기 십상이다. 노련한 운전자는 앞길이 텅텅 비어 있더라도 마구 달리지 않으며,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사각지대엔 위험 요소가 숨어 있다는 가정 아래 방어 운전을 한다.
윤 대통령의 정치는 이제 막 초보에서 벗어나는 단계에 있다. 가장 위험한 시기다. 게다가 최근 권력 핵심에서 대통령은 모르는 게 없다는 식의 ‘윤비어천가’가 나온다. 다시 ‘적자생존’(받아 적어야 살아남는다) 시대로 접어든 것 같다. 이런 대통령이 “제일 중요한 것이 이념” “철학 없이 실용 없다”고 외치니 국정은 민생보다 이념으로 흘렀고, 이번 선거 참패로도 이어졌다.
윤 대통령의 국정 철학과 방향은 타당하다. 벌써 임기의 4분의 1 이상 지났다. 목표 제시보다 실행을 최고 가치로 삼아야 할 때다. 그런데 추진력을 뒷받침할 정치력이 없다. 국정 개혁 과제는 대개 입법을 통해 이뤄진다. 여의도 정치가 아무리 한심해도 함께하면서 끌고 가야 하는 이유다. 문제는, 윤 대통령은 국회의원을 단 하루도 한 적이 없고, 여의도 정치와는 정반대인 ‘뼛속까지 검사’ 체질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당장 여소야대를 뒤집을 방법도 없다. 내년 총선에서 여대야소 국회를 만든 뒤 제대로 국정을 펼치겠다는 식이면 총선 참패는 뻔하다. 국민은 그때까지 현 정부가 얼마나 성과를 냈느냐를 가장 큰 판단 기준으로 삼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진정성을 보여야 승리의 가능성이 열린다. 윤 대통령이 정치 초보자임을 인정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발목 잡는 야당을 탓하기 앞서 본인의 정치력 부족을 탓해야 한다.
야대 국회와 대법원, 좌파 미디어와 시민단체에 포위된 윤 대통령은 사면초가 상태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마키아벨리식 전술도 필요하다. 야당 대표도 만나야 한다. 그런다고 야당이 바뀌진 않겠지만, 국민은 달리 볼 것이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노예제도 폐지’ 개헌을 위해 야당 의원들에 대한 회유와 협박도 피하지 않았다. 대연정·소연정을 반복하며 16년 집권했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한순간도 정치인들과의 소통을 멈추지 않았다. 휴대전화 SMS 서비스가 ‘Short Merkel Service’로 불릴 정도였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선 보수·자유 대연합도 필수다. 다소 껄끄러운 인사도 포용해야 한다. ‘텐트 안에서 바깥으로 오줌을 누게 하는 것이 반대 방향으로 그러는 것보다 낫다’는 미국 정치 속담도 있다.
이를 위해 윤 대통령부터 바뀌어야 한다. 최악 상황에서 최상의 성취를 이뤄낸 최고의 지도자 윈스턴 처칠의 최대 무기는 양보와 소통이었다. 적절한 단어 하나를 찾기 위해 밤을 새웠다. 정적(政敵) 기용도 마다하지 않았다. 미국 도움을 받기 위해 무슨 일이든 감내했다. 나치 독일의 침공 초기 가장 암담했던 때를 다룬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마음을 바꾸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11-13 JM당은 민주당 아니다
이재명 친위대 변신한 민주당
민주주의 수호 않고 되레 위협
김대중 노무현 정신에도 역행
탄핵안 재발의는 野 의원 떼법
당 장악 못하면 잃는 것 많은 李
재명당 선언하고 심판 받아야
정통 민주당은 이미 죽었다. 더불어민주당의 원조인 신익희·조병옥·장면의 민주당은 1955년 반공과 반독재, 대의정치와 책임정치를 기치로 내걸고 출범했다. 부칙 한 줄로 당시 대통령(이승만)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앤 제2차 개헌(사사오입 개헌)에 반발한 세력이 뭉친 1세대 야당이다. 제2기 민주당은 1970년대 들어 과감한 세대교체와 함께 시작됐다. 김영삼·김대중·이철승의 40대 기수론은 신민당과 신한민주당으로 이어지며 유신과 전두환 정권에 맞섰고, 1987년 민주화의 주역이 됐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제3기로 볼 수 있다. 광주민주화운동 뒤 반미와 주체사상 유입 등의 영향으로 반공에서 친북으로 기울었지만, 자유민주주의와 한미동맹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피해 당사자가 화해 적임자”라며 박정희·전두환과의 화해에 앞장섰고, 친일 비난을 무릅쓰고 한일관계 발전도 이뤄냈다. 노무현은 야당에 대연정을 제안할 정도로 통합을 희망했고 “미국 바짓가랑이” 운운할 만큼 미국과 개인적 거리감이 있었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이라크 파병, 제주 해군기지를 결단했다. 선거에 지더라도 명분과 원칙을 지킴으로써 패배 후의 희망까지 잃어선 안 된다고 했다.
문재인 정권과 이재명 체제의 더불어민주당은 제4기에 해당하는데, DNA가 바뀌었다. 문재인은 미국·일본보다 북한·중국 편에 섰다. ‘자유’를 제거하는 개헌도 시도했다.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라며 “중국몽에 함께 할 것”이라고 했다. 이재명은 주한 중국 대사를 만나 “중국 패배에 베팅하면 반드시 후회” 등의 훈시까지 들었다.
급기야 민주당은 ‘이재명의, 이재명에 의한, 이재명을 위한 정당’ 지경에 이르렀다. 인재영입위원회가 아닌 인재위원회를 신설해 이 대표가 직접 위원장을 맡았다. 외부 인사 발탁은 뒷전이고, 총선 공천 이전에 친위그룹으로 내부 교통정리를 마치겠다는 취지다. 이러니 “당내 민주주의 와해” “공산당 같다”는 비명계의 비명이 나온다.
최근 탄핵소추 사태는 민주주의와 삼권분립도 위협한다. 민주당의 탄핵소추안은 ‘파면할 정도로 중대하고 구체적인 위헌·불법’과는 거리가 멀다. 해당 검사가 이재명 관련 사건을 수사하지 않았다면 탄핵소추에 나섰겠는가. 검사 권한 정지와 수사 방해가 목표라는 분석이 타당하다. 재판이 불리하면 판사 탄핵에도 나설 태세다. ‘본회의에 보고된 때부터 24시간 이후 72시간 이내에 탄핵소추 여부를 무기명투표로 표결한다’는 국회법 제130조는 다른 해석이 필요 없을 만큼 명료하다. 그런데도 소추안 철회와 재상정을 우긴다. 사사오입 개헌 행태보다 덜하지 않다. 이런 식이면 ‘민주당 떼법’이 헌법과 국회법 위에 선다.
민주당은 이제 민주주의를 수호하긴커녕 위협한다. 21세기 연성 독재는 대개 총칼이 아니라 다수결과 여론조작을 통해 이뤄진다. 러시아의 푸틴,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헝가리의 오르반이 대표적이다. 정치 철학과 노선 측면에서도 역대 민주당은 상상도 못 할 만큼 타락했다. 김대중은 대선 패배 뒤 정계 은퇴를 하고 국민의 부름을 기다렸다. 비주류가 위축되지 않도록 배려했다. 노무현은 험지 출마 등 궂은일에 앞장서 ‘바보’ 별명까지 얻었다. 이 대표에게는 그런 정치적 인간적 염치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 대표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 여권 난맥상을 보면, 내년 총선에서 이기고 차기 대선에 도전할 수도 있다. 민생 어려움과 사회 갈등이 커지면 포퓰리즘이 잘 먹히고, 자신의 사법적 도덕적 리스크는 뒷전으로 밀린다. 가장 큰 장애물은 검찰과 법원인데, 이번 탄핵소추 사태를 통해 대응 방법을 찾았다. 의석을 다소 잃는 한이 있더라도 민주당을 친위대로 재편하는 일이 급선무다. 당 장악에 실패하면 당장 모든 것을 잃기 때문이다.
반세기 이상 국민 사랑을 받아온 민주주의 대들보 정당의 적통은 끊겼다. 정통 민주 세력의 대의와 품격은 이재명(JM) 당과 양립할 수 없다. 개딸 중심 정당을 내걸고 심판 받는 게 그나마 명실상부한다. 오랜 민주당원과 많은 국민에겐 시 ‘님의 침묵’이 맴돌 것이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었습니다.’
12-11 與 ‘패배할 결심’과 구원투수 한동훈
더러운 승리 불사하는 야당에
무난한 패배 향하는 국민의힘
尹 결단 없인 흐름 바꿀 수 없어
김기현·김건희 리스크 없애고
엑스포 실패 읍참마속도 필요
한동훈 ‘제2 인요한’ 땐 공멸
총선을 꼭 4개월 앞둔 오늘의 형세를 보면, 여당의 ‘무난한 패배’와 야당의 ‘더러운 승리’가 유력하다. 대부분의 여론 지표와 두 달 전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는 4년 전 총선 결과의 재현을 예고한다. 당시 현 여당은 103석, 야당은 180석을 얻었다. 여당은 죽을 힘을 다해 판세 뒤엎기에 나서고, 야당은 부자 몸조심하듯 현상 관리에 치중해야 하는데, 실상은 정반대다.
국민의힘의 인요한 혁신위원회는 용두사미로 끝났다. 혁신돼야 할 김기현 대표 체제는 오히려 더 공고해졌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사생결단 태세다. 당헌도 명분도 아랑곳 않는다. 이재명 대표는 “멋있게 지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어쨌든 선거는 이겨야 한다”고 선언했다. “더러운 평화가 이기는 전쟁보다 낫다”는 어투를 뒤집은 셈이지만, 총선 승리와 입지 강화에 도움이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의미다.
윤석열 대통령은 필패 전망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태생적 한계부터 인정해야 한다. 0.73%P 표차로 승패가 갈린 정치 지형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 콘크리트 지지층도 없다. 박근혜 국정농단 수사를 지휘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보수 세력이 지지하긴 했지만, 대안 부재론 성격이 강했다. 원래 총선은 정권 심판 성격을 띤다. 사정이 이런데도 지지 기반 확충은커녕 비주류 인사들을 내쳤다. 합법과 불법, 옳고 그름을 양단하는 검사 세계관에서 탈피하지 않으면 ‘플러스 정치’는 불가능하다. ‘뼛속까지 검사’였던 윤 대통령이 이런 이치를 단기간에 체득하긴 어렵다. 김수환 추기경도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칠십 년 걸렸다”고 했다.
실패 대응 공식은 ‘시인→사과와 문책→재발 방지’ 3단계다. 강서구 선거 패배 때는 공천 등의 문제점을 자인했고, 엑스포 유치 실패 때는 사과 단계까지 나아갔다. 그런데 마지막 단계에서 역주행하려 든다. 혁신위는 당 지도부 벽에 막혀 좌초했다. 엑스포 유치 실패 자체보다 심각한 것은 정보와 판단의 실패다. 기업과 외교 일선에서는 ‘1차 투표 근접, 2차 투표 뒤집기’가 얼마나 허황한 분석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윗선으로 올라가면서 각색됐다. 윤 대통령이 “예측이 많이 빗나간 것 같다”면서 “저의 부족”을 여러 차례 말했으면, 핵심 라인 몇 명은 자진해서 물러나는 게 상식이다. 그런 통렬한 반성과 엄정한 문책이 없으면 윤 정부는 더듬이 잘린 곤충처럼 스러진다.
결단이 시급하다. 첫째는 여당의 파괴적 혁신이다. 현 체제를 비상기구로 전환해야 한다. 나중에 혁신하겠다는 것은, 지금 실력은 밑바닥인데 시험 직전에 벼락치기 공부로 1등 하겠다는 몽상과 같다. 그런 주장의 근저에 한동훈 장관 활용 방안도 있다. 마침 선호도 여론조사에서 한 장관(16%)이 이 대표(19%)에 근접한 경우도 있었다. 문제는 영입 인사의 한 사람으로 들러리 역할을 맡기려는 꼼수다. 실질적 권한도 없는 ‘제2 인요한’으로 만들면, 훌륭한 정치적 자산을 장식품으로 허비하고 공멸하는 결과를 자초할 것이다. 야신(야구의 신)으로 불리는 김성근 감독은 약체팀이 이길 승부수로 ‘벌떼 야구’를 구사한다. 공 몇 개를 던졌건 실책 땐 즉각 투수를 바꾸고, 다음 선수 또 다음 선수에게 어려운 일을 넘기는 것이다. 지금 그런 ‘벌떼 정치’가 필요하다.
정부와 대통령실 쇄신도 서둘러야 한다. 인사가 최고의 메시지다. 최근 개각 면면은 그런 점에서 턱없이 부족하다. 수석비서관 전원이 바뀔 정도면 비서실장부터 읍참마속을 자청하는 게 옳다. 마지막으로 김건희 여사 문제다. 필자는 지난해 9월 19일 본란에 ‘김 여사 목에 방울 달기’ 칼럼을 게재했다. 불행히도 상황은 더 나빠졌다. 오는 28일 국회에서 ‘대통령 배우자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특검법’이 통과될 것이다. 최근 명품 가방 ‘함정 동영상’까지 유포되면서 특검법 지지 여론이 60%를 넘겼다. 거부권 행사 근거는 충분하지만, 정치적 타격이 불가피하다. 특검 수용에 준하는 특단 조치를 병행해야 한다. 어떤 대응이든,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정직과 투명성이다.
한 해를 정리하고 새출발을 다짐하는 연말연시가 기회다. 담대한 정치적 상상력과 결단이 필요하다. 계속 머뭇거리면, 4월 총선 결과도 윤 정권 운명도 불 보듯 뻔하다.◎
문화일보